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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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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초평
### 기사:
초평(初平)은 중국 후한(後漢) 헌제(獻帝)의 첫 번째 연호이다. 190년에서 194년 1월까지 4년 1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개원
초평(初平) 원년 1월 1일(190년 2월 23일)에 연호를 초평(初平)으로 개원함.
연대대조표
각주
관련항목
중국의 연호
후한의 연호<|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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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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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C%B4%20%28%EC%B2%A0%ED%95%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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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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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무 (철학)
### 기사:
무(無, )는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며, 이는 철학, 물리학 등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어떠한 것이 '있다'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통한 판단이 필요하다. 여기의 판단이란 분별인데 분별이란 다른 것과 구분하여 가르는 것이다. 유(有)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면 유와 구분하여 가를 수 있는 반대 항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음, 무(無)이다. 무(無)는 이렇게 유(有)를 끌어 들여와야 설명이 가능한, 유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무와 유는 서로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무(無), 없음은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있음, 존재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는 무로서 살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상 속의 실재와 관련하여 살피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는 무란 비존재(非存在)를 뜻한다. 즉, 절대적인 무이다. 이 절대적 무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비존재로서의) 무는 무(없음)이다. 이 명제는 결국 유와의 관련성, 상대성을 끊어낸다. 절대적인 무는 절대적으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계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포착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무는 상대적 의미의 무이다. 이는 우리의 현상 세계에서 포착이 가능한 운동,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면 특정인의 부재를 말할 때, 이때의 없음이 이 무에 해당한다.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는 철학에서는 존재에 대한 사유와 관련하고 물리학에서는 진공과 관련한다.
무의 철학적 함의
동양 철학
동양철학에서의 무는 절대적 없음이 아닌 오히려 전체를 뜻하는 경향이 있다. 경계가 없이 전체인 것, 그렇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바깥의 경계를 포착할 수 없는 상태, 무한을 무로 본다.
노자의 무(無)
노자의 우주관에 따르면 이 우주는 도(道)로 가득 차 있다. 노자의 도(道)는 우주의 모든 만물을 산출하는 배후의 힘을 가리킨다. 이 도의 작용에 의해 포착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에게 포착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전자가 무, 후자가 유이다. 즉, 절대적인 없음에서 만물의 존재가 나오는 인과적 관계가 아니다. 노자는 도의 작용이 있기 전, 파악 가능하지 않은 것을 무라고 하고 파악 가능한 것을 유라고 한다. 노자의 무와 유는 서로 순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영향을 주어 의존하는 상관적 관계이다. 무가 유가 되기도 하고 유가 무가 되기도 한다.
불교의 공(空)
불교의 공(空)은 모든 실체가 실상 공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불교의 연기성(緣起性)을 의미한다. 불교에서의 연기란, 실체는 원래 그 실체가 아닌 것들과의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임을 말한다. 이렇게 생성된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라진다. 불교의 세계관은 절대적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인과적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연기사상에 따라 현상은 인연의 산물로 가유(假有)일 뿐 실상은 공한 것이다. 그러한 가유들은 제8아뢰야식의 전변활동의 결과인 상분과 견분일 따름이다. 모든 것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마음의 작용이고, 이것들을 걷어내면 남아있는 것은 공함이다. 이때의 공함은 절대적인 비워짐이 아니다. 이는 일종의 무한이다. 불교의 무아(無我)란 자아는 없다, 즉 나의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면 모두가 하나가 되며 곧 전체가 된다. 따라서 내가 네가 될 수 있고, 네가 내가 될 수 있으며 결국엔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다. 경계의 무한한 확장은 이렇게 일심(一心)사상으로 이어진다.
서양철학
서양철학에서의 무는 절대적인 무에 가깝다. 신이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에서 인과적 관계로 무와 유를 파악하고 있다. 무란 신이 창조하지 않은, 신과는 대치하는 개념이 된다.
고대 철학
파르메니데스는‘무는 없다’라는 명제를 내세워 무를 배제시키고 유만으로 존재를 실체화 시켰다. 절대적 무는 존재, 있음, 유와는 무관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유의 논리학이 지배해온 서양의 형이상학에서는 이러한 무의 개념이 논리적 사유의 범주에 들지 않기에 논의에서 배제해 왔다. 그저 이러한 무를 부정, 부인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헤겔
헤겔은 순수 유, 순수 존재, 있음뿐인 그 있음 자체의 절대적인 공허를 순수한 무로 보았다. 단지 있다는 것은 그것의 속에 아무것도 없는 공허뿐이라 이는 무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순수 존재는 순수 무와 동일한 것으로 보게 된다.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무는 존재자의 총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 말했다. 하이데거의 입장에 따르면 이전의 서양 형이상학에서 무를 범주에서 제외하였기 때문에 무가 부정과 부인의 사유방식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무에서 그 모든 부정과 부인의 사유방식이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들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존재적 인식을 넘어서야 무를 알 수 있다. 하이데거의 무는 존재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다만, 불안으로 나타난다. 세인(Das Man)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본래적 자기로 돌아갈 수 있는 때는 이 무를 대면했을 때이다. 그 무는 죽음을 뜻한다.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 없고 죽지 않을 수도 없다. 죽음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불안은 바로 이 무에서, 죽음에서 온다. 그렇기에 하이데거가 “불안이 무를 계시한다(Die Angst offenbart das Nichts)”라고 말한 것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는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사물 존재인 '즉자적 존재'를 위식에 의해 규정된 인간 존재인 '대자적 존재'와 구분한다. 즉자적 존재는 본질 그대로인 것으로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자적인 존재는 기획과 무화가 가능하다. 사르트르는 "존재를 통해 무가 출현하는데, 그런 존재는 자신의 존재에서 존재의 무가 문제인 존재이다. 존재를 통해 무가 세계에 도달하는데, 그런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규정이며 실존 안에 이미 자신의 부정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실존은 모순적이다. "존재는 존재가 아닌 것이며 그리고 존재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인간이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자신을 기획하는 존재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아직 아닌(not-yet)의 존재이다. 따라서 그 존재 구조는 자유로, 무언가를 기획할 수 있다. "자유는 기획에 의한 즉자의 무화無化이다."
무(無)의 물리학
디랙의 구멍이론에서의 진공개념
역사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은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디랙 방정식을 통해 반물질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 이론을 디랙의 구멍이론(hole theory)라 한다. 디랙방정식을 풀이하면 전자가 가질 수 있는 가능한 에너지 상태는 양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음의 에너지 상태 또한 가능하다는 뜻을 가진다. 양의 에너지만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기존의 논의와 비교하여 새로운 이론 이었고 이는 곧 반물질의 예언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 후 반물질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음의 에너지
높은 에너지 준위에 있는 전자는 낮은 에너지 준위로 떨어질 때 빛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며 떨어진다. 디랙의 이론에 따르면 음의 에너지상태가 있으므로 전자는 단순히 낮은 상태의 에너지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바닥의 음의 에너지 상태로 떨어진다.
디랙의 바다
음의 에너지 상태에 전자가 가득찬 상태를 디랙의 바다 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상태가 에너지가 가장 낮은 상태이다. 즉, ‘진공상태’이다.
진공상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닌, 입자(이를테면 전자)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태이다. 아무런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닌 입자와 반입자가 가상으로, 지속적으로 생성 및 소멸이 반복되는 역동적인 상태이다. 즉, 진공의 요동상태를 말한다.
구멍이론
디랙의 바다 상태에서 에너지(빛)를 가하면 음의 에너지 상태에 있던 하나의 전자가 양의 에너지를 가진다. 양의 에너지상태의 전자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자(물질)이다. 반대로, 음의 에너지 상태에는 전자가 빠져나간 구멍이 생기고 이 구멍이 양전자(반물질)이다. 즉, 물질이 생성되면 반물질이 동시에 생기게 된다. 이를 쌍생성이라 하고, 이 반대 과정은 쌍소멸이다.
철학적 함의
이는 동양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경이 될 수 있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時空 空卽時色)’과 네덜란드 화가인 에셔(Escher)의 작품 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알렉산더 빌렌킨의 무(無)에서 생겨난 우주
천체물리학자인 알렉산더 빌렌킨은 1981년 앨런 구스의 인플레이션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1982년 우주는 ‘무’에서 탄생했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M이론이나 인플레이션 이론과도 관련이 있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전자와 양전자는 쌍생성 될 수 있다. 즉, 물질과 반물질이 생성되기 전 까지는 ‘진공’상태이다. 이 진공상태는 물질도 반물질도 없기 때문에 고전역학적으로 ‘무’상태이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알렉산더 빌렌킨은 전자(물질)와 양전자(반물질) 대신 우주와 반우주의 쌍생성이 가능성을 증명하였다. 즉, 우주와 반우주가 쌍생성되기 전의 상태가 허수시간의 영역이며 이 ‘무’의 동안에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여러 가지 에너지 상태가 가능하며 터널효과가 발생해 우주는 실제로 존재하게 되었고 지수함수 형태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참조
실존주의 개념
지각
존재론
가치관
형이상학 개념<|end_of_text|>
| 16.676121 | 2,881.513184 |
1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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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8%8C%EB%9D%BC%EC%9D%B4%EC%8A%A4%20%EC%BA%90%EB%8B%88%EC%96%B8%20%EA%B5%AD%EB%A6%BD%EA%B3%B5%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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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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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
### 기사: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Bryce Canyon National Park)은 미국 유타주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수만개의 섬세한 첨탑을 가진 여러 개의 반원형 극장의 집단과 같은 모습이다. 이곳의 수만개를 헤아리는 기묘한 첨탑 하나하나는 모두 물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다밑에 있을 때 토사가 쌓여서 형성된 암석이 지방에 우뚝 솟은 후 빗줄기와 흐르는 물의 힘에 의해 다시 본래의 토사로 변하여 흘러내려가는데 비교적 단단한 암석만 침식되지 않고 남아서 무수한 첨탑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브라이스 캐니언을 형성하고 있는 반원형 극장의 가장자리는 50년 간격으로 약 1피트씩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지질학적으로 볼 때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서식하는 동물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사는 수목과 화초들 모두가 이 신비한 자연 속에 서로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위대한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해발 7천피트 내외의 이 공원의 밑바닥에는 시퍼라고 부르는 향나무의 일종인 Utah Juniper가 무성하다. 전망대가 설치된 8천피트 내외의 지대에는 Ponderosa Pine이라는 소나무들이 즐비하며 9천피트의 정상부에는 Douglas Fir와 White Fir 등의 전나무 종류가 있어 자태를 뽐낸다.
이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1923년 준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5년후인 1928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이 공원의 면적은 3만6천여 에이커이지만 남북으로 21마일이나 되는 긴 지역이며 잘 포장된 도로가 공원 전체에 깔려 있어 13개나 되는 전망대에 들르기 편하다. 대표적인 전망대로는 선라이즈 포인트, 브라이스 포인트, 선셋 포인트, 페얼리랜드 포인트 등이 있다.
기후
각주
IUCN 카테고리 II
유타주의 국립공원
유타주의 바위 지형
미국의 천연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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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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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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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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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국학
### 기사:
국학(國學)은 유교 진흥책의 하나로서 설립된 통일신라의 교육 기관이다. 신라의 지배 체제가 삼국통일 이후 성숙해짐에 따라 유교 이념의 교육과 관리 양성의 필요성으로 설립되었다.
설치
신문대왕 2년(682년)에 설치되어 성덕대왕 16년(717년) 당으로부터 공자와 그 제자들의 화상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하였으며, 경덕대왕 6년(747년)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고, 국학의 이름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다. 혜공대왕 12년(776년)에 다시 국학으로 환원하였다.
교육 내용
교육 내용은 4과(四科)로 나누어 경의(經義, 경서) 즉, 《논어(論語)》, 《효경(孝經)》, 《서경(書經, 상서尙書)》, 《시경(詩經, 모시毛詩)》, 《주역(周易, 역경易經)》, 《춘추(春秋, 좌전左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산학(算學, 수학數學)》 등을 가르쳤다. 이중 논어,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였다. 그 외 5경과 문선, 수학을 학습시켰다.
학생
학생은 15~30세의 귀족 자제로서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까지이다. 학생 중 능력이 부족하면 퇴학시키고, 재질이 성취할만 하되 미숙한 자는 9년을 넘어서도 재학하게 된다. 졸업자는 대나마(大奈麻), 나마(奈麻)의 관위를 주었다. 교수는 박사, 조교 등이 있었다.
결과
결과적으론 골품제의 제약과 진골귀족들의 관리 독점에 의해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국학으로 인해 학문과 유학을 신라 사회에 널리 보급시켜 무치주의의 신라 사회를 문치주의로 바꾸는 계기가 되어 고려 시대에 유교를 확립시키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이 보기
독서삼품과
태학
국자감
성균관
향교
각주
참고 문헌
신라
한국의 학교
교육 제도
남북국 시대의 문화
한국의 역사
경상도의 역사<|end_of_text|>
| 19.101208 | 1,937.986811 |
40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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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B%82%98%EB%A6%AC%EC%86%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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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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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개나리속
### 기사:
개나리속은 물푸레나무과의 속으로, 노란 꽃을 피우는 낙엽 관목이다. 한반도에서는 초봄에 꽃을 피운다.
다음과 같은 종이 속한다.
개나리(Forsythia koreana) — 한반도 원산.
당개나리(Forsythia suspensa) — 중국 원산.
만리화(Forsythia ovata) — 한반도 원산.
의성개나리(Forsythia viridissima) — 중국 원산.
Forsythia europaea — 발칸반도 원산.
Forsythia giraldiana — 중국 북서부 원산.
Forsythia japonica — 일본 원산.
교배종인 인터미디어개나리Forsythia × intermedia(F. suspensa × F. viridissima)와 Forsythia × variabilis(F. ovata × F. suspensa)도 관상용으로 심는다.
사진
외부 링크
물푸레나무과
나무<|end_of_text|>
| 10.199358 | 582.903513 |
107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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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B2%A0%EB%A6%AC%EC%95%84%ED%98%B8%EB%9E%91%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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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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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시베리아호랑이
### 기사:
시베리아호랑이(Panthera tigris altaica)는 호랑이의 아종이다. 영어로 시베리아호랑이라고 불리지만, 정작 이 호랑이들은 시베리아에 살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백두산호랑이', '한국호랑이', '아무르호랑이'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고 있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크며, 몸길이 수컷 2.2~3.8m, 암컷 1.8~2.8m, 몸무게 수컷 150~350kg, 암컷 100~200kg이다. 과거 시베리아호랑이 수컷의 평균체중은 215kg이고 암컷은 137kg였지만, 현재 수컷의 평균 체중은 176kg이고, 암컷은 118kg이다. 같은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는 없으며 한 호랑이 안에서도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줄무늬가 각각 다르다. 털빛깔은 황갈색이고 여름에는 다소 짙어지나 대체로 남방계 아종보다 엷으며, 몸 아래쪽의 흰 부분이 보다 넓다. 시호테알린 산맥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극동의 프리모르스키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에만 분포한다.
임신기간은 약 100일이며 2~3년마다 한 배에 2~5마리의 새끼를 밴다. 새끼는 암컷이 돌보며, 수컷은 자기 새끼가 아닌 다른 새끼를 보면 죽이는 습성이 있어 암컷은 수컷에게 공격적이다. 수명은 약 10~15년이다.
등은 짙은 적황색, 불규칙한 검은색 줄무늬가 많다. 배에는 갈색 반점이 매우 두드러진다. 가을털은 여름털에 비해 짧고 옅으며, 수염은 순백색이다. 이마에 임금 왕(王)자는 수컷의 상징이다. 몸놀림이 민첩하고 조심성이 아주 많으며, 소리없이 먹이감에 접근한다. 먹이를 찾아서 하룻밤에 대략 100km 정도를 돌아다니며, 급한 산비탈이나 바위도 잘 오르내린다. 특히 사납고 용맹스럽다.
1900년 무렵에는 한반도를 비롯해서 만주와 몽골 북부, 러시아 극동지방에 걸쳐 분포했었다. 남한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무차별 포획으로 1922년 1월 1일 이후 살아있는 호랑이가 확인되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 현재 몇 마리가 서식한 것으로 보여졌으나 남한에서는 거의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에 적지 않은 목격담(1960년대에 어떤 남성두명이 미군트럭을 타고 강원도 산골로 연탄을 운반하러 가다가 호랑이를 본 사건, 1970년대, 대청봉에서 목격, 1990년대 강원도 화천에서 많은 목격담이 들리기 시작했고 이는 뉴스에 나오기까지해 큰화제를 일으킴, 가까운 최근에는 2019년, 고성 산불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가던 한 남성이 2마리의 호랑이를 봄.)이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건 없다.
현재는 러시아 극동 남부의 프리모르스키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에만 남아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몇 마리(혹은 400여 마리)가 남아있다. 만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약20마리 정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됨.), 대한민국(목격담으로 보아 극소수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에 극소수가 남아있다. 1930년대에는 야생의 개체수가 50마리 이하까지 감소했었으나 그 후 수가 늘어 2005년에는 431마리에서 529마리까지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개체수가 감소해 2009년에는 224마리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생태
산림, 관목림, 덤불과 같은 곳에서 살며 나무에 오르는 일은 드물고 나무 위에서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단독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생활권은 넓고 1마리가 아닌 무리로 생활하며, 무리는 암수와 새끼들로 구성된다. 호랑이는 일몰부터 일출까지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이다. 하루 행동반경은 약 20km로 두 마리가 최소 약 4백km2 정도의 서식면적을 요구하는데, 숫호랑이의 경우는 행동범위가 더욱 넓다.
먹이를 사냥할 때는 은신접근, 매복, 일순공격의 패턴을 구사한다. 대형 초식동물을 공격할 때는 온몸을 던져 덮치거나 강대한 앞발을 사용해 강타하고 매달린 후, 주로 수십개의 이빨을 이용해 목부위를 물어 긴 송곳니로 살을 찢고, 어금니 4개는 힘줄과 질긴 피부를 자른다. 잡은 먹이 가운데 워낙 큰 것은 서늘한 곳에 옮겨 놓고 여러날에 걸쳐서 먹기도 한다. 무는 힘과 뒷다리는 매우 강하며, 한번 물리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한다.
한번에 많은 먹이를 먹고 나면 일주일 가까이 먹지 않고 굶는 일도 많다. 먹이의 종류로는 자연계에서는 주로 대형의 사슴이나 작은 사슴, 산양, 멧돼지이며 먹이가 되는 야생동물의 수가 줄어들면 민가로 내려와서 소나 말, 닭, 오리, 염소 등의 가축도 잡아먹는다. 사육할 때에는 말고기, 고래고기, 토끼고기, 쥐고기등 1일에 4~5kg정도 먹는다. 수명은 야생으로 15년 정도이며, 사육하에서는 20년이 넘는 기록도 있다.
호랑이의 교미기간은 12월~1월의 겨울인데, 수컷은 이때가 되면 짝을 찾아 먼길을 떠나며, 잦은 포효를 한다. 호랑이의 포효소리는 낮은 음이지만 매우 멀리까지 들려 가까운 곳의 다른 수컷을 위협하고 암컷에게 위치를 알리는데 유리하다.임신기간은 약 1백일로 한배에 1~3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7마리를 낳은 기록도 있다. 새끼는 눈을 감고 있으며 무늬가 있고 몸무게는 약 1kg이다.
새끼의 성장은 빠르며, 2주후에는 눈을 뜨고 4~5주때 보행을 시작하며, 8주가 되면 젖을 떼기 시작한다. 7개월째에는 스스로 먹이를 잡을 수 있게 되는데 2세까지는 어미와 지내며 그동안에 사냥훈련을 받고 3세가 되면 어미를 떠나 독립할 준비를 하고, 4세이면 다 자란다. 다 자란 호랑이 암컷은 매년 번식하는 것이 아니고 한 마리가 평생에 4~5차례만 번식해 4~15마리의 새끼를 기를 뿐이다. 한편, 호랑이는 다른 고양이과 동물과는 달리 물가의 생활이나 헤엄을 즐기며, 특히 물속에서 놀 때도 많다.
먹이
시베리아호랑이는 한반도(북한)와 만주, 러시아 극동지방에 서식하며 인도나 동남아시아와 다르게 먹이동물이 크지 않는다. 주로 멧돼지나 대륙사슴, 말사슴, 말코손바닥사슴이며 영양, 산양, 노루, 들쥐, 고라니, 멧토끼, 다람쥐, 물고기, 야생 조류 등 고기라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먹는다. 고라니나 노루, 산양이나 메추라기, 비둘기나 멧토끼, 꿩, 들꿩 등 작거나 중소형 야생동물은 한번에 다 먹지만, 멧돼지나 대륙사슴, 말사슴, 말코손바닥사슴 같은 대형 야생동물은 며칠 간격으로 먹어치운다. 주로 1년에 100kg짜리 발굽동물 30~40마리 정도 잡아먹는다.
그래도 먹이가 떨어지면 호랑이들은 민가로 내려가서 가축을 잡아먹기도 한다. 주로 오리를 잡아먹으며 호랑이가 좋아하는 가축먹이 중 하나이다. 또한 능력이 되면 소나 말등 대형가축이나 돼지, 닭, 염소등 기타 가축도 잡아먹는다. 남한이나 북한, 중국, 러시아등 시베리아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의 경우 다자란 대형 소가 가끔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 경우는 호랑이에 의한 피해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 훈춘지방에서는 소나 말등 가축이 호랑이에게 사냥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며 심지어는 블루베리, 산딸기 등의 열매도 먹는다고 한다.
현황
현존하는 야생 시베리아호랑이는 130에서 50마리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 수가 매년 10~13%씩 계속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비교적 잘 알려진 러시아의 시호테알린 생물권 보존구역등을 포함한 연해주 산간 보호구역내에는 현재 약 50마리가 생존하고 있고, 연해주 전체에 2백마리 미만, 중국 동북 지방에는 50여마리 그리고 한반도에 15~20마리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시베리아호랑이는 세계 각국의 동물원등에서 30여마리가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계통 분류
한국호랑이
한국호랑이는 유전적으로 아무르호랑이와 거의 동일한, 한반도에 서식하였던 시베리아호랑이의 개체군이다. 한국호랑이는 한때 한반도에 널리 서식하였지만 조선시대 말기부터 호랑이의 서식지가 농경지로 개간되었고, 조선 정부의 호랑이 사냥 장려로 수가 줄어들었다. 먹이가 부족해진 호랑이들이 민가에 자주 출몰하였고 호환이 증가하였다. 궁궐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 이유는 조선의 궁궐이 자연친화적 입지를 갖고 있어 호랑이가 머물고 이동하기에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사냥으로 확인된 것만 호랑이 97마리, 표범 625마리, 반달가슴곰 1100마리, 늑대 1350마리가 잡혔다고 하나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사냥되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것이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1950년 이후 한국호랑이는 시베리아호랑이의 아종으로 통합되었는데, 일부에서는 한국호랑이를 시베리아호랑이와 다른 아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선 한반도의 지형이 연해주보다 더 험해 서식하는 호랑이의 체격이 작아질 수밖에 없고 그 예로 여러 기록에 의하면 시베리아호랑이보다 몸집이 작았고 털이 짧았으며 무늬가 다르다고 한다. 시베리아호랑이의 학명은 Panthera tigris altaica인데 동물학자인 테밍크가 1844년 한반도에서 잡힌 표본이 기준표본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브라스란 학자는 1904년 한국의 호랑이가 아무르호랑이보다 넓고 뚜렷한 줄무늬가 있고 붉은 빛깔이 도는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가죽을 지니고 있다는데 착안해 ‘한국호랑이(Panthera tigris coreensis)’라는 별개의 아종으로 기재했다.
이어 사투닌이라는 러시아 학자는 1915년 한국호랑이란 아종의 이름을 ‘코리엔시스’에서 ‘미카도이(mikadoi)’로 바꾸었는데, ‘미카도’는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쨌든 한국호랑이란 아종명은 1965년까지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국제무역에 관한 협약(CITES)’목록에 올라 있었다가 나중에 아무르호랑이로 통합됐다. 2012년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의 이항 교수팀은 1900년대에 한반도에서 포획되어 미국과 일본등 해외에 반출된 호랑이 표본을 조사하여 유전자 조사결과 한국호랑이가 시베리아호랑이와 같은 아종으로 밝혀졌다.
한반도에서의 호랑이 흔적과 생존
한반도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정호기와 그 대표인 일본의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사냥과 6.25 전쟁으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호랑이와 표범이 거의 사라졌다. 현재는 북한의 일부 지역에서 호랑이의 발자국이 발견되어 서식한다고 발표되었고, 백두산에도 인근에 설치해두었던 카메라에 호랑이가 몇몇 포착되어 백두산에도 호랑이가 생존함이 확인되었으나, 남한에서는 전부 멸종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남한 전역에서 목격담이나 흔적이 발견되면서 생존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현재 한국호랑이의 박제는 대부분이 일본으로 유출되었고 목포시 유달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박제가 유일하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가 1917년에 박제를 기증하기도 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100년전까지 전남 진도에서 호랑이 포획사진이 발견되어서 한반도 전역에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였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호랑이 복원사업
러시아에서는 호랑이가 살 수 있는 서식지를 확보하고 밀렵으로부터 보호하는 ‘시베리아 야생 호랑이 보호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남한지역에서는 호랑이와 표범, 늑대 등이 사라지면서 이들의 먹이인 멧돼지나 고라니 등 야생동물이 증가하여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중국에서 백두산호랑이를 들여와 개체수를 늘리는 호랑이 복원을 추진중에 있다.
현재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 Ⅰ급에 포함되어 있으며, 정부는 2009년 러시아에서 야생의 호랑이를 들여와 비무장지대에 호랑이를 풀어놓는 계획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호랑이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연천군의 호랑이 방사 계획
경기도 연천군은 2008년 11월, 멸종된 시베리아호랑이를 복원시키기 위해 호랑이 3마리를 고대산에 방목 방식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연천군은 이를 위해 1억 5000만원의 예산을 마련하였고 이어 5월 중 3마리를 들여와 신서면 대광리 고대산 평화체험특구 6600m2에 이중 펜스를 설치해 보호공간을 확보한 뒤 한국호랑이보호협회와 공동으로 호랑이 보호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한 생태학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결국 한강유역환경청의 수입허가를 받지 못해 계획은 무산되었고 결국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자연 유입
학계 일부에서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방사하는 것보다는 호랑이의 행동반경이 넓어서 보호가 이루어져 개체수가 늘면 이들이 한반도로 돌아올 수 있다는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동러시아에 존재하는 호랑이 개체군을 보호하여 개체수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호랑이들의 근친교배를 막기위해서 DMZ 철책을 제거하여 이동통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각주
참고 자료
〈밀림 이야기 - 시베리아 호랑이 3대의 죽음〉, EBS 다큐멘터리, 2003.8.14 ~ 15 방영
《21세기 웅진학습백과사전》 16권 '생물인체 2', 한국의 자연탐험 1권 '백두산'
외부 링크
한국호랑이, 한국법 보존기금
호랑이 - 멸종위기 야생생물 포털
Amur (Siberian) tiger, 세계자연보호기금(WWF)
Siberian Tiger, 내셔널 지오그래픽
Wildlife Conservation Society's Siberian Tiger Project
AMUR - 야생의 표범과 호랑이 보호
Information Resources on Tigers, Panthera tigris: Natural History, Ecology, Conservation, Biology, and Captive Care, USDA, 2006.4.
Siberian Tiger Escapes From San Francisco Zoo Cage, Killing 1, Injuring 2
21st century Tiger - fundraising for tiger conservation
호랑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대한민국의 상징
1884년 기재된 포유류
시베리아의 포유류
중국의 포유류
러시아의 포유류
고양이과
육식성
러시아 극동
한국의 포유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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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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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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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배리 마셜
### 기사:
배리 J. 마셜(Barry J. Marshall, AC, FRS, 1951년 9월 30일 ~ )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위염 등 위장 질환의 원인임을 증명하여 종전의 위궤양은 스트레스, 자극적인 음식, 위산 과다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단순한 통설을 뒤집은 것으로 유명하다.
1974년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에서 의학과 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에는 왕립 퍼스 병원에서 위염에 관심있는 병리학자인 로빈 워런을 만나 같이 위염에 관한 세균을 찾는 연구를 했다. 이듬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세균이 위염과 위암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당시 학계의 다른 학자들은 위산 속에서 세균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가설을 웃음거리로 여기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셜은 1984년에 프리맨틀 병원에서 실시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이 코흐의 공리에 맞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스스로 배양한 균이 든 시험관을 통째로 마신 뒤 위궤양이 일어난 것과, 그 위궤양이 항생제로 치료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과학자 배리 마셜과 로빈 워런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발견한 공로로 200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마셜은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기 전에 대한민국의 유제품 생산업체인 한국야쿠르트에서 생산한 발효유 제품인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광고에 나왔다.
외부 링크
1951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물학자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 동문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벨상 수상자
왕립학회 석학회원
캘굴리 출신
버지니아 대학교 동문
오스트레일리아의 미생물학자
래스커-드베키 임상 의학 연구상 수상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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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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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김학응
### 기사:
김학응(金鶴應, 일본식 이름: 金子薰, 1899년 1월 25일 충북 청주 ~ ?)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생애
일제 강점기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충청북도 지역 군수를 지내는 등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1공화국에서 충북지사와 충남지사를 맡았으며, 충남지사 재임 중 4·19 혁명이 일어나 3·15 부정선거의 충남 지역 책임자로 기소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들어 있다.
약력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졸업
충청북도 진천군 내무과장
충청북도 보은군, 옥천군, 제천군 군수
1951년 : 충청북도 내무국장
1952년 : 전라북도 내무국장
1953년 : 충청남도 내무국장
1954년 : 경기도 내무국장
1955년 : 충청북도 지사
1958년 : 충청남도 지사
참고자료
각주
외부 링크
1899년 출생
몰년 미상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일제강점기의 관료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와세다 대학 동문
청주시 출신
안동 김씨 (구)<|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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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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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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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원화
### 기사:
원화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원화(-貨): 원을 화폐 단위로 하는 통화.
대한민국 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
원화(源花 또는 原花): 신라시대 화랑의 전신
원화(原畵): 복사나 복제의 바탕이 되는, 본이 되는 그림.
원화(元華, 1950 ~ ): 홍콩 배우
원화(元和)는 후한(後漢) 장제(章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원화(元和)는 당(唐)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원화리()는 다음 지역에 위치한 중화민국이며, 대한민국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리이다.
리원화()
같이 보기<|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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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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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 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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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에스퍼 마미
### 기사:
에스퍼 마미()는 후지코 F.후지오가 1977년 제작한 만화로, 주간 소년 빅 코믹이란 잡지에서 연재되었다.
줄거리
이 만화의 주인공인 '사쿠라 마미'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네게츠(明月) 중학에 다니는 보통의 중학생으로, 동급생인 타카하타 카즈오를 돕다가 자신이 초능력자라는 것을 들키게 된다. 카즈오는 당초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오해하고 있었으나, 마미가 초능력자라는걸 알게 되고부터 마미를 많이 이해하고 조언도 많이 해준다. 마미는 초능력을 사람을 돕기 위해서 사용하기로 한다.
드라마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하여 드라마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2002년 1월 5일부터 2002년 3월 23일까지 총 12화를 방영했다.
외부 링크
DVD 사이트
1987년 애니메이션
1988년 애니메이션
1989년 애니메이션
일본의 애니메이션
TV 아사히 계열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애니메이션
NHK의 텔레비전 드라마
2002년 드라마
후지코 F. 후지오의 만화
코미디 만화
일본의 만화의 텔레비전 드라마화 작품
도쿄도를 배경으로 한 만화
도쿄도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도쿄도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1987년 시작한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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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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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문화일보
### 기사:
문화일보(文化日報, The Munhwa Il-bo)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발행되는 석간(주 5일 발행) 일간지이다. 1991년 11월 1일 창간되었으며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2에 있다. 1991년 11월 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소재한 현대상선 빌딩에서 전직 동아일보 기자 출신 언론인 이규행 등 전직 언론인과 현대그룹의 후원으로 창간했다.
역사
창간 당시에는 종합일간지의 허가를 받지 못해 석간, 문화전문지로 출발했으며 이후 종합지로 전환했다. 현대그룹에 의해서 창간돼 사명이 현대문화신문으로 등록되었다. 현대그룹의 후원을 바탕으로 소설가 박경리씨의 토지를 연재했으며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 4컷 만화도 인기리에 연재했다. 1995년 7월 종합지로 전환하면서 고급지 개념을 도입해 국내 최초로 오피니언면을 만들어 국내 유수의 필진을 고용해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1998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유동성위기를 겪을 당시 현대그룹에서 완전히 분리, 독립경영체제로 돌아섰다. 몇번의 조간 논의가 있었으나 석간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으며 1999년 11월부터 지면을 살구빛 고운종이로 바꾸었다. 당초 광화문 현대상선 빌딩에서 신문을 발간하다가 1994년 현재의 서대문의 옛 동양극장자리에 10층 사옥을 신축하여 이전했다. 2009년 12월 현재 대표이사는 이병규, 편집국장은 김병직
김대중 정부 당시 현대그룹이 추진했던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으로 인하여 대북정책에 있어 진보적 색깔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대체로 안보에 있어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유신헌법에서 유래한 자유민주이지만 헌법에 근거가 없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기타
신정아 누드 공개 논란
2007년 9월 13일 문화일보가 문화계 유력인사의 집에서 신정아의 누드사진이 발견되었다며, 지면(3면)에 몸통 부분에 모자이크 처리가 된 2장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문화일보는 누드사진이 신정아가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성 로비를 했을 증거라며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네티즌들과 시민단체는 누드사진 게재가 사건의 본질인 변양균 전 정책실장의 비호 의혹에서 빗나간 인권침해라며 비난하였으며 신정아 자신도 조작된 사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문화일보는 누드사진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반박하였다. 문화일보는 2007년 10월 18일 신정아 누드 사진 게재에 대해 사과하였다. 한편, 문화일보는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선정성 논란에 따라 한국신문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은 바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 관련 오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관련 뉴스보도 중 '침몰이 일어난 후 전원구조 되었다'라고 보도하여 관련 학부모들과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초기 대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자매지
《디지털타임스》: 디지털 IT 경제 신문
《에이엠세븐》: 무료 종합 일간지 - 현재 무기한 휴간
같이 보기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국민일보
경향신문
현대그룹
디지털 타임스
각주
외부 링크
문화일보 공식 홈페이지
디지털 타임스
대한민국의 언론
1991년 창간
대한민국의 신문
한국어 신문
현대그룹의 이전 자회사
1990년 설립된 기업<|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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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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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 기사: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는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에 위치한 호텔이다. 이름에 아카사카라고 붙어있지만, 미나토구에 위치한 것은 아니다. 1955년 10월 1일에 개장한 도쿄의 대표적인 호텔 중 하나이다. 2001년에 개축하여 761실으로, 1454명의 수용이 가능하다.
구관의 서양요리 트리아농(Trianon) 건물은 1930년에 세워진 대한제국 의민태자(영친왕이라고도 불림)의 저택을 개축한 것이다. 1955년에 호텔이 되었지만, 지금은 객실 없이 1층과 2층이 각각 결혼식장 등과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관은 지상 40층의 건물로, 단게 겐조가 설계하여 1982년 11월에 준공되었다. 신관은 NHK의 텔레비전 방송 예비송신소의 기능도 가지고 있어, 옥상에는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아카사카 미쓰케 역에서 도보로 1분, 나가타초 역에서 2분, 고지마치 역에서 5분정도 걸린다. 또한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의 경우 2011년 3월 31일에 영업이 완전 종료되었지만,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피난민 및 이재민이 잠시 머물던 곳으로 유명하였으나, 2013년 발파 해체 공법으로 철거되었다.
일화
이 호텔은 원래 대한제국 의민태자(영친왕으로도 불림)의 사택을 개조한 것이다. 의민태자의 차남인 이구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2005년 7월 16일 이구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같이 보기
의민태자
회은태손 이구
프린스 호텔
더 프린스 갤러리 도쿄 기오이초 (현재의 자리)
각주
외부 링크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지요다구의 마천루
지요다구의 호텔
일본의 초고층 호텔
1955년 완공된 건축물
1982년 완공된 건축물
일본의 없어진 건축물
이축한 건축물<|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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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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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F%B8%EC%A6%88%20%ED%9E%88%EB%A1%9C%EC%95%B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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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히로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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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시미즈 히로야스
### 기사:
시미즈 히로야스(, 1974년 2월 27일~)는 일본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이다. 홋카이도 오비히로시 출신이다.
1993년 세계 스피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여 500m에서 5위를 하였다. 1995년과 1996년 세계 스피린트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고, 그 사이 월드컵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5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개최국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은 일본 뿐 아니라 동양인 최초의 것이다. 또한 같은 대회 1000m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그 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5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세계 종목별 선수권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록하여 500m 종목에서 1996년 금메달, 1997년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19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연속 4회 금메달을 땄다. 그 외에 500m 세계신기록을 4차례 경신하였으며, 특히 2001년 3월의 34초 32의 기록은 4년 이상동안 세계기록으로 유지되다가 2005년 11월에 가서야 가토 조지에 의해 깨졌다. 월드컵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500m 종목에서 1993년부터 2005년 사이에 34차례나 우승하였다. 2006년 동계 올림픽 500m 종목에서는 18위로 부진했으며, 이후 일본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2010년 동계 올림픽 선발전에서도 탈락한 후 2010년 3월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접었다.
각주
외부 링크
시미즈 히로야스 - Speedskatingresults.com
시미즈 히로야스 - Speedskatingbase.eu
시미즈 히로야스 - SpeedSkatingNews
시미즈 히로야스 - Sports Reference.com
197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20세기 일본 사람
21세기 일본 사람
일본의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일본의 스포츠 해설가
일본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일본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일본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메달리스트
1998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2002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일본의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1994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1998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2002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2006년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일본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일본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아시안 게임 스피드스케이팅 메달리스트
2003년 동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2003년 동계 아시안 게임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 스피드스케이팅 참가 선수
오비히로시 출신
니혼 대학 동문<|end_of_text|>
| 4.476798 | 1,361.008395 |
21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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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1%EC%9B%90%EC%A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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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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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탁원제
### 기사:
탁원제(卓元濟, 1944년 7월 1일 ~ )는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다. 본관은 광산 탁씨. 1969년 TBC 5기 성우로 입사했으며, 언론통폐합으로 인하여 현재는 KBS 11기로 분류된다.
출연 작품
애니메이션
소년탐정 김전일 Original (챔프)
레츠고 MBA (SBS)
개구쟁이 스머프 (KBS) - 가가멜
개구리 왕눈이 (KBS) - 투투
꼬마자동차 붕붕 (KBS)
이누야샤 (애니원) - 쟈켄 / 가영이 할아버지
이누야샤 완결편 (애니원) - 쟈켄
만능수리공 매니 (EBS) - 팻
제이크와 네버랜드 해적들 (EBS) - 미스터 스미
미래소년 코난 (KBS) - 다이스 선장
캡틴 테일러 (투니버스) - 백두 총장
작안의 샤나 - 천목 일개
결계사 (투니버스) - 스미무라 시게모리
심슨 가족 (MBC, EBS) - 몽고메리 번즈 사장
늑대기사 실반 (SBS)
게드전기 (MOVIE) - 왕
강철의 연금술사 BROTHERHOOD (챔프) - 팀 마르코
카우보이 비밥 - 안토니오
키바 - 지코
티몬과 품바 (KBS) - 자주
하우스 오브 마우스 - 지미니 크리켓, 험프리의 훈련관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KBS)
달려라 또뽀 (MBC)
달려라 바우 (KBS)
배트맨 (2004)(카툰네트워크) - 알프레드
뚝딱박사 핌 (KBS) - 핍스
꼬마유령 캐스퍼 (KBS) - 심술이
꼬마탐정 가제트 (SBS) - 서장
쥬만지 (KBS) - 반 펠트
우주의 여왕 쉬라 (KBS)
하얀마음 백구 (SBS) - 미감이 할아버지
숲 속의 백설공주 (SBS)
이겨라 승리호 (SBS)
스타 워즈: 클론 전쟁 (EBS)
후레쉬 프리큐어 (챔프) - 소미 할아버지
파워 퍼프 걸 (SBS) - 시장, 샌드맨
터보유격대 - 블루 터보
허클베리핀의 모험 (투니버스) - 허크 아빠
기동전사 건담 SEED (애니원) - 우즈미 나라 아스하
마법소녀 리나 (SBS) - 사일라그 신관장 (NEXT)
제로의 사역마 (애니맥스) - 오스만
재키 찬 어드벤처 (애니맥스) - 삼촌
건담 0080 주머니 속 전쟁 OVA (애니박스) - 찰리
건담 이글루 - 1년 전쟁 비록 (애니박스) - 알베르트 샤하트
감바의 모험 (VIDEO) - 박사
무적왕 트라이제논 (투니버스) - 우츄
풀 메탈 패닉 후못후 (투니버스) - 리차드 마듀커스
탐정학원 Q (투니버스) - 여관 주인
크르노 크루세이드 (투니버스) - 엘더 장로
명탐정 코난 (투니버스) - 담해 (3기 10~11화), 손님 4 (3기 12화), 문병찬 (4기 5화), 조희동 (5기 11~12화), 하남우 (11기 14~15화), 장이덕 (16기 4화), 전원일 (18기 26~27화)
츠바사 크로니클 (투니버스) - 영주
원피스 (대원방송) - 나구리
음양대전기 (투니버스) - 난카이
배틀짱 (투니버스) - 원장
몬스터 (투니버스) - 경찰
정령의 수호자 (애니박스) - 소야 할아버지
으랏차차 삼총사 (투니버스) - 위점싼 사부
용용나라로 떠나요 (EBS) - 용계로 선생님 (쿼찰)
영심이 (KBS) - 영심이 아빠
나루토 질풍전 (투니버스) - 후카사쿠
뾰로롱 꼬마마녀 (KBS) - 공사 현장 감독
은하철도 999 (백록판 VIDEO) - 해설 (1989년 7월 10일 그첫번째 재더빙판)(2018년 3월 13일)
반요 야샤히메 (애니박스) - 쟈켄 / 가영이 할아버지
닌타마 란타로 24기 (KBS 키즈) - 교장
극장용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 - 자주
라이온 킹 2 - 자주
라이온 킹 3 - 자주
뮬란 (MOVIE) - 츠푸
올리버와 친구들 - 티토
피노키오 - 지미니 크리켓
헷지 (MOVIE) - 헤더 아빠
로봇 - 라쳇의 아버지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와 바람의 마을 (대원방송) - 야크 / 장로님
돼지코 아기공룡 임피의 모험 (KBS)
타이탄 A.E - 군
원더풀 데이즈 (KBS) - 부관
원피스 스페셜 에피소드 (투니버스) - 파브르
원피스 스페셜: 3D2Y (투니버스) - 위키
바비의 호두까기 인형 (SBS) - 소령
붕가부 (KBS) - 타타르
블랙잭 - 어둠의 의사 (KBS) - 아르만
공룡, 타임머신을 타다 (KBS) - 삐딱눈 교수
월리스와 그로밋: 거대 토끼의 저주 (MOVIE) - 경관
도라에몽 극장판 - 야크
몬스터 대학교 - 돈 칼튼
곰돌이 푸 오리지널 클래식 / 티거 무비 / 곰돌이 푸 2011 - 토끼
카/카 2 - 대럴 카트립
카 3: 새로운 도전 - 대럴 카트립 / 러스티
인크레더블 - 길버트 허프
잠자는 숲 속의 미녀 - 스테판왕
명탐정 코난: 전율의 악보 - 유파건
왕후 심청 - 이러나 대감
영화
이연걸의 정무문 (MBC)
소리없는 승리 (KBS)
대부 (96년 더빙판/MBC) - 톰 헤이건(로버트 듀발)
대부 2 (96년 더빙판/MBC) - 톰 헤이건(로버트 듀발)
크림슨 리버 2 (KBS)
더 콘서트 (KBS) - 올리비에 (프랑수아 벨레앙)
칠검 (KBS)
추락한 백만장자 (KBS)
스타쉽 트루퍼스 (KBS) - 자니의 아버지 (크리스토퍼 커리) / 총지휘관 (딘 노리스)
천국의 속삭임 (KBS) - 교장 (노먼 모차토)
매드 맥스 (MBC) - 피피(로저 워드)
더 캣 (SBS) - 내레이터 (빅터 브렌트)
오션스 일레븐 (SBS) - 루벤 티쉬코프 (엘리엇 굴드) / 자동차 딜러 (조 라 두에)
매트릭스 2: 리로디드 (SBS) - 원로 (앤서니 저브) / 키메이커 (김덕문) / 설계자 (헬무트 바카이티스)
매트릭스 3: 레볼루션 (SBS) - 원로 (앤서니 저브) / 설계자 (헬무트 바카이티스)
유니버셜 솔져 (SBS)
솔드 아웃 (SBS) - 험멜 경관 (로버트 콘래드)
장미의 이름 (SBS)
글로리아 (SBS) - 신부님
피아니스트의 전설 (SBS)
아마게돈 (SBS) - 대통령(스탠리 앤더슨)
스타 워즈 에피소드 4: 새로운 희망 (KBS)
34번가의 기적 (KBS)
오멘, 최후의 심판 (SBS)
용적심 (SBS)
모스맨 (SBS)
쉬핑뉴스 (SBS)
포스 오브 네이처 (SBS)
스키아카데미 (SBS)
심판 (SBS) - 신부
미스 에이전트 (SBS) - 멜링 (마이클 케인)
벤허 (SBS) - 빌데사르 (핀레이 큐리)
십계 (KBS) - 다단 (에드워드 G. 로빈슨)
그렘린 2 (SBS) - 프레드 (로버트 프로스키)
사운드 오브 뮤직 (SBS) - 젤러 (벤 라이트)
폴리스 스토리 4 (SBS) - 서걸와 애니의 아버지(우청람)
터미네이터 (SBS)
투명인간의 사랑 (SBS)
쿼바디스 (SBS)
마이 라이프 (SBS)
무간도 (KBS) - 서장 (윤지강)
폭풍의 월요일 (KBS)
몰랫츠 (KBS) - 스탠리
택시3 (KBS) - 장군
멕시칸 (KBS) - 윈스턴 (제임스 갠돌피니) / 멕시코 경찰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주니어)
원초적 본능 2 (KBS) - 거스트 (헤드코트 윌리엄스)
리틀 뱀파이어 (SBS)
성룡의 나이스 가이 (KBS) - 재키의 아버지
로미오와 줄리엣 (KBS) - 로미오 아버지
크리스마스 캐럴 (KBS) - 제이콥 말리
바라바 (KBS) - 라자로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MBC) - M (버나드 리)
딥 임팩트 (MBC) - 태너 대위 (로버트 듀발)
다이하드 (SBS) - 로빈슨 부국장(폴 글리슨)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KBS) - 노다 벤 (오노 타케히코)
데니스 P (KBS) - 글로버스 사 사장
의혹 (SBS) - 라렌 리틀 (폴 윈필드)
크로커다일 던디3 (KBS) - 동크 (스티브 랙맨)
호랑이와 눈 (KBS) - 변호사 (루치아 폴리)
댄싱히어로 (SBS) - 레스 켄달
동방삼협 (SBS)
볼 폰 (KBS)
대부 3 (KBS)
빌리 베스게이트 (KBS)
공포의 비행 (KBS)
하이랜더 (KBS)
스플래시 (KBS) - 바이라이트 (셔키 그린)
JFK (KBS) - 페리 (조 페시) / 검사 (로이 바닛)
윈스턴 처칠의 폭풍전야 (KBS) - 인치스 (로니 바커)
카라멜 (KBS) - 찰스 (디미트리 스타네오프스키)
왕자와 거지 (KBS) - 하트퍼드 (해리 엔드류스)
올리버 트위스트 (KBS) - 브라운로(헨리 스티븐슨)
올리버 트위스트 (KBS) - 브라운로 (에드워드 하드윅크)
쌍웅 (KBS)
대통령의 연인 (KBS)
이너프 (KBS)
양가휘의 굿바이 차이나 (KBS) - 홀든 사장 / 변호사
K-19: 위도우메이커 (KBS) - 브라티예프 (존 슈랍넬)
행복한 날들 (KBS)
하일복성 (KBS)
타임라인 (KBS)
꼬마돼지 베이브 (KBS)
명탐정 디씨 (KBS)
머큐리 (KBS)
데이트 소동 (KBS)
조지 오브 정글 (KBS)
파이어 스톰 (KBS) - 변호사 (테렌스 켈리)
카사블랑카 (KBS)
귀여운 빌리 (KBS)
허드서커 대리인 (KBS) - 신문사 국장 (존 머호니) / 이사회 인원(리처드 우드스) / 우편실 직원 / TV 방송 음성
러시아워 (MBC)
스팅 (KBS)
사소한 이야기들 (KBS) - 아나운서
로맨싱 스톤 (KBS)
돈가방을 든 수녀 (SBS)
케인호의 반란 (KBS) - 로이드 삼촌 (데이턴)
브랜단 & 트루디 (KBS)
황비홍 3 (KBS) - 리홍장
경찰서를 털어라 (KBS)
법외정 (KBS) - 판사
행복을 파는 기계 (KBS)
어바웃 슈미트 (KBS) - 존 (해리 그로너)
마틴을 위한 노래 (KBS) - 하트만
차이나 스트라이크 포스 (KBS)
왕의 춤 (KBS) - 캄퍼
아가사 크리스티의 창백한 말 (KBS) - 오스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KBS) - 라파엘 (미하일 라즘니)
라스트 콘서트 (KBS)
회색의 그늘 (SBS)
특종 카메라 (KBS)
궁둥이를 쏜 사나이 (SBS)
벤10: 과거로의 질주 (카툰네트워크) - 교장
언더시즈 (SBS) - 함장 (패트릭 오닐) / 베이츠 합참의장 (앤디 로마노)
클리프 행어 (SBS) - 프랭크 (랄프 웨이트) / FBI 요원(존 핀)
로켓 맨 (KBS)
자칼 (SBS)
쿨러닝 (KBS) - 어브 (존 캔디)
머니 핏 (KBS) - 카를로스(존 판드레일런)
페노메논 (KBS) - 마을 사람 (트로이 에반스) / FBI 요원 (비토 루기니스)
마지막 보이스카웃 (KBS) - 반장 (조 산토스)
사랑과 미움의 교차로 (KBS)
마녀의 산 (KBS)
북해유전 특공작전 (KBS) - 플레처 (조지 베이커)
코난 (KBS)
48시간 2 (SBS)
침대 귀신 소동 (KBS) - 보이 (프랭크 월리)
뉴욕 뉴욕 (KBS)
마우스 헌트 (SBS) - 어니와 라스의 변호사 (에릭 크리스마스)
콘스탄트 가드너 (KBS) - 팀 (도널드 섬터)
일대종사 (KBS) - 궁이의 아버지의 스승 (조본산)/ 무술인(왕각)
007 위기일발 (KBS) - 모제니 (월터 고텔)
절대쌍교 (KBS) - 쌍존 (오요한)
경천 12시 (KBS) - 병원장 (원규)
쾌찬차 (KBS) - 환자 (오요한) / 이웃집 남자 (호세프 루이스 포놀)
아스테릭스 (KBS) - 예언자 프롤릭스 (데니에르 프레보스트)
사랑은 소리높이 (KBS) - 장의사 (알렉스 디아컨)
SAS 특공대 (KBS) - 파월 서장(에드워드 우드워드) / 리처드(폴 프리먼)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KBS) - 페인(클로드 레인스)
배트맨 포에버(KBS) - 버튼(러네이 오베어전와)
사랑의 빛 (KBS) - 하킨 박사(리처드 로마너스)
여인의 초상 (KBS) - 프랭크(레이몬드 머시)
어니스트: 유령 퇴치 작전 (KBS) - 머독 시장(레리 블랙)
천국의 열쇠 (KBS) - 성직자(세드릭 하드위크)
허비 - 몬테카를로에 가다 (KBS) - 맥스(버나드 폭스)
공주는 못말려 (SBS) - 오스볼 왕자(마르틴 팔틴)
황야의 결투 (KBS) - 손다이크(앨런 모브레이) / 보안관(해리 우즈)
퍼스트 어벤저 - 어스킨 박사(스탠리 투치)
외화
찰리 제이드 (KBS) - 볼트
말괄량이 마법학교 - 캠퍼스 대소동 (SBS) - 세이크
V (KBS) - 앤드류 신부
스필버그의 어메이징 스토리 (KBS) - 벤 올트먼
삼국지 (KBS) - 수경 선생
대마법사 멀린 (KBS) - 왕실 역술인 (피터 우드토프로) / 핵터 경 (케이스 백스터)
어스시의 마법사 (KBS) - 두내인 (데이브 워드) / 게드의 아버지
경감 메그레 (KBS) - 뫼르스 (마크 헵) / 티쏘 교수 (데이빗 아넨) / 기자
탐정 스펜서 (KBS)
긴급출동 911 (MBC) - 해설 (윌리엄 샤트너)
특촬물
우뢰매 4탄 썬더V 출동 - 지구방위 사령관 (박암)
방송
안나푸르나와의 약속 (청주 MBC)
세계가 보는 한반도 통일 2부 (KBS) -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수상
KBS 무대 10년 (내 슬픈 기억의 집)(KBS 제 2 라디오)
KBS 라디오 극장 10년 (청해당의 아침)(KBS 라디오) - 만석 어른
드라마
연개소문 (SBS) - 이세민의 시중
별순검 시즌 3 (MBC 드라마넷) - 황 경무관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나사우의 모리스
광고
한국GM 프린스
외부 링크
KBS 성우극회의 탁원제 블로그
194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광산 탁씨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end_of_text|>
| 19.748165 | 3,054.654053 |
18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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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2%AC%EC%B9%B4%EC%99%80%EB%B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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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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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아사카와번
### 기사:
아사카와 번()은 일본 에도 시대에 있던 번으로, 시라카와번의 지번에 해당한다. 지금의 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 이시카와 정에 위치했으며, 번청은 아사카와 진야였다.
