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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 ‘랑카’라는 인도의 한 왕국에‘라바나’라는 젊은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라바나 왕은 현명하고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무술도 뛰어나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게다가 경건한 마음으로 신을 모셨지요. 그래서 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브라흐마’는 라바나 왕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맹수도, 심지어 하늘의 신이라 해도 라바나를 해칠 수 없다.” 브라흐마 신의 말은 곧 법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가진 신들도 라바나 왕을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라바나 왕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이길 존재는 아무도 없다. 내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우쭐해진 라바나 왕은 힘없는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들까지도 괴롭혔지요. 바람의 신‘바유’의 날개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불의 신‘아그니’의 불씨를 꺼뜨리기도 했습니다. 신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나라야나’신에게 호소했습니다. “나라야나 신이여! 라바나는 브라흐마 신의 사랑을 믿고 너무나 거만해졌습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신들까지도 괴롭힐 정도입니다. 나라야나 신께서 라바나를 벌하여 주십시오.” 나라야나는 신 중에서 가장 신통력이 뛰어났고, 몇 번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재주도 부릴 수 있었습니다. “알겠소. 내가 라바나를 물리치도록 하겠소.” 나라야나 신의 대답에 불의 신 아그니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라바나는 브라흐마 신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맹수는 물론이고, 우리 같은 신조차 라바나를 죽일 수 없다는 축복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나라야나 신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브라흐마 신의 축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맹수와 신도 라바나를 해치지 못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인간이 빠져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맹수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면 라바나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나라야나 신의 말에 다른 신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맞다! 인간은 라바나를 물리칠 수 있어.” 그러자 바람의 신 바유가 영리한 표정으로 두 눈을 굴리더니 냉큼 제안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원숭이도 빠졌습니다. 원숭이는 동물이지만 분명 맹수는 아닙니다. 게다가 원숭이는 사람처럼 영리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지요. 그러니까 원숭이가 나라야나 신을 돕는다 면 라바나를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바유 신의 제안에 나라야나 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맙소, 바유. 그럼 내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원숭이를 친구로 만들어서 함께 라바나를 혼내 주겠소.” 나라야나 신은 어느 곳에서 누구의 아들로 태어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애절하게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코살라 왕국의 다사라타 왕이 올리는 기도 소리였습니다. “하늘이시여, 신들이시여! 제게 아들을 주시옵소서. 제 뒤를 이어 왕이 될 아들을 얻어야만 이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부디 아들을 낳게 해 주신다면 신들을 위해 그 아들을 성자에게 보내 도를 닦도록 하겠습니다.” 다사라타 왕의 기도 소리를 들은 신들은 다사라타 왕이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나라야나 신이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코살라 왕국 다사라타 왕의 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라바나를 물리칠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제가 나라야나 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잘 지켜 주십시오. 신들은 나라야나 신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앞길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한편 다사라타 왕은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다사라타 왕 앞에 떡 한 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떡을 왕비들에게 먹이도록 해라. 그러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사라타 왕은 떡을 두 조각으로 잘라 그 중 큰 덩어리를 첫째 왕비인 카우살리야에게 먹이고, 작은 덩어리는 둘째 왕비 카이케이에게 먹였습니다. 다사라타 왕은 두 아들을 모두 사랑했지만, 라마 왕자에게 좀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라마 왕자는 아주 잘생긴 데다가 성품이 너그럽고 명랑해서 모두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총명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라마 왕자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나라야나 신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라마 왕자는 자신이 나라야나 신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전하! 라마 왕자를 지나치게 편애하시는 것 아니옵니까?” 카이케이 왕비는 다사라타 왕에게 뾰로통한 얼굴로 불평을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언제나 라마 왕자만 사랑하실 뿐 바라타 왕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않으시잖아요.” 카이케이 왕비의 불평에 다사라타 왕은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왕은 젊고 아름다운 왕비 카이케이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간혹 이렇게 예의 없는 행동을 해도 귀엽게 보아 넘겼지요. “카이케이! 바라타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오. 그러나 라마가 먼저 태어난 형이지 않소? 그래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인물이니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뿐이라오. 내가 바라타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러나 카이케이 왕비의 눈에서는 서운함과 질투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꼭 라마 왕자를 몰아내고 내 아들 바라타가 왕위를 이어받게 할 거야. 흥, 두고 보라지!’ 첫째 왕비 카우살리야는 카이케이 왕비의 이러한 심보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성이 착하고 너그러운 카우살리야 왕비는 언제나 라마 왕자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카이케이 왕비도 너에게는 어머니이니 언제나 효성을 다하도록 해라. 그리고 무엇이든 바라타에게 양보하도록 하렴.” 그래서 라마 왕자는 아침마다 카이케이 왕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고 언제나 정성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케이 왕비는 라마 왕자의 그런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성자 비슈바미트라가 다사라타 왕을 찾아왔습니다. 인도에서는 유명한 성자가 왕을 찾아가면 환대를 받습니다. 성자를 잘 대접한 왕은 하늘의 축복을 받기 때문에 성자들은 늘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다사라타 왕도 비슈바미트라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다사라타 왕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행의 길을 선택한 성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비슈바미트라는 다사라타 왕에게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요구했습니다. “라마 왕자를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다사라타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왕께서는 오래전에 스스로 신들에게 한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분명히 아들을 낳게 해 주면 그 아들을 성자에게 바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신들은 당신에게 아들을 두 명이나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어기시면 되겠습니까? 비슈바미트라의 말에 다사라타 왕은 온몸이 오싹해졌습니다. 그래서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하지만 라마 왕자는 안 됩니다. 장차 왕위를 이어갈 아들입니다. 다른 아들을 데려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편 손님을 위해 후식을 가지고 오던 카이케이 왕비는 다사라타 왕과 비슈바미트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카이케이 왕비는 눈물을 흘리며 다사라타 왕에게 외쳤습니다. “라마 왕자는 안 되니 다른 아들을 데려가라고요? 그렇다면 내게서 바라타 왕자를 떼어 놓겠다는 것인가요?” 카이케이 왕비가 소란을 피우며 울자 카우살리야 왕비와 바라타 왕자, 라마 왕자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비슈바미트라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라마 왕자여! 오래전 당신의 아버지는 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아들을 낳게 해 주면 그 아들을 성자에게 바쳐 고행을 하게 하겠다고. 그래서 신들은 당신의 아버지에게 당신과 바라타 왕자를 주셨소. 그런데 내가 와서 당신을 데려가겠다고 하니 그럴 수 없다고 하는군요. 라마 왕자는 아버지의 근심 어린 얼굴, 눈물을 흘리는 카이케이 왕비, 잔뜩 겁먹은 얼굴로 떨고 있는 바라타 왕자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바마마, 제가 성자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다사라타 왕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렸습니다. “안 된다. 너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후계자다.” “아바마마! 인간들끼리도 서로에게 한 약속을 지킵니다. 하물며 아바마마께서 신들에게 한 약속을 어기셔야 되겠습니까? 게다가 바라타는 몸이 약해서 고행을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 비슈바미트라 성자님께서도 저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마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 어머니인 카우살리야 왕비에게 절을 했습니다. “어마마마,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저로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이케이 왕비와는 달리 경건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카우살리야 왕비는 라마 왕자의 손을 잡으며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성한 것이다. 또한 비록 바라타와 네가 같은 날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바라타는 너보다 몸이 약해서 고행하는 것이 무척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신들께서 너를 원하신다니 더욱더 네가 떠나야겠지. 나는 너를 위해 신들께 날마다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겠다. 비슈바미트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카우살리야 왕비의 인품에 감동하였습니다. ‘과연 어머니가 저렇게 현명하시니 아들도 저렇게 잘 키워 낼 수 있었구나.’ “이왕 떠나기로 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라마 왕자는 당장 짐을 꾸려 그날로 비슈바미트라를 따라 왕궁을 떠났습니다. 카우살리야 왕비는 눈물을 꾹 참고 아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다사라타 왕은 너무 슬픈 나머지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왕궁을 떠나는 라마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카이케이 왕비였습니다. ‘잘됐다. 라마 왕자만 없으면 이제 왕위는 내 아들 바라타가 차지할 거야.’ 편안한 왕궁에서만 살아 온 라마 왕자에게 왕궁을 떠나 도를 닦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인간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마들이 곳곳에서 소동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악마들은 인간들을 서로 이간질해서 싸우게 만들고 나라와 나라끼리 비참한 전쟁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간간이 악명 높은 라바나 왕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소문도 들려왔습니다. 비슈바미트라는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라마 왕자여! 라바나라는 이름을 꼭 기억하거라. 라바나 왕은 악마의 심부름꾼이다. 너는 그 라바나 왕을 벌주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비슈바미트라는 대단한 도력을 갖춘 성자였습니다. 악마들을 만날 때마다 비슈바미트라는 뛰어난 도술로 악마들을 물리쳤습니다. 불길을 일으키는 악마를 만나면 커다란 물줄기를 뿜어 올려 불을 끄고, 지진을 일으키는 악마를 만나면 그 땅을 도로 메우는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비슈바미트라가 이 모든 것을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저 앉은 자세로 다 해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비슈바미트라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생각하면 그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라마 왕자는 스승의 놀라운 능력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스승님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아스트라만 배우면 너도 할 수 있단다.” ‘아스트라’란 주문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생각하며 특수한 주문을 입으로 외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라마 왕자는 놀란 얼굴로 물었습니다. “칼이나 창, 활을 쓰지 않고 오직 정신을 집중해서 아스트라만 외우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그러자 비슈바미트라는 손을 가슴에 올리며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원하지. 그러나 원하기만 할 뿐, 정작 그 꿈을 간절하게 생각하며 온 정신을 집중하지는 않는다.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바로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간절한 마음만큼 강한 것은 없다. 그러니 너도 네가 바라는 것을 온 정신을 집중해 생각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연습을 하거라. 그 다음 내가 가르쳐 준 아스트라를 외운다면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날부터 라마 왕자의 혹독한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라마 왕자는 스승을 따라 몇 달 동안 물만 먹으며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허약해져 환상과 환청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카우살리야 왕비가 나타나 애잔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라마야. 너를 보내고 나는 너무 슬픈 나머지 죽어 가고 있단다. 나를 보러 오지 않겠니? 돌아와 주지 않겠니?” 어머니의 슬픈 눈물을 본 라마 왕자는 이성을 잃고 그 자리를 뛰쳐나왔습니다. “어마마마,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외치며 달려가던 라마 왕자는 갑자기 커다란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비슈바미트라가 아스트라를 외어 라마 왕자를 붙잡은 것입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모든 것은 네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어머니가 보인 것은 네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그만큼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네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면 너는 절대 아스트라를 배울 수 없고, 아스트라를 배우지 못한다면 절대 라바나 왕을 이길 수 없다. 네가 라바나 왕을 이기지 못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영원히 전쟁과 미움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단 말이다.” 비슈바미트라의 서릿발 같은 꾸짖음에 라마 왕자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절대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날부터 라마 왕자는 한 점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수련에만 열중했습니다. 라마 왕자의 도력은 나날이 강해졌고, 이 사실은 금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인도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라바나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라마 왕자를 찾아 내서 죽여 버려야겠어. 지금 당장 악마들을 모두 보내서 라마 왕자를 해치워 버려.” 라바나 왕의 명령을 받은 악마들은 라마 왕자와 비슈바미트라가 수련하는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라마 왕자는 숲 가장 깊은 곳에서 신들의 아스트라를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늘이 까맣게 변하더니 악마들이 내려왔습니다. “라마야, 침착하거라! 정신을 집중하고 아스트라를 외우거라.” 라마 왕자는 침착하게 아스트라를 외웠습니다. 불의 신 아그니여! 악마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불을 내려 주소서. 바람의 신 바유여! 그 불길이 멀리 퍼져 나가도록 힘을 빌려 주소서. 천둥의 신 인드라여! 악마들을 공포에 떨게 해 주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아그니의 불화살이 떨어졌습니다. 바람의 신 바유는 폭풍을 일으켰고, 인드라는 번개와 천둥을 불러 왔습니다. 한편 숲 주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하늘을 까맣게 덮다시피 하고 날아오는 악마 무리를 보고 라마 왕자가 걱정되어 숲으로 몰려갔습니다. “아아, 우리를 위해 라바나 왕을 물리치겠다던 라마 왕자님이 돌아가시겠구나.” 관을 두 개 만들어서 숲으로 들어간 마을 사람들은 뜻밖의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난 불길 속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악마들의 모습을 보았으니까요. 불의 신 아그니가 내린 불길을 바람의 신 바유가 널리 퍼지게 하자 악마들은 뜨거운 불길 안에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어쩌다 불길 속에서 도망쳐 나온 악마들은 인드라 신이 천둥과 번개를 떨어뜨려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바위에 꼼짝 않고 앉아 아스트라를 외는 라마 왕자의 늠름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라마 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하늘이 보낸 우리의 왕이시다! 왕에게 축복을! 영웅에게 충성을!”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라마 왕자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인도 전체에 퍼졌습니다. “뭐라고? 코살라 왕국의 라마 왕자가 아스트라로 악마들을 물리쳤다고?” 소문을 전해 들은 미틸라 국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라마 왕자와 시타가 결혼한다면 코살라 왕국과 우리 미틸라 왕국이 함께 힘을 합칠 수 있겠지. 그러면 주변 강대국들에게서 우리 왕국을 지킬 수 있을 거야. 뿐만 아니라 신기한 능력을 지닌 라마 왕자가 내 사위가 되는 것 아닌가.’ 시타 공주는 미틸라 국왕이 무척 아끼는 딸이었습니다. 미틸라 국왕은 그날 곧바로 라마 왕자와 비슈바미트라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이렇게 저희를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위대한 분들을 손님으로 모실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제 딸 시타를 시켜 식사 시중을 들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방 한쪽의 커튼이 사르르 열리며 아름다운 아가씨가 걸어 들어왔습니다. 바로 미틸라 국왕이 사랑하는 딸 시타 공주였습니다. 검은 눈에 흑단 같은 긴 머리, 날씬한 허리에 춤추듯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 시타 공주를 본 라마 왕자는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시타 공주도 라마 왕자를 살펴보았습니다. 고행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한 얼굴에 반듯한 이마, 빛나는 두 눈이 시타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날 밤 궁전의 정원을 거닐던 비슈바미트라는 라마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라마야, 오늘로 너의 수련은 다 끝났다. 이제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가 왕이 되고, 힘을 모아 못된 라바나 왕을 물리치는 일만 남았다. 그러기 전에 너도 결혼을 해야 할 텐데, 시타 공주는 너에게 좋은 배필이 되리라 생각한다. 너도 시타 공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니? 그러니까 오늘밤 청혼하거라.” 라마 왕자는 용기를 내어 시타 공주가 있는 별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시타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시타 공주님! 저는 이제 수련을 다 끝냈습니다. 저와 결혼하여 코살라 왕국으로 함께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라마 왕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시타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라마 왕자가 내민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기꺼이 왕자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며칠 후 미틸라 왕국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미틸라 왕국 백성들은 꽃을 뿌리며 라마 왕자와 시타 공주의 결혼을 축복하였습니다. 결혼식을 마친 라마 왕자는 시타 공주를 데리고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사라타 왕과 카우살리야 왕비, 많은 신하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라마 왕자 부부를 맞이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상냥한 시타 공주를 본 왕과 왕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게다가 라마 왕자와 시타 공주가 결혼하였으니 코살라 왕국과 미틸라 왕국이 힘을 합쳐 주변 강대국들과 싸워 나가자는 미틸라 국왕의 편지를 읽은 다사라타 왕은 더욱더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그러나 라마 왕자의 귀국으로 왕궁에는 또 다른 갈등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라마 왕자가 떠난 후 다사라타 왕이 늙어 힘이 없어지자 신하들은 대부분 바라타 왕자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다사라타 왕이 죽으면 다음 왕위는 자연히 바라타 왕자에게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되기에는 카이케이 왕비의 힘이 컸습니다. 그런데 맏아들 라마 왕자가 돌아왔으니 카이케이 왕비와 바라타 왕자는 무척 불안했습니다. 이미 신하들은 라마 왕자 편과 바라타 왕자 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습니다. “라마 왕자는 맏아들이다. 당연히 다음 왕이 되어야지.” “천만에. 라마 왕자는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고 고행에 나섰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자리를 돌려 달라는 게 말이나 돼?” 자기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안 라마 왕자는 괴로웠습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떠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시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공주로 태어나 고생이라고는 해 보지 않은 시타가 과연 험난한 길을 함께 갈 수 있을까?’ 라마 왕자의 고민을 알아차린 시타 공주는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왕자님과 결혼할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디든 함께 가겠습니다.” 라마 왕자는 신하들과 다사라타 왕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나라의 평화, 백성들의 행복입니다. 제가 있으면 바라타가 불안해할 것이고, 바라타가 불안해하면 백성도 나라도 불안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떠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붙잡는 부모님과 신하들을 뿌리치고 라마 왕자는 시타 공주와 함께 왕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국경 근처에 있는 숲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조용히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바나 왕은 자기가 보낸 악마들이 모두 라마 왕자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괘씸한 라마! 절대로 살려 두지 않겠다.” 라바나 왕은 라마 왕자를 죽이려고 독수리를 타고 오두막으로 찾아갔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각, 라마 왕자는 수련을 하기 위해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고 시타 공주 혼자 오두막에 남아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시타 공주를 본 순간 라바나 왕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좋아. 라마의 아내를 빼앗아서 내 아내로 삼아야지.’ 라바나 왕은 반항하는 시타 공주를 억지로 독수리에 태우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총명한 시타 공주는 끌려가는 중에도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목걸이와 팔찌 등을 하나씩 땅에 떨어뜨린 것입니다. ‘아아, 왕자님이 이것들을 길잡이 삼아 나를 구해 주러 오시기를!’ 한편 산속에 있던 원숭이들은 하늘을 날아가는 라바나 왕의 독수리와 아름다운 시타 공주를 보았습니다. “아니 저런, 큰일이야! 라바나 왕이 또 아름다운 아가씨를 납치해 가는구나.” “그런데 그 아가씨가 무엇인가를 떨어뜨렸어.” 원숭이들은 떨어지는 장신구들을 하나씩 주워 들고 대장 원숭이 하누만에게 달려갔습니다. “대장님! 조금 전에 라바나 왕의 독수리가 날아갔는데, 독수리 등에서 이런 것들이 떨어졌습니다.” 하누만은 원숭이들 중에서 가장 영리한 원숭이였습니다. 하누만은 팔찌에 새겨진 ‘시타’와 ‘라마’라는 이름을 보고는 당장 라마 왕자를 찾아갔습니다. “당신의 아내는 라바나 왕에게 끌려간 게 틀림없습니다.” 라마 왕자는 아내의 팔찌를 바라보며 넋을 잃었습니다. 하누만은 라마 왕자를 격려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힘을 합쳐 시타 공주님을 구해 옵시다.” 라마 왕자는 시타 공주의 팔찌를 손에 쥐고 맹세했습니다. “반드시 라바나를 물리치고 아내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한편 랑카 왕국에서는 라바나 왕이 시타 공주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시타 공주! 부디 내 아내가 되어 주시오. 라마 왕자는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바보 같은 사람이오. 하지만 내 아내가 되어 준다면 이 세상은 당신의 것이 되오.” 그러나 시타 공주는 거절했습니다. “저는 라마 왕자님과 일생을 같이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당신과는 절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화가 치민 라바나 왕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좋아! 내 아내가 되든가 평생 이 탑 안에 갇혀 있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 라바나 왕이 나간 후 시타 공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마 왕자님, 어서 저를 구해 주세요.” 이때 왕궁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시타 공주는 발돋움을 하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성 밖에는 원숭이 떼가 몰려와 있었고, 하늘에서는 신들이 꽃비를 뿌려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꽃비를 맞으며 서 있는 용맹한 장수, 분명 라마 왕자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라바나 왕은 악마들을 시켜 라마 왕자와 싸우게 했습니다. 칼로 목을 베어도 새로 머리가 돋아나는 악마,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악마, 눈이 여러 개 있어 무엇이든 찾아 낼 수 있는 악마 등 많은 악마들이 라마 왕자에게 덤벼들었습니다. 라마 왕자는 비슈바미트라에게 배운 아스트라를 외우면서 악마들을 하나씩 처치했습니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군. 좋아! 내가 직접 나서겠다!” 드디어 라바나 왕이 전차를 타고 자신의 무기인 삼지창을 휘두르며 라마 왕자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자 번개의 신 인드라가 자신의 전차와 검을 라마 왕자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인드라 신의 전차를 탄 라마 왕자는 검을 꺼내 라바나 왕과 맞서 싸웠습니다. 악마들은 라바나 왕을 응원하고, 신들은 라마 왕자를 응원했습니다. “챙강 챙강! 철그럭 철그럭!” 라마 왕자의 검과 라바나 왕의 삼지창은 햇빛을 받아 눈부신 빛을 뿜었고, 부딪힐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라바나 왕은 정말 강했습니다. 비슈바미트라가 가르쳐 준 아스트라도 라바나 왕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은 모든 힘을 라마 왕자에게 모아 주었습니다. “라마 왕자여! 우리 모두의 이름을 부르는 아스트라를 외우시오!” “하지만 아직 그 아스트라는 연습해 본 적이 없어요.” “자신을 믿어요. 그것이 가장 큰 힘입니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라마 왕자의 입에서 아주 강한 아스트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러자 불의 신 아그니는 라마 왕자의 화살이 되고, 바람의 신 바유는 그 화살에 돋은 날개가 되어 라바나 왕을 향해 날아가더니 정확히 가슴에 명중하였습니다. 라바나 왕은 피를 토하며 전차에서 떨어졌고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세! 만세! 라마 왕자 만세!” 사람들도 원숭이들도 신들도 라마 왕자의 이름을 부르며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라마 왕자는 시타 공주를 구해 냈습니다. 이 소식은 코살라 왕국에도 전해졌습니다. 백성들은 만나기만 하면 라마 왕자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바라타 왕자는 다사라타 왕과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라마 형님은 저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게다가 맏아들이십니다. 마땅히 그분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카이케이 왕비는 울음을 터뜨리며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바라타 왕자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라바나 왕도 욕심 때문에 비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온 라마 왕자는 정식으로 왕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사라타 왕이 죽자 코살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라마 왕자는 나라를 평화롭게 잘 다스렸으며, 죽은 후에는 다시 나라야나 신으로 돌아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서사시. 라마야나는‘라마가 나아간 길’을 뜻하며, 흔히 ‘라마의 사랑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라마야나는 24,000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아주 긴 시입니다. 이와 같이 한 나라의 역사적인 일에 얽힌 신화나 전설 등을 긴 시로 읊은 것을‘서사시’라고 합니다. 라마야나는 마하바라타와 함께 세계에서 제일 긴 서사시로 꼽힙니다. 라마야나가 지금의 이야기로 모양을 갖춘 것은 2세기 말쯤입니다. 기원전 300년 이후에 살았던 ‘발미키’라는 시인이 라마야나를 지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발미키는 그 당시까지 시인들의 노래로 전해져 온 많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정리하였을 뿐입니다. 산스크리트 어로 쓰인 라마야나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문장의 으뜸으로 꼽힙니다. 때문에 인도 문학 중에는 라마야나의 문장을 따라 하거나 그 내용을 비슷하게 흉내내서 쓴 것이 많습니다. 또 라마야나는 인도 문화가 해외에 퍼지면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문화 예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의 삶과 함께하다. 라마야나는 인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라마야나를 외우는 것을 커다란 덕을 쌓는 길로 생각합니다. 이렇듯 라마야나는 인도에서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종교와도 같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의 라마야나에 대한 유별난 사랑은 삶 곳곳에도 묻어납니다. 인도 각 지방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한편, 인도 북부 지방 곳곳에서는 라마야나의 사건들이 ‘람릴라’라는 야외 연극으로 해마다 한 번씩 상연되고 있습니다. 또 남부 지방에서는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함께 유명한 인도 전통극인 ‘카타칼리’의 줄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라마야나는 17세기와 18세기에도 인도 화가들이 즐겨 다룬 그림의 주제였습니다. 이웃인 인도네시아의 많은 절에도 라마야나의 내용이 조각되거나 새겨져 있습니다. 라마야나가 보여 주는 풍부한 상상력과 황홀한 신들의 세계는, 인도는 물론 주변 나라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을 위한 보물 창고 역할을 했습니다.
페리움과 카츠바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멀고 먼 옛날 인도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키르티 왕국은 바로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작은 나라였지만 인도에서 키르티 왕국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페리움 공주 때문이었지요.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날씬한 몸매, 아름답고 커다란 두 눈, 웃으면 하얗게 드러나는 고른 이. 페리움 공주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뿐사뿐 걸으면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누구든 한번 페리움 공주를 보면 사랑하게 될 정도였지요. 키르티 왕국의 타고르 왕 부부는 페리움 공주를 무척 아꼈습니 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식이라고는 페리움 공주 하나뿐이었으니까요. 키르티 왕국은 작고 약했지만 딸을 몹시 사랑하는 타고르 왕 부부 덕분에 페리움 공주는 어느 나라 공주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나날이 아름다워지면서 그만큼 더 거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옷은 어제도 입은 거잖아? 한 번 입은 옷은 두 번 다시 입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아, 이 보석들은 이제 지겨워. 아바마마를 졸라서 새 보석을 사야지.” 이렇게 페리움 공주는 사치스럽고 어리석게 변해 갔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페리움 공주가 아름다운 것만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병든 사람, 다친 사람, 가난한 사람, 낡은 옷을 입은 사람 등을 보면 불처럼 화를 냈습니다. 페리움 공주의 이러한 마음가짐과 행동 때문에 타고르 왕 부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공주야,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도 원래부터 그런 모습이 아니었단다. 모두 사고를 당하거나 불행을 만나서 그렇게 된 거야. 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공주인 네가 할 일이란다.” “싫어요! 아름답지 않은 것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요!” 페리움 공주는 화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타고르 왕 부부는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딸을 잘못 키운 것 같아요.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사랑받을 수 없어요.” 왕비의 걱정에 타고르 왕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나랏일로도 머리가 아픈데. 우리 왕국을 넘보는 다른 나라들때문에 걱정이오.” 타고르 왕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왕비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키르티 왕국은 힘 없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타고르 왕은 언제나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것입니다. 키르티 왕국은 여러 강한 나라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백성이 적으니 병사도 적었고, 땅도 좁으니 농산물도 이웃 나라에서 사다 먹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키르티 왕국 사람들은 장사 솜씨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험한 길, 먼 길도 무릅쓰고 무역을 해서 돈을 벌어 들였지요. 그리고 페리움 공주의 아름다움이 알려지면서 키르티 왕국의 이름도 함께 널리 알려져 장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의 강한 나라들은 키르티 왕국을 강제로 자기네 영토로 만들고 싶어 했고, 페리움 공주를 자기네 왕국의 왕비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키르티 왕국의 왕과 왕비에게는 페리움 공주가 하나뿐인 자식이기 때문에, 페리움 공주가 어떤 나라로 시집을 가게 되면 결국 키르티 왕국은 그 나라 차지가 될 형편이었습니다. 페리움 공주가 누구와 결혼을 하는가가 키르티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에 타고르 왕은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과 왕비가 걱정을 하든 말든 페리움 공주는 자기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습니다. 사실 페리움 공주의 친구들은 모두 이웃 나라에서 보낸 첩자들이었습니다. 첩자들은 일부러 페리움 공주를 사치스럽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키르티 왕국 백성들이 타고르 왕과 페리움 공주를 미워해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페리움 공주는 친구들이 시키는대로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거만한 얼굴로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키르티 왕국 백성들의 마음은 점점 페리움 공주에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첩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궁전 한구석에 모여 쑥덕거리며 음모를 꾸몄습니다. “흥! 어리석은 페리움 공주는 우리 말을 정말 잘 듣더군.” “그러게 말이야. 신하들도 페리움 공주를 저렇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불평하고 있더라고.” “그뿐인 줄 알아? 페리움 공주가 너무 사치스러워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백성들의 불만이 점점 쌓여 가고 있어.”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반란이 일어날 거야.” “그럼 건방진 페리움 공주는 하루아침에 공주 자리에서 쫓겨나겠지. 아이, 고소해.” “맞아. 사실 임무니까 하고는 있지만 페리움 공주에게 아부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 얼마나 아니꼬운지.” 타고르 왕의 걱정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구려. 정말 큰일이오.” 때마침 이웃 나라가 키르티 왕국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건방진 공주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젊은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 했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충성스런 신하가 타고르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전하, 우리를 도와줄 이웃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주나 왕국이지요. 주나 왕국에는 ‘하미르’라는 왕자가 있습니다. 공주님과 나이도 비슷한데 매우 지혜롭다고 합니다.” 신하의 말을 들은 타고르 왕은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주나 왕국의 하미르 왕자가 있었지.” 주나 왕국은 키르티 왕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나라 크기는 키르티 왕국과 비슷하지만 백성이 훨씬 많았습니다. 키르티 왕국에는 산이 많고 평지가 적었지만, 주나 왕국은 평야가 아주 넓어 곡식도 풍부했기 때문이지요. 주나 왕국의 하미르 왕자와 키르티 왕국의 페리움 공주가 결혼한다면 두 나라는 힘을 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키르티 왕국이 다른 나라에게 침략을 당하면 주나 왕국이 도와 주고, 주나 왕국이 어려움을 겪으면 키르티 왕국이 도울 수 있겠지요. 타고르 왕은 주나 왕국에 사신을 보내 뜻을 전했습니다. 페리움 공주와 하미르 왕자를 결혼시키자는 타고르 왕의 전갈을 받은 주나 왕국의 왕은 곧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아름다운 페리움 공주를 며느리로 맞을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이겠습니다. 페리움 공주와 하미르 왕자의 결혼으로 키르티왕국과 주나왕국이 함께 도와 가며 살아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답장을 읽은 타고르 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페리움 공주와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장 하미르 왕자와 페리움 공주의 결혼식을 준비하라.”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첩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키르티 왕국이 주나 왕국과 동맹을 맺으면 우리 왕국이 쉽게 공격할 수 없게 될 텐데, 큰일이야.” “그러면 우리 계획은 물거품이 되잖아? 어떻게든 이 결혼을 막아야 해.” “그래야지. 하지만 어떻게 하지?” 갑자기 가장 나이 많은 첩자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겉모습이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잖아. 그 허영심을 이용해 보자!” 나이 많은 첩자가 무엇이라고 소곤거리자 다른 첩자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럴 듯한데. 당장 공주에게 가자.” 첩자들은 페리움 공주에게 몰려갔습니다. “공주 마마, 결혼하실 하미르 왕자의 별명을 아세요? 카츠바래요.” “뭐? 카츠바? 거북이란 말이야?” “네. 하미르 왕자는 거북이처럼 생겼대요. 목은 짧고 키도 작고,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주름이 가득하대요.” “뭐라고?” 페리움 공주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첩자들이 나간 후 페리움 공주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공주의 방에는 결혼식에 쓸 여러 가지 보물과 옷감이 널려 있었습니다. 주나 왕국에서 보낸 반지와 귀걸이 등 보석들도 쌓여 있었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대와 설렘으로 옷감과 보석을 매만지던 페리움 공주는 큰 소리로 울어 대며 타고르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절대로 괴물같이 생긴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페리움 공주는 발까지 구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타고르 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페리움 공주를 쳐다봤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울먹거리며 하미르 왕자의 별명과 생김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타고르 왕과 왕비는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미르 왕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총명하다는 것만 알 뿐이었습니다. 만약 페리움 공주의 말대로 ‘거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면 분명히 못생겼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취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타고르 왕은 페리움 공주를 달랬습니다. “너는 공주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도 있단다. 지금 우리 왕국은 주나 왕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주나 왕국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네가 하미르 왕자와 결혼해야 한단다.” 타고르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리움 공주는 더욱더 목 놓아 울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거북이와 살 수는 없어요. 제가 공주라서 못생긴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면 오늘부터 공주 안 할래요. 못생긴 사람은 정말 싫단 말이에요.” 페리움 공주가 울고불고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왕비는 부드럽게 타일렀습니다. “공주야, 이미 약속을 했단다. 약속을 지켜야지.” “그까짓 못생긴 거북이와 한 약속 따위 어기면 어때요?” 그러자 타고르 왕이 무섭게 화를 냈습니다. “그까짓 약속이라니! 절대 안 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리고 너는 공주다. 우리 왕국을 위하는 일은 네 의무다.” 처음으로 타고르 왕이 화내는 모습을 본 페리움 공주는 움찔했습니다. “아무리 네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 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너를 응석받이로 키운 것이 후회된다. 이제부터는 엄하게 대할 테니 그리 알아라.” 그러고 나서 타고르 왕은 경비병을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페리움 공주를 탑에 가두어라. 그리고 오늘부터 공주에게 절대로 음식을 주지 마라.” 페리움 공주는 물론 왕비와 신하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공주를 아끼던 타고르 왕이 이렇게 변하다니요. 그러나 그만큼 결혼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좋아요. 가두시려면 가두세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페리움 공주는 당돌하게 말하고는 스스로 걸어서 탑으로 갔습니다. 물론 페리움 공주는 탑에 갇히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믿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아바마마가 나를 굶기실 리가 없지. 조금만 지나면 허허 웃으시면서 나오라고 하실거야. 그러면 그 때 다시 떼를 써야지.’ 페리움 공주는 이렇게 생각하고 며칠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타고르왕은 페리움 공주를 꺼내 주기는 커녕 정말로 음식도 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나날이 야위어 갔습니다. 먹지 못해 기운이 없으니 몸에 걸치고 있는 보석들도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보석을 다 떼어내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아! 이 보석이 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곰팡이가 핀 빵이라도 좋아, 아니 누가 먹다 버린 빵이라도 좋으니 한 조각만 먹었으면.” 창밖을 내다보니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큰길을 걸어가는 늙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도 부러웠습니다. ‘저런 얼굴로 살아도 좋아. 나가서 자유롭게 걸어 다녔으면 좋겠어.’ 어디선가 값싼 채소만 넣고 끓이는 커리 냄새가 났습니다. 그전 같으면 냄새가 나쁘다고 인상을 찌푸렸겠지만 지금은 향기롭게 느껴졌습니다. 페리움 공주가 창가에 힘없이 서 있는데 경비병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왔습니다. 과일 향기를 맡은 페리움 공주는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습니다. “주나 왕국의 하미르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전하께서 하미르 왕자님의 선물은 특별히 전해 드려도 된다고 하셔서 갖고 왔습니다.” 경비병에게서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든 페리움 공주는 과일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습니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과일 바구니를 제법 두툼한 보자기로 덮어 놓았는데도 향기가 강하게 날 정도로 향긋한 과일이었습니다. “흥, 못생겼어도 눈치는 있군. 좋아, 먹어 주지. 그렇지만 내가 이 과일을 먹는다고 자기같이 못생긴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 착각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페리움 공주는 이렇게 종알거리면서 과일 바구니를 덮은 보자기를 들췄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페리움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은 불쾌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어머, 이게 뭐야? 이렇게 생긴 것을 어떻게 먹으라는 거지?” 바구니 안에는 무척 흉측하게 생긴 과일이 들어 있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과일은 두리안입니다. 아주 먼 나라에서 나는 귀한 과일이라면서 하미르 왕자님께서 꼭 페리움 공주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페리움 공주는 있는 힘껏 과일 바구니를 집어 던졌습니다. 두리안은 벽에 부딪혀 부서지거나 뭉그러졌습니다. “하미르 왕자가 나를 놀렸구나. 내가 갇혀서 벌 받고 있다니까 못생긴 왕자가 보낸 못생긴 과일을 먹고 항복할 줄 안 모양이지? 천만에! 별명이 거북이라더니 자기처럼 생긴 것만 보내는군!” 방 안 여기저기에 두리안을 집어 던지고 나서 페리움 공주는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울 기운도 없었습니다. 잠시 후 페리움 공주는 망설이면서 천천히 두리안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조심스럽게 한 입 먹어 보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과일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 겉만 예쁘다고 좋은 게 아니야. 저 보석을 봐. 보석은 그냥 돌멩이일 뿐이야. 향기도 없고 내게 힘을 주지도 않아. 하지만 이 못생긴 과일은 향기도 좋고 내게 힘을 주지. 내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하미르 왕자님은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려고 못생긴 두리안을 보내신 거야.” 페리움 공주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페리움 공주가 뉘우쳤다는 말을 들은 타고르 왕은 몹시 기뻤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감추고 페리움 공주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럼, 내일 당장 결혼식을 올려도 되겠느냐?” “예.” 이렇게 대답하는 페리움 공주의 얼굴은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습니다. 페리움 공주의 상한 얼굴을 보자 타고르 왕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타고르 왕은 마음을 가다듬고 일부러 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느냐?” 타고르 왕의 물음에 페리움 공주는 마지막 남은 두리안 하나를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두리안은 겉으로 봐서는 몹시 못생겼지만 그 맛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았어요.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을 두리안을 먹다가 깨달았어요. 그리고 한 왕국의 공주로서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타고르 왕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페리움 공주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네가 잘못을 뉘우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그날 밤 페리움 공주는 곱게 꾸미고 신랑이 될 하미르 왕자를 만났습니다. 하미르 왕자는 얼굴을 가린 채 물었습니다. “내가 거북이처럼 생겼는데도 괜찮으십니까?” “예. 겉으로 보이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요.” 그러자 하미르 왕자가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그 순간 페리움 공주는 깜짝 놀랐습니 다. 우뚝 선 콧날, 서글서글한 눈, 멋지게 웃는 입술. 하미르 왕자는 세상에 둘도 없이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페리움 공주는 말을 더듬었습니다. “별명이 거북이라고 하던데.” 타고르 왕이 대신 설명을 했습니다. “그건 하미르 왕자가 거북이처럼 끈기 있고 건강해서 붙은 별명이란다.” 페리움 공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아닙니다. 이제 공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한 여인이 되셨습니다.” 다음 날 키르티 왕국에서는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키르티 왕국과 주나 왕국은 서로 힘을 합쳐 서로를 지켜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공주님 만세!” “왕자님 만세!” 키르티 왕국과 주나 왕국의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웃 나라들은 감히 키르티 왕국으로 쳐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고, 첩자들은 모두 자기 나라로 도망쳤습니다. 힌두교사상이 깔린 민간 설화. 민간 설화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페리움과 카츠바는 인도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민간 설화입니다. 그래서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요. 우리 옛날이야기처럼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나라의 민간 설화가 그렇듯이 인도 민간 설화도 인도 문학의 원천이자 뿌리입니다. 특히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인도 민간 설화에는 힌두교의 사상과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힌두교는 불교처럼 윤회를 믿습니다. 인간이 현재의 삶을 살다가 죽은 후 다른 생에 태어나 다시 산다는 믿음이‘윤회 사상’이지요. 윤회 사상은 인도 문학의 결말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페리움과 카츠바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외면의 아름다움만 좇던 페리움 공주가 고통을 받으며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다음 생을 준비하며 현재의 고통과 슬픔을 기꺼이 참아 내는 인도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에도 몸보다 영혼을 중요시하는 인도 사람들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이야기. 인도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라는 신분 계급 제도를 유지하고 있습 니다. 즉 브라만 승려, 크샤트리아 왕이나 귀족, 바이샤 상인, 수드라 일반 백성 및 천민 으로 구분되어 있지요. 이들 각 계층은 저마다의 삶에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때문에 문학도 계층의 특색에 맞게 매우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답니다. 페리움과 카츠바는 왕가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계층으로 보면 크샤트리아의 이야기로, 풍요롭고 화려한 시선이 담겨 있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인도 각 계층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유는 불교라는 공통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많은 인도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이야기로, 인도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한편 제목의‘카츠바’는 거북이를 뜻합니다. 이처럼 인도의 민간 설화에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다양한 동물들이 저마다의 사연들을 들려주지요.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인도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뒤바뀐 심장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아주 먼 옛날, 뻐꾸기 한 쌍이 숲속의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들 사이에서 예쁜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빠 뻐꾸기는 날마다 먹이를 구해 새끼들에게 물어다 주었습니다. 어느 날 먹이를 찾아 숲속을 날아다니던 아빠 뻐꾸기는 연못에 있는 벌레를 잡기 위해 연꽃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햇볕이 뜨거워졌고 연꽃은 꽃잎을 오므려 닫았습니다. 연꽃에 갇힌 아빠 뻐꾸기는 다시 꽃잎이 열릴 때까지 애를 태우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후 해가 서산 너머로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연꽃은 이슬을 받기 위해 다시 꽃잎을 펼쳤습니다. 꽃봉오리가 열리자, 아빠 뻐꾸기는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힘차게 날갯짓하여 둥지로 돌아오던 아빠 뻐꾸기는 깜짝 놀랐습니다. 푸른 나무로 가득하던 숲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죠. 아빠 뻐꾸기는 걱정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아내와 새끼 뻐꾸기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엄마 뻐꾸기가 날아오며 말했습니다. “숲에 불이 났는데 당신은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이렇게 늦게 돌아오다니. 아이들은 불쌍하게도 그만.” 아빠 뻐꾸기는 늦게 돌아온 사정을 얘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 뻐꾸기는 새끼들을 잃은 슬픔으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여자로 태어나서는 어떤 남자와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엄마 뻐꾸기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고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아빠 뻐꾸기는 아내와 어린 새끼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것이 너무도 미안하여 아내를 따라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며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도 아내와 부부가 되게 해 주소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는 말하지 않아도 저와는 말하게 해 주소서.” 아빠 뻐꾸기는 다록나건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왕자는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재치가 있어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왕자에게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시종이 한 명 있었습니다. 비록 신분의 차이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지요. 열다섯 살이 된 왕자는 나라의 법에 따라 깊은 산에 사는 뛰어난 도사에게 무예와 도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왕자를 돌보기 위해 함께 간 시종도 같이 무예와 도술을 익혔습니다. 두 사람이 무예와 도술을 익히기 시작한 지 오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여러 도술을 익히고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사는 두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기 심장을 꺼내 다른 곳에 둘 수 있는 도술이었습니다. 심장을 꺼내 죽은 사람이나 동물에 넣어 되살아나게 하고, 물건에 넣어 마치 사람처럼 말할 수 있게 하는 도술이었습니다. 다만 심장을 꺼낸 본래의 몸은 잘 보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되살아날 수 없는 위험한 도술이기도 했습니다. 삼 년을 연마하고서야 두 사람은 이 도술을 제대로 익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모든 도술을 다 배웠다. 이제 왕국으로 돌아가거라.” 왕자와 시종은 도사에게 큰절하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한편 파란시 왕국의 왕과 왕비는 공주 때문에 커다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무척 아름답고 영리했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와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아버지인 왕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중을 드는 사람은 물론 공주가 사는 궁을 지키는 병사까지도 모두 여자였습니다. “남자와는 말을 한마디도 나누지 않으니, 저러다가 결혼도 하지 못하면 어찌하오?” 왕이 걱정하자 왕비가 말했습니다. “여러 나라 왕자를 초대하여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 결혼을 시키도록 하지요.” “그것참 좋은 생각이오. 어서 여러 나라에 알립시다.” 아름다운 공주와 말을 한마디라도 나누면 결혼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러 나라에서 왕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공주는 남자 앞에서는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파란시 왕국의 왕과 왕비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습니다. 때마침 궁으로 돌아온 다록나건 왕국의 왕자도 공주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남자와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아름다운 공주라고? 무척 관심이 가는걸. 어디 내가 한번 가 봐야지. 왕자는 시종과 함께 파란시 왕국으로 가서 왕을 만났습니다. “그대가 도록 나건 왕국의 왕자인가? 공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네.” “기다려 주십시오. 틀림없이 공주님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왕자는 도술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시종은 방에서 자는 것처럼 누워 있고, 왕자는 시종의 심장을 공주 방문에 넣고 문과 이야기를 나누는 척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문 선생. 아름다운 공주님의 방문인 당신은 행복하겠죠?”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공주님은 남자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니까요.” 실제로는 문이 아니라 시종의 심장이 대답한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공주는 무척 신기하게 여겨 왕자와 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지 못하겠군요.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좋고말고요. 꼭 듣고 싶어요.” 왕자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의 친구가 있었어요. 한 사람은 먼 곳을 볼 수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활을 잘 쏘았고, 또 다른 사람은 수영을 잘했고, 마지막 사람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힘이 있었지요. “시작부터 흥미롭군요.” 어느 날 먼 곳을 보는 친구가 말했어요. ‘저기 하늘에 독수리가 예쁜 여인을 물고 날아가네.’ 그러자 활을 잘 쏘는 친구가 활을 꺼내 독수리를 쏘아 맞혔지요. 화살에 맞은 독수리는 부리에 물고 있던 여인을 강에 떨어뜨렸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친구가 재빨리 강으로 뛰어들어 여인을 구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죠. 그래서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친구가 여인을 다시 살려냈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네 사람은 모두 여인이 마음에 들었어요. 서로 결혼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네 명 모두와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과연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요? 왕자의 물음에 문이 답했습니다. 독수리가 여인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본 친구 아닐까요?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 여인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때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공주가 끼어들어 한마디 했습니다. 아니에요. 마땅히 다시 살려낸 사람과 결혼해야죠. 죽은 사람과는 결혼할 수가 없잖아요. 드디어 공주가 남자에게 말을 건넨 것입니다. 몰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과 왕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왕자는 이번에는 시종의 심장을 등잔에 넣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등잔 선생! 밤을 밝히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인걸요.”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지요?”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등잔이 답을 대지 못하자 답답했는지 공주가 또 끼어들었습니다. “그건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기어다니니 네 발, 젊어서는 걸어 다니니 두 발, 나이가 들면 지팡이를 짚으니 세 발이 되는 셈이죠.” 공주가 또 왕자에게 말하자, 왕과 왕비는 공주를 왕자와 결혼시키기로 했습니다. 공주도 자신이 말하도록 한 왕자의 총명함에 이끌려 승낙했지요. 화려한 결혼식이 치러졌고, 다록나건 왕국과 파란시 왕국은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왕자와 공주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왕자는 늘 함께 다니는 시종과 숲으로 사냥하러 가서 사슴을 한 마리 잡았습니다. ‘내가 만약 사슴이라면 숲속을 자유롭게 뛰어다닐 텐데.’ 이런 생각을 하던 왕자는 시종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맞아! 내 심장을 꺼내 사슴에게 넣으면 나는 사슴처럼 뛰어다닐 수 있을 거야.” “좋은 생각이군요, 왕자님.” “내가 잠시 사슴이 되어 숲을 뛰어다니다 올 테니 그때까지 내 몸을 잘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까 말이야.” “염려 마십시오 왕자님.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왕자는 도술을 부려 자기 심장을 꺼내 사슴에게 넣었습니다. 그러자 숨이 끊어졌던 사슴이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왕자는 사슴이 되어 있어. 이건 좋은 기회야!” 오랫동안 왕자를 모시던 시종은 겉으로는 친형제처럼 왕자를 보살피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시샘하고 있었습니다. 무예나 도술 실력도 비슷한데 한 사람은 왕자이고 자신은 시종인 것이 늘 불만스러웠기 때문이지요. “좋아, 내 심장을 꺼내 왕자의 몸에 넣고 내가 왕자가 되는 거야.” 시종은 자기의 심장을 꺼내 왕자의 몸에 넣었습니다. 자는 듯 쓰러져 있던 왕자가 깨어났습니다. 실제로는 몸만 왕자이고, 마음은 시종이었지요. 왕자로 변한 시종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기 몸을 들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서 아무도 찾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제 내가 왕자가 되는 거야. 진짜 왕자가 돌아오더라도 자기 몸이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 왕자로 변한 시종은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종을 데리고 나갔던 왕자가 혼자 돌아오자 이상히 여긴 공주가 물었습니다. “어째서 혼자 돌아오시나요? 시종을 데리고 가시지 않았나요?” “그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하기에 내가 먼저 죽이고 산에 묻고 왔소.” 가짜 왕자가 이렇게 말했지만, 공주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시종을 형제처럼 아끼던 왕자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공주가 자세히 살펴보니 왕자의 말이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모습은 틀림없는 왕자였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 씀씀이가 예전처럼 곱지 않았습니다. 그날부터 공주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가짜 왕자를 멀리했습니다. 사슴이 되어 숲속을 뛰어다니다가 돌아온 왕자는, 시종은 물론 자기 몸도 보이지 않자, 모든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그토록 아껴 주었거늘 욕심을 부려 나를 배반하다니.’ 주위를 둘러보던 왕자는 숨이 끊어진 채 땅에 떨어져 있는 뻐꾸기를 보았습니다. 왕자는 도술을 부려 심장을 꺼내 뻐꾸기에게 넣고 훨훨 날아 아무도 모르게 공주에게로 갔습니다. “여보, 내가 왔소.” 그리운 남편의 목소리에 공주는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창으로 뻐꾸기 한 마리가 날아와 공주의 손 위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도술을 부려 뻐꾸기 몸속에 들어와 있소.” “정말이에요?” 공주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겪은 이야기를 들은 공주는 시종에게 빼앗긴 왕자의 몸을 되찾기 위해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이튿날 공주는 가짜 왕자를 찾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당신은 뛰어난 스승께 도술을 배워 심장을 마음대로 꺼낼 수도 있다면서요?” 가짜 왕자는 공주에게 잘 보일 기회가 왔다고 여겨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물론이오. 당장이라도 보여 줄 수 있소.” 그러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당신의 도술을 보여 주세요. 그러면 더욱 당신을 믿고 따르게 될 것 아니에요? “좋소, 그렇게 하리다.” 가짜 왕자는 공주가 자신을 속이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승낙했습니다. 가짜 왕자는 방금 죽은 염소에게 자기 심장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염소가 벌떡 일어나 뛰어다니며 말했습니다. “어떻소, 내 도술이.” 그때 숨어 있던 왕자는 재빨리 심장을 꺼내 자기 몸에 넣었습니다. “저 염소를 잡아 죽이도록 하라.” 왕자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시종이 변한 염소를 잡아 칼로 찔렀습니다. 칼에 찔린 시종은 꼼짝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공주의 재치로 자기 몸을 되찾은 왕자는 다시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훌륭한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불교의 교훈이 담긴 이야기. 뒤바뀐 심장은 타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간 설화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다시 태어나는 것, 나쁜 짓을 하면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 등 불교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타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업보나 윤회 등을 믿습니다. 타이 사람 대부분이 불교 신자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요. 뒤바뀐 심장은 자연을 배경으로 그 속에 사는 동물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오래전에는‘샴’이라 불렸던 타이는 천연자원이 많아서 사람들이 아주 풍족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타이 사람은 자연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타이 사람은 코끼리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코끼리를 상서롭게 여겨 국기에도 사용한 적이 있지요. 한편 뒤바뀐 심장의 이야기 무대는 왕가입니다. 지금도 타이의 공식 나라 이름은 ‘타이왕국’입니다. 예로부터 타이 사람에게 왕가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민간설화 등에는 왕가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여러 문화가 만나 만들어진 다양한 이야기들. 타이는 예로부터 인도나 중국 등 큰 나라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몽골이나 크메르제국의 침략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타이에는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입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 대부분은 신에 관한 이야기나 타이의 역사나 불교와 관계된 이야기들이고, 자연환경과 타이 사람들의 삶, 민간 신앙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있답니다. 지역에 따라 이야기의 종류도 차이가 있습니다. 타이의 북부나 동북부 지방에는 상아사 할아버지와 상아시 할머니, 거인이 나오는 세상이 만들어질 때의 이야기, 인간이 생겨난 이야기 등이 많이 있습니다. 중부 지방에는 브라마, 비슈누 등 힌두교 신들에 관한 신화가 많습니다. 그리고 타이 사람의 용감성과 모험 정신, 민족의 우월성과 현명함 등을 담고 있는 민간 설화들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타이의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데, 프라 루엉이나 프라야 콩 프라야 판 등이 대표적인 타이 민족의 영웅 이야기입니다.
마하티리 왕의 시련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의 마하티리라는 지혜로운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하티리 왕은 하늘의 별을 보고 앞날을 짐작하며 어진 정치를 펼쳤고, 신하와 백성은 모두 마하티리 왕을 존경하며 진정으로 따랐습니다. 그날도 마하티리 왕은 밤하늘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밝게 빛나던 왕의 별이 점점 흐려지더니 빛을 잃는 게 아니겠습니까? “앗! 왕의 별, 내 별이 빛을 잃다니. 큰일이 일어나겠구나."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마하티리 왕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어젯밤 하늘을 살펴보니 왕의 별이 빛을 잃었소. 내게 앞으로 한 해 동안 어려움이 닥친다는 뜻이오. 자칫하면 충성스러운 그대들과 왕국에까지 화가 미칠 수 있으니 그동안 궁을 떠나 있으려 하오.” 마하티리 왕의 말에 놀란 신하들이 말렸습니다. “안 됩니다, 전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궁에 계셔야 합니다.” “아니오.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소. 내가 없는 동안 그대들이 변함없이 나라를 잘 다스려 주기 바라오.” 눈물을 흘리는 신하들과 작별을 한 마하티리 왕은 살며시 궁을 빠져나왔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봐 낡은 옷을 걸치고 말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궁 밖으로 나와 길을 걷던 마하티리 왕은 점점 다리가 아프고 배도 고파졌습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아픈 다리를 쉬며 주위를 살펴보니 작은 오이밭이 눈에 띄었습니다. 왕은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미안하지만 오이 하나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이 마르고 배도 고프거든요.” “여기 있소, 젊은이! 어서 드시오.” 노인은 마하티리 왕을 알아보지 못한 채 오이 몇 개를 따 주었습니다. 노인이 준 오이로 배를 채우고 기운을 차린 마하티리 왕은 남은 오이 하나를 가방에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저물 즈음 마하티리 왕은 친구인 수타라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성문을 막 들어서는 마하티리 왕에게 한 사내가 다가와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습니다. “이 도둑놈! 드디어 잡았다.” “무슨 소리요, 내가 도둑이라니?” 마하티리 왕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따졌습니다. 도둑이 아니라고? 네가 내 염소를 훔쳐 갔잖아." 그럼, 그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지? “내 가방 안에는 농부에게서 얻은 오이뿐이오.” 마하티리 왕은 자신 있게 말하며 가방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가방 안에는 오이가 아니라 양의 목이 들어 있었습니다. “흥! 이래도 아니라고 잡아뗄 테냐?” 마하티리 왕은 양을 훔치지 않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사내는 마하티리 왕을 끌고 수타라 왕에게로 갔습니다.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린 마하티리 왕은 수타라 왕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수타라 왕은 마하티리 왕을 알아보지 못한 척하면서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도둑질한 죄는 채찍으로 백 대를 맞아야 한다." "저 사내를 때린 다음 성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마하티리 왕은 채찍으로 백 대를 맞고 수타라 왕의 나라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채찍으로 맞은 상처보다도 친구가 자신을 모르는 척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성 밖으로 쫓겨난 마하티리 왕은 몸도 마음도 지쳐 그냥 들판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자다가 목이 말라 깨어난 마하티리 왕은 옆에 있던 깨진 항아리를 들고 냇가로 가서 물을 펐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물속을 헤엄치던 뱀 한 마리가 항아리의 깨진 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마하티리 왕은 항아리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습니다. 너무도 목이 말라 정신없이 마시는 바람에 항아리 안에 있던 뱀이 물과 함께 마하티리 왕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마하티리 왕은 뱃속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채찍으로 맞고 마음에 충격을 받아서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마하티리 왕은 아픈 마음과 지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며칠을 걸어 여동생이 왕비로 있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왕비인 여동생은 신을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거지나 가난한 사람을 열심히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오후가 되면 먹을 것을 들고 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많은 사람이 왕비가 음식을 나눠 주는 장소로 몰려들었습니다. 마하티리 왕도 그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먼 길을 걸어온 마하티리 왕은 누가 보더라도 거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왕비께서 오셨다!” “어제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주신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소리쳤습니다. 왕비는 따뜻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었습니다. 왕비가 앞으로 다가오자, 마하티르 왕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동생아!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네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너는 신의 축복을 받을 거야.” 이 말을 들은 왕비는 웬 거지가 무례하게 말을 거는가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왕비는 그 거지가 오빠인 마하티리 왕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 앞에서 낡고 초라한 옷을 입은 거지 같은 사내를 오빠라고 부르기는 싫었습니다. “나보고 동생이라고? 무례하구나. 거지 주제의 왕비인 나를 동생이라고 하다니! 우리 오빠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지 너 같은 거지가 아니다. 조용히 주는 음식이나 받아먹도록 해라.” 왕비는 마하티리 왕이 들고 있는 그릇에 음식을 부어 주고는 휙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아끼던 여동생이 그토록 차갑게 대하자, 마하티르 왕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바닥에 쏟아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눠 주는 음식은 따뜻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차갑기만 하구려. 이런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날까 무섭소.” 그곳을 떠나는 마하티리 왕의 얼굴에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왕비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는 멀어져 가는 마하티리 왕을 보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하지만 마하티리 왕을 붙잡지는 않았습니다. 왕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할 뿐이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마하티리 왕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밥을 먹으면 배는 부풀어 오르는데 배고픔은 가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 속에 있는 뱀이 마하티리 왕이 먹는 음식을 모두 받아먹기 때문인데, 마하티리 왕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떠돌다가 이름 모를 마을에 도착한 마하티리 왕은 피곤함에 지친 모습으로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소녀가 마하티리 왕 앞을 지나갔습니다. “불쌍한 거지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시오. 너무 배가 고파 걸을 힘도 없군요.” 소녀는 마하티리 왕을 보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정말 힘들어 보이는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음식을 가져다드리죠.” 소녀는 곧 푸짐한 음식을 가져왔고 마하티리 왕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습니다. 마하티리 왕은 이미 열 사람 몫을 먹었지만 계속 배가 고팠습니다. “참으로 많이 먹는군요.” 소녀가 놀란 듯 말했습니다. “이상하게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답니다. 가끔 배가 아프기도 하고요.” 소녀는 동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마하티리 왕을 위로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져서 그렇겠지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며 몸을 회복하도록 하세요. 제가 음식을 가져다드릴 테니까요.” 다음 날부터 소녀는 마하티리 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상냥하게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딸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거지에게 음식을 갖다주는 것은 물론 아주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있소." "아마도 그 거지를 사랑하는 모양이오. 동네 창피하게 출신도 모르는 거지를 사랑하다니." 저녁이 되어 소녀가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불처럼 화를 내며 호통쳤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소녀는 마하티리 왕에게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쁜 소문만 믿고 저를 내쫓으셨어요.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니 항상 옆에서 당신을 보살펴 드릴 수 있게 됐군요.” 마하티리 왕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소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구걸하여 배를 채우고, 밤이면 아무 곳에나 지친 몸을 누이고 쉬었으며, 날이 밝으면 일어나 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 깊이 잠든 마하티리 왕 곁에 앉아 있던 소녀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마하티리 왕 옆을 지나가자 잠든 왕의 입에서 커다란 뱀이 나왔습니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마하티리 왕의 뱃속에 들어가 음식을 다 받아먹으며 그토록 고통을 주고도 모자라 이제는 나까지 잡아먹으려 하다니. 그렇지만 이제는 너도 끝났어. 왕의 별이 잃었던 빛을 되찾았으니 이제 곧 마하티리 왕은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말이 많다.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면 더 이상 말을 못 하겠지.” 뱀은 개구리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녀는 근처에 있던 커다란 돌을 주워 뱀에게 던졌습니다. 뱀은 돌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전하! 당신이 위대한 마하티리 왕인 줄도 모르고 제가 여태까지 무례하게 군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잠에서 깨어난 마하티리 왕에게 소녀가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아니오. 그대는 나를 정말로 정성스럽게 보살펴 주었소." "절대 무례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왕인 줄 알았소?” 소녀는 마하티리 왕이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마하티리 왕이 땅바닥을 보니 커다란 뱀이 죽어 있었고 아팠던 배도 거짓말처럼 나아 있었습니다. 소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마하티리 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과연 소녀가 개구리에게서 들은 것처럼 왕의 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저 별을 보시오. 이제 빛을 되찾았소. 날이 밝으면 나는 궁으로 돌아갈 것이오. 당신은 나와 결혼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왕비가 되어 주시오.” 마하티리 왕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살짝 붉혔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멀리서 황금 가마를 메고 오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름 아닌 마하티리 왕의 신하들로, 약속한 한 해가 지나자, 마하티르 왕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전하! 비록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들판에 서 계시지만 얼굴은 더욱 밝아지신 것 같습니다.” 정말로 마하티리 왕의 얼굴은 궁에 있을 때보다 더욱 밝았습니다. 고생은 했지만, 많은 것을 깨달았고 게다가 어진 왕비까지 얻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소?” “어젯밤 저희 모두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이 들판에서 전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을 말입니다.” 마하티리 왕은 신하들이 준비해 온 향수로 몸을 씻은 다음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관을 쓰자 마하티리 왕은 예전과 다름없이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시녀들은 왕비가 될 소녀의 몸을 향수로 씻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마하티리 왕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는 열흘 동안이나 열렸습니다. 모든 백성이 기뻐했고 먼 나라 왕들도 조급히 달려와 축하 인사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마하티리 왕이 고생할 때 모른 척했던 친구 수타라 왕과 마하티리 왕의 여동생도 있었지요. 마하티리 왕은 이번에는 여동생에게 말했습니다. “누이여! 너는 내가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나를 모른 척했던 일을 기억하느냐?” 여동생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마. 그때, 네 눈에는 내가 거지로 보였을 테니까.” 마하티리 왕은 모두를 용서한 뒤에 신하와 백성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 여인은 내가 힘든 여행을 할 때 곁에서 지켜 준 사람이다. 오늘 이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겠노라.” 곧 마하티리 왕과 소녀의 결혼식이 치러졌고 흥겨운 잔치가 계속되었습니다. 미얀마 사람의 90퍼센트는 불교 신자입니다. 불교의 영향으로 미얀마 사람들은 현재 살고 있는 생에서 부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습니다. 현세의 삶은 다음 생으로 가기 위한 일시적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미얀마 사람들의 생각은 민간 설화인 마하티리 왕의 시련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왕으로서 갖는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접고 신하와 백성을 위해 자진해서 시련의 길을 떠나는 마하티리 왕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언뜻 중생들을 위해 고행을 하는 석가모니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사건을 그리고 있는데, 그 사건들은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또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를 마음에 새기고 그것으로 생기는 행복한 결과를 꿈꾸게 합니다. 결국 마하티리 왕의 시련은 삶의 이치를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아시아의 경제 대국 미얀마는 26년 동안 군사 독재를 경험하면서 가난한 나라가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미얀마는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부문에서 뒤처졌는데 문학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대부분 독재 정부를 홍보하는 출판물이었고, 군대를 선전하고 미화하는 일부 문학 작품만이 활개를 쳤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탄압으로 문학의 순수성은 점점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민간 설화의 발굴과 보존도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1950년대 선각자 마웅팅아웅은 구전되는 민간 설화를 미얀마어와 영어 책자로 정리해 놓았지만, 그 후로 미얀마의 서점에서 민간 설화에 관한 책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웅팅아웅은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얀마 문학의 뿌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책을 출판하는 등 민간 설화를 정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마웅팅아웅이 펴낸 버마 이야기 30편은 미얀마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초원의 여우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 옛적 몽골의 어느 초원에 가난하지만 마음은 그지없이 착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양을 기르며 살고 있었는데, 밤마다 나타나 양을 잡아먹는 늑대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젊은이는 활과 화살을 만들어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젊은이는 양 떼를 습격하는 늑대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제 젊은이가 기르는 양들은 안전하게 풀을 뜯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혹시라도 늑대가 남아 있을지 몰라 양 우리 앞에 덫을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덫에 여우 한 마리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여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저쪽 초원에 사는 여우입니다. 겨울이라 먹을 것은 없고 너무 배가 고파 이곳까지 왔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신다면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우는 몹시 굶주린 듯 형편없이 야위어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여우가 불쌍해졌습니다. “좋아. 지금 한 약속을 지킨다면 너를 풀어 주겠다.” “하늘에 걸고 맹세합니다.” 젊은이는 여우를 덫에서 풀어 주고 상처를 치료한 다음 자기가 먹던 양고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우는 젊은이의 친절에 감동했습니다. 양고기를 다 먹고 난 여우가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소원을 하나 들어 드릴게요.” 젊은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네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느냐? 나는 욕심 없어. 그저 늑대가 양 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걱정이지.” 젊은이의 선한 눈빛을 본 여우는 발딱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방울을 좀 빌려주시겠어요?” 젊은이는 말의 목에 달아 둔 방울을 하나 떼어 내서 여우에게 주었습니다. 여우는 방울을 자기 목에 달더니 어딘가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여우가 찾아간 곳은 늑대의 굴이었습니다. 여우 목에 걸린 방울을 보고 늑대가 물었습니다. “그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야?” 늑대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지요. 여우는 이런 늑대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답니다. 여우는 짐짓 허세를 부리며 말했습니다. “아, 이거요? 하느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랍니다. 이 방울은 배고플 때마다 맛있는 토끼가 내 앞을 지나가도록 해 주는 힘이 있어요.” "뭐라고? 나도 그럼 하나 얻을 수 없을까?” 늑대는 완전히 방울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우는 앙큼하게 속삭였습니다. “당연히 얻을 수 있지요. 오늘 밤 꽁꽁 언 강 위에 앉아 기도를 올리세요. 그러면 하늘에서 방울이 떨어질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늑대는 음흉하게 웃으며 언제든지 맛있는 토끼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푹 빠졌습니다. 그날 밤 늑대는 강가로 나갔습니다. 몽골의 겨울은 무척 춥습니다. 게다가 허허벌판이라 사방에서 몰아쳐 오는 바람 때문에 눈을 뜨기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방울을 갖고 싶은 마음에 늑대는 여우가 시킨 대로 강 위에 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지요. “하느님! 제게도 방울을 내려 주세요. 여우의 방울만큼 멋진 방울을 하나, 아니 여우 것보다 훨씬 큰 방울을 두 개 주세요.” 욕심 많은 늑대가 기도드리는 것을 숨어서 보고 있던 여우는 웃음을 참으며 젊은이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커다란 몽둥이를 가지고 강으로 나가 보세요. 바보 같은 늑대 한 마리가 앉아 있을 거예요. 지금쯤은 꼬리와 다리가 얼음 위에 꽁꽁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 할 거예요. 빨리요.” 여우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몽둥이를 들고 가 늑대를 때려잡았습니다. 늑대는 울부짖으며 달아나려고 했지만 다리와 꼬리가 꽁꽁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여우야, 정말 고맙다.” “뭘요. 저는 은혜를 갚았을 뿐인걸요.” 여우는 수줍게 웃으며 말하고는 쏜살같이 달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한편 젊은이가 늑대를 죽였다는 소문을 들은 호랑이는 화를 냈습니다. “감히 동물의 왕인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늑대를 죽여? 용서하지 않겠다!” 여느 때처럼 양 떼를 지키고 있는 젊은이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어흥!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늑대를 죽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젊은이는 너무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습니다. 호랑이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와 힘겨루기를 하자. 네가 지면 당장에 너를 잡아먹을 테다!" 호랑이의 말에 벌벌 떨던 젊은이는 겨우 용기를 내서 말했습니다. “저에게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좋아. 뭐 하루쯤이야 기다려 주지.”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자 젊은이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엉겁결에 시간은 벌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젊은이는 두려움에 떨면서 여우를 찾아갔습니다. “늑대를 잡은 게 잘못이었나 봐. 호랑이가 잔뜩 화가 났어.” 이야기를 들은 여우가 말했습니다. “호랑이와 이런 내기를 하세요. 먼저 돌을 쥐어짜서 물이 나오게 하고, 그다음에는 땅을 굴러 물이 나오게 하며, 마지막으로 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내기를 하세요.” 여우의 말에 젊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돌을 쥐어짜서 물이 나오게 할 정도로 힘이 세다면 무슨 걱정이겠어요? “나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젊은이는 풀이 죽어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꼬리로 다정하게 젊은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장담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준비를 해 놓을 테니까요.” 과연 여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음 날 젊은이는 여우가 정해 준 장소에서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먼저 돌을 쥐어짜서 물이 나오게 하고, 땅을 발로 굴러서 물이 나오게 하며, 마지막으로 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뽑아 버리는 건 어때요?” 호랑이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좋다! 네가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그렇게 자신 있다면 한번 겨루어 보자.”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이 난 발을 번쩍 들더니 돌 하나를 움켜쥐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빨로 물어뜯어도 돌은 끄떡없었습니다. “저, 아무래도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건 무리인 것 같으니 두 번째 것을 해 보시죠.” 젊은이가 살짝 약 올리듯이 말하자 호랑이는 성이 나서 발을 쾅쾅 굴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나무 뽑기라도 해 보시지 그래요?” 젊은이는 이제 드러내 놓고 호랑이를 놀리듯이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너무나 화가 나서 콧김을 ‘흥흥’하 고 내뿜었습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안고 뽑아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나무는 살짝살짝 흔들리기만 할 뿐 뽑히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씨름하던 호랑이는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헉헉! 이럴 수가! 하나도 안 되는군. 좋아, 이번에는 네 차례야.” 그러자 젊은이는 씨익 웃으며 나섰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하는 것을 잘 보세요.” 젊은이는 우선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를 지르며 돌을 힘껏 쥐어짰습니다. ‘아무리 그래 봐야 인간 녀석이 나보다 힘이 셀 리가 없지.’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던 호랑이는 눈앞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놀랍게도 젊은이가 움켜쥔 돌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게 아닙니까! 호랑이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땅에서 물이 나오게 해 봐.” “잘 보세요.” 말을 마친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높이 뛰어올랐다가 땅에 내려섰습니다. 쾅! 그러자 이게 웬일입니까? 땅에서 물이 솟는 것이 아니겠어요! 호랑이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자존심이 더욱더 상했지만 그래도 호랑이는 우겼습니다. “좋아.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뽑아야 해.” 젊은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습니다.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숲으로 간 젊은이가 조금 가느다란 나무를 잡으려 하자 호랑이는 발끈 화를 냈습니다. “그건 안 돼! 내가 가리키는 나무를 뽑아야만 해.” 호랑이의 고집에 젊은이는 선선히 응했습니다. “좋아요. 어떤 나무든 좋으니 골라 보세요.” 호랑이는 나무들을 둘러보다가 그중에서 가장 딱딱하고 굵은 나무를 가리켰습니다. 나무는 단단하게 생긴 데다가 옆에 커다란 바위까지 있어서 뽑아내기가 무척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별 투정도 하지 않고 나무를 끌어안더니 커다란 기합을 넣으며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굵은 나무가 번쩍 뽑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호랑이는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고, 잠시 후 분해서 이를 갈며 사라졌습니다. 과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모두 꾀 많은 여우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여우는 돌 대신에 새알에 흙을 묻혀 갖다 놓았고, 젊은이는 그걸 집어 들어 으스러뜨린 것이지요. 새알이 깨졌으니 물이 흘러나올 수밖에요. 또 여우는 땅을 파고 물주머니를 묻은 다음 흙으로 덮어 놓았습니다. 젊은이는 물주머니가 묻힌 곳에서 뛰어올랐다가 내려서며 물주머니를 밟아 터뜨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무는 미리 뽑아서 살짝 세워 둔 것이죠. 젊은이가 그것을 뽑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리한 여우는 호랑이가 분명히 제일 굵고 단단한 나무를 가리킬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굵고 단단한 나무를 미리 뽑아 놓았던 것이지요. “여우야, 넌 정말 대단하구나.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다.” 그러자 여우가 말했습니다. “별것 아니에요. 이제는 결혼을 시켜 드릴게요.” “나같이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올 여자가 있을까?” “저만 믿으세요.” 여우는 곧장 임금님에게 달려갔습니다. “제가 모시는 주인님은 잘생긴 데다가 힘도 세고 엄청난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공주님을 사랑하신대요. 부디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임금님은 말하는 여우를 가진 남자는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다. 하지만 그 전에 시험을 거쳐야 해. 호랑이, 늑대, 표범을 잡아다 줘야 한다.”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숲속을 급히 뛰어가던 여우는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어딜 그렇게 뛰어가니?” “임금님께서 힘센 짐승들을 불러 모아 상을 주신대요. 모두에게 알리러 가는 거죠.”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가야지.” 호랑이가 여우 뒤를 따랐습니다. 여우는 늑대와 표범에게도 똑같은 얘기를 했고, 모두 여우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여우는 호랑이, 늑대, 표범을 데리고 궁전으로 달려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은 화살을 쏘아 호랑이와 늑대와 표범을 잡았습니다. 임금님은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데 네 주인의 집은 어디냐?” 여우는 멀리 있는 커다란 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집입니다. 오늘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공주님과 함께 오세요.” 여우는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사실 그 집에는 사람을 괴롭히는‘망가스’라는 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공주님이 이리 오고 있어요. 내가 당신 칭찬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결혼하겠다면서 오는 중이에요.” “그게 정말이냐?” 망가스는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물론이죠. 하지만 공주님이 못생긴 당신 얼굴을 보면 결혼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 구덩이 안에 숨어 있다가 임금님과 신하들이 돌아가고 공주님 혼자 남으시면 그때 청혼하세요. 그러면 공주님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나.” 여우의 말을 들은 망가스는 기뻐하며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우는 재빨리 구덩이를 막은 다음 검은 돌 하나를 올려놓았습니다. 망가스를 구덩이에 가둔 여우는 젊은이를 데려와 망가스의 멋진 옷을 입혔습니다. 곧 임금님과 신하들, 공주가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집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게다가 젊은이를 그 집의 주인으로 믿고 있었지요. “이렇게 부자인 데다가 멋진 젊은이라면 내 딸을 주어도 아깝지 않지.” 임금님은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젊은이는 이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여우가 임금님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사실 이 검은 돌 밑에는 이웃 나라에서 온 염탐꾼이 숨어 있습니다. 그놈을 먼저 해치우시지요.” 그러자 임금님은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들을 시켜 검은 돌을 치우고 망가스를 끌어내 처치하도록 했습니다. 임금님은 부자인 데다가 얼굴도 잘생겼고 용감하기까지 한 젊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당장 사위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젊은이와 공주님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백성들의 축복 속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마친 젊은이와 공주님은 멋진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는 이 모든 기쁨을 여우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여우야, 네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도 초원에서 혼자 외롭게 양을 치며 살고 있었을 거야. 네 덕분에 이렇게 행복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보살펴 줄게. 위험한 초원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여기서 살자꾸나.” 그러나 여우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도 당신과 헤어지는 것은 슬퍼요. 하지만 저는 자연에 사는 동물이라 이런 집보다는 초원이 더 좋아요. 위험하지만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니까요. 이렇게 말한 여우는 그날 밤 아무도 몰래 초원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 젊은이는 두 번 다시 그 여우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베니스의 상인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곤돌라 노 젓는 소리와 사공의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는 도시입니다. 베니스는 ‘물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수상 교통이 발달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물건이 운반되어 와 팔리는 곳이기에 많은 상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인들 가운데 안토니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안토니오는 젊지만 큰 배를 여섯 척이나 갖고 있었으며, 성품이 착하고 의리가 있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습니다. 어느 날 바사니오가 안토니오를 찾아왔습니다. 안토니오와 둘도 없는 친구인 바사니오는 귀족 출신의 군인이었으나 제대를 한 뒤에는 무척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안토니오, 나는 지금 무척 곤란한 처지에 있다네. 제발 한번만 나를 도와주게.” 며칠 후 나는 포샤라는 아가씨에게 청혼하려 한다네. 그런데 귀족인 내가 청혼을 하러 가자면 그에 걸맞는 치장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인들도 필요하고 말이야. “어허, 큰일이로군.” “하지만 너무 염려 말게. 내 신용으로 돈을 빌릴 만한 사람이 있을 거야. 함께 나가 보세.” “고맙네, 안토니오!” 그러나 삼천 다컷은 너무나 큰돈이었기에 빌려 줄 만한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맥이 빠져 걷던 두 사람은 소문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샤일록은 아주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 주고는, 날짜가 지나 돈을 갚지 못하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물건이라도 빼앗아 가는 사람으로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고 의리 있는 안토니오는 샤일록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호통을 치며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붙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망신을 당한 샤일록은 안토니오가 베니스에서 유명한 상인임을 알고 꾹 참고 넘겼지만 언젠가는 앙갚음을 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오는 샤일록과 얼굴을 마주하는 게 무척 싫었지만 친구를 위해 딱 한 번만 양보 하기로 하고 샤일록의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니 베니스에서 가장 유명한 두 분께서 이곳엔 웬일이신가요?” “내 친구 바사니오가 돈이 필요하다네. 내가 보증을 설 테니 돈 좀 빌려 주게.” 안토니오의 말에 샤일록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나리가 보증을 선다면 당연히 빌려 드리지요. 하지만.” “하지만 뭔가?” 배라는 것은 앞날을 알 수가 없지요. 폭풍을 만날 수도 있고 암초에 부딪힐 수도 있으며 해적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지요. 안토니오 나리께서 제게 서약서라도 써 주셔야 돈을 빌려 드릴 수 있겠는뎁쇼. “좋네.” 안토니오는 시원하게 답했습니다. “나리께서 보증을 서시는 만큼 이자는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기한 안에 돈을 갚지 못하면, 제가 나리의 살 일 파운드를 베어 내도 좋다는 서약서를 써 주십시오.” “살 일 파운드를?” 더욱 놀란 것은 바사니오였습니다. “됐네, 안토니오! 이런 터무니없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네.”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지요?” 샤일록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안토니오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좋아. 서약서에 서명을 해 주지. 제때에 돈을 갚지 못하면 내 살 일 파운드를 베어 내도 좋네.” “어디라도 상관없으십니까?” “물론이지.” “안토니오! 그럴 수는 없네.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 텐가?” “걱정 말게, 바사니오. 내 배는 약속한 날짜보다 한 달은 일찍 돌아올 걸세.” 안토니오와 바사니오가 실랑이를 벌이자, 샤일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비록 약속한 날짜를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안토니오 나리의 살 일 파운드를 얻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실제로 사람의 살은 양고기나 쇠고기만큼도 값어치가 없잖습니까? 안토니오가 이상한 약속을 하고 얻어 준 돈으로 바사니오는 멋진 옷을 사 입고, 하인들을 데리고 포샤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름다운 포샤여. 부디 제 청혼을 받아 주시오.” “바사니오, 저도 당신을 마음 깊이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저와 결혼하시려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야 합니다.” 포샤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포샤와 결혼하려는 사람은 금 상자, 은 상자, 납 상자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안에 있는 글대로 해야 한다.”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또 어떤 글이 남겨져 있는지는 포샤도 몰랐습니다. 세 개의 상자를 눈앞에 둔 바사니오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상자는 겉은 번쩍거리지만 오히려 안은 비었을지도 몰라. 초라한 납 상자가 오히려 진짜일 수도 있지.’ 마음을 정한 바사니오는 납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아름다운 포샤의 초상화였으며, 이러한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겉만 보고 고르지 않은 그대에게 행운이있도다. 이제 내 딸 포샤는 그대의 아내가 되리라. 실제로 금 상자에는 해골이 들어 있었으며, ‘번쩍인다고 모두가 금은 아니다. 화려한 겉모습에 끌려 인생을 망친 사람은 수없이 많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 상자에는 우스꽝스런 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었으며, ‘이 상자는 일곱 번 담금질하여 만든 것, 사람도 일곱 번 이상 단련되어야 비로소 똑똑해지는 법이다. 그대는 아직 어리석도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바사니오와 포샤는 화려하고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포샤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질고 똑똑한 여자였습니다. 바사니오는 그러한 아내를 얻게 된 기쁨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바사니오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친구인 안토니오가 보내온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리운 친구 바사니오에게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오던 배가 태풍을 만나 모두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네. 돈을 갚을 수가 없으니, 이제 그 끔찍한 유대인 샤일록은 내 살 일 파운드를 베어 갈 것이네. 마지막으로 자네를 한번 만나고 싶네. 안토니오 편지를 읽고 표정이 어두워진 바사니오를 보고 포샤가 물었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인가요?” “내 친구 안토니오가 위험에 처했다고 하는구려. 안토니오야말로 당신과 나를 맺어 준 은인인데.” 바사니오는 포샤에게 안토니오가 샤일록과 어떻게 하여 터무니없는 약속을 했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고마우신 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죠. 제가 당신이 빌린 금액의 세 배를 드릴 테니 얼른 가셔서 돈을 갚고 친구를 구하도록 하세요.” “고맙소, 포샤!” 바사니오가 베니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토니오가 감옥에 갇힌 뒤였습니다.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창백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습니다. 돈을 제날짜에 갚지 못했다고 샤일록이 고발했다네. 