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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불교가 한창 번창하던 신라에는 크고 작은 절이 많았어요. 신라 사람들은 그 중에서 황룡사를 특히 아끼고 자랑스러워했지요. 하루는 황룡사의 절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렸어요. 다들 무엇엔가 홀린 표정이었답니다. 황룡사의 뒷벽에 푸르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서 있었어요. “이렇게 잘생긴 소나무는 처음 보네그려.” “황룡사의 기운이 좋은 건 이 소나무 때문일 거예요.” 사람들이 소나무를 보며 한 마디씩 말했어요. 한 남자는 무릎을 두드리며 말했어요. “이 나무 밑에서 쉬면 아픈 다리도 싹 낫겠구먼.” 그때,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나타나 소나무 주위를 빙빙 맴돌았지요. 매는 눈이 밝아 땅 위의 작은 동물도 정확하게 보는 새지요. “저 매도 이 소나무를 좋아하나 보네, 허허허.” 바로 그때였어요. 하늘 위를 빙빙 돌던 매가 소나무에 앉으려고 날아왔어요. 탁! 나무에 앉으려던 매가 무언가에 세게 부딪치고는 땅으로 떨어졌어요. 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가 소나무를 만져 보더니 소리를 질렀어요. “나무가 아니야! 이 소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그림이야!” 황룡사 뒷벽의 소나무는 진짜 나무가 아니라 벽에 그려진 그림이었던 거예요. 소나무 그림에 관한 소문은 신라 곳곳으로 퍼졌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소나무 그림에 관한 이야기뿐이었지요. “황룡사에 가 봤어요? 절 뒷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소나무가 살아 있다지 뭡니까?” “얼마나 감쪽같은지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고 한대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바람이 불면 소나무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린다지 뭡니까? 본 사람도 있대요.” 이렇게 유명한 소나무 그림은 ‘솔거’라는 사람이 그린 것이었어요. 솔거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솔거의 집은 그날그날 끼니 걱정을 할 만큼 가난했지요. 솔거가 갓난아이였을 때 솔거의 어머니가 밭일을 하기 위해 어린 솔거를 풀밭 위에 잠시 눕혀 놓았어요.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 밥을 먹으려고 풀밭으로 온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갓난아이가 손가락으로 흙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은 솔거가 그린 그림을 보며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지요. “허어, 그놈 참 신통하게 잘 그리는구먼. 솜씨를 보니 앞으로 훌륭한 화가가 될 게야.” 시간이 흘러 솔거는 열세 살이 되었어요. 한창 뛰어놀 나이였지만, 솔거는 오로지 그림만 그렸어요. 하루는 솔거가 친구들과 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갔어요. 지게에 나무를 짊어지고 걷던 솔거는 큰 바위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어요. 바위 밑에는 칡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지요. “나는 좀 있다 갈 테니까 너희 먼저 내려가.” 솔거는 지게를 내려 놓고 칡뿌리를 뜯었어요. 그리고 칡뿌리로 바위 위에 그림을 그렸어요. 친구들은 솔거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였어요. “그림은 종이에 그리는 거잖아.” “종이가 얼마나 비싼데, 그걸 어떻게 구해?” 솔거의 집은 가난해서 그림 공부는커녕, 종이도 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솔거는 모래며, 흙이며, 바위며 그릴 수 있는 것에는 가리지 않고 그림 연습을 했지요. 솔거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솔거의 그림이 신통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솔거는 언제부터인가 단군을 그리고 싶었지만 그릴 수 없었어요. 단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날도 솔거는 단군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어요. “내가 단군이니라. 너의 정성이 갸륵하여 너를 도와주겠다.” 잠에서 깬 솔거는 꿈에서 본 단군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어요. “그래, 이제 그릴 수 있어!” 솔거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단숨에 단군의 얼굴을 무려 천 장이나 그렸어요. 며칠 만에 단군의 초상화 천 장을 그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솔거는 더욱 유명해졌어요. 어느 날, 한 귀족이 솔거의 집을 찾아왔어요. “그대가 천재 화가 솔거인가? 그대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네. 돈은 넉넉히 줄 터이니 내 초상화를 그려 주게나.” 솔거는 귀족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어요. “죄송하오나 아직 저는 미천하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시지요.” 솔거가 거절하자 귀족은 화를 내며 가 버렸어요. 솔거의 어머니는 궁금한 마음에 물었어요. “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 네 실력이면 충분히 그릴 수 있을 터인데.” 솔거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어머니, 저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귀족들의 초상화나 그리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꼭 제가 그려야만 하는 그림이 있겠지요? 저는 제가 그려야 하는 그림을 찾겠습니다.” 그 길로 집을 나온 솔거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지요. 집을 떠난 이후, 솔거는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그림만 그렸어요. 솔거는 돈이나 명예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자신만의 그림을 원했지요. 여기저기 다니던 솔거는 어느 마을에서 한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아가씨는 마을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지요. 어느 날, 아가씨의 아버지가 솔거를 찾아왔어요. “이제 내 딸이 나이가 차 짝을 찾아 주려 했으나 자네와의 정을 버릴 수 없다고 하니 별 도리가 없네. 내 딸과 혼례를 서두르도록 하세. 허나 조건이 있네.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은 그만두고, 우리 가게를 도와 주게. 그리 하겠는가?” 솔거는 고개를 떨구었어요.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그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사옵니다.” 솔거의 말에 상인은 크게 화를 냈어요. “이런 고얀 것을 보았나!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주려 했거늘, 끝까지 그림쟁이 노릇을 하겠다는 게야?” 상인은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고 돌아갔어요. 솔거는 사랑을 포기하고 길을 떠나 어느덧 황룡사에 이르렀어요. 솔거는 황룡사에 머물며 오로지 그림만 그렸어요.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황룡사의 주지 스님은 솔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어요. 황룡사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절이었어요. 솔거는 절의 풍경을 그리고 싶었어요. 절 앞마당에 그림 도구를 펼치고 막 그림을 그리려는데 주지 스님이 다가왔어요. “여보게, 이 늙은 중의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소?” “무슨 부탁이신지요?” 주지 스님은 솔거를 데리고 황룡사 뒷벽으로 갔어요. “이왕 그리는 거 이 벽에 소나무 하나 그려 줄 수 있겠소? 내 늘 이 뒷벽이 허전하다 생각했다오. 푸른 소나무를 그려 사람들이 쉬어가게 하면 어떨까 싶소이다.” 솔거는 주지 스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이곳에 소나무를 그리면 사람들이 쉬어가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솔거를 보며 빙그레 미소지을 뿐이었어요. 솔거는 잠시 생각에 빠졌어요. ‘소나무를 그려야 하나? 이제껏 나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찾아 헤맸거늘 사람들도 오지 않는 이런 외진 벽에 겨우 소나무 그림이나 그려야 한단 말인가?’ 솔거는 혼자서 산책을 했어요. 우연히 황룡사 뒷벽으로 갔을 때 한 아이가 벽에 나무를 그리고 있는 게 보였어요. “여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인데 어찌 혼자 여기 있는 것이냐?” 아이는 솔거를 보며 싱긋 웃었어요. “잘 모르시나 봐요. 이 절에서 여기가 제일 좋은 곳이에요. 경치도 좋고 바람이 시원해서 여기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여기가 말이냐? 그런데 그림은 왜 그리려고 하느냐?” 솔거는 그 까닭이 궁금했어요. “큰 나무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곳에서 더욱 편안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솔거는 크게 깨달았어요. “어른인 내가 어린 너보다 생각이 짧았구나. 진정한 그림이란 나보다 남을 위할 때 더 빛나는 것을.” 솔거는 소나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일임을 깨달았어요. 솔거는 몸을 깨끗이 하고 깊은 명상에 잠겼어요. 그러고는 황룡사의 뒷벽 앞에 섰어요. 주지 스님이 솔거를 보며 말했어요. “이제 마음을 잡으신 듯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솔거는 비장한 표정으로 주지 스님을 보았어요. “스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릴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하오나 모든 정성을 다해 그려 보겠습니다.” 솔거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은 채 오로지 소나무 그리기에 열중했어요.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어요. 솔거의 얼굴은 점점 초췌해졌지만 어느 때보다도 눈빛은 빛났지요. 솔거는 소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바람이 불거나 날이 추워도 붓을 놓지 않았지요. 드디어 소나무 그림이 완성되었고, 솔거는 조심스럽게 마지막 색을 칠했어요. “이제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림을 그렸으니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 사람들은 소나무가 그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 밑에서 쉬어 가곤 했어요. 솔거는 사람들이 소나무 그림을 사랑해 주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어요. 그때 대궐에서 한 사람이 솔거를 찾아왔어요. “그대의 명성이 이미 신라 땅에 자자하오이다. 그대를 대궐 안에서 일하게 하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지만 솔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어요. “저는 그리 뛰어난 화가가 아니옵니다. 대궐로 가는 것은 영광이기는 하오나 대궐 안에 머무는 한 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대궐에서 나온 사람은 끝내 솔거를 설득하지 못한 채 돌아갔어요. 솔거는 오랫동안 머물렀던 황룡사를 떠나 또다시 길을 떠났어요. 솔거가 황룡사를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사람들은 솔거를 찾아 헤맸지만 솔거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동안 솔거가 그린 소나무도 늙어 갔지요. 오랜 세월의 비바람 속에 소나무의 색깔도 바래져 가고 황룡사에도 새로운 스님들이 들어왔어요. 어느 날, 한 스님이 걱정스러운 듯 소나무 그림을 보았어요. “어허, 소나무가 푸른 빛을 잃고 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이 소나무는 황룡사의 상징인 것을. 이대로 둘 수는 없겠구나.” 스님은 신라에서 유명하다는 화가를 불렀어요. “우리 황룡사의 소나무 그림은 중요한 그림이오. 그런데 색깔이 변해가고 있으니 소나무를 다시 푸르게 만들어 주시오.” 화가는 솔거가 그린 소나무 그림 위에 덧칠을 했어요. 소나무는 푸른 빛깔로 되살아나고 훌륭한 소나무가 되었지요. 사람들도 푸르게 변한 소나무를 보며 행복해했어요. 그때 하늘에서 새가 날아왔어요. “이제 새들이 더 많이 날아들겠구먼.” 사람들은 새들이 소나무 그림으로 날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들은 소나무 그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이상한 일이로군. 늘 소나무에 새들이 날아왔었는데.” 화가가 소나무 그림에 덧칠을 한 뒤부터 새들은 더 이상 솔거의 소나무로 날아들지 않았어요. “솔거가 그린 소나무가 아니란 걸 새들이 먼저 안 거야.” 황룡사의 스님은 솔거의 소나무 그림에 덧칠을 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답니다.
김생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신라 어느 시골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어요. 남편은 선비 집안에서 글만 읽으며 자라 집안일에 서툴렀지만 아내는 남편을 사랑했어요. 아내는 남편이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고, 밭일을 잠시 쉴 때 나무그늘에서 남편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했어요. 특히 아내는 남편이 글씨 쓰는 모습을 제일 좋아했답니다. 남편이 벼루에 먹을 갈고, 부드러운 붓에 먹물을 찍어 하얀 종이 위에 글씨를 쓰면 아내는 미소를 머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꿈에서 커다란 용을 보았어요. 용은 입안에서 여의주를 꺼내 글씨를 쓰기 시작했지요.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넋을 놓고 바라보던 아내는 잠에서 깨어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지요.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용이 나타났다니 분명 사내아이를 낳을 태몽 같소. 게다가 여의주를 뱉어 글씨를 썼다니 아마 우리 아이는 나중에 신라에서 제일가는 명필이 되려는 모양이오.” 남편의 말에 아내는 가슴이 벅찼지요. 그런데 두 사람에게 불행이 닥쳐왔어요. 남편이 먼 곳으로 성을 쌓는 부역을 나가게 된 것이었지요. “당신은 밭일도 제대로 못하시는데 어떻게 성 쌓는 힘든 일을 하실 수 있겠어요?”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걱정 마시오. 당신과 우리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무사히 돌아오겠소.” 남편은 불안해하는 아내를 위로하며 떠났어요.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렸어요. 그러나 몇 달 후 남편은 싸늘한 시체가 돼서 돌아왔지요. “흑흑흑. 여보, 저 혼자 어떻게 살아가란 말씀이세요.” 아내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나 아내는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고 용기를 냈지요. ‘이 아이는 남편이 내게 준 마지막 희망이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훌륭한 아이로 키워야겠다.’ 몇 달 후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고 아이의 이름을‘김생’이라고 지었어요. 김생은 아버지를 닮아 글씨를 잘 썼어요. 가난해서 서당에 다니지는 못했지만 친구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혼자서 천자문을 익혔지요. 어느 날 김생은 벽장에서 단단하고 차가운 검은 돌을 하나 발견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들어와 김생이 들고 있는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요. “그것은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아끼시던 벼루란다.” 어머니는 남편이 쓰던 붓과 먹을 꺼냈어요. 그리고 남편이 썼던 글씨도 보여주었지요. 김생은 아버지의 글씨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어요. “어머니, 이 물건들을 보고 있으니 마치 아버지께서 옆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날부터 김생은 아버지의 벼루와 먹, 종이를 가지고 글씨 쓰는 연습을 시작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김생의 실력은 눈부시게 향상되었어요. 김생이 글씨를 잘 쓴다는 소문이 퍼지자 멀리서 김생의 글씨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김생은 글씨를 팔아 번 돈으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게 되어 기뻤지요. 하지만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이었어요. “어머니, 이제 제가 번 돈으로 편하게 살게 되었는데 기쁘지 않으십니까?” “나는 네가 학자나 스님이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를 원했단다. 그런데 네가 나를 먹여살리느라 글씨를 써서 파는 글 장수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구나. 이제는 더 이상 내 걱정은 말고 산으로 들어가 글씨 연습을 하거라. 그래서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명필이 되도록 하거라.” 어머니 말씀에 따라 김생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어요. “김생, 자네는 서예에 소질이 있으니 그 재능을 살려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도록 하게.” 주지 스님의 권유로 김생은 청량산 골짜기에 있는 굴로 들어갔어요. 김생은 굴에서 꼬박 십 년 동안 붓글씨를 썼어요. 종이를 다 쓰고 난 뒤에는 산의 나뭇잎을 긁어모아 그 위에 먹으로 글씨를 쓴 다음, 나뭇잎을 물에 씻어 또다시 그 위에 글씨를 썼어요. 그 바람에 청량산에 흐르는 냇물이 새까만 먹 색깔로 변할 정도였지요. 냇가에는 은은한 먹 향기가 퍼졌어요. 굴에서 생활한 지 십 년째가 되는 어느 날 김생은 붓을 씻으며 중얼거렸어요. “이제 서예에 있어서만큼은 신라에서 나를 따라올 자가 없을 거야.” 김생은 짐을 꾸려 산을 내려갔어요. 산을 내려오던 김생은 한 여인을 만났어요. 여인은 김생에게 말을 건넸어요. “스님께서는 십 년 동안 산에서 글씨를 쓰며 도를 닦으셨다지요? 저는 산 아래 마을에서 십 년 동안 길쌈을 해왔답니다. 저와 실력을 겨루어보시겠습니까?” ‘흥!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김생은 큰소리를 쳤어요. “좋소. 그럼 어디 한번 해봅시다.” 두 사람은 캄캄한 동굴로 들어갔어요 김생은 글씨를 쓰고 여인은 길쌈을 했지요. “다 끝나셨으면 불을 켜겠습니다.” 여인이 등잔에 불을 켠 순간 김생은 할 말을 잃었어요. 여인이 짠 베의 결은 올이 곱고 일정했지만 김생이 쓴 글씨는 삐뚤빼뚤 엉망이었지요.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는 여인이 관세음보살*로 변했어요. 김생은 얼른 고개를 숙였지요. 관세음보살은 말했어요. “앞으로 겸손하게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으시오.” 이 말을 마치자마자 관세음보살은 사라졌어요. 김생은 삐뚤빼뚤한 자신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접어 소중히 품에 넣었어요. ‘관세음보살님이 자만한 나를 꾸짖으러 오셨구나. 앞으로 이 일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실력을 길러야겠다. 이제 당나라에 가서 더 깊이 공부해야지.' 당나라로 건너간 김생은 열심히 서예 공부에 매달렸어요. 당나라는 땅도 넓고 인재도 많아 글씨를 잘 쓰는 사람도 아주 많았어요. ‘아, 관세음보살님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신라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었겠지. 예전의 내 모습이 정말 부끄럽구나.’ 김생은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이제는 당나라에서도 김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신라에서 왔다며 무시하던 당나라 서예가들도 김생의 글씨 앞에서는 모두들 혀를 내둘렀지요. 그러는 사이 김생은 조금씩 관세음보살의 충고를 잊어갔어요. ‘이 정도면 이제 정말 누구와 겨루어도 자신 있다. 설령 관세음보살이 다시 나타나서 겨루자고 해도 내가 이길 거야.’ 어느 날 김생은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집 앞에서 소년이 기름병을 들고는 2층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요. “아저씨! 기름 한 병만 주세요.” 그러자 2층 창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하품을 하며 나왔어요. “아함, 졸려. 거기에 기름병을 들고 서있거라. 내가 여기서 따라줄 테니.” 남자는 난간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면서 기름 바가지를 기울였어요. ‘저런, 아까운 기름을 다 쏟아버리겠군.’ 김생은 혀를 찼어요. 그런데 남자는 졸면서도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기름 병에 따르는 것이었어요. 그 모습을 본 김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과연 나의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할 수 있는가? 나의 실력이 저 기름 장수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으로 돌아온 김생은 벽장에 처박아두었던 종이를 꺼냈어요. 그 종이는 청량산에서 관세음보살과 겨루며 썼던 글씨가 쓰인 종이였지요. ‘아,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자던 다짐을 잊고 또다시 자만심에 빠졌구나.’ 그날부터 김생은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글씨 쓰는 일에 집중했어요. 이렇게 노력한 결과 김생은 당나라에서 으뜸가는 명필이 되었어요. 그 즈음 신라의 왕이 김생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대의 재능이 신라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으며 신라의 이름을 빛내 주었소. 이제 신라로 돌아와 나라의 스승이 되어 신라의 백성들을 이끌어 주시오.' 김생은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어요. 그런데 돌아가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기름 장수였지요. 김생은 기억을 더듬어 그 기름집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어요. “여기 살던 기름 장수는 어디로 갔나요?” 김생이 이웃 상인에게 물어보자 상인이 말했어요. “기름 장수요? 이 집은 몇 년 전부터 계속 빈 집이었는데요.” 김생은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아, 기름 장수는 관세음보살님이고 그 소년은 문수보살님이었구나. 관세음보살님과 문수보살님이 자만하는 나를 꾸짖으러 오셨던 거야.’ 김생은 그 집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경건하게 절을 했어요. 신라로 돌아온 김생은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어요. 김생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루도 글씨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김생을‘해동의 서성’이라고 불렀지요. ‘서성’이란 글씨를 잘 써서 그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김생은 최고의 경지에 올라서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의 실력을 쌓았답니다. 순수한 열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은 김생은 서예가로서 크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답니다.
월명 스님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풀밭에 누워 있는 소년의 얼굴 위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었어요. 소년은 눈을 감은 채 빙긋 웃었지요. 눈을 감고 있어도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푸른 잎사귀들이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도 느껴졌지요. 멀리서 마을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얍! 나는 용감한 신라군이다. 에잇! 당나라 놈아, 내 칼을 받아라!” “우윽.” “잡아라!” “얏! 얏!” 소년은 친구들이 왜 전쟁놀이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신라 사람이나 당나라 사람이나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서로 해치고 죽이려 하는 걸까? 도대체 왜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거지?’ 소년의 부모님은 소년 때문에 늘 걱정이었어요. “사내 녀석이 꽃이나 나비만 보러 다니고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내고 있으니......, 정말 걱정이오.”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제기를 차거나 씨름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소년의 부모님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데 저만치 논둑길에서 소년의 모습이 보였어요. 어찌 된 일인지 소년은 양손에 신발을 하나씩 벗어 들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소년의 아버지는 화가 치밀었어요. “이 녀석아! 얼른 뛰어오지 못해?” 소년은 겁먹은 눈으로 아버지를 흘낏 쳐다보았지만 뛰어오지는 않았어요. 뛰어오기는커녕 더 느릿느릿 걸어왔지요. 화가 난 아버지가 논둑길로 달려가 소년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꿀밤을 한 대 먹였어요. “이 녀석아! 아버지 말이 말 같지 않느냐? 얼른 뛰어오라는데 도리어 더 슬슬 걸어와?” 그러자 소년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어요. “아버지, 논둑에 벌레가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꽃씨는 또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데요. 그것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느라 천천히 걸었던 건데 아버지가 불쌍한 벌레들을 다 밟아 죽이셨어요.” 아버지는 기가 막혔어요. “이 녀석, 정말 안되겠구나! 사내 녀석이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그날 밤 소년은 대문 밖으로 쫓겨나 벌을 받았어요. 밥도 굶은 채 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렸지요. 하지만 배가 고파서도, 벌을 받는 것이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답니다. 아버지 때문에 죽은 벌레들이 불쌍했기 때문이었어요. 어머니는 소년이 걱정되었어요. “여보! 지금쯤 그 애도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 거예요. 이제 데리고 들어와서 밥이라도 좀 먹이도록 하지요.” 그때였어요. 밖에서 소년의 맑고 조용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벌레들아, 꽃씨들아. 너희는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하늘로 가서 별이 되었구나. 내년 봄에 다시 와서 예쁜 나비가 되어 날고, 예쁜 꽃이 되어 피어나렴." 소년이 부르는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했어요. 엄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조차 낮에 밟혀 죽은 벌레와 꽃씨들을 떠올릴 정도였지요. “누가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지?” “처음 들어보는 노랫말인데 참 아름답군.” 사람들은 노랫소리를 따라 소년의 집 앞으로 모여들었어요. 소년은 제 또래 아이들과 달리 먹을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쩌다가 소년의 노래를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주면 그대로 가져와 여동생에게 주었지요. 소년의 여동생은 소년처럼 눈이 맑고 마음씨가 착한, 예쁜 소녀였어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집안에 누워있는 날이 많았지요. 소년은 여동생을 무척 사랑했어요. “오라버니! 나도 오라버니처럼 들판에 나가서 꽃을 보고 싶어.” 그러면 소년은 여동생을 등에 업고 산으로 들로 꽃을 보러 다녔어요. “오라버니! 종달새의 노래를 들어 보고 싶어.” 여동생이 말하면 소년은 종달새를 부르는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면 어느새 종달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불러주었지요. 소년은 나무와 새, 꽃과 풀들하고도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었거든요. 마을 사람들은 소년이 갖고 있는 신비로운 힘을 빌리기도 했어요. “얘야, 우리 집 강아지가 밥을 먹지 않는구나. 왜 그러는지 알아봐 주겠니?” 앞집 아주머니의 부탁에 소년은 강아지를 가만히 쳐다보았어요. 그리고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아주머니, 강아지의 목에 생선 뼈가 걸려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대요.” 사람들이 강아지 목을 살펴보니 정말로 생선 뼈가 걸려 있었어요. “얘야, 우리 집 은행나무가 왜 열매를 맺지 않는지 알려주겠니?” 뒷집 아저씨가 묻자 소년은 은행나무를 가만히 끌어안았어요. 그리고 나무줄기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지요. “아저씨, 나무뿌리가 커다란 바위에 닿아 있어요. 그래서 은행나무가 갑갑하고 힘이 든대요.” 사람들이 모여들어 땅을 파 보았더니 정말로 큰 바위가 나무뿌리를 누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신비한 능력에 감탄했어요.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었어요. 청년은 여전히 자연과 벗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지요. 목소리도, 노랫말도 나날이 아름다워졌어요. 노랫소리를 들은 마을 아가씨들은 청년을 남몰래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밤이면 청년은 동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거나 피리를 불었어요. 그러면 마을 아가씨들은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하지만 청년은 어떤 아가씨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답니다.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좋은 색시감을 골라 혼인을 해야지.” 부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청년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혼인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을 아가씨들뿐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에도 병이 날 지경이었어요. 청년은 아름다운 여자를 봐도 그저 시큰둥했고 아무리 좋은 보물을 봐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자연을 보면 행복했고,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졌지요. 결국 청년은 부모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렸어요. “아버지, 어머니. 저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스님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청년의 부모님은 서운했지만 청년이 어릴 때부터 워낙 특별했던 지라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 알았다. 이왕 스님이 되려면 훌륭한 스님이 되거라.”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병약한 여동생을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너를 위해 부처님께 항상 기도 하마.” 여동생은 길을 떠나는 청년의 손을 꼭 잡아주었어요. “오라버니는 반드시 훌륭한 스님이 될 거예요.” 청년은 ‘사천왕사’라는 절을 찾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어요. 그리고 ‘월명’이라는 법명을 받았지요. 월명은 ‘밝은 달’이라는 뜻이에요. 청년이 해와 달, 나무, 꽃 같은 자연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승님이 붙여준 이름이었지요. 월명 스님은 절에서 화랑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늘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지요. “서로 목숨을 빼앗는 것은 죄악입니다. 따라서 전쟁은 마땅히 없어져야 하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니 화랑은 더욱더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 적을 죽이되 절대로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 말고,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는 벌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함부로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화랑들은 월명 스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어요. 그래서 스님의 말씀대로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는 결코 생명을 해치지 않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월명 스님은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몸이 약해 늘 병을 앓던 여동생이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었어요. 월명 스님은 슬픔을 달래며 노래를 불렀지요. 사람이 살고 죽는 길이 여기 있는데 너는 간다는 말도 다 못하고 가버렸구나.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에서 너를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리라. 이 노래는 여동생이 극락으로 가길 비는 노래였지요. 그 노래가 너무 슬퍼서 장례식장은 눈물 바다가 되었어요. 심지어 꽃들도 눈물을 흘리고 새들도 노래를 그쳤답니다. 세상을 떠난 여동생 생각을 하며 정처 없이 서라벌 밤거리를 걷던 월명 스님은 피리를 불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하늘에 떠가던 달이 그대로 멈춰 밤새 움직이지 않았답니다. 신라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떠오른 거예요. 두 개의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고, 논과 밭은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졌어요. 심한 가뭄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지요. 백성들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도적이 되어 떠돌아다녔어요. 궁궐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답니다. 근심에 쌓여있던 경덕왕에게 한 신하가 말했어요. “월명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은 자연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스님을 모셔와서 태양과 이야기를 하게 해보시지요.” 경덕왕은 곧바로 월명 스님을 불러오게 했어요. 월명 스님은 제단에 향을 피운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그러고는 두 개의 태양을 향해 꽃잎을 뿌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오늘 이렇게 산화의 노래 부르며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따라 미륵보살님을 모시어라. 월명 스님은 하루 종일 태양을 향해 노래를 불렀지요. 경덕왕과 신하들도 월명 스님을 따라 함께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자 저녁 무렵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이글이글 타던 두 개의 태양 가운데 하나가 점점 작아져 자그마한 반지 모양이 되더니 마치 별똥별처럼 토함산 뒤쪽으로 떨어진 거예요. 경덕왕과 신하들, 백성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어요. 경덕왕은 몹시 기뻐하며 월명 스님에게 향기 좋은 차와 염주를 상으로 내려주었어요. 그런데 상을 건네려는 순간 갑자기 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오더니 차와 염주를 빼앗아 달아났어요. “저런 괘씸한 놈이 있나! 저놈을 잡아라!” 경덕왕이 화를 내며 소리치자 월명 스님이 조용히 말렸어요. “폐하! 저 아이는 부처님이 보내신 아이입니다. 부처님께 바치려고 가져간 것이니 그대로 두소서.” 아니나 다를까 아이를 뒤쫓아갔던 신하가 돌아와 보고했어요. “아이가 법당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았더니 불상 앞에 차와 염주가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경덕왕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러자 월명 스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어요. “요 몇 년 간 전하는 물론이고 신라의 귀족들 모두가 게을러지고 사치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를 꾸짖으시려고 태양을 두 개나 띄우셨던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산다면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신하들은 모두 숨을 죽였어요. 감히 왕 앞에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니, 분명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지요. 그러나 경덕왕은 잔잔한 미소를 띄며 말했어요. “스님의 말씀이 옳소. 한 나라의 왕인 내가 매일 잔치를 열고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니 이러한 왕 아래 어느 신하가 백성들을 돌보겠소? 그러니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닿아 태양이 두 개나 뜨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오. 이번 일을 잊지 않고 앞으로 현명한 왕이 되겠소.” 그 후 경덕왕은 검소하고 현명한 왕이 되었어요. 경덕왕은 월명 스님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월명 스님은 사양하고 다시 절로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지으며 향기롭게 살았어요.
김대성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한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어요. 소년의 얼굴은 화가 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요. 소년은 또래 아이들보다 몸집이 작고 가냘펐지만 머리는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는 컸어요. 소년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어요. “허, 볼 때마다 그렇지만 정말 희한하게 생긴 아이야.” “저 머리를 좀 보게나. 이마가 어찌나 넓은지 멀리서 보면 꼭 커다란 성을 보는 것 같아.” “그래서 이름도 대성이가 아닌가. 커다란 성, 대성 말이야.” “참 이상도 하지? 저 아이의 어머니인 경조 부인은 굉장한 미인인데 말이야.” “그래. 안타깝게도 대성이는 제 어머니를 닮지 못 했구먼.” 대성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모른 체했어요. ‘괜찮아. 이런 일에 흔들리면 대장부가 아니야.’ 대성은 힘차게 걸어갔지요. 대성은 시장 안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대뜸 주인을 붙잡고 사정했지요. “저는 아직 어리지만 일을 아주 잘 합니다. 몸이 튼튼해서 힘든 일도 척척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여기서 일하게 해 주세요.” 대성의 모습을 살피던 주막 주인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어요. “이 녀석아, 손님들이 네 얼굴을 보면 술맛이 나겠니? 딴 데 가서 알아보거라.” 주막에서 쫓겨난 대성은 이번에는 대장간으로 들어가 대장장이를 붙잡고 사정했어요. “여기서 일하게 해 주세요. 품삯은 조금만 주셔도 돼요.” 대성은 모량리라는 마을에서 어머니와 살았어요. 어머니는 얼굴도 아름답고 마음씨도 착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어요. 하지만 혼인하고 대성이 태어나자마자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 어린 대성을 키우며 살고 있었지요. 대성의 어머니는 어느 부잣집에서 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아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일을 하다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계속 방에 누워 있었어요. ‘대체 대성이가 어디에 갔길래 하루 종일 안 보이는 거지?’ 어머니는 걱정이 되었어요. 이때 문이 열리며 대성이 들어왔어요. “대성아, 어디를 다녀오니?” 대성은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어요. “어머니, 저는 왜 이렇게 못났습니까? 어머니 약값을 마련하려고 일을 구하러 갔는데 모두 제가 몸도 약하고 얼굴이 이상하게 생겨서 싫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는 대성이 안쓰러웠어요. 밖으로 나간 대성은 개울물에 자기 얼굴을 비춰 보았어요. 자기가 보아도 우스꽝스럽게 생긴 얼굴이었지요. 그런 자신의 얼굴이 보기 싫어 대성은 돌멩이를 집어던졌어요.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어요. 대성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삿갓을 쓴 스님이 한 분 서 있었어요. 스님은 대성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어요. “얘야.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태어난 거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귀하게 여기도록 해라. 너의 머리카락 하나도 모두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소중하게 여기거라.” 스님의 말씀에 대성은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그래. 아무리 못났어도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이니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자 대성에게 새로운 용기가 생겼어요. 대성은 스님께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다음 어머니가 일하던 집으로 달려갔어요. “네가 어머니 대신 일을 하겠다고?” 복안이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어요. 대성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한 달은 돈을 받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한 달 뒤에 보시고 제가 일을 못 한다면 내쫓으셔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대신 제가 일을 잘 한다면 그때 품삯을 주시고 계속 일하게 해 주십시오.” 대성의 진실한 모습에 복안의 마음이 움직였어요. “좋다. 나를 따라오너라.” 복안은 집 뒤에 있는 밭으로 대성을 데려갔어요. 자갈이 많고 흙이 거칠어서 몇 년 동안 버려둔 밭이었지요. “한 달 동안 이곳의 돌을 골라내고 흙을 잘 다듬어 놓거라. 네가 밭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보고 너를 일꾼으로 쓸 것인지 결정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날부터 대성은 매일 텃밭으로 나가 일을 했어요.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돌을 골라내고, 호미로 흙덩이를 잘게 부수고는 거름을 주었어요. 그렇게 며칠을 일하자 조금씩 밭이 정리되기 시작했어요. 대성은 좋은 씨앗을 골라 뿌리고 물을 주었어요. 이렇게 한 달을 보살피자 작은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지요. 대성은 여린 싹을 소중하게 보살폈어요. ‘밭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마음이 쓰이는데 어머니는 나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부모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깊구나.’ 대성은 어머니께 더 효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드디어 복안이 밭을 둘러보는 날이 됐어요. 대성은 밭을 구석구석 살피는 복안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지요. 복안은 흙을 만져 보기도 하고, 싹을 살피기도 했어요. 이윽고 복안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대성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어요. ‘드디어 여기에서 일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복안은 뜻밖의 말을 꺼냈어요. “대성아, 이 밭을 너에게 줄 테니 잘 가꾸어 보아라.” 대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어요. “너의 갸륵한 마음과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에 감동했단다. 농사를 잘 지어 지금처럼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거라.” 대성은 복안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했어요. “고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복안에게 밭을 받은 후 대성은 밝은 얼굴로 열심히 일했어요. 어머니도 차차 건강해졌지요. 대성에게 밭을 준 복안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지만 겸손한 사람이었어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기꺼이 도와주었지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대성은 복안을 아버지처럼 여겼어요. ‘언젠가는 나도 복안 어른처럼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아야지.’ 그러던 어느 날, 대성은 복안의 집을 찾았다가 개울가에서 만났던 그 스님을 만났어요. 복안은 일꾼들을 시켜 창고에서 베 50필을 내 와 스님 앞에 놓으며 말했어요. “점개 스님! 부처님께 바치는 저의 작은 정성입니다.” 그러자 점개 스님이 경건하게 손을 모으며 대답했어요. “복안 어른의 정성이 이렇게 지극하시니 부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나를 보시하면 그 만 배를 주시니까요.” 그 말을 들은 대성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점개 스님이 떠나려 하는데 대성이 다가가 물었어요. “스님! 정말로 부처님께 하나를 보시하면 그 만 배를 받을 수 있습니까?” 점개 스님은 호탕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단다. 부처님은 욕심을 부리는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거든.” 집으로 돌아오는 대성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구나.’ 며칠을 생각하던 대성은 결심을 하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어머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부처님께 보시하면 그 만 배의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안 어른에게 받은 텃밭을 부처님께 보시하려고 합니다.” 대성의 말에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어요. “그래. 어차피 그 땅은 복안 어른에게 얻은 것이잖니? 이제 나도 일을 할 수 있으니 그 밭은 부처님께 바치도록 하자.” 대성은 그날로 점개 스님을 찾아가 밭문서를 드렸어요. “제 작은 정성입니다. 이 텃밭을 드릴 테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비록 작은 텃밭이었지만 대성의 마음 씀씀이에 점개 스님은 감동했어요. “대성아. 너는 분명 훌륭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대성은 점개 스님께 절을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날부터 대성이 시름시름 앓더니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어요.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에 대성의 어머니는 앓아 눕고 말았지요. 대성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신라의 귀족 김문량은 책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어요. 꿈속에서 하얀 수염을 길게 드리운 신선이 나타나 김문량에게 말했어요. “모량리의 김대성이 너희 집에 태어날 것이다.” 잠에서 깬 김문량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했어요. “아무래도 그건 부처님의 말씀 같아요.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 김대성이라는 아이가 있는지 알아보지요.” 며칠 후, 모량리로 갔던 사람이 돌아와 김문량에게 말했어요. “김대성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효성이 아주 지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일한 재산인 텃밭을 부처님께 보시하고 돌아오더니 그만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혼자 남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김문량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어요. 혼인하고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안타까워하던 김문량 부부는 몹시 기뻐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았어요. “어렵게 얻은 아들인데 손이 펴지지 않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하지만 부처님이 주신 아이니 소중하게 키우도록 합시다.” 김문량은 이렇게 아내를 위로했어요. 그런데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아이가 스르르 왼손을 폈어요. 김문량과 부인은 기뻐하며 아이의 손을 잡았어요. 그런데 아이의 손바닥에 글자가 쓰여져 있었어요. “여보, 아이의 손에 글자가 쓰여 있어요.” 그것은 ‘대성’이라는 두 글자였지요. “그래. 그때 분명히 ‘김대성’이라는 아이가 우리 집에 태어난다고 했는데 그 아이인 것 같소. 그러니 아이의 이름을 대성으로 합시다.” 김문량의 말에 아내도 찬성하며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이 아이가 모량리의 김대성이라면 아이의 어머니도 우리가 데리고 와서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 보니 어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먼저 보낸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김문량은 아내의 착한 마음씨에 깊이 감동했어요. 대성의 어머니 경조는 대성이 죽은 후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매일같이 대성의 무덤을 찾아와 울기만 했어요.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았어요. “대성아, 너를 먼저 보내고 이 어미 혼자 어떻게 산단 말이냐. 나도 이제 죽어서 네 뒤를 따르련다.” 이때 화려한 수레가 대성의 무덤 앞에 도착하더니 아름다운 귀부인이 아이를 안고 내렸어요. 바로 김문량의 아내였어요. 김문량의 아내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경조에게 다가가 아이를 보여 주며 말했어요. “울지 마세요. 대성이는 이렇게 다시 태어났답니다.” 경조가 선뜻 믿지 못하자 김문량의 아내는 대성의 손바닥에 씌인 글자를 보여 주었어요. 그래도 경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어요. 이때 점개 스님이 나타나 경조에게 말했어요. “아들이 한 말을 잊었소? 사람은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대성은 밭을 보시하여 신라의 귀족 집안에 새로 태어난 거요.” 그제야 경조는 김문량의 아내가 한 말을 믿었어요. 그리고 대성을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그날부터 경조는 김문량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어요. 혹시라도 대성이를 놓고 김문량의 아내와 경조가 질투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미 대성이와 저의 인연은 전생의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대성을 낳은 사람은 마님이시니 당연히 대성의 어머니는 마님이십니다.” 경조가 이렇게 말하면 김문량의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했어요.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죽음으로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보다 먼저 대성이를 만나 부모 자식의 인연을 맺으셨으니 경조 부인이야말로 대성의 진짜 어머니시지요.” 대성은 이렇게 인자하고 너그러운 두 어머니 사이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어요. 전생에는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했지만 이제 신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대성은 별 고생하지 않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요. 경조는 언제나 대성에게 주의를 주었어요. “대성아, 너는 전생에 복안 어른처럼 겸손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단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대성은 경조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겼어요. 어려서부터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대성은 커서 자신에게 텃밭을 주고 격려해 주었던 복안 어른을 찾아뵙고 깍듯하게 대접했어요. 점개 스님의 절에도 자주 찾아가 불공을 드리고 보시도 했지요. 또한 대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어요. 대성이 잘 보살펴 주어 대성이 사는 마을에는 밥을 굶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대성은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기를 바랐어요. ‘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을 만들자.’ 대성은 서라벌에 ‘불국사’를 지어 김문량 부부에게 바쳤어요. 또한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껏 자신을 키워 준 전생의 어머니 경조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어서 바쳤어요. 오늘날까지도 불국사와 석굴암은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속에는 김대성의 뜨거운 효심이 숨쉬고 있답니다.
김현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신라 원성왕 때 김현이라는 가난한 젊은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어요. 김현의 어머니는 날마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어요. “부처님, 현이가 신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김현은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집안이 가난한 것을 원망하지 않고 글공부와 무예 수련에 힘썼지요. 김현의 꿈은 화랑이 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김현은 아무리 노력해도 화랑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신분 제도를 엄격하게 지키던 신라 사회에서는 능력이 뛰어나도 귀족의 아들이 아니면 화랑이 될 수 없었거든요. 김현은 화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몹시 화가 나고 실망했어요. 마음이 상한 김현은 매일같이 숲으로 나가 닥치는 대로 동물을 잡아 오곤 했지요. 하루는 김현이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자 어머니가 엄한 얼굴로 김현을 불렀어요. “나를 따르거라.” 김현은 사냥한 동물을 내려 놓고 어머니를 따라 나섰어요. 김현과 어머니는 흥륜사라는 절로 갔어요. 흥륜사 마당에는 커다란 탑이 있었는데 신라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2월 8일에서 15일 사이에 이 탑을 돌며 기도를 했지요. 사람들은 이것을 ‘탑돌이’라고 했어요. 흥륜사 마당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춰 탑돌이를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김현의 손에 염주를 쥐어 주며 말했지요. “현아, 화랑이 되지 못한 것은 그렇게 실망하고 좌절할 일이 아니다. 네가 그 일로 화가 나서 함부로 동물들을 죽이면 그 죄를 어찌 갚으려고 하느냐?” 말을 마친 어머니는 김현과 함께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 틈에 들어갔어요. 김현은 그제서야 자기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부처님, 이제부터는 함부로 생명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김현은 탑돌이를 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그 후 김현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분풀이를 위해 함부로 사냥을 하는 일은 없었어요. 활쏘기를 연습할 때에도 혹시라도 화살에 맞아 동물이 다칠까 봐 끝이 뭉툭한 화살을 사용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큰 소동이 일어났어요. 토함산에 사는 엄청나게 큰 호랑이 세 마리가 마을로 내려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어 갔지요. 호랑이들은 밤이 되면 온 마을을 자기 집처럼 뛰어다녔어요. 어흥! 어허흥! 한 마리가 울부짖으면 다른 호랑이들도 따라 울부짖었어요. 이렇게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면 어느 집에선가 끔찍한 비명소리가 나고 뒤이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이웃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혀 가도 사람들은 무서워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오들오들 떨기만 했답니다. 대궐에서는 호랑이 사냥꾼을 시켜 토함산을 뒤지고, 마을에 군사들을 풀어 사람들을 보호하게 했어요. 하지만 호랑이는 잡히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호랑이에게 잡혀가거나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지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원성왕은 중대한 발표를 했어요. ‘토함산 호랑이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높은 벼슬과 상금을 내리겠노라.’ 어머니와 함께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김현은 거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현은 호랑이를 잡으면 신분이 낮아도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지요. 하지만 함부로 생명을 죽이지 않겠다던 다짐이 생각났어요. 김현의 마음을 눈치챈 어머니가 말했어요. “현아,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죽이는 호랑이를 그대로 두는 것 또한 부처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니 네가 호랑이들을 잡아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게 도와주어라.” 어머니가 이렇게 허락해 주니 김현은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그리고 반드시 호랑이들을 잡겠다고 다짐했지요. 김현은 하루 종일 토함산을 뒤지며 호랑이들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밤이 되면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했지요. ‘부처님! 저도 신라를 위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제가 호랑이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김현은 호랑이를 잡기는커녕 호랑이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지요. 이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어요. 호랑이들은 여전히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잡아가곤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집을 버려 둔 채 다른 마을로 달아나기도 했어요. 마을에는 빈집이 하나 둘씩 생겨났지요. 이제 김현은 상을 받거나 벼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호랑이 때문에 슬픔을 겪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지요. ‘부처님! 벼슬이나 상금에 대한 욕심은 버렸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목숨을 해치는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비록 제가 아닌 누구라도 호랑이를 잡게 하시어 사람들을 구해 주십시오.’ 김현은 탑돌이를 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어요. 어느새 같이 탑돌이를 하던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김현 혼자만 남아 탑돌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현이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처녀가 조용히 김현의 뒤를 따르며 기도하고 있었어요. 밤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환한 달빛이 절 마당을 비추었어요. 달빛에 드러난 처녀의 모습을 본 김현은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백옥을 깎아 만든 듯한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긴 속눈썹이 아름다운 처녀였어요. 어느새 김현은 처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지요. 처녀는 김현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더니 갑자기 홱 돌아서서 총총히 가 버리는 게 아니겠어요? 김현은 잠시 망설였어요. 모르는 처녀를 좇아가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지만 그 처녀를 다시 못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김현은 처녀의 뒤를 따랐어요. 김현은 달려가 처녀를 붙잡아 세웠어요. 처녀는 달아나려 했지만 김현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어요. 처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따라오시는 겁니까? 놔 주세요.” “저도 무례한 행동인 줄은 압니다. 그런데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처녀도 김현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렸던 터라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어요. 서로 사랑하게 된 김현과 처녀는 매일 밤 만났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김현은 처녀가 좋아졌어요. 그런데 처녀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김현은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이제 김현은 호랑이를 잡는 것도 벼슬을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김현은 용기를 내어 처녀에게 청혼했어요.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며 한평생 같이 살고 싶소. 부디 나의 아내가 되어 주시오.” 하지만 처녀는 눈물을 떨구더니 고개를 저었어요. 청혼을 거절당하자 김현은 몹시 서운했어요. “내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남편으로 맞기 싫은 건가요?” 김현의 물음에 처녀는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어요. “도련님, 그만 저를 잊어 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처녀는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당황한 김현은 처녀를 따라갔어요. 처녀는 마을을 지나 토함산 중턱까지 단번에 달려갔어요. 연약한 처녀가 김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토함산 중턱까지 올라가다니 김현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 저 여자는 내게 이름도 집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뭔가 비밀이 있는 거야.’ 김현은 필사적으로 처녀의 뒤를 따라갔어요. 골짜기를 몇 개 넘자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초가가 보였어요. 처녀는 그 초가로 달려갔어요. 김현도 뒤를 따라갔지요. 초가 앞에 도착한 처녀는 김현을 돌아보았어요. 처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어요. “이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군요. 모든 비밀을 다 말씀드릴 테니 저를 따라 들어오세요.” 김현은 처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어요. 좁은 방 구석에서 할머니가 기도를 하다가 인기척에 눈을 떴어요. 김현을 본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처녀를 꾸짖었어요. “이게 무슨 짓이냐! 이곳에 사람을 데리고 오면 어쩌느냐?” 그러자 처녀는 무릎을 꿇더니 입을 열었어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흥륜사에 탑돌이를 갔다가 이분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분은 제 사정을 전혀 모르고 청혼을 하십니다.” “어째서 네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단 말이냐!” 김현은 처녀와 할머니가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이때였어요. 밖에서 호랑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순간 할머니와 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네 오빠들이 오고 있구나. 어서 이 총각을 숨겨라.” 처녀와 할머니는 김현을 벽장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궜어요. ‘호랑이가 처녀의 오빠라고?’ 김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어요. 이윽고 방 안으로 호랑이 세 마리가 들어왔어요. 김현은 벽장 문틈으로 그들을 훔쳐보았어요. “하하하, 역시 사람 고기가 제일 맛있어.” “어머니도 저희와 같이 마을로 가셔서 사람을 잡아먹자고요.” 벽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김현은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이럴 수가! 여기가 호랑이들의 소굴이었구나. 내가 사랑한 여자가 호랑이라니!’ 이때 한 호랑이가 킁킁대더니 처녀를 향해 사납게 물었어요. “어디서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네가 숨겨 놓았지? 얼른 내놔!” 그러나 처녀는 침착하게 웃으며 대답했어요. “사람을 숨겨 놓다니요? 오늘 제가 절에 갔다 오느라 사람 냄새가 몸에 묻어서 그럴 거예요.” 하지만 오빠들은 처녀의 말을 믿지 않고 방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어요. “잔인한 호랑이들아! 너희를 위해 기도하는 여동생과 어미를 봐서 너희들을 벌주지 않았다만 더는 참을 수 없다. 너희가 찾는 사람은 신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할 사람이니 해치지 말지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호랑이들에게 벼락이 떨어졌어요. 호랑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달아났어요. 김현은 재빨리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그들을 뒤따라 나갔어요. 처녀는 김현을 붙잡으며 사정했어요. “오라버니들의 벌은 제가 받을 테니 용서해 주세요.” 김현은 차마 사랑하는 처녀의 말을 외면할 수 없었어요. 처녀는 울먹이며 말했어요. “이제 제가 도련님과 혼인할 수 없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저는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랍니다. 그러니 저를 잊으세요.” 김현은 입술을 꼭 깨물고 산을 내려왔어요. 사랑을 잃은 아픔으로 김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김현은 흥륜사 탑을 돌다가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뒤이어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요. 또다시 호랑이가 나타난 거예요. 김현은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갔어요. 길 한복판에서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어린아이를 입에 물고 달아나고 있었어요. 군사들도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요. 김현은 재빨리 말을 잡아 타고 호랑이를 쫓아갔어요. 김현을 돌아본 호랑이는 깊은 숲 속으로 달려갔어요. 김현은 호랑이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어요. 슝! 화살은 호랑이 등에 명중했어요. 호랑이는 아이를 풀숲에 떨어뜨리고 더 깊은 숲 속으로 달아났지요. ‘상처를 입혔으니 멀리 못 갈 거야.’ 김현이 한참을 말을 달려 쫓아가자 숲 한쪽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어요. 김현은 말에서 내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어요. 그 순간 김현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어요. 화살을 맞아 신음하고 있는 것은 김현이 사랑하던 처녀였지요. “낭자, 이게 어찌된 일이오?” 김현은 달려가 처녀의 등에서 화살을 뽑아 주려 했어요. 하지만 처녀는 김현을 말렸어요. “저는 오라버니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기로 했습니다. 기왕 죽을 목숨이라면 도련님의 손에 죽고 싶었습니다. 저를 잡으면 도련님이 벼슬을 하실 수 있으니까요.”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쏘아 죽이다니 김현은 믿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처녀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어요. “진심으로 도련님을 사랑했습니다. 도련님도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죽고 나서 절을 하나 지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는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답니다. 도련님 품에서 죽을 수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말을 마치고 처녀는 숨을 거두었어요. 김현은 처녀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비록 호랑이지만 그대는 어떤 사람보다도 아름답고 착했소. 나는 그대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 김현이 호랑이를 잡아 오자 원성왕은 김현에게 벼슬과 상금을 내렸어요. 그토록 바라던 벼슬과 상금을 손에 넣었지만 김현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요. 호랑이 처녀가 그리워 하루도 가슴속에서 슬픔이 걷히지 않았지요. 김현은 호랑이 처녀가 부탁했던 대로 절을 하나 지었어요. 그리고 ‘호원사’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호랑이가 원해서 세운 절’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호원사 마당에는 아름다운 탑을 세웠어요. 밤이 되면 김현은 혼자 그 탑을 돌며 호랑이 처녀를 위해 기도를 올렸어요. “부처님! 호랑이 처녀는 사람도 갖기 어려울 만큼 고운 마음씨를 갖고 있었습니다. 부디 호랑이 처녀가 다음 세상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하며 탑을 돌던 김현은 가끔 멈춰서 주위를 돌아보곤 했어요. 혹시라도 그때처럼 처녀가 함께 탑돌이를 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달빛에 비치는 탑 그림자만이 외롭게 보일 뿐이었어요. 김현은 평생 호랑이 처녀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채 살았답니다.
손순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햇볕이 따사롭게 비치는 봄날이었어요. “아버지! 이 보드랍고 하얀 솜뭉치 같은 게 뭐지요?” 신라의 어느 시골 마을 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은 사내아이가 민들레 홀씨를 잡으며 물었어요. 아이의 아버지 손순은 밭에서 흙을 고르다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어요. “민들레 홀씨란다. 민들레가 부모라면 홀씨는 자식인 셈이지.” 손순의 말에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민들레 홀씨를 바라보았어요. 아이의 이름은 돌이였어요. 예쁘장한 얼굴의 돌이는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돌이는 한참 동안 민들레 홀씨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물었어요. “하지만 민들레랑 이 홀씨는 하나도 닮지 않았는 걸요. 저는 아버지랑 닮았잖아요.” 손순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어요. 손순은 돌이와 놀아 주고 싶었지만 오늘 안으로 밭을 다 갈아야 했어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일을 마친 손순은 돌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까마귀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아버지! 동네 할아버지들 말씀이 까마귀는 기분 나쁜 저승새래요.” 돌이의 말에 손순은 찬찬히 설명을 해 주었어요. “그건 사람들이 까마귀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사실 까마귀는 아주 착한 새란다. 다른 동물들은 몸이 자라면 어미 곁을 떠나지만 까마귀는 그렇지 않단다. 까마귀는 어미 새가 늙고 힘이 없어 날지 못하면 먹이를 물어다가 어미 새에게 먹여 준단다.” “그럼 까마귀는 효자새군요!”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은 손순과 돌이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미소를 지었어요. “그렇게 친다면 까마귀는 손순새야. 세상에 손순 같은 효자는 없어.” “맞아요. 눈먼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잖아요?” “쌀이 없어 제 아들에게는 죽을 먹이면서도 어머니께는 꼬박꼬박 쌀밥을 지어 드린다더군.” “언젠가는 하늘이 손순에게 큰 복을 내릴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손순을 칭찬하며 집으로 향했어요. 손순의 가족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어요. 손순의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흰 쌀밥을 드리고, 손순과 돌이, 자기 몫으로는 멀건 시래기죽을 내놓았어요. 앞을 못보는 어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손순에게 물었지요. “얘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구나. 우리는 논밭이 없어서 남의 집 일을 도와주며 사는데 어째서 매일같이 쌀밥을 먹을 수 있느냐?” 손순은 당황하며 말했어요. “어머니, 올해는 풍년이 들어서 집집마다 곡식이 넘쳐나요. 그래서 제가 품삯을 많이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손순의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그런데 너희가 앉아 있는 쪽에서 시래기 냄새가 나는구나. 혹시 나에게만 쌀밥을 주고 너희들은 시래기 죽을 먹는 게 아니냐?” 이번에는 손순의 아내가 다급하게 말했어요. “어머니, 제가 시래기 국을 끓였는데 아마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그제서야 손순의 어머니는 안심하고 다시 쌀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직 어린 돌이는 자꾸만 할머니의 흰 쌀밥을 보고 군침을 삼켰어요. 손순의 아내는 돌이를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어요. 그 모습에 손순은 마음이 아팠지요. 다음 날도 손순은 여느 때처럼 밭에 일을 하러 나갔어요. 돌이는 밭두렁에서 민들레를 가지고 놀다가 손순에게 물었어요. “아버지, 이상해요.” 손순은 호미질을 멈추고 돌이를 돌아보았어요. “아버지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남의 집 빨래를 해 주시고 쌀을 얻어 오십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래기 죽을 드시고, 하루 종일 집에 편안히 계시는 할머니는 쌀밥을 드시잖아요.” 돌이의 말을 들은 손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아버지가 화나셨다는 것을 눈치챈 돌이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시래기 죽만 먹었더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요. 그런데 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오죽하시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쌀밥을 드시고 기운을 차려서 일을 많이 하시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 식구 모두가 쌀밥을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손순은 호미를 던지고 돌이를 무릎에 엎어 놓고는 엉덩이를 마구 때렸어요. “나쁜 녀석! 어디서 그런 못된 생각을 배웠느냐?” “엉엉엉, 아버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어느새 손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돌이가 울음을 그치자 손순은 밭두렁에 핀 민들레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돌이야, 민들레는 부모고 홀씨는 그 자식이라고 했지?” 돌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손순은 민들레 홀씨를‘후’하고 불었어요. 그러자 하얀 민들레 홀씨가 하늘로 붕 떠오르더니 멀리 날아갔어요. “이 홀씨처럼 부모와 자식도 언젠가는 헤어진단다.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 그동안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니?” 돌이가 손순을 찬찬히 바라보았어요. “할머니는 힘들게 아버지를 낳으셨고, 정성스럽게 키워 주셨단다. 얼마나 고마우신 분이냐? 그러니까 정성껏 모셔야 한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면 그때는 늦지 않겠니?” 돌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요.” 돌이가 손순에게 안기며 속삭였어요.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손순은 돌이를 안으며 하얀 민들레 홀씨를 바라보았어요. 그날 저녁에는 돌이가 할머니의 쌀밥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손순과 아내는 그런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아팠어요. 저녁을 먹은 후 손순의 어머니는 어깨가 아프다고 했어요. “할머니! 제가 어깨를 주물러 드릴게요.” 돌이가 할머니의 어깨를 정성껏 주물러 드렸어요. 돌이는 그새 부쩍 철이 든 것 같았지요. “아이구, 시원하다. 돌아, 할머니가 목이 마른데 물 좀 떠다 주련?” “잠시만 기다리세요.” 돌이는 얼른 부엌으로 갔어요. 등잔에 심지를 돋우던 손순도, 바느질을 하던 손순의 아내도 빙그레 웃었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손순과 아내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어요. 부엌 바닥에는 돌이가 쓰러져 있었어요. 낮부터 어지럽다고 하더니 결국 쓰러지고 만 거예요. 손순은 돌이를 업고 방으로 들어왔어요. 정신을 잃은 돌이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쌀밥, 모락모락 김이 나는 쌀밥. 아, 먹고 싶어.” 순간 손순과 아내는 깜짝 놀라 돌이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손순의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어째서 너희들이 앉아 있는 쪽에서 늘 시래기 냄새가 났는지, 왜 돌이가 이렇게 야위었는지 이제서야 이유를 알겠구나. 늙은 나에게 쌀밥을 먹이려고 너희들은 시래기 죽을 먹었던 것이구나.” 손순의 어머니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어요.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는 너희와 한창 자라는 돌이가 시래기 죽을 먹는 동안에 하는 일 없이 방만 지키고 있는 이 늙은이는 쌀밥을 배부르게 먹었구나.” 손순은 어머니를 달랬지만 손순의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요. 결국 모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요. 다음 날부터 손순의 어머니는 밥을 먹지 않았어요. “어머니, 이러시면 건강을 잃으십니다. 어서 드세요.” 손순이 아무리 권해도 손순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어요. 대신 돌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는 더듬거리며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여 주었어요. 처음에는 손순의 눈치를 보며 먹지 않던 돌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조금씩 받아 먹었어요.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하게 말했어요. “할머니! 쌀밥이 아주 맛있어요. 이번에는 제가 할머니께 먹여 드릴게요.” 돌이는 숟가락 가득 쌀밥을 떠서 할머니 입에 넣어 주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지금까지 할미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구나.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거라.” 쌀밥을 먹으면서부터 돌이는 키도 부쩍 더 자라고 힘도 세어졌어요. 하지만 그만큼 손순의 어머니는 야위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손순과 아내는 그런 어머니가 몹시 걱정이 되었어요. “저러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이에요.” 손순의 아내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어요. 그러자 손순이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사실은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게 있소. 어머니를 살리려면 돌이가 함께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소.” 그러자 손순의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설마, 당신 돌이를 버리자는 말씀이세요?” “돌이가 있으면 어머니는 계속 진지를 드시지 않으실 거고 결국은 돌아가실 거요. 그래도 좋단 말이오?” 손순은 아내를 설득했어요.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한번 돌아가시면 다시는 뵐 수 없소. 부디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기 바라오.” 손순의 아내는 숨죽여 서럽게 울었어요. 마당 한 켠에서 신나게 제기를 차며 웃는 돌이가 보였어요. 돌이의 머리 위로 하얀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고 있었지요. 그러자 얼마 전, 돌이가 밭두렁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손순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어요. “돌이야, 이 못난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그날 밤, 손순과 아내는 잠든 돌이를 업고 집을 나섰어요. 하루 종일 밖에서 노느라 피곤했는지 돌이는 손순 아내의 등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손순은 괭이를 메고 몇 발 앞서 걸었어요. 가난 때문에 자식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손순과 아내는 드디어 깊은 계곡에 도착했어요. 아내는 울음소리를 감추려고 손으로 입을 막았어요. 발걸음을 멈춘 손순이 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어요. 퍽, 퍽 ! 그때였어요. 철그럭! 괭이 끝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상하게 여긴 손순이 달빛을 불빛 삼아 땅을 파 보니 커다란 돌종이 나왔어요. “여보, 이게 뭘까요? 왜 여기에 돌종이 묻혀 있을까요?” 아내가 묻자 손순은 고개를 저었어요. 잠에서 깬 돌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돌멩이로 돌종을 때렸어요. 종에서는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울렸어요. “아버지! 이렇게 예쁜 소리를 내는 종은 처음이에요.” 돌이가 순진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그러자 아내가 손순에게 간절하게 말했어요. “여보! 돌이를 묻으려고 한 곳에서 돌종이 나오다니 이것은 분명 하늘이 돌이를 살려 주시려는 뜻일 거예요.” “그래,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을 이렇게 버릴 수는 없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요. 저도 열심히 일할 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손순의 아내는 돌이를 업고, 손순은 돌종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날부터 손순의 집에서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그러자 신기하게도 손순의 어머니가 건강해지기 시작했지요. 여전히 쌀밥은 돌이에게 주고 손순의 어머니는 시래기 죽을 먹는데도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더 곱고 밝아졌어요. “얘야, 참 신기하구나. 저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배도 고프지 않고 몸도 아프지 않구나. 이건 분명히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 같구나.” 손순의 어머니는 돌종을 깨끗이 닦고 기도를 올렸어요. 종소리를 좋아하는 건 손순의 가족만이 아니었어요. 마을 사람들도 손순의 돌종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졌지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아들을 버릴 생각을 했다니, 하늘이 손순의 효심에 감동해서 선물을 보내신 거야.” 마을 사람들은 돌종소리만 울리면 손순과 손순 아내를 칭찬했어요. 돌종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이웃 마을에서도 돌종소리를 듣기 위해 손순의 집으로 모여들었어요. 소문은 흥덕왕의 귀에도 들어갔어요. “허허허, 참으로 신기한 돌종이구나. 한번 구경이나 해야겠다.” 흥덕왕은 마차를 타고 손순의 집으로 찾아왔어요. 난데없이 흥덕왕이 찾아오자 손순은 깜짝 놀랐어요. 손순의 아내는 바들바들 떨면서 손순에게 속삭였어요. “아무래도 돌종이 폐하의 것인가 봐요. 폐하의 보물을 가져왔으니 우리는 죽은 목숨이에요.” 손순은 부들부들 떨면서 흥덕왕 앞에 엎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가난하여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습니다. 철없는 아들이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기에 할 수 없이 아들을 산속에 묻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를 파 보니 돌종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돌종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돌종이 폐하의 보물인 줄 알았다면 절대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소서.” 손순의 말을 들은 흥덕왕의 눈썹이 꿈틀했어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게 사실인가?” 돌이를 죽이려 한 것까지 밝혀지자 손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흥덕왕이 미소를 지으며 손순을 일으켜 세웠어요. “이미 그대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한지 들었다. 돌종은 하늘이 그대의 효심에 감동해서 내리신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제서야 손순은 마음이 놓였어요. 어느새 손순의 집 주변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요. 흥덕왕은 근엄함 목소리로 말했어요. “신라에 손순 같은 효자가 있다는 것이 몹시 기쁘다. 손순에게 집을 지어 주고, 해마다 쌀 50섬을 내리도록 하겠다. 손순! 그대는 앞으로 어머니를 더욱 잘 모시고 아들도 잘 키우도록 하라.” 손순 가족들은 흥덕왕에게 감사드리며 큰절을 올렸어요.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손순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어요. 모인 사람들도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지요. 그 후로 손순은 흥덕왕이 지어 준 집에서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또한 굶주리는 이웃을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어요. 나중에 사람들은 손순의 집에 절을 세우고 돌종을 모신 다음 절 이름을 ‘홍효사’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돌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손순의 효성을 떠올리곤 했지요.
최치원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서라벌 한쪽에 있는 사량부는 예로부터 최씨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어요. 사량부에 사는 최충은 6두품 귀족 출신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정직해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어요. 어느 날 저녁,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어요. 책을 읽던 최충은 그제서야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났어요. “이런, 비가 오겠군. 어서 아내를 데리러 가야겠구나.” 최충은 아내를 몹시 사랑했어요. 그런데 결혼한 지 7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부부는 조금씩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최충의 아내는 매일 마을 뒷산 동굴에서 기도를 했어요. 우르릉, 콰콰쾅, 쏴아아아아! 최충은 거센 빗줄기를 뚫고 동굴로 달려갔어요. 동굴 안에서 최충의 아내는 기도를 하다 지쳐 잠이 들어 있었어요. “이런, 이러다가 감기 들겠소. 어서 집으로 갑시다.”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말했어요. “여보! 신기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황금빛 돼지 한 마리가 용 무늬의 이불 위에서 잠자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아내의 말에 최충은 기뻐하며 말했어요. “그 꿈은 분명히 태몽이오. 우리에게 귀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소.” 그 일이 있은 후, 최충의 아내는 아이를 가졌고, 여섯 달 뒤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지요. 최충은 아이의 이름을 ‘치원’으로 지었어요. 최치원은 태몽만큼이나 특별했어요. 최치원의 부모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서 최치원에게 젖을 먹이고 사라졌지요. 게다가 최치원은 태어난 지 석 달이 지나자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태어난 지 석 달 밖에 안 된 네가 말을 하다니, 이 아버지는 믿을 수가 없구나.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최치원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하늘에 계신 선비님들이 가르쳐 주셨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충의 꿈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말했어요. “그 아이는 본래 하늘에 떠 있는 문창성인데, 잠시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오. 장차 위대한 학자가 되어 후세에 이름을 떨칠 것이니, 잘 키우도록 하시오.” 꿈에서 깨어난 최충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자 아내가 놀라워하며 말했지요. “저도 막 똑같은 꿈을 꾸었어요. 분명히 치원이는 큰 인물이 될 거예요. 우리 치원이를 정성껏 키워요.” 최충 부부는 잠든 치원의 얼굴을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최치원은 클수록 영리해졌어요. 특히 글 읽는 것을 좋아해서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천자문을 다 익히고 사서삼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최치원은 또래 아이들과 실력 차이가 많아 공부를 같이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최충이 직접 최치원을 가르쳤어요. 시간이 지나 최치원의 학문이 더욱 깊어지자 학식 높은 선비에게 보내 글을 배우게 했어요. 어린 최치원은 매일같이 하인의 등에 업혀서 공부를 하러 갔어요. 어느 날, 하인의 등에 업혀 길을 가던 최치원이 죽은 지렁이를 보았어요. 하인이 장난삼아 물었지요. “도련님, 저게 뭐지요?” “응, 저건 한 일자야.” 며칠 뒤, 이번에는 길바닥에 죽어 있는 개구리를 보았지요. “저건 또 뭐지요?” “응, 저건 하늘 천.” 글을 빨리 깨우친 최치원은 지렁이를 ‘한 일’로, 죽은 개구리를 ‘하늘 천’으로 본 것이었지요. 최치원의 학문이 깊어질수록 마땅한 스승을 찾는 일도 어려워졌어요. 여느 선비들보다 훨씬 글을 많이 읽은 최치원을 가르치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어느 날, 최치원이 최충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저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당나라에 유학을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최충은 어린 아들이 큰 결심을 하자 기특해했어요. “네 꿈이 대견하구나. 허나, 유학을 가기 전에 나와 한 가지 분명히 약속을 하여야 한다. 앞으로 10년 안에 당나라에서 실시하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만약 합격하지 못하면, 이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는 볼 생각을 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와 한 약속을 꼭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어요. 그즈음 당나라에는 신라에서 유학 온 청년들이 많았어요. 당나라의 앞선 문물과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였지요. 신라에서 유학 온 청년들 대부분은 신라 귀족의 자식들이었어요. 하지만 형편이 그리 넉넉치 못한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다른 유학생들처럼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지요. 그래서 최치원은 당나라의 서점에서 일을 해 주며 어렵게 공부를 했어요. 최치원이 성실하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당나라의 재상이 최치원을 불러서 말했어요. “자네 같은 인재가 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안타깝네.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머물면서 편하게 공부하도록 하게.”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당나라 재상의 집에는 귀중한 서적들이 가득한 서재가 있었어요. 거기에 있는 책은 귀한 것들이라서 신라에서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요. 최치원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것이 마냥 즐거웠지요. 최치원은 단숨에 글을 쓰고는 붓을 내려놓았어요. 최치원이 쓴 글을 읽은 당나라 황제와 신하들은 깜짝 놀랐어요. 종이에 쓴 글씨가 마치 용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뛰어났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황제가 곧 비웃으며 말했어요. “상자 안의 물건이 둥글다고 한 것과 반은 희고 반은 황금이라고 한 것은 맞도다. 하지만 나머지는 틀렸다.” 그러나 최치원은 당당하게 말했어요. “황제께서는 돌 상자 안에 분명히 달걀을 넣으셨습니다. ‘백금’은 달걀의 흰자이고, ‘황금’은 달걀의 노른자입니다. 그 달걀이 나중에 닭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을 알리는 새’라고 썼습니다.” 황제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어요. “네 말대로 이 돌 상자 안에는 달걀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달걀은 달걀일 뿐, 새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틀린 것이다.” 신하들은 황제의 시험에 실패한 최치원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어요. 모두들 황제가 과연 어떤 벌을 내릴지 조마조마했지요. 당나라 황제가 말했어요. “자, 이제 돌 상자를 열어서 이 소년에게 보여 주거라.”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 신하가 돌 상자를 열었어요. “아, 아니! 저, 저럴 수가!” 황제는 놀란 나머지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떨어뜨리며 ‘쿵’하고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삐악, 삐악! 돌 상자의 뚜껑을 연 순간, 가느다란 병아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노란 병아리 한 마리가 튀어나왔어요. “분명 달걀을 넣어 두라고 했는데, 어째서 병아리를 넣었느냐?” 화가 난 황제가 신하에게 호통을 쳤어요. 하지만 며칠 전 분명히 달걀을 넣어 둔 신하는 몸 둘 바를 몰라 했어요. “폐하! 맹세코 달걀을 넣었습니다. 저 혼자 한 일이라면 저의 실수라 할 것이오나, 그날 돌 상자를 닫기 전에 여럿이 함께 보았으니 틀림없사옵니다.” 그제서야 황제가 무릎을 치며 말했어요. “오, 알겠다. 따뜻한 돌 상자 안에서 며칠씩 있다 보니, 그사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왔구나. 참으로 놀랍도다! 이 소년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천재로구나!” 당나라 황제는 최치원의 놀라운 지혜를 칭찬하였지요. 당나라 황제에게 인정을 받은 후부터 최치원은 유명해졌어요. 하지만 최치원은 자만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10년 안에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로 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로부터 6년 후, 최치원은 드디어 열여덟 살의 나이로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어요. 당나라로 유학을 오기 전 아버지 최충과 했던 약속 시간을 4년이나 앞당겨 지킨 셈이지요. 당나라 황제는 기쁜 마음으로 최치원에게 벼슬을 내렸어요. “그대의 뛰어난 재능을 당나라를 위해 써 주게.” 뿐만 아니라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주색 관복과 황금 허리띠를 선물로 주었어요. 이것은 황제가 인정하는 신하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었지요. 외국 출신인 최치원에게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어요. 최치원이 스물세 살 때, 당나라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어요. ‘황소’라는 사람이 도적 떼를 이루어 난리를 일으킨 것이었지요. 황소의 도적 떼는 백성을 괴롭히며 온 나라를 휩쓸고 다녔지만, 어찌나 행동이 재빠르고 세력이 큰지 당나라 황제의 군대조차도 어쩌지 못했어요. 당나라 황제는 도적 떼 때문에 큰 골치를 앓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최치원을 불러 물었어요. “그대는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니, 이 도적 떼를 물리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오. 무슨 뾰족한 수가 없겠소?” “적을 물리치려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줄로 아옵니다.”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그러하옵니다. 제가 격문을 하나 써 드리겠습니다. 황제께서는 이 격문을 마을마다 붙이라고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알겠소.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할 터이니 어서 격문을 써 주시오.” 최치원은 바로 황소를 꾸짖는 글을 썼어요. ‘도적 떼의 우두머리 황소는 듣거라! 너는 이 나라를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죽였다. 황제는 하늘이 내리신 사람이다. 그래서 하늘의 신과 땅의 귀신들도 황제를 돕는다. 그런데 하늘의 신과 땅의 귀신들은 이번에 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고 몹시 화가 났다. 그래서 황제와 신과 귀신들이 의논을 한 결과, 너와 너를 따르는 수많은 도적 떼를 함께 죽이기로 결정을 했느니라.’ 다음 날, 최치원이 쓴 격문이 당나라 방방곡곡에 붙었어요. 처음에 격문을 본 황소는 코웃음을 쳤어요. “황제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황제가 신과 의논을 해서 나를 죽인다는 게냐?” 하지만 황소를 따르던 부하들은 달랐어요. 그들 대부분은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최치원의 글을 그대로 믿었지요. “아이고, 하늘이 내리신 황제를 배신했으니 귀신들이 우리를 죽이고 말 거야.” 겁먹은 황소의 부하들은 모두 달아나고 말았어요. 심지어 어떤 부하는 관가로 달려와 황소가 숨어 있는 곳을 몰래 가르쳐 주기도 했어요. 그리하여 당나라를 어지럽히던 황소의 난은 쉽게 가라앉았어요. “수많은 군사가 하지 못한 일을 붓 한 자루로 해냈으니, 장한 일이로다.” 당나라 황제는 최치원을 칭찬했어요. 황소의 난을 잠재운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제일가는 대신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이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온갖 부귀와 명예를 다 누리게 되었어요. 하지만 최치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신라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나는 나의 실력과 재능을 당나라를 위해 쓰고 있다. 그러나 나의 조국은 신라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해 약하고 작은 나라다. 내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나 혼자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어요. 당나라 황제와 대신들은 최치원을 붙잡았지만 최치원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어요. 당시 신라에서는 귀족들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귀족들 마음대로 왕을 죽이거나 왕위에서 쫓아냈어요. 게다가 지방에 세력을 둔 호족들은 호시탐탐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어요.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자 헌강왕이 반갑게 맞이했어요. “신라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소. 그대의 재능을 신라를 위해 써 주시오.” 헌강왕은 최치원을 ‘한림학사’로 임명했어요.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거세었어요. “한림학사라는 중요한 관직은 진골과 성골만이 맡을 수 있사옵니다. 6두품인 최치원은 절대 한림학사가 될 수 없습니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어요. 신분 제도에 따르면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한림학사가 될 수 없었지요. 재능이나 됨됨이보다는 출신 신분으로 벼슬이 정해지는 신라에서는 최치원이 마음껏 꿈을 펼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최치원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최지원은 헌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성왕에게 (시무십조)를 올렸어요. (시무십조)란 부패한 신라 사회를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 해야 할 열 가지 일이었지요. 그 내용은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법을 없애고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줄이는 것과 같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귀족들과 호족들은 최치원을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최치원은 신라를 뒤엎으려고 합니다. 당장 최치원을 신라에서 내치십시오.” 귀족들에게 눌려 힘이 없었던 헌강왕은 어쩔 수 없이 최치원을 쫓아냈어요. “아, 당나라에서는 실력만으로 외국인인 나를 인정하였는데 신라는 아직도 고리타분한 신분을 고집하는구나. 신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결국 최치원은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로 평생을 보냈어요. 그런데 그것마저도 귀족들이 방해를 했어요. “최치원이 젊은이들에게 위험한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최치원에게 배우는 젊은이들에게는 절대 벼슬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최치원은 제자들도 잃고 말았지요. 실의에 빠진 최치원은 결국 가족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글을 쓰며 나라를 걱정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뛰어난 글 솜씨와 깊은 학식으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정작 조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불행한 천재 최치원은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답니다.
처용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끼룩 끼루루룩.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개운포에는 오늘도 여러 나라 배들이 들어왔어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삼국을 통일한 후 개운포는 세계 여러 나라 상인들이 드나드는 유명한 항구가 되었지요. 붉은 돛에 거대한 용 머리를 단 당나라 배, 검은 돛에 코끼리 무늬가 그려져 있는 인도 배, 하얀 돛에 주홍색, 노란색 깃발을 화려하게 펄럭이는 아라비아 배가 닻을 내렸어요. 신라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당나라 상인, 가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예쁜 인도 상인, 하얀 얼굴에 갈색 눈을 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라비아 상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떠들어 대는 통에 개운포는 늘 활기찼어요.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는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어요. 백제의 드넓고 비옥한 평야를 차지하면서 먹을 것이 풍부해졌고, 용감한 고구려 사람들이 군대에 배치되자 나라의 수비도 튼튼해졌지요. 이제 신라에는 부족한 것이 없는 듯 보였어요. 토함산에서 서라벌을 내려다보면 시내 전체가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가득했지요. 서라벌 시내를 화려한 마차 행렬이 지나갔어요. 개운포로 뱃놀이를 하러 가는 헌강왕의 행렬이었지요. 헌강왕의 행렬이 지나가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어요. 헌강왕은 화려한 서라벌 시내를 보며 미소를 지었어요. 하지만 헌강왕은 그리 지혜롭지 못한 왕이었어요. 사실 화려하게 차려 입고 배불리 먹는 사람들은 귀족과 관리들뿐이었고, 백성은 나날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거든요. 왕이 직접 다스리기 힘들어 내려 보낸 지방 관리들은 그 지역을 잘 다스리기는커녕 세금을 많이 걷어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사는 데에만 신경을 썼어요. 그러다 보니 백성의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지요. 헌강왕은 백성의 이러한 고통을 알지 못했어요. 헌강왕 주위에는 헌강왕의 비위만 맞추며 사치를 즐기는 귀족들만 있었기 때문이에요. 드디어 헌강왕을 태운 마차가 개운포에 이르렀어요. 이때였어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웬 남자가 달려와 헌강왕의 다리에 매달리며 사정했어요. “폐하! 우리 지역 관리들을 내쫓아 주소서. 그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서 백성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굶어 죽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남자의 말에 헌강왕은 크게 놀랐어요. “무엇이라고? 내 백성이 가난에 시달리고 심지어 굶어 죽기까지 한다고?” 놀란 신하들은 그 남자를 어딘가로 끌고 가 버렸어요. 사실 신하들은 나라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혹시라도 헌강왕이 이를 알게 되면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어 벌을 줄까 봐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폐하! 배가 준비되었으니 어서 뱃놀이를 가시지요.” 신하들은 헌강왕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서둘러 헌강왕을 배에 태웠어요. 배 위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지만 헌강왕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어요. ‘혹시 백성이 가난에 시달리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하들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그때,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하늘의 해를 가려 버렸어요. 그와 동시에 바다에서 회색빛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안개에 휩싸여 헌강왕과 신하들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어요. 헌강왕은 일관을 불러 호통을 쳤어요. “그대가 오늘 분명 날이 맑을 것이라고 해서 이곳으로 뱃놀이를 왔거늘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안개까지 피어오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는 분명 동해 용왕이 화가 나서 그런 듯하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용왕이 화를 풀겠느냐?” “용왕에게 절을 지어 주겠다고 하시면 날이 갤 것입니다.” 일관의 말에 헌강왕은 안개를 헤치고 뱃머리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목청껏 외쳤지요. “동해의 용왕이여! 그대를 위해 절을 지어 주겠으니 우리가 무사히 항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바다를 덮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디선가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더니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던 구름을 날려 버렸어요.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바다에는 맑은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헌강왕이 탄 배 주변으로 파도가 일어나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용 여덟 마리가 나타난 거예요. 왕과 신하들은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 여덟 마리 중에서 가장 큰 용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어요. 금관을 쓴 용은 헌강왕 앞으로 헤엄쳐 오더니 공손하게 절을 올렸어요. “폐하! 저는 동해를 지키는 용왕입니다.” 헌강왕과 신하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용왕을 바라보았어요. 용왕은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뒤에 있는 일곱 마리 용은 제 아들들입니다. 폐하께서 저희들을 위해 절을 지어 주신다니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저희들의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용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용왕과 일곱 아들이 화려한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입에 문 여의주를 하늘로 던졌다가 받기도 하고, 꼬리로 물을 튀기며 재주를 부리기도 하고, 긴 몸을 이리저리 꼬아 신기한 모양을 만들기도 했어요. 세상의 여러 춤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던 헌강왕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신기한 춤은 처음 보았지요. “훌륭하오! 정말 훌륭하오!” 헌강왕이 칭찬하자 용왕과 일곱 아들도 몹시 기뻐했어요. “폐하! 저희들을 위해 절을 지어 주시고, 또 저희들의 춤을 아름답다고 칭찬까지 해 주시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 보답으로 제 아들 중에 한 명을 폐하께 보내고자 합니다.” 용왕은 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뒤에 있던 일곱 마리 용도 용왕을 따라 바다 속으로 들어갔지요. “아니, 아들 한 명을 내게 준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하게 생각한 헌강왕이 바다를 굽어보는 순간, 갑자기 물속에서 웬 사내가 올라왔어요. 회색 눈에 하얀 피부, 그리고 용의 비늘과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의 신비한 모습이었어요. 사내는 헤엄을 쳐서 배 위로 올라오더니 헌강왕에게 인사했어요. “폐하! 저는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이라고 하옵니다. 아바마마의 분부로 폐하를 모시기 위해 왔으니 부디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헌강왕은 비록 겉모습은 특이했지만 총명하고 선량해 보이는 처용을 신하로 삼기로 했어요. 다음 날부터 처용은 헌강왕의 곁에서 나랏일을 도왔어요. 처용은 재주가 많았지요.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아서 당나라는 물론이고 인도나 아라비아 사신들과도 척척 대화를 나누었어요. 다른 나라 왕이 보낸 편지를 읽고 그 뜻을 풀어 주고 답장을 쓰는 것도 처용의 일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처용은 병을 잘 고쳤어요. 배가 아프거나 피부병이 생기거나, 심한 병에 걸려 꼼짝 못 하게 된 환자들도 처용이 지어 준 약을 먹으면 병이 씻은 듯이 나았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처용은 신라에서 유명해졌어요. 헌강왕이 처용을 아낀 가장 큰 이유는 처용이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처용은 욕심이 없어서 벼슬살이를 하며 녹봉을 받아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돈 한 푼 받지 않고 병을 치료해 주었어요. 이렇게 가난한 백성을 보살피다 보니 처용은 신라 사정을 더 잘 알게 되었지요. 처용은 헌강왕에게 정직하게 말했어요. “폐하! 폐하께서 신라 각 지역에 내려 보내신 관리들은 백성의 생활을 돌보기는커녕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처용의 보고를 받은 헌강왕은 곧 조사를 벌여 백성을 괴롭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관리들을 벌했어요. 이렇게 되자 이제 관리들은 함부로 백성을 괴롭힐 수 없었어요. 헌강왕은 처용을 더욱 믿고 아꼈지요. 하지만 가족들과 헤어져 낯선 땅에서 홀로 생활하는 처용은 외로웠어요. 아무리 처용이 지혜롭고 너그러워도 특이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여자들은 처용을 무서워하고 혼인을 꺼려했지요. 처용은 헌강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동해 용왕을 위해 지은 망해사에 찾아가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하염없이 동해를 바라보기도 했어요. ‘아, 차라리 바다 속에 있었다면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텐데.’ 처용이 외로워하는 것을 눈치 챈 헌강왕은 신라 귀족의 딸들 중에서 아름답고 착한 처녀를 골라 처용과 혼인시켜 주었어요. 처용의 아내가 된 여인은 처음에는 처용을 보고 놀랐지만 이내 처용의 따뜻한 성품을 알고는 진심으로 처용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처용이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에 신라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어요. 처용은 매일 약을 챙겨 들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어요. 처용이 노력한 결과 병은 곧 사라졌어요. 헌강왕은 몹시 기뻐하며 처용을 위해 잔치를 열어 주었지요. 그날 밤 처용은 기분 좋게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안방의 불은 꺼져 있었어요. “아내는 먼저 잠들었나 보구나.” 처용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문을 열었어요. 그 순간 처용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버렸어요. 아내는 깊이 잠이 들어 있었지요. 그런데 웬 남자가 처용의 아내를 꼭 끌어안고 함께 잠들어 있는 것이었어요. ‘이럴 수가! 아내가 나 외에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처용은 가슴 가득 슬픔이 밀려왔어요. 처용은 가만히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왔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신라 사람이 될 수 없는 모양이구나.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내 아내는 나를 낯선 남자로 밖에 보지 않는다니.’ 처용은 당장 바다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자 슬픈 노래가 떠올랐어요. 처용은 슬픔을 가득 담은 몸짓으로 춤을 추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닐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불 밑에 다리가 네 개구나. 둘은 내 아내의 다리인데 나머지 둘은 누구의 다리인가? 본디 내 아내이지만 빼앗으려 하니 어쩔 수 없어라.” 처용은 구슬픈 노랫소리에 맞추어 달빛 아래서 쓸쓸하게 춤을 추었어요. 춤을 추는 처용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이때였어요. 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달려나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어요.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처용은 춤을 멈추고 가만히 그 남자를 바라보았어요. 달빛 아래서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사람이 아니라 전염병을 몰고 다니는 귀신이었어요. 귀신은 바들바들 떨면서 사정했어요. “저분이 전염병을 고치시는 처용 어른의 부인이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지나가다가 하도 아름다운 여인이 자고 있길래 그저 잠시 옆에 누웠을 뿐입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소서.” 처용은 귀신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어요. “자네도 어지간히 외로웠나 보군. 나도 처음 신라에 왔을 때 그랬다네. 용서해 줄 테니 어서 가게.” 그러자 귀신이 울면서 말했어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처용 어른이 계시는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귀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이 일은 곧 신라 전체에 퍼졌어요. 그때부터 신라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대문에 붙여 놓았어요. 그러면 전염병을 몰고 다니는 귀신이 절대 그 집의 사람은 해치지 않았어요. 용왕의 아들 처용은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주는 수호신이 되었어요.
궁예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헌안왕의 후궁이 아기를 낳는 날이었어요. 헌안왕이 창밖으로 후궁이 머무는 별궁 쪽을 바라보는데 별궁 지붕에 무지갯빛이 피어올라 하늘을 향해 올라갔어요. ‘오호, 저것은 보통 조짐이 아니다. 아무래도 우리 통일 신라를 발전시킬 뛰어난 아이가 태어나려는가 보다.’ 헌안왕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싸움을 벌이던 삼국 시대에 신라는 가장 약한 나라였지만, 김유신과 김춘추를 비롯한 많은 영웅들과 화랑들의 뛰어난 활약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통일 신라로 거듭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귀족들은 나라의 안정보다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채우려 했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어요. 결국, 통일 신라는 조금씩 국력이 쇠약해져 갔지요. 헌안왕은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울 때 영특한 왕자가 태어나 통일 신라에 다시 한 번 눈부신 전성기를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후궁의 처소에서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이윽고 시녀 하나가 달려와 말했어요. “폐하! 축하 드리옵니다. 왕자 아기씨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목소리도 우렁차시고 인물도 아주 좋으십니다.” 헌안왕은 호탕하게 웃었어요. 그러나 시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일관은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요. “폐하! 오늘 태어나신 왕자님은 이상하게 벌써 이가 나 있사옵니다. 게다가 오늘은 음력 5월 5일 단오입니다. 예로부터 단오에 태어난 아이는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뒤탈을 없애기 위해 왕자님을 키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관의 말에 헌안왕은 생각에 잠겼어요. ‘혹시라도 그 아이가 자라 나라에 누를 끼친다면 내가 큰 죄를 짓는 것이니 어쩔 수 없구나.’ 헌안왕은 눈물을 머금고 자객을 불러 몰래 명령을 내렸어요. “오늘 당장 후궁이 낳은 그 아이를 없애도록 해라.” 그날 밤, 후궁은 아기를 품에 안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어요. “아가야. 너는 이제 신라의 왕이 될 거야. 반드시 좋은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렴.” 바로 그때 하인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불이야! 불이야!” 바깥에는 넘실거리는 붉은 불꽃이 보였지요. 후궁은 깜짝 놀라 아기를 안고 일어섰어요. 그때, 문이 열리며 자객이 뛰어 들어왔어요. 자객은 다짜고짜 아기를 빼앗아 달아나려고 했어요. “내 아기를 돌려주세요. 아가! 아가!” 후궁은 울부짖으며 매달렸어요. 그러자 자객은 칼을 들어 후궁을 찔러 죽이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어요. 사람들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객이 아기를 안고 달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후궁에게 줄 죽을 끓이던 유모가 그 모습을 보았어요. 유모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자객의 뒤를 밟았어요. 자객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불길 속을 헤치고 달리더니 높은 누각으로 올라갔어요. ‘앗! 저기서 왕자님을 던지려고 하는구나.’ 순간적으로 눈치를 챈 유모는 누각 밑으로 몸을 숨겼어요. 유모의 예상대로 자객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그대로 누각 아래로 던져 버렸어요. 유모는 재빨리 달려가 아기를 받아 안았지요. 유모는 아기를 안은 채 벌벌 떨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자기 손가락이 아기의 한쪽 눈을 찌르고 있었던 거예요. 떨어지는 아기를 받아 안을 때 실수를 했던 것이지요.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었어요. 유모는 아기를 안고 불길을 헤치며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왕자님,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왕자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유모는 그날 밤 목숨을 걸고 대궐을 빠져나갔어요. 유모는 아이의 이름을 궁예라고 짓고 시골에 숨어 살았어요. 궁예는 유모를 자신의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지요. 그러나 어려서부터 궁예는 슬픔과 분노를 먼저 배웠어요. 아기였을 때 당한 사고로 애꾸눈이 된 궁예는 어디서나 놀림받고 따돌림을 당했지요. 유모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어요. 어느 날 유모는 궁예를 불러 놓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궁예는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사실 저는 왕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유모였습니다.” 유모는 눈물을 흘리며 궁예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았어요. 자신이 버려진 왕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궁예는 한동안 멍해서 할 말을 잃었어요. “왕자님, 왕자님은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쁜 행동은 그만하시고 공부와 무예 수련에 힘쓰십시오. 그래야 왕자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궁예는 공손히 유모에게 절을 올렸어요. “아무리 유모라고 해도 저를 구하고 키워 주셨으니 제게는 친어머니나 다름없으십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이제부터는 바르게 자라겠습니다.” 며칠 후 궁예는 유모에게 이별을 고했어요. “저는 반드시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성공하거든 다시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궁예는 그길로 깊은 산중에 있는 세달사라는 절로 들어갔어요. 일단 스님이 되어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지요. 세달사에서 궁예는 불교 공부를 하는 틈틈이 병서를 읽었어요. “스님이 병서를 읽다니, 정말 이상해.”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지만 궁예는 신경쓰지 않았어요. 어느 날 궁예가 법당으로 가고 있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궁예의 바리때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리고 날아갔어요. 궁예가 집어 보니 그것은 작은 상아 조각이었어요. 상아 조각에는 글자가 씌어 있었어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본 궁예는 깜짝 놀랐어요. 그 글자는 왕을 뜻하는 글자였거든요. ‘그래. 언젠가는 내가 왕이 될 인물이라는 것을 하늘이 가르쳐 주는구나.’ 궁예는 상아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했어요. 그즈음 신라는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더욱 큰 혼란에 빠졌어요. 부패에 찌든 관리들은 백성들에게서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였고,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도적 떼에 합류했어요. 조금이라도 무예 실력이 있는 사람은 쉽게 도적 떼의 두목이 되었지요. ‘드디어 때가 왔다! 이제 내 뜻을 펼치러 나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궁예는 절을 떠났어요. 그동안 궁예는 무예 실력도, 병법에 대한 지식도 눈부시게 발전해 있었지요. 궁예는 북원에서 이름을 떨치는 도적 두목 양길을 찾아갔어요. 양길은 첫눈에 궁예의 뛰어난 재주를 알아보았어요. 당시 대부분의 도적들은 활 쏘는 법이나 칼 쓰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지요. 궁예는 양길의 밑으로 들어간 그날부터 부하들에게 무예의 기본부터 가르쳤어요. 양길도 유능한 부하를 얻은 것을 기뻐하며 궁예를 신임했어요. 양길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한 궁예는 드디어 부대를 이끌고 신라 동부 지역으로 쳐들어갔어요. ‘내 왕좌를 빼앗은 나라! 내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든 나라! 반드시 신라를 쳐서 내 자리를 되찾을 테다.’ 궁예는 치악산 석남사에 근거지를 둔 다음 동부 지역 성을 차례차례 함락해 나갔어요. 궁예는 병서에서 익힌 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적을 무찔렀어요. 일부러 후퇴하는 척하면서 적을 유인한 다음 갑자기 뒤를 쳐서 무찌르기도 하고, 밤중에 기습을 하기도 했어요. 가짜 근거지를 만들어 놓아 신라군이 몰려들게 한 다음 그들을 겹겹이 둘러싸고 화살을 쏘아 대어 승리를 거두기도 했어요.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머리를 써서 전투를 했기 때문에 궁예의 부대는 늘 가장 적은 희생자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이렇게 되니 양길 밑의 부하들은 너도나도 궁예의 부대에서 싸우고 싶어했어요. 어느덧 궁예는 부하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대장이 되었어요. 부하들이 궁예를 따른 것은 단순히 궁예가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궁예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다스릴 줄 알았어요. 궁예는 전투에서 이겨 전리품을 챙기면 제일 먼저 양길의 몫을 떼어 내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리고 자기 몫은 맨 나중에 챙겼지요. 자연히 궁예의 부하들은 누구나 궁예를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를 했어요. 궁예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양길은 궁예를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궁예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궁예를 없애려는 계획까지 세웠지요. 양길의 속셈을 알아차린 궁예는 독립을 하기로 결심하고 양길을 떠났어요. 그러자 수많은 부하들이 궁예를 따라나섰어요. 이제 자기만의 무리를 이끌고 독립한 궁예는 더욱 무서운 기세로 신라의 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궁예는 비록 왕실에는 분노를 느꼈지만 백성에게는 너그러웠어요. 항복해 오는 신라 군사들은 절대 죽이지 않았고, 함락된 성의 백성들에게도 곡식을 나누어 주었지요. 성을 함락해 보물을 챙기면 보물을 신라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어요. 이런 소문이 퍼지자 신라의 성들은 궁예가 나타나면 아예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어요. 이제 궁예는 왕실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세력으로 성장했어요. 궁예의 부하들은 궁예에게 제안했어요. “우리 무리는 단순한 도적의 무리가 아닙니다. 이제는 성도 있고 백성들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새로운 나라를 세웁시다.” 궁예는 부하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왕이 되었어요. 그리고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고 지었어요. 용맹한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하겠다는 뜻이지요. 이즈음 궁예에게 큰 지원 세력이 나타났어요. 송악을 다스리는 왕씨 일가가 궁예를 찾아온 것이지요. “폐하! 저는 왕건이라 하옵니다. 저를 부하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궁예는 젊고 늠름한 왕건에게 호감을 느꼈어요. 궁예는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왕건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여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벌이게 했어요. 왕건은 한강 이북까지 정복하여 후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백성들은 후고구려로 몰려들었고 궁예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 갔지요. 반면에 신라는 점점 국력이 약해졌어요. 이렇게 궁예의 세력이 무서운 속도로 커지자 양길은 질투를 느꼈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방랑하던 녀석을 내가 부하로 거두어 주었더니 녀석은 내 부하들을 이끌고 달아났어. 그런데 이제는 나라까지 세우고 왕이 되었단 말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궁예는 양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발 먼저 양길의 군대를 공격했어요. 치열한 전쟁 끝에 양길의 군대는 크게 패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어요. 지난날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양길과 궁예는 이렇게 원수가 되었어요. 양길은 달아나면서 궁예에게 외쳤어요. “너는 배신자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너도 네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그 말을 흘려들었어요. 궁예에게는 이미 이 땅 어디에서도 자신에게 대적할 세력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를 더욱 튼튼하게 꾸려 나갔어요. 그러나 이렇게 힘이 강해지자 궁예는 점점 변하기 시작했어요. 예전의 너그럽고 인자하던 성품은 사라지고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특히 궁예는 왕건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궁예는 부하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왕건을 보면서 지난날 자신이 양길의 부하로 있을 때를 떠올렸어요. ‘나도 꼭 지금의 왕건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양길에게 어떻게 했던가? 양길에게서 나를 따르는 군사들을 빼내고 결국 양길을 공격했다. 왕건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게다가 양길이 자신에게 저주처럼 퍼부었던 말도 떠올랐어요. “너는 배신자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너도 네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자 궁예는 두려워졌어요. 부하들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누구든 조금만 수상하면 그대로 처형했어요. 이렇게 궁예가 난폭해지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어요. 궁예의 부하들도 왕건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지요. “임금님을 죽이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부하들의 간청에 왕건도 어렵게 결심했어요. “좋습니다.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왕을 몰아냅시다.” 왕건은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귀족들이 왕건 편에 가담했어요.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궁예는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따르는 부하 몇 명과 간신히 성을 빠져나왔어요. 깊은 산속으로 도망친 궁예는 보리 이삭을 훔쳐 먹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나가다가 그만 백성들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폭군 궁예다!” “당장 죽여라!” 결국 궁예는 자기 백성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어요. 버림받은 신라의 왕자로 태어난 궁예는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어요.
왕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진성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였어요. 진성여왕은 나라를 돌보지 않아 나라 안팎이 몹시 어수선했답니다. 송악의 태수 왕융은 신라의 상황을 생각하니 몹시 답답했어요. 오늘도 왕융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집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정자 한쪽에서는 태수의 부인 한씨가 가야금을 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보름달은 이지러져 초생달이 되고 오늘 부는 바람은 어제 분 바람이 아니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오늘을 평생처럼 살아보세.” 노래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어요. “저 노래는 꼭 요즘 신라의 신세를 그대로 읊은 것 같군.” 왕융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때, 대문 쪽에서 왁자지껄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어요. “태수님! 저희는 충청도에서 도망 나온 백성입니다. 배가 고파 그러니 식은 밥이라도 좀 주십시오.”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은 겁에 질린 채 몹시 피곤한 모습이었어요. “아니, 왜 충청도에서 이곳까지 도망을 왔단 말이오?” 왕융이 묻자 한 아낙이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어요. “여왕님께서 나라를 전혀 돌보지 않으니 관리들이 저희를 괴롭힙니다. 세금을 어찌나 많이 내라고 하는지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 도망쳤습니다.” 뒤이어 한 남자가 분하다는 듯 외쳤어요. “제 이웃들은 모두 도적 떼에 들어갔습니다. 저도 도적이 되고 싶었지만 차마 죄를 지을 수가 없어서 도망 나온 것입니다.” 앞에 서 있던 아이가 말했어요.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신라는 곧 망할 거래요.” 아이의 말에 왕융은 가슴이 아팠어요. 왕융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얘야. 우리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는단다.” 한씨 부인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고 정자로 돌아왔어요. 왕융과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지요. “그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이대로 가면 신라는 망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 않습니까?” 한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자 왕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이곳 송악은 고구려의 땅이었지 않소? 얼마 전에는 고구려 후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는 현장을 덮쳤다오. 이번에는 다행히 잡아들였지만, 앞으로도 반란은 계속 일어날 것이오.” 그러자 다른 남자가 말했어요. “사실은 몇 달 전에 고향에 갔다 왔는데 그곳에서도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백성들도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그때 나지막히 목탁 소리가 들려왔어요. 웬 스님이 왕융의 집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지요. 당시에는 스님들을 존경하여 깍듯이 대접했어요. 왕융은 정자 아래로 내려와 손을 모으고 스님께 인사했어요. “스님, 저희와 함께 차라도 드시고 가시지요.” 왕융이 자리를 권했지만 스님은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집을 둘러보았어요. 그러고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어요. “흐음, 기장 심을 밭에 인삼을 심었구먼.” 모두 어리둥절한 눈으로 스님을 바라보았지만 스님은 말없이 그대로 왕융의 집을 나갔어요. 왕융과 한씨 부인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스님을 붙잡았지요. “스님!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은 왕융과 한씨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어요. “그대들에게 이 나라를 통일할 왕이 태어날 것이오. 그런데 이 집은 왕이 태어날 곳이 못 된다오. 그러니 어서 이사를 가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스님은 편지 한 장을 건네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왕융과 한씨 부인은 스님이 준 편지를 읽어 보았어요. “태수 왕융이여! 그대의 아들은 왕이 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집터는 그대의 아들에게 좋지 않으니 송악산 아래로 이사 가시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건’이라고 지으시오.” “여보,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겠어요. 만약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가 왕이 될 운명을 지녔다는 소문이 나면 신라 왕실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한씨 부인의 말에 왕융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옳은 말입니다. 일단 스님이 알려 주신 곳으로 이사를 갑시다.” 한 달 뒤 왕융은 송악산 아래로 이사를 했어요. 이사한 뒤 한씨 부인은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어요.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체격이 크고 목소리도 우렁찼어요. 왕융은 스님이 지어 준 대로 아이의 이름을 ‘건’이라고 지었지요. 왕건은 어릴 때부터 자기 나이 또래 아이들보다 힘이 셌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작은 아이들에게 맞고 왔지요. “너는 체격도 큰데 왜 항상 너보다 작은 아이들에게 맞고 오느냐?” 한씨 부인이 속상해하며 묻자 왕건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어요. “어머니, 저는 저보다 큰 아이에게는 절대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어리거나 작은 아이에게는 져 줍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제가 일부러 사정을 봐주었다는 것을 알고는 저를 따르고 좋아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융은 생각했어요. ‘이 아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구나. 스님 말씀대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없어.’ 왕융은 훌륭한 스승을 모셔다가 왕건에게 역사와 문학은 물론이고, 병법까지 가르쳤어요. 그즈음 신라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이 백제 후예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후백제’라는 나라를 세웠지요. 또한 신라 왕실 출신의 궁예는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고구려 후예들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를 세웠어요. 다시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서로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신라는 완전히 기울어 옛 영광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어요. 서쪽에서 공격해 오는 후백제와 북쪽에서 공격해 오는 후고구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요. 이렇게 되자 송악 태수 왕융은 입장이 곤란해졌어요. 송악은 신라보다는 후고구려에 더 가까웠지요. 궁예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송악도 불바다가 될 것이 뻔했어요. 그렇다고 궁예를 따른다면 그것은 신라를 배신하는 것이었지요. 궁예는 왕융에게 항복하라고 자꾸만 협박을 해 왔어요.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신라 왕실에서 버림받아 그곳까지 온 것이었지요. 그래서 궁예는 신라를 아주 싫어했어요. “그대가 내 신하가 된다면 송악을 공격하지 않고 잘 보호해 주겠다. 그러나 그대가 계속 신라 왕실을 따른다면 송악을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궁예의 편지를 받은 왕융은 고민에 빠졌지요. “신라 왕실을 배신하고 송악 백성을 지키느냐, 신라 왕실을 받들고 송악 백성을 전쟁터로 내모느냐. 음, 어떻게 해야 할까?” 왕융이 이 문제로 걱정하자 왕건이 말했어요. “아버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왕과 지도자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라 왕실은 백성을 편안하게 보살피지 못하니 자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송악 백성을 전쟁에 시달리게 한다면 그것 또한 지도자로서 죄를 짓는 일입니다. 차라리 후고구려의 궁예에게 일시적으로나마 항복을 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왕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왕융은 왕건을 데리고 궁예를 찾아갔어요. “송악 태수인 저 왕융은 오늘부터 폐하의 신하가 되고자 하오니 부디 제 아들과 저를 신하로 받아들여 주소서.” 궁예는 의심 어린 눈으로 왕융과 왕건을 노려보았어요. “폐하! 송악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비록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저희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도 고구려의 후예로서 폐하만큼이나 신라 왕실에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부디 폐하의 신하가 되어 후삼국을 통일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왕건의 말을 들은 궁예는 매우 기뻐하며 호탕하게 웃었어요. “하하하! 내가 이제야 쓸 만한 인재를 만났구나. 왕건이라 했느냐? 오늘부터 내 곁에 머물면서 후삼국 통일을 위해 생각을 모아 보자.” 왕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어요. 그날부터 왕건은 궁예의 오른팔이 되었지요. 신라는 날이 갈수록 기울어 갔어요.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는 서로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되려고 팽팽하게 겨루었지요. 어릴 때부터 병법을 공부해 온 왕건은 전투에 나가 군사들을 잘 지휘했어요. 왕건은 후고구려 장군들 중에서 너그럽고 용맹하여 부하들도 왕건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지요. 왕건 덕분에 궁예는 신라와 후백제 땅을 빼앗아 영토를 넓혔어요. 후고구려는 점점 더 세력이 커져 갔어요. 후고구려의 힘이 강해지고 신라가 쩔쩔매며 항복해 오자, 궁예는 점점 교만해졌어요. 후고구려를 세울 당시 용맹하고 당당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괴롭혔어요. 또, 쓸데없는 전쟁을 자주 일으켜 백성을 지치게 만들었지요. 백성들은 궁예를 원망하게 되었고, 궁예를 따르던 귀족들도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어요. “올바른 지도자를 새로 모셔야 합니다.” 귀족과 백성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왕건에게로 향했어요. 후고구려를 이만큼 키워 놓은 것은 왕건이었으니까요. 그러자 궁예는 왕건을 의심하고 경계하였어요. 어느 날 밤 왕건의 집에 여러 장수들이 몰려왔어요. “이 밤중에 무슨 일들이오?” 왕건이 묻자 한 장수가 다급하게 외쳤어요. “어서 달아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장군을 반역죄로 잡아들이기 위해 군사를 보냈습니다. 어서 저희와 함께 몸을 피하십시오.” 잠시 후 궁예의 군사들이 왕건의 집에 들이닥쳤어요. 그러나 왕건은 장수들을 따라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궁예는 몹시 분개했지요. 한편 귀족들과 장군들은 왕건이 숨어 있는 곳으로 속속 모였어요. “왕건 장군님! 이제 새로운 시대가 옵니다. 부디 저희의 새로운 왕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전쟁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후고구려 백성을 구해 주시옵소서.” 처음부터 궁예를 배신할 마음이 없었던 왕건은 왕위에 오르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어요.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면 무조건 거절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결단이 필요했지요. 왕건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알겠소. 백성을 위해서 그대들과 손잡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소.” 왕건의 말에 장수들은 엎드리며 충성을 맹세했어요. 왕건은 말에 올라 힘차게 외쳤어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진격한다!” “와! 궁예를 무찌르러 가자!” 왕건의 군사들은 궁예의 성으로 쳐들어갔어요. “궁예는 나와서 목을 내놓으라!” 성 밖에서 들리는 함성 소리에 궁예는 대궐 마당으로 달려나왔어요. 대궐을 몇 겹으로 둘러싼 횃불들이 너울거리고 있는 가운데 성난 군사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요. 이윽고 군사들이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어요.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들고 여기저기서 칼싸움이 일어났지요. 성문이 열리자 군사들이 들어왔어요. 군사들은 궁예를 찾아 온 대궐을 뒤졌어요. 궁예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변장을 하고 겨우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성 밖의 마을을 지나가다가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지요. 화가 난 사람들은 궁예에게 마구 돌을 던졌어요. 결국 궁예는 자기가 다스리던 백성의 손에 죽고 말았답니다. 궁예를 내쫓은 후 왕건은 왕위에 올랐어요. 왕건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하와 백성에게 외쳤어요. “우리는 자랑스런 고구려의 후예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한다. 용맹했던 조상들의 명예와 영광을 우리가 되살리도록 하자.” 고려를 세운 후 왕건은 백성의 세금을 줄여 주었어요. 또한 백성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지켜 주었지요. 왕건이 나라를 잘 다스리자 신라는 물론 후백제의 백성까지도 왕건을 왕으로 모시고 싶어했어요. 왕건은 후백제와 계속 경쟁하는 한편, 신라와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러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신라의 왕은 스스로 신라를 고려에 바치기에 이르렀어요. 결국 왕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라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신라와 손을 잡은 왕건은 드디어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는 영웅이 되었답니다. 그 후로도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 출신의 백성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황진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따스한 바람이 겨우내 얼어붙은 시냇물을 어루만져 졸졸 흐르게 했어요. 길가의 버드나무들은 바람에 늘어져 찰랑찰랑 춤을 추었지요. 나비들은 진달래꽃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팔랑팔랑 넘나들었어요. 송도에 흐드러진 봄날이 온 거예요. 한 어여쁜 아가씨가 몸종을 거느리고 봄나들이를 나왔어요. 아가씨는 연분홍빛 진달래꽃을 홀린 듯 바라보았어요. “이 여린 꽃잎 좀 봐. 작은 입술을 내민 아기처럼 앙증맞지 않니?” 아가씨가 진달래꽃 향기를 맡으려고 허리를 숙일 때였어요. 쓰고 있던 장옷이 스르르 흘러내려 꽃같이 고운 얼굴이 드러났지요. 마주 오던 한 서생이 아가씨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아름다운 처자로다! 여보게, 저 처자가 대체 어느 댁 규수인가?” 서생은 얼굴이 붉어져 친구들에게 물었어요. “아니, 황 진사 댁 서녀 황진이를 모른다는 말인가? 얼굴이 고울 뿐 아니라 사서와 경서까지 읽는다고 소문이 쫙 퍼졌지.” “허허, 아녀자가 책을 읽어서 어디에다 쓰겠나? 시집 잘 가서 좋은 낭군 만나면 그만이지. 하긴 첩의 딸이라 시집 잘 가기도 글렀군.” 친구들은 소리 높여 웃었지만, 서생은 웃지 않았어요. 황진이에게 첫눈에 반해 넋이 빠진 듯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어디선가 새들이 담장 안으로 포르르 날아와 노래했어요. 뜰을 거닐던 황진이는 부러운 듯 새들을 바라보았어요. ‘새들도 온 세상을 누비며 마음껏 노래하는데, 어째서 나는 시 한 수 맘껏 읊지 못할까? 쓰고 싶은 시는 많은데, 여자가 글을 써서 뭐하느냐고 하니 답답하기만 해.’ 황진이가 한숨을 쉬는데 몸종이 달려와서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어요. 이웃 사람이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데,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딱 멈춰 꼼짝도 안 한다는 거예요. 죽은 사람은 봄날에 황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한 그 서생이었어요. 서생은 남몰래 황진이를 좋아하다가 상사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 거예요. “그런데 서생의 집안사람들이 아가씨의 저고리를 좀 줄 수 있겠느냐고 하네요. 아가씨의 저고리로라도 서생의 넋을 달래면 어떻겠느냐고.” 몸종에게 서생의 죽음을 전해 들은 황진이는 눈시울을 붉혔어요. “나 때문에 한 목숨이 지다니. 늦었지만 서생의 넋이라도 달래 줘야지.” 황진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기꺼이 저고리를 내주었어요. 황진이의 저고리를 서생의 관에 덮자,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여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서생이 죽은 뒤, 황진이는 기생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사람들은 여자가 저고리를 함부로 내주었으니 시집가긴 다 틀렸다고 해. 첩의 딸로 태어나 첩이 될 수밖에 없는데 시집을 간다고 얼마나 행복할까? 뒷방에서 죽은 듯이 지내다 남자의 눈 밖에 나면 버림받고 눈물 속에서 살아야 해. 아서라, 사람으로 태어나 그리 살진 말자. 새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노래하는 길을 가자.’ 황진이는 높은 담장을 벗어나 날아오르는 새처럼 훌쩍 집을 나섰어요. 기생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어요.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글을 쓰고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는 법까지 배워야 했지요. ‘나는 술자리에서 흥이나 돋우려고 기생이 된 게 아니야. 마음껏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여자지만 선비들과 이야기하며 세상살이를 공부해야지.’ 황진이는 얼굴이 고울 뿐만 아니라 재주도 뛰어나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어요. 특히 시를 잘 지어 여러 선비와 어깨를 나란히 했지요. 반달을 노래하다. 누가 곤륜산의 옥을 깎아.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나. 견우가 떠난 뒤 오지 않으니. 슬픔에 겨워 텅 빈 푸른 하늘에 던졌네. 황진이의 이름이 널리 퍼지자, 수많은 사람이 황진이를 보고 싶어 했어요. “여보게, 황진이라는 이름이 자자하던데 한번 만나러 가세. 어떤가?” “허, 황진이는 여느 기생과 다르다네. 멋을 알고 시와 음악을 주고받으며 자기랑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만 만난다네.” “흥, 그래 봤자 내가 돈 꾸러미를 안겨 주면 맘이 달라질걸.” “멋모르는 소리! 황진이는 돈을 많이 준다고 아무하고나 어울리지 않는다네. 비싼 보석이나 옷도 마다하고 아무리 떵떵거리는 사람을 만나도 빗질과 세수만 깨끗이 할 뿐, 늘 입던 대로 입는대.” 사람들의 말처럼 황진이는 수수한 차림을 하고 책이나 시를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하루는 나라에서 손꼽히는 가야금 연주가인 엄수가 황진이를 만났답니다. 칠십이 넘은 엄수는 황진이가 노래를 부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요. “이 노랫소리는 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이로구나!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박연 폭포.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 나와.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네.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보이는 듯하다.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고. 구슬 절구에 부서진 옥 맑은 허공에 가득하니. 나그네여, 여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천마산이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알지니. 어느 날, 황진이의 집 가까이에 있는 누각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어요. ‘흠, 제법 흥을 아는 가락이로구나. 누가 거문고를 타는 걸까? 어느 사내가 날 보려고 일부러 집 근처에서 거문고를 타는 건 아니겠지?’ 황진이가 누각에 가니, 한 남자가 점잖게 거문고를 타고 있었어요. 남자는 거문고를 한 곡 탄 뒤 황진이를 본체만체하고 누각을 떠났지요. 황진이가 남자의 하인에게 물으니 남자의 이름은 ‘벽계수’라고 했어요. ‘나를 보고도 그냥 가는 걸 보니, 내 관심을 끌려고 거문고를 탄 게 아니구나. 정말 거문고에 빠진 사람인지 어디 한번 떠봐야지.’ 황진이는 남자의 이름인 벽계수를 가지고 시를 지어 노래했어요. 푸른 산에 흐르는 맑은 골짜기 물아, 쉽게 흘러감을 자랑하지 마라. 드넓은 바다에 한 번 다다르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빈산에 가득하니 쉬었다 간들 어떠리. 황진이가 노래를 마치자마자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벽계수가 아름다운 노래에 이끌려 뒤돌아보다가 나귀에서 떨어진 거예요. 사실 벽계수는 왕의 친척으로, 황진이를 만나려고 꾀를 낸 것이었어요. “벽계수는 마음이 굳은 선비가 아니라 그냥 멋 부리는 남자로구나!” 황진이가 웃으며 되돌아가자 벽계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답니다. 판서 소세양은 글을 잘 쓰고, 시를 잘 짓기로 이름이 났어요. 하루는 황진이가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들한테 말했어요. “그깟 기생이 뭐가 대단하다고! 좋아, 내가 황진이를 만나러 가지. 황진이랑 딱 삼십 일만 만나고, 삼십 일 뒤에는 꼭 헤어지겠네. 만일 황진이를 좋아해서 하루라도 더 만나면 내가 사람이 아닐세!” 소세양은 큰소리를 떵떵 치고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났어요. 황진이는 소세양의 글솜씨를 높이 사 정성껏 대했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어느덧 삼십 일이 흘렀어요. 내일이면 소세양은 친구들과 약속한 대로 송도를 떠나야 했지요. 황진이는 소세양과 누각에 올라 마지막 잔치를 벌였어요. “이제 곧 나리와 헤어지는데, 제가 시 한 수 바쳐도 되겠습니까?” 황진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시를 써서 소세양에게 건넸어요.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달빛 아래 오동 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와 어울려 차가운데.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그대를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의 시를 읽은 소세양은 입이 떡 벌어지도록 감탄했어요. “참으로 마음을 울리는 시다! 에라, 약속이고 뭐고 모르겠다! 내가 사람이 아니지!” 소세양은 떠나지 않고 황진이의 곁에 더 머물렀답니다. 황진이는 여러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크게 슬퍼하지 않았어요. 살갑게 지내다가도 떠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보냈지요. ‘꽃이 피면 지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아픈 가슴일랑 시와 노래로 달래자.’ 황진이는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과 그리움을 시에 담았어요. 아, 내가 한 일이여! 임을 그리워할 줄 몰랐던가. 있으라고 했더라면 임이 갔겠는가마는 굳이. 보내고 나서 그리워하는 정은 나도 모르겠구나. 황진이는 푸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았어요. 늘 같은 자리에 있는 푸른 산은 자기 같고, 늘 흘러가 버리는 푸른 물은 떠난 임 같았지요. ‘하지만 푸른 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가듯이, 임도 내가 그리워 눈물지으며 가겠지.’ 황진이는 울며 가듯이 흐르는 푸른 물줄기를 떠올리며 붓을 들었어요. 푸른 산은 내 뜻이요 푸른 물은 임의 정. 푸른 물이 흘러간들 푸른 산이야 변할까. 푸른 물도 푸른 산을 못 잊어 울며 흘러가는구나. 일 년 가운데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이 찾아왔어요. 밤이 깊었지만 황진이는 잠들지 못하고 뜰 앞을 서성였답니다. ‘사락사락 내리는 흰 눈이 앙상한 겨울나무를 봄 이불처럼 포근히 감싸 주네. 아, 춥고 기나긴 겨울밤에 홀로 지내니 참 쓸쓸하구나. 다정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밤이 이리 길면 얼마나 좋을까!’ 황진이는 종이를 꺼내 달빛을 불빛 삼아 시를 지었어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어 내어.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그리운 임 오시는 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때로는 그리운 사람을 꿈에서 만나 잠결에 슬피 울기도 했어요. 꿈은 잠깐이고, 그나마 꿈에서도 자주 만날 수 없어 안타까워 했지요. 꿈에서 황진이는 임을 찾아 길을 나섰지만 만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임도 자기를 찾아 나섰다가 중간에 길이 엇갈렸다고 생각했지요. 상사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내가 임 찾아 떠났을 때 임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거니, 멀고 아득한 다음날 밤 꿈에는. 같이 출발해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언젠가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송도를 벗어나 본 적도 없어. 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금강산을 보고 크고 넓은 마음을 길러야 해.’ 황진이는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마음먹고, 이생이라는 사람과 함께 가기로 했어요. “나리, 하인이나 말은 다 두고 떠나시지요. 양반이고 기생이고 신분 따위는 다 벗어 버리고, 무지렁이처럼 마음대로 세상을 떠도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진이의 말대로 이생은 수수한 베옷에 삿갓을 쓰고 먹을거리를 직접 짊어졌어요. 황진이 또한 송라 원정을 쓰고 갈포 저고리에 베치마를 입고 짚신을 끌며 대나무 가지를 짚고 따랐지요. “아, 내 발로 금강산을 밟아 보다니! 아름다운 경치에 눈앞이 아찔하구나!” 황진이는 커다란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 금강산의 경치에 할 말을 잃었어요. “산은 수백, 아니 수천 년을 말없이 비바람을 견뎌 왔겠지. 사람도 산과 같이 한자리에서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은 옛날 산인데 물은 옛날 물이 아니로구나. 밤낮으로 흐르니 옛날 물이 있겠는가. 뛰어난 인물도 물과 같아서 가면 다시 오지 않는구나. 황진이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두루두루 둘러보았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상은 참 좁았구나. 조금만 길을 나서도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거늘. 책상머리에서 글자만 파고드는 게 공부일까? 푸른 산과 맑은 내를 떠돌며 견문을 넓히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게 참된 공부야.’ 황진이는 금강산을 떠나 태백산, 지리산까지 갔답니다. 머나먼 길을 가마나 말도 없이 짚신만 달랑 신고 하염없이 걸었어요. 추적추적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다리가 아프면 바위에 앉아 쉬었지요.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행복해!’ 어느새 황진이는 금성에 이르렀어요. 마침 고을 원님이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지요. 떠들썩한 음악에 맞춰 화려하게 차려입은 양반과 기생들이 어울려 놀고 있었어요. 아무도 황진이를 거들떠보지 않았답니다. 황진이는 시꺼멓고 파리한 얼굴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황진이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자 모두 황진이를 쳐다보았지요. “겉모습만 보고 얕잡아 봤더니 하늘의 선녀가 따로 없구나!” 고향인 송도로 돌아온 황진이는 이름난 곳을 쭉 둘러보았어요. 송도는 옛날에 고려의 수도여서 고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지요. ‘그 옛날 한 시대를 휘어잡던 고려도 시간이 흘러 흔적만 남았구나.’ 황진이는 고려의 자취를 더듬으며 가슴에 이는 쓸쓸함을 노래했어요. 만월대를 생각하며. 옛 절은 쓸쓸히 어구 곁에 있고. 저녁 해가 나무에 비치어 서럽구나. 연기와 노을은 스러지고 스님의 꿈만 남았는데.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네. 누런 봉황새는 어디 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진달래꽃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송도가 빛나던 날을 생각하니. 어찌 지금처럼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송도. 눈 가운데 고려의 빛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남쪽 누각에 올라 시름에 겨워 홀로 섰노라니.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네. 봄이 오면 온 산에 핀 진달래꽃이 비치어 붉게 물드는 연못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 연못을 꽃 연못이라는 뜻으로 ‘화담’이라고 불렀어요. 화담에는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우러르는 학자가 살고 있었어요. 화담에 산다고 해서 호가 ‘화담’인 서경덕이었지요. 서경덕은 학문과 사람됨이 뛰어났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어요. 화담에서 조용히 살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답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집을 나섰어요. “아씨, 화담에 가시려고요? 아이고, 그만두십시오. 화담 나리는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몸종의 말에 황진이는 뒤돌아보며 빙긋 웃었어요. “내 비록 기생이지만, 학문에 뜻이 있어 스승을 모시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한다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모두 날 여자이자 기생으로만 봤지. 만일 화담 선생이 나를 여자가 아닌 제자로 본다면, 나는 정성을 다해 스승으로 모실 것이다.” 황진이는 (대학)을 챙겨 들고 사뿐사뿐 길을 갔어요. 황진이는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을 끌고 서경덕을 찾았어요. 서경덕은 아리따운 여인이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만, 이내 조용하게 물었지요. “여기는 세상과 떨어져 학문에 힘쓰는 곳이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는가?”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절을 한 뒤 입을 열었어요. “비록 천한 기생이오나 학문에 뜻이 있어 제자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서경덕은 말없이 황진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지금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과연 날 여자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황진이는 곱게 꾸미고 찾아와 여러 번 서경덕의 마음을 흔들려고 했어요. 하지만 서경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황진이를 변함없이 제자로 대했지요. ‘아, 이제야 따를 만한 참된 스승을 찾았구나!’ 황진이는 서경덕의 높은 학문과 됨됨이를 깨닫고 스승으로 받들었어요. 어느 날, 황진이가 방그레 웃으며 서경덕에게 물었어요. “송도삼절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송도삼절이라. 글쎄, 무엇이냐?” “박연 폭포와 선생님과 소인입니다.” 서경덕은 황진이의 재치에 웃음을 터뜨렸어요. 가을 찬바람에 노랗게 물든 단풍이 연못 위로 우수수 떨어졌어요. 바람 소리는 마치 사락사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 같았어요. 서경덕은 황진이가 온 줄 알고 문을 열었지만, 밖에는 달빛만 고요했지요. 서경덕은 스산한 마음을 달래려 붓을 들었어요. 마음이 어리석은 뒤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구름이 첩첩이 덮인 산에 어느 임 오겠는가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혹시 그 사람인가 하노라. 황진이 또한 깊은 밤, 홀로 쓸쓸히 앉아 시를 썼지요. 내 언제 믿음을 저버리고 임을 속였기에. 달 저무는 깊은 밤이 되도록 임 오실 기척이 없네. 가을바람 지는 잎 소리에 임 오신 줄 속는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의 시는 송도를 넘어 온 나라를 감동시켰어요.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재주를 뽐내기 힘들었지만 황진이는 달랐지요. 기생이라는 신분에 갇혀 날개를 접고 살지 않았어요. 화려한 생활에 파묻히지 않고,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데 힘썼어요. 선비들과 어깨를 겨루며 시를 짓고, 학문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떠돌았지요. 황진이가 경험한 모든 것이 황진이가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게 도왔어요. 우리 문학을 아름다운 시로 수놓은 황진이는 조선 시대를 빛낸 여성 시인으로 손꼽히며,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답니다.