번의 역사
1662년, 이시카와번과 마찬가지로, 시라카와 번주 혼다 다다요시의 셋째 아들이 혼다 다다모치가 아버지로부터 1만 석 영지를 분봉받아 번이 성립되었다. 다다모치의 뒤를 이은 혼다 다다하루가 1681년에 미카와국 이보 번으로 전봉되면서 아사카와 번은 폐지되었다.
역대 번주
혼다 다다모치() 재위 1662년 ~ 1664년
혼다 다다하루() 재위 1664년 ~ 1681년
같이 보기
시라카와번
이시카와번
일본의 번
후쿠시마현의 역사
헤이하치로 혼다가
이와키국의 번<|end_of_text|>
| 11.994253 | 683.217615 |
139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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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9D%B4%20%EC%BD%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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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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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로이 콥
### 기사:
로이 콥(Roy Cobb, 1914년 ~ 1990년) 이병은 미국 육군 101 공수 사단 506 낙하산 보병 연대 이지 중대에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다. 로이 콥은 10부작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미국의 배우 크레이크 히니가 연기했다.
콥은 장교를 폭행한 이후로 진급되지 않았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콥은 매우 사납고 냉소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오랫동안 군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단 한번도 진급이 되지 않은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노르망디에 강하할 때 콥은 비행기 안에서 부상을 입어서 강하하지 못했다. 콥은 이후 이지 중대가 노르망디에서 돌아온 다음, 다시 라인 강을 건너는 많은 다리를 점령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강하할 때 합류하였다. 이 공수 작전은 연합군의 실패한 작전 중 하나인 마켓 가든 작전의 일환이었다.
콥은 벌지 전투와 헤게나우(헤게나우에선 작전에서보트가 미끄러짐)에서도 전투에 참여하였다.
같이 보기
미국 506 낙하산 보병 연대 E 중대
밴드 오브 브라더스
1914년 출생
1990년 사망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장인물
미국 육군공수학교 동문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미국 육군 군인<|end_of_text|>
| 15.527059 | 1,165.598297 |
18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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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C%B2%98%EB%9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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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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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리처드
### 기사:
리처드(Richard)는 독일의 요소 'ric'(왕)과 'hard'(굳셈)에서 비롯한 말이며,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족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
요크 공작 슈루즈베리의 리처드: 잉글랜드의 왕자이자 왕족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잉글랜드의 왕족
희곡
리처드 2세 (희곡): 약 1595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 희극
리처드 3세 (희곡)
실존 인물
리처드
리처드 닉슨: 미국의 정치가, 제37대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파인만: 미국의 물리학자
조지 리처드 마이넛: 미국의 의학자
리처드 액설: 존스홉킨스대학교 메디컬 스쿨 수료 후 컬럼비아 대학교의 전 교수
리처드 E. 테일러: 스탠퍼드 대학교의 명예 교수이자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J. 로버츠: 영국의 생화학자, 분자생물학자
리처드 애튼버러: 영국의 배우,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리처드 헨더슨: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R. 슈록: 미국의 화학자
리처드 F. 헥: 미국의 화학자
리처드 스몰리: 미국의 화학자
리처드 싱: 영국의 화학자
리처드 드라이퍼스: 미국의 배우
리처드 버턴: 영국 웨일스의 배우
리처드 마퀀드: 영국의 영화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미국의 영화 감독
리처드 도킨스: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
리처드 스톨먼: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 인물
리처드 기어: 미국의 배우
리처드 탈러: 독일계 미국 태생의 경제학자
리처드 해리스: 아일랜드의 영화 배우
리처드 체임벌린: 미국의 배우
리처드 판스워스: 미국의 배우
리처드 스톤: 영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보처즈: 군론과 리 대수, 수리물리학을 연구하는 영국의 수학자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의 귀족
리처드 젱킨스: 미국의 배우
리처드 던: 아일랜드의 은퇴한 축구 선수
리처드 멘터 존슨: 미국의 제9대 부통령(1837~41)
리처드 해밍: 미국의 수학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조지 5세의 손자
리처드 후커: 영국 성공회의 신학자
리처드 브랜슨: 영국의 기업가
리처드 프라이스: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
리처드 커: 더비 카운티에서 수비수로 활약하고 있는 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리처드 S. 이월: 미국의 군인
리처드 윌슨 (화가): 웨일스의 풍경 화가
리처드 윈터스
리처드 로저스
클리프 리처드: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의 가수
리처드 에벌린 버드: 미국의 탐험가 및 비행사
리틀 리처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
리처드 라이트 (음악가): 영국의 키보디스트
리처드 오언: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비교해부학자, 고생물학자
리처드 멀케이: 아일랜드의 정치인, 군인
리처드 베드퍼드 베넷: 캐나다의 변호사이자 정치인
리처드 레스터: 미국의 영화 감독
리처드 로저스 (건축가): 영국의 건축가
리처드 포터스: 미국의 기타리스트
리처드 라이트 (축구 선수):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리처드 로티: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도너: 미국의 영화 감독
리처드 프라이어: 미국의 배우, 스탠드업 코미디언
리처드 크롬웰
리처드 프랜시스브루스: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 편집자
리처드 S. 프레이저: 미국의 사회주의자, 인종문제 활동가
리처드 E. 그랜트: 에스와티니에서 태어난 영국의 배우
리처드 아미티지 (배우):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니부어
리처드 개리엇: 게임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
리처드 D. 재넉: 미국의 영화 제작자
리처드 시프: 미국의 배우
리처드 커티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영화 각본가 · 감독 · 프로듀서
리처드 트레비식: 영국의 발명가
제1대 하우 백작 리처드 하우: 영국 해군의 제독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영국의 탐험가, 인류학자, 작가, 언어학자, 번역가, 군인, 외교관
리처드 막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리처드 몽고메리: 아일랜드 태생의 군인
리처드 아이오아디: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카인드: 미국의 배우
리처드 제퍼슨: 미국의 농구 선수이자 NBA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선수
리처드 해치: 미국의 배우
리처드 록스버그: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제3대 벌링턴 백작 리처드 보일
리처드 애시크로프트: 영국의 가수 겸 작곡가
리처드 T. 존스: 미국의 배우
리처드 플라이셔: 미국의 영화 감독
리처드 그리피스: 영국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리모: 케냐의 육상 선수
리처드 크루즈: 영국의 펜싱 선수
리처드 로퍼: 미국의 칼럼니스트이자 영화 평론가
리처드 톰슨: 영국의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 가수
리처드 번스: 잉글랜드의 자동차 경주 선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영국의 귀족이자 정치가, 군인
USS 본험 리처드 (LHD-6): 미국 해군의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중 3번째 함선
리처드 매든: 스코틀랜드의 배우
리처드 아미티지: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아크라이트: 영국의 발명가
리처드 용재 오닐: 비올리스트
리처드 바크: 미국의 비행사, 작가
리처드 휴스
리처드 로런스 테일러: 영국의 수학자
리처드 라미레스: 미국의 연쇄 살인자
리처드 브레머: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스탠리 피터스: 영국의 철학가로 주로 정치 이론, 심리철학, 교육철학을 연구했다
리처드 호슬리: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종교학과 교수
리처드 첼리모: 케냐의 장거리달리기 선수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10,000m 은메달을 획득했다
리처드 힐튼: 미국의 사업가
리처드 타이슨: 미국의 배우
리처드 서클: 《스쿠비 두》(2002), 《아메리칸 허슬》(2013),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등을 제작한 영화 프로듀서
리처드 리치
리처드 윌슨
리처드 존스
리처드 스나이더: 미국의 외교관
리처드 플래너건: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리처드 버기: 미국의 배우
리처드 킹
리처드 스틸: 영국의 수필가·극작가·정치가
리처드 스티븐 호비츠: 미국의 배우이자 성우
리처드 코일: 영국의 배우
리처드 브레이크: 웨일스의 배우
리처드 하우프트먼: 미국의 범죄인
리처드 킬: 미국의 배우
리처드 딘 앤더슨: 미국의 텔레비전 및 영화 배우이자, 프로듀서 겸 작곡가
리처드 버: 미국 공화당 소속의 정치인
리처드 밴크로프트: 캔터베리 대주교
리처드 라이트: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리처드 라이트 (작가):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가필드: 매직 더 개더링 등 여러 카드 게임을 만든 게임 디자이너
리처드 아미티지 (정치인): 친일성향의 지일파(知日派) 미국의 정치인
리처드 베이머: 미국의 배우
리처드 마텔롱: 케냐 육상 선수
리처드 윌리엄슨: 영국인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리처드 그린
리처드 보컴: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이자 신약학자, 역사신학자
리처드 로저스 (작곡가): 미국의 작곡가
리처드 벨먼: 1953년 동적 계획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응용수학자
리처드 존슨
리처드 클라크: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육심리학 교수
리처드 오브라이언: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해먼드: 잉글랜드의 텔레비전 진행자
제2대 클렌카티 백작 리처드 트렌치: 영국의 정치인·외교관
리처드 베넷
리처드 헨리 리: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했던 미국 식민지의 〈리 결의안〉을 대륙회의에 제출한 것으로 유명한 정치인
리처드 그리코: 미국의 배우
돈 리처드: 미국의 가수, 댄서, 음악 프로듀서
리처드 페디: 캐나다의 기업인이자 메이플 리프 스포츠 앤드 엔터테인먼트의 회장이자 CEO로 토론토 랩터스와 토론토 FC의 공동 구단주
리처드 시먼스: 미국의 피트니스 유명인이자 배우
리처드 카일리: 미국의 배우
리처드 크레나: 미국의 배우
리처드 워커: 미국의 전 학자, 전 외교관
리처드 파워스: 미국의 작가
리처드 토머스: 미국의 배우
리처드 비그스: 미국의 배우
존 리처드 그린: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블루먼솔: 미국 민주당 소속의 정치인
리처드 커원: 아일랜드의 과학자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대학 교수, 역사학자
리처드 칸시노: 미국의 성우
리처드 애버던: 미국의 패션·인물 전문 사진 작가
리처드 셸비: 미국의 정치인
리처드 센터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로 캘리포니아 대학 준교수
리처드 보나: 카메룬 출신의 베이스 연주자
리처드 크로커: 아일랜드계 미국인 정치인
리처드 디지너: 미국의 다이빙 선수
리처드 이언 콕스: 웨일스 태생의 캐나다 성우
리처드 리 (기업인): 홍콩의 기업인
리처드 휴스 (음악가): 잉글랜드의 드러머
리처드 카본: 영국의 정치인
리처드 하먼: 캐나다의 배우
리처드 조던 개틀링: 개틀링건을 만든 사람
제1대 홀데인 자작 리처드 홀데인: 영국의 정치인
리처드 이스텀: 20세기 미국 배우
리처드 몰: 미국의 배우
리처드 카펜터 (음악가)
리처드 풀러
리처드 S. 해밀턴: 미국의 기하학자
리처드 징그러스: 미국의 기업인
리처드 스윈번: 영국의 철학가
리처드 라운트리: 미국의 배우
리처드 윈저: 잉글랜드의 배우 및 댄서
리처드 박
리처드 스톨츠만: 미국의 클라리넷 연주자
리처드 홀러웨이: 스코틀랜드 성공회(The Scottish Episcopal Church)의 주교
리처드 사이크스: 1979년 헤이그에서 아일랜드 공화국군에게 살해된 네덜란드 주재 영국 대사
리처드 S. 웨스트폴: 미국의 전기작가이자 과학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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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머리: 영국의 기업인이자 찰턴 애슬레틱 FC의 구단주이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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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G. 해처: 아프리카계 미국인 처음으로 게리의 시장(1968~87)을 지낸 정치인
리처드 리
리처드 스파이트 주니어: 미국의 배우
리처드 톰슨 (육상 선수):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육상 선수
리처드 카펜터: 영국 잉글랜드의 건축가
리처드 포스터: 미국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 미시건의 스프링 아버 대학교의 영성신학 교수
리처드 그린 (권투 심판): 미국의 권투심판
리처드 윌슨 (스코틀랜드의 배우): 스코틀랜드의 배우
리처드 이달고: 베네수엘라의 프로 야구 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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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쇼트: 잉글랜드의 배우
리처드 도노번: 아메리칸사모아의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골키퍼
리처드 파이러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출신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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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리어스: 영국의 배우
리처드 존슨 (배우)
리처드 버크: 모리스 버크라고도 불렸으며, 19세기 말의 중요한 정신과 의사
리처드 휴스 (작가): 영국의 소설가ㆍ극작가
리처드 샌더슨: 스코틀랜드(영국)의 가수
클레이턴 리처드: 미국의 야구 선수
리처드 구티에레스: 필리핀의 배우
리처드 크로너
리처드 에드런드: 미국의 영화 특수 효과 관련자
리차드
션 리차드: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연기자 겸 연극연출가
리차드 수쿠타 파수: 독일의 축구 선수
리차드 우레나: 미국 프로야구 아메리칸 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선수
리차드 게핀: 칼빈주의 신학자이며 장로교 목사
리차드 백스터: 영국의 청교도지도자, 시인, 찬송작가, 신학자
리차드 멀러: 미국의 역사 신학자이며 세계적인 칼빈연구가
리차드 마우: 미국의 신학자이며 철학자
리차드 프랫
리차드 십스: 영국의 신학자이자 성경 해석학자
리차드 플라벨
리차드 오피옹: 영국 잉글랜드 출신의 축구 선수
리차드 핼버슨
리차드 C. 갬블: 미국의 개혁신학자이며 교수
리차드 호튼: 영국의 의사, 잡지 편집자
리차르드
구즈미치 리차르드: 헝가리의 축구 선수
리차르드 오르티스: 파라과이의 축구 선수
리차르드 카라파스: 에콰도르의 사이클 선수
가공의 인물
리처드 앨퍼트 (로스트): 미국의 방송사 ABC에서 방영한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로스트의 등장인물 중 하나
리처드 웨버: 숀다 라임스가 제작한 TV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등장인물
리처드 워터슨:검볼의 등장인물.검볼의 아빠역이다.
리처드: 모여봐요 동물의숲의 주민이다.
같이 보기
리하르트<|end_of_text|>
| 7.516609 | 2,065.525879 |
253720
|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C%B4%88%20%28%EC%A0%84%EC%A1%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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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초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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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광초 (전조)
### 기사:
광초(光初)는 중국 전조(前趙) 조주(趙主) 유요(劉曜)와 말주(末主) 유희(劉煕)의 연호이자 전조의 마지막 연호이다. 318년 10월에서 329년 8월까지 10년 11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318년 10월, 유요는 석륵(石勒)과 힘을 합쳐 반란군을 제압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개원하였다. 328년 8월에 석륵에게 패하고 사로잡힌 유요는 항복을 거부하여 329년 초에 살해되었다. 이에 유요의 아들 유희가 도망쳐서 황위를 계승하여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으나 9월에 석호(石虎)에게 패하여 전조는 멸망하고 광초 연호는 폐지되었다.
같은 시기에 사용된 다른 연호로는 동진(東晉)에서 사용한 대흥(大興 : 318년 ~ 321년), 영창(永昌 : 322년 ~ 323년), 태녕(太寧 : 323년 ~ 326년), 함화(咸和 : 326년 ~ 334년), 성한(成漢)에서 사용한 옥형(玉衡 : 310년 ~ 334년), 전량(前凉)에서 사용한 건흥(建興 : 314년 ~ 361년), 후조(後趙)에서 사용한 태화(太和 : 328년 ~ 330년)가 있다.
연대대조표
관련항목
중국의 연호
전조의 연호<|end_of_text|>
| 7.938506 | 859.765929 |
261318
|
https://ko.wikipedia.org/wiki/Rm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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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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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Rmdir
### 기사:
rmdir(혹은 rd)는 유닉스, 도스, OS/2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등의 운영 체제에서 빈 디렉터리를 제거하는 명령어이다. 유닉스에서는 대문자로 쓸 수 없지만 DOS와 OS/2 운영 체제에서는 이러한 제한 조건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용법
일반적으로 가장 단순하게는 아래와 같이 사용될 수 있다:
rmdir 디렉터리_이름
위와 같은 형식으로 입력하며, 디렉터리_이름 대신에 삭제하고자 하는 디렉터리의 이름을 입력하면 된다.
이 명령어에 대해 유닉스에서는 -p와 같은 옵션도 존재한다. 이 옵션은 상위 디렉터리 역시 비어 있을 경우 상위 디렉터리도 함께 삭제하는 옵션이다. 예를 들어:
rmdir -p foo/bar/baz
라고 입력하면 baz/가 먼저 삭제되고, 다음 bar/ 그리고 마지막으로 foo/가 삭제됨으로써 명령어에서 지정한 모든 디렉터리 트리가 전체적으로 삭제된다.
유닉스 운영 체제에서 제공되는 rmdir 명령어는 디렉터리가 비어 있지 않은 이상 그 디렉터리를 삭제할 수 없다. 디렉터리와 디렉터리의 모든 내용을 함께 삭제하는 방법은 rm 명령어를 아래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다:
rm -r foo/bar/baz
도스에서는 이 명령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deltree라는 명령어를 사용하며 윈도에서는 rd /s directory_name를 사용한다.
참고 자료
rmdir - The program's manpage
각주
외부 링크
Microsoft TechNet Rmdir article
윈도우 명령어
유닉스 SUS2008 유틸리티
유닉스 파일 시스템 관련 소프트웨어
내부 도스 명령어
윈도우 관리
OS/2 명령어<|end_of_text|>
| 9.256058 | 1,021.402666 |
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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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D%B4%EC%95%8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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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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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아이아스
### 기사:
아이아스 또는 아약스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그리스 신화
아이아스(Αἴα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두 명의 아이아스가 나온다. 로마 신화의 아약스(Ajax)에 해당한다.
큰 아이아스 - 텔라몬의 아들
작은 아이아스 - 오일레우스의 아들
큰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의 용사이며 오디세우스와의 투표에서 지자 그 날 밤에 미치광이가 되어 소를 죽이게되고 날이 밝은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자살한다.
문학
아이아스는 아이아스를 주제로 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다.
스포츠
AFC 아약스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다.
아약스 케이프타운 FC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다.
컴퓨터
Ajax(Asynchronous JavaScript and XML)는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 기법이다.
지명
아이아스 (이탈리아)
같이 보기<|end_of_text|>
| 13.492716 | 762.429939 |
21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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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B%A3%A8%EC%9D%B4%EC%A6%88%20%EB%8F%84%ED%8A%B8%EB%A6%AC%EC%8A%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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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루이즈 도트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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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 기사:
마리 루이즈(, 1791년 12월 12일~1847년 12월 17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의 딸로, 프랑스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나폴레옹 1세의 황후이자 왕비였다. 빈 회의에서 한 때 프랑스 황후였던 그녀를 위해 파르마와 피아첸차, 구아스텔라의 여공작의 지위를 주었다.
생애
마리 루이즈는 프란츠 2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인해 쇤브룬 궁전에서 두 번 쫓겨나, 나폴레옹은 무섭고 증오할 남자라고 배웠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형을 괴롭히며 자랐다.
기대되는 결혼
그녀는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이혼을 알았을 때, 다음 황후가 될 사람에게 진심으로 동정함과 동시에,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자신이 나폴레옹과 결혼해야 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계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1810년 4월 1일, 마리 루이즈는 루브르 궁의 예배당에서 나폴레옹과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을 매우 상냥하게 대했기 때문에 마리 루이즈는 마침내 마음을 열고,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녀를 결코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녀는 후에 친구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항상 수많은 여관들과 담소를 나누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는 다르게 마리 루이즈는 사실에 들여보내는 것은 여관장인 몽테벨로 부인과 의상담당의 류세이 부인 등 한정된 사람들 뿐 그녀의 방은 언제나 조용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여대공이기는 하나 조신하게 자랐기 때문에, 치장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고, 옷은 조제핀과 비교하면 조금밖에 주문하지 않았으며, 보석은 거의 주문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제핀이 황후였을 때에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상인들 사이에서 마리 루이즈의 평판은 대단히 나빴다. 또한 나폴레옹의 여동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낼 수 없었다.
적자 출산
1811년 3월 20일, 마리 루이즈는 로마왕(나폴레옹 2세)를 출산했다. 이 때, 꽤 심한 난산으로 모자 중 어느 쪽 밖에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을 때, 나폴레옹은 주저하지 않고 어머니를 구해라!라고 했다. 나폴레옹은 아들의 탄생을 매우 기뻐해서 귀여워했지만, 마리 루이즈는 별로 이 아이에게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양육 담당인 몽테스큐 부인은, 로마 왕이 눈을 뜨면 바로 마리 루이즈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작은 아이에게 익숙하지 않은 마리 루이즈는, 마치 부서진 물건을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손대고, 가슴에 조금 안은 것만으로 바로 아이를 몽테스큐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오후에는 마리 루이즈가 로마왕의 방에 가는 게 습관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어르는 일도, 말을 거는 일도 없고 단지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것뿐으로, 여관들이 그녀에게는 모성애가 빠져있는 게 아닐까 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만큼, 아이의 양육을 몽테스큐 부인에게 일임해버렸다. 그 때문에, 로마왕이 가장 정든 사람은 몽테스큐 부인으로, 그가 처음으로 말한 단어는 '마망 큐'로, 부인을 많이 감격시켰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 탈출
하지만, 1812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고, 1813년 라이프치히의 싸움에서도 대패했다. 1814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 장군, 프로이센의 블뤼허 장군, 나폴레옹의 옛 부하였고 스웨덴 왕세자가 된 베르나도트(후의 스웨덴의 칼 14세), 영국의 웰링턴 공에 의한 대규모 나폴레옹 포위망이 결성되어, 더욱 더 나폴레옹과 제국은 궁지에 몰렸다.
마리 루이즈가 있는 튈르리 궁전에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동맹군의 파리 공격에 대비해, 그녀와 로마왕의 처우를 둘러싸고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브리 경무대신은, 황후가 수도를 벗어나는 일은 제국의 붕괴와 동일하고, 반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파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칸바세레스 대법관과 탈레랑도 이 의견에 찬동하였으나, 육군대신 클라르크는, 만일을 생각해서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장소로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마리 루이즈는 한 마디도 말하는 일 없이 논의의 내용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어도 논의는 결론이 나지 않고, 투표에 부쳐졌다. 그 결과, 로마왕과 마리 루이즈는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며 기권한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일어서서, 전에 나폴레옹에게서 받아둔 성명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불행에도, 만일 싸움에 지는 일이 생겼을 때, 황후와 로마왕은 빨리 파리에서 랑부예로 떠나서, 절대로 적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 루이즈는, 이 명령에 결사 반대했다. 그리고 파리를 비우는 일은 부르봉 왕조의 부활에 절호의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나는 이대로 파리에 머무르면서 황제 부재시의 섭정을 맡은 프랑스 황후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때 마리 루이즈는 아버지 프란츠 2세를 통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설득하여, 로마왕을 나폴레옹 2세로 즉위시킬 가능성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814년 3월 29일 아침, 마리 루이즈와 로마왕은 10대의 대형마차로 랑부예를 항해 출발했다. 하지만 랑부예도 이미 위험한 것을 알고, 마리 루이즈 일행은 더욱 먼 루아르 강 근처에 있는 블루아 성으로 나아갔다. 성에 도착한 것은 4월 2일 밤중이었다.
6일 뒤인 4월 8일에, 마리 루이즈는 남편이 퐁텐블로 궁전에서 퇴위했다는 전갈을 들었다. 나폴레옹이 있는 퐁텐블로 궁전이 자신이 있는 블루아 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그녀는 곧바로 마차를 준비해 나폴레옹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도중에 장 란 원수의 미망인인 몽테벨로 부인은, 나폴레옹 황제가 나라를 잃어버린 지금은, 마리 루이즈와 로마왕의 앞날이라도 프란츠 황제에게 탄원해서 보증을 서라고, 조언을 집요하게 계속했다. 몽테벨로 부인은, 엘바 섬에 간 것은 정말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궁정의 편한 생활을 안 그녀는, 지위를 잃은 나폴레옹에게의 충성을 빨리 버리고, 부르봉 측에 붙어 단물을 빨아먹는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오를레앙에 도착해서,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 앞으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당연히 프란츠 1세는 딸의 애원같은 건 들을 생각이 없었다. 황제도 메테르니히도, 마리 루이즈를 어디까지고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허락하에 시집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토스카나는 원래 통치자인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프란츠 1세의 친동생, 마리 루이즈의 숙부)에게 반환했고, 마리 루이즈를 위해서는 파르마 공국의 통치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 4월 12일에, 몽테벨로 부인의 뜻을 전해받았다고 생각되는, 프란츠 2세의 사자를 칭하는 인물이 돌연 마리 루이즈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반강제적으로 그녀와 로마왕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날 밤, 완전히 절망한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궁전에서 독을 마셨다.
나이페르크 백작의 등장
마리 루이즈는 러시아 병사가 수비하는 랑부예에 있는 성에서,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그에게서 편지를 받는 일도 없이, 오랫동안 지내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인 프란츠 1세와 재회한 그녀는,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프란츠 1세는 여윈 그녀에게, 오랫동안 엑스레뱅에 있는 온천에서 정양하고, 거기서 엘바 섬으로 가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마리 루이즈는 빈에 로마왕을 남긴 채로, 엑스레뱅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엑스레뱅에 향할 때, 마리 루이즈는 메테르니히가 붙여준 호위 겸 감시역의 나이페르크 백작과 동행했다. 메테르니히는 엑스레벵'에서 마리 루이즈가 체제중에 필요한 수단을 써서 엘바 섬에 있는 나폴레옹과 합류하고 싶다는 바람을 단념시키는 것. 혹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엘바 섬으로 갈 것을 단념하지 않고 실행할 때에는 동행할 것이라고 명령을 내렸다.이 명령을 받은 나이페르크 백작은 10개월 안에 연인이 되고, 곧 남편이 되어주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그는 42세의 유부남으로,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증오하고 있었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생일에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로마왕의 흉상을 보냈고, 몇 통이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한편, 나폴레옹 쪽에서도 마리 루이즈가 로마왕을 데리고 와 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들인 알렉산드르를 데리고 엘바섬에 와 준 애인 마리아 발레프스카까지도 3일만에 쫓아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엑스레뱅에서는, 세련된 귀족인 나이페르크 백작이 기지가 풍부한 회화 등으로 금세 마리 루이즈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그녀는 마침내 나폴레옹을 잊어버렸다. 어느 가을날, 산책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피한 소레이유 돌이라고 하는 조그만 숙소에서 남녀의 관계를 맺었다. 이 때문에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루이즈는 하늘을 우러러봤다. 그리고 그녀는 또다시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3월 20일,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돌아오라는 편지를 몇통이고 보냈으나, 그녀는 한 번도 답장을 쓰려고도 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의 아내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생활
같은 해 6월 18일의 회의에서 마리 루이즈의 파르마 통치가 결정되었다. 아들인 로마왕이 동행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녀는 조금도 파르마 행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새로운 생활만이 가득차 있었다. 3개월 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다는 것을 알고, 이제 세상은 편안합니다. 나폴레옹은 두번이나 평화를 흔들려고 했지만 불가능했으니까. 앞으로는 사람들이 선의와 관용을 가지고 그와 접촉해 주시길 빌 뿐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운명과 관련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라고 프란츠 1세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1816년 3월 7일, 마리 루이즈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같이 파르마를 향해 떠났다.
한편, 로마왕은 감금과 같이 외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마리 루이즈와 헤어져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을 기대했지만, 마리 루이즈는 1817년 5월 1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 알베르티나를 비밀리에 출산해서 로마왕과의 약속을 간단하게 깨버렸다. 어머니가 약속을 깨어버렸기 때문에 로마왕은 아주 슬퍼했다. 마리 루이즈가 아들을 만나는 간 것은 헤어지고 2년도 더 지난 1818년 7월의 일이었다.
이 때,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에게 시집간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지나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냈으며, 사이가 좋았던 언니 마리 루이즈에게도 몇통씩 써 보냈지만, 그녀와 프란츠 1세는 레오폴지나에게 거의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끝까지 곤경에 처한 레오폴지나의 기분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레오폴지나는 자신을 합스부르크 가의 희생자로 부르며, 자신은 곧 남편의 폭력에 의해 죽을 거라고 비통한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곧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로마왕과 재회한 뒤, 파르마에 돌아온 마리 루이즈는, 1819년 8월 9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두 번째 아이인 그리에모를 역시 비밀리에 출산한 뒤, 로마왕을 만나러 빈에 가는 일을 중지했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었다. 마리 루이즈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러 오페라 극장에 갔을 때 우연히 본 신문에서 나폴레옹의 죽음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마리아 루이즈에게 자신의 심장을 보관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녀는 내 소원은 그의 심장이 그의 무덤에 묻히는 것입니다라고 한 마디로 거절하고, 그 대신에 데스마스크를 받았다. 하지만 그 데스마스크도 오랫동안 아이들의 장난감의 하나가 되었다.
1822년 8월 15일, 마리 루이즈는 나이페르크 백작의 네 번째 아이가 되는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1825년에는 다섯 번째의 아이를 유산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가 빈에 있는 아들을 보러 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9월 초순에, 프란츠 1세의 승낙을 받고 정식으로 나이페르크 백작과 결혼했다. 이 때, 로마왕은 라이히슈타트 공이 되었다.
나이페르크 백작의 죽음과 그 후
1829년 2월 22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었다. 그의 유언에는, 프란츠 1세에게도 라이히슈타트 공에게도 비밀로 했던 알베르티나와 그리에모에 관한 일이 기재되어 있어서, 마리 루이즈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아이들은 나폴레옹이 생존해있을 당시에 태어난 아이로, 마리 루이즈와는 별거를 강요당해 매일같이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는 것을 금지당해, 타인과 같이 부를 것을 의무로 정했다. 그 일을 안 프란츠 1세는 경악했으나, 다음과 같이 딸에게 말했다.
1832년 7월 22일, 라이히슈타트 공은 죽었다. 다음날,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인 마리아 레티치아에게 손자의 죽음을 편지로 알렸다.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 뒤, 마리 루이즈의 통치 보좌역으로서 벨크라인, 다음에는 말샬이 왔으나, 인기가 낮거나 파르마에 친숙해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달아 해임되었다. 그 뒤, 7월 혁명까지 샤를 10세를 시중들고, 프랑스에 살고 있던 샤를 르네 도 봉벨이 왔다. 그는 온화한 인물로, 마리 루이즈와 그는 서로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1834년 2월 17일에 결혼했다.
1847년 12월 17일, 마리 루이즈는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1.나폴레옹 1세와의 사이에서
1.나폴레옹 2세(로마왕,라이히슈타트 공)
2.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사이에서
1.알베르티나
2.그리에모
3.?
3.샤를 르네 도 봉벨과의 사이에서
자식 없음
1791년 출생
1847년 사망
오스트리아 여대공
프랑스의 왕비
프랑스의 섭정
파르마 공작
오스트리아의 왕녀
오스트리아계 이탈리아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빈 출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세기 보헤미아 사람
19세기 여자 통치자<|end_of_text|>
| 15.47714 | 2,805.108887 |
21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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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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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임영호
### 기사:
임영호(林榮鎬, 1955년 5월 15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한국철도공사(KORAIL) 상임감사, 대전 동구청장을 지냈다. 대전 동구 출생이다.
학력
1967 산내초등학교
1970 충남중학교
1973 충남고등학교
1980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 학사
1983 한남대학교 경영학 학사
1991 서울대학교 대학원 도시계획학 석사
2002 한남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생애
1955년 5월 15일에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에서 태어났으며, 2살 때 부친의 별세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젊은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도 9급, 7급, 행정고시를 내리 합격하여 공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39세에 고향인 대전 동구의 구청장을 역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3번 대전 동구청장을 지냈다.
대전 동구청장 재임시 대전 동서관통도로를 개통했고 16개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추진했으며 가오지구 개발, 낭월지구 개발, 용수골 대학촌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중앙시장과 대전역세권에 대규모 공영주차장을 건립했고 중앙시장 아케이드 건립에 노력을 기울였고, 구청사에 문화갤러리, 가양동에 문화정보관을 개관하고, 인동장터 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만들었으며 대전 동구에 각종 도서관, 복지관, 체육관, 노인회관 등을 건립하여 동구의 문화복지 인프라를 확충했다. 또한 민원처리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해 행정착오보상제도, 해피콜 제도, 행정서비스 헌장의 제정, 구정 설명회, 동장회의 주민참관 제도 등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그의 동구청장 재임시 대전 동구는 2년 연속 전국 최우수기관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최우수 단체, 월간 신동아에서 뽑은 전국 기초단체 베스트 선정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으로 대전 동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에서 경제정책과 법안을 논의하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하여 정하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금융과 공정거래정책 및 법안을 논의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그밖에도 국회 공기업관련대책특별위원회 간사,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간사, 국제경기대회지원특위 간사도 역임하였다.
이후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철도공사(KORAIL) 상임감사를 역임하였다.
선거 정보
각주
외부 링크
임영호 의원 홈페이지
195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동구 (대전광역시) 출신
한남대학교 동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동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
충남고등학교 동문
충남중학교 동문
산내초등학교 (대전) 동문
대전대학교 교수
자유민주연합 당원
선진통일당 당원
국민의당 당원
바른미래당 당원
대전 동구청장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평택 임씨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대전광역시의 국회의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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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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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차로 스팔란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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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라차로 스팔란차니
### 기사:
라차로 스팔란차니(, 1729년 1월 10일 ~ 1799년 2월 12일)는 이탈리아의 동물학자로, 고기 국물을 충분히 끓인 다음 마개를 막아도 미생물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또 하등동물의 신체의 일부가 재생하는 것에 관한 연구와 온혈·냉혈동물의 호흡에 의한 가스 교환에 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양서류의 인공수정에 성공하여 수정 (受精) 에서의 정액을 연구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동물에 대하여 재생 (再生) 실험을 행하고, 혈액순환을 연구하며, 소화 문제(消化問題)에도 손을 대었고, 또 호흡에 관해서도 귀중한 관찰과 실험을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생물학 연구에 논리적·계통적 방법을 적용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는다.
1729년 출생
1799년 사망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이탈리아의 곤충학자
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왕립학회 석학회원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신부
가톨릭 성직자 과학자
이탈리아의 생리학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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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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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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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소마 (동음이의)
### 기사:
소마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음식
소마: 인도와 이란 종교에서 언급되는 음료.
소마: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마약.
지리
소마시: 일본 후쿠시마현의 시.
소마촌
소마군
소마: 감비아 남부에 위치한 마을.
소마: 튀르키예의 도시.
소마역: 일본 후쿠시마현 소마시에 있는, 동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
소마 나카무라 번: 일본 에도 시대의 번 중 하나.
실존 인물
소마 나오키: 일본의 은퇴한 축구 선수
사이토 소마: 일본의 성우
소마 노부타네 (1677년):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미치타네: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마스타네: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다다타네: 에도 시대 전기의 다이묘
소마 요시타네 (1619년): 소마 나카무라 번의 2대 번주
소마 다카타네: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마사타네 (1661년):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마사타네
소마 무라타네: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도모타네: 막말의 다이묘
소마 모로타네: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요시타네 (1765년):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사다타네: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
소마 도시타네: 소마 나카무라 번의 초대 번주
소마 요시타네
소마 노부타네: 소마 나카무라 번의 8대 번주 소마 모로타네의 맏아들
소마 다카히토: 일본의 축구 선수
가공의 인물
소마: 양경일이 그린 만화 《소마신화전기》의 주인공.
소마: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직업 소울마스터의 약칭.
기타
소마 큐브: Piet Hein이 개발한 퍼즐.
소마 사건: 일본 메이지 연간에 발생한 다이묘 가문의 내분인 오이에 소동(御家騒動)의 하나.
소마 (비디오 게임)
같이 보기<|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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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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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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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박정희 (동음이의)
### 기사: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사람
박정희(朴正熙, 1917년 ~ 1979년)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로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박정희(朴貞嬉, 1923년 ~ 2014년)는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박정희(1941년 ~ )는 대한민국의 대구광역시의원이다.
박정희(1947년 ~ )는 대한민국의 강원도 강릉시의원이다.
박정희(朴貞熹, 1960년 ~ )는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로 고려대학교 과학기술대학 자연과학부 신소재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박정희(1966년 ~ )는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이다.
박정희(1973년 ~ )는 대한민국의 제9대 충청북도 청원군의원이자, 제1·2·3대 충청북도 통합 청주시의원이다.
박정희(朴貞姬, 1975년 ~ )는 대한민국의 핸드볼 선수이다.
지명
박정희로(朴正熙路)는 경상북도 구미시의 간선도로이다.
박정희체육관은 경상북도 구미시 광평동에 있는 실내 체육관이다.
같이 보기<|end_of_text|>
| 5.734859 | 607.803951 |
17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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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칼자리 감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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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조각칼자리 감마1
### 기사:
조각칼자리 감마1(Gamma¹ Caeli)은 조각칼자리에 있는 쌍성이며, 지구에서 약 185광년 떨어져 있다.
주성 조각칼자리 감마1 A는 겉보기 등급 +4.55의 오렌지색 거성이며, 반성 감마1 B는 A로부터 천구상으로 3.1초각 떨어져 있으며 겉보기 등급은 +8이다.
감마1
쌍성
바이어 천체
K형 거성
032831
1652
023595<|end_of_text|>
| 18.829433 | 466.731975 |
126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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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0%9D%EA%B3%A0%20%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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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렝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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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마렝고 전투
### 기사:
마렝고 전투(, , 1800년 6월 14일)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州) 알렉산드리아 도시 근교 남동쪽 5km 떨어진 마렝고 평원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프랑스군이 미하엘 폰 멜라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격전끝에 이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브뤼메르 쿠데타(Brumaire coup)로 인해 신설된 제 1집정관(First Consul)이 된 나폴레옹은 휘하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진군하던 와중에 멜라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에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허를 찔렸고 물러날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전투 와중에 나폴레옹이 보낸 전언으로 인해 루이 드제(Louis Desaix)가 지휘하는 선발 예비대가 돌아와 전투에 참여했다. 드제는 포격을 가한 끝에 반격을 시도했고, 물러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였다. 이때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맡은 기병대의 지휘는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Kellermann)이 맡아 오스트리아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약 9,5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태로 알렉산드리아로 물러났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역전을 성공시킨 주역 드제는 난전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배경
1798년 오스트리아는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을 개시하고 1800년까지 북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1799년 제 1통령에 취임하여 프랑스 독재권을 확립한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제네바에 군을 집결시켰다. 1800년 5월 37,000명을 이끌고 그랑 생 베르나도 고개(Gran San Bernardo)을 넘어 북 이탈리아에 진출했다.
그때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임무를 맡은 미하일 폰 멜라스가 10만의 병력을 갖고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 앙드레 마세나를 압도하여 이탈리아의 요충지 제노바를 포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배후에 있던 밀라노와 파비아를 점령하여 멜라스와 오스트리아-알프스 방면군을 분단시키는 작전에 나섰으나 제노바의 프랑스군 부대는 한계에 달하여 6월 4일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토리노에 집결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차단을 노리고 폰강을 건너 6월 9일 전위부대가 제노바에서 진출한 오스트리아군과 충돌하여 승리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퇴로가 차단당할 위험이 생겼고, 사령관 멜라스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을 공격하기로 하고, 동쪽으로 진군할 것을 결정한 뒤 알렉산드리아에 집결하여 프랑스군과 대결하기 위해 전진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알렉산드리아엔 없고, 제노바 방면으로 퇴각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상당한 전력을 가진 분견대를 분산하여 오스트리아군의 북쪽 퇴로인 포강과 남쪽 퇴각로인 제노바로 서진했다.
루이 드제군단의 별동대는 제노바에 대한 차단을 위해 파견하고, 주력은 멜라스와 맞아 싸우기 위해 마렝고로 향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전진하고 있었고, 이렇게 양군은 6월 14일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마렝고 평원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멜라스는 공격을 개시했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아차렸다.
오스트리아군 공격
오스트리아군(약 3만 1천의 전력과 100문의 포)은 보르미다 강(Bormida River)을 좁은 폭에 있는 두 개의 다리를 통해 건너(강은 쉽게 건너기 힘든 곳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의 이동은 오전 6시에 시작되었는데 9시까지도 아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드레아스 오레일리( Andreas O'Reilly)가 지휘를 맡은 약 3,300명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는 프랑스군의 정찰거점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으로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멜라스가 지휘하는 18,000명의 오스트리아군 중앙은 폰타노(Fontanone) 하천 앞에 배치되어 있는, 클로드 빅토르(Claude Victor)의 휘하 군단의 1개 혹은 2개의 사단을 지휘하는 가스파르 가르당(Gaspard Gardanne)의 프랑스 보병대의 저지를 받을 때까지 마렝고로 진군하였다. 피터 오트(Peter Ott)장군이 지휘를 맡은 7,500의 오스트리아군 좌익은 프랑스군의 북쪽에 위치한 카스텔 케리올로 성(Castel Ceriolo)을 프랑스군이 방어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프랑스군의 우익을 포위하거나, 프랑스군의 전열과 밀라노와의 연락망을 끊을 수도 있었기에 프랑스군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가르당 휘하의 부대는 훌륭한 활약을 펼쳐 상당한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군을 저지하였다. 가르당 휘하의 사단이 지쳤을 때 빅토르는 이들에게 폰타노 하천 뒤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휘하의 2번째 사단을 지휘하던 자크 삼발르(Jacques Chambarlhac)에게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크 삼바르는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울 용기를 잃었고 곧 궤주하였다. 프랑스군은 오후까지 마렝고 마을과 폰타노 하천을 따라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우익과 좌익 모두 아무 장해물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우선 멜라스는 빅토르가 방어를 맡은 지역에 카를 해딕(Karl Haddick)의 사단을 보내 맹공을 펼쳤다. 그러나 카를 하디크는 전사하고 휘하 부대는 퇴각하였다. 이에 멜라스는 콘라드 카임(Conrad Kaim)의 사단을 보냈다. 결국 프랑스군에 지원군이 도착하자 피터 모르친(Peter Morzin) 휘하의 정예 척탄병 사단이 마렝고 마을 공격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이때 멜라스는 심각한 전술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루이 가브리엘 쉬셰(Louis Gabriel Suchet) 휘하의 군단이 남쪽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한다는 잘못된 보고를 곧이곧대로 믿고 님프스히(Nimptsch)의 후사르 여단 2,300명을 떼어내 있지도 않은 남쪽의 적을 저지하는 데 파견했다.
마렝고에서 5km 정도 떨어져있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기병대 일부가 남쪽으로 이동했음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오전 10시쯤에 이러한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이 퇴각을 엄호하기 위한 양동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부관 장 란(Lannes)과 조아생 뮈라(Murat)에게 빅토르 휘하의 군단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장 란 휘하의 군단은 프랑수아 와트린(François Watrin)의 보병 사단, 조제프 마이노니(Joseph Mainoni)의 보병 여단 그리고 피에르 샹포(Pierre Champeaux)의 기병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 란 군단은 좌측이 취약한 전열을 이루었다. 켈레르만(Kellermann) 휘하의 중기병 여단과 제8 용기병 부대는 좌측의 보호를 맡았으나 빅토르 휘하의 부대를 포위공격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한 조반니 필라티(Giovanni Pilati) 휘하의 오스트리아 경 용기병 부대의 공격을 받아 격파 당했다. 샹포는 오트 휘하의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오전 11시가 되었을 무렵 나폴레옹은 전장에 있었고, 분견대로 파견했던 부대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려 구원하러 오도록 하였다.
프랑스 군 분견대가 달려오는 동안 장 샤를 모니에르(Jean-Charles Monnier) 사단과 집정관 근위대가 마렝고를 지키기보다는 탄약이 떨어져 가는 빅토르 휘하 부대가 방어를 하고 있던 프랑스군의 우익으로 달려가 방어에 합류했다. 오후 2시경 프랑스군은 카스텔 케리올로를 공격했다. 오트는 모니에르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모니에르는 북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거의 같은 시작 마렝고가 오스트리아군에 함락되었고 나폴레옹 휘하의 부대는 총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약 3km정도를 물러난 후 산 길리아노(San Giuliano)에서 간신히 병력을 재집결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일단 23,000명의 병력과 16문의 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적으로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불리했고, 유리한 방어거점을 상실한 상태였다. 전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멜라스는 작은 부상을 입은데다가 70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지휘권을 참모장 안톤 자흐(Anton Zach)에게 넘겼다. 오스트리아군 중앙은 프랑스군을 전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총 공격을 감행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에서 오레일리가 소규모 프랑스 분대(이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를 습격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며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오레일리의 부대는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담당한 오트는 올리버 리바우드(Olivier Rivaud) 휘하의 소규모 기병 여단이 북쪽에서 견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을 몰아붙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의 반격
오후 3시가 막 지났을 무렵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쪽 방면의 견제를 명령 받은 드제(Desaix)는 나폴레옹 본인 휘하의 병력(장 부데(Jean Boudet) 휘하의 사단으로 5,000명의 보병과 8문의 포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끌고 온 것을 발견했고,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고 드제는 대답했다.
"이 전투는 완전히 패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아직 오후 2시, 이제는 저희가 이길 차례입니다."
프랑스군은 재빨리 움직여 산 길리아노 앞에 체력을 충분히 비축한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은 느리게 공격을 개시했다. 오귀스트 마르몽(Auguste Marmont)은 남은 프랑스군의 포를 총동원해 진군해오는 오스트리아군에 포격을 개시했다. 부데 사단은 여단의 전열을 이루어 오스트리아군의 종대 끝을 향해 전진하여 프란시스 세인트 줄리엥(Francis Saint-Julien)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선봉 여단을 격파하였다. 자흐는 프란츠 라터만(Franz Lattermann) 휘하의 척탄병 여단으로 하여금 전열을 구성하여 전진시킨 후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다. 위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드제를 다시 파견했고, 기병대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마르몽이 지휘하는 포병대는 오스트리아군에게 근거리에서 포도탄을 쏘아댔다. 얼마 후 오스트리아군의 화약 운송차가 폭발하였다. 이렇게 혼란이 퍼진 와중에 켈레르만의 중무장 기병대(약 400명)가 라테만 휘하의 부대의 좌측을 공격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 척탄병 부대는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자흐와 휘하의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조아생 뮈라와 켈레르만은 즉각적으로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이들을 궤주시켰다.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통해 도망쳤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군 후방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제2 척탄병 여단과 혼란에 휩쓸리지 않은 기병대의 도움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 중군은 간신히 보르미다(Bormida)의 뒤에 있는 안전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오트와 오레일리 휘하의 양 측은 무사히 퇴각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2시간의 전투 와중에 15개의 군기 40문의 포를 잃었고, 거의 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사상자는 6,000명에 달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4,700명 정도이고 900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장을 탈환하였고, 전략적인 주도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제의 몸이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영향
24시간의 전투 끝에 멜라스는 협상에 임하기로 하였다.(알렉산드리아 협정 Convention of Alexandria)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은 티치노 강(Ticino River) 서쪽의 북부 이탈리아에서 퇴각하였고, 이탈리아에서 군사작전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제 1 집정관으로서의 나폴레옹의 위치는 이전의 전역과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였다. 결국 모로(Moreau)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이 알프스 이북에서 1800년 11월 3일 호엔린덴 전투(Battle of Hohenlinden)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종전을 하게 된다.
일화
양파와 버섯을 와인과 토마토소스에 삶은 유명한 닭요리는 치킨 마렝고(Chicken Marengo)라 불리는데,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따왔다. 지역 전승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요리사가 근처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사르도우(Sardou)의 연극 라 토스카(La Tosca), 푸치니(Puccini)의 오페라 《토스카》Tosca)는 모두 이 사건이 일어났던 때를 주로 다루고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의 경우 테 데움(Te Deum 토스카가 잔칫날 저녁 부르는 노래)은 마렝고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음을 기념하고 있다. 이 상황은 초전에 프랑스군이 불리했던 소식이 전해졌을 때이며, 후에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이 명백해 지자, 제2막에서는 나폴레옹이 승리했다고 수정한다.
각주
참고
역사군상시리즈 《전략전술병기사전 유럽근세편》
Arnold, James R. (2005). Marengo & Hohenlinden: Napoleon's Rise to Power. Pen & Sword.
Smith, D. (1998). The Greenhill Napoleonic Wars Data Book. Greenhill Books.
Shosenberg, James (June 2000). "To Marengo, Battle of 1800". Military History 17 (II).
외부 링크
The Battle of Marengo - A Bicentennial Review An overview of the battle, including short summaries for beginning students and detailed analysis for more serious readers.
The French Army 1600-1900
Consular Guard at Marengo
Gaspar Cugnac, Campaign of the Army of the Reserve in 1800 This link is really a taster for purchase of the whole thing: it is not live for the second volume (covering Marengo) or for the second half of the first volume
Alex. Berthier, Relation of the Battle of Marengo
A wargame on the battle of Marengo Interesting, but Berthier "lies like a bulletin"; the French loss of Marengo village is actually described straight-faced as a planned withdrawal to previously-prepared positions.