돈을 갚을 길도 없고, 이미 날짜가 지났으니 악마 같은 샤일록은 약속한 대로 살 일 파운드를 베어 갈 걸세. 나는 이제 틀렸네. “염려 말게, 안토니오! 내가 꼭 자네를 구해 줄 테니.” 바사니오는 급히 샤일록을 찾아갔습니다. “빌린 돈의 세 배를 줄 테니 제발 안토니오를 풀어 주게.” “안 됩니다. 약속한 날짜가 이미 지났거든요. 저는 안토니오 나리의 살 일 파운드를 베어 가질 겁니다.” 샤일록은 음흉하게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바사니오는 힘없이 샤일록의 집을 나와야만 했습니다. 결국 안토니오는 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사니오를 떠나보내고 난 포샤는 하녀를 불러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직접 가 봐야겠으니 떠날 준비를 하렴. 잠시 벨라리오 박사님을 뵙고 와서 바로 출발하자. 근처에 사는 유명한 법률학자 벨라리오 박사를 만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포샤는 여행하기 편하도록 남자 옷을 입고 베니스로 출발했습니다. 눈부신 햇살을 받은 포샤의 금발 머리가 더욱 빛났습니다. 포샤는 안토니오의 재판이 막 시작될 즈음 베니스에 도착했습니다. 법정에는 최고 재판관인 공작을 비롯해서 관리들과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었습니다. 공작은 안토니오가 훌륭한 상인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샤일록을 불러 타일렀습니다. “샤일록, 그대가 서약서대로 안토니오의 살 일 파운드를 베겠다고 했지만, 이제 안토니오도 고생을 할 만큼 했으니 고소를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하네. 나뿐만 아니라 베니스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네.” 그러나 샤일록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안 됩니다. 서약서는 법에 따라 만든 것입니다. 이제 와서 재판관께서 그만두라고 하시면 스스로 법을 어기시는 게 됩니다.” 그때 였습니다. 포샤가 재판관 앞으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법률학자 벨라리오 박사님을 돕고 있는 사람입니다. 박사님께서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셔서 저를 보내 판결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아, 유명한 법률학자 벨라리오 박사님께서 보내신 분인가요? 그렇지 않아도 도움을 청하려 했는데 이렇게 와 주시다니 정말 고맙소.” 재판관의 허락을 얻어 법정에 선 포샤는 샤일록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그대는 정녕 안토니오의 살 일 파운드를 가지려 하오? 그의 친구 바사니오가 세 배의 돈을 준다는 것도 거절하고서?” “네, 그렇습니다.” “좋소.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오. 이 서약서에 쓰여 있는 대로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 일 파운드를 베도록 하시오.” 법정 여기저기에서 한숨 짓는 소리가 들렸고, 샤일록은 품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잠깐, 이 서약서에는 살 일 파운드만 적혀 있을 뿐 다른 내용은 없소. 그러므로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 일 파운드를 베어 내되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오. 만약 피가 날 경우에는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할 것이오.” 포샤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샤일록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살을 베어 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 사정이오. 나는 법에 따라 만든 서약서의 내용을 지키도록 할 뿐이오.” “그,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돈 대신 살 일 파운드를 받겠다고 한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소.” “그러면 돈을 세 배 받겠습니다.” “당신이 분명히 돈은 필요 없고 살 일 파운드를 갖겠다고 했소. 당신이 말한 이상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것이오. 자기 스스로 포기했으니까.” 샤일록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이 기회에 안토니오를 혼내 줄 작정이었는데, 거꾸로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져서 돈까지 잃게 된 것입니다. “과연 명재판이오.” 공작이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고, 사람들은 손을 모아 박수를 쳤습니다. 이렇게 안토니오와 바사니오는 무사히 법정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고맙네. 여기까지 와 주어서.” “무슨 소릴! 당연히 와야지. 우선 벨라리오 박사님의 조수라는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 우리의 은인이니까 말이야.” 안토니오와 바사니오는 그 젊은이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습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얼굴, 젊은이는 다름 아닌 포샤였습니다. 깜짝 놀란 바사니오가 소리쳤습니다. “포샤!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아무래도 일이 쉽지 않겠다 싶어 벨라리오 박사님께 여쭙고 달려왔어요.” “정말 잘했군, 잘했어. 참, 인사하게. 바로 내 아내 포샤라네.” 바사니오는 포샤를 안토니오에게 소개했습니다. “바사니오! 자네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현명하고 용감한 부인을 얻었군.” “모두가 자네 덕분이지.” “자, 우리 함께 즐거운 파티를 열지요.”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물의 도시 베니스 하늘에 널리 퍼졌습니다.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 특히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은 대영제국의 황금기였습니다. 당시 영국이 거느린 식민지들 중에 가장 중요한 곳이 ‘인도’였지요. 그런데 영국인들은“셰익스피어를 인 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작가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랫 퍼드어폰에이번에서 태어났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선배 극작가의 희곡을 수정하는 조수로 일하다가 헨리 6세를 시작으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극작가로 등단했습니다. 로마 고전 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매력 있는 인물들, 한치 앞을 짐작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내용 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햄릿, 리어왕, 오델로, 맥베드로 대표되는 4대 비극을 비롯해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 밤의 꿈, 십이야 등 셰익스피어가 남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걸작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문학 창작의 표준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불쌍한 사람일 뿐 악인은 없다. 1597년에 쓴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베니스의 상인은 젊고 착한 젊은이들이 지혜를 모아 악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 복수하고 자신들의 사랑을 이룬다는 낭만적이고 통쾌한 희극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유럽인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싫어하고 핍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세계 여러 나라를 전전했던 유대인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뛰어난 사업 능력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이나 은행을 비롯한 금융업에 많이 진출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기독교 대신 자기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으며 유대인끼리 똘똘 뭉쳐 사는 바람에 미움을 받았는데, 경제적인 힘까지 쥐게 되니 더욱더 원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악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극적이고 슬픈 인물로 그렸습니다. 이는 사회 통념에 따라서 악인의 운명을 겪게 하면서도 소수 핍박받는 민족의 슬픔과 분노를 호소했던 것과 같습니다. 적어도 셰익스피어는 모든 사람과 사회를 사랑과 연민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졌던 작가였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영국 런던 시내의 중심가에는‘스크루지와 말리 상회’라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스크루지와 말리가 함께 차린 가게였습니다. 말리는 칠 년 전에 죽어 지금은 스크루지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지만, 간판을 새로 만드는 데 드는 돈이 아까워 가게의 이름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구두쇠인 스크루지는 생활비가 더 드는 것이 아까워 결혼조차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스크루지는 소문난 구두쇠일 뿐만 아니라 마음도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길을 지날 때 스크루지를 보고 인사하는 사람은 물론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거지조차 피해 갈 정도였으니까요.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늦게까지 가게에 있던 스크루지는 밖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캐럴에 신경질을 내며 말했습니다. “뭐가 좋다고 야단들이람.” 점원인 봅은 언 손을 호호 불어 가며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두쇠 스크루지는 석탄을 때는 것조차 아까워했기에 가게는 바깥만큼 추웠습니다. “안녕하세요? 삼촌!” 스크루지의 조카 프레드가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시는군요.” “웬일이냐?” “내일 저희 집에 오셔서 저녁 드시라고요.” “일해야 한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하루쯤은 쉬셔야죠.” “일요일이라고 쉬고 크리스마스라고 쉬고, 일은 언제 하니? 그러니까 네가 가난한 거야.” 스크루지의 말에 프레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게를 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스크루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땡! 땡! 땡! 시계가 종을 열두 번 치며, 크리스마스가 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스크루지! 스크루지!” 어둠 속에서 스크루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습니다. 놀란 스크루지가 눈을 떠 보니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온 몸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고, 쇠사슬에는 장부와 서류, 지갑과 열쇠 등이 매달려 있는 끔찍한 모습이었습니다. “스크루지, 나 말리일세.” 어둠 속의 사람이 말했습니다. “말리! 자네는 칠 년 전에 죽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나는 유령일세.” 스크루지가 자세히 보니 틀림없는 유령이었습니다. “자네 몸에 감은 쇠사슬은 뭔가?”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지. 살아 있는 동안에 말이야. 아마 자네 것은 내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울걸.” “무슨 소리야? 대, 대체 웬일인가?” “자네에게 알려 줄 게 있어서 왔다네.” “무, 무엇을 말인가?” “앞으로 사흘 동안 새벽 한시가 되면 유령이 나타날 거야. 하루에 하나씩 유령 셋을 만나게 될 걸세. 그 유령들을 따라다니면 틀림없이 배우는 것이 있을 테니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게.” “유령을 셋이나 만난다고?” 스크루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습니다. 어느새 말리의 유령은 사라졌습니다. 스크루지는 무서움과 추위에 떨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땡! 종소리가 한 번 울렸습니다. 새벽 한시가 된 것이죠. 갑자기 이불이 휙 젖혀졌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스크루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말리의 말대로 유령이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과거의 유령이다.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 볼 곳이 있으니까.” 젊은 유령은 이렇게 말하며 스크루지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휘익!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눈을 뜬 스크루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자신이 유령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런던을 벗어난 둘은 작은 시골 마을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스크루지는 그곳이 어디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스크루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습니다. 어린 스크루지는 친구들과 즐겁게“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거리를 다녔고, 집에 들어와서는 난롯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볼 수 있지만, 저들은 우리를 보지 못해.” 유령 말대로 누구도 스크루지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고 있던 어린 스크루지조차 말입니다. 유령은 시골 마을을 벗어나 번화한 도시로 스크루지를 데려갔습니다. 들뜬 분위기와 흥겨운 캐럴 소리로 보아 크리스마스이브인 것 같았습니다. “이 가게를 기억하나?” 유령이 어느 가게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점원으로 일했던 페지위크 영감님의 가게죠.” 가게 안에서는 흥겨운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불을 지핀 난로 주위에는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페지위크 영감님이 점원들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 것입니다. 페지위크 영감님의 가게를 지나자 조금은 더 나이가 든 스크루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년의 스크루지는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있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변했어요.”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변한 게 없소. 그대로요.” “아니에요. 당신은 나보다 돈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보다 돈이 당신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 같군요. 그러니 당신을 떠나겠어요.”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다니. 사람이 가난하면 얼마나 불편한지 당신은 모르오? 가난을 벗어나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섭섭하구려.” “당신 말도 틀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돈을 버는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살지는 않아요. 당신은 돈을 벌지는 몰라도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차라리 가난했을 때는 행복했는데, 이제 당신에겐 희망이 없어요.” 여인은 등을 돌리고 힘없는 걸음으로 걸어갔고, 중년의 스크루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스크루지는 침대에서 잠을 깼습니다. 지난밤에 유령과 함께 자신의 지난 시절을 본 것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꿈을 꾼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본 것일까?’ 스크루지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계가 다시 새벽 한시를 알리는 종을 쳤습니다. 땡! 종소리와 함께 몸집이 거대한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현재의 유령이다.” 스크루지는 또 현재의 유령을 따라 어디론가 갔습니다. 스크루지가 유령과 함께 도착한 곳은 바로 자신의 가게 근처였습니다. 눈을 치우며 웃고 장난치는 소년들, 물건을 파는 상인과 사는 손님,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모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보았던 광경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 유령은 스크루지를 이끌었습니다. 유령이 스크루지를 데려간 곳은 봅의 집이었습니다. 집은 작았고 식탁에는 칠면조 한 마리와 음료수만 놓여 있었지만, 가족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 스크루지 씨를 위해서 건배!” 봅이 음료수 잔을 들면서 말하자 부인이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아니, 월급이라고 쥐꼬리만큼 주는 데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구두쇠 영감을 위해 건배하다니요?” “크리스마스잖소. 잘못을 용서하고 모두가 서로 기쁨을 나누는 날이라오.” 다음으로 스크루지가 도착한 곳은 조카 프레드의 집이었습니다. 보잘것 없는 음식은 봅의 식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가족들의 얼굴은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스크루지 삼촌께서 오셔서 저녁이라도 같이 하면 좋으련만.” “당신 삼촌은 엄청난 부자라면서요?” 프레드의 부인이 물었습니다. “돈이 많으면 뭐 해요? 삼촌이 가진 돈은 그저 종이 조각일 뿐이지요. 남에게는 물론 삼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오.” “당신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불쌍한 분이로군요. 크리스마스를 얼마나 쓸쓸하게 보내실까요?” “글쎄 말이오. 언젠가는 삼촌도 변하시겠지요.” 스크루지가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자신의 침대 위였습니다. 시계는 거의 새벽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스크루지는 잔뜩 긴장을 하고 다음 유령을 기다렸습니다. 땡! 종소리와 함께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미래의 유령이다.” 유령은 스크루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영감이 죽었다면서?” “그러게 말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스크루지와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얼굴은 알고 있는 동네의 상인들이었습니다. “엄청난 재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저승에 갈 때는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니 소용없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스크루지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령이 다음으로 스크루지를 데려간 곳은 바로 자신의 가게였습니다. 분명 자기의 가게인데, 가게에 앉아 있는 것은 스크루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이곳은 내 가게인데. 제가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나요?” 스크루지가 물었지만 유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스크루지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스크루지는 온갖 범죄자들이 득실대는 더러운 뒷골목에 와 있었습니다. 도둑으로 보이는 몇몇 사내들은 각각 훔쳐 온 물건을 꺼내 보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훔쳐 온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 “스크루지 영감은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니까 관심 갖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런데 자네는 무엇을 가져왔나?” “도장과 펜과 몇 가지 장식품이야. 몽땅 싸구려라 값이 나갈 만한 것은 없어.”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벗겨 왔지. 어차피 스크루지 영감 시체를 묻어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스크루지는 어떤 방에 와 있었습니다. 방에는 낡은 침대가 있었고, 침대 위에는 하얀 이불을 덮어쓴 누군가가 누워 있었습니다. 한참을 살펴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대체 누가 죽은 걸까?’ 스크루지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습니다. “헉! 바로 나잖아? 내가 죽었단 말인가? 어느 누가 돌봐주기는커녕 입었던 옷까지 도둑을 맞는 불쌍한 모습으로 죽는단 말인가?” 큰 충격을 받은 스크루지는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스크루지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만난 것이 꿈에서였는지 아니면 현실에서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몇 시간이, 아니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난 스크루지는 밝은 햇살에 이끌려 창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하얀 눈이 덮인 거리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 스크루지는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가게로 향하는 스크루지의 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얼굴에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지요. 스크루지는 만나는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전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평소 무뚝뚝한 스크루지가 살갑게 인사를 하니 사람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어지는 스크루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스크루지가 가게에 도착해서 불을 피우고 있을 즈음 봅이 출근을 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온 봅은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 늦도록 가족들과 지내느라고.” “아, 괜찮아. 크리스마스 아닌가.” 어리둥절해하는 봅을 남겨 두고 스크루지는 가게를 나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조카 프레드에게 갈 것이네. 가기 전에 선물을 사야 하니까 조금 시간이 걸리겠군. 자네는 대충 정리하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게. 그리고 이달부터는 월급을 올려 주지. 그래야 더 근사한 크리스마스 식탁을 차릴 수 있을 테니까.” 크리스마스를 맞아 스크루지는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찰스 디킨스(1812 1870)는 영국 의회를 출입하는 기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디킨스는 신문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디킨스는 소설을 통해 사회 문제를 깊이 파헤치며 잘못된 생각이나 태도를 비판하거나 풍자했습니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를 풍자 문학의 대가라고 합니다. ‘풍자 문학’이란‘사회나 인물, 그 시대나 사회의 문제점 등을 재치 있게 빗대어서 비판하는 문학’을 말합니다. 찰스 디킨스가 쓴, 학대받는 아이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오늘날 동화로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니콜라스 니클비, 돔비부자 상사, 힘든 시절, 막내도릿, 위대한 유산, 크리스마스 캐럴 등을 통해 디킨스는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꾸준히 다루어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1843년에 발표된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여러 해에 걸쳐 발표된 다섯 편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집 중 첫 번째 작품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한 늙은 구두쇠가 어느 날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봄으로써 그동안의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적으로는 단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기 예수의 큰 사랑이 가득 한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배경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디킨스는 이런 시간적 배경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인정과 사랑이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바람직한 자세라고 말해 줍니다. 이런 작품 경향은‘크리스마스 철학’이라는 디킨스의 사회관과 인생관을 보여줍니다. 디킨스는 몸소 체험한 하층민들의 생활상과 삶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당시 영국 사회의 모순과 부정을 용감하게 비판했습니다. 찰스 디킨스가 문학을 통해 고발한 어린이 학대, 재판의 비능률 등 당시 영국의 사회 문제가 실제로 개선되었다고 하니 문학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로빈 후드의 모험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헌팅턴의 귀족 로버트 피츠 백작이 사랑하는 마리안과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는 교회에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병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기스본의 가이 경이다. 국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이 결혼식을 멈춰라!” “도대체 무슨 이유요?” 로버트 백작이 묻자 가이 경이 말했습니다. “네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셔우드 숲의 도적들과 한패라는 증거가 있다. 당장 궁으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로버트 백작은 셔우드 숲의 무리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평소 리처드 대왕을 존경하고 따르던 로버트 백작을 몰아내려는 존 왕자의 음모였습니다. 로버트 백작은 사랑스런 신부 마리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결혼식을 할 수 없게 되었구려. 존 왕자의 부하들이 나를 잡아가려 하니 일단 몸을 피해야겠소.” “염려 마세요. 로버트!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마리안과 작별 인사를 마친 로버트 백작은 앞으로 나서며 외쳤습니다. “앞장서시오.” 가이 경은 로버트 백작이 순순히 말을 듣자 안심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때 갑자기 로버트 백작이 가이 경을 주먹으로 때려 쓰러뜨리고 달아났습니다. “저, 저놈을 잡아라!” 가이 경이 일어서며 소리쳤지만, 이미 로버트 백작은 교회 이 층으로 뛰어올라간 뒤였습니다. 병사들이 우르르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백작은 창밖으로 뛰어내려 매어 있던 말을 타고 달아났습니다. 가이 경과 병사들이 뒤를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로버트 백작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사슴들이 뛰노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느새 왕실의 소유인 셔우드 숲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아까 가이 경이 말하기를, 내가 셔우드 숲 도적들과 한패라고 했겠다. 대체 왜 그랬을까?’ 로버트 백작은 나무 밑에 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인과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을 다스리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지요. 리처드 대왕의 동생인 존 왕자는 이 틈을 타서 왕위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존 왕자는 충신들을 감옥에 가두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벼슬을 주어 궁을 지배하는 한편 돈을 받고 벼슬을 팔기도 했습니다. 욕심 많은 존 왕자의 횡포에 나라 살림은 엉망이 되었고, 백성들은 점점 살기가 힘들어져 도망가거나 도둑이 되었습니다. 특히 셔우드 숲은 왕실의 소유였기에 병사들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무엇보다 사냥할 사슴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피해 들어왔습니다. 로버트 백작이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사내 몇 명이 나타났습니다. “너는 누구냐?”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귀족 같은데, 혼자 왔을 리는 없고. 존 왕자가 보낸 첩자가 틀림없구나.” “맞아!” 사내들은 칼을 빼 들고 로버트 백작을 에워쌌습니다. “잠깐! 내 말 좀 듣고 나서 싸워도 늦진 않소. 당신들은 수도 많고 나는 이곳 지리도 잘 모르니 도망치기 힘들지 않겠소?” 이 말에 사내들이 칼을 거두자 로버트 백작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버트 백작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존 왕자를 욕했습니다. “정말 못된 녀석이로군. 결혼식까지 방해하다니.” “큰일이야. 어서 리처드 대왕께서 돌아오셔야 예전처럼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있으니 걱정스럽군.” “이러다가 정말 존 왕자가 왕이 되기라도 하면 살기 더욱 힘들어질 거야.” 한 사내가 로버트 백작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셈이오?” “달리 갈 데도 없으니 나도 여러분과 함께 셔우드 숲에서 지냈으면 하오.” 로버트 백작의 말에 사내들은 놀라는 듯하더니, 조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소? 귀족 출신이니 농사는 지어 보지 않았을 텐데.” “농사는 짓지 못하지만 활을 좀 쏘지요.” “활을 쏠 줄 안다고? 어디 한번 쏴 보시오.” 로버트 백작은 한 사내가 가지고 있던 활을 빌려 화살을 잰 다음 말했습니다. “저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꽁지 털만 맞히겠소.” 슝!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로버트 백작의 말대로 새의 몸은 다치게 하지 않고 꽁지 털만 맞히고는 나무에 박혔습니다. 깜짝 놀란 새는 파닥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지요. “와! 정말 귀신같은 솜씨군.” “새를 맞히는 것도 힘든데, 꽁지 털만 맞히다니.” 로버트 백작의 활 솜씨에 감탄하던 사내들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얘기하더니 로버트 백작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지금은 도적이 되어 지나가는 나그네의 주머니를 털지만, 우리는 농민이었소. 그래서 싸울 줄을 모른다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병사들이 이곳까지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소. 설령 들어온다고 해도 우리만큼 이곳을 잘 알지 못하므로 아직은 위험하지 않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서 말인데, 당신도 쫓기는 몸이 된 이상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오. 귀족이었으니 병사들의 움직임도 잘 알 것이고, 활 솜씨도 뛰어나니 말이오. 사내들이 로버트 백작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을 했습니다. 로버트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좋소. 당신들의 지도자가 되겠소. 하지만 나그네를 터는 좀도둑은 싫소. 우리의 적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 못된 관리요. 존 왕자의 부하들과 못된 관리를 혼내 주고 백성을 돕는 의로운 도적이 됩시다. 알겠소? 지금부터 나를 로버트라는 이름 대신 로빈 후드로 불러 주시오. “와! 로빈 후드 만세!” 영리하고 용감하며 활도 잘 쏘는 지도자의 탄생을 기뻐하는 함성이 셔우드 숲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 후 로빈 후드가 지휘하는 셔우드 숲 형제들은 못된 성주나 관리들을 혼내 주고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주의 병사들이 그들을 잡으려 했지만 귀신같은 로빈 후드의 활 솜씨에 혼이 나서 도망치기 일쑤였습니다. 또 셔우드 숲은 아주 울창하여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길을 잃고 헤매기 때문에 아무리 병사가 많아도 오랫 동안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부터 귀족들은 로빈 후드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습니다. 어느 날 로빈 후드는 개천에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그 외나무다리는 한 사람이 건너기에도 좁아서 조심스럽게 건너고 있었지요. 그런데 반대쪽에서도 한 사람이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로빈 후드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큰 체격이었고 단단해 보이는 목봉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봐, 비켜. 내가 먼저 건너야 하니까.” 로빈 후드는 사내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일부러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내도 결코 만만찮았습니다. “무슨 소릴! 내가 먼저 건너야 해.” “정 그렇다면 승부를 가리는 수밖에 없지.” “내 무기는 목봉이니까 자네도 가서 하나 마련해 오지, 그래?” 사내의 말에 로빈 후드는 숲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꺾어 목봉을 만들어 왔습니다. “자, 그러면 한번 시작해 볼까?” 로빈 후드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내의 목봉이 날아왔습니다. 엄청나게 빠르고 힘찬 공격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좁은 외나무다리 위에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로빈 후드의 솜씨도 뛰어났지만, 사내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에잇!” “이크!” 한참을 싸우던 로빈 후드는 발이 미끄러져 물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하하! 꼭 물에 빠진 생쥐 같구나.” 사내가 물에 빠진 로빈 후드를 보고 크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실수로 떨어진 거야. 어쨌거나 솜씨가 대단한데. 놀랐어. 자네는 누군가?” “나는 리틀 존이라고 해. 로빈 후드를 만나러 가는 길이지.” ‘리틀’이라는 말은 아주 작다는 뜻인데, 체격이 남보다 배는 커다란 사내가 리틀이라고 하니 정말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로빈 후드는 한참 배를 잡고 웃다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잘 왔군. 내가 바로 로빈 후드라네.” “정말인가? 내가 듣기로 로빈 후드는 활을 잘 쏜다던데.” 로빈 후드는 활을 꺼내며 말했습니다. “저쪽에 보이는 나무 두 번째 가지에 달린 잎 세 개를 맞혀 보겠네.” 바람같이 날아간 화살이 보기 좋게 나뭇잎 세 개를 꿰뚫자 리틀 존은 놀라 소리쳤습니다. “틀림없는 로빈 후드로군!” “그런데 자네는 왜 나를 만나려 했지?” 리틀 존이 물로 뛰어들며 말했습니다. “못된 귀족에게 농토를 모두 빼앗겨 도적이 되려고 왔다네. 나도 셔우드 숲 형제로 받아 주게.” “좋고말고. 자네처럼 든든한 형제가 생겨서 기쁘네.” 셔우드 숲에는 리틀 존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 습니다. 대부분 귀족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빈 후드 형제들의 힘이 강해지자 골치가 아파진 것은 존 왕자와 못된 관리들이었습니다. 특히 예전에 크게 혼난 적이 있는 가이 경은 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가이 경은 존 왕자를 찾아갔습니다. “전하! 로빈 후드를 잡을 수 있는 좋은 계획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이오?” “활쏘기 대회를 여는 겁니다.” “활쏘기 대회를 열어서 어쩌겠다는 건가?” “로빈 후드는 활을 잘 쏘니 반드시 대회에 참가할 것입니다.” “만약 참가하지 않으면?” “만약 로빈 후드가 참가하면 잡으면 되고, 참가하지 않는다면 우승자를 뽑아 로빈 후드를 잡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분명 로빈 후드만큼 활 솜씨가 뛰어날 테니 말입니다.” “그거 아주 멋진 계획이로군. 당장 활쏘기 대회를 열도록 하시오.” 활쏘기 대회가 열리고 우승자에게는 은으로 만든 화살을 준다는 소식이 퍼지자, 전국에서 활을 잘 쏜 다는 사람은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서로 실력을 겨룬 끝에 마지막 두 명이 승부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빈 후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빈 후드는 나타나지 않았나?” 존 왕자가 가이 경에게 물었습니다. “아쉽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겁을 집어먹은 것 같습니다.” “쥐새끼 같은 녀석!” “하지만 결승에 오른 두 사람 실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로빈 후드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우승자에게 은 화살 외에 따로 작은 벼슬을 주어 로빈 후드를 잡는 임무를 내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야겠지. 어서 시작하게.” 가이 경은 존 왕자에게 고개 숙여 절을 하고 물러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자, 결승이다. 누구든 이긴 사람에게는 상품과 함께 많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니 최선을 다하라.” 첫 번째 사내가 활을 쏘았고, 화살은 과녁 한가운데에 꽂혔습니다. “와아! 명중이다.” 이어 두 번째 사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내는 애꾸눈이었지만 놀라운 솜씨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결승까지 올라왔습니다. 애꾸눈 사내는 과녁을 겨냥한 뒤 활을 쏘았습니다. 다음 순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애꾸눈 사내가 쏜 화살이 과녁 한가운데 꽂혀 있던 화살을 반으로 가르며 그 자리에 꽂힌 것입니다. “저럴 수가!” “정말 로빈 후드도 울고 갈 솜씨로군.” 존 왕자가 애꾸눈 사내에게 우승 상품인 은 화살을 주며 말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솜씨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느냐?” “체스터 셔먼이라고 합니다. 사냥꾼입죠.” “내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흉악한 도적 로빈 후드 일당을 잡는 일이다.” “로빈 후드를 말입니까? 좋습니다. 그 녀석에게 사냥한 짐승을 빼앗긴 적이 있거든요.” 셔먼이라는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습니다. 아마도 로빈 후드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가? 잘되었구나.” “그러면 잠시 고향에 다녀오겠습니다. 우승 소식을 알리고 준비를 갖춰서 오겠습니다.” 존 왕자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이 경 역시 기쁜 표정을 지은 것은 물론이지요. 로빈후드를 상대할 만한 실력을 갖춘 셔먼을 부하로 두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존 왕자와 가이 경은 축하 파티를 열었습니다. “건배!” 존 왕자가 술잔을 들며 외치는 순간이었습니다. 피융!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존 왕자가 들고 있던 술잔을 맞혔습니다. 술잔은 멀리 날아갔고, 깜짝 놀란 존 왕자가 소리쳤습니다. “누구냐?” “앗, 전하! 화살에 편지가 묶여 있습니다.” 가이 경이 달려가 화살에 묶인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존 왕자 오늘 나를 우승자로 뽑아 주어 고맙소. 상품으로 받은 은 화살은 녹여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줄 것이오. 그리고 앞으로 나를 잡겠다는 생각일랑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셔우드 숲의 로빈 후드 “그, 그렇다면 셔먼이라는 녀석이 로빈 후드였단 말인가?” 존 왕자는 편지를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습니다. 며칠 뒤 혼자 순찰을 나선 로빈 후드는 숲에서 한 떠돌이 무사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존 왕자가 보낸 정탐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빈 후드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떠돌이 무사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보게, 이 숲을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야 한다네.” “통행세를 내야 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걸? 대체 누구에게 내야 한단 말인가?” 떠돌이 무사는 전혀 놀라지 않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셔우드 숲의 주인인 로빈 후드에게 내야 한다네.” “셔우드 숲은 국왕의 소유라고 알고 있는데 이상하군.” 떠돌이 무사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이상하게도 로빈 후드는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배짱 한번 두둑하군. 어디 말솜씨만큼 칼도 잘 다루는지 겨뤄 볼까?” “무사는 싸움을 걸지 않지만 걸어 온 싸움을 피하지는 않는 법이지.” 로빈 후드가 칼을 빼 들고 공격을 하자 떠돌이 무사도 맞섰습니다. 챙챙!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고 칼날은 햇빛을 받아 번쩍였습니다. 한참을 겨뤘지만 도무지 승부가 나질 않았습니다. 로빈 후드는 무사를 시험해 볼 생각이었기에 있는 힘을 다하지 않았지만, 떠돌이 무사 역시 실력을 다 드러낸 것 같지 않았습니다. 로빈 후드는 칼을 거두며 말했습니다. “훌륭한 실력이로군.” “자네도 대단하군그래.” “좋았어. 나와 함께 가서 술이나 한잔 하세.” 로빈 후드는 떠돌이 무사를 데리고 깊은 숲 속에 있는 본거지로 왔습니다. “수상해 보이는걸? 대체 누군가?” 리틀 존이 물었습니다. “떠돌이 무사야. 시험 삼아 겨뤄 보았는데 무척 뛰어난 솜씨더군. 마치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 같았어. 염탐꾼은 아닌 것 같아 술이나 한잔 하려고 데려왔네.” 곧 로빈 후드와 사람들은 모닥불을 지피고 사슴 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고기가 익을 무렵 술까지 마련되어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떠돌이 무사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면 혹시 리처드 대왕의 소식을 들은 적 있나?” 로빈 후드의 물음에 떠돌이 무사는 묘한 웃음을 띠며 답했습니다. “글쎄,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도 하고, 살아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중이라고도 하던데, 확실한 것은 모른다네.” 그때 술을 더 가지러 갔던 리틀 존이 사람들을 몇 명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로빈! 자네를 보자는 사람들이 있기에 같이 왔네.” 고개를 돌려 그 사람들을 본 로빈 후드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마리안! 여길 어떻게?” 그들은 다름 아닌 로빈 후드의 영원한 사랑 마리안과 마리안의 아버지 피츠월터 경이었습니다. “과연 로버트 자네였군. 소문에 로빈 후드가 자네와 많이 닮았다고 해서 마리안과 함께 왔네만 정말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로빈 후드와 마리안은 몹시 감격해서 서로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앗! 저분은. 리처드 대왕 폐하!” 갑자기 피츠월터 경이 떠돌이 무사에게 가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떠돌이 무사가 사자왕 리처드 1세란 말인가?” 로빈 후드와 셔우드 숲 형제들은 크게 놀라는 한편 매우 기뻐했습니다. 존경하는 리처드 대왕을 직접 만났으니까요.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리처드 대왕은 동생 존 왕자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정체를 숨긴 채 셔우드 숲을 지나다가 우연히 로빈 후드와 마주쳤던 것이었습니다. “셔우드 숲 형제들이 폐하를 뵈옵나이다.” 로빈 후드와 형제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리처드 대왕께서 오셨으니 존 왕자도 꼼짝 못 하겠군요.” 로빈 후드의 말에 피츠월터 경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존 왕자도 리처드 대왕 폐하가 영국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야. 신하들을 위협해서 하루빨리 왕위를 받으려 한다더군.” “뭐라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리틀 존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습니다. “리처드 대왕 폐하! 저와 셔우드 숲 형제들이 폐하를 돕겠습니다.” “로빈 후드는 본래 헌팅턴의 귀족이었습니다. 제 딸의 약혼자이기도 하지요.” 피츠월터 경이 말했습니다. “오, 그런가? 이렇게 든든한 친구들이 도와준다니 정말 고맙군.” “공격하라! 형과 나라를 배신한 존 왕자를 무찌르자!” 로빈 후드를 비롯한 셔우드 숲 형제들과 리처드 대왕에게 충성하는 지방의 귀족들이 존 왕자의 궁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대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많은 신하와 병사들이 도망쳤지만, 악에 바친 존 왕자는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셔우드 숲의 도적인 로빈 후드와 한패라면 모두가 도적이다. 도적에게 나라를 내줄 수는 없다.” 존 왕자와 가이 경은 이렇게 외쳤지만, 이미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자꾸 밀리기만 했습니다. 셔우드 숲 형제들은 앞장서서 궁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리틀 존이 가장 눈부시게 활약했습니다. 리틀 존이 휘두르는 단단한 목봉에 맞은 존 왕자의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습니다. 결국 존 왕자는 도망을 가고 가이 경은 로빈 후드가 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리처드 대왕은 왕위를 되찾고 이제 영국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원히 함께하겠는가?” “네.” “신부는 신랑을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원히 함께하겠는가?” “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알린다.” 막 결혼식을 마치고 행복하게 웃는 부부, 로빈 후드와 마리안이었습니다. 로빈 후드와 마리안은 리처드 대왕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고, 리처드 대왕이 왕위를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운 로빈 후드는 귀족의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셔우드 숲 형제들과 로빈 후드의 부인 마리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많이 약해진 로빈 후드는 치료를 받기 위해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병이 깊군요. 피를 뽑아야겠습니다.” 수도원장은 로빈 후드를 침대에 눕히고 양쪽 팔의 혈관에서 피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침대에 누운 로빈 후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추위를 느낀 로빈 후드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수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로빈 후드, 가이 경을 기억하는가? 내가 바로 가이 경의 동생이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제야 원수를 갚게 되었구나.” 로빈 후드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셔우드 숲 형제들을 부를 때 사용하던 뿔 나팔이 눈에 띄었습니다. 뿌우! 길게 울려 퍼지는 뿔 나팔 소리를 들은 리틀 존은 로빈 후드 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수도원장은 놀라 달아났지만 리틀 존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리틀 존은 모든 방을 다 뒤진 끝에 로빈 후드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로빈 후드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뒤였습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로빈 후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리틀 존! 내게 활을 주게. 내가 쏜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나를 묻어 주게.” 그리고 로빈 후드는 마지막 힘을 다해 활을 쏘았습니다. 화살은 셔우드 숲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얼마 후 셔우드 숲 한가운데에 무덤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쓸쓸한 무덤이었지만, 비석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헌팅턴의 백작 로버트, 이곳에 잠들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궁수. 사람들은 그를 로빈 후드라고 불렀다. 이제 다시는 그와 셔우드 숲 형제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재주가 많은 아동 문학가. 하워드 파일은 미국의 델라웨어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파일은 뉴욕 시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순수 미술보다는 잡지와 책에 실리는 삽화를 그리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파일은 미술뿐만 아니라 글 솜씨도 대단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작가들이 쓴 동화나 소설에 삽화를 그려 주는 일을 하다가 직접 이야기를 짓고 삽화까지 그리는 재주 많은 작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파일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 설화나 전설을 기초로 새로운 동화를 지어내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로빈 후드의 즐거운 모험, 은 손의 오토, 잭 밸리스터의 행운 등입니다. 파일은 글을 쓸 때는 물론 삽화를 그릴 때도 역사책을 뒤져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생생한 작품을 쓴 작가입니다. 진정한 영웅을 그리며. 로빈 후드는 영국의 전설이나 민간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입니다. 뛰어난 활 솜씨와 용기를 지닌 영웅 로빈 후드는 셔우드 숲을 근거지로 포악한 관리와 욕심 많은 귀족들을 혼내 주고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홍길동과 같은 인물이지요. 로빈 후드에 대한 전설이 인기를 얻을 무렵, 유럽 특히 영국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당시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십자군은 이슬람 군을 무찌르기 위해 전쟁에 나갔지만 패하거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량도 부족해지고 부자와 권력자들은 힘없는 백성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은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영웅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러면서‘로빈 후드’라는 전설이 생겨난 것입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약자에게 관대하고 강자에게 더 강합니다. 늘 당당하고 정직한 영웅 로빈 후드를 보며 우리는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정글북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인도의 깊은 정글 안에 있는 시오니 언덕은 온갖 동물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밤, 달빛이 늑대 가족이 사는 동굴을 환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빠 늑대가 사냥하기 위해 동굴에서 나오려는데 승냥이 타바키가 나타났습니다. 타바키는 정글의 고자질쟁이여서 모두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웬일이야, 이 밤에?” “절름발이 호랑이 시어칸이 이곳 언덕에서 사냥한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시어칸의 사냥터는 와잉강거 강 부근이야. 그 녀석이 나타나면 우리 먹이가 없어지고 말 텐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 늑대가 말했습니다. “시어칸은 옛날에 사람을 노리다가 빨간 꽃에 다리를 다치고도 비겁한 행동을 계속하더니, 결국은 정글의 법칙조차 어기는군요.” 엄마 늑대의 말대로 정글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위급할 때 말고는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많은 사람이 정글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빨간 꽃을 뿜는 막대기를 가진 사람은 정말로 무서운 존재들입니다. “쉿! 모두 들어 봐요.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아요?” 엄마 늑대가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사나운 울부짖음과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습니다. 시어칸이 누군가를 습격하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들려온 시어칸의 울부짖음은 조금도 우렁차지 않았습니다. “실패했나 보군. 멍청한 녀석!” 아빠 늑대가 비웃듯이 말했습니다. “잠깐! 조심해요.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엄마 늑대의 말에 아빠 늑대는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허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동굴 밖을 살폈습니다. “사람이다. 어린아이야!” “사람 아이라고요? 나는 아직 사람 아이를 본 적이 없어요. 이리 데려와 봐요.” 아빠 늑대가 아이의 옷을 조심스럽게 물어 동굴 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아이는 다친 곳이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털이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귀여울까?” 엄마 늑대가 다가가자 무서움을 모르는 아이는 그 품으로 파고들어 젖을 빨기 시작했습니다. “어마나! 내 젖을 빨아요. 우리 새끼들과 똑같군요.” “그 아이는 내 먹이야. 손대지 마!” 갑자기 절름발이 호랑이 시어칸이 나타나 고함쳤습니다. 시어칸은 또 정글의 법칙을 어기고 사람을 습격했나 봅니다. 아이의 부모는 놀라서 달아났거나 죽었을 것이고 아이 혼자서 이곳까지 찾아온 듯했습니다. “비겁한 녀석! 또 법칙을 어기고 사람을 습격하다니. 더구나 자기 사냥터 도 아닌 곳에서.” “잔말 말고 내 먹이를 내놔!” “우리 늑대들은 우두머리의 명령에는 따르지만, 네 말은 듣지 않아. 네가 아무리 호랑이라고 해도 말이야. 더구나 이곳은 우리 사냥터야.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우리 식구들이 가만있지 않을걸.” 엄마 늑대의 말에 시어칸은 움찔했습니다. 늑대는 호랑이와는 달리 무리를 지어 살기 때문입니다. “좋다. 내 오늘은 물러가지만 언젠가는 저 아이를 반드시 잡아먹을 테다.” “여보! 비록 늑대는 아니지만 이 아이는 정말 귀여워요.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요?” “글쎄, 늑대 식구들이 사람 아이를 받아들일지가 문제지요. 정말 이 아이를 기를 생각이오?” “이 어린아이가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잔뜩 굶주린 채로 말이에요. 게다가 우리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니 기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보름날 열리는 모임에서 잘되도록 얘기해 봅시다.” “우리 꼭 그렇게 해요. 이것 좀 봐요. 털이 없는 살이 무척 매끈거려요. 마치 모글리 같아요.” 모글리란 개구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털이 없는 사람 아이가 늑대에게는 마치 개구리처럼 느껴졌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는 모글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엄마 늑대는 품에서 잠든 모글리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매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늑대 무리는 바위산에서 모임을 엽니다. 새로 태어난 새끼의 얼굴을 무리에 알려 한 식구임을 인정받아 공격당하지 않도록 하는 일도 하지요. 이 모임에는 늑대 외에도 친한 몇몇 동물들도 참가하는데, 검은 표범 바기라와 갈색 곰 발루는 거의 빠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늑대가 모인 가운데 우두머리인 아케라가 말했습니다. “모두 규칙을 알고 있겠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아케라는 크게 외친 후 말했습니다. “우리 식구 가운데 하나가 사람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여 키우려고 한다. 찬성하는가?” 그때 시어칸이 나타나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는 내 먹이야. 돌려줘!” 하지만 아케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다. 다른 녀석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어. 우리끼리 결정하는 거야.” 그러자 갈색 곰 발루가 커다란 몸을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나는 찬성하오. 사람 아이는 나쁜 짓을 하지 않소. 게다가 지혜가 있으니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오. 내가 잘 가르칠 테니 무리에 넣어 주시오.” 그러자 검은 표범 바기라도 입을 열었습니다. “새로운 아이에게 문제가 있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을 때는 다른 무엇으로 보상하면 살려 주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오. 보상은 반드시 누가 해야 한다고 정해지지는 않았소. 내가 들소 한 마리를 내놓을 테니 늑대 부부가 사람 아이를 기르도록 해 주시오.” “맞아. 아무 힘 없는 어린아이를 죽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바기라가 보상한다니 무리에 넣어 주자고.” 나이 든 늑대의 말에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도 좋다. 늑대 무리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잘 키워라.” 우두머리인 아케라가 말했습니다. 엄마 늑대는 기쁨에 겨워 모글리를 부드럽게 혀로 핥아 주었습니다.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모글리는 늑대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모글리는 힘도 세지 않고 날카로운 이도 없지만, 자유롭게 손을 쓸 수 있었기에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호랑이 시어칸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모글리를 노렸지만, 늘 발루와 바기라가 붙어 다녔고 또한 늑대 무리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모글리는 바기라와 발루에게 여러 가지 정글 법칙과 적을 공격하는 법, 덫을 피하는 법, 계절의 변화와 바람의 느낌을 알아내는 법, 올빼미의 말과 물고기의 움직임이 뜻하는 의미를 배웠습니다. 발루는 정글의 노래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리의 하나인 귀여운 아기 곰일지도 모르니까. “내게 아무도 덤빌 수 없어.” 처음으로 사냥을 한 아이는 자랑할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라. 정글이 얼마나 넓고, 아이는 얼마나 작은지를. 햇볕이 따스한 날 모글리는 갈색 곰 발루와 검은 표범 바기라와 함께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들소 한 마리와 맞바꿔서 정글의 식구로 받아들여진 거야. 그러니 너는 다른 동물은 공격할 수 있지만 절대 들소를 습격해서는 안 돼. 먹어서도 안 되고 말이야. 그게 정글의 법칙이거든. 바기라와 공부를 마치면, 발루가 모글리를 가르쳤습니다. 발루는 공부할 때는 엄격하여 모글리가 틀린 답을 대기라도 하면 한 대씩 꿀밤을 먹였습니다. 발루로서는 살짝 건드리는 것이지만 모글리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발루는 곰 가운데서도 힘이 무척 셌거든요. “오늘은 그동안 배운 것을 복습해 보자. 먼저 정글의 모든 네발짐승에게 통하는 암호를 말해 봐!” 발루의 물음에 모글리가 답했습니다. “우리는 한 핏줄, 너와 나!” “새의 암호는?” 모글리는 새 소리를 낸 다음 조금 전에 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좋아, 그러면 뱀의 암호는?” 모글리는 슛슛 하는 뱀 소리를 내고서 또 암호를 말했습니다. “훌륭해! 너는 털도 없고 꼬리도 없지만 우리 형제와 다름없어. 이젠 정글 어느 곳에 가도 문제가 없을 거야.” 발루가 모글리를 칭찬하자 검은 표범 바기라도 한마디 했습니다. “하지만 말이야, 원숭이 무리와는 어울리지 마. 녀석들은 위험하진 않지만 아주 예의가 없거든.” 그러나 며칠이 지나 바기라가 걱정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원숭이 무리가 모글리를 억지로 끌고 간 것입니다. 모글리는 아직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데다가 원숭이의 억센 힘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지요. 힘센 원숭이 두 마리가 모글리를 양쪽에서 잡고 날아가듯 나무를 타고 갔습니다. 너무도 빠른 속도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모글리는 어떻게 해서든 이 사실을 발루와 바기라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높은 하늘에 솔개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글리는 솔개의 울음소리를 내고 “우리는 한 핏줄, 너와 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솔개 한 마리가 쏜살같이 모글리 가까이 날아왔습니다. 솔개 중에서도 아주 날쌘 틸이었습니다. 모글리는 재빨리 말했습니다. “틸! 내가 가는 길을 잘 봐 두었다가 시오니 늑대들의 친구인 바기라와 발루에게 알려 줘.” 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이 ‘시원한 거리’라고 부르는, 정글 바깥쪽에 있는 폐허로 모글리를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옛날에는 무척 아름다웠을 것 같은 커다란 궁전이었습니다. 모글리! 너는 우리보다 손을 훨씬 잘 쓰더구나. 그 좋은 솜씨로 우리 잠자리를 만들어라. 원숭이 우두머리인 밴더 록이 말했습니다. 싫어. 바기라가 너희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 너희는 예의가 없어. 지금도 마치 나를 부하처럼 취급하잖아. 모글리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큰일 났어. 솔개 틸이 그러는데 모글리가 원숭이들에게 끌려갔대.” 바기라가 달려와 발루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그럼 당장 가야지.” 발루와 바기라는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비단구렁이 카를 만났습니다. 카는 정글에서 가장 큰 뱀으로, 길이가 십 미터나 되었습니다. “그리 급히 가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카의 물음에 발루가 답했습니다. “우리 친구 모글리가 원숭이들에게 끌려갔어.” “모글리라면 늑대가 키운 사람 아이 말인가?” “맞아, 도와주겠나?” “좋아. 그 아이와 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왠지 귀엽게 느껴졌거든.” 카가 돕겠다고 하자 바기라와 발루는 힘이 솟았습니다. 원숭이들은 비단구렁이 카를 가장 무서워했거든요. 한편 원숭이 대장 밴더 록은 모글리가 말을 듣지 않자, 화가 났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내 주는 수밖에 없지.” 밴더 록이 손짓하자 원숭이 무리는 모글리를 둥글게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번쩍이며 한 발씩 다가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으르릉! 우렁찬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바기라가 마치 한 줄기 검은 바람처럼 원숭이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바기라!” “모글리, 내가 이 녀석들과 싸우는 동안 빨리 달아나. 곧 발루와 카도 올 거야.” “카라니? 큰 비단구렁이 말이야?” 바기라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원숭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바기라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지금은 숫자를 믿고 덤비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바기라 또한 정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덤벼라! 모글리 너는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어.” 바기라의 외침에 원숭이들은 한꺼번에 덤벼들었습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엄청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고, 바기라의 발톱과 이빨은 금세 붉게 물들었습니다. “헉헉! 이건 끝이 없군. 너무 많아.” 바기라와 모글리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원숭이들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바기라도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고, 모글리도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밴더 록은 눈을 빛내며 외쳤습니다. “녀석들은 지쳤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쓰러질 거야.” 원숭이들은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모글리, 바기라! 힘내라. 내가 왔다!” 갑자기 발루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발루는 바기라보다 걸음이 느리기 때문에 늦게야 도착한 것입니다. 힘이 엄청난 발루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원숭이들은 맥없이 나가떨어졌습니다. “안 되겠다. 일단 피하자!” 우두머리 밴더 록의 말에 따라 원숭이들이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들 앞에는 무시무시한 카가 똬리를 튼 채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카는 커다란 꼬리를 들어 원숭이 무리 한가운데를 내리쳤습니다. 원숭이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카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곤두세웠다가 갑자기 돌리기도 하고, 왼쪽을 보는 듯하다가 갑자기 오른쪽을 향하기도 했습니다. 고개의 움직임에 따라 커다란 몸도 이리저리 꿈틀댔습니다. 커다랗고 긴 몸은 둥글게 말렸다가 펴지고 팔 자 모양이 되기도 하더니 마침내 언덕만 한 똬리를 틀었습니다. 카가 사냥할 때 춘다는 마법의 춤이었습니다. 모글리와 바기라, 발루도 넋을 잃고 카의 춤을 구경했습니다. 춤을 추고 난 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친구들의 허락도 없이 모글리를 데려간 것은 잘못이다. 발루나 바기라 심지어는 나에게도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오들오들 떨고만 있는 원숭이들을 잠시 쳐다보던 카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그 대가를 치르면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너희가 모글리를 함부로 데려간 것과 많은 원숭이가 죽거나 다친 것은 서로 비기기로 한다. 그리고 다시는 모글리를 괴롭히지 마라.” “아, 아, 알았습니다.” 밴더 록이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슛슛! 우리는 한 핏줄, 너와 나! 덕분에 살았어. 앞으로 네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내가 잡은 먹이를 모두 주겠어.” 모글리가 뱀의 암호로 인사를 하자 카는 모글리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말했습니다. “정말 용기 있고 예의 바른 아이로군.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꾸나.” 모글리가 위험을 겪은 이듬해에는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강은 바닥을 드러냈고 수풀은 누렇게 변했으며 동물들은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 내려가 물을 찾아야 했습니다. 정글의 어른 흰 코끼리 하티는 긴 코를 하늘 향해 높이 들고 ‘물터의 휴전’을 알렸습니다. 정글의 법칙에 따라 물터에서는 절대 사냥해서는 안 되며, 만약 법칙을 어기고 사냥을 한 동물은 사형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하루라도 물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모글리는 바기라, 발루와 함께 바닥을 드러낸 물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어칸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이제 정글도 벌거숭이 사람 꼬마가 뛰노는 곳이 되고 말았군.” 모글리는 말없이 시어칸을 노려보았고 바기라가 한마디 했습니다. “시어칸! 피 냄새가 나는걸. 또 누군가를 해쳤구나.” 시어칸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차갑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사냥했지. 모글리! 잊지 마라. 언젠가는 너도 내 먹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시어 칸은 등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바기라는 시어칸이 물을 마신 곳에 가서 냄새를 맡아 보고는 부르짖었습니다. “사람 냄새다. 시어칸은 사람을 해쳤어!” “뭐라고, 사람을? 이런 때 사람을 해치다니.” “대체 시어칸은 왜 사람을 해치는 거지?” 모글리가 묻자, 발로가 답했습니다. “지금은 정글의 동물들이 서로 다른 동물을 사냥하기 힘들거든. 그리고 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의 조상이 사람에게 혼난 일이 있어서도 그럴 거야. 호랑이는 앙갚음한다고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습격을 해. 시어칸처럼 말이야.” 찌는 듯한 더위도 지나가고 서늘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모글리는 훌쩍 커서 이제 바기라와 힘 겨루기를 할 정도로 튼튼해졌습니다. 그러나 바기라는 늘“시어칸을 조심하라.” 는 말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젊은 늑대들이 시어칸과 어울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너는 내가 잡은 들소 한 마리를 늑대들에게 주고 정글 식구로 받아들인 거야. 하지만 이제 네 부모님이나 우두머리 아케라는 늙었어. 그때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늑대들은 네 편을 들지 않을 수도 있어. 염려 마. 이젠 나도 튼튼해. 너처럼 날카로운 이빨은 없지만 머리가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마을로 내려가 사람이 쓰는 뜨거운 빨간 꽃을 가져오려고 해. 그러면 시어칸도 문제없어. 모글리가 말하는 뜨거운 빨간 꽃이란 다름 아닌 불입니다. 그날 밤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간 모글리는 몸을 숨기고 사람들이 불을 다루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저 빨간 꽃도 자꾸 먹이를 줘야 커지는구나. 먹이는 나무나 마른풀 같은 거네.’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알게 된 모글리는 사람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빨간 꽃이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훔쳐 정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빨간 꽃이 시들지 않도록 계속 먹이를 주며 보살폈습니다. 보름달이 뜬 밤, 늑대의 모임이 열렸습니다. 늘 함께하던 발루와 바기라도 있었지만,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는 승냥이 타바키와 시어칸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모글리는 늑대들의 형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야. 언젠가는 사람의 무리를 이끌고 올지도 모르니 쫓아내야 해. 시어칸의 부하가 된 타바키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기라가 반박했습니다. “모글리는 십 년 전에 들소 한 마리를 주고 받아들인 아이야.” 바기라의 말을 비웃듯 시어칸이 말했습니다. “십 년 전 들소 한 마리라면 이젠 아무런 가치가 없어.” 타바키의 꼬임에 넘어간 젊은 늑대들은 대부분 모글리를 향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모글리 편을 든 것은 우두머리인 아키라를 비롯한 모글리를 키워 준 부모 늑대와 나이 든 늑대들이었습니다. 만약 늑대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면 모글리 쪽이 무척 불리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다. 사람은 정글에서 쫓아내야 해. 놈을 없애자!” 시어칸이 외치자 젊은 늑대들이 모글리에게 덤벼들었고, 바기라가 몸을 날려 젊은 늑대들을 막아섰습니다. 그 틈을 타서 모글리는 숨겨 두었던 빨간 꽃을 들고나와 소리쳤습니다. “누구든지 덤벼라. 빨간 꽃의 먹이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비겁한 시어칸!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늑대들을 꼬드겨 나를 쫓아내고 늑대 무리를 공격할 생각이었지!” 화가 난 시어칸이 덤벼들었지만, 모글리가 휘두른 빨간 꽃에 몸을 데었습니다. 시어칸이 달아나자, 타바키와 몇몇 젊은 늑대들도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한 핏줄, 너와 나! 모글리는 형제들에게 약속한다. 시어칸의 가죽을 벗겨 올 것을!” 한 달 뒤 바위에서 물소 떼를 지켜보던 모글리에게 아케라가 말했습니다. “시어칸이 숨어 지내다가 드디어 돌아왔다는구나.” “잘됐네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와잉강거 강 골짜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거야. 낮에 돼지 한 마리를 먹어 치웠거든.” “그러면 지금은 몸이 둔하겠군요. 좋은 기회예요.” 모글리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물소 떼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모글리의 신호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물소 떼는 엄청난 속도로 골짜기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시어칸은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에 깼습니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 보니 골짜기로 물소 떼가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시어칸! 편히 낮잠을 자고 있다니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가장 힘이 센 물소의 등에 올라탄 모글리가 소리쳤습니다. 시어칸은 달아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뒤는 막혔고, 양쪽 골짜기는 너무 가팔라 돼지를 먹어 몸이 무거운 시어칸이 오르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결국 시어칸은 물소들에게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모글리는 시어칸의 가죽을 벗겨 둘러메고 정글로 돌아왔습니다. “약속한 대로 시어칸의 가죽을 벗겨 왔다. 이제는 나를 형제로 인정하겠는가?” 모글리 말의 모든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시어칸의 꼬임에 넘어가 잠시 모글리를 적으로 돌렸던 젊은 늑대들까지도 말입니다. 아케라와 부모 늑대는 모글리를 자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모글리는 누구나 인정하는 정글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기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약속을 지킨 의리 있는 형제이자 용감한 투사야. 이제 정글에서 너를 무시할 동물은 없어. 하지만 너는 사람이야. 사람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야 해. “나를 쫓아내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야. 누구나 자기와 핏줄이 이어진 무리와 함께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 하지만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 정글 식구들은 모두 너를 한 식구로 여기고 있으니까.” 바기라가 어딘가로 가더니 조금 후 들소를 한 마리 물고 나타났습니다. 자! 내가 잡은 들소야. 십 년 전 네 빚은 이로써 모두 갚은 거야. 이제 너는 자유로워졌어. 하지만 잊지 마. 나는 네 친구라는 사실을. 발루가 모글리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바기라 말이 맞아. 이제 너는 새로운 세계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 모글리는 발루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것이 설레기보다 깊이 정든 정글 식구들과 헤어진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가르쳐 준 발루와 바기라의 말인 만큼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모글리의 앞날을 축복하듯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인도를 사랑한 키플링. 조셉 루디야드 키플링(1865, 1936)은 인도에 있는 봄베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키플링의 부모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키플링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여섯 살 때 부모와 떨어져 영국에서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외로움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정글에 혼자 남겨진 정글북의 모글리는 바로 어린 시절 키플링의 모습과 닮았지요. 키플링은 대학을 졸업한 후 인도에서 7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인도의 원시림도 아주 좋아했지요. 인도의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쓴 소설이 바로 정글북입니다. 정글북으로 키플링은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았습니다. 키플링은 미국과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오가며 꺼진 불빛, 용기 있는 지휘자, 킴 등 많은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하여 190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자연과 동화된 삶. 정글북은 조셉 루디야드 키플링의 대표적인 아동 문학 작품입니다. 1894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이듬해인 1895년에는 인기에 힘입어 두 번째 정글북이라는 제목으로 속편도 출간되었습니다. 정글북은 속편을 합쳐서 열다섯 편의 동물 이야기로 꾸며져 있으며, 그중 여덟 편에 모글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늑대가 키운 소년 모글리는 비열한 호랑이와 싸우거나 빨간 늑대를 무찌르기도 하며, 늑대 무리와 함께 인간의 탐욕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정글북은 여러 동물의 특성이나 본능이 생동감 있게 잘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동물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으로 표현하여 동물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 외 일곱 편은 각각 다른 단편입니다. 하얀 바다표범, 리키 티키 타비, 코끼리 추마이 등으로, 따뜻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요. 오늘날에도 정글북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된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준 문학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우리나라에는 늑대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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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어느 날 이름난 탐정인 셜록 홈스는 친구이자 의사인 왓슨과 길을 걷던 중 런던 경시청의 레스트레이트 경감을 만났습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레스트레이트 경감에게 홈스가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표정을 보니 뭔가 골치 아픈 사건이 있는 것 같군요?"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작은 사건이지요. 하지만 이상한 점이 많아서요."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나요?" 홈스와 함께 있던 왓슨이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정신병자가 저지른 것이 틀림없어요. 나폴레옹을 몹시 미워하는지 나폴레옹 흉상만 골라서 부숴 버렸거든요. 더구나 남의 집에까지 들어가서 말입니다." "나폴레옹 흉상을 부수러 남의 집에까지 들어갔단 말입니까? 이상하군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홈스는 레스트레이트 경감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부탁했습니다. "나흘 전이었습니다. 케닝턴 거리에서 미술품을 파는 모스 허드슨이라는 사람의 가게에서 일어난 사건이지요. 허드슨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가 진열해 둔 석고상 중에서 나폴레옹 흉상만 골라 깨뜨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에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난 거예요." "저런! 어젯밤에도요?" "시내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바니컷 박사는 나폴레옹을 존경해서 집에 나폴레옹에 관한 책과 그림이나 기념품을 많이 모아 두고 있었답니다. 며칠 전에 바로 사건이 일어난 모스 허드슨 가게에서 나폴레옹 흉상을 두 개 사서 하나는 집에, 또 하나는 병원에 두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집에 있는 흉상이 깨져 있었다지 뭡니까? 놀라서 병원에 가 보니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흉상이 깨져 있었답니다." "기묘한 사건이로군요. 그런데 바니컷 박사의 집과 병원에서 부서진 흉상은 모두 모스 허드슨 가게에 있던 것과 똑같은 모양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두 똑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병자라면 어떻게 나폴레옹 흉상이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아냈는지 궁금하군요." "맞아! 우연히 나폴레옹 흉상을 보았다면 발작을 하여 깨뜨릴 수도 있겠지만 집 안에 있는 흉상까지 깨뜨렸다는 건 좀 이상한걸." 왓슨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습니다. "정신병자들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일도 저지를 수 있으니까요." 레스트레이트 경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지만, 홈스는 계속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홈스는 곤히 자고 있는 왓슨을 깨웠습니다. "레스트레이트 경감에게서 연락이 왔어. 또 사건이 일어났으니 빨리 와 달라고 말이야." 서둘러 움직인 홈스와 왓슨은 시내에 있는 어느 이층집 앞에서 레스트레이트 경감을 만났습니다. 레스트레이트 경감은 실내복을 입고 있는 중년 남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또 나폴레옹 흉상과 관계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이 죽었어요." "살인 사건이로군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레스트레이트 경감은 함께 있던 실내복 차림의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하커 씨! 겪으신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하커라고 불린 남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중앙통신사 기자인 하커입니다. 원고를 정리하느라고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지요." "그런데 새벽에 아래층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혹시 도둑이라도 든 게 아닌가 생각하여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손에 들고 내려가 보니, 창문이 활짝 열려 있고 선반 위에 놓아 둔 나폴레옹 흉상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급히 불을 밝히고 밖으로 나갔는데 문 앞에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쓰러진 사내를 살펴보니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경찰에 연락을 했죠." "피살된 남자는 누군가요?" 홈스가 레스트레이트 경감에게 물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외지에서 온 사람이겠죠.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다만 주머니에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홈스는 경감이 건네주는 사진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사진에 있는 사람은 눈썹이 짙고 턱 선이 굵으며 어딘가 날카롭게 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홈스는 사진을 돌려주며 물었습니다. "그 나폴레옹 흉상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빈집에 부서져 있었답니다. 같이 가 봅시다." 홈스와 왓슨은 레스트레이트 경감을 따라갔습니다. 나폴레옹 흉상이 깨져 있는 곳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들고 왔을까요?" 홈스의 물음에 레스트레이트 경감이 답했습니다. "빈집이니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죠." "하지만 여기에 오기 전에도 빈집이 몇 채 있었거든요." "하긴 그렇군요. 왜 그랬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본래 정신병자란 엉뚱한 일을 하니까요." "글쎄요.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레스트레이트 경감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수사하실 생각인가요?" "먼저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 친구들을 조사하려고 합니다." "괜찮다면 이 사진을 좀 빌려 주십시오. 조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여섯 시에 집에서 다시 모입시다." 홈스와 왓슨은 나폴레옹 흉상 사건이 처음 일어난 케닝턴 거리의 모스 허드슨 가게로 가서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 나폴레옹 흉상은 어디서 산 것입니까?" "스텝리의 처치 거리에 있는 겔더 상회에서 샀습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홈스가 레스트레이트 경감에게서 빌려 온 사진을 보여 주며 허드슨에게 물었습니다. "앗! 이 사람은 베포입니다." "여기에서 일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에 그만두었습니다. 조각품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았는데." 허드슨은 놀라움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게를 나오면서 홈스가 왓슨에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겔더 상회로 가 보세." 스텝리에 있는 겔더 상회의 넓은 뜰에는 조각상의 재료로 쓰이는 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많은 기술자들이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홈스는 지배인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장부를 조사하여, 일 년 전에 나폴레옹 흉상을 여섯 개 만들었으며 세 개는 모스 허드슨 가게에, 나머지 세 개는 하딩 형제의 가게에 팔았음을 알아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사람을 아십니까?" 홈스가 베포의 사진을 꺼내 보였더니 지배인은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베포! 맞아요, 베포예요. 일 년 전쯤까지 이곳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경찰이 와서 잡아갔지요." "친구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던 중이었다고 했어요. 경찰의 눈을 피해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죠. 여기에서는 먹고 자고 할 수 있으니 별로 나갈 일이 없거든요. 솜씨가 무척 뛰어났었는데.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홈스와 왓슨은 이번에는 나머지 나폴레옹 흉상 세 개를 샀다는 하딩 형제의 가게로 갔습니다. "그 사건이라면 신문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하커 선생님은 저희 가게의 단골이며, 그 나폴레옹 흉상은 꽤 오래전에 팔았습니다." "하커 선생 말고 누가 샀는지 알 수 있는지요?" 홈스의 물음에 하딩은 장부를 살펴보더니 말했습니다. "치즈위크의 레버넘 베일에 있는 브라운 씨와 레딩의 글로브 거리에 사는 샌드퍼드 씨가 사 가셨습니다." 하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홈스는 수첩에다 계속 뭔가를 적었습니다. 하딩 형제의 가게를 나온 홈스와 왓슨은 베이커 거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레스트레이트 경감을 기다렸습니다. 곧 들어온 레스트레이트 경감은 바로 사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하커 씨 집 앞에서 죽은 사람은 나폴리 태생의 피에트로 베누치라는 사람인데 유명한 불량배였습니다." "나폴레옹 흉상을 훔치던 범인은 무슨 일 때문에 피에트로에게 쫓기다가 오히려 피에트로를 죽인 것 같습니다." "훌륭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흉상이 부서진 것에 대해서는 조사를 안 하셨군요?" "또 그 나폴레옹 흉상 얘기입니까? 그것보다는 살인범을 잡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요." "하지만 살인범을 잡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흉상에 얽힌 비밀을 풀어야 합니다." 홈스의 말에 레스트레이트 경감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습니다. "비밀이라니요? 그 흉상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겁니까?"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범인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폴레옹 흉상이 있는 곳을 알아냈고, 또 그것을 훔쳐 밝은 곳에서 깨뜨렸습니다." "밝은 곳이라니요?" "생각해 보십시오. 흉상이 깨진 곳은 가게와 병원 안으로, 모두 밝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하커 씨의 집에서 훔친 흉상은 한참 떨어진 빈집에서 깨뜨렸지요. 도중에 빈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하긴 그게 이상하긴 했어요." "그 빈집은 가로등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흉상은 가로등 밑에 깨져 있었고요." "범인은 흉상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범인이 노리는 것은 나폴레옹 흉상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얘기죠." "그럴 법하군요." "그러면 오늘 밤에는 우리와 함께 치즈위크를 조사해 보도록 합시다. 그곳에는 나머지 나폴레옹 흉상을 사 간 사람이 있으니 아마도 범인이 나타날 겁니다." 깊은 밤 홈스와 왓슨, 레스트레이트 경감은 치즈위크의 레버넘 별장 근처의 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 하나가 원숭이처럼 날쌔게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잠시 후 그 그림자는 한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집을 빠져나오더니 가로등 아래로 가서 들고 있던 것을 힘껏 바닥으로 내던졌습니다.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쭈그리고 앉아 바닥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다!" 홈스가 재빠르게 그 그림자를 덮쳤고 레스트레이트 경감이 수갑을 채웠습니다. 체포된 것은 다름 아닌 사진에 있던 인물 베포였고, 베포가 던져 깨뜨린 것은 나폴레옹 흉상이었습니다. 홈스는 부서진 나폴레옹 흉상의 조각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찮은 석고 조각일 뿐이었습니다. 베포를 체포해서 경찰서로 돌아가는 레스트레이트 경감에게 홈스가 말했습니다. "내일 저녁 여섯시에 우리 집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경감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다음 날 저녁 레스트레이트 경감과 왓슨은 홈스의 집에 있었습니다. 홈스는 누군가를 몹시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드디어 홈스가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쑥한 차림에 중절모를 쓴 사내는 홈스에게 나폴레옹 흉상을 보이며 말했습니다. 바로 베포가 깨뜨린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홈스는 사내에게 돈을 지불한 다음 조각상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내가 돌아간 뒤 홈스는 나폴레옹 흉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채찍으로 힘차게 내려쳤습니다. 나폴레옹 흉상은 단번에 부서지면서 하얀 석고 조각이 우르르 떨어졌습니다. 홈스는 그 조각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소리를 지르면서 조각 하나를 높이 쳐들어 보였습니다. 그 하얀 석고 조각에는 건포도처럼 검고 둥근 것이 박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르지아 집안의 유명한 흑진주를 보십시오!" 레스트레이트 경감과 왓슨은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지, 진주라니?"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주입니다. 이탈리아의 캘로나 공작이 가지고 있던 이 진주가 겔더 상회의 공장에서 만든 여섯 개의 나폴레옹 흉상 가운데 하나, 즉 이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죠." 홈스는 마치 무대에 선 배우처럼 왓슨과 레스트레이트 경감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레스트레이트 경감님, 이 흑진주가 도난당했을 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물론이죠. 이 년쯤 되었나요? 보르지아 가문의 것으로, 캘로나 공작이 사서 부인에게 선물했는데 도난당하고 말았죠. 그때 공작 부인의 하녀였던 이탈리아 여인이 의심스러웠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녀는 그저께 밤에 죽은 피에트로 베누치의 여동생이었죠. 그 하녀는 훔친 진주를 오빠에게 건넸고 그것을 다시 베포가 빼앗았던 겁니다." "베포가? 그렇다면 베포와 피에트로 베누치는 서로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요?" "맞아요. 베포는 피에트로를 칼로 찌른 뒤 진주를 빼앗아 도망친 것이죠." "그 사건으로 베포가 감옥에 간 것이로군." 왓슨이 말했습니다. "맞네, 왓슨! 진주를 가지고 도망친 베포는 겔더 상회에 숨어서 지냈지." "그런데 베포는 경찰이 체포하러 오자 갖고 있던 진주를 막 만들어 낸 여섯 개의 나폴레옹 흉상 가운데 하나에 숨긴 것이지. 석고상은 아직 굳지 않아서 말랑말랑했으니까." "기가 막히는군." "아마도 베포는 감옥을 나와 흑진주를 찾으려 했겠지." "그러나 베포가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이에 나폴레옹 흉상은 팔리고 만 거야. 베포는 교도소를 나온 뒤 겔더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여섯 개의 나폴레옹 흉상이 도매로 팔려 간 곳을 알아냈지. 그리고 모스 허드슨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해서 장부를 훔쳐보고 누구에게 팔렸는가를 조사한 거야." "그래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그만둔 것이로군요. 다 알아냈으니까." 레스트레이트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습니다. 처음에 모스 허드슨 가게에서 깨뜨린 흉상 안에서 진주가 나오지 않자, 바니컷 박사의 병원에 있는 것을 훔쳤고 다시 하커 씨 집에서 흉상을 훔친 것이죠. 그런데 하커 씨 집에서 흉상을 가지고 나오다가 피에트로와 맞부딪힌 것이었죠. 피에트로도 진주를 찾기 위해 베포를 뒤쫓고 있었거든요." "놀란 베포는 칼을 휘둘러 피에트로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었죠. 하지만 그 흉상 안에도 진주는 없었어요. 또 레버넘 별장에서 가지고 나온 흉상에도 없었으니 남은 것은 하나뿐이지요?" "그래서 나는 마지막 흉상을 산 샌드퍼드 씨에게 연락을 해서 비싼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래서 보시다시피 이 진주를 찾은 것입니다." "정말 훌륭하군요! 여섯 개의 나폴레옹 흉상에 그런 비밀이 담겨 있을 줄이야." "어쨌든 홈스 씨 덕분에 또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건을 보고하면서 진주를 캘로나 공작께 돌려드리도록 하죠. 홈스 씨께는 공작께서 후한 사례를 하실 겁니다." 홈스에게 진주를 건네받는 레스트레이트 경감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습니다. 탐정 문학의 아버지, 아서 코난 도일. 아서 코난 도일(1859~1930)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든버러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소설 창작에 깊이 빠져 있었던 코난 도일은 스트랜드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에드거 앨런 포나 에밀 가보리오의 추리 방법과 비슷한 소설을 연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셜록 홈스의 모험입니다. 어떤 복잡한 사건도 뛰어난 추리로 해결하는 아마추어 탐정 홈스의 모델은 바로 코난 도일의 선생님인 조셉 벨 교수라고 합니다. 벨 교수는 찾아온 환자가 말을 하기도 전에 얼굴만 보고도 그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셜록 홈스의 모험이 큰 인기를 끌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면서 코난 도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추리 작가가 되었습니다. 셜록 홈스의 모험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24회에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스가 폭포에서 떨어져 죽는 이야기로 끝을 맺자 독자들은 홈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상장(죽은 사람을 기리는 표시)을 달기도 하고 출판사에 항의 전화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영국 런던에 '셜록 홈스의 집'이 있을 정도로 코난 도일은 영국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감각을 쓰는 탐정을 창조하다. 나폴레옹 흉상만 훔쳐서 부수는 도둑의 출현, 그리고 살인 사건! 레스트레이트 경감이 살인 사건에만 주목하는 반면 셜록 홈스는 살인 사건과 나폴레옹 흉상 사이의 관계를 추리하면서 범인을 잡아냅니다. 아주 작은 단서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홈스는 몸의 모든 감각을 써서 사건을 해결하지요. 홈스가 세기의 명탐정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홈스의 모델이 된 조셉 벨 교수는 늘 의대생들에게 "의사는 눈, 귀, 코, 손, 머리를 다 써야 한다."며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셜록 홈스라는 인물을 만드는 데 쓰인 것뿐 아니라 코난 도일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코난 도일은 책상에 앉아 아이디어를 짜내지 않고 여행이나 조사를 통해 소재를 얻고 작품을 썼습니다.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가하여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왕실로부터 '경'이라는 호칭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호기심이 많고 왕성한 창작욕을 지닌 코난 도일은 추리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과학 소설과 역사 소설도 많이 발표했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세계나 마라코트 심해와 같은 소설들은 공상 과학 소설의 대명사 쥘 베른의 작품들과 견줄 정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행복한 왕자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유럽의 어느 아름다운 도시에 ‘행복한 왕자’ 동상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온몸이 순금으로 덮여 있고 두 눈은 반짝이는 푸른 에메랄드였지요. 그리고 허리춤에 찬 칼자루에는 커다란 루비가 박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 제비 한 마리가 행복한 왕자 동상이 있는 도시에 날아왔습니다. 친구들은 오래전에 모두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고 홀로 뒤처진 제비였습니다. “오늘 밤은 어디에 머무르면 좋을까?” 주위를 둘러보던 제비는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행복한 왕자 동상을 보았습니다. “여기가 좋겠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 기막히게 멋진 장소야.” 제비는 그렇게 행복한 왕자 동상의 두 발 사이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멋지다! 오늘 밤은 황금으로 덮인 방에서 잘 수 있겠어. 푹 자고 내일 아침에는 따뜻한 남쪽으로 가야지.” 제비가 막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커다란 물방울이 제비의 등에 뚝 떨어졌습니다. “앗, 차가워! 응? 정말 이상한 일이네. 하늘엔 구름 한 조각 없고 별이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데 비가 오다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 위해 날개를 펴고 고개를 든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왕자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차가운 물방울은 비가 아니라 행복한 왕자가 흘린 눈물방울이었던 것입니다. 대체 행복한 왕자는 무슨 슬픈 일이 있었기에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행복한 왕자란다.” “행복한 왕자라면서 왜 울고 있어요? 당신이 흘린 눈물 때문에 온몸이 젖었잖아요!” 제비의 투정에 행복한 왕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슬픔이 무언지 모를 정도로 행복하게 살았던 왕자란다. 낮에는 꽃밭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밤에는 커다란 방에서 무도회를 열어 신나게 춤을 추었지. 난 그렇게 살았고 죽을 때조차 행복하게 눈을 감았지. 그런데 내가 죽고 난 뒤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려고 동상으로 만들어, 이렇게 높은 곳에 세워 놓았단다. 그래서 난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 됐지.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도 불쌍하게 살고 있더구나. 그 모습을 보고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니? “어떤 모습이 그렇게 슬퍼서 눈물을 흘렸나요?” 행복한 왕자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저쪽 골목에 가난한 집이 있어. 문이 열려 있어서 항상 어떤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단다. 몹시 지쳐 보이는 얼굴을 하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앙상하게 마른 데다가 손은 온통 바늘에 찔린 자국으로 빨갛지. 바느질하는 여인이거든. 그 집 한쪽에 있는 침대에는 조그만 사내아이가 누워 있어. 병이 났나 봐. 하지만 엄마는 돈이 없어서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갈 수도 없어. “저런, 불쌍해라!”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를 들은 제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은 제비야! 내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서 저 집에 가져다줄 수 있겠니? 나는 발이 받침대에 붙어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구나.” 행복한 왕자가 부탁했지만, 제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친구들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먼 곳까지 가려면 지금 잠을 자야 해요. 미안해요.” “제비야!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없겠니? 저 아이는 병원에 가지 않으면 위험해. 엄마가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구나.” 제비는 무척 슬픈 얼굴을 하는 행복한 왕자를 보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긴 추워서 오래 있기 힘들지만, 왕자님이 그렇게 부탁하시니 들어드리죠. 그러면 하룻밤 더 있어야 하겠네요.” “고맙다, 작은 제비야.” 슬퍼 보이던 행복한 왕자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얼굴을 본 제비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칼자루에 박힌 붉은 루비를 뽑아 부리로 물고 지붕 위를 날아 골목에 있는 작은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한 제비는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이가 괴로워하며 침대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데도, 엄마는 너무 피곤했는지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제비는 창문으로 날아 들어가 식탁 위에 루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침대 주위를 날면서 날개로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아이의 열을 내려 보려고 했습니다. 잠시 후 아이는 기분이 좋아진 듯 곤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잠이 들자, 제비는 창문을 빠져나왔습니다. 행복한 왕자에게로 돌아온 제비는 자기가 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아, 그래? 정말 좋은 일을 했구나.” “참 이상해요. 추운 밤인데도 몸이 무척 따뜻하거든요.” 제비의 말을 들은 행복한 왕자가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란다.” 행복한 왕자의 말을 들으며 제비는 아주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자 제비는 연못으로 날아가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연못을 지나던 사람이 제비를 보고 말했습니다. “정말 놀랍군. 추운 겨울이 다 되어 가는데 제비가 있다니!” 밤이 되었습니다.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올라 도시 전체를 비추었지요.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떠날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러자 행복한 왕자가 말했습니다.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더 있어 주지 않으련?” “친구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꼭 가야만 해요.” 제비야, 저 멀리 지붕 밑 다락방에 젊은 청년이 보인단다. 청년은 부탁받은 글을 써야 하는데,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그럴 수가 없단다. 먹을 것도 없고 난롯불도 꺼졌거든. 미안하지만 한 번 더 심부름해 주지 않으련? "정 그렇다면 제가 하룻밤만 더 여기 있기로 하지요.” 마음씨 고운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말에 또 한 번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루비를 가져다줄까요?” “안타깝게도 이제 루비는 없단다. 내 눈이 에메랄드로 되어 있으니까 하나를 뽑아서 청년에게 가져다주렴. 이걸 팔면 먹을 것과 땔감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왕자님, 그런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제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제비야, 작은 제비야. 제발 내가 말한 대로 해 주렴. 눈은 하나만 있어도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행복한 왕자의 간절한 부탁에 제비는 할 수 없이 파랗게 빛나는 눈을 하나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파란 에메랄드를 물고 젊은이가 살고 있는 지붕 밑 다락방으로 날아갔습니다. 다락방 안에서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비는 살짝 창문으로 날아 들어가 청년의 책상에 파란 에메랄드를 놓고 빠져나왔습니다. 문득 책상 위에 있는 반짝이는 에메랄드를 발견한 청년은 기쁨에 소리쳤지요. 아니, 이게 웬 보석이지? 아하, 아마도 내 작품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몰래 가져다 놓은 모양이군. 이 보석을 팔면 먹을 것과 땔감을 살 수 있겠어. 이제 밥을 먹고 몸을 녹이면 기운을 차려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청년은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나갔습니다. 보석상에게 보석을 팔기 위해서지요. 날이 밝자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정말 떠나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러나 행복한 왕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더 있어 다오.” 벌써 겨울이 다 됐어요. 이제 곧 눈이 내릴 거예요. 저는 떠나야만 해요. 남쪽에서 겨울을 나야 하거든요.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고요. 하지만 왕자님을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내년 봄에는 왕자님이 사람들에게 나눠 준 보석을 대신할 아주 아름다운 보석을 두 개 가져다드릴게요. 장미보다 더 붉은 루비와 바다보다 더 푸른 에메랄드를 가져오겠어요. 그러나 행복한 왕자는 제비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길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제비야! 저 아래쪽 길에 말이야. 어린 성냥팔이 소녀가 있단다. 그런데 성냥을 물에 빠뜨려서 전부 못 쓰게 되어 버렸어. 만약 돈을 벌어 가지 않으면 소녀는 아버지한테 혼이 날 거야. 그러니 남은 내 눈을 저 소녀에게 가져다주렴. 그러면 아버지한테 혼나지 않을 거야.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비는 슬픈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러면 하룻밤만 더 왕자님 곁에 남아 있기로 하죠. 하지만 왕자님 눈을 뽑을 수는 없어요. 그러면 왕자님은 장님이 되어,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요. “작은 제비야, 제발 부탁이야. 내가 말한 대로 해 주렴.” 제비는 할 수 없이 행복한 왕자의 남은 눈을 뽑아 물고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의 손바닥에 보석을 떨어뜨렸지요. “어머나, 예쁜 보석이네. 됐어, 이걸 팔면 아버지께 혼나지 않을 수 있어.” 소녀는 기쁜 듯 소리치면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돌아가서 말했습니다. “이제 왕자님은 장님이 되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네요. 할 수 없지요. 제가 곁에 있을 수밖에요.” “아니야, 넌 내일 남쪽으로 가야 한단다. 벌써 추워졌잖니.”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왕자님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어요.” 제비는 이렇게 말하고 행복한 왕자의 발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제비는 하루 종일 행복한 왕자의 어깨 위에 앉아서 그동안 날아다니며 보고 들었던 먼 나라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귀여운 작은 제비야, 너는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구나. 하지만 제비야,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해 주렴. 며칠을 보지 못했더니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구나.” 그래서 제비는 추운 날씨에도 도시 곳곳을 날아다니며 길과 골목마다, 그리고 집마다 일어나는 온갖 슬픈 일들과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행복한 왕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제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행복한 왕자는 말했습니다. “작은 제비야, 내 몸은 금으로 덮여 있단다. 금을 조금씩 벗겨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렴. 사람들은 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러면 왕자님 모습이 흉해질 텐데요.” “모습이 흉한 게 무슨 문제겠니? 사람들이 행복하면 되지.” 제비는 부리로 행복한 왕자의 몸에 덮여 있던 금을 조금씩 떼어 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반대로 금칠이 벗겨진 행복한 왕자의 모습은 점점 흉해졌습니다. 날씨는 몹시 추워졌지만, 제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금 조각을 물어 날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흰 눈으로 뒤덮인 지붕과 길은 은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처마에는 고드름이 달렸고,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녔습니다. “제비야, 이제 눈이 내리는구나. 어서 남쪽으로 가거라.” “아녜요. 저는 왕자님 곁에 있을래요. 왕자님은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고, 이제 금칠마저 벗겨져 누구도 쳐다보지 않으니, 제가 곁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그날 밤 작은 제비는 결국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행복한 왕자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너무나 가슴이 아픈 나머지 납으로 만든 심장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나! 행복한 왕자 동상이 왜 저렇게 흉하게 변했지? 금칠도 벗겨지고 말이야.” 우연히 행복한 왕자 동상을 쳐다본 여인이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제비가 물어다 준 금 조각을 받았지만, 그것이 행복한 왕자의 몸을 덮고 있던 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곧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저마다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시장도 있었지요. “이런, 금칠만 벗겨진 것이 아니라 눈과 칼자루에 박혀 있던 보석들도 없어졌네.” “저 동상은 우리 마을의 상징이야. 저렇게 흉한 모습으로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시장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말이 맞습니다. 저 동상보다 더 훌륭한 동상을 만들어 세우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장은 유명한 조각가에게 행복한 왕자 동상을 다시 만들도록 했습니다. “저 동상은 어떻게 할까요?” 아래 직원이 묻자, 시장이 말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더 훌륭한 동상을 세울 것이니 치워 버리게.” 시청 직원들은 행복한 왕자 동상을 밧줄로 묶어 기둥에서 끌어 내렸습니다. 그때 죽은 제비의 몸이 행복한 왕자의 발밑에서 기둥으로 떨어졌습니다. 시청 직원은 행복한 왕자 동상을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는 용광로에 넣었습니다. 행복한 왕자 동상은 금방 녹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납으로 만든 심장은 녹지 않았습니다. 녹지 않고 남아 있던 심장을 청소부가 발견하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하느님은 천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에서 가장 소중한 것 두 가지를 가져오너라.” 마을로 내려간 천사는 행복한 왕자를 받치고 있던 기둥 위에 있는 죽은 제비의 몸과 쓰레기통에 버려진 행복한 왕자의 납 심장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행복한 왕자의 깨진 심장과 죽은 제비를 본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구나, 작은 제비야. 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천국의 정원에서 영원히 노래를 부르며 살아라. 그리고 행복한 왕자는 빛나는 도시에서 영원히 그 이름을 찬양하도록 하노라.” 아일랜드가 낳은 천재 문인. 오스카 와일드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지요. 하지만 식민지라 해도 오스카 와일드는 유복하고 지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안과 의사이자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학구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오스카 와일드는 아일랜드의 명문인 더블린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으로 유학하여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학업보다 문학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이탈리아의 라벤나라는 마을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으로 젊은 문학가에게 주는 ‘뉴디기트 상’을 받았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시뿐만 아니라 빼어난 소설과 희곡을 쓴, 아주 재능이 뛰어난 작가입니다. 불행하게도 마흔다섯 살에 생을 마친 오스카 와일드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 천재 문인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인간을 향한 순수한 사랑. 흔히 사람들은 오스카 와일드를 탐미주의의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탐미주의’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예술가들은 인생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고민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탐미주의자이지요. 오스카 와일드는 이러한 탐미주의를 처음으로 이야기했답니다. 하지만 1888년 같은 제목의 동화집에 발표한 행복한 왕자는 그런 탐미주의를 넘어 인간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각으로 썼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희생하는 행복한 왕자와 제비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름다움 이상의 순수하고 고귀한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 작품은 발표될 무렵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영국의 물질주의를 풍자한 것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에게까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두고두고 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정환 선생이 1912년 왕자와 제비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해 소개했습니다.