정조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먹구름이 가득한 검은 하늘에 온 세상이 떠나갈 듯 천둥이 쳤어요.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려올 것 같았지요. 그때였어요. 휙! 휙! 아주 크고 긴 그림자가 꿈틀대며 하늘을 휘저었어요. 용이 나타난 거예요! 용은 빛나는 여의주를 잡고 휘휘 돌더니, 궁궐 안 세자의 침실로 홱 뛰어들었어요. 세자가 깜짝 놀라 눈을 떴어요. ‘아, 꿈이었구나! 용이 침실로 뛰어들었으니, 훌륭한 인물을 낳을 꿈이로다!’ 세자는 꿈에서 본 용을 얼른 벽에 그렸어요. 얼마 뒤, 세자빈이 정말 아들을 낳았어요. 이 갓난아이가 바로 조선에 새바람을 몰고 온 정조예요. 갓난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여덟 살에 세손이 되었어요. 세자는 책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직접 책을 만들어 주었지요. “세손, 책을 읽으며 마음을 바로잡고 백성을 위하는 길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네, 아바마마! 소자가 바른길로 갈 수 있게 늘 지켜봐 주십시오.” 세손은 따스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힘차게 대답했어요. 그러나 세자는 아들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어요. 영조 때에는 신하들이 무리를 지어 정치 싸움을 많이 했는데, 싸움에서 이긴 무리는 권력을 뺏기지 않으려고 다른 무리의 목숨까지 빼앗았지요. 그런데 세자가 다른 무리와 가까이하자 힘을 쥐고 있던 ‘노론’이라는 무리가 모함을 한 거예요. 결국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지요. ‘아아, 내가 어리석었도다! 거짓에 눈이 멀어 내 아들을 죽게 하다니.’ 영조는 뒤늦게 후회하며 세자를 ‘사도 세자’라고 부르게 했어요. ‘아바마마, 좁고 깜깜한 뒤주 안에서 얼마나 몸부림치셨습니까?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부디 소자를 용서하소서!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소자를.’ 세손은 슬픔에 몸이 부서질 듯했지만 마냥 슬픔에 빠져 있을 수 없었어요. ‘슬픔과 분노에 갈팡질팡하면 나 또한 나쁜 무리에게 휘둘릴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의 힘을 키우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참된 정치를 펴는 것, 그것이 아바마마의 바람일 것이다.’ 세손은 깊은 밤에도 책을 펴고 앉아 마음을 바로잡았어요. 책을 읽으며 수많은 날을 지새우곤 했답니다. “전하! 세손 저하께서 요순을 배우고 싶다 하셨습니다.” “세손 저하께서 소인도 모르는 것을 물으시어 깜짝 놀랐습니다.” 세손을 가르치는 신하들은 학문이 뛰어난 세손을 크게 칭찬했어요. 영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지요. “늘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 세손은 학문하는 마음을 타고났느니라.” 하루는 세손이 영조와 함께 있을 때였어요. “전하, 삼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의 얼굴빛이 누렇다고 하옵니다.” 그 말을 들은 세손은 밥상에 올라온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어요. 영조가 까닭을 묻자 세손은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말했지요. “굶주리는 백성들을 생각하니 가여운 마음이 들어 젓가락이 가지 않습니다.” “백성을 생각하는 네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영조는 나날이 커 가는 세손을 그윽하게 바라보았어요. 영조는 세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노론은 세손을 헐뜯고 왕의 명령까지 거슬렀어요. ‘세손이 왕이 되면 사도 세자의 복수를 하려고 우리를 몰아낼 것이다.’ 노론이 힘을 다해 막았지만 세손은 꿋꿋하게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드디어 정조의 시대가 열렸지요.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기리고 바른 정치를 펼 것을 다짐했어요. “신하들이 서로 벼슬을 하려고 다투다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신하들의 싸움으로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이 어찌 편히 살겠는가? 나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선왕의 탕평책을 이어받겠다.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신하를 골고루 써서 백성을 편히 보살피리라!” 정조는 침실에 편액을 ‘탕탕평평실’이라고 달고 아침저녁으로 마음에 새겼어요.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나랏일을 돌보자 신하들이 걱정했지요. 하지만 정조는 끼니를 거르면서도 힘든 줄 몰랐답니다. “한 나라의 왕이면 나랏일과 백성을 걱정하는 일로 마음을 써야 하지 않겠소?” 정조는 궁궐에 있는 책과 유물을 간직할 수 있도록 규장각을 세웠어요. 규장각은 궁궐의 도서관이자 박물관이었지만, 정조가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곳이기도 했지요. ‘백성을 위하고 문화가 꽃피는 나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뛰어난 인재를 뽑아 학문과 정치를 연구하게 해야겠다.’ 정조는 학문이 뛰어난 신하들을 규장각에서 일하게 했어요. 서얼은 벼슬을 할 수 없었지만, 정조는 뛰어난 서얼을 규장각 신하로 뽑았지요. “여봐라, 촛불이 꺼져 가는구나. 어서 새 불을 밝혀라!” 정조는 꺼져 가는 불을 밝히며 밤늦도록 규장각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했어요. “규장각 신하는 손님이 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고 계속 일하라. 잘못을 저질러도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끌고 갈 수 없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보살폈어요. ‘요즘 젊은 신하들은 과거에만 합격하면 학문을 게을리하니 안타깝구나. 학문을 하고 싶어도 일에 쫓겨 사니 참으로 큰일이다. 나라의 앞날은 젊은 신하들에게 달려 있건만. 어떻게 하면 젊은 신하들을 바로잡아 나라를 짊어질 일꾼으로 만들 수 있을까?’ 정조는 생각 끝에 무릎을 탁 쳤어요. “여봐라, 젊은 신하들 가운데 학문이 뛰어난 신하들을 뽑아라. 규장각에서 삼 년 동안 학문을 닦게 한 뒤 실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리라.” 정조의 명령에 따라 뽑은 신하들을‘초계문신’이라고 해요. 초계문신들은 규장각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힘을 쏟았답니다. 다달이 어려운 시험도 쳤는데, 시험 문제는 정조가 직접 냈지요. “정약용이 이번 시험에서 또 장원을 했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정조는 늘 열심히 노력하고, 학문이 뛰어난 정약용을 눈여겨보았어요. 또한 부지런히 공부하는 신하는 큰 상을 내리고, 게으른 신하는 호되게 꾸짖었지요. 초계문신들은 정조의 뜻에 따라 나라의 앞날을 밝힐 일꾼으로 컸고, 정조가 새로운 정치를 펼 수 있게 도왔답니다. 규장각에서 일한 정약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은 실학을 했어요. “생활에 도움이 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학문이 참된 학문이다. 이를 실학이라고 하는데, 실학으로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 정조는 실학을 하는 신하들과 나랏일을 자주 의논했어요. “백성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알리라.” 실학을 하는 신하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정조에게 말했어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노비 법을 꼭 없애야 합니다.” “일은 백성이 하는데 곡식을 거두면 땅 주인인 양반이 반 넘게 가져갑니다. 그나마 남은 곡식은 가뭄 때 빌린 곡식을 갚고, 빚만 진 채 또 빌리고.” “백성이 잘살려면 농업 못지않게 상공업을 키워야 합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 멀리할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문화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발전하고 백성이 편안합니다.” 정조는 백성의 편에 선 실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어요. 백성을 위해 참된 정치를 펴려는 꿈이 같았으니까요. 휙! 탁! 휙! 탁! 정조는 틈틈이 활을 쏘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데 모았어요. 활을 참 잘 쏘았는데, 50발을 쏘면 꼭 49발만 바로 맞혔지요. “전하, 왜 일부러 한 발만 빗나가게 하십니까?” “무엇이든지 가득 차면 못 쓰느니라.” 정조는 활쏘기를 비롯해 무예에 관심이 많았어요. 한번은 정조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정조의 목숨을 노렸어요. 정조는 아무 일이 없었지만, 강한 친위 부대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장용영을 만들었지요. “나라를 잘 이끌려면 학문 못지않게 무예도 길러야 한다. 장용영 군사들이 싸우는 기술을 배우도록 훈련 교본을 만들어라.” 장용영은 정조의 명령에 따라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훈련했어요. 정조는 틈틈이 장용영이 훈련하는 모습을 둘러보며 지휘했어요. “왼손에 창을 들고 오른팔을 높이 쳐들어라!” 장용영 군사들은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법을 훈련했어요. 이마에 땀방울이 줄줄 흘렀지만, 씩씩하게 소리치며 말을 달렸지요. 장용영은 아무도 넘보지 못하도록 든든하게 정조를 지켰어요. 하루는 궁궐의 정자에서 잔치를 하는데, 제비 한 마리가 주위를 뱅뱅 돌았어요. 정자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는데 사람이 있어 가까이 오지 못했지요. “가엽구나.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야 하는데 얼마나 애가 타겠느냐.” 정조는 제비가 새끼를 돌볼 수 있도록 잔치를 그만하고 떠났어요. 제비를 위하는 마음처럼 정조는 늘 백성을 생각하며 자기를 돌아보았지요.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이 힘겹게 일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시원한 궁궐에 있으면 한여름에 땀 흘리며 밭일하는 농부가 생각난다.” 정조는 헐벗은 백성을 생각하며 무명옷을 즐겨 입었어요. 하루에 두 끼만 먹고 반찬도 조촐하게 차리게 했답니다. 정조는 고을을 다스리도록 수령을 내려 보낼 때면 꼭 만나서 일렀어요. “부디 백성의 아픔을 살피고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라.” 때때로 백성을 괴롭히는 못된 수령이 있으면 암행어사를 보내 혼냈지요. 아들 문효 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예요. 때마침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백성이 병들고 숨졌지요. “백성들의 시신이 땅에 뒹구는데 병이 옮을까 봐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안타깝도다. 백성들의 시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어라.” 정조는 슬픔 속에서도 날마다 신하들을 불러 백성을 돌보게 했어요. 정조는 상공업을 발전시키려고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쳤어요. 상공업이 발전해야 백성이 두루 잘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여보게, 소식 들었나? 우리도 맘 편하게 장사할 수 있다네.” 난전 상인들은 기뻐하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어요. 정조가 금난전권을 없앤다는 ‘신해통공’을 발표했거든요. “그동안 시전 상인들이 우리 같은 난전 상인들을 얼마나 못살게 했나? 도성 근처에선 자기들만 물건을 팔 수 있다고 우리는 얼씬도 못하게 했지.” “다 금난전권 때문이지. 하지만 전하가 금난전권을 없애셨으니 이젠 우리도 맘껏 물건을 팔 수 있어!” 난전 상인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팔을 걷어붙이고 물건을 팔았어요. “물건을 맘껏 사고파니 물건 값이 확 내렸어.” “싼값에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우리도 허리 펴겠네.” “이게 다 주상 전하의 은혜일세. 하하!” 물건을 사러 온 백성들도 발걸음이 가벼웠답니다. 정조의 가슴에는 시간이 흘러도 잦아들지 않는 슬픔이 있었어요. 억울하게 숨진 아버지 사도 세자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답답했어요.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터가 좋은 화성으로 옮기고 마음을 달랬어요. ‘아버님, 이제는 좁고 어두운 뒤주를 잊으시고 편히 잠드소서!’ 정조는 자주 무덤을 찾아 아버지를 기렸어요. 궁궐을 나설 때마다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지요. “주상 전하, 소인의 말 좀 들어 주십시오!”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은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정조에게 하소연했어요. 한강에 배 수십 척이 깃발을 휘날리며 배다리로 놓였어요. 옛날에는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거나, 돈을 많이 들여 배다리를 놓았어요. 정조는 신하들과 지혜를 모아 적은 돈으로 더 튼튼하게 배다리를 놓았지요. “허허, 멋있다! 강물 위를 저리 편하게 건널지 누가 알았나!” 구경하던 사람들은 정조의 지혜에 또 한 번 놀랐어요. 정조는 가슴을 쫙 펴고 행차를 이끌며 배다리를 건넜어요. 넘실대던 푸른 물결도 정조에게 고개를 숙이는 듯 잠잠했지요. 이것을 격쟁이라고 하고, 글을 써서 하소연하는 걸 상언이라고 해요. “백성들이 걸핏하면 징을 치며 행차를 가로막습니다. 전하께 사소한 일까지 들어 달라고 하니 격쟁을 없애야 합니다.” “힘없는 백성이 얼마나 억울하면 먼 길을 와 내게 이르겠는가! 백성의 목소리가 위로 통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격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지만, 정조는 끝까지 없애지 않았어요. 정조는 백성의 목소리를 다 들은 뒤 다시 길을 떠났어요. 정조는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은 꿈을 펼칠 때가 왔음을 깨달았어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화성에 온 나라의 본보기가 되는 성을 쌓으리라!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고 백성 모두가 잘사는 땅, 씩씩한 군대가 지켜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땅을 만들리라!’ 지금의 수원에 화성을 세우기로 한 거예요. 정조는 뛰어난 실학자 정약용에게 화성을 지을 계획을 세우라고 했어요. 일찍이 배다리를 만든 정약용의 실력을 높이 샀지요. 공사를 책임진 채제공에게 공사에 쓸 돈과 사람을 일렀어요. “옛날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걷고, 억지로 백성을 부려 성을 지었다. 허나 나는 공사에 쓸 돈은 쓸 데 없는 나라 살림을 줄여 마련하고, 일하는 백성에겐 품삯을 주겠다.” 정조는 화성을 지으며 실학, 과학 등 새로운 학문과 문화를 한데 모았어요. 모두의 힘과 지혜로, 10년을 생각한 공사가 2년 6개월 만에 끝났답니다. 특히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서 힘과 돈을 크게 아꼈지요. 화성은 눈부신 햇살 속에 우뚝 서서 우람한 모습을 자랑했어요. 정조는 화성에서 백성이 맘껏 농사지을 수 있도록 거친 땅을 일구어 땅을 넓히고, 큰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도 끄떡없게 했답니다. “길을 비켜라! 주상 전하, 나가신다!” 백성들은 정조의 행차를 구경하려고 아침부터 몰려들었어요. “주상 전하께서 어머님 회갑 잔치를 하러 화성으로 가신대!” 1,700명이 넘는 사람들과 700필이 넘는 말이 줄지어 8일 동안 행차에 나섰어요. 씩씩한 군사들이 활이나 총 같은 무기를 들고 늠름하게 앞뒤를 지켰지요. 정조는 말 위에 올라 백성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드러냈어요. ‘온 나라에 왕의 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모두가 나를 믿고 따라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게!’ 정조는 화성에서 3천 명이 넘는 장용영 군사들을 한밤중에 훈련시켰어요. 백성과 군사는 성안과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훈련을 함께했지요. ‘보라! 어둠을 밝히는 저 불빛이 백성의 꿈이요, 나의 꿈이다. 화성을 모두가 잘사는 땅으로 만들어 내 꿈을 온 나라에 전하리라!’ 정조는 꿈꾸던 앞날을 그리며 기쁨에 가슴이 벅찼어요. 날이 밝자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었어요.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주고, 노인잔치를 열어 백성과 기쁨을 함께했지요. 화성을 떠나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 정조는 문득 뒤돌아보았어요. ‘아버님! 이 고개만 넘으면 아버님의 무덤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차가운 땅에 아버님을 홀로 두고 떠나지만, 뒷날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이 땅, 화성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버님 곁을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비추는 새로운 앞날을 준비하겠습니다!’ 정조는 아련히 멀어지는 화성을 등지고 고개 너머로 사라졌어요. 아쉽게도 정조는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의 꿈을 펼치지 못했어요.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요. 정조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폈어요. 백성을 이롭게 하는 학문을 받아들이고, 문화를 꽃피워 모두가 널리 누리도록 했지요. 정조의 어진 정치로 조선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몰려왔어요.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다시 어려워졌어요. 힘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나라가 또 어지러웠답니다. “왕이 백성이 아니면 누구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새로운 정치, 백성을 위하는 나라를 바라던 정조의 꿈은 지금도 수원 화성에 서려 있어요.
안데르센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인어 공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다들 한 번쯤 읽어 본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이 바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에요. 안데르센은 덴마크의 오덴세 섬에서 태어났어요. “으앙, 으아앙! ” “이 녀석, 울음소리가 이토록 큰 걸 보니 이다음에 큰 인물이 되겠는걸.” 아버지는 아기를 안고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안데르센의 집은 몹시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뚝딱뚝딱 구두를 만드는 구두장이였고, 어머니는 남의 집 허드렛일을 했지요. 두 사람이 부지런히 일해도 겨우 굶지 않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작고 초라한 안데르센의 집에는 언제나 웃음이 가득했답니다. 저녁이면 아버지는 늘 안데르센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주었어요. “하하, 아기가 웃었어! 꼭 알아듣는 것 같아.” 아버지는 신기한 듯 안데르센을 바라보았어요. “좋은 집도 비싼 물건도 사 줄 수 없지만, 우리가 정성을 다해 키운다면 이 아인 행복할 거요.” 아버지는 어머니 손을 꼭 잡았어요. 어머니도 틈날 때마다 성경을 읽어 주고, 옛 성인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재미있게 들려주었어요. 안데르센은 매일 매일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어요. 몇 권 안 되는 책들이 나달나달 닳을 정도였지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안데르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자랐답니다. 안데르센은 매일 도시락을 들고 아버지의 작업장에 갔어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작업장 구석에서 안데르센이 인형들을 꺼내 놓으면, 아버지는 이리저리 줄을 잡아당기며 인형극을 보여 주었어요. “아버지 손길만 닿으면 못난이 인형들도 살아 있는 요정과 천사가 돼요!” 안데르센은 행복했어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어느새 안데르센은 멋진 왕자님이 되었지요. “아버지, 눈을 감으니까 아버지가 임금님이 되었어요. 하지만 난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가 더 좋아요. 꽃이 들려준 이야기랑 바위가 들려준 이야기를 멋진 인형극으로 보여 주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요!” 안데르센은 자라면서 점점 생각이 많아졌어요.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주전자나 쟁반과도 이야기했어요. “안데르센, 나는 꽃의 여왕님을 모시는 시종이란다. 오늘 밤 꽃의 궁전에서 무도회가 열리는데, 여왕님이 너를 초대했어.” 데이지 꽃이 장미 여왕님의 초대장을 들고 안데르센을 찾아왔어요. “알았어, 데이지. 꼭 갈게!” 꽃밭에서 안데르센이 꽃들과 나누는 말을 듣고 할머니가 물었어요. “안데르센,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니?” “오늘 밤, 장미 여왕님의 무도회에 초대받았어요.” “오, 그래? 장미 여왕님께 할머니 안부도 전해 다오. 꽃들과 놀다가 너무 늦지는 말고. 알겠니?” 안데르센은 할머니의 풍부한 상상력을 그대로 물려받았답니다. 어느 날, 오덴세 섬에 왕립 극단이 공연을 하러 왔어요. ‘안데르센이 연극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아버지는 안데르센 손을 잡고 극장에 갔어요. 안데르센은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화려한 옷을 입은 배우들이 멋진 공연을 펼쳤어요. “와, 정말 멋지다! 나도 배우가 되고 싶어.” 안데르센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어요. 집으로 돌아온 안데르센은 꼼지락꼼지락 인형 옷을 만들며 말했어요. “호수의 요정아, 사랑하는 거울 공주가 호수에 빠졌노라. 어서 달려가 여왕님께 거울 공주를 구해 달라고 전하여라.” 안데르센은 벌써부터 유명한 배우가 된 듯했어요. 안데르센이 늘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인형 놀이만 하자, 부모님은 걱정이 되었어요. 하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학교에는 보낼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돈이 적게 드는 수도원 여학교를 찾아냈어요. “안데르센은 여자래요!” 여학교에 들어가자 친구들이 안데르센을 놀려 댔어요. “어머, 안데르센은 정말 이상해. 꽃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바보인가 봐.” 학교 친구들은 안데르센을 비웃었지요. 안데르센은 외톨이로 지내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답니다. 훗날, 안데르센은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미운 오리 새끼에 썼답니다. 안데르센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어요. 전쟁터에 나갔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돌아가신 거예요. 안데르센은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어요. 어머니는 안데르센을 달래 시립학교에 보냈어요. 안데르센은 글자 공부 대신 책을 달달 외워 비슷하게 희곡을 써서 읊고 다녔어요. “어이! 엉뚱한 극작가 선생, 또 베껴서 이야기해 보시지.” 안데르센이 지나가면 모두 비웃고 놀려 댔어요. 그러자 안데르센은 학교를 그만두고 방직 공장에 취직을 했답니다. 방직 공장에 들어간 안데르센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불렀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고요. “안데르센, 넌 마치 유명한 배우 같구나.” 사람들 칭찬을 들으면서 안데르센은 다시 배우의 꿈을 키웠어요. 얼마 뒤, 안데르센은 코펜하겐의 왕립 극장을 찾아갔어요. 해 질 무렵, 한 귀부인이 극장을 나서는 것이 보였어요. “앗, 저분은 오덴세에 오셨던 발레리나 셀 부인이잖아!” 안데르센은 무작정 셀 부인 앞으로 다가가 꾸벅 절을 했어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배우로 써 주세요.” 안데르센은 부인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연기를 해 보였어요. “그만 하렴. 넌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구나.” 차디찬 한마디에 안데르센은 그만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어요. 안데르센은 포기하지 않고 극단을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모두 손을 내저었어요. 게다가 돈마저 다 떨어져 안데르센은 할 수 없이 다시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안데르센은 용기를 내어 국립 음악 학교 교장을 찾아갔어요.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느님, 제발 도와주세요.” 마침 음악 학교 교장의 집에는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어요. “오, 여기서 노래를 하겠다? 용기 있는 소년이군. 어디 한번 불러 보게.” 교장의 말에 모든 예술가의 눈이 안데르센에게로 쏠렸어요. 안데르센의 머릿속으로 지난 일들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어요. ‘안데르센, 힘내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어요. 안데르센은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가 끝나자 바이제 교수가 안데르센을 불렀어요. “나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네. 내게 와서 노래 공부를 하게.” 덴마크 최고의 작곡가 바이제 교수는 안데르센에게 용돈까지 줘 가며 노래를 가르쳤어요. 하지만 용돈으로는 하숙비를 내기에도 빠듯했어요. 안데르센은 좁고 허름한 하숙방에서 딱딱한 빵을 먹으며 겨우 겨우 생활해 나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지독한 감기를 앓고 일어났는데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아아아. 목소리가 왜 이러지?” 목소리가 변해서 결국 노래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때부터 안데르센은 낮에는 작은 극장에서 견습 배우로 일하고, 밤에는 추운 하숙방에서 희곡을 써서 왕립 극장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맞춤법조차 맞지 않는 희곡들은 계속 되돌아올 뿐이었지요. 안데르센이 희곡을 보낸 지 한참 뒤였어요. 안데르센이 보낸 <태양의 요정>이 왕립 극장을 새로 맡은 요나스 콜린 눈에 띈 거예요. “음, 지금 당장 공연을 하기엔 거칠고 서툴지만, 제대로 공부한다면 뛰어난 재능을 펼칠 수 있겠어.” 요나스 콜린은 안데르센이 라틴 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어요. ‘많은 사람이 나에게 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할 테야.’ 꺽다리 안데르센은 열 살이나 어린 친구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지만, 부끄럽지 않았어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작은 책상 앞에 앉았지요. 그러나 쉬는 시간마다 희곡이나 시를 쓰는 건 여전했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교장은 눈을 흘겼어요. 하지만 안데르센은 꿋꿋하게 공부했답니다. 라틴 어 학교를 무사히 마친 안데르센은 마침내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했어요. 그때 발표한 코펜하겐 여행기는 수많은 사람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겨 주었어요. 안데르센은 이어서 아름다운 시와 소설을 발표했지요. 얼마 뒤, 안데르센은 어렸을 때 꿈꾸고 상상했던 세계를 그려 보고 싶어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집을 펴냈어요. 괴로움을 겪는 어린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안데르센은 여행을 다니며 아름다운 동화를 쓰기 시작했어요. 어린 시절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이 그대로 스며든 안데르센의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어요.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웠던 꺽다리 안데르센은 국왕에게 교수 칭호를 받은 세계적인 대작가가 되었답니다. 또 덴마크 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국왕으로부터 훈장도 받았지요. 안데르센은 발코니에 놓인 흔들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곤 했어요. “이제 나이가 들어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도 다니지 못하겠구나.” 머리가 하얗게 센 안데르센은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어요. 언제나 어린아이 같던 모습이 어느덧 일흔 살의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어요. 안데르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인생보다 멋진 동화는 없어.” 얼마 뒤, 안데르센은 창밖으로 보이는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히 눈을 감았어요.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다정한 이야기꾼을 잃자 사람들은 몹시 슬퍼했어요. 지금도 안데르센은 동화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가만가만 속삭이지요. “얘들아! 꿈과 희망을 잃지 마라. 너희들은 분명 멋지고 아름다운 백조가 될 거야.”
방정환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모든 어린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날’을 맨 먼저 만든 사람이 바로 소파 방정환이에요.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때까지는 우리말에는 ‘어린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정환은 어리다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항상 안타까워했어요. “아이들을 존대해서 부른다면 어른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야.” 정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어린이’라는 아름다운 말과 즐거운 ‘어린이날’이 만들어진 거예요. 정환은 1899년 쌀집을 운영하는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정환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어요. 한학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자문을 줄줄 외워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요. 어느 날, 정환은 신식 학교에 다니는 삼촌을 따라나섰어요. 신식 학교에서는 무얼 배우나 몹시 궁금했거든요. 마침 교실에서 학생들이 숫자 셈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정환은 창밖에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다 선생님이 불러 주는 문제를 썼어요. 그리고 술술 답을 써 나갔지요. 아버지가 쌀 파는 걸 보면서 혼자서 계산하는 법을 익혔던 거예요. 정환이 한창 문제를 풀고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다가왔어요. “어린아이가 계산을 곧잘 하는구나. 너도 학교에 다니고 싶니?” 뜻밖의 말에 정환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정환의 댕기 머리를 만지며 말했어요. “학교에 다니려면 머리부터 잘라야 한단다.” 정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교장 선생님을 따라가 댕기 머리를 싹둑 잘랐어요.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거든요. 댕기가 없는 정환의 머리를 보고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했어요.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때렸지만 정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답니다. 정환이 학교에 들어간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졌어요. 아버지가 운영하던 쌀집이 문을 닫게 된 거예요. 정환은 도시락은커녕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날이 많았어요. 점심시간이면 주린 배를 움켜잡고 교실 밖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밥을 굶는 아이가 정환만이 아니었어요. 교실 밖에는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힘없이 앉아 있었어요. “너희도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구나.” 정환은 어른이 되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환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어요. 형편이 더 어려워져 정환이 집안을 도와야 했거든요. ‘언젠가 다시 공부할 거야.’ 정환은 공부에 대한 꿈을 가슴 깊이 간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사는 화가가 정환을 양자로 삼고 싶다며 찾아왔어요. “마음은 고맙지만 정환은 우리 집 장남입니다.” 아버지는 정중히 거절했어요. 화가는 돌아가며 정환에게 환등기를 선물했어요. 환등기는 스크린에 필름이나 그림을 비추어 크게 볼 수 있는 기계예요. 정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환등기를 돌려 벽에 비춰 보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비록 학교에 다닐 수는 없었지만 공부에 대한 꿈은 접지 않았답니다. 아버지가 인쇄 공장에서 일하게 되자 정환은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업학교에 들어갔지만 상과 공부는 재미가 없었어요. 정환은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더 좋았어요. 그러다가 집안 살림이 다시 어려워져 졸업을 1년 남짓 남겨 두고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 뒤 정환은 토지 조사국에 취직해 하루 종일 서류 정리하는 일을 했어요. 밤이면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서 책을 읽으며 글을 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왔어요. 정환이 쓴 시 낙화가 잡지에 실린 거예요. 정환은 너무 기뻐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그 무렵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었어요. 참다 못한 사람들이 3 1 운동을 일으켜 독립의 의지를 밝혔지만, 일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요. ‘독립신문’을 만들어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모두 감옥에 갇히고 말았지요. 정환은 직접 독립신문을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밤새 원고를 쓰고 친구들과 함께 신문을 만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어요. 정환은 경찰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어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그 뒤로도 정환은 몇 번이나 더 잡혀가 고문을 당했어요. 그럴수록 정환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지요. 정환은 어린이 교육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있는 동경대학에 들어갔어요. 부지런히 동시를 쓰고 외국 동시를 번역해 고국으로 보냈지요. ‘어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건 잡지에 어린이 노래 불을 켜는 아이를 발표하면서부터예요. 정환은 어린이를 잘 키워 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미래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이라 믿었지요. 그래서 ‘소년회’라는 어린이 운동 단체를 만들어 어린이 교육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어린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혀야 해.” 읽을거리가 변변하지 않던 때라 정환은 외국 동화책 번역에 힘을 기울였어요. 아라비안나이트,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 동화 들을 번역해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다듬었지요. 이 동화들을 사랑의 선물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펴냈어요. 책이 나오자 아이들은 사랑의 선물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답니다. 이때부터 어린이를 위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정환이 우리나라 어린이 책의 물꼬를 활짝 터 준 거예요. 그러자 일본 경찰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맨 먼저 정환을 잡아갔어요. 정환은 잦은 고문으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어요. 정환은 어린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해 더욱 깊이 공부하려던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어요. 건강이 좋아지자 정환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천도교 회관에서 동화 대회를 열었답니다. “우아! 이야기 아저씨가 오셨대. 빨리 가자!”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도 정환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줄을 섰어요.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아이들은 웃다가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어요. 참았던 오줌을 싸는 아이도 있었고요. “이야기 아저씨,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만 더 해 주세요.” 아이들이 졸라 대자 정환은 다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어요. “황금 깃털이 번쩍번쩍 빛나는 거위가 있었어요.” 정환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꽥꽥 거위 흉내를 냈어요. 아이들도 덩달아 뛰어다니며 꽥꽥 소리를 질렀지요. 정환이 가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어요. 들어설 자리가 없으면 담장 위나 지붕 위, 나무 위에도 올라가 정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요. 감시하러 왔던 일본 경찰조차 정환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돌아갔답니다. ‘신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어린이 잡지를 만들자! 동화와 동시를 가득 싣는 거야!’ 정환은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어요. 얼마 뒤 정환은 6 10 만세 운동을 벌이다 감옥에 갇혔어요. 좁은 감옥 안에서도 정환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니 희망이 솟습니다.” 답답한 창살 안에서 정환은 한 줄기 빛과 같았지요. 정환은 감옥에서 나온 뒤, 잡지 만드는 일에 더욱 정성을 쏟았어요. 하지만 잡지사는 점점 빚더미에 올라앉았어요. 한번은 빚쟁이가 돈을 받으려고 잡지사로 찾아왔어요. 정환이 직원들에게 한창 이야기를 들려주던 참이었지요. “흑흑,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함께 이야기를 듣던 빚쟁이는 그냥 돌아가고 말았어요. 정환의 이야기는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마법 같았어요. 드디어 정환이 정한 첫 번째 어린이날이 밝았어요. “기쁘구나, 오늘! 어린이날은 우리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정환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어린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우아아! 우아아!” 어린이들의 행진은 종로에서 광화문까지 밤늦도록 이어졌어요. 정환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행복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지요. 그 뒤, 정환은 병이 악화되어 서른세 살이라는 젊디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정환이 뿌린 어린이 운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까지도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방정환은 어린이들을 위해 두 가지 일을 했어요. 하나는 어린이들을 잘 가르치고 튼튼하게 키우자는 어린이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이들이 읽을 좋은 동화를 쓰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지요. 옛날에는 어린이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어요. 나이가 어리다고 대화 상대가 되어 주지도 않았고, 자세히 가르쳐 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기쁘거나 슬픈 일이 있어도 이야기할 사람이나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어요.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시절에는 더욱 심했지요. 방정환은 미래를 이끌어 갈 주역이 어린이란 걸 일찍 깨달았어요. 그래서 어린이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려는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답니다. 방정환은 어린이 교육을 위해 일본 동 경대학에서 아동 예술과 아동 심리학 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오 자마자 본격적으로 어린이 운동을 시작했어요. 방정환은 좋은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도록 가르쳤어요. 그래서 잡지 ‘어린이’를 비롯해 여러 아동 잡지에 창작 작품은 물론 외국 아동 문학 작품을 번역하 여 싣는 데 정성을 기울였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가 거의 없었거든 요. 방정환의 번역 작품은 선량하고, 정직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재 미있는 작품이 많아요. 이 작품들은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참된 사랑을 베풀라고 말하고 있어요. 또 어 린이들이 올바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전해 주지요. 방정환은 외국 동화 번역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어요. 방정환은 외국 동화 속에 담겨 있는 선진화 된 교육 문화를 받아들이고 싶은 바람도 갖고 있었어요. 방정환의 동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 있는 인물이에요. 이를 통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고생하는 어린이, 어른들에게 하찮게 대우받는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을 나타낸 거지요. 동화를 읽으면서 어린이를 사랑하는 방정환 선생님의 깊은 마음을 느껴 보기로 해요.
월트 디즈니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월트, 닭 모이 좀 가지고 오너라.” 아버지가 소리쳤지만 월트는 듣지 못했어요. 새로 칠한 창고 벽에 뭔가를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다 됐다. 이제 꼬리를 그려야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을까요? 넓은 벽에는 월트의 키 높이를 따라 빙 둘러 돼지들이 그려졌어요. “이 못된 녀석! 이게 무슨 짓이냐?” 월트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요. 언제 왔는지 아버지가 뒤에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림을 둘러보던 아버지는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돼지가 꼭 살아 있는 것 같구나!” 혼이 날까 봐 조마조마해하던 월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토끼 굴속으로 들어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랑스러운 생쥐 미키 마우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백설공주,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 거짓말을 하면 코가 쑥쑥 길어지는 피노키오.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만화 영화지요. 월트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았어요. 다람쥐며 토끼를 쫓아 산과 숲을 뛰어다녔지요. 월트와 함께 뒹굴며 놀았던 오리, 토끼, 개, 다람쥐 들은 나중에 만화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어요. 어머니는 틈만 나면 담벼락에 동물을 그려 대는 월트에게 말했어요. “월트야, 닭을 잘 돌보면 물감을 사 주마.” 물감이라는 말에 월트는 때 맞춰 모이도 주고 냄새나는 닭장도 깨끗이 치웠답니다. 어느 날, 월트는 작대기로 마당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의사 선생님이 종이와 물감을 주며 말했어요. “월트, 나에게 말 그림을 그려 주지 않겠니?” 월트는 신이 나서 말을 그렸지요. 말은 금방이라도 ‘히잉!’ 하고 발길질을 할 것 같았어요.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이건 그림값이다.” 월트는 의사 선생님에게 난생 처음 그림값을 받았어요. 월트 가족은 심한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자 캔자스로 이사를 했어요. 그곳에서 작은 신문 보급소를 차려 온 가족이 함께 일했지요. 월트도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을 배달했어요. “신문이오, 신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월트는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신문을 돌렸답니다. 월트는 신문에 나온 만화를 따라 그리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월트는 빼곡하게 만화를 그려 넣은 스케치북을 펼쳐 보이며 말했어요. “아버지, 전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그래, 열심히 해 보려무나.” 아버지는 월트를 미술 학교에 보내 주었어요. “그림을 잘 그리려면 다른 공부도 해 둬야겠어.” 월트는 그림 공부뿐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 열심히 공부했어요. 얼마 뒤, 아버지가 시카고의 과자 공장에서 일하게 되자 월트는 아버지를 도와 과자 공장에서 일을 하며 학교에 다녔어요. 틈틈이 우체국과 기차역에서도 일했답니다. “월트, 아까는 우체국에서 일하더니 어느새 철도 안내원 옷으로 갈아입었구나. 정말 부지런하단 말이야!” 사람들은 월트를 볼 때마다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 무렵,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어요. 미국의 많은 젊은이가 자원해 유럽으로 떠났어요. 월트의 두 형도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갔지요. 어느 날, 친구가 우체국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어요. “월트, 적십자 구호 부대를 만드는데 우리 같은 소년도 받아 준대!” “그래? 나도 형들처럼 나라를 위해 싸울 테야!”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월트는 나이를 속이고 적십자 구호 부대에 들어갔어요. 월트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사이 연합군의 승리로 긴 전쟁이 끝났어요. 하지만 전쟁을 치른 나라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지요. 월트는 구호 부대에 뽑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무너진 마을을 세우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어요. 월트는 군인 매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월트가 그린 포스터를 본 군인들이 줄을 섰어요. 그러자 소문을 듣고 크래커라는 사업가가 월트를 찾아왔어요. “월트, 독일군 철모를 구해 줄 테니 기념품으로 만들어 보지 않겠나?” 월트는 흔쾌히 승낙했어요. ‘어떻게 하면 멋진 기념품이 될까?’ 고민하던 끝에 월트는 철모를 땅에 문질러 흠집을 내고 군데군데 페인트 칠을 해서 낡은 것처럼 만들었어요. “멋져! 자네가 손질한 철모 기념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네.” 철모 기념품 덕분에 월트는 꽤 많은 돈을 벌었어요. 월트는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어 켄자스로 떠났어요. 하지만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신문 귀퉁이에서 반가운 광고를 발견했어요. “켄자스 광고 회사, 만화가 구함! 바로 이거야!” 월트는 부리나케 광고 회사로 달려갔어요. “오, 그림 솜씨가 제법이군!” 광고 회사 사장은 월트의 스케치북을 보고 단번에 일을 맡겼어요. 월트는 신이 나서 열심히 일했어요. 바탕이 되는 밑그림을 그리고 종이 인형을 만들었지요. 그런 다음 인형을 오려 움직이며 하나씩 필름으로 찍었어요. 그러자 만화가 움직였어요. “이야! 만화가 정말 움직이네!” 월트는 즐거워서 콧노래를 불렀답니다. 월트는 새로 들어온 에이브와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그즈음 월트는 움직이는 만화에 푹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직접 만드는 방법을 익혔지요. “에이브, 난 직접 만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월트는 에이브와 함께 빈 창고를 빌려 촬영소를 만들었답니다. 광고 회사 일이 끝나자마자 둘은 촬영소로 달려갔어요. 그러고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밤새워 만화 영화를 만들었어요. 어느 날, 뉴맨 극장 주인이 월트를 찾아왔어요. “영화를 보면서 자막을 따라 읽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요. 사람들의 입을 꾹 다물게 할 만화 영화를 만들어 주세요.” 월트는 궁리 끝에 땅딸보 아저씨를 만들었어요. 자막을 따라 읽는 사람들을 극장 밖으로 날려 버리는 내용이었지요. 땅딸보 아저씨는 대성공이었어요. “월트, 정말 대단해요! 자막을 따라 읽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뉴맨 극장 주인은 기뻐하며 월트에게 계속 일을 맡겼어요. 월트의 소문은 금세 온 도시에 퍼졌어요. 너도나도 월트에게 만화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찾아왔지요. 월트는 넓은 곳으로 촬영소를 옮겼어요. 카메라도 새것으로 장만했고요. 월트는 직접 만화 영화 회사를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월트, 자네가 회사를 차린다면 기꺼이 돈을 빌려 주겠네.” 사람들은 월트를 믿고 선뜻 돈을 빌려 주었어요. 드디어 러프 오 그램 만화 영화 회사가 탄생했어요. 직원은 월트와 에이브, 세 명의 조수가 전부였지만 일감은 쉬지 않고 밀려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게 순조롭지는 않았어요. 영화 배급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월트는 눈물을 머금고 회사 문을 닫아야 했어요. 다시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고 만 거지요. 월트는 돌멩이처럼 딱딱한 빵을 씹으면서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다시 만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어요. “어린이들에게 양치질하는 방법을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주세요. 지금 바로 치과 대학교로 오실 수 있나요?” “지금 당장이라고요? 그런데 저, 구둣방에 맡긴 구두를 찾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어요. 그런데 잠시 뒤 맥그램 교수가 월트의 구두를 찾아 들고 나타난 거예요! 그렇게 만든 영화가 토미 카터의 이랍니다. 토미 카터의 이를 보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이를 닦고 싶어졌지요. 월트는 좀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어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로 갔어요. 하지만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지요. 만화 영화를 알리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앨리스가 뒤늦게 좋은 반응을 얻어 만화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었어요. 그런데 토끼 오스 왈드를 만들 때였어요. 누군가 월트의 작품을 베껴서 먼저 영화를 만들었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월트는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때 생쥐 한 마리가 다가와 월트를 말똥말똥 쳐다보았어요. “배가 고픈 거로구나.” 월트는 생쥐에게 먹던 빵을 나눠 주었어요.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생쥐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화 영화를 만드는 거야!” 월트와 에이브는 미키 마우스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미키 마우스가 소리를 내게 할 수는 없을까?’ 월트는 자신의 목소리로 미키 마우스의 목소리를 만들었어요. 미키 마우스는 대성공이었어요. 사람들은 귀여운 미키 마우스를 보려고 줄을 길게 늘어섰어요. 월트는 미키 마우스로 아카데미상을 받았어요. “이제 색깔이 들어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어!” 월트는 검은색과 흰색만 나오는 흑백 영화 시절에 알록달록한 컬러 영화를 만들어 냈어요. 또 만화 주인공들이 음악에 맞춰 신나게 움직이는 새로운 영화도 만들었지요. 월트의 만화 영화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그 덕분에 월트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지요.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어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어린이 왕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월트는 할리우드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애너하임에 넓은 땅을 샀어요. ‘코로 ‘뿌우우’ 물을 뿜는 코끼리 인형은 어떨까? 그래, 무시무시한 해골 바위도 세우자. 밤마다 불꽃을 터뜨리고, 강물에는 하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거야. 그 위로 유람선이 지나게 해야지!’ 월트는 ‘디즈니랜드’에다 온갖 신기한 것들을 만들어 세웠어요. “우아! 꼭 만화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요!” 어린이들은 디즈니랜드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행복해했어요. “제발 몸을 좀 돌보세요. 쉬엄쉬엄 일하시고요.” 월트는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만 했어요. 그러다가 덜컥 병이 나고 말았지요. “당장 수술해서 폐를 잘라 내야 합니다.” 길고 힘든 수술이었지만 월트는 견뎌 냈어요.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는 로봇을 꼭 만들어야 하는데.’ 월트는 병석에 누워서도 아이들 생각뿐이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어요. 예순다섯 살의 겨울이 월트에게는 마지막 겨울이 되고 말았답니다. 비록 로봇의 꿈을 남긴 채 눈을 감았지만 사람들은 잊지 않고 월트의 뜻을 이어 가고 있어요. 세상 모든 어린이가 구김살 없이 밝게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면서 말이에요. 못다 한 이야기. 만화 영화의 선구자 월트 디즈니. 월트 디즈니는 만화 영화의 선구자로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같은 만화 주인공들을 만들어 냈어요. 또 세계의 모든 어린이가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어 하는 꿈의 동산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지요. 1955년 로스앤젤레스 부근에 디즈니랜드를 개장했고, 플로리다 주 올랜도 부근에 제2의 유원지 월트 디즈니월드 건설 작업에 착공했어요. 월트 디즈니월드는 월트가 세상을 떠난 뒤 1973년에 개장해서 지금껏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상상력과 창의력, 순발력 있는 유머 감각,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척척 알아내는 재능을 지닌 월트는 전 세계의 모든 어린이에게 널리 사랑받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냈어요. 월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오락물의 창조자예요. 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나중에는 월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기도 했어요. 심지어 월트를 싫어하는 사람도 생겼지요. 교육자들은 그의 만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폭력성과 잔인함을 들어 월트를 공격했고, 디즈니랜드를 ‘오락물 슈퍼마켓’이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캘리포니아 주 발렌시아에 캘리포니아 미술 연구소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월트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절대 흔들리지 않았어요. 언젠가 월트는 자신의 만화 영화와 디즈니랜드에 관해 “나는 예술을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사업이며 나는 사업가일 뿐이다.”라고 말했어요. 어른들이 월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월트는 전 세계 모든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고, 만화 영화를 만든 아버지로서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지금도 월트가 만든 만화 영화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세계 여러 곳에서 어린이들과 만나고 있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자고 일어난 침대는 스스로 정돈해야지. 세수할 땐 귀 뒤도 깨끗이 닦고, 욕실 바닥 청소까지 깔끔하게 해 놓고 나오거라.”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마리아를 엄격하게 키웠어요. 마리아가 형제도 없이 외동딸로 자라는 데다 너무 영리해서 버릇없는 아이가 될까 봐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마리아는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불평하지 않고 어머니 말에 따랐지요. 또 공부도 열심히 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늘 일 등을 도맡아 했어요. 그 당시, 여자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리 큰 자랑이 아니었어요. 마리아는 우수한 성적으로 의과 대학에 지원했지만, 어디서도 마리아를 받아 주지 않았어요. “어떻게 여자가 의사를 하겠다는 거지?” 지금이라면 도리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겠지만, 그때는 여의사가 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교황이 한 말 덕분에 마리아는 로마 대학 의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여성도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한 거예요. 마리아는 6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 이탈리아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되었답니다. 마리아는 어린이 치료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발달이 늦는 정신 지체 어린이들을 돕고 싶었지요. 그래서 어린이 환자들을 더 열심히 관찰하고 연구했어요. ‘왜 이 아이들은 정신적인 반응이 늦거나 없는 걸까? 가만히 내버려 두어 자극을 못 받아서일까?’ 마리아는 어린이 환자들을 운동시키기 시작했어요. 몸에 자극이 되도록 자기 뜻을 표현하는 쉬운 행동부터 가르쳤지요.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들이 조금씩 나아졌어요. ‘그래!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사나 약이 아니라 자극을 주는 효과적인 교육이었어!’ 새로운 발견은 마리아의 마음을 세게 흔들었어요. 마리아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기보다 교육자가 되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시 대학에 들어가 교육학을 공부하며, 특수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지요. 여덟 살짜리 아이들 반을 맡은 마리아는 매일 매일 아이들에게 충분한 자극을 주고 반응을 끌어냈어요. 아이들은 점점 나아져서 읽기와 쓰기까지 곧잘 했지요. “세상에, 이럴 수가! 도대체 아이들한테 어떻게 한 거예요? 국가시험에서 읽기와 쓰기 성적이 보통 아이들보다 정신 지체 아이들이 더 높게 나왔어요.” 마리아의 교육 방법은 많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정신 지체 아이들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정상적인 아이들의 교육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마리아는 칭찬에 으쓱하기보다 궁금한 마음이 커졌어요. 그래서 정신 지체 어린이의 치료를 넘어 어린이들의 교육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어느 날, 산 로렌조 거리에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우리 아파트는 대부분 부부가 모두 일을 하러 나가요. 돌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아이들이 제멋대로지요. 여기저기 낙서하고 깨뜨리고, 어찌나 말썽을 부리는지. 선생님께서 애들 좀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마리아는 그 제안이 아주 특별하게 여겨졌어요. 얼마 뒤, 마리아가 산 로렌조 거리에 ‘어린이집’을 열자, 친구들은 마리아를 걱정하거나 비웃었어요. “의사를 그만두더니 국립특수아동학교 교장까지 그만두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보모를 하겠다니. 쯧쯧.” 하지만 마리아는 그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개발해 온 ‘몬테소리 교육법’을 실천하며, 아이들과 보람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어요. 어린이집에 온 아이들은 처음에는 겁을 먹거나 심통을 부렸어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어린이집에 오는 것을 즐거워하게 되었답니다.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공부나 예절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깔끔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장난감을 준비해 아이들이 즐겁게 갖고 놀 수 있게 했지요. 또한 아이들의 행동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조용히 관찰했어요. 처음에는 서로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보면 금세 친구가 되었어요. 가끔 다투거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함께 어울려 노는 재미를 점점 깨달아 갔지요. 사람마다 각자 다른 점이 있고, 그것을 존중하면 다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 느끼게 된 거예요. 어린이집의 장난감은 마리아가 잘 짜 놓은 마술이었어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게 갖고 놀았지만, 그것은 교육을 위한 학습 도구였지요. 아이들의 흥미와 수준을 고려해서, 쉬운 것부터 자연스럽게 어려운 단계로 올라가게 만든 마리아의 교육법이었어요. 아이들은 장난감에 푹 빠져 놀며 혼자서 배우고 깨달았어요. 또 종이 글자를 가지고 놀면서 스스로 글자를 깨우친 아이들도 있었지요. 마리아의 어린이집은 금세 유명해졌어요. 천재를 길러 내는 마리아의 교육법이 궁금한 사람들은 어린이집에 직접 찾아오기도 했지요. 이탈리아의 여왕이 어린이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에요. 여왕은 네 살배기 레니아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한참 동안 레니아 옆에 서 있어야 했답니다. 블록 놀이에 푹 빠져 있는 레니아가 놀이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지요. 여왕은 마리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어요. “아이들을 믿고 존중하는 교육만이 큰 일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박사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군요. 부디 이탈리아 어린이들의 큰 스승이 되어 주세요.”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변화만이 아니었어요. 꾸준히 부모와 상담을 해 오던 마리아는 부모들 역시 점점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선생님, 렌조 아버지가 담배를 끊었답니다. 앞으로는 술도 줄이겠다고 약속했어요.” “카를로의 편지를 읽고 저희 부부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답니다. 앞으로 카를로를 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마리아의 마음속에 뜨거운 감동이 일었어요. 아이를 통해 부모가 건강하게 변화된다면, 따뜻한 가정을 통해 사회도 올바르게 변할 거라고 믿었지요. 1909년, 몬테소리 교육법이라는 책을 낸 마리아는 몬테소리 교사를 길러 내는 데 온 힘을 쏟았어요. 세계 곳곳에서 많은 여성이 마리아를 찾아왔어요. 여성들은 자신의 나라 아이들에게도 몬테소리 교육법으로 가르치겠다고 했지요. “억지로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해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하는 사람이며,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과 헌신, 깊은 배움이 있어야 해요.” 마리아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어요. 여성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몬테소리 학교’를 세웠어요. 몬테소리 교육법을 실천하는 학교가 세계 곳곳에 세워진 거예요. 마리아는 몬테소리 학교를 다니며 연설을 하고,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몬테소리 교육법에 대한 열기는 날로 뜨거워졌어요. 그러자 너도나도 학교를 짓고는 몬테소리 학교라고 우기는 일까지 생겨났어요. 결국 마리아는 1929년에 ‘세계 몬테소리 협회’를 만들고, 아들 마리오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에 본부를 두었어요. 그 뒤, 몬테소리 교육법에 관계된 모든 일은 협회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었어요. 마리아는 70세가 넘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쉬지 않고 일했어요. 직접 인도까지 가서 몬테소리 학교를 세우기도 했어요.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린 간디와 타고르는 몬테소리 교육법이 인도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어요. 마리아는 인도에서 7년 동안 머물며 천 명도 넘는 교사를 양성했으며, 인도의 신분 제도를 누그러뜨렸어요. 몬테소리 학교 안에서는 아이의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종교 다툼이나 민족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마리아는 인도와 인도의 아이들을 몹시 사랑했답니다. 어느 날, 마리오가 걱정스레 말했어요. “어머니,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이젠 집에서 좀 쉬세요.” 82세의 마리아는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어요. 하지만 마리아는 아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쉬긴 어떻게 쉰단 말이냐? 나를 힘없는 늙은이 취급 하는 게냐?” 하지만 얼마 안 가 마리아는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았던 마리아는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아이들을 돕고 있을 거예요. 어린이 교육의 어머니 마리아 몬테소리 어린이 교육에 평생을 바친 마리아 몬테소리는 ‘혁신가’라고 불리기도 해요. ‘혁신’이란 말은 원 래부터 해 오던 방식을 새롭게 고쳐서, 보다 나은 방 법이나 쓸모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지요. 마리아 몬테소리는 그동안 어린이들을 교육해 오던 따라만 하는 학습 방법에서 벗어나 어린이들 스스로가 자기 안의 훌륭한 능력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법을 만들어 낸 교육의 혁신가랍니다. 마리아 몬테소리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교육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답니다. 1. 어린이는 놀이로 배운다. 2. 어린이는 태어날 때부터 배운다. 3. 어린이에게는 자극이 중요하다. 4. 어린이는 배우는 것에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가진다. 5. 학습이란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6. 교구는 교육을 위한 장난감으로써, 재미있어야 하며 감각을 훈련시킬 수 있어야 한다. 7. 어린이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교육에 방해가 될 뿐이다. 8. 학교는 어린이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시킬 권리를 갖는 곳이다. 9. 나이보다는 흥미와 능력에 따라 학급을 나눈다. 10. 학교는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부모들도 참여해야 한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위의 내용들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여요. 요즘에는 재미있는 장난감이 나 놀이를 통해 교육 받는 아이들이 많고, 학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부모들도 많은 데다 잘 만들어진 교구도 아주 많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익숙한 이 모든 어린이 교육의 시작에는 바로 마 리아 몬테소리가 있었답니다. 그녀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던 사람들은 몬테소 리가 힘써서 연구하고 새롭게 만들어 낸 교육법을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몬테소리가 없었다면 어린이들은 아직도 어린이가 아닌 작은 어른으로 취급을 당하고, 제대로 존중 받지 못했을 거예요. 또 재미없이 따라만 하는 학습으로,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몬테소리 교육법은 이탈리아 어린이 교육의 큰 기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세계의 많은 어린이와 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노란 불빛이 비치는 공장 앞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어요. 소년은 공책에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지요. “요 녀석! 또 여기 왔구나!” 아버지가 공장에서 나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들의 얼굴을 마주 보았어요. “비행기가 그렇게 보고 싶으냐?” “네, 꼭 한 번만 보여 주세요.”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불이 환하게 켜진 공장 안으로 들어갔어요. 덜컥대는 기계들 가운데 커다란 비행기가 놓여 있었어요. ‘자전거만 한 비행기가 있다면 어떨까?’ 공장 구석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이 소년이 훗날 만화 영화의 거장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랍니다. 하야오의 아버지는 전투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하야오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공장을 오가며 갖가지 기계와 자동차, 비행기 등을 볼 수 있었지요. 하야오는 특히 커다란 비행기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나도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 당시 일본은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이느라 많은 무기를 만들어 냈어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무기 공장들은 문을 닫아야 했고,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야오는 전처럼 가까이에서 비행기를 볼 수 없었지만 날고 싶은 꿈을 접지 않았어요. “형, 이 비행기 어때?” 하야오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형에게 보여 주었어요. “하하, 커다란 배에 날개가 달렸네? 이렇게 무거운 배가 어떻게 하늘을 날지?” 동생들도 그림을 보고는 배를 잡고 웃어 댔어요. “이게 무슨 그림이야? 만화지!” 하야오는 형제들이 놀려 대도 즐겁기만 했어요. “나는 만화가 좋아! 우주 소년 아톰 좀 봐. 우주를 맘껏 날면서 악당을 물리치잖아. 정말 멋지지 않아? 나도 아톰 같은 멋진 만화를 그릴 거야!” “자, 병실에 들어가면 다들 조용히 해야 한다.” 아버지 말에 하야오의 형제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병실 문을 열자, 어머니가 정답게 웃으며 가족을 맞았어요. 어머니는 폐결핵에 걸려서 몇 년 동안 병원에서 지내야 했어요. “엄마,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하야오는 가방에서 그림을 꺼내 보였어요. “어머나, 우리 하야오는 상상력이 참 풍부하구나! 이 그림을 보니 나도 하늘 높이 날 것 같은걸?”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칭찬해 주었어요. 몇 년 뒤, 어머니가 병이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집은 활기를 되찾았답니다. 하야오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미술 공부를 했어요. 미술 선생님은 하야오의 재능을 단숨에 알아챘어요. “하야오,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러려면 상상의 세계를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해. 너는 상상력이 풍부하니 상상의 기계나 동물을 그려 보렴.” 선생님 말에 용기를 얻은 하야오는 더욱 열심히 만화를 그렸어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하야오는 <백사전>이라는 만화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그것은 일본 최초의 컬러 만화 영화였지요. 하야오는 <백사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만화 영화를 만드는 거야!” 그날 밤, 하야오는 마음속에 소중한 꿈을 품었답니다. 만화 영화에 푹 빠진 하야오는 수업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만화를 그리고 또 그렸어요. 책상 위에는 늘 만화를 그린 종이들로 가득했지요.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만화만 그려 댈 테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갈 준비를 해야지!” 아버지의 호통에도 하야오는 꿋꿋하게 대답했어요. “저는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아요. 영화사에 들어가서 만화 영화를 만들 거예요!” “뭐라고?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 해라! 대학에 가지 않으면 널 다시는 보지 않겠다!” 결국 하야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했어요. 하야오는 아버지의 뜻대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어요. 하지만 만화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포기한 건 아니었어요. 틈틈이 신문에 실리는 만화를 그리며 미래를 준비했지요. 하야오는 대학을 졸업한 뒤 도에이 영화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곳은 바로 <백사전>을 만든 만화 영화사였어요. “만화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거야!” 하야오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어요. 하야오가 처음 하게 된 일은 똑같은 그림을 매일 수십 장씩 그리는 일이었어요. 밤늦도록 일하고 돈도 조금밖에 받지 못했지만, 하야오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그림을 그렸어요. “하야오, 자네의 상상력은 정말 뛰어나군!” 다카하타 감독이 깜짝 놀라 외쳤어요. “이제부터는 나를 도와 연출을 해 보게!” “그게 정말입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야오는 다카하타 감독을 도와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이라는 만화 영화를 만들었어요. 3년 동안 공들여 만든 영화였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어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는 없어!” 하야오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1978년, 하야오가 연출한 미래 소년 코난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어요. “와, 멋지다! 나도 코난처럼 힘센 발가락을 갖고 싶어.”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었고, 하야오의 이름은 일본에 널리 알려졌어요. 자신감을 얻은 하야오는 1984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라는 극장용 만화 영화를 만들었지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바람 계곡에 사는 나우시카 공주가 오염된 지구에서 갈 곳 잃은 생명체를 위해 싸우는 이야기예요. 오토바이보다 작은 비행정을 타고 하늘을 나는 나우시카 공주를 통해 하야오는 오랫동안 꿈꿔 왔던 자유를 맛보았어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어요. “하야오 감독님! 성공이에요, 성공!” 이제 하야오의 이름은 미국과 유럽에까지 알려졌어요. 같은 해, 하야오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스튜디오를 세웠어요. “새 스튜디오 이름을 ‘지브리’라고 하면 어떨까? 지브리는 사하라 사막에 부는 뜨거운 바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전투기 이름이기도 하지.” “지브리라. 아주 좋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지브리는 미국의 월트 디즈니 사와 맞먹는 세계적인 만화 영화 제작소로 발전했답니다. 브리는 하야오의 꿈의 공장이었어요. 하야오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상상을 보태어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 냈지요. 하야오는 털북숭이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 등을 상상하여 1988년, 마침내 이웃집 토토로를 완성했어요. 이웃집 토토로는 시골로 이사 온 두 자매가 숲의 요정 토토로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사람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나는 토토로와 열두 개의 다리로 바람처럼 달리는 고양이 버스에 홀딱 반했지요. 그 뒤, 이웃집 토토로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하는 영화로, 일본 만화 영화의 전설이 되었답니다. 하야오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했어요.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고, 어린이들에게는 근사한 만화 영화 주인공을 선물했지요. 자연과 사람은 이웃입니다. 우리의 이웃인 아름다운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합니다. 하야오는 오직 인간만이 위대하며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연에 큰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은 하야오의 만화 영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사람들은 하야오를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하야오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생생한 배경과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틈만 나면 여행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했어요. “휴, 드디어 이야기 줄거리가 잡혔군! 이제 주인공 모습과 배경 그림을 정해야 해.” 하야오는 만화 원화가들과 함께 수백 장이 넘는 배경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렸지요.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하야오의 만화 영화는 나올 때마다 큰 인기를 얻었답니다. 하야오의 만화 영화는 아주 특별해요. 하야오가 만든 만화 영화를 보고 나면,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웃음을 터뜨리게 되고, 좌절에 빠진 사람들은 힘과 용기를 얻게 되지요. 하야오는 각박한 세상에 ‘행복’을 선물한 위대한 만화 영화 감독이자 철학자예요. 지금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신기하고 재미난 상상을 하고 있을 거예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산타클로스처럼 ‘어떤 만화 영화를 선물할까?’ 하고 고민하면서 말이에요.
광개토 대왕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오랫동안 서로 힘을 겨루어 왔어요. 이때를 ‘삼국 시대’라고 불러요. 고구려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어요. 하지만 북쪽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북쪽 오랑캐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어요. 게다가 남쪽에 있는 백제와 신라의 침입에도 대비해야 했고요. 고구려 백성은 잦은 싸움에 몹시 지쳐 있었답니다. “신이시여, 하루라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살펴 주옵소서.” “부디 우리 고구려에 슬기롭고 힘 있는 임금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고구려 백성은 하나같이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었어요. 아침부터 궁궐 안이 소란스러웠어요. 고국양왕의 아들 담덕이 태자가 되는 날이었거든요. 고국양왕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왕자 담덕이 태자가 되었음을 알리나니, 태자에게 충성을 다하길 바라노라.” “황공하옵니다.” 신하들이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조아렸어요. 고국양왕은 태자 담덕의 머리에 관을 씌워 주었어요. 담덕의 나이 열세 살이었어요. 담덕은 어렸지만 체격이 크고 늠름했어요. “담덕 태자 만세! 고구려 만세!” 고구려 백성은 담덕 왕자가 태자가 된 것을 매우 기뻐했어요. 다음날, 담덕은 아침 일찍 일어났어요. 국내성 주위는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담덕은 말을 달려 성 근처에 있는 산으로 향했어요.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요. 하지만 담덕은 쉬지 않고 내달려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어느덧 태양이 밝게 떠오르고 있었어요. 담덕은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말에서 내렸어요. 그러고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지요. 산봉우리와 드넓은 벌판에 햇살이 부서져 내렸어요. ‘저 벌판을 반드시 우리 고구려 땅으로 만들고 말겠다!’ 담덕은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그때, 가까운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바위 위에 떡 버티고 서 있었어요.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매서운 눈으로 담덕을 노려보았어요. “어흥!” ‘당황하지 말자. 겁내지 말자.’ 담덕은 무서웠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요. 호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화살을 뽑아 들었지요. 그러고는 호랑이 눈을 향해 정확히 활을 겨누었어요. 활을 겨눈 채, 얼마쯤 시간이 흘렀어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한동안 담덕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호랑이가 등을 돌려 어슬렁어슬렁 바위를 내려가는 거예요.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담덕을 뒤따라온 병사들이 수군거렸어요. “저렇게 큰 호랑이가 오히려 도망을 가다니, 역시 담덕 태자님이야.” “태자님은 정말 훌륭한 왕이 되실 거야.” 병사들은 입을 모아 담덕을 칭찬했어요. 담덕은 호랑이가 물러난 뒤에도 활을 겨눈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요. 담덕은 잠시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고구려를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담덕은 사냥 대회를 자주 열었어요. 짐승들을 쫓아 험한 산을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력을 단련시킬 수 있고 무술도 익힐 수 있을 테니까요. 말하자면 사냥이 신나는 군사 훈련이었던 셈이지요. “가장 큰 짐승을 잡은 자와 가장 많은 짐승을 잡은 자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자, 시작하라!” 담덕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회의 시작을 알렸어요. 물론 담덕도 여러 병사와 함께 사냥을 했지요. “태자님의 칼 쓰는 모양새와 활 솜씨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시네그려.” “우리도 힘내서 더욱 열심히 하자고.” 병사들은 늠름한 담덕의 모습을 보고 더욱 분발했어요. 담덕이 사냥만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에요. 낮에는 무예를 익히고 밤에는 글을 읽었지요. 책을 보면서도 훗날 임금이 되었을 때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차근차근 그려 보곤 했답니다. 어느 날, 담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러 병사와 함께 무예를 익히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신하가 다급하게 담덕을 찾았어요. “어서 서두르십시오. 임금님께서.” 담덕은 허겁지겁 성으로 달려갔어요. 하지만 고국양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어요. “아바마마! 아바마마!” 담덕은 깊은 슬픔에 잠겨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어요. 담덕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19대 왕이 되었어요. 이 왕이 바로 우리나라 역사상 땅을 가장 많이 넓혔던 광개토 대왕이랍니다. ‘아바마마, 반드시 훌륭한 왕이 되겠나이다. 하늘나라에서 지켜봐 주옵소서.’ 광개토 대왕은 먼저 씩씩한 젊은이들을 뽑아 군사 훈련을 시켰어요.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백제가 시도 때도 없이 고구려를 넘보고 있었거든요. 광개토 대왕이 왕의 자리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였어요. 광개토 대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어요. “고구려 병사들이여, 백제에게 빼앗긴 우리 성을 되찾자!” 광개토 대왕은 맨 앞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백제 석현성으로 쳐들어갔어요. “자, 공격하라!”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어요. “아니, 화살이 모조리 나무 방패에 꽂혀 버리잖아!” “고구려 병사들이 예전 같지 않아. 너무 강해졌어!” 백제 병사들은 당황했어요. 결국 해도 지기 전에 싸움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답니다. 고구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석현성은 물론이고, 주위의 성 10여 개도 단숨에 무너뜨렸지요.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다음은 관미성이다.” 관미성은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바다에서 싸우려면 새로운 작전이 필요하다.” 광개토 대왕은 먼저 수군을 뽑아 여러 편으로 나눈 뒤 성을 둘러싸도록 했어요. 그런 다음 훈련이 잘 되고 날랜 병사를 뽑아 백제군으로 변장을 시켰답니다. “너희들은 어둠을 틈타 성안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불을 질러라. 그 불을 신호로 나머지 병사들이 한꺼번에 쳐들어가 공격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모두 결의에 차 있었어요. “불이야! 불이야!” 관미성이 불바다로 변했어요. 백제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줄 몰랐지요. 불길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치느라 정신없었어요. “자, 공격하라!” 광개토 대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구려 병사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어요. 불화살을 쏘아 대고 창과 칼을 휘두르며 관미성 안으로 쳐들어갔어요. 백제 병사들은 아우성치며 바닷물로 뛰어들었지요. 한참 뒤, 관미성 꼭대기에서 고구려 깃발이 휘날렸어요.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고구려 만세! 광개토 대왕 만세!” 고구려 병사들의 만세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답니다. ‘이제 백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광개토 대왕은 오랜만에 마음 편히 성안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어요. ‘북쪽으로 가자! 어렸을 때 보았던 드넓은 벌판을 우리 고구려 땅으로 만들자!’ 광개토 대왕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어요. 그즈음, 중국 연나라가 고구려에 쳐들어왔어요. 광개토 대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어요.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 놈들을 모조리 쳐부수자!” 광개토 대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공격 신호를 보냈어요. 하지만 연나라 장수는 콧방귀를 뀌며 병사들에게 말했어요. “성문을 굳게 닫아라! 고구려 놈들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절대 공격하지 마라!” 광개토 대왕은 새로운 작전을 세웠어요. “지금부터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모두 막아라. 연나라 병사가 한 명이라도 성 밖으로 나오면, 그것을 공격 신호로 삼는다.” 고구려 병사들은 즉시 커다란 돌을 쌓아 물길을 막았어요. 얼마 가지 않아 연나라 병사들은 목이 말라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고구려 병사들이 잠들면 몰래 물을 길어 오자.” 한밤중에 굳게 닫혔던 성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연나라 병사 몇 명이 항아리를 들고 물을 긷기 위해 나왔어요. “이때다, 공격하라!” 고구려 병사들은 순식간에 성안으로 쳐들어갔어요. 연나라 병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성을 빼앗겼어요. “만세! 고구려 만세!” 고구려 병사들은 서로 얼싸안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어요. 광개토 대왕은 차츰차츰 고구려 땅을 넓혀 갔어요. 나라도 훌륭하게 다스렸고요. “땅이 넓으니까 농사지을 곳이 많아서 좋아.” “전쟁이 없으니까 살 것 같아.” 백성은 광개토 대왕에게 감사하며 평화롭게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구려에 큰 불행이 닥쳤어요. 광개토 대왕이 갑자기 병을 얻어 쓰러진 거예요. 광개토 대왕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드넓은 만주 벌판을 우리 땅으로 삼아 다스렸던 광개토 대왕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 때 우리나라 땅은 오늘날의 한 반도보다 훨씬 넓었어요.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 북쪽 으로는 중국의 쑹화강, 동북쪽으로는 러시아의 옌하 이저우까지, 서쪽으로는 중국 랴오허 강 동쪽까지 모두 고구려 땅이었어요. 이처럼 광개토 대왕은 국토를 넓히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태자 시절부터 무엇보다도 나라의 힘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구려는 중국 연 나라와 백제의 공격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어요. 342년에는 연나라의 군대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까지 쳐들어와 고국원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잡아가고, 할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가기 도 했어요. 그리고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평양성에 쳐들어온 백제와 싸우다가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지요.
김정호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화창한 봄날이었어요. 김정호는 산 위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냇물과 멀리 보이는 산도 그렸지요. 그런데 문득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저 산 너머에는 어떤 마을이 있을까? 저 산줄기들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냇물은 어디까지 흘러갈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점 많아졌어요. “서당에서는 왜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지? 책에도 그런 내용은 없잖아.” 정호는 툴툴거리며 산을 내려왔어요. 며칠 뒤, 정호가 서당에 갔을 때였어요. 훈장님이 이상한 그림을 보고 있었어요. “훈장님, 이 그림은 뭐예요?” 정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어요. “이건 우리 마을을 그린 지도란다.” “지도요? 그게 뭐예요?” 정호는 지도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지도란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땅의 모양을 그려 놓은 그림이란다. 이건 산이고, 이건 강을 표시한 거야. 그리고 이건 관아 표시지. 지도를 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단다.” 훈장님은 지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어요. 정호는 귀가 번쩍 뜨였어요. ‘그래, 바로 이거야!’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던 정호는 훈장님께 물었어요. “훈장님, 이 지도를 한 장만 베껴 가면 안 될까요?” “지도를 가지고 뭐 하려고 그러느냐?” “너무 신기해서요.” 정호는 지도를 똑같이 그렸어요. ‘정말 이 지도에 우리 마을이 그대로 나타나 있을까?’ 정호는 빨리 지도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글공부가 끝나자마자 급히 산으로 달려갔답니다. 산봉우리에 올라, 정호는 지도를 펼쳤어요. 한참 동안 지도와 마을을 번갈아 가며 살펴보던 정호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냇물이 흐르는 방향이 달라. 저쪽에 있는 산은 아예 표시도 되어 있지 않고.” 지도는 마을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다른 곳이 많았어요. “왜 이렇게 엉터리로 그렸지? 내가 제대로 고쳐야겠어.” 정호는 다음 날부터 지도를 고치기 시작했어요. 빠진 부분을 그려 넣고, 잘못 그려진 길이나 하천은 바로잡았어요. “됐어! 이제야 정확한 지도가 되었어.” 정호는 자신이 그린 지도를 보며 흐뭇해했어요. “마을 지도를 그렸으니까, 이번엔 읍내 지도를 그려 볼까?” 정호는 읍내 지도를 그리기 위해 날마다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얘들아, 이것 봐! 내가 그린 우리 읍내 지도야.” 정호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그린 지도를 보여 주었어요. “이게 뭐야? 볼품없는 선만 삐뚤삐뚤 그렸잖아.” “무슨 그림이 나무도 없고 바위도, 구름도 없어?” 친구들은 정호가 그린 지도를 보고 한마디씩 했어요. “이건 그냥 그림이 아니라 지도라는 거야.” 정호는 친구들에게 지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어요. “쓸데없이 땅은 왜 그리니?” 친구들은 시큰둥하게 말했어요. 하지만 정호는 글공부보다 지도 그리는 것이 더 즐거웠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지도에 대한 정호의 관심은 식을 줄 몰랐어요. 지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지요. 정호는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한 지도를 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한양에 가면 정확한 지도가 있다더군.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도 있대.” 정호는 규장각에 있는 지도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한양으로 갔지요. 마침 벼슬을 하고 있던 친구 최한기의 도움으로 규장각에 있는 지도들을 볼 수 있었어요.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구나!” 말로만 듣던 지도를 직접 본 정호는 가슴이 마구 뛰었어요. 그런데 지도를 꼼꼼하게 살펴보다가 정호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같은 한양을 그린 지도인데 왜 다들 다르지?” 지도의 내용이 서로 달라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어요. 정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고향을 살펴보았어요. 지도에는 빠진 부분이 많았고 잘못 표시된 곳도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정확하다는 지도가 이렇게 잘못된 곳이 많다니…….” 정호는 한숨을 내쉬었어요. “예전에 만들어진 지도니 지금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그리고 요즘에 만들었다고 해도 어찌 정확할 수 있겠나?” 최한기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정호는 생각이 달랐어요. 지도를 보며 한숨짓던 정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내가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어!”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정호는 여러 지도를 검토해 보았어요. 그리고 각 지방의 날씨나 인구를 적어 놓은 책들도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최한기가 찾아왔어요. “지도를 만들려면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지 집 안에만 있으면 어떡하나?” 최한기의 말에 정호는 고개를 저었어요. “그렇지 않네. 무턱대고 돌아다닌다고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높은 산에 올라가서 살펴본다고 정확한 지도를 그릴 수 있겠나?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충분한 기초 지식을 쌓아야 한다네.” 정호의 말을 듣고 최한기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 나한테 지도에 관한 책이 있는데 그것들도 가져다주겠네.” 최한기는 정호에게 필요한 책과 지도를 갖다주었어요. 정호는 지도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서로 비교해 보았어요. “이 지도는 정말 잘 만들어졌군.” “이건 이 부분이 잘못됐어.” 여러 지도의 좋은 점은 모으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았어요. 그리고 지도를 봐도 알 수 없는 것은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했지요. 정호는 마침내 우리나라 지도를 완성했어요.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지 10년 만의 일이었어요. 정호는 지도 이름을 ‘청구도’라고 지었어요. “정말 대단해! 이렇게 자세한 지도는 처음 보네!” 최한기는 정호가 그린 지도를 보고 감탄했어요. 하지만 정호는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아니야, 아직 부족해. 더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 해.” 정호는 다시 지도 만드는 일에 매달렸어요. 예전에 지도를 만들 때보다 집을 떠나 있는 날이 훨씬 많았지요. 정호는 오랫동안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했어요. 때로는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을 헤매기도 하고 잠잘 곳이 없어 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잠을 잤어요. 또 돈이 없어 며칠 동안 밥을 굶기도 했지요. 추운 겨울에 손발이 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정호는 마음이 뿌듯했어요. “강물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흐르는구나.” “여기에 산이 하나 있었군.” 정호는 예전에 그렸던 지도에서 빠진 부분을 하나하나 채워 넣었어요. 누가 시키거나 큰 재물을 얻는 일은 아니었지만 정호는 오로지 지도에만 매달렸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정호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까짓 지도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 고생입니까?” 그때마다 정호는 차근차근 설명했어요. “지도는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지도가 있으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지요. 또 외적과 싸울 때에도 지도가 있어야만 군사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고요.” 정호는 30여 년 만에 마침내 ‘동여도’ 를 완성했어요. 어떤 지도보다 정확한 동여도를 보고 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했어요. 동여도는 궁궐뿐 아니라 관청에서도 널리 사용하였어요. “축하하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게나.” 최한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고맙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네.” “할 일이라니?” “지도를 나무판에 새겨 종이에 찍어 낼 생각이네.” 당시에는 지도를 사용하려면 일일이 붓으로 베껴야 했어요. 복잡한 지도를 베끼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요. 또 베끼다 보면 내용을 잘못 옮기는 경우도 많았고요. 게다가 일반 백성은 지도를 구하기조차 힘들었답니다. “지도는 양반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필요해.” 정호는 지도를 목판에 새겨 한꺼번에 많은 지도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도를 나무판에 새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나무를 톱으로 펀펀하게 켠 다음, 하나하나 조각칼로 파내야 했지요. 정호는 가난했기 때문에 기술자를 부를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모든 일을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나무판 하나를 파는 데만 몇 달이 걸렸어요. 정호의 손은 늘 상처투성이였지요. “이런, 여기가 잘못 파졌군!” 나무판에 새긴 지도를 종이에 찍어 보고 조금이라도 틀린 곳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새겼어요. 몇 달 동안 고생해서 판 나무판을 버려야 했지만, 정호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드디어 내가 바라던 지도를 완성했구나!” 나무판을 파기 시작한 지 6년 만에 정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어요. “처음 지도를 만들 때는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나이였는데, 이제는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되어 버렸구나. 하지만 후회는 없어. 이렇게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으니 말이야.” 정호 옆에는 그동안 힘들게 판 126장의 나무판이 놓여 있었어요. 이 나무판들을 종이에 찍어서 이으면 이층 건물보다 높은 7미터 정도의 커다란 지도가 된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동여지도’ 예요. 김정호가 없었다면 대동여지도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김정호의 강한 집념과 백성을 향한 깊은 사랑이 느껴진답니다. 대동여지도의 ‘대동’은 우리나라를 나타내는 말인데, ‘동방의 큰 나라’라는 뜻이에요. 김정호가 지도의 이름을 대동여지도라고 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한 나라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김정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콜럼버스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어느 화창한 봄날, 키다리 선장과 조그만 소년이 뱃머리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선장님, 저 바다 끝에는 무엇이 있나요?” “바다 저편에는 지구의 끝인 낭떠러지가 있단다. 그래서 가까이 가면 뚝 떨어지고 말지.” “선장님은 바다 끝을 보았나요?” “누구도 바다 끝을 본 적은 없단다.” 소년은 갑자기 큰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어요. ‘아무도 보지 못한 바다 끝을 내가 찾아낼 거야.’ 호기심 많은 이 소년이 훗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콜럼버스는 1451년 이탈리아 제네바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옷감을 파는 상인이었는데, 콜럼버스가 제네바 최고의 상인이 되길 바랐지요. 하지만 콜럼버스는 높은 물살을 가르며 커다란 배가 오가는 드넓은 바다가 좋았어요. 그래서 콜럼버스는 항상 엉뚱한 질문만 했답니다. “아빠, 저렇게 무거운 배가 어떻게 뜨죠?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는 어디예요?” 또 틈만 나면 선원들을 따라다니며 신기한 바다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콜럼버스, 바다 밑에는 커다란 괴물이 살아. 그 괴물은 파도를 일으켜 성보다도 큰 배를 꿀꺽 삼켜 버린단다.” 콧수염 아저씨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어요. “우아! 으스스해요! 그런데 아저씨는 괴물과 싸워 봤어요?” 콜럼버스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어요. “암, 한번은 큰 파도가 배를 들어올렸는데 파도 밑에 검고 물컹한 것이 있었어. 눈앞이 캄캄했지만 용기를 내서 대포를 쏘았지. 그러자 파도가 스르르 물러갔단다. 그것 참 희한하지?”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콜럼버스는 생각했어요. ‘그래, 나도 선장이 되어 바다 끝까지 가 볼 테야.’ 얼마 뒤, 콜럼버스는 난생 처음 배를 타게 되었어요. “배가 출렁출렁하네? 정말 신기해!” 장난꾸러기 콜럼버스는 배 안 여기저기를 신나게 뛰어다녔어요. 콜럼버스는 선장에게 물었어요. “선장님, 바다 끝까지 가 보셨어요?” “아니, 바다 끝은 낭떠러지여서 아무도 갈 수 없단다.” 선장이 잔뜩 겁을 주며 말했어요.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평평한 지구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었지요. 콜럼버스의 호기심은 점점 더 커져 갔어요. 콜럼버스는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제노바 상선의 선장이 되었어요. 첫 항해가 시작되던 날, 선원들은 콜럼버스와 함께 외쳤어요. “콜럼버스 선장을 위하여!” 선원들은 젊은 선장 콜럼버스를 믿고 잘 따랐어요. 그 덕분에 콜럼버스는 많은 돈을 벌었고 별 걱정 없이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바다 저 건너편에 가 있었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바다의 끝은 꼭 정복하고 싶은 미지의 세계였으니까요. 어느 날,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을 읽다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배를 타고 인도에 가는 거야! 그러면 육지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겠지!” 콜럼버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뛰었어요. “배와 선원들, 먹을 식량과 물이 필요하고. 아참! 대포도 필요해. 해적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콜럼버스는 꼼꼼히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콜럼버스의 힘으로 필요한 것을 모두 준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콜럼버스는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어요. “저에게 배와 돈을 지원해 주신다면 신비의 나라 인도에서 황금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콜럼버스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터무니없다고 비웃었어요. “흥!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겠다고? 서쪽 끝은 바다 낭떠러지야. 정신 차리게, 콜럼버스!” 그러던 어느 날,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을 만났어요. “콜럼버스, 그대에게 배를 세 척 내줄 테니 힘차게 나가 보시오!” 콜럼버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항해 준비를 서둘렀어요. 1492년 8월 3일, 드디어 출항의 순간이 다가왔어요. “닻을 올려라! 출항이다!” 콜럼버스는 뱃머리에 서서 우렁차게 외쳤어요. 많은 사람이 항구에 나와 콜럼버스 일행을 배웅했지요. 산타 마리아호를 이끄는 콜럼버스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어요. 하지만 선원들은 달랐어요. “우리 모두 바다 귀신의 밥이 될지도 몰라.” “아니, 바다 끝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 거야.” “배를 돌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선원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어요. 콜럼버스는 선원들에게 외쳤어요. “여러분, 누구도 지구 끝까지 가 본 사람이 없는데 왜 지구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콜럼버스의 말에 선원들은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 우리가 한번 가 보는 거야!” 선원들도 희망에 부풀어 소리쳤어요.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파도 그리고 거센 비바람과 싸우는 사이 선원들은 하나 둘 지쳐 갔어요. “선장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낯선 바다 위에서 죽고 싶지 않아요!” 날이 갈수록 선원들의 항의는 거세졌어요. 선원들의 거센 항의 속에서도 콜럼버스는 항해를 멈추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앗, 저건 새잖아!” 새 무리가 콜럼버스 눈에 띈 거예요. 새가 있다는 건 멀지 않은 곳에 육지가 있다는 증거였지요. 그러자 뱃머리 위에 있던 선원들이 소리쳤어요.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모두 갑판으로 달려 나왔어요. 작은 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감격에 겨워 외쳤어요. “우아! 드디어 해냈어!”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얼싸안고 기뻐했어요. “인도다! 황금의 나라 인도에 도착했어!” 콜럼버스는 섬에 첫발을 내디디며 소리쳤어요.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어요. 콜럼버스는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지만 말이에요. 섬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어요. 원주민들은 콜럼버스 일행이 몹시 낯설었어요. 하지만 금세 익숙해져 친절하게 대해 주었답니다. 얼마 뒤, 콜럼버스는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배에는 신비의 땅에서 가져온 선물이 가득했어요. 콜럼버스는 기쁜 마음으로 이사벨 여왕을 찾아갔어요. “여왕님, 저는 지구의 반대편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곳에서 여왕님께 드릴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콜럼버스는 섬에서 가지고 온 신기한 과일과 보석을 내놓았어요. “오, 세상에! 너무나 탐스럽고 아름답군요!” 이사벨 여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어요. 그리고 콜럼버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답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에게 인정을 받자 심술궂은 귀족들은 콜럼버스를 헐뜯었어요. “흥! 자신이 발견한 땅에서 왕 노릇을 하려고 할걸?” “맞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귀족들은 콜럼버스를 괴롭히고 창고에 가두었어요. “억울합니다. 나는 한번도 왕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저 탐험가일 뿐이에요.” 콜럼버스가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소식을 들은 이사벨 여왕은 불같이 화를 냈어요. “콜럼버스를 당장 풀어 주어라!” 콜럼버스는 풀려나자마자 다시 항해를 시작했어요. 바다를 건너고 지구의 끝을 돌고 또 돌았지요. 어느 날, 콜럼버스는 마지막 항해를 떠났어요. 동생과 아들이 함께 배에 올랐지요. “자, 출항이다!” 힘찬 목소리로 닻을 올렸지만 항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어요. 콜럼버스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배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에스파냐 산루카 항구에 닿자마자 콜럼버스는 자리에 눕고 말았어요. “인도 땅을 꼭 밟아 보고 싶었는데. 내가 못다 한 일들을 이루어 다오.” 콜럼버스는 이루지 못한 꿈을 뒤로하고 쉰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뒤 콜럼버스는 유럽의 영웅이 되었어요. 여러 왕실에서 콜럼버스를 초대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어요. 콜럼버스는 힘들었던 항해와 선원들의 반란 그리고 신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 주었어요.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듣고 왕과 귀족들은 모두 감탄했어요. 하루는 한 신부가 콜럼버스를 근사한 만찬에 초대했어요. 그 자리에는 귀족이 많이 있었어요. 귀족들은 콜럼버스의 탐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어요. 그때였어요. 그 자리에 있던 한 귀족이 비웃듯이 말했어요. “쳇! 콜럼버스, 그대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오. 그곳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 가 발견할 땅이었소.” 사람들은 깜짝 놀라 콜럼버스의 눈치를 살폈어요. 그런데 콜럼버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하다가 식탁 위에 있는 삶은 달걀을 집어 들며 말했어요. “누구든 이 달걀을 식탁 위에 세워 보십시오.” “그거야 쉽지.” 사람들은 식탁 위에 달걀을 세우려고 애썼어요. 그러나 달걀은 쓰러지기만 할 뿐 세워지지 않았어요. 그러자 콜럼버스는 달걀 밑 부분을 두드려 깬 다음 식탁 위에 달걀을 세웠어요. “자, 보세요. 섰지요?” “그렇게는 누구든지 할 수 있소.” 귀족들의 말에 콜럼버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바로 그거예요. 무슨 일이든지 처음 해내는 것이 중요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일을 처음 해낸 사람은 바로 접니다.”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콜럼버스는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간 사람이에요. 그는 수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새로운 바닷길을 열었어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수많은 유럽 사람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갔어요. 콜럼버스 덕분에 세계 역사는 크게 변하기 시작했지요. 콜럼버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스스로의 의지를 믿고 탐험을 시작했어요. 콜럼버스는 호기심의 천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낸 의지의 천재이기도 하답니다.
나폴레옹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무지개가 뜨자 코르시카 섬의 개구쟁이들은 신이 났어요. 그중에 유난히 키가 작은 꼬마가 눈을 반짝거리며 소리쳤어요. “얘들아, 무지개를 잡자!” 꼬마는 재빨리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손이 미끄러지면서 절벽 한가운데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어요. “꼼짝 말고 있어! 어른들을 불러올게!” “아니야, 나 혼자 내려갈 수 있어.” 꼬마는 발버둥을 치다가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런데 꼬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어요. “다음엔 꼭 무지개를 잡고 말 테야!” 이 꼬마가 바로 훗날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종종 나폴레옹에게 코르시카 섬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영웅들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폴레옹은 생각했어요. ‘훌륭한 군인이 되어서 꼭 코르시카 섬을 지킬 테야!’ 나폴레옹은 열 살 때 프랑스에 있는 소년 사관학교에 입학했어요. 사관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프랑스 귀족의 자녀였어요. “야, 저기 코르시카 촌뜨기가 간다!” 아이들은 나폴레옹을 놀려 대며 따돌렸어요. 외톨이가 된 나폴레옹은 혼자 책을 읽거나 먼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꿈을 키웠어요. 나폴레옹은 공부는 잘했지만 친구가 없었어요. “나폴레옹, 넌 아주 훌륭한 학생이야. 하지만 훌륭한 군인이 되려면 남들과 어울리는 법도 배워야 해.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는 장군이 진정한 군인이야.” 선생님의 충고를 들은 뒤 나폴레옹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사관학교 학생들은 편을 나누어 눈싸움을 시작했어요. 나폴레옹은 철저하게 작전을 짰어요. 도망가는 척하며 자기 편이 숨어 있는 곳으로 상대편을 유인했지요. 상대편이 쫓아오자 숨어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눈덩이를 던졌어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상대편 아이들은 허둥지둥 도망쳤어요. 그 뒤, 아이들은 더 이상 나폴레옹을 무시하지 않았답니다. 얼마 뒤, 나폴레옹은 파리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학했어요. 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코르시카에서 슬픈 소식이 날아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어요. “장교가 된 모습을 맨 먼저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나폴레옹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슬픔을 꾹 참았지요. 훌륭한 군인이 되어 코르시카 섬을 독립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꿈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나폴레옹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장교가 되었답니다. 그 뒤, 나폴레옹은 발랑스라는 작은 도시의 포병 부대로 갔어요.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는 매우 엄격했지만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병사들과 함께했어요. 대부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병사들은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답니다. 프랑스의 장교로 근무하면서도 나폴레옹의 마음은 늘 바다 건너 코르시카에 있었어요. ‘코르시카를 위해 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폴레옹은 하루빨리 코르시카가 독립되길 간절히 기도했어요. 1789년 여름, 프랑스에 큰일이 생겼어요. 프랑스 국민이 사치스러운 왕을 내쫓아 버린 거예요. 나폴레옹은 지금이야말로 코르시카가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코르시카 섬을 되찾읍시다!” 나폴레옹은 당장 코르시카로 달려가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믿고 따랐어요. 프랑스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코르시카를 독립시켰어요. “코르시카 만세! 나폴레옹 만세!” 나폴레옹을 믿고 따르는 무리가 늘어나자 몇몇 사람이 나폴레옹을 없애려고 했어요. 나폴레옹은 독립된 조국을 가슴에 품은 채 코르시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영국 함대의 공격을 앞장서 진압했어요.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큰 상을 내리고 장군으로 임명했어요.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된 거지요.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반란군과 싸워 매번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얼마 뒤,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결혼했어요.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총사령관이 되어 프랑스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떠나야 했지요. 코르시카 섬의 꼬마 나폴레옹이 프랑스 군대의 총 지휘관이 된 거예요.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어요. “나의 병사들이여, 우리에게는 낡은 무기밖에 없다. 그러나 굳은 의지만 있다면 어떤 군대도 이길 수 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죽을 각오로 원정에 나섰다. 부디 힘껏 싸워 주길 바란다!” 나폴레옹의 우렁찬 외침에 병사들은 큰 용기를 얻었어요. “나를 따르라! 모두 돌격하라!” 나폴레옹은 맨 앞에서 용감하게 병사들을 지휘했어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가는 곳마다 큰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이었어요. 산책을 나갔다가 나폴레옹은 한 보초병이 졸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나폴레옹은 병사의 총을 살짝 빼어 들고 대신 보초를 섰어요. 잠에서 깬 병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어요. 나폴레옹은 총을 건네주며 다정하게 말했어요. “무척 피곤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보초는 중요한 임무이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소문은 온 군대에 퍼졌어요. 그 뒤 병사들은 더욱 나폴레옹을 믿고 따랐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오스트리아군을 이기고 이집트와 터키도 정복했어요. 나폴레옹은 어느새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어요. 나폴레옹이 전쟁을 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프랑스는 다시 혼란스러워졌어요. 나폴레옹은 부하들과 의논한 끝에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세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를 만들고 나폴레옹도 그중의 한 사람이 되었어요. 나폴레옹은 나쁜 법을 고치고 세금도 공평하게 내도록 했어요. 또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도록 신분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섰어요.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10세 때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어요. 그 뒤, 프랑스 육군이 된 나폴레옹은 진취적이고 솔직한 모습과 뛰어난 통솔력으로 부하들의 믿음을 얻었어요. 또 치르는 전쟁마다 승리하며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고, 마침내 황제가 되었어요. 나폴레옹의 유럽 재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아요.
퀴리 부인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퀴리 부인의 어릴 때 이름은 마리였어요. 마리는 1867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그때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다스리고 있어서 학교에서 러시아 말과 러시아 역사를 배워야 했지요.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와 똑같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랬듯이 폴란드 학생들도 숨어서 몰래 폴란드 말과 역사를 공부했어요. “마리, 스타니슬라스 오구스투스는 어떤 왕이었지요?” 오늘도 투팔스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폴란드 역사를 가르쳤어요. “스타니슬라스 오구스투스 왕은 매우 영리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왕이었어요. 특히 예술가들을 아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없는 왕이었어요.” 마리는 또박또박 대답했어요. 바로 그때, 복도에서 벨이 짧게 두 번, 길게 두 번 울렸어요. 학생들은 흠칫 놀라 재빨리 폴란드 교과서를 숨기고, 바늘과 천을 꺼내 바느질을 시작했어요. 잠시 뒤,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러시아 장학관이 들어왔어요. 장학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둘러보았어요. 책상도 살피고 여기저기 뒤져도 보았지만 아무런 트집을 잡을 수 없었지요. “흠,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시험해 봐야겠소.” 장학관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푹 숙였어요. ‘아, 제발 다른 학생을 시켰으면.’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일어나 봐요.” 선생님은 어느새 마리 곁으로 다가와 있었어요. 마리가 일어서자 장학관이 물었어요. “신성한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이름은?” 마리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꾹 참고 또박또박 대답했어요. “카드리느 2세, 폴 1세,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스 1세, 알렉산드르 2세.” 장학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요. “지금 우리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지?” 마리는 잠시 머뭇거렸어요. 이것만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지금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나?” 장학관의 짜증스러운 말에 마리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어요. “지금 우리를 다스리는 분은, 알렉산드르 2세 황제 폐하입니다.” 장학관은 그제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을 나갔어요. “오, 마리!” 투팔스카 선생님이 마리를 꼭 안았어요. 마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답니다. “엄마!” 집에 돌아온 마리는 엄마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지요.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처럼 마리를 살짝 밀어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결핵을 앓고 있어서 마리에게 옮길까 봐 조심했던 거예요. “또 장학관이 왔던 모양이구나.” 엄마는 마리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어요. 비록 엄마 품에 안기지는 못했어도 마리는 곧 마음이 편해졌어요. “엄마, 빨리 나으세요. 그래서 저를 꼭 안아 주세요!” 엄마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어요. 엄마는 마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병이 깊어져 마리가 열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큰언니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뒤여서 마리의 가슴은 더욱 찢어질 듯 아팠어요.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가 곁에 계셨지만, 엄마와 언니가 떠난 빈자리는 몹시 컸어요. 마리는 언니 오빠를 의지하며 바르게 자랐어요. 마리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어요. 아버지는 마리에게 1년간 휴가를 주었어요. 시골 친척집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면서 푹 쉬다 오라고 했지요. 마리의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게 보낸 즐거운 1년이었어요. 마리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어요. 나는 아무 때나 일어나서 숲으로 산책을 가. 그리고 아이들과 굴렁쇠를 굴리고 술래잡기도 하면서 논단다. 산딸기도 실컷 따 먹고 때로는 아이들과 함께 그네도 타. 더우면 개울에서 멱을 감고 밤이면 횃불을 들고 가재도 잡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나는 생활이야. 마리는 나중에도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했어요. 집으로 돌아온 마리는 다시 바쁘게 생활했어요. 집안일을 돌보며 가정교사 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틈틈이 비밀 모임에도 나갔는데, 그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과 모여 공부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바쁘게 지내다가도 토요일 저녁이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아버지, 정말 아름다운 시예요!” 아버지가 들려주는 시는 마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답니다. 마리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 바르샤바 대학은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여자들이 대학에 가려면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지요. 마리는 브로냐 언니가 마음에 걸렸어요. 의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언니가 돈이 없어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마리는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언니에게 말을 꺼냈어요. “내가 돈을 벌어 보낼 테니까, 언니가 먼저 파리로 가서 공부를 시작해. 그리고 졸업하면 그땐 언니가 나를 도와줘.” 브로냐 언니는 동생의 따뜻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였어요. 브로냐 언니는 마리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났답니다. 마리는 시골에서 가정교사 일을 하며 6년 동안 언니를 뒷바라지했어요. 마침내 언니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어요. 이제 마리가 공부할 차례였지요. 마리는 드디어 파리로 갔어요. ‘아, 소르본 대학! 내가 여기서 공부를 하게 되다니!’ 마리는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마리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은 채 공부에만 매달렸어요. 교수님의 강의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고, 조그만 다락방으로 돌아오면 다시 신비로운 과학의 세계에 푹 빠져 들었지요. 먹을 음식이 없어도, 난로에 넣을 석탄이 없어도 마리는 행복했어요. 그리고 물리학 학사 시험 일등, 수학 학사 시험 이등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답니다. 마리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를 만나 결혼했어요. 이제 퀴리 부인이 된 거예요.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는 과학자로 모든 일을 함께 하며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다정하게 지냈어요.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마리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방사선을 내뿜는 광물들 속에 알려지지 않은 원소 두 가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지요. “당신이 원소에 이름을 붙여 봐요.” 피에르의 말에 마리가 대답했어요. “조국 폴란드를 기념해서 폴로늄이라 짓고 싶어요.” 그리고 나머지 원소에는 라듐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하지만 과학자들은 퀴리 부부의 연구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우리에게 그것들을 증명해 보시오. 그러면 새로운 원소로 인정하겠소.” 가난한 퀴리 부부는 광산에서 버린 광물 찌꺼기를 얻어 와 비가 새는 창고를 빌려서 다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 뒤 4년 동안 마리는 날마다 광석 찌꺼기를 녹여 휘저으며 연구에 몰두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퀴리 부부는 아주 적은 양의 라듐을 따로 떼어 낼 수 있었어요. 라듐은 캄캄한 실험실 안에서 빛을 내뿜었어요. “여보, 저 빛을 봐요. 너무나 아름답지요?” 마리가 감격에 차서 말했어요. 피에르도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았어요. 라듐이 암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라듐이 인류에 도움이 되다니 너무 기뻐요!” 마리는 뛸 듯이 기뻤어요. 퀴리 부부는 큰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과학 정신과 어긋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런 대가 없이 모두에게 라듐을 걸러 내는 방법을 알려 주었답니다. 그 덕분에 라듐 공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어요. 퀴리 부부는 1903년, 이 위대한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어요. 그 뒤, 피에르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리는 실험 주임이 되었어요. 비로소 비가 새는 창고를 떠나 좋은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게 된 것이지요. 비가 내리는 어두운 목요일이었어요. 피에르는 우산을 쓰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어요. 그때 마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모퉁이를 돌아 나오더니 피에르를 향해 돌진해 왔어요. “히이잉!” 피에르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마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뭐라고? 피에르가.” 소식을 전해 들은 마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넋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지요. 피에르와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마리를 더욱 슬프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피에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어요.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죽는 일이 생겨도, 남은 한 사람은 연구를 계속해야 하오.” 마리는 슬픔을 억누르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방사선에 관한 여러 가지 눈부신 성과를 얻었지요. 1911년, 마리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어요. 얼마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마리는 엑스선 진료반을 이끌고 다니며 부상자들 치료에 앞장섰어요. 마침내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폴란드도 150년 만에 독립을 했어요. 하지만 오래도록 방사선을 쐬며 일을 해 온 마리는 백혈병에 걸려 예순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이듬해 큰딸 이렌은 인공 방사능을 발견하여 노벨상을 탔어요. 둘째 딸 이브는 작가가 되어 어머니의 전기를 써서 퀴리 부인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온 세상에 알렸답니다. 라듐을 발견한 여성 과학자 퀴리 부인. 라듐을 발견하고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어요. 중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여학생들의 기숙 학교를 운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마리는 행복하게 자랐지요. 하지만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까닭에 폴란드 말과 역사 대신 러시아 말과 역사를 배워야 했어요. 게다가 갑자기 언니가 전염병에 걸려 죽고 뒤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마리의 가족은 삽시간에 불행에 빠지고 말았지요. 마리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아버지마저 쇠약해져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워졌어요. 당시 바르샤바의 대학에서는 여성들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공부를 하려면 파리로 유학을 가야 했어요. 마리는 먼저 언니를 공부 시킨 뒤, 언니가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 그렇게도 원하던 공부를 하게 되자 마리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공부에 빠져 들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소르본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마리는 쉬지 않고 연구에 매달렸어요. 그러던 중 피에르 퀴리라는 젊고 뛰어난 과학자와 결혼을 했지요. 두 사람은 함께 연구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퀴리 부부는 방사성 물질에 관심이 높아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강력한 방사능을 가진 폴로늄과 라듐을 찾아냈어요. 라듐의 발견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명예와 행복을 뒤로 한 채 1906년,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마리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에 잠겼어요. 그러나 슬픔을 이겨 내고 남편의 뜻을 이어 남은 연구를 계속하여 ‘방사성 물질량의 측정법’을 발명했습니다. 1911년 마리는 다시 노벨 화학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어요. 마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어 프랑스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으며, 연구소를 차려 방사능 연구를 계속하였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직접 진료반을 이끌고 부상병들의 치료를 돕기도 했지만 오랜 방사능 연구로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1934년 7월 4일, 온 인류의 애통 속에서 마리 퀴리는 예순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마르코 폴로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마르코 폴로는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아버지와 삼촌이 들려주는 여러 나라의 이야기는 마르코의 가슴을 뛰게 했지요. 세상에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참 많다고 해요. 생긴 것도 다르고, 옷도 다르게 입고,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했지요. 오늘 아버지와 삼촌이 다시 중국으로 떠나신답니다. “아버지, 저도 중국에 데려가 주세요.” “마르코, 중국까지 가는 길은 아주 멀고 험하단다.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할 뿐 아니라 때로는 도적 떼를 만나기도 하지.” “저도 이제 열일곱 살이에요. 그 정도 어려움은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어요!”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마르코의 어깨를 툭툭 쳤어요. 이번에 아버지와 삼촌이 중국으로 떠나는 것은 중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쿠빌라이 칸은 유럽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칸은 교황에게 유럽 사람들의 지식을 전해 줄 박사들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썼지요. 이제 아버지는 두 사람의 박사와 함께 교황의 편지와 선물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려는 참이에요. “베네치아야, 안녕! 나는 중국으로 간다!” 마르코가 탄 배가 서서히 항구를 떠났어요. 뱃멀미에도 익숙해질 무렵, 나쁜 소식이 들려왔어요. 전쟁이 나서 바닷길이 막혔다는 소식이었지요. 마르코 일행은 더 이상 배를 타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육지로 가기 위해 배에서 내리자, 함께 가던 박사 두 사람은 도망을 가고 말았어요. 하지만 아버지와 삼촌은 쿠빌라이 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마르코 일행은 터키를 지나가게 되었어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가축들이 풀을 뜯기 좋은 곳에다 천막을 치고 살았지요. “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마르코는 터키에서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양탄자를 보았답니다. 양탄자를 짜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또 아주 높은 산에도 올라가야 했어요. 이 산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도착했다는 아라라트산이었어요. “아버지, 너무 더워요.” “정말 뜨겁구나. 물도 얼마 없는데.” 태양이 불처럼 뜨겁게 내리쬐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을 지나, 마르코 일행은 페르시아에 도착했어요. 이곳에서는 머리에 터번을 두른 사람들이 갖가지 보석과 화려한 칼들 그리고 고운 색깔의 비단을 팔고 있었어요. “아버지, 이 과일 좀 보세요.” 딱딱한 껍질 속에 빨간 속살이 가득 들어 있었어요. 한 입 콱 깨물면 새콤달콤한 물이 터져 나왔지요. “맛있는 과일도 있고, 시원한 물도 있고, 갖가지 신기한 물건도 많고. 아버지, 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요?” 마르코의 아버지와 삼촌은 껄껄 웃었어요. 계속되는 여행에 지쳐 마르코는 결국 병이 나고 말았어요. 마르코 일행은 계속 여행을 할 수가 없어서 바다흐샨에서 1년 동안이나 쉬어야 했어요. 차츰 몸이 나아지자 마르코는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었어요. 아직 보지 못한 세상의 많은 것이 마르코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마르코 일행은 다시 여행을 시작했어요.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아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파미르 고원이었어요. 이곳은 너무 높아서 세상 모든 것이 내려다보였어요. 하지만 너무 추웠고, 숨을 쉬기도 힘들었어요.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었지요. 게다가 늑대와 곰처럼 무서운 동물들도 나타났어요. 마르코 일행은 이곳을 빨리 지나가기로 했어요. 하지만 가도 가도 산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마르코는 점점 지쳐 갔습니다. 겨우 겨우 파미르 고원을 벗어나자 넓은 사막이 마르코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막에는 햇볕과 목마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어요. 사막에 사는 마귀였지요. 사람들은 마귀가 사람 이름을 불러 길을 잃게 한다고 했어요. “마르코, 삼촌을 잘 보고 따라가거라.” “예, 잘 알겠어요.” 마르코는 삼촌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어요. 하지만 모래 바람이 귓가를 지나갈 때면, 누군가 자꾸만 마르코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요. 정신이 멍해질 때마다 삼촌은 낙타에 달아 놓은 방울을 세게 흔들어 마르코를 깨워 주었답니다. 이 사막은 죽음의 사막이라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이었습니다. 베네치아를 떠난 지 3년이 넘어서야 마르코 일행은 중국 땅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 중국 사람들은 머리 색깔이 검군요. 옷도 독특하고, 머리 모양도 참 재미있어요.” 마르코는 중국 사람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중국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르코를 바라보았죠. 마르코는 찡긋 웃어 보였어요. 그러자 이상하게 바라보던 사람들도 어색하게 웃었어요. 아버지와 삼촌은 쿠빌라이 칸에게 나아가 절을 했어요. “이제야 왔구나. 그대들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와 삼촌은 교황에게서 받은 편지와 선물을 칸에게 주었어요. 칸은 아름다운 유리병과 예수의 무덤을 밝히는 기름을 받고 무척 기뻐했어요. “젊은이는 누구인가?” 칸이 마르코를 바라보며 물었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어요. “제 아들입니다. 황제 폐하를 뵙고 싶다고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칸은 험한 여행을 씩씩하게 이겨 낸 용감한 젊은이라며 마르코를 칭찬했어요. 중국에는 신기한 것이 참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종이돈은 매우 편리했어요. 금이나 보석을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는 것은 무겁고 불편했기 때문이지요. 또, 중국에는 검은 돌이 있었어요. 검은 돌은 신기하게도 불을 붙이면 열을 내는데, 아주 뜨거웠답니다. 마르코는 궁전에서 중국 말을 배우며 편안하게 지냈어요. 궁전의 잔치는 정말 황홀했어요. 칸과 신하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었고, 칸의 곁에는 갖가지 보물이 가득 쌓여 있었어요. 그리고 5천 마리나 되는 거대한 코끼리 떼가 줄을 지어 걸어갔어요. 마르코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마르코는 칸에게 중국으로 오면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마르코, 자네는 많은 나라를 여행하였으니 이제 중국의 여러 마을을 여행해 보게. 중국은 너무 넓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내가 다 알 수 없다네. 그러니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내게 말해 주게.” 칸의 부탁으로 마르코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았어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마르코 폴로는 17세 때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동방 여행길에 올랐어요. 마르코 폴로는 호기심이 많고 총명하여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아 중국 각지를 여행하게 되었어요. 마르코 폴로가 17년 동안 여행하며 겪은 일을 이야기로 펴낸 동방 견문록은 그 무렵의 유럽 사람들에게 놀랍고 신기한 동방의 소식을 전해 주었어요. 함께 마르코 폴로의 여행지를 따라가 보아요. 티베트에서는 사람을 통째로 삼키는 뱀을 보았고, 미얀마 사람들은 몸에 문신을 많이 새겨야 아름답다고 했어요. 스리랑카에서는 빨간 불꽃과 같은 보석을 보았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뜰 수 없었지요. 인도 사람들은 여러 신을 믿었어요. 그중에는 자기 몸을 고통스럽게 하여 신을 섬기는 요가 수행자도 있었어요. 중국의 항저우는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커다란 호수와 큰 강이 있어 고향인 베네치아를 생각나게 했지요. 너무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이어서 떠나고 싶지 않았답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났지만, 마르코는 서서히 고향이 그리워졌어요. 머리가 하얗게 센 아버지와 삼촌도 고향에 가고 싶어 했고요. “칸이시여! 제가 이곳에 온 지 17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삼촌도 많이 늙으셔서 이제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칸은 마르코 일행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때마침 공주가 페르시아로 시집을 가게 되었지요. 칸이 말했어요. “마르코, 그대들을 보내는 것이 몹시 서운하지만 공주를 페르시아까지 데려다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네. 부디 공주를 페르시아에 무사히 데려다 주길 바라네.” 칸은 떠나는 마르코 일행에게 많은 보물을 선사했어요. 마르코는 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어요. 바닷바람이 다시 가슴을 설레게 했지요. 집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다 여행은 쉽지 않았어요. 폭풍이 불어와 배가 부서지기도 했고, 무서운 해적들에게 보물을 빼앗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마르코 일행은 공주를 무사히 페르시아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페르시아에 도착했을 때는 공주와 결혼할 왕은 이미 죽고 없었어요. 그래서 페르시아 풍습에 따라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였답니다. 마르코 일행은 결혼식을 보고 다시 떠나기로 했어요. 그동안 공주와도 정이 들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지요. 그때 쿠빌라이 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마르코는 너무나 슬펐어요. 이제 다시는 중국에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지요. 저 멀리 마르코의 고향 베네치아 항구가 보였어요. 마르코는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어요. 열일곱 살 때 중국으로 떠난 마르코가 마흔한 살이 되어 돌아오자, 마르코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버지와 삼촌도 마찬가지였지요. 마르코는 친척들에게 여행에서 돌아온 것을 알렸어요. 그리고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지요.
찰리 채플린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1894년 어느 날 밤이에요. 영국 런던의 한 극장 식당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침내 한 여인이 무대 위로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야유를 퍼부었어요. “그 따위 노래는 집어치워!” “무슨 가수 목소리가 그 모양이야?” 사람들이 빈정대고 놀리자, 노래하던 여인은 도망치듯 무대 뒤로 들어갔어요. ‘한나’라는 가수는 목이 아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거예요. 극장 감독은 한나의 아들 찰리에게 말했어요. “찰리, 네가 엄마 대신 나가서 노래를 부르렴.” 잠시 뒤, 찰리가 무대에 나가 노래하고 춤을 추자, 사람들은 찰리의 깜찍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어요.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앙코르!’를 외치며 무대 위로 동전을 던졌어요. “고맙습니다. 동전을 줍고 나서 다시 노래를 하겠습니다.” 찰리의 능청스러움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어요. 찰리의 첫 번째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어요. 찰리 채플린이 고작 다섯 살 때 일이랍니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배우였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어요. 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헤어졌기 때문에 찰리는 어머니와 형 시드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어요. “얘들아, 엄마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을 것 같아. 목소리가 점점 나오지 않는구나.”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어요. 배우 일을 못하게 되자 어떻게 생활비를 벌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에요. “엄마, 걱정 마세요. 저희가 도울게요.” 찰리와 시드니는 어머니를 위로했어요. 어머니는 재봉틀을 빌려 열심히 옷을 만들었지만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폈어요. 힘든 하루 일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춤과 연기를 보여 주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요. “엄마, 이번엔 제가 해 볼게요.” 찰리는 배불뚝이 빵집 아저씨 흉내를 내었어요. 그러자 어머니와 시드니는 손뼉을 치며 웃었어요. “찰리, 정말 똑같구나. 으스대며 걷는 모습이 빵집 아저씨랑 똑같아.” 어머니는 찰리의 연기를 칭찬했어요. 이렇게 행복한 시간도 잠시뿐, 찰리에게 큰 시련이 닥쳤어요.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지냈는데, 그 때문에 그만 정신병을 앓게 된 거예요. 어머니가 정신 병원에 입원하자, 찰리와 시드니는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기숙학교로, 아버지 집으로, 또 친척 집으로 옮겨 다니며 살게 되었어요. 찰리에게는 슬프고 힘든 시간이었지요. 어느 날, 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었어요. “아, 나도 엄마처럼 배우가 되고 싶어!” 찰리는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을 받고 무대 위의 인생을 꿈꾸게 되었어요. 그 뒤로 어머니는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했어요. 찰리는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지요. 읽기와 쓰기를 다 배우지도 못했어요. 선생님이 책 읽기를 시키면 찰리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어요. “선생님, 책 읽기는 너무 어려워요. 그 대신 이야기를 외워서 말할 수는 있어요.” 찰리는 아이들 앞에 나가 외운 이야기를 실감나게 했어요. 그러자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 했고, 선생님도 찰리를 칭찬해 주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찰리는 아홉 살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어요. 그 뒤, 다시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답니다. 찰리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일을 해야 했어요. 무용단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꽃을 팔기도 하고, 의사의 조수나 심부름꾼으로 일하기도 했지요. 모든 일이 힘들었지만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견뎠답니다. “형, 나는 배우가 될 거야. 내가 훌륭한 배우가 되면 엄마도 기뻐서 어쩌면 병이 나을지도 몰라.” 찰리의 말에 형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래, 너는 재능이 있으니까 꼭 훌륭한 배우가 될 거야.” 찰리는 배우의 꿈을 키우며 열심히 일했어요. 찰리는 용기를 내어 극단을 찾아다녔어요. 마침 한 극단에서 찰리에게 배역을 맡겼는데, 셜록 홈스라는 연극의 ‘빌리’ 역이었지요. “이제 나는 배우가 된 거야. 남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새로운 연기를 보여 주겠어.” 찰리는 빌리라는 역할을 꼼꼼히 연구한 뒤, 열심히 연기 연습을 했어요. 그래서 셜록 홈스를 본 사람들은 찰리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그 뒤, 찰리는 코미디로 이름난 프레드 카노 극단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찰리의 연기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마침내 영국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었어요. 프레드 카노 극단이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갔을 때였어요. 어느 날, 한 영화사에서 찰리를 찾아왔어요. “찰리,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연기라면 관객들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찰리는 영화라는 말에 마음이 끌려 스물네 살 되던 해에 영화라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어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꼼꼼히 살펴보자.” 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기 연습을 했어요. 영화가 상영된 뒤, 찰리는 영화배우로도 성공을 거두었답니다. 생활이 안정되자, 찰리는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 왔어요. 어머니는 찰리가 마련한 집에서 편안하게 살게 되었지요. 찰리는 영화를 통해 많은 돈과 인기를 얻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어요. ‘영화를 통해 삶의 진실을 보여 주고 싶어.’ 자신의 생각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 직접 대본을 쓰고 감독을 하며 영화를 만들었어요. 찰리가 만든 키즈, 황금광 시대,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스 들은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이에요. 떠돌이 신사 찰리가 있어요. 찰리는 헐렁한 바지에, 몸에 꼭 끼는 작은 윗도리를 입었어요. 너무 커서 덜걱거리는 구두를 신고, 챙이 달린 둥근 모자를 썼어요. 뭉툭한 콧수염을 단 찰리가 지팡이를 휘저으며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워요. 떠돌이 신사 찰리는 가는 곳마다 소동을 일으킵니다. 거만한 부자나 나쁜 사람을 골려 주다가 경찰에게 쫓기기도 하지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웃음과 기쁨을 안겨 줍니다. 이것은 영화 속에 나오는 찰리의 모습이에요. 찰리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 담았어요. 또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고 전쟁을 반대했어요.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찰리의 바람과는 달리, 세계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어요. “독일의 히틀러는 곧 전 세계 사람을 전쟁터로 내몰 거야. 사람들은 히틀러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 줄 모르고 있어.” 찰리는 영화를 통해 평화를 위협하는 히틀러를 고발했어요. 바로 위대한 독재자란 영화예요.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유럽에서는 벌써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무자비한 전쟁의 피바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어요.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찰리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닥쳤어요. 미국에서 한 무리의 정치인들이 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몰아세운 거예요. 전쟁 중에 찰리는 독일과의 전쟁으로 고통받는 소련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1952년, 찰리는 미국에서 추방되어 이듬해부터 스위스에서 살게 되었어요.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세계 평화를 위해 애쓴 찰리를 환영했어요. 1975년, 영국 여왕은 찰리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어요. 런던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찰리가 영예로운 찰리 채플린 경이 된 거예요. 그로부터 2년 뒤, 크리스마스 아침이었어요. “아버지, 일어나요. 크리스마스예요!”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려고 찰리를 깨웠지만 찰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요.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만 거예요. 하지만 영화 속의 떠돌이 신사 찰리는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전하며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답니다. 20세기를 뒤흔든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이 태어난 1889년은 영화가 탄생한 해이기도 해요. 그래서일까요? 채플린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며 영화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어요. 처음에 만들어진 영화는 지금 영화와는 아주 달랐어요. 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야말로 움직이는 사진에 불과했고 상영 시간도 고작 몇 분을 넘기지 못했어요. 많은 사람이 영화에 흥미를 느끼고 신기해했지만 영화를 예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그저 잠깐 동안 웃기 위해 보는 오락거리로 여겼을 뿐이지요. 1913년, 채플린은 영화 세계에 뛰어들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어요. 채플린은 뛰어난 연기와 영화의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 보여 줌으로써, 영화를 21세기에 가장 촉망받는 예술의 위치로 올려놓았어요. 채플린의 영화는 아주 재미있어요. 황금광 시대에서는 굶주린 채플린이 장화를 맛있는 식사인양 먹고, 모던 타임스에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 쉬지 않고 일하다가 잠시 얼이 빠져 광대짓을 해요.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은 히틀러의 모습으로 나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독재자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고요. 살인광 시대에서는 착하지만 나중에는 살인까지 저지르는 이중성격의 베르두를 연기했어요. 살인광 시대를 보고 미국의 관리들은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라고 몰기도 했어요. 라임 라이트에서는 무성 영화 시대의 경쟁자였던 키튼과 함께 출연해 연기의 진수를 보여 주었어요. 그 뒤로도 채플린은 여러 작품에서 연기했어요. 홍콩 백작 부인이 채플린의 마지막 작품이지요. 이렇듯 채플린이 보여 주는 인물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지만, 그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잘못된 사회에 대한 비판, 평화의 소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에 채플린 영화의 매력이 있어요. 영화의 거장 채플린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채플린의 영화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헬렌 켈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미국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 마을에 담쟁이가 아름다운 집이 있었어요. 바로 헬렌의 집이지요. 헬렌은 곱슬머리에다 푸른 눈을 가진 사랑스럽고 영리한 아기였답니다. 헬렌이 두 살 되던 어느 겨울밤이었어요. 갑자기 헬렌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어요. 부모님이 황급히 의사를 불렀지만 헬렌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끙끙 앓았어요. “심한 열병이에요.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의사의 말에 부모님은 간절히 기도했어요. “오, 하느님! 제발 우리 헬렌을 살려 주세요.” 헬렌은 여러 날 만에 끔찍한 열병에서 깨어났어요. 하지만 앞을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지요. 깜깜한 어둠 속에 갇히고 만 거예요. 헬렌은 너무나 갑갑해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제멋대로 행동했어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헬렌을 안고 함께 울었어요. “헬렌을 이대로 둘 수 없소. 헬렌을 도와줄 수 있는 선생님을 찾아봅시다.” 아버지는 헬렌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헬렌은 안과 의사의 소개로 벨 박사를 만났어요. 벨 박사는 전화를 발명한 사람인데, 어머니와 아내가 청각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헬렌의 손짓을 금방 이해했어요. “헬렌은 참 귀엽고 똑똑한 아이군요. 한꺼번에 커다란 장애가 오긴 했지만 이 아이를 가르칠 방법이 꼭 있을 겁니다.” 벨 박사는 부모님에게 용기를 주었어요. 얼마 뒤, 퍼킨스 맹학교의 설리번 선생이 헬렌의 가정교사로 오게 되었어요. 설리번 선생은 어렸을 때 눈병을 앓아 앞을 거의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어요. 수술을 받고 시력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불행한 사람을 위해 일해 왔답니다. 설리번 선생은 가여운 헬렌을 보며 다짐했어요. ‘헬렌이 갇혀 있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빛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자.’ 설리번 선생은 먼저 손가락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헬렌의 한 손에 인형을 쥐어 주고, 다른 손바닥에다 ‘인형’이라고 썼지요. 헬렌은 그때까지 세상의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 헬렌이 귀찮다고 손을 뿌리쳐도 설리번 선생은 몇 번이고 쓰고 또 썼어요. 한참 만에 헬렌은 설리번 선생이 손바닥에 쓴 글자가 ‘인형’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요. 헬렌은 곧 모든 물건의 이름을 알아 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물’이라는 글자는 아무리 알려 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설리번 선생은 뒤뜰에 있는 펌프를 바라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맞아, 물의 느낌을 강하게 주는 거야.”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손에 물잔을 쥐어 주고는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게 했어요. 그러고는 헬렌의 손바닥에 ‘물’이라고 썼지요. 그 순간, 헬렌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설리번 선생의 손바닥에 ‘물’이라고 따라 썼어요. 글자를 배운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헬렌은 편지를 쓸 정도로 많은 낱말을 익혔어요. 그리고 궁금한 게 점점 많아졌지요. ‘비는 왜 내릴까? 나무와 풀은 어떻게 자랄까?’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손을 잡고 들판으로 나가 꽃잎의 부드러움과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었어요. 한번은 마을에 서커스단이 왔어요. 설리번 선생은 서커스단에 부탁해 헬렌이 곰과 악수하고 새끼 사자를 안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어요. 또 코끼리 등에 올라타 기린의 얼굴도 만질 수 있게 해 주었지요. 어느 날, 부엌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어요. 헬렌이 하녀 바니를 마구 때리고 있었어요. 헬렌이 유리잔 속에 돌을 넣는 걸 보고 바니가 유리잔을 빼앗았거든요. 하지만 헬렌은 자신이 다칠까 봐 걱정해 준 바니의 마음을 알지 못했어요. ‘헬렌의 마음속에 어떻게 사랑을 심어 줄 수 있을까?’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잘못을 하나하나 알려 주고, 스스로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어요.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헬렌은 바니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어요. 그 뒤, 고집 세고 거칠던 헬렌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로 자랐답니다. 설리번 선생과 헬렌은 손가락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설리번 선생은 헬렌에게 글 읽는 법도 가르쳐 주고 싶었어요. 점자 카드를 이용한 방법이었지요. 점자는 종이 위에 찍힌 오톨도톨한 점을 손끝으로 만져서 읽는 글자예요. 헬렌은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점자가 아주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점자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헬렌은 초등학교 점자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또 퍼킨스 맹학교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헬렌은 열심히 노력했어요. 얼마 뒤, 헬렌은 설리번 선생과 함께 보스턴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퍼킨스 맹학교의 졸업식에 초대를 받은 거예요. 졸업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설리번 선생과 헬렌이 손가락 글자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다음 해에 헬렌은 퍼킨스 맹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헬렌은 도서실에 점자 책이 가득 꽂혀 있어 몹시 기뻤어요. 호기심 많은 헬렌은 많은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석 달 만에 프랑스 어를 모두 익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답니다. 헬렌과 설리번 선생이 이룬 기적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어요. 하지만 헬렌은 만족하지 않았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헬렌은 소리 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풀러 선생을 찾아갔어요. “자, 천천히 따라 해 보렴.” 헬렌은 풀러 선생의 입과 혀를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모양을 익히고 소리를 내 보려고 애썼어요. 오랫동안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지요. “날-씨-가-따-뜻-해-요!” 마침내 헬렌이 처음으로 말을 했어요. 풀러 선생과 설리번 선생은 헬렌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어느 날, 헬렌은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눈과 귀가 먼 여섯 살짜리 꼬마 토미는 너무 가난해서 교육을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했지요. ‘토미도 나처럼 글을 읽고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헬렌은 토미가 공부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여러 곳에 편지를 보냈어요. 헬렌의 마음에 감동한 사람들이 도움을 주어 토미는 퍼킨스 맹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열여섯 살 되던 해, 헬렌은 일반 학생들이 다니는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입학했어요. 설리번 선생은 헬렌에게 수업 내용을 손바닥에 써 주고 점자 책으로 만들어 주었지요.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졸업한 헬렌은 래드클리프 대학에 들어갔어요.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룬 거예요. 헬렌은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은 험한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어요. 또 공부하는 틈틈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잡지에 실었어요. “눈과 귀가 있다고 해서 언제나 사물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비록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진정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헬렌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어요. 헬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장애인을 위해 글을 쓰고 여러 곳을 다니며 강연을 했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헬렌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혔어요. 자신만의 행복을 찾지 말고 많은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헬렌의 외침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설리번 선생이 세상을 떠났어요. 49년 동안 자신을 지켜 주던 선생님을 잃자 헬렌은 가슴이 터질 듯 아팠어요. 하지만 슬픔을 이겨 내고 더 열심히 일했어요. 1960년, 헬렌이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이했어요.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편지를 보내 축하해 주었지요. 또 생일을 기념하여 ‘헬렌 켈러 재단’도 만들어졌어요. 헬렌 켈러 재단은 가난한 나라의 장애인을 위해 일했어요. 헬렌은 모든 것에 감사했어요. 자신에게 찾아온 장애의 불행마저 감사하게 받아들였지요. 그로부터 8년 뒤, 헬렌은 평온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어요. 어둡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겨 내고 이룬 헬렌의 굳은 의지와 사랑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어 줄 거예요. 장애를 극복한 사회 사업가 헬렌켈러.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헬렌 켈러가 성취한 일들은 참으로 기적 같아 요. 몸이 성한 보통 사람도 들어가기 힘든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 때, 세상 사람 들은 모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헬렌 켈러가 보여 준 피땀 어린 노력에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지요. 헬렌 켈러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 은 아니에요. 태어난 지 14개월 되었을 때 심한 열병에 걸려 시력과 청력, 언어 발생력을 잃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헬렌 켈러를 ‘세 가지 장애를 이긴 성녀’, ‘빛 의 천사’라고 부른답니다. 헬렌 켈러의 생애가 장애를 가진 사람, 소외받는 사람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지요. 헬렌 켈러 곁에는 늘 앤 맨스필드 설리번 선생님이 있 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설리번 선생님은 눈병을 치 료하지 못해 시력을 거의 잃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뒤, 퍼킨스 맹학교 교사가 되어 장애인들을 위해 일 해 왔지요.