1800년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의 전투
프랑스가 참가한 전투
오스트리아가 참가한 전투
1800년 분쟁
1800년 프랑스
1800년 이탈리아
1800년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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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B%B0%EB%AC%B4%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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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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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티무르
### 기사:
티무르 베그 구르카니(, , 1336년 4월 9일~1405년 2월 18일)는 중앙아시아의 몽골인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재위: 1370년 ~ 1405년)이다. 그의 이름은 본래 몽골어계 인명인 테무르이나, 그것의 페르시아어형인 티무르라는 표기로 더 많이 쓰인다. 유럽권에서는 태멀레인 또는 타메를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름
‘티무르’는 튀르크어 ‘테무르(Temür, 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의 이란어형이다. 테무르는 철(鐵)을 의미하는 돌궐어에서 나온 것으로, 튀르크인과 몽골인들의 이름에 흔히 사용되었다. 철(鐵)이라는 뜻의 테무르는 현대 투르크어에서 테미르(temir)로 변형되어 그대로 통용되고 있고 남성의 이름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티무르의 시대의 몽골의 전통은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한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한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아미르’(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때때로 그 앞에 ‘부주르그(buzurg)’ 또는 ‘칼란(kalān)’, 즉 ‘위대한’을 붙여 ‘위대한 아미르’라 했다.
그가 칭기스 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그의 이름으로 통치한 뒤에는 ‘부마‘()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사위’라는 의미인데, 그가 칭기스 가문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인 무굴 제국의 군주들은 이를 근거로 스스로의 왕조를 ‘구르칸(Gurkān) 왕조’라고 불렀다.
이란의 사서들에서 그는 티무리 랑()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의미이다. 그의 적들은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 몽골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역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도고론 테무르(Доголон Төмөр)라 불렀다. 유럽에서 그를 부를 때 사용하는 태멀레인(Tamerlane)은 ‘티무리 랑’의 변형이다.
부계조상 및 징기스칸과의 관계
티무르는 자신의 부계 혈통이 투마나이칸(Tumanay Khan) 툼비나이 세첸(Tumbinai Setsen)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투마니이칸은 징기스칸(Genghis Khan)의 고조부라는 점에서, 티무르의 주장이 맞다면 티무르와 징기스칸은 같은 부계 혈통에 속하는 친족이 된다. 투마나이칸의 현손(玄孫)인 카라차르 노얀(Qarachar Noyan)은 황제의 장관으로서,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의 통치자이자 후임자의 아들인 차가타이칸(Chagatai Khan)을 도왔다. 13-4세기 기록에서 카라차르에 관란 언급은 많지 않지만, 티무르제국(Timurid) 시기 자료에서는 몽골제국 초기 역사에서 카라차르에 관한 역할을 상당히 강조한다. 또한 이들 사료에서는 징기스칸이 차가타이칸의 딸을 카라차르에게 시집보내어서 이들 간에 부자관계를 형성하였다고 강조한다. 카라차르와 차가타이의 딸의 후예라고 주장함으로써 티무르는 차가타이의 친족임을 주장하였다.
티무르의 모친 테키나 하툰(Tekina Khatun)의 계통은 더욱 불분명하다. 야즈디(Yazdi)의 전기 자파르나마(Zafarnama)에는 테키나 하툰에 관한 배경 설명 없이 이름만 표기되어 있다. 1403년 술타니야(Sultaniyya) 대주교(Archbishop) 요하네스 데 갈로니폰티부스(Johannes de Galonifontibus)의 기록에서는 테키나 하툰이 천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수 십년 후에 기록된 무이즈 알 안삽(Mu'izz al-Ansab)이라는 기록에서는 테키나 하툰은 몽골 바를라스(Barlas) 부족과 인접한 야사우리(Yasa'uri) 부족과 관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븐 할둔(Ibn Khaldun)은 티무르가 자신의 모친이 페르시아(Persia)의 영웅 마누체르(Manuchehr)의 후손이라고 언급하였다고 전한다. 아흐마드 이븐 아랍샤흐(Ahmad ibn Arabshah)는 그녀가 징기스칸 후예라고 하였다. 18세기 저술 『티무르의 책(Books of Timur)』에서는 테키나 하툰이 '사드르 알 샤리아(Sadr al-Sharia)'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드르 알 샤리아는 부하라(Bukhara) 지역의 하나피(Hanafi) 학자 우바이드 알라 알 마부비(Ubayd Allah al-Mahbubi)로 추정된다.
배경
1340년대 차가타이 칸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마 와라 알나흐르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서는 1346년에 유력한 아미르인 카자간이 군주인 카잔 한을 살해하고 실권을 잡았다. 권력을 장악한 카자간은 헤라트와 인도 방면에 대한 원정을 기도했지만, 1358년에 암살당하고 만다. 카자간의 죽음이후 마 와라 알나흐르 지역은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다. 이때 동차가타이 한국에서는 투글루크 티무르가 한으로 즉위하면서 칸의 권력이 확고하게 되었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이슬람을 수용하고 카자간의 암살 이후 혼란에 빠진 마 와라 알나흐르에 두 번이나 진군해 차가타이 울루스를 재통일했다. 티무르가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때이다.
티무르가 속한 바를라스부는 칭기스 칸이 차가타이에게 부여한 4개 천호의 하나이다. 티무르의 가문은 바를라스부의 명문에 속했지만, 티무르가 태어날 무렵에는 소수의 하인을 거느린 가문에 불가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의 사회적 명망은 아주 높았었다. 그의 가문은 칭기스 가문과 공통적인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티무르의 아버지 아미르 타라가이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바를라스부 내부에서는 존중받았다.
생애
젊은 시절 티무르는 차가타이 한국의 동서분열과 혼란을 틈타 하인들을 데리고 가축을 약탈하는 도적질을 일삼았지만, 뛰어난 군사지휘자로서 그 재능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인망을 모아 서차가타이 한국의 유력자로까지 성장하였다.
1360년 동 차가타이 한국의 투그르 티무르가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발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곧 동 차가타이 한국을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드를 손에 넣었다. 이 기간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Tīmūr-i Lang 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타멜랑(또는 타메렝, 크리스토퍼 말로위(Christopher Marlowe)에 따르면 타메를란(Tamerlan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후 패권을 둘러싸고 후사인과 대립하여 1369년에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를 공격해 후사인을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한 뒤 1370년에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그 대신에 오고타이의 후예 슈르가드미슈 란 왕자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 해 후사인의 과부로써 칭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큐레겐)를 자칭했다.
칭기스칸의 자손이 아닌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칸에 즉위하지 않고, 다른 유목부족의 장군들과 같이 아미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명목상은 칸이었던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로써 칸의 곁에 있는 아미르의 최고 유력자로써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370년 중앙 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이라고 불렀다.
티무르는 칭기스칸이 쌓아 올렸던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또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한 후 10년간 동 차가타이 한국을 지배한 모그리즈탄(동 투르키스탄)에 원정을 되풀이해, 코기란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을 병합하고, 주치의 후예 토그타미슈를 지원하여 토크다미슈를 주치 울루스(Juchi Ulus) 혹은 킵차크 한국(The Golden Horde, 金帳汗國)의 칸에 추대해주고, 주변의 여러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1380년부터는 일 한국 왕조의 해체 후 분열상태로 있던 이란(Iran)에 진출하여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1388년 토그타미슈가 티무르 제국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잠시 3년 전쟁을 종료한 티무르는 토그타미슈를 격파한 뒤 다시 서쪽으로 이란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였다. 1392년에 시작된 5년간의 전쟁에서 티무르는 페르시아령 쿠르디스탄(Persian Kurdistan)을 공격하였다. 1393년, 시라즈(Shiraz)가 항복 후에 함락되었고, 무자파르 왕조(Muzaffarid dynasty)는 티무르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무자파르 왕조의 샤 만수르(Shah Mansur)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티무르는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무자파르 왕국은 완전히 합병되었다. 이로써 티무르는 이란 전역을 지배 하에 두게 되었다. 곧바로 킵차크 한국이 조지아(Georgia)를 이용하여 이란 북부를 위협할 수 없도록, 조지아를 파괴시켰다. 같은 해인 1393년 8월, 티무르는 시라즈에서 8일 만에 바그다드까지 진격하여 성을 급습하였다. 술탄 아흐마드 잘라이르(Ahmad Jalayir)가 시리아(Syria)로 피난하였고, 그곳에서 맘루크 술탄 바르쿠크(Barquq)가 그를 보호하면서 티무르의 사절을 살해하였다. 티무르는 바그다드 통치를 위해 사르바다르(Sarbadar) 왕자 쿠와자 마스우드(Khwaja Mas'ud)를 남겨뒀지만, 아흐마드가 돌아오면서 쫓겨났다. 아흐마드는 인기가 없었지만 카라 코윤루(Kara Koyunlu)의 카라 유수프(Qara Yusuf)로부터 원조를 얻었다. 1399년, 아흐마드는 다시 피난하였다. 이번에는 오토만(Ottoman) 제국이었다. 한편,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여기서 북상하여 카프카스를 넘어 토크타미슈를 격파하여 볼가강 유역에까지 진군하였고,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Sarai)를 파괴하고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까지 침입한 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인도 원정을 결심하고,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들어가서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거기서 이라크로 전진해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중앙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군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확대를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바야지드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옛 영주들에게 반환해 준 뒤에 귀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명 원정 시도
1368년, 한족 군대가 몽골을 중국에서 몰아내었다. 명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과 아들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는 중앙아시아 조공국을 확보하였다. 명과 티무르제국 감의 종주국과 속국 관계는 장기간 지속되었다. 1394년, 홍무의 사절단은 마침내 티무르에게 신하로서 그를 대하겠다는 서신을 제시했다. 이때 파견된 사절은 감군(監軍) 부안(傅安), 장군(將軍) 곽기(郭驥), 태감(太監) 유위(劉煒) 등이었다. 1397년, 홍무제의 사절 진덕문(陳德文)이나 영락제의 등극을 알리는 사절단 모두 아무 소득이 없었다.
티무르는 마침내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티무르는 몽골리아(Mongolia)를 기반으로 하는 몽골 민족과 연합하였고, 부하라(Bukhara)로 가는 준비를 마쳤다. 엥크 칸(Engke Khan)은 손자 울제이 테무르 칸(Öljei Temür Khan)을 보냈다. 울제이 테무르 칸은 티무르 조정이 사마르칸트(Samarkand)에 있었을 때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에 '부얀시르 칸(Buyanshir Khan)'으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1404년 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중국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라르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맏아들 자한기르의 둘째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평가
티무르는 군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생애에 걸쳐 벌인 전투에서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을 할 경우 특별한 이슬람교적인 문화로서의 도시건설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원정은 그곳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을 살려주었던 반면에 티무르는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도 여지없이 도살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티무르 1대에 쌓아올린 티무르 왕조는 그 지배도 티무르의 개성에 크게 기대고 있었고, 티무르 생전에 확고한 지배체제가 준비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티무르의 사후 그의 제국은 급속도로 동요하고 분열되어 갔다.
일화
구리 아미르 사당(“아미르의 묘”란 뜻)에 있던 티무르의 검은돌로 된 관 속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봉되어 다리 장애 등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일이 있은 후 3일 후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한 소련 침공)이 실행되어 이것이 소련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이었다. 후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에 의해 뚜껑이 납으로 용접되어, 이후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티무르가 쌓아올린 해골의 탑
티그리스 강 유역을 침공하여 타크리트 전투에서 대항하던 적들을 살해하고 그 해골을 가지고 2개의 피라미드 형 탑을 만들고, 티그리스 강에서 가져온 흙으로 그 탑을 더욱 단단하게 강화했다. 그는 탑의 기단 부분에 이런 기명을 적어 넣게 했다. "법을 지키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의 운명이 무엇인지 여기 와서 보도록 하라."
티무르의 후손들
티무르의 아들들
자한기르 b. 티무르
우마르 셰이흐 b. 티무르
미란샤 b. 티무르
샤루흐 b. 티무르
티무르의 손자들
자한기르의 아들들
무함마드 술탄 b. 자한기르 b. 티무르(어머니 한자다 베굼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무함마드 자한기르 b. 무함마드 술탄
(무함마드) 할릴 술탄 b. 무함마드 자한기르
사디 와카스 b. 무함마드 술탄
피르 무함마드 이븐 자한기르
카이두 b. 피르 무함마드
자한기르 b. 피르 무함마드
우마르 셰이흐의 아들들
피르 무함마드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를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루스탐 b. 우마르 셰이흐
이스칸다르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를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아흐마드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를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바이카라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를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만수르 b. 바이카라
후세인 b. 만수르
바디 알자만 b. 후세인
무자파르 b. 후세인
미란샤의 아들들
아바 바크르 b. 미란샤
우마르 b. 미란샤
할릴 술탄 b. 미란샤(어머니 한자다 베굼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술탄 무함마드 b. 미란샤
아부 사이드 b. 무함마드
술탄 아흐마드 b. 아부 사이드
술탄 마흐무드 b. 아부 사이드
술탄 마수드 b. 술탄 마흐무드
바이순구르 b. 술탄 마흐무드
술탄 알리 b.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 칸 b. 술탄 마흐무드
우마르 셰이흐 b. 아부 사이드
자히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 b. 우마르 셰이흐(이후 무굴 제국으로 이어짐)
자한기르 b. 우마르 셰이흐
나시르 b. 우마르 셰이흐
이칠 b. 미란샤
샤루흐의 아들들
울루그 베그 b. 샤루흐(가우하르샤드의 아들)
압둘 라티프 b. 울루그 베그
아흐마드 b. 압둘 라티프
무함마드 주키 b. 압둘 라티프
압둘 아지즈 b. 울루그 베그
이브라힘 b. 샤루흐
압둘라 b. 이브라힘
바이순구르 b. 샤루흐(가우하르샤드의 아들)
알라 알다울라 b. 바이순구르
바이순구르
이브라힘 b. 알라 알다울라
술탄 무함마드 b. 바이순구르
야드가르 무함마드 b. 술탄 무함마드
아불 카짐 바부르 b. 바이순구르
샤 마흐무드 b. 아불 카짐 바부르
소유르가트미쉬 b. 샤루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를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무함마드 주키 b. 샤루흐
아바 바크르 b. 무함마드 주키
무함마드 카심 b. 무함마드 주키
각주
참고 및 참조문헌
고마츠 히사오 외 씀, 이평래 옮김,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소나무, 2005.
르네 그루쎄 씀,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이주엽, 「16세기 중앙아시아 지배계층의 몽골제국 계승성 연구 -우즈벡,카자흐칸국과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中央아시아硏究』, 9(2004), pp. 67–105.
「티무르」,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B.F. Manz, The rise and rule of Tamerl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Roemer, H. R., “Tīmūr in Iran,” in Camb. Hist. Iran, VI, Peter Jackson e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외부 링크
네이버캐스트 - 티무르
Timur's Life
Towers of Terror
The Battle of Ankara
The rise of Timur-i-Leng
The Timurid Dynasty
Memoir of the Emperor Timur (Malfuzat-i Timuri) Timur's memoirs on his invasion of India
Tamburlaine the Great Part One
Concise Britannica Online, Encyclopaedia Britannica For alternative information about Timur
Farman by Timur
1336년 출생
1405년 사망
무굴 제국
티무르 왕조
테무르
무슬림 통치자
수니파 무슬림
창업군주<|end_of_text|>
| 14.167438 | 2,714.568848 |
169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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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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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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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필
### 기사:
필에는 다음 뜻이 있다.
도량형
필(疋)은 일정한 길이의 직물(천, 옷감)을 세는 단위이다.
필(筆)은 구획된 논이나 밭, 임야, 대지 따위를 세는 단위다.
필(匹)은 소나 말을 세는 단위이다.
천문
필(畢)은 별자리의 하나이다.
역사
필(畢)은 중국 춘추 시대의 제후국이다.
지리
필 (맨섬)(Peel)은 영국 맨섬에 있는 도시이다.
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Peel)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역이다.
필역: 빌마리 지역구에 위치한 몬트리올 지하철 녹색 선 정차역
인명
실존 인물
필(Phil)은 필립의 줄임말이다.
브렛 필(Brett Pill, 1984~ )은 KBO 리그 KIA 타이거즈 소속의 내야수이다.
렘브란트 필(Rembrandt Peale, 1778~1860)은 찰스 윌슨 필의 아들로, 미국의 화가이다.
조지 필(George Peele, 1556~1596)은 영국의 극작가이다.
찰스 윌슨 필(Charles Willson Peale, 1741~1827)은 미국의 화가이다.
필 니크로: 너클볼을 던진 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투수
필 콜린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드럼 연주자
조던 필: 미국의 배우, 코미디언, 영화 감독
필 (춘추): 공족의 후예
필 자기엘카: 잉글랜드 출신의 폴란드계 프로 축구 선수
필 네빌: 잉글랜드 출신의 전직 프로 축구 선수이자 현직 축구 감독
필 러드: 오스트레일리아의 드러머
필 미컬슨: 미국의 프로 골프 선수
필 바즐리: 잉글랜드 태생 스코틀랜드의 축구 선수로 번리에서 활약하고 있다
필 러마: 미국의 배우
필 라이넛: 아일랜드의 가수
필 콜린슨: 영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
필 셀웨이: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며 작곡가
필 섀터: 미국의 프로레슬링선수
필 로드 & 크리스토퍼 밀러: 미국의 영화 · 텔레비전 작가, 프로듀서, 감독 듀오
필 코크: 미국 출신의 야구 선수이자, 2011년 현재 미국 메이저 리그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수
필 안젤모: 판테라, 다운, 슈퍼조인트의 리드 보컬로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의 헤비 메탈 음악가
앨리슨 필: 캐나다의 배우
필 콜린: 잉글랜드의 기타리스트
필 영허즈번드: 필리핀의 전직 축구 선수
필 하트먼: 미국, 캐나다의 배우
필 에이브러햄: 미국의 촬영 감독, 프로듀서
필 모리스: 미국의 배우
필 히메네스: 미국의 만화가
필 잭슨: 전 미국의 NBA 농구 선수, 감독과 총장
필 케설: 미국의 아이스하키 선수
메리 베스 필: 미국의 배우
필 가트사이드: 영국의 기업인이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볼턴 원더러스 FC의 회장이었다
필 루이스: 미국의 배우
필 오도넬: 스코틀랜드의 축구 선수
필 보그스: 미국의 다이빙 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3m 스프링보드 종목 금메달리스트
필 히스: 미국의 보디빌더
필 모그: 잉글랜드의 가수
필 에드워즈 (육상 선수): 중거리달리기 종목에 활약한 캐나다의 육상 선수
필 존스
필 리주토
필 더마트레
로버트 필
필 어윈
필 포든
필 맥그로
필 휴스
필 라몬
필 브라운
필 데이비스
필 나이트
가공의 인물
필 콜슨: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캐릭터
기타
필 (담배)
같이 보기<|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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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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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D%B4%EC%9E%91%20%ED%97%A4%EC%9D%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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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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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아이작 헤이스
### 기사:
아이작 리 헤이스 주니어(, 1942년 8월 20일 ~ 2008년 8월 10일)는 미국의 소울, 펑크 가수 겸 작곡가, 레코드 제작자, 편곡자, 작곡가, 배우이다. 헤이스는 1971년 흑인 영화 《샤프트》의 음악 작업에 참여하였고, 아카데미 주제가상과 그래미상의 두 분야에서 수상하였다. 앨범인 Black Moses로 자신의 세 번째로 그래미상을 받았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헤이스는 코미디 센트럴에서 방영하는 《사우스 파크》의 등장 인물인 셰프의 목소리 역할을 맡았다.
각주
외부 링크
IsaacHayes.com
Allmusic.com의 아이작 헤이스 프로필
1942년 출생
2008년 사망
미국의 남자 가수
미국의 R&B 가수
미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20세기 미국의 남자 성우
미국의 사이언톨로지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수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자
그래미상 수상자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아카데미 주제가상 수상자
뇌졸중으로 죽은 사람
멤피스 (테네시주) 출신
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21세기 미국의 남자 성우<|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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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다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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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코트다쥐르
### 기사:
코트다쥐르(, ) 또는 프랑스의 리비에라는 남동부 프랑스 지중해 해안이다. 코트다쥐르는 툴롱(Toulon)에서, 이탈리아 국경선과 가까운 마을인 망통(Menton)까지 이어진다. 코트 다쥐르의 도시 중 하나인 칸(Canne)에서는 세계 각국의 영화 스타를 끌어들이는 칸 영화제를 매년 개최한다.
범위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코트다쥐르는 이탈리아의 리비에라로부터 서쪽으로 이어지고, 알프마리팀주의 지중해 해안을 따라 망통, 모나코, 니스, 앙티브와 칸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리비에라의 범위에 대한 다양한 의견
칸을 지나서 서쪽 어디까지 코트다쥐르로 봐야 하는가에 대해 이견이 있다. 몇몇 기관(알프마리팀 관광청을 포함)들은 코트다쥐르가 테울 쉬르 메르(Théoule-sur-Mer) 너머 바르주(Var)의 경계선까지라고 주장한다. 다른 기관들은 코트다쥐르의 범위를 바르 주의 경계선 밖 해안선으로, 적어도 생트로페(Saint Tropez)까지, 가능하면 예르(Hyères)까지, 아니면 더 나아가 부슈뒤론주(Bouches-du-Rhône)의 경계선까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
코트다쥐르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인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영국 상류층의 호응이 좋았다. 윈스턴 처칠은 코트다쥐르에 정기적으로 왔고, 이곳 코코 샤넬의 별장에 머물며 자서전을 쓰곤 했다. 이곳은 비교적 따뜻한 겨울 휴양지로 유명했는데 나중에는 여름 휴양지로 더 유명해졌다.
동네
코트다쥐르에 해당하는 동네(서쪽에서 동쪽 순):
예르 (Hyères)
생트로페 (Saint Tropez)
생라파엘 (Saint-Raphaël)
칸느 (Cannes)
그라스 (Grasse)
주앙레팽 (Juan-les-Pins)
앙티브 (Antibes)
비오 (Biot)
소피아앙티폴리스 (Sophia Antipolis)
생폴드방스 (Saint-Paul-de-Vence)
니스 (Nice)
빌프랑슈쉬르메르 (Villefranche-sur-Mer)
생장카프페라 (Saint-Jean-Cap-Ferrat)
볼리외쉬르메르 (Beaulieu-sur-Mer)
모나코 (Monaco)
몬테카를로 (Monte-Carlo)
망통 (Menton)
카오카오 (Cao Cao)
이곳에 사는 유명인
조앤 콜린스 (Joan Collins)
엘튼 존
티나 터너
데이비드 베컴 부부
셜리 배시 (Dame Shirley Bassey)
브리지트 바르도
이바나 트럼프 (Ivana Trump)
Jenson Button
카를라 브루니 (Carla Bruni)
Stelios Haji-Ioannou
Troy Bayliss
Nico Rosberg
Juan Pablo Montoya
David Coulthard
Jacques Villeneuve
Rubens Barrichello
Tommi Mäkinen
Lucas Luhr
Jason Plato
Alex Zanardi
Andrew Vicari
Sophie Sandolo
장 자베르(Jean Jaubert)
Emma de Sigaldi
Michelle Rousseau
Loretta Lux
Richie Benaud
장 콕토 (Jean Cocteau)
Tom Boonen
더 보기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제노바 만
터키의 리비에라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Provence-Alpes-Côte d'Azur)
리비에라, 세계의 다양한 리비에라
외부 링크
리비에라 타임즈 (영문 신문)
리비에라 리포터 (영문 잡지)
리비에라 라디오 (영어 라디오)
AngloINFO 리비에라 (영어 가능한 현지 거주자의 정보)
프랑스의 해안
프랑스의 해수욕장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관광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지형
리구리아해<|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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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D%9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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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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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오행
### 기사:
오행(五行, )은 동양 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변화양상을 5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하는 이론으로, 5행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다섯 개 원소로 생각된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의 운행변전(運行變轉)을 말한다. 행(行)이라는 것은 운행의 뜻이다.
사상의 발전
5행(五行)에 대한 생각은 이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서 보인다. '홍범'은 은나라의 유민(遺民)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 그 전설이 그대로 믿어질 수는 없어도 '홍범'은 《금문상서》 29편의 하나이기도 하여, 5행에 대한 생각이 아득한 옛 것임을 짐작케 한다. 다만 '홍범(洪範)'에서 말하는 5행은 다섯 개의 요소를 열거하는 데 그쳤을 뿐, 그 운행 변전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 5행은 상생설(相生說)과 상극설(相剋說)이 생겨 우주나 인간계의 현상을 5행의 상생·상극으로 이해하고 예측하는 사고법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이르는 5행사상(五行思想)이다. 5행의 '상생(相生)'이라는 것은 목(木)은 화(火)를 생하고, 화(火)는 토(土)를, 토(土)는 금(金)을, 금(金)은 수(水)를, 수(水)는 목(木)을 생한다고 생각하는 순환 변전의 이치이다. '상극(相剋)'이라는 것은 수는 화를 이기고, 화는 금을, 금은 목을, 목은 토를, 토는 수를 이긴다는 것이다. 이 관념적 논리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신비화시키기 위하여 음양2원(陰陽二元)의 생각과 융합을 도모하여 여기에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이라고 하는 중국 특유의 사고(思考) 논리가 생겼다.
5행설을 신비화하고 관념화하여 음양5행설을 제창한 사람은 맹자보다 조금 후의 사람인 제나라의 추연(鄒衍)이라고 알려져 있다. 음양사상과 5행사상은 원래 각각 다른 것이었으나, 추연 이후 더욱이 한대(漢代)에 있어서 5행사상에 음양2원의 사상을 합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이 신비적인 유심론은 바로 현상의 예측이나 역사의 해석에까지 이용되었다.
의미
오행이란 역학(易學)에서 우주 만물의 걸음걸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행을 한 글자 한 글자 분석해보면 다섯 오(五)자에 다닐 행(行)자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다닐 행자는 걸음걸이라는 뜻이다. 우주 만물의 다섯 가지 걸음걸이. 그것이 바로 오행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걸음걸이라는 말은 바로 만물이 지나가는 방향, 만물의 상태가 변화하는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배가 고파지기도 하고 졸립기도 하고 행복해지기도 한다. 이것을 배가 고픈 길을 걷고, 졸린 길을 걷고, 행복한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은 어떠한 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변화의 길에서 원칙을 찾아냈고, 그것을 오행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오행은 사람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의 개념에서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목(木)은 뭉쳐있지만 유약한 것이었고, 화(火)는 정밀하지만 적은 것이었으며, 토(土)는 실하지만 흩어져 있는 것, 금(金)은 강하고 견고한 것, 수(水)는 많으나 허한 것을 뜻했다. 오행이 처음 이론으로 제안된 것은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추연에 의해서다. 하지만 추연의 저작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며 우리가 접하는 오행은 음양론, 장상론, 상한론과 순서대로 결합한 중의학의 오행배당표가 대표적이다.
학문적 위치
종종 일반인들은 오행을 동양철학의 일부로 파악한다. 다만 이 '동양철학'이라는 용어는 유가, 도가, 불가, 음양가 등 다분히 광범위하고 종종 양립하기 힘든 개념들을 포괄해서 가리키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동양철학 중에서 음양가, 즉 역학(易學)에 속하는 이론이다.
역학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발전한 학문으로, 음양의 질서를 통해 파악한 우주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점술로 이용한 사람들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유교에서 우주론의 일부로 연구한 분야로 현대인들이 존경하는 많은 유학자들은 역학을 숭배하고 주역에 대해 많은 연구를 수행하였다.
구성
오행의 구성은 다섯 가지 요소와 두 가지 상관관계로 이루어진다. 다섯 가지 요소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상관관계는 바로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다.
다섯 가지 요소
오행의 다섯 가지 요소로는 목, 화, 토, 금, 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무엇을 뜻함을 알기전에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어떻게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오행과 현실 간의 관계는 추상화로 요약할 수 있다. 현실을 한 단계 추상화시켜 현실에서 어떠한 특성을 추출해낸 것이 바로 오행인데, 사실 이러한 구조는 이른바 현대 학문들이 가지고 있는 구조와 동일하다. 예를 들어서, 물리학에서는 현실을 한 단계 추상화시켜 현실에서 "질량"이라든지 "전하량"이라는 특성을 추출해낸다. 현실은 질량 이외에도 색깔, 모양, 재질 등 여러 특성들이 혼재되어 있지만 해석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특정한 요소들을 추출해낸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에서 어떠한 특성들을 추출해서 오행이라고 부르고, 그 오행 간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 오행론이다. 즉, 현실에서 오행의 특성을 추출하고 오행의 특성에서 다시 오행론에 입각해서 해석하며, 그 오행론의 결과로 현실을 깊이있게 바라보는 것이 오행론의 연구방법이다.
이러한 추상화의 개념을 잘 이해한다면 목은 나무가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행론은 단순히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행론은 나무의 특성을 가진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생명력있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오행론이다. 그와 같이 오행론에서 화는 불이 아니며 토는 흙이 아니고 금은 돌이 아니고 수는 물이 아니다. 목, 화, 토, 금, 수는 A, B, C, D, E같은 일종의 기호라고 보면 된다.
두 가지 관계
중의학에서는 오행(五行)의 생리적 관계에서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을 설명하고 병리적 관계에서 상생(相生)과 상승(相乘) 및 상모(相侮)를 설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오행의 두 가지 관계를 말할 때는 생리적 관계에서의 상생과 상극을 뜻한다.
생리적 관계에서 상생은 하나의 요소가 다음 번 순서의 요소를 촉진하고 자생하며 조장하는 것으로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이라고 한다. 상극은 하나의 요소가 다른 요소를 제약하거나 억제하는 것으로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이라고 한다. 생리적 관계에서 상생과 상극은 정상이며, 다섯 가지의 요소가 서로 도와주고 제어하며 운동함으로써 사물의 동태적 평형을 유지한다.
병리적 관계에서 상생은 생리적 관계의 상생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상생하는 순서를 따라 질병이 전변되는 것을 뜻한다. 목생화(木生火)가 안 되면 목(木)이나 화(火)에 병이 생길 수 있는데, 이때 목(木)에 생긴 병은 화(火)로 전변될 수 있다. 상승은 생리적 관계의 상극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제어하는 쪽이 너무 강하거나 제어를 받는 쪽이 너무 약할 때 일어난다. 목극토(木剋土)에서 목(木)이 너무 강해도 토(土)에 이상이 생기고 토(土)가 너무 약해도 토(土)에 이상이 생긴다. 상모도 생리적 관계의 상극에 이상이 생긴 것이나 제어하는 쪽이 너무 약할 때 일어난다. 목극토(木剋土)는 정상적인 상태지만 목(木)이 너무 약해서 토(土)를 제어하지 못할 경우 반대로 토(土)에 의해서 목(木)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다.
오행은 사람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의 개념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원소의 개념으로 발전했고, 오늘날에는 만물에 대한 추상화로 이해되고 있다. 중의학에서는 여기에 장상론(藏象論)에서 설명하는 장부(臟腑)와 연계시켜 오행변증 등에서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개념을 적용시키고 있다.
상생(相生)
목생화(木生火): 나무는 불을 낳는다. 나무에서 불이 난다.
화생토(火生土): 불은 흙을 낳는다. 불이 나면 재가 나와 흙이 된다(재가 흙을 비옥하게 만든다).
토생금(土生金): 흙은 쇠를 낳는다. 흙에서 쇠가 난다.
금생수(金生水): 쇠는 물을 낳는다. 쇠에서 물이 맺힌다(쇠가 물을 맑게한다).
수생목(水生木): 물은 나무를 낳는다. 물은 나무를 살린다.
상극(相剋)
목극토(木剋土): 나무는 흙을 이긴다. 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린다.
토극수(土剋水): 흙은 물을 이긴다. 흙은 물을 가둔다.
수극화(水剋火): 물은 불을 이긴다. 물은 불을 끈다.
화극금(火剋金): 불은 쇠를 이긴다. 불은 쇠를 녹인다.
금극목(金剋木): 쇠는 나무를 이긴다. 쇠는 나무를 자른다.
오행과 중국문화의 관계
중국문화에서 오행과 방위, 색, 신수 모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같이 보기
기
음양
오방색
고대 원소
각주와 참고 문헌
외부 링크
도교
중국 철학
한국 철학
사상사
고대 원소
명수 5<|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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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C%B2%A0%20%281893%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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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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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상철 (1893년)
### 기사:
이상철(李相喆, 1893년 ~ 1979년 11월 27일)은 언론인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2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충청남도 청양 출생이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조선일보, 그리고 매일신문의 사회부·정치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자유신문사 부사장도 역임하였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민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고향인 청양에서 당선되었으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서 당선되었으며, 1963년 제6대 선거 때에는 국민의당의 공천으로 청양·홍성 지구에서 당선되었다.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뒤 체신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65년에는 국회부의장이 되었으며, 1969년에는 신민당의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그 외에도 민주당 지도위원, 민중당 지도위원을 역임하였다.
약력
1948년 5월 10일 : 제헌 국회의원(충남 청양) 낙선
참고 자료
1893년 출생
1979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
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
장면 내각의 국무위원
메이지 대학 동문
청양군 출신
19세기 한국 사람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충청남도의 국회의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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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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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문헌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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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증보문헌비고
### 기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동국문헌비고의 증보판이다. 증보문헌비고는 총 250권의 방대한 분류서로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16개 분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정리한 백과사전이자, 국가를 다스리는 데 필수적인 기초 문헌이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또는 《증정동국문헌비고》(增訂東國文獻備考)라고도 불린다.
개요
1770년(영조 46) 12월 왕명으로 문헌비고 찬집청을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하여 9개월 만인 이듬해 상위(象緯)·여지(輿地)·예·악(樂)·병·형(刑)·전부(田賦)·재용(財用)·시적(市糴)·선거(選擧)·학교·직관(職官)의 13고로 편찬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는 이름으로 편찬 간행되었으나, 사실의 오류와 빠진 것 등이 많았다.
1782년(정조 6) 2월에 관청을 설치하지 않고 이만운(李萬運) 개인에게 일임하여 재 편찬에 들어가 1790년(정조 14) 《증정동국문헌비고(增訂東國文獻備考)》가 만들어졌으나, 정조 즉위 후의 사실이 많이 빠져 계속 보완·증보의 작업이 이어져 간행되지 못했다.
대한제국 이후 국가 제도가 크게 바뀌어 이를 반영시키기 위해 1903년(광무 7) 홍문관 안에 문헌비고 찬집청을 두고 증보작업에 착수하여 1907년(융희 원년) 12월 《증보문헌비고》 편찬 작업을 완료하였다. 이듬해 1908년(융희 2년) 50책으로 인쇄했다.
영조-정조 시대를 거쳐 고종 대에 이르는 140여 년의 기간에 걸쳐 홍봉한, 채제공, 신경준, 이만운, 김택영, 장지연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편찬한 책으로 16고(考)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
상위고(象緯考): 권1~12
여지고(輿地考): 권13~39
제계고(帝系考): 권40~53
예고(禮考): 권54~89
악고(樂考): 권90~108
병고(兵考): 권109~126
형고(刑考): 권127~140
전부고(田賦考): 권141~153
재용고(財用考): 권154~160
호구고(戶口考): 권161~162
시적고(市糴考): 권163~170
교빙고(交聘考): 권171~183
선거고(選擧考): 권184~201
학교고(學校考): 권202~213
직관고(職官考): 권214~241
예문고(藝文考): 권242~250
조선의 책
한국의 역사책
한국의 지리지
백과사전
1770년 책
한국의 음악
한국의 음악사<|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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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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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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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류승곤
### 기사:
류승곤(1980년 11월 12일 ~ )은 한국의 남자 성우다. 2004년 MBC 17기 공채 성우로 데뷔했다.
출연 작품
애니메이션
아웅다웅 동화나라 (MBC)
장금이의 꿈 1, 2기 (MBC) - 민정호
아빠 어릴 적엔 (MBC)
내친구 마카다 (MBC)
에어로버 (MBC) - 첸
파이널 판타지 (MBC) - 과학자
베리베리 뮤우뮤우 뉴 - 파이
터닝메카드 (KBS ) - 독꼬리
터닝메카드 W (KBS ) - 독꼬리(서준의 테이머)
터닝메카드 R (KBS) - 독꼬리
신비아파트 고스트볼 ZERO (투니버스) - 현악귀
엉뚱발랄 콩순이 5기 (KBS) - 할아버지
가이킹 - 대공마룡의 전설 - (재능TV) - 소룡
건퍼레이드 오케스트라 (애니맥스) - 류조지 시온
꿈빛 파티시엘 프로페셔널 (투니버스) - 죠니
데스노트 (애니원) - 류우가 히데키, 경비원
맥스 스틸 (애니맥스) - 맥스 맥그래스
명탐정 코난 (애니맥스) - 안정훈
몬스터 버스터 클럽 (애니박스) - 마크
미라클 체인지! 퍼펙트 반장 (챔프) - 마이클
바질리스크 ~코우가인법첩~ (애니박스) - 핫토리 쿄하치로, 키사라기 사에몽, 카자마치 쇼겐
부릉부릉 친구들 (재능TV) - 마일즈
소년탐정 김전일 Original (애니박스) - 히야마 타츠유키
슈발리에 (애니맥스)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스모모모모모모 ~지상최강의 신부~ (애니박스) - 요시오, 로이치, 강도, 우즈키 시로, 키모공
얼렁뚱땅 반쪽이네 (재능TV) - 장어개
에어 (애니맥스) - 타치바나 케이스케
원피스 New 홀케이크 아일랜드 편 - 빈스모크 이치디
유희왕 5D's (챔프) - 브릿츠
유희왕 ZEXAL (챔프) - 강유마
은하로 킥오프!! (애니맥스) - 남궁진
엽기인걸 스나코 (애니박스) - 거절남 등
절대가련 칠드런 (애니박스) - 마기, 켄, 총리, 오오바타
정령의 수호자 (애니박스) - 탄다
제로의 사역마 (애니맥스) - 헬리
채운국 이야기 2기 (애니맥스) - 육청아
천원돌파 그렌라간 (애니맥스) - 로시우
크게 휘두르며 (애니맥스) - 니시히로 신타로
토라도라! (애니맥스) - 코지
프리큐어 Max Heart (대원방송) - 돌의 요정, 서큐러스, 노유천
헌터X헌터 리메이크 (애니맥스) - 카스트로
흑집사 (애니박스) - 소마 아스만 카다르
흑집사 스페셜 (애니박스) - 소마
프리티 리듬 오로라 드림 (카툰네트워크) - 타키가와 쥰
꼬마버스 타요 (EBS) - 루키 / 앤디
베르사이유의 장미 (EBS) - 제로델, 카우니츠
터닝메카드 W: 반다인의 비밀 (투니버스) - 독꼬리
용감한 소방차 레이 (EBS) - 비콘
헬로 카봇(SBS) - 스피드
헬로 카봇 유니버스(SBS) - 독꼬리
영화 애니메이션
xxx HOLIC 극장판 - 한 여름의 꿈 (애니박스 ) - 샤오랑
명탐정 코난 극장판 - 차한별
스페이스 치킨: 마법 부적의 비밀 - 치키
쿵푸 팬더 3 - 마스터 베어
특촬물
가면라이더 덴오(대원방송) - 사쿠라이 유토(가면라이더 제로노스)
극장판 가면라이더 이그제이드: 트루 엔딩 - 강인준(가면라이더 브레이브)
파워레인저 트레저포스 (대원방송) - 재키(트레저 실버)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대원방송) - 발전 반기
파워레인저 고버스터즈 (대원방송) - 류지(블루 버스터)
파워레인저 닌자포스 (대원방송) - 신기원
긴급출동! 레스큐파이어 (재능TV) - 타이거 / A.I / 죠카엔
엑스가리온 - 마이크몬
마담 퐁파두르 (EBS) - 황태자
크리스마스 살인 (EBS) - 빅토
CSI 과학수사대 (MBC) - 헨리
CSI 뉴욕 (MBC)
CSI 마이애미 (MBC)
영화 더빙
거북이도 난다 (SBS) - 파쇼 (사담 후세인 페이살)
마더 테레사(MBC)
미션 임파서블 3(MBC) - 릭(아론 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MBC) - 공항 직원
신용문객잔(MBC)
호스티지(MBC)
DOA (MBC)
터미네이터2 (MBC)
트루 라이즈 (MBC)
페이스 오프 (MBC) - 캐스터의 동료(폴 힙)
대진제국 (MBC)
청사 (MBC)
모래와 안개의 집 (MBC) - 에스마일 (조나단 아도트) 외
쉬즈 더 맨 (MBC) - 엔드류(클리프톤 머리)
본 얼티메이텀 (MBC) - 마르틴 (다니엘 브륄) 외
콜드 마운틴 (MBC)
이탈리안 잡 (MBC) - 금고 차량 경비원(사이먼 리) / 경비원(오스카 누녜스)
언더월드 (MBC)
월드 오브 투모로우 (MBC)
80일간의 세계일주 (MBC) - 라이트 형제(루크 윌슨)
웰컴 투 정글 (MBC)
사무라이 픽션 (MBC) - 구로이와, 귀송
이연걸의 탈출 (MBC)
동방삼협 (MBC)
황후화 (MBC) - 원성 왕자 (친 쥔지에)
세컨핸드 라이온스 (MBC) - 월터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울트라맨 가이아 (챔프) - 카지오
세 나라 영웅전 (MBC)
더 록 (MBC) - 로이스 (하워드 플라트)
토네이도 (MBC) - 롭
스내치 (MBC) - 유태인 소년
훌라 걸스 (MBC)
레이디 킬러 (MBC) - 강도(아마드 잭슨)
개같은 내 인생 (MBC)
굿 나잇 앤 굿 럭 (MBC) - 리버 라치(본인)
노브레인 레이스 (MBC)
알렉산더 (MBC) - 병사(리 안소니 파넬)
스토커 (MBC) - 직원(데이브 잉퍼)
아이 스파이 (MBC)
천녀유혼 (MBC) - 아근
코어 (MBC) - 데스티니 프로젝트 관계자(코스타 스파노스)
버드가의 섬 (MBC)
일본침몰 (MBC)
코로나도 (MBC)
에어 포스 원 (MBC) - 구조대원(J. 스콧 숀카)
나비효과 (MBC) - 넬슨 (데이빗 쿡)
투모로우 (MBC)
미션 (MBC) - 필리포(에이던 퀸)
히 러브스 미 (MBC)
히달고 (MBC) - 이등병(크리스 오언)
식스데이 세븐나잇 (MBC)
젠틀맨 리그 (MBC) - 군인(로버트 오르)
의천도룡기 (MBC) - 가짜 소림승
제르미날 (MBC)
프로텍션 (MBC)
S.W.A.T. 특수기동대 (MBC) - 강도(그레고리 스폴레더)
아이엠 샘 (MBC)
실버호크 (MBC)
브루스 올마이티 (MBC) - 불량배(마크 아데어-리오스)
어바웃 어 보이 (MBC) - 지배인, 소년2
시빌 액션 (MBC)
픽쳐 클레어 (MBC)
엘프 (MBC) - 요정(크리스티안 아이리)
사선에서 (MBC)
윈스턴 처칠의 젊은 시절 (MBC)
옹박 (MBC) - 매드독 (데이빗 이스마로네)
빠삐용 (MBC)
식스팩 (MBC)
일렉션 (MBC) - 데이빗
헨리 이야기 (MBC)
패스트 & 퓨리스 (MBC)
순류역류 (MBC)
본 슈프리머시 (MBC) - 존 네빈스(팀 그리핀)
이브는 대단해 (EBS)
밴드 오브 브라더스 (MBC)
바람이의 모험 (MBC)
세나라 영웅전 (MBC)
천녀유혼2 (MBC)
세 얼간이 (MBC) - 라주 (셔먼 조쉬)
이터널스 - 데인 휘트먼(킷 해링턴)
내래이션
교양/다큐멘터리
내 손 안의 책 (MY MBC)
와일드 인디아 (NGC)
와일드 러시아 (NGC)
와일드 미시시피 (NGC)
교활한 약탈자, 하이에나 (NGC)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NGC)
사악한 동물들 (NGC)
와일드 프레데터 (NGC)
야생의 지배자 (NGC)
어메이징 와일드 (NGC)
멸종위기, 연어의 전쟁 (NGC)
인간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동물들 - 바다의 공포, 물밑의 공격자 (NGC)
일상탈출 세계견문록 (대구MBC)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NGC)
물과 불의 공존, 하와이 (NGC)
MBC 다큐프라임 294회 : 바다의 경고, 해안침식 (MBC)
UMAX 한국, 우크라이나 수교 25주년 UHD 다큐멘터리 <한류, 또 다른 시작 1회> (UMAX)
2TV 생생정보 (KBS2)
예능/버라이어티
베스트 슈즈 차트 (M.net)
스타골프쇼 (SBS 골프)
일요일 일요일 밤에 - 퀴즈프린스 (MBC)
젠장뉴스 (FOX)
토크 앤 시티 (스토리온)
CF
AXA손해보험 AXA다이렉트
아모레퍼시픽 이니스프리 포레스트포맨 퍼펙트 올인원 에센스(이민호)편
한국GM 쉐보레 말리부 말리부의 철학편
한국GM 쉐보레 스파크S
한국GM 쉐보레 2014년형 퍼펙트 G2크루즈
기타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 코리아 알림 목소리
게임
클로저스 - 볼프강 슈나이더
오버워치 - 라이프위버
007 제임스 본드: 퀀텀 오브 솔러스 - 용병 등
디아블로3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후오진 판다렌 수장 지 파이어포우
로맨틱 프린세스 - 란스 램브란트
리그 오브 레전드 - 타릭
사이퍼즈 - 잭 더 리퍼
로드 오브 다이스 - 레이븐
오버히트 - 아이작
마피아42 - 교주, 연인(남)
꿈왕국과 잠자는 100명의 왕자님 - 이설
쿠키런: 킹덤 - 민트초코 쿠키,치약초코 쿠키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했던 사정- 노아 벌스테어 윈나이트
원신 - 토마
드라마 CD
Perle - 막시밀리언 요아힘
kill the light - 필 햅슨 外
3월의 보름을 조심하라 - 김낙원
방구석에 인어아가씨 - 박도경
보이스북 - 홀리도어~뱀파이어의 만찬~ - 진
보이스북 - 1617 The Origin of Holydoor - 진
보이스북 - DEATH MATCH - 진
외부 링크
문화방송 성우극회 류승곤 블로그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
198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전광역시 출신<|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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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C%B1%84%EB%B3%B4%EC%83%81%EC%9A%B4%EB%8F%99%EA%B8%B0%EB%85%90%EA%B3%B5%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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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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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기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國債報償運動記念公園)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2가에 있는 공원이다. 동인동에 있어 ‘동인공원’이라고 불리다가 1999년 4월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역사
1907년 봄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고, 1998년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 경제난 극복과 도심지내 녹지공간 확보 및 시민의 안락한 휴식공간 제공을 위하여 명칭 또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정하여 1998년 3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중구 동인동에 조성된 공원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조성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42,509m2(12,859평)의 면적에 달구벌 대종, 종각, 녹도, 편의시설 등이 있다. 공원내 달구벌 대종은 향토의 얼과 정서가 담긴 맑고 밝은 소리가 울려 만인의 기상을 일깨우고, 화합과 번영을 염원하는 대구시민들의 뜻을 온세상, 온누리에 알리고자 1998년 12월 22일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내에 건조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의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의 구국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조성된 이 공원은 중앙도서관과 동인지하주차장 사이에 펼쳐진다. 이 곳에는 22.5t의 달구벌대종을 비롯하여, 향토서예가들이 쓴 이육사·박목월·조지훈·이호우·윤동주의 시비와 대형 영상시설, 이언적·김굉필·서거정·이황·정몽주·서상일·서상돈·이상화의 명언비가 있는 오솔길, 시원스럽게 뿜어대는 분수, 화합의 광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지하에 3층 규모의 동인지하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들의 주차공간 확보를 돕고 있으며, 중앙도서관을 끼고 있어 청소년들이 많이 모인다. 시내가 가까워 연인들에겐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다.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공원으로 넓은 잔디광장과 주위로 천여그루의 수목이 심겨져 있으며, 벤치도 넉넉하게 마련되어 휴식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또한 시원스럽게 뿜어대는 분수와 정자, 시골강산 나무를 연상시키는 석조물 등이 정취를 살리고 있다. 청소년 놀이마당, 음악회, 전시회 등이 개최되고 있으며, 달구벌대종 타종의식 행사를 매주 토.일 시행함으로써 많은 관광객들이 공원을 찾고 있다.
공원 위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1907년 2월 21일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시작된 대표적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1998년 3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조성됐다. 공원 동쪽은 공평로, 북쪽은 국채보상로, 서쪽은 동덕로로 둘러싸여 있다. 민족시인 이육사, 박목월, 조지훈, 이호우, 윤동주의 시비와 대형영상시설물 등이 분수와 석조물 등 조경물과 어우러져 있다. ‘달구벌대종’은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제야의 종 타종식을 거행한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는 255m 길이의 대왕참나무 오솔길과 소나무숲, 분수와 정자, 잔디광장, 향토 출신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시상의 오솔길, 선현들의 명언비로 꾸민 명언순례의 길 등이 갖추어져 있다. 가로 9m, 세로 6m 규모의 대형 전광판을 통해 각종 생활정보와 프로그램 중계 등을 볼 수 있다. 공원 곳곳에는 낙락장송 및 이팝나무·산벚나무 등 30종 1만 2300여 그루의 수목과 원추리·은방울꽃 등 5종 3만여 본의 꽃이 심어져 있다. 또한 무게 22.5t의 달구벌 대종이 있어 해마다 이곳에서 '제야의 종' 타종식을 거행한다. 대구시민의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이용되며, 각종 전시회와 공연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사진
외부 링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대구광역시청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같이 보기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로
애국계몽운동
각주
1998년 설립
대구 중구
대구광역시의 공원<|end_of_text|>
| 14.411365 | 2,732.049561 |
175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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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A%A9%EB%B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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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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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용범
### 기사:
이용범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다.
이용범(李龍範, 1903년 - 1968년)은 대한민국의 교육인, 기업인, 정치인이다.
이용범(李龍範, 1952년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이용범(李容汎, 1984년 - )은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게이머이다.
같이 보기<|end_of_text|>
| 10.91534 | 258.138268 |
28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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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7%90%EB%8B%A4%20%EA%B2%90%ED%82%A4%EC%B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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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겐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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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우에다 겐키치
### 기사:
우에다 겐키치(, 1875년 3월 8일 ~ 1962년 9월 11일)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 발발 당시에 관동군의 사령관이었다.
생애
겐키치는 일본 오사카부 출신으로, 육군 군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에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인이 된 후에는 육군의 두 사단, 일본 군무국, 참모 본부를 거쳐, 시베리아 출병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가 되었다.
이후 교육 총감부와 기병 연대를 거쳐 1923년 8월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28년 8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맡은 후에는 제9사단장으로서 상하이 사변에 참가하였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尹奉吉)이 던진 폭탄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그 뒤에는 참모 본부에서 일했고,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4년 11월에는 군사 참의관을 맡은 후에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고, 재임 중에 일어난 할힌골 전투의 발발로 인해 전투가 끝난 후, 그 책임을 지는 형태로 1939년 12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향우연맹 회장을 맡았고 1962년에 사망하였다.
에피소드
할힌골 전투 당시,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된 제23사단 담당구역에서 처음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력한 소련군에 대응하기 위해 관동군 최고의 정예부대인 제7사단을 파견하자는 부하의 상신에 대해, 만약 자신의 담당구역에 벌어진 사건을 다른 사단에 맡긴다면 자신은 할복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흥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동군 사령관인 우에다의 주도로 약체의 제23사단이 소련군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참패했고, 자신도 이에 책임을 지고 예편처분 되었다.