벽을 드나드는 남자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파리 몽마르트르에 듀티윌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코안경을 쓰고 짧은 턱수염을 기른 듀티윌은 성격이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요. 듀티윌은 등기청의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겨울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버스를 타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걸어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듀티윌에게는 남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벽을 통과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듀티윌은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마치 문으로 드나드는 것처럼 쉽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듀티윌은 서른세 살 때 자신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전기가 잠시 끊겨 초를 찾으려고 방 안을 헤매고 있었는데, 전기가 들어온 다음 보니 자신이 방이 아닌 복도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방문은 완전히 잠겨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어리둥절했습니다. 벽을 뚫고 복도로 나왔다면 다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듀티윌은 벽을 마주하고 서서 크게 숨을 쉰 다음 곧장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치 벽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있는 듯 벽을 지나 방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듀티윌은 믿을 수 없어 다시 실험해 보았습니다. 방에서 벽을 마주하고 섰다가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이번에도 듀티윌은 벽을 지나 거실로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공기처럼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이 듀티윌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듀티윌은 자신의 능력이 신기했지만 무섭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듀티윌은 병원을 찾았습니다. “별 이상은 없지만, 갑상선의 기능이 다른 사람과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싫다면 일이나 운동을 해서 몸을 피곤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 약을 일 년에 두 알씩 먹도록 하십시오.” 의사는 이렇게 말하며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듀티윌은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말에 안심하며 약을 한 알 먹고 나머지 한 알은 서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듀티윌이 하는 일은 몸이 아닌 머리를 쓰는 일이었고, 취미 또한 우표 수집이었기 때문에 별로 피로할 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자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려,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남아 있게 되었지요. 듀티윌은 무척 조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벽을 드나드는 능력을 사용할 일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레퀴에가 과장으로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느 날 듀티윌의 상관이었던 무롱 과장이 그만두고 레퀴에 과장이 새로 왔습니다. 레퀴에 과장은 출근하는 첫날부터 듀티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듀티윌의 작은 코안경과 턱수염이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레퀴에 과장은 듀티윌이 하는 일마다 트집을 잡았고 작은 실수라도 하면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자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이걸 일이라고 하는 건가?” 그날도 듀티윌은 레퀴에 과장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듀티윌이 쓴 서류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듀티윌은 여러 번 고쳐 써 보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사용하던 문구를 썼고 또다시 레퀴에 과장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몇 번이나 주의를 줘도 알아듣지 못하다니. 자네는 상관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건가?” 레퀴에 과장은 호통을 치며 듀티윌을 자신의 방 뒤쪽의 어두운 골방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듀티윌은 무척 속이 상했습니다. ‘정말 너무하는군. 틀린 것도 아니고 단지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렇게 야단을 치다니. 앙갚음을 해 줄 방법이 없을까?’ 문득 듀티윌에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듀티윌은 레퀴에 과장 방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기침을 했습니다. “에헴! 에헴!” 책상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레퀴에 과장은 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듀티윌의 머리가 마치 박제한 사슴 머리처럼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헉! 저, 저게 뭐야?”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듀티윌의 머리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레퀴에 과장! 당신은 참으로 못된 사람이야.” 깜짝 놀란 레퀴에 과장은 한참 동안 듀티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순간 듀티윌은 얼른 머리를 벽에서 빼내고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곧 레퀴에 과장이 듀티윌의 방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과장님?” 듀티윌이 시침을 뚝 떼고 말했습니다. 레퀴에 과장은 듀티윌을 찬찬히 쳐다보다가 멋쩍은 듯 말했습니다. “아, 아닐세. 아무것도 아, 아니야.”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듀티윌은 틈날 때마다 벽으로 얼굴을 내미는 행동을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벽에 얼굴을 내민 채 아무 말 없이 과장을 노려보기만 했고, 또 어떤 날에는 잘못을 꼬집어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끔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상체까지 내밀고 양팔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나는 가루가루다! 너를 잡아먹을 테다.” ‘가루’란 늑대를 뜻하는 말이었으니, 레퀴에 과장은 듀티윌을 늑대 인간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레퀴에 과장은 불과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몸이 마르더니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포크로 스프를 떠 먹는다거나 경찰관을 보면 경례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레퀴에 과장을 쫓아낸 듀티윌은 자신의 성격이 변했음을 느꼈습니다. 여태까지 조용하게 지내던 듀티윌은 레퀴에 과장과 싸움을 벌여 승리하자 가슴 깊은 곳에 있던 도전 정신이 용솟음친 것입니다. 듀티윌은 새로운 모험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행을 터는 일이었습니다.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남들이 못 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듀티윌은 먼저 경찰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가루가루라는 사람입니다. 경찰 여러분이 요즘 너무 한가한 것 같아 내일 저녁 여덟시에 센 강 옆에 있는 가장 큰 은행에서 돈을 훔치고자 하니 특별히 경계를 잘 서 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은 정신병자가 보낸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주 엄중한 경계를 폈습니다. 그러나 듀티윌은 아무도 모르게 은행의 두꺼운 벽을 통과해서 금고에 있는 돈을 한 주머니 가득 가지고 나왔습니다. 분홍색 분필로‘가루가루’라는 사인까지 남기고 말입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뤼팽보다 더욱 뛰어난 도적 가루가루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렸고, 사람들은 모두 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뒤로 듀티윌은 날마다 은행이나 보석 가게, 심지어는 부잣집에 들어가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가루가루의 정체를 무척 궁금해하면서 뛰어난 솜씨에 감탄을 했습니다. 신문에는 날마다 가루가루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우체국에는 주소도 없이 가루가루에게 보내는 편지가 가득 쌓였습니다. 이제 가루가루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등기청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듀티윌은 어디를 가나 하루 종일 가루가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통에 짜증이 났습니다. 이제 슬슬 비밀을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듀티윌은 심각한 얼굴로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사실 가루가루는 바로 나야.” 듀티윌의 고백에 동료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듀티윌이 가루가루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동료들은 듀티윌을 놀려 댈 뿐이었습니다. “자네가 가루가루란 말인가? 그렇다면 오늘은 어느 은행에 들어가 돈을 훔치려나?”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자 화가 난 듀티윌은, 그날 저녁 보석 가게에 들어가 진열장을 깨서 물건을 꺼내 놓고 경찰이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며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가루가루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부러 경찰에 잡힌 것입니다. 듀티윌이 감옥에 갇힌 다음 날 교도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듀티윌의 방에 교도소장의 금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란 간수들은 시계를 빼앗아 다시 교도소장의 방에 가져다 두었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 듀티윌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히게도 다음 날에는 교도소장 방에 있던 소설책까지 듀티윌의 머리맡에 있었습니다. 또한 밤에 순찰을 돌던 간수들이 가끔씩 누군가의 발에 엉덩이를 차이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도소장은 듀티윌을 특별 감방으로 옮기고 간수들에게 엄중히 경계를 서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여전히 교도소장의 물건이 듀티윌의 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감옥 생활이 지겨워진 듀티윌은 교도소장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소장님이 가지고 계신 책을 모두 읽었기에 내일 밤 열한 시 이십오 분부터 삼십 분 사이 감옥을 나가고자 합니다.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루가루 올림. 교도소장은 어느 때보다도 철저히 경계를 서도록 지시하고 자신도 직접 순찰을 돌았습니다. 그러나 벽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듀티윌은 정확히 열한 시 이십팔 분에 감옥을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듀티윌은 먼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교도소 근처 식당에서 음료수를 마시다가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교도소장은 듀티윌을 어두컴컴한 독방에 가두고 삼중으로 자물쇠를 채우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듀티윌은 교도소장의 방에서 간수를 불러 아침을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도소장은 듀티윌을 다시 감방에 가두고 간수에게 스물네 시간 내내 경비를 서게 하고는, 먹을 것은 빵 한 조각만 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듀티윌은 자신이 체포되었던 식당에서 교도소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기서 음식을 먹었는데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요. 죄송하지만 오셔서 음식 값을 치러 주시겠습니까?” 교도소장은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와 마구 욕을 해댔습니다. 이 일로 마음이 상한 듀티윌은 그날 밤 감옥을 빠져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감옥을 나온 듀티윌은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턱수염도 깎고 안경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가명으로 미리 얻어 놓고 물건까지 옮겨 둔 새 아파트에서 조용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훔치거나 감옥을 빠져나오는 일이 시시하게 느껴진 듀티윌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볼 궁리를 하며, 예전처럼 우표 수집을 하거나 밝은 거리를 산책하는 등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듀티윌은 길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고는 한눈에 반했습니다. 눈부신 금발에 하얀 피부, 천사 같은 웃음을 띤 여인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긴 듀티윌은 여인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아두었습 니다. 그리고 다음 날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장을 보러 나온 여인을 만난 듀티윌은 장미를 바치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첫눈에 반하고 말았소. 내 사랑을 받아 주오.” 여인은 얼굴을 붉혔습니다. 하지만 손을 살며시 내밀어 장미를 받아 드는 것을 보면 듀티윌이 마음에 드는 듯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무척 엄하셔서 조금이라도 늦게 다니면 야단을 치세요. 그리고 밤에는 외출하지 못하도록 문 밖에 무거운 자물쇠를 채우시지요. 저도 당신을 만나고 싶지만 나갈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요.” “염려 마시오. 오늘 밤 내가 당신을 찾아가리다.” 깊은 밤, 여인의 부모가 대문과 방문에 커다란 자물쇠를 채운 것을 확인한 듀티윌은 벽을 통과해 여인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마나, 정말 오셨군요.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자물쇠가 채워져 있을 텐데.” “사랑 앞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오.” 두 사람은 밤새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듀티윌은 벽을 통과해 집을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 듀티윌은 밤마다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여인의 부모가 채운 커다란 자물쇠는 오히려 두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는 만큼 두 사람의 사랑도 깊어만 갔습니다. 어느 날 밤새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듀티윌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습니다. 듀티윌은 서랍을 열고 약을 찾았습니다. 서랍에는 일 년 전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통약이라고 착각한 듀티윌은 약을 단숨에 삼키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에도 듀티윌은 여인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밤 공기는 상쾌했고 두통도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집 벽을 막 통과하려는 순간 평소와는 달리 몸이 부드럽게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피곤해서 그럴 거야. 조금 있으면 나아지겠지.’ 듀티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여인의 방으로 들어간 듀티윌은 여인과 밤새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덧 서서히 날이 밝아 왔습니다. 듀티윌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여인의 방을 빠져나 왔습니다. 그리고 집의 담을 통과하려는 순간 듀티윌은 어깨와 허리에 무언가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뻑뻑해지더니 듀티윌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듀티윌은 자신이 먹은 약을 생각해 냈습니다. 일 년 전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 효과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 밤 사랑하는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몸이 무척 피로했기에 약효가 빨리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듀티윌은 결국 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히고 말았습니다. 듀티윌은 그만 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파리의 노르뱅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이 우는 듯한 슬픈 흐느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언덕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라고 여기는 그 흐느낌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벽이 되어 버린 듀티윌의 구슬픈 울음소리입니다.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 벽을 드나드는 남자를 지은 마르셀 에메는 프랑스의 주아니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메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했고, 공상에 잠기기를 좋아해서 엉뚱한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또한 호기심 많은 에메는 의학, 과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의학 공부도 하고 신문 기자를 하기도 했습니다. 에메는 1927년 장편 소설 브륄브아를 발표하며 소설가가 되었고, 허기진 자들의 식탁으로 르노도 상을 받았습니다. 에메는 특히 뛰어난 단편 소설을 남겼는데, 녹색의 암말, 벽을 드나드는 남자 등이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그리고 환상과 풍자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희곡 클레랑바르, 달의 새들, 루이지안 등과 프랑스 아동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나무에 오른 고양이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에메의 소설에는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에메의 독특한 상상력 때문이지요. 그래서 에메를 ‘두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 꾼’이라고도 한답니다. 악하기도 하지만 약한 인간. 1942년에 발표된 벽을 드나드는 남자는 에메의 대표적인 단편 소설입니다. 벽을 통과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주인공이 자신이 생각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하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벽 속에 갇히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하게 진행되지만 에메 특유의 괴기한 상상력이 녹아들어 현실과 환상이 맞닿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래서 벽을 드나드는 남자를 읽은 독자는 놀랍고 잊혀지지 않는 긴 여운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작품은 짧은 단편 소설이지만 순간순간 무릎을 치게 하는 글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에메는‘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 또는 ‘짧은 이야기의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또한 에메는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서도 ‘옳고 그름’이라는 일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원래 죄인’이라는 종교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약점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선량함은 물론 나약함과 사악함까지도 따뜻하게 보듬으려는 작가의 마음에서 비롯되지요. 벽을 드나드는 남자에도 이러한 에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괴도 신사 뤼팽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는 어느 날 오후, 대서양을 가로질러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 프로방스 호에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전신이 날아들었습니다. 프로방스 호 일등 선실에 아르센 뤼팽이 타고 있음. 금발이며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음. 동행은 없으며, 가명은 R. 뤼팽은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도둑이었습니다. 엄청난 부자나 귀족의 집만 골라 값진 물건을 훔쳐 가며 시간과 장소를 미리 알리고 범행을 하는 괴상한 도둑이었습니다. 또 변장술이 뛰어나 누구의 모습으로라도 변할 수 있기에 ‘괴도 신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배에 탄 넬리는 여행하면서 알게 된 프랑스 청년 당드레 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정말 뤼팽이 누군지 모르나요?” “아직 확실한 것은 없어요. 저 중년 신사이거나 저쪽에 있는 청년, 아니면 나일 수도 있죠.” “호호호. 당신일 수도 있다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그만큼 뤼팽은 변장술이 뛰어나다는 얘기죠.” 이때 넬리의 친구인 절런드 부인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보석! 보석을 모두 도둑맞았어요!” 절런드 부인의 보석이 없어진 사건으로 뤼팽이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뤼팽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모든 선실과 승객들의 짐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도둑맞은 보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뤼팽이 보석을 어디에 숨겼을까요?” 넬리의 질문에 당드레주가 답했습니다. “보석은 크기가 작고 무겁지도 않습니다. 그런 걸 숨기는 거야 간단하죠. 예를 들어 내가 들고 있는 이 카메라 안에다 넣었을 수도 있고 말이에요.” 뤼팽의 출현으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우울한 여행을 하던 승객들은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비로소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더구나 항구에는 파리 경시청에서 나온 수사관 가니마르 경감이 뤼팽을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서 더욱 안심할 수 있었지요. 당드레주와 넬리가 배에서 내리자 가니마르 경감이 말했습니다. “아르센 뤼팽! 너를 체포한다.” “무슨 말씀을! 이분은 당드레주 씨예요.” 넬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진짜 당드레주는 삼 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기 내 신분증이 있소. 그리고 내 이름은 R 자로 시작 하지도 않고.” 당드레주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신분증이야 얼마든지 가짜로 만들 수 있는 것이고, R로 시작하는 이름이란 것은 사람들이 헛갈리도록 당신이 전신에 슬쩍 끼워 넣은 거지. 제법 머리를 썼지만, 이번에는 꼬리를 잡히고 말았군. 뤼팽! 순순히 수갑을 차시지.” “좋소. 수갑을 채우시오. 경찰서에 가서 사실을 밝힙시다.” 당드레주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발을 헛디뎠는지 비틀하면서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가 바다 속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뤼팽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카메라 안에 보석이 숨겨져 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니마르 경감에게 체포된 당드레주는 뤼팽으로 판정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당드레주가 정말 뤼팽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뤼팽이라는 인물 자체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모를 정도로 온통 수수께끼였으니까요. 하여튼 감옥에 갇힌 당드레주, 아니 뤼팽은 다른 죄수들과 다름없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사람들도 뤼팽이라는 존재를 점점 잊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파리의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는 말라키 성이 있었습니다. 말라키 성의 주인은 귀족인 카오론 남작으로, 골동품과 보석 수집가로도 유명한 사람이었지요. 어느 날, 카오론 남작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곳은 라 상테 교도소였고, 보낸 이는 놀랍게도 아르센 뤼팽이었습니다. 카오론 남작, 남작의 성에 있는 그림과 보석은 제 마음에 쏙 드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로 그 물건들을 파리 기차역으로 보내 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구월 이십칠일 밤에 제가 직접 가지러 가겠습니다. 아르센 뤼팽. 편지를 읽은 카오론 남작은 경찰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뤼팽은 지금 라 상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 무슨 수로 남작님의 물건을 훔친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장난 편지일 테니 염려 마십 시오. 그러나 상대는 괴도 신사라고 불리는 뤼팽입니다. 남작은 걱정이 되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뤼팽을 체포한 가니마르 경감이 휴가를 얻어 말라키 성 근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니마르 경감이시죠? 저는 카오론 남작이라고 합니다. 실은 며칠 전에 이런 편지를 받았기에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카오론 남작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가니마르 경감에게 뤼팽이 보낸 편지를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편지를 읽어 본 가니마르 경감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뤼팽은 절대 남작님의 물건을 훔칠 수 없습니다. 제가 직접 잡아 감옥에 넣었으니까요. 이건 아마도 장난 편지일 겁니다. 하지만 워낙 귀신같은 도둑이라고 하니 안심할 수가 없군요. 그날 하루만이라도 성에 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가 볼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남작께서 간곡히 부탁하시니 그렇게 하지요.” 뤼팽이 오겠다던 구월 이십칠일이 되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가니마르 경감은 날카로운 인상에 힘이 세 보이는 두 사내를 데리고 카오론 남작의 성에 나타났습니다. 제 부하 형사들입니다. 남작께서는 중요한 물건들을 모아 방 안에 넣으십시오. 저희가 지키기 쉽도록 말입니다. 카오론 남작은 값나가는 그림과 보석들을 모아 방 안에 두고 열쇠를 채웠습니다. “이제 부하들이 이 방을 지킬 테니 남작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긴장을 풀기 위해 거실에서 저와 체스라도 한 판 두실까요?” 카오론 남작은 가니마르 경감의 자신 있는 태도와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두 형사를 보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가니마르 경감이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말했습니다. “보세요. 아무 일도 없지 않습니까? 남작께서는 괜한 걱정을 하신 겁니다. 그럼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가 볼까요?” 가니마르 경감과 카오론 남작은 형사들이 지키고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두 형사는 바닥에 쓰러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물론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봐! 일어나. 무슨 일이 있었나?” 가니마르 경감이 한 형사를 흔들어 깨우며 물었습니다. “그, 그냥, 물을 조금 마신 것밖에는.” 형사는 아직도 졸린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가니마르 경감은 주전자에 담긴 물을 조금 맛보더니 부르짖었습니다. “수면제다! 물에 수면제를 탔어.” 가니마르 경감은 맥이 빠진 모습으로 카오론 남작에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설마 이런 방법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뤼팽을 막지 못했으니 사례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하품을 해대는 부하들을 부축하여 돌아가는 가니마르 경감의 어깨는 올 때와는 반대로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뤼팽이 보물을 훔쳤다는 소식을 들은 경시청은 난리가 났습니다. 가니마르 경감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뤼팽을 만나러 라 상테 감옥을 찾았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말라키 성 도난 사건은 정말 자네가 한 일인가?” “물론이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 감옥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물건을 훔친단 말인가?” “내겐 부하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래도 말라키 성은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니, 간단하죠. 주인이 나를 초대하게 만들면 되니까요.” “하지만 도둑을 초대하는 정신 나간 주인이 어디 있나?” “그 사람이 도둑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초대하겠죠.” “도둑을 잡는 사람이라니. 경찰 말인가?” “딩동댕! 그것도 아주 유명한 형사라면 도둑에게 편지를 받은 주인은 당연히 모시겠죠.” “그게 누군가?” “바로 당신, 뤼팽을 잡은 사람이죠.” “뭐, 뭐라고? 나, 나라고?” 그렇습니다. 카오론 남작 앞에서 형사 행세를 한 세 사람은 뤼팽의 부하였던 것입니다. 괘씸한. 나로 변장해서 물건을 훔치다니. 좋아, 이번 재판 때 그 죄까지 더해서 영원히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할 테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가니마르 경감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미안합니다만 이번 재판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가서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요. “뭐라고? 탈옥을 하겠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미리 시간을 알리고 물건을 훔친 것처럼, 대담하게도 탈옥을 예고하는 뤼팽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어렸습니다. 경찰서로 돌아온 가니마르 경감은 서장에게 말했습니다. “뤼팽을 다른 감옥으로 옮기도록 해 주십시오.” “감옥을 옮기다니. 그러다가 탈옥이라도 하면 어쩔 텐가?” “탈옥을 시키는 겁니다.” “탈옥을 시킨다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경찰 서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니마르 경감을 바라보았습니다. 감옥을 옮긴다는 핑계로 뤼팽을 차에 태웁니다. 빗장을 헐렁하게 해 두고 말이죠. 그리고 일부러 차 사고를 내서 소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때 헐거운 빗장이 풀리겠죠. 경찰들은 사고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고, 약삭빠른 뤼팽이 그것을 놓칠 리 없죠. 분명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탈출을 할 겁니다. “탈출을 하면?” “사고 지점에 미리 변장하고 숨어 있던 형사들이 뤼팽의 뒤를 밟는 겁니다. 뤼팽은 틀림없이 본거지로 돌아갈 테고, 그러면 뤼팽뿐만 아니라 부하들까지 모두 잡을 수 있지요.” “정말 괜찮은 계획이로군. 좋아, 당장 실행하게. 그리고 날쌘 형사들을 모두 동원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다음 날 가니마르 경감은 감옥을 옮긴다는 구실로 뤼팽을 차에 태웠습니다. 뤼팽이 탄 뒤 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가벼운 충격에도 풀리도록 조작해 놓은 것이었죠. 뤼팽을 태운 차는 감옥을 나와 삼십 분쯤 가다가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다른 자동차와 부딪치는 사고를 냈습니다. 뤼팽을 감시하던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차에 혼자 남겨진 뤼팽은 문득 문이 열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차 사고의 충격으로 빗장이 풀린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뤼팽은 차 문을 열고 밖을 보았습니다. 경찰들은 사고 처리에 정신이 팔려 있어 어느 누구도 뤼팽이 탄 뒤 칸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습니다. 슬며시 차를 빠져나온 뤼팽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차 사고가 난 건너편 골목에서 이 광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가니마르 경감이었죠. 가니마르 경감은 부하들에게 눈짓을 해서 뤼팽의 뒤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뤼팽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 있는 걸음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자기 뒤에 스무 명이 넘는 형사들이 제각기 변장을 하고 쫓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걷던 뤼팽은 길가 식당 한 자리에 앉더니 시원한 주스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뤼팽을 쫓던 형사들은 바짝 긴장했습니다. 뤼팽이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주스를 다 마신 뤼팽은 종업원을 불러 말했습니다.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돈이 한 푼도 없는데.” “그러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종업원의 말에 옆자리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손님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하!” “자기가 괴도 신사 뤼팽이래! 요즘은 공짜로 음료수를 마시고도 저렇게 허풍을 떠는군.” 식당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뤼팽은 또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형사들도 다시 뤼팽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돌아 큰길로 나와서도 뤼팽은 계속 걷기만 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드디어 뤼팽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뤼팽이 멈춰 선 곳은 놀랍게도 바로 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 앞이었습니다. 사백십칠 호에 있던 뤼팽이오. 다시 감옥에 들어가려 하니 문을 열어 주시오. 경비원은 놀라 문을 열었고, 뤼팽은 자기가 갇혀 있던 감방으로 돌아갔습니다. 탈옥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뤼팽이 제 발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잠시 후 뤼팽은 자신을 찾아온 가니마르 경감에게 말했습니다. “천하의 뤼팽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다니, 실망스럽군요. 모두 경감의 생각이었죠?” 가니마르 경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내 뒤를 쫓은 형사가 스무 명은 되었을 겁니다. 마치 내가 어미 닭이고 형사들은 병아리인 것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녔겠지요? 산책은 잘 했는데, 오랜만에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군요. 나는 이제부터 자려고 하니 나중에 보도록 하지요.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돌아선 가니마르 경감은 입술을 깨물며, 감옥의 소장을 만나 뤼팽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뒤로 간수들은 스물네 시간 내내 뤼팽을 감시했고, 가니마르 경감은 날마다 뤼팽의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흘렀습니다. “뤼팽은 어떤가?” 가니마르 경감의 물음에 간수가 답했습니다. 글쎄요. 두 달 전 감옥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뒤부터는 침대에 누워서 멍 하니 안쪽 벽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밥도 잘 먹지 않고요. 예전처럼 명랑하지도 않습니다. 운동도 하지 않고, 감방에서 도무지 나오려 하지 않아요. 불도 켜지 않고요. “그래?” “아마도 저희가 이렇게 철저히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감옥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여하튼 재판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욱 조심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재판이 열리는 날, 재판정에 나타난 뤼팽은 힘없이 걸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얼굴색도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아르센 뤼팽인가?” “저, 저는 보드리 데지레입니다.” 이상스럽게도 그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드리 데지레라고? 그것은 새로운 가명인가?” 판사의 말에 법정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귀족과 부호들의 물건을 훔치고, 얼마 전 카오론 남작의 말라키 성에서도 물건을 훔친 죄를 인정하는가?”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보드리 데지레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떻게 감옥에 들어왔는가?” 두 달 전에 술에 취해 소란을 피웠는데, 경찰이 저를 어떤 차에 태웠습니다. 저는 잠이 들었고 깨어 보니 감옥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간수들은 저를 뤼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 달 전이라면 가니마르 경감이 차 사고를 가장하여 거짓 탈옥을 시켰지만 뤼팽이 스스로 돌아온 그날 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이 뤼팽이 아니라고 밝히지 않았나?” 판사가 물었습니다. “밖에 나가 보았자 먹고살 길도 없고. 비록 감옥이지만 음식도 훌륭했고, 힘든 일도 시키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법정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크게 외쳤습니다. “재판장님! 저 사람은 뤼팽이 아닙니다.” 모두가 놀랄 만한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가니마르 경감이었습니다. 뤼팽을 직접 체포해서 감옥으로 보낸 가니마르 경감이 이번에는 뤼팽이 아니라고 하다니, 대체 어찌 된 것일까요? 가니마르 경감은 앞으로 나와 보드리 데지레라는 사내를 자세히 살펴본 다음에 입을 열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뤼팽과 무척 닮았습니다. 하지만 뤼팽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뤼팽은 도둑이지만 괴도 신사라고 불릴 만큼 멋지고 활기차거든요. 이 사내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키도 약간 작고, 말투나 행동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눈썹도 조금 짧고, 입도 약간 비뚤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빛이 흐립니다. 뤼팽은 비록 도둑이지만 눈이 아주 빛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내의 눈은 알코올 중독자의 흐린 눈입니다. 너무도 뜻밖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판사가 묻자 가니마르 경감이 답했습니다. “자신이 말한 대로 보드리 데지레입니다. 집도 직업도 없는 부랑자죠. 우연히도 뤼팽이 감옥을 옮기던 날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운 죄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뤼팽은 감쪽같이 이 사내와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람. 그렇다면 여지껏 엉뚱한 사람을 가두었단 말인가?” 판사는 서류를 뒤적여 보더니 이렇게 선고했습니다. “피고는 아르센 뤼팽이 아닌 보드리 데지레로 밝혀졌다. 술을 먹고 소란을 피웠지만 그동안 감옥에 있던 두 달로 충분히 죗값을 치렀으니 석방한다.” 재판정을 나와 느릿한 걸음으로 공원에 도착한 보드리 데지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습니다. “가니마르 경감! 거기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지.”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가 나무에 숨어 살펴보던 가니마르 경감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이, 이럴 수가!” 그 사내는 바로 자신이 항구에서 체포한 뤼팽이 틀림없었습니다. 빛나는 얼굴, 밝은 인상, 활기찬 목소리 그대로인 괴도 신사 뤼팽이었습니다. 보드리 데지레가 재판정을 나온 후, 여기까지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감시하며 따라왔는데 도대체 어느 틈에 사람이 또 바뀐 걸까요? “뭘 그리 놀라시나?” “어, 언제 바뀌었지?” “바뀐 적은 없어. 항구에서 잡힌 것도 나, 감옥에 있던 것도 나, 재판을 받은 것도 나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니마르 경감은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체포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풀어 주도록 한다. 얼마나 뤼팽다운 방법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가니마르 경감? 그러면 나중에 또 보세. 뤼팽은 몇 걸음을 가다가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참! 행여나 뒤를 따라올 생각은 말게. 다시는 잡히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멍하니 앉아 있는 가니마르 경감의 귓가에는 뤼팽의 웃음소리만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추리 문학의 자존심. 프랑스 추리 문학을 대표하는 모리스 르블랑은 루앙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자로 일하던 스물일곱 살 때 신문에 소설 몇 편을 발표하여 작가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인간의 이야기를 사실적이고도 짜임새 있게 그렸던 작가 모파상의 영향을 받고 추리 소설로 방향을 바뀝니다. 그리고 1905년 아르센 뤼팽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소설을 발표하여 마침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06년에는 단편집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을 간행하면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독자들은 두뇌가 뛰어난 도둑이면서도 명탐정 역할까지 일인이역을 하는 뤼팽의 매력에 푹 빠졌지요. 결국 르블랑은 뤼팽을 추리 소설뿐 아니라 모험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내세워 뤼팽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듭니다.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것도 그런 공헌 때문이지요. 이 외 속이 빈 바늘, 수정 마개, 아르센 뤼팽의 고백, 황금의 3각, 무서운 사건, 녹색 눈의 아가씨 등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르블랑의 추리 걸작들입니다. 프랑스 인의 영웅이 된 대도둑. 르블랑의 추리 소설은 대부분 뤼팽이 주인공입니다. 작품마다 뤼팽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재미를 더해 줍니다. 뤼팽은 절대 가난한 사람의 물건은 훔치지 않습니다. 귀족들이나 부자의 저택만을 노리지요. 변장술도 뛰어난 데다가 외모도 수려하고 예절 바른 신사입니다. 어떤 때는 도둑이면서도 어떤 때는 유능한 탐정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애국심도 대단합니다. 르블랑의 작품에서 뤼팽은 당시 프랑스를 위협하던 독일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1908년에 발표된 아르센 뤼팽 대 셜록 홈스에서는 셜록 홈스라는 영국의 탐정과 대결을 벌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언제나 경쟁 관계였는데 추리 소설에서도 자존심 대결을 벌였던 것이지요. 물론 르블랑의 작품에서는 뤼팽이 승리했습니다. 만약 코난 도일이 썼다면 결과는 반대가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괴도 뤼팽은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또한 뤼팽의 기상천외한 모습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서 자주 사용되어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집 없는 아이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프랑스 시골 작은 마을에 사는 레미는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레미를 길러 준 발브렝 부인은 착하고 정이 많았지만 발브렝 씨는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늘 파리에 나가 일을 하던 발브렝 씨는 레미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몸을 다쳐 집에 돌아왔습니다. 레미를 본 발브렝 씨는 얼굴을 찌푸리며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애도 아닌 이 아이를 왜 아직도 키우고 있소? 당장 고아원에 보내시오!” 그날 밤 레미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발브렝 씨는 레미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들른 술집에서 떠돌이 곡예단 단장인 비탈리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끌고 어디로 가는 거요?” “고아원으로 데려가는 길이오.” 그러자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고아원에 데려가 봤자 한 푼도 생기지 않을 거요. 차라리 그 아이를 나한테 파시오.” 돈을 준다는 말에 발브렝 씨는 주저하지 않고 레미를 비탈리스 할아버지에게 넘겼습니다. 비탈리스 곡예단에는 원숭이 졸리케르, 흰 개 카피, 검은 개 제르비노, 아직은 어린 잿빛의 돌체라는 개가 있었습니다. 레미는 자신을 길러 준 아주머니와 헤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만, 눈물을 감추고 동물들과 친구가 되어 씩씩하게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다음에 공연할 마을까지는 험한 산길과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을 지나야 했습니다. 레미 일행은 힘든 산길을 쉬지 않고 걸어야 했고, 밤이 되면 그저 아무 곳에서나 웅크리고 자야 했습니다. 어쩌다가 외딴집의 헛간이라도 빌리면 다행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녁이라고는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전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이 어린 레미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힘들까?’ 추운 헛간 바닥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레미에게 카피가 끙끙거리며 다가왔습니다. 카피는 어린 레미를 따뜻하게 해 주려는 듯했습니다. “카피! 이리 오렴.” 레미는 기뻐하며 카피를 껴안았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생긴 레미는 한결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공연할 마을에 도착하자,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레미에게 가죽 구두와 벨벳 윗도리, 모직 바지, 모자 등을 사 주었습니다. 비록 조금 낡았지만 레미로서는 난생 처음 입어 보는 고급스런 옷이었습니다. “이제 너도 곡예단의 훌륭한 단원이니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마라.” 말은 부드러웠지만 비탈리스 할아버지의 연습은 철저했습니다. 신호에 따라 원숭이는 재주를 넘었고 개들은 두 발로 서서 사람처럼 걸어 다녔습니다. 짤막한 희극을 연습할 때는 익숙하게 잘 해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시켰습니다. 그러나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실수해도 화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레미는 불평 없이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눈물겹게 연습한 결과 공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특히 원숭이 졸리케르가 장군으로 나오고 레미가 멍청한 하인으로 나오는 희극을 공연할 때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정말 똑똑한 원숭이야!” “맞아. 그런데 사람은 정말 바보 같아.” 영리한 카피는 모자를 거꾸로 물고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돈을 받았습니다. “수고했다, 레미! 돈을 제법 많이 벌었어.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도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겠구나. 너도 정말 잘했다.”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레미의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공연을 하고 돈을 번 레미는 비탈리스 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다음으로 레미 일행이 간 곳은 지중해의 해안 도시 툴루즈였습니다. “오늘은 네가 졸리케르와 둘이서 사람들을 모아 보거라. 나는 나중에 가마.”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레미는 졸리케르를 데리고 거리에 나가 하프를 켜며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아름다운 하프 소리와 원숭이의 재롱에 사람들이 모이자 레미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곡예단이 왔습니다! 동물들이 펼치는 뛰어난 묘기와 재미있는 희극을 구경하러 오세요.” 그때 갑자기 군인 한 명이 나타나 레미의 따귀를 때리며 말했습니다. “누구 맘대로 여기서 공연을 하려는 거냐?” 그때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나타나 군인의 손목을 꽉 잡았습니다. “아이를 때리지 마십시오.” “당신은 뭐야?” “곡예단 단장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잡아가야겠군.”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잡혀가면서 레미에게 말했습니다. “여관으로 돌아가서 기다려라. 곧 연락을 할 테니까.”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잡혀간 지 사흘째 되던 날 여관에 있는 레미에게 비탈리스 할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레미야, 난 두 달 동안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동안 개들과 원숭이를 잘 보살펴 다오.” 편지를 여관 주인에게 보여 주자 돈을 받을 수 없겠다고 여긴 여관 주인은 레미와 동물들을 내쫓았습니다. 레미는 동물들을 이끌고 길을 나섰지만, 돈도 거의 떨어졌고 당장 잘 곳도 없었습니다. 빵 값을 벌기 위해 공연을 해 봤지만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없어서인지 구경꾼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며칠을 굶고 길에서 잠을 자며 고생한 끝에 레미 일행은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자, 여기서 연습하자. 전에 공연이 성공하지 못한 건 연습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야. 그렇지?” 컹컹! 레미의 말에 개들이 맞장구치듯이 짖어 대며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여름날 강가의 경치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레미는 하프를 열심히 연주했고 개들과 원숭이는 즐겁게 춤추고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정말 재미있다!” 어디선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레미가 주위를 살펴보니 배 한 척이 멈춰 있었습니다. 갑판에는 유리로 된 방이 있고 그 안에는 젊은 부인과 레미 또래의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재미있다는 말은 아마도 소년이 한 것 같았습니다. “아서가 너희를 보고 즐거워하는구나. 괜찮으면 이리 와서 차와 과자를 좀 먹으렴.” 부인의 말에 레미는 동물들을 데리고 배에 올랐습니다. “나는 뮬리건이고, 이 아이는 내 아들 아서란다. 몸이 약해서 바람도 쐬지 못하고 늘 앉아서만 지내지. 그래서 잘 웃지도 않는데. 그래, 동물들과 무엇을 하고 있던 거니?” “곡예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곡예단이었니? 어쩐지. 네 이름은 뭐니?” “저는 레미라고 해요. 흰 개는 카피, 검은 녀석은 제르비노, 잿빛 강아지는 돌체고요. 이 원숭이는 졸리케르라고 해요. 모두 한 식구지요.” 동물들을 마냥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어?” 뮬리건 부인도 말했습니다. “제발 우리 아서의 부탁을 들어주렴. 아파서 늘 혼자만 있다 보니 무척 외로워한단다. 그런데 너희와 함께 있으면 외롭지도 않고 건강도 좋아질 것 같구나. 레미는 친절한 뮬리건 부인과 아서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고, 배를 타고 구경 다니는 것도 좋을 듯하여 잠시 함께 지내기로 했습니다. 레미는 아서와 함께 공부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둘이 꼭 형제 같구나.” 두 소년이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뮬리건 부인이 말했습니다. “아서에게는 형이 있었단다. 갓난아기일 때 잃어버렸지만. 아서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일찍 돌아가셨지. 그 애가 살아 있다면 레미 너만 할 텐데. 언젠가는 반드시 찾을 거라 믿고 있지만. 이런, 내가 괜한 얘기를 해서 네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구나.” “아니에요, 아주머니. 아서의 형을 꼭 찾으실 거예요.” “네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는구나. 고맙다.” 그 후로 뮬리건 부인은 더욱 레미에게 잘 대해 주었고, 두 소년의 우정도 점점 깊어 갔습니다. 그렇게 꿈결 같은 두 달이 흘러갔습니다. 두 달이 지나자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레미는 동물들과 함께 할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아서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습니다. “내가 비탈리스 씨와 얘기해 보마. 난 네가 여기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구나.” 뮬리건 부인은 레미와 함께 비탈리스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오오, 레미! 그동안 잘 지냈냐? 그래 졸리케르, 카피, 제르비노, 돌체! 모두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자신과 동물들을 무척 반기는 비탈리스 할아버지를 보며 레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곁을 떠날 수는 없어. 생각해 보면 내가 아서를 만나 즐겁게 지낼 수 있던 것도 할아버지가 나를 보살펴 주신 덕분이야. 나 때문에 교도소에 가셔서 고생도 하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보살펴 드릴 차례야.’ 레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뮬리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눈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배에서 나오며 말했습니다. “부인과 아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너라. 나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레미는 아서와 뮬리건 부인에게 눈물로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아서는 레미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손을 흔들 뿐이었습니다.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파리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파리까지는 길이 너무 멀고 험했으며, 날씨도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여행을 계속한 레미 일행은 허허벌판에서 작은 통나무집을 발견했습니다. “다행이다. 오늘은 저곳에서 쉴 수 있겠어.”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나무를 모아 집 안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레미와 번갈아가며 불이 꺼지지 않게 지키면서 밤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잠든 후 장작불을 살피던 레미는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멍멍멍! 갑자기 카피가 큰 소리로 짖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카피, 왜 그래?” 카피가 짖는 소리에 잠을 깬 레미가 카피를 불렀습니다. 입구에서 짖어 대던 카피는 두려움에 떨며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바깥에 무언가 있는 모양이다.”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문밖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둠 속에 파랗게 빛나는 눈! 바로 이리 떼였습니다. 이리 떼는 통나무집을 빙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계속 불을 지펴라. 절대 꺼지지 않도록 해야 돼.” 그런데 제르비노와 돌체, 졸리케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리에게 잡아 먹힌 걸까요? 레미와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무척 걱정이 됐지만, 이리들이 있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뮬리건 부인과 함께 있게 하는 건데. 내 고집이 제르비노와 돌체, 졸리케르까지 죽이고 말았구나.”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장작을 지피며 탄식했습니다. “큰일 났어요. 이제 나무가 없어요.” 점점 불꽃이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땔나무가 없었습니다. 불이 꺼지면 이리들이 달려들 것입니다. 그때 얼기설기 엮인 통나무 사이로 한줄기 빛이 비쳐 들어왔습니다. “다행이다. 동이 트기 시작했어.” 아침이 밝아 오자 이리들은 숲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레미와 할아버지, 카피는 아무런 일도 겪지 않았지만 그 밤은 너무도 길었습니다. 고생 끝에 파리에 도착하자 비탈리스 할아버지는 한 소년단 단장에게 레미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소년단 단장의 말에 할아버지는 안심하며 레미에게 말했습니다. “겨울만 여기서 지내라. 난 그동안 새로운 개들을 훈련시켜서 올 테니까.” 할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소년단 단장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나가서 돈을 벌어 오란 말이야. 돈을 벌어 오지 못하면 밥도 없어.” 소년단 단장은 아이들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시켰고, 벌어 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인정사정없이 매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가 지나 레미를 보러 잠시 들른 비탈리스 할아버지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레미의 손을 잡고 소년단을 나왔습니다. “전에 내가 일하던 채석장으로 가자. 거기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고생 끝에 찾아간 채석장은 이미 문을 닫아 더 이상 돌을 캐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가!” 맥이 빠진 할아버지는 추위와 굶주림과 피곤으로 길거리에 쓰러졌습니다. 레미는 카피와 함께 할아버지 몸을 덥혀 주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레미가 정신을 차린 곳은 따뜻한 침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카피는 어디 있어요?” 레미는 눈을 뜨자마자 물었습니다. 낑낑! 카피가 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와 레미의 품에 안겼습니다. “안됐구나. 할아버지께서는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채석장 근처에 사는 아캉 씨는 쓰러진 두 사람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간호했지만,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만 것이었습니다. 꽃집을 한다는 그 집에는 아캉 씨와 레미 또래의 소년 두 명, 어린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레미는 그곳에서 아캉 씨를 도와 정원을 가꾸며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이 년 동안 레미는 아캉 씨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 닥쳐 아캉 씨의 온실과 정원이 모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아캉 씨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고 아이들은 모두 뿔뿔이 친척 집에 맡겨졌습니다. 레미는 다시 카피와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가자, 카피!” 하지만 이제 열두 살이 된 레미는 넓은 세상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캉 씨의 집을 나와 들판에서 밤을 지샌 뒤 길을 가던 레미는 우연히 마치아라는 소년을 만났습니다. 마치아는 바이올린을 잘 켜는 아이였습니다. “우리 함께 짝을 이뤄 연주를 해 보자. 그리고 카피에게 모자를 물고 돈을 받도록 하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거야.” 레미의 생각은 들어맞았습니다. 사람들은 두 소년의 연주에 흥겨워했고 모자를 물고 다니며 돈을 받는 카피를 무척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두 소년은 그렇게 번 돈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고마웠어. 덕분에 많은 돈을 벌었어.” “내가 더 고맙지. 그동안 돈도 벌었고 또 즐겁게 지냈으니까. 그런데 레미 넌 이제 어디로 갈 거니?” “나를 키워 주신 분이 있어. 그분께 소를 한 마리 사 드렸으면 했거든. 마침 돈도 벌었으니 그분을 찾아가려고 해. 같이 갈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으니까.” 레미는 마치아와 함께 소 한 마리를 끌고 발브렝 부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 이럴 수가! 레미로구나!” 발브렝 부인은 레미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발브렝 부인은 그동안 일어났던 이야기와 함께 레미가 영국인인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런던에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면 어쩌면 네 친부모님을 찾을 수 있어.” 레미는 마치아와 함께 런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친아버지라는 드리콜 씨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드리콜 씨는 레미를 보고서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고, 레미와 마치아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시켰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친아버지일까?’ 레미는 의심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사가 드리콜 씨를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우연히 들은 마치아는 놀라운 사실을 레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레미, 지금 온 사람은 제임스 뮬리건이라고 하는데, 아서라는 아이의 외숙부야. 그 사람이 드리콜 씨에게 네 아버지 행세를 하도록 시킨 거야. 넌 뮬리건 부인의 아들이야. 아서의 형이고. 네가 받을 유산을 가로채려고 제임스 뮬리건이 꾸민 일이지. 이 말을 들은 레미는 마치아와 함께 뮬리건 부인을 찾아 떠났습니다. 두 달 가까이 헤맨 끝에 레미는 스위스 어느 강가에서 뮬리건 부인의 배를 찾았습니다. “앗, 레미 형이다!” 레미를 발견한 아서가 소리쳤습니다. 뮬리건 부인, 아니 친엄마를 만난 레미는 드리콜과 제임스 뮬리건의 음모를 알렸습니다. “이럴 수가! 아무리 재산이 탐났다고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다니.” 뮬리건 부인은 즉시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 뒤 드리콜이 모든 것을 자백해 제임스 뮬리건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입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 아래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레미를 바라보는 뮬리건 부인의 눈에는 긴 세월 동안 겪은 슬픔과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 섞여 있었습니다. “내 아들, 레미야!” 뮬리건 부인은 되찾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꼭 끌어안았습니다. “어머니!” 레미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정말로 불러 보고 싶던 어머니였습니다. 레미와 뮬리건 부인은 꼭 부둥켜안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아서도 곁에서 형을 찾았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온갖 어려운 일에도 꿋꿋하게 버텨 왔던 레미는 마침내 자신의 진짜 신분을 되찾고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레미는 더 이상 집 없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기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 작가.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엑토르 앙리 말로는 1930년 프랑스 라 뷔유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말로의 아버지는 관청과 법원에서 일을 하는 관리였습니다. 안정된 직업을 가진 아버지 덕에 말로는 비교적 풍요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지요. 말로는 어려서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자라서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학교를 졸업한 후 관청의 서기로 일했습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을 누를 수가 없어 로피니옹 나쇼날이라는 잡지에 문예 평론을 발표하여 기자 생활을 합니다. 그 후로 영역을 넓혀 드디어 소설도 쓰기 시작하게 됩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진 말로는 사랑의 희생자, 로망 카르브리의 모험 등 사실적인 작품을 많이 썼지만 말로를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은 바로 아동 문학의 걸작인 집 없는 아이와 집 없는 소녀입니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어린 영웅의 모험담. 집 없는 아이는 1878년 발표되어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고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힘든 방랑을 하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집 없는 아이에는 작가 말로의 사회 비판적인 의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로가 이 소설을 쓸 당시 프랑스에는 가난 때문에 레미처럼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가 많았습니다. 말로는 이러한 현실을 마음 아파했고 아이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착한 마음과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기 위해 집 없는 아이를 썼습니다. 또한 말로는 그 당시 어른들이 아이에게 하는 지나친 말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예리하게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집 없는 아이는 한 소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와 다양한 등장인물의 매력,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정신 등으로 많은 독자를 감동시켰습니다. 한편, 비탈리스 곡예단이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는 것은 프랑스의 지리와 풍속을 소개하고, 계절에 따라 변해 가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장발장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1815년 10월 초, 프랑스 디뉴 시에 한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볼에는 텁수룩한 수염이 나 있었습니다. 사내는 낡고 지저분한 옷에 커다란 자루를 둘러멘 채 몹시 지친 얼굴로 여관에 들어섰습니다. “하룻밤 묵을 수 있나요?” “돈만 내시면 됩니다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사내를 살펴보던 여관 주인은 급히 종이에 뭔가를 적어 심부름하는 소년에게 쥐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다람쥐처럼 여관을 달려 나갔지요. 잠시 뒤 소년이 돌아와 주인에게 뭐라고 속삭였습니다. 주인은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사내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기서 나가 주십시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돈은 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을 크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나가게. 뭔가 수상쩍다 싶어서 알아 보았더니 당신은 전과자더군. 전과자에게는 줄 음식도 재워 줄 방도 없으니 나가 주게.” 사내는 주인을 노려보더니 묵묵히 여관을 나왔습니다. 그 사내의 이름은 장발장.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십구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전과자였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발장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나와 함께 일곱 조카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장발장은 조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온갖 힘든 일을 했지만 가난한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배고파 우는 조카들을 보다 못한 장발장은 빵집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장발장은 누나와 조카들 걱정에 탈출하려 했지만 번번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처음에 사 년이던 형량은 십구 년으로 늘었고,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는 가족들과 이미 연락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십구 년 동안이나 가두다니, 세상이 너무 잘못됐어.” 장발장은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졌습니다. 여관에서 쫓겨나 잘 곳을 찾던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살고 있는 주교관 앞에 이르렀습니다. 일흔다섯 살 노인인 미리엘 주교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누이동생, 하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미리엘 주교를 존경했고, 하느님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미리엘 주교는 집에서도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늘 은촛대에 초를 꽂아 불을 켜고, 은접시에 음식을 담아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먼저 드리고 나서 밥을 먹었습니다.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장발장은 뜻밖의 친절에 놀라 미리엘 주교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저는 전과자입니다, 도둑질을 했다고요.”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요. 마음껏 드세요. 그리고 당신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십시오.” 미리엘 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은접시에 음식을 가득 담아 장발장에게 건넸습니다.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장발장은 정말로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자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위해 손님방에 푹신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장발장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십구 년 동안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자다가 갑자기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고, 무엇보다 저녁을 먹으며 보았던 은접시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은접시만 훔쳐서 팔면 그동안 감옥에서 모은 돈의 두 배는 받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친절한 주교님의 그릇을 훔칠 수는 없어. 그런 일을 한다면 나는 정말 사람도 아니야.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어. 하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고민하던 장발장은 발소리를 죽이며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저녁에 보았던 은접시는 깨끗이 닦여 선반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접시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며 장발장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장발장은 은접시를 훔쳐서 몰래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주교님! 어제 묵었던 사람도 보이지 않고 은접시도 없어졌어요. 그 사람 전과자라고 하더니 은접시를 훔쳐 달아난 모양이에요. 그렇게 잘 대해 줬는데. 아침에 하녀의 말을 들은 미리엘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와 누이동생이 아침을 먹으려고 할 때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경찰들과 장발장이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은접시를 훔쳐 달아났던 장발장이 경찰들에게 붙잡힌 것입니다. “주교님! 수상한 사내가 보여서 조사했더니 주교님의 은접시를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붙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요? 당신한테 은촛대도 주었는데 그건 왜 갖고 가지 않았소?” 장발장은 놀라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그럼 주교님께서 이 사람에게 은접시를 주신 겁니까?” 경찰이 묻자 미리엘 주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촛대까지 장발장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이 은접시를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쓰겠노라고 약속해 주시오.” 그날 장발장은 주교관 앞에 무릎을 꿇고 밤새 기도를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도였습니다. 미리엘 주교 덕분에 생각이 크게 바뀐 장발장은 이름을 ‘마들렌’이라고 바꾸고 메르라는 도시로 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은접시를 판 돈을 밑천으로 작은 공장을 얻어 장식용 구슬을 만들었습니다. 사업은 점점 번창했고, 마들렌은 이 년 뒤에 큰 공장을 세웠습니다. 마들렌은 사업으로 번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썼습니다. 공장 직공들의 품삯을 올려 주고 마을에 필요한 다리나 병원을 짓는 데도 많은 돈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때문에 일을 나가지 못하는 여인들을 위해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마들렌 씨, 당신처럼 훌륭한 사람이 우리 시의 시장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런 간곡한 권유를 끝내 거절할 수 없어 마들렌은 시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마들렌은 시장이 된 뒤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검소한 차림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녔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조용히 산책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마들렌의 집 또한 검소했습니다. 벽에는 값싼 도배지를 발랐고, 물건은 낡은 가구 몇 점이 전부였습니다. 조금 값나가는 물건이라고는 벽난로 위에 장식된 은촛대 두 개뿐이었습니다. 마들렌은 자신을 일깨워 준 미리엘 주교를 잊지 않기 위해 은촛대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들렌이 시장으로 있는 메르 시에는 팡틴이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여읜 팡틴은 돈을 벌기 위해 세 살밖에 되지 않은 딸 코제트를 파리 근처의 몽페르메이유 여관에 맡기고 혼자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팡틴은 어렵게 번 돈을 대부분 코제트의 양육비로 여관 주인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제트를 맡은 여관 주인 테나르디에 부부는 욕심 많고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팡틴이 코제트의 양육비로 보내는 돈으로 자기 딸들에게 좋은 음식과 옷을 해 주고, 코제트에게는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팡틴은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고되게 일을 하다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 사정을 알게 된 마들렌은 팡틴을 찾아갔습니다. 팡틴은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했습니다. “한 번만,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우리 코제트를 보고 싶어요.” “염려 마시오. 내 반드시 코제트를 데려오겠소.” 다음 날 마들렌은 시장의 자격으로 어떤 재판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다가 잡힌 사내가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자벨 경감이 그 사내를 보고 장발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장발장은 전과가 있었고, 또한 미리엘 주교 집에서 은접시를 훔쳤다고 의심되어 경찰이 계속 조사 중이었기에 이번에 다시 감옥에 가면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재판을 지켜보던 마들렌, 아니 진짜 장발장은 고민 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나선다면 여태까지 이뤄 놓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더구나 불쌍하게 죽은 팡틴의 딸 코제트는 누가 보살핀단 말입니까? 하지만 장발장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미리엘 주교의 얼굴을 떠올리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러고는 판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진짜 장발장입니다. 저를 잡아 가십시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823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파리 근처의 몽페르메이유 여관에 한 노인이 묵었습니다. 노인은 심부름하는 코제트가 귀엽다며 값비싼 인형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못된 주인 테나르디에 부부는 노인이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바가지를 씌웠습니다. 음식 값이나 방 값을 모두 두 배씩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노인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돈을 치렀습니다. “아주머니, 장사가 잘됩니까?” 노인의 물음에 테나르디에 부인이 답했습니다. “웬걸요? 전혀 안 돼요. 게다가 저 아이까지 돌보려니 힘들죠.” “저 아이라니 누구 말입니까?” “코제트 말이에요. 우리 아이들을 기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남의 아이까지 돌보자니 너무 힘들거든요.” “그럼 내가 저 아이를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노인의 말을 들은 테나르디에는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좋고말고요. 하지만 이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꽤 들었거든요. 천오백 프랑은 주셔야 되겠는데요.” 노인은 두말없이 천오백 프랑을 꺼내 테나르디에 부부 앞에 놓고는 코제트를 안고 여관을 나갔습니다. 코제트를 데려간 노인은 다름 아닌 장발장이었습니다. 몇 달 전, 자수를 하여 감옥으로 간 장발장은 종신형을 받고 온몸이 쇠사슬에 묶인 채 힘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체격도 크고 힘도 센 장발장은 남보다 더욱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죄수들이 배를 수리하는 일을 돕기 위해 항구로 갔는데, 배를 고치던 선원 하나가 높은 돛대에서 미끄러진 것입니다. 다행히 선원은 간신히 돛대 끝을 잡고 매달려 있었지만, 점점 팔에 힘이 빠지는지 곧 떨어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마치 다람쥐처럼 날쌔게 돛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죄수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죄수는 엄청난 힘으로 자기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돛대로 올라간 것입니다. 미끄러운 돛대를 어려움 없이 올라간 죄수는 가지고 간 밧줄을 던져 선원을 구했습니다. “우아!” 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환성을 질렀습니다. 선원을 구한 죄수는 조심스럽게 돛대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을 헛디뎠는지 아니면 힘이 빠져서인지 돛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0월이었지만 바닷물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죄수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감옥에서는 그 죄수가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죄수의 이름은 장발장이었죠. 어렵게 감옥을 빠져나온 장발장은 팡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몽페르메이유 여관으로 가서 코제트를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데리고 파리로 와서 미리 마련해 둔 집으로 갔습니다. 고르보 저택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이층집이었습니다. 메르 시에서 열심히 사업을 해 모아 둔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장발장은 무척 조심스럽게 생활했습니다. 낮에는 집에만 있었고 필요한 일이 있더라도 항상 어두운 밤에만 외출을 했습니다. 그래도 장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지낼 수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유일한 가족이었으며, 코제트 역시 장발장을 아버지처럼 잘 따랐습니다. “난 아버지랑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항상 함께 있을 거예요.” 장발장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며 코제트를 진심으로 아껴 주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산책을 나온 장발장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장발장은 재빨리 골목으로 들어가 자기 뒤를 쫓는 사내를 살펴보았습니다. 큰 키에 마른 체격, 긴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든 모습은 감옥을 나온 이후 언제나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던 자벨 경감이었습니다. 장발장은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코제트, 짐을 챙겨라. 몸이 가벼워야 하니 중요한 것만 꾸려라.” “왜 그러세요, 아버지?” “이 곳을 떠나야겠다.” 장발장은 혹시라도 코제트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자신이 전과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영리하고 착한 코제트는 장발장의 얼굴을 보고 묵묵히 짐을 꾸렸습니다. 자벨 경감을 피해 도망친 장발장과 코제트는 한 수녀원에 도착했습니다. 그 수녀원의 정원지기 할아버지는 장발장이 메르 시의 시장이었을 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던 노인이었습니다. 제가 숨겨 드리지요, 시장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입니다. 노인은 장발장이 자기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코제트와 함께 수녀원에 머물 수 있게 도왔습니다. 장발장은 수녀원의 정원사로 일했고, 코제트는 수녀원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칠 년이 지났습니다. 장발장과 코제트는 수녀원을 나와 플뤼메 거리의 한적한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코제트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숙녀로 성장했습니다. 장발장은 이제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코제트는 장발장과 함께 공원으로 자주 산책을 다녔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산책하는 모습은 정말 정답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마리우스라는 청년이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마리우스는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지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자 마리우스의 집안도 자연히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마리우스는 기품 있고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부르짖는 청년들의 모임인 ‘아바세의 친구’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공원에 산책을 나왔던 마리우스는 우연히 코제트를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코제트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고, 코제트의 우아한 몸짓과 은은한 향기를 느끼며 마리우스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코제트 역시 마리우스의 늠름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보던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마침내 서로 마음을 열고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코제트, 지금껏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상할 수가 없군요.” “저도 그래요, 마리우스. 우리 영원히 함께해요.”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날마다 공원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웬일인지 코제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몸이라도 아픈 게 아닐까?’ 마리우스가 코제트의 집을 찾았지만 집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관리인은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어젯밤에 떠나셨습니다. 아주 멀리 가신다고 들었는데요.” 장발장이 코제트와 함께 급히 플뤼메를 떠나게 된 것은 자벨 경감을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코제트가 마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혼자 산책 가는 일이 많아지자, 장발장도 종종 혼자서 산책을 하게 되었지요. 저 노인은, 맞아! 틀림없이 코제트를 데려간 그 노인이야. 멀리서 장발장을 보고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사내는 오래전 몽페르메이유에서 여관을 하던 테나르디에였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우연히 장발장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테나르디에는 장발장의 정체는 모르고 그저 돈 많은 노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테나르디에는 혼자 산책하고 있던 장발장에게 다가가 권총으로 위협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는 테나르디에와 같은 부랑자 패거리가 모여 있었습니다. “테나르디에! 웬 노인을 데리고 왔나?” “흐흐흐! 이 노인은 복덩이란 말이야. 엄청난 부자거든.” 테나르디에가 방심한 틈을 타서 장발장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테나르디에 손에서 권총을 떨어뜨렸습니다. “앗! 저 녀석이 도망간다.” “잡아라. 놓쳐서는 안 돼!” 도망을 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장발장은 테나르디에 패거리와 격투를 벌였습니다. 장발장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이가 들었고 테나르디에 패거리는 너무 많았습니다. 장발장은 누군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삑삑! 요란한 호각 소리가 들리며 경찰이 나타났습니다. “모두에게 수갑을 채워. 저 노인은 부축하고.” 테나르디에 패거리를 모두 체포한 뒤 경찰을 지휘하던 경감이 노인을 찾았습니다. 테나르디에 패거리에게 습격 받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을 지휘하던 사람이 바로 자벨 경감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발장은 자벨 경감이 자기를 알아볼까 봐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코제트를 데리고 멀리 도망친 것입니다. 한편 코제트와 함께 잠시 다른 도시로 피했던 장발장은, 코제트가 마리우스에게 써 놓은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우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잠시 떠나 있어야 해요.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예요. 슬퍼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장발장은 그제야 코제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코제트에게 마리우스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파리로 떠났습니다. 한편 코제트가 아무 말도 없이 멀리 떠나자 절망에 빠진 마리우스는 시민과 학생과 함께 시위대를 만들어 혁명에 참가했습니다. ‘코제트가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사는 건 의미가 없다. 차라리 옳은 일을 하다 죽자!’ 마리우스는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총탄 에 맞고 말았습니다. 그때 장발장이 나타났습니다. 장발장은 전투가 심한 시내를 피해 마리우스를 업은 채 하수도를 기어갔습니다. 더럽고 기나긴 하수도를 몇 시간이나 기어서 간신히 밖으로 나온 장발장은 자벨 경감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이 치료를 받게 도와주시오. 그 뒤에 나를 잡아가시오.” 그러나 자벨 경감은 뜻밖에도 장발장을 그냥 두고 돌아섰습니다. 마리우스의 목숨을 구해 주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쫓던 장발장이 악인이 아니라 남을 돕는 착한 사람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한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우스는 장발장에게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나는 전과자일세. 십구 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나오자마자 미리엘 주교님의 은접시를 훔쳤네. 다른 이유로 다시 감옥에 갔지만 어렵게 탈옥을 했지. 난 아직도 죄인이야. 충격을 받은 마리우스는 홀로 떠나는 장발장을 잡지 않았습니다. 장발장 때문에 자신과 코제트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코제트와 떨어져 혼자 살게 된 장발장은 나날이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코제트를 향한 그리움에 마음의 병까지 더해졌고 증세는 점점 더 깊어 갔습니다.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신 장인은 시체를 메고 하수도를 기어가더군요. 난 증거를 남기려고 시체의 옷자락을 몰래 찢어 놓았소.” 테나르디에가 꺼낸 옷자락을 본 마리우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옷자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마리우스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장발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우스는 테나르디에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분은 내 생명의 은인이오. 썩 나가시오!” 뒤늦게야 장발장이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안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함께 장발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병이 깊어져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코제트는 장발장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 “오오, 코제트냐? 너를 봤으니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구나.” 마리우스 역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장인어른을 오해 했습니다. 용서 해 주십시오.” 장발장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구해 줬어. 코제트 때문에 행복했고. 이제 마리우스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고 코제트를 두고 떠날 수 있겠구나. 이젠 주교님을 만나러 하늘로 가야겠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장발장은 코제트의 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정의를 꿈꾸었던 프랑스의 양심. 빅토르위고는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을 섬기던 장군이던 아버지는 위고가 군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위고는 각종 시 경연 대회에서 입상하며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공화파와 왕당파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왕당파는 왕과 귀족 평민으로 이루어진 신분 사회를 부활시키려고 했고 공화파는 신분 제도를 없애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위고는 공화파가 되어 싸웠습니다. 이 일로 위고는 핍박을 받게 되고, 19년이나 다른 나라에 숨어 생활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걸작 장발장입니다. 이외에도 노트르담의 꼽추, 크롬웰, 에르나니 등 많은 명작들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일생을 사회의 발전, 차별을 없애기 위해 싸운 위고는 숨을 거둘 때까지 주로 인간의 도리를 고민하는 작품들을 써 냈습니다. 위고가 죽자 프랑스 국민들은 이런 뜻을 기려 위고를 국민적인 대시인으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공을 세운 사람만이 묻히는 팡테옹에 묻었습니다. 인류애가 담긴 걸작 중의 걸작. 삼십 년이라는 거의 평생을 걸쳐 구상해 1862년에 완성한 장편 소설 장발장은 빅토르 위고의 최고 대표작입니다. 원 제목은 레 미제라블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제목은 작품 안에서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묻는 작품의 주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느 한 사나이가 빵 한 조각을 훔쳐 감옥살이를 하는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해, 마지막에는 프랑스 시민 혁명이 배경으로 나오면서 거대한 역사 소설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이야기의 흐름은 작가 자신이 처했던 당시 뼈저린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 내내 비치는 작가의 인간을 향한 시각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한 인간을 어떻게 바뀌게 하는지, 과연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작가의 깊은 생각은 장대한 시적 표현과 합쳐져 19세기 유럽 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나는 라브리라는 사냥개 한 마리를 데리고 뤼브롱 산에서 양 떼를 지키는 목동입니다. 산 위의 드넓은 초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꽃과 나무와 양 떼뿐, 사람은 구경하기도 힘들지요. 가끔씩 약초를 찾는 몽 드뤼르의 수도자들이나 피에몽 주변에 사는 숯장수가 지나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달에 두 번, 그러니까 보름 걸러서 한 번뿐입니다. 보름마다 농장에서 식량을 보내 주거든요.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리며, 심부름하는 어린 아이의 밝은 얼굴이나 나이 든 노라드 아주머니의 붉은 두건이 보일 때면 한없이 기뻤습니다. 식량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고,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관한 소식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근처 마을을 통틀어 스테파네트 아가씨보다 더 예쁜 처녀는 없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아가씨가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산에서 지내는 목동인 내게 그런 일들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 나이 스무 살이고,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이제껏 내가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답답니다.” 이번 일요일은 농장에서 식량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식량을, 아니 사람을 기다렸지만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당의 미사가 늦게 끝났거나, 아니면 점심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소낙비 때문에 길이 나빠져서 늦는 것이라고 여겼지요. 오후 세 시쯤 되자 하늘이 맑게 개고 산은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빛났습니다. 짤랑짤랑! 시냇물이 힘차게 흐르는 소리 사이로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렸습니다. 방울 소리는 부활절에 울리는 종소리만큼이나 맑고 경쾌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새를 끌고 온 것은 어린아이도 노라드 아주머니도 아니었습니다.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스테파네트 아가씨였습니다. 노새 등에 실은 바구니 사이에 몸을 세우고 앉아 있는 아가씨는 소낙비가 내린 뒤에 부는 시원한 산바람을 맞아 뺨이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매우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아가씨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파서 누워 있고, 노라드 아주머니는 휴가를 얻어 집에 가셨어요. 올 사람이 없으니 내가 올 수밖에.”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노새에서 내리며 사람들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가씨는 산길이 처음인 데다가 오는 도중 쏟아지는 비를 피하다 그만 길을 잃어서 늦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앙증맞은 리본을 하고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치마를 입은 아가씨는, 숲 속에서 길을 잃어 헤맸다기보다는 무도회라도 들렀다 오느라 늦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정말 아무리 쳐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큼 예뻤습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가까이서 아가씨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아가씨가 내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서 말입니다.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바구니에서 식량을 다 꺼내 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양 우리로 들어가더니 구석에 있는 내 잠자리와 양피를 깐 방석, 벽에 걸린 커다란 외투, 지팡이와 사냥총을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마을에서만 살았던 아가씨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런 데서 살고 있군요. 항상 혼자 있으니 얼마나 심심할까? 날마다 무얼 하며 지내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나요?” 나는 “아가씨!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며 지낸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아가씨도 분명히 내 마음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술궂은 아가씨는 장난스런 질문으로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들며 혼자 좋아했습니다. “애인이 가끔 당신을 만나러 오지요? 당신 애인은 아마도 황금빛 양이 아니면, 산꼭대기를 뛰어다니는 선녀 에스테렐일거야. 어때요, 틀림없죠?”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아가씨야말로 언제 왔는지 모르게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선녀 에스테렐인 것 같았습니다. “잘 있어요.” “아가씨, 고마워요. 안녕!” 어느덧 꿈결 같은 시간이 지나고, 아가씨는 빈 바구니가 실린 노새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이 비탈길을 따라 사라져 갔을 때, 노새 발굽에 차여 구르는 조약돌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언제까지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이 깰까 봐 해질 무렵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마냥 서 있었습니다. 깊은 골짜기에 어두운 푸른빛이 감돌고, 양들이 소리 내어 울며 우리로 돌아올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비탈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조금 전 명랑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옷이 물에 젖은 채 추위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냇물을 건너려고 하다가 그만.” 아가씨는 채 말을 맺지도 못했습니다. 소낙비 때문에 물이 엄청나게 불어난 시내를 무리하게 건너려다가 휩쓸렸던 모양입니다. 가녀리고 순한 아가씨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안타깝게도 지금 마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가씨 혼자서 어두운 산길을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내가 양 떼를 그냥 두고 아가씨를 바래다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산에서 밤을 보낸다면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걱정을 할까 하는 생각에 아가씨는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아가씨, 칠월의 밤은 짧으니까 잠깐만 참으면 돼요.” 나는 아가씨를 안심시킨 다음, 물에 흠뻑 젖은 몸과 옷을 말리도록 급히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따뜻한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가엾게도 아가씨는 불을 쬐려 하지도 않았고, 음식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가씨의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나도 울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었습니다. 희뿌연 햇살과 붉은 석양이 산꼭대기에 걸려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쉬세요.” 나는 침대 위에 고운 모피를 깔아 놓고, 잘 자라고 말한 다음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느 양보다도 더 소중하고 순결한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내 보호 아래 안심하고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별들이 그처럼 빛나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갑자기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며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나왔습니다. “양들이 움직이며 부스럭대는 소리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아가씨는 밖으로 나와 불이라도 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듯 보였습니다. 아가씨가 내 옆에 와서 앉았고, 나는 그 작은 어깨에 양털 가죽을 덮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모닥불은 주위를 환하게 밝히며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인 듯, 주위는 아주 고요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별빛을 바라보며 밤을 보낸 적이 있다면, 우리가 잠드는 동안 또 하나의 신비한 세계가 고요함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샘물은 더욱 맑게 노래하고 연못에서는 작은 불꽃들이 빛납니다. 모든 산의 요정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허공에서는 무언가가 가볍게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자라고 풀잎이 돋아나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낮이 살아 있는 세상이라면 밤은 고요함에 묻힌 세상입니다. 이런 고요함과 친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밤을 무서워합니다. 우우! 길고 구슬픈 소리가 저 아래 반짝이는 연못에서부터 우리가 있는 곳까지 메아리쳐 왔습니다. 아가씨는 몸을 떨며 내게 바싹 붙어 앉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빛나는 유성 하나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마치 방금 들려온 구슬픈 소리가 빛을 이끄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게 뭐지요?”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떤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성호를 그었습니다. 아가씨도 나를 따라 성호를 긋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불쑥 물었습니다. “목동은 모두 점쟁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천만에요, 아가씨. 그렇지 않아요. 다만 높은 산에 사는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별과 조금 더 가까이 지내고 있죠. 그래서 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잘 알 수 있답니다.” 아가씨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손으로 턱을 괸 채 양털 가죽을 두르고 있는 그 모습은 정말 귀엽고 아름다웠습니다. “별이 저렇게 많다니! 저렇게 많은 별은 생전 처음이에요. 저 별들도 이름이 있나요?” 물론이지요.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는 저 별이 ‘성 자크의 길’이에요. 프랑스에서 스페인의 하늘까지 이어지지요. 용감한 샤를마뉴 대왕이 사라센 인들과 전쟁을 할 때, 바로 갈리스의 성 자크가 대왕께 길을 알려 주었죠.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영혼들의 수레’와 반짝이는 바퀴 네 개를 보세요. 앞에 있는 별 세 개가 ‘세 마리 짐승’이고, 마지막 세 번째 별 옆에 있는 아주 작은 별이 ‘마부’랍니다. “꼬마 마부라니, 귀엽기도 해라.” 그 언저리에 온통 빗발처럼 쏟아지는 별들이 보이죠? 그건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에 들여놓지 않는 영혼들이랍니다. 저편 그 아래쪽을 보세요. 저기 있는 별은 ‘갈퀴’ 또는 ‘오리온’이라고 하지요. 우리 목동들에게 시계 노릇을 해 준답니다. 그 별을 보고 자정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남쪽 좀 더 아래로 보이는 반짝이는 별이 별들의 횃불인 ‘장 드 밀랑’이랍니다. 저 별에 관해서는 목동들 사이에 이런 얘기가 전해 오고 있어요. 어느 날 밤, 장 드 밀랑은 오리온과 ‘병아리 장’과 함께 친구 별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대요. 병아리 장은 남들보다 일찍 서둘러 떠나 맨 먼저 윗길로 들어갔지요. 오리온은 좀 더 아래로 곧장 가로질러 병아리 장을 따라갔어요. 그런데 게으름뱅이 장 드 밀랑은 늦잠을 자다가 그만 꼬리가 되고 말았어요. 화가 난 장 드 밀랑은 병아리 장과 오리온을 멈추게 하려고 지팡이를 집어 던졌어요. 그래서 오리온을 ‘장 드 밀랑의 지팡이’라고도 부르지요. 하지만 모든 별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별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우리의 별인 ‘목동의 별’이랍니다. 새벽에 양 떼를 몰고 나갈 때나 저녁에 다시 몰고 돌아올 때, 한결같이 우리를 비춰 주는 별이죠. 우리는 그 별을 ‘마글론’이라고 불러요. ‘프로방스의 피에르’ 뒤를 쫓아가서 칠 년에 한 번씩 결혼하는 예쁜 마글론 말이죠. “어머나! 별들도 결혼을 하나요?” “그럼요, 아가씨.” 결혼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주려고 할 때, 나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살며시 내 어깨를 누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아가씨가 리본과 레이스와 부드럽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비비며 내 어깨에 기대 온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는 환히 먼동이 터 별들이 빛을 잃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게 머리를 기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가씨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며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내 가슴은 무척이나 설레었지만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맑은 밤하늘의 보호를 받아, 성스럽고 순결한 생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서는 많은 별들이 양 떼처럼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별들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숱한 별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곱게 잠들어 있노라고 말입니다. 남프랑스의 햇살을 닮은 작가. 알퐁스 도데(1840 1897)는 남프랑스의 님에서 태어났습니다. 도데는 리옹에서 고등중학교를 다녔지만 집안의 사업 실패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지요. 그 뒤 알레스에 있는 중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남프랑스에서 보낸 청소년기는 알퐁스 도데에게 문학적으로 커다란 자산이 되었답니다. 1858년에 발표한 시집 연인들이 모르니 공작에게 인정받아 공작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도데는 이 일을 계기로 문학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지요. 그 후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랄을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공쿠르, 투르 게네프 같은 작가들과 사귀면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썼습니다. 알퐁스 도데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창작 세계가 있는데, 이것이 도데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자서전적 소설 꼬마, 별,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월요일 이야기,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 자크, 르 나바브, 뉘마 루메스탕, 전도사, 사포 등이 알퐁스 도데의 대표작입니다. 특히 희곡 아를의 여인은 비제가 오페라로 작곡하여 더욱 유명해졌답니다. 깨끗하고 순박한 사랑. 별은 1869년 알퐁스 도데의 첫 번째 단편 소설집 방앗간 소식에 실려 있습니다. 도데의 고향인 프로방스를 무대로 펼쳐지는 순박한 목동의 사랑 이야기지요. 별에는 알퐁스 도데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도데는 사람 사이의 갈등, 역사나 사회 문제에서 벗어나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순수함을 좇으며, 맑고 깨끗한 인간의 감정을 그려 나가지요. 특히 별은 시골을 배경으로 낭만적인 서정을 가득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알퐁스 도데는 배경과 소재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설정하고,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 목동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 별과 인간을 대비시켜 하늘의 별만이 가지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형상화하여 인간의 순수함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별에 실린 이러한 작가의 마음이 잘 전달되는 이유는 섬세하고도 사실적인 표현 때문입니다.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대사를 통해 보이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묘사와 어우러져 깊은 문학적 향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멋과 예술의 도시 파리. 사람들은 많은 화가가 그림에 담는 몽마르트르 언덕과 센 강의 아름다움, 퐁텐블로 숲의 싱그러움을 자랑합니다. 파리에는 무려 십사 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십칠 층짜리 오페라 극장도 있었습니다. 이 오페라 극장은, 매일 밤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이 직접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최고의 오페라 가수들이 화려한 공연을 펼치는 세계적인 명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페라 극장이 크고 유명하다 보니 이상한 소문도 떠돌고 있었습니다. 바로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었지요. "정말 유령을 보았다니까! 키가 아주 큰 남자였어." "청소부 아주머니 말이 그 유령은 얼굴이 없다던데, 정말일까?" 오페라에서 조연을 맡은 젊은 여가수들이 분장실에 모여 ‘오페라의 유령’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인 여가수 크리스틴은 동료들의 수다에 끼지 않고 묵묵히 악보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틴은 날씬한 몸매에 피부가 고운 미인이었습니다. 특히 곱슬거리는 금발을 늘어뜨리고 파란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면 정말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나 요정 같았습니다. "크리스틴이야말로 여신 역할을 하면 딱 어울릴 텐데 말이야." "그만해. 질투 심한 카를로타 귀에 들어가면 야단나겠네." 카를로타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유명한 주연 여가수였습니다. "라울! 오늘 오페라 극장에 가면 멋진 아가씨들을 만날 게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필립 드 샤니 백작이 남동생 라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신사 라울은 씨익 웃기만 했습니다. 라울은 파리의 명문 귀족인 샤니 가문의 둘째 아들이지만 사교계 생활보다는 여행과 자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해군 장교가 되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립은 라울이 더 이상 떠돌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교 모임이나 무도회, 공연장에 반드시 라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형. 내게는 첫사랑이 있으니까." 라울이 꿈꾸는 듯한 눈으로 말하자 필립은 웃었습니다. "또 시작이구나. 네가 늘 말하는 아가씨 말이지?" "형은 그 아가씨를 못 봐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까지 나는 그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도, 더 고운 목소리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요." 이렇게 말하는 라울의 얼굴에는 열정과 그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 시각 오페라 극장 분장실에서는 가수들이 분장을 마친 뒤 옷차림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란한 소리가 나며 분장실 문이 열리더니 지배인 드비엔느와 폴리니가 긴장한 얼굴로 들어오며 말했습니다. "크리스틴 다에 양. 줄리엣의 노래를 불러 보세요." 크리스틴은 약간 놀랐지만 곧 숨을 고르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아, 로미오. 내가 미워하는 것은 당신의 이름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순간 방 안에는 놀라움이 담긴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크리스틴의 독창은 그녀의 푸른 눈 만큼이나 맑고 아름다웠으니까요. 폴리니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듯 외쳤습니다. "크리스틴, 당장 줄리엣 의상으로 갈아입으시오. 오늘 주연은 당신이오." 크리스틴은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의 눈도 휘둥그레졌습니다. "하지만 주연은 카를로타 양이......." "카를로타 양은 배탈이 났소." 드비엔느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급히 나가던 드비엔느의 손에서 쪽지가 떨어졌습니다. 크리스틴은 드비엔느가 쪽지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 재빨리 그 쪽지를 집어 들고 분장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른 가수들은 부러움과 놀라움, 질투가 섞인 눈길로 크리스틴을 바라보았습니다. 쪽지를 펴 본 크리스틴은 깜짝 놀랐습니다. 종이에는 붉은 잉크로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드비엔느씨 오늘 카를로타는 배탈이 나서 무대에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 줄리엣 역은 크리스틴 다에 양에게 맡기시오. 만약 내 요구를 거절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오페라의 유령. 순간 놀라움과 공포에 휩싸인 크리스틴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에릭! 당신 정말로 나를 주연으로 만들려고 했군요. 아아......." 에릭은 오페라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사내의 이름이었습니다. 크리스틴은 사람들이 유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직접 말도 해 보고 노래를 같이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 번도 오페라의 유령 얼굴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목소리로만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석 달간 오페라의 유령과 이야기하면서 크리스틴은 오페라의 유령이 지배인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배인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극장에서는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공연 도중에 조명이 전부 다 꺼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배인 드비엔느는 어쩔 수 없이 오페라의 유령이 요구하는 것에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쨌든 오늘 공연에서 성공하면 크리스틴은 꿈에도 그리던 주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두고 보세요. 꼭 잘 해낼 거예요.’ 어린 시절 크리스틴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아버지 다에 씨와 함께 프랑스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바이올리니스트와 천사의 목소리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틴이 바닷가 마을에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스카프가 날아갔습니다. 스카프는 그대로 바닷물에 빠져 버렸지요. 모두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한 소년이 용감하게 바다로 뛰어들더니 스카프를 건져다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크리스틴과 소년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라울이라는 그 소년은 유명한 샤니 백작의 아들이었지만 신분을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크리스틴과 어울렸습니다. 다에 씨도 라울을 귀여워해서 가끔 둘을 앉혀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다에 씨는 음악의 천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예술가는 음악의 천사가 선택한 사람이란다. 음악의 천사가 찾아오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음악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는 거야." 그 말을 듣고 크리스틴은 불안해졌습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음악의 천사를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몇 년 후 병이 깊어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다에 씨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한 크리스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크리스틴, 걱정 마라. 반드시 음악의 천사가 너를 찾아올 거야. 내가 하늘나라로 가거든 음악의 천사를 너에게 보내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크리스틴은 라울과도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된 라울은 가문의 명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게다가 크리스틴은 평민인 자기와 귀족인 라울은 절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그 마을을 떠나 음악 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파리 오페라 극장에 들어갔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역만 맡았습니다. '성공하고 싶어. 반드시 주인공이 되고 싶어.’ 이렇게 생각한 크리스틴은 날마다 분장실의 낡은 거울 앞에서 혼자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날도 크리스틴은 평소와 다름없이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울 안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습니다. 크리스틴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유령이 나타난다더니 정말이구나!’ 크리스틴은 문 쪽으로 달아나며 십자가를 그었습니다. 바로 이때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나는 오페라의 유령이야. 하지만 크리스틴! 무서워하지 마. 난 너를 돕고 싶어서 왔으니까." 이윽고 유령은 그윽한 바리톤 음성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도망가려던 크리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거울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유령의 노랫소리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다 크리스틴의 머릿속에 갑자기 아버지의 유언이 떠올랐습니다. "크리스틴, 걱정 마라. 반드시 음악의 천사가 너를 찾아갈 거야. 내가 하늘나라로 가거든 음악의 천사를 너에게 보내마." 크리스틴은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당신은 아버지가 내게 보내신 음악의 천사로군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다정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크리스틴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봐, 크리스틴! 나는 천사가 아냐. 내 이름은 '에릭’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오페라의 유령’이라고 부른다고." "그럼 당신을 에릭이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에릭, 당신은 유령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보내신 음악의 천사예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마세요." 그러자 오페라의 유령은 다정하게 속삭였습니다. "아! 난 '천사’라는 말은 처음 들어. 고마워. 난 지금 참 행복해." 크리스틴은 거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거울에는 크리스틴 자신의 모습만 비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틴, 나를 보려고 하지 마. 아니 보지 않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보다 나는 너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고 싶어. 너는 분명 재능이 있지만 아직은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아. 너를 돕고 싶어. 네가 나를 음악의 천사라고 믿는다면 말이야. 크리스틴은 몹시 흥분했습니다. "믿어요. 당신은 음악의 천사예요. 부디 내게 노래를 가르쳐 주세요. 나는 주연을 맡고 싶어요." 그날부터 분장실에서는 날마다 이상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크리스틴은 극장 사람들이 출근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분장실의 거울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의 발성법을 교정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기도 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에게 음악 수업을 받으면서 크리스틴의 실력은 나날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크리스틴, 너는 천재야. 이제 곧 네 목소리가 온 파리를 놀라게 할 거야. 아니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거야." "그럴 리가요. 지금 우리 극장에서 카를로타를 따라갈 가수는 아직 없어요." 그러자 오페라의 유령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습니다 "흥! 그 여자는 성량은 풍부하지만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늘 꽥꽥 소리를 질러대기만 하지. 그건 노래가 아냐. 그리고 크리스틴, 좀 있으면 이 극장의 지배인과 부지배인이 바뀌면서 송별회를 겸한 특별 공연이 있어. 아마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야.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너는 줄리엣 역을 맡는 거야. 네가 주연이 되는 거라고." 그날부터 날마다 맹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실제로 크리스틴이 맡은 역은 많은 시녀들 중 하나였습니다. 크리스틴은 낮에는 줄리엣 역을 연습하는 카를로타 옆에서 시녀 역을 하다가 밤과 아침에는 분장실에서 줄리엣 역을 연습하는 이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에릭의 예언대로 크리스틴이 줄리엣 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도무지 지금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 크리스틴은 눈을 꼭 감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의상을 입기 위해 분장실로 향했습니다. 필립과 라울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뚱뚱한 지리 부인이 특별석으로 안내했습니다. 라울도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사실 이런 오페라 극장에 오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페라 보러 오는 여자들이 마음에 안 들어. 음악을 들으러 오는 건지 옷과 보석 자랑을 하러 오는 건지 분간이 안 가. 또 향수는 왜 그렇게 많이 뿌리는지 머리가 지끈지끈해.' 같은 시각 크리스틴은 줄리엣 의상을 입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습니다. '내가 줄리엣이 된다. 드디어 주연을 맡은 거야. 아아,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지금 이 순간 자기와 이 기쁨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 크리스틴은 몹시 외로워졌습니다. 크리스틴은 한 청년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어렸을 때 바다에 빠진 스카프를 건져 준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됐을 라울 드 샤니 자작이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곧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 같은 여자는 까맣게 잊었겠지. 아마도 고귀한 혈통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있을 거야.' 이때 지리 부인이 크리스틴에게 쪽지를 한 장 전해 주고 나갔습니다. 붉은 잉크로 쓴 낯익은 필체, 오페라의 유령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랑하는 크리스틴! 이제 주연을 맡았으니 열심히 해. 내가 너를 지켜보고 응원해 줄게. 에릭. 크리스틴은 그 쪽지를 소중하게 접어 서랍에 넣었습니다. '그래. 에릭이 있었지. 나의 성공을 누구보다 기뻐해 주는 사람. 그래, 난 혼자가 아니야.' 한편 라울은 아까부터 비어 있는 특별석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저 자리는 비어 있는데도 왜 오페라 관람용 안경과 과자를 놓아두나요?" "그 자리는 오페라의 유령을 위한 특별석이래." 필립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요?" "이 극장에 있는 유령이 저 자리를 자기 자리로 정해 달라고 해서 늘 과자를 갖다 둔다는구나." "말도 안 돼. 유령이 있는 게 아니라 극장에서 선전하려고 지어낸 말이겠죠." 라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때 라울은 조금 특이한 차림을 한 남자가 들어와 또 다른 특별석에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까만 눈, 그리고 터번을 쓴 남자. 여행을 많이 한 라울은 단박에 그 남자가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도 있네요?" 그 말에 필립은 신기하지도 않다는 듯 흘낏 보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맞아. 그런데 저 친구도 희한해.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오거든.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가 오페라의 유령을 잡겠다고 떠든다는 거야." 라울은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습니다. 필립은 공연 안내서를 보며 투덜거렸습니다. "이런, 오늘은 카를로타가 출연하지 않는다는군. 웬 무명 여가수가 줄리엣 역을 맡았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무대의 막이 올랐습니다. 캐플렛 집안에서 열리는 무도회 장면으로, 로미오가 무도회장에 몰래 들어왔습니다. 이윽고 무대 반대쪽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며 줄리엣이 등장했습니다. 처음에 객석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카를로타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터라 낯선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그 여가수의 노래에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라울도 여가수의 노랫소리에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것 외에 무엇인가 몹시 그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라울은 오페라 관람용 안경을 집어 들고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줄리엣을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라울은 낮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물결치는 황금색 머리카락, 푸른 눈......, 저 여인은 분명! "형, 저 여가수 이름이 뭐죠?" 라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필립은 공연 안내서를 뒤적이며 말했습니다. "어디 보자, '크리스틴 다에'라고 쓰여 있군." 라울은 오페라 관람용 안경을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크리스틴!" 물론 라울의 목소리는 웅장한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노래하던 크리스틴은 이상한 느낌에 특별석 쪽을 보았습니다. 순간 크리스틴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특별석에서 일어나 놀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년, 바로 라울이 있었으니까요. "아아, 그렇게 찾아다니며 그리워하던 크리스틴을 여기서 만나다니......." 그제야 필립은 라울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알아차렸습니다. "라울! 네가 말한 그 아름다운 아가씨가 저 여가수냐?" 라울은 기쁨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줄리엣 역의 크리스틴은 애절한 음성으로 로미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울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크리스틴은 자신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윽고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오페라의 막이 내려졌습니다.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대단한걸. 카를로타보다 나은 것 같은데." "크리스틴! 크리스틴!"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무대 위로 꽃을 던지며 크리스틴의 이름을 외쳤습니다. 크리스틴은 기쁨에 겨워 라울을 향해 환하게 웃었습니다. 예전에 크리스틴은 귀족인 라울이 자기 같은 평민과 결혼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먼저 라울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라울의 눈빛을 본 순간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 눈빛에는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이 담겨 있었으니까요. 무대와 객석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라울과 크리스틴은 서로의 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울은 꽃다발을 들고 크리스틴이 있는 분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웬 남자의 목소리가 안에서 새어 나왔습니다. "크리스틴, 대답해 봐. 나 없이 살아갈 수 있겠어?" "아뇨, 에릭. 저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사랑과 성공,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는 없어. 자! 이제 네 선택만 남았어. 만약 내가 떠나면 너는 다시는 노래를 할 수 없어. 너도 알고 있지? 내가 음악의 천사라는 걸 말이야."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과 라울이 주고받는 눈빛을 보고 몹시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라울은 힘없이 꽃다발을 떨어뜨리고 쓸쓸히 그곳을 떠났습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크리스틴이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크리스틴은 자기를 바라보던 라울의 뜨거운 눈빛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귀족인 라울과 평민인 내가 결혼할 수 없어. 그러니 나는 사랑과 성공 중에서 성공의 길을 택해야 하는 거야.' 바로 이때 크리스틴은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꽃다발에서 빠져나온 작은 쪽지도 함께. 크리스틴! 이제야 당신을 찾았군요. 사랑하오. 이제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겠소. 당신의 라울 크리스틴은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아아, 에릭과 나눈 대화를 라울이 들었나 봐. 내 마음을 오해하고 있겠구나.' 크리스틴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눈물은 라울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다음 날 밤 라울은 극장의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아름답고 고운 글씨체, 그리운 크리스틴의 편지였습니다. 사랑하는 라울 어제 당신이 무슨 말을 들었을지 짐작합니다. 나를 오해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믿어 주세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라울뿐입니다. 만나서 사정을 말씀드릴게요. 아직도 저를 사랑하신다면 오늘 밤 파리 오페라 극장 옥상으로 와 주세요. 당신의 크리스틴편지를 읽은 라울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크리스틴이 자기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틴을 만나 보고 싶어. 그래, 만나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 크리스틴을 믿자." 라울은 곧장 오페라 극장 옥상으로 달려갔습니다. "라울!" "크리스틴!"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틴은 달려가 라울에게 안겼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헤어져 있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포옹한 채 서 있었습니다. "라울, 아직 저를 사랑하세요?" "나야말로 당신에게 묻고 싶소." "당신 외에는 사랑한 남자가 없어요." "그렇다면 망설일 것 없잖소. 결혼합시다, 당장!" "그럼 저를 데리고 도망가 주세요." 크리스틴의 절박한 목소리에 라울은 이상하다는 듯 크리스틴을 바라다보았습니다. 크리스틴은 몸을 떨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라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크리스틴을 설득했습니다. "크리스틴,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셨소. 그런데 에릭은 당신이 결혼하면 노래를 못 하게 한다고 했소. 당신 아버지가 보낸 천사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소." 크리스틴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언제나 크리스틴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셨던 아버지가 라울과의 결혼을 반대하실 리가 없겠지요. "크리스틴! 지체할 것 없소.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납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라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크리스틴은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바로 이때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누구세요?" "에릭이야." 크리스틴은 깜짝 놀랐습니다. 여전히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틴! 너는 오늘 나와 결혼해야 해." 이 말이 끝나자마자 오페라의 유령은 가면을 벗었습니다. 그 순간 크리스틴은 너무 놀라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있을 곳에는 검고 큰 구멍만이 두 개 보였고, 입술도 없이 하얀 이가 해골처럼 드러나 있으며, 두 뺨의 피부는 갈색으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밤 라울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극장에서 본 페르시아 인이었습니다. "큰일 났소! 에릭이 크리스틴을 납치해 갔소." 라울은 깜짝 놀라 총을 챙겨 페르시아 인을 따라나섰습니다. "말해 보시오. 도대체 당신은 누구고, 에릭은 누구인가요? 또 크리스틴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가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페르시아 인은 놀라운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나는 페르시아의 경찰 총책임자인 다가로입니다. 살인마 에릭을 해치우러 왔습니다." 흉측한 몰골로 태어난 페르시아 사람, 에릭은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모는 흉측했지만 에릭은 천사의 목소리를 지녔고, 재주가 많아 뛰어난 솜씨로 멋진 궁전을 설계했으며, 마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재능을 아낀 왕비는 에릭을 측근 부하로 두었는데, 에릭은 왕비의 권세를 믿고 잔인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장난삼아 사람을 죽이고 왕비에게도 살인을 하도록 충동질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의 왕은 다가로를 시켜 에릭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에릭은 한발 빨리 파리로 도망와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괴물에게 크리스틴이 잡혀 있다고 생각하니 라울은 그대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라울과 다가로는 서둘러 크리스틴의 분장실로 달려갔습니다. 다가로는 커다란 거울 앞으로 가더니 거울 뒤쪽의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거울이 돌아가면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생겼습니다. 라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에릭은 페르시아 궁전에도 이런 장치를 만들어 놓았었습니다." 다가로는 통로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습니다. 라울도 다가로의 뒤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로 이어진 긴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대한 호수가 펼쳐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호숫가에는 조각배까지 있었습니다. "혹시 이곳이 파리의 하수도와 통하는 게 아닐까요?" "맞습니다. 에릭은 주변의 지형과 건물을 아주 잘 이용하지요." 조각배를 타고 한참을 가던 라울은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호숫가에 거대한 성채가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성의 기둥과 지붕, 계단이 모두 무대 장치에서 쓰던 것이었습니다. "가짜 성이군요." 라울의 말에 다가로가 동의했습니다. "그래요. 에릭은 솜씨가 뛰어난 건축가지만 진짜 걸작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 같군요." 라울은 분노를 삭이려 애쓰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릭은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지만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고 있지요." 성으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난 두 사람은 사방이 거울로 꾸며진 방에 이르렀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습니다. 다급하게 돌아서던 라울은 그만 기운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방이 모두 거울이라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다가로가 소리를 지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천장에는 흉측한 모양을 한 올가미가 걸려 있었습니다. "에릭은 올가미의 명수요. 페르시아 왕궁에 있을 때는 심심풀이 삼아 올가미로 사람을 잡아 죽였지요. 우리가 찾아올 것을 알고 함정을 파 둔 거요." 그러나 라울은 침착하게 총을 꺼내 들고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침착하세요. 저는 명사수입니다. 절대 이대로 죽지 않아요. 게다가 이제 겨우 다시 만난 크리스틴을 잃을 수는 없어요." 옆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습니다. "크리스틴의 목소리예요! 크리스틴!" 마음이 다급해진 라울은 안타깝게 크리스틴을 부르며 거울 벽을 더듬다가 유리문을 발견했습니다.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 라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에는 꽁꽁 결박당한 크리스틴이 애절한 눈빛으로 라울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크리스틴, 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바로 이때 크리스틴을 가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면을 쓴 오페라의 유령, 에릭이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가면을 벗었습니다. 검고 퀭한 구멍 같은 두 눈, 축 늘어진 피부, 입술도 없이 그대로 드러난 이. 너무나 끔찍한 모습에 라울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크리스틴! 저런 괴물에게 잡혀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라울은 속으로 이렇게 되씹으며 오페라의 유령을 향해 천천히 총을 겨누었습니다. 명중시킬 자신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틴의 안전을 생각하니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에릭! 부탁이에요. 라울을 살려 주세요." 크리스틴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오페라의 유령은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상자에는 금으로 만든 전갈과 메뚜기가 한 마리씩 들어 있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라울과 다가로, 크리스틴을 번갈아 보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선택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나와 결혼하겠다면 이 전갈을 집어 들어.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면 이 메뚜기를 집어 들면 돼." 크리스틴은 겁먹은 얼굴로 오페라의 유령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제가 전갈을 집는다면 어떻게 되죠?" "당신과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결혼하지. 저 두 사람은 하객이 되고........" 오페라의 유령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라울이 외쳤습니다. "크리스틴! 전갈을 집으면 안 돼요!" 크리스틴이 메뚜기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습니다. "나와는 결혼하지 않겠다? 그게 당신의 뜻인가?" 오페라의 유령은 어두운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벽에 있는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라울과 다 가로가 있는 거울의 방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물은 찰랑거리며 라울의 발을 적시고, 종아리까지 차올랐습니다. "에릭! 