오프라 윈프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이렇게 나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사회자는 초대 손님과 악수를 나누었어요. 방청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지요. 이 토크 쇼가 바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보는 ‘오프라 윈프리 쇼’예요. 1985년에 시작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에서만도 2천6백만여 명이 보고 있고, 전 세계 132여 개 국가에서도 즐겨 보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프라 윈프리 쇼를 좋아하는 까닭은 진행자인 오프라의 진실한 마음 때문이에요. 오프라는 1954년, 미국 미시시피 주의 코지어스코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오프라의 어머니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오프라를 낳아 할머니한테 맡기고는 밀워키로 떠났어요. 오프라는 어린 시절 내내 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오프라가 세 살이 되자, 할머니는 오프라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어요. 함께 놀 친구도,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던 오프라에게 성경 읽기는 즐거운 놀이가 되었어요. 어느 날, 주일 예배에서 오프라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운 성경 구절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어쩜, 저 아이는 천재가 틀림없어요.” 사람들은 오프라의 영리함에 깜짝 놀랐답니다. 얼마 뒤, 오프라는 유치원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오프라는 유치원 생활이 너무 지루하기만 했어요. 이미 읽고 쓰는 법을 알고 있어 시시했기 때문이에요. 어느 날, 오프라는 편지를 써서 선생님에게 건넸어요. “선생님, 저는 유치원에 오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선생님은 오프라의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벌써 글을 쓸 줄 알다니! 학교에 들어가도 되겠구나.” 선생님은 오프라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하지만 오프라는 얼마 안 가 코지어스코를 떠나야 했답니다. 할머니가 병이 들어 어머니가 살고 있는 밀워키로 가게 된 거예요. “부디 잘 지내거라. 하느님이 널 지켜 주실 거야.” 오프라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외로웠어요. 어머니가 너무 바빠 오프라를 보살필 시간이 없었거든요. 오프라는 오직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어요. “넌 허구한 날 책만 보니? 좀 밖에 나가서 놀아라!” 어머니는 소리치며 오프라의 책을 홱 낚아채기도 했어요.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난 덩컨 선생님은 오프라를 남다르게 대해 주었어요. “오프라, 책 속엔 아주 귀한 보물이 숨어 있단다. 책을 많이 읽으면 현명한 사람이 될 거야.” 함께 어울릴 친구 한 명 없던 오프라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덩컨 선생님을 잘 따랐어요. 오프라는 중학생이 되자 공부에만 온 힘을 쏟았어요. “저 아이는 늘 열심히 책을 읽는군.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면 큰 인물이 될 거야.” 오프라를 유심히 지켜보던 진 아브람스 선생님은 그녀에게 많은 재능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아챘어요. 그래서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더욱 체계적인 교육을 해 주는 프로그램에 오프라를 추천해 주었지요. 그 프로그램에 따라 오프라는 니콜렛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어요. 오프라는 그곳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오프라가 점점 변해 가기 시작했어요. 공부는 멀리하고 친구들과 나쁜 행동을 하고 다닌 거예요. 학교 수업을 빼먹고 어머니 돈을 훔쳐 집을 나가기도 했지요. “왜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 거니? 도저히 널 키울 자신이 없구나.” 어머니는 오프라를 내쉬빌에 사는 아버지에게 보냈어요. 아버지는 오프라를 따뜻이 감싸 안아 주었어요. “세상에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과 남이 만들어 낸 일을 지켜보는 사람,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있단다. 오프라,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오프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프라는 우등생이 되어 토론 팀에도 참가하며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답니다. 오프라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화재 예방 미인 대회’에 나갔어요. 오프라는 대회 내내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행동했어요. “지금 백만 달러가 생기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심사 위원이 묻자, 오프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마구 써 버릴 거예요. 어디에 쓸지는 모르지만 쓰고 또 쓸 거예요.” 심사 위원들은 오프라의 재미있고 정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럼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나요?”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 방송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심사 위원들은 오프라의 솔직한 성격과 총명함에 높은 점수를 주었어요. 오프라는 당당히 ‘미스 화재 예방’으로 뽑혔답니다. 오프라는 대학에서 말하기와 드라마에 관한 공부를 했어요. 그 뒤, 내쉬빌에 있는 한 방송국 기자 오디션에 합격해 뉴스 진행자로서 첫발을 내딛었어요. 내쉬빌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뉴스 진행자가 탄생한 거예요. 어느 날, 오프라는 생방송으로 뉴스 진행을 하다 큰 실수를 했어요. “다음은 캐나드아 소식입니다. 아니, 캐나드아가 아니라 캐나다입니다. 푸하하하.” 말은 끝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생방송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오프라는 이 일을 통해 더욱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래, 실수는 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더욱 최선을 다하자.” 1976년, 오프라는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볼티모어의 WJZ-TV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좀 더 큰 도시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거든요. 오프라는 그곳에서도 계속 뉴스 진행을 맡았어요. 하지만 오프라에게는 뉴스 진행자로서 큰 문제점이 있었어요.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저건 말도 안 돼요!” 오프라는 차분하고 정확하게 뉴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뉴스에 따라 같이 울고 웃으며 감정에 휩싸였어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오프라가 뉴스 진행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방송국은 오프라에게 새로운 아침 토크 쇼인 ‘피플 아 토킹’의 공동 진행을 맡기기로 결정했어요. ‘피플 아 토킹’의 진행자가 된 오프라는 토크 쇼가 자신에게 꼭 맞는 옷처럼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따뜻하고 재치 있는 진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차츰 오프라는 자신만의 토크 쇼를 진행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6년 뒤에 시카고 WLS-TV 방송국의 ‘에이엠 시카고’라는 토크 쇼에 도전했어요. “전 흑인이고 뚱뚱해요. 하지만 이 자리를 얻기 위해 내 겉모습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당당함 덕분에 오프라는 ‘에이엠 시카고’의 진행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단 토크 쇼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오프라 윈프리 쇼’예요. 1996년 9월, 오프라는 자신의 쇼에 책을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책을 통해 느꼈던 희망과 즐거움을 시청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거든요. 오프라는 시청자들에게 책을 한 권 소개한 뒤, 한 달 뒤엔 그 책의 저자를 초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니, 누가 토크 쇼에서 소개한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어요. “오프라, 나는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소개한 책을 읽고 내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오프라의 북클럽’에서 소개된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마을마다 북클럽이 생겨날 정도였지요. 오프라는 교육이 한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프라는 어린 시절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도움을 준 두 선생님을 잊을 수 없었어요. “아무런 선택권이 없을 때 그분들을 못 만났다면, 그래서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거예요.” 오프라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공부를 할 수 없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어요. 재능 있는 아이들을 위한 장학금과 기부금도 냈지요. 또 2007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오프라 윈프리 리더십 아카데미’를 세워, 가난한 아프리카의 소녀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답니다. 오프라의 도전은 토크 쇼 진행자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 오프라는 연기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1985년 겨울, 영화 컬러 퍼플에 출연하면서 그 꿈은 이루어졌어요.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어요. 기회가 다가올 때 잡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세요.” 오프라는 늘 준비하고 새롭게 도전했어요. 그 뒤, 오프라는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직접 드라마를 만들기도 하면서 사업가로서의 꿈도 이루었어요. 오프라가 만든 드라마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오프라는 실망하지 않았어요.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도전했다는 사실이지요.” 1991년, 오프라는 미국 의회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에 관련된 연설을 했어요. 오프라는 어린 시절 성폭행과 학대로 고통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신과 같은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마침내 미국 의회는 아동 학대 범죄자 명단을 작성하는 법을 만들었어요. 이 법을 ‘오프라 법안’이라고 불러요. 오프라가 사랑받는 이유는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진실된 마음 때문이에요. “나는 아직도 꿈을 이루어 가고 있는 중이에요. 미래에는 더욱 놀라운 꿈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프라는 지금도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답니다. 오프라의 어린 시절은 흑인에 대한 냉대와 가난, 불행 한 가족, 그리고 어른들로부터 받은 학대로 얼룩져 있 어요. 하지만 오프라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덕분에 오프라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큰 명성과 부를 쌓았지요. 오프라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열 가지 계명을 이렇게 말해요. 1. 애써 남들의 호감을 얻으려 하지 마라. 2. 출세하기 위해 겉치레에 매달리지 마라. 3.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라. 4. 주변에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 하라. 5.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6. 중독된 것들을 끊어라. 7. 당신에 버금가는, 또는 당신보다 나은 사람 들로 주위를 채워라. 8.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면 돈 생각은 아예 마라. 9. 재능이 많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만하지 마라. 10. 꿈을 이루고 싶다면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라. 하지만 열 가지 계명보다 오프라가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라고 할 수 있어요. 오프라는 늘 자신을 믿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든 꼭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 요. 오프라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오프라는 자신의 인생을 더 훌륭하게 이끌어 준 다섯 가지 교훈에 대해 말해 주었어요. 1. 인생은 여행과 같다.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다. 2. 상대방이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억지로 전달하려고 애쓰지 않도록, 그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때 그들을 믿어라. 3. 사람들은 모두 실수를 한다. 실수를 통해 지혜를 얻어라. 4. 모든 일에 감사하라. 날마다 일어나는 고마운 일들을 기억하라. 그러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5. 할 수 있는 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꿈을 가져라. 인생은 자신이 바라고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 문이다. 오프라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에게 큰 용기와 깨달음을 주었어요. 사람들이 오프라 덕분에 삶 이 바뀌었다고 말할 때마다 오프라는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정주영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정주영이 태어나 자란 때는 일제 강점기였어요. 사람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지요. 주영은 여덟 남매 중 맏이로, 식구가 모두 열이나 되었어요. “이 밭에 감자를 심으면 겨울 식량 걱정은 덜 수 있을 게다.” 이른 새벽, 주영은 부지런히 곡괭이로 흙을 고르며 밭일을 도왔어요. 비탈진 땅은 몹시 메마른 데다가 흉년이 자주 들어 가족은 늘 먹을 것이 모자랐어요. 어머니는 쌀이 듬성듬성 섞인 잡곡밥으로 저녁을 때우게 한 뒤, 바느질을 하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요. 아이들이 고픈 배를 달래며 옛날이야기를 듣는 동안, 강원도 통천 아산 마을의 밤은 깊어 갔어요. 주영은 공부를 잘했지만 가난해서 중학교에 갈 수 없었어요. 앞날이 보이지 않는 시골 생활이 답답하기만 했지요. ‘넓은 도시로 가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어!’ 주영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달아났어요. 나쁜 짓인 줄은 알지만, 성공해서 꼭 갚으리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주영은 아버지에게 붙잡히고 말았어요.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촌놈이 도시에서 뭘 하겠다는 거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게야.” 주영은 집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일을 도왔지만, 잘살아 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지요. 열아홉 살 되던 해 봄, 주영은 다시 집을 떠났답니다. 주영은 인천 부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어요. 온종일 배에서 짐을 오르내리느라 몹시 고단한 나날이었지요. 그런데 일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합숙소에 우글거리는 빈대였어요. “앗, 따가워!” 주영은 꾀를 내어 상다리에 물그릇을 받쳐 놓고 상 위에 누웠어요. ‘빈대들이 기어오르려다가 물에 빠져 죽겠지?’ 하지만 얼마 안 가 주영은 또 빈대에 물려 눈을 떴어요. 놀랍게도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주영이 누워 있는 곳으로 톡톡 떨어졌어요. ‘아, 빈대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는구나.’ 하찮게 생각했던 빈대에게서 큰 교훈을 얻은 거예요. 그 뒤로 주영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빈대를 떠올리며 힘을 냈답니다. 주영이 서울의 한 쌀가게에서 일할 때였어요. 곡식 두 가마를 자전거에 싣고 배달을 나섰다가 진흙탕에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곡식을 쏟고 말았어요. 속이 상한 주영은 쌀가게에서 오랫동안 일한 선배를 찾아갔어요. “쌀가마를 세워서 싣고 균형을 잘 잡아야 해.” 주영은 선배한테 배운 대로 날마다 연습했어요. 그 덕분에 근처에서 가장 날랜 배달꾼이 되었지요. 하루는 쌀가게 주인 영감님이 말했어요. “자네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한 젊은이는 처음 보네. 이 가게를 넘겨줄 테니 자네가 맡아 하고 돈은 천천히 갚게나.” 주영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덕에 쌀가게 주인이 되었어요. 1939년, 일본은 ‘쌀 배급제’를 만들었어요. 쌀 배급제란 정부가 개인이 일한 만큼 쌀을 나누어 주는 제도예요. 주영은 더 이상 쌀가게를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돕고 결혼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이 자동차 수리 공장을 내놓았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주영은 생각 끝에, 쌀가게를 할 때 알게 된 영감님을 찾아가 3천 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당시 3천 원이면 황소 70마리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지요. 영감님은 주영을 믿고 선뜻 3천 원을 빌려 주었어요. 공장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장에 불이 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주영은 하루 세 시간만 자고 열심히 일했어요. 3년 뒤, 주영은 이자까지 보태어 영감님의 돈을 갚을 수 있었지요.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어요. 다음 해, 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리고, 얼마 뒤엔 ‘현대건설’도 세웠어요. 하지만 1950년에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해야 했어요. 부산에서 주영은 미군이 이용할 건물을 짓게 되었어요. 전쟁 중이었지만 약속 날짜에 건물을 완공시키자, 미군 사령관은 주영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어요. 전쟁이 끝나 갈 무렵,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었어요. “분명 유엔군 묘지에 들를 텐데 이렇게 붉은 흙으로 덮여 있으니.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미군 사령관의 말에 주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어요. “이맘때면 어머니가 보리 싹으로 된장국을 끓여 주셨지요.” 주영은 보리 싹을 유엔군 묘지에 보기 좋게 옮겨 심었어요. 이 일로 미군은 주영을 더욱 믿게 되었어요. 전쟁이 끝난 뒤, 현대건설은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를 맡았어요. 하지만 다리를 고치는 데 필요한 시멘트와 불도저, 포클레인 같은 장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어요. 또 걸핏하면 흙탕물이 넘쳐, 쌓아 둔 목재 등이 휩쓸려 갔지요. “이 일을 계속하다가는 망하고 말 겁니다.” 현대건설 간부들이 아우성쳤지만 주영은 단호했어요. “망하더라도 약속은 지켜야 해. 사업가에게 신용은 생명이야.” 결국 자동차 수리 공장을 팔고 빚까지 지고서야 다리가 완성되었어요. 그러자 정부는 주영의 신념을 높이 평가했어요. 사람들 또한 ‘현대건설은 믿을 수 있는 회사’라고 믿게 되었지요. 미군 공병대 군함이 드나들 인천 부두 공사를 맡았을 때예요. 주영은 공사에 쓸 시멘트를 외국에서 사들여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우리나라 곳곳에서 석회가 나는데도 시멘트를 사들여야 하다니.’ 주영은 고민 끝에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세웠어요. 그리고 공장을 짓는 2년 동안, 일요일마다 공사 현장으로 가서 일꾼들과 함께 생활했어요. “식탁을 따로 차릴 것 없어. 함께 일하고 먹으면 되지.” 주영의 소탈한 성격 덕분에 일꾼들은 공사 기간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답니다. 1967년, 춘천에 소양강 댐을 건설하게 된 주영은 직원들에게 소양강 주변을 자세히 살피라고 지시했어요. 그래서 강 주변에 특히 많은 자갈과 모래를 이용해 사력 댐을 만드는 게 유리하다는 결정을 내렸지요. 하지만 댐 설계를 맡은 일본 회사는 콘크리트 댐을 고집했어요. “우리는 일본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한 최고의 기술자들이오.” 결국 주영은 대통령의 뜻에 따르기로 했어요. “현대 정 사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오. 다시 철저히 조사해 보시오.” 대통령의 명령에 댐 설계자들은 다시 조사에 들어갔고, 주영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덕분에 댐 건설 비용도 3분의 1이나 줄일 수 있었답니다. 주영은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세우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외화도 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조선소를 세우려면 외국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려야 했어요.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회사에 순순히 돈을 빌려 주려는 외국 은행은 없었답니다. 주영은 기술 계약을 맺은 영국의 애플도어 회사를 찾아갔어요. 그러고는 회장 앞에 500원짜리 종이돈을 꺼내 보였어요. “이 돈에 그려진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입니다.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섰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이 만든 배입니다.” “좋소. 당신의 자신감과 한국인의 힘을 믿고 돈을 빌려 주겠소.” 5년 뒤, 주영은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세웠어요. 1970년,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경부 고속도로를 완성했어요. 우리 경제 발전의 젖줄이 개통된 것이지요. 그러자 주영은 자동차도 직접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많은 돈과 복잡한 기술이 필요했어요. 주영은 외국 자동차 회사들을 찾아가 기술 계약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주영에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어요. “우리 실정에 맞는 차를 직접 개발하는 수밖에 없어.” 정주영은 ‘현대자동차 주식회사’를 세워 우리만의 기술을 쌓아 갔어요. 실패도 맛보았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지요. 그 결과, 1976년에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 ‘포니’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같은 해, 현대건설은 큰 경쟁을 뚫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바일 산업항 공사를 맡게 되었어요. 주영은 공사에 필요한 재료를 우리나라에서 가져갈 계획을 세웠어요. 하지만 울산에서 걸프만까지 가는 데만 35일이 걸리고, 모두 열아홉 번을 오가야 하는 엄청난 일이라 모두들 반대했어요. “회사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위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대신 공사 기간을 줄여 일을 끝마칩시다!” 정주영은 어떤 일이든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었어요. 그 덕분에 4년 정도 예상되었던 공사를 3년 만에 모두 끝마쳤지요. “역시 한국 사람들이 최고야!”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했어요. 그 무렵, 우리나라는 1988년에 열릴 24회 올림픽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자 온 노력을 기울였어요.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 위원장’에 임명된 주영은 몹시 난처했어요. 분위기는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거든요. “우리나라는 82표 가운데 겨우 세 표 정도 얻을 거예요.” 이런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영은 올림픽 위원들의 방에 꽃바구니를 하나씩 선물하고, 중동, 아프리카 등 개발이 덜 된 나라의 대표를 찾아가 설득했어요. “가난한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면 여러분의 나라도 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영의 호소는 아프리카 대표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24회 올림픽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게 되었답니다. 주영은 나이를 먹을수록 북쪽 고향이 그리웠어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내가 할 일이 없을까?’ 주영은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일이 바로 그 첫걸음이라 여겼어요. 북한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조금씩 다가가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대로 남북을 오갈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요.
칭기즈 칸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테무친은 넓은 초원을 뛰어다니며 씩씩하게 자랐어요. 열 살이 되기 전에 벌써 말 타는 법과 활 쏘는 법을 배웠지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느는군. 저 아이는 분명 큰 인물이 될 거야.” 에수게이는 테무친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어요. 어느 날, 테무친은 강가에서 한 소년을 만났어요. “난 에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야.” “난 자무카라고 해.” 테무친과 자무카는 금세 친해져, 날마다 함께 말을 타고 활쏘기도 했어요. “너하고 나, 영원한 친구가 되자!” 테무친과 자무카는 손을 굳게 잡고 맹세했어요. 어느 날, 테무친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슬피 울고 있었어요. “흑흑, 타타르족이 술에 독을 넣어서 아버지를 죽였단다.” 테무친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부족 사람들이 하나 둘씩 다른 곳으로 떠나 갔기 때문이에요. “제발 떠나지 마세요! 테무친이 부족을 잘 다스릴 거예요!” 어머니가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어요. “흥, 어린 테무친이 뭘 할 수 있다는 게요?” 부족 사람들이 가축까지 모조리 끌고 떠나 버리자, 황량한 벌판에 테무친 가족만 남겨졌어요. “어린 네가 동생들까지 돌봐야겠구나. 흑흑.”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테무친의 손을 잡았어요. 그 뒤, 테무친은 활과 낚싯대를 들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어요.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날은 풀뿌리를 캐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야 했지요. “테무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훌륭한 부족장이셨다. 네가 꼭 우리 부족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테무친에게 꿈을 심어 주었어요.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부족을 다시 일으키겠습니다.” 테무친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어요. 테무친이 자랄수록 다른 부족 사람들은 불안했어요. “저 녀석을 그냥 놔뒀다간 우리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 에수게이의 옛 부하들이 모여들기 전에 없애 버리자.” 사람들은 테무친의 집으로 쳐들어갔어요. “샅샅이 뒤져 테무친을 찾아내라!” 테무친은 부랴부랴 산으로 도망쳤지만 곧 붙잡히고 말았어요. 하지만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쳤어요. “앗, 테무친이 도망쳤다! 어서 잡아라!” 테무친은 연못으로 뛰어들어 수풀에 몸을 숨겼어요. 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청년이 된 테무친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어요. 점차 안정을 찾아 가던 어느 날, 메르키트족이 습격해 왔어요. 예전에 에수게이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러 온 거예요. 테무친은 말을 타고 급히 산으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았어요. “아, 아내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하다니.” 테무친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흑흑, 오늘을 잊지 말고 힘을 기르자!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 테무친은 가장 큰 부족인 케레이트족 족장 완칸을 찾아갔어요. “메르키트족과 싸우려고 합니다. 군사를 빌려 주십시오.” “난 예전에 자네 아버지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다네. 이번엔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완칸은 테무친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고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어요. 바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자무카였어요. 자무카는 어느덧 큰 무리를 이끄는 족장이 되어 있었어요. 두 사람은 반가움에 어쩔 줄 몰랐지요. “여기서 친구를 만나다니, 정말 꿈만 같네!” “나도 자네를 돕겠네. 우리는 영원한 친구니까!” “공격하라! 메르키트족을 무찔러라!” 테무친은 군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쳐들어갔어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적들은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 몰랐어요. 마침내 테무친은 적을 무찌르고 아내도 무사히 구해 냈어요.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어요. “테무친이 천하무적 메르키트족을 무찔렀대!” 그러자 뿔뿔이 흩어졌던 부족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어요. 테무친의 힘이 날로 커 가자 자무카는 화가 났어요. 자신이 몽골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얼마 뒤, 몽골족의 여러 족장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우리 몽골족은 지금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힘을 하나로 모아 몽골족을 이끌어 갈 왕을 뽑읍시다!” “용감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테무친을 추천합니다.” 마침내 테무친은 부족 연합인 몽골족의 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테무친을 ‘칭기즈 칸’이라고 불렀어요. 칭기즈 칸은 ‘강하고 큰 왕’이라는 뜻이에요. 칭기즈 칸이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자, 타타르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들은 자무카를 왕으로 삼아 칭기즈 칸에 맞섰어요. 칭기즈 칸과 자무카는 이제 친구가 아닌 적이 되고 말았어요. 칭기즈 칸과 자무카는 여러 차례 싸움을 벌였어요. 완칸마저 자무카 편이 되어 칭기즈 칸을 공격했지요. 위험한 고비도 많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칭기즈 칸에게 돌아왔어요. 부족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가던 칭기즈 칸은 마침내 자무카도 무릎을 꿇게 만들었어요. “자무카, 다시 내 친구가 되어 주게!” 하지만 자무카는 고개를 저었어요. “천하가 이미 당신 것이 되었소. 그런데 나 하나 더 얻는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소.” 자무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요. 마침내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을 세웠어요. 1206년 봄, 칭기즈 칸의 고향인 오논 강가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어요. 칭기즈 칸은 그 가운데 우뚝 서서 우렁차게 외쳤어요. “몽골 제국 국민이여,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다. 내게 충성을 다하고 내 말에 따르라!” “칭기즈 칸이여,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칭기즈 칸에게 존경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어요. 칭기즈 칸은 나라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몽골 제국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갔어요. 몽골은 농사지을 땅이 넉넉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식량과 옷감 등이 턱없이 부족했지요. “세상은 넓다. 다른 나라를 쳐서 필요한 식량과 물건을 가져오자!” 칭기즈 칸은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했어요. 하지만 금나라는 몽골보다 강하고 과학 기술도 발달한 나라였어요. 게다가 몽골 초원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성을 함락시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칭기즈 칸은 용감하게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 궁궐을 포위해 들어갔어요. 당황한 금나라 왕은 궁궐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가 버렸지요.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이긴 칭기즈 칸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어요. 중앙아시아에 있는 ‘호라즘’이라는 큰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였지요.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몽골군은 초원의 늑대처럼 빠르고 용맹스러웠어요. 그들과 맞서 싸운 호라즘의 도시들은 모조리 잿더미로 변했어요. “몽골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이다! 두려워 말고 전진하라!” 몽골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의 깃발이 나부꼈어요. 칭기즈 칸은 호라즘 왕국을 정복하고 러시아 군까지 무찔러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할 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 칭기즈 칸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서하를 공격했어요. 서하는 몽골 제국을 따르던 신하 나라였어요. 그런데 금나라와 손을 잡고 몽골에 맞서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1227년 여름, 칭기즈 칸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어요. “끝내 금나라를 정복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구나. 너희는 내 뒤를 이어 정복에 힘쓰기를 멈추지 마라!” 칭기즈 칸이 아들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어요.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에는 칭기즈 칸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답니다.
장영실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얏!” “비켜라, 비켜!” 아이들이 마을 뒷산에 모여서 칼싸움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영실은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영실이 엄마는 기생이래.” 아이들이 영실을 놀려 대며 따돌렸거든요. 기생은 신분이 낮아서 누구나 천하게 여겼답니다. ‘나무칼을 만들어 칼싸움을 하면 더 재미있을 텐데.’ 물끄러미 구경만 하던 영실은 여기저기서 나무 막대기를 주웠어요. 그러고는 부지런히 나무칼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휴, 이제 다 됐다. 그런데 친구들이 좋아할까?” 영실은 떨리는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나무칼을 나누어 주었어요. “와, 이거 정말 네가 만들었어?” “진짜 칼 같아!” 친구들은 신기한 얼굴로 나무칼을 만지작거렸어요. 영실은 정말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였어요. 영실이 만지기만 하면 버려진 나무토막은 멋진 장난감이 되었고, 고장나서 못 쓰게 된 물건은 감쪽같이 새것으로 변신을 했답니다. 영실의 어머니는 관가에서 일하는 기생이었어요. 영실이 살던 때는 부모님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정해졌어요. 그래서 영실이도 관가의 종으로 살아야 했지요. 영실이 열 살 되던 해 어느 겨울날이었어요.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영실아, 이제부터 너는 관가에서 일해야 한단다.” 영실은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보다도 어머니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꾹 참고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시고 몸 건강하세요!” 영실은 큰절을 올린 뒤 길을 떠났어요. 관가에서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어요.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일해도 항상 일이 많았어요.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요. 누가 심부름을 시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관가 안이 어수선했어요. 사또 부인이 가장 아끼던 장롱이 망가졌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혹시라도 잘못 만졌다가 더 망가뜨릴까 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영실이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저, 제가 한번 고쳐 볼까요?” “예끼, 나이 많은 사람들도 손을 못 대는데 네가 무슨 재주로 고친단 말이냐?” 그러나 영실은 자신 있게 방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사또 부인이 기뻐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어요. “솜씨가 제법이로구나. 이렇게 감쪽같이 고치다니!” 사또 부인은 장롱을 쓰다듬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어린 녀석이 솜씨 하나는 뛰어나구먼!” “다행이다, 영실아. 괜히 나섰다가 고치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어?”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영실의 재주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어요. 그날 이후로 영실은 더욱 바빠졌어요. 무엇이건 조금만 고장나도 모두 영실을 찾았거든요. 그러면 영실은 금방 새것처럼 고쳐 주고 전보다 더 쓸모 있게 만들어 주었답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한가하네. 잠깐 쉬어야지.” 영실은 땀을 닦으며 그늘이 있는 창고 쪽으로 걸어갔어요. “어, 저건 무기 아냐?” 창고 앞에는 휘어진 창, 녹슨 칼, 부러진 활 같은 낡은 무기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어요. ‘아직 쓸 만한데 왜 저렇게 내버려 두었지? 조금만 손질하면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을 텐데.’ 그날부터 영실은 낡은 무기들을 고치기 시작했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만 나면 창고로 달려갔지요. 며칠 뒤, 사또가 영실을 불렀어요. “낡은 무기들을 너 혼자서 고쳤단 말이냐? 허허, 참으로 기특하구나.” 사또는 영실을 칭찬하며 상을 주었어요. 몇 해가 지났어요.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지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햇볕이 쨍쨍 내리쬐었어요.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이를 어째.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졌네그려.” “비가 통 내리질 않으니, 농사지은 것이 다 말라비틀어졌지 뭔가.” “아무래도 좋은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야겠어. 이대로 있다간 올해 농사 다 망치겠어.” 참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비를 내려 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로 했어요. ‘제사를 지낸다고? 과연 그 방법만이 최선일까?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은 없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민하던 영실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영실은 얼른 사또를 찾아갔지요. “사또 어른, 가뭄으로 갈라진 논밭에 물을 댈 방법이 있습니다.” “오, 그래? 그게 무엇이냐?”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강이 있는데, 그 강물을 끌어오면 어떨까요?” “그 강이라면 너무 멀리 있지 않느냐?” “하지만 우리 마을이 그 강보다 낮아서 물길만 트면 어렵지 않게 물을 끌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힘을 합쳐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하면 정말 우리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거야?” “거참, 땡볕에 고생만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도 영실의 계획을 완전히 믿지 못했어요. 밤낮없이 일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 마침내 물길을 따라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어요. “됐다, 됐어! 물이 흐른다!” “만세! 물이다, 물!” “이건 기적이야. 기적이라고!” 사람들은 서로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그해 가을, 다른 마을은 가뭄 때문에 농사를 망쳤지만 영실네 마을은 풍성한 수확을 얻었어요.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궐까지 퍼졌답니다. 마침 궁궐에서는 유능한 기술자를 구하고 있었어요. “재주 많은 그 젊은이를 당장 궁궐로 불러들이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영실은 궁궐로 가게 되었어요. 세종 대왕은 영실의 능력을 인정하여 궁궐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어요. “그대에게 벼슬을 내릴 테니, 앞으로 좋은 기계와 기구를 만들어 나라에 큰 힘이 되어 주시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 뒤 영실은 명나라에 유학을 가 천문학을 공부했어요. 그리하여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 와 ‘혼천의’ 를 만들었어요. 또한 ‘자격루’ 라는 자동 물시계를 발명해 정확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했어요. 세종 대왕은 무척 기뻐하며 영실에게 더 높은 벼슬을 내렸답니다. 영실은 무언가를 발명하고 나면, 단점을 찾아보고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어요. 하루는 새벽부터 장대비가 쏟아졌어요. 영실은 빗소리에 놀라 문을 열어 보았지요. 그때 문득 처마 밑에 있는 항아리가 눈에 띄었어요. 항아리 안에는 빗물이 고여 있었어요. “옳거니, 바로 저거다!” 영실은 무릎을 ‘탁’ 내리쳤어요. 그러고는 얼른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지요. 그것은 둥근 기둥 모양의 그릇이었어요. “일정한 크기의 통을 만들어서 그 안에 고인 빗물의 양을 재면.” 영실의 얼굴이 환해졌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발명품의 밑그림을 그린 종이를 들고 세종 대왕을 찾아갔어요. “전하, 비의 양을 재는 기구이옵니다. 비가 내린 양을 조사해 두면 농사에 아주 이로울 것입니다.” “해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때를 알아 미리 대비하면, 홍수의 피해도 막을 수 있겠구려.” 영실은 비의 양을 재는 기구를 완성하여 각 지방에 나누어 주었어요. “이게 측우기래. 측우기만 있으면 홍수 걱정이 없다던데?” “어디 홍수뿐이겠어? 가뭄이 들면 저수지에 모아 두었던 물을 쓰면 되잖아.” 백성들은 다 함께 기뻐했어요. 어느 날, 영실은 모처럼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다리 밑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영실은 다급하게 달리기 시작했어요. 아주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지? 강물의 깊이를 잴 수 있는 기구, 수표를 만드는 거야. 돌에 눈금을 새겨서 그 돌로 다리를 만들어 세우면.” 영실은 강과 저수지에 수표를 만들어 세웠어요. 수표만 보고도 강물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말이에요.
최무선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최무선이라는 사람 이야기 들었어?” “듣고말고. 화약을 만들겠다고 밤낮으로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는군.” “중국이 화약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화약을 만들 수 있겠어?” 사람들은 최무선이라는 청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무선이 화약과 무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렸을 때 불꽃놀이를 보고 나서부터였어요. “와! 정말 예쁘다! 그런데 불꽃은 어떻게 생기는 건가요?” 무선은 아버지에게 물었어요. “응, 화약을 터뜨리는 거란다.” “정말 신기해요! 아버지, 저도 화약을 갖고 싶어요.” 무선의 엉뚱한 말에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말했어요. “무선아, 화약은 아주 귀하기 때문에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불이야! 불이야!” 갑자기 부엌에서 불길이 치솟았어요. 하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불을 껐지요. 그러자 연기 속에서 시꺼멓게 그을린 아이가 기침을 하며 걸어 나왔어요. “도련님, 거기서 뭐 하셨어요?” “저, 화약을 만들려고.” 하인들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무선을 바라보았어요. 그 뒤로도 무선은 틈만 나면 부엌 아궁이를 뒤졌어요. ‘어떻게 하면 화약을 만들 수 있을까?’ 무선의 머릿속은 온통 화약 생각뿐이었지요. 며칠 뒤, 아버지는 무선에게 화약에 관한 책을 한 권 주셨어요. “이 책을 읽어 보아라. 궁금한 건 풀어야지. 하지만 글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예, 아버지. 고맙습니다!” 무선은 아버지가 주신 책을 읽고 화약이 불꽃놀이보다는 무기를 만드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무기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들도 읽어 보았지요. “나라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야 해.” 무선은 무기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했어요. 어른이 되었을 때는 우리나라에서 최무선만큼 무기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 뒤, 무선은 군기감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즈음, 우리 백성은 일본 해적의 침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었어요. 일본 해적이 수시로 쳐들어와 괴롭혔거든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선은 생각했어요. ‘일본 해적을 물리치려면 우리에게도 화약이 필요해.’ 하지만 화약은 중국에서만 만들어서 많은 돈을 주고 사 와야 했어요. 게다가 화약 만드는 방법은 중요한 비밀이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중국에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도 만들 수 있어. 화약만 있으면 일본 해적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할 거야.’ 무선은 자신의 힘으로 화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어요. 무선은 화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어요. 중국 사람을 만나면 화약에 대해 물어보려고 틈틈이 중국 말도 익혔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를 구해다 실험도 열심히 했어요. “아하! 바로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무선은 몇 년을 고생한 끝에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알게 되었어요. 화약은 숯과 유황, 염초를 섞어서 만들지요. 숯은 대나무를 태워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유황은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었지만 먼지와 흙에서 만들어진다는 염초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무선은 중국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예성강 나루터에 자주 갔어요. 어쩌면 그곳에서 화약에 대해 잘 아는 중국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이원이라는 중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원은 화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요. 다행히 무선은 중국 말을 잘했기 때문에 이원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어요. 무선은 이원을 집으로 데려와 잘 대접했어요. 하지만 이원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어요. “우리 백성은 일본 해적에게 식량과 물건을 빼앗기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화약만 있으면 일본 해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이원은 나라를 걱정하는 무선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어요. 얼마 안 가 이원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무선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마루 밑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원이 물었어요. “아니, 거기서 뭐 하십니까?” “염초를 만들려고 먼지를 모으고 있답니다.” “그런 일까지 하시다니, 그 꼴 좀 보십시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루빨리 염초 만드는 법을 알아내서 우리 백성을 괴롭히는 일본 해적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이원은 무선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무선이 20년 동안이나 화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거든요. “대단하시군요. 그동안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알겠습니다.” 마침내 이원은 무선에게 염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무선은 이원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염초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유황과 숯에 섞어 조심스럽게 불을 붙여 보았지요. “타다닥, 타다닥.” 타들어 가던 불꽃이 큰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터졌어요. 무선은 너무나 감격스러워 소리쳤어요. “드디어 화약을 만들었다!” 무선은 화약을 안고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무선은 임금님께 화약을 발명했다고 편지를 썼어요. 전하! 드디어 화약을 만들었습니다. 어서 이 화약을 이용해 백성을 괴롭히는 일본 해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임금님과 신하들은 정말로 화약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어요. 중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화약을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지요. 무선은 임금님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약에 불을 붙였어요. 잠시 뒤,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울렸어요. “펑!” 지켜보던 임금님과 신하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어요. “장하도다. 우리 힘으로 화약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장하도다!” 임금님은 무선의 공로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임금님은 무선에게 화통도감에서 화약을 만들게 했어요. 드디어 우리 기술로 화약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거지요. 하지만 화약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화약을 넣어 발사할 화포가 있어야 하니까요. 무선은 그동안 무기에 대해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기를 스무 가지나 만들었어요. 얼마 뒤, 일본 해적이 또 쳐들어왔어요. 무선은 화약과 무기를 배에 실으며 자신 있게 외쳤어요. “이놈들,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일본 해적이 아무리 많이 쳐들어온다 해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어요. 일본 해적은 우리나라에 화약과 화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500척의 배를 이끌고 쳐들어왔어요. 일본 해적은 100척밖에 되지 않는 우리 배를 보고 비웃었어요. “겨우 100척의 배를 가지고 우리를 막겠다는 거냐? 고려의 군대는 신경 쓸 것 없다. 모두 육지에 배를 대고 공격하라!” 그러고는 겁도 없이 육지에 배를 대려고 했어요. 무선은 해적의 배가 가까이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어요. 잠시 뒤, 일본 해적이 육지에 다다랐을 때, 우리나라 배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어요. “쾅! 쾅! 쾅!” 소리가 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일어났고, 일본 해적의 배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지요. “이럴 수가! 고려에 화약이 있었다니.” 일본 해적은 겁에 질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고, 500척이나 되던 배는 산산이 부서졌어요. 무선의 화약과 화포에 형편없이 무너진 거예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진포 대첩입니다.
우장춘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빨리빨리 줄 서자!” “에이, 오늘도 감자잖아.” 동경 근처의 조용하던 절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어요. 스님들이 나눠 주는 감자를 받기 위해 고아원 아이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었거든요. ‘아, 감자라도 실컷 먹었으면.’ 장춘도 일본 아이들 틈에 끼어 줄을 섰어요. 문득 바라본 구름 사이로 어머니 모습이 아른거렸어요. ‘어머니, 빨리 오셔서 저 좀 데려가세요.’ 어머니를 생각하자 장춘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려워진 형편 때문에 고아원에 맡겨진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거든요.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는 장춘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장춘은 1898년 일본에서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장춘은 이름이 두 개였어요. 한국 이름은 장춘, 일본 이름은 나가하루였지요. “야, 나가하루! 이 조선 놈아! 너희 나라로 가 버려!” 장춘은 학교에서 나가하루라는 이름을 썼어요. 하지만 일본 아이들은 나가하루의 아버지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매일 놀려 댔어요. 그러면 장춘은 늘 시무룩해져서 돌아오곤 했답니다. “장춘아, 비록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너는 조선 사람이야. 돌아가신 네 아버지 나라를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일본 사람이었지만 장춘이 조선 사람임을 늘 일깨워 주었어요. 차츰 장춘의 마음속에도 아버지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싹텄답니다. 장춘이 중학교를 졸업하자, 히로시마로 이사를 했어요. 장춘이 사는 마을은 항구 가까이에 있어서 군함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와, 멋지다! 나도 해군이 되고 싶어.’ 장춘은 멋진 제복을 입은 해군들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해군이 되려면 해군 사관학교에 가야 했어요. 하지만 장춘은 몸도 약하고 성적도 좋지 않아 갈 수가 없었지요. 더구나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불리했고요. 하는 수 없이 장춘은 동경 제국 대학 농학과에 들어갔어요. 농학과의 특성상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밖에서 직접 일을 하며 공부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장춘은 열심히 일을 배우고 익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가 장춘에게 말했어요. “다음 주에 조선인 유학생들끼리 모이기로 했어.” “무슨 일인데?” 장춘이 주위를 살피며 물었어요. “조선인 유학생들끼리 독립 운동을 하기로 했어. 너도 갈 거지?” 장춘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식들을 뒷바라지해 준 어머니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어두운 얼굴로 돌아온 장춘을 보고 어머니가 물었어요. “장춘아,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니?” “아니에요, 어머니. 아무 일 없어요.” 장춘은 어머니 앞에서는 괴로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장춘은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에 취직했어요.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도울 수 있어서 무척 기뻤지요. 동생도 동경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어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여 살 수 있었어요. “어머니, 이제부터는 편히 지내세요.” “그래, 고맙구나!” 장춘은 열심히 일해 기사로 승진했어요. 그 무렵, 일본 관동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땅이 갈라지고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고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여기저기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라 거리는 폐허가 되고 전기와 교통 시설마저 마비되자, 사람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어요. 그러자 나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조선인들이 지진이 날 때 불을 질렀대.” “우물에 독약도 뿌렸대.” “조선인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해.” 동경에 있던 조선 사람 수천 명이 이유도 없이 죽어 나갔어요. 일본은 조선 사람이 독립 운동을 하니까 몹시 불안했던 거예요. 그러던 차에 지진으로 일본 전체가 혼란스러워지자, 모든 죄를 조선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것이지요. 다행히 장춘의 가족은 모두 무사했어요. 하지만 장춘은 조선 사람이 일본에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장춘은 스물일곱 살 때 고하루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을 약속했어요. 그러자 고하루의 부모님이 펄펄 뛰며 반대했어요. “조선인과 결혼하다니, 절대 안 돼!” 하지만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어요. 얼마 뒤, 장춘은 코노스 농장으로 가게 되었어요. 코노스 농장은 전쟁을 치르느라 부족해진 식량을 더 늘리기 위해 농림성에서 만든 곳이었지요. 장춘은 그곳에서 새로운 나팔꽃을 연구했어요. ‘새로운 나팔꽃을 만들면 어떨까?’ 장춘은 나팔꽃을 연구하면서 육종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장춘은 ‘피튜니아’라는 꽃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꽃잎이 모두 크면 더 예쁠 텐데.’ 피튜니아는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이에요. 홑꽃과 겹꽃이 피는데, 홑꽃은 볼품이 없지만 겹꽃은 크고 화려하지요. 그런데 피튜니아 씨앗을 뿌리면 절반 정도만 겹꽃을 피웠어요. 그래서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겹꽃만 피는 피튜니아 씨앗을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장춘은 피튜니아 연구에 매달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겹꽃만 피는 피튜니아 씨앗을 개발했어요. 이것은 오래도록 믿어 온 다윈의 진화론을 뒤엎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답니다. 장춘은 피튜니아의 성공에 힘을 얻어 새로운 나팔꽃 연구에 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나팔꽃을 관찰하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연구에 몰두했지요. “후유, 이제야 완성했군. 이 논문을 제출하면 그동안 조선인이라고 깔보던 사람들도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 장춘은 한껏 기쁨에 들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날 밤, 연구실에 불이 나고 말았어요. 장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논문도 한순간에 재가 되고 말았지요. “아, 이럴 수가! 어떻게 쓴 논문인데.” 장춘은 넋을 잃고 땅바닥에 주저앉았어요. 하늘이 내려앉는 듯했지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어.’ 장춘은 애써 다시 기운을 차렸어요. “자, 올해부터 우리가 연구할 과제는 유채 씨앗의 품종 개량입니다.” 코노스 농장의 모든 연구원이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어요. 장춘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구했어요. “일본의 유채 씨앗은 빨리 거둘 수는 있지만 수확량이 너무 적어요. 반대로 서양의 유채 씨앗은 수확량은 많은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장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어요. 장춘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해 드디어 새로운 유채 씨앗을 만들었어요. 수확량도 많고 빨리 거둬들일 수 있는 특별한 씨앗이지요. 장춘은 이 씨앗의 이름을 ‘농림 1호’라고 했어요. 장춘은 농림 1호를 바탕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나팔꽃 연구 논문이 불탄 지 5년 만에 장춘은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 박사가 되었답니다. 장춘의 논문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자 학계에서는 한바탕 야단이 났어요. “대단한 연구야! 아주 뛰어난 학자가 탄생했는걸!” 장춘의 논문은 대학 교과서에도 실렸답니다. 하지만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장춘의 큰 업적은 희미하게 가려져 버렸어요. ‘일본은 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구나.’ 장춘은 조선 사람을 차별하는 곳에서 더 이상 연구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언젠가는 아버지 나라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의 한 줌 흙이 되리라.’ 장춘은 굳게 결심하고 코노스 농장을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다키이 종묘 회사 농장의 농장장으로 들어갔어요. 장춘은 다키이 종묘 회사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채소의 종자 개량 연구에 몰두했어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이 독립을 하자, 장춘은 다키이 종묘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이제부터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해야겠어.’ 한국으로 갈 생각을 하니 장춘은 가슴이 뛰었어요.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식량이었어요. 그동안 일본군의 식량으로 사용할 쌀과 보리만 경작했기 때문에 무와 배추 같은 채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광복이 된 뒤에도 채소 씨앗은 여전히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지요. 좋은 씨를 뿌려야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인데, 한국에는 좋은 씨앗을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연구비도 턱없이 부족했어요. “우장춘 박사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마침 한국 정부에서 장춘에게 도움을 청해 왔어요. “가겠습니다. 가고말고요!” 한국 정부의 요청에 장춘은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어요. 장춘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온 국민이 성금을 모아 농장을 마련했어요. 그리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만들어 장춘에게 맡겼지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무와 배추의 씨앗을 만드는 것입니다.” 장춘은 직원들에게 좋은 씨앗을 만드는 육종학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어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나라 안이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어요. “이럴 때일수록 좋은 무와 배추 씨앗을 만들어야 해.” 장춘은 연구를 계속했어요. 연구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드디어 우수한 배추와 무의 씨앗을 만들었어요. “이제 더 이상 일본 씨앗을 수입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은 장춘이 개발한 배추 씨앗으로 가장 우수한 배추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답니다. 또 장춘은 버려진 땅인 강원도 고랭지에 감자를 심었어요. 예전에도 감자를 심기는 했지만 쉽게 병이 들어 수확량이 아주 적었지요. 하지만 장춘은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병에 걸리지 않는 씨감자를 만들었고, 강원도는 전국 최고의 감자 생산지가 되었어요. 국가에서는 장춘의 업적을 인정하여 ‘대한민국 문화포장’이라는 최고 훈장을 주었어요. 장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요. “조국은 나를 인정하였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광복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 농촌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피해가 컸어요. 우리나라는 김치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인데, 좋은 배추와 무를 재배하지 못해 농민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한국으로 온 우장춘이 맨 먼저 연구한 것은 맛 좋은 배추와 무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어요. 우장춘은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7년간의 연구 끝에 우수한 배추 씨앗을 만들어 냈어요. 그때 만든 배추 씨앗이 전국 농가로 퍼져 지금까지도 매년 맛있는 배추를 생산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세계의 유전 연구 학자들이 가장 우수한 배추로 우리나라의 배추를 지정하여 연구하기로 한 거예요. ‘게놈 프로젝트’라고 하는 유전자 지도를 만드는 연구 계획 중에 배추 분야의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우리나라 배추가 뽑힌 것이지요. 우리나라 배추는 김치를 담그는 데 가장 알맞은 성분을 가지고 있어요. 50년 전에 우장춘이 만든 배추 씨앗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거지요. 또 한 가지, 우장춘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 있어요. 우장춘이 배추 씨앗을 심고 연구할 땅을 찾기 위해 제주도에 들렀을 때예요. 어느 농장에서 시들어 가는 귤나무를 보았어요. “아니, 귤나무가 왜 이렇게 시들었지요?” “재배법을 몰라 그냥 놔뒀더니 이렇게.” 그때까지만 해도 식량이 부족하던 때라 귤은 그냥 사치스러운 과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제주도의 기후는 귤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입니다. 제주도에서 귤을 재배하면 크게 성공할 거예요.” 얼마 뒤 우장춘은 귤나무를 연구하고 묘목을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제주도 기후에 알맞은 새로운 품종을 심고 묘목도 새로 만들어 보급하였지요. 이렇게 보급된 귤나무가 오늘날 제주도의 자랑거리가 되었답니다. 우장춘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 농업을 일으켜 세우고, 육종학이라는 학문을 널리 알린 최고의 과학자예요. 또한 일본에서 자라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여섯이나 두었지만, 조국이 부르자 가족 모두를 일본에 남겨두고 달려와 숨질 때까지 조국을 위해 일한 진정한 애국자랍니다.
유일한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어요. 일한의 아버지는 아들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어요. 그래서 선교사에게 부탁했어요. “선교사님! 제 아들을 미국에 보내 공부시키고 싶습니다.” 선교사는 흔쾌히 승낙했어요. 마침 미국에 보내 공부시킬 똘똘한 조선의 소년들을 찾고 있었거든요.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뻤어요. 하지만 일한의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어요.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된 어린애를 머나먼 나라로 보내다니요?” 그러자 아버지가 차분하게 말했어요.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면, 그 정도 어려움은 참고 이겨 내야 하오.” “안 돼요. 꼭 보내려거든 더 자라면 보내세요.” 어머니는 일한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지의 물음에 일한은 부모님을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그러고는 결심을 한 듯 당차게 말했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한은 아홉 살 때 유학을 떠났답니다. 일한은 인천에 있는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어요. 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말했어요. “너는 내 아들이기에 앞서 대한의 아들이다. 미국에 가서도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아버지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두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일한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어요. 일한은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미국 중부에 있는 네브래스카라는 작은 도시로 갔어요. 일한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꿋꿋하게 새 삶을 시작했어요. 어린 일한에게 가장 힘들고 답답한 일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하루빨리 영어를 익혀야 해.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일한은 손짓 발짓을 하며 영어를 배우는 데 온 힘을 쏟았어요. 다행히 활달한 성격이 사람을 사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일한은 다음 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학교 공부를 시작했어요. 일한은 또래 아이들보다 영리하고 배우고자 하는 욕심도 많았어요. “너처럼 영어를 빨리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아주 기특해!” 미국인 선생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일한을 칭찬했어요. 어느덧 일한은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그런데 미국인 친구들이 일한을 따돌리며 못살게 굴었어요.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게 이유였지요. 일한은 축구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몸집도 작은 동양인 주제에 미식축구를 하려 들다니, 꿈도 꾸지 말게!”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선수로 받아 주십시오.” 일한이 끈질기게 매달리자, 축구부 감독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어요. 일한은 미국인 친구들보다 더 피나는 연습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일한이 시합에 나가 다 지다시피 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어요. “일한 덕분에 우리가 이겼어!” 친구들은 그제야 일한을 친구로 받아들였답니다. 일한은 큰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시간 대학에 입학했어요. 큰 사업가가 되어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거든요. 조국과 동포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어요. ‘사업가가 되려면 일찌감치 장사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일한은 무슨 장사를 할까 생각했어요. 당시 미국에는 중국 사람이 많이 건너와 살았답니다. 일한은 중국인 거리를 돌며 비단, 차, 장신구와 같은 중국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을 팔았어요. “아, 좋다! 미국 땅에서 중국 물건을 살 수 있다니!” 중국 사람들은 너도나도 물건을 사려고 모여들었어요. 일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돈을 벌었답니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어요.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만세 운동에 호응하여 궐기 대회를 열기로 했어요. 일한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 운동가 서재필 박사를 만났어요. 서재필 박사를 중심으로 ‘한인자유대회’를 열었지요. 우리나라가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미국 땅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일한은 서재필 박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자네처럼 성실하고 꿋꿋한 청년은 처음 보네. 앞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는 멋진 사업가가 되어 주게.” “예, 박사님 말씀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 뒤, 일한은 대학을 졸업하고 제너럴 일렉트릭 사에 취직했지만, 일 년 만에 그만두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사업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일한은 숙주나물 장사를 시작했어요. 숙주나물은 중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만두에 꼭 들어가는 재료일뿐만 아니라, 서양 음식을 만드는 데도 즐겨 쓰는 중요한 재료였어요. 문제는 신선한 숙주나물을 제때에 공급하는 것이었지요. 일한은 신선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담아 팔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어요. ‘숙주나물을 더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관해야 해.’ 일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한 끝에, 숙주나물 통조림을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사업이 점점 커지자, 일한은 대학 동창생 스미스와 힘을 합쳐 ‘라초이 식품 회사’를 세웠어요. 일한은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사기 위해 중국으로 갔어요. 당시 중국 상하이에는 독립 운동을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었어요. 그곳에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만난 일한은 굳게 결심했어요. ‘내 조국과 동포를 돕기 위해 꼭 큰 사업가가 될 거야. 나라를 빼앗기고 고생하는 동포들을 돕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니까.’ 일한은 잠깐 고향에 들러 부모님을 만났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부터 펑펑 쏟았어요. 아버지는 반가운 마음을 누르며 물었어요.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 “조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아버지는 장하고 기특한 마음에 아들의 손을 꼭 잡았어요. 일한은 다시 미국으로 가 더욱 열심히 사업을 일으켰어요. 라초이 식품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일한은 스미스를 조용히 불렀어요. “스미스, 나는 이 회사에서 손을 떼겠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둘이 동업을 하고 있지만, 이 회사는 자네 회사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걸 따져 무엇 하겠나? 이제 이 회사는 자네 회사일세. 나는 우리나라로 돌아가 내 조국을 위해 새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네.” “일본 사람들이 훼방을 놓을 텐데, 왜 굳이 지금 가려고 하나?” “조국이 어려울 때 힘을 보태야지. 지금이 조국을 위해 일할 때라고 판단했네.” 스미스가 거듭 말렸지만 일한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1926년, 일한은 20여 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세웠어요. 유한양행은 의약품, 화장품, 농기구 들을 파는 무역 회사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약을 구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지요. 일한은 좋은 약품을 수입해서 싸게 파는 일이야말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사업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유한양행 약품이 가짜라는 헛소문을 퍼뜨렸어요. 유한양행 때문에 자기네 약품이 팔리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일한은 꿋꿋하게 회사를 키워 나갔어요. 의사인 아내도 일한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어요. 유한양행 건물 2층에 소아과 병원을 열어 병든 어린이들을 돌보았답니다. 일한은 유한양행을 세계적인 제약 회사로 키워 갔어요. 미국에만 의존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유럽 쪽으로 눈을 돌려 사업을 넓혀 갔지요. 그리고 여러 사람이 주인이 되는 주식회사로 키웠어요. 열심히 일한 정도에 따라 직원들에게도 주식을 나눠 주었지요.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어요. “내가 회사의 주인이 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무척 좋아했어요. 일한은 늘 생각했답니다. ‘유한양행은 내 개인의 회사가 아니라, 회사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유한양행은 이제 아주 큰 회사가 되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일한에게 정치를 해 보라며 부추겼어요. “나는 사업가이지 정치가가 아니오.” 일한의 생각은 아주 단호했어요. “유 회장, 상공부 장관을 맡아 주겠소?” 일한은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도 정중히 거절했어요. 1946년, 일한은 뛰어난 기업가들이 모여 만든 ‘대한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으로 뽑혔어요. 그리고 얼마 뒤, 회사의 사장 자리를 능력이 있는 친구에게 물려주었어요. 가족이 아닌 친구에게 큰 회사의 사장 자리를 물려준 것 역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일한은 큰 부자였으나 언제나 검소하게 살았어요. 교육 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유한 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을 세웠어요. 나라에서는 일한의 공을 높이 사 동탑 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어요. 일한은 평생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1971년 3월 1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런데 일한의 유언장에는 아주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내 모든 재산을 한 푼도 남김없이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위해 써 주시오!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고 모든 재산을 사회를 위해 내놓고, 큰 사업가 유일한은 빈손으로 우리 곁을 떠났답니다. 유일한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어요.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아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유일한은 꿋꿋이 견뎌 냈어요. 외국인보다 작은 몸집으로 미식축구부에 들어가 한국인의 끈기와 패기를 보여 주기도 했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유일한의 아버지는 아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어 주기를 바랐지요. 유일한은 우선 담임 선생님의 도움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으로 보냈어요. 그 뒤, 유일한은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해서 빌린 돈을 모두 갚고 미시간 대학에 입학했어요. 물론 대학 생활 내내 학비를 벌어야 했지요. 사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유일한은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뒤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해서 크게 성공했어요. 그리고 미시간 대학 시절부터 사귀어 온 호미리 여사와 결혼했어요. 호미리 여사는 중국인으로 미시간 대학과 코넬 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동양 여성 최초로 소아과 의사 자격증을 땄어요. 우리나라로 돌아온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세워 세계적인 사업가가 되었고,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일에 늘 앞장섰어요. 유일한이 큰 사업가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참 많아요. 그중에서 어린 시절 미국 유학을 도와준 미국인 선교사는 유일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지요.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일한은 미국에서 독립 운동가 서재필 박사를 만났어요. 서재필 박사는 유일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랍니다. 또한 ‘라초이 식품 회사’를 함께 꾸려 간 친구 스미스와 중국 상하이에서 만난 독립 운동가들도 유일한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유일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매우 엄격했지만 일찍이 서양 학문을 가르치려 한 아버지 덕분에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니까요. 유일한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를 위해 쓰도록 내놓았어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의 것이라는 평소 생각을 실천한 것이지요. 유일한은 참된 기업인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답니다.
석주명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1905년, 우리나라는 일본과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었어요.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아 버린 거예요.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훗날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나비 박사가 태어났답니다. “고 녀석, 참 또랑또랑하게도 생겼구나!” 석주명은 1908년 11월 13일,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방 안에 있던 가족들은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바라보며 웃음꽃을 피웠어요. 주명은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다녔어요. 하지만 글공부보다 밖에 나가 노는 걸 더 좋아했지요. 개구리나 맹꽁이, 메뚜기를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았어요. 하루는 주명이 흙범벅이 되어 돌아오자 아버지가 호되게 꾸짖었어요. “이 녀석! 글공부를 열심히 해야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게 아니냐!” 그 뒤로 주명은 글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주명은 보통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공부를 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홉 살 때 나이를 속이고 평양에 있는 보통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에는 열 살이 되어야 보통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주명은 동물 중에서도 곤충을 무척 좋아했어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들판을 쏘다니며 새, 나비, 잠자리, 방아깨비 같은 곤충을 쫓아다녔어요. 집에서는 개와 고양이, 토끼도 키웠고요. 그러던 1919년 3월, 3학년이 시작될 무렵이었어요. 강제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횡포는 점점 더 심해졌어요. 참다 못한 사람들은 탑골 공원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어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소리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불길처럼 일어났어요. 주명도 사람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지요. ‘우리나라를 되찾을 날이 반드시 올 거야!’ 주명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요. 주명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 중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무렵 주명은 만돌린이라는 악기에 흠뻑 빠져 있었어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주명의 선배였지요. 방학 때는 안익태를 비롯한 선후배들과 어울려 공연을 다니기도 했답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일본을 헐뜯고 다닌다며 모두 끌고 갔어요. 나아가 조선인 학교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하기 시작했지요. 숭실 중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주명을 송도 고등 보통학교로 전학시켰어요. 이것은 주명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어요. 송도 고등 보통학교는 표본실, 실험실, 낙농 실습을 위한 농장을 갖춘 학교였거든요. 주명은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 농림학교에 들어갔답니다. “생물학은 관찰하는 학문입니다.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보려는 집념을 가져야 합니다. 파브르처럼 말이지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주명은 파브르에 관한 책과 논문을 읽었어요. 얼마 안 가 주명은 학교에서 곤충 박사로 통했답니다. “석주명 학생, 정말 훌륭해요! 앞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곤충학자가 되길 바랍니다.” 생물학 선생님은 주명을 볼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았어요. 주명은 흔하지만 예쁘고 화려한 나비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었어요. 파브르처럼 끈질긴 인내력과 관찰력으로 나비 연구의 대가가 되고 싶었던 거예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명은 영생 고등 보통학교의 생물 선생님이 되었어요. 주명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비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아니, 뚱딴지같이 왜 나비만 쫓아다니지?” “나비에게 무슨 현상금이라도 붙었나?” 사람들은 주명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망태기 아저씨! 나비 잡아서 뭐 할 거예요?” 아이들은 주명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놀려 대곤 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안경을 쓴 채 낡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십 개의 채집 주머니를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가방을 궁둥이까지 축 늘어뜨린 모습은 영락없는 각설이었어요. 하지만 주명은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고 나비를 찾아다녔어요. 2년 뒤, 주명은 모교인 송도 고등 보통학교로 옮겼어요. 주명은 방학 때마다 학생들에게 나비 채집을 해 오라고 했어요. 송도 고등 보통학교에는 전국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 있었어요. 그래서 여러 지방의 나비를 골고루 채집할 수 있었지요. 물론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요. 주명은 결혼해 어여쁜 딸까지 낳았지만 가족에게는 무관심했어요. 오로지 나비 채집을 위해 백두산, 간도, 금강산, 전라도 등 전국을 돌아다니기에 바빴지요. 방방곡곡을 다니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어요. 왕오색나비를 잡으려다가 나뭇가지가 꺾이는 바람에 죽을 뻔했고, 남방노랑나비를 잡으려다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비를 잡을 때마다 주명은 기쁨에 넘쳐 말했어요. “오! 이렇게 아름다운 나비가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놀라워!” 주명의 방 천장에는 채집해 담아 놓은 나비 봉지가 잔뜩 매달려 있었어요. 종이 봉지에는 나비를 채집한 날짜와 장소가 꼼꼼히 적혀 있었지요. 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주명을 한의사로 여길 정도였답니다. 미국 앤드루스 공룡 탐사대의 일원인 모리스 박사가 몽골에서 탐사를 끝내고 일본으로 갈 때였어요. 모리스 박사 일행은 그만 실수로 개성에서 내렸어요. 개성 전도단은 모리스 박사 일행을 송도 고등 보통학교 박물관으로 데려갔어요. “오! 정말 훌륭해요, 훌륭해!” 주명의 나비 표본을 본 모리스 박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국의 여러 박물관에 있는 나비 표본과 연구 자료를 보내 주겠다고 선뜻 약속했답니다. 주명은 개성 지방의 나비류와 알려지지 않은 조선산 나비류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관심을 끌었어요. 생물학자들은 이때부터 주명을 ‘나비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주명의 연구 논문은 세계 곤충학계에 널리 알려졌어요. 영국의 왕립 아시아 학회는 주명에게 조선의 나비를 정리해 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주명은 학교에 휴가를 내고 연구에 매달렸어요. 어머니는 주명을 위해 타자기를 사 주었고요. 이렇게 해서 조선산 나비 총목록 이라는 책이 나오게 된 거예요. 조선산 나비 총목록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책이 되었어요. 주명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곤충학자가 된 거예요. 그리고 세계에서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었어요. “저분이 나비 박사 석주명이래!”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사람들은 모두 주명을 우러러보았어요. 일본의 억압 속에서 한숨짓던 우리 민족에게 주명은 커다란 자랑이자 기쁨이 되어 주었답니다. 또한 주명은 ‘나비’라는 말이 ‘나뵈’ 또는 ‘남이’라는 말에서 변해 온 것을 밝혀내 나비 박사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그 무렵,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갔어요.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자, 주명은 송도 고등 보통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그곳에서도 ‘제주도 박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많은 연구를 했어요. 제주도에 관한 논문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집, 제주도 문헌집, 제주도 수필 제주도의 자연과 인문, 제주도 곤충상 등 많은 책을 펴냈어요. 주명은 이렇게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끈질기게 파고들어 최고가 되었답니다. 1945년, 드디어 우리나라는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았어요. 그 무렵 국립 과학관 동물학 연구 부장으로 있던 주명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길을 걸으며 먹을 정도로 연구에 몰두한 끝에 발표한 나비의 개체 변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어요. 조선산 배추흰나비 앞날개의 변이 논문은 일본의 곤충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비 분포에 관한 연구도 하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나비에게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어요. 부전나비, 산호랑나비, 수노랑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제주왕나비, 줄나비, 청띠제비나비, 각시멧노랑나비, 네발나비, 유리창나비, 모시나비, 배추흰나비 들이 바로 주명이 지어 준 이름이에요. 1950년 6 25전쟁이 일어나자 주명에게도 커다란 시련이 닥쳤어요. 국립 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주명이 애써 연구한 논문과 자료, 나비 표본 15만 마리와 소중한 책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한 거예요. “오! 나비, 나비야!” 주명은 자식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어요.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건강도 무척 나빠졌지요. 한 달 뒤, 주명은 국립 과학관 재건축 회의에 참석하려고 길을 나섰어요. “인민군이다!” 군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주명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젊은이는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요. 그렇게 어이없이 주명이 세상을 떠나자, 마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듯 수백 마리의 나비가 너울너울 묘지로 날아왔다고 합니다. 주명은 죽기 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비의 분포 지도를 그렸는데 다행히 누이동생 석주선이 그 지도를 잘 간직했어요. 전쟁 중에도 오빠의 유품을 소중히 지켰던 거예요. 1973년, 마침내 한국산 접류 분포도가 출판되었어요. 이 책은 250여 종의 한국 나비가 분포하는 지역을 표시한 책이에요.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주명의 연구 논문과 책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빛을 보게 되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석주명은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금도 남한산성 능골 언덕에 고이고이 잠들어 있답니다. 못다 한 이야기. 세계가 인정한 나비 박사 석주명. “우리나라에 나비에 미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조선 순조 때 태어나 고종 25년에 죽은 화가 남계우요, 또 한 사람은 일제 치하에 태어나서 6 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죽은 석주명이다. 사람들은 남계우를 ‘남 나비’라고 했고, 석주명을 ‘나비 박사’라고 불렀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나비 박사 석주명은 1908년 11월 13일, 평양 대동문 근처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의 3남 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어요. 평양 종로 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석주명은 들판을 쏘다니며 개구리를 잡거나 새, 나비, 잠자리, 방아깨비 같은 곤충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숭실 고등 보통학교에 들어간 석주명은 항일 운동에도 참가했어요. 석주명은 송도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일본 가고시마 고등 농림학교에 들어갔는데, 특히 곤충에 관심이 많았지요. 우리나라로 돌아온 석주명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비 연구를 시작했어요. 석주명의 논문 128편 중 97편이 나비에 관련된 것이에요.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은 석주명은 194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의 의뢰를 받아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출간했어요. 이 책은 영국 왕립 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아주 유명하고 소중한 책으로 인정받았어요. 이로 인해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 학회의 회원이 되었답니다. 그 뒤로도 석주명은 나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나비의 ‘분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석주명은 나비의 ‘분포’ 쪽으로 연구 방향을 돌렸어요. 그때부터 그의 방에는 거미줄처럼 그려진 분포 지도가 놓여 있곤 했어요. 하지만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6 25전쟁이 일어나 국립 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나비 표본 15만 마리가 모두 불에 타는 아픔을 겪었어요. 그해 10월, 석주명은 너무나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어요. 한 젊은이가 석주명을 인민군으로 잘못 알고 총을 쏜 거예요. 석주명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나비 분포 지도 한국산 접류 분포도는 1973년에 발간되었어요. 우리나라 전통 복식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석주명의 누이동생 석주선이 피난 중에도 오빠가 남긴 500여 장의 지도를 등에 지고 다니며 소중하게 간직한 덕분이었지요. 비록 석주명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20여 권의 책과 13편의 논문은 고스란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답니다.
김순권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김순권은 1945년 울산에서 딸만 여섯을 둔 집안에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온 집안 식구가 금이야 옥이야 하며 떠받들었지요. 그런데 너무 귀하게 키우다 보니 순권은 점점 버릇없고 고집불통이 되어 갔어요. 순권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아버지는 순권의 장래를 위해 억지로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시켰어요. 순권은 시집간 누나 집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그러나 집을 떠나 있으니 공부도 안 되고 슬프기만 했어요. “누나, 집에 돌아가고 싶어.” 순권은 날마다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만 지었어요.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순권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고향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자 순권은 무척 기뻤어요. 꼬박 한 시간 반 동안 걸어 다녀야 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다녔답니다. 순권은 책상이 없어 늘 밥상을 펴 놓고 공부했어요. 어떤 때는 방바닥에 엎드려 하기도 했고요. ‘책상만 있으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순권은 점점 책상이 갖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옳지! 밥상 다리를 높여 책상을 만들어야겠다!’ 순권은 밥상 다리에 튼튼한 나무를 대고 못질을 한 뒤 끈으로 동여맸어요. 볼품은 없지만 그럴듯한 책상이 되었어요. 책상이 생기고 나니 이번에는 의자가 필요했어요. ‘의자는 또 어떻게 만들지?’ 그때 이웃에 사는 친구가 찾아왔어요. “순권아, 뭐 하니?” “응, 책상을 만들었는데 의자가 없어서.” “그래?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학교 창고에 남는 의자가 많잖아. 거기 가서 한 개만 가져오자!” 순권은 귀가 솔깃했어요. 다음날, 순권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학교 창고로 들어갔어요. 친구가 망을 보는 사이 순권은 의자를 한 개 훔쳐 몰래 빠져나왔지요. “후유, 성공이다.” 순권은 친구와 함께 콧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갑자기 누군가 따라오며 소리쳤어요. “이 녀석들! 거기 서지 못해?” 뒤따라온 사람은 같은 학교 선배였어요. 순권은 움찔 놀라 그 자리에 멈췄어요. “아니, 학교 의자를 훔치다니.” 선배는 순권과 친구를 마구 혼냈어요. 순권이 자초지종을 말하며 용서를 빌었지만 소용없었어요. 이 사실이 알려져 순권과 친구는 보름 동안 화장실 청소를 했어요. 청소를 하며 순권은 다짐했어요.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겠어!’ 순권은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지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지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고등학교도 못 들어가게 되었으니 어쩌지?’ 순권은 고민하다가 농사일을 돕기로 했어요. 농사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또 때 맞춰 곡식을 거둬들이고. 한 가지도 쉬운 일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쟁기질이 가장 힘들었어요. 순권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혼자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다음 해에 순권은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순권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교회에 다녔어요. 그러면서 꿈을 키우기 시작했지요.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처럼 육종학자가 되어야지.’ 꿈을 이루기 위해선 대학에 진학해야 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무슨 돈으로 대학에 가지?’ 순권의 고민을 알고 어머니가 용기를 주었어요. “순권아, 걱정 말고 대학에 가거라.” 순권은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농과대학에 합격했답니다. “순권아, 이걸로 대학 입학금을 내라.” 어머니가 신문지로 싼 돈뭉치를 내놓았어요. “어머니, 이렇게 큰돈을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어요. 논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답니다. 순권은 그 사실을 알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농업경제학과 하병욱 교수가 순권을 불렀어요. “자네, 대학원에 가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할 생각 없나?” “제가 대학원엘요?” 하병욱 교수는 순권을 농업경제학 교수로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순권은 육종학을 공부하면서 옥수수 육종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옥수수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거든요. 대학을 졸업한 순권은 대학원을 포기하고 농촌진흥청 옥수수과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어요. 농촌진흥청에는 벼과, 보리과, 콩과, 옥수수과 등 여러 과가 있었는데, 직원들은 각 과에 맡겨진 농작물을 연구했어요. ‘좋은 옥수수 품종을 만들어 가난한 농민들에게 희망을 줘야겠어!’ 순권은 이렇게 결심하고 열심히 연구했어요. 대학에서는 주로 이론을 연구했지만, 이곳에서는 직접 옥수수를 재배하며 연구에 몰두했답니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에서의 연구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육종학은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었거든요. 순권은 육종학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비행기에서 내린 순권은 깜짝 놀랐어요. 땅에서 샘솟듯 ‘쏴아’ 하고 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에요. “아니, 저게 뭐지?” 그것은 바로 잔디밭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였어요. 순권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에도 없는 스프링클러가 잔디밭에 있다니!’ 순권은 미국의 선진화된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어요. 순권은 하와이 대학에서 보루베이커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하루는 보루베이커 교수가 순권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말했어요. “자네는 옥수수를 기계처럼 정확하게 심는군. 내일은 교배하는 걸 가르쳐 줄 테니 일찍 나오게.” 교배란 수꽃의 꽃가루를 암꽃에 묻혀 주는 일이에요. 그래야 열매가 맺히는데, 서로 다른 옥수수끼리 교배시켜야 새롭고 좋은 옥수수가 나올 수 있지요. 순권은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해 많은 유학생 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었어요. 순권은 교수님의 남다른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더욱 열심히 육종학을 연구했어요. 그리고 3년 3개월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모두 받았답니다. “우리 회사로 와 주십시오.” “아니, 우리 회사로 오세요.” 미국의 여러 종자 회사에서 순권을 서로 데려가겠다고 야단이었어요. 그러나 순권은 모두 거절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순권은 돌아오자마자 농촌진흥청으로 출근했어요. 무엇보다 우리 땅, 우리 흙이 반가웠어요. ‘미국 땅이 아닌 내 나라 땅에서 세계 최고의 옥수수 품종을 개발하겠어!’ 순권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어요. 그 뒤, 순권은 옥수수밭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한 해에 5만 번이던 옥수수 교배를 50만 번으로 늘리고 더 좋은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연구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새 품종 개발에 성공했지요. “10년 걸려야 할 수 있는 일을 1년 만에 해내다니!” 동료들은 모두 감탄했어요. 순권은 새 품종을 가지고 나이지리아로 갔어요. ‘국제열대농업연구소’의 초청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꿈 때문이었지요. ‘내가 개발한 옥수수로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굶지 않길 바란다.’ 순권은 갖은 고생 끝에 옥수수 재배에 성공했어요. “옥수수 박사, 만세!”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순권은 전 세계에 ‘옥수수 박사’로 널리 알려졌어요. 순권은 자신이 개발한 두 개의 옥수수 품종에 ‘오바 슈퍼 1호’, ‘오바 슈퍼 2호’란 이름을 붙였어요. ‘오바’란 왕이란 뜻인데, ‘슈퍼’가 붙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죠.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병에서 구해 냈다면, 순권은 굶주림에서 구해 냈어요. 옥수수로 말이에요. 나이지리아에서는 순권을 ‘마이에군’이란 명예 추장으로 추대했어요. 마이에군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사람’이란 뜻이에요. 순권은 1995년 11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지금은 경북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옥수수 품종으로 북한 동포를 살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아인슈타인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우아, 신기하다! 어떻게 바늘이 한쪽만 가리키지요?” 네 살배기 꼬마는 나침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어요. 이리저리 아무리 돌려 봐도 나침반의 빨간 바늘은 항상 같은 방향만 가리켰거든요. “이건 방향을 가리키는데.” 아버지는 꼬마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어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흔들흔들 춤추는 나침반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이 꼬마가 바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궁금한 게 너무 많았어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지요. “아인슈타인, 1 더하기 1 은 2란다.” “왜요?” “잘 보렴. 여기에다 하나를 더 놓으면.” “왜요?” 아인슈타인의 질문은 끝이 없었어요. 세 살 때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겨우 입을 뗀 뒤에도 하루 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요. 그래서 ‘심심한 도련님’이라고도 불렸답니다. 학교에 가서도 아인슈타인의 질문은 계속되었어요. “선생님, 이 수학 공식은 무엇을 근거로 한 건가요?” 선생님은 이치를 설명해 주는 대신 무조건 외우라고 했어요. “왜 공식을 외워야 하지요?” “뭐라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어!” 선생님은 화가 나서 아인슈타인을 교실 밖으로 내쫓았어요. 교실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아인슈타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왜 과정을 설명해 주지 않고 무조건 외우라는 거지?’ 그 뒤로도 아인슈타인은 수도 없이 교실 밖으로 쫓겨나곤 했답니다. 아인슈타인은 특히 수학을 좋아했어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삼촌에게 물었어요. 나중에는 대학생들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도 혼자서 척척 풀 정도였지요. 삼촌이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부모님에게 말했지만 부모님은 믿지 않았어요. 엉뚱한 질문만 해 대는 아인슈타인이 잘 자라 주기만 바랐지요. 아인슈타인의 가족은 모두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저녁때면 온 가족이 모여 작은 음악회를 열었답니다. 아인슈타인이 열다섯 살 되던 해였어요. 아버지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졌어요. 아인슈타인은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을 따라 이탈리아로 갔어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아인슈타인은 고생하는 부모님을 위해 빨리 돈을 벌고 싶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위스 공과 대학 입학 시험을 봤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어학과 동식물학 시험에서 낙제를 했기 때문이에요. 아인슈타인이 잔뜩 풀이 죽어 학교를 나설 때였어요. 스위스 공과 대학 학장님이 아인슈타인을 불렀어요. “아인슈타인, 비록 합격하진 못했지만 수학과 물리학 성적이 아주 좋더군. 김나지움에서 낙제한 과목을 다시 공부한다면 입학을 허락하겠네.” 아인슈타인은 너무 기뻤어요. 김나지움에 들어간 아인슈타인은 대학에 들어갈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스위스 공과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 아인슈타인은 단짝 친구 그로스만과 함께 늘 실험실에서 살았어요. 하루는 알코올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 “됐어, 이제 불을 붙여.” 그로스만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어요. “부, 불을 붙이다가 폭발하면 어떡하지?” 성냥을 든 채 덜덜 떨며 아인슈타인이 말했어요.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떻게 실험을 해?” “맞아, 난 물리학자는 못 될 것 같아.” 아인슈타인은 몹시 실망했어요. 그로스만이 다정하게 아인슈타인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어요. “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론 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어때?” 그로스만의 격려에 아인슈타인은 힘을 얻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에서 일했어요. 아인슈타인은 일하는 틈틈이 물리학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대학 때부터 사귀어 온 밀레바와 결혼을 약속했지요. 밀레바는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은 아가씨였어요. 결혼식 날이었어요. 피로연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도착했는데, 집 열쇠가 없는 거예요. 아인슈타인이 미안해하며 주인 할머니를 깨우려고 하자 밀레바가 말렸어요. “주무실 텐데 깨우지 말고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요.” 둘은 현관 앞에서 밤을 꼬박 새웠어요. 그 뒤 아내는 누구보다 아인슈타인을 이해해 주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답니다. 아인슈타인은 스물여섯 살 되던 해 ‘광양자 이론’을 발표했어요. 뒤이어 ‘특수 상대성 이론’도 발표했지요. 그러자 과학자들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어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동안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었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아인슈타인이 누구야?”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을 만나기 위해 특허국으로 찾아왔어요. 그런데 부스스한 머리에 꾀죄죄한 모습을 보고는 모두 어이없어했지요. “당신이 그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입니까?”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진 뒤에도 돈과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지요. 여기저기서 아인슈타인을 데려가려고 야단이었어요.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어요. 아인슈타인은 점점 더 유명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어요. “아빠는 왜 유명한 거예요?” “글쎄, 앞이 보이지 않는 벌레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가르쳐 주었어요?” 아들은 궁금한 듯 눈이 동그래졌어요. “답을 알아낼 때까지 끊임없이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용케 알아내게 된 거야.” 그 무렵 독일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어요. 독일이 전쟁에서 진 것을 모두 유대인 책임으로 돌리며 유대인들을 괴롭힌 거예요. 아인슈타인은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걸 떳떳이 밝혔어요. 그러자 독일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을 비난하며 헐뜯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꾸며낸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지요. 아인슈타인이 강의를 하러 다른 나라에 간 사이 히틀러가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버렸어요. 게다가 아인슈타인을 없애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아버지, 무서워요. 어서 독일을 떠나요.” 가족은 공포에 떨며 아인슈타인을 졸랐어요. 마침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와 달라는 제안을 해 왔어요. 아인슈타인은 하는 수 없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얼마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어요. 오랫동안 전쟁 준비를 해 온 히틀러가 삽시간에 세계를 손 안에 넣은 거예요. 사람들은 히틀러가 무시무시한 원자 폭탄을 만들어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 거라며 불안에 떨었어요. “당장 막아야 해.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인슈타인 박사뿐이야!” 원자 폭탄을 만드는 원리는 바로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이론’을 이용한 거였어요. ‘어떻게 하면 독일의 원자 폭탄 개발을 막을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아인슈타인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어요. 독일을 막으려면 미국이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미국은 서둘러 원자 폭탄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독일이 원자 폭탄을 만든다는 말은 헛소문이었어요. 일본이 전쟁에 합세해 미국을 위협하자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단 두 개의 원자 폭탄은 26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가고, 16만 명이 넘는 사람을 다치게 했어요.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했던 아인슈타인은 너무나 괴로웠어요. ‘내가 연구한 이론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다니.’ 그 뒤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전쟁에 이용되지 않도록 평생을 바쳐 일했어요. 전 세계를 다니며 핵무기 반대 운동을 벌였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라이트 형제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얘들아, 선물이다.” 아버지가 장난감을 사 오셨어요. “우아, 정말 신기하게 생겼어요.” 윌버와 오빌은 장난감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어요. “이건 하늘을 나는 장난감이야. 자, 이 태엽을 감아서 높이 날려 보렴.” “이야, 정말요?” 형제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어요. 그러고는 태엽을 감아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 살며시 놓았어요. 그러자 장난감이 높이 날아올랐어요. 윌버와 오빌은 날아오르는 장난감을 보며 풍선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어요. 어른이 되자, 손재주가 좋은 윌버와 오빌은 자전거 상회를 열었어요. “뚝딱뚝딱.” 자전거를 수리하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가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신문을 보던 형 윌버가 놀라 소리쳤어요. “릴리엔탈이 시험 비행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대.” “비행기를 만들던 독일 사람 말이야?” 오빌이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어요. “그래. 그럼, 이제 누가 비행기를 만들지?” 윌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그러자 오빌이 눈을 반짝거리며 윌버에게 다가왔어요. “형, 우리가 하자. 우리가 비행기를 만드는 거야.” 윌버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어요. “좋아, 우리가 한번 해 보자!” 윌버와 오빌은 새로운 기대로 마음이 설레었어요. 윌버와 오빌은 가게가 끝나면 비행기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시뉴트가 찾아왔어요. 시뉴트는 오랫동안 비행기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에요. 윌버와 오빌은 비행기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시뉴트에게 묻곤 했지요. “자네들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네.” 시뉴트가 내민 커다란 보따리 안에는 비행기에 대한 연구 자료가 가득했어요. “나는 너무 늙었어. 부디 자네들이 완성시켜 주게.” 시뉴트는 윌버와 오빌의 손을 꼭 잡았어요. 윌버와 오빌은 시뉴트의 설계도로 글라이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만들었지요. 드디어 ‘글라이더 1호’가 완성되었어요. “자, 이제 직접 날려 보자.” 형제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키티호크로 갔어요. “형, 내가 먼저 날아 볼게.” “괜찮겠니? 위험할 수도 있는데.” 윌버가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걱정 마. 우린 성공할 거야.” 오빌은 글라이더 1호 위로 올라가 손을 흔들었어요. 그러고는 글라이더 날개를 양팔에 끼고 바람이 강하게 불 때를 기다렸다가 힘껏 달렸어요. 하지만 글라이더는 잠시 떠 있다가 ‘쿵!’ 떨어지고 말았지요. 윌버와 오빌은 실망했지만 다시 힘을 냈어요. “이번엔 꼭 성공할 거야.” 두 사람은 ‘글라이더 2호’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꼬리도 새로 만들어 붙이고 방향 조정 키도 만들었지요. 또 안전하게 날 수 있도록 물새처럼 날개 끝도 구부렸어요. “자, 이제 멋지게 나는 거야!” 윌버와 오빌은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자 오빌은 재빨리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어요. 마을을 하나 지나자 또 다른 마을이 보였어요. 드디어 글라이더 2호가 하늘을 난 거예요. “야호! 오빌, 날았어! 우리가 해냈다고!” 윌버는 오빌을 향해 힘껏 소리쳤어요. 윌버와 오빌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약한 바람에도 날 수 있는 글라이더를 만들자!” 형제는 다시 ‘글라이더 3호’를 만들어 날고 또 날아 보았어요. 마침내 약한 바람에도 날 수 있는 글라이더 3호를 완성했지만 두 사람은 연구를 멈추지 않았어요. “이젠 바람 없이도 하늘을 나는 거야. 비행기에 엔진을 다는 거지.” 윌버와 오빌은 곧바로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철판을 잘라 외형을 만들고 부속을 구해 와 엔진도 만들었어요.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지만 윌버와 오빌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어요. 세상에 첫 번째로 선보일 비행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올랐으니까요. 드디어 가솔린 엔진과 프로펠러가 달린 비행기가 완성되었어요. 라이트 형제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냈어요. 사람이 하늘을 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처음 있는 위대한 일입니다. 비행을 앞둔 전날 밤, 윌버와 오빌은 키티호크로 갔어요. 형제는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까만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지요. “형, 사람들이 우리 비행을 보러 올까?” “물론이지, 내일은 역사적인 날이 될 거야.” 윌버와 오빌은 가슴이 두근거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답니다. 날이 밝자 윌버와 오빌은 비행기를 끌고 모래사장으로 갔어요. “아니, 이럴 수가!” 두 사람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어요. 많은 사람으로 붐빌 것이라 생각했던 모래사장에는 겨우 다섯 사람만 모여 있었거든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야.” 대부분의 사람은 라이트 형제의 말을 믿지 못했어요.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도 혹시 비행기가 추락하면 라이트 형제를 구하려고 온 거였지요. “걱정 마. 우리는 반드시 해낼 거야.” 윌버와 오빌은 서로를 격려하며 각오를 다졌어요. 오빌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행기 위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날개 위에 바짝 엎드린 다음 소리쳤어요. “형, 준비됐어!” 오빌이 신호를 보내자 윌버는 프로펠러를 힘껏 돌렸어요. “부릉, 부릉, 부르릉!” 엔진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우아! 난다, 날아!”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하며 소리쳤어요. 라이트 형제의 소문은 삽시간에 이웃 나라에까지 퍼졌어요. 사람이 난다는 소문은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지요. “라이트 형제가 프랑스에 온대!”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요. 붉게 물든 저녁 하늘 위를 나는 모습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어요. “세상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윌버와 오빌은 ‘하늘의 왕’이라 불렸답니다. 얼마 뒤, 미국 정부가 큰 제의를 해 왔어요. 비행기에 한 사람을 더 태우고 하늘을 날면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를 사겠다는 제안이었지요. 너무나 좋은 기회였어요. 오빌은 시험 비행을 마친 다음, 셀프리지 중위를 태웠어요. “중위님, 이제 출발합니다.” 오빌이 조정 키를 잡았어요. 그런데 날아오른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어요. “앗! 프로펠러가 부러졌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순간, 비행기는 땅으로 곤두박질쳤어요. 이 사고로 셀프리지 중위는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나 때문에 셀프리지 중위가 죽은 거야.” 심하게 부상을 입은 오빌은 죄책감에 괴로워했어요. ‘안타깝게 죽은 셀프리지 중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해.’ 오빌은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그리고 건강이 회복되자 문제점을 찾아내어 새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얼마 뒤, 오빌은 다시 비행기에 올랐어요. 옆에는 레일 중위가 함께 탔지요. 드디어 비행이 시작되었어요. 비행기는 뭉게구름을 뚫고 자유롭게 날아올랐어요. “우아, 성공이야, 성공!”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어요. 오빌이 마치 곡예를 하듯 멋진 비행을 마치고 내려오자 여동생 캐서린이 맨 먼저 달려왔어요. “오빠, 축하해요!” 캐서린은 오빠들을 도우며 누구보다 이 순간을 기다렸거든요. 숨 죽이고 지켜보던 대통령이 다가와 라이트 형제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어요. “축하하네. 약속한 대로 자네들이 만든 비행기를 사겠네.” “축하해요, 축하해!” 모여 있던 사람들도 박수를 보내며 축하해 주었어요. 라이트 형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하늘의 왕’이 되었어요. 한 프랑스 사업가의 도움으로 ‘아메리칸 라이트 비행기 제작 회사’도 차렸지요. 윌버와 오빌은 큰 부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비행기에 대한 연구는 끊임없이 계속했어요. 1912년, 윌버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30여 년이 지난 1948년 오빌도 형을 따라 눈을 감았어요. 지금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낸 라이트 형제 덕분이랍니다. 세상에 날개를 달아 준 발명가 라이트 형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 했어요. 옛이야기만 보더라도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리스 신화에는 하늘을 날다가 바다로 곤두박질친 이카루스 이야기가 나와요. 도를 닦은 도사가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이야기도 있고,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모험을 즐기는 아라비아의 옛이야기도 있어요. 또 안데르센 동화에는 가방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나는 이야기도 실려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재미와 더불어 꿈을 갖게 해요.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것을 단순히 이야기로 즐기기보다는 진짜로 하늘을 날기 위해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13세기 로저 베이컨은 공기를 뺀 커다란 공을 생각해 냈어요. 공기를 빼면 주변보다 가벼워져서 커다란 공이 둥실둥실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파브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앙리 파브르는 남프랑스에 있는 생레옹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생레옹은 땅이 험하고 거칠어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파브르네 집은 몹시 가난했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파브르를 할아버지 집에 맡기기로 했어요. “파브르, 할아버지 집에는 가축들이 많단다. 먹을 것도 풍족하고.” 파브르는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어요. 넓은 들판을 지날 때였어요. 나풀나풀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파브르 앞으로 날아왔어요. “아빠, 호랑나비 좀 보세요!” 파브르가 나비를 쫓아가며 소리쳤어요. 들판 가득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지만, 파브르는 호랑나비에게 마음을 쏙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일꾼이 많았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식사 때마다 많은 음식을 준비했어요. “파브르, 이리 오너라.” 할아버지는 언제나 파브르를 곁에 앉게 했어요. 파브르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셨거든요. 저녁 식사가 끝나면, 파브르는 물레를 돌리는 할머니 곁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그런데 파브르는 늘 이야기 밖의 것이 더 궁금했어요. “할머니,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귀신들은 어째서 빵을 먹지 않죠?” “글쎄다.” 궁금증을 풀지 못한 날이면, 파브르는 밤늦게까지 혼자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곤 했어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어요. 파브르는 눈이 너무 부셔 이맛살을 찌푸렸어요. ‘나는 저 해를 눈으로 보는 걸까, 아니면 입으로 보는 걸까?’ 파브르는 해를 바라보다가 문득 실험해 보고 싶었어요. 먼저, 두 눈을 감고 입을 크게 벌렸어요. 해는 보이지 않았지요. 다음에는 입을 꼭 다물고 눈을 크게 떴어요. 그러자 눈부신 해가 한눈에 쏘옥 들어오며 눈물이 났어요. 파브르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았어요. 그러고는 저녁 식탁에서 낮에 실험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어요. “하하하! 파브르, 그런 걸 실험해 보다니. 정말 엉뚱하구나!” 일꾼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 댔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대견스러운 듯 말했어요. “파브르, 훌륭하구나. 작은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날 밤이었어요. “찌르르, 찌르르륵.”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어요.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파브르는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이틀 밤이나 찾아다닌 끝에야 풀숲에서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냈지요. 파브르는 살금살금 다가갔어요. “잡았다!” 그것은 날개가 얇고 초록빛이 나는 작은 벌레였어요. 할아버지가 ‘풀무치’라고 알려 주었어요. 파브르는 풀무치를 밝은 불빛에 비춰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찌르르, 찌르르륵.” 풀무치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파브르를 곤충의 세계로 푹 빠져 들게 했답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파브르는 생레옹의 집으로 돌아왔어요. 학교에 가기 위해서였지요. 학교에는 피에르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것저것 아는 것이 참 많았어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들로 산으로 마음껏 뛰어다니게 했지요. 하루는 아이들에게 자루를 하나씩 나누어 주며 말했어요. “자, 오늘은 달팽이를 잡아 볼까?” 아이들은 신이 나서 달팽이를 잡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파브르는 달팽이를 한 마리 잡고선 눈을 떼지 못했어요. ‘이 큰 달팽이는 무늬도 있네? 집에 가지고 가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지.’ 파브르는 집에 와서도 달팽이만 바라봤어요.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때까지도 파브르는 제 이름조차 쓰지 못했거든요. 아버지는 걱정 끝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곤, 동물 그림 밑에 이름이 쓰인 낱말 카드를 사 왔어요. “아빠, 너무 재미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파브르는 동생에게 가르쳐 줄 만큼 글자를 깨우쳤답니다. 그런데 파브르의 집안 형편이 더욱 나빠졌어요. 하는 수 없이 파브르네 집은 로데즈로 이사를 했어요. 부모님은 그곳에서 작은 음식점을 차렸어요. 하지만 음식점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어요. 결국 어머니는 다른 가게의 점원으로 일해야 했고, 동생은 친척 집에 맡겼어요. 그래서 파브르는 혼자 지내게 되었답니다. 파브르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시장에서 레몬을 팔기도 하고, 공사장에서 흙을 나르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비뇽 거리를 지나다가 반가운 소식을 들었어요. “아비뇽 사범학교에서 장학생을 뽑는다는군.” 아비뇽 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면, 수업료뿐 아니라 먹고 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파브르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그래서 아비뇽 학교에 1등으로 합격했답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서도 곤충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어요. “파브르, 공부는 하지 않고 책상 밑에서 무얼 하는 거지?” 라틴 어 선생님이 큰 소리로 물었어요. “땅벌 꽁무니에서 빼낸 침과 매미의 허물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파브르는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어요. 선생님은 속이 상해 파브르의 일을 교장 선생님께 알렸어요. “이상한 일이군요. 1등으로 들어온 학생이 수업 시간에 벌레나 들여다보다니.” 교장 선생님은 파브르를 불러 이유를 물었어요.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교장 선생님은 파브르를 3학년으로 올려 주었어요. 파브르는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어요. 파브르는 초등학교에서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가르쳤어요. 그러면서 파브르는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는데, 얼마 안 가 수학과 물리학 선생님 자격증을 모두 땄어요. 파브르는 중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기 위해 코르시카로 갔어요. 그 무렵 초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마리와 결혼도 했고요. 코르시카는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섬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당통이 코르시카로 왔어요. 당통은 유명한 물리학자인데, 코르시카 섬에 있는 동물과 식물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온 것이었지요. 파브르는 당통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함께 연구에 몰두했어요. 그런 파브르를 보고 당통이 말했어요. “수학이나 물리학보다 생물학을 공부하는 게 어떻겠소? 당신은 훌륭한 생물학자가 될 것 같소.” 파브르는 당통의 말에 가슴이 설레었어요. 연구에만 몰두하던 파브르는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늘 질척질척한 늪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병을 얻은 거예요. 하는 수 없이 파브르는 프랑스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건강이 회복되자 아비뇽의 한 중학교에서 다시 물리학을 가르쳤어요. 그러던 어느 날, 파브르는 의사이면서 곤충학자인 ‘뒤프르’가 쓴 책을 읽게 되었어요. 비단벌레와 나나니벌에 대한 내용이었지요. ‘나나니벌은 죽은 비단벌레의 몸에 썩지 않게 하는 침을 놓는다. 그런 다음, 비단벌레 몸에 알을 낳아 알에서 깬 애벌레가 비단벌레를 먹게 한다.’ 파브르는 날이 밝도록 뒤프르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어요. ‘벌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할 일이야.’ 파브르는 새로운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나나니벌과 비슷한 노래기벌을 잡아서 침에 든 독성분을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비단벌레 대신 바구미를 먹이로 주었고요. 그런데 노래기벌에 쏘인 바구미를 관찰하던 파브르는 깜짝 놀랐어요. 벌에 쏘여 죽은 줄 알았던 바구미가 사흘이 지나도록 썩지 않는 거예요. 다시 바구미 연구에 몰두한 파브르는 드디어 굉장한 사실을 알아냈어요. ‘알았다, 노래기벌은 바구미를 죽이지 않고 신경을 마비시켜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한 거야!’ 파브르는 노래기벌 연구 내용을 자세히 써서 과학 잡지에 발표했어요. “참으로 멋진 연구를 해냈군요. 어려움이 많겠지만, 더욱 훌륭한 연구를 부탁합니다.” 파브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큰 상을 받았답니다. 아비뇽에서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강좌를 열고 있었어요. 파브르는 교육부 장관의 부탁으로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했어요. 파브르의 강의는 인기가 대단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강의를 하러 강의실에 도착한 파브르는 어이없는 소식을 들었어요. “파브르 선생의 강의가 취소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항의가 들어온 거예요. 새롭고 신비한 곤충들 이야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거지요. 이 일로 파브르는 학교에서도 쫓겨났고 집마저 비워 주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파브르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어요. 파브르는 자기가 알아낸 곤충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썼어요.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파브르에게 높은 관심을 보였어요. 파브르는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지요. 덩굴식물인 꼭두서니 연구로 훈장까지 받았고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이었어요. 사랑하는 아들이 죽고 만 거예요. 파브르는 큰 슬픔에 잠겼어요. 그러나 슬픔을 딛고 일어나 오래전부터 아들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지요. 바로 쉽고 재미있는 곤충기를 쓰기 시작한 거예요. 오랜 시간 끝에 파브르의 곤충기가 책으로 나왔지만 학자들의 반응은 차가웠어요. “너무 쉽게 쓰였어!” 그러나 파브르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곤충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흥미를 갖도록 해야 해.’
파스퇴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병균이 병을 옮긴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예전에는 달랐답니다. 사람들은 병균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병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다.” 이렇게 생각할 뿐 병이 왜 생기는지조차 알지 못했어요. 의사들마저 병이란 몸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 보니 의사들은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고, 수많은 사람은 왜 병이 났는지도 모른 채 죽어 가야 했어요. 질병은 수천 년 동안 인류가 풀지 못한 숙제였지요. 질병의 비밀을 밝혀낸 사람이 바로 루이 파스퇴르입니다. 루이 파스퇴르는 1822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어요. 파스퇴르는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어요.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가족들 얼굴을 그렸지요. “이것 좀 봐요. 파스퇴르가 그린 그림인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어린애가 어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지?” 파스퇴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모두 감탄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어요. 파스퇴르가 그림 그리느라 공부를 게을리했기 때문이에요. “파스퇴르, 공부는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릴 거니?” “공부보다 그림 그리는 것이 더 재미있어요.” 부모님의 꾸중에도 파스퇴르는 계속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어요. 주위 사람들은 파스퇴르가 화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파스퇴르의 꿈은 따로 있었어요. “나는 에콜 노르말에 들어가 선생님이 될 거야.” 에콜 노르말은 파리에 있는 유명한 사범대학이에요. “너같이 공부도 못하는 애가 에콜 노르말에 간다고?” 친구들은 파스퇴르를 비웃었어요. 에콜 노르말은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만 모이는 학교였거든요. 목표가 정해지자 파스퇴르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에콜 노르말에 당당히 합격했답니다. “정말 장하구나, 파스퇴르!” 파스퇴르가 꿈에도 그리던 대학에 합격하자, 부모님도 뛸 듯이 기뻐했어요. 어느 날 교수님이 파스퇴르에게 현미경을 내밀었어요. “이걸 한번 보게나.” 파스퇴르는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어요.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소금이야. 소금은 한 가지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세 개의 결정체가 섞여 있어.” 현미경으로 바라본 소금의 모양은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웠어요. ‘왜 세 가지가 섞여 있을까?’ 파스퇴르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간만 나면 실험실로 달려갔어요. “화학이란 알수록 신기한 학문이구나!” 파스퇴르는 실험을 하면 할수록 화학이 재미있었어요. 친구들은 파스퇴르를 ‘실험 벌레’라고 불렀답니다. 대학을 졸업한 파스퇴르는 화학 교수가 되었어요. “저기 있는 포도로 설탕을 만들 수 있고, 그 설탕으로 알코올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알코올로 다시 식초를 만들 수 있지요. 화학이란 이렇게 신기한 학문입니다.” 파스퇴르는 어려운 화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했어요. 파스퇴르의 수업 시간은 웃음과 활력이 넘쳤어요. 학생들은 파스퇴르의 강의를 매우 좋아했어요. “파스퇴르 선생님 때문에 화학이 좋아졌어.” 강의실은 언제나 학생들로 넘쳐났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파스퇴르를 찾아왔어요. “저는 술을 만드는 사람인데, 종종 술이 시어져서 많은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술이 시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술이 시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 파스퇴르는 그날부터 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어요. 파스퇴르는 공장에서 신선한 술과 시어진 술을 가지고 왔어요. “이걸 어떻게 연구해야 하지?” 막상 술을 가지고는 왔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래, 먼저 현미경으로 관찰해 봐야겠어.” 파스퇴르는 술을 한 방울 떨어뜨려 조심스럽게 들여다봤어요. 무엇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관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저게 뭐지? 아주 작고 둥그런 것들이 움직이고 있네?” 파스퇴르는 깜짝 놀랐어요. 술에 작은 생물들이 살고 있었던 거예요. 이번엔 시어진 술을 관찰했어요. 거기에는 둥글고 작은 생물 대신 검고 작은 막대 모양의 생물이 움직이고 있었어요. 많이 시어진 술일수록 막대 모양의 생물이 많았어요. 계속해서 술을 관찰하던 파스퇴르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어요. “둥글고 작은 생물들은 과일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고, 막대 모양의 생물들은 술을 시어지게 하는구나.” 수천 년 전부터 과일이나 곡식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지만, 과일이 발효되면 왜 술이 되는지 아무도 몰랐답니다. 그런데 파스퇴르가 발효의 신비를 푼 거예요. 파스퇴르는 여러 가지 실험 끝에 술이 시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술을 60도 정도로 끓여서 보관하세요. 그러면 시어지게 하는 미생물이 죽어 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퇴르식 저온 살균법’이에요. 파스퇴르식 저온 살균법은 포도주나 맥주뿐만 아니라 우유, 식초 같은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데도 쓰였어요. “선생님 덕분에 포도주를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파스퇴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파스퇴르는 한사코 거절했어요.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과학자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술에서 미생물을 발견한 파스퇴르는 미생물에 대한 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어요. 그 결과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미생물을 찾아냈지요. 또 실험을 통해 미생물의 비밀도 하나씩 밝혀냈고요. “미생물은 음식을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미생물이 있기 때문에 술이나 치즈를 만들 수 있지요. 미생물은 어디에나 있어요. 지금 우리 눈앞에도 미생물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파스퇴르는 가는 곳마다 미생물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파스퇴르의 발견은 전 세계 과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그리고 과학자로서 파스퇴르의 이름을 널리 알렸어요. 파스퇴르는 마흔 살 때 과학자의 최고 영예인 과학 학술원 회원이 되었어요. 또한 프랑스 황제가 파스퇴르를 위해 실험실까지 직접 지어 주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스퇴르의 아내가 울면서 연구실로 뛰어왔어요. 병을 앓던 딸 세실이 갑작스레 죽은 거예요. “아, 어린아이가 병으로 죽어야 하다니.” 파스퇴르는 깊은 절망에 빠졌어요. 벌써 세 딸을 병으로 잃었거든요.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몇 년 사이 딸 셋을 모두 잃자, 파스퇴르는 질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얼마 뒤, 파스퇴르도 뇌출혈로 쓰러져 몸의 왼쪽이 마비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파스퇴르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어요. “질병은 병균 같은 미생물 때문에 생긴다.” 파스퇴르는 오랜 기간 미생물을 연구한 결과, 질병이 미생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파스퇴르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의사들도 비웃었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스퇴르는 여러 과학자와 함께 소나 닭에게 병을 일으키는 병균을 찾아내어 비웃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파스퇴르는 실험실에서 병균들을 직접 키우며 연구에만 전념했어요. 한쪽이 마비되어 불편한 몸이었지만 실험을 멈추지 않았지요. 파스퇴르는 제자들에게 항상 말했어요. “모든 질병은 사람 손에 달려 있다.” 파스퇴르가 콜레라를 연구하던 1880년 여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어요. 기르던 콜레라균을 그대로 두고 휴가를 다녀온 뒤, 오래된 콜레라균을 암탉에게 주사했어요. 그런데 주사를 맞은 닭들이 병에 걸렸다가는 금방 나은 거예요. “이상하다? 병균이 약해져서 그런가?” 새로운 콜레라균을 다시 주사했지만 닭들은 멀쩡했어요.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었어요. 약해진 병균을 주사하면, 몸이 그 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낸 거예요. 파스퇴르는 이러한 예방법을 ‘백신법’이라고 불렀어요. 파스퇴르는 백신법을 이용해서 탄저병이나 콜레라 같은 동물들의 질병을 예방하는 데 성공했어요.
스티븐 호킹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형, 밥 먹을 때도 꼭 책을 봐야 해?” 막내 에드워드가 밥을 먹다 말고 물었어요. 스티븐은 에드워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고개를 숙여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모두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식사를 했어요. 그래서 스티븐네 저녁 식탁에서는 책장 넘기는 소리와 숟가락 달각거리는 소리만 났답니다. 아직 어린 막내 에드워드는 이런 분위기가 늘 못마땅했어요. “어휴, 누구 나랑 놀 사람 없어?”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요. 책을 보지 않을 때는 가족이 모여서 게임을 했어요. 체스를 두거나 낱말 게임을 했지요. “우리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볼까?” 항상 똑같은 게임을 하는 게 싫증 난 스티븐이 말했어요. “정말? 오빠가 게임을 만들 수 있어?” 동생들은 스티븐이 어떤 게임을 만들지 잔뜩 기대에 부풀었어요. 며칠을 생각한 끝에 스티븐은 중세 영국을 배경으로 한 보드 게임을 만들었어요. “우와, 재미있다. 어떻게 이런 게임을 만들었어?” “게임 만드는 법 좀 가르쳐 줘. 응?” 동생들이 법석을 떨며 졸라 댔어요. 스티븐은 그다지 주목받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창가에 앉아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던 금발 소년이 거대한 우주의 비밀을 풀어 낸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스티븐의 천재성은 가끔씩 모두를 놀라게 했답니다. “아무도 못 풀겠니?”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물었어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스티븐이 손을 들었어요. 그리고 암산으로 뚝딱 계산해 답을 말했어요. “아니, 스티븐,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계산한 거니?” 모두 놀란 얼굴로 스티븐을 바라보았어요. “머릿속으로요. 암산이 훨씬 빨라요.” 스티븐이 씩 웃으며 대답했어요. 스티븐의 대답에 선생님도 깜짝 놀랐어요. 스티븐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얘들아, 컴퓨터라고 들어 봤니?” “컴퓨터?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어.” 당시에는 컴퓨터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어요.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물론 구경해 본 사람도 거의 없었지요. “그럼, 우리가 만들어 볼래?” 스티븐의 말에 친구들은 망설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먼저 컴퓨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원리를 찾아낸 다음.” 스티븐과 친구들은 꼬박 한 달 동안 컴퓨터 만드는 일에 몰두했어요. 그리고 한 달 뒤, 드디어 작은 컴퓨터를 한 대 만들었어요. 고등학생들이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소식은 지방 신문에까지 실렸답니다. 스티븐은 열일곱 살에 옥스퍼드 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어요. 친구들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지요. 스티븐은 대학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수학과 물리학만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래서 다른 과목 교수들한테 미움을 사기도 했답니다. 어느 날, 통계학과 교수가 스티븐을 불렀어요. “자네는 공부를 통 안 하는 것 같아. 자, 다음 시간까지 이 책에 나온 문제를 모두 풀어 오게. 숙제를 안 해 오면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스티븐은 두꺼운 통계학 책을 받고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스티븐, 숙제는 다 해 왔겠지?” 며칠 뒤, 통계학 교수가 물었어요. “네, 하지만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는 아닙니다. 숙제를 하려고 보니 책에 틀린 부분이 너무 많더군요. 그래서 틀린 곳을 모두 찾아내 고쳤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책을 펼쳐 본 교수는 깜짝 놀라 스티븐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스티븐의 천재성에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스티븐은 대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주는 물리학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진학했지요. 하지만 스티븐이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몸무게가 얼마나 되는데?” 스티븐이 조정 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덩치 큰 선수들이 비웃으며 물었어요. “50킬로그램이 조금 넘습니다.” “그 몸으로 노를 들어 올릴 수나 있겠어?” “아니요, 저는 키잡이가 되고 싶습니다.” 키잡이는 노를 젓지 않고 배 앞머리에서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이에요. 머리가 좋고 몸이 가벼운 스티븐에게 딱 맞는 일이지요. 그래서 스티븐은 조정 선수로도 활동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은 신발 끈을 매려다 푹 주저앉고 말았어요. “이상하다. 왜 손이 잘 움직여지지 않지?” 차츰 말하는 것도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몸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어요. 병원을 찾은 스티븐은 당장 입원해야 했어요. “무슨 병입니까?”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어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입니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란 목 아래쪽 근육이 마비가 되는 병이에요. “그럼 제가 죽나요?”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고, 내장까지 마비되면. 보통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2, 3년 안에 죽습니다.” 스티븐은 말을 잃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괴로워했어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연구가 무슨 소용이람.’ 스티븐은 2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지냈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목 아래가 마비된다고? 그래, 목 아래만 마비되는 거야! 생각하고 연구하는 머리는 멀쩡하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연구는 계속할 수 있는 거잖아!’ 스티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어요. 당장 학교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했지요.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걸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 되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병은 스티븐의 몸속 깊이 파고들었어요. ‘손에 힘이 없으니 어떡하지?’ 스티븐은 두 손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어요. 손의 근육이 마비되어 글씨를 쓸 수조차 없었거든요. 글을 쓸 수 없으니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도 없었지요. 그즈음, 스티븐은 제인을 만났어요. 제인은 모든 걸 알고서도 스티븐을 사랑했어요. “당신이 논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게요.” 제인은 스티븐 옆에서 스티븐의 연구와 생활을 도와주었어요. 제인 덕분에 무사히 논문을 완성한 스티븐은 곤빌 앤 케이스 대학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답니다. 그해 여름, 스티븐은 미국의 코넬 대학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었어요. 스티븐은 그곳에서 자신의 연구를 한층 깊게 해 줄 친구를 만났어요. 수학자 로저 펜로스였는데, 우주에 관심이 아주 많았어요. 두 사람은 함께 우주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얼마 뒤 당시의 학설을 뒤엎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어요. 당시에는 ‘정상 우주론’ 이라는 학설이 옳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스티븐은 정상 우주론의 잘못된 점을 밝히고 ‘우주는 대폭발로 만들어졌다’ 는 대폭발 이론을 증명했어요. 이 연구 결과로 스티븐은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어요. 스티븐은 블랙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우주 연구 분야의 최고 과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답니다. 스티븐이 일하는 곤빌 앤 케이스 대학 연구소에서는 월급을 받으려면 강의를 해야 했어요. 하지만 스티븐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었어요. 힘없는 목소리로 말도 더듬더듬 겨우 했거든요. 결국 스티븐은 월급을 주는 다른 연구소를 찾았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곤빌 앤 케이스 대학은 발칵 뒤집혔어요. “스티븐처럼 훌륭한 과학자를 다른 데로 보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스티븐에게 월급을 줍시다.” 스티븐은 이 대학에서 월급을 받는 최초의 연구원이 되었어요.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왕립 협회 회원도 되었고요. 또한 1980년에는 루카시언 석좌 교수가 되었어요. 루카시언 석좌 교수는 영국 과학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지요. 그러나 1985년, 스티븐의 건강에 다시 큰 문제가 생겼어요. 폐렴에 걸려 정신을 잃은 거예요. “기관 절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수술을 안 하면 목숨이 위험해요. 그런데 기관을 절개하면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의사들은 스티븐의 목소리도, 목숨도 지켜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긴 수술 끝에 스티븐은 목소리를 완전히 잃고, 숨도 가슴에 꽂은 관을 통해 겨우 쉴 수 있었어요. 그러나 스티븐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강연을 하려면 어른 남자 둘이 휠체어를 옮기고, 간호사가 따라다니며 스티븐의 건강을 보살펴야 했어요. 연구를 할 때도 조수가 따라다녀야 했고요. 하지만 스티븐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김홍도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김홍도는 1745년, 조선 시대 후기에 태어났어요. 전쟁이 없고 나라 살림도 넉넉한 태평한 시기였지요. 홍도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해 서당 공부가 끝나면 외갓집에 들렀다 오곤 했어요. 화원인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그린 그림을 구경하느라고요. ‘화원’이란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말해요. 하지만 그 시절에는 화원을 ‘환쟁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홍도가 외갓집에 자주 드나드는 걸 몹시 싫어했지요. “홍도야, 또 외갓집에 갔다 왔구나.” 어머니는 홍도가 열심히 공부해 높은 벼슬을 하길 바랐거든요. 홍도는 꾸중을 들어도 그림 생각만 하면 마냥 즐거웠어요. ‘외삼촌이 그린 그림을 나도 그려 봐야지!’ 홍도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종이를 펼쳤어요. 붓에 먹물을 찍어 종이에 동그라미 다섯 개를 그렸어요. ‘이야, 외삼촌이 그린 매화꽃과 비슷한걸!’ 홍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외갓집에 다녀온 어머니가 홍도에게 붓과 먹, 벼루를 내밀었어요. “외삼촌께서 이것들을 너에게 주라고 하셨다.” 마침내 어머니가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한 거예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홍도는 뛸 듯이 기뻤어요. 다음날, 아버지는 홍도를 데리고 외할아버지 댁에 갔어요. “홍도야, 그림을 한번 그려 보아라.” 홍도는 다소곳이 앉아 먹물에 붓을 적신 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을 그렸어요. “참으로 대단한 솜씨로구나!” 외할아버지는 무릎을 치며 놀라워했어요. 아버지도 무척 기뻐했지요. “그림 공부를 하되 항상 예의를 지키며 겸손해야 한다.” 아버지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어요. 얼마 뒤, 외삼촌은 홍도를 김응환에게 소개했어요. “홍도가 그린 그림이라네.” 김응환은 도화서에 있는 사람으로 홍도보다 열여덟 살이나 많았어요. 도화서는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에요. “아니, 이토록 뛰어난 솜씨를 집에서 썩게 하다니!” 김응환은 홍도가 그린 그림을 강세황에게 보이자며 서둘렀어요. 강세황은 조정 안 예술가들의 우두머리로 글과 그림에 뛰어난 사람이었지요. 며칠 뒤, 강세황이 직접 홍도의 외갓집을 찾아왔어요. “정말 뛰어난 재주를 가졌군.” 강세황은 홍도의 솜씨를 크게 칭찬하며 도화서에서 일하게 해 주었어요. “그림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는군.” 홍도는 도화서 안에서 곧 유명해졌어요. 하지만 늘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요. 홍도는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어요. 어느 날, 김응환은 홍도에게 자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여 주었어요. “마치 금강산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는 듯합니다!” 홍도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김응환은 금강산 그림을 홍도에게 선물했어요. 스승이 제자에게 그림을 선물한다는 것은 제자의 실력을 크게 인정한다는 뜻이지요. 하루는 홍도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왔어요. “저는 김한태라고 합니다. 제 어머니 환갑 때 병풍을 선물하고 싶은데 제게 병풍 그림을 그려 주실 수 있는지요?” 홍도는 김한태의 겸손함과 효심에 감동하여 병풍 그림을 그려 주었어요. “참 훌륭한 그림일세! 어느 대감 댁에 보내는 병풍인가?” 화원들의 물음에 홍도는 대답 대신 그저 빙긋이 웃었어요. “어머니께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한태는 고마움의 뜻으로 홍도에게 많은 식량과 옷감을 보냈어요. 그 뒤, 홍도는 정식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어요. 강세황과 김응환은 진심으로 축하하며 홍도에게 ‘단원’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어요. 홍도는 스물여덟 살 때 강세황의 추천으로 영조 임금님과 왕세손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어요. 홍도뿐만 아니라 다섯 명의 화원이 함께 그렸지요. 그 가운데 변상벽이 그린 왕세손의 초상화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뽑혔어요. 영조 임금님의 초상을 잘 그린 사람으로는 홍도가 뽑혔고요. 얼마 뒤, 영조 임금님이 세상을 떠나고 왕세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정조 임금님이지요. 그 뒤, 홍도는 정조 임금님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어요. “내가 세손이었을 때 그려 준 그림도 훌륭했는데, 이번 그림은 더욱 뛰어나구려!” 정조 임금님은 매우 기뻐하며 홍도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어요. 세월이 흘러, 어느덧 홍도의 나이 마흔세 살이 되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제각기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둘 수는 없을까?” 정조 임금님은 김응환과 홍도를 불러 금강산을 그려 오라고 명을 내렸어요. 두 사람은 금강산을 여러 방향에서 그리기로 하고 단발령을 거쳐 외금강과 해금강을 두루 돌아보았지요. 홍도와 김응환은 금강산의 돌멩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렸어요. 마치 금강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지요. “참으로 훌륭하오. 마치 금강산 앞에 서 있는 것 같구려!” 정조 임금님은 백 장이 넘는 금강산 그림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두 사람을 칭찬했어요. 얼마 뒤, 정조 임금님이 두 사람을 다시 불렀어요. “일본 쓰시마 섬을 그려 주시오. 나라의 안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이오. 경치를 그대로 그리되, 멀고 가까운 거리를 상세하게 그려 주시오.” 그런데 김응환은 금강산에서 돌아온 뒤로 자주 앓아누웠어요. 김응환은 아픈 몸을 이끌고 홍도와 함께 부산까지 갔지만, 결국 병이 깊어져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스승이자 친구였던 김응환이 세상을 떠나자, 홍도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홍도는 슬픔을 뒤로하고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쓰시마 섬에서 지내는 동안 홍도는 온갖 고초를 다 겪었어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일본인으로부터 갖은 욕설을 들어야 했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홍도는 쓰시마 섬 곳곳을 상세하게 그렸어요. “그대의 공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정조 임금님은 홍도의 손을 꼭 잡았어요. 정조 임금님은 홍도에게 아버지 사도 세자의 넋을 모신 용주사에 불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홍도도 뒤주 속에서 처참하게 세상을 떠난 사도 세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요. 홍도는 강세황을 찾아가 불화 그리는 방법을 물었어요. “서양 그림에는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는 원근 기법이 있지. 그림자가 있는 듯 그려 넣는 음영 기법도 있고. 그런 것들은 배울 만한 점이라네. 있는 그대로만 그릴 것이 아니라 개성을 살려야 하네.” 홍도는 강세황의 말대로 서양 그림의 기법을 참고하여 최선을 다해 불화를 그렸어요. “그대가 그린 사천왕을 보면 너무 무서워 죄지을 생각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구려.” 완성된 불화를 보고 정조 임금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홍도는 점점 더 유명해졌어요. 강세황은 홍도를 ‘역사에 길이 남을 화가’로 손꼽았지요. 홍도에게 큰 힘이 되어 주던 강세황이 세상을 떠난 뒤, 홍도는 충청도 어느 마을에 현감으로 가게 되었어요. 해마다 흉년이 계속되어 살기는 어려웠으나 백성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지요. 홍도는 관가의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어요. 김홍도는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불화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어요. 특히 사실적인 묘사를 예술로 꽃피운 산수화와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익살스러운 풍속화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지요. 김홍도의 그림은 당시에 이름을 떨친 신윤복, 이인문, 김득신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하늘이 낸 천재 화가 김홍도!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한 김홍도의 세계를 따라가 보아요. ‘저토록 순박한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지. 그림으로 남겨 두어야겠다.’ 홍도는 단오와 한식, 한가위 때 백성이 명절을 맞는 모습을 그림으로 옮겼어요. 그리고 3년 뒤, 현감 자리에서 물러났답니다. 홍도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자 집안 형편은 다시 어려워졌어요. “생활은 걱정하지 말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마음을 쏟으시지요.” 그 사정을 안 김한태가 홍도에게 쌀과 옷감을 보내 주었어요.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잊지 않고 도움을 주다니, 참으로 고맙구려.” 홍도는 김한태 앞에서 시를 한 수 읊으며 고마움을 전했어요. 오래된 먹을 가니 책상에 향기가 가득하구나. 벼루에 물을 담아 놓으니 얼굴이 비쳐 보이는구나. 산새는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날마다 와서 울어 대고 들꽃은 심어 놓은 사람 없어도 향기를 내뿜는구나. 그리고 정성스럽게 그려 만든 작은 화첩을 선물했어요. 홍도는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오랫동안 갈고닦은 끝에 개성이 뚜렷한 그림을 그리게 된 거예요. 틈틈이 평범한 백성의 생활 모습을 그리기도 했어요. 홍도가 그린 서당에는 훈장님과 우는 아이, 웃음을 참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요. 또 씨름은 씨름하는 남자의 다리 힘줄이 곧 튕겨 나올 듯 생생하지요. 홍도의 그림은 생동감이 넘쳐 흘렀어요. 그러는 동안, 홍도는 어느덧 예순 살이 되었어요. 홍도는 아들이 화원이 되어 기뻤으나, 몸은 병들어 늘 울적했어요. 게다가 결혼 뒤 홀로 된 딸마저 병이 들어 홍도의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답니다. 홍도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종종 텃밭에 나가 밭일을 했어요. 낮에는 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밤에는 낚시를 한다네. 그러면서 구름 위에도 밭을 간다네. 이것이 농부가 된 나의 요즘 생활이라네. 홍도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냈어요. 그래서인지 그 무렵 홍도의 그림에는 논과 밭이 자주 등장해요. 홍도는 병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타며 시를 지었답니다. 어느 해에 홍도가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은 오래도록 빛날 것입니다. 김홍도는 조선 시대 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가 되는 것 을 바라지 않았으나 아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어요. 김홍도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그림 연습을 하여 외삼촌의 소개로 김응환을 만나게 되었 어요. 김응환은 김홍도가 장차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강세황에게 소개하였지요. 또 강세 황은 김홍도가 도화서 화원이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었 어요. 어느 날, 김홍도는 소금을 만들어 파는 김한태라는 사 람을 알게 되었어요. 김한태는 김홍도에게 어머니의 환갑에 쓸 병풍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김홍도는 김한태의 효성에 감동하여 부탁을 들어주었지요. 김 한태는 고마운 마음으로 김홍도의 집에 쌀과 옷감을 보내 살림을 도와주었답니다. 그 뒤, 김한태는 죽을 때까지 김홍도가 그림을 그 릴 수 있도록 돌봐 주었어요. 김홍도는 화원으로서 점점 이름이 높아졌고, 마침 내 정조 임금님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어요. 또 정조 임금님의 명령으로 금강산도 그렸고요. 김홍도는 임금님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금강산을 그렸어요. 얼마 뒤, 김홍도와 김응환은 정조 임금님으로부터 쓰시마 섬을 그려 오라는 명을 받았어요. 그러나 김응환은 건강이 나빠져 쓰시마 섬으로 향하던 도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김홍도는 쓰시마 섬에 도착 한 뒤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며 그림을 그렸으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추 위에 떨고 며칠씩 굶기도 했으며,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져 갖은 고생을 해야 했지요. 일본에서 돌아온 김홍도는 다시 임금님의 명으로 용주사에 불화를 그리게 되었어요. 그 뒤, 연풍 현 감으로 내려가 마을을 다스리면서 백성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그렸지요. 서양의 명암 기법과 원근 기법을 받아들여 김홍도는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만들어 냈어요. 김홍도는 산수화, 인물화, 신선화, 불화, 풍속화 등에 고루 능했으며, 많은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병으로 고생했지만, 김한태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세월을 보냈어 요. 하지만 강세황과 김한태가 죽자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지요. 게다가 홀로 되어 집으로 돌아온 병든 딸 때문에 마음의 병이 깊어졌어요. 김홍도는 송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시를 즐겨 읽었는데, 종종 그림에 시를 곁들이곤 했어요. 김홍도 의 그림은 당시에 이름을 떨친 신윤복, 이인문, 김득신 같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하 늘이 낸 천재 화가, 김홍도! 물론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이름을 떨치고 있답니다.
