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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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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다마스쿠스
### 기사:
다마스쿠스(, , )는 시리아의 수도이다. 아샴()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7년 기준으로 인구는 약 167만명에 달한다.
현존하는 도시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이기도 한 다마스쿠스는 이슬람 문화의 4대 도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중의 하나이자 수많은 이슬람 학자들의 수련장이었으며,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를 저지하는 전략적 요지로 역할하였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대상 무역로, 아라비아 반도와의 통상로 등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볼거리들은 바자르를 둘러싸고 있는 로마 시대의 성벽 안에 밀집해 있다. 눈앞에 높은 미나렛과 함께 우마야드 모스크와 유리로 천장을 만들어 올린 모스크, 로마 시대의 기둥들과 서문들 그리고 사도 파울로스의 눈을 치료했다는 아나니아의 교회 등이 길 사이에 뒤섞여 있다.
도시의 이름
도시의 정식 이름은 아랍어로 디마슈크 아샴(دمشق الشام, Dimashq ash-Sham)으로 불린다. 많은 사람들은 「디마쉿」으로 압축해 부르며, 다마스커스 시민이나 시리아 등 아랍권 사람들은 「앗샴」으로 부른다. 「앗샴」은 아랍어로 「북쪽」이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갖는 말로 시리아(특히 역사적 시리아에 대해서)는 「비라드 앗샴」(북쪽 땅)이라고 불렀다. 영어 이름 「다마스커스」는 그리스어 Δαμασκός를 어원으로 하며, 라틴어를 거쳐 전해졌다. 이들은 곧 아랍 고어의 도시명으로써 다르메섹((דרמשק Darmeśeq, '봇물 대기 좋은 땅'이라는 뜻)에서 왔다. 그러나 아랍인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유적인 에블라 왕국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서는 에블라 남쪽에 있는 마을을 「다마스키」라고 적고 있어, 다마스커스라는 이름의 기원은 아랍인 이전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마스커스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기원전 15세기의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남긴 지리 문헌에서 「T-m-ś-q」라고 읽는 문자가 있다. 「T-m-ś-q」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아카드어로는 「디마슈카(Dimašqa)」、고대 이집트어로는 「T-ms-ḳw」, 고대 라틴어로는 「다마스쿠 Dammaśq דמשק」,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에는 「다메섹(Dammeśeq, דמשק)」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카드어 발음은 기원전 14세기 아마르나 문서에 등장하는 아카드 어 문헌에서 나온다.
훗날의 아카드어에서의 철자는 「주거」를 의미하는 어간인 「dr」에 영향을 받은 「r」(레슈)가 들어가서 쿰란 문서에는 「다르메세쿠 Darmeśeq דרמשק」로, 시리아어에서는 「다르무스쿠(Darmsûq, ܕܪܡܣܘܩ)」가 되었다.
지리
다마스쿠스는 지중해에서 약 80km 내륙에 위치해 있고, 안티레바논 산맥이 바다와 도시를 서로 가로막고 있다. 도시는 안티레바논 산맥 기슭의 해발 680m의 고원 위에 있다. 다마스쿠스의 위치는 북위 33도 30분, 동경 36도 18분에 해당한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 다마스쿠스는 바라다 강의 바로 남안에 있다. 그 남동쪽, 북쪽, 북동쪽의 모퉁이에는 중세에 세워진 근교구역이 있다. 또한 남서쪽에는 미단, 북쪽과 북서쪽에 사르쟈와 아마라 등 각 지구가 있다. 이들 지구는 원래 도시에서 바깥으로 뻗은 도로변에 있었고 종교상으로도 중요한 묘소 근처를 따라 생겨난 것이었다. 동쪽에는 구타(الغوطة)라 불리는 바라다 강 등의 내륙 하천을 따라 생겨난 숲이나 논밭이 모인 커다란 오아시스가 있어, 이것이 에덴동산의 모델이 되었다고도 한다.
19세기에 옛 시가를 북서쪽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쟈바르 콰시운(콰시운 산,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했다고 전하는 장소)의 경사면 위에 근교 농촌이 개발되었다. 그 가까운 곳에는 이븐 아라비의 영묘 주위로 사리히 지구가 세워져 있다. 이들 새로운 지역은 일찍이 쿠르드인 군인들이나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역(크리스천들이 제압된 지역)에서 무슬림 난민들이 들어와 살았던 곳으로 「아크라드」(쿠르드인)나 「무하지린」(이민)으로 불리며, 옛 시가에서 2~3km 북쪽에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적인 행정 ・ 상업의 중심이 옛 시가 서쪽의 바라다 강 주변, 「마르제」(목초지라는 뜻)라 불리는 곳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마르제는 이후 근대 다마스쿠스의 중심이 된 시청 앞 광장의 이름(마르제 광장)의 유래이기도 하다. 재판소, 우편국, 아나톨리아나 헤자즈로 통하는 헤자즈 역이, 조금 남쪽의 높은 장소에 지어졌다. 유럽화된 주택가는 마르제 광장과 사리히야 지구 사이를 잇는 도로 가에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신시가지의 상업과 행정은 차츰 그 방향으로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 보다 새로운 교외가 바라다 강의 북쪽에 개발되어, 옛 시가지 남쪽에도 넓은 구타 오아시스를 침식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955년부터 새로운 도시 구역 야르무크가 팔레스타인 난민 수만 명의 난민 캠프가 되었다. 프랑스인 미셸 에코샤르나 일본인 혼슈야 교지(番匠谷尭二) 같은 다마스쿠스의 도시계획자들은 남쪽의 구타 숲을 가능한 남겨두고자 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에는 주로 개발은 도시 북부 및 서부의 멧제 지구, 최근에는 바라다 강이 앞으로 흐르는 북서부 둔마르 골짜기에, 북동부의 벨제 산줄기의 경사면을 따라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은 공식적인 허가 없이 지어진 것으로 대부분 옛 시가지 남쪽에 몰려 있다.
다마스쿠스는 오아시스에 둘러싸여 있다. 구타 오아시스의 숲은 바라다 강으로부터 물을 공급받고 있다. 바라다 강가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있는 피제 샘은 다마스쿠스 시의 중요한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다. 구타 오아시스는 다마스쿠스의 급속한 주택화와 산업화로 차츰 면적이 줄고, 거리의 교통, 산업, 쓰레기 때문에 오염되고 있다.
기후
1981〜2010년까지의 평년치에 따르면 1월 평균 기온은 6도, 7월 평균 기온은 27도, 연평균 기온은 16.7도, 연 강수량은 176.1mm이다.
역사
예로부터 시리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써 다마스커스는 기원전 10세기에는 아람인들이 이곳에 왕국을 세우고 수도로 정했다.
그 독립은 신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셀레우코스 제국 및 로마 제국에게 패하면서 무너져 버렸다. 로마 시대 다마스쿠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수용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자유도시 연합의 명예도시가 되었다. 그 뒤 이슬람 제국의 팽창과 함께 635년에 정복되었고, 우마미야 왕조의 수도로써 번영을 누렸다. 우마미야 왕조는 705년에 다마스쿠스의 옛 크리스트교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하였고, 그때 지어진 우마야드 모스크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시리아에서 죽은 살라흐 앗딘(살라딘)이나 바이바르스의 무덤 모두 이곳에 있다.
고대
다마스커스의 변두리에 있는 텔라마드 유적을 통해 다마스커스는 기원전 8000년부터 10000년 이상은 된 도시로써 그 무렵부터 이곳에 사람이 정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마스커스가 인간이 연속적으로 정주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아람인(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셈어파 계통의 언어를 쓰는 유목민족)이 등장할 때까지는 다마스커스는 중요한 도시로써 기록된 적은 없다. 바라다 강의 편이성을 최대한 활용한 운하와 수도의 건설로 다마스쿠스에 수도가 처음으로 개설한 것도 다름 아닌 아람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훗날 이 네트워크는 로마인들과 우마미야 왕조에서도 그대로 이어 썼고, 현대까지도 다마스쿠스 옛 시가지의 수도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다.
기원전 1100년, 이 도시는 아람 다마스쿠스라 불리는 강력한 아람인 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또한 앗시리아인과 이스라엘인과의 숱한 전쟁에 말려들었다. 아람 다마스쿠스의 왕 벤 하다트 2세(하닷에세르)가 카르카르 전투에서 이스라엘 등 다른 국가과 함께 샬만에세르 3세와 전투를 벌였다. 아람인의 도시 유적은 벽에 둘러싸여 다마스쿠스 옛 시가지 동부 지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732년에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한 뒤 몇백 년 간 다마스쿠스 도시는 독립을 잃었다. 기원전 572년에 처음으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지배하에 들었다. 바빌로니아 지배는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 제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제국령 시리아 주(州)의 주도(州都)로써 쓰였다.
그리스 · 로마 시대
다마스쿠스는 동방을 석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원정으로 서양의 지배 아래 들게 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다마스쿠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의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도시의 지배권은 양자 사이를 오갔다.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안티오키아를 자신이 세운 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북방의 라타키아 같은 새로 건설된 셀레우코스 왕조의 도시에 비해 다마스쿠스는 그 중요성이 다소 퇴색되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리스 서부를 병합하면서 처음으로 다마스쿠스가 로마의 판도에 들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데카폴리스로써 알려진 10개 도시의 연합에 들였다. 이는 다마스쿠스가 그리스 · 로마 문명의 주요 중심지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한창 크리스천을 탄압하던 시절 예수의 환상을 체험한(훗날 그가 개종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사건으로 성경 속에서 묘사되는) 것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서였다고 한다.
37년에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칼리굴라는 정령을 내려 다마스쿠스를 나바테아 왕국의 지배 하에 두었다. 나바티아의 왕 아레타스 4세 피로파토리스는 수도 페트라에서 다마스쿠스를 지배했다. 그러나 106년경, 나바티아 왕국은 로마인들에게 정복당하고, 다마스쿠스는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었다.
다마스쿠스는 2세기 초까지 그저 거대 도시의 하나일 뿐이었다. 222년에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부터 식민 도시인 콜로니아로 격상되었다. 팍스 로마나라는 이름의 제국의 태평성세가 찾아오자 다마스쿠스와 로마령 시리아도 다른 로마령들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남아라비아, 팔미라, 페트라로 이어지는 교역로와 중국에서 오는 비단 교역로(실크로드)까지 모두가 다마스쿠스를 거치게 되어 있었고, 다마스쿠스는 대상들의 도시로써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다마스쿠스는 동양에서 오는 교역품으로 로마인들의 수요를 채웠다.
로마 건축의 흔적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옛 시가지의 도시계획은 오랫동안 그 효과를 드러냈다. 로마인 건축가들은 그리스와 아람의 도시 기반을 토대로 성벽을 쌓고 길이 1500×750미터의 새로운 레이아웃에 융합시켰다. 성벽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었고 동문(바브 샤르키)은 로마 시대에 지어진 그대로 남아 있다. 로마 시대의 다마스쿠스는 대부분 현재의 도시의 5미터 이내 지하에 묻혀 있다.
이슬람 세력의 정복 그리고 파티마 왕조까지
636년, 다마스커스는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우마르 1세)에게 정복되었다. 그 직후 지금의 에스파냐에서 인도까지 팽창한 우마이야 왕조(661년-750년)의 수도가 되는 동시에 도시의 힘과 위광도 그 정점에 달했다. 705년에 그리스도교 교회를 이슬람식의 모스크로 개조한 우마야드 모스크는 오늘날까지도 다마스쿠스에 남아 있다.
한국의 신라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고 717년부터 727년까지 인도, 아프가니스탄 및 중앙아시아 일대의 불교 유적을 순례한 승려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는 대식국(아랍) 왕이 본국을 떠나 소불림국(小佛臨國)에 거주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는데, 정통 칼리파 시대 칼리파의 거성이 메디나였던 것이 우마이야조 아랍 제국 시대에는 다마스쿠스로 거점을 옮겼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소불림국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시리아 일원을 지칭하며, 혜초가 대식(페르시아) 지역을 방문했던 726년경 우마이야 조는 10대 칼리파 히샴 이븐 압둘 말리크(724~743 재위)의 치세에 있었다. 혜초는 "소불림에서 바다를 끼고 서북쪽으로 가면 바로 대불림국"에 이른다고 기술하였는데, 여기서 혜초가 서술한 노정은 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노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대불림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그곳을 수도로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이어 혜초는 "대식이 몇 차례나 대불림국을 쳤으나 얻지 못하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실제로 혜초가 현지를 방문하기 직전 황제 레오 3세의 지휘 아래 동로마 제국은 717년부터 718년까지 1년 동안에 걸친 우마이야 조 아랍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공세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744년, 우마이야 조 마지막 우마야드 칼리파 마르완 2세는 수도를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하스란으로 옮겼고, 이후 다마스쿠스는 그때까지의 정치적 중요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압바스 왕조가 일어나, 다마스쿠스는 바그다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858년, 알무타와킬은 수도를 사마라에서 옮겨올 생각으로 잠시 다마스쿠스에 거처를 두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압바스 왕조가 기울면서 다마스쿠스 방면은 불안정해졌고, 지방 정권이 수립되어 다마스쿠스를 지배했다. 875년, 이집트의 지배자 아흐마드 이븐 두룬이 이 도시를 차지했고, 압바스 왕조는 905년에야 다마스쿠스를 회복할 수 있었다. 945년, 함다니드 왕조가 다마스쿠스를 다시 손에 넣었고, 그 뒤 잠시 이흐시디드 왕조의 개조(開祖) 무함마드 이븐 투크주에게 넘어갔다. 968년과 971년에 다마스쿠스는 잠시 카르마트파에 점령되었다.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십자군
970년, 카이로에 있던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되찾았다. 이것이 다마스쿠스가 앞으로 겪게 될 파란(波亂)의 시작이었다. 파티마 왕조의 주력군을 이루고 있던 베르베르인 군대는 시민들 사이에서 불평을 샀고, 시리아의 카르마트파, 때로는 투르크인들의 군대가 다마스쿠스를 지배했으며, 베두인들로부터의 끊임없이 압력을 받았다. 978년부터 잠깐 동안, 다마스쿠스는 이자흐 앗딘 알 카삼의 지도와 시민군의 보호를 받으며 자치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타 오아시스는 베두인의 침입으로 투르크가 이끄는 전투를 거친 뒤 이 도시는 다시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029년부터 1041년까지,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자히르의 치하, 투르크의 군사지휘자 아누슈타킨이 다마스쿠스의 총독이 되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
그 기간 동안, 다마스쿠스는 블록과 인술라(집합주택)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 로마풍 도시 계획에서 보다 친숙한 이슬람풍의 도시로 차츰 변모해갔다. 격자 모양의 직선으로 뻗은 큰 길에서 좁은 골목길의 패턴으로 변했고, 대부분의 주민이 밤에는 범죄자나 세금 징수를 위한 묵직한 빗장으로 폐쇄되는 하라트 안에 사는 모양새가 되었다.
11세기 후반에 셀주크 투르크의 도래와 함께 다마스쿠스는 다시 독립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1079년부터 1104년까지는 셀주크 왕조 및 시리아 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가 다른 투르크 왕조인 브리드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1148년 제2차 십자군의 공성전도 견뎌냈다. 1154년에 다마스쿠스는 십자군의 숙적, 알레포의 장기 토후국의 유명한 아타베그, 누르 앗딘에게 정복되었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고, 그가 죽은 뒤 아이유브 왕조 이집트의 지배자 살라흐 앗딘(살라딘)에게 이를 빼앗겼다.
살라흐 앗딘은 다시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다마스쿠스의 성채를 재건하였다. 그의 통치 아래서 교외에도 마치 도시나 다름없을 정도로 넓어졌다고 한다. 이븐 주바이르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의 치세에 다마스쿠스에는 많은 대학교가 세워졌고, 「방해받을 걱정 없는 연구와 은둔」을 위해 세계에서 모여든 근면한 젊은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라흐 앗딘의 사후, 아이유브 왕조는 내분으로 차츰 기울어갔다.
그 당시 다마스쿠스 강은 십자군 사이에서 전설적인 이름을 얻고, 오늘날까지도 표면에 무늬가 있는 강을 다마스쿠스 강이라 부르고 있다(다만 당시의 기술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나 중국에서 오는 무늬 새긴 견직물(비단)은 실크로드 서쪽의 종점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지나 유럽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영어로 다마스쿠 직물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맘루크 왕조의 지배, 그리고 몽골과 티무르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및 자치)는 1260년 몽골 제국이 시리아를 침입하면서 끝이 났다. 몽골이 물러간 뒤 다마스쿠스는 맘루크 왕조의 지방 수도가 되어,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1400년에 몽골인 정복자로써 칭기즈 칸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다. 맘루크 왕조의 술탄 나스르 파라즈는 카이로에서, 이븐 할둔 등의 대표단을 보내 교섭을 맡겼지만 그들은 쫓겨났고, 다마스쿠스는 약탈되었다. 우마야드 모스크는 이 때 한 번 불타버렸고,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옮겨진 기술자와 노예들을 제외하고 숱한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그 목이 성벽 북동쪽 모퉁이 바깥에 탑처럼 쌓였다. 오늘날 도시 한 모퉁이에 부르즈 알 루우스(burj al-ruus, 원래 뜻은 「수급의 탑」 즉 경관京觀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그 자리였다고 한다.
다마스쿠스는 이후 재건되어 1516년까지 맘루크 왕조의 지방 수도로 기능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6년에 마르쥬 다비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는 191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들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시작된 1516년 당시의 다마스쿠스 인구는 전 도시 통틀어 5,5000인(약 8천 호) 정도로 추정되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몇 차례 행정 구역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다마스쿠스는 주도(州都)로써의 위치를 유지했다. 이는 다마스쿠스가 알렛포와 함께 제국의 시리아 지배의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오랫동안 이 지역의 통치 ・ 경제의 중심지였던 점, 다마스쿠스가 무슬림에게도 중요한 메카 순례를 위한 대상들의 출발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오스만 제국은 다마스쿠스를 중시하게 되었다.
18세기 이래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시리아 지방에서도 다른 오스만 제국의 각지에서처럼 아샨(명사)이라 불리는 반독립적 대토지 소유자들이 등장하였다. 다마스쿠스와 하마를 통치하던 아즘 가문 등이 시리아 지방의 아샨으로 알려져 있다. 아즘 가문은 시리아 주의 총독 자리를 세습하며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즘 가문은 19세기에 들어 중앙정부의 탄지마트(은혜개혁)로 독점적 지위를 잃었지만, 그 뒤에도 다마스쿠스의 명망가로써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마스쿠스의 옛 시가지에는 아즘 가문이 세운 궁전이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는 관광 명소의 하나로 쓰이고 있다.
그 뒤, 두 차례의 이집트 투르크 전쟁의 결과, 1832년에서 1840년에 걸쳐 시리아 지방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다마스쿠스를 지배하였다. 그 뒤 1840년 런던 조약으로 다마스쿠스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 돌아왔고, 다마스쿠스는 오스만 제국군 제5군단 사령부가 주둔하였다. 그러나 크리스천과 무슬림의 종교 대립, 경제적 문제가 겹쳐 1860년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870년대에는 시리아 주 총독이 된 미드하트 파샤에 의해 수크(시장)의 정비 등이 행해졌고, 이 시기에 정비된 두 개의 지붕 딸린 수크(시장)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08년에는 도시 전기 회사가 개업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두의 다마스쿠스는 차츰 서구적 인프라가 정비되어 갔고, 지역에서의 정치 ・ 군사의 중심지로써도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경제적 측면에서 다마스쿠스는 신흥 항구도시 베이루트에 그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이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헤자즈 방면으로의 여행객이나 화물을 이전처럼 다마스쿠스를 거칠 필요 없이 베이루트에서 직접 배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다마스쿠스의 상인들은 대항 수단으로 철도 건설을 강하게 요망했고, 중앙정부에 몇 차례 진정을 올렸다. 이는 1900년부터 시작된 다마스쿠스를 기점으로 하는 헤자즈 철도의 건설이라는 형태로 일단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베이루트에 빼앗긴 지역경제의 주도권을 되찾아오지는 못했다.
또한 다마스쿠스는 근동에 대한 독일(프로이센)의 「세계정책」(3B정책)의 무대이기도 했다. 1898년에는 독일 황제(카이저) 빌헬름 2세가 몸소 다마스쿠스를 방문하여, "독일 황제는 세계 3억의 무슬림의 친구요"라는 유명한 연설을 해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친밀하게 어필하였다. 이 무렵 빌헬름 2세가 살라딘 영묘를 방문하여 나무로 된 그의 소박한 관을 보고 감동하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관과 금속으로 만든 꽃장식을 선물한 일화도 있다(꽃장식은 훗날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다마스쿠스에 입성했을 때 가져갔다고 하며, 살라딘 영묘에는 현재까지도 빌헬름 2세가 기증한 관이 남아 전시되어 있지만, 살라흐 웃딘의 시신은 변함없이 나무로 된 기존의 관에 안치되어 있다).
아랍 민족주의의 발흥
다마스쿠스에서 큰 영향을 행사하던 명망가 계층이 철도 건설 등을 동해 이스탄불 궁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탓에, 베이루트에 비해 민족주의의 발흥이 늦었던 다마스쿠스에도 20세기 초두에 이르러 민족주의적 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문화적 민족주의였던 것이 차츰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일어난 아랍 민족주의의 여러 운동들은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것이 일찍부터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던 것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도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치를 요구한다는 온건한 경향을 띠었다.
1908년, 청년 투르크인 혁명 뒤, 통일과진보 위원회가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다마스쿠스에도 아라비아어 공용화나 연방제 도입이 실시되어, 아랍인의 권리나 제국의 분권화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려던 통일과진보 위원회는 때로는 그들을 달래기도 하고, 으르기도 하면서 그들을 대했다. 이러한 통일과진보 위원회의 방침은 중앙집권화라는 이름의 「투르크화」 정책으로 받아들여졌고, 다마스쿠스의 아랍 민족주의자 가운데서도 자치에서 독립으로 그 주장을 보다 강하게 드러내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통일과진보 위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제말 파샤가 방면군 사령관으로써 다마스쿠스에 부임해 왔다. 1915년부터 1916년에 베이루트와 다마스쿠스는 제말 파샤에 의해 애국적 지식인들이 다수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어 민족주의자들의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또한 이 처형은 다마스쿠스 주민들에게 메카의 태수 하산 이븐 알리가 외친 「아랍의 반란」에 대한 지지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1918년에 아랍군과 영국군이 잇따라 다마스쿠스로 들어와, 주민들이 철수하는 투르크군의 뒤에 대고 발포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다마스쿠스
1918년 10월 1일, 후세인의 부하로 훗날 이라크 왕국의 재상이 되는 누리 알 사이드가 이끄는 아랍 반란군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했다. 같은 날 영국군에 속한 오스트리아인 부대도 함께 들어왔고, 오스만 제국의 시리아 주지사의 항복 문서를 받아냈다.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포함한 다른 영국군 부대도 다마스쿠스로 들어왔다.
그러나 1917년 11월, 10월 혁명으로 성립된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가 프랑스와 영국이 교섭해 아랍을 분할하려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맺었다고 폭로했고, 아랍의 정치적 긴장도 높아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명의로 「투르크의 긴 압제를 받아온 사람들의 완전한 해방」을 약속하는 선언을 발표한다. 시리아에서는 민주적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리고, 1920년에는 후세인의 아들 페이사르 이븐 후세인을 국왕으로 하는 시리아 왕국의 건설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통치하는 것이 인정되는 바람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페이사르의 독립국 선언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1920년 7월 23일, 안티레바논 산맥을 넘어 프랑스군이 마이살룬 고개에서 시리아인 부대를 격파하고(마이살룬 전투), 페이사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쫓겨났다.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근거로 시리아 지방은 영국과 프랑스에 분할되었고 다마스쿠스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구로(Henri Joseph Eugène Gouraud)가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자마자 먼저 살라딘 영묘를 찾아가, "살라딘이여, 우리가 돌아왔다. 지금 여기, 나의 존재가 초승달(이슬람)에 대한 십자가(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다(Réveille-toi, Saladin, nous sommes de retour. Ma présence ici consacre la victoire de la croix sur le croissant)."라고 선언한 일화가 있다.
1925년에 시리아 남서부 하우란 지방에서 일어난 드루즈인의 봉기가 다마스쿠스에까지 그 여파를 끼치자, 프랑스군은 다마스쿠스 시가지에 포격과 공습을 가해 이를 진압하였다. 알 하미디야 시장(수크)와 미드하트 파샤 시장 사이의 오래된 거리도 이 폭격으로 불타버렸고, 많은 시민이 죽었다. 그 뒤 옛 시가지는 구타 오아시스로부터 오는 반란 분자들을 차단하고자 철조망을 설치하고, 장갑차 등이 투입될 수 있는 새로운 도로가 북부 교외에 설치되었다.
1941년 6월 21일, 이라크에서 쳐들어온 연합군 부대가 뷔시 정권이 지키고 있던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다.
1945년에 프랑스군은 다시 한 번 다마스쿠스를 공습했지만, 영국군이 개입해 프랑스군은 철퇴해야 했고, 1946년에 시리아는 독립을 이루었다. 이후, 다마스쿠스는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2012년 1월 시리아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충돌은 다마스쿠스 외곽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특히 1월 말부터 2월까지 보안 작전이 강화되면서 다마스커스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집을 떠나거나, 외부로부터의 주민 귀환도 통제되었다. 6월에 있었던 시가지 충돌에서 다마스커스의 민가에까지 포탄이나 탄환 파편이 날아들었다. 현지 활동가들에 따르면, 최소 세 개의 탱크 파편이 카본(Qaboun)의 중앙 다마스쿠스 지역에 있는 주거 지역에까지 쳐들어 갔으며, 이때의 격렬한 소총 공격은 온라인에 올라온 현지 주민 및 아마추어 비디오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했다.
다마스커스의 교외 지역인 구타(Ghouta)가 2017년 12월에 폭격을 당한 데 이어, 2018년 2월 리프디마슈크 공세(Rif Dimashq Offensive)로 알려진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되었다.
2018년 5월 20일, 다마스커스와 리프디마슈크주가 7년만에 다시 시리아 정부군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역사적 지구
다마스쿠스는 도시의 곳곳에 온갖 시대의 역사적 유적이 남아 있는 유적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하다. 과거에는 점령자들에 의해 다마스쿠스의 도시 규모가 증축되었고, 현재의 도시 8피트 지하에 묻혀 있는 다마스쿠스의 모든 유적을 발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마스쿠스의 성채는 옛 시가지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사도행전 제9장 11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개종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직선으로 뻗은 도로는 이름을 비아 렉트라(Via Recta)라고 하며 로마 시대의 다마스쿠스의 메인 스트리트의 하나였고, 1500미터가 넘는 길이이다.
이 길은 오늘날에는 수크 샤르키 거리과 겹치는 수크(시장) 미드하트 파샤가 들어서 있다. 수크 샤르키 거리는 작은 상점으로 가득하며, 크리스천들의 구역인 밥 토마(Bab Touma, 성 토마스의 문)로 이어진다. 수크 미드하트 파샤 또한 다마스쿠스의 주요 시장(수크)로써 수크를 쇄신한 오스만 제국 시대의 시리아 주지사 미드하트 파샤에 의해 명명됐다. 수크 샤르키 거리 옆에는 아나니아스의 집이라고 불리는 지하저장고가 딸린 지하교회가 있다. 또한 다마스쿠스에는 수크 미드하트 파샤와 평행하는 또 하나의 지붕 딸린 수크가 있는데, 이곳은 건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압뒬하미트 2세의 이름을 따서 수크 하미티예라 불린다.
우마이야 모스크, 또는 이름을 다마스쿠스 대(大)모스크라 불리는 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모스크의 하나로써, 이슬람이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 안의 사원에는 세례 요한의 머리가 안치되어 있다고 전한다.
다마스쿠스의 성벽과 성문
다마스쿠스의 옛 시가는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의 일부를 성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현존하는 다마스쿠스 성문은 모두 일곱 개다. 가장 오래된 곳은 로마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성벽 북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바브 알 파라즈(Bab al-Faraj, 구원의 문)
바브 알 파라디스(Bab al-Faradis, 과수원의 문)
바브 알 살람(Bab al-Salam, 평화의 문) - 이상 세 곳은 옛 시가 북쪽에 있다.
바브 토우마(Bab Touma, 도마의 문) - 북동쪽 모퉁이에 있으며, 같은 이름의 크리스천 구역으로 통하고 있다.
바브 샤르퀴(Bab Sharqi, 동문) - 동쪽 벽에 있으며, 로마 시대에 설계된 것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바브 키산(Bab Kisan) – 남동쪽에 있으며, 사도 파울로스가 이곳에서 줄 달린 바구니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다마스쿠스를 탈출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현재는 폐쇄되어 있고, 이 고사를 기념하는 교회가 그 장소에 세워져 있다.
알 바브 알 사귀르(al-Bab al-Saghir, 작은 문) - 남쪽에 있다.
나아가 아 파라즈 대문(Bab a-Faraj)과 알 파라이디스 대문(Bab al-Faraidis), 수크(시장) 미드하트 파샤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알 자비야 대문(Bab al-Jabiya)과 수크(시장) 알 하미디야(al-Hamidiyya)의 입구에 가까운 알 바리드 대문(Bab al-Barid)는 과거에는 수쿠로 가는 입구의 구역을 가리켰고, 다마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성벽 밖에 있는 두 구역 또한 「바브」(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밖에 모우살라 대문(Bab Mousalla)와 스레이자 대문(Bab Sreija)도 있는데 모두 성벽 바깥의 남서쪽에 있다.
교통
다마스쿠스 국제공항으로 중동이나 아시아, 유럽 각국으로 이어진 항로를 갖고 있다. 이 다마스쿠스 국제공항은 시리아 아랍 항공의 허브 구실을 해왔다.
자매도시
- 예레반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다마스쿠스 - Virtourist.com
시리아의 도시
다마스쿠스주
아시아에 위치한 수도
신약의 도시
데카폴리스
비단길
아모리인
시리아의 세계유산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end_of_text|>
| 15.257147 | 2,790.449219 |
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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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C%A0%95%EC%B2%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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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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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교정청
### 기사:
1894년(고종 31), 제1차 동학농민전쟁으로 통해 전주화약을 맺은 조선정부는 6월 6일 자주적으로 내정개혁및 폐정개혁안을 위하여 교정청을 설치했는데,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중추부영사 신응조(申應朝),중추부판사 김홍집(金弘集) 등이 총재관(摠裁官)으로 임명되어 자주적 개혁정책을 협의하고자 하였다.
교정청을 설립한 목적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요구한 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물리치고, 자주적인 내정개혁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6월 21일 일본은 경복궁을 포위, 점령하고, 민씨 정권을 몰아내면서 흥선대원군을 섭정에 앉혀놓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정부를 수립, 자주적개혁목적으로 설립한 교정청을 혁파하고 일제가 주도하여 군국기무처를 설립하여 이로 하여금 일본과 내정개혁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6월 25일 개혁을 담당하고 추진할 기구로서 교정청 대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오토리[大鳥] 일본공사가 고문이 되어 제1차 갑오개혁(1894)에 간섭하였다.
같이 보기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군국기무처
조선<|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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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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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9%88%EC%B2%B8%EC%B4%88%20%EC%9D%B4%EC%95%84%ED%80%B8%ED%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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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초 이아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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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빈첸초 이아퀸타
### 기사:
빈첸초 이아퀸타(, Ufficiale OMRI, 1979년 11월 21일, 이탈리아 쿠트로 ~ )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다.
선수 경력
이아퀸타는 전 소속팀 우디네세에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였고, 2002-2003 시즌에 7골을 기록해 팀 내에서 득점왕이 되면서, 단번에 팀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다음 해부터는 세리에 A 득점왕 싸움에도 가세해, 팀을 견인하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그는 라치오로 이적한 로베르트 무치의 공백을 느끼지 않게 하는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종종 이적한다는 소문이 보도되었지만, 2007-08 시즌부터 세리에 A에 복귀한 유벤투스로 이적하였다.
이아퀸타는 이탈리아 U-21 대표팀에도 소집되었지만 당시는 주전 선수가 아니고, 에밀리아노 보나졸리의 후보 선수였다. 하지만, 2006 FIFA 월드컵에서는 그의 실력을 알아본 마르첼로 리피는 그를 최종 선수 명단에 포함시켰다. 초반에는 이 선택에 대해 의문의 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가나전에서 자신의 국가대표 첫 골을 넣어, 우수한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네 번째 월드컵 우승에 공헌했지만,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주로 교체 선수로 출전했다.
다음 2010년 FIFA 월드컵에는 질라르디노와 투톱으로 나섰는데, 뉴질랜드와의 2차전에서 페널티킥을 득점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고, 이탈리아는 3차전 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2 : 3으로 패배하며 2무 1패 조 최하위의 성적을 기록해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36년 만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2014년 7월 22일, 그는 공식적으로 현역 은퇴를 밝히고 감독직으로서 새롭게 축구계 경력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2015년 12월에 난데없이 불법 권총 소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이탈리아 매체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는 22일(현지시간) "이아퀸타가 총기를 불법으로 소지한 사실이 경찰에게 발각돼 기소됐다. 이아퀸타가 마피아와 연계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아퀸타가 받고 있는 혐의는 2정의 총기 등 불법 총기소지 및 마피아 조직인 은드란게타와 결탁한 혐의이다. 재판에 넘겨진 이아퀸타는 당국에 자신이 소지한 총기를 아버지의 집으로 운반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이아퀸타는 이미 은드란게타의 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고유한 코드네임까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8년 10월 31일, 이탈리아 법원은 빈첸초 이아퀸타는 마피아 조직 은드란게타와 관계가 있다는 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기각했지만 불법으로 총기를 소지한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어 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반면, 빈첸초 이아퀸타의 부친인 주세페 이아퀸타는 은드란게타와 결탁한 혐의가 명백히 입증된다고 하여 징역 19년 형을 선고했다. 이에 이아퀸타 부자는 판사를 향해 "말도 안 된다. 이것은 수치"라고 외치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이아퀸타는 권총을 소지한 혐의에 대해 현역 은퇴 후 사격장을 다니는 취미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해명해왔으나 법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상
2006년 FIFA 월드컵 우승
훈장
2006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4등급 (Ufficiale OMRI)
각주
외부 링크
FootballDatabase.com provides Iaquinta's profile and stats
197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남자 축구 공격수
이탈리아의 남자 축구 선수
유벤투스 FC의 축구 선수
칼초 파도바의 축구 선수
우디네세 칼초의 축구 선수
AC 체세나의 축구 선수
200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
칼라브리아주 출신
201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FIFA 월드컵 우승팀 선수
이탈리아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이탈리아 남자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이탈리아 남자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세리에 B의 축구 선수
크로토네도 출신
이탈리아 남자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세리에 C의 축구 선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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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와그너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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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로저 와그너 합창단
### 기사:
로저 와그너 합창단(The Roger Wagner Chorale)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근거로 한 합창단이다. 초창기에는 로스앤젤레스 콘서트 합창단(Los Angeles Master Chorale)이라고 불렸다.
뛰어난 미국의 합창단으로 이 로저 바그너란 이름은 이 합창단을 조직하고 육성시킨 지휘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이 합창단은 로스앤젤레스의 세인트 조셉 교회의 성가대가 발전한 것으로, 로저 와그너 합창단으로 발족한 것은 1946년이다. 역사는 짧지만 지휘자 로저 와그너의 지도를 받아서 정교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정규 멤버는 남녀 모두 24명이나 이 밖에 약 3백명 가까운 예비단원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파리나 런던에도 분단이 있어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합창단은 종교음악에서도 훌륭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계 각국의 민요 분야에서도 큰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합창단
로스앤젤레스 출신 음악 그룹
1946년 결성된 음악 그룹<|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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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남용 금지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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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
### 기사: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Abus de droit(권리남용), )은 법학 전반의 주요한 원칙 중의 하나이다. 민법상의 원칙으로서는 권리행사의 목적이 오직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려는 데 있을 뿐 행사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경우를 금하는 것을 말한다.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은 권리남용으로 권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특정한 행사가 허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다만,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법리일 뿐 근대 민법의 대원칙은 사적자치의 원칙이다. 사적자치의 원칙이 제한되는 경우는 주로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이에 반하는 강행법규가 있는 경우고, 둘째는 법원이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을 들어 권리행사를 제한하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 헌법과 법률상의 근거가 있어야 하며, 후자의 경우 사적자치를 인정하는 것이 정의관념에 비추어 도저히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여야 한다. 법원이 함부로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을 인용하는 것은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라고 하여 금지된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인용하여 "근대법의 대원칙은 공공복리 또는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인데, 대한민국에서만은 사적자치의 원칙이 대원칙으로 취급되기도 한다"라고 서술한 잘못된 정보가 오랫동안 위키백과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진실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공공복리나 권리남용금지가 사적자치보다 우선하는 것은 중세 사회의 법리이고, 공공복리와 권리남용금지 등의 명분으로 군주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저항하여 탄생한 것이 근대적인 민법이다.
세계적으로 보아 권리남용금지원칙은 영미법계에서는 아예 인정조차 되지 않으며, 대륙법계에서도 예외적인 경우에만 소극적으로 적용되는 법리로 결코 사적자치의 원칙에 우선하여 민법의 대원칙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전세계가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을 대원칙으로 삼는데 대한민국의 일부 세력만 사적자치를 대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은 악의적이고도 심각하게 날조된 허위 정보다. 참고로 공공복리 또한 헌법 제37조 제2항의 요건으로서, 일반적 행동자유권에서 파생하는 사적자치의 원칙을 엄격한 요건 하에 예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법계는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권리가 있으면 당연히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설령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권리인 이상 행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영미법계의 관점이다. 영국은 상업적 전통이 강한 국가이고, 마그나 카르타를 시초로 개인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를 견제해온 역사가 길기 때문에 위와 같은 관점을 강하게 견지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WTO 등 국제기구가 규범을 확립할 때에는 권리남용금지 원칙에 대한 영미법계와 대륙법계의 관점 차이를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작용한다.
다른 사람에 해를 줄 목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시카네(Schikane)가 권리남용의 선구를 구성한다. 영미법의 더러운 손 원칙과 비슷하다.
비교법
요건
권리자의 적법한 권리 및 그 행사에 해당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그 권리의 행사가 권리의 사회성을 일탈하는 정도로 행해져서 법이 당해 권리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어야 하며
가해의사, 즉 권리행사의 목적이 오로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기 위한 것이야 한다
판례
권리행사가 권리남용(Rechtsmissbrauch)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주관적으로 그 권리행사의 목적이 오직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려는 데 있을 뿐 행사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경우여야 하고, 객관적으로는 그 권리행사가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한 비록 그 권리행사에 의하여 권리행사자가 얻는 이익보다 상대방이 잃을 손해가 현저히 크다 하여도 그러한 사정만으로는 권리남용이라 할 수 없다. 국가에게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유만으로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신의칙에 반하고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하려면 일반 채무자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에서와 같은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그와 같은 일반적 원칙을 적용하여 법이 두고 있는 구체적인 제도의 운용을 배제하는 것은 법해석에 있어 또 하나의 대원칙인 법적 안정성을 해할 위험이 있으므로 그 적용에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확정판결에 의한 권리라 하더라도 신의에 좇아 성실히 행사되어야 하고 판결에 기한 집행이 권리남용이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으므로 집행채무자는 청구이의의 소에 의하여 집행의 배제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채권양도가 소송신탁에 해당하여 무효라고 볼 여지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갑의 판결금 채권에 기초한 강제집행이나 권리행사가 당연히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력공사가 정당한 권원에 의하여 토지를 수용하고 그 지상에 변전소를 건설하였으나 토지 소유자에게 그 수용에 따른 손실보상금을 공탁함에 있어서 착오로 부적법한 공탁이 되어 수용재결이 실효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토지에 대한 점유권원을 상실하게 된 경우, 그 변전소가 철거되면 61,750가구에 대하여 전력공급이 불가능하고, 그 변전소 인근은 이미 개발이 완료되어 더 이상 변전소 부지를 확보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그 부지를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변전소를 신축하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며, 그 토지의 시가는 약 6억 원인데 비하여 위 변전소를 철거하고 같은 규모의 변전소를 신축하는 데에는 약 164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며, 그 토지 소유자는 그 토지가 자연녹지지역에 속하고 개발제한구역 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토지를 인도받더라도 도시계획법상 이를 더 이상 개발·이용하기가 어려운데도 그 토지 또는 그 토지를 포함한 그들 소유의 임야 전부를 시가의 120%에 상당하는 금액으로 매수하겠다는 한국전력공사의 제의를 거절하고 그 변전소의 철거와 토지의 인도만을 요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토지소유자가 그 변전소의 철거와 토지의 인도를 청구하는 것은 토지 소유자에게는 별다른 이익이 없는 반면 한국전력공사에게는 그 피해가 극심하여 이러한 권리행사는 주관적으로는 그 목적이 오직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려는 데 있고, 객관적으로는 사회질서에 위반된 것이어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
같이 보기
신의성실의 원칙
직권남용죄 -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 권리남용을 한 경우에는 범죄가 된다.
각주
법률 용어
민법총칙<|end_of_text|>
| 13.419557 | 2,659.03418 |
105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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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98%EB%AC%B4%20%EA%B5%90%EC%9C%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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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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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의무 교육
### 기사:
의무 교육(義務敎育, )은 국가에서 제정한 법률에 의거, 일정한 연령에 이른 아동이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강제로 받아야만 하는 기본 교육이다.
국가 혹은 지역사회의 교육 당국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그 구성원에게 교육을 제공할 의무를 동시에 충족 시키는 교육을 지칭하거나 두 가지 의무 중 하나를 충족시키는 교육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1794년 프로이센의 보통법에 규정되었고 루터가 그 주창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교육법이 공포됨에 따라 출범되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초중등교육법 제 13조에 의거,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총 9년 과정의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며, 향후 고등학교까지 총 12년 과정으로 늘릴 계획이다(현재는 재정 상태 고려, 정부 예산 확보, 책임 부처 지정, 지원 대상 균등 문제 따위의 암초에 걸려 중학교까지만 의무교육으로 정해져 있음. 단 자율형 사립고, 특목고는 제외).
만일 본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홈스쿨링이나 대안학교를 선택하는 경우,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교육법 제30조에 따르면,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이를 보장하여야 한다.
또한, 교육을 받지 않는 경우 법적 책임이 부과되는 수가 있으며, 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 교육청에서는 해당 학생의 보호자에게 경고 및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 해당 학생은 대학 진학이나 취업 과정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므로, 국가 이미지의 실추로 이어지게 된다.
의무 교육 기간은 국민공통기본교과 적용 기간하고 일치한다. 중학교의 경우 국어 442시간, 영어 340시간, 수학 340시간, 사회·역사·도덕 510시간, 과학·기술가정 680시간, 예술(음악·미술) 272시간, 체육 272시간, 선택 272시간을 이수하여야 한다. 다만, 예술과 체육을 제외한 교과군은 80%를 이수하여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31조하고 세계 인권 선언 26조에서는 의무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정해져 있으며, 해당 비용은 모두 나랏돈(세금)으로 지원된다(사립초 제외).
대한민국 외 국가에서
입학 연령은 각 나라마다,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세계 OECD 회원국 대부분이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대부분 국가들이 만 6세부터 만 16세까지 해당하는 초등학교~중학교 과정까지 의무교육으로 정해져 있으며, 타이완, 덴마크, 마카오, 멕시코, 스웨덴, 아일랜드, 일본, 태국, 홍콩, 중국 들은 한국하고 같은 6-3-3학년제를 시행하고 있다(중국 일부 지역은 5-4-3학년제).
유럽 등 서방 선진국의 대부분은 유치원부터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으며, 그 과정 중 월반 및 유급 제도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경우 7월 말에 종합 성적을 매겨 진급, 유급 여부를 결정하는데 보통 한 반의 학생 10명 중 1명이 유급된다.
미국, 캐나다의 경우 대부분의 지역에서 의무 교육 기간 중 중, 고등학교에서는 학점제를 채택하고 있다. 학점제에 의해서 학점을 빨리 채웠을 경우에는 조기이수도 가능하다.
각주
교육
청소년의 권리<|end_of_text|>
| 15.53671 | 2,551.181159 |
77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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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B%AF%BC%EC%A3%BC%EC%A3%BC%EC%9D%98%EC%9D%B8%EB%AF%BC%EA%B3%B5%ED%99%94%EA%B5%AD%EC%9D%98%20%EB%AA%85%EC%A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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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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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
### 기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봉건시기의 낡은 제도를 타파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인민들에게 태음력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반드시 태양력을 사용하도록 하며, 봉건 시기의 전통문화와 전통 오락, 그리고 전통명절을 사용하지 말 것을 강조했으나, 1980년도에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지시에 의하여 전통문화와 풍습들을 인정하고, 음력설과 단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수리날로 부름)와 같은 전통명절들을 복원시켰다.
조선의 전통문화를 담은 자료는 "조선의 민속놀이"(1995년 금성청년출판사), "조선의 민속료리"(2003년 평양출판사)가 있으며, 수리날이라는 단오(음력 5월 5일)와 음력설에 전통놀이들을 하는데, 연날리기가 그 중에서 인기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썰매타기와 팽이치기를 하고 있다. 조선중앙방송에서는 모란봉극장에서 씨름선수권경기를 방송하곤 한다.
한편,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2000년에 조선노동당 직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음력설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음력설이 복원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크게 국가명절과 민속명절로 나뉘며, 민속명절은 전통문화를 따르는 전통 명절들이며 국가명절은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과 관련된 날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민속명절보다는 국가명절에 더 큰 비중을 두어 기념하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은 민속 최대의 명절이라 하여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민속명절 중 음력설은 3일 연휴로, 음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 쉬며, 국가명절 중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과 김정일의 생일인 광명성절은 2일 연휴로 하루를 더 쉰다.
같이 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각주
한국의 명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념일
나라별 공휴일 목록<|end_of_text|>
| 12.721215 | 1,520.876097 |
188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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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A0%9C%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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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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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가제트
### 기사:
가제트(Gazette)는 공식 저널, 기록 신문, 또는 단순 신문이다.
영어권 및 프랑스어권 국가에서는 17세기부터 신문 출판업자들이 가제트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수많은 주간지와 일간지가 가제트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어원학
가제트는 프랑스어에서 온 외래어로서, 16세기 이탈리아 가제타(gazzetta)의 순열어로, 베네치아 동전의 이름이다. 가제타는 16세기 초중반 베네치아 신문이 한 가제타(영국의 《페니 공포 소설》이나 미국의 《다임 노블》과 같은 언어 출판의 다른 언어들과 비교)를 하는 동안 신문의 비명이 되었다. 이 외래어는 다양한 부패와 함께 수많은 현대 언어(슬라브어, 튀르크어)로 남아있다.
각주
외부 링크
웨스트민스터 체제<|end_of_text|>
| 21.075937 | 783.369909 |
146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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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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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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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파
### 기사:
파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생물학
파는 줄기채소이다.
파는 부추과의 식물이다. 대파와 실파가 있다.
쪽파는 부추과의 식물이다
물리학
파(波)는 흔히 파동을 나타내는 접미어이다.
지명
파(巴)는 중국의 지명이다.
파는 중국의 동주 시대의 옛 나라이다.
음악
파(fa)는 7음계의 4번째 계이름이다.
파(Far)는 음악 밴드이다.
언어학
파()는 아랍 문자의 스무번째 글자이다.
스포츠
파 (골프 용어)
인명
캐서린 파(1512~1548)는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이다.
다이앤 파: 미국의 배우
제이미 파: 미국의 배우
로버트 파: 이론 화학자
조나단 파: 노르웨이 출신의 프로 축구 선수
같이 보기
PA
FA
PAR
FAR<|end_of_text|>
| 21.249084 | 800.754203 |
12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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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A6%88%EB%85%B8%20%EB%A0%8C%ED%83%80%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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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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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미즈노 렌타로
### 기사:
미즈노 렌타로(, 1868년 2월 3일 ~ 1949년 11월 25일)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가, 내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문부대신, 귀족원의원으로 요직을 역임한 사람이다.
개요
아키타 번의 번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키타 중학교(현재 아키타 현립 아키타 고등학교), 제일고등중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하였다.
1919년, 신임 정무총감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는데, 남대문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이들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미즈노는 다치는 데에서 그쳤다. 일본에서는 저작권법을 제정할 때 저작권 보호를 추진한 인물로 유명한 반면, 한국에는 간토 대지진 당시 내무대신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악감정을 조장해 학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1868년 출생
1949년 사망
일본 제국의 정치인
A급 전범 용의자
일본의 내무대신
일본의 문부대신
데와국 사람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훈2등 욱일중광장 수훈자
훈3등 욱일중수장 수훈자
훈1등 서보장 수훈자<|end_of_text|>
| 13.514154 | 1,096.173527 |
154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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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U%20%EC%98%81%EC%96%B4%EC%99%80%20non-U%20%EC%98%81%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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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영어와 non-U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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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U 영어와 non-U 영어
### 기사:
U 영어()와 non-U 영어()는 1950년대 영국 및 미국 북동부에 존재했던 사회적 방언(사회방언)에 관한 담론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U’는 상류층(upper class)이 쓰는 U 영어는 노동자 계급이 쓰는 언어와 비슷한 반면에 중산층의 non-U 영어는 더 ‘고상한’ 표현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역사
이 논쟁은 1954년, 영국 버밍엄 대학교 언어학 교수인 앨런 로스() 교수가 처음 제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 영어 사용에 차이가 있음을 밝히면서 U 및 non-U라는 용어를 그의 논문에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글은 핀란드의 언어학 저널에 발표되었다.. 그의 논문은 발음 및 글쓰기 스타일의 차이점도 밝히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논문이 밝히고 있는 계층 간 어휘의 차이에 주목하였다.
영국의 작가 낸시 밋퍼드는 이에 자극을 받아 에세이를 하나 쓴다. 제목은 〈영국의 귀족성 The English Aristocracy〉이었는데, 1954년 인카운터에 발표하였다. 밋퍼드는 상류층들이 쓰는 단어들을 모아서 제시하였다. 오른쪽에 보이는 표와 같은 것인데, 이를 본 사람들에 의해 영국의 계층-자각성 및 속물성에 대한 논란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진지한 자아 성찰과 연관이 있었고, 이는 타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에벌린 워, 존 베처먼 및 그 외 사람들에 의해, 이 에세이 및 알란 로스 교수의 최초 논문이 Noblesse Oblige: an Inquiry into the Identifiable Characteristics of the English Aristocracy라는 제목으로 1956년에 재발행되었다. 벳셔먼의 〈How to Get on in Society〉라는 제목의 시가 이 콜렉션의 끝에 첨부되었다.
U 영어 및 non-U 영어 논란은 가볍게 다뤄질 수 있을 만한 것이었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1950년대 내핍 경제 하의 중산층들의 곤궁한 생활에서 비롯된 불안 때문이었다. 특히 보도 매체들이 이 논란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생산해냄으로써, 처음에 의도했던 바가 아닌 좀 다른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만개했던, 상위 계층의 문화와 매너를 배워 자기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분노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2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위에서 논의된 개념과 용어들은 사라져 갔다. 영국에서는 반속물화 현상이 나타나 상류층이나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노동자 계급의 화법을 채용하는 일이 늘어났다. (:en:Estuary English 항목 참조) 하지만 대부분의 차이점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는 하며 사회 계층 지시자로 사용할 수 있다.
같이 보기
양층언어
Fox, Kate. Watching the English: The Hidden Rules of English Behaviour. Hodder & Stoughton, London 2004.
Cooper, Jilly. Class. Corgi Adult, 1999.
Charlotte Mosley (ed.) The Letters of Nancy Mitford and Evelyn Waugh. Hodder, London 1996, at pp. 297-394.
[임귀열 영어] U-English vs. non-U English 1 (계층별 영어 1) 한국일보
임귀열 영어칼럼 [20040701] U and Non-U (상류층 영어와 서민 영어)
각주
사회언어학
영어<|end_of_text|>
| 21.925133 | 2,806.658951 |
1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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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B%B4%89%EA%B8%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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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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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윤봉길
### 기사: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현 예산군) 출생이다.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그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농촌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훙커우(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를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일본군 1만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든 급조폭발물이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천황탄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는데, 바로 그 허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하고 나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하고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하고 내빈은 퇴장하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그 틈에 노림수를 사용하여 수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키고 나서 힘차게 던진 찰나에, 단상으로 정확하게 명중이 되었다. 그 틈을 노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폭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되는 그 찰나에 일본 헌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윤봉길을 덮쳐 제압하였다. 윤봉길은 제압을 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여,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되는 등 일본 군 고위 간부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었는데, 당시 기념식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하면서, 윤봉길을 극찬하였으며,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된 것이다. 당시 쑨원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11월 2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반면, 일본 헌병대와 순사들이 조선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일제의 복수에 불과할 뿐 의사의 탓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당시 상하이 시에 위치해 있던 임시 정부 청사를 충칭으로 옮겨야만 했다.
순국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처절한 복수였다.
유언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사후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기념사업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
2012년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모욕적인 문구가 담긴 말뚝을 박는 사건이 벌어져 논란이 되었다.
기념관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이 4세 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의 장소였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 대해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던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제스의 이러한 감탄은 이 말이 가장 많이 나올 수 있는 백범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와 장제스 일기에서 사실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장제스 일기에서는 "옛 사람이 말하길 국가의 원수(怨讐)와는 한 하늘 아래서는 같이 살 수 없다 하였다. 공적을 쌓고자 무력을 앞세워 침략을 일삼는 자들이 깨달은 바가 있지 않겠는가?"고 의거를 굉장히 높게 칭송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김구 선생은 만주사변 발발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더욱더 위축된 상황으로 정무적 정세적 판단하에 과감한 결단이 윤봉길의 거사였으나,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논란
당시 사진의 조작 논란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현재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오른쪽 사진)이 가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오른쪽 사진과 표제 사진의 인물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물론, 윤봉길은 중절모를 쓴 적이 없으며, 트렌치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작 판명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 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저서
《오추》(嗚推)
《옥수》
《농민독본》3권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가족 관계
증조할아버지:윤재
큰할아버지:윤헌영
두번째 큰할아버지:윤필영
조부:윤진영
큰아버지:윤경
아버지:윤황(????~1950년)
어머니:김원상(1889년~1952년)
부인: 배용순(1907년 8월 15일 ~ 1988년 7월 10일)
장남: 윤종(尹淙, 1927년 ~ 1984년 4월 22일)
자부: 김옥남(1936년~)
손녀: 윤주경(尹柱敬, 1959년 5월 3일 ~ )
손녀: 윤주원
손자: 윤주웅(尹柱雄, 1971년 1월 26일~)
증손자:윤행복
차남: 윤경(尹涇, 1928년 ~ 1929년) - 2살 때 홍역으로 사망
외동딸: 윤안순(尹安順, 1929년 ~ 1929년) - 1929년 아직 만나이 한살바기도 채 아니 되어 홍역으로 사망
삼남: 윤담(尹淡, 1930년 ~ 1938년) - 덕산보통학교 1년 중퇴 후 9살 때 복막염으로 사망
유품
윤봉길 의사 유품
대중 문화
윤봉길을 연기한 배우
텔레비전 드라마
남성식 -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 (1979년, KBS)
정성모 - 《조선총독부》 (1984년, MBC)
이한승 -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 (1985년, KBS1)
박영규 - 《그의 아내》 (1986년, MBC)
박영태 - 《백범일지》 (1989년, MBC)
김상중 - 《매헌 윤봉길》 (1992년, MBC)
차광수 - 《김구》 (1995년, KBS1)
이강민 - 《이몽》 (2019년, MBC)
영화
이경선 - 《윤봉길 의사》(1947년)
윤일봉 - 《아아 백범 김구선생》 (1960년)
박노식 - 《일본제국과 폭탄의사》 (1967년)
박노식 - 《상해 임시정부》 (1969년)
연극
은희진 - 《윤봉길 의사》(1986년)
오페라
양승호 (오페라가수) - 《매헌 윤봉길-1932 상하이의 아침》 (2023년, 김포시오페라단)
같이 보기
배용순
김구
이봉창
안중근
백정기
한인애국단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윤봉길의사 기념관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각주
외부 링크
(사)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윤봉길 - 브리태니커
윤봉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8년 출생
1932년 사망
20세기 한국 사람
일제강점기의 교사
일제강점기의 시인
일제강점기의 저술가
한국독립당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파평 윤씨
예산군 출신
국민주의 암살자
총살형된 사람
사형된 한국 사람
사형된 정치인
일본에서 사형된 사람
한국의 독립운동가<|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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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프로그래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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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웹 (프로그래밍)
### 기사:
웹(WEB) 도널드 커누스가 만든 컴퓨터 프로그래밍 시스템이다. 본인이 제안한 문학적 프로그래밍(literate programming)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보통 프로그램을 짤 때 프로그램을 먼저 짜고 나중에 주석으로 프로그램의 동작을 설명하는 방법을 쓴다. 문학적 프로그래밍에서는 문학작품을 쓰는 것처럼 프로그램이 어떻게 동작해야 하는지 말로 풀어쓰고, 그 동작과 관련된 코드는 특별한 기호로 구분하여 작성한다. 그리고 웹을 이용해서 설명과 관련된 부분은 출력가능한 문서로 뽑아내고 소스 코드 부분은 컴파일 가능한 코드로 뽑아낸다.