안 돼요! 라울을 살려 주세요." "난 괜찮소, 크리스틴! 사랑하지도 않는 괴물과 결혼해서는 안 돼요. 절대 전갈을 집어서는 안 돼요!" 라울은 어느새 목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 크리스틴! 어서 선택해! 전갈이야? 메뚜기야?" 오페라의 유령이 다그치자 크리스틴은 눈물을 흘리며 전갈을 집었습니다. 크리스틴은 어떻게든 라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내게 입을 맞춰 줘. 그러면 라울을 살려 주겠어." 크리스틴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거울의 방은 물로 가득 차 라울과 다가로는 천장까지 밀려 올라가 있었습니다. 곧 물이 가득 차면 라울은 죽고 말 것입니다. 크리스틴은 눈을 질끈 감고 오페라의 유령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행복한 듯 눈을 감았고 라울은 질투와 분노로 절규했습니다. 바로 이때 페르시아 인이 천장의 올가미를 잡고 외쳤습니다. "라울! 찾았소! 저 단추를 누르시오!" 다가로가 가리키는 곳에는 검은 단추가 하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궁에도 똑같은 장치가 있어서 기억하고 있소. 저걸 누르시오." 라울은 힘껏 팔을 뻗어 간신히 그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방 안 가득한 물이 거대한 소용 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에 있던 구멍이 열리며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물이 빠지면서 라울과 다가로는 바닥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방은 거대한 욕조 같군." 한편 물이 빠지는 것을 본 오페라의 유령은 깜짝 놀라 총을 쏘았습니다. 다가로가 비명을 지르며 굴렀습니다. 다리에 총알을 맞은 것입니다. 라울은 총을 쏘며 크리스틴이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을 잡고 라울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탕탕! 라울과 오페라의 유령은 총을 쏘며 서로를 견제했습니다. 그러다 총알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다가로가 절뚝거리며 뛰어 들어오더니 라울에게 총을 내밀었습니다. "자! 이제 이 녀석을 한 방에 보내 버려요!" 라울은 총을 잡으려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놈은 빈손인데 나만 총을 쓰는 건 비겁한 짓이야." 라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페라의 유령이 라울을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잽싸게 총을 집어 들고 라울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크리스틴이 라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습니다. "에릭.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당신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라울을 죽인다면 나는 당신을 영원히 보지 않을 거예요. 아니, 나도 같이 죽어버리겠어요." 크리스틴의 말에 오페라의 유령은 천천히 총을 내렸습니다. "크리스틴, 당신은 정말로 이 남자를 사랑하는군. 내가 졌어. 이곳에서 빨리 나가. 여기는 이십 분 뒤에 폭파되니까. 조금 전에 폭파 장치를 가동시켜 놓았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크리스틴! 나는 지금까지 아무한테서도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오늘 당신이 내 이마에 입 맞춰 주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나는 이것으로 만족해." 오페라의 유령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고는 다시 총을 겨누었습니다. "다섯 셀 동안 나가지 않으면 모두 쏜다! 하나, 둘, 셋......." 다가로가 재빨리 크리스틴과 라울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갔습니다. 호수를 건너고 비밀 통로를 지나 거울 문 앞까지 뛰어갔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하 깊은 곳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자신의 성채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에릭은 진심으로 크리스틴을 사랑한 것 같소." "맞아요. 에릭은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늘 외로웠던 거예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몰랐고요. 에릭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이에요." 라울과 크리스틴은 오페라 극장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접었어요." "우리 시골로 돌아갑시다. 그곳에서 행복하게 삽시다. 영원히 사랑하면서." 라울과 크리스틴은 서로 꼭 끌어안고 황금빛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프랑스가 사랑한 추리 작가. 가스통 르루(1868 1927)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법률가가 되고자 했지만 문학에도 깊이 빠져 있었지요. 특히 영국 작가 코난 도일과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을 좋아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정교한 소설을 쓰는 두 작가를 좋아한 가스통 르루는 사회나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는 추리 소설을 쓰는 데 푹 빠졌습니다. 1904년 테오프라스트 롱게의 이중 생활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추리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뒤이어 발표한 대표작 노란 방의 비밀이나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의 향기도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추리 스타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검은 옷을 입은 부인의 향기에서는 소년 탐정 루르타비유를 등장시켜 화제가 되었습니다. 르루는 괴도 신사 뤼팽으로 유명해진 르블랑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며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기도 했답니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 1910년에 발표된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가스통 르루의 대표작은 아닙니다. 하지만 르루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 르루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야기에 흐르는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사고로 생긴 흉측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삐뚤어진 삶을 살다 죽는 오페라의 유령. 에릭의 유령 행세는 독자들에게 그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섬뜩한 공포감과 불안감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유령의 모습은 어느덧 독자들 자신, 즉 우리 인간의 내면에 살아 숨어 있는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지요. 이것이 오페라의 유령만이 갖는 환상미입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영국의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뮤지컬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고전적 선율에 맞춰 극 전체의 구성을 오페라 형식으로 끌고 가는 이 뮤지컬은, 1986년 10월 런던에서 처음 공연되어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될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또한 1925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린 왕자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여섯 살 적에 나는 원시림을 묘사한 책을 본 기억을 되살려 그림 하나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보이며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모자가 왜 무서워?” 그러나 내 그림은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그린 것입니다. 이처럼 어른들은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해 줘야만 알아들으니 참으로 답답하지요. 어른들은 나보고 그런 그림 따위는 그만 그리고 차라리 지리, 역사, 산수, 문법에 관심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섯 살 때 화가가 되는 꿈을 버렸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는 꿈을 잃은 뒤 어쩔 수 없이 고른 직업이었지요. 나는 전 세계를 마음대로 날아다녔습니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많은 어른을 만났고 그때마다 보아 뱀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나는 서로 가슴을 열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도 없이 혼자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비행기 엔진이 고장나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엔진을 수리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깨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멋진 옷을 입은 예쁜 소년이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양을 그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 뱀을 그려 주었습니다. “아냐! 아냐! 난 보아 뱀 뱃속에 있는 코끼리는 싫어. 나는 양을 갖고 싶단 말이야.” 소년은 내 그림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양을 그려 주었습니다. “싫어. 이 양은 병이 들었잖아.” 그래서 나는 다시 양 한 마리를 그렸습니다. “이건 양이 아니라 염소야. 뿔이 있으니까." 나는 비행기를 고쳐야 했으므로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되는 대로 상자를 하나 그려 주며 말했습니다. “양은 그 안에 들어 있어.” 놀랍게도 소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맞아, 내가 원하던 거야.” 그렇게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된 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어디서 왔는지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게는 여러 가지를 물어보면서 내가 묻는 말에는 조금도 귀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다만 어쩌다 우연히 하는 말로 차츰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령 어린 왕자가 내 비행기를 보고 물을 때입니다. “이 물건은 뭐야?” “이건 물건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야, 비행기.” 그러자, “야! 아저씨도 하늘에서 왔구나! 어느 별에서 왔어?” 어린 왕자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소리쳤습니다. “그럼 넌 다른 별에서 왔니?” 내 물음에 어린 왕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왕자의 고향은 소행성 B612호입니다. 별의 크기가 집 한 채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하다고 합니다. 별에 관해서는 비극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양이 나무를 먹으니까 바오바브나무도 먹겠지?” “아냐! 그건 너무 크거든.” “바오바브나무도 커다랗게 자라기 전에는 작은 나무였잖아? 그러니까 양이 먹을 수 있어.”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는 바오바브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오바브나무는 너무나 크고 빨리 자라기 때문에 큰 뿌리로 별에 구멍을 뚫는다고 합니다.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 B612호는 너무 작기 때문에 뿌리가 커다랗고 굵은 바오바브나무가 자라면 자칫 별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해 질 무렵을 좋아해. 우리 해 지는 걸 구경하러 가.” “하지만 기다려야 돼.” “뭘 기다려?”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거지.” 어린 왕자는 약간 이상해하는 눈치더니 이윽고 웃었습니다. “난 아직도 우리 집에 있는 줄 알았지 뭐야?” 정말 그랬습니다. 어린 왕자의 별에서는 몇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해 질 녘을 구경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떤 날에는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보았어! 아주 슬펐거든.” “그날 너는 왜 그렇게도 슬펐니?” 내 물음에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역시, 양 덕분에 어린 왕자의 비밀을 한 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양은 작은 나무를 먹으니까 꽃도 먹겠지? 가시가 있는 꽃도?” "꽃들이 공연히 심술을 부리는 거지!” “아냐! 가시는 꽃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거야.” 나는 비행기를 고치느라고 바빠 더 이상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 해! 나에겐 지금 중대한 일이 있어!” “중대한 일이라고? 아저씨도 다른 어른들처럼 말하고 있잖아!” 어린 왕자는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습니다. 금빛인 머리칼이 온통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지요.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별을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그 사람은 속으로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거든.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는다면 갑자기 모든 별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이야?” 어린 왕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자 나는 손에서 연장을 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린 왕자를 위로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팔로 어린 왕자를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양이 꽃을 먹지 못하게 굴레를 그려 줄게.” 그러나 더 이상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왕자의 마음을 어떻게 감동시키고 붙잡을 수 있을지 모르는 내 자신이 무척 서툴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내 별에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났어. 물을 달라거나 바람을 막아 달라며 나를 귀찮게 했고, 가시를 뽐내기도 했지. 그래서 물을 주고 바람막이를 해 주었어.” 어린 왕자는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았어야 했어. 꽃의 말엔 절대로 귀를 기울이는 법이 아니거든." "바라보고 향기만 맡아야 돼. 그런데 난 그걸 즐길 줄 몰랐어.” 어린 왕자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어. 꽃의 말보다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는데. 장미의 심술 뒤에는 사랑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난 너무 어려서 장미를 사랑할 줄 몰랐던 거야.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도망치고 말았어. 여행을 한다며 떠나온 것이지. 아마도 영영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나는 이후 어린 왕자가 이동하는 철새들을 이용해 별을 떠나왔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별을 떠나기 전, 화산 세 개를 깨끗이 청소하고 바오바브나무 싹들을 모두 뽑아냈으며 장미에게 유리 덮개를 씌워 주고 슬픈 작별을 했다는 사실은 들을 수 있었지요. 어린 왕자가 다다른 첫 번째 별에는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왕은 자줏빛 천과 흰 담비 모피로 만든 옷을 입고 작지만 위엄 있는 옥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 신하가 한 명 왔구나!” 어린 왕자가 오는 것을 보자 왕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까이 오라.” 어린 왕자는 앉을 자리를 찾았으나 별이 온통 왕의 호화스런 망토로 뒤덮였기에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피곤이 몰려와 하품을 했습니다. “왕 앞에서 하품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다. 하품을 금지하노라.” “기나긴 여행을 해서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네게 명하노니 하품을 하도록 하라. 자! 어서.” 왕은 모든 것을 명령했고 어린 왕자는 그런 행동이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권위를 내세워 제멋대로 명령할 뿐이었습니다. 한숨을 쉬던 어린 왕자는 그 별을 떠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하군.” 두 번째 별에는 허영심에 빠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 나를 찬양하는 사람이 찾아오는군!” “안녕하세요. 이상한 모자를 쓰고 계시군요.” 어린 왕자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환호를 보낼 때 답례하기 위해서야. 너도 나를 찬양하지?” "찬양하는 게 뭐죠?” “그건 내가 이 별에서 가장 잘생겼고, 가장 옷을 잘 입고, 가장 부자이고, 가장 똑똑하다고 인정해 주는 거지.” “하지만 이 별엔 아저씨 혼자밖에 없잖아요!” 어린 왕자는 그 별을 떠나며 중얼거렸습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군.” 다음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무얼 하세요?” “술을 마시지.” “왜 술을 마시죠?” “잊기 위해서.” “무엇을 잊기 위해서요?” "부끄럽다는 걸 잊기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술꾼이 대답했습니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난처해진 어린왕자는그 별을 떠나며 중얼거렸습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군.” 어느 한 별을 지나 어린 왕자가 도착한 별은 모든 별 중에서 가장 작아 가로등 하나와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있을 자리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가로등 켜는 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안녕, 아저씨. 왜 가로등을 지금 막 껐어?” “그건 명령이야.” “명령이 뭐야?” “가로등을 끄는 거지.” 가로등 켜는 사람은 다시 불을 켰습니다. “왜 지금 가로등을 다시 켰어?” "명령이야.” 어린 왕자는 별을 떠나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지 몰라. 그래도 왕이나 허영심이 많은 사람 이나 술꾼보다는 덜 어리석지. 내가 친구로 삼을 수 있었던 사람은 저 사람뿐이었는데, 별이 너무 작아. 두 사람이 있을 자리가 없어.’ 다음 별에는 책을 쓰는 늙은 학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꺼운 책들은 뭐예요? 여기서 뭘 하시는 거죠?” “난 지리학자란다. 바다 강 도시 산 사막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지.” “그거 참 재미있네요. 그런데 이 별에는 바다도 있나요?" “난 몰라.” “할아버지는 지리학자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난 탐험가는 아니거든. 지리학자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 한가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지. 서재에서 탐험가들을 만나서 질문을 하고 그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거야.” “저는 여행 중이에요.하지만 모든 별을 다 가 볼 수는 없으니 어디를 가는 것이 좋을까요?” “지구로 가 봐. 대단히 유명한 별이거든." 그래서 어린 왕자는 지구로 왔습니다. 일곱 번째 별이었지요. 지구에서 어린 왕자가 처음 만난 것은 뱀이었습니다. “안녕! 지금 여긴 어디지?” “지구야, 아프리카지.” “그럼 지구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니?” “여긴 사막이야. 사막에는 아무도 없어." "지구는 아주 크거든.” 뱀이 말했습니다. “근데, 여긴 무엇 때문에 왔니?” “어떤 꽃과 골치 아픈 일이 있었거든.” 어린 왕자가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뱀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넌 아주 재밌게 생겼구나.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고 발이 없으니 여행도 할 수 없겠고.” “그래도 난 왕의 손가락보다 더 힘이 세. 또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그가 태어난 땅으로 돌려보낼 수 있고.” 뱀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어린 왕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막을 지나는 동안 어린 왕자가 만난 것은 오직 꽃 한 송이뿐이었습니다. 꽃잎이 석 장 달린 볼품없는 꽃이었지요. “안녕!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사람들이라고? 오래전에 몇 사람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 지는 알 수 없어.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서 바람에 날려 다니거든.” 어린 왕자는 높은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린 왕자가 아는 산이라고는 겨우 무릎에 닿는 화산 세 개가 고작이었지만, 높은 산에서는 지구 전체와 사람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죠. “안녕!” 어린 왕자가 소리쳤습니다. “안녕, 안녕, 안녕!” 메아리가 대답했습니다. “너는 누구니?” “너는 누구니, 너는 누구니, 너는 누구니.” “참 이상한 별이군! 메마르고 험하고, 게다가 사람들은 상상력이 없어서 내가 한 말만 흉내 내다니. 내 별에 있는 꽃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어린 왕자는 오랫동안 걸어서 드디어 장미가 활짝 핀 정원에 이르렀습니다. “안녕!” “안녕!” 어린 왕자가 인사하자 장미꽃들이 대답했습니다. 모두가 자기 별에 있는 꽃과 똑같이 생겼기에 어리 둥절해진 어린 왕자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누구니?” “우리는 장미꽃이야.” 어린 왕자는 자기가 아주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은 하나뿐이라고 장미꽃이 어린 왕자에게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 가득히 똑같은 꽃들이 수천 송이나 있다니요! 여우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아주 슬프단다.”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어린 왕자의 말에 여우가 대답했습니다. “길들여진다는 게 뭐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넌 그저 소년이고, 나는 그저 여우일 뿐이야." "관계를 맺기 전에는 말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내가 아는 꽃 한 송이도 나를 길들인 걸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지구에는 온갖 것이 다 있으니.” “아니야! 지구에서가 아니야.” 여우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럼 다른 별에서?” “응.” 여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기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나는 닭을 쫓고 사냥꾼은 나를 쫓지. 닭들도 사냥꾼들도 모두 다 똑같아. 너무 심심해.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이면 내 생활은 밝아질 거야. 너의 발자국 소리는 나를 땅굴에서 불러낼 테고, 정말 근사할 거야. 부탁이니 나를 길들여 줘! “나도 그러고 싶어.” 어린 왕자가 대답했습니다. 이튿날 어린 왕자는 다시 왔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간에 왔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가령 네가 오후 네 시 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걸.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고 네 시가 되면 안절부절못할 거야. 행복의 값어치를 알아낸 거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몇 시에 날 치장할지 알 수가 없잖아? 만남에는 의식이 필요한 거야.” 잠시 후 떠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 말했습니다. “다시 정원으로 가서 장미꽃들을 보렴. 그러면 네 장미꽃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란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돌아와 작별 인사를 해 주면 한 가지 비밀을 선물할게.” 어린 왕자는 정원으로 장미꽃을 보러 갔습니다. “너희는 내 장미꽃과 닮지 않았어. 아무도 너희를 길들이지 않았거든." 그리고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돌아갔습니다. “안녕, 내 비밀은 이거야. 진실은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을 잘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습니다.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너의 장미꽃과 보낸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그걸 잊으면 안 돼. 너는 네 장미에게 책임이 있는 거야.” 사막에 불시착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을 마시며 어린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난 아직도 비행기를 고치지 못했어." "마실 거라고는 없고. 물이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나도 목이 말라." "우물을 찾으러 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우물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왕자가 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린 왕자를 안고 걸었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나는 동이 틀 무렵에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어린 왕자는 웃으며 줄을 잡고 도르래를 잡아당겼습니다. “우물을 깨웠더니 노래를 불러.” 물을 마시고 난 어린 왕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약속했잖아. 양에게 굴레를 씌워 준다고. 난 그 꽃한테 책임이 있어!” 나는 끄적거려 두었던 그림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그림을 보고 활짝 웃었습니다. “바로 이 근처야. 일 년 전에 내가 지구에 떨어진 게." "아저씨는 이제 일을 해야 해. 아저씨 기계로 돌아가. 난 여기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일 저녁에 돌아와.” 다음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보니 어린 왕자가 우물 옆 낡은 돌담 위에 걸터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담 밑을 내려다보고는 기겁을 했습니다. 삼십 초 만에 사람을 죽이는 독이 있는 노란 뱀이 어린 왕자를 향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놀라 달려가자 뱀은 모래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저씨가 비행기를 고쳐서 기뻐.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 그건 훨씬 더 멀고 훨씬 더 어려워. 그래도 나에겐 아저씨가 준 양이 있어." "그리고 그 양을 넣어 둘 상자도 있고, 굴레도 있고." 그러더니 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오지 마." "아마도 난 아픈 것처럼 보일 거 야.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니까 보러 오지 마. 그럴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게 벌써 여섯 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나와 다시 만난 친구들은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나는 슬펐지만, 피곤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친구들에게 둘러댔습니다. 이제는 내 슬픔도 약간 가셨습니다. 나는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왼쪽 그림을 자세히 잘 보아 두었다가 여러분이 언젠가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할 때, 이와 똑같은 풍경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그리로 지나가게 되거든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별빛 아래에서 잠시 기다려 보길 간곡히 부탁합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의 리옹에서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갈색 고수머리에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 생텍쥐페리는 어려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생텍쥐페리는 창의력도 뛰어났지만 반면에 좀 엉뚱한 면도 있어 돛 달린 자전거를 고안하기도 했답니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감정이 풍부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늘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조종사 생활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비행 중에 실종된 친구를 찾아 위험을 무릅 쓰고 안데스 산맥으로 날아가 친구를 구해 오기도 했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간의 대지)를 썼습니다. 그 외에도 조종사 생활의 생생한 경험에 상상을 더해 만든 작품이 바로 (남방 우편기), (어린 왕자), (야간 비행) 등입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도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 던 생텍쥐페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출격 명령을 받고 이륙한 후 실종되었습니다.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작품은 남아 우리에게 자유와 양심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유작으로는 (성채)가 있습니다. 1943년에 발표된 (어린 왕자)는 동화입니다.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우주를 여행하면서 이상한 어른들을 많이 만납니다. 무엇이든 명령만 하는 어른, 쉼 없이 자신을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어른, 술에 취해 있는 어른. 이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꿈을 잃어버린 어른들의 세계입니다.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는 바로 불쌍한 어른의 모습이지요. 조종사는 신비한 어린 왕자를 만나 함께 지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 등을 배웁니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을‘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했던 것입니다. 비단 (어린 왕자)뿐 아니라 생텍쥐페리의 모든 작품에 한번도 빠짐없이 나오는 주제는 바로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아름다운 정신적 교감을 시적인 느낌으로 표현합니다. 한편 생텍쥐페리의 작품에는 하늘을 테마로 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은 생텍 쥐페리가 비행기 조종사라는 점과 관련이 깊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작품이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도 하늘의 자유로움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저 이만 리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1866년에 일어난 그 사건은 너무도 이상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다를 누비는 거대한 물체가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직접 본 뱃사람들의 말로는, 그 물체는 고래보다 훨씬 크고 빠르며 때로는 밝은 빛을 낸다고 했습니다. 항구의 주민과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마침내 유럽 여러 나라 정부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867년 4월 13일에 또다시 기묘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날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여객선 스코샤호는 항해 중에 무언가에 부딪혔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가 배를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근처에 암초 따위는 없었기에 아마도 큰 고래나 그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 선장은 안전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잠수부를 배 밑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잠수부가 보고한 내용은, 배 뒤 아래쪽에 이 미터 정도 되는 큰 구멍이 나 있으며, 마치 톱이나 기계로 자른 듯 잘린 면이 깨끗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바다를 누비는 거대한 괴물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한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이미 깊은 바다의 신비라는 책을 발표해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바다 생물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모르는 것이죠.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생물이 아주 많다는 얘기입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여러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설령 전설이라 해도, 도저히 깊이를 잴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에는 거대한 외뿔고래 같은 동물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다의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이 고래는 가끔씩 물 위로 올라와 지나가는 배에 부딪칠 수도 있지요. 분명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는 세계, 우리가 모르는 생물이 존재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미국 정부는 거대한 물체의 정체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속도가 빠른 링컨 호에 온갖 장비와 무기를 싣고 출항 준비를 시켰습니다. 7월 3일 샌프란시스코와 중국 상하이를 왕복하는 기선의 선원이 문제의 괴물을 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미국 정부는 링컨 호를 출항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링컨 호의 지휘는 경험 많고 용감한 패러겟 선장이 맡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링컨 호가 항구를 떠나기 세 시간 전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로낙스 박사님께. 거대한 물체의 정체를 밝히는 탐험대가 곧 출항합니다. 박사님께서 프랑스 대표로 링컨 호에 승선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충직한 하인 콩세유와 함께 링컨 호에 올랐습니다. 듣던 대로 패러겟 선장은 뛰어난 뱃사람이었고, 선원들 또한 용감했습니다. 모두 괴물을 잡겠다는 의지가 굳세었고, 더구나 패러겟 선장이 괴물을 처음 발견하는 사람에게 상금 이천 달러를 주겠다고 했으므로 사람들은 바다를 감시하는 일에 매우 열성을 보였습니다. 링컨 호는 속력이 빠를 뿐 아니라 싣고 있는 장비도 모두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링컨 호의 가장 큰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작살의 명수 네드였습니다. 캐나다인 네드는 뛰어난 고래잡이로, 던지는 작살은 여지껏 목표물을 빗나간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항해를 하는 동안 나는 네드와 친해져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네드가 북극해에서 고래 잡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치 내가 고래 사냥을 하는 듯 흥분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네드는 내가 주장하는 외뿔고래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네드, 자네는 전문적인 고래잡이인 만큼 거대한 바다 생물을 많이 보았을 텐데, 어째서 거대한 외뿔고래가 있을 것이라는 걸 믿지 않나?" “화성에 생물체가 산다거나 아직도 원시 시대의 공룡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 것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죠. 고래잡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한 번에 고래 열두 마리를 잡기도 했지요. 하지만 어떤 고래도 스코샤 호에 그런 구멍을 뚫을 수는 없습니다.” “커다란 고래가 배에 구멍을 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텐데.” “그건 나무로 만든 배였겠죠.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어느덧 11월이 되었습니다. 뱃사람들도 서서히 지쳐 갔습니다. 하루 종일 바다만 쳐다보고 있자니 점점 지겨워진 것이었죠. 더구나 괴물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11월 4일 늦은 오후, 모두를 긴장하게 하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괴물이 나타났다!” 모두 갑판으로 뛰어갔습니다. 심지어는 기관사까지 뛰어나왔습니다. 과연 배 오른쪽 삼백 미터쯤 되는 바다 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빛은 거대한 타원형이었으며 특히 가운데 부분은 무척 밝았습니다. 갑자기 괴물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배 왼쪽에 나타났습니다. 링컨 호의 밑을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빠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것은 틀림없는 고래입니다. 숨쉬는 소리가 들려요.” 네드의 말대로 엄청난 힘으로 물을 뿜어내는 듯한 쉿쉿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왜 빛이 나지?” 선장의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했습니다. “야광충 무리가 고래 등에 붙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네드는 작살을 들고 괴물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괴물이 링컨 호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다가왔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습니다. 쿵! 둔한 소리가 나며 링컨 호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 충격으로 나는 갑판에서 튕겨 나와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링컨 호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나를 잡았습니다.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다름 아닌 콩세유였습니다. “콩세유, 자네도 빠졌나?” “아닙니다. 박사님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죠.” 콩세유와 나는 서로를 붙잡아 주며 링컨 호로 헤엄쳐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파도가 거칠어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에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움직여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콩세유와 나는 너무도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뭔가 단단한 물체에 몸이 닿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콩세유와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더라면 우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나를 잡아 끌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단단하고 억센 팔, 콩세유는 아니었습니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바로 네드였습니다. “네드! 자네도 떨어졌나?” “작살을 던지다가 갑판에서 튕겨 나왔죠. 박사님보다는 운이 좋아 이 움직이는 섬에 금방 올랐지만.” “움직이는 섬이라니?”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던진 작살이 왜 괴물의 몸에 꽂히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지요. 이건 강철로 만들어졌거든요.” “강철로 만들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 괴물은 박사님이 생각하시던 외뿔고래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물체라는 말입니다.” 그건 바로 콩세유의 목소리였습니다. “콩세유! 거기 있었나?” “박사님이 계시는 곳에 늘 제가 있죠.” 비로소 안심한 나는 우리가 몸을 싣고 있는 물체를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말대로 그것은 틀림없는 강철이었습니다. 크기는 적어도 팔십 미터는 되는 듯했고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네드가 ‘움직이는 섬’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여러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괴물은 인간이 만든 잠수함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꽤 먼 거리를 이동했는지 링컨 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구조될 가능성은 사라진 것입니다. 덜컹! 빗장을 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더니 사내 몇 명이 나 타났습니다. 사내들은 뭐라 할 틈도 없이 우리를 잡아서 움직이는 섬, 아니 거대한 잠수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꽤 넓은 방에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방에는 창문은 물론 안에서 문을 여는 장치도 없었습니다. 방에 마련 되어 있는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피곤에 지쳐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피곤하셨던 모양이군요?” 낯선 목소리에 우리는 잠에서 깼습니다. 키가 크고 인상 이 날카로운 사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잠수함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인 듯했습니다. “박물학자 아로낙스 박사와 하인 콩세유, 고래잡이 네드! 맞죠? 나는 이 노틸러스 호의 선장 네모입니다.” “노틸러스 호라고요?” 나는 놀라 소리쳤습니다. 물론 얘기를 듣기 전부터 잠수함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막상 잠수함을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자 호기심과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 잠수함은 인류 과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의 도움을 얻어 이 잠수함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이 노틸러스 호에 탑승하여 전 세계 바다 속을 다니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면 육지에는 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들입니다. 잠수함에 타기 전에 맹세를 했지요.” “세상에 그럴 수가.” “여러분은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곳곳에 나타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았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괜한 호기심으로 우리 뒤를 쫓은 것이죠.” “스코샤 호에 구멍을 낸 것도 그런가요?” “그것은 정말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그 일 때문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쉽게 말하면 우리의 포로인 셈입니다. 여러분께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정한 규칙을 지킨다면 여러분은 적어도 이 잠수함 안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요.”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지요?” “안타깝지만 우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여러분의 목숨을 빼앗을 수밖에 없습니다.” 네모 선장이 정한 규칙을 지키는 조건으로 잠수함에 남기로 한 우리는 답답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신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을 다닌다는 것도 신기한데, 잠수함 안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을 바다에서 얻는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음식은 물론이거니와 옷을 비롯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은 바다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또한 서재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책이 일만 이천 권이나 있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쓴 책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재 옆에는 세계의 온갖 진귀한 물건을 모아 놓은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거대한 노틸러스 호를 움직이는 힘이 바로 전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기를 얻나요?” 내가 묻자 네모 선장이 답했습니다. “바다에는 아연, 철, 금 등 여러 가지 금속성 물질이 풍부합니다. 굳이 육지에서 금속을 가져올 필요가 없지요. 게다가 바닷물의 주성분인 나트륨에서는 무한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에는 또한 석탄도 엄청나게 많이 있고요.” “음식, 생필품, 에너지까지. 정말 모든 것을 바다에서 얻는군요.” “물론입니다. 그저 산소가 필요할 때 물 위로 떠오를 뿐입니다. 하긴 산소도 어느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지만요.” 며칠을 노틸러스 호에서 지내며 나는 네모 선장과 무척 가까워졌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잠수함을 어떻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고 만들었습니까?” “우선 설계를 하고 각 부품을 따로따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만들도록 했지요. 그러니까 각 공장에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어디에 쓸 것인지를 모르게 말이지요.” “그래도 잠수함을 만들려면 모두를 한곳에 모아 만들어야 했을 텐데요.” “바다 한복판에 있는 무인도에 작은 공장을 세웠지요. 그 공장에서는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 이 노틸러스 호에 탈 승무원들만이 작업을 했고요. 잠수함이 완성되고 나서는 그곳에 불을 질러 모든 흔적을 없앴습니다.” “놀랍군요.” “참, 오늘은 사냥을 하려 하는데, 함께 가시렵니까?” “사냥이라니? 육지에 오른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다 속에서 사냥을 하지요.” 그날 우리는 무척이나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네모 선장이 만든 특수 잠수복을 입고 바다 속을 걸으며 사냥을 한 것입니다. 압축 공기를 이용해 유리 총알을 발사하는 총은 사용하기도 쉬웠고 위력도 대단했습니다. 네 시간에 걸친 사냥으로 물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았지만 녹초가 된 우리는 물고기 요리를 먹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대서양에 이르렀습니다. 노틸러스 호는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물 위로 떠올랐고, 우리는 오랜만에 갑판에 올라가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습니다. 잠수함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데 네모 선장이 불쑥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박사님은 역사에 대해 잘 아십니까?” “글쎄요. 깊게는 아니지만 약간은.” “오늘 밤 진귀한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모 선장은 묘하게 웃으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밤 열 시경, 네모 선장이 나를 조종실로 불렀습니다. 노틸러스 호의 조종실에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노틸러스 호에서 밝히는 불빛으로 주위는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물속에 거대한 도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듯한 길, 사람들이 살던 집, 커다란 항구와 무너진 사원도 보였습니다. “사라진 아틀란티스입니다. 고대 그리스에 대항해서 최초로 전쟁을 벌인 아틀란티스 인의 땅이죠. 어때요, 신비롭지 않습니까? 이렇게 바다는 우리에게 숨은 역사를 알려 주기도 합니다.” 나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평균 수심 일천오백 미터에 이르는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네드는 해초 사이로 헤엄치는 오징어들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오징어 소굴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괴물도 있을지 모르고요.” “괴물이 있다고?” 콩세유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거대한 오징어를 말하는 거야. 전설에서는 크라켄이라고도 하지.” 그때 노틸러스 호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멈췄습니다. “오징어 떼가 잠수함에 달라붙었습니다. 프로펠러에도 감겨 잠수함이 움직이지 않아요.” 네모 선장이 우리에게 와 알렸습니다.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탱크의 물을 빼고 물 위로 떠올라 거기에서 저놈들을 해치워야죠.” 노틸러스 호가 떠오르자 모두 도끼와 칼로 무장하고 갑판으로 나갔습니다. 선원들과 오징어 떼의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작은 오징어는 한 차례 칼질을 하면 떨어졌지만, 문제는 네드의 말대로 크라켄이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오징어였습니다. 몸길이가 십 미터는 넘는 것 같았고, 그보다 훨씬 더 긴 열 개의 다리를 휘두르며 공격을 해 왔습니다. “으악!” 갑자기 비명이 들렸습니다. 선원 하나가 그 긴 다리에 휘감겨 공중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모두가 달려들었지만 거대한 오징어를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슈욱! 날카로운 작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오징어의 몸을 꿰뚫었습니다. 고래잡이 네드가 유감없이 솜씨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선원은 무사히 구출되었고 노틸러스 호도 다시 출발했습니다. “자네에게 큰 빚을 졌군. 고맙네.” 네모 선장이 네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오징어 떼와의 싸움이 있은 며칠 뒤 노틸러스 호는 산소를 공급받고 엔진을 손보기 위해 하루 정도를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갑판으로 나오니 가까이에 푸른 섬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육지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쳤습니다. “네모 선장님, 저 섬에 가서 사냥을 해도 될까요?” 보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물어보았지만 뜻밖에도 네모 선장은 쉽게 허락을 했습니다. 게다가 혹시라도 우리가 도망 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조금도 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나와 콩세유, 네드 세 사람은 배를 저어 섬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밟아 보는 육지인가요? 발에 느껴지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흙과 싱그러운 풀 냄새가 우리를 자극했습니다. 네드는 육지에서도 뛰어난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았지요. 그때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박사님, 하늘에서 돌이 떨어질 수도 있나요?” “그럴 리는 없지. 혹시 원숭이가 던진 것 아닐까?” “원숭이라면 야자열매 같은 것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불안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사내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풀을 이용해서 아랫도리만 가린 채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 원주민인 듯했습니다. “빨리! 서둘러!” 우리는 배로 달아났습니다. 기운 센 네드는 위험한 와중에도 사냥한 멧돼지를 들고 왔지요. 노를 저어 간신히 노틸러스 호에 도착해서 네모 선장에게 위험을 알렸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염려 말라니요? 지금 원주민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노틸러스 호를 습격할 겁니다. “노틸러스 호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네모 선장은 태연했습니다. 어느새 원주민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틸러스 호를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그중 몇몇이 갑판으로 올라왔는데 그들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로 빠졌습니다. "아악!" 네모 선장이 노틸러스 호 표면에 전기가 흐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강한 전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 충격을 주기만 할 정도로 약한 전기가 흐르도록 한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창을 던졌지만 단단한 강철로 만든 노틸러스 호에는 상처도 나지 않았습니다. “잠수!” 네모 선장의 명령에 노틸러스 호가 잠수를 시작했습니다. 안전해진 우리는 원주민들의 놀란 얼굴을 상상하며 마음껏 웃었지요. 그리고 저녁에는 육지에서 잡아 온 멧돼지 고기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었습니다. 비록 노틸러스 호에서 탈출을 하진 못했지만, 위험하면서도 즐거웠던 하루였습니다. 항해가 계속되자 네드는 점점 못 견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와 콩세유도 마찬 가지였지만 자유로운 고래잡이였던 네드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겠지요. 계속 남쪽으로 향하던 노틸러스 호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배가 얼음에 갇혔습니다. 모두 나와서 작업을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얼음을 깨야 하거든요.” 갑판에 나가니 바람은 살을 에는 듯이 차가웠고, 사방은 온통 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남극 가까이 온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수온이 내려가 얼음이 어는 바람에 노틸러스 호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얼음을 깨는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두 시간 동안 얼음을 깨고 한 시간은 쉬면서 모두가 교대로 열심히 일한 결과 이틀 후에는 얼음을 깨고 다시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소. 오늘은 푹 쉬시오.” 네모 선장은 우리 모두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깊이 잠든 나를 누군가 깨웠습니다. “쉿! 오늘 밤이 기회예요. 탈출합시다.” 네드가 이끄는 대로 나가 보니 갑판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작은 배 에서 콩세유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혹시라도 들킬까 긴장하며 조용히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앗! 소용돌이다.” 네드의 외침과 동시에 우리가 탄 배는 손쓸 사이도 없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깨어난 것은 노르웨이 로포텐 섬에 있는 어느 어부의 집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소용돌이를 벗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나와 콩세유, 네드까지 모두가 무사했던 것은 그저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지요. 노틸러스 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서운 소용돌이에 휩쓸려 영영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소용돌이를 벗어나 또 다른 어떤 곳을 항해하고 있을까요? 나는 노틸러스 호가 무사히 소용돌이를 벗어나서, 네모 선장이 순수한 과학자로서 항해를 계속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열 달 동안 내 일행이 겪은 신비한 바다 속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두 개의 꾸러미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먼저 회색 옷을 입은 신사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차만 타지 않았더라도 제 삶은 달라졌을 겁니다. 그날 저는 임시직이었지만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지요.” “저는 조그만 꾸러미를 들고 기차에 탔는데 선반에는 짐이 가득 차서 옆자리에 놓아두었지요. 그때 옆에 앉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짐을 놓아두었나 봅니다. 기차에서 내리고 보니 짐이 바뀌었지 뭡니까?” “허어! 정말입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신사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누가 먼저 잘못 들고 내린 것인지 모르지만, 꾸러미를 풀어 보니 그 안에는 순금으로 만든 잉크병이 두 개 들어 있었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들었는지 겉에 새겨진 무늬가 아주 화려했지요.” “무척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기야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요.” 회색 옷를 입은 신사는 살며시 웃으며 계속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요.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경찰서에서는 잃어버린 물건을 보관했다가 주인을 찾아 주었거든요.” “만약 일 년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물건을 신고한 사람이 갖게 되어 있었습니다.” “맞아요! 당시에는 법이 그랬지요.” 옆에 앉은 신사가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회색 옷을 입은 신사는 앞에 놓인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금 잉크병은 제 것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잉크병을 팔아 버릴까 했습니다. 값이 꽤 나갈 테니까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순금 잉크병의 주인이 된 것은 어떤 까닭이 있는 듯했습니다.” “운명의 힘이랄까요?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잉크병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을 했지요. 왜 이것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것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말입니다. 그러다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지요. 저는 순금 잉크병에 잉크를 담아 온 정성으로 글을 썼습니다.” “마치 금으로 원고를 칠하듯 글자 한 자 한 자에 온 정성을 기울였지요. 그러다 마침내 내가 쓴 작품은 순금 잉크병보다 더욱 가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제가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은 우연히 얻게 된 순금 잉크병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소설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푸른 옷을 입은 신사가 술을 한 잔 권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잉크병이라고 생각하신 것은 조미료 통입니다. 소금과 후추를 담으려고 만들었지요. 아, 그러고 보니 잉크병으로도 여길 수 있겠네요. 워낙 잘 만든 것이었으니까요.” “그,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소설가가 놀라서 묻자 푸른 옷을 입은 신사가 답했습니다. “그날 저는 순금 조미료 통이 든 꾸러미를 들고 기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꾸러미가 바뀐 것이고요.” “아니, 그게 당신 물건이었다고요? 정말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지요. 그날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푸른 옷을 입은 신사는 옛일이 생각나는 듯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저도 기차에서 내려서야 비로소 꾸러미가 바뀐 것을 알았지요. 제가 들고 내린 꾸러미 안에서 나온 것은 제도기였습니다. 아주 좋은 제품이더군요.” “맞아요! 제가 잃어버린 것은 제도기였습니다. 저는 건축가가 되려고 했었지요. 그래서 설계사무실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소설가가 흥분해서 소리쳤습니다. 푸른 옷을 입은 신사는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 “저는 세공사의 조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귀부인의 주문을 받고 순금으로 조미료 통을 만들었습니다.” “아마 석 달 이상 공을 들여 만들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재료가 순금이니 당연히 멋진 물건이 만들어졌겠지만, 완성된 것을 보니 정말이지 눈부실 정도였어요. 저는 주문대로 다 만든 물건을 전하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탔지요.” “그런데 피곤해서 깜빡 졸았던 모양이에요. 기차에서 내린 저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꾸러미를 풀어 보았는데 그 안에는 순금 조미료 통이 아닌 제도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 당신이 무심결에 물건을 바꿔 내린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기차에서 바뀌었다고 해 봐야 믿어 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목숨을 끊으려고 강으로 가기까지 했다니까요.” 신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도도히 흘러가는 물을 보니 갑자기 ‘나도 저렇게 힘차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직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훔치고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게 뻔했으니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데 웬 사내가 다가왔습니다. 그 사내는 제게 “저는 아트스코 남작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오늘 생일을 맞으신 주인께서 연회장의 창을 통해 선생을 보시고는 모셔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하인을 따라 호화로운 저택으로 들어갔지요.” “그곳에서는 아주 근사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먹음직스런 음식, 많은 사람, 낯선 분위기에 잠시 얼이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아트스코 남작이 다가와 한 여인을 소개했습니다.” “바로 남작의 여동생이었지요. 몇 년 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를 초대한 것은 그 여인이었습니다.” “우연히 창으로 강가에 서 있던 저를 본 것이지요. 어쩌면 제가 물에 뛰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리려고 부른 것인지도 몰라요. 여하튼 저는 그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비록 그 여인이 저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말입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셨군요.” 소설가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죠. 그 여인은 평생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제게 집을 짓는 일은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창문을 만들면서는 아내가 그 창으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했고, 베란다를 만들 때는 아내와 둘이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떠올렸지요. 그야말로 나무 한 토막 못 한 개에도 사랑을 담아 집을 지으니,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집을 지으셨겠군요.” “그러고 보니 집 짓는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어쨌든 당신이 잃어버린 그 제도기가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다듬고 공간을 꾸미는 재능은 아마도 타고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짧은 시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죠.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당신의 제도기와 아내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소설가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우연히 짐이 바뀌었고 그 때문에 생각하지도 않은 길을 걷게 되었지만 모두 성공을 거둔 것이로군요.” “맞습니다.” “당신은 순금 조미료 통을 잃었고 저는 제도기를 잃어버렸지요. 그런데 저는 조미료 통을 잉크병으로 잘못 알아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도기를 보고 건축가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이렇게 훌륭하게 되었고요.” “맞습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지요. 대부분 잃는 것만 생각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기품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을 보자 건축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여보! 인사하시오. 내가 만든 조미료 통을 잘못 가져가신 분이라오. 내겐 둘도 없는 은인이지.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들어 주셨으니까.” 여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건축가의 팔을 잡고 함께 호텔을 나갔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소설가는 빙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가. “그는 문학상 한번 타 본 적이 없다. 학술회 회원으로 뽑힌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서 독창적인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어느 독일 지식인이 이렇게 칭송한 작가가 바로 쿠르트 쿠젠베르크입니다. 쿠젠베르크는 1903년 독일에서 태어나 베를린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혔습니다. 사실 쿠젠베르크는 작가이기보다는 출판 편집자로서 더 유명합니다. 원래 여러 방면에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쿠젠베르크는 나라별, 시대별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전기 작품들을 담은 인물 백과사전 ‘로로로 시리즈’를 출판하여 주목받았습니다. 또 베르트람 아저씨는 어디에?, 침대 예찬 등도 썼습니다. 쿠젠베르크는 출판 편집 일을 하는 틈틈이 소설을 썼는데 대부분 아주 짧은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쿠젠베르크의 짧은 소설에는 놀라운 재치가 번뜩입니다. 짧고도 짧은 글에 실린 인생의 뒤바뀜. 쿠르트 쿠젠베르크는 박식하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사람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지닌 재주라고는 두 가지뿐인데, 글을 좀 쓸 줄 알고 귓바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귓바퀴를 움직이는 건 벌이가 안 돼서 글을 쓰기로 했다. 글 한 편이 완성되면, 난 보상 삼아 포도주를 한 병씩 마신다. 어서 또 포도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에 내 글은 점점 짧아진다.” 두 개의 꾸러미는 뒤바뀐 짐 때문에 오히려 더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 두 남자가 재회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남자는 우연히 짐이 뒤바뀌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자살까지도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불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더욱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두 개의 꾸러미에는 살면서 만나는 어떤 불행도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행운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쿠젠베르크의 낙천적인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느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어느 아름다운 별의 남쪽 지방에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무서운 폭풍과 홍수, 지진으로 여러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집이 여러 채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원과 들판, 숲과 나무들도 모두 묻혀 버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마을의 탑에서는 슬픈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구원의 손길이 여기저기서 뻗쳐 왔습니다. 다른 지방에서 음식, 옷, 수레, 말, 목재 등을 보내온 것이지요. 다친 사람들은 정성스런 간호를 받았고, 온전한 사람들은 무너진 흙더미에서 시체를 꺼내 묻었으며 부서진 집을 수리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사람들은 엄숙한 마음으로 죽은 이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기 위한 꽃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꽃밭이 있던 세 마을이 한꺼번에 지진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도무지 꽃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의 관이나 무덤을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해야 죽은 이들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죽음이 슬프거나 불행할수록 더욱 화려하게 장식했지요. 처음에는 황폐한 뜰에서 가져온 시든 꽃과 나뭇가지로 죽은 사람의 관과 무덤을 장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마저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로에게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몰려가자 장로가 말했습니다. 수염으로 덮인 장로의 입가에는 조용하고 편안한 웃음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닥친 불행은 하느님의 시험입니다. 무너지고 파괴된 것은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형제의 영혼을 달래고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할 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은 이의 관과 무덤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뜻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요. 꽃이 있어야 해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습니다. 지금 우리를 도울 사람은 왕뿐입니다. 궁전의 정원에는 꽃이 가득 피어 있을 테니까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을 왕에게 보내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왕에게 보내야 할까요? 그 사람은 젊고 튼튼해야 합니다.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이 맑고 순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얼굴을 붉히면서 걸어 나왔습니다.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습니다. “네가 가겠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무엇 때문인지 말해 주지 않겠느냐?” 장로가 묻자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외쳤습니다. “우리는 그 소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로는 친근하게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지진으로 꽃을 잃은 것이 아까우냐?”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네. 하지만 그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는 아끼는 친구와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지진으로 죽고 말았지요. 그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꽃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소년의 머리에 얹어 축복을 내렸습니다. 소년은 곧 말에 올라타 작별 인사를 하고는 들판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자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신전에 이르렀을 무렵, 크고 검은 새가 날아와 신전의 지붕에 내려앉았습니다. 신전에는 검은 돌로 만든 제단이 있었고, 제단에는 사나운 새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근처에 핀 초롱꽃을 따서 제단에 바친 다음 절을 하고 구석에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검은 돌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고, 그림 속에 있는 신의 모습은 유령처럼 무서웠기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전 밖으로 나왔습니다. 소년이 밖으로 나오니 신전 위에 앉아 있던 검은 새가 날개를 치며 물었습니다. “왜 잠을 안 자고 나오는 거니?” 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인지 자신이 새의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소년은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슬퍼서 잠이 안 와.” “어떤 슬픔을 겪었는데?” “다정한 친구와 아끼는 말이 죽었어.”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야.” 새가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야. 죽음은 이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가 슬픈 것은 꽃이 없어서 그들을 묻어 줄 수 없다는 거지.” 꽃이 없어서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쁜 일도 있지. 너는 아직 그보다 더 슬픈 일을 겪어 보지 않아서 그런 거야. 슬픔이 어떤 것인지 너는 아직 모르고 있어. 너는 죄악이나 증오, 살인, 질투를 아니?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습니다. “꽃도 없고 하느님도 없었을 때는 그런 것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어.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로만 전해지거든.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아." 새는 커다랗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왕을 찾아가는 중이지? 데려다 줄까?” “어떻게 알았지? 그래, 나를 데려다 주면 좋겠어.” 검은 새는 소년을 등에 태우고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말했습니다. “눈을 감아!” 소년이 눈을 감자 새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 가는 것으로 보아 무척 빠르게 날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제는 눈을 떠도 돼.” 소년이 눈을 떠 보니 새벽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들판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이 들판을 지나면 왕이 있는 곳에 다다를 거야.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새는 화살처럼 날아 사라졌고, 소년은 안개에 싸인 들판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지만 눈앞에는 고향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태양은 빛났으며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지진이 지나간 듯 건물은 허물어져 있었으며 쓰러진 나무와 울타리 주변에는 농기구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밭에서는 미처 땅에 묻히지 못한 시체들이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뭇가지와 꽃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을 가려 주었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모두 재난으로 죽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문득 신전에서 검은 새가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보다 더욱 나쁜 일도 있지.” 그렇습니다. 소년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검은 새가 소년을 다른 별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누군가 들판을 걸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년은 급히 그쪽으로 뛰어갔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너무 흉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전혀 위할 줄 모르고 온통 거짓과 더러움으로 찌든 얼굴이었습니다. 상냥한 소년은 정답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 사람은 소년의 눈에 담긴 맑은 빛에 놀라는 듯하다가 한참 만에 얼굴에 웃음을 띠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 있다가 밝은 빛을 본 듯 환한 웃음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지금처럼 무섭게 변했나요?” 그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답했습니다. “너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구나. 이것은 전쟁이야. 전쟁이 일어났다고. 저기가 우리 집이었는데.” “왕은 어디 계신가요?” 소년의 물음에 그 사람은 손을 들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천막을 가리켰습니다. 소년은 그 사람의 이마에 손을 얹어 작별 인사를 하고 황량한 들판을 지나서 왕이 머무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무기를 든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소년을 막지 않았습니다. 가장 크고 아름다운 천막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침대에 왕이 앉아 있었습니다. 왕은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고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왕의 발 옆에는 날카로운 칼이 싸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소년이 왕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소년의 맑은 눈과 믿음이 가득 찬 표정을 본 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언젠가 너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어렸을 때 알았던 누군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저는 다른 별에서 왔습니다.” “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 재난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례를 치를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묻어 주려면 꽃이 필요한데, 꽃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고?” 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예, 제가 사는 곳에서는 장례를 치를 때 죽은 이의 관이나 무덤을 꽃으로 장식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꽃이 없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이곳으로 데려다 준 검은 새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제가 아는 것보다 더욱 많은 슬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요? 소년의 말을 듣고 왕이 웃으려 했지만, 오랜 세월 고통과 슬픔으로 얼굴이 굳은 왕은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척 고맙구나.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내게 어머니의 기억을 되돌려 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년은 웃음을 잃어버린 왕을 보니 가엾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무척 슬퍼 보이는군요. 전쟁 때문입니까?” “그렇다.”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지요? 누구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까?” “이 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별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 또 다른 삶이 시작되니까요.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왕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별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장 무거운 죄로 다스린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예외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미움이나 질투,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요구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어떤 죽음이든 두렵기는 마찬가지란다.” “이 별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좋다. 무엇이 궁금하냐?” 이 별에는 악몽과도 같은 고통과 절망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별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신인지 악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사는 별에도 아주 옛날에는 전쟁과 절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꾸며 낸 옛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자신의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질서, 친절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바라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왕의 얼굴에는 웃음이 깃들어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소년이여. 나는 네가 말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 우리도 자유와 행복, 평화의 신을 느끼고 있다. 네 마음에 깃들어 있는 행복과 평화를 우리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바라고만 있을 뿐이지. 이제 가거라. 이 별의 전쟁과 절망을 그냥 두고 떠나거라. 전쟁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어서 피해라. 마을이 불타고 피가 흐를 때마다 내게 어머니를 일깨워 준 너를 기억할 것이다. 천막을 나온 소년은 들판을 지나 검은 새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소년을 태운 새는 조용히 어둠을 뚫고 날아갔습니다.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슬에 젖은 숲에서 말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울고 있었지만, 검은 새와 다른 별의 황량한 들판 그리고 슬픈 표정의 왕과 전쟁으로 파괴된 마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처음 그대로 산 위의 작은 신전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이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신전에서 나온 소년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마침내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소년의 맑은 눈을 본 왕은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맑은 눈이 내게 이미 말을 했다. 네 소망은 내가 듣기도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대로 꽃을 가져가거라.” 꽃을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는 왕의 허락을 받은 소년은 꽃을 수레에 가득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관과 무덤에 꽃을 장식했고, 소년도 죽은 친구와 말에게 꽃을 바쳤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은 부서진 건물을 수리하고 망가진 길을 새로 닦았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은 기쁜 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소년이 가져온 꽃이 이렇게 사람들을 기쁘게 한 것이었습니다. 소년은 장로를 찾아가 자신이 겪은 다른 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로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른 별 여행이 혹시 꿈은 아니었느냐?”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꿈이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슬픔의 그림자가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귓가에는 그 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일 다시 신전을 찾아가거라. 그곳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절망이 존재하던 시대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 곳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꽃과 꿀, 노래를 그 신전에 바치는 것이 좋겠다." 소년은 장로의 말대로 그 신전을 찾아갔습니다. 산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험한 산길도 며칠 전에 말을 끌고 올라가던 그대로였지만, 신전이 있었던 자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은 여러 날 동안 산속을 헤맸지만 결국 신전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소년은 노래를 부르며 추억의 영혼에게 신전을 지키는 검은 새와 죽은 사람들, 슬픈 표정의 왕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간의 양심과 진리를 고민한 대문호. 헤르만 헤세(1877 1962)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작가입니다. 독일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헤세는 신학교를 중퇴한 후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899년에는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발표했습니다. 두 작품은 독일 문단에서 인정을 받았고 헤세는 이를 계기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페터 카멘친트, 크눌프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은 헤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기가 사랑 하는 조국 독일이 세계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 때문이었지요. 헤세는 몹시 괴로워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 일 때문에 독일 국민들에게 외면당하자 은둔 생활을 하면서 동양의 불교와 유교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양심과 진리에 대해 고민하는 걸작들을 내놓았습니다.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등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작품을 많이 쓴 헤세는 1946년에 노벨 문학상과 괴테 상을 수상했습니다. 사랑과 평화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 어느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은 헤르만 헤세의 사상을 가장 쉽고 분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평화로운 별의 사람들이 관과 무덤에 꽃을 장식해야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는 부분은 불교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일평생을 살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을 얻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윤회 사상입니다. 불교에 심취했던 헤세의 사상이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지요. 때문에 어느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은 서양의 독일인이 쓴 동양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폐허가 된 별은‘지구’를 의미합니다. 헤세가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헤세의 반전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러 가지 난관을 뚫고 간신히 꽃을 구해 온 소년은 그 후로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 별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헤세의 문학 작품을 통해‘사랑과 평화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딸그락딸그락! 톡톡톡! 뚝딱뚝딱! 콩콩콩! 갈색 문 안에서 하루 종일 들려오는 소리에 슈탈바움 씨네 아이들은 마음이 설렙니다. “대부님이 올해에는 무엇을 만들어 주실까?” 일곱 살 난 마리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습니다. 지금 방 안에서 나는 소리는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슈탈바움 씨네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드는 소리입니다. 드로셀마이어 대부는 작은 키에 깡마르고 얼굴이 주름투성이인 데다가 한쪽 눈에는 안대까지 하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은 무서워하지만, 사실은 아주 상냥한 분입니다. 드로셀마이어 대부는 슈탈바움 씨네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해서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직접 선물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난 밤색 말이랑 장난감 병정을 갖고 싶어.”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프리츠가 말했습니다. “대부님은 우리를 위해 정성스럽게 선물을 만들어 주시잖아. 어떤 것이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야 해.” 첫째인 루이제가 의젓하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다 좋아. 난 내 선물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거야.” 다정다감한 막내 마리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드디어 육중한 문이 활짝 열리며 슈탈바움 씨가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자, 들어오렴! 멋진 선물이 기다리고 있단다.” 프리츠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프리츠가 갖고 싶어 했던 병정 인형들이 씩씩한 모습으로 줄을 맞춰 서 있었으니까요. “와, 병정이다! 대부님, 고맙습니다.” 루이제의 눈길을 끈 것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예쁜 거울이었습니다. “어머나, 이 거울을 들고 다니면 모두 저를 부러워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대부님.” 드로셀마이어 대부는 막내 마리에게 인형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왕방울 같은 눈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병정 인형이었습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입에 커다란 이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어딘가 다정해 보이는 표정이 마리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이란다. 호두를 좋아하는 우리 마리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지.” 마리는 접시에서 가장 작은 호두를 하나 집어 조심스럽게 인형의 입에 넣고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습니다. ‘따악!’경쾌한 소리가 나더니 호두 알맹이가 튀어나왔습니다. “고마워, 인형아.” 마리는 고소한 호두 알맹이를 먹으며 방긋 웃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이런 바보같이 생긴 병정이 뭐가 좋아?” 장난꾸러기 프리츠가 호두까기 인형을 빼앗더니 굵고 딱딱한 호두를 여러 알 인형의 입에 넣고 거칠게 머리를 잡아당겼습니다. “안 돼! 그러지 마! 인형이 얼마나 아프겠어!” 마리가 울면서 매달렸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몇 번이고 호두를 깨던 인형의 턱이 그만 헐거워지고 말았습니다. 커다란 이도 세 개나 부러졌습니다. “에이, 시시해.” 프리츠는 호두까기 인형을 던져 버리고 방을 나갔습니다. 마리는 눈물을 흘리며 인형을 안아 들었습니다. “미안해. 많이 아프지?” 마리는 손수건으로 인형의 턱을 싸매 주고는 꼭 안았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런 마리의 행동을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리야, 너는 정말 상냥한 아이로구나. 그 인형도 이제는 행복해지겠구나.” “대부님은 이 인형을 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이렇게 대답하는 드로셀마이어 대부의 얼굴이 쓸쓸해 보여서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날 밤 마리는 장난감을 모아 두는 방에 들어가 장식장에 조심스럽게 호두까기 인형을 놓아두었습니다. 그 장식장에는 마리와 루이제의 인형들과 프리츠의 장난감 병정들이 사이좋게 놓여 있었습니다. “잘 자, 인형아. 내일 턱을 고쳐 줄게.” 마리가 호두까기 인형에게 뽀뽀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장식장 뒤, 난로 안, 방구석 여기저기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다음 순간 마리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둠 속에서 생쥐들이 몰려나왔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셀 수도 없이 많은 생쥐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가장 앞에 있는 생쥐 왕은 끔찍하게도 머리가 일곱 개나 달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식장 안에 있던 호두까기 인형이 칼을 뽑아 들고 벌떡 일어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장난감 친구들이여! 나를 따르라!” 호두까기 인형의 외침에 다른 장난감과 인형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마리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마리 아가씨! 저를 아가씨의 기사로 삼아 주십시오. 아가씨의 이름으로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마리는 머리를 묶고 있던 파란 리본을 풀어서 호두까기 인형에게 주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공손하게 리본을 받더니 자기 허리에 척 묶었습니다. 그리고 프리츠의 장난감 병정들에게 힘차게 외쳤습니다. “자! 마리 아가씨의 명예를 걸고, 장난감 나라의 평화를 위해, 우리 모두 싸우러 나가자!” 병정 인형들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또각또각! 말들이 걸어 나갔습니다. 구릉구릉 구르릉! 포병들이 대포를 끌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어떤 포병은 탄환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갔습니다. 수레에는 탄환으로 쓸 후추 과자와 알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인형들과 생쥐 군대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프리츠의 병정 인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병정들이여! 생쥐 왕은 내가 맡을 테니 나머지 생쥐들을 맡아 주시오.” “와아아!” 프리츠의 병정들은 함성을 지르며 생쥐 군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마리는 너무나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생쥐 왕과 치열한 칼싸움을 벌였습니다. 챙챙챙! 찰캉찰캉 챙! 칼과 칼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습니다. 포병 인형들이 생쥐들에게 장난감 대포를 쏘았습니다. 딱콩 딱콩 딱콩! 대포에서 알사탕들이 튀어나와 생쥐들을 덮쳤습니다. 그러나 생쥐 병사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퍽, 딱, 퍽, 딱! 콰콰콰콰쾅!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격렬해졌습니다. 그러다 호두까기 인형은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징그러운 생쥐 왕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칼을 들고 호두까기 인형에게 다가갔습니다. “안 돼! 내 인형이야! 내 기사야!” 마리는 자기도 모르게 생쥐 왕에게 신발을 벗어 던지다가 장식장에 부딪혀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마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어머니의 목소리에 눈을 뜬 마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은 심하게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사방에 알사탕과 후추 과자 부스러기가 널려 있었고, 장난감 병정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마리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엄마, 어젯밤에 여기서 큰 싸움이 일어났어요!” 마리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쥐 군대가 쳐들어온 일, 호두까기인형이 프리츠의 장난감 병정들을 이끌고 생쥐 군대와 싸운 일. “아무래도 마리가 아파서 악몽을 꾼 모양이구나.” 마리는 너무 답답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종일 마리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찾아와 호두까기 인형을 고쳐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대부님.” “마리야, 난 네 말을 믿는단다. 어제 네가 겪은 그 싸움 이야기 말이야.” 드로셀마이어 대부의 말에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정말요? 제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그래. 내가 말하지 않았니? 나는 이 호두까기 인형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고.” 마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이제부터 이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마.” 마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드로셀마이어 대부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과 왕비가 살았단다. 어느 해 두 사람에게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지. 얼굴은 백합처럼 희고, 눈은 호수처럼 파랗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황금색으로 빛났단다. 왕은 공주의 생일을 맞아 큰 잔치를 열기로 했단다. 특히 왕은 왕비에게 직접 소시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 왕비의 소시지 만드는 솜씨는 여러 나라에 소문이 났을 정도였으니까. 왕비는 기쁜 마음으로 부엌에서 소시지를 만들고 있었지. 질 좋은 돼지고기를 달달 볶고있는데 부뚜막 아래에서 찍찍찍 하는 소리가 나는 거야. 바로 부엌에서 살고 있는 생쥐들의 여왕이었어.“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에요. 돼지고기 좀 나눠 주세요.” 마음 착한 왕비는 돼지고기를 조금 떼어 주었단다. 그런데 큰일이 나고 말았어. 갑자기 여기저기서 생쥐 여왕의 일곱 아들이 몰려나온 거야. 생쥐 떼는 마구 달려들어 돼지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단다. 왕비의 비명을 들은 병정들이 달려와 생쥐들을 내쫓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노발대발했어. “감히 공주 생일에 쓸 음식을 훔쳐 먹다니! 못된 생쥐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왕은 총애하는 신하를 불렀어. 그 신하의 이름은 나와 똑같은‘드로셀마이어’였단다. “당장 생쥐들을 모두 없애 버리도록 하시오!” 드로셀마이어는 튼튼한 쥐덫을 만들고 그 입구에 먹음직스런 돼지고기를 놓았지. 영리한 생쥐 여왕은 돼지고기를 봤지만 그냥 지나쳐 갔단다. 하지만 생쥐 여왕의 아들들은 그다지 영리하지 못했어. 녀석들은 돼지고기를 보자 좋아서 찍찍거리며 달려들었다가 그만 모두 덫에 갇혀 죽고 말았지. 생쥐 여왕은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간신히 달아났단다. 하지만 얼마 뒤 부엌에서 다시 소시지를 만들고 있는 왕비 앞에 나타나 이렇게 경고했어. “내 아들들을 죽였으니 당신 딸도 무사할 수 없어. 당신의 예쁜 공주가 어떤 벌을 받는지 두고 봐라!” 이 말을 전해 들은 왕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시녀들에게 하루 종일 고양이를 안고 공주를 지키게 했단다. 그런데 어느 날 공주를 지키던 시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어. 왕과 왕비가 달려가 요람에 있는 공주를 살펴보았지. 그 순간 왕비는 그대로 쓰러지고 왕은 넋을 잃고 말았어. 그 예쁘던 공주의 얼굴이 흉하게 변하고 만 거야.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는 툭 튀어나온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모습이라니! 왕은 당장 드로셀마이어를 불렀어. “당신이 만든 덫으로 생쥐 여왕까지 잡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소. 당장 공주의 모습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알아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겠소.” 공주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드로셀마이어는 마법에 대한 책들을 모두 뒤져 보았단다. 그리고 드디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냈어. 바로 크라카툭 호두의 알맹이를 공주에게 먹이면 되는 거였어! 크라카툭 호두는 어찌나 단단한지 대포가 그 위를 지나가도 끄떡없을 정도였대. 그런데 그렇게 단단한 크라카툭 호두를 어떻게 깨느냐고? 방법이 딱 하나 있었어. 태어나서 한번도 수염을 깎은 적이 없고, 장화를 신은 적이 없는 청년이 공주 앞에서 크라카툭 호두를 깨문 다음 뒤로 일곱 걸음만 걸으면 저주가 풀린다는 거야. 드로셀마이어는 왕에게 이러한 사정을 모두 설명하고 크라카툭 호두와 호두를 깰 청년을 찾아 나섰단다. 크라카툭 호두와 호두를 깰 청년을 찾아 헤매던 드로셀마이어는 고향에 들르게 되었어. 그런데 드로셀마이어의 사연을 들은 사촌 동생이 손뼉을 치며 말했단다. “걱정 마세요, 형! 내가 크라카툭 호두를 갖고 있으니까요!” 사촌 동생은 상자에서 금을 입힌 호두 하나를 꺼내 드로셀마이어에게 주었어. 그 호두에는‘크라카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단다. “어느 해 우리 집 앞에 호두 장수가 와서 호두를 사라고 귀찮게 굴더군요. 그런데 어떤 짐수레가 그만 그 호두 장수의 호두 자루를 밟고 지나갔어요. 호두가 모두 깨졌는데 크라카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이 호두 한 알만은 멀쩡하더군요. 저는 빈털터리가 된 호두 장수가 불쌍해서 이 호두를 금화를 주고 샀답니다.” 자! 이렇게 해서 크라카툭 호두를 손에 넣었어. 이제 호두를 깰 청년을 어디서 찾는다지? 이때 사촌 동생의 아들인 조카가 나섰어. “저는 한번도 수염을 깎지 않았고, 장화도 신어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호두를 잘 까서 별명이 호두까기일 정도예요.” 조카는 드로셀마이어 앞에서 딱딱 신나게 호두 몇 알을 깨어 보였지. “이제 살았구나, 살았어.” 드로셀마이어는 사촌 동생과 조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단다. 드로셀마이어는 조카를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왔어. 십오 년 만이었지. 그사이 공주는 소녀가 되었지만 흉측한 모습은 그대로였단다. 궁전은, 공주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청년에게 공주와 왕국을 주겠다는 왕의 약속을 듣고서 몰려온 청년들로 가득했어. 드로셀마이어가 나타나자 왕과 왕비는 몹시 반가워했어. 공주는 드로셀마이어 옆에 서 있는 잘생기고 다정해 보이는 청년에게 한눈에 반했지. 드디어 드로셀마이어의 조카는 왕과 왕비, 공주에게 인사를 한 다음 크라카툭 호두를 받아 들었어. 그리고 곧 호두를 이 사이에 넣고는 힘껏 깨물었지. 그러자 딱 하는 소리가 나며 크라카툭 호두는 산산조각이 났단다. 청년은 호두 알맹이를 왕의 손에 올려 주고 천천히 뒤로 일곱 걸음을 걷기 시작했지. 왕은 기뻐어쩔 줄 몰라 하며 그 호두 알맹이를 공주에게 먹였단다. 공주가 호두 알맹이를 먹자마자 순식간에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자리에 매우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는 게 아니겠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단다. 그 와중에도 청년은 계속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지. 바로 이때였어. 뒷걸음질하던 청년의 발에 무엇인가가 밟힌 거야. 돌아본 청년도, 드로셀마이어도, 왕도, 왕비도 깜짝 놀랐어. 밟힌 건 바로 생쥐 여왕이었어. 생쥐 여왕은 청년에게 밟혀 죽으면서 저주의 말을 했지. 그리고 다음 순간 청년은 예전에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거야. “으악! 저런 괴물과 결혼하라면 저는 죽어 버리겠어요.” 이미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은 공주는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지. “저 괴물을 당장 내쫓아라, 어서!” 왕의 명령에 청년은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어. 드로셀마이어도 조카를 따라 함께 궁전을 나왔단다. 자기 때문에 조카가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던 드로셀마이어는 그날부터 마법 책을 뒤적이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지. 그리고 몇 달 만에 조카에게 걸린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어. 바로 진심으로 청년을 사랑하는 아가씨가 나타난다면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거였지. 그래서 지금도 드로셀마이어와 조카는 진심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아가씨를 찾아 세상을 헤매고 다닌단다.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이야기를 다 마쳤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마리는 가만히 드로셀마이어 대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지금 말씀하신 것은 대부님 이야기지요?” 드로셀마이어 대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단다. 그리고 이 호두까기 인형은 내 불쌍한 조카란다.” 마리는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드로셀마이어 대부는 마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마리야, 오직 너만이 호두까기 인형을 구할 수 있단다. 호두까기 인형을 생각하는 상냥한 마음을 계속 지켜 주기 바란다.”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돌아간 후 마리는 애처로운 심정으로 호두까기 인형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그때였습니다. 놀랍게도 호두까기 인형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습니다. “전쟁 중에 칼을 잃어버렸답니다. 칼을 하나만 구해 주세요. 그러면 용감하게 싸울 수 있어요.” 마리는 프리츠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는 마리의 말을 전혀 믿지 않던 프리츠도 서서히 이해하는 눈치였습니다. “마리, 너는 거짓말할 아이가 아니야. 그리고 대부님도 그러시지. 좋아, 칼이라면 걱정마. 내 병정 인형들이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프리츠는 병정 대장이 차고 있는 가장 멋진 칼을 떼어 내서 호두까기 인형에게 채워 주었습니다. 새 칼을 찬 호두까기 인형은 훨씬 더 늠름해 보였습니다. 그날 밤 마리는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장난감 방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 ‘또 전쟁이 났구나.’ 마리는 서둘러 장난감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머리 일곱 개 달린 생쥐 왕을 앞세운 생쥐 떼가 몰려나와 있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프리츠에게 받은 칼을 휘두르며 용맹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이 공중을 날 때마다 허리에 묶은 마리의 파란 리본이 하늘하늘 흔들렸습니다. “호두까기 인형님! 힘내세요.” 마리는 덧신으로 생쥐들을 때리며 응원했습니다. 챙챙챙! 쟁강쟁강! 여기저기서 칼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딱콩 딱콩! 퐁퐁퐁! 알사탕과 후추 과자들이 날아다녔습니다. 챙챙챙! 쟁강쟁강!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의 칼싸움이 더욱더 치열해졌습니다. 드디어 호두까기 인형이 힘찬 소리를 지르며 칼을 휘두르자 생쥐 왕이 푹 고꾸라졌습니다. 장난감과 인형들은 함성을 질렀고 생쥐 군대는 놀라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생쥐 왕의 금관 일곱 개를 마리 앞에 놓고 절을 했습니다. “오늘의 승리를 마리 아가씨께 바칩니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마리는 조그만 금관 일곱 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마리, 늦잠을 자는구나. 어서 일어나렴.”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마리는 눈을 떴습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마리의 얼굴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도, 장난감 병정들도, 생쥐 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 호두까기 인형이 누군지 아세요? 사실은 드로셀마이어 대부님의 조카라고요.” 마리의 말에 식구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밖에서 마차 멈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머, 드로셀마이어 대부님이 오셨어요. 그런데 웬 소년을 데리고 오시네요.” 모두 드로셀마이어 대부를 맞이하러 거실로 나갔습니다. 드로셀마이어 대부는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옆에 있던 소년을 소개했습니다. “제 조카입니다.” 소년은 하얀 얼굴로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루이제가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마리! 어떻게 된 거야? 호두까기 인형이 대부님의 조카라더니!” 그때 소년이 빙긋 웃더니 호두 한 알을 집어 딱 하고 깼습니다. 소년의 행동에 모두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의 작은 가슴은 콩콩 뛰었습니다. 모두 아침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소년이 마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습니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습니다. 그것은 마리의 파란 리본이었습니다. 마리는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소년은 마리의 머리에 리본을 묶어 주며 속삭였습니다. “사랑하는 마리.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 주셨어요.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이 제게 걸린 저주를 풀었답니다. 어른이 되면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마리는 설레는 가슴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용감하고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당신의 청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어요.” 마리가 손을 내밀자 소년은 정중하게 마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이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 슈탈바움 씨 집 앞에 화려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멋진 청년은 바로 드로셀마이어 대부의 조카였지요. 청년은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마리를 마차에 태우고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름다운 그 나라에서 청년과 마리는 서로 사랑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1776 1822)은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연방 트베리 주)에서 변호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호프만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랐고,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가족들의 권유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호프만은 낮에는 법관으로 충실히 일하면서 밤이나 주말에는 글을 쓰고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했던 호프만은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호프만의 문학 작품에는 음악과 미술과 연극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호프만의 작품들은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유령 호프만’, ‘밤의 호프만’과 같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황금 단지, 돈 후안, 악마의 묘약 등 환상적이고 기지가 있으며 풍자가 담긴 호프만의 작품들은 보들레르,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포, 디킨스, 바그너 등 세계적인 작가와 음악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는 호프만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운명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착한 어린이 마리와 저주에 걸린 호두까기 인형이 펼치는 사랑과 모험의 이야기입니다. 알사탕과 후추 과자로 대포를 쏘는 장난감 병정들의 전쟁 장면, 무시무시한 생쥐 군대들. 비록 200년 전에 쓰인 동화이지만 오늘날 읽어도 흥미진진한 걸작입니다. 호프만의 작품 중에는 호두까기 인형처럼 동화색이 짙은 것이 많습니다. 1819년 처음에 동화로 발표된 호두까기 인형은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알렉산더 뒤마는 호프만의 호두까기 인형을 바탕으로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호두까기인형을 발레로 만들어 무대에 올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미녀와 함께 19세기 발레 음악의 대가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답니다.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환상과 동화를 절묘하게 뒤섞은 줄거리와 춤이 어우러지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세묜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집도 땅도 없이 세 든 집에서 열심히 구두 고치는 일을 하여 먹고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져 외투를 장만해야 했지만 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모아 둔 삼 루블에 아랫마을 농부 두 사람에게 빌려 준 돈하고, 또 구두 고쳐 준 값으로 받을 돈까지 합치면 그럭저럭 외투 살 정도가 될 거야.” 세묜은 집을 나와 아랫마을 농부의 집으로 갔습니다. 빌려 준 돈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보이지 않았고 농부의 아내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이는 일하러 나갔어요. 그리고 아직 돈이 마련되지 않았으니 나중에 오세요. ”세묜은 돈을 빌려 준 다른 농부의 집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도 돈이 없다면서, 얼마 전에 장화를 고쳐 준 품삯만 건네주었습니다. 시장으로 간 세묜은 가죽 장수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외상으로 양가죽을 팔게나. 모자란 건 곧 주겠네.” “안 되네. 외상은 곤란해. 나중에 돈을 다 가지고 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게.” 결국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세묜은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양가죽 외투는 마련하지도 못했고, 얼마 안 되는 품삯과 고쳐 달라는 장화 한 켤레를 얻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죽어라 일해도 양가죽 외투 한 벌 살 수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이야? 돈을 빌려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두 어렵다고 하면서 갚을 생각을 안 하니 이거야 원! 자기들은 농사지을 땅도 있고 가축도 있지만, 나는 고작 구두 고치는 기술뿐인데.’ 생각할수록 답답하여 속이 상한 세묜은 길가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그날 받은 품삯 전부를 털어 술을 사 마시고 말았습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한 세묜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세묜이 길모퉁이에 있는 교회 근처에 이르렀을 때 무언가 하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무엇인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 돌 같은 건 없었는데. 짐승인가? 아냐, 사람 같은데. 아니야, 사람이 이런 데 있을 리가 없어. 그런데 왜 저렇게 하얗지?” 가까이 다가간 세묜은 깜짝 놀랐습니다. 벌거벗은 사내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누군가 사람을 죽이고 옷을 벗겨 여기에 버린 걸까? 잘못하다가는 나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는걸.’ 세묜은 덜컥 겁이 나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기엔 마음이 편치 않아 교회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벌거벗은 사내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는데 약간씩 몸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가 버릴까? 다시 가 볼까? 아냐, 공연히 시끄러운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 혹시 죽을지도 모르잖아. 더구나 이렇게 추운데 벌거벗고 있으니 얼어 죽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 교회가 보였습니다. 교회는 세묜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했는데 그냥 가 버리려 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무엇이 겁나서 도망치려 하는 거냐? 네가 부자라서 뭘 빼앗길까 두려운 것이냐?” 세묜은 얼른 발걸음을 되돌려 사내 곁으로 갔습니다. 세묜은 사내에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젊은 사람이었고, 다행히도 몸에서 상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추위에 몸이 얼어서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묜이 다가가자 사내는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고 세묜을 바라보았습니다. 세묜은 그 착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겉옷을 벗어 사내에게 입히고 들고 있던 장화를 신겨 주었습니다. “이제 되었네. 좀 움직여서 몸을 녹이도록 하게. 그런데 자네 걸을 수 있겠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세묜은 사내를 부축하여 함께 걸으며 물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쩌다가 봉변을 당했나?” “하느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하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뭔가?” “미하일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어디로 갈 건가?” “마땅히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집으로 가세. 언 몸을 녹일 수는 있을 거야.” 세묜의 아내 마뜨료나는 작은 고민에 잠겨 있었습니다. ‘빵을 오늘 구울까, 내일 구울까?’ 집에는 빵이 딱 한 조각 남아 있었습니다. ‘만약 세묜이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면 저녁을 그리 많이 먹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일 빵은 이것으로 충분할 텐데.’ 그런데 마뜨료나는 집에 돌아온 세묜을 보고 놀라 크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세묜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으며, 그 뒤에는 세묜의 겉옷을 걸친 반벌거숭이 청년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투를 사러 나갔던 사람이 술을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벌거숭이 건달까지 데려오다니. 대체 이 사람은 누구예요? 마을에서 만난 술친구인가요?” 세묜은 미하일을 벽난로 앞으로 데려가 불을 쪼이게 하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술을 한잔 마시고 돌아오는데 교회 옆에서 이 젊은이가 추위에 떨고 있더군요. 아마도 하느님이 나를 이끄신 모양이에요. 참, 이 친구 이름은 미하일이에요. 그나저나 저녁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나요?” “준비는 했지만 술주정뱅이를 위한 것은 아니죠. 주정뱅이와 건달까지 보살피다간 없는 살림에 뭐가 남겠어요.” 마뜨료나는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미하일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하일의 맑은 눈을 보자 이상하게도 화가 가라앉았습니다. 기분이 나아진 마뜨료나는 서둘러 저녁 준비를 했고 미하일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미하일은 세묜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자네, 무슨 일을 할 줄 아나?” “글쎄요.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네. 그래야 빵도 살 수 있고 남을 위할 수도 있거든. 그런데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글쎄요. 뭐든지 해야겠죠.” “그러면 구두 고치는 법을 배우게,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우선 실 꼬는 것을 잘 보게.” 세묜이 실을 꼬는 것을 본 미하일은 금방 배워서 실을 꼬았습니다. 오랫동안 실을 꼬아 온 세묜이 꼰 것보다 더욱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세묜이 구두 고치는 법을 가르쳐 주자, 미하일은 그 일도 금방 배웠습니다. 미하일은 사흘 뒤부터는 세묜과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미하일은 마치 오래전부터 해 온 것처럼 구두를 고치는 일이나 만드는 일을 능숙하게 했습니다. 미하일의 솜씨는 날로 좋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세묜이 솜씨 좋은 일꾼을 두었다며 칭찬을 했고, 세묜의 가게에서 만든 구두는 모양도 예쁘며 튼튼하다고 멀리까지 소문이 나서 돈도 꽤 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미하일 덕분이었지만 미하일은 언제나 조용히 일만 했습니다. 밥도 조금밖에 먹지 않았고, 일이 없을 때는 조용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처음 마뜨료나가 저녁을 준비할 때 보인 환한 웃음을 다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세묜의 가게 앞에 멋진 마차가 와서 섰습니다. 값비싼 옷을 입은 신사가 마차에서 내리더니 하인을 데리고 세묜의 구둣방에 들어왔습니다. “주인이 누군가?” “예! 제가 주인입니다.” 세묜이 대답하자 신사는 하인에게 들려 가져온 가죽을 보여 주었습니다. “잘 봐. 이게 어떤 가죽인지 알겠지?” 세묜은 가죽을 꼼꼼하게 살펴본 뒤 말했습니다. “독일제군요. 아주 비싼 고급품인데요.” “맞아, 아주 좋은 것이지. 자네는 구경조차 못 했을 거야. 이걸로 구두를 만들 수 있겠나?” “만들 수 있습니다.” “좋아, 굽이 높은 장화를 만들어 주게. 십 루블 주지. 단, 일 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지 말아야 하고 망가져서도 안 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아예 손을 대지도 말게. 만약 엉터리로 만들었다간 감옥에 보낼 테니까.” 세묜은 덜컥 겁이 나 슬며시 미하일을 바라보았습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세묜은 힘차게 대답을 하고는 신사의 발을 재기 시작했습니다. 발을 재는 동안에도 신사는 거만한 표정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며 이것저것을 물었습니다. “저 젊은이는 누군가?” “예, 제 조수입니다. 나리의 신발을 만들 겁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신사가 아니라 가게의 한구석을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기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잠시 후에 고개를 든 미하일이 환하게 웃었습니다. 미하일이 세묜을 만난 뒤 두 번째로 보인 환한 웃음이었습니다. “여하튼 적어도 일 년은 끄떡없어야 해.” 신사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말하고 가게를 나갔습니다. 신사가 돌아가자 세묜은 미하일에게 말했습니다. “아주 까다로운 손님이군. 일을 맡기는 했지만, 자칫 하면 감옥에 갈지도 몰라. 자, 발 잰 것을 보고 자네가 가죽을 자르게. 나는 겉가죽을 꿰맬 테니까.” “알겠습니다.” 미하일은 받아 든 가죽을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가죽을 둥글게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장화를 만들려면 가죽을 길게 잘라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실을 꿰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상했습니다. 장화를 만들 때는 실을 두 겹 사용해야 하는데, 미하일은 슬리퍼를 만들 때처럼 한 겹만 꿴 것입니다. 미하일은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미하일이 만든 신발을 본 세묜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미하일은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아니 여보게 미하일! 대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건가? 그 신사는 분명히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네. 그런데 슬리퍼를 만들다니, 잘못 들었나? 큰일 났군. 이런 가죽은 다시 구하기도 힘든데.” 그때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묜이 창밖을 내다보니 아까 신사가 타고 온 마차가 가게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곧 가게 문이 열리고 아까 신사를 따라왔던 하인이 들어오며 말했습니다. “주인마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세묜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자, 장화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장화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어요. 나리가 돌아가셨거든요. 글쎄 집에 도착해 보니 그만 나리께서 숨져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님께서 장례용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하셨어요.” 미하일은 만들어 둔 슬리퍼를 하인에게 내밀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세묜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서 있었습니다. 미하일은 어떻게 슬리퍼가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그리고 두 번째로 보인 웃음은 무슨 뜻일까요? 미하일이 세묜의 집에 온 지도 벌써 육 년이 지났습니다. 미하일은 변함없이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고 쓸데없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미하일이 웃는 모습을 보인 것은 단 두 번뿐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세묜의 집에 처음 오던 날 마뜨료나가 저녁을 준비할 때였고, 두 번째는 신사가 구두를 맞추러 왔을 때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모를 것이 많았지만 세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미하일이 나가겠다고 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가게 밖을 내다보던 마뜨료나가 말했습니다. “저기 보세요. 부인 한 분이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오네요. 우리 가게로 오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미하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미하일은 여태까지 한 번도 내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부인과 여자아이 둘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가엾게도 한 아이는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낯선 듯 부인의 무릎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신을 구두를 맞추러 왔어요.” “예, 어떤 모양이든 주문만 하십시오. 우리 집 미하일은 솜씨가 아주 좋으니까요.” 세묜은 이렇게 말하면서 미하일을 돌아보았습니다. 미하일은 아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두 아이는 무척 귀여웠습니다. 까만 눈에 발그레한 두 뺨, 입고 있는 옷까지 무척 앙증맞았습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동안 누구를 뚫어지게 쳐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미하일의 표정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 아이 발만 재도 될 거예요. 둘은 쌍둥이라서 똑같거든요.” 부인의 말에 세묜이 아이의 발 치수를 재면서 물었습니다. “귀엽게 생겼는데, 저 아이는 언제부터 다리를 절었나요?” “태어날 때 몸을 뒤척이던 엄마에게 눌려서 그렇게 되었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뜨료나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부인은 이 애들의 엄마가 아닌가요?” “저는 엄마도 아니고 친척도 아닙니다. 그저 이 아이들을 맡아서 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내 젖을 먹여 키웠으니 정이 깊이 들었지요.제가 낳은 아이는 일찌감치 하느님이 데려가셨는데, 아마도 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죠?” 마뜨료나가 묻자 부인은 무언가 회상하듯 말했습니다. “육 년 전 일입니다. 이 애들 아빠는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다쳤는데, 집으로 돌아온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고, 애들 엄마는 사흘 뒤에 혼자 아이를 낳았어요.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말이에요. 이웃에 살던 제가 궁금해서 그 집으로 가 보니 애 엄마는 이미 숨진 뒤였어요. 그런데 한 아이가 엄마에게 눌려 있었지 뭐예요. 그때 다리를 다친 것이죠.” 부인은 다리를 저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 아이들 부모의 장례를 치렀지요. 그런데 문제는 갓난아이들이었어요.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때 저는 낳은 지 두 달밖에 안 되는 아이가 있었기에, 젖을 먹일 수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부탁해서 제가 맡아 기르게 되었지요. 젖은 둘뿐이니 세 아이를 먹이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하느님이 보살펴 주셨는지 아이들은 잘 자랐어요. 하지만 제가 낳은 아이는 이 년이 채 못 되어 죽고 말았지요. 그 뒤로 제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저는 더욱이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았지요. “부모 없이는 살아가도 하느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정말인 것 같군요.”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간 뒤 미하일은 천장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미하일이 보이는 세 번째 웃음이었습니다. “미하일! 자네의 웃는 얼굴을 세 번째 보는군. 무엇이 그리 좋은가?” 세묜이 묻자 미하일은 일어나서 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주인아저씨 그리고 아주머니, 용서하세요. 하느님께서 저를 용서하셨으니 두 분께서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젠 떠날 때가 되었군요.” 말을 하는 미하일의 몸에서 눈부신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수가!” “미하일, 자네는 결코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네. 어떻게 몸에서 빛이 날 수가 있나?” 놀라는 두 사람에게 미하일은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은 하느님께 벌을 받았다가 이제야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육 년 전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하느님께 벌을 받아 세상으로 쫓겨 온 것이었죠.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묜은 헛기침을 한 뒤에 다시 물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네.” “그게 뭔데요?” “자네가 우리 집에 온 뒤로 단 세 번밖에 웃지 않았네. 왜 그런 것인가?” 세묜의 물음에 미하일이 답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세 번밖에 웃지 않은 까닭은 하느님의 세 가지 말씀의 뜻을 깨달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말씀이라니?” “한 가지 말씀은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온 날 아주머니가 저녁 준비를 할 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또 두 번째 말씀은 신사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 깨달았지요. 그래서 또 웃었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방금 두 여자아이를 보았을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웃었습니다.” “자네는 대체 왜 하느님의 벌을 받았으며, 그 세 가지 말씀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 세묜의 물음에 미하일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습니다. 저는 본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느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아까 왔던 쌍둥이를 낳은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저히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남편을 잃었고, 쌍둥이를 낳았지만 젖을 줄 기운도 없이 누워 있었거든요. 여인은 저를 보자 제발 아기들을 자기 손으로 키우게 해 달라고 울며 부탁을 했지요. 저는 도저히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갈 수 없어서 빈손으로 돌아가 하느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내려가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너라. 그러면 세 가지 말의 뜻을 알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말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알게 되면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오게 되리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저는 다시 내려와 여인의 영혼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순간 몸이 한 아기의 다리를 눌렀지요. 그래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여인의 영혼을 거둔 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께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제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영혼만 하느님께로 날아가고 저는 인간 세상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제야 세묜과 마뜨료나는 자신들과 함께 지냈던 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기쁨과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렸지요. 미하일은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천사는 땅에 떨어진 순간부터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겪게 되지요. 저는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추위나 배고픔도 몰랐고요. 그런데 막상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교회가 보여 그곳으로 갔지만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 없었지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터라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지만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몸은 얼어붙기 시작했지요. 그때 주인아저씨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술에 취했고 외투를 어떻게 마련할까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어 가고 있는데, 저 사람은 양가죽 외투를 어떻게 마련할까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저 사람은 나를 도와줄 힘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과연 아저씨는 저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제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이었죠. 그런데 얼마 후 아저씨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저씨 얼굴은 아주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되돌아온 아저씨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하느님의 숨결마저 느껴졌습니다. 아저씨는 제게 다가와 옷과 신발을 주고 집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나쁜 기운이 느껴졌지요. 아주머니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거든요. 처음 아저씨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무서웠지요. 저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저를 쫓아내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하느님 얘기를 하자 아주머니는 금방 화를 가라앉히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지요. 불과 잠깐 사이인데도 아주머니의 얼굴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씻은 듯 사라지고 생기가 넘쳐흘렀지요. 또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한 저는 하느님의 첫 번째 말씀을 생각했지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게 되리라’라는 말씀이요. 저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바로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웃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웃음이었군.” 마뜨료나의 말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세묜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일 년 동안 신어도 닳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한 신사는 그날 저녁에 죽을 운명이었어요. 저는 그 신사 뒤에 죽음의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거든요. 물론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요. 그때 저는 ‘사람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저 신사는 자기가 오늘 저녁에 죽을 운명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일 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친구인 천사를 만난 것도 기뻤고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을 깨달은 것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웃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무엇인가?” 저는 하느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실 때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영혼을 데려간 여인이 낳은 쌍둥이가 나타났습니다. 그 아이들은 엄마가 죽었지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부모 없이는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부인이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것은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마지막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용서하신 것을 알았을 때 세 번째로 웃었던 것입니다. 미하일이 말을 마치자 미하일의 모습은 사라지고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는 천사가 서 있었습니다. 천사는 마치 머나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이를 낳은 엄마는 자기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다. 신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장화인지 슬리퍼인지조차 몰랐으니까. 내가 사람이 되고서도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지나가던 사람과 그 사람의 아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잃은 쌍둥이가 잘 자라는 것도 아이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 여인이 잘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마음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기만 알고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으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해서 살도록 하신 것이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다. 자신을 걱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 실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다.하느님은 곧 사랑이시다. 천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등에서 날개가 펼쳐지더니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사상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러시아 툴라 현에 있는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몸이 약하고 공상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던 톨스토이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열여섯 살에 카잔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딱딱한 법률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하고 말았지요. 몇 년 후 톨스토이는 군에 입대하는데, 카프카즈 지방에서 복무하며 첫 작품 유년 시절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작가 생활을 시작한 톨스토이는 계속해서 소년 시절, 청년 시절,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썼습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은 전쟁과 평화입니다. 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인간의 운명을 묘사한 전쟁과 평화는 지금도 세계적인 소설로 손꼽힙니다. 전쟁과 평화는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함께 톨스토이의 3대 걸작으로 불립니다. 톨스토이는 주로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삶의 자세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작품을 썼습니다. 문학과 종교의 예술적 결합. 톨스토이는 언제나 사람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를 고민했던 작가입니다. 1885년에 발표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러한 톨스토이의 사상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가 러시아 민간 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와 천사의 교제를 통해 ‘참다운 삶은 남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는 삶’이라는 참사랑의 중요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자칫 이기적으로 살아가기 쉬운 오늘날 우리들에게 톨스토이의 소설은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이와 같은 톨스토이의 사상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독교적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포함해 인생 후기에 쓴 나의 신앙,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인생 독본 등은 사람의 내적인 고민과 절망을 풀기 위해 종교적인 시각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톨스토이는 가난에 허덕이며 고통받는 당시 러시아 민중에게 참된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종교의 예술적 결합을 우리는 여러 톨스토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답니다.