외부 링크
우에다 겐키치의 이력
1875년 출생
1962년 사망
일본 육군 대장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관동군 관련자
제1차 상하이 사변 관련자
할힌골 전투 관련자
오사카부 출신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훈1등 서보장 수훈자
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수훈자
스뱌토고스타니스와프 훈장 수훈자
외다리<|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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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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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황방리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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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양주 황방리 느티나무
### 기사:
양주 황방리 느티나무(楊州 篁芳里 느티나무)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마을 입구의 시냇가 공터에서 자라고 있는 양주 남면의 느티나무는 나이가 8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가슴높이 둘레 7.75m이다. 태풍의 피해로 한 쪽 큰 가지가 쪼개져서 잘라내었으며, 나무의 밑부분 중심은 썩어서 3m 정도까지 속이 텅비어 있었는데,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시멘트로 채웠다. 하지만 겉모습은 튼튼하고 온전해 보인다.
이 마을에서 살던 밀양 박씨의 조상들이 심은 나무로 전해지며 현재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나무 아래서 즐겁게 이야기하며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양주 황방리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참고 자료
경기도의 천연기념물
황방리 느티나무
유명한 느티나무<|end_of_text|>
| 14.074027 | 1,240.191229 |
19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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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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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푸퉈산
### 기사:
보타산()은 중국 저장성 항저우 만 끝자락에서 동쪽으로 약 100해리 밖의 저우산 군도에 있다.
개요
행정 구역 상으로 저우산 시 푸퉈 구 푸퉈산 진이다. 섬의 전체 면적은 12.5 평방킬로미터이며, 최고봉은 불정산으로 300m 높이다. 무엇보다 보타산이 유명한 것은 중국 4대 불교명산의 하나라는 점이다. 보타산은 관음보살의 도량이며, 현재 20여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보제선사(普濟禪寺), 법우선사(法雨禪寺), 혜제선사(慧濟禪寺)이다. 또한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 대학이 있다.
역사
서한 때는 매잠(梅岑)으로 불렸다.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때부터 관음보살을 모시게 되어 가정(嘉定) 7년(1214년)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지정되었다.
불교에서 관음보살이 산다는 산인 보타락이라는 이름이 붙어 보타산으로 불렸고, 송나라 때는 백화산(白華山)으로도 불렸다.
한참 불교 전성기 산에는 3대사찰, 88개 암자, 128개 모봉에 3000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보타산 풍경구
보타산 풍경구는 총 면적 41.95km2이며,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길게 뻗어있고 백사장이 넓고 부드러우며 기이한 돌들이 천태만상을 이루고 동굴과 깊은 골짜기들이 절경을 이룬다.
유명 명소로는 다보탑(多寶塔), 천보사(千步沙), 반타석(磐陀石), 심자석(心字石), 이귀석(二龜石), 범음동(梵音洞), 조음동(潮音洞), 조양동(潮陽洞) 등이 있다.
주요 선사
보제선사(普濟禪寺)
법우선사(法雨禪寺)
혜제선사(慧濟禪寺)
사진
같이 보기
중국 사대 불교명산은 다음과 같다.
오대산 - 문수보살의 성지
구화산 - 지장보살의 성지
아미산 - 보현보살의 성지
보타산 - 관음보살의 성지
저장성의 산
중국의 영봉
중국의 불교
불교 명산
1000미터 이하 봉우리
저우산 군도
관음보살<|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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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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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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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아크메이지
### 기사:
아크메이지(Archmage)는 1999년에 마리텔레콤에서 서비스를 했던 웹기반 턴제 전략 게임이다.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자금 부족을 이유로 현재는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게임의 개요
일반적인 머드, MMORPG 등의 온라인 게임이 사용자로부터 실시간으로 지속적인 입력을 받아 게임을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아크메이지는 실시간에 비례하여 턴이 쌓이고, 이 턴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으로 게임이 진행되게 된다. 매 턴은 건물 짓기, 마법 연구, 땅 개척, 병력 모집, 전쟁 등을 하면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시간에 비례하여 사용할 수 있는 턴이 쌓이므로, 서버에 접속하고 있다고 해서 무한정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시간이 지나야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일반 서버의 경우는 15분에 1턴 정도가 쌓였으며, 보다 활발한 진행을 원하는 사용자를 위해서 보다 짧은 5분 정도에 1턴이 쌓이는 블리츠 서버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아크메이지의 목적은 아마겟돈이라는 마법을 복수의 사용자가 성공적으로 시전하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시전되면 1위에서 10위까지의 사용자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며 게임이 종료되게 된다. 이후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므로, 순위에 들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또한 순위에 들지 못 할 사용자의 경우는 아마겟돈 시전을 막기 위해 시전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시전자의 국가가 망할 경우 마법은 취소된다.
성공적인 세력 확장 및 아마겟돈의 시전을 위해 길드가 존재하였으며, 길드 내에서는 상대 길드 및 경쟁 국가를 차례로 공격한다. 각 사용자 당 턴이 제한적이고, 또한 전쟁 가능한 국가는 자신의 순위 주변의 국가뿐이므로, 길드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하지만 길드가 너무 중요해지고, 이에 따라 길드 비소속 사용자가 흥미를 잃게 되자, 길드가 허용되지 않는 서버도 등장하였다.
2003년도에 아크메이지를 즐겼던 해외 여러 프로그래머들이 모여 The-Reincarnation 라는 아크메이지 환생서버를 만들었다.
같이 보기
온라인 게임 목록
웹게임
외부 링크
연회장 사람들의 커뮤니티
The-Reincarnation.com
더로드 아크메이지(The Lord Archmage)
아크메이지 최강길드 삼족오
브라우저 게임<|end_of_text|>
| 17.929102 | 1,884.835693 |
198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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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E%90%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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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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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힐로
### 기사:
힐로(Hilo, )는 미국 하와이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2000년 기준 40,759명이다. 하와이주에서 가장 넓은 섬인 하와이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와이섬을 관할하는 하와이군의 군청소재지이다. 하와이주에서 주도 호놀룰루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힐로만에 면하는 항구도시이며, 주변에는 사탕수수 재배가 성하여 관련 산업이 발달하였다.
인구
기후
각주
하와이주의 도시
하와이주의 군청 소재지
하와이섬<|end_of_text|>
| 10.768758 | 425.420196 |
3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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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A4%EB%8B%88%ED%86%A0%EB%B0%94%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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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토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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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매니토바주
### 기사:
매니토바주(영어: Manitoba)는 캐나다의 5번째 주이며, 앨버타주, 서스캐처원주와 더불어 "프레리의 주"들로 알려졌다.
서부는 서스캐처원주, 동부는 온타리오주, 남부는 미국 미네소타주, 노스다코타주와 경계를 이루며 주도는 위니펙이다.
행정구역
역사
접촉 이전의 시기
캐나다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접촉하기 전에 그들은 많은 세대 동안에 매니토바 지방에 살았다. 원주민이 아닌 첫 탐험가들과 모피 교역인들이 도착하여 단체들의 수가 지역을 통하여 살면서 사냥을 하였다. 치페와이언 딘 족은 북부 구역을 가로질러 순록을 사냥하였다. 비버, 순록과 말코손바닥사슴을 사냥한 우들랜드와 스웜피 크리 족들은 중부 산림과 해안 저지대들에 살았다. 애시니보인 족은 남서부 평원에 살고 들소를 사냥하였다. 또한 들소를 사냥한 치페와 족은 평원의 남동부 구역에 살았다.
이민자들
잉글랜드의 탐험가 토머스 버튼 경과 그의 일원들은 매니토바 지방의 첫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1612년에 허드슨만의 서부 해안으로 항해하여 내려왔다. 버튼과 그의 일원들은 넬슨 강의 입구에서 겨울을 보내고 매니토바에 대하여 잉글랜드의 토지선언을 하였다. 2명의 잉글랜드의 선원들 루크 폭스와 토머스 제임스는 1631년에 허드슨 만과 그 서부 해안을 탐험하였다.
1670년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지방에서 교역의 권리들을 잉글랜드 모험 회사와 총독에게 런던의 허드슨 베이 회사로 승인하였다. 지방은 루퍼트의 대지로 불리었다. 1690년으로 봐서 잉글랜드의 모피 교역인들은 허드슨 만 지방으로 향하여 서부로 밀고 나간 자신들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라이벌들과 많은 싸움을 벌였다. 회사는 서부 내륙 지방의 퍼스트 네이션즈를 따라 새로운 모피 교역 상대자들을 찾는 데 헨리 켈시를 원정에 보냈다. 켈시는 요크 공장에서 회사의 거류지를 떠나 1690년부터 1692년까지 매니토바와 서스캐처원의 중부와 남부의 퍼스트 네이션즈를 따라 여행을 하였다. 그는 많은 그들에게 모피들을 북부에 있는 회사의 교역지들로 가져오도록 설득하였다.
1731년 피에르 콜티에 드 바렌 드 라 베른드리가 몬트리올을 떠나 태평양으로 육상 인도 통로를 찾는 데 나섰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모피 교역자들이었다. 그들은 슈피리어호 지역과 서스캐처원 강의 저지대 사이에 여러 요새들을 세웠다. 이 거류지들은 1738년 오늘날의 위니펙의 대지에 라 베른드리가 지은 포트루지를 포함하였다. 그가 설립한 모피 교역은 허드슨 베이 회사의 교역으로 거대하게 삭감되었다.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캐나다 대지들을 영국에게 포기하였고, 매니토바 지방에서 프랑스의 탐험과 교역이 멈추어졌다. 1770년대에 노스 웨스트 회사는 허드슨 베이 회사와 함께 경쟁하는 데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그 새로운 회사는 곧 해산되었다. 1784년에발행된 새로운 동의서는 회사를 다시 설립하고, 공식적으로 노스 웨스트 회사의 이름을 채택하였다.
레드 강 식민지
2개의 모피 회사들이 교역을 위한 경쟁을 하는 동안에 계획들은 매니토바 지방의 첫 농업적 정착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1811년 토머스 더글러스, 5대 셀커크의 백작은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 대지의 승인을 얻었다. 그 대지는 100,000 스퀘어 마일(260,000 스퀘어 킬로미터) 이상으로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매니토바 주, 노스다코타주와 미네소타주의 대부분을 덮었다. 1812년과 1816년 사이에 셀커크 백작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와 아일랜드인들의 몇몇의 파들을 오늘날 위니펙 주위의 레드 강으로 보냈다. 이민들은 레드 강 식민지를 창립하였다.
초기의 식민주의자들은 거대한 고생을 겪었다. 서리, 홍수와 메뚜기들이 많은 수확물들을 망쳤다. 처음에 정착자들은 고기를 위하여 들소와 다른 동물들에 엄하게 의지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는 운영들의 노스 웨스트 회사의 지역의 중심에 놓였다.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식량, 특히 들소고기를 위한 많은 경쟁들이 있었다. 회사는 식민지의 행정인들이 레드 강 유역에서 들소 사냥을 금지하는 데 시도한 페미칸 선언을 발행한 후 더욱 적대적으로 되었다. 그 선언은 메티스를 포함한 지방 거주민들을 식민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데 전향시켰다. 자신들이 아끼던 들소에 의지한 메티스들이 1815년 식민지를 공격하였다. 1816년 그들은 식민지의 총독 로버트 셈플을 살해하고, 세븐옥스 전투에서 다른 20명의 식민주의자들을 죽였다. 1821년 노스 웨스트 회사와 허드슨 베이 회사가 병합되면서 평화가 왔다.
레드 강 반란
4개의 주를 연합한 캐나다 자치령이 1867년에 창립되었다. 1869년 1.5 백만 달러와 대지의 양보를 위한 반환에서 루퍼트의 대지의 대부분을 허드슨 베이 회사로부터의 이전을 계획하였다. 이 지역은 매니토바 지방과 레드 강 식민지를 포함하였다. 그 지역의 메티스들은 이전을 여기는 데 상담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이 캐나다 자치령의 일부가 된 후 서두를 정착자들에게 자신들의 대지를 잃을 것 같은 위협에 놓였다. 메티스와 다른 지방 거주민들은 전환에 반대하였다. 메티스의 지도자 루이 리엘은 1869년 반란을 지도하였다.
1870년 캐나다 정부는 매니토바 법령에서 권리들의 법안을 메티스들에게 승인하였다. 이 법령은 그해 7월 15일에 매니토바를 캐나다의 5번째 주로 만들었다. 새로운 주는 구 레드 강 정착지를 포함한 오늘날의 남부 매니토바 주의 작은 부분 만을 덮었다. 위니펙이 주도가 되고, 앨프레드 보이드가 초대 주지사였다.
주의 번창
1870년 이후 매니토바 주로 기대된 정착자들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1871년과 1881년 사이에 인구는 2배보다 많았고, 25,228명에서 62,260명으로 올랐다. 새로운 도착자들의 대부분은 온타리오주에서 왔다. 매니토바 주는 원주민의 주에서 백인 이민들에 의하여 통치된 주로 변형시켜졌다.
1876년 매니토바 주는 밀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레드 강 유역의 농부들은 레드 강을 따라 남부로 향하여 미네소타 주와 온타리오 주 토론토로 밀을 배에 실어갔다. 밀은 곧 모피를 대신하여 매니토바 주의 가장 가치적인 생산품이 되었다. 1878년 주에서 첫 철도가 위니펙과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을 이었다. 1881년 다른 철도선들은 위니펙을 캐나다 동부의 도시들과 슈피리어 호와 함께 한 밀생산 지방들과 이었다. 매니토바 주의 곡식은 그러고나서 오대호의 항구들을 통하여 캐나다와 유럽의 시장들로 실어나갈 수 있었다.
1890년대에서 시작에 매니토바 주는 새로운 정착자들의 주요 경향을 경험하였다. 많은 정착자들은 캐나다 동부에서 왔고, 많은 다른이들은 영국과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 왔다. 특히 1900년부터 1913년까지 곡식의 생산은 빠르게 확장되었다. 이 번영의 세월 동안에 위니펙은 캐나다의 프레리 지방 전체를 위한 철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1년으로 봐서 매니토바 주의 인구는 1871년의 인구의 10배 이상이나 증가하였다. 캐나다 정부는 1881년에 현재 서스캐처원주로 향하는 서부, 1884년 온타리오 주로 동부의 주 경계를 넓혔다. 1912년 북부 경계선이 허드슨 만과 적도의 북부 60도선으로 넓혀져 매니토바 주에게 그 오늘날 크기와 모양으로 주었다.
경제적 발전
매니토바 주의 경계선의 허드슨 만으로 연장이 미네랄 자원의 개발을 위한 대지들을 열고 제1차 세계 대전의 군사적 필요함이 탐험에 용기를 주었다. 1915년 투기자들은 매니토바 주 북동부에 있는 플린플론의 대지에서 구리와 아연의 큰 매장량들을 발견하였다. 광업의 운영들은 1930년에 완전히 발전하고 타운은 곧 재빠르게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값이 싼 전력, 풍부한 수자원과 노동의 유효성이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에 많은 산업들의 번창에 용기를 주었다. 펄프와 종이 공장 지대가 1927년 파인폴스에 개장되었다. 모피 가공과 의류 교역들은 1930년대 동안에 위니펙에서 재빠르게 발전하였다.
정치적 발전
1878년과 1922년 사이에 매니토바 주는 보수당과 자유당에 의하여 교대로 다스려졌다. 토머스 그린웨이(1888~1900)의 자유당 행정부는 철도와 정착지의 확장에 지배하였다.
위니펙의 곡식 업자 로드먼드 P. 로블린에 의하여 지도된 보수당은 1900년부터 1915년까지 정부를 통치하였다. 정부는 경제적 발전과 경계선의 확장에 집중하였다. 토비어스 C. 노리스의 자유당 정부는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주를 경영함 거의 개혁의 입법을 통과시켰다. 이 개혁들의 어떤 것들은 여성의 참정권, 근로자들의 보수, 14세에게 의무적 교육과 시골 농장의 신용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위니펙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노동의 불안의 소굴을 남겼다. 도시의 노동 문제들은 한번 52개의 조합들이 파업을 일으킨 1919년의 위니펙 총파업으로 일어났다. 연방 정부와 시민 단체들은 주의 서비스들의 진행을 간직하는 일을 하고 파업을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 일은 최근에 생겨난 경제에서 근로자들의 권리들에 주의를 가져왔다.
1922년 결성된 농부들의 단체는 자유당 정부를 꺾었다. 그들은 매니토바 농업 칼리지의 교장 존 브래켄 아래의 새로운 진보적 정부를 형성하였다. 그는 당들의 연합을 몰아냈다. 이 일은 1932년 자유당과 진보당이 자유진보당을 형성하는 데 합병되 때 일어났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매니토바 주에서 많은 곤란을 창조하였다. 농산물, 특히 곡식을 위한 가격들이 극단적으로 낮았다. 아직도 농업에 의존하는 이 주는 넓게 퍼진 실업을 겪었다.
1930년대에 2개의 새로운 정당들이 나타났다. 후에 신민주당으로 불린 협동연방연합이 농부와 공장 근로자들로 이루어졌다. 다른 정당은 사회신용당이었다. 그 당원들은 정부들이 경제적 생산에 기지를 둔 분배금을 모든 시민들에게 내야 할 것을 믿었다.
1900년대 중반
제2차 세계 대전은 매니토바 주의 가축, 금속, 밀과 목재를 위한 거대한 요구를 창조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많은 산업들이 주에서 새로운 공장들을 지었고, 제조업은 1940년대 후반에 지속적으로 빠르게 번창하였다. 1950년으로 봐서 매니토바 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제조업이 주의 주요 소득의 근원으로서 농업보다 지위가 높아졌다.
전쟁이 끝난 후, 매니토바 주는 늘어난 기계들의 사용과 새로운 농사 방법들의 이유로 약간의 농부들을 필요하기 시작하였다. 수천명의 주민들이 시골 지역들로부터 도시들로 이주하여 공장과 서비스업들에서 직업을 찾았다.
지질학자들 은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에 매니토바 주에서 중요한 미네랄 자원의 매장량들을 발견하였다. 구리, 니켈과 아연이 1945년 북서부 지역에서 찾아졌다. 석유 회사들은 1950년대 초반에 버든 근처에 풍부한 유전들을 개발하였다. 1956년 투기자들은 모크레이크-미스터리레이크 지역에서 큰 니켈의 매장량들을 찾았다. 캐나다 국제 니켈 회사 유한 책임(현재 베일 인코)이 톰슨에 단지를 지어 니켈 체굴이 1960년 거기서 시작되었다. 톰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니켈 생산의 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주는 지속적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력의 풍부한 근원들을 개발하였다. 1954년으로 봐서 모든 시골 지역들은 전기 서비스가 있었다. 1963년 첫 실험소들이 위니펙 근처에 있는 피나와에서 화이트셸 원자력 연구소에서 개장되었다. 원자로는 1965년에 운영으로 들어가고 1985년에 폐문하였다.
가장 큰 번창은 서비스와 공공 부문에 있었다. 1970년으로 봐서 연방, 주와 지방 정부들이 매니토바 주에서 가장 큰 고용주들이었다.
자유진보당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대부분에 매니토바 주를 다스렸다. 진보보수당은 1958년에 권력을 이겨 1969년까지 있었다. 그해에 투표인들은 서스캐처원 주 외부의 캐나다에서 사무소를 보유하는 데 처음이자 마지막 사회주의 정부를 선출하였다. 정부는 신민주당의 에드워드 R. 슈라이어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진보보수당원들이 1977년까지 정부의 통치를 다시 얻었다. 스털링 R. 라이언이 주지사가 되었다.
언어적 권리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치솟은 문제들이 프랑스어 사용 권리들을 근심시켰다. 프랑스어는 1890년 매니토바 주의 공용어로서 이동되었다. 하지만, 1979년에 이 이동은 캐나다 대법원에 의하여 비헌법적이라고 밝혀졌다. 1980년 영어 만으로 발행된 속력 벌금의 헌법적은 법원에서 도전되었다.
1981년 하워드 R. 폴리가 주지사로서 신민주당이 권력에 돌아왔다. 정부는 주요 입법의 프랑스어 사용 공동체의 번역과 헌법적 도전들을 끝내기 위한 반환에서 어떤 프랑스어 서비스들의 연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타협의 일괄을 제정할 수 없었다. 1985년 캐나다 대법원은 영어 만으로 제정된 매니토바 주의 모든 4,000개의 법률들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다스렷다. 하지만, 프랑스어에서 연장된 서비스들을 마련하는 것에 대한 토론은 지속되고 있다.
다른 발전들
1980년대 초반으로 봐서 소홀의 세월들은 위니펙 중부의 거의가 버려지게 되는 지도를 하였다. 그때 이래, 개발 의안제출권들은 도시의 다운타운 지역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의안제출권들은 1990년에 관광객들에게 문을 열은 포크스로 알려진 역사적 지역의 개발과 역사적 거래 구역의 개발을 포함하였다.
1988년 게리 필먼이 주지사로서 진보보수당이 권력에 돌아왔다. 게리 도어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1999년, 2003년과 2007년에 선거와 정부의 통치를 이겼다.
오늘날 매니토바 주에서 생활비는 캐나다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주에서 실업은 노동력의 10 퍼센트 아래에 적절하며, 인구는 1980년대 이래 착실하게 번창하였다.
경제
서비스업
서비스업은 매니토바 주의 국내총생산과 고용의 대략 4분의 3을 차지한다. 서비스업들은 위니펙에 집중되어 있다.
주도인 위니펙은 정부 활동의 중심지이다. 캐나다의 큰 금융 회사들 중의 어떤 회사들은 위니펙에 자신들의 본부를 두었다. 몇몇의 트럭 회사들 또한 거기서 운영된다. 도시는 캐나다의 유일한 농산물 거래소의 본거지이다. 위니펙은 캐나다에서 가장 큰 대중 매체 복합 기업인 캔웨스트 글로벌 커뮤니케이션과 매니토바 주의 가장 큰 공립 대학인 매니토바 대학교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제조업
제조업은 매니토바 주의 국내총생산과 고욕의 대략 10분의 1을 차지한다. 제조업의 대다수는 위니펙 혹은 그 근처에서 운영된다.
식료품 가공업은 매니토바 주에서 주요 제조업 활동이다. 지도적인 식품 가공 설립들은 제과류, 낙농제품, 정육 제품, 냉동 감자 제품과 채소 기름을 포함한다.
위니펙은 캐나다에서 지도적인 버스와 항공 우주 요품의 생산지이다. 톰슨에 있는 니켈 제련소와 플린플론에 있는 구리와 아연 제련소는 기초적 금속들을 생산한다. 매니토바 주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창문, 문, 부엌 장식과 가구 제조업의 본거지이다. 또한 서부 캐나다에서 단 하나의 생물약제학 제조업의 본거지기도 하다.
농업
농업은 매니토바 주 남부에서 대부분의 시골 공동체들을 위한 경제적 기초를 마련한다. 육우와 돼지는 지도적인 축산물이다. 낙농업은 위니펙의 남동부에서 가장 중요하다. 닭과 달걀도 또한 주에서 중요한 농산물이다.
카놀라와 밀은 매니토바 주의 가장 가치적인 수확물로서 순위권에 들어와있다. 감자와 귀리도 그 다음의 권위에 들어와있다. 감자는 매니토바 주의 남부와 서부에서 재배된다. 밀과 귀리 생산은 위니펙이 남서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편이다. 카놀라, 아마 씨와 해바라기는 기름을 얻기 위하여 재배된다.
광업
구리, 니켈, 석유와 아연은 매니토바 주의 주요 광물이다. 구리는 니켈 체굴의 부산물로서 획득된다. 또한 아연과 함께 일어나기도 한다. 큰 구리-아연 광산들은 플린플론과 스노레이크 근처에서 운영된다. 톰슨은 매니토바 주에서 니켈 생산의 중심지이다. 매니토바 주에서 체굴된 석유의 전부는 주의 남서부에서 왔다.
주민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매니토바 주의 인구가 1,148,401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인구는 2001년으로 본 1,119,583명에서 대략 2.5 퍼센트나 증가하였다.
매니토바 주민들의 대략 70 퍼센트는 도시 지역에 산다. 대략 60 퍼센트는 위니펙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산다. 위니펙은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주요 산업의 중심지이다. 캐나다 통계에 의하여 규정된 주의 단 하나의 인구 조사 메트로폴리탄 지역이 있다.
브랜던은 매니토바 주에서 두번째로 가장 큰 도시이며, 톰슨과 포태지라프레리가 그 다음이다.
매니토바 주민 100명 중의 대략 86명은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매니토바 주민들은 영국 계통이다. 다른 주요 민족들로는 큰 순서대로 독일, 우크라이나,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계통의 주민들이다. 위니펙의 세인트포니페이스 구역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문화의 지방적 중심지이다. 그 외 해외에서 온 주민들로는 아시아계 주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니토바 주에는 대략 72,000명의 메티스들이 있다. 주에는 대략 100,000명의 퍼스트 네이션즈 주민과 대략 600명의 이누이트 족들이 있다. 매니토바 주는 대략 80개의 인디언 보호 구역들이 있으며, 이누이트 족의 대부분은 처칠 근처에 산다.<|end_of_text|>
| 16.746655 | 2,885.835205 |
8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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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C%82%B0%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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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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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일산구
### 기사:
일산구(一山區)는 과거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에 존재했던 구이다. 2005년에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分區)되면서 폐지되었다. 일산구청사와 일산구에 부여된 행정자치부의 자치단체 고유코드는 일산동구가 승계했다.
역사
조선시대 : 경기도 한성부 고양군
1906년 : 양주군 신혈면
1914년 : 고양군 중면
1980년 : 고양군 중면이 일산읍으로 승격.
1989년 4월: 일산 신시가지 개발 계획 발표.
1992년 2월 1일 고양시로 승격.
1992년 8월 일산신도시 입주 시작.
1992년 10월 자유로 건설공사 준공.
1993년 12월 1단계 택지조성공사 완료.
1994년 12월 2단계 택지조성공사 완료.
1995년 12월 3·4단계 택지조성공사 완료.
1996년 3월 4일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일산구를 신설하였다.
2003년 2월 3일 일산1동을 탄현동으로 분동하였다.
2005년 5월 16일 일산구는 다시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95%;"
| colspan=5 | 고양시 조례 제892호
|-
! colspan=2 | 구 행정구역 !! colspan=2 | 신 행정구역 !! 법정동
|-
| rowspan=5 | || rowspan=2 | 식사동, 풍산동, 백석동, 마두1동, 마두2동, 장항1동, 장항2동, 고봉동 || rowspan=3 | || 식사동, 풍산동, 백석동, 마두1동, 마두2동, 장항1동, 장항2동 || 식사동, 풍동, 산황동, 백석동, 마두동, 장항동
|-
| 고봉동 || 사리현동, 지영동, 설문동, 문봉동, 성석동
|-
| 일산2동(분동), 일산4동 || 중산동, 정발산동 || 중산동, 정발산동(신설)
|-
| rowspan=2 | 일산1동, 일산2동(분동), 일산3동, 탄현동, 주엽1동, 주엽2동, 대화동, 송포동, 송산동 || rowspan=2 | || 일산1동, 일산2동, 일산3동, 탄현동, 주엽1동, 주엽2동, 대화동 || 일산동, 탄현동, 주엽동, 대화동
|-
| 송포동, 송산동 || 덕이동, 가좌동, 구산동, 법곳동
|}
인구
고양시 일산구의 연도별 인구(내국인) 추이
각주
고양시의 행정 구역
고양시의 역사
경기도의 폐지된 행정 구역
1996년 설치
2005년 폐지
대한민국의 폐지된 구<|end_of_text|>
| 6.244108 | 1,476.300403 |
4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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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A%B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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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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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여과
### 기사:
여과(濾過, filtration, )는 액체와 고체가 혼합된 물질을 입자의 크기 차이를 이용해 분리하는 방법이다. 여과를 통해 얻어낸 여과액(濾過液)은 녹지 않는 물질이 들어 있는 혼합물을 거름 장치에 걸렀을 때 거름종이를 통과해 모인 액체이다.
정의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래 같은 것이면 데칸테이션으로 분리시킬 수 있다. 그러나 흙과 같이 입자가 작아서 물 속에서 휘저었을 때, 곧 가라앉지 않는 것은 체로 쳐서 나누는 방법을 이용하면 된다. 이 경우 거름 종이가 체의 구실을 한다. 거름 종이는 특수한 셀룰로오스로 되어 있는 종이인데, 작은 틈이 있다, 보통은 둥근 거름종이를 사용하는데, 대개는 거름 종이를 넷으로 접은 다음 한쪽을 벌려서 원뿔꼴로 만들어 깔때기에 끼워서 사용한다. 이때 원뿔꼴 거름종이의 반면은 세겹이 되고 다른 쪽 반면은 흩겹이며, 사용되는 부분은 거름종이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 거름종이를 여과할 액체에 적셔서 깔때기에 꼭 붙게 하고, 액체를 그릇에 조용히 유리 막대를 타고 흐르도록 하면서 거름종이 위에 붓는다. 이때 액체의 양은 깔때기에 댄 거름종이의 80%정도만 붓고 넘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깔때기는 깔때기 받침으로 지지하고, 그 끝은 액체를 받는 비커의 벽에 닿게 하여 떨어지는 액체가 튀지 않고 벽을 타고 내리도록 한다. 이러한 조작을 여과라고 한다, 거름종이에 남은 고체는 물을 부어서 씻는다. 여과할 때 거름 종이에 남는 고체보다 여과액 쪽이 필요한 경우는 여과되는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거름 종이를 주름을 많이 잡아 꽃 모양으로 접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거름종이의 전면이 여과에 사용되므로, 넷으로 접은 경우보다 빨리 여과시킬 수가 있다. 많은 용액을 빨리 여과시키고자 할 때는 흡인 여과를 한다. 자기로 만든 브흐너 깔때기의 눈금접시 위에 거름종이를 액체에 적셔 붙이고, 깔때기를 고무 마개로 흡인병에 고정시켜서 수류펌프 등으로 흡인한다. 그러면 흡인병 속의 압력이 저하되어, 거름종이에 담긴 액체가 대기압으로 해서 급속히 여과된다.
여과 방법
여과 방법은 크게 거름종이와 깔때기를 사용하는 방법과 멤브레인필터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여과를 한 후에 여과지상에 남는 고체를 찌꺼기(residue), 여과지를 통과한 액체를 액(filtrate)이라고 부른다. 또, 기체로부터 고체를 제거하는 경우에도 여과지는 필터라고 부른다.
주로 화학실험이나 화학공업 등에서 이용되지만 가정에서 종이 필터를 이용하고 커피를 걸러주는 것도 훌륭한 여과 방법이다.
예
여과의 예는 다음을 포함한다.
커피 필터는 굵게 갈린 커피를 가두는 역할을 한다.
공기 조화에서 헤파(HEPA) 필터는 공기로부터 입자들을 제거한다.
광업에서 벨트 필터는 귀금속을 추출해 준다.
자동차에서의 기름 거르개
같이 보기
투석
추출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화학공학 공정
분석화학<|end_of_text|>
| 16.855637 | 2,759.71734 |
11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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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9%9C%EB%A1%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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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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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멜론
### 기사:
멜론(, )은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이다. 북아프리카·중앙아시아·인도 등지를 원산지로 보고 있으나 서아시아에서도 야생종이 재배되므로 정확한 원산지는 알 수 없다.
어원
영어 ‘멜론()’은 고프랑스어인 에서 왔다. 이는 다시 인 ‘멜로넴()’에서 왔는데, 이 때에는 호박속에 속하는 박 등을 부르는 말로 쓰였다. 더 이전 시대의 라틴어로는 ‘멜로페포넴()’이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어 멜로페폰()에서 왔으며, 이 단어는 ‘사과’를 뜻하는 ‘멜론()’과 ‘익은’을 뜻하는 ‘페폰()’이 합쳐진 것이다.
특징
기는 줄기는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를 붙잡아 감고 올라간다. 전체에 거센 털이 있다. 잎이 변해서 된 덩굴손은 꼬불꼬불한 작은 코일처럼 생겼다.
멜론 열매는 둥근 모양이거나 달걀 모양이며, 대개 지름은 30cm 이상이며, 무게는 1 ~ 4kg이다. 열매는 종류에 따라 노란빛이 도는 분홍색, 노란색, 옅은 녹색, 짙은 녹색 등 여러 색깔을 띤다. 과육은 즙이 많고, 녹색·흰색·노란색·오렌지색·분홍색·붉은색을 띤다.
종류 및 쓰임새
오늘날 경제적으로 중요한 멜론 종류는 멜론 변종들이며, 캔털루프, 참외, 감로멜론 따위가 대표적이다. 네트멜론으로도 알려진 머스크멜론은 북아메리카에서 널리 재배된다. 이 열매의 껍질은 연노란색을 띠고 부드러우며 그물무늬가 있다. 과육은 녹색이거나 노란빛이 도는 분홍색으로, 맛이 달콤하고 사향 냄새를 풍긴다.
유럽에서 많이 재배하는 캔털루프멜론은 껍질이 사마귀혹처럼 울퉁불퉁하고 녹색을 띤다. 과육은 노란빛을 띤 오렌지색으로 달다. 감로멜론은 초록빛이 도는 흰색을 띠는 매끈한 껍질과 달콤한 녹색 과육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여러 멜론 종류가 있다. 카사바멜론은 껍질이 쭈글쭈글하고 세로홈이 있는 머스크멜론 종류도 겨울멜론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에서 재배하는 오겐멜론은 캔털루프멜론 종류이며, 샤랑테멜론은 머스크멜론 종류이다. 이 밖에 망고멜론, 동양산 피클멜론, 뱀멜론 이 세 종류는 저장식품과 피클을 만드는 데 쓰이며, 널리 재배되진 않는다. 향기로운 관상 품종인 악취 멜론 품종도 있다.
변종 또는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린다.
네트멜론
머스크멜론
참외
캔털루프
하미과
허니듀멜론
사진
같이 보기
외 (열매)
각주 및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칼 폰 린네가 명명한 분류군<|end_of_text|>
| 12.553461 | 2,254.226788 |
255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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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0%EB%A1%9C%20%28%EC%A0%84%EC%A7%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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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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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감로 (전진)
### 기사:
감로(甘露)는 중국 전진(前秦) 선소제(宣昭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359년 6월에서 364년까지 5년 7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같은 시기에 사용된 다른 연호로는 동진(東晉)에서 사용한 승평(昇平 : 357년 ~ 361년), 융화(隆和 : 362년 ~ 363년), 흥녕(興寧 : 363년 ~ 365년), 전량(前凉)에서 사용한 건흥(建興 : 314년 ~ 361년), 승평(昇平 : 361년 ~ 376년), 전연(前燕)에서 사용한 광수(光壽 : 357년 ~ 360년), 건희(建熙 : 360년 ~ 370년), 대(代)에서 사용한 건국(建國 : 338년 ~ 376년)이 있다.
연대대조표
관련항목
다른 왕조의 같은 연호
전한(前漢) 감로(기원전 53년 ~ 기원전 50년)
조위(曺魏) 감로(256년 ~ 260년)
손오(孫吳) 감로(265년 ~ 266년)
중국의 연호
전진의 연호<|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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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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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86%8C%EC%98%81%20%281978%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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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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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윤소영 (1978년)
### 기사:
윤소영(1978년 9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전 SBS 아나운서이다.
경력
2001년 10월 SBS 11기 공채 아나운서에 입사.
2004년 1살 연상의 사업가 서윤석(32)씨와 결혼하였다.
2013년 9월 17일 SBS에서 퇴사.
학력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학사 (1996년 3월 입학, 2001년 2월 졸업)
기타
SBS TV에서 '2008 베이징 하이라이트' 방송에 출연하며 과감한 의상을 선보여 누리꾼 사이에서 '윤소핫'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진행 프로그램
굿모닝 세상은 지금 (2007년)
미소가 있는 TV
생방송 투데이
생방송 모닝와이드
열린TV 시청자 세상 - 옴부즈맨
SBS 뉴스퍼레이드 (2008년 5월 5일 ~ 2009년 10월 30일)
모닝와이드 아침종합뉴스
각주
197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SBS의 아나운서
고려대학교 동문
주엽고등학교 동문
SBS의 아나운서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해평 윤씨<|end_of_text|>
| 13.232488 | 870.361468 |
3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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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연방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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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시베리아 연방관구
### 기사:
시베리아 연방관구()는 러시아를 구성하는 8개 연방관구 가운데 하나이다. 우랄 연방관구,극동 연방관구를 접한다.
시베리아 지역을 관할하며 본부는 노보시비르스크주의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다. 인구는 17,178,298명(2010년 기준)이다. 2018년 11월을 기해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속해 있던 부랴트 공화국, 자바이칼 지방이 극동 연방관구로 편입되었다.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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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연방관구<|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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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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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언 프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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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루시언 프로이드
### 기사:
루시언 마이클 프로이드(, OM, CH, 1922년 12월 8일~2011년 7월 20일)는 독일에서 태어난 영국의 사실주의 화가로,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다.
생애
프로이드는 유대인으로, 1922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아버지인 건축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로이트(Ernst Ludwig Freud)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이사하며 1939년 영국 국적을 취득한다. 그는 데번의 다팅턴 홀 학교에 재학했으며 나중에는 브리앤스턴 학교에 재학했다. 그 이후 그는 런던에 있는 샌트럴 미술학교와 골드스미스 컬리지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작품 스타일 및 활동
초기의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성향을 많이 보이는데, 사람과 식물, 가구 등을 독특한 방식으로 나열한 그림을 그렸다. 이 때의 그는 비교적 물감을 얇게 펴바르는 방식을 사용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그는 초상화와 누드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그는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기법이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터치법을 사용하면서부터 프로이드는 단 한 번의 붓터치 후에도 꼭 붓을 씻어내야 할 정도였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의 색감은 부드러우며 채도가 낮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앉아 있는 사람만을 그렸다. 그가 그리는 초상화의 모델들은 대다수가 그의 주변인물로, 친구, 가족, 동료 화가들, 애인, 혹은 아이들이었다.
루시언 프로이드는 주로 인물화와 초상화를 그려왔는데, 사실적이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강박적인 묘사가 타 사실주의 작품들과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은 고독하고 밝은 색감에 날카로우며 세심한 형태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많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인물이지만 간간히 나타나는 도시풍경이나 정물 등을 보면 회화 매체에 대한 프로이드의 숙련도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프로이드의 무정하고 비전통적인 누드 작품들은 충격적이어서 전시중에는 미성년자에게 관람이 금지된 작품들도 있다.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둔 그의 작품들은 종종 육체적인 추함을 묘사함으로써 그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곤 한다.
" 보통 나는 사람들 얼굴의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얼굴만 그렸었는데 마치 얼굴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것들의 팔다리가 되고 싶은 것처럼..." - 루시언 프로이드
그는 1951년에 그린 <패딩턴 실내(Interior at Paddington)>로 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21세기 사실주의 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예술성과 상품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그의 최근 작품들은 1차 시장 가격이 약 30억~150억 원에 달한고 60~70년대의 작품들은 사적인 거래에서 약 200억 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어 생존 작가로서는 기록적인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기존 최고가 작품은 경매 가격을 기준으로 415만 파운드(약 77억원)로, 2005년 2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팔린 <의자에 앉은 붉은 머리칼의 남자(Red Haired Man on a Chair)>(1962~63년작)이며, 2002년에 그려진 영국 출신의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임신 당시를 그린 극사실주의 화법의 누드화 <나체 초상화 2002(entitled-naked Portrait 2002)>가 2005년 2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392만 파운드(약 76억원)에 팔렸다. 뉴욕 경매에서 기존 최고 낙찰가 기록은 <넓은 실내 W11(와토를 따라서)Large Interior W11(After Watteau)>가 보유하고 있는 583만 달러(약 58억원)로, 1998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팔렸다.
서훈
1983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CH)
1993년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
1922년 출생
2011년 사망
영국의 화가
유대계 영국인
유대계 독일인
독일계 영국인
유대인 화가
프로이트가
유대계 잉글랜드인
20세기 화가
21세기 화가
영국의 판화가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오스트리아계 영국인<|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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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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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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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사과풍년
### 기사:
〈사과풍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혁명가극인 《금강산의 노래》 가운데 나오는 현대 무용 작품으로, 4대 혁명무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4대 혁명무용 가운데〈사과풍년〉과 〈키춤〉의 두 작품은 별도의 무용이 아닌 혁명가극의 가극 무용에 속한다.
이 춤은 《금강산의 노래》 중 제3장 〈선과장〉에 등장하며, 주인공이 근무하는 협동농장에서 사과 풍년을 맞아 다함께 춤을 추며 기뻐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구니를 든 12명의 여성 무용수가 사과나무가 보이는 무대에서 농장원 처녀를 연기하며 노동의 기쁨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전달한다.
참고자료
《조선중앙통신》 (2002.5.3) 무용 〈사과풍년〉
KBS 온라인 오피스, 북한백과 - 4대 혁명무용 | 공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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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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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4%89%ED%95%98%EB%A7%88%EC%9D%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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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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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봉하마을
### 기사:
봉하마을(烽下─)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일대의 지명이자 마을이다. 봉화산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봉하마을이라고 불리며,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출생지이며, 그가 퇴임 후 거주하고 2009년 5월 23일 검찰의 압박조사 중 생을 마감한 곳으로 알려졌다. 주요 작물로는 진영단감과 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대통령 사저
노무현 前 대통령은 퇴임하기 전에 봉하마을에 자신의 집을 건축하였고, 주위에 경호관저도 함께 건립했다. 퇴임 후에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주변의 자연습지 하천인 화포천과 굴포천, 봉화산 등이 관광지로 변모해왔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에는 권양숙 여사가 홀로 사저에서 거주하다가, 2019년 대통령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사저가 완전개방되었다. 사저가 시민관람공간으로 변하면서 권양숙 여사는 봉하마을을 떠나 진영읍 내에 다른 집을 짓고 그 곳에서 거주중이다.
특산물
봉하오리쌀
노무현 前 대통령은 퇴임 후 봉하마을로 귀향한 뒤, 친환경 생태마을 만들기의 일환으로 봉하오리쌀을 내어놓았다. 봉하오리쌀은 친환경농법으로 제초제와 살충제 등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오리를 이용해 해충을 방제하는 방식으로 재배를 하였다. 2008년 봉하마을이라는 영농법인을 만들어 봉하오리쌀이라는 브랜드로 2008년분 판매를 완료하였다.
봉하마을 찰보리빵
봉하마을 찰보리빵은 봉하마을 현지에서 직접 만든 빵으로 공식명칭은 '봉하마을에서 만든 찰보리빵'이며 줄여서 '봉하빵' 이라고 불린다. 둥글고 누르스름하게 익은 빵이며 2겹으로 되어있고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보리로만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포장지에는 '봉하마을에서 만든 찰보리빵'이라는 문구가 써져있으며 '봉하빵인'이라는 도장이 새겨져있다. 본래 이 가게는 경주시 출신의 외지인이 운영하고 있었으나, 2009년 2월 가게를 노무현 前 대통령의 친척에게 처분했다.
주변 관광지
봉화산 마애불
[http://www.e-hanlim.co.kr/ 한림민속 박물관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농부가그린정원
교통
철도
경전선 한림정역이나 진영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도보로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김해시내버스
10번 (진영신도시, 진영역 방면) : 첫차 06:45, 막차 21:00 (하루 20회 운행, 30~60분 간격)
57번 (진영터미널, 장방, 한림, 모정 방면) : 첫차 06:30(모정)/07:20(진영), 막차 20:40(모정)/21:30(진영) (하루 8회 운행)
300번 (진영역, 주촌 덕암공단, 부원역, 외동터미널) : 첫차 10:45, 막차 21:30 (하루 5회 운행)
행정 구역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법정리) 봉하리(행정리)
사진
같이 보기
김해시
부엉이바위
노무현
봉화산
노건평
노판석
이순례
기타
김대중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외부 링크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생가
사람사는 세상
진영읍
각주
김해시의 지리
노무현
대한민국의 마을
김해시의 관광지<|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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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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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C%9A%A9%EC%8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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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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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모용수
### 기사:
연 세조 성무황제 모용수(燕 世祖 成武皇帝 慕容垂, 326년~396년, 재위: 384년~396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의 초대 천왕으로, 자는 도명(道明)이다.
생애
즉위 이전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셋째 아들로 모친은 단씨(段氏)이며 원래 이름은 모용패(慕容覇)이다. 326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용황의 총애를 받았다. 모용황은 모용패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태자 모용준(慕容俊)보다 모용패를 더 총애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준은 모용패를 시기하였다. 모용준이 즉위한 이후 모용패는 견제를 받아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많은 제한을 받았다. 모용패는 낙마하여 앞니가 부러지게 되자 이를 핑계로 이름을 수(垂)로 바꾸기도 하였다. 모용수의 부인은 단씨(段氏)였는데, 모용준의 황후인 가족혼씨(可足渾氏)와 불화가 있어 누명을 쓰고 죽었다. 황후는 동생을 모용수의 부인으로 삼았으나 사이가 좋지 않아 모용수를 더욱 미워하였다.
360년, 모용준이 죽자 모용위(慕容暐)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뒤를 이었으며, 모용수의 형 모용각(慕容恪)이 정권을 잡았다. 모용수는 모용각에게 협력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모용각이 367년에 죽자 모용수는 권력자 모용평(慕容評)의 시기를 받아 다시 견제를 받게 되었다. 369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으로 쳐들어오자, 모용수는 북벌군을 물리치는 1등 공신이 되었다. 이에 모용수의 세력을 두려워한 모용평과 태후 가족혼씨는 모용수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며,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전연을 탈출하여 전진(前秦)으로 망명하였다.
370년에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수는 전연의 귀족들을 회유하는 한편 전진의 장수로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383년에 부견(苻堅)이 비수대전(淝水大戰)을 일으키자 모용수는 군단을 이끌고 형주(荊州) 지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부견이 비수에서 패전하자 대부분의 군대가 와해되었으나 모용수의 부대만 온전히 퇴각에 성공하였다. 부견은 모용수의 보호를 받으며 퇴각하였다. 모용수는 부견이 몰락한 것을 깨닫고 독립할 것을 꾀하였는데, 부견을 설득하여 업(鄴)에서 북방을 방어하도록 허락받아 부견의 곁을 떠났다.
업에는 부견의 아들 부비(苻丕)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수는 모반을 계획하였다. 이때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명받아 업에서 출진하였다. 모용수는 감시역으로 파견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으는 한편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치세
384년 1월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이후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포위하고 1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부비의 수비가 견고하여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385년 8월에 부비가 업에서 빠져나가자 업을 점령하였고 황하 이북 일대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386년 1월에는 황제에 즉위, 수도를 중산(中山;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정하고 내정을 정비하였다. 392년에는 정령족 적교(翟釗)의 적위(翟魏)를 멸망시켰고, 394년에는 서연(西燕)을 멸망시켜 화북 일대를 평정하였다. 동진과는 주로 산동 지방에서 충돌하였는데, 394년 이후 동진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한편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한 모용수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5년에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보내 북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군대가 학살되었고, 이에 모용수는 396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북위를 정벌하였다. 평성(平城)을 점령하고 북위에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 모용수는 전해에 참합피에서 학살당한 군대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다. 이로 인해 북위 정벌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돌아오던 도중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가족
아내
정궁
성소황후(成昭皇后) 단씨(段氏) - 모용령, 모용보의 어머니
장안군(長安君) 가족혼씨(可足渾氏)
단왕비(段王妃)
성애황후(成哀皇后) 단씨(段氏) - 모용랑, 모용감의 어머니
후궁
단귀빈(段貴嬪) - 모용희의 어머니
모씨(某氏) - 모용농의 어머니
모씨(某氏) - 모용륭의 어머니
모씨(某氏) - 모용린의 어머니
아들
헌장황제(獻莊皇帝) 모용령(慕容令) - 장남, 모용전(慕容全)이라고도 함.
요서왕(遼西王) 모용농(慕容農) - 3남
혜민제(惠愍帝) 모용보(慕容寶) - 4남
고양왕(高陽王) 모용륭(慕容隆)
조왕(趙王) 모용린(慕容麟)
발해왕(渤海王) 모용랑(慕容朗)
박릉왕(博陵王) 모용감(慕容鑒)
양평왕(陽平王) 모용유(慕容柔)
모용주(慕容州)
소문제(昭文帝) 모용희(慕容熙)
모용수가 등장한 작품
《근초고왕》(KBS, 2010년~2011년, 배우:정재곤)
《광개토태왕》(KBS, 2011년~2012년, 배우:김동현)
참고 문헌
《진서(晉書)》
《자치통감(資治通鑑)》
326년 출생
396년 사망
전연의 황자
전연의 장군
전진의 장군
창업군주
4세기 중국 사람
4세기 중국의 군주
차오양시 출신
후연의 황제<|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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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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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피아노
### 기사:
피아노()는 대표적인 건반악기로서 피아노포르테()의 준말이다. 총 52개의 건반으로 구성되어 나무로 된 작은 망치가 강철 프레임에 고정된 피아노줄을 건반으로 소리를 낸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Christofori, B.)가 고안하여 독일에서 완성하였다.
역사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급되고 있는 일반적인 유건타현(有鍵打絃)악기이다. 피아노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쳄발로와 클라비코드가 가장 많이 보급된 건반악기였으나, 1709년에 이탈리아 사람인 쳄발로 제작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1655-1731)가 쳄발로의 몸통(胴)을 써서 ‘포르테피아노’라고 이름붙인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피아노의 효과적인 최초의 고안이어서, 그가 피아노의 발명자로 되어 있다. 쳄발로나 클라비코드는 음이 작아 실내 연주용 외는 쓰이지 않던 것이었으나 이 발명은 현을 펠트로 된 해머로 쳐서 음을 내고, 댐퍼를 붙인 것으로 거의 오늘날의 피아노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써 음은 힘차고 크게 되어 넓은 스테이지의 연주나 그 밖의 악기와 조화를 이루는 합주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제조기술의 연구가 종종 있었고 18세기의 중엽(바흐나 헨델이 일생을 마칠 무렵)부터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 뒤 많은 개량이 가해졌고 특히 현이 굵어졌으며 액션(손가락의 누른 키가 현을 칠 때까지의 장치)이나 댐퍼 등의 정교한 것 등이 나오게 되어 현재의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고, 피아노의 원래 이름은 피아노포르테였다.
피아노의 형태
피아노에는 그랜드형()과 업라이트형()의 두 가지 형태가 있고, 각각 소형에서 대형까지 여러 가지 크기가 있다. 그랜드형이 피아노 본래의 형태이며 이 형태는 쳄발로의 형태에서 생긴 것으로 음량도 크다. 피아노는 철골틀에 현을 매었고 그 틀의 뒷면에 울림판이 있어 해머로 친 현의 진동을 울림판으로 확대한다. 현은 피아노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강철선으로서 낮은음부의 현은 그 선의 둘레를 구리선(銅線)으로 감아 낮은 음현일수록 굵고 높은 음현일수록 가늘다. 페달은 보통 3개가 있고 악기를 향해서 오른쪽은 보통 댐퍼 페달이라 하여 밟으면 전체 댐퍼가 일시에 현에서 떨어져서 두드린 음은 긴 여운을 가지게 된다. 왼쪽 페달은 그랜드와 업라이트와는 조금 구조가 다르나 음량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쓰인다. 피아노의 키의 수효는 52, 64, 76, 88 등 크기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88건이며 그 음역은 A0에서 C8까지로 7옥타브 이상이나 된다.
피아노는 건반으로 누르면서 치는 악기이다.