WEB은 'tangle'과 'weave'라는 두 가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tangle: 소스코드에서 컴파일 가능한 파스칼 코드를 뽑아내는 프로그램
weave: 출력가능한 TeX 문서를 뽑아내는 프로그램.
WEB의 새로운 버전 CWEB도 있다.
참고 문헌
Donald E. Knuth, Literate Programming, Stanford, California: Center for the Study of Language and Information, 1992, CSLI Lecture Notes, no. 27.
외부 링크
CWEB 홈페이지
자유 문서 생성기
문학적 프로그래밍
TeX<|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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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B%AC%B4%EC%9B%90%EC%9E%90%EA%B2%A9%EC%82%AC%EC%B9%AD%EC%A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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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자격사칭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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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공무원자격사칭죄
### 기사:
공무원자격사칭죄(公務員資格詐稱罪)는 공무원의 자격을 사칭하여 그 직권을 행사하는 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118조). '공무원의 자격을 사칭하여'라 함은 공무원이 아닌 자가 공무원의 자격을 사칭하는 경우와 공무원의 자격을 가진 자가 자기의 자격 이외의 자격을 사칭하는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공무원 개념에는 공무원 임용령 제43조에 의한 임시직원도 포함된다.
본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단순한 사칭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더 나아가서 그 사칭한 직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청와대민원비서관임을 사칭하여 시외전화 선로고장수리를 하라고 말한 경우는 청와대 민원비서관의 직권을 행사하는 요건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피고인들이 그들이 위임받은 채권을 용이하게 추심하는 방편으로 합동수사반원임을 사칭하고 협박하여도 위 채권의 추심행위는 개인적인 업무이지 합동수사반의 수사업무의 범위에는 속하지 아니하므로 직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여서 공무원자격사칭죄로 처벌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중앙정보부 직원 아닌 자가 중앙정보부 직원을 사칭하고 청와대에 파견된 감사실장인데 사무실에 대통령 사진의 액자가 파손된 채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나왔으니 자인서를 작성 제출하라고 말한 행위는 중앙정보부 직원의 직권행사에 해당되지 않아 본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단순한 사칭에 그쳤을 경우에는 경범죄처벌법에 의하여 처벌된다(경범 3조 7호).
각주
형법
법률<|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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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모양 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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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눈모양 은하
### 기사:
눈모양 은하(영어: , NGC 4435/8, Arp 120)는 처녀자리에 있는 상호작용 은하 1쌍으로, 렌즈형 은하인 NGC 4435와 활동 나선 은하인 NGC 4438을 통틀어 일걷는 말이다. 이 은하쌍은 마카리안 연쇄은하(Markarian’s chain)의 일부분으로 M86 근처에 있다.
각각 은하들
NGC 4435와 NGC 4438은 밝은 하얀색의 은하 팽대부(bulge)가 서로 쌍둥이처럼 비슷하지만, NGC 4438의 경우, 애꾸눈 선장의 눈처럼 푸른빛의 칼날 상처가 있는 것이 서로 다르다. NGC 4435은 막대 렌즈형 은하이며, NGC 4438는 활동은하핵을 가진 나선 은하이다. 비교적 작은 공간에 은하 밀도가 높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구성원들처럼, 이 두 은하는 아마도 서로 충돌했던 과거가 있는 듯하다. 찬드라 X-선 우주망원경의 관측결과에 따르면, 이 두 은하는 약 1억년 전에 충돌하여 1,600광년 정도 멀어지기 전까지 서로 밀고 당기는 물질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파로 NGC 4435는 다소 초라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NGC 4438은 깊은 상처와 함께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NGC 4435
비록 NGC 4438 은하보다 더 초라하게 되었지만, 사실 NGC 4435도 상대 은하처럼 항성 형성 지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렌즈형 은하의 특색덕에 이런 지역은 은하의 중심부로 제한되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NGC 4435의 중심부의 사진과 스피처 우주망원경이 관측한 바로는 이 은하에는, 렌즈형 은하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별들과 달리, 어린 별들이 모인 집단이 모여있는 장면이 포착됐으며, 또한, NGC 4435에서부터 충돌 여파로 인한 별 꼬리가 포착되었는데, 이는 이 은하가 별 생성이 활발한 지역을 가지고 있을수 가능성을 재기한다. 하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이 별 꼬리가 우리은하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NGC 4438
관측과 사진으로 통해 NGC 4438은 NGC 4435와 확연히 다르게 항성 생성이 더 활발하다. NGC 4438의 파란 부분은 새롭게 태어난 수많은 별들이 내는 빛이며, 검은 부분은 먼지대(dust lane)에 의해 가려져 보인다. 이 먼지와 항성을 형성하는 가스는 NGC 4435 은하와 충돌과 근쳐 M86 은하와 상호작용한 여파로 NGC 4438 은하에 남아 돈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과거로인해, NGC 4438 은하는 과거에 폭발적 항성생성이 발생했다. 그 증거는 이 은하의 바깥쪽에 있는 어린 푸른 별들의 고리인데, 그 이유는 이러한 별들은 본래 나선 은하나 상호작용 은하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NGC 4435 은하와 달리, NGC 4438은 더 활발한 은하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 은하가 대조되는 다른 은하보다 더 활발한 초대질량 블랙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 증거로, 허블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NGC 4438의 중심부 영상에는 그 초거대블랙홀에 의한 제트가 부글부글 끓는 거품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근거해봤을때, NGC 4438 은하는 활동 은하라고 단정지을수있지만, 이 은하가 과연 세이퍼트 은하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은하가 활동은하핵을 지닌 세이퍼트 은하로 추정했으나, 확실히 단정지을수는 없었다. 이런 불확실은 NGC 4438 은하의 중심부가 먼지띠와 가스 구름으로 가려져, 확실한 은하핵을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이 제일 크다.
상호작용 관계
NGC 4435와 NGC 4438은 상호작용 은하로서 할튼 알프의 특이은하 목록 (Arp)에 120번째 천체로 올라와 있다 (Arp 120).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이 두 은하는 서로 은하간 충돌을 겪은 과거가 있다. 또한 현재, 이 두 은하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다. 그 증거로 현재 NGC 4438 은하의 바깥쪽에 있는 푸른 가스와 별 띠의 형태를 보면, NGC 4435의 인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NGC 4438은 근처의 M86 타원 은하와 희미한 가스 필라멘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추가 관측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은 NGC 4438와 근처의 NGC 4435, 그리고 M86 은하가 처녀자리 은하단의 많은 은하가 그랬듯이, 서로 상호작용했을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갤러리
처녀자리
나선은하
상호작용은하
처녀자리 은하단
4435
120<|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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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2%8C%ED%86%A0%EB%B0%A4%EC%A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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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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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게토밤즈
### 기사:
게토밤즈()는 2002년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결성된 펑크 록 밴드이다.
1981년생 부산 출신 동갑내기 백준명, 최석, 현민호, 공태호는 부산 스카 / 펑크 밴드 사이드티켓과 런캐럿에서 활동 하다가, 2002년 게토밤즈 결성하여 서울에 진출했다. 현민호는 서울 부적응 증세로 밴드를 탈퇴했으며,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거지 단역, 럭스와 칵크래셔에서 베이스, 백보컬을 맡고 있던 이주현이 기타를 짊어 지고 현민호의 자리를 대신하여 다시금 왕성한 활동을 하며 다수의 클럽 공연과 페스티벌 참가, 그리고 정규 앨범 한장을 발매하고 2006년에 돌연 해체됐다.
현재 백준명은 페이션츠와 문샤이너스에서, 최석은 도피돌즈를 거쳐 텔레파시, 이주현은 갤럭시 익스프레스, 공태호는 도피돌즈를 거쳐 락타이거즈에서 잠시 드럼을 맡았다. 이들의 음악에서 클래시와 랜시드의 냄새를 맡아 볼 수 있는데, 가장 영향을 받은 밴드가 대표적으로 그 두 팀이라고 알려졌다.
경력
2002년 부산에서 결성
2002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 숨은 고수, 쌈넷 전속 음반 계약
2003년 STAR (게토밤즈/스키조 스플릿음반) 발매
2003년 We are the Punx in Korea “Happen” 삽입
2003년 영화 <똥개> O.S.T “사노라면” 삽입
2003년 인디파워 2003 “그땐 그랬지” 삽입
2003년 영화 <동해물과백두산이> “Kill Me” 삽입
2004년 V.A “우린 언제나” 삽입
2003년 쌈지스포츠 모델
2004년 성도 하프클럽(halfclub.com) 광고 모델 촬영
2004년 SKT speed 010 “자유”편 TV CM 촬영
2004년 KTF ever “콘서트” 편 TV CM 촬영
2005년 7월 데뷔앨범 “Rotten City” 발매
구성원
백준명 - 보컬 & 기타
최석 - 베이스 & 보컬
이주현 - 기타 & 보칼
공태호 - 드럼 & 보컬
전 구성원
현민호 - 기타 & 보컬 (현재 사우스베이 보컬 & 기타)
음반 목록
정규 앨범
Rotten City (2005)
I'm not wrong
Spider's web
50% (Feat. *Shorty Cat)
Rotten city
OK OK
Radio
Once upon a time
검은 나
Party's going on
우리 여기 모여
Two thieves
We will Forever(feat. *Wonjamaica)
비정규 앨범
From The Rotten City Rejects (2005)
Ridin' on U
Friend Friend
Liar
우린 모든것을 잃었네
거리를 서성이다
나의 노래
Rock n' Roll Beach (featuring: Kingston Rudie Ska)
이런 젠장할
24
옛날노래
Rising Sun
Make My Day
기타
동해물과 백두산이 O.S.T(2003)
Star Vol.1 Split w/Schizo(2003)
똥개 O.S.T(2003)
Indie Power 2003(2003)
라이브 클럽 페스트 1(2004)
외부 링크
다음 카페
대한민국의 록 밴드
대한민국의 펑크 록 밴드
2002년 결성된 음악 그룹
2006년 폐지
4인조 음악 그룹
남성 음악 그룹
2000년대 음악 그룹<|end_of_text|>
| 20.140583 | 2,897.641019 |
177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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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B%A7%8C%EC%84%9D%20%281911%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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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만석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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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윤만석 (1911년)
### 기사:
윤만석(尹萬石, 1911년 6월 19일 경북 문경 ~ 1988년 8월 18일)은 일제강점기부터 변호사를 지낸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제3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약력
문경공립보통학교 졸업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변호사
대구지검 검사
대구지법 밀양지원 판사
청주지검 검사장
부산지검 검사장
참고 자료
1911년 출생
1988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법조인
문경초등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법조인
자유당 (대한민국)
문경시 출신
해남 윤씨
경상북도의 국회의원
20세기 대한민국 사람<|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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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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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88%EB%8F%84%EC%9A%B0%20NT%20%EC%8B%9C%EC%9E%91%20%ED%94%84%EB%A1%9C%EC%84%B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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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NT 시작 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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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윈도우 NT 시작 프로세스
### 기사:
윈도우 NT 시작 프로세스(Windows NT startup process)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NT, 윈도우 2000,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운영 체제를 시작하는 과정이다. 윈도우 비스타에서는, 시작 프로세스의 과정이 약간 변경되어 있다. (윈도우 비스타 시작 프로세스를 볼 것)
같이 보기
시동(부팅)
멀티 부팅
리눅스 시작 프로세스
부트비스
윈도우 NT 아키텍처
외부 링크
Startup Applications List
How to edit SETUPAPI.DLL
윈도우 구성 요소
윈도우 NT
윈도우 NT 아키텍처
부팅<|end_of_text|>
| 9.841662 | 461.898183 |
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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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995%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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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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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1995년
### 기사:
1995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사건
1월 1일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발족하였다.
1월 6일 - 보진카 계획이 발견되다.
1월 8일 - 대한민국에서 개인정보보호법(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다.
1월 17일 - 일본 한신·아와지 대지진(6,434명 사망, 43,792명 부상, 3명 행방 불명) 발생.
3월 20일 - 옴진리교가 일본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다.(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12명이 사망하였고, 5000여 명이 중독되었다.
3월 30일 - 김종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다.
4월 13일 - 대한민국과 이집트가 대사급으로 격상된 외교관계를 맺고 정식으로 수교하다.
4월 17일 - 청일 전쟁 종전 100주년.
4월 19일 -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다. 168명이 사망하였고, 68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4월 28일 -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로 101명이 사망하다.
5월 - 중화인민공화국 산서성에서 장평 대전 당시 생매장된 유해들이 대거 발굴되다.
5월 11일 - 핵확산 방지조약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다.
5월 27일 - 대법원이 지존파 일당 6명에 대한 사형을 최종 확정하다.
5월 30일 - 서해상에서 대한민국 어선 우성호가 인천항에 귀항 중, 조선인민군 해군의 함정의 총격을 받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되었다.
6월 27일 -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선출하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다.
6월 29일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인해 502명의 사망자와 93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다.
7월 17일 - 미국 우주비행사 거주 및 작업공간인 Spektr이 우주정거장의 로봇 팔에 의해 모듈의 위치가 변경되다.
7월 18일 - 대한민국 검찰이 지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5·18 관련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7월 23일 - 씨프린스호가 제3호 태풍 페이에 휩쓸려 좌초되어 총 99000톤의 기름이 유출되었다.
7월 24일 - 대한민국, 태풍 재니스 상륙. 28일까지 지속되다.
8월 4일 - 대한민국, 정보화촉진기본법을 공포하다.
8월 5일 - 미국과 베트남이 재수교하다.
8월 15일 -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옛 조선 총독부 첨탑을 제거함으로 청사를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8월 21일 - 경기도 용인군 경기여자기술학원 기숙사 방화로 37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하다.
8월 24일 - 윈도우 95가 출시되었다.
9월 5일 -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창당하다.
9월 8일 -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사자들, 제네바 평화 협상에서 보스니아 평화 원칙에 합의하다.
9월 19일 -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가 《유나바머 선언》을 싣다.
10월 2일 - 미국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 무죄 평결 석방되다.
10월 6일 - 네이처 지에 페가수스자리 51번 별을 도는 행성 발견에 대한 기사가 실리다.
10월 8일 - 을미사변 100주년.
10월 24일 -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두 명의 무장 공비가 발견되어 교전 끝에 한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하다.
10월 27일 - 노태우 전 대통령, 연희동 자택에서 비자금 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다.
10월 28일 -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렸던 《젊음의 삐삐 012 콘서트》 현장에서 1만여 명의 관객이 한꺼번에 입장하려다 8명이 부상을 입었다.
11월 2일 - 지존파 일당과 온보현 등 흉악범 19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11월 4일 -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당하다.
11월 6일 - 조선 중종 때 정온의 시신, 파주군에서 미라로 발견되다.
11월 12일 - 크로아티아 전쟁 종전.
11월 16일 -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당시 5,0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기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되다. 헌정 사상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광복 이후 처음이다.
12월 3일 - 전두환 전 대통령,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다.
12월 6일 -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출범하다.
12월 12일 - 대동여지도 목판본이 발견되다.
12월 14일 -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다.
12월 20일 - 아메리칸 항공 965편 추락 사고 발생.
문화
1월 1일 -
대한민국에서 행정 구역 체계의 개편이 이루어져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편되고 전국단위의 도농통합으로 창원시 등 도농복합시들이 출범하다.
키리바시가 표준 시간대를 UTC-11:00와 UTC-10:00에서 UTC+13:00과 UTC+14:00로 24시간 앞당기면서 1994년 12월 31일을 없앴다.
1월 8일 - NHK의 드라마 8대 장군 요시무네 방송 개시(~12월 10일)
1월 9일 - SBS TV 모래시계 방송 시작.
2월 1일 - 부산불교방송 개국.
2월 15일 - 대한민국, 러시아,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해저 광케이블이 개통되다.
3월 1일 -
대한민국의 매일경제TV MBN, 중앙방송, YTN, Q채널(現 JTBC2), KM, KTV 국민방송, 가톨릭평화방송, BTN불교TV, Mnet, KMTV, DCN(現 OCN), 캐치원(現 캐치온) 등의 케이블 TV 방송국들이 개국하였다.
광주불교방송 개국.
서울시 구로구의 남동부와 경기도 광명시의 일부 지역이 합쳐져 금천구로 분리독립했다.
특별시·광역시·도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되고 특별시·광역시의 일부 자치구들이 분구되다.
3월 2일 - 현대자동차에서 마르샤가 출시되었다(시판은 같은 달 3일).
3월 16일 - 현대자동차에서 아반떼가 출시되었다.(시판은 같은 달 17일)
4월 3일 - KBS 제2FM 볼륨을 높여요 첫방송.
4월 5일 - 일본에서 웨딩피치를 방영하다.
4월 8일 - 일본에서 몬타나존스를 종영이 되었다.
4월 10일 -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현 서원구) 사직동에서 청주예술의전당이 준공 및 개관했다.
4월 15일 -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이 잠실 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하다.
4월 28일
쌍용자동차에서 이스타나가 출시되었다.(시판은 7월)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운전면허학과시험을 20문제에서 40문제가 바뀐다고 했고, 운전면허학과시험을 2배로 늘려서 40문제(1종:80점 이상, 2종:70점 이상)로 변경되었다.
5월 2일 - 운전면허학과시험이 20문제에서 40문제(1종:80점 이상, 2종:70점 이상)로 바뀌었다.
5월 10일 - 김해시 등 시군 통합되어 도농복합시들이 출범하다.
5월 14일 - 대한민국에서 SBS의 1차 지역 민방 네트워크 가맹국인 부산방송(PSB), 광주방송(kbc), 대전방송(TJB), 개국하였다.
5월 30일 - 윈도우 NT 3.51이 출시되다.
5월 31일 - 이슬람력 설날.
6월 20일 - 기아자동차에서 크레도스가 시판되었다.
8월 5일 - 대한민국 최초의 통신위성 무궁화 1호,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 성공하다.
8월 11일 - 대한민국 광복 50주년 맞아 이듬해인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발표하다.
8월 15일 - 대한민국, 옛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공사를 시작하다.
8월 18일 - 대한민국, 문화방송, 위성방송사업단이 발족하다.
8월 24일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5를 출시하다.
8월 25일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36만쌍 축복결혼식을 함
8월 29일 - 대한민국, 중앙고속도로, 칠곡-안동, 제천-원주, 홍천-춘천간 2차로 개통함.
9월 4일 - KBS 1TV, KBS 2TV, MBC TV, SBS TV 4개 채널을 평일 방송시간을 오후 17시 30분에서 밤 0시까지 오후 17시로 변경이 되었고, 평일 오후 방송시간을 오후 17시부터 새벽 1시로 변경되었다.
9월 6일 -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격수 칼 립켄 주니어가 2,131번째 경기에 출장하면서 루 게릭이 가지고 있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깨다.
9월 20일 -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 (~11월 20일)
9월 22일 - 중앙일보 가로쓰기 발행 시작.
10월 4일 -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 방영을 개시하다. (~1996년 3월 27일)
10월 17일 - SBS 프로덕션 홍진경의 글자놀이/숫자놀이가 출시되다.
11월 7일 - V-리그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창단
11월 9일 - 마카오 국제공항 개항.
11월 13일 - 기아자동차에서 프레지오가 시판되었다.
11월 15일 - 수도권 전철 5호선 강동구간 왕십리~상일동 구간이 개통되었다.
11월 22일 - 대한민국, 19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22일 - 영화 토이 스토리가 개봉되다.
12월 1일 - 대한민국 투니버스, 바둑TV, KCTS(現CTS기독교TV), A&C코오롱(現 K-STAR) 등 4개의 케이블 TV 채널이 개국되었다.
12월 10일 - 국내 최초의 다채널 사업자였던 온미디어가 설립되다.
12월 15일 -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K리그 제9구단으로 창단하다.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CBS 음악FM 개국. (주파수 93.9 MHz, 7㎾)
12월 18일 - 제2경인고속도로 광명 나들목 ~ 석수 나들목 (5.39 km) 구간 개통
12월 20일 - KBS 제3라디오인 사랑의 소리방송을 KBS 라디오채널을 개국하다.
12월 23일 - 현대정공(현대모비스의 전신)에서 싼타모가 시판되었다.
12월 28일 - 제2경인고속도로 석수 나들목 ~ 삼막 나들목 (1.22 km) 구간 개통
12월 31일 - 수인선 협궤열차가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운행중지 되었다. 이후 복선전철 완전 개통시까지 16~24년 동안 운행이 중단되었다.
날짜미상
USL 프리미어 디벨로프먼트 리그의 첫 시즌이 시작되었다.
미국 전역에 유연 휘발유 사용이 금지되었다.
탄생
1월
1월 1일
이란의 축구 선수 사르다르 아즈문.
스위스의 축구 선수 플로리야나 이스마일리.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그래프트 프로게이머 윤영서.
1월 3일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김설현 (AOA).
대한민국의 가수 지수 (블랙핑크).
1월 4일
미국의 배우 매디 해슨.
대한민국의 래퍼 비바.
1월 7일
대한민국의 배우 오진석.
대한민국의 유튜버 잼미님. (~2022년)
대한민국의 배우 홍서영.
1월 8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미스틱.
1월 9일
대한민국의 배우 하승리.
미국의 배우 니컬라 펠츠.
멕시코의 축구 선수 카를라 파올라 니에토.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뜨뜨뜨뜨.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또니.
1월 10일 - 일본의 가수 켄타 (JBJ).
1월 12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알레시오 로마뇰리.
1월 13일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어스 (온앤오프).
대한민국의 유튜버 태경 (유튜버).
1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영 (블랙식스).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리라.
1월 16일
일본의 축구 선수 미나미노 타쿠미.
대한민국의 모델 심소영.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이혜인.
1월 17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도미니크 얀선.
1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상현.
1월 20일
대한민국의 가수 김소희 (네이처).
우루콰이의 축구 선수 호세 마리아 히메네스.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캘럼 체임버스.
미국의 힙합 가수 조이 배드애스.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이수웅.
1월 21일
대한민국의 배우 최아라.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박지훈.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진이.
1월 23일
대한민국의 가수 와이엇 (온앤오프).
대한민국의 가수 조용근 (D1CE).
대한민국의 전 가수, 배우 이화겸.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이주호.
1월 24일 -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강신혁.
1월 25일 - 대한민국의 골퍼 박지연.
1월 26일
중국의 가수 선의 (우주소녀).
러시아의 레슬링 선수 세르게이 세묘노프.
1월 28일 - 일본의 아이돌 니시무라 호노카.
1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정수종.
1월 30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나현.
1월 31일 - 일본의 성우 쿠보타 미유.
2월
2월 1일 - 독일의 배우 파울라 베어.
2월 2일 - 폴란드의 축구 선수 카롤 리네티.
2월 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용익.
2월 5일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곽나훈.
벨기에의 축구 선수 아드난 야누자이.
2월 6일
대한민국의 가수 종업 (B.A.P).
대한민국의 쌍둥이 가수 진, 빈 (MVP).
2월 8일
대한민국의 가수 송윤형 (iKON).
독일의 축구 선수 요주아 키미히.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승민.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게임캐스터 최시은.
2월 9일
미국의 가수 쟈니(NCT).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고유민. (~2020년)
2월 10일
일본의 배우 카와구치 하루나.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나뷔 케이타.
대한민국의 배우 지하윤.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이민욱.
2월 11일
슬로바키아의 축구 선수 밀란 슈크리니아르.
네델란드의 축구 선수 릭 카르스도르프.
2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진재승.
2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건욱.
2월 15일
대한민국의 배우 고민시.
미국의 래퍼 메건 더 스탤리언.
독일의 축구 선수 자라 데브리츠.
대한민국의 배우 장서연.
2월 16일 - 일본의 배우 마츠오카 마유.
2월 18일
아이슬란드의 축구 선수 루나르 루나르손.
네델란드의 축구 선수 나탄 아케.
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태환 (서프라이즈).
2월 2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건희.
2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유.
2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도코 (시적화자).
2월 2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혜영.
2월 27일
대한민국의 가수 리키 (틴탑).
대한민국의 배우 이연.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체코의 축구 선수 토마시 소우체크.
2월 28일
대한민국의 배우 방효린.
대한민국의 가수 유회승(엔플라잉).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크라운.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한다혜.
3월
3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준용 (느와르).
3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주영.
3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홍지윤.
3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호.
3월 5일 - 일본의 배우 시손 쥰.
3월 6일
대한민국의 전 가수 진혜원. (파이브돌스)
일본의 가수 아이묭.
3월 7일
미국의 배우 헤일리 루 리처드슨.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임팩트.
일본의 가수, 배우 키쿠치 후마.
3월 9일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신우영.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앙헬 코레아.
3월 10일
일본의 배우 사쿠마 유이.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정지석.
대한민국의 국악인 이아진.
3월 12일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공윤희.
대한민국의 래퍼 해쉬스완.
3월 13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강현무.
3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지빈.
3월 15일
대한민국의 배우 이준영.
일본의 성우 토요타 모에.
대한민국의 가수 마독스.
3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쟈쟈.
3월 19일
스페인의 축구 선수 엑토르 베예린.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양유진.
3월 20일
대한민국의 가수 Kei (러블리즈).
캐나다의 배우 서맨사 와인스틴. (~2023년)
3월 21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서은교.
3월 23일 - 튀르키예의 축구 선수 오잔 투판.
3월 24일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엔조 지단.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헬퍼.
3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임연.
3월 27일 - 미국의 쇼트트랙 선수 존헨리 크루거.
3월 29일
대한민국의 배우 최정우.
미국의 배우 마크 무소(Marc Musso).
3월 30일 - 잉글랜드의 배우 시몬 애슐리.
3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오스틴.
4월
4월 1일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동녕(FXOpen).
미국의 프로레슬링 선수 로건 폴.
4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연.
4월 3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아드리앵 라비오.
4월 5일
대한민국의 배우 기도훈.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강은일.
대한민국의 배우 김하림.
4월 6일
일본의 가수, 배우 모리모토 류타로 (Hey! Say! JUMP).
대한민국의 래퍼 윤훼이.
4월 7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임태정.
4월 8일 - 일본의 성우, 배우 시라이시 하루카.
4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다미.
4월 10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이광호.
4월 11일
대한민국의 배우 이도현.
벨기에의 모델 유미 랑베르.
대한민국의 래퍼 장문복.
4월 12일
대한민국의 스타그래프트 프로게이머 최성일.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픽서.
4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채희.
4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이민지.
4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남주 (에이핑크).
4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승식 (빅톤).
4월 17일
대한민국의 가수 휘인 (마마무).
영국의 배우 피비 디네버.
대한민국의 배우 안효섭.
4월 18일
벨기에의 축구 선수 디보크 오리기.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 이승윤.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조혜주.
4월 19일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전하린.
4월 23일
대한민국의 배우 윤예주.
미국의 모델 지지 하디드.
4월 24일 - 대한민국의 쌍둥이 가수 영민, 광민 (보이프렌드).
4월 27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니스 선수 닉 키리오스.
4월 28일
대한민국의 배우 신윤정.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심우준. (KT 위즈)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사진가 멜러니 마르티네스.
4월 29일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서연정.
4월 30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김수인.
5월
5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미미 (오마이걸).
5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육성재 (비투비).
5월 3일
대한민국의 배우 유주은. (~2022년)
미국의 야구 선수 오스틴 메도스.
5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인 (멜로디데이).
5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왕재민.
5월 6일 - 대한민국의 힙합 아티스트 원슈타인.
5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하영민. (넥센 히어로즈)
5월 8일
대한민국의 가수 정화 (EXID).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준.
대한민국의 배우 한지안.
5월 9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채유정.
5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종운 (블랙식스).
5월 12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엘커 판 호르프.
5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다솔.
5월 15일 - 대한민국의 발레무용가 최예림.
5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키 (블랙식스).
5월 19일
대한민국의 가수 시우 (더스틴).
대한민국의 가수 해인 (라붐).
5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진석. (SK 와이번스)
5월 22일
대한민국의 바둑캐스터 이유민.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베리타스.
5월 23일
대한민국의 가수 김상균 (탑독, JBJ).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감강찬.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민.
5월 25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호세 루이스 가야.
5월 26일
대한민국의 배우 이예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백승현.
대한민국의 배우 정건주.
5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이아청.
5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연.
5월 29일 - 코트디부아르의 축구 선수 니콜라 페페.
6월
6월 1일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박재하.
일본의 아이돌 마에다 아미.
6월 5일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수, 작곡가, 배우 ,유튜버 트로이 시반.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찬호.
6월 6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오현민.
6월 7일
대한민국의 가수 주은 (다이아).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임프.
6월 8일
대한민국의 래퍼 JR (뉴이스트).
프랑스의 축구 선수 페를랑 멘디.
6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희재.
6월 1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배병옥.
6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찬이 (더 맨 블랙).
6월 15일
대한민국의 전 래퍼 버피.
대한민국의 유튜버 문복희.
6월 16일
대한민국의 배우 주다영.
대한민국의 래퍼 희현 (다이아).
일본의 배우 아카오 히카루.
6월 17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클레망 랑글레.
6월 18일
대한민국의 전 가수 호.
스페인의 축구 선수 마리오 에르모소.
일본의 아이돌, 배우 마츠무라 호쿠토.
대한민국의 가수 최향.
6월 19일
대한민국의 가수 박아론 (W24).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유희운. (KT 위즈)
대한민국의 전직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데이드림.
대한민국의 유튜브 슈기.
6월 20일
대한민국의 배우 이지원.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최양비.
6월 21일
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 BOYCOLD.
일본의 배우, 모델 바바 후미카.
6월 22일 - 대한민국의 모델 김아영.
6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SUN (BXK).
6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재이.
6월 2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주후.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조영우. (한화 이글스)
6월 28일
대한민국의 골프선수 김시우.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안영준.
6월 29일
대한민국의 배우 최리.
대한민국의 발로란트 프로게이머 에스더.
6월 30일 - 일본의 성우 카스가 노조미.
7월
7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용 (NCT).
7월 2일 - 일본의 아이돌 가수 카나자와 토모코.
7월 3일
대한민국의 래퍼 먼치맨.
대한민국의 힙합 래퍼 겸 프로듀서 제레미 퀘스트.
프랑스의 축구 선수 마이크 메냥.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노바.
7월 4일
미국의 래퍼, 가수 포스트 말론.
대한민국의 래퍼 릴러말즈.
대한민국의 전직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레인오버.
7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혁 (빅스).
7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진 (JXR).
7월 7일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고진영.
7월 9일 - 대한민국의 인터넷 방송인 티티.
7월 10일
일본의 가수 신가키 유토.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아다 헤게르베르그.
대한민국의 가수, 성악가 고우림.
7월 11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채지선.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스윗.
7월 12일
영국의 축구 선수 루크 쇼.
대한민국의 배우 고은새.
7월 13일
대한민국의 가수 문빛.
미국의 야구 선수 코디 벨린저.
7월 14일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김효주.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김인혁. (~2022년)
독일의 축구 선수 세르주 그나브리.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백아.
7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세진.
7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성범.
7월 19일
대한민국의 배우 박한솔.
일본의 성우 야마시타 나나미.
7월 21일
대한민국의 가수 백호 (뉴이스트).
대한민국의 래퍼 김심야.
7월 2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황현수.
7월 23일
대한민국의 가수 화사 (마마무).
일본의 성우 스즈키 아이나.
7월 24일
대한민국의 가수 다원 (SF9).
대한민국의 배우 김태민.
7월 25일
대한민국의 배우 최재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민우.
7월 26일 - 대한민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7월 28일 - 영국의 가수 브래들리 심슨 (더 뱀프스).
7월 31일
대한민국의 래퍼 민우 (보이프렌드).
대한민국의 가수 Y (골든차일드).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경호.
8월
8월 1일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체이서.
일본의 야구 선수 후타키 고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문환.
대한민국의 근대5종 경기 선수 전웅태.
8월 2일
대한민국의 가수 진후 (업텐션).
일본의 성우 쿠보타 리사.
8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동헌.
8월 5일
덴마크의 축구 선수 피에르에밀 호이비에르.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장경호.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스테파노 센시.
일본의 성우 나가나와 마리아.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최솔규.
8월 7일 - 대한민국의 래퍼 김승민.
8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에스쿱스 (세븐틴).
8월 9일
대한민국의 가수 민현 (뉴이스트, 워너원)
미국의 배우 저스티스 스미스.
8월 10일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지성.
러시아의 유도 선수 니야스 일리야소프.
8월 11일
대한민국의 래퍼 타쿠와.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허광희.
8월 15일
대한민국의 가수 김윤수 (W24).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김류아.
대한민국의 모델 진정선.
일본의 가수 오구라 유이.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민유라.
미국의 래퍼 치프 키프.
8월 16일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오장원.
대한민국의 농구선수 허훈.
대한민국의 가수 해빈.(구구단)
대한민국의 가수 루빈.
8월 17일 - 미국의 스케이트 선수 그레이시 골드.
8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리제.
8월 19일
대한민국의 가수 보나(우주소녀).
대한민국의 가수 희진.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이주미.
8월 21일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박서진.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홍덕.
8월 22일
영국의 가수 두아 리파.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김아랑.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임동휘. (넥센 히어로즈)
중국의 가수 시카 (피나틱스).
미국의 배우 줄리엣 고글리아.
대한민국의 방송인 미미미누.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박상현.
8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진기.
8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임영준 (HIGH4).
8월 25일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옹성우 (워너원).
대한민국의 가수 도운.
8월 28일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박광열. (NC 다이노스).
대한민국의 유튜버 꾸몽(팀샐러드).
8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빛나.
8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루디.
9월
9월 1일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하.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안중열. (롯데 자이언츠)
스페인의 축구 선수 무니르 엘 하다디.
9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연습생, 마약사범 한서희.
9월 3일
독일의 축구 선수 니클라스 쥘레.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지호.
9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민제.
9월 5일 - 미국의 배우 캐럴라인 선샤인.
9월 6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지섭. (LG 트윈스).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정민.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마이티베어.
9월 7일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김준혁.
일본의 성우 무라카미 나츠미.
9월 8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율리안 바이글.
9월 9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김류아.
9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디애나 (소나무).
9월 11일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재선.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수민.
9월 12일
대한민국의 스노보드 선수 이상호.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장성재.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신지현.
대한민국의 배우 송지혁.
9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태훈.
9월 14일
대한민국의 가수 안지영 (볼빨간사춘기).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 심재영.
9월 15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프로핏.
9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재림.
9월 17일
대한민국의 배우 남지현.
대한민국의 가수 유아 (오마이걸).
일본의 배우, 아이돌 야마구치 마호.
9월 18일
미국의 가수 메건 리.
일본의 배우 스기노 요스케.
9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연 (트와이스).
9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황현조.
9월 26일
대한민국의 가수 앤제이(씨리얼).
일본의 성우 후카가와 세리아.
9월 27일
대한민국의 가수 권은비 (아이즈원),
대한민국의 현직 아나운서 정채운.
9월 28일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권지민.
대한민국의 배우 김보라.
9월 29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박재연.
9월 30일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임보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병욱.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조환지.
10월
10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시연 (드림캐쳐).
10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채리은.
10월 3일
대한민국의 가수 우예린.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범수.
10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한 (세븐틴).
10월 5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김채은.
10월 6일
대한민국의 가수 케이시.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박령우.
대한민국의 배우, 미스코리아 김예린.
10월 7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태진.
영국의 축구 선수 로이드 존스.
10월 8일 - 일본의 아이돌, 방과후 프린세스의 멤버, 그라비아 모델 나가사와 마리나.
10월 9일 - 대한민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김준호.
10월 10일
대한민국의 가수 오승희 (CLC).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성우 오오츠카 사에.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역도 선수 진윤성.
10월 12일
대한민국의 배우 연제형.
일본의 배우 오기노 카린.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민 (방탄소년단).
10월 14일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안세현.
대한민국의 범죄자 조주빈.
10월 15일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백규정.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민호.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박상영.
10월 17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하성. (키움 히어로즈)
대한민국의 가수 미소 (글램).
대한민국의 배우 김채은.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빈센스.
10월 19일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강하운.
대한민국의 범죄자 문형욱.
10월 21일
미국의 래퍼, 가수 도자 캣.
중국의 배우 쑨자위.
일본의 가수 쿠로키 호노카.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튜버 류민희.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지원.
10월 26일
일본의 가수 유타 (NCT).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사석찬.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한비.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안예슬.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이인희.
10월 30일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이머 미믹.
일본의 배우 마츠다 루카.
일본의 성우 와카이 유우키.
10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지애.
11월
11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보이샘.
11월 2일 - 일본의 성우 아키나.
11월 3일
대한민국의 가수 렌 (뉴이스트).
미국의 모델 켄들 제너.
11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소이.
11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도현.
11월 6일
대한민국의 가수 엑시 (우주소녀).
대한민국의 모델 도연.
11월 7일 - 일본의 성우 요시오카 마유.
11월 8일 - 일본의 모델, 배우 모모츠키 나시코.
11월 11일
대한민국의 래퍼 쿤 (업텐션).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퓨리.
11월 12일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투신.
프랑스의 축구 선수 토마 르마르.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근대5종 선수 이지훈.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지예.
11월 16일
대한민국의 가수 창조 (틴탑).
대한민국의 가수 MK (온앤오프).
대한민국의 가수 린지.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연.
11월 18일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남기웅.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탱크.
11월 20일
대한민국의 전 가수 일반인 박재석.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고민성.
헝가리의 쇼트트랙 선수 류 사오린 샨도르.
11월 21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민혁 (KT 위즈).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준원 (LG 트윈스).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모델 한슬.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겸 가수 김나영 (구구단).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모델 서연.
11월 27일
대한민국의 성우 장예나.
대한민국의 가수 윤용빈.
대한민국의 배우 이세온.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근대 5종 선수 김세희.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민.
11월 30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안규현 (삼성 라이온즈).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세웅 (롯데 자이언츠).
일본의 성우 코야마 모모요.
12월
12월 1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김민지.
12월 2일
대한민국의 배우 겸 모델 이주형.
일본의 성우 미나세 이노리.
12월 3일 - 일본의 가수 이리야마 안나.
12월 4일
대한민국의 배우 권도형.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유서준.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파일럿.
대한민국의 가수 조하.
12월 5일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앙토니 마르시알.
캐나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케이틀린 오즈먼드.
12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리오.
12월 7일
대한민국의 배우 최성민.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김소원.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이병권.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닉스.
12월 8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조던 아이브.
12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현 (소나무).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원 (펜타곤).
12월 12일 - 미국의 야구 선수 DJ 피터스.
12월 13일
영국의 배우 에마 코린.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노도희.
12월 14일
대한민국의 가수 허찬 (빅톤).
스페인의 축구 선수 알바로 오드리오솔라.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연준석.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스노보드 선수 정해림.
12월 18일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박지은.
대한민국의 가수 나영 (프리스틴, 아이오아이)
대한민국의 국악인 서의철.
12월 19일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신규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선호.
12월 20일
대한민국의 전 래퍼 T.K..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승헌.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BOBBY (iKON).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칸.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위즈덤.
12월 25일
대한민국의 가수 박재정.
대한민국의 가수 임영민 (AB6IX, MXM).
12월 26일
대한민국의 가수 도이현 (마이네임).
대한민국의 배우 오현중.
12월 27일 - 미국의 배우 티모시 샬라메.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유튜버 잠뜰 (CH.DIA).
12월 29일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퓨어.
대한민국의 기계체조 선수 김한솔.
일본의 아이돌 이코마 리나 (노기자카46).
12월 30일
대한민국의 가수 뷔 (방탄소년단).
미국의 가수 조슈아 (세븐틴).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박소정.
사망
1월 29일 - 대한민국의 레슬링 선수 송성일. (1969년~)
2월 4일 - 미국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1921년~)
2월 2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오진우. (1917년~)
3월 7일 - 대한민국의 안과 의사, 타자기 연구가 공병우. (1907년~)
3월 14일 - 미국 천문학자 윌리엄 앨프리드 파울러. (1911년~)
3월 31일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셀레나. (1971년~)
4월 17일 -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 김소희. (1917년~)
4월 25일 - 미국의 배우, 가수 진저 로저스. (1911년~)
4월 28일 -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희생자 101명
5월 8일 - 중화민국의 가수 등려군. (1953년~)
5월 24일 - 영국의 정치가, 총리 해럴드 윌슨. (1916년~)
6월 14일 - 미국의 소설가 로저 젤라즈니. (1937년~)
6월 17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동리. (1913년~)
6월 29일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 502명
7월 4일 - 미국의 화가 밥 로스. (1942년~)
7월 5일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대신 후쿠다 다케오. (1905년~)
7월 13일 - 대한민국의 교육자 겸 사회사업가 박찬주. (1914년~)
7월 16일 - 영국의 문인 스티븐 스펜더. (1909년~)
7월 20일 - 독일의 지식인, 정치활동가 에르네스트 만델. (1923년~)
8월 3일 - 영국, 미국의 배우, 영화감독 이다 루피노. (1918년~)
8월 11일 - 미국의 수학자 알론조 처치. (1903년~)
8월 13일 - 미국의 야구 선수 미키 맨틀. (1931년~)
8월 17일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박현채. (1934년~)
8월 28일 -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 (1929년~)
8월 29일 - 프랑스의 작곡가 피에르 막스 뒤부아. (1930년~)
9월 15일 - 일본의 정치가 와타나베 미치오. (1923년~)
10월 9일 - 영국의 정치가 앨릭 더글러스흄. (1903년~)
11월 2일 - 대한민국의 범죄자 최명복. (1957년~)
11월 3일 - 한국계 독일의 작곡가 윤이상. (1917년~)
11월 4일 - 이스라엘의 제17,25대 총리 이츠하크 라빈. (1922년~)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성재. (1972년~)
11월 23일 - 프랑스의 영화 감독 루이 말. (1932년~)
12월 25일
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장기려. (1911년~)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1906년~)
노벨상
경제학상: 로버트 E. 루카스 2세
문학상: 시머스 히니
물리학상: 프레더릭 라이네스,마틴 L. 펄
생리학 및 의학상: 에드워드 루이스,에릭 위샤우스,크리스티안네 뉘슬라인 폴하르트
평화상: 요세프 로트블라트
화학상: 파울 크뤼천,F. 셔우드 폴런드,마리오 몰리나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end_of_text|>
| 11.171219 | 2,471.260986 |
119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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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93%9C%EC%9C%88%20%ED%97%88%EB%B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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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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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에드윈 허블
### 기사:
에드윈 파월 허블(,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미국의 천문학자이다. 그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는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했다. 1929년에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걸 발표했다.
허블은 1921년 경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우주의 크기를 재었다. 이 발견은 후에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의 대논쟁을 종결하는 데 근거로 쓰였다. 또한, 그는 1929년 경 은하를 관측하여 스펙트럼의 선에 나타나는 적색 편이를 시선속도라고 해석하고, 후퇴하는 속도가 은하 간 거리에 비례한다는 허블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여 이후 빅뱅 이론의 기초가 된다. 그의 발견 때문에 그는 여러 영예를 누렸다. 허블 우주 망원경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생애
출생과 학창 시절
에드윈 허블은 1889년 미국 미주리 주에서 존과 제니 허블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블은 그의 할아버지 마틴 허블에게서 천문학을 배웠다. 허블은 고등학생 때 별과 행성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고 화성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지방 신문에 실렸다. 당시 허블의 선생님이었던 해리엇 그로트 부인은 허블이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후에 허블은 휘튼 칼리지에 진학했다. 휘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허블은 대학의 다른 여러 물리학 과목을 수강하여 천문학자의 꿈을 계속 길러나갔다.
청년 시절
1913년 1월 19일에 허블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허블은 영국에서의 생활을 접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허블은 자신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한동안 고등학교 선생으로 일한 뒤, 18개월간 시간제로 법률 관련 일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안정시켰다. 허블은 천문학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접지 않았다. 다시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서 헤일의 첫 번째 망원경이 있는 여키스 천문대로 가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허블은 네벨플렉켄이라고 불리는 성운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 후에 허블은 가장 좋은 망원경이 있는 천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윌슨산 천문대로 가고자 하였다. 1916년 11월에 윌슨산 천문대로부터 허블에게 제의가 왔다. 하지만 미국의 세계 제 1차 대전 참전으로 인해 채용이 미뤄졌다. 허블은 4개월간 독일 점령군으로 복무한 뒤 1919년 8월에 윌슨산 천문대에 도착하였다. 당시 윌슨산 천문대에는 할로 섀플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윌슨산 천문대에서 허블과 섀플리는 충돌이 잦았다.
대논쟁의 막을 내리기까지
1921년 섀플리가 하버드 천문대의 책임자가 되어 윌슨산을 떠나면서 허블은 더 많은 시간 망원경을 관측할 수 있게 되었다. 1923년 10월 4일 저녁, 허블이 윌슨산에 와서 4년이 지난 날, 그는 100인치짜리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을 관측하였다. 당시 관측상태는 최악의 상태였다. 허블은 40분간 노출하여 안드로메다성운 사진을 찍었다. 다음날 사진 현상 후, 사진에서는 흠집이거나 신성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이 발견되었다. 허블은 그 점이 신성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안드로메다 성운을 5분간 노출하여 찍었다. 그 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신성일 가능성이 있는 두 점을 더 발견하였다. 이후에 그는 두 번째 점이 신성임을 알아냈고, 세 번째 점이 세페이드형 변광성임을 알아냈다. 허블은 자신이 발견한 세페이드형 변광성을 이용하여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추정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는 지구에서 약 90만 광년으로, 우리 은하의 지름의 길이인 10만 광년보다 훨씬 먼 거리였다. 그는 안드로메다 성운이 하나의 또 다른 은하임을 증명하여 대논쟁의 막을 내렸다. 1924년 2월, 허블이 섀플리에게 자신이 발견한 결과를 편지로 알리자, 섀플리는 “이것이 내 우주를 파괴한 편지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1924년 위싱턴에서 열린 미국 과학진흥협회 회의에서 허블의 성과가 발표되었는데, 그는 그 회의에서 가장 뛰어난 논문에 수여하는 1천 달러의 상금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우주팽창론, 그리고 죽음
허블은 성운 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많은 성운들이 독립된 은하라는 것을 증명하여 몇 년 동안 천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멀어지는 은하가 많다는 슬라이퍼의 관측 결과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 현상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허블은 당시 윌슨산 천문대의 천문 사진가인 밀턴 휴메이슨과 함께 은하를 관측하였다. 두 사람은 일을 분담하여, 허블은 은하들 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휴메이슨은 은하들의 도플러 편이를 측정하였다. 1929년 허블과 휴메이슨은 46개 은하들의 적색 편이와 거리를 측정하였고, 관측한 은하들의 데이터를 속도와 거리를 각각의 축으로 하는 그래프 위에 나타내었다. 그 그래프는 은하의 속도가 거리에 비례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허블은 이 그래프를 ‘외계 은하 성운의 시선 속도와 거리 사이의 관계(A Relation between DISTANCE and RADIAL VELOCITY among EXTRA-GALACTIC NEBULAE)’ 라는 제목의 6쪽짜리 논문에 실었다. 허블과 휴메이슨은 계속 관측하여 1931년 더 멀리 있는 은하들을 측정하고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당시 조르주 르메트르와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이 제시한 대폭발 이론을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유명세를 통하여 팔로마산의 200인치 망원경의 계획과 건립에 힘썼다. 1953년 9월 28일 허블이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은하의 연구에 이 망원경을 사용했다고 한다.
허블의 업적
세페이드 변광성의 밝기
변광성이라는 별의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항성이다. 이런 현상은 존 구드릭(John Goodricke) 와 에드워드 피것(Edward Pigott)에 의해 규명되었다. 구드릭은 대부분의 변광성의 밝기는 대칭적이며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드릭은 이 현상을 식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식현상과 변광성의 밝기 모두 대칭적인 성향을 띠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밝다 짧은 시간동안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대부분의 변광성을 잘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모든 박희설을 설명하지 못하였기에 구드릭은 다른 종류의 변광성이, 즉 세페이드 변광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변광성의 밝기는 주기가 길고, 밝기가 천천히 감소하다가 비교적 빨리 최고 밝기에 도달하였다.
헨리에타 스완 리빗은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의 관계를 잘 찾아내었다. 그녀는 에드워드 찰스 피커링이 고용한 사진을 분석하여 정리하는 “여지 계산가”(Harvard Computers) 중 1명이었다. 리빗은 거리가 대략적으로 같은 박희설 성운의 수많은 변광성들(약 2400개)의 사진을 분석하여 광도와 주기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빗은 후에 광도와 주기의 log값이 비례한다는 것을 찾아냈다. 이 발견은 허블이 안드로메다 은하(그 당시에는 성운이라고도 불렸다) 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할로 섀플리와 에나르 헤르츠스프룽 같은 천문학자들의 힘으로 세페이드 변광성은 우주에서 거리를 재는 척도가 되었다. 그들은 연주시차법을 동원하여 어떤 한 세페이드 변광성 까지의 거리를 쟀다. 이 측정은 리빗의 밝기-주기 관계에서 비례상수를 구한거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천문학자들은 모든 세페이드 변광성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게 되었다.
허블은 이 모든 발견들을 안드로메다 성운(현재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한 변광성에 적용을 시켰다. 그는 이를 통하여 안드로메다까지의 거리를 쟀는데 90만 광년이라는 이 거리는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 내부에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우리 은하의 반지름은 대략 10만 광년이다). 그런데 이렇게 먼 안드로메다가 선명하게 관측된다는 것은 그만큼 밝다는 것이고 이는 안드로메다에는 별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안드로메다는 우리 은하 내의 성운이 아니라 수많은 별들을 포함하고 있는 독립적인 다른 하나의 은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를 통해 허블은 대논쟁을 종결짓게 되었다.
은하의 분류
허블은 은하들을 관찰하여 생김새에 따라 분류하였다.(이 분류 방법을 허블 순차라고 한다) 허블의 분류에 따르면 은하들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뉘는데, 타원은하, 나선은하, 렌즈은하, 그리고 불규칙 은하들이다. 관측되는 은하 중 나선은하는 약 77%, 타원은하는 약 20%, 불규칙은하는 약 2%를 차지한다. 각 은하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타원은하
타원은하는 나선팔을 갖고 있지 않으며 특별히 삐져나오거나 뾰족한 곳 없이 매끄러운 타원 모양을 가진다. 보통 E (Ellipse에서 따옴)로 표기하며, 구형에서 가장 찌그러진 모양까지, E0에서 E7까지 표기한다. (E0가 구형에 가까운 것들이고, E7은 가장 찌그러진 것들이다.) 가장 흔하게 관측되고, 다른 은하들보다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별들로 구성된다. 대표적인 예로 처녀자리 은하단에 있는 M49 은하가 있다.
나선은하
나선은하는 나선 모양의 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자전축의 중심 부근에 대칭적으로 위치한 두 팔을 가지고 있다. 나선은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S나 SA로 표기되는 정상나선은하(Normality Spiral Galaxy)와 SB로 표시되는 막대나선은하(Barred Spiral Galaxy)이다. 정상나선은하는 나선팔이 핵에서부터 나오는 은하를 이르고, 전체 나선 은하의 1/3 정도가 정상나선은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역동적이고 활발한 모습의 은하이다. 막대나선은하는 중간에 중심을 가로지르는 막대물질이 있는데, 두 팔은 이 막대의 양쪽 끝에서부터 반대 방향으로 나온다.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모두 팔이 얼마나 단단하게 감겼는지, 팔의 균형, 그리고 핵의 상대적인 크기에 따라서 a, b, c 타입으로 다시 분류한다. 즉, Sa, Sb, Sc, SBa, SBb, SBc의 6가지로 분류되는 것이다. 첨자 a가 있는 Sa, SBa 타입은 핵이 상대적으로 크고, 나선팔이 핵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감겨 있는 경우이다. Sa는 나선팔이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첨자 b는 나선팔이 좀더 열려 있는 경우를 나타내고, 첨자 c는 보통 핵이 상대적으로 작고 나선팔이 강조되어, 더 펼쳐져 있는 경우를 나타낸다. 대표적인 정상나선은하로는 안드로메다 은하가 있고, 전형적인 막대나선은하로는 NGC 1300이 있다.
렌즈형 은하
나선은하 중 S0를 렌즈은하라고 하는데, 이는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사이의 형태를 가진다. 마치 타원은하처럼, 가운데가 (핵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고, 그것을 통과하는 원판이나 막대 모양의 구조가 있다. 그렇지만 나선은하와 다른 모습은 뚜렷한 팔이 없고, 나선은하만큼 활발한 별의 생성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 허블이 은하를 분류했을 때, 렌즈 은하에 대해서는 아직 실존여부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하지만 허블은 렌즈 은하가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회견에서도 은하의 진화를 생각해 보았을 때 꼭 필요한 단계라고 말하였다. 추후의 많은 관측들에서 허블의 예상이 정확하다는 것이 판명났다.
불규칙 은하
허블은 불규칙 은하를 두 가지로 또 분류하였는데, 불규칙 은하 I, 그리고 불규칙 은하 II이다. (Irr I galaxy, Irr II galaxy) 불규칙 은하의 특성상 둘 다 대칭적인 구조를 보이지 않으며, 성간 먼지의 뚜렷한 흡수선과, 가스 성분의 많은 방출선을 보인다. 불규칙 은하 I은 비대칭적인 윤곽을 가지고, 어린 별들로 이루어진 여러 개별적인 성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불규칙은하 II는 좀더 매끄러운 윤곽선을 가지고, 개별적인 별이나 성단이 보이는 대신 뿌옇고 흐릿하게 분산되어 보인다. 대표적인 불규칙 은하로는 큰곰자리의 M81과 마젤란 은하가 있다.
보통 나선은하에는 젊은 별들과, 별 생성이 일어나는 곳들이 여러 군데 있는데 반면 타원은하에서는 오래된 성단들이 많이 관찰된다. 따라서 여러 과학자들은 타원은하와 렌즈은하가 나선은하와 불규칙 은하보다 더 일직 진화했다는 설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접근은 오류가 있는데, “허블 순차”가 은하가 진화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다. 하지만, 허블은 허블 순차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우주의 탄생 직후에는 나선은하와 불규칙 은하가 많았으며, 이로부터 타원 은하와 렌즈 은하가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
허블의 법칙
허블의 법칙은 크게 두 부분으로 기술되는데, (1) 성간 공간에 있는 (우주의) 모든 천체들은 도플러 효과를 보인다. (2) 도플러 효과로 인해 측정된 이들의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에 대한 상대 속도는 두 물체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주는 팽창하고 있고 은하들은 바깥쪽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은하의 팽창 속도는 그들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결국, 허블의 법칙은 우주 (엄밀하게는, 관측 가능한 우주)가 (시공간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블은 그의 유명한 1929년 논문에서 “적색 편이의 법칙”을 발표하였고, 이것이 곧 “허블의 법칙”이다. 허블의 법칙은 잘 알려진 공식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v = H0D라는 공식이다. H0는 비례상수인 “허블 상수”인데, 아직까지 이 값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결과치가 없다. D는, 천체와 관측지점과의 거리이며, v는 천체의 상대속도 (겉보기 속도)이다. 즉, 천체의 상대 이동속도는 거리와 직접적으로 비례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공식이다. H0은 은하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가와 관련이 깊다. H0가 클수록 은하가 빨리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H0가 작을수록 은하가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H0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들이 일고 있으며, 아직 의견들이 완전하게 통일되지 못했다. 반면, 1/H0은 우주의 나이를 나타낸다. (1/H0를 “허블 시간”이라고 한다. 즉, 우주팽창이 시작된 이래의 경과 시간(우주의 연령)을 나타낸다.)
허블 상수
허블 상수의 측정
허블 상수를 측정하는 일에는 두 가지 측정값이 필요하다. 우선, 은하의 적색 편이를 알기 위한 천체들(은하)의 흡수 스펙트럼 분석을 해야 한다. 적색 편이를 통해 상대속도를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둘째로는, 은하와 지구의 정확한 거리를 재어야 한다. 이 때, 허블 상수를 재기 위해 측정하는 은하는 지구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은하들의 속도 v는 적색편이가 진정한 별들의 운동에 기인한다는 가정 하에서 측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주변 천체들의 중력으로 인해서 오차가 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은하를 측정해야 한다. (이 ‘특이한 운동(peculiar motion)’은 허블의 법칙의 경향성에서 벗어난 점들에 대한 설명이 된다.)