죄와 벌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칠월 초 무더운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급한 걸음으로 막 비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에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습니다. 초라한 차림을 한 그 젊은이는 몇 달째 하숙비가 밀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붙들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위대한 계획을 실행하려는 내가 기껏 하숙집 아줌마를 피해 다니다니.” 이름이 라스콜리니코프인 이 젊은이는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습니다. 페테르부르크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을 뿐만 아니라, 숨 막힐 듯한 악취와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맑은 눈에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젊은이였는데, 남의 눈길을 끌 정도로 옷차림이 누추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술병을 들고 짐수레에 올라앉아 있던 주정뱅이가 소리쳤습니다. “어이, 젊은 친구. 그 따위 괴상한 모자는 벗어 버리라고. 하하하!” 라스콜리니코프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움켜잡았습니다. 눈앞에는 바로 자신이 목표로 하는 시커먼 사 층 건물이 떡 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몸까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사 층 건물에는 재단사와 열쇠 장수, 요리사, 하급 관리 등 온갖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이 들락거려 인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오른쪽으로 난 계단으로 미끄러지듯 숨어들었습니다. 다행히 마주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둡고 좁은 계단을 잽싸게 올라가 어느 방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습니다.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누르는 손이 떨렸습니다. 잠시 후 빠끔히 문이 열리더니 그 틈으로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이 보였습니다. 두 눈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낯선 방문객의 아래위를 찬찬히 살폈습니다. “누구요?” “라스콜리니코프입니다. 한 달 전에 다녀간.” 문이 조금 더 열리며 키가 작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코끝이 뾰족해서 더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돈이 필요해서 이걸 맡기려고요.” 라스콜리니코프가 아버지의 유품인 은시계를 꺼내 보이자 비로소 노파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잽싸게 방 안을 훑어보았습니다. “언제나 싸구려만 가져오는구먼. 일 루블 반, 그 이상은 안 돼. 그것도 이자는 미리 떼고.” “일 루블 반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적어도 사 루블은.” “싫으면 말고.” 노파는 은시계를 도로 내밀었습니다. 마음이 상한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대로 돌아서려다 다른 목적을 생각해 내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거라도 주세요.” 노파가 금고에서 돈을 꺼내러 뒤쪽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 남은 라스콜리니코프 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열쇠가 짤랑거리는 소리, 장롱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일 위쪽 서랍이군.’ 순간 커튼이 젖혀지면서 노파가 나타났습니다. 노파에게서 돈을 받아 쥔 라스콜리니코프는 문 쪽으로 가다 돌아섰습니다. “며칠 있다가 은 담뱃갑을 가져오죠.”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자고.” 노파의 말투는 정이 떨어질 만큼 냉정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몹시 떨려 몇 번씩이나 멈춰 섰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생각이 어떻게 떠올랐을까? 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술 취한 사람처럼 지나치는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걷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 술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둡고 더러운 지하 술집의 구석진 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그때 늙고 초라한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르멜라도프라는 사람으로, 한때는 관리였으나 술 때문에 직장을 잃은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마르멜라도프의 말에 여기저기서 비웃는 듯한 웃음이 터졌습니다. 마르멜라도프는 술집에서조차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르멜라도프는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집엔 어린것이 셋, 그 위로 열여덟 살 난 소냐가 있다오. 소냐는 전처가 낳은 딸인데, 마누라는 항상 못살게 군다오.” 어느새 마르멜라도프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마누라가 또 소냐를 들볶더군. 소냐는 아무 말 없이 외투를 입고 나갑디다. 그 아이가 돌아온 건 여덟시가 넘어서였소. 지금도 난 소냐가 술집에 나가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있으니, 나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하지 않겠소?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욕설, 빈정거림이 터져 나왔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벌떡 일어나 마르멜라도프를 끌다시피 하여 술집에서 나왔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술 취한 마르멜라도프를 부축하여 지저분한 뒷골목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돈은 못 벌어 오면서 날 마다 술만 마시다니, 대체 어떻게 살란 말이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몹시 야윈 마르멜라도프의 아내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습니다. 촛불 하나가 켜져 있는 마르멜라도프의 초라한 집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아이들의 누더기 옷이었습니다. 방 안에는 다 낡은 식탁과 의자 두 개, 쇠 촛대 하나가 있을 뿐 쓸 만한 가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몽땅 마셔 없앴군. 십이 루블이나 있었는데, 그 돈마저 훔쳐다가 몽땅 마셔 없앴어. 도대체 아이들은 뭘 먹고 살라는 거야! 마르멜라도프의 아내가 화를 이기지 못해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마르멜라도프의 머리를 휘어잡고 쓰러뜨렸습니다. 자고 있던 아이들이 깨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잘못했어. 용서해 줘!” 마르멜라도프는 아내에게 머리칼을 붙잡힌 채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가면서 두 손으로 싹싹 빌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라스콜리니코프는 주머니에 있는 대로 돈을 몽땅 꺼내 창가에 놔두고 나왔습니다. 하숙비를 내지 못해 시달리는 처지였으면서도 말입니다. 다음 날 아침 라스콜리니코프는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잠에서 깨었습니다. 작고 낡은 다락방은 누렇게 빛바랜 벽지 때문에 더욱 초라했고, 게다가 천장까지 낮아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의자를 침대 삼아 누워 누덕누덕 기운 학생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그만 일어나요, 언제까지 잠만 잘 거예요!” 하녀가 장난치듯 소리치며 들어왔습니다. “아주머니가 학생을 경찰에 고발하겠대요." “나를 왜 고발한다는 거죠?” “하숙비도 안 내고 방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라스콜리니코프의 멍한 표정에 하녀는 배를 잡고 웃더니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하녀가 나가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재빨리 편지를 뜯었습니다. 편지를 든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보고 싶은 우리 아들 로자, 소식을 전하지 못한 지도 오래됐구나. 로자, 생활에 쪼들려 몇 달 째 학교도 못 다니고 있다는 소식에 이 어미는 마음이 아프단다. 도울 수도 없어 답답하기만 하구나. 로자, 너는 우리의 희망이다. 네가 행복하면 나와 네 여동생 두냐도 행복할 거다. 편지를 읽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었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어! 이젠 행동으로 옮길 때야.”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순간 라스콜리니코프의 기억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달 전 싸구려 식당에 서 젊은 장교와 대학생이 나누던 대화였습니다. “그 노파는 엄청난 부자야. 모두 돈이 떨어지면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그 노파에게 가지.” 대학생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그 지독한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 해도 양심에 거리낄 건 없어. 전혀 가치 없는 생명 하나를 없애고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노파를 죽이는 것쯤이야 벌레를 죽이는 것하고 뭐가 다르겠어? 안 그래?” 밤이 되도록 라스콜리니코프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아래층의 시계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방바닥 사이 작은 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습니다. 오늘 밤 노파에게 잡힐 물건이었습니다. 은 담뱃갑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산책하다 주운 양철 조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담뱃갑 같군.” 라스콜리니코프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방을 나와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문지기의 방에서 몰래 칼을 훔쳐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자. 그 돈으로 귀중한 사람들 수백 명을 구하자.’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가 속삭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노파의 집 건물 앞에 도착하자 망설여졌습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하지만 여동생 두냐와 가엾은 소녀 소냐의 처지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노파를 죽여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숨에 사 층까지 올라가 노파의 집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몹시 숨이 가빴습니다. 안에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또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빠끔히 문이 열렸습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은 담뱃갑을 가져왔어요.” 어둠 속에서 의심에 가득 찬 두 눈이 경계하듯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다짜고짜 노파를 떼밀듯이 하며 가까스로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여러 번이나 묶은 거야?” 노파가 저당물을 받아 매듭을 풀려고 애를 쓰며 말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심장이 급하게 뛰었습니다. 마음속 악마가“지금이야!”라고 충동질을 해 댔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흐릿한 의식으로 칼을 꺼내 공중에 치켜들었습니다. 칼은 노파를 향해 커다란 은빛 원을 그렸습니다. 노파는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의 목에 걸려 있는 열쇠를 빼낸 다음 커튼 뒤쪽 방으로 갔습니다. 침대 밑에 큰 가방이 보였습니다. 열쇠는 꼭 들어맞았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큰 가방 안에 있는 금붙이를 꺼내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노파가 쓰러져 있는 방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숨을 죽였습니다. 나지막한 비명 소리가 들린 듯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문틈으로 살짝 엿보니 커다란 보따리를 든 한 노파가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노파는 보따리를 안은 채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만 죄 없는 사람마저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달아나야 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막 문 앞으로 갔을 때,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재빨리 빗장을 걸고 문 옆에 바짝 붙어 섰습니다. 칼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습니다. “이봐요, 할머니! 문 좀 열어요!” 한 사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열 번도 넘게 초인종을 눌러 댔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너무 긴장해서 금방이라도 기절해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안 되겠어. 문지기를 불러와야지.” 사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재빨리 빗장을 뺀 라스콜리니코프는 계단을 뛰어내려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라스콜리니코프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긴 의자에 걸터앉은 채 덜덜 떨면서 자기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세히 살폈습니다. 범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노파를 죽일 때 튄 핏방울이 혹시 옷에 묻어 있지 않을까 겁이 났던 것입니다. “이런, 아직 이걸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니!” 노파의 집에서 훔친 금붙이가 주머니에 가득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금붙이를 발각되지 않을 만한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꺼내서 다른 곳에 숨겼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아! 이제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너무나 겁이 나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깊은 절망에 빠져 들었습니다. “누, 누구요?” “어서 문 열어요. 열시가 지났단 말이에요!” 하녀는 이렇게 말하며 계속 문을 두드렸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하녀 옆에는 문지기까지 와 있었습니다. “호출장이에요. 경찰서에서 오랍디다.” 문지기가 잿빛 종이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예? 경찰서요?” 라스콜리니코프는 깜짝 놀랐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모두 자백해 버리자!” 좁고 가파른 경찰서 계단을 올라가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중얼거렸습니다. 경찰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봐, 아홉시까지 출두하라고 했는데, 벌써 열한시가 넘지 않았나?” 뜻밖에도 경찰관의 말투는 부드러웠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 사건 때문이 아니라 하숙비를 내지 않는다고 고발당했기 때문에 불려 왔던 것이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경찰관에게 사정했습니다. “저는 가난한 대학생입니다. 어머님이 돈을 보내 주시면 바로 하숙비를 내겠습니다. 이런 일로 고발하다니, 하숙집 아주머니도 너무하는군요.” 그때 저쪽에서 다른 경찰관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칠장이 녀석이 수상해. 그 녀석이 돈을 훔칠 생각으로 노파를 죽이고 여동생까지 죽인 후 잡아떼는 것이 아닐까?” “칠장이의 집을 수색해 보는 게 어떨까?”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서명을 마치고 재빨리 경찰서를 빠져나와 곧장 하숙집으로 돌아온 라스콜리니코프는 방에 숨겨 두었던 금붙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시 하숙집을 나왔습니다. “이 금붙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면 안전할 거야.” 라스콜리니코프는 외진 공사장 빈 터에 훔친 금붙이를 몰래 숨겨 두었습니다. “지금 몇 시나 됐지?” 라스콜리니코프가 눈을 뜨고서 친구인 라즈미힌에게 물었습니다. “정신없이 자더군. 벌써 저녁 여섯시가 지났어. 자네 헛소리까지 하던데?” “칠장이 아닐까요? 경찰은 칠장이를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데요. 칠장이가 금귀고리를 술집에 팔려다 붙들렸다고 하잖아요.” “정말 칠장이 짓일까? 금귀고리는 계단에서 주웠다고 하던데.” 라스콜리니코프는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바보 같은 놈.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겨우 몇 십 루블밖에 안 훔치다니, 장롱 서랍에 현금이 천오백 루블이나 있었다던데.” 라즈미힌과 의사가 간 뒤 라스콜리니코프도 집에서 나왔습니다. 거리는 찌는 듯 무더웠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도 모르게 전당포 건물 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이 마차에 치였다!” 사람들이 한곳에 몰려 수군거리고 있고, 고삐를 잡힌 말이 히힝거리며 뒷발질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가 보니 마차 바퀴 옆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술집에서 만났던 마르멜라도프가 틀림없었습니다. “이 남자를 압니다. 내가 데려가겠소.” 라스콜리니코프는 마르멜라도프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마르멜라도프의 식구들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의사가 치료를 했지만 마르멜라도프는 가망이 없었습니다. “소냐를 불러 줘, 빨리!” 마르멜라도프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마르멜라도프는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딸의 손을 잡더니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소냐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마르멜라도프의 아내에게 쥐어 주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때 소냐의 동생이 따라 나오며 물었습니다. “아저씨가 어디 사는지, 소냐 언니가 물어보래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이름과 주소를 가르쳐 주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며칠 후 경찰관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왔습니다. 지난번에 고발당해 경찰서에 갔을 때 만났던 경찰관이었습니다. “당신이 맡긴 은시계가 노파의 방에서 나왔어요. 종이에 당신 이름하고 물건을 맡긴 날짜도 적혀 있고.” “맞습니다.” ‘전당포 노파 따위는 정말 하찮은 벌레나 다름없어. 나는 해로운 벌레 한 마리를 없앴을 뿐이야.’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지만, 지독한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기만 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살을 결심하고, 죽기 전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천사처럼 맑은 눈빛의 소냐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용기를 내어 소냐를 찾아갔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네. 지난번에 저희 가족을 도와주셨던 분이시죠? 그런데 무슨 일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게 마치 죽은 사람 같아요.” “소냐, 전당포 노파 자매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소냐는 아무 말 없이 맑은 눈빛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쓰러질 듯 몸을 숙이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살인자는 바로 접니다!” 소냐는 처음에는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되는 듯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을 가슴에 끌어안았습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나요?” 소냐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새파랗게 질려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소냐의 발 앞에 엎드린 게 아닙니다. 전 인류의 고통 앞에 엎드린 겁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냐는 쓰러질 듯 고통에 떠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위해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죽음으로 동생을 잃은 한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여인은 예수 앞으로 나오면서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여인을 데리고 무덤이 있는 정원으로 들어가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청년이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가 손을 뻗쳐 청년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청년은 예수를 보는 순간 사랑하게 되었고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는 청년에게 할 일을 가르쳤고, 저녁 때 청년은 벗은 몸에 옷을 두르고 예수께 나와 그날 밤 예수와 함께 보냈다. 예수는 천국의 신비를 청년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요르단 강 건너로 돌아갔다. 소냐가 읽어 준 것은 성경의‘나자로의 부활’ 부분이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지 모를 슬픔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소냐, 만일 내가 굶주림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면, 오로지 돈을 훔칠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거라면, 지금처럼 괴로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소냐, 난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라스콜리니코프는 흐느끼며 물었습니다. 일어나세요. 이 세상은 넓지만 지금의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 맞추세요. 그런 다음 온 세상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절을 하세요. 그리고 자수하세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겁니다. 마치 나자로를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처럼요. “네, 갈게요. 꼭 가겠어요.” “정말 믿어도 됩니까? 당신은 나 같은 살인자를 피하고 싶지 않은가요?”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하겠어요. 어디라도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시베리아라도 갈 작정이에요.”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뜻에 따라 자수를 결심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들을 걱정한 나머지 병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이별을 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맞았습니다. “로자, 어서 오너라. 그런데 어찌 된 일이냐? 이렇게 흙투성이가 되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괴롭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사랑해 주시는 거죠?” “얘야, 그걸 말이라고 하니?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혹시 여행이라도 떠나려는 거니?” 두 사람은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슬픔에 찬 어머니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신앙심 깊은 소냐의 사랑에 용기를 얻은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침내 경찰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무슨 일로 왔나요?” 경찰관이 물었습니다. “제가 전당포 노파를 죽였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말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형을 받을 죄를 지었으나 자수했기 때문에 팔 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자신도 궁핍한 형편에 어려운 사람을 도운 일도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급 죄수가 되어 넓고 황량한 시베리아의 강기슭에 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편 소냐는 약속대로 죄수 호송 마차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머물면서 정기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면회하고 다른 죄수들도 함께 돌보아 주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처음 얼마간은 소냐가 면회 오는 것을 꺼렸지만, 소냐가 몸이 아파 찾아오지 않았을 때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소냐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라스콜리니코프는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소냐가 준 것인데 여태까지 한번도 꺼낸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책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마음과 생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에 새로이 자리한 희망처럼 창살 밖으로 밝은 달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포근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내의 도움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병약한 몸이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글을 썼지요. 그리고 학대받은 사람들, 도박자, 죄와 벌 등은 물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작 가 일기를 써서 러시아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 창작에 있어서 인간의 내면을 밝히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이것이 높은 평가를 받아 현재는 톨스토이와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 최대 작가로 불립니다.선구적인 정신의 탐구자. 인간이라는 존재를 밝혀내는 것을 문학의 과제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살던 러시아의 모습을 병든 인간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아름다운 이상을 좇는 고귀한 병자’라는 문학적 주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동경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지드, 모리아크, 카뮈 등 20세기의 많은 작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866년에 발표된 첫 장편 소설 죄와 벌에도 살인 사건이라는 일상 적인 소재를 통해 이러한 작가의 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난에서 탈출하고 출세를 하기 위한 범죄나 전당포 노파 동생의 살인처럼 특정한 이유가 없는 범죄가 현대 사회에는 아주 흔합니다. 이렇게 살인이라는 죄와 그 속죄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을 비판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1860년대 러시아 사회가 혼란스러웠을 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상적 갈등이 커지고 도덕적 기준이 흔들렸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이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어두운 현실에서 방황하는 상황을 생각해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간형을 창조했지요.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백조의 호수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멀고 먼 옛날 숲과 호수가 많은 아름다운 나라에 지크프리트라는 왕자가 있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았고 지식도 풍부했습니다. 또 칼싸움과 승마를 비롯한 모든 무예가 뛰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지크프리트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왕자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이렇게 많은 장점이 있으면서도 언제나 겸손하고 소탈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크프리트가 백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면 백성들은 더없이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아가씨들은 가슴 설레며 훔쳐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라에는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왕 로트바르트였지요. 로트바르트는 늙은 수리부엉이의 영혼으로 태어난 사악하고 욕심 많은 악마였습니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렸고 덩치도 곰처럼 엄청나게 컸습니다. 로트바르트는 이 나라의 왕좌를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지크프리트! 너는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다. 그러니 로트바르트의 검은 기운이 우리 왕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늘 부모님에게 이런 당부를 들은 지크프리트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로트바르트를 해치우리라 다짐했습니다. 로트바르트 역시 항상 지크프리트를 해치울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로트바르트는 지크프리트가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죽이려 했지만, 신의 축복을 받은 지크프리트는 쉽사리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죽였어야 했는데! 이제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지크프리트 녀석은 더 강해질 텐데 큰일이야.” 로트바르트의 걱정대로 며칠만 있으면 지크프리트는 성인이 됩니다. 지크프리트의 성인식이 다가오자 백성들은 모두 들떠 있었습니다. “우리 왕자님이 성인이 되시면 로트바르트는 더욱더 힘을 쓸 수 없을 거야.” “그럼요. 우리 지크프리트 왕자님은 신의 축복을 받은 분이라 왕이 되시면 우리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지크프리트의 성인식을 축복하던 그 시간, 지크프리트는 어머니인 왕비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내 아들 지크프리트! 네가 어엿한 성인이 된다니 몹시 기쁘구나. 자, 이것은 네 성인식 축하 선물이다.” 왕비가 내민 것은 아름다운 활이었습니다. 활쏘기를 좋아하는 지크프리트는 기쁜 마음으로 활을 받아 시위를 몇 번 당겨 보았습니다. 팅, 팅! 활에서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비가 말했습니다. “지크프리트! 내일 밤 너의 성인식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릴 것이다. 여러 나라 공주들과 고귀한 가문의 아가씨들이 많이 모인단다. 그 아가씨들 중 한 사람을 택해서 곧 결혼식을 올리자꾸나.” 왕비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과 꽃 한 송이까지 모두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백성들이 사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행복한 얼굴로 결혼식을 올리는 젊은이들을 보면 몹시 부러웠습니다. 자기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처음 본 여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지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해 살아야 하는 것이 왕자라는 자리입니까?” 지크프리트의 질문에 왕비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너는 왕자다. 백성들처럼 결혼할 수는 없지. 너는 언제나 나라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한다. 네 결혼도 마찬가지야.” ‘머리가 너무 복잡하구나. 어머니가 주신 활로 사냥이라도 다녀와야겠다.’ 마음이 답답해진 지크프리트는 말을 타고 깊은 숲 속으로 달려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크프리트의 어머니도 이웃 나라 공주 출신이었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아버지 역시 성인식 날 열린 무도회에서 어머니를 선택해 결혼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숲에서는 새들과 동물들이 쌍쌍이 다정하게 노닐고 있었습니다. ‘새들과 동물들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왕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당장 내일 신붓감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지크프리트의 현실입니다. 지크프리트는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는 듯 더욱 힘차게 말을 몰았습니다. “으흐흐흐. 오는구나, 지크프리트!” 바로 그때 깊은 숲 속에 있는 로트바르트의 성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로트바르트의 요술 구슬에는 늠름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흐흐흐. 그래, 더 깊이 들어오너라. 이제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그런데 로트바르트의 외동딸인 오딜로가 방에 들어왔다가 요술 구슬에 비친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이분이 지크프리트 왕자님이로군요. 정말 멋있어요. 이렇게 멋진 왕자님을 죽이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오딜로의 말에 로트바르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한가한 소리 하지 마라! 지크프리트가 있는 한 이 아버지는 왕이 될 수 없다. 내가 왕이 못 되면 너도 공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 아버지의 호통에 오딜로는 입을 비죽거리며 나갔습니다. “으흐흐흐. 자, 지크프리트! 이제 너는 영원히 이 숲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왕 로트바르트는 숲에 마법을 걸었습니다. 마법에 걸린 나무들은 갑자기 길을 막아서거나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빙빙 돌게 되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길은 조금 전에도 지나왔던 길인데. 이런, 이 나무는 아까도 본 나무잖아. 그러고 보니 내가 같은 자리를 계속 빙빙 돌고 있었구나. 어떻게 된 거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사방은 점점 어두워만 갔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혹시 마왕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든 건 아닐까?’ 지크프리트는 어머니에게 선물로 받은 활을 꼬옥 쥐고 말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달린 말이 지쳐서 헉헉거리자 지크프리트는 말에서 내렸습니다. “미안해. 목마르지? 잠깐 기다려라. 물을 구해 오마.” 지크프리트는 조심조심 숲길을 걸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어려서부터 사냥을 하면서 숲에 대해서도 공부했기 때문에 공기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물이 어디쯤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얼마를 걷자 어디선가 싱그러운 물 냄새가 풍겨 왔습니다. 그리고 파닥파닥 날갯짓 소리와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지크프리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활을 꽉 잡은 다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소리 나는 곳에 다다른 지크프리트는 깜짝 놀랐습니다. 눈앞에는 유리알처럼 맑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호수 위에는 눈처럼 하얀 백조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백조들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백조 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중 한 마리 백조에게 시선이 갔습니다. 몸이 유난히 하얗고 날갯짓이 더욱 우아한 백조였습니다. 게다가 머리에는 왕관도 쓰고 있었지요. ‘백조가 왕관을 쓰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쩌면 이것도 로트바르트의 마법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당장 저 백조를 잡아야지.’ 지크프리트는 우아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백조를 향해 활을 겨누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상상치 못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백조 무리가 일제히 호숫가로 날아오더니 갑자기 한 마리 한 마리가 아름다운 아가씨로 바뀌는 게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하얀 옷을 입은 아가씨들은 조용히 원을 만들며 앉았습니다. 이윽고 원 안으로 바로 그 우아한 백조가 너울너울 날아와 앉았습니다. 백조의 머리에서 조그만 왕관이 빛났습니다. 왕관을 쓴 백조가 서서히 지는 해를 향해 날개를 펴자 하얀 안개가 그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노을이 비쳐 반짝이는 물결을 배경으로 백조가 우아하게 몸을 돌리자 영롱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더니 갑자기 백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지개 속에서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비단처럼 반짝이는 긴 금발에 호수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매우 아름다운 그 아가씨는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아까 백조가 쓰고 있던 것과 똑같은 조그만 왕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아가씨들 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지크프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졌습니다. 그 바람에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화살 소리에 놀란 아가씨가 눈을 크게 뜨고 왕자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눈동자에는 원망과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은 무척 점잖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왜 그 선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우리에게 화살을 겨누셨나요? 아가씨의 목소리는 영롱하고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슬프게 들렸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름다운 백조를 보고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사과에 아가씨는 원망의 눈길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눈에는 슬픈 눈물이 고였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대로 두지 않고 잡아가려고만 할까요?” 아가씨의 원망 섞인 말에 지크프리트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아가씨는 호수 건너편에 있는 낡은 성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제 이름은 오데트입니다. 지금은 버려진 성이지만, 본래 저 성의 공주였답니다.” 지크프리트는 형편없이 낡았지만 예전에는 분명 아름다웠을 궁전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루는 마왕 로트바르트가 찾아와 저에게 청혼을 했지요. 당연히 저는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로트바르트는 저를 비롯해 시녀들에게까지 저주를 내렸습니다. 모두 백조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백조로 변했다가 밤에만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답니다. 오데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왕이 저를 이렇게 백조로 만들었는데, 당신은 이런 저를 화살로 잡으려고 했으니 제가 얼마나 슬프겠어요.” 지크프리트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데트 공주님!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지크프리트의 진심 어린 사과에 오데트의 마음도 움직였습니다. 왕자님은 진정한 영웅이시군요.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 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왕자님을 뵙게 되어 저도 기뻐요. 그런데 오데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들릴 때마다 지크프리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얼굴이 상기되었습니다. 그제야 지크프리트는 이것이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드디어 지크프리트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오데트 공주님!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제 아내가 되어 주십시오.” 오데트는 눈물 고인 눈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당신은 왕자님입니다. 당신에게 맞는 아가씨와 결혼해야 합니다.” 지크프리트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일 제 성인식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립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신부를 고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 무도회에 참석해 주십시오. 정식으로 당신에게 청혼하고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로트바르트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오데트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 못된 마왕도 제가 물리치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지크프리트의 자신에 찬 모습에 오데트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오데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지크프리트에게 하얀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기뻐하며 오데트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둘러서 있던 시녀들도 모두 기뻐했습니다. 이윽고 동이 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크프리트의 품속에 있던 오데트가 슬픈 눈으로 왕자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왕자님, 이제 해가 뜨네요. 저는 다시 백조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답니다.” “알고 있어요. 오늘 밤 궁전에서 열리는 성인식 축하 무도회에 꼭 참석해 주세요.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지크프리트와 오데트는 서로의 사랑과 전날 밤의 약속을 확인하며 두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오데트의 몸이 서서히 백조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날개로 변한 두 팔을 조용히 움직이며 오데트가 물었습니다. “왕자님! 저를 기억하실 수 있겠지요? 오늘 많은 아가씨들이 몰려올 텐데 그 가운데서 저를 찾으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당신의 눈빛과 목소리를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염려 마세요.” 오데트는 행복하게 웃으며 백조가 되어 날아갔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백조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서 말을 타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로트바르트가 오데트와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다 보고 있었습니다. “흥, 오데트! 감히 내게서 도망치려고 해? 나를 두고 지크프리트와 결혼 한다고? 내가 가만히 놔둘 줄 알아? 으하하하하.” 사실 로트바르트는 어젯밤에 왕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딜로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 아버지! 제발 지크프리트 왕자를 살려 줘요. 살려서 내 남편으로 만들어 달란 말이에요. 아버지가 마법을 걸어서 지크프리트가 오데트 대신 나를 사랑하게 해 달란 말이에요. 오딜로의 말을 듣고 있던 로트바르트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좋아! 내가 오데트와 결혼하고 지크프리트는 내 딸 오딜로와 결혼시켜야겠다. 그러면 나는 왕자의 장인이 되는 것이지. 그런 후 때를 보아서 조용히 왕자를 없애 버리면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을 거야.’ 결심을 굳힌 로트바르트는 오딜로에게 명령했습니다. “오딜로! 오늘 밤 무도회에 가거라. 지크프리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아름답게 치장을 하거라.” 그날 밤 궁전에서는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아내가 되려는 꿈을 안고 많은 아가씨들이 몰려와 있었지만 어디에도 오데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초조해졌습니다. “지크프리트야!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많은데 아직도 신붓감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말이냐?” 왕비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은 지크프리트 자신이었습니다.내가 어리석었어. 오데트 공주가 어떻게 이 어두운 밤에 숲길을 헤치고 오겠어? 혹시 로트바르트에게 잡힌 것은 아닐까?’ 고민하던 지크프리트는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섰습니다. ‘안 되겠어. 내가 직접 호수로 가서 오데트 공주를 데리고 와야겠어.’ 바로 이때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오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어느 나라 공주님이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지크프리트의 눈이 빛났습니다. 그곳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오데트가 우아한 모습으로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의 손을 잡고 왕과 왕비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저는 이 아가씨와 결혼하겠습니다.” 왕과 왕비도 오데트가 마음에 들어 흡족하게 웃었습니다. 이윽고 웅장한 음악이 울렸고 지크프리트와 오데트는 즐겁게 춤을 추었습니 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춤을 추면서 지크프리트는 조금씩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오데트! 당신의 눈은 호수 빛깔이었는데 오늘 보니 회색이군요. 왜 그렇지요?” “불빛 때문이랍니다. 게다가 쉬지 않고 왔더니 피곤해서 눈 색깔이 바뀌었어요.” 잠시 생각하던 지크프리트는 또 물었습니다. “오데트! 당신의 몸이 왜 이렇게 차갑지요? 어젯밤 당신과 춤을 추었을 때 당신은 아주 따뜻했어요.” 오데트가 묘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숲은 밤에 몹시 춥답니다. 호숫가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왔어요. 무섭고 추웠지만 오로지 왕자님을 뵐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왔어요. 그래서 몸이 차답니다.” 발을 맞추어 춤을 추던 오데트는 갑자기 슬픈 눈으로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왕자님은 지금 저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어제는 사랑한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의심을 하시는군요. 사랑과 의심은 같이 갈 수 없는 사이랍니다.” 당황한 지크프리트는 서둘러 말했습니다.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이때 왕이 손을 들어 음악을 멈추게 했습니다. “이제 왕자의 신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노라. 왕자는 그 아가씨의 손을 잡고 이리 올라오라.” 지크프리트는 오데트의 손을 잡고 왕과 왕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왕은 결혼반지를 꺼내 지크프리트와 오데트의 손에 하나씩 끼워 준 다음 우렁차게 외쳤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표하노라!” 웅장한 음악이 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두 멋진 왕자와 아름다운 왕자비의 사랑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무심코 창가로 시선을 돌린 지크프리트는 깜짝 놀랐습니다. 창가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는 아가씨! 다름 아닌 오데트였습니다. “오데트!” 지크프리트가 소리치며 아가씨의 손을 놓아 버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 마녀가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로트바르트의 딸 오딜로예요. 오늘부터 당신의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오데트로 변한 로트바르트의 딸과 춤을 추고 결혼 발표까지 해 버린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는 오데트와 결혼하기로 했소.” 지크프리트는 이렇게 외치고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던져 버리고 왕과 왕비에게 말했습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제가 어리석어 잠시 착각했습니다. 제 진짜 신부는 아름답고 어진 오데트 공주입니다. 제가 공주를 찾아오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왕과 왕비, 그리고 많은 하객들을 남겨 두고 지크프리트는 궁전 뜰로 달려나가 백마에 올라탔습니다. 오딜로는 질투에 떨면서 검은 새가 되어 로트바르트가 있는 성으로 날아갔습니다. 지크프리트는 백조의 호수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오데트는 울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 내 얼굴조차 기억을 못 하시는군요.” 지크프리트는 용서를 빌었습니다. “미안해요.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소.” 바로 그 순간 매서운 돌풍이 불더니 로트바르트가 나타났습니다. “으하하하! 이미 늦었다, 지크프리트! 너는 이미 내 딸 오딜로와 결혼하기로 맹세 했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로트바르트! 잘 만났다. 다시는 나쁜 짓을 못 하게 만들겠다.” 지크프리트는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로트바르트와 맞섰습니다. 로트바르트는 마법을 부리며 온갖 종류의 괴물로 변신해 지크프리트를 공격했습니다. 지크프리트도 뛰어난 검술로 로트바르트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왕인 로트바르트보다는 인간인 왕자가 먼저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크프리트! 내 딸을 봐서라도 너를 살려 주려 했는데 안 되겠다. 각오해라!” 로트바르트가 결정타를 날리려 덮쳐 오는 순간 지크프리트는 성인식 선물로 받은 활을 쏘았습니다. 화살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가 로트바르트의 가슴에 명중했습니다. ‘케엑!’ 로트바르트는 그대로 숨을 거두며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로트바르트는 오데트를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오데트를 호수로 빠뜨린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지크프리트는 오데트를 따라 뛰어내렸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지크프리트와 오데트는 호수 옆 고운 모래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데트는 백조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모습 그대로 방긋 웃으며 오데트가 말했습니다. “왕자님! 왕자님의 진실한 사랑이 저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 주었답니다.” 지크프리트는 몹시 기뻐하며 오데트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며칠 후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지크프리트와 오데트는 서로 사랑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천재 음악가의 손에서 부활한 전설. 동화나 소설을 발레나 무용극, 영화로 다시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조의 호수는 처음부터 발레 공연을 위한 대본이었습니다. 1875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관리인 블라디미르 베기체프는 독일 작가 무제우스가 쓴 동화와 오래전부터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을 바탕으로 백조의 호수라는 대본을 썼답니다. 이렇게 완성한 대본에 세계적인 음악가 차이코프스키가 곡을 붙여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처음 발레로 공연되었지요. 그러나 생각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죽고 나서 러시아 무용가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 두 사람이 대본을 새로 손질하고 안무도 새롭게 만들어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시 공연했습니다. 이때는 전과는 달리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답니다. 이와 같이 백조의 호수는 이야기보다는 차이코프스키의 대표 발레곡으로 더 유명하답니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지젤과 더불어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답니다. 내면의 세계를 보여 주는 변신 이야기. 사람의 몸이 다른 동물 등으로 바뀌는 ‘변신’은 여러 나라의 신화나 전설, 민담 등에 자주 등장합니다. 총 4막으로 이루어진 백조의 호수에도 변신이라는 문학적 요소가 깔려 있지요. 오데트와 오딜로는 ‘새’로 변신을 하고 마왕 로트바르트는 괴물로 변신을 합니다. 이러한 변신은 등장인물의 이중적인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 주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히 환상적인 분위기만을 표현하기 위해 ‘변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몸을 감싸면서 옥조이고 있는 껍질을 벗어 던진다는 뜻은,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도 합니다. 오데트의 모습이 백조로 표현된 것은 오데트의 마음이 백조처럼 우아 하고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동화나 설화 중 백조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특히 백조 왕자, 미운 오리새끼 등 덴마크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작품을 보면 백조가 자주 등장하지요. 하얀색 깃털이 난, 겨울 철새인 백조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특히 북유럽 지역에서 친근한 이야기 소재로 쓰이고 있습니다.
눈의 여왕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어느 마을에 카이라는 소년과 겔다라는 소녀가 살았습니다. 카이와 겔다의 집은 서로 마주하고 있었고, 특히 두 아이는 창문만 열면 얼굴을 볼 수 있는 다락방에 살고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친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겔다의 집에 놀러 간 카이는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눈을 바라보며 겔다의 할머니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흰 벌이 날아다니는 듯하구나.” “저기에도 여왕이 있을까요?” "물론이지. 벌 떼에게 여왕벌이 있듯 눈에도 여왕이 있단다. 눈의 여왕은 눈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답지. 그리고 땅에 내려앉지 않고 하늘로 날아오른단다." "눈의 여왕이 창에 대고 숨을 불어 넣으면 아주 예쁜 꽃 모양 무늬가 생기지.” “저도 본 적이 있어요. 눈이 내리는 추운 날, 창문에 아주 예쁜 무늬가 생겼었어요.” “저는 눈의 여왕이 나타나면 이 난로 옆에 앉힐 거예요.” 카이의 말에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눈의 여왕은 녹아 버릴 테니 절대 앉지 않을 거다.” 카이와 겔다는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날밤 카이는 집으로 돌아가, 난로에 놓아 빨갛게 달군 동전으로 꽁꽁 언 창문에 구멍을 내어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때 무척 크고 아름다운 눈송이 하나가 화분에 내려앉더니 눈부시도록 흰옷을 입은 여인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에, 얼음으로 이뤄진 듯한 피부의 여인은 카이를 향해 손짓했습니다. 그러나 카이는 겁이 나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리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커다란 새가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 여인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카이와 겔다는 다락방 창가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앗! 눈이 아파. 뭐가 들어갔나봐. 가슴도 콕콕 쑤시는 것같아.” 그림책을 보던 카이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놀란 겔다가 카이의 눈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걸. 곧 괜찮아질 거야.” 겔다는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카이의 눈과 심장에는 바로 트롤의 깨진 거울 조각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너무 작아서 겔다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죠. 트롤은 무엇이든 흉한 모습으로 비추는 이상한 거울을 가진 악마입니다. 그 거울에 비치면 예쁜 소녀도 밉게 보이고, 아름다운 풍경도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트롤이 거울을 깨뜨렸습니다. 수백만 조각으로 부서진 거울 조각들은 바람에 실려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날아갔습니다. 이 거울 조각이 눈에 박힌 사람은 모든 것이 밉게만 보였고, 심장에 박히면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습니다. 바로 그 거울 조각이 카이에게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 뒤부터 카이는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겔다를 보고 못생겼다고 놀리는가 하면, 그림책을 보다가 유치하다며 집어 던졌고, 장미꽃이 밉다며 꺾어 버리는 못된 아이로 변한 것입니다. 다시 겨울이 왔습니다. 카이는 커다란 돋보기로 눈송이를 보며 말했습니다. “이 눈송이를 봐. 얼마나 멋있어." "진짜 꽃보다 훨씬 아름다워. 흠잡을 데가 없거든.” 카이는 모든 것을 흉하게 보면서도 이상하게 눈만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눈처럼 차갑게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도 카이는 추위도 잊은 듯 종일 눈 위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통 흰색으로 칠한 큰 썰매가 지나갔습니다. 썰매에는 흰 털외투를 입고 흰 모자를 쓴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카이는 재빨리 자기 썰매를 그 썰매 뒤에 묶었습니다. 흰 썰매가 달려가면서 카이의 썰매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카이 혼자서는 절대로 내지 못할 빠른 속도로 말입니다. 썰매는 나는 듯 달려 어느새 마을을 지나 성문을 빠져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신이 났던 카이도 썰매가 마을을 벗어나자 점차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눈은 더욱 세차게 내렸고, 썰매가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카이는 내릴 생각도 못하고 추위와 두려움에 덜덜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썰매가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썰매를 몰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맑지만 생기 없는 눈, 투명하도록 하얗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피부, 눈으로 만든 외투와 모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눈의 여왕이었습니다. “춥지? 내 외투 안으로 들어오렴.” 여왕은 자신의 외투자락을 들추며 말했습니다. 물론 그 안에 입은 옷도 흰색이었지요. 카이는 외투 안으로 들어갔지만 더욱 심한 추위를 느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의 여왕이 입은 외투는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었습니다. 여왕은 카이 이마에 입을 맞췄습니다. 얼음보다도 차가운 입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카이는 전혀 추위를 느낄수 없었습니다. “이제 너는 누구에게도 입맞춤을 받아서는 안 돼!” 눈의 여왕의 속삭임에 카이는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도 카이가 돌아오지 않자 겔다는 카이를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겔다는 그동안 아끼며 신지 않았던 빨간 구두를 꺼내 신었습니다. 성을 지나 강에 도착해 흐르는 강물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네가 카이를 데려갔니? 내 친구를 돌려준다면 이 빨간 구두를 줄게.” 겔다는 구두를 벗어 물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물결이 구두를 밀어 다시 겔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마치 자기는 카이를 데리고 있지 않다는 듯이. “그러면 카이가 간 곳을 알고 있니?" 강물은 겔다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겔다가 서 있는 반대편으로 흘렀습니다. 강가에 매여 있는 배를 발견한 겔다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배는 강물이 흐르는 대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흘러가던 배는 아기자기한 창문이 있는 집 앞에 멈춰 섰습니다. 겔다는 배에서 내려 그 집 정원에 가득 핀 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안에서 예쁜 장미가 그려진 모자를 쓴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말했습니다. “예쁜 아이로구나. 강물에 실려 여기까지 왔나 보구나.” 할머니는 겔다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맛난 버찌를 주고, 황금으로 만든 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겔다는 모든 걸 잊게 되었습니다. 마술사인 할머니는 깜찍한 겔다와 함께 살고 싶어서 기억을 지워 버리는 마술 황금 빗으로 머리를 빗긴 것입니다. 혹시라도 겔다가 장미를 보고 카이를 생각해 낼까 봐 할머니는 마술을 부려 장미를 흙 속에 숨기고 겔다를 꽃밭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어머! 예쁘기도 해라.” 겔다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해가 질 때까지 즐겁게 춤을 추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집에 들어가니 겔다를 위한 작은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침대 곁에는 맑은 향기를 품은 제비꽃이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푹신한 침대에서 향기를 맡으며 단잠을 잔 겔다는 다음 날도 꽃밭에 나가 하루 종일 놀았고,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날마다 아름다운 꽃밭에서 지냈지만 겔다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한구석이 비어 있는 듯했습니다. 갖가지 꽃이 피어 있었지만 뭔가 한 가지가 빠져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겔다는 할머니가 벗어 놓은 모자에 그려진 장미를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모자에 그려진 장미를 깜빡 잊고 숨기지 못했던 것이죠. “맞아! 장미가 없어.이렇게 많은 꽃이 있는데.” 겔다는 정원으로 뛰어나가 장미를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원을 헤매도 장미는 없었습니다. 맥이 빠진 겔다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눈물이 떨어져 흙을 적셨습니다. 그러자 흙 속에서 잠을 자던 장미가 깨어났습니다. “나는 카이를 찾으려고 집을 나섰는데, 혹시 카이가 죽은 건 아닐까?” 아름답게 핀 장미를 보자 카이가 생각난 겔다는 말했습니다. “아냐, 죽은 사람은 누구나 땅속으로 오는데 카이는 오지 않았어. 우리는 그동안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전부 알고 있거든.” 장미의 말을 듣고 기운을 얻은 겔다는 카이를 찾기 위해 마술사 할머니 몰래 집을 떠났습니다. 겔다는 길을 가다 까마귀를 만났습니다. “까마귀야! 혹시 내 친구 카이가 어디 있는지 아니?” “이 나라에는 똑똑한 공주가 살고 있지. 그 공주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공주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한 소년이 나타났어. 옷은 낡았지만 긴 머리에 눈이 반짝이는 소년이었지.” “맞아! 내 친구 카이가 틀림없어.” “글쎄, 카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주는 소년이 지혜롭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부터 궁에서 함께 지내고 있어.” 겔다는 까마귀의 안내를 받아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뒤쪽 길이었기에 어둡고 무서웠지만 꾹 참았습니다. 겔다는 떨리는 손으로 침실 문을 열었습니다. 침실에는 빨간 침대와 하얀 침대가 있었습니다. 겔다는 램프를 켜고 빨간 침대에서 자고 있는 소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카이가 아냐.” 겔다의 말에 하얀 침대에서 자다가 깬 공주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지?” 겔다는 공주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머, 가엾어라. 내가 마차를 줄 테니 타고 가서 친구를 찾도록 하렴.” 공주가 준 마차를 타고 산길을 가는데, 갑자기 숲에서 험상궂은 사람들이 뛰어나왔습니다. “꼼짝 마! 우리는 산적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라.” 겔다는 오들오들 떨며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때였지요. “안 돼! 나는 이 아이와 함께 놀 거야. 이제부턴 내 친구니까 아무도 손대지 마.” 바로 산적의 딸이었습니다. 친구가 없어 외롭게 지내던 소녀는 비슷한 또래인 겔다를 보자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소녀는 겔다를 데리고 숲 속의 빈 터로 가서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주위로 비둘기 떼와 순록이 다가왔습니다. “내 친구들이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아주 좋아하지.” 겔다는 순록을 쓰다듬으며 소녀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겔다의 이야기에 소녀는 눈물을 흘렸고, 비둘기 떼는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우리는 카이를 봤어. 흰 썰매를 타고 갔는데, 그 썰매를 몰던 사람이 차가운 입김을 내뿜어 친구들 몇이 얼어 죽고 말았지.” “썰매를 타고 갔다고? 대체 어디로 갔을까?” 깜짝 놀란 겔다를 보며 순록이 말했습니다. “아마도 흰 썰매를 몬 것은 눈의 여왕일 거야. 눈의 여왕은 핀란드에서 조금 떨어진 북극 근처 스피츠베르겐에 살아.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기에 잘 알고 있어.” 소녀는 못내 아쉬운 듯 겔다에게 속삭였습니다. “너와 오랫동안 함께 놀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니 보내 줘야겠구나. 네 친구 카이를 찾도록 말이야.” “정말이야?” “잘 들어. 조금 있으면 모두 술을 마시고 곯아떨어질 거야. 그때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해. 이 순록을 타고 말이야". "그곳이 고향이라니까 가는 길을 잘 알 거야.” 잠시 후 소녀의 말대로 산적들은 모두 술에 취해 잠들었습니다. 겔다는 살금살금 조심스레 산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순록을 타고 북극으로 향했습니다. 겔다는 마음이 급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순록도 겔다의 마음을 아는지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저건 오로라라고 하는 거야. 아름답지?” 순록의 말에 겔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이 온통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핀란드에 도착한 것입니다. 핀란드에 도착한 겔다와 순록은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겔다를 따뜻한 방으로 데려가 언 몸을 녹여 주었고, 더위에 약한 순록의 이마에는 얼음을 올려 주었습니다. “눈의 여왕이 데려간 아이를 찾아왔다고?" "그렇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겔다 너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녹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단다.” 이어서 할머니는 순록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겔다를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는 숲으로 데려다 주어라."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눈의 여왕이 사는 궁전이 있거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겔다를 보며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겔다야, 그 스프를 다 먹어야지만 궁전까지 갈 수 있단다.”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는 숲에 도착한 겔다는 순록에서 내려 눈의 여왕이 사는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점점 바람이 거세지고 주위는 온통 눈뿐인 하얀 세상을 겔다는 혼자서 걸어갔습니다. 문득 추위를 느끼고서야 장갑도 끼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왔음을 알았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 눈송이들은 눈의 여왕을 지키는 눈의 군사였습니다. 눈송이들은 땅에 닿자 뿔이 돋은 돼지나 굵고 긴 뱀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였습니다. 겔다는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번쩍이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천사군은 눈의 군사들과 불꽃 튀는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의 군사는 천사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천사군의 갑옷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과 천사군이 뿜어내는 열기에 눈의 군사는 마구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사군이 휘두른 칼에 눈의 군사는 가루가 되어 날아갔고, 날카로운 창에 찔린 눈의 군사는 그 자리에서 녹아 버려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눈의 군사를 모두 물리친 천사군은 겔다를 호위하여 궁전 앞으로 데려다 주더니,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눈의 여왕이 사는 궁전은 온통 얼음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습니다. 궁전에는 카이처럼 눈의 여왕이 데려온 사람들이 꽁꽁 얼어 마치 조각처럼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눈의 여왕은 어디론가 나갔고, 카이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얼음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이 점점 얼어 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요. “카이! 드디어 너를 찾았구나.” 겔다가 소리치며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카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눈에 박힌 거울 조각과 추위로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 버려, 이제는 겔다마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겔다는 카이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겔다의 뜨거운 눈물은 카이를 적셨습니다. 겔다의 눈물은 카이의 몸을 점차 따뜻하게 만들었고 심장에 박힌 트롤의 거울 조각까지도 녹였습니다. 몸이 따뜻해진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마침내 눈에 박혀 있던 트롤의 거울 조각도 녹아 버렸습니다. “겔다! 여기는 어디지?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제정신이 돌아온 카이가 소리쳤습니다. “너는 눈의 여왕에게 잡혀 온 거야. 어서 나가자.” 겔다는 카이와 함께 붉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있는 숲으로 돌아와 순록의 등에 올랐습니다. 순록은 두 사람을 태우고 핀란드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향했습니다. 할머니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으며 맛있는 점심을 마련했고, 또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옷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겔다와 카이는 할머니가 준 썰매에 몸을 싣고 그동안 도움을 준 많은 동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고향으로 출발했습니다. 겔다와 카이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교회 종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두 사람은 정답게 손을 잡고 집으로 갔습니다.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서 겔다의 할머니가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겔다와 카이는 서로 마주 보며 싱긋 웃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어른이 되어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근처에 있는 오덴세에서 태어났습니다. 안데르센은 가난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던 아버지에게서 세계 명작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열네 살 때 코펜하겐으로 이주한 뒤에는 단역 배우로서 왕립 극장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열네 살 때 코펜하겐으로 이주한 뒤에는 단역 배우로서 왕립 극장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 안데르센은, 요나스 콜린이라는 정치가의 도움으로 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안데르센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체험과 인상을 바탕으로 1835년 (즉흥시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안데르센의 뛰어난 재능은 동화에서 더욱 빛납니다. (즉흥시인) 과 같은 해에 발표한 (어린이를 위한 동화집)이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것이죠. 그 후 안데르센은 (인어 공주), (미운 오리 새끼), (엄지 공주), (성냥팔이 소녀), (분홍신), (벌거숭이 임금님) 등 많은 걸작 동화를 발표 하면서 덴마크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1875년 안데르센이 죽었을 때에는 덴마크 모든 국민이 상복을 입고, 국왕과 왕비도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안데르센은 130여 편에 이르는 많은 동화를 발표했습니다. 그중 (눈의 여왕)은 안데르센이 가장 활발하게 동화를 썼던 1885 년 나온(새 동화집)에 실려 있지요. (눈의 여왕)은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북유럽을 배경으로 한, 가장 아름다운 안데르센 동화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의 여왕)은 주인공 겔다가 보여 주는 카이를 향한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 때문에 더욱더 빛이 납니다. (눈의 여왕)의 결말 부분에 할머니가 읽는 성경 구절을 보면, 이 동화를 통해 안데르센이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눈의 여왕)에 는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안데르센의 믿음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눈의 여왕)은 1957년 러시아의 애니메이션 작가 레프 아타마노프가 만든 환상적인 영상으로 다시 한번 전세계 어린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눈의 여왕)이 보여 주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내용과 가슴 깊이 파고드는 감동은 세계의 많은 창작자들에게도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사랑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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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왜 그렇게 방학은 빨리 지나가는 걸까요? 방학 동안 시골에서 동생과 뛰어놀 때는 무척 즐거웠는데 아쉽게도 벌써 개학 날이 되었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습니다. “엔리코, 이제 너와도 헤어지는구나.” 삼 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웃고 계셨지만 나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이 층 사 학년 교실에서 공부합니다. 담임 선생님은 페르보니 선생님이셨고, 함께 공부할 친구들은 모두 쉰다섯 명이었습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열다섯 명쯤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늘 일 등만 하는 데로시도 있었습니다. 페르보니 선생님은 키가 크고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있어서 약간 무서워 보였습니다.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실 때면 마치 우리 마음을 모두 읽고 있는 듯했습니다. 페르보니 선생님 옆에는 낯선 아이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오늘 새로 전학 온 친구예요. 칼리브리아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해요. 모르는 것은 친절하게 알려 주고 친하게 지내도록 하세요.” 페르보니 선생님은 칠판 옆에 걸려 있는 이탈리아 지도에서 칼리브리아 지방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대표하여 우등생인 데로시가 나가서 환영 인사를 했고, 짝이 된 친구는 연필을 주었습니다.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앉은 갈로네는 우표를 주었습니다. 갈로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항상 명랑하고 남을 잘 도와주는 아이거든요. 코레티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초콜릿 색 스웨터를 입고, 고양이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니는 코레티는 늘 웃는 명랑한 아이입니다. 넬리도 친한 친구인데, 가엾게도 곱사등이입니다. 내 앞자리에 앉은 안토니오는 아버지가 미장일을 하시기 때문에 ‘꼬마 미장이’라고 불립니다. 안토니오의 짝은 가로피인데, 주머니 안에 언제나 신기한 물건이 가득합니다. 대장간 집 아들 프레코시는 아픈 것처럼 얼굴빛이 좋지 않은 데다가 마음도 무척 약합니다. 나는 프레코시를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크로시는 팔을 한쪽밖에 쓰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미국으로 돈을 벌러 가셨기에 채소 장수를 하는 어머니와 어렵게 살고 있지요. 내 짝인 스타르디는 뚱뚱하고 말이 별로 없는 아이인데,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성적이 오르지는 않습니다. 프란티는 아주 못돼서 아이들을 자주 괴롭힙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막 교실에 들어서는데 아이들 서너 명이 크로시를 놀리고 있었습니다. “야, 빨강 머리 외팔이!” 한 아이는 팔을 붕대로 묶고 크로시 흉내를 냈으며, 또 한 아이는 머리를 툭툭 치기도 했습니다. 프란티는 책상 위로 올라가 채소 장수 흉내를 냈습니다. 크로시 어머니의 흉내를 낸 것이지요. “자, 채소가 왔어요. 싱싱한 채소!” 견디다 못한 크로시는 잉크병을 들어 프란티에게 던졌습니다. 그러나 프란티가 몸을 피하는 바람에 마침 교실로 들어오시던 페르보니 선생님이 잉크병에 맞았습니다. “누구죠? 잉크병을 던진 사람이?” 페르보니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에 겁을 먹고 모두 주저하고 있을 때 갈로네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선생님! 제가 잉크병을 던졌습니다.” “아닙니다. 접니다. 아이들이 놀려서 제가 그랬습니다.” 크로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나쁜 짓 한 사람은 모두 일어서요.” 프란티와 몇몇 아이가 머뭇거리며 일어섰습니다. “몸이 불편한 친구를 돕지는 못할망정 놀리다니.” 페르보니 선생님은 아이들을 혼내시고는 갈로네에게 다가가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훌륭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갈로네가 선생님에게 뭐라고 속삭였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모두 용서하겠어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렇게 말씀하시며 페르보니 선생님은 흐뭇하게 웃으셨습니다. 신문에서 어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기사를 본 어머니는 그 사람을 돕기로 했습니다. 나는 옷 보따리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사람은 다 쓰러져 가는 집의 다락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옷 보따리를 전하자 그 기사의 주인공인 젊은 부인이 고맙다며 웃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눈길을 돌리다가 열려 있는 방문 사이로 우리 반 친구 크로시를 보았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크로시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크로시를 부르려 하자 어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엔리코, 모른 척해라. 친구가 부끄러워할 수도 있잖니?” 그때 크로시가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크로시의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 해?” “숙제하고 있었어.” “애 아버지가 미국에 돈을 벌러 가서 육 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채소 장수를 해서 생활했는데, 요즘은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크로시 어머니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내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힘내세요.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요.”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구김살 없이 공부하고 있는 크로시가 참 좋아졌습니다. 카를로 노비스의 아버지는 토리노 시에서 아주 지위가 높은 사람입니다. 노비스는 그런 아버지를 믿고 곧잘 잘난 척을 하지요. 어제는 노비스와 숯 가겟집 아들인 베티가 싸웠습니다. “가난뱅이 숯장수의 아들이 왜 까불어?” 노비스의 말에 베티는 얼굴이 빨개졌고,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을 쏟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 베티의 아버지가 페르보니 선생님을 만나러 학교에 오셨습니다. “선생님, 학교에서 아이들은 모두 같은데 가난하다고 놀림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노비스를 데려다 주러 학교에 오셨던 노비스의 아버지가 선생님과 베티 아버지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노비스의 아버지는 아이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노비스를 혼내셨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다니, 당장 베티에게 사과해라.” 노비스 아버지의 화난 얼굴에 노비스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베티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리고 노비스 아버지는 베티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숯으로 까맣게 된 베티 아버지의 손을 전혀 꺼리지 않고 말입니다. 베티 아버지가 노비스 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 페르보니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일을 잘 기억해 두도록 해요.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무척 유익한 교훈이 될 테니까요.” 시험을치르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반 시험 감독으로는 코아티 선생님이 들어오셨지요. 코아티 선생님은 키가 크고 매우 뚱뚱합니다. 눈도 부리부리하고 목소리도 무척 크지요. 게다가 짙은 턱수염 때문에 웃으시는 건지 화를 내시는 건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코아티 선생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놈! 경찰서에 데리고 갈까 보다.” 그러나 아직까지 경찰서에 끌려간 아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선생님이 모두 여덟 분 계십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분도 계시고, 다리 한쪽이 없는 분도 계십니다. 수업도 열심히 하시면서 틈틈이 공부하셔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은 선생님도 계시지요. 체육 선생님은 꼭 군인 같은데, 실제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다친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분입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학교에 나오시고 가장 늦게 퇴근하십니다. 모두가 우리를 보살피기 위해서지요. 안타깝게도 교장 선생님의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슬픔에 잠긴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직서를 써 두셨다고 합니다. ‘내 표정이 어두우면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으니, 학교를 떠나려 합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얼마 뒤 한 아이가 전학을 왔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한참 동안 책상 위에 놓인 아들 사진과 아이 얼굴을 번갈아 보셨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거든요. “잘 왔구나. 열심히 공부해라.”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며칠째 가지고 다니시던 사직서를 찢어 버리셨다고 합니다. 나는 보티니와 함께 공원으로 놀러 갔습니다. 멋쟁이인 보티니는 가죽에 수를 놓은 파란 구두를 신고, 금장식이 달린 비단 윗도리를 입고 있었지요. 우리는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어떤 아이가 혼자 앉아 있는 긴 의자에 함께 앉았습니다. “엔리코, 내 구두 어떠니? 장교가 신는 것과 같은 거야.” 보티니는 나보다 옆에 앉아 있는 아이가 들으라는 듯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보티니의 말에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보티니는 또 말했습니다. “이젠 금장식 단추는 싫증이 났어. 은장식으로 바꿀 거야.” 그래도 옆 아이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였습니다. 나는 보티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에다가 금을 입힌 거니?” “아니야. 이건 진짜 금이야.” 보티니는 옆에 앉은 아이에게 회중시계를 보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좀 볼래? 분명히 진짜 금이지?” 그렇지만 그 아이는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몰라. 그게 금이든 아니든 나와는 상관없어.” “야, 이거 봐라. 아주 건방진 놈이잖아!” 보티니가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우리는 그 아이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보티니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습니다. “미안해. 난 정말 몰랐어.”“괜찮아.” 보티니는 그 아이와 헤어져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몹시도 부끄러웠나 봅니다. 보티니는 잘난 척을 하기는 해도 마음은 따뜻한 친구입니다. 첫눈이 내렸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우리는 자꾸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은 수업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습니다. “와, 나가자!”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한꺼번에 밖으로 몰려나왔습니다. 칼리브리아에서 온 아이는 눈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고, 크로시는 가방에 눈을 가득 채웠습니다. 꼬마 미장이 안토니오는 눈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씹었고, 거의 웃지 않던 프레코시도 활짝 웃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길 한가운데에서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받아라!” “어림없는 소리!” 아이들은 신이 나서 눈을 뭉쳐 던졌습니다. “얘들아, 거리에서 눈싸움을 하면 위험하단다. 누가 맞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지나가던 어른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눈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가로피가 던진 눈덩이에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맞은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눈도 뜨지 못한 채 비틀거렸고, 아이들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나는 그때 책방 앞에 있었는데, 아이들 몇 명이 도망쳐 왔습니다. 할아버지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경찰관 아저씨도 달려왔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경찰관 아저씨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눈을 던진 아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는 가로피에게 갈로네가 말했습니다. “네가 그랬다고 말해. 너 때문에 다른 아이가 잡혀 혼날 수도 있잖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그래도 네가 던진 눈덩이에 할아버지가 맞았잖아. 용기를 내서 네가 그랬다고 말해. 내가 따라가서 도와줄게.” 갈로네의 말에 가로피가 용기를 내어 할아버지에게 갔습니다. “옳지, 네 녀석이 그랬구나.” “저런 녀석은 혼쭐이 나 봐야 해.” 어른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가로피가 울먹이며 할아버지에게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때 마침 퇴근하시던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아이는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지요.” 가로피는 울며 할아버지에게 안겼고 할아버지는 가로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프레코시는 몸이 마르고 키가 작지만 상냥하고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렇지만 프레코시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아무 이유도 없이 프레코시를 때렸습니다. 프레코시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다음 날이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프레코시, 또 아버지한테 맞았구나. 눈에 멍이 들었어.” 그러나 프레코시는 절대 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맞았어.” 오늘 첫째 시간이었습니다. 숙제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프레코시, 공책이 불에 탔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깜빡 졸다가 공책을 난로에 떨어뜨렸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프레코시 아버지가 술주정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대장장이라고 하지만 프레코시의 아버지는 일을 거의 하지 않고 술만 마셨기에,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프레코시는 발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신발을 끌고 다녔고, 땅바닥에 끌리는 낡은 바지에 소매를 몇 번이나 접어 올린 낡은 윗도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책을 빌려 볼 때도 많았고, 찢어진 공책을 풀로 붙여 쓰기도 했습니다. 가끔 끼니를 굶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마음 착한 갈로네는 자기가 가져온 빵을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프레코시가 주정뱅이가 아닌 아버지를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프레코시는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니까 제대로 공부한다면 일 등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레코시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나는 가난과 어려움에도 용기를 잃지 않는 프레코시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짓기 시간이었습니다. 페르보니 선생님은 우리가 쓴 글을 모두 읽어 보시고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데로시가 참 잘 썼어요. 오늘 글짓기 일 등은 데로시예요.” 그때 보티니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데로시를 노려보았습니다. 보티니는 자기가 일 등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보티니는 잘난 척을 하긴 해도 마음은 따뜻한 아이인데, 오늘 같은 행동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티니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늘 일 등을 데로시에게 빼앗겨서 질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우리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교실로 들어오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데로시에게 ‘거룩하신 주여’라는 시를 외워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시를 아직 외우지 못했습니다.” 데로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보티니가 일어섰습니다. “저는 외울 수 있어요.” “좋아, 보티니. 네가 한번 외워 보거라.” “거룩하신 주여, 당신의 뜻은 어느 곳에.” 보티니는 첫 구절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했습니다. 질투심으로 나섰던 보티니는 창피만 당하고 만 것이지요. 그러나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서 보티니의 실수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화약을 가지고 장난하다가 일주일 전에 퇴학당했던 프란티가 어머니와 함께 왔던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으니 제발 우리 프란티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학교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곳입니다.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은 곤란하지요.” “저는 병이 깊어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죽기 전에 프란티가 착한 아이가 되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프란티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교장 선생님은 프란티가 다시 학교에 나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프란티는 전과 다름없이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끝날 무렵, 나는 아버지를 따라 어느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그 선생님 댁 탁자에는 훌륭하게 조각된 펜 받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 펜 받침대는 내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잠시 옛일을 생각하시는 듯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몇 해 전 토리노에 있는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죄수들 중 가구점 직공이었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심술 사나운 주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대패를 던졌는데, 주인이 그것에 맞아 다쳐서 감옥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머리가 좋은 젊은이는 삼 개월 만에 글자를 완전히 익혔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베네치아 교도소로 옮기면서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 육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선생님도 이제 그 죄수를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그 젊은이가 불쑥 선생님을 찾아와서 펜 받침대를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만들었습니다. 고마움의 표시로 받아 주십시오.” 선생님은 정성이 담긴 선물을 받으며 감격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도 감동하신 듯 눈시울이 붉어지셨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요. 학교에 가서 내가 그 얘기를 데로시에게 하자, 데로시가 놀라 속삭였습니다. “그저께 크로시 아버지가 미국에서 육 년 만에 돌아왔다고 했어. 그리고 아버지가 만든 것이라며 펜 받침대를 보여 주었어.” “그렇다면 그 죄수는 바로 크로시 아버지야.” 나와 데로시는 그때부터 크로시와 더욱 친하게 지냈습니다. 한 팔을 못 쓰는 크로시의 숙제를 도와주기도 하고 학용품도 나누어 썼습니다. 친구를 돕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어느 날 치치로의 집에 전보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전보를 읽은 치치로 어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어쩌면 좋으냐? 네 아버지가 다치셔서 나폴리에 있는 자선 병원에 계시다는구나.” 프랑스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셨던 치치로 아버지가 다쳐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일도 해야 하고 동생들도 돌봐야 하니 집에 계세요. 제가 다녀오겠어요.” 치치로는 나폴리에 도착하여 병원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저 안쪽 침대에 누운 환자인가 보구나.” 간호사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은 환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난 치치로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저예요. 치치로가 왔어요.” 환자는 붕대 사이로 간신히 눈을 떠 치치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그때 간호사가 치치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걱정 마라. 정성껏 간호하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나으실 테니까.” 그날부터 치치로는 열심히 간호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궁금해할까 봐 조근조근 집안 이야기도 전하면서요. 치치로 아버지는 가끔씩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퇴원을 하는지 작별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합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치치로가 고개를 돌려 보니, 놀랍게도 그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아, 아버지!” “치치로! 네가 여기 웬일이냐?” 간호사의 실수로 치치로는 엉뚱한 사람을 간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치로 아버지는 생각보 다 상처가 가벼워 금방 나은 것이고요. 치치로는 건강한 아버지를 만나 기뻤지만 그대로 떠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간호해 온 환자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저는 이분을 더 간호해 드리고 나중에 가겠어요.”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치치로는 닷새나 병원에 머물며 환자를 간호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환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병원 문을 나서면서 치치로는 환자가 마지막 순간 보인 웃음을 생각했습니다. 붕대 사이로 희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 것 같았습니다. “고맙다. 네 정성을 절대 잊지 않으마.” 계속 말썽을 피우던 프란티는 결국 또 퇴학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스타르디 녀석이 교장 선생님께 고자질한 거야. 절대 가만 두지 않을 테야.” 화가 난 프란티는 골목에 숨어서 스타르디를 기다렸습니다. 스타르디는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프란티와 맞닥뜨렸습니다. 프란티가 스타르디 동생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잡아당겼습니다. “으아앙!” 스타르디의 동생은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고, 스타르디는 동생을 안아 일으키며 프란티에게 따졌습니다. “무슨 짓이야?” “네 녀석 때문에 내가 퇴학을 당했어. 너도 네 동생도 모두 혼나 봐야 해.” 스타르디는 주먹을 불끈 쥐고 프란티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기운 센 프란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란티는 마구 주먹을 휘둘렀고 스타르디는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비겁한 녀석! 자기 잘못으로 학교에서 쫓겨나고는 남한테 뒤집어씌우다니.” 스타르디는 다시 일어나 프란티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지나가던 여학생이 둘이 싸우는 광경을 보고 스타르디를 응원했습니다. “스타르디, 힘내!” 더욱 약이 오른 프란티는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자, 항복해!” “나는 절대 항복하지 않아.” 그때 길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프란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습니다. “어린 녀석이 함부로 칼을 빼 들다니!” 프란티는 도망을 쳤고 스타르디는 놀란 동생을 달랬습니다. “괜찮아, 이제 프란티는 다시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넬리는 곱사등이입니다. 그래서 체육 시간이 되면 늘 힘들어하지요. 넬리 어머니가 체육 선생님을 찾아와 넬리가 체육 수업에 들어가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체육 선생님도 답답한 듯 말했습니다. “저도 넬리를 달래 보았지만, 한사코 고집을 피우더군요.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넬리는 자기 혼자 빠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넬리는 수직봉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수직봉 운동은 수직봉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데로시와 코레티가 가장 먼저 올라갔고, 그 다음 가로피와 프레코시도 올라갔습니다. 멋쟁이 보티니는 두 번이나 미끄러졌지만, 송진 가루를 손에 묻히고서 거뜬히 올랐지요. 드디어 넬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넬리, 할 수 있겠니?” “네, 저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넬리가 수직봉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더 웃기만 해 봐. 내가 모두 때려 줄 거야.” 갈로네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깜짝 놀라 웃음을 그쳤습니다. 넬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끝까지 힘을 내서 수직봉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따스한 봄 햇볕 아래 활짝 웃는 넬리는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습니다. 나는 몸이 아파 이 주일이나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몸이 아프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회복되어 학교에 갔는데, 페르보니 선생님이 슬픈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로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갈로네가 학교에 나오면 따뜻하게 위로해 주도록 해요.”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려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걱정되어 데리러 오신 것이죠. 반가움에 달려가려던 나는 문득 갈로네를 생각하고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머니의 손을 잡지도 않았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갈로네는 슬픈 표정으로 돌아가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요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씀을 하시다가도 나나 실비아 누나가 나타나면 이야기를 멈추십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실비아 누나도 눈치를 챘는지 내게 말했습니다. “요즘 아버지 일이 잘 안 되시나 봐. 어머니도 마음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위로해 드리자.” 나와 누나는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요즘 우리 집 형편이 어렵죠?” “그게 무슨 소리니?” 어머니가 깜짝 놀란 듯 물었습니다. “저희도 이젠 다 컸어요. 이번에 사 달라고 한 그림물감과 부채는 다음에 사 주세 요. 놀러 가자고 조르지도 않고, 집안일도 도울게요. 아버지 일이 잘 될 때까지요.” “저도 학용품을 아끼고, 어머니를 돕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어머니는 우리를 번갈아 껴안아 주시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셨습니다. “조금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너희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너희 마음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쁘구나.” 그날 저녁 평소보다 늦게 들어오신 아버지는 무척 피곤해 보였습니다. ‘불쌍한 아버지!’ 나는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은 누나와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식탁 위에는 그림물감과 부채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림물감은 내가 쓸 것이고, 부채는 누나 것이었습니다. 누나와 내가 기뻐하는 것을 보시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셨습니다. 아침 일찍 나는 스타트 광장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즐거운 소풍날이거든요. 데로시, 가로피, 넬리, 코레티, 갈로네, 프레코시 등 이미 많은 친구가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그란 마들레 데오로 갔습니다. 그곳은 넓은 초원이 있는 멋진 곳입니다.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힘차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얘들아, 가방은 모두 내게 맡겨.” 날마다 아버지를 도와 장작을 나르던 코레티는 우리 가방을 모두 둘러메고 언덕을 오르면서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등생인 데로시는 들에서 자라는 나무와 풀, 곤충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알프스가 보이는 언덕에서 우리는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소풍에 따라온 코레티의 아버지는 통조림을 따서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라. 지금 친하다고 해서 영원히 친할 수는 없는 법이란다.” “아니에요. 우리는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설령 제가 러시아 황제가 된다고 해도 말이죠.” “그래? 암, 그래야지. 정말 좋은 친구들이로구나.” 저녁이 되어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언덕길을 내려왔습니다. 막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집에 도착했는데, 이 학년 때 담임이었던 여 선생님이 계단을 내려 오고 계셨습니다. “엔리코, 잘 지내라. 선생님은 영원히 너를 잊지 않을 거야.” 내가 인사하자 선생님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시고는 천천히 걸어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몸이 아프셔서 멀리 휴양을 떠나시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에 선생님의 창백한 얼굴과 슬픈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즐겁던 소풍날은 이렇게 슬픔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학기말 시험도 끝나고 성적표를 받는 날입니다. 부모님들도 학교에 오셨습니다. 페르보니 선생님은 성적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투치, 칠십 점 만점에 육십 점. 진급! 데로시, 칠십 점 만점에 칠십 점. 일 등!” 역시 데로시가 일 등을 차지했습니다. 한 명을 빼놓고 모두 진급했습니다. 낙제를 한 아이는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시험엔 운이 따르는 법이야. 너무 실망하지 마라.” 페르보니 선생님은 그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일 년 동안 즐거웠어요. 여러분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지만 또 다른 만남이 있겠지요. 오 학년이 되어 다른 선생님을 만나서도 열심히 생활하세요. 그럼 모두, 안녕!” “선생님, 안녕!” 아이들은 아쉽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교실을 나섰습니다. “엔리코! 그동안 수고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면서 나는 일 년간 정이 든 교실을 돌아보았습니다. ‘고맙다, 정든 교실아!’ 이제 여름 방학이 끝나면 오 학년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지요. 이탈리아 어린이들의 스승.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는 이탈리아 오넬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오랫동안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단결하지 못했고 외국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한 지식인들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벌이고 있었지요. 어려서부터 애국심이 강했던 아미치스는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이때의 경 험을 바탕으로 군대 생활, 추억들 같은 소설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아미치스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잘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의 소원, 노동자들의 여 선생님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소식이 끊긴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어린 소년 마르코의 모험담 엄마 찾아 삼만 리, 다양한 친구들이 같은 반에서 공부하며 우정을 나누는 성장 동화 사랑의 학교는 오늘날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까지도 즐겨 읽는 아동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시각에서 쓴 성장 동화. 1886년에 처음 발표되어 우리나라에 사랑의 학교로 번역된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쿠오레입니다. ‘쿠오레’는 이탈리아 어로 ‘마음’이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하면 ‘사랑의 마음’으로 풀이됩니다. 사랑의 학교는 현재 이탈리아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국민들이 늘 곁에 두고 읽는 귀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개성이 서로 다른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갈등, 인자한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성장 동화입니다. 또한 조국과 부모 형제에 대한 사랑, 이웃과 약자에 대한 너그러움을 강조합니다. 또 초등학교 사 학년생인 엔리코의 일인칭 시각에서 쓴 일기 형식 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여기에는 주된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이야기의 흐름에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작가의 친절한 배려가 깔려 있답니다. 사랑의 학교라는 동화집 안에는 아미치스의 걸작 단편인 엄마 찾아 삼만 리가 들어 있습니 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주인공 마르코는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꿈 을 심어 줍니다. 이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미치스는 어린이 편에 서서 바른 길을 함께 찾았던 작가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피노키오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목수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숲에서 통나무 한 토막을 발견하고는 땔감으로 쓰려고 주워 왔습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막 도끼로 내려치려는데 통나무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세게 내려치지 마세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옆집에 사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어이, 안토니오! 자네, 거기서 뭐 하는가?” “아무것도 아닐세. 개미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중이야. 그런데 웬일인가?” “인형을 만들 나무나 얻을까 해서 왔다네.” “그래? 그럼 이걸 가져가게.” 그러자 나무토막은 저절로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날아가 정강이를 때렸습니다. “아야! 이봐, 안토니오. 자네는 남에게 물건을 줄 때 늘 이런 식인가?” “아닐세. 내가 던진 게 아냐. 나무가 저절로 날아간 거라고.” “거짓말 말게. 못된 사람 같으니라고.” 제페토 할아버지는 투덜대며 나무토막을 들고 나갔습니다. 두 사람은 늘 이렇게 다투면서도 금방 화해했지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에게서 얻어 온 나무토막으로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눈과 코, 귀와 입을 새겨 얼굴을 만든 다음, 몸통에 팔과 다리를 만들어 붙이니 마치 소년처럼 귀여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쁜 인형이 되었군. 그런데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그래, 피노키오가 좋겠다.” “피노키오? 그게 제 이름인가요?” 나무 인형이 말을 하다니... 제페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럴 수가! 이건 하느님의 축복이야. 오, 하느님!”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무 인형이 손을 뻗어 제페토 할아버지의 머리를 움켜잡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가발이 훌렁 벗겨져 대머리가 드러났습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머리가 벗겨져 가발을 쓰고 있었거든요. “말썽꾸러기 같으니라고! 만들어 놓자마자 장난을 치다니. 그러면 안 돼.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 아빠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아빠 말을 들어.” 그러나 피노키오는 말을 듣지 않고 깡충깡충 뛰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누가 저 녀석 좀 잡아 주시오.” 제페토 할아버지가 고함을 지르자 길을 지나던 순경이 피노키오를 막아섰습니다. 피노키오는 잽싸게 순경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순경에게 코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집으로 데려와서 타일렀습니다. “그런 장난을 치면 못쓴다. 너는 착하게 지내야 해. 학교에도 다녀야 하고. 나는 밖에 나 가 뭘 좀 사올 테니 기다려라.” 외출한 제페토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피노키오는 화로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결에 다리를 화로에 올려놓고 말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피노키오의 다리는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습니다. “피노키오! 문 열어라. 내가 왔다.” 제페토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피노키오가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모두 타 버려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피노키오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엉엉! 걸을 수가 없어요.” 피노키오의 울음소리에 걱정이 된 제페토 할아버지는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엉엉! 걸을 수가 없어요.” 피노키오의 울음소리에 걱정이 된 제페토 할아버지는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불에 타서 다리가 없어진 피노키오를 보고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울지 마라, 피노키오. 이 아빠가 더 예쁘고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주마.”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가 자는 동안 열심히 다리를 만들어 감쪽같이 접착제로 붙여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피노키오는 기분이 좋아서 집안을 마구 뛰어다녔습니다. “피노키오, 다시 튼튼한 다리도 만들어 주었으니 오늘부터는 학교에 가야 한다.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지.” “학교에 가려면 옷이 있어야지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솜씨 좋게 색종이를 오려 피노키오의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무껍질로는 신발을, 빵으로는 모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멋지구나, 피노키오! 하지만 옷만 멋지다고 신사가 아니란다. 마음이 착해야지.” “알았어요, 아빠! 그런데 또 필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뭔데?” “학교에 가려면 책이 있어야 하잖아요.” “알았다. 내가 나가서 책을 사 오마.” 제페토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뒤 제페토 할아버지는 손에 책을 들고 돌아왔지만 외투를 벗은 셔츠 차림이었습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는데도 말입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의 책을 사려고 외투를 판 것이었습니다. 피노키오는 고마워서 아빠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고마워요, 아빠!” 눈이 그치자 피노키오는 새로 산 책을 들고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에 가서 오늘은 읽기와 쓰기를 배우고, 내일은 계산하는 법을 배울 거야. 그리고 돈을 벌어서 아빠에게 멋진 외투를 사 드려야지.”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흥겨운 나팔 소리와 피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뚜뚜뚜! 삘리리 삘리리!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피노키오는 금방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곳에 가 보고, 학교는 내일 부터 가야지.” 나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니 천막 극장에서는 재미있는 인형 극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형극을 보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피노키오가 가진 것 가운데 돈이 될 만한 것은 책뿐이었습니다. 피노키오는 책으로 입장료를 대신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앗! 우리의 형제 피노키오가 왔다.” 인형들은 피노키오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무대 위로 올라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학교도 까맣게 잊고 무대에 올라간 피노키오는 다른 인형들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오늘 네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구나. 자, 이건 네 몫이다.” 극장 주인은 피노키오에게 금화 다섯 닢을 주었습니다. ‘아빠께 이 돈을 드리면 무척 기뻐하실 거야.’ 피노키오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다리를 저는 여우와 앞을 못 보는 고양이가 나타나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 피노키오! 돈이 참 많구나. 그걸로 무얼 할 거니?” “가장 먼저 아빠께 멋진 외투를 사 드릴 거예요. 그리고 내 책을 사야죠. 공부를 해야 하니까.” “공부를 한다고? 우리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나는 공부하러 학교에 가다가 다리를 다쳐서 잘 걷지도 못해.” “나는 책을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눈이 멀었어.” 여우와 고양이는 피노키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네 돈을 열 배 아니 스무 배로 불리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정말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피노키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바보들의 나라에 가면 기적의 밭이 있어. 거기에 금화를 묻고 물을 준 다음 소금을 뿌리는 거야. 그렇게 해 놓고 하룻밤이 지나면 금화가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를 볼 수 있지.” 피노키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돈이 많으면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사드릴 수 있으니까요. “바보들의 나라에는 어떻게 가지요?” “우리를 따라와.” 바보들의 나라로 가는 도중 저녁이 되어 피노키오 일행은 근처 여관에 묵었습니다. 고양이와 여우는 배가 고프다며 값비싼 음식을 마구 시켜 먹고는 쉬었다가 밤 열두시에 다시 출발하자고 했습니다. 피곤한 피노키오는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손님, 일어나세요. 열두시예요.” 여관 주인이 피노키오를 깨웠습니다. “고양이와 여우도 깨워 주세요. 함께 가야 하니까요.” “그분들은 아까 떠나셨는데요. 바쁜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요.” “혹시 무슨 말을 하지 않았나요?” “내일 아침 기적의 밭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피노키오는 주인에게 기적의 밭으로 가는 길을 묻고 여관을 나오려 했습니다. “손님, 저녁 드신 돈과 방 값을 주셔야지요.” “고양이나 여우가 내지 않았나요?” “그분들은 손님 대신 돈을 지불하는 것은 커다란 실례라면서 그냥 가셨습니다.” “쳇! 그런 실례는 얼마든지 해도 되는데...” 피노키오는 고양이와 여우가 먹은 음식 값과 방 값으로 금화 한 닢을 내야 했습니다. 밤길을 가던 피노키오 앞에 험상궂은 사내들이 나타났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돈을 빼앗는 산적들이었습니다. “꼼짝 말고 가진 돈을 전부 내놔!” 피노키오는 재빨리 남은 금화 네 닢을 혀 밑에 감추었습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돈이 나오지 않자 산적들은 피노키오를 높은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가 버렸습니다. 피노키오는 처음에는 발버둥을 쳤지만, 점점 정신이 흐려지더니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편 숲에는 머리가 파란색인 아름다운 요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요정은 나무에 매달려 정신을 잃고 있는 피노키오가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요정이 손뼉을 치자 어디선가 커다란 매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저기 나무에 매달린 인형이 보이지? 네 튼튼한 부리로 밧줄을 끊고 인형을 내게로 데려오렴.” 매는 요정이 시킨 대로 부리로 밧줄을 끊고 피노키오를 업어 데려 왔습니다. 피노키오는 친절한 요정의 보살핌으로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흉악한 산적들과 마주치게 되었니?” 피노키오는 요정에게 여태까지 자기가 겪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그 금화는 어디 있지?” “몰라요. 잃어버렸나 봐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피노키오의 코가 손가락 두 개 길이만큼 길어졌습니다. “어디서 잃어버렸지?” “숲에서요.” 또다시 거짓말을 하자 피노키오의 코는 더욱 길어져, 얼굴을 들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다리가 짧아지는 거짓말이고 또 하나는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이지.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네가 잘못했다고 하니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 주지.” 요정이 손뼉을 치자 창문으로 딱따구리들이 날아왔습니다. 딱따구리들은 길어진 피노키오의 코를 쪼아 댔습니다. “고마워요.” 코가 작아진 피노키오가 말하자, 요정이 답했습니다. “나와 함께 살지 않을래?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내 동생이 될 거야.” “저도 같이 있고 싶어요. 하지만 불쌍한 우리 아빠는요?” “곧 이리로 오실 거야.” “정말요? 그럼 제가 마중을 나갈래요. 아빠가 무척이나 보고 싶거든요.”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나러 숲으로 가던 피노키오는 그곳에서 여우와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피노키오! 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한참 동안 찾았어.” “너희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나를 두고 갔잖아.” “그건 말이야, 누군가 기적의 밭을 몽땅 사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야. 내일부터는 아무도 거기에 돈을 심을 수 없게 돼.” “큰일이로군.” “하지만 오늘까지는 괜찮아. 네가 만약 오늘 밤에 돈을 심는다면 내일은 주렁주렁 열린 금화를 딸 수 있을 거야.” 결국 기적의 밭으로 간 피노키오는 고양이와 여우의 말을 믿고 금화를 땅에 묻었습니다. “이제 가서 물을 길어 와. 물을 뿌려야만 나무가 잘 자라거든.” 하지만 피노키오가 물을 떠 가지고 오니 고양이와 여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란 피노키오가 땅을 파 보았더니, 묻었던 금화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고양이와 여우가 피노키오를 속인 것입니다. 피노키오는 여우와 고양이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그만 짐승을 잡는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덫이 너무도 단단히 조여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되자 농부가 나타났습니다. “네가 우리 닭을 훔쳐 가는 녀석이로구나.” 농부는 닭이 자꾸 없어지자 덫을 놓았는데, 그만 피노키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아니에요. 저는 닭을 훔치지 않았어요.” “거짓말 마라. 닭을 훔친 벌로 오늘부터는 네가 닭장을 지켜야 해.” 농부는 피노키오를 닭장에 가두고 목에는 굵은 쇠사슬을 채웠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살쾡이 세 마리가 닭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살쾡이들이 바로 농부의 닭을 훔쳐 갔던 것입니다. 피노키오는 재빨리 빗장을 걸고 고함을 쳤습니다. “아저씨! 빨리 나와 보세요. 닭 도둑을 잡았어요.” 닭 도둑을 잡아 주고 무사히 풀려난 피노키오는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그만 길을 잃 고 산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혹시 피노키오를 아니?” 나무 위에 앉은 비둘기가 물었습니다. “내가 바로 피노키오야.” “그래? 네 아빠가 너를 찾고 있어. 바닷가에 계시니까 빨리 가 보도록 하렴.” 피노키오는 비둘기에게 바닷가로 가는 길을 물어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바닷가에 이르자 멀리 제페토 할아버지가 탄 조각배가 보였습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가 돌아오지 않자, 피노키오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아빠! 저 피노키오예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열심히 노를 저어 피노키오에게로 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다 속에서 커다란 상어가 나타나 제페토 할아버지가 탄 조각배를 한입에 삼켰습니다. “앗, 아빠!” 피노키오가 애타게 불렀지만, 제페토 할아버지가 탄 조각배를 삼 킨 상어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용감히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큰 파도 에 휩쓸려 상어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흘러갔습니다. 바닷물에 휩쓸린 피노키오는 간신히 어느 해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배도 고프고 몸도 피곤해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물통을 들고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 물 좀 주세요.” 피노키오는 아주머니가 준 물을 정신없이 마셨습니다. “목이 무척 말랐나 보구나. 나를 따라오렴. 먹을 것을 줄 테니까.” 피노키오는 친절한 아주머니를 따라 집으로 갔습니다. 아주머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가득 내왔습니다. 정신없이 먹던 피노키오는 문득 그 아주머니가 누군가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혹시 전에 제 코가 길어졌을 때, 딱따구리들을 불러 코를 쪼아 짧게 만들어 주신 파란 머리 요정님 아니세요?” “호호호! 피노키오, 이제 알았구나.” “어떻게 이곳에 계세요?”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정말이에요? 그럼 저도 사람이 될 수 있나요?” “물론이지. 내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 틀림없이 사람이 될 수 있어.” “아빠는요?” “당장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만나게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튿날부터 피노키오는 학교에 나가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자 피노키오는 모범생이 되어 우등상을 탔습니다. “피노키오! 이제 너는 나무랄 데 없이 착한 아이가 되었으니 곧 사람이 되겠구나. 내일 축하 파티를 열 테니까 친구들에게 알리고 오렴.” 피노키오는 기쁜 마음에 나는 듯이 달려 친구 로메오의 집으로 갔습니다. 로메오가 집에서 막 나오고 있었습니다. “로메오! 어디 가는 거야?” “장난감 나라에.” “장난감 나라라고? 거기가 어딘데?” “모든 장난감이 있어서 날마다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야. 그곳에서는 지겨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돼.” “정말 그런 곳이 있니?” “곧 마차가 와서 나를 태워 갈 거야.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피노키오는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장난감 나라는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잠깐만, 아주 잠깐만 다녀오는 거야.’ 피노키오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열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나타났습니다. 마차 안에는 이미 많은 아이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장난감 나라로 간다는 생각에 모두 들떠 있었습니다. 히히힝! 힘찬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곧 마차가 출발했습니다. 밤새 달려 도착한 장난감 나라는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로메오의 말대로 장난감이 엄청 많이 있었고,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머리 아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지겨운 선생님의 말씀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피노키오는 깜짝 놀랐습니다. 양쪽 귀가 한 뼘씩이 나 길어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방문이 열리며 로메오가 놀란 얼굴로 들어왔습니다. 로메오의 귀도 피노키오만큼이나 길어져 있었습니다.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이 점점 커져서 똑바로 서지 못하고 엎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몸에서 털이 돋아나더니 꼬리까지 생겼습니다. 피노키오와 로메오는 당나귀가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지요. 뭐라고 말을 하려 해도 당나귀 울음소리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장난감 나라는 어린아이들을 꾀어 와서 당나귀로 만드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동안 먹은 음식에는 사람을 당나귀로 만드는 무서운 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당나귀로 변한 피노키오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끄는 곳으로 팔려 갔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힘들게 일을 해도 먹을 것이라고는 여물뿐이었고, 잠도 서서 자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배에 실려 가던 피노키오 당나귀는 그만 발을 헛디뎌 서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피노키오 당나귀가 온몸을 움직이며 뭍으로 기어오르려 애를 쓰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상어 한 마리가 나타나 피노키오 당나귀를 한입에 삼켰습니다. 피노키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당나귀 가죽이 벗겨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걸려 찢어진 것 같았습니다. ‘여긴 어디지? 왜 이렇게 어둡지? 맞아, 상어가 나를 삼켰지. 그렇다면 여기는 상어 뱃속이란 말인가?’ 피노키오는 더듬더듬 어둠 속을 헤맸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밝은 빛이 보였습니다. ‘이 속에서 빛이 나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피노키오는 그 빛을 따라 걸었습니다. 갈수록 빛이 환해졌고, 촛불이 놓인 식탁 앞에 앉아 생선을 먹고 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아빠!” 그 사람은 피노키오를 찾으러 나왔다가 상어에게 잡아먹힌 제페토 할아버지였습니다. 제페 토 할아버지를 삼킨 상어가 피노키오도 삼킨 것입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그동안 상어가 삼킨 생선을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피노키오야. 네가 여길 어떻게?” 둘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피노키오와 제페토 할아버지는 상어가 잠든 틈을 타서 커다란 이빨 사이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헤엄을 쳐서 무사히 육지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멀리 요정의 집이 보였습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와 함께 그곳으로 갔습니다. 파란 머리 요정은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를 반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노키오, 이제 정말로 착한 아이가 되었구나. 더구나 아버지까지 구하다니. 사람이 된 것을 축하한다.” 요정의 말을 들은 피노키오는 손으로 뺨을 만져 보았습니다. 피노키오의 뺨은 딱딱한 나무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손도 다리도 모두가 살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피노키오를 정말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군요.” 이제 진짜 아빠가 된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행동하는 예술인 이탈리아의 동화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유명한 카를로 콜로디 (1826~1890)의 본명은 카를로 로렌치니입니다. 유럽을 대표하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자란 콜로디는 어릴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 이 많았습니다. 특히 조국 이탈리아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라서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고 정치 잡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북돋우기도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성격 탓에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도서관 서기가 되어 고서학자인 주제 페 밑에서 고대 법전 등 서적 연구를 하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콜로디가 어린이 문학을 쓰는 데 몰두한 것은 1861년 이탈리아 가 통일된 뒤입니다. 콜로디는 과거 이탈리아의 아픔을 떠올리며, 나라가 강하고 잘 살려면 미래의 주인인 어린이들이 올바른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자라나야 한다는 믿음으로 1890년 숨을 거둘 때까지 좋은 동화를 썼습니다. 대표작인 <피노키오>를 비롯해 <눈과 코>, <즐거운 이야기> 등은 모두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는 남을 배척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해할 줄 알아야 평화로울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지요. 이렇듯 <피노키오>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인 동시에 훌륭한 아동 교육서이기도 합니다. 콜로디를 단순한 아동 문학가가 아니라 전 세계 어린이들의 스승이자 교육자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랍니다. 작품의 깊은 뜻으로 인해 <피노키오>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어린이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읽히고 있습니다.