신사임당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신사임당은 1504년 늦가을 북평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 사내아이였더라면.’ 어머니는 아기를 보며 못내 아쉬워했어요. 당시에는 남자만 공부하고 출세할 수 있었거든요. 뒤늦게 아버지 신명화가 도착했어요. “허허, 이 녀석 여간 똘똘한 게 아니오. 아들이 아니면 어떻소? 아들이건 딸이건 모두 귀한 자식 아니겠소.” 아버지는 아기가 어질고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면서 ‘인선’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인선은 외갓집에서 자랐어요. 효성이 지극했던 어머니가 부모님이 걱정되어 집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인선은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곧게 자랐어요. 인선의 그림 솜씨는 매우 뛰어났어요. 인선이 일곱 살 때 일이었어요. “아니, 이 그림을 정말 네가 그렸단 말이냐?” 인선의 그림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어요. 안견의 산수화와 똑같았거든요. 안견은 세종 임금 시대의 유명한 화가예요. “허허, 정말 안견 선생의 그림을 그대로 옮겼구나!” 할아버지는 인선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하루는 인선의 그림을 보고 언니가 눈살을 찌푸렸어요. “에구머니! 풀벌레잖아. 이런 징그러운 벌레를 무엇 하러 그리니? 예쁜 꽃이나 그리지 않고.” “징그럽긴요. 언니, 이것 봐요. 꽃이 풀벌레들과 같이 있으니까 더 예쁘죠?” 그림 속 벌레들은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어요. 어느 날, 아버지는 인선의 그림에 찍힌 낙관을 보고 물었어요. 낙관이란 글씨나 그림에 자기 이름이나 호를 쓰고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해요. “인선아, 네 호를 ‘사임당’ 이라고 지은 까닭이 무엇이냐?” “예, 아버님.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이신 태임 부인을 본받겠다는 뜻이옵니다. 문왕이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으로 손꼽히게 된 건 바로 태임 부인의 훌륭한 교육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오, 그래? 너에게 썩 잘 어울리는 호로구나. 너도 훌륭한 어머니가 될 거다.” 아버지는 기특해하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사임당이 열여덟 살 되던 해,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한양에 있던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급히 부평 마을로 향했어요. 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마을로 오는 길에 아버지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요. 어머니와 사임당이 밤낮으로 간호했지만 아버지의 병은 점점 깊어 갔어요. “인선아, 아버지 곁을 지켜라. 나는 뒷산에 다녀오마.” 어머니는 깨끗이 목욕을 한 뒤 뒷산으로 올라갔어요. “부디 제 남편을 살려 주세요!” 어머니는 하늘이 감동할 만큼 정성을 다해 기도했어요. 며칠 뒤, 아버지의 병은 거짓말처럼 나았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정성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사임당의 그림 솜씨는 날이 갈수록 훌륭해졌어요. 어느 날, 이웃집에 잔치가 벌어졌어요. 그런데 음식을 나르던 하녀가 그만 한 처녀의 비단 치마에 국을 엎질렀어요. 사임당은 울고 있는 처녀에게 다가갔어요. “치마를 벗어서 펼쳐 놓으세요.” 사임당은 치마 위에다 곧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덩굴과 싱싱한 잎사귀가 피어나더니, 어느새 치마 위에는 탐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렸지요. 보기 흉하던 치마는 포도송이가 가득한 멋진 치마가 되었어요. 사임당의 소문은 금세 마을 밖까지 퍼졌답니다. 어느덧 사임당은 열아홉 살이 되었고, 이원수라는 선비와 결혼을 했어요. 이원수는 사임당만큼 학문이 깊지는 못했지만, 사임당을 사랑하며 아껴 줄 수 있는 듬직한 청년이었어요. 사임당은 당분간 친정에서 살기로 했어요. “인선은 똑똑하고 재주가 많은 아이라네. 당분간 이곳에서 더 공부하고 솜씨를 닦았으면 하네.” 이원수는 사임당이 장인에게 아들처럼 의지가 되는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장인의 뜻을 기껍게 받아들였답니다. 사임당은 넓은 마음을 가진 남편이 무척 고마웠어요. 이원수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글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실 거예요?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해 보세요.” “알겠소. 앞으로 십 년 동안 집에 오지 않고 공부만 하겠소.” 이원수는 짐을 싸서 한양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하루도 못 넘기고 집으로 되돌아왔어요. “당신을 영영 못 볼 것 같아 발이 떨어지지 않소. 내일 다시 떠나리다.” 그러나 다음 날도 다시 돌아와 버렸어요.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지요. 사임당은 남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가위를 꺼내 들었어요. 머리를 자르고 절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어요. “알겠소, 부인!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소.” 이원수는 곧장 한양으로 떠났어요. 얼마 뒤, 아버지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어요. 사임당은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렀어요. “어머니, 저도 어머니처럼 좋은 아내와 어진 어머니로 잘 살겠습니다.” 사임당은 홀로 남은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남편을 따라 한양으로 갔어요. 시댁에는 새색시를 보겠다고 친척들이 잔뜩 모여 있었어요. “이 댁 며느리는 공부도 많이 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면서요?” “흥,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여자는 살림만 잘하면 되지요.” 친척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어요. 그러자 시어니가 말했어요. “얘, 아가. 너도 말 좀 해 보려무나.” 사임당이 다소곳이 대답했어요. “여자로 태어나 문밖에 나가 보지 못해 본 것이 없으니,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시어머니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며느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사임당은 어느새 네 아이를 둔 어머니가 되었어요. 어느 날 밤, 사임당은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바다 한가운데에서 선녀가 나타나 잘생긴 사내아이를 건네주는 꿈이었지요. 꿈을 꾼 뒤 사임당은 다섯 번째 아기를 가졌어요. 그 아기가 태어나던 날, 사임당은 다시 한 번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바다 한가운데에서 검은 용이 튀어나오더니, 사임당이 있는 친정집 방 앞에 똬리를 틀고 앉는 꿈이었지요.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야.’ 그날 밤 태어난 아기가 바로 조선의 대학자이자 사상가인 율곡 이이 선생이에요. 율곡이 태어나기 얼마 전이었어요. 한 여인이 이원수에게 말했어요. “태어날 아이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밤나무를 천 그루 심고, 아이가 다섯 살이 되어 늙은 중이 찾아오면 밤나무를 보이십시오.” 율곡이 다섯 살이 되자 정말 늙은 중이 찾아왔어요. “금강산에 살고 있는 중인데,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밤나무를 천 그루나 심어 덕을 쌓았는데, 어찌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십니까?” “그럼, 밤나무를 보여 주십시오. 만약 한 그루라도 모자라면 아이를 데려가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나무는 천 그루가 아니라 구백구십구 그루였어요. 이원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죠. 그때 밤나무 사이에 있던 자그마한 도토리나무가 소리쳤어요. “나도 밤나무예요!” “하늘이 돕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구나! 어흥!” 늙은 중은 갑자기 무서운 호랑이로 변하더니 산속으로 달아나 버렸답니다. 작품 으로 보는 초충도 8폭 병풍 수박과 들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임당 습작 묵매도. 오죽헌 사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충도 8폭 병풍 가지와 방아깨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사임당의 세계. 신사임당은 훌륭한 예술가였어요. 신사임당이 살던 시절에는 여자들이 글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재능을 펼치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신사임당은 부모님 덕분에 글과 그림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지요. 글씨와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던 신사임당의 세계를 따라가 보아요. 율곡은 영리하고 재주가 뛰어난 아이였어요. 하루는 뜰에 있는 석류를 보고 말했어요. 은행은 껍질 속에 푸른 구슬을 갖고 있고 석류는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빛나네. 세 살짜리 꼬마가 시로 지어 읊은 거예요. 율곡은 열세 살 때 과거 시험에 합격했어요. 사임당은 글공부보다 사람됨이 먼저라고 가르쳤어요. “글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 남을 업신여긴다면 쓸모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 율곡은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어요. 훗날 율곡은 과거 시험에 아홉 번이나 합격하며 대학자가 되었지만 늘 겸손했다고 합니다. 사임당은 남편을 받들고 일곱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점점 건강이 나빠졌어요. 대관령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사임당을 힘들게 했지요.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한양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평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사임당은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을 때 이런 시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남편과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답니다. 율곡은 훗날 자신의 책에서 어머니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실수를 하시면 반드시 일러 주셨습니다. 자식들을 올바르게 가르치시고 허물을 꾸짖어 주셨습니다. 집안 식구와 아랫사람 모두 어머니를 따르고 받들었습니다. 사임당이 마흔일곱 살 되던 해 이원수는 처음으로 벼슬을 얻었어요. 사임당은 남편이 뒤늦게라도 벼슬길에 오르자 무척 기뻤어요. 이원수가 평안도로 떠날 때, 맏아들 선과 율곡도 아버지를 따라갔어요. 남편과 아들들이 떠나자마자 사임당은 곧 자리에 눕고 말았어요. “어머니, 아무래도 아버지께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안 된다. 내가 아픈 건 작은 일이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은 나라의 큰일이다.” 사임당은 자식들을 말렸어요. 하지만 병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깊어 갔어요. 사임당은 자녀들을 한자리에 불렀어요. 막내아들이 겨우 열 살 때였지요. 사임당은 슬픈 눈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답니다.
한석봉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흠, 어디 점괘를 한번 살펴볼까?” 점쟁이는 한동안 손가락을 짚어 보더니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어요. 점을 부탁한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혹시 우리 석봉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하늘의 옥토끼가 동쪽 나라에 태어났으니, 낙양의 종이 값이 치솟겠구려.” 점쟁이가 알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자 부인이 더욱 다그쳐 물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속 시원히 말 좀 해 주세요.” “이 아이가 훗날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란 말이오.” 부인은 점쟁이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어요. 석봉은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어요. 어릴 적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석봉의 집은 몹시 가난했어요.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해서 버는 돈으로 근근이 먹고살았지요. 석봉은 어려서부터 글씨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어린아이가 쓴 글씨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재주가 남달랐지요. 하지만 마음껏 글씨 연습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가난해서 종이 살 돈이 없었거든요. 어머니가 가끔 종이를 사 오면, 석봉은 너무 기뻐 밤새 끌어안고 있을 정도였지요. 석봉은 종이만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글씨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 보면 종이는 금세 바닥나고 말았지요. 어머니는 종이와 먹을 마음껏 사 주지 못해 늘 안타까웠어요. “미안하구나, 석봉아. 요즘 떡 장사가 잘 안 돼서 종이도 못 사 주고.”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석봉은 고생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종이를 아껴 쓰려고 애썼어요. 종이마다 얼마나 빽빽이 글씨를 썼는지 빈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석봉은 나무를 하다가도 틈만 나면 땅바닥에다 글씨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 문득, 커다란 떡갈나무 잎이 눈에 띄었어요. “그래, 바로 저거야!” 커다란 나뭇잎이 마치 종이처럼 보였던 거예요. 다음날부터 석봉은 아예 붓과 벼루, 먹을 가지고 산에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지게를 저만큼 팽개쳐 둔 채 나뭇잎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어요. “이야! 생각보다 잘 써지는데!” 석봉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어요. 석봉은 커다란 나뭇잎을 찾아 글씨를 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답니다. 가을이 되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어요.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에는 글씨를 쓸 수가 없었지요. 글씨 연습을 못 하게 되자 석봉은 애가 탔어요. 그때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옳지, 그러면 되겠구나!” 석봉은 잽싸게 개울물을 떠 왔어요. 그러고는 먹을 갈아 평평한 바위 위에다 글씨를 쓰기 시작했어요. “조금 거칠긴 해도 제법 쓸 만하군.” 석봉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어요. 글씨 쓸 곳이 없으면 물로 바위를 씻어 내며 해가 질 때까지 글씨 연습을 했어요. 틈이 날 때마다 글씨 연습을 하다 보니 먹도 다 닳아 없어졌어요. 그러자 석봉은 붓 끝에 맹물을 묻혀 글씨를 썼어요. 물기가 마르면 그 위에 또 쓰곤 했지요. ‘아, 종이를 마음껏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먹이라도 실컷 쓸 수 있었으면.’ 하지만 석봉은 어머니에게 말조차 꺼낼 수 없었어요.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떡을 파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거든요. 그럴수록 석봉은 더욱 열심히 글씨를 쓰고 또 썼어요. 어느 날, 석봉은 동네 할아버지를 찾아갔어요.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어 마을에서 척척박사로 통했지요. “할아버지, 먹은 어떻게 만들어요?” “먹 말이냐? 송진을 태우면 그을음이 생기는데, 그것을 뭉쳐 단단하게 굳히면 먹이 되지.” “아, 그렇구나!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석봉은 뛸 듯이 기뻐하며 얼른 집으로 달려갔어요. 그러고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아궁이 속에는 검댕이 잔뜩 붙어 있었어요. 석봉은 검댕을 물에 풀어 잘 저었어요. 그랬더니 제법 먹과 비슷해졌지요. 그 뒤로 석봉은 검댕으로 만든 먹으로 글씨 연습을 했어요. 하루는 석봉이 아궁이에 머리를 디밀고 검댕을 긁어모으고 있을 때였어요. “아니, 석봉아! 거기서 뭐 하는 거니? 얼굴은 또 그게 뭐냐?” 떡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물었어요. 석봉의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거든요. “그게, 저 먹이 다 닳아서.” 석봉의 말을 듣고 어머니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며칠 뒤, 어머니는 조용히 석봉을 불렀어요. “석봉아, 너를 가르칠 훌륭한 스승님을 알아보았다. 앞으로 십 년 동안 집을 떠나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오너라. 네가 천하의 명필이 되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마.” 석봉은 훌륭한 스승님 밑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기뻤지만, 어머니와 헤어지자니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길을 떠났답니다. 석봉은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먼 산을 보다 생각에 잠겼어요. ‘집을 떠난 지도 벌써 삼 년이 되었구나. 어머니는 몸 건강히 잘 계실까?’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자 석봉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어요. 그날 저녁, 석봉은 스승님 몰래 산을 내려왔어요. 어둠을 뚫고 집을 향해 허겁지겁 달렸지요. 십 년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은 채 말이에요. 오직 어머니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석봉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예상보다 일찍 마을 어귀에 도착했어요. 해는 져서 주위는 컴컴했어요. 석봉은 희미하게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힘들게 글씨 공부를 하던 때가 생각났지요. 떡을 팔아 종이를 사 오던 어머니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어요. 떠나올 때 손을 흔들어 주던 모습도 떠올랐지요. ‘아, 어머니.’ 석봉은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어요. 석봉은 조심스럽게 사립문을 열었어요. 흐릿한 등불 아래 ‘똑똑똑’ 떡을 써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방문에 비쳤어요.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 순간 떡 써는 소리가 멈추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어요.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석봉은 너무 반가워 방 안으로 뛰어들어 갔어요. “어머니께서 잘 계신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그동안 글씨 실력도 많이 늘었고요.” 하지만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어요. “실력이 늘었다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어머니,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글씨를 쓰겠습니다.” 그러자 별안간 어머니는 등불을 꺼 버렸어요. “어머니, 등불을 끄면 어떻게 글씨를 씁니까?” “진정한 명필은 어둠 속에서도 글씨를 잘 쓰는 법이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써라.” 한참 뒤, 등불 아래 드러난 석봉의 글씨는 삐뚤삐뚤 형편없었어요. 그러나 어머니가 썬 떡은 반듯반듯 모양이 똑같았지요. 석봉은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네 실력을 이제 알겠느냐? 지금 당장 돌아가 눈을 감고서도 글씨를 똑바로 쓸 수 있을 때까지 다시는 집에 올 생각 마라!” 석봉은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다시 집을 떠났어요. 석봉은 마음을 가다듬고 피나는 노력을 계속했어요. 그리하여 십 년 공부를 마쳤을 즈음에는 명필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사람들은 너도나도 석봉의 글씨를 얻어 가서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어요. 석봉은 스물다섯 살 때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어요. 임금님도 석봉의 글씨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듣던 대로 과연 명필이로다!” 임금님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면 꼭 석봉을 함께 보냈답니다. 그래서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은 마침내 명나라에까지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어요. 석봉이 세상을 떠난 지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한석봉의 글씨를 보면 살아 있는 듯한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답니다. 우리가 요즘 흔히 보는 반듯반듯한 천자문의 예 쁜 글씨가 바로 한석봉의 글씨예요. 한석봉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했던 게 아니라 중국 명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어요. 한석봉과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어요. 선조 임금님 때였어요. 조선은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어요. 그때 일본을 물리치는데 명나라가 도움을 주었지요. 전쟁이 끝난 뒤, 선조 임금님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한석봉도 사신들과 함께 가게 되었 지요. 명나라의 서울은 연경이었는데, 연경의 부자들 사이에서는 멋진 그림이나 글씨를 모으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명나라에 간 한석봉은 어느 부잣집에 머물게 되 었어요. 그 부잣집에는 아주 진귀한 그림과 글씨가 많았어요. 어느 날 연경의 부자들과 이름난 서예가들이 부잣집에 모두 모였어요. 좋은 글씨를 새로 구했다는 소문 때문이었지요. “이번에 조선에서 아주 귀한 글씨를 구했다 면서요? 어디 한번 구경 좀 해 봅시다.” “허허, 소문 한번 빠르군.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부잣집 주인은 벽장에서 족자를 하나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어요. 사람들 틈에 끼어 무심코 족자를 보던 한석봉은 깜짝 놀랐어요. 바로 자기가 쓴 글씨였기 때문이었지요. 사람들이 저 마다 한마디씩 했어요. “과연 소문대로 훌륭한 글씨야. 조선에 이런 명필이 있다니! 왕희지가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군.” 왕희지는 중국에서 글씨를 가장 잘 썼던 사람이에요. 그러니 최고의 칭찬을 한 셈이지요. 한석봉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글씨 쓰기 대회를 열었어요. 한석봉도 글씨를 써서 냈지요. 한석봉의 글씨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이 벌어졌어요. 아까 자기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글씨와 똑같았기 때문이에요. “그럼 당신이 한석봉이란 말이오?” 사람들은 한석봉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했어요. 그리고 한석봉의 글씨를 서로 얻으려고 아 우성쳤다고 합니다. 한석봉은 비록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떡장사를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 만 나라를 빛낸 조선 최고의 명필이 되었어요. 한석봉이 이렇듯 이름을 떨친 것은 피나는 노력과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한석봉의 이야기는 누구나 어려움을 이겨 내고 꾸준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답니다.
박동진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지금부터 큰 소리꾼 박동진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볼 테니까 편안하게 들어 보세요. 박동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줄광대였어요. 서커스 하는 데 가면 높다란 줄 위에서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줄광대예요. 옛날엔 줄광대가 재주도 부리고 소리도 하고 그랬답니다. 그 줄광대 할아버지 재능이 박동진 할아버지에게로 이어졌던가 봐요. 어려서부터 소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했거든요. 어때요, 박동진 할아버지 소리 한 대목 들어 보고 시작할까요? 박동진 할아버지 나이 아홉 살 때였어요. 우리나라 최고 명창들이 모여 소리 공연을 하는 ‘협률사’ 란 단체가 할아버지가 사는 충청도 공주 지방에 내려왔어요. 할아버지는 열 일 제쳐 두고 공연을 보러 달려갔어요. 고종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명창 이동백, 전설의 여류 명창 이화중선, 이동백과 어깨를 견주던 명창 송만갑이 멋들어지게 소리 공연을 했어요. 위대한 소리꾼들의 소리를 직접 들은 할아버지는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소리꾼이 되어 보려고 ‘협률사’를 찾아가 사정을 했답니다. “저도 소리를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말았어요. 누가 아홉 살짜리 시골 아이를 덜컥 제자로 받아 주겠어요. 안 그래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장차 소리꾼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할아버지 나이 열한 살 때였어요. 이웃 마을에서 환갑 잔치가 열렸어요.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우연찮게 소리를 한 자락 내지르게 되었어요. 옥에 갇힌 춘향이가 서울 간 이 도령을 그리워하는 대목이에요. “그놈, 소리 한번 구성지게 잘하는구나!” 소리를 듣고 잔칫집 주인이 소리값을 던져 주었어요. 박동진 할아버지가 소리를 해서 처음 돈을 번 날이었지요. 이 일로 조금 우쭐해하자, 소리꾼 삼촌이 한마디 했어요. “이놈아, 꽃은 그냥 피는 게 아녀!” 할아버지 나이 열세 살 때였어요. 마침내 소리에 살고 소리에 죽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어요. 금강 건너 어느 마을에 소리 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집을 나섰지요.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는데 뱃삯이 없었어요. 뱃사공이 뺨을 철썩 후려치며 눈을 부라렸어요. “야, 이놈아, 어린것이 뱃삯도 없이 배를 타? 저 강물 속에 처박아 버릴까 보다.” 오싹하는 마음에, 뱃머리에 서서 냅다 소리를 한 대목 내질렀어요. 그러자 배에 탄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다시 해 보라며 난리가 났어요. “저 아이 뱃삯은 내가 내리다.” 모두 어린 소리꾼의 노래 한 자락에 푹 빠져 버린 거예요. 박동진 할아버지는 선생님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요? 선생님을 따라 칠갑산을 넘어 청양에 가는 길이었어요. 눈 덮인 칠갑산은 고요히 말이 없고, 꼭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박동진 할아버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심청가 한 대목을 불렀어요. 그 순간, 웬 할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물었어요. “지금 한 소리가 뉘 소리냐?” 박동진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해하며 대답을 못 했어요. “나는 칠갑산 산신령이다. 내가 잠시 목소리를 네게 빌려 준 게야. 소리란 모름지기 혼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게야. 그래야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느니라.”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선생님이 덧붙였어요. “허허, 하늘이 소리꾼으로 널 점찍은 모양이구나.” 소리 공부를 한 지 꼬박 1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이제 내게선 더 배울 소리가 없구나. 심청가 최고의 명창 김창진 선생님이 서천에 머물고 계신다. 그분을 찾아뵙고 심청가를 배워라.”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김창진 선생님은 어떤 분인가요?” “김창룡 명창의 동생인데, 어려서부터 소리가 형만 못하다고 구박과 멸시를 받으며 자랐단다. 그래서 형이 소리할 때 옆에서 북장단이나 맞춰 주는 처량한 신세였지. 그러던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10년 공부에 들어간 거야. ‘형의 소리를 뛰어넘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 버리리라.’ 김창진 선생님은 깊은 산속 암자에 틀어박혀 자그마치 10년 동안 오로지 심청가 하나를 갈고 닦아, 마침내 심청가 최고의 명창에 오른 분이란다.” 박동진 할아버지는 그길로 김창진 명창을 찾아갔어요. 김창진 명창은 소리 한 대목을 청해 들어 보더니, “네가 목청은 타고났구나. 뼈가 녹아드는 슬픔을 모르면 심청가를 부를 수 없느니라. 그것을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어요. “예, 선생님. 죽기 살기로 심청가를 배우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따라 배를 타고 아무도 살지 않는 꽃섬으로 건너갔어요. 그곳에서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가사와 가락을 익히는 데만 꼬박 반 년 세월이 걸렸어요. 박동진 할아버지가 심청가 가사와 가락을 익히느라 씨름하는 동안, 선생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소리를 갈고 닦으셨어요. 명창이 된 뒤에도 끝없이 자기 소리를 가다듬지 않으면, 목청이 망가져 소리꾼의 삶이 끝장난다는 걸 몸소 가르쳐 준 거예요. 한번은 김창진 선생님을 따라 공주 어느 잔칫집에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선생님은 사흘에 걸쳐 심청가를 불렀어요. 사흘째 되던 날 밤은 그야말로 소리판의 절정을 이루었지요.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슬픔을 깨물듯 질러 대던 선생님의 소리. 소리가 끝나 갈 무렵, 선생님의 목구멍에서 울컥 핏덩어리가 넘어왔어요. 선생님은 잠시 소리를 멈추더니, 심청이가 되어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러자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소리를 듣던 사람들 모두가 박동진 할아버지를 따라 우는 거예요. 소리를 하는 소리꾼과 소리를 듣는 청중이 하나가 되어 눈물바다를 이루었답니다. 심청가를 다 배우고 떠나올 때, 김창진 선생님이 말했어요. “목에서 피를 댓 사발은 토해야 명창이 될 수 있느니라. 피를 토하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면, 똥물밖에 약이 없다는 걸 알아 두어라.” 박동진 할아버지는 춘향가 최고의 명창 정정렬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계룡산에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힘들게 찾아갔지만 소리 배우는 값이 자그마치 100원이나 되었어요. 그 당시 100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게다가 박동진 할아버지는 땡전 한 푼 없는 신세였지요. 소리를 배우게 해 달라고 사흘 밤낮을 굶으면서 떼를 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김창진 선생님께 배운 심청가 한 대목을 처량하게 부른 뒤 지친 몸을 이끌고 계룡산을 내려왔어요. 여러 해가 흐른 뒤, 박동진 할아버지는 정정렬 명창을 다시 찾아갔어요. 물론 춘향가를 배우기 위해서였지요. 정정렬 명창은 소리 한 대목을 청해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계룡산에서 처량하게 심청가를 부르고 간 녀석이 바로 너로구나!” 하시며 제자로 받아 주었어요. 이렇게 해서 박동진 할아버지는 정정렬 선생님에게 꼬박 1년 동안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춘향가를 배운 다음엔 박지홍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웠어요. 이어 조학진 명창에게 적벽가를, 유성준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웠지요. 박동진 할아버지는 판소리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마당을 당시 최고의 명창들에게 모두 배운 거예요. 이제 그동안 배운 소리를 자기 소리로 바꾸는 일이 남았어요. 박동진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가 뒷산에 움막을 짓고 백 일 동안 소리 독공에 들어갔어요. 소리 독공이란 혼자 죽기 살기로 소리를 가다듬는 걸 말해요. 잠자는 시간만 빼고 오로지 소리에만 매달리는 것이지요. 50일이 지나자 잇몸이 퉁퉁 붓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어요. 그러더니 마침내 목구멍에서 핏덩어리가 넘어왔지요. 하지만 박동진 할아버지는 소리를 멈추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요. “아버지, 똥물을 갖다 주세요. 그걸 먹어야 살 수 있어요.” 아들이 걱정되어 찾아온 아버지에게 겨우 입을 뗐어요. 아버지는 허겁지겁 똥물을 구해 왔답니다. 똥물을 먹고 살아난 박동진 할아버지는 백 일 독공을 모두 마쳤어요. 그 소리가 얼마나 구성졌는지 밤마다 산짐승들이 몰려와 들을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점점 우리 소리를 외면했어요. 위대한 명창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우고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소리를 갈고 닦았건만, 정작 우리 소리가 다 죽어 가고 있으니,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았지요. 박동진 할아버지는 우리 소리를 되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공연에 도전했어요. 흥보가를 장장 다섯 시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부른 거예요. “옳지, 잘한다. 우리 소리 좋은 것이여!” 공연은 예상을 뒤엎고 대성공을 거두었어요. “얼쑤, 지화자! 좋다!” 공연이 끝나도록 사람들은 흥을 돋우었답니다. 다음해 박동진 할아버지는 춘향가로 9시간 공연에 도전했어요.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전이었지요. 소리를 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을 각오를 했던 거예요. 소리꾼 혼자 청중들을 웃고 울리면서 9시간 동안 소리를 질러 대는 건 결코 쉬은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답니다. 이 소식은 전 세계 신문과 방송도 앞다퉈 다뤘어요. 얼마 뒤 박동진 할아버지는 소리꾼 인간문화재가 되었어요. 인간 문화재가 되려고 그 고생을 한 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인간 문화재가 되고 나니, 한평생 소리에 바친 삶이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몇 해 전,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고향 마을에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을 세웠어요. 우리 소리가 오래도록 이 땅에 살아 숨 쉬라는 뜻을 담아서 말이지요. 그 뒤, 박동진 할아버지는 ‘판소리 전수관’ 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과 함께 우리 판소리의 세계를 넘나들며 즐겁게 지냈어요. 죽는 날까지 우리 판소리 사랑에 흠뻑 빠져 살다가, 2003년 7월 8일 박동진 할아버지는 87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답니다. 이제, 박동진 할아버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에요. 못다 한 이야기 소리판의 큰 별박동진 판소리는 ‘춘향전’이나 ‘흥보전’같이 긴 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뜻하는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를 합친 말이지요. 노래하는 소리꾼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중간 중간에 말로 하는 ‘아니리’ 와 몸짓인 발림을 섞어 이야기를 엮어 나갑니다. 그러면 고수는 북을 치면서 ‘얼쑤!’ , ‘좋다!’ 같은 추임새 로 흥을 돋우지요. 빠르고 자극적인 서양 음악이 넘쳐 나는 가운데서도 소중한 우리 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가장 애쓴 분이 바로 박동진 할아버지예요. 박동진 할아버지는 줄광대인 할아버지의 재능을 이어 받아 어려서부터 소리에 관심을 보였어요. 당시만 해도 이름 없던 손병두 선생님께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우리나라 최고의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판소리 다섯 마당인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를 차례로 배웠답니다.
백남준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백남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디오 예술가예요. 텔레비전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비디오 예술가라고 해요. 텔레비전을 보면 마치 그림을 넣은 액자처럼 보이지요? 그러니까 텔레비전 화면이 종이인 셈이고요, 붓 대신 비디오 카메라를 써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종이 위의 그림은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지만, 이 그림은 움직이기도 하고 소리도 나지요. 그 뿐인가요? 텔레비전을 갖다 붙여서 조각품도 만들고, 아예 텔레비전을 때려 부수기도 해요. 이런 비디오 예술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이 바로 백남준이에요. 1932년, 백남준은 서울에서 큰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남준은 누나가 피아노 배우는 걸 어깨너머로 보다가 누나보다 더 잘 치게 되었어요. 그러자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사내 녀석이 무슨 피아노냐! 다시는 피아노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이 사업가가 되길 바랐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어요. 노랫소리를 따라 뒤뜰로 나간 어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남준이 땅바닥에 건반을 그려 놓고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얼마나 피아노가 치고 싶었으면.’ 어머니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남준에게 행운이 찾아왔어요. 음악 선생님이 누나 친구여서 남준에게 따로 음악을 가르쳐 준 거예요. 남준은 신이 나서 피아노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어요. 나중에 남준은 음악 선생님을 추억하며 <두 스승>이란 작품을 만들었답니다. ‘신재덕 선생이 피아노를 탈 때, 나는 침을 떼떼 흘리며 빽빽 꾹꾹.’ 어린 남준이 즐겁게 음악을 배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남준은 일본 동경 대학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런데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영학부가 아니라 예술을 공부하는 미학 문학부에 들어갔어요. 물론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했지요. 그러나 학교에서 온 우편물을 보고 아버지도 곧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노발대발했어요. “아버지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그따위 공부를 하다니!” 남준은 괴로웠지만 마음에도 없는 사업가의 길을 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 내가 훌륭한 예술가가 되면 언젠가는 아버지도 나를 이해해 주실 거야.’ 남준은 음악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어요. 독일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음악회를 열었는데, 그 가운데 존 케이지란 음악가도 있었어요. 남준은 그때까지 악기로 연주하는 것만 음악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차 소리 같은 소음을 넣어 연주하는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아! 저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지금껏 시끄럽게만 여겼구나!’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지요. 그래서 남준은 존 케이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더 깊이 있게 음악을 공부했어요. 두 스승이란 작품에 남준은 존 케이지 부분을 이렇게 썼어요. ‘케이지는 우리말로 새장, 즉 존이 새장에 갇혔다.’ 장난꾸러기 예술가 백남준다운 말이지요? 남준은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답답한 세상을 비웃고 싶었어요. ‘얌전히 앉아서 연주하는 것만 음악이 아니야.’ 그런 생각으로 27세 때 남준은 첫 연주회를 열었어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음악회와는 전혀 다른 난장판 음악회였어요. 남준이 틀어 놓은 카세트에서는 베토벤 음악부터 사이렌 소리, 수탉 울음소리까지 나왔어요. 자신은 무대 위에서 깡통을 차고, 손이 아닌 머리로 피아노를 쳤고요. 그것도 모자라 객석으로 내려가 관중의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에 샴푸를 붓고는 그대로 극장을 나가 버렸어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앉아 있을 때, 남준은 근처 카페에서 극장으로 전화를 걸어 큰 소리로 말했답니다. “공연은 끝났습니다! 다들 돌아가십시오!” 한번은 남준이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올랐어요. 남준은 3분 동안 아주 천천히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어요. 그런 다음, 바이올린을 내리쳐서 부숴 버릴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객석에서 누군가 소리쳤어요. “바이올린을 부수지 마!” 소리친 사람은 바이올린 연주자였어요. 바이올린이 부서지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자 이번엔 요셉 보이즈라는 사람이 일어나 소리쳤어요. “연주회를 방해하지 마라!” 요셉의 도움으로 연주회는 무사히 끝났어요. 이 일로 남준과 요셉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그 뒤로 많은 공연을 같이했답니다. 얼마 뒤, 남준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이라는 전시회를 열었어요. 거기에는 남준이 전 재산을 털어서 산 고물 텔레비전 열세 대가 여기저기 아무렇게 놓여 있었어요. 텔레비전마다 전혀 다른 화면이 나오는 데다 관객들이 발로 밟거나 손으로 만져야만 켜지는 텔레비전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며 혀를 내둘렀어요. 그때만 해도 텔레비전이 귀할 때라 사람들은 남준이 말하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앞으로 텔레비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겁니다. 10년 뒤에는 내가 왜 이런 전시회를 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전시회는 텔레비전이 예술품으로 등장한 첫 전시회였어요. 비디오 예술이 시작된 거지요. 그 뒤 비디오 카메라가 발명되었어요. 이제 비디오 예술은 새로운 예술 분야로 관심을 끌게 된 거예요. 그 무렵 남준은 샤롯 무어맨이란 여성 첼로 연주자를 알게 되었는데, 샤롯은 남준과 뜻이 잘 통했어요. 샤롯과 남준은 함께 색다른 연주회를 많이 열었어요. 텔레비전으로 만든 첼로를 연주하는 샤롯의 안경에 작은 텔레비전이 매달려 있었어요. 속옷도 텔레비전으로 되어 있었지요. 연주가 시작되면 텔레비전마다 각각 다른 화면이 나오고, 연주 소리에 따라 영상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어요. 남준은 텔레비전이라는 딱딱한 기계에 부드러운 여성의 몸과 아름다운 음악을 이어 주고 싶었던 거예요.
베토벤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어린이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봐요. 만약에 앞을 보지 못하는 화가가 있다면?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축구 선수가 있다면? 맛을 느낄 수 없는 요리사가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 이렇게 말할 거예요. “에이, 말도 안 돼. 그러면 그림도 못 그리고, 축구도 못 하고, 요리도 못 하잖아?”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에 바로 그런 사람이 있어요.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도 더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낸 음악가, 베토벤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베토벤은 유난히 추운 어느 겨울에 태어났어요. 베토벤의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궁정에서 음악을 하는 음악가 집안이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여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어요. 하루는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와 보니, 어머니와 아기가 추위 속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이런!”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집 안을 따뜻하게 했어요.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굉장히 무섭게 대했어요. 그 대신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한 어머니와 언제나 다정한 할아버지가 곁에 있어 베토벤은 외롭지 않았어요. 하루는 베토벤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놀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우연히 베토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오, 아름다운 노래구나. 무슨 노래냐?” 베토벤이 웃으며 대답했어요. “그냥 아무렇게나 지어 불러 본 거예요.” 할아버지는 베토벤의 재능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다음날부터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당시 독일은 모차르트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였어요. 모차르트가 연주 여행을 다니며 귀족들에게 돈을 받기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는 베토벤을 이용해 돈 벌 궁리를 했지요. “너라고 못 할 것 없지. 잘하면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어.” 아버지는 베토벤의 나이를 두 살이나 줄여 여섯 살이라고 속였어요. 베토벤은 아버지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쉴 새 없이 연주했어요. 베토벤은 음악을 몹시 좋아했지만, 아버지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하다 보니 점점 지겨워졌어요. 그러는 사이 베토벤은 열 살이 되었어요. “베토벤, 너에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앞으로 내가 음악을 가르쳐 주마.” 베토벤은 궁정 악단에 새로 온 오르간 연주자 네페 선생 눈에 띄었어요. 네페 선생은 베토벤에게 오르간 연주뿐 아니라 작곡도 가르쳐 주었어요. 열심히 공부한 베토벤은 열두 살 되던 해, 첫 작품을 발표했어요. 베토벤의 실력이 나날이 늘어 가자 귀족들은 돈을 모아 베토벤을 음악의 도시 빈으로 보내 주었어요. 꿈에 부풀어 유학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슬픈 소식이 날아왔어요. “뭐? 어머니가 위독하다고?” 베토벤은 부랴부랴 독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지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술주정은 더욱 심해졌어요. 베토벤은 어린 나이였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궁정에서 연주도 하고, 귀족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치러 가는 집 중에 브로이닝 부인 집이 있었어요. 브로이닝 부인은 부유한 귀족인 데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요. 또 베토벤에게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대해 주었고요. 그곳에서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도 알게 되었어요. 발트슈타인 백작은 베토벤이 다시 빈으로 가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답니다. 다시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은 하이든을 비롯한 여러 음악가에게 열심히 음악을 배우고 연주 활동도 활발히 했어요. “당신의 연주는 폭풍 같아요!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 사람들은 열광했어요. 베토벤의 인기도 나날이 치솟았지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된 베토벤은 오랜만에 단란한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 언제나 불행했던 내게도 이렇게 좋은 날이 오는구나.’ 베토벤은 모든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베토벤이 곡 쓰는 데 열중해 있는데, 동생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어요. “형, 왜 불러도 대답을 안 해?” 베토벤은 깜짝 놀라 동생을 바라보았어요. 하지만 귓속에서는 바람 소리만 윙윙거릴 뿐 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얼마 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더니 기어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된 거예요. 베토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베토벤은 안정을 찾기 위해 조용한 시골 마을로 갔어요. 하지만 마음은 지옥과도 같았어요. ‘음악가가 소리를 못 듣는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시골 경치는 볼 수 있었지만 새소리나 개울물 소리, 바람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지요. 베토벤은 너무나 괴로웠어요. ‘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을 음악에 담을 수 있을 텐데.’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베토벤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어요. ‘운명한테 이렇게 질 수는 없어.’ 베토벤은 운명과 싸우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베토벤의 용기에 운명도 겁을 먹고 달아난 걸까요? 베토벤은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전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한 곡들을 내놓았지요. 귀가 들리지 않아 연주는 할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의 소리는 베토벤의 손끝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었어요. 피아노 소나타 열정, 교향곡 전원 같은 명곡들이 모두 이때 탄생했어요. “따다다 딴, 따다다 딴.”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하는 교향곡 운명도 이때 만들었고요. 베토벤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어요. 베토벤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시인 실러의 시에 아름답고 웅장한 곡을 붙이기로 마음먹었어요. 기쁨이여, 신들의 아름다운 빛이여, 낙원의 딸이여. 불 같은 기쁨에 취해 우리 모두 신들의 집으로 가자꾸나. 이 곡은 악기만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나 노래만으로 이루어진 합창과는 달리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규모의 합창 교향곡이었어요. 베토벤의 아홉 번째 교향곡 합창이 드디어 무대에 올랐어요. 하지만 듣지 못하는 베토벤은 지휘를 할 수 없어 옆에 앉아 악보만 보고 있었어요. 음악이 흐르자 사람들은 숨을 죽였어요. 합창에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베토벤의 삶이 녹아 있었거든요.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하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베토벤은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러자 합창 단원 한 사람이 베토벤을 일으켜 주었어요. 열광하는 청중을 바라보는 베토벤의 뺨 위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교향곡 합창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부은 탓인지 베토벤은 자리에 눕고 말았어요. 숨을 거두기 전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말했어요. “다들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게나. 이제 무대의 막이 내릴 테니.” 그때 갑자기 커다랗게 천둥이 울리며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어요. 베토벤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렸어요. 마치 운명과 싸우기라도 하듯이 말이에요. 그러나 이내 베토벤의 주먹은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어요.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며 결코 지지 않았던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슈베르트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연주에 맞춰 한 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여섯 살배기인데도 음정과 박자가 아주 정확했지요. “형! 지금 그 부분 잘못 연주한 거 아니야?” 아이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갑자기 물었어요. “응? 어디? 정말 그렇구나! 미안해.” 아이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형 얼굴이 금세 빨개졌어요. 바이올린을 켜던 아버지와 노래를 감상하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지요. “허허!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 내다니, 정말 대단한걸?” 가족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이 아이가 바로 슈베르트예요.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는데, 가족 모두 음악을 사랑해 집 안엔 언제나 음악 소리가 흘렀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슈베르트에게 새 바이올린을 사 주었어요. 그 뒤 슈베르트는 아버지에게는 바이올린을, 형에게는 피아노를 배웠어요. 슈베르트는 하나하나 알아 가는 게 즐거웠어요.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더 훌륭한 선생님을 소개했어요. “슈베르트, 홀처 선생님이시다.” 홀처 선생님은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음악가로 리히텐탈 교회 합창대 지휘자였어요. “이 곡을 한번 연주해 볼래?” 슈베르트는 선생님이 내미는 악보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했어요. “오! 아직 어린데 솜씨가 대단하구나.” 홀처 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슈베르트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어요.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물론이고 노래 실력 또한 뛰어났지요. 그러던 어느 날, 홀처 선생님이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은 거의 천재적입니다. 모두를 감동시킬 훌륭한 음악가가 될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뜻밖이었어요. “슈베르트를 절대 음악가로 만들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슈베르트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던 거지요. 홀처 선생님은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1808년 10월 어느 날, 빈 궁정 예배당은 아침부터 시끌벅적했어요. 콘빅트 학교의 합창 단원을 뽑는 시험이 있는 날이었거든요. 콘빅트 학교는 궁정 안에 있는 국립학교인데, 신분이 높거나 공부를 잘하는 부잣집 아이들만 다닐 수 있었어요. 슈베르트는 아버지를 설득해 시험에 응시했어요. 아이들은 초라한 슈베르트를 보고 수군거렸어요. “어머, 저 낡은 옷 좀 봐.” “저렇게 가난한 집 아이가 시험을 보러 오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슈베르트는 기죽지 않았어요. 차례가 되자,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지요. “우아! 대단한데?”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어요. 슈베르트는 훌륭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했답니다. 슈베르트는 음악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수학, 역사, 지리 공부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 말씀이 마음에 걸렸지만, 음악 공부가 너무너무 좋았어요. 슈베르트는 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요. “넌 정말 바이올린을 잘 켜는구나!” 슈베르트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슈파운이 말했어요. 언제나 슈베르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좋은 친구였지요. 하루는 슈파운이 오선지를 잔뜩 싸 들고 슈베르트를 찾아왔어요. “작곡할 때 이걸 쓰도록 해.” 슈베르트는 오선지를 사서 쓸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거든요. 그런 사정을 알고 있던 슈파운은 줄곧 슈베르트를 도와주었답니다. 슈베르트는 곡 만드는 일이 정말 좋았어요. 슈베르트의 곡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했지요. 그 가운데 살리에리라는 음악가도 있었어요.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인데, 한때 베토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한 사람이에요. “음, 내가 자네의 작곡 공부를 도와주도록 하지.” 그때부터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에게 작곡 지도를 받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슈베르트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어요. 언제나 힘이 되어 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게다가 변성기가 찾아와 더 이상 합창 단원으로 노래를 부를 수도 없게 되었고요. 슈베르트는 하는 수 없이 콘빅트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공부에만 전념해서 선생님이 되어라.” 아버지가 슈베르트를 불러 놓고 말했어요. 슈베르트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단호했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선생님이 되지 않으면 군대에 가야 했어요. ‘더 이상 어쩔 수 없구나.’ 슈베르트는 할 수 없이 사범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1814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작곡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연주도 했지요. 그즈음, 슈베르트는 한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테레제라는 아가씨인데, 노래 실력이 뛰어나 음악 모임에서 늘 소프라노를 부르곤 했지요. 어느 날, 슈베르트는 용기를 내어 테레제에게 말했어요. “조금 있으면 제가 작곡한 노래가 완성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프라노 부분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제게 그런 영광을 주신다니 최선을 다할게요.” 열네 살의 귀여운 아가씨 테레제는 기꺼이 승낙했어요. 며칠 뒤, 리히텐탈 교회에서 미사가 열렸어요. 테레제는 앞으로 나가 슈베르트가 작곡한 노래를 불렀어요. 그 뒤, 슈베르트는 테레제를 생각하며 <실을 잣는 그레트헨>이란 명곡을 만들었답니다. 슈베르트가 시를 읽으며 작곡에 열중하고 있을 때, 친구 슈파운과 마이어호퍼가 찾아왔어요. 슈베르트는 두 친구에게 말했어요. “괴테의 시 마왕을 음악으로 만들었어.” 마왕은 빗속을 뚫고 말을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예요. 아들은 마왕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고 울며 소리치지요.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꼭 안고 달래며 집으로 말을 몰아요. 하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답니다. 슈베르트는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마왕은 매우 힘차고 강한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곡이에요. 빗소리, 말발굽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것처럼 말이에요. 연주가 끝나자, 두 친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답니다. 슈베르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곡을 만들었어요. 실을 잣는 그레트헨, 마왕, 들장미뿐 아니라 1815년 한 해에만 140곡이 넘는 가곡을 만들었어요.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작곡 실력을 높이 평가했어요. “난 자네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으면 하네.” “하지만 작곡만 해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어.” 슈베르트는 생활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작곡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우리가 슈베르트를 도와주면 어떨까?” 친구들이 모여 ‘슈베르트 후원회’를 만들었어요. 좋은 친구들 덕분에 슈베르트는 작곡에만 힘을 쏟게 되었답니다. 라이트너 박사 집에서 한 달에 몇 번씩 음악회가 열렸는데, 슈베르트는 이 음악회에서 가곡을 자주 불렀어요.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어요. “이 곡이 그 유명한 마왕이군요?” “정말 훌륭해요. 악보를 볼 수 없을까요?” 사람들은 특히 마왕에 관심을 보였어요. “그래, 악보를 만들어서 팔자.”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마왕과 실을 잣는 그레트헨의 악보를 만들었어요. 악보는 날개 돋친 듯 팔렸지요. “슈베르트, 이 돈을 생활비에 보태게.” 친구들은 악보 판 돈을 슈베르트에게 주었어요. “정말 고맙네.” 슈베르트는 친구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어요. 친구들이 끊임없이 도와주었지만, 슈베르트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어요. 게다가 건강까지 점점 나빠졌어요. ‘가난은 그림자처럼 예술가를 따라다니는구나.’ 하지만 슈베르트는 낙심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그럴수록 곡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쏟았지요.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아름다운 곡들도 이때 만들었어요. 어떤 때는 하룻밤에 한 곡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슈베르트는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을 매우 존경했어요. 베토벤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스물두 살 때 빈으로 와서 줄곧 그곳에서 생활했어요. “베토벤 선생님의 건강이 매우 안 좋으시다네.” 친구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슈베르트는 곧장 베토벤을 찾아갔어요. “자네 마음속에는 신성한 불꽃이 있네. 자네에게서 내 영혼을 발견하곤 하지.” 침대에 누운 베토벤이 힘겹게 말했어요. 며칠 뒤, 베토벤은 눈을 감고 말았어요. 베토벤이 죽자, 슈베르트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슬펐어요. “슈베르트, 자네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이네.” 오랜만에 찾아온 슈파운이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음, 좀 무리했더니 그런가 봐.” 슈베르트는 수척해진 얼굴을 감싸 쥐었어요. 얼마 뒤,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라는 명곡을 완성했어요. “대단해! 내 평생 이렇게 멋진 곡은 처음이야.” 많은 사람이 겨울 나그네의 웅장함에 찬사를 보냈어요. 그로부터 1년 뒤인 1828년 11월, 슈베르트는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짧은 생애였지만, 슈베르트는 600곡이 넘는 가곡을 비롯해 수많은 명곡을 남겼답니다.
피카소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1881년 10월 25일, 깊은 밤이었어요. 에스파냐의 도시 말라가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요. “여보,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아요. 어떻게 해요?” 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흐느껴 울었어요. 아버지는 가슴을 졸이며 아기를 안았어요. 그러고는 조심스레 때려 보았지요. “응애응애.” 아기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여보! 우리 아기가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아버지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아버지 품에 안겨 첫 울음을 터뜨린 이 아기가 바로 장차 위대한 화가로 성장할 파블로 피카소예요. 피카소의 아버지는 지방 학교의 미술 선생님이자 화가였어요. 그래서 피카소는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레 그림과 친해질 수 있었지요. ‘이 아이가 위대한 화가로 자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의 바람 때문인지 피카소는 그림을 매우 좋아했어요. 어느 날, 피카소가 더듬더듬 말했어요. “여언필.” 아버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누르고 곧바로 연필과 종이를 아들의 손에 쥐어 주었어요. 피카소는 신이 나서 종이에 그림을 그렸어요. “하하하! 태어나서 맨 처음 한 말이 ‘연필’이라니.” 아버지는 피카소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어요. 피카소는 자라면서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어요. 하지만 학교에 가는 것은 싫어했어요. 다른 과목들을 공부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지요. “글쓰기나 계산은 너무 재미없어요. 그림만 그리면 좋겠어요.” 피카소는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평소 비둘기를 즐겨 그리던 아버지는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를 보고 깜짝 놀랐지요. “파블로! 이젠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구나.” 아버지는 그림 도구를 모두 피카소한테 주고, 아들의 그림 공부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어요. 피카소는 열네 살 때 바르셀로나로 갔어요. 아버지가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피카소는 론잔 미술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시험을 봤어요. 시험 문제는 조각상 데생이었는데, 보통 한 달 정도 걸리는 것을 피카소는 단 하루 만에 완성했어요. 피카소는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당당히 합격했답니다. 그때부터 피카소는 에스파냐 미술 학교의 콩쿠르를 모두 휩쓸었어요. 피카소는 ‘검은 고양이’라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답니다. 카사헤마스라는 친구와는 작업실을 함께 사용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어요. 어느 날, 피카소는 카사헤마스에게 말했어요. “이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 생각이야.” 1900년, 피카소는 열아홉의 나이에 검은 고양이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어요. 주로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 모습을 스케치해 백오십 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했답니다. 위대한 화가의 탄생을 알리는 뜻 깊은 행사였지요. ‘에스파냐에서는 이제 더 이상 배울 게 없어.’ 피카소는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로 향했어요. 두 사람은 파리 몽마르트르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파리 시내의 미술관들을 부지런히 둘러보았지요. 피카소는 열정을 담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피카소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카사헤마스가 자살을 한 거예요.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피카소는 큰 슬픔에 빠졌어요. 게다가 그림도 팔리지 않아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지요. 피카소의 그림은 점점 우울하고 어두워져 갔어요. 피카소는 파리의 뒷골목 빈민촌에서 살아야 했어요. 고통과 절망 속에서 그림을 그렸지요. 그래서 그때 그린 작품에는 우울한 빛의 짙푸른 청색이 감돈답니다. 다행히 피카소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어요. 막스 자콥이라는 시인이었지요. 자콥은 피카소의 작품에 끌려 친구가 되었어요. 자콥은 자신도 어렵게 살면서 항상 피카소를 보살펴 주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피카소의 그림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저 수많은 무명 화가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많은 사람이 청색 그림을 사랑했어요. 청색 그림은 다른 작품보다 이해하기 쉽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거든요. 피카소의 그림이 점점 밝아졌어요. 페르낭드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거든요. 페르낭드는 피카소를 이해해 주고 훌륭한 모델도 되어 주었어요. 피카소는 점점 기운을 되찾았고, 웃음도 찾았답니다.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예술가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어요. 또, 틈만 나면 서커스 구경을 다녔어요.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에는 곡예사와 동물이 많이 등장한답니다. 이때 그린 그림에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생동감이 가득해요. 하지만 피카소는 여전히 가난해서 때로는 굶기도 하고, 구두가 없어 외출을 못 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답니다. ‘그림을 색다르게 그릴 방법은 없을까?’ 피카소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어느 날, 피카소는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원시 작품을 보고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1907년이 끝나 갈 무렵, 드디어 아비뇽의 아가씨를 완성했어요. 하지만 사람들 반응은 무척 냉담했어요. 단 한 사람만 빼고요. “정말 놀라운 그림이야!” 그 사람은 바로 유명한 미술 수집상 칸바일러였어요. 피카소는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그림도 잘 팔려 생활도 점차 나아졌지요. 피카소의 새로운 그림 기법은 참 놀라웠어요. 수백 년 동안 그려 왔던 그림과 무척 달랐지요. 사람의 눈과 코가 엉뚱한 데 붙은 그림도 있었고, 무엇을 그렸는지 도무지 알기 힘든 작품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피카소의 이런 그림을 ‘큐비즘’이라고 불렀어요. 큐비즘은 마티스라는 화가가 피카소 작품 속에서 정육면체들을 발견해 붙인 이름이에요. 피카소는 원기둥, 원뿔 같은 단순한 도형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답니다. 큐비즘은 미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어요. 피카소는 갈수록 이름도 높아지고 큰 부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얼마 뒤, 에스파냐에서 전쟁이 일어나 게르니카가 불바다가 되었어요. 파카소는 전쟁의 비참함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이 작품 속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답니다.
셰익스피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에 있는 ‘스트래트퍼드’ 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파란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에이번 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지요. 셰익스피어는 에이번 강가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에이번 강에는 귀여운 백조들이 노닐고 있었거든요. “어쩜, 셰익스피어도 백조 같구나!” 마을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에이번 강가의 귀여운 백조’라고 불렀답니다. 셰익스피어의 집은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어요. “셰익스피어, 오늘은 연극을 보러 가자꾸나.” 아버지는 셰익스피어와 종종 유랑극단 공연을 보러 갔어요. “우아, 정말 멋져요!” 연극을 보는 내내 셰익스피어는 입을 다물지 못했지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도 이다음에 멋진 배우가 될래요!” “하하, 그러렴.” 아버지는 언제나 셰익스피어 편이었어요.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버렸거든요. 그 뒤, 셰익스피어는 열네 살의 나이로 가장 노릇을 했어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지요. 그러면서도 틈틈이 문학 작품을 읽으며 힘들고 지친 마음을 달랬답니다. 당시에는 시를 쓰고 문학을 배우는 건 부유한 집 자식이나 귀족들만 할 수 있었어요. 셰익스피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혼자서 시를 쓰며 공부를 했지요. 그래서 늘 가슴 한 켠이 비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럴 때마다 용기를 주는 아가씨가 있었어요. “셰익스피어, 당신의 시는 정말 훌륭해요!” 셰익스피어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앤 해서웨이였어요. 얼마 뒤, 두 사람은 결혼을 했어요. 그때 셰익스피어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답니다. 셰익스피어는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접을 수 없어서 무작정 런던에 있는 큰 극장을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셰익스피어는 극장에 온 손님들의 말을 관리했어요. 지독한 냄새가 나는 마구간이었지만 행복하기만 했지요. 매일 연극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했거든요. 셰익스피어는 대사를 모두 외울 정도로 연극을 보고 또 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셰익스피어를 눈여겨보던 극장 책임자의 눈에 띄어 셰익스피어는 무대에 서게 되었어요. 비록 짧은 대사였지만 셰익스피어는 혼신의 힘을 다했지요. 하지만 아무도 셰익스피어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뭐야? 시골뜨기 주제에 배우가 되겠다고?” 배우들은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뿐이었지요.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세련되고 똑똑한 배우들 틈에는 낄 수가 없었어요. 셰익스피어는 무척 힘들고 외로웠어요. 하지만 스스로 위로하며 용기를 잃지 않았지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글을 쓰리라.’ 셰익스피어는 희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 작품을 정말 당신이 썼단 말이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본 극장 책임자는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당장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지요. 공연은 대성공이었어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기 위해 귀족들은 물론 왕족까지 찾아올 정도였답니다. 셰익스피어는 극본을 쓰는 데만 전념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어요. “이탈리아 베로나에 몬태규와 캐풀렛 가문이 있었는데, 두 집안은 대대로 원수지간이었어. 그런데 몬태규 가문의 로미오와 캐풀렛 가문의 줄리엣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만 거야.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른들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내 죽고 말았지.”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어요. “공작님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도망쳐 버릴 테야!” 허미아는 달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결혼식이 이미 코앞에 다가왔거든요. 결국 허미아는 아버지를 피해 사랑하는 라이샌더와 요정의 숲으로 도망치고 말았어요. 마침 숲 속에서는 요정들의 사랑 싸움이 한창이었어요. 관객들은 요정 퍼크의 실수에 연방 웃음을 터뜨렸지요. 한여름 밤, 숲 속 빈터에서 꿈처럼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바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이에요. 공연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자 셰익스피어는 글로브 극장의 책임자가 되었어요. 셰익스피어는 극본을 쓰고 연기를 지도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 햄넷이 큰 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햄넷은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났지요. “오, 햄넷! 내 아들 햄넷!” 아내는 햄넷을 끌어안고 크게 울부짖었어요. 셰익스피어는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지요. 그 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웃음이 사라져 버렸어요. “아들아, 나는 네 삼촌에게 독살당했다. 네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네 삼촌과 결혼한 거야. 꼭 원수를 갚아 다오!” 북유럽에서 전해진 햄릿 왕자의 이야기는 가슴 아픈 비극인 햄릿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질투심에 불타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셀로의 이야기에도 셰익스피어의 슬픈 마음이 담겨 있었지요. 리어 왕과 맥베스 역시 슬픈 이야기예요. 영국의 전설적인 왕 리어에게는 세 딸이 있었어요. 첫째 딸 고네릴은 욕심이 많았고, 둘째 딸 리건은 교활했어요. 하지만 셋째 딸 코델리아는 착하고 진실했지요. 결국 리어 왕은 마음씨 나쁜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치고 말아요.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의 이야기예요.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맥베스는 지나친 야심으로 폭정을 펴다가 결국 다른 장수에게 살해되지요.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의 성공은 셰익스피어에게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안겨 주었어요. 셰익스피어가 이끄는 극단은 왕실 극단이 되어 여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요.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마흔여덟 살이 되던 해에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고향에서 평온하게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밤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던 커다란 별 하나가 떨어졌어요.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에이번 강가의 귀여운 백조들은 크게 울며 몹시 슬퍼했지요.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영혼은 아직도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수백 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말이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에 나오는 명대사 예요. 셰익스피어는 20여 년간 글을 쓰면서 자신의 시간을 한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37편의 희곡과 수많은 시를 남겼으니까요. “셰익스피어는 천재야!”, “셰익스피어는 진짜로 존재 했던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희곡을 쓸 수 있었을까?” 전 세계 작가들은 셰익스피어의 능력에 감탄했지요.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은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고 있 어요. 또한 4대 비극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는 세계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작품이지요. 셰익스피어는 어떤 이야기를 썼기에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감동하는 걸까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살펴보기로 해요. 맥베스 Macbeth 스코틀랜드의 무장 맥베스는 왕이 되고 싶은 야심가예요. 어느 날, 맥베스는 왕을 자기 성으로 초대 하여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지요. 그 뒤 맥베스는 왕의 자리를 잃을까 봐 불안해하다가 동료인 밴코 를 암살해요. 욕망에 눈이 먼 맥베스는 결국 전 왕의 아들 맬컴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오셀로 Othello 베니스 공국의 딸 데스데모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오셀로와 결혼하지요. 장군 오셀로는 베니스 공국을 지키기 위해 성실히 책임을 다하지만 욕심 많은 부관 이아고의 음모로 아내를 죽이고 말아요. 그 뒤 오셀로는 이아고의 음모 때문에 아내를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해 요. 오셀로에게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씌운 이아고는 처형을 당한답니다. 리어 왕 King Lear 어느 날, 리어 왕은 세 딸에게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막내인 코델리아는 자신은 효심을 다할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어요. 그러자 화가 난 리어 왕은 코델리아를 내쫓고 남은 두 딸에게 국토를 나누어 준답니다. 그러나 두 딸은 오만하게 굴며 아버지를 무시했어요. 화가 난 리어 왕은 궁전을 나와 황야를 헤매며 두 딸을 저주하지요. 한편, 쫓겨 나와 프랑스의 왕비가 된 코 델리아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가지만 아버지와 함께 포로가 된답니다. 코델리아는 병사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고, 리어 왕은 헤어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오열해요. 햄릿 Hamlet 덴마크의 왕자 햄릿의 부왕이 숙부에 의해 살해되자, 햄릿이 그 진실을 밝혀내지요. 그리고 햄릿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복수를 하지만 결국 자신도 독이 묻은 칼에 찔려 죽고 만답니다.
최승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최승희는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 이름은 조선이었고,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요. 승희의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승희는 명랑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어요. 승희는 특히 음악과 무용에 재능이 있어 학예회 때마다 무대에 섰어요. “승희야, 오늘 참 멋지더라. 정말 잘했어.” 승희의 노래와 춤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어요. 어느 날, 오빠 승일이 말했어요. “일본의 유명한 무용가, 이시이 바쿠 공연에 함께 갈래?” 승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승일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갔어요. ‘춤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승희는 춤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었어요. 그래서 승일을 졸라 함께 이시이 바쿠를 찾아갔지요. “선생님, 저에게 춤을 가르쳐 주세요.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나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승희의 다부진 모습에 이시이 바쿠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승희는 일본에 가서 무용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해서 너만의 춤을 추어야 해.” 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어요. ‘그래, 나는 일본에서 무용을 배우는 최초의 조선 사람이야. 뛰어난 무용가가 되려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승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어요. 또 틈틈이 책을 읽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 피나는 노력 덕분에 승희는 일본에 간 지 석 달 만에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었답니다. 무용을 배운 지 일 년이 지났을 때였어요. “가을에 있을 경성 공연에 너도 참여할 준비를 하거라.” 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말에 가슴이 뛰었어요. ‘조선 사람도 훌륭한 무용가가 될 수 있다는 걸 꼭 보여 줄 테야!’ 승희는 쉬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요. 드디어 경성 공연이 시작되는 날, 조선 최초의 무용가 최승희가 독무를 춘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공연장으로 몰려들었어요. 무대에 오른 승희는 꿈속에서까지 연습했던 춤 세레나데를 조용하고 부드러운 선율에 맞추어 정성을 다해 추었어요. “와, 조선의 꽃 최승희 만세!”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어요. 승희는 일본에 간 지 3년 만에 경성으로 돌아와, 남산 기슭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1930년, 승희는 우아한 조선 춤인 영산춤 등으로 꾸민 첫 무용 발표회를 열었어요. 우리나라 현대 무용의 시작을 알리는 뜻깊은 발표회였지만, 승희는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공연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어요. 승희는 두 번째, 세 번째 무용 발표회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작가 안막과 결혼했어요. 그 뒤에도 승희는 쉬지 않고 공연을 펼쳤지만, 조국에서 무용을 계속하기엔 어려움이 많았어요. 승희는 가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갔어요. 이시이 바쿠의 권유로 승희는 한성준에게 조선 춤인 승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아, 우리 춤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언젠가는 전 세계에 우리 춤을 알리겠어.’ 승희는 조선 춤의 멋에 흠뻑 빠졌어요. 얼마 뒤, 일본에서 여성 무용 대회가 열렸어요. 승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더듬으며 만든 에헤라 노아라라는 조선 춤을 추었어요. 사람들은 승희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과 일본에서는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지요. “정말 잘했다. 이제 내게서 독립해도 되겠구나.” 이시이 바쿠가 활짝 웃으며 축하해 주었어요. 승희는 일본에서 첫 신작 발표회를 열기로 했어요. 발표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결혼반지와 남편의 옷까지 팔았지요. 발표회를 여는 날,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어요. 승희는 관객이 없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여보, 3층까지 관객이 꽉 들어차 있어!” 남편의 말에 밖을 내다본 승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혼신의 힘을 다해 춘 공연은 대성공이었어요. 최승희보다 더 뛰어난 무용가는 없다. 일본 신문은 앞다투어 승희에 대한 기사를 실었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이 승희를 후원하겠다고 나섰지요. 이제 승희는 아무 걱정 없이 무용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뒤, 승희는 자신이 직접 만든 춤 열여섯 편을 선보였어요. 그 가운데 번쩍이는 칼을 양손에 들고 추는 검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불끈불끈 솟게 하는 춤이었어요. “최승희, 최승희!” 사람들은 승희의 춤에 열광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어요. 이제 승희는 조선과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승희는 경성에서 음반을 내고, 광고 모델도 했어요. 또 주인공을 맡아 무용가의 성공 이야기인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를 찍기도 했어요. 인기가 날로 높아져 가자, 승희는 조선과 일본이라는 무대가 좁게만 느껴졌어요. 그래서 세계 공연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지요. 1937년, 승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프랑스로 향했어요. 유럽의 첫 무대인 파리에서 초립동을 추었어요. 장가가는 어린 신랑의 신나는 모습을 표현한 경쾌한 춤이었지요. “와, 최승희는 동양 최고의 무용가이다!” “최승희의 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다!” 유럽 사람들이 승희의 춤에 열광하자, 신문들은 앞다투어 승희를 칭찬하는 기사를 실었어요. 또 승희가 초립동 공연에서 썼던 모자는 파리 시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승희는 미국과 남아메리카 순회 공연에도 나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어요. 승희는 해외 공연을 마치고 3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일본은 전쟁 때문에 나라 안이 어수선했어요. 어느 날, 승희는 일본 경시청에 불려 갔어요. “당신은 일본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일본 춤을 추시오. 그렇지 않으면 공연을 허가하지 않겠소.” 그 뒤, 승희는 ‘샤이 쇼오기’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일본풍의 춤을 추어야 했어요. 또 일본군의 위문 공연을 위해 중국 만주에 가기도 했지요. 북경에서 승희는 중국의 경극을 접하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역사와 나라는 달라도 예술은 하나의 생명력을 갖고 있어.’ 승희는 일본으로 돌아와 조선과 일본, 중국을 아우르는 춤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용을 창조하려는 꿈을 품었답니다. 날이 갈수록 일본의 전세는 불리해져 갔어요. 그러자 무용 공연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사그라들었지요. 하지만 승희의 공연장만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어요.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조선의 교포들과 유학생들도 승희의 공연을 보려고 모여들었어요. 그러자 일본 경시청은 또다시 승희를 간섭했어요. “한복을 입지 말고 일본 옷을 입고 춤을 추시오.” “일본 군가에 맞추어 춤을 추시오.” 일본 경시청의 끝없는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승희는 중국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최승희 동방 무도 연구소’를 열고, 중국 춤을 연구하고 동양 무용을 창작하는 일에 몰두했지요.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았어요. “아, 이제 내 조국에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겠구나!” 승희는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만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일본을 도왔다는 누명을 쓰고, 간첩이라는 기사까지 잡지에 나기도 했지요. ‘계속 경성에 있다가는 무용을 못하게 될지도 몰라.’ 승희는 두려움에 떨며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갔어요. 그리고 평양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열고, 딸 안성희에게도 무용을 가르쳤어요. 1950년 6월 25일,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어요. 중국으로 피신한 승희는 중국 총리의 도움으로 공연도 하고, 북경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그녀가 새롭게 보여 준 춤은 중국 무용가들에게 자극을 주어 중국의 무용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답니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 승희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북한 예술가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인민배우가 되어,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냈어요. 승희의 무용 생활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날, 김일성 주석과 많은 외국인 축하객이 참석했어요. 승희는 조선민족무용기본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어요. 이것은 조선 춤의 기본 동작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훗날 승희의 춤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답니다. 북한은 점점 김일성의 독재 체제로 변해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안막이 감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북한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이유였지요. 승희도 무용 활동을 접고 집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승희는 목숨만큼 사랑하는 무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안성희에게 당부했어요. “나 대신 우리의 민족 무용을 지켜 다오.” 1967년, 승희는 무용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그 뒤 북한 정부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해요.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태어나 불꽃같이 빛나던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세계 예술계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떠났어요.
코코 샤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옛날 서양 여자들은 코르셋으로 몸을 꽉 조이고, 치렁치렁 늘어진 긴 드레스를 입었어요. 또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에는 꽃이나 리본, 깃털 같은 장식물을 달았어요. 그런 불편한 차림 때문에 여자들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얼마 뒤에 단순한 디자인의 모자와 숨통이 트이는 편안한 옷이 나오게 된답니다. 여자들이 지금처럼 마음껏 활동하게 된 데에는 이 사람의 공을 빼놓을 수 없어요. 바로 세계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에요. 코코 샤넬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이에요. 샤넬은 188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어요. 가난한 장사꾼이었던 아버지는 늘 집 밖으로 떠돌았고, 몸이 약한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꾸려야 했어요. 어머니는 힘든 내색도 않고 묵묵히 할 일을 다했지만,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엄마, 돌아가시면 안 돼요. 흑흑.”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고 우는 아이들을 거두지 않았어요. 아들들은 농장 일꾼으로 보내고, 딸들은 고아원으로 보냈지요. 열두 살 소녀 샤넬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 뒤로 밤만 되면 잠결에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몽유병을 앓게 되었어요. 고아원이 방학을 하면, 샤넬은 할아버지 집에 가곤 했어요. 그곳에는 비슷한 또래의 아드리엔 고모가 있었어요. 샤넬과 아드리엔은 성격도, 외모도 많이 달랐어요. 아드리엔은 아름답고 성격도 온순했지만, 샤넬은 남자 같은 외모에 성격 또한 개성이 강했지요.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친해져서 오랫동안 벗이자 동료로 지냈어요. 샤넬과 아드리엔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기숙학교에 들어갔어요. 기숙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어야 했어요. “난 교복이 참 좋아. 고아원에서도 교복 입는 것은 좋아했지.” 샤넬은 이웃 남학교의 교복도 눈여겨보았어요. 교복의 단순함은 훗날 샤넬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샤넬과 아드리엔은 기숙학교를 졸업한 뒤, 물랭에 있는 의상실에 취직했어요. 젊고 바느질 잘하는 점원들이 새로 왔다는 소문은 귀부인들을 통해 퍼져 나갔고, 일감은 점점 늘어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샤넬은 엉뚱한 일을 벌였어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된 거예요. 코코리코와 누가 코코를 보았는가라는 두 곡을 불렀는데, 꽤 인기가 좋아서 샤넬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코코, 코코!” 하고 외치며 박수를 보냈어요. 그래서 샤넬은 ‘코코 샤넬’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답니다. 이 일로 샤넬은 의상실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샤넬은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큰 도시 비시로 갔어요. 하지만 성악 선생님에게 재능이 없다는 말을 듣고 꿈을 접었지요. 샤넬이 실망에 빠져 있을 때, 남자 친구 에티엔 발장이 위로해 주었어요. 둘은 경마장에 놀러 가고 승마도 배웠어요. 그런데 치마를 입고 말을 타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어요. ‘여자라고 해서 치마를 입은 채로 말을 타야 하나?’ 그길로 샤넬은 양복점을 찾아가 남자 승마 바지를 내밀었어요. “이 바지를 제 몸에 맞게 고쳐 주세요.” “뭐, 뭐라고요? 여자 바지를 만들어 달라는 얘긴가요?” 재단사는 자기 귀를 의심했어요. 그 당시에는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경찰에게 경고를 받을 정도로 옷차림에 대한 간섭이 심했거든요. 샤넬은 경마장이나 파티에 온 여자들의 옷차림을 관찰하곤 했어요. ‘후후, 모자에 주렁주렁 달린 장식이 크리스마스트리 같아.’ 그 순간, 샤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여자들 모자를 단순하게 만들어 보자.’ 샤넬이 만들어 쓴 모자는 곧 여자들의 눈길을 끌었어요. “어머나, 참 멋지네요! 나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샤넬은 점차 모자 사업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발장의 생각은 달랐어요. 발장은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일을 하려는 샤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샤넬은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을 만나게 되었어요. 카펠은 발장과는 달리 뚜렷한 목표와 계획이 있는 남자였어요. ‘아, 정말 멋진 사람이야. 나도 저 사람처럼 꿈을 이루며 살고 싶어.’ 샤넬은 카펠에게 모자 사업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했어요. “오,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해냈군요.” 카펠은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기 때문에, 샤넬의 마음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찬성해 주었어요. “샤넬, 당신의 능력과 열정이라면 꼭 성공할 거요. 파리로 가서 당신의 꿈을 펼쳐 보는 게 어떻겠소?” 카펠의 말에 샤넬은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다음 해인 1909년, 샤넬은 파리로 갔어요. 그리고 이듬해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가게를 열고, 여동생 앙투아네트도 불러 함께 일했어요. 모자 가게는 아주 큰 호황을 누려 이듬해에 더 넓은 가게로 옮겼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빌린 돈까지 모두 갚을 수 있었지요. 그러고 나서 샤넬은 도빌에 의상실을 열었어요. 단순한 디자인의 모자에 어울리는 외출복과 파티복을 선보이고, 바닷가 도시에 걸맞는 휴양지 패션도 만들었어요. 샤넬은 때때로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아드리엔과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지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어요. 파리의 수많은 피난민이 도빌로 몰려들었어요. 전쟁은 샤넬에게 기회가 되었어요.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자 여자들이 대신 일을 해야 했는데, 여자들은 거추장스러운 옷보다 샤넬의 편한 옷을 좋아했답니다. 이듬해, 샤넬은 에스파냐와 맞닿은 바닷가 비아리츠에 두 번째 가게를 열었어요. ‘흠, 여기는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니 값비싼 제품을 만들어야겠어.’ 샤넬의 생각은 딱 맞아떨어졌어요. 가게 안은 부자들로 북적댔고, 에스파냐 왕가도 고객이 되었지요.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카펠은 다른 귀족 여자와 결혼했어요. 귀족과 결혼하여 정치적 성공을 하려는 야심 때문이었지요. 샤넬은 몹시 괴로웠지만 조용히 카펠을 보냈어요. 그러나 더 슬픈 일들이 잇따라 찾아왔어요. 그해 겨울에 카펠이 교통사고로 죽고, 다음 해에 결혼식을 올린 여동생 앙투아네트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거예요. 샤넬은 큰 충격에 휩싸여 울부짖었어요. “내 손으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입힌 앙투아네트가 죽다니. 다시는 웨딩드레스를 만들지 않을 거야.” 샤넬은 한동안 슬픔에 잠겨 지냈어요. 이때 샤넬 곁을 지켜 준 사람이 평생의 벗인 미시아예요. 미시아는 함께 여행을 하며 샤넬에게 예술가들을 소개해 주었어요. 영화감독 장 콕토,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작가 막스 자코브 등이 바로 이때 만난 사람들이랍니다. 샤넬은 이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지만, 그들의 작품을 사 모으지는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예술 작품을 감상할 권리가 있어. 이런 위대한 작품은 내 집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가야 해.” 그 뒤, 샤넬은 향수와 장신구 등 여성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것에 손을 뻗었어요. 그 당시에는 장미 등의 꽃향기 향수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샤넬이 만든 향수는 달랐어요. 한 가지 향이 아닌 수십 가지 향이 섞여 있었지요. 향수병 역시 유행하던 화려한 모양이 아닌 단순하고 네모난 모양이었어요. ‘샤넬 넘버5’라는 이름 또한 남달랐어요. 숫자 5는 샤넬이 행운으로 여기던 숫자였는데, ‘샤넬 넘버5’는 정말 샤넬에게 큰 행운을 안겨 주어 샤넬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답니다. 샤넬은 가짜 보석으로 장신구도 만들었어요. “왜 장신구는 진짜 보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몸에 돈을 붙이고 다니는 것과 뭐가 달라?” 샤넬은 특히 양식 진주를 즐겨 사용했어요. 천연 진주보다 값이 싸면서도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또 어깨에 메는 가방을 만들어 손을 자유롭게 해 주었고, 장례식 옷이나 만들던 검은색 천으로 파티복을 만들기도 했어요. 이처럼 샤넬은 멋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으며 시대를 한발 앞서 갔답니다. 어느덧 샤넬은 직원을 4천 명이나 둔 기업가가 되었어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손에서 일을 놓았던 샤넬은 14년 만에 다시 의상실을 열었어요. 이어서 재기 패션쇼를 통해 새로운 의상을 선보였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어요. “샤넬도 한물갔구먼. 쯧쯧, 할머니 패션이잖아.”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어요. 이듬해에 샤넬이 만든 옷과 가방, 신발이 엄청난 인기를 얻어 샤넬의 대표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샤넬은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로 ‘패션 오스카 상’을 탔어요. 1971년, 샤넬은 숨지기 이틀 전까지 패션쇼를 준비하며 일했어요. 그리고 모두가 쉬는 휴일, 고아원 소녀에서 세계를 주름잡는 패션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모든 슬픔과 영광을 뒤로 한 채 편안히 잠들었답니다. 샤넬은 열두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자매들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어요. 농장에 일꾼으로 들어간 남동생들과도 헤어지고, 아버지는 그 뒤로 다시 만날 수 없었지요. 이때 샤넬이 받은 상처는 매우 컸어요. 샤넬은 어른이 된 뒤 “나는 열두 살 때 모든 걸 빼앗 겼다.”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크게 성공한 뒤에도 고 아원 앞을 눈물 없이 지나간 적이 없었고, ‘고아원’이라는 말조차도 입에 담기 싫어했어요. 외로운 고아원 시절에 얻은 몽유병은 평생 동안 샤넬 을 따라다녔어요. 패션 디자이너로서 모든 꿈을 이룬 뒤에도 몽유병을 앓았으니까요. 한밤중에 잠옷 차림으 로 리츠 호텔을 돌아다니는 샤넬의 모습은 여러 사람 의 눈에 종종 띄곤 했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샤넬이 자는 호텔 방의 커튼과 이불 따위가 가위로 마구 잘려 있기도 했어요. 평소 일할 때 에도 단순한 스타일을 좋아한 그녀답게 뭔가를 덧붙이 는 도구인 바늘보다는 뭔가를 잘라 내는 가위를 늘 지 니고 다녔어요. 그래서 꿈속에서도 가위질을 하며 디 자인에 몰두했는지도 몰라요. 고아원 시절, 샤넬은 여러 가지 공상을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곤 했어요. 특 히 예쁜 집을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좋아했어요. ‘난 나중에 눈부시게 새하얀 집에서 살 거야.’ 훗날 샤넬은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었어요. 그런데 그 오랜 꿈과는 반대로 집 안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 지요. 그건 바로 샤넬이 평생을 통해 사랑해 왔던 카펠이 세상을 떠난 뒤에 얻은 슬픔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슬픔을 상징하던 검은색을 화려한 파티복으로 승화시킨 것도 샤넬이었어요. 샤넬이 살던 때 에는 검은색은 장례식 옷을 만들 때나 쓰던 색이었어요. 하지만 샤넬이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검은 파티복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거예요. 이처럼 샤넬은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곤 했어요. 모든 여성이 치렁치렁한 긴 치마를 입 을 때 무릎 아래 길이의 짧은 치마를 입었고, 모두가 화려한 모자를 쓸 때 단순한 디자인의 모자를 썼으며, 모두 긴 머리를 할 때 짧은 커트를 했어요. 또한 단순한 꽃향기로 향수를 만들어 쓸 때 여러 가지 향을 섞어 만든 향수를 내놓았으며, 화려한 향수병을 선호할 때 단순하고 네모난 모양의 향수 병을 만들었고, 남자 옷을 만들 때나 쓰던 저지 옷감으로 여자 옷을 만들고, 남자들이나 입던 승마 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했어요. 샤넬은 단지 눈에 띄기 위해서 일부러 남과 다르게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늘“아름다움보다 편안함이 우선이다. 우리는 옷 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말했어요.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샤넬의 디자인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랍니다.
가우디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엄마, 너무 아파요.” 아이가 가쁜 숨을 내쉬었어요. “아가야, 괜찮아질 거야. 더 아플 때도 잘 견뎌 왔잖아. 네가 꿈을 이룰 때까지 하느님이 지켜 주실 거야.”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꿈을 이룬다고요?” 엄마는 아이의 빛나는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자 아이는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가족이 사는 아름다운 집을 짓는 꿈을 꾸면서 말이에요. 그 아이가 바로 천재 건축가라고 불리는 가우디예요. 가우디의 아버지는 대장장이였어요. 가우디는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어요. 평평한 동판이 반짝이는 그릇으로 변하는 것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아빠는 꼭 마술사 같아요. 나도 커서 아빠처럼 대장장이가 될래요.” 아버지는 가우디를 번쩍 들어 올려 창 쪽으로 다가갔어요. 창밖으로 긴 강이 펼쳐져 있었지요. “이 대장간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다. 너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더 큰 꿈을 펼쳐야지.” 가우디는 몸이 아파서 학교에 못 가는 날이 많았어요. 그럴 때면, 강가나 숲길을 조용히 거닐거나, 여러 동물의 집을 관찰하곤 했어요. “달팽이집은 참 재미있게 생겼어. 빙글빙글 도는 팽이 같아. 거미집은 촘촘한 그물 모양이고, 새들은 나뭇가지를 엮어 집을 짓는구나. 이야, 벌집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가우디는 눈을 반짝이며 자연의 신비에 빠져 들었어요. “동물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집을 짓는구나!” 가우디는 자연과 어우러진 동물들의 집을 보며 모두 조화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가우디에게는 리베라와 토다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가우디와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이었지요. “우리 포블레트 유적지에 가 볼까?” 포블레트 유적지에는 아주 멋진 수도원이 있었어요. 하지만 전쟁과 도굴로 많이 망가져 있었지요. “우리가 이곳에 다시 수도원을 세우는 거야!” 가우디의 말에 리베라와 토다는 신이 났어요. 세 아이는 돌을 옮겨 높은 성벽을 쌓고, 납작한 돌로 지붕도 만들었어요. 그 뒤, 가우디는 건축가의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청년이 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건축 대학에 입학했어요. 아버지가 땅을 팔아 입학금은 마련해 주었지만, 스스로 학비를 벌어 가며 공부해야 했어요. 건축학과 교수의 조수로도 일하고, 장식품을 만드는 작업장에서도 일을 했지요. 그러면서도 틈날 때마다 책을 읽었어요. 책을 읽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책 여백에 적어 놓곤 했답니다. 한날도 책을 읽다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데, 친구가 오더니 버럭 화를 냈어요. “가우디! 내 책에 낙서를 하면 어떡해!” 책 내용에 깊이 빠져 있다가, 친구한테 빌려 온 책인 것을 깜박 잊은 거예요. “가우디, 몸도 약한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일하느라 지쳤을 텐데 책 속에 파묻혀 있으니.” 의과 대학에 다니는 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형은 얼른 의사가 되어 약한 동생을 보살펴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의사가 되기도 전에 형은 죽고 말았어요.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지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가우디는 큰 슬픔에 빠졌어요. “가족과 함께 사는 멋진 집을 짓고 싶었는데.” 하지만 가우디는 슬픔을 이기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더욱 열심히 일했어요. 가우디는 다른 학생들과 많이 달랐어요. 가우디만의 독특한 설계는 교수들을 갸우뚱하게 만들곤 했지요. 묘지로 들어가는 문을 설계하라고 하면 묘지 앞에서 사람들이 슬퍼하는 풍경화를 그렸고, 병원 설계도를 그리라고 하면 병원 구석구석을 조사하는 일에 더 몰두했어요. 졸업식 날, 교수는 가우디에게 졸업장을 주며 말했어요. “지금 내가 건축가 자격증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정신 나간 사람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가우디는 상관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이 꿈꾸는 집을 설계할 수 있으니까요. 가우디는 책상이나 가로등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새내기 건축가인 가우디에게 아무도 건물 설계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가우디는 장식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가우디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박람회에 쓸 진열장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가우디는 나무와 유리, 금속으로 아름다운 장식장을 만들어 보냈지요. 그런데 며칠 뒤, 작업장으로 한 신사가 찾아왔어요. “만국 박람회에서 당신이 만든 장식장을 보았습니다. 너무 아름답더군요!” 그 신사가 바로 가우디의 영원한 벗이자 후원자가 된 구엘이랍니다. 드디어 가우디가 처음으로 집을 짓게 되었어요. 타일 공장 사장의 집이었지요. 가우디는 기뻐하며 집터로 달려갔어요. 노란 금잔화와 커다란 야자수가 있는 아름다운 집터였어요. 가우디는 자연을 닮은 집을 짓기 위해 기둥 하나, 타일 하나도 깊이 고민했어요. 마침내 타일로 만든 집 ‘카사 비센스’가 완성되었어요. 꽃무늬가 들어간 타일과 짙은 황토 빛깔의 돌, 이파리를 본떠 만든 대문, 카네이션 모양이 새겨진 돌담 등 집 안 곳곳에서 자연의 멋이 풍겼어요. 사람들은 신비스러운 집을 보고 크게 감탄했답니다. 가우디는 서른한 살 되던 해에 ‘성가족성당’을 짓는 총감독이 되었어요. 가우디는 신부들에게 말했어요. “성당은 하느님이 머무는 곳이며, 신도들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저는 모든 이의 꿈과 소망을 담은 성스러운 예술 작품을 지을 것입니다.” 가우디는 건축 계획과 장식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어요. 신부들은 가우디의 열정과 집념에 크게 감동했어요. 하지만 성가족성당을 짓는 일은 생각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았어요. 워낙 큰돈이 들어서 순조롭지 않았던 거예요. 구엘은 가우디의 실력을 아주 높이 샀어요. 그래서 가우디에게 공원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지요. 가우디는 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만들었어요. 반쯤 기울어진 독특한 모양의 돌기둥,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수도 만들었어요. 가우디는 값비싼 타일도 주문했어요. 그런데 타일이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을 내 버렸어요.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지요. 깨진 타일 조각이 아기자기한 모자이크가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렇게 다양한 아름다움을 담고 탄생한 구엘 공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카사밀라’ 역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구불구불한 굴뚝과 모자이크로 뒤덮인 옥상문,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천장,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한 앞모습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건물이었지요. 카사밀라를 본 사람들이 가우디에게 물었어요. “집을 왜 이렇게 구불구불하게 지은 거요?” 가우디는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며 대답했어요. “다른 뜻은 없소. 이 집이 저기 보이는 산과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밖에.” 가우디는 가족을 위한 집을 짓고 싶었어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집을 말이에요. 하지만 정작 가우디에게는 함께 살 가족이 없었어요. 어릴 적 꿈을 심어 주었던 아버지와 40년을 함께한 구엘마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가우디는 성가족성당을 짓는 일에만 온 힘을 쏟았어요. 중앙 벽을 세우는 데만 10년이 걸렸고, 벽면도 모형 조각을 수없이 만들어 본 뒤에야 채워졌지요. 가우디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죽기 전에 성당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지요. 어느 날 저녁, 가우디는 일을 마친 뒤 저녁 기도를 하러 길을 나섰어요. 그때, 갑자기 지나가는 전차를 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큰 슬픔에 잠겼어요. 가우디는 수십 년간 열정을 바친 성가족성당 지하에 묻혔어요. 지금도 성가족성당은 가우디의 설계에 따라 지어지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성가족성당과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려고 바르셀로나를 찾고 있어요. 가우디는 자연을 닮은 그의 수많은 건축물과 함께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속에 머무를 거예요.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 가면 가우디의 아름답고 독특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요. 찰흙을 주물러 놓은 듯한 건물이며, 자연과 아주 잘 어울리는 아담한 공원, 하늘로 치솟은 성당의 웅장한 모습은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남긴답니다. 가우디는 이렇게 독특한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 시대의 유명한 건축 양식을 따르거나 어느 유명한 교수에게 배운 것은 아니었어요. 가우디의 스승은 바로 자연이었어요. 어린 시절, 몸이 무척 약했던 가우디는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기보다 집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하늘, 구름, 들판, 강물, 산, 돌, 동물 들이 그의 건축물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랍니다. 유네스코가 가우디의 작품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도 작품 속에 자연과의 조화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에요. ‘구엘 공원’은 마치 자연이 빚어 놓은 조각처럼 느껴져요. 돌들을 기묘하게 쌓아 올린 기둥은 흘러내린 종유석처럼 보이고, 길고 구불구불한 의자에는 알록달록한 타일 조각이 채워져 있어 마치 거대한 파충류를 보는것 같지요. 또한 아치 모양의 산책로와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구엘 공원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랍니다. ‘카사밀라’는 직선이 하나도 없는 집이에요.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곡선이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어요. 동굴 입구처럼 생긴 출입구, 꽃줄기를 떠올리게 하는 난간도 매우 특이하지요. 이 집은 멀리 보이는 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주어 대자연의 힘을 느끼게 한답니다. ‘카사 바트로’는 난간과 기둥이 꼭 사람의 뼈 모양처럼 생겨, ‘해골집’이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건물의 앞부분은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이는데, 그 위를 덮은 색유리 조각과 타일은 햇빛을 받으면 무지개 빛으로 빛나고, 지붕은 마치 비늘을 연상시킨답니다. ‘구엘 궁전’은 가우디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구엘을 위해 지은 집이에요.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대들보가 없는 넓은 홀과 벽돌과 타일 조각으로 채워진 열여덟 개의 굴뚝은 이 집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성가족성당’은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건축물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성당이 살아서 움직일 것 같다’라고 말해요.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은 네 개의 탑은 날카롭다기보다는 하늘을 어루만지는 듯한 부드러움과 장엄함을 함께 선물하지요. 가우디는 ‘독창적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의 믿음처럼 그의 건축물들은 자연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답니다.
김유신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으앙!” 방 안에서 힘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몇 시간째 진통을 하던 만명 부인이 아기를 낳은 거예요.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남편은 울음소리를 듣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어요. “부인, 고생 많았소. 건강한 사내아이구려.” 만명 부인과 만노군의 태수 김서현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기가 바로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에요. 김유신의 조상은 원래 금관가야 사람이에요.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마지막 왕 구형왕이 바로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였지요. 신라 법흥왕은 구형왕의 가족을 따뜻이 맞아 주고 자신의 성을 따르게 했어요. “우리 유신이 신라를 위해 큰일을 할 장군이 되었으면 하오.” 아버지는 흡족한 얼굴로 유신을 바라보며 말했어요. “별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아이니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예요.”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어요. 유신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답니다. 전쟁 놀이를 하면 유신은 언제나 대장이었어요. “자, 모두 나를 따르라.” 유신은 친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적보다 군사의 수가 적을 때에는 탁 트인 들판보다 이런 곳이 유리해. 이렇게 험한 산속에 숨어 있다가 공격하는 거야.” 유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어요. 유신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화랑이 되어 이름난 산과 강, 들판을 다니며 무예를 쌓고 화랑의 도를 익혔어요. 화랑도는 신라 시대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단체예요. 화랑은 화랑도의 우두머리를 말하는데,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지요. 유신은 친구들과 술집에 갔다가 천관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었어요. 유신은 천관에게 마음을 빼앗겨 수련마저 소홀히했어요. 보다 못한 어머니가 엄하게 꾸짖었어요. “화랑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 뒤, 유신은 천관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유신이 집에 가려고 말에 올랐는데 너무 피곤하여 그만 꾸벅꾸벅 졸았어요. 나중에 눈을 뜬 유신은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곳은 천관의 집 앞이 아닌가?” 말이 자주 가던 천관의 집을 찾아갔던 거예요. “이놈! 네가 내 의지를 꺾으려고 하는구나. 에잇!” 유신은 그 자리에서 아끼던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답니다. 유신이 열일곱 살 때였어요. “백제군이 또 쳐들어왔다!” 신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북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걸핏하면 두 나라의 침략을 받곤 했으니까요. ‘이러다간 큰 위험이 닥치겠어.’ 유신의 근심은 날로 커져 갔어요. 유신은 생각 끝에 중악산에 올라가 신령님께 기도를 했어요. 중악산은 신라 사람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산이었지요. “신령님, 신라는 지금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부디 저에게 두 나라를 이길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유신은 며칠 밤을 새우며 기도했어요. 기도를 드린 지 여러 날이 지난 어느 새벽이었어요. 어디선가 백발 노인이 나타나 물었어요. “너는 누군데 이 험한 산골까지 찾아왔느냐?” 유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손하게 말했어요. “나라가 위험에 처해 깨달음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부디 나라를 구할 비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노인은 유신의 얼굴에서 비장함을 느꼈어요. “예로부터 비법을 잘못 사용하면 커다란 재앙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러니 너는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을 옳은 일에만 써야 한다.” 노인은 유신에게 비법을 일러 주었어요. 그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요. 유신은 귀한 가르침을 반드시 값지게 쓰리라 다짐했어요. 629년,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당시 신라는 한강 유역에서 당나라와 무역을 했는데,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자꾸 침범했던 거예요. 마침내 진평왕은 명을 내렸어요. “김용춘, 김서현 장수! 이번 싸움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 주시오.” 유신도 아버지를 따라 고구려 낭비성으로 향했어요. ‘반드시 승리하여 화랑의 용맹함을 보여 주리라!’ 유신은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화랑이 된 뒤 처음으로 나가는 싸움이었거든요. 낭비성 싸움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어요. 두 나라는 승패도 없이 모두 큰 피해만 입고 있었지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네.” 김용춘과 김서현이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였어요. 유신이 자신에 찬 모습으로 나섰어요. “아버님, 제가 나가 싸우겠습니다.” “좋다, 나가서 화랑의 장수답게 용감히 싸우도록 해라!” 김서현은 유신의 두 손을 꼭 잡았어요. 유신은 힘차게 말을 몰아 앞으로 돌진했어요. “힘을 내서 고구려를 쳐부수자!” 유신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군사들의 사기가 치솟았어요. 얼마 뒤 유신은 의기양양하던 고구려 장수를 쓰러뜨렸어요. “우아! 우리가 이겼다. 김유신 만세!” 유신은 고구려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어요. 모처럼 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차기를 했어요. 김춘추는 신라의 왕족으로 유신과는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지요. 그런데 유신의 실수로 김춘추의 옷이 찢어지고 말았어요. 유신은 집으로 가서 누이동생 보희에게 말했어요. “보희야, 내가 실수로 이분의 옷을 찢었는데 네가 좀 꿰매어 드려라.” “오라버니, 어찌 낯선 남자의 옷을.” 보희가 얼굴을 붉히며 거절하자 동생 문희가 나섰어요. “오라버니, 제가 꿰매어 드리겠습니다.” 김춘추는 문희의 다소곳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어요.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답니다. 그 뒤, 유신은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용맹을 떨쳤어요. 한번은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가던 중이었어요. “장군님, 저기 장군님 댁이 보입니다.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오랜 싸움으로 유신은 벌써 몇 달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지요. “아니다, 그 대신 우리 집에 가서 물을 한 잔 떠 오너라.” 한 군사가 얼른 달려가 물을 떠 왔어요. 유신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단숨에 물을 마셨어요. “물맛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집에 아무 일 없나 보구나. 다른 군사들도 가족이 보고 싶을 텐데 어찌 나만 집에 간단 말이냐. 자, 가자!” 유신은 전쟁터를 향해 다시 말을 몰았어요. 군사들은 유신의 깊은 헤아림에 크게 감동했어요. 647년, 유신과 김춘추는 선덕 여왕을 위협하는 반란군과 맞서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유신의 군사들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어요. “큰일이다! 별똥별이 우리 쪽으로 떨어졌어!” “정말? 별똥별이 떨어진 쪽은 싸움에 진다던데.” 군사들이 크게 불안해하자 사기는 한없이 떨어졌어요. 이를 지켜보던 유신은 몰래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허수아비에 불을 붙인 다음 연에 매달아 하늘로 올려 보냈지요. 떨어진 별똥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거예요. “어? 저기 별똥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군사들은 신기해하며 몹시 기뻐했어요. 다시 용기를 얻은 군사들은 싸움에서 크게 승리했어요. 선덕 여왕의 뒤를 이어 진덕 여왕이 왕위에 올랐어요. 진덕 여왕은 유신에게 이찬이라는 벼슬을 내렸어요.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지요. 그 뒤로 김춘추가 진덕 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 무열왕이 되었어요. 유신은 나라의 중대한 일을 도맡아 하며 무열왕을 잘 받들었어요. “마마, 백제의 의자왕이 술에 빠져 있어 나라가 매우 어수선하다고 합니다. 지금이 백제를 칠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옵니다.” 유신의 말에 무열왕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신라는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칠 계획을 세웠어요. “김유신에게 5만 대군을 주어 백제를 치게 하라!” 무열왕의 명이 떨어지자 유신은 김흠순, 김품일 장수와 함께 황산벌로 향했어요. 황산벌에는 계백 장군이 거느린 5천 명의 결사대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처음에 신라군은 백제 군사들을 우습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은 결코 만만치 않았어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전투가 치열할 때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나섰어요. 반굴은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화랑이었지만 용기가 대단했어요. “제가 계백 장군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용감히 싸워서 나라를 구하도록 하라.”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반굴은 말을 몰고 나아갔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군의 칼에 죽고 말았답니다. “장군님, 제가 나가 반굴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번에는 관창이 유신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김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 역시 나이는 어렸지만 매우 용감한 화랑이었지요. 유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관창은 적진으로 뛰어들었어요. 어린 화랑들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군사들은 힘을 모았지요. 마침내 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백제군을 물리쳤어요. 그 뒤, 백제를 정벌하고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까지 멸망시켰답니다. 문무왕 668년 9월, 드디어 삼국 통일이 이루어졌어요. “아! 꿈이 이루어졌구나!” 유신은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문무왕은 유신의 공로를 칭찬하며 ‘태대각간’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어요. 673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은 편안히 눈을 감았답니다.
을지문덕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평양 석다산 아래 작은 마을 어느 집에서 벌써 여러 날째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어요. “으 으악!” 비명 소리는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되풀이했어요. 남편은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천지신명님! 제발 아내가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애를 태우던 남편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어요. 그때 스님 한 분이 사립문 밖을 지나갔어요. 남편은 얼른 스님 앞을 막아섰어요. “스님, 제 아내 좀 살려 주십시오. 벌써 여러 날째 진통만 하고 아기가 나오지 않아 죽게 생겼습니다.” 남편은 스님 앞에 넙죽 엎드렸어요. 그러자 스님은 사립문 옆 버드나무로 다가가 공손히 절을 하고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남편에게 건넸어요. “이 가지를 아내가 있는 방에다 놓고 기도를 올리십시오. 그러면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편은 나뭇가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방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남편은 너무 기뻐 울먹이며 말했어요.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건강한 사내아이구려.” 부모님의 애를 태우며 태어난 이 아기가 바로 을지문덕이에요. 을지문덕은 씩씩하게 자랐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놀고 있는 을지문덕을 불렀어요. “내일부터 경당에 가도록 해라.” “정말요? 저도 이제 경당에 다니는 거예요?” 을지문덕은 너무 좋아서 깡총깡총 뛰었어요. 경당에 다니는 마을 형들을 볼 때마다 늘 부러웠거든요. 그 뒤 경당에서 글은 물론 활쏘기, 말 타기, 창던지기 같은 무술을 배웠어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을지문덕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갔어요.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수확한 곡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나면 무술 대회를 열었어요. 을지문덕은 열 살이 되던 해 무술 대회에 참가했어요. 전국 곳곳에서 늠름한 청년들이 경기장으로 모여들었어요. 을지문덕도 청년들과 함께 나란히 줄을 섰지요. 그러자 경기장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니, 저렇게 어린 아이가 무술 대회에 참가한 거야?” “그러게 말일세. 어디 한번 지켜보세.” 마침내 대회가 시작되었어요. 청년들은 차례로 활시위를 당겼어요. “에이, 화살이 과녁 근처에도 못 갔어.” “아깝다, 아까워.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갔으면 명중인데.” 사람들은 청년들이 활을 쏠 때마다 안타까워하며 함께 마음을 졸였어요. 드디어 을지문덕 차례가 되었어요. 을지문덕은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힘껏 당겼다가 놓았어요. 화살은 번개처럼 날아가 과녁 한가운데에 정확히 꽂혔어요. “우아, 명중이다!” “어린애가 보통이 아닌걸.” 사람들은 을지문덕의 뛰어난 실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활쏘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말 타기 경기장으로 우르르 몰려갔어요. “말 타기에서는 누가 일등 할까?” “글쎄, 말을 마음대로 다루려면 아무래도 덩치도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일등을 점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비록 덩치는 작지만 당당하게 겨루어 볼 테야!’ 을지문덕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새롭게 했어요. 이윽고 말 타기가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출발선에 등장한 선수는 단 두 명뿐이었어요. 나라에 말 잘 타기로 이름난 청년이 참가한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기권한 거예요. “에이, 보나 마나 한 경기잖아.” 사람들은 어린 을지문덕과 청년을 번갈아 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나 을지문덕은 아랑곳하지 않고 채찍을 꽉 움켜잡았어요.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어요. 사람들은 하나 둘 몸을 일으키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예상과 달리 두 말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어요. “야호! 달려라, 달려!” “꼬마야! 힘내라, 힘!” 어느덧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을지문덕을 응원했어요. 말 타기 경기는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을지문덕의 승리로 끝났어요. “어린아이가 대단하군, 대단해!” “아니, 저 아이는 활쏘기에서 일등을 한 바로 그 아이가 아닌가?” “을지문덕이라고 했지? 부디 용감한 장군이 되어 나라를 튼튼히 지켜 주면 좋겠구먼.” 사람들은 을지문덕이 대견하여 저마다 한마디씩 했어요. 을지문덕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어요. ‘더욱더 노력해서 꼭 고구려 최고의 장군이 될 테야.’ 을지문덕은 굳게 다짐했어요. 을지문덕은 무예를 닦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그 무렵, 고구려는 몹시 혼란스러웠어요.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서쪽에서는 수나라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고구려 백성은 계속되는 전쟁에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지요. “후유, 수나라가 언제 또 쳐들어올까? 몇 달 만이라도 마음 편히 살았으면 원이 없겠네.” 고구려에는 슬기롭고 용감한 장군이 절실히 필요했어요. 을지문덕은 산속에서 10년 동안 무예를 갈고 닦아 늠름한 장군이 되었어요. 하루는 궁궐에서 회의가 열렸어요. 수나라가 어마어마한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지요. “장군, 부디 어려움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해 주시오.” 영양왕은 을지문덕의 두 손을 꼭 잡았어요. 집으로 돌아온 을지문덕은 며칠 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수나라를 물리칠 방법을 궁리하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았지요. ‘그래, 수나라의 단점을 이용해 수나라 군대를 치는 거야.’ 을지문덕은 작전을 꼼꼼히 적어 나갔어요.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을지문덕은 군사들을 셋으로 나누어 강가에 배치했어요. 그런 다음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기를 기다렸지요. 고구려를 공격하려면 큰 강을 건너야 했거든요. “둥, 둥, 둥.” 수나라 진영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수나라 군사들이 배에 올라탔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어디선가 화살이 소나기처럼 날아들기 시작했어요. 수나라 군사들은 배에 미처 오르기도 전에 물속으로 고꾸라졌어요. “고구려 군사들이 숨어 있다. 후퇴하라!” 수나라 장군은 허겁지겁 후퇴 명령을 내렸어요. 그날 밤, 수나라 군사들은 배를 연결해 다리를 놓았어요. 다리를 이용해 한달음에 강을 건너겠다는 속셈이었지요. 을지문덕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강기슭에 둑을 쌓은 뒤 그 아래에 창과 칼을 잘 쓰는 군사들을 숨겨 두었어요. 날이 밝자, 수나라 군사들이 벌 떼처럼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어요. “뭐야? 아무도 없잖아. 괜한 걱정을 했네.” 강을 무사히 건넌 수나라 군사들이 긴장을 풀며 말했어요. 바로 그때, 창과 칼을 든 고구려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왔어요. 당황한 수나라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어요. 번번이 고구려에 패한 수나라 장군은 복수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수나라 군대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거듭되는 패배와 굶주림으로 군사들의 사기가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거든요. 싸우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갈 방법만 궁리하고 있었지요. 그러는 동안 을지문덕은 다음 작전을 세웠어요. ‘이번에는 거짓 항복 작전을 써야겠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 편지를 받은 수나라 장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요. ‘끈질긴 고구려군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으니, 체면이 서겠구먼.’ 수나라 군대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어요. 수나라로 가려면 살수라는 큰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에는 배도 한 척 없고 다리를 놓을 수도 없었지요. “물이 얕은 것 같으니 그냥 건너자!” 수나라 군사들은 앞 다투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강을 반쯤 건넜을 때였어요. 갑자기 산더미 같은 물이 밀려왔어요. 고구려 군사들이 미리 막아 놓았던 강물을 일시에 튼 거예요. 수나라 군사들은 강물에 휩쓸려 가며 아우성쳤어요. 이때 고구려 군사들이 총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수나라 대군을 물리쳤다!” “고구려 만세! 을지문덕 장군 만세!” 고구려 군사들의 만세 소리는 그칠 줄 몰랐어요. 이 싸움이 바로 유명한 ‘살수 대첩’이랍니다. 못다 한 이야기. 살수 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 을지문덕. 고구려 영양왕 때 장군이었던 을지문덕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고 자세하지도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이름에 관해서도 의견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요. 먼저 을지문덕이 성과 이름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어요. 그 예로 을지문덕을 ‘위지문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만일 ‘을지’가 ‘위지’와 같은 말이라면 을지문덕은 하늘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위지’가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뜻의 단어는 주로 왕에게 붙였기 때문에 을지문덕은 왕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답니다. 또한 ‘문덕’이라는 말은 글을 잘 알고 덕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가 하면 ‘을지’는 성씨가 아니라 나이가 많은 연장자 혹은 가족 중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는 의견도 있고, ‘을지’에서 ‘을’만이 성씨이고 ‘지’는 존대의 의미로 붙이는 글자로 보는 의견도 있어요. 이렇듯 을지문덕의 이름조차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답니다. 하지만 ‘살수 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에 관해서만큼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고구려의 군사 규모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수나라 군대와 맞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었어요. 을지문덕은 우선 수나라 군대의 식량과 무기 등을 대는 통로를 끊고,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 버렸어요. 그런 다음 수나라 군사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방법을 썼어요. 또한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의 구실을 찾던 수나라 장군에게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한 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하리.’라는 글을 보내 돌아가라고 종용했지요. 이 같은 전략으로 30만 5천 명에 달하는 수나라 군대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겨우 2천 7백여 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이순신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앞으로 돌격!” 순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앞으로 뛰어나갔어요. “와아아! 와아아!” 아이들의 함성으로 마을 뒷산이 크게 들썩였어요. 전쟁놀이가 한창이었거든요. “얘들아, 이제 요새를 만들자.” 아이들은 순신이 시키는 대로 돌멩이를 모아 담을 쌓기 시작했어요. 크고 무거운 돌은 여럿이 힘을 합해 옮겼지요. 그러자 금세 튼튼한 요새가 만들어졌어요. “오랑캐가 쳐들어와도 끄떡없겠어.” 순신과 아이들은 흐뭇한 얼굴로 요새를 바라보았어요. 그때, 한 선비가 요새를 가로지르며 소리쳤어요. “거추장스럽게 웬 돌무더기를 이렇게 쌓아 놓았담?” 그러자 순신이 얼른 선비 앞을 막으며 말했어요. “여기는 전쟁터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임금님도 성을 가로지르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선비는 기가 막혀 순신을 빤히 바라보았어요. “거참, 기세가 대단하구나. 네 이름이 뭐냐?” 그러자 아이들이 소리 높여 외쳤어요. “우리 대장 이순신이에요!” 선비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어요. “너희 대장의 말이 맞구나! 허허!” 선비는 기분 좋게 웃으며 다른 길로 돌아갔답니다. 어느덧 순신은 늠름한 청년이 되었어요. 순신은 장수가 되기 위해 말 타기와 활쏘기뿐 아니라 글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드디어 나라에서 장수를 뽑는 날이에요. “말 타는 솜씨가 굉장하군!” 구경하던 사람들이 맨 앞에서 달리는 순신을 칭찬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순신이 탄 말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어요. 그 바람에 순신은 말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지요. “저런, 장수로 뽑히고도 남을 젊은인데.” “쯧쯧, 정말 안됐군!”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했어요. 몇 년 뒤, 순신은 무관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어요. 순신은 모든 장수들이 가기 싫어하는 국경경비대로 갔어요. 국경경비대는 오랑캐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시설은 낡고 부서져 형편없었어요. 병사들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병사들이여! 국경을 지키지 못하면 나라도 가족도 안전하지 못하다!” 순신은 직접 돌을 나르며 허물어진 성벽을 쌓았어요. 병사들의 사기는 금세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지요. 얼마 뒤,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왔어요. 하지만 오랑캐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기 바빴어요. 그리고 그 뒤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답니다.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순신에게 큰 상과 높은 벼슬을 내렸어요. “이순신을 전라도 앞바다를 지키는 좌수사로 명하노라!” 바다 건너 왜구가 호시탐탐 침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거든요. 전라 좌수사가 된 순신은 늘 고민했어요. ‘왜구의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는 튼튼한 배가 없을까?’ 그러다 문득 단단한 등딱지를 가진 거북을 생각해 냈어요. 순신은 거북의 모양을 본떠서 단단한 철갑을 두른 거북선을 만들었어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서 군사들도 강하게 훈련시켰지요. 얼마 뒤, 순신이 염려하던 대로 왜군이 쳐들어왔어요. “자, 모두 나를 따르라!” 순신은 군사들과 함께 거북선을 몰고 바다로 나갔어요. “아니, 배가 이상하게 생겼잖아?” “그러게. 머리는 용 모양인데, 몸통은 꼭 거북 같군.” 왜군은 거북선을 보고 비웃었어요. 그러나 얼마 안 가 모두 벌벌 떨기 시작했지요. 거북선에 슬쩍 부딪치기만 해도 배들이 모두 부서져 버렸거든요. 사방에서 날아드는 대포도 무시무시했어요. 다급해진 왜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지요. “만세! 우리가 이겼다! 이순신 장군 만세!”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사천 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대첩까지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이순신이라면 자다가도 만세를 부르겠군!” “이순신을 저대로 놔두면 안 되겠어.” 순신의 명성이 높아지자 질투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순신을 모함했지요. 임금님께 거짓 상소를 올려 순신을 죄인으로 만든 거예요. 순신은 그만 옥에 갇히고 말았어요. 순신이 갇히자, 다른 장수들이 바다로 나가 싸웠어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싸움마다 지고 말았지요. “제발 이순신 장군을 풀어 주세요. 우리 바다를 지킬 사람은 이순신 장군뿐입니다.” 백성과 군사들은 순신을 풀어 달라고 애원했어요. 마침내 순신은 풀려났어요. 그러나 배들은 이미 다 부서져 단 열두 척만 남았고, 군사들의 사기는 한없이 꺾여 있었어요. “모두 일어나라! 우리가 힘을 모으면 못할 일이 없다!” 순신이 돌아오자 군사들은 다시 기운을 차렸어요. 남은 무기를 살피고 부서진 배를 고쳤지요. 그때, 한 군사가 달려오며 소리쳤어요. “백 척이 넘는 왜군의 배가 명량 앞바다로 몰려옵니다!” 군사들은 잔뜩 움츠러들었어요. “우리에게 남은 배는 단 열두 척입니다. 무슨 수로 적을 이기겠습니까?” 순신은 골똘히 생각한 끝에 꾀를 내었어요. 순신은 물살이 센 곳에 덫을 놓았어요. “왜군의 우두머리가 탄 배를 먼저 공격하라!” 우두머리가 탄 배가 쓰러지고, 배가 물살이 빠른 곳으로 몰리자 왜군은 허둥대기 시작했어요. “이때다! 덫을 올려라!” 왜군의 배는 덫에 걸려 모두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지요. “와! 이겼다!” 군사들이 감격하여 소리쳤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대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순신은 모든 공을 군사들에게 돌렸어요. 이 싸움이 바로 유명한 명량대첩이에요.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이 순신을 찾아왔어요. 아껴 둔 식량을 내놓기도 하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주를 쓰겠다고 했지요. “저는 무엇이든 잘 만듭니다. 무기를 만들겠습니다.” “저는 뚝딱뚝딱 잘 고칩니다. 부서진 배를 손보겠습니다.” 곧이어 수백 명의 젊은이가 군사 훈련을 받겠다고 찾아왔어요. “그래,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마음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순신은 더욱 힘이 났어요. 새로 들어온 병사들을 부지런히 훈련시키고 군대를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어요. 전쟁이 계속되자, 백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순신의 군대는 꿋꿋하게 왜군과 맞서 싸웠어요. “도망갈 때 가더라도 이순신의 군대는 꼭 쓰러뜨려야겠다.” 번번이 순신에게 당하기만 한 왜군은 노량 앞바다에 모였어요. 왜군의 배는 무려 오백 척이 넘었지요. 하지만 순신과 군사들은 겁내지 않고 나아갔어요. “둥둥둥둥!” “마지막까지 있는 힘을 다해 싸워라!” 북소리와 함께 순신의 힘찬 호령이 떨어지자, 군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어요. “와아!” 군사들은 용감히 맞서 싸웠어요. 왜군도 물러서지 않고 사정없이 총을 쏘아 댔지요. 그때, 총알 하나가 순신의 왼쪽 가슴을 뚫고 지나갔어요. “앗, 장군님! 장군님!” 한 병사가 쓰러지는 순신을 부축하며 소리쳤어요.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방패로 나를 가려라. 아무에게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순신은 곧바로 숨을 거두었어요. 병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지요. 치열한 전투 끝에 우리 군사들은 왜군을 모조리 무찔렀어요. “만세! 이순신 장군, 만세!” 승리의 기쁨도 잠시, 군사들은 순신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순신의 죽음이 전해지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어요. “이순신, 그대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구려.” 임금님은 순신에게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어요. 그리고 무덤 옆에 현충사라는 사당을 지어 순신의 넋을 기리게 했지요. 이순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말이에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했던 이순신의 높고 위대한 정신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횃불로 타오를 거예요. 조선 시대의 명장 이순신 1592년,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알려져 있어요. 처음에 거북선을 본 사람들은 철로 겉을 두른 배가 물에 뜰까 걱정했답니다. 물론 거북선이 등장하기 2백 년쯤 전에도 철을 두른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배의 형태나 배를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이순신은 스스로 연구하여 거북선을 만들었어요. 다행히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순신의 노력은 결실을 볼 수 있었지요. 거북선은 길이가 22미터, 가운데 폭이 4미터가 넘어 120명까지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배 안은 2층으로 되어 있고, 방도 24개나 되었다고 해요. 군사들이 쉬는 방, 무기를 넣어 두는 방을 따로 만든 것이지요. 열네 명이 노를 젓고, 26필이나 되는 베로 돛을 달아 전투 중에는 노를 저어 이동하고, 먼 거리를 갈 때에는 돛을 이용해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답니다. 천장이 쇠로 되어 있어 화살이나 총을 맞아도 끄떡없었고, 쇠 지붕 위에는 뾰족한 쇠못을 잔뜩 박아 적들이 배에 기어오를 수도 없었어요. 게다가 배 양옆에 22개의 총구멍이 있으니 천하무적일 수밖에요. 가장 멋진 건 거북선의 머리였답니다. 용의 입에서 유황과 엽초를 태운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적들은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고 해요. 거북선이 완성된 바로 그해에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어요. 이순신은 거북선 세 척과 다른 군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어요. 조총을 쏘아 대도 꿈쩍 않고, 쇠못에 찔릴까 봐 기어오를 수도 없는 데다가 부딪치면 다른 배를 종이배처럼 가라앉게 하는 거북선이 왜군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이순신과 거북선은 옥포, 당포, 한산도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왜군은 번번이 많은 배와 군사들을 잃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이순신이라 해도 왜적을 혼자 무찌른 건 아니에요. 거북선을 만들 때 나무를 져 나르고 못질을 한 많은 백성과 지휘에 따라 용감히 전쟁터에 나선 군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지요. 나라를 지키려는 많은 이의 마음이 하나로 합해져서 결국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김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빼앗아 백성들 모두 힘겹게 살 때였습니다. 독립을 위해 애쓴 수많은 사람 중에 김구가 있습니다. 김구의 일생은 험하고 또 험했지요. 일본 군인의 칼에 죽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다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생을 하기도 하고, 총에 맞아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과 평화를 바라는 김구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머슴으로 일해도 좋다고 말했던 김구는 우리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였습니다. 김구는 훤한 대낮에도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씩씩한 개구쟁이로 자랐어요. “찰그랑, 찰그랑!” 멀리서 가위 소리가 들려왔어요. “헌 놋그릇이나 부러진 숟가락을 엿으로 바꿔 줍니다.” 엿장수의 달콤한 외침도 들려왔고요. “부러진 숟가락? 부러진 건 없는데, 어쩌지? 에라!” 김구는 아버지 숟가락을 뚝 부러뜨려 엿을 사 먹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냥 허허 웃으며 타일렀지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그런데 얼마 안 가 김구는 또 말썽을 부렸어요. 부모님 몰래 스무 냥을 들고 집을 나선 거예요. “이 녀석, 돈을 가지고 어디 가느냐?” 김구를 보고 동네 할아버지가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어요. “떡 사 먹으러 가요.” 김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어요. 할아버지는 돈을 빼앗아 아버지에게 갖다 주었어요. 아버지도 이번엔 화가 나서 회초리를 들었어요. 김구는 떡도 못 먹고 매만 맞은 게 억울해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답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김구의 성격은 사실, 아버지를 쏙 빼닮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반들이 상민을 업신여기고 못되게 구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어요. 아는 사람 일이건 모르는 사람 일이건 양반들을 혼내 주었지요. 마을 일을 맡아서 할 때는, 양반들에게는 세금을 엄하게 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은 대신 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했답니다. 어머니는 따뜻하면서도 올곧은 분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도 김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갇혔을 때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김구를 자랑스럽게 여겼지요. “네가 큰 벼슬을 한 것보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갇힌 것이 더 기쁘구나.” 김구가 일본인의 꾐에 넘어간 동포가 쏜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도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았어요. “하느님이 보호해 주셔서 목숨은 구했다만, 동포의 총에 맞다니. 차라리 왜놈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나을 뻔했구나!” 김구는 한때 관상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관상은 얼굴 생김새를 보면서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내다보는 일이에요. 자기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본 김구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얼굴에 높은 사람이나 부자가 되기는커녕 가난하게 살면서 나쁜 일을 당할 거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김구는 이내 생각을 바꿨어요. 얼굴 좋은 것보다 몸 튼튼한 것이 낫고, 몸 튼튼한 것보다 마음 좋은 것이 낫다.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이 김구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거든요. 김구는 얼굴보다 마음 가꾸는 데 힘쓰며 의리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구는 후세를 잘 가르치고 애국심을 키워야만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었어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며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어요. 글을 모르는 죄수들 대신 편지도 써 주고, 재판에 필요한 서류도 써 주었어요. 죄수들은 김구를 선생님으로 모시며 따랐고, 간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답니다. 나라 안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자, 김구는 상하이에 있는 임시 정부를 찾아갔어요. “우리나라 정부가 생기면, 그 문을 지키면서 마당을 쓰는 것이 평생 제 소원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지기 노릇을 하게 해 주십시오.” 임시 정부를 이끌던 도산 안창호는 김구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어요. 일본 경찰에게서 우리 독립 투사를 지키는 일이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김구는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임시 정부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해외 동포들도 발 벗고 나섰어요. 그러자 일본 경찰은 김구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기회만 있으면 없애려고 했지요. 김구가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어요.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어요. “일본 영사관에서 선생님을 처치하면 큰돈을 주겠다고 해서 덜컥 총을 받았는데, 독립을 위해 애쓰시는 선생님을 뵈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권총을 꺼내 놓으며 울먹였습니다. 많은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어요. 윤봉길도 그중 한 사람이었지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윤봉길은 큰 뜻을 품은 대장부였어요. “고맙소.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룬다고 했으니, 틀림 없이 큰일을 해낼 거요.” 김구는 윤봉길의 손을 꼭 잡았어요. 윤봉길은 얼마 뒤에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 모임에서 도시락 폭탄을 터뜨려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어요. 우리나라가 독립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싸우는지 전 세계에 알리는 큰 사건이었지요.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일본이 드디어 항복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기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기쁨보다 염려가 더 컸어요. “이제야 제대로 싸워 볼 준비를 마쳤는데,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구나! 우리 힘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냈어야 하는데. 이제 누가 우리 말을 들어줄까.” 김구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어요. 김구의 걱정은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우리나라를 둘로 나누어 멋대로 다스리려 했어요. 사람들도 두 편으로 갈라져서 서로 옳다고 싸우기 시작했지요. ‘이제는 힘을 모아 튼튼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같은 민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서 힘을 낭비하다니.’ 김구는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김구는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 설득했어요. “나라를 하나로 합해야 합니다. 서로 뜻을 모아 조국을 위해 일합시다!” 하지만 누구도 김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안두희가 김구를 찾아왔어요. 안두희는 김구 밑에서 일하던 군인이었지요. 김구가 반갑게 맞으려 할 때 안두희가 갑자기 총을 꺼내 들었어요. “탕! 탕! 탕!” 찢어질 듯한 총성과 함께 김구는 쓰러졌습니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김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구는 늘 말했어요. “나는 우리나라에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평화가 세계로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를 자유의 나라로 만듭시다.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과 질서가 지켜지는 나라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나라는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구가 그토록 바랐던 자유와 평화, 사랑과 질서를 우리가 꽃피워 나간다면, 언젠가는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재산은 넉넉히 살 정도만 되면 족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정도만 되면 족합니다.” 김구의 강직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어요. 대낮에도 집 앞으로 호랑이가 지나다닐 만큼 깊은 산골에서 자라서인지 어려서부터 아주 용감했답니다. 또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하고야마는 당찬 성격이었지요.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김구는 과거 시험을 보았지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미리 돈을 낸 사람들이 과거 시험에 합격 했다는 말을 듣고 김구는 무척 낙심했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 준다는 동학에 관심을 갖고 한동안 동학 교도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김구는 어느 나루터에서 허리에 칼을 찬 수상한 일본인을 만났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인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김구는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그 일본인을 죽인 뒤 당당하게 잡혀 들어갔습니다. 얼마 뒤, 김구는 여러 사람과 힘을 합해 감옥을 탈출했습니다. 김구는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실력과 독립심을 키우는 것만이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로 우리의 국권을 빼앗아 갔어요. 김구는 독립 운동에 몰두하 다가 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내 생명은 빼앗을 수 있어도 내 정신만은 빼 앗지 못하리라.” 하면서 오히려 일본 경찰을 호통쳤지요. 나라 안에서 활동하기가 힘들어지자, 김구는 임시 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습니다. 안창 호는 김구를 경무국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일본 경찰들의 움직임을 살펴서 독립 운동가들을 보호하 는 중요한 자리였지요. 그 뒤, 김구는 임시 정부의 국무령, 그러니까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봉창, 윤봉길 등과 함께 일본 천황과 일본 장군들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노렸지요. 이봉창은 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지만 윤봉길은 행사에 참석했던 장군들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은 물론 중국 과 다른 나라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는 독립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건 반쪽짜리 독립이었습니다. 김구는 둘로 나뉘어 소련과 미국의 손아귀에 각각 들어가게 된 나라를 안타까워하며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다 결국 1949년,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안두희는 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지만, 50여 년이 지난 1996년 이를 분하게 여긴 사람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죗값을 치른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김구의 안타까운 마음이 달래질까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는 날에야 김구 선생은 조국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을 것입니다.