허블 상수의 단위
SI 단위로 허블 상수를 나타내면 그 단위는 /s가 되겠지만, 보통은 (km/s)/Mpc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허블의 법칙으로 속도를 계산했을 때 km/s으로 단위를 얻기 위해서이다. 만약 허블 상수가 H (km/s)/Mpc라면, 1Mpc만큼 천체가 멀어질 때마다, 그것이 바깥쪽으로 가려 하는 속도는 H km/s만큼 증가한다는 말이다. 비록 km과 Mpc는 둘 다 거리의 단위이지만, (km/s)/Mpc으로 계산하는 것이 더 간단하고 편리하기 때문에 허블 상수는 대부분의 경우 저 단위로 나타내진다.
허블 상수의 값
허블 상수는 빛의 속도처럼 단 하나의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이론값을 구할 수 없다. 천체들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고 계산값도 다르기 때문이다. 허블 정상수의 가능한 작은 값은 h = 0.5 정도로 앨런 샌디지와 카네기 연구소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 (참고: 허블 상수는 그 불확실성 때문에 H = 100h (km/s)/Mpc으로 정의되는 상수 h값을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상수 값에 의하면 우주의 나이는 193 억년 정도가 된다. 큰 값은 h = 1 정도로, 많은 다른 천문학자들(제라드 드보쿨레르, 리처드 피셔 등) 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 H = 100의 값은 사용된 중력인자에 의존하여 우주의 나이가 샌디지가 주장한 것의 반 정도인 단지 90억년 전후가 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의견은 그 중간 값인 70(km/s)/Mpc 정도로 모아지고 있다. 현재 많은 백과사전에는 H0 = 70.4 ± 2.4 (km/s)/Mpc으로 나와 있다. 한편, WMAP 데이터를 이용하여 구한 허블 상수의 값은 대략 h = 0.71 (+0.04/-0.03)이다. 이 H0 값을 이용하여 “허블 시간”, 즉 우주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150±50억 년이 되는데, 이 값은 구상성단의 연령이나 우주 초기의 원소 합성이론으로 유도되는 연령과 본질적으로 같다. 허블은 진짜 대단하다 겁나 똑똑하네
의의: 과학사에 끼친 영향
대논쟁의 종결
대논쟁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성운들은 어디에 있을까? 보이는 것처럼 작고 가까울까? 아니면 멀어서 작아 보이는 걸까? 국립 과학아카데미는 이 질문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두 집단이 다른 과학자들 앞에서 토론을 벌이게 했다. 이 두 집단은 바로 우리 은하가 성운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던 윌슨산 천문대의 천문학자들과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독립된 은하라는 생각을 지지하던 릭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이다. 전자는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를 대표로 내보냈고 후자는 히버 커티스(Heber Curtis)를 대표로 내보냈다.
1920년 4월, 대논쟁은 섀플리와 커티스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섀플리는 우리 은하가 우주 전체를 포함한다는 주장에 크게 2가지 근거를 내세웠다. 먼저, 성운의 분포가 있었다. 성운들은 보통 우리 은하의 은하면 바로 위와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 섀플리는 성운들이 바로 행성과 항성들의 기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섀플리가 관측한 것은 우리 은하로 가까워질수록 항성과 행성들이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섀플리는 성운들은 우리 은하 위와 아래쪽에 있고, 그 성운들에서 생성된 항성과 행성들은 모양을 갖춰가면서 우리 은하 쪽으로 이동해간다고 주장했다. 만약 은하들이 우주에 골고루 분포한다면 성운의 분포는 일정해야하기 때문에 우주에서 은하는 우리 은하 하나뿐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근거는 바로 신성(nova)의 발견이었다. 신성은 근처에 있는 동반성의 물질을 흡수하여 갑자기 밝게 빛나는 별을 말하는데, 1885년 안드로메다에서 어떤 신성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안드로메다에서 발견된 이 신성이 특이한 것은 이 신성은 안드로메다 밝기 전체의 1/10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섀플리는 만약 안드로메다가 성운이 아니고 은하라면 신성의 밝기는 안드로메다의 밝기의 수십억분의 일이 돼야 하는데 실제로는 수백만 개의 별의 밝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안드로메다는 은하가 아니라 성운이라고 주장하였다.
커티스는 이 근거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반박을 했다. 첫 번째 근거에는 특정 지역에서만 관측되는 것은 은하면의 별들, 성간먼지에 가려 관측이 되지 않는 것뿐이라 반박을 하였다. 두 번째 근거에는 안드로메다의 나선팔에서 발견된 다른 수많은 신성들은 그 특정 신성보다 훨씬 희미하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안드로메다 신성의 경우는 특이한 경우라고 주장했다. 커티스는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이를 비롯한 여러 반박들과 주장들을 펼쳤다. 후에 섀플리는 자신이 “논문을 읽었으며" 커티스는 “발표”하였다고 했고, 커티스는 자신이 “비교적 앞섰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주제는 관측결과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펼쳐도 불충분한 근거라는 명목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큰 진전이 없었다.
허블이 계산한 안드로메다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까지의 거리는 대논쟁을 확실히 끝맺었다. 그 거리는 우리 은하의 크기와 비교할 수 없이 멀었기 때문에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허블은 또다른 희미한 세페이드 변광성 하나를 찾아서 똑같은 90만 광년이라는 거리를 계산해냈다. 그는 이 결과를 은하는 하나뿐이라는 주장을 한 섀플리에게 편지로 부쳤다. 섀플리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가 20일이나 되는데 주기가 긴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해 계산한 거리는 신빙성이 없다며 반박을 시도했지만 몇 년 만에 다른 은하들의 거리가 안드로메다보다 훨씬 멀리 있다는 것이 계산되고 나서 대논쟁은 해결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성운이라는 개념 중에서 정말로 우리 은하 내부에 있는 기체구름들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이들은 계속 성운이라 불리고 있다. 또한, 대논쟁에서 섀플리가 언급한 안드로메다 신성은 별이 폭발하는 현상인 초신성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는 실제로 순간적으로 수십억 개의 별보다 밝게 빛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팽창우주론
팽창우주론(또는 우주팽창론)의 시작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부터였다. 비록 아인슈타인은 정적인 우주를 굳게 믿고 있었지만, W. 데시테르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하여 우주각 팽창하고 있다는 설을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데시테르가 중력론의 방정식을 풀 때 우주의 평균 밀도를 0으로 두었기 때문에, 그의 우주론에는 물질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흠이 있다. 1922~1929년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 조르주 르메트르, 하워드 퍼시 로버트슨 등이 물질을 포함하는 팽창우주론을 발표하였다. 1922년, 프리드만은 아인슈타인이나 데시테르와는 다른 새 팽창우주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였지만, 폐렴 때문에 사망하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비슷한 시기의 1927년, 조르주 르메트르는 허블과 유사한, 속도-거리 관계와 유사한 적색편이-거리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는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제안했지만, 안타깝게도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렇게 새로운 가설들이 나오고 있을 때 과학계의 정설은 정적 우주였다. 아인슈타인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적 우주론을 믿고 있었고, 팽창우주론 지지자들과 정적 우주론 지지자들은 이 주제로 논쟁을 많이 일으켰다.
1929년, 허블은 윌슨 산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은하들 사이의 거리와 적색편이의 체계적 분석을 통해 팽창 우주론을 지지하는 논문을 표하였다. 이 “허블의 법칙”이 바로 팽창우주론의 결정적 천문학적 증거였다. 1930년, 에딩턴과 드 시터 등 영향력 있는 천문학자들이 정적 우주론보다 팽창 우주론이 새로운 천체 관측 결과와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묻혀 있던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작업이 재발견되면서 과학계의 인식은 정적우주론에서 팽창우주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천체들 사이의 도플러 효과를 보여 주는 허블의 법칙이 팽창우주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팽창우주론은 그 후 더 보충되어 대폭발 이론으로서 많은 학자의 지지를 얻고 있다. 대폭발 이론이란, 우주가 하나의 아주 작은 질량점으로부터 시작했고, 한순간의 ‘대폭발’로 인해 우리 우주는 팽창을 시작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는 설이다. 1940년 가모브에 의하여 현재의 대폭발론으로 체계화하였다. 대폭발 이론의 두 가지 대표적인 증거는 허블의 법칙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우리 은하계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과 3 K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다.
저서
1936 성운의 왕국
영예와 인정
허블은 살아 생전에, 그리고 죽고 난 뒤에까지 많은 영예와 인정을 누렸다.
노벨 상
허블은 생전에 많은 여러 상을 수상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워했다. 당시 노벨물리학회는 허블이 당대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물리학상을 수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업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시 천문학을 물리학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노벨물리학위원회는 비밀리에 규칙을 바꾸어 에드윈 허블의 노벨상 수상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을 발표하기 전, 1953년 9월에 허블은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벨상은 사후에 수여될 수 없었기 때문에 허블은 수상할 수 없었고, 위와 같은 토의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노벨물리학위원회의 두 위원, 엔리코 페르미와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는 허블의 위대한 업적이 결코 무시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허블의 노벨상 수상 결정 사실을 허블의 부인 기매에게 알려 세상에 공개하였다.
허블 우주 망원경
허블 우주 망원경은 대기권 밖에서 지구 중심 궤도를 돌고 있는 우주 망원경이다. 이 망원경은 1969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스피처의 제안에 의해서 제작 추진이 되었다. 에드윈 허블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고, 1990년 4월 25일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에 실려 지구 상공 610 km 궤도에 올려져 관측활동을 시작하였다. 허블 우주 망원경은 지구 대기 밖에 있어 지구 대기에 의한 효과를 받지 않아 고분해능의 많은 관측자료를 얻어낼 수 있었다. 허블 우주 망원경은 많은 관측 자료를 제공하여 천문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측 25주년을 맞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기리기 위해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서 허블이 찍은 '가장 아름다운 우주 사진 10 가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타임>지 표지모델
허블은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된 최초의 천문학자였다. 그는 허블법칙이라고 불리는 은하들의 멀어지는 속도가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을 다양한 은하들의 분포를 측정하여 알아낸 뒤, 엄청난 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는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된 것 뿐만 아니라 영화 배우나, 작가들과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1937년에 허블은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 프랭크 캐프라의 주빈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우표
허블 망원경 10주년 우표
2000년 4월 2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허블 망원경 10주년 기념을 맞아 미국에서 허블 우표가 발행되었다. 우표는 허블이 팔로마산 천문대에서 40인치 망원경으로 관측하는 사진과 다양한 성운들의 사진이 포함되었다. 이 우표는 2000년 7월 16일,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세계 우표 엑스포를 장식했다.
미국의 4대 과학자 우표
2008년 3월 6일, 미국 우체국(USPS)에서 4명의 유명한 미국 과학자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에드윈 허블은 4명의 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출처
같이 보기
세페이드 변광성
허블의 법칙
허블 우주 망원경
허블 순차
허블 상수
대폭발 이론
1889년 출생
1953년 사망
미국의 과학자
미국의 천문학자
소행성 발견자
20세기 천문학자
로즈 장학생
옥스퍼드 대학교 퀸스 칼리지 동문
시카고 대학교 동문
우주론자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end_of_text|>
| 11.213758 | 2,475.152832 |
28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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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D%B4%EC%A7%84%20%EC%82%B0%EC%84%B1%20%28%EB%8F%84%EC%95%BC%EB%A7%88%ED%98%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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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진 산성 (도야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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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덴진 산성 (도야마현)
### 기사:
덴진 산성()은 도야마현 우오즈시 덴진 산에 있었던 산성으로 하기 성(萩城)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역사
센고쿠 시대인 1554년 마쓰쿠라 성의 지성으로 축성되었다. 성의 범위는 현재 긴타로 온천 부근까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우에스기 겐신이 엣추 공략의 거점으로 나가오 가게나오를 성주로 파견했으며, 1582년 우오즈 성 전투에서 있어서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입성하였다. 혼노지의 변 후, 마에다 도시이에의 가신 아오야마 사토노카미, 분고노카미 부자가 성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후, 얼마 뒤 폐성되었다.
현재 가타카이 강에 면한 성루와 성 주변에 팠던 구덩이 등이 남았다. 또, 산 정상부에서는 야요이 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성터 주변은 우오즈 역사 민속박물관, 덴진야마 온천 등이 있다.
아울러 덴진 산은 예부터 마쓰오 산(松尾山)이라고 불렸지만,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키가 난을 피해 이곳 쇼센지(小川寺)에 몸을 의탁한 후, 수호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간코(菅公), 덴진(天神)으로 불리고 있으며 덴만 궁(天満宮)이라는 신사에서 그의 제를 지낸다. 학문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
교통
JR 서일본 우오즈역에서 버스로 환승〈덴지야마 온천〉에서 하차, 도보로 5분소요.
주변 문화시설 및 관광명소
덴진야마 온천
우오즈 역사 민속박물관
같이 보기
우오즈 성 전투
마쓰쿠라 성 (도야마 현)
외부 링크
덴진 산성 (NHK 대하드라마 천지인)
도야마현의 성
우오즈시의 건축물
우오즈시의 역사<|end_of_text|>
| 19.693287 | 1,731.541388 |
128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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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1%9C%EC%A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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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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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표집
### 기사:
표집(sampling)은 모집단에서 표본을 추출하는 일이다.
관심 대상의 모집단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의도로 개별적 관측을 선택하는 통계적 수행의 일부이며 또한 가설검증의 일부이다.
과정
표집 과정은 다음의 7 단계로 구성된다.
관심 대상의 모집단에 대한 정의
측정 가능한 항목이나 사건의 집합인 표집 틀(sampling frame)의 상술
틀로부터 항목이나 사건을 선택하기 위한 표집 방법의 상술
표본 크기의 결정
표집 계획의 구현
표집 및 자료의 수집
표집 과정의 재검토
방법
표집 방법으로는 단순 무작위 표집(simple random sampling), 대응 무작위 표집(matched random sampling), 계통추출법(systematic sampling), 집락추출법 (cluster sampling), 층화추출법 (stratified sampling), 기계적 표집(mechanical sampling), 임의(편의적) 표집(convenience sampling) 등이 있다.
같이 보기
모집단
표본
통계학<|end_of_text|>
| 15.665589 | 756.653291 |
186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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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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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 기사:
프레드라그 페자 미야토비치(, 1969년 1월 19일, 유고슬라비아 몬테네그로 티토그라드 ~ )는 과거 몬테네그로의 축구 선수로,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스포츠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 그의 나라에서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으며, 선수 시절 그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별명은 빠른 발을 가지고 있으면서 강력한 슈팅을 날린다하여 "발칸의 속사포"였다.
그는 선수 시절, 부두츠노스트 티토그라드, FK 파르티잔, 발렌시아 CF, 레알 마드리드, 피오렌티나, 레반테 등 총 6개의 클럽을 거쳤으며, 국가대표팀에선 73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해 28골을 득점하였으며, 1998년 FIFA 월드컵과 유로 2000에 참가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과 분열 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대표 출전 기록 포함.) 그리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레알 마드리드의 단장을 맡기도 했다.
외부 링크
Profile at Serbian Football Federation Site
Interview with Elena Rakočević, Mijatović's ex-wife
196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유고슬라비아의 남자 축구 선수
몬테네그로의 남자 축구 선수
FK 부두치노스트 포드고리차의 축구 선수
FK 파르티잔의 축구 선수
발렌시아 CF의 축구 선수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선수
ACF 피오렌티나의 축구 선수
레반테 UD의 축구 선수
199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남자 축구 미드필더
남자 축구 공격수
이탈리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몬테네그로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유고슬라비아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스페인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라리가의 축구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포드고리차 출신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의 축구 선수
스페인에 거주한 몬테네그로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레알 마드리드 CF의 비선수진<|end_of_text|>
| 8.145698 | 1,254.298921 |
158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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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20%EC%A0%9C10%EB%8C%80%20%EA%B5%AD%ED%9A%8C%EC%9D%98%EC%9B%90%20%EB%AA%A9%EB%A1%9D%20%28%EC%A7%80%EC%97%AD%EA%B5%AC%EB%B3%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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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목록 (지역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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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목록 (지역구별)
### 기사: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일: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임기: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지역구별 보기
서울특별시
부산직할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제주도
전국구 보기
참고자료
법률 제3093호 국회의원선거법 (1977년 12월 3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각주
10<|end_of_text|>
| 7.487478 | 358.355295 |
24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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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6%AC%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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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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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리고등학교
### 기사:
이리고등학교(裡里高等學校)는 전라북도 익산시 남중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55년 4월 15일 : 개교 2학급
1955년 6월 17일 : 구교사 준공
1970년 9월 1일 : 동중, 이리고 분리
1981년 11월 11일 : 30학급 인가
1989년 12월 31일 : 본관 증개축 준공
1991년 12월 14일 : 과학실 및 특별교실 증축
1998년 11월 15일 : 도서관 신축
2002년 5월 7일 : 우정학사(기숙사) 준공
2013년 4월 25일 : 본관 4층 증축(리모델링)
2020년 3월 1일 : 제26대 이종혁 교장 부임
2021년 1월 27일 : 제64회 졸업식(졸업생 326명, 총 23,534명)
2021년 3월 2일 : 제67회 입학식(입학생 273명)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익산시의 고등학교
전라북도의 공립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남자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1955년 개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태권도부
과학중점 고등학교<|end_of_text|>
| 7.27709 | 734.350455 |
14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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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UEFA%20%EC%9C%A0%EB%A1%9C%202004%20%EC%98%88%EC%84%A0%2010%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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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4 예선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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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UEFA 유로 2004 예선 10조
### 기사:
다음은 UEFA 유로 2004 예선 10조의 순위와 경기 결과이다.
순위
경기 결과
모든 경기는 현지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최고 득점자
각주
10조<|end_of_text|>
| 15.372988 | 221.341563 |
40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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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9D%B5%ED%9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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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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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신익희
### 기사:
신익희(申翼熙, 1894년 7월 11일 (음력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대한민국의 고위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미군정청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대한민국 민의원 의장 등을 지냈다.
자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해후(海侯), 별칭은 왕방평(王邦平)·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宇), 임방호(壬邦乎).
이력
그는 일찍이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화민국 본토 대륙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영어 학원의 강사로도 활동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촉성국민회,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 백의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1948년 5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그 뒤를 이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재건 초기 이승만을 지지하여 지지하여 친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나, 이후 야당 성향으로 변모하고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는 등 야권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56년에는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를 다니던 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미군정기의 한국의 정치결사단체인 백의사와 정치공작대의 지휘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교육 계몽에 뜻을 두어 대학 설립운동을 추진했으며, 결국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본관은 평산으로 자(字)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해후(海侯).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 또는 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牛), 임방호(壬邦乎)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해공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社村)의 소론계 명문가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신익희는 좌의정(정1품) 문희공 신개의 후손으로 자헌대부(정2품) 장례원경(정2품) 을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단은 판서와 장례원경을 지낸 인물로 고향에서는 신판서로 불렸다. 신익희의 선조는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후손으로,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희의 동생 신경연(申景禋)의 9대손이었다. 또한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 역시 신익희의 가문 사람으로, 그의 13대 방조인 신명화(申命和)의 딸이었다. 그의 집안은 9대 방조 신경진이 서인에 가담하면서 서인이었다가, 뒤에 노소 분당때는 소론에 가담하여 이후 소론계열이었으나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은 관계로 노론 벽파가 승리하고, 세도 시대가 되었으나 관직에 계속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 신단은 첫 부인에게서 보희를 얻었으나 첫 부인은 일찍 사망하여 두 번 재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 역시 요절하고, 세 번째 부인 전주이씨에게서 규희, 필희, 정희와 딸 1명을 두고, 정경랑에게서는 요절한 아들과 재희, 익희를 두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 정경랑은 1867년 경남 김해에서 아전인 정태조의 딸로 태어나 경기도 양평에서 성장한 후, 경기도 광주의 신단에게 시집갔다. 신단은 아들로는 신보희(申輔熙)·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신정희(申庭熙)·이름 미상·신재희(申宰熙)·신익희 등 7형제와 1녀를 두었고, 신익희는 이중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었다. 어머니 정경랑은 김해의 향리였던 정태조(鄭太朝)의 딸로, 아버지는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오빠 1인이 있었다. 그는 뒤에 한성으로 올라와 이집, 저집에 의탁하여 생계를 이어가다가 판서 신단의 집에 거처하게 되었고, 그의 넷째 부인이 되었다. 정경랑은 신단에게 시집와 첫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요절했고, 둘째 아들로 신재희를 두고, 이어 셋째 아들로 신익희를 두었다. 신재희는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었으나 뒤에 동생이 독립운동가라 하여 핍박을 받자 역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배다른 형 중 큰형 신보희는 큰아버지 신식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나, 결혼 직후 사망했다. 이로서 둘째 이복형인 신규희가 장남이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 신익희에게 한학과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가르쳤다. 친형인 신재희의 부인은 경주 이씨로, 형수 경주 이씨는 이조판서 이유원의 딸이었다.
소학교, 한성학교 시절
신익희는 10살 때에 조카들, 노비의 자제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스스로 한글을 깨우친 그는 일종의 국문교본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다. 1905년 형 신규희의 추천으로 광주 남한산성의 소학교에 입학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음에도 유복한 환경 덕에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는 서양문명을 배우려면 먼저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보고 영어학과를 선택하였다. 외국어학교 은사 중 이기룡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 영어에 능하였으며, 자유당의 실력자가 된 이기붕의 사촌이었다.
대학시절,비밀결사운동에 매달렸던 학우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사회주의 노선을 신봉하는 동창들로부터 '영국식 젠틀멘'이라는 조롱 섞인 평을 듣기도 했다. 1908년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여 경성의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로 진학하였다. 아버지 신단의 사후 신학문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이복 형 신규희의 뜻으로 신익희는 조카 신정균 등 일가 소년들 몇명과 함께 1908년 9월 관립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중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신익희는 형인 신규희의 아들이자 동갑내기 조카인 신정균과 함께 경성에서 하숙했는데, 신정균의 장인인 호조참판 이위의 배려로 이위의 댁에서 학교로 통학하였다. 신익희는 영어학과에 입학했고, 조카 신정균은 한문학과에 입학하였다. 한편 신익희는 호조참판 이위 댁에서 가정교사로도 활동하며 용돈을 조달하여 쓰기도 했다.
후일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 동창생인 독립운동가 겸 한글학자 이희승의 회고에 의하면 '나보다 두 살 위인 신익희는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으로 동료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한 고향 친구인 이윤신의 집에 기숙하던 그는 늘 검정물을 들인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15세 소년 시절에도 매우 점잖고 성숙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와 친하게 지낸 한성외국어학교 동창 이태승(李兌承)은 후일 한국 광복군의 참모장이자 대한민국 제1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의 친외삼촌이기도 했다.
청년기
일본 유학과 대학 재학
1910년 한성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둘째 형 신규희의 주선으로 참판을 지낸 이명재의 딸 이승희와 약혼하고, 1911년 결혼하였다. 해영 이승희에게서는 딸 신정완과 아들 신하균이 태어난다. 그러나 그는 곧 해화 김순이라는 첩을 들이게 된다.
1911년 9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배워야 한다는 일념에서 신혼의 단꿈을 떨치고 일본 동경 유학을 결행하였다. 동경에 도착한 신익희는 신전구(神田區) 금정(錦町) 1정목 19번지의 잠룡관에 거처를 정하였다. 학비는 둘째 형인 신규희와 셋째 필희, 넷째 정희 등이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틈틈이 일본어를 익힐 겸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체면을 버리고, 상점에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용돈을 조달하였다.
세이소쿠 영어학교 고등수험과에 입학하였고, 1912년 여름방학 기간 중 2개월간 일본 각지를 답사하였다. 1913년 3월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는 진학할 대학을 놓고 동경제국대학·게이오기주쿠 대학·와세다 대학 등을 두고 고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관리가 될 마음은 없었으므로 동경제국대학을 제치고, 경응대학과 와세다대학 등을 두고 저울질하다가 경응대학보다는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특권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은 학풍을 지닌 와세다대학을 선택했다.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그곳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여총무·평의회장(評議會長)·회장 등 임원을 맡았으며,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면서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4월 와세다 대학 고등 예과에 입학하였다. 입학후 그해 여름과 겨울 방학때는 귀가하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며 견문을 넓히는 기회를 삼았다.
한편 여기서 그는 장덕수를 만나게 된다. 장덕수는 일본유학생 성향 가운데 독립성향과 정치성향이 가장 강한 편에 속했다. 그는 신익희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같이 다니며 학업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활동에 주력하였다. 와세다 대학 졸업이후 1919년 11월 경 신익희를 만나 잠시 심회를 나눈 뒤에는 함께 활동하지는 않았다.
교육 계몽 활동
2학년때의 성적은 우수하였고, 1914년 7월 고등 예과를 수료하고 전과하여 10월에 같은 와세다대학의 정치경제학과에서 배웠다. 1915년 5월에 졸업하였다.1917년 7월 귀국할 때 일본 당국이 금서로 정한 숙상신주광복지연의란 책을 트렁크에 숨겨 왔다. 이 책은 신해혁명 이듬해인 1912년 상해에서 발행된 책으로 중화민국이 청나라로부터 국권을 되찾는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책은 상하 16책의 분량이라 당시로서는 거액을 지불해야 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비판을 받자, 그는 자신에게 재산이 없음을 들어 자신 역시 무산자라고 대응하였다.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 1913년의 여름방학 때부터 그는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3년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대학 재학 중 1914년 여름방학때 동경공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경석과 함께 축구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때 신익희는 부여에 들려서 시합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귀국 직전부터 보성전문의 교수로 출강한 그는, 1917년 귀국 이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보성전문에서는 그는 법학 교수와 재무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을 가르쳤다. 신익희는 어려운 단어를 쉽게 풀이하고 쉬운 단어를 활용하여 보다 많은 학생들과 청강생들이 몰려들었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로부터까지 명강의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독립운동
독립운동에 투신
1918년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1919년 김시학(金時學)·윤치호(尹致昊)·이상재·남강 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하였으며,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파견되었다. 대세의 추이와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보여주었고, 이승훈의 동참으로 평안도 기독교 세력의 3·1 만세운동의 참여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어 종로청년회관으로 윤치호를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설명하며 독립운동에 동참을 권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기회가 아니라며 사절하였다.
1918년 11월 말 중국으로 건너갔다. 한달 반 정도 체류하다가 국내로부터 소식이 없어서 2월 중순경, 톈진·베이징·선양을 거쳐서 귀국길에 올랐다.
3.1운동의 실패와 망명
1919년 김시학(金時學),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등과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결의하고, 3월 3·1운동 때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3월 1일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절당한다. 한편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지명수배를 당하게 된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학, 재무학 교수 및 중동학교의 교사직을 사직한다.
3.1운동 직후 3월 2일 일경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는 상주 복장을 하고 경성에 도착하였다. 3·1운동 중 독립운동자에 대한 검거열풍 속에서 신익희는 등사판을 빌려다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시내 각 가정에 배포하였다. 이 일은 순사보조원으로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던 이기원(李基元)에게 전담하게 했다. 그러나 며칠 뒤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이기원이 체포되었고, 그는 일경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집 뒷담을 뛰어넘어 담밑에 숨었다. 그러다가 일본어에 능통한 관립농림학교 학생 조정환이 진고개에서 사온 하오리를 입고 게다를 신고 태연한 자세로 일본 여관으로 피신하였다.
그 뒤 그는 배편으로 황해를 건너 중국 상하이 시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9호 설립된 독립임시사무소를 찾아갔다.
임시정부 활동
임정 초기 활동
1919년 3월 19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독립임시사무소에서 활동하였으며 4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였다.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호(趙東祜)·신규식(申圭植)·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그해 4월 의정원이 설치되자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의 초안작성에 참여하였고, 의정원법 초안을 낭독하여 가결하여 채택하게 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익희는 최근우의 천거로 내무차장으로 선출된다. 이 무렵 이시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총장들이 아직 상해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익희 등 각부 차장들이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게 된다. 1919년 8월 그는 다시 임정 법무차장에 임명됐으며 9월 법무총장을 거쳐 1920년 9월에는 임정 외무총장이 되었다. 그 뒤 내무차장·외무차장·문교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그는 계속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제4대 학우회 회장에 올랐다. 1920년 임시정부 내무총장서리 겸 외무총장서리를 거쳐 임정 국무원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임정이 창조파와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게 되자 그는 김구, 이동녕,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고수파에 가담한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사회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성향을 본 후 고수파에 가담하였다.
1921년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의정원부의장 등을 역임하고 1922년 7월 김구, 안창호, 여운형, 조소앙, 이시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1년부터 임정의 존폐 여부를 놓고 갈등을 벌이자 그는 중립적인 입장에 선다. 그러나 임정 활동을 회의를 품게 된다.
중국 국민당군 육군 복무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존립여부를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나뉠 때 그는 김구, 이유필, 이동녕 등과 임정 고수파의 입장에 섰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에 자금난이 발생하자, 독립운동 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수완이 좋고 언변에 달변가였던 그는 상업에도 수완이 있었다.
1923년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유학 시절 만난 중국 국민당군 육군 대장 호경익 장군을 찾아갔다. 호경익과의 면담 중 그는 한중합작 투쟁이 명분과 승산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호경익은 신익희를 육군 중장으로 추천하고, 경호군인 70여명과 전용 자동차를 제공한다.
1927년 중국 정부요청으로 국민군 중장에 위촉받고 남경정부심계원 고문으로 위촉받았으며, 도와 달라는 중국 국민당 정권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임시정부 재정에 도움을 주고 한중합작전선(韓中合作戰線)을 도모하다. 이때의 신익희의 이름은 왕해공(王海公)이었는데 자신의 호인 해공을 가명으로 쓰고 왕해공이라는 이름으로 호경익을 만났던 것이다.
호경익과 신익희는 한중 연합 게릴라 부대 편성을 추진한다. 호경익 부대의 사단 참모장이었던 신익희는 한국인인 점을 생각, 한국 청년 500명을 모집하여 분용대를 조직하고 한국독립에 동조하는 중국 청년 600명과 러시아 청년 500명을 모집하여 특수부대를 편성하였다. 신익희는 한국어와 중국어로 부대원들을 지휘하였다. 신익희는 호경익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한국인 청년들로부터 수천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기탁받고, 그 중 1천 원을 상하이 임시정부 측에 군자금으로 건넸다.
그러나 호경익이 급사하고 악유준이 후임자로 오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악유준은 신익희에게 아편을 팔아 그 돈으로 자금으로 활용하고, 분용대의 무기를 구입하라는 말을 하였다. 평소에 악유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익희는 이를 모욕적인 제안이라 생각하고 분개한다. 그는 신임 사령관 악유준에게 "이 나라를 구하는 독립전쟁이 아무리 급해도 사람의 피를 말리는 아편 중개를 하라는 것은 한국의 혁명가를 모독하는 것이오" 라며 악유준의 얼굴에 술잔을 부었다. 그 뒤 중국군 육군 중장직을 사퇴하고, 한중합작을 통한 대일항전의 계획을 일시 포기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민족유일당 운동 참가
1931년 어머니 정경랑은 병이 있음을 감지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본처의 장자이자 선영을 지키던 신규희나 신정균의 가세가 좋지 못하자 1년만에 중국으로 되돌아온다. 1932년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로 일본 영사관의 상하이 방문이 잦아지자 그는 분장을 한 후, 가족들을 은신시킨 뒤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로 유랑했다.
1932년 이후 신익희는 한때 영어를 가르치거나 아편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다. 1933년에는 김규식, 김원봉 등과 같이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고 1934년 이승만, 조소앙 등과 함께 임정의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말 어머니 정경랑이 되돌아왔으나 곧 난징의 병원에서 사망한다. 어머니 정경랑은 죽으면서 자신을 고국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하였으나, 신익희는 독립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독립을 보지 못한다면 아들, 손자에게 독립운동을 하도록 유언할 요량으로 어머니 정경랑의 시신을 화장하여 양쯔 강에 뿌린다. 그러나 신창현에 의하면 신익희는 1945년 11월 귀국 이후 어머니 정경랑의 시신을 고국에 모시지 못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통한해하였다 한다.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던 신익희는 종종 길을 잃고 일본 영사관의 일본 조계나, 일본군 주둔지로 들어갔다가 추격을 피해 가까스로 피하여 체포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민족유일당 운동 때 그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민족유일당의 창립에 합의하여 1935년 7월 5일에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혁당은 다시 분열되어 1937년에 그는 민족혁명당을 탈당, 김인철(金仁喆) 등의 소수 청년들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한국광복진선 결성에 참여하였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0년 입각 이후 독자적 세력이 없었던 그는 독자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3년 9월 한국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할 때 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이연호(李然浩)와 함께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외교위원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43년 임시정부의 선전부가 설치되자 조소앙·엄항섭·유림과 함께 선전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조소앙·엄항섭(嚴恒燮)·유림(柳林) 등과 함께 선전계획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4년 4월 내각 개편때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1945년 2월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경위대를 조직했다. 경무국이 있었으나 그는 경위대를 별도로 설치하여 내무부의 직속으로 활용하였다. 8월 10일 쓰촨성 충칭에서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8월 15일 광복 소식을 접한다.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의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요원의 귀국절차를 중국정부와 주중미군당국과 교섭대표로 위촉받아 주중 미군사령부에 찾아가 교섭하였다. 그 후 교섭에는 성공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참전국으로 인정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유엔군측은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모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 하였다.
독자세력 구축 운동
임정이 연립내각으로 발족할 때 신익희는 한국청년당의 대표로 입각 하였다. 장준하에 의하면 '그러나 그 청년당은 사실 1인 1당의 고독한 당이어서 신내무부장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증언하였다.
장준하 등 일본군 탈영병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이동해갔으나 신익희는 이들 청년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영입하려 노력했다. 신익희는 일본군이나 학도병을 탈출하여 임정으로 찾아오는 젊은이들 외에, 광복군 훈련장에도 직접 방문하여 청년들 중 일부를 포섭하려 노력했다. 장준하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 이를 기록하였다.
장준하에 의하면 '우리가 일단 임정을 떠나 토교에 와 있는데도 신익희 내무부장은 우리 대원을 한 둘 씩 불러내어가곤 했다. 한두 차례 불리어 간 동지가 있었을 때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상당히 은밀한 계획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왜냐하면 불리어 갔다온 대원들이 왜 불려갔는지를 똑똑히 말해주지 않고 그저 어물어물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다녀온 대원들이 늘고 그 횟수가 늘어 마침내는 수십 명이 되자, 그들은 마침내 우리로부터 이탈해, 다시 임정에 되돌아갈 것을 정식으로 제의하기 시작했다. 간다는 이유는 임정 내무부 관할로 '경위대'라는 것이 새로 조직되는데, 그 경위대원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다.
장준하 등은 경위대원이 되려고 다시 임정으로 가겠다는 동지들을 붙잡았으나 실패했다. '우리들 전체는 그동안 같이 고생해온 정을 호소, 몇 번이나 말렸으나 그들은 이미 신 내무부장관과 관계가 깊어진 듯 끝내 고집을 부렸고 마침내는 가고 말았다.'한다.
동지들이 신익희를 따라 가자 장준하는 분노했다. 장준하는 일단 그들을 보내놓고 밤새워 등사를 전단했다. 등사를 전단한 내용은 신익희 내무부장을 비롯한 기타 정당의 정당인들을 규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등불 잡지의 호외 형식으로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장준하외 20명은 그것을 안고 몽둥이까지 하나씩 들고 임정을 향해서 출동했다. 젊은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익희는 피신했다. 임정 청사에 닿은 장준하 일행은 '경위대를 해체하라',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신익희를 찾았다. 그러나 신익희는 어느새 재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들은 규탄대상을 놓치고 말았다.
독자적 세력구축에 실패하자 결국 당을 해산하고 한국독립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그의 경위대는 귀국 직후 정치공작대로 변환시켜서 독자적 청년단체로 활용하였다.
광복 직후의 정치 활동
광복과 귀국
광복 후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편성되자 신익희는 인공 내각의 체신부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국후 그는 인공 내각 체신부장 취임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제2진으로 전라북도 군산 비행장으로 입국, 귀국한 후, 미군 지프차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하여 약간씩 거리를 두었으며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 활동하였으며 이승만에게 서서히 접근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중순, 송진우의 초대로 서울 관수동 국일관에서 열린 주연에서 한국민주당 측 인사들을 가리켜 친일파라고 주장하여,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송진우에게 논박당하였고, 뒤에 한민당과 연합을 하게 된다. 12월 말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지자, 반탁운동에 가담하였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관련 회의에 참석하였다.
12월 31일 신익희는 임정 내무부장 자격으로 국자 제1호, 제2호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임정 각주인 김구 등이 미군정청 하지에게 소환되어 경고를 받은 뒤 반탁운동은 표면상 중단되었다.
임정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거사지휘
1946년 2월말 신익희는 조중서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와 연계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념식에서 폭탄투척계획을 세웠다. 2월 15일 무임승차권인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시정부 신임장을 발급해 주었다.
46년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를 받은 백의사는 3명의 청년을 평양으로 보냈는데, 북한의 3.1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을 분실했고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면서 발각되었다.
우익 정치인 활동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등을 지냈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설립하여, 초대학장을 맡으며 겸 교수로 활동하며 민족학과목을 강의하였다. 행정연구반을 구성하여 건국후 시행할 행정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제8대 대한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에 추대되었다.
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위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을 이탈하였다. 미소공위 참가를 중앙 당부에 건의한 바 있는 서울시 당위원장 신익희는 공위참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6월 23일 한독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1946년초 2월과 5월에 개최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이승만과 김구가 회의 개최를 강력 반대하자 그 역시 공위 개최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는 예정대로 덕수궁에서 개최되었고, 그는 2차 쿠데타를 기도한다.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 계획
신익희는 46년 8월부로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6년 8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은 신익희에 의해 쿠테타적인 형태로 추진되었다. 좌익에서 군정의 철퇴와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길 것을 요구할 때, 극우세력은 군정의 철퇴와 정권을 즉시 중경 임시정부에 넘기라는 요구의 유인물을 8월 29일 국치일에 뿌렸다. 8월 15일 며칠 전에 경찰은 좌익이 극비의 음모사건을 꾸민다고 좌익간부를 검거하고 그 집을 수색하였는데, 실제 쿠데타 계획은 중경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이던 신익희에 의해 준비되고 있었다. 신익희의 거사는 원래 8·15에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승만과 김구가 찬동하지 않아 8월 29일로 연기된 것이었다.
신익희는 1945년 12월 8일 중경임정 비밀회의에서 설립이 결의된 특별정치부대를 동원하여 8월 29일 국치일에 정부 건물을 접수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8월 21일, 8월 22일에 장덕수, 윤치영 등이 미군 CIC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신익희는 새 정부가 세워질 때 주요 지위를 약속하고 부유층으로부터 많은 돈을 거둬들인 혐의를 받았다. 민전의 간부 김광수는 1946년 8월 16일 CIC와의 인터뷰에서 신익희는 한국 전체의 경찰조직에 대해 얼마큼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나아가 각 지역의 우익 리더들로부터 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지방을 여행중이라고 말했다. 8월 22일 윤치영은 CIC요원에게 신익희가 1) 8·29에 중경임정 승인 탐색, 2) 영향력 있는 새 인물 임정에 배치, 3) 승인될 새 정부 구성 탐색, 4) 군정의 무능 드러내고 새 정부를 위한 요구를 주장하는 미군정에 대한 대중시위를 갖는다는 4단계 계획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좌절되자 신익희는 윤치영을 책망했고, 윤치영은 후회한다. 좌익측은 그가 부유층들에게 돈을 거둔 것을 계속 반복하여 공격했다.
이후 신익희는 CIC의 출두 요청을 받고 출두하였다. 8월 27일 신익희는 CIC 요원에 의한 심문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이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좌익간부에 대한 검거와 가택수색이 있었을 때인 8월 8일 신익희와 백관수의 가택도 수색되었다. 존 하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일을 벌이면 사살할 수 있다고 경고를 주고 되돌려보냈다.
국민대학교 창립
교육 계몽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김구가 수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의 강사,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의 강사로도 출강했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자금을 모아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는데 와세다 동창인 김성수, 장덕수 등의 도움과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으로부터도 약간의 자금 지원을 얻고, 1946년 9월 미군정청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국민대학관을 건립한다.
국민대학관은 창립 초기에는 일반 성인들을 교육하는 야간 대학의 형태로 창립되었으나, 뒤에 주간반도 편성되었다. 창립 초기에 부지가 없었던 신익희는 보인상업학교에 학교를 임시로 건립했다. 그러나 뒤에 자금을 추가로 마련하여 1948년 2월 서울 창성동 체신요원양성소로부터 구지를 매입하여 학교 건물을 세운다.
신익희는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이사장, 초대 학장이었다. 1946년 9월 설립자 겸 초대학장에 취임했으나, 정계에 진출하면서 학교 경영에 직접 참여가 어려워지면서 1954년 3월 박이순에게 학장직을 넘긴다.
정치 활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되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이후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갔다. 47년 7월 신익희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가 되었다. 임정 요인들 중 남북협상을 추진하자 신익희는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는데, 그는 조소앙을 찾아가 조소앙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설득하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1947년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47년 12월 와세다 대학 동창인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신익희는 장덕수를 추모하는 추도사에서 자신과 장덕수의 관계를 중국 고사에 나오는 절친한 친구인 백아와 종자기에 비유하였다.
1948년 제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나자 그는 협상의 불가함을 들어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한편 그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을 영입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정치 활동
정부 수립 초기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초대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국회의장직이 공석이 되자 8월 4일 열린 국회의장 보궐선거에서 새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1949년 대한축구협회장을 사퇴하였다. 1949년에는 곽상훈, 이청천, 유진산, 이철승 등과 함께 백민태 등 테러리스트들의 암살표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그는 이승만에게 일부 한국독립당 출신 인사들의 등용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48년 8월 11일 제8대 대한축구협회장에 추대되었다. 48년 11월 13일 친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 약칭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와 상하이 시절의 생각으로 국가를 경영한다며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한민당과 통합,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2월 10일 같은 날 그는 대한축구협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헌 국회에 이어 2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
1950년 6월 19일 실시된 국회의장 선거에서 2차 투표까지 간 끝에 국회의장에 당선되었다. 1차 투표에서는 민국당의 지지를 받은 신익희가 96표를, 국민당 등 친이승만 세력의 지지를 얻은 오하영은 46표를 얻는 등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2차 투표에서는 신익희가 당선 요건을 넘는 106표를 얻어 제2대 국회의장으로 재선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열차편으로 남하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는 민주국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고 정·부통령 선거를 직접 선거로 치르게 되자 신익희는 불출마를 결정하였고, 민국당의 대통령 후보로는 이시영 전 부통령이, 부통령 후보로는 조병옥 당 사무총장이 출마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대대적인 야당 탄압을 통해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 이후 깊은 무력감에 빠져 후보를 내지 못하고 있던 민국당이 이같이 이시영 전 부통령을 후보로 정한 것에는 조봉암 민의원부의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과 무관치 않았다. 좌파적 색채가 강한 조봉암이 야권의 대표 선수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그 대안으로 이시영을 옹립한 것이었다. 김성수·김창숙·이동하·장면 등 8명의 야권 지도자는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뉴델리 밀회 사건
1953년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가 귀국했을 때 인도에서 조소앙과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53년 10월 민주국민당의 의원 함상훈은 그가 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에 북조선에 있는 조소앙을 인도 뉴델리에서 상봉하여 남북협상 문제를 밀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곧, '제3세력'이 민국당 위원장 신익희와 내통하여 김일성과 이승만 정권을 배제한 중립화 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신익희와 조소앙이 뉴델리에서 만났고, 또 조소앙이 보낸 특사를 신익희가 만났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폭탄적인 성명에 대해 민주국민당은 적극적으로 부정하였다.
함상훈은 또 195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 민국당 위원장이 만났다고 주장하였다. 내무장관 백한성은 함상훈을 불러 의혹을 제보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궁하였으나 함상훈은 정확한 이름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함상훈의 의견에 동조하며 신익희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신익희와 조소앙이 만났다는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못하자 결국 1954년 함상훈의 제명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계속 신익희를 의심하였다. 이듬해인 1954년 3월 16일 당시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은 영국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조병옥은 최두선이 귀국한 날 저녁 신익희를 제외한 민국당 간부들을 자신의 집으로 소집했다.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하며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확신했다. 함상훈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사건은 종결됐지만 조병옥은 계속 신익희를 의심했다.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자 아무도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신당 조직 계획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자유당에서 소위 사사오입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키자 이에 분노하고 1954년 11월 30일 야권 신당 창당을 위한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봉암이 호헌동지회에 가입하려 하자 장택상, 김성수, 박기출, 서상일은 찬성하였으나, 조병옥, 장면, 김도연, 박순천, 곽상훈 등은 조봉암을 받아주어선 안 된다며 강력한 반대를 표해 호동 내 갈등이 점화되었다.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민주대동파, 혹은 대동단결파로 불렀으며, 조봉암의 영입을 반대하는 세력은 자유민주파로 불렸다. 당시 신익희는 조봉암의 참여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논란이 거세지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고 논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호동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조봉암의 가입을 찬성하는 입장이면서도 자유민주파 인사들에게 영향력이 있던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 국회 임시의장 등을 지낸 조봉암은 모욕감을 느낀다면서도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고 답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의 호동 참여를 두고 논란은 잠재워지지 않았고, 야권의 강력한 리더였던 신익희에게 확실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1955년 11월 민국당과 기타 야권 세력의 통합을 통해 민주당이 창당되자 그는 민국당 출신 인사들, 즉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가 된다.
생애 후반
야당 대통령 후보
1955년 민국당과 기타 야권 세력이 통합한 민주당이 창당되자 신익희는 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한민당 출신은 아니었으나 민주국민당 출신으로 민주당 창당 뒤에는 조병옥, 유진산, 윤보선 등과 함께 민주당의 구파로 활약하였다. 이때 민국당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구파와 비민국당 인사들로 구성된 신파는 통합 후로도 단합에 실패하여, 결국 창당 5년만인 1960년 민주당이 분당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조봉암도 진보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해 야권의 후보는 두 명이 되었다. 신익희와 조봉암은 야권 단일화 없이는 여당의 후보인 이승만을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선거 운동 전부터 단일화 협상에 돌입하였다. 진보당은 4월 3일 두 당이 후보 지명을 백지화하고 새로 연합 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민주당은 진보당 측이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모두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월 31일 진보당 추진 대표자 회의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에 민주당은 진보당의 사상이 의심된다며 진보당과의 협상을 거부하였다. 협상이 깨질 것 같자 김창숙 등 야권의 원로 인사들이 나서서 단일화 협상 속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순회 유세와 후보단일화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는 비밀회동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는 자신이 사퇴할 테니 부통령 후보는 진보당의 박기출 후보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하였다. 신익희는 면전에서는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으나,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야당 단일화 협상은 5월로 이어졌는데 그 결과 조봉암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신익희를 지지해주되, 차기 대선 때는 조봉암이 야권 단일 대통령 후보를 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가 발표되기도 전에 신익희는 사망하였고, 단일화 합의 또한 무용지물이 되었다.
4월부터 5월까지 신익희는 열차와 고속버스편으로 전국 순회유세를 다녔다. 비서 유치송,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은 그가 무리하는 것을 염려하였으나 그는 괜찮다며 순회유세를 강행했다. 민주당 동료 의원이자 의사 출신인 조영규 의원 역시 그가 과로로 피로한 모습을 보고 염려하였으나, 신익희는 자신의 아버지 이상 선조들이 조선시대에 60세 이상 장수한 점을 자랑하며 자신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강조했다. 바로 조영규 의원이 신익희의 호남 열차유세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했으나 신익희는 이를 거절했다.
사망
5월 2일 한강 백사장에서 장시간의 선거 유세를 했다. 신익희는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파로 비난하였다. 이승만은 5월 3일 논산훈련소에서 수만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라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신익희는 선거유세 내내 피로한 모습을 보였고, 주변에서는 당분간 지방유세를 중지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신익희의 호남 유세를 결정한다.
1956년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위해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안에서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신익희가 졸도한 후 45분만에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가까운 호남병원으로 달렸지만 끝내 숨졌다. 신익희의 정확한 사망 장소는 불상이나 이리역과 함열역을 지날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아 넥타이를 메다가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린다. 이어 깨어난 신익희는 열차 안에서 홍차를 마신 뒤,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뒤지(휴지)를 달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되었고 후에 밝혀진 당시 상황의 전부였다.
죽음 이후
강경에서 이리로 향하던 호남선에서 사망하였으나 그의 정확한 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익희의 운구가 5월 5일 오후 4시 서울역에 도착하자 운집한 군중들이 그의 유해를 경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 하면서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발포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700여 명이 피검되었다. 신익희의 죽음 이후 노래 〈비 내리는 호남선〉의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의 시신에 대해서 민주당 내부에서도 갈등을 벌였는데, 선거가 끝난 뒤에 매장하기로 결정하고 종로 6가 자택에 안치하였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신익희를 추모하기 위해 무효표를 던질 것을 독려하여 실제로 총 투표수의 20%가 넘는 185만여 표가 무효표가 되었다. 죽은 뒤 1개월이 경과한 1956년 6월에 서울특별시 수유동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훗날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논란과 의혹
타살 의혹
일각에서는 신익희를 음해하는 세력 의해 독사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호남선을 타고 서울로 상경하던 중 홍차를 마신 뒤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뒤지(휴지) 몇 장을 얻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배를 쥐고 쓰러졌다. 이 때문에 시중에는 독살설이 유포되기도 하였으나, 사인은 뇌일혈 및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한편 그의 독살설과 관련, 장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신익희의 죽음을 놓고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었음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민주당에서도 그런 수법으로 해공 선생의 사인을 전략적으로 선동하여 ‘암살의 혐의가 있어 조사 중이다’라고 했더라면, 그때 자유당의 타격은 어떠했을까? 민주당의 성격은 여기서도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병옥의 의심
1953년 10월 민주국민당 대표 신익희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인도 뉴델리를 순방하던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소앙을 만나 영세중립화 음모를 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신익희는 1953년 5월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가 귀국했을 때 인도에서 조소앙과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의 성명서에 의해 공개되었다. 함상훈은 민주국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
이와 같은 폭탄적인 성명은 민주국민당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부정되고, 내무장관 백한성은 함상훈을 불러 의혹을 고한 사람을 추궁하였으나 함상훈은 의혹을 제보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함상훈의 의견에 동조하며 신익희를 의심하였다.
1954년 3월 함상훈에 의해 다시 영세중립화 의혹이 제기됐지만 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사건은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신익희와 조소앙이 만났다는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못하자 결국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 조치되었다. 조병옥과 김준연 등은 함상훈을 두둔했으나 출당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신익희를 계속 의심하였다. 54년 3월 16일 조병옥은 신익희와 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신익희가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당초 영국을 방문하고 3월 16일에 돌아온 최두선 역시 초청하였으나 최두선은 피로를 이유로 거절했다.
1954년 3월 16일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은 영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조병옥은 이날 저녁 민국당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날 저녁 조병옥의 집에서 민주국민당 간부급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6.25 전쟁 중 부산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조병옥의 집에 모여 회식을 의례적으로 하였다. 1954년 3월 16일에도 회식을 하였다. 김준연은 최두선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피로하다고 사절하였다.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하며 말하기를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신익희를 의심했고, 김준연은 그에게 '잘 알아봐야겠다'며 응수했다. 그 자리에는 신각휴(申珏休), 송필만(宋必滿) 등도 있었다.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뉴델리 밀회 사건 발표에 대해 함상훈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자 아무도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가족 관계
신익희의 어머니 정경랑은 아버지 신단의 네 번째 부인이었다. 여섯째 형 신재희와 그의 자녀들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신재희는 동생 신익희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33년에 자신도 중국으로 거너갔다. 그는 망명 전에는 동아일보 지국에서 근무하였고, 망명 후에는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하여그의 2남 3녀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막내아들 신양균을 데리고 중경으로 피난가던 중 병으로 사망했고, 신양균은 일본 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신재희의 장남 신해균은 미혼의 누이 신계순을 데리고 연안으로 가서 김두봉의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한편 종손 신창현(申昌鉉)을 비서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본처 이승희(李承姬)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그 외에 소실 김해화(金海華)가 있었고, 기타 중국인 여성 사씨 와의 사이에서 딸 1명을 두었으나 요절했다.
고조부 : 신대우
증조부 : 신현(申絢), 지중추부사 (정2품) 역임
할아버지 : 신명호(申命濩), 적성현감 역임
백부 : 신식(申植)
아버지 : 신단(申檀, 1832년 ~ 1905년)
어머니 : 풍양조씨(豊穰趙氏)
이복 형 : 신보희(申輔熙)(, 1859년 - ?)
이복 형수 : 연안이씨
양 조카 : 신용균
어머니 : ?
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복 형 : 신규희(申揆熙)(1863년 ~ 1943년)
조카 : 신정균
이복 형 : 신필희(申弼熙)(1866년 ~ 1944년)
이복 형 : 신정희(申庭熙)(1872년 ~ 1943년)
누이 : 신씨(申氏, ? ~ ?)
생모 : 정경랑(鄭敬娘, 1867년 ~ 1932년, 본관은 동래)
친형 : 요절
친형 : 신재희(申宰熙)(1891년 ~ 1943년,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복무원)
조카 : 신해균(申海均), 독립운동가
조카 : 신양균, 독립운동가, 일본 공군의 폭격으로 사망
조카 : 신용균, 독립운동가,
조카 : 신계순(申季順), 독립운동가
조카 : ?
손자 : 신기현(申驥鉉1952~)
부인 : 이승희(李承姬, 호는 해영(海影) 1893년 2월 22일 ~ 1951년 12월 30일)
장녀 : 신정완(申貞婉)(다른 이름은 왕령(王玲), 1916년 ~ 2001년 4월 29일)
사위 : 김재호(金在浩), 광복군 소령 역임
외손자 : 김낙양(金落陽, 1937년~1940년 요절)
외손자 : 김유생(金유生, 1940년~)
진외증손 : 김솔봉(1981년 - , 음악가)
아들 : 신하균(申河均)(1918년 ~ 1975년 11월 10일)
며느리 : 이름 미상
손자 : 손자 : 신기현(申驥鉉, 1952년 ~ )
첩 며느리 : 위리런(于立人, ? - ?, 중국 여성, 궈모루(郭沫若)의 처제)
손자 : 왕충칭(王重慶) 텐진(天津)대학 화학과 교수
손자 : 왕지엔핑(王建平) 티엔진댐 건설설계원 부원장
손자 : 왕건명(王建明, 1946년 ~ )
부인: 김순이(金順伊, 호는 해화, 1907년 - 1987년 5월 12일)
정인 : 사씨(謝氏), 중국 항주 출신, 중국 여성으로 혼인관계는 아님
딸 : 신씨, 중국 여인 사씨에게서 얻은 딸로 일찍 죽음
종손 : 신창현, 둘째 형 신규희의 손자
외할아버지 : 정태조(鄭太朝, 본관은 동래, 경남 김해군의 아전)
평가
긍정적 평가
신익희가 서울에 ‘국민학관’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민학관’은 부산으로 서둘러 옮겨졌다. 난리통과 재정난 등 엎친 데 겹쳐 대학은 ‘보따리 신세’가 되어 1952년 해인사 재단으로 넘겨지면서 명칭이 ‘해인대학’으로 하였다. 캠퍼스도 경남 진주로 이동했다.
1961년에는 마산으로 학교가 옮겨지면서 ‘마산대학’으로 다시 1971년 12월 교명을 경남대학으로 바꾸었고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 있던 ‘국민학관’은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자인 실업가 김성곤이 인수하였다. 1971년 현재의 북악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이렇게 신익희가 설립한 ‘국민학관’은 2개의 대학으로 파생되어 대학교육에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인 이철승에 의하면 '신익희는 자유주의자 정치인으로 현실주의적인 융통성과 탄력이 있는 분'이라는 평을 내렸는데 '환국하자마자, 윤길중 등 친일 고관들까지 포섭해서 정치 공작대를 조직하여 국내세력을 만들었던 점을 들었다. 그러나 자유스런 융통성과 중도노선의 정치력 때문에 억측과 오해를 받았고 잦은 정치노선의 변경과 변심으로 야당(민국당)의 운명을 좌우하는 여당(자유당)의 모략에 앞장을 섰다는 평을 받았다.(예시, 2대 민의원의장 재직시 뉴델리사건)
부정적 평가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것을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6월 23일,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하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진 단체지만 완전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조직의 달인' 신익희가 김구 쪽에서 이승만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측에 합작을 청했을 때 유림측에서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이 모두 이 '변절'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1947년 7월 이후에는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갔다. 이처럼 신익희는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부위원장)로 활동하였는데 귀국 초기에 한민당(한국민주당)과의 타협을 거부하였으나 뒤에 한민당과 연대하였다는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한편 잠시 같이 활동했던 장준하는 신익희가 광복군 훈련장에 찾아와서 경위대로 젊은이들을 영입해가는 것을 조롱하였는데 '명분을 위해 내무부 밑에 경위대를 둔다고 하였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임정 조직을 한 모든 정당이 다 그렇듯이 그들에겐 당세 확장이 곧 그 발언권 강화와 직결되는 입장이었다. 이 내무부 밑의 경위대라는 것도 그 저의가 빤하게 떠올라 보이는 것이어서 우리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남는 것은 신 내무부장에 대해 괘씸하다는 생각, 그것 뿐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장준하와 일행 20명은 임정을 찾아가 권력의 하수인이 돼가는 젊은이들을 보고 '경위대를 해체하라', '차라리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며 신익희를 규탄하였는데 이들은 이때 신익희에 대항하여 직접 몽둥이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기타
그의 조카 신해균은 화가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월간지 '조선예술'과 '천리마'는 2000년 11월호에서 독립운동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조카인 화가 신해균이 "인공기를 도안했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한민당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또한 임시정부에 있을 때도 적당히 지냈다 고 한다.