쿠오바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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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관리 페트로니우스가 잠을 깬 것은 한낮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어젯밤 네로 황제가 마련한 잔치에서 늦도록 술을 마셨기 때문이지요. 네로 황제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족까지 죽인 폭군이지만, 오직 페트로니우스의 충고만은 들었기 때문에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신 것이었습니다. 페트로니우스가 피로를 풀기 위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고 있을 때 하인이 들어와 알렸습니다. “비니키우스 님께서 나리를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비니키우스가 왔다고? 어서 들라고 해라.” 비니키우스는 페트로니우스 누나의 아들로,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뛰어난 용모에 씩씩함과 용맹스러움을 갖춘 조카 비니키우스를 누구보다 아꼈습니다. “비니키우스! 정말 오랜만이다. 몰라보게 건강하고 씩씩해졌구나. 그래 어쩐 일이냐?” “저는 파르티아 군의 화살 끝에는 가벼운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사랑의 여신이 쏜 화살에 맞아 견딜 수 없게 되어 외삼촌의 힘을 빌리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 정말 축하할 일이로구나. 대체 그게 누구냐? 어서 말해 보아라.” “저는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길에 말에서 떨어져 팔을 다쳤습니다. 그런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플라우티우스 장군에게 발견되어 간호를 받았지요. 그런데 그 집에서 제 마음을 빼앗은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플라우티우스 장군에게는 딸이 없으니 아마도 노예일 듯싶은데, 노예라면 네가 사면 되지 않겠느냐?” “그 여인은 노예가 아니라 리지아 족장의 딸입니다. 플라우티우스 장군께서 양녀로 삼으셨다고 하더군요.” “리지아 족장의 딸이라면 볼모로 잡혀 온 것 아니냐? 어쨌거나 플라우티우스 장군이 허락을 하면 되겠지. 내가 힘써 보마.” “고맙습니다. 외삼촌.” “그런데 너는 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해 보았느냐?” “아니요, 아직. 그런데 얼마 전에 저를 본 그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갈대로 모래 위에 물고기를 그려 놓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물고기를 그렸다고? 글쎄, 무슨 뜻일까?” 이튿날 오후 두 사람은 플라우티우스의 집을 찾았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플라우티우스를 그동안 고지식한 군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집 안이 소박하면서도 고상하게 꾸며져 있어 플라우티우스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조카를 잘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런 용맹스러운 젊은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히려 제가 즐거웠습니다.” 네로 황제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페트로니우스의 갑작스런 방문에 플라우티우스는 잠시 긴장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을 놓았습니다. 잠시 뒤 리기아가 음식을 내왔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이야기를 하면서 리기아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리기아는 조카의 말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호박 빛깔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넘실거리고 까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리기아는 품위마저 갖추고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과연 비니키우스가 한눈에 반할 만하군.’ 페트로니우스는 돌아오는 길에 비니키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내게 좋은 수가 있으니 며칠 후면 리기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재치 있는 말솜씨로 네로 황제를 설득하여 사흘 후 플라우티우스의 양녀 리기아를 궁전으로 데려오도록 한 뒤, 다시 그녀를 비니키우스에게 보내도록 손을 써 놓았습니다. 플라우티우스와 아내 폼포니아는 리기아를 위험한 네로 황제에게 보낸다는 것이 걱정스럽기만 했습니다. “너를 보내고 싶진 않다만, 황제의 명이니 어쩔 수 없구나.” 리기아는 폼포니아의 가슴에 안겨 슬피 울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자기를 데려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궁전으로 간 리기아는 페트로니우스의 계획에 따라 네로 황제의 부인 악테에게 보내졌습니다. 악테는 마음씨가 착해서 노예 출신이었음에도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네로 황제를 폼피아에게 빼앗겼지만, 악테는 궁중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폼피아보다도 훨씬 아름다워. 너는 오늘 네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 혹시 불쾌한 일이 생기더라도 꾹 참아야 해. 만일 수치를 당하거나 죽음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해라. 하지만 절대 네로 황제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리기아는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연회는 말할 수 없이 화려했습니다.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인 옷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원로와 유명한 귀족, 예술가와 귀부인들이 참석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름다운 리기아의 두 볼이 붉어졌습니다. 비니키우스와 페트로니우스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녕하셨소? 아름다운 분이시여!” 비니키우스가 다가와 인사를 했습니다. 조각 같은 얼굴에 용감한 전사답게 태도가 늠름했지요. “안녕하셨어요? 비니키우스 님.” 이때 네로 황제는 시를 읊으라는 귀족들의 청을 듣고 폼피아를 나오게 했습니다. 보라색 옷을 입은 폼피아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폼피아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폼피아와 비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리기아! 내게 입을 맞춰 주시오. 내일 밤에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겠지만 그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소.” 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때 우르수스가 나타나 무서운 힘으로 비니키우스를 밀쳐 냈습니다. 우르수스는 자나 깨나 리기아를 보호하는 리지아 족의 용사였습니다. 우르수스와 함께 연회를 빠져나온 리기아는 악테를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제발 저를 다시 양아버지 플라우티우스 님의 집으로 보내 주세요.” “그러면 플라우티우스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비니키우스의 집으로 가거라.” 악테는 리기아에게 비니키우스의 아내가 되라는 뜻을 은근히 비쳤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궁전에도 머물지 않을 것이고, 비니키우스 님의 집에도 가지 않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비니키우스가 싫으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비니키우스 님과는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맺어질 수 없습니다.” 리기아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우르수스도 리기아를 따라 아침 햇살이 창에 비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리기아는 플라우티우스 집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비니키우스가 데리러 올 때를 이용하여 우르수스와 함께 로마 밖으로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밤이 되어 비니키우스에게 리기아를 데려갈 사람들이 도착하자, 리기아는 악테와 작별을 하고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순간 우르수스와 함께 힘을 다해 뛰어 달아났습니다. “뭐라고? 리기아를 데려오지 못했다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가씨 스스로 도망친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오지 못한 비니키우스는 분노와 아쉬움으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비니키우스는 사람들을 시켜 리기아를 찾도록 하고, 자신도 직접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리기아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슬픔에 빠진 조카 비니키우스를 본 페트로니우스는 부하들에게 비밀리에 리기아의 행방을 찾도록 하는 한편 지혜롭기로 소문난 킬로키로니데스를 찾았습니다. “어떤 여인이 땅바닥에 물고기를 그렸다고 하더군요. 그 뜻을 아시는지요?” “물고기라고요? 아마도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 같군요. 그리스 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들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맞춰 보면 ‘물고기’라는 단어가 되거든요.” ‘새로운 종교라. 비니키우스는 상당히 어려운 사랑을 시작했군.’ 페트로니우스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페트로니우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딸 어거스트 왕녀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 리기아가 궁전으로 보내졌을 때였던 것입니다. 이상한 신을 믿는 리기아가 마법을 걸어 왕녀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페트로니우스는 리기아가 행방을 감춘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먼저 플라우티우스 집안이 화를 입었을 것이고, 조카 비니키우스와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트로니우스는 리기아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네로 황제를 찾았습니다. “폐하, 사랑하는 왕녀를 잃으셔서 얼마나 슬픔이 크십니까? 안티움으로 여행을 다녀 오시면 기분이 좀 나아지시지 않을까요?” “오오! 과연 경은 짐의 마음을 잘 알고 있구려. 그래, 안티움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죽은 어거스트를 위한 시를 지어야지.” 네로 황제가 로마를 떠나 있는 사이에 리기아를 찾아내어 안전한 장소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운 페트로니우스는 비니키우스를 찾아 위로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같이 사랑에서도 승리자가 되어라.” 며칠 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모이는 살라리아 묘지의 비밀 모임에 리기아가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은 비니키우스는 몰래 그곳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밤에 반드시 리기아를 만나고, 다시는 리기아를 떠나보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는 비니키우스의 마음은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밤이 되자 비니키우스는 로마에서도 제일가는 투사 크로톤과 하인을 데리고 살라리아 묘지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살라리아 묘지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비니키우스는 엄숙한 분위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일어나 설교를 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멀리까지 울려 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사치와 낭비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시오. 그리고 순결과 진리를 사랑하시오. 남을 믿지 못하고 헐뜯는 일을 삼가시오. 그대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이어진 설교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은 현재의 평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을 듣고 있는 사이에 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찾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요한과 나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리스도는 되살아나시어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꿈결 같은 기분으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비니키우스에게 함께 간 하인이 속삭였습니다. “저기 리기아 아가씨 같은 분이 계십니다.” 하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리기아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니키우스는 소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려 크로톤과 함께 리기아의 뒤를 밟았습니다. 그러나 리기아가 집으로 들어가고 나자 우르수스가 그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비니키우스는 크로톤에게 우르수스와 싸워 관심을 돌리도록 했습니다. 리기아 족 최고 장사인 우르수스와 로마 제일의 투사 크로톤의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동안 비니키우스는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리기아를 데리고 나왔지만 우르수스의 억센 손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로마 제일의 투사라는 크로톤도 우르수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을 다치게 하지 마!” 리기아가 소리쳤지만, 이미 비니키우스는 쓰러진 뒤였습니다. 비니키우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비니키우스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르수스에게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나마 리기아의 외침을 들은 우르수스가 마지막 순간에 힘을 뺐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죠. 비니키우스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의사 글라우코스의 치료와 리기아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글라우코스와 리기아와 함께 지내면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말씀은 비니키우스의 마음을 움직였고, 바울의 웅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리기아도 점차 비니키우스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리기아가 그리스도교 신자도 아닌 비니키우스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직 베드로만은 리기아의 사랑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이지요.” 비니키우스는 그리스도교를 알게 되면서 그동안의 삶이 덧없이 느껴졌으며, 심지어는 존경하던 외삼촌 페트로니우스의 삶도 실망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으로 마음의 변화를 겪은 것이었습니다. 그즈음 네로 황제는 안티움에 머물면서 로마가 세워진 이래 가장 성대한 연회를 열고 날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시를 읊으며 음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예술적 기질은 있지만, 성격이 불안하여 때로는 이상 증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시를 짓다가 문득문득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지요. “아름다운 시를 짓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다.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다. 대도시가 불타오르는 광경을 본다면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텐데.” 페트로니우스를 시샘하여 어떻게 하든 네로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하려는 총독 티겔리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께서 명령만 하신다면 로마 시를 불바다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불이야! 불이야! 도시가 불에 타고 있다.” “황제 폐하! 불이 났습니다. 로마 시 전체가 엄청난 불에 휩싸여 있습니다.” 신하가 급하게 달려와 알리자 네로 황제는 눈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오오, 불에 휩싸인 도시를 보고 트로이의 노래를 짓자. 어서 출발하자. 불이 꺼지기 전에.” 불길에 휩싸인 로마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시민들은 가족과 집을 잃고 울부짖었으며, 이미 평화와 질서는 사라지고 폭력이 들끓었습니다. “오, 정말 아름답구나. 저 불길! 사람들의 아우성!” 네로 황제는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는 네로 황제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로마였지만, 폭군이자 정신이상자인 네로 황제 때문에 멸망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시를 짓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분노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미친 황제를 몰아내라!” “네로 황제를 사형시켜라!” 정신은 이상하지만 마음 약한 네로 황제는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 가슴에 있는 분노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자 교활한 총독 티겔리누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 불은 로마의 신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무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른 것이오. 병사들을 시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신의 심판을 받도록 할 것이오.”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잡혀 왔습니다. 그중에는 리기아와 우르수스도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원형 경기장에서 우르수스에게 사나운 황소와 맞서도록 했습니다. 황소의 몸에는 리기아가 묶여 있었기에, 리기아를 살리기 위해서 우르수스는 반드시 황소를 쓰러뜨려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분노한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리기아가 위험에 처하자 비니키우스는 베드로의 발밑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셨다. 당장은 괴로울지라도 앞날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금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베드로의 말에 비니키우스는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인간과 황소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틈에서 비니키우스는 누구보다도 가슴을 졸이며 그리스도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여! 제 사랑을 구해 주시옵소서.” 달려드는 황소의 뿔을 움켜쥔 우르수스의 양쪽 발은 모래 속으로 깊이 들어갔고, 등은 활처럼 휘었습니다. 우르수스는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우웍!” 짧은 울부짖음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뿔이 꺾인 황소가 지른 소리였습니다. 황소가 쓰러지자 우르수스는 리기아를 두 팔로 안아 내린 다음 외쳤습니다. “나의 아가씨를 살려 주시오!” 관중들은 우르수스의 엄청난 힘과 주인을 극진히 섬기는 마음에 감동하여 우르수스를 용서하고 리기아를 구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비니키우스도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 “불쌍한 여인을 보호하라!” 하고 호소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소리치자 네로 황제도 어쩔 수 없이 리기아와 우르수스를 풀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리기아와 우르수스를 살려 주라는 신호를 보내자 경기장 안은 엄청난 함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아름다운 리기아 만세! 천하장사 우르수스 만세!” 영웅을 숭배하는 로마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인 리기아와 우르수스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더욱 깊이 믿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점점 늘어 가자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지도자 격인 베드로와 바울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 베드로와 바울 두 사람만 없으면 그리스도교의 세력도 점차 약해지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은 비니키우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네로가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하려 합니다. 잠시 이곳을 피해 있도록 하십시오.” “나는 주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끝까지 로마에 남아 있을 것이야.” “네로에게 맞서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베드로 님께서는 널리 그리스도의 뜻을 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발 피하십시오.” 결국 비니키우스를 비롯한 신자들의 권유를 이기지 못한 베드로는 동이 틀 무렵 소년 나자렛과 함께 로마를 빠져나갔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몸을 피하자 비니키우스도 리기아와 플라우티우스 장군 가족과 함께 페트로니우스의 권유에 따라 시칠리아 섬으로 피했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네로 황제가 교활한 총독 티겔리누스를 신임하면서 점점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페트로니우스의 말만 듣던 네로 황제는, 요즘에 들어서는 페트로니우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반대를 한다고 여기고 말을 하면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침착하게 곧 닥쳐올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년 나자렛과 함께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는 문득 하늘에서 황홀한 금빛 광채가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찬란한 빛은 땅에까지 이르렀고 누군가 그 빛 사이로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과 황홀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땅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자렛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베드로의 귀에는 슬프고 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나의 양 떼를 버리고 가니 나는 로마로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 베드로가 고개를 들었을 때 주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몸속에는 굳은 의지와 맑은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베드로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잡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시 로마로 가자!”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와 더욱 열심히 설교를 하고 그리스도교를 알리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네로 황제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과 티겔리누스의 잔인함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로마 인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고, 앞을 다투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황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해 오더라도, 결코 살아 있는 진리는 멸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의 승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는 네로 황제의 병사에게 체포되어 바티칸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바티칸 언덕까지 끌려가는 두 사도의 뒤를 많은 신자들이 뒤따랐고, 베드로는 세상의 축복을 빌면서 기쁘게 형벌을 받았습니다. “나는 마침내 성스러운 싸움에서 이겼고 신앙의 길을 지켰으니 정의의 관은 내 머리 위에 씌워질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베드로는 숨을 거두었지만,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으니까요. 하지만 두 사도가 죽은 뒤 네로 황제의 정신 이상 증세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작은 트집을 잡아 신하들을 사형시켰고 아내 폼피아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페트로니우스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조카 비니키우스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외삼촌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저와 리기아, 플라우티우스 장군님의 가족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외삼촌 덕이지요. 이곳 시칠리아 섬은 매우 평화롭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잔잔한 바다에는 우르수스가 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고 있으며, 아내 리기아는 제 곁에서 실을 잣고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괴로움에 비한다면 아주 크고 소중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주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종교 안에 산다고 해서 슬픔과 눈물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눈물을 아끼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로마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 님과 바울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네로 황제의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베드로 님도 바울 님도 죽음 뒤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누릴 것이니 오히려 기쁨을 느끼지만, 저희는 외삼촌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모든 불행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법인데 지금 로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미친 듯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평화와 기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한 치 앞을 못 보는 바보들의 소란일 뿐이죠. 부디 외삼촌께서도 하루빨리 악의 도시를 벗어나 그리스도와 저희가 기다리는 시칠리아로 오시기를 빕니다. 비니키우스 드림. 조카 비니키우스의 편지를 받았지만 페트로니우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조카는 젊으니 이제 막 아침 해가 뜨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겠지만, 자기의 삶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황혼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구나 페트로니우스는 자기 방식대로 삶을 마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총독 티겔리누스와의 세력 싸움에서 지고, 네로 황제의 총애도 멀어지자 페트로니우스는 나름대로의 멋진 복수를 생각해 냈습니다. 네로 황제의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페트로니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몹시 분노했고, 그 뒤로 증세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곳곳에서 폭동과 반란 소식이 들려옴에도 네로 황제는 코웃음만 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습니다. 아무리 네로 황제에게 아첨하는 신하들이라 할지라도 황제가 반란군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마치 역사에 없었던 예술가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로마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터였고 네로 황제의 이상한 행동은 반란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결국 반란군과 시민들은 궁전으로 몰려왔습니다. “폭군 네로 황제를 몰아내자!” “시를 짓기 위해 로마를 불태운 네로 황제는 사형시켜야 한다!” 겁이 난 네로 황제는 자살을 하려고 칼을 들었으나, 용기가 없어 스스로를 찌르지 못하고 옆에 있던 궁녀에게 자신을 찌르도록 했습니다. 네로 황제가 죽자 로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바티칸 언덕에는 베드로를 기념하기 위한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그 예배당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폴란드의 행동하는 양심. 헨리크 솅키에비치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바르샤바대학교에서 문학은 물론 법학, 역사, 철학, 의학까지 두루 공부를 한 솅키에비치는 일찍이 사회 문제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다 장편 소설 공터를 발표해 문단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솅키에비치는 이후 역사 소설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외세에 대항한 폴란드 인의 투쟁을 그린 불과 검을 가지고를 비롯해 대홍수, 판 보우오디요프스키 등의 3부작 역사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스위스로 망명하여 조국 폴란드를 위해 활발한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 다. 그런 가운데 쿠오바디스를 발표했고 190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뒤로도 줄곧 조국의 독립 운동과 적십자 활동에 열정을 기울이다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하고 1916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솅키에비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러시아 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조국 폴란드에 자부심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 헨리크 솅키에비치가 1896년에 쓴 쿠오바디스의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예수가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갈 때 제자 베드로가 안타깝게 따라오며 외친 말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장편 역사 소설 쿠오바디스는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스승이 죽은 뒤 로마에까지 들어가 그리스도교를 전파했습니다. 이때 로마의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리기아를 사랑하게 된 후 우여곡절 끝에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억압하던 네로 황제는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 자살하고 맙니다. 이 작품에서 로마 인들에게 박해받는 이스라엘 인들은 바로 러시아에게 박해받는 폴란드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솅키에비치는 쿠오바디스를 통해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믿음을 폴란드 국민들에게 주고자 했습니다. 쿠오바디스는 1951년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할리우드 대작 영화로 선보여 아카데미 8개 부문 상을 휩쓸면서 원작의 작품성을 다시 한번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 어느 나라에 나이 많은 황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너무나 늙어서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 황제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를 지나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가 나옵니다. 그 나라에 있는 신비로운 우물물을 마시면 젊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곧 세 아들을 불러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꿈에서 천사가 말한 대로 반드시 그런 우물이 있을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그 물을 가져오겠느냐?” 첫째 아들이 나섰습니다. “아바마마, 제가 반드시 신비로운 우물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배 한 척과 군인들을 주십시오.” 첫째 왕자는 많은 군인들과 함께 커다란 배에 타고 신비로운 우물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기나긴 항해 끝에 첫째 왕자와 군인들은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이 나타나 첫째 왕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내 나라에 왔는지 말해라.” 첫째 왕자는 화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 왕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왕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몰라도 돼!”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은 수염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를 내며 첫째 왕자와 군인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한편 황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첫째 왕자가 돌아오지 않자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그러자 둘째 왕자가 나섰습니다. “제가 우물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제게도 배 한 척과 군인들을 주십시오.” 둘째 왕자도 군인들과 함께 배에 타고 신비로운 우물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배도 좀 작고 군인의 수도 적었습니다. 첫째 왕자가 나라에서 가장 큰 배와 많은 군인을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오랜 항해 끝에 둘째 왕자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이 둘째 왕자 앞에 나타나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내 나라에 왔는지 말해라.” 둘째 왕자는 화가 났습니다. 둘째 왕자도 지금까지 누군가에게서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왕자도 첫째 왕자처럼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몰라도 돼!”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은 노발대발 화를 냈습니다. “너희 형제는 모두 건방지고 버릇이 없구나! 너도 혼 좀 나야겠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은 둘째 왕자와 군인들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둘째 왕자는 그곳에서 첫째 왕자를 만났습니다. 형제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첫째 왕자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얘야, 너와 내가 이렇게 갇혀 버렸으니 이제 막내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겠구나.” 첫째 왕자의 말에 둘째 왕자도 초조해졌습니다. 황제는 슬픔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두 왕자가 모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공연한 욕심을 부려서 두 아들만 잃었구나.” 황제가 탄식하자 드디어 막내 왕자가 나섰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니 제게도 배 한 척과 군인들을 주십시오.” 그러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너는 내게 남은 유일한 아들이다. 너까지 잃을 수는 없다.” 별 수 없이 막내 왕자는 밤중에 몰래 나라를 빠져나왔습니다. 막내 왕자는 작은 배에 고작 군인 세 명을 이끌고 신비로운 우물을 찾아 길을 떠난 것입니다. 막내 왕자의 배는 작고 힘이 없어서 항해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갖가지 위험한 고비를 넘긴 끝에 막내 왕자의 일행은 겨우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내 나라에 왔는지 말해라.” 막내 왕자는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의 우물물을 드시면 젊음을 되찾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곳을 지나 신비로운 우물물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사실은 첫째 형과 둘째 형이 먼저 물을 구하려고 길을 떠났는데 돌아오지 않아 아버지의 근심이 크십니다. 공손한 대답을 들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은 매우 기뻐하며 막내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처럼 예의가 바르고 효심이 깊은 사람은 처음 보았소. 사실 당신의 두 형은 내가 붙잡아 두고 있소. 뜻밖에 형들의 소식을 들은 막내 왕자는 깜짝 놀라며 사정했습니다. “제발 형들을 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신비로운 우물물을 가져와서 내게도 좀 나누어 준다면 형들을 풀어 주겠소.” 막내 왕자는 형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물물을 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르던 막내 왕자는 늙은 사냥꾼을 만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는 어떻게 가나요?” “나는 몰라. 하지만 산봉우리 너머에는 늙어서 날지 못하는 독수리가 있는데 그 새는 알고 있을 거야.” 막내 왕자는 헐떡거리면서 산봉우리를 넘었습니다. 과연 사냥꾼 말대로 늙은 독수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오래전에 한 번 그 나라에 가 본 적이 있어. 그 우물도 본 적이 있지.” 독수리의 말에 막내 왕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가면 되지요?” 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 우선 잘 구운 양고기 열두 토막이 필요해. 그리고 마당을 쓰는 비 두 개, 동아줄 하나가 필요하지. 막내 왕자는 양을 잡아 열두 토막을 낸 다음 정성스럽게 불에 구웠습니다. 또 장에 가서 새 비 두 개를 사고, 단단한 동아줄도 하나 엮었습니다. 막내 왕자가 양고기와 비와 동아줄을 가지고 오자 독수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의 성문은 사자 열두 마리가 지키고 있지. 사자들에게 양고기를 던져 주면 널 물지 않을 거야. 그 다음에 성문을 열고 들어가면 소녀 둘이 달려들 거야. 그 소녀들에게 비를 하나씩 주면 얌전해질 거야. 그리고 좀 더 걸어가면 신비로운 우물이 나오거든. “그러면요?” “웬 소녀 하나가 머리카락에 두레박을 매어 우물물을 긷고 있을 거야. 그 소녀에게 동아줄을 주면 소녀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리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막내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겠군요.” 그러자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중요한 건 다음이야.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의 여왕은 낮에는 잠을 자거든. 여왕의 방에 살짝 들어가서 왼쪽 손에서는 반지를 빼고, 오른발에서는 양말을 벗기고, 무릎에는 표시를 해 두고 와야 해.” 막내 왕자는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해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날 막내 왕자는 독수리가 말한 물건을 모두 챙겨서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로 떠났습니다. 여러 개의 골짜기를 건너고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절벽 아래에는 그곳을 지나다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머리 위로는 집채만큼 큰 콘도르가 빙빙 돌며 날고 있었습니다. 만약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 당장에 콘도르의 밥이 될 것이었습니다. 막내 왕자는 양고기, 비, 동아줄이 든 자루를 허리에 단단히 동여매고 간신히 벼랑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벼랑을 벗어나니 눈앞에 거대한 성이 한 채 보였습니다. 독수리가 말한 대로 그 성의 입구에는 사자 열두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막내 왕자가 다가가자 사자들은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막내 왕자가 재빨리 양고기 열두 조각을 던지자 사자들은 양고기를 먹느라 곧 얌전해졌습니다. 성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두 소녀가 막내 왕자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막내 왕자가 얼른 소녀들에게 비를 하나씩 쥐어 주자 두 소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하게 비질을 시작했습니다. 막내 왕자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드디어 신비로운 우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독수리의 말대로 그 우물에서는 한 소녀가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에 두레박을 매어 물을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 매우 불안해 보였습니다. 막내 왕자는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다가가 동아줄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동아줄을 잡은 소녀는 거짓말처럼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습니다. 소녀의 몸이 굳은 틈을 타서 막내 왕자는 재빨리 두레박으로 신비로운 우물물을 길었습니다. ‘찰랑찰랑’하는 물소리가 마치 아버지의 건강한 웃음소리 같아 막내 왕자는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이윽고 막내 왕자는 신비로운 우물물을 가득 채운 물병을 자루에 넣고 성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 여왕의 방이 있었습니다. 막내 왕자는 벽을 타고 올라가 여왕의 방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여왕은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흉측하게 생긴 마녀일까?’ 막내 왕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침대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여왕의 얼굴을 본 순간 막내 왕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잠든 여왕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서 물결치고 오뚝한 콧날은 귀여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아마 눈을 뜬다면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내 왕자는 이내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독수리가 말해 준 대로 조심스럽게 여왕의 반지를 빼내고 양말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에 작은 표시를 했습니다. 여왕의 방을 나와서도 막내 왕자는 자꾸만 여왕의 아름다운 모습이 생각나 발걸음이 느려졌습니다. 막내 왕자는 한눈에 여왕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올리니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막내 왕자는 여왕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고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막내 왕자는 다시 절벽을 타고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 어렵게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형들이 잡혀 있는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막내 왕자에게 신비로운 우물물을 받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은 매우 기뻐하며 가두었던 두 왕자와 군사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세 왕자는 얼싸 안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네가 가장 어리지만 가장 큰일을 해냈구나.” “우리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맙다.” 막내 왕자는 형들을 구할 수 있어서 몹시 행복했습니다. 신비로운 우물물을 얻어 기분이 좋아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의 왕은 세 왕자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멋진 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막내 왕자는 자기가 겪은 모험담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 여왕의 무릎에 표시를 한 것, 여왕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설레었던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세 왕자는 아버지를 위한 신비로운 우물물이 든 물병을 소중히 간수했습니다. 그러나 항해가 길어지면서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는 엉뚱한 생각에 빠졌습니다. “형님! 이렇게 되면 막내가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저 녀석을 없애야겠어.” 두 왕자는 막내 왕자가 길어 온 물을 자기들의 병에 붓고, 막내 왕자의 병에는 바닷물을 넣어 두었습니다. 세 왕자가 돌아오자 나라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황제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지요. 특히 어리다고 생각했던 막내 왕자가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기뻐했습니다. “아바마마, 이 신비로운 우물물을 마시면 건강해지실 것이옵니다.” 막내 왕자가 공손하게 물병을 바치자 황제는 흡족한 얼굴로 꿀꺽꿀꺽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황제는 괴로워하더니 물을 모두 토해 냈습니다. 며칠이나 묵은 바닷물을 마셨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막내 왕자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가 나섰습니다. 사실 막내와 저희는 길이 엇갈렸을 뿐입니다. 저희는 저희대로 물을 길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저희가 떠 온 물을 마셔 보십시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제는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가 가져온 물을 마셔 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막내 놈은 결국 나를 속인 거야. 황제는 막내 왕자를 나라에서 쫓아냈습니다. 막내 왕자는 억울했지만 아버지가 건강해지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산으로 올라가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한편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라의 여왕은 그 사이 막내 왕자의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자 여왕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막내 왕자가 있는 나라로 왔습니다. “신비로운 우물물을 가져간 왕자와 결혼하고 나라의 왕위를 주려고 합니다.”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는 여왕 앞으로 가서 서로 자기가 그 남자라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여왕이 물었습니다. “두 분 중 누가 제게 흔적을 남겼나요?” “흔적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자 여왕은 두 왕자가 모두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자기 아들을 불렀습니다. 당신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이 아이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불러 오세요.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가 막내 왕자를 쏙 빼닮았던 것입니다.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된 황제는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를 내쫓고 막내 왕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여왕은 막내 왕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어떤 흔적을 남겼나요?” “당신 손에서 반지를 빼고 발에서 양말을 벗기고 무릎에 표시를 해 두었지요.” 그 말에 여왕이 빙긋 웃으며 절을 했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제 남편입니다.” 마음이 착한 막내 왕자는 누명도 벗고 두 나라의 왕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쫓겨난 두 왕자는 산에서 양을 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시련을 견디면 행복이 온다. 유고슬라비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문화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져 유고슬라비아의 문화에서는 쉽게 동양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터키의 문화는 유고슬라비아 문화에 강하게 배어 있지요. 음악은 애절하고 슬픈 데 반하여 춤은 아주 빠르고 힘찬 것이 그런 영향력 때문입니다. 문학도 이런 경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늘 전쟁에 시달려 슬픔 에 잠긴 역사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시련과 맞서는 유고슬라비아 사람의 강인한 감성이 문학 안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고슬라비아 사람의 삶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민간 설화 역시 비슷하답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유고슬라비아의 험난한 역사를 담아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의 자리를 두고 서로 배신을 하는 왕자들, 하지만 정직한 마음의 막내 왕자는 추방을 당하면서도 결국 진실을 밝히고 궁으로 돌아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 행복이 온다.’ 는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의 강한 믿음이 민간 설화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다양한 민족이 만들어 낸 독특한 문화. 발칸 반도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연방 체제의 나라입니다. 세르비아 사람이 가장 많고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헝가리, 슬라브, 크로아티아, 집시, 슬로바키아,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우크라이나 사람 등 많은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세르비아 말을 공용어로 쓰고 있지만 각 민족은 자기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도 느낌이 다양합니다. 하지만 1940년대 말 공산화가 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문학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고 다양성도 많이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50년 대 중반부터 서구 문학의 경향과 표현 양식에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다시 민족 분열에 의한 전쟁으로 문학이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지정학적 위치로 전쟁을 다룬 영웅담 등이 많고 성서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이야기들이나 이슬람의 전설, 설화 등이 겨우 문학으로서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백만 파운드 지폐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광업 주식 중개업소 직원이었습니다. 내 취미는 요트를 타는 것이었는데, 한번은 너무 멀리 나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조난을 당했습니다. 다행히도 영국선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그 배의 목적지가 런던이었기에 나도 런던에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 내 모습은 엉망이었고 주머니에는 일 달러밖에 없었습니다. 싸구려 음식을 사 먹으며 그럭저럭 하루는 견뎠지만 다음은 막막했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허기진 배를 안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의 손을 잡고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아주 맛있어 보이는 배를 겨우 한 입만 먹고 바닥에 버리는 게 아닙니까? 입에서는 군침이 돌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지요. 나는 그것을 주워 먹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뒤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젊은이, 이리 와 보게.” 돌아보니 건물 이 층 창문에서 한 신사가 몸을 내밀고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집 앞으로 가 말쑥한 옷차림을 한 하인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가 이 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층에는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신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인 두 사람은 ‘런던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인이 은행에서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든 백만파운드 지폐 한 장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백만 파운드라면 엄청나게 큰돈이고 그 지폐는 보통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형은 백만 파운드 지폐를 사용할 수 없으니 굶어 죽을 것이라고 했고, 동생은 사용하기는 힘들겠지만 큰돈을 가지고 있는 만큼 어떻게 하든지 한 달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말다툼하다가 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마침 내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신사가 내게 봉투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젊은이, 이것을 가지고 가게.” 그 집에서 나와 봉투를 열어 보니 편지 한 장과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돈이 생긴 나는 먼저 근처 식당으로 달려가 마음껏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하루를 굶은 터라 음식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죠. 배불리 먹고 나서 음식 값을 내려고 봉투를 열어 돈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펼쳐 보고는 하마터면 기절을 할 뻔했습니다. 인쇄된 액수는 놀랍게도 백만 파운드였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백만 파운드 지폐를 주인에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음식 값을 치르고 남은 돈을 거슬러 주시오.” 백만 파운드 지폐를 받아 든 주인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멍청하게 서 있더니, 나를 존경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엄청난 부자께서 저희 식당을 찾아 주셨으니 영광입니다. 음식 값은 다음에 주십시오. 아니 앞으로도 음식 값을 받지 않을 테니 종종 찾아 주십시오.” 나는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백만 파운드짜리 지폐를 주다니요. 백 파운드짜리를 넣는다는 것이 실수로 바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내가 돈을 훔쳤다고 생각하여 신고라도 한다면 바로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까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두 분은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조금 전 문을 열어 주었던 하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한 달이오? 이거 야단났군.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없나요?” “떠나시면서 한 시간쯤 후에 선생께서 찾아와 여러 가지를 물어보겠지만 잘못된 것은 전혀 없으니 안심하시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터덜터덜 걷던 나는 갑자기 돈과 함께 봉투에 있던 편지가 생각났습니다. 당신은 돈 한 푼 없는 외국인이지만 똑똑하고 정직한 사람 같으니, 백만 파운드짜리 지폐를 한 달 동안 빌려 주기로 했소. 과연 백만 파운드짜리 지폐를 사용할 수 있을지? 또 사용한다면 그 가운데 얼마를 쓸지가 무척이나 궁금하다오. 한 달 뒤 당신이 집으로 찾아온다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것이오. 나는 한참 동안 생각했습니다. 만약 백만 파운드 지폐를 가지고 은행에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은행 사람들은 내게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을 것이고, 사실대로 답하면 당장 정신병원으로 보낼 것이 뻔했습니다. 세상에 백만 파운드나 되는 돈을 처음 보는 이에게 빌려 줄 멍청한 사람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두 신사는 여행을 떠나 한 달 후에나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런던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결국 나는 백만 파운드 지폐 한 장을 가지고 한 달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생각을 정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 졌습니다. 길을 걷던 나는 양복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당장 옷을 한 벌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옷을 한 벌 사고 싶은데요.” 내 모습은 엉망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배에서 지냈기에 세수를 못 해 얼굴에는 때가 끼어 있었고, 옷은 초라하다 못 해 거의 누더기였습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양복점 점원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아주 값싼 옷을 한 벌 가져왔습니다. 나는 기분이 상했습니다. “이 옷밖에 없나요?” “손님께는 이 옷이 어울릴 것 같아서요.” 양복점 점원의 비아냥거리는 태도에 나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좋소. 이것으로 하지요. 그런데 옷값은 며칠 있다 주어도 되겠소? 마침 잔돈이 없어서.” “아, 잔돈이 없으시다고요? 물론 선생 같은 분은 큰돈밖에 없으시겠죠.” 점원은‘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비꼬듯 말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입고 있는 옷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오. 이 옷값 정도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지만 그저 큰돈을 헐기가 귀찮아서 그러는 거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얼마나 큰 돈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가게는 런던에서도 가장 큰 양복점입니다. 선생께서 가지고 계신 큰 돈을 얼마든지 바꿔 드릴 수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 있소. 옷값을 뺀 나머지를 거슬러 주시오.” 내가 내민 백만 파운드 지폐를 살펴본 점원은 곧 표정이 굳게 얼어붙고 얼굴은 노란빛으로 바뀌더니 백만 파운드 지폐를 들고 양복점 사장에게로 허둥지둥 달려갔습니다. 잠시 후 양복점 사장이 달려 나와 말했습니다. “백만장자께서 저희 가게를 찾아 주시니 영광입니다. 이 옷을 입으십시오. 가장 좋은 천으로 가장 솜씨가 뛰어난 직공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는 줄자로 내 몸의 치수를 재어 부지런히 적으며 말했습니다. “저희가 예복, 외투, 셔츠 등 모든 것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양복 값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무슨 말씀을! 다음에 들를 때 주십시오. 백만장자께서 저희 가게를 찾아 주신 것만도 영광입니다.” 어디를 가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식당에 가서 아무리 고급 음식을 먹어도, 가게에서 비싼 물건을 사도 주인은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다녀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손님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던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내게 베풀어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니, 나를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나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최고급 호텔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돈 한 푼 지불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나는 삽시간에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가끔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백만 파운드 지폐를 가지고 다닌다는 사람이!” 어느 날 나는 대사가 여는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갔고, 그곳에서 내 운명을 바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내가 미국 은행에서 근무할 때 도움을 준 사업가 헤이스팅즈였고, 또 한 사람은 포셔 랭검 양이었습니다. “헨리 애덤스 아닌가? 자네가 그 유명한 백만 파운드 지폐의 신사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헤이스팅즈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얘기해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데 저기 있는 금발의 아가씨는 누구지?” “대사 딸의 친구인 포셔 랭검이라는 아가씨야. 올해 스물두 살이라네. 첫눈에 반한 모양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헤이스팅즈의 말 그대로 한눈에 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랭검 양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랭검 양에게 빠져 들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랭검양에게 만나자는 말을 했고, 랭검 양 역시 내가 싫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랭검 양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결혼을 해서 생활하려면 고정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확실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백만 파운드짜리 지폐가 있지만, 이제 곧 두 신사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돌려주어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어느 이른 아침에 누군가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습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잠옷을 입은 채로 문을 열었습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헤이스팅즈였습니다. “이보게, 제발 나 좀 도와주게.” “무슨 일인지 얘기부터 해 보게나.” 나는 하품을 하며 의자에 앉았습니다. “실은 오래전에 이십만 파운드를 광산에 투자했다네. 이번에 자금이 더 있어야 하는데, 은행에서 보증을 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네. 제발 보증을 서 주게. 아니면 나는 전 재산을 잃게 될 거야.” 헤이스팅즈는 무척이나 다급한 듯 말했습니다. “뭐 그 정도 일로 야단인가? 세수나 하고 나서 함께 은행으로 가세.” “정말인가? 고맙네.” 나는 은행으로 가서 기꺼이 헤이스팅즈를 위해 보증을 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행운이 따랐습니다. 백만 파운드 지폐의 주인이 보증을 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헤이스 팅즈의 광산에 투자를 했고, 덕분에 그 가치는 세배가 넘게 올랐습니다. 원금을 빼고 나머지 금액을 둘이 나누니 헤이스 팅즈와 내게 각각 이십만 파운드가 생겼습니다. 돈이 생긴 것보다 더욱 기쁜 것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고민을 많이 했는데, 친구를 도운 일이 내게도 이득을 가져다주어 이제는 떳떳하게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백만 파운드 지폐를 가지고 생활한 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왔을 두 신사를 만나기 위해 랭검 양과 함께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는 하인을 통해 자세히 들었네. 우리가 빌려 준 그 지폐는 가지고 있나?” “여기 있습니다.” 나는 지폐를 내밀었습니다. “어허! 내가 지고 말았군. 그래 젊은이 소원을 이야기해 보게. 자네가 이 지폐를 가지고 한 달을 지내면 내가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두 신사 가운데 형인 듯한 사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왜 말이 없나?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주겠네.” “아닙니다. 지폐를 빌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지요.” 나는 신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랭검 양이 일어서서 신사에게로 다가가더니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습니다. “아빠! 이분은 나 같은 여자는 싫은가 봐요. 아빠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저를 준다고 해도 싫다니 말이에요.” 나는 몹시 놀라 소리쳤습니다. “아빠라니요? 그러면 이분이 당신의." “예, 그래요.” 랭검 양의 대답에 나는 신사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소원이 생겼습니다. 따님을 제게주십시오. 결혼하고 싶습니다.” 얼마 후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나는 랭검 양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영국 은행은 내가 가졌던 백만 파운드 지폐에 ‘무효’ 라는 도장을 찍어 돌려주었지요. 이제 그 백만 파운드 지폐는 한 푼의 가치도 없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해 준 기념품이니 액자에 곱게 넣어 우리 집 거실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백만 파운드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보낸 한 달 동안의 내 이야기가 알려져 두고두고 런던 시민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1835 1910)의 본명은 새뮤엘 랑호르네 클레멘스입니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로 태어난 마크 트웨인은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했습니다. 그 뒤 미국의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1857년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으로 지내면서 작품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트웨인의 대표작인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모두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트웨인의 이러한 경험 때문입니다. 소설을 발표하면서‘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썼는데, 마크 트웨인은 뱃사람들이 쓰는 말로, ‘안전 수역’이라는 뜻입니다. 트웨인이 작가 생활을 할 당시, 역사가 짧은 미국은 화려한 문명과 역사의 유럽 국가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트웨인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트웨인의 작품에는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 건강하고 활기에 찬 미국인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대부분 아름다운 미국의 자연을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대표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클베리 핀의 모습을 통해 아직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단편인 백만 파운드 지폐에서는 돈이면 모든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돈 한 푼 없는 신세이지만 우연히 얻은 백만 파운드 지폐 한 장으로 런던 최고의 유명 인사가 되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까지 합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백만 파운드 지폐 한 장 앞에서 순식간에 행동이 바뀌는 욕심 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몹시 어리석어 보입니다. 실제로 트웨인은 무척 부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물질만능 주의에 빠져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잃는 것을 몹시 경계했습니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큰돈을 벌었지만 트웨인은 미시시피 강에서 수로 안내인을 하던 소박한 시절에 얻은 교훈을 평생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십 년 후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밤 열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거리 저쪽 끝에서 작은 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순찰을 돌고 있는 경관이었습니다. 경관은 손에 익은 경찰봉을 빙빙 돌리면서 가끔씩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리와 집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챙이 달린 모자에 푸른 제복을 입고 의젓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이 약간 거드름을 피우는 듯 보였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관의 습관이었지요. 경관은 건장한 체격에 마음씨도 좋았으며, 태도가 의젓해 경찰관의 본보기라고 할 만했습니다. 경관이 순찰을 담당하는 이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성실한 사람들이었고, 시끄럽게 떠들거나 밤늦도록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밤이 꽤 깊은 시간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쉬고 있었고, 문이 닫힌 회사나 관청의 건물은 불이 꺼져 있었지요. 가끔 담배 가게나 밤새도록 장사를 하는 가게의 불빛이 보이긴 했지만,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늦은 시간에 조용한 거리를 순찰할 때면 경관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신이 마을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다는 뿌듯함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큰 사건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순찰은 항상 변함이 없지만 늘 새롭기도 했습니다. 의젓한 걸음으로 천천히 걷던 경관은 갑자기 걸음을 늦췄습니다. 불빛도 없는 철물상 앞 컴컴한 곳에 한 사나이가 불을 붙이지도 않은 담배를 물고 서 있었습니다. “순찰 중이신가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경관이 다가가자 사나이는 경관을 안심시키려는 듯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경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나이를 바라보았습니다. 하긴 늦은 밤, 낯선 사람이 으슥한 곳에 서 있으니 경관으로서는 당연히 살펴봐야 하겠지요. 사나이는 경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친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십 년 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했지요. 하긴 이십 년이라면 무척 오래된 일이니 좀 이상하긴 하지요?” 경관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나이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십 년 전 바로 이 자리에는 식당이 있었지요. ‘빅 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브레디가 경영했던 식당이지요.” “브레디의 가게 말입니까? 맞아요. 스테이크 맛이 좋았지요. 그 가게는 오 년 전까지도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경관의 얼굴에는 비로소 경계하는 빛이 사라지고, 마치 오랜 고향 친구를 만난 듯 친근한 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습니다. 건물을 등진 채 서 있던 사나이는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성냥불에 언뜻 창백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 각진 턱과 오른쪽 눈썹 옆 조그만 흉터가 보였습니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은 한눈에 고급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비싼 것이었습니다. “이십 년 전 오늘 밤, 나는 브레디의 식당에서 지미 웰즈라는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지미는 나와 가장 친한,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친구였지요. 그 친구와 나는 이 뉴욕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우린 형제나 다름없었죠. 그때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지미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사나이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이튿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서부로 떠날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함께 저녁을 먹은 것이죠. 나는 지미에게 함께 서부로 가자고 여러 번 말했어요. 하지만 지미는 뉴욕을 떠나기 싫어했고, 결국 나 혼자 가기로 했죠. 그 친구는 세상에서 뉴욕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경관이 불쑥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 말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잖습니까? 뉴욕은 분명 좋은 곳이니까요.” “그런가요?” 사나이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가난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같이 했어요. 그래서 더 형제처럼 가까워졌고요. 그런 친구와 헤어져야 하니 무척이나 섭섭했지요. 그래서 약속을 했습니다. 꼭 이십 년이 지난 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요. 이십 년이라면 꽤 긴 세월이니 많이 변하겠지만, 어떤 모습으로 살더라도 또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다시 만나 자고 다짐했지요. “그거 참 재미있군요. 하지만 이십 년이라는 세월은 좀 긴 것 같군요. 어쩌면 약속했다는 사실조차 잊을 수도 있을 텐데요.” “젊은 시절 한때의 기분으로 약속했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주 진실된 마음이었기에 그런 일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서로 헤어진 뒤로는 통 연락이 없었나요?” 경관이 물었습니다. “아니요. 처음 얼마 동안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무척 자주 편지 를 썼고 바로 답장이 왔지요. 그러다가 한두 해가 지나자 소식이 끊기고 말았어요. 바쁜 생활을 하는 만큼 편지를 쓸 시간도 없었지만, 내가 사는 곳을 자주 옮겼기 때문에 편지가 제때에 배달되지 않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그만 연락이 끊어지고 만 것이죠. 그래도 지미는 반드시 나를 만나러 여기로 올 겁니다. 죽지 않았다면 말이죠. 절대 약속을 잊을 리가 없어요.” “친구에 대한 믿음이 정말 강하군요.” “지미는 정말 진실한 친구였습니다. 절대 약속을 잊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 왔어요. 이십 년 전의 약속대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옛 친구를 기다리는 사나이는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았습니다. 뚜껑에는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고급 시계였습니다. “열시 삼 분 전이네요.”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열시 정각이었어요. 우리가 브레디네 식당 앞에서 헤어진 것이.” 사나이는 이십 년 전 친구와 헤어질 때를 떠올리는 듯했습니다. “당신은 서부에 가서 돈을 많이 벌었나요?” 경관이 물었습니다. “물론이지요.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꽤 많이 벌었어요. 지미도 아마 어느 정도 성공해서 살고 있을 겁니다. 지미는 좀 둔한 편이었지만 정직하고 착한 성품이니까요. 나는 서부에서 남의 돈을 빼앗으려 눈에 불을 켠 약삭빠른 사람들과 경쟁했지요. 서부는 뉴욕하고는 완전히 달랐어요.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는 곳이에요.” “고생을 많이 했겠군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이야기 잘 들었소.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구려. 계속 순찰을 돌아야 하니까 말이오.” 경관은 가볍게 손을 들어 모자챙에 붙여 사나이에게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렸습니다. 경찰봉을 빙빙 돌리면서 걸어가던 경관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오. 만약 친구가 늦는다면 어느 정도나 기다릴 생각인가요?” 사나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뭐, 삼십 분 정도는 기다려야겠지요. 사정이 있어서 늦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친구는 살아 있다면 반드시 올 겁니다.” “당신 친구가 틀림없이 오기를 바라오.” “예, 고맙습니다. 경관 나리.” “행운을 빕니다.” 경관은 다시 등을 보이고는 의젓한 걸음걸이로 걸어갔습니다. 간간이 불어오던 바람이 점점 세차졌고 차가운 이슬비까지 내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옷깃을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찌르고는 종종 걸음으로 지나갔습니다. 경관 외에 마을에서 본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천 마일이라는 먼 길을 달려온 사나이는 철물상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요? 길고 두꺼운 외투를 입고 깃을 귀밑까지 세운 키 큰 사나이가 급한 걸음으로 길을 건너오더니 곧바로 철물상 앞에 서 있는 사나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봅?” 그 사나이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는 투로 말했습니다. “지미 웰즈?” 철물상 앞에서 기다리던 사나이가 큰 소리로 외쳤고, 길을 건너온 사나이는 상대의 두 팔을 붙잡고 흔들며 말했습니다. “틀림없는 봅이로구나. 살아 있다면 반드시 만날 줄 알았다. 이십 년이라니,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옛날 식당은 없어졌고. 만약 있었다면 거기서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방금 전 순찰을 돌던 경관이 그 식당은 오 년 전에 없어졌다고 하더군.” “그래, 서부는 어땠어?” “대단했지.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다 있었으니까. 고생도 많이 했지만 돈도 꽤 벌었지. 이야기를 하자면 며칠 밤을 새더라도 모자랄 거야.” “하긴 그렇겠지. 서부는 넓은 곳이니까.” “그나저나 너도 많이 변했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키도 훨씬 크고 말이야.” 지미는 약간은 어색하게 답했습니다. “스무 살이 넘어서 갑자기 컸지.” “어떻게 지냈어, 지미? 무슨 일을 하고?”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지. 지금은 시청에 근무해.” “시청에 근무한다고? 과연 착실한 너답구나. 너는 어려서부터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했지.” “가자, 봅. 내가 잘 아는 집에 가서 천천히 지난 얘기나 나누자.” 지미와 봅은 팔짱을 끼고 걸어갔습니다. 봅은 걸어가는 동안에도 지난 이야기와 성공담을 섞어 가며 줄줄이 풀어 놓기 시작했고, 지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길모퉁이에 불을 환하게 밝힌 약국이 있었습니다. 약국 앞을 지나던 지미와 봅은 넓은 창으로 흘러나오는 밝은 불빛에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봅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풀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넌 지미 웰즈가 아냐.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이렇게 얼굴이 바뀔 수는 없어.” 그러자 키 큰 사나이는 천천히 외투 깃을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십 년이란 세월은 착한 사람을 나쁘게 만들 수는 있지.” 사나이의 말에 봅은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당신은 끌려가고 있는 거요, 봅. 시카고에서 전보가 왔소. 당신이 이쪽으로 온 것 같다는. 자, 순순히 따라오겠소?” 봅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반항하는 빛도 없었습니다. “여기 당신에게 전하라는 편지가 있으니까 경찰서에 도착하기 전에 읽어 보시오. 당신 친구인 지미 웰즈가 쓴 편지요.” 봅은 키 큰 사나이가 내미는 편지를 받아 펼쳤습니다. 편지를 읽던 봅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봅에게! 나는 정확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갔다네. 이십 년 전의 약속을 잊지 않았거든. 그런데 자네가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나는 시카고에서 지명 수배를 내린 사나이의 얼굴을 보았다네. 자네가 범죄자가 되다니, 너무 가슴이 아팠네. 하지만 더욱 슬픈 것은 내가 자네를 체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네. 나는 경관이니까 말일세. 그러나 자네를 내 손으로 체포할 수가 없었네. 어쨌거나 우리는 오랜 친구 아닌가? 그래서 친구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일을 다른 경관에게 부탁했네. 부디 새사람이 되어 주게. 친구 지미가. 편지를 읽고 난 봅은 넋이 나간 듯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고, 지미 행세를 하던 경관은 봅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혹시라도 봅이 도망칠지도 모르기에 긴장을 늦추지는 않고서 말입니다. 몇 분이 지나자 경관은 봅의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봅은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경관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습니다. 단편 소설의 귀재. 오 헨리의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입니다. 1862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버러에서 태어난 오 헨리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제대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카우보이, 점원, 직공 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 오 헨리는 어렵게 생활하다가 결혼을 했고, 은행에서 근무하며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 공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삼 년 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오 헨리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직업과 아픈 경험 등을 소재로 서부의 마음, 사백만 등의 단편을 발표하여 인기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대표작 마지막 잎새를 비롯해 경관과 찬송가, 현자의 선물, 운명의 길, 이십 년 후 등 300편 가까운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오 헨리는 러시아의 체호프, 프랑스의 모파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소외당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 오 헨리는 인간의 따뜻한 웃음과 깊은 슬픔을 짧은 소설로 아주 잘 표현합니다. 오 헨리의 소설은 주로 미국 남부나 뉴욕의 뒷골목에 사는 가난한 서민의 삶을 다루고 있지요. 오 헨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표현과 교묘한 화술로 그려 냅니다. 이십 년 후도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특히 이십 년 후에는 오 헨리가 젊은 시절 겪은 여러 직업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오 헨리는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에서 소외받는 범죄자들을 따뜻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오 헨리는 가난한 서민들의 아픔은 돈이나 권력으로가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이나 친구들의 위로로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 헨리의 소설은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어 이야기의 흐름을 반전시키며 결말을 맺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십 년 후, 크리스마스 선물, 구르는 돌 등이 그러한 작품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네가 낙제 점수를 받은 건 당연한 일이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깐깐한 스펜서 선생님이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홀던 콜필드! 너처럼 불성실한 학생은 처음이다.” 선생님의 마지막 호통에 나는 조용히 대꾸했습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스펜서 선생님께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다니는 펜시 예비학교에서는 네 과목 이상 낙제 점수를 받으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나는 스펜서 선생님의 역사 과목뿐 아니라 수학을 비롯한 다른 세 과목에서도 낙제 점수를 받았습니다. 나는 퇴학생이 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학교를 싫어한 다는 말이 더 맞을 겁니다. 나는 학교가 싫습니다. 내가 다니는 펜시 예비학교는 미국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 고등학교입니다. 해마다 많은 펜시 예비학교 졸업생이 하버드나 예일, 프린스턴 같은 명문 대학에 진학하지요. 게다가 학생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 출신들입니다. 아버지는 뉴욕에서 꽤 알려진 변호사입니다. 아들인 나도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라시며 펜시 예비학교에 보내 셨지만 불행히도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친구들의 교만함이 나를 화나게 했습니다. 펜시 예비학교 학생들은 이웃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친구들을 얕봅니다. 자기들 집안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게다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고 몹시 시기합니다. 겉으로는 늘 웃으면서 친한 척하지만 뒤돌아서서는 친구와 자신의 성적을 비교해 보 며 이를 갈기도 합니다. 특히 나와 기숙사 방을 같이 쓰는 스트라이레이더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녀석입니다. 그 녀석은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만합니다. 자기 말에 맞서는 의견을 말하면 누구든지 적으로 여기고 따돌리기 일쑤입니다. 아무리 학교가 싫다고 해도 퇴학당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입니다. 더욱이 크리스마 스 날 퇴학생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면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긋지긋한 스트라이레이더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퇴학이 즐겁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 나는 그 녀석을 싫어합니다. “야, 홀던! 그게 사실이냐? 네가 쫓겨난다는 소문 말이야!” 내가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친구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들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사실은 고소해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었습니다. 화가 치민 나는 녀석들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고 방으로 들어와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유감이군그래.” 스트라이레이더가 심술궂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홀던 콜필드! 난 너랑 더 친해지고 싶었어. 너희 형이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라면서? 너하고 잘 사귀어 두면 영화 촬영장에도 가고 영화배우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말이야.” 스트라이레이더의 말에 나는 화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당장 나가!” 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짐을 챙겼습니다. 녀석들은 피식 웃더니 어슬렁거리며 방을 나갔습니다. 형에 대한 말을 하다니, 스트라이레이더는 정말 나쁜 녀석입니다. 그래요. 녀석의 말대로 우리 형은 할리우 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형은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썼지요. 가끔 재미있는 동화를 써서 나와 여동생 피비, 남동생 앨리에게 읽어 주었 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겉모습만 멋지고 머리는 나쁜 영화배우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형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피비와 앨리만은 사랑합니다. 초등학교 삼 학년인 피비는 예쁘고 영리한 소녀입니다. 나를 아주 잘 따르고 내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동생이지요. 남동생 앨리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만약 앨리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같이 펜시 예비학교에 다녔다면 나는 학교생활을 좀 더 잘 견뎌 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앨리는 죽었습니다. 빨간 머리 앨리는 아주 다정다감하고 명랑한 아이 였습니다. 야구와 시를 좋아했지요. 얼마나 시를 좋아하는지 야구 장갑에 깨알만한 글씨로 시를 써 놓고는 야구하는 틈틈이 읽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주근깨가 있는 앨리의 웃는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깨알만한 글씨로 시를 써 놓은 앨리의 야구 장갑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 집에 가면 피비에게 뽀뽀를 해 주고 앨리의 무덤에 꽃을 놓아 줄 생각입니다. 아직 부모님께는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어제 학교에서 집으로 성적표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마 크리스마스 다음 날쯤이면 부모님도 내가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겠지요. 적어도 그때까지만이라도 퇴학 소식을 부모님께 감추고 싶습니다. 가족들이 나 때문에 우울한 기분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것은 마음 아프니까요. 짐 가방을 들고 교문을 나서다가 학교를 돌아보았습니다. 오래된 벽돌 건물과 담쟁이넝쿨, 진한 초록색이 도는 지붕과 반원형 창문들. 정이 들었을 만도 한데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교문을 빠져나오자 내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인한테 전화라도 한번 해 볼까?’ 아, 제인! 제인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푸른 눈에 빛나는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제인! 내가 제인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제인이 나처럼 책을 좋아하고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제인은 펜시 예비학교에서는 좀 떨어진 다른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지금쯤은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와 있을 것입니다. 제인은 나와 한동네에 삽니다. 우리를 이어 준 것은 제인이 키우는 강아지였습니다. 제인의 강아지가 우리 집 정원에 오줌을 누고 달아나는 일이 자꾸 일어나자 우리 어머니와 제인의 어머니가 다투셨습니다. 그 일로 제인과 나도 만나게 되었지요. “강아지 문제는 신경 쓰지 마.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리고 너희 집 강아지는 정말 예뻐.” 내가 이렇게 말하자 제인은 빙긋 웃었고 그날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퇴학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제인의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저녁 늦게 학교를 나섰기 때문에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습니 다.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기차역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그 불빛 을 보자 왠지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차 시각을 물어보았습니다. “뉴욕으로 가는 야간 기차는 열 시 반에 있습니다.” 역무원의 말에 나는 뉴욕행 야간 기차 표를 한 장 샀습니다. 어두운 승강장에는 가로등이 몇 개 쓸쓸히 서서 희미한 빛을 던져 주고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어둠 속에 뻗어 있는 철길을 바라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철길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그렇게 혼자 앉아 있자니 외로워졌습니다. 내가 퇴학당한 사실을 아시면 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내시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겠지요. 불쌍한 피비는 부모님의 기분을 헤아리느라고 눈치를 보고 지낼 것입니다. 제인의 어머니는 내가 제인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시겠지요. ‘아, 정말 난 혼자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오자 갑자기 서러워졌습니다. 그때 기차가 굉음을 내며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릅니다. 기차에 올라타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기차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집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후 한 부인이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 않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펜시 예비학교에 다니나요? 교복을 보니 우리 아들 교복이랑 같은데...” 부인이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나는 난처했습니다. 혹시 나를 잘 아는 아이의 어머니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펜시 예비학교에 다닙니다. 루돌프 슈미트입니다.” 부인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던 나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 그래? 우리 아들 이름은 어네스트야. 어네스트 모로.” 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부인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부인과 어네스트는 얼굴이 아주 닮았으니까요. 어네스트 모로라면 거만하기로 이름난 친구입니다. 걸핏하면 선생님께 고자질을 하고 친구들을 이간질하는 녀석이지요. 그러나 부인은 어네스트가 그렇게 한심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겠지요. 나는 어네스트의 행실에 대해 다 말해 버릴까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렇게 상냥한 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네스트는 아주 다정하지요. 정직하기도 하고요. 펜시 예비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생입니다.” 내 말에 부인은 정말로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짐 가방을 보더니 피해 가고 싶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네. 집에 가는 거니? 어네스트 편지에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방학이 라고 하던데... 학생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니?” 나는 머뭇거리다가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지요. “아뇨. 집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좀 아파서요.” 내 대답에 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저런! 어디가 얼마나 아픈데? 심각한 병이니?” “아뇨. 별것 아닙니다. 뇌에 조그만 혹이...” “혹이라고?”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습니다. 내가 둘러대자 부인은 조금 안심한 듯했지만 여전히 걱정이 남은 얼굴로 나를 바라 보았습니다. 이렇게 상냥한 부인을 걱정시키다니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남을 속이려고 거짓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재미있는 상상을 하다가 엉뚱하게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해 결국 거짓말을 한 꼴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행히 부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습니다. 이제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무심히 창밖을 보니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는 문득 황금색 호밀밭을 지나는 상상을 했습니다. 언뜻언뜻 불빛에 비치는 들판은 아름다운 황금색 호밀밭 같았습니다. ‘태양 아래서 본다면 얼마나 눈부실까?’ 문득 나는 호밀밭을 자유롭게 달려 보고 싶어졌습니다. 죽은 앨리와 귀여운 피비, 그리고 그 또래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뛰어노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행복해 보입니다. 나는 호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 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혹시 넘어지거나 다치는 아이가 있을까 봐 걱정하면서요!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에 기쁨이 가득 차는 것 같았습니다. 기차는 밤 열두시가 넘어서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기차역을 빠져나왔습니다. 뉴욕은 밤을 모르는 도시입니다. 높은 건물과 간판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일찍 잠자리에 든 사람도 있겠지요. 이제 나는 집으로 가야 합니다. 부모님은 아직 주무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뉴욕의 유명 인사인 아버지는 밤에도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자리에는 어머니도 함께 가십니다. 그러다 보니 두 분은 늦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계실 때가 많습니다. 만약 지금 집에 들어가다가 부모님과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만 이럴 때는 좀 곤란합니다. 상대가 부모님입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부모님께 어떤 거짓말이 통할 수 있겠어요! 방학도 되지 않았는데 불쑥 집에 온 나를 보면 부모님은 분명히 의심하실 겁니다. 더욱이 그동안 내 성적이 좋지 않아 학교에 몇 번 불려오신 적이 있기 때문에 내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실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는 얼마나 끔찍해질까요? 오늘 밤 나를 재워 줄 만한 몇몇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들 대부분은 예비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쯤 학교 기숙사에서 자고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하룻밤 재워 줄 정도로 친한 친구들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공상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상대는 제인뿐입니다. 나는 제인이 다니는 학교가 방학을 일찍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제인의 집에 전화를 한다면 나는 무례하고 뻔뻔한 아이로 찍힐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아지 사건으로 나와 우리 가족을 못마땅해 하시는 제인의 어머니는 나와 제인을 만나지 못하게 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추운 겨울에 한데서 가방을 끌어안고 졸다가는 얼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호텔에서 하루 묵기로 했습니다. 호텔 앞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나는 열여섯 살이지만 키가 크고 어른스럽게 생겨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청년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좀더 목소리를 어른스럽게 꾸미고 침착하게 행동한다면 호텔 직원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호텔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호텔 직원들은 눈에 졸음을 달고 있었습니다. 다들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습니다. “하룻밤 묵으려고 합니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굵게 내며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 숙박계에 서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호텔 직원은 한 점 의심도 없이 내게 숙박계를 내밀었습니다. 이름과 나이, 주소를 쓰는 칸이 보였습니다. 나는 적당히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주소도 거짓으로 꾸몄습니다.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는구나.’ 호텔 직원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괴롭히거나 속일 마음이 없는데도 이렇게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니 나는 점점 더 기분이 우울해졌습니다. 안내받아 들어간 방은 몹시 좁고 더러웠습니다. 게다가 창문 밖으로는 바로 옆 건물 의 우중충한 벽이 보였습니다. 그런 방에 있는 게 싫어서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식당에서는 어른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고 있을 뿐 내 또래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완전히 외톨이였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호텔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아, 이 호텔 근처에 커다란 공원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 공원 안에 있는 맑은 연못도 생각났지요. 내가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연못가에 앉아 얼어붙은 연못을 바라보았습니다. 전에는 예쁜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추워져서 우리 안으로 들어갔나 봅니다. 앨리가 살아 있었을 때 우리는 곧잘 이곳에 놀러 왔습니다. 앨리, 피비, 형, 나, 이렇게 넷이서 연못가에 앉아 오리를 구경했지요.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입니다. 형은 할리우드로 가고 앨리는 하늘나라로 갔으니까요. 연못가에 앉아 나는 앨리를 떠올렸습니다. 앨리의 장례식이 생각났습니다. 앨리는 겁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그런 앨리를 땅에 묻다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하루도 더 못 살 것처럼 슬피 울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다들 앨리를 조금씩 잊었습니다. 지금은 앨리의 무덤에도 잘 찾아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꼭 앨리의 무덤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어지러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밤새 한잠도 자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대로 있으면 몸살이 날 것 같아 호텔로 돌아와 죽은 듯이 잠을 잤습니다. 지금은 나를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스스로 나를 돌보아야 합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좀 나아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호텔 직원들의 눈치가 이상했습니다. 밤에는 무심히 넘겼지만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내가 미성년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벌써 나를 경찰서에 신고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가능한 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서둘러 밥을 먹고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습니다. 막상 갈 곳이 없어서 거리를 서성거리는데 어디선가 피비가 좋아하 는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노래는 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 습니다. 나는 얼른 음반 가게로 들어가 피비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서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에는 밤에 몰래 들어가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게다가 나는 몹시 외로웠습니다. 함께 있어 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바쁘다거 나 피곤하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외로움과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갑자기 호밀밭이 떠올랐습니다. 그 넓은 호밀밭, 시원하게 뻗어 있는 호밀밭! 나는 호밀밭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 거기로 가자! 그리고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나는 넓은 호밀밭이 있는 서부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곳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피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정한 여동생 피비에게만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고 싶었습니다. 나는 식구들이 모두 잠드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열쇠로 문을 열고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비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피비를 깨웠습니다. “일어나 피비, 내가 왔어. 홀던 오빠가 왔단 말이야.” 눈을 뜬 피비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음반을 내밀자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음반은 깨져 있었습니다. 나는 몹시 미안했지만 피비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고마워, 오빠. 소중히 간직할게.” 이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음반을 책상에 올려놓던 피비는 갑자기 물었습니다. 퇴학당한 이야기, 호텔에서 묵은 이야기, 이제 호밀밭이 펼쳐진 서부로 혼자 떠날 거라는 이야기...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피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자 피비는 내 볼에 입을 맞춘 다음 지갑에서 돈을 찾아 내밀었습니다. “여행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거야. 오빠는 돈이 별로 없지? 내가 빌려 줄게.” 피비에게 돈을 받으며 나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런데 말해 줄 수 있어? 호밀밭에서 무슨 일을 할 거야?” 피비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호밀밭은 아이들이 뛰놀기 좋잖아. 나는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도록 할 거야. 그런데 놀다 보면 넘어지거나 다치는 아이도 있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절벽으 로 달려가는 아이도 있을 거야. 나는 그런 아이들이 하나도 다치지 않고 즐겁게 놀수 있도록 지켜 주는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나는, 한마디로 말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내 말에 피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환히 웃어 보였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고? 왠지 멋있을 것 같아. 하지만... 오빠랑 헤어지는 건 싫어. 아무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씀드려야겠어.” 피비의 말에 나는 펄쩍 뛰었습니다. “너까지 비밀을 지켜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혼자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습니다. 피비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있었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창문 으로 뛰어내린 나는 허겁지겁 어둠 속을 달렸습니다. 피비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어느새 시내 한복판까지 왔습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어지러웠습니다.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자동차 한 대가 내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나는 자동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면 서도 비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대로 자동차에 치이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학교, 퇴학, 부모님의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이 모든 것들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앨리가 생각났습니다. “형! 어서 피해!” 앨리가 외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음 순간 나는 앨리의 이름을 부르며 옆으로 몸을 굴렸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자동차 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내가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피비에게 짧은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피비! 아무래도 오빠는 좀 더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내 힘으로 여행 경비를 마련해서 서부로 떠날 거야. 점심시간에 학교 앞에서 잠깐 만나자. 돈을 돌려줄게.” 피비가 다니는 학교로 간 나는 편지를 교장 선생님의 비서에게 주며 피비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피비가 다니는 학교 앞으로 갔더니 저만치서 피비가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피비를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피비가 여행복 차림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도 오빠랑 같이 갈 거야. 서부의 호밀밭에 같이 갈 거야.” 야무지게 말하는 피비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나는 일단 피비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근처에 있는 놀이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피비에게 회전목마를 타라고 했습니다. “오빠, 도망 안 가고 여기 있을 거지?” 피비는 몇 번이나 다짐을 받더니 겨우 회전목마에 탔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를 탄 피비가 나를 보며 웃었습니다. 그런 피비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가 떠나면 피비는 또 눈물을 흘리겠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슬퍼하실 거야. 그리고 앨리도 내가 이렇 게 방황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회전목마를 타며 웃는 피비를 나는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이들을 지켜보듯이 사랑스러운 동생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회전목마가 멈추면 피비의 손을 잡고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은둔의 삶을 사는 귀재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19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계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린스턴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모두 중퇴했습니다. 그러다가 1939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문학 수업을 받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샐린저는 1940년 '젊은 사람들'을 발표한 후 많은 단편 소설을 썼으며, 1942년에는 군대에 들어가 세계 대전에도 참가했습니다. 