유관순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유관순은 1902년 4월 26일, 충청남도 천안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관순은 어릴 적부터 착하고 명랑했어요. 또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답니다. 관순이 열세 살 되던 해 어느 날이었어요. 밖에서 놀던 남동생 관복이가 머리를 크게 다쳐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관순에게 동생을 때린 아이를 당장 붙잡아 오라고 했어요. 그러나 관순은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어요. “관복이 먼저 잘못했을지도 모르니, 야단을 치려면 잘잘못을 가려야 합니다.” 아버지는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따져 행동하는 관순이 몹시 기특하고 자랑스러웠어요. 당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아 백성을 괴롭히던 때였어요. 아버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우리 백성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사람들이 찾아와 관순의 아버지를 마구 때렸어요. 학교를 지을 때 돈을 조금 빌렸는데, 이자에 이자를 더해서 열 배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지요. 아버지는 분하고 억울해서 병이 나고 말았어요. 관순은 아버지를 보면서 반드시 나라를 되찾는 데 앞장서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버지는 관순을 서울로 보내 공부시킬 생각을 하고 선교사 부인에게 부탁했어요. 관순을 나라의 큰 일꾼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관순은 마침내 이화 학당에 입학하게 되었어요.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지요. “좋겠다. 서울 가면 공부 열심히 해.” 친구들은 부러워하면서 함께 기뻐해 주었어요. 관순이 서울로 떠나는 날, 마을은 마치 잔칫날 같았어요. 관순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어요. “네가 공부하는 것은 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빼앗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는 관순을 꼭 안아 주었어요. 관순은 아버지의 불 같은 애국 정신을 본받고 싶었어요. ‘조국을 위해 반드시 큰일을 해야지.’ 관순은 굳게 다짐했어요. 관순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어요. 한번은 같은 반 친구 선옥이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 몹시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친구의 딱한 처지를 알고 관순은 친구들과 돈을 조금씩 모아서 선옥에게 전했어요. “선옥아 힘내. 이만한 일로 낙심하면 안 돼.” 관순은 선옥을 따뜻하게 위로했어요. 선옥은 관순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어요. 이 일은 교장 선생님에게까지 알려졌어요. 교장 선생님은 관순을 불러 크게 칭찬했어요. “전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더 애썼는걸요.” 관순은 교장 선생님의 칭찬을 친구들에게 돌렸어요. 어느덧 관순은 열다섯 살이 되어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지냈는데, 일본 사람들이 곡식을 모두 빼앗아 가 다들 먹고살기가 어려웠어요. 어머니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지요. 관순은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마을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쳤어요. 그러면서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어요. 그중에서도 잔 다르크 이야기는 몇 번을 읽고 또 읽었지요.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이렇게 용감하게 싸우다니.’ 관순은 책을 꼭 안았어요. 새 학기가 시작되려던 어느 날이었어요. 한 친구가 급하게 뛰어오며 소리쳤어요. “관순아, 큰일 났어! 고종 황제가 돌아가셨대!” 친구는 주위를 살핀 다음 관순의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일본군한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관순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그 소식을 듣고, 백성도 울분에 차 통곡했지요. 독립지사들은 몰래 모여 독립 선언서를 만들고 탑골 공원에서 만세 운동 벌일 계획을 세웠어요. “오늘 밤부터 태극기를 만들자.” 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기로 했어요. 관순과 친구들은 매일 밤 모여 몰래 태극기를 만들었어요. 만세를 부르는 날 사람들의 손에서 태극기가 물결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지요. 드디어 약속한 날이 밝았어요. 이날이 바로 우리 민족이 영원히 기억할 1919년 3월 1일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과 어른들이 구름처럼 탑골 공원으로 모였어요. 마침내 정오가 되자 민족 대표 한 분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어요.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한 사람이 먼저 만세를 부르자 봇물 터지듯 만세 소리가 쏟아졌어요.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어요.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마구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 댔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관순도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힘차게 만세를 불렀어요. 다음날, 학교에 슬픈 소식이 전해졌어요. 일본 정부가 독립 만세 부른 일을 트집 잡아 임시 휴교령을 내린 거예요. 학생들이 학교로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문을 닫아 버렸지요. 만세 운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모두 감시 대상이 되었고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자, 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그러나 일본 헌병의 감시는 고향에서도 계속되었어요. “너도 서울에서 만세 운동을 했지? 바른대로 말해!” 일본 헌병이 관순을 다그쳤어요. “예, 만세를 불렀어요. 태극기도 만들었고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 왜 잘못인가요?” 관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어요. “어린 녀석이 보통이 아니구나. 앞으로 조심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당장 잡아갈 테다.” 일본 헌병은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어요. 일본 헌병이 돌아가자 관순은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우리 마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여요. 지난번 탑골 공원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을 보고 참 많은 것을 느꼈어요.” 아버지는 관순이 너무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웠어요. “암, 불러야 하고말고. 나도 돕겠다.” 아버지 말씀을 듣자 관순은 용기가 났어요. 관순은 생각해 온 일들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어요.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만세 운동 계획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도 열심히 만들었어요. 밤에는 산으로 올라가 횃불로 신호를 보내며 이웃 마을 청년들과 결의를 다졌답니다. 드디어 만세를 부르기로 한 날이 되었어요.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한 달 만이었지요. 천안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정오가 되자 관순은 높게 쌓은 가마니 위로 올라가 소리쳤어요.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관순이 먼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목이 터져라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사람들도 따라 만세를 불렀지요. 관순은 태극기를 흔들며 아버지와 함께 장터를 돌았어요. 사람들의 만세 소리로 거리는 떠나갈 듯했어요.
한용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충청남도 어느 시골 마을 서당에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마을 아이들이 훈장님 앞에 앉아 글을 읽는 소리였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훈장님 표정이 점점 무섭게 변해 갔어요. “네 이놈! 누가 책에다 낙서를 하라고 가르치더냐?” 훈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글을 읽던 아이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훈장님을 바라보았어요. 꾸지람을 들은 아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요. “책에다 낙서를 한 것이 아니라.” “낙서가 아니라니. 그럼, 원래부터 네 책이 이렇게 지저분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전 다만 내용을 풀이해 놓은 것 중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지웠을 뿐입니다.” 아이의 대답에 훈장님은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대학을 이해하고 비판까지 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요. “흐음, 역시 신동이라 불릴 만하구나!” 훈장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훈장님을 놀라게 한 이 아이가 바로 한용운이에요. 용운은 여섯 살 때 글을 익힌 뒤,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을 척척 읽어 ‘신동’이라 불렸어요. 하루는 용운이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였지요. 마침 방물장수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용운이 글 읽는 소리를 들었어요. 방물장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동안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제법이군. 저 아이와 같이 다니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는걸.’ 방물장수는 주위를 살핀 뒤 용운에게 다가갔어요. “꼬마야, 글 읽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이런 시골에 묻혀 살기에는 참으로 아까운데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용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방물장수를 따라나섰어요. “좋아요, 어서 앞장서세요.” 방물장수는 웬 떡이냐 싶었지요. 그런데 산마루에 다다랐을 때였어요. 용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어요. “아저씨, 제가 여기까지 아저씨를 따라온 건 저를 칭찬해 주신 것에 대한 예의였어요. 그러면 안녕히 가세요.” 방물장수는 어이없는 얼굴로 용운의 뒷모습만 바라보았어요. 이처럼 당찬 용운은 의젓한 청년으로 자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용운이 책을 멀리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어요. 책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지요. ‘이렇게 어수선한 나라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용운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 나라 걱정으로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무렵, 안에서는 고약한 벼슬아치들의 횡포가 판치고, 밖에서는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거든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용운은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 한양으로 가자! 거기서 내가 할 일을 찾아보자!” 용운은 그길로 집을 나서 한양으로 향했어요. 고향에서 멀리 벗어난 적도 없고 한양으로 가는 길도 알지 못했지만, 무작정 걷고 또 걸었지요. 그러다가 잠시 쉬어 가기 위해 나지막한 바위 위에 올라앉았어요. 아래로 자신이 걸어온 꼬불꼬불한 길이 훤히 내려다보였어요. 용운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나는 저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면 이전엔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은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요. ‘이렇게 한심할 수가. 내가 가야 할 길도 모르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용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났어요.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걸음은 한양을 향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지요. 용운은 설악산으로 걸음을 옮겼어요. ‘설악산에 가서 큰스님에게 깨달음을 구해 보자!’ 용운의 걸음이 빨라졌어요. 새로운 결심이 서자 다시 기운이 넘쳤지요. 용운이 다다른 곳은 ‘오세암’이라는 작은 암자였어요. 용운이 천천히 절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스님이 말을 건넸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왔습니다.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는지요?” 스님은 말없이 용운을 바라보았어요.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지요.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용운은 자신도 모르게 다소곳이 합장을 올렸어요. 절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어요. 새벽부터 일어나 땔감을 구해 오고 밥을 지어야 했어요. 암자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일도 용운의 몫이었지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들었지만 용운은 공부와 기도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났어요. 설악산 깊은 산속 오세암에 겨울이 찾아왔어요. 용운은 깨끗이 몸을 씻고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어요. 마침내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순간이었지요. 용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어요.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며, 외국에 나가 사찰을 두루 살펴보기도 했어요. ‘제 할 일을 못 하고 있는 불교를 바로 세워야 한다.’ 용운은 불법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책으로 펴내고 불도를 알리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어요.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지요. 학원을 세워 청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렸어요. 어느덧 용운은 큰스님이 되어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어요. 용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어요.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며, 외국에 나가 사찰을 두루 살펴보기도 했어요. ‘제 할 일을 못 하고 있는 불교를 바로 세워야 한다.’ 용운은 불법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책으로 펴내고 불도를 알리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어요.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지요. 학원을 세워 청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렸어요. 어느덧 용운은 큰스님이 되어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우리나라는 일본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겼어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나라를 빼앗기다니.’ 용운은 울분이 치밀어 견딜 수 없었어요.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지요. ‘아!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나라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용운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했어요. “만주로 가자! 그곳에 가서 독립 운동을 하자!” 마침내 용운은 마음을 정하고 만주로 떠났어요. 만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했어요. 더구나 용운은 머리를 박박 밀었기 때문에 일본 앞잡이로 오해받기 십상이었지요. 용운이 고개를 넘고 있을 때였어요. “이 못된 일본 앞잡이야!” 웬 남자의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총알이 날아왔어요. 용운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얼마 뒤, 용운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어요. 용운은 모든 게 나라를 빼앗겨 당하는 설움이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졌어요. 건강을 회복하자 용운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곳곳을 다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났어요. 일본 사람이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그러자 뜻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 맞서 싸웁시다!” “하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모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국민 대표가 될 만한 33명의 인물을 가렸어요. 용운은 불교계의 대표로 뽑혔어요. 마침내 만세 운동을 약속한 3월 1일이 되었어요. 민족 대표 33명은 한목소리로 만세를 외쳤어요.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어요. 용운도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지요. 하지만 모진 고문도 용운의 뜻을 꺾지 못했어요. 용운은 감옥에서뿐만 아니라 풀려나서도 독립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비록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죽는 날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한 용운의 큰 뜻은 온 겨레의 가슴에 길이길이 남아 있답니다. 못다 한 이야기. 어두운 시대를 밝힌 등불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일생은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나눌 수 있어요. 승려, 독립 운동가, 시인으로서의 모습이에요. 먼저 승려로서의 한용운은 부패한 불교를 바로 세우고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힘썼어요. 불교에 대한 한용운의 생각은 조선 불교 유신론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이 책에는 승려들이 깊은 산속에 있는 절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절에서 내려와 백성을 이해하고 백성과 함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혀 있어요. 주로 우리나라 불교의 낡고 부패한 것들을 고쳐 새롭게 하자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어요. 다음으로는 독립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한용운은 평생 동안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했어요.
윤봉길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이 녀석, 어디다 한눈을 팔아!” 선생님이 다가와 봉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어요. 열한 살 늦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간 봉길은 학교생활이 도무지 재미가 없었어요. 선생님들은 늘 칼을 차고 있어 무서운 데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배우지 않고 엉뚱하게 일본 말만 배웠거든요. 봉길은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어요. ‘나는 조선 사람이야. 그런데 왜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울 수 없는걸까?’ 오늘도 수업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하다가 꿀밤을 맞은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아침부터 학교가 어수선하더니, 수업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이 말했어요.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친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거라!”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책을 챙겼어요. 뜻밖에 일찍 마쳐 모두 신이 난 모습이었어요. 그때 한 아이가 교문을 나서며 말했어요. “너희들 왜 일찍 마쳤는 줄 모르지? 오늘 장터에서 무슨 일이 있대.” “무슨 일인데?” “글쎄, 아주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하던데.” “야, 재미있겠다. 우리도 가 보자!” 아이들이 앞장서자 봉길도 슬그머니 뒤를 따랐어요. 봉길과 아이들이 장터에 다다랐을 때였어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갑자기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장터는 순식간에 태극기로 큰 물결을 이루었어요.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봉길도 사람들을 따라 만세를 불렀어요. 그러나 얼마 뒤, 요란한 군화 소리와 함께 일본 헌병들이 총을 들고 나타났어요. “탕! 탕! 탕!” 총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요. 사람들은 죽어 가면서도 태극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이런 나쁜 놈들!” 봉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맞붙어 싸우고 싶었지만, 어린 봉길에겐 아직 그럴 힘이 없었어요. ‘ 두고 보자. 언젠가는 반드시 내 힘으로 일본 놈들을 혼내 줄 거야.’ 봉길은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자, 일본 말과 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더욱 싫어졌어요. 집으로 돌아온 봉길은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이제부터 학교에 다니지 않겠어요.” 아버지도 처음엔 노발대발 화를 냈지만 봉길의 뜻을 알고는 허락했어요. 봉길은 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서당의 매곡 훈장님은 학식이 높을 뿐 아니라 인품도 매우 훌륭한 분이었어요. 봉길은 매곡 훈장님으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어요. 특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과 열사에 관한 이야기는 봉길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지폈답니다. ‘아, 나도 나라를 위해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할 텐데.’ 봉길의 마음이 애국심으로 가득 찼어요. ‘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아야 해. 그러자면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쌓자.’ 봉길은 굳게 다짐하고 공부에 전념했어요. 어느새 봉길은 열아홉 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어요. 일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지요. ‘우리 민족이 이런 설움을 당하는 것은 못 배웠기 때문이야. 지금부터라도 백성을 깨우치고 힘을 길러야 돼.’ 봉길은 사랑방에다 야학을 열었어요. 야학이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모여서 공부하는 곳이지요. “가, 갸, 거, 겨.” 밤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어요. 봉길은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우리 역사도 가르쳤어요. 봉길의 뒤에는 항상 감시의 눈길이 따라다녔어요. 봉길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헌병이었지요. “윤봉길은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이야. 철저히 감시하도록!” 일본 헌병은 봉길에 대해 샅샅이 캐묻고 다니며 별것 아닌 일로도 툭하면 트집을 잡았어요. “요즘 야학에서 노래도 하고 연극도 한다는데, 내용이 뭐요?” “농촌을 잘살게 만들자는 것이오.” “조금이라도 일본을 욕보이는 행동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명심하시오!” 일본 헌병은 공연히 으름장을 놓았어요. 일본 헌병은 봉길을 점점 더 못살게 굴었어요. ‘ 일본 놈들 등쌀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만주나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을 하는 게 낫겠어.’ 봉길은 마침내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무렵, 만주나 상하이에서는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어요. 봉길은 집을 떠나면서 자신의 각오를 글로 남겼어요. 대장부는 한번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봉길이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독립 운동에 나섰는지 잘 나타나 있는 글이에요. 만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독립군을 찾아내려는 일본 헌병의 눈초리가 매서웠거든요. 봉길은 몇 번이고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가까스로 만주에 도착했어요. 드넓은 만주 벌판을 보자 봉길은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우리 조상들이 말을 달리던 이 땅을 무대로 나라를 되찾는 일에 이 한 목숨 아낌없이 바치리라!’ 봉길은 입술을 꼭 깨물며 새롭게 다짐했어요. 만주에는 독립 운동을 하는 단체가 여럿 있었어요. 그곳을 두루 살펴본 봉길은 다시 상하이로 향했어요. 임시 정부의 주석으로 있는 김구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지요. 봉길은 사람들 눈을 피해 비밀리에 김구 선생을 만났어요. “선생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선생님을 도와 독립 운동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독립 운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오. 언제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정말 믿음직한 젊은이구려. 고맙소!” 김구 선생은 애국심에 불타는 봉길의 손을 덥석 잡았어요. 봉길은 채소 장사를 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읽던 봉길의 눈이 번쩍 뜨였어요. “뭐? 일본 천황의 생일인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축하 기념식을 갖는다고?” 봉길은 곧장 김구 선생에게 달려갔어요. “선생님, 이 신문을 좀 보십시오. 조국의 원수를 갚을 둘도 없는 기회이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 “자네가 잘 해낼 수 있겠나?” “꼭 성공하겠습니다, 선생님!” 봉길은 자신 있게 대답했어요. 날짜가 점점 다가오자 봉길은 준비를 서둘렀어요. 기념식장에서 터뜨릴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에다 숨겼어요. 도시락과 물통 말고는 아무것도 기념식장에 가져갈 수 없었거든요.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어요. 훙커우 공원으로 떠나기 전, 봉길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김구 선생을 찾았어요. “제 시계가 선생님 것보다 좋으니 제 것과 바꾸시지요.” “아니, 시계를 바꾸다니?” “이제 떠나면 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좋은 시계를 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김구 선생은 봉길의 비장한 각오에 목이 메어 말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기념식장은 일본 헌병들이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어요.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즉시 끌고 갔지요. 봉길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진정시킨 뒤, 일본 사람 흉내를 냈어요. 그 덕분에 무사히 기념식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답니다. 기념식이 시작되자 봉길은 단상을 향해 힘껏 폭탄을 던졌어요. “꽈광! 꽝!” 기념식장은 폭탄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해 독립군을 괴롭히던 수많은 일본 군인이 죽거나 다쳤어요.
원효 대사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신라 압량 고을 불지촌에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살고 있었어요. 부부는 자식이 없어 늘 근심이었지요. 그래서 날마다 절에 가서 소원을 빌었어요. 어느 날, 아내가 신기한 꿈을 꾸었어요. “여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더니 내 품 안으로 들어왔어요.” “태몽이구려! 우리 소원이 이루어지려나 보오.” 남편은 매우 기뻐했어요. 열 달이 흘러, 아내는 친정집에서 아기를 낳기 위해 길을 나섰어요. “여보, 여기서 좀 쉬었다 가요.” 부부는 큰 밤나무 아래서 멈추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었어요. “여보, 배가 너무 아파요. 아기가 곧 나올 것 같아요.” 아내는 큰 밤나무 아래서 사내아이를 낳았답니다. 할아버지는 아기 이름을 ‘서당’이라 지었어요. 이 아기가 바로 원효 대사입니다. 서당은 예의 바르고 영리한 아이로 자랐어요. 할아버지는 서당이 화랑이 되길 바랐어요. 서당도 김유신 장군 같은 화랑이 되어 나라에 충성하고 널리 이름을 떨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열두 살이 되는 해, 서당은 화랑의 꿈을 안고 서라벌로 떠났어요. 서당은 책을 읽고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닦으며 정신 수양에도 힘썼어요. 사냥을 할 때마다 짐승을 죽여야 하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화랑이 되기 위해 열심히 무술을 익혔지요. 그때,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 군사와 싸워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목숨은 소중한 것인데 왜 서로 죽일까? 싸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없을까?’ 서당은 깊이 생각한 끝에 화랑이 되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서당은 매우 슬펐어요. “아버지, 화랑이 되어 나라에 충성하고 이름을 떨치기보다는 사람들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싶습니다. 불법을 공부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겠습니다.” 서당은 또박또박 자신의 뜻을 말했어요. 뜻밖의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지만 서당을 막을 수 없었어요. 얼마 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서당은 더욱 굳게 결심했어요.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이 부처님의 진리를 찾아 떠나자.’ 서당은 마침내 서라벌에 있는 황룡사로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 열네 살이었어요. 서당은 ‘ 으뜸가는 진리’라는 뜻의 ‘원효’라는 법명을 받았어요. 원효는 황룡사에서 불경을 읽었어요. 신비로운 불교의 진리를 알게 되니, 근심이 사라지며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쳤어요. “이렇게 훌륭한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원효는 세상 사람들 가까이 가서 불법을 실천하리라 마음먹었어요. 원효는 고향 불지촌에 ‘초개사’라는 절을 지었어요. “원효 스님이 우리 마을에 절을 지었으니, 우리는 이제 큰 복을 받을 거야.”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원효가 서당이라는 걸 몰랐어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며 더욱 기뻐했지요. 어느 날, 원효는 혜공 스님에 대한 말을 듣고 항사사를 찾아갔어요. 혜공 스님은 참 기이한 분이었어요.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물고기를 잡아먹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천한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친구처럼 대하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 중이라고 비웃지. 하지만 사람은 모두 귀한 거야. 책상머리에 앉아 불경만 읽으면 무엇 하겠느냐?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으니 대안 스님을 찾아가라.” 원효는 혜공 스님을 통해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불교의 참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뒤, 원효는 대안 스님을 찾아가 한층 더 깊은 진리를 배웠어요. 이제 나라 안에서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원효는 가끔 궁궐에 들어가 임금님에게 불법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늘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지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원효는 화엄경 속에 그 답이 있다고 믿었어요. 그때부터 밤낮없이 화엄경을 공부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공부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의상 스님이 찾아왔어요. 의상은 원효보다 어렸지만 훌륭한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어요. “원효 스님, 당나라에 지엄 화상이라는 분이 화엄경을 환히 꿰뚫어 알고 있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당장 찾아가야지요.” 원효는 너무 기뻐 의상의 손을 덥석 잡았어요. 의상도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기로 약속했답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려고 길을 나섰어요. 당항성에서 배를 타기로 했지요. 먼 길을 걸어 당항성 가까이 이르자 날은 저물고 두 스님은 몹시 지쳤어요. 하는 수 없이 두 스님은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잤어요. 원효는 잠결에 몹시 목이 말랐는데 마침 물이 담긴 바가지가 손에 잡혔어요. 원효는 벌컥벌컥 물을 마셨어요. 시원하고 달콤했어요.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뜬 원효는 깜짝 놀랐어요. 간밤에 그렇게 달게 마셨던 물이 해골바가지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원효는 뱃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 냈어요.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그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어. 이게 바로 진리야!’ 원효는 굳이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원효는 그길로 서라벌 분황사로 되돌아왔어요. 그 뒤, 화엄경을 쉽게 풀이한 화엄경소라는 책을 썼답니다. 원효는 분황사에 틀어박혀 마음을 닦았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부처님의 진리를 이야기했지요.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분황사로 모여들었어요. 하루는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사는 요석 공주가 찾아왔어요. 요석 공주는 무열왕의 둘째 딸이었어요. 그날 원효는 석가모니가 비둘기를 구하려고 마귀에게 자기 살을 베어 준 이야기를 했어요. 모든 생명은 귀중하다는 뜻이지요. “아, 저분이 말로만 듣던 원효 스님이구나!” 요석 공주는 원효의 인품에 반하고 말았어요. 궁궐로 돌아온 요석 공주는 원효에게 결혼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원효는 거절했지만 순진한 공주의 마음이 상할까 봐 마음이 불편했어요. “여기를 떠나자. 그러면 괴로움도 사라질 거야.” 원효는 서둘러 짐을 쌌어요. 그리고 아무도 몰래 분황사를 떠났습니다. 원효는 무작정 남산을 오르다가 뜻밖에 혜공 스님을 만났어요. 혜공 스님은 여전히 누더기를 걸치고 방울 지팡이를 들고 있었어요. 원효는 혜공 스님에게 요석 공주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사람들의 고통을 감싸 주는 것이 부처님의 진리야. 공주님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되지.” 원효는 한동안 혜공 스님이 사는 굴속에서 같이 지냈어요. 낮에는 마을로 내려가 밥을 얻어먹고 밤이 되면 혜공 스님을 따라 술집으로 가 술에 취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어요. “잘 보았느냐? 스님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야.” 원효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래, 부처님의 진리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거야.’ 그러자 요석 공주의 야윈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어요. 서라벌에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다니는 괴짜 중이 나타났어요. 알고 보니 원효였어요.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지 않겠는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련만.” 이 노래는 널리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졌어요. 무열왕은 노래의 뜻을 알고 기뻐했어요. “아하, 원효가 내 딸을 원하고 있구나. 이제 공주의 병이 낫게 됐어.” 무열왕은 요석 공주가 원효를 사모하여 병이 난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날 밤 원효는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다가 난데없이 포졸들에게 잡혀갔어요. 도착한 곳은 요석 공주가 사는 궁궐이었어요. 며칠 동안 원효와 요석 공주는 부부처럼 지냈어요.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었지요. “공주님, 이제 저는 떠나야 합니다. 만일 아기가 태어나면 잘 키워 주십시오.” 요석 공주는 원효를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어요. 원효도 슬펐지만 묵묵히 길을 떠났어요. 궁궐에서 나온 원효는 스님 옷을 벗고 거렁뱅이 차림으로 떠돌아다녔어요. 술과 고기를 먹고 공주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니, 불교의 계율을 깨뜨린 거지요. 원효는 거리를 쏘다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아무 데나 끼어들었어요. 광대들의 놀음판에서 춤을 추고, 장터 술집에 들어가 술도 마셨어요.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다 주기도 하고,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 곁에 함께 있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꼭 부처님을 찾았지요. “저 사람은 미치광이 중이야!” 원효는 사람들이 이름을 물으면 ‘소성 거사’라고 했어요. 소성 거사란 ‘불교를 믿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미치광이 중이 원효라고 알려지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그 뒤 원효는 산속으로 들어가 조그만 암자를 짓고 지냈어요. 이 암자가 바로 원효가 주지 스님을 지낸 고선사입니다. 사복은 슬프게 울었어요. “사복아, 울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 어머니가 극락에 가시도록 함께 기원하자.” 원효는 불경을 외며 정성껏 기원했어요. 사복이 원효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곁에 있는 풀을 뽑자, 아름다운 땅속 세상이 열렸어요. “대사님 덕분에 어머니와 미천한 제가 극락으로 갑니다.” 사복은 어머니를 업고 아름다운 땅속 세계로 들어갔어요. 꿈 같은 일이었지요. 원효는 부처님의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무렵, 문무왕의 왕비가 큰 병이 들었는데 도무지 낫지 않았어요. 그러자 한 스님이 말하기를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세상에 널리 알리면 왕비의 병이 낫는다고 했어요. 문무왕은 원효에게 부탁했어요. 그러자 여러 스님이 문무왕의 명을 반대했어요. “원효는 계율을 깨고 부처님을 욕되게 한 못된 중이옵니다.” 그렇지만 문무왕은 원효에게 그 일을 맡겼어요. 원효는 소가 끄는 수레와 붓과 벼루를 준비해 달라고 하고는 수레에 앉아서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어서 금강삼매경소를 썼어요.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이야기하는 날이었어요. 임금님과 수많은 사람이 황룡사에 모였어요. 원효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감탄했지요. 금강삼매경소는 당나라에서도 훌륭한 책이라고 인정하여 금강삼매경론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오랜만에 평화로웠어요. 이 무렵, 원효는 깊은 산속 혈사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늙고 몸이 약해지자 조용히 불경을 읽으면서 부처님께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 소식을 듣고 의상 대사가 달려와 원효를 위로했어요. “슬퍼하지 마십시오. 모두 가는 길입니다.” 원효는 힘없이 웃으며 의상 대사의 손을 잡았어요. 686년 3월 30일, 원효는 바람처럼 세상을 떠났어요.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시체를 황룡사로 옮겨 장례를 치렀어요. 그런데 화장한 뼛가루로 원효의 상을 만들고 절을 올렸더니 그 상이 돌아보았다고 해요. 이것을 본 사람들은 원효 대사의 기적이라며 놀라워했지요. 설총은 훗날 ‘이두’라는 글자를 만든 위대한 학자가 되었어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어루만지던 원효의 손길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민중의 벗 큰 스님 원효대사. 화랑이 되려던 원효는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스님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원효는 이런 공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곧 불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원효는 귀족이나 부자들만 부처님 세계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어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도 똑같이 부처님 세계에 갈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지요. 모든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불경을 풀이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냈어요. 이렇게 원효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불교를 우리나라에 맞게 고쳐 널리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간디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영국이 인도를 다스리던 때가 있었어요. 인도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어요. 인도 사람들은 간절히 독립을 원했지만 어려운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자기들끼리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종교도 다른 데다가 신분 차이 때문에 한마음이 되지 못했거든요. 그런 인도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룬 위대한 사람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간디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영국으로 가서 공부했어요.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지만, 인도에는 변호사가 너무 많았어요. 게다가 간디는 사람들 앞에 서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어서 일솜씨도 신통치 않았답니다. 마침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일자리가 생겨서 간디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어요. 그런데 갑자기 승무원이 간디를 향해 소리쳤어요. “아니, 백인도 아닌데 왜 특실에 앉아 있는 거야? 당장 나가!” 간디가 차표를 보여 주었지만 소용없었어요. 승무원은 막무가내로 간디를 끌어냈어요. 간디는 시골 역에서 꼬박 하룻밤을 보내야 했지요.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 차별이구나.’ 간디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어요. ‘이토록 인종 차별이 심한 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간디는 스스로가 몹시 부끄러웠어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몰랐던 거예요.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멸시하고 괴롭히는 건 옳지 않아.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귀한 거야. 사람들이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간디는 새롭게 결심했어요.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멸시받는 인도 사람들을 위해 싸웠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인도 사람의 지도자가 되었지요. 하지만 간디는 무조건 싸우지는 않았어요.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인도 사람들이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간디는 인도 사람들에게 늘 말했어요. “남을 속이지 마세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합시다. 그리고 영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영어를 제대로 배웁시다!” 간디는 변호사 일을 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았어요. 집도 초라한 곳으로 옮겼지요.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죠?” 아내가 불평을 늘어놓았어요. “여보, 욕심을 버립시다. 이게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신을 섬기는 길이오.” 그뿐만 아니라 간디는 하인들도 모두 돌려보내고 화장실 청소까지 직접 했어요. 간디의 그런 모습을 본 아내도 점점 변해 갔지요. 그 뒤, 아내는 평생 동안 간디를 이해하고 도와준 좋은 친구가 되었답니다. 간디는 영국 정부가 잘못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고쳐 줄 것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영국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인도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했지요. “너희 나라로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영국 사람들은 간디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어요. 간디는 세 번이나 감옥에 갇혔어요. 하지만 간디는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려고 애썼습니다. 영국 사람들 중에는 인도 사람에게 심하게 구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간디를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어요. 결국 영국이 간디에게 졌어요. 인도 사람에게 불리한 옳지 못한 법들을 간디가 바라는 대로 바꾸었지요. 그 뒤, 간디는 인도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20년 만에 돌아온 인도는 아주 비참했어요.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할 뿐 아니라 아무 희망도 없이 간신히 하루하루 목숨만 이어 가고 있었지요. 몇 안 되는 부자들은 가난한 이웃을 못 본 체했어요.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끼리도 서로 무시하고 미워했고요. 간디는 안타까웠어요. 간디는 먼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어요. 그런 다음 영국과 맞서 싸웠지요. 하지만 절대로 무기를 쓰거나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어요. 바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펼친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힘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어요. 그러자 영국 군인들은 법을 어겼다며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 댔어요. 수많은 인도 사람이 죄 없이 죽어 갔지요. 간디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그렇다고 영국 사람들과 똑같이 총을 들고 싸울 수는 없었어요.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간디는 부르짖었어요.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을 얻읍시다. 우리의 바람은 꼭 이루어질 거예요. 신은 옳은 자와 함께 하시니까요.” 이것이 간디가 펼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정신이었어요. “아이들을 영국인 학교에 보내지 맙시다! 영국인을 위해서 일하지 맙시다! 세금을 내지 맙시다! 영국에서 들여온 옷감을 사지 말고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옷감을 짜서 인도 고유의 옷을 만들어 입읍시다!” 간디는 말로만 외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앞장서서 실천했어요.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잣는 간디의 모습은 인도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을 감동시켰지요. 간디는 밥 먹듯 감옥에 갇혔어요. 하지만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었어요. 또 인도 사람들이 서로 폭력을 쓴다거나 종교 문제로 싸운다는 소식이 들리면 며칠이고 단식을 하며 기도했어요. 간디가 단식을 하다가 건강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들리면 싸우던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고 간디의 회복을 빌었지요. 인도 사람들에게 간디는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거든요. 날이 갈수록 터무니없는 일로 싸움이 잦아지자 인도는 조용한 날이 없었어요. 영국에 대항해서 싸울 때는 마음을 합했지만 막상 독립이 되어 자유를 얻자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나뉘었어요.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지요. 결국 힌두교도들은 인도에 남고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어요. 하지만 그 뒤로도 싸움은 계속되었어요. 간디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같은 민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간디는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을 시작했어요. 단식이 길어지자 간디는 몸져눕고 말았지요. 그러자 간디를 사랑하는 두 종교의 지도자들은 할 수 없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로 약속했답니다. 하지만 모든 인도 사람이 간디를 존경하고 따랐던 것은 아니에요. 간디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간디 때문에 인도가 두 동강이 났어. 이슬람교도를 모두 몰아내고 힌두교도만의 나라를 만들어야 해!” 이런 생각을 가진 힌두교도 가운데 한 사람이 기도회에 나가던 간디를 총으로 쏜 거예요. 세상에서 폭력이 사라지고 오직 진리와 사랑만이 가득하기를 바라던 마하트마 간디는 수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깊은 사랑을 심어 주고 눈을 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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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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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독일 카이저스 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슈바이처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다섯 살이 되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슈바이처는 신이 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음악 시간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서툰 솜씨로 오르간 반주를 했어요. “선생님, 제가 쳐 볼게요.” 슈바이처는 오르간 앞에 앉아 반주를 시작했어요. “슈바이처! 어쩜 그렇게 잘 치니?” 슈바이처의 오르간 솜씨에 모두 박수를 보냈어요. 그 뒤로 음악 시간이 되면 슈바이처는 선생님을 도와 반주를 하곤 했답니다. 하루는 슈바이처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야, 슈바이처!” 아이들이 슈바이처 앞을 가로막았어요. 모두 낡고 허름한 차림이었어요. 슈바이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어요. 그때 한 아이가 슈바이처의 옷을 홱 잡아당기며 말했어요. “너, 좋은 옷에다 가죽 신발 신고 다닌다고 자랑하지 마!” “난 자랑한 적 없어!” 그런데 슈바이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아이가 슈바이처를 냅다 밀쳤어요. “하하하! 저 꼴 좀 봐.”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깔깔대며 웃었어요. 슈바이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 녀석이!” 슈바이처는 벌떡 일어나 밀친 아이에게 덤벼들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힘없이 픽 넘어졌어요. 슈바이처는 당황하여 아이를 일으켜 세운 뒤 손을 내밀었어요.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그러자 아이는 슈바이처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어요. “흥!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너처럼 매일 고기 수프를 먹으면 너따위는 문제없어!” 그 순간 슈바이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어요. ‘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는걸까?’ 슈바이처는 그 뒤로 절대 고기 수프를 먹지 않았어요. 추운 겨울에도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외투를 입지 않았고요. 또 친구들과 가까워지려고 많은 노력을 했답니다. 중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슈바이처를 불렀어요. “너를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그럴 수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 부모님은 슈바이처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등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슈바이처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섯 아이를 모두 교육시키기가 힘들었지요. 다행히 친척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슈바이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슈바이처는 할아버지 집에서 지냈어요. “슈바이처, 항상 부지런해야 한다.” 할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셨고, 할머니는 규칙적인 생활을 강조하셨어요. 슈바이처는 꽉 짜인 계획표에 따라 움직여야 했지요. 게다가 학교생활도 쉽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슈바이처는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 갔어요. 자꾸만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었어요. 성적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지요. 마침내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를 불렀어요. “성적이 아주 형편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장학금 혜택도 받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는 간곡히 부탁했어요.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십시오. 곧 좋아질 겁니다.” 슈바이처는 겨우 퇴학을 면하게 되었지만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슈바이처를 나무라지 않고 다정하게 안아 주었어요. “아버지,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슈바이처는 새롭게 결심을 했어요. 그러자 성격도 밝아지고 학교생활에도 점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답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슈바이처를 보고 수군대는 걸 들었어요. “쟤는 오늘도 똑같은 옷을 입었어.” 슈바이처의 외출복이라곤 어머니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 만들어 준 옷 한 벌뿐이었거든요. 그 순간, 슈바이처는 옛날 일이 떠올랐어요.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슈바이처는 개의치 않고 도서관으로 향했어요. 베만 선생님은 몹시 자상하고 친절했어요. 슈바이처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마다 자세히 가르쳐 주고 언제나 용기를 북돋워 주었어요. “슈바이처, 이 문제를 한번 풀어 보자. 너는 풀 수 있을 거야.” 슈바이처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성적도 부쩍 좋아졌지요.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슈바이처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어요. 열심히 공부해 스물일곱 살에 철학과 신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그리고 대학교수가 되었답니다. 어느 날, 슈바이처는 ‘콩고 지방의 형제들을 구하자’ 라는 기사를 보았어요.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 땅, 굶주려 죽어 가는 아이들, 수많은 전염병, 그런데도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의사도 없습니다. ‘그래, 이 세상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야겠어.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야!’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슈바이처, 그건 미친 짓이야!” “왜 하필 아프리카니? 무더운 기후에 병균마저 들끓는 그곳에…….” 부모님과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렸어요. “아프리카에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저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슈바이처의 결심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어요. “훌륭한 생각이에요. 저도 힘껏 당신을 돕겠어요.” 슈바이처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딱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자 친구 헬레네였어요. 헬레네는 슈바이처를 돕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슈바이처는 의과 대학에 입학했어요. 어린 학생들 틈에 끼어 열심히 공부했지요. 낮에는 의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틈틈이 피아노 연주회도 열었고요. 연주회에서 생긴 돈으로 아프리카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어요. 슈바이처는 잠자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바쁘게 보냈어요. 많은 사람이 슈바이처의 건강을 걱정했어요. 슈바이처는 서른여섯 살에 마침내 의사가 되었어요. 길고도 힘든 6년의 세월이었지요. 다음 해에 슈바이처와 헬레네는 결혼했어요. 헬레네는 슈바이처를 도우며 평생을 함께했지요.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천사와 같았답니다. 슈바이처 부부는 1913년 3월, 아프리카로 떠났어요. 의사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원주민들은 새벽부터 몰려왔어요. 진찰실도 없고 약품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슈바이처는 몰려드는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어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을 보고 진찰했어요. 슈바이처는 낡은 닭장을 고쳐서 임시 진료실로 사용했어요. 슈바이처 부부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지요. ‘이토록 많은 사람이 나를 원하고 있었다니. 이곳으로 오길 정말 잘했어.’ 슈바이처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어요. 하루는 발이 썩어 가는 소녀가 병원을 찾아왔어요. 슈바이처는 소녀를 마취시키고 수술을 했어요. 소녀가 마취에서 깨어나자 소녀의 어머니가 놀라 소리쳤어요. “내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 오강가가 나타났어!” ‘오강가’는 마술사란 뜻을 가진 아프리카 원주민들 말이지요. 어느 날, 영어와 프랑스 어를 잘하는 조셉이 찾아왔어요. 슈바이처는 통역해 줄 사람이 생겨서 무척 기뻤어요. 슈바이처는 우선 병원 규칙부터 만들었어요. 병원 바닥에 침을 뱉지 말 것, 떠들지 말 것, 약병은 반드시 다시 가져올 것. 그 무렵, 유럽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싸우고 있었어요. 어느 날, 슈바이처 병원으로 프랑스 군인들이 찾아왔어요. “여기는 프랑스 땅이오. 당신은 독일 사람이니 감시를 받아야 하오.” 슈바이처 부부는 결국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 년 뒤, 독일로 돌아와야 했지요. 슈바이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슈바이처는 여러 곳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와 강연회를 열어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어요. 많은 사람이 깊은 감동을 받고 선뜻 성금을 내놓았어요. 마침내 슈바이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갔어요. 그리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쁘게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어요. 78세 되던 해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상금은 나환자촌을 만드는 데 모두 썼지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풀 한 포기, 하찮은 벌레나 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을 실천했어요. 1965년, 90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돈과 명예를 다 버리고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원주민을 위해 슈바이처는 몸과 마음을 바쳤어요.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없지만, 슈바이처가 남긴 인류에 대한 사랑과 희생정신은 온 세계 사람의 가슴에 큰 교훈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나이팅게일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옛날에 영국은 부자와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렸어요. 윌리엄 에드워드 나이팅게일은 굉장한 부자였어요. 또한 대대로 내려오는 훌륭한 집안 사람이었고요. 에드워드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답니다. 1819년, 에드워드는 부인과 함께 남유럽을 여행하고 있었어요. 비행기나 기차가 없을 때여서 나이팅게일 부부는 마차를 타고 다녔지요. “여보, 여기는 어떻소?” “좋아요. 저 숲과 강물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두 사람은 아름다운 곳을 두루두루 다니며 여행을 즐겼답니다. 나이팅게일 부부는 이탈리아 나폴리에 머물면서 귀여운 딸을 낳았어요. 나폴리는 그리스 말로 ‘파세노프’예요. “여보, 파세노프에서 귀여운 딸을 낳았으니, 이름을 ‘파세노프’라고 지읍시다.” “그래요, 예쁜 이름이네요.”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도시 플로렌스에서 둘째 딸을 낳았어요. 둘째 딸의 이름도 그 도시 이름을 따서 ‘플로렌스’라고 지었답니다. 플로렌스가 태어난 지 1년 뒤 나이팅게일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왔어요. 두 사람은 더비셔 주 리허스트에 새 집을 지었어요. “여보, 집이 참 아름답지 않소?” “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궁전같이 아름다워요.” “우리 이곳에서 예쁜 두 딸을 잘 키웁시다.” 나이팅게일 부부는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넓은 뜰에는 철 따라 고운 꽃이 피고, 숲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며 플로렌스네 가족을 즐겁게 해 주었어요. 플로렌스와 파세노프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가정에서 무럭무럭 자랐답니다. 어린 자매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언니, 난 성서가 가장 재미있어. 이야기가 흥미롭거든.” “난 조금 어렵긴 해도 영어가 더 좋아.” 둘은 마주 보며 활짝 웃었어요. 플로렌스는 노래도 잘 불렀고, 피아노도 잘 쳤어요. 또 동물을 좋아해 함께 뛰노는 것도 아주 좋아했답니다. 플로렌스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만 마을이 있었어요.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데다가 병을 앓는 사람이 많았어요. 인정 많은 플로렌스 어머니는 꽃이나 음식을 들고 그 마을을 찾아가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플로렌스는 어머니를 따라갔어요.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 “플로렌스, 고맙구나.” 아저씨는 플로렌스의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요. 플로렌스는 혼자서 마을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말렸지만, 플로렌스는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 몹시 즐거웠어요. 크리스티 선생님은 플로렌스가 즐겁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해 주었어요. “플로렌스, 꼭 천사 같구나. 이다음에 간호사가 되면 좋겠어.” “네, 선생님. 저도 간호사가 되어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크리스티 선생님은 기특해하며 성경을 한 구절 읽어 주었어요. “기뻐하는 자와 더불어 기뻐하고 슬픈 자와 더불어 슬퍼하라.” 플로렌스는 성경 구절을 마음 깊이 새겼답니다. 어느덧 플로렌스는 열일곱 살의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어요.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두 자매는 왕실 파티에 초대받았어요. “플로렌스, 넌 어떤 옷을 입을 거니?” 언니는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어요. 그러나 플로렌스는 별로 기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어요. “플로렌스, 너는 왕실 파티에 초대받은 것이 기쁘지 않니?” 플로렌스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어요. “화려한 파티는 별로예요. 어머니, 전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뭐? 간호사가 되겠다고?” 어머니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어요. “안 된다. 간호사는 절대 안 돼!” 아버지도 펄쩍 뛰었어요. 귀족들은 간호사라는 직업을 천하게 여겼거든요. 플로렌스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어요.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에요.” “플로렌스, 엄마는 네가 좋은 사람과 결혼하길 바란단다.” “아빠도 네가 그렇게 힘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부모님은 플로렌스를 말렸어요. “하지만 저는 꼭 간호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살고 싶어요.” 부모님은 더 이상 플로렌스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답니다. 아버지는 플로렌스의 생각을 바꾸어 보려고 유럽 여행을 떠났어요. 세 번에 걸친 긴 여행이었어요. 플로렌스는 여행을 하는 동안 시드니 에버트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에버트는 훗날 플로렌스를 많이 도와주는 소중한 친구지요. 독일에 머무는 동안 플로렌스는 카이저스 베르트 병원에서 간호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세 번째 여행이 끝났을 때, 플로렌스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 살이 되었어요. 플로렌스는 마침내 간호사가 되었어요.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런던 자선 병원이었어요. 자선 병원 형편은 매우 어려웠어요. 플로렌스는 부모님께 도움을 청했어요. 사랑하는 부모님께 저는 지금 런던 자선 병원에서 큰일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물자가 모자라 걱정이에요. 편지를 읽고 부모님은 눈물을 글썽였어요. “여보, 플로렌스가 자랑스러워요.” “그래요, 우리가 플로렌스를 도와줍시다.” 아버지는 해마다 500파운드씩 보내 주기로 약속했어요. 1853년, 크림 전쟁이 일어났어요. 크림 반도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러시아군과 맞서 싸웠어요.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군인이 죽거나 다쳤지요. 부상당한 군인들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답니다. 전쟁터의 안타까운 사정이 신문에 크게 실렸어요.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니.' 플로렌스는 전쟁터로 가서 군인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플로렌스는 곧 영국 정부와 의논하여 38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터키로 떠났어요. 전쟁은 계속되었어요. 부상당한 병사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지요. 부상병들은 터키의 스쿠타리로 옮겨졌어요. 플로렌스 일행은 그곳에 있는 병원에서 일했어요. 낡고 큰 건물을 빌려 임시 병원으로 쓰고 있었는데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어요. 부상병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팔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 몸에서 피고름이 나는 사람.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플로렌스의 가슴을 파고들었어요. 플로렌스 일행은 밤낮없이 부상병들을 치료했어요. 부상병이 너무 많아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었지만, 플로렌스는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어요. 플로렌스 일행이 영국을 떠날 때, 허버드 장관은 식량과 의약품을 넉넉히 보내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식량과 의약품은 제대로 도착하지 않았어요. 플로렌스는 기꺼이 자신의 돈을 내놓았어요. 그 돈으로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을 샀지요. 플로렌스 일행은 자신들의 비상식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부상병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상처를 빨리 낫게 하려면 기운을 북돋워 줘야 하니까요. 부상병들은 플로렌스를 천사처럼 생각했답니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2년을 끌던 긴 전쟁이 마침내 끝났어요. 그러자 플로렌스는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부상병들을 돌보느라 지치고 힘들어 몸이 몹시 야위어 있었지요. 플로렌스는 쉬면서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간호에 대한 책을 썼어요. 플로렌스의 책을 읽고 스위스의 ‘앙리 뒤낭’이란 사람이 찾아왔어요. 앙리는 플로렌스에게 힘을 모아 함께 적십자를 만들자고 제의했어요. 플로렌스의 사랑과 봉사 정신이 국제 적십자사를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어요. 국제 적십자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람들은 지금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적십자의 어머니’로 존경하고 있답니다. 플로렌스가 인류를 위해 평생을 바친 데는 착하고 아름다운 성품이 큰 몫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받은 기독교 교육의 영향이 컸어요. 1837년 2월 어느 날, 플로렌스는 사명을 일러 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 사명이 무엇인지는 9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해요. 크림 전쟁이 끝난 뒤, 영국 정부에서는 플로렌스를 환영하고 그녀의 노고를 기리는 행사를 크게 벌이려고 했어요. 그러나 플로렌스는 끝까지 사양하였답니다. 1860년, 플로렌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민이 기부한 나이팅게일 기금 4만 5천 파운드로 플로렌스는 세계 최초로 간호학교를 세웠어요. 또한 극빈자 진료소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조산원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어요. 나이팅게일은 평생을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았던 거예요. 1910년 8월 13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자 영국 정부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려 했지요. 그러나 플로렌스의 유언에 따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시골의 작은 교회 묘지에 묻어 주었답니다. 플로렌스의 거룩하고 고귀한 정신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아 영원히 빛날 거예요.
마틴 루터 킹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마틴, 우리 집은 검둥이가 놀러 오는 집이 아니야. 검둥이는 검둥이끼리 놀아라.” 이웃집 아주머니가 어린 마틴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어요. 백인 친구들도 마틴을 슬슬 피해 다녔어요. ‘백인은 왜 흑인을 싫어하는 거지?’ 풀이 죽은 채 집으로 돌아온 마틴은 아빠 품에 안겨 엉엉 울었어요. “아빠, 내 얼굴은 왜 까매요? 친구들이 내가 까맣다고 같이 안 논대요.” 교회 목사님인 아빠는 대답 대신 마틴을 꼭 안아 주었어요. “마틴, 그건 말이야.” 아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아빠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마틴이 너무 어렸거든요. 당시 미국은 인종 차별이 아주 심했어요. 흑인들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 온 사람들이었어요. 노예제도가 없어진 뒤에도 백인은 여전히 흑인을 업신여겼어요. “노예 자식 주제에 어딜 들어와!” 흑인들은 영화관이나 음식점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어요. 어딜 가나 ‘백인만 들어올 수 있음’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으니까요. “제발 다른 데로 가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당신들이 있으면 장사가 잘 안 되는 걸 어떡하겠소.” 흑인에게 친절한 백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백인은 흑인과 어울려 지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에게도 백인과 흑인이 따로 놀도록 가르쳤지요. 어느덧, 마틴은 고등학생이 되었어요. 마틴은 교내 웅변대회에 참가해서 ‘흑인과 헌법’이라는 제목으로 아주 감동적인 웅변을 했어요. “여러분! 흑인도 존중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 땅의 국민입니다. 그런데 왜 피부가 검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받아야 합니까? 우리도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웅변대회에서 마틴은 큰 상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 뒤로도 차별은 여전했어요. 버스를 탈 때 백인은 앞문, 흑인은 뒷문으로 타야 했지요. 흑인은 언제나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틴은 다짐했어요. ‘언젠가는 이런 모순된 사회를 꼭 바꾸고 말 테야.’ 공부를 잘했던 마틴은 남들보다 일찍 대학에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 흑인을 위해 일하고 싶었지만 생각 끝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 신학을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는 거야.’ 마틴은 인도의 지도자 간디를 존경했어요. 간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도의 독립 운동을 이끈 위대한 인물이에요. ‘흑인 인권 운동도 간디처럼 해야 돼.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를 바꿔 가는 거야.’ 마틴은 서로 싸우지 않고도 흑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꿈을 꾸었어요. 마틴이 보스턴 대학에 진학했을 때였어요. 친구가 마틴에게 예쁜 흑인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었어요. “꿈이 많은 너에게 잘 어울리는 친구야. 잘해 봐.” 이 여학생이 바로 훗날 아내가 된 콜레타예요. “저는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마틴의 꿈은 뭐예요?” 콜레타의 물음에 마틴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어요. “저는 훌륭한 목사가 될 겁니다. 보다 나은 세상에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콜레타는 마틴을 보며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꿈을 이루도록 평생 옆에서 돕고 싶다.’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했답니다. 다음 해, 마틴과 콜레타는 딸 ‘욜란다’를 낳았어요. 마틴은 욜란다만 보면 늘 마음이 아팠어요. ‘욜란다는 흑인이라고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야 할 텐데.’ 마틴은 욜란다가 좋은 세상에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모든 흑인을 화나게 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로저 파크스라는 흑인 여자가 버스를 탔는데, 너무 피곤해서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어요. 그러자 서 있던 백인이 파크스 부인에게 소리쳤어요. “일어나! 감히 흑인이 앉아서 가다니!” 하지만 파크스 부인은 꼼짝하지 않았어요. “난 몹시 피곤해요. 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거죠?” 뜻을 굽히지 않고 백인에게 당당히 맞서던 파크스 부인은 결국 경찰서로 끌려가고 말았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도대체 언제까지 참고 살아야 합니까!” “맞아요. 파크스 부인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우리도 행동으로 당당히 맞서야 해요!” 흑인들은 한마음으로 뭉쳤어요. 그리고 스물여섯 살의 마틴을 흑인 지도자로 내세웠어요. 마틴은 먼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였어요. “우선, 흑인을 무시하는 버스를 타지 않기로 합시다. 여러분, 힘들겠지만 걸어 다니십시오! 우리도 힘을 모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줍시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흑인의 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흑인들은 ‘버스 안 타기 운동’을 계속해 나갔어요. 그리고 몽고메리 시에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렸어요. 첫째, 백인 운전 기사는 흑인 손님에게 나쁜 말을 하지 말 것 둘째, 손님을 차별하지 말고 타는 순서대로 앉힐 것 셋째, 버스 회사는 흑인 기사를 고용할 것 나이가 많은 흑인 노인들도 꾹 참고 걸어다녔어요. 흑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어느 날, 마틴은 길을 걷다 흑인 할머니를 만났어요. “할머니, 힘드시지요?” “내 다리는 비록 힘들지만 내 영혼이 이렇게 자유롭기는 처음이라네.” 그 누구도 이 운동을 막지 못했어요. 흑인들의 간절한 희망을 아무도 꺾을 수 없었으니까요. 백인들은 마틴을 협박하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집회에서 마틴이 연설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왔어요. “목사님! 크, 큰일 났습니다! 목사님 댁에 누군가 폭탄을.” 마틴은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집에 있는 아이들과 아내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어요. 다행히 아내와 아이들은 무사했지만, 마틴은 몹시 힘들고 괴로웠어요.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죽을 뻔했어.’ 하지만 흑인 지도자로서의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요. 협박이 거세질수록 마틴은 더욱 강하게 마음을 먹었어요. 마틴은 세계 곳곳에 흑인의 억울함을 알렸어요. 마침내 미국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렸어요. “버스 안에서의 인종 차별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결국 흑인들이 승리한 거예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결국 우리가 해냈습니다!” 이 판결로 다른 지역에 사는 흑인들도 희망을 갖게 되었지요. “우리도 권리를 되찾읍시다!” 마틴은 더욱 바빠졌어요.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책으로 출판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마틴은 흑인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세상이 단번에 바뀌는 건 아니었어요. 흑인을 업신여기던 백인들은 더욱 똘똘 뭉쳐 자기들만 편하게 살려고 맞섰어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큰일 나겠어.” “맞아, 흑인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해.” 흑인과 백인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맞섰어요. 백인 경찰들은 시위하는 흑인들을 흩어 놓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리고 몽둥이로 겁을 주었어요. 하지만 날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 흑인들을 당할 수는 없었어요. 결국 미국 곳곳에서 일어난 많은 시위에서 대부분 흑인들이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1963년 8월, 워싱턴에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어요. 흑인 지도자로 우뚝 선 마틴 루터 킹은 사람들을 향해 외쳤어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형제처럼 손을 잡고 뛰어노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또, 흑인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유의 종이 미국 온 땅에 울려 퍼지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마틴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마틴이 꿈꾸는 그런 세상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도했지요. 이날은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하루였어요. 1964년, 마틴 루터 킹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마틴은 노벨상을 받는 자리에서 말했어요. “이 상은 저 혼자만의 상이 아닙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노력한 흑인 모두에게 주는 상입니다. 저는 미국의 미래를 믿으며, 인류의 미래는 매우 희망적이라고 믿습니다!” 마틴은 흑인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흑인을 돕기 위해 빈민 운동에도 앞장섰어요. 흑인은 백인과 똑같은 일을 해도 백인보다 돈을 적게 받기 때문에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마틴은 항상 헐벗고 가난한 이웃들 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 움직였답니다. 1968년 4월 어느 날, 마틴은 멤피스에서 연설을 했어요. “신께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우리에게 약속한 땅을 보고 싶습니다.” 이 연설이 마틴의 마지막 연설이었어요. 마틴은 바람을 쐬기 위해 숙소에서 나오다 흑인 인권 운동을 반대하던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어요. 마틴 루터 킹은 자신이 흑인이면서도 늘 흑인들에게 백인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쳤어요. 지금도 많은 사람이 마틴 루터 킹의 묘지에 꽃을 바치며 그 위대한 뜻을 기리고 있답니다.
달라이 라마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오랜 옛날인 7세기쯤, 티베트 왕은 멀리 인도까지 땅을 넓히고 이웃 나라 공주들과 결혼했어요. 이때 이웃 나라 공주들이 티베트로 오면서 불상을 들여와 티베트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어요. 1578년, 몽골 황제는 티베트 스님 소남 갸초를 초대했어요. 소남 갸초는 황제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황제는 그 이야기에 큰 깨우침을 얻었어요. “아, 이렇게 큰 가르침을 주시다니. 당신을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겠습니다.” 달라이 라마란 ‘바다처럼 큰 덕을 지닌 스승’을 뜻해요. 그 뒤로, 티베트 최고 지도자를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불교에서는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을 믿어요. 그래서 달라이 라마도 죽으면 어디선가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지요. 1933년,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떠나자,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남쪽을 향하던 시신의 얼굴이 어느 새 북동쪽을 향하고, 달라이 라마가 앉았던 옥좌의 북동쪽에 별 모양 버섯이 자랐지요. 스님들은 입을 모아 말했어요. “이것은 달라이 라마가 북동쪽에서 환생했다는 뜻이오.” 한날은 달라이 라마를 대신하여 티베트를 다스리던 섭정이 호숫가에서 기도하다가 신비로운 환상을 보았어요. 청록색과 황금색 지붕의 절과 하늘색 지붕의 집을 본 거예요. 스님들은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으러 북동쪽으로 길을 떠났어요. “오, 저기 청록색과 황금색 지붕의 절이 있소!” 그 절에 머물던 스님들은 오래지 않아 근처 마을에서 하늘색 지붕의 집을 발견했어요. 그 집은 ‘라모 톤둡’이라는 어린아이가 사는 집이었어요. “꼬꼬닭아, 노래를 불러 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라모 톤둡은 동물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귀여운 아이였어요.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한 티베트에서는 아이를 승려로 만들기 위해 절로 보내는 일이 흔했는데, 라모의 형들 가운데 두 형도 절에 들어가 있었지요. 스님 일행은 조심스럽게 집 안에 들어섰어요. 두 살배기 라모는 낯선 스님들을 스스럼없이 대했어요. 나이 많은 스님의 무릎에 기어오르기도 하고, 스님 목에 걸려 있는 염주를 만지작거리더니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이게 정말 스님 건가요?” 염주는 스님의 것이 아니라 13대 달라이 라마의 것이었어요. 스님들은 놀라워하며 똑같은 물건을 둘씩 늘어놓았지요. 라모는 13대 달라이 라마의 물건만 골라 내며 외쳤어요. “맞아, 이건 내 거야.” 스님들은 몹시 기뻐하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어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았다!’ 라모가 태어난 탁처는 중국에 속한 곳이었어요. 그래서 밖으로 나가려면 중국의 허락이 필요했지요. 스님 일행이 라모가 누군지를 밝히지 않아도 중국은 곧 눈치 챘어요. “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를 찾았으면 몸값을 내야지.” 중국은 비싼 몸값을 두 번이나 받은 뒤에야 라모를 풀어 주었어요. 어느덧 라모는 네 살이 되었어요.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난 라모는 형들과 장난도 치고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면서 마침내 라싸에 다다랐어요. 라싸에는 ‘신들의 집’이라 불리는 포탈라 궁이 있었어요. 바로 달라이 라마가 지내는 곳이지요. 오랜 여행으로 지쳐 있던 라모는 자신을 맞으러 나온 수많은 사람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1940년, 포탈라 궁에서 14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이 열렸어요. 다섯 살 된 라모는 즉위식에서 아주 의젓하게 행동했고, ‘텐진 갸초’라는 새 이름도 얻었어요. ‘믿음을 지키는 사람, 지혜의 바다’라는 뜻이지요. 달라이 라마가 자랄 때까지 티베트는 섭정이 대신 다스리고, 그동안 달라이 라마는 여러 가지 공부를 해야 했어요. 불교와 기도문에 대해 배우는 것은 물론 천문학, 지리, 역사, 영어, 과학 기술 등도 공부했어요. 달라이 라마는 하인들을 보며 불공평한 사회에도 눈을 떴어요. ‘지위 높은 스님과 지주들은 이렇게 누리는 게 많은데, 농민이나 하인들은 교육도 못 받고 가난하게 사는구나. 달라이 라마는 궁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도 했어요. 또 사람들이 오가는 시내를 망원경으로 보면서 궁에 갇혀 지내는 외로움과 지루함을 달래곤 했지요. 달라이 라마가 특히 좋아한 것은 기계와 자동차였어요. 십 년도 넘게 세워 두기만 한 자동차를 보고 달라이 라마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달려야 하는 자동차를 가만히 세워 두다니! 내가 한번 타 볼까?’ 달라이 라마는 아무도 몰래 자동차를 운전해 보았어요. 그런데 그만 나무를 들이받아 전조등이 깨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유리에 설탕 시럽을 잔뜩 바른 뒤 전조등처럼 살짝 끼워 놓았답니다. 달라이 라마가 열네 살이 되던 해, 티베트에 큰일이 벌어졌어요. 중국이 티베트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쳐들어온 거예요. 달라이 라마는 국제 연합에 호소했지만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어요. “티베트는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아니니 도와줄 수 없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티베트는 그동안 고립 정책을 펴 왔어요.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아 국제 사회에서도 외면당한 거예요. 그러자 국민들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이끌기를 바랐어요. 원래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는 열여덟 살이 넘어야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열다섯 살의 나이로 최고 지도자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다음 해, 중국은 티베트를 위협해 라싸에 중국 군대를 머물러 있게 했어요. 1954년, 달라이 라마는 직접 중국에 갔어요. 마오 주석은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했지만, 나중에 보인 행동은 그와 딴판이었지요.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와 인도의 지도자를 만나 도움을 청했어요. 하지만 모두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티베트를 도우려 하지 않았어요. 중국은 자신들이 맺은 협정마저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재물을 빼앗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어요.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소. 군대를 조직해서 티베트를 지킵시다!” 분노한 티베트 국민이 무기를 들고 중국에 맞서려고 했어요. 그러자 달라이 라마가 간절히 호소했어요. “폭력으로 맞서서는 안 됩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목숨도 넘보았어요. 중국군을 위한 연극 공연에 달라이 라마를 초대하면서 수행원을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한 거예요. 티베트 국민의 분노와 불안은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달라이 라마 홀로 적지에 들어가게 할 수 없소!” “옳소! 우리가 달라이 라마를 지킵시다!” 온 국민이 달라이 라마를 지키려고 궁을 에워쌌어요. 그러자 중국군은 무기를 들고 이를 막았지요. 달라이 라마는 궁 밖을 내다보며 괴로워했어요. ‘나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게 할 수 없어.’ 달라이 라마는 할 수 없이 티베트를 떠나기로 했어요. 1959년, 궁을 떠나는 달라이 라마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어요.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남겨지는 국민은 어찌할까.’ 달라이 라마는 군인으로 변장하고 궁을 빠져나왔어요. 강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 일행을 배에 태웠어요. 일행은 달라이 라마와 가족, 관리들, 스승들을 합해 백 명쯤 되었지요. “다행히도 구름이 달빛을 가려 주는구나.” 일행은 마음을 졸이며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어요. 달라이 라마가 떠난 지 이틀 뒤, 중국군은 궁을 부수고 티베트 국민에게 마구 총을 쏘아 댔어요. 그 소식을 들은 달라이 라마는 몹시 괴로웠어요. 가는 길에 만난 티베트 저항군은 일행이 인도에 다다를 때까지 일행을 안전하게 지켜 주었어요. “저희는 돌아가 중국과 싸우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달라이 라마는 3주쯤 지나 인도에 도착했어요. 인도 사람들은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지요.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봄딜라를 거쳐 다람살라로 갔어요. “여긴 티베트와 비슷한 고원 지대라 좋군요. 중국과 사이가 나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받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처음에는 티베트로 곧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망명 생활이 길어지고 인도로 넘어오는 티베트 사람들이 늘자, 그곳에 학교와 절 등을 세웠어요. 중국이 티베트의 문화재와 예술품, 절 등을 마구 파괴하는 동안, 달라이 라마는 ‘작은 라싸’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티베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답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지 40년도 넘게 세월이 흘렀어요. 그는 날마다 새벽 네 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하고 경전을 읽으며 마음을 닦는답니다. 또 티베트의 지도자로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세계 여러 나라에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고, 중국에 평화롭게 지내자는 제안을 보내기도 했지요. 이처럼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도, ‘비폭력’이라는 원칙만은 변함없이 지켰어요. “나의 종교는 사랑과 자비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정신은 수많은 책과 연설을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어요. 1989년,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티베트의 독립을 위한 평화로운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지요. 자신만 행복해지려고 하다 보면 남에게 고통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적마저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지금도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하며 티베트의 평화, 나아가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노력하고 있답니다. 못다 한 이야기. 자유와 평화를 꿈꾸는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라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라를 대표할 뿐 아니라 종교와 정치를 함께 이끄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어요. 티베트 국민은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여길 뿐 아니라 부처의 화신으로 믿어 끝없는 존경과 애정을 보낸답니다. 그렇다면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위치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판첸 라마’예요. 판첸은 ‘위대한 학자’, 라마는 ‘스승’을 뜻해요.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 같은 권력은 없지만, 티베트 국민에게 큰 존경을 받는다는 점이 같아요. 그래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서로의 권위를 인정한답니다. 10대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뒤, 중국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어요. 중국은 판첸 라마가 중국 편에 서서 정치 지도자 노릇을 해 주길 바랐어요. 그러나 판첸 라마는 오히려 국민들 앞에서 “티베트의 지도자는 달라이 라마뿐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장수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고 말했지요. 그러자 화가 난 중국은 그를 가두고 심한 고문을 했어요. 그 뒤 판첸 라마는 10년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5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10대 판첸 라마가 세상을 떠난 뒤, 달라이 라마는 겐둔 최키 니마라는 소년을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했어요. 그러나 겐둔마저 6세 때 중국에 끌려가 아직까지 소식조차 알 수 없어요. 그리고 중국은 겐둔과 같은 나이인 노르부를 판첸 라마로 임명했어요. 하지만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국민은 그를 판첸 라마로 인정하지 않지요. 중국의 이러한 간섭 때문에, 얼마 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 ‘전생활불 제도’를 없앨 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전생활불 제도는 티베트에서 700년 이상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전생라마’라고도 해요. 즉, 살아 있는 부처로 여기는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것이지요. 이 전통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환생할 곳에 대해 미리 알려 주는데, 14대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중국의 지배 아래 놓인 곳에서는 환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달라이 라마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티베트의 진정한 지도자를 뽑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답니다. 첫째는 달라이 라마 제도를 없애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 대륙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뽑는 것이며, 셋째는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다음 달라이 라마를 지명하는 거예요. 그러나 달라이 라마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티베트의 독립을 보고, 그리운 고국 땅을 밟는 것이겠지요. 모든 티베트 국민의 소망인 독립을 평화롭게 이루기 위해,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답니다.
세종 대왕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어질고 슬기로운 임금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니, 바로 조선 시대 네 번째 임금 세종 대왕이에요.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예요. 세종 대왕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어렸을 때 이름은 충녕이었어요. 충녕에게는 두 형이 있었는데, 첫째 형은 양녕, 둘째 형은 효령이었답니다. 양녕은 활을 귀신처럼 잘 쏘았지만, 술을 마시며 호탕하게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둘째 효령은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있곤 했어요.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걸까?’ 사냥을 가서도 솔방울이나 쏠 뿐 짐승은 맞히지 않았지요. 또 셋째 충녕은 대단히 슬기롭고 총명했어요. 공부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해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책을 읽다가 병이 날 정도였답니다. 세 왕자의 성격은 이렇듯 달랐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세상 어느 형제보다도 컸어요. 어느 날, 양녕은 효령을 불러 말했어요. “아무리 봐도 충녕이 임금이 되어야 나라가 잘될 것 같구나.” 형의 말에 효령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예, 형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양녕은 일부러 술주정도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왕자답지 않게 굴었어요. “아니, 왕이 되실 분이.” 모두 양녕을 걱정했어요. 효령은 아예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고요. 그래서 충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답니다. 세종 대왕은 무엇보다도 공부를 많이 하고, 덕이 높은 훌륭한 신하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재주 있는 젊은 선비들을 뽑아 집현전에서 공부를 하게 했지요.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어요. ‘어허, 밤에 공부를 하려면 몹시 추울 텐데.’ 세종 대왕은 선비들이 걱정되어 한밤중에 살그머니 집현전으로 나가 보았어요. 그런데 한 선비가 추위에 떨며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어 있는 거예요. 세종 대왕은 가만히 겉옷을 벗어 잠이 든 선비를 덮어 주었답니다. 세종 대왕은 좋은 책을 많이 만들었어요. 무엇보다도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해 가장 먼저 역사에 대한 책을 쓰게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학자들이 조선에 대해서는 좋게 쓰고 고려에 대해서는 나쁘게만 쓰는 거예요. 세종 대왕은 버럭 화를 냈어요. “역사를 쓰는 붓은 칼날보다도 정확해야 하거늘, 이토록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학자들은 세종 대왕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어요. “백성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데, 농사에 대해 쓴 변변한 책 한 권이 없구나!” 세종 대왕은 농사에 대한 책도 쓰게 했어요. 책에 쓰인 대로 농사를 짓자, 농작물을 훨씬 더 풍성하게 거두어들일 수 있었지요. 또한 각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과 땅 모양에 대한 책도 펴내고, 효자와 충신, 열녀 이야기를 담은 책과 병을 치료하고 약을 짓는 법에 대한 책도 펴냈답니다. 세종 대왕은 음악도 매우 좋아했어요. 그래서 박연을 불러 우리 음악에 맞는 악기를 만들라고 했지요. 박연은 경석이란 돌로 편경이란 악기를 만든 뒤, 세종 대왕 앞에서 연주를 해 보였어요. 돌이 내는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궁궐 가득 울려 퍼졌어요. “참으로 훌륭하오. 그런데 짐의 귀에는 일곱 번째 돌 소리가 조금 낮게 들리는구려.” 세종 대왕의 말에 박연은 깜짝 놀라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그랬더니 정말 일곱 번째 경석 위에 먹줄 자국이 남아 있는 거예요. 먹줄 자국을 갈아 내고 다시 연주를 하자 나무랄 데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답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종들 중에 장영실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손재주가 아주 뛰어났어요. 세종 대왕은 장영실을 불러 재주를 시험해 보고는 말했어요. “매우 훌륭한 재주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종이 아니니,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하라!” 장영실은 세종 대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어요. 별의 위치와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구도 만들고 시간을 재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만들었으며, 비가 온 양을 재는 측우기도 만들었답니다. 세종 대왕은 자나 깨나 백성 걱정뿐이었어요. “비가 내리지 않고 가물어 흉년이 드는 게 가장 큰일이구나.” 세종 대왕은 백성을 위해 나라 안에 큰 저수지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곳곳에 곡식을 저장할 창고도 만들었지요. 굶을 걱정이 없어지자 백성은 모두 세종 대왕을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존경했어요. 세종 대왕은 마음이 어진 임금이었어요. 억울하게 벌을 받는 백성이 많다는 걸 알고는 마음이 너무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세 번에 걸쳐 조사를 받도록 했어요. 가벼운 죄를 지었을 경우, 등을 때리던 것도 볼기를 때리도록 바꾸었지요. 또 그때까지는 주인이 종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었는데, 세종 대왕은 그 법도 바꾸었답니다. “아무리 신분이 낮은 종일지라도 짐의 백성이다. 반드시 관가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라.” 세종 대왕은 나라를 지키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백성이 늘 왜구와 여진족에게 시달리니, 이래서야 어찌 하루라도 발을 뻗고 자겠는가?’ 세종 대왕은 장군들을 불러 명령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몰아내도록 하라!” 남쪽으로 이종무 장군을 보내 왜구의 항복을 받아 내게 하고, 북쪽으로 김종서 장군을 보내 여진족을 물리치게 했지요. 그 덕분에 백성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어요. 압록강에서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국경도 이때 정한 거랍니다. 세종 대왕은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어요. ‘한자가 우리말하고 다를 뿐 아니라 너무 어려워서 백성이 배우기 쉽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할꼬!’ 세종 대왕은 우리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자는 뜻을 따라 글자를 만들었지만, 우리글은 소리대로 뜻이 나타나게 만드시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 대왕의 뜻을 받들어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쉽고 아름다운 글자를 만들었어요. 바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이에요. 세종 대왕은 소리 내어 한글을 읊어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어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또 세종 대왕은 학자들에게 한글로 글을 짓게 하고, 월인천강지곡이란 아름다운 글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백성을 위해 연구하고 마음을 쓰는 사이, 몸은 점점 약해졌어요. 세종 대왕은 자리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답니다. 쉰네 살의 창창한 나이에 말이에요. 세종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은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어요. 하지만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종 대왕이 남긴 업적은 그대로 남아 온 국민의 힘이 되고 있어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 한글에는 이토록 커다란 세종 대왕의 사랑이 담겨 있답니다. 바로 그 커다란 사랑 덕분에 여러분은 지금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고요. “가, 나, 다, 라.” 자, 이제부터는 한글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지요?
이황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담장 밖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습니다. ‘누가 서당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글을 외는 걸까?’ 훈장님은 궁금해서 담장 밖을 넘겨다보았어요. 거기에는 여섯 살짜리 꼬마 이황이 담장에 기대앉아 글을 외고 있었지요. ‘옳거니! 어제 배운 것을 공부하고 나서 들어오려는 거로군.’ 훈장님은 이황이 대견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황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한번 배운 것은 뜻을 깨우칠 때까지 보고 또 봤지요. 이처럼 철저하게 공부하는 습관을 지닌 덕분에 조선 시대의 위대한 학자가 되었어요. 이황은 1501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어요. 이황이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직접 농사도 짓고 누에를 치며 자식들을 공부시켰어요. 어머니는 틈틈이 자식들을 불러 놓고 당부했어요. “아버지가 안 계시니 더욱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이황은 형제 가운데서도 유달리 마음씨가 착하고 여렸답니다. 한번은 형이 손가락을 칼에 베어 피를 뚝뚝 흘렸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이황이 울음을 터뜨렸어요. “얘야, 손을 다친 것은 형인데 네가 왜 우느냐?” 어머니가 묻자 이황은 훌쩍이며 대답했어요. “어머니, 저렇게 피가 흐르니 형님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생각했어요. ‘형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다니, 이 아이의 마음이 참으로 어질구나.’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황의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이황은 열두 살이 되면서 작은아버지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습니다. 이우는 이름난 학자로, 이황을 친자식처럼 아꼈지만 공부를 가르칠 때는 몹시 엄했어요. 하지만 이황은 군소리 한마디 없이 작은아버지를 따르고, 논어의 가르침을 익혀 나갔답니다. 하루는 이황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마음속이 환해지는 걸 느끼고, 급히 작은아버지를 찾았어요. “숙부님, 논어에 나오는 ‘이’ 란 모든 일의 옳은 것을 뜻하는 거지요?” “옳지! 네가 벌써 글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구나.” 작은아버지는 이황의 말에 무릎을 치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고, 앞으로 가고 뒤로 가니 발이 많기도 하다. 한 움큼의 물로도 살기에 충분한데, 강과 호수에 물 많음을 물어 무엇 하리. 이황이 열다섯 살 때 가재를 보고 지은 시예요. 강과 호수의 물을 탐내지 않고 산골짝 시냇물에서 욕심 없이 사는 가재의 모습을 노래했지요. “나도 가재처럼 한평생 욕심 없이 살고 싶어.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 수만 있다면.” 이황은 공부하는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시로 썼습니다. 남달리 공부를 좋아한 이황이지만, 과거 시험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어요. 다른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해서 관리가 되고, 높은 벼슬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떨치려고 했어요. 그래서 너나없이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지요. 하지만 이황은 출세를 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자신의 마음을 닦는 데 힘썼어요. 그러다 보니 결혼을 하고 나이 서른이 되도록 과거에 붙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이황의 집으로 들어오며, “이 서방 집에 있나?” 하고 소리쳤어요. 이황은 자기를 찾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하인 이 서방을 찾는 소리였어요. ‘아, 내가 과거에 붙지 못해 스스로도 내 이름을 낮게 여기고 있었구나.’ 이황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며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어머니께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과거 시험을 열심히 준비하여 서른두 살의 나이로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어요. 그리고 2년 뒤, 마침내 임금님 앞에서 보는 과거에도 급제하였답니다. 이황은 여러 벼슬을 지냈어요. 그동안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과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에서도 훌륭하게 일을 해내었지요. 이황의 벼슬은 나날이 높아졌어요. 하지만 이황은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힘쓰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이황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요. “벼슬을 하더라도 고을 수령 정도에 머무르고, 높은 자리에는 나아가지 마라. 세상이 너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황은 어머니가 말씀하신 뜻을 헤아리고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않았어요. 재물을 늘리는 일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지요. 그래서 이황이 살던 집은 늘 소박했으며, 오히려 누추하기까지 했답니다. 어느 해 가을이었습니다. 옆집 밤나무 가지가 이황의 집으로 뻗어 있었는데 탐스러운 알밤이 이황의 집 마당으로 떨어졌어요. 이황은 책을 읽다가 잠시 쉴 때마다 떨어진 알밤을 주워 옆집으로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두 아들이 물었어요. “아버님, 무얼 하시는 거예요?” 이황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밤 한 톨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단다.” 그래서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밤이 떨어지면 주워서 옆집으로 던지곤 했습니다. 한번은 좌의정이 이황의 집을 찾아왔는데, 이황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어요. “영감님, 반찬은 없지만 많이 잡수세요.” 밥상이 들어오자 이황이 권했어요. “원 별말씀을요!” 좌의정은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어요. 거친 잡곡밥에 반찬이라고는 김치와 나물무침뿐이었거든요. 이황은 늘 먹던 음식이라 달게 잘 먹었지만, 좌의정은 몇 숟가락 뜨지 못했습니다. 그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그대가 청렴하다더니 참으로 그러하오. 내가 이제껏 맛있는 음식만 찾아 먹었으니 그대 보기에 너무나 부끄럽소.”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황의 높은 인품과 학문을 우러러보았어요. 이황의 벼슬도 차츰 높아졌지요. 이황은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쓰는 일과 임금님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일, 조선 시대의 대학인 성균관을 맡아보는 일들을 했어요. 그러나 이황은 벼슬자리에 오래 있지 않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임금님은 다시 이황에게 벼슬을 내려 조정으로 부르곤 했답니다. 이황은 사십 년 가까이 벼슬을 하면서, 네 분의 임금님을 섬겼고, 일곱 번 벼슬에서 물러났어요. 그 뒤 고향에 돌아와서 한서암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이황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요. 이황은 그 즐거움을 시를 지어 노래했어요. 아늑한 오막살이에 바쁜 일도 없는데 책은 네 벽에 가득 쌓여 있네. 옛사람은 이미 여기에 없지만 그 말의 향기는 아직도 그윽하네. 한서암 곁에는 토계라는 개울이 있었어요. 이황은 개울 이름의 ‘토’ 를 ‘퇴’ 로 바꾸어 ‘퇴계’ 라고 호를 지었어요. ‘벼슬에서 물러나 사는 계곡’ 이라는 뜻이에요. 오래지 않아 한서암은 몰려드는 제자들로 비좁아졌어요. 그래서 이황은 도산 남쪽에 집을 지어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도산서당이며 지금의 도산서원이에요.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온 정성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이황의 제자 가운데 훌륭한 정치가와 학자만 해도 330여 명이나 된답니다. 일흔 살이 되던 해, 이황은 감기에 걸려 오랫동안 앓았어요. 이황은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아들을 불러 말했지요. “빌려 온 책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또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고, 무덤에 비석 대신 작은 돌을 세우라는 유언도 남겼어요. “삶과 죽음이 갈리는 때에 제자들을 보지 않을 수 없구나.” 이황은 병으로 몸이 고통스러웠지만 옷을 단정히 입고 제자들을 만나 이별의 말을 나누었답니다. 며칠 뒤, 이황은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다음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1570년 12월 8일, 평생 한눈 팔지 않고 학문의 길만 걸었던 대학자 이황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답니다. 이황은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 경북 안동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이자 교육자입니다. 학문이 깊었을 뿐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여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천 원짜리 지폐를 보면 이황과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폐에 모습이 실릴 만큼 이황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훌륭한 스승으로 두고두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위대한 학자를 꼽는다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들 수 있습니다. 율곡 이이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난 천재였다면, 퇴계 이황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쉼 없이 노력하여 대학자가 되었습니다. 이황은 날마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진리를 탐구하였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몸소 지키려 애썼습니다. 언짢은 일이 있어도 성을 내지 않았고, 언제나 온화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자기 주변의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고 스스로 처리했다고 합니다. 또한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지행일치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마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7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이런 생각들을 실천하였습니다. 이황의 이러한 실천 자세는 오늘날 끈기가 부족한 우리에게 항상 겸허한 가운데서도 끝내 이루어 내겠다는 의지를 가지도록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높은 벼슬을 지내고 수많은 제자를 둔 나이 많은 대학자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 직접 마당을 쓸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황의 사상은 지금 ‘퇴계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철학사에 우뚝 서 있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시경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이상하다? 덜렁봉에 오르면 하늘에 닿을 줄 알았는데.’ 까치발을 하고 펄쩍펄쩍 뛰어 보았지만 하늘은 저 높이 있었어요.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늘을 만져 보려고 덜렁봉에 올랐던 이 소년이 바로 주시경 선생이에요.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상호예요. 상호는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 무릉골에서 가난한 선비 주학원과 이씨 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상호를 갖기 전에 어머니는 신비한 꿈을 꾸었어요. “자, 이것을 잘 받아 두어라.” 수염이 하얀 신선이 연적을 건네주었어요. 이 꿈이 뒷날 우리말과 우리글을 바르게 알린 주시경 선생의 태몽이랍니다. “어머니, 배고파요.” 상호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직 끼니 때가 안 되었는데. 아버지 오시면 같이 먹자꾸나.” “네. 그럼, 제가 아버지께 다녀올게요.” 상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나섰어요. 상호네 집은 몹시 가난했어요. 흉년이라도 들면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요. 상호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나무를 올려다보며 노래를 불렀어요. “어서 커라, 어서 커라. 할 일이 있으니 어서 커라.” 어서 자라 글을 배워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바람으로 상호는 더욱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답니다. 상호가 열두 살이 되던 1887년 어느 날이었어요. 한성에 사는 큰아버지가 무릉골을 찾아왔어요. 큰아버지는 한성에서 장사를 크게 하고 있었어요. “장사가 잘되어 먹고살 걱정은 없지만 자식이 없으니 늘 허전하구나. 그래서 말인데, 상호를 양자로 데려갔으면 하는데.”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말했어요. “형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상호 공부는 계속 시켜야 합니다.” 갑자기 부모님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상호는 눈물을 글썽였어요. “아버지, 전 그냥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사내대장부는 넓은 곳으로 나가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상호는 큰아버지를 따라 한성으로 가게 되었답니다. 한성은 무릉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은 곳이었어요. 큰아버지는 상호를 집 근처에 있는 글방에 보내 주었어요. “무릉골? 하하하, 너 촌놈이구나.” 글방 아이들은 상호를 우습게봤어요. “장사를 하려면 셈만 헤아릴 줄 알면 되지, 무슨 글공부람?” 상호는 글방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선생님도 성의 없이 가르쳤고요. 상호는 글방에 가는 것이 점점 더 재미없어졌답니다. 그런 상호에게도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었어요. 그것은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어요. 글방을 오가는 길에 아주 큰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언제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답니다. 그날도 상호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담 아래 서 있었어요.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하인이 대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어요. 집 앞을 서성거리는 상호를 수상하게 여겼던 거예요. “저, 저는 그저 글 읽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밖이 소란스럽자 주인인 이 진사가 나왔어요. 이 진사는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었지요. 상호는 그동안 집 앞을 서성거렸던 이유를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허허, 그래? 그렇다면 너도 내일부터 나와서 글을 배우도록 해라.” 이 진사가 인자하게 말했어요. “어르신, 감사합니다.” 상호는 기쁜 마음에 큰절을 올렸어요. 상호는 어느 때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했어요. 배움은 하루하루 깊이를 더해 갔지요. 상호가 이 진사 댁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2년쯤 되었을 때였어요. ‘한자는 배우면 배울수록 더 어려워.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도 이런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런 생각을 하자 한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왜 알기 쉬운 우리글은 천시하고 어렵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한자만 배울까?’ 당시에는 우리글을 상놈이나 여자들이 쓰는 글이라고 여겼거든요. 우리글은 한자보다 훨씬 더 쓰기 쉬운 과학적인 글인데도 말이에요. ‘그래, 우리글 공부를 시작하자!’ 상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글 공부를 시작했어요. 열아홉 살 되던 해 상호는 마침내 한문 공부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름도 주상호에서 주시경으로 바꾸었고요. “큰아버님, 신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뭐라고? 그건 안 된다.” 신학문이라는 말에 큰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반대했어요. 신학문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이에요. 시경은 할 수 없이 무릉골로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님,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옛날 것만 고집하면 나라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시경이 간곡히 말했지만 아버지는 신학문 배우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시경의 굳은 결심에 결국 허락하고 말았답니다. 한성으로 돌아온 시경은 긴 머리를 짧게 깎고 배재 학당에 들어갔어요. 배재 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학교예요. 신학문을 배우는 동안 시경의 우리글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져 갔어요. ‘서양처럼 발달된 문명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글을 잘 알아야 해.’ 시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글을 공부했어요. ‘국문 동호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먼저 ‘바르게 적는 법’부터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배재 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서재필 박사가 시경을 찾아와 말했어요. “자네가 우리글을 연구한다고? 정말 장한 일일세. 우리말을 바로 세우는 것 또한 애국하는 일이네.” 서재필과의 인연으로 시경은 우리글 연구에 더욱 힘을 쏟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서재필이 시경을 불러 말했어요. “드디어 우리글로 된 신문을 만들게 되었네. 자네가 그 일을 맡아서 해 주게.” 시경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시경은 ‘독립신문’의 교정을 보게 되었어요. 교정이란 기사 가운데 틀린 글자를 고쳐서 바로잡는 것이지요. 1896년 4월 7일, 드디어 독립신문 창간호가 나왔어요.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새로운 신문 이야기로 야단이었어요. “기사를 읽으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야.” “자기 이익만 챙기는 벼슬아치들은 뜨끔했을걸?” 독립신문에는 부패한 벼슬아치들과 외국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기사가 끊이지 않았거든요. 그즈음 우리나라는 매우 혼란스러웠어요.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데다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어요. 이 일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들고일어났어요.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 나랏일을 보게 되었지요. 서재필은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독립협회’를 만들었어요. 시경은 서재필을 도와 독립협회에서 많은 일을 했지요. 독립협회에 대한 백성의 지지는 대단했어요. 나라와 백성 편에 서서 언제나 옳은 말과 일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자 외국에 기대어 옳지 못한 일을 꾸미던 조정의 신하들은 덜컥 겁이 났어요. “독립협회를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조정의 나쁜 신하들은 독립협회를 역적 모임으로 몰았어요. 그럴수록 시경을 비롯한 독립협회 회원들은 더욱 힘을 냈지요. 강연회를 열어 백성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나쁜 신하들을 비판하는 기사도 계속 실었답니다. 그러나 고종은 서재필을 외국으로 내쫓으라는 명을 내렸어요. “내가 없더라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잘 부탁하오.” 서재필은 시경의 손을 꼭 잡으며 당부했어요. 독립협회의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았어요. 협회를 무너뜨릴 생각으로 간부들을 하나 둘씩 잡아 가두기 시작한 거예요. “주 선생, 얼른 몸을 피하시오. 놈들이 주 선생을 잡으러 온다 하오.” 동료의 도움으로 시경은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어요. 시경이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어요. 독립협회는 문을 닫고, 독립신문도 펴낼 수 없게 되었지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바르게 전하는 것뿐이구나!’ 시경은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 우리말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어요. 학생들에게 국어 문법을 가르치며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요. 어느 날, 시경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말했어요. “이제부터는 우리글을 ‘한글’이라고 부릅시다.” 학생들은 처음 듣는 한글이라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어요. “한글은 ‘크고 바르고 으뜸이 되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언문’이라 멸시받던 우리글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한 거예요. 시경은 ‘크고 밝은 겨레의 샘’이라는 뜻으로 호를 ‘한힌샘’이라고 지었어요. 이즈음 시경은 ‘국어 문법’을 완성했는데 이것은 8년 뒤에야 책으로 나왔답니다. 시경은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강의를 했어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강습회를 열었지요. “얘들아, 저기 주보따리 선생님 지나가신다.” 주보따리는, 강의에 필요한 책 보따리 덕분에 생긴 별명이에요. 또 ‘두루때글’이라는 희한한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했어요. 주시경이란 이름을 순 우리말로 바꾼 말인데, ‘두루 주’, ‘때 시’, ‘글 경’을 풀어 쓴 것이랍니다. 주시경 선생의 한글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지요. 하루는 의사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 선생이 시경을 찾아왔어요. “주 선생, 내가 도울 일이 없을까 해서 찾아왔소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한글 사전을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시오. 내 한번 알아보리다.” 지석영 선생의 도움으로 마침내 ‘국문 연구소’라는 한글 연구 기관이 생겼어요. 시경은 국문 연구소에서 일하며 한글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업적을 쌓았어요. ‘조선어 강습원’에 나가 한글도 열심히 가르쳤고요. “이곳을 졸업하거든 시골로 가서 한글을 가르쳐라.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말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말은 곧 그 민족의 혼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주시경 선생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이렇게 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친 주시경은 1914년 급성 체증으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래, 바로 이 책이야!” 주시경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주시경의 손에는 <안남 망국사>라는 책이 들려 있었어요. 안남은 월남, 곧 지금의 베트남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안남 망국사는 당시 월남에서 망명한 소남자와 양계 초가 나눈 대화를 책으로 만든 것이에요. 이 책에는 베 트남이 968년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프랑스의 보호 국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러니까 월남이 망하게 된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베트남은 주위 강대국들의 힘 에 눌려 1884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거든요. 또한 이 책에는 식민지가 된 뒤, 프랑스의 보호 정책과 베트남 국민의 고통 그리고 애국지사들의 일대기도 담 겨 있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이 책이 나온 때는 1905 년이었는데, 그때 우리나라는 일본과 을사조약을 체결 했어요. 을사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서 강제로 맺은 조약이에요. 안남 망국사에는 이런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눈 부분도 있어요. ‘일본은 무엇을 어 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조선은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지요. 이런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주시경은 안남 망국사를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1905년 을사조약 후, 일본의 보호국이 된 조선이 처한 상황과 베트남의 처 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 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일깨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 책을 우리말로 옮겨서 백성에게 알리자!’ 주시경은 어려운 한문 대신 순 우리말로 책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렇게 해서 1908년 11월에 안남 망국사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어요. 이 책은 나온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세 번이나 새로 찍 어야 할 만큼 널리 읽혔답니다. 하지만 책 내용을 알게 된 일본 통감부는 책 파는 것을 금지했어요. 서점에 깔린 책을 모두 거두어 갔고, 출판사에 남아 있는 책까지 모두 빼앗아 갔지요. 하지만 책에 대한 소문은 날이 갈수록 더해 몰래몰래 빌려 읽었답니다. 안남 망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주시경의 뜻대로 된 거지요. 주시경은 한글 보급에 힘쓴 건 물론이고,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냈어요. 제자들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해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의 결실을 맺게 했지요. 이렇듯 주시경은 우리 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체계를 세우고, 국어학 발전을 이끄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답니다.
링컨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미국 남부 켄터키 주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어요. 이 아이가 훗날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된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사람들은 링컨을 ‘에이브’ 라고 불렀어요. 농부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에이브와 누나 사라도 철이 들면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지요. “힘들지 않니?” 아버지가 허리를 펴며 물었어요. “아버지와 함께 일하니 재미있어요.” 에이브는 밝게 웃었어요. 비록 가난했지만 에이브네 가족은 참 행복했어요. 에이브네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가까운 이웃이 없었기 때문에 에이브는 친구가 없었어요. 심심하고 외로웠을 거라고요? 그건 아니에요. 에이브는 틈만 나면 집 가까이 있는 숲으로 달려갔어요. 숲에는 사슴, 토끼, 들오리가 살고 있었답니다. 나뭇가지를 오가며 노래하는 갖가지 새들도 볼 수 있었고요. 에이브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았어요. 산짐승들은 에이브의 소중한 친구였지요. 에이브는 숲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산짐승처럼 순박하고, 시냇물처럼 맑은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푸른 나무같이 키도 무럭무럭 자랐답니다. 에이브가 아홉 살 때였어요. 어머니가 큰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어요. “에이브, 용기 잃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알았지?” 어머니는 에이브와 사라의 손을 잡은 채 목이 잠겨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어요. “엄마! 기운 차리세요. 죽으면 안 돼요.” 에이브는 슬피 울며 고개를 저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며 말했어요. “여보, 저 궤 속에 있는 성경을 갖다 주세요.” 어머니는 낡은 성경을 에이브에게 주었어요. “에이브, 잘 간직하여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을 마친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답니다. 얼마 뒤, 에이브는 새어머니를 맞았어요. 새어머니는 슬픔에 빠져 있는 에이브와 사라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어요. 집 안으로 햇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을 내고, 마루도 말끔히 깔았어요. 새어머니의 노력으로 집안에는 다시 웃음이 넘쳤어요. 어느 날, 새어머니가 에이브에게 책을 한 권 내밀었어요. “에이브, 이 책은 네가 보렴.” 에이브는 선뜻 받지 못했어요. “왜 그러니?” 새어머니가 물었어요. “그, 글자를 몰라서요.” 에이브는 그만 얼굴이 빨개졌어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던 에이브는 그때까지 제 이름조차 쓸 줄 몰랐던 거예요. 새어머니는 당장 에이브에게 글자를 가르쳤어요. 글자를 알게 되자 에이브는 신이 났어요. 소리 내어 책도 읽고, 이름도 자꾸자꾸 써 보았지요. “아니, 누가 이렇게 낙서를 했지?” 일을 마치고 들어온 아버지가 버럭 소리쳤어요. 에이브가 벽에다 제 이름을 크게 써 놓았거든요. 새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아버지의 꾸중을 막아 주었어요. 그날 저녁, 새어머니는 조용히 에이브를 불렀어요. “에이브, 네 이름 에이브러햄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 라는 뜻이란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이브러햄은 인정 많고 용기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지. 너는 바로 그런 소중한 이름을 갖고 있어. 오늘 네가 썼던 그 이름을 정말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렴.” “네, 어머니.” 새어머니는 에이브의 손을 꼭 잡았어요. 어느 날, 에이브네 집에 켄트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켄트는 에이브네 집 근처에 있는 큰 가게 주인이었어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이브를 우리 가게 점원으로 쓰고 싶습니다.” “우리 에이브를 어떻게 아십니까?” “에이젤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습니다. 무척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에이브에게 우리 가게를 맡기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에이브를 돌아보았어요. “저녁 시간을 자유 시간으로 주신다면 하겠습니다.” 에이브가 정중히 말했어요. “가게 문을 닫은 뒤에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런데 그 시간에 무얼 하려고?”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공부? 그렇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주겠네.”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에이브에게는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손님 중에는 목사님이 한 분 있었어요. 에이브는 목사님 집에서 종종 책을 빌려 읽곤 했답니다. 제퍼슨 연설집을 빌린 어느 날이었어요. 밤새 비가 내려 지붕으로 새어 든 빗물 때문에 책이 흠뻑 젖어 버렸어요. 젖은 책을 보니 에이브는 울고만 싶었지요. 하지만 에이브는 용기를 내어 목사님을 찾아갔어요. “목사님! 죄송합니다. 책값은 꼭 갚겠습니다.” “흠, 책값 대신 사흘 동안 우리 집 정원 일을 해 주게.” 에이브는 사흘 간 열심히 일했어요. 일을 마치자 목사님은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하나 주었어요. “그동안 열심히 일해 줘서 주는 선물일세. 사양 말고 받게.” 선물은 빗물에 젖었던 바로 그 책이었어요. 얼마 뒤, 에이브는 제임스 테일러라는 사람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작은 배로 미시시피 강을 오가며 채소와 곡식을 파는 일이었지요. 미시시피 강은 넓은 들판과 울창한 숲 사이를 흐르는 긴 강이에요. 한 번 나서면 두어 달이 걸려야 뉴올리언스까지 갈 수 있었어요. 노를 저으며 에이브는 생각했어요. ‘미국은 얼마나 크고 넓을까?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어떨까?’ 에이브는 미국 땅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보고 싶었어요. 시골에서 태어나 멀리 나가 보지 못한 에이브는 궁금한 게 참 많았어요. 드디어 뉴올리언스에 도착했어요. 도시의 모습은 정말 화려하고 신기했어요. 울긋불긋한 옷차림과 호화로운 가게들, 높다란 집.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에이브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지요. 에이브는 친구 앨런과 함께 낯선 거리를 쏘다녔어요. 넓은 광장에 다다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어요. “여기가 말로만 듣던 흑인 노예 시장인가 봐.” 에이브가 얼굴을 찡그리며 막 고개를 돌릴 때였어요. “엄마, 가지 마! 엄마! 엄마!”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한 흑인 아이가 울부짖으며 발버둥치고 있었어요. 엄마인 듯 보이는 여자 노예는 강제로 끌려가고 있었고요. 노예 상인은 엄마를 부르며 한사코 따라붙는 아이에게 채찍을 휘둘렀어요. “멈추시오!” 에이브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어요. 앨런이 말리지 않았다면 큰 싸움이 벌어질 뻔했지요. 에이브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어요. 사람을 사고파는 일만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에이브는 큰 잡화점으로 일자리를 옮겼어요. 잡화점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을 팔았기 때문에 종종 물건 값을 잘못 계산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날도 문을 닫고 계산을 해 보니 돈이 남는 거예요. 자주 찾아오는 할머니에게 거스름돈을 내주지 않은 게 떠올랐어요. 에이브는 할머니 집으로 찾아갔어요. 할머니 집은 가게에서 4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어요. “할머니, 거스름돈을 드리지 않았더군요.” 이 일이 있은 뒤, 정직한 점원 에이브의 소문은 금세 온 마을에 퍼졌어요. 에이브 덕분에 가게는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답니다. 그러나 주인은 낭비가 무척 심하고 게을러서 에이브가 애써 장사를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 가게는 문을 닫았고 에이브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어요. 에이브는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에이브를 ‘링컨’ 이라고 불렀어요. 링컨을 믿고 따르는 사람도 많아졌지요. 그 무렵, 링컨이 살던 뉴살렘 지역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요. 강 건너로 옮겨 가서 살고 있는 인디언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었어요. 사람들은 의용군을 조직하여 싸움을 준비했어요. 링컨은 망설였어요. 하지만 이웃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비겁하게 머뭇거릴 수 없었지요. 링컨이 의용군에 참가하자 사람들은 링컨을 대장으로 뽑았어요. 링컨은 선두에 서서 의용군을 잘 이끌었지요. 마침내 석 달 동안 계속되던 전쟁이 끝났어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링컨을 칭찬했어요. 사람들은 링컨이 일리노이 주 대표가 되기를 원했어요. “부디, 우리 주 대표가 되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링컨은 사양했어요. 그러나 사람들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안심하고 우리 주를 맡길 사람은 당신뿐이오.” 특히 링컨과 함께 일했던 가게 주인들이 발 벗고 나섰어요. 링컨은 끝내 거절하지 못해 선거일을 불과 2주일 앞두고 주의회 의원 선거에 나섰어요. 하지만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링컨은 실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어요. 측량 기사와 우편배달부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2년 뒤, 마침내 링컨은 당당히 일리노이 주 의회 의원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링컨과 함께 당선된 스튜어트 소령이 찾아왔어요. 스튜어트 소령은 인디언 토벌에 참여한 군인이었지만, 늘 인디언들에게 인정을 베풀려고 노력했어요. 두 사람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일했어요. 어느 날, 스튜어트 소령은 링컨에게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을 건넸어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흑인 노예들 이야기였어요. 링컨은 책을 읽으며 예전에 보았던 흑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아! 불쌍한 흑인들.” 링컨은 노예제도 때문에 차별받는 흑인들의 처지가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직접 나서기로 했어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요. 하지만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남부의 여러 주에서 노예제도를 지키기 위해 자기들끼리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거든요. 링컨은 한 나라가 둘로 나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어요. 결국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링컨은 전쟁 중에 노예 해방을 선포했어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헌법도 만들었지요. 미국 국민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링컨을 꼽아요. 미국의 민주주의를 바르게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형제가 없습니다. 사촌조차 없습니다. 한 살 위인 누나가 있었으나 결혼 후에 가난하게 살다가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났 습니다. 동생도 있었지만 어릴 때 죽고 말았습니다. 혼자서 정 말 오랜 시간을 살았습니다.” 링컨은 스스로 외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링컨은 창도 없는 통나무집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래 서 더욱 어렵고 약한 사람에게로 다가갔고, 흑인과 인디언들의 이웃이 되었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남북 전쟁 중에 노예를 해방시키 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는 법을 만들어 발표했 어요. 그 바람에 남부에 가담하는 주가 늘어나게 되어 링컨이 이끄는 북부는 더욱 불리해졌어요. 링컨은 캄캄한 밤중에 홀로 깨어 기도했어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달리 생각나지 않 았기 때문이지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세요.”
보람아, 학교 가자!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취학 통지서가 나왔어요! 네가 보람이니? 취학 통지서가 나온 걸 보니 이제 학교에 가겠구나. 취학 통지서가 뭐예요? 우리 보람이가 이제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됐다는 뜻이란다. 그럼, 이제 학교에 다니는 거예요? 보람아, 입학을 축하해! 허허, 우리 보람이가 벌써 학교 다닐 나이가 되었구나, 축하한다! 우리 보람이,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알겠지? 학교에 가면 시험도 보고, 숙제도 있어.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싫어, 언니가 학교에 가면 나는 누구랑 놀아. 보람아, 오늘부터 엄마랑 학교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하자꾸나. 아빠는 너무 기뻐. 보람아, 축하해! 삼촌한테 업어 달라고 떼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보람아, 학교에 가면 새로운 친구들 많이 사귀렴. 왜 학교에 다니는 걸까요?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만 6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요.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해요! 학교에 가서 한글을 제대로 배우면 재미있는 책도 읽고, 일기와 편지도 쓸 수 있어요. 학교에 가면 셈도 척척 할 수 있게 돼요. 백, 아니 천보다 더 큰 숫자도 읽고 쓸 수 있어요. 학교에서는 한글과 숫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과목을 공부해요.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기초를 잘 쌓아야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멋진 대학생이 될 수 있어요. 학교에 가면 친구가 참 많아요. 지금보다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요. “그래도 싫어요! 학교에 안 갈래요!" 취학 통지서를 받은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무척 심심할 거예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 친구와 함께 현장 체험 학습을 가요. 김밥도 먹고 신나는 놀이도 하면 정말 재미있어요. 보람이는 초등학교에 다닐 만큼 다 자랐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씩씩한 초등학생이 되는 거예요. 학교 가기 전에 익혀야 할 습관이 있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해요. 학교에 가려면 아침 8시 전에 일어나야 하거든요! 옷은 스스로 입도록 해요. 단추 잠그기, 지퍼 올리기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야 해요. 자기 물건은 스스로 챙기고, 놀고 난 자리는 깨끗이 청소해요. 학교에 가면 대신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요. 친구들과 물건을 나누어 쓸 줄도 알아야 해요. 욕심부리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면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어요. 어른들을 만나면 공손히 인사를 해요. 인사를 잘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될 수 있어요. 항상 질서를 잘 지켜야 해요. 학교는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조르거나 떼쓰면 안 돼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떼를 쓰면 안 돼요. 학교 가기 전에 몸을 튼튼히 해요! 매일 일찍 일어나 학교에 다니며 수업을 받으려면, 몸이 건강해야 해요. 음식은 꼭꼭 씹어 먹고, 좋아하는 반찬만 가려 먹지 않아요. 학교 가기 전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요! 멀리 있는 글자와 사물이 잘 보이는지 시력 검사를 받아요. 시력이 나쁘면 안경을 써야 해요. 양쪽 귀가 잘 들리는지 청력 검사도 받아요. 청력이 나쁘면 보청기 등 의료기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예방 주사는 미리미리 맞아 둬야 해요. 그리고 예방 주사를 맞았다는 확인증을 학교에 내야 해요. 간단한 한글 쓰기와 수 세기를 익혀 두세요! 학교에서 배우겠지만, 소지품에 이름을 쓸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알림장도 스스로 써야 하니까 간단한 한글 쓰기를 배워 둬요. 간단한 수 세기와 더하기, 빼기는 미리 배워 둬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더 자세하게 가르쳐 주실 거예요. 아서라, 그만! 이제 보람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알려 주려무나. 학교에서 언제 집에 오나요? 1학년은 낮에 수업이 끝난단다. 학교에서 조금도 떠들면 안 돼요?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해야지. 학교 선생님은 무서워요? 선생님들은 모두 친절하셔. 친구들이 나를 좋아할까요? 네가 친절하게 대하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될 거야. 꼭 매일매일 학교에 가야 해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가지 않아. 예비 소집일이에요! 오늘은 예비 소집일!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갔어요. 차례로 줄을 서서 입학식 안내장을 받았지요. 엄마와 함께 초등학교를 둘러보았어요. 교문을 나오다가 보미 친구 세연이를 만났는데 “와, 언니 초등학교 다녀?” 하고 묻는 거예요. 순간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의젓하게 “응.” 하고 대답했지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교실이에요. 체육 시간이면 신나게 뛰어놀 운동장이에요. 화장실도 미리 들어가 봤어요. 깨끗해서 참 좋았어요. 쉿! 책도 보고 공부도 하는 학교 도서실이에요. 학교 가는 길을 미리 알아 둬요! 보람아, 학교에서 집까지 찾아가 볼까? 길을 건널 때는 신호등과 주변을 잘 살펴야 해.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을 사야 할 때는 문방구로 가렴. 급한 일이 있을 땐 돈이 없이도 통화할 수 있는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하면 돼.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야 해. 친구와 약속을 했다면 먼저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나서 나가야 해. 낯설거나 어두운 골목길은 위험하니까 다니지 않도록 해. 초등학교와 유치원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유치원은 대부분 나이에 따라 5세, 6세, 7세 반으로 나뉘어요. 유치원은 작고 아담하며 작은 놀이터가 있어요. 유치원에는 챙겨 가야 할 책과 준비물이 많지 않아요. 초등학교는 각 학년별로 여러 명의 학생과 선생님이 있어요. 그래서 학생과 선생님이 다 모이면 넓은 운동장이 가득 차요.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교실과 그 외에 운동장, 도서실, 과학실, 음악실 등도 있어요. 초등학교에는 시간표에 따라 챙겨 가야 할 교과서와 준비물이 많아요. 초등학교 교과서예요! 학교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처음 한 달 동안 배워요. 국어 과목은 국어와 국어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1학년 수학은 수와 연산, 도형, 측정, 규칙성, 확률과 통계를 배워요. 학교마다 특성에 맞게 창의적 체험 활동을 선택할 수 있어요. 주로 컴퓨터, 독서, 창의성 교육, 안전 교육 등을 해요. 통합 교과서는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을 주제 중심으로 구성한 교과서예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학교, 봄, 가족, 여름, 마을, 가을, 나라, 겨울 등 8개의 주제로 통합 학습이 가능해요. 또한 체험 중심의 안전한 생활 과목이 신설되었어요. 초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이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을 활용해 체계적으로 안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어요. 미리 학교 준비물을 챙겨요! 멋지다! 우리 딸. 그럼, 누구 딸인데? 엄마 아빠 나 잘 쓰지요? 나머지 준비물들은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말씀해 주실 거야. 그때 사도 늦지 않단다.