넷째 형인 신재희의 부인은 경주 이씨로, 조선의 이조판서 이유승의 딸이자, 이회영, 이석영, 이건영, 이철영, 이시영, 이호영, 이소영 7형제의 여동생이었다. 이시영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다.
대통령 후보지명 전후
민주당 지방 유세 때 곽상훈은 대통령 후보로 나오려는 조병옥과 장면을 설득시켰다. 그에 의하면 '어느날 밤 마산의 어느 여관방에서 해공과 운석 사이에 내가 눕게 되었는데, "운석, 이번에는 대통령을 해공을 주자. 어떻나? 작정해라. 그래야 우리 민주당이 잘될 것 아닌가?" 라고 하였다. 곽상훈은 장면을 종용했지만 장면은 즉석에서 쾌락을 안했다. 그런데 곁에 누워 자고 있던 신익희는 자는 척하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장면은 다음날 대통령 후보직을 신익희에게 양보하겠다고 선언한다.
생계와 아편
한때 호경익의 후임자인 악유준이 그에게 아편 장사를 해보라고 권고하였다. 아편장수 제안을 모욕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술잔에 술을 따라 그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남경정부군을 떠난다. 그러나 별다른 재능이 없었던 그는 1932년 이후 한때 영어를 가르치거나 아편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다.
여성 편력
그에게는 본부인인 연안이씨 해영 이승희외에도 첩인 김해 김씨 해화 김순이가 있었다. 1951년 해영 이승희가 죽자 첩이었던 해화 김순이를 본처로 격상시켜 호적에 올렸다. 중국 생활 중 중국 여성인 항저우 출신 사씨(謝氏)를 내연녀로 하여 딸 1명이 있었으나 어려서 요절했다.
그의 아들 신하균 역시 본처 외에 중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고, 이들은 중국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화
1945년 12월 중순, 국일관에서 술자리 겸한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가 한국민주당에 의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한민당에 장덕수가 반발하여 '그렇다면 나는 어김없이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신익희는 '어디 설산(장덕수 호) 뿐인가?'라고 맞받았다. 보고있던 고하 송진우가 '여보, 해공(신익희 호), 표현이 좀 안됐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거요?'라고 말하면서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라.'고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외가가 경상남도 김해군의 향리였던 신익희는 그의 어머니 정경랑에게는 1명의 오빠가 있었고, 해방 이후에 자신의 외가를 여러 번 수소문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같이 보기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독립당
시사책진회
대한국민당
독립촉성국민회의
독립촉성중앙회
민주국민당
민주당
정치공작대
신단
신립
신규희
신재희
신하균
안창호
김구
김규식
장덕수
지청천
김성숙
김원봉
중화민국
신창현
백의사
안봉순
이승만
이범석
김성수
염동진
이범석
윤치영
윤치호
유치송
곽상훈
조병옥
조성환
장건상
장택상
장면
송진우
윤보선
박정희
이봉의
와세다 대학
한국민족문화사업회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관련 서적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김석영, 《신익희선생일대기》 (조대동창회, 1956)
유치송, 《해공신익희선생일대기》 (해공기념사업회, 1984)
이현희·정경환, 《해공 신익희 연구》 (삼화출판사, 2007)
신창현, 《내가모신 해공신익희선생》 (인물연구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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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학회, 《신익희》 (신문학회, 1956)
김석영, 《신익희선생의 일대기》 (早稻田大學同窓會 出版部, 1956)
관련 문화재
신익희생가 -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
대중문화의 신익희
텔레비전 드라마
전운 - 《제1공화국》 (1981년, MBC 드라마)
전운 - 《한》(1982년, MBC 드라마)
문오장 - 《오성장군 김홍일》(1986년, KBS1 드라마)
김기종 - 《무풍지대》 (1989년, KBS2 드라마)
전운 - 《반민특위》(1990년, MBC 드라마)
진봉진 - 《야인시대》 (2002년, SBS 드라마)
박영록 - 《서울 1945》 (2006년, KBS 1TV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
김종성 - 《정계야화》(1970년, 동아방송)
김종성 - 《격동30년》(1988년 4월, MBC라디오)
연극, 영화
조항 - 1967년 《춘원 이광수 (1967년 영화)》, 영화
조항 - 1969년 《춘원 이광수 (1969년 영화)》, 영화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참고 자료
해공 신익희선생 기념회
해공 신익희 가옥
외부 링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1894년 출생
1956년 사망
평산 신씨
광주시 (경기도) 출신
와세다 대학 동문
중화민국 국방대학 동문
국방대학교 교수
조선의 사회 운동가
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
일제강점기의 대학 교수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일제강점기의 학자
일제강점기의 작가
일제강점기의 시인
일제강점기의 상인
중국의 대학 교수
광복군 관련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1930년)
한국독립당의 당원
호헌동지회
대한국민당 (1948년) 당원
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
한국의 군정기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후보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육군 중장
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대한민국의 서예가
대한민국의 학원 강사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국민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의 작가
대한민국의 시인
대학 설립자
경남대학교 교수
대한축구협회 회장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미국에 거주한 한국인
병사한 사람
의문사한 사람
경기도의 국회의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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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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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왕징웨이 정권
### 기사:
왕징웨이 정권()은 1940년 3월 30일부터 1945년 8월 16일까지 존재했던 중화민국의 국민정부이다. 중일전쟁에 있어 일본군 점령지에 성립했던 친일 정권이다.
행정원장(수상)은 왕징웨이(왕자오밍). 1944년 11월 왕이 죽은 이후로는 천궁보가 그 자리를 맡아보았다. 슬로건은 "화평·반공·건국"이며 수도는 난징, 최대 도시는 상하이. 정부는 중화민국 국민정부(中華民國國民政府)로 호칭되며 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충칭 국민정부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난징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아 '가짜정권'이라는 의미로 왕위정부(汪偽政府)나 왕위정권(汪伪政权)이라고 불렀다.
왕징웨이 정권하의 중화민국은 일당공화제 국가로서 통치되었다. 장제스의 라이벌이자 국민당의 평화파였던 왕은 일본 측으로 망명하여 1940년 점령하의 난징(중국의 정통적 수도)에서 합작 정권을 수립하였다. 신국가는 중국 전토를 영유하며 충칭의 장 정권과는 대조적으로 신해혁명과 쑨원의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일본의 점령지를 실효 지배하에 두었을 따름이었다. 국가의 승인은 방공협정에 서명한 다른 가맹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존재했으나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시점에서 체제는 해산되었으며 주요 당원들은 대부분 반역죄를 물어 처형되었다.
중국의 중앙부와 북부를 각각 지배하던 괴뢰정권인 중화민국 유신정부(1938년-1940년)과 중화민국 임시정부(1937년-1940년)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통치원리
삼민주의
쑨원이 제창하고 중국국민당이 당시로 삼은 삼민주의는 쑨원 자신도 연관된 국공합작(제1차)을 거쳐 그 안에 제국주의 비판을 내포하고 있던 것에서 연유하여 중일전쟁 당시 일반 일본국민에게는 "반일 이데올로기"로 비추어졌으며 그 뿐만 아니라 시안 사건 후 제2차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전쟁을 착수하려던 장제스 정권 측에서도 삼민주의를 "반일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며 그에 더하여 그 자신도 정권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쑨원의 법통을 이어받은 직계 후계자를 자처하고 때문에 신정부의 정통성의 확립을 꾀하는 왕징웨이로서는 제휴 상대인 일본인의 삼민주의에 관련된 선입관를 타파하고 더욱이 장 정권 측의 삼민주의 해석과도 대결해야만 하는 형국이 되었다. 1939년 11월 23일 왕징웨이는 일본군 선전주임막료회의에서 연설하는 가운데 충칭 정부의 '항전건국(抗戰建國)'에 대하여 '화평건국(和平建國)'을 내세우며 그에 더하여 삼민주의라는 것은 "구국(救國)을 목표로 했으므로 구국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구국주의'에 다름 아니다라고 역설하며 왕징웨이 본인의 독자적 삼민주의 해석을 제시했다.
1924년 11월 28일 쑨원이 고베의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세아주의 연설'을 행한 시기는 제2차 국공합작을 시작한 직후였으며 그 무렵의 삼민주의는 확실히 '반제국주의'의 의미를 포함하며 일·중·소의 제휴를 제창하고 당시의 패권주의적 일본의 자세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반일'은 직접적으로 삼민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연소(連蘇), 용공(容共), 부조공농(扶助工農) 3대 정책에 의한 것이므로 왕징웨이파가 바야흐로 용공정책을 흔들림없이 포기하고 또 일본제국과 마찬가지로 '반공'의 표어를 채용하여 외교방침이 중일간 일치하는 이상 삼민주의는 반일 이데올로기일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장제스 정권은 여전히 용공정책을 채용하고 있었으므로 삼민주의는 반일 이데올로기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왕징웨이는 쑨원 저 《삼민주의》 〈민족주의 제1강〉 모두의 정의를 제시하며 자신의 정권을 '진정한 삼민주의'에 기초하는 정통정권임을 주장하였다.
대아주주의
왕징웨이는 삼민주의가 구국주의인 이상 그것을 아시아 전체에 적용한다면 '대아주주의(大亞洲主義)'의 주장이 될 것임을 표명하고 자신의 '대아주주의'는 아시아를 지배하는 백색인종을 아시아 땅에서 구축하여 '아시아인의 아시아'를 실현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며 말하자면 '아시아판 삼민주의'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일본이 아시아의 지도자로서 중국인과 연대하여 백인과 싸우기를 원한다면 중국에 대한 우월감정과 멸시감정을 일절 버리고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 입장에서 일본은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스스로 솔선하여 폐기해야 한다고 거듭 설명했다.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심한 현상에서 일본이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최초로 중일의 진정한 평화는 실현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무렵 왕징웨이는 쑨원 저 《중국존망의 문제》 속 "중국이 없으면 일본이 없고, 일본이 없으면 중국이 없다"라는 일설을 인용하며 이것이야말로 쑨원의 생애에 걸친 신념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왕징웨이의 '대아주주의'는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 사상과도 연관된 것이었다.
같이 보기
중화민국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각주
내용주
출처주
외부 링크
Nanjing Puppet Government National Flag
Central China Railway Company Flag, under Japanese Army control
Japanese occupation moneys
Slogans, Symbols, and Legitimacy: The Case of Wang Jingwei's Nanjing Regime
중국의 역사
반공주의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
추축국<|end_of_text|>
| 18.302818 | 2,976.824463 |
4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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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20%EA%B3%B5%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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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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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대한민국 공군
### 기사:
대한민국 공군(大韓民國 空軍, )은 대한민국의 영공 방위를 책임지는 대한민국 국군의 공군이다.
대한민국 공군은 병력 약 63,000명(2018년 기준), 전술기 414여대, 감시통제기 30대, 공중기동기 50대, 훈련기 180대, 헬기 30대를 보유하고 있다.
역사
임시정부
1920년 4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미국의 한인 6명이 장차 독립군 공군을 이끌기 위하여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내의 한인 비행학교를 수료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독립신문은 이들 비행사 한장호, 이용근, 이초, 이용선, 오임하, 장병훈의 기념사진을 기사와 함께 실었다. 미국내 한인 교포들의 성금으로 독립운동가 노백린이 설립한 한인 비행학교에서 훈련한 이들은 "반드시 동경에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는 결의로 훈련에 임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사용한 연습용 경비행기에는 대한 항공대를 뜻하는 KAC(Korea Air Corps)를 표기하였다. 이들 외에도 박희성과 같은 이들이 이 학교를 졸업하여 미국 비행면허를 취득하였다. 박희성은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항공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창설 ~ 한국전쟁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조직된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비롯하여 20대의 경비행기를 인도받아 육군 항공대를 설립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하였다. 창설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규모는 열악한 수준이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F-51 머스탱 전투기를 미군으로부터 공여받아 꾸준히 전력이 증대하여 1952년 첫 단독 전투 출격이 있었고 휴전 무렵에는 1개 전투비행단, 3개 전투비행대대 및 전폭기 79대를 포함한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편성 및 조직
국방개혁 2020 계획에 의하면, 작전통제권 전환에 따라 전술항공통제부대와 5개의 비행단을 가진 공군북부전투사령부가 작전사령부 예하에 신설되고, 공군남부전투사령부에는 1개의 비행단이 새로 편제되어 4개 비행단을 갖춘다. 임무 부담을 덜어 주고 공중 우세(제공권 장악)와 정밀 타격, 대규모 대량 폭격에 맞는 구조를 진행 중이다.
장비와 사업
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KFP 사업으로 도입하고 면허생산한 KF-16 (Block 52 및 52+) 134대와 F-16C/D(Block 32) (과거에는 F-16PB로 불렀으나 2017년 기준으로는 이미 개량 완료되어서 F-16PBU) 34대, F-15K 59대, 대한항공에서 면허생산한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 195대 중에서 60대는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전투기인 FA-50으로 대체하였고 노후화로 추락된 기체로 인한 영향으로 현재 F-5 계열은 100여대 정도만 남아있다.(2030년에 전량 퇴역예정)
또한 F-4E 2016년 이전에는 80여대가 있었으나 MIMEX 잉여물자 사업 등으로 들여온 F-4E가 노후화되면서 퇴역함에 따라 2017년에는 30여대가 남아있다.(2020년 초~중반 퇴역예정), T-103 러시아제 훈련기 72대(퇴역중, KT-100으로 대체),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B (블랙 이글스)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LIFT) 22대를 운용 중이고 F-4E,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E (타이거 II), KF-5E/F (제공호)의 130대는 F-16급 이상을 갖춘 추후 개발될 예정인 미듐급의 성능을 갖춘 KF-21로 대체되고, F-4E는 F-35A로 대체할 예정이다.
수송기는 전략 전술 수송기인 C-130J 4대 C-130H 12대, CN-235-220M 18대가 있으며 VIP 수송용으로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보잉 747-400 1대를 비롯해 보잉 737-300 1대, VCN-235 2대, VC-118 1대, BAe-748 2대가 있다. 정찰기로는 호커800기를 개조한 금강정찰기와 백두정찰기, RF-4C 18대, RF-5A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를 운용 중이며 회전익 항공기 (헬기)는 구조.탐색용인 HH-60 페이브호크, HH-47 치누크, 카모프 Ka-32가 있으며 병력 수송용인 벨 205, 212, 412, UH-60 블랙호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VIP 수송용인 VH-92, VH-60, AS-362 '수퍼퓨마'가 있다. 또한 공군은 국산 헬기인 수리온을 2기 주문하였다.
공중급유기는 에어버스 A330 MRTT 4기를 2018년과 2019년에 도입 운용된다.
공군 전력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인 대한민국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KF-X 사업과 차기 대통령전용기 사업인 VC-X사업, 원격지원전자전기 사업, 스텔스 무인 전투기(UCAV)의 개발 및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인사
참모총장
현재 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은 정상화이다.
복무 기간
대한민국 공군 병은 지원에 의한 모집을 통해 선발하며 이에 따른 의무 복무 기간은 2년이다. 국방부의'병 복무 단축 관련 개정안'에 따르면 8년 6개월에 걸쳐(약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최종 1년 9개월로 단축할 예정이었으나 2011년 11-1차 병부터 단축 계획이 중단되어 2년 복무로 확정되었다.
한편 육군의 복무 기간은 2011년 2월 27일 기준 일자로 이후에 입영하게 되면 복무 기간이 1년 9개월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육군의 경우 백일휴가 외에 1차, 2차, 3차 휴가가 있는 반면, 공군은 추가적으로 정기적인 휴가가 있다.
상징
빨간 마후라 : 대한민국 공군의 조종사는 흔히 빨간 마후라라고 불린다. 이는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만의 고유한 전통으로 한국 전쟁 당시 강릉 지역에 있던 제10전투비행전대에서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준장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1964년 제작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와 함께 유명해졌다.
계급장
다음 계급장은 여름철에 입는 공군의 하약정복(夏略正服) 기준 계급장이다. 따라서 견장 위에 흰색으로 된 계급장이 기계자수로 새겨져 있다. 병 계급은 전투복 기준인데, 장교와 준사관, 부사관들도 전투복과 같은 일반 근무복에서는 청색으로 된 계급장을 부착한다. (또는 은색 또는 금색의 금속제 계급장을 부착함)
병과
전투병과
조종과
항공통제과
방공포병과
기술병과
정보과
군수과 - 2012년, 군수전문가를 양성하는 차원에서 공군 항공무기정비ㆍ보급수송과를 군수과로 통합하도록 했다.
정보통신과
기상과
공병과
재정과
인사교육과
공보정훈과
군사경찰과
특수병과
의무과
법무과
군종과
같이 보기
방공식별구역(ADIZ)
조선인민군 공군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대중매체
《빨간 마후라》
《R2B: 리턴투베이스》
각주
외부 링크
역대 참모총장 소개
1949년 설립
계룡시<|end_of_text|>
| 17.484367 | 2,929.978516 |
95648
|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A0%9C%EB%A6%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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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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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윤제림
### 기사:
윤제림 (1960년 1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봉구할아버지 커다란 손〉이, 같은 해 《문예중앙》에 시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21세기 전망’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우경, 1988), (문학동네, 1997)
《황천반점》 (민음사, 1994)
《미미의 집》
《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2001)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2008)
《강가에서》
196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제천시 출신
대한민국의 시인
동국대학교 동문
21세기 전망 동인<|end_of_text|>
| 15.37474 | 776.094144 |
197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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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B%8F%99%ED%9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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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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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강동희
### 기사:
강동희는 다음 사람 등을 가리킨다.
강동희(姜東曦, 1886년 ~ 1964년)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이다.
강동희(1957년 ~ )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강동희(姜東熙, 1966년 ~ )은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 지도자이다.
강동희(1991년 ~ )은 대한민국의 연극 배우, 뮤지컬 배우이다.
같이 보기<|end_of_text|>
| 6.935865 | 273.075505 |
35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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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83%81%EC%A0%88%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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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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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주상절리
### 기사: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서 굳을 때 육각기둥 모양으로 굳어져 생긴 지형이다.
개요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것인데, 기둥의 단면은 4각~6각형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유동성관계로 큰 현무암질 용암류가 급격히 냉각되면 큰 부피변화와 함께 수축하게 된다. 이때 용암이 식으면서 최소한의 변의 길이와 최대의 넓이를 가지는 "육각기둥"의 모양으로 굳는 경향을 보인다. (원은 선의 길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길이 대비, 다른 도형보다 넓이가 크지만 원으로는 빈틈 없이 조밀한 구조를 생성할 수 없다.) 수축이 진행되면서, 냉각중인 용암표면에서 수축이 일어나는 중심점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지점들이 고르게 분포하면서, 그 점을 중심으로 냉각,수축이 진행되면 다각형의 규칙적인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균열들이 수직으로 발달하여 현무암층은 수천 개의 기둥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들은 용암의 두께, 냉각 속도 등에 따라 높이 수십 m, 지름 수십 cm의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하게 된다고 한다
각주
같이 보기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415호
제주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 -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443호
무등산 주상절리대 -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65호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 -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6호
강동화암주상절리 - 울산광역시 시도기념물 제42호
세계의 주상절리 목록(영어)
지질학
구조지질학<|end_of_text|>
| 16.750048 | 1,420.474154 |
9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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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C%EA%B5%AC%EC%88%98%EC%9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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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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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근구수왕
### 기사:
근구수왕(近仇首王, ? ~ 384년 음력 4월, 재위: 375년 11월~384년 4월)은 백제의 제14대 국왕이다. 근초고왕의 아들로, 휘는 부여수이다. 《삼국사기》, 《양서(梁書)》에는 이름이 수(須)로, 《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須) 또는 근귀수(近貴首)로, 《속일본기》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로 기록되어 있다.
생애
즉위 전
369년, 태자 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틈을 이용해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 구 모로성) 부근을 약탈하자 부여수가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이때, 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로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 군사는 머리수만 채운 허세이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 뿐'이라고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부여수에게 알려줌으로써 백제는 사기의 말대로 고구려의 적기부대(赤旗部隊)를 먼저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그 기세를 몰아 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부여수는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고자했다. 그러나 장군 막고해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라고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또 다시 침입하자 부여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군사를 패수에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실정
375년 11월 부여수는 근초고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오른다. 이듬해 장인 진고도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진(眞)씨가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였고, 내정이 주로 진씨에게 맡겨졌다.
376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공세를 강화하여 11월 백제 변경을 공격했다. 근구수왕은 377년 10월 3만명의 병사로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그 해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기후가 겹치면서 제1차 여제전쟁은 고구려의 대승리로 끝이 났다.
자연재해
다음은 근구수왕대에 일어난 재앙의 기록이다.
379년 4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380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여름 5월에 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깊이 다섯 장, 너비 세 장이나 되었는데 삼일만에 합쳐졌다.
382년 봄에 가뭄이 들어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결국 국가창고의 곡식을 푸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동진과의 관계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기에는, 379년 3월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되돌아 왔다고 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양서 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 백제왕 수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사망
384년 4월,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가계
근구수왕이 등잔한 작품
드라마
《근초고왕》, KBS, 2010년 ~ 2011년, 배우 : 건일
참고
내물 이사금 (356년 - 402년)
소수림왕 (371년 - 384년)
이시품왕 (346년~407년)
닌토쿠 천황 (310년~399년)
4세기 출생
384년 사망
백제 국왕
근구수왕
생년 미상
4세기 한국 사람
부여씨<|end_of_text|>
| 21.538656 | 3,143.525635 |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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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B%90%EC%A0%81%EB%A1%9C%20%28%EC%9D%B8%EC%B2%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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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로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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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원적로 (인천)
### 기사:
원적로(Wonjeok-ro)는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가재울사거리에서 부평구 부평동 산곡입구삼거리를 연결하는 도로로, 총 연장은 4.91km이다. 이름이 유래된 것은 도로가 관통하는 원적산의 이름을 인용하여 제명되었다.
역사
2009년 7월 6일 : 도로명으로 원적로를 고시
주요 경유지
서구
가좌3동, 가좌2동
부평구
산곡1동 - 산곡2동 - 산곡4동 - 청천2동 - 부평1동 - 부평4동
접촉하는 도로
열우물로
장고개로
신진말로
건지로
산곡로
마장로
안남로
원길로
부영로
부평대로
외부 링크
(인천 부평구)
(인천 서구)
인천광역시의 도로
인천 부평구의 교통
인천 서구의 교통<|end_of_text|>
| 11.849318 | 672.457508 |
21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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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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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민중가요
### 기사:
민중가요(民衆歌謠, ) 또는 투쟁가요(鬪爭歌謠) 혹은 항쟁가요(抗爭歌謠)는 주로 사회운동에서 불리는 노래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노동운동, 통일운동, 인권운동, 정치운동 등 주제별로 다양하다.
대한민국의 민중가요는 주로 1980년대 6월 항쟁의 기간에 많이 생겨났다. 이후 민중가요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해당 운동의 주제를 주로 담았다. 6월 항쟁 이후에는 많은 대학교에 민중가요 노래패(동아리)가 창설 되었다.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기간에는 철의 노동자와 같은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민중가요가 많이 불렸으며,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에는 미국을 비판하는 노래가 많이 나왔다. 2008년에 벌어진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도 새로운 민중가요들이 많이 생겨났다.
대한민국에서 시위, 집회가 있을 때 공통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많이 제창한다.(민중의례)
대표적인 아티스트
대한민국
김광석
김민기
김호철
꽃다지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서울대의 동아리 메아리와 관련되어 있다.
맥박
민중문화운동연합
박성환 밴드
박준
백자
아름다운 청년
안치환
우리나라
윤민석
이수진
이씬
임지훈
임정득
정태춘, 박은옥
조국과 청춘
천지인
최도은
희망새
그 외에도 각 대학에 민중가요 노래패들이 민중가요를 창작하거나 구전을 통하여 보존/발전 시켜왔다.
미국
우디 거스리
밥 딜런
톰 웨이츠
피트 시거
캐나다
닐 영
대표적인 민중가요
대한민국
노동/빈민 운동 계열
그날이 오면
단결 투쟁가
동물의 왕국
대결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사계
연대 투쟁가
인터내셔널가
저 평등의 땅에
철의 노동자
청계천 8가
총파업가
파업가
진짜 노동자
민주화 운동 계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상록수/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 곡 제작 당시에는 민중가요가 아니었으나 시위 현장에서 널리 부르면서 민중가요로 정착함.
아침 이슬 - 곡 제작 당시에는 민중가요가 아니었으나 시위 현장에서 널리 부르면서 민중가요로 정착함.
임을 위한 행진곡-가장 대표적
타는 목마름으로
오월의 노래-5·18 민주항쟁 관련
유월의 노래-6월 민주항쟁 관련
바위섬-5·18 민주항쟁 관련
일어서는 사월-4·19 혁명 관련
진달래-4·19 혁명 관련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의연한 산하
일반적인 주제를 갖고 있는 민중가요
광야에서
동지
바위처럼 :
불나비
어머니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흔들리지 않게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 민중가요로 시작했으나 이후 개사가 이뤄져 대중가요, 동요로도 활용됨
학생운동 계열
당당한 주인으로
전대협 진군가
총학생회가
한총련 진군가
민족성대 진군가
민족한신 진군가
건국대학교 진군가
반미 계열
Fucking USA
또라이 부시
주한미군 철거가
탱크라도 구속해
혁명동지가
2008년 촛불 시위 관련
다시 광화문에서
쇠고기 논란 관련
촛불을 들어라
Hey, Mr. Lee
통일 관련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2016년 촛불 시위(박근혜-최순실 게이트)관련
이게 나라냐
말레이시아
민주화 운동 계열
Negarakuku
이슬람 운동 계열
Lelaki (Warkah Seorang Anak) (원래는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에게 바치는 노래이나 종종 이슬람운동가 닉 아지즈 닉 맛을 기리는 데 사용되어 민중 가요로 변질된 부분이 있음)
이탈리아
벨라 차오
홍콩
영광이 다시 오길
작품에 나타난 민중가요
소설가 공지영의 등단작인 '동트는 새벽'의 마지막 장면에는 1980년대 대표적인 민중가인 '동지가'가 나온다.
최규석의 만화 '100°c'에서 5.18을 추모하는 '오월의 노래'를 부른다.
같이 보기
사회운동
운동권
민중가요 노래패
외부 링크
PLsong.com 민중가요 사이트
정치 운동<|end_of_text|>
| 23.001482 | 3,210.812012 |
82553
|
https://ko.wikipedia.org/wiki/%EB%B9%8C%EB%A5%98%EC%9D%B4%EC%8A%A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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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류이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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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빌류이스크
### 기사:
빌류이스크()는 사하 공화국 빌류이스키 군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1만 명(2005년)이다.
빌류이강(레나 강의 지류)에 접해 있고, 야쿠츠크에서 북서쪽으로 592km지점에 위치해 있다.
빌류이스크에는 현재 공항이 위치해 있다(야쿠츠크에는 현재 항구가 위치해 있다.). 빌류이 강에 다리가 놓여 있다.
역사
1634년에 코자크가 이곳을 세웠을 때에는 베르흐네빌류이스코예(Верхневилюйское)였다. 1783년에서 1821년까지는 올렌스크(Оленск)였다.
외부 링크
빌류이스크 깃발의 역사
사하 공화국의 도시<|end_of_text|>
| 23.05526 | 677.785086 |
19759
|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95%99%EC%97%AD%20%28%EC%95%88%EC%82%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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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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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중앙역 (안산)
### 기사:
중앙역(Jungang station, 中央驛)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4호선,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의 철도역이다. 부기역명은 서울예술대이다. 2024년에 신안산선이 개통되면 여의도역까지 30분이 소요될 전망이다.
안산시 중앙동 행정동 지역명에서 유래되었으며, 실제로도 안산시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안산시 중심 상업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연혁
1988년 10월 25일: 안산선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1993년 1월 15일: 과천선과 직결 운행 개시
1994년 4월 1일: 서울 지하철 4호선과 직결 운행 개시
1994년 9월 1일: 수인선 운행 중단
2009년 12월 1일: 철도승차권 단말기 철거
2010년 1월 18일: 안산선 급행열차 정차
2020년 9월 12일: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 개통과 함께 환승역이 됨
역 구조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이다. 본선에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부본선은 노반이 있고 선로는 설치되지 않았다.
승강장
역 주변
안산종합버스터미널
안산시청
안산 중앙역 로데오거리
뉴코아아울렛 안산점
롯데백화점 안산점
서울예술대학교
경안고등학교
송호중학교
버거킹 안산중앙역점
스타벅스 안산중앙역점
승차량 변동
갤러리
인접한 역
각주
외부 링크
한국철도공사 중앙(서울예술대학교)역
안산시의 전철역
1988년 개업한 철도역
1994년 폐지된 철도역
계획 중인 철도 노선<|end_of_text|>
| 7.99111 | 1,101.514668 |
63035
|
https://ko.wikipedia.org/wiki/%ED%84%B0%EB%B3%B4%EC%83%A4%ED%94%8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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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보샤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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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터보샤프트
### 기사:
터보샤프트() 엔진은 가스 터빈 엔진의 한 종류로 같은 가스 터빈에 기반한 제트 엔진이 힘을 추력으로 얻는 데 반해 터보샤프트는 이 추력으로 자유 터빈(free turbine)을 구동하여 기관 외로 전달한다.
터보샤프트는 그 구조가 터보프롭과 유사하다. 터보프롭은 엔진 전면에 감속기어에 연결된 프로펠러를 구동하기 위해 샤프트를 통해 터빈과 직접 연결하지만 터보샤프트는 또 다른 터빈을 구동하여 힘을 전달한다. 주로 헬리콥터에 많이 응용되고 전차, 호버크래프트 등에 사용된다.
처음으로 터보샤프트를 제작한 곳은 조셉 시드로우스키(Joseph Szydlowski)가 설립하고 운영한 프랑스 회사인 터보메카(Turbomeca)였다. 1948년에 100sph782를 제작하였고 1950년에는 Aérospatiale Alouette II헬기 엔진으로 280sph Alouette를 제작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엔진은 엔진의 회전 속도와는 별개로 자유회전을 하는 설계를 채택한다. 이러한 설계의 장점은
헬기의 회전익이나 프로펠러가 엔진의 속도와 별개로 다양한 회전 속도를 갖는다.
엔진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서 엔진의 주기관을 한데 모으고 동력 전달 계통을 한데로 모아 정비가 용이하다.
안그래도 이러한 시스템은 엔진이 약간 커지는 단점이 있는데다 서방 엔진은 원심 터빈이 하나 들어가기 때문에 엔진 직경이 더욱 커져버린다. 그래도 속도 운용 폭이 넓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으며 출력이 크게 강하지 않아도 되어 엔진 크기가 작아지는 중소형 비행기에 적합하다. 여객 항공기나 전투기 엔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비행기가 이러한 자유회전을 하는 터보프롭이나 터보샤프트이다.
동구권의 회전익용 터보샤프트는 죄다 축류식 압축기와 축류식 자유회전 터빈만을 장착한 축류식으로, 서구권의 회전익용 터보샤프트가 죄다 원심식 압축터빈이 들어간 것과는 반대된다. 덕분에, Mi-8/14/17, Mi-24, Ka-27/32가 공유하는 엔진이 고정익 수송기인 안토노프 An-140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서방 역시 최근에 헬기용 원심식 터보샤프트 엔진을 고정익에 채용하기도 했으나, 전통적으로 고정익은 축류식을 쓴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수명및 신뢰성에서 밀리기는 해도 정비편의성 및 설계편의성, 생산성 등 여러 요소에서 동구권이 앞선다.
같이 보기
가스 터빈
제트 엔진
터보프롭
가스 터빈
항공기 엔진<|end_of_text|>
| 16.573341 | 2,178.849327 |
163330
|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BD%94%20%ED%8C%8C%EB%9D%BC%EB%8B%A4%EC%9D%B4%EC%8A%A4%20FM
|
에코 파라다이스 FM
|
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에코 파라다이스 FM
### 기사:
에코 파라다이스 FM은 팔라우에 있는 국영 FM라디오방송국이며 일본의 TOKYO-FM과 일본항공의 지원에 의해 개국했으며 2003년 JFN 특별 가맹국으로서 가맹했다.그 때문에 TOKYO-FM의 일부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연혁
1998년 7월 27일 시험 방송 개시.
1998년 8월 1일 개국과 동시에 본방송 개시.
2003년 7월 23일 JFN에 특별가맹.
주파수
본방송국:87.9MHz(출력:4kW)
AM 1584KHz에서도 방송하고 있다.
FM 라디오 방송
팔라우의 방송
1998년 설립<|end_of_text|>
| 18.361015 | 584.956166 |
28793
|
https://ko.wikipedia.org/wiki/%EC%95%94%ED%95%98%EB%9D%BC%EC%96%B4
|
암하라어
|
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암하라어
### 기사:
암하라어()는 셈어파 에티오피아 셈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다. 역사적으로 에티오피아에서 지배적이던 암하라족의 모어이자,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정부 업무 등에 사용되는 공식 언어이다. 민족과 언어가 다양한 에티오피아의 도시 지역에서도 공용어(lingua franca)로 쓰인다. 모어 화자 수는 약 3천 2백만 명, 제2언어 화자 수는 약 2천 5백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셈어 중 아랍어 다음으로 많은 화자 수이다.
암하라어는 아부기다형 문자 체계인 그으즈 문자로 표기되며,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쓴다.
역사
암하라어는 에티오피아 북서부 에티오피아 고원에 뿌리를 둔 암하라족의 민족 언어로서, 예쿠노 암라크가 에티오피아 제국의 솔로몬 왕조를 성립시킨 12세기 말부터 암하라 출신 귀족들이 주류이던 궁정에서 쓰이게 되었고, 제국 내에서 공용어의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암하라어는 에티오피아 터와흐도 정교회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그으즈어와도 가까운 언어이나 그 직계 후손에 해당하는지는 불확실하다. 현재도 에티오피아의 공용어로서 공적 업무·방송·신문 등에서 쓰인다.
문자
암하라 문자(그으즈 문자)는 피덜(ፊደል) 문자라고도 하는데, 남부셈어 문자의 일종인 그으즈어(게즈어)를 표기하던 문자에서 발달하였다. 본래 자음만을 나타내던 그으즈어 문자에 비교적 규칙적인 모음부호가 붙은 아부기다의 형태이다.
음운
닿소리
홀소리
문법
어순은 기본적으로 주어-보족어(목적어 등)-서술어(SOV형)의 순서를 나타내며, 서술어에는 인칭과 성, 수에 따라 인칭어미가 붙는다.
예제
기본 회화
안녕하십니까?: ሠላም / ሰላም 살람
미 어서오십시오: እንኩአን ደህና መጡ 은콴 데나 메따츄
고맙습니다:
에티오피아:
예:
아니요: / አይ 아이
안녕히 가십시오: /
숫자
각주
외부 링크
셈어파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의 언어
암하라주
굴절어<|end_of_text|>
| 14.433197 | 1,962.105188 |
259546
|
https://ko.wikipedia.org/wiki/%ED%98%91%EB%8F%99%EC%A1%B0%ED%95%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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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
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협동조합
### 기사:
협동조합(協同組合, )은 경제적으로 약한 지위에 있는 소생산자나 소비자가 서로 협력,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상호복리를 도모할 목적으로 공동출자에 의해 형성된 기업이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직접목적은 영리(營利)보다는 조합원의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상호부조(相互扶助)에 있다. 협동조합은 산업혁명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발전된 대기업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19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네덜란드의 생산조합·영국의 소비조합·독일의 신용조합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역사
원칙
협동조합의 원칙(1995년 ICA-국제협동조합연맹)
개방적 회원(조합원)제도 - 가입과 탈퇴가 가능하다.
민주적 관리 - 주식회사의 1주 1표와 달리 조합원의 권리가 동등한 1인 1표제 의사결정구조.
경제적 참여 - 경제적 참여를 목적으로 하며, 종교 정치적신념 남녀 차별 등을 금지한다.
자율과 독립 - 협동조합은 조합원에 의한 자율적 통제를 따르며, 외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교육과 정보의 제공 - 조합원을 교육하며, 조합원에게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한다. 조합원이 아닌자에게도 가능한 공개한다.
협동조합간 협동 - 다른협동조합과 개인이나 타 사업체에 우선적으로 협력한다.
사회적기여 - 협동조합은 사회적기여(기아, 환경, 실업 문제 등 해결)를 자신의 원칙으로 삼는다.
협동조합은 사기업과 달리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는 특징이 있으며, 이 원칙들은 상호부조주의·민주주의·이용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합 자체의 영리보다 조합원인 소규모 사업자 또는 소비자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다.
조합원의 임의 가입·탈퇴를 인정하지만 각 조합원은 출자액에 관계없이 평등한 의결권을 가진다.
조합의 잉여금 배분은 원칙적으로 이용도에 비례하여 행한다.
형태
협동조합은 생산자 협동조합인 생산협동조합과 소비자 협동조합인 소비협동조합으로 대별(大別)된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금융분야외에 모든분야에서 협동조합설립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기본법에 따르면 일반 협동조합과 협동조합연합회, 사회적협동조합과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로 구분되며, 단일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협동조합만이 아니라 다중이해자의 협동조합도 가능하다.
생산협동조합
생산협동조합(生産協同組合)은 소생산자들이 설립하는 것으로 농업·수산업·축산업·공업협동조합 등이 있으며, 사업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판매협동조합(販賣組合) - 조합원의 판매상의 불리를 없애기 위하여 공동으로 조합원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조합이다. 이 조합에는 판매 외에 생산물을 가공, 공동판매하는 것과 같은 가공판매조합이 있다.
구매협동조합(購買組合) - 조합원에게 필요한 생산물이나 원재료를 공동구매하기 위하여 설립된 조합이다.
이용협동조합(利用組合) - 조합원이 필요로 하는 시설을 공동출자에 의하여 설치하고, 이를 이용할 목적으로 설립된 조합이다.
신용협동조합(信用組合) - 조합원이 서로 자금을 융통하는 외에 외부에서 자금을 차입, 조합원에 융자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예금까지도 취급한다.
생산협동조합(生産組合) - 조합원이 공동생산하는 조합으로 원료구입에서부터 생산·가공까지를 행하는 것과 가공만을 행하는 것이 있다.
소비협동조합
소비협동조합(消費協同組合)은 조합원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동으로 싼 값으로 구입함으로써 소비자인 조합원의 소비생활 향상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생활물자의 공동구입 외에 의료시설이나 목욕탕·주택 등을 설치, 이용한다든가 또는 조합원으로부터 여유자금을 예치, 필요한 조합원에 대부해 주는 것도 있다. 이러한 소비조합은 회사·관청 등의 직장에 설치된 직장조합도 있으며 특정지역에 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지역조합도 있다.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교직원 밥집과 매점은 소비협동조합이다.
다중이해관계자협동조합
다중이해관계자협동조합은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둘 이상 유형의 조합원들이 모여 상호 배려하면서 자주적ㆍ자립적ㆍ자치적인 협동조합 활동을 통하여, 조합원의 경영개선 및 생활 향상에 이바지하고,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협동조합의 주체별 분류
소비자협동조합
한국의 소비자 협동조합으로 대표적인 연합조직은 4개이다(2015).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합회(https://web.archive.org/web/20181124042928/http://www.hansalim.or.kr/), 아이쿱생협(https://web.archive.org/web/20160617172938/http://icoop.coop/), 두레생협(https://web.archive.org/web/20160611055202/http://www.ecoop.or.kr/), 행복중심생협(https://web.archive.org/web/20160331135815/http://www.happycoop.or.kr/) 이 그것이다. 이들은 2015년말 기준 약 100만명의 조합원가구와 약 1조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사업자협동조합/생산자협동조합
사업자협동조합 또는 생산자협동조합이라고 부르는 협동조합은 사업자(주로 중소 사업자)들의 공동구매, 공동판매, 공동브랜드 등을 통해 사업의 효율화를 위해 설립 운영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농업협동조합, 수산업협동조합, 산림업협동조합 등이 각각의 업종에서 1930년대 이후 운영되어 오고 있으며, 다른 업종의 협동조합은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발효이후 다양하게 설립되고 있다.
노동자협동조합
한국의 노동자 협동조합은 "일하는 사람들의 협동조합연합회" (https://web.archive.org/web/20181206225438/http://www.kfwc.or.kr/ )중심으로 해피브릿지협동조합, (협)한국협동조합창업경영지원센터, 쿱비즈협동조합 등이 운영 중이며, 연합회에 9개 협동조합 200여명이 약 600억원의 매출 규모로 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2015년)
사회적협동조합
5인 이상의 발기인(조합원)이 모여 중앙부처의 장에게 인가 및 설립등기를 거쳐 설립할 수 있다. 사회적협동조합은 공익 사업을 40% 이상 수행해야 하며, 여기에 해당되는 공익 사업은 지역사회공헌, 지역 주민권인 증진, 취약계층 사회서비스 제공, 취약계층 일자리 제공, 공공기관 위탁사업, 기타 공익을 위한 사업이 포함된다. 일반 협동조합과 달리 주 사업 이외의 사업으로 정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조합원을 대상으로 납입 출자금 2/3 한도 내에서 소액대출을 할 수 있고, 납입 출자금의 총액 한도 내에서 상호부조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협동조합 빠띠(https://parti.coop/)가 있다.
같이 보기
사회적 기업
FC 바르셀로나: 세계최초의 협동조합 형태 스포츠클럽
에코구로 협동조합
한국종교 협동조합
각주
외부 링크
국제협동조합연맹
시장사회주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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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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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8%B0%EB%8B%88%EC%98%A4%20%EC%8A%A4%ED%8A%B8%EB%9D%BC%ED%94%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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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니오 스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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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기니오 스트라피
### 기사:
이기니오 스트라피(, 1965년 ~, 구알도)는 이탈리아 출신의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윙스 프렌즈》의 창작자이자 감독이다.
그는 레인보우 S.p.A 사의 CEO이자 공동창립자이다. 이 회사는 애니메이션을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이탈리아 내 애니메이션 산업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 디자이너로서 여러 잡지, 출판사에서 일하였다. 이후 그는 애니메이션 업계로 뛰어들기를 작정하고는 업계에 뛰어들었다. 프랑스 및 룩셈부르크 등을 돌아다니며 영화 제작을 배웠다.
199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 경험들을 살려 회사 레인보우 S.p.A를 차렸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 《윙스 프렌즈》()는 유럽, 미국, 아시아 각지의 130여 개 국에서 방영되었다. 그는 《윙스 프렌즈》 외에도 시리즈물 《프레쯔몰로》 (파슬리, 이탈리아 가르다랜드 테마 파크 마스코트에서 영감을 받았다.), 《몬스터 알레르기》 (, 월트 디즈니 회사 만화책으로도 있다.) 그리고 《토미와 오스카》() 등을 감독/제작하였다.
생애
이기니오 스트라피는 12세에 회화를 공부하였다. 그 때부터 그의 작품을 팔러 다녔다. 대학생 때는 파트-타임 만화가로 일하였다.
24세 때는, 만화 시리즈 《Nick Raider》를 그렸다. 이 책 시리즈는 7만 5천 부 이상 팔려나갔다.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196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이탈리아의 영화 프로듀서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션 영화 프로듀서
마체라타도 출신<|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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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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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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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두목
### 기사:
두목(杜牧, 정원 19년(803년)~대중 6년(852년))은 중국 당나라 후기의 시인이다.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지금의 산시성 시안시) 사람으로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통전》의 저자로 유명한 대학자 두우의 손자로, 마찬가지로 당나라 후기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순학은 그의 서자로 알려져 있다.
중당 시대의 시인 두보와 작풍이 비슷하며, 노두(老杜) 두보와 구별하기 위해 소두(小杜)라고도 부르며,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과 함께 「만당의 이두(李杜)」로 통칭된다.
약력
덕종 정원(貞元) 19년(803년)에 태어났다. 당의 명문가였던 경조 두씨(京兆杜氏) 출신으로 두목 자신도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조카에게 보내는 시에서 "우리 집안은 상공의 집안, 칼 차고 띵땅거렸지(我家公相家, 劍佩嘗丁當)"라고 읊기도 했다.
문종 대화(大和) 2년(828년), 26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대화 7년(833년), 31세 때 양주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우승유(牛僧孺)의 밑에서 서기(書記)를 맡아, 양주에 머무르는 3년 동안 밤만 되면 기루를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일족을 부양하기 위해 명문 출신임에도 중앙에서의 출세를 단념하고 지방관 부임을 지망하여 황주(黄州)・지주(池州)・목주(睦州)・호주(湖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하였으며, 선종 대중(大中) 6년(852년)에 중앙으로 돌아와 중서사인(中書舎人)이 되었다. 두목을 가리키는 두자미(杜紫微)라는 이름도 중서성의 다른 이름이었던 자미성(紫微省)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목의 문집인 《번천집》(樊川集)은 신라의 장보고와 친구 정연의 이야기를 읊은 「장보고정년전」(권제3)이 실려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이것은 《신당서》신라전(권제220)과 《삼국사기》장보고 열전(권제44)의 주요 저본으로 인용되었다.
주요 작품
만당 시기 당시(唐詩)의 섬세하고 기교적인 풍조에 비해 평이하면서도 호방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풍류를 즐기기 위한 풍류시와 과거의 역사를 노래한 영사(詠史), 시사 풍자에 뛰어날 뿐 아니라 요염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럼에도 강건한 면을 모두 갖추어 때때로 리얼리즘을 떠나서 인상파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강남(江南)의 풍경을 그림처럼 표현한 〈강남춘〉(江南春)이 유명하며, 양주에서 풍류재자(風流才子)로서 지내덜 시절의 모습을 그린 〈견회〉(遣懷)는 현실을 벗어난 가상적이라는 시풍(詩風)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烏江)까지 도망쳐 왔을 때의 일을 노래한 〈제오강정〉(題烏江亭)은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賦)로는 23세 때 정치에 대한 정의감을 불태우며 지었던 〈아방궁부〉(阿房宮賦)가 유명하다.
당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인기도가 높지만, 성당을 중시하여 중당(中唐)・만당의 시를 비판했던 명의 고문사파(古文辭派)의 문학관이 반영된 《당시선》(唐詩選)에는 두목의 시가 한 수도 실려 있지 않다.
계보
아버지: 두종욱(杜從郁) - 당의 재상 두우의 셋째 아들
처 : 배씨(裴氏) - 낭주자사(郎州刺史) 배언(裴偃)의 딸로 두목 앞에서 사망
아들 : 두매사(杜晦辭) - 어릴 때의 이름은 조사(曹師),회남절도판관(淮南節度判官)
아들 : 두덕상(杜德祥) - 어릴 때의 이름은 축니(祝柅),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하고 아들 준(遵)을 두었음
아들
두승택(杜承澤) - 자는 준지(浚之). 일찍 죽음
두란(杜蘭)
두흥(杜興)
딸
두진(杜眞)
같이 보기
한시(漢詩)
중국문학
803년 출생
852년 사망
당나라의 정치인
당나라의 시인
시안시 출신
9세기 중국 사람
9세기 시인
경조 두씨<|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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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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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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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반군
### 기사:
추상대수학에서 반군(半群, )은 결합법칙을 따르는 하나의 이항 연산이 부여된 대수 구조이다.
정의
반군 은 다음과 같은 데이터로 구성되는 대수 구조이다.
는 집합이다.
은 결합법칙을 만족시키는 이항 연산이다.
은 항등원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항등원을 갖는 반군을 모노이드라고 한다. 즉, 반군과 모노이드의 관계는 유사환과 환의 관계와 같다. 보통, 편의상 이항 연산을 (곱셈과 같이)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즉, 다음과 같은 포함 관계가 성립한다.
마그마 ⊋ 반군 ⊋ 모노이드 ⊋ 군
반군 준동형
두 반군 , 사이의 반군 준동형(半群準同型, )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이항 연산의 보존) 임의의 에 대하여,
모든 모노이드는 반군이므로, 두 모노이드 사이의 반군 준동형을 생각할 수 있다. 두 모노이드 사이의 모든 모노이드 준동형은 반군 준동형이지만, 두 모노이드 사이의 반군 준동형은 모노이드 준동형이 아닐 수 있다 (즉, 항등원을 항등원으로 대응시키지 않을 수 있다).
부분 반군
반군 의 부분 집합 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를 의 부분 반군(部分半群, )라고 한다.
임의의 에 대하여,
모노이드의 모든 부분 모노이드는 부분 반군이지만, 모노이드의 부분 반군은 부분 모노이드가 아닐 수 있다 (즉, 항등원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다).
반군 속에서,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반군 을 의 왼쪽 아이디얼()이라고 한다.
반군 속에서,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반군 을 의 오른쪽 아이디얼()이라고 한다.
왼쪽 아이디얼이자 오른쪽 아이디얼인 부분 반군을 아이디얼()이라고 한다. 모노이드의 아이디얼은 부분 모노이드를 이룰 필요가 없다 (즉, 1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환의 환론적 아이디얼이 부분환을 이룰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군 의 부분 반군의 몫반군을 의 인자()라고 한다.
특별한 원소
영원
반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원소 가 존재한다면, 이를 의 왼쪽 영원()이라고 한다.
반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원소 가 존재한다면, 이를 의 오른쪽 영원()이라고 한다.
왼쪽 영원이자 오른쪽 영원인 원소를 영원()이라고 한다. 왼쪽 영원과 오른쪽 영원은 일반적으로 유일하지 않지만, (양쪽) 영원은 만약 존재한다면 유일하다.
항등원
반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원소 가 존재한다면, 이를 의 왼쪽 항등원()이라고 한다.
반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원소 가 존재한다면, 이를 의 오른쪽 항등원()이라고 한다.
왼쪽 항등원이자 오른쪽 항등원인 원소를 항등원()이라고 한다. 왼쪽 항등원과 오른쪽 항등원은 일반적으로 유일하지 않지만, (양쪽) 항등원은 만약 존재한다면 유일하다. 이렇게 양쪽 항등원을 갖는 반군을 모노이드라고 한다.
멱등원
반군 속에서 를 만족시키는 원소 를 멱등원()이라고 한다. 왼쪽 영원 · 오른쪽 역원 · 왼쪽 항등원 · 오른쪽 항등원은 모두 항상 멱등원이다.
유한 반군은 항상 적어도 하나 이상의 멱등원을 갖는다. 보다 일반적으로, 모든 원소의 차수가 유한한 반군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멱등원을 갖는다. 이는 하나의 원소로 생성되는 모든 유한 반군은 멱등원을 갖기 때문이다.
정칙원
반군 속의 원소 에 대하여, 만약 가 되는 원소 가 존재한다면, 를 정칙원()이라고 하고, 를 의 유사역원()이라고 한다. 유사역원은 일반적으로 유일하지 않다.
연산
반대 반군
반군 가 주어졌을 때,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다른 이항 연산 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는 반군을 이룬다. 이를 의 반대 반군(反對半群, )이라고 하고, 으로 쓴다.
반대 모노이드나, 군론의 반대군이나, 환론의 반대환은 반대 반군의 특수한 경우이다.
군의 경우 모든 군은 스스로의 반대군과 역원 함수를 통해 표준적으로 동형이지만, 반군의 경우 일반적으로 스스로의 반대 반군과 동형이 아니다. (가환 반군은 물론 스스로의 반대 반군과 같다.)
몫반군
반군 위의 합동 관계 는
를 만족시키는 위의 동치 관계이다. 반군 위의 합동 관계가 주어졌을 때 몫반군(-半群, ) 을 정의할 수 있다. 군이나 유사환의 경우와 달리, 반군의 경우 합동 관계는 일반적으로 정규 부분군이나 유사환 아이디얼과 같은 부분 집합으로 나타내어지지 않는다.
몫반군의 특별한 경우로, 반군 의 아이디얼 가 주어졌을 때, 동치 관계
는 합동 관계를 이루며, 따라서 몫반군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꼴의 몫반군을 리스 몫반군()이라고 한다. 만약 가 공집합이 아니라면, 는 항상 영원 를 가진다. 만약 이라면 이며, 반대로 라면 은 자명군이다.
직접곱
반군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이므로, 여러 개의 반군들의 직접곱을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반군과 반군 준동형의 범주에서의 범주론적 곱이다. 구체적으로, 반군들의 집합 의 직접곱 은 집합으로서 곱집합과 같으며, 그 위의 이항 연산은 다음과 같다.
각 의 성질은 에게 다음과 같이 유전된다.
만약 모든 가 가환 반군이라면, 이들의 직접곱 역시 가환 반군이다.
만약 모든 가 모노이드라면, 직접곱 역시 모노이드이며, 이는 모노이드 직접곱과 같다.
만약 모든 가 군이라면, 직접곱 역시 군이며, 이는 군의 직접곱과 같다.
반직접곱
두 반군 , 및 의 위의 작용 이 주어졌을 때, 반직접곱 를 정의할 수 있다.
자유곱
반군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이므로, 여러 개의 반군들의 자유곱을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반군의 범주의 쌍대곱이다. 반군의 자유곱은 모노이드의 자유곱과 다르다. 즉, 각 성분들의 항등원이 모노이드 자유곱에서는 한 원소로 합쳐지지만, 반군 자유곱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원의 추가
반군 가 주어졌을 때, 에 다음과 같은 이항 연산을 주자.
그렇다면 는 반군을 이루며, 새로 추가한 원소 은 그 속의 영원을 이룬다. 만약 가 모노이드라면 역시 모노이드이다.
멱집합
반군 가 주어졌을 때, 그 멱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이항 연산을 주자.
그렇다면 는 반군을 이룬다. 는 항상 영원을 가지며, 이는 공집합이다. 또한, 역시 반군을 이룬다.
만약 가 모노이드라면 역시 모노이드이다.
화환곱
군론의 화환곱()을 반군에 대하여 일반화할 수 있다. 즉, 두 반군 , 와 가 왼쪽에서 작용하는 집합 가 주어졌을 때, 화환곱 는 집합 위에 주어진 반군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다음과 같다.
작용을 갖춘 반군들에 대하여, 화환곱은 결합 법칙을 따른다.
성질
군론의 케일리 정리와 마찬가지로, 반군에 대하여 케일리 정리가 성립한다. 즉, 임의의 반군 에 대하여, 어떤 집합 위의 완전 변환 모노이드 로 가는 단사 반군 준동형
이 존재한다. 또한, 만약 가 유한 반군이라면 역시 유한 집합으로 잡을 수 있다.
반군 의 부분 반군 가운데 부분군인 것들은 포함 관계에 따라 부분 순서 집합을 이룬다. 그렇다면, 다음 두 집합 사이에 표준적인 전단사 함수가 존재한다.
의 극대 부분군들의 집합
의 멱등원들의 집합
구체적으로, 의 극대 부분군 에 대하여, 는 의 멱등원을 이룬다. 반대로, 임의의 멱등원 에 대하여, 에 대한 역원을 갖는 모든 원소들의 집합
은 를 항등원으로 하는 극대 부분군이다.
공집합이 아닌 모든 유한 반군은 항상 하나 이상의 멱등원을 가진다. (모노이드의 경우 항등원이 멱등원이므로 이는 자명하게 성립한다.) 그러나 이는 무한 반군에 대하여 성립하지 않는다.
종류
다음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반군들의 모임이 존재한다.
멱등 반군(, )은 모든 원소가 멱등원인 반군이다.
가환 반군()은 이항 연산이 교환 법칙을 따르는 반군이다.
멱등 가환 반군을 반격자()라고 하기도 한다.
모노이드()는 항등원을 갖는 반군이다.
왼쪽 소거 반군()은 만약 라면 가 성립하는 반군이다. 오른쪽 소거 반군()은 만약 라면 가 성립하는 반군이다. 소거 반군()은 왼쪽 소거 반군이자 오른쪽 소거 반군인 반군이다.
정칙 반군()은 모든 원소가 정칙원인 반군이다.
아르키메데스 반군()은 임의의 원소 에 대하여 가 되는 원소 와 양의 정수 이 존재하는 가환 반군이다.
분류
유한 반군
유한 반군에 대하여, 크론-로즈 정리()라는 구조 정리가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유한 반군 는 유한 단순군과 비자명군을 포함하지 않는 유한 반군들의 화환곱의 부분 반군의 몫반군이다. 즉, 다음과 같은 꼴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은 각각 다음 둘 가운데 하나이다.