특히 1944년까지는 제4사단의 정보부에서 일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독일의 비밀 경찰을 잡아내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샐린저의 작품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호밀밭의 파수꾼'이 큰 관심을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샐린저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샐린저는 텔레비전 출연이나 신문 인터뷰에 절대로 응하지 않고 지금도 산속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살며 소설만 쓴다 고 합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청소년 문학 1951년 '뉴요커' 에 발표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가출한 사춘기 소년이 며칠 동안 겪는 세상 경험과 마음의 변화를 독백 형식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원작 '호밀밭의 파수꾼'은 예민하고 반항적인 사춘기의 주인공이 ‘허위로 가득 찬’ 어른의 세계에서 도피하여 순수와 진실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정신병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한때 미국의 많은 중고등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된 적 도 있습니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은 문학, 영화, 음악 등 문화계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대표적 성장 소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내 이름은 제제, 올해 다섯 살입니다. 우리 집은 브라질의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식구가 많습니다. 아빠, 엄마, 릴리 누나, 자린다 누나, 글로리아 누나, 또또까 형, 나, 막내 루이스가 같이 살고 있습니다. 글로리아 누나와 또또까 형 사이에 누나가 한 명 더 있는데 북부에 있는 먼 친척 집으로 보냈습니다. 우리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지요. 아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 다니셨는데, 사장 아저씨랑 싸운 뒤에 그만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집세가 여덟 달치나 밀려서 곧 비워 주어야 합니다. 새로 이사 갈 집을 얻기 위해서 릴리 누나와 엄마는 공장에 나가 일합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누나와 자린다 누나가 나와 또또까 형과 막내둥이 루이스를 보살펴 줍니다.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 와서 엄마와 아빠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할 때, 생활비가 떨어져서 엄마가 이웃집에 가서 어렵게 돈을 꾸어 오며 눈물을 흘리실 때, 이럴 때마다 나는 언젠가 시인이 되어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낼 때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말썽만 피우면서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래? 네 안에는 작은 악마가 들어 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개구쟁이일 리가 없지 않니?” 내가 장난을 많이 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동네는 나 때문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으니까요. 엄마와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저지른 말썽 때문에 이웃에게 사과하러 다니기 바쁘십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나를 귀여워합니다. 물론 장난을 치면 꾸중하지만 어느새 금방 화를 풀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요. 가족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아이라니, 좀 이상한가요? 먼 친척인 에드문드 아저씨도 나를 무척 예뻐하십니다. 내가 말썽을 부려도, 이따금 고집을 피워도 아저씨는 내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죠. “제제! 너는 네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별과 태양이 될 거야.” 에드문드 아저씨 말대로 내가 나중에 별이나 태양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집안의 말썽꾸러기입니다. ‘이웃들은 내 장난을 웃어넘기는데 왜 우리 가족은 내가 조금만 장난을 쳐도 때릴까?’ 아주 어렸을 때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다섯 살이 되니 조금 철이 들어서 그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내 장난을 받아 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집주인은 마지막이라며 집을 비워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서둘러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집을 계약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다음 날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 갈 겁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전기세를 오랫동안 내지 못해 전기 회사에서 전기를 끊어 버린 것입니다. 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더 이상 살기 싫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가 새집을 구경하러 가지 않겠냐고 하셨을 때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날 오후 엄마가 앞장을 서고 나, 루이스, 또또까 형, 글로리아 누나, 자린다 누나, 릴리 누나 모두 함께 새집을 보러 갔습니다. 새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여전히 방구 시 안에 있었습니다. 새집으로 가려면 철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빵 빠앙!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철길을 밟고 달려오는 빨간 기차를 보고 기뻐서 함성을 질렀습니다. “망가라치바! 망가라치바!” 나와 또또까 형은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 기차의 이름이 ‘망가라치바’였거든요. 그런데 문득 나는 그 빨간 기차가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있고 강하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위협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테고 또 나를 때릴지도 모르니까요. “바로 저 집이란다.” 엄마가 가리키는 곳에는 작고 아담한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지금 사는 집보다 많이 낡고 초라했지만 우리는 그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갑자기 글로리아 누나가 마당으로 달려가더니 망고 나무를 끌어안으며 외쳤습니다. “이건 내 나무!” 그러자 또또까 형도, 자린다 누나도, 릴리 누나도 나무를 한 그루씩 잡고 똑같이 외쳤습니다. 우리 남매는 늘 이런 식으로 자기 나무, 자기 꽃, 자기 그림을 정해 놓습니다. 나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나무를 한 그루도 차지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서둘러 뒷마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작고 어린 라임 오렌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실망해서 풀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글로리아 누나가 다가와 나무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어머, 정말 예쁜 라임 오렌지 나무구나. 내가 너만 한 아이라면 딴 나무는 바라지도 않겠다.” 그러나 나는 입을 비죽거렸습니다. “난 아주 커다란 나무가 좋단 말이야. 이 나무는 너무 작아서 타고 오를 수도 없잖아.” 글로리아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습니다. 잘 생각해 봐, 제제. 이 나무는 아직 어리잖아? 이제 곧 커다란 나무가 될 거야. 너도 지금은 어리지만 곧 어른이 되겠지? 나무랑 너랑 같이 자랄 거야. 그럼 너희는 형제처럼 사이가 좋아질 테고. 나는 글로리아 누나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앉았습니다. 누나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그냥 가 버렸습니다. 바로 이때 작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난 누나 말이 맞다고 생각해.”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라임 오렌지 나무만 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라임 오렌지 나무야, 혹시 지금 네가 말을 한 거니?” “응. 내 몸에 귀를 대 봐. 내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나무에 귀를 대 보았습니다. ‘탁탁’하고 무엇인가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무척 놀랐습니다. “혹시 너는 누구하고든 이야기할 수 있는 요술 나무니?” 내가 이렇게 묻자 라임 오렌지 나무는 한들한들 잎사귀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니.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제제 너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어. 얼마 전에 요정이 내게 와서 말하고 갔거든. 너처럼 자그마한 아이랑 친구가 되면 말할 수 있게 되고 아주 행복해질 거라고 말이야.” 나는 기뻐서 나무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너를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미안해. 커다란 나무보다 네가 훨씬 더 멋진 나무야.” 그러자 라임 오렌지 나무는 작은 키를 한껏 돋우면서 말했습니다. “나도 너를 태울 수 있어. 내 가지에 올라와 볼래?” 나는 조심조심 나뭇가지에 올라갔습니다. 보기보다 단단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에 앉자 바람이 불어와 흔들흔들 나뭇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마치 망아지를 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지 위에 앉아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나무의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밍기뉴! 밍기뉴가 어떨까? 귀엽고 사랑스럽잖아?’ “그래, 나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어느새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라임 오렌지 나무, 아니 밍기뉴가 불쑥 말했습니다. 아아, 정말 멋진 나무입니다. 밍기뉴를 꼭 끌어안은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집이 더 가난해지는 것도, 다정한 이웃들과 헤어지는 것도 더 이상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밍기뉴를 만난 기쁨도 며칠 후 다가온 크리스마스이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웃에 사는 비리끼뉴가 찾아와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상파울루 시내에 있는 오락장 앞에서 어린이에게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난감을 가득 실은 커다란 트럭이 와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짜로 선물을 준대. 그런데 꼭 어린아이에게만 준다고 하더라.” 나는 루이스의 손을 잡고 상파울루 시내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차비가 없어서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한참을 걷던 루이스는 발이 아프다고 칭얼거렸습니다. “형, 그냥 집으로 가자. 오늘 밤에 엄마, 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실 거잖아.” 나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루이스는 나보다 더 어려서 우리 집 사정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선물은커녕 저녁을 굶을지도 모릅니다. 집에는 빵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집주인은 집세를 재촉하러 계속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루이스, 조금만 참아. 오늘 오락장 앞에서 선물을 받지 못하면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아마 다른 선물도 없을 거야.” 나는 칭얼거리는 루이스를 업고 몇 시간을 걷고 또 걸어서 해 질 녘이 되어 서야 상파울루 시내에 있는 오락장 앞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락장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락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트럭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리끼뉴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바로 그때 우리 발치로 종잇조각들이 날아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장난감을 쌌던 포장지였습니다. 잠시 후 오락장의 수위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말했습니다. “이런, 늦었구나. 선물은 벌써 오래전에 다 떨어졌단다. 나도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지 못했단다.”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는 루이스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루이스에게 말했습니다. “루이스, 너는 왕이야.”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루이스는 막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습니다. “루이스! 넌 왕이야. 왕은 울면 안 돼. 왕은 절대 울지 않아.” 나는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기특하게도 루이스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내가 울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걸까? 아닌 것 같아. 아기 예수도 가난한 아이는 싫어하고 부자만 좋아하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자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루이스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형, 나더러 울지 말라더니 형은 왜 울어?” “괜찮아. 나는 왕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바보같이 울어도 돼.”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고는 루이스를 꼭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크리스마스 만찬을 먹었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는 빵 한 조각 없었는데 에드문드 아저씨와 진지냐 할머니가 음식을 싸 가지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레는 작은 집으로 이사 가야 하니까요. 아빠는 여전히 일자리를 얻지 못하셨고 엄마는 힘들게 공장으로 출근해야 하니까요. 그날 밤 나는 운동화를 내 방 앞에 내놓았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운동화를 내놓으면 거기에 선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소용없는 짓이야. 올해는 어림도 없어.” 또또까 형이 비웃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텅 빈 운동화를 발견했을 때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아빠를 가진 건 정말 운 나쁜 일이야!”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고 나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바로 내 앞에 아빠가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빠는 무척이나 슬프고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조용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내 머릿속은 하얘졌습니다. ‘이런, 아빠가 내가 한 말을 들으셨어.’ 바로 그때 또또까 형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렸습니다. “나가! 넌 정말 나쁜 녀석이야! 넌 악마야!” 나는 그대로 형의 주먹을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오후 나는 우리 집 창고에서 구두 통을 찾아 메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나는 아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또까 형 말대로 난 정말 악마인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악마라고 해도 우리 집이 가난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내가 아빠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빠에게 선물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빠는 가난합니다. 나도 가난합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그 말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빠는 한 번도 선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가난하니까 예수님도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내가 가난한 아빠의 아이일 뿐 가난한 게 나 때문이 아니니까 특별히 준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대신 다른 집 아이보다는 훨씬 값싼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그것마저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확실합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아빠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주지 않으면 나라도 아빠에게 선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파울루 시내를 걸어 오락장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바로 어제 만났던 수위 아저씨였습니다. “내 구두 좀 닦아 주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위 아저씨의 구두를 닦았습니다. 구두를 다 닦은 후 수위 아저씨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이백 레이스예요.” “다른 구두닦이는 사백 레이스를 받는데 왜 넌 반밖에 받지 않니?” “제가 정말로 구두닦이로 먹고산다면 사백 레이스를 받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직 어리고 진짜 구두닦이가 아니니까 반만 받을래요.” 수위 아저씨는 오백 레이스짜리 지폐를 주셨습니다. “이백 레이스는 팁이고, 나머지 백 레이스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메리 크리스마스!” 나는 인사를 하고 지폐를 받아 넣었습니다. 잠시 후 멋진 자동차 한 대가 달려가다가 내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차 안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와 부모님인 듯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부자구나. 그렇다면 분명히 선물을 많이 받았겠지. 나처럼 크리스마스에 밥을 굶지도 않을 거야.’ 차 안에 있던 아주머니가 동정 어린 눈길로 나를 보더니 지갑을 열어 돈을 꺼냈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말리면서 나를 흘낏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속지 마오. 저 아이는 자기가 어리다는 것과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이용해 구걸하는 거니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구걸하는 게 아니에요. 구두를 닦아서 돈을 벌고 있어요. 아주머니도 구두를 닦을 게 아니라면 제게 돈을 주실 필요 없어요.” 나는 구두 통을 메고 뛰었습니다. 얼굴이 화끈화끈했습니다. 나를 거지로 보다니요! 나는 가난한 아이지만 거지는 아닌데! 얼마를 더 걸어가다가 또또까 형의 친구인 세르지뉴 형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세르지뉴 형은 정원이 있는 멋진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세르지뉴 형은 나를 보더니 말을 건넸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제제, 선물 많이 받았니? 나는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어. 그리고 동화책 한 질, 색연필, 장난감도 받았어.” 세르지뉴 형의 말을 듣고 나는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어. 예수님은 분명히 부자를 좋아해.’ 다행히 세르지뉴 형은 마음 착한 부자입니다. 단박에 내 사정을 알아차리고는 자기 구두를 닦아 달라고 했습니다. 난 거절했습니다. “형 친구의 구두를 닦아 주고 돈을 받을 수는 없어.” 내가 분명하게 말하자 이번에는 돈을 그냥 주겠다고 했습니다. “난 거지가 아냐. 구걸하는 게 아니고 일하는 거야.” 세르지뉴 형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좋아. 그럼 빌려 줄게. 대신 다음에 네 구슬을 나한테 줘.” 그 조건에는 나도 만족했습니다. 나는 돈을 받고 세르지뉴 형과 헤어졌습니다. 나도 만족했고 세르지뉴 형도 만족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나는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구두 통을 멘 채 거리를 쏘다녔습니다. 그 후로도 몇 사람의 구두를 더 닦았습니다. 그리고 세르지뉴 형에게서 빌린 돈, 아니 구슬 값으로 받은 돈을 합치니 그럭저럭 이십 또스땅이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나는 아빠가 좋아하는 고급 담배를 한 갑 샀습니다. “설마 네가 피우려는 건 아니겠지?” 담배 가게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찡긋하셨습니다. “아빠에게 줄 거예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게 안에 있던 아저씨들이 빙긋이 웃으며 나를 쳐다보셨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캄캄했습니다. 또 한바탕 꾸중을 듣겠구나 생각하며 방으로 살금살금 가다가 나는 흠칫 놀랐습니다. 부엌 식탁에 아빠가 혼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채 불호령이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저녁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단다. 네가 구두 통을 메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가족들은 어제 남은 음식으로 저녁을 때웠나 봅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담뱃갑을 꺼 내 아빠에게 내밀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빠.” 아빠는 담뱃갑을 받아 들더니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나는 얼른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아빠의 입에 물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아빠는 조용히 한 모금 피우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걸 사려고 하루 종일 구두 통을 메고 다녔던 거냐? 크리스마스에 하루 종일 굶으면서?” 나는 아빠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 아빠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아기 예수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지 몰라도 저는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는 나를 위해 남겨 두었던 과일 샐러드를 손수 떠먹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이 나서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목으로 넘기니 과일 샐러드에서 쓴맛이 났습니다. 나는 과일 샐러드를 먹다 말고 아빠 품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담배 냄새가 밴 아빠의 냄새는 정말 좋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해도, 모레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도 더 이상 슬프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다음 날,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습니다. 이웃 아저씨의 수레를 빌려 짐을 싣고 새집으로 향했습니다. 시내를 지나 우리가 살 동네 어귀로 들어서려고 할 때, 수레 옆으로 멋진 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저건 마노엘 벨나레데스 씨의 차야.” 수레의 주인 아저씨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포르투갈 사람인데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모양이야.” 에드문드 아저씨도 가족 없이 혼자 사는데 그 포르투갈 아저씨도 비슷한가 봅니다. 세상에는 외로운 아저씨들이 참 많은 것 같았습니다. 새집에 도착해서 나는 곧장 뒷마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를 보자마자 밍기뉴는 작은 키를 한껏 발돋움하며 세웠습니다. 나는 달려가 밍기뉴를 꼭 끌어안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밍기뉴, 난 크리스마스에 아빠에게 정말 몹쓸 말을 하고 말았어. 우리 가족은 모두 착한 사람들인데 모두 불행해.” “제제, 산다는 게 늘 행복한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거야. 그러는 사이에 웃을 일이 생기기도 하지. 네가 아빠에게 담배를 선물한 것처럼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슬퍼졌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너무 양이 적은 셈이잖아요. “밍기뉴, 울면 보기 흉할까?” “당연히 보기 흉하지. 왜 그래?” 나는 가만히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모르겠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 그래요. 난 슬픔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슬픔에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렸습니다. 빨간 기차 망가라치바가 달려오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더 슬퍼졌습니다. 이사 온 뒤에도 아빠는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학교생활에 푹 빠져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키 작은 아이였지만 공부는 잘했습니다. 특히 국어는 언제나 최고 점수였습니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미래의 시인이 국어 과목을 어려워할 리가 있겠어요? 우리 반 담임인 세실리아 빠딤 선생님은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웃는 모습이 그렇게 따뜻하고 멋진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빠딤 선생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어를 가르칩니다. 이래저래 나는 빠딤 선생님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더욱 기쁜 것은 빠딤 선생님도 나를 제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국어 시간에 빠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제는 우리 반에서 읽기와 쓰기를 가장 잘하는 우수한 학생이야.” 말썽꾸러기, 악마, 이런 말만 듣다가 ‘우수한 학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게다가 빠딤 선생님은 점심시간이면 다른 친구들 몰래 내게 돈을 주셨습니다. 생과자를 사 먹으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아마 내가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할 때가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가슴 아픈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교무실 안에는 여러 선생님의 책상이 놓여 있고 책상 위에는 꽃병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생님의 꽃병에는 어김없이 꽃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빠딤 선생님의 꽃병은 늘 비어 있었습니다. 아마 빠딤 선생님이 미인이 아니라서 아이들이 꽃을 선물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선생님에게 꽃을 줄 수 있을지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다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세르지뉴 형네 집 정원을 흘낏 쳐다보았습니다. 정원에는 흰 장미, 붉은 장미, 화사한 난초 등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나는 세르지뉴 형네 정원으로 살짝 들어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어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꽃을 꺾을 때 가시에 찔려 손가락에 피가 좀 났지만 괜찮았습니다. 그날 그 꽃을 빠딤 선생님의 꽃병에 꽂았습니다. “오, 제제! 너는 정말 멋진 기사야.” 빠딤 선생님은 몹시 기뻐하며 내 볼에 뽀뽀를 해 주었습니다. ‘기사’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는 그날 밍기뉴에게 살짝 물어보았습니다. “기사란 왕자처럼 교육을 잘 받은 신사를 가리키는 말이야.” 밍기뉴의 말을 듣고 나는 심장이 콩닥콩닥 두방망이질 쳤습니다. ‘우수한 학생’에다가 ‘기사’라니! 어쩌면 에드문드 아저씨 말대로 나는 주위를 밝히는 별이나 태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빠딤 선생님이 내게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제제야, 네가 이 꽃을 세르지뉴네 정원에서 몰래 꺾어 왔다는데 사실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빠딤 선생님은 내 어깨를 잡고 엄한 목소리로 꾸중했습니다. “제제, 그건 도둑질이야.” 그러나 그 말에는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배웠어요. 그러니까 그 꽃은 하느님의 것이에요. 하느님께 기도하고 꽃을 꺾었어요.” 내 이야기를 듣는 선생님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제게 날마다 돈을 주시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네가 돈을 안 받으려고 자꾸 숨더구나.” “도르띨리야 때문이에요.” 도르띨리야는 흑인 여자아이인데 가난하다고 놀이에 끼워 주지 않아 늘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우리더러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저보다 더 가난한 그 애를 돕고 싶었어요.” 빠딤 선생님은 나를 따뜻하게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앞으로 꽃을 훔치지 않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꽃병이 늘 비어 있어서 어떡하죠?” 내 질문에 빠딤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꽃병은 절대로 비어 있는 게 아냐. 나는 그 꽃병을 볼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으니까.” 빠딤 선생님은 내 이마에 뽀뽀했습니다. 나는 몹시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나는 라디스라우 아저씨의 가게 앞에 서 있는 멋진 자동차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사하던 날 옆을 지나가던 포르투갈 아저씨의 자동차였습니다. 나는 살짝 자동차 뒤에 매달렸습니다. ‘박쥐 놀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박쥐 놀이’란 달리는 자동차 뒤에 매달리는 놀이입니다. 귓전에 쌩쌩쌩 바람이 지나가고 씽씽씽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맡기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환상적인 기분입니다. 이윽고 가게 안에서 포르투갈 아저씨가 나왔습니다. 처음 본 포르투갈 아저씨는 눈도 얼굴도 코도 하나같이 커서 어느 나라의 왕 같았습니다. 세련된 옷차림에 커다란 체구가 아주 당당해 보였습니다. “잘 가게, 뽀르뚜까!” 라디스라우 아저씨가 인사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포르투갈 아저씨를 ‘마노엘 벨나레 데스’라는 이름보다는 ‘뽀르뚜까’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뽀르뚜까’란 ‘포르투갈’의 우리식 발음입니다. 드디어 뽀르뚜까 아저씨의 자동차가 출발했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에서 박쥐 놀이를 해 봤지만 이렇게 빨리 달리는 자동차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저씨는 차를 세우고는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와 내 목덜미를 잡아채더니 엉덩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길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못된 녀석! 또다시 이렇게 위험한 장난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날 나는 밍기뉴 앞에서 이렇게 종알거렸습니다. “정말 나쁜 아저씨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며칠 후 나는 장난을 치며 놀다가 유리 조각에 발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유리 조각이 꽤 깊이 들어가 피가 무척 많이 났습니다. 만약 엄마와 아빠가 알면 맞을까 봐 나는 글로리아 누나의 도움으로 몰래 소금물로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등굣길에 나는 죽을 것 같은 통증을 느꼈습니다. 붕대에는 피가 발갛게 배어 나왔습니다. 담벼락에 기대어 발을 끌며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빵빵’ 하고 경적을 울렸습니다. 놀랍게도 뽀르뚜까 아저씨가 자동차를 세우고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난번에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한 일이 생각나 뾰로통한 얼굴로 그냥 지나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뽀르뚜까 아저씨는 내 발의 붕대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았나 봅니다. 뽀르뚜까 아저씨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차에 태웠습니다. 그러고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내려 줘요. 아저씨한테 도움 같은 것 받기 싫어요.” “내가 미워도 병원에는 가야 해. 안 그러면 파상풍에 걸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 죽는다는 말에 나는 더럭 겁이 났습니다. 운전하는 뽀르뚜까 아저씨를 보니 지난번보다 표정이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상처가 아주 깊은걸요. 감염될 수도 있었겠군요.” 의사 선생님이 내 발을 다시 소독하고 찢어진 곳을 꿰매었습니다. 나는 너무 아파 몸을 비틀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뽀르뚜까 아저씨가 힘차게 나를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갑자기 뽀르뚜까 아저씨가 더 이상 밉지 않았습니다. 아니, 우리 아빠보다 엄마보다 형보다 누나들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그날 이후 나와 뽀르뚜까 아저씨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건 뽀르뚜까 아저씨랑 너랑 나, 이렇게 셋만이 아는 비밀이야.” 나는 밍기뉴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알아. 너는 나랑 이야기하는 것도 비밀로 하잖아. 뽀르뚜까 아저씨도 비슷한 거지.” 밍기뉴는 명랑하게 웃었습니다. 아직 꽃도 피지 않은 어린 나무지만 밍기뉴는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나무입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밍기뉴와 뽀르뚜까 아저씨만큼은 내 마음에 비밀로 숨겨 두려고 합니다. 진짜 보물은 남에게 보여 주지 않는 법이니까요. 뽀르뚜까 아저씨는 멋진 집과 자동차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뽀르뚜까 아저씨를 좋아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믿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를 잘 모르겠어요. 에드문드 아저씨는 저더러 태양과 별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우리 식구들은 저더러 새끼 악마래요. 마음에 악마가 있어서 크리스마스에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요.”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루이스를 데리고 선물을 받으러 갔다가 허탕 치고 울었던 일, 아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일, 구두를 닦아 담배를 사 드린 일. 뽀르뚜까 아저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꼭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제, 아저씨가 약속하마. 이제 다시는 네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얻으러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해 줄게.” 또다시 멀리서 기적 소리가 울렸습니다. ‘망가라치바’입니다. 그러나 뽀르뚜까 아저씨의 품에 안겨 있으면 ‘망가라치바’의 기적 소리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를 만나고 난 뒤 나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쁜 욕도 하지 않고, 위험한 장난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변한 내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화창한 어느 날 뽀르뚜까 아저씨와 나는 호수로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한적한 호수였습니다. 낚싯대를 걸쳐 놓고서 뽀르뚜까 아저씨와 나는 나무 그늘에 사이좋게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난 뽀르뚜까 아저씨의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습니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빠는 나를 미워해요. 아빠뿐만 아니라 모두 다 나만 미워해요.” “어른이 되면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 그렇단다.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란다. 사랑하니까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더 힘들어서 그런 거란다.” “저는 어린데도 힘든걸요. 아저씨도 어른이라서 힘드세요?” “나도 어른이니까 힘들지. 하지만 너를 만나면 행복해진단다. 그 행복이 아주 커서 다른 걱정을 잊을 수 있는 거지.” 나는 뽀르뚜까 아저씨의 큰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저도 아저씨를 만난 뒤부터 변했어요. 아주 착해졌거든요. 게다가 굉장히 행복해요.” “나도 네가 있어서 행복하단다.” “그럼 우리 맹세해요. 영원히 함께하기로!” 뽀르뚜까 아저씨는 나와 손가락을 걸며 이렇게 속삭이셨습니다. “제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단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지켜볼 거야.” 뽀르뚜까 아저씨와 낚시를 다녀온 며칠 후였습니다. 그날도 나는 국어 시간에 칠판 앞에 나가 의기양양하게 작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로니모가 후다닥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러더니 잔뜩 흥분한 얼굴로 떠들어 댔습니다. “망가라치바가 자동차를 치었어요! 기차가 자동차를 치었다고요. 뽀르뚜까 아저씨의 자동차를요!” 순간 나는 분필을 떨어뜨렸습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제로니모가 그 뒤로도 뭐라고 떠들었지만 더 이상은 듣지 못했습니다. 난 그길로 교실을 뛰쳐나왔습니다. 귓속에서는 윙윙 소리가 났습니다. 마치 뽀르뚜까 아저씨의 자동차 뒤에 매달려 박쥐 놀이를 할 때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습니다. 결국은 망가라치바 그 빨간 기차가 내 행복을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언제나 불길하게 울던 그 기차가! 철길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누군가가 거세게 잡았습니다. 라디스라우 아저씨였습니다. “놔요! 뽀르뚜까 아저씨를 봐야 해요.” 라디스라우 아저씨는 울먹이는 나를 달랬습니다. “제제! 뽀르뚜까는 멋쟁이였어. 그러니까 너한테는 언제나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을 거야. 지금 가면 뽀르뚜까가 싫어할 거야. 그리고 네가 이렇게 슬퍼하면 뽀르뚜까 가 몇 배는 더 슬퍼할 거야. 그러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잖니? 제제, 강해지렴.” 나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내가 수술받을 때 꼭 안아 주던 모습,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손가락을 걸던 모습. 뽀르뚜까 아저씨와 지낸 순간순간이 생각나 나는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며 몸부림을 치다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가 돌아가신 후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심하게 앓았습니다. 밍기뉴에게도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창문을 열고 밍기뉴를 보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밍기뉴를 보면 뽀르뚜까 아저씨가 더 생각났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는 결심했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와 나는 영원히 함께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아니, 아저씨 없이는 더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철길에서 죽자. 망가라치바한테 치어서 죽는 거야.’ 마음을 굳힌 내가 옷을 갈아입고 막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글로리아 누나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습니다. “제제, 이것 좀 봐!” 누나는 하얀 오렌지 꽃을 들고 들어와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밍기뉴가 드디어 첫 꽃을 피웠어. 이제 열매가 열릴 거야. 그러면 진짜 라임 오렌지 나무가 되는 거야.” 나는 글로리아 누나가 내민 하얀 오렌지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외면한 사이에도 밍기뉴는 혼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앓으면서 자라고 있었겠지요. 나는 꽃잎 한 장을 손에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문득 뽀르뚜까 아저씨가 속삭이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제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단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고 지켜볼 거야.” 그제야 뽀르뚜까 아저씨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으려던 생각을 버렸습니다. 대신 밍기뉴가 피운 첫 꽃의 향기를 맡으며 뽀르뚜까 아저씨께 속삭였습니다. “뽀르뚜까 아저씨, 아저씨는 제게 사랑을 가르쳐 준 분이랍니다.” 브라질의 국민 작가 바스콘셀로스. 주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로스(1920 1984)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인디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친척 집에 살았는데 운동을 아주 잘해서 수영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바스콘셀로스는 바나나 농장 인부, 종업원 등 험한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1942년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지만 별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바스콘셀로스는 장미, 나의 쪽배라는 소설이 성공하여 ‘브라질의 국민 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바스콘셀로스가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68년 마흔여덟 살에 발표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때문이지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바스콘셀로스가 20년 이상을 구상해 왔던 것으로, 1968년 간행 당시 브라질에서는 유례가 없는 20판 발행에 50만 부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출간되자마자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브라질 초등학교 수업 시간의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라임 오렌지 나무는 꽃을 피우고 나면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과일 나무들이 그렇습니다. 눈이 트고 열매가 열리기까지 나무는 큰 고통을 견뎌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장하면서 겪는 아픔입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성장’이라는 주제를 가장 아름답게 그린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등과 함께 성장 소설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바스콘셀로스는 어린 시절의 어려움과 이별의 아픔 등을 잔잔히 그리면서 한켠에서 묵묵히 하얀 오렌지 꽃을 피우는 라임 오렌지 나무를 통해 ‘힘들지만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어린이에게는 물론이지만, 이미 어린 시절의 꿈을 잃어버린 어른에게도 큰 감동을 줍니다. 다섯 살 어린 제제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순수한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지요. 또한 어린이는 또래 친구 제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장난만 하면 잔소리하는 엄마와 아빠, 나를 구박하는 형과 누나, 그러나 모두 사랑하는 가족이지요. 가난이 싫지만 가난한 아빠를 사랑하는 제제의 마음, 작고 여린 나무지만 함께 성장하면서 마음의 비밀을 나누는 나무 친구 ‘밍기뉴’. 한 번쯤은 눈을 감고 제제의 마음이 되어 나의 ‘밍기뉴’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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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어느 인디오 마을에 곱사등이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순둥이’, 또 한 사람은 ‘욕심쟁이’라고 불렸지요. 별명처럼 순둥이는 인정도 많고 너그러워 모두 가 좋아했고, 욕심쟁이는 화를 잘 내고 욕심도 많아서 사람들이 싫어했습니다. 욕심쟁이는 신세를 한탄하며 날마다 술만 마셨습니다. 이웃에 사는 순둥이는 친구가 그럴 때마다 마음 아파하면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여보게, 너무 절망하지 말게. 열심히 살다 보면 우리도 행복해질 날이 있을 거야.” 순둥이와 욕심쟁이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아 생활을 꾸려 갔습니다. 욕심쟁이는 나무를 하면서도 늘 투덜거렸습니다. 어떤 날은 자기가 할 일을 순둥이에게 시키기도 했습니다. “난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몹시 피곤해. 게다가 어제 다리까지 다쳐서 걷는 것도 힘들어. 그러니까 자네가 내 몫까지 나무를 해 줘.” “걱정 말게. 몸이 나을 동안 며칠이고 자네 몫까지 내가 나무를 해 올 테니 좀 쉬게나.” 순둥이가 산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자 욕심쟁이는 신나게 낮잠을 잤습니다. 순둥이는 깊은 산속에서 열심히 나무를 했습니다. 욕심쟁이 몫의 나무까지 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습니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지지요. 주위가 벌써 어두컴컴 해지고 말았습니다. “꼼짝없이 여기서 밤을 보내야겠군. 그래도 가을이라 다행이야. 겨울이면 얼어 죽었을 텐데.” 이렇게 순둥이는 언제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둥이는 밤을 새우기 위해 나뭇잎을 긁어모아 덮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숲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세히 들어 보니 그것은 노랫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음성 같지는 않았습니다. 훨씬 맑고 귀여운 목소리였습니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순둥이는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몸에서 밝은 빛을 내는 작은 요정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순둥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습니다. 요정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았습니다. 월요일 땡! 화요일 땡! 수요일 땡땡! 월요일 땡! 화요일 땡! 수요일 땡땡! 그 노래는 순둥이도 잘 아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가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요정들은 계속 같은 소절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순둥이는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컴컴한 숲 속에 난데없이 사람이 나타나자 요정들은 몹시 놀란 눈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정 여러분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나무를 하다가 그만 늦어져서 산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히 여러분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이곳까지 왔을 뿐이랍니다.” 요정들은 여전히 조심스런 눈초리로 순둥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부르시는 노래의 뒷부분을 제가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가르쳐 드리고 싶어서...” “아니, 그럼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틀렸다는 건가요?” “예. 계속 같은 소절만 부르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제일 작은 요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언니들. 사실은 인간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여기까지밖에 못 들었어요.” 요정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랬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좋아요. 그렇다면 아저씨가 노래의 뒷부분을 가르쳐 주세요.” 요정들에게 부탁을 받자 순둥이는 몹시 기뻐서 신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셋,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여섯. 요정들은 박수를 치며 순둥이를 따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월요일 땡! 화요일 땡! 수요일 땡땡! 월요일 땡! 화요일 땡! 수요일 땡땡!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셋,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여섯. 어느새 순둥이와 요정들은 함께 어울려 덩실덩실 신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와! 아저씨 덕분에 즐거웠어요. 보답으로 아저씨께 선물을 드릴게요.” 말을 마친 요정은 마법 지팡이로 순둥이의 굽은 등을 톡톡 쳤습니다. 그러자 순둥이의 등에 있던 혹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순둥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몇 번이고 자기 등을 손으로 쓸어 보고 자신의 모습을 연못에 비춰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순둥이의 등은 쭉 펴졌고 혹이 사라진 만큼 키가 더 자라 있었습니다. “착한 요정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순둥이는 감격하여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우르릉 쾅쾅!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요정들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저씨, 큰일났어요. 요괴들이에요. 어서 나무 위로 숨으세요.” 요정들은 순둥이를 나무 위에 올려놓은 다음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순둥이는 나무 위에서 몸을 숨기고 바짝 긴장한 채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흉물스럽게 생긴 요괴 세 마리가 땅에서 솟아 나더니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자, 지난달에도 다들 나쁜 짓을 많이 했겠지?” “그럼, 그럼. 그게 우리의 일인걸.” “좋아. 그럼 하나씩 이야기해 볼까?” 첫째 요괴가 말했습니다. “나는 마을 사람들 전부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어.” 둘째 요괴가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어.” 그러자 셋째 요괴가 나섰습니다. “나도 만만찮아. 나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귀머거리로 만들었거든.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해 죽어 가도 알아듣지를 못한다고.” “아이고 재미있어!” 요괴들은 허리를 잡고 웃어 댔습니다. 나무 위에서 요괴들의 이야기를 모두 엿듣고 있던 순둥이는 화가 났습니다. ‘재미를 위해서 사람에게 해를 입히다니, 정말 나쁜 요괴들이야.’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첫째 요괴의 말에 순둥이는 정신이 퍼뜩 들어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장님이 볼 수 있도록 하려면 이른 새벽에 고인 맑은 이슬을 모아서 해바라기씨를 담갔다가 그 물로 눈을 비벼 주면 되지.” “내 치료법도 아주 쉬워. 귀머거리 마을 뒤에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망치로 탕탕 때려서 그 소리를 듣게 하면 들리게 되거든.” “내 치료법도 아주 간단해. 들판에서 비를 잔뜩 맞은 꽃을 따서 그 꽃잎으로 차를 끓여 마시면 단번에 입이 열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지. 게다가 이 꽃잎 차는 무슨 병이든지 다 낫게 할 수 있다고.”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고생하고 있겠지? 킬킬킬!” 요괴들은 키득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갔습니다. 요괴들의 이야기를 모두 엿들은 순둥이는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나는 요정들 덕분에 등에 있던 혹을 뗄 수 있었어.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를 도와줘야지. 순둥이는 그길로 산을 내려와 벙어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요괴가 말한대로 비를 맞은 들판의 꽃을 따다 꽃잎으로 차를 끓여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차를 마시면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꽃잎 차를 마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모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용하던 마을은 순식간에 웃음과 함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나귀 한 마리에 금덩이를 실어 선물로 주 었습니다. 순둥이가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순둥이는 금덩이를 실은 나귀를 끌고 귀머거리 마을로 갔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서로가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 전체가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순둥이는 요괴가 말한 대로 뒷산 언덕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 커다란 바위를 망치로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귀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순둥이의 나귀에 금덩이를 실어 주었습니다. 순둥이는 나귀를 끌고 이번에는 장님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요괴가 말한 대로 새벽이슬을 받아다 해바라기 씨를 담근 다음 그 물로 사람들의 눈을 씻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울고 웃었습니다. “아아,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다니!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보잘것없지만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장님 마을 사람들도 금덩이를 갖고 와 순둥이의 나귀에 실었습니다. 귀머거리 마을, 장님 마을 사람들을 낫게 해 준 후 순둥이는 고향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순둥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순둥이가 이제 더 이상 곱사등이가 아니네? 혹이 없어졌어.”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 나귀 등에 실린 금덩이가 전부 다 순둥이 거래요.” 이 소식을 들은 욕심쟁이는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어서 나한테 말해 줘. 어떻게 해서 이런 복을 받았는지 말이야.” 순둥이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정들에게 노래만 가르쳐 주면 다 된다 이거지?” 욕심쟁이는 그날 밤 당장 요정들의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과연 순둥이의 말대로 요정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월요일 땡! 화요일 땡! 수요일 땡땡! 월요일 땡! 화요일 땡! 수요일 땡 땡!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셋,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여섯. 듣고 있던 욕심쟁이는 요정들 앞으로 뛰어나가며 외쳤습니다. “야, 이 바보들아. 다음 소절도 모르면서 노래를 부르냐? 내가 가르쳐 주지.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여섯, 그리고 일요일은 일곱!' 알겠어?” 그러자 요정들은 뾰로통해서 대들었습니다. “우리를 무시하다니 너무 기분 나빠요.” 이때 요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순간 요정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요괴들은 대번에 욕심쟁이를 잡고서 윽박질렀습니다. “괘씸한 놈!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아. 어떤 놈이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사람 들을 고쳐 줬다고 하던데 바로 너로구나.” “좋아, 벌을 주겠다. 각오해라.” 욕심쟁이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요괴들은 욕심쟁이의 등에 커다란 혹을 하나 더 붙여 버렸습니다. 혹을 떼러 왔던 욕심쟁이는 등에 혹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습니다. 마을로 돌아온 욕심쟁이는 순둥이를 찾아가 엉엉 울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욕심쟁이의 이야기를 들은 순둥이는 친구를 위로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고. 자, 우선 이 차를 마시고 몸이나 좀 녹이게.” 욕심쟁이는 순둥이가 내미는 차를 마셨습니다. 그러자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욕심쟁이 의 등에서 혹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순둥이가 손뼉을 쳤습니다. “이제 생각났어. 그날 요괴가 꽃잎을 따다 차를 끓여 마시면 벙어리가 말을 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무슨 병이든지 고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자네 혹도 없어진 거야.” 순둥이의 말을 들은 욕심쟁이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네가 왜 복을 받았는지 알겠어. 자네의 고운 마음이 행운을 가져온 거야.” 욕심쟁이는 이렇게 말하며 순둥이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욕심쟁이’ 곱사등이를 ‘욕심쟁이’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할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제일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음, 이제 ‘욕심쟁이’ 에게 다른 별명을 붙여 주어야겠는걸.”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욕심쟁이에게 ‘멋쟁이’라는 별명을 새로 붙여 주었습니다. 순둥이와 욕심쟁이, 아니 멋쟁이는 평생 사이좋은 친구로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좋아합니다. 거리든 골목이든 사람들만 모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멕시코 인디오의 민간 설화 '행복한 곱사등이'에 나오는 상냥한 곱사등이도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멕시코 사람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곱사등이'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서 들어온 '혹부리 영감' 이야기와 많이 비슷합니다. '혹부리 영감'은 착한 혹부리 영감의 노래에 반해 혹을 떼어간 도깨비들이, 혹이 노래주머니가 아님을 알고 다른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에게 착한 혹부리 영감의 혹까지 붙인다는 내용입니다. 순둥이 곱사등이는 요정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준 대가로 혹을 떼고, 욕심쟁이 곱사등이는 혹을 하나 더 붙인다는 '행복한 곱사등이'와 아주 비슷하지요? 낙천적이고 다정한 사람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행복한 곱사등이'는 멕시코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답니다. 우리나라의 반대쪽에 있는 멕시코는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16세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그곳에 살던 인디오들은 우 리와 같은 혈통의 사람들입니다. 옛날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의 중앙부까지 진출한 아시아 대륙의 몽골인들이지요. 갓 태어난 인디오 아기의 엉덩이에 나타나는 푸른색 몽고반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멕시코 사람들은 외모가 닮은 것은 물론이고 일상생활까지 많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민간 설화 '혹부리 영감'이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해지고 그것이 '행복한 곱사등이'라는 인디오의 민간 설화로 다시 탄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감성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멕시코 민간 설화의 주인공들도 매우 순수하고 착한 사람으로, 자연을 친구 삼아 살고 있습니다. 단점이 있는 친구라도 항상 감싸주고, 욕심쟁이도 결국 잘못을 뉘우치게 되는 '행복한 곱사등이'에서 우리와 비슷한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지의 청년 음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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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은강게줄루의 왕에게는 사랑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딸인 노마잘라 공주였지요. 노마잘라 공주는 영양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워 이웃 나라 왕자들의 청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노마잘라 공주에게 청혼을 하려고 신하와 보물을 앞세우고 은강게줄루 국을 찾는 왕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은강게줄루의 왕은 노마잘라 공주를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렇게 찾아온 청혼자들에게 어려운 시험을 보게 한 뒤 쫓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은강게줄루에 음자모라는 낯선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음자모의 아버지 쿠말로는 가난했지만 아들을 용감하게 키우려고 일부러 돈 한 푼 없이 먼 나라를 여행하게 했습니다. 음자모는 벌써 여러 나라를 돌면서 몸도 튼튼해졌고, 다른 청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 몹시 목이 말랐던 음자모는 은강게줄루 왕궁 근처의 호수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손으로 물을 떠먹던 음자모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 떨어진 호수 한쪽에서 목욕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날씬한 몸에 크고 아름다운 눈. 음자모는 갈증도 잊고 그만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굳어 버렸습니다. ‘아아! 저건 사람이 아냐.’ 바로 그 순간 음자모를 발견한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숨었습니다. 음자모는 몹시 미안했습니다. “아가씨, 미안해요. 실례했습니다. 이대로 사라질 테니 물 밖으로 나오세요.” 이렇게 말하고 음자모는 휙 돌아서서 뛰었습니다. 그러나 달리면서도 음자모의 눈에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이 어른거렸습니다. 다음 날 음자모는 시장을 구경하러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 어제 호수에서 본 아가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음자모가 막 시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요란한 행차가 지나갔습니다.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코끼리 등에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맵시 있게 앉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여인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절을 했습니다. “만세! 노마잘라 공주님 만세!” 호기심이 일어난 음자모는 사람들 틈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고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더운 바람이 훅 불면서 천이 벗겨져 날아가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그 순간 음자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여인은 분명 어제 호수에서 보았던 아가씨였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럼 어제 내가 보았던 여인이 그 유명한 노마잘라 공주님이란 말인가?’ 음자모는 갑자기 허탈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눈물까지 나려고 했습니다. ‘공주님이라니! 그렇다면 도무지 나 같은 남자가 청혼을 할 수도 없는 신분이잖아.’ 노마잘라 공주의 행렬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웃 나라 왕자가 왕궁으로 들어가던데 분명 노마잘라 공주님께 청혼하러 왔겠지?” “당연하지. 그 왕자는 벌써 시험에 세 번째 도전한다더군. 그 사이 우리 왕께 갖다 바친 보물만도 만만치 않을걸.” “그나저나 가장 불쌍한 사람은 노마잘라 공주님이셔. 왕의 욕심 때문에 결혼도 못 하시고.” “아아, 누구든 우리 왕께서 내는 문제를 풀어서 노마잘라 공주님과 결혼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음자모의 가슴에 작은 희망의 싹이 움텄습니다. ‘그래, 무슨 시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도전해 보자. 설령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해도 한번 해 보는 거야.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지.’ 다음 날 음자모는 날이 밝자마자 왕궁으로 갔습니다. “전하! 저는 쿠말로의 아들 음자모라고 합니다. 노마잘라 공주님을 사랑하기에 결혼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왕은 성난 얼굴로 호통을 쳤습니다. “참으로 무례하구나. 한 나라의 공주에게 청혼하러 오면서 혼자 몸으로 더군다나 빈손으로 오다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신하들은 왕의 호통에 고개를 숙였지만 음자모는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왕이시여,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보시다시피 저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시며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확실히 믿음이 가는 일이라면 눈치 보지 말고 용감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모험을 해 왔습니다.” 음자모의 당당한 태도에 신하들은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이제껏 이처럼 용감한 청년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지금까지 보아 온 어느 나라 왕자보다 당당한걸.” “저런 남자가 노마잘라 공주님과 결혼해서 우리 은강게줄루의 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누구보다 음자모의 태도에 반한 사람은 노마잘라 공주였습니다. 노마잘라 공주는 며칠 전 호수에서 만났던 청년 음자모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놀란 나머지 물속으로 숨어 버렸지만 음자모의 다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평민이라는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음자모의 용기에 감동했습니다. ‘아, 정말 믿음직스럽고 멋진 사람이야. 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면 왕비가 되지 않아도 좋아. 평민으로 살아도 좋다. 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노마잘라 공주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러나 노마잘라 공주나 신하들과는 달리 왕은 음자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데다가 평민 출신이면서 감히 공주에게 청혼하다니.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서 도망가게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왕은 짐짓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어쨌든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자, 청혼을 하러 왔다고 하니 내가 내는 문제를 해결해 보아라.” 음자모는 시험을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어떤 문제를 내시든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왕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짓궂게 웃으며 문제를 냈습니다. “용기 있는 젊은이 음자모여! 이 왕궁 바깥에는 계곡이 하나 있다. 우리는 그 계곡을 개간해서 옥수수를 심어 놓았지. 네가 노마잘라 공주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 계곡에 있는 옥수수를 모두 오늘 안에 거두어들이도록 하라.” 한순간 용기가 꺾였지만 음자모는 곧 약한 마음을 떨쳐 버리고 씩씩하게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왕이시여! 반드시 오늘 안으로 옥수수를 다 따겠습니다.” 왕궁을 나온 음자모는 옥수수 밭이 펼쳐진 계곡으로 갔습니다. 노란 옥수수들이 하나 가득 지천으로 널려 있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음자모에게는 목숨을 걸고 헤쳐 나가야 할 밀림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겁먹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당장 시작하자!’ 음자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옥수수를 따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어느덧 동쪽 하늘에 걸려 있던 해가 서서히 움직여 음자모의 머리 위에서 쨍쨍 내리쬐는 정오가 되었습니다. 음자모는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일 초라도 아껴서 옥수수를 따야만 해.’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이를 악물고 옥수수를 땄습니다. 그러나 해는 자꾸자꾸 서쪽으로 기울고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음자모는 땀을 닦으며 옥수수 밭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직 반도 따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해야 하나?’ 음자모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때 언덕 너머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작고 노란 옥수수야. 우리 어머니들이 뿌려 놓은 씨에서 자란 옥수수야. 너희가 편하게 쉴 수 있는 바구니 안으로 너희가 알아서 모이렴. 너희가 알아서 모이렴.” 그러자 놀랍게도 밭에 있던 옥수수들이 저 혼자 뚝뚝 떨어지더니 음자모의 바구니 안으로 휙휙 날아드는 게 아니겠어요! 바구니는 금방 옥수수로 가득 찼습니다. ‘아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목소리가 무척 아름다운 누군가가 도와준 것 같은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음자모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옥수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끌고서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음자모가 거대한 바구니 가득 옥수수를 담아서 끌고 오는 것을 본 왕과 신하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지금쯤 음자모가 포기하고 은강게줄루를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는 왕 앞에 커다란 바구니를 끌어다 놓은 음자모는 눈을 빛내며 힘차게 외쳤습니다. “왕이시여! 명령하신 대로 해가 지기 전에 계곡에 있는 옥수수를 모두 따 왔습니다. 이제 노마잘라 공주님과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 신하들은 기대 어린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왕이 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한 신하들은 용기와 행동력이 있는 음자모가 믿음직하게 보였습니다. 왕은 몹시 난처해졌습니다. 설마 음자모가 정말로 옥수수를 다 따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황한 왕은 헛기침을 하고는 얼버무렸습니다. “잘했다. 사실 오늘 낸 문제는 아주 쉬운 것이지.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해결했으니까. 내일 시험을 더 치러야 하니 오늘은 그만 푹 쉬어라.” 음자모는 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조금 실망했지만 참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정해 준 오두막에서 푹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음자모는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왕은 눈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음자모를 내쫓기 위해 궁리하느라고 밤을 새웠기 때문이지요. 왕은 능청스럽게 말했습니다. “어제 옥수수를 땄던 계곡 옆에는 물이 흐르는 숲이 하나 있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그 숲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어 놓아라.” 음자모는 어제 옥수수를 따다가 슬쩍 봤던 그 울창한 숲을 떠올렸습니다.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져 있던 푸른 나무들, 그 나무들을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다 베어 놓으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맥이 풀렸지만 그래도 음자모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며 왕에게 무릎 꿇고 외쳤습니다. “왕이시여, 반드시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나무를 모두 베어 놓겠습니다.” 왕궁을 나온 음자모는 어제 옥수수를 따던 계곡을 지나 숲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숲에서 가장 큰 나무를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나무를 한번 올려다본 음자모는 도끼를 들고 숨을 고른 다음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굵은 나무는 아주 작은 홈만 패일 뿐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무려 마흔 번을 내리치자 ‘끼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가 비틀거렸습니다. 다시 열 번을 더 내리치자 그제서야 나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습니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떠 있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해서는 절대 오늘 안에 이 숲의 나무를 다 벨 수 없어. 나무를 다 베기는커녕 내가 먼저 지쳐 죽을 거야.’ 그러나 음자모는 다시 용기를 냈습니다. ‘그래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나무를 베자. 그럼 다 베지 못한다 해도 부끄러울 것은 없어. 하지만 해 보지도 않고 도망간다면 그게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 음자모는 ‘이영차 이영차’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도끼를 내리쳤습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음자모는 헉헉거리면서 숲을 둘러보았습니다. 숲은 아직도 울창하기만 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어디선가 또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의 나무들아. 음자모의 도끼 앞에서 너희 스스로 넘어지렴. 너희 스스로 넘어지렴.” 그러자 빽빽하게 둘러서 있던 나무들이 한꺼번에 옆으로 흔들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음자모는 쓰러지는 나무를 피해 숲을 빠져나왔습니다. 잠시 후 그곳으로 돌아가 보니 울창하던 숲은 온데간데없고 하늘 아래 넓은 벌판에 무수한 나무들만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쯤은 그 바보가 나라 밖으로 도망갔겠지.’ 이렇게 생각한 왕은 심부름꾼을 보내 음자모를 살펴보게 했습니다. 심부름꾼은 도끼를 든 음자모 앞에 일제히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 왕궁으로 달려가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뭐라고?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무래도 믿을 수 없었던 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직접 숲으로 갔습니다. 왕의 행차를 본 음자모는 얼른 얼굴의 땀을 닦고 자신 있게 활짝 웃으며 외쳤습니다. “왕이시여! 분부하신 대로 해가 지기 전에 이 숲의 나무를 모두 베었습니다.” 왕은 입을 떡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도대체 음자모는 어떤 녀석일까?’ 음자모는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이제 노마잘라 공주님과 결혼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왕은 아무래도 음자모를 사위로 맞이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또 둘러댔습니다. “오오, 그래. 기특하다. 하지만 시험은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일단 수고했으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또 다른 시험을 보도록 하라.” 왕의 말에 음자모는 화가 났습니다. “왕이시여! 약속을 지키시옵소서.” 음자모의 말에 왕은 발끈 화를 냈습니다. “무엇이라고? 감히 왕인 나에게 대들다니, 너처럼 예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공주를 줄 수 없다!” 깜짝 놀란 음자모는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왕이시여,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제야 왕은 콧방귀를 뀌며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음자모는 화를 꾹 누르고 그날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 날 음자모는 아침 일찍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왕의 눈은 하룻밤 사이에 더욱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왕은 세 번째 시험 문제를 냈습니다. “노마잘라 공주가 아주 아끼는 금팔찌가 하나 있다. 그런데 며칠 전 노마잘라 공주가 호수에서 목욕을 하다가 그만 그 팔찌를 호수에 떨어뜨리고 말았다는구나. 그러니 그 팔찌를 찾아오도록 해라. 어제 네가 나무를 벤 숲에 있는 호수다.” 왕의 말을 들은 음자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호수는 바로 음자모와 노마잘라 공주가 맨 처음 만난 장소였으니까요. “왕이시여! 팔찌를 찾아오겠사오니 이번에는 꼭 결혼시켜 주시옵소서.” 음자모는 씩씩하게 말하고 왕궁을 나섰습니다. 호수에 도착한 음자모는 노마잘라 공주가 목욕을 하던 근처를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넓디넓은 호수에서 어떻게 작은 팔찌를 찾을지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목욕을 하던 노마잘라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자 새로운 의지가 솟아났습니다. “해 보는 거야.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도와준다는 말이 있잖아.” 다행히 음자모는 헤엄을 아주 잘 쳤습니다. 호수로 뛰어든 음자모는 바닥까지 내려가 돌 틈과 흙을 뒤지며 팔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수 바닥을 뒤지고 다녀도 팔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 위로 올라와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잠수하기를 수천 번, 건강한 음자모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노마잘라 공주님을 여기서 보았던 것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아야 하나 보다.’ 바로 이때였습니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구렁아, 구렁아. 물속에 사는 구렁아. 네가 살고 있는 물속에서 공주님이 잃어버린 것을 가져다 다오.” 그러자 호수에 요란한 파동이 일더니 커다란 구렁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음자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구렁이의 입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작은 물건이 물려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팔찌였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구렁이가 나를 도와주다니.” 구렁이는 음자모에게 절을 하고는 금팔찌를 음자모의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유유히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호수는 다시 조용해졌지요. 음자모는 기뻐서 한달음에 왕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금팔찌를 내려놓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왕이시여! 분부하신 대로 공주님의 팔찌를 찾아왔습니다. 이제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신하들은 왕이 이제는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아주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아직 안 된다. 내가 내는 마지막 문제까지 다 풀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드디어 음자모는 화가 폭발했습니다. “왕이시여!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십니까?” 왕도 더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싫으면 당장 돌아가거라! 붙잡지 않을 것이다!” 별 수 없이 음자모는 한 번 더 참기로 했습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지. 좋다. 조금만 더 참자.’ 드디어 왕이 마지막 문제를 냈습니다. “왕궁 바깥에 절벽이 있다. 그 절벽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지. 네가 그 대추나무 꼭대기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가져온다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음자모는 절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왕이 말한 대추나무를 보았습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 상황이었습니다. 음자모는 크게 숨을 한번 고르고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왕과 신하들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한참을 오르던 음자모는 한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습니다. 그러더니 발이 미끄러지며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모두 비명을 질렀습니다. 다행히 음자모는 간신히 나뭇가지를 붙잡았지만 서서히 팔의 힘이 빠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또다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추나무야, 대추나무야. 붉은 잎이 달린 대추나무야. 붉은 열매를 맺는 대추나무야. 나무 꼭대기에 있는 네 잎을 우리에게 주렴. 그럼 우리는 아주 기쁠 거야. 그 잎을 음자모의 손바닥에 떨어뜨려 다오. 네 스스로 말이야.” 노래가 끝나자마자 나무 꼭대기에 있던 잎사귀가 팔랑팔랑 음자모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습니다. 음자모는 잎사귀를 입에 물고 간신히 대추나무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둘러서 있던 구경꾼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왕도 더 이상은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좋다. 결혼을 허락한다.” 사람들은 환성을 질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전에 저를 도와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이때 노마잘라 공주가 나타나며 말했습니다. “그 말은 저에게 하시면 됩니다. 제가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사실 노마잘라 공주는 자연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 그 덕분에 언제나 풍년이 들었던 것이지. 그래서 내가 공주의 결혼을 막았던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왕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자모는 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공주님과 결혼하여 이곳에서 살겠나이다.”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고 왕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 은강게줄루에서는 성대한 결혼 잔치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밤새워 춤을 추며 먹고 마셨습니다. 노마잘라 공주와 결혼한 음자모는 왕이 되어 은강게줄루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다스렸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줄루 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 중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줄루 족은 자신들을 ‘아마줄루’라고 부르는데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줄루 족은 아이를 가르칠 때 민간 설화를 즐겨 이용했습니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민간 설화는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내려오는 ‘구전 문학’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줄루 족 민간 설화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라 내용이 교훈적입니다. 줄루 족 아이는 어른이 들려주는 민간 설화를 들으면서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배웁니다. 또한 줄루 족의 민간 설화에서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 아주 자연스러운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의지의 청년 음자모의 노마잘라 공주는 노래를 불러 자연과 소통합니다.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 믿었던 줄루 족은 자연과 인간이 형제처럼 서로를 지켜 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눈물과 피가 서린 문학 세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나라입니다. 일찍이 유럽 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지하자원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부족 사회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졸지에 노예가 되어 다이아몬드 광산 등에서 일하다가 죽기 일쑤였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아도 이미 유럽 인들이 땅을 다 차지해 버려 그 밑에서 차별과 서러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세계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가장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일찌감치 영국인들이 국토를 장악하여 대대적으로 원주민을 탄압했습니다. 지금은 인종 차별도 없어지고 원주민 출신 대통령도 나왔지만 그동안 줄루 족 등 원주민들의 문화는 짓밟혀 거의 다 없어져 버렸답니다. 물론 전통 문학도 같은 처지입니다. 1940년대부터 아프리카 인을 위한 대중 신문과 정기 간행물 등에 원주민의 풍습 또는 가치관을 담거나 흑백 인종 문제를 다룬 몇몇 작품이 소개되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답니다. 의지의 청년 음자모도 끈끈하게 이어져 내려온 아프리카 원주민의 저력을 담고 있습니다.
욕심 많은 사냥꾼과 고릴라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 케냐 어느 마을에 사냥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냥꾼의 뛰어난 활 솜씨는 마을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냥꾼을 ‘얼음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뛰어난 솜씨를 갖추기는 했지만 너무나 인정이 없고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얼음심장은 길눈이 밝아서 처음 가 본 밀림에서도 길을 잃는 법이 없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지나간 길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의 발자국을 구분할 수 있었고 동물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도 환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얼음심장이 한 번 밀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얼음심장의 집에는 진귀한 짐승 가죽과 고기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얼음심장은 가족과 고기를 나누어 먹고 남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아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얼음심장의 살림살이를 부러워했지만 얼음심장의 가족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가 음식을 좀 달라고 하면 거칠게 문을 닫아 버렸으니까요.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야지!” 얼음심장의 가족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뛰어난 사냥 솜씨 덕분에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지만 얼음심장의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얼음심장은 밀림 한구석에 오두막을 지었습니다. “집과 사냥터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시간 낭비야. 아예 여기서 며칠씩 먹고 자면서 한꺼번에 사냥을 해 가지고 집으로 가져가야겠어.” 명궁수인 얼음심장이 밀림에 집까지 지어 놓고 사냥을 하자 동물들은 더욱더 불안해졌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사냥을 해 대는 얼음심장 때문에 밀림의 동물들은 잠시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린 동물들은 세상 구경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굴에 숨어 오들오들 떨어야 했습니다. 밀림에 사는 동물들의 대장인 고릴라가 더 참지 못하고 얼음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오두막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또 사냥을 나간 것이지요. 방 안을 둘러보던 고릴라는 한구석에 놓인 자루에 눈길이 갔습니다. 열어 보니 그 안에는 구운 빵과 생선 튀김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얼음심장의 비상식량인 듯했습니다. 고릴라는 너무 배가 고파 빵 몇 조각을 꺼내 먹었습니다.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배가 고파졌습니다. 고릴라는 자루 안에 든 생선 튀김까지 모두 먹어 버렸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이런 괘씸한 고릴라 같으니!” 성난 목소리에 돌아보니 얼음심장이 화난 얼굴로 고릴라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아, 미안해요. 난 당신과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 하지만 말을 더 이을 틈도 없이 화살이 날아와 고릴라의 왼쪽 팔에 꽂혔습니다. “우웃!” 고릴라는 너무나 아파 비명을 질렀지만 침착하게 화살을 뽑아내서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케냐 제일의 사냥꾼인 얼음심장은 당황하지 않고 또 활을 쏘았습니다. 고릴라는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잡아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단숨에 얼음심장의 손에서 활과 화살을 빼앗았습니다. 얼음심장은 무서워 얼굴이 노랗게 질렸습니다. 얼음심장! 내가 활을 갖고 너를 쳐다보니 너도 무섭지? 죽을까 봐 무섭지? 우리 동물도 마찬가지야. 네가 사냥을 하려고 들어오면 모두 무서워 죽을 지경이라고. 이제 우리 마음을 좀 알겠어? 얼음심장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싹싹 빌었습니다. “아이고,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당장에라도 얼음심장을 죽이려던 고릴라는 눈물까지 흘리는 얼음심장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저는 고릴라 당신처럼 힘이 센 것도 아니고 사자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습니다. 독수리 같은 날개도 없고요. 그러니 이런 식으로밖에는 먹고 살 방법이 없답니다. 제발 저를 친구로 삼아 주시고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고릴라는 완전히 마음이 누그러져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 사람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겠지. 오늘 한 번은 용서해 줄 테니 당장 이 오두막을 없애고 이곳을 떠나도록 해. 알았지?” “예, 약속합니다.” 겨우 목숨을 건져 집으로 돌아온 얼음심장은 몹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케냐에서 제일가는 사냥꾼인 내가 그까짓 멍청한 고릴라한테 꼼짝없이 당하다니. 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반드시 그 미련한 고릴라에게 복수하고 말테다.’ 얼음심장은 훨씬 강한 활과 화살을 만들고, 새총과 칼, 굵은 몽둥이도 챙겼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불러 모은 다음 무기를 하나씩 쥐어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건방진 고릴라를 잡아 올 테니까 각자 무기를 들고 집에서 기다려. 그러다가 내가 그놈을 자루에 담아 오면 마구 때리도록 해.” 사냥꾼은 그전에 고릴라가 맛있게 먹었던 빵과 생선 튀김을 싸들고 밀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빵과 생선 튀김 냄새를 맡은 고릴라가 얼음심장 앞에 나타났습니다. 굳은 표정의 얼음심장과는 달리 고릴라는 다정하게 웃기까지 했습니다. 고릴라는 지난번 일 이후로 얼음심장과 친구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친구, 오랜만이네. 한동안 자네가 사냥을 오지 않아서 우리 동물 가족은 행복했다네. 그런데 결국 또 사냥을 하러 왔군. 사냥을 해서 먹고사는 자네더러 사냥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부디 너무 많이 잡지는 말게. 특히 어린 동물들은 놓아 주게나.” “물론이지요. 우린 친구인걸요.” 고릴라는 얼음심장이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얼음심장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시장에 가면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들이 많답니다. 어린 동물이 먹을 만한 음식도 아주 많지요.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고릴라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정말? 내가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지." 얼음심장은 웃으며 자루를 펼쳤습니다. “그럼 이 안에 들어가십시오.” “왜 그래야 하지?” “저야 친구가 되었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은 당신을 무서워할 겁니다. 그러니 이 자루에 들어가시면 제가 자루를 들쳐 업고 시장으로 가려고요.” 마음씨 좋고 용감하지만 머리가 나쁜 고릴라는 얼음 심장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자루 안으로 들어 가며 말했습니다. “미안해서 어쩌나? 꽤 무거울 텐데.” 고릴라가 자루에 들어가자 얼음심장은 자루 주둥이를 단단히 묶은 다음 짊어지고 집으 로 향했습니다. 한편 얼음심장의 가족은 각기 몽둥이와 칼과 새총을 하나씩 움켜쥐고는 이제나저제나 하고 얼음심장이 고릴라를 메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숨을 헐떡이며 자루를 둘러메고 걸어오는 얼음심장이 보였습니다. 가족들을 발견한 얼음심장은 고릴라가 든 자루를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얼음심장, 벌써 시장에 도착했나?” “시장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여기는 저승이야.”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순간 얼음심장의 가족들은 고릴라가 든 자루에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릴라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윽고 고릴라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자 얼음심장과 가족들은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놈은 죽었어.” “아버지, 오늘 밤에 마을 잔치가 있지요? 이 고릴라를 가져가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고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아들의 말을 들은 얼음심장은 아들을 쥐어박았습니다. “왜 우리가 힘들게 잡은 것을 남과 나눠 가지냐? 이놈은 방에다 갖다 놓고, 마을 잔치에 가서는 맛있는 걸 잔뜩 먹는 거지. 그리고 이 녀석은 내일 잡아서 고기로 내다 팔자고.” 얼음심장과 가족들은 고릴라가 든 자루를 방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고릴라는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지요. 정신을 차린 고릴라는 자루 주둥이를 조금 열고 밖을 엿보았습니다. 때마침 얼음심장이 거울 앞에서 한껏 멋을 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 마을 잔치에서 최고 멋쟁이로 뽑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고른 끝에 마음에 드는 옷으로 갈아입은 얼음심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고릴라는 자루 안에서 살짝 빠져나왔습니다. 하도 맞아서 몸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사냥꾼 녀석! 반드시 혼내 주겠다.’ 고릴라는 잔치가 열리는 마을로 가서 얼음심장을 혼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처럼 변장을 해야 했습니다. 고릴라는 얼음심장의 옷장을 뒤져 적당한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얼음심장이 한 것처럼 거울 앞에서 옷을 입었습니다. 한편 마을 한복판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고기를 굽는 모닥불 주위에서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남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얼음심장은 여느 때처럼 시끄럽게 술을 마시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심코 모닥불 주위를 바라보던 얼음심장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습니다. 그곳에서는 얼음심장의 옷을 입은 고릴라가 사람들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고릴라는 춤을 추면서 얼음심장을 찾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얼음심장이 먼저 고릴라를 발견하고 만 것입니다. 얼음심장은 살금살금 모닥불 가까이 다가가서 불이 붙은 장작을 재빨리 고릴라에게 던졌습니다. “끼야아악!” 고릴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습니다. 엉덩이에 불이 붙은 고릴라는 울부짖으며 냇물로 뛰어들어 간신히 불을 껐습니다. 하지만 불에 그슬린 엉덩이는 흉측하게 변해 버렸습니다. “놈은 죽었을 거야. 내 솜씨를 당할 자는 없거든.” 얼음심장은 잘난 척하며 마을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있었습니다. “모두 기다려. 내가 놈의 시체를 찾아올 테니 오늘 밤은 맛있는 고릴라 고기를 먹어 보자고.” 얼음심장은 큰소리를 치며 밀림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두 개의 눈이 보였습니다. 고릴라의 눈이었습니다. 그 아래로 하얀 이빨이 드러났습니다. 얼음심장은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너는 우리 동물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리고 친구가 되자 해 놓고는 나를 속였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다음 순간 엄청나게 센 주먹이 얼음심장의 얼굴로 날아왔습니다. 얼음심장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은 밀림 속에서 싸늘하게 식은 얼음심장의 주검을 발견했습니다. “천벌을 받은 거야.” “그렇게 욕심을 부리더니 결국 죽고 말았군.” 동물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며 함부로 사냥을 하던 얼음심장은 그렇게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놀부전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에 흥부와 놀부라는 형제가 살았어요. 형 놀부는 심술쟁이에다 욕심꾸러기였지요. 그러나 동생 흥부는 마음씨가 착했어요. 둘은 각각 결혼을 했는데, 흥부는 자식을 열둘이나 낳았답니다. 덕분에 집안이 늘 시끌시끌했지요. 놀부는 그런 흥부네 가족이 못마땅했어요. 하지만 놀부가 아무리 구박해도 마음씨 좋은 흥부는 항상 싱글벙글 웃었답니다. 놀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흥부네 가족을 쫓아냈어요. “애들이 징징거려서 듣기 싫다. 당장 나가거라!” 착한 흥부는 형 놀부의 말을 순순히 따랐어요. 작은 초가집으로 이사하고 가난하게 살았지요. “아버지, 배고파요!” “어머니, 밥 좀 주세요!” 흥부는 형 놀부를 찾아가서 사정했어요. “형님, 쌀 한 되만 주세요.” 하지만 욕심 많은 놀부는 흥부를 모른 척했어요. “댁은 뉘시오?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 “형님, 그러지 마시고 도와주세요. 아이들이 굶고 있습니다.” 그러자 놀부의 아내가 달려 나와 밥주걱으로 흥부의 뺨을 철썩 때리지 않겠어요? 결국 흥부는 아픈 뺨을 어루만지며 빈손으로 돌아갔지요. 어느 봄날, 흥부네 집에 제비 한 쌍이 찾아왔어요. 제비들은 처마 밑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았지요. 얼마 후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어요. 그런데 하루는 큰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제비 둥지로 다가가는 게 아니겠어요? “앗! 저놈의 구렁이가!” 흥부가 급히 구렁이를 쫓아냈지만,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어요. 흥부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어요. 다음 해 봄이 되자 제비가 다시 찾아왔어요. “지지배배, 지지배배!” 제비는 흥부 앞에 박씨를 떨어뜨리고 갔어요. 흥부는 박씨를 심고 정성껏 길렀지요. 가을이 되자 보름달처럼 둥근 박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흥부네 가족 모두 마당에 모였어요. “여보, 어서 박을 타 봅시다.” 흥부와 아내는 박을 타기 시작했어요. “슬렁슬렁 박을 타세. 살강살강 박을 타세.” 커다란 박이 쩍 벌어지자 어머나, 하얀 쌀이 쏟아져 나왔어요! “이야, 쌀이다!” 흥부와 아내는 신이 나서 두 번째 박을 탔어요. 이번에는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지요. 세 번째 박을 타자 아름다운 선녀가 나타났어요. “이것들은 제비 나라 임금님이 보낸 선물이랍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흥부네는 제비가 준 박씨 덕분에 큰 부자가 되어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게 되었어요. 흥부의 소식을 전해 들은 놀부는 얼른 뒷산에서 제비를 잡아 왔어요. 그리고 제비 다리를 똑 부러뜨렸지요. “제비야, 내가 잘 치료해 줄게. 박씨만 물어 와라.” 이듬해 봄, 제비가 놀부 집 앞에 박씨를 떨어뜨렸어요. 놀부는 얼른 박씨를 주워 마당에 심었어요. 가을이 되자 주렁주렁 박이 열렸지요. 놀부와 아내는 신이 나서 박을 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박 속에서 도깨비들이 우르르 나오지 않겠어요? “이놈, 넌 착한 동생을 내쫓고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지! 어디 한번 혼 좀 나 봐라!” 도깨비들은 놀부 집을 방망이로 쿵쾅쿵쾅 다 때려 부수었어요. “아이고,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구나. 이제 나는 거지가 되었네. 아이고, 아이고!” 놀부와 아내는 땅을 치며 울었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옛날에 흥부와 놀부라는 형제가 살았어요. 흥부는 집도 가난하고 일도 잘 못했지요. 매번 놀부를 찾아와 도움만 받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놀부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여보, 이제 흥부네 가족이 찾아오면 절대 도와주지 마시오. 도와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도와주니까 의지만 하고 스스로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구려.” “그러다 굶어 죽으면 어떡해요?”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당신은 절대 도와주면 안 돼요. 마음이 아파도 냉정하게 대하시오.” 그때 흥부가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형님, 좀 도와주십시오. 아내와 아이들이 굶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네 가족은 네가 책임져라. 네가 열심히 벌어서 아이들을 먹이고 공부도 시키란 말이다.” “형님, 다시는 손 벌리지 않을 테니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다 까먹고 또 내가 얼마나 도와주었느냐? 이제부터 너와 나는 형제도 아니니 썩 물러가거라.” 결국 흥부는 쌀 한 톨도 받지 못하고 놀부네 집에서 쫓겨났어요. ‘형님은 정말 너무해. 나보다 재산도 더 많이 물려받았잖아. 그리고 형님은 부자면서 가난한 동생을 좀 도와주면 어때! 쳇, 어디 두고 봐. 꼭 보란 듯이 성공하고 말 거야. 그때는 내가 형님을 모른 체할 거야.’ ‘무엇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지? 무엇을 해야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을까? 농사를 짓자니 물려받은 논밭을 이미 다 팔았고, 장사를 하자니 밑천이 없고, 품삯을 받고 남의 집 일을 하자니 양반 체면이 말이 아닌데.’ 흥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돈벌이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때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주인장, 계시오?” 흥부가 방문을 열고 나갔어요. “내가 이 집 주인인데 누구시오?” “나는 바가지 장수올시다. 당신 지붕 위에 열린 박이 하도 탐스러워서 말이오. 저 박을 타서 바가지를 만들어 내게 팔지 않겠소? 값을 후하게 쳐 드리리다.” “아무렴, 팔고말고요!” 흥부네 가족은 얼른 박을 타서 바가지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바가지를 팔아서 많은 돈을 벌었지요. “여보, 우리도 이제 쌀밥을 먹게 되었어요.” “그러게 말이오. 이 돈들 좀 보시오. 우린 이제 잘살 수 있소!” 그 후 흥부네 가족은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서 똥을 붓고 박씨를 많이 심었어요. 다음 해, 큼직한 박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흥부는 박을 전부 타서 열심히 바가지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직접 바가지 장수로 나섰지요. 흥부가 만든 바가지는 불티나게 팔렸어요. 흥부네 가족은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부자가 된 흥부는 자기 집 곳간을 들여다보았어요. ‘이만하면 내가 형님보다 더 부자겠지? 형님 집에 가서 누가 더 부자인지 가려봐야겠다!’ 흥부는 놀부 집으로 달려가 몰래 곳간을 열어 봤어요. 그런데 곳간에 곡식은 없고 바가지만 가득했지요. 바로 흥부가 바가지 장수에게 팔았던 바가지였어요. ‘아, 형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했던 거구나.’ 흥부는 그제야 놀부의 마음을 알아차렸어요. 흥부는 놀부 방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형님, 이 못난 동생을 용서해 주세요. 형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지금껏 형님만 원망하며 살았어요.” “아니다. 이렇게 성공했으니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그 뒤 흥부와 놀부는 더욱 사이좋게 지냈답니다.
콩쥐의 오해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착하고 예쁜 콩쥐가 살았어요. 어머니는 콩쥐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어요. 콩쥐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새 아내를 맞이했어요. 새어머니는 팥쥐라는 동생을 데리고 왔지요. 새어머니와 팥쥐는 콩쥐를 못살게 굴었어요. 하루는 새어머니가 콩쥐와 팥쥐에게 일을 시켰어요. 콩쥐는 새어머니가 시킨 대로 나무 호미로 돌밭을 매었어요. 하지만 나무 호미는 금세 부러져 버렸지요. “호미가 부러졌으니 이 돌밭을 어떻게 매지? ” 콩쥐는 새어머니에게 혼날까 봐 엉엉 울었어요. 그때 소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음매. 콩쥐야, 울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이거 먹고 있어.” 소는 콩쥐에게 사과 한 바구니를 주고 돌밭을 대신 매 주었어요. 콩쥐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새어머니에게 사과를 드렸어요. 그런데 새어머니는 콩쥐를 야단쳤어요. “이 사과는 어디서 났니? 훔쳐 온 것 아니니?” 그러고는 사과를 모두 빼앗아 팥쥐에게 주었지요. 콩쥐에게는 밥도 주지 않았어요. 콩쥐는 배가 고파 밤새 훌쩍훌쩍 울었지요. 어느 날, 마을에 새로 오신 사또님이 큰 잔치를 연대요. 새어머니는 팥쥐에게만 예쁜 옷을 입히고 잔치에 가기 위해 나섰어요. 콩쥐는 예쁜 옷을 입고 잔치에 가는 팥쥐가 부러웠어요. “어머니, 저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새어머니는 콩쥐에게 일만 잔뜩 시켰지요. 콩쥐는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물을 부어도 항아리는 채워지지 않았어요. 항아리 밑이 깨져서 물이 새고 있었거든요. 그때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콩쥐야, 내가 항아리 밑을 막아 줄게.” 콩쥐는 두꺼비의 도움으로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직 벼 찧기와 베 짜기가 남아 있었어요. 콩쥐는 한숨을 푹 내쉬었어요. “이 많은 벼를 언제 다 찧지?” 그러자 참새들이 날아왔어요. “우리가 부리로 껍질을 벗겨 줄게.” 그사이 아름다운 선녀도 나타났어요. “콩쥐야, 베는 내가 짜 줄 테니 이 꽃신과 비단 을 입고 어서 잔칫집에 가거라.” 꽃신을 신고 비단옷을 입은 콩쥐는 달님처럼 환하고 별님처럼 빛났어요. 콩쥐는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뛰어갔지요. 콩쥐가 다리를 건널 때였어요. “길을 비켜라. 새로 오신 사또님 행차 시다.” 콩쥐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어요. 그 순간 꽃신 한 짝이 벗겨져 냇물에 떨어졌어요. 콩쥐는 꽃신을 줍지도 못하고 뛰어갔지요. 사또님은 달님처럼 환하고 별님처럼 빛나는 콩쥐에게 마음을 빼앗겼어요. “꽃신을 주워 주인을 찾아오너라.” 신하들은 꽃신의 주인을 찾아온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마침내 신하들이 콩쥐네 집에도 왔어요. 팥쥐가 먼저 꽃신을 신어 보았지만 발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콩쥐가 꽃신을 신자 딱 맞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리하여 사또님은 착하고 아름다운 콩쥐를 아내로 맞이했답니다. 콩쥐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 콩쥐 아빠는 새 아내를 맞이했어요. 새엄마는 콩쥐네 집에 팥쥐라는 동생을 데리고 왔지요. 새엄마는 좀처럼 웃지도 않고 무뚝뚝했어요. 콩쥐는 그런 새엄마가 무서웠어요. 네 식구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 새엄마는 콩쥐의 친엄마가 앉던 자리에 앉았어요. ‘어, 저긴 엄마가 앉던 자리인데......’ 콩쥐는 자꾸만 친엄마가 떠올랐어요. 콩쥐는 식사 시간 내내 말 한마디도 없이 앉아 있다가 방 안으로 쏙 들어와 버렸지요. 콩쥐 아빠는 콩쥐와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어요. 콩쥐네 집과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일을 해야 했거든요. 이제 콩쥐는 한 달에 한 번만 아빠와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여보, 우리 콩쥐를 잘 부탁해요.” “예, 걱정하지 말아요.” 콩쥐 아빠는 새엄마에게 콩쥐를 부탁하고 떠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콩쥐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글쎄, 방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지 않겠어요? 침대와 책상, 옷장의 위치가 바뀌었지요. 침대 옆에 두었던 엄마 사진과 뚜껑을 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엄마의 보석함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요. 하루는 콩쥐가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보고 있었어요. 새엄마가 깔깔 웃는 콩쥐에게 다가와 물었어요. “숙제는 다 했니?” “아직 안 했어요.” “그럼 숙제 먼저 끝내도록 해.” 새엄마는 텔레비전을 껐어요. 콩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눈물을 글썽였어요. 어느 일요일, 같은 반 친구의 생일 잔치가 있는 날이었어요. “저, 친구 생일 잔치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는 다 했니?” “아직 안 했어요.” “그럼 공부를 다 하고 가도록 해.” 콩쥐는 날이 저물도록 공부를 끝내지 못했어요. 결국 생일 잔치에도 가지 못했지요. ‘새엄마는 왜 나한테만 그러지? 팥쥐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몹시 속이 상한 콩쥐는 공원에 갔어요. 친엄마와 자주 가던 곳이었지요. 콩쥐는 벤치에 앉아 오고 가는 가족들을 보았어요. 모두 행복해 보였어요. 콩쥐는 친엄마가 더욱 그리웠어요. 어느덧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어요. “이제 집에 들어가야겠다.” 콩쥐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빠가 와 계셨어요. “새엄마가 널 찾으러 나가셨어. 그동안 새엄마가 네게 특히 엄했던 건 콩쥐 너를 바르게 키워 달라는 내 부탁 때문이었단다.” 방 안으로 들어온 콩쥐는 책상 서랍을 열다 깜짝 놀랐어요. “어, 이게 뭐지?” 서랍 속에는 예쁜 상자가 놓여 있었어요. 그 안에는 친엄마의 사진과 보석함이 들어 있었지요. 새엄마가 정리해 놓은 것이었어요. 잠시 후 새엄마가 터덜터덜 돌아왔어요. 콩쥐는 달려 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어요. “고맙습니다, 엄마.” 새엄마는 크게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콩쥐를 품에 꼭 끌어안았지요. 아빠와 팥쥐도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답니다.