피아노 연주
피아노의 가격은 700만원부터 3억원까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피아노 주법은 19세기에 극도로 발달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베토벤 이후 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을 거쳐서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의 대작곡가가 피아노 음악의 알차고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웅장한 느낌을 주는 편이다.쇼팽이나 리스트의 음악은 피아노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히 살리고 있으며 또 양 손가락의 운동이나 페달의 효과를 극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같이 보기
재즈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하프시코드
각주
건반 악기
현울림악기
이탈리아의 발명품
리듬 섹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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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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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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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기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도피안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에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63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신라 48대 경문왕 5년(865년)에 제작되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불상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높고 안정된 이중 대좌(二重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91cm이다.
개요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같이 보기
도피안사
각주
참고 자료
강원특별자치도의 국보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불
비로자나불
좌상
신라의 불상
9세기 불상<|end_of_text|>
| 12.376255 | 1,844.066545 |
5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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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B0%EB%B2%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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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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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곰베
### 기사:
곰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곰베주는 나이지리아의 주이다.
곰베는 나이지리아 곰베 주의 주도이다.
같이 보기<|end_of_text|>
| 19.117424 | 191.78901 |
187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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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A%B5%AD%20%EC%99%95%EB%A6%BD%20%ED%95%B4%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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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립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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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영국 왕립 해군
### 기사:
왕립 해군()은 영국군에서 가장 오래된 군종으로 대영 제국 시대(18세기~20세기)에 가장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었다. 2차 대전 때에는 900척의 군함을 운영하다가 냉전 시기에는 소련의 잠수함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현재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사이에서 2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 러시아에 이어서 세계 3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의 임무는 영국의 영해 방어와 세계의 항로 방어이다. 제국주의 시대가 몰락하고, 대부분의 해외기지는 폐쇄된 상태에서도, 영국해군은 포클랜드 제도와 키프로스 등에 기지를 보유하고, 유사시 거점으로 쓰고있다.
기지
국내기지
포츠머스 기지 (영국해군의 주요수상함대 데어링급 방공구축함과 23형 호위함의 모항이다.)
클라이드 기지 (영국해군의 호위함대의 절반과 전략원잠; 벵가드급 원자력잠수함대의 모항이다.)
데본포트 기지 (영국해군의 고속정함대와 초계함대의 모항이다, 영국해군의 공격잠수함인 트라팔가급의 모항이기도 하다.)
해외기지
포클랜드 기지 (영국해군의 포클랜드 기지로, 포클랜드 섬과 주변 영국령 섬들을 보호한다.)
키프로스 해군기지 (영국해군의 키프로스 기지로, 지중해에서의 영국 이권을 보호한다.)
지브롤터 기지 (영국령 지브롤터 반도를 보호한다.)
바레인 기지 (조만간 완공 예정이며, 영국의 지중해 전진기지로 사용할 예정이다.)
장비
수상함대 (Surface Fleet)
항공모함 (Aircraft Carrier)
퀸 엘리자베스급의 무장
퀸 엘리자베스급의 항공기 수량
구축함 (Destroyer)
데어링급의 무장
호위함 (Frigate)
23형 호위함의 무장
상륙전 (Amphibious Warfare)
오션급의 무장/수송 능력
알비온급의 무장/수송 능력
원양 초계 (Offshore Patrol)
리버급의 무장 (Mercy, Servern, Tyne)
리버급의 무장 (Clyde)
리버급의 무장 (Forth)
소해함 (Mine Hunter Countermeasure)
헌트급/샌드다운급의 무장
고속정 (Patrol Boat)
아쳐급의 무장
시미터급의 무장
정찰
에코급의 무장
프로텍터의 무장
잠수함대 (Submarine Service)
전략원잠 (Ballistic Missile Submarine)
벵가드급의 무장
공격원잠 (Attack Submarine)
트라팔가급의 무장
아스튜드급의 무장
역사적 보존함 (Historic Ship)
전열함 (Ship of Line)
구축함 (Destroyer)
보조함대 (Royal Fleet Auxiliary)
보급 (Replenishment)
타이드급의 무장
웨이브급의 무장
포트 빅토리아급의 무장
포트 로질급의 무장
상륙함 (Dock Landing Ship)
베이급의 무장/수송 능력
항공 훈련함 (Aviation Training Ship)
아거스급의 무장
전방 수리함 (Forward Repair Ship)
딜리전스급의 무장
항공기
회전익기
고정익기
미사일 수량
이름 명명
"Royal" Navy
영국의 해군을 나타내는 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사용된다. 영국 연방 국가의 해군은 "Royal (나라이름) Navy"로 명명한다. 예를 들면 오스트레일리아의 Royal Australian Navy를 들 수 있다. 또한 왕국의 해군의 경우에는, 네덜란드 해군(,)와 같이 자국의 해군을 영어로 표기할 때에 Royal Navy라 부른다.
영국공군과 같이 왕립해군이란 이름은 왕의 명령에 의하여서 설립한데에서 기인하였다.
같이 보기
영국 육군
영국 공군
영국 해병대
16세기
이그 노벨상 수상자
왕실 후원을 받는 영국의 단체<|end_of_text|>
| 12.154204 | 2,557.619385 |
48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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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D%B4%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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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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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자이르
### 기사:
자이르 공화국(), 약칭 자이르()는 1971년 10월 27일에서부터 1997년 5월 16일까지 26년간 사용되었던 콩고 민주 공화국의 옛 이름이다.
1971년 10월 27일 콩고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가 국호를 자이르로 바꾸었다. 자이르라는 이름은 콩고강의 포르투갈어 이름인 자이르 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제1차 콩고 내전이 종식된 1997년 5월 17일에 반모부투 계열 반군 수장인 로랑데지레 카빌라가 킨샤사를 장악하고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국호를 환원하면서 자이르는 폐지되었다.
같이 보기
콩고 민주 공화국 비밀정보국
디디에 예툼바 롱질라
콩고 민주 공화국의 역사
아프리카의 옛 나라
냉전기의 정체
군사독재<|end_of_text|>
| 13.478973 | 715.311015 |
25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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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6%89%EB%8F%99%20%EC%88%98%EC%A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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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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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행동 수정
### 기사:
행동 수정(behavior therapy)은 보다 안정된 결과를 효율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행동을 수정하는데 초점을 두는 것으로 심리학,체육학,임상적 상황등에서 증상을 보다 안정적이게 하고 또한 행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고전적 조건화나 조작적 조건화, 혐오치료, 상호억제,이완훈련(relaxation training)과 같은 기본적인 학습 기법등을 적용하여 긍정적인 패턴이 증가하거나 부적응적인 패턴이 감소하도록 적절한 방향으로 행동수정과정을 지원하는 것이다.
문제 행동 수정을 위한 기법
강화 기법
발생율이 높은 행동에 대한 차별강화
정해놓은 시간 내에 적응 행동이 명시된 반응 빈도 이상으로 나타났을 때 강화를 준다.
발생율이 낮은 행동에 대한 차별강화
소거될 부적응 행동이 교사가 정해 놓은 시간 내에 반응 빈도수보다 낮은 반응을 보일 때 강화를 준다.
표적행동과 다른 행동에 대한 차별강화
교사가 정해 놓은 시간 내에 특정 표적 행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강화를 준다.
표적행동의 대안적 행동들에 대한 차별강화
미리 표적행동에 대한 대안적 행동이 명시되고, 명시된 대안적 행동을 했을 때에 강화를 줌.(명시되지 않은 행동은 적응 행동이라도 무시한다.
정해진 표적행동에 대한 상반행동 차별강화
부적절한 표적행동에 대응한 신체적으로 혹은 기능적으로 상반되는 행동만을 선정하여 강화(예 : 손을 흔드는 행동을 한다면 손으로 만들기를 하게 하게 한다.
소거
소거는 부적절한 행동을 무시하여 그 행동을 감소시키는 기법이다.
소거의 기법은 용이하긴 하나 종종 공격성이나 발작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소거의 목적으로 쓰인 반응이 아이의 문제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예: 아이가 떠드는 것을 줄이기 위해 교실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벌을 주지만 아이는 수업이 싫어 계속 교실밖으로 나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계속 떠든다.
토큰 체계
토큰체계는 적절한 행동을 늘이기 위한 일시적인 중재법으로 토큰체계가 끝난 후 자연적인 보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아동의 행동변화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 토큰체계를 사용할 때에는 강화를 받을 기회를 많이 부여한 다음 점차 행동의 난이도 수준을 높여 강화받을 기회를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
토큰체계 계획시에는 토큰과 강화물의 교환 시기를 설정해야 하며 아동의 특성을 고려하여 토큰을 점수로 할 것인지 구체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한 규칙을 아동 스스로가 관리하도록 도와 자기 통제력 향상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행동계약 기법
부적절한 행동은 감소시키고 미리 정해놓은 행동은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적절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행동의 성공기준, 성취해야하는 기간, 행동계약 마감일,보상의 내용 등) 부적절한 행동을 보이는 아동과 교사가 하는 일종의 약속이다.
행동계약은 집단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 기술과 대인관계 기술, 그리고 과제수행 기능을 개발하고 증가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벌
강화가 되는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부적응 행동을 줄여나가거나 자극을 부여하여 부적응 행동의 발생을 줄이는 것을 뜻함.
벌에 대해서는 여전히 찬반의 논의가 진행 중임(벌이 과연 문제행동 교정에 효과적인가? 벌이 남용될 가능성은 없는가? 등)
벌의 주요 기법에는 반응대가(부적응 행동이 발생하면 주어진 보상을 뺏는 것등),과잉교정(부적 행동이 발생하면 바람직한 행동을 반복해서 수행하도록 하는 것), 충격요법(부적응 행동의 발생시 일시적으로 전기충격을 주는 것) 등이 있다.
정서, 행동장애에서의 행동치료 적용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아동이 집중했을 때 강화물을 통해 보상한다.
산만하지 않도록 환경을 구조화한다.
큰 과제를 작은 과제로 나누어 준다.
적절한 행동 양식을 규칙으로 정하여 그에 합당한 행동을 했을 때 반드시 보상한다.
강화시간을 점차 증가시킨다.
품행 장애
타임-아웃을 이용해 공격행동을 감소시킨다.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때 미리 정한 시간 동안 정해진 장소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으로 타임-아웃이 끝난 후에는 바른 행동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대안적 의사 소통에 의한 공격 행동의 감소시킨다.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자가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공격적 혹은 부적절한 행동을 감소
인형극 등 역할 놀이를 통한 공격 행동 감소시킨다.
감정을 바르게 표출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
문제행동 기능 분석에 의한 공격행동 감소시킨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상황과 시간, 환경, 아이의 상태등을 관찰하여 원인을 분석한다. 그리고 문제행동을 야기시키는 상황을 변화시켜 문제행동을 감소시킨다.
자기 느낌과 요구에 대해 적절히 주장하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이 잘못한 행동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느끼게 하여 부적절한 행동을 감소시킨다. 화가 나더라도 신체적으로 표출하는 정도를 제한해 준다.
분리불안 장애 및 공포증
분리불안과 공포를 점진적으로 소거한다.
불안 반응보다 훨씬 강한 역조건화에 의해 불안을 소거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에 공포를 가진다면 처음에는 한명 앞에서 다음에는 2, 3, 4명 등으로 점차 늘려가면서 공포를 제거한다.
분노 및 파괴적 방해 행동
완벽한 무시를 통해 감정이 폭발하는 행위를 감소시킨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침착하고 일관성 있게 무시반응을 제공하고 적절한 행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강화를 한다)
자기 주장 훈련을 통해 반항적 방해행동을 감소시킨다.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의사소통기술을 훈련시키고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서 교사와 부모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목소리에서 적대적 감정이 드러나선 안된다.
토큰 강화에 의한 싸우는 행동을 감소시킨다.
문제행동이 감소되었을 때 토큰을 제공하여 강화하여 점차적으로 행동을 감소시킨다.
행동 수정의 절차
행동 양식 이해
정서, 행동문제를 분석하여 정의한다. 객관적 기준은 없으므로 부적절한 행동을 보일 시 기록하여 둔다.
관찰
관찰 되는 학생과 관찰자, 관찰날짜 , 관찰목적을 명확히 하여 앞서 정했던 문제행동을 측정한다.
자료 수집과 중재계획
여러 상황에서 문제행동을 관찰하고 문제행동의 원인을 잠정적으로 설정하여 그에 맞는 중재계획을 세운다.
참고 문헌
아동의 이해와 심리.행동 치료교육, 강위영 외 6명, 1997년 7월 30일 ,대구대학교출판부
정서장애아 행동치료교육 ,연구자: 이상복, 정대영, 1995. ·12. 25, 국립특수교육원
정서적 패턴의 발견과 치료 교육 ; 정서장애아와 행동 수정, 이성진, 1986, 한국정서.행동장애아교육학회(구.한국정서학습장애아교육학회)
특수 교육
교육학
행동주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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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86%A0%20%EB%A7%88%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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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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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고토 마이
### 기사:
고토 마이()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고토 마이 (성우)(1982~) - 일본의 여자 성우.
고토 마이 (배우)(1977~) - 일본의 여자 배우. 그라비아 아이돌.<|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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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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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83년
### 기사:
연호
후한(後漢) 건초(建初) 8년
기년
후한(後漢) 장제(章帝) 8년
신라(新羅) 파사 이사금(婆娑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태조대왕(太祖大王) 31년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7년
사건
문화
탄생
사망<|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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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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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공휴일
### 기사:
공휴일(公休日, (休息日))은 국가에서 정한 휴일을 말한다. 대한민국,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는 휴일이 다른 휴일과 겹치는 경우에는 그 다음날까지 쉬는 대체휴일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조선 초에는 태음태양력인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다가, 세종 때에는 회회력을 바탕으로 개정된 역법을 사용하였다. 1654년(효종 5년)부터는 청나라의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이 서양역법을 적용하여 만든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차원에서 그레고리력 채택을 추진하여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양력(그레고리력)을 사용하였다.
조선에서 일요일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95년 4월부터였으며 그 이전에는 일요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대신에 매월 1일, 7일, 15일, 23일, 절기가 드는 날(입춘, 경칩 등)은 정기휴일이었다. 국정 공휴일은 설날 7일, 대보름과 단오 그리고 연등회에 3일, 추석에는 하루였다. 또한 정월에 자일(子日)과 오일(午日)에 쉬었으며 일식과 월식이 있으면 그날은 부정을 탄다 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공휴일
일본의 공휴일
중화민국의 공휴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공휴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미국의 공휴일
각주<|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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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글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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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옴니글롯
### 기사:
옴니글롯(Omniglot)은 1998년부터 영국인 사이먼 에이거(Simon Ager)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세계의 문자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이다. 2006년 기준으로, 약 400여종이 넘는 문자가 수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접할 수 없는 진기한 문자나, 사이트 방문자가 자신이 고안한 문자를 직접 투고할 수 있는 등,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문자를 다룬 사이트로서는 세계 최고의 정보량을 자랑한다.
옴니글롯은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 omni와 말, 언어를 뜻하는 그리스어 glossa의 합성어로 "모든 언어" 또는 "모든 말"로 해석 가능하다. 옴니글롯에 나와 있는 한국어 번역어 제안으로는 온말, 온글이 제안되어 있다.
분류 체계 leen mar
옴니글롯은 다음의 체계에 따라 수록문자를 분류해 놓고 있다.
아브자드(자음알파벳): 자음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음은 기본적으로 표시하지 않거나, 별도의 부호를 첨가하는 방식의 문자체계 아랍 문자, 히브리 문자가 대표적
알파벳: 자음과 모음의 음소를 표시하는 문자가 분리되어 있는 체계. 라틴 문자가 대표적이며, 자질문자로 별도분류되기도 하는 한글도 편의상 알파벳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다.
아부기다(음절알파벳): 음절문자와 알파벳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문자체계. 주로 인도대륙의 제문자와 인도계 문자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의 문자가 이에 속한다. 기본자모에 독립된 자음을 나타내는 자모가 없고, 자음기본글자는 항상 a소리를 동반하며, a이외의 모음을 나타낼 경우에 별도의 홀소리기호를 붙여 이를 표시한다. 이는 인도계 언어의 끝소리가 -a로 끝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반영한 체계로 여겨진다.
음절문자: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하나의 음절이 하나의 문자에 대응하는 문자체계. 일본어의 가나, 체로키 문자, 크리 문자등이 대표적이다. 음절문자중에서도 가나나 체로키문자는 음의 변화와 글자의 형태에 전혀 규칙성이 없이 개별적이나, 크리문자의 경우는 같은 모음을 공유하고 있는 음절문자사이에 형태상의 일정한 규칙성이 있는 차이가 있다.
복합문자체계(complex scripts) 음과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는 문자체계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상형문자, 표의문자도 이 분류에 속한다.
미해독문자(Undeciphered) 이 분류는 구조상의 분류가 아니라, 아직 해독되지 않은 문자들을 미해독문자라는 범주로 묶어 놓은 것이다. 이스터섬의 롱고롱고문자, 보이니쉬문자등 유명한 미해독문자들을 포함한다.
대안문자(Alternative scripts) 대안문자란 특수한 목적하에 기존의 문자를 보완하거나, 대처할 목적하에 만들어진 문자를 말한다. 예를 들어,빠른 필기를 위한 속기문자,해상신호기체계, 전신을 위한 모스 부호, 영어철자를 음소적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알파벳등이 이에 속한다. 이외에 인공문자중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영화,소설,컴퓨터게임에 등장하는 인공문자들은 이 분류로 분류해 놓았다.
방문자 투고문자(Your con-scripts): 사이트 운영자가 옴니글롯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분류로서, 방문자자신이 고안한 인공문자를 투고할 수 있는 곳이다. 분류에 따라 다음의 넷으로 구분된다.
자연어표기-인공문자: 표기언어가 자연어인 경우
인공어표기-인공문자: 표기언어가 인공어인 경우(대부분 방문자자신의 인공어인 경우가 많다)
음성기호적 문자: 정확한 발음표기를 위한 문자들로써, 철자가 아닌 음성에 따른 표기를 중시하여, IPA분류체계에 따른 정연한 구조를 갖추거나, 이론상 어떤 언어도 표기가능 하도록 IPA처럼 가능한 모든 음소를 구비한 것도 있다.
기존문자채용: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문자를 변형시켜 새로운 언어를 표기하는 체계. 영어표기용 아랍문자나, 영어표기용 가나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밖의 내용
다언어구사자이기도 한 자신의 경험에 따라 언어학습의 조언, 언어와 관련 있는 뉴스및 글모음, 특정언어의 간단하고 자주쓰이는 표현이나 문구를 알아볼 때 편리한 여러 가지 문구 모음과 운영자의 블로그 등 언어와 문자에 관한 다양한 읽을거리를 구비해 놓고 있다.
옴니글롯에 있는 한글 및 한국어 관련 항목
옴니글롯에서 한글은 알파벳으로 분류되어 있고, 한국어의 계통및 역사, 한글창제의 역사등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방문자 투고 문자란에서는 한글의 모양이나, 결합방식의 영향을 받은 인공문자가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기타 한글 창제 이전의 한국어표기시도였던 이두, 향찰, 구결, 한글 풀어쓰기안 등이 한국과 관련하여 추가로 실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외부 링크
옴니글롯 웹사이트
온라인 백과사전
자유 저작물<|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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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 함마르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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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다그 함마르셸드
### 기사:
다그 얄마르 앙네 카를 함마르셸드(, 1905년 7월 25일 ~ 1961년 9월 18일)는 스웨덴의 외교관으로 제2대 유엔 사무 총장이었다. 1953년 4월 18일부터 사망 전인 1961년 9월 18일까지 역임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함마르셸드는 조국을 대표하기보다는, 국제 공동체의 대표라는 입장을 취했다. 함마르셸드는 지속적인 평화 달성을 헌신을 인정받아 사후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초기 생애와 교육
옌셰핑에서 태어난 함마르셸드는 대학 도시 웁살라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살았다. 그는 스웨덴의 총리 얄마르 함마르셸드 (1914년 ~ 1917년)와 아그네스 알름퀴스트의 4번째이자 막내 아들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17세기 이래 스웨덴의 왕실을 섬겼다. 자신의 청소년 시절 동안 함마르셸드의 부친은 우플란드의 지사였다.
그는 18세때 웁살라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들을 시작하였다. 1925년 영예들과 함께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주요 전공들은 언어학, 문학과 역사학이었다. 그는 웁살라에서 자신의 전공들을 지속하여 경제학에서 석사 학위 (1928년)와 법학 학사 (1930년)를 속행하고 취득하였다.
스웨덴 정부에서 경력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함마르셸드는 무직에 정부 위원회의 서기였다. 그는 또한 박사 학위 논문 〈비즈니스 순환의 퍼짐〉을 썼다. 함마르셸드는 1933년 스톡홀름 대학교로부터 경제학에서 자신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몇년 동안 그는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정치 경제학의 조교수로 일하였다.
1936년 그는 스웨덴 은행의 서기가 되었다. 단 1년 후에 함마르셸드는 정부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들 중의 하나로 숙고된 재무부에서 영구적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또한 정부의 임명으로 스웨덴 국립은행의 이사회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동시에 2가지 임무를 가지는 데 첫 사람이었다.
1945년이 시작되면서 함마르셸드는 재정과 경제적 문제들에 내각으로 조언자가 되었다. 이 직위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기의 경제적 문제들을 완화하는 데 정부의 계획들을 조정하였다.
함마르셸드는 1947년 스웨덴 외무부로 임명되어 지속적으로 경제 문제들을 다루는 책임을 지었다. 2년 후, 그는 외무부를 위한 국가 서기가 되었다.
또한 1947년 그는 마셜 플랜을 설립한 파리 회의에 대표였다. 그는 1948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회의에 참석하러 다시 파리로 갔다.
1950년 함마르셸드는 UNISCAN에 스웨덴 대표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 조직은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 경제 협력을 흥행하는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다음해 그는 무임소 장관이 되어 본질적으로 외무부의 부장관이었다. 함마르셸드가 사회민주당에 의하여 지배된 내각과 지냈어도 그는 전혀 아무 정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1951년 함마르셸드는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의 6차 정규 회의로 스웨덴 대표단의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1952년 7차 유엔 총회에 스웨덴 대표단의 임시 대행 의장이 되었다.
1954년 12월 20일 함마르셸드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부친의 비워진 의석을 차지하는 데 선출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선택하면서 맡아진 조직이다.
유엔 사무총장
1953년 트뤼그베 리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자신의 직위로부터 사임하였을 때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함마르셸드에게 놀라웠던 직위로 그를 추천하였다. 유엔 총회는 4월 7일부터 4월 10일까지 회의에서 만장 일치로 그를 선출하였다. 1957년 그는 재선되었다.
지식이 풍부하고 겸손한 남자로 알려진 함마르셸드는 쉬운 역할로 지낸 사무총장에 관하여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그를 알던 이들은 그가 그의 전체의 힘과 결심과 함께 책음으로 완전히 자신을 준 것을 입증하였다.
함마르셸드는 유엔 사무국과 사무총장의 역할과 책임들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기간을 시작하였다. 그는 회원국들의 목표와 어려움들에 관한 완전한 객관적인 정보를 모으는 데 둘다의 임무였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무총장이 유엔 헌장의 규칙들에 기초를 둔 취사 선택을 형성하는 데 의무가 지어져 전혀 그 규칙들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도 하였다.
1953년의 종말 가까이 함마르셸드는 다음과 같이 곰곰히 생각하였다.
함마르셸드는 이 조용한 외교로 헌신한 자신을 통하여 분쟁의 양당들 사이에 사적 논의들을 통한 분쟁들을 해결하는 데 자신을 바쳤다. 자신의 기간들 동안 함마르셸드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관계들을 진정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1955년 그는 한국 전쟁에 복무하고 중공군에 의하여 사로 잡힌 15명의 미군 조종사들의 석방을 협상하러 중공에 갔다. 1956년 그는 유엔 긴급군을 설립하였고 이듬해 수에즈 위기에 중재하였다.
1960년 전 벨기에의 식민지이자 이제 새롭게 독립한 콩고민주공화국은 심화되는 내전을 해체하는 것에 유엔의 원조를 위하여 의문하였다. 함마르셸드는 콩고로 4번의 여행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비식민지화를 향한 그의 노력들은 소련에 의하여 불충분한 것으로 숙고되었다. 그헤 9월 소련은 평화를 지키는 데 유엔 긴급군을 보내는 그의 결정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의 사임과 거부권 (트로이카)에서 3사람의 이사에 의하여 사무총장직의 대체를 요구하였다.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록들에 의하면 목표는 "국가들의 3개 단체 -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최근에 독립한 국가들의 이익들을 동등하게 대표하는" 것이었다.
함마르셸드는 유엔의 독립적인 권환이 강화될 종말로 완고하게 남아있었다. 그의 직위는 어쩌다 서방에 의하여, 그러나 소련에 의하여 더욱 자주 그리고 강하게 그를 공격의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느 유엔의 주의깊게 지키는 보호를 필요한 전체의 다른 국가들이 아닌 소련 혹은 다른 강대국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완고하게 믿고 진술하였다.
1961년 노벨 위원회의 의장 군나르 얀은 노벨상 수여 연설이 있던 동안 유엔이 "효과적과 구성적인 국제 기구가 되어 유엔 헌장에서 표현된 원칙과 목표들로 인생을 주는 자격이 있어 국제적으로 느끼고 활동한 자들에 의하여 관리되었다. 그가 항상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목적은 유엔 헌장을 전체의 국가들이 직접 규제한 것에 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는 결과에서 비판과 공격들의 표면에서 완고히 서면서 그의 길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은 것과 함께 함마르셸드에게 공로를 돌렸다.
사망
1961년 9월 함마르셸드는 비전투 유엔군과 모이즈 촘베의 카탕가 주 군대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북로디지아 (현재 잠비아)의 은돌라 근처에서 그의 비행기가 추락하였을 때 9월 17일 ~ 18일의 밤에 휴전을 협상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와 다른 15명이 사망하였다.
추락의 원인에 아직도 사색이 있다. 당시 조사자들의 설명은 함마르셸드의 비행기가 밤에 은돌라의 공항으로 그 접근에 너무 낮게 내려갔다는 것이다. 승무원 전원은 안전 이유들을 위한 비행 계획을 제출하지 않았다. 폭탄, 지대공 미사일 혹은 공중 납치의 증거가 여태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일은 더글러스 DC-6 호의 승무원 전원이 북로디지아에서 은돌라 (4,167 피트/1,270m) 보다 낮은 높이에 콩고에서 은돌로 (915 피트/297 미터)를 위하여 높이 데이타를 정확하지 않게 이용했던 것으로 사색되었다.
1998년 8월 19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 위원회의 의장 데스먼드 투투 대주교는 1961년 함마르셸드의 비행기의 추락 사건에 이전적으로 폭로된 편지들이 영국의 M15, 미국의 CIA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보부를 연루시킨 것을 드러냈다.
2005년 7월 29일 함마르셸드의 탄생의 정확히 100년 후에 노르웨이의 소장 비에른 에게는 함마르셸드의 사망을 둘러싼 이벤트들에 신문 〈아프텐포스텐〉에게 인터뷰를 주었다. 시체를 보는 데 첫 유엔군 사관이었던 에게에 의하면 함마르셸드는 그의 이마에 구멍이 났고, 이 구멍은 시체를 찍은 사진들로부터 즉시 에어브러시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에게에게 함마르셸드가 비행기로부터 던져져 그의 손에 잔디와 잎들은 그가 추락을 생존하여 잔해에서 출격해야 했던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에게의 진술은 투투 대주교의 정보와 결합하지 않는다.
함마르셸드의 단 하나의 저서 〈길잡이〉는 1963년에 출판되었다. 그 책은 그의 일기 묵상들의 수집이다. 그것은 그가 20세였던 1925년에 시작되어 1961년 그의 사망에 끝난다. 함마르셸드는 일기의 항목들을 통하여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의 일기 항목들에서 그는 자신의 외교 생활을 "내면의 여정"의 측면에서 묘사한다. 책은 미국의 학생들과 전 스웨덴의 대주교 K. G. 함마르와 함께 인기있게 되었다.
유산
오늘날 많은이들는 이벤트들을 형성하는 데 그의 능력 때문에 함마르셸드를 거대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간주한다.
코피 아난은 함마르셸드에 관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함마르셸드의 사망한지 얼마 안되어 세계를 주위로 많은 도시들은 그의 영예에 거리와 광장들의 이름을 다시 지었다.
유엔 본부 근처에 있는 맨해튼의 공원은 다그 함마르셸드 플라자로 불린다.
조직으로 다그 함마르셸드의 서비스의 기념에 적철한 기념비를 세우는 데 욕망한 유엔은 함마르셸드의 이름을 딴 새로운 도서관으로 선출하였다. 도서관은 1961년 11월 16일 봉납되었다.
함마르셸드는 "인류와 국가들 중에 평화와 친설을 창조하는 데 그가 한 모든 감사함으로써, 그가 달성한 것으로서, 그가 싸운 것으로서" 1961년 11월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같이 보기
안드레아스 웅에
요나스 웅에
니콜라스 그룬트비
프리티오프 난센
외부 링크
Dag Hammarskjöld archives
The Nobel Peace Prize 1961 - Dag Hammarskjöld - 노벨 재단 홈페이지
1905년 출생
1961년 사망
노벨 평화상 수상자
스웨덴의 외교관
유엔 사무총장
항공 사고로 죽은 사람
추락사한 사람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
웁살라 대학교 동문
스톡홀름 대학교 동문
스웨덴의 루터교도
독일에 거주한 스웨덴인
아일랜드에 거주한 스웨덴인
잉글랜드에 거주한 스웨덴인
미국에 거주한 스웨덴인
노르웨이에 거주한 스웨덴인
핀란드에 거주한 스웨덴인
민족주의자
스웨덴의 경제학자
20세기 경제학자
스웨덴의 유엔 직원<|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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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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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보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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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DOUBLE (보아의 노래)
### 기사:
〈DOUBLE〉은 가수 보아의 싱글이다. 일본에서 10번째로 발매된 싱글이며,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발매한 싱글이다. 일본에서 발매된 싱글의 경우 수록된 3곡이 모두 타이틀 곡인 3A 싱글이다.
첫 번째 수록곡 〈DOUBLE〉은 〈LISTEN TO MY HEART〉, 〈VALENTI〉 등 보아의 히트곡을 다수 작곡한 하라 가즈히로가 작곡했다. 보아가 직접 출연한 자동차 회사 혼다의 광고 음악으로 선정되어 전파를 탔다. 이전의 곡들과 마찬가지로 이 곡 역시 강렬한 댄스곡이다. 뮤직 비디오에서는 은색 의상을 입은 보아와 검은색 의상을 입은 보아가 등장하는데, 이 둘이 서로 천장과 바닥에서 대칭을 이루면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도록 합성되어 있다. 이에 맞춰 화면은 상하가 반전되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곡으로 2003년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였다.
일본 발매반의 두 번째 수록곡 〈Midnight Parade〉는 일본 롯데의 초콜릿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댄스곡이다. 2004년 한국어로 번안되어 SM TOWN 여름앨범에 수록되었다. 세 번째 수록곡 〈Milky Way~~〉는 대한민국에서 발매한 3집 《Atlantis Princess》의 수록곡인 〈Milky Way〉를 일본어로 번안한 곡으로, '테레비 도쿄 개국 40주년 기념 럭비 월드컵 2003'의 이미지 송으로 선정되었다.
한국 발매반에는 커플링 곡으로 강타가 작사·작곡한 발라드 곡 〈이별풍경 (Always)〉과, 〈Milky Way〉의 리믹스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발매반에 수록된 3곡이 모두 2004년 발매된 일본 정규 3집 《LOVE & HONESTY》에 수록되었고, 실질적 활동곡이었던 〈DOUBLE〉은 첫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에도 수록되었다. 또, 한국 발매반 커플링 곡 〈이별풍경 (Always)〉과 〈Milky Way (Club Remix)〉는 1달여 후 발매된 앨범 《SHINE WE ARE》에 다시 수록되었다.
보아 베스트앨범 전집앨범 수록곡 10여가지 있으며 TAPE 있으며 더블부터 〈Milky Way〉의 리믹스 버전이 수록곡까지 나머지는 전집앨범 수록곡 나오기도 했다
방송 출연 목록
트랙 리스트
일본 발매반
DOUBLE
작사 : 와타나베 나쓰미 / 작곡 : 하라 가즈히로 / 편곡 : h-wonder
Midnight Parade
작사 : 후지바야시 쇼코 / 작곡 : BOUNCEBACK / 편곡 : AKIRA
Milky Way~~ Milky Way~그대의 노래~
일본어 작사 : 후지바야시 쇼코 / 작곡·편곡 : Kenzie
DOUBLE (Instrumental)
Midnight Parade (Instrumental)
Milky Way~~ (Instrumental)
한국 발매반
DOUBLE
한국어 작사 : 보아 / 작곡·편곡 : 하라 가즈히로
이별풍경 (Always)
작사·작곡·편곡 : 강타
Milky Way (Club Remix)
작사·작곡·편곡 : Kenzie
DOUBLE (Instrumental)
이별풍경 (Always) (Instrumental)
2003년 싱글
보아의 노래
SM 엔터테인먼트 음반
대한민국의 음반
2003년 노래<|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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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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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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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오손
### 기사:
오손(烏孫)은 유목 민족이다. 오손족은 중국문헌에 따르면 월지 근처에 살았다. 그러나 기원전 173년 경 흉노의 공격을 받고 하서지역으로 이동한 월지에게 공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흉노 선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한 오손의 왕자 엽교미는 흉노의 힘을 빌려 기원전 130년 대에 일리 강 유역으로 이동해있던 월지를 쫓아내고 오손을 부활시켰다. 흉노의 군신 선우가 사망하자 엽교미는 흉노와 거리를 두고 속국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흉노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기원전 126년 경 장건이 방문하였을 무렵 오손은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하였고, 인접한 흉노와 동맹을 원하는 한 제국 사이에서 실리에 따라 외교를 하며 균형을 유지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호수는 12만, 인구는 63만, 병사는 18만 8천이었다. 오손에 대한 중국의 마지막 문헌은 서기 436년에 중국의 사절단이 방문한 것이다.
그들의 국가들은 제티수 지역의 이동에 관련있다. 그들이 이동하여 건국한 국가들의 기록이 6세기에서 오늘날까지 페르시아, 아랍, 투르크와 러시아 문헌에 남아있다. 현재 그들의 후손은 약 250,000 명이며 서기 1세기의 인구의 절반정도이다. 우이신스는 두 부족이 있는데 둘라트와 사리 우이신(황오손)이 그들이다.
카자흐족은 오손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정치 체계
《한서》에 따른 것이다.
수도는 적곡성(赤谷城)이다. 군주는 곤막(昆莫) 혹 곤미(昆彌)라고 한다.
관직으로는 상(相), 대록(大祿), 좌·우대장 각 1명, 후(侯) 3명, 대장과 도위 각 1명, 대감(大監) 2명, 대리(大吏) 2명, 사중대리(舍中大吏) 2명, 기군(騎郡) 2명이 있다.
역대 군주
오손은 자신들의 군주를 '곤미'라고 불렀다. 광왕 니미 사후, 전한의 개입으로 대곤미, 소곤미 2명의 군주를 두고 6:4의 비로 오손을 나누어 다스렸다.
곤막(昆莫) 엽교미(獵驕靡)
잠취(岑陬) 군수미(軍須靡)
비왕(肥王) 옹귀미(翁歸靡)
광왕(狂王) 니미(泥靡)
대곤미
원귀미(元歸靡)
성미(星靡)
자율미(雌栗靡)
이질미(伊秩靡)
소곤미
오취도(烏就屠)
부리(拊離)
일이(日貳)
안일(安日)
말진장(末振將)
안리미(安犁靡)
각주
서역
유라시아 유목민
중국의 고대 민족
위구르족
중앙아시아의 역사<|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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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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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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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오마르 봉고
### 기사:
엘 하지 오마르 봉고 온딤바(, 1935년 12월 30일~2009년 6월 8일)는 1967년부터 2009년 사망할 때까지 42년 동안 가봉의 두 번째 대통령이었다. 오마르 봉고는 1960년대에 가봉의 초대 대통령 레옹 음바 밑에서 젊은 관리로서 주요 직책으로 승진한 후 1966년에 자신의 권한으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그는 음바의 뒤를 이어 가봉의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봉고는 1990년까지 가봉 민주당(PDG)의 단일 정당 정권을 이끌었고, 대중의 압력에 직면하여 가봉에 다당제 정치를 도입해야 했다. 1990년대 초 그의 통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생존은 다시 한번 그 당시 주요 야당 지도자들 대부분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였다. 1993년 대통령 선거는 극도로 논란이 많았지만, 그 당시 그의 재선과 1998년과 2005년의 후속 선거로 끝이 났다. 그의 각각의 의회 다수당은 증가했고 다음 선거 때마다 반대파는 더 가라앉았다. 2008년 2월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물러난 후, 봉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통치한 비왕실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00년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비왕실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봉고는 사실상 가봉과 그 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 지역 엘리트들을 위해 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녹색당 정치인 에바 졸리는 봉고의 장기 통치 기간 동안 석유 주도의 1인당 GDP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봉은 1년에 5km의 고속도로만 건설했고 2009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유아 사망률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2009년 6월 봉고가 사망한 후, 그의 아버지에 의해 오랫동안 주요 장관직을 배정받았던 그의 아들 알리 봉고 온딤바가 2009년 8월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초기 생애
12남매 중 막내인 알베르 베르나르 봉고()는 1935년 12월 30일 현재 콩고 공화국과의 국경 근처 가봉 남동부에 위치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레와이(현 봉고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은 바테케 부족 집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1973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엘 하지 오마르 봉고로 개명했다.
정치 경력
1960년 가봉의 독립 후, 알베르 베르나르 봉고는 레옹 음바 대통령 아래에서 일련의 직위들을 통해 빠르게 상승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봉고는 196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트오고웨주에서 M. 산동아웃을 위한 선거 운동을 벌였고, 그 자신의 권리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산동아웃은 선출되었고 보건부 장관이 되었다. 봉고는 한동안 외교부에서 일했고, 1962년 3월에 대통령 내각의 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7개월 후에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 가봉 역사상 유일한 쿠데타 시도 중 음바가 납치되었고 봉고는 리브르빌의 군 캠프에 수용되었지만 음바는 이틀 후에 권력을 되찾았다.
1965년 9월 24일, 그는 대통령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국방과 조정을 담당했다. 그 후 그는 처음에는 임시로 정보 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66년 8월 공식적으로 그 직책을 맡았다. 1966년 11월 12일, 건강이 악화된 음바는 봉고를 가봉의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1967년 3월 19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음바는 대통령으로 재선되었고 봉고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봉고는 1966년 11월 레옹 음바 대통령의 오랜 병으로 인해 가봉의 실질적인 통치를 받았다.
대통령직
일당제
봉고는 1967년 12월 2일 음바가 사망한 지 나흘 만에 대통령이 되었고 샤를 드골과 영향력 있는 프랑스 지도자들의 동의에 의해 정식으로 취임했다. 32세의 봉고는 부룬디의 미셸 미콤베로 대위와 토고의 냐싱베 에야데마 하사에 이어 당시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어린 대통령이었다. 1968년 3월 봉고는 가봉을 일당제 국가로 선언하고 가봉 독립당인 가봉 민주권(BDG)의 이름을 가봉 민주당(PDG)으로 변경했다. 1973년 국회의원 및 대통령 선거에서 봉고는 유일한 대통령 후보였다. 그와 모든 PDG 후보들은 99.56%의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1975년 4월 봉고는 부통령직을 폐지하고 전 부통령인 레옹 메비암을 총리로 임명했다. 메비암은 1990년 사임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
1967년부터 국방부 장관(1967년~1981년), 정보부 장관(1967년~1980년), 기획부 장관(1967년~1977년), 총리(1967년~1975년), 내무부 장관(1967년~1970년) 등 여러 장관직을 역임했다. 1979년 1월 PDG의 의회와 1979년 12월 선거에 이어 봉고는 자신의 장관직 일부를 포기하고 메비암 총리에게 정부의 수장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했다. PDG 의회는 봉고 정부의 비효율적인 운영을 비판하고 복수의 사무실을 보유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봉고는 1979년에 다시 7년 임기로 재선되어 99.96%의 인기 투표를 받았다.
봉고 대통령 정권에 대한 반대는 1970년대 후반 가봉인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더 극심해지자 처음 나타났다. 첫 번째로 조직되었지만 불법적인 야당은 MORENA, 민족회복운동(Movement de redress national)이었다. 1981년 12월 리브르빌에 있는 오마르 봉고 대학교가 임시 폐쇄되었을 때 이 온건한 반대 단체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시위를 후원했다. MORENA는 봉고 대학이 부패와 개인적인 사치를 하고 자신의 바테케 부족을 편애한다고 비난했다. 이 단체는 다당제를 복원할 것을 요구했다. 1982년 2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에서 야당이 봉고 정권을 비판하는 전단을 배포하면서 체포되었다. 1982년 11월, 37명의 MORENA 회원들이 국가 안보에 대한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 13명에 대해 20년 간의 중노동을 포함한 중형이 선고되었지만, 모두 사면되었고 1986년 중반에 석방되었다.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마르 봉고는 일당 통치에 전념했다. 1985년, 과거의 절차를 따르는 입법 선거가 열렸다. 모든 지명은 PDG에 의해 승인되었고, PDG는 단일 후보자 목록을 제시했다. 후보들은 1985년 3월 3일 대중 투표에 의해 비준되었다. 1986년 11월, 봉고는 99.97%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다당제
1990년 5월 22일 파업, 폭동, 소요 사태 이후 PDG 중앙 위원회와 국회는 다당제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승인했다. 1994년까지 유효했던 기존의 대통령 권한은 존중되어야 했다. 이후의 대통령 선거는 한 명 이상의 후보자가 경쟁하게 되며, 대통령 임기는 5년으로 변경되었고, 임기는 한 번의 재선으로 구성된다.
다음 날인 1990년 5월 23일, 봉고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자 주요 야당 지도자인 조제프 렌잠베가 호텔에서 독극물에 의해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야당인 가봉 진보당(PGP)의 저명한 기업 임원이자 사무총장인 렌잠베의 죽음은 봉고의 23년 통치 중 최악의 폭동을 촉발시켰다. 리브르빌의 대통령 건물에 불이 났고 프랑스 총영사와 석유회사 직원 10명이 인질로 잡혔다. 프랑스군은 외국인들을 대피시켰고, 렌잠베의 고향이자 전략 석유 생산지인 포트 젠틸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이 비상사태 동안 가봉의 두 주요 석유생산기업인 엘프와 쉘은 하루 생산량을 270,000배럴에서 20,000배럴로 줄였다. 봉고는 그들이 정상적인 생산량을 회복하지 않으면 석유생산 허가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고, 곧 그렇게 했다. 프랑스는 "20,000명의 거주 프랑스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가봉에 영구 주둔하는 500명의 해병대 대대를 강화하기 위해 5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폭도들을 막기 위해 탱크와 군대가 대통령궁 주변에 배치되었다.
1993년 12월, 봉고는 새 다당제 하에서 실시된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약 51.4%의 간발의 차이로 승리했다. 야당 후보들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심각한 시민 소요 사태로 인해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정부와 야당 파벌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회담들은 1994년 11월 파리 협정으로 이어졌고, 몇몇 야당 인사들이 국가 통합 정부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곧 결렬되었고, 1996년과 1997년의 입법부 및 지방자치단체 선거는 새로운 당파 정치의 배경을 제공했다. PDG는 입법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리브르빌을 포함한 몇몇 주요 도시들은 1997년 지방 선거에서 야당 시장을 선출했다. 봉고는 결국 권력을 다시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는데, 대부분의 주요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의 고위직을 부여받거나 매수되어 1998년에 그는 편안한 재선을 보장받았다.
2003년, 봉고는 헌법을 개정하여 그가 원하는 만큼 재선에 도전할 수 있도록 했고,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변경했다. 봉고의 비평가들은 그가 평생 통치할 의도가 있다고 비난했다. 2005년 11월 27일, 봉고는 79.2%의 득표율로 4명의 도전자들을 여유 있게 앞섰으며, 7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그는 2006년 1월 19일에 또 다른 7년 임기를 위해 선서했고, 2009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프랑스와의 관계
프랑스의 문화, 경제, 그리고 정치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가봉을 지배해 왔다.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통제는... 1960년 독립 이후 가봉의 지도력에 의해 형성된 파리와의 음흉한 화해로 대체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오랫동안 정통한 프랑스 기자는 "가봉이 신식민지주의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썼다.
봉고의 국제 관계와 업무는 그의 것에 의해 지배되었고, 더 나아가 프랑스와의 관계인 가봉은 프랑수아프리크의 야망에 포함되었다. 석유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우라늄(가봉 우라늄은 1960년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이 알제리 사막에서 실험한 프랑스의 핵폭탄을 공급했다)의 5분의 1, 철과 망간 매장량, 풍부한 목재로 가봉은 프랑스에게 항상 중요했다. 봉고는 "프랑스가 없는 가봉은 운전자가 없는 차와 같다. 가봉이 없는 프랑스는 연료가 없는 차와 같다..."라고 말했다.
1964년, 망명 군인들이 리브르빌에서 그를 체포하고 음바 대통령을 납치했을 때, 프랑스 낙하산 부대는 납치된 대통령과 봉고를 구출하여 그들을 권력으로 회복시켰다. 봉고는 1965년 파리에서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사실상의 인터뷰와 승인을 받은 후 1966년 부통령이 되었다.
개인 생활
봉고는 1973년 리비아를 방문하는 동안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오마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은 토착민의 소수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봉고의 개종 이후 그 수는 증가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그는 1942년 사망한 아버지 바실레 온딤바를 기리기 위해 2003년 11월 15일 온딤바를 성으로 추가했다.
봉고의 첫 번째 결혼은 루이즈 무야비 무칼라였다. 그들은 1957년 프랑스빌에서 태어난 딸 파스칼린을 두었다. 파스칼린은 가봉의 외무장관이자 대통령 내각의 책임자였다.
봉고의 두 번째 결혼은 후에 조세핀 봉고로 알려진 마리 조제핀 카마였다. 그는 1987년에 그녀와 이혼했고, 그 후 그녀는 파티숑 다바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아들 알랭 베르나르 봉고와 딸 알베르틴 아미사 봉고가 있었다. 1959년 브라자빌에서 태어난 알랭 베르나르 봉고(나중에 알리 봉고 온딤바로 알려짐)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1999년부터 2009년까지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2009년 8월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봉고는 그 후 1989년에 거의 30살 연하인 에디트 루시 사수 응게소와 결혼했다. 그녀는 콩고 공화국의 대통령 드니 사수 응게소의 딸이었다. 그녀는 에이즈 퇴치에 헌신하는 것으로 유명한 훈련된 소아과 의사였다. 그녀는 봉고에게 두 아이를 낳았다. 에디트 루시 봉고는 2009년 3월 14일 모로코 라바트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을 발표한 성명서에는 사인이나 병의 성격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죽기 전 약 3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녀는 2009년 3월 22일 그녀의 고향 콩고 공화국의 북부 마을 에두에 있는 가족 묘지에 묻혔다.
봉고는 아내와 다른 여자들과 함께 모두 30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았다.
질병 및 사망
2009년 5월 7일, 가봉 정부는 봉고가 일시적으로 공무를 중단하고 아내를 애도하고 스페인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제 언론은 그가 중병에 걸렸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봉 정부는 그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심한 감정적 충격" 이후 며칠간 스페인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가 "건강 검진을 받고" 스페인 병원에 있다고 인정했다.
2009년 6월 7일, 프랑스 언론과 "프랑스 정부와 가까운" 소식통을 인용한 미확인 보도는 봉고가 진행 중인 암 합병증으로 스페인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가봉 정부는 다른 수많은 뉴스 매체들에 의해 포착된 보도를 부인하고 그가 잘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그의 죽음은 결국 2009년 6월 8일 GMT 12시 30분 직전에 봉고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진술한 당시 가봉 총리 장 아이에 은동에 의해 확인되었다.
봉고의 시신은 가봉으로 옮겨져 5일 동안 안치됐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조문을 하러 왔다. 2009년 6월 16일 리브르빌에서 수십 년간 자신들이 통치해온 아프리카의 몇몇 강자들과 현직 및 전직 프랑스의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와 자크 시라크를 포함한 거의 24명의 아프리카 국가원수들이 참석한 국장이 거행되었다.
봉고의 시신은 그가 태어난 남동부 오트오고웨주의 주요 마을인 프랑스빌로 옮겨져 2009년 6월 18일 개인 가족 장례식에 묻혔다.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외부 링크
Omar Bongo's Official Presidential Facebook page
"Omar Bongo's Demise Should Awaken Continent's Tyrants" by Arthur Asiimwe, New Times, 10 June 2009
1935년 출생
2009년 사망
가봉의 대통령
가봉의 부통령
가봉의 총리
가봉의 무슬림
기독교를 이탈한 사람
이슬람 개종자
올림픽 훈장 수훈자
암으로 죽은 사람<|end_of_text|>
| 12.491613 | 2,585.658936 |
7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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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D%99%94%EB%8C%80%ED%98%81%EB%A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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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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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문화대혁명
### 기사: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문화·정치상의 대변혁 또는 소란으로,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고 약칭은 문혁()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 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요
문화 대혁명의 형식상 표면에 내세운 구실은 "회생하려는 전근대성 문화와 시장 정책 문화를 비판하고 더욱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라는 정치·사회·사상·문화 개혁 운동이었지만, 실질로는 대약진 운동이 크게 실패한 탓에 정권 중추에서 잠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재부상을 획책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 폭력 운동을 동원해 시장 회생파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몰아간 마오쩌둥파와 덩샤오핑파 간의 권력 투쟁을 겸하였다.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가 공산당과 중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청년 학생들과 민중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인민민주독재를 더욱 확고히 실현키 위해 "혁명 후의 영구적 계급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분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마오가 문혁을 제창하게 된 동기는 노선을 변경한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공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 더욱 이상적인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한편, 마오쩌둥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 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 당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이 덩샤오핑과 류샤오치에게 넘어가려하자, 극좌적 계급투쟁 형식을 빌어 이를 선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는 것도 통설이다. 1969년 마오는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고 학생과 노동 운동가들 일부를 체포하였으나, 사실상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여러 혼돈과 변혁을 통틀어 길게 문혁기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화 혁명으로 인해 수십만에서 2 천만에 이르는 추정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베이징의 "붉은 8 월"을 시작으로 광시 대학살 (대규모 식인 풍습 발생), 내몽골 사건, 광동 대학살 등 중국 본토 전역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문혁은 대개의 중국인들이나 외부인 심지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에 이를 마오의 과오가 크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린뱌오와 사인방도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정치적 배경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상 정화 운동
1949년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공산당이 실시한 여러 개혁정책은 중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지배층들은 "반동분자"의 낙인이 찍혀 재산 및 모든 기득권을 잃는 것은 물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이런 와중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무산계급 독재 혁명투쟁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공산당 집권 후 사상개조를 받고 관리층이나 학자층, 지배층에 계속 머무르고 있던 이들이 꽤 많았다.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사회 변화로 인해 새롭게 지배계급이 된 무산계급의 불만과 권력욕을 해결하고 당내의 불순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대규모의 사상정화운동을 주기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문화 대혁명 이전에도 공산당이 지도한 사상정화운동이 있었으며, 그 방법론은 집권하기도 전인 1930년대 말에 벌인 연안(延安)에서의 정풍운동에서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즉 이런 군중 운동들에서 초기에는 무산계급 독재를 위한 "올바른 사상의 함양"을 외치던 것이, 후기로 접어들면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당내 투쟁으로 번졌고, "반혁명세력" 및 "우파"를 숙청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식이었다.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과 중소 분열
1953년 스탈린 사후 집권한 소련의 흐루쇼프는 전임 지도자였던 스탈린을 경제를 망친 독재자로 규정하고 국가적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 또한 "평화 공존 정책"을 부르짖으며 서방과 화해를 모색했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최고지도자로 여겼던 스탈린이 격하되는 모습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에게 충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은 서방 제국주의세력을 제3세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강한 혁명이 필요하며 "핵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평화공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반소 봉기와 폴란드 반소 봉기로 인해 소련의 공산주의권의 지도력에 대해 중국은 의구심을 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소련을 추종해왔던 중국의 외교방침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었다. 또한 소련은 1962년에 벌어진 중인국경분쟁에서 인도를 지지하였으며, 이는 중국측을 크게 실망시켰다.