짝꿍, 짝꿍, 내 짝꿍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짝꿍, 짝꿍, 내 짝꿍. 토순이는 돼지 학교 1학년 3반이에요. 오늘은 짝을 정하는 날이에요. 이번에는 누가 짝이 될까 두근두근했어요. 토순이는 지금 짝인 토식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빨리 새로운 짝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또 토식이가 짝이 되고 만 거예요. 짝꿍, 짝꿍, 내 짝꿍. 토순이는 돼지 학교 1학년 3반이에요. 오늘은 짝을 정하는 날이에요. 이번에는 누가 짝이 될까 두근두근했어요. 토순이는 지금 짝인 토식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빨리 새로운 짝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또 토식이가 짝이 되고 만 거예요. 또 짝이 된 토식이가 토순이를 불렀어요. "토순아! 색연필 좀." "싫어." 토순이는 토식이에게 색연필을 빌려주기 싫었어요. 토순이는 뒤에 앉은 토미에게 물었어요. "토미야, 넌 짝꿍이 맘에 들어?" "글쎄, 넌 누구랑 짝하고 싶은데?" 토순이는 친구들을 둘러보다가 통통이랑 눈이 마주쳤어요. '으악, 제발! 장난꾸러기 통통이는 안 돼.' "토순아, 넌 누구랑 짝하고 싶냐니까?" "어? 나야 당연히 너랑 짝하고 싶지." 쉬는 시간, 토순이와 토미가 선생님께 물었어요. "선생님, 친한 친구끼리 짝하면 안 돼요?" "물론 그래도 되지. 하지만 반 친구들끼리 서로 배우고 돕도록 짝을 하는 거야." 그러자 토미가 말했어요. "선생님, 친한 친구끼리 짝을 하면 싸우지 않잖아요." "그렇겠구나, 대신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는 줄어들겠지? 반 친구들이 모두 친해지면 짝을 하고 싶은 친구와 앉혀 줄게." 드디어 한 달이 지났어요. "얘들아, 오늘 새로운 짝을 정하고 자리도 바꿀 거야. 오른쪽 줄만 쪽지에 자기 이름을 써서 바구니에 담도록 해라." 선생님은 토순이가 앉은 줄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그리고 왼쪽 줄에 있는 학생들이 쪽지를 골라 이름이 쓰여 있는 친구 옆에 가서 앉아." 토순이는 보물찾기를 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으악, 어떡해!' 토순이는 토식이가 펼친 종이를 보고 그만 울상이 되었어요. 그 종이에는 '토순이'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선생님, 저랑 토식이가 또 짝이 되었어요. 바꿔 주세요!" "토순아, 토식이랑 한 달 동안 더 친해져 보렴. 짝을 바꾸고 싶은 친구들이 또 있을 텐데 너만 바꿔 줄 수 없구나." 토순이는 시무룩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때 토식이가 친구들이 흘린 물건을 정리했어요. '그러고 보니 내 색연필을 찾아 놓은 게 토식이였잖아.' 토식이는 조용히 칠판을 지우고 지우개를 털러 나갔어요. 토순이는 토식이를 느림보라고 생각한 것이 미안했어요. 토식이가 찾아 준 색연필을 함께 쓰기 싫어한 것도 부끄러웠고요. 그때, 친구들이 토순이에게 다가왔어요. "토순아, 너 느림보 토식이랑 또 짝꿍이 돼서 속상하겠다." "뭐? 토식이가 어때서? 앞으로 내 짝꿍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토순이는 토식이에게 편지를 썼어요. 그리고 편지와 함께 아껴 두었던 막대 사탕을 토식이의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토식아, 안녕. 전에 색연필 빌려주지 않은 거 미안해! 그리고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토순이가. 짝꿍은 왜 필요할까요? 짝꿍은 동료나 매우 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하지만 학교에서의 짝꿍은 어떤가요? 때때로 나를 괴롭히거나 놀리지 않나요? 짝꿍 없이 나 혼자 앉으면 편할 것 같지만, 짝꿍이 없다면 외롭고 외톨이 같은 기분이 들 거예요. 짝꿍에게 양보하고 협동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면 장차 어른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어요. 또한 짝꿍의 좋은 점은 배우고, 좋지 않은 점은 반복하지 않도록 이야기하고 도움을 주세요. 짝꿍이 내게 꼭 필요한 친구가 될 거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짝꿍이 마음에 안 들어요. 짝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맘에 맞게 만들 수는 없어요. 이럴 때에는 짝꿍이 나와 다른 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내 짝꿍은 너무 시끄러워.'라고 생각하기보다 '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데 내 짝꿍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지 않나 봐.' 하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 다음, 내 짝꿍 안에 꼭꼭 숨겨진 보물을 찾아보세요. 여러분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좋은 점이 내 짝꿍에게도 있을 거예요. 꼭 짝꿍을 하고 싶은 친구가 있어요. 알림장에 메모를 하거나 일기에 써 보세요. 선생님께서 답장을 써 주실 거예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짝꿍이 될지도 몰라요. 짝꿍이 수업 시간에 말을 시키고 자꾸만 괴롭혀요. 이런 짝꿍은 정말 곤란하겠지요? 짝꿍에게 수업 시간에 말이나 장난을 걸지 말라고 정확하게 말하세요. 그래도 안 되면 선생님께 조용히 말씀드려 도움을 청하세요. 짝꿍이 내게 빌려 간 물건을 함부로 다루거나 잘 돌려주지 않아요. 짝꿍에게 내 생각을 알려야 해요. 빌려 간 물건을 쓰고 돌려주지 않으면 앞으로는 빌려줄 수 없다고 말이에요. 내 친구, 킹콩과 땅콩. 양양이는 까무잡잡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고양이예요. 성격이 활발해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지요. 친구들이 붙여 준 별명도 셀 수 없이 많아요. 아프리카 원주민, 연탄, 검정콩, 왕눈이, 발발이. 그런데 곰곰이는 양양이와 많이 달랐어요. '곰곰이는 하루 종일 앉아서 무얼 하는 거지? 엉덩이도 안 아픈가?' 양양이는 슬며시 곰곰이 곁으로 가 보았어요. "와! 킹콩, 이 그림 정말 멋지다. 이거 나 줘." 줄냥이가 곰곰이에게 말했어요. "알았어, 땅콩 너 가져." 곰곰이는 그림을 선뜻 줄냥이에게 주었어요. '킹콩과 땅콩? 잘 어울리는 별명이네.' 양양이는 곰곰이와 줄냥이가 부러웠어요. 양양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곰곰이와 친해지고 싶었어요. "야, 킹콩! 나도 게임 주인공 하나만 그려 줘." "뭐? 네가 뭔데 나한테 킹콩이래? 그리고 내가 왜 너한테 그림을 그려 줘야 하는데?" 곰곰이가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어요. "줄냥이도 너보고 킹콩이라고 부르잖아. 킹콩보고 킹콩이라고 부르는데 뭐 잘못됐냐?" 양양이는 곰곰이가 왜 소리를 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어요. 그때 줄냥이가 양양이 곁으로 다가왔어요 "누구보고 킹콩이래? 양양이 너 말조심해!" "땅콩, 너나 말조심해. 네 일도 아닌데 왜 끼어들어?" 양양이는 곰곰이 편을 드는 줄냥이가 얄미웠어요. '치! 둘이서 친하다고 같이 덤비네. 그럼 누가 기죽을 줄 알고?' 양양이가 화가 나서 씩씩거렸어요. 셋이서 싸움이 붙을 듯 아슬아슬했어요. 그때 다행히 선생님이 오셨어요. "이번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에는 토론을 할 거야. 친구의 별명을 부르는 것이 좋은 이유와 별명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은 이유를 발표해 보자. 자, 누가 먼저 발표해 볼까?" 양양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요. "저는 별명을 부르면 금세 친해져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별명 때문에 그 친구를 쉽게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제 별명을 부르면 놀리는 것 같아서 싫어요." 양양이 말에 줄냥이가 반대 의견을 발표했어요. 양양이 발표가 끝나자 곰곰이도 발표를 했지요. "저는 친한 친구가 별명을 부르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친하지 않은 친구가 별명을 부르면 기분이 나빠요." 양양이는 줄냥이와 곰곰이의 말을 듣고 마음이 뜨끔했어요. 이제야 둘이서 왜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토론을 마무리하며 학생들에게 부탁했어요. "앞으로는 친구가 싫어하면 별명은 부르지 않기로 하자." "대신, 친구의 좋은 점을 찾아 멋진 별명을 선물하는 게 어떨까?" "멋진 별명을 선물한다고요? 네, 좋아요." 아이들은 좋은 별명을 짓느라 속닥거렸어요. 수업이 끝나자 양양이는 곰곰이를 찾아갔어요. "곰곰아, 아까는 미안했어! 난 친해지려고 별명을 부른 건데 네가 싫다면 부르지 않을게." "아니야, 나도 소리쳐서 미안해." "괜찮아. 참, 내 별명은 얼굴이 까맣다고 검정콩이야." "뭐? 검정콩? 그러면 킹콩과 땅콩과 검정콩, 모두 콩이네." 곰곰이의 말에 콩 셋은 하하하 웃었어요. 새로운 친구는 어떻게 사귈까요? 성격이 활달하면 새로운 친구도 금방 사귀어요. 하지만 수줍음이 많으면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어도 선뜻 말을 걸기가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가 먼저 말을 건네거나 아는 체해 주기를 기다리게 되지요. 우선은 여러분이 사귀고 싶은 친구를 잘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친구의 성격이나 그 친구가 좋아하는 놀이, 그 친구와 친한 친구 등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다음, 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게임을 좋아하면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건네고, 책 읽기를 좋아하면 내가 읽은 책을 빌려주거나 친구에게서 책을 빌려 보면 더욱 쉽게 친해질 수 있어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어떻게 할까요?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해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요. 첫째, 친한 친구 사이라도 예의를 지키세요. 친하다고 해서 무조건 내 뜻에 따라 달라고 고집을 부리거나, 싫어하는 별명을 마구 부른다거나, 약속 시간을 잘 안 지킨다거나, 친구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친구 간의 예의에 어긋나요. 둘째, 약속을 꼭 지켜요. 친구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해요. 그리고 친구가 나를 믿고 한 비밀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전달해서는 안 돼요. 셋째, 친구를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해요. 친구 사이에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다투지 말고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세요. 하지만 무조건 양보하거나 참지 말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친구에게 충분히 설명하세요. 넷째, 친구를 험담하지 마세요. 다른 친구에게 친한 친구를 험담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친구에게 말해요. 내 친구, 남팽준. "오늘 우리 반에 전학을 온 새 친구 남팽준이다. 팽준이는 어려서 다리를 다쳐 걷는 게 조금 불편하니까 너희들이 팽준이를 많이 도와주거라." "안녕? 내 이름은 남팽준이야.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 그런데 아이들은 모두 팽준이의 다리만 쳐다봤어요. 짝이 없던 팽규는 짝이 생겨서 신이 났어요. "넌 수학을 잘하는구나. 난 잘 못하는데." 팽규가 팽준이의 수학 공책을 보며 말했어요. "그럼, 내가 도와줄까?" "정말? 그럼 내가 학교에 대해 알려 줄게." "그래, 고마워." 쉬는 시간이 되었어요. 팽규가 손을 내밀자 팽준이가 빙그레 웃었어요. "괜찮아, 나 혼자서도 걸을 수 있어." "참, 그렇지!" 화장실에 가는데 아이들이 팽준이를 보며 수군거렸어요. "팽준아, 아이들은 네가 낯설어서 그러는 거야." "괜찮아, 이제 친구들이 쳐다보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팽준이는 괜찮은 듯 말했지만 어느새 얼굴이 빨개졌어요. 그때 다른 반 친구들이 팽규를 보며 말했어요. "야, 쟤 누구냐?" "얘는 새로 전학 온 남팽준이야! 글씨도 잘 쓰고, 수학도 무지 잘해!" 팽규는 자랑하듯 말했어요. 그러고는 팽준이와 다정하게 식당으로 갔어요. "팽준아, 맛있게 먹어." 팽규는 팽준이에게 급식을 들어다 주었어요. 팽준이는 미안해했지만 팽규는 마음이 뿌듯했어요. "팽준아, 우리 급식 다 먹고 얼음판에서 놀래?" "좋아, 재밌겠다!" 급식을 먹고 난 뒤, 얼음판으로 향했어요. 팽규는 팽준이의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지요. 아이들이 또 팽규와 팽준이를 쳐다보며 수군거렸어요. 그때였어요.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같은 반 친구들이 달려왔어요. "야, 우리랑 같이 놀자!" 팽규는 같은 반 친구들이 무척 반가웠어요. 팽준이도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었어요.
나도 할 수 있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이름표가 없는 실내화. “엄마, 선생님이 자기 물건에 이름표 붙여 오라고 하셨어요.” 소희가 책가방을 거꾸로 들고 흔들자 책과 학용품이 쏟아졌어요. “아이고, 소희야! 하나씩 꺼내야지 그렇게 마구 흔들면 어떡하니?” 엄마 말에 소희가 헤헤 웃으며 흩어진 책과 학용품을 모았어요. 엄마는 스티커에 이름을 써 주었어요. 소희도 큼지막하게 이름을 썼어요. 삐뚤빼뚤하게 쓴 이름이 활짝 웃는 것 같았어요. 소희는 이름을 쓴 책가방과 신발주머니가 마음에 들었어요. “잘 다녀오렴.” 봄바람이 소희의 얼굴을 살랑살랑 간질였어요. 빨강 책가방도, 빨강 운동화도 신이 났어요. 길가의 개나리들도 학교에 가고 싶은지 소희만 쳐다봤어요. 교실에 도착한 소희는 친구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어요. “얘들아, 안녕?” 소희는 짝꿍인 정태의 연필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어요. “어? 내 연필과 똑같네.” 소희가 자기 연필을 꺼내서 정태에게 보여 줬어요. “걱정 마, 소희야. 이름 때문에 누구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어.” 소희와 정태는 똑같은 연필을 들고 씽긋 웃었어요. 오늘은 운동장 텃밭에 나가 어떤 식물들이 자라는지 알아보기로 했어요.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물었어요. “이 텃밭에는 어떤 채소가 자라고 있을까요?” 그러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채소 이름을 외쳤어요. “와, 어떻게 알았어요?”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이름이 쓰여 있잖아요.” 아이들이 푯말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자, 선생님도 아이들을 따라 웃었어요. “어, 실내화가 어디 갔지?” 소희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신발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실내화가 없었거든요. 소희가 운동장으로 나올 때 신발을 바꿔 신으면서 실내화를 챙기지 않았나 봐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봐도 실내화는 보이지 않았어요. 금세 소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소희야, 이 실내화, 네 거니?” 선생님이 실내화를 흔들어 보였어요. “이름이 안 적혀 있어서 주인을 못 찾을 뻔했구나?” 저런, 소희가 실내화에 이름 쓰는 것을 깜박 잊은 모양이에요. 소희가 웃자, 주인을 찾은 실내화도 하얗게 웃었어요. 수업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학교에 입학하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준비물이 있어요. 색연필, 크레파스, 풀, 가위, 연필, 지우개, 필통, 공책 등이지요. 학습 준비물은 꼭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준비하세요. 미리 준비했다가 다시 사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색연필은 종이 껍질을 벗겨 사용하는 것과 뒤 꼭지를 돌려 사용하는 것 두 가지가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아직 쥐는 힘과 누르는 힘이 약하니까 약간 무르고 진한 2B 정도의 연필을 사용하는 것이 좋아요. 공책에는 줄이 있는 것과 줄이 없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8칸과 10칸짜리 공책도 있어요. 요란한 소리를 내는 철제 필통은 공부를 방해해요. 필통과 부딪혀 연필심도 잘 부러져요. 되도록이면 천으로 된 필통을 준비하세요. 이런, 이름이 없군! 어떻게 주인을 찾아 주지? 여러분은 자기 물건에 꼭 빠짐없이 이름을 쓰세요. 그리고 자기 물건 잘 챙기기! 알았죠? 이름표 쓰기. 설레는 1학년, 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워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여러분의 목에 이름표를 달아 주어 서로의 이름을 빨리 익히도록 하지요. 저런, 저런. 학교 늦었다고 허둥대고 가다간 잊고 가는 물건들이 많을 텐데. 1학년이 되었으니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요. 알림장이 이상해요. 가위, 풀, 크레파스, 색연필, 색종이, 도화지. “내일 가져올 준비물이에요. 알림장에 빠짐없이 쓰도록 해요.” 병호는 알림장에 또박또박 준비물을 쓰기 시작했어요. “선생님, 다 썼어요.” 영수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어요. “저도요, 저도요!” 다른 아이들도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어요. “벌써 다 썼어요? 아직 못 쓴 사람, 손들어 봐요.” 선생님이 교실 안을 빙 둘러봤지만 손드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어요. 병호는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다가 알림장을 덮어 버렸어요. “그럼, 내일 준비물 꼭 챙겨 오도록 해요.” “네!” 다음 날, 수업 시간이 되자 모두들 준비물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색종이랑 도화지는?” 미연이가 병호에게 물었어요. 그러고는 선생님을 향해 소리쳤어요. “선생님, 병호는 색종이랑 도화지 안 가져왔대요.”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쭉 빼고 병호를 쳐다봤어요. 병호의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미연이는 병호의 알림장을 보고 또 소리쳤어요. “선생님, 병호가 알림장에 색종이와 도화지를 안 썼어요.” 아이들이 병호 자리로 우당탕탕 몰려들었어요. “모두 제자리에 가서 앉아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어요. “음, 병호 알림장에는 글자를 먹는 벌레가 사는구나. 그럼, 벌레를 없애 줄까? 수리수리, 벌레야 사라져라. 얍!” 선생님은 마술사처럼 알림장 위에 손바닥을 쫙 폈어요. “우하하하! 선생님은 순 엉터리야.” 아이들은 책상을 막 두드리며 웃었어요. “병호야, 이젠 괜찮을 거야.” 선생님이 병호를 향해 쌩긋 웃으며 색종이와 도화지를 주셨어요. 아이들이 칠판을 보며 열심히 알림장을 적고 있어요. 병호는 틀린 글자가 없는지 다시 훑어보았어요.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이어 썼어요. 조금 지나자, 아이들은 책가방을 싸느라 무척 소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병호가 다 쓸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지요. “선생님, 다 썼어요!” 병호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선생님이 교탁을 탁탁 쳤어요. “책가방 다 쌌나요? 그럼, 차 조심하고 내일 만나요.” “네!” 병호가 우렁차게 대답했어요. 알림장은 왜 필요할까요? 알림장을 보면 다음 날, 학교에 가져가야 할 준비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저도 알아요. 알림장을 보면 오늘 숙제를 잊지 않고 할 수 있어요. 맞아요, 또 알림장에는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부모님이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간단히 적어 보낼 수 있어요. 알림장은 이렇게 써요. 알림장을 틀리게 써 와도 기다려 주세요. 아직 글 쓰는 근육이 발달되지 않아 쓰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마다 개인차가 있어서 어떤 아이는 알림장을 다 써도, 어떤 아이는 알림장을 다 쓰지 못할 때가 있어요. 다 쓰지 않고 틀린 내용이 있어도 조급해하지 말고, 학교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날아다니는 글자들. 희영이는 학교 가는 게 즐거웠어요. 아빠처럼 자상한 선생님이 날마다 희영이를 반갑게 맞아 주거든요. 게다가 짝이 된 민수도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싫은 것이 있었어요. 그건 쓰기 시간이에요. 독서기록장 쓰기, 일기 쓰기, 알림장 쓰기. ‘뭐 이렇게 쓰는 게 많지? 유치원처럼 그림만 그리면 안 되나?’ 희영이는 쓰는 시간만 되면 투덜거렸어요. “아휴, 글쓰기는 왜 있는 거야?” 희영이는 독서기록장을 펴 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어요. 그리고 책상에 엎드려 연필로 독서기록장만 콕콕 찍고 있었지요. “희영아, 글을 쓸 때는 똑바로 앉아서 써야지.” 엄마가 엎드려 있는 희영이를 일으켜 세웠어요. “엎드려서 글을 쓰면 눈도 나빠지고, 저 소나무처럼 등이 휘어진단다.” 엄마가 마당에 서 있는 구부정한 소나무를 가리켰어요. “그래도 난 이게 편한걸요?” 희영이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어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죠? 희영이 등이 점점 구부정구부정 휘기 시작했어요. 눈에는 뱅글뱅글 도수 높은 안경까지 끼고요! 저런, 공책에서는 글자들이 나와서 날아다녀요. 옆으로 누운 글자, 머리만 큰 글자, 다리만 큰 글자, 거꾸로 된 글자. “맙소사!” 희영이와 글자들이 마법에 걸렸나 봐요. “희영아, 우린 너와 꼭 닮은 글자들이야.” 옆으로 누운 글자가 희영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아냐, 난 너희들과 안 닮았어. 내가 너희들처럼 못생겼다고?” 그러자 다른 글자들도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희영이는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싫어! 가까이 오지 마!” 희영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휴, 꿈이었구나.” 희영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어요. 국어 시간에 무엇을 배울까요? 선생님, 국어 시간에는 무엇을 배우나요? 국어 시간에는 낱말을 정확하고 바르게 쓰고, 생각을 글씨로 표현하는 것을 연습해요. 희영이처럼 자꾸 쓰기 연습을 하다 보면 잘 쓸 수 있어요. 선생님, 국어 시간에는 또 무엇을 배우나요? 국어 시간에는 표준말을 사용하여 책을 잘 읽는지, 또 책을 읽고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는 공부를 해요. 받아쓰기 시험도 보니까 열심히 공부해야겠지요. 선생님,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도 공부죠? 그럼요, 국어 시간에는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자기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배워요. 잘 들어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요. 희영이는 책상에 똑바로 앉아 동시 숙제를 했어요. 다음 날,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희영이를 칭찬해 주었어요. 동시도 재밌고 글씨도 정말 예쁘게 잘 썼다고요. 그리고 앞에 나와 써 온 동시를 읽어 보라고 했지요. 동시를 들은 반 친구들이 “우아!”하며 크게 박수를 쳤어요. 친구들은 희영이를 보고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어요. 희영이는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이제 희영이는 글쓰기를 좋아하겠지요.
숫자들아, 모여라!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안녕? 내 이름은 차경호야. 나는 신나라 초등학교 1학년 7반이야. 유치원 때는 ‘백조반’, ‘파랑새반’, ‘비둘기반’이 있었는데, 초등학교에서는 1반부터 10반까지 나뉘어 있어. 학생 수도 정말 많아. 1학년이 한 반에 30명씩 10반까지 있어. 2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 수를 모두 합하면, 아휴, 내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돼. 나와 반 친구들에게 번호가 생겼어. 키가 제일 작은 미영이가 1번이고, 키가 제일 큰 명우가 30번이야. 선생님이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길 때 나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었어. “선생님, 경호가 자꾸 발뒤꿈치를 들어요.” 석이가 선생님께 일러바치는 통에 나는 석이 앞에 서야 했지. 30명의 중간인 15번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야. 결국 나보다 아주 쪼끔 큰 석이가 15번이 되었어. “14번, 차경호!” 그때부터 선생님은 번호와 이름을 같이 부르셨지. 선생님, 경호가 자꾸 발뒤꿈치를 들어요. 야호, 내가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커! 쉿, 떠들지 마세요!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14명이고, 남자아이들은 16명이야. 14명에 16명을 더하면 30명! 맞지? 한번은 여자 대 남자로 편을 짜서 이어달리기 시합을 했어. 그런데 남자아이들이 2명 더 많은 거야. 결국 키가 가장 큰 명우는 여자 편 달리기 선수가 됐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남자 팀이 이기고 있는데 명우가 쌩하고 앞서 달리는 거야. 결국 이어달리기 시합은 여자 팀이 이겼어. 명우,이겨라!” “ “명우,잘한다!” 우리 반은 모둠끼리 모여 앉아서 공부해. 한 모둠당 6명씩 5묶음이니까 모두 30명! 맞지? “자, 어떤 모둠이 스티커를 많이 받나 볼까?” 선생님 말씀에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조용해졌어. 한 사람만 떠들어도 그 모둠은 노란 스티커를 받아. 노란 스티커를 3개만 받아도 그날은 청소를 해야 돼. 그런데 석이가 떠들고 싶어 몸을 들썩들썩하는 거야. 내가 다리를 툭 찼더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어. 얼마나 웃기던지 하마터면 웃음보가 터질 뻔했지 뭐야. 자, 어떤 모둠이 스티커를 많이 받나 볼까? 한 모둠에 6명이잖아. 6명씩 다섯 모둠이 있으니까 6을 5번 더하면 돼. 5씩 묶어서 세도 되는데. 하지만 미영이도 기죽을 필요는 없어. 1학년 1학기에는 50까지의 수와 덧셈, 뺄셈을 배울 거야. 그리고 여러가지 모양과 길이와 높이 비교하기, 가르기와 모으기도 배울 거란다. 수학 교과서. 수학 교과서는 수학과 수학 익힘으로 나뉘어요. 수학 교과서는 수학의 개념과 용어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수학 익힘은 학교에서 배운 개념을 집에서 스스로 학습하는 워크북이에요. 학습 결과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게 정답 및 풀이를 활용하면 돼요. 1학년 수학은 수와 연산, 도형, 측정, 규칙성, 확률과 통계를 배워요. 아이에게 단순한 반복 계산 연습보다는 수학적 과정을 통한 창의성 및 인성을 키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아침마다 7시 30분이면 시끄럽게 울어 대는 뻐꾸기 자명종 소리. “아이, 시끄러워. 난 더 잘 거야.” 나는 이불을 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어. 그런데 자명종 소리는 이불 속까지 들어와 뻐꾹뻐꾹. 결국 일어나 자명종 전원을 꺼야 했어. 시간이 없는 나라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 시끄러워. 난 더 잘 거야! ‘으악, 지각이다!’ 교실 문을 열어 보니 벌써 반 친구들이 다 와 있었어. 나는 힐끔힐끔 선생님 눈치를 보며 자리에 가 앉았어. ‘지각했으니 선생님한테 혼나겠지?’ 그런데 선생님이 나를 보고 방긋 웃으시는 거야. ‘어? 이상하다. 지각 아닌가?’ 교실 뒤에 있는 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시계가 없었어. 그리고 반 친구들은 모두 수학책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어. ‘어? 1교시는 여름 시간인데?’ 그러고 보니 칠판 옆에 있던 시간표도 없었어. 자, 모두 수학책을 펴세요. 수업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허리도 아프고, 팔도 저려 왔어. 그런데 시계가 없으니 몇 시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선생님, 화장실 갔다 와도 돼요?” “안 돼!” 갑자기 선생님이 무서워졌어. 슬슬 오줌까지 마렵기 시작했어.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어. 선생님, 화장실 갔다 와도 돼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수업이 끝나지 않았어. 꼬르륵꼬르륵. ‘아, 배고파. 수업은 언제 끝나지?’ 그때,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렸어. “야호!” 나는 벌떡 일어나 뛰다가 어딘가로 굴러떨어졌어. “경호야, 학교 지각하겠다. 빨리 일어나야지.” 엄마 목소리에 잠을 깨 보니 나는 침대 아래 누워 있었어. “앗, 8시 10분이네. 늦겠다!” ‘또 수업이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교실 문을 열었더니 반 친구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거야. “와, 지각 대장인 경호가 오늘은 일찍 왔네.” ‘8시 40분! 휴, 지각은 아니구나.’ 오늘은 10분 일찍 왔더니 모두들 박수를 쳐 주었어. 어찌나 부끄럽던지. 큼지막한 시간표도 박수를 치는 것 같았어. 아, 시간이 없는 나라는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해! 나는 지금 시간표가 좋아. 40분 공부하면 10분 쉬고, 내가 좋아하는 국어도 있고, 수학 수업도 있어. 시간표 때문에 우리가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잖아. 쉬는 시간 10분은 너무 짧아! 수업 시간하고 쉬는 시간을 바꾸면 좋겠어! 그럼 40분 쉬고, 10분 공부하는 거네. 그거 재밌겠는걸. 그럼 만날 공부하려면 쉬고, 공부하려면 쉬어서 배우는 게 없잖아. 쉬는 시간이다! 빨리 화장실 다녀와야지. 2교시는 수학. 이 정도쯤이야 쉽지. 우리 술래잡기 하자! 3교시는 국어. 나는 발표하는 게 제일 재미있어. 다음 수업은 봄 수업 맞지? 4교시는 봄 수업이지? 준비운동부터 해야지! 열, 열하나, 열둘, 어때, 나 잘하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야호, 수업 끝났다! 종민아, 내일 봐. 우리 모둠 만세! 나는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보는 게 있어. 바로 우리 반 교실 뒤에 있는 ‘모둠별 스티커 그래프’야. 세로는 날짜, 가로는 이름을 나타낸 그래프가 1모둠에서 5모둠까지 있어. 선생님은 8시 50분까지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에게만 스티커를 주셔. 그리고 한 달 동안 한 사람도 지각하지 않은 모둠에게는 상도 주시지. 1모둠 장인 용찬이가 그래프를 보고 몹시 아쉬워했어. 나는 용식이 때문에 달라진 우리 모둠 그래프를 보면서 자신이 생겼어. 그동안 지각 대장인 용식이 때문에 우리 모둠은 한 번도 1등을 못 해 봤거든. 어휴, 승희와 인수가 지각하는 바람에 스티커 못 받았어. 1모둠 2모둠 3모둠 4모둠 용찬아, 너희 모둠은 지난번에 1등 했잖아. 이번에는 우리 3모둠이 꼭 1등 할 거야! “용식아, 우리도 1등 좀 하자. 응?” 우리 모둠 아이들이 모두 용식이에게 부탁을 했어. “아, 알았어.” 용식이는 미안했는지 말까지 더듬었어. 그런데 정말 용식이가 이번 달 들어서 지각을 안 하는 거야. 다음 주가 이번 달 마지막 주야. 우리 3모둠은 지금까지 날짜 선에 따라 차곡차곡 스티커를 쌓아 올리고 있었어. “용식아, 우리는 할 수 있어. 힘내자!” 우리는 용식이에게 힘을 줬지. 이번에는 우리 모둠이 1등 하는 거야! 한 달째 되는 날 아침, 우리 모둠은 용식이만 빼고 모두 와 있었어. “왜 용식이가 안 오지? 2분밖에 안 남았는데.” 나는 계속 시계만 들여다봤어. 오늘만 지각하지 않으면 우리 모둠이 1등인데. 아이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운동장을 쳐다봤지. 그때, 운동장에서 뒤뚱뒤뚱 뛰어오는 용식이가 보였어. “용식아, 빨리빨리!” 석이가 소리쳤어. “1분 남았어, 빨리 뛰어!” 용식이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왔어. 용식아, 빨리빨리! “10초, 9초, 8초, 7초, 6초, 5초, 4초, 3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용식이가 들어왔어. “야호, 지각 아니다.” 우리 모둠 아이들은 용식이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었어. “8시 49분 58초!” 선생님이 시계를 보며 크게 말씀하셨지. 용식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스티커를 받았어. “이번 달의 1등은 3모둠이다.” “와!” 우리 모둠은 마치 경기에서 이긴 것처럼 기뻐했어. 선생님은 사물함에서 상품을 꺼내 우리 모둠에게 나누어 주셨어. 선물은 가방에 다는 예쁜 동물 인형들이었지. “다음 달에도 우리 1등 하자.” 하하! 용식이 녀석, 이젠 자신감이 생겼나 봐. 벌써 다음 달에는 어느 모둠이 1등을 할지 궁금하네. 물론 우리 3모둠이 1등을 하면 좋겠지만 말이야. 그래프로 보니까 한눈에 쏘옥! 휴, 연필이 도대체 몇 개야. 지우개, 자, 공책, 풀도 몇 개씩 되고. 아, 그렇지! 그래프로 나타내 보는 거야. 연필은 10자루, 공책은 7권, 지우개는 4개, 풀은 2개, 자는 3개. 그래프로 정리하니까 뭐가 몇 개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어.
스스로 척척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세미는 아침부터 화가 났어요. 요즘 엄마는 세미한테 뭐든 스스로 하라고 해요. “이제 1학년이잖아.”라고 하시면서요. 세미는 학교 가는 내내 투덜거렸어요. “옷도 안 입혀 주고, 준비물도 안 챙겨 주고. 엄마, 나빠. 1학년 싫어!” 세미는 친구들한테도 화가 났어요. ‘흥, 모두 지수만 좋아해.’ 재영이는 학교에 오자마자 지수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지수야, 이따 집에 갈 때 나랑 같이 가자.” 영주는 지수에게 예쁜 스티커를 주었고요. 세미는 입을 삐죽거렸어요. ‘친구들도 나빠!’ “다음 주 우유 당번은 누가 할까?” 담임 선생님이 물으시자, 지수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선생님, 제가 할게요.” 선생님이 지수를 보며 활짝 웃으셨어요. 그러자 재영이도 상미도 손을 들었어요. ‘1학년이 되니까 엄마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마음에 안 들어. 1학년 싫어!’ 선생님, 제가 할게요. 선생님, 저도요. 선생님 저도요, 저도 할래요. 오늘은 세미네 모둠이 청소 당번이에요. 아이들은 부지런히 책상 줄을 맞추고 바닥을 쓸었어요. ‘몇 시간이나 공부해서 힘들단 말이야.’ 세미는 가만히 서서 아이들을 보고 있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들어오셨어요. “세미도 친구들과 같이해야지.” 세미는 속이 상했어요. ‘선생님은 나만 미워하셔.’ 세미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청소는 선생님이 해 주시면 안 되나? 유치원 때는 선생님들이 하셨는데. 숙제도 많고, 준비물도 많고, 1학년은 너무 힘들어!’ 세미는 친구들 뒤에 처져서 터덜터덜 걸었어요. 지수가 재미난 말을 했는지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어요. ‘선생님과 친구들은 왜 지수를 좋아할까?’ 세미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어요. 스스로 척척, 지수의 하루. “일어나, 일어나!” 지수는 자명종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요. 잠자리 정리도 지수가 해요. 욕실에 가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요.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다시 한번 확인해요. 아침밥은 꼭꼭 씹어 먹어요. 먹고 난 뒤에 이를 꼭 닦아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부모님께 인사하고 집을 나서요. 오늘은 지수가 우유 당번이에요. 친구들에게 우유를 나누어 주어요. 영주가 갑자기 배가 아프대요. 청소 시간이에요. 교실에 떨어진 쓰레기를 빗자루로 쓸어요. 그리고 책상 줄을 반듯하게 맞춰요. 힘든 만큼 깨끗해지면 기분이 좋아요. 집에 와서 다음 날 시간표와 알림장을 보고 가방을 챙겨요. 숙제도 하고, 준비물도 미리 챙겨 둬요. 친구들과 노는 건 언제나 즐거워요! 내 것을 양보하고 친구를 배려하면, 사이좋게 놀 수 있어요. 행복한 꿈나라로! 일찍 잠자리에 들어요. 그래야 아침 일찍 일어나거든요. 지수는 오늘도 스스로 알아서 척척! 혼자서도 참 잘했어요! “누가 선생님 심부름 좀 해 줄래?” 선생님이 물으셨어요. “저요!” 또 지수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어요. 다른 아이들도 잇따라 손을 들었지요. 선생님은 누구를 시킬까 찬찬히 둘러보다가 세미와 눈이 마주쳤지요. 세미는 손을 들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물으셨어요. “세미야, 선생님 좀 도와주지 않을래?” “아, 네. 뭔데요?” 세미는 얼떨결에 대답했어요. “이걸 3학년 난초반 선생님께 전해 주렴.” 세미는 봉투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어요. 처음 와 보는 곳이라 낯설고 떨렸어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난초반을 찾았어요. 교실 안을 살짝 보았더니 선생님이 안 계셨어요. ‘이걸 어쩌지?’ 세미는 봉투를 들고 머뭇거렸어요. “선생님 찾아왔니? 우리 선생님 교무실 가셨는데.” 교실 밖으로 나온 언니가 알려 주었어요. 세미는 봉투를 가지고 교무실로 갔어요. “3학년 난초반 선생님 계세요?” “난데, 무슨 일이니?" 책을 읽던 선생님이 손을 들어 보이셨어요. 세미는 선생님께 다가가 인사하고 봉투를 드렸어요. “1학년 국화반 선생님이 드리라고 하셨어요.” “교무실까지 찾아와 주다니 정말 고맙구나. 심부름을 아주 잘하네.” 선생님의 칭찬에 세미는 어깨가 으쓱해졌어요. “심부름 다녀왔습니다.” 세미가 교실로 들어서면서 말했어요. “그래, 고맙다. 세미가 심부름을 아주 잘하는구나. 담임 선생님도 세미를 칭찬해 주셨어요. “떨리지 않았어? 나는 처음 심부름할 때 무지 떨렸는데.” 지수가 웃으며 말했어요. “나도 좀 떨렸어. 그런데 심부름 참 재미있다.” 세미도 지수를 보며 미소 지었어요. 미술 시간이 되었어요. “오늘은 모둠 활동으로 협동화 그리기를 할 거예요. 모둠 친구들과 의논해서 함께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준비물은 다 챙겨 왔죠?” 친구들은 모두 “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어요. 그런데 가방 안을 살피던 세미의 얼굴이 빨개졌어요. 사물함에도 가방에도 크레파스가 없었거든요. ‘난 몰라. 엄마가 안 챙겨 줬잖아.’ 세미는 금방 울상이 되었어요. “세미야, 크레파스 안 가져왔어?” “응, 엄마가 챙겨 주실 줄 알았는데.” 세미는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렸어요. “내 크레파스 같이 쓰자.” 지수가 크레파스를 세미 쪽으로 밀었어요. “난 준비물은 꼭 내가 챙겨. 엄마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쁘시거든.” 세미는 아침마다 엄마에게 투덜대는 자신이 떠올랐어요. 그러자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지요. ‘이젠 나도 준비물을 스스로 챙길 거야.’ “와, 공주님이 웬일이야? 청소는 안 하는 공주인 줄 알았더니.” 지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나, 공주 아냐.” 세미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어요. “공주 맞아. 착하고 예쁜 공주!” 지수의 말에 세미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신나게 협동화를 그리고 나니, 책상 여기저기 크레파스 자국이 묻어 있었어요. 세미는 걸레로 책상을 닦았어요. 자기 책상만이 아니라 친구들 책상도 닦아 주었지요. 세미랑 지수는 나란히 서서 화단에 물도 주었어요. 흙이 바짝 말라 있었거든요. “맛있게 먹고 쑥쑥 자라라.” 세미가 꽃들에게 말했어요. “아, 정말 맛있다. 고마워. 쑥쑥 자랄게.” 어느새 들어오신 선생님이 아기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어요. 선생님은 세미와 지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세미와 지수는 선생님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네.” 선생님 칭찬에 세미와 지수는 배시시 웃었어요. “얘들아, 오늘 우리 집에 가서 놀자.” 영주가 말했어요. “그래, 숙제 다 하고 가방 챙겨 놓고 갈게.” 지수가 대답했어요. “나도 숙제하고 가방 챙겨 놓고 갈게.” 세미가 똑같이 말했어요. 아이들이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어요. 세미는 웃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어요. ‘1학년도 좋다. 참 좋다!’
학교생활 10가지 규칙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호상이와 예령이는 1학년 동갑내기 친구예요. 호상이는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실수투성이예요. “으, 난 학교생활이 너무 어려워." 예령이네 집에 놀러 온 호상이가 투덜댔어요. “난 이제 걱정 안 해. 열 가지 규칙만 지키면 되니까!” 새침데기 예령이가 누나처럼 의젓하게 말했어요. “어, 열 가지 규칙이 뭐야?” “우리 담임 선생님이 알려 주신 거야. 너에게만 특별히 가르쳐 줄게! 그 대신 규칙 한 개당 사탕 하나씩이다?” 예령이와 호상이는 쪼르르 방으로 갔어요. 그리고 종이에 쓰인 글을 또박또박 읽었어요. 100점 맞는 학교생활 규칙. 1. 학교에 지각하지 마세요. 2. 수업 시간표대로 교과서를 챙기세요. 3. 학교생활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세요. 4.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세요. 5. 학교에 있는 물건들은 소중히 아껴 주세요. 6. 위험한 장난을 치지 마세요. 7. 차례를 지키세요. 8. 조퇴나 결석을 하게 되면 담임 선생님께 미리 알려 주세요. 9.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세요. 10. 담임 선생님이 정해 준 규칙을 지키세요. 1학년 2반 담임 이성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호상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어요. 그때 예령이 엄마가 말했어요. “호호호, 어디 보자. 아줌마가 설명해 줄게. 학교는 많은 아이들이 모인 곳이라 규칙이 필요해.” 1. 학교에 지각하지 마세요. 학교는 대부분 오전 아홉 시에 1교시가 시작돼. 그러니까 매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해. 참, 잠들기 전에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을 미리 챙겨 두면 다음 날 허둥대지 않아도 돼. 특히 학교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신호등을 확인하고, 차가 오는지 잘 살피고 건너렴. 조금 일찍 학교에 가서 책을 읽고, 수업 준비도 한다면 참 좋겠지? 2. 수업 시간표대로 교과서를 챙기세요. 학교에는 수업 시간표가 있어. 그러니까 꼭 시간표에 맞춰 교과서를 챙겨야 해. 그리고 알림장에 준비물을 꼼꼼히 적어 온 다음, 미리 책가방에 넣어 두면 돼. 3. 학교생활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세요. 학교에 갈 때는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는 게 좋아. 진짜 멋쟁이는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는 거야. 몸에 꽉 끼는 옷은 불편하니까 입지 않는 게 좋아. 너무 짧은 옷이나 너무 긴 옷도 마찬가지야. 신발은 굽이 높거나 끈을 여러 번 묶는 건 불편해. 굽이 낮고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신발이 좋아. 머리는 깨끗이 감고 단정히 빗으면 더 예뻐 보여. 미술 시간에는 팔에 토시를 하고 앞치마를 하면, 옷이 더러워지는 걸 막을 수 있어. 학교에 슬리퍼를 신고 가면 안 돼! 4.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세요. 수업 시간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묻고 생각하는 시간이야. 선생님은 수업 시간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셔. 그러니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듣고 잘 모르거나 궁금한 것들은 손을 들고 질문을 하면 돼. 교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야. 잠은 집에 가서 밤에 자야지. 귓속말도 금지! 수업에 방해가 되거든. 물건을 던지면 친구가 다칠 수도 있어.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 외의 다른 책은 꺼내지 않도록 해. 질문을 할 때는 손을 들고 하고, 수업과 관계없는 질문은 쉬는 시간에 해야 돼.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가야 해. 참다가 옷에 실수를 하면 큰일이잖아. 수업 시간에 몰래 과자를 먹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수업에 방해가 돼. 수업 시간에 큰 소리를 지르거나 떠들면 수업에 방해가 돼. 5. 학교에 있는 물건들은 소중히 아껴 주세요. 교실에 있는 책상이나 의자, 사물함은 너희들이 학교에서 1년 동안 빌려 쓰는 물건이야. 다음 해가 되면 새로운 1학년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아끼고 소중하게 사용해야 해. 낙서를 하거나 망가뜨리면 나도 불편하고 다른 친구들도 불편해 내 이야기를 듣는 눈빛이 초롱초롱한 걸 보니, 초등학교 1학년을 잘 보내고 싶은가 보구나! 그럼요! 난 1학년이 된 게 진짜 좋아요! 설명을 들으니까 앞으로 학교 물건을 아껴 써야겠어요. 내 짝이 공부할 때 자꾸만 말을 시켜서 속상해요. 어? 나도 짝에게 말을 시켰는데. 너희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친구가 안 듣고 딴청을 하면 속상하지? 수업 시간에 친구들에게 말을 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런 행동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방해가 돼. 내일 학교에 갈 때 고모 결혼식에 입고 간 드레스를 입어야지. 난 내일 학교에 갈 때 태권도 도복을 입을 거야. 호호호, 너희들 반에 공주 드레스나 태권도 도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들이 있다고 상상해 봐! 어때? 공주 드레스다! 태권도 도장에 온 거 같아. 모두들 학교에 뽐내려고 옷을 입고 온다면 공부도 못하고 옷 자랑만 할 거야. 또 친구들에게 자랑할 옷이 없는 친구들은 속상할 거야. 다른 친구들의 마음도 생각해 봐! 네! 다른 나머지 규칙도 알려 주세요. 6. 위험한 장난을 치지 마세요. 많은 친구와 언니, 오빠가 함께 생활하는 학교에서는 서로 부딪힐 수도 있으니 주위를 잘 보고 다니렴. 창틀이나 복도 난간에서 떨어지거나, 계단에서 굴러서 다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교실 문에 손이 끼지 않도록 세게 열거나 닫지 않도록 해. 운동장을 지날 때는 한가운데로 가로질러 가지 마. 공에 맞거나 아이들에게 부딪혀 다칠 수도 있으니까. 화단에 핀 꽃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좋아. 화단 안에 들어가면 꽃을 망치거나 벌에 쏘일 수도 있어. 7. 차례를 지키세요. 화장실에 갈 때도 차례차례! 나도 급하고, 너도 급하거든. 급식을 받을 때도 차례차례! 밀지 마, 뜨거운 국물에 데일 수도 있어! 도서실에서 책을 빌릴 때도 차례차례! 장난치지 마, 책이 떨어져서 다칠 수 있어! 숙제 검사를 받을 때도 차례차례! 조용히 차례를 기다려, 장난이 심하면 애써 한 숙제가 구겨져! 티격태격 싸우지 마, 숙제 한 종이가 찢어져! 8. 조퇴나 결석을 하게 되면 담임 선생님께 미리 알려 주세요. 학교에 못 가게 되면 담임 선생님께 연락하렴. 학교에 전화해서 학년과 반을 말하면 담임 선생님과 통화할 수 있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기 전에 집에 가야 할 때도 담임 선생님께 미리 알려 주어야 해. 담임 선생님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집에 가서는 안 돼. 결석과 지각, 조퇴 때문에 수업한 날짜 수가 모자라면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해. 그러니까 담임 선생님께 미리 결석이나 조퇴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리면 좋겠지. 9.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세요. 수업이 끝나면 담임 선생님이 교문까지 데려다 줄 거야. 아침에 녹색 어머니회에서 지도해 준 것처럼 교통 신호를 꼭 지키렴. 딴 곳에 한눈팔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야 해. 군것질을 하거나 게임을 하고 늦게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셔. 낯선 사람이 괴롭히면 큰 소리로 도와 달라고 해.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로 다니는 건 위험해. 마음씨 나쁜 사람들이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으니까. 10. 담임 선생님이 정해 준 규칙을 지키세요. 학교에는 모두가 지켜야 할 공통된 규칙이 있어. 그리고 각 반에도 정해진 규칙이 있지. 또 상황에 따라 지켜야 할 규칙도 있어. 학교에서 주는 안내문이나 알림장을 꼭 확인해 봐. 매번 담임 선생님이 알려 주는 것을 잘 지키면 학교생활은 걱정 없어. 담임 선생님이 할 일을 정해 주면 꼭 해 보도록 해. 학급을 위해 맡은 일을 하다 보면 책임감이 길러져. 청소 당번이 귀찮다고 모르는 척 집으로 가면 다른 친구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해. 각자 자기가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킨다면 모두가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야호, 이제 내일부터 학교생활은 걱정 없어! 호상이가 좋아하니 아줌마도 기분이 좋은걸! 예령이는 어때? 엄마, 나도 이제 학교생활을 척척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건 규칙을 잘 지키는 실천이야. 떡볶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도 만들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엄마, 우리 떡볶이 해 주시게요? 헤헤. 갑자기 나도 떡볶이가 먹고 싶어요. 뭐? 금방 우유랑 도넛을 간식으로 먹었잖니? 이 녀석들이 꾀를 부리는구나. 아, 아니에요! 열심히 설명을 듣다 보니 또 배가 고파졌어요. 말씀해 주신 규칙들을 오늘부터 지킬 테니까 떡볶이 해 주세요. 아줌마, 저도요. 그래, 좋았어! 너희들도 정해 준 규칙을 잘 지켜야 해! 그리고 규칙보다 중요한 건 친구들과 선생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이제 조금만 기다려! 맛있게 만들어 줄게. 네, 엄마! 이야, 고맙습니다!
학교 종이 딩동댕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세호와 세정이는 쌍둥이 남매예요. 세호는 10분 빨리 태어난 세정이의 오빠지요. 학교에서는 함께 공부하는 같은 반 친구예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세정이는 교실로 들어서며 선생님께 공손히 인사를 했어요. “세정이도 안녕! 머리 리본이 아주 예쁘구나.” 세정이는 쌩끗 미소를 짓다가 소연이와 눈이 마주쳤어요. 하지만 수줍어서 소연이에게 인사를 하지 못했지요. 마음으로는 몇 번이나 ‘소연아, 안녕?’하고 인사했지만요. 세정이네 반은 아침 자습 시간에 동화책을 읽어요. 책을 다 읽고 나면 독서기록장을 쓰고 예쁘게 꾸미지요. 세정이는 독서기록장에 시를 쓰기도 하고 가끔 만화도 그렸어요. 독서기록장을 잘 꾸민 친구에게 선생님은 칭찬 스티커를 주지요. 그래서 세정이는 벌써 칭찬 스티커를 열 장이나 모았어요. 세정이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동화책을 꺼냈어요. 하지만 세호는 짝인 민지와 장난치는 게 더 좋은가 봐요. 아침 자습 시간이 끝나면 학급 조회가 있어요. “시간표대로 교과서를 모두 잘 챙겨 왔나요?” “네.” 하고 세정이네 반 친구들이 자신 있게 대답했어요. “잘했어요. 여러분 스스로 챙겼지요?” 선생님이 다시 물어보자, 친구들은 대답을 못하고 쭈뼛거렸어요. “아니요, 엄마가 챙겨 주셨는데요.” 세호가 큰 소리로 대답하자 친구들이 ‘와’하고 웃었어요. 세정이는 오빠 때문에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어요. ‘에이, 오빠는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큰 소리로 대답한담?’ 국어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세정이는 오늘따라 앉아 있는 게 힘이 들었어요. ‘아, 수업은 언제 끝나지?’ 세정이는 자기도 모르게 쭉 기지개를 켰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세정이가 화장실에 간다고 손을 든 줄 아셨나 봐요. “세정아, 화장실 가려고? 빨리 다녀오렴!” 세정이는 부끄러워 아니라는 말도 못 했어요. 그래서 화장실로 달려 나가다가 쿵 넘어지고 말았지요. 세호가 세정이를 일으켜 주었어요. 세정이는 조금 전 오빠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게 미안했어요. 아침 자율 학습 시간에는 무얼 할까요? 학급별로 창의적인 교육 활동. 아침 자율 학습은 보통 ‘아침 자습’이라고 해요. 아침 자습 시간에는 담임 선생님에 따라 학급별로 창의적인 교육 활동이 이루어져요. 담임 선생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다양한 내용에 따라 한자와 영어 익히기, 책 읽기, 신문 읽기 혹은 신문 활용 교육(N.I.E.) 등으로 아침 자습 시간이 이루어지지요. 실제로 아이들은 아침 자습 시간에 공부한 내용으로 한자 골든벨, 독서 골든벨, 한자 경시대회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해요. 알차고 유익한 아침 자율 학습 시간.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지요.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작은 티끌이라도 쌓이고 또 쌓이면 큰 산을 이룬다는 말이에요. 아침 자습 시간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아침 자습 시간마다 하루에 한자를 한 단어씩 익힌다면 6학년까지 아주 많은 한자를 배우게 되지요.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한자 공인 급수도 딸 수 있어요. 만약 아침 자습 시간과 쉬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6년 동안 엄청난 지식을 얻을 수 있겠지요.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침 자습 시간을 잘 활용해 보세요. 수업 시간표는 무엇일까요? 하루의 수업 시간 안내표. 학교 홈페이지에는 수업 시간표가 있어요. 수업이 시작하는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알 수 있지요. 만약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들렀다가 학교에 가야 할 경우, 수업 시간에 들어가서 수업을 방해하게 된다면 곤란하겠지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수업 시간표를 확인하세요. 그 밖에 조회 시간, 점심시간, 5교시가 있는 날의 수업 시간까지 자세히 알 수 있어요. 어떤 과목을 공부할까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3월에는 ‘학교생활 첫걸음’이라는 교과서를 가지고 학교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입학 초기 적응 교육을 배워요. 4월부터는 국어, 수학과 주제별로 구성된 통합 교과를 배워요. 국어 과목은 국어와 국어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학 과목은 수학과 수학 익힘책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통합 교과서는 학교·봄, 가족·여름, 마을·가을, 나라·겨울과 같이 주제 별로 되어 있어요. 수업 시간표를 보면 이러한 교과 외에 창의적 체험 활동(창체)이 들어가 있어요. 이 시간에는 컴퓨터 교육, 독서 교육, 폭력 예방 교육, 창의성 교육, 안전 교육 등 학생들의 소질과 잠재력을 키워 나가는 내용의 공부를 해요. 2교시는 봄 시간이에요. “이번 시간에는 놀이할 때 주의할 점을 알아볼 거예요. 모두 두 줄로 서서 조용히 선생님을 따라오세요.” 선생님은 반 친구들을 운동장으로 데려갔어요. “여러분, 운동장과 놀이터는 여럿이 함께 이용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주변을 살피지 않고 뛰놀면 다칠 수도 있어요.” 선생님은 놀이할 때 주의할 점을 자세히 알려 주셨어요. 세정이는 선생님 말씀에 눈이 동그래졌어요. 운동장과 놀이터는 즐겁게 뛰노는 곳으로만 생각했거든요. “선생님!” 그때 세호와 동수가 손을 높이 들고 합창하듯 말했어요. “그래, 질문 있니?” “그건 아니고요, 운동장에서 조금만 놀아도 돼요?” 세호와 동수의 엉뚱한 말에 선생님은 피식 웃고 말았어요. “그럼, 안전한 놀이 기구를 이용하도록 해요!” “야, 신난다!” 세정이네 반 친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놀이터로 뛰어갔어요. “세정아, 내가 밀어줄까?” “어? 그래, 고마워.” 세정이는 소연이와 그네를 타면서 금세 친해졌지요. “세정아, 3교시 창의적 체험 활동은 뭘 하는 시간이야?” 3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세호가 물었어요. 그런데 그때 선생님이 들어오셨어요. ‘어이쿠, 오빠는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뭘 들은 거야? 화요일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에는 도서실에서 수업한다고 했는데.’ 세정이는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렸어요. “여러분, 이번 시간에는 도서실에서 수업을 할 거예요.” 세정이는 반 친구들과 선생님을 따라갔어요. 미술실을 지나고, 과학실을 지나고, 음악실도 지나갔어요. 마치 꼬불꼬불 미로 놀이를 하는 것만 같았지요. 세정이는 도서실이란 푯말을 보고 속으로 외쳤어요. ‘와, 도서실이다! 미로 찾기 끝.’ 도서실에는 사서 선생님과 도우미 선생님이 계셨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도서실을 관리하는 사서 선생님이에요. 이번 시간에는 도서대출증을 만들 거예요.” “도서대출증요?” 세정이와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여러분이 읽고 싶은 책을 빌려 갈 수 있는 신분증이에요.” 세정이는 도서대출증이 어떻게 나올지 무척 궁금했어요. “세정아, 우리 다음 시간에는 도서대출증으로 책 빌려 볼까?” “그래, 나도 빌려 보고 싶어.” 세정이는 소연이를 마주 보며 방긋 웃었어요. 딩동댕동!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어요. “소연아, 우리 미로 찾기 놀이할래? 아까 도서실에 왔던 길을 따라 우리 교실을 찾아가는 거야.” “그래, 재미있겠다.” 컴퓨터실을 지나서 쭉 가면 음악실, 그다음에 과학실, 다음에 미술실, 걸을 때마다 눈도장을 꼭꼭 찍었지요. “와, 우리 교실이다! 미로 찾기 끝.” 우리 학교에는 어떤 곳이 있을까? 학교에는 일반 교실 외에 실험과 실습을 하는 특별 교실이 있어요. 특별 교실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 미술실, 음악실, 과학실, 컴퓨터실, 어학(영어)실, 시청각실, 예절실, 도서실, 체육관 등이 있지요. 특별 교실에는 수업을 위한 여러 설비가 갖추어져 있어서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거나 사용할 수는 없어요. 도서실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 하지요. 특별 교실은 전 학년이 함께 사용하므로 먼저 사용한 학급이 깨끗하게 정리 정돈을 해야, 다음 학급의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어요. 미술실, 음악실, 체육실. 초등학교 1, 2학년에는 음악, 미술, 체육이 통합 교과로 합쳐져 있다가 3학년부터 나누어져요. 선생님이 수업 내용이나 자료에 따라 어느 교실에서 수업을 할지 결정하지요. 그리고 학교에 따라 미술이나 음악, 체육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어요. 체육 수업은 대부분 운동장에서 하는데, 학교에 따라 체육관에서 하기도 해요. 과학실. 초등학교 1, 2학년에는 과학 교과가 통합 교과로 합쳐져 있다가 3학년부터 사회와 과학으로 나누어져요. 과학 교과에서 실험을 해야 할 때, 과학실에서 수업해요. 과학실에서 과학 실험 도구들을 다룰 때에는 반드시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조심해서 다루어야 해요. 컴퓨터실. 1학년부터 컴퓨터실과 도서실 수업이 있으니 컴퓨터실 위치는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해요.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에는 정보 활용 교육과 독서 교육을 하게 되는데 정보 활용 교육은 컴퓨터실, 독서 교육은 도서실에서 수업을 하지요. 선생님 몰래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거나 게임을 하면 안 돼요. “야호, 4교시 끝나면 급식 시간이다! 오늘 반찬은 시금치나물이랑 팝콘 치킨이래.” 세호가 신이 나서 말했어요. ‘어떡하지? 난 시금치 못 먹는데.’ 세정이가 시무룩해져 있을 때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어요. “오늘 봄 시간에는 비가 올 때 준비할 일을 알아볼 거예요.” “선생님, 저요!” 세호와 몇몇 친구들이 서로 발표를 하려고 손을 들면서 소리쳤어요. “얘들아 잠깐만, 이번 시간에는 모둠 수업을 할 거야. 먼저 모둠에서 토의를 한 다음에, 발표자를 뽑아 발표하는 거예요.” 세호, 민지, 소연이, 세정이, 동수가 한 모둠이 되었어요. “나중에 가장 발표를 잘한 모둠을 뽑는대.” 세정이의 짝인 동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어요. “그럼, 내 목소리가 제일 크니까 발표는 내가 할게.” 세호가 나서서 말했어요. 세정이는 시금치나물을 먹을 걱정에 친구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싫어, 나도 발표하고 싶어.” 동수가 반대하자 세호가 씩씩거렸어요. 이번에는 씩씩한 민지가 세호와 동수에게 눈을 흘겼어요. “남자들만 발표하란 법 있어?” “그러지 말고 좋은 의견을 낸 사람이 발표를 하는 게 어때?” “그래, 그러자.” 소연이의 말에 동수와 민지가 화를 풀었어요. 세호는 아직도 토라졌는지 소연이에게 화를 내며 돌아앉았어요. “오빠, 왜 그래? 소연이 말이 맞잖아.” “넌 상관하지 마!” 세호는 소연이 편을 드는 세정이가 서운했어요. 세정이도 친구들 앞에서 자기한테 소리친 오빠가 미웠어요. “얘들아, 우선 토의부터 하자. 세정아, 네가 토의 내용을 공책에 적어 줄래?” 소연이가 토의를 이끌었어요. 민지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손을 들고 말했어요. “비가 올 때는 우산과 장화를 준비해야 해.” 민지의 말에 동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어요. “우산을 써도 책가방이 젖지 않을까? 책도 젖을 거야.” 그러자 세호가 답답한지 손을 들며 말했어요. “그러니까 책가방을 메고 그 위에 비옷을 입으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각자 작은 수건을 가져오면 어떨까?” 세정이가 공책에 열심히 정리하다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어요. “그래, 그게 좋겠다.” 세호의 대답에 세정이는 기분이 좋아 빙긋 웃었어요. “여러분, 토의가 끝났으면 발표자를 정하도록 하세요.” 선생님 말씀에 세정이는 얼른 세호를 쳐다보았어요. 그런데 민지가 세정이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좋은 의견을 내고, 정리도 했으니까, 네가 발표해야지.” “아, 안 돼. 난 못해!” 세정이는 놀라서 허둥거렸어요. 하지만 세호랑 동수, 소연이까지 모두 찬성을 했어요. 세정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다른 모둠의 발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요. 드디어 세정이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지요. “4 모둠에서 발표하겠습니다.” 세호와 친구들이 큰 목소리로 하라며 응원했어요. 세정이는 가슴을 펴고 큰 소리로 말했어요. “4 모둠에서 발표하겠습니다.” 세정이가 큰 목소리로 발표를 마치자 세호와 모둠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어요. “세정이가 발표할 때 목소리가 우렁차네, 잘했어요!”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었어요. 세정이는 환하게 웃으며 마음속으로 외쳤어요. ‘오세정은 발표도, 급식도 두렵지 않아! 나도 이제 씩씩한 1학년이다!’ 학교 홈페이지. 학교 홈페이지를 보면 연간 학교 행사 계획표,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담임 선생님에 따라 인터넷에 반 카페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어서 아이들 소식이나 친구 관계 등도 알 수 있지요. 특히, 연간 학교 행사 계획표를 보면 일 년 동안 어떤 행사가 언제쯤 열리고, 어떤 종류의 대회가 열리는지 알 수 있어서 미리 준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연간 학교 행사 계획표는 프린트를 해서 눈에 띄는 곳에 붙여 두거나 달력에 기록해 두면 유익해요. 학부모 총회와 학부모 단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학부모 총회’ 시간이 있어요. 담임 선생님이 1년 동안 어떻게 아이들을 지도할 것인지 말씀을 하시고, 학부모들이 궁금해하는 사항도 질문을 받는 시간이지요. 이 기회에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아침 자습 활동, 급식 지도, 일기 지도, 한문이나 독서 지도 등에 대해 알아보면 좋아요. 또 학부모 상담 주간이 있어요. 이때 개인적으로 담임 선생님께 미리 아이의 특이 사항을 전달하는 것도 담임 선생님이 아이를 지도하는 데 참고가 되겠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자세한 개별 상담을 하기는 곤란해요. 학부모 총회가 끝나면 학부모 단체에 참여할 수 있는 학부모의 지원을 받아요. 학부모 단체로는 학교의 운영을 심의하는 학교운영위원회, 학교나 학급의 행사 때마다 봉사하는 학부모회, 교통안전을 지도하는 녹색 어머니회가 있어요. 그 밖에 급식을 검수하고 돕는 급식 도우미, 도서실의 도서 정리 및 독서 지도를 돕는 독서 도우미, 선생님을 돕는 명예 교사 등이 있지요. 학부모의 여건에 맞는 단체나 활동을 선택해서 참여하면 세부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아이에게 적극적으로 학교 일에 참여하는 모범을 보일 수 있어 유익해요.
즐거운 하루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3월 27일 금요일 날씨 구름. 이모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민지야, 초등학생 되니까 좋지?” “아니요, 안 좋아요.” “왜? 얼른 초등학생 되고 싶다더니?” “초등학교는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해요. 다시 유치원 가면 좋겠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모랑 엄마가 웃으셨다. 뭐가 재미있다고 웃으시지? 담임 선생님이 내일은 선후배 행사를 한다고 하셨다. 선배랑 후배가 짝이 된다는데, 뭘 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 짝, 이모는 이모부 짝이라던데 그럼 난 선배랑 결혼하는 건가? 나는 선배 말고 우리 반 정우랑 결혼하고 싶은데. 선후배 행사가 뭔지 알았다. 1학년과 6학년, 2학년과 5학년, 3학년과 4학년이 짝이 되는 거다. 나는 1학년 1반 27번이니까, 6학년 1반 27번인 수빈 언니랑 짝이 됐다. 짝끼리 게임을 하고 선물도 주고받았다. 수빈 언니는 나한테 예쁜 팔찌를 선물해 줬다. 소정이가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게 부러웠는데 나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생겨서 참 좋다. 4월 13일 월요일 날씨 바람. 등굣길에 수빈 언니를 만났다. “민지야, 내일 학부모 참관 수업하는 거 알아?” “어, 그게 뭔데요?” “우리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나 엄마 아빠가 보러 오시는 거야. 긴장하거나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잘해. 알았지?” 수빈 언니가 있으니까 참 좋다. 수학 시간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색종이를 오렸다. 이걸 내일 학부모 참관 수업에 쓴다는데, 뭘 하게 될까?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4월 14일 화요일 날씨 해님. 수학 시간에 부모님들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선생님이 칠판에 여러 가지 모양의 색종이를 붙이셨다. "이어진 모양에 어떤 규칙이 있나 찾아보세요. 삼각형 다음에 올 모양을 아는 사람?" 반 친구들이 번쩍번쩍 손을 들었다. 수빈 언니가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엄마는 얼른 손을 들라고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셨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의 색종이를 규칙대로 붙여 포장지를 만들었다. 나는 이 포장지로 정우 생일 때 줄 선물을 포장해야겠다. 담임 선생님이 내일은 체험 학습을 갈 거라고 하셨다. 유치원 때 소풍이나 견학은 많이 가 봤는데, 체험 학습은 어떨지 무척 궁금하다. 엄마랑 시장에 가서 김밥 재료랑 음료수와 간식을 샀다. 선생님께 드릴 박하사탕이랑 정우한테 줄 막대 사탕도 챙겼다. 정우가 딸기 맛을 좋아할지 포도 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두 개나 챙겼다. 오늘은 비가 왔지만 내일은 제발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4월 24일 금요일 날씨 맑음. "민지야, 얼른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야지." 어젯밤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늦잠을 잤다. 벌떡 일어나 창밖을 봤더니 해님이 둥실 떠 있었다. 부엌에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엄마가 맛있는 김밥으로 도시락을 챙겨 주셨다. 꽃을 심고 꽃잎으로 손수건 물들이기를 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란색과 보라색을 골라 손수건에 물을 들였다. 손수건에서 꽃향기가 날 것 같다. 점심시간에 정우가 소정이랑 밥을 먹었다. 그래서 난 민석이랑 밥을 먹고 막대 사탕도 민석이한테 줬다. 정우는 바보다. 나랑 밥 먹었으면 사탕도 먼저 고르라고 했을 텐데. 9월 8일 화요일 날씨 흐림. 내일은 과학 발명품 대회를 한다고 한다. 무얼 만들면 좋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유치원에서 수수깡 안경을 만들던 재료로 돛단배를 만들기로 했다. 내가 만든 돛단배는 진짜 배처럼 물 위를 잘 떠다녔다. 물고기 인형을 함께 띄웠더니 돛단배랑 친구가 되고 싶은지 가까이 다가갔다. 내일 친구들이 무얼 만들어 올지 궁금하다. 9월 9일 수요일 날씨 바람. 친구들이 멋진 과학 발명품을 만들어 왔다.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발명가 같다. 다들 재활용품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특히 페트병으로 만든 과학 발명품이 많았다. 페트병으로 만든 화분, 우주선, 로봇. 과학 발명품들을 전시해 놓았더니 우리 반이 발명 교실이 된 것 같았다. 정우는 빈 캔과 스티로폼 접시로 탱크를 만들었다. 선생님이 내가 만든 돛단배랑 정우가 만든 탱크를 나란히 두셨다. 기쁘면서도 조금 부끄러웠다. 9월 24일 목요일 날씨 맑음. 내일은 운동회를 한다. 난 운동을 못해서 걱정이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운동을 잘하고 못하는 건 상관없어요. 다치지 않게 질서를 지키면서 즐겁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다칠 수도 있나 보다. 나는 점점 더 걱정이 됐다. 달리기를 잘하는 소정이는 “얼른 내일이 왔으면!” 하면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또 달리기에서 일 등을 할 거라고 자랑했다. 그래서 나도 소정이한테 “잘난척쟁이!”라고 해 줬다. 비가 오지 않고 햇볕만 쨍쨍 났다. 운동회를 하러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상자 높이 쌓기, 줄다리기, 공 굴리기, 터널 통과하기, 콩 주머니 던져 바구니 터뜨리기, 달리기, 이어달리기를 했다. 그중에서도 줄다리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우리 모둠이 아슬아슬하게 일등을 했다. 우리 모둠은 신나서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쳤다. 운동회가 아니라 놀이하는 날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참, 소정이는 이어달리기에서 대표 선수로 뛰다가 넘어져서 울었다. 나는 소정이에게 꽃물을 들인 손수건을 빌려줬다. 어제 잘난척쟁이라고 말한 게 미안했다. 10월 16일 금요일 날씨 구름. 내일은 알뜰 시장이 열리는 날이다. "알뜰 시장이 뭐예요? 시장놀이예요?" 내가 물었더니 담임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집에서 안 쓰는 깨끗한 물건을 가져와서 파는 거야." "물건을 팔아서 번 돈은 모두 가져도 돼요?" 민석이의 물음에 선생님이 또 웃으셨다. "아니, 불우 이웃 돕기 성금으로 조금은 내야 돼." 나는 옷장, 신발장, 베란다에 있던 안 쓰는 물건을 찾아서 꺼냈다. 유치원 때 신었던 공주 신발을 팔까 말까 생각하다가 팔기로 했다. 물건을 많이 팔아서 불우 이웃을 도와야지. 10월 17일 토요일 날씨 구름. 돗자리에 물건을 놓고 알뜰 시장을 열었다. 나는 가게 이름을 ‘엄청 싸고 좋은 가게’라고 지었다. 작아진 공주 신발과 옷, 엄마가 뜨개질로 만든 수세미, 슈퍼마켓에서 선물로 받은 도시락 통, 어렸을 때 읽던 그림책을 팔았다. 수세미는 안 팔릴 줄 알았는데 제일 먼저 팔렸다. 나는 수빈 언니 가게에 가서 옷이랑 신발을 샀다. 언니는 우리 가게에 와서 도시락 통을 샀다. 오늘 돈을 많이 벌어서 불우 이웃 성금을 5천 원이나 내고도 2천 원이 남았다. 이 돈은 군것질하지 말고 저금해야지. 12월 18일 금요일 날씨 흐림. 어제 선생님이 내 일기장을 가져가시며 말씀하셨다. "민지가 일기를 잘 쓰니까 학교 신문에 내야겠다." 선생님한테 일기장을 받아서 한번 읽어 보았다. 초등학교가 유치원보다 재미없다고 쓴 일기도 있었다. 사실 1학년 때 재미있는 일도 많았는데. 2학년 때도 정우랑 같은 반이 되면 좋겠다. 민석이도, 그리고 소정이도. 가끔 얄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제일 친하다. 12월 19일 토요일 날씨 눈. 교문을 나오는데 눈이 내렸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면 눈사람을 만들어야지. 겨울 방학식을 하고 학교 신문을 받았다. 학교 신문에 내가 운동회 때 쓴 일기가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학교 신문을 흔들며 집으로 뛰어갔다. 엄마가 내 일기를 읽고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우리 민지 잘했네. 벌써 2학년이 되는구나." 겨울 방학 때는 운동회나 알뜰 시장을 할 수 없어서 심심할까? 방학 때도 알차고 재미있게 보내야겠다.
야호, 쉬는 날이다!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토요일. 오늘은 쉬는 날, 토요일이에요. 나도 학교에 안 가고, 엄마 아빠도 회사에 안 가요. 그런데 엄마 아빠는 쿨쿨 잠만 자려고 해요. “엄마 아빠, 일어나세요. 우리 밖에 나가요.” 아빠가 침대에 누운 채 하품을 하며 말했어요. “쉬는 날은 집에서 푹 쉬는 거야. 또 어딜 가자고?” “음, 놀이동산요!” 엄마도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비비며 말했어요. “쉬는 날은 학교 다닐 때 못하는 체험 학습을 하는 거야.” 휴, 식구마다 하고 싶은 게 다 달라요. 아빠는 쉬자, 엄마는 체험 학습을 하자, 나는 놀자고 했어요. 나는 종이와 연필, 빈 통을 가져왔어요. “그럼, 무엇을 할지 뽑기로 정해요.” 우리 가족은 쉬는 날 하고 싶은 일들을 쪽지에 적었어요. “자, 이 통에 쪽지를 다 넣고 쉬는 날마다 하나씩 뽑는 거예요.” 나는 뽑기 통을 잘 흔든 다음, 몇 번이나 쪽지를 집었다 놨다 하면서 골랐지요. “와, 놀이동산이다!” 나는 폴짝폴짝 뛰면서 손뼉을 쳤어요. “누가 쓴 건지 보나 마나 뻔하네.” 아빠가 아직도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어요. 나는 모른 척하며 재빨리 나갈 준비를 했지요. 가족 모두 신나는 놀이동산에 왔어요. 빙글빙글, 여러 가지 놀이 기구도 타고 냠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빰빠라 빰빰, 흥겨운 퍼레이드도 봤어요. 나는 그중에서도 범퍼카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아빠 차를 쫓아다니면서 쿵, 쿵! 아빠는 도망치면서 으악, 으악! 우리는 밤하늘에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며 놀이동산을 나왔어요. “어이구, 주말에 못 쉬었더니 온몸이 쑤시네.” 나는 얼른 아빠 등을 콩콩 두드려 주었어요. 개교기념일. 오늘은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이에요. 엄마는 나 혼자 집에 있을까 봐 회사에 휴가를 냈어요. 나는 뽑기 통을 잘 흔든 다음 쪽지를 뽑았어요. “에이, 박물관이네. 누가 쓴 건지 보나 마나 뻔해!” 엄마는 모른 척하며 나갈 준비만 했어요. 공휴일이 아니어서 박물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야호! 이 전시실에는 아무도 없네. 내 세상이다!” 팔짝팔짝 뛰는 나를 엄마가 나무랐어요.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면 안 돼. 더구나 귀한 물건이 많은 박물관에서는 더 조심해야지.” 엄마는 처음 보거나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수첩에 적으라고 하셨어요. 입장권과 안내 책자도 다 챙기래요. 체험 학습 보고서에 붙여야 한다고요. 박물관 앞에서 체험 학습 보고서에 붙일 사진도 찰칵! 나는 집에 와서 또박또박 체험 학습 보고서를 썼어요. 회사에서 돌아온 아빠가 오늘 뽑은 쪽지를 보면서 말했어요. “박물관 다녀오기. 이거 누가 쓴 쪽지인지 금방 알겠는걸. 재미있었니?” 나는 오늘 찍은 사진과 입장권, 안내 책자를 꺼내 놓고 자랑을 했어요. 재량 휴업일. 학교에서 쉬는 날로 정한 재량 휴업일이에요. 오늘은 아빠가 회사에 휴가를 냈어요. 나는 뽑기 통을 잘 흔든 다음 쪽지를 뽑았어요. “푸른 자연으로 나가기. 어디로 가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푸른 자연이라면 바다도 산도 강도 있잖아요. 아빠는 산을 좋아하고 나는 바다를 좋아해서 고민을 했지요. 바다에는 여름에 물놀이하러 가기로 하고.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산에 가기로 했어요. 헉헉, 산을 오르는 건 힘들었어요. “좀 쉬었다 갈까?” 아빠가 배낭에서 오이를 꺼내 주었어요. 한입 먹어 보니 시원하고 맛있었어요. 산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멋졌어요. 저 멀리까지 한눈에 다 보였지요. 시원한 산들바람이 땀을 다 식혀 주었어요. “야호, 산에 오니 정말 좋아요!” 방학. 드디어 여름 방학이 시작됐어요. 나는 뽑기 통을 잘 흔든 다음 쪽지를 뽑았어요. “와, 시골 할머니 집에 가는 거네? 신난다!” 나는 수영복이랑 튜브랑 장난감을 싸고, 엄마는 일기장과 갈아입을 옷을 쌌어요. 참,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떡도 샀어요.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출발! “할머니!” “오냐, 우리 강아지 왔냐?” 시골 할머니 집에 진짜 강아지 누렁이도 있는데, 할머니는 만날 나더러 강아지래요. 못 보던 사이에 누렁이는 튼튼한 개가 됐어요. 나를 보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지요. 할머니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정말 많아요. 물놀이도 하고, 매미도 잡고, 수박이랑 옥수수도 먹어요. 그리고 할머니 팔다리도 주물러 드려야 해요. 내가 방학 내내 게으름을 부리면, 할머니가 한마디 하시기도 해요. “일기 쓰기가 밀리면 엄마가 다음 방학 때는 여기 안 보낸다더라.” 이키, 그 한마디면 나는 벌떡 일어나 일기를 써요. 그러다가 곧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꾸벅꾸벅 졸지요. 엄마가 보면 책상에 똑바로 앉으라고 잔소리하겠지만, 할머니는 가만히 내 배 밑으로 방석을 넣어 주시지요. 나는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공휴일. 달력에 있는 날짜가 빨간색인 오늘은 모두가 쉬는 공휴일이에요. 나는 뽑기 통을 잘 흔든 다음 쪽지를 뽑았어요. 두근두근 마음을 졸이며 쪽지를 편 순간, “꽝! 다음 기회를! 으악, 이게 뭐야? 이거 아빠가 썼죠?” 아빠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어요. 하지만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지요. “하하, 집에서 쉬는 날도 있어야지.” “치, 알았어요.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아빠가 싱글벙글. “오랜만에 실컷 자 보겠네.” 엄마도 싱글벙글. “미장원에 다녀올게.” 나는 한숨을 휴. 시무룩해져 있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가 뽑기 통을 다시 들자, 아빠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어요. “규칙은 규칙이야. 다시 뽑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뽑기 통을 꾸미려고요.” 나는 색종이와 색연필로 뽑기 통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낮잠을 자려고 하던 아빠도 슬그머니 다가와 도와주었지요. 멋진 뽑기 통 완성! “와, 진짜 멋지네.” 현장 체험 학습. 다음 주에 막내 이모가 결혼한대요. 신부 드레스를 입은 막내 이모는 얼마나 예쁠까요? 그런데 이모는 내가 학교에 가는 날에 결혼한대요. “이모 결혼식 때 나도 데려갈 거예요?” “그럼, 체험 학습 신청서를 써서 선생님께 내면 갈 수 있지.” 나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어요.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우리는 신부 방에 들어갔어요. 이모는 고운 한복을 입고 우리를 맞아 주었어요. 이모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 혼례를 한대요. “엄마, 이모가 선녀 같아요.” 막내 이모와 엄마가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어요.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되었어요. 이모는 왕비 같고 이모부는 임금님 같았지요. 그런데 체험 학습 보고서에 뭘 쓸지 고민이에요. 쓸 게 너무 많아졌거든요. 선녀 같은 신부 이야기를 쓸까요? 전통 혼례에 대해 쓸까요?
고조선 2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처음 나라, 고조선. 단군왕검은 우리민족 처음 나라인 고조선을 세웠어요.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바탕 위에 세워져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그 힘을뻗어 나갔지요.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꽃 피우기도했어요.그리고 중국 한나라와 한반도 남쪽의 진나라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팔며 힘을 키우기도 했어요. 하늘이시여, 우리를 보살펴 주소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늘에서 내려온 단군. 우리 민족이 생겨난 이야기, 단군 신화 아주 오랜 옛날, 하늘 나라를 다스리던 환인의 아들 환웅이 큰 뜻을 품었어요. 바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 는 생각이었지요. 환웅은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신하와 3천 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태백산 꼭대기 마을에 자리를 잡고 그 마을을 '신시' 라고 하였지요. 바로 '신성한 도시, 신성한 마을' 이라는 뜻이에요. 어느 날, 환웅에게 곰과 호랑이가 찾아왔어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사람이 되고 싶으면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들어가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도록 해라." 곰과 호랑이는 환웅의 말대로 깊은 동굴로 들어갔어요. 호랑이는 너무 괴로워 끝내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왔어요. 하지만 곰은 꿋꿋하게 잘 참았지요. 21일이 지나자 곰은 예쁜 여자가 되었어요. '웅녀' 라는 새 이름도 얻었지요. 그리고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어요. 어른이 된 단군왕검은 아사달을 수도로 나라를 세웠어요. 그리고 이름을 '조선' 이라고 했지요. '조용하고 신선한 아침' , '아침 햇빛이 처음 비치는 곳' 이라는 뜻이었어요. 훗날 사람들은 단군왕검의 조선을 '오래된 조선' 이라는 뜻으로, 고조선이라고 불렀어요. 단군 신화에 숨겨진 이야기. 옛날 사람들은 어떤 동물이나 자연물이 자신들의 부족과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그 동물이나 자연물이 자신들의 부족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기도 했지요. 이런 부족 중에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과 곰을 섬기는 부족이 있었어요. 또 하늘을 믿는 환웅 부족도 있었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장을 하늘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환웅 부족은 청동기를 앞세워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아울러 나라의 모습을 갖춰 갔어요. 그리고는 곰을 섬기는 부족과 힘을 모아 한 나라를 이루었지요. 신화 속에서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 단군왕검은 사실 환웅 부족과 곰 부족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의 우두머리였을 거예요. 단군 신화에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홍익인간 사상이 나타나 있어요. 이런 마음은 고조선을 다스렸던 사람들 대대로 이어져 갔어요. 그래서 고조선의 왕들은 스스로를 하늘이 고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지요. 사람이 되려면 동굴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어야 한다. 점점점 땅을 더 크게. 중국으로 뻗어나간 고조선. 기원전 4세기쯤, 고조선은 중국의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넓은 땅을 다스렸어요. "우리 고조선은 이제 주변의 어떤 나라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강한 나라가 되었다. 저 넓은 땅을 보아라!" 비파형 동검이나 랴오닝식 동검, 미송리식 토기, 탁자식 고인돌들은 고조선의 유물이에요. 이 유물들이 나오는 곳을 보면 당시 고조선의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이 유물들은 중국 랴오허 강의 동쪽에서부터 한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고루 퍼져 있어요. 이처럼 같은 모양의 유물과 무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 지역에 같은 나라의 사람들, 다시 말해 고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지요. 청동기 안에 저런 그림을 새겨 넣은 걸 보면 고조선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나 봐. 고조선의 강력한 왕, 부왕. 중국의 여러 나라와 겨루며 발전하던 고조선에 어려움이 닥쳤어요. 고조선과 이웃한 중국의 연나라가 힘을 키워 고조선을 괴롭히기 시작한 거예요. 연나라는 단단한 강철검으로 고조선을 공격해 많은 땅을 빼앗아 갔어요. 싸움에서 밀린 고조선은 수도를 옮겨야 했지요. 대동강 근처의 왕검성으로 옮겨 간 고조선은 나라의 힘을 되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기원전 3세기쯤, 고조선에 '부왕' 이라는 강력한 왕이 나타났어요. 부왕의 노력으로 고조선은 예전처럼 강해졌지요. 부왕은 상, 대부, 장군이라는 관직을 만들고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갔어요. "다음 왕위를 내 아들에게 물려주겠다." 부왕의 말에 신하들은 머리를 숙이고 부왕의 뜻을 따랐지요. 대를 이어 가며 왕이 된다는 것은 왕권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에요. 고조선의 땅이 이렇게 커졌구나. 위만 조선의 시대가 시작되다. 웅성웅성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나타난 위만. 부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고조선의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준왕이에요. 그 무렵 중국은 여러 나라로 쪼개져 서로 싸우고 있었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고조선으로 들어왔어요. 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준왕에게 찾아왔어요. "저와 이 사람들이 고조선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철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철기는 강력한 무기였어요. 준왕은 위만을 받아 주었어요. 그리고 위만에게 고조선 서쪽 끝을 지키는 일을 맡겼어요. "그대는 청동검보다 훨씬 강한 강철검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고조선을 지켜 주시오." "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위만은 고조선 서쪽 끝을 지켰어요. 하지만 위만의 군대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자 위만은 슬며시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된 위만 위만은 군사들을 이끌고 준왕을 찾아갔어요. "지금 중국의 한나라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군사들과 함께 성을 지킬 테니 빨리 성문을 열어 주십시오!" 준왕은 얼른 성문을 열어 주었어요. 그러나 한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위만은 성으로 들어가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지요. 이렇게 시작된 나라를 '위만 조선' 이라고 해요. 왕이 된 위만은 준왕이 다스리던 고조선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어요. "나라의 이름은 그대로 조선이라 부르고, 조선의 제도와 문화, 관습도 그대로 따르겠다." 위만은 철로 만든 무기를 앞세워 다른 나라와 전쟁을 했어요. 연이어 거둔 승리로 조선의 땅은 점점 더 커졌지요. 또 철로 만든 농기구 덕분에 곡식도 많이 얻을 수 있었어요. 넌 누구냐? 전 중국에서 온 위만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백성들에게 금한 8조 법금. 신분이 제각각이었던 고조선. 고조선은 철로 농사를 짓는 기구나 무기를 만들 수 있었어요. 그러자 살림이 훨씬 나아졌지요. 그런데 누구나 살림살이가 나아진 건 아니었어요. 힘이 있는 사람만 철기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철기를 가진 사람은 철기를 사용해서 점점 더 부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철기를 갖지 못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졌지요. 나라를 이루게 되면서 힘 있는 귀족과 가난한 평민, 노비가 생겨났어요. 전쟁에서 중요한 일을 한 장군이나 부자였던 사람은 귀족이 되었어요. 귀족은 나라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았지요. 이에 비해 일반 백성인 평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그리고 노비는 귀족의 집안일을 돕거나 나라의 허드렛일을 해야 했지요. 또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산 채로 함께 땅에 묻히기도 했어요. "죽어서도 주인을 섬겨야 하니 주인을 따라 가거라." 철로 된 농기구를 만들려면 이렇게 두드려 줘야 한다고. 여덟 가지를 하지 말라, 8조 법금. 고조선에는 8조 법금이라고 부르는 여덟 가지의 법이 있었어요. 주로 귀족의 재산과 힘을 지켜 주는 법이었지요. 8조 법금을 보면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요. 농사를 짓고 살았고, 재산을 갖기도 했으며, 여러 신분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또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개인이 가진 재산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도 알 수 있어요. 8조 법금이 있으니 든든해. 고조선이 무너지다. 한나라와 싸워 이긴 고조선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한나라와 직접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막았어요. "앞으로는 우리 고조선을 통해서만 물건을 사고팔 수 있소." 고조선은 중간에서 많은 이익을 남겨 나라의 힘을 키웠지요. 한나라는 물건을 사고팔 때마다 고조선이 못마땅했어요. 더욱이 고조선이 한나라와 사이가 나빴던 흉노와 친하게 지내자 더욱 걱정이 되었지요. 그래서 한나라의 황제 무제는 '섭하'라는 사신을 고조선에 보냈어요. "고조선은 이제부터 흉노를 멀리하고, 우리 한나라를 섬겨라!" 하지만 우거왕은 한나라의 말에 콧방귀를 끼었어요. "우리 고조선이 무엇이 부족해 한나라를 섬긴단 말이냐? 어림없는 소리!" 그러자 화가 난 한나라가 5만 7천 명의 대군으로 고조선에 쳐들어왔어요. 하지만 강력한 철로 만든 무기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고조선은 한나라를 물리쳤지요. 무너진 고조선의 뒷모습 무제는 강한 고조선의 군사력에 놀랐어요. 그래서 전쟁보다 고조선에 사신을 보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고조선도 같은 마음으로 한나라에 태자를 보냈어요. 하지만 두 나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지요. 전쟁이 1년 넘게 계속되자 고조선의 귀족들은 두 편으로 나뉘었어요. "이제 그만 한나라와 화해를 합시다. 한나라는 우리가 상대하기에 너무 강해요." "절대 안 됩니다. 한나라가 우리 고조선을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귀족들은 옥신각신 다투었어요. 그러자 우거왕이 나섰어요. "끝까지 한나라와 싸워야 하오. 물러서면 한나라는 고조선을 제 맘대로 부릴 것이 뻔하오." 그러자 어떤 귀족들은 우거왕을 피해 고조선을 빠져나가 한나라군에 항복했어요. 그 사이 우거왕은 몰래 들어온 자객에게 죽고 말았지요. 나라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고조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어요. 하지만 왕을 잃고, 귀족들이 빠져나간 나라를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은 수도인 왕검성을 한나라군에게 빼앗기면서 무너지게 되었어요. 대대손손 내려온 단군왕검. 단군왕검이라는 이름에서 '단군'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을 뜻해요. '왕검'은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즉 임금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왕의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지요. 단군은 백성들에게 농사 기술을 새롭게 가르치며, 농사가 잘 지어 지도록 하고, 나랏일을 돌보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또 백성들이 잘못을 하면 엄한 벌도 주었어요. 단군 신화에서는 단군왕검이 1908세까지 고조선을 잘 다스리다가 산신령이 되었다고 말해요.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지요. 이 이야기는 제1대 단군왕검, 제2대 단군왕검, 제3대 단군왕검과 같은 많은 단군왕검들이 1908년에 걸쳐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뜻일 거예요. 고조선 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온 위만. 임금의 자리가 욕심난 위만은 준왕에게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며 거짓말을 했어요. 그리고는 왕검성을 지켜 주겠다며 군대를 끌고 성 안으로 들어와 왕검성을 차지해 버렸지요. 위만이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와 처음으로 왕검성을 찾아왔을 때, 위만은 고조선의 옷을 입고 왔어요.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고조선의 풍습을 그대로 따랐지요. 나라 이름도 단군왕검이 다스릴 때와 같이 조선이라고 했어요. 관직도 단군 조선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고, 높은 관리들도 단군 조선 때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뽑았어요. 이런 것을 보면 위만 조선은 왕조만 바뀌었을 뿐, 단군 조선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위만. 정말 우리 고조선 사람과 똑같군. 고조선의 뒤를 이은 나라들. 철기가 널리 퍼지자 우리 땅 여기저기에서 여러 나라가 일어났어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그 나라들이었지요. 이들 나라가 생길 때쯤에는 이미 벼농사가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농기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로 나라 사이에 물건을 사고파는 일도 이루어지기 시작했지요. 고조선의 뒤를 이은 첫 나라, 부여. 부여를 다스린 마가 우가 저가 구가.고조선이 망할 무렵, 우리 땅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러 나라들이 생겨났어요. 새롭게 세워진 나라들은 철기를 이용해 무기도 만들고 농사도 지으면서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지요. 만주 송화강 부근의 넓은 들판에는 부여가 세워졌어요. 부여는 여러 부족이 어울려 이루어진 나라예요. 그래서 왕이 중앙을, 마가·우가·저가·구가라는 네 명의 부족장들이 각각 지방을 나누어 다스렸지요. 네 명의 부족장들이 다스린 지방을 통틀어 사출도라고 해요. 부족장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는 왕과 같은 힘을 가졌어요. 부여의 왕은 부족장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지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자꾸 생기니 이 참에 왕을 몰아냅시다. 좋소. 이대로 있다가 나라에 더 큰 일이 생길지도 모르오. 다음 왕으로는누가 좋겠소? "올해는 가뭄이 들어서 농사를 망쳤습니다. 작년엔 홍수가 났고요." "이게 다 왕이 제 할 일을 다 못했기 때문이오." "이참에 왕을 몰아냅시다!" 부여에서는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사출도의 부족장들이 왕을 쫓아냈어요. 부여를 지키는 법과 제천 의식 부여에도 고조선처럼 법이 있었어요. 그 가운데 네 개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요. 하나,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둘, 도둑질한 사람은 물건 값의 열두 배를 물게 한다. 셋, 남편이나 아내 몰래 다른 사람과 사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넷, 질투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 부여의 법은 '1책 12법' 이라고 불러요. 부여의 법을 보면 노비가 있었다는 것과 부자들의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부여에는 영고라는 제천 의식도 있었어요. 가을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 백성들이 동네마다 한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지요.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는 이 제사 때에는 며칠 동안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놀았어요. 또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 주었어요. 동해안 지역에 옥저가 일어나다. 강한 지도자가 없었던 옥저. 옥저는 오늘날의 함경도 해안 지방에 있었어요. 옥저는 동해와 붙어 있어 해산물과 소금이 많았어요. 땅이 기름져 농사도 잘 되었지요. 옥저 사람들은 강하고 용맹스러웠어요. 그런데 옥저에는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어요. 대신 여러 마을로 나뉘어 부족마다 '읍군' 이나 '삼로'라는 부족장이 있었지요. 옥저는 힘이 약해서 늘 옆에 있는 고구려의 눈치를 봐야 했어요. "귀한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을 고구려 왕께 바칩니다." "아주 깨끗하고 좋은 소금이옵니다." 옥저는 물고기와 소금 같은 특산물을 고구려에 바쳤어요. 힘없는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옥저에서 나는 특산물을 가져왔습니다. 특산물을 가져왔으니 당분간 괴롭히지 말아야겠군. 고구려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옥저의 풍습 옥저의 풍습은 고구려와 비슷했어요. 그런데 혼인 풍습은 고구려와 많이 달랐어요. 옥저에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지요. 신부가 열 살에 약혼을 하고 미리 신랑의 집에 가서 살아요.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신랑이 신부의 몸값을 치른 다음 혼인하는 제도였지요. ‘민며느리’ 라는 말은 며느리로 삼으려고 민머리인 채 데려와 기른 여자 아이라는 뜻이에요. 장례 풍습도 고구려와 달랐어요. 옥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어요.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덮어서 묻어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 뼈만 남으면 그 뼈를 거두어 커다란 나무 관에 넣었지요. 그리고 나중에 다른 가족이 죽으면 같은 방법으로 뼈를 모아서 모든 가족의 뼈를 한 나무 관 속에 넣었어요. 그리고 죽은 사람의 모습을 새긴 나무 인형을 만들어 그 인형의 수로 관 속에 있는 죽은 사람의 수를 헤아렸지요. 나무 관 입구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 쌀을 담은 그릇을 매달아 놓았어요. 죽어서 가는 길에도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저희 딸을 예쁘게 봐 주세요.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동예. 동예의 큰 자랑 동예는 강원도 북부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였어요. 나라의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이웃해 있었고, 동쪽은 동해에 맞닿아 있었지요. 동예는 기름진 땅에서 나는 곡식과 바다의 해산물 덕분에 비교적 잘 살았어요. 옥저처럼 동예에도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없었어요. 대신 마을마다 부족장이 있어 각 마을을 다스렸지요. 동예도 힘센 고구려에게 특산물을 바쳐야 했어요. 동예의 특산물로는 '단궁' 이라는 활과 '과하마' 라는 말이 유명했어요. 옥과 구슬은 보석으로 여기지도 않을 만큼 많았어요. 동예 사람들은 옷감을 매우 잘 짰어요. 그래서 좋은 옷을 많이 만들어 입었지요. 남자들은 은으로 꽃 장식을 만들어 옷에 달고 다니기도 했어요. 우리 동예의 옷감 짜는 솜씨는 어디에 내 놔도 뒤지지 않지. 동예의 색다른 제도와 풍습 "별빛을 보니, 올해에는 풍년이 들 것 같습니다." 동예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하늘을 잘 살폈어요. 새해의 별빛을 관찰해 그해에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를 미리 점쳤지요. 해마다 10월에는 '무천' 이라는 축제를 벌였어요. 이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어요. 동예는 여러 부족과 마을이 제각각 따로 움직였어요. 마을마다 작은 나라처럼 뚜렷한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다른 마을에 들어갈 수 없었지요. "허락 없이 다른 마을에 들어가면 소나 말을 물어 주어야 한다. 만약 물어 줄 재산이 없으면 그 마을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 동예 사람들은 같은 부족 사람과는 혼인하지 않았어요. 다른 부족의 사람과 혼인한다고 해서 이 풍습을 ‘족외혼’ 이라고 불렀어요. 우리 동예 사람은 다른 부족 사람과 혼인하지요.
고구려 1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알에서 태어난 주몽 부여의 금와왕이 사냥을 나갔어요. 금와왕은 그곳에서 유화라는 여인을 만났지요. “저는 물을 다스리는 신 하백의 딸 유화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 님과 부모님 몰래 혼인했다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금와왕은 유화를 불쌍히 여겨 궁궐로 데려왔어요. 유화의 방에는 늘 햇빛이 깊게 비쳤어요. 햇빛은 늘 유화를 따라다녔지요. 햇빛을 받고 임신한 유화는 알을 하나 낳았어요. “사람이 알을 낳다니, 불길하구나. 당장 갔다 버려라!” 금와왕은 알을 버리라고 명령했어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버려진 알을 새와 동물들이 따뜻하게 품는 거예요. 알을 깨뜨리려 도끼로 이리저리 내려쳐도 깨지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금와왕은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어요. 그리고 며칠 뒤, 알에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어요. 알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부터 활을 무척 잘 쏘았어요. 그래서 ‘활을 잘 쏜다’ 는 뜻으로 주몽이라고 불렀지요. 주몽은 활을 잘 쏘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 실력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았어요. 금와왕은 주몽을 누구보다 사랑했어요. 그러자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이 주몽을 시샘했어요. 졸본을 둥지로 삼은 고구려 “아우들아, 더 이상 주몽을 두고 볼 수 없다. 오늘 밤에 해치우자!” 금와왕의 첫째 아들 대소 왕자는 음모를 꾸몄어요. 하지만 꿍꿍이를 눈치 챈 유화 부인은 주몽이 피하도록 도와주었어요. 주몽은 서둘러 어머니와 작별하고 오이와 마리, 협보라는 세 친구와 함께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렸어요. 쫓아오는 자들을 피해 달리던 주몽은 강가에 이르렀어요. 주몽은 강을 향해 소리쳤지요. “나는 물의 신 하백의 손자 주몽이다.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러자 갑자기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 다리를 밟고 주몽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지요. 주몽은 졸본이라는 곳에 이르렀어요. 그곳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어요. 주몽은 자신의 성도 ‘고’ 씨로 새로 지었어요. 이때 주몽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지요. 아들에게 남긴 부러진 칼 조각 부여를 떠나올 때 주몽에게는 뱃속에 아이를 가진 아내가 있었어요. 하지만 급하게 떠나 오는 바람에 아내 예씨 부인을 부여에 두고 오게 되었지요. 주몽은 아내에게 다음에 꼭 아이와 함께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어요. 주몽이 떠난 뒤 예씨 부인은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이 바로 유리예요. 유리도 아버지 주몽을 닮아 활을 잘 쏘았어요. 뛰어다니는 짐승과 날아가는 새도 잘 맞혀 떨어뜨렸지요. 그러던 어느 날, 활솜씨를 뽐내던 유리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같은 마을 여인이 머리에 지고 가던 물동이를 깨뜨리고 만 거예요. 화가 난 여인은 유리에게 소리쳤어요. “이런 못된 놈! 아버지가 없는 녀석이라 버릇이 없구나!” 이 말에 속이 상한 유리는 어머니에게 달려갔어요. “어머니, 저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유리야, 네 아버지는 고구려의 왕이시란다. 신표를 가져가 아버지에게 보이도록 해라.” “그 신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있다고 하셨단다. 잘 찾아보거라.” 유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신표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지친 유리는 마루에 걸터앉아 기둥 아래를 무심히 보았어요. “어, 주춧돌에 일곱 모가 나 있네? 기둥을 소나무로 만든 걸 보니 신표는 저 기둥 아래에 있겠구나!” 유리는 기둥 아래에서 신표를 찾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신표는 부러진 칼 조각이었어요.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이 된 유리 이튿날, 유리는 신표를 들고 고구려로 떠났어요.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기 위해서였지요. 주몽을 찾아간 유리는 신표를 보여 주었어요. 신표를 본 주몽은 유리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어요. “내 아들 유리가 맞구나. 이제야 유리를 만났어!” 주몽은 첫째 아들인 유리를 왕자로 삼았어요. 주몽이 세상을 떠난 뒤, 유리는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이 되었어요. 왕이 된 유리는 수도를 졸본에서 압록강가의 국내성으로 옮겼어요. 유리왕은 고구려를 침입한 부여를 물리치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싸우면서 땅을 넓혀 갔어요. 이후 고구려는 부여, 옥저, 동예도 차지했어요.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압록강 부근과 만주, 한반도의 북부 지방까지 정복한 강하고 큰 나라가 되어 갔지요. 부족장보다 강한 힘을 얻은 왕 고구려에는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이렇게 다섯 부족이 있었어요. 나라를 세우는 데 중심이 된 다섯 개의 부족들은 함께 나라를 다스렸지요. 이것을 5부족 연맹체라고 해요. 각 부족의 부족장들은 함께 모여 나랏일을 결정하는 제가 회의를 열었어요. 처음 고구려 왕은 소노부에서 맡았어요. 하지만 태조왕 이후부터는 계루부에서 왕이 나오게 되었지요. 태조왕은 강하게 나라를 다스려 다른 부족장들보다 큰 힘을 내보였어요. 태조왕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해산물을 가지고 있던 옥저도 차지했지요. 옥저를 차지한 태조왕은 옥저에게 해마다 특산물을 바치게 했어요. 똘똘 뭉친 하나 된 나라를 위하여 고구려 왕의 힘은 점점 강해졌어요. 그러자 고구려 왕은 부족장들을 신하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5부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냈어요. “우리 고구려를 세운 동명 성왕께 제사를 지내자!” “동명 성왕인 주몽을 낳은 유화 부인께도 제사를 지내야 해.” 고구려 왕은 압록강의 배 위에서 유화 부인의 모습을 한, 나무로 만든 조각상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어요. 강변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제사를 지켜보았지요. 고구려는 해마다 추수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가졌어요. 이때 동명 성왕과 유화 부인께 제사를 올렸어요. 동맹이 열리는 동안은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축제를 즐겼지요. 굶주림에 눈물짓는 백성들 고국천왕은 고구려의 아홉 번째 왕이에요. 고구려를 크게 발전시킨 왕이기도 하지요. 고국천왕은 왕의 자리를 동생이 아닌 아들에게 물려주도록 법을 바꾸었어요. 그래서 왕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어요.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고국천왕은 길가에서 울고 있는 젊은이를 보았어요. “그대는 왜 울고 있는가?” “전하, 저는 하루하루 일을 해서 받은 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곡식을 한 줌도 얻을 수 없어 쫄쫄 굶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요? 흑흑.” 이와는 반대로 고구려의 귀족들은 넉넉한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평민들은 겨우내 먹었던 쌀이 떨어지는 봄부터 굶주려야 했지요. 더욱이 흉년✽이라도 들면 겨울에도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평민들은 나라와 귀족들에게 꼬박꼬박 세금을 내야 했어요. 그래서 어떤 평민들은 차라리 귀족의 노비가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노비가 되면 굶어 죽지 않는 대신, 죽는 날까지 일만 하다 죽어야 했어요. 그리고 노비는 세금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가 많아지는 것은 고구려의 큰 골칫거리기도 했지요. 봄에 빌린 곡식을 가을에 갚고 궁궐로 돌아온 고국천왕은 신하인 을파소를 불렀어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거나 노비가 되는 백성들이 늘고 있소. 백성들의 굶주림을 없앨 좋은 방법이 없겠소?” “전하, 진대법을 실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곡식이 떨어지는 봄이나 흉년에는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는 것이지요. 빌려간 곡식은 가을에 추수하면 갚도록 하면 됩니다.” 을파소의 말에 귀족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대했지만 을파소는 더욱 힘 주어 말했어요. “백성 없이 어찌 나라가 있고 왕이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어야 나라에 세금도 내고 군대에도 갈 수 있습니다.” 고국천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을파소의 말대로 진대법을 실시했어요. 그러자 백성들은 더 이상 굶주리거나 노비가 될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굶주림에서 벗어난 백성들은 왕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구려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어요. 물론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나라의 살림살이도 훨씬 나아졌어요. 낙랑군을 무찌르고 요동을 향해 미천왕은 나라를 새롭게 가다듬었어요. 그리고 군대도 잘 훈련시켰지요. 313년, 미천왕은 드디어 낙랑군을 공격했어요. 이 싸움에서 고구려군은 낙랑군을 천여 명이나 사로잡으며 크게 이겼어요. 마침내 낙랑군을 무찌른 것이지요. 고조선이 무너진 뒤 400여 년 만에 중국이 우리 땅에서 완전히 물러간 거예요. 낙랑군을 무찔러 서북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서쪽으로 향했어요. 동북아시아의 중심지, 요동 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였지요. 고구려군은 요동 지역에 살고 있던 선비족을 공격했어요. 하지만 선비족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어요. 선비족이 다시 공격해 오자 고구려군은 요동 지역을 도로 빼앗겨야 했지요. 이후, 두 나라는 요동을 두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계속했어요. 미천왕은 고구려의 서쪽뿐 아니라, 남쪽도 연이어 공격했어요.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점점 황해도 지역까지 땅을 쭉 넓혀 갔어요. 두루두루 고구려를 돌본 소수림왕 낙랑군을 무찌른 고구려는 백제와 남쪽이 맞닿아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평양성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고국원왕의 죽음으로 소수림왕이 왕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때에 고구려는 위험에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소수림왕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으기 위해 고민고민하고 있었지요. ‘아버지 고국원왕의 죽음을 틈 타 백제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니 우선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게 좋겠어.’ 소수림왕은 고구려 서쪽에 있던 중국의 전진이라는 나라와 친하게 지냈어요. 전진에서는 고구려에 불상과 불교 경전을 보냈어요. 승려✽도 보내 불교 문화를 전했지요. 소수림왕은 기꺼이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또 소수림왕은 인재를 키우기 위해 태학이라는 학교도 세워 학문도 발전시켰어요. 그리고 고구려의 법과 제도도 가다듬었어요. 불교로 왕권을 강하게 불교가 들어오기 전, 백성들은 해와 달, 하늘, 땅, 강, 산과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며 무당을 통해 신의 뜻을 물어보기도 했어요. 이런 것을 민간 신앙이라고 해요. 이런 민간 신앙과 불교는 여러모로 달랐어요. 우선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열심히 수행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했지요. 반면 불교는 왕과 귀족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지킬 수 있게 해 주기도 했어요.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지금의 신분이 결정되었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귀족이 될 수 있었어. 너희들은 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이 된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왕은 곧 부처님이야. 그러니 부처님을 모시듯 왕께 충성을 다 바쳐야 해!” 소수림왕은 이렇듯 백성들에게 왕을 떠받들도록 하는 불교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소수림왕뿐만 아니라 소수림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의 왕들도 이런 이유로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불교를 권장했어요. 혼인해서 여자의 집으로 간 데릴사위 제도 데릴사위 제도는 혼인을 하면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여자 집에서 살다가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풍습이에요. 당시 고구려에서는 농사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야 좋았어요. 그런데 여자가 혼인을 해서 갑자기 남자 집으로 떠나면 여자 집의 일손이 부족해졌지요. 그래서 데릴사위 제도 같은 풍습이 생겨난 거예요. 으라차차 씨름 씨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운동이에요. 두 사람이 허리와 다리에 띠를 묶고 상대방의 띠를 잡은 다음, 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는 사람이 이기지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에는 각저총이라 불리는 무덤이 있어요. 무덤 속 벽에 씨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각저총이라 부르지요. 씨름을 한자어로 ‘각저’ 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벽화에 씨름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씨름을 고구려 시대에 널리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구려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고분벽화 고분은 오랜 옛날에 만든 무덤이에요. 고분 속 벽에 그려진 그림을 고분 벽화라고 하지요. 고구려 사람들은 고분 벽화를 많이 그려 놓았는데 고분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알 수 있지요. 지금 남아 있는 고분 벽화 중에서 유명한 그림은 무용총의 ‘수렵도’ 와 강서 대묘의 ‘사신도’ 같은 것들이지요. 고구려 유리왕에게는 화희와 치희라는 부인이 있었어요. 화희는 고구려 사람이고 치희는 중국의 한나라 사람이었는데, 두 부인은 서로 사이가 나빠 자주 다투었어요. 어느 날,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화희가 치희를 꾸짖었어요. “너는 한나라의 비천한 첩인데, 왜 나에게 예의 없이 행동하느냐?” 화희의 꾸짖음에 마음이 상한 치희는 한나라로 돌아가 버렸어요. 유리왕이 급히 치희의 뒤를 쫓아가 데려오려고 했지만, 치희는 끝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요. 치희를 떠나 보내고 혼자 돌아오던 유리왕은 나무 밑에서 잠깐 쉬다가 노란 꾀꼬리 한 쌍을 보았어요. 유리왕은 다정한 꾀꼬리 한 쌍을 보면서 자신의 처지가 더욱 외롭게 느껴졌지요. 그래서 꾀꼬리를 보며 시를 지은 것이 황조가예요. 여기서 황조는 꾀꼬리를 말해요. 슬픈 사랑의 주인공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이별의 슬픔을 구슬프게 노래한 유리왕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황조가 고구려의 호동 왕자는 낙랑을 여행하다가 낙랑의 공주를 만났어요.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혼인을 했지요. 몇 달 뒤, 호동 왕자는 낙랑 공주에게 잠시 고구려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낙랑에 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구려. 아버님을 뵈러 잠시 고구려에 다녀오겠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당신을 고구려로 데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오.” 그런데 고구려로 간 호동 왕자를 기다리던 낙랑 공주는 뜻밖의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부인! 낙랑의 자명고를 찢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데리러 낙랑에 갈 수가 없소.’ 낙랑에는 ‘자명고’ 라는 북이 있었어요. 적군이 가까이 오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낙랑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신기한 북이었지요. 낙랑 공주는 고민했어요. 그러다 결국 자명고를 찢고 말았지요. 이 사실을 안 낙랑의 왕은 크게 화를 내며 낙랑 공주를 죽였어요. 자명고가 없어진 낙랑은 쳐들어온 고구려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지요. 한편, 낙랑 공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호동 왕자는 마음에 병이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낙랑 공주의 곁으로 갔답니다. 백제, 고구려의 신하 나라가 되다 4세기 후반, 중국 대륙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 서로 다투고 있었어요. 그때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의 조카인 담덕이 열여덟 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지요. 담덕이 바로 광개토 태왕이에요. “전하, 지금 고구려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나라는 서쪽의 모용 선비족이 세운 후연입니다. 그들을 막으려면 먼저 남쪽의 백제를 공격해 다른 위험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 백제를 무너뜨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일찍이 고구려의 수도를 파괴했던 모용 선비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후연을 무찔러야 한다!” 왕이 된 광개토 태왕은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하나하나 차지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를 백제로 삼았지요. 광개토 태왕이 직접 이끈 고구려군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했어요. 고구려군의 당당함에 백제의 아신왕은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말았지요. “우리 백제는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를 섬기겠습니다.” 광개토 태왕은 아신왕의 자리를 빼앗지는 않았어요. 그 대신, 왕의 동생과 백제의 귀족들을 볼모로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한강의 북쪽 지역을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지요. 이렇게 백제는 고구려의 신하 나라가 되었어요. 세상을 뒤흔든 강한 나라 광개토 태왕이 나타나면서 동북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어요. 광개토 태왕이 큰 나라를 꿈꾸며 거침없이 땅을 차지해 나갔기 때문이지요. “이제 기름진 땅과 풍부한 철을 가진 나라가 있는 요동을 정복하자!” 광개토 태왕은 군대를 이끌고 후연을 공격했어요. 후연은 고구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요. 광개토 태왕은 곧 후연의 숙군성을 빼앗고, 요동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어요. 광개토 태왕은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며 이겨 만주의 동쪽과 동부여까지 차지했어요. 그러자 고구려 땅은 점점 넓어졌어요. 광개토 태왕은 북쪽으로는 헤이룽 강, 남쪽으로는 임진강,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연해주, 서쪽으로는 랴오허 강까지 땅을 차지했어요. 마침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강한 나라가 되었어요. 위험에 빠진 신라를 도와준 고구려 “신라 땅에 가야와 왜가 힘을 합쳐 쳐들어왔습니다. 부디 우리 신라를 도와주십시오!” 고구려의 찰갑가야의 판갑 기마병 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 철갑옷 철로 만든 갑옷. 철갑옷은 무거웠지만 병사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지. 내물왕의 간절한 부탁 고구려의 광개토 태왕이 땅을 넓혀가고 있을 때, 신라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어요. 신라 남쪽의 가야와 왜가 서로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한 거예요. 철이 많이 나는 나라인 가야의 철갑옷을 두른 가야군과 싸움을 잘하는 왜군이 함께 쳐들어오자 신라는 당해 낼 수 없었지요. 그러자 신라의 내물왕은 재빨리 고구려의 광개토 태왕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신라 땅에 가야와 왜가 힘을 합쳐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의 힘이 너무 강해 신라군이 당해 내질 못하여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 신라를 도와주십시오!” 내물왕의 간절한 부탁에 광개토 태왕은 오만 명의 군사를 신라에 보냈어요. 고구려의 기마병은 병사뿐 아니라 말까지도 철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지요. 고구려가 마음대로 힘을 휘두르다 힘을 합친 가야군과 왜군도 고구려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고구려군은 가야군과 왜군을 모두 물리쳤어요. 그리고 도망가는 병사들을 쫓아 금관가야까지 쳐들어갔지요. ‘가야군도 고구려군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로구나.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금관가야는 고구려군에게 무릎을 꿇었어요. 고구려군의 도움으로 신라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사건건 고구려의 참견을 받아야 했지요. 고구려는 신라의 왕을 결정하는 일에까지 참견했어요. 이렇듯 신라도 백제처럼 고구려의 신하 나라가 된 것이지요. 남, 남, 남쪽을 향해 광개토 태왕이 죽자 첫째 아들인 장수왕이 고구려를 다스렸어요. 이 무렵, 북위라는 나라가 중국 북부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했지요. 그러자 고구려의 서쪽이 북위와 맞닿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중국이 여러 나라로 흩어져 있어서 땅을 넓히기 쉬웠지. 하지만 중국 북부를 통일한 북위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북위가 있는 곳보다 남쪽으로 땅을 넓히는 게 낫겠어!’ 장수왕은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 땅을 넓히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무렵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주위에는 산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농사 지을 땅도 비좁고 길도 비좁아 사람들이 오가기 불편했지요. 그래서 장수왕은 광개토 태왕 때 이미 옮기기로 결정되었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어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가 된 평양 장수왕은 수도를 남쪽인 평양으로 옮기자고 귀족들에게 말했어요. “북위 때문에 땅을 넓히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러니 평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해 남쪽을 공격하겠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어요. “국내성은 400년 넘게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지금까지 잘 지냈는데, 굳이 수도를 옮겨야 합니까?” 그래도 장수왕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어요. “평양의 대동강 주변에는 기름진 평야가 많고, 가까이 있는 서쪽 바다를 통해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도 교류✽할 수 있소.” 이렇게 장수왕이 힘주어 말하자 귀족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어요. 427년,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그리고 대성산 남쪽에 새로운 도성을 짓고, 안학궁이라는 궁궐도 지었지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장수왕은 자신감에 차서 남쪽으로 땅을 넓히기 위한 준비를 서서히 해 갔어요.
고구려 2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고구려에 무릎 꿇은 중국. 흩어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했어요.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공격했지요. 하지만 고구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을지문덕은 살수 대첩으로 수나라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고, 연개소문도 계속된 당나라의 공격에 당당히 맞섰어요. 양만춘도 안시성 싸움에서 당나라군을 몰아냈지요. 고구려의 힘이 생각보다 세군.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공격. 고구려와 수나라의 맞대결. 6세기 말, 중국의 수나라는 흩어진 중국을 통일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수나라 황제 문제는 고구려도 수나라의 신하 나라로 만들려고 했지요. "우리 수나라만이 천하의 중심이다. 그러니 고구려는 수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수나라에 당당히 맞섰어요. "천하의 중심은 너희 수나라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다. 어찌 우리가 수나라에 머리를 숙일 수 있겠느냐?" 고구려는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성벽도 고치고 군사도 훈련시켰어요. 어느새 자신감에 찬 고구려는 수나라를 슬쩍 떠보기 위해 먼저 수나라를 공격했어요. 수나라 황제 문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핑계로 고구려를 공격했어요. 마침내 천하의 중심이라고 외치는 두 나라 사이의 불꽃 튀는 대결이 시작된 거예요. 장마와 전염병에 스르르 무너진 수나라군. 수나라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랴오허 강 하류를 건넜어요. 그런데 뜻밖의 어려움이 수나라군을 가로막았지요. 바로 장마와 전염병이었어요. 수나라는 장마철인 6월에 공격을 시작했는데, 때마침 늪지대가 많은 랴오허 강 하류 근처에 홍수로 물이 넘쳤어요. 그래서 수나라 군사들은 꼼짝없이 강가에 갇히게 되었지요. 강가에 갇힌 수나라군의 식량은 점점 바닥났어요. 그러자 굶주려 기운이 없어진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지요. "이런, 고구려를 공격할 때를 잘못 골랐구나. 다시 우리 수나라로 돌아가자!" 수나라군은 되돌아갔어요. 하지만 이미 수많은 병사를 잃고, 큰 손해를 본 후였지요. 수나라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양제는 욕심이 더욱 많은 사람이었어요. "고구려왕이 직접 찾아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수나라는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절대 굽히지 않았어요. 이렇게 두 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어요. 누구 맘대로 우리 고구려에 발을 들여놓았느냐? 이거 원 , 시시해서. 얕잡아 보았다가 큰 코 다쳤네. 배고파. 꾀를 내어 수나라군을 물리치다. 요동성까지 우르르 쳐들어온 수나라군. 수나라 양제는 5년 동안 고구려와 싸우기 위해 단단히 준비했어요. 그리고 612년, 드디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직접 고구려를 공격했지요. 하지만 고구려군이 랴오허 강을 건너려는 수나라군을 막아 세우는 바람에, 수나라군은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랴오허 강을 건너 고구려의 요동성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 "수나라군의 수가 너무 많으니 맞서 싸우지 말고 성을 지키며 기다려라. 기회를 봐서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지키기 작전으로 맞섰어요. 이에 답답해진 수나라군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이 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 막았어요. 수나라 양제는 점점 초조해졌어요. 그래서 30만 명의 특별 부대를 뽑아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갑자기 공격하기로 했어요. 수나라의 특별 부대를 이끄는 우중문은 군사들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어요. 살수 대첩을 이끈 을지문덕 장군. 수나라의 특별 부대가 평양성 근처에 도착했어요. 그러자 그곳을 지키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군의 우중문을 찾아갔어요. "나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오. 곧 항복할 테니 협상합시다." 하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군에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 한 거였어요. 사실은 수나라 군사들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간 것이었지요. 먹을 것이 거의 떨어진 수나라 군사들은 몹시 지쳐 있었어요. 을지문덕 장군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수나라군은 다시 평양성을 공격했어요. 서로 싸우고 막고를 계속하며 수나라군은 평양성 가까이 도착했지요. 을지문덕 장군은 우중문에게 편지를 보내 여기서 그만두고 돌아가면 고구려의 왕이 수나라 왕을 찾아가겠다고 했어요. 더 이상 싸울 힘도 식량도 남아 있지 않았던 우중문은 군사들을 데리고 돌아갔지요. 그런데 돌아가는 수나라군이 살수를 건널 때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을 공격했어요.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에요. 수나라 30만 대군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가 불과 2,700명에 불과할 정도로 고구려의 대승이었어요. 수나라 놈들 맛 좀 봐라. 고구려를 휘어잡은 연개소문. 날로 거세지는 당나라의 위협. 수나라에 이어 중국에는 당나라가 들어섰어요. '고구려는 수나라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던 강한 나라야.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수나라와 똑같이 되고 말 거야!' 당나라는 처음 몇 년 동안은 고구려와 평화롭게 지냈어요. 하지만 태종이 황제가 된 후, 두 나라는 사이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태종은 주변의 모든 나라를 차지하려는 당찬 생각을 가지고 차츰차츰 땅을 넓혀 갔어요. 고구려는 점점 강해지는 당나라에 맞설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랴오허 강 주위의 국경에 천리장성도 쌓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하 나라가 될 것을 요구했어요. 우리 당나라의 신하 나라가 될 기회를 주겠다! 우리 고구려를 만만하게 보다니. 당나라에 기죽지 않은 연개소문 영류왕과 평양의 귀족들은 잠시 동안 당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더라도 힘이 센 당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연개소문은 절대 당나라에 무릎을 꿇어선 안 된다고 당당히 맞섰지요. 싸움이 계속되자 연개소문을 싫어하던 귀족들은 영류왕과 짜고 연개소문을 몰래 죽이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연개소문이 먼저 왕과 귀족들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지요.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대막리지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어요. 이렇게 해서 왕이 된 어린 보장왕 뒤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지요.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청했어요. 그러자 당나라는 고구려를 위협했어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지 않으면, 고구려로 쳐들어가겠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너희가 쳐들어오면 끝까지 맞서 싸울 테다." 이렇게 고구려와 당나라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맞섰어요. 안시성 싸움으로 당나라를 몰아내다. 당나라를 몰아내다 연개소문이 강하게 맞서자 당나라 태종은 그동안 미루어 오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했어요. 당나라군은 거침없이 공격해 왔어요. 그리고는 마침내 요동성 주위를 에워쌌어요. 고구려군은 요동성을 꿋꿋이 지켰어요. 하지만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당나라군의 불화살에 그만 요동성 안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지요. 결국 고구려군은 요동성을 당나라군에게 내어 주었어요. 요동성에 이어 다른 고구려 성들도 하나둘 무너져 갔어요. 하지만 연개소문도 가만 있지는 않았어요. 당나라군을 둘러싸고 식량이 지나다니는 걸 막았어요. 식량이 떨어지자 당나라군은 안시성으로 공격해 왔어요. 하지만 이곳엔 성주 양만춘이 있었어요. 양만춘은 당나라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어요. 드디어 고구려에 앙갚음을 할 때가 왔다. 고구려로 쳐들어가서 연개소문을 혼내 주자! 무너진 흙산이 고구려를 돕다. "안시성 성벽 앞에 흙산을 높이 쌓아라! 흙산 위에서 성을 공격하자!" 당나라군이 흙산을 쌓기 시작했어요. 60일이 지나자 흙산은 어느덧 안시성 성벽보다 높아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흙산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어요. 그 바람에 흙산과 안시성의 성벽이 맞닿게 되었지요. "흙산이 무너졌다.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흙산을 차지하자!"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흙산을 차지해 버렸어요. 갑작스런 사고로 흙산을 빼앗긴 당나라군은 다시 기운을 잃었어요.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은 점점 길어졌어요. 점점 매서운 추위도 몰려왔지요. 이렇게 되자 당나라군은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어요. '안시성처럼 작은 성 하나 제대로 손에 넣지 못하다니. 이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당나라 태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요. 하지만 안시성 싸움에서 진 당나라군은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지요. 흙산이 무너지니 당황하는군. 하하. 이크, 돌아가자! 고구려의 튼튼한 성 중국의 큰 나라들은 수많은 군사와 우수한 무기를 갖고도 고구려를 쉽게 이기지 못했어요. 고구려의 성이 매우 튼튼했기 때문이지요. 중국의 성이 주로 평지에 벽돌을 쌓아 만든 것과 달리, 고구려의 성은 자연환경을 이용해 돌을 쌓아 만들었어요. 이런 고구려의 성에는 '치'와 '옹성' 이 있었지요. 치는 성을 둘러싼 성벽 중, 볼록 모양으로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에요. 앞쪽과 왼쪽, 오른쪽에서 오는 적을 막기에 좋았어요. 또 옹성은 성문을 둥그렇게 말아 쌓은 것인데 적군을 가두어 무찌르는 데 쓸모가 있었지요. 추운 집을 따끈따끈하게 해 주는 온돌. 고구려 사람들은 온돌을 만들어 추위를 이겨 냈어요. 그런데 당시의 온돌은 방 한쪽에 흙으로 긴 굴을 만들어 아궁이에 장작을 때어 썼어요. 그러면 연결된 통로를 따라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지요. 온돌을 쓴 사람들은 평민들이었어요. 허름한 집에 사는 평민들에게는 추운 집을 따뜻하게 해 주는 온돌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온돌은 점차 남쪽의 백제, 신라에까지 퍼져 나갔지요. 고구려 사람들의 먹을거리.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비옥한 땅이 적어 곡식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사냥해서 잡은 동물의 고기를 곡식과 함께 먹었지요. 얼마 나지 않는 쌀은 아무나 먹을 수 없었어요. 높은 귀족들만 먹을 수 있었지요. 반면 평민들은 조, 콩, 밀과 같은 것을 먹었어요. 고구려 귀족들은 동해에서 나는 해산물도 즐겨 먹었어요. 동해안에 있는 옥저를 공격해서 특산물을 바치게 했기 때문이지요. 거문고를 만든 왕산악. 중국에서 일곱 줄이 있는 악기를 고구려에 보내 왔어요. 하지만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지요. 결국 나라에서는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어요. 그때 왕산악이 나섰어요. 왕산악은 그 악기를 새롭게 고쳐 만들었고 멋지게 연주를 했지요. 왕산악의 연주가 시작되자 어디선가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이 악기를 거문고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신분을 극복한 사랑 바보온달과 평강 공주. 온달산성 거문고 평원왕에게는 평강 공주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어요. 평강 공주는 어릴 적 엄청난 울보였지요. 공주가 울 때마다 왕은 공주에게 말했어요. "어허, 이렇게 자꾸 울면 다음에 바보 온달한테 시집보낼 거야. 뚝!" 평강 공주가 어른이 되자 평원왕은 평강 공주를 높은 귀족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어요. 그러자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요.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냈어요. 궁궐을 나온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을 했지요. 온달은 홀로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청년이었어요. 평강 공주와 혼인한 온달은 열심히 학문과 무예를 닦았어요. 그리고는 마침내 나라의 사냥 대회에서 일등을 했지요. 그리고 중국의 후주와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어요. 그러자 평원왕은 온달을 사위로 받아들였어요. 이후에도 온달은 전쟁터에서 큰 활약을 했어요. 그러다가 신라군과 싸우던 아차산에서 안타깝게 죽고 말았답니다. 사냥에 나를 당할 사람은 없어. 무너진 고구려, 다시 일어서라! 신라가 당나라와힘을 합해 고구려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크게 흔들렸어요. 게다가 연개소문이 죽자, 왕의 자리를 놓고 연개소문의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나라는 어지러웠어요.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 쳐들어온 나 당 연합군에 고구려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요. 하지만 고구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고구려의 유민들은 계속해서 고구려를 다시 세우려 노력했어요. 그렇게 해서 세워진 나라가 발해예요.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웁시다! 힘을 보태겠소. 김춘추의 부탁을 절한 연개소문. 쌀쌀 맞은 연개소문의 대답.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자 백제는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어요. 그리고 급기야 신라 왕족 김춘추의 사위가 지키던 대야성을 빼앗아 버렸지요. 이 싸움으로 사위와 딸을 잃어버린 김춘추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다짐했지요. '반드시 백제를 무찔러 내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혼내 달라고 부탁했지요. 하지만 연개소문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왜 우리가 아무 얻는 것도 없이 백제를 공격하겠는가?"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고 나서 말했어요. "만약 저희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고구려에 불행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하지만 연개소문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딱 잘라 말했어요. "죽령의 북쪽은 원래 우리 고구려의 땅이오. 그런데 지금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소. 그 땅을 돌려준다면 신라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꾀를 내어 신라로 돌아간 김춘추. 죽령의 북쪽은 신라에게 아주 중요한 땅이었어요. 만약 죽령을 고구려에게 돌려준다면 신라는 백제보다 더 무서운 고구려를 코앞에 두어야 했지요. "그건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요구에 한 발 물러섰어요. 화가 난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가두어 버렸어요. 갇힌 김춘추는 고구려 귀족인 선도해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선도해는 김춘추를 도와 한 가지 꾀를 내게 했지요. 바로 연개소문에게 거짓으로 땅을 돌려준다는 약속이었어요. "제가 신라로 돌아가서 선덕 여왕께 죽령의 북쪽 땅을 고구려에게 돌려주자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간신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죽령의 북쪽을 돌려준다면 신라와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안 되겠다. 그냥 돌아가자! 나 당 연합군이 만들어지다. 신라와 당나라가 힘을 합치다. 간신히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다짐했어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서해를 건너야겠다. 신라가 살아남는 길은 바다 건너의 당나라와 손을 잡는 방법밖에 없어.' 김춘추는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어요. '당나라를 어떻게 끌어들여야 할까?' 김춘추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옳지! 당나라는 지금 고구려를 쓰러뜨릴 궁리만 하고 있으니 우리 신라를 먼저 도와 백제를 물리쳐 주면 우리가 당나라를 돕겠다고 하면 되겠군.' 서해를 건너 당나라의 황제 태종을 만난 김춘추는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당나라의 태종은 백제에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 한 통만을 써 주겠다고 했지요. 그러자 김춘추는 당나라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했어요. "지난날, 당나라가 안시성 싸움을 비롯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진 이유는 식량을 나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나라가 우리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로 쳐들어간다면 신라가 식량을 대겠습니다." 당나라의 태종은 김춘추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어요. 결국 신라와 당나라는 나 당 연합군을 만들기로 결정했지요. 그리고 나중에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면 대동강의 남쪽 땅은 신라가, 대동강의 북쪽 땅은 당나라가 나눠 갖기로 약속했어요. 꺼지는 불꽃, 고구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그 이듬해 고구려를 공격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고구려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어요. 몇몇 당나라 군사들만이 겨우 목숨을 건진 채 당나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까지 공격을 계속하자, 고구려의 힘은 날로 약해져 갔어요. 그리고 계속되는 흉년으로 나라의 살림살이도 어려워졌지요. 어느덧 연개소문도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다가왔어요. 연개소문은 세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어요. 당나라와신라가 우리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서로 힘을 모아 고구려를 지키거라!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 사이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었어요. 고구려는 점점 힘을 잃어갔어요. 고구려, 70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다.연씨 형제들 사이의 다툼 연개소문의 자리는 큰아들 남생이 이어받았어요. 남생은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평양성을 떠났어요. 그러자 연씨 형제들 사이를 벌여 놓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남생은 아우인 두 분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형의 자리를 빼앗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목숨을 잃을 겁니다." 이 말에 속아 넘어간 남건과 남산은 남생이 없는 틈을 타서 형의 자리를 빼앗았어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남생은 깜짝 놀랐지요. "아니, 이 녀석들! 감히 형의 자리를 넘보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 하지만 남생에게는 군사가 얼마 없었어요. 그래서 우선은 국내성으로 피했지요.형인 나를 우습게 여기다니. 형도 우리를 의심했지 않습니까? 얼마 뒤, 남건과 남산은 군사를 보내 남생을 공격했어요. 싸움에서 지자 화가 난 남생은 당나라로 찾아가 항복해 버렸어요. 어이없이 무너진 고구려. '연개소문도 죽고 그의 맏아들마저 우리 당나라에 항복했으니, 이제 고구려도 얼마 남지 않았군.' 당나라는 이때가 고구려를 물리칠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당나라는 즉시 고구려를 공격했어요. 이때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간 사람은, 다름 아닌 남생이었지요. 고구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생이 앞세운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성들을 손에 넣고 평양성을 향했어요. 신라군도 이를 도와 평양성으로 출발했지요. 적들에게 둘러싸인 고구려의 평양성은 마침내 배신자가 성문을 열어 준 탓에, 668년, 결국 나 당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어요. 이것으로 700년의 역사를 이어 나가며 동북아시아를 크게 호령했던 고구려가 형제들 사이의 자리다툼으로 어이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지요. 전쟁에서 이긴 당나라군은 보장왕과 20만 명의 고구려 사람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고구려 땅에 안동 도호부를 만들어 고구려를 직접 다스리려고 했어요. 괘씸한 녀석들, 두고 보자! 고구려를 되살리자! 당나라에 맞서는 고구려의 유민들. 보장왕의 항복으로 고구려는 무너졌지만, 압록강의 북쪽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의 많은 유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당나라군과 맞서 싸웠어요. "보장왕은 백기를 들었지만, 그건 왕과 귀족들이 항복한 거야. 우리들은 끝까지 당나라에 맞설 거야!"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군에 맞서자, 당나라는 유민들을 중국 안쪽으로 끌고 갔어요. 하지만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려는 유민들은 줄지 않았어요. 아니 점점 더 많아졌어요. 나라는 사라졌지만 고구려의 힘은 고구려 유민들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어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은 발해 고구려 관리였던 검모잠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았어요. 그리고 한성,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자리를 잡고 활발하게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러면서 고구려의 왕족 안승을 왕으로 떠받들었어요. "폐하, 이제 당나라를 물리치고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아야 합니다!" 안승과 검모잠, 고연무는 힘을 합쳐 평양성에 있던 당나라군을 몰아냈어요. 이렇게 힘을 합쳐 처음에는 큰 성과도 거두었지요. 하지만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이때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서 벗어나 고구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어요. 그리고 698년,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지요. 마침내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나갈 나라가 세워진 거예요.