유한 단순군이며, 스스로 위에 작용한다.
크기 2의 집합 위에 작용하는 크기 3의 비가환 멱등 모노이드인 플립플롭 모노이드()이다. (이러한 모노이드는 두 개가 있으며, 서로의 반대 모노이드이다.)
는 작용을 갖춘 반군들의 화환곱이다.
는 위 (반)군들의 화환곱의 부분 반군이다.
은 위의 반군 합동 관계이다.
가환 반군의 구조 이론
가환 반군의 경우, 다음과 같은 구조 정리가 존재한다.
임의의 가환 반군 에서 가환 멱등 반군 으로 가는 반군 준동형 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
각 원소 의 원상 은 의 부분 반군을 이룬다. 이를 로 표기하자.
임의의 에 대하여, 이다. 즉, 는 에 의하여 등급 반군을 이룬다.
임의의 가환 반군 에 대하여, 이 가환 멱등 반군이 되는 가장 섬세한 합동 관계 가 존재하며, 는 에 대한 등급 반군을 이룬다. 또한, 각 에 대하여, 동차 성분 는 모두 아르키메데스 반군을 이룬다.
따라서, 가환 반군의 분류는 가환 멱등 반군의 분류와 아르키메데스 반군의 분류로 귀결된다. 가환 멱등 반군은 공집합이 아닌 유한 부분 집합이 항상 최소 원소를 갖는 부분 순서 집합과 동치이다. 이 경우 부분 순서는 와 같다.
예
모든 모노이드는 반군이다. 따라서 모든 군은 반군이다. 모든 유사환 에 대하여, 은 반군을 이룬다. (는 아벨 군이므로 역시 반군이다.) 모든 격자 에 대하여, 와 역시 각각 가환 멱등 반군을 이룬다. (만약 이 최대 원소 또는 최소 원소를 갖지 않는다면, 둘 가운데 하나는 모노이드를 이루지 않는다.)
임의의 음이 아닌 정수 에 대하여, 는 덧셈에 대하여 가환 반군을 이룬다. 이라면 이는 모노이드가 아니다.
공반군
공집합 위에 유일한 이항 관계를 준다면, 이는 자명하게 반군을 이룬다. 이를 공반군(空半群, )이라고 하며, 이는 모노이드가 아니다.
영반군
집합 에 원소 을 추가한 분리합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이항 연산을 상수 함수로 정의하자.
그렇다면 은 반군을 이룬다. 이를 영반군(零半群, )이라고 한다. 만약 가 공집합이 아니라면 이는 모노이드를 이루지 않는다. (만약 가 공집합이라면 이는 자명군을 이룬다.)
아벨 군 위에 곱셈을 모두 0으로 정의하여 영 유사환을 정의할 수 있는데, 그 곱셈 반군은 영반군이다.
자유 반군
반군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이므로, 이에 대한 자유 대수를 정의할 수 있다. 집합 위의 자유 반군(自由半群, )은 위의 클레이니 스타 (자유 모노이드) 에서, 길이가 0인 문자열 (항등원)을 제거한 반군 이다.
한원소 집합으로 생성되는 자유 반군은 양의 정수의 덧셈 반군 과 동형이다.
마찬가지로 자유 가환 반군(自由可換半群, )을 정의할 수 있다. 집합 위의 자유 가환 모노이드는 의 원소들로 구성된 유한 중복집합들의 모노이드이며, 위의 자유 가환 반군은 이 가운데 공집합을 제거한 것이다.
왼쪽·오른쪽 영원 반군
집합 위에 다음과 같은 두 이항 연산을 정의하자.
그렇다면 과 는 각각 반군을 이룬다. 를 왼쪽 영원 반군(), 를 오른쪽 영원 반군()이라고 한다.
왼쪽 영원 반군에서, 모든 원소는 왼쪽 영원이자 오른쪽 항등원이다. 오른쪽 영원 반군에서, 모든 원소는 오른쪽 영원이자 왼쪽 항등원이다.
왼쪽 · 오른쪽 영원 반군은 가 한원소 집합이 아니라면 모노이드를 이루지 않는다.
하나의 원소로 생성되는 반군
하나의 원소로 생성되는 반군은 항상 가환 반군이며, 다음 두 경우 가운데 하나와 동형이다.
한원소 집합 위의 자유 반군. 양의 정수의 덧셈 반군 과 동형이다. 이는 멱등원을 갖지 않는다.
두 양의 정수 에 대하여, . 이는 집합으로서 개의 원소 를 가지며, 그 위의 이항 연산은 다음과 같다.
이 경우 하나의 멱등원 을 갖는다.
만약 일 경우 이는 모노이드가 아니며, 일 경우 이는 순환군 이다.
만약 일 경우 이는 영원을 갖지 않으며, 일 경우 유일한 멱등원 은 영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원소로 생성되는 모노이드는 항상 가환 모노이드이며, 다음 두 경우 가운데 하나와 동형이다.
한원소 집합 위의 자유 모노이드. 자연수(음이 아닌 정수)의 덧셈 모노이드 와 동형이다.
및 에 대하여, . 이는 집합으로서 개의 원소 를 가지며, 그 위의 이항 연산은 다음과 같다.
인 경우 이는 군이 아니며, 인 경우 이는 순환군 이다.
작은 크기의 반군
크기가 인 반군의 동형류의 수는 다음과 같다. (. 모노이드와 그 반대 모노이드는 일반적으로 서로 동형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1, 1, 5, 24, 188, 1915, 28634, 1627672, 3684030417, 105978177936292, …
만약 반군과 그 반대 반군을 동치로 놓았을 때, 동치류의 수는 다음과 같다. ()
1, 1, 4, 18, 126, 1160, 15973, 836021, 1843120128, 52989400714478, …
만약 반군과 그 반대 반군을 동치로 놓았을 때, 정확히 1개의 멱등원을 갖는 반군의 동치류의 수는 다음과 같다.
0, 1, 2, 5, 19, 132, 3107, 623615, 1834861133, 52976551026562, …
정확히 2개의 멱등원을 갖는 반군의 동형류의 수는 다음과 같다.
0, 0, 2, 7, 37, 216, 1780, 32652, 4665709, 12710266442, …
크기가 인 가환 반군의 동형류의 수는 다음과 같다.
1, 1, 3, 12, 58, 325, 2143, 17291, 221805, 11545843, 3518930337, …
크기가 0인 반군은 공반군 밖에 없고, 크기가 1인 반군은 자명군 밖에 없다. 크기가 2인 반군은 총 5개가 있다.
2차 순환군 . 이는 크기 2의 유한체 의 덧셈 아벨 군이다.
2원소 불 대수의 (만남 또는 이음) 모노이드 . 이는 크기 2의 유한체 의 곱셈 모노이드이다.
크기 2의 영반군
크기 2의 왼쪽 영원 반군 과 크기 2의 오른쪽 영원 반군
크기가 3인 반군은 총 24개가 있다. 이 가운데 모노이드가 아닌 것은 17개이며, 다음과 같다. 아래 목록에서 표시는 반군의 표시이며, 영원의 경우 항상 0으로 표기하며 이에 대한 관계 ( 등)는 생략하였다.
크기 2의 반군에 영원 추가:
및 그 반대 반군 . 이는 비가환 멱등 반군이다.
(가환 멱등 반군). 이는 2원소 불 대수에 영원을 추가한 것이다.
기타 가환 반군:
영반군
(가환 반군)
(가환 반군)
(가환 반군)
(가환 반군)
(가환 멱등 반군)
기타 비가환 반군:
왼쪽 영원 반군 , 오른쪽 영원 반군 . 이는 비가환 멱등 반군이다.
및 그 반대 반군
및 그 반대 반군
및 그 반대 반군. 이는 비가환 멱등 반군이다.
역사
1904년에 장아르망 드 세기에(, 1862~1935)가 최초로 반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드 세기에는 이를 오늘날과 달리 "소거 반군"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1908년에 해럴트 힐턴(, 훗날 해럴드 심프슨()으로 개명, 1876~1974)은 최초로 영어 문헌에서 "반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힐턴은 반군을 오늘날과 같이 정의하였다.
반군에 대한 최초의 (자명하지 않은) 정리들은 하인리히 브란트(, 1886~1954)의 1926년 논문과 안톤 카시미로비치 수시케비치(, 1889~1961)의 1928년 논문이다. 앨프리드 호블리첼 클리퍼드(, 1908~1992)는 수시케비치의 구조 정리들을 일반화하였다.
데이비드 리스(, 1918~2013)는 1947년에 역원 반군()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 랴핀(, 1914~2005)와 고든 프레스턴(, 1925~2015)은 그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밖에도, 제임스 알렉산더 그린(, 1926~2014), 존 매킨토시 하위(, 1936~2011) 등이 반군 이론에 공헌하였다. 특히, 그린은 1951년에 그린 관계를 도입하였다.
사무엘 에일렌베르크(1913~1998)와 마르셀폴 쉬첸베르제(, 1920~1996)는 반군 이론을 자동기계 이론에 응용하여 발전시켰다. 특히, 쉬첸베르제는 1957년에 쉬첸베르제 군을 도입하였다.
크론-로즈 정리는 미국의 케네스 크론()과 존 루이스 로즈(, 1937~)가 1965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발표하였다.
1961년~1967년에 클리퍼드와 프레스턴은 당시 알려진 반군 이론을 체계화하여, 반군 이론에 대한 최초의 책을 출판하였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같이 보기
모노이드
모노이드 대상
반군론<|end_of_text|>
| 5.36668 | 1,720.534424 |
2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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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C%A7%84%EC%B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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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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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북진책
### 기사:
북진책(北進策)은 고려의 건국이념의 하나로 고려조에 일관된 정책이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송사(宋史)』 『원사(元史)』의 고려전에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後身)처럼 기록한 것은 그 명칭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고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서희(徐熙)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지계(地界)를 따지자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遼陽)·심(瀋:奉天)은 본래 우리나라 옛땅에 속한 것이라 하여 달랜 사실 등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구도 평양성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고 임금이 자주 행차하였으며 이후 역대 임금이 이를 계승하여 성종 초기에는 고려 영토가 청천강(淸川江)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博川)·영변(寧邊)·운산(雲山)·태천(泰川) 등지 압록강 연안일대를 차지했고, 991년(성종 10)에는 압록강 이남(以南)의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을 남겼다.그런데 고려는 건국 이래로 요(療:契丹)·금(金:女眞)·원(元:蒙古)의 강국이 만몽지방(滿蒙地方)을 무대로 등장하였으므로 그의 이상(理想)을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그러나 북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벌을 행하였던 것이니 요가 쇠하고 금이 일어나기 전인 예종(睿宗) 때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었으며, 공민왕 초기에 원의 세력이 쇠하자 압록강 이서(以西)의 팔참(八站)을 정벌하였고, 또 1370~1371(공민왕 19~20)에는 동녕부와 요양(遼陽)을 정벌하였으며, 우왕(禑王) 때의 요동정벌(遼東征伐) 출병도 모두 북진책의 전통적 이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의 군사<|end_of_text|>
| 21.934988 | 1,973.285055 |
156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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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UTC%2B00%3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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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C+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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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UTC+00:20
### 기사:
UTC+00:20은 협정 세계시보다 20분 빠른 동경 5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시간대이다.
시간대
1909년부터 1940년까지 네덜란드에서 사용된 표준시이다. 암스테르담시 또는 더치시로도 부른다. 정확히는 1909년 5월 1일부터 1937년 7월 1일까지 GMT +0시 19분 32.13초, 간략하게 GMT +0시 20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베를린 표준시가 적용되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0시 19분 32.13초의 시차가 생긴 이유는 시간대가 암스테르담에 있는 서교회(베스테르케르크, Westerkerk) 탑(4° 53' 01.95" E)의 평균 태양시를 중심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각주
외부 링크
Albertus Antonie Nijland, "Time in Holland", The Observatory, 32 (1909), 301.
Wettelijke tijdregeling in Nederland
+0020
20세기 네덜란드<|end_of_text|>
| 16.875811 | 859.067898 |
5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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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C%EC%A7%95%20%EB%8C%80%ED%95%99%EC%82%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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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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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난징 대학살
### 기사:
난징 대학살(, , )이란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 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강간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20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일본군 상부는 몽골이 중국 한족들을 잔인하게 지배했다는 것을 들어 중국 침략 전쟁에서는 일본군 상부의 지시와 묵인으로 일본군에 의한 중국 한족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일본군 상부는 만주족이 한족들을 대량 학살한 것들을 비교하며 만주족보다 두배 이상 강간과 학살을 하여 중국인들에게 공포를 주라고 명령하였다.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대학살 배경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노구교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등등했었다.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처럼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은 손 쉽게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石)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통첩도 없이 곧바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향해 진격을 한다.
대학살 전개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중경)을 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들어오는 일본군의 포위속에 중국 국민당 주요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에 약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 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뜨러진 군기와 지휘관들의 부재 및 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되었던 것에 큰 한 몫을 했다. 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로 뒤숭숭한 혼란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6주간의 학살과 강간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신호등 약국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토막살을 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난징 안전지대
독일 나치스당원이자 지멘스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는 외교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다.
난징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난징 안전지대를 만든 것은 욘 라베 뿐이 아니었다. 진링 여자 예술 과학대학의 교육학부 학장이자 연구 책임자인 윌헬미나 보트린(Wilhelmina Vautrin)또는 미니 보트린은 난징대학살 당시 51세였다. 학살이 시작되자 그녀는 1937년 12월 둘째 주, 진링 여자 예술 과학대학을 피난처로 만들었다. 초기에 그녀는 피난처에 여자들과 부상자들만을 수용하려 했지만 매일 약 천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12월 15일에는 3천 명 정도, 결과적으로는 약 1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이 학교에 들어와 중국인들을 끌고 가려고 할 때마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 힘썼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 혹은 참상을 목격한 후유증으로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간 지 1년 만인 1940년 자살하기에 이른다.
난징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의사 로버트 윌슨(Robert O. Wilson)은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고 끝까지 남아 난징의 유일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학살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갈 곳 없는 환자들을 모두 수용하여 대학병원은 또 다른 피난처가 되었다.
파나이 호 사건
파나이 호 사건은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난징 인근의 양쯔강 유역에서 일본 해군(해군 소속 전투기)에 의하여 당시 난징인근 양쯔강 유역을 순찰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비정인 파나이 호가 침몰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00인 참수 경쟁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한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함께 총살되었다.
대학살 이후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일본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1938년 1월 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다.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를 정부수반으로 친일성향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일방적으로 세워진 왕징웨이의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 등 일본군, 일본인들은 중화민국의 군대가 난징에 입성하기 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
난징전범재판은 1946년 8월~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도중 둘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난징전범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년 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년 2월 6일, 다니 히사오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3월 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총살이 집행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학살의 주요 책임자
조 이사무 (1895년 1월 19일 ~ 1945년 6월 23일) - 난징전투 당시 아사카 야스히코의 참모. 난징대학살에 깊게 관여했고 포로 학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아사카 야스히코 (1887년 10월 2일 ~ 1981년 4월 12일) - 일본의 황족으로서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마쓰이 이와네 (187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3일)- 난징대학살 당시 총책임자. 그러나 난징 함락될 당시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다니 히사오 (1882년 12월 22일 ~ 1947년 4월 26일) -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사건 일지
최근 상황
난징 대학살 논쟁
최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되었다고 증언한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 경쟁 가담자는 1948년,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였다. 일본군은 심지어 중국인 군인 포로들을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및 우익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환상설이나 부정론을 내세우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거나 "난징 사건"이라고 사건을 일축하는 등 오히려 난징 대학살 언급을 금기시되고 있어서 중국측과 대립하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난징 대학살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으로 엇갈리는데, 서양의 서적 중에서는 4만2천 명 설을 언급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15만이나 20만 명 설까지 다양하다. 또 일본 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 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표자인 가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司) 츠루 문과대학 교수나 와세다 대학교 교수였던 호라 도미오조차도 25만 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기타 20만 명설, 15만 명설, 1만 명설, 3천 명설, 심지어는 일본 우익 진영에서는 40~50명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 봐야 1~2명 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이러한 일본 극우 난징 대학살 부정파들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일본 극우 세력과 현 정부의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제작되어 난징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2010년 5월 16일에는 1937년 일본군의 `난징(南京)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록영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다.
아이리스 장 -The Rape of Nanking(난징의 강간)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은 아이리스 장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사이에 6주간 일어난 난징 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으로 1997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이 책은 저자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에 관한 자료조사에 기초하여 서술했으며, 저자는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1931년~1945년사이에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 대학살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웅변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대사를 생방송으로 주미 일본대사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제대로 논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이리스 장은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 일부 우익세력들은 '아이리스 장의 책은 왜곡과 날조'라 반박하며 아이리스 장에게 전화와 메일, 시위 등 방법으로 협박했었다. 한편, 이책을 일본에서 한 출판사가 번역출판을 시도하자, 일본 우익세력들은 출간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규탄집회를 열었다. 결국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 출간하려 했던 출판사는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않은 이 책에 대한 비판서들이 등장하는 등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과 극우파들의 저지시도 끝에 일본어판은 2007년에 출간됐다.
아이리스 장은 일본우익들로부터 여러 협박과 우울증에 견디지 못해 2004년 11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학살에 대한 피해 규모 논쟁
오래전부터 난징 대학살 피해 규모에 대해 논쟁이 격렬히 났었는데, 최근 중일 양국의 전문가로 구성된 중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난징 대학살의 피해 규모에 대해 논의를 놓고 2009년 12월 23일에 최종결론이라 불리는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양측의 팽팽한 주장 대립속에 합의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중국 측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난징 대학살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수가 30만 명이며 “일본은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측
반면 일본 측은 수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대학살'이라 부르지 않고 '사건'이라고 부르며 역사적 사실을 축소해 왔다. 일본 측은 "일본은 일부 군부 세력에 의해 전쟁에 끌려들어 갔고 그리하여 전선을 확대했다"라는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일본의 난징 논쟁사
당시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일본의 반응
일본에 난징 대학살의 존재는 학살이 진행 중이던 1937년 12월 당시에도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국내에는 아예 보도되질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당시 국민들은 전쟁에 찬동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알려지게 된 것은 패전 후의 일이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는 15만 명으로 사상자를 결론지었다. 전후에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으나 신문 상에서 최대의 기사거리는 국제 사회에서 지원될 식량과 식량의 종류, 배급일자가 1면 기사였고, 난징 학살의 기사는 2면이나 3면기사로 보도되면서 전후에 일본 국민들의 기억속에서 곧 잊혀졌다.
논쟁
그러나 1971년에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혼다 카츠이치 기자가 홍콩을 경유해 중국에 입국해서 당시 일본과 국교가 없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를 여행하며 신문상에 연재한 '중국 여행'이라는 르포가 화제와 인기를 끌면서 다시금 일본에 난징 대학살 논쟁의 불씨를 당겼으며, 이 과정에서 100인 참수 경쟁의 이야기나 731 부대의 이야기도 연재되었다.
이 르포기사를 반박하는 일본의 극우 언론인 산케이 신문의 스즈키 아키라 기자가 1973년에 난징 대학살의 환상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일본내에서도 다시금 논쟁이 격해졌다. 그리고 1981년에 '중국 여행'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또 다시 화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일본의 교과서에는 1965년에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의 문부과학성 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이 삭제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었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한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의 30년에 걸친 교과서 소송 재판이 1995년에 마침내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교과서에 의무적으로 실리게 되었으나, 1999년부터 다시 학살 부정론이 우익 진영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다.
193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이 극에 달했을 무렵,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100인 목베기 시합을 했다는 내용의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개제되었던 게 있었는데, 최근 2005년에 그 유가족들이 100인 목베기 시합에 대해 보도했던 언론사들을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발하여 소송을 걸었다. 일본 극우 및 우익 단체들은 이 유가족들을 지원하는 모임도 결성하는 등 소송을 지원했다. 소송을 건 원고측은 "전쟁 수행 중에 일본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 실제 목베기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이 사건에 대해 도쿄 지방 재판소는 100인 목베기 시합이 없었던 일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며 유가족 등 원고측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2000년 1월 23일 오사카에서는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난징 대학살을 철저히 검증하는 집회" 대회를 열어 부정파론자들이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난징 대학살 부정파론을 주장하는 부정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만화가 코바야시 요시노리, 아세아 대학교 교수 히가시나카노 슈도 등이 최선봉이 되어 다시금 부정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반면에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일본 제국의 여러 전쟁 범죄에 대한 진실을 일본의 민간 단체 및 시민 단체에서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고 진상규명을 밝히고자 하지만, 최근에는 일본의 부정파론이 대두되면서 난징 대학살에 대해 금기시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있다.
일본의 난징 대학살에 대한 반응은 크게 3부류로 나뉜다.
인정파: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학살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하며, 난징 대학살의 실체를 인정하는 세력들. 대표적인 인물이 츠루문과대학교 교수로 지내고 있는 가사하라 도쿠시와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난징 대학살은 역사적 사실이다. 단지,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도파: 이들은 난징 대학살에서 민간인들의 희생은 인정하지만, 전쟁수행 중의 피해일 뿐, 희생자수도 불과 몇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세력들. 대표적인 인물이 리쓰메이칸 대학교 교수로 지내고 있는 기타무리 미노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있다. 하지만, 계획적인 학살이 아닌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정파: 이들은 난징 대학살의 학살자체가 없었음은 물론, 아예 '난징 대학살 자체가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의 날조로 인한 거짓'이라는 이른바 '환상설'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세아대학교 교수로 지내고 있는 히가시나카노 슈도를 비롯한 도쿄도지사를 지내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등 일본 극우세력들이다. 이들은 '난징 대학살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증거 사진들도 죄다 조작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본 극우 세력 난징 대학살 부정파들의 주장
일본 극우세력들 가운데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이른바 '환상설'을 주장하는 부정파들은 오른쪽과 왼쪽 사진들을 예시로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있다.
오른쪽 사진의 설명은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목베는 사진'인 것인데, 일본 극우 부정파들은 '난징이라는 증거가 없다. 먼저,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일본군이 죽이는 장면을 촬영하게 할 이유가없다.'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이들은 '일본군의 경우, 목을 벨 때 발을 뻗는 동작이 다르다.'는 등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 결국은 '중국인이 일본사람 행세를 하는 조작한 사진'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또한, 그 외에 강간 사진 등에 대해서도 부정파들은 온갖 논리를 내놓고 있다. '중국인들이 일본군으로 변장해 조작한 이른바 포르노 사진'이라고 주장하면서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부정을 하고 있다.
이들 일본 극우파들은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사진들이라고 설명된 것들 가운데 단 한 장의 사진도 난징 대학살의 증거사진이 될 수 없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즉, 이들 극우 부정파들은 '꼬투리'잡을 만한 빌미가 한가지 생겼을 때, 이를 최대한 과장한다. 특히 극우, 부정파들의 경우는 이를 빌미로 '난징 대학살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이란 책의 경우, 여기서 책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게 되면 전부가 잘못되었다고 살짝 바꾸려고 하는 등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결국 '증거 사진이 없기 때문에 난징 대학살이란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란 논리적 비약으로 연결되고 있다.
일본 극우, 부정파들은 '난징 대학살은 연합국과 중국이 일본군을 비방하기 위해 정보전, 선전용으로 날조한 것이며, 일본 국민들에게 범죄 의식, 잘못했다는 의식 등을 심어주기 위한 선전용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게 일본을 비방하고 침몰시키기 위한 모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난징 대학살 부정론자들이 주축인 '새역모'단체에서 발행한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에서는 '난징 대학살'이 아닌 '난징 사건'이라 축소하듯이 표현하고 있으며, 교과서에는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라고만 간단하게 정리되어있다. 마치 '난징 대학살이란 것은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라듯이 저술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극우 부정파들의 역사왜곡 의식에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같은 일본의 역사 의식 배후에는 일본 정부가 있으며, 겉과 속이 다른 정책으로 이와 같은 역사 왜곡 등을 부추기고 있다.'라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원인
루스 베네딕트는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이 전시중 보여준 특이성과 잔인성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아니라, 천황에 대해 충성하는 충성심이라 분석했다. 일본 육군은 천황에 대해 봉사하게 돼 있고, 천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목숨,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도 가치 없는 것이라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도덕적 테두리를 벗어나는 범위에서는 아무런 거림낌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한다.
물론, 집단 학살은 서구에도 있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의 경우 독일과 자신을 동일시 했던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인격적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면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 등에서 행한 학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차이이다.
난징 대학살의 원인을 평소에는 명령에 순순히 따라오는 일본인의 오랜 복종의 습성과 강압적인 수단으로 맹종을 요구하는 일본군의 체제가 복합되어 형성된 외형적인 군기가 전쟁 말기의 혼란상황에서 통제 및 감시 체제가 무너지자 필연적으로 함께 허물어진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학살에 대한 책임 회피의 논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아가 확립되지 않아 정신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을 창출할 수 없는 무사상과 무신념의 맹종집단이었다는 것으로, 결국 일본인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자격이나 민주의식이 없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같이 보기
존 라베
장제스
중화민국의 역사
일본제국 육군
조 이사무
일본 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 범죄
마닐라 대학살
간토 대학살
쓰지 마사노부
사쿠라이 마코토
미즈시마 사토루
난징의 진실(일본영화)
일본문화채널 사쿠라
난징 안전지대(난징안전구)
100인 참수 경쟁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마쓰이 이와네
아즈마 시로
숙칭 대학살
100 부대
731 부대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사진 자료
난징 대학살 당시의 모습
난징 대학살 희생자 추모비
난징 대학살 희생자 추모 부조
각주
참고자료 및 참고 문헌
《The Rape of Nanking》(한글명: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 - 아이리스 장
《John Rabe Der gute Deutsche von Nanking》(한글명:존 라베 난징의 굿맨) - 존 라베 저/에르빈 비커르트 편
문화방송 다큐멘터리, 세계를 뒤흔든 순간-난징대학살 편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 (72) 중일 전쟁의 발발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 (73) 난징 대학살
日외무, 1938년 비밀전문서 "난징에서 최소 30만명 살육"
BBC News: Nanjing remembers massacre victims
Online Documentary: The Nanking Atrocities A master's degree thesis that delves into the atrocity
"Denying Genocide: The Evolution of the Denial of the Holocaust and the Nanking Massacre," college research paper by Joseph Chapel, 2004
English translation of a classified Chinese document on the Nanjing Massacre
Japanese Imperialism and the Massacre in Nanjing by Gao Xingzu, Wu Shimin, Hu Yungong, & Cha Ruizhen
Kirk Denton, "Heroic Resistance and Victims of Atrocity: Negotiating the Memory of Japanese Imperialism in Chinese Museums"
The Nanjing Incident: Recent Research and Trends by David Askew in the Electronic Journal of Contemporary Japanese Studies, April 2002
Nanjing Massacre Memorial Hall
'No massacre in Nanking,' Japanese lawmakers say
The Rape of Nanking - Nanjing Massacre -English Language Edition - 1:17:17 - Aug 25, 2006
Rape of Nanking Original reports from The Times
The Rape of Nanking — Nanjing Massacre — English Language Edition. Two hour web documentary.
War and reconciliation: a tale of two countries
"Booknotes" interview with Iris Chang on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January 11, 1998.
외부 링크
문화방송 다큐멘터리, 세계를 뒤흔든 순간-난징대학살 편
독도 수호지기 - 난징 대학살
1937년 12월, 일본군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선간후살, 목 베기 시합...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No more Nanjing(일본의 시민단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NanJing 1937
난징대학살동포기념관
1937년 중국
중화민국의 역사
중일 전쟁
일본의 전쟁 범죄
중국의 반일 감정
난징시의 역사
일본의 학살
집단학살
반중폭력
193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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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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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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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피오네르
### 기사:
피오네르(, )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공산주의 국가의 소년단을 말한다. 피오네르란 러시아어로 「개척자」를 의미한다. 보통 8세에서 19세를 대상으로 하며, 공산당과 콤소몰의 지도를 받는다.
각국의 피오네르
공산주의 선봉대 (중화인민공화국)
호찌민 소년 피오네르 (베트남)
공산주의 국가의 피오네르
에른스트 텔만 피오네르 조직 (Ernst Thälmann Pioneer Organisation, 독일민주공화국)
디미트로프의 9월 피오네르 (Димитровска пионерска организация "Септемврийче, 불가리아)
엔베르 호자의 피오네르 (Pionierët e Enverit, 알바니아)
호세 마르티의 피오네르 (Organización de Pioneros José Martí, 쿠바)
피오니르 (Pionýr, 체코슬로바키아)
같이 보기
콤소몰
외부 링크
Pioneers (Belgium)
Rules of Thälmann Pioneers (GDR)
Young Pioneers (People's Republic of China)
Ho Chi Minh Communist Youth Union (Vietnam)
소련
러시아어 낱말
콤소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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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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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분
### 기사:
분은 다음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 낱말
분(扮)은 분장(扮裝)의 준말이다.
분(憤·忿)은 분기(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의 준말이다.
분(盆)은 화분의 준말이다.
분(粉)은 가루나 분말을 뜻한다.
백분(白粉)은 흰 가루, 특히 얼굴 등에 바르는 흰색 가루 화장품을 뜻한다.
분()은 베트남의 쌀국수이다.
분(糞)은 똥을 고상하게 이르는 말이다.
지명
분군: 미국의 여러 군
분 (콜로라도주)
분 (아이오와주)
분 (미주리주)
분 (네브래스카주)
분 (노스캐롤라이나주)
분 (테네시주)
분 (웨스트버지니아주)
분강
단위
분은 어떤 단위의 1/60을 나타낸다.
분(分)은 1 시간의 1/60 되는 단위이다. 60 초에 해당한다. 기호는 min 또는 m을 쓴다.
분(分)은 각의 1도를 60등분한 단위이다. 60 초에 해당한다. 기호는 프라임 부호(')을 쓴다. 간단히 따옴표(')로 쓰기도 한다.
분(分)은 어떤 단위의 1/10 또는 1/100을 나타낸다. 푼을 보라.
분(分)은 0.1 또는 1/10을 나타내는 한자 숫자이다.
분(分)은 비율에서 1/100을 나타내며, 할(割)의 1/10과 같다.
분(分)은 비율에서 1/10을 나타낸다.
분(分)은 조선에서 1돈의 1/10을 나타내며, 1냥의 1/100과 같다. 1문 또는 1닢이라고도 한다.
분(分)은 무게 1돈의 1/10을 나타낸다.
분(分)은 길이 1치의 1/10을 나타낸다.
인물
분(蚡, ? ~ ?)은 전한 초기의 관료이다.
분(賁, ? ~ ?)은 전한 중기의 관료이다.
에런 분: 미국의 전직 메이저 리그의 3루수이자, 현직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의 감독
대니얼 분: 미국 서부개척자이자 사냥꾼이며 미국 최초의 민중영웅
대니얼 분 (가수): 잉글랜드의 가수 겸 작곡가, 세션 연주자
데비 분: 미국의 가수
마크 분 주니어: 미국의 배우
팻 분: 미국의 팝 가수
대니 분: 프랑스의 배우, 각본가, 영화 감독
조시 분: 미국의 농구 선수
조시 분 (영화 감독): 미국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메건 분: 미국의 배우
분 로건: 미국의 야구 선수
로버트 분: 미국의 배우, 연극 배우, 텔레비전 배우
제시카 분: 미국의 영화배우, 연극 배우, 텔레비전 배우, 성우
쉘리 분: 미국의 배우, 텔레비전 배우, 영화배우
랜디 분: 미국의 배우, 가수, 싱어송라이터, 텔레비전 배우, 작곡가 겸 작사가
가공의 인물
분 칼라일: 미국의 드라마 로스트의 등장인물
같이 보기
푼
퍼센트<|end_of_text|>
| 8.352893 | 1,827.565442 |
25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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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B%82%99%EB%8F%99%EA%B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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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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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서낙동강
### 기사:
서낙동강(西洛東江)은 원래 낙동강 본류였으나,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이 건설된 이후 본류와 분리되어 생기게 된 강이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과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을 연결하는 대저수문에서 시작하여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과 녹산동을 연결하는 녹산수문까지 이어진다. 지류로는 조만강, 지사천, 맥도강, 평강천, 예안천, 신어천, 주중천 등이 있다.
낙동강 권역
부산광역시의 하천
경상남도의 하천
대한민국의 국가하천
서낙동강<|end_of_text|>
| 13.750395 | 511.108167 |
266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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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A5%B4%20%EB%93%9C%20%EB%B0%9C%EB%A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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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 드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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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코르 드 발레
### 기사:
코르 드 발레(프랑스어:corps de ballet)는 발레 가운데에서 주요한 역할을 갖지 않는 군무(郡舞)형식을 담당하는 무용수를 가리킨다. 단독으로는 절대로 추지 않으며 언제나 많은 인원이 어울려 춘다.
코르 드 발레의 발레에서의 중요한 역할은 정경(情景)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예컨대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의 제1막에서 왕자 지크프리트의 성년식(成年式)을 축하하여 마을의 남녀가 춤을 춘다. 또한 그 제2막인 호반의 장면에서 백조들이 떼를 지어 추나, 그것들은 각각 특정한 성격이 부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코르 드 발레의 군무로 전자는 화려한 성년식을 경축하는 무드를 자아내어 그 정경을 만들고 후자는 백조가 사는 호반의 정경을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코르 드 발레에 통제가 없고 함부로 난무(亂舞)할 때는 다음에 나타나는 솔리스트의 춤이 지니는 효과를 감소시킬 위험이 있다.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솔리스트의 춤이므로 그것을 효과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통제가 있는 연출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코르 드 발레는 대형(隊形)을 갖춰 질서 정연한 움직임이 부여되고 그 대형의 위치와 변화에 중점이 두어진다. 바꿔 말하면 코르 드 발레는 솔리스트를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발레는 코르 드 발레의 춤과 솔리스트들의 춤이 번갈아 엇갈리며 구성되는 변화로 이루어진다. 그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번갈아 등장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때로는 솔리스트의 춤의 배후에서 무대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고조시키는 구실을 맡기도 한다. 즉 솔리스트의 배경을 맡는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배경적인 역할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솔리스트의 앞에 나서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처럼 발레에서는 솔리스트의 춤을 중요시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주역을 맡는 제1무용수는 발레의 중심인물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발레<|end_of_text|>
| 16.809164 | 1,718.551844 |
30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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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린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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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가가린 (러시아)
### 기사:
가가린()은 스몰렌스크주에 있는 도시다. 가가린스키 군의 중심지이다. 그자티 강(볼가강의 지류)이 흐른다. 면적은 11,5km2, 인구는 2만7,800명 (2005)이다. 그자티 강에 접해 있고 스몰렌스크에서 북동쪽으로 239km 떨어져 있다. 철도역이 위치해 있다.
역사
1719년에 그자츠크()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1776년에 도시로 승격되었다. 1968년에 그자츠크는 1934년에 가가린스키군의 클루시노에서 태어난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가가린으로 변경되었다.
기후
주목할만한 출신
니콜라이 노스코프 – 러시아의 가수이다
자매 도시
라팅엔
모자이스크
바리사우
Krupki
외부 링크
가가린 시 사이트
스몰렌스크주의 도시<|end_of_text|>
| 18.48682 | 787.605658 |
164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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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C%9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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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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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박희양
### 기사:
박희양(朴熙陽, 1867년 음력 8월 22일~1932년 양력 9월 8일)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역시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박이양의 동생이다. 본관은 반남이다.
가족관계
증조부 : 박종구(朴宗球)
조부 : 박용수(朴容壽)
부 : 박제순(朴齊恂) -- 양부 : 박제성(朴齊性)
생애
1885년 법부 주사를 시작으로 농상공부 주사, 참서관, 서기관과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을 거치는 등 대한제국의 관료로 근무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으며,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경성군인후원회에 기부금 2원을 납부하였고, 1915년 한일 병합 5주년을 기하여 식민통치를 홍보하고자 열린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부회원으로 참가하여 10원을 기부한 일이 있다.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의 반도사편찬사업에 조사주임에 임명되었다. 반도사편찬사업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본래 한 뿌리였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으로 제시된 사업이다. 1920년 유교의 부흥을 내세운 친일 단체로 박이양이 이사로 있던 대동사문회에 평사로 참가하였다.
1921년 중추원 개편 때 주임대우 참의가 되어 1924년까지 재임했다. 중추원에 재직한 총 기간은 약 14년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같이 보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대동사문회
참고자료
각주
1867년 출생
1932년 사망
대한제국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관료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반남 박씨<|end_of_text|>
| 11.449665 | 1,660.251023 |
5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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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C%9E%89%2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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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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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보잉 757
### 기사:
보잉 757()은 미국 보잉에서 3발기인 보잉 727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협동체형 쌍발 제트 여객기이다. 보잉 727에 비해 엔진의 개수가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연비가 향상되었으나 보잉 727이 이/착륙하는 지방 공항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게 엔진 출력을 높였기 때문에 타 쌍발기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비가 좋지 않으며, 좌석 폭이 좁은 협동체(1열 통로) 항공기라 여행자들에게 선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단종되었다. 현재는 아이슬란드 항공, 델타 항공, UPS 항공 등이 운행 중이다.
주로 델타 항공을 비롯한 미국 항공사들 위주로 많이 팔렸다. 미국 내 국내선 등 중거리 노선에 투입하기 위해 많이 도입하였으며, 항속거리를 늘려서 대륙 횡단이 가능한 기종과 화물기 기종도 존재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적사들은 이 기종을 운용하지 않았다. 아시아나항공이 보잉 757-200을 주문하였으나, 1993년에 여객기가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주문을 취소하고 다른 항공기로 대체하였다. 동북아시아권에서는 중국의 몇몇 항공사들이 이 기종을 운용했다.
모델
보잉 757-100
보잉 727-200을 대체하기 위해 기존 모델보다 길이가 짧은 150석 표준형으로 설계했으나, 항공사로부터 수주를 얻지 못해 개발이 취소되었다.
보잉 757-200
보잉 757 기종의 최초로 개발된 표준형으로, 913대를 생산했다. 2005년 4월 26일 상하이 항공에 인도된 것을 마지막으로 단종되었다.
보잉 757-200M
757-200의 여객기와 화물기 혼합 유형으로 문 배치는 표준형 757-200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맨 앞부분과 주익 전방 유형 A문 사이에 757-200PF뿐만 아니라 화물 문을 설치 하지만 이 화물 문에 창이 있다. 객실은 150명의 승객을 태운 상태에서 3개의 화물 컨테이너 탑재가 가능하다. 유일하게 네팔 항공만 이 기종을 도입했다. 현재는 모두 퇴역했다.
보잉 757-200PF
757-200 화물 전용기 유형으로 1985년에 UPS 항공에서 최초로 주문했다. PF는 "Package Freighter" 줄인 말로 객실 창문이 존재하지 않고 동체 전방 왼쪽 측면에 화물 문을 설치 했으며 다른 조종사의 출입에 작은 문이 있다.
보잉 757-300
757-200의 동체를 7.11m 연장한 기체로 협동체 쌍발기 중 제일 규모가 크다. 꼬리부분에 테일 스키드가 장착되어 있으며, 무게가 증가함에 따라 주 날개와 기어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부에 한해 동체 구조가 강화되어 있다. 총 55대가 생산되었으며, 보잉 757-200과 함께 단종되었다.
보유 항공사
여객 항공사
화물 항공사
이전 보유 항공사
같이 보기
에어버스 A310
투폴레프 Tu-204
에어버스 A321
보잉 737-800, 900ER
외부 링크
보잉 757 - Boeing.com
여객기
미국의 민간 항공기
보잉 항공기
1982년 첫 비행한 항공기
쌍발 제트기
저익기<|end_of_text|>
| 13.886791 | 2,436.248637 |
15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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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C%EB%A6%AC%EC%B2%A0%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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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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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심리철학
### 기사:
심리철학 또는 정신 철학()은 마음 또는 정신 현상, 정신적 기능 내지는 성질, 의식, 또 그것들과 물리적인 몸과의 관계를 다루는 철학의 한 분과이다. '심신 문제' 또는 '몸과 마음의 문제', 즉 몸과 마음의 관계가 심리철학의 가장 중요한 이슈이다.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고, 경험할 수 없는 정신(mentality)이 육체와 상호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우리는 늘 일상에서 이런 인과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물을 마시고 싶다는 의지(정신상태) 때문에 시원한 물을 마시러 냉장고에 가며 어떤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떠올릴 때(정신) 눈물을 흘리는(육체적 상태) 경우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심리(정신)철학은 이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본디 심리철학은 언어철학에서 그 흐름이 이어진 것이다. 또한 현대 인식론도 결국에는 정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기에 최근 현대영미철학의 흐름은 심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 번역이 "심리철학"으로 되어버린 탓에, 흔히 심리학(Psychology)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심리철학과 심리학은 엄연히 다른 학문이며, 특히나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과 별도로 심리학 철학(Philosophy of Psychology)가 별도로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철학"이라는 표현이 언급되기도 한다.
심신문제의 역사
이원론(Dualism)과 일원론(Monism)이 이에 대한 가장 주요한 해결방안이다. 이원론은 몸과 마음이 개념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심장에 우리의 마음(소위말하는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의 이야기에 불과하고, 우리는 현재 모든 정신작용이 우리의 두뇌(brain)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의 거칠고 피상적인 논의에 거쳤던 심신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대표적 인물은 17세기의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소위말하는 이원론자(dualist)로서,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 그중에서도 실체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선 실체(substance)라는 개념을 상정하는데, 이 실체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개개의 인간은 모두 하나의 실체이고, 지나가는 개 한마리도 실체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실체이다. 문제는 인간은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데카르트는 인간은 육체라는 실체와 정신이라는 실체 두 실체가 함께 공존하는 독특한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 이 실체는 속성들을 가질 수 있는데, 육체는 연장(extension)하는 속성을 가지고(그 만큼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 정신은 사유하는 속성을 가진다. 그도 그럴것이, 육체와 정신은 그 성격이 너무나도 다른 것이기에 데카르트는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은 두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라고 해버리면 문제가 끝날 것 같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어떻게 이질적인 두 실체가 인과관계를 맺느냐는 것이다. 그 때 데카르트는 다소 어설픈 답으로 '송과선'이라는 곳에서 두 실체가 만나 상호작용한다는 답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발전한 의학적 지식으로도 당장 받아들이기 힘든것임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이론들을 살펴보자면, 우선 스피노자를 들 수 있다. 그는 어쩌면, 현대 심리철학의 대세인 속성이원론에 근접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라이프니츠이다. 보통 그를 떠올릴 때 흔히 단자(Monad)론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흔히 무창 단자(Windowless Monads)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단자로, 단자들 끼리 인과(Causation)도 없고,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최소단위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운동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에 대해 그는 "예정조화설"(Preestablished harmony)을 제시한다. 이 예정조화설은 단자들끼리의 상관관계를 신이 일정한 질서로 이미 마련해놓았다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더 이상 확장된 논의가 곤란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 다음으로 이성론(합리론, 지성론)에서 떠올려 볼 수 있는 사람은 말브랑슈이다. 그는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고 불리는 설명을 제안했다.
현대는 실체이원론이 아닌 속성이원론(Property Dualism)으로 출발한다. 인간이라는 한 실체 안에 두 속성, 육체(phisical)적인 속성과 정신적(mental) 속성 두 속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속성이원론자들에게 있어서도 육체와 정신간의 인과관계는 골치거리이다(김재권의 <심리철학>에서는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을 버리고 속성이원론으로 간 자들이 배신의 대가로 데카르트의 악령에 의해 괴롭힘당한다는 표현을 쓴다)
일원론(Monism)으로는 과학적 방법이 전제될 수 있는 동일론(Identity Theory)의 맥락과 이중 관점 이론(Double-aspect theory 양면론)이 잘 알려져있다.
심성에 대한 이론들
심성 또는 심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심리철학적 입장들이 있다.
행동주의
행동주의는 심적 표현을 공적으로 관찰가능하고 간주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조건과 사실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논리적 행동주의는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행동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만으로 정의되거나 적어도 번역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아픔'은 눈물을 흘리거나 아픈 곳을 만지는 행동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더라도 눈물을 흘리거나 아픈 곳을 만지지 않을 수 있고 이러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마음을 행동으로 번역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존재론적 행동주의는 심리적인 것 중에서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조금 다르게 심리학이 과학이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나타난 자료에만 기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의식상태와 같은 것은 객관적 관찰이 불가능하므로 과학적으로 다룰 수 없다. 좀 더 강한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심리학의 이론이 생물의 행동을 설명할 때 충동이나 기억 같은 관찰할 수 없는 심적 상태에 의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방법론적 행동주의는 20세기 초 심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리주의
물리주의는 마음은 곧 두뇌의 상태라는 입장이다.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곧 두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마음과 두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일한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을수있다. 개별자 동일론은 심적 속성을 갖는 사건들은 물리적 속성도 갖는다는 이론이고, 유형동일론은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고통을 느꼈을 때 어떤 신경세포 C가 자극되었다"고만 한다면 개별자 동일론이지만, "고통은 곧 신경세포 C의 자극"이라고 한다면 유형동일론이다. 유형동일론은 환원적 물리주의다.
유형동일론에 대한 한 가지 반박은 다수실현가능성(multiply realizability)이다. 다수실현가능성은 같은 심적 속성이라도 여러 가지의 물리적 속성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고통은 신경세포 C의 자극과 같다"라고 한다면, 고통을 느끼는 모든 동물은 신경세포 C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생물종에 따라 두뇌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유형동일론은 서로 다른 종의 동물에 대해 같은 종류의 심적 속성을 부여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동일론의 물리주의는 마음은 곧 두뇌의 상태라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정신의 이면인 그러한 신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수의 심리학자나 과학자들이 지지하는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고있다.
기능주의
기능주의는 심적 속성을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하는 대신 생물의 기능으로 정의한다. 생물이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상처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동물마다 뇌의 구조는 다르더라도 상처를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기능주의적 입장에서는 그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 기능주의의 논리를 연장한다면 생물이 아닌 기계라고 하더라도 생물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면 그 기계도 마음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기능주의에는 인과론적 기능주의와 기계 기능주의가 있다. 인과론적 기능주의는 심적 사건을 자극과 반응을 인과적으로 매개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발가락을 찧었을 때(자극), 그는 고통을 느끼고(심적 사건), 비명을 지른다(반응)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자극과 반응에 의해 심적 사건을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인과론적 기능주의는 심적 사건을 정의하기 위해 그 사건을 포함하여 자극과 반응을 설명하는 심리 이론을 필요로 한다. 만약 서로 다른 동물에 같은 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면 두 동물은 같은 심적 속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고통 이론이 적용되는 모든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
기계 기능주의는 마음을 일종의 튜링 기계로 보는 것이다. 즉 하나의 생물이나 시스템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한 하나의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기계 기능주의는 인과론적 기능주의에서 심리 이론을 튜링 기계로 보는 것이다.
비환원적 물리주의
다수실현가능성에 대한 물리주의적 반론 하나는 심적 속성을 여러 가지 물리적 속성의 집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통은 신경세포 C, D, E, …의 자극과 같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심적 속성에 대응하는 여러 물리적 속성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없다면, 그 물리적 속성의 집합을 다룰 수 있는 단일한 과학 이론을 세우기가 불가능하다.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을 연결짓는 법칙이 없다면, 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 즉 심적 인과도 불가능하다. 심적 인과가 가능하려면 물리적 현상에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심적 현상은 물리적 현상이기도 해야 한다. 도널드 데이빗슨의 이 이론은 심물 법칙을 요구하지 않는 일원론이기 때문에 무법칙적 일원론이라고 한다.
대표적 학자
존 설
도널드 데이비드슨
데이비드 차머스
힐러리 퍼트넘
존 스마트
김재권의 환원적 물리주의
원래 김재권 교수는 무어가 윤리학에서 제시했던 수반(Supervenience)개념을 심리철학으로 끌고와 속성이원론 이론을 정립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입장을 바꿔, 대다수 분석철학자(Analytic Philosopher)들이 그렇듯 물리주의(Physicalism, Materialism(유물론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넓게는 혼용되어 쓰일 수 있다))를 일관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속성(Mental Property)가 물리적 속성(Physical Property)에 환원(reduction)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환원적 물리주의 이론을 주장한다. 그가 보통 수반개념을 이용한 속성이원론을 공격할 때의 주된 논점 두 가지는 바로 1) 인과적 배제의 원리와 2)인과적 과잉 결정 상황이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하나의 결과는 하나의 원인에서 도출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상황을 살펴보자. 한 사람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동시에 그에게 총을 발사했고, 두 총알이 정확히 동시에 그의 심장을 관통하였다고 하자. 그럴 경우 두 총알 모두 그의 사망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이다. 두 총알 중에 어느것이 진짜 사망 원인인지를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신인과에서도 이런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한다. 물리적 사건 b가 결과로서 발생했다고 했을 때, 이 물리적 사건 b는 동일한 물리적 사건인 사건 a에 의해서 야기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신적 사건 a 에 의해서도 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인과적 과잉 결정의 상태일 때, 물리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경험적으로 관찰이 힘든 정신적인 영역보다 물리적인 영역이 존재론적 우선권을 선취(Preemption)하므로, 결과가 물리적 사건이라면 원인도 물리적 사건으로 서로가 닫혀있다고 할 수 있다. (인과적 배제의 원리) 그렇다면 결국 정신적 속성은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원인도 될 수 없고, 뭐라 말하기 힘든 곤란한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김재권은 정신적속성을 물리적 속성에 환원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각주
[참고]Biological Psychology , James W. Kalat ,Wadsworth, Cengage Learning, 2009
외부 참조
율곡사상으로 본 이원과 일원
의식 (심리철학)
창발
인식론 개념
형이상학 개념
감각질<|end_of_text|>
| 14.585227 | 2,744.329346 |
123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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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C%A0%9C%EB%A6%AC%20%EC%B6%95%EA%B5%AC%20%EA%B5%AD%EA%B0%80%EB%8C%80%ED%91%9C%ED%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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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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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알제리 축구 국가대표팀
### 기사:
알제리 축구 국가대표팀(, )은 알제리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알제리 축구 연맹에서 운영하고 있다. '사막의 여우', '사막의 전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프리카 축구 강호이며 홈 구장으로는 1962년 7월 5일 경기장, 오란 올림픽 스타디움, 무스타파 차케르 스타디움, 스타드 압델카데르 칼레프를 사용하고 있다.
개요
알제리는 개인 돌파와 드리블에 강점을 지니고 체격 조건이 우수한 팀으로 거친 압박을 잘 사용하는 팀이며 전통적 라이벌은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이며 특히 이집트와의 2010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 타이브레이크에서 1-0 승리를 거둔 후 발생한 사건 때문에 이집트와의 라이벌 관계가 더욱 심화되었다.
국제 대회 경력
FIFA 월드컵
1982년 FIFA 월드컵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4번의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라 이 가운데 2014년 대회에서 사상 첫 16강에 이름을 올렸으며 1982년 대회 당시 UEFA 유로 1980 우승국인 독일을 2-1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는 등 2승 1패의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발생한 승부조작 사건 일명 히혼의 수치로 인해 억울하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던 쓰라린 과거도 갖고 있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96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통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후 현재까지 총 18번의 본선에 올라 자국에서 열린 1990년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고 그로부터 29년 후인 2019년 대회에서 통산 2번째 아프리카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자국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만 참가할 수 있는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본선에 2011년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4위에 입상하였으며 자국에서 열리는 2022년 대회에서 11년만에 2번째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본선에 올랐다.
하계 올림픽
성인대표팀 시절에는 1980년 대회에 유일하게 참가하여 이 대회에서 8강에 올랐고 U-23 대표팀으로는 2016년 대회에 출전하였으나 1무 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FIFA 아랍컵
1988년 대회를 통해 FIFA 아랍컵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참가한 이전 2번의 대회에서는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나 9년만에 재개된 2021년 대회에서 튀니지를 따돌리고 사상 첫 FIFA 아랍컵 정상 탈환에 성공했다.
기타 국제 대회 경력
지중해 경기 대회에는 10번 출전하여 자국에서 열린 1975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993년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1979년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으며 팬아랍 게임에는 1985년 대회에 유일하게 참가하여 이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최근 경기 일정 및 결과
최근 경기 결과와 일정
국제대회 기록
FIFA 월드컵
하계 올림픽
지역대회 기록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FIFA 아랍컵
지중해 게임
판 아랍 게임
선수단
최근 선수 명단
일자: 2022년 11월 16일, 19일
종류: 와 과의 친선 경기를 위한 알제리 선수 명단
출장 수와 골 수 기준: 2022년 11월 19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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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선수
소피안 페굴리
안타르 야히아
자멜 압둔
나빌 길라스
메딜 라셀
이샤크 벨포딜
푸에드 카디르
리야드 마레즈
이슬람 슬리마니
같이 보기
히혼의 수치
각주
알제리의 축구
축구 국가대표팀
아프리카의 축구 국가대표팀<|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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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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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8%A4%EC%84%B8%ED%8B%B0%EC%95%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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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오세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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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남오세티야
### 기사:
남오세티야(, , , ) 또는 츠힌발리 지역(, )은 조지아에 위치한 사실상의 독립 상태로 통치되는 지역이자 미승인 국가로 수도는 츠힌발리이다. 정식 국호는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야국(, )이다.
압하지야와 함께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러시아와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나우루, 시리아 등 소수만이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조지아는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조지아의 법률에서는 남오세티야를 압하지야와 함께 "피점령 지역"으로 분류한다. 미국, 캐나다, 유럽 연합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들, 유엔을 비롯한 대다수의 국제 기구에서는 남오세티야를 조지아의 일부로 여긴다.
주민
주민의 상당수는 오세트인 (89.1%)이며, 그 밖에도 조지아인 (8.9%), 러시아인 (1.0%), 우크라이나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있다. 인구는 2012년 자료로 약 5만 2천 명이다.
남오세티야지역에 살던 조지아인들이 2008년 조지아-남오세티야 전쟁으로 인해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난을 가거나 사망하여 2007년에 남오세티야 인구의 25.0%를 차지했던 조지아인들은 2012년 8.9%로 줄어들었다.
주요 언어는 오세트어이지만 러시아어, 조지아어도 사용된다. 현재 러시아의 북오세티야 공화국과 같이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역사
러시아 혁명 이후에 오세티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조지아에 편입된 남오세티야는 1922년 4월 20일을 기해 남오세티야 자치주가 되었고 러시아에 편입된 북오세티야는 1924년을 기해 북오세티야 자치주(1936년에 북오세티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편됨)가 되었다.
1980년대 말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조지아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남오세티야에는 민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1989년에는 남오세티야 자치주가 조지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남오세티야 자치주 소비에트 의회는 남오세티야 자치주를 자치 공화국으로 격상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그루지야 최고 소비에트 의회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990년 12월 11일에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의회가 남오세티야 자치주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남오세티야 자치주 소비에트 의회는 이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1991년 1월 5일부터 1992년 6월 24일까지 일어난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결과로 인해 남오세티야는 사실상 조지아로부터 독립한 상태가 되었지만 조지아 통제 지역과 남오세티야 통제 지역으로 분할하게 된다.
2008년 8월 7일부터 8월 12일까지 일어난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남오세티야는 압하지야-러시아 연합군과 함께 조지아 군대를 격파하면서 조지아 통제 지역을 완전히 탈환했다. 2008년 8월 25일에는 러시아 의회가 압하지야와 더불어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러시아는 2008년 8월 26일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공식 성명을 통해 남오세티야를 독립 국가로 인정했고, 남오세티야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는 2008년 9월 2일에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와 군사 협정을 체결했다. 2008년 10월 8일에 러시아군은 남오세티야 부근에서 최종 철군 작업을 시작했다. 남오세티야는 2009년 5월 31일에 총선이 시작되었으며 6월 1일에 개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유럽 연합은 남오세티야의 총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2015년 3월 18일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남오세티야의 레오니트 티빌로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남오세티야 간의 '동맹과 통합'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남오세티야 군대를 러시아 군대에 통합시키는 내용, 남오세티야 세관을 러시아 세관에 통합시키는 내용, 러시아 정부가 남오세티야 출신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와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지아 외무부는 이 조약이 러시아가 남오세티야를 실제로 병합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비판했고 미국, 유럽 연합도 조지아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7년 4월 9일에 대통령 선거와 함께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남오세티야의 국호를 '남오세티야 공화국-알라니아국'으로 변경하는 안건이 가결되었다.
행정구역
외교
독립 승인 국가
유엔 회원국
유엔 비회원국
독립 승인 철회 국가
각주
같이 보기
북오세티야 공화국 (북오세티야 공화국)
외부 링크
남오세티야 대통령 홈페이지
미승인 국가
러시아어권
조지아의 분리주의
오세티야
남캅카스
러시아 민족통일주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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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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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B%A5%98%EC%9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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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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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비류왕
### 기사:
비류왕(比流王, ? ~ 344년 10월, 재위: 304년 10월 ~ 344년 10월)은 백제의 제11대 국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다른 줄에 의하면 그는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8대 고이왕의 손자 분서왕이 죽자 그의 아들 계(契)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하여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는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이 너그러웠다고 한다.