중국은 1950년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MiG-15 제트전투기와 같은 최신 무기를 소련에서 구매했는데, 소련이 공산주의 우방국의 혜택을 주지 않고 중국에 거액을 청구하여 중국측을 격분시켰다. 또한 소련은 중국에 약속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취소했으며, 이때문에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중국의 산업화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두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격하 운동은 중국 공산당 수뇌부들에게도 경각심과 긴장감을 주었다. 당 간부들은 언제든 자신도 격하되거나 비판받을 수 있다며 술렁였고, 마오쩌둥은 소련이 공산주의 노선에서 어긋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마오는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규정하였고, 소련은 "공산전체주의 국가"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 또는 좌파를 빙자한 파시즘 국가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과 같은 인민이 소외된 관료제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마오는 중국이 관료의 영향력 하에서 소련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중적 사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갈등
1959년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사임했다. 이어서 류샤오치가 국가주석, 등소평이 당총서기를 맡게 되었고, 다만 총리 저우언라이는 계속 유임되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개혁은 마오쩌둥이 실시한 집단화 정책에서 부분적인 후퇴였지만,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였다. 류샤오치는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는 대여가 더 좋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기며 새로운 경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고, 마오쩌둥의 자급자족 경제관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류샤오치는 마오가 실시했던 여러 "도약" 정책을 종식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화를 해체하고,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정책때문에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간에 점점 갈등이 심화되었다.
류의 개혁은 성공을 거두어서 대기근은 사라졌고, 류는 인민들뿐만 아니라 고급 당원들 사이에서도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덩샤오핑과 함께 류는 마오를 점진적으로 정계로부터 끌어내리고 자신이 확고하게 최고실권자로 올라서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1963년부터 "공산주의 교육 운동"을 개시했다.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마오의 강력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운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목표로 한 것이어서 현행 정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몇 년후 마오의 주된 지지 세력, 즉 홍위병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1963년 마오는 계급투쟁의 이상은 항상 이해되고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4년까지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사청운동(四淸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것들을 청산해야한다는 것이었고 마르크스 수정주의파 류샤오치를 직접적으로 겨눈 운동이었다.
사회적 배경
대약진 운동
1957년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난 후, 중국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니만큼, 마오는 공산주의 이행 속도를 증진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오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의 목표는 식량과 철강 생산을 증산하여 단번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계획이었다.
산업발달의 척도가 되는 철강 생산을 위해 전국적으로 각 마을마다 재래식 고로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다른 목표인 식량증산을 위해서 농촌에 존재하던 소규모 협업조직인 호조조(互助組)를 해체하고 이를 대규모로 만들어 집단농업과 집단동원을 위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재앙으로 밝혀졌다. 농민들이 농사보다는 질낮은 철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전 산업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철들은 목표량 달성에 급급한 관리들이 농민들을 몰아붙여 농가의 마당에 설치된 구식 화로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산업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동시에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철을 조달하여 농기구 조달난에 시달렸고 이는 농업 생산성 감소로 이어졌다.
1959년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 원수는 개인적 서한을 보내 대약진 운동을 개시한 마오쩌둥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의 파국은 미숙한 행정도 한몫 했지만, 대약진운동 자체가 "소부르조아 환상주의"라고 규정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에 관해 자신의 과오를 거듭 인정했지만, 대약진운동은 전체로봐서는 70%는 옳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어하였다.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으로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하였고 국가 행정은 새 국가주석인 류샤오치, 총리 저우언라이, 그리고 당총서기 덩샤오핑 등이 운영하였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덩샤오핑과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일시적인 국가운영권을 내 주고 그 반대급부로 펑더화이를 고립시켜 "우익 기회주의자"로 규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어 실각하였다.
생산량의 감소와 대기근
1950년부터 1953년 무렵 한국전쟁에 가담하기 위해 대량의 철이 조달되었다. 대량의 농기구들이 화로에서 철 생산을 위해 녹여졌기 때문에 한국전쟁 종료 이후 농업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지역담당자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허위생산량을 보고하여 문제가 커졌다.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 및 중일 전쟁, 한국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던 중국경제는 회복되는 듯하다가 다시 한번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철강 생산량은 연간 520만 톤에서 1400만 톤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처음의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연간 3000만 톤의 철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후에 더 현실적인 2000만 톤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철은 대부분 질이 떨어졌고, 처음에 목표한 산업발전을 위한 기자재로 쓰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동안 식량생산에서도 문제가 불거져서, 농민들이 철생산에 매달린데다가, 이런 철생산을 위한 연료로 쓰기 위해 목재를 남벌한 결과 1958년부터 여름마다 홍수가 나서 농경지는 침수되었다. 또한 대약진운동과 함께 벌어진 제사해 운동에서는 참새를 유해조로 지정해서 대대적 퇴치운동을 벌였는데, 이때문에 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여름에 병충해가 창궐하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집단화된 농업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고, 더욱이 검증이 안된 새로운 작황법을 도입해 종자를 밀집되게 심었다가 도리어 생육에 지장만 주었다. 그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의 기근이 발생했다. 더욱이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하였는데도 중국정부는 소련의 기술도입료와 차관상환을 곡물로 하여 해외 수출을 계속하였다. 기근은 매우 심각했고, 이때 기근으로 사망한 이들은 2,000만-3,000만으로 추산된다. 이 기근은 1961년까지 계속되었다.
노동자 불만 확산
1957년의 반우파투쟁 때부터 도시에서부터 서서히 혁명 사조가 전국적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식량 생산이 감소함에 따라 생계난을 겪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노동계층 중 대다수는 청나라가 몰락하기 이전부터 하층민이었거나 노비에서 석방된 이들이 도시로 흘러들어와 형성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더욱 증폭시켰다. 시골에서 재산을 쌓아두고 풀어두지 않는 지역 유지들과 당내의 부르주아들에 대한 불만이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상하이의 극좌 문화는 1958년에 이미 달아오르기 시작하여 문혁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상하이에서는 1958년부터 노동자들 사이에서 먼저 마오쩌둥 사상 학습 운동이 퍼져나갔다. 1만 5000개에 이르는 학습 소조(모임)이 등장했고, 연인원 20만 명이 여기에 참여했다. 그와 동시에 전 시민의 혁명 시가(詩歌) 운동도 진행되었다. 시와 예술작품은 모두 혁명의 구호여야 마땅하다고 주장되었다. 노동계층의 불만은 퇴폐, 타락한 사회문화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야오원위안은 신문 지상에서 예술 시를 비판하고,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모두 혁명의 구호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 스스로 지은 '혁명 시'를 발표했다. 자구책이 없이 불만을 품던 노동계층은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에 열렬히 호응하였다.
1950년대 후반 상하이의 프롤레타리아 문예 창작자들은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극좌 문화의 작품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후일 문화대혁명 10년 간 장칭의 지도 아래 창작된 '혁명 모범극'은 당시 중국인이 관람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극이었다. 문혁 때에 유일하게 상영이 권장되었던 그 여덟 편의 모범극 가운데 여섯 편은 상하이 작가의 원작을 수정한 것이었다. 현실에서의 불만을 해소할 방법이 없던 노동자 계층은 이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울분을 해소하였다.
문혁 속에서 상하이는 극좌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당시 중국 유일의 문학 월간지 '조하(朝霞)'가 상하이에서 창간되어, 수많은 혁명 문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장했다. 야오원위안은 그들의 선배이자 전범이었다.
좌절한 공산주의 지식인과 청년들
195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공산주의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면서 청년층의 성공, 출세의 수단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일부 공산당 고위층의 아들들에게 그대로 상속되었고 기회의 평등을 외치며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지만 그 대상은 주로 공산당 간부들의 딸들이었다. 한편 홍군이나 국공내전 등에 참여하지 않던 시골 지역의 유지들은 청나라 또는 그 이전부터 세습되던 토지와 건물로 어느정도 자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공산당에 충성하거나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어오던 좌익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부 공산당 고위층의 반혁명성, 반당 행위, 그리고 혁명에 참여하지도 않고, 기존의 자산을 보유하면서도 당 간부직을 유지하는 지역 유지들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털어놓기 시작하고 그들보다 훨씬 극좌적인 방법을 택해 보복하고자 하였다.
1966년 5월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학술적으로 권위 있는 부르주아 반동 입장들을 철저하게 폭로하고, 학술계·교육계·언론계·문예계와 출판계의 부르주아 반동 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여, 이러한 문화영역에서 영도권을 탈취하자”는‘5·16 통지(通知)’가 제출되면서부터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을 무정부적 상태로 몰아넣게 되었다. 좌절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좋은 학력과 당 고위직을 세습하는 간부 자녀들과 시골의 지역유지들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와 처단을 실시하였다.
한편 대학을 졸업하거나 기술을 익히고도 주임, 서기급에서 올라가기 힘들었던 실무자층의 좌절 역시 분노로 변해갔다. 문혁의 발동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 집단은 좌절을 경험했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이러한 분노는 예학과 상장제례 등을 강조하던 유교 사상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분노로도 이어졌다. 명청대의 고위 관료들의 무덤과 사당은 퇴폐한 반동으로 몰려 파괴되고 부관참시되었다. 유교 사상은 비록 철저히 부숴졌지만 신분제도와 계급체계를 여전히 정당화하고, 여성과 피지배층을 학대하는 등 인간의 평등을 억압하는 악질 제도라고 비판받아 유교와 관련된 사상가들, 학자들의 묘소와 석물, 저서등은 모두 파괴, 소각되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분노와 파괴는 문화 대혁명 이후의 권위 해체 분위기로 이어졌다.
문혁이 공식 종식되면서 찾아든 덩샤오핑에 의한 사상해방운동은 한동안 개성의 해방, 인성과 인권의 존중, 인간의 심리성과 잠재 능력의 발휘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예술의 비예술적 요소의 침입을 막고 예술로 하여금 예술로 환원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문혁 기간 탄압받던 우파 지식인들이 복권되고 극좌 사상에 대한 사회적 반성 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의 보급
문화 대혁명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도시에서 오지에 이르기까지 보급되기 시작한 미디어인 라디오가 큰 역할을 하였다. 전화기의 보급 증가 역시 연락망의 확충에 기여하였다. 문화 대혁명의 초기 준비단계에서, 중국 정부는 모든 학교, 군부대, 그리고 공공조직에 라디오를 청취한 후 이를 다시 대중에게 전달할 선전자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은 이런 선전활동을 위한 기구였으며, 선전자들은 방송을 듣고 이것을 다시 대중들에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선전자의 수는 1960년대에 4억의 농촌 인구 중에 7천만에 달했다.
직접적인 계기: 해서파관과 조반유리
1959년 말, 역사가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吳晗)이 역사 희곡 《해서파관()》(해서가 파면되다)을 발표하였다. 이 극은 명나라때의 실존 청백리인 해서(1515-1587)가 암군 가정제에게 파면된다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처음에 이 극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965년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그녀의 피후견인인 야오원위안(당시 상하이의 신문인 《문회보()》의 편집장이었으며, 그때까지 무명인사였다)은 이 희곡을 비판한 논평을 썼다. 그들은 이 희곡이 독초이며, 마오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고, 황제는 마오, 해서는 펑더화이를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평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많은 신문들은 이것이 언론탄압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여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한편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은 우한을 지지하여 이 비판이 지나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문화혁명오인소조(文化革命 5人小組)"를 구성하였고, 이 소조는 《현재 학술적 문제에 관한 제강()》 또는 《2월제강()》을 발표하여 "해서파관"에 관한 논란을 정치문제가 아닌 순수한 학술문제로 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칭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문예계가 "일부 반당, 반공산주의의 불순세력의 음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국방부장이었던 린뱌오가 합세하고 세를 불리기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다시 한번 우한과 펑전을 비판하는 논평을 발표하였다. 5월 16일, 마오의 주재 하에서 당 정치국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혹은 《5.16통지(五一六通知)》를 발표하였다. 이 통지에서 펑전은 날카롭게 비판되었고, 5인소조는 해체되었다.
이 통지는 펑전과 5인소조가 "표리부동한 자세로 마오쩌둥 동지의 우한에 관한 교시와 마오 주석이 이룩한 위대한 문화혁명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년 후, 1967년 5월 18일 "인민일보"는 이 고시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하에 작성된 위대한 역사적 문서"라고 칭송하였다.
1966년의 이후 정치국 회의에서 새로운 "문혁 소조"()가 구성되었다. 5월 18일 문혁 소조의 린뱌오는 한 연설에서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정치인의 만 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며 마오에 대한 숭배를 학생들이 나서도록 지시했다. 이때 장칭과 린뱌오는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5월 25일 베이징 대학의 경제학과, 철학과 교수이자 철학과 여성 당서기를 맡던 녜위안쯔는 대학 당국과 다른 교수들이 우파, 또는 반당(反黨)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대학생들이 기존의 체제 내 탄압을 받으며 어렵게 연구해 온 온건파 학자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데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며칠 후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적으로 회람해 반영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것을 "이번 문화 대혁명의 첫 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이다"라고 추어올렸다. 5월 29일, 칭화 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마오는 첫 번째 중학생 홍위병을 결성시켰으며 이들은 칭화 대학을 무더기로 찾아가 교문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마오가 그 적과 지식분자를 응징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치밀하게 결성된 것이었다.
1966년 6월 1일, 공식적인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자본주의자들과 그의 앞잡이, 그리고 자본주의적 지식인들"을 반드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대학 총장과 다른 온건파 지식인을 겨냥한 대대적인 마오쩌둥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6년 7월 27일, 홍위병의 대표단이 마오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사회와 정치와 문화를 뒤집어 엎고 대량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마오는 이에 대해 전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하였다.
8월 8일 인민일보에 마오의 짧은 논평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가 실렸다. 여기에서 마오는 반혁명, 우파(실질적으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투쟁을 전인민에게 부르짖었다. 이로써 문화 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개 과정
개시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 약칭 《16개 항》을 발표하였다. 이 문건은 문화 대혁명을 인민들의 혼까지 와닿는 혁명이고,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사에 새로운 장을 연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결정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학생운동을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들이 집단이 참여하는 전국규모의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상부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 대자보와 논쟁을 사용했다. 문화 대혁명의 주목표중의 하나는 "4개의 낡은 것()"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말한다.
이 결정문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인민에게 최대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이 "표현의 자유"는 마오쩌둥 사상에 의해 범위와 성질이 규정된 것이었다. 또한 언론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15항, 16항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마오의 의중에 따라 진정한 의미가 결정되었다. 제16항이 규정한 자유는 후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대민주(大民主)의 4대자유(四大自由)로 규정되었다. 자유롭게 말할 권리(), 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권리 또는 다른 사람과 단결할 수 있는 권리(大放, 또는 ), 대자보를 쓸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논쟁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렇게 규정된 자유들에 의거해 홍위병은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마오쩌둥 주의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비판을 하였고, 때로는 부패혐의로 고발하여 감옥에 보내거나 실각시켰다. 후에 이 자유들에 쟁의권이 추가되어 다시 보완되었다. 그러나 이 쟁의권은 1967년 2월, 민간 대중 정치에 대한 군대의 개입으로 심하게 약화되었다. 이 권리들은 1978년 서단민주장(西單民主墻) 사건이후, 덩샤오핑 집권시인 1979년 헌법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1966년 8월 이후
1966년 8월 16일, 전국으로부터 수백만명의 홍위병이 마오 주석을 회견하기 위해 베이징에 모였다.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톈안먼 광장의 단상에서 전국에서 상경한 약 1100만의 홍위병들에게 자주 모습을 드러내어, 매번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마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한 최근의 운동(즉 문화 대혁명)에서 보여준 홍위병의 행동을 칭찬했다.
"4구" 파괴 운동에서, 홍위병은 모든 종교활동에 핍박을 가했다. 절, 서원, 교회, 수도원 등은 문을 닫았고, 더 나아가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홍위병은 4구라고 간주된 모든 것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핍박 끝에 심문과 고문도 일어났고, 구타와 폭행을 견디지 못한 많은 이들이 자살을 마지막으로 선택하였다.
8월과 9월에 베이징에서만 홍위병에 의해 1,772명이 살해되었다. 상하이에서는 문화 대혁명에 관련되어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되었다. 우한에서도 62명이 자살하고 32명이 살해당했다. 관계 당국은 이런 홍위병의 폭력을 막는 것을 제지당하거나 방관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1968년까지 약 2년 동안(어떤 곳에선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하였다), 홍위병과 같은 학생운동세력은 사회적 발언권과 권한을 늘렸고,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편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을 가속화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발전과 강화를 위한 자산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전단을 뿌렸고, "반혁명"혐의자라고 지목된 이들의 명단을 대자보에 공개했다. 그들은 집단을 이뤄 집회를 열고 교훈적인 연극을 상연했다. 또한 그들은 집회에서 자아비판을 행하고 "반혁명"혐의자 들을 비판했다.
마오를 비롯한 문화 대혁명의 수뇌부들과 "16개 항"은 물리적 수단()보다는 언어적 수단()의 투쟁을 권고했으나, 이런 활동은 결국 폭력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그리고 활동가들 사이의 논쟁이 더욱 폭력적이 되어 급기야는 1967년 군부대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문화 대혁명의 수뇌부들은 활동가들의 언어 투쟁이 폭력사태로 비화하는 것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가끔은 "무투"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기고 탈취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러한 대중 운동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한편 류샤오치는 카이펑으로 유배되었다가, 지병이 악화되었지만 의사가 치료를 거부하여 1969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덩샤오핑은 소위 "재교육"과정을 세번 거쳐 결국 엔진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이후 저우언라이에 의해 구제될 때까지 몇 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혁명분자" 및 "우파"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홍위병의 행동을 칭송하였다. 1966년 8월 22일 마오는 공안이 홍위병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홍위병의 행동을 제지하는 공안은 "반혁명세력"의 딱지가 붙어서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9월 5일, 마오는 모든 홍위병이 베이징을 순례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숙박비와 교통비는 정부가 부담한다는 것을 곁들였다. 10월 10일, 문혁의 수뇌부중의 한명인 린뱌오는 류와 덩을 공개적으로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로 비난하였다. 또한 펑더화이도 베이징에서 홍위병에 의해 자택에서 끌려나와 조리돌림되었다.
일월의 폭풍과 정리 작업
1967년 1월 3일, 린뱌오와 장칭은 미디어를 동원하여 지방의 문혁지도원들에게 소위 "일월의 폭풍(一月風暴)"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 이 운동에서 상하이의 수많은 고위 행정직들이 심하게 비판받았고 숙청되었다. 이것은 문혁파였던 왕훙원이 지역혁명위원회 지도자로서 상하이의 행정과 시당(市黨)을 장악하는 데 길을 열어주었다. 이곳의 지역정부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것을 "조반"이라고 했으며, 이들을 본 따 각 관공서에서 하위직들이 상급자들을 몰아내는 조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는 류와 덩이 다시한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당의 비판활동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던 캉셩이나 천보다 등은 이를 기회로 삼아 부총리였던 타오주가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중앙정부 내부와 지방당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문혁을 자신의 반대자나 정적을 "반혁명분자"로 고발하여 실각시키거나 숙청시키는 기회로 삼는 권력투쟁의 시작이었다.
1월 8일, 마오는 "인민일보"를 통한 이러한 활동을 크게 칭찬하였고, 모든 지방 정부 지도자들이 자아비판과 함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숙청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지방정부 내에서 숙청에 숙청이 꼬리를 문 대규모의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것이 심화되자 지방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혁명활동"(즉 문화 대혁명)에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것도 꼭 확실한 보장은 아니었다.
사회 전 부문으로의 자기비판 확산
1967년 2월, 장칭과 린뱌오는 마오의 승인하에서 "계급투쟁"을 군사부문까지 확대했다. 동시에 자기비판 및 퇴폐, 향락문화에 대한 정리 작업이 공공부문으로도 확산되었다. 중공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한 인민해방군의 많은 유력 지휘관들이 "군사부문의 문화 혁명"을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전(前) 외교부장이자 군에서 원수인 천이는 정치국 회의에서 문혁파가 군사부문을 황폐화시키고 다음에는 당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다른 원수였던 네룽전, 쉬샹첸도 이런 운동에 큰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던 문혁파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의 반격을 받아 차례로 "2월역류"(二月逆流)의 낙인이 찍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결국 홍위병의 비판을 받아 강제 예편과 동시에 당정군의 요직에서 실각하였다.
동시에 많은 홍위병 조직들도 분화하여 자신과 다른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는 다른 조직들을 서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들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혼동을 가중시켰다. 이에 대해 장칭은 홍위병 내의 모든 불건전한 활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6일, 류샤오치는 장칭과 캉셩 일파로부터 공개적이고 광범위하게 비판받았고 여기에 궁극적으로 마오가 가세하여 비판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공개 비판 집회들이 열렸고, 장은 이에 참석하여 모든 "반혁명활동"을 규탄하였다.
장칭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군사부분까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러한 집회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열렸던 우한으로 달려가서 우한의 방위를 맡고 있던 천자이다오 장군을 비판하였다. 7월 22일에 장칭은 홍위병이 필요하다면 인민해방군을 대체하고 현존하는 군을 무력화 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장칭의 선동으로 홍위병은 군대에 난입하여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은 반혁명분자로 몰릴 것을 두려워 한 군의 지휘관들이 통제할 수 없어서 1968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청년 하방(下放) 운동
동시에 도시의 지식인 청년들 사이에서 실천주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마오쩌둥의 혁명사상을 농촌에도 보급하자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자신의 청춘과 피와 생명을 이 '성전'에 내걸었다. 1967년 10월, 베이징의 일단의 홍위병 그룹이 네이멍구로 갔다. 이것이 하방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때 문혁을 믿어 의심치 않은 순진한 그들은 '사회주의 농촌의 건설'과 '자신을 참된 공산주의자로 개조한다'는 꿈을 그렸다. 하방은 한 세대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홍위병 운동보다도 더욱 심각한 사회 운동이었다. 홍위병 운동은 청년들에게 '철저한 해방'이라는 큰 무대를 제공하고, 거기서 자유분방하게 청춘을 발산케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혈투쟁도 등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년들은 하방운동에서 급속히 하나의 운명 공동체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운명 공동체 속에서 한때 서로 다투던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투쟁 상대인 다른 청년그룹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홍위병 운동에서 철저하게 해방을 맛본 청년들은 하방을 통해 집단 인격과 공동 문화를 구축해갔고, 자신들만의 '성인 의식'을 완성시켰다.
지식 청년들은 혁명의 실천에 참가한다는 정치적 사명을 갖고 농촌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하방에 적극적이어서 변방의 가장 궁핍한 촌락을 고르곤 했다. 지식 청년들은 낮에는 밭에 나가 일했고, 저녁이면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농민 발전에 대해 연구했다. 이들은 농촌 계몽에도 앞장서서, 야학당을 개설하고 문맹자들에게 무료로 한자와 숫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외지인 지식청년에 대한 농촌지역의 배척과 경계는 식자 청년들에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고, 반동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획책하는 음모로 이해되었다.
제3세대라 불리는 지식 청년들은 자신들의 하방 경험을 혁명 제1세대의 전쟁 체험과 같은 것으로 보곤 한다. '혁명 빈농이 주인공인 농촌 사회'는 학교에서 배우던 사회주의의 '장밋빛 사회'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말하던 '좋은 아이'의 기준은 어려운 생존 환경 속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옳다고 배워왔던 것이 현실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인맥과 연줄로 만사가 정해지는 농촌의 풍경과 적당히 은폐하려는 농촌 문화에 지식청년들은 좌절했다. 동시에 지식청년들은 학교 교육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철저한 적자생존의 법칙은 청년들의 가치관을 철저히 깨뜨렸다. 현실의 농촌 생활은 장밋빛과는 전혀 다른 혹독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이 현실 사회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었음을, 척박한 들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후일 문혁이 실패로 인정되었으나 당시 홍위병, 하방 등에 참여한 청년들은 대부분 당시 교육자들에 대한 단죄, 숙정작업에 한해서는 후회나 반성을 거부하였다.
1968년
1968년 봄, 이미 숭배의 대상이 된 마오쩌둥을 신격화시키려는 대규모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마오는 이런 시도를 자신의 "최고지침"으로 지지하였다. 1년 후 홍위병은 완전히 몇 개 파로 분열되었고, 갈등은 더 커졌다.
마오는 홍위병이 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혼란이 공산당의 지지기반에 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마오의 입장에서는 홍위병이라는 존재로써 권력회복이라는 목표를 대체로 달성하였기 때문에 더이상의 혼란은 원치 않았다. 이제 광범위한 파괴와 혼란을 부른 홍위병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7월 27일에는 인민해방군에 대한 홍위병의 우위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군대가 나서 홍위병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정부는 병력을 파견하여 홍위병의 목표가 될만한 곳들을 경비하였다.
10월 초반, 마오는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고위 공직자를 겨냥한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재교육의 명목으로 농촌으로 보내져서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다. 같은달 제8차 중앙위원회의 제12차 전체회의에서는 류샤오치를 당에서 영구제명하기로 결정하였고, 린뱌오가 당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린을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오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린은 마오에 이어 권력 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
마오는 하방운동의 자발적이고 전국적 전개과정을 주목하였다. 1968년 12월 마오는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다시 배우자"고 주장하면서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개시하였다.약 10년간 계속된 이 운동에서 도시에 살고 있던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그곳에서 육체노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최근에 중학교(대한민국 학제로는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외지의 이질적인 문화로 고통받으면서도 지식청년층들은 마오의 혁명사상 전파와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0년 후반에, 이런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 운동은 홍위병들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보내 사회적 분란을 감소시키려는 의미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정계의 변화
린뱌오의 득세와 몰락
마오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린뱌오는 1968년 이래 중국 지도부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몇차례 마오의 암살기도가 벌어진 후 1971년 9월 린뱌오가 탄 비행기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과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 1968년과 1971년 사이에 린뱌오와 관련된 사건들을 정확하고 타당성있게 검증하는 것은 현재에도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린의 득세와 몰락 그리고 죽음은 아직까지 역사가들의 주된 이슈이고, 아직도 확실히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당내 권력 이동
1969년 4월 1일, 중국공산당의 9차 중앙위원회에서 린은 가장 큰 승리자였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제2인자가 되었다. 또한 국방부장을 오래 지낸 그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도 다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린의 가장 큰 잠재적 경쟁자이었던 류샤오치는 이미 숙청되었고, 저우언라이는 이미 고령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제9차 중앙위원회는 린뱌오가 제출한 정치보고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보고는 류샤오치 및 다른 "반혁명세력"에 대한 규탄과, 지속적으로 마오 어록을 인용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어젠다는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에 맞춰 당을 새롭게 건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안에서 마오의 이름은 린뱌오와 연결되어 언급되었다. 즉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의 식의 호칭이다.
세 번째로 새롭게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은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셩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정치국은 문화 대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사들로 대부분 채워졌다. 저우언라이는 정치국에 남았지만, 서열은 5명중 4위로서 위상이 축소되어 있었다.
린뱌오의 권력 기반 확장 시도
당시는 린의 최전성기였으며,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마오에 이어 2인자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린은 좀 더 확실한 안전판을 두고 싶어했다. 즉, 마오의 후계자로 확정된 이후, 린은 류샤오치의 실각으로 폐지된 국가주석 직을 복원하려고 노력하였다. 린은 마오를 주석에 두고 자신은 부주석 자리를 가지려고 한 것이다.
1970년 8월 23일, 중국공산당의 제9차 중앙위원회의 제2차 전체회의는 1959년에 뒤이어 다시 루산에서 열렸다. 천보다가 첫 번째 연설자로 나서 간접적으로 스스로를 높이려는 의도로 마오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발언을 하였다. 동시에 천은 국가주석제를 복원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의 제안을 크게 비판했고,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하였다.
천의 상무위원직 해임은 린뱌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제9차 중앙위원회가 끝난 후에도, 린은 계속적으로 당직과 정무직에서 승진을 요구하였다. 마오는 린의 의도가 최고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을 축출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오는 천보다가 제의한 국가주석직 신설도 의심의 눈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즉, 주석인 마오의 사후에 부주석인 린이 자동적으로 승계를 하겠다는 의도로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마오의 안전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린뱌오의 쿠데타 기도
린뱌오의 당과 정부안에서의 권력확장 시도에 대한 마오의 의심과 거부는 린을 심리적으로 좌절시켰다. 더욱이 린의 권력기반은 당기관에서 이 날로부터 축소되기 시작하였고, 그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다. 린은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한다.
린의 지지자들은 마오를 축출하기 위해 아직 린뱌오의 손에 남아있는 군권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린의 아들이자 공군의 고위 지휘관이었던 린리궈와 다른 고위 음모자들은 상하이에서 마오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이를 "571 공정"()이라고 이름붙였는데 571의 중국어 발음 "우치이"는 무장 봉기를 뜻하는 중국어 단어인 "우치이"()와 발음이 같다. 이 음모에 린뱌오가 얼마나 간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수정주의 해석자들은 이 계획은 린뱌오 보다는 린의 아들이 대부분 꾸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음모는 대체로 공군을 동원한 폭격과 병력동원으로 이뤄어졌다. 이 계획이 성공했을 때, 린뱌오는 모든 정적을 체포하고, 최고 지도자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마오를 암살하기 위한 기도가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있었다. 이러한 음모는 실행되기 이전에 지역 공안당국이 눈치채고 있었다. 공안 당국은 린뱌오측이 거사를 위한 요원들을 군부대에서 훈련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오는 이때 남부중국을 방문중이었는데, 마오가 습격당했다는 여러 설과 보도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마오가 전용 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오던 중 위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마오가 탄 열차가 다리를 지날때 폭파하려고 했으나, 정보기관이 미리 감지하여 마오가 일정을 바꾸어 무사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수많은 병력이 마오를 경호하기 위해 10-20m 간격으로 배치되어 철로를 지켰다. 또한 이 병력중에도 암살자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아래, 모든 병력의 시선은 바깥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이런 설들은 서로 모순되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1971년 9월 11일 이후 린뱌오과 린의 부하들은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수가 홍콩으로 도피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약 20명의 육군 장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1971년 9월 13일에는 린뱌오와 그의 부인 예췬, 그리고 그의 아들 린리궈와 몇 명의 보좌관들이 비행기로 소련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몽골에서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같은 날 정치국은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린뱌오의 혐의에 관한 여러 건을 토의했다. 9월 30일에 린뱌오의 사망이 베이징에서 확인되면서 당초 10월 1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 행사도 취소되었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가랑 유력한 설은 연료가 부족했거나 혹은 갑작스러운 엔진고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소련측이 이 비행기에 탄 탑승자의 유해를 수거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린의 쿠데타 기도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잃는 파멸적인 운명을 맞았다.
사인방의 대두와 몰락
저우와 덩에 대한 사인방의 적의
자신의 가장 친밀한 수하였다고 생각했던 린뱌오의 배신과 몰락 때문에 마오는 후계문제와 당의 앞날에 관해 깊이 근심하게 되었다. 적당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1972년 9월 상하이의 젊은 당간부였던 왕훙원이 베이징의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승진하여 다음해에 공산당의 부주석에 올랐고, 마오의 잠재적 후계자로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해에 저우언라이의 건의로, 이전에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부총리에 올라, 정부의 일일 업무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린뱌오의 죽음과 마오의 건강 악화 때문에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들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장칭은 문화 대혁명의 초반에 방향을 이끌었던 주역이었지만, 린뱌오의 사후 장칭이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그녀는 정치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그리고 정치적으로 친밀했던 왕훙원과 연합하였다. 이 4명은 후에 "사인방()" (4사람의 불량배)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미디어와 선전망을 장악하였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집행하는 경제정책에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1973년 말, 사인방은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함)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겉으로 내건 목표로는 중국 문화에서 유교적 영향을 제거하고, 린뱌오의 반역행위를 비판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저우언라이를 겨눈 운동이었다.
사인방은 저우를 《포스트-마오》 이후 후계구도에서 가장 큰 잠재적 위협으로 보았다. 이 운동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사인방은 역사적 인물인 주나라의 주공(周公)을 자주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저우(周)씨였던 저우언라이를 은유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대중은 대체로 쓸데없고 파괴적인 정치적 운동에 식상하게 되었고, 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저우언라이를 실각시키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사인방은 미디어를 장악했지만, 덩샤오핑이 경제 정책의 집행을 통해 실세로 떠오르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덩은 당의 분파운동에 대해 명백히 반대했으며, 그는 당의 단합이 효과적인 생산활동의 전제 조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덩의 정책이 "우파의 복권운동"이라고 칭했다.
문화 대혁명 전체의 명성이 덩의 정책때문에 금이 갈 위기에 처하자, 마오는 1975년 12월 덩에게 자아비판서를 쓰도록 하였다. 이것은 사인방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마오의 사망, 사인방의 체포 및 문화 대혁명의 종말
1월 8일, 저우언라이는 방광암으로 사망하였다. 다음날 베이징의 인민영웅비 앞에서는 이를 추모하는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1월 15일, 저우의 장례식이 열렸고, 저우에 대한 폭넓은 인민들의 존경심때문에 추모열기는 전국을 휩쓸었다.
사인방은 이것이 정치적인 파고로 변모하지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미디어를 통해 추모열기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검은 옷이나 하얀 조화 및 다른 조문행위에 대해 제한을 가했다. 그 자신도 심하게 와병 중이었던 마오를 제외한 모든 중국의 고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덩샤오핑은 공식적으로 저우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2월, 사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인 부총리 덩샤오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저우의 죽음 이후 마오는 사인방중에서 총리를 선발하지 않고,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4월 5일은 중국의 전통 명절인 청명절이었고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추모를 행하는 날이었다. 군중들은 3월 말부터 톈안먼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은 전횡을 일삼는 사인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군중이 여기에 가담하였고, 사인방을 규탄하는 포스터나 격문이 발표되었다. 4월 5일, 수십만의 인파가 텐안먼 광장에 집결하였고, 이 군중은 비폭력 항의 시위로 변하였다. 사인방은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공안이 이를 해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텐안먼의 시위대는 덩샤오핑의 지도 하에서 "소수의 우파 반혁명 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국적인 미디어를 통해 이를 규탄하였다. 4월 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개인적으로 덩을 공격했고, 덩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가택연금되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은 사망하였다. 문화 대혁명 동안 형성된 마오의 이미지는 대중과 항상 함께한 이상적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마오의 죽음은 중국 사회주의의 상실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의 통지문으로 9월 9일 오후 그의 죽음이 발표되었을때,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겼고 추모열기에 쉽쌓였다. 거리에서는 통곡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쪽지를 넘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화궈펑을 당의 새로운 주석으로 등극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는, 화는 정치적 기술이나 야망이 부족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져 있어서, 사인방이 마오를 계승하는데 별로 위협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젠잉과 같은 유력한 군지도자와 비록 몰락했지만 당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덩샤오핑,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지지아래서 화궈펑은 사인방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10월 10일, 8341 특수연대는 사인방 전원을 체포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이것을 문화 대혁명 시대의 종말로 간주한다.
이후 상황 전개와 덩샤오핑의 집권
화궈펑은 공식적으로 사인방을 비판하고, 그들을 체포하였지만, 그도 마오의 이름을 빌어 마오 시대의 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는 "양개범시"(兩個凡是)(마오쩌둥이 '결정한 것'과 '지시한 것' 두 가지는 무엇이든 옳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마오 주석이 행한 정책은 모두 옳고, 이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화궈펑의 목표도 문혁으로 야기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실용적이었던 덩과는 달리 화는 1950년대 소련의 계획경제를 모델로 한 정치경제 구조를 선호하였다.
화궈펑의 정무에는 재야에 있던 덩샤오핑의 도움이 필수적임은 명백해졌다. 비록 사인방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었지만, 덩샤오핑은 당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10월 10일, 덩샤오핑은 개인적으로 화궈펑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복권, 복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예젠잉은 덩이 정무원에 복직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화궈펑을 닦달했다는 설이 있다. 증가하는 압력하에서 1977년 7월 화궈펑은 덩을 다시 정무원으로 복직시켜 부총리에 임명하였고, 당직도 복원시켜주었다.
이것으로 덩은 화궈펑에 뒤이은 제2의 실력자가 되었다. 8월 제11차 중앙위원회가 베이징에서 열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녠, 왕동싱이 이 서열순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5월, 덩은 자신의 피후견인인 후야오방을 더 승진시킬 기회를 잡았다. 후는 "광명일보()"에 기고하면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인용하여 덩의 이론을 치켜세웠다. 이 기고문이 발표된 후, 후와 덩의 지지는 확산되었다. 7월 1일, 덩은 대약진운동에 관한 마오의 자아비판서를 공개하였다. 덩은 지지기반을 넓혀가다가 1978년 9월부터 공개적으로 화궈펑의 "양개범시" 정책을 비판하였다.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3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덩은 "사상의 해방"이 바람직하며, 당과 국가는 "실사구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화궈펑은 자아비판을 하고, "양개범시"는 자신의 과오였다고 말했다. 예전에 마오의 추종자였던 왕둥싱도 비판받았다. 이 총회에서 청명절에 열렸던 텐안먼 사건도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또한 유배중 사망한 류샤오치의 뒤늦은 국장도 치러졌다.
1980년에 열린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5차 전체회의에서는 문혁기간에 숙청된 펑전, 허룽 및 다른 고위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행해졌다. 후야오방은 당총서기가 되었고, 또다른 덩의 피후견자인 자오쯔양도 중앙위원회에 들어왔다. 이 해 9월 화궈펑은 사임하고, 총리직은 자오쯔양이 계승하였다. 덩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로써 실용적인 개혁파 지도자로의 권력이동은 완성되었다.
영향
문화 대혁명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중국인민들 대부분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경제 활동이 "계속 혁명" 활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앞에 정지되었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몰려왔다. 그런데 이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했고, 홍위병의 우선적 수송은 철도망을 마비시켰다. 홍위병은 여러 역사적 건물, 공예품, 미술품, 서적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한편 마오쩌둥 어록은 전인민의 성서로 우상화되어 누구나 휴대하여야만 했으며 1967년 12월까지 3억 5천만부가 인쇄되었다.
인도 주의적 위기
사망자 수, 학살 및 식인 풍습
문화대혁명의 추정 사망자 수는 수십만에서 2 천만에 달한다. 학살은 중국 본토 전역에서 일어났다.
붉은 8 월 (북경 대학살): 1980년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6년 8월부터 9월까지 총 1,772 명 (많은 학교의 교사와 교장 포함)이 베이징에서 홍위병에 의해 사망했다.
광시 대학살: 100,000-150,000 명이 사망했다 (공식 수치). 광시 성의 어떤 지역에서는 이런 폭력이 극단적으로 변하여 "계급투쟁"과 "정치혁명"의 이름으로 식인행위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당의 고위 역사가들조차도 문혁 기간동안 어떤 곳에서는 "반혁명세력"을 학살 후 소화기관과 살점을 익혀먹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내몽골 사건: 20,000-100,000 명이 살해당했다. 수십만 명이 체포되고 박해를 받았으며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오 젠민(赵健民)스파이 사건: 17,000 명이 학살로 사망했고 61,000 명이 평생 불구가 되었다. 130만 8천 7백 명의 사람들이 연루되고 박해를 받았다. 이 사건은 윈난성에서 일어났다.
핍박과 가혹 행위
문혁 기간동안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자본주의의 "첩자", "주구(走狗)", "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감금, 강간, 심문, 고문 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혹사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어떤 사람은 구타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은 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신체장애인이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였다.
주요 희생자
라오서 : 작가, 전 중국 마르크스주의 소설가, 사인방의 핍박을 받고 자살.
슝스리 : 유학자, 전 중화민국 저장 대학 출강 강사, 핍박을 받고 절식하여 자살.
리리싼 : 중국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1920년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음독 자살.
톈한 :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 사인방이 가사를 문화대혁명의 극좌 이상에 맞게 고쳐서 새로운 국가를 발표해서 부르게 하면서 핍박을 받고 병사.
허룽 : 전 중공 인민해방군 군인, 원수. 홍위병에 의한 구타 및 폭행 중 병사.
주덕해 : 조선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州長). 문혁 기간 중 박해 당하며 병사.
바진 : 중국의 전 아나키스트이자, 마르크스주의 작가, 문화대혁명의 기간 동안 매국노이자 반혁명세력으로 매도를 당하면서 마오쩌둥의 문화적 공작 부대 홍위병들에게 둘러싸여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깨진 유리조각 위에 무릎을 꿇게 하는 가혹 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문혁의 10년 동안 지속적인 감시 하에 자아 비판을 강요당하였으며, 그의 아내는 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의료 서비스를 거부당하게 됨으로써 사망한다. 그는 마오의 사망과 사인방의 몰락 이후에야 복권하게 된다.
이 외에도 각계에서 많은 명사가 홍위병의 학대와 핍박에 의해 사망하거나, 그로 인한 병사, 혹은 이를 견디다 못한 자살을 하였다. 또한 자신의 가족에 의해 고소, 고발되어 처형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자신의 치부가 가족과 지인에 의해 드러나는 일이 계속되면서 가족, 지인 간의 신뢰도는 추락하고 문화, 사회 면에서 타인을 불신하게 되는 가치관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권위 해체와 민주화 요구
홍위병에 참여했거나 간접 체험했던 청년들과 하방 청년들은 부모 세대와 교사들의 타락과 부패, 비리행위를 캐냈다는 자부심이 있어 기존 권위주의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반성을 거부하는 기성세대와 심리적으로 대립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문혁이 종결되고 4.5 천안문 사건은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 직후에 베이징의 하방 청년들은 차례차례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조금도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중국 정치와 문화의 무대에 올랐다. 청년 정치 활동가들은 덩샤오핑의 경제 근대화에 대해 '정치의 근대화'를 제기했고,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덩샤오핑은 일단 마오쩌둥의 공과 과를 인정하면서 수용하려 하였지만, 탈권위주의적인 행보에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문학 청년들에 의해 '지하 문학'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창작 활동의 열기가 넘쳐났다. 이러한 작품들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조롱의 성격도 강하게 나타났다.
문화 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
문혁 기간 동안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공예품들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산출하기 어렵다. 서양의 목격자들은 중국 역사의 수천년의 문화유산들이 단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파괴되었다고 추산한다. 또한 이런 파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가들은 문화 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탄압도 이 기간동안 심화되었다. 종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으로, 티베트 숨첼링 사원에서는 홍위병들이 몰려와 사찰에 불을 지르고 라마불교 승려들을 쫓아내는 폭력이 일어났다.
문혁 기간 동안 중국의 전통 문화의 지위도 크게 손상되었다. 많은 전통 문화, 예를 들어 점술, 종이 공예, 풍수지리, 중국 전통의례, 음력, 중국고전학(한문), 그리고 음력 원단(1월 1일) 등의 위상이 중국에서 약화되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홍콩이나 타이완, 심지어는 한국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후에 대륙에서 복원되기도 하였다.
교육의 해체와 변화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 대혁명 기간동안 교육이 마비되었다. 이 당시에 대입시험은 취소되었으며, 대학은 문을 닫았고, 교수들은 농촌이나 공장같이 생산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하방(下放)에 처해졌다.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퇴폐 교육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교사들, 대학 교수들이 재판과 정죄의 대상이 되거나 파면, 혹은 사퇴 압력을 받고 물러나기도 했다. 대학 교육은 사인방이 몰락하고도 한참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가야만 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로 중국을 떠나 망명하였다. 문혁기간동안 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곳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포기한채 공산당의 선전교육만을 받는 일도 있었다. 불필요하고 이론적인 지식을 가르쳐서 청년층의 취직을 방해하고, 인민의 고혈을 쥐어짠다는 이유로 많은 교사들과 대학 교수들이 단죄되기도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진학이나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은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육 수준에 머물렀다.
초창기에는 학부모에게 각종 선물이나 뇌물, 촌지를 받는 교사, 대학 교수들을 색출하여 조리돌림하고 처벌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생 홍위병들과 청년들이 반감을 품은 교사, 대학 교수에 대한 사사로운 원한 보복 등의 악순환도 더러 등장하였다. 많은 생존자들이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있는 사람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덩샤오핑 지지자나 서방측 목격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부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대를 산출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타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맹율은 측정되지 않았다. 전장 구의 몇 개 현에서는 문혁이후 20년이 지난 이후에도 문맹율이 41%나 되었다.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어떠한 문맹문제도 부인해왔다. 이 결과는 자격있는 교사들이 문혁기간동안 제거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많은 지구에서는 교사가 없어서 선발된 몇몇 학생들이 다음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책임졌다.
전통 도덕 및 인습의 해체
문혁의 가장 중요한 주체 집단은 좌절을 경험한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마오쩌둥의 사상은 전통 도덕과 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들을 이끄는 중심논리가 되었다. 홍위병의 권한은 군, 공안부, 그리고 사법 기관을 넘어섰다. 좌절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이러한 전통을 인습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성공과 지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하여, 마오의 사상에 적극 동의하지 않더라도 적극 호응하게 되었다. 중국의 전통 예술과 사상은 무시되었고, 그 자리에 마오쩌둥 사상이 차지하게 되었다.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부모와 교사의 부정 부패 및 비리행위를 자녀, 청소년이 고발하는 일도 흔했다. 동시에 쉬쉬해오고 은폐되던 의문의 살인사건, 각종 뇌물 수수 사건, 구타 폭력, 도박, 음란 행위 등이 당의 지원을 받던 홍위병들의 추적과 뒷조사에 의해 드러나면서 이들의 행동은 정당화되었다. 부모와 교사, 기성세대의 타락한 행동은 이들에게 더욱 명분을 주었다. 문혁 지도부는 사람들이 문화적 전통들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것은 "비림비공" 운동 때 더욱 강조되었다.
당파적 전쟁
문혁은 또한 공산당 내에서 여러 당파의 내부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중 많은 것들은 당지도자의 권력투쟁과는 상관없이 지역 당파주의와 사소한 경쟁심이 "혁명"에 관계없이 빚어낸 것이다. 정치적 혼란 때문에, 지방 정부는 존재하더라도 집행력과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당파에 속한 이들은 백주의 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정치적 암살이 흔히 일어났다.
대중은 자발적으로 이러한 당파에 가담했고, 다른 당파에 대한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런 당파 투쟁을 야기한 사상적 차이는 사실 모호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지역적 권한을 장악하는 것이 대중이 참여한 당파투쟁의 유일한 동기였다.
소수민족 탄압 핍박
문혁은 특히 소수민족의 전통 문화에 파괴적이었다.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인 홍위병도 참여하여 6,000개의 사찰이 파괴되었다. 내몽골에서는 수 십년전 해체된 "내몽골 인민당"의 분리주의자로 지목된 79만명의 인물이 박해받았다. 그중 22,900명은 학살로 사망하고, 12,000명은 장애인이 되었다.
이슬람이 전통종교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꾸란이 불살라지고, 무슬림 이맘이 물감을 뒤집어 쓴 채 조리돌림되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로 수업하는 민족학교들이 파괴되었고 족보는 홍위병의 강요도 있었지만, 반혁명 세력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자발적으로 불살라졌으며, 민족 문화를 보호한다고 지목된 인사들은 핍박 및 학대를 당했다. 윈난성에서는 다이족의 왕의 궁전이 불살라졌다. 또한 1975년 샤덴 사건에서는 인민해방군이 회족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는데 희생자 수는 1,600명에 이른다고 한다.
평가
문혁에 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 평가
중국에서는 모든 역사 사건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 역사해석의 기준이 된다. 그리하여 문화 대혁명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는 현재 중국의 공식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인방의 몰락 이후 집권한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중의 하나는 어떻게 문혁을 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이 사건을 중국의 복잡한 역사지형에서 다룰 것인가였다.
1981년 6월 2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건국이래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를 발표하여 건국 이후 발생한 여러 사건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 문건은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고 밝혔다. 이 문건은 현재 중국 역사 해석의 주된 뼈대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계속 중국공산당에서 발표되는 문건에서는 문화대혁명은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건은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문혁의 지도자 마오"와 "혁명의 영웅 마오"를 분리했고, 마오의 개인적 과오를 마오의 사상과도 분리하였다. 그것은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절대적으로 기여했고, 마오의 사상이 곧 당의 지도 이념이기 때문이었다.
마오를 부정하는 것은 곧 공산당 자신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분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에서 스탈린 사후 일어났던 격하운동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에 있어 마오와 마오 사상의 존재는 부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건은 마오 사상에 근거한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공산주의 건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문혁의 총책임자인 마오를 옹호하기 위해 린뱌오나 사인방을 희생양 삼아 실제보다 많은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의 사상은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에 맞게 해석되어, 현재도 중국공산당의 이념인 "중국 특색의 공산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문혁에 관한 신좌파의 긍정적 시각
중국공산당 내에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중국 신좌파(新左派)가 생겨났다. 이들은 문혁 기간동안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것이 이후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후의 역사적 노정을 볼때 마오가 문혁기간동안 자본주의 지향적인 특권관료제의 폐해를 우려한 것은 옳았다고도 주장한다. 마오쩌둥은 이들과 싸우기 위해 문화 대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또한 문혁 기간동안에 보장되었던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개방 정책으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자 중국의 많은 빈농과 노동자는 문화 대혁명과 마오시대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가오모보와 같은 빈농 출신 작가는 문화 대혁명이 농촌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작품에 서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보 등의 어떤 작가들은 문혁이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술적 논쟁
학자와 학자들은 사건이 왜 그렇게 전개되었는지, 마오쩌둥의 역할, 문화대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출처를 탐색함에 따라 수십 년 동안 바뀌었다.
1960년대에 많은 학자들이 마오쩌둥의 구상을 이념적이고 파괴적이라고 일축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평등, 관료주의와 부패에 대한 반대, 개인의 이기심에 대한 그의 관심에 동조했다. 그들은 마오주의를 대중 참여, 대중 비판과 반란의 권리, 새로운 지배계급을 말살하려는 결단에 대한 포퓰리즘적 주장으로 보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하버드 대학의 사회학자 앤드류 왈더는 "현장의 여론이 현저하게 바뀌었다"고 썼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문화대혁명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의 대공포에 따른 인간의 재앙, 심지어 역사적 범죄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왈더는 문화대혁명의 실패가 빈약한 실행, 관료적 방해 공작, 불충성, 또는 오래 지속되는 계급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이 마오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나온다면, 이것은 아마도 마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왈더는 결론지었다. ... 결과는 마오주의 교리와 목표를 감안할 때 예상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많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지도자가 이끄는 이 운동은 주로 공산주의 기득권에 대한 일련의 풀뿌리 대중 봉기에 의해 주도되었다. 역사가 Anne F. Thurston은 그것이 "문화와 영적 가치의 상실, 희망과 이상, 시간, 진리, 삶의 상실로 이어졌다"고 썼다. Barnouin과 Yu는 문화대혁명을 "전례 없는 사회적 분열, 대중 동원, 히스테리, 격변, 자의적 잔학, 고문, 살인, 심지어 내전까지 낳은 정치 운동"으로 요약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주류적 묘사에 도전하고 그것을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가오모보는 이 운동이 수백만 명의 중국 시민, 특히 농업 및 산업 노동자에게 혜택을 주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오늘날 중국에서 계속되는 마오주의의 향수를 긍정적인 유산의 잔재로 언급하면서 중국을 평등주의적이고 진정한 포퓰리즘적이라고 본다. 일부는 의도와 수행을 구분한다. 마오쩌둥의 지도력은 운동 초기에 중추적이었지만, 진추는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마오의 유토피아적 비전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대혁명은 실제로 훨씬 더 분권화되고 다양한 운동으로 점차 응집력을 잃어 성격과 목표가 다른 많은 '지역 혁명'을 낳았다.