백제 2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다시 일어서는 백제. 백제는 개로왕때, 고구려군에게 수도 위례성이 있는 한강 유역을 빼앗기며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수도도 웅진성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무령왕의 노력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백제는 성왕 때에는 나라의 힘을 되찾았지요.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신라와 힘을 합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어요. 하지만 백제는신라에게 배신을 당해 또다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왕권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시키는 데 힘쓰겠다. 예,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구려에 무릎을 꿇다. 고구려의 신하 나라가 된 백제. 391년, 고구려의 왕이 된 광개토 태왕은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먼저 백제 북쪽 서해안에 있는 관미성을 공격하여 차지했지요. '다른 나라로 가는 길목인 관미성을 빼앗겼으니 큰일이군. 이제 곧 백제성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겠어.' 백제는 큰 위기감을 느꼈어요.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군에 맞서기 위해 왜에 군사를 보내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광개토 태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는 번번히 지고 말았어요. "폐하, 또 고구려군이 물밀듯 쳐들어옵니다. 얼른 성을 빠져나가 몸을 피하십시오!" "아니다. 이미 늦었어. 나라를 살리려면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다." 고구려군이 위례성을 둘러싸자, 아신왕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나가 광개토 태왕에게 무릎을 꿇었어요. "우리 백제는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를 섬기겠습니다." 광개토 태왕은 백제의 항복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 귀족 열 명을 볼모로 끌고 갔어요. 이렇게 백제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신하 나라가 된 거예요. 내 할아버지이신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내가 왔다! 고구려에 맞선 백제. 광개토 태왕이 세상을 떠난 후 장수왕이 고구려를 다스렸어요.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남쪽과 더 가까운 평양으로 옮겼지요. 이렇게 되자 백제와 신라는 두려움에 떨었어요. "아니, 북쪽의 넓은 땅을 놔두고 왜 남쪽으로 내려오는 거야?" 두려움에 떨던 백제와 신라는 힘을 합쳐 고구려에 맞서기로 했어요. 나 제 동맹이 맺어진 거예요. 이에 화가 난 장수왕은 군사들을 보내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백제와 신라는 서로 도와 고구려의 공격에 맞섰어요. 한편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북위는 백제의 청을 거절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어요.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약속하더니. 백제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어! 혼쭐을 내 줘야지!' 화가 난 장수왕은 백제로 쳐들어왔어요. 백제의 위례성은 금세 고구려군에게 둘러싸였지요. "아들아! 너는 어서 신라로 가서 병사들을 요청하거라." 백제의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신라로 보내고 고구려군에 맞서 싸웠어요. 하지만 결국 성 밖으로 도망치다 붙잡혀 아차산 아래에서 죽고 말았어요. 위례성을 잃고 웅진성으로. 위례성을 빼앗긴 백제의 눈물 백제의 왕자 문주는 신라에서 1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어요. 하지만 위례성은 이미 무너지고 난 뒤였어요. 위례성 성문 위에는 고구려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지요. 그때 상처를 입은 채 숨어 있던 신하들이 문주를 보고 달려 나왔어요. "왕자님, 살아계셨군요. 위례성은 고구려군에게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그리고 왕께서는 적들의 손에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흑흑." "아아,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백제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문주는 땅을 치며 슬피 울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었지요. 이제 위례성은 고구려의 것이 되었다! 나쁜 고구려 놈들, 내 아버지를 죽이고 위례성까지 빼앗아 가다니.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긴 문주왕. 문주는 살아남은 신하와 군사,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어요. 고구려군을 피해 멀리 내려가야만 했지요. "수도는 웅진성으로 정하겠소. 웅진성은 금강을 끼고 있어 바다로 나가기 좋고, 주변에 산이 높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에도 알맞은 곳이오." 문주는 왕의 자리에 오른 다음, 수도를 웅진성으로 정했어요. 문주왕은 열심히 나라의 힘을 키워 고구려에 복수하기로 결심했어요. 하지만 백제의 힘과 왕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이런 틈을 타 권력을 잡으려는 귀족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지요. 나라 안은 싸우는 귀족들로 몹시 시끌시끌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문주왕이 해구라는 귀족에게 목숨을 잃었어요. 아버지의 원수도 갚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지요. 문주왕이 죽자 백제는 계속되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점점 더 어지러워졌어요. 이제부터 웅진성을 우리의 수도로 삼겠다. 백제가 다시 일어서다. 백제를 다시 일으킨 무령왕. 귀족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죽은 문주왕에 이어 문주왕의 조카가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동성왕이에요. 하지만 동성왕도 백가라는 사람에게 죽음을 당했지요. 그러자 백제는 또다시 어지러워졌어요. 이 시기에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무령왕이었어요. 무령왕은 마흔 살의 늦은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잘생기고 너그러워서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어요. 왕이 된 무령왕은 먼저 동성왕을 죽인 백가를 죽이고 왕권을 강하게 했어요. ‘백제의 옛 영광을 되살리려면 왕권을 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해.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겠군!’ 무령왕은 왕족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려 왕권을 강하게 했어요. 또 농사를 돌보고 백성들을 보살펴 나라의 살림살이도 가다듬었지요. 이 소문이 퍼지자 전쟁과 굶주림으로 도망갔던 농민들이 하나둘씩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내가 백제의 옛 영광을 꼭 되살리리라. 자신감을 되찾은 백제. 그 무렵 중국 남쪽에는 양나라가 있었어요. 무령왕은 양나라와 관계를 맺고 많은 문물을 들여왔어요. 그러자 자연히 백제의 문화도 풍성해졌어요. 여전히 고구려군은 여러 차례 백제로 쳐들어왔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무령왕은 용감히 싸워 적의 공격을 막아 냈지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고구려군에게 이기기도 했어요. "우리 백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무찌르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몇 번의 승리로 무령왕은 점차 자신감을 얻었어요. 나라를 안정시킨 무령왕은 나라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해 각 지방에 22담로를 보내기로 했어요. 왕자나 왕의 가족들을 보내 그 지방을 직접 다스리게 한 거예요. 그러자 왕의 명령이 훨씬 강하게 전해져 왕의 힘과 나라의 힘도 더 강해질 수 있었지요. 백제도 만만치 않군. 터가 넓은 사비성으로 수도를 삼다. 터가 넓은 사비성이 새로운 수도로. 원래 백제는 가야 연맹을 간섭하는 힘센 나라였어요. 그런데 백제가 위례성을 빼앗겨 수도를 웅진성으로 옮기자, 가야는 힘이 약해진 백제의 말을 잘 듣지 않았지요. 하지만 백제는 무령왕을 거쳐 성왕때에 이르러 예전의 강한 힘을 되찾았어요. 그래서 다시 가야 연맹을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백제의 성왕은 가야 연맹을 이끌고 있던 대가야를 공격해서 서쪽 지역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그곳에 성을 쌓고 백제군을 두었어요. 백제가 가야 지역에서 예전의 힘을 되찾자 성왕의 자신감도 커졌어요. 그래서 한강 유역과 위례성을 되찾으리라 다짐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백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지요. '웅진성은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비좁지. 이제 고구려의 공격이 두렵지 않으니 수도를 넓은 곳으로 옮겨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겠어!' 오랜 생각 끝에 성왕은 수도를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옮겼어요. 금강을 끼고 있는 사비성은 웅진성보다 터가 넓어서 백성들이 살기에 보다 편안한 곳이었지요. 성왕의 노력으로 힘을 되찾은 백제.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긴 성왕은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어요. 백제가 고구려처럼 부여에서 직접 갈라져 나왔음을 알리고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거예요. 성왕은 백제의 정치도 새롭게 바꾸었어요. 전국을 다섯 개의 '방' 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과 '성'을 두었지요. 그리고 수도인 사비성도 다섯 개 구역으로 나누었어요. 또 많은 승려를 뽑아서 나랏일에 참여하게 하였고, 불교를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해 많은 절도 세웠지요. 성왕은 동맹 관계에도 정성을 쏟았어요.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튼튼히 하였고, 남중국과도 친하게 지냈지요. 그리고 왜에도 사신을 보내 그동안의 관계를 계속해 나갔어요. 이런 성왕의 노력으로 백제는 예전의 힘을 되찾아 강한 나라로 다시 태어났어요. 신라에 배신당한 성왕. 한강의 하류는 백제가, 상류는 신라가. 백제를 다시 꽃피운 성왕에게는 평생의 꿈이 있었어요. 바로 개로왕 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는 것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성왕의 꿈을 이룰 기회가 찾아 왔어요. 고구려에서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나 왕이 죽고 귀족들 사이에서 큰 싸움이 일어난 거예요.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에게 함께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자고 했어요. 진흥왕은 땅을 넓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보내 주었지요. 뿐만 아니라 성왕은 가야 연맹의 군사들까지 불러 모았어요. 힘을 합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했어요. 그리고 전쟁에서 이겨 백제는 한강의 하류 지역을, 신라는 한강의 상류 지역을 차지했지요. 정치가 어지러우면, 나라의 힘도 약해지지. 바로 지금이 고구려를 칠 때야. 성왕의 죽음.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아 매우 기뻤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하게 되었지요. 바로 신라가 성왕을 배신한 것이었어요. 신라가 백제를 갑자기 공격해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의 하류 지역을 빼앗았어요. 백제는 분하고 억울했어요. 한강 유역을 다 차지해서 중국과 직접 교역하려는 신라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던 거예요. '함께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가 어찌 백제를 배신한단 말인가!' 이렇게 120년 동안 유지되었던 나 제 동맹은 깨지고 말았어요. 신라는 백제의 원수 나라가 된 거예요. 백제는 군사들을 모두 모아 신라를 공격했어요. 왕자 창이 먼저 군대를 이끌고 관산성을 공격했어요. 하지만 쉽게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러자 왕자를 격려하기 위해 성왕이 얼마 되지 않는 군사들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지요. 성왕이 관산성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군은 길목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을 했어요. 안타깝게도 성왕은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던 성왕의 꿈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요. 우리를 배신한 신라를 가만두지 않겠다! 약속은 했지만 한강 하류 지역도 욕심나니 어쩔 수 없지. 백제의 보물이 가득가득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의 스물다섯 번째 왕인 무령왕의 무덤이에요.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백제의 보물 창고이지요.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관 장식, 금 목걸이와 귀걸이, 청동 거울과 같은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남중국의 도자기, 인도식 유리 구슬, 일본 소나무로 만들어진 관과 같은 세계 곳곳의 유물도 발견되었지요. 백제 사람들이 즐겨 먹은 먹을거리. 백제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과 비슷한 먹을거리를 먹었어요. 서로 같은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백제 사람들은 곡식과 채소로 밥과 반찬을 만들고, 떡을 쪄서 먹었어요. 그리고 녹차도 마셨다고 해요. 또 발효 기술이 발달해서 술, 간장, 된장, 젓갈도 많이 먹고, 백김치도 많이 먹었지요. 전라북도 익산에는 백제 후기의 대표적 절터인 미륵사터가 있는데, 절터에서 1미터가 넘는 크기의 토기들이 발견되었어요. 이 커다란 토기는 백제의 김장독으로 생각되고 있어요. 백제 최고의 공예품 금동 대향로.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는 금동 대향로는 백제의 성왕을 제사 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용의 모습이 발톱 하나, 비늘 하나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요. 그리고 향로 위에는 복스럽고 좋은 일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새 봉황이 꼿꼿하게 서 있지요. 그리고 향로에 새겨진 산과 시냇물, 여러 사람들과 동물들의 모습 속에서 신선처럼 동물들과 어울려 살고 싶어 했던 백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요. 바둑을 잘 둔 고구려의 첩자.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위례성을 공격하기 전에 바둑을 잘 두는 승려 도림을 첩자로 백제에 보냈어요. 바둑을 좋아했던 개로왕은 도림과 바둑을 두며 나랏일을 게을리했어요. 어느 날, 도림은 개로왕을 부추겼어요. "폐하, 궁궐이 초라하여 폐하와 어울리질 않습니다. 커다란 궁궐을 지어 폐하의 위엄을 보이십시오." 도림의 말을 그대로 믿은 개로왕은 백성들을 시켜 무리하게 궁궐을 다시 짓게 하고, 계속 공사를 벌였어요. 그러자 백성들은 개로왕을 원망하기 시작했어요. 이 틈을 타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위례성을 공격했어요. 이리하여 고구려는 손쉽게 위례성을 차지할 수 있었지요. 남편만을 사랑한 도미의 부인. 개로왕 때, 백제에는 도미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도미의 부인은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요. 그래서 개로왕은 도미의 아내를 빼앗기로 마음먹고, 도미를 몰래 붙잡아 둔 뒤 밤에 도미의 부인을 만나러 갔어요. 하지만 도미의 부인은 꾀를 내어 여자 노비를 방으로 들여 보냈어요. 그리고 개로왕을 피해 도망갔지요. 속은 것을 알게 된 개로왕은 도미를 벌하여 장님으로 만들고 작은 배에 태워 강물에 띄워 보냈어요. 그리고 도미의 부인을 궁궐로 끌고 왔지요. 그러나 도미의 부인은 다시 한 번 꾀를 내어 도망쳤어요. 그리고 나루터로 달려갔어요. 슬피 우는 도미의 부인 곁에 조그만 배 한 척이 떠내려 왔어요. 배를 탄 도미의 부인은 도미를 만나게 되었지요. 두 사람은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나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네가 예쁘기로 소문난 도미의 부인이구나. 사그라드는 백제의 불꽃. 신라의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어요. 그래서 무왕과 의자왕 초기에는 신라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의자왕이 무리하게 공격을 계속하자 나라의 힘은 차츰 약해졌어요. 그래서 나 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하지 못했지요. 결국 백제는 나 당 연합군의 공격에 스르르 무너지고 말았어요. 저것 좀 봐! 궁녀들이 떨어진다. 슬프구나. 산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야 하다니. 어려움에 빠진 백제. 관산성에서 성왕이 죽은 후 백제는 크게 어지러워졌어요. 왕을 잃고 힘이 빠진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다시 크게 져 많은 병사들이 죽었지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사비성으로 돌아온 왕자 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위덕왕이에요. 위덕왕은 여러 차례 신라를 공격하였어요. 하지만 신라군이 워낙 잘 막아 냈기 때문에 별로 얻는 게 없었어요. '아버지의 원수 신라에 복수를 해야 하는데, 쉽지 않구나. 죽어서 아버지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위덕왕 이후의 왕들도 신라로 자주 쳐들어갔어요. 하지만 큰 공을 세우지 못한 채 일찍 죽고 말았지요. 무왕의 매서운 공격. 600년에 왕의 자리에 오른 무왕은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신라를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 나라의 힘이 세지려면 왕권을 키우고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야 해." 무왕은 왕권을 보여 주기 위해 수도인 사비성에 '왕이 흥하라' 는 뜻의 왕흥사라는 절을 지었어요. 또 사비성 부근에 있는 익산에 미륵사라는 큰 절도 지었지요. 미륵 부처는 언젠가 이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님이에요. "나는 미륵 부처를 만나 미륵사를 짓게 되었다. 미륵 부처가 오셨으니 이제 우리 백제는 더욱 좋아질 것이다. 내가 그런 나라를 만들 것이다." 백성들은 부처님을 공경하듯 무왕을 떠받들었어요. 이렇게 나라의 힘이 커지자 무왕은 신라를 매섭게 공격했어요.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고 성왕의 복수를 하자!" 무왕이 자꾸만 공격하자 신라도 점점 지쳐 갔지요. 신라는 혼자 힘으로 백제를 맞서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어요. 할 수 없이 신라의 진평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와 달라 청했어요.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로 신라를 도와 줄 형편이 못 되었지요. 이렇게 되자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점점 유리해졌어요. 백성들의 마음이 모아졌으니 이제 왕권이 강해지는 것도 시간 문제군. 신라의 대야성을 빼앗다. 나라 안을 잘 가다듬은 의자왕. 무왕의 뒤를 이어 무왕의 맏아들이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의자왕이에요. 의자왕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어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지요. 왕의 자리에 오른 의자왕은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어요.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빼고는 죄수들도 모두 풀어 주었지요. 의자왕은 호시탐탐 왕에게 덤비려는 기회를 엿보는 귀족 40명을 쫓아내며 왕권을 강하게 했지요. 이렇게 나라 안을 가다듬은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했어요. 이 싸움에서 백제군은 신라와 닿아 있는 곳에 있는 성 40여 개를 빼앗았지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한강 유역을 다시 되찾고 신라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 무왕께서 못다 이루신 평생의 꿈이다." 이 신라의 성들이 모두 백제의 차지다! 대야성 싸움의 승리. 의자왕은 윤충 장군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했어요. 지금의 합천 지역에 있던 대야성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 모두에게 중요한 곳이었지요. 백제가 쳐들어오자 신라 역시 대야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병사들을 보냈어요. 윤충은 거센 공격으로 마침내 대야성을 빼앗았어요. 그때 대야성은 신라의 장군 김품석이 지키고 있었었요. 그는 왕족 김춘추의 사위였지요. 성을 빼앗기자 김품석과 그의 부인이 항복하러 나왔어요. 하지만 윤충은 그들을 죽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로 돌아왔어요. 백제가 대야성에서 승리하자 백제는 한동안 축제 분위기였어요. 대야성의 승리는 성왕의 죽음 이후 가장 큰 승리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의 슬픔은 너무나 컸어요. '내 기필코 백제를 무너뜨려 내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 김춘추는 굳게 결심했지만 백제를 이기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어요. 전쟁에서 중요한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백제를 이기기가 더욱 쉽지 않았지요. 신라는 다시 대야성을 빼앗을 좋은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백제의 영웅 계백. 나 당 연합군을 만든 김춘추. 대야성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백제는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어요. 그때 신라를 다스리던 선덕 여왕은 백제의 공격이 계속되자 고민이 많았어요. "폐하, 제가 고구려에 가서 도와줄 병사를 청하고 오겠습니다." 백제군에게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백제에게 복수도 하고 나라도 구하고 싶은 생각에 발 벗고 나섰지요.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만난 김춘추는 군사를 보내 달라 부탁했지만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청을 물리쳤어요. 대신 신라의 죽령 이북의 땅을 내어 주면 신라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김춘추는 신라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달라고 하는 연개소문의 말을 따를 수 없었어요.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고심 끝에 이번에는 바다 건너 있는 당나라로 갔어요.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지기만한 당나라의 황제 태종은 신라를 도와주면 당이 고구려를 물리치는 것을 돕겠다는 김춘추를 반갑게 맞이했어요. 두 사람은 나 당 연합군을 만들자고 약속했지요. 내 목숨을 바쳐 백제를 지킬 것이다.
신라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는 처음에는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하지만 내물왕 때에 왕권이 세지면서 김씨만 왕이 되었지요. 신라는 나라의 힘을 키워 나라 밖으로도 땅을 넓혀 갔어요. 하지만 가야 왜 연합군의 공격으로 크게 흔들리게 되었지요. 그 뒤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신라는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치게 되었어요. 내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라오.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 왔소. 서라벌의 왕이 된 박혁거세.사로국에 찾아든 이상한 빛. 지금의 경주가 있는 곳에 삼한의 하나였던 진한이 있었어요. 진한에는 열두 개의 나라가 있었지요. 그 가운데 사로국은 여섯 마을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였어요. 이 여섯 마을은 각각 나이와 경험이 많은 촌장들이 다스리고 있었어요. 어느 날 촌장들은 알천이라는 곳에 모여 마을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우리에게 왕이 없다 보니 마을의 질서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우리 여섯 마을을 모두 다스릴 강한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바로 그때, 남쪽 하늘에서 번개와 같은 이상한 빛이 땅을 비추었어요. 여섯 촌장들은 빛이 번쩍이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지요. 빛이 비춰진 곳은 나정이라는 우물 옆이었어요. 우물 가까이 가자 우물 옆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흰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을 하는 거였어요. 촌장들은 조심스레 말에게 가까이 다가갔어요. 그러자 흰말은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말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색 알 한 개가 남아 있었어요. "아무래도 보통 알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한번 깨뜨려 봅시다." 사내아이 혁거세와 여자아이 알영의 탄생. 촌장들이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어요. 아이의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다웠지요. 그 아이를 동쪽 개울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빛이 났어요. 이어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면서 아이를 따라 오고, 하늘과 땅이 같이 흔들렸어요. 해와 달은 더욱 환하게 밝아졌지요. "이 아이가 나온 알의 모양이 마치 박처럼 생겼으니 성을 박씨로 합시다." "그러면 아이의 이름은 세상을 온통 밝게 한다는 뜻의 혁거세라 하는 것이 좋겠소." 촌장들은 아이에게 박혁거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그리고 마을로 데려가 잘 키웠지요. 한편 박혁거세가 태어난 날, 이웃 마을 알영정이란 우물가에서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닭의 머리를 가진 용이 왼쪽 갈비에서 알을 낳은 거예요. 그리고 얼마 후 이 알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어요. 사람들은 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처럼 '알영' 이라 지었지요. 두 아이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사내아이 박혁거세는 왕이 되고, 여자아이 알영은 왕비가 되었어요. 그리고 수도를 금성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하였어요. 이때가 기원전 57년의 일이었어요. 박·석·김씨가 번갈아 왕이 되다. 서라벌의 세 번째 왕 이사금. 박혁거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남해가 왕이 되었어요. 남해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는데, 석탈해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궤에 버려져 바다를 떠돌다가 서라벌에 온 사람이었지요. 석탈해는 재주가 많기로 소문이 나서 왕의 사위까지 되었어요. 남해는 죽으면서 아들인 유리에게 말했어요. "덕이 많은 탈해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도록 해라." 남해의 유언이 있었지만 탈해는 남해의 아들 유리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했어요. 하지만 유리가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며 미루자 탈해가 말했어요. "지혜가 많은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합니다. 떡을 물어 나타난 이의 개수를 보고 왕의 자리를 정합시다." 두 사람이 떡을 한 입 베어 물자 떡에 잇자국이 또렷이 남았어요. 잇자국을 세어 보니 유리가 가진 이의 수가 더 많았지요. 그래서 유리는 이사금이라는 칭호로 서라벌의 세 번째 왕이 되었어요. 번쩍거리는 황금빛 궤에서 나온 김알지. 유리왕이 죽은 뒤, 석탈해가 왕이 되었어요. 석탈해가 왕이 된 지 9년째의 일이었어요. 수도인 금성 서쪽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려 신하인 호공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하였어요. 호공이 숲에 가 보니 흰 닭이 울고 있는 나무 위에 황금빛 궤가 걸려 있었어요. 궤에서는 눈부신 빛이 나오고 있었지요. 호공이 탈해왕에게 보고 온 것을 이야기하자 탈해왕이 말했어요. "참 신기한 일이로군. 내가 직접 가서 황금빛 궤를 보아야겠다." 숲으로 가서 그 황금빛 궤를 열어 보니 궤 안에는 사내아이가 있었어요. "이 아이는 하늘이 내려 준 아이다. 이 아이를 궁궐로 데리고 가서 귀하게 길러야겠다." 탈해왕은 금으로 된 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아이의 성을 '김' 으로 하고, 이름을 '알지' 라고 지어 주었어요. 탈해왕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올 때 하늘에서는 온갖 새가 날고, 땅에서는 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따라왔지요. 세상에! 황금빛 궤에 아이가 들어 있다니! 안으로는 왕권을 강하게, 밖으로는 땅을 넓게.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신라는 나라가 만들어진 초기에는 박혁거세와 석탈해, 김알지가 왕이 되었듯이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되었어요. 그 뒤 4세기에 김알지의 후손이었던 내물왕이 왕이었을 때였어요. 내물왕은 왕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벌였어요. 먼저 왕의 칭호를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고쳤어요. "내가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마립간은 으뜸가는 지배자란 뜻이다." '마립' 은 특별한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뜻하고, '간' 은 우두머리를 뜻하지요. 그러니까 내물왕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는 내물 마립간이라고 불렸던 거예요. 이렇게 최고의 지도자를 마립간으로 칭호를 바꾼 내물왕 때에는 이전 어느 왕 때보다 왕권이 세졌어요. 왕권을 강하게 한 내물 마립간. 내물왕, 즉 내물 마립간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왕들의 힘도 강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왕권이 보다 더 강하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해. 나는 내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줄 테다." 그래서 내물왕은 김씨만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했어요.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올랐던 것을 김씨만 왕이 되도록 한 거예요. 안으로 자신의 힘을 키운 내물왕은 밖으로 눈을 돌렸어요. 그리고 군사의 힘을 길러 주변 지역을 합쳐 나갔어요. 내물왕의 노력으로 신라는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힘을 길러가던 신라는 남쪽의 가야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여섯 개의 가야가 연맹을 이루고 있었어요. 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나 철로 만든 물건들로 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있었어요.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친 신라. 신라를 도운 고구려군. 신라는 내물왕 때 주변 지역을 조금씩 차지하면서 땅을 넓혀 갔어요. 한편 신라가 가야의 땅에 넘어오자 가야는 신라를 공격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가야에서 많이 나는 철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들고 말을 타며 싸울 수 있는 철갑 기병들을 준비시켰지요. 이때 가야 군대에는 가야를 돕기 위해 왜에서 온 군사들도 있었어요. 가야가 왜에 없는 철을 전해 준 보답으로 왜가 보낸 군대였지요. 신라를 도와 주기 위해 우리 고구려군이 왔다! 고구려군 때문에 안 되겠군. 마침내 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했어요. 가야 왜 연합군의 거센 공격에 어려움에 처한 신라는 급하게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어요. "고구려 태왕 폐하! 지금 저희 신라는 가야 왜의 연합군과의 싸움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광개토 태왕은 신라를 도와주기 위해 많은 군대를 보내 주었어요. 힘센 고구려군 앞에서 가야 왜 연합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지요. 결국 가야 왜 연합군은 고구려군에 크게 지고 뿔뿔이 흩어졌어요. 신라의 또 다른 골칫거리 신라를 구하러 온 고구려군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더 깊숙이 가야로 쳐들어가 금관가야까지 공격했지요.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금관가야는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어요. 한편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나라의 큰 위기를 넘겼지만 또 다른 걱정이 생겼어요. '광개토 태왕이 보내 준 군대 덕분에 우리 신라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 뒤로 고구려가 우리 신라의 일에 이것저것 간섭을 하니 앞으로가 또 걱정이군.' 고구려는 신라 땅 곳곳에 고구려 군대를 머무르게 했어요. 그리고 신라의 나라 살림살이에 대해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했지요.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도 고구려의 승낙을 받게 했어요. '요즘엔 고구려 녀석들이 우리 신라를 신하 나라로 아는군. 하루빨리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나라를 세운 신화 속의 동글동글 알 이야기. 건국 신화는 나라가 세워진 이야기예요. 그래서 각 나라의 건국 신화에는 그 나라를 세운 시조가 등장하지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를 보면 고구려를 세운 주몽,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가야를 세운 김수로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사람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람이 하늘의 뜻에 따라 태어난 것을 뜻해요. 각 나라마다 자신의 시조가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시조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다섯 개의 무덤 신라 오릉. 신라의 수도인 금성이 있었던 경주시 탑동에는 다섯 개의 무덤이 모여 있어요. 그래서 신라 오릉이라고 부르지요.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오릉을 신라의 제1대 왕인 박혁거세, 박혁거세의 아내인 알영 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무덤이라고 전해요.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오릉을 박혁거세와 알영 부인만의 무덤이라고 전하지요. 박혁거세가 죽자 박혁거세를 따라 알영 부인도 죽었어요. 그러자 서라벌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한 곳에 묻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큰 뱀이 쫓아와 이를 방해했어요. 그래서 무덤을 다섯 개로 만들어 왕과 왕비를 나누어 묻었다는 것이지요. 사로국 여성들의 전국적인 행사 가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절은 설날과 추석이에요. 그 가운데 추석은 신라의 길쌈놀이인 '가배' 에서 시작되었어요. 길쌈은 삼베, 모시, 실크 같은 섬유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일이에요. 신라가 사로국이었을 때 여성들은 음력 8월 15일마다 모여 길쌈놀이를 했어요. 꾀를 내어 호공의 집을 차지한 석탈해. 석탈해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궤에 담긴 채 바다에 버려졌어요. 그리고 서라벌로 떠내려왔지요. 서라벌에 온 석탈해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하필, 석탈해가 찾아낸 곳에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석탈해는 꾀를 내어 호공의 집 옆에 숯을 몰래 묻은 뒤, 호공을 찾아가 그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말했어요. 둘은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관청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지요. 관청에 간 석탈해는 자기가 원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그 집을 빼앗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땅을 파 보면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석탈해의 말대로 관청의 관리가 땅을 파자, 땅에서 숯과 숫돌이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석탈해는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 연오랑과 세오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때, 동해 바닷가에는 사이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어요. 남편은 연오랑, 부인은 세오녀였지요. 어느 날, 미역을 따던 연오랑은 갑자기 바위가 둥둥 떠내려가는 바람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도착하게 되었어요. 그 모습을 본 일본 사람들은 연오랑을 신비하게 여겨 왕으로 모셨지요. 그리고 얼마 뒤, 세오녀도 똑같이 일본으로 떠내려가 왕비가 되었어요.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어요. 그러자 세오녀는 비단을 짜서 신라에 보내 주었어요. 신라에서는 이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 다시 빛을 되찾을 수 있었지요. 이 설화는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으로 볼 때, 일월 신화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무렵 일본에도 일월 신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와 일본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는 일본에서 왕과 왕비가 되었지. 삼국을 둘러싼 싸움에서 이기다. 지증왕은 왕이 죽으면 왕을 섬기던 노비를 산 채로 묻는 순장을 못하게 했어요. 그리고 농사에 소를 이용해 나라의 힘을 키웠지요. 그리고 나라 이름도 신라로 바꾸었어요. 지증왕에 이어 법흥왕은 율령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하게 했지요. 진흥왕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을 차지했어요.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부근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무너뜨리며 땅을 크게 넓혀 갔어요. 내가 신라 땅을 크게 넓힌 진흥왕이야. 앞으로 더 큰 꿈을 이루소서. 신라의 발전을 꿈꾼 지증왕. 소를 농사에 이용하다. 내물왕 때부터 고구려의 간섭을 받아오던 신라는 눌지왕 때 백제와 힘을 합해 차츰 고구려의 간섭을 벗어났어요.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5세기가 끝날 무렵, 신라에서는 지증왕이 왕이 되었어요.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신라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한 지증왕은 왕이 되자 신라의 발전을 위한 일들을 하나씩 펼쳐 나갔어요. "왕이 죽으면 왕과 함께 왕의 노비들을 함께 묻는 순장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야. 또 죽은 사람을 위해 일을 해야 할 산 사람을 죽일 이유는 없지." 지증왕의 명령으로 왕이 죽으면 남자와 여자 노비 다섯 명씩 순장하던 풍습은 사라지게 되었어요. 또 지증왕은 나라를 부자로 만드는 길은 농사를 잘 짓는 일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농사를 짓는 데 소를 이용하게 했지요. "소 한 마리가 사람 두세 명이 할 일을 거뜬히 하니 소를 데려다 농사 일에 쓰라."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자 농사가 크게 발달하고 거두어들이는 수확도 많아졌어요. 그리고 저수지를 많이 만들어 곡식에 줄 물이 많아지자 벼농사도 널리 퍼졌지요. 나라 이름은 신라로, 마립간은 왕으로. 지증왕은 그동안 사라, 사로, 서라벌, 신라처럼 다르게 불리던 나라 이름을 '신라' 로 정했어요. 이때부터 '신라' 가 나라 이름이 된 거예요. "신라라는 이름은 매일매일 발전해 나가 사방을 다 아우른다는 뜻이지." 곧바로 지증왕은 지배자의 칭호도 신라 고유의 '마립간' 에서 '왕' 으로 바꾸었어요. 지증 마립간이 지증왕이 된 것이지요. 나라의 이름을 바꾸고, 왕의 칭호도 바꾼 것은 새로워진 신라의 모습을 나라 안팎에 널리 알리고자 한 거예요. 안으로 나라 살림을 안정시킨 지증왕은 장군 이사부를 시켜 동해 바닷가에 있는 우산국을 손에 넣으라고 했어요.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사자가 진짜 사자인 양 겁을 주어 우산국을 차지했어요. 이때부터 울릉도와 울릉도에 속한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 되었어요. 나무로 만든 사자로 우산국을 손에 넣었다. 하하. 불교로 왕권을 강하게 한 법흥왕. 제도를 가다듬은 법흥왕. 지증왕의 뒤를 이은 왕은 법흥왕이었어요. 법흥왕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발전시키고 왕권을 강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왕을 중심으로 나라가 잘 굴러가려면 법이 필요하다. 모든 백성들이 법을 지켜 각자의 일을 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법흥왕은 중국의 율령을 받아들여 신라에 맞게 고쳤어요. 그리고 이렇게 가다듬어진 율령을 백성들에게 알렸어요. 이때부터 신라는 전해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율령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어요. 그만큼 나라의 질서가 잡히게 된 것이지요. 법흥왕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옷의 색깔도 정해 주었어요. 그래서 관리들은 자신이 맡은 관직에 따라 자주색,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의 옷을 입게 되었지요. 또 나랏일을 돌보는 여러 관청을 만들어 각각 다른 일을 나누어 맡아 하도록 했어요. 이차돈의 희생으로 불교의 나라가 된 신라. 왕권을 키워 더욱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법흥왕은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이미 신라에도 고구려를 통해 불교는 들어와 있었지만 전통 신앙을 믿는 귀족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지요. '어떻게 하면 불교를 우리 신라의 종교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법흥왕에게 어느 날 이차돈이 찾아왔어요. "폐하! 제가 희생하여 신라에 불교가 퍼지게 하겠습니다." 이튿날, 이차돈은 전통 신앙의 중심지에 절을 짓기 시작했어요. 놀란 귀족들이 법흥왕에게 가서 안 될 일이라며 반대하자 이차돈이 나서 말했지요.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니 제가 모든 것을 떠안고 죽겠습니다. 제가 죽으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의 뜻입니다." 귀족들은 당장 이차돈의 목을 베라고 했어요. 귀족들의 말대로 이차돈의 목을 베자 붉은 피 대신에 흰 피가 하늘로 솟구쳤어요. 그리고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흔들리며 꽃비가 내렸지요. 이것을 보고 놀란 귀족들은 더 이상 불교를 반대하지 못했어요. 이차돈의 희생으로 신라에 불교가 자리 잡았지. 이럴 수가! 흰 피가 솟구치다니. 뛰어난 인재를 기른 진흥왕. 신라에서 뽑은 인재, 화랑과 낭도. 법흥왕의 뒤를 이은 왕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인 진흥왕이었어요. 진흥왕은 신라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나라를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어요. '우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나라의 힘이 약하다. 두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를 많이 길러야 한다.' 진흥왕은 나라의 소년들을 모이게 했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행동이 바르고 똑똑한 소년 수백 명을 뽑았어요. 이렇게 뽑은 소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귀족의 자식을 화랑으로 정하고, 나머지는 낭도라고 하였어요. 진흥왕 때 나라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던 원광 스님은 화랑들에게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었어요. "화랑은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 또 친구들과 믿음으로 사귀고, 적들과 싸움을 할 때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을 함부로 죽여서도 안 된다."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신라의 화랑들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청년으로 자라났어요. 진흥왕 이후 신라를 이끈 힘은 모두 화랑도로부터 나왔지요. 한강의 상류 지역을 차지한 신라. 진흥왕이 신라를 다스리고 있을 무렵, 고구려는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어요. 그러니 나라의 힘도 약해지게 되었지요. 한편 백제는 성왕이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고 나라를 바로잡아 힘을 크게 길렀어요. 어느 날,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진흥왕에게 연락을 했어요.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싶었던 진흥왕은 성왕의 소식을 반겼어요. 드디어 신라와 백제는 힘을 합쳐 한강 유역에 있는 고구려군을 공격했어요. 힘을 합쳐 쳐들어온 백제와 신라에 고구려군은 무너지고 말았어요. 이렇게 해서 한강의 상류 지역은 신라가, 한강의 하류 지역은 백제가 차지하게 되었어요. 지금 고구려는 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두 나라가 힘을 합쳐 한강 유역에 있는 고구려를 공격합시다. 좋소. 우리 신라도 한강 유역에 나아가고 싶었다오. 함께 고구려를 공격합시다.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다.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은 신라.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한 진흥왕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어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도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강 하류 지역도 가져야겠어. 땅이 기름지고 곡식이 넉넉한 곳이거든. 또 중국과 직접 오가며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 그런데 만약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면 그동안 백제와 맺은 나 제 동맹이 깨질 텐데 어떻게 한담?' 고민하던 진흥왕은 마음을 굳히고 군사들에게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요. "군사들이여! 이제 한강 주변을 모두 신라의 땅으로 만들자." 신라와의 약속만 믿고 있던 백제는 신라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꼼짝없이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백제의 성왕은 노여움으로 가득 차 군사들에게 신라를 공격하게 했어요. "절대 신라를 용서할 수 없다. 우리 백제의 원수 신라를 공격하라." 하지만 백제는 신라를 쉽게 이길 수 없었어요. 백제의 성왕도 신라군에게 목숨을 잃었지요. 그러자 신라를 향한 백제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갔어요.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부를 모두 차지하고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한 신라는 더욱 발전했어요. 하지만 땅과 왕까지 잃은 백제는 점점 힘이 약해졌지요. 진흥왕은 계속해서 땅을 넓혀 갔어요. 남쪽으로는 가야 연맹의 대표자였던 대가야를 공격해 빼앗았어요. 대가야가 무너지자 가야 연맹도 모두 무너졌어요. 그러자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이 모두 신라의 땅이 되었지요. 진흥왕은 동해안을 따라 계속 뻗어나갔어요. 지금의 영흥만 일대까지 나아간 신라는 동예의 옛 땅도 차지했지요. 이렇게 땅을 넓힌 진흥왕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창녕에 큰 비석 네 개를 세웠어요. 진흥왕의 큰 성공으로 신라는 훗날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어요. 땅도 넓히고 비석도 세우고 내 꿈을 이루었지.
고려 3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은 높은 벼슬에 오르고, 재물을 차지했어요. 고려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된 것이지요. 이들을 문벌 귀족이라고 해요. 문벌 귀족의 대표적인 사람이 이자겸이었어요. 이자겸은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어요. 또 묘청은 이런 문벌 귀족에 맞서 난을 일으켰지요. 이렇게나라가어지러웠지만 의종은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노는 데만빠져 고려는 더욱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었어요. 벼슬과 재물을 양손에 쥔 귀족들 성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 고려는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섰어요. 중앙에는 새로운 지배층도 나타났지요. 바로 고려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던 호족과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던 신라 6두품들이었어요. 나라는 이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주었어요.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자와 그 자손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 옳다.” 성종은 이들을 위해 음서 제도를 만들겠다고 했어요. 음서는 왕족이나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의 자손, 또는 5품 이상의 높은 벼슬을 가진 자손들이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벼슬을 할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었지요. 문종 때에는 공음전도 주었어요. 공음전이란 농사짓는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 중 일부를 세금으로 받을 수 있는 땅이었어요. 5품 이하의 다른 벼슬아치들도 나라를 위해 일한 대가로 땅을 받았어요. 하지만 공음전은 벼슬아치가 죽어도 나라에 다시 돌려주지 않고,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었어요. 혼인으로 힘을 키우는 귀족들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귀족들은 자손들의 혼인✽도 자기들끼리 하였어요. 특히 왕실과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값어치 있게 생각되었지요. “우리 집안이 고려 최고의 집안이 되려면 왕이나 왕자와 혼인을 해야 해.” 실제로 고려의 귀족이었던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의 아내로 들여보내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왕의 장인이 된 이자연은 고려에서 큰 힘을 자랑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음서와 공음전, 왕족과의 혼인으로 귀족들은 고려의 특별한 가문을 만들게 되었어요. 바로 이러한 고려의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불렀어요. 경원 이씨, 경주 김씨, 해주 최씨, 파평 윤씨가 대표적인 가문이었어요. 난을 일으킨 이자겸 “내 딸이 바로 왕비다. 그러니 나는 왕의 외할아버지란 말이다.” 왕실과 경원 이씨의 혼인 관계도 이자겸, 두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다 문벌 귀족 중에서 경원 이씨는 가장 힘이 있는 문벌 귀족이었어요. 경원 이씨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힘을 키웠지요. 문종부터 인종까지 80년 동안 일곱 명의 왕은 경원 이씨의 여인들과 혼인을 했어요. 이런 경원 이씨 가문에서도 가장 힘이 있었던 사람은 바로 이자겸이었어요. 아무도 이자겸에게 함부로 맞서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요. “내 딸이 바로 왕비다. 그러니 나는 왕의 외할아버지란 말이다.”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냈어요. 그리고 이어서 다음 왕인 인종에게도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냈지요. 인종은 이자겸에게는 외손자되는 셈이었어요. 외손자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으니, 인종은 자기 이모 두 명과 혼인을 한 꼴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높은 벼슬에 오른 이자겸은 마침내 ‘국공’ 이라 불리며 왕 아래 최고의 위치인 태자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어요. 이자겸만 문제가 아니었어요. 이자겸의 자식들도 중요한 벼슬을 독차지하고 재산을 긁어모았지요. 그의 자식들을 따르는 자들도 제멋대로 재산을 긁어모았어요. 이렇게 되자 백성들의 원망이 점점 쌓여갔어요. 인종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왕을 가둔 이자겸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장수를 이끌고 이자겸을 몰래 죽이기 위해 궁궐을 샅샅이 뒤졌어요. 하지만 이자겸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 이자겸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척준경의 동생 준식과 그의 아들 우와가 눈에 띄었어요. 신하들은 그들을 먼저 죽였어요. 이 사실을 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요. 동생과 아들을 잃은 척준경도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대감, 명령만 내리십시오. 이놈들을 제가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이자겸은 척준경에게 먼저 병사를 이끌고 궁궐로 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마침 잘 됐어. 이참에 왕을 몰아내고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 척준경은 단번에 궁궐로 들어가 신하들과 장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어요. 그리고 궁궐에 불도 질렀지요. 인종은 겨우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어요. 하지만 이자겸은 궁궐이 불탔다는 이유로 인종을 자기 집에 가두었어요. 인종이 더 이상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자겸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팔자가 왕이 된다’ 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지요. ‘십팔자’ 는 합치면 ‘이’ 가 되는데, 바로 ‘이씨’ 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어요. 이자겸의 난이 막을 내리고 궁지에 몰린 인종은 마지막 꾀를 내었어요. 인종은 신하인 최사전을 불러 척준경을 설득하라고 했지요. “장군! 이자겸이 왕을 죽이려고 하고 있소. 이자겸은 당신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최사전은 이자겸이 척준경이 더 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곧 죽일 거라 겁을 주었어요. 최사전의 말을 듣던 척준경은 덜컥 겁이 났어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자겸을 먼저 죽이기로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이자겸은 척준경을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척준경이 자기를 배신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척준경은 군사를 이끌고 이자겸에게 갔어요. 그리고 이자겸을 사로잡아 귀양을 보냈어요. 이렇게 해서 이자겸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었어요. 수도를 서경으로 이자겸의 난이 끝났지만 고려 왕실은 여전히 어지러웠어요. 인종도 궁궐이 불타고 자신도 죽을 뻔하자 마음이 착잡했지요. 게다가 나라 밖으로는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며 고려를 점점 조여 오고 있었어요. 인종의 근심은 하루도 멈출 날이 없었어요. 그때 왕실의 스님이었던 묘청이 인종을 찾아왔어요. “폐하! 하루빨리 수도를 옮기셔야 합니다. 이자겸이 죽고 그 무리들이 쫓겨났다고 하나 아직 개경은 문벌 귀족이 판치는 곳이옵니다. 만약 이곳을 계속 수도로 삼는다면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옵니다. 이는 개경이 이제 그 기운을 다했기 때문이옵니다.” “아니, 그럼 수도를 어디로 옮긴다는 말이오? 어디 좋은 곳이라도 생각한 곳이 있소?” “예, 폐하! 바로 서경이옵니다.” 묘청의 말에 곁에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도 묘청의 말을 거들며 말했어요. “폐하! 더 늦기 전에 개경의 궁궐을 수리하던 것을 멈추고 북쪽인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소서. 이참에 수도를 북으로 옮겨 북쪽에서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는 금나라 오랑캐들을 물리칠 준비를 하셔야 하옵니다.”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묘청의 주장은 금방 궁궐 안과 밖으로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문벌 귀족들이 인종에게 달려가 말했어요. “폐하! 개경은 태조 때부터 대대로 이어온 수도입니다. 묘청의 말은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 일이옵니다. 묘청의 목을 베소서.” 인종은 묘청의 말에 솔깃했지만 문벌 귀족들의 말도 무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우선 수도를 옮기는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서경에 궁궐부터 짓도록 하였지요. 시간이 흐르자 서경에 가 있던 묘청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인종을 서경으로 옮기고, 난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어요. 인종이 서경을 둘러보기 위해서 개경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가장 힘 있는 문벌 귀족 중의 한 사람인 김부식이 인종을 찾아왔어요. “폐하! 올해 여름에 서경 대화궁 30여 곳에 번개가 떨어졌다 하옵니다. 만약 그곳이 수도로 옳다면 하늘이 그렇게 하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인종은 김부식의 말도 맞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서경으로 가는 것을 멈추었지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묘청 소식을 전해 들은 묘청은 화가 났어요. 지금까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서 온 힘을 다 바쳤지만 서경에 대화궁을 지은 것 밖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묘청은 결심했어요. ‘금나라에게 굽실거리고 이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하는 문벌 귀족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힘으로 하는 수밖에 없지.’ 묘청은 조광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힘을 모아 난을 일으켰어요. 이 반란을 묘청의 난이라고 해요. 묘청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나라까지 세웠어요. 나라의 이름은 ‘큰일을 한다’ 라는 뜻의 ‘대위’ 라고 하였지요. 서경의 반란군과 개경 군대가 맞붙어 싸우다 묘청의 난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인종은 어쩔 줄 몰랐어요. 그때 김부식이 나섰어요. “폐하! 저에게 군사를 내어 주십시오. 서경으로 가서 묘청 일당들을 모두 몰아내겠습니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군사를 내주었어요. 개경에서 김부식이 이끄는 어마어마한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묘청의 군사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묘청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조광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큰 뜻을 품고 묘청과 함께 나라를 세웠으나, 고려의 군사를 이길 수는 없겠어.’ 결국 조광은 묘청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어요. 하지만 조광의 부하들은 감옥으로 보내졌지요. 그제서야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조광은 김부식의 군대와 끝까지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어요. 서경의 반란군과 개경 군대 싸움은 1년 넘게 계속되었어요. 반란군은 군사와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졌지요. 결국 조광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었어요. 나라를 돌보지 않는 의종 인종의 큰 아들이 스무 살의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그가 바로 의종이에요. 그런데 의종은 왕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술과 놀이에만 빠져들고 말았지요. 나라와 백성을 돌봐야 하는 왕이 노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거예요. 의종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몇몇 신하들은 크게 걱정했어요. “왕이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저렇게 매일매일 놀고만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려. 앞으로 우리 고려가 어떻게 될지 걱정일세.”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괜히 말 잘못해서 왕을 따르는 자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편히 있지 못할 걸세.” 그 말은 사실이었어요. 의종의 주위에는 왕의 눈치만 보고 기분만 맞추려는 신하들로 가득했지요. 그러다 옳은 말을 하는 신하가 어쩌다 나타나기라도 하면 내쫓거나 죽이기까지 했어요. 머리카락을 판 아내의 사연 의종은 연못에 배를 띄우고 노래 부르며 놀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큰 연못에 정자를 짓기로 했지요. 이 정자를 ‘중미정’ 이라 했어요. 수많은 백성들은 중미정을 짓는 데 끌려나갔어요. 하지만 일을 하고도 일한 대가를 받기는커녕 점심도 얻어먹지 못해 집에서 가져온 점심을 먹어야 했지요. 어려운 살림살이에 점심을 못 가져오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럴 때면 주위의 일꾼들이 밥 한 술씩을 떠서 나누어 주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계속 점심을 싸오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 얻어먹기만 하던 한 남자의 아내가 일터로 찾아왔어요. “여보, 오늘은 제가 점심을 넉넉히 가지고 왔으니, 여기 계신 분들과 나누어 드세요.” 아내가 가져온 음식을 보고 남자는 깜짝 놀라며 물었어요. “아니, 우리같이 가난한 살림에 어디서 이 많은 것을 얻은 것이오?” “훔쳐온 것은 아니니 마음 편히 드세요.” 하지만 아내의 대답에도 궁금함이 풀리지 않은 남편이 계속 아내를 다그치자 아내는 솔직히 말했어요. “계속 당신이 사람들에게 점심을 얻어먹는 것이 딱하여 제 머리카락을 팔아 구한 음식이에요.” 이 말을 들은 남자는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그리고 머리카락이 없는 아내의 모습을 본 일꾼들도 흐느껴 울었지요. 백성이 이 지경인데도 의종은 노는 데에만 빠져 나라 살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어요. 척준경은 이자겸의 난 때 이자겸을 도왔던 장수예요. 그러다가 다시 인종의 편에 서서 이자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기도 했지요. 척준경은 이렇듯 이자겸의 난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훌륭한 장수였어요. 윤관이 여진을 몰아낼 때 유난히도 돋보였던 장수가 바로 이 척준경이었지요. 척준경은 여러 차례 여진과의 싸움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적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어요. 송인 비개인 긴 둑에 푸른 풀빛이 짙은데 님 보내는 남포에 서니 슬픈 노래가 흐르는구나. 아 저 대동강물이 어느 때나 마르리 이별의 눈물이 해가 갈수록 푸른 물결에 더하여지네. 정지상이 소년 시절에 지은 시 정지상은 묘청과 함께 고려의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묘청의 난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개경에 있던 정지상도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정지상은 시를 잘 짓기로도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정지상을 고려의 뛰어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뽑기도 하였지요. 정지상의 시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고려사절요>라는 책에 실려 있어요. 어느 날 정지상이 시를 하나 짓고 있었는데 김부식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마지막 시구를 자신이 마무리하겠으니 이 시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지요. 하지만 정지상은 이를 거절했어요. 이 대목은 정지상이 김부식의 글도 거절할 만큼 고려에서 아주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신들의 분노 의종은 나랏일을 멀리하고 노는 데만 빠져 있었어요. 이런 의종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로 무신들이었지요. 무신들은 평소에도 문신들보다 푸대접을 받는 일이 많았어요. 무신들은 최고 벼슬에도 오를 수가 없었고, 전쟁이 나도 최고 지위자는 강감찬, 윤관, 김부식과 같은 문신들이 맡았지요. 무신 가운데는 글자도 모르거나, 천한 신분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문신들은 무신들을 호위병 정도로 얕잡아 보았어요. 그러자 불만이 점점 쌓여 가던 무신들은 의종이 놀기만 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 눈으로 보았어요. “쳇, 왕과 문신들은 술이나 마시며 실컷 놀면서, 우리들 보고 하루 종일 밖에서 자기들을 지키고 있으라고 하다니.” “그러게 말일세. 가만 있어서는 안 되겠네. 무슨 수라도 써야지.” 그때 무신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정중부가 나타났어요. “그대들의 마음은 다 알고 있네. 조금만 참으면 분명히 기회가 올 걸세.” 무신을 얕잡아 보는 문신들 “쳇, 왕과 문신들은 술이나 마시며 실컷 놀면서, 우리들 보고 하루 종일 밖에서 자기들을 지키고 있으라고 하다니.” 큰 창피를 당한 이소응 어느 날, 의종은 신하들을 데리고 경치가 좋아 자주 가던 보현원으로 향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의종이 무신들에게 무술 대결을 해 보라고 했어요. 왕의 명령에 따라 무신들은 겨루기를 하였지요. 그러다가 대장군 이소응과 한 젊은 무신이 겨루는 순서가 되었어요. 이소응은 육십 살에 가까운 늙은 장수였어요. 아무리 대장군이지만 젊은 무신을 당해 낼 수 없었던 이소응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지요. 그때 그것을 지켜보던 문신 한뢰가 갑자기 내려와 일어나려던 이소응을 밀치며 말했어요. “이 늙은 무신 놈아. 대장군이 어린 놈에게 맥없이 넘어가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고도 고려의 대장군이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왕과 문신들은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어요. 그러자 정중부가 벌떡 일어나 한뢰를 크게 꾸짖으며 말했어요. “이 고약한 놈! 이소응 장군은 높은 벼슬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그런데 감히 더 낮은 벼슬을 가진 네놈이 이소응 장군을 밀치고 비웃는단 말이야.” “정중부 장군, 왜 이러나? 한뢰가 술을 많이 마셔 말과 행동이 좀 지나쳤네. 그만 화를 풀게.” 정중부의 분노에 찬 모습에 깜짝 놀란 의종은 황급히 정중부를 달랬어요. 하지만 정중부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고려 6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이유로,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왕의 자리에 올렸어요. 정도전과 같은, 고려를 바로잡으려는 신하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고자 했지만,몇몇신하들은찬성하지않았어요. 결국 이성계는 자신을 따르는 정도전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는 신하들과 함께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의 자리에 올랐지요. 최영과 다른 길을 간 이성계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원나라가 물러가고 명나라가 중국을 차지할 때였어요. 하지만 고려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어요. 명나라도 고려를 괴롭혔기 때문이에요. 명나라는 원나라를 멀리 쫓아내는 데 필요하다며 공물을 바치라고 했어요. 게다가 고려의 북쪽 지방인 철령 이북 지방은 원래 자기네 땅이라며 직접 다스리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고려 장수 최영은 명나라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명나라를 공격하자고 했어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북쪽 요동을 공격해 고구려의 옛 땅도 찾고, 우리 고려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 줘야 합니다.” 우왕은 최영의 뜻대로 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이성계는 최영의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며 반대했어요. 이성계의 주장을 귀담아듣지 않은 우왕은 이성계에게 군대를 이끌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라고 했지요.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요동으로 향했어요. 그리고 이성계의 군대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까지 도착했어요. 하지만 이성계는 머뭇거렸어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오히려 명나라의 미움만 사게 되는 일이 될 거야 .’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왕이 있는 개경으로 향했어요. 이 사건을 위화도 회군이라고 해요. 회군은 군사를 돌려 돌아간다는 뜻이에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은 최영 이성계가 요동으로 향하지 않고,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우왕과 최영에게 전해졌어요. 최영은 우선 개경에 있는 군사를 모두 모았어요. 이성계의 군사에 비하면 숫자가 많이 모자랐지요. 머지않아 이성계의 군사들이 개경에 도착했어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최영과 군사들은 이성계의 군사들과 맞붙어 싸웠어요. 하지만 최영의 군사들은 하나둘씩 무너지고 말았어요. 최영은 서둘러 우왕을 찾아가 절을 올렸어요. “폐하, 저는 이제 죽으러 갑니다. 끝까지 폐하를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최영은 싸우다 이성계의 군사에게 붙잡혔어요. 그 뒤로 얼마 되지 않아 최영은 최후를 맞이했어요. 최영은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당하게 죽음을 택했지요. 한편 이성계는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우왕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올렸어요. 이 사람이 바로 창왕이에요. 하지만 백성들은 왕보다 이성계를 고려에서 더 높고 힘센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이성계와 손잡은 사람들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이성계는 우왕을 귀양보내고, 최영을 죽였지만 바로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어요. 왕위에 오르고 싶었지만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지요.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떳떳하게 설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나라를 세우려는 큰 뜻을 접고 그냥 무턱대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왕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군. 왕이 되려면 정도전처럼 고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선비들과 손을 잡아야겠어.’ 이성계는 함께 고려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자며 정도전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새로운 나라를 이끈 젊은 선비들 내가 고려를 새롭게 하겠소.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것들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땅, 땅, 땅 정도전은 고려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고쳐나가기로 했어요. 가장 적극적으로 고려 사회를 뜯어고치려 했던 정도전은 뜻을 이루게 되었지요. “이제는 이성계 대감이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소?”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는 많은 신하들이 생겨났어요. 조준도 이성계를 따르기로 하고 먼저 땅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어요. “나라의 세금을 자신의 것으로 몽땅 가져간 귀족들의 잘못된 행동부터 고쳐야겠소.” 그의 말에 함께 개혁을 원하는 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직도 왕실과 벼슬자리에 부패한 귀족의 무리들이 많소. 이것도 고쳐야 할 것이오.” 정도전의 뜻대로 이성계는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땅을 빼앗고 백성들이 내는 세금 제도도 바꾸었어요. “귀족들의 땅을 모두 나라의 땅으로 하라.” 바뀐 제도 덕분에 백성들은 나라에 내는 세금이 줄어들어 살림이 나아졌고 나라는 귀족들이 모두 챙기던 세금을 거두어 넉넉해졌어요. 이성계의 힘을 빌려 고려를 새롭게 바꾸고자 하는 신진 사대부의 움직임이 드디어 시작되고 있는 순간이었어요. 신진 사대부란 누구일까요? 성리학은 고려의 학자 안향에 의해 고려에 널리 퍼진 중국 학문이에요. 당시 글을 배우는 선비들은 널리 퍼진 성리학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높았어요. 그리고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어요. 이들을 바로 신진 사대부라고 불렀어요, ‘신진’ 은 ‘새롭게 나아가다’ 라는 뜻이고, ‘사대부’ 는 ‘글공부를 하는 선비’ 를 뜻한답니다. 백성들을 위한 개혁 작업 과전법 넓은 땅인 농장을 가진 귀족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나라의 땅으로 하고, 귀족들이 다시는 함부로 땅을 빼앗지 못하도록 했어요. 이 제도를 과전법이라고 해요. 빼앗은 땅은 다시 관리들의 월급으로 나누어 주었지요. 이렇게 나누어 준 땅은 ‘과전’ 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관리들에게는 땅에서 나는 수확물을 가질 권리만 주었어요. 관리가 물러나거나 죽으면 이 땅을 다시 나라에 돌려주어 대를 이어 부를 누릴 수 없게 했지요. 과전법으로 인해 과전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내는 세금도 줄었어요. 그러자 농민들은 과전법을 크게 환영했어요. 도동묘 안호가 조선 숙종 임금 때에 우리나라 주자학의 시조인 안향과 송나라 주자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에요. “나라의 세금을 자신의 것으로 몽땅 가져간 귀족들의 잘못된 행동부터 고쳐야겠소.” 두 갈래로 나뉜 신진 사대부 이성계를 믿고 따르던 무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둘로 갈라지는 일이 생겼어요. 바로 정도전이 아주 큰일을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정도전은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만만치 않았어요. 고려는 이제 무너져가고 있소. 이번 기회에 아예 새로운 나라와 왕을 세웁시다. 정도전 대감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신하된 자로서 어찌 나라와 왕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누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이성계 장군이오. 이성계 장군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때 이 나라를 구하신 분이오. 많은 백성들은 이성계 대감을 존경하고 있소. 나는 하늘이 이성계 장군을 왕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오. 배신이라니요? 맹자께서도 하늘과 백성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왕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였소. 새 나라를 위해 뛰는 정도전 정도전의 생각은 금방 여러 사람의 귀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던 정몽주도 그 이야기를 알게 되었지요. 정몽주는 펄쩍 뛰었어요. “신하는 나라와 임금을 섬겨야 되는 법. 그런데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니.” 정몽주는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정도전을 나무랐어요. 하지만 정도전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어요. “고려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드니, 하늘이 더 이상 지켜 주지 않는 것이오. 새 나라를 열어야 할 때가 온 것이오.” 정도전은 여러 신하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많은 신하들은 이성계와 정도전 쪽으로 점점 생각이 기울었어요. 정몽주의 긴 한숨 이성계가 왕에 오른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돌고 있었어요. 그때 뜻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어요. 오랜만에 사냥을 나갔던 이성계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게 된 거예요. 정도전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갔어요. 정몽주도 이성계가 누워 있는 황주로 급히 병문안을 갔어요. 이성계 곁에는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지키고 있었지요. 이방원은 아버지가 새로운 왕이 되는 데 가장 앞장서는 사람이었어요. 이방원은 정몽주가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그를 한번 떠 보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왕이 되는 일에 함께하시겠소?” “나라를 바꿔 나가는 것은 찬성이지만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은 안 될 말이네.” 정몽주는 이성계가 왕이 된다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말해 주었어요. 정몽주는 돌아가는 길에 고려의 앞날이 걱정되어 한숨만 내쉬었어요. 선죽교에서 꺼져간 정몽주의 숨소리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을 때, 정몽주를 태운 말이 개경의 선죽교를 건너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때 갑자기 어두운 데서 누군가가 나타났어요. “거기 멈춰라! 당신의 목숨은 여기까지요.” 그는 이방원이 보낸 부하였어요. 정몽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에서 내렸어요. “어찌 고려의 신하로서 나라와 임금을 배신하려 하느냐?” 정몽주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숨을 잃었어요. 고려의 충성스런 신하였던 정몽주는 이렇게 해서 쉰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서서히 무너져 가는 고려 정몽주가 세상을 떠난 후, 정몽주를 따르던 많은 신하들은 세상을 한탄했어요. “이제 정말 고려가 망해가는구나.” 그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개경에는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한편 왕의 자리에 있던 공양왕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나?’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왕대비는 ‘공양왕이 어리석고 둔해 나라와 백성을 맡을 수 없다’ 는 내용의 글을 왕실에 내렸어요. 이성계를 따르던 이들이 공양왕이 왕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글을 써 달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공양왕은 왕의 자리에 큰 욕심이 없었어요. ‘불안하게 허수아비 왕으로 있느니, 남은 일생을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낫겠구나.’ 공양왕은 자신이 갖고 있던 옥새를 내주었어요. 새 나라의 왕, 이성계 이제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오를 일만 남았어요. 정도전과 조준은 옥새를 가지고 신하들과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갔어요. “이 나라와 백성이 임금으로 모시길 원합니다. 옥새를 받으시옵소서.” 하지만 이성계는 뜻밖에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자 정도전은 문을 억지로 밀고 들어가 옥새를 마루에 놓았어요. “이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이것은 곧 백성의 마음이니 어서 나와 옥새를 받으시옵소서.” 긴 생각에 빠져 있던 이성계는 조용히 나왔어요. “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옥새를 받겠노라.” 이성계는 이렇게 임금의 자리에 올랐어요.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이성계의 주장 4불가론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이 요동을 공격하자고 하였을 때,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어요. 이것이 바로 이성계의 4불가론이에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는 없다. 둘째, 여름에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어렵다. 셋째, 큰 군사를 일으켜 북으로 가면 왜구가 그 틈을 노려 쳐들어온다. 넷째, 장마철에는 활에 힘이 없고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고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이 같은 주장을 우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요동을 향했던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지요. 정몽주가 죽은 슬픈 다리 선죽교 선죽교는 이방원이 부하를 보내 정몽주를 죽였던 다리예요. 선죽교는 지금의 북한 개성(고려 때의 개경)에 있어요. 북한에서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선죽교를 나라의 보물로 정하였어요. 선죽교는 원래 이름이 ‘ 선지교’ 였어요. 그런데 이 다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정몽주가 가진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스러움을 드높이기 위해 이름이 바뀌었어요. 곧음의 상징인 대나무 ‘ 죽’ 자를 넣어 선죽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지요. 풀이 돋아 나지 않는 최영 장군의 묘 지금의 경기도 일산에 가면 최영 장군의 묘를 볼 수 있어요. 이곳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린 뒤 최영을 귀양 보낸 곳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그의 무덤에 풀이 나 있지만 한동안 풀이 잘 자라지 않았다고 해요.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영이 죽기 전에 ‘ 내가 조금이라도 누구에게 원한이 있으면 내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해요. 최영이 죽고 난 후로도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최영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지요. 이색은 고려의 학자 중에서도 가장 큰 어른으로 꼽혀요. 정몽주, 이숭인과 같은 유명한 학자들도 모두 이색에게 학문을 배웠어요. 이색은 그의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한 것이 있었어요. 바로 충성과 의리였어요. 이색은 ‘ 아무리 사람이 세상을 놀랄 만한 일을 하여도 충성과 의리가 아니면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고 말했어요. 한때 임금이 되려는 이성계의 움직임에 반대하다가 귀양을 떠나기도 하였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벼슬을 하지 않으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어요. 충성과 의리를 강조한 목은이색 17 정몽주는 지혜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학자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토론을 할 때에도 정몽주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했어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정몽주의 뛰어난 지혜와 가르침에 감탄하곤 했지요. 특히 이색은 ‘ 정몽주가 말하는 것은 맞지 않음이 없구나’ 라고 할 정도였어요. 이성계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지만, 정몽주는 끝까지 이를 따르지 않았어요. 이색도 칭찬한 포은 정몽주 말과 행동이 항상 반듯했던 야은길재 우리 모두 고려에 충성한 사람들이지. 길재는 어려서부터 글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깊었어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라면 아주 먼 곳이라도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길재는 당시 뛰어난 학자였던 이색과 정몽주를 찾아가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뛰어난 학자가 되었어요. 길재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고 항상 말했어요. 그리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였지요. 그의 말처럼 길재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도 버렸어요.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홀로 계신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어요. 고려에서 피어난 불교와 문화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어요. 고려 여러 곳에 절들이 많이 세워졌고,심지어 승려 의천은 고려의 왕자였던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불교는 고려에 여러 문제를 낳기도 했어요. 그래서 승려 지눌은 불교를 깨끗이 하기 위해앞장서기도했지요. 한편 고려는 문화와학문이발전한나라이기도했어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려만의 청자가 만들어졌고,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책도 만들어졌어요. 문종의 아들, 의천 고려 왕실에는 승려가 되었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어요.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던 왕자 의천도 열한 살 때부터 승려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의천은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교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의천이 송나라에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당시 거란의 눈치를 봐야 했던 고려는 거란과 사이가 좋지 않은 송나라에 아무리 승려이지만 왕자를 보낼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의천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 보내 주지 않는다면 몰래 가는 수밖에 없지.’ 의천은 예성강으로 갔어요. 그리고는 그냥 보통 승려인 양 배에 올라탔어요. 송나라 상인 누구도 그가 고려의 왕자 의천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요. 송나라에서 불교 공부에 푹 빠진 의천 의천이 송나라로 갔다는 소식은 고려의 왕실에 곧 알려졌어요. 그리고 곧 송나라도 이 일을 알게 되었지요. 고려의 왕자 의천이 송나라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송나라의 황제 철종은 신하들에게 의천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어찌하여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 “불교의 깊은 진리를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의천 고려의 승려가 되는 과거시험 승과 고려에서는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이 있었어요. 바로 ‘ 승과’ 였지요. 승려들은 승과를 보고 붙으면 보통 관리처럼 등급을 받았어요. 그리고 능력에 따라 그 등급이 올라갔어요. 고려의 많은 승려들은 도를 닦기 위해 노력도 하였지만 벼슬 등급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기도 했어요. 송나라의 철종은 의천의 마음가짐과 됨됨이에 감탄하여 의천이 송나라에서 어려움 없이 공부를 잘할 수 있게 해 주었어요. 오랫동안 송나라에 머물렀던 의천은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려로 돌아왔어요. 그 무렵 고려의 불교는 경전 공부를 중요시하는 교종과 구체적인 실천으로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선종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의천은 경전과 깨달음을 모두 강조하는 천태종을 열었어요. 그리고 불교의 참뜻을 전하기 위해 죽는 날까지 노력했어요.
조선 2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한글을 만든 위대한 세종 세종은 태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요. 세종은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어요. 왕이 된 후에는 나라와 백성과 신하를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지요. 세종은 뛰어난 과학자 장영실에게 자격루, 앙부일구와 같은 많은 발명품을 만들게 했고,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도 만들었어요. 태종의 큰 걱정거리, 세자 양녕 태종은 왕의 자리를 놓고 형제들과 싸웠던 기억이 생생했어요. 그래서 세자를 정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서둘렀어요. 태종은 첫째 왕자 양녕을 세자로 정했지요. 세자는 왕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어요. 하지만 세자가 된 양녕은 태종의 기대와는 달랐어요. 공부는 뒷전이고 몰래 사냥을 나가거나, 궁궐 밖에 사는 기생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어요. 심지어 궁궐 밖에 사는 사람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놀기도 했지요. 양녕에 대한 태종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왕이 될 준비는 하지 않고 놀이에만 빠져 있는 세자를 어찌할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태종은 양녕을 바로잡기 위해 양녕과 어울렸던 사람들을 붙잡아다 멀리 보내거나 죽이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양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세자가 된 공부벌레 충녕 태종은 고민 끝에 신하들을 불러 모았어요. “세자인 양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왕이 될 자격이 없소. 그래서 세자를 바꾸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생각해 두고 있는 왕자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신하들의 생각이 자신과 같다고 느낀 태종은 결심했어요. “셋째 왕자 충녕을 세자로 삼겠소. 그러니 지금부터 세자는 충녕이오.” 당시 양녕의 아들은 나이가 어리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은 불교에 빠져 있어 세자의 자리에는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태종은 셋째 아들인 충녕을 세자로 삼은 거예요. 충녕은 책읽기를 몹시 좋아해서, 학문이 깊었어요. 또 평소에 백성과 신하를 아끼는 성품으로 임금의 믿음이 두터웠지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가던 충녕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그가 바로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이에요.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 ‘어떻게 하면 조선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세종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늘 고민했어요.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할 발명품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쏟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세종은 장영실을 불렀어요. “명나라에 유학을 가서 천문 기구를 배워 오도록 하라.” 장영실은 본래 노비 출신이었지만, 워낙 기술이 뛰어나 궁궐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장영실은 활과 창, 수레, 배 같은 물건을 잘 만들고 고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지요. 세종이 그의 재주를 알아본 거예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한 장영실은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계절과 시간을 알아내는 과학 기구인 혼천의를 발명했어요. 세종은 혼천의를 보고 크게 기뻐했지요. 농사에 이로운 발명품이 쏟아져 나오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어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시계를 만들도록 하라.” 세종의 명령에 따라 장영실은 시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나온 것이 자격루라는 물시계였지요. 세종은 장영실에게 자격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어보았어요. “먼저 위쪽 단지에 물을 부으면, 단지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 물이 아래쪽 단지로 흐릅니다. 그러면 아래쪽 단지의 물이 늘어나면서, 인형이 시간에 맞추어 종을 울리기도 하고 북을 치기도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의 지혜에 감탄하고 매우 흡족해 했어요. 그리고 장영실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해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는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비가 내린 양을 알 수 있는 ‘측우기’ 예요. 세종 때 만들어진 발명품들은 대개 백성들의 생활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이런 발명품은 특히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었지요. 세종은 농사를 도와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많은 힘을 기울였어요. 세종의 깊고 깊은 뜻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한자를 사용했어요. 당시에는 우리 글자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한자는 글자 수도 많고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농민이나 노비와 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하는 가난한 백성들은 한자를 배울 시간도, 배울 형편도 못 되었기 때문에 평생 글자를 모르고 살았어요. 세종은 좋은 책을 만들어도 읽을 수 없는 백성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지요. 세종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에게 물었어요. “우리나라의 글자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한자가 있는데 왜 굳이 다른 글자를 만들려고 하십니까?” 어떤 학자들은 세종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한자가 우리나라의 글자는 아니지 않소? 나는 백성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는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고 싶은 것이오.” 세종의 말에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깊은 뜻을 곧 이해하게 되었어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우리 글을 만드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어요. 훈민정음의 위대한 탄생 오랜 연구 끝에 드디어 우리 글인 한글이 만들어졌어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글자는 ‘ㄱ’ , ‘ㄴ’ 과 같은 자음 열일곱 자와 ‘ㅏ’ , ‘ㅑ’ 와 같은 모음 열한 자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새롭게 만들어진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함께 사용하면 입에서 나오는 어떤 소리도 글로 쓸 수 있었지요. 1443년, 세종은 새롭게 만든 우리 글인 한글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짓고 세상에 알렸어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에요. 세종은 훈민정음을 소개한 책의 맨 앞장에 우리 글을 만든 이유를 밝혔어요. “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이제 백성들이 쉽게 배워 널리 사용하기를 바라노라.” 대마도에 나타난 일본 해적 고려 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혔던 왜구는 조선이 세워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바다를 건너와 백성들을 괴롭히곤 했어요. 특히 경상도 남쪽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마도(지금의 쓰시마 섬)는 왜구들이 들끓는 곳이었지요. 대마도는 땅이 비좁고 메말라서 농사를 짓기 어려웠기 때문에, 왜구는 식량이 부족해지면 조선으로 쳐들어와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의 식량과 물건을 빼앗아 갔어요. 세종은 더 이상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두고만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종무 장군을 불러 명령을 내렸어요. “배 227척과 병사 1만 7천 명을 내어 줄 테니 대마도에 가서 일본 해적을 혼내 주고 오라!” 세종의 명령을 받은 이종무 장군은 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대마도로 향했어요. 그리고 대마도에 있는 왜구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혼쭐이 난 왜구는 그 뒤로는 함부로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했어요. 여진족을 몰아내고 안정을 되찾은 북쪽 땅 조선의 북쪽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진족이 조선에 쳐들어와서 북쪽에 사는 백성들의 곡식과 물건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갔어요. 여진족은 대마도의 왜구보다 훨씬 강했어요. 여진족들이 조선의 북쪽 경계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들어오자 신하들이 세종에게 말했어요. “전하, 여진족을 피해 나라의 경계를 남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 조상들이 힘들게 차지한 땅을 하나라도 버릴 수 없소!” 그 무렵, 여진족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여진족의 힘이 약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세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바로 지금이다. 김종서 장군은 당장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여진족을 몰아내라!” 북쪽 경계에 도착한 조선의 군사들은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조선의 북쪽 경계에 사는 백성들은 이때부터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되었지요. 세종은 조선의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외적으로부터 잘 지켜낸 왕이기도 했어요. 장영실은 우리 민족의 과학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에요. 물론 장영실이 없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혼천의, 물시계와 같은 발명품들이 만들어졌겠지만, 장영실로 인해 다양한 발명품이 좀 더 빨리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는 양반이 아니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벼슬을 할 수 없는 신분제 사회였어요. 그리고 천민인 노비는 나라나 양반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 수 없었지요. 장영실은 벼슬을 할 수 없는 노비 출신이었어요. 하지만 세종은 장영실의 뛰어난 재주와 공을 인정하여 노비였던 장영실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어요. 노비라는 신분과 상관없이 장영실의 재주를 인정했던 세종의 큰 뜻이 없었다면 장영실이라는 훌륭한 과학자도 없었을 거예요. 노비였던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한글을 쓰는 것을 반대했던 신하 최만리 한자를 쓰는 것이 명나라에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종에 의해 한글이 만들어졌지만 조선 시대의 모든 신하들이 한글을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그 이유는 최만리가 세종에게 올린 글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최만리는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신하였지요. 최만리는 세종에게 한자를 사용하던 조선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이 중국 명나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리고 왕이 될 세자가 쓸데없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고, 세종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에 관해 신하들과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불평하는 글을 올렸지요. 최만리가 올린 글을 본 세종은 화가 났어요. 그래서 최만리와 그를 따르는 여러 신하들을 감옥에 가두었지요. 만약 세종이 최만리같이 한글 만드는 것을 반대했던 신하들의 말을 따랐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 어려운 한자로 글을 읽고 쓰고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신분에 따라 삶이 달라지다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이라는 법에 따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은 크게 양인과 천민으로 나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천민은 노비나 광대와 같이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천민이 아니면 모두 양인이었지요. 천민은 나라 또는 양인들에게 매여 살아야 하는 신세였어요. 양인은 자유롭게 살면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고, 시험에 합격하면 벼슬을 얻을 수도 있었어요. 다만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군대를 가야만 했지요. 조선 시대, 한 농민의 아들이 억울해 하며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왜 같은 양인인데 양반의 아들은 군대를 안 가고 저는 군대를 가야 하나요?” “양인이라고 다 같은 양인이더냐? 양반은 벼슬도 지내고 공부도 하니 양인이지만 군대를 가지 않는단다.” 법에 따르면 양반도 양인이기 때문에 군대에 가야 했어요. 하지만 법에는 벼슬을 지내는 사람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하는 사람은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와 있어요. 그래서 조선의 양반들은 사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어요. 양반이 아닌 사람들의 삶 백성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농민이었어요. 농민들은 농사도 지어야 하고, 나라에서 일을 시키거나 군사 훈련을 받으라고 하면 바로 가야 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야 했어요. “나라에서 성과 다리 공사를 한다고 내일부터 일하러 오라네.” “도대체 농사는 누구 보고 지으라고 자꾸 불러대는지.” 농민도 그랬지만 노비와 같은 천민들은 더욱 살기 힘들었어요. 주인에게 매여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했지요. 이렇듯 조선은 양인과 천민으로 나누어진 사회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양반과 양반이 아닌 사람으로 나뉘어진 사회였어요. 조선의 주민등록증,호패 조선 시대에는 16세 이상의 양인 남자라면 누구나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어요. 호패를 보면 그 사람이 양반인지, 농민인지 그리고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있었지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호패는 신분에 따라 달랐어요. 양반은 동물의 뼈로 만든 멋진 호패를 지니고 다녔고, 농민과 같은 보통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지니고 다녔어요. 조선 시대에는 호패 관리가 엄격해서 가짜 호패를 만드는 사람이나 호패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나라에서 따끔하게 큰 벌을 주었어요. 장군이 되기 위한 무과 시험 조선 시대에는 벼슬을 얻기 위해 과거 시험을 봐야만 했어요. 시험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공부를 해야 했지요. 과거 시험은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는 문과 시험과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는 무과 시험, 그리고 외국어가 뛰어나거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뽑는 잡과 시험으로 나뉘었어요. 과거 시험은 해마다 있지 않았어요. 가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뽑기도 했지만 대개 3년마다 한 번씩 시험을 치렀어요. 그래서 한 번 떨어지면 3년을 기다려야 했어요. 그래서 양반 집 자식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어요. “자넨 활을 잘 쏘고, 말 타기를 잘하니 무과에 합격할 거야.” “무과 시험은 활을 잘 쏘고 말 타기를 잘한다고 해서 합격하는 것이 아니지. 책을 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해야 해.” 무과 시험은 얼마나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것인지가 매우 중요했어요. 하지만 조선을 이끌어 나갈 장수는 똑똑하고 지혜로워야 하기 때문에 군사 또는 전쟁과 관련된 여러 책들에서 나오는 시험 문제도 잘 풀어야 했지요. 높은 벼슬에 오르기 위한 문과 시험 왕이 있는 궁궐에서 일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었어요. 문과 시험은 정말 어렵기로 소문난 시험이었지요. 책을 많이 읽어야 했고, 또 시와 글을 아주 잘 지어야 했어요. 그리고 무과든 문과든 시험은 한 번이 아니었어요. “이제 대과를 봐야지.” 1차 시험을 작은 시험이라고 해서 ‘소과’ 라고 해요. 소과에 합격을 하면 큰 시험인 ‘대과’ 를 볼 차례가 되지요. 대과는 두 번의 시험을 거친 후 마지막에 왕이 보는 앞에서 시험을 봐야 했어요. 대과에 합격해야만 나랏일을 돌보는 관리가 될 수 있었어요. 이처럼 조선의 과거 시험은 너무 어렵고 기회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시험에 합격하면 집안의 큰 영광이었지요. 조선의 과거 시험은 너무 어렵고 기회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시험에 합격하면 집안의 큰 영광이었지요. 고을에서 제일 높은 사또 조선 시대 수령은 왕의 명령에 따라 정해졌어요. 고을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를 수령이라고 해요. 그 무렵 백성들은 수령을 사또라고 불렀어요. 경국대전에는 사또가 해야 할 여러 임무가 잘 나와 있어요. 경국대전은 조선 시대 법을 적어 놓은 책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사또의 임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농사철에 맞게 씨를 잘 뿌려야 한다. 선비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의 일을 대비해서 군사 훈련을 해야 한다. 재판을 잘 해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 밖에도 사또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이 경국대전에 쓰여 있었지요. 사또는 고을의 임금과도 같았어요. 재판도 하고 군사도 이끌고, 백성도 다스렸기 때문이에요. 사또는 고을에서 아주 큰 힘을 가졌어요. 그래서 고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잘못을 가려 주었지요. 또 사또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나랏일에 많이 끌려가고 괜히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암행어사 납시오 어떤 사또는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고,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나라의 재산인 세금을 자신의 재산으로 빼돌리기도 했지요. “사또에게 잘 보여야 해.” “고을에서 사또보다 무서운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왕은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또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몰래 암행어사를 보내곤 했어요. 암행어사는 방방곡곡을 다니며 나쁜 관리를 잡아들이는 일을 했지요. 그래서 사또가 함부로 힘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고, 약한 백성을 올바르게 보살필 수 있도록 했어요. 23 마패 암행어사는 마패를 가지고 다녔어요. 암행어사라는 것은 마패를 보고 알 수 있었어요. 재물로 여겨진 노비들 조선에서 주인들은 노비를 재산처럼 여겼어요. 그래서 물건처럼 팔기도 하고 살 수도 있었지요. 물건처럼 사고팔렸던 노비 조선 시대에는 천민 중의 대부분이 노비였어요. 노비는 ‘종’ 이라고도 불렸지요. 조선에서 주인들은 노비를 재산처럼 여겼어요. 그래서 물건처럼 팔기도 하고 살 수도 있었지요. 또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노비들은 마음대로 이사를 갈 수도 없었어요. “내일이면 나는 이 집을 떠나 멀리 간다네. 잘 있게나.” “아니, 무슨 소리인가? 노비가 주인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이야?” “주인이 나를 팔아 버렸네. 내일부터 주인이 바뀌는데 그 주인이 아주 먼 곳에 산다는군.” 주인집에 사는 노비들은 집안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했어요. 그리고 불을 때고, 밥을 짓고 심지어 주인과 가족들의 세숫물을 갖다 주며 온갖 일들을 다 도맡아서 했어요. 주인과 따로 살았던 바깥 노비 노비라고 해서 모두 주인집에 살면서 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주인과 따로 떨어져 사는 노비도 있었어요. 이들을 바깥 노비라고 불렀는데 바깥 노비들은 집안에 사는 노비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어요. 그 대신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어서 어느 정도를 주인에게 바쳐야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자신과 가족들이 사용할 수도 있었지요. 또 주인 땅이 아닌 다른 사람의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고, 재산도 가질 수 있었어요. 또 천민 중에는 노비 말고도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어요. 바로 무당, 광대, 백정과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무당은 귀신에게 굿을 하는 사람이고, 광대는 묘기를 보여 주거나 우스꽝스러운 연기로 돈을 버는 사람이었어요. 백정은 가축을 죽여 고기를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노비는어떻게 혼인했을까요? 조선 시대에 노비들은 주인의 재산이었어요. 그래서 혼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지요. 아무리 둘이 사랑을 하더라도 주인이 정해 주는 사람과 혼인을 해야만 했어요. 그렇다고 주인들이 노비가 혼인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노비가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자신의 노비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주인에게는 노비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재산이 늘어나기 때문에 노비가 혼인하여 자식을 낳는 일을 반겼답니다. 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세종 조선의 나라 살림은 농사와 관계가 깊었어요.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거두어 들인 농작물의 일부를 나라에 바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풍년이 들면 나라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금도 함께 늘어났어요. 세종은 농사를 특히 더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어요. “농사는 세상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농사가 잘 되도록 힘쓰라.” 그래서 세종은 곡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넓히는 데 힘을 기울였어요. 땅이 있다고 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조선에서는 농사를 짓기에 좋지 않은 땅들이 많았어요. 땅속에 크고 작은 돌멩이가 많고, 큰 나무의 뿌리들이 땅속 깊이 뻗어 있어 곡식이 자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조선에서는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만드는 백성에게는 여러 해 동안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해 주었어요.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땅을 일구었어요. 이런 노력으로 고려 때보다 농사짓는 땅이 세 배나 늘어났어요. 대접 받지 못한 상인들이 투덜투덜 농민들 중에는 힘든 농사일보다 다른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건을 만들거나 물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반기지 않았어요.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왕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어요. 높은 벼슬에 있던 정도전은 나랏일을 하는 관리들에게 목소리를 높였어요. “아낄 줄 아는 것은 좋은 마음이지만 쉽게 돈을 벌어 함부로 막 쓰는 것은 나쁜 마음이오.” 사람들이 힘써서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사고파는 모습을 꾸짖기 위한 말이었지요. 정도전이 그렇게 말한 뒤로, 사람들은 나라의 허락 없이 함부로 물건을 만들거나 팔 수 없었어요.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불평불만이 많았어요. “이 나라에서 우리 상인들은 노비를 빼고 가장 천한 사람이 되었네.” “그러게 말이야. 농민보다 못하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니.” 조선에서는 양반이 아닌 사람들의 직업 중에서 농민을 가장 높다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 또 다음은 물건을 파는 사람 순이었지요.
조선 3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왕의 자리를 빼앗은 세조. 1450 문종, 왕위에 오름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왕이 되었어요. 1452 단종, 왕위에 오름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이 되었어요. 1455 세조, 왕위에 오름 세조는 어린 단종을 쫓아내고 왕이 되었어요. 1456 사육신, 죽음 단종을 다시 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여섯 명의 신하가 죽었어요. 1469 성종, 왕위에 오름 1482 성종, 젊은 선비들을 뽑아 궁궐에 들임 1494 연산군, 왕위에 오름.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첫째 아들 문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2년 만에 병으로 죽었어요. 그러자 열두 살 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하지만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작은아버지였던 수양 대군은 단종과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을 쫓아내고 왕이 되었어요. 단종의 충성스러운 신하 여섯 명은 끝까지 단종을 다시 왕의 자리에 올리려 했지만 끝내 죽고 말았지요. 1498 무오사화 1504 갑자사화 1506 중종, 왕위에 오름 1515 조광조, 선비를 조정에 들임 1519 조광조, 사약을 받아 죽음. 1524 상평창 설치 1559 임꺽정의 난. 왕이 된 열두 살의 어린 소년. 신하의 도움으로 왕 노릇을 하는 단종.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인 문종은 세종의 첫째 아들이었어요. 하지만 문종은 병에 걸려 왕이 된 지 2년 만에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뒤를 이어 문종의 아들이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단종이에요. 하지만 열두 살인 단종이 왕의 일을 하기엔 너무도 어렸어요. 단종은 왕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지요. "내가 너무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소. 특히 사람을 벼슬에 앉히거나 내쫓는 일이 가장 어렵게 느껴지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은 단종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어요. "저희 세 사람은 신하들이 올리는 글을 보고 이름 옆에 노란색 표시를 하겠습니다." 단종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노란색으로 표시된 사람을 뽑거나 내쫓았어요. 이렇게 되자 궁궐에 있는 신하들이 단종을 얕보고 숙덕거렸어요. "임금이 신하가 시키는 대로 하다니." "누가 들을까 무섭네." 열두 살인 단종이 왕의 일을 하기엔 너무도 어렸어요. 저희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양 대군. 어느 날,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은 단종의 허락을 받아 명령을 내렸어요. “벼슬을 얻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그만두어라.” 이들이 생각한 힘 있는 사람은 왕의 삼촌이나 사촌과 같은 친척이었어요. 왕이 어리기 때문에 친척들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하며 나서게 되면 왕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이 소식을 들은 수양 대군은 펄쩍 뛰었어요. 수양 대군은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어요. 지혜롭고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욕심도 많았지요. 수양 대군의 집에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막으니 수양 대군은 울화통이 터졌어요. “이제 무서운 것이 없는 모양이군.” 수양 대군은 곧바로 단종을 따르는 신하들을 찾아갔어요. 수양 대군이 펄쩍 뛰며 화를 내자 신하들은 수양 대군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막지 않겠다고 한 발짝 물러섰어요. 하지만 수양 대군은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문종은 누구일까요?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세종처럼 학문을 좋아하고 너그러운 성격이었어요. 왕이 되기 전 2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문관과 무관을 고루 관리에 오르게 했어요. 신하들의 이야기를 골고루 들어가며 세종을 도와 백성을 잘 다스렸지요. 그리고 세종이 병들자 5년간 세종을 대신하여 나랏일을 돌보았어요. 하지만 정작 왕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지요. 감히 내 집을 드나드는 것을 막다니 용서할 수 없다. 수양 대군에게 밀려난 단종. 단종을 밀어내는 일을 꾸미는 한명회. 수양 대군은 어린 조카인 단종이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요. 욕심 많은 수양 대군은 자신이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수양 대군 밑에서 일하고 있던 한명회가 수양 대군의 마음을 읽고 나섰어요. “대군 마마, 큰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일을 꾸미겠습니다.” 한명회는 단종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을 힘으로 쫓아낼 생각을 했어요. 수양 대군은 한명회에게 그 일을 준비하도록 허락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회는 무예가 뛰어난 장수들을 몰래 모았어요. 그리고 큰일을 치를 때를 기다렸어요. 세조의신하, 칠삭둥이 한명회. 수양 대군의 충성스런 신하였던 한명회는 어릴 때부터 ‘칠삭둥이’ 라 불렸어요. 칠삭둥이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일곱 달 만에 미리 나왔다는 뜻이지요. 그가 진짜 칠삭둥이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명회가 못생기고 몸집도 작아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해요. 그렇게 놀림을 받던 한명회가 조선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큰 벼슬과 힘을 가진 신하가 되었어요. 수양 대군의 무서운 행동에 단종과 왕실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였어요. 수양 대군의 명령대로 모두 없애 버리자. 누구 맘대로! 수양 대군에게 죽어간 신하들. 어느 늦가을, 수십 명의 장수들이 수양 대군의 집에 모였어요. 그들은 활을 쏘고 음식을 먹으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수양 대군은 조용히 명령을 내렸어요. “먼저 어린 임금의 주변에 있는 신하들의 집으로 가자.” 수양 대군은 장수들을 이끌고 가서 신하들을 단숨에 없앴어요. 그리고 단종에게 갔어요. “전하, 신하들이 난을 일으키려 해서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을 죽였습니다.” 단종은 수양 대군의 억지스런 말을 듣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린 단종은 어떻게 할지를 몰랐어요. 수양 대군의 무서운 행동에 단종과 왕실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였어요. 신하들이 난을 일으키려 해 먼저 없앴습니다. 수양 대군이 더 무서운데. 삼촌이 왕의 자리를 빼앗다.허수아비 왕, 단종. 수양 대군은 단종 주위의 신하들을 모두 없애 버리거나 내쫓았어요. 궁궐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힐끔힐끔 수양 대군의 눈치만 보게 되었지요. 단종은 누가 보아도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어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단종은 신하인 성삼문을 불렀어요. “나는 너무 어려서 나랏일을 돌보기 어렵다. 그래서 왕의 자리를 수양 대군에게 넘겨 주려 한다. 이 뜻을 수양대군에게 전하거라.” 수양 대군은 성삼문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단종을 찾아왔어요. “전하, 임금이 살아계신데 감히 어찌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수양 대군의 속마음은 달랐어요. 왕의 자리를 덥석 받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거절하는 척했을 뿐이었지요. 그렇게 몇 차례 거절을 하던 수양 대군은 마지못해 단종의 뜻을 들어 주는 척하면서 왕이 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옥새를 넘겨받는 수양 대군. 수양 대군이 왕의 자리에 오르는 날, 단종은 신하인 성삼문에게 말했어요. “가서 옥새를 가지고 오라. 그리고 수양 대군에게 넘겨 주라.” 단종은 수양 대군에게 나라와 백성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왕비와 함께 궁궐을 떠났어요. 옥새. 옥새는 임금님의 도장을 말해. 마침내 수양 대군은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조선의 7대 왕인 세조예요. 세조는 신하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어요. “조선이 세워진 뒤 훌륭한 왕들께서 이 나라를 다스렸다. 나 또한 어진 임금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임금이 되겠노라.” 세조는 왕이 되는데 도왔던 신하인 공신들을 포함해 많은 신하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벌였지요. 하지만 아직도 몇몇 신하들은 속으로 조카를 내쫓고 왕이 된 세조를 흉보고 있었어요. 세조는 나라의 중심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세조는 신하들의 힘에 눌리면 나라의 중심이 서지 않는다며, 왕의 힘으로 나라를 움직이려 했어요. 그래서 신하들의 의견을 두루 듣기보다는 왕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다루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왕이 되었어요. 옥새를 받았으니 이제부터 내가 왕이다. 왕이 되려고 조카를 내쫓다니 단종을 다시 왕으로. 수양 대군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들이 착착. 단종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옥새를 수양 대군에게 건네주었던 성삼문은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며 지냈어요. 이렇게 성삼문처럼 수양 대군이 왕이 된 것을 크게 못마땅해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또 있었어요. 바로 박팽년이었지요. 박팽년은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지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단종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죄스러워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명나라에서 수양 대군이 왕이 된 것을 축하하러 온다고 하오. 그날 우리 편의 장수를 수양 대군 곁으로 가게 해서 수양 대군을 없애 버립시다.” “반드시 성공해서 수양 대군을 몰아내고, 다시 단종을 왕으로 모십시다.” 성삼문의 말대로 그날 수양 대군을 보호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이었어요. 성승은 젊은 사람들의 뜻에 따르기로 약속했어요. 모두 잡아들여 죽여라! 수양 대군은 진짜 왕이 아니오. 물거품이 된 계획. 마침내 계획한 날이 왔어요.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어요. 수양 대군 곁에 장수를 두지 않겠다는 명령이 궁궐에서 내려온 것이었어요. 그때 성삼문과 같이 행동하기로 한 사람 중에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김질이었지요. 김질은 혹시 자신에게 큰 해가 올까 봐 그 엄청난 계획을 한명회에게 알렸어요. 한명회는 깜짝 놀라며 세조에게 가서 이 사실을 말했어요. 세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어요. “어서 이 일을 계획한 자들을 당장 잡아들여라.” 곧 성삼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조 앞에 끌려왔어요. 계획에 포함된 사람은 모두 잡혀서 온몸이 피와 멍으로 물들었어요. 하지만 끝까지 자신들이 한 일은 옳은 일이었다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어요. “우리는 쫓겨난 임금을 다시 제자리에 모시고자 했을 뿐이오.” 화가 난 세조는 그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어요. 이 사건이 계유정난이에요. 단종을 다시 임금에 오르게 하기 위한 계획을 했던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창덕궁이었어요. 중국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잔치가 창덕궁에서 있었기 때문이에요. “반드시 성공해서 수양 대군을 몰아내고, 다시 단종을 왕으로 모십시다.” 단종의 무덤 장릉. 왕의 자리를 수양 대군에게 넘겨 주었던 단종은 신하들을 부추겨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려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았어요. 그래서 세조는 그를 강원도 영월로 보냈어요. 영월에서 외롭고 쓸쓸한 날을 보내던 단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한양에서 그에게 사약을 내리기 위해 신하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단종의 시신은 영월 사람 엄홍도라는 사람이 몰래 거두어 묻어 주었어요. 하지만 왕의 무덤으로 볼 수 없는 초라한 무덤이었지요. 뒷날 단종의 억울함이 풀리고 난 뒤 단종의 무덤은 왕의 무덤답게 새로 꾸며졌어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단종의 무덤, 장릉이에요. 단종을 위해 죽은 여섯 명의 신하 사육신. 단종을 왕으로 다시 만들려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 여섯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있었어요. 그들을 사육신이라 하지요. ‘사’ 는 ‘죽다’ 라는 뜻이고 ‘육’ 은 여섯을 뜻하는 말이에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가 바로 이들이지요.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들 말고 김문기를 더 추가하기도 했어요. 이들은 집현전의 학자들로서 세종과 문종에게 아주 믿음직스러운 신하들이었어요. 특히 문종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이들에게 어린 세자였던 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들은 비록 죽었지만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어요. 꿈속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 몽유도원도. 안평 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었어요. 학문과 글 솜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억울하게도 그의 형 수양 대군에 의해 먼 곳으로 쫓겨났다가 결국 죽게 되었어요. 세조가 황보인, 김종서와 일을 꾸며 왕의 자리를 넘보았다는 죄를 뒤집어씌운 거예요. 이런 안평 대군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문화 유산이 있어요. 바로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이지요. 이 그림은 안평 대군이 없었다면 그려지지 않았을 거예요. 안평 대군이 꿈속에서 아주 신기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것을 안견에게 말해 그리도록 했기 때문이에요. 세조를 ‘나리’라고 불렀던 박팽년. ‘사육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박팽년이에요. 박팽년은 세조에게 끌려가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에는 신하들이 왕을 ‘전하’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박팽년은 죄인으로 끌려간 자리에서 세조에게 ‘나리’라고 불렀지요. ‘나리’란 말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에요. 하지만 왕에게는 분명히 ‘전하’라고 불러야 하는 말이 있음에도 ‘나리’라고 한 것은 세조를 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지요. 또 박팽년은 세조가 ‘어찌 내가 주는 나랏돈을 받는 신하가 나를 ‘전하’라고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지만, 그는 세조가 왕이 된 뒤로는 나랏돈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박팽년은 결국 세조에게 죽고 말았어요. 그런데 조선에서는 왕을 해치려 했던 사람은 그 가족까지도 죽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의 아버지, 네 명의 동생들, 외아들 모두 죽게 되었어요. 다만, 그의 며느리 이씨는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종이 되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육신들의 가족들은 모두 죽었지만 오직 박팽년의 손자 한 명만은 죽지 않고 살 수가 있었어요. 조카를 몰아낸 임금을 ‘전하’라고 부를 수 없소. 사육신과 다른 길을 갔던 신숙주. 사육신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괴로워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신숙주라는 사람이었지요. 신숙주는 세종 때부터 집현전에서 함께 일하던 학자로 성삼문과는 친한 친구 사이였어요. 하지만 신숙주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함께하지 않았어요. 나라가 강해지려면 수양 대군과 같이 강하고 힘센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결국 사육신 친구들과는 달리 신숙주는 세조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높은 벼슬을 얻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신숙주를 손가락질했지요. 성삼문은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신숙주는 쉽게 변하는 사람이라면서 말이에요. 심지어는 나물 중에서도 쉽게 쉬어버리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지요. 수양 대군은 강한 나라를 만들 것이오. 왕인 나를 누가 뭐라 하겠느냐 ? 하하. 왜 저러실까? 쯧쯧. 1450 문종, 왕위에 오름. 1452 단종, 왕위에 오름. 1455 세조, 왕위에 오름. 1456 사육신, 죽음. 1469 성종, 왕위에 오름 성종이 예종에 이어 왕이 되었어요. 1482 성종, 젊은 선비들을 뽑아 궁궐에 들임 성종은 나이든 공신을 누를 젊은 선비를 쓰기 시작했어요. 1494 연산군, 왕위에 오름 성종에 이어 연산군이 왕이 되었어요. 폭군이 된 왕, 연산군. 성종은 젊고 똑똑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벼슬을 주고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왕비를 궁궐 밖으로 내쫓아 죽게 한 것이 훗날 큰 문제가 되었어요. 성종의 아들 연산군은 왕이 된 후, 나라는 돌보지 않고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은 것에 대해 앙갚음하는 일에만 몰두했어요. 1498 무오사화 연산군은 세조에 대해 비판한 김종직을 따르는 김일손과 선비들을 죽였어요. 1504 갑자사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많은 선비들이 연산군에 의해 죽었어요. 1506 중종, 왕위에 오름 1515 조광조,선비를 조정에 들임 1519 조광조, 사약을 받아 죽음 1524 상평창 설치 1559 임꺽정의 난. 궁궐로 몰려드는 젊은 선비들. 고민으로 끙끙대는 성종. 조선의 아홉 번째 왕인 성종은 궁궐에 나이 많은 신하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많은 신하들은 성종이 왕이 되기 이전부터 궁궐에서 일했기 때문에 성종이 쉽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어요. 그리고 나이 많은 신하들은 젊고 새로운 선비들을 신하로 뽑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을 신하로 뽑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성종은 젊고 똑똑한 선비를 신하로 두고 새롭게 자신의 뜻을 펼치길 원했어요. 그때 김종직이란 선비가 성종의 눈에 쏙 들어왔어요. 지혜롭고 생각이 깊었던 김종직은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선비였지요. 나라를 새롭게 하려면 젊은 일꾼이 필요해. 김종직 대감은 정말 존경스러워. 성종은 젊고 똑똑한 선비를 신하로 두고 새롭게 자신의 뜻을 펼치길 원했어요. 왕도 정치의 시작. 어느 날 김종직은 성종에게 말했어요. “전하, ‘왕도 정치’를 펴셔야 이 나라가 올바로 설 것입니다.” 왕도 정치란 왕이 자신의 뜻대로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어진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뜻해요. 성종은 김종직에게 물었어요. “그럼, 왕도 정치를 하는 방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백성의 마음을 잘 아는 선비들을 신하로 두는 것입니다.” 성종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자네를 따르는 선비들이 많다고 들었네. 그러니 궁궐에 들어와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할 선비들을 소개해 보게나.” 그 뒤 김종직은 자신을 따르는 젊은 선비들을 하나둘씩 궁궐로 불러들였어요. 하지만 젊은 선비들이 많아질수록 오랫동안 궁궐에 있었던 나이 많은 신하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어요. 젊은 선비들이 많아지니 우리 편이 줄어드는 것 같군. 성종이 남산골 샌님을 과거에 합격시킨 이야기. 어느 날, 나그네 차림으로 남산골에 간 성종은 아버지의 환갑날에 노래를 부르는 가난한 선비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술상을 차린 며느리의 효심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가난한 남산골 선비 부부의 이야기를 과거시험 문제로 냈지요. 당연히 과거시험을 보러 왔던 남산골의 선비는 정답을 쓰고 합격하게 되었어요. ‘남산골 샌님’ 이란 서울 남산 아랫마을에 사는 가난한 선비를 뜻하기도 해요. 멀리멀리 쫓겨난 왕비 윤씨. 왕비 윤씨에게 닥친 불행. 성종 곁에는 윤씨 성을 가진 후궁이 있었어요. 성종은 예쁘고 똑똑한 윤씨를 아끼고 가까이 했지요. 그리고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 왕후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아끼던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삼았어요. 왕비가 된 윤씨는 왕자를 낳았어요. 그리고 왕자의 이름을 ‘융’ 이라고 지었지요. 성종은 왕자가 어려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길 원했어요. 그래서 왕자를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신하의 집에서 자라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왕비의 질투 때문에 궁궐이 발칵 뒤집어지는 일이 생겼어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 대비는 화가 난 목소리로 신하를 불렀지요. “왕비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소. 지금 당장 임금을 찾아가서 왕비를 쫓아내라고 하시오!” 인수 대비는 왕비의 질투를 나무라며 화를 냈어요. 성종이 다른 후궁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비가 성종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에요. 여러 신하들과 후궁들은 성종에게 왕비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어요. 조선 시대에는 아내가 남편을 질투하는 것은 큰 흠이 되었어요. 그런데다 하늘같이 높은 임금에게 한 질투였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가 되었어요. 고민하던 성종은 결국 왕비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어요. 폐비는 궁궐에서 쫓겨난 왕비를 이르는 말이야. 여러 신하들과 후궁들은 성종에게 왕비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어요. 폐비 윤씨의 슬픈 죽음.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는 어머니와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았어요. 그 뒤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폐비 윤씨의 집으로 궁궐에서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전하의 명령이오. 죄인은 어서 사약을 받으시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폐비 윤씨는 사약을 마셨어요. 잠시 뒤 폐비 윤씨의 입에서 피가 흘렀지요. 폐비 윤씨는 소매의 천을 찢어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곁에 있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했어요. 궁궐로 다시 오라하실 줄 알았는데, 사약이라니 흑흑. 어머니, 이 피 묻은 천을 꼭 왕자 융에게 꼭 전해 주세요. 한편 성종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그래서 왕자 융은 어른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몰랐어요.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을 융에게 절대 말하지 마라! 이 왕자가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른 연산군이에요. 어마마마. 세조를 욕한 신하들이 벌을 받다. 이극돈의 걱정.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른 연산군은 실록을 쓰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실록은 이전의 왕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이에요. “성종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4년째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실록을 쓸 준비를 하라.” 연산군의 명령에 따라 신하들은 실록을 쓸 준비를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신하 이극돈은 실록이 쓰여진다는 말에 걱정만 앞섰어요. ‘성종의 할머니이자, 세조의 부인인 정희 왕후가 돌아가셨을 때, 기생들과 놀았던 잘못이 있는데, 실록에 이런 이야기가 들어가면 어떡하지?’ 걱정이 된 이극돈은 실록을 쓰는 신하인 사관에게 가서 자신이 놀러간 일을 적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사관은 실록은 정확히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면서 이극돈에게 안 된다고 했어요. ‘만약 왕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난 큰 벌을 받을지도 몰라.’ 이극돈은 불안했지요. 잘못을 들킬까 불안하니 좀 훔쳐봐야겠다. 사관의 억울한 죽음. 불안했던 이극돈은 실록을 쓰는 건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실록을 쓰기 전 연습장에 미리 써 놓은 글들을 보았어요. 역시나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글이 쓰여 있었지요. 그런데 한숨을 쉬던 이극돈은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을 찾았어요. ‘이 글은 세조 임금을 헐뜯는 내용이 아닌가?’ 이극돈이 본 것은 사관이 스승인 김종직의 글을 칭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김종직의 글은 중국의 항우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을 꾸짖으면서, 은근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를 나무라는 것이었어요. 이극돈은 이 글을 다른 신하들에게 슬쩍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말은 연산군의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연산군은 불같이 화를 내며 사관을 당장 잡아들였어요. “감히 누가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 임금을 욕한단 말이냐! 이것은 나를 욕하는 것과 똑같다!” 이 사건으로 사관을 포함해 젊고 똑똑한 선비들이 한꺼번에 큰 벌을 받고 말았어요. “감히 누가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 임금을 욕한단 말이냐! 이것은 나를 욕하는 것과 똑같다!”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실록을 쓰는 사람인 사관은 왕이 죽으면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써 놓은 것을 꼼꼼히 보고 연대에 따라 다시 정리하여 실록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실록은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기 때문에 왕은 볼 수 없었어요. 왕은 원칙적으로 사관의 기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사관은 왕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모든 일을 자세히 남길 수 있었지요. 김종직은 누구일까요? 김종직은 어릴 적부터 매우 똑똑해서 많은 책을 단숨에 읽었다고 해요. 그리고 스물세 살 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얻었지요. 성종은 김종직을 높은 벼슬에 앉히고 김종직이 뽑은 선비들에게도 중요한 벼슬을 줄 만큼 김종직을 아꼈어요. 김종직은 많은 제자와 선비들의 안타까움 속에서 예순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의 원수를 갚은 연산군. 피 묻은 천을 본 연산군. 연산군은 왕이 된 뒤에도 어머니인 윤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신하가 연산군의 외할머니를 궁궐로 데리고 왔어요. 신하는 연산군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전하, 전하의 외할머니를 모셔 왔습니다.” “나에게 외할머니가 있다니, 그게 정말인가? 어서 이리 모시고 오라!” 연산군은 자신 앞에 선 늙은 여인을 고개 숙여 보았어요. 늙은 여인은 오랜 고생의 흔적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했지요. “당신이 나의 외할머니가 맞소? 그럼 왜 이제야 나타났단 말이오?” 연산군의 외할머니는 오래전의 일들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인수 대비와 후궁, 신하들 때문에 궁궐에서 쫓겨나 결국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지요. 그리고 옷 속에서 고이 간직한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꺼냈어요. “전하, 이 천을 보시옵소서. 전하가 왕이 되면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사옵니다.” 연산군은 갑작스레 들은 이야기로 어리둥절했어요. 임금인 자신의 어머니가 억울한 일로 사약을 마셨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어요. 연산군은 건네받은 천을 천천히 살펴보았어요. 천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어요. 성종은 아들 연산군을 위해 어떤 유언을 남겼을까요? 연산군을 걱정한 성종은 ‘내가 죽더라도 폐비인 연산군 어머니의 일을 연산군에게 말하지 말라’ 는 유언을 남겼어요. 하지만 성종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어요. 폐비의 일을 알게 된 연산군은 20년이 지나서 폐비의 일에 관련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요. 어머니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신하와 선비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라고 했지요. 붉은 피로 물든 궁궐. 연산군에게 전해진 천은 폐비 윤씨가 죽기 전,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던 천이었어요. “누가 어머니를 죽였느냐? 내 그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연산군은 먼저 어머니를 모함한 후궁 두 명을 데려오게 했어요. 그리고 후궁들을 발로 차서 단숨에 죽게 했지요. 왕이 두 후궁를 죽였다는 끔직한 소문이 온 궁궐에 퍼졌어요. 소문을 들은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 대비는 연산군을 꾸짖었지요. 하지만 연산군은 인수 대비를 밀쳐 버렸어요. “당신도 똑같이 나쁜 사람이오!” 연산군의 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연산군은 죽은 후궁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마저 죽게 했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신하와 선비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라고 했지요. 결국 100여 명이 넘는 신하와 선비들이 이 사건으로 죽음을 맞았어요. 이럴 수가. 내 어머니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전하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음악 백과사전 악학궤범. 성종은 세종처럼 조선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왕이에요. 특히 악학궤범은 조선의 음악을 정리해 놓은 책으로, 성종의 명령에 따라 여러 신하들이 만든 책이지요. 악학궤범에는 61가지 악기에 대한 설명과 20여 곡의 음악, 30여 종의 춤, 그리고 음악을 연주할 때 입는 옷과 도구들이 소개되어 있어요. 한마디로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음악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음악의 가사가 한글로 되어 있어서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뿐 아니라, 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책이에요. 조선 왕조의 대기록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때, 실록을 쓰기 위해 준비하다가 세조를 욕했다는 이유로 죽게 된 사람은 김일손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조선의 스물다섯 번째 왕 철종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에요. 실록은 왕이 한 일과 당시의 이야기들을 낱낱이 기록한 책으로, 다음 왕이 ‘실록청’ 이라는 관청의 사관에게 지난 왕에 대한 글을 쓰게 했어요. 그리고 사관이 올바른 역사를 남기도록 하기 위해 왕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열어 볼 수 없었지요.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역사책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어요. 연산군이 놀기 좋아했던 절 원각사. 서울 종로의 탑골 공원 자리에는 원각사라는 절이 있었어요. 고려 시대에 지어진 원각사는 경복궁 가까이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도 왕실 사람들이 종종 찾는 절이었지요. 나랏일은 뒤로 하고 술과 놀이에 빠져 지냈던 연산군은 원각사에서 놀기를 좋아했어요. 승려들은 하나둘 원각사를 떠났지요. 승려들이 빠져나간 절은 더 이상 절이 아니었어요. 승려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절은 점점 사라져갔어요. 지금은 세조 때 세운 원각사비만이 남아 있어요. 죽고서도 한 번 더 죽어야 했던 김종직.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난 김종직이 죽고서도 한 번 더 죽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 까닭은 연산군 때,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이 실록을 준비하며 미리 써 놓은 글에서 조의제문을 칭찬했기 때문이에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를 은근히 나무라는 내용이었지요. 글의 내용을 알고 화가 난 연산군은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신하와 선비들을 죽이고, 김종직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서 벌을 내렸어요. 그리고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이미 죽은 김종직의 목을 베었어요. 하지만 중종이 왕이 된 뒤,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선비들의 부탁에 김종직의 죄는 풀리게 되었지요.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건진 허종.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면 할머니, 후궁, 왕자, 신하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때에 죽음을 피한 신하가 있었어요. 바로 말에서 일부러 떨어진 허종이었지요. 성종은 자신의 아내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허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허종은 연산군이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되면 사약을 전했던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궁궐로 말을 타고 가는 길에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지요. 그리고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사약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전했어요. 허종의 생각대로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계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어요. 허종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지요. 말에서 떨어지면 사약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될 거야. 어이쿠!