생애
가계 배경 의혹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다른 줄에는 그가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고도 한다. 비류왕과 비류왕의 형 사반왕 사이에는 7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형제 여부에 관하여 이견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아버지로 지목하는 구수왕과 형으로 지목한 사반왕이 죽은 뒤 70년 만에 즉위하여 40년을 통치한다.
치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312년 음력 2월 신하를 보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피고, 홀아비, 과부, 고아, 그리고 자식 없이 외롭게 지내는 노인들을 도와주었다. 그중에서도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곡식을 3섬씩 나누어주었다. 병관좌평(兵官佐平)에 해구(解仇)를 등용하였고 321년 정월에는 왕의 서제(庶弟) 우복(優福)을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으나 우복이 327년 북한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켜 왕은 이를 토벌하였다. 337년 봄 음력 2월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왔으며 극진히 대접하였다. 344년 겨울 음력 10월 비류왕이 붕어하자 계(契)가 왕위를 물려받아 12대 계왕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비류왕의 즉위는 백제 왕실이 초고왕계로 변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비류왕 사후 계왕이 즉위하면서 잠시 고이왕계로 복귀하였으나 계왕이 2년만에 사망하고 근초고왕이 즉위하면서 초고왕계 왕실이 확립되었다고 본다.
자연재해 및 천문 현상 기록
비류왕 대에는 자연재해와 천문 현상 기록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308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 일식이 발생했다.
316년 봄: 가뭄이 발생했다.
321년 가을 음력 7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327년 가을 음력 7월: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331년 봄, 여름: 가뭄이 크게 들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음력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33년 여름 음력 5월: 별이 떨어졌다.
335년 겨울 음력 10월 초하루 을미: 일식이 발생했다.
336년 봄 정월 신사: 혜성(彗星)이 별자리 규(奎)에 나타났다.
가계
부왕 또는 선조 : 구수 - 이설 있음.
형 또는 선조 : 사반
이복 동생 : 부여우복
왕비 : 왕비 해씨(解氏)
장남 : ?
후궁 : 왕비 진씨(眞氏)
차남 : 근초고왕
비류왕이 등장한 작품
《근초고왕》 (KBS, 2011년, 배우:윤승원)
참고
기림 이사금 (298년 ~ 310년)
흘해 이사금 (310년 ~ 356년)
미천왕 (300년 ~ 331년)
고국원왕 (331년 ~ 371년)
거질미왕 (291년~346년)
오진 천황 (270년~310년)
닌토쿠 천황 (310년~399년)
각주
2세기 출생
생년 미상
344년 사망
백제 국왕
4세기 한국 사람
3세기 한국 사람
부여씨<|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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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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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B2%A0%EB%A5%B4%EB%89%B4%20%28%ED%94%84%EB%A1%9C%EB%B1%85%EC%8A%A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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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뉴 (프로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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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오베르뉴 (프로뱅스)
### 기사:
오베르뉴(, )는 현재의 프랑스 중부에 있던 나라로, 후에 프랑스의 프로뱅스로 합쳐졌다. 오베르뉴의 전통적인 수도는 리옹이다. 현대 프랑스의 레지옹 오베르뉴는 역사적으로 오베르뉴의 일부가 아닌 지역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주도는 클레르몽페랑이다. 오베르뉴어가 사용된다.
역사
오베르뉴라는 이름은 갈리아의 부족 아르베르니족에서 따온 것이며, 아르베르니의 수도 게르고비아는 현재의 클레르몽페랑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7세기에 들어 오베르뉴는 프랑크족과 아퀴타니아인들 사이의 분쟁지역이 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후에 아키텐 공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오베르뉴 백작들은 서서히 자치권을 늘려갔다. 10세기에 들어 오베르뉴는 푸아티에와 툴루즈 백작령 사이의 분쟁지역이 되었다.
오베르뉴는 중세를 지나며 넷으로 갈라졌는데:
오베르뉴 (980년경)
클레르몽 주교령 (980년경)
오베르뉴 도팽령 (1155년; 1302년 공인)
오베르뉴 공국 (1360년)
오베르뉴는 1531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넘어갔고, 곧 왕실령에 통합되었다.
외부 링크
오베르뉴
프랑스의 프로뱅스<|end_of_text|>
| 12.561954 | 1,019.861134 |
46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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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93%B0%EC%B9%B4%EC%9D%B4%EC%B9%98%EC%8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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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쓰카이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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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하쓰카이치시
### 기사:
하쓰카이치시()는 히로시마현 서부에 있는 시이다.
사에키 군()에 소속했던 하쓰카이치 정()이 히로시마시의 위성 도시로서 인구가 급증, 1988년 4월 1일 시로 승격했다. 2003년 3월 1일에는 인접하는 사에키 군 사에키 정()과 요시와 촌()을 편입하여 면적이 약 8배로 늘어났다. 특히 요시와 촌은 2000년 현재의 인구가 853명인 과소 지역이었으며, 재정적인 어려움과 과소 대책을 위해 하쓰카이치 시로의 편입을 선택했다.
이어서 2005년 11월 3일에는 사에키 군의 미야지마 정()와 오노 정()을 편입하여 인구가 10만명을 넘었다. 미야지마 정을 편입함으로써 일본 삼경()의 하나인 "아키노 미야지마"()와 세계유산에 지정된 이쓰쿠시마 신사()를 행정 구역으로 포함하게 되었는데, 미야지마 정 역시 인구 과소와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주민 투표를 통해 히쓰카이치 시로 편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지리
히로시마 현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니시추고쿠 산지의 산등성이로 시마네현·야마구치현 모두와 경계를 접하며 남쪽은 세토 내해(히로시마 만)의 해안선이 이어진다. 연안부는 도시화가 진행되는 한편, 내륙의 농촌 지대는 과소화의 진행이 현저하다.
인접한 자치체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시(사에키구)
오타케시
야마가타군 아키오타정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
시마네현
마스다시
역사
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에 의해 사에키 군 하쓰카이치 정이 성립하였다.
1956년 9월 30일 : 하쓰카이치 정·히라라 촌·하라 촌·미야우치 촌·지고젠 촌이 합병해 새로운 하쓰카이치 정이 성립하였다.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히로시마 시에 인접하는 이쓰카이치 정과 서쪽으로 이웃하는 하쓰카이치 정은 함께 히로시마 시의 주택 지역으로서 급속히 발전을 이루었다. 이쓰카이치 정은 히로시마시 와의 합병을 선택하고 1985년 3월, 구 정역 전역을 구역으로 하는 "히로시마 시 사에키구"가 성립했다. 당초에는 하쓰카이치 정도 사에키 구에 편입한다는 안이 있었지만 하쓰카이치 정은 단독 시 승격을 택해 사라지게 되었다.
1988년 4월 1일 : 하쓰카이치 정이 시로 승격해 하쓰카이치 시가 성립하였다.
2003년 3월 1일 : 사에키 정·요시와 촌을 편입하였다.
2005년 11월 3일 : 오노 정·미야지마 정을 편입하였다.
교통
철도
서일본 여객철도 산요 본선
히로시마 전철 미야지마 선
히로시마 관광 개발 미야지마 로프웨이
도로
주고쿠 자동차도
산요 자동차도
국도 2호선
국도 186호선
인구
기후
외부 링크
하쓰카이치 시 공식 홈페이지
히로시마현의 도시<|end_of_text|>
| 8.4599 | 1,966.645702 |
204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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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C%98%A4%20%28%ED%94%84%EB%A1%9C%EA%B7%B8%EB%9E%98%EB%B0%8D%20%EC%96%B8%EC%96%B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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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오 (프로그래밍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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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다오 (프로그래밍 언어)
### 기사:
다오()는 객체 지향 스크립트 언어이다. 복잡합 자료 구조를 지원하는 동적 타이핑 변수(dynamically typed variables)를 지원한다. 정규 표현식 매칭 같은 텍스트 처리 기능이 들어가 있다. 복소수, 다차원 배열 및 그것에 맞는 연산 등 여러 다양한 자료형을 언어 자체에서 지원한다. 다오는 또한 자체적으로 멀티 스레드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다오 인터프린터는 가볍고 효율적인 가상 레지스터(register) 머신 (Dao VM)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 C로 구현되어 있다. 간단하고 평이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C 혹은 C++ 과 같이 확장되어 사용될 수 있다.
다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정적 그리고 동적 형체계(type system)을 섞어서 지원. 자동 형 유추 기능.
유연한 매크로 체계. 새로운 문법 정의 가능.
동시적이며(Concurrent) 분산된(distributed) 프로그래밍. 메시지 전달 인터페이스 제공.
다오 프로그램에 C 코드를 직접 포함(embedding) 가능
기초
Hello World
Hello world 프로그램을 다오를 써서 작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stdio.print ( "Hello world!" )
여기서 stdio는 입출력을 처리하는 표준 라이브러리이다. 다오에는 내장 함수(built-in function)이 없다. 모든 함수는 어떤 라이브러리의 일부이다. 예를 들면, stdio, stdlib, math, coroutine, reflect, mpi (message passing interface), network, 그리고 thread 같은 것들이다.
프로그래머는 stdlib.listmath 루틴을 사용하여 라이브러리 내의 메소드들을 출력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math의 메소드들은 다음과 같이 하면 출력된다.
stdlib.listmath ( math )
자료형
다오의 변수는 암묵적으로(implicitly) 선언된다. 어떤 익스프레션의 결과를 대입하면 선언된다.
a_number = 123
a_string = "abc"
a_list = { 1, 2, 3 }
a_hash = { "CD"=>123, "AB"=>456 }
a_vector = [ 1, 2, 3 ]
a_matrix = [ 1, 2; 3, 4 ]
기본적으로, 변수는 변수를 선언하는 데 쓰인 익스프레션에서 다오 인터프린터가 유추해낸 형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타이핑을 암묵적 타이핑(implicit typing)이라고 부른다. 프로그래머는 변수의 형을 명시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파스칼 (프로그래밍 언어) 비슷한 문법을 쓰면 된다.
var_typed : type
var_typed : type = value
type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장 형(type)들이 들어갈 수 있다. int, float, double, string, complex, list, hash, array, buffer, routine 같은 것들이다.
혹은 이들의 조합 중 일부가 들어갈 수 있다.
예:
a_list2 : list<list<float> >
a_list3 : list<list<string> > = {}
a_hash2 : hash<string,int> = { "ABC"=>123 }
type 자리에는 다오 클래스 이름이 들어갈 수도 있으며, 사용자가 정의한 C 형(type)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다. 이른바 "무엇이든 형"(any type)에는 any 키워드를 쓴다. , 정의 안 된 형(undefined types)에는 ?를 쓴다.
형이 결정된(typed) 변수는 다오 인터프리터 측에서 정적 형 검사(static checking)을 해준다.
제어
If-Elif-Else:
a = math.rand();
if( a > 0.75 ){
a -= 0.75
}elif( a > 0.5 ){
a -= 0.5
}else{
a -= 0.25
}
While:
i = 0;
while( i < 10 ) i++
For:
for( i=0; i<10; i++ ) stdio.println( i )
for( i=0 : 9 ) stdio.println( i )
for( i=0 : 2 : 9 ) stdio.println( i )
For-in:
a_list = { 1, 2, 3 }
for( it in a_list ) stdio.println( it )
a_list2 = { "a", "b", "c" }
for( it in a_list; it2 in a_list2 ) stdio.println( it, it2 )
For-in 구문은 해시(hash)에도 쓸 수 있다.
Switch
a = "abc"
switch( a ){
case 1 : a += 123;
case "abc" : a += "456"
default : stdio.println( "default case" )
}
함수
다오에서는 기본적인 함수를 "루틴"(routine)이라고 부른다. 기본적인 함수는 다음과 같은 모양새를 갖는다.
routine foo( a, b : string, c = 123 ) => int
{
return 456;
}
다오는 일차 함수(first-order functions)를 지원한다. 보통의 함수 정의와 정의 방식은 똑같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갖는다.
함수 이름을 꼭 써 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생성한 함수는 꼭 변수에 할당하여야 한다.
기본값(the default value) 식(expressions)은 상수 식(constant expressions)일 필요가 없다. 런타임에 함수가 생성될 때, 계산된다.
함수 바디(body)는 그 함수를 생성해주는 "상위" 함수에서 정의하고 있는 변수들을 포함할 수 있다.
a = "ABC";
rout = routine( x, y : string, z = a+a ){
a += "_abc";
stdio.println( "lambda ", a )
stdio.println( "lambda ", y )
stdio.println( "lambda ", z )
}
rout( 1, "XXX" );
클래스
class MyNumber( value = 0 )
{
private
my Value = 0; # default value is zero
Value = value;
public
routine setValue( value : int ){ Value = value }
routine getValue(){ return Value }
}
매크로
프로그래머는 다오 매크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syntax{
source_syntax_pattern
}as{
target_syntax_pattern
}
"while-do-end"를 {} 괄호 없이 쓰면 다음과 같다.
syntax{
while $EXP do \[ $BL \] end
}as{
while( $EXP ){ \[ $BL \] }
}
동시적이며(Concurrent) 분산된(distributed) 프로그래밍
비동기 함수 호출
다오에서 멀티 스레드 프로그램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마도 비동기 함수 호출(AFC)일 것이다. 비동기 함수 호출은 동기 함수 호출과 매우 비슷하다. 끝에 키워드 async를 붙이면 된다.
myfunc( myparams ) async;
myobj.mymeth( myparams ) async;
모든 함수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동기 방식 호출이 가능하다.
보통, AFC는 상호 다른 네이티브 스레드 상에서 실행된다. 스레드 풀 중에서 사용 가능한 아이들(idle) 스레드일 수 있고, 그때그때 생성된 새 스레드 일 수도 있다.
외부 링크
Dao Language
Daoscript
스크립트 언어
가상 머신<|end_of_text|>
| 10.682017 | 2,425.407227 |
39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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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6%B5%ED%82%B9%EB%A7%8C%20%EC%82%A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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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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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통킹만 사건
### 기사:
통킹만 사건(, , )은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 해군 구축함인 USS 매독스함을 선제 공격하여 양국 함대가 교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 의회는 대통령에게 무력행사를 자유롭게 실행할 권한을 부여하는 통킹만 결의를 가결하였고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다.
한편, 1971년 다니엘 엘즈버그는 미 국방부 펜타곤 보고서를 공개하며, 북베트남 측의 두 번째 공격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미국에서 베트남전 개입을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폭로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또한 1995년 회고록에서 유사한 내용을 고백하였다.
결과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부터 1차 공격 이후 2차 공격이 있었다고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발표하였고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의결하였으며, 1965년 2월부터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북폭에 나섰고, 지상군도 파견되었다.
후일 북베트남 당국은 공격한 이유를 '당시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 함선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미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전사자는 없었다. 이후 다음날인 8월 3일 매독스함이 재차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당하는, 일명 제2통킹만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교전은 후술할 자작극 폭로로 인해 진위 논란이 일었다.
논란
본래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즈에 통킹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쓴 실 니항 기자가 7,000 페이지에 달하는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입수하여 분석한 결과, 통킹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뉴욕 타임즈는 2005년에도 로버트 한 요크 NSA 역사 연구관의 말을 인용하여 NSA의 중간간부들이 감청내용을 왜곡했고 정책결정자들은 허위보고에 근거해 폭격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한편, 두 번째 공격이 의도적인 왜곡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통신 감청기관인 NSA(군함의 후방에서 북베트남의 무선통신을 감청하는 기관)가, 소나(어뢰공격 탐지기구) 담당 병사가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착각하여 어뢰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하자(실제로 당시 함정의 승무원들은 공격이 있었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취합했던 정보들을 잘못 해석하여 생긴 오류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같이 보기
베트남 전쟁
외부 링크
통킹만 결의서 (원문)
펜타곤 보고서
각주
1964년 분쟁
1964년 베트남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의 전투와 작전
해전
미국-베트남 관계
1964년 8월
1964년 군사사
통킹만
1964년 북베트남
미국의 역사 (1964-1980)<|end_of_text|>
| 13.949886 | 2,572.220032 |
11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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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91%EC%A0%84%20%EA%B0%80%EB%8F%99%EC%9C%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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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가동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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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작전 가동율
### 기사:
작전 가동율은 항공기 가동율에 관련된 용어로서 임무 가능(MC, Mission Capable)과 임무 불가(NMC, Non Mission Capable)로 구분된다. 임무 가능은 부여된 임무를 완전히 수행할 수 있는 항공기 상태로서 보유한 항공기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시간율로 표현되며, 임무 불가는 보급 불가 또는 정비 불량으로 인하여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로 구분한다.
항공기<|end_of_text|>
| 14.810669 | 398.911472 |
129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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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B%83%EB%B0%B1%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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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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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아웃백 (동음이의)
### 기사:
아웃백(Outback)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내륙부의 미개척지를 의미한다. 그 외에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아웃백은 음악 밴드의 이름이다.
스바루 아웃백은 승용차의 이름이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 미국에 본거지를 둔 스테이크 외식 업체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출연하는 가공의 로봇 이름으로 아웃백이 있다.
같이 보기<|end_of_text|>
| 15.966714 | 393.411872 |
27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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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83%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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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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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사생
### 기사:
사생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사생(舍生)은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을 말한다.
사생(寫生)은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사생(四生)은 불교 용어로, 난생(卵生)태생(胎生)습생(濕生)화생(化生)을 말한다.
사생(私生)은 법률상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 아이가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사생아(私生兒)는 사통(私通)하여 낳은 아이라는 뜻으로, 법률상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혼인 외의 출생자를 폄하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사생팬(私生-)은 유명 연예인을 과도하게 쫓아다니는 극성팬의 다른 말이다.
같이 보기<|end_of_text|>
| 14.507467 | 604.473961 |
166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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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6%B4%EB%8F%84%EB%B9%84%20%28%EA%B8%B0%EC%97%8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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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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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어도비 (기업)
### 기사:
어도비(Adobe)는 사진, 동영상, 이미지와 그래픽 디자인 등의 미디어에 관한 작업을 목적으로 하는 소프트웨어인(대표적으로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라이트룸, 이펙트, 프리미어 프로 등의)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PDF와 호환될 수 있게 하여 문서 작업과 변환을 지원하는 Document 클라우드,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을 통해 사업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Experience 클라우드를 제공하는 기업으로서, 이 3개의 사업부문들과 함께 '디지털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이다. 2007년 12월부터 샨타누 나라옌이 CEO를 맡고 있다.
포스트스크립트 페이지 기술 언어를 개발하고 판매하기 위해 제록스 PARC를 떠난 존 워녹과 찰스 게시키는 1982년 12월에 어도비를 설립하였다. 1985년에 애플 컴퓨터는 포스트스크립트를 레이저라이터 프린터에 사용하기 위해 라이선스하였으며, 이로써 탁상 출판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어도비"(Adobe)라는 회사 이름은 회사 창립자 존 워녹의 집 뒤에 흐르던 어도비 개천(Adobe Creek)에서 따온 것이다. 어도비는 이전 경쟁사인 매크로미디어를 2005년 12월에 인수한 바 있다.
2007년 1월쯤, 어도비 시스템즈는 6,677 명을 고용하고 있고, 그 가운데 40 퍼센트가 새네제이에서 일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어도비의 직원은 전 세계적으로 26,000명이 넘는다. 어도비는 또한 워싱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오타와, 캐나다, 미니애폴리스, 미네소타, 뉴튼 (메사추세츠주), 샌 루이스 오비스포, 독일의 함부르크, 인도의 노이다와 벵갈루루에서 주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인도의 노이다(Noida)와 방갈로르(Bangalore)에서도 주요 개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
회사는 존 워녹의 차고에서 시작되었다. 회사 이름인 어도비는 워녹의 집 뒤를 흐르는 하천인 캘리포니아주 로스앨토스에 있는 어도비 크릭에서 유래되었다. 그 개울은 그곳에서 발견된 점토의 종류(어도비는 머드브릭의 스페인어 단어임)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으며, 이는 회사 소프트웨어의 창의적인 성격을 암시한다. 어도비의 기업 로고는 양식화된 "A"를 특징으로 하며 존 워녹의 아내인 그래픽 디자이너 마바 워녹이 디자인했다. 2020년에는 로고를 단색, 올레드 로고로 업데이트하는 등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업데이트했다.
스티브 잡스는 1982년에 회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워녹과 게슈케는 이를 거부했다. 투자자들은 잡스와 뭔가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촉구했고, 그래서 그들은 잡스와 회사 지분 19% 상당의 주식을 그에게 팔기로 동의했다. 잡스는 당시 회사 가치의 5배에 달하는 금액과 포스트스크립트에 대한 5년 라이센스 비용을 미리 지불했다. 이러한 구매 및 승격을 통해 어도비는 실리콘 밸리 역사상 첫 해에 수익을 올린 최초의 회사가 되었다.
워녹과 게슈케는 복사 서비스 사업과 사무용 인쇄를 위한 턴키 시스템을 포함한 다양한 사업 옵션을 고려했다. 그런 다음 전문 인쇄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어도비 포스트스크립트 페이지 설명 언어를 만들었다.
포스트스크립트는 여러 언어의 문자 형식을 설명하는 알고리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 인쇄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국제 표준이었다. 어도비는 1988년에 한자 프린터 제품을 추가했다. 워녹과 게슈케도 조판 제조업체와 연결하여 포스트스크립트의 신뢰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컴퓨그래픽으로 작업할 수 없었지만 리노타입과 협력하여 (리노트론 100을 통해) 헬베티카 및 타임스 로만 글꼴에 대한 라이센스를 얻었다. 1987년까지 포스트스크립트는 400개 이상의 타사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19개 프린터 회사와의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 업계 표준 프린터 언어가 되었다.
워녹은 이 언어를 사무실 인쇄에 그래픽 아트 표준을 적용하는 능력에서 "확장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포스트스크립트 이후 어도비의 첫 번째 제품은 타입 1이라는 독점 형식으로 출시된 디지털 글꼴이었으며 빌 팩스턴이 스탠퍼드를 떠난 후 작업했다. 이후 애플은 글꼴 윤곽선에 의해 생성된 픽셀 패턴의 완전한 확장성과 정밀한 제어를 제공하는 경쟁 표준인 트루타입을 개발하고 이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라이선스했다.
1980년대 중반, 어도비는 애플 매킨토시용 벡터 기반 드로잉 프로그램인 일러스트레이터를 통해 소비자 소프트웨어 시장에 진출했다. 회사 내부 글꼴 개발 소프트웨어에서 성장한 일러스트레이터는 포스트스크립트 지원 레이저 프린터의 대중화에 도움을 주었다.
어도비는 1986년 8월에 나스닥 컴포지트 지수에 편입되었다. 어도비의 수익은 1999년 약 10억 달러에서 2012년 40억 달러로 증가했다. 어도비의 회계 연도는 12월부터 11월까지이다. 예를 들어, 2020년 회계연도는 2020년 11월 27일에 종료되었다.
1989년에 어도비는 포토샵이라는 매킨토시용 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인 자사의 주력 제품이 될 제품을 출시했다. 안정적이고 모든 기능을 갖춘 포토샵 1.0은 어도비에 의해 효과적으로 판매되었으며 곧 시장을 장악했다.
1993년에 어도비는 PDF, 어도비 어크로뱃 및 리더 소프트웨어를 출시했다. PDF는 현재 국제 표준인 ISO 32000-1:2008이다.
1991년 12월 어도비는 어도비 프리미어를 출시했으며 어도비는 2003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로 브랜드를 변경했다. 1992년 어도비는 OCR 시스템즈를 인수했다. 1994년 어도비는 알두스 코퍼레이션을 인수하고 이후 제품 라인에 페이지메이커 및 애프터 이펙트를 추가했다. 또한 TIFF 파일 형식을 제어한다. 같은 해 어도비는 레이저툴스 및 컴퓨션을 인수했다. 1995년 어도비는 프레임 테크놀로지를 인수한 후 장문 문서 DTP 응용 프로그램인 프레임메이커를 제품 라인에 추가했다. 1996년 어도비는 아레스 소프트웨어를 인수했다. 2002년 어도비는 캐나다 회사인 Accelio(젯폼)를 인수했다.
2003년 5월 어도비는 Syntrillium Software로부터 오디오 편집 및 멀티트랙 녹음 소프트웨어인 쿨 에딧 프로를 1,650만 달러에 구입했을 뿐만 아니라 "Loopology"라는 대형 루프 라이브러리도 구입했다. 그런 다음 어도비는 쿨 에딧 프로의 이름을 "어도비 오디션"으로 바꾸고 크리에이티브 제품군에 포함시켰다.
2005년 12월 3일 어도비는 콜드퓨전, 컨트리뷰트, 캡티베이트, 브리즈(어도비 커넥트로 브랜드 변경), 디렉터, 드림위버, 파이어웍스, 플래시, 플래시플레이어, 플렉스를 추가하여 약 34억 달러 상당의 주식 교환을 통해 주요 경쟁사인 매크로미디어를 인수했다. 프리핸드, 홈사이트, JRun, 프레젠터 및 오소웨어를 어도비 제품 라인으로 확장한다.
어도비는 2008년 4월 어도비 미디어 플레이어를 출시했다. 4월 27일 어도비는 드림위버를 위해 기존 HTML/웹 개발 소프트웨어인 고라이브의 개발 및 판매를 중단했다. 어도비는 고라이브 사용자에게 드림위버 할인을 제공하고 온라인 튜토리얼 및 마이그레이션 지원을 통해 여전히 고라이브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원한다. 6월 1일, 어도비는 공동 작업을 위한 일련의 웹 애플리케이션인 Acrobat.com을 출시했다. 디자인, 웹, 프로덕션 프리미엄 및 마스터 콜렉션이 포함된 크리에이티브 스위트 4는 2008년 10월에 약 US$1,700~$2,500의 가격으로 또는 개별 애플리케이션별로 6가지 구성으로 출시되었다. 윈도우 버전의 포토샵에는 64비트 처리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2008년 12월 3일, 어도비는 취약한 경제 환경을 이유로 직원 600명(전 세계 직원의 8%)을 해고했다.
2009년 9월 15일, 어도비 시스템즈는 온라인 마케팅 및 웹 분석 회사인 옴니투어를 18억 달러에 인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거래는 2009년 10월 23일에 완료되었다. 이전 옴니투어 제품은 어도비 마케팅 클라우드에 통합되었다.
2009년 11월 10일에 회사는 680명의 직원을 추가로 해고했다.
어도비의 2010년은 아이폰, 아이패드 및 기타 제품에서 어도비 플래시를 지원하지 않는 애플과의 계속적인 논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전 애플 CEO 스티브 잡스는 플래시가 충분히 안정적이거나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한 반면 어도비 경영진은 애플이 iOS 플랫폼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4월 스티브 잡스는 Thoughts on Flash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게시하여 플래시와 HTML 5의 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2010년 7월 어도비는 CQ 제품 라인(WCM, DAM, SOCO 및 모바일)을 통합하는 데이 소프트웨어를 인수했다.
2011년 1월 어도비는 DemDex의 고객 최적화 소프트웨어를 온라인 마케팅 제품군에 추가하려는 의도로 DemDex사를 인수했다. 포토샵 월드 2011에서 어도비는 새로운 모바일 사진 서비스를 공개했다. Carousel은 포토샵 라이트룸 기술을 사용하여 사용자가 모든 플랫폼에서 이미지를 조정하고 미세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폰, 아이패드 및 맥용 새로운 응용 프로그램이다. Carousel을 사용하면 사용자가 자동으로 사진을 동기화, 공유 및 탐색할 수 있다. 이 서비스는 나중에 "어도비 레벨"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1년 10월 어도비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 프레임워크인 폰갭 제조사인 니토비 소프트웨어를 인수했다. 인수의 일환으로 폰갭의 소스 코드가 아파치 재단에 제출되어 아파치 코도바가 되었다.
2011년 11월 어도비는 버전 11.1 이후 모바일 장치용 플래시 개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모바일 장치용 HTML 5에 중점을 둘 것이다. 2011년 12월 어도비는 비상장 이피션트 프론티어를 인수하기로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2012년 12월, 어도비는 유타주 레히에 26,000m2 규모의 새로운 기업 캠퍼스를 열었다.
2013년 어도비는 심각한 보안 침해를 겪었다. 회사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 중 상당 부분이 도난당하여 온라인에 게시되었으며 어도비 고객의 1억 5천만 개 이상의 기록이 즉시 다운로드 가능해졌다. 2012년에는 어도비 해킹으로 인해 약 4천만 세트의 결제 카드 정보가 손상되었다.
회사가 직원 보상을 억압했다고 주장하는 집단소송은 2013년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에서 어도비를 비롯한 실리콘밸리 소재 3개 회사를 상대로 제기됐다. 2014년 5월에는 어도비, 애플, 구글 등 4개 회사가 공개됐다. 인텔은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4개 회사의 직원 64,000명인 원고와 총 3억 2,45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2018년 3월 어도비 서밋에서 회사와 엔비디아는 업계를 주도하는 AI와 심오한 학습 혁신을 신속하게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주요 협회를 공개했다. 수년간의 협력을 통해 조직은 엔비디아 GPU를 위한 어도비 센세이 AI 및 기계 학습 구조를 간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공동 노력을 통해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및 익스피리언스 클라우드 고객과 엔지니어를 위한 새로운 센세이 기반 서비스의 실행을 선보이고 향상시키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될 것이다.
어도비와 엔비디아는 어도비의 창의적이고 컴퓨터화된 다양한 항목에 대한 GPU 가속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10년 넘게 협력해 왔다. 여기에는 어도비 캐릭터 애니메이터 CC의 자동 립싱크, 포토샵 CC의 얼굴 인식 편집과 같은 센세이 기반 기능과 어도비 스톡 및 라이트룸의 사진 조사와 같은 클라우드 기반 AI/ML 항목 및 기능, 어도비 익스피리언스 슈퍼바이저의 CC 및 자동 레이블 지정이 통합되어 있다.
2018년 5월 어도비는 사모펀드 Permira로부터 전자상거래 서비스 제공업체인 마젠토 커머스를 16억 8천만 달러에 인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거래는 분석, 광고, 마케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익스피리언스 클라우드 비즈니스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 거래는 2018년 6월 19일에 종료되었다.
2018년 9월 어도비는 마케팅 자동화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케토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18년 10월, 어도비는 공식적으로 사명을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어도비로 변경했다.
2019년 1월 어도비는 3D 텍스처링 회사인 Allegorithmic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20년에는 연례 어도비 서밋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 행사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으며 총 동영상 조회수는 2,100만 회 이상, 행사 웹사이트 방문자 수는 22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
거대 소프트웨어 회사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자사의 디지털 광고 판매 플랫폼에서 정치 광고 기능을 금지했다.
2020년 11월 9일, 어도비는 마케팅 협업 소프트웨어 제공업체인 워크프론트를 인수하기 위해 15억 달러를 지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수는 2020년 12월 초에 완료되었다.
2021년 8월 19일, 어도비는 선도적인 클라우드 기반 비디오 협업 플랫폼인 Frame.io를 인수하기로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거래 규모는 12억7500만 달러에 달하며 어도비의 2021회계연도 4분기에 마감됐다.
2021년 9월 15일, 어도비는 올해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결제 서비스를 추가하여 플랫폼의 판매자가 신용카드 및 페이팔을 포함한 결제를 수락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2022년 9월 어도비는 소프트웨어 디자인 스타트업 피그마를 2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피그마의 클라우드 기반 디자인 소프트웨어는 어도비 XD와 직접 경쟁한다. 이 거래는 규제 조사에 직면해 있다. 2023년 2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유럽연합 합병 규정(EUMR)에 따라 인수를 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제품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제품군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제품군(어도비 시스템즈가 개발한 그래픽 디자인, 영상 편집, 웹 개발 응용 프로그램들이 한데 묶은 제품군)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어도비 포토샵, 어도비 인디자인,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어도비 파이어워크, 어도비 사운드부스, 어도비 오디션
서버 소프트웨어
어도비 콜드퓨전, 어도비 컨텐트 서버, 어도비 라이브사이클
포맷
PDF(Portable Document Format), 포스트스크립트, 액션스크립트, 어도비 플래시(SWF), 플래시 비디오 (FLV)
웹 호스트 서비스
어도비 쿨러, 포토샵 익스프레스, Acrobat.com
웹디자인 프로그램
어도비 드림위버, 어도비 컨트리뷰트, 어도비 플래시
비디오 편집과 시각효과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 어도비 애프터 이펙트
이런닝 소프트웨어
어도비 캡티베이트
재정 정보
어도비 시스템즈는 1986년에 나스닥에 들어갔다. 어도비의 2006년 소득은 25,750,000,000 달러였다. 2007년 2월에 어도비의 시가 자본은 거의 230,000,000,000 달러에 육박하였다.
매출
반응
2000년부터 포춘(Fortune)은 어도비를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21년에는 어도비가 16위에 올랐다. 글래스도어는 어도비를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선정했다. 2021년 10월 패스트 컴퍼니(Fast Company)는 브랜즈 댓 매터(Brands That Matter) 목록에 어도비를 포함했다. 2008년 10월, 어도비 시스템스 캐나다는 미디어콥 캐나다(Mediacorp Canada Inc.)에 의해 "캐나다 상위 100대 고용주"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매클린(Maclean)의 뉴스 매거진에 소개되었다.
어도비는 2017년 정부 데이터 요청 처리와 관련하여 전자 프런티어 재단으로부터 별 5개 등급을 받았다.
2022년에 어도비는 DEI(Disability Equality Index)에서 장애인 포용을 위해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각주
같이 보기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제품군
오픈타입
PDF
포스트스크립트
어도비 콜드퓨전
외부 링크
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업
1982년 설립된 기업
산호세 (캘리포니아주)의 기업
미국의 다국적 기업<|end_of_text|>
| 14.55006 | 2,741.857422 |
147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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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LOSE%20YOUR%20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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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E YOU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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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LOSE YOUR MIND
### 기사:
〈LOSE YOUR MIND〉는 가수 보아의 일본 24번째 싱글이다. 팬클럽 메일을 통해 2007년 10월 하순에 싱글 발매 정보와 곡의 장르 등 대략적인 정보가 발표되었고, 11월에 들어서 싱글 제목, 자켓 사진 등이 공식 홈 페이지에 게재되었다. 11월 19일 밤, 마이니치 방송의 프로그램 《MUSIC EDGE + Osaka Style》에 보아가 직접 출연하였고, 이날 방송에서 〈LOSE YOUR MIND〉의 뮤직 비디오 일부가 소개되기도 했다. 뮤직 비디오 전체가 공개된 건 11월 22일 밤이었다.
싱글의 타이틀 곡 〈LOSE YOUR MIND〉는 〈〉 이후 2년 만의 겨울에 발매하는 댄스곡이다.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보컬·기타리스트인 Yutaka Furukawa가 게스트 기타리스트로 참여하여 곡의 펑키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곡의 분위기에 맞게 뮤직 비디오에는 격렬한 안무가 등장한다. 패션쇼의 런웨이를 연상하게 하는 무대를 배경으로, 의자를 이용하여 춤을 추거나 남자 댄서의 무릎에 앉는 등의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커플링 곡 〈Smile again〉은 보아 본인이 작사를 맡은 서정적인 발라드 곡이다. 2007년 7월부터 테레비아사히의 《토요 와이드 극장》의 테마곡으로 선정되어 방송되기 시작했다. 《토요 와이드 극장》은 30년의 역사를 가진 장수 드라마로, 이전에 테마곡을 맡았던 가수에는 ZARD, 마쓰다 세이코 등이 있다.
2008년 2월 27일 발매된 6번째 정규 앨범 《THE FACE》에 이 싱글에 수록된 2곡 모두 수록되었다.
트랙 리스트
2007년 싱글
보아의 노래
2007년 노래<|end_of_text|>
| 14.108912 | 1,323.403358 |
19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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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B%AC%B8%ED%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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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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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송문화
### 기사:
송문화(宋文華, 일본식 이름: 山本文華야마모토 분카, 1886년 12월 ~ ?)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생애
한성부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지사까지 지낸 고위 관료 송문헌과는 형제 사이이다.
관립한성사범학교를 1910년에 졸업하고, 하동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임명되어 교직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성주공립보통학교 훈도, 1914년 이천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지냈고, 1920년에 경기도 학무과 서기로 관직에 들어섰다.
1924년 조선총독부 군수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경기도 지역에서 강화군, 광주군, 양주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다. 1931년 훈6등 서보장을 받는 등 1935년을 기준으로 훈6등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평안북도 참여관을 거쳐 1941년에는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한국 전쟁 중인 1950년에 실종되어 종적을 알 수 없다.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과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의 세 분야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도 중추원과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이 보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송문헌
각주
외부 링크
1886년 출생
몰년 미상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일제강점기의 관료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서울특별시 출신
납북자<|end_of_text|>
| 11.416489 | 1,344.152344 |
11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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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B%AF%B8%EB%94%94%20%EC%97%94%ED%84%B0%ED%85%8C%EC%9D%B8%EB%A8%BC%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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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디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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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레미디 엔터테인먼트
### 기사:
레미디 엔터테인먼트()는 1995년에 설립되어 핀란드 에스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컴퓨터·비디오 게임 개발사이다. 잠입수사에 뛰어든 뉴욕 경찰 맥스 페인의 이야기를 그린 맥스 페인을 개발한 게임 회사로 알려져 있다. 영화와 같은 진행과 줄거리, 영화와 같은 진행과 줄거리, 그리고 블릿 타임의 요소를 포함한 필름 누아르 스타일의 3인칭 슈팅 게임인 맥스 페인 시리즈를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한 엔진 Max-FX는 벤치마크 프로그램 전문 회사인 퓨처마크사의 벤치마크 프로그램인 3D마크에 채용되기도 하였다.
제작한 게임
데스 랠리 - PC (1996년)
맥스 페인 - PC, 맥 OS, 플레이스테이션 2, 엑스박스, 게임보이 어드밴스 (2001년)
맥스 페인 2: 더 폴 오브 맥스 페인 - PC, 플레이스테이션 2, 엑스박스 (2003년)
앨런 웨이크 - 엑스박스 360 (2010년)
퀀텀 브레이크 - 엑스박스 원, PC(윈도우10)(스팀) (2016년)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1995년 설립된 기업
핀란드의 비디오 게임 회사
비디오 게임 개발사
1995년 설립된 기업<|end_of_text|>
| 12.565145 | 938.973807 |
28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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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91%90%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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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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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정두원
### 기사:
정두원(鄭斗源, 1581년 ~ ?)은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호정(壺亭),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생애
1616년(광해군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23년(인조 1년)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관향사(管餉使)로 모문룡에게 군량을 조달했다. 정묘호란 때 전향사(轉餉使)가 되어 임진강의 군량 수송을 맡았다.
1630년(인조 8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鍾) 등 서양 기계와 《천문서》,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서적을 가지고 왔다. 정두원은 이탈리아 사람 로드리게스로부터 한역(漢譯) 과학서적과 기구 등을 가져왔다.
각주
조선의 문신
광주 정씨<|end_of_text|>
| 14.725623 | 852.59972 |
245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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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B%A6%AC%EC%9E%AC%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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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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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만리재로
### 기사:
만리재로(萬里재路, Mallijae-ro)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255-31에서 중구 만리동1가 50을 잇는 도로로, 총 길이 2.2 km의 왕복 6차선 도로이다. 이 도로는 조선 세종 때의 문신 최만리(崔萬里)가 지금의 만리재에 살았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도로명으로 삼은 것이다.
역사
1972년 11월 26일 :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 도로를 만리로(萬里路)로 명명
1984년 11월 7일 : 도로명을 만리로에서 만리재길로 변경
2010년 4월 22일 : 도로명을 만리재길에서 만리재로로 변경
경유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 신공덕동)
용산구 (서계동)
중구 (만리동2가 - 만리동1가)
노선
부속도로
●: 전 구간 해당
▲: 일부 구간 해당
✖: 해당 없음
각주
외부 링크
(서울 중구)
(서울 용산구)
(서울 마포구)
서울특별시의 도로
서울 마포구의 교통
서울 용산구의 교통
서울 중구의 교통<|end_of_text|>
| 9.60394 | 789.498522 |
98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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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D%99%94%20%ED%8F%89%EA%B7%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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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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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조화 평균
### 기사:
수학에서 조화 평균(調和平均)은 주어진 수들의 역수의 산술 평균의 역수를 말한다. 평균적인 변화율을 구할 때에 주로 사용된다. 실수 a1, ..., an이 주어졌을 때, 조화 평균 H는
로 주어진다.
예
경우에 따라서 조화 평균이 정확한 평균치를 돌려준다. 예를 들어, 전체 거리의 절반을 40km/h의 속도로 달리고, 남은 절반을 60km/h로 달렸다면, 평균 속력은 40과 60의 조화 평균인 48km/h가 된다. 이동하는데 전체 거리를 48 km/h의 속력으로 달린 경우와 같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만약 전체 "시간"의 절반씩을 달렸다면, 평균 속력은 산술 평균인 50km/h가 된다.)
두 수의 조화 평균
두 수가 주어졌을 때, 두 수의 조화 평균은 다음 식으로 간단히 정리된다.
이때, 산술 평균
과 기하 평균
에 대해 조화 평균은
의 관계식이 성립한다.
평균<|end_of_text|>
| 14.026526 | 742.107007 |
6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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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D%8B%B0%EC%8A%A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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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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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발티스크
### 기사:
발티스크(, , , 1725년 - 1946년까지는 필라우())는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의 도시이다. 인구는 32,697명(2010년)이다.
발트해의 비스툴라 만에 접해 있다. 1945년까지는 독일 동프로이센의 도시 '필라우'였으며, 잠란트 군(郡: Landkreis Samland)에 속해 있었다.
역사
본래 프로이센인의 마을이었다. 어원(語源)이 된 pils는 고대 프로이센어로 "항구"를 의미했다. 1510년 9월 10일에 불어닥친 거대한 폭풍우는 이 마을의 앞에 항해가 가능한 석호(潟湖)를 만들어주었다. 이로부터 필라우는 프로이센 공국의 중요한 항구로 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기에 도시는 상당히 확장되었다. 등대와 석조 교회가 창건되었고, 표트르 대제(大帝)도 세 번이나 필라우를 방문했다. 러시아령이 된 지금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등대 곁에 세워져 있다. 필라우는 1725년에 도시가 되었고, 시청이 건설되었다. 이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때에 파괴되었다.
7년 전쟁 중에 러시아군이 도시를 점령해 작은 러시아 정교(正敎) 교회를 세우기도 했으며, 1807년 6월에 나폴레옹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기도 했다. 1901년 11월 15일 필라우와 쾨니히스베르크가 운하로 연결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필라우는 U보트 훈련기지의 소재지였다.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에 육박해오자, 45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필라우 항구를 거쳐 서부와 중부 독일로 피난하였다. 필라우는 1945년 4월 25일 소련군이 완전히 장악하였다. 남아 있는 독일인 주민들도 추방되었다.
1946년에 '발티스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952년부터 러시아 해군(발트 함대)이 주둔하고 있다. 그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시기에는 폐쇄된 도시로 남아있었다.
기후
자매 도시
넵테유간스크
칼스크로나
엘블롱크
니사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칼리닌그라드주의 도시
발트해의 항구 도시
독일-소련 관계<|end_of_text|>
| 14.529091 | 1,795.698626 |
23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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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88%20%EC%9E%A5%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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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장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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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금 장종
### 기사:
금 장종 완안경(金 章宗 完顔璟, 1168년 8월 31일(음력 7월 27일) ~ 1208년 12월 29일(음력 11월 20일))은 금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 1189년 ~ 1208년). 여진 이름은 마달갈(麻達葛). 시호는 헌천광운인문의무신성영효황제(憲天光運仁文義武神聖英孝皇帝). 제5대 황제인 세종의 적손자. 아버지는 세종의 아들로 황태자인 완안윤공(完顔允恭). 후에 제8대 황제가 된 선종은 서형(庶兄)에 해당된다.
생애
1168년, 그는 완안윤공(完顔允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 세종의 황태자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손자였던 그가 조부의 지명을 받아 황태손이 되었다. 1189년, 조부 세종의 사후에 황위를 이어명창의 치라 불리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 장종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금 장종 완안경의 신하였으며, 금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화되었다고 본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면 권력을 확고부동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저하였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문부대신)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1208년 붕어하였는데 향년 41세였다. 6명의 왕자가 요절하여 후사가 없어 숙부 완안윤제(금 소왕)가 즉위하였다.
가족관계
조부모와 부모
조부 : 세종(世宗) 인효황제(仁孝皇帝) 완안 옹(完顔 雍)
조모 : 명덕황후(明德皇后) 오림답씨(烏林答氏)
부친 : 현종(顯宗) 광효황제(光孝皇帝) 완안 윤공(完顔 允恭)
모친 : 효의황후(孝懿皇后) 도단씨(徒單氏)
황후
후궁
황자
황녀
기년
각주
1168년 출생
1208년 사망
금나라의 황제
금나라의 상서우승상
12세기 중국 사람
13세기 중국 사람
칭기즈 칸
12세기 중국의 군주
13세기 중국의 군주<|end_of_text|>
| 15.953643 | 2,143.737874 |
16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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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A%B3%B5%EC%9C%84%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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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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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인공위성
### 기사:
인공위성(人工衛星) 또는 아티피셜 새틀라이트()은 로켓을 사용하여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려져 주로 지구 둘레의 원 또는 타원 궤도를 위성처럼 비행하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체이다.
인공위성이란 인공적으로 행성 주위를 회전하도록 만든 물체들을 말한다. 비행하는 궤도의 고도에 따라 크게 정지위성과 이동위성으로 나뉘고, 사용 목적에 따라 통신위성, 방송위성, 기상위성, 과학위성, 항해위성, 지구관측위성, 기술개발위성, 군사위성 등으로 구분된다. 엄밀히 말하면 궤도 비행을 하는 스페이스 캡슐, 우주 왕복선, 우주 정거장도 인공위성에 해당하고, 지구로 떨어지지 않고 궤도를 돌고 있는 다 소진된 로켓 추진장치나 빈 연료탱크 따위도 인공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비행하는 궤도의 해수면에 따라 정지위성(geostationary satellite)과 이동위성(orbiting satellite)으로 나눈다. 용도에 따라 과학위성, 통신위성, 군사위성, 기상위성 등으로 분류하며, 궤도에 따라 저궤도 위성, 극궤도 위성, 정지 궤도 위성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정지궤도위성을 중심으로 정지궤도위성보다 낮은 궤도로 지구주위를 비행하는 인공위성과 높은 궤도로 지구주위를 비행하는 인공위성이 있다. 정지궤도위성은 적도 상공 약 36,000km의 정지궤도를 비행하는 위성이고, 정지궤도 이외의 궤도를 비행하는 것은 이동위성이다. 이동 위성은 대부분 정지궤도위성보다 낮은 궤도를 비행하는 저궤도위성이지만 우주 탐사 위성과 같이 정지궤도위성보다 높은 궤도를 비행하는 것도 있다. 사용 목적에 따라 통신위성, 방송위성, 기상위성, 과학위성, 항행위성, 지구관측위성, 기술개발위성, 군사위성 등으로 분류된다. 정지궤도위성은 지구의 자전주기와 같아서 지표면에서 보면 위성이 상공의 한 지점에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위성이다.
로켓(발사체)에 의해 대기권 밖의 궤도까지 올라간 인공위성이 계속 공전하기 위해서는 수평방향으로, 초속 7.9km 이상의 속도가 필요하다. 인공위성은 지구 밖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지구의 중력 때문에 결국 지구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며, 지구가 당기는 인력과 회전에 의한 원심력이 평형을 이루어 '타원궤도'로 지구를 공전하게 된다. 그런데 속도를 더 크게 해서 어떤 한계를 넘으면 떨어져 나갔던 인공위성은 다시는 지구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지구의 인력을 벗어나기 위한 속도를 '탈출속도'라 하며, 11.3km/sec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인공위성이 도는 궤도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지구의 인력이 약해지므로, 도는 데 필요한 속도는 느려도 된다. 그 대신 인공위성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필요한 시간(주기)은 보다 길어진다. 인공위성의 높이가 3만 6천km에 이르면, 지구 주위를 도는 인공위성의 주기는 24시간이 되어 지구의 자전 주기와 같아진다. 그러므로 인공위성을 적도 위에서 높이 3만 6천km의 궤도로 올리면, 위성은 지구와 함께 돌게 되고 마치 머리 위에 멈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위성을 '정지위성'이라 한다.
인공위성은 크게 '유인위성'과 '무인위성'으로 나눌 수 있다. 무인위성은 과학위성ㆍ실용위성ㆍ군사위성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과학위성'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공간의 관측과 지구의 여러 가지 일을 조사하기 위한 위성이다. '실용위성'은 땅 위에서의 인류 생활에 직접 이용하기 위하여 쏘아 올리는 위성으로 일기예보에 이용하는 기상위성, 통신을 위한 통신위성, 배ㆍ비행기에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는 항해위성,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측지위성, 자원을 조사하는 자원위성 따위가 있다. 군사위성은 기능에 따라 첩보위성(정찰위성), 조기경보위성, 군사통신위성, 함정의 전천후 운항을 지원하는 군사항법위성 등으로 분류된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은 1957년 10월 4일에 발사한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은 1992년 8월 11일에 발사한 우리별 1호이다.
현재 50개국 이상이 인공위성을 운용하고 있지만, 인공위성 발사는 10개국에서만 이루어졌다. 수백개의 인공위성이 현재 작동중이지만, 수천개의 폐기된 인공위성과 그 조각들이 지구궤도 상에 존재한다. 지구 이외에 달이나 금성 주위를 공전하는 인공위성도 존재한다.
인공위성의 궤도
인공위성의 궤도는 보통 타원이다. 또 정지형(靜止型) 위성 이외에서는 궤도면이 적도면(赤道面)과 어떤 경사를 가지며 궤도경사각으로 그 경사를 나타낸다. 이 경사각은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로켓 발사장의 위치 및 발사조건에 따라서 결정된다. 보통의 위성은 지구 자전에 따른 접선속도(接線速度)가 로켓의 비행속도에 가중하도록 진동(眞東) 방향으로 향해서 발사된다. 적도상에 있어서의 자전속도는 초속 약 465m로, 위도가 높아지면서 감소하고 극(極)에서는 0이 된다. 예를 들면, 대략 위치 북위 30°에서 진동으로 발사한 경우, 지구 자전속도에 의한 이득은 초속 약 400m가 된다. 진동으로 발사된 로켓은 항상 지구의 중심으로 끌리므로 점차 남하 진로를 진행하여 적도를 가로질러 남위 약 30°까지 남하하면 이번에는 북위 30°까지 북상한다. 즉, 적도에 대하여 경사각 30°의 궤도를 잡는다.
자전속도에 의한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또 로켓의 힘에 여유가 있다면 어느 방향으로 발사하는 것도 가능하며, 임의의 경사각을 가진 궤도에도 발사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단식(多段式) 로켓을 사용하여 순차적으로 이탈시키면서 가게 되므로 그것들을 낙하시키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도 발사방향은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그 때문에 진동으로 발사하여 초기적인 궤도에 진입시키고 나서 궤도면이나 고도 등을 변경시키는, 이른바 궤도변환 조작을 실시하는 일이 많다. 복잡한 궤도변환의 한 예로는 정지형 궤도에의 변환이다. 정지형 궤도는 지구가 자전하는 각속도(角速度)와 같은 각속도로 적도 상공의 원 또는 그것에 가까운 타원궤도를 주회하게 되므로 이 궤도를 동쪽으로 주회하는 인공위성은 그 상공에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이 궤도속도는 초속 약 3.08km이며, 필요한 반지름은 지구 반지름의 약 6.6배인 4만 2188km가 되며, 고도는 적도 상공 3만 5810km이다.
이러한 궤도에 위성을 단번에 들여보내는 것은 로켓의 에너지를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리하지 못하다. 그래서 먼저 위성을 발사기점의 위도에 대응한 경사각을 이루는 장원궤도에 발사한 다음에 위성에 조립되어 들어 있는 원지점모터(apogee motor)라고 하는 로켓엔진을 원지점 고도에서 작동시켜 궤도면 및 고도를 바꾼다. 이런 경우 추진력이 작용하는 방향을 바르게 조정하기 위해 위성의 자세를 정확하게 제어해야 하며, 애포지모터의 작동위치나 작동시간 등 일련의 조작을 정밀하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정지형 통신위성인 경우, 초기중량(初期重量)의 약 반을 애포지모터가 차지하며, 다시 자세제어 및 이후의 궤도수정에 필요한 추진제(推進劑)를 상당히 적재해야 한다. 정지형과 비슷한 것으로 준정지형(準靜止型)이라고 하는 궤도가 있다. 이것은 정지형 궤도의 인공위성인 경우, 지구의 광역(廣域)을 내려다볼 수 있는 반면에, 극에 가까운 고위도 지대는 포괄할 수 없으므로, 약간 경사각을 가지게 하여 적도 상공을 축으로 하여 마치 8자형으로 남북을 이동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궤도의 위성은 북반구에 12시간, 남반구에 12시간의 비율로 원형운동을 하게 된다. 이것과는 다른 준정지형 궤도에는 정지형과 마찬가지로 적도 상공에 있지만 고도를 정지형보다 약 2,000km 낮은 곳에 발사하는 방법이 있다. 이 궤도에 들어간 위성은 매일 약 30°씩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가 12일 후에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이것을 궤도에 몇 대 이상 배치해 두면 순차적으로 접근하여 오는 위성을 이용할 수 있다. 지구의 적도면은 공전궤도면과 23.4° 경사되어 있으나 이들 면은 1년에 2회, 춘분과 추분에 교차한다. 그 때문에 지구의 어느 특정 지점의 특정 시각, 예를 들면 정오의 태양 방위는 매일 쏠리게 된다. 이 쏠림은 360°÷ 365일 = 0.99°로 인공위성의 궤도면을 매일 이만큼 쏠리게 하면 특정 시각 특정 지점의 상공에 위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궤도를 태양동기궤도(太陽同期軌道)라고 하며, 군사용의 정찰위성과 같이 특정 지점을 매일 정기적으로 내려다보는 데 편리한 궤도이다.
한편 인공위성은 지구 밖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지구의 중력 때문에 결국 지구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며, 지구가 당기는 인력과 자유낙하에 의한 중력이 균형을 이루어 원심력이 평형인 '타원궤도'로 지구를 공전하게 된다. 이러한 지구의 궤도와 중력 낙하 곡선을 일치시키위한 속도는 적어도 약 시속27,000km(초속 7.9km) 이상의 속도가 필요하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속력을 내면 지구의 인력을 벗어나는 궤도를 얻을수있는데 약 시속40,000km(11.3km/sec) 이상에서 그 한계를 넘으면 지구의 궤도를 돌던 인공위성은 궤도에서 떨어져 나가 우주로 향해 나갈수있는 '탈출속도'를 얻게 된다.
인공위성의 기본구성
인공위성은 미션계, 텔레미트리·추적사령계(追跡司令系), 궤도·자세제어계, 전원계, 구조체 등으로 이루어진다.
임무체계
그 위성이 궤도상에서 실시하는 계획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장치나 기기의 집합을 말한다. 통신위성인 경우, 중계하는 지상으로부터의 통신전파를 수신하는 안테나로부터 수신기를 거쳐 증폭하여 목적지로 송출하는 송신기나 송신 안테나까지를 포함한 것이 미션계가 된다.
통신·추적사령체계
이 계에서 중요한 것이 통신(Telemetry: 원격측정)이다. 이것은 위성내의 여러 가지 상태나 장치의 관리에 필요한 데이터를 계측하여 지상 기지로 통보하는 시스템이며, 지상 기지는 그 데이터에 의하여 위성의 운영·관리에 필요한 처치를 판단하고 위성에 대하여 전파로 지시를 보낸다. 그리고 위성 쪽에서는 이 사령을 받아 장치를 제어하도록 되어 있다. 이 밖에 인공위성의 시시각각의 위치를 지상에 알리기 위하여 지상의 레이다가 추적하는 단서가 되는 신호를 발하는 기능도 이 계에 포함된다.
궤도·자세제어체계
위성궤도는 지구의 중력이나 고층대기 등의 영향에 의하여 장기간에 상당히 변동하므로, 때때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위성의 자세변화도 일어나므로 정확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수정을 실시하는 것이 궤도·자세제어계이다. 특히, 지구 표면을 관측하는 텔레비전 카메라나 관측기기가 바른 각도를 향하도록 하거나, 날카로운 지향성(指向性)을 가진 전파를 송수신하는 안테나의 방향 등을 제어하는 데도 위성의 자세제어는 중요하다.