학문적 관심은 마오쩌둥의 성격과 운동의 관계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오는 자신을 전시 게릴라 지도자로 생각했고, 이로 인해 그는 평시 통치의 관료적 성격을 경계했다. 문화대혁명과 함께 마오는 단순히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고, 다시 한번 제도화된 당 관료집단에 맞서 싸우는 게릴라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다. 로더릭 맥파커와 미하엘 쇤할스는 이 운동을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둘러싼 진정한 전쟁 이나 마오의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고 묘사한다. 마오쩌둥의 개인적 동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문화대혁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들은 다른 복잡한 요인들이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에 기여했다고 추론했다. 여기에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과 중국의 관계, 지정학적 우려, 중국과 소련 간의 이념적 균열, 흐루쇼프의 축출, 대약진 운동의 실패가 포함된다. 그들은 그 운동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오쩌둥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위신을 높이고 사후 그의 사상의 불변성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역사에서 마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유산 프로젝트라고 결론지었다.
해외의 반응
문화 대혁명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당시 소속 정파에 따라 다양했다.
유럽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는 "낡은 것을 타파하자"고 외치는 문화 대혁명에 대한 호의적 시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68년의 68 혁명 기간 동안 학생들이 홍위병을 본따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시위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한 장폴 사르트르와 같은 지식인들도 스스로 마오주의자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문화 대혁명이 야기한 파괴와 혼란이 대부분 알려져서 호의적 평가보다는 부정적 평가가 우세하게 되었다.
일본
일본에서는 문화계가 나서 "문화 대혁명 반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하여 아베 고보, 미시마 유키오 등의 수백명의 저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에 대해 항의운동을 벌이고, 중국 당국이 중국의 역대 문화 유산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당시 고조되고 있던 학생 운동 세력(전공투 참조)과 노동운동 세력은 문화 대혁명에 영향을 받아 과격화되었다. 일본의 노조 세력과 학생운동 세력의 과격한 운동은 현실의 벽을 느낀 지식인들과 청년들의 호응을 얻어 1980년 일본이 경제위기를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홍콩
영국령 홍콩에서는 문화 대혁명에 영향받아 1967년 봉기와 친공산 세력의 과격한 정치운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과격행위는 홍콩인들이 한 세대 동안 친공산세력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반공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 기회를 빌려 문화 대혁명이 중국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1966년 11월부터 이에 맞선 "중화문명부흥운동"을 실시하였다. 장제스는 타이완과 홍콩 내의 각종 매체들을 통해, 마오쩌둥은 살인을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공산주의자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중화민국은 전통 문화를 보호하고 있는 자유 국가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반공 교육을 하는데 좋은 소재로 활용되어 공산주의의 잔인성에 대한 증거로서 자주 언급하는 교육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진보주의 언론인이었던 리영희는 저서 《8억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 서구의 문화 대혁명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소개하고 중국의 전통적 지배계급에 대한 인민대중노선, 집단적 권위주의에 대한 해체 운동 등에 대해 역발상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후 리영희는 냉전을 거치며 중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어보고자 하였고 당시 공급된 정보의 제한 때문에 자신은 문혁의 부정적인 면과 홍위병의 잔인한 행태에 대해서 책을 펴낼 당시에는 몰랐다고, 지금은 견해를 수정하였다고 말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외교와 내치 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홍위병은 대자보를 통해 당시 시장 활동에 조금씩 나서려고 했던 김일성 주석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했고 심지어는 월경을 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침입해 자기네 영토로 만들려고 하는가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반(反) 김일성 봉기가 일어났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해 기회를 넘보려하기도 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김일성은 한때 혈맹 관계였던 조중 관계를 파기하고 친소 노선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김일성 자신도 문화 대혁명을 모방한 운동을 오랫동안 펼치며 주체사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지도 이념이 되어왔다.
기타
최근까지 전 세계적으로 "마오주의 정당"으로 자칭하는 정치세력이 남아있고, 페루와 네팔에서는 정부를 위협하는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특히 네팔에서는 최근에 이들이 집권당으로 떠올랐다(네팔 공산당). 또한 이들은 "혁명적 국제주의자 운동(Revolutionary Internationalist Movement)"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느슨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같이 보기
대자보
트로츠키주의
정풍운동
반우파운동
부르주아
인민재판
반달리즘
폐불훼석
탈레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1976년 톈안먼 사건
사인방
마녀사냥
린뱌오
중앙문화혁명소조
분서갱유
광시 대학살
붉은 8월
각주
외부 링크
Encyclopædia Britannica. The Cultural Revolution
History of The Cultural Revolution
Chinese propaganda posters gallery (Cultural Revolution, Mao, and others)
Hua Guofeng's speech to the 11th Party Congress, 1977
Morning Sun - A Film and Website about Cultural Revolution and the photographs of the subject available from the film's site.
Memorial for Victims of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Exhibition causes stir with candid views of 'great' Mao The Times, July 14, 2005
Chinese Museum Looks Back in Candor: Groundbreaking New Exhibit on Cultural Revolution Sparks Official Displeasure but Visitors' Praise from the Washington Post, June 3, 2005
"William Hinton on the Cultural Revolution" by Dave Pugh
"Student Attacks Against Teachers: The Revolution of 1966" by Youqin Wang
A Tale of Red Guards and Cannibals by Nicholas D. Kristof. The New York Times, January 6, 1993.
The new face of the cultural revolution in China, by Rainer Hurtado Navarro, November 26., 2010.
중국의 공산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중국공산당
마오쩌둥
스탈린주의
반수정주의
공산주의 혁명
중화인민공화국의 범죄
1966년 중국
1967년 중국
1968년 중국
마오쩌둥 사상
중국의 냉전사
20세기 혁명<|end_of_text|>
| 19.755714 | 3,055.04541 |
6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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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3%91%ED%9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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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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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김병현
### 기사:
김병현(金炳賢, 1979년 2월 15일~)은 전 오스트레일리아 야구 리그 멜버른 에이시스의 투수이다. 역대 3번째로 MLB에 진출한 한국인 메이저리거였다.
선수 시절
미국 프로야구 시절
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2001년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에 참가했고,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박찬호, 류현진 다음으로 한국 선수 중 MLB에서 승리를 많이 했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팀이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는 덕분에 커리어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기록은 월드시리즈 엔트리에 들은 경우에만 인정되기에 2004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아니었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는 우승 멤버 외에 정규시즌 출전 이력이 있는 선수, 마이너리그 감독, 구단 직원 등에게 수여되기 때문에 그는 우승 반지를 2개 소유하고 있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횟수는 1회이다.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과 2006년 WBC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1999년 애리조나에 입단해 MLB에 데뷔했다. 특히 전성기 때의 슬라이더는 MLB에서 알아 주는 마구로 통했다. 2007년 이후 MLB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2008년 3월에 소속 팀에서 방출됐다. 2009년 WBC 출전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여권 분실 해프닝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가운데 손가락을 내민 게 오해를 불러일으켜 보스턴 시민들이 싫어하는 편이다. 2010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체결했으나 얼마 안 돼서 2010년 3월 16일에 방출됐다.
미국 독립야구 시절
2010년 5월 7일 미국 독립 리그 골든 베이스볼 리그의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와 계약했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2011년 1월 25일에 1년 총 3,300만엔(한화 약 4억 4,700만원)에 계약했다. 그러나 1군에 오르지 못하고 2011년 11월에 방출됐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넥센 히어로즈시절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1997년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으나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 해결 후 MLB에 진출했으나 최희섭과 함께 KBO에서 영구 제명돼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권이 말소됐다. 2007년 4월 2일 해외파 특별 지명 회의에서 현대 유니콘스에 영구 지명됐고,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그의 지명권이 히어로즈에 인계됐다. 라쿠텐에서 방출된 후에도 계속 히어로즈의 제안을 거절하다가, 2012년 1월 18일 계약금 10억, 연봉 5억, 옵션 1억 등의 총액 16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국내에 복귀했다. 2군에서 감각을 끌어올린 후 2012년 5월 8일 LG전에 구원 등판해 1이닝 3피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 2012년 6월 20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6이닝 4피안타, 5사사구, 1실점으로 KBO 리그 데뷔 첫 승을 거뒀으며 이는 2007년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 메츠전 선발 승 이후로 4년 8개월 만이었다.
KIA 타이거즈 시절
2014년 4월 10일 당시 KIA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김영광과의 1:1 트레이드로 이적하였다.
2016년 시즌 전 스프링 캠프에서 맹장 수술로 인해 몸을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시즌을 맞이했고, 러닝 훈련을 하다가 골반에 무리가 와 1군에서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며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
도미니카 프로야구 시절
2017년 9월 23일에 기간테스 델 시바오에 입단하였다. 하지만 정식 선수가 아니었기에 등판하지 못했고, 결국 방출됐다. 하지만 그와 함께 도미니카 윈터 베이스볼 리그에 있던 강정호 덕분에 강정호가 있었던 아길라스 시베나스에 입단하였다.
호주 프로야구 시절
2018년 10월 30일에 멜버른 에이시즈에 입단하였다.
2019년 1월 3일 인터뷰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별명
MLB 팬들이 그가 삼진을 많이 잡고 멋있게 잡는 모습을 보고 삼진을 잡기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는 의미로 Born to K, 줄여서 BK라고 불렸다.
자신에게 야유하는 팬들과 기자들에게 손가락 욕을 해서 '법규형'이라고 불렸다.
전성기의 슬라이더와 같은 언더핸드 마구를 던져 '핵잠수함'이라고 불린다.
프리즈비 슬라이더:슬라이더의 휘는 각이 프리즈비 원반과 비슷해서 '프리즈비 슬라이더'라고 불린다.
뭉쳐야 찬다, 뭉쳐야 쏜다에서 엉뚱한 행동을 자주 해서 '유니크 김'이라고 불린다.
출신 학교
광주수창초등학교
무등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력
1995년 보스턴 세계청소년대회 국가대표
1996년 쿠바 세계청소년대회 국가대표
1998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2001년 아시아인 야구 선수 최초 월드시리즈 출장
2006년 WBC 국가대표
수상
1995년 청룡기 MVP
1998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1년 한국인 최초 월드 시리즈 우승
2002년 MLB 올스타게임 출전
2019년 MBC 방송연예대상 인기상 《편애중계》
2021년 KBS 연예대상 리얼리티부문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2022년 KBS 연예대상 리얼리티부문 남자 우수상
2022년 KBS 연예대상 베스트 아이콘상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방송 출연
2019년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 - 625회 게스트 (2019년 7월 11일 방송분 출연)
2019년 JTBC 《뭉쳐야 찬다》 - 고정 출연
2019년 MBN 《자연스럽게》 - 게스트
2019년 MBC 《편애중계》 - 고정 출연
2020년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 - 게스트
2020년 JTBC 《아는형님》 - 게스트
2021년 JTBC 《뭉쳐야 쏜다》 - 고정 출연
2021년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 고정 출연
2021년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 특별 출연
2021년 MBC 《안싸우면 다행이야》 - 게스트
2022년 채널A 《슈퍼 DNA-피는 못 속여》 - 1회 게스트
2022년 JTBC 《전설체전》 - 고정 출연
2022년 KBS 《청춘야구단: 아직은 낫아웃》 - 감독
2022년 JTBC 《톡파원25시》 - 게스트
2023년 TV CHOSUN 《조선체육회》 - 고정 출연
드라마
2020년 SBS 《펜트하우스》 ... 주단태의 절친 투수 역 (특별 출연)
통산 기록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같이 보기
대한민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목록
각주
외부 링크
김병현 - 스탯티즈
김병현 사랑 모임
197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광주광역시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대한민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선수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
플로리다 말린스 선수
마이애미 말린스 선수
피츠버그 파이리츠 선수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 선수
대한민국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선수
KBO 리그 투수
넥센 히어로즈 선수
KIA 타이거즈 선수
기간테스 델 시바오 선수
아길라스 시베나스 선수
멜버른 에이시즈 선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1998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
1998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월드 시리즈 우승 선수
내셔널 리그 올스타
광주수창초등학교 동문
무등중학교 동문
광주제일고등학교 동문
성균관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end_of_text|>
| 9.654919 | 2,321.886719 |
1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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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8D%B0%EC%8A%A4%EB%B2%A0%EB%A5%B4%ED%81%AC%20%EA%B0%95%EB%A0%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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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데스베르크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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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고데스베르크 강령
### 기사:
고데스베르크 강령(Godesberger Programm)은 1959년에서 1989년까지 독일사회민주당의 강령을 말한다. 1959년 11월 15일 본 근처에 위치한 바드 고데스베르크시에서 개최된 독일사회민주당 임시 당대회에서 324대 16으로 채택되었다.
이 강령은 사민당이 '사회주의 노동자당'에서 '실용주의적 국민정당'으로 전환을 강령에 반영한 것이다. 사민당은 지금까지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1925년 채택된 하이델베르크 강령이 직전 강령이지만 사실상 1946년의 '사민당의 정치적 기본입장'에 의해 이미 많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고데스베르크 강령은 1989년 베를린 강령에 의해 대체된다.
성립
사회민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시대를 거치면서 큰 변화를 경험한다. 정권참여, 10여년후에 뒤따른 공화국의 붕괴 그리고 망명의 경험은 강령에 대해서 새로운 검토를 필요로 했다. 지속적이 빈번한 대립 끝에 빌리 아이흘러의 하의 강령위원회는 초안을 제출한다.
강령은 빌리 아이흘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칼로 슈미트, 발데마르 폰 크뇌링엔, 프리츠 엘러등이 영향을 미쳤다.
헤르베르트 베너가 자유민주주의 기본입장을 강령에 포함하기로 입장을 바꾼것이 강령이
성공적으로 채택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강령을 통해 사민당은 계급투쟁, 주요산업의 사회화나 계획경제같은 마르크스주의개념들로부터 결별을 하게 된다.
1960년 베너는 사민당의 대외정책 전환을 한다. 그 내용은 기존에 독일을 중립적 통일 정책에서 친서방정책으로 전환을 핵심으로 한다.
1975년 '지침 85'를 통해 강령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다. 최종적으로 1989년 12월 20일 베를린 강령으로 대체된다.
내용
이 강령은 자유로운 사회주의와 자유롭지만 책임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찬성을 통해 많은 요구들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다. 계획경제는 시장경제의 일반지식에 의해 대체되어 폐기되었다. '부르조아 계급지배의 철폐'는 생산수단의 사적이지만 공동체 지향적인 소유의 수용으로 대체되었다.
이 강령의 핵심 요구는 '법치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이다.
강령의 첫 문장은 "사회주의자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속에서 그들의 개성을 발전시킬수 있는 공동체지향하는 한편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 책임있게 임하는 인간성을 함께 발전시키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라고 하고 있다.
강령에서 사민당은 아래 구절을 통해 자기 규정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지속적인 과제이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며, 자유와 정의를 지키는 것이며, 자유와 정의 속에 지켜지는 것이다."
외부 링크
고데스베르크 강령 전문
1959년 독일
독일 사회민주당
서독의 정치
1959년 문서<|end_of_text|>
| 17.360691 | 2,420.368782 |
10218
|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A%B5%AD%EC%A0%95%EC%9A%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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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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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동국정운
### 기사:
《동국정운》(東國正韻)은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간행된 책이다. 1448년(세종 30년)에 반포된 한국 최초 표준음에 관한 책이자 운서(韻書)이다.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였다. 그 시대에 통용되던 한자음을 충분히 고려치 않았기 때문에 국가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잘 사용되지 않다가 16세기 들어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설명
《동국정운》은 훈민정음 반포한 다음 해인 1447년 음력 9월에 완성하고, 1448년 음력 10월에 반포했었다. 편찬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曹變安), 김증(金曾)이 담당하였다. 신숙주가 동국정운의 서문을 통해 책을 지은 이유를 밝혔다.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에 관한 동국(즉 한국)의 표준적인 운서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동국정운》에서 제시된 한자음은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써온 현실 한자음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한자음을 일반적으로 동국정운식 한자음(東國正韻式漢字音)이라 부른다. 《동국정운》 편찬자들은 현실 한자음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동국정운》 서문에 따르면 현실 한자음의 ‘잘못’은 아래와 같다.
계모(溪母; [])의 대부분이 견모(見母; [])에 들어가 있다.
계모의 일부가 효모(曉母)에 들어가 있다.
탁음이 없다.
성조에서 상성(上聲)과 거성(去聲)이 구별되지 않는다.
입성 중 단모(端母; [])로 끝나야 할 것이 내모(來母; [])로 끝난다.
설두음(舌頭音)과 설상음(舌上音), 중순음(重脣音)과 경순음(輕脣音),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이 구별되지 않는다.
체계
동국정운식 한자음 체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한자음을 초성, 중성, 종성 세 부분으로 나눈 점이다. 이는 중국 음운학에서 한자음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 두 부분으로 나눈 것과는 다르다. 또 한국어 표기와 달리 한자음 표기에는 초성, 중성, 종성 세 부분이 모두 갖춰져 있고 종성이 없는 한자음이 없는 것도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특징 중 하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중국어 중고음(中古音)의 음운 체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하면서도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1297년)나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의 체계, 그리고 현실 한자음의 음형(音形)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성모
성모(聲母) 체계는 훈민정음의 초성과 같은 23 자모 체계이며 중고음의 삼십육자모(三十六字母) 체계와 다르다. 자모는 중국 음운학에서 쓰이는 자모를 사용하지 않고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자모를 사용한다. 따라서 중국 음운학의 견모(見母)는 《동국정운》에서 군모(君母)가 되며 계모(溪母)는 쾌모(快母)가 된다. 성모에 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전탁음
《동국정운》에서는 전탁(全濁) ‘ㄲ, ㄸ, ㅃ, ㅉ, ㅆ, ㆅ’을 인정하고 있다. 탁음에 관해서는 《동국정운》 서문에 “我國語音, 其淸濁之辨, 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한국 말소리에서 청탁의 구별은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유독 한자음에서만 탁성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2. ㅋ
계모(溪母; [])는 ‘쾌’를 제외하고 현실 한자음에서 모두 ‘ㄱ’로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에서는 중고음에 의거해 ‘ㅋ’로 했다.
3. 설두음과 설상음, 중순음과 경순음, 치두음과 정치음
설두음(舌頭音)과 설상음(舌上音)의 구별, 중순음(重脣音)과 경순음(輕脣音)의 구별,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의 구별이 없다. 그렇지만 순음의 무겁고 가벼움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에 기술이 있으며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1455년)에서는 중순음 ‘ㅂ, ㅍ, ㅃ, ㅁ’과 경순음 ‘ㅸ, ㆄ, ㅹ, ㅱ’, 치두음 ‘ᄼ, ᄽ, ᅎ, ᅔ, ᅏ’과 정치음 ‘ᄾ, ᄿ, ᅐ, ᅕ, ᅑ’이 벌써 사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은 자모들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ㆁ
유모(喩母; []) 3등이 《동국정운》에서 ‘ㆁ’로 나타난다. “고금운회거요”에서 유모 3등의 반절 상자(反切上字)가 의모(疑母)와 통용되어 있어 《동국정운》도 이를 따른 셈이다. 참고로 아음 ‘ㆁ’의 자형이 ‘ㄱ’에 의거하지 않고 후음 ‘ㅇ’에 의거한 이유가 운서에서 유모(喩母)와 의모(疑母)의 혼동을 반영한 것임은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에 “牙之ㆁ雖舌根閉喉聲氣出鼻, 而其聲與相似, 故韻書疑與喩多相混用, 今亦取象於喉, 而不爲牙音制字之始(아음 ‘ㆁ’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고 소리와 공기가 코에서 나오지만 그 소리가 ‘ㅇ’과 비슷하므로 운서에서는 의모와 유모가 많이 혼용되니 지금 역시 후음에서 모양을 만들고 아음은 문자를 만드는 시작으로 하지 않았다)’처럼 기술된 바와 같다.
운모
운모(韻母)는 중성과 종성으로 이루어진다. 중성에는 다음 소리들이 쓰인다.
종성에는 다음 소리들이 쓰인다.
중성과 종성을 합친 운모는 26개 운목(韻目), 91개 운으로 나뉜다. 26개 운목은 아래와 같다. 입성은 운목만 제시하고 수록운은 생략했다.
운모는 종성의 오음(五音) 차례 ‘ㆁ(ㄱ), ㄴ(ㅭ), ㅁ(ㅂ), ㅱ, ㅇ’에 따라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 운서와 순서가 크게 다르다. 운목은 원칙적으로 “고금운회거요”에 나타나는 각 운의 첫 글자이다. 운모에 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운의 통합, 분리
예를 들어 고금운회거요의 강운(江韻)과 양운(陽韻)은 동국정운에서 강운(江韻)으로 통합되고 반대로 고금운회거요의 경운(庚韻), 청운(青韻), 증운(蒸韻)은 동국정운에서 긍운(搄韻), 굉운(觥韻), 굉운(肱韻), 경운(京韻)으로 세분화되는 등 운의 통합, 분리가 있다.
2. 합구 개음
합구 개음(合口介音)은 현실 한자음에서 아음, 치음, 후음에만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는 설음에도 나타난다.
3. 중성 ㆊ, ㆋ
중성 중에 ‘ㆊ[], ㆋ[]’는 주모음(主母音)이 두 개 있는데 실제로는 이들의 ㅠ를 전설 원순 개음을 나타내는 표기로 사용해 각각 [], []로 발음했다고 추측된다.
4. 종성 ‘ㅇ, ㅱ’
모음으로 끝나는 운 중에 과섭(果攝), 가섭(假攝), 해섭(蟹攝), 지섭(止攝), 우섭(遇攝)은 종성 ‘ㅇ’을 가지며 운미(韻尾)에 []가 있는 유섭(流攝), 효섭(效攝)은 종성 ‘ㅱ’을 가진다. ‘ㅇ’은 후음이며 ‘ㅱ’은 순음 밑에 ‘ㅇ’을 연서(連書)한 순경음으로 둘다 자음에 속하는데, 실제 문헌에서는 뒤에 붙는 어미가 ‘-를’ 등 모음에 붙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운들은 모음으로 끝나는 운으로 취급되었다.
5. 종성 ‘ㅭ’
중고음의 입성 []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이영보래(以影補來) ‘ㅭ’으로 나타난다. 현실 한자음은 ‘ㄹ’[]로 나타나지만, 원래 입성인 이 소리가 폐쇄음인데도 현실 한자음인 ‘ㄹ’로는 폐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입성의 폐쇄음적 특성을 지니게 하기 위해 ‘ㄹ’에 ‘ㆆ’을 덧붙인 것이다. 입성 []를 ‘ㅭ’로 옮기는 것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해에 “半舌之ㄹ, 當用於諺, 而不可用文. 如入聲之彆字, 終聲當用ㄷ.(반설음 ‘ㄹ’은 국어에만 써야 할 것이며 한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 입성 ‘彆’자 등은 종성에 ‘ㄷ’을 써야 한다.)”라고 하며 당시 학자 사이에서 견해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사용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한자음의 규범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보았으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한글 문헌은 모두 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에 따라 주음(注音)되었다. 그러나 현실 한자음을 반영하지 않은 이 한자음은 급속히 쓰이지 않게 되어 《동국정운》 반포 28년 후에 간행된 《오대진언(五大眞言)》에서는 홍무정운식 한자음에 따라, 《육조법보단경 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1496년)에서는 현실 한자음에 따라 주음되고 16세기에 이르러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아예 쓰이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간송미술관 소장본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건국대 박물관 소장본
동시 출간된 국보 제71호『동국정운』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첫째, 개장(改裝) 당시 책은 실로 짠 천이나 종이(紙)를 약간 절단해 냈고, 둘째, 제목은 다같이 목판인쇄이나, 그 서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 셋째, 책의 순서로 예, 악, 사, 어, 서, 수를 묵서했는데 국보 제71호에 없는 것으로 봐서 이것은 뒤에 한 것으로 보인다.
종이: 저지(楮紙).
크기: 세로 31.9센티미터, 가로 19.8센티미터.
판광(板匡): 반엽(半葉) 세로 23.3센티미터, 가로 16.2센티미터, 사주단변(四周單邊), 무계(無界),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
반엽의 행수, 자수: 서문은 반엽 9행, 1행 15자, 본문은 반엽 7행, 1행 11자.
활자: 서문은 초주 갑인자(소자), 본문 표제자는 갑인자(대자) 목활자임. 본문 한글 자체(字體)는 훈민정음 해례에서 쓰인 것과 같음.
권수: 6권.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권차가 있음.
같이 읽기
한국 한자음
참고 자료
강신항, 《한국의 운서》, 國語學叢書2, 國語學會, 2000년.
鄭寅承·成元慶, 〈東國正韻解題〉, 《國寶第142號 東國正韻 全六卷(附:解題·索引)》, 建國大學校出版部, 1973년.
외부 링크
국가기록유산
동국정운
각주
조선의 책
한국어의 역사
음운론
1448년 책
운서<|end_of_text|>
| 10.215034 | 2,379.633057 |
12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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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88%EB%8F%84%EC%9A%B0%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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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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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윈도우 3.0
### 기사:
윈도우 3.0(Windows 3.0)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세 번째 버전의 운영 환경으로, 1990년 5월 22일에 발매되었다. 윈도우 3.0은 윈도우 버전 중에서 처음으로 널리 성공한 버전이며 GUI 대열에서 애플의 맥 OS와 코모도어의 아미가OS의 강력한 라이벌이 된다. 윈도우 3.0은 후에 윈도우 3.1x로 이어지게 된다.
윈도우 2.1x를 이어받은 윈도우 3.0은 이전 버전에 비해 사용자 인터페이스 부분에서 상당히 바뀌었으며 인텔의 80286과 80386 프로세서의 메모리 관리 기능의 더 나은 사용을 위한 기술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MS-DOS용으로 작성된 텍스트 모드 프로그램도 창으로 열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멀티태스킹 기능이 좀 더 갖추어졌다. 하지만, 윈도우 3.0은 계속 DOS 접근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 게임과 기타 오락용 프로그램들 때문에, 가정용 시장에서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MS-DOS 실행"이 맡았던 파일 관리/프로그램 실행 역할은 아이콘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 관리자와 목록을 기반으로 한 파일 관리자로 바뀌었으며 덕분에 프로그램을 좀 더 쉽게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MS-DOS 실행은 이 둘을 대신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으로 계속 포함되었다.
제어판의 경우, 단순한 형태의 애플릿에서 벗어나 재구성되었다. 제어판은 시스템 설정의 중심으로, 비록 제한된 형태이긴 했지만 인터페이스의 색을 바꿀 수 있었다. 몇 개의 메모장과 라이트, 매크로 기록기, 계산기 같은 단순한 프로그램도 포함되었다. 게임 같은 경우 오델로 게임 뿐만 아니라, 솔리테어도 추가된다.
윈도우 3.0은 이전 윈도우에서 실행되던 프로그램과 100% 호환되는 마지막 윈도우였으며, 이 점이 광고되기도 했다.
메모리 모드
윈도우 3.0은 세 가지 다른 메모리 모드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윈도우다.
실제 모드 : 인텔 80286보다 낮은 CPU로 동작하는 오래된 컴퓨터를 위한 모드. 실제 모드에 상응한다.
표준 모드 : 80286 프로세서로 동작하는 컴퓨터를 위한 모드. 보호 모드에 상응한다.
386 호환 모드 : 인텔 80386 프로세서, 또는 그 이상의 프로세서로 동작하는 신형 컴퓨터를 위한 모드. 보호 모드와 가상 8086 모드에 상응한다.
멀티미디어 확장
1991년 가을에는 멀티미디어 확장이 나왔는데, 사운드 카드 지원 뿐만 아니라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던 CD-ROM 드라이브도 지원했다. 멀티미디어 확장은 주로 CD-ROM 드라이브나 사운드 카드 제조 업체, OEM에게만 제공되었으며 그리고 오디오 입출력을 위한 기본적인 멀티미디어 지원 및 CD 오디오 플레이어 애플리케이션이 윈도우 3.0 이 추가되었다. 멀티미디어 확장의 새 기능들은 윈도우 3.0의 실제 모드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후에 윈도우 3.1x에서 멀티미디어 확장의 많은 기능들이 포함된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이 확장을 보완하기 위해 윈도우 사운드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글판
한글판은 1991년 7월에 한글 윈도우 3.0으로 출시되었다. 5.25인치 1.2MB 플로피 디스크 5장이 제공되었고 따로 5장의 추가 글꼴 파일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오델로와 솔리테어 게임이 기본으로 제공된다.
마케팅
윈도우 3.0부터는 IBM PC 호환 제조업체들이 윈도우를 미리 하드 드라이브에 설치하고 고객에게 배송했다. 제니스 데이터 시스템(Zenith Data Systems)은 과거 윈도우 1.0, 윈도우 2.0 때는 컴퓨터와 함께 플로피 디스켓들을 배송했으나 윈도우 3.0이 개발 초기 단계에 있을 때 미리 설치하고 고객에게 배송하기로 하였다. 실제로, 제니스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게 GUI를 보다 발전시키도록 강하게 압력을 넣었는데, 이유는 대학 시장에서 제니스의 직접적인 경쟁자인 애플을 의식해서였다.
각주
같이 보기
윈도우 3.1x
외부 링크
GUIdebook: 윈도우 3.0 갤러리
Windows 3.1 Rocks 메일링 리스트 - 윈도우 3x 사용자들을 위한 프리웨어 다운로드, 링크, 지원 제공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1990년 소프트웨어<|end_of_text|>
| 9.550481 | 2,310.749756 |
13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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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B%85%80%EC%B9%9C%EC%9A%B0%ED%98%91%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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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친우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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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소녀친우협회
### 기사:
소녀친우협회(Girls' Friendly Society, GFS)는 성공회 봉사기관이다. 7세부터 70세까지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 라고 언급된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서술을 기본정신으로 한다.
역사
1875년 영국에서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회원국이 22개국인 큰 봉사기관으로 성장하였다. 대한민국에는 1965년 9월 설립되었으며, 1966년 10월 서울교구 GFS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현재 전국 15지부 4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봉사 활동
국제 GFS의 봉사 사업:10대 노동자 처우 개선, 여성 기술 교육, 미혼모 돕기 등
한국 GFS의 봉사 사업:부모 교육(PET), 주니어 교육을 통한 다민족 체험, 여성 교육, 결손가족 돕기, 외국인 여성노동자 돕기(성공회 남양주 교회, 담당 사제 이정호 골롬바 신부), 각 선교단체와 미자립교회 후원, 위기여성상담소 운영
1875년 설립
대한민국의 성공회<|end_of_text|>
| 21.765572 | 1,053.472661 |
16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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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QBZ-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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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BZ-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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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QBZ-95
### 기사:
QBZ-95() 혹은 95식 자동소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북방공업(Norinco)에서 생산하는 불펍 돌격소총이다. 현재 중국인민해방군의 제식소총이며, 1997년 주(駐) 홍콩부대가 장비하여 처음 외부로 알려졌다.
QBZ-95계열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5.8 × 42 mm DBP87 탄을 사용하지만, 수출용으로 개발된 QBZ-97 계열은 5.56 × 45 mm NATO 탄환을 사용하도록 개량된 버전으로 AR-15/M16 계열과 호환되는 STANAG 탄창을 사용한다.
대중 문화
게임
배틀그라운드,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에서 5.56mm탄을 사용하는 돌격소총 QBZ로 등장한다.
같이 보기
불펍
돌격소총
외부 링크
Modern firearms - Assault rifles - Type 95 / QBZ-95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총
돌격소총
불펍 화기<|end_of_text|>
| 20.146648 | 855.86581 |
2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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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B%BC%EB%B9%84%EC%9A%B0%EC%8A%A4%EC%9D%98%20%EB%9D%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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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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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뫼비우스의 띠
### 기사:
뫼비우스의 띠()는 위상수학적인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대표적인 도형으로서 비가향적(non-orientable)이다. 1858년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모형은 종이 띠를 절반 만큼 비틀어 끝을 붙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 유클리드 공간에서는 어느 쪽으로 비트느냐에 따라 두 종류의 뫼비우스 띠가 존재한다. 따라서 뫼비우스의 띠는 키랄성(Chirality; 실제상과 거울상이 겹치지 않은 구조의 성질, 즉 회전반사대칭이 없는 구조의 입체적 성질)을 띤다.
뫼비우스 띠의 오일러 지표는 0이다.
성질
뫼비우스 띠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성질을 가진다. 어느 지점에서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반대면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계속 나아가면 두 바퀴를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연속성에 의해 뫼비우스 띠는 단일 경계를 가지게 된다.
띠의 중심을 따라 뫼비우스 띠를 자르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가 단일한 경계를 가지기 때문인데, 자르기를 하면 두 번째 경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띠의 중심을 따라 1/3씩 평행한 두 줄로 자르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된다.
하나는 동일한 길이의 뫼비우스의 띠가 되고, 다른 하나는 두 배로 긴,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짝수번 비튼 띠는 뫼비우스의 띠는 아니다.
1번 비튼 띠 (1번 비튼 띠=180°회전시킨 띠)
-2등분시 = 4번 비튼 띠 (1개)
-3등분시 = 4번 비튼 큰 띠(=두번 꼬인 띠) 1개, 1번 비튼 띠(1개)가 연결되어 있다.
2번 비튼 띠
-2등분시 = 2번 비튼 띠 (2개)
-3등분시 = 2번 비튼 띠 (3개)
3번 비튼 띠
-2등분시 = 8번 비튼 띠 (1개)
-3등분시 = 8번 비튼 큰 띠(1개), 3번 꼬인 띠 (1개)
4번 비튼 띠
-2등분시 = 4번 비튼 띠(2개)
-3등분시 = 4번 비튼 띠(3개)
기하학과 위상수학
상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매개변수로 표현하는(parametrization) 한 가지 방법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때, 이다. 이것은 xy평면 위에 있는 반지름이 1인 중심원 위에 놓인 너비가 1인 뫼비우스 띠를 만든다. 변수 u는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v는 모서리 사이를 움직인다.
위상수학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우측 다이어그램과 같이, 정사각형 [0,1] × [0,1]에서 위쪽 모서리와 아래쪽 모서리가 0 ≤ x ≤ 1에서 (x, 0) ~ (1 − x, 1)로 동치 관계(Equivalence relation)를 주어서 정의한다.
뫼비우스의 띠는 경계를 가지는 2차원 콤팩트 다양체(compact manifold with boundary)이다. 또한 비가향적(non-oriantable)인 곡면으로 가장 유명한 예가 된다.
관련 대상
기하학적 대상으로서 클라인 병과 매우 연관이 깊다. 클라인 병은 두 개의 뫼비우스 띠의 경계를 붙여서 만든다. 물론 보통의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다른 기하학적인 대상으로는 실수 사영 평면이 있다. 원판(disk)의 경계를 따라 뫼비우스의 띠의 경계를 붙이면 실수 사영 평면을 얻는다.
대중 문화 속 인용
네덜란드의 화가 에셔의 작품 중에는 뫼비우스의 띠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 많다.
미국의 재활용 마크는 뫼비우스의 띠 모양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조세희의 단편 소설 모음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의 제목이 〈뫼비우스의 띠〉다.
대한민국의 보이 밴드 젝스 키스의 4집 앨범 《Com'Back》에 "뫼비우스의 띠"라는 제목의 수록곡이 있다.
각주
같이 보기
교차모
리본 이론 (Ribbon theory)
클라인 병
Umbilic torus
곡면
위상수학
유희 수학<|end_of_text|>
| 7.794318 | 2,102.676514 |
17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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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C%B9%B4%EC%9D%B4%EB%A0%88%EC%9D%B8%EB%B3%B4%EC%9A%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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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레인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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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스카이레인보우
### 기사:
스카이레인보우()는 대한민국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 채널번호 525번의 직접사용 채널로 2008년 3월 10일 개국했다.
스카이레인보우채널은 대한민국 방송콘텐츠 육성과 시청자 선택권 확대에 기여하고자 2008년에는 법률방송(법률/상담), 브레인TV(장기/체스), 비타민TV(의료/건강), FoodTV(음식/요리), TV서울(교통/기상)로부터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 받아 채널별 블록 시간에 스카이라이프가 채널 408번에 자체적으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레인보우 HD라는 이름으로 개국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채널 525번으로 자리를 옮겨 경제, 보도, 금융 전문 프로그램을 수급하여 방송할 계획으로 현재는 방송이 일시 중단된 상태이다.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SkyTV의 텔레비전 네트워크<|end_of_text|>
| 20.699903 | 809.044431 |
1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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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84%B1%EC%82%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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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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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천성산
### 기사:
천성산(千聖山)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높이 920.17m의 산이다. 산 정상에는 초원과 습지가 발달해 있으며 습지에는 도룡뇽을 비롯한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대구와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철도 2단계 사업 때 건설된 원효터널이 천성산을 관통하고 있다. 원효터널 공사 당시 지율 스님을 비롯한 환경 단체 관계자와 시민들은 늪지 훼손, 생태계 파괴 등을 이유로 공사 착공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하였으나 부산고등법원의 2차 항고에서 패소했다.
명칭
이전에는 제1봉(920.17m)을 원효산(元曉山)으로 제2봉(852.2m, 비로봉)을 천성산(千聖山)으로 칭했다. 그러나 양산시에서 이 2개 산의 이름을 통합하여 천성산으로 변경하고, 기존의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제1봉), 천성산을 제2봉으로 삼았다.
천성산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천(千)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聖人)이 되게 했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효산은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대동지지에서는 이 산을 원적산(圓寂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는 이 산을 소금강(小金剛) 또는 소금강산으로도 부른다고 적고 있다.
같이 보기
한국의 산
각주
외부 링크
천성산 살리기 공식 웹사이트
경상남도의 산
양산시의 지리<|end_of_text|>
| 15.584909 | 1,274.28463 |
25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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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5%AC%EC%95%84%EB%82%98%EC%86%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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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아나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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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구아나속
### 기사:
이구아나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카리브 제도에 서식하는 이구아나과의 도마뱀무리이다. 녹색이구아나와 소앤틸리스이구아나 두종이 있다. 이구아나의 어원은 원래 타이노 어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인 "Iwana"의 에스파냐어 형태이다.
하위 종
녹색이구아나 ("Green iguana")
소앤틸리스이구아나 (Iguana delicatissima)
각주<|end_of_text|>
| 15.919948 | 440.044088 |
55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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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2%A4%EC%8A%A4%20%28%EB%B0%B4%EB%93%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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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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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키스 (밴드)
### 기사:
키스(Kiss)는 1973년 뉴욕 시에서 결성된 하드 록 밴드이다. 키스는 특이한 분장과 의상, 불꽃과 조명을 이용한 현란한 무대로 알려져 있으며, 그 어느 미국 밴드보다 많은 골드 앨범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VH1에서 선정한 100 Greatest Artists of Hard Rock에서 10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KISS는 흔히 팬들에게 Knights In Satan's Service의 약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구성원
오리지널 구성원
폴 스탠리 (Paul Stanley) - 리듬 기타, 보컬
진 시몬스 (Gene Simmons) - 베이스 기타, 보컬
에이스 프렐리 (Ace Frehley) - 리드 기타, 보컬
피터 크리스 (Peter Criss) - 드럼, 보컬
현재 구성원
폴 스탠리 (Paul Stanley) - 리듬 기타, 보컬
진 시몬스 (Gene Simmons) - 베이스 기타, 보컬
토미 세이어 (Tommy Thayer) - 리드 기타
에릭 싱어 (Eric Singer) - 드럼
디스코그라피
정규 앨범
1974년 - Kiss
1974년 - Hotter Than Hell
1975년 - Dressed to Kill
1975년 - Alive!
1976년 - Destroyer
1976년 - Rock and Roll Over
1977년 - Love Gun
1977년 - Alive II
1979년 - Dynasty
1980년 - Unmasked
1981년 - Music From "The Elder"
1982년 - Creatures of the Night
1983년 - Lick It Up
1984년 - Animalize
1985년 - Asylum
1987년 - Crazy Nights
1989년 - Hot in the Shade
1992년 - Revenge
1993년 - Alive III
1996년 - KISS Unplugged
1997년 - Carnival of Souls: The Final Sessions
1998년 - Psycho Circus
2003년 - KISS Symphony: Alive IV
컴필레이션 앨범
1978년 - ‘Double Platinum’
1982년 - ‘Killers’
1988년 - ‘Smashes, Thrashes & Hits’
1996년 - ‘You Wanted the Best, You Got the Best!!’
1997년 - ‘Greatest KISS’
2001년 - ‘KISS: The Box Set’
2002년 - ‘The Very Best of KISS ’
2003년 - ‘The Best of KISS: The Millennium Collection’
2004년 - ‘The Best of KISS, Volume 2: The Millennium Collection’
2005년 - ‘Gold’
2005년 - ‘KISS Chronicles: 3 Classic Albums’
외부 링크
키스
미국의 보이 밴드
미국의 하드 록 밴드
뉴욕 출신 음악 그룹
1973년 결성된 음악 그룹<|end_of_text|>
| 4.740602 | 1,107.988872 |
77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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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C%A0%88%EC%A0%9C%EC%88%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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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절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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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위절제술
### 기사:
위절제술(胃切除術)은 위의 일부 혹은 전부를 들어내는 수술이다.
최초의 성공적인 위절제술은 테오도어 빌로스가 1881년에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 했던 수술이다. 위절제술은 암이나 소화기 궤양, 장벽의 천공 등을 치료하기 위해 시술된다. 최근에는 소화기 궤양을 주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균에 대한 항생제나 내시경을 이용해 치료하기 때문에 시술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수술<|end_of_text|>
| 16.820799 | 471.376889 |
102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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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84%B1%EB%85%84%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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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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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미성년자
### 기사:
미성년자(未成年者, minor)는 대한민국 민법상으로는 19세에 달하지 않은 자를 말한다.(대한민국 민법 제4조) 연령은 출생일을 산입하여 역(歷)에 따라 계산한다.(대한민국 민법 제158조) 성년기를 선고하는 입법례로는, 스위스 민법의 성년선고제도 및 프랑스 민법의 자치산제도 등이 있다.
대한민국 민법에서 미성년자는 혼인에 의하여 성년으로 의제(간주)되므로(제826조의 2), 혼인의 성립과 동시에 미성년자는 성년자와 같은 능력을 가진다. 성년의제는 법률혼에 한정된다. 그러나 공직선거법, 청소년보호법(19세 미만), 근로기준법 등의 적용에서는 여전히 미성년자이다.
한편 대한민국 형법상 미성년자는 19세 미만인 자를 이르며(대한민국 형법 제9조), 책임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민법
기준
미성년자의 능력
미성년자의 영업
특별법상 규정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상,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등이 14세 미만의 아동으로부터 개인정보 수집ㆍ이용ㆍ제공 등의 동의를 받으려면 그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경우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그 아동에게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기 위하여 필요한 법정대리인의 성명 등 최소한의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제31조 제1항)
기타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는 뜻으로 연소자(年少者)라고도 부른다. 근로기준법상의 "연소근로자"와는 의미가 다르다.
같이 보기
미성년자보호법
각주
민법총칙
어린이
나이<|end_of_text|>
| 13.13237 | 1,230.888315 |
9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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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B%8D%B0%ED%8C%A1%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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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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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라데팡스
### 기사:
라데팡스(는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의 중심가의 루브르 박물관과 개선문을 중심축으로 도심에서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센 강변에 조성된 파리의 부도심이다. 단 행정 구역 상으로는 파리가 아닌 쿠르브부아(Courbevoie), 퓌토(Puteaux),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 속한다.
프랑스의 대통령인 미테랑과 파리 당국 등 자치단체로 구성된 라데팡스 개발위원회가 1958년부터 30여년에 걸친 장기 개발구상을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는 대부분의 공사를 마무리했다. 라데팡스는 46만평의 땅 위에 첨단업무, 상업, 판매, 주거시설이 고층·고밀도로 들어섰고 고속도로, 지하철, 일반도로 등은 지하로 배치해 도심의 혼잡이 거의 없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그랑다르슈()이 있으며 파리 도심과 지하철로 직결된다.
대표적인 건축물
그랑다르슈 -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1989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투르 아이요 - 1976년에 세워진 아파트이다.
악사(Tour AXA) - 세계적인 보험사인 악사의 본사 건물이다.
투르 소시에테 제네랄(Tour Société Générale) - 세계적인 금융그룹인 소시에테 제네랄의 본사 건물이다.
투르 토탈(Tour TOTAL) - 세계적인 석유, 가스 에너지 기업인 토탈 S.A.의 본사 건물이다.
투르 아레바(Tour AREVA) - 세계적인 원자력 기업인 아레바의 본사 건물이다.
외부 링크
라데팡스 역사 박물관
파리의 카르티에
파리의 경제
파리의 관광지
오드센주의 관광지
중심 업무 지구
금융가
개선문<|end_of_text|>
| 16.088467 | 1,436.279063 |
232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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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F%89%EC%B0%BD%20%EB%82%98%EB%93%A4%EB%AA%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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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나들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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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평창 나들목
### 기사:
평창 나들목(Pyeongchang IC)은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에 설치된 영동고속도로의 32번 교차로이다. 용평면, 봉평면, 대화면 등지로 진출할 수 있으며, 영동고속도로에서 평창읍내로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다. 개통 당시 명칭은 장평 나들목이었으나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평창군에서 나들목 명칭 변경을 추진해 2016년 1월 1일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연혁
1975년 10월 14일 : 영동고속도로 새말 ~ 강릉 구간 개통에 따라 장평 교차로라는 이름으로 평면 교차로로 영업 개시
1997년 10월 2일 : 1999년 12월까지 나들목 접속부 입체화 공사로 인해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79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9년 7월 15일 : 새말 요금소 ~ 월정 요금소 구간이 왕복 4차선으로 확장 개통되면서 나들목을 이전 및 장평 나들목으로 명칭 변경, 나들목에 요금소를 설치하고 통행료 징수 개시
2016년 1월 1일 : 나들목 명칭을 장평 나들목에서 평창 나들목으로 변경
구조물 정보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업소: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용평면 금송길 22
접속하는 도로
국도 제6호선 (경강로)
지방도 제408호선 (태기로)
간접 연결 : 국도 제31호선 (평창대로, 장평교 이용), 지방도 제424호선 (금당계곡로, 태기로 이용)
교통량 정보
각주
국도 제6호선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나들목
강원특별자치도의 고속도로 나들목
평창군의 교통<|end_of_text|>
| 8.087569 | 1,095.331985 |
28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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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7%88%EB%8B%A4%EB%B0%94%EB%9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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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다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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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아마다바드
### 기사:
아마다바드(, )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351만 5,361명(2001)이다. 사바르마티 강 연변에 전개된다. 15세기에 아마드 1세가 건설한 도시인데, 시내에는 자마마스지드 이슬람교 대사원과 아마드샤의 묘를 비롯한 많은 훌륭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인도의 면공업 중심지가 되었으며, 봄베이와 맞먹는 근대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20세기에는 인도 민족운동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간디의 무저항, 불복종의 독립운동 본부가 있었다. 사바르마티 강변에 남아 있는 간디 수도원과 간디가 독립운동의 투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창설했던 구자라트 대학도 이 도시의 유서깊은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인구
기후
각주
외부 링크
http://www.auda.org.in/
인도의 도시 및 마을<|end_of_text|>
| 22.422241 | 908.135564 |
4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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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C%9B%90%20%EB%B0%B1%EC%94%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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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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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수원 백씨
### 기사:
수원 백씨(水原 白氏)는 경기도 수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으로 중국 소주(蘇州) 출신이다. 당(唐)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아 780년(신라 선덕왕 1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 경주시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 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계대(系代)가 불명하여 신라 경명왕(재위 917년 ∼ 924년)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되었다는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었다.
백창직의 증손 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사적이 없고, 그의 9세손 천장(白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고려 충선왕 때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고 하나 이 역시 사적에 없다. 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이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원 백씨는 개성에서 왔다고 했다. 조선 조 이래 백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백효삼(白效參)의 증손인 문신 백인걸(白仁傑)이 있다. 2015년 인구는 354,428명이다.
사적(史籍)으로 볼 때 수원을 본관으로 처음 쓴 사람은 백효삼(白效參)이다. 백효삼은 1427년(세종 9) 친시(親試)에서 과지에 본관을 '수원'으로 기재하였다. 백효삼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낸 백회(白薈)의 아들로, 임천 백씨 백경신(白景臣)의 아들 진식(眞植)의 후손인 백천장(白天藏)의 현손이다. 조선조에 효삼의 후손들이 잇달아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는 백씨 일족 중에서도 대관(大貫)이 되어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시조 동래설 문제점
시조 백우경의 동래설은 당나라 덕종년간인 서기780년에 소주에서 통일신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고 서기 1669년 경주부사 민주면이 간행한 동경잡기에 실린 기록인데 그 출처는 서기 1637년 간행된 대흥백씨 정축구보의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서 보다 명확한 고증이 될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진필명(秦弼明)은 한반도 진씨의 시조인데 서기 624년에 출생,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 그의 증손자 진자윤(秦自潤)의 처가 바로 백씨로서 진씨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대략 710년~720년에 출생한 사람이라 시조 백우경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나이가 많으니 시조의 동래설은 의심되는 바이며,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의 5세손 이입전(李立全)의 배위는 한림학사 백광선(白光善)의 여식이라고 선원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장인인 백씨는 대략 730~740년대 사람이지만 지금의 백씨족보에는 나오지 않는다.
본관 연혁
수원은 선사 시대에 '모수국'으로 불렸다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한강 이남에서 몰아낸 후 '매홀군'(買忽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으로 그 명칭을 고쳤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水州)로 승격하여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파하고, 1018년(현종 9)에 다시 지수주사(知水州事)로 삼았다. 1271년(원종 12)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그 뒤에 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군(郡)으로 강등시켰는데, 후에 다시 부(府)로 되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조선태조 3)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수원'(水原)으로 개명되어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正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전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원(移園)과 함께 도시 방어를 위한 수원 화성과 왕의 능행차 때 묵는 화성 행궁이 건립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에 두어 상업이 발전하였으며,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순조 원년) 정조가 사망한 후 수원에 대해 베풀던 특권이 폐지되면서 쇠퇴하였다.
상계도
분파
백씨는 중시조 백창직의 후대에서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9개 파로 갈라졌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 ~ 927?)에게 길(吉)과 탁(卓), 두 아들이 있었는데, 백길(白吉)의 후손이 28개 파(派)를 이루고 백탁(白卓)의 후손은 문간공파 뿐이다. 백길의 후계 중 5세 백간미(白簡美)의 후손들이 25개 파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1세 백인관(白仁寬)의 후손이 장파인 <선정공파>(선산 백씨)다. 12세 백역(白繹)의 후손이 <인주공파>(정주 백씨)이고, 13세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이 <오산군파>(청도 백씨)이다. 13세 백유(白維)의 후손이 <장단공파>이며, 10세 백문보(白文寶)의 후손이 <담암공파>(대흥 백씨)이다.
백간미(白簡美)의 셋째 아들인 6세 백무신(白武臣)의 후손이 <양곡공파>, 넷째 아들인 백가신(白可臣)의 후손이 <태사공파>(홍주 백씨)이다.