조선 4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포악한 행동을 일 삼았던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쫓겨났어요. 그리고 동생인 중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중종은 큰 벼슬을 조광조에게 주고 나라를 새롭게바꾸고자했어요.하지만 조광조의 노력은나이 많은신하들의 큰 반대에 부딪쳤어요. 조광조는 멀리 쫓겨나서 죽고 말았지요. 성종의 또 다른 아들, 진성 대군 연산군의 난폭함은 날이 가도 그칠 줄을 몰랐어요. 연산군은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술과 놀이에만 빠졌지요. 많은 신하들이 나라 걱정을 하였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혹시라도 왕의 잘못을 말했다가 멀리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연산군의 모습을 보다못한 신하 두 명이 일을 꾸몄어요. 바로 박원종과 성희안이었어요. “나라꼴이 말이 아니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소.” 박원종의 말에 성희안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어요. “맞는 말이오.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 대군을 왕으로 모십시다.” 진성 대군은 성종의 또 다른 아들이자, 연산군과는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었어요. 두 사람은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는 신하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우르르 몰려가 연산군을 몰아내다 드디어 연산군을 몰아내기로 한 날이 되었어요. 박원종은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데리고 왕실을 덮쳤어요. 연산군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크게 놀랐어요. 박원종은 그런 연산군에게 큰 소리로 말했어요. “옥새를 넘겨 주십시오. 이제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 연산군은 주위를 돌아보았어요. 주위에는 박원종을 따르는 사람들로만 가득하고 자신을 지켜 줄 신하들은 없었지요. 연산군은 할 수 없이 옥새를 넘겨 주었어요. 옥새를 넘겨받은 박원종은 진성 대군을 궁궐로 데려왔어요. 그리고 그를 왕에 자리에 앉혔지요. 바로 그가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이에요. 신하들은 연산군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중종은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어요. 대신에 강화도의 외딴 섬으로 쫓아버렸어요. 쫓겨난 연산군은 하루하루를 억울해 하며 지내다가 죽었어요. 중종의 새로운 신하, 조광조 왕의 자리에 오른 중종은 자기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기 힘들었어요. 자신을 왕의 자리에 앉힌 신하들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에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고 여러 방법으로 땅과 재산을 늘려가고 있었어요. 중종은 그들의 간섭을 물리치고 싶었어요. 그때 중종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가 그들을 막을 수 없다면, 그들을 막을 사람을 내세워야겠다.’ 중종은 똑똑하고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신하를 찾아보았어요. 중종이 찾아낸 사람은 바로 조광조였어요. 조광조는 젊었지만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바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제사를 모두 없앤 조광조 조광조는 나라를 새롭게 바꾸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했어요.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즉시 왕에게 고치도록 하였어요. 한번은 조광조가 중종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던 일도 있었어요. “전하, 유교를 기본 가르침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할 왕실에서 하늘과 미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말이 안 되옵니다. 없애 주시옵소서.” 그러나 중종도 이것만큼은 쉽게 들어 줄 수가 없었어요. 왕실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어요. 이 제사는 왕의 어머니인 대비와 왕비, 궁녀들이 나서서 준비하는 제사였지요. “이번 일만은 왕실의 오랜 전통이라 쉽게 들어 줄 수 없네.” “이 제사는 미신이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당장 없애셔야 합니다.” 그래도 중종은 조광조의 뜻을 받아 주지 않고 물러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조광조는 궁궐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했어요. 빗줄기가 강해지고 밤이 깊어도 조광조는 꿈쩍도 하지 않고 중종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버텼어요. 고민하던 중종은 조광조의 말대로 제사를 없애기로 했어요. 공이 있는 진짜 신하를 다시 가려내라 조광조는 더 큰일을 계획했어요. 바로 중종이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신하들을 가려내는 일이었어요. 조광조는 공이 있는 신하들의 이름이 쓰인 책을 보았어요. 그 책에는 가장 공이 큰 신하부터 차례대로 이름이 쓰여 있었고, 어떤 공을 세웠는지도 나와 있었어요. 책을 보던 조광조는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벼슬과 재물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공을 높인 흔적들이 많구나.” 조광조는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과연 책에 나와 있는 대로 공을 세웠는지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중종을 찾아갔어요. “전하, 거짓으로 책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 있습니다. 모두 76명을 책에서 지워버림이 옳은 줄 아뢰오.” 중종은 조광조의 말대로 거짓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지우도록 했어요. 조광조가 나타나 정치를 하면서 정치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더 큰일을 당하기 전에 조광조를 따끔하게 손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종의 마음 벌레 먹은 나뭇잎에 대해 알게 된 중종은 화가 난 목소리로 신하들에게 말했어요. “이렇게 임금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가 떠돌다니. 당장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아라.” 잠시 후, 나이든 신하들이 중종에게 몰려왔어요. “전하, 이것은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짓이 분명하옵니다.” “맞습니다. 조광조는 자기가 마치 임금인 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중종을 찾아온 신하들은 조광조 때문에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조선을 조광조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조광조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중종은 조광조를 벌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어느새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어요. 벌레가 파먹은 ‘주초위왕’ 나뭇잎에 나타난 ‘주초위왕’ 글씨는 벌레가 파먹은 것이라고 해요. 이것은 조광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나뭇잎에 ‘주초위왕’ 이라는 글씨를 꿀처럼 단 음식으로 써 놓아 이것을 벌레가 먹게 했다고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요. 하지만 어떤 역사 학자는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해 보았지만 벌레는 꿀만 먹었지, 나뭇잎까지 먹지는 않았다고 해요. 주초위왕의 나뭇잎을 벌레가 파먹었는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파놓았는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사건은 분명 조광조의 운명을 바꿔 놓은 큰 사건이 되었어요. 조광조를 벌한 중종 중종도 조광조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어요. 조광조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왕이라고 할지라도 할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중종은 그런 조광조가 점차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드디어 중종이 조광조를 불렀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내가 아닌 조광조 네가 다스린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임금과 나라를 위해서 옳은 일을 하는 신하일 뿐입니다.” 조광조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어요. 이 말은 마치 못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종에게 불만이 섞인 소리처럼 들렸어요. 잠시 후에 중종이 말했어요. “조광조가 임금과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너무 날뛰었도다. 아주 먼 곳으로 보내라.” 이렇게 한 번 내려진 중종의 명령은 다시 거두어지지 않았어요. 조광조를 따르는 선비들이 울다 결국 조광조는 능주(지금의 전라남도 화순)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어요. 조광조를 따르는 제자들과 많은 선비들이 궁궐 앞에 몰려와 조광조를 궁궐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엎드려 외쳤어요. 하지만 중종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유배 간 조광조는 하루하루 나라 걱정을 하며 보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왕의 명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조광조를 찾아왔어요. “임금의 명이다. 죄인 조광조는 사약을 받으라.” 조광조를 내쫓은 신하들은 조광조가 다시 궁궐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중종에게 말해 조광조가 사약을 받게 한 거예요. 결국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고 서른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조광조가 궁궐에서 쫓겨나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 ‘주초위왕’ 나뭇잎 사건이에요. 그 나뭇잎 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홍경주와 그의 딸 희빈 홍씨였어요. 희빈 홍씨는 중종이 아끼는 후궁 중에 하나였어요. ‘주초위왕’ 사건이 있기 전에 홍경주는 조광조에 의해 벼슬에서 쫓겨나 있었어요. 그 뒤 홍경주의 마음은 조광조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찼지요. 그래서 홍경주는 그의 딸인 희빈 홍씨에게 틈만 나면 말했어요. 조광조가 욕심이 가득하고 언젠가는 왕마저도 얕잡아 볼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희빈 홍씨는 중종이 조광조를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말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벼슬에서 쫓겨난 아버지를 생각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조광조를 나무라는 말을 중종에게 했어요. 결국 홍경주는 그가 마음먹은 대로 조광조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딸의 힘을 빌려 ‘이조 판서’ 라는 아주 높은 벼슬까지도 오르게 되었지요. 딸을 앞세워 조광조를 몰아낸 홍경주 17 중종의 세 번째 아내인 문정 왕후는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왕비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왕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중종은 첫째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어요. 그 왕이 바로 인종이에요. 하지만 인종은 어릴 때부터 늘 병에 시달리더니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게 되었어요. 그래서 문정 왕후의 아들이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명종이에요. 하지만 열두 살인 명종은 왕 노릇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어요. 왕이 나이가 어릴 경우 보통 어머니나 할머니가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수렴청정’ 이라고 해요. 문정 왕후가 이때부터 무려 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어요. 나라를 다스렸던 문정 왕후는 그 무렵 신하들에게 왕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왕과신하들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게되면서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나쁜관리들은백성들에게더많은 세금을내게하고, 더많은일을억지로시켰어요. 견디다못한백성들은 도망을 가거나도적이 되는 일도 자주일어났어요. 백성들의 고통이 된 특산물 특산물을 쌀로 대신 내기도 했어요 고을에는 나쁜 관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씨 착한 사또도 있었어요. 특산물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어느 고을의 사또는 특산물이 부족해서 양을 채우지 못하는 백성에게는 부족한 만큼을 쌀로 내게 하기도 했어요. 이이와 유성룡 같은 사람들은 특산물을 쌀로 내는 것을 아예 법으로 정하자고 말을 하기도 했지요. 특산물을 내지 못한 백성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너무 적게 가져왔으니 받을 수 없소. 시름이 깊어가는 백성들 조선은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때에 들어서서, 나라가 혼란스럽고 백성들은 더욱 살기 어려워졌어요. 왕과 신하들이 서로 싸우느라 백성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 틈을 타, 고을의 나쁜 관리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거나 일을 시키며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기 일쑤였어요. 특히 백성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특산물을 내야 하는 공납이었어요. 특산물은 고을에서 특별히 생산되는 물건이나 농작물, 물고기 같은 것들이에요. 조선의 백성들이라면 반드시 정해진 양의 특산물을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은 내야만 했지요. “올해는 사과 농사를 망쳐서 정해진 양만큼 내지 못할 것 같네.” “내년에 농사를 잘 지어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백성들은 나라에 특산물을 바치는 날이 다가오면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농민을 울리는 나쁜 관리들 어려운 살림을 꾸리던 백성들은 부족한 특산물을 들고서 관청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나리, 올해 농사를 망쳐서 낼 수 있는 사과가 이것밖에 없습니다. 내년에 농사를 잘 지으면 그때 더 많이 내겠습니다.” “원래 내야 할 양을 채우지 못하면 받을 수가 없네. 어서 썩 물러가게나.” 백성들은 울며 사정을 하였지만 관리는 더 이상 듣지도 않고 가버렸어요. 특산물을 내지 못한 백성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만약 정해진 날짜에 내야 할 사과를 다 채우지 못하면 관청에서는 매를 내리고 감옥에 가둘 것이 불 보듯 뻔하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형편이 안 좋은 백성들을 더욱 한숨짓게 하는 것은 관리의 말이었어요. 오히려 자신이 대신 사과를 내줄 테니 나중에 이자를 듬뿍 내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말을 들은 백성들은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백성들의 허리를 휘게 하는 군대 조선에는 특산물 말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또 있었어요. 바로 군대를 가야 하는 군역이었어요. 조선에서는 천민을 빼고 나이가 16세에서 60세가 되는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 했어요. 1년 내내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거나 전쟁이 났을 때 나라를 위해서 싸우러 나가야 했어요. 그때에는 나라에 큰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는 않고 대개 농사 일이 바쁠 때를 피해서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백성들은 불만이 많았어요. “아니, 군사 훈련을 받으러 갔는데 성 쌓는 일을 하라니 기가 막히는군.” 나라에서는 왕의 무덤을 만든다던지, 성을 쌓고 고치는 일도 백성들에게 시켰어요. 이 일도 정해진 기간 동안만 하면 되었어요. 큰 공사를 하는 데 사람이 부족하면 군인들에게 이 일을 시키곤 하였어요. 하지만 군인들은 이것이 아주 큰 불만이었어요. 공사 일은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큰 돌과 나무를 나르다가 다치거나 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점점 줄어드는 군인들 “아니, 군사 훈련을 받으러 갔는데 성 쌓는 일을 하라니 기가 막히는군.”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생겨난 방법 원래 가야 할 군대를 다른 사람이 가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재물을 주고 사람을 사서 군대에 보내기도 했어요. “농사 일이 바쁘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저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뿐이 아니었어요. 대신 군대에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한 백성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기도 했어요. “나리, 제가 사정이 있어 올해 군대를 가지 못할 것 같은데, 삼베를 대신 내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관리나 관청에서는 일 년 동안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정해진 삼베를 내도록 허락해 주었어요. 이렇게 되자 삼베를 내고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어요. 나라에서는 백성에게 받은 삼베로 군인을 사려고 했지만 군대에 가려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조선에는 군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어요. 농민들은 왜 대신 사람을 구하거나, 삼베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려고 했을까요? 농민들이 군역을 하느라 서울이나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느라 4~5개월이 걸리면 정작 때를 놓쳐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삼베를 줄 테니 군대에 오시오. 난 삼베를 내고 군대 걱정을 덜었지. 곡식을 빌리는 백성들 백성들의 생활은 계속 어려워졌어요. 고을 여기저기서 굶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뿌리를 삶아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때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생활이 어려운 백성을 위해서 관청에서 곡식을 빌려 주겠노라.” 어느 고을 사또가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가라고 말을 하였던 것이에요. 조선에도 삼국 시대처럼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나중에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둘 때에 갚도록 하는 법이 있었어요. 대신에 갚을 때는 빌린 곡식보다 조금 더 많은 곡식을 이자로 내야만 했어요. 곡식을 갚지 못해 도망치는 백성들 지난 봄 곡식을 빌렸던 백성이 가을이 되어 농사로 거둔 곡식을 가지고 관청을 찾아왔어요. 나리, 곡식을 갚으려고 왔습니다. 빌린 곡식과 이자입니다. 빌린 곡식의 양은 맞지만 이자가 부족하다.빌린 곡식의 반을 이자로 내거라. 하지만 곡식의 양을 세어 보던 관리는 눈살을 찌푸렸어요. 홍길동은 연산군 때 있었던 실제 사람이에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홍길동은 도적이었는데, 낮에는 높은 벼슬 옷차림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고을의 수령도 진짜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인 줄 알고 꼼짝을 못했다고 해요. 홍길동은 도적들 중에서도 대장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잡혀서 감옥에 갇혔지요. 실제 홍길동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이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만들어진 소설이 바로 허균이 썼다고 알려진 홍길동전이에요. 실제 있었던 홍길동보다 약 100년 뒤에 나온 소설이지요. 홍길동이 조선 시대에 아주 유명한 도적이었다는 것은 사실과 소설이 맞아떨어지고 있어요. 실제의 사람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 홍길동 27 홍길동과 함께 조선 시대 유명한 도적이 있어요. 바로 임꺽정이에요. 임꺽정은 홍길동보다 약 60년 뒤에 나온 사람이에요. 임꺽정은 황해도의 구월산에 사는 도적이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만 활동하지는 않았어요. 구월산을 중심으로 평안도, 강원도 심지어는 왕이 살고 있는 한양까지도 와서 도적질을 하였지요. 임꺽정은 나쁜 짓을 일삼는 부자들의 집을 털어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비록 임꺽정이 도적이었지만 많이 존경하고 고마워했어요. 나라에서는 임꺽정을 잡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잡을 수가 없었어요. 백성들이 임꺽정이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임꺽정은 그의 부하 서림의 배신으로 결국 잡혀서 죽고 말았어요.
대한제국 2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 제국으로 바꾸었어요. 독립 협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회를 열어 사람들을 깨우치려 했어요.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왕비 민씨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어요. 그러자 일본은 생각했지요. “우리에게 방해가 되는 왕비 민씨를 아예 없애 버립시다!” 일본은 새벽에 몰래 경복궁으로 들어가 왕비 민씨를 죽였어요. 이 사건이 을미사변이에요.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조선을 더욱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고종은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일본이 왕비까지 죽였으니 이제 내 목숨까지 노리겠구나.’ 그 무렵 러시아와 친한 조선의 신하들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에 맞서려 했어요.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내 몸을 피하게 합시다.” 공사관은 다른 나라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고종은 신하들의 뜻에 따라 궁궐을 비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갔어요.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해요. 고종과 세자는 일 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서 살았어요. 고종이 자리를 비우자 조선의 자주성은 크게 땅에 떨어졌어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다시 오늘날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우리 조선은 자주 독립 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고종은 조선을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종은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기로 했어요. 그리고 왕을 ‘황제’ 라 부르고, 왕후를 황후로, 세자를 황태자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어요. 이때 왕비 민씨의 시호도 ‘명성 황후’ 라고 정했어요. 고종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원구단이라는 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고 대한제국이 열렸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어요. 대한제국은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했어요. 전국의 땅을 새로 조사하여 세금을 거두고,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야심차게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노력은 여러 나라의 방해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어요. 미국에 건너가 의사가 된 서재필은 조선을 미국과 같은 근대 국가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았어요.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만듭시다!” 영은문은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조선 신하들이 나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라 이름을 바꾸고 싶었던 거예요. 조선 독립의 상징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요.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 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여기서 쓰인 ‘독립’ 이라는 말은 청나라의 간섭을 없애고 조선이 홀로 선다는 뜻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독립 협회의 뜻을 따라 함께했어요. 그래서 독립문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곳을 수리하여 독립관도 만들었지요. 이곳은 독립 협회 회원들이 모이는 장소로 쓰였어요. 독립 협회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어요. 토론회에 함께한 사람들은 조선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특히 시민, 학생, 상인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모인 ‘만민공동회’ 에서 사람들은 조선을 지키자는 주장을 했어요. “서양 나라들의 간섭을 물리치고 조선의 독립을 지켜 냅시다!” 고종은 처음에 의회를 만들자고 한 독립 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독립 협회의 활동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고종에게 거짓말을 꾸몄어요. “독립 협회가 폐하를 내쫓고 대통령을 세워 나라를 바꾸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고종은 명령을 내렸어요. “지금 당장 독립 협회를 해산시켜라!” 결국 독립 협회는 뿔뿔이 흩어졌고,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된 나라를 만들려던 독립 협회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요. 일본은 중국과 대한제국을 차지하고 싶어서 늘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한제국에 세력을 넓히려고 했던 러시아를 걸림돌로 생각했어요. “러시아와 전쟁을 한판 벌여 혼내 주어야겠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자 대한제국은 두 나라 중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에 군대를 보내 언제든지 일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어요.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일본 군대가 필요한 땅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억지를 부렸어요. 러시아에 연이은 승리를 거둔 일본은 결국 러시아를 물리쳤어요. 그 무렵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게 손을 쓰고 있었어요. “일본은 조선을 차지할 테니 미국은 넘보지 마시오.” “그럼 미국은 아시아에서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 테니 일본은 넘보지 마시오.” 이렇게 미국과 일본은 서로 비밀리에 약속을 했어요. 일본은 영국과도 약속하여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고 약속했지요. 일본은 고종에게 약속을 하라고 협박했어요. “대한제국의 외교에 관한 문제는 이제 일본이 대신 맡아서 하겠소.” 게다가 일본은 사람을 보내 대한제국의 정치까지도 간섭하겠다고 했어요.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일본과의 약속에 도장을 찍지 않았지요. 일본에게 외교권을 넘겨 준다는 것은 대한제국이 독립된 나라이기를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의 대신들에게 겁을 주기 시작했어요. “일본과 이 약속을 맺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니 절대 못하겠소.” 고종은 끝까지 거부했지만, 일본의 협박과 일본의 편을 드는 대신들 때문에 결국 원하지 않는 길을 걷게 되었어요. 이것이 바로 을사조약이에요. 그때부터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렸지요. 일본이 강제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자 전국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어요.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 다시 찾읍시다!” “을사조약을 없었던 걸로 하고 일본 놈들을 당장 몰아냅시다!” 양반, 학생, 상인들 모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웠어요. 또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 선 사람들을 공격하고,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의병을 일으키는 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본에 맞섰어요. 장지연은 신문에 ‘오늘에야 목 놓아 크게 통곡하노라’ 라는 글을 실어 억울한 심정을 토했어요. 심지어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을사조약이 맺어질 무렵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 평화 회의를 열 예정이었어요. 고종은 여기에서 을사조약이 일본의 협박으로 억지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종은 이준에게 비밀문서를 주어 헤이그로 보냈어요. 하지만 일본, 영국, 미국의 대표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이준은 회의하는 곳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어요. 이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끊었어요. 이 사실은 일본에게로 전해졌어요. “고종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일본은 강제로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순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내세웠어요.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자며 목소리를 높였어요. 그리고 또다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어요. 하지만 일본의 거침없는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일본은 우리 정부의 각 부서에 일본 사람을 차관으로 두고, 대한제국의 군대도 없애 버렸어요. 군대가 강제로 흩어지자 군인들 가운데에서는 의병에 나서는 사람이 많았어요. 대한제국의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자 의병들의 무기도 더욱 좋아져 일제에 더 잘 맞서 싸울 수 있었어요. 갑오개혁이 계속되면서 일본은 점점 조선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왕비 민씨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이런 일본을 몰아내려고 했어요. 이를 알아차린 일본은 일본의 외교관이었던 ‘미우라’ 라는 사람을 시켜 왕비 민씨를 죽일 계획을 짰어요. 이들은 이 계획의 암호를 ‘여우사냥’ 으로 정하고 행동에 옮겼어요. 일본은 새벽에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에워쌌어요. 그리고 칼을 든 일본 사람들이 왕비 민씨가 자고 있는 옥호루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왕비 민씨와 궁녀들을 칼로 찔러 잔인하게 죽이고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불에 태워버렸지요. 이 사건이 ‘을미사변’ 이에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정부에서 돈을 받아 펴낸 독립신문은 처음에는 4면으로 만들었어요. 그 가운데에 3면은 한글로, 1면은 영어로 만들었지요. 영어로 신문을 만든 까닭은 우리나라의 사정을 외국 사람들에게도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독립신문은 국민들을 위해 어떤 일이든지 대신 말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정부가 하는 일을 국민에게 전하고, 국민들의 생활을 정부에 알리려고 했지요. 국민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고발하기도 했어요. 독립신문은 신문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 그 뒤에 여러 신문이 나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고종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사람을 보냈어요. 일제가 우리에게 한 짓을 알리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때 고종의 지시를 받고 헤이그로 떠난 사람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었어요. 하지만 일제는 이 세 사람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았어요. 외국어를 잘하던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에 글을 실어 주목을 끌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요. 불행히도 헤이그 특사 사건은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이유가 되고 말았어요.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만들어 사람들을 깨우치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 노력했어요. 서재필 은 일찍부터 개화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개화에 눈을 떴어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 으켰다가 실패한 뒤 일본으로 도망갔어요. 그곳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어요. 세월이 흘러 서재필은 반란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벗게 되자 11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서재필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 협회도 만들었어요. 그리고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독립하는 일에 온몸을 바쳤어요. 최익현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를 없애는 일에 앞장섰어요. 최익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공사를 위해 당백전을 만들어 나라 살림을 어렵게 했다는 글을 왕에게 올려 흥선 대원군을 쏘아붙이기도 했어요.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최익현은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사람들을 없애자고 했어요. 최익현은 모두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우자고 하면서 세금을 내지 말 것, 철도를 이용하지 말 것, 일본 상품을 사지 말 것을 행동에 옮기자고 호소했지요. 최익현은 일흔네 살의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 싸웠어요.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일본의 대마도로 끌려 갔어요. 최익현은 그곳에서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며 단식을 계속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식민지로 삼았어요.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세우고,헌병 경찰을통해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우리민족을 다스렸어요. 하지만 우리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3.1운동으로 독립 만세의 물결을 전국 곳곳에 퍼지게하였지요. 그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서 독립 운동을 계속 벌여 나갔어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도 마음대로 못하고, 군대와 경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일본은 우리 민족을 더욱 괴롭혔어요.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겠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다스리면서 우리의 나라 살림을 빼앗는 일을 벌여나갔어요. “조선에 건너와 살면서 싼값에 땅을 사 부자가 되시오.” 조선에 넘어 온 일본 사람들은 땅을 사서 큰 농장을 가졌어요. 일본 농부 중에는 많은 논밭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선 사람에게 돈을 받고 자신들의 땅에서 농사를 하도록 한 뒤 이익을 챙겨가는 사람이 많았지요. 또한 일본에서 사용하는 돈을 똑같이 조선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바꾸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준비를 빈틈없이 해나갔어요. 일본은 드디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작업에 들어갔어요. 바로 대한제국과 일본을 완전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어요. 육군 대장 출신으로 조선의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이를 위해 온갖 꾀를 부렸어요. “어린 순종을 이용해 대한제국과 일본을 하나로 합치는 약속을 맺도록 합시다.” 데라우치는 을사조약 때 이미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이완용과 손잡고 음모를 꾸몄어요. 이완용은 순종에게 일본과의 약속을 맺는 데 필요한 권한을 받아냈어요. 그리고 데라우치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미리 준비한 약속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었어요. 이 순간이 바로 일제가 조선을 통째로 집어삼킨 순간이었어요. “드디어 우리 일본 제국과 대한제국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소.”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 만든 이 약속에는 대한 제국의 황제가 가지는 모든 권한을 일본 국왕에게 넘겨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이완용은 여기에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들을 관리로 뽑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더했어요. 이 내용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어요. “오백 년 넘게 계속된 조선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게 되다니.”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로 지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요. 대한제국을 송두리째 빼앗은 일제는 처음부터 우리 민족을 꼼짝도 못하게 억누르려 했어요. “헌병 경찰로 조선 사람들을 다스려야겠어.” 일제는 헌병 경찰을 내세워 조선을 다스리기로 했어요. 칼을 차고 군복을 입은 헌병 경찰의 권한은 어마어마하게 컸어요.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감시하고 잡아갈 수 있었지요. 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재판에 보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심판할 수도 있었어요.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서로 끌고 가 고문을 하고 볼기를 치기도 했지요. 이렇게 볼기를 치는 벌을 태형이라고 하는데 일제는 아예 이것을 법으로 정해 버렸어요. “헌병 경찰을 조심해야 하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아랫마을 돌쇠는 볼기 30대를 맞다가 죽었다더군.” 조선 사람들에게 태형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어요.
토란이의 열두 달 이야기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3월 10일 월요일 날씨 비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집 앞 대추나무 가지에 새끼손톱만 한 새싹이 돋았습니다. 멀리서 나무에 돋은 새싹을 보면 마치 연둣빛 꽃처럼 보입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났던 제비도 돌아왔습니다. 어느새 따뜻한 봄이 왔나 봅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새싹이 돋아나요. 하루가 다르 게 나뭇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어나지요. 봄은 따뜻해서 활동하기 좋 은 계절이에요. 하지만 날씨가 건조해서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계절이 기도 해요. 4월 8일 화요일 날씨 :맑음 아빠가 누렁이를 데리고 밭을 갈았습니다. “음매음매.” 누렁이는 침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아빠, 누렁이가 힘든가 봐요. 좀 쉬었다 해요, 네?” “빨리 밭을 갈아야 감자도 심고, 옥수수도 심지.” 아빠는 누렁이 생각은 않고 쟁기질만 재촉했습니다. “음매음매, 너무 힘들어요.” 내게는 누렁이 우는 소리가 그렇게 들렸습니다. 나는 누렁이가 불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겨우내 눈비를 맞아 단단해진 땅에는 농작물이 뿌리를 내리기 힘들어요. 그래서 농사를 짓기 전에 논밭의 흙을 갈아엎어야 해요. 단단해진 땅에 거름을 뿌려 두었다가 쟁기질을 하면서 흙과 섞어요. 이렇게 하면 농작 물이 잘 자라지요. 5월 9일 금요일 날씨 맑음 엄마가 옷장에서 여름옷을 꺼냈습니다. 나는 얼른 작년에 입던 바지를 입어 보았습니다. 분명히 칠부바지였는데, 바지 끝이 무릎까지 올라오고 허리는 잠기지도 않았습니다. “엄마, 옷이 줄었어!” “호호호, 옷이 준 게 아니고 토란이 네가 큰 거야.” 한 해 동안 내가 이렇게 많이 자랐다니,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논밭에는 농작물과 여러 가지 잡초가 함께 자라요. 잡초는 농작물이 이 용해야 할 햇빛과 양분 등을 빼앗기 때문에 뽑아 주어야만 농작물이 잘 자라요. 이렇게 논밭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김매기라고 해요. 6월 18일 수요일 날씨 맑음 내 손가락만 하던 고추 모종이 어느새 내 어깨 높이만큼 자랐습니다. 줄기 여기저기에 하얀 꽃이 피었고, 벌써 고추가 열린 것도 있습니다. 꽃이 많이 필수록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데, 올해는 고추 농사가 잘되려나 봅니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 김매기를 했습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자꾸 자랍니다. 김을 매느라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7월 12일 토요일 날씨 :비 비가 내립니다. 벌써 며칠째 계속해서 비가 내립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물난리가 나면 안 되는데.” 할아버지는 오늘도 비옷을 입고 논에 찬 빗물이 빠져나갈 물꼬를 트러 갔습니다. 나도 걱정이 되어서, 친구와 놀면서도 자꾸 문밖을 내다보았습니다. 8월 3일 일요일 날씨 :맑음 아침부터 날씨가 찌는 듯이 더워서 친구들과 계곡으로 물놀이를 하러 갔습니다. 계곡에서 물장난을 치니 이가 덜덜 떨릴 만큼 추웠습니다. 그럴 때는 햇볕에 데워진 너럭바위가 최고입니다. 나는 친구들과 너럭바위에 앉아 찐 옥수수와 감자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9월 24일 수요일 날씨 맑음 “훠이훠이.” 허수아비를 세운 논에서 하루 종일 참새 떼를 쫓았습니다. 참새 떼가 낟알을 쪼아 먹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산들바람이 불어 한낮에도 시원합니다. 높고 파란 하늘과 노랗게 물든 가을 논이 참 아름답습니다. 10월 2일 목요일 날씨 맑음 “탈탈탈, 털털털.” 요즘에는 탈곡기와 경운기 소리로 날마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합니다. 오늘은 우리 집도 추수를 했습니다. 추석이 되면 오늘 수확한 햅쌀로 송편을 빚고, 새로 딴 햇과일을 올려 차례 상을 차릴 겁니다. 나는 밤과 감, 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요즘이 참 좋습니다. 11월 3일 월요일 날씨 흐림 오늘은 우리 집에서 김장을 했습니다. 순이네 집에 김장 김치를 가져다주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넓게 펼쳐진 논밭이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런 벼가 출렁이던 논과 배추와 무가 자라던 밭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어디선지 귀신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아 나는 집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12월 23일 화요일 날씨 :흐림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습니다. 지붕 위에도, 장독 위에도, 나뭇가지에도 흰 눈이 소복소복 쌓였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친구들과 밖에서 놀았습니다.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느라 추운 줄도 몰랐습니다. 1월 17일 토요일 날씨 :맑음 아빠와 동네 아저씨들이 토끼 사냥을 갔습니다. 나와 친구들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는 손뼉을 치며 토끼를 몰았습니다. 어느새 코와 볼이 빨개지고, 콧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나서, 온종일 토끼를 쫓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2월 7일 토요일 날씨 맑음 “할아버지, 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는 색동저고리에 초록 치마를 입고 예쁘게 세배를 했습니다. “우리 토란이가 이제 숙녀가 다 됐구나!” 할아버지가 세뱃돈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떡국을 한 그릇 먹고 나니, 한 살 더 먹은 게 실감이 났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여름과 가을이 차례로 찾아옵니다. 계절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나는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계절을 맞이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자라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나성실 아저씨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조용하고 깨끗한 햇빛마을 한 귀퉁이에 울타리가 낮은 집 한 채가 있어. 부지런하고 성실한 나성실 아저씨네 집이야. 나성실 아저씨는 이른 아침부터 바빠. 일어나자마자 체조를 하고, 골목길을 청소하지. 강아지 행복이와 산책하는 것도 날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야. 나성실 아저씨가 국회 사무실로 출근을 했어. 나성실 아저씨는 행복당의 국회의원이거든. 아저씨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개의 신문을 읽으며 텔레비전 뉴스를 들었어. 국회의원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알아야 하니까. “휴, 밤사이에 참 많은 일이 일어났군!” 나성실 아저씨가 신문을 뒤적이며 말했어. 국민들이 직접 투표를 해서 뽑은 국민의 대표예요. 국회의원은 국회의 회의에 참석해 나랏일을 결정하고, 정부가 일을 잘하는지 감시하는 등 국민을 대표해 여러 가지 일을 해요. 나성실 아저씨가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어. 홈페이지를 열자 사람들이 보낸 편지가 가득했지. 아저씨는 편지를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어.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읽은 건 지호가 보낸 편지였어. 지호는 비만으로 고민이래. “흠, 이건 정말 큰 문제군!” 아저씨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어. 아저씨, 저는 아홉 살이에요. 저는 몸무게가 35킬로그램이나 나가요. 그래서 아이들이 뚱뚱하다고 놀려요. 엄마, 아빠는 운동을 하라는데 어떤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처럼 비만이 되지 않도록 학교에서 미리미리 가르쳐 주면 좋겠어요. 나성실 아저씨는 지호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어린이 비만과 관련된 법안을 만들기로 했어. 아저씨는 곧바로 법안을 만들 준비를 했지. 도서관에 가서 여러 가지 자료를 찾고, 비만인 어린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물었어.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법을 만들려고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지. 나성실 아저씨는 다른 국회의원들을 만나 어린이 비만이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했어. “비만인 어린이에 대한 관리와 어린이 비만 예방을 위한 법을 만들면 어떨까요?” 아저씨의 말에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입을 모았어. 아저씨는 국회의원들과 의논하며 ‘어린이 비만 관리 법안’을 만들었어. 그리고 그 법안을 국회에 냈지. 법으로 만들기 위해 제안하는 내용을 법안이라 해요. 법안의 제출은 국회의원과 정부가 할 수 있으며, 국회의원이 법안을 제출하려면 열 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찬성해야 하지요. 오늘은 정기 국회가 시작되는 날이야. 정기 국회가 열리는 본회의장이 국회의원들로 가득 찼어. 나성실 아저씨도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정기 국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탕! 탕! 탕!” 국회 의장이 회의의 시작을 알리며 의사봉을 두드렸어. 이제부터 100일 동안의 긴 회의가 시작되는 거야. 나성실 아저씨는 교육부의 국정 감사를 했어. “문방구 앞에 게임기를 두는 것은 불법인데 아직도 그런 문방구가 많은 이유가 뭡니까?” “아, 단속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만.” 나성실 아저씨의 날카로운 질문에 앞에 앉은 장관은 진땀을 흘렸어. 사람 좋은 나성실 아저씨이지만, 국민을 대표해서 일할 때는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 오늘은 ‘어린이 비만 관리 법안’에 대한 본회의가 열리는 날이야. 회의가 시작되자 나성실 아저씨가 앞으로 나갔어. 아저씨는 법안의 내용을 열심히 설명했지. “비만 어린이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린이 비만 관리를 미룰 수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어린이 비만 관리 법안’을 통과시켜 어린이들이 보다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어. “어린이 비만 관리 법안 통과!” 나성실 아저씨가 만든 ‘어린이 비만 관리 법안’은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통과되었어. 그 법안뿐만 아니라 많은 법안이 함께 통과됐지. “아파트 담 허물기 지원 법안 통과!” “어린이 도서관 지원 법안 통과!” 모두 국민들이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만든 법안이었어. 어느덧 길고 긴 정기 국회가 끝났어. 그럼 나성실 아저씨도 쉬냐고? 아니야, 성실한 국회의원인 나성실 아저씨는 여전히 바빠. 텔레비전 방송에 나가서 어린이 비만 관리법에 대해 설명하고, 학교에 가서 법이 잘 지켜지는지도 살펴봐야 하거든. 오늘도 나성실 아저씨의 책상에는 서류가 잔뜩 쌓여 있어. 나랏일은 잘 처리되고 있는지, 세금이 잘못 쓰이지는 않는지, 아저씨는 서류를 보며 꼼꼼히 조사하지. 또 국민을 위해 어떤 법이 필요한지 고민도 해. 그런 일을 하느라 아저씨의 사무실은 날마다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아. 정기 국회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야. 아저씨의 홈페이지에 반가운 편지가 와 있었어. 바로 지호가 보낸 편지였지. 어린이 비만 관리법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며 아저씨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온 거야. 지금은 살도 많이 빠지고 건강해졌다며 최근에 찍은 사진을 함께 보내왔어. 아저씨는 지호의 사진을 보며 얼굴이 환해졌어. 조용하고 깨끗한 햇빛마을 한 귀퉁이에 울타리가 낮은 집 한 채가 있어. 국회의원 나성실 아저씨네 집이야. 오늘도 나성실 아저씨는 금빛 배지를 달고 출근을 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건 즐거운 일이야.” 힘차게 걷는 아저씨의 가슴에서 배지가 반짝 빛났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국민이 직접 뽑은 국민의 대표로, 국민을 대신해 나랏일을 해요. 국회의원은 국민의 바람을 나랏일에 반영하고, 국민을 위해 일하며,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하지요. 국회의원이 하는 일 국회의원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국회에서 열리는 여러 회의에 참석해 나랏일을 살피고 결정하는 것이지요. 국민을 위해 법을 만들고, 나라 살림에 관한 일을 결정하 며,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잘못이 없는지 살펴 국민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국회의원이 할 일이지요. 국회의원의 자격 만 25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국회의원 후보가 될 수 있어요. 학력, 성 별, 재산의 많고 적음 등은 상관이 없어요.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할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국회의원 후보 신청을 할 수 있지요. 단 법을 어겨 벌을 받고 있는 사람 등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고 법으로 정한 사람은 국회의원 후보가 될 수 없 어요. 국회의원의 의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4년의 임기 동안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어요. 또 국회 의원 신분을 이용해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거나 그 지위를 함부로 이용해서도 안 돼 요. 국회의원은 오로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고,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 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요. 국회는 대통령이 일을 잘 못하거나 법을 어겨 나라와 국민에게 큰 해를 입히면 대통령 직을 그만두게 할 수 있어요. 또 대통령은 국회에서 만든 법안이 나라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법안을 거부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국회와 대통령 중 누가 더 힘이 세다고 말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는 국회와 대통령에게 똑같은 힘을 갖게 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때는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여의도에 있는 지금의 국회 의사당은 1975년에 지어졌어요. 스물네 개의 기둥이 둥근 모양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여기에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 담겨 있대요. 여의도에 국회 의사당을 짓기 전에는 중앙청이나 부민관 같은 정부의 건물을 국회 의사당으로 사용했어요.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먼저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을 해야 해요. 국회의원 후보는 나라에서 정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알려 국회의원으로 뽑히기 위해 노력하지요. 국민들은 후보가 국민들에게 약속한 공약을 잘 살펴본 뒤, 나라와 지역을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할 후보에게 투표를 해요. 투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데, 당선되면 4년 동안 국회의원으로 일해요. 임기가 끝난 뒤에도 국민이 다시 뽑아 주면 몇 번이든 국회의원이 될 수 있어요.
사진으로 보는 우리 기후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내 이름은 이지우야. 나이는 여덟 살이고, 초등학교 1학년이야. 나와 우리 아빠는 닮은 점이 참 많아. 서로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말이야. 우리 아빠는 사진 찍는 걸 아주 좋아해. 물론 나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그래서 아빠가 사진을 찍으러 갈 때면 항상 아빠를 따라가고는 해. 아빠와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갔어.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개나리를 찍기 위해서였지. 3월이 되면 날이 따뜻해지고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어와.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예쁜 꽃도 피어나지. 우리나라는 따뜻한 남쪽에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그래서 남쪽에 있는 섬 제주도에 가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핀 개나리꽃을 찍었어. 아빠와 남산에 올랐어. 케이블카를 타고 단숨에 서울 타워까지 올라갔지. 다른 날 같았으면 걸어 올라갔을 텐데, 황사가 심해서 그럴 수 없었거든. 봄이 되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 바람 때문에 마음 놓고 밖에 나갈 수 없는 날이 많아. 서울 타워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누런 모래가 서울 시내를 온통 뒤덮고 있었어. 시골 할아버지네 집에 갔어. 나는 시골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가 일하는 논으로 달려갔지.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었어. 할아버지 말이 매년 이맘때면 가뭄 때문에 논과 밭이 말라붙고는 한대.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지 않으면 큰일이라며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어. 어서 비가 내려 할아버지의 걱정이 사라졌으면 좋겠어. 요즘은 날마다 장맛비가 내려.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비가 내리지. 아빠와 차를 타고 가다 넓은 호수를 봤어. 나는 아빠에게 잠시 차를 세워 달라고 하고, 호수 가까이 가 보았어. 가까이 가서 보니 그건 호수가 아니었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논이 빗물에 잠긴 거였지. 지난달에는 가뭄으로 논이 말라 걱정이었는데, 이번 달에는 장마로 논이 물에 잠겨 걱정이야. 푹푹 찌는 듯한 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어. 밤에도 더위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야. 우리 가족은 더위를 피하려고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한강 둔치로 나갔어. 한강 둔치에는 우리 가족 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었지. 모두 더위를 피해 강가로 나온 것 같았어. 시원한 비가 내려서 무더위를 식혀 주면 좋겠어. 아빠와 바닷가로 여행을 갔을 때야. 하필 그때 태풍이 몰려와, 아빠와 나는 바닷가에는 나가지도 못한 채 온종일 숙소에서 창밖만 내다보았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퍼붓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 또 파도가 무섭게 일더니 육지로 넘쳐 들어왔지. 마치 육지를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았어. 아빠와 여행하면서 그날처럼 무서웠던 적은 없었어. 무덥고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어. 맑고 파란 하늘에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소풍 가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야. 아빠와 나는 가을 풍경을 찍기 위해 야외로 나갔어. 먼 산에는 울긋불긋 곱게 단풍이 들었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지. 향긋한 꽃향기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어. 엄마, 아빠와 시골 외갓집에 갔을 때였어.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 새벽에 잠이 깼어. 그리고 혼자 가기 무서워 엄마를 깨웠지. 우리 외갓집은 뒷마당에 화장실이 있거든. 나는 얼른 화장실에 갔다 와 엄마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 보았어. 그런데 집 앞의 논밭이 온통 하얗게 반짝이는 거야. 밤새 내린 서리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거였지. 하얗게 반짝이는 서리는 정말 예뻤어. 며칠 동안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차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어. 추운 날씨에 집 앞의 개천 물도 꽁꽁 얼어붙었지.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 친구들과 얼음 위에서 신나게 썰매를 탔어. 내일은 눈이 펑펑 내려 친구들과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울릉도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래. 아빠는 눈 내리는 울릉도를 사진으로 찍고 싶어 했어. 그래서 한겨울에 울릉도에 갔지. 아빠와 나는 함께 울릉도의 바다 풍경을 보았어. 부두에 서 있는 작은 배들 위로 흰 눈이 소복이 쌓여 갔어. 날이 어두워지면서 춥기는 했지만 눈 내리는 울릉도의 풍경은 참 멋졌어. 며칠 후면 3월인데 아직 날씨가 쌀쌀해. 한동안 봄이 온 듯 따뜻하더니 갑자기 추워졌어. 꽃이 필 무렵 찾아오는 이런 추위를 꽃샘추위라고 해. 봄꽃이 피는 걸 샘내는 추위라는 뜻이지. 하지만 꽃샘추위가 샘을 내도 봄은 오는 것 같아. 우리 집 텃밭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나뭇가지에도 연둣빛 새순이 돋았거든. 오늘은 아빠와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기로 했어. 아빠가 찍은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니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사진이 없었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고, 계절마다 기후가 달라 볼거리도 많은 우리나라가 나는 참 좋아! 우리나라의 기후.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온대 기후예요. 여름에는 기온과 습도가 높은 무더운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돼요. 또 봄과 가을에는 맑고 건조한 날이 많아요. 기온. 우리나라는 일 년 평균 기온이 섭씨 10~16도예요.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달인 8월에 는 평균 기온이 25도 가까이 올라가고, 가장 추운 달인 1월에는 평균 기온이 영하 1도 가까이 내려가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이가 무척 커요. 요즘에는 지구 온난화로 평균 기온이 해마다 조금씩 높아지고 있어요.
구름 타고 한반도 여행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높고 높은 하늘나라에 한 왕자가 살고 있었어요. 왕자는 하늘나라보다 땅 세상에 관심이 많았지요. 어느 날, 왕자는 요술 거울로 땅 세상을 구경하다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곳을 발견했어요. “저기는 어떤 곳일까?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 호기심을 참지 못한 왕자는 땅 세상으로 내려가 직접 살펴보기로 했어요. 왕자가 구름 위에 올라타고 막 떠나려는데, 시녀가 다급하게 외쳤어요. “왕자님, 곧 수업이 시작될 텐데 어디 가세요?” “쉿, 조용히! 잠깐 가 볼 데가 있어.”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시녀는 급한 마음에 구름 꽁무니를 덥석 붙잡았어요. “왕자님,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임금님께 혼날 거예요.” 간신히 구름 위에 올라탄 시녀가 말했어요. 하지만 왕자는 시녀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어요. “우아, 저기 좀 봐! 꼭 호랑이처럼 생겼어. 그렇지?” 왕자가 가리킨 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였어요. 왕자는 한반도로 구름을 몰았어요. “산이 호랑이 등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는 것 같아.” “한반도는 북쪽의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남쪽의 지리산까지 쭉 뻗어 있답니다. 저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고 하지요.” 왕자는 시녀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어요. “너는 한반도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느냐?” “궁에 가서 말씀 드릴 테니, 어서 돌아가시지요.” 시녀가 왕자를 재촉했어요. 왕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아래로 내려갔어요. “산이 이렇게 높으면 사람들이 오가기 힘들겠어.” 왕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어요. “그래서 다른 지방으로 오갈 때면 산에 난 고개를 넘어간답니다.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지방이 나뉘거든요.” 시녀는 막힘없이 술술 설명을 했어요. “어, 산속에도 마을이 있네. 저기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살까?” “산에서 나는 산나물과 약초를 캐서 팔거나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 때 쓸 목재를 내다 팔지요. 높은 산 중턱에 넓은 평지가 펼쳐진 곳도 있어요.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밭에 배추와 무를 심기도 하고, 넓은 목장에서 가축을 기르기도 하지요.” “그렇구나!” 왕자는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저기 좀 봐. 산에서 흘러나온 작은 개울이 모여 아주 큰 강이 되었어!” “맞아요. 그리고 저 강은 바다로 흘러가지요. 한반도의 강은 주로 서해와 남해로 흐른답니다. 옛날에는 저 강에 배를 띄워 물건을 실어 날랐어요.” 시녀는 강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었어요. “나 혼자 왔으면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을 텐데 네가 따라와서 참 좋구나.” 왕자의 칭찬에 시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왕자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강을 따라 평야 쪽으로 가 봐야 별것 없어요.” “평야? 평야가 뭐야?” 왕자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어요. “강 주변에 넓게 펼쳐진 평평한 땅이 평야예요. 물이 풍부해서 주로 벼농사를 짓지요. 또 살기도 편해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아요.” “그럼 저쪽에 있는 것도 평야로구나.” 왕자가 으스대며 다른 곳을 가리켰어요. “호호, 저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곳은 분지라고 해요. 분지에서는 산에서 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고, 땅이 평평하여 농사짓기도 좋지요. 그래서 큰 도시가 많이 생긴답니다.” 왕자는 한반도가 점점 마음에 들었어요. “이왕 온 김에 바닷가도 가 보자!” “안 돼요, 제발 그만 돌아가요.” 하지만 왕자는 바닷가 쪽으로 구름을 몰았어요. “한눈에 봐도 바닷가의 생김새가 많이 다른걸.” “동해안은 해안선이 무척 단순한 반면, 서해안과 남해안은 해안선이 들쑥날쑥하고 섬이 많지요.” “그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서로 다르겠네.” 왕자의 말에 시녀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어요. “맞아요. 바닷물이 깊은 동해안에서는 주로 고기잡이를 하고,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는 갯벌에서 굴과 조개를 캐며 살지요. 김이나 굴을 양식하는 사람도 많고요.” 시녀의 설명에 왕자는 또다시 눈이 동그래졌어요. “우아, 넌 정말 모르는 게 없구나!” 왕자는 한반도의 남쪽으로 구름을 몰았어요. “저 산은 산봉우리가 왜 움푹 패어 있지?” “저 산은 제주도의 한라산입니다.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섬이에요. 움푹 파인 곳은 화산이 폭발할 때 생긴 분화구랍니다.” “참 신기하구나. 한반도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곳이야. 어딜 가도 똑같은 곳이 하나도 없어.” 왕자는 한반도를 모두 돌아보고 나서야 하늘나라를 향해 구름을 몰았어요. “그나저나 너처럼 똑똑한 아이는 처음 봤어.” 왕자의 칭찬에 시녀는 얼굴을 붉혔어요. “모두 왕자님 덕분이에요. 그동안 왕자님 책을 몰래몰래 읽었거든요.” 궁으로 돌아간 왕자는 임금님께 큰 꾸중을 들었어요. 하지만 한반도 구경을 후회하지는 않았답니다. 지형과 생활 우리나라는 지형에 따라 산간 지역, 평야 지역, 해안 지역으로 나눌 수 있어요. 각 지역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도 차이가 있지요. 산간 지역 산간 지역에는 농사를 지을 넓은 땅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산비탈에 계단 모양의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지요. 또 산나물이나 약초를 캐고 버섯 따위를 길러요. 강원도 평창이나 영월 등지에는 높은 산 중턱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데, 이런 곳은 여름에도 서늘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기후를 이용하여 고랭지 농업과 목축업을 하지요. 산간 지역은 경치가 좋고 자원이 풍부하지만, 교통이 불편해서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아요. 평야 지역 큰 강 주위에 넓게 펼쳐진 평야 지역은 우리나라의 남서쪽에 많아요. 평야 지역은 물을 대기 쉬워 농사짓기 좋을 뿐만 아니라, 교통이 편리해 예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았어요. 한강 주변의 김포평야, 낙동강 주변의 김해평야, 금강 주변의 논산평야, 만경강과 영산강 주변의 호남평야가 대표적인 평야 지역이에요. 평야 가운데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분지라고 해요. 분지는 땅이 넓고 자원을 얻기 쉬워 분지를 중심으로 서울, 대구, 대전 같은 큰 도시가 발달했어요. 해안 지역 바다에 접해 있는 해안 지역의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요. 너른 갯벌이 있는 곳에서는 조개나 굴, 낙지 등을 잡고, 바닷물이 깨끗한 곳에서는 굴이나 김, 물고기 양식을 많이 하지요. 해안 지역에는 해산물을 사고파는 큰 시장이 서는 곳도 있고, 항구를 중심으로 큰 도시가 발달한 곳도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오랜 세월 동안 물과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지형, 땅이 솟아오르면서 만들어진 지형 등 독특한 지형이 많아요.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아름답고 신기한 지형을 살펴보아요. 파도에깎인절벽,해식애 우리나라 바닷가에는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절벽이 있어요. 이런 곳을 해식애라고 하는데, 밀물과 썰물의 차가 적고 파도가 센 동해에 많지요. 강원도 고성군의 해금강과 울릉도 해안, 통영의 소매물도, 부산의 태종대가 대표적인 곳이지요. 해식애가 발달한 바닷가는 절벽이 빚어내는 풍경이 아름다워 관광지가 된 곳이 많아요. 굽이굽이흐르는강,감입곡류 우리나라에는 산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하천이 많아요. 이런 하천을 감입 곡류 하천이라 부르지요. 원래는 평지를 지나던 물줄기가 땅이 솟아오르자 깊은 골짜기를 만들며 흐르게 된 것이지요. 강원도 동강을 비롯해서 금강 상류와 한강 상류에서 많이 볼 수 있어요. 바닷가의모래언덕,해안사구 파도에 떠밀려 온 모래가 쌓이고 쌓여 언덕이 된 곳이 있어요. 이런 곳을 사구라고 하는데, 충남 태안의 신두리 사구가 대표적이지요. 사구는 폭풍이나 해일로부터 해안과 농경지를 보호해요. 바다와 연결된 섬,육계도 섬이 육지 가까이에 있을 때, 육지와 섬 사이의 얕은 바다에 모래가 쌓여 육지와 섬이 길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이렇게 육지와 이어진 섬을 육계도라고 해요. 제주도의 성산 일출봉, 영흥만의 호도반도와 갈마반도 등이 대표적인 육계도랍니다.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오름 아주 오래전, 제주도의 큰 화산 폭발로 한라산이 생겨났어요. 그 이후 한라산 기슭의 작은 분화구에서 다시 용암이 분출하면서 작은 화산이 만들어졌어요. 이 작은 화산을 오름이라고 하지요. 한라산 주변에는 이러한 오름이 360여개나 있어요. 바닷물이 만든 호수, 석호 석호는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들어 왔다가 다시 나가지 못하고 갇혀서 만들어진 호수예요. 얕은 바다에 있던 모래가 점점 쌓여 바닷물이 빠져나갈 길을 막아 버리자, 그곳에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강릉의 경포호, 속초의 영랑호와 청초호, 양양의 매호 등이 있어요.
넓고 넓은 바닷가에서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사촌 동생 기찬이가 고모, 고무부와 함께 우리 집에 왔어요. 고모는 곧 아기를 낳을 거래요. 고모가 아기 낳고 몸조리할 동안 기찬이와 고모는 우리 집에서 지낼 거예요. “영수야, 기찬이랑 잘 놀아야 한다.” 고모부가 떠나면서 내게 부탁했어요. 다음 날 아침, 기찬이가 호들갑스럽게 나를 깨웠어요. “형, 큰일 났어! 바닷물이 저 앞에까지 들어왔어.” “걱정 마, 이따 낮이 되면 다시 빠질 거야. 그럼 함께 갯벌에 가서 조개 잡자.” 기찬이는 아침 밥상 앞에서도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와, 김치랑 나물에 조개, 새우가 들어 있네!” 나는 늘 먹던 거라 아무렇지도 않은데, 기찬이는 그것도 신기한가 봐요. 바닷물이 빠지자 우리는 갯벌에 나갔어요. 엄마와 아주머니들은 낙지를 잡느라 바빴어요. 나는 기찬이와 함께 조개를 캤어요. “형, 조개가 물을 내뿜어!” 기찬이가 신기한 듯 소리쳤어요. 우리는 구멍에 소금을 넣어 맛조개를 잡고, 바지락도 캤어요. 하루는 기찬이랑 옆 마을 바닷가에 놀러 갔어요. 바닷가에는 기다랗게 쌓아 놓은 돌담이 있었어요. “형, 저게 뭐야?” 기찬이가 신기한 듯 물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일러 주었지요. “그건 물고기를 잡으려고 만든 돌살이란다. 밀물 때 바닷물에 밀려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고 돌살 안에 갇히게 되지.” 돌을 쌓아 물고기를 잡다니, 참 신기했어요. 아빠가 조기를 잡으러 칠산바다로 나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어요. “아빠! 여기예요, 여기!” 나는 아빠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어요. “잘 놀았니? 아빠가 조기를 잔뜩 잡아 왔단다.” 아빠도 나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어요. 아빠랑 같이 배를 타고 나간 아저씨들도 기분이 좋아서 활짝 웃었어요. 우리 동네에는 곳곳에 덕장이 많아요. 덕장에서는 소금에 절인 조기를 바람에 말리지요. “형, 조기가 정말 많다!” 기찬이가 덕장에서 말리고 있는 조기를 보며 소리쳤어요. “이렇게 말린 조기를 굴비라고 한단다. 우리 동네는 햇볕과 바람이 좋아서 굴비 맛이 뛰어나지. 그래서 옛날에는 임금님 밥상에 올리기도 했어.” 덕장에서 일하는 아저씨의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나랑 기찬이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할아버지께서 집 앞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계셨어요. “할아버지, 조기 잡는 얘기 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요즘은 조기가 옛날만큼 안 잡혀. 내가 젊었을 때는 조기가 어찌나 많이 잡히던지, 바다 위에서 조기 파시가 열리곤 했단다.” “파시가 뭔데요?” “바다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이란다. 조기를 팔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이 되곤 했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계속되었어요. 부두에 꽃게잡이 배가 들어왔어요. 옆집 아저씨가 배에서 꽃게 상자를 내리고 있었어요. “아저씨, 꽃게 많이 잡으셨어요?” “그럼, 지금이 꽃게 철이라서 아주 많이 잡았지. 자, 이건 엄마 갖다 드려라.” 아저씨가 꽃게를 몇 마리 싸 주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보니, 식당 아주머니가 밖에 나와 커다란 물고기를 손질하고 있었어요. “아줌마, 이 물고기 이름이 뭐예요?” 기찬이가 아주머니 옆에 앉으며 물었어요. “기운을 돋우는 데 좋은 민어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저씨도 거들었어요. “민어 부레로는 갖풀도 만들지.” 몸에도 좋고, 갖풀도 만들 수 있다니 민어는 참 쓸모가 많은 물고기인 것 같아요. 저녁에 옆집 아저씨가 놀러 왔어요. “이번에는 조기를 많이 잡았다면서? 한동안 안 잡힌다고 걱정하더니 참 다행일세.” “요즘은 조기를 잡기가 점점 힘들어져. 많이 잡았다고는 하지만 예전보다는 못하지.” 아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조금 뒤, 엄마가 꽃게찜을 만들어 내왔어요. 나랑 기찬이는 꽃게를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에서 뛰어놀았어요. 엄마가 나랑 기찬이한테 옷을 사 주었어요. “낙지를 좋은 값에 많이 팔았단다.” “와, 엄마가 갯벌에서 낙지를 더 많이 잡으면 좋겠다.” 내가 신이 나서 말하자,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갯벌을 자꾸 없애서 걱정이다. 갯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엄마 말에 나랑 기찬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고모가 아기를 낳았어요. 우리 가족은 빙 둘러앉아 아기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어요. 엄마는 조기를 넣고 미역국을 끓여 내왔어요. “옛날부터 허약한 사람한테는 조기죽을 끓여 먹이고, 산모에게는 조기 미역국을 끓여 먹였단다.” 고모는 맛있다며 미역국을 두 그릇이나 먹었어요. 나랑 기찬이도 맛있게 먹었어요. 고모랑 기찬이가 돌아가는 날이에요. “형, 우리 집에 꼭 놀러 와야 해.” 기찬이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응, 할머니 올라가실 때 꼭 같이 갈게.” 나는 기찬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지요. 기찬이가 떠나고 나면,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산골 아이 찬이의 하루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쿵쿵, 쿵쿵.” 찬이는 장작 패는 소리에 잠에서 깼어요. 오늘도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셨나 봐요. 찬이는 책상 위에 있던 사진을 집어 들었어요. 엄마, 아빠와 동생 현이가 사진 속에서 방긋 웃고 있었어요. 찬이는 사진을 들여다보다 벌떡 일어났어요. 학교에 가려면 서둘러야 하거든요. 찬이가 문을 열고 나오니, 찬 바람이 쌩하고 불었어요. 찬이네 집은 산속에 있어서 가을에도 추워요. 그래서 집을 지을 땐 열을 뺏기지 않게 방과 부엌과 외양간을 붙여 짓지요.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통나무로 이 귀틀집을 지었어요. 지붕에는 참나무 껍질인 굴피를 얹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굴피 대신 함석으로 지붕을 고쳤지요. 찬이는 아침밥을 먹고 책가방을 챙겨 들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학교 다녀올게요.” 찬이는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집 앞에 서 있던 마을 아저씨의 차에 올랐어요. 찬이네 마을에서는 마을 아저씨들이 돌아가며 아이들을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줘요. 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한참 내려가야 학교가 있거든요. 찬이네 마을에는 아이들이 셋뿐이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다섯 명이었는데, 둘은 올봄에 도시로 이사를 갔어요. 찬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엌 옆에 있는 외양간으로 갔어요. 황소 누렁이가 찬이를 보고 눈을 껌벅였어요. 누렁이는 곧 새끼를 낳을 거예요. 찬이는 쇠죽을 듬뿍 떠서 누렁이에게 주었어요. “누렁아, 많이 먹고 힘내서 새끼 잘 낳아라.” 그러고는 서둘러 계곡으로 뛰어갔어요. 마을 아이들과 가재를 잡기로 했거든요. 계곡에는 재민이와 동희가 먼저 와 있었어요. “에이, 다리를 잘라 놓고 도망갔잖아.” “호호, 어쩌니? 난 벌써 한 마리 잡았는데.” 가재를 놓친 재민이가 투덜거리자 동희가 약을 올렸어요. 찬이도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찬이는 순식간에 가재 한 마리를 잡았어요. 하지만 가재를 다시 물속에 놓아주었지요. “치, 놓아줄 거면 나한테 주지.” 동희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어요. “얘들아, 가재 많이 잡았니?” 재민이 아빠와 마을 아저씨들이 산에서 내려오다 아이들을 보고 소리쳤어요. “아빠, 아빠! 제가 잡은 가재 좀 보세요.” 재민이가 자기 아빠를 보고 달려가 자랑을 했어요. “와, 좋겠구나. 아빠도 버섯을 많이 따서 기분이 좋단다. 그런데 찬아, 현이는 좀 어떠니?” “아직 소식이 없어요.” 찬이가 재민이 아빠에게 힘없이 대답했어요. 찬이는 아이들과 헤어진 뒤 이장 아저씨네 황기 밭으로 갔어요. 할머니가 거기서 일을 할 거라고 했거든요. “에잇, 중국산 때문에 올해도 제값 받기는 틀렸군.” 이장 아저씨는 황기 값이 너무 싸다며 화가 나 있었어요. 할머니는 찬이를 보자 바지를 털고 일어났어요. “찬아, 잠깐 동희네 집에 들렀다 가자꾸나.” 할머니가 찬이 손을 잡아끌며 말했어요. 동희 할머니는 쿵덕쿵덕 디딜방아를 찧고 있었어요. 찬이는 동희네에만 있는 디딜방아가 늘 부러웠어요. “나도 한번 방아를 찧어 볼래요.” 찬이가 대뜸 디딜방아에 올랐어요. 하지만 기우뚱하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요. “호호, 쌤통이다!” 언제 왔는지 동희가 옆에 서서 웃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동희 할머니랑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마도 아픈 현이 이야기일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동희 할머니와 의논을 해요. 동희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 첩첩 산골로 들어왔대요. 그리고 산비탈에 있는 돌투성이 땅에서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며 밭을 일구었대요. 그때는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았다니, 마을이 생긴 건 동희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지요. 찬이와 할머니는 동희 할머니가 싸 준 옥수수떡을 들고 할아버지한테 갔어요. “우리 찬이, 어서 오렴!” 벌통을 살펴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찬이를 반갑게 맞았어요. 찬이 할아버지와 아빠는 산에 벌통을 만들어 놓고 벌을 길러 꿀을 따요. 아빠는 올봄에도 벌통을 늘리느라 바빴어요. 그런데 지금은 동생 현이가 아파 엄마와 병원에 가 있지요. 찬이는 할아버지가 건네준 꿀을 맛있게 먹었어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어요. 찬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향했어요. 집 가까이 왔을 때, 누렁이가 ‘음매 음매’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찬이는 얼른 외양간으로 뛰어갔어요. “저것 좀 보세요! 누렁이가 새끼를 낳았어요.” 찬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기뻐하며 활짝 웃었지요. 그날 밤, 찬이는 할아버지와 화로에 밤을 구워 먹었어요. 할아버지가 찬이에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예전에 호랑이를 직접 잡은 적이 있단다.” “정말요?” “그럼, 정말이고말고. 우리 마을은 사방이 산이라 가끔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오곤 했지. 그래서 커다란 함정을 파 놓고 호랑이를 잡았단다. 그때 잡은 호랑이는 황소만큼 컸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백번 들어도 재미있어요. “따르릉, 따르릉!” 건넌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더니, 할머니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어요. 잠시 후, 할머니가 찬이를 부르며 소리쳤어요. “찬아, 현이 병이 다 나아 내일 집으로 돌아온대.” 현이가 돌아온다는 말에 찬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찬이는 오늘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요. 산촌의 자연환경 산촌은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비탈진 곳이 많아요. 그래서 산골짜기의 평평한 곳이나 길을 따라 드문드문 집들이 흩어져 있지요. 농사를 지을 만한 넓은 평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산비탈에 계단 모양으로 만든 논이나 밭이 많아요. 또 길이 좁고 고갯길이 많아 교통이 불편해요. 하지만 나무가 많아서 공기가 맑고 경치가 아름답지요. 산촌의 생활 모습 산촌은 농촌이나 어촌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지만 임산 자원과 지하자원이 풍부해요. 산촌의 자연환경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산촌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아요.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버섯을 따요 산촌 사람들은 산에서 나는 쑥, 산삼, 천궁, 천마, 도라지, 더덕, 송이버섯 같은 산나물과 약초, 버섯 등을 내다 팔아 소득을 올려요. 요즘에는 건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약초와 버섯의 효능과 쓰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약초와 버섯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어요. 그래서 산촌 사람들은 약초나 버섯을 밭에 직접 길러 판매하기도 해요. 계단식 논이나 밭에서 농사를 지어요 산촌에는 농사를 지을 만한 넓은 평지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비탈진 땅에 계단 모양으로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지요. 논에는 벼농사를 짓고 밭에는 감자, 무, 배추 등을 길러요. 벌을 쳐서 꿀을 얻어요 꿀을 얻기 위해 벌을 기르는 것을 양봉이라고 해요. 산촌 사람들은 햇볕이 잘 드는 언덕이나 야산에 여러 개의 벌통을 만들어 놓고 벌을 치는데, 꿀뿐만 아니라 로열 젤리, 꽃가루 등을 함께 생산해서 큰 소득을 얻어요. 지하자원을 캐요 산간 지역 가운데는 여러 가지 지하자원이 묻혀 있는 곳이 있어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런 곳에서 석탄, 고령토, 철광석, 납 같은 지하자원을 캐며 광산촌을 이루고 살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지하자원을 생산하는 광산이 점점 줄고 있어요. 오랫동안 질 좋은 석탄을 캐 오던 강원도의 광산촌 가운데도 석탄 소비량이 줄어 폐광촌이 된 곳이 많아요. 풀밭에서 소와 양을 길러요 산촌에서는 소, 양, 염소 등의 가축을 길러요. 산간 지역 가운데는 강원도의 대관령 지역처럼 높은 산 중턱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 곳도 있는데, 이런 곳은 여름에도 서늘해서 풀이 잘 자라고 모기와 진드기 등이 살지 않아요. 그래서 넓은 풀밭에 소나 양을 풀어 놓고 기르지요. 산촌의 변화 생활이 불편하고 소득을 많이 올릴 수 없어 산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자꾸 늘자, 산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요. 스키장이나 자연 휴양림 등을 만들어 관광객을 모으고, ‘목장 체험’이나 ‘주말 산촌 학교’ 같은 체험 학습장을 운영하기도 해요. 또 산촌의 깨끗한 환경에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여러 가지 임산물로 공예품, 지역 특산품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지요 눈길에서 신는 설피 산촌은 다른 곳에 비해 기온이 낮기 때문에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고, 눈이 녹지 않은 채 계속 쌓여 있어요. 그래서 산촌 사람들은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면 설피를 신어요. 설피는 신발 바닥에 대는 넓적한 덧신으로 물푸레나무, 노간주나무를 휘어서 만들어요. 눈이 많이 쌓인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갈 때나 사냥을 나갈 때 주로 신는데, 설피를 신으면 눈에 빠지거나 미끄러지지 않지요. 나무로만든생활용품들 산촌에서는 나무를 이용해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요. 덩굴나무인 칡과 싸리나무 등 산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바구니, 삼태기, 광주리, 주루막같은 것들을 만들지요. 또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피나무의 속을 파내어 그릇이나 김칫독을 만들었어요. 멧돼지를잡는벼락틀 산촌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들어 썼어요. 산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생활 도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아요. 산촌 사람들은 사냥을 할 때 창과 덫을 이용하거나 함정을 파서 동물을 잡았어요. 멧돼지같이 덩치가 큰 동물을 잡을 때는 벼락틀을 사용했는데, 벼락틀은 굵은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 비스듬하게 세워 놓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은 덫이에요. 동물들이 지나가다가 벼락틀을 건드리면 돌들이 벼락 치듯이 쏟아져 꼼짝 못하게 되지요. 그러나 지금은 야생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냥이 금지되어 있어요. 추위를 이기게 하는 고콜 산촌의 겨울은 무척 추워요. 그래서 산촌 사람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방 안에 고콜을 만들어 사용했어요. 고콜은 방 귀퉁이에 만든 벽난로예요. 불을 때는 아궁이와 연기를 밖으로 빼내는 굴뚝이 설치되어 있지요. 산촌 사람들은 고콜에 불을 지펴 방을 환하게 밝히고 따뜻하게 난방도 했어요. 옛날에는 겨울에 고콜의 불씨를 꺼뜨리면 집안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해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겨울을 났대요.
서울 구경은 즐거워!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오늘은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가는 날이거든. 보람이와 나는 인터넷 동아리 친구인데 서울에 사는 보람이가 나를 초대했어. 서울은 어떤 곳일까? 보람이랑 만나면 무얼 할까? 나는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어. 드디어 서울역에 도착했어. 나는 사람들을 따라 기차에서 내렸지. 서울역이 어찌나 넓고 큰지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어. 나는 서울역 밖으로 나와 보람이를 찾았어. “지수야, 여기야!” 보람이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큰 소리로 외쳤어. 나는 손을 흔들며 얼른 보람이에게 뛰어갔지. 보람이 엄마가 남산에 있는 서울 타워에 들렀다 가자고 했어. 우아,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서울 타워에 가다니 서울에 온 게 진짜 실감 났어. 나는 보람이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었어. 넓은 도로 가득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지나갔어. 그렇게 많은 자동차는 처음 봤어!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니 서울 타워가 우뚝 서 있었어. 우리는 곧장 서울 타워 전망대로 올라갔지. 그곳에서는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어. “이야, 저게 한강이구나!”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어. 넓은 한강과 한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차들, 높은 건물과 아파트를 보니 놀랍기만 했어. 서울 타워를 내려와서 지하철역으로 향했어. 지하철을 타고 보람이네 집으로 갈 거래. 길거리에는 사람도 상가도 참 많았어. 병원, 약국, 은행, 음식점, 미용실. 빌딩마다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이었어. 나는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도 타 보았어. 난간을 꼭 붙잡고 있는데도 어지러웠어. 땅속으로 한참을 내려가니 지하철이 보였어. 지하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지. 지하철을 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거렸어. 보람이가 내게 발이 빠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러 줬어. 나는 보람이를 따라 얼른 지하철에 올라탔어. 드디어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캄캄한 땅속을 한참 달리는가 싶더니 지하철이 어느새 땅속을 빠져나왔어.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한강을 건널 때는 쇠기둥이 휙휙 지나갔어.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서울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금세 보람이네 동네 지하철역에 도착했어. 우리는 지하철역이랑 연결되어 있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가기로 했어. 끝이 안 보일 만큼 넓은 슈퍼마켓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이 가득했어. 슈퍼마켓 위층에는 옷 가게도 있고 음식점도 있대. 서울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이 참 많은가 봐. 도시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물건을 파 는 상점이 많아요. 백화점, 재래시장, 슈퍼마켓, 대형 할 인점 등 물건을 파는 상점의 종류도 여러 가지예요. 여기가 보람이가 사는 아파트래. 세상에, 25층이나 되는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어. 칸칸이 다 집이라니, 정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겠어.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집을 어떻게 찾아?̀” 내 말에 보람이와 보람이 엄마가 깔깔 웃었어. “우리 집은 저기 202동 1705호야.” 보람이가 자기 집을 가리키며 말했어. 보람이네 집은 서울 타워만큼은 아니지만 꽤 높았어. 거실에 있는 커다란 창으로, 근처 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였지. 나는 보람이 방에 짐을 풀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어. 둘이서 할 얘기가 끝도 없이 많았거든. 저녁때가 되자 보람이 아빠가 퇴근을 하고 돌아왔어. 보람이 아빠는 날 보고 아주 반가워했어. 보람이네 가족과 저녁을 먹는데, 온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밥이 꿀맛이지 뭐야. 저녁을 먹고 보람이와 산책을 나왔어. 우리는 아파트 옆에 있는 공원으로 갔지. 공원에는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나무도 많았어. 시원하게 물을 뿜는 분수도 있었어. 산책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사람들이 모두 여유로워 보이는 걸 보면 서울 사람들도 바쁘기만 한 건 아닌가 봐.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어. 나는 보람이와 베란다로 나갔어. 우아, 서울은 밤도 낮처럼 환해. 건물마다 환한 불빛이 밝혀져 있고, 번쩍이는 간판 불빛, 자동차 불빛, 온통 밝은 불빛으로 가득해. 늦은 밤인데도 길가에는 자동차와 사람이 많았어. 밤하늘에 뜬 별을 볼 수는 없어도 멋진 풍경이야. 보람이와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어. 내일은 임금님이 살던 궁궐을 구경하러 갈 거야. 커다란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기로 했지. 서울엔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은 것 같아. 다음번에는 보람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했어. 보람이가 오면 우렁이도 잡고, 산딸기도 따 먹을 거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어.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우리나라의중심서울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의 중심지예요. 서울에는 청와대와 국회 의사당, 대법원 등의 중요 국가 기관이 있고, 서비스업과 상업이 매우 발달해 있어요. 서울은 도로, 철도, 항공 등 교통의 중심지이며, 종합 병원, 방송국, 각종 문화 시설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는 거대 도시예요. 또한 도심 한복판에 초고층 빌딩과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의 문화 유적이 함께 있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이기도 해요. 국제무역도시부산 부산은 커다란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예요. 부산항은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이어 주는 길목에 있어 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우리나라에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화물의 대부분이 부산항을 통해 드나들어요. 부산항에서는 커다란 컨테이너를 배에서 내리고 싣는 크레인과 밤낮없이 작업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어요. 또 일본과 중국을 오고 가는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기 때문에 늘 사람들로 붐빈답니다. 산업도시울산 울산은 과거에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1960년대에 배를 만드는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그 모습이 크게 달라졌지요.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모여들었고, 점차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어요. 오늘날의 울산은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늘 활기가 넘치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업 도시예요.
우리 땅 우리 특산물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 봉당골에 방 도령과 어머니가 단둘이 살았어. 게으른 방 도령은 일할 생각은 않고 날마다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지냈지. 보다 못한 어머니는 방 도령을 내쫓다시피 하며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 보고 오라고 했어. “에라, 이왕 나섰으니 방방곡곡 구경이나 하자.” 방 도령은 그렇게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겼어. 한참을 걸어 고갯마루에 오른 방 도령은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 옆에 앉으니 진한 향이 솔솔 풍겨 왔지. “이게 무슨 향이에요?” 방 도령이 묻자, 그 사람은 봇짐 속에서 인삼을 꺼내 보여 주었어. “아무리 아파도 먹으면 금세 기운을 차리게 된다는 인삼일세. 몸이 약한 딸을 위해 개성에서 구해 오는 길이라네.” 그 말을 들은 방 도령은 개성에 가 보기로 했어. 방 도령은 개성에 도착하자마자 인삼 밭으로 갔어. 그러고는 다짜고짜 주인에게 인삼을 좀 달라고 했지. 하지만 귀한 인삼을 주인이 거저 줄 리 있겠어? 방 도령은 인삼 밭에서 한나절을 일하고서야 인삼 한 뿌리를 얻을 수 있었어. 인삼을 얻어 신이 난 방 도령은 다시 길을 나섰지. 한참 뒤, 방 도령은 강가에 이르렀어. 방 도령은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 보기로 했지. 강을 건네준 뱃사공이 어딜 가느냐고 물었어. “그냥 여기저기 구경 다니는 길이에요.” 그러자 뱃사공이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며 말했어. “부탁이오. 나는 뱃사공이라 자리를 비울 수 없다오. 강화도로 시집간 누이에게 이 편지 좀 전해 주구려.” 방 도령은 뱃사공이 딱해 보여 그러겠다고 했지. 방 도령은 물어물어 뱃사공 누이네 집을 찾아갔어. “애고, 우리 오라버니가 날 잊지 않았구나. 오라버니는 나룻배로 사람들을 건네주느라, 나는 왕골 길러 화문석을 짜느라,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못 봤네. 흑흑.” 뱃사공 누이는 방 도령이 전해 준 편지를 보며 한참 동안 주르르 눈물을 흘렸어. 그러고는 편지를 전해 주어 고맙다며 방 도령에게 화문석을 주었어. 방 도령은 화문석을 옆구리에 끼고 강화도를 떠났지. 여러 가지 무늬를 넣어 짠 돗자리인 화문석은 왕골로 만들어요. 습지가 많고 기후가 따뜻한 강화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자라지 않는 하얀색의 질 좋은 왕골이 자라요. 그런 왕골로 만들기 때문 에 강화의 화문석은 색이 곱고 질도 좋지요. 한강 줄기를 따라 며칠을 걸어가니 여주 평야가 펼쳐졌어. 산골짜기에서만 살던 방 도령은 드넓은 평야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 도자기가 유명한 여주에는 곳곳에 가마터가 있었어. 방 도령은 한 가마터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멀쩡한 도자기를 깨뜨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어. 방 도령은 깜짝 놀라 한걸음에 다가갔지. “어르신, 애써 만든 도자기를 왜 깨 버리세요?” 방 도령이 안타까워하며 물었어. “이 도자기들은 빛깔이 곱지 않아.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도자기를 어찌 세상에 내놓겠어.” 도공은 물레 앞에 앉아 다시 도자기를 빚기 시작했어. ‘깨 버릴 도자기를 뭐 하러 애써서 빚는담!’ 방 도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길을 돌렸어. 여주를 떠난 방 도령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담양까지 내려왔어. 방도령은 대나무 숲을 지나다 대바구니를 잔뜩 지고 장에 가는 장사꾼을 만났어. 방 도령은 장 구경도 할 겸 장사꾼을 따라나섰지. 대바구니, 대소쿠리, 대자리, 죽부인, 참빗. 장에는 대나무로 만든 물건이라면 없는 게 없었어. 방 도령은 참빗 하나를 사고는 발길을 돌렸어. 방 도령은 전라도 골골을 찾아다녔어. 가는 곳마다 맛난 먹을거리가 참 많았지. 영광 굴비, 무등산 수박, 나주 배는 꿀맛이었고, 꼬물거리는 목포 세발낙지도 입에 착착 감겼어. 벌교에서는 꼬막을 배가 불룩해지도록 먹고, 여수에서는 갓김치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어. 방 도령은 전라도를 구경하는 동안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니까. 전라도를 돌아본 방 도령은 경상도로 향했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나전 칠기로 유명한 통영이었지. 방 도령은 길을 가다 나전 칠기 만드는 노인을 보았어. 노인은 조개껍데기를 얇게 갈고 잘게 썰어 자개를 만든 다음, 옻칠을 한 나무 상자에 붙여 무늬를 만들었어. 방 도령은 나전 칠기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노인을 보며 감탄했어. 방 도령이 걸어 걸어 안동에 도착했는데 한 할머니가 방 도령을 딱하다는 듯 바라봤어. 방 도령의 옷이 여기저기 해져 있었거든. “집을 떠나온 지 오래돼서요.” 방 도령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이자, 할머니는 방 도령에게 삼베옷을 하나 건네주었어. “도령,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게.” 옷을 갈아입은 방 도령은 할머니의 당부대로 집으로 향했어. 방 도령은 어머니를 만날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어. 되짚어 보니 집을 떠나온 지 벌써 몇 달째야. 마침내 봉당골 집 앞에 다다르자 어머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방 도령을 반겼어. 방 도령은 어머니에게 화문석이랑 인삼, 참빗을 내놓으며 큰절을 올렸지. 어머니는 의젓해진 방 도령을 보고 흐뭇해했어. 방 도령은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어. 방 도령의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고 신기한지 옥분이란 처녀는 날마다 방 도령을 찾아왔어. 방 도령도 옥분이가 마음에 들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지. 그러다 방 도령과 옥분이는 혼인을 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잘 살았대. 여러 가지 특산물 특산물은 한 지역에서만 생산되거나, 지역에서 나는 물건 가운데 맛과 품질이 뛰어 나 전국에서 으뜸으로 치는 물건이에요. 여러 특산물의 특징을 중심으로 그 종류를 알아보아요. 자연환경이 좋아요 특산물은 자연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어요. 각 지방의 자연환경에 따라 특산물이 다 르지요. 땅이 기름진 이천은 쌀, 비가 적게 내리고 햇볕이 좋은 대구와 충주는 사과, 바닷물이 따뜻하고 깨끗한 울릉도는 오징어가 유명하지요. 또 물이 맑고 기온이 따 뜻한 지리산 자락의 하동과 보성에서는 녹차, 산이 많아 그늘진 금산과 풍기에서는 인삼이 잘 자라 특산물이 되었어요. 자원이 풍부해요 지역에서 많이 나는 자원이나 재료를 이용해서 만든 물건이 특산물인 곳도 있어요. 질 좋은 고령토가 많은 이천의 도자기, 닥나무가 잘 자라고 물이 맑은 괴산과 전주의 한지, 대나무가 잘 자라는 담양의 죽세공품, 다른 지역에서는 자라지 않는 하얀색의 왕골이 자라는 강화의 화문석 등이 그런 특산물에 속해요. 기술과 솜씨가 뛰어나요 물건을 만드는 기술과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 많은 지역에서는 솜씨 좋게 만든 물건 이 특산물이 되었어요. 솜씨 좋은 유기장이 많아 유명해진 안성의 유기, 쇠를 다루는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 많아 뛰어난 모양과 품질을 자랑하는 울산의 은장도 등이 있어요. 특산물을 더 특별하게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의 종류는 달라도 특산물이 각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는 것 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는 특산물의 판매를 늘리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하는 여러 가지 노력에 대해 알아보아요. 특산물을 널리 알려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특산물을 알리고 홍보 자료를 만들어 나누어 줘요. 특산물 축 제를 열어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며 저렴한 가격에 특산물을 살 수 있게 해요. 또 특 산물에 상표를 만들어 붙여 상표만 보고도 품질이 좋고 우수한 특산물임을 알 수 있 게 해요. 다양한 판매 방식을 이용해요 인터넷이나 전화로 주문을 받아 특산물을 팔면 보다 많은 사람에게 특산물을 팔 수 있어요. 요즘에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특산물을 알리고 직접 판매하기도 하고 우체 국을 통해 특산물을 주문받아 소비자에게 택배로 보내 주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 으로 특산물을 판매해요.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요 특산물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는 지역도 있어 요. 곶감이 특산물인 상주에서는 과자나 빵 등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는 곶감 분말 을, 감이 유명한 청도에서는 감물로 염색한 제품과 얼린 홍시를 개발해 특산물보다 높은 가격에 판매하고 있어요. 또 사과나무를 도시 사람들에게 분양해서 직접 사과 를 따 볼 기회를 제공해 소득을 올리는 지역도 있어요. 고려 시대 관리인 이자겸은 죄를 지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가 있다가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처음 먹어 보았어요. 그런데 그 맛이 일품이라 임금님에게 말린 조기를 보내고 싶었지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고민이었지요. 이자겸은 생각 끝에 말린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을 붙여 임금님에게 보냈어요. 굴비는 비굴하지 않다는 뜻이었어요. 그때부터 말린 조기를 굴비라고 부르게 되었대요. 스님에게서 배워 만든 남원 목기 전라도 남원은 나무로 만든 생활 도구인 목기가 유명한 곳이에요. 신라 시대 남원에 있던 큰 절인 실상사의 스님들은 나무로 그릇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어요. 남원 사람들은 스님들에게 기술을 배워, 지리산에서 나는 질 좋은 나무로 크고 작은 그릇과 제기, 상 등을 만들어 냈어요. 지금까지도 남원 목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목기로 알려져 있답니다. 귀신도 탐을 낸 한산 모시 충청도 서천의 한산은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옷감인 모시가 특산물이에요. 한산 모시는 어찌나 빛깔이 곱고 보드라운지 귀신도 탐을 냈다고 해요. 그래서 한산 모시를 사고파는 장은 귀신을 피해 새벽에 열렸지요. 밤 귀신은 새벽이 되기 전에 돌아가고 낮 귀신은 해가 떠야 나타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래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비싼 값에 모시를 팔기 위한 것이었어요. 모시는 새벽에 가장 보드랍게 느껴지고 빛깔이 곱게 보이거든요.
태풍이 몰려와요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무엇이든 아는 척하는 척척 씨와 무슨 일이나 착착 해내는 착착 씨가 한집에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은 태풍이 몰려온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태풍이란 말이지, 태평양에서 뜨거워진 공기가 큰 바람과 비를 몰고 오는 거야.” 척척 씨의 말을 듣고 착착 씨가 벌떡 일어섰어요. “내가 나가서 태풍이 어디쯤 오고 있나 볼게.” 착착 씨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어요. 그때 마침, 이장님이 마을 방송을 시작했지요. “아, 아! 우리 마을 농부님들!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나갈 거라고 합니다. 피해를 입지 않도록 모두들 잘 대비하세요. 비닐하우스는 단단히 묶어 두고, 집 주변과 논밭에는 배수로를 파 두고, 지붕이랑 담도 미리미리 수리해 두세요.” 착착 씨는 그 말을 듣고,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착착 씨가 공구들을 챙기며 말했어요. “척척아, 태풍에 대비하려면 서둘러야겠어.” 하지만 척척 씨는 느긋하기만 했어요. “아이, 걱정 마. 작년에도 태풍이 비껴갔는걸, 뭐.” 착착 씨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갔어요. 착착 씨는 비닐하우스를 단단히 묶고, 담과 지붕도 꼼꼼히 손보았어요. 착착 씨의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꼼짝하지 않았어요. 착착 씨가 집 주변에 배수로를 팔 때였어요.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며 먹구름이 몰려왔어요. 곧이어 번개가 치고 요란한 천둥소리도 들렸어요. 이내 엄청난 비가 퍼붓기 시작했지요. “어이쿠, 올 것이 왔구나!” 착착 씨는 비를 맞으며 서둘러 배수로를 팠어요. 하지만 척척 씨는 창문으로 착착 씨를 딱하다는 듯 내다볼 뿐이었어요. 이장님이 빗속을 뚫고 허둥지둥 달려왔어요. “큰일 났네! 강물이 곧 넘칠 것 같아.” 착착 씨는 척척 씨를 끌고 강으로 달려갔어요. “모래 자루를 차곡차곡 쌓으면 강물이 넘치는 걸 막을 수 있기는 한데.” 척척 씨가 아는 척을 했어요. 그러자 착착 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서둘러 둑을 쌓기 시작했어요. 척척 씨도 마지못해 모래 자루를 날랐어요. 바람이 세차게 불어 일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강물이 넘칠까 봐 다들 열심히 일했지요. 척척 씨만 일하기 싫어 딴청을 피웠어요. 그러는 사이에 척척 씨 쪽으로 강물이 흘러넘쳤어요. “으악, 사람 살려!” 척척 씨는 그만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어요. 다행히 가까이에 있던 착착 씨가 급히 달려가 척척 씨를 물 밖으로 끌어냈지요. 순식간에 마을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집 안까지 물이 차오르자 깜짝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왔지요. 강물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어요. “저기, 우리 돼지가 떠내려가요!” “아이고, 우리 집 살림살이가 모두 떠내려가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어요. “언덕 위에 있는 학교로 대피합시다! 서둘러요!” 사람들은 이장님을 따라 학교로 몸을 피했어요. 그 뒤에도 비바람은 사정없이 몰아쳤지요. “이러다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겠어요.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 볼게요.” 답답한 마음에 착착 씨가 나섰어요. “큰일 나요. 태풍이 잦아들 때까지 참아요.” 마을 사람들이 착착 씨를 말렸어요. 모두들 교실 안에서 밤을 새우며 태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어요. 다음 날도 비는 계속 내렸어요. 바람도 무섭게 휘몰아쳤어요. 비닐하우스가 여기저기 찢겨 날아가고, 곳곳에서 담과 벽이 무너졌어요. 급기야 마을 뒷산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렸어요. “뒷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 내는 게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마을을 바라보며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지요. 태풍은 사흘이 지나서야 잠잠해졌어요.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눈앞이 캄캄했지요. 집은 부서지고 논밭은 모두 물에 잠겨 있었어요. 엉망이 된 마을을 보니 척척 씨도 마음이 아팠어요. 둑을 쌓을 때 게으름을 부린 것도 후회됐지요. “착착아, 마을 사람들을 도울 일이 없을까? 이제부터는 나도 열심히 일할 거야.” 척척 씨의 말에 착착 씨가 빙긋이 웃었어요. 척척 씨와 착착 씨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망가진 곳을 고쳐 주었어요.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기운을 내기 시작했지요. 집 안에 고인 물을 퍼내고, 가재도구를 내다 말렸어요. 구조대는 큰 장비를 가지고 와서 산사태로 무너진 흙을 치워 주었어요. 군인과 자원 봉사자들도 일손을 거들었어요. 며칠 뒤, 마을 사람들이 척척 씨와 착착 씨를 찾아왔어요. “우리 집 지붕을 고쳐 줘서 고마워요.” “우리 논의 벼를 세워 줘서 정말 고마워요.”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몇 번씩 고맙다는 말을 했어요. “척척이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척척이가 아니었으면 다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착착 씨는 척척 씨의 손을 꼭 잡았어요. 척척 씨는 쑥스러워 머리를 긁적였지요. 이제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어요. 마을 사람들은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마을 뒷산에 모여 나무를 심었어요. 열심히 나무를 심던 척척 씨가 땀을 닦으며 말했어요. “해마다 태풍이 커지고 있대. 그러니 아주 단단히 대비해 두자고!” 착착 씨는 부지런해진 척척 씨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어요. 자연은 우리 삶의 터전이에요. 하지만 때로는 큰비와 거센 바람, 지진이나 폭설 같은 자연현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기도 하지요. 이러한 자연현상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미리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는 있어요. 여러 가지 자연재해. 자연재해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목숨까지 앗아 갈 만큼 커다란 피해를 주어요. 우리나라에서 자주 일어나는 자연재해에 대해 알아보아요. 집중 호우. 한 지역에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을 집중 호우라고 해요. 집중 호우가 내리면 강물이 넘쳐 집과 논밭이 물에 잠기는 등 큰 피해를 입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에 집중 호우가 많이 내려요. 태풍. 태풍은 북태평양에서 생겨나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열대성 저기압이에요. 태풍은 많은 비와 거센 바람을 몰고 와요. 그래서 태풍이 불어오면 비와 바람으로 인한 피해를 한꺼번에 입게 되고 그 피해가 엄청나지요. 해마다 7~9월이면 두세 개의 큰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나가요. 가뭄.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들면 논밭이 갈라지고 농작물이 말라 죽어요. 또 사람들이 마시고 사용할 물도 부족하게 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봄가을에 가뭄이 드는 경우가 많아요. 폭설. 짧은 시간에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폭설이라고 해요. 폭설이 내리면 비닐하우스나 건물 지붕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지고, 과수원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도 해요. 또 도로에 쌓인 눈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기도 하지요. 점점 커지는 자연재해의 피해. 자연재해의 피해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자연을 훼손하고 함부로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산에 있는 나무를 마구 베어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가 하면,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태풍이나 홍수의 규모도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자연재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 태풍이나 집중 호우 등의 자연현상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줄일 수는 있어요. 어떻게 하면 자연재해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지 알아보아요. 기상 예보.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자연현상을 미리 알면 피해를 줄일 수 있어요. 기상청에서는 인공위성이나 기상 레이더 같은 첨단 장비를 이용해 기상 현상을 파악하고, 피해가 예상될 때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 대비하게 하지요. 방재 시설. 방파제를 설치해서 높은 파도를 막고, 댐을 만들어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는 것도 자연재해의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돼요. 또 강바닥을 고르게 하고 둑을 쌓으면 강물이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자연보호. 자연을 잘 가꾸고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의 피해를 줄일 수 있어요. 산에 나무가 많으면 나무뿌리가 흙을 움켜쥐어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아 주지요. 또 바닷가의 너른 갯벌은 해일과 파도로 인한 피해를 줄여 주어요.
푸른 별 환경 지킴이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안녕? 내 이름은 슬기야. 오늘 나는 친구들과 함께 ‘푸른 별 환경 지킴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어. 회원은 소연이, 민수, 나 이렇게 셋뿐이지만 우리는 지구의 환경을 지키는 일에 앞장설 거야. 지구는 우주에서 보면 푸른색으로 보이잖아. 그래서 모임 이름이 ‘푸른 별 환경 지킴이’야. 우리가 걸고 있는 목걸이도 푸른 별 지구를 뜻해. 우리가 왜 이런 모임을 만든 줄 아니? 지금처럼 환경오염이 계속되면 지구에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거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그래서 우리가 환경 지킴이가 되기로 한 거야. 우리는 먼저 우리 동네의 환경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했어. 그래서 자동차가 쉴 새 없이 오가는 도로로 나갔어. 자동차들이 매연을 어찌나 많이 뿜어내는지 몸이 약한 소연이는 바로 기침을 해 댔어. 우리는 일단 물에 적신 하얀 수건을 나무에 걸어 놓았어. 그럼 매연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거든. 한 시간 뒤, 우리는 수건을 걸어 놓았던 곳으로 갔어. 세상에,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에 하얀 수건이 시커메졌지 뭐야! 자동차의 매연은 우리 몸에 아주 해로워. 몸속에 쌓이면 천식이나 기관지염 같은 많은 질병을 일으키거든. 그런데 우리 동네의 공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오염되어 있었어. 우리가 날마다 이렇게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있는 거야? 정말 끔찍해! 우리는 동네 하천도 살펴보기로 했어. 소연이와 민수가 바지를 걷고 하천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물속에 어떤 생물이 사는지 조사했어. 그런데 물고기는 한 마리도 없고 실지렁이와 붉은색 깔따구만 있었어. 그건 하천이 아주 심하게 오염됐다는 뜻이야. 하천이 오염되는 이유는 생활하수와 공장 폐수가 하천으로 흘러들기 때문이지. 오염된 물에서 사는 생물도 있어. 생물이 사니까 깨끗한 거 아니야? 우리는 하천이 오염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봤어. 우선 깨끗한 물이 없으니까 마실 물이 부족하게 돼. 또 물속에서 물고기가 살 수 없게 되고, 나쁜 세균이나 벌레가 들끓어 전염병이 돌게 돼. 그런 걸 생각하니, 우리 동네 하천이 오염된 게 정말 심각하게 느껴졌어. 우리는 길을 걸어오다 커다란 청소차를 봤어. 청소차 안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지. 쓰레기를 싣고 있는 아저씨에게 그 많은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어보았어. 아저씨는 쓰레기를 싣고 가서 매립지에 묻는다고 했어. 우리는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쓰레기 매립지까지 따라가 보기로 했어. 쓰레기를 묻는 매립지가 따로 있단다. 쓰레기 매립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었어. 그 넓은 땅에 쓰레기가 가득했는데, 청소차들이 계속해서 쓰레기를 쏟아 붓고 있었어. 땅속에 묻힌 쓰레기들이 썩어 없어지려면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컵 라면 그릇이 썩는 데는 5백 년도 더 걸린대. 그러니까 지금처럼 사람들이 쓰레기를 마구 버리면 머지않아 지구가 온통 쓰레기로 뒤덮일 거야. 세상에, 온통 쓰레기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쓰레기통을 뒤져 보았어.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어찌나 많은지 푸른 별 환경 지킴이로서 정말 부끄러웠어. 쓰레기 중에는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어. 신문지, 우유 팩, 캔, 유리병.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따로 모으니까 쓰레기가 훨씬 줄어들었어. 지구의 환경을 지키려면 쓰레기부터 줄여야겠어. 맛있는 참치가 들어 있던 캔도 재활용할 수 있어. 재활용 쓰레기는 따로 분리해서 버리면 다른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줄여야 할 게 또 있어. 그건 바로 지구의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가스야. 지구의 오존층이 파괴되면 해로운 자외선 때문에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에 걸리고, 생태계가 파괴된대. 그런데 우리가 생각 없이 사용하는 헤어스프레이, 살충제, 에어컨과 냉장고에는 프레온 가스가 들어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지구 환경을 지키려면 이런 물건의 사용도 줄여야 해.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질은 돌고 돌아. 공기가 오염되면 산성비가 내리고, 산성비가 내리면 땅과 물이 오염돼. 그러면 땅 위에서 자라는 식물이 오염되고, 그 식물을 먹는 동물과 사람도 위험에 처하게 되지. 한번 오염된 환경을 되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 환경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고 깨끗한 환경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해. 나와 소연이와 민수는 우리 동네의 환경오염을 조사하고 지구 환경에 대한 공부도 했어. 그러고 나서 푸른 별 환경 지킴이가 할 일을 하나하나 정했어.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많더라고.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샴푸 대신 비누로 머리를 감자! 물건을 아껴 써서 쓰레기를 줄이고 전기도 아껴 쓰자! 우리처럼 환경 지킴이가 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니 당장 시작해 봐. 가까운 친구들과 환경 모임을 만들 수도 있고, 인터넷으로 환경 모임에 가입할 수도 있어. 환경을 지키기 위해 작은 실천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환경 지킴이라는 걸 잊지 마! 환경오염을 막기 위한 노력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해요. 지구 환경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에 대해 알아보아요. 나라에서 하는 일 고속도로, 댐, 비행장을 지을 때는 환경 영향 평가를 실시해 그 공사가 자연환경에 주는 영향을 미리 조사해요. 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공사를 못 하게 하지 요. 또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시설물과 오염 물질을 많이 내뿜는 자동차 등에는 환경 개선 부담금을 부과하고, 화석 연료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친환경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힘쓰고 있어요. 환경 단체에서 하는 일 환경 운동 연합, 녹색 연합, 그린 훼밀리 운동 연합 등의 여러 환경 단체에서는 환경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어요. 정부나 기업의 정책을 환경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꾸도록 설득하는 일, 사람들에게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활동 등을 하지 요. 갯벌을 메워 땅으로 만드는 간척 사업에 반대하고, 오염된 산과 강을 살리려는 운동도 꾸준히 벌이고 있어요. 개인이 하는 일 사람들의 작은 노력만으로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어요.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거 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먼 곳에 갈 때는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요. 또 쓰레기를 버릴 때에는 꼭 재활용품을 따로 분류하여 버리고, 물건을 아껴 써 서 쓰레기를 줄여야 해요. 평상시에 전기와 물을 아껴 쓰는 것도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이에요. 우리나라는 환경오염이 심각한 나라 가운데 하나예요.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환경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의 환경오염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보아요. 남산의 소나무가 죽어 가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자동차가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서울에서는 심한 대기 오염 때문에 산성비가 자주 내려요. 이 산성비로 인해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남산의 땅은 중금속으로 심하게 오염되었어요. 그래서 애국가 가사에도 나오는 남산의 대표 식물인 소나무가 대부분 말라 죽고 있어요. 또 소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도 잘 자라지 못하지요. 그 이유는 산성비 때문에 낙엽이 썩지 않아 땅의 영양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래요. 시끄러워서 못 살겠어요 우리는 자동차 소리,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 등 소음 공해 속에서 살아가요. 소음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책을 읽고, 대화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하면 청각 장애를 일으키거나 혈압이 오르게 하는 등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쳐요. 공항 주변은 특히 소음이 심한데,대구의 한 초등학교는 비행기 소음 때문에 60년의 역사를 이어 온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고, 법원에서는 대구 공항 근처 주민들이 소음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항공사가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기까지 했어요. 외출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대기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병원에는 대기 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환자와 피부병 환자가 날로 늘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서울시에서는 1995년부터 사람들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오존과 미세 먼지의 농도를 날마다 측정해서 알려 주고 있지요. 대기 오염이 심해 오존 경보와 미세 먼지 경보가 내려진 날에는 가급적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좋아요.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는 새들의 먹이가 풍부해 철새들이 많이 찾아들어요. 낙동강 하구에 있는 을숙도라는 섬은 갈대가 많이 자라고 먹이가 많아 희귀한 새들이 많이 찾아오는 유명한 철새 도래지였어요. 그런데 낙동강 하구에 둑을 건설해 철새가 머물 곳이 줄어들고, 공장에서 배출하는 오염 물질 때문에 환경이 점점 파괴되었어요. 그 결과 1970년을 고비로 을숙도와 낙동강 주변으로 날아오던 철새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아름다움을 되찾은 난지도 수풀이 우거진 월드컵 공원 쓰레기를 더 이상 묻을 수 없을 만큼 난지도에 쓰레기가 가득 차자, 나 라에서는 1995년에 난지도에 공원을 만들기로 했어요. 7년의 기간을 거 치며 난지도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거듭났어요. 한때 쓰레기 산이었던 난지도에 지금은 다양한 동물과 400종이 넘는 식물이 자라고 있어요.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 매립지 1978년에 나라에서는 난지도를 쓰레기 매립지로 정했어요. 커다란 제 방을 쌓고 서울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가져다 묻기 시작한 이후 난지도 의 아름답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졌어요. 난지도는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파리와 모기, 온갖 벌레가 들끓는 거대한 쓰레기 산으로 바뀌었 어요. 아름다운 섬 난지도 난지도라는 이름은 난초와 지초가 자라는 섬이라는 뜻이에요. 오래전의 난지도는 철마다 온갖 꽃이 피는 아름다운 섬이었어요. 물이 맑고 깨끗 하며 먹이가 많아 철새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지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름진 땅에 땅콩과 수수를 재배하는 넓은 밭이 있었고, 난지도로 나들이를 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도깨비방망이 잘 쓰는 법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도깨비들은 도깨비방망이를 뚝딱 두드려 무엇이든 마음껏 만들어 쓰고 살았어요. 대왕 도깨비는 물건을 아껴 쓸 줄 모르는 도깨비들의 잘못을 고쳐 주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새 도깨비방망이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어요. “이제부터는 이 방망이를 쓰도록 해라. 한 달에 딱 20번만 원하는 걸 만들 수 있으니 방망이에 쓰인 숫자를 보며 현명하게 잘 써야 한다.” 하지만 도깨비들은 새 도깨비방망이를 예전처럼 마구 두드려 댔어요. 그렇게 20번을 쓰고 나면 다음 달까지는 아무것도 더 만들 수 없었어요. 그러자 힘이 약한 도깨비의 방망이를 빼앗거나, 다른 도깨비의 방망이를 몰래 쓰는 일이 생겨났어요. 도깨비 마을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지요. “후유, 새 방망이를 현명하게 잘 쓰라고 했는데.” 도깨비방망이 때문에 다투는 도깨비들을 보며 꼬마 도깨비 콩콩이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맞아! 사람들은 도깨비방망이 대신 돈을 쓴다고 했어.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고 도깨비방망이 잘 쓰는 법을 알아 와야겠어.” 콩콩이는 머리에 난 뿔을 가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으로 향했어요. 시장에 간 콩콩이는 한 여자 아이가 머리핀을 고르는 걸 봤어요. “다 예쁘고 마음에 들지만 이것만 살래요.” 그러더니 아이는 빨간 머리핀 하나를 샀어요. “다 예쁘다면서 왜 하나만 사니?” 콩콩이가 궁금한 걸 못 참고 불쑥 물었어요. “머리핀을 여러 개 사면 다른 데 쓸 돈이 모자라. 용돈을 어디에 쓸지 미리 계획을 세워 놓았거든.” 콩콩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이렇게 적었어요. 어디에 쓸지 미리 계획을 세운다. 콩콩이는 시장을 이리저리 다니다가 설탕 봉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아주머니를 봤어요. “아주머니, 다 똑같은 설탕인데 뭘 그렇게 고르세요?” “물건을 살 때는 따져 보아야 할 게 많단다.” 콩콩이는 일단 수첩에 이렇게 적었어요. 방망이를 두드리기 전에 따져본다. “그런데 무얼 따져 봐요?” 콩콩이가 아주머니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려 했더니 아주머니는 벌써 저만치 가고 없었어요. “싸요, 싸! 신발을 싸게 팔아요.” 콩콩이는 신발 가게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어요. 사람들이 너도나도 신발을 사러 모여들었어요. 그런데 한 아주머니만 본척만척하며 지나쳤어요. 콩콩이는 아주머니를 따라가 물었어요. “왜 신발을 싸게 파는데 안 사세요?” “싸다고 무조건 사니? 꼭 필요한 것만 사야지.” 콩콩이는 또다시 수첩을 꺼내 이렇게 적었어요. 꼭 필요한 것만 만들어 낸다. 콩콩이가 수첩을 가방에 집어 넣으려는데 한 아이가 손에 돈을 쥔 채 달려갔어요. 아이는 곧장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어요. 그러더니 값만 묻고 그냥 나오지 뭐예요? “아이스크림이랑 팽이가 모두 1000원이네. 그럼 오랫동안 가지고 놀 수 있는 팽이를 사야지!” 아이는 혼잣말을 하며 뛰어갔어요. 콩콩이는 똑똑해 보이는 그 아이를 따라가 보기로 했어요. 콩콩이는 창문으로 아이네 집 안을 들여다봤어요. 마침 아이 아빠가 아이에게 봉투를 내밀며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민호야, 이번 달 용돈이다. 아껴 쓰고, 용돈 기입장을 쓰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네, 고맙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어요. 그때 강아지가 콩콩이를 보고 크게 짖어 댔어요. 민호네 가족이 창밖을 내다봤어요. “어? 아까 시장에서 봤던 아이잖아!” 민호가 콩콩이를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민호 친구니? 밖에 서 있지 말고 들어오렴.” 민호 엄마가 문을 열고 말했어요. 콩콩이는 얼른 민호네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다 그만 모자가 문에 걸려 벗겨지고 말았어요. “으악! 도깨비다!” 민호네 가족이 콩콩이의 뿔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놀라지 말고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세요.” 콩콩이는 민호네 가족에게 도깨비 마을에 일어난 일과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모두 말했어요. 그러자 민호네 가족이 콩콩이를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민호는 용돈 기입장을, 민호 아빠는 가계부를 보여 주며 돈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 주었어요. 민호는 아빠가 설명할 때 콩콩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나는 새 자전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어.” 용돈 기입장을 쓰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어. 그럼 돈을 아껴 쓰게 돼. 한 달 동안 쓴 가계부를 보고, 다음 달 계획을 미리 세울 수도 있단다. 콩콩이는 민호네 가족의 말을 들으며 기억할 내용을 수첩에 적었어요. 콩콩이는 수첩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어요. 어서 도깨비 마을로 돌아가 다른 도깨비들에게 자기가 배운 걸 알려 주고 싶었지요. 그래서 민호네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도깨비 마을로 향했어요. 도깨비방망이 잘 쓰는 법. 어디에 쓸지 미리 계획을 세운다. 방망이를 두드리기 전에 따져 본다. 꼭 필요한 것만 만들어 낸다. 방망이를 두드려 무엇을 만들었는지 적어 둔다. 꼭 필요할 때를 위해 아껴 쓴다. 사람들한테서 방망이 잘 쓰는 법을 배워 왔어요. 콩콩이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도깨비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러고는 수첩을 꺼내 자기가 배워 온 것을 일러 주었지요. 도깨비들은 콩콩이의 말을 열심히 듣더니 모두 좋은 방법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금세 방망이를 현명하게 잘 쓰지는 못했어요. 생각 없이 방망이를 두드리고는 후회할 때가 더 많았어요. 하지만 다행히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어요. 콩콩이는 방망이를 더 잘 쓰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그건 바로 서로를 위해 선물을 만들어 주는 거였지요. 콩콩이가 방망이를 힘껏 두드리며 외쳤어요. “자전거 나와라, 뚝딱!” 그 자전거는 민호에게 선물할 거였어요. 콩콩이는 자전거를 받고 기뻐할 민호를 생각하니 자기를 위해 방망이를 쓸 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어요. 공부는 꼭 해야 하니까 책 나와라, 뚝딱! 이번 달에는 다섯 번이나 남겼네. 사람들은 일을 해서 소득을 얻고, 그 소득으로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을 소비하며 살아가요. 소득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현명하게 소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아요. 소득과 소비. 오늘날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받으려면 돈을 내고 사야 하는데, 이렇게 돈을 내고 사서 쓰는 것을 소비라고 해요. 소비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득을 얻어 소비할 돈을 마련하지요. 이러한 소득과 소비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물건을 사서 쓰기 전에 자신의 소득을 먼저 따져 보고, 물건을 사는 데 쓸 돈의 액수를 결정해요. 소득의 종류. 소득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예요. 소득의 종류와 사람들이 소득을 얻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아요. 근로 소득 대부분의 사람이 직장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요. 이렇게 일을 한 대가로 벌어들이는 돈을 근로 소득이라고 해요. 미용사가 미용실에서 일을 하고 받는 돈이나 버스 기사가 운전을 하고 받는 돈도 근로 소득이지요. 사업 소득 공장, 회사, 가게 등을 운영해서 소득을 얻기도 해요. 이렇게 직접 사업을 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사업 소득이라고 해요. 농부가 농사를 짓고, 어부가 고기잡이를 해서 벌어들이는 돈도 사업 소득에 속해요. 재산 소득 자신이 가진 재산을 이용해서 소득을 얻는 경우도 있어요. 돈을 은행에 예금해 두고 그 이자를 받거나, 땅과 집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고 임대료를 받는 경우예요. 이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재산 소득이라고 해요. 현명한 소비. 사람들은 현명한 소비를 통해 같은 돈으로 더 큰 만족을 얻고 싶어 해요. 또 벌어들이는 소득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 없이 소비를 하게 되면 꼭 필요한 물건인데도 돈이 없어 못 사는 경우가 생기지요. 따라서 소비를 할 때는 여러 가지 것들을 따져 봐야만 해요. 현명하게 소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보아요. 가장 필요한 물건부터 사요. 사야 할 여러 가지 물건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떤 것을 먼저 사고 어떤 것을 나중에 살지 결정해요. 내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지, 나에게 즐거움이나 도움을 주는 것인지,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것인지 등을 잘 생각해 보면 무엇을 먼저 사야 할지 알 수 있어요. 더 싼값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요. 똑같은 물건이라면 값을 비교해 보고 더 싸게 파는 곳에서 물건을 사요.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싸게 할인해서 파는 기간까지 기다렸다가 사는 것도 물건을 싸게 사는 방법이지요. 또 물건 값이 같더라도 양이 더 많은 것, 품질이 더 좋은 것을 사면 싸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가계부나 용돈 기입장을 써요. 돈을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가계부나 용돈 기입장에 날마다 기록해 두면 일정 기간 동안의 소득과 소비를 한눈에 알 수 있어요. 또 가계부나 용돈 기입장에 기록해 둔 내용을 살펴보면 낭비한 곳을 알 수 있어,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고 아껴야 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답니다. 민호의 현명한 소비. 사고 싶은 게 많은데. 그래, 가장 필요한 필통을 사자! 조금 멀어도 싸게 파는 곳에 가서 사야지. 값은 같은데 이 필통이 더 튼튼해보이네. 오늘 쓴 돈을 용돈 기입장에 적어야지. 소비를 해서 더 큰 만족을 얻으려면 물건을 살 때 선택을 잘 해야겠지요. 물건을 선택하기 전에 어떤 점을 생각해야 할지 민호의 생활을 통해 알아보아요. 민호는 텔레비전에서 자전거 광고를 봤어요. 자전거가 아주 튼튼하고 좋아 보여 꼭 사고 싶었지요. 하지만 엄마는 광고만 보고 물건을 사면 안 된대요. 왜 그럴까요? 광고는 물건을 만든 회사에서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해 만든 거예요. 광고를 만들 때는 물건을 더 좋게 보이도록 꾸며 촬영을 하고, 장점을 강조해서 설명하고는 하지요. 하지만 주의 사항이나 불편한 점은 거의 설명하지 않지요. 그래서 광고를 보면 모든 물건이 다 좋아 보이지요. 무조건 광고 내용만 믿고 물건을 사면 실망하거나 후회할 수 있어요. 민호는 새 신발이 필요해요. 운동화도 사고 싶고 장화도 사고 싶은데, 둘 다 살 수는 없어요. 어떤 것을 사는 게 좋을까요? 같은 종류의 물건 가운데서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할 때는 더 쓸모가 많은 물건을 사야 해요. 장화는 비 오는 날 신으면 발이 젖지 않아 편하지만 평상시에는 신지 않아요. 하지만 운동화는 날마다 신을 수 있지요. 민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은 새 신발이에요. 그러니까 운동화와 장화 가운데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쓸모가 더 많은 운동화를 사는 쪽이 좋겠지요. 민호는 엄마와 축구공을 사러 가서 냉큼 유명 상표의 축구공을 집어 들었어요. 엄마는 유명 상표의 물건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래요. 엄마 말이 무슨 뜻이지요? 품질이 비슷한 물건이라도 유명 상표의 물건은 값이 비싸요. 유명 상표의 물건 값에는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돈 외에도 광고비나 홍보비 등의 비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물건을 살 때는 상표만 보지 말고 질이 좋은지, 가격이 적당한지 꼼꼼히 따져 봐야 해요. 민호네 반에서는 요즘 캐릭터 가방이 유행이에요. 민호도 그 가방이 갖고 싶은데 엄마는 안 사 준대요. 다른 친구들이 다 갖고 있는 가방을 왜 안 사 줄까요? 쓸 수 있는 가방이 있는데도 유행하는 가방을 또 사는 것은 낭비예요. 유행을 좇아가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어울리는지, 튼튼해서 오랫동안 쓸 수 있는지, 꼭 필요한 물건인지 생각해 보고 물건을 사는 게 현명한 소비예요. 친구가 생일 잔치에 민호를 초대했어요. 민호는 돈을 아끼느라 선물을 사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그런 민호를 보고 얌체라고 놀렸어요. 돈을 아끼는 게 나쁜 일인가요?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은 쓸데없는 데에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돈을 아낀다고 꼭 써야 할 데에도 돈을 쓰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기분이 언짢아질 수 있어요. 무조건 아끼기보다 가진 돈을 현명하게 잘 써 만족을 얻는 게 중요하지요.
자동차는 누가 만들었나?
사회관계
초등_저학년
자동차는 정말 편리해요. 자동차를 타면 먼 곳도 금방 갈 수 있고 무거운 짐도 쉽게 실어 나를 수 있지요. 하지만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으로 하늘은 늘 뿌옇고 공기는 오염됐어요. 매연을 내뿜지 않는 자동차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이곳에서 아주 새로운 자동차를 선보인대요. 사람들이 새로운 자동차를 보려고 모여들었어요. 새로운 차는 어떤 모양일지,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모두들 궁금해했어요. 예쁜 도우미가 차에 덮인 천을 벗기려 하자 모두들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어요. 우아! 유리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깜찍하면서 세련된 자동차예요. 게다가 매연도 내뿜지 않고 아주 적은 연료로 쏜살같이 달릴 수 있대요.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정말 정말 특별한 자동차예요. 그런데 저렇게 멋진 자동차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새 자동차는 내가 만들었어. 나는 큰 자동차 회사의 사장이야. 3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자동차 회사를 세웠지. 나는 공장을 지어 온갖 부품과 재료를 사들이고, 기술자를 불러 모아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게 했어. 내 회사가 없다면 어떻게 자동차를 만들겠어? 그러니 새 자동차는 내가 만든 거지. 새 자동차는 내가 만들었어. 나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자동차 디자이너야. 내가 디자인 한 자동차를 보면 모두 감탄하지. 이번에 만든 자동차는 특히 신경을 많이 썼어. 동글동글한 몸체부터 손에 착 감기는 핸들까지 하나하나 내가 디자인 했지. 내 디자인이 아니라면 깜찍하고 세련된 자동차가 어떻게 만들어졌겠어? 그러니 새 자동차는 내가 만든 거지. 새 자동차는 우리가 만들었어. 우리는 매연을 내뿜지 않고 적은 연료로 쏜살같이 달리는 엔진을 만들어 냈어. 우리는 534일하고도 20시간 동안이나 연구를 했어. 그래서 훌륭한 엔진을 만들어 냈지. 우리가 만든 엔진이 없다면 새 자동차가 특별할까? 그러니 새 자동차는 우리가 만든 거지. 새 자동차는 우리가 만들었어. 두껍고 단단한 철판을 매끈하게 자르는 일은 우리처럼 뛰어난 기술자만이 할 수 있어. 철판을 잘 잘라야 새 자동차처럼 미끈한 모양의 자동차를 만들 수 있어. 우리가 철판을 자르지 않으면 자동차를 만들 수 없지. 어때, 새 자동차는 우리가 만든 게 맞지? 아무리 철판을 잘 자르면 뭐 해? 우리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 조각조각 잘린 철판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자동차를 만든 건 우리라고. 우리는 작은 틈도 없게 철판을 이어 붙여 처음부터 한 덩어리였던 것처럼 완벽하게 만들었어. 당연히 새 자동차는 우리가 만든 거지. 새 자동차의 아름다운 색을 좀 봐. 그렇게 고운 색을 칠한 건 바로 우리야.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자동차는 그저 쇳덩이처럼 보일 뿐이지. 자동차에 페인트를 곱게 칠하는 건 우리처럼 솜씨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림없어. 아름다운 새 자동차는 우리가 만든 거야. 누가 뭐래도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퀴야. 나는 새 자동차의 바퀴를 만들었어. 가장 좋은 고무를 구해, 부드럽게 잘 굴러 가고 눈길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바퀴를 만들었어. 내가 만든 바퀴가 없다면 새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겠어? 그러니 새 자동차는 내가 만든 거야. 우리는 조립의 천재들이야. 새 자동차는 우리가 조립했어. 우리는 3만 개의 부품을 제자리에 끼우고 튼튼하게 조여 자동차를 만들었어. 부품 하나만 잘못 조립해도 큰 사고가 날 수 있어. 우리 덕분에 안전하고 튼튼한 자동차가 만들어진 거야. 그러니 새 자동차를 만든 건 우리야. 자동차를 만들 공장을 짓고, 기술자를 불러 모으고, 새롭고 멋진 자동차를 디자인 하고, 매연 걱정이 없는 엔진을 만들고, 철판을 매끈하게 잘라 내고, 철판을 튼튼하게 이어 붙이고, 자동차에 아름답게 페인트칠을 하고, 성능이 뛰어난 바퀴를 만들고, 모든 부품을 조립해 자동차를 완성했지.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 생산 과정에는 자본을 투자하는 사람,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 땀 흘려 물건을 만드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이 참여 해요.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 이 자기 역할을 잘 해내야겠지요. 길거리에 새 자동차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어요. 새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너도나도 새 자동차를 타고 싶어 하지요. 깜찍하고 세련된 모양에 매연 걱정이 없는 자동차를 탈 수 있는 건 자동차를 만든 여러 사람들 덕분이에요. 생산이란 생활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을 만들어 내는 걸 말해요.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하는 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생산이지요. 여러 가지 생산 활동과 생산에 필요한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아요. 여러 가지 생산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내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생산이라고 해요.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생산은 크게 세 가지 로 분류할 수 있어요.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생산에 대해 알아보아요. 자연을 이용한 생산 자연에서 나는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생산이에요. 농부가 쌀과 채소를 기르는 것, 어부가 바다에서 물고기나 조개를 잡는 것, 산에서 나무를 베거나 산나물을 캐는 것 이 모두 생산 활동이에요. 이런 생산 활동을 통해 얻어진 생산물은 특별한 가공 과정 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소비자에게 전달되지요. 물건을 만들어 내는 생산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생산이에요. 옷이나 신발, 가구, 자동차, 컴퓨터 등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공장에서 생산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집을 짓거나 다리와 도로를 만드는 것, 광산에서 지하자원을 캐내어 가공하 는 것도 이러한 생산 활동에 속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생산 물건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거나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 는 것도 생산이에요. 물건을 운반하는 것, 판매하는 것,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는 것 도 모두 생산이지요. 또 가수가 노래를 불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생산이에요. 생산 요소 자동차를 생산하려면 자동차를 만들 공장이 있어야 하고, 자동차를 만들 사람과 여 러 가지 재료가 필요하지요. 이렇게 생산하는 데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이를 생산 요소라 하는데, 대표적인 생산 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에 대해 알아보아요. 토지 토지는 보통 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하지만 생산 요소에서 말하는 토지는 땅뿐만 아니라 철광석이나 금, 시멘트, 석유 같은 지하자원이나 목재 등의 임산 자원과 같이 자연에서 얻는 모든 자원을 뜻한답니다. 노동 사람이 생산 과정에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노동이라고 해 요. 농사를 짓는 일, 물건을 나르는 일, 마사지를 하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는 일 등이 모두 노동이에요. 기업은 노동의 대가 로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사람들은 생산 과정에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소 득을 얻어요. 자본 자본이란 쉽게 말해 많은 양의 돈을 뜻해요. 생산에서 말하는 자본은 생산에 필요한 돈과 도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에요.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 여러 가지 부 품과 재료는 물론이고, 공장이나 회사 건물, 철도, 도로 등의 시설까지 모두 자본에 속하지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생산 활동을 해 왔어요. 오늘날은 기술과 기계의 발달로 생산 활동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요. 옛날과 오늘날의 생산 활동에 대해 알아보아요. 경제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썼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어 요.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집안일을 도왔어요. 작은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어요. 그물이나 낚시 같 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고기잡이를 했어요. 쇠를 녹여 농사 도구와 생활용품 등을 만드는 대장 장이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일을 했어요. 물건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만들 어 내는 물건의 양이 적었어요. 옷이나 신발 등의 물건을 집에서 만 들어 썼어요. 옷을 만들기 위해 실을 잣는 것부터 천을 짜는 일까지 모두 집에서 했지요.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갈고, 씨를 뿌 리고, 거둬들이는 모든 일을 사람이 직접 했어요. 사람의 힘으로 모든 일 을 했기 때문에 거둬들이는 농산물의 양이 적었어요. 물건을 만드는 일보다 물건을 나 르거나, 판매하는 등의 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어요. 큰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많은 물고기 를 잡아요. 물고기는 잡자마자 냉동시켜 육 지로 가져와요. 바닷가에서는 양식으로 수 산물을 길러 내지요. 모심는 기계부터 곡식을 베는 기계까지 다 양한 농기계가 발명되었어요. 혼자서도 넓 은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거둬들이는 농산물의 양도 늘었어요.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을 공 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요. 공장에 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일만 맡아 빠르게 처리해요. 머리를 손질해 주는 미용사처럼 전문 기술을 갖춘 새로운 직업이 많이 생겨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