또한, 태양전지(太陽電池)에 의한 기전력(起電力)은 전지면의 태양방향 지향정도(指向精度)가 나쁘면 대폭적으로 저하하므로 이 제어도 실시되는 일이 많다. 앞서 말한 정지형 궤도로 하기 위한 일련의 궤도수정 조작을 실시하는 것도 이 계의 임무이며, 통신·기상·자원탐사 등 특히 정도가 높은 미션(사용목적)을 가진 위성에서는 이 계가 상당히 대규모적인 것이 되고 중량적으로도 커진다.
궤도·자세를 변화시키는 동력(動力)으로서는 대형 애포지모터나 소형 제트분사장치 등 외에 모터로 휠을 돌려서 얻어지는 토크나 자이로(gyro) 효과 또는 요요(yoyo)와 같은 추를 선단에 단 와이어를 방출하는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필요수정량에 대응하여 사용한다. 가장 기본적인 자세안정법으로는 위성 전체를 팽이처럼 회전시키는 스핀 안정이 있다. 본체 표면에 태양전지를 가득 붙인 형의 위성에서는 위성을 일정한 속도로 회전시키지 않으면 태양전지의 각 면이 고르게 빛을 받지 못하므로 적정한 회전율로 위성에 스핀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전원체계
인공위성에 탑재되는 여러 가지 장치를 작동시키는 힘은 대부분이 전력에 의존하는데, 전원계는 이러한 전력을 확보하고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고장이 나서 전력공급이 멎게 되면 위성의 기능은 모두 정지하게 되므로, 특히 높은 신뢰성과 안정된 성능이 요구된다.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전원계는 발전 또는 기전계(起電系)와 이것을 받아 충전하는 2차 전지, 전지로부터 기기로 급전할 때 안정이나 정격화(定格化)를 실행하는 제어계, 그리고 바르게 각 기기에 전력을 분배·접속하는 계로 이루어진다.
현재 인공위성의 발전
·기전계를 대표하는 것은 태양광선을 받아서 광기전효과(光起電效果)에 의하여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태양전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태양전지의 기전력은 수광면적(受光面積)에 비례하며 수광면에 직각으로 태양광을 받은 경우는 지구 주변의 궤도에서 1m2당 100W 전후이다. 궤도에 있어서의 위성은 태양으로부터 광선뿐만 아니라 고에너지 방사선도 받으므로 그대로는 태양전지의 수광면에 손상이 생긴다. 방호를 위하여 전지 표면에 석영(石英) 유리를 피복해야 하는데, 그 때문에 태양전지의 무게는 1m2당 3kg 전후가 되어 있다.
아폴로 우주선에서 활약하고 스페이스 셔틀 등 유인우주선의 전원으로 이용되는 것은 연료전지이다. 이것은 수소와 산소와의 화학반응에 의하여 발전하는 것으로 효율이 높은 것과 발전량의 제어가 쉽다는 장점이 많은 반면, 반응제를 탱크에 수납하여 궤도에 운반하기 때문에 이용기간이 반응제의 양으로 제한된다. 이 밖에 방사성 동위원소(放射線同位元素)가 붕괴할 때 방출되는 방사선을 용기의 안벽에 받으면 가열되므로 이 열을 제벽효과[熱起電力效果]에 의하여 전력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행성탐사기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는 방사성 동위원소는 주로 플루토륨 238이다. 기전용 열전쌍(熱電雙) 1조에 대하여 기전력은 0.4W로 낮기 때문에 1천 수백 조가 집합하여 1조로 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는 발열이 있기 때문에 방열장치가 필요하며, 위성기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탑재하여 방사선이나 열로부터 방호해야 한다.
특히, 대전력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특수한 예이지만, 소형의 발전용 원자로(原子爐)가 위성에 탑재되는 일이 있다. 부피 및 무게를 감안하여 고속중성자로(高速中性子爐)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에서 발생하는 열의 흡수, 노심의 냉각을 알칼리금속으로 실시하고 이것에 의하여 수은을 작업유체(作業流體)로 하는 보일러를 가열하여 증기가 된 수은으로 터빈을 돌려 교류발전기를 구동하는 것이 전형적이다.
이 밖에 태양열을 모아 보일러를 가동시키는 태양로를 이용하는 발전도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는 태양전지를 주류로 하고 있다. 주기 100분인 인공위성에서는 일조시간(日照時間)이 약 60분이므로 이 사이에 2차 전지에 태양전지의 기전력에 의하여 충전하고, 그늘에 들어가는 약 40분간은 2차 전지의 방전기간이 되도록 충방전 사이클을 설정한다. 위성탑재 규격의 2차 전지는 니켈-카드뮴 전지이며 앞의 충방전사이클이 7,000~1만 회 이상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고 되어 있다. 또 과충전을 방지할 필요가 있으므로 제어장치가 부속된다.
구조체계
인공위성은 발사로켓의 머리부에 설치되는 노즈콘(Nosecone: 단두원뿔)이라고 하는 원통 부분에 수용해야 하므로, 그 외형은 대부분 다면구체(多面球體) 또는 원통형으로 되어 있다. 태양전지를 본체에 장착하지 않고 평판패널에 배치하는 것은 패널을 접어서 탄도원뿔 안에 수납하여 탄도원뿔을 이탈시키고 나서 전개시킨다.
인공위성은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 절대조건이므로 기기를 받치는 구조체는 가급적 가벼운 재료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발사시의 가속도나 충격·진동에 견딤과 함께 자세·궤도의 제어에 적합한 구조이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기의 대부분은 전자장〉)이며 그것들이 한정된 내부부피에 수납되므로 기기상호간의 전기적 간섭이 생길 가능성이 높고 그 대책도 중요시된다.
인공위성 중에는 궤도를 일정기간 비행시키고 나서 지상으로 강하시켜 회수할 필요가 있는 것이 있다. 유인위성이나 군사 정찰위성 등이 그 예이다. 이 경우 궤도로부터 감속·이탈시키기 위한 장치나 대기권 진입 중에 생기는 공기력 가열에 견디는 구조가 필요하게 된다. 또 지상에 강하할 때의 충격에 의한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낙하산이나 역분사 로켓이 조립되어 들어간다. 회수는 위성 본체 전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그 일부를 미리 캡슐로 만들어 두고 그것을 강하·회수한다. 군사 정찰위성 중에는 캡슐 몇 개를 탑재하여 발사하고 정기적으로 1개씩 회수하는 것도 있다. 해상에서 회수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은 회수선(回收船)이 도착할 때까지 떠 있을 수 있는 에어백(바람자루)의 준비나 전파로 위치를 나타내는 발신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인공위성의 응용
인공위성을 사용목적별로 분류하면, ① 과학관측·연구, ② 지구상의 경제사회 활동의 지원, ③ 군사를 포함하는 안전보장상 필요한 정보수집, ④ 우주공간을 이용하는 산업활동 등이 있다.
과학관측·연구
우주공간의 과학관측이나 연구 분야는 인공위성이 실용화된 초기에는 고층대기나 지구의 자기권(磁氣圈) 등이 연구 대상이었다. 그 후 태양활동과 지구 환경과의 상관(相關)이나 행성간 대기의 물리학적 조사·관측 등에 확대되어, 태양계뿐만 아니라 은하계나 우주구조 등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다. 그 때문에 과학위성은 점차 전문화되어 국제 공동연구로 실시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스페이스 셔틀에 탑재되는 우주실험실 스페이스래브에서는 대량의 관측·실험장치를 한번에 탑재할 수 있으므로 여러 분야의 연구가 동시에 실시되고, 또한 전문과학자가 탑승하는 일도 있어서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구상의 경제사회 활동의 지원
국제통신, 기상관측, 자원·환경탐사 등은 인공위성을 응용하여 지상의 경제사회 활동을 지원하는 분야이다. 특히 통신은 1970년대 후반에는 국내용으로서도 이용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또 1976년 9월 정부간 해사협의기구(IMCO:Inter-Governmental Maritime Consultative Organization)는 국제해사위성기구(INMARSAT:International Marine Satellite Organization)의 설립을 결의하고, 1980년대 해사위성(海事衛星)을 발사하여 해상항행 중의 선박과 지상간 통신 연락체제의 정비를 하게 되어 있다.
1964년 8월 발족한 국제상업통신위성기구는 1973년 2월부터 항구조직(恒久組織)으로 되어 국제전기통신위성기구(INTELSAT)로 개칭되어, 현재 대서양·태평양·인도양 상공에 15개의 상업통신위성을 정지형 궤도에 배치하여 활발한 국제통신 중계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 항공기를 대상으로 하는 에어로샛 위성조직의 설립도 국제간에서 협의되고 있다.
자원·환경탐사에서는 미국이 1972년 7월 발사한 어츠 1호(ERTS 1:뒤에 Landsat 1호로 개칭)의 성과가 예상 외로 크고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탐사제안도 수백 건에 이르렀기 때문에 계획은 순조롭게 확대·발전하여 탐사 데이터의 이용범위도 확대되고 있다. 또 이러한 탐사를 육상에만 그치지 않고 해양자원 ·환경에도 미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해양탐사위성을 발사하고 있다.
제16회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세계기상기구(WMO)는 1967년 세계기상감시(WWW) 계획을 채택하여 5항목의 과제를 대상으로 하여 기상업무의 충실·정비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인공위성에 의한 지구대기연구계획(GARP:Global Atmospheric Research Program)이다. 이것은 정지형 궤도에 5대, 극주회(極周回) 궤도에 2대의 기상관측 위성을 발사하여 입체적 관측을 항시 실시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가 각 2대, 일본이 1대의 정지형 기상위성을 분담하여 발사하였다.
군사를 포함하는 안전보장상 필요한 정보수집
군사를 포함하는 안전보장상의 정보수집을 인공위성에 의하여 실시하는 것은 우주활동 개시 때부터 실시되어 왔으며, 근년에는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대규모적이고 정밀한 것이 되고 있다. 주요한 것은 사진정찰·적외선탐지·전자정찰(電子偵察)·군사통신·기상관측·측거(測距) 등이며, 특히 미사일 발사기지의 상황이나 미사일 성능의 평가, 부대의 이동 ·전개의 추적 등이 중요 항목이다. 현재로는 미국과 러시아가 주로 실행하고 있다.
우주공간을 이용하는 산업활동
장래의 인공위성의 이용으로는 스페이스 셔틀과 같은 대형물체를 궤도에 운반하는 수단을 실용화하여 우주공간의 무중량(無重量)이나 고진공 등의 특수환경을 이용하여 지상에서는 제작·합성할 수 없는 재료나 물질을 생산할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로켓이나 인공위성의 개발과정에서 이루어낸 신기술을 민간산업에 응용하는 데 그친 우주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산업면에서 이용하려는 것이다. 또 초대면적의 태양전지 패널을 궤도에 올려 태양광선으로 얻은 대전력을 마이크로파로 변환하여 지상에 보내고 수전설비(受電設備)로 이것을 다시 전력으로 바꾸는 태양발전위성(太陽發電衛星)도 검토하고 있다. 보다 원대한 계획에는 달의 암석을 정련하여 얻어지는 금속재료를 주로 사용하여 우주콜로니[植民地]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다. 이것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 기술로 충분히 실현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건설에 소요되는 방대한 경비가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세계의 인공위성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은 1957년 10월 4일 구(舊)소련이 발사한 스푸트니크 1호인데, 대기에 관한 여러 자료를 기록하고 전송할 수 있는 장치를 실은 직경 57cm, 무게 82.8kg의 금속구로 지구의 둘레를 96분에 1주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적위성은 우리별 1호다. 세계적으로 연간 120~140개의 인공위성이 발사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인공위성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는데 1994년까지 지구에서 발사한 인공위성은 대략 6,000여 개에 이르고 있으나 이 가운데 폐기하거나 대기권에 진입하여 타서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현재 운용되고 있는 것은 약 2,000여 개에 불과하다. 미국·러시아 외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한 나라는 프랑스·영국·일본·중국·인도·이스라엘 등으로, 영국은 1회만 실시하고 활동을 정지하였고, 프랑스는 그 후 독일 등 서유럽 여러 나라와 함께 결성한 유럽우주기구(ESA)의 중심이 되어 공동으로 아리안이라는 대형로켓을 계획하여 현재 아리안 5까지 상용화 된 상태이고, 아리안 6가 2020년을 목표로 개발 중에 있다.
일본도 인공위성발사를 몇 번 시도하였고, 중국도 인공위성을 발사하였으며, 그 중에서 몇 개는 회수하기까지도 하였다. 한편, 동유럽 여러 나라도 러시아의 힘을 빌려 우주연구·이용조직을 만들어 과학위성이나 생물실험위성을 발사하고 있다. 그 밖에 국토가 넓고 미개발지역을 안고 있는 나라에서는 통신위성이 통신체계 정비에 유리하다는 데서 미국에 통신위성 발사를 위탁하는 나라가 197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미 영국·캐나다 등에서도 실시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도 국내용 통신위성 파라파를 미국의 로켓으로 발사하여 사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우리별(KITSAT): 과학 실험 위성 - KAIST(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위성(STSAT): 과학 기술 위성 - KAIST(한국과학기술원)
무궁화(KOREASAT) & 올레(KOREASAT) : 상용 방송 통신 위성 - KT
아리랑(KOMPSAT): 다목적 실용 위성 - KARI(한국항공우주연구원)
천리안(COMS): 기상관측위성 - KARI(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누리(HAUSAT): 교육용 초소형 위성
인공위성의 수명
일반적으로는 위성이 대기 속으로 재돌입하여 소멸할 때까지를 수명으로 생각하지만 인공위성은 궤도상에서 관측 또는 통신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쏘아올린 것이므로 주어진 일을 해낼 기능이 정지된 시점에서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관측과 같은 기능이 정지되는 요인으로서는
탑재 전원(電源)의 소모,
송신기의 고장에 의한 통신 정지,
태양 방사선과 같은 장해,
미소(微小) 운석과의 충돌 등을 들 수가 있다.
이 중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경우가 많다.
같이 보기
통신위성
기상위성
과학위성
지구관측위성
기술개발위성
측지위성
자원위성
실용위성
군사위성
정찰위성
조기경보위성
군사통신위성
군사항법위성
미사일탐지위성
핵폭발 탐지위성
항행위성
측량위성
군용항공위성
전자정보위성
해양감시위성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세게 던진 뉴턴의 사과
NASA 3D 자바 인공위성 추적 화면, 미항공우주국
금속 제품
소련의 발명품
러시아의 발명품<|end_of_text|>
| 7.368271 | 2,045.115479 |
10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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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A%90%EB%85%BC%20EOS-1D%20Mark%20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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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EOS-1D Mark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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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캐논 EOS-1D Mark III
### 기사:
캐논 EOS-1D 마크 III()는 2,010만 유효 화소를 가지는 전문가용 디지털 SLR 카메라이다. 캐논 EOS-1D Mark II N의 후속 모델이다. 2007년 2월 21일 발표되었고, 2007년 5월에 출시되었다. 28.1 × 18.7 mm 크기의 CMOS 이미지 센서를 가지고 있으며, 초당 10 프레임을 촬영할 수 있다.
EOS-1Ds 계열에 대비하여 EOS-1D 계열 모델들은 프레스 사진 시장에 최적화된 특징이 있다.
향상된 기능들
EOS-1D Mark II N과 비교했을 때, 유효 화소 수, 연속 촬영 속도, 자동 초점 성능 등이 향상되었으며, 먼지 제거 기능, 라이브 뷰 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자동 초점 시스템: 크로스 타입 센서 수가 7개에서 19개로 증가하였다. CMOS 자동 초점 센서의 감도가 향상되어, 저광량 시 자동 초점 능력이 EV 0에서 EV -1로 향상되었다.
문제점
캐논의 플래그십 보디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에서 낮은 기계적 신뢰도를 보여주고 있다.
AF 관련 문제
시리얼 번호가 501001과 546561 사이인 1D Mark III 제품에서 AF미러의 부품의 결함으로 AF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온 환경에서 AI-Servo 연사시 초점 추적 능력이 낮아지는 현상이 일어나 1D Mark III 사용자들이 항의하였다. 이 결함은 2008년 11월 캐논 한국지사에서 공식 인정되었고, 캐논측은 해당 제품들에 대해서 수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오일스팟 문제
1D Mark III 제품들중 70% 이상의 제품에서, 미러유닛에서 업다운 운동이 잘 되도록 발라져 있는 오일이 결함으로 잘 밀폐되지 못하고, 촬영시 업다운 운동에 의해 오일의 일부가 튀어 센서에 묻는 문제가 발생하여 해당 제품에 대해서 무료 세척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사진
같이 보기
캐논
캐논 EOS
캐논 EF 마운트
각주
외부 링크
dcinside.com 리뷰
SLRCLUB.com 리뷰
캐논코리아 1D mark III 공식 안내 사이트
White Paper (PDF) White Paper
GETTING THE MOST FROM YOUR EOS-1 CLASS DIGITAL SLR TIPS AND TECHNIQUES: CAMERA HANDLING & MAXIMUM IMAGE QUALITY
Canon EOS-1D Mark III Digital Camera - Hands-On Preview - The Imaging Resource
A first look at the Canon EOS-1D Mark III by Rob Galbraith
The Luminous Landscape Canon 1D MKIII – First Impressions
캐논 EOS DSLR 카메라<|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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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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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7%A4%EB%93%9C%EC%85%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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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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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헤드셋
### 기사:
헤드셋() 또는 오디오 헤드셋()은 머리에 장착하는 마이크로폰의 총칭이다. 일반적으로 헤드폰에 소형 마이크가 장착 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마이크를 손을 사용하여 들 필요가 없이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서 입 (음원)과 마이크의 거리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음성이 안정된다.
헤드셋은 전화나 컴퓨터를 통해 연결되므로 사용자는 양손을 자유롭게 유지하면서 말하고 들을 수 있다. 이는 직원이 컴퓨터에 정보를 입력하는 동안 고객과 대화할 수 있는 고객 서비스 및 기술 지원 센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컴퓨터 게이머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헤드셋은 서로 대화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하여 게임을 할 수 있는 헤드셋이기도 하다.
컴퓨터
컴퓨터 헤드셋은 일반적으로 표준 3.5mm 연결과 USB 연결의 두 가지 연결 유형으로 제공된다. 일반 3.5mm 컴퓨터 헤드셋에는 2개의 3.5mm 커넥터가 함께 제공된다. 하나는 마이크 잭에 연결되고 다른 하나는 컴퓨터의 헤드폰/스피커 잭에 연결된다. 3.5mm 컴퓨터 헤드셋은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헤드셋의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하는 사운드 카드를 통해 컴퓨터에 연결된다. USB 컴퓨터 헤드셋은 USB 포트를 통해 컴퓨터에 연결되며 오디오 변환은 헤드셋 또는 헤드셋 제어 장치에서 발생한다.
컴퓨터용 게임용 헤드셋은 게임용으로 특별히 설계되었으며 게이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추가 기능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능에는 게임별 사운드 모드, 인기 게임이나 테마에서 영감을 받은 미적 디자인, 분리형 마이크, RGB 조명이 포함된다.
휴대전화
휴대폰 헤드셋은 종종 핸즈프리라고도 한다. 구형 휴대폰은 마이크 모듈이 케이블에 연결된 단일 이어폰을 사용했다. 음악을 재생하는 휴대폰의 경우 제조업체에서 스테레오 이어폰과 마이크를 번들로 제공할 수 있다. 더 나은 음질이나 무선 연결을 제공하는 타사 브랜드도 있다.
모바일 헤드셋은 목뒤 착용, 머리 착용, 귀 착용, 경량 이어버드 등 다양한 착용 스타일로 제공된다. 일부 애프터마켓 모바일 헤드셋에는 휴대폰의 오디오 커넥터와 다른 표준 2.5mm 플러그가 함께 제공되므로 사용자는 어댑터를 구입해야 한다. 컴퓨터용 USB 헤드셋도 휴대폰이나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의 마이크로 USB 슬롯에 직접 연결할 수 없다. 스마트폰은 표준 3.5mm 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용자가 헤드셋을 직접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3.5mm 플러그에는 주로 OMTP 및 CTIA 핀 정렬이 있으므로 사용자는 헤드폰/헤드셋을 구입하기 전에 장치가 어떤 설정을 사용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많은 무선 모바일 헤드셋은 많은 전화기와 컴퓨터에서 지원되는 블루투스 기술을 사용하며 때로는 블루투스 어댑터를 USB 포트에 연결한다. 버전 1.1부터 블루투스 장치는 음성 통화를 전송하고 여러 음악 및 비디오 형식을 재생할 수 있지만 휴대폰이나 미디어 장치 및 헤드셋에 A2DP 프로필이 없으면 오디오가 스테레오로 재생되지 않는다.
같이 보기
VR 헤드셋
컴퓨터 주변기기
음향 기기
사운드 카드
마이크로폰
이어폰<|end_of_text|>
| 9.698482 | 2,167.45873 |
3992
|
https://ko.wikipedia.org/wiki/185%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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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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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185년
### 기사:
연호
후한(後漢) 중평(中平) 2년
기년
후한(後漢) 영제(靈帝) 18년
신라(新羅)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2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천왕(故國川王) 7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20년
사건
음력 1월, 신라, 벌휴 이사금, 시조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음력 2월, 신라, 구도(仇道)에게 파진찬(波珍飡)의 벼슬을, 구수혜(仇須兮)에게 일길찬(一吉飡)의 벼슬을 내리고, 좌우(左右)의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쳤다.
음력 7월, 후한, 삼보(三輔)에 멸구떼가 나타났다.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황보숭(皇甫嵩)을 면직하였다.
음력 8월, 후한, 사공(司空) 장온(張溫)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북궁백옥(北宮伯玉)을 토벌하였다.
문화
탄생
사망
참고 문헌
범엽(5세기), 《후한서》 〈제8권〉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벌휴 이사금 조(條)<|end_of_text|>
| 15.256777 | 1,081.834427 |
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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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D%82%A4%EB%A7%A4%ED%94%BC%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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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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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위키매피아
### 기사:
위키매피아(Wikimapia)는 전 세계 누리꾼들이 만드는 세계지도이다. 러시아인 알렉산드르(Alexandre Koriakine)와 에비제니(Evgeniy Saveliev)가 위키백과와 구글 지도에서 영감을 얻어 2006년 만든 것이다. 구글 지도(Google Map) API를 이용해서 구현했다. 위키미디어 재단과는 관련이 없다.
기능
누리꾼은 둘레가 노란색인 사각형을 지도 상의 어느 위치에든 그려 넣을 수 있다. 사각형이 아닌 장소에는 둘레가 녹색인 다각형을 그려 넣을 수 있다.
한 장소에는 "태그", "종류", "설명"이 붙어, 그 장소를 설명한다. 태그, 종류, 설명은 64여 개의 언어로 기술될 수 있다. 검색 결과는 현위치와의 거리 순으로 정렬되기도 한다. 또한, 거리를 재거나 면적을 재는 도구 여러 가지가 제공된다.
최근, 등록된 사용자들을 위한 포럼이 개설되었다. 등록된 사용자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면, 그가 갖고 있는 포인트가 올라가며, 자동적으로 관리자로 승격되기도 한다.
같이 보기
오픈스트리트맵
구글 지도
각주
외부 링크
웹 2.0
크라우드소싱
지리 정보 시스템<|end_of_text|>
| 16.047434 | 1,004.748714 |
115096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6%84%EB%AA%A8%EC%9C%A1%ED%8C%94%EB%A9%B4%EC%B2%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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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모육팔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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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마름모육팔면체
### 기사:
마름모육팔면체는 아르키메데스의 다면체 중 하나이다. 면의 수가 26개, 모서리의 수가 48개, 꼭짓점의 수가 24개이다. 또 정육면체나 정팔면체를 부풀려서도 만들 수 있다고 하여 부풀린 정육면체, 부풀린 정팔면체라고도 한다. 또, 육팔면체의 꼭짓점을 각 모서리의 절반지점까지 깎아서도 만들 수 있다(1/3 지점까지 깎으면 깎은 육팔면체 즉 큰 마름모육팔면체가 된다). 이것은 늘린 맞붙인 두 사각지붕으로 볼 수 있다. 맞붙인 두 사각지붕 사이에 정팔각기둥을 끼워 넣는다. 정사각형들 끼리 이루는 내각은 135°이고, 두 곳을 자르면 팔각기둥이 되는 것을 이용하면 팔각기둥의 이면각은 정일 경우 4_4=135°, 4_8=90°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식
한 모서리의 길이가 인 마름모육팔면체의 겉넓이 와 부피 는 다음과 같다.
같이 보기
다듬은 육팔면체
부풀린 육팔면체
연등회
아르키메데스의 다면체<|end_of_text|>
| 14.359531 | 929.880461 |
139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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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B1%EA%B0%80%ED%8F%AC%EB%A5%B4%20%EC%B6%95%EA%B5%AC%20%EA%B5%AD%EA%B0%80%EB%8C%80%ED%91%9C%ED%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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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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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
### 기사: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은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싱가포르 축구 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태국, 베트남 등과 함께 동남아시아 축구 강호로 손꼽히는 팀으로 1953년 4월 11일 대한민국과의 국제 A매치 데뷔전에서 2-3으로 패했으며 현재 홈 구장으로는 싱가포르 국립경기장을 사용하고 있다.
국제 대회 경력
FIFA 월드컵
월드컵 본선 경험은 전무하지만 201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4경기에서 3승 1무(1차 예선, 2차 예선)의 성적으로 3차 예선까지 오르며 싱가포르 축구 역사상 월드컵 지역 예선 최고 성적을 남겼고 3차 예선에서도 복병 레바논과의 2번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쟁취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AFC 아시안컵
아시안컵 본선에는 자국에서 열린 1984년 대회에 유일하게 참가하여 첫 경기에서 인도를 2-0으로 꺾고 메이저 대회 본선에서 첫 승을 올렸지만 이후 3경기에서 1무 2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조 4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이후의 아시안컵 본선 기록은 전무하다.
아세안 축구 선수권 대회
1996년 첫 출전을 시작으로 14번의 대회에 모두 참가하여 이 중 4번의 대회(1998년, 2004년, 2007년, 2012년)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5회 우승의 태국에 이어 2번째로 가장 많은 우승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고 2008년 대회에서는 4강에 오르는 등 12번의 대회 중 5번의 대회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동남아시아에서만큼은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아시안 게임
아시안 게임에는 성인대표팀으로 4번 출전했고 U-23 대표팀으로는 3번 출전하여 성인대표팀 시절이던 1966년 대회에서 4강에 이름을 올렸으며 U-23 대표팀으로는 3번의 대회에서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에는 16번 출전하여 이 중 7번의 대회에서 은메달 3개(1983년, 1985년, 1989년), 동메달 4개(1975년, 1991년, 1993년, 1995년)를 획득했다.
FIFA 월드컵 (본선)
FIFA 월드컵 (예선)
AFC 아시안컵 (본선)
AFC 아시안컵 (예선)
아시안 게임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주요 선수
하산 수니
바이하키 카이잔
사푸완 바하루딘
하리스 하룬
샤흐단 술라이만
카이룰 니잠
이즈완 마흐부드
나즈룰 나자리
줄파미 아리핀
샤키르 함자
카이룰 암리
파리스 람리
송의영
이르판 판디
이크샨 판디
일한 판디
각주
싱가포르의 축구
축구 국가대표팀
아시아의 축구 국가대표팀<|end_of_text|>
| 7.566618 | 1,714.113075 |
24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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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2%BD%EC%9A%B1%20%28%EC%96%91%EA%B6%81%20%EC%84%A0%EC%88%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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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양궁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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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김경욱 (양궁 선수)
### 기사:
김경욱(金京郁, 1970년 4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전직 양궁 선수이자, 현재 스포츠 해설가이다.
경기도 여주출신로 여주 여흥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0년에 양궁에 입문하여, 1987년 여주여종고 2학년때 양궁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다. 1989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에서 은메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다음해인 1990년에는 아시안컵 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94년 일본 히로시마시에서 열린 국제양궁대회에서도 모두 금메달을 석권하였다. 1996년 프레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하였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석권하였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 다음 해인 1997년에는 전 빙상 국가대표 선수인 이인훈과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에도 2001년 세계 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개인전 은메달,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2004년부터는 현대모비스에서의 선수생활과 함께 KBS의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중계방송 해설도 병행하였다. 2007년에는 수원시청으로 소속팀을 옮겼으나 같은해 말에 팀이 해체되면서 2008년 1월 14일에 현역 선수로서의 은퇴를 공식 선언하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만삭의 몸으로 SBS의 양궁경기 중계방송의 해설을 담당하였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SBS의 양궁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올림픽 출전과 퍼펙트 골드
김경욱은 1987년에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이 되었으나, 올림픽 출전은 9년이 더 지난 1996년에야 본 대회에 출전한다. 국가대표 발탁 다음 해인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하여 치른 국내 예선전에서 10점 만점을 기록한 화살 3발을 심판이 확인하기도 전에 뽑아버리는 바람에 3발 모두 0점 처리되는 등의 어이없는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나중에 김경욱 자신은 긴장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연습 때처럼 하려던 게 정말 연습처럼 해버리는 실수를 범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전에서도 초반에 탈락하였다.
이후 국가대표 발탁 9년 만인 1996년 만 26세의 나이로 애틀란타 올림픽의 올림픽 국가대표 3인 중 1명으로 최종 발탁되었다. 대회에서 김경욱은 개인전에서의 금메달과 단체전에서의 금메달 모두를 석권하게 된다. 특히 개인전 결승에서 과녁 정중앙에 위치한 초소형카메라를 2번이나 박살낸 일화가 유명하다. 이 일화를 계기로 김경욱은 '퍼펙트 골드'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후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했다.
출신 학교
여흥초등학교
여주여자중학교
여주여자종합고등학교
한성디지털대학교
각주
외부 링크
김경욱 - 세계 양궁 연맹
김경욱 - Sports Reference.com
197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여자 양궁 선수
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
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올림픽 양궁 메달리스트
1996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올림픽 양궁 참가 선수
1996년 하계 올림픽 양궁 참가 선수
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
체육훈장 거상장 수훈자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자
여주시 출신
여흥초등학교 동문
여주여자중학교 동문
세종고등학교 (경기) 동문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불교도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end_of_text|>
| 8.651984 | 2,209.575684 |
12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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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B%A6%AC%EC%95%88%20%28%ED%8F%AC%ED%84%B8%20%EC%82%AC%EC%9D%B4%ED%8A%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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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 (포털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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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천리안 (포털 사이트)
### 기사:
천리안(Chollian)은 미디어로그에서 운영하는 포털 사이트이다.
처음에는 (주)데이콤(현재 유플러스로 통합)에서 비디오텍스 시버스 '천리안'으로 시작하고 이후 BBS 서비스 'PC-SERVE'와 통합하여 만든 대한민국의 PC통신 서비스였다. 한때 천리안 매직콜이라는 이름으로 전용 프로그램 기반의 GUI 중심 서비스도 시도하였으나, 인터넷이 널리 사용된 이후로 LG인터넷의 웹 기반 멀티미디어 통신서비스 '채널아이'를 흡수하며 인터넷 포털 서비스 'CHOL.com' 위주로 개편되었다. 현재는 유플러스의 자회사인 (주)미디어로그(舊 (주)데이콤멀티미디어인터넷)에서 운영하고 있다.
역사
1985년 10월, '생활정보 DB'를 구축하고 시범 서비스를 시작하다 그 다음 해인 1986년 9월에 본격적으로 천리안 서비스를 개시한다. PC통신에 접속해서 해외로 메일을 작성해서 발송하고 메일을 읽게 되는 상용 이메일 서비스를 PC통신 업계에서는 유일하게 제공하는데, 이메일 주소 1개의 년간 사용료가 1992년 당시에는 2백만원으로 책정되었다. 이메일 편지함은 천리안 편지함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며, PC통신 천리안 메인 메뉴들과는 완전히 구분되어 있었던 해당 메뉴로 접속을 하게 되면 서버 프롬프트가 새롭게 나타나며 텍스트 기반 이메일 응용프로그램을 직접 실행시켜야 해서 UNIX 텍스트 콘솔 같았다.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컴퓨터 통신을 기반으로 중앙교육진흥연구소에서 종이 학습지 아이템풀을 PC기반으로 컴퓨터에서 가정학습이 가능하도록 새롭게 재작한 A플러스 교육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PC통신으로 DOS 실행 프로그램 형태의 교재를 다운로드 받아서 학습자가 오프라인으로 학습하는 형태였다. 학습지를 기반으로 제작되어서 객관식 4지선다 문제 풀이가 대부분이었지만, 본고사를 대학 입시로 치르는 시절이었으나 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 영역 문제지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비커, 알코올램프 등에 실험 기구들이 VGA 컬러 모니터에 나타나서 물이 끓거나 온도계의 온도가 올라가고 액체의 색상이 바뀌는 실험 장면을 누르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간단한 애니메이션으로 간접 체험 시키는 풍부한 학습 경험도 제공하였다. 온라인을 활용한 교재이다 보니 추가로 제작한 교제가 전자 게시판을 통해서 보완 즉시 서비스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1994년 1월, 천리안 가족지 《월간 천리안》이 창간되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터넷 연결 서비스를 시작했으나 서비스 초기에는 WWW는 지원하지 않았다. 1995년 4월부터 WWW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1996년 11월에는 PPP 프로토콜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한, 90년대 초반까지는 통신 요금을 사용 시간에 따라 부과하는 종량제만 도입하였으나,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월 일정 요금을 내면 무제한으로 접속할 수 있는 정액제를 새로 도입하였다.
한때 2000년 8월 유료 가입자 35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으나, 1999년부터 초고속 인터넷의 엄청나게 빠른 보급과 2003년 7월부터 CHOL이 출범하면서 천리안의 이용자는 2000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이후 텔넷을 통해 서비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2007년 12월 27일 텔넷 서비스를 중단하여 이후 모든 서비스는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게 된다.
또한, 천리안의 이메일 주소는 @chollian.net이었으나 사용자들이 많은 혼란을 겪게 되자 2004년부터 @chol.com으로 바꾸었다.
참고 문헌
같이 보기
AOL
하이텔
미니텔(:en:Minitel)
나우누리
유니텔
LG유플러스
외부 링크
천리안 홈페이지
PC통신을 체험할 수 있는 사이트
LG그룹
1986년 설립
대한민국의 PC통신<|end_of_text|>
| 18.254673 | 2,974.127197 |
187967
|
https://ko.wikipedia.org/wiki/%EB%B0%B0%ED%8B%80%ED%81%AC%EB%A6%AC%ED%81%AC%20%28%EB%AF%B8%EC%8B%9C%EA%B0%84%EC%A3%B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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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크리크 (미시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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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배틀크리크 (미시간주)
### 기사:
배틀크리크(Battle Creek)는 미국 중서부 미시간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53,364 (2000). 주변은 곡물 생산지로 유명하며, 미시간주 중남부의 중심지이다. 시리얼 생산으로 잘 알려진 켈로그사의 본사가 있다. 이로 인하여 '시리얼의 도시'(Cereal City)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인구
기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공식 관광 웹사이트
페스티벌 공식 웹사이트
미시간주의 도시<|end_of_text|>
| 15.833835 | 430.895259 |
28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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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0%94%EB%9D%BC%ED%82%A4%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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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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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바라키역
### 기사:
이바라키역()은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 있는, 서일본 여객철도의 도카이도 본선(JR 교토 선) 상의 역이다.
오사카 만박 (일본 만국 박람회)이 열렸을 때 제일 가까운 역으로 버스 터미널이 정비되어 발전하였다.
덧붙여, 이 역에서 한큐 전철의 이바라키 시 역과는 1.5 km 정도 떨어져있어, 도보로 18분이 걸린다. 양 역간에는 한큐 버스, 긴테츠 버스, 게이한 버스 등이 다니고 있다.
개요 및 역 구조
2면 4선의 섬식 플랫폼이 있는 지상역이며, 교상 역사를 가지고 있다. ICOCA, J스루 카드를 이용할 수 있으며, ICOCA 상호 이용 카드들도 이용가능하다.
승강장
↑오사카·산노미야 방면
12 34
다카쓰키·교토 방면↓
1·4번 승강장은 아침시간대 이외에는 정차하는 열차가 없어 비사용 시간대에는 줄로 폐쇄한다.
운전 선로 호칭
1번선 (승강장 없음, 대피선)
2번선 (1번 승강장, 하행 외측선)
3번선 (2번 승강장, 하행 내측선)
4번선 (3번 승강장, 상행 내측선)
5번선 (4번 승강장, 상행 외측선)
6번선 (승강장 없음, 대피선)
1번선과 6번선은 무코마치~신오사카·오사카 간의 회송 열차등의 대피에 쓰인다.
하행 방면은 장내와 제 1 출발~제 3 출발 신호기를 가지고 있으며, 제 1 출발 신호기는 외측선->내측선, 제 3 출발 신호기는 내측선->외측선·화물선에의 진출에 쓰인다.
상행 방면은 제 1 장내~제 4 장내 및 출발 신호기를 가지고 있으며, 제 1 장내 신호기는 화물선에서 외측선에 합류할 때, 제 2 장내 신호기는 외측선->내측선 진입시, 제 3 장내 신호기는 내측선->외측선 진출에 쓰인다.
부대 시설
자유 통로에 자동 발매기, 일본여행 (Tis), 미도리노마도구치, 매점, 식당 등이 있다.
서쪽 출구 계단 밑에는 렌터 사이클이, 동쪽 출구 계단 밑에는 편의점 등이 있다.
또, 이 역에 설치된 화장실은 오사카 부의 JR 역 중에서는 간사이 공항역과 오사카 역 다음으로 무료 화장지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노약자 등을 위한 엘리베이터 등의 배리어 프리 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역세권 정보
버스 터미널
오사카 모노레일 개업 이후, 오사카 만국 박람회 기념 공원에의 버스 이용자가 감소하고 있다.
서쪽 출구
노선 버스는 한큐 버스, 긴테츠 버스, 게이한 버스의 3사가 운행 중이다. 버스 5번 승강장은 리소나 은행 앞에 있다.
동쪽 출구
긴테츠 버스가 노선 버스를 1계통 운행하고 있으며, 그외에는 간사이 공항 교통, 한큐 버스, 긴테츠 버스, 난카이 버스의 공동 운행으로 간사이 공항 리무진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또, 2007년 9월 29일부터는 게이한 버스도 운행을 시작하였다.
이용 현황
2006년도의 1일 평균 승차량은 45,468명으로 (JR 서일본 홈페이지에서), 서일본 여객철도의 역 중에서는 17위이다.
역사
1876년 8월 9일 - 일본국유철도의 역으로 개업. 여객, 화물 취급 개시.
1969년 10월 - 교상역사 사용 개시 (3대째).
1970년 3월 14일~9월 13일 -일본 만국 박람회 개최에 맞추어, 쾌속이 임시 정차. 만국 박람회 동쪽 입구역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개최 후에도 쾌속 정차 운동 등의 영향으로 계속 쾌속이 정차하게 됨.
1986년 1월 1일 - 화물 취급 중지.
일본 담배 산업 이바라키 공장,, 도요 제관 이바라키 공장, 삿포로 맥주 오사카 공장에의 전용선은 남아있어, 화물 수송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1987년 4월 1일 - 일본국유철도 분할 민영화에 따라 서일본 여객철도의 역이 됨.
1990년 4월 1일~9월 30일 - 국제 화초 박람회 개최에 맞추어 일부 호쿠리쿠 방면 특급 열차가 박람회 수송 등의 목적으로 임시 정차.
인접역 정보
각주
외부 링크
JR 서일본 오데카케 (이바라키 역)
서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
이바라키시의 철도역
JR 교토선
1876년 개업한 철도역
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end_of_text|>
| 10.60604 | 2,418.0979 |
88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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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B2%A0%EB%A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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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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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소철류
### 기사:
소철류(蘇鐵類)는 소철문(Cycadophyta)에 속하는 겉씨식물의 총칭이다. 일반적으로 크고 단단하며 뻣뻣한 상록수이다. 보통 깃꼴 모양의 잎이 줄기 끝에 모여 달리고, 튼튼하고 목질 줄기가 있는 종자식물이다. 종은 암수딴그루이므로 종의 개별 식물은 수컷 또는 암컷이다. 소철류의 크기는 줄기가 불과 몇 센티미터에서 몇 미터까지 다양하다.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 분포한다. 전 세계에 약 160여 종이 있으나, 한국에 자생하는 종은 소철 1종뿐이다.
하위 분류
소철아목 (Cycadineae)
소철과 (Cycadaceae)
플로리다소철아목 또는 자메이카소철아목 (Zamiineae)
스탄게리아과 (Stangeriaceae)
자메이카소철과 (Zamiaceae)
계통 분류
각주
살아있는 화석
식물의 문<|end_of_text|>
| 14.324145 | 755.992816 |
1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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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280%EB%85%84%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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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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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1280년대
### 기사:
1280년대는 1280년부터 1289년까지를 가리킨다.<|end_of_text|>
| 14.965943 | 124.46575 |
70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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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A%98%EB%A6%AC%ED%8F%AC%EB%8B%88%EC%95%84%20%EB%8C%80%ED%95%99%EA%B5%90%20%EB%A1%9C%EC%8A%A4%EC%95%A4%EC%A0%A4%EB%A0%8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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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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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 기사: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줄여서 UCLA)는 1919년에 설립,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미국 내에서 최상위권 명문대이자 세계 최고의 대학교 중 하나이다. U.S. News & World Report가 발표한 2018-2022년 미국 학부대학순위에서 5년 연속 공립대학 1위로 랭크 되었으며, 타임지가 발표한 2021년 세계대학순위에서는 15위를 차지하였다. 미국에서 지원자수가 가장 많은 대학이고, 졸업생과 교수 포함 1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 중심 대학으로도 평가받는다. 미국 공립대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모금하는 학교이며 2018년에는 하버드, 스탠포드, 컬럼비아에 이어서 미국에서 4번째로 많은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학문 외에도 스포츠 팀이 강하기로 유명한데, 총 214명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금 106, 은 54, 동 54)를 배출했다. 1969년 스탠퍼드 대학교 연구 기관과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이자 현재의 인터넷의 기반이 된 아파넷이 개발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대학 병원인 로널드 레이건 메디컬 센터는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으며,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영화감독, 영화음악감독들을 배출해낸 학교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최상위권 대학교 중 인종 다양성과 문화 다양성, 경제 다양성이 가장 높은 대학교이다.
역사
설립
1882년 로스앤젤레스의 주민들의 요청으로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인구 증가에 대응할 목적으로 교사를 키우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이 학교는 할리우드로 옮겨졌으며, 1917년에 이 학교를 버클리에 이은 두 번째 캘리포니아 대학교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되어, 1919년 캘리포니아주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의 이름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남부 분교(Southern Branch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였고, 이로 인해 교육학부에 이어 일반 인문학부가 설립되었다.
발전
1927년에서야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았으며, 현재의 위치인 웨스트우드에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여 1929년 4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1933년에 석사 과정, 그리고 1936년에 박사 과정이 각각 만들어졌다.
여러 전공 과목과 빌딩들이 건설되었고 현재에 이른다.
1994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십여 년에 걸쳐 복구하였다. 발전 기금을 가장 많이 모은 대학으로 2011년에 러스킨(Ruskin) 부부로부터 $1,000,000을, 린시(Lincy) 재단으로부터 $2,000,000을 기부 받는 등 사회적인 교류와 지원이 활발하다. 비슷한 예로, 한국계 미국인인 데이빗 리(David Lee)가 $1,000,000을 한인이 학장(박노희)으로 있는 이 대학 치과대학에 기부하기도 했다.
구성
UCLA에는 약 25,000의 학부생과 11,000명의 대학원생이 공부하고 있다. 대학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학부대학 및 일반대학원
UCLA는 5개 학부 단과대학이 있다.
문리대학(College of Letter and Science) 일반대학원
인문 (Humanities)
미술사 (Art History)
아시아언어 및 문학학 (ages and Cultures)
고전학 (Classics)
비교문학 (Comparative Literature)
영문학 (English)
불어학 (French & Francophone Studies)
독어학 (Germanic Languages)
이탈리아어학 (Italian)
인도-유럽학 (Indo-European Studies)
법률&철학 (Law and Philosophy)
소수성애자학 (LGBTQ Studies)
언어학 (Linguistics)
음악학 (Musicology)
중동학 (Near Eastern Languages and Cultures)
철학 (Philosophy)
스칸디나비아학 (Scandinavian)
슬라브·동유럽·유라시아학 (Slavic, East European & Eurasian Languages & Cultures )
서반아&포르투갈어학 (Spanish & Portuguese)
종교학 (Study of Religion)
사회과학 (Social Sciences)
항공우주학 (Aerospace Studies)
흑인학 (African-American Studies)
미국원주민학 (American Indian Studies)
인류학 (Anthropology)
고고학 (Archaeology)
미국계아시아인학 (Asian American Studies)
히스패닉학 (César E. Chávez Department of Chicana and Chicano Studies)
커뮤니케이션학 (Communication Studies)
보전학 (Conservation)
경제학 (Economics)
노동학 (Labor Studies)
여성학 (Gender Studies)
지리학 (Geography)
사학 (History)
군사과학 (Military Science)
해군과학 (Naval Science)
정치학 (Political Science)
사회학 (Sociology)
융합학부 (Interdepartmental Program; Interdisciplinary Education)
국제학 (Global Studies)
국제개발학 (International Development Studies)
국제지역학 (International & Area Studies IDP)
아프리카&중동지역학 (African & Middle Eastern Studies)
아시아지역학 (Asian Studies)
유럽지역학 (European Studies)
라틴아메리카지역학 (Latin America Studies)
생명과학 (Life Sciences)
생태학&진화생물학 (Ecology and Evolutionary Biology)
미생물학&면역학&분자유전학 (Microbiology, Immunology, & Molecular Genetics)
분자·세포·발달생물학 (Molecular, Cell, and Developmental Biology)
통합 생물학 & 생리학 (Integrative Biology and Physiology)
심리학 (Psychology)
사회 & 유전학 (Society and Genetics)
자연과학 (Physical Sciences)
대기·해양과학 (Atmospheric and Oceanic Sciences)
화학 & 생화학 (Chemistry & Biochemistry)
지구과학·행성학·우주과학 (Earth, Planetary, and Space Sciences)
물리학 & 천문학 (Physics & Astronomy)
수학 (Mathematics)
통계학 (Statistics)
학부교육 프로그램 및 센터 (Undergraduate Education)
예술건축대학·대학원(School of Arts and Architecture)
건축&도시설계 (Architecture and Urban Design)
예술 (Art)
디자인미디어아트 (Design and Media Art)
음악 (Music)
세계예술·문화/무용 (World Arts and Cultures/Dance)
시각·공연예술교육 (Visual and Performing Arts Education)
헨리사무엘리공학대학·대학원(Henry Samueli School of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
바이오공학 (Bioengineering)
화학·생물분자공학 (Chemical and Biomolecular Engineering)
토목·환경공학 (Civil and Environmental Engineering)
컴퓨터과학 (Computer Science)
전기·컴퓨터공학 (Electrical And Computer Engineering)
재료과학·공학 (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
기계·항공공학 (Mechanical and Aerospace Engineering)
허브 알퍼트 음악대학·대학원(The Herb Alpert School of Music)
인류음악학 (Ethnomusicology)
음악 (Music)
음악학 (Musicology)
연극영화텔레비전대학·대학원(School of Theater, Film, and Television)
영화·텔레비전·디지털미디어학 (Film, Television and Digital Media)
연극학 (Theater)
간호대학·대학원(School of Nursing)
전문 대학원
대학원은 의학대학원, 법학대학원, 경영대학원, 치의학대학원 등이 있다.
교육·정보학대학원(Graduate School of Education and Information Studies)
앤더슨경영대학원(Anderson School of Management)
법학대학원 (School of Law)
데이빗 게펜 의학대학원 (David Geffen School of Medicine)
치의학대학원(School of Dentistry)
필딩 보건대학원(Fielding School of Public Health)
러스킨 행정대학원(Luskin School of Public Affairs)
신경정신연구원(Neuropsychiatric Institute)
학교 현황
순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버지니아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와 함께 미국 최고의 공립대학으로 뽑히며 특히 의학대학원, 치의학대학원, 교육대학, 건축대학원 등이 유명하다. UCLA의 도서관은 800만 부의 서적을 보유해, 미국 내 장서량으로 최상위권에 있다. 2019년 《U.S. 뉴스 & 월드 리포트》 미국 종합대학 학부 순위에서는 19위를 기록하며 UC버클리를 제치고 미국 공립대학 1위가 되었다. 2019년 QS 랭킹에 따르면 경영대학원이 전세계에서 11위를 차지하였다. 로스쿨이 16위, 교육대학원이 11위, 공학대학원이 16위, 의학대학원이 연구 12위, 1차의료 13위, 미술대학원이 4위를 차지했다.
다음은 종합 순위 목록이다.
미국 국내 학부 순위:
19위 - 《U.S. 뉴스 & 월드 리포트》 종합대학 학부 순위 2019
25위 - 타임스 고등교육 미국 대학 평가 2019
세계 대학 종합 순위:
13위 - 《U.S. 뉴스 & 월드 리포트》 세계 대학 순위 2019
11위 - 중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 2018
17위 - 타임스 고등교육 세계 대학 평가 2019
32위 -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 2019
기타 순위
총 연구비 지출 - 3위 (785,625,000) (2007년) : 2002~2004년 2위
연방차원 연구비 지출 - 6위 ($467,505,000) (2009년)
사립 연구비 지출 - 7위 ($2,161,411) (2009년)
학부 입학 현황
프린스턴 리뷰(Princeton Review)에 의하면 입학 난이도는 98점으로 어려운 등급에 속하며 1998년 이후 가장 많은 지원자를 받는 학교이다.
2017년에도 역대 최고의 가장 많은 지원자들이 몰리면서 UC Berkeley보다 낮은 합격률을 보였다. 합격하는 학생들의 경우 최상위권의 GPA, SAT, SAT II 성적 및 화려한 스펙을 자랑한다.
미국에서 지원자 수가 가장 많은 대학교 중 하나로, 2016년에는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9만 7064명의 지원자가 몰리기도 하였다. 2009년 가을에 입학하는 신입생의 경우 21.7%가 합격해 미 전국 공립학교 중 가장 낮은 합격률을 자랑하고있다. 2011년 가을에 입학하는 캘리포니아주 출신 학생의 합격률의 경우 17.93%로, UC버클리보다 낮다.
2011년에 인종별 구성은 백인 33.7%, 아시아인(황인) 32.0%, 히스패닉 13.9%,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4.0%으로 매우 다양하고 인종 차별이 발생하기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2006년 신입생의 경우, 4,700명 중 흑인이 90명밖에 되지 않아(이 중, 20명은 스포츠 선수임), 논란이 있었으나, 이후 소수인종인 흑인과 히스패닉 인종의 구성 비율을 조정하였다. 국제학생, 유학생의 입학은 매우 힘들며, 주 학생을 많이 뽑는데다, 인종 구성 비율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다.
대학원의 경우 2005년 치대는 1,465명의 지원자 중 88명만이 합격하였고, 약대는 4.5% 만이 합격하였다.
한 해에 약 5000명의 편입생들이 UCLA에 진학한다고 한다.
캠퍼스 및 환경
로스앤젤레스의 서부에 자리한 캠퍼스는, 설립 이후 웨스트우드로 옮겨간 1929년에는 건물이 네 동밖에 없었으나, 현재는 1.7 평방킬로미터에 걸쳐 16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있다.
웨스트우드 북쪽에 위치하며 선셋 대로의 남쪽에 걸쳐있는 캠퍼스는 부촌인 벨에어로 둘러쌓여있고 베벌리힐스, 할리우드,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가까워 문화 활동과 오락 생활에 유리한 위치조건을 가지고 있다.
크게 북 캠퍼스(North Campus)와 남 캠퍼스(South Campus)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북 캠퍼스는 오래된 고풍의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인문 계열의 전공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 캠퍼스는 이공 계열의 전공들이 현대식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프랭크 D. 머피(Frank D. Murphy) 정원, 조각 공원, 분수가 있으며, 모든 건물이 도보로 연결되어있고 광장과 공원이 많다.
지역적 이점으로 일년 내내 맑고 시원하고 따뜻한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주변에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많으며, 오락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이 풍족하다.
건축
건물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또는 로마네스크 부흥주의 양식이며, 넓은 정원과 잔디 그리고 이국적인 나무들로 캠퍼스가 아름답다.
초기 건물들은 Allison형제에 의해 지어졌고, 20세기에는 UC 샌디에이고를 설계한 William Pereira 등 유명 건축가로부터 건물을 설계받았다.
현대 건물들은 I. M. 페이, 시저 펠리, 로버트 벤투리와 같은 유명 건축가로부터 설계되었고 현재 많은 건물들이 공사중에 있다.
영화 배경
헐리우드와 가까운 위치로, 많은 영화가 촬영되었다. 영화 《잡스 (영화)》, 《금발이 너무해》, 《아메리칸 파이》부터 한국의 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가 촬영된 곳이다.
주요 건물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당(Basilica of Sant'Ambrogio)에서 모티브를 따온 로이스 홀(Royce Hall)은 아름다운 건축뿐만아니라 이곳에서 열리는 공연들로 유명하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엘라 피츠제럴드, 마일스 데이비스, 조지 거슈윈, 레너드 번스타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음악계 거장들의 공연과 존 F. 케네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설도 개최한 콘서트 홀이 있다. 이 건물은 1994년 지진으로 피해가 있었는데, 71만 달러를 들여 보수한 후 스티비 원더 등 유명 가수의 공연도 있었다.
캠퍼스 전경을 내려다보는 전망을 가진 잔 계단(Jann Steps)은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연설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프랭크 D. 머피(Frank D. Murphy) 정원은 로댕, 미로, 마티스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통
문화의 도시답게 많은 가수와 연예인을 초청해 공연을 주최하며 학생들이 많이 참여한다. 이 지역사회에 봉사와 과학기술적 교류가 활발하다. 이처럼 사회적 참여가 높으면서도 같은 지역에 위치한 사립 USC(남가주 대학교)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있는데, 이들간 학문 및 스포츠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일원으로서 청색과 노란색 계열을 상징으로 사용하는데, UCLA의 트루 블루(True Blue)와 금색은 학교의 주된 색상으로, 이는 스포츠 팀과 응원 팀 등에 널리 응용되어 학교를 상징한다.
기말 고사 주간 밤에 옷을 벗고 캠퍼스를 뛰어다니는 전통인 'Midnight Yell(Undie Run)'도 있다.
스포츠
이 대학은 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스포츠 스타를 배출함은 물론, 대학 중 최다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UCLA의 NCAA(미국대학스포츠협회) 우승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남자 스포츠 (71회)
농구 - 11회
미식축구 - 1회
골프 - 2회
체조 - 2회
축구 - 4회
수영 - 1회
육상 - 8회
테니스 - 16회
배구 - 19회
수상폴로 - 8회
여자 스포츠 (37회)
골프 - 3회
체조 - 6회
육상 - 5회
소프트볼 - 11회
테니스 - 1회
배구 - 4회
수상폴로 - 7회
지미 코너스, 아서 애시 등 유명 테니스 선수부터 재키 로빈슨, 카림 압둘-자바, 카를로스 보카네그라(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많이 배출하였다.
저명한 동문
12명의 로즈 장학생과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학계와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유명 인사들이 UCLA를 졸업했다. 다음은 이 학교가 배출한 명예 수상자 수의 목록이다.
노벨상 수상자 - 15명 (교수, 졸업생), 이중 7명이 졸업생
퓰리처상 수상자 - 3명
필즈상 수상자 - 1명
아카데미상 수상자 - 13명
프리츠커상 수상자 - 2명
올림픽 메달리스트 - 214명(금 106, 은 54, 동 54)
로즈 장학생 - 12명
저명한 졸업생으로는 정계에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커스틴 질러브랜드, 전 로스앤젤레스 시장 토머스 브래들리와 안토니오 빌라레이고사, 재계에 블랙록 회장 겸 CEO 로런스 핑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마이클 모하임, 앨런 애덤과 프랭크 피어스, 마이스페이스 공동설립자 톰 앤더슨, 구글 부사장 빈트 서프, 브로드컴 공동설립자 헨리 새뮤얼리, 학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 예술/문학계에 아카데미상 수상 작곡가 존 윌리엄스, 퓰리처상 수상 작가 마틴 셔윈,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하고 오스카상을 다섯 번 수상한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배우 벤 스틸러. 팀 로빈스, 제임스 프랭코, 조지 타케이, 숀 애스틴, 홀랜드 로든, 마일로 벤티밀리아, 캐럴 버넷, 가수 세라 바렐리스, 록밴드 도어스의 짐 모리슨과 레이 만자렉, 록밴드 린킨파크의 브래드 델슨, 록밴드 마룬 5의 미키 매든, 록밴드 배드 릴리전의 그렉 그래핀이 있으며 스포츠계에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카를로스 보카네그라, 2014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멥 케플레지기 등이 있다. 한인 동문으로는 전산학자 전길남이 대표적이다.