백간미의 다섯째 아들 경신(景臣)의 후손 원정(白元貞) 계통
9세인 백천장(白天藏)은 경신(景臣)의 후계로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그 후손들은 모두 17개 파(派)로 분파하였다. 백천장의 아들 련(璉)의 장손으로 12세 백장(白莊)이 장흥으로 낙향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정신재공파>(장흥 또는 해미 백씨)이다. 해미 백씨에서 태인 백씨가 분적하여 의주로 이거하였다.
려말선초에 개성에 살던 일족들 중 백장의 동생 백회(白薈(繪))가 보성현감(甫城縣監)을 지내고 남하하여 장남인 13세 백효삼의 자손들이 수원을 본관으로 삼고 파주와 양주 등지에 자리잡았다. 14세 백사순(白思純)의 후손이 <좌랑공파>, 16세 백인현(白仁賢)의 후손이 <훈정공파>, 백인영(白仁英)의 후손이 <도승지공파>, 백인웅(白仁雄)의 후손이 <참봉공파>, 백인호(白仁豪)의 후손이 <별좌공파>,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이 <문경공파>다. 백효삼의 동생들로, 백효옹(白效雍)의 후손이 <청산공파>, 백효연(白效淵)의 후손이 <산음공파>, 백효약(白效若)의 후손이 <임피공파>다. 백회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조선 중후기에는 백씨의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었다.
백천장의 둘째 아들 전(琠)의 아들 11세 백인석(白仁碩)의 후손이 <봉익대부공파>(奉翊大夫公派)이고, 셋째 아들 환(環)의 후계에서 13세 백운실(白雲實)의 후손이 <보공장군공파>(保功將軍公派), 12세 백수희(白受禧)의 후손이 <부사공파>(직산 백씨)이며, 넷째 아들 산(珊)의 후계에서 12세 백수(白粹)의 후손이 <금릉부원군파>(김천 백씨)이고, 다섯째 아들 황(璜)의 후대에서 17세 백응상(白應祥)의 후손이 <함판공파>, 18세인 백흥남(白興男)의 후손이 <절제공파>다. 그리고 백천장(白天藏)의 여섯째 아들 백거(白琚)의 후손이 중랑장(中郞將) <수의부위공파>(부령 백씨)이니, 백천장의 후손 17개 파(派)를 수원 백씨라 한다.
백천장의 동생인 백지장(白地藏)의 후손은 <동림공파>(임천 백씨)다.
5세인 백행미의 후손은 <시랑공파>(태천 백씨), 백가미(白可美)의 후손은 <사부공파>(신풍 백씨), 백채(白採)의 손자인 6세 백영신(白英臣)의 후손이 <부여군파>(부여 백씨)다.
중시조 백창직의 둘째 아들 백탁(卓)의 후손은 단계(單係)로 이어져 백문절(白文節)에 이르고, 그 후손이 <문간공파>(남포 백씨)다.
고려 조에 선산, 대흥, 남포, 직산, 청도 등을 본관으로 번성했던 백씨들이 조선 조 들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들어 출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쇠락한 반면, 절조를 버리고 조선 창업 무렵 창관한 수원 백씨들은 개국 이래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전체 백씨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1850년대부터 수원으로 본관을 통합하려는 논의마저 전개되었다.
인물
백사수(白思粹) : 1454년 문과, 훈련원정(訓正)을 지냈다.
백인영(白仁英) : 1537년 문과,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백인걸(白仁傑, 1497년 ~ 1579년) :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스승이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1579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했다. 사후 종1품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1603년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백유함(白惟咸, 1546년 ~ 1618년) :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명나라의 군량(軍糧)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1594년 동부승지·좌부승지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호군(護軍)으로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를 만나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의논하였다.
백유양(白惟讓, 1530년 ~ 1589년) : 1572년 문과, 이조참의(吏議)를 지냈다
백광현(白光炫, 1625년 ~ 1697년 ) : 독학으로 침술을 익혔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였으나,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악성종기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였다. 1670년 현종의 종기를 완치하여 어의가 되었고, 효종비 인선왕후, 숙종의 종기를 치료하였으며, 1691년 정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1692년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숙종실록29권에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신의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동수(白東脩, 1743년 ~ 1816년) : 무예가 뛰어나 당대 창검의 일인자로 꼽혔다. 1790년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파와 깊이 교유하였는데 이덕무는 "백동수는 딴 세상을 노니는 사람 같았다." 고 평하였다. 당대 제일의 무인이지만, 학문과 서예에도 뛰어난 경지를 보여 박지원, 성대중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용성(白龍成, 1864년 ~ 1940년) :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여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지원.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백정기(白貞基, 1896년 ~ 1934년) : 독립운동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에서 항일운동을 이끈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3년 일경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34년 6월 순국하였다. 사후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수습하여 7월6일국민장을 거행하고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백인제(白麟濟, 1898년 ~ ? ) : 1915년 경성의전 입학,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다. 1941년 백외과(현재 백병원)를 개업하였고, 해방후 서울의과대학(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장, 서울의사회 초대회장, 대한외과학회 초대 및 3대회장을 역임했으며, 당시 국내 의술계의 제1인자로 손꼽혔다. 6.25전쟁때 납북되었다.
과거 급제자
조선 문과
백효삼(白效參) 백사수(白思粹) 백 훈 (白 勛) 백인영(白仁英) 백인걸(白仁傑) 백유양(白惟讓) 백유함(白惟咸) 백대형(白大珩) 백홍규(白鴻逵) 백시광(白時光) 백홍거(白鴻擧) 백대성(白大成)
백상우(白相右) 백의환(白義煥) 백인환(白仁煥) 백종혁(白宗赫) 백사은(白師殷) 백광택(白光澤) 백사곤(白師坤) 백사근(白師謹) 백경해(白慶楷) 백흥삼(白興三) 백문경(白文璟) 백사곤(白思坤)
백광유(白光濡) 백시원(白時源) 백시형(白時亨) 백동규(白東奎) 백만영(白萬榮) 백문봉(白文鳳) 백종걸(白宗杰) 백윤학(白潤鶴) 백동규(白東奎) 백종전(白宗佺) 백문진(白文振) 백종규(白宗逵)
백시은(白時殷) 백규수(白奎洙) 백봉삼(白鳳三) 백오진(白五珍) 백인행(白仁行) 백의행(白義行) 백시범(白時範) 백성수(白誠洙) 백규연(白奎演) 백낙흥(白樂興) 백영제(白永濟) 백선행(白璿行)
백규섭(白奎燮) 백시현(白是玄) 백취규(白聚奎) 백주범(白周範) 백시순(白時淳) 백진섭(白珍燮) 백면행(白冕行) 백남도(白南道) 백영기(白霙基) 백문행(白文行) 백호섭(白虎燮) 백극행(白克行)
백낙순(白樂舜) 백학구(白鶴九) 백현곤(白顯袞) 백현진(白顯震)
무과
백인현(白仁賢) 등 101명
생원
백사수(白思粹) 등 54명
진사
백인호(白仁豪) 등 57명
집성촌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강원도 평강군 목전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전라북도 진안군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전라남도 영암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전라남도 장흥군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부포리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황해도 장연군 신화면
평안남도 순천군 후탄면 양포리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금서리
평안북도 정주시 갈산면 익성리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상원리 경상북도 경주시
항렬자
대동항렬(중시조로 1세)
주해
각주
외부 링크
수원백씨 중앙종친회
수원 백씨 대종회
수원
수원
백씨
경기도 소재 성씨
수원시
중국계 한국인의 성씨<|end_of_text|>
| 20.243128 | 3,080.00293 |
8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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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2%AC%EC%9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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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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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사악
### 기사:
이삭, 또는 이사악(, , ISO 259-3 Yiçḥaq, "그가 웃을 것이다([he] will laugh)", , 또는 )은 히브리어 성경과 쿠란(코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유일한 아들이자,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100세이고 사라가 90세일 때 이삭을 낳았다고 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심에 따라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한 제단을 쌓는다. 마지막 순간에 천사가 급히 그를 막는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조상 3대 계보 속 세 인물 중 유일하게 이름이 변하지 않으며, 가나안 땅에서 유일하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비교했을 때, 이삭은 상대적으로 평온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180세가 되어 죽었으며 셋 중에 가장 오래 살았다.
어원
영어화된 표기인 아이작(Isaac)은 히브리어 '이쯔앜'()의 음역으로, 그것의 의미는 "그가 웃는다/웃을 것이다."이다. 기원전 13세기에 쓰여진 우가리트어 문서에서는 가나안 종교의 신 엘의 인자한 미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엘이 아니라 이사악의 부모인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엘로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얼굴을 떨어뜨리고 웃었다. 왜냐하면 부인 사라는 너무 늙어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후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다시 언약하였을 때, 사라는 같은 이유로 속으로 웃었다. 엘로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냐고 물었고 사라는 이를 부인하였다.
역사성
일부 학자들은 이삭을 " 전설적인 인물" 또는 " 부족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 또는 " 반유목민 지도자"로 묘사한다. 이삭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다른 족장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그들의 초기 히브리 목축 경험의 민간 기억과 구전 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다." Cambridge Companion to the Bible은 족장들의 성경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그들의 세계와 문학적 성장 및 구성의 시대 사이에 거리를 유지하지만 후기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합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야기가 기록되기 시작했을 때(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 정치 세계의 일부였던 민족과 조상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롯은 암몬과 모압의 트란스요르단 민족의 조상이며, 이스마엘은 비록 구약 성서에 네게브에 있지만 북아라비아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유목민을 의인화합니다. 에서는 에돔을 의인화하고(36:1), 라반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아람 국가들을 대표합니다. 끈질긴 주제는 조상들과 가나안 토착민들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사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에 대한 주제는, 조상들에 의해 의인화된 것처럼, 왕정 시대의 이웃 민족들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선택한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신학적 봉사에 효과적으로 강조됩니다.히브리 성서 학자인 마르틴 노스(Martin Noth)에 따르면, 이삭의 이야기는 서부 요르단 야곱의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문화 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 지파들은 아직 정착 생활을 하지 않았다. 목초지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블레셋 남부에서 정착한 시골 주민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성서 역사가 A. 욥센은 이삭의 전통과 북부 사이의 연관성을 믿으며 이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모스 7:9("이삭의 산당")을 인용한다.
알브레히트 알트(Albrecht Alt) 와 마르틴 노스(Martin Noth)는 "이삭의 형상은 오경 전통의 성장의 남부-팔레스타인 단계에서 이전에 '조상들 신'의 숭배와 결합되었던 약속의 주제가 이스라엘의 신조에 통합되었을 때 향상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마르틴 노스(Martin Noth)에 따르면 오경 전통의 성장의 남부 팔레스타인 단계에서 이삭은 성경의 족장 중 한 사람으로 확립되었지만 그의 전통은 아브라함에게 유리하게 물러났다.
고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 1961년)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가 기원전 19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John J. Bimson은 1980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이후로... 성경 전통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증거의 사용에 대한 강한 반응이 있었고, 올브라이트의 발언은 오늘날 어떤 진실로도 반복될 수 없습니다". 나훔 M. 사르나 (1978)는 족장들의 이야기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성이 반드시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그의 구약성서 신학 Old Testament Theology (1962)에서 족장 내러티브는 공동체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나중에 해석한 실제 사건을 기술한다고 가정했다. Thomas L. Thompson 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내러티브를 이데올로기 및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착 이전 기간의 역사적 재구성에는 신뢰할 수 없는 후기 문학 작품(기원전 6세기 및 5세기)으로 간주한다. The 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 (1974) 에서 Thompson은 내러티브가 희망을 구현하기 위해 과거의 상상적인 그림으로 표현된 어떤 긴급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했다고 제안했다.
The Bible Unearthed (2001) 은 고대 근동 지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족장(Patriarch) 내러티브의 여러 시대 착오적인 점들을 지적하며, 족장(Patriarch) 내러티브가 실제로 기원전 9-7세기에 설정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아람인이 자주 언급되지만 고대 문헌에는 기원전 1100년경까지 언급되지 않았으며 기원전 9세기 이후에야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속 족장 내러티브에서 낙타를 기반으로 한 무역상들이 고무, 향유, 몰약을 나르는 것을 언급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기원전 8~7세기에야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BC 10세기 이전에는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팀나 계곡의 최근 발굴에서는 이스라엘 또는 심지어 아라비아 반도 외부에서 발견된 가축화된 낙타의 가장 초기 뼈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기원전 93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이 시기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사용된다.
고고학자 윌리엄 G. 데버(William G. Dever)는 2001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세기에 걸친 철저한 조사 끝에 존경할 만한 모든 고고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또는 야곱을 '역사적 인물'로 만들 어떤 맥락도 복구할 희망을 포기했다."
성경에서의 묘사
탄생
족장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며, 그 이름은 이사악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첫 부인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의 두 번째 아들이자 사라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아이였다.
이사악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하는 하느님와의 계약을 준수한 것이다.
이사악이 자라 젖을 뗀 후,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인 여종 하갈을 내쫓으라고 요구했는데, 그제야 비로소 이사악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머뭇거렸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부인의 요청을 따랐다.
번제
이사악이 유년기를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를 모리아산으로 데려갔다. 신의 명령에 따라서 아브라함은 희생 제물을 위한 제단을 쌓고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았다. 그는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놓고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급히 그를 막는다. 아브라함은 그 대신에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 제물로 삼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인간을 제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건이었다.
결혼
이사악이 40세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엘리에셀로 추정되는 종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도록 한다. 노종은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인 리브가를 고른다. 이사악이 결혼한 후 몇 년이 지났지만 리브가는 아직 아기를 갖지 못했고 불임인 것으로 보였다. 이사악은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아이를 가졌다. 리브가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때 이사악이 60세였다.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편애했다.
이주
이사악이 75세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자 브엘라해로이로 옮겨 살았다. 기근이 찾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가 전에 살았던 그랄의 블레셋으로 다시 옮겨갔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 그 땅은 아비멜렉 왕의 지배 하에 있었다. 아버지처럼 이사악은 그의 부인에 대해 아비멜렉에게 거짓말을 했고 우물을 파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아버지가 팠던 우물에 모두 가보았는데 모두 흙으로 막혀 있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시기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악은 다시 그것들을 파고 브엘세바로 가서 더 많은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삭 또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었다.
장자권
나이가 든 이사악은 눈이 어두워져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아들 에서를 불러 자신을 위해 염소를 잡아오면 이사악에게 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에서가 사냥을 하고 있을 즈음, 복을 가로채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야곱은 자신을 에서처럼 꾸며 아버지에게 축복 기도를 받았다. 이로써 야곱이 이사악의 상속자가 되고 에서는 뒤로 밀려나게 된다. 창세기 25장 29-34절에 따르면, 에서는 예전에 야곱에게 '빵과 죽'을 받고 장자권을 판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이사악은 야곱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서 부인을 얻도록 한다. 삼촌 라반을 위해 20년간 일한 후, 야곱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쌍둥이 형 에서에게 사과하고, 그 뒤에 아버지 이사악이 180세의 나이로 죽었고 두 형제는 아버지를 헤브론 땅에 묻는다.
가계도
매장지
지역 전통 관습에 따라서 이삭과 리브가의 무덤은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레아의 무덤과 함께 패트리아크 동굴에 있다.
참조
외부 링크
이삭 - 유대 대백과사전
Abraham's son as the intended sacrifice (Al-Dhabih, Qur'an 37:99, Qur'an 37:99–113): Issues in qur'anic exegesis, journal of Semitic Studies XXX1V/ Spring 1989
성경의 족장
히브리어 성경의 예언자
아브라함의 자식
시각 장애인
구약성경의 성인
가톨릭 성인
동방 정교회 성인
루터교 성인 달력에 표시된 사람
실존 여부가 의심되는 인물
야곱
에서<|end_of_text|>
| 18.819681 | 3,005.34082 |
9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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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EA%B7%9C%20%281964%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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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규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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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이철규 (1964년)
### 기사:
이철규(李哲揆, 1964년 5월 6일~1989년 5월 10일)는 의문사당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이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고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체험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투신한 이철규는 민족 해방(NL) 계열에서 적극으로 활동하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했으며, 1986년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가석방되었다. 당시 조선대학교에서는 총장 박철웅을 상대로 한 학원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었고 이철규는 가석방되자마자 이 운동에 즉시 가담했다가 1988년 학교에 복적했다.
1989년 1월 조선대학교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장을 맡았는데 교지에 실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내용이 문제가 되어 그해 4월 편집위원 전원이 수배당했다. 이후 숨어 지내던 이철규는 5월 3일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중 경찰관에게 검문받았고 검문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되었다.
일주일 뒤인 5월 10일 이철규의 시신이 인근 수원지에 빠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심하게 변색이 되어 있는 등 일반적인 익사체와 다르게 보였기 때문에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이철규를 경찰관이 체포하고서 고문해 죽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실족사라는 당시 수사 결과를 뒤집는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기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있는 의문사 사건으로 남아 있다.
1992년 문병란과 지선이 건립위원장이 되어 추모비를 세웠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같이 보기
이한열
강경대
박종철
조국통일상
임수경
각주
외부 링크
이철규열사 추모사업회 홈페이지
1964년 출생
1989년 사망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노태우 정부
장성군 출신
의문사한 사람<|end_of_text|>
| 15.432998 | 1,734.946004 |
13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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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C3%EC%B0%A8%20%EC%8B%AD%EC%9E%90%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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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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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제3차 십자군
###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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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1189년~1192년)은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이자 '이슬람의 옹호자'라고 알려진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결성된 기독교의 십자군을 말한다.
배경
1169년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한 살라흐 앗 딘은 1171년 재상을 맡아 일해오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하였다. 그 후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낸다는 신념의 실현을 위해 생애 전부를 걸었다. 1174년 시리아를 다스리기 시작해 십자군 국가들을 포위하였다. 1187년 7월 4일 살라흐 앗 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10월 2일 예루살렘이 항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붕괴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당시에 발생했던 십자군들의 잔악한 행위와는 반대로,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정복시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 세력의 거점은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경과
3차 십자군의 발흥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이 유럽에 전해졌을 때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교황 우르바노 3세는 그 충격으로 죽었고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탈환을 목표로 새로운 십자군 파견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호소했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존엄왕 필리프 2세는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상태에 있었으나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종결하고, 쌍방은 국내에서 [사라덴세(稅)]을 부과하여 십자군 편성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양국간의 전쟁은 곧 재개되고, 게다가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가 국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각국의 호응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도 교황의 호소에 답하여 십자군 첫 선봉으로 1189년에 출발했다. 프리드리히는 도중에 살라흐 앗 딘과 비밀협정을 맺었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게로스의 적대적 행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령을 급히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189년 5월 18일 룸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코니움을 점령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가 킬리키아의 살레흐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보다도 많았으나, 프리드리히가 죽자 순식간에 해산하고 말았다. 일부 사람들은 계속 전진했으나 시리아에서 전투를 벌이다 패배한다.
1191년 잉글랜드 왕 사자심왕 리처드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함께 해로를 통해 출발했으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각자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리처드는 도중에 키프로스섬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그 시기 비잔티움 제국측의 총독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에게서 받은 무례에 분노하여 5월말까지 섬 전체를 점령했다. 그 후 이미 유명무실해진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낭에게 이 섬을 넘겼다. 한편 필리프는 티레에 도착해, 예루살렘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코라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아크레 공방전
1191년 4월 필리프는 예전 프리드리히의 패잔병을 가세시켜, 아크레를 포위공격 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리처드의 군이 포위에 가담했다. 아이유브 왕조군은 포위를 뚫으려고 여러차례 시도했으나 격퇴되고, 7월 12일 아크레는 함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십자군측 3명의 사령관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싼 내부항쟁이 벌어졌다. 독일인들의 사령관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와 필리프와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으나, 리처드는 점령한 도시에서 레오폴트의 깃발을 제거했다. 필리프도 또한 리처드에게 불만을 품게되어, 8월 귀국하고 만다.
8월 22일 리처드는 아크레 항복시 맺은 협정을 살라흐 앗 딘이 준수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억류했던 이슬람교도 3,000명을 모두 처형하였다.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한 출발지로써 항구 야파의 탈취를 계획했다. 9월 아르수프를 행군하던 그들은 살라흐 앗 딘에게 공격받았으나, 리처드는 이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아르수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192년 1월 예루살렘에 접근했으나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을 맞닥뜨리자 군대를 후퇴시켰다. 7월에 들어서 살라흐 앗 딘이 야파 탈환의 움직임에 나섰으나, 7월 31일의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의 군대에게 패배해 실패했다.
휴전과 철수
리처드의 군대는 피로가 쌓였고, 언제까지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과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에 대한 불만이 군대 내에 퍼졌다. 1192년 9월 2일 리처드와 살라흐 앗 딘은 1년 이상 교섭을 나눈 결과, 아크레를 포함한 티레부터 야파에 이르는 해안부의 모든항구를 예루살렘 왕국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의 통치하에 둔다는 최종적인 휴전협정을 맺었다.
또한 체결된 문서에는 비무장한 기독교도의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는 것을 허락한다는 조건도 더해졌다. 9월말 리처드는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하고, 제3차 십자군 원정은 이로써 종료되었다.
제3차 십자군의 영향
제3차 십자군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기술한 것은 노르만인 시인 안브로제 및 웨일즈의 역사가 지랄두스 칸브렌시즈의 저작에서 참조하였다.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으나, 하틴 전투 이후 살라흐 앗 딘의 파죽지세가 멈추었고, 해안지역의 도시들을 넘겨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아콘을 탈환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한 것으로 인해, 레반트 교역을 유지하여 이후 약 100년 넘게 라틴 기독교 세력은 해안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십자군에 대한 비협력과 십자군측의 키프로스 점령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측의 균열이 한층 더 심해졌다.
로마 교황은 각 국왕이 주체가 된 십자군에 실망하여 다시 제1차 십자군처럼 제후십자군을 원하게 되었다.
십자군 종료 후에도 아콘에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후에 튜튼 기사단의 기초가 되는 야전병원을 창설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이 전투에서 병을 얻게 되어, 제3차 십자군 원정 1년후, 1193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하고, 그 후 아들들에 의한 후계자 쟁탈이 9년간 계속되었다. 아이유브 왕조는 동생 알아딜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프랑스가 참전한 전쟁
잉글랜드가 참전한 전쟁
동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 관계
12세기 십자군<|end_of_text|>
| 12.659046 | 2,599.292969 |
115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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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E%9C%EB%93%9C%EB%A7%88%ED%81%AC%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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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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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랜드마크 (동음이의)
### 기사:
랜드마크는 어떤 지역에서 두드러지는 지형물이나 사물을 뜻한다.
랜드마크 대학 — 버몬트 퍼트니에 있는 대학.
랜드마크 타워 —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타워.
더 랜드마크() — 홍콩에 있는 명품 쇼핑몰.
랜드마크, 아시안 쿵후 제너레이션의 음반
같이 보기<|end_of_text|>
| 21.249926 | 388.156873 |
4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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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D%98%20%EB%A1%9C%EB%A7%88%20%EA%B0%80%ED%86%A8%EB%A6%AD%20%EC%84%B1%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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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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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기사: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은 모두 103명이며 조선 정부의 박해로 순교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이들 중 79위는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의 순교자로 1925년 7월 5일에 로마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나머지 24위는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로 1968년 10월 6일에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들 103위 복자 모두는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품에 올랐다. 이들의 시성 과정에는 시성의 필수 조건인 기적 심사가 모두 면제되었으며, 시성식은 수 세기 만에 처음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다른 곳(여의도공원)에서 이뤄졌다.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은 9월 20일이다.
성인 목록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 권득인 베드로 (기해박해)
성녀 권진이 아가타 (1840년)
성녀 권희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녀 김 테레사 (1840년)
성녀 김 루치아 (기해박해)
성녀 김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녀 김 로사 로사 (기해박해)
성녀 김 루치아 루치아 (기해박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병오박해, 첫 한국인 천주교 사제)
성 김성우 안토니오 (1841년)
성녀 김성임 마르타 (기해박해)
성녀 김아기 아가타 (기해박해)
성녀 김업이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녀 김유리대 율리에타 (기해박해)
성녀 김임이 데레사 (병오박해)
성녀 김장금 안나 (기해박해)
성 김제준 이냐시오 (기해박해)
성녀 김효임 골룸바 (기해박해)
성녀 김효주 아녜스 (기해박해)
성 남경문 베드로 (병오박해)
성 남명혁 다미아노 (기해박해)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기해박해)
성 남종삼 요한 (병인박해)
성 다블뤼 안토니오 (병인박해, 선교사, 로마 가톨릭 주교)
성 도리 베드로 (병인박해)
성 모방 베드로 (기해박해)
성 민극가 스테파노 (1840년)
성녀 박봉손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녀 박아기 안나 (기해박해)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1840년)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 (기해박해)
성 박후재 요한 (기해박해)
성녀 박희순 루치아 (기해박해, 궁녀)
성 베르뇌 시메온 (병인박해, 로마 가톨릭 주교)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 (병인박해)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병인박해)
성 샤스탕 야고보 (기해박해)
성 손선지 베드로 (병인박해)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1840년)
성 손자선 토마스 (병인박해)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기해박해, 로마 가톨릭 주교)
성 오메트르 베드로 (병인박해)
성 우세영 알렉시오 (병인박해)
성녀 우술임 수산나 (병오박해)
성녀 원귀임 마리아 (기해박해)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병인박해)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기해박해)
성 유대철 베드로 (기해박해, 최연소 순교자)
성 유정률 베드로 (병인박해)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기해박해)
성녀 이 가타리나 (기해박해)
성녀 이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녀 이 아가타 (1840년)
성녀 이간난 아가타 (병오박해)
성녀 이경이 아가타 (1840년)
성 이광렬 요한 (기해박해)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기해박해)
성녀 이매임 데레사 (기해박해)
성 이명서 베드로 (병인박해)
성 이문우 요한 (1840년)
성녀 이소사 아가타 (기해박해)
성녀 이연희 마리아 (기해박해)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 이윤일 요한 (병인박해)
성녀 이인덕 마리아 (1840년)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 이호영 베드로 (기해박해)
성 임치백 요셉 (병오박해)
성 장성집 요셉 (기해박해)
성 장주기 요셉 (병인박해)
성녀 전경협 아가타 (기해박해)
성 전장운 요한 (병인박해)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기해박해)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병인박해)
성 정원지 베드로 (병인박해)
성 정의배 마르코 (병인박해)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기해박해)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 (병오박해)
성 정하상 바오로 (기해박해)
성 정화경 안드레아 (1840년)
성녀 조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 조신철 가롤로 (기해박해)
성 조윤호 요셉 (병인박해)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 조화서 베드로 (병인박해)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기해박해, 최양업 사제의 부친)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1840년)
성 최창흡 베드로 (기해박해)
성 최형 베드로 (병인박해)
성녀 한아기 바르바라 (기해박해)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 (병오박해)
성 한재권 요셉 (병인박해)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 (기해박해)
성 허협 바오로 (1840년)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 (기해박해)
성 현석문 가롤로 (병오박해)
성녀 홍금주 페르페투아 (기해박해)
성 홍병주 베드로 (1840년)
성 홍영주 바오로 (1840년)
성 황석두 루카 (병인박해)
한국의 시복시성 운동
2014년 8월 16일에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제1차 시복식(윤지충 바오로를 포함한 순교 복자 124위)을 거행했으며,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부터 5월 29일을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제2차 시복 시성 (이벽 요한 세례자를 포함한 순교자 133위) 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시성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를 포함한 순교자 81위) 을 추진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덕원의 순교자" 시복 시성(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를 포함한 순교자 38위)을 추진하고 있다.
각주
가톨릭 성인
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
교황 프란치스코가 시복한 복자<|end_of_text|>
| 8.673242 | 2,212.088379 |
96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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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84%EA%B1%B4%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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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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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버건군
### 기사:
버건군(Bergen County)은 미국 뉴저지주의 카운티(county)로, 뉴저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카운티이다. 2016년 추정 인구조사에 의하면 939,151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2010년 인구조사 때보다 3.8% 높다. 버건 군에는 71개의 지자체들(municipalities)이 있다. 뉴욕과 조지 워싱턴 교를 통해 연결된 포트리(Fort Lee) 등의 도시가 있다.
버건 군은 미국에서 한국계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군이다. 2010년 인구조사에서는 6.3%, 2011에는 6.9%로 집계되고 있으며, 미국 전국에서 한국계 인구 비율이 제일 높은 톱 10개 지자체가 모두 버건 군에 있다. 이에 따라 선거 시에 한국어로 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있기도 하다.
인구
갤러리
각주
외부 링크
버건 군청(Bergen County)
뉴저지주의 군<|end_of_text|>
| 12.965567 | 671.321842 |
27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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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A9%EC%9C%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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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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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합유
### 기사:
합유(合有)는 법률의 규정이나 계약에 의하여 수인이 조합체로서 물건을 소유하는 형태를 말한다. 법률의 규정으로 합유 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는 민법의 조합재산, 수탁자가 수인있는 경우 신탁 재산 등이 있다. 부동산을 합유하는 때에는 등기를 해야 한다. 합유는 공유와 총유의 중간 형태로 공유와 달리 합유는 지분처분의 자유와 분할청구권이 없다.
성질
공유와 총유의 중간 형태로, 공유와 달리 합유는 지분처분의 자유와 분할청구권이 없다.
분류
공유
총유
물권법
민법
법률 용어<|end_of_text|>
| 14.782179 | 549.458153 |
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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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EC%A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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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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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삼국지
### 기사:
《삼국지》(三國志)는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중국 삼국시대의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후한 말기부터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다. 본래의 표제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인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삼국지는 '사기', '한서'의 체계를 따라 기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쓰여진 역사서이다. 진수는 황제들의 전기인 본기를 위나라의 황제들로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무제(武帝, 조조), 명제(明帝, 조예) 등의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여 기술하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는 진수가 벼슬을 하던 진나라가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나라이기에 위를 정통으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진수의 이러한 사관은 훗날 습착치의 《한진춘추》나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이 촉을 정통으로 보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위/촉한정통론에 대해서는 정통론을 참조하라.)
배송지주
《삼국지주》(三國志注) 또는 《배송지주》(裴松之注)는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가 역사학자 배송지에게 명하여 삼국지에 주를 단 것으로 “배주”(裴注)라고도 하고 원문과 함께 칭할 때는 “수지배주”(壽志裴注)라고도 한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한 것이다. 본래 주(注)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약 200여 권이 넘는 여러 사서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 자, 주(註)가 54만 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본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 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 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 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 자 주가 약 4만 2천 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 자 주가 약 6만 5천 자이다.
목차
위서(魏書)
본기
열전
오환선비동이전
서술이 간결하고 분명하여 명저라 일컬어져 왔다. 또한 위서의 마지막 30권인 위서 동이전(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순서별로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 왜인 등의 동양 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혼란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어려워 많은 사료를 참고하지 못하였다. 진수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왕침(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전(夫餘傳)
부여전(夫餘傳)은 총 930자(字)이며,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한 최초의 열전(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衣食)·의례(儀禮)·풍속·산물(産物) 등 부여의 생활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현도군·후한(後漢)·공손씨(公孫氏) 등 중국의 제(諸) 세력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 《위략(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진수가 참고한《위략(魏略)》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위략(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魏略)》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부여전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두찬(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략(魏略)》이 멸실된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촉서(蜀書)
오서(吳書)
위의 목차는 송나라 이후에 보편화된 삼국지 목록 체계에 따른 것이다.
관련 도서
참고서
청나라: 전대소(錢大昭)의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3권),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30권),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
최근: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고적출판사 간, 1957, 65권+보권 2권), 소연뢰(蘇淵雷)의 삼국지 금주금역(三國志今注今譯)(호남사범대학교출판사, 1991)
우리말 번역
첫 번역: 김원중 옮김, 《정사 삼국지》(전 4권), 민음사, 2007
개정 번역: ″, 《정사 삼국지》(전 4권), 휴머니스트, 2018
진기환 번역 《삼국지》(전 6권) 명문당, 2019
같이 보기
중국의 삼국 시대
삼국지 게임 시리즈
정통론
정사 및 연의 삼국지 인물 전체 목록
후한서
진서
각주
외부 링크
wikisource - 후한서(後漢書)
wikisource - 삼국지(三國志)
wikisource - 자치통감(資治通鑑)
이십사사
진나라 (위진)의 문학
명수 3
기전체
3세기 역사책<|end_of_text|>
| 16.234621 | 2,854.037598 |
3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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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84%EC%A7%80%EB%8B%88%EC%95%84%EB%B9%84%EC%B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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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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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버지니아비치
### 기사:
버지니아비치(Virginia Beach)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독립시이다. 인구 425,257명 (2000년)으로 버지니아주 최대, 미국 전체에서 40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
기후
각주
내용주
외부 링크
버지니아비치 공식 홈페이지 (영어)
버지니아주의 도시
미국의 해수욕장<|end_of_text|>
| 22.148891 | 356.245549 |
15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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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C%8A%A4%ED%83%80%EB%A6%AC%EC%B9%B4%20%EC%9A%94%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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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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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코스타리카 요리
### 기사:
코스타리카 요리(Costa Rica 料理, )는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코스타리카의 요리이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쓰는 식단으로서 맛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이라고 한다. 주요 요리로는 가요 핀토()가 있는데 쌀과 검은 콩을 넣고 만드는 음식으로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하루 세 끼 꼭 나오는 음식이다.
요리
전형적인 코스타리카의 아침은 가요 핀토와 계란 오렌지 주스로 시작한다. 니카라과에서는 팥으로 수프를 만들어 먹지만 코스타리카에서는 검은 콩으로 만들어 먹는다.
점심 때는 국가 전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요리인 카사도를 먹는다. 쌀과 콩으로 만드는 방식은 똑같지만 각각 조리해서 따로 나오는 것이 가요 핀토와 다른 점이다. 고기나 샐러드도 같이 내놓는다. 치즈나 토르티야를 함께 먹기도 한다.
모든 식단에서 야채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호박과에 속하는 야채를 많이 먹는다. 주치니, 자파요, 차요테 등의 요리가 있고 감자, 양파, 빨간색 고추가 보통 들어간다. 저녁 식사 때는 쌀과 닭고기, 계란을 먹는다.
커피와 바나나가 주요 수출품인 만큼 지역 요리에서도 두 재료가 많이 등장한다. 커피는 아침에 많이 먹고 오후 3시 즈음에 있는 커피 타임 때 마신다.
음료
커피 이외에 아침에 먹는 전통차로는 단물이라는 것이 있다. 또 사탕수수즙을 주전자에 끓여서 고체로 굳혀 먹기도 한다.
점심 때 먹는 음료도 따로 있다. 프레스코(스페인어로 시원하다는 뜻) 혹은 레프레스코라고 하는데 과일즙을 내서 물이나 우유에 달게 해서 먹는다. 메론이나 딸기, 수박, 망고, 구아바 등을 재료로 쓴다.
그라니사도라고 하는 음료도 있는데 잘게 얼음을 갈아서 위에 시럽을 얹어서 만드는 음료수이다.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은 콜라 맛이다. 이것은 탄산을 탄 콜라 맛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체리 맛을 내는 시럽 종류를 지칭하는 것이다.
코스타리카의 국민 술이 있다면 그것은 가로(guaro)라는 것인데 사탕수수로 만든다.
같이 보기
라틴 아메리카 요리
중앙아메리카 요리<|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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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B0%20%ED%85%8C%EB%AC%B4%EB%A5%B4%20%ED%86%A0%EA%B3%A0%EA%B0%84%20%EC%B9%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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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테무르 토고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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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군 테무르 토고간 칸
### 기사:
군 테무르 칸(坤帖木兒汗, ᠭᠦᠩ ᠲᠡᠮᠦᠷ, Гүнтөмөр хаан, 1377년 ~ 1402년)은 몽골 북원의 대칸(재위: 1400년 ~ 1402년)이었다. 휘는 보르지긴 군 테무르()였다. 다른 이름은 '코케 테무르'(Köke temür)였으며, 몽골식 존호는 토고간 칸(脱古罕 可汗, ᠲᠣᠭᠣᠭᠠᠨ ᠬᠠᠭᠠᠨ, Toγoγan qaγan)이었다. 페르시아 사서에는 '쿤 테무르'(کن تیمور), 투르크식 이름은 '투란 테무르'(突蘭帖木爾)였다. 청나라 때인 1662년에 편찬된 《흠정몽골원류》에는 '군 테무르'(琨特穆尔)로 표기되었다. 타환 카안(托歡 可汗, Тогоон хаан)이라는 이름도 있다.
그는 신장의 합밀 칸국 복속을 시도했으며, 그의 통치기간 중 서부 몽골의 오이라트와 동부 몽골 사이의 분단이 심화되었다. 명나라의 사서인 《명사》에 의하면 그는 북원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1402년 굴리치의 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그의 이름 '군 테무르'에서 '군'은 몽골어로 '깊고', '지적인', '강한'이라는 뜻이었고, '테무르'는 '철', '두꺼운 철', '지혜'를 의미했다.
생애
초기 생애
군 테무르는 1377년에 태어났으며 《몽골원류》에 의하면 전임 대칸이었던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장남 혹은 둘째 아들, 혹은 다른 아들이었고, 아리크 부케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돌궐계보》(突厥系谱)에 의하면 그는 칭기즈 칸의 또 다른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쿠빌라이 칸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아리크 부카의 또다른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아버지 엘베그 칸도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의 아들이라는 설과 쿠빌라이 칸의 후손 설 및 아리크 부케의 후손 설 등이 있어, 군 테무르의 가계는 불확실하다. 페르시아어로 된 또다른 몽골 사서《전기지우》(傳記之友)에 의하면 그는 칭기즈 칸의 또다른 자손이라는 설도 있다. 《몽골비사》에는 그와 전임 칸, 후임 칸의 정확한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부냐시리 울제이테무르 칸의 형이라는 설과, 그의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1404년에 티무르 제국의 사마르칸트를 방문했던 카스티야 왕국의 사절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Ruy González de Clavijo)에 의하면 군 테무르는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막내 동생으로, 엘베그 칸에 저항했었다 한다. 티무르 제국의 페르시아계 작가 무함마드 크완다미르의 책 하비브 알 시야르(Habib al-siyar)에는 그는 칭기즈 칸의 또다른 후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티무르 제국 계열의 다른 문헌에 의하면 그는 아리크 부카 가문의 또다른 후손이라 한다.
엥케 칸과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을 동일인물로 오해했던 문헌 항하지류(恒河之流)에 의하면 그는 엔케 엘베그의 아들이라 한다.
군 테무르에서 군은 몽골어로 깊고, 지적인, 강한이라는 뜻이고, 테무르는 철을 의미한다. 또는 중세 몽골어로 두꺼운 철, 또는 지혜, 지적인, 강한 이를 의미한다. 그의 초기 생애와 행적에 대한 것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몽골어 존호인 토고간 칸 혹은 황금사에 의하면 타환 카안(托歡 可汗, Тогоон хаан)으로 표기되는데, 토곤은 몽골어로 냄비, 가마를 뜻한다. 몽골 황금사에 의하면 다른 이름도 전하는데, 투란테무르라 한다.
북원의 대칸 즉위
1399년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이 여인 문제로 틀어진 오이라트에 의해 암살되자 그 뒤를 이었다. 명나라의 최전성기를 열은 성조 영락제 주체는 서몽골 오이라트의 수장 우게치 카스카를 몽골의 새로운 통치자로 승인했다. 오이라트 우게치 카스카와 바툴라 칭상은 자신들을 공동 통치자, 오이라트와 몽골의 칸이라고 선언했다. 몽골의 지도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군 테무르를 대칸으로 추대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원수인 우게치 카스카를 몰아내고, 동몽골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아 카라코룸으로 입성, 정권을 차지했다. 일설에는 아수드 출신 아룩타이가 우게치 카사하를 실각시켰다 한다. 그러나 몽골 서부에는 오이라트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기에, 군 테무르의 영향력은 몽골 중부와 동부에 한정되었다.
한편 우게치 카스카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을 시해하고, 이듬해 군 테무르를 대칸으로 옹립했다는 설도 있다. 알탄 톱치(Алтан товч)에 의하면 1399년 그가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을 살해하고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했다 한다. 몽골원류에 의하면 1400년에 즉위했다는 설이 있다.
《명태종(성조)실록》에 의하면 1400년 2월 18일 명나라의 연왕 주체는 조카인 혜종 건문제를 상대로 정난의 변을 일으키기 직전, 몽골의 대칸인 군 테무르와 오이라트의 수장 몽케 테무르에게 효유하는 사자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연왕 주체가 군 테무르 토고간 칸에게 보낸 서신의 정확한 내용은 《명태종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오이라트와의 갈등, 피살
토고간 칸의 통치 기간 동안 서몽골의 오이라트와 동몽골의 북원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토고간 칸은 자신의 권위를 굳히고자, 명나라와 동맹을 맺었던 카라델 칸국을 공격했다. 토고간 칸은 카라델 칸국의 칸 엥케 테무르를 사로잡아 살해했다.
명나라의 연왕 주체는 오이라트의 우게치 카스하, 바툴라 칭상 등을 몽골의 지도자로 승인하였다. 군 테무르는 명나라에 여러번 사절을 보내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1401년 12월 31일 군 테무르는 명나라로 사자를 파견해 수교를 체결하였다.
1402년 봄, 토고간 칸은 울루그 테무르 칸 굴리치의 공격을 받았다. 이어 울루그 테무르 칸 굴리치, 오이라트의 바툴라(마흐무드), 아수드(알란, 아스, 아스트)의 아룩타이 등과 싸우다 패배했고, 결국 굴리치의 칼에 맞아 시해당했다. 명나라의 기록에 의하면 도쿠즈(脫古思)라는 인물에게 암살되었다 한다. 정확한 사망 시점은 전하지 않으나 명사明史) 권327에 의하면 1402년 봄이었다 한다.
사후
일설에는 1402년 사망 당시 그의 나이가 28세였다는 설도 있다.
울루그 테무르 칸 굴리치는 토고간 칸을 시해하고 몽골의 대칸이 된 뒤, 북원이라는 국호와 황제 칭호를 폐지했다 한다. 그러나 이후로도 에센 타이시, 다얀 카안 등은 스스로를 원나라의 카안을 자처하여 다소 이견이 있다. 토고간 칸 군 테무르의 시호, 묘호 추서 연도는 불명으로 《명사》(明史) 권327 <열전> 제215에는 그의. 장지는 미상이다.
청나라에서 음역한 문헌에서는 그의 칭호는 토고간 카안(脫古罕可汗)으로 나타난다.
각주
1377년 출생
1402년 사망
북원의 대칸
원나라의 군인
원나라의 황제
보르지긴
테무르
암살된 사람
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칭기즈 칸의 후예<|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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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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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B9%EA%B0%95%EB%8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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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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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맹강녀
### 기사:
맹강녀(孟姜女)는 만리장성을 울음으로 무너뜨렸다는 만리장성 축성공사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의 여주인공이다. 폭정(暴政)의 비극을 실화로서 말할 수 없으므로, 전설의 형태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맹강(孟姜)이라는 말은 '강(姜)'씨 성을 가진 집안의 맏딸이라는 뜻이다. 이 맹강녀는 시경(詩經)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小雅 - 有女同車章)
맹강녀의 전설
맹강녀(孟姜女) 이야기는 중국에 전해오는 4대 민간 전설의 하나다.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의 주인공이다.
전국시대 진의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천하에 인부 동원령을 내렸다. 제나라 여인이었던 맹강녀의 남편 범희량(范喜良)도 인부로 징용됐다. 혼인한 지 사흘만이었다. 남편이 떠나고 맹강녀는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시 황제의 만리장성 보다 맹강녀가 흘린 그리움의 눈물이 먼저 만리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르고 엄동설한, 겨울이 깊었다. 도저히 집에 머무를 수 없었던 맹강녀는 두툼한 솜옷을 지어 길을 나섰다.
몇날 며칠이 지나 만리장성 축조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성벽 아래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묻혔다고 했다. 원통 분통, 맹강녀는 통곡을 했다. 사흘 밤낮을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늘이 답했다. 만리장성 800리가 무너졌다.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백골 뿐, 남편의 유골을 찾는 게 불가능했다. 맹강녀는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마다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중 한 유골이 피를 빨아들였다. 남편이었다. 맹강녀는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내고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었다.
멍장뉘먀오
멍장뉘먀오는 孟姜女庙(맹강녀묘)라고 하는데 산하이관성[山海关城] 동부 왕푸스촌[望夫石村] 북부에 자리한 봉황산(鳳凰山)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다.
'정녀사'라고도 하며 송대(宋代)에 세워져, 명대(明代)에 중건되었다.
같이 보기
백사전
양축(梁祝) -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
견우직녀(牽牛織女)
각주
진나라 사람
진나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end_of_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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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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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1%B4%EB%A6%AC%ED%8B%B0%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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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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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클리티아
### 기사:
클리티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님프로,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이다.
클리티아는 헬리오스의 사랑을 받았지만, 뒷날 레우코테아를 사랑하게 된 헬리오스는 클리티아를 버렸다. 레우코테아를 질투한 클리티아가 레우코테아의 아버지 오르카모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오르카모스는 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딸을 산 채로 매장하였다. 클리티아는 레우코테아가 죽었으므로 헬리오스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헬리오스는 클리티아에게 반감을 가져 그녀에게 가지 않았다. 헬리오스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 클리티아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벌거벗은 채 바위 위에서 9일 동안 자신을 버린 태양신 헬리오스를 바라보았다. 9일이 지나자 클리티아는 노란색과 갈색으로 이루어진 해바라기로 변하게 되었다. (그녀가 변한 꽃이 헬리오트로프, 혹은 금잔화라고도 한다.) 해바라기로 변한 클리티아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헬리오스가 모는 태양 전차 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되었다. 이 신화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등장한다.
각주
그리스 신화
님프<|end_of_text|>
| 12.48379 | 961.808207 |
250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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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C%9A%B4%EA%B5%90%ED%86%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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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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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세운교통
### 기사:
세운교통은 인천광역시의 시내버스 회사이며, 본사 및 차고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에 있으며 시영운수와 같은 위치에 있다.
주요 연혁
1992년: 부개운수로 인천마을버스 회사 설립.
1992년 7월 22일: 마을버스 부평 11번(現 561번: 삼능 - 부일여자중학교 - 부개4거리 - 부평역)노선을 낙찰받아 운행하였다.
1995년: 당시 일신교통 마을버스 회사(당시 부평9번(現 559번), 부평9-1번(現 579번))를 인수하여 부일운수로 변경 설립하였다.
2000년 12월 13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개동 502-4로 회사 이전.
2002년 1월: 강인여객의 11번 시내버스, 인천버스의 67번 시내버스노선을 인수하여 운행하였고, 지선버스 561번(전 부평11번)을 스위트버스에 매각하였다.
2006년 11월: 원진운수로부터 24번 시내버스(연안부두 - 동인천역 - 송림동 - 가좌동 - 부평역) 노선을 인수하였다.
2008년 1월: 원진운수로부터 24-1번 시내버스(가좌범양아파트 - 산곡동 - 부평역 - 삼산동 - 임학역) 노선을 인수하였다.
2009년 7월 10일: 계열사 부일버스를 설립하여 24번 시내버스와 지선버스 노선을 보유하게 된다.
2010년: 부일운수의 간선버스 노선을 오케이버스에 인수되어 계열사로 편입되었다.
2011년 7월 20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청천동 67-2로 회사 이전
2012년 10월 4일: 인천광역시 부평구 보도진로30번길 26 (가좌동)으로 회사 이전.
2014년 3월 28일: 67번 시내버스 노선이 가좌동 범양아파트 기점에서 가좌진주아파트-가좌고-인천의료원-가좌동차고지로 노선이 연장되었으며 기점도 가좌동 차고지로 변경되었다.
2014년 10월: 인천 시내버스 최초로 한국화이바 화이버드 투입
2016년 7월 20일: 인천광역시 서구 경명대로 463 (경서동)에 광역버스 지점 설치. 지배인 박수응 선임.
2016년 7월 30일: 인천시내버스 노선개편으로 24-1번 노선이 가좌범양아파트에서 가좌동 차고지로 기점 및 노선이 변경되었고, 67-1번 노선도 삼산농산물시장에서 가좌동 차고지로 기점과 노선이 변경되었다.
2016년 8월 1일: 삼화고속으로부터 광역버스 9500번 인수
2016년 9월 21일: 본점을 현 위치인 인천광역시 서구 보도진로18번길 24-1 (가좌동)으로 이전. 시영운수 주식회사에 인수. 여옥현 대표이사 사임, 안광헌 대표이사 취임.
2016년 10월 4일: 회사명을 부일운수 주식회사에서 세운교통 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 여상현 대표이사 사임, 이준우 대표이사 취임.
2016년 12월 3일: 11번 시내버스(문학경기장 - 인천터미널 - 인천대공원 - 송내역 - 일신동 3군지사)와 67번 시내버스(가좌동 차고지 - 인천의료원 - 진주아파트 - 부평역) 노선을 통합하여 통합 11번으로 개통하여 운행.
2016년 12월 6일: 삼화고속으로부터 광역버스 1400번 인수
2017년 3월 27일: 9500번 광역버스 노선이 인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부평역으로 기점이 변경되어 운행.
2017년 5월 1일: 삼화고속으로부터 광역버스 1000번 인수하였다.
2017년 6월 1일: 보유했던 광역버스 3개 노선을 마니교통에 양도양수 하였다.
2020년 9월 20일: 광역버스지점을 폐지.
2020년 12월 31일: 인천시내버스 개편으로 24-1번 노선이 종점이 오조산공원에서 청라국제도시역으로 변경되어 운행.
2022년: 사모펀드 '차파트너스'에 피인수
운행 노선
간선버스
인천이음버스
이전 보유 노선
● 67번: 가좌동(시영운수차고) ~ 부평역 (2016년 12월 2일까지 운행 후 11번과 통합)(2021년~2022년 신동아교통에서 운행했던 67번과는 다른 노선이다.)
● 1400번: 인천종합버스터미널 ~ 서울역(마니교통에 매각)
● 9500번: 부평역 ~ 양재시민의숲역(마니교통에 매각)
운용 차량
한국화이바 프리머스
에디슨모터스 화이버드
자일대우 BS106 뉴 로얄시티
에디슨모터스 스마트 110
에디슨모터스 스마트 8.7
현대 뉴 슈퍼 에어로시티
현대 일렉시티
본점 및 지점 현황
본점: 인천광역시 서구 보도진로18번길 24-1 (가좌동)
각주
차파트너스
인천광역시의 시내버스 기업
인천 서구의 교통
1999년 설립된 기업<|end_of_text|>
| 8.856004 | 2,233.441895 |
116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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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C%95%88%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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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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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기사
### 제목: 노안역
### 기사:
노안역(Noan station, 老安驛)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장동리에 있는 호남선의 철도역이다. 호남선 복선화 공사와 동시에 현 위치로 옮겼으나, 마을과 바로 인접해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허허벌판에 위치해 이용객이 급감하여 2011년 10월 5일부터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다.
역사
1939년 5월 16일 : 영업 개시
1944년 6월 15일 : 폐역
일자 불명 : 역 신설로 영업 재개시
1949년 2월 26일 : 배치간이역으로 승격
1960년 2월 1일 : 보통역으로 승격
1977년 5월 16일 : 수소화물 취급 중지
2001년 7월 10일 : 호남선 복선 전철화로 역사 신축 이전
2009년 10월 31일 : 화물 취급 중지
2010년 7월 1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
2011년 10월 5일 : 여객 취급 중지
각주
나주시의 건축물
전라남도의 철도역
나주시의 교통
1939년 개업한 철도역
1944년 폐지된 철도역<|end_of_text|>
| 7.751232 | 726.987389 |
Subsets and Spl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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