또한 UCLA는 화려한 교수진을 자랑하는데 현재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생리학/지리학/역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 나치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사울 프리드랜더, 필즈상을 수상한 수학자 테렌스 타오,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생리학/약리학자 루이스 이그나로, 노벨 화학자 폴 보이어, 노벨 경제학자 로이드 섀플리가 UCLA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같이 보기
캘리포니아 대학교
UCLA 데이비드 게펜 의과대학
UCLA 법학대학원
UCLA 유학생 정착 안내서
참조
외부 링크
UCLA 한인학생회(대학원생) 홈페이지
UCLA 한인학생회 (학부생) 홈페이지
UKV(United Korean Voice) 홈페이지
학교 소개 영상
학교 소개 영상
1881년 설립
미국 대학 협회
캘리포니아주의 대학교
미국의 공립 대학
로스앤젤레스의 교육
로스앤젤레스의 건축물
로스앤젤레스의 대학교<|end_of_text|>
| 10.225325 | 2,380.664307 |
39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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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Dragostea%20din%20t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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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gostea din t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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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Dragostea din tei
### 기사:
〈Dragostea din Tei(드라고스테아 딘 테이, )〉는 몰도바 팝 그룹인 O-Zone의 루마니아어 싱글이다. O-Zone의 멤버 단 벌란(Dan Bălan)이 작사·작곡하였다. 2003년 O-Zone이 활동하고 있던 루마니아에서 싱글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루마니아 댄스 가수 하이두치(Haiducii, 본명 파울라 미트라케 Paula Mitrache)가 같은 곡을 부른 것을 2004년 이탈리아에서 싱글 음반으로 발매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에 힘입어 O-Zone의 원곡도 기타 유럽 국가에서 2004년 봄을 전후하여 싱글 음반으로 발매되어 유럽에서 2004년 최고의 여름 인기곡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해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O-Zone과 하이두치는 서로 상대방이 곡을 허가 없이 도용했다고 주장했고 O-Zone이 하이두치를 고발하자 하이두치 역시 맞고소로 대응했으며 루마니아 재판소는 해당곡의 작사 및 작곡자를 가려내는 과정을 거쳤는데 O-Zone의 멤버인 단 벌란이 드라고스테아 딘 테이의 작곡가라는 것을 밝혀내게 되어 O-Zone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하이두치는 전 세계적인 비판을 받고 해체되었다.
O-Zone과 하이두치가 부른 〈드라고스테아 딘 테이〉의 두 버전은 매우 비슷하다. 다른 점은 뮤직비디오의 내용인데 O-Zone의 곡은 경비행기를 빌려서 하늘에 떠 있는 경비행기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된 것이지만 하이두치의 곡은 호텔을 빌려서 촬영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하이두치의 곡이 인기 순위 1위에 올랐으나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O-Zone의 곡이 발매된 영국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O-Zone의 곡이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 재판 이후 두 버전이 동시에 1, 2위에 오르는 일도 일어났다.
인터넷에서의 인기와 리메이크
〈드라고스테아 딘 테이〉는 유럽에서 최고 인기를 달렸지만 미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게리 브롤스마(Gary Brolsma)라는 미국인이 이 음악을 립싱크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이것은 곧 큰 인기를 끌었고, 2005년 2월에는 뉴욕 타임즈에 실리기까지 했다. ‘Numa Numa’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동영상은 여러 가지로 패러디되기도 했다.주로 딥페이크를 이용해서 특정인의 얼굴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일본 2채널에서 ‘마이야히(マイアヒ)’라는 제목으로, 2채널 특유의 아스키 아트 플래시로도 나왔다. 이 플래시들은 대부분 루마니아어 가사를 일본어 발음으로 옮겨서 말이 안 되는 가사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잠시 여러 플래시 동영상이 퍼졌었지만, 이 플래시 동영상들은 일본어를 잘 알고 있어야만 이해가 가는 내용이라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또 판타지 개그의 제작자인 장땡도 이 곡을 이용한 플래시 동영상을 제작하였다.
2005년 3월에는 《恋のマイアヒ(사랑의 마이아히)》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싱글 음반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리믹스 음반이 출시되었다. 이런 인기의 영향인지 2006년 2월에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이 음반을 대한민국에 발매하였다.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인 현영의 1집 앨범에는 〈드라고스테아 딘 테이〉의 번안곡인 〈누나의 꿈〉이 수록되어 있다.
싱가포르의 가수인 곽미미(郭美美)는 〈드라고스테아 딘 테이〉의 번안곡인 〈부파부파〉()을 발표했다.
독일의 아티스트 이탈로브라더스의 곡인 〈My Life Is A Party〉는 리메이크 중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곡으로 불린다.
리한나가 피처링한 T.I.의 곡 《Live Your Life》는 이 곡을 샘플링했다.
2018년에는 단 벌란이 〈누마 누마 2〉를 발표했다. 말리 워터스가 피처링했으며 에이벡스에서 출시를 했기 때문에 《사랑의 마이아히 2018》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외부 링크
O-Zone 공식 사이트
사랑의 마이야히 일본 공식 사이트
마이야히 플래시 동영상
드라고스테아 딘 테이 뮤직비디오
몰도바의 노래
루마니아의 노래
다언어 노래
인터넷 문화
음악 밈
2004년 싱글
2004년 노래
2000년대 인터넷 문화<|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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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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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메탄올
### 기사:
메탄올(, ), 화학식 CH3OH), 메틸알코올, 목정(木精)은 가장 간단한 알코올 화합물로 무색의 휘발성, 가연성, 유독성 액체이다. 메탄올은 극성 분자이고, 수소 결합을 한다.
메탄올은 혐기성 생물의 대사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조금 마시면 눈이 멀고, 많이 마시면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제법
천연가스 또는 코크스로 가스 중의 메탄을 산소, 수증기와 함께 일산화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합성가스로 만든 후, 이것을 다시 촉매에서 반응시켜 메탄올로 만든다. 일반적인 용도는 포르말린 제조에 주로 사용되며 각종 에스테르류와 할로겐화물 외에 아세트산의 제조에도 쓰인다.
혈구염색과 메탄올
혈구들을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혈구 관찰 시 슬라이드 글라스에 메틸알코올을 가하는데, 이것을 고정이라고 하며, 특히 백혈구의 고정에 용이하다.
메탄올과 에탄올
에탄올과 메탄올은 알코올이라는 같은 부류의 물질이며, 성질이 비슷하다. 단지, 메탄올이 에탄올에 비해 탄소와 수소를 적게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메탄올의 끓는점이 에탄올보다 낮다. 따라서, 물과 메탄올이 섞여 있는 혼합물의 분리도 분별 증류를 이용하면 된다. 메탄올은 약 64°C에서 그래프가 일정해지면서 메탄올이 먼저 나오며, 100°C에서 물이 끓어 나오게 된다. 반면, 물과 에탄올의 분리에서는 에탄올이 약 78°C 정도에서 끓어 나오며, 물은 100°C에서 끓어 나온다. 메탄올의 연소 반응은 다음과 같다.
2CH3OH (l) + 3O2 (g) → 2CO2(g) + 4H2O (l)
또한 메탄올은 인체 내에 흡수 시, 간에서 폼알데하이드라는 물질로 변환되어 인체에 치명적인 반면, 에탄올은 인체 내에 흡수되어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독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물질로 변화하여 음용이 가능하다. 에탄올은 술의 기본적인 원료로 쓰인다. 반면 메탄올은 알코올 램프 연료 및 화공 약품, 용제로 주로 쓰인다.
독성
메탄올은 인체 내에 흡수 시, 폼알데하이드라는 물질로 변환되어 인체에 치명적이다. WHO 필수 의약품 목록에 있는 포메피졸(:en:Fomepizole)이라는 해독제가 있다.
만일 실수로 메탄올을 섭취했고 포메피졸을 구할 수 없는 경우 응급 처치로 다량의 에탄올을 투여하면 된다. 즉, 술을 약간 마시면 된다. 그 이유는 에탄올과 메탄올이 신체 내부로 동시에 유입되면 에탄올이 먼저 분해되며 섭취된 메탄올은 에탄올이 분해될 때까지 분해되지 않고 유지되다가 그대로 노폐물이 되어 신체 외부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용도
전자제품 칩 제조 및 식각에 이용된다.
폐수처리에 이용된다.
바이오디젤 생산에 이용된다.
석유, 화학, 식품공업에 이용된다.
각주
일차 알코올
알코올 용매
연료
에너지 저장
GABAA 양성 알로스테릭 조절자
신경독<|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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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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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기류시
### 기사:
기류시()은 일본 군마현 동부에 있는 시이다.
일본 유수한 방직업 도시이고 나라 시대부터 견직물의 명산지로서 알려져 기류 직으로 불리는 고급 직물로 교토의 니시진과 대등하게 칭해졌다.역사가 오래되고 문화재가 많은 특징 등으로 "동쪽의 작은 교토", 일본 최초의 매뉴팩처에 의한 섬유업의 발전으로부터 "일본의 맨체스터"라고 해진다.
1921년에 시가 될 당시의 구역은 옛 야마다 군에 해당했다. 현재의 시역은 옛 야마다 군, 아시카가 군, 아소 군, 세타 군으로 구성된다. 시역의 인구는 12만명이고 인접하는 미도리시나 옛 야부즈카혼 정을 포함한 옛 기류 광역권의 인구는 20만 명이다.
지리
간토평야의 북단의 한 구석 있고 북쪽에는 아시오 산지가 늘어서있다. 또 시내에는 와타라세 강이나 기류 강이 흐른다.
시역의 7할 이상이 산지이고 적은 평지의 대부분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기류 시가지는 기류 강이 아시오 산지로부터 간토평야로 흐르기 시작하는 지점에 형성된 계곡 입구에 있는 집락을 기초로 발달하고 있다.
2005년에 합병한 니사토 지구, 구로호네 지구(옛 니사토 촌, 구로호네 촌)는 기류 시 중심부와는 사이에 미도리시를 두고 월경지가 되어있다. 합병 이전의 기류 시의 면적(137.47km)과 월경지로서 더해진 옛 니사토 촌, 구로호네 촌의 합계 면적(137.10km)이 거의 같고, 이러한 대규모 월경지가 있는 자치체는 일본에서도 몇 개 정도 밖에 없다.
인접한 자치체
군마 현
누마타시
마에바시시
미도리시
오타시
이세사키시
도치기현
사노시
아시카가시
역사
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에 수반해 야마다군 기류정, 우메다촌, 아이오이촌, 가와우치촌, 사카이노촌, 히로사와촌, 미나미세타군 구로호네촌, 니사토촌이 성립하였다.
1896년 4월 1일 - 히가시군마군, 미나미세타군과 합병해 세타군이 성립하였다.
1921년 3월 1일 - 기류정이 시로 승격해 기류시가 되었다.
1933년 4월 1일 - 사카이노촌을 편입하였다.
1937년 4월 1일 - 히로사와촌을 편입하였다.
1954년 10월 1일 - 야마다군 우메다촌, 아이오이촌, 가와우치촌의 일부가 기류시에 편입되었다.
2005년 6월 13일 - 니사토 촌(), 구로호네 촌()을 편입하였다..
교통
도로
국도 제50호선
국도 제122호선
국도 제353호선
철도
도부 철도
기류 선: 신키류 역 - 아이오이 역
동일본 여객철도
료모 선: 기류역
와타라세 계곡 철도
와타라세 계곡선
기류 역 - 시모신덴 역 - 아이오이 역 - 운동공원역 - (미도리 시에 2역 있음) - 모토주쿠 역 - 미즈누마역
조모 전기 철도
조모 선: 니사토 역 - 닛카와 역 - 히가시닛카와 역 - (미도리 시에 1역 있음) - 기류 야구장 앞 역 - 덴노주쿠 역 - 후지야마시타 역 - 마루야마시타 역 - 니시키류 역
인구
기후
자매 도시
나루토시( 도쿠시마현)
콜롬버스( 조지아주)
히타치시( 이바라키현)
주요 인물
시노하라 료코 (篠原 涼子)
각주
외부 링크
기류 시 공식 사이트
군마현의 도시
월경지
야마다군 (군마현)<|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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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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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십자군
### 기사:
십자군 전쟁()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에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종교전쟁(교황의 권력을 찾기 위한 전쟁)이다. 좁은 의미의 십자군이라고 하면 성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서 진행된 전쟁들을 가리키나, 넓은 의미에서 중세의 기독교회에서 주동한 다른 전쟁들을 십자군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760년경을 전후하여 처음 사용례가 나타난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을 소환한 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본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있던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위한 군사원조가 그 명분이었다. 우르바노 2세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우르바노 2세 및 우르바노 2세의 소환에 응하여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의 진정한 동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르바노 2세의 대전략은 아마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지중해 동해안에는 4개의 십자군 국가들(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졌다. 우르바노 2세의 선동에 서유럽의 모든 계층이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이것이 이후 다른 모든 십자군들의 선례가 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의용병들은 공개적으로 서원을 세우고 교회의 면벌부를 수여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단체 승천하게 될 것을 기대하거나 자신의 모든 죄를 신이 사해줄 것을 희망한 이들도 있었다. 종교적 동기 외에도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이후 6개의 주요 십자군 국가들과 그보다 세력이 미미한 여러 군소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십자군 국가들은 결국 모두 멸망하면서 2세기에 걸친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1291년 최후의 기독교 전초기지가 무너진 뒤 성지 방면으로는 더 이상 십자군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유럽과 서유럽 내부에서의 십자군은 여러 번 더 이루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어 발트 지역과 메클렌부르크, 루사티아 일대의 비기독교 부족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3세기 초에는 독일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독일기사단국을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이용했다. 14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자 기독교 세계는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와 1444년 바르나 전투의 대패로 가톨릭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과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것의 양대 대형 사건은 이 시기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의 최종적 중심축을 매듭지었다. 이후로도 구호기사단 같은 조직들이 존속하면서 십자군의 개념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유럽 세계의 관심은 이슬람 세계에서 신대륙으로 옮겨갔다.
십자군에 대한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십자군의 명분과 도덕적으로 결함되는 행동들을 지적한다.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군들은 이동하는 경로상에서 약탈을 저지르곤 했고, 십자군 지도자들은 획득한 영토를 본래 명분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기보다 자기 영토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 십자군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라인란트 학살), 제4차 십자군 때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 약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분명히 서양문명사에 유의미한 영향을 남겼다. 십자군으로 인해 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해양 공화국들이 번영했다. 교황의 지도에 따라 라틴 교회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영웅주의, 기사도, 신앙심은 중세 문학과 철학의 촉매가 되었다.
용어
우르바노 2세가 처음 십자군을 소집했을 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대에는 "여행()" 또는 "순례()"라는 말들이 사용되었다. 12세기에 "십자가를 지닌 자(, )"라는 말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 종교전쟁을 가리키는 용어는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십자군"을 의미하는 영어 의 어원을 < , , , < 에서 찾는다. 이는 "십자가하다.", "십자가되다.", "십자가 표를 하다.", "십자가를 취하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명사에 기인한 표현들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중세 영어는 고프랑스에에서 유래하여 13세기-15세기에는 croiserie, 15-17세기에는 croisée라고 했다. 1575년경 croisade 가 처음 출현하여 1760년경까지 주도적인 표기 자리를 지켰다. 1095년부터 시작된 기독교 종교전쟁들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학자들이 "십자군(crusade)"이라는 말을 선택했지만, 워낙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들을 하나의 단어로 칭하는 것은, 특히 초기 십자군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지중해 동해안의 성지에 대해 이루어진 십자군들은 전통적으로 총 9회차로 구분된다. 최초는 1095년-1099년의 제1차 십자군이고 최후는 1271년-1272년의 제9차 십자군이다. 이 구분은 찰스 밀스가 1820년 책 《십자군 성지탈환경략사》에서 처음 사용했다. 밀스의 분류는 다소 임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편리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사용된다. 다만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도한 제5차, 제6차 십자군은 하나의 원정으로 묶을 수 있고,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지도한 제8차, 제9차 십자군도 마찬가지로 묶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십자군이 총 7회차로 정리된다.
"십자군"이라고 불릴 만한 종교전쟁의 범주는 학자마다 사용하는 맥락이 다르다. 자일스 컨스터블은 역사학자들의 십자군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전통파(Traditionalists): 지중해 동해안 성지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들을 돕거나 예루살렘과 성묘를 해방시킬 것을 목적으로 성지에 대해 전개된 기독교 측의 원정만을 십자군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십자군은 1095년에 시작되어 1291년 종료되었다.
다원파(Pluralists): 당시 재임 중인 교황의 승인에 따라 소집된 원정을 모두 십자군이라고 한다. 이것은 교황이 소집한 모든 군사원정이 그 원인, 정당화, 원정 지역에 무관하게 모두 십자군으로서 동등한 유효성을 갖는다는 기독교회의 입장을 반영한다. 또한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 같은 십자군 시대 당대인들도 이렇게 생각했다. 이 넓은 정의에 따르면 이교도 원주민을 개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북방 십자군, 기독교 이단을 토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알비 십자군 및 후스 전쟁도 십자군이 된다. 또한 정치적 이득을 목적으로 한 전쟁, 예컨대 시칠리아의 아라곤 십자군 역시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가 1202년에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를 파문하고 토벌을 명했기에 십자군이 된다. 또 여러 교황들이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 아들들을 파문하고 내린 토벌령도 십자군이고, 잉글랜드왕 헨리 3세에 대한 두 차례의 토벌령도 십자군이며,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낸 레콩키스타도 십자군이다.
일반파(Generalists): 라틴 교회와 관련되어 신앙 수호를 목적으로 싸운 모든 종교전쟁을 십자군으로 본다.
대중파(Popularists): 종교적 열정에 기반하여 대중 절대다수의 참여로 고조된 것들만 십자군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제1차 십자군과 군중 십자군만이 십자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을 사라센인이라고 불렀다. "무슬림" 및 "이슬람"이라는 말은 유럽에서는 16세기 이전까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원래 "사라센인"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아라비아 속주의 사막에 사는 비아랍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 아랍 부족들도 사라센인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게 의미가 변화하였고, 12세기가 되면 오늘날의 "무슬림"과 같은 의미의 민족적 종교적 지칭어로 중세 문헌에서 사용되었다. 한편 무슬림들은 서유럽인들을 "프랑크인" 또는 "라틴인"이라고 부르며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인"과 구분했다. 알리 이븐 알아시르 같은 중세 무슬림 역사가들은 십자군을 "프랑크 전쟁(, )"이라고 불렀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서양에서 사용하는 "십자군"이라는 말을 그대로 수입하여 "십자가 원정들(, )"라고 부른다.
지중해 동해안 십자군
배경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고, 632년 죽기 전까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하나의 정체로 통일시켰다. 아랍인들은 7세기와 8세기를 거치며 군사 정복을 통해 급속히 팽창했다. 그들의 영향력 판도는 인도 아대륙 북서부와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 피레네산맥에 걸쳤다. 예루살렘은 637년 공성전 때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지배한 뒤로도 아랍 세계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어느 정도 관용하며 무역과 정치적 관계를 지속했다. 천주교도들의 성지순례가 허용되었고, 무슬림 영토에 사는 기독교도들에게는 딤미의 지위가 내려져 법적 보호를 받았다. 기독교도 딤미들은 교회를 계속 운영했으며, 서로 종교가 다른 집안 사이의 통혼도 극히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와 신념들이 혼재하며 평화롭게 경쟁하던 관계는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071년 셀주크 튀르크족이 비잔틴 육군을 대패시킨 만지케르트 전투가 전통적으로 그 변곡점으로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 천주교도 순례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이런 상황들이 전해졌고, 시리아 지역의 항구들과 예루살렘은 점차 각박해졌다.
기독교도들은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정복당했던 이베리아반도를 재정복하는 레콩키스타를 8세기부터 진행해 왔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레콩키스타 운동이 전환점을 맞았다. 유사한 시기인 1091년, 노르만인 모험가 로제 드 오트빌이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시칠리아 토후국을 무너뜨렸다.
이렇게 여러 전선에서 권력쟁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1054년에는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 기독교 세계가 두쪽나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 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령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권력을 증가시키려 시도해 왔고, 그 과정에서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중 어느 쪽에 사제 서임권에 대한 우선적 권리가 있느냐는 서임권 투쟁이 1075년경부터 시작되어 제1차 십자군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서임권 투쟁 중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대립교황 클레멘트 3세가 옹립되어 군림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초기 재임기 대부분을 로마 밖에서 망명생활로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증대시키고자 한 교황령의 종교적 선전선동에 의해 무슬림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성지를 되찾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천주교 세계 인구 전반에 걸쳐 극렬해졌다. 십자군 종군은 그 자체로 죄를 씻을 수 있는 보속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
11세기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소규모 용병부대 정도를 기대했던 것 같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의 재정과 권위를 다잡은 중흥군주였지만, 여전히 많은 외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나톨리아 지역을 급속히 식민하고 있는 튀르크족이 가장 골치였다. 같은 해에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는 이 안건을 논의하며 십자군 소집을 설교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르바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얼마 전 갈라진 동서 교회를 재통합, 자신이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피에르 레르미트라는 자가 수천 명의 기독교도 빈민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것을 오늘날 흔히 군중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피에르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임박한 말세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천국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 군중 십자군의 동기에는 빈민들의 구세주의가 강하게 깔려 있었으며,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만 하면 바로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군중 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길에 독일에서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사태를 일으키는데, 이를 라인란트 학살이라고 한다. 스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등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행위가 일어났다. 이런 적대행위는 제한적 폭력에서 완전한 군사적 공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에 도착한 뒤 귀족들을 기다리라는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무시하고 니케아로 쳐들어갔다가 튀르크족의 기습을 받고 대패, 불과 3천 명만 살아남았다(키베토트 전투).
당시 프랑스왕 필리프 1세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모두 우르바노 2세와 분쟁 관계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저지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들이 이 모험에 동참했다. 그 중 필두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노회한 정객이었던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질이었다. 한편 남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하지만 무력이 강용한 노르만인 귀족 보에몽 드 타란토와 그 조카 탕크레드 드 오트빌이 레몽에 맞서 그와 경쟁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그 동생 보두앵 드 볼로뉴가 로렌, 로타링기아, 독일에서 소집된 군대를 이끌고 여기에 합류했다. 이상 다섯 명이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로베르 2세 드 노르망디 공작, 에티엥 2세 드 블루아 백작, 로베르 2세 드 플랑드르 백작이 소집한 북프랑스군도 합류했다. 이렇게 모인 제1차 십자군의 총 병력은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10만 명 정도였다. 그들은 육상으로 동진하여 비잔티움에 도달, 알렉시오스 1세의 조심스러운 환영을 받았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제후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과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룸 술탄국의 수도로 선언한 니케아를 첫 공략 목표로 삼을 것을 설득했다. 오합지졸 군중 십자군을 무찌르고 방심하고 있던 킬리지 술탄은 다른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고 니케아를 비워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이 육상에서 공성하고 동로마군이 해상 지원하면서 니케아가 함락되었다. 이후 십자군은 이집트로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 했는데, 십자군이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종교적 분열을 이용하려 한 첫 사례였다.
십자군이 튀르크족의 궁기병 전술과 제대로 처음 맞붙어본 것은 도릴라이움 전투 때였다.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인 선두 부대가 튀르크 경기병대에게 습격당했다. 노르만인들은 몇 시간 동안 버텼고,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자 튀르크족은 후퇴했다. 이 전투 이후 셀주크 튀르크는 십자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또한 말리크 샤 1세가 죽고 튀르크족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 각각 후계 샤를 옹립하고 서로 싸우는 분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십자군은 3개월에 걸친 고된 행군 끝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굶주림과 갈증, 질병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고, 보두앵은 에데사에 자기 나라를 세우겠다고 기사 100명을 데리고 이탈하기까지 했다. 십자군은 8개월에 걸쳐 안티오키아를 공성했지만 자원의 부족으로 도시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안티오키아 시민들 역시 침략군을 격퇴할 만한 자원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에몽이 수비병 한 명을 꾀어 성문을 열게 했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십자군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인,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시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제 십자군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 술탄은 모술 영주 카르부가에게 군대를 내주고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게 했다. 십자군에서 이탈한 에티엥이 동로마측에게 전쟁의 대의명분을 이미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동로마군은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수비를 도와주지 않았다. 탈영자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십자군은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카르부가가 십자군을 모조리 죽이겠다며 거부했다. 그러던 와중 피에르 바르텔레미가 성 안에서 성창을 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수비군의 사기가 고양되었다. 보에몽은 이제 남은 선택지는 결전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공격군에 대한 역습을 개시했다. 카르부가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무슬림 특유의 분파주의로 분열되어 있었던데다 예상치 못한 십자군의 습격에 놀라 공성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후 십자군은 획득한 영토를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며 안티오키아에 몇 개월을 눌러앉았다. 그러던 와중 이집트의 파티마조가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취했으며, 이집트인들이 지배를 공고히하기 전이 공격의 기회로 부상함에 따라 마침내 공격이 재개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계속 남아서, 점령지를 동로마 황제에게 반환하겠다던 맹세를 어기고 안티오키아를 자기 것으로 취했다. 이후 나머지 십자군은 레몽의 지휘하에 지중해 동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쾌진격했다.
예루살렘에 대한 첫 공격은 십자군측의 자원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노바인들이 자파를 통해 장인들과 보급품을 전달해오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십자군은 거대한 공성병기 두 개를 건조했고, 그 중 고드프루아가 지휘한 공성병기가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성벽을 깨뜨렸다. 이후 이틀에 걸쳐 십자군은 예루살렘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학살의 수효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성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는 사실은 십자군의 평판이 야만으로 굳어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고드프루아는 파티마조 칼리파의 고관 알아프달 샤한샤가 이끄는 지원군을 아스칼론 전투에서 깨뜨리면서 프랑크인의 우위를 확실히 했다. 무슬림 지원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알아프달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십자군은 자신들의 성지순례가 완료되었다고 여기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성지에 남은 것은 고드프루아와 기사 300명, 졸병 2,000명 뿐이었다. 고드프루아 외에 남은 제후는 자기 나라를 세울 야망을 가지고 있던 탕크레드 뿐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민중들 사이에 큰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경건한 천주교도들은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과 안티오키아에서의 동방교회인 학살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한편 이슬람 세계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해 남긴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다. 1130년 이전에는 문헌적 증거가 지극히 희박하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오해에 더 큰 원인이 돌려지고 있다. 알아프달을 비롯한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정복과 영구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동기로 충만한 전사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그저 동로마 황제의 사주를 받은 용병대의 선두집단쯤으로 여겼다. 또한 이슬람 세계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시아파와 이집트의 수니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전쟁의 원인이 된 튀르크족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로 분열되어 있었다. 바그다드에서는 셀주크 튀르크 술탄이 아바스조 칼리파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범세계적 반격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12세기
이후 12세기 초의 교황들은 새로이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동지중해 지역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을 계속 파병했다. 1120년대의 주요 사건들로는 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십자군, 그리고 성전기사단의 창설 등이 있다. 같은 시기, 교황의 적에게 반하는 것을 통해 면벌을 받는 구상이 흥하였고 이는 정치적 목적의 십자군들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한편,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28년 알레포를, 1144년 에데사를 함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서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각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지만, 그 동안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1차 십자군 때 그러했듯 이번에도 십자군들은 애먼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라인란트, 쾰른,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성지 탈환을 위한 금전을 내놓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다.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플랑드르에서 독일까지 여행하며 숱한 폭력을 목격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기독교도 제후들이 계속 승세를 점했다. 포르투갈왕 아폰수 1세가 리스본을, 러몸 버렁거 4세 데 바르셀로나 백작이 토르토사를 함락시켰다. 북유럽에서는 색슨인들과 데인인들이 아직 고대신을 믿는 슬라브족 민족인 벤트인을 토벌하는 벤트 십자군에 참여했다. 다만 이 시기 제2차 십자군 이외의 십자군을 공인하는 교황칙서가 내려진 적은 없다. 마침내 1162년 벤트인들은 소멸한 민족이 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수니파 칼리파인 아바스조에서 독립하여 969년부터 시아파 칼리파인 파티마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1121년부터 파티마조는 암살로 얼룩진 내부 분열의 수렁에 빠졌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는 이집트를 침공하려 했으나 이집트 측에서 160,000 황금 디나르를 바치면서 계획을 중지했다. 1163년, 비지어(칼리파 밑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재상) 자리에서 쫓겨난 샤와르가 장기의 아들인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딘을 방문하여 정치적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누르 앗딘의 지원이 십자군의 움직임을 예견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누르 앗딘은 십자군이 나일 강 유역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할 것이 자명해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르 앗딘은 쿠르드인 장군 시르쿠를 이집트로 파병하여 파티마조를 뒤집어 엎고 샤와르를 비지어에 복직시켰다. 그러자 샤와르는 독립을 선언하고 보두앵 3세의 동생이자 그 후계 예루살렘왕인 아모리 1세와 동맹했다. 그러다 아모리가 동맹을 파기하고 가열찬 공격을 가해오자 샤와르는 다시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누르 앗딘은 시르쿠를 두 번째로 파병했고, 아모리는 퇴각했다. 하지만 시리아군은 한 번 배신했던 샤와르를 잡아 죽였고, 시르쿠가 비지어로 임명되었다. 2개월 뒤 시르쿠는 사망하고 그 조카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가 비지어를 계승했다. 유수프는 "정의와 신념"이라는 뜻의 별명 살라흐 앗딘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누르 앗딘은 1174년 사망했다. 누르 앗딘은 십자군 시대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모두 손에 넣어 시리아를 통일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당대 무슬림들은 장기로부터 누르 앗딘을 이어 살라흐 앗딘으로까지 이어지는 무슬림 세력의 부활이라는 관념을 지지했지만, 그 과정은 말처럼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살라흐 앗딘은 칼리파의 모든 후계자들을 감금했다. 대개 이럴 경우 이전 왕조의 대를 끊기 위해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선에서 살려 주었다. 상전 누르 앗딘이 죽고 권력을 장악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에서 자치 정권을 수립해 할거하느냐, 동지중해 세계 제일의 무슬림이 되느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했다.
누르 앗딘이 죽으면서 그의 영토들은 분할되었다. 살라흐 앗딘은 바그다드의 아바스조 칼리파와 누르 앗딘의 아들 아스살리흐 이슬라미 알말리크에게 동시에 신종하면서, 수니파의 보호자의 위치를 점했다. 살라흐 앗딘은 전성기에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알레포는 장악하지 못했다. 예루살렘 왕국 측의 공격 계획에 대처하기 위한 수비군을 조직했지만, 살라흐 앗딘의 라틴 십자군과의 첫 교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나친 자신감과 전술적 착오로 인해 살라흐 앗딘은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 한 차례의 차질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십수 년에 걸친 정치, 강압, 저수준 군사행동을 통해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했다. 1186년 생명이 위중할 정도의 병을 겪고 난 뒤, 살라흐 앗딘은 이슬람 측의 대전사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라틴 십자군에 대한 전역을 개시했다. 당시 예루살렘왕 기는 예루살렘 왕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을 동원하여 야전에서 영격에 나섰지만, 살라흐 앗딘은 기의 부대를 수자원 보급이 불가능한 사막 속으로 끌어들인 뒤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섬멸했다(하틴 전투). 살라흐 앗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평화롭게 살던지, 아니면 40일 안에 퇴거하던지의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살라흐 앗딘의 수중에 떨어졌고, 왕도 예루살렘마저 5일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되었다. 아바스 베네딕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3세가 그 소식을 듣고 침통한 나머지 1187년 10월 19일 홧병으로 선종했다고 한다.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는 아우디타 트레멘디 칙서를 발표,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한편 1189년 8월 28일 성지에서는 기가 거점도시 아크레를 포위했다가 살라흐 앗딘에게 역포위를 당하면서 2년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양군 모두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오랫동안 스테일메이트 상태가 지속되었고, 십자군 측은 인육을 먹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제3차 십자군이 지중해 동해안까지 가는 길은 다사다난했다.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살레프 강에서 익사해 버려서, 프리드리히가 지휘하던 독일군 중 목적지까지 도달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편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 사자심왕은 바다를 통해 이동했는데, 리처드와 다른 배로 가던 리처드의 누이 조안과 약혼자 베렝겔라가 난파하여 키프로스에 조난되었다. 키프로스를 지배하고 있던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두 여자를 포로로 붙잡았고, 이에 리처드는 무슬림보다 먼저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하여 전쟁터인 아크레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프랑스왕 필리프 2세였고, 리처드는 1191년 6월 8일에 도착했다. 프랑스군과 앙주군의 도착으로 전세가 반전되었고, 아크레의 무슬림 수비대장이 7월 12일에 항복했다. 필리프는 이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병력들은 남겨두는 대신 자기는 프랑스 국내 문제를 해결하러 돌아가 버렸다. 반면 리처드는 지중해 동해안을 따라 계속 남하하면서 아르수프 근교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항구도시 자파를 탈환했다. 리처드는 예루살렘에서 걸어서 하루 거리 떨어진 곳까지 두 차례 진격했지만 자원의 부족으로 예루살렘 공략에는 실패했다. 이로써 리처드의 십자군도 끝났고, 프랑크인들의 사기는 치명타를 입었다. 3년의 휴전이 협상되어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가 보장되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 국내 문제와 신병으로 인해 동지중해를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살라흐 앗딘도 1193년 3월에 죽었다.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의 맹세를 대신 이루기 위해 1197년 십자군을 소집했다.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가 지휘하는 독일 십자군은 시돈과 베이루트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가 1197년 죽으면서 십자군들은 각자 영지를 보호하고 차기 황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으로 돌아갔다.
13세기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의 소집을 개시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십자군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이 있었다.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다. 단돌로의 목적은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해양력 확장이었고, 필리프는 자기 조카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동로마 황제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이 목적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임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4세의 친삼촌)를 폐위시켜야 했다.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를 공성했다. 식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을 즉각 파문했다.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면서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뒤 일단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이번에는 도시를 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들 절대다수를 학살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1,000 마일 떨어진 위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다. 청소년 및 소년들 여러 무리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른들은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지중해까지 도달한 어린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가장 희박하지만, 당시 천명된 대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시사해주는 지표가 된다.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 일대의 살라흐 앗딘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5차 십자군이다. 지휘관은 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하여 항복했다.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하여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원래는 십자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와 결혼했기에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고,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에게서 탈환된지 얼마 안 된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군주들 중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무슬림 근위병을 두고 심지어 하렘도 가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제6차 십자군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협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예루살렘의 거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에서 아크레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 알카밀과 동맹도 맺었다. 이런 조약을 맺는 것은 프리드리히가 이 일대 지역에 어떠한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케 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자기 직할령이 공격받자 프리드리히는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종종 원정을 벌였다. 1239년의 남작 십자군은 나바라왕 티발트 1세와 콘월 백작 리처드가 이끌었다. 이 십자군은 무력 외교와 아이유브조의 여러 파벌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음모 공작을 병행 실시했다. 이 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다. 하지만 그 중흥은 어디까지나 알카밀이 죽고 아이유브조가 분열되어 약화된 것에 기인했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다.
1244년, 한 무리의 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로 와서 다마스쿠스 토후 아스살리흐 이스마일과 계약했다. 그리고 화레즘 용병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용병대가 제멋대로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화레즘 용병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뒤이어 라포르비 전투에서 기독교도들과 시리아 무슬림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7차 십자군이다. 제7차 십자군은 1249년 이집트에 도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이는 만소우라에서 패배하고 다미에타 방면으로 후퇴하던 도중 포로로 붙잡혔다. 10년 기한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루이는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다. 루이는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면서 십자군 국가들의 공고화를 도모했다. 이후 1265년에서 1271년에 걸쳐,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가 프랑크인들을 해안의 소규모 전초기지 몇 곳으로 내몰고 나머지 땅을 모두 빼앗아갔다.
13세기 말의 동지중해의 정치 판도는 여러 세력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복잡했다. 바이바르스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는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루스 스텝 지역으로부터 노예를 수급해 오는 교역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여 바이바르스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루이 9세의 동생)과 대립하는 것을 도왔다.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되었고, 여러 세력이 영향력을 발휘하려 경쟁했다. 한편, 삽바스 전쟁의 결과 경쟁 해양 공화국 제노바로부터 아크레에서 티레에 이르는 영토를 빼앗은 베네치아는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기꺼이 무역했다. 바이바르스는 그러는 동시에 니케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제노바인들의 자유로운 통행도 보장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당주가 유사하게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샤를은 시칠리아와 비잔티움의 영토를 탈취하는 한편, 딸들을 라틴계 비잔티움 제위 요구자들에게 시집 보냈다. 1270년, 샤를의 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예루살렘 왕위를 노리던 샤를은 형을 설득해서 예루살렘이 아닌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초토화되었고 루이 본인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죽었다.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수행단만 계속 남아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짜리 휴전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로써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 1281년 교황 선거 결과 프랑스인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의 모든 권력이 샤를 당주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되었다. 샤를은 과거 제4차 십자군이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황제위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십자군을 일으키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대적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고, 아라곤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왕을 칭했다. 마르티노 4세는 페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을 토벌하는 아라곤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285년, 지중해 제국을 만들고자 평생을 바친 샤를 당주가 그 모든 노력이 무상하게 사망했다. 루이와 샤를 형제는 자신들을 교황청을 옹위하는 신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십자군 원정의 쇠퇴와 십자군 국가들의 파탄의 원인은 상당히 다면적이다. 무슬림 세계의 통일과 열정적 지하드를 통해 이를 설명하려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토머스 애스브리지 등의 학자들은 이것이 너무 단순화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무슬림들의 통합은 산발적이었으며, 지하드에 대한 열정은 간헐적이었다. 그보다 십자군 자체의 본질이 성지 정복과 방어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개인들의 순례 여행이었으며, 대부분의 십자군은 성지만 찍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십자군의 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십자군이 제각기 꿍꿍이가 있는 이들이 동상이몽하는, 중앙집권적 지도부가 없는 일회성 군대들의 집합이었다는 점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십자군 국가들이 국가로서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규모의 상비군이었다. 종교적 열정은 군사적 모험을 촉발시키는 데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지휘통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어려움을 나타냈다. 유럽에서의 작위 계승 분쟁들, 흉작과 이단 종파의 발생 등으로 인해 라틴 유럽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싸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터는 유럽의 본거지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는 보급과 통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카리스마적인 누르 앗딘이나 관대한 살라흐 앗딘, 무자비한 바이바르스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 근접성을 십분 발휘하여 보급상의 이점을 얻었고, 이것이 승리로 이어졌다. 1289년 트리폴리가,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은 완전히 지워졌다. 멸망한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도들은 키프로스 같은 섬으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거기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유럽 대륙 십자군
북방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12세기 교황들(첼레스티노 3세, 인노첸티오 3세, 호노리우스 3세, 그레고리오 9세)을 고무시켰고, 멀리 북동유럽 일대를 기독교화시키기 위한 군사원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원정들을 통칭 북방 십자군이라고 한다. 1147년의 벤트 십자군에는 색슨인, 데인인, 폴인들이 참여하여, 메클렌부르크와 루사티아 일대의 폴라비아 슬라브족, 속칭 "벤트족"을 강제로 개종시켰다. 1193년 첼레스티노 3세가 십자군을 소집하자 베르톨트 폰 하노버 주교가 1198년 여기에 호응했지만, 베르톨트는 대패를 하고 자기도 죽었다. 이에 인노첸티오 3세는 다시 십자군을 모집하는 칙사를 발표, 브레멘 주교 하르트비히 폰 우틀레데가 검우기사단과 함께 발트 지역 북동부 전역을 가톨릭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1226년에는 콘라트 1세가 독일기사단에 헤움노를 헌납하여 그 일대의 폴란드계 공후들을 대상으로 한 십자군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게 했다. 검우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1237년 검우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독일기사단에 합류시켜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만들었다. 12세기 중반이 되면 독일기사단은 프루센 정복을 완료했으며,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리투아니아를 굴복시키고 개종시켰다. 뿐만 아니라 프스코프 공화국이나 노브고로드 공화국 같은 동방정교회 세력과도 분쟁했지만, 이쪽은 결과가 그리 신통치 못했다. 1240년 네바 강 전투에서 노브고로드군이 스웨덴인이 주력인 가톨릭 군대를 패퇴시켰고, 2년 뒤에는 빙상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노브고로드군에게 대패했다.
알비 십자군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알비파라고도 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십자군이다. 카타리파는 프랑스 남부에서 상당한 교세를 모으고 있었다. 십자군에게 카타리파는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교세 중심지였던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위의 유일한 추정상속인 잔이 루이 9세의 남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잔과 알퐁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못한 채 잔이 죽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의 직할령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프랑스왕 입장에서 알비 십자군의 실제 동기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된다.
보스니아 십자군
보스니아 십자군은 독립 보스니아 교회 토벌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이다. 보스니아 교회는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1216년, 보스니아를 개종시키기 위한 사절이 파견되었으나 개종에 실패했다. 1225년 호노리우스 3세는 헝가리인들에게 보스니아에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이 모히 전투에서 몽골에게 패배하면서 보스니아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1234년 그레고리오 9세가 재차 십자군을 독려했지만 이번에는 보스니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격퇴해냈다.
레콩키스타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이베리아 기사단이 이합집산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산티아고 기사단을 형성했고, 이들을 돕는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212년에서 1265년 사이에 무어인, 무와히드조 등 무슬림 세력을 크게 몰아냈고, 교황이 승인한 이베리아 십자군들의 도움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라나다 토후국은 1492년까지 존속했지만, 그라나다마저 멸망한 이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다.
14세기, 15세기, 16세기
대 오스만 십자군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던 14세기를 거쳐, 14-15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발칸반도 정복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십자군이 이루어지게 된다. 1309년, 잉글랜드, 프랑스 북동부, 독일에서 30,000 여명의 농민들이 모였으나 아비뇽까지 가서 거기서 해산했다. 1365년,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를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이라고 한다. 피에르 1세의 동기는 종교적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만큼 경제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90년에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을 적으로 삼은 바르바리 십자군을 지휘했다. 하지만 10주간의 공방전 끝에 십자군은 10년 기한의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오스만 튀르크는 발칸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동로마의 영향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한 뼘 밖에 남지 않았다. 1393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이듬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서방 교회의 분열로 교황 세력이 아비뇽과 로마로 두쪽이 난 와중에도 튀르크족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선언했다. 이 십자군은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지휘했다. 많은 프랑스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의 군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부르고뉴 공자 장이 두각을 드러냈다.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에게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다뉴브 강에 도달한 십자군은 바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9월 25일 오스만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을 깨뜨리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오스만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했고, 술탄 무라드 2세가 1444년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 십자군이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마지막 헝가리인 원정대도 격파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가 베오그라드에서 농성했다. 에네아스 실비우스(훗날의 교황 비오 2세)와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토가 십자군 소집을 선동했고, 신성로마제국의 공후들이 라티스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의회에서 원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 없었다. 1487년 4월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보이아, 피에몬테, 도피네 일대에서 발도파 이단이 퍼지고 있으니 토벌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중 무언가 행동이 이루어진 곳은 도피네 뿐이었고, 그나마도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이 시기가 되면 지중해 주변에서 오스만에게 유의미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는 베네치아가 유일했지만, 베네치아의 소위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은 1718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계가 무슬림 세계를 최대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와 다투면서, 독일의 개신교도 제후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후스 십자군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진행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려 한 십자군이다.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의 대 후스파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로 교리 차이로 반목하던 후스파의 내부 종파들이 단결하여 침략자 십자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스 전쟁은 1436년 끝났지만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천주교회는 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을 맺어야 했다.
십자군의 유산
십자군 서술의 사학사
각주
외부 링크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성지 탈환 주장
중세
예루살렘의 역사
기독교화
침략전쟁<|end_of_text|>
| 12.68799 | 2,601.631592 |
16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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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3%B0%EA%B0%80%EB%A3%A8%EB%B0%98%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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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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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쓰가루반도
### 기사:
쓰가루반도()는 일본 혼슈의 북단에 있는 반도로 아오모리현에 소속되어 있다. 동쪽 해안은 아오모리만, 무쓰만과 그 개구부인 다이라다테해협을 끼고 시모키타반도와 마주보고 있다. 북쪽 해안은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홋카이도의 마쓰마에반도와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 해안은 동해이다.
일본의 반도
아오모리현의 지형
아오모리현의 자연경승지<|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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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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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프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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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카디프 시티 FC
### 기사:
카디프 시티 FC(, )는 웨일스의 카디프를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웨일스의 중심지인 카디프를 연고지로 하나, 웨일스 프리미어리그가 아닌 잉글랜드 풋볼리그 챔피언십에 참가하고 있다. 현재까지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에 소속되었던 웨일스 클럽은 카디프 시티 FC와 그 라이벌 팀인 스완지 시티AFC 단 두 팀뿐으로, 두 팀은 각각 캐피탈원컵(칼링컵)우승과 FA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클럽에 있어서 최대의 성공은 1927년 FA컵 우승이었으며, 아스널과의 결승전은 BBC 라디오로 생중계된 최초의 축구 경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67-68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4강에도 오른 적이 있다.
이 클럽은 2009년까지 니니언 파크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였으나, 2010년 카디프 시티 스타디움으로 이전하였다. 또한 2012년 말레이시아의 빈센트 탄이 클럽을 인수한 이후 로고와 유니폼 색상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었다.
2003-04 시즌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승격한 이후 상위권의 성적을 내고는 있으나 승격에는 계속 실패하고 있다. 최근 칼링컵 결승에 올랐으나 리버풀에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7-2018 시즌에 EFL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5시즌만에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였다.
2018-2019시즌에 프리미어리그 18위를 기록해 1시즌 만에 다시 EFL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
역대 우승 기록
리그
컵
선수단
현재 선수 명단
2021년 3월 16일 기준
임대 선수 명단
외부 링크
프리미어리그 구단
웨일스의 축구단
1899년 설립된 축구단
잉글랜드 리그에 소속된 웨일스의 축구단<|end_of_text|>
| 9.709367 | 1,245.653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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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소나타 16번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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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피아노 소나타 16번 (베토벤)
### 기사:
《피아노 소나타 16번 사장조, 작품 번호 31-1》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의해 쓰인 피아노 소나타이다. 세 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작품 번호 31 세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
개요
16번 소나타는 1801년에서 1802년 초에 걸쳐 17번 및 18번 소나타와 함께 작곡이 이루어지고 있다. 장르 일련번호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17번 템페스트 소나타가 이 16번 소나타보다 먼저 작곡된 것으로 여겨진다.
1822년 4월 22일에 작곡가의 동생인 카스파는 악보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사와 본 작품의 출판에 관하여 교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첫 출판은 한스 게오르크 네겔리가 기획한 클라브생 연주자 연주곡집에 17번과 쌍으로 수록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때, 제1악장에서는 베토벤이 의도하지 않았던 네 마디의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를 바로 잡기 "정확한 개정판"이 1803년에 짐로크 사를 통해 나왔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본 작품은 17번 소나타와 세트로 되어 있었지만, 1805년에 카피 사가 출판한 판부터 16번, 17번 소나타에 18번 소나타가 더해져 현재의 작품 번호 31의 세트로 정리되었다.
베토벤은 1802년에 시들어가는 청력에 시달리다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그의 제자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같은 시기에 베토벤은 그의 친구로 바이올린 연주자 겸 만돌린 연주자인 벤젤 크럼폴츠에게 "지금까지의 작품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로운 길을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실의와 결의 속에 작곡된 이 소나타는 고전적인 모습 속에 밝은 악상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다.
악장
작품은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제2악장. 아다지오 그라치오소
제3악장. 론도. 알레그레토 - 아다지오 - 프레스토
각주
외부 링크
16
사장조 작품<|end_of_text|>
| 16.155563 | 1,761.17341 |
129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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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8B%9C%EC%95%84%EA%B0%80%EB%85%B8%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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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아가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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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니시아가노역
### 기사:
니시아가노 역()은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에 있는 세이부 철도 세이부 지치부 선의 철도역이다.
타는 곳
역세권 정보
국도 제299호선
역사
1969년 10월 14일 : 영업 개시.
인접역
한노시의 철도역
1969년 개업한 철도역
세이부 철도의 철도역
세이부 지치부선<|end_of_text|>
| 16.400242 | 369.243078 |
84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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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9%EA%B4%80%EC%84%B1%EB%AA%A8%EB%A9%98%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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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관성모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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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극관성모멘트
### 기사:
극관성모멘트(極慣性-, polar moment of inertia)는 비틂에 저항하는 성질을 나타낸 값이다. 돌림힘이 작용하는 물체의 비틀림을 계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휨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 값인 단면 이차 모멘트(처짐을 계산하는 데 필요함)와 유사하다.
극관성모멘트의 값이 클수록, 같은 돌림힘이 제한되었을 때 비틀림은 작아진다.
정의
오른쪽의 그림과 같은 임의의 단면에 대해서 극관성 모멘트는
로 정의된다. 여기서
Ip - 원점 O를 지나며 평면에 수직인 축에 대한 극관성모멘트
dA - 미소 면적 요소
ρ - 중심축으로부터 면적 요소 dA 까지의 거리
한편, 이므로,
로도 나타낼 수 있다. 이때 Ix, Iy는 각각 x축, y축에 대한 단면 이차 모멘트이다.
극관성모멘트를 Ip 대신 J로 나타내기도 한다.
단위
극관성모멘트의 SI 단위는 단면 이차 모멘트와 같은 네제곱 미터(m4)이다. 야드파운드법과 미국 단위계에서는 네제곱 인치(in.4)도 사용된다.
응용
극관성모멘트는 비틂으로 인한 전단 응력과 비틀림각에 대한 공식에 나타난다.
비틀림 공식:
τ - 전단 응력
T - 돌림힘
ρ - 중심축으로부터의 거리
Ip - 극관성 모멘트
원형단면봉에 대해서, 비틂으로 인한 최대 전단 응력은 단면의 가장 바깥 표면(돌림힘이 최대)에서 발생한다. 즉:
예제
단면의 반지름이 r인 원형단면봉의 단면 도심을 지나며 단면에 수직한 중심축에 대한 극관성 모멘트:
같이 보기
단면 이차 모멘트
외부 링크
여러 가지 단면 봉의 극관성 모멘트 - engineeringtoolbox.com
연속체역학
재료역학
구조역학<|end_of_text|>
| 14.292059 | 1,473.475999 |
106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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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94%EB%A6%AC%ED%85%8C%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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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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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솔리테어
### 기사:
솔리테어(solitaire) 또는 페이션스(patience)는 혼자서 하는 카드 게임을 총칭하는 말이다.
카드놀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3.0부터 클론다이크(Klondike)를 구현한 게임이 '솔리테어(Solitaire)'라는 이름으로 번들되었다. 리눅스(Linux)에서는 아일라이엇 솔리테어(AisleRiot Solitaire)라는 게임 이름으로 그놈 프로젝트에서 개발 제작 및 배포하고있다.
아일라이엇 솔리테어
아일라이엇 솔리테어(AisleRiot Solitaire)의 게임 목록은 80개 이상이 포함되어있으며 클론다이크(Klondike) 게임 모음들 이외에도 아코디언(Accordion), 아테나(Athena), 앤트 메리(Aunt Mary)등의 게임 종류가 들어있다.
같이 보기
페그 솔리테어
솔리테어 목록
엑스보드
외부 링크
솔리테어
각주
(GNOME- About Aisleriot)https://wiki.gnome.org/Apps/Aisleriot
카드 게임
모바일 게임<|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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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메지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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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사메지마 사건
### 기사:
사메지마 사건() 또는 사메지마 괴담이란 2채널이 발신지라고 생각되는 인터넷 괴담의 일종이다. 그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현재는 인터넷에서 발생한 도시전설로서 실제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고 한다.
내용
1999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인터넷 괴담의 일종으로, 사메지마란 아이디로 웹 사이트에 아동포르노, 스너프 필름 등 반사회적인 영상물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던 업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많은 인터넷 유저들이 사메지마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사메지마가 공급하던 동영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도를 넘어선 반인륜적 내용으로 채워져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는데, 마침내 어느 인터넷유저가 개인직거래를 미끼로 사메지마를 불러내어 정체를 알아내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상에 동조자를 모집하였다. 정의감에 충만한 이들은 불러낸 사메지마를 가볍게 응징할 생각이었지만, 거래장소에 나온 "사메지마"를 만나자 응징은 집단구타(린치)로 이어지고, 동조자중 한 명이 그 처참한 광경을 캠코더에 담아 인터넷에 올리게 된다. 구타당한 사메지마는 그만 죽고 마는데, 수일 후에 이 동영상이 올려진 웹사이트에 스스로를 "사메지마"로 밝힌 인터넷 유저가 복수를 다짐하는 글을 올린다. 그 후, 진짜 사메지마로부터의 보복을 두려워한 가담자들은 서로 연락을 끊고 뿔뿔이 흩어졌으나, 차례 차례로 사메지마로부터 보복을 당해 살해된다는 이야기. 나중에 이 사건에 국가공안위원회등 정부기관이 직접 개입하여 일체의 증거물-사메지마가 올린 동영상, 관련 게시물, 린치살해 동영상, 해당 웹사이트-등을 폐기처분하고, 사건전체의 내막을 은폐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사메지마의 정체"와 사회적 파장이 큰 반인륜적 내용이 가져올 파급효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사메지마 사건의 진실은, 2ch이 아닌 더 언더그라운드의 사이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사이트에 사메지마라는 ID를 사용하던 사람은 스너프 필름을 팔았다. 몇 개나 되는진 아무도 몰랐지만 모두 장애인이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아이들이 죽임과 강간을 당하는 내용의 비디오였다.
그 사이트의 이용자들은 그 비디오를 판매하는 사메지마라는 남자에게 물었다,"그 비디오에 찍힌 남자가 누군지 아느냐?"
그러나 사메지마 본인이 함구하고 피했다. 그것이 게시판 사용자들을 터무니없는 상상이자 사실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다.
저 남자가 비디오에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죽인 그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라고.
그리하여, 한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역 앞으로 사메지마를 불러왔다. 물론 그의 패거리도 함께.
그리고 그때부터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사메지마가 린치당하는 과정은 인터넷에 실황으로 중계되었다.
사메지마 사건과 함께 나오는 것은 린치를 가하던 사람들이 찍은 피의사진 16장이다. 현재는 당시의 동영상은 폐기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사메지마를 린치하면서 찍은 사진인데, 제일 처음 사진은 역 앞 간판을 찍은 사진에서부터 마지막은 사메지마의 잘게 잘린 손가락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린치가 끝난 뒤. 인터넷에 접속한 가해자들은 놀랄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죽인 남자는 사메지마가 아니었다. 그를 사칭한 사람이었을 뿐. 진짜 사메지마는 사람들이 실황으로 자신을 사칭한 자를 죽이는
사진을 보고 분노했다. 그리고 글을 올렸다 "저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 죽인다. " 라고.
그리고 그 린치에 가담한 사람 여섯명이 죽었다. 사인은 갖가지였다. 모두 타살.
모두가 사메지마가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메지마가 죽였다고 믿었다.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일에 놀란 사람들은 사메지마를 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잠잠해진 지금도 2ch에서 사메지마가 금기인 이유는, 2ch 운영자인 히로유키가 사메지마 사건에 가담했기 때문에
본인의 두려움때문이라고 한다.
해석
사메지마 괴담은 종래 구전되어 오던 유언비어나 괴소문 등이 인터넷이라는 신종매체를 타고 현실적인 힘을 얻게 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증명되지 않는 내용의 괴담이 그것을 음모론과 연결짓는 조류
가공의 사건
농담<|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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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9%80%EB%A1%B1%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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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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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와롱성
### 기사:
와롱성()은 프랑스 서부, 되세브르주의 와롱에 위치한 성이다. 샤를 페로의 동화, 장화신은 고양이의 배경이 되었으며, 루이 14세의 정부인 몽테스팡 부인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
이곳의 기원은 15세기 프랑스를 지배하려는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유래된다. 샤를 7세는 이 와롱의 영토와 대삼림을 기욤 구피에에게 하사하였고, 그는 Touraine의 지배관이 되었다. 오늘날 와롱은 루아르 계곡의 성들에서 차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15세기에는 궁정 권좌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고 여겨졌다. 기욤 구피에는 이 성을 건립하였고, 그의 자손들이 개보수를 하고 확장하였다. 1551년 앙리 2세와 궁정 일원들은 카라바즈 후작 작위를 받은 클로드 구피에에게 초대객이었다. 클로드 구피에는 샤를 페로의 〈장화신은 고양이〉에 등장하는 카라바스 후작의 모델이 되었다.
같이 보기
샤를 페로의 장화신은 고양이
프랑스의 성 목록
외부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070205074833/http://www.oiron.fr/ 와롱 성 공식 사이트 (프랑스어)
프랑스의 성
프랑스의 공식 역사 기념물
되세브르주
되세브르주의 박물관<|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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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sets and Spl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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