행복한 왕자의 부활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어느 마을의 공원 한가운데에 ‘행복한 왕자’ 라 불리는 동상이 있었어요. 왕자의 온몸은 황금으로 덮여 번쩍거렸고 두 눈에는 푸른 사파이어가, 칼자루에는 붉은 루비가 박혀 반짝반짝 빛났어요. “이야, 어쩌면 저리 아름다울까!”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어느 날이었어요. 남쪽으로 날아가던 제비 한 마리가 행복한 왕자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행복한 왕자님! 왜 울고 계세요?” “제비야, 나는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단다. 모두 나처럼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이 높은 곳에서 보니 그렇지가 않구나.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제비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네, 왕자님. 말씀하세요.” “저 낡은 집에 몸이 아픈 아이가 있어. 하지만 엄마는 돈이 없어서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단다. 제비야, 내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서 저 엄마에게 가져다주렴.” 제비는 루비를 물고 그 집으로 날아갔어요. 그리고 창문 앞에 루비를 톡 떨어뜨렸지요. “이게 무슨 소리지?” 창문을 연 엄마는 루비를 발견하고 기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어요. 가을바람이 점점 쌀쌀해졌어요. “고마운 제비야.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지 않겠니? 내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뽑아다가 초록 지붕 집에 사는 가난한 화가에게 주렴.” “왕자님! 그러면 한쪽 눈을 잃게 되잖아요.” “난 괜찮으니 그렇게 해 주렴, 제비야.” 제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난한 화가에게 사파이어를 가져다주었어요.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왕자님, 전 이제 가야 해요.” 그런데 행복한 왕자가 다시 간절히 부탁하지 않겠어요? 결국 제비는 성냥을 팔지 못해 며칠째 굶은 성냥팔이 소녀에게 왕자의 하나 남은 사파이어를 전해 주었답니다. 그 후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고 행복한 왕자 곁에서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어요. “제비야, 내 몸에 있는 금 조각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렴.” 행복한 왕자는 점점 초라해졌어요. 날이 추워지자 제비도 잘 날지 못했지요. 흰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제비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 “제비야, 제비야!” 왕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추운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왔어요. 동상에 쌓여 있던 눈이 녹자 행복한 왕자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났어요. “이럴 수가! 행복한 왕자 좀 봐!” “아니, 왜 저렇게 보기 흉해졌을까?” “저 제비는 왜 여기서 죽은 거야!” 사람들은 행복한 왕자를 불 속에 던져 버렸어요. 왕자의 동상은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지만 단 하나, 심장만은 녹지 않았어요. 결국 왕자의 심장은 죽은 제비와 함께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지요. 하루는 하느님이 천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그러자 천사들은 행복한 왕자의 심장과 죽은 제비를 하늘로 가져왔지요. 하느님은 그 둘을 품에 꼭 안고 말했어요.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구나. 너희는 내 곁에서 영원히 함께 지내자.” 그리하여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느 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던 제비가 행복한 왕자의 곁에서 잠시 쉬고 있었어요. 그때 행복한 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말했어요. “제비야, 궁전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보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참 많구나. 내 몸에 있는 금과 보석들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겠니?” “네, 왕자님!” 제비는 이곳저곳 바쁘게 날아다니며 왕자의 부탁을 들어주었답니다. 한편, 행복한 왕자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초라해진 행복한 왕자를 보고 깜짝 놀랐지요. 행복한 왕자가 자신들을 도와주고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시간이 갈수록 행복한 왕자의 동상은 점점 볼품없이 변해 갔어요. “어머나, 행복한 왕자가 왜 저렇게 되었지?” “에잇, 내일 동상을 없애 버립시다.” “그래요. 불에 녹여 버려요.” 마을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동상을 없애자고 이야기했어요. 드디어 다음 날 아침!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행복한 왕자가 예전처럼 황금빛 옷을 입고 있지 뭐예요! 두 눈은 다시 푸르게 빛났고 칼자루도 붉은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지요.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자, 그럼 사람들이 동상을 없애자고 얘기했던 날로 돌아가 볼까요? “그 금 조각은 행복한 왕자가 준 거였구나. 덕분에 옷 가게를 낼 수 있었는데......” 가게 아주머니는 금색 실로 황금빛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오늘 밤 왕자의 동상에 황금빛 옷을 입혀 놓자.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왕자의 동상을 없애지 않을 거야.’ 그날 밤, 아주머니는 사람들 몰래 행복한 왕자에게 번쩍이는 황금빛 옷을 입혀 놓았어요. 아주머니가 황금빛 옷을 입히고 사라진 후, 화가가 가방을 들고 나타났어요. 화가는 가방 안에서 붓과 물감을 꺼냈어요. “그 사파이어는 왕자님이 주신 거였군요." "왕자님의 푸른 두 눈이 없어진 걸 보고 알았어요. 덕분에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는데 고마운 왕자님을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 없어요.” 화가는 왕자의 얼굴과 몸에 색을 칠해서 왕자를 원래 모습처럼 돌려놓았어요. 화가가 사라지자 제비가 날아왔어요. “왕자님, 예전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왕자님이 되셨어요.” 제비는 기쁜 마음으로 밤새도록 왕자 주변을 맴돌았어요. 왕자도 행복하게 웃으며 제비를 바라보았답니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았지요? 행복한 왕자의 소문은마을 곳곳에 널리 퍼져 나갔어요.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잘못을 뉘우쳤지요. “그런 사연도 모르고 행복한 왕자를 없애려고 했다니......” “우리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그 후 사람들은 행복한 왕자를 대신해서 서로서로 도움을 주었어요.그리고 예전처럼 행복한 왕자를 사랑하고 아꼈어요.왕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제비야, 사람들이 서로 돕는 모습을 보니행복한 왕자가 된 것이 너무 기쁘구나!” “네, 왕자님! 저도 기뻐요.”
샤일록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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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 안토니오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어요. 안토니오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에 물건을 파는 상인이었지요. 안토니오는 용감하고 정의로워서 베니스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오의 친구 베사니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찾아왔어요. "첫눈에 반한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려는데 청혼할 돈이 없다네." 안토니오는 친구를 돕고 싶었어요. "내 배들이 모두 바다에 있어서 지금은 내가 가진 돈이 없네. 대신 샤일록에게 돈을 빌려 보겠네." "아니, 그 고약한 유대 나라 사람에게?" 베사니오는 깜짝 놀랐어요. 안토니오는 샤일록을 굉장히 싫어했거든요. 샤일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터무니없이 비싼 이자를 받았어요. 그리고 돈을 갚지 못하면 아주 못살게 굴었지요. 하지만 안토니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어요. "자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상관없네." 그래서 두 친구는 샤일록을 찾아가게 되었지요. 안토니오가 찾아오자, 샤일록은 깜짝 놀랐어요. 안토니오는 종종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샤일록을 무시했거든요. '안토니오, 이 기회에 골탕 좀 먹어 봐라.' 샤일록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어요. "무슨 일로 찾아왔소?" "돈을 좀 빌릴까 하오." 샤일록은 돈을 빌려주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었어요.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지 못하면 당신의 살 1파운드를 주시오." 베사니오는 깜짝 놀라 안토니오를 말렸어요. "살 1파운드를 베어 낸다는 건 목숨을 달라는 거나 다름없네!" "베사니오, 걱정하지 말게. 샤일록, 그렇게 하겠소." 결국 베사니오는 안토니오의 도움으로 포시아를 만나러 갔어요. "사랑하는 포시아, 나와 결혼해 주오."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보았고 곧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런데 베니스에서 안토니오의 배가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지 뭐예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베사니오는 안토니오가 걱정되었어요. 베사니오는 고민 끝에 그동안의 일을 포시아에게 모두 말했어요. 포시아는 깜짝 놀라며 베사니오에게 얼른 돈을 주었어요. "어서 베니스로 가서 친구를 구하세요." "고맙소, 포시아!" 베사니오는 서둘러 베니스로 떠났어요. '뭔가 더 확실한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포시아는 옷을 갈아입었어요. 그리고 베사니오의 뒤를 따라 베니스로 향했지요. 베사니오는 베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재판소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샤일록에게 돈을 내밀며 말했지요. "내가 그 돈을 배로 갚겠소!" 하지만 샤일록은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필요 없습니다. 저는 약속한 대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만 받겠습니다." 재판관도 안타까운 듯 말했어요. "그냥 저 돈을 받는 것이 어떻겠소?" "싫습니다. 저는 오직 약속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샤일록은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요. 결국 재판관은 할 수 없이 판결을 내렸어요. "샤일록은 약속대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베어 가시오." 그러자 샤일록은 음흉스레 웃으며 칼을 빼어 들었지요. 바로 그때, 한 젊은 법학자가 나타났어요. 그는 큰 소리로 샤일록에게 외쳤지요. "하지만 약속에 없는 안토니오의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오." 그러자 샤일록이 울상을 지었어요. "어떻게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베라는 겁니까?" "그럼 살을 베겠다는 약속은 올바르다고 생각하오?" 샤일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재판관은 샤일록에게 벌을 내렸어요. "샤일록은 재산의 절반을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안토니오에게 주시오. 종교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도록 하시오!" 베사니오는 기쁜 소식을 전하러 집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알고 보니 젊은 법학자는 바로 포시아가 아니겠어요? 베사니오는 지혜로운 포시아에게 고마워했어요. 한편 안토니오의 배는 무사히 항구에 도착했어요. 이렇게 힘든 일들이 잘 해결되자 모두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안토니오를 해치려던 샤일록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어요. 화가 난 안토니오가 재판관에게 말했어요. "이 나쁜 유대 사람에게 더 무거운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샤일록이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나쁜 유대 사람? 재판관님!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안토니오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평범한 상인이었습니다." 샤일록의 이야기는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어요. 샤일록은 장사를 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베니스로 건너와 작은 가게를 열었어요. 샤일록은 성실히 일했고 덕분에 가게는 금세 커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한 베니스의 상인이 샤일록에게 많은 양의 물건을 준비해 달라고 했어요. 샤일록은 상인의 말만 믿고 전 재산을 털어 물건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샤일록, 그 상인이 다른 곳에서 물건을 샀대!" 큰 손해를 보게 된 샤일록은 안토니오를 찾아갔어요. '정의로운 안토니오라면 분명 내 억울함을 풀어 줄 거야.'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안토니오는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베니스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소. 게다가 당신 같은 유대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소." 안토니오는 샤일록을 내쫓았어요. 샤일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요. "아, 내가 어리석었어." 샤일록은 베니스의 상인들과 안토니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다시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요.
황소와 삼백 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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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살았어요. 농부는 참외 농사를 지었는데, 남들보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참외가 무럭무럭 컸지요. “어이쿠! 이게 참외야, 수박이야?” 사람들은 농부네 밭 참외를 보고 감탄했어요. 어느 날, 농부는 참외 밭에서 엄청나게 큰 참외를 발견했어요. “와, 이렇게 크고 귀한 참외는 임금님께 바쳐야겠다.” 농부는 수박만 한 참외를 따서 궁궐로 가져갔어요. “내 생전에 이렇게 큰 참외는 처음 보는구나!” 임금님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여봐라, 이 기특한 농부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적당한 것이 뭐가 있겠느냐?” 신하 중 하나가 대답했어요. “예, 저 참외만 한 금덩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럼 그걸 저 농부에게 상으로 주도록 해라.” 농부는 입이 딱 벌어졌어요. “감사합니다, 임금님.” 농부는 커다란 금덩이를 품에 꼭 안고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왔지요. 이 소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에 퍼졌어요. 같은 마을에 살던 욕심쟁이 농부도 그 얘기를 들었지요. “참외를 바치니 그만한 금덩이를 상으로 주더란 말이지? 그렇다면.” 곰곰이 궁리하던 욕심쟁이 농부는 이웃에게 돈을 꾸었어요. 그러고는 시장을 샅샅이 뒤져서 몸집이 우람한 황소 한 마리를 샀지요. 임금님에게 황소를 바치고 그만한 금덩이를 얻어 오겠다는 속셈이었지요! 욕심쟁이 농부는 소를 끌고 궁궐로 갔어요. “제가 애지중지 키웠더니 소가 이렇게 우람해졌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소가 분명해 임금님께 바치고자 이렇게 끌고 왔습니다.” 임금님은 소를 보고 감탄했어요. “내 생전에 이렇게 큰 소는 처음 보는구나!”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물었어요. “여봐라! 이 기특한 농부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적당한 것이 뭐가 있겠느냐?” “예, 수박만 한 참외가 하나 있습니다.” “잘됐구나. 그 참외를 저 농부에게 상으로 주도록 해라.” 그 말을 들은 욕심쟁이 농부는 기가 막혔어요.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돈까지 꿔서 산 황소가 겨우 참외 하나로 바뀐단 말이야?’ 욕심쟁이 농부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때 신하 하나가 근엄하게 농부를 꾸짖었지요. “어험, 임금님께서 상을 내리시는데 어째서 감사하다는 말을 올리지 않느냐?” 욕심쟁이 농부는 억지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어요. “ 감사합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참외를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욕심쟁이 농부는 꺼이꺼이 울고만 싶었어요. 소를 사느라 꾼 돈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어요. 수박만 한 참외는 무척 무거웠어요. 농부는 “에라!” 하고 참외를 던지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대요. ‘아니, 고작 참외라니!’ 욕심쟁이 농부는 당황하여 다급히 말했지요. “임금님! 참외 대신 다른 걸 주셨으면 합니다.” “어허!” 하고 신하들이 버릇없는 농부를 꾸짖었어요. 그렇지만 임금님은 마음이 너그러웠지요. “너는 참외를 싫어하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다른 걸 줘야지.”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물었어요. “참외 말고 다른 것은 없느냐?” “큰 항아리만 한 호박과 중국에서 온 비단옷 한 벌, 또 인도에서 가져온 향 한 줌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가져다 놓고 저 농부에게 고르도록 하여라.” 이렇게 해서 욕심쟁이 농부 앞에는 큰 호박과 비단옷과 향 한 줌이 놓이게 되었어요. 욕심쟁이 농부는 무엇을 고를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호박이야 제아무리 크다 해도 그저 호박일 뿐이지. 비단옷? 호박보다는 낫지만 황소 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인도 향이라. 귀하긴 해도 고작 한 줌이 얼마나 하겠어?’ 욕심쟁이 농부는 머리를 긁적이며 임금님에게 말했어요. “임금님, 여기엔 제 맘에 드는 것이 없사옵니다. 차라리 돈으로 주시면 좋겠는데.” 신하들은 또 헛기침을 하며 꾸짖었지만 임금님은 마음이 아주 넓었어요. “저 농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라!”
진짜 아버지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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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어요. 농부는 열심히 일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욕심쟁이 부자 영감에게서 땅을 샀어요. “이제 내 땅이 생겼으니 신나게 일해 볼까?” 그런데 농부는 얼마 못 가서 울상이 되고 말았어요. 농부가 산 땅은 온통 돌멩이뿐이었거든요. 욕심쟁이 부자 영감이 가장 나쁜 땅을 농부에게 팔았던 거예요. “할 수 없지. 돌멩이를 다 골라내고 씨앗을 뿌려야겠다.” 농부는 다시 힘차게 괭이를 내리쳤어요. 그때 “때앵!” 하고 무언가 괭이에 부딪혔어요. “이게 뭐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은 커다란 항아리였어요. “쌀독으로나 써야겠다.” 농부는 항아리에 괭이를 넣어 집으로 가져갔지요. 집에 도착한 농부는 항아리 안에서 괭이를 꺼냈어요. 앗! 그런데 괭이는 하나가 아니었어요. 괭이가 둘, 셋, 넷....., 자꾸만 나왔지요. 농부는 그만 입이 떠억 벌어졌어요. 농부는 혹시나 하고 동전 하나를 쨍그랑 넣었어요. 그러자 순식간에 동전이 항아리에 가득 찼지요. 농부는 그만 입이 떠억 벌어졌어요. 요술 항아리 덕분에 농부는 부자가 되었어요. 소문은 순식간에 동네방네 퍼졌어요. 농부에게 땅을 판 욕심쟁이 부자 영감은 심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게 원래 누구 땅인데! 당장 가서 내 항아리를 찾아와야겠다!” 욕심쟁이 부자 영감은 농부를 찾아가서 다짜고짜 소리쳤어요. “ 당장 내 항아리를 내놓아라!” 농부도 지지 않고 소리쳤지요. “이것이 어찌 영감 항아리요? 내 땅에서 나온 것이니 내 항아리가 분명하오!” “내가 판 것은 땅뿐이지, 항아리는 판 적이 없다!” 두 사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싸움은 도무지 끝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사또를 찾아가기로 했지요. 농부와 영감은 한 목소리로 외쳤어요. “사또! 이 항아리의 주인을 밝혀 주십시오.” “ 일단 진짜 요술 항아리인지 확인부터 해 보자. 쌀 한 톨을 넣어 보아라.” 농부가 쌀 한 톨을 항아리에 넣자, 순식간에 쌀이 불어나 항아리에 그득 찼지요. 이를 본 사또는 요술 항아리가 몹시 탐이 났어요. “어험, 항아리 때문에 이웃 간에 싸움이 나다니. 이 항아리는 당분간 관가에서 맡아 두어야겠구나!” “이제 나는 큰 부자가 되겠구나!” 사또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사또는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밤에 요술 항아리를 등에 지고 집에 가져다 놓았지요 사또의 아버지가 대청마루에 놓인 항아리를 보았어요. “이게 웬 항아리야? 뭐 좋은 것이라도 들었나?” 사또의 아버지는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다 그만, ‘우당탕!’ 빠지고 말았지요. “아이고, 늙은이 살려라!” 놀란 사또는 얼른 아버지를 꺼냈어요. 그런데 또다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를 꺼내지 않고 뭣 하느냐!” 항아리 안에서는 아버지가 자꾸만 나왔어요. 결국 사또의 아버지가 열 명이나 되었지요. “욕심을 부리다가 벌을 받는구나.” 사또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답니다. 사또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어요. “아범아, 이 가짜 영감이 날 꼬집었어. 혼 좀 내 줘.” “아니야, 이 가짜 영감이 나를 먼저 때렸어.” 밥을 먹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열 명의 아버지들은 애들처럼 서로 다투었어요. 사또는 머리가 지끈지끈, 눈이 어질어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요. “이 일을 어떡하나.” 사또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 무릎을 탁 쳤어요. “생김새는 같아도 좋아하는 것은 다를 거야!” 사또는 얼른 쌉싸름한 씀바귀 김치로 밥상을 차렸어요. 씀바귀 김치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거든요. 그런데 열 명의 아버지는 동시에 군침을 꿀꺽 삼키더니 씀바귀 김치를 서로 먹겠다고 달려들지 뭐예요. 밥상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지요.
마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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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엄마가 보고 싶어.” “그레텔, 이제는 새엄마가 우리 엄마야.” 마음 여린 그레텔은 헨젤에게 다가와 울먹거렸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심술궂은 새엄마와 함께 살았거든요. 그해 마을에 큰 가뭄이 들었어요. “이제 먹을 것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어쩌지?” 아빠는 한숨을 푹 쉬었어요. 그때 새엄마가 다가와 말했어요. “애들을 숲속에 버리고 오면 되지요.” “뭐라고? 어떻게 아이들을.” “그럼, 다 같이 굶어 죽을 생각이에요?” “휴, 알았소.” 그 말을 엿들은 헨젤과 그레텔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이제 우린 어떡하지?” ‘하얀 조약돌을 길 위에 떨어뜨려 두자. 그러면 숲속에서 길을 잃어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날부터 헨젤은 하얀 조약돌을 모았어요. 며칠 뒤 새엄마가 남매를 불렀어요. “얘들아, 다 함께 나무하러 가자꾸나. 어서!” 헨젤은 주머니 속에서 조약돌을 꺼내 길 위에 하나씩 떨어뜨렸어요. 그사이 새엄마와 아빠는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길로 도망쳤지요. “오빠, 아빠와 새엄마가 안 보여. 이제 우린 어떡해!” “그레텔, 발밑에 하얀 조약돌이 보이니? 내가 집에서 나올 때부터 길 위에 떨어뜨려 둔 거야.” “그럼, 이 조약돌만 따라가면 집에 갈 수 있겠네!” 헨젤과 그레텔은 조약돌을 따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새엄마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어떻게 집을 찾아왔지?’ 밖을 살펴보던 새엄마는 조약돌을 찾아냈어요. ‘흥, 저거로군. 모두 없애야겠다.’ 다음 날, 새엄마는 헨젤과 그레텔을 다시 숲속에 남겨 놓고 달아나 버렸어요. “앗, 조약돌이 없어졌어.” “그럼, 집에 못 돌아가는 거야?” 아이들은 울먹이며 숲속을 헤맸어요.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요? “오빠! 저기 과자로 만든 집이 있어!” “야호, 배고팠는데 잘됐다!” 헨젤과 그레텔은 허겁지겁 달려갔어요. 그리고 과자집을 뜯어 먹기 시작했지요. 그때, 마녀가 문을 열고 나왔어요! “누가 내 집을 망가뜨리는 거냐?” 헨젤과 그레텔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어요. 마녀는 헨젤과 그레텔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얘들아, 집 안으로 들어오렴. 더 맛난 걸 주마.” 헨젤과 그레텔은 신이 나서 마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마녀는 헨젤을 우리에 가두었어요. “너는 살이 포동포동 찌면 잡아먹겠다!” 그리고 그레텔에게는 온갖 일을 시켰지요. 그러던 어느 날, 마녀가 말했어요. “더는 못 기다리겠어. 그레텔, 어서 장작에 불을 지펴!”
쥐가 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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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찍찍! 찍찍! “큰일 났다! 쥐들이 마을을 덮친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에 새까맣게 쥐 떼가 몰려왔지 뭐예요. 쥐들은 거리와 집 안 곳곳에 바글바글 들끓었어요. 사각사각, 우당탕 쿵쾅! 평화로웠던 하멜른은 술렁거렸어요. “이 많은 쥐들을 어떡하죠?” “고양이들이 도망갈 정도니.” 그때 마을에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했어요. “제가 쥐를 모두 없애 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게 금화 천 개를 주세요.” 사나이의 말에 모두 귀가 솔깃했어요. “하지만 금화 천 개는 큰돈인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고민 끝에 사람들은 사나이에게 쥐를 없애 달라고 부탁했어요. 사나이는 피리를 불며 하멜른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쥐들이 여기저기서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사나이의 뒤를 따르는 거예요. 사람들은 모두 입을 쫙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요. 사나이는 피리를 불며 낭떠러지로 걸어갔어요. 쥐들도 사나이를 따라 낭떠러지까지 쪼르르 기어갔지요. 사나이는 낭떠러지 위에 멈추어 서서 피리를 계속 불었어요. 그러자 피리 소리에 취한 쥐들이 하멜른의 깊고 푸른 강으로 퐁당퐁당 뛰어들었지요. 모든 쥐들이 강물로 뛰어들 때까지 피리 연주는 계속되었어요. 쥐들이 모두 사라지자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말했어요. “이제 약속했던 금화 천 개를 주세요.” 그런데 사람들이 딴청을 피우는 게 아니겠어요? “당신 같은 떠돌이에게 그렇게 큰돈을 줄 수는 없소.” 사람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마을 밖으로 쫓아냈어요. 화가 난 사나이는 마을을 향해 소리쳤어요. “당신들은 금화보다 더 큰 것을 잃게 될 것이오!” 얼마 후, 조용한 하멜른 거리에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피리 소리를 들은 마을 어른들은 깜짝 놀랐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다시 나타났어요!” “어?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잖아! ” “어머나, 저길 좀 봐요.”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피리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모두 거리로 뛰어나왔어요.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춤추며 사나이 뒤를 따라갔지요. 한참 뒤, 사나이와 아이들은 마을 밖으로 사라졌어요. 그러자 피리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요. 어른들은 그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어서 아이들을 찾으러 갑시다!” 모두가 서둘러 거리로 뛰쳐나와 여러 곳을 헤매고 다녔지요. 이곳저곳을 헤매던 어른들은 산 앞에 멈추어 섰어요. “저 산으로 간 게 아닐까요?” 그때 한 아이가 다리를 절며 산에서 내려왔어요. “얘야, 어떻게 된 거니?”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지요. “다들 피리 부는 아저씨를 따라 산속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사람들은 무서움에 떨며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아이들을 찾지 못했답니다. 삐리 삐리, 삐리리리. 앗! 하멜른의 사라졌던 아이들이에요. 모두 흥겨운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네요. “아저씨, 또 피리 불어 주세요.” “아저씨 피리 소리는 재미있어요.” “하하! 꼬마 친구들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 없군.” 삐리 삐리, 삐리리리. “나는 사실 이 피리 때문에 친구가 없었어.” “왜요? 이렇게 즐거운 연주를 들려주는데.” “사람들은 이 피리 소리가 무섭다고 했지. 내 피리 연주를 좋아해 준 건 너희가 처음이야.” 피리 부는 사나이는 빙그레 웃었어요. “이제 마을로 돌아가도록 해.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 “아직 금화 천 개를 못 받았잖아요.” “너희가 친구가 되어 준 걸로 충분하단다.” 아이들은 또 놀러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저기 아이들이 오고 있어요!” 하멜른의 어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니?” “아니에요! 피리 부는 아저씨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친구가 되기로 한걸요!” “그 녀석은 못된 짓을 했어. 우리 돈을 훔쳐 가려는 것도 모자라 너희를 데려가지 않았니? 다시는 녀석을 만나면 안 된다.” 아이들은 삐죽 입을 내밀었지요. 하멜른의 사람들이 쿨쿨 잠든 깊은 밤이었어요. 사각사각, 찍찍찍! 마을 사람들은 기분 나쁜 쥐 소리에 잠에서 깨었지요. 다음 날 아침, 모두 광장에 모였어요. “어젯밤에 쥐 소리를 들었지요?” “광장 앞 나무 기둥이 갉아져 있어요!” “쥐가 다시 나타난 걸까요?” 어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오늘 밤 다 같이 쥐를 잡기로 해요. 숨어서 광장 앞 나무들을 지켜봅시다.” 달빛이 광장을 환하게 비추는 밤이에요. 사각사각, 찍찍찍! 어머나! 이게 웬일일까요? 아이들이 커다란 앞니로 나무 기둥을 갉작갉작 갉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어이쿠!” 깜짝 놀란 어른들은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그 소리에 아이들은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지요.
아빠를 찾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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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어느 마을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박사가 살았어요.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밤낮으로 연구만 했어요. 그래서 박사의 연구실은 밤에도 불이 켜져 있었지요. 소문에 의하면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무시무시한 연구를 하고 있대요. 어떤 연구냐고요? 바로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박사는 오랜 연구 끝에 드디어 사람을 만들었어요. “내 아들아, 이제 눈을 떠라!” 그러자 어둠 속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럴 수가, 그건 너무 무섭게 생긴 괴물이었어요! “으악, 내가 괴물을 만들다니! 넌 내 아들이 아니야 ! ” 우당탕! 콰당! 박사는 괴물이 무서워서 고향으로 도망쳤어요. 이제 막 눈을 뜬 괴물은 궁금한 게 참 많았어요. “아빠는 왜 날 버리고 사라졌을까?” “난 왜 남들과 다르게 생겼지?” “저것들은 다 무엇일까?” 괴물은 연구실 여기저기를 뒤적거렸어요. 그러다 박사의 일기장을 발견했지요. 일기장에는 박사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적혀 있었어요. “그래, 아빠의 고향으로 가 보자. 아빠를 만나서 궁금한 걸 물어봐야지.” 박사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어요. 괴물은 배가 고파서 사람들에게 *구걸하기도 했어요. “저리 가, 괴물아!”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도망갔지요. 괴물은 그런 사람들이 미웠어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내 얼굴만 보고 날 싫어해.” 괴물은 박사가 원망스러웠어요. “아빠는 왜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오랜 여행 끝에 괴물은 박사의 고향에 도착했어요.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아빠를 만나야겠어.” 괴물이 근처 숲에 숨어서 잠을 자려던 순간,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 괴물을 향해 다가왔어요. 바로 숲속을 헤매고 있던 어린 소녀였지요. 신기하게도 소녀는 괴물을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괴물은 소녀를 위해 모닥불을 피워 주고 따뜻한 털옷도 주고 밤새 동물들로부터 지켜 주었지요. 소녀는 괴물의 다리를 베고 쌔근쌔근 잠들었답니다.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이 숲으로 몰려왔어요. 소녀를 찾기 위해서 바쁘게 걸어 다녔지요. 그러다가 괴물과 소녀가 같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괴물이다! 괴물이 소녀를 해치려고 한다!” 사람들은 괴물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아니에요! 이 아저씨는 저를 지켜 주었어요!” 소녀가 사람들을 말렸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사람들 사이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보이지 않겠어요? 괴물은 너무나 기뻐 박사에게 달려갔지요. “아빠, 묻고 싶은 게 많아서 찾아왔어요!” 박사는 벌벌 떨며 소리쳤어요. “나는 네 아빠가 아니다! 다가오지 마!” 박사는 도망치려다 그만, 꽈당! 땅바닥에 넘어지면서 크게 다치고 말았어요. “아이고, 괴물이 박사님을 해쳤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박사를 병원으로 옮겼어요. 괴물은 너무 슬퍼 엉엉 울었지요. “아빠가 많이 다쳤나요? 저도 따라갈래요. 흑흑.” 그러자 사람들이 화를 내며 괴물을 막았어요. “또 누굴 해치려고! 저리 가!” 그날 밤, 괴물은 몰래 창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어요. “아빠, 제가 아빠를 보살펴 드릴게요.” 그리고 죽어 가는 박사를 업고 도망쳤어요. 그날 괴물을 본 사람들은 말했어요. “글쎄, 괴물이 펑펑 울면서 박사를 업고 갔어요.” “그 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던지 나도 눈물이 났어요.” 그 후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해요. 산속 깊은 곳에 작은 집이 있었어요. 이곳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서로 도우며 작은 텃밭을 가꾸었지요. 비가 내리는 밤이었어요. 누군가 비를 흠뻑 맞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집을 찾아왔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지요. 그런데 손님이 움직일 때마다 큰 소리가 들렸어요. 발소리가 쿵쾅쿵쾅, 숨소리가 훅훅. 손님은 바로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던 거예요. 할머니는 손님에게 따뜻한 수프를 끓여 주었어요. 할아버지는 폭신한 이불로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지요. 괴물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고운 마음씨에 감동했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친절한 분들은 처음 뵙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날, 비가 그치고 해님이 방긋 떠올랐어요. 괴물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무언가 해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힘이 굉장히 세고 키도 무척 커요.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 “그럼, 지붕을 고쳐 줄 수 있겠니?” “네, 금방 고쳐 드릴게요!”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 괴물은 지붕을 고치기 시작했어요. 힘센 팔로 뚝딱뚝딱 망치질을 했지요. 그런데 지붕을 거의 다 고쳤을 때 괴물은 그만 손가락을 다치고 말았어요. “아야!” 할머니는 괴물의 손가락에 약을 발라 주고 붕대도 감아 주었어요. “너는 참 커다란 손을 가졌구나.” “네, 제 손은 어른보다 더 크고 힘이 세요.” “그럼, 손가락이 다 나으면 우리 텃밭에 있는 바위도 치워 줄 수 있겠니?” “그럼요, 지금 바로 해 드릴게요!” 괴물은 곧장 텃밭으로 달려갔어요. 으라차차! 바위를 단숨에 들어 올리더니 휙 던졌어요. 쿵!
볏단을 훔친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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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산골 작은 마을에 사이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형제는 비록 가난했지만, 홀아버지를 모시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따스한 봄날, 형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아우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지요. "형님, 정말 축하해요." "아우야, 고맙구나." 하지만 얼마 뒤, 홀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갑작스러운 일에 형제는 커다란 슬픔에 잠겼지요. 하지만 서로를 다독이며 다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살아갔어요. 그러는 사이, 아우도 결혼해서 사랑하는 가족이 생겼답니다. 곧 계절은 바뀌어 가을이 찾아왔어요. 형제는 다 익은 벼를 나눠 갖기로 했어요. "아우야, 네가 더 가져가거라. 나는 그동안 게으름만 피웠잖니?" "네? 형님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하셨는데요! 형님이 더 가져가셔야죠." 형제는 서로에게 볏단을 더 주려고 했어요. 그때, 형제 곁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말했어요. "어허, 그거 똑같이 반으로 나누면 되지 않소?" 그 말을 들은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그런데 댁들의 벼가 아주 잘 익었소!" "예, 올해 농사가 무척 잘되었답니다." "허허, 기쁘겠소. 그것참, 축하하오." 형제와 나그네는 동네 주막에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어요. 그러던 중 나그네는 형제가 사는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지요. 나그네는 속으로 껄껄 웃었어요. '하하, 형제의 볏단은 모두 내 것이다!' 사실 나그네는 도둑이었던 거예요! '우선 형의 볏단부터 훔칠까?' 그날 밤, 도둑은 형의 집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형의 볏단을 옮기고 있었던 거예요. '에잇! 벌써 다른 도둑이 왔잖아.' 도둑은 아우의 집으로 달려갔어요. '아니, 여기도 이미 누가 훔치고 있네?' 도둑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요. '쳇, 어떤 놈인지 내가 한번 봐야겠어!' 도둑은 살금살금 사내의 뒤를 밟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반대편 언덕에서도 한 사내가 볏단을 가지고 내려오는 거예요. 마주친 두 사내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곧 서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갔어요. 두 사내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도둑은 깜짝 놀랐어요. '아니, 사이좋은 형제였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그럼, 형제가 벼를 벤 날로 돌아가 봐요! 벼를 다 베어 놓은 날이었어요. 그날 밤, 형은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여보, 아우네 살림이 어려우니 볏단을 더 주는 게 어떨까요?"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서방님 댁에 곧 아이도 생길 텐데, 그게 좋겠네요." "그런데 볏단을 어떻게 줄까요?" 한편, 아우도 고민하고 있었어요. "형님은 식구가 많아 곡식이 더 필요할 거야. 내 볏단을 드려야겠어. 그런데 어떻게 가져다드리지?" 그때 형과 아우에게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몰래 볏단을 가져다 놓으면 되겠구나!' 형은 자신의 볏단을 아우의 집에 몰래 두고 왔어요. 아우도 자기 볏단을 형의 마당에 쌓아 두었지요. 이튿날, 형제는 마당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어째서 볏단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 그날 밤, 형은 다시 볏단을 가지고 아우네 집으로 갔어요. 아우도 볏단을 가지고 형네 집으로 갔지요. 다음 날 아침, 형제는 또 놀랐어요.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도 볏단이 그대로잖아. 너무 조금 가져다 놓았나? 오늘은 더 많이 가져다 놓아야겠군.' 형제는 다음 날 밤, 서로의 집에 볏단을 쌓아 놓으러 달빛이 비친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때 멀리 볏단을 지고 오는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형제는 그제야 왜 볏단의 양이 그대로였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날, 형과 아우는 서로의 손을 오랫동안 꼭 잡고 있었대요. 맞잡은 두 손이 너무나 따뜻했으니까요. 이제 알았나요? 도둑이 형제를 몰래 지켜보던 날, 형제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이유를 말이에요. 옛날에 욕심 많은 형제가 살았어요. 서로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하루 종일 다투기만 했지요.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혀를 끌끌 찼답니다. "어쩌면 둘 다 저렇게 성질이 고약하담?" "쯧쯧, 제 욕심 채우기 바쁘다니까." '저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꼬?' 부모님은 늘 속을 앓았어요. 형제를 보며 걱정만 하던 부모님은 마음의 병을 얻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형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야." "웃기네. 네가 말썽을 피워서 그런 거야." 형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서로의 탓으로 돌렸어요. 형제는 서로를 더욱 원망했지요. 형제는 부모님이 남겨 주신 땅을 차지하려고 또다시 싸웠어요. "내가 형이니까 더 많이 가져야 해." "형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그럼 원님을 찾아가서 여쭤보자." 형은 아우를 끌고 원님을 찾아갔어요. 형제의 이야기를 듣던 원님은 말했지요.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땅을 가지도록 하여라." '그렇다면 내가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이 추수해야지.' 형제는 온종일 쉬지 않고 일했어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이지요. 마주쳐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어요. '저 녀석이 형님 무서운 줄 몰라. 추수할 때 두고 보자.' '꼭 형보다 더 많이 추수해야지.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겠어.' 형제는 서로 미워하는 마음만 더욱 키워 갔어요.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가을이 왔어요. "풍년이구나. 다 내 덕분이지." "무슨 소리야? 다 나의 공이라고!" 형제에게 풍년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누가 더 많이 추수할지에만 관심이 있었지요. "내일은 원님께서 볏단의 양을 재기로 한 날이야." "알고 있어. 두고 보자고." 형제는 자신의 앞마당에 쌓인 볏단을 보고 생각했어요. '형의 것이 더 많으면 어쩌지?' '아우의 것이 더 많으면 곤란해.' 형제는 서로의 볏단 양이 궁금해졌어요. 날은 저물고 어두운 밤이 되었어요. 형제는 슬금슬금 집에서 빠져나와 서로의 집을 몰래 찾아갔답니다. 형은 아우의 집에 있는 볏단을 훔쳐 왔어요. 아우도 형의 집에 있는 볏단을 훔쳤지요. '이만하면 내가 더 많겠지?' 형제는 훔쳐 온 볏단을 보며 흐뭇해했어요. 다음 날 원님은 볏단의 양을 재기 위해 형의 집과 아우의 집을 번갈아 찾았어요. 볏단의 양을 다 잰 원님은 말했어요. "형과 아우의 볏단 양이 똑같구나. 두 사람은 땅을 반씩 나누어 가지도록 하라." 형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원님은 형제에게 덧붙여 말했어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으니 잘 들어라. 앞으로 너희가 싸움할 때마다 내가 너희 땅을 한 평씩 가져가겠다. 그러니 서로를 도우며 잘 살아가도록 해라." 형제는 할 수 없이 원님의 뜻대로 하기로 약속했답니다. 하지만 형제는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요. "네가 몰래 내 볏단을 훔쳤다면서?" "형님이야말로 저희 집 볏단을 몰래 가져갔다면서요?" 형제의 땅은 점점 원님의 땅이 되어 갔어요. 갈수록 형제는 가난해졌지요. '괜히 내 욕심만 부렸구나.' 형제는 후회하기 시작했어요. 형과 동생은 서로에게 미안해했어요. "다 내 탓이다. 형인 내가 참 모질었구나." "아니에요. 마음이 삐뚠 제 탓이죠."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게 몇 년 만이지?" "그러고 보니 우린 매일 싸우기만 했네요."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어느새 형제의 얼굴은 따뜻한 미소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랑을 고백한 인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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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 속에 인어 궁전이 있었어요. 임금님에게는 여섯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 인어 공주가 가장 아름다웠답니다. 인어 공주는 바다 위의 세상이 너무 궁금했어요. "나도 빨리 열다섯 살이 되어서 바다 위로 나가고 싶어." 드디어 열다섯 살이 되던 날, 인어 공주는 바다 위로 헤엄쳐 올라갔답니다. 마침 바다 위에는 커다란 배 한 척이 떠 있었어요. 인어 공주는 배 위에서 환하게 웃는 왕자를 보았지요. '어쩌면 저렇게 멋질까!' 우르릉 쾅! 우르릉 쾅!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어요.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높게 일어났어요. 왕자가 탄 배는 순식간에 뒤집어졌지요. "왕자님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인어 공주는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 모래밭에 누였어요. 그리고 왕자에게 입을 맞추며 기도했지요. '제발 왕자님을 살려 주세요!'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인어 공주는 재빨리 바위 뒤로 숨었지요. "어머나, 왕자님! 눈 좀 떠 보세요!" 이웃 나라 공주와 하인들이었어요. 정신을 차린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에게 말했어요. "당신이 날 구해 주셨군요!" 왕자는 인어 공주가 자기를 구한 것을 알지 못했어요. '나에게 물고기 꼬리 대신 사람처럼 두 다리가 있었다면.' 인어 공주는 마녀를 찾아갔어요.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인간의 두 다리를 얻는 물약을 받았지요.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너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인어 공주는 물약을 들고 바다 위로 올라왔어요. '아빠, 언니들! 모두 안녕!' 그리고 물약을 마시고는 정신을 잃었답니다. 눈을 떠 보니 왕자가 인어 공주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아가씨, 당신은 어디에서 왔나요?"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인어 공주는 대답할 수 없었지요. "가엾게도 말을 못 하는군요. 나와 함께 궁전으로 갑시다." 인어 공주는 왕자의 곁에 머물게 되어 너무 행복했답니다. 하지만 결국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와 결혼했어요. 이웃 나라 공주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고 믿었거든요. 결혼식 날 저녁, 축하 잔치가 열렸어요. 인어 공주는 왕자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지요. '왕자님을 구한 건 바로 저예요.' 그러나 왕자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이웃 나라 공주와 춤출 뿐이었어요. '이제 나는 곧 물거품이 되겠지.' 인어 공주는 바다를 바라보며 슬퍼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언니 인어들이 나타났어요. "막내야! 해가 뜨기 전에 이 칼을 왕자의 가슴에 꽂아! 그럼 넌 예전처럼 인어가 될 수 있어!" 인어 공주는 칼을 들고 왕자의 방으로 갔어요. 하지만 도저히 왕자를 찌를 수 없었지요. '왕자님, 안녕!' 인어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바다에 몸을 던졌어요. 그리고 서서히 녹아 물거품이 되었답니다. 인어 공주는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 주면서 사랑을 느꼈어요. 그래서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고 인간의 두 다리를 얻어서 왕자를 찾아왔답니다. 하지만 왕자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오히려 이웃 나라 공주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왕자와 이웃 나라 공주, 인어 공주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요. 왕자는 줄곧 이웃 나라 공주하고만 즐겁게 이야기했어요. 인어 공주는 너무 속상했지요. 그런데 그때 왕자가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고 말았어요. 풍덩! 인어 공주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왕자를 구해 냈어요. 정신을 차린 왕자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이제야 기억나! 그날 폭풍 속에서 나를 구해 준 사람이 바로 너였구나!" 그로부터 얼마 후 왕자의 나라에서 올림픽을 열게 되었어요.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마땅한 수영 선수가 없구나." 임금님의 말에 왕자는 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바로 훌륭한 수영 솜씨로 바다에 빠진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인어 공주였답니다! "넌 수영을 정말 잘하던데 수영 경기에 나가 보면 어떻겠니?" 인어 공주는 잠시 망설였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웠거든요.
나도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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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개굴개굴.”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엄마 청개구리가 연못에 알을 낳았어요. 얼마 후, 알 속에서 작은 올챙이들이 꼼지락거리며 나왔어요. 그런데 엄마 청개구리의 아이들은 올챙이 때부터 좀 이상했어요. 엄마 청개구리가 “이리로 헤엄쳐 오렴.” 하면 “싫어요. 저리로 헤엄쳐 갈래요.” 하고, “저쪽으로 헤엄쳐 가 보자.” 하면 “싫어요. 이쪽으로 갈래요.” 했지요. 어느새, 아기 올챙이들은 쑥쑥 자라서 청개구리가 되었어요. “얘들아, 너희도 이제 우는 법을 배워야지.” “싫어요!” “자, 그러지 말고 엄마를 따라 해 보렴. 개굴개굴.” 그러자 아기 청개구리들은 키득키득 웃더니 “굴개굴개.” 하는 거예요. “아니, 얘들아. 그렇게 우는 게 아니에요. 개굴개굴. 이렇게 해야지.” “싫어요. 이게 더 재밌어요. 굴개굴개!” 세상에! 어쩌면 좋죠? 아기 청개구리들은 점점 더 엄마 청개구리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얘들아, 오늘은 벌레를 잡아 보자.” “싫어요! 연못으로 목욕하러 갈래요!” “휴. 그래, 목욕하러 가자.” “싫어요! 벌레 잡으러 갈래요!” “휴.” 엄마 청개구리는 한숨만 늘어 갔어요. 씽씽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어요. “자, 이제 따뜻한 땅속에서 잠을 자자.” “싫어요! 잠자는 건 지루해요 ! ” “연못으로 수영하러 갈래요!” 엄마 청개구리는 깜짝 놀랐어요. “얘들아, 안 돼!” 하지만 아기 청개구리들은 차가운 연못으로 폴짝폴짝 뛰어들었어요. 엄마 청개구리는 얼굴이 하얘졌어요. 차가운 연못에 있다가는 아기 청개구리들이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새파랗게 질린 아기 청개구리들이 소리쳤어요. “어푸어푸! 엄마, 살려 주세요!” 풍덩! 엄마 청개구리는 연못으로 뛰어들어 아기 청개구리들을 모두 구해 냈어요. 하지만 그해 겨울, 엄마 청개구리는 큰 병에 걸리고 말았지요. 엄마 청개구리는 봄이 되어서야 겨우 기운을 차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아기 청개구리들이 걱정되었지요. “얘들아, 저 산에는 무서운 뱀이 산단다. 절대 가지 마라.” 그러나 이번에도 아기 청개구리들은 말을 듣지 않았어요. “싫어요! 갈 거예요!” 그리고 며칠 후 아기 청개구리들이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 청개구리는 서둘러 산으로 뛰어갔지요. 어머나, 커다란 뱀이 아기 청개구리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 나쁜 뱀아, 멈춰!” 엄마 청개구리는 힘껏 달려가 뾰족한 꼬챙이로 뱀을 쿡 찔렀어요. “으악!” 깜짝 놀란 뱀은 엄마 청개구리를 꼬리로 때려서 넘어뜨렸어요. 그리고는 멀리멀리 도망갔지요. “야호, 엄마가 이겼다!” 뱀을 무찌르기는 했지만 엄마 청개구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어요. 결국 엄마 청개구리는 끙끙 앓아눕고 말았어요. 하지만 아기 청개구리들은 놀기 바빴어요. “엄마가 잔소리 안 하니까 너무 좋다!” “오늘은 저 연못에 놀러 가자!” 아기 청개구리들은 손을 잡고 연못으로 폴짝폴짝 달려갔어요. 엄마 청개구리의 기침 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어요. “얘들아, 내가 살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 엄마가 죽으면 꼭 냇가에 묻어 다오.” 엄마 청개구리는 이렇게 말하면 항상 반대로 하는 아기 청개구리들이 언덕에 무덤을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엄마 청개구리가 끝내 눈을 감고 말았어요. “엄마! 우리가 잘못했어요.” 아기 청개구리들은 엉엉 울었어요. “엄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드리자.” “그래. 엄마를 냇가에 묻어 드리자.” 아기 청개구리들은 냇가로 달려가 엄마 청개구리의 무덤을 토닥토닥 만들었어요. “엄마, 여기서 편히 쉬세요.” 그때였어요.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예요. 빗방울은 점점 거세졌어요. “큰일 났어! 냇물이 불어나고 있어.” “이러다 엄마 무덤이 떠내려가겠어!” “개굴개굴. 엄마, 잘못했어요.” 그 후로 청개구리들은 비만 오면 냇가에서 구슬피 운다고 해요. 부엌에서 나온 엄마가 소리쳤어요. “신발주머니에 도시락통은 넣지 말라고 했지!” “그럼 짐이 두 개로 늘어나서 손이 불편하다고요!” “얘, 신발주머니는 더럽잖니!” 개굴이는 오늘도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었어요. 개굴이는 침대에 누워 낮의 일을 떠올렸어요. “나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데 엄마는 자꾸 잔소리만 해! 나도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 그러고는 스르르 잠이 들었지요. 아침 해가 뜨자 개굴이는 부스스 눈을 떴어요. ‘4월 20일 오전 9시’ “아홉 시? 으악, 지각이다!” 개굴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왜 엄마는 나를 안 깨운 거야. 엄마! 엄마!” 매일 아침 엄마는 개굴이에게 일찍 일어나라고 잔소리를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엄마가 쿨쿨 늦잠을 자고 있네요. “엄마, 이렇게 늦게까지 자면 어떡해요! 날 깨우지도 않고! 에이 참, 내 도시락은 싸 놨어요?” “아, 도시락은 챙겨 놓았단다.” 헐레벌떡 학교로 간 개굴이는 결국 지각을 해서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어요. “와, 점심시간이다!” “오늘 네 도시락 반찬은 뭐야?” 친구들이 개굴이 곁으로 달려왔어요. 엄마의 음식 솜씨 덕분에 개굴이의 도시락은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거든요. “어서 열어 봐.” 친구들은 젓가락을 들고 군침을 꿀꺽 삼켰어요. 개굴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어요. “어? 이게 뭐지?” 글쎄, 도시락 속에 신발이 들어 있지 뭐예요. “으하하! 개굴이는 도시락으로 냄새나는 운동화를 싸 왔다!” “네가 지저분한 건 알았지만 이건 심하다! 으하하.” 친구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딩동댕동. “만세! 집에 갈 시간이다.” “잠깐! 개굴이는 지각한 벌로 화장실 청소하고 가라.” 시무룩해진 개굴이는 홀로 화장실 청소를 끝냈어요. 그러고는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가면서 투덜거렸어요. “엄마가 도대체 왜 그러지? 오늘은 나도 엄마한테 잔소리를 해야겠어!” 개굴이가 집으로 돌아오자 동생 굴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어요. “형아, 왜 그래?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었어?” “응. 그게 말이야, 엄마가 늦잠 자느라 나를 깨우지도 않고, 내 도시락에는 운동화를 집어넣었다고!” 굴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어요. “맞아. 엄마가 오늘 이상해. 형아, 나는 아까 엄마랑 밥 먹는데 엄마가 혼자서 맛있는 반찬만 다 골라 먹었어.” “뭐라고?” “그래서 나 밥도 거의 못 먹었어.” “안 되겠다. 우리도 엄마한테 잔소리를 하자!” “그래, 좋아. 엄마, 얘기 좀 해요!” 그런데 이상하죠? 집 안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어요. 대신 이런 쪽지가 남겨져 있었지요. ‘얘들아, 나 놀다 올게.’ 어느새 저녁이 되었어요. 딩동! “얘들아, 아빠 회사 다녀왔다!” “아빠, 엄마가 놀러 나가서 안 들어와요!” “뭐라고?” 그날 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결국 아빠와 개굴이, 굴개는 직접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지요. “자! 굴개는 냄비를 가져오고, 개굴이 너는 이 빨래들을 세탁기에 넣고 와.” 그때 개굴이가 소리쳤어요. “아빠! 세탁기 속에 동전이 잔뜩 들어 있어요!” 이번에는 굴개가 소리쳤어요. “아빠! 냄비 안에 모자가 들어 있어요!” “뭐?”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 투덜거렸어요. “너희는 엄마가 왜 그러는지 아니?” “몰라요. 엄마가 오늘 이상해요.” “글쎄, 아까는 엄마가 제 도시락통에 더러운 운동화를 넣어 놨어요!” “그런데 형아, 생각해 보니 이상해. 엄마가 형한테 도시락통을 더러운 신발주머니에 넣지 말라고 그러셨잖아.” “어, 그러게?” “그러고 보니 엄마가 아빠에게 세탁기에 바지를 넣을 때 주머니에서 동전을 다 빼라고 했는데, 오늘은 네 엄마가 그랬구나.” “저는 엄마가 냄비를 모자처럼 쓰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은 엄마가 냄비에 모자를 넣어 놨어요.” “아, 엄마가 우리한테 하지 말라고 했던 것들을 그대로 했어!” “그러게, 이제야 엄마가 집을 나간 이유를 알겠어!” 셋은 밤새 엉엉 울었어요.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가득 차올랐어요. 번쩍 눈을 뜬 개굴이는 시계를 보았어요. ‘4월 20일 오전 9시’ “어? 이상하다. 어제가 20일이었는데? 그럼 엄마가 집을 나갔던 게 다 꿈이었구나!” 개굴이는 마루로 달려갔어요. “엄마!” “우리 개굴이, 일요일인데 혼자 벌떡 잘도 일어났네!” “엄마! 잔소리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겠어요!” “아니, 우리 개굴이가 자고 일어나더니 철이 들었네!” 개굴이는 엄마 품에 폭 안겨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엄마, 사랑해요!”
에너지도 아껴 써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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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선생님, 에어컨 켜 주세요! 너무 더워요!” 종혁이가 등교하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어요. 옆에 있던 민 규도 맞장구쳤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5월 최고 기온이래요.” “그러게 말이야. 며칠 비까지 올 거라는구나. 여름 장마도 아닐 텐데…….” 안경 너머 선생님 눈빛이 걱정스러워 보였어요. 선생님은 들 고 있던 부채로 종혁이를 향해 펄럭거려 주었어요. 선생님도 에어컨을 물끄러미 바라봤어요. “더 더워지면 켤게요. 아직은 안 돼요.” 짐짓 단호한 말투였어요.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물었어요. “1인 1역은 생각해 봤나요? 참, 이번 달부터 바람맨이 생겼 다고 한 거 기억하죠?” 그렇지만 지금은 제일 근사하게 느껴졌어요. 바람을 지배한다니, 마음껏 바람 을 일으킬 수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 거예요. 아이들이 다섯 명씩 앞으로 나갔어요. 칠판에 적힌 역할 중 원하는 곳에 이름을 적었어요. 종혁이 차례가 되었어요. “예스! 좋았어!” 한껏 들떠 있는 종혁이에게 선생님이 부탁했어요. “종혁이가 번개맨도 같이 맡아 주겠니?” 번개맨은 전깃불 담당이에요. 비어 있는 역할이 있으면 1인 2역을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힘들거나 시시해 보이는 일이 대부분이에요. 솔 직히 다른 때 같았으면 종혁이는 분명 망설였을 거예요. 그건 바로 선생님께 에어컨 리모컨을 받는 일이 었어요. 종혁이는 손바닥만 한 리 모컨을 손에 넣자 아주 큰 힘을 가진 것 같았어요. 콧 노래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 었어요. “종혁아, 지구를 부탁 한다.” 생각지 못한 말에 종 혁이는 흠칫 놀랐어요. 단지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맨일 뿐인데 지구 를 부탁한다니요. 그래 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머뭇거렸어요. “테스트야, 테스트!” 민규가 옆에서 종혁이 편을 들었어요. “솔직히 다희 너도 시원한 게 좋잖아. 어휴,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다희가 얼굴을 찌푸렸어요. 주위에 있던 아이들은 시원하다 며 바람을 즐겼어요. 그렇게 쉬는 시간 내내 에어컨을 켜 놓았 어요. 누군가 선생님이 오신다고 알려 주었고, 종혁이는 서둘 러 에어컨을 껐어요. “그래 줄래? 딱 한 번만! 대신 내일은 내가 초록이 할게.” “어휴, 천종혁! 내가 오늘만 봐준다.” 다희가 생색을 내고는 교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어요. 총 총거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어요. “정다희, 진짜 최고야! 땡큐!”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딱 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종혁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싸늘했어요. 그러더니 곧 표정을 바꿔 다희에게 말했어요. “바람맨도 네가 할 수 있겠니? 아무래도 그게 낫겠어.” “엄마! 흐엉엉엉!”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종혁이를 안고 토닥였어요. 차츰 울음이 잦아들자 엄마가 종혁이를 나무라기 시작했어요. “무슨 에어컨을 이렇게 켜 놨어? 세상에, 창문도 안 닫아 놓고……. “어머, 냉장고 문이 열려 있잖아!” 부엌으로 간 엄마 목소리가 커졌어요. 종혁이는 아차 싶었 어요. 아까 아이스크림을 꺼낸 뒤 제대로 닫지 않았나 봐요. 이대로 가만있으면 엄마가 계속 혼낼 게 틀림없어요. 볼멘소리를 하며 복도 개수대로 갔어요. 남은 건 버리고 콸 콸 쏟아져 나오는 물에 손을 씻었어요. 찰박찰박 손뼉을 치니 물방울이 얼굴에 간지럽게 튀었어요. 그렇게 한참 동안 물을 맞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물이 뚝 끊겼어요. 갑자기 교실 등이 깜박거렸어 요. 비도 오고 날이 흐려서인지 어 딘가 으스스했어요. 종혁이도 오싹한 느 낌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어요. “번개맨! 꼭 번개 치는 것 같지 않냐?” 민규가 전등 스위치를 딸깍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이 깜박거리는 등을 보고 재밌어했어요. 그 모습을 보니 종혁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따닥 따닥 따닥 따닥. 엄청난 속도였어요. 전등이 번쩍번쩍했어요. 지켜보던 아이 들의 입이 떡 벌어졌어요. 그런데 20분 정 도 지났을까요. “선생님, 추워요. 바람맨 한테 에어컨 꺼 달라고 해 도 돼요?” 이번엔 다희였어요. 에어 컨 바로 밑이라 시원할 것 같은데 오들오들 떨고 있 는 거예요. 민규는 아직 안 된다며 반대했고요.
더러운 게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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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민지야, 밥 먹자.” 민지는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어요. 아빠가 세 번이 나 불렀지만 민지는 아빠 목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도 헷갈 렸답니다. 부엌에서 오므라이스를 만들던 아빠가 앞치마를 입은 채 민지의 방으로 달려오고 나서야 민지는 겨우 눈을 떴지요. 날마다 민지네 집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져요. 아빠가 아무리 깨워도 민지는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기만 하거든요. 잠꾸러기 민지를 깨우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민지 깨워서 학교 보내기’는 아빠 담당이에요. 민지네 엄 마는 아침 일찍 회사를 가거든요. 민지네 아빠는 집에서 그 림을 그리는 일을 해요. 아빠는 얼른 비누 거품을 만들어 민지의 얼굴에 문질렀지 요. 비눗물이 들어갈까 봐 민지는 눈을 꼭 감았어요. 물이 얼굴에 닿는 것도 싫었지만,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는 건 끔 찍할 정도로 싫었거든요. 그런데 더러우면 정말 친구들이 안 놀아 줄까요? 민지는 아빠가 얼굴을 닦아 주는 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민지야, 흘리지 말고 먹어야지.” 만화 영화를 보다 보니 밥이 제대로 민지의 입으로 들어 가지 않았어요. 민지는 아무렇지 않게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었어요. 젓가락질이 귀찮아 깍두기는 그냥 손으로 집어먹 었고요. 손에 묻은 김치 국물은 옷에 문질러 닦았어요.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 지나갔어요. 소동은 양치질을 할 때 다시 일어났어요. “싫어! 이 닦기 싫어!” 민지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아빠가 들고 있는 칫솔을 계속 밀어냈어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요. “아빠~ 제발.” 민지가 간절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았어요. “어휴~ 민지야.” 아빠가 또 다시 한숨을 쉬었어요. 민지는 세수만 싫어하는 게 아니예요. 양치질은 세수보 다 더 싫어해요. 찬이는 콧등으로 조금 내려온 동그란 안 경을 고쳐 쓰고 헛기침을 하더니 자기소개 를 시작했어요. “안녕? 내 이름은 윤찬이야. 전에 다녔 던 학교에서는 별명이 척척박사였어. 내가 아는 게 좀 많거든. 그러니까 너희들도 모 르는 게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한 테 물어 봐! “민지야, 민지야!” 유진이가 갑자기 팔꿈치로 민지의 옆구리를 찔렀어요. “찬이 쟤 되게 멋지다, 그렇지?” “뭐가?” “애들 앞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씩씩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멋지잖아.” ‘하필이면 뒷자리일 게 뭐람.’ 민지는 유진이의 마음을 홀랑 빼앗아 간 찬이가 영 못마땅했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어요. 배가 고팠던 민지가 기다리던 시간이었지요. “손이 왜 그렇게 하얘? 혹시 그거 분필 가루야?” 그제야 민지는 제 손을 내려다봤어요. 찬이의 말대로 민 지의 손에는 분필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어요. “주번이라 칠판 지워서 그래.” 민지는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어요. 그 모습을 보고 찬이 가 얼굴을 찡그렸어요. “그 손으로 밥을 먹으려고?” “뭐가 어때서?” 화장실까지 오기는 했지만, 민지는 여전히 손을 씻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 참. 귀찮게…….’ 민지는 손끝에 살짝 물을 묻혀 손 씻는 시늉만 했어요. 그리고 냉큼 화장실을 나 왔지요. 점심시간은 언제나 즐거웠어요. 밥도 아주 맛있었지요. 급식을 먹는 동안 민지의 원피스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어요. 된장국도 한 차례 주르륵 쏟았고, 책상 위에 떨어진 야채 볶음도 치맛자락으로 슥 문질러 닦았거든요. 민지의 하얀 원피스는 얼룩덜룩해졌어요. 하지만 옷이 더러워지건 말건 민지는 여전히 교실 바닥을 뒹굴며 친구들과 놀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저 천방지축 아가씨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 교실 정리 다했어요.” 교실 뒷정리를 마친 민지가 선생님에게 말했어요. 선생님이 교실을 둘러보는 동안 민지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사실 칠판지우개도 털지 않았고요, 작은 쓰레기는 구석으로 밀어 넣었거든요. 민지는 선생님의 말에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자신 이 손 씻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선생님이 알고 일부러 그 런 말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민지는 창피하고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손 씻기는 여전히 귀찮았어요. ‘아이, 모르겠다!’ 잠시 망설이던 민지는 얼른 책가방을 멨어요. 다행히 아픈 곳은 없었는데 넘어질 때 뭐가 들어갔는지 눈이 몹시 가려웠어요. 민지는 눈을 비볐어요. ‘아차! 아까 손 안 씻었는데!’ 칠판을 지우고, 교실 뒷정리를 하고, 화장실도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민지는 손을 한 번도 씻지 않았어요. 게다가 운동장에서 노는 바람에 민지의 손은 엄청나게 더러웠지요. ‘에이, 괜찮겠지 뭐.’ 민지는 수돗가에 가지 않았어요. 눈이 계속 따갑고 아파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거든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민지는 눈을 비볐어요. 유진이가 걱정스레 민지를 바라보았어요. “민지야, 너 괜찮아?” “응, 괜찮아. 눈이 좀 간지러워서 그래.” 민지는 유진이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지만,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어요. 민지는 다시 힘껏 눈을 비볐어요. 그때 민지의 모습을 본 엄마가 깜짝 놀라며 물었어요.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누구랑 싸웠니?” 평소에도 잘 씻지 않는 민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러웠거든요.
나는 혼자가 더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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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오늘도 파이팅!” 학교 갈 준비를 하느라 거울 앞에 서 있던 초영이는 스스 로에게 파이팅을 외쳤어요. “초영아,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한껏 신이 난 초영이를 바라보던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물 었어요. “오늘 그리기 수업이 있거든요.” 초영이는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해내는 아이예요. 엄마는 늘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초영이를 칭찬해 주었답니다. 초영이는 아침부터 그림 그릴 생각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 왔어요. 반에서 제일 멋진 그림을 그릴 자신이 있거든요. 선생님이 짝꿍이랑 하라고 했던 것도 생각이 났고요. 그래 서 진구에게 물었어요. “좋아. 뭘 그리고 싶다고?” “우주나 바닷속.” “그럼 어디다 그릴 건지 먼저 그려 봐.” 초영이가 그리고 있던 도화지를 진구 쪽으로 밀었어요. 어 떤 것을 그릴지 곰곰이 생각하던 진구는 도화지 한쪽에 작 고 귀여운 물고기를 그렸다가 지우고, 태양을 그렸다가 다시 지웠어요. “아휴, 답답해. 언제까지 지우기만 할 거야?”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는 진구를 바라보던 초영이가 답답 하다는 듯 말했어요. “그럼 네가 그려 봐.” 초영이의 타박에 머쓱해진 진구가 초영이 쪽으로 도화지 를 슥 밀었어요. “넌 뭐 그리고 싶은데?” 초영이가 물었어요.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초영이의 질문에 진구는 깜짝 놀라서 얼떨결에 먹다 남긴 우유를 그림에 엎지르고 말았어요. “야!” 초영이가 소리를 빽 질렀어요. 그리기에 집중했던 아이들 이 소리 나는 쪽을 보더니 수군거렸어요. 그때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어요. “이제 그만! 그림을 다 못 그린 조는 쉬는 시간이나 수업 이 끝난 다음 완성하세요. 그림은 내일 걷을 거예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초영이의 귓가에 맴돌았어요. “너 때문이야!” 초영이가 진구를 노려보며 말했어요. “어제 그림을 못 낸 조는 책상 위에 완성한 그림을 올려놓 으세요.” 다음 날 1교시가 시작되자마자 선생님이 말했어요. 여기 저기서 그림을 꺼내느라 교실이 소란스러워졌어요. 진구가 쭈뼛쭈뼛 머뭇거리며 책상 서랍에 손을 넣었을 때였어요. 초영이가 책상 위에 그림을 올려놓았어요. “이리 줘 봐.” 그때 갑자기 초영이가 손바닥을 펼쳤어요. 진구는 초영이 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어요. “그림 말이야. 네가 그린 거.” 초영이가 진구의 서랍에서 그림을 꺼내려고 했어요. “안 돼!” 진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림을 잡았어요. 초영이의 손과 진구의 손이 부딪치면서 그만 그림이 찢어 지고 말았어요. 찢어진 종이는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지 고 말았어요. 진구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어요. “그냥 보여 줬으면 됐잖아!” 그림이 찢어져서 당황한 초영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나는 혼자 하는 게 더 좋단 말이야.’ 초영이는 혼자 하는 게 좋아요. 둘이나 셋이서 하려면 답 답하니까요. 어제도 자꾸 진구의 생각을 물어보느라 답답 했어요. 선생님은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요? 집에 돌아온 초영이는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선생님이 내 준 숙제를 살펴봤어요. ‘주제랑 설명하는 방법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무엇으 로 하면 좋을까?’ 초영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일 먼저 떠오른 학교를 주제 로 정했어요. 주제를 정한 초영이는 생각나는 것들을 종이 에 술술 적었어요. “쉽네. 별것 아닌데?” 초영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숙제를 끝낼 수 있었어요. “응, 난 다했어.” “뭐? 벌써 다했다고?” 진구의 눈이 커졌어요. 평소에도 초영이가 혼자서 잘한다 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끝냈다고 하니 깜짝 놀란 것 이지요. “그 정도야, 뭐. 너도 잘하고 있어?” 깜짝 놀라서 자신을 보는 진구에게 초영이가 물었어요. ‘아냐. 난 혼자가 편해.’ 초영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어요. ‘다음 주가 얼른 왔으면 좋겠어. 분명 이번에도 칭찬을 받 아서 친구들이 부러워할 테니까.’ 초영이는 이런 생각만으로도 금방 기분이 좋아졌어요. 초영이가 기다리던 발표 날이에요. ‘두 명이서 하면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 초영이는 같이 하는 친구들이 조금 부러워졌어요. 그다음은 진구와 시훈이, 채연이가 발표할 차례예요. 세 사람이 어떤 주제를 선택했을지 궁금해진 초영이는 귀를 쫑 긋 세우고 집중했어요. 웃음을 터뜨렸어요. “교장 선생님이다!” 누군가가 외쳤어요. 진구의 뒤를 이어 시훈이는 교감 선생 님, 채연이는 담임 선생님 흉내를 내며 들어왔어요. “보시다시피 저희 주제는 학교입니다. 저희가 하는 행동을 보고 답을 알아맞히면 됩니다.” 진구가 의젓하게 주제와 게임 방법을 설명했어요. 초영이는 준비한 것보다 잘하지 못해서 속이 상하고 부끄 러웠어요. “선생님, 저희 이 수업 한 번 더 해요!” “네. 재미있어요. 한 번 더 해요.” 발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숙제를 원하는 아이들의 목소 리가 들렸어요. “스스로 숙제를 하겠다고 한 건 처음이네요.
거짓말이 툭 튀어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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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세인아, 엄마 갔다 올게. 시간 맞춰서 학교에 가.” 출근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세인이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어요. 일찍 출근하는 엄마 때문에 세인이도 등교 준비를 마쳤거든요. “세인아, 지금이 몇 시야?” 선생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어요. 그런데 민기가 엉거주춤 서 있는 세인이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눈치 없이 말했지요. “선생님, 지금 9시 25분이에요.” ‘으아, 그걸 굳이 말해야 해?’ 그러자 선생님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세인이 앞에 쪼그려 앉았지요. “아이쿠, 그랬구나. 큰일 날 뻔했네. 유치원 때부터 친구예요.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은 하은이는 피아노도 잘 치고, 여러 악기를 배웠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플루트까지……. 이번엔 진짜 부러웠어요. “좋겠다. 난 진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세인이의 말에 하은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어요. “너 있잖아. 그거! 너도 배웠다고 했잖아.” “하은아, 사실 그게 아니라…….” 거짓말을 했던 게 창피했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자꾸 망설여지는 거예요.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하은이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까 봐 겁도 났거든요. “너도 잘할 거야.” 학교 수업이 마칠 때까지, 그리고 축구 클럽에 다녀오는 내내, 세인이 머릿속엔 발표회 생각뿐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와 현관 문을 열면서 세인이는 엄마와 바이올린을 동시에 찾았어요. “엄마, 바이올린 어디 있어요?” 온몸에 소름이 돋는 소리가 났어요. 텔레비전에서 볼 때와 영 딴판이었죠. 세인이는 숨을 한번 더 고르고 활을 부드럽게 움직 였어요. ‘끼이이이잉.’ 소리는 좀 전과 다르지 않았어요. 종일 배배 꼬인 기분 때문인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세인이는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퇴근한 엄마가 세인이를 불렀어요. “세인아, 세인아. 일어나 봐.”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동생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해인아, 오빠 물건은 만지지 말랬지?” “나, 안 만졌는데. 뭐?” “바이올린. 이거 봐. 활이 부서졌잖아.” 그런데 발표회 이틀 전, 세인이는 또 당황하고 말았어요. 어제 선생님이 발표회 최종 연습을 할 거라며 준비물을 챙겨 오라고 했거든요.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선생님이 말했어요. “자, 가져온 발표회 준비물을 책상 위에 꺼내 볼까요?” 다른 걸 준비하지도 못했거든요. 아이들의 시선이 세인이를 향하자 당황한 세인이의 입에서 또 거짓말이 튀어나왔어요. “동생이 바이올린 활을 부러뜨려서 못 가져왔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래? 그럼 어쩌지? 오늘 연습은 빠져야겠네.”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또 가슴이 뜨끔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세인이는 긴 복도를 후다닥 달려 2층 제일 끝 도서실로 갔어 요. 그곳에 있다가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 조용히 혼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책장 맨 안쪽 구석으로 간 세인이는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았 어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 울 생각이었거든요. “세인아,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발표회 때 바이올린 연주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종이에 괜히 적은 것 같아.” “아니. 그게 내가 한 거짓말이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당히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는 하은이 가 좀 웃기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어요. “왜 그랬는데?” “애들이 서로 막 자랑하는 게 부러워서 그랬지. 난 집에 딱 두 권밖에 없는데. 괜히 지는 것 같아서 싫더라고.” “그렇다고 23권이나 있다고 뻥을 친 거야?” “세인아, 난 솔직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한 번 쉬어. 그리고 내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없던 용기가 막 생기더라고. 너도 이렇게 한번 해 봐.” 세인이가 하은이를 따라 가슴에 손을 얹었어요.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어요. “그래.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세인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선생님이 고마웠어요. 어쩌면 다 알고 계시지만 모른 척해 주시는지도 몰라요.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교실 문을 나서는데, 복 잡했던 마음이 후련했어요. 2학년 5반 발표회 날, 알록달록한 풍선과 리본으로 꾸민 교 실은 작은 파티장으로 변했어요. “얘들아, 우리 기념사진 찍을까?” 선생님은 교실 앞쪽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았어요. “하나, 둘, 셋 하면 크게 웃는 거야.” ‘찰칵’ 소리에 맞춰 반 친구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어요. ‘연습을 정말 많이 했나 봐. 저렇게 연주하려면 손가락이 엄 청 아팠을 텐데.’ 현우를 보며 세인이는 다짐했어요. 나중에 바이올린을 배우 게 되면 현우처럼 연습을 많이 해서 멋진 소리를 낼 거라고 말 이에요.
발표 안 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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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분홍색입니다.” 하율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친구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 렸어요. 남자가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분홍색을 좋아한다 니 웃을 수밖에요. “하율아, 분홍색이 왜 좋지?” 선생님이 웃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부드러운 미소로 하율이에게 물었어요. 위로 누나가 둘이나 있다 보니 누나들의 분홍색 티 셔츠나 점퍼를 물려 입을 때도 있고, 학용품도 분홍색이 종 종 끼어 있거든요. “하율이는 여자래요! 여자 색 옷 입었대요.” 하고 친구들 이 놀리면 오히려 쯧쯧 혀를 차며 “아직 어리군. 색깔에 남 자 색 여자 색이 어디 있냐? 나는 분홍색도 좋고 파란색도 좋아.” 하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다온이는 친구들과 생각이 조금 달라요. 정답이 아닌 걸 왜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틀린 답을 말해 친 구들이 웃는 것도 싫어요. 이왕이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우아! 다온이 정말 잘한다!”, “역시 다온이는 똑똑해. 어떻 게 그런 걸 알았어?” 같은 말을 듣고 싶거든요. 고개를 숙이는 이유가 ‘나 발표하기 싫어요. 절대 시키지 마 세요.’란 것쯤은 선생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싫다고 피 하기만 하면 다온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남들 앞에서 말하 는 것을 힘들어 할지도 몰라요. 여러 산이 겹치고 겹친 산속이란 뜻으로 어려움이 더해지 는 것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입니다. 분명히 이럴 때 쓰는 말 이겠죠? 다온이는 자신이 마치 여러 산이 겹쳐 있는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다온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며 아이가 적응은 잘하고 있는 지,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지, 학교에서 어떤 모습인지 엄 마는 항상 궁금했어요.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저런 걱정이 되기도 했죠. 그러니 엄마는 학교에 직접 가서 다온이가 공부하는 교 실도 보고,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는 공개수업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으악!”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깬 다온이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 후 주변을 둘러봤어요. 그러고는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그런데 순간, 다온이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어요. “발표 준비는 잘했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담 으며 엄마가 미소를 지었어요. 다온이는 힘없이 엄마를 바 라봤습니다. “엄마, 나 머리 아파.” 물론 꾀병이에요. 오늘 발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학교 를 안 가는 것뿐이다 싶어 꾀병을 부리기로 한 거죠. “흠흠! 목도 아파. 말을 잘 못하겠어.” 다온이는 ‘나 정말 아파요’라는 표정으로 엄마를 간절히 바라봤어요. 이제 엄마가 오늘 학교 쉬어야겠다고 말만 해 주면 됩니 다. 그런데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온이가 예상한 말이 아니었어요. 매일 보는 엄마지만, 학교에서 엄마를 만난다는 건 더없이 설레고 행복한 일이 죠. 다온이도 발표만 아니었다면 저 친구들처럼 엄마를 기 다리며 신이 나 있을지도 몰라요. 드디어 공개수업이 시작되는 4교시. 친구들은 뒤에 있는 엄마들 틈에서 자기 엄마를 찾느라 바쁩니다. “제 꿈은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저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에 게 그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어요.” “저의 꿈은 유치원 선생님입니다. 어린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다온이는 얼른 고개를 젓고는 발표 내용을 써 온 종이를 내려다봤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읽어 나갔어요. “저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듣자, 다온이는 이내 말을 멈 추었어요. 발표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 위로 다온이의 눈물 이 뚝뚝 떨어졌지요. 다온이는 말없이 계속 눈물만 흘렸어 요.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도, 엄마들도 다온이의 예상치 못 한 눈물에 깜짝 놀랐어요. 다온이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절 레절레 저으며 믿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요.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건 믿는 사람에게는 마법의 캔디지만, 믿지 않는 사람 에겐 평범한 캔디밖에 안 돼. 불안증을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에 또다시 기회를 준 거죠. 물론 선생님은 혹시나 다온이가 또 힘들어하진 않을까 걱정 이 되기도 했어요. 이때 앞에 앉은 하율이가 뒤를 돌아 다 온이에게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어요. “다온아, 캔디!” “뭐?” “우리 다온이에게 잘했다고 박수쳐 주자!” 발표 시간이 무섭기만 했는데 친구들 이 잘 들어 주고 박수까지 쳐주 니 신이 날 수밖에요. 다온이는 하율이를 바라보며 씩 미소 지었어요. 하율이는 다온이에게 잘했다고 엄지를 척 올려 주었죠. 다온이는 이 게 꿈이 아닌지 슬쩍 볼을 꼬집어 봤어요.
왜 나만 시간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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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언제까지 잘 거야?” 엄마가 하경이를 깨우며 말했어요. “벌써 아침이에요?” 잠에서 덜 깬 하경이가 이불 속에서 얼굴을 빼꼼 내놓고 는 물었어요. 그러다 늘어지게 하품을 했어요. 하경이를 본 엄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방에서 나가며 이렇게 말했어요. “도대체 너를 어쩌면 좋니?”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들을 거라고 예상했던 하경이는 안심 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시계 바 늘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거든요. “이런!” 하경이는 갑자기 바빠졌어요. “일찍 깨워 주시지…….” 여자 아이들 모두가 하준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죠. 그래서 오늘은 더 신경을 써야 해요. “이게 좋을까? 아님 이게 더 나을까?” 거울 앞에 선 하경이 주변에는 널브러진 옷으로 가득했어요. “엄마, 어떤 게 예뻐요?” 하경이는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너 안 늦은 거야?” 엄마의 목소리에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가 다 되어 가고 있었어요. “엄마, 갔다 올게요.” 늘어놓은 것을 치우지도 않은 채 하경이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용돈을 챙겨서 부리나케 나왔어요. 그러자 친구들도 차례대로 준비해 온 선물을 주었지요. 하경이도 하준이 앞에 선물을 놓았어요. 잠시 후 하준이는 받은 선물을 하나씩 풀어 보았어요. “와, 이거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건데! 가원아, 고마워.” 하준이 목소리가 커졌어요. 하준이가 친구들 모두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가원이의 선물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조금만 일찍 일어났다면, 조금만.’ 머릿속에서 계속 이 생각만 맴돌았어요. 생일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갈 때도 하준이 선물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생각이 자꾸 나서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가만히 있어도 머리만 복잡했어요. 그래서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켰어요. 마침 하경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어요. “이제 들어가서 자야지. 내일 학교 늦겠다.” 하경이는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손바닥으로 쳤어요. 그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하경이 쪽을 쳐다보았어요. 가원이와 눈이 마주치자 하경이는 얼굴을 휙 돌려 버렸어요. “오늘 모둠별로 발표 준비는 다 했죠?”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하경이의 머릿속이 하얘졌 어요. 분명히 어제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하경아.” 모둠 친구들이 모두 하경이의 얼굴만 쳐다보았어요. 하경 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 못했어요. “너 설마 잊어버린 거야?” 근심스러운 하경이의 얼굴을 보고 엄마가 말했어요. “얼굴 펴.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라. 너 스스로 하는 습 관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경이는 엄마의 말처럼 될 것 같지 않았어요. 오늘은 행복한 월요일이 아니에요. “하경아.” 하경이는 하준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교실을 향해 걸었는데 어느새 하준이가 옆으로 다가왔어요. “내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어? 어……. 생각 좀 하느라고.” 하경이가 말끝을 흐리자 하준이는 자기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며 웃었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원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요. “대단하다. 언제 이걸 다 그린 거야? 나도 고슴도치 좋아 하는데.” 여기저기 가원이의 그림 솜씨를 칭찬하는 말이 들렸어요. “쉬는 시간에 조금씩 그린 거야.” 그러고 보니 가원이는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어요.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던 거예요. 하경이가 그림을 손에 들고 이리 저리 들여다봤어요.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뭐 그런대로 잘 그렸네.” 하경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어요. “어? 웬일이야?” 하경이는 짱마트에서 가원이와 딱 마주쳤어요. 둘은 동시에 깜짝 놀랐지요. “난 며칠 있으면 갖게 될 고슴도치 보러 왔어. 넌?” “고둥이, 귀엽지?” 가원이가 하준이와 하경이를 보며 물었어요. 하경이는 자 신보다 고슴도치를 먼저 기르게 된 가원이가 부러웠어요. 가원이가 고슴도치를 기르게 됐다며 하준이에게 고슴도치를 보러 오겠냐고 하자 얼떨결에 하경이도 따라왔어요. “냄새로 나를 알아본대. 신기하지? 밤에는 잘 움직여.” 가원이는 쉬지 않고 이야기했어요. 하경이가 고슴도치를 만지려고 손을 내밀자 가원이가 “안 돼!”라고 소리치며 하경이 손을 막았어요. “함부로 만지면 스트레스 받아.”
내가 하는 말이 왜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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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말에는 특별한 힘이 있어요. 칭찬을 들은 꽃은 예쁘게 피 어나지만, 나쁜 말, 부정적인 말을 들은 꽃은 금방 시들어버 린다고 해요. 우리도 마찬가지겠죠? 여러분도 친구와 가족에 게 예쁜 말,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주고받는 그런 멋진 하 루를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럼 우리 마음에 예쁜 꽃이 필 테 니까요.” 2학년인 마루보다 세 살 많은 형은 마루에게 툭하면 욕을 해요.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래요. 방에서 나오는 순간 고소한 버터 냄새가 코끝을 스쳤어요. 아직 잠에서 덜 깨 눈을 비비며 나오던 마루의 눈이 번쩍 떠 졌죠.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에 마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 정으로 입을 실룩거렸어요. “형이 내 토스트랑 주스 다 먹어 버렸어!” 마루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엄마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 어요. 그러고는 몸을 숙여 마루의 눈을 바라봤어요. “야, 땅꼬마! 키가 작아서 실내화 가방 바닥에 다 끌리겠다.” 동호의 목소리에 마루는 순간 움찔했어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죠. 하지만 금세 뒤따라 온 동호에게 잡히고 말았어요. “그만해! 마루가 싫어하잖아.” 누군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동호를 다그쳤어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미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화 가 난 표정으로 동호를 노려보고 있었어요. 소미는 마루와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예요. ‘미안해.’라고 표현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친구의 좋은 점을 잘 찾아내서 칭찬을 해 주기도 했죠. 소미는 친구들이 다 부르는 친구의 별명도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어요. 소중한 의미를 가진 예쁜 이름 대신 왜 별명을 부르냐며 친구들을 타이르기도 했죠. 그래서 친구들은 모두 소미를 좋아해요. 물론, 한 번씩 소미에게 잔소리를 듣는 일 부 남자애들은 빼고 말이죠. 소미의 말에 반응한 사람은 오히려 마루였어요. 형은 인터넷 방송에서 배운 나쁜 말들을 아무 때나 내뱉 으며 마루의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동호도 마찬가지였어요. 툭하면 키 작다고 놀려대고, 그래서 싫은 내색을 하면 욕하 거나 나쁜 말로 마루를 괴롭혔어요. 그 말들은 고스란히 마루의 가슴에 하나하나 꽂혔고, 마루 의 마음의 상처는 깊어져 갔어요. 소미의 말처럼 때리면 몸에 상처가 남듯, 나쁜 말은 마음에 아주 커다란 상처를 남겨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만 상처 받아야 하지?' “아, 관종새끼!” 마루가 한 마디를 더 내뱉자, 동호는 입이 턱 벌어졌어요. 더 이상 어제의 마루가 아니었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형이나 동호에게 들을 땐 끔찍이도 싫 었던 욕이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고, 또 그 말에 당황하는 동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쿵쾅거리며 쾌감이 느껴지니 말 이에요. 그럴 때마다 형에게 들었던 말들을 차곡차곡 모아 놨던 나쁜 말 상자가 열린 듯 마루의 입에서는 온갖 말들이 쏟아 져 나왔어요. 친구들이 좋아해 주자, 그 말이 나쁜 말 같지 않고 재미있 는 말처럼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이런 말을 써도 되나 고민 도 되고 아직 입에 붙지 않아 쭈뼛거렸던 적도 있지만 이젠 굳이 이런 말을 해야지 생각하지 않아도 술술 나왔어요. 어느새 마루는 남자아이들의 중심에 있었어요. 집에서도 마루는 달라졌어요. 예전처럼 형에게 당하기만 하는 마루가 아니었죠. 이제 마루도 형에게 대꾸를 하기 시 작했어요. 여느 때처럼 형이 마루를 쏘아보며 말했어요. “뭘 쳐다보냐?” “관종이냐. 안 봤거든.” 형의 한마디면 꼼짝도 못하던 동생이 자신의 말에 따박따 박 대꾸하며 욕까지 하자 형은 화가 잔뜩 났어요. 형은 마루 를 한 대 쥐어박았어요. 그러자 마루는 집이 떠나가라 으아 아앙 큰소리로 울어 버렸어요. “5학년이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무슨 뜻 인지 잘 알지? 마루가 욕을 어디서 배웠겠니? 네가 자꾸 나 쁜 말을 하니까 마루도 배워서 똑같이 하는 거 아니겠어?” 엄마의 말에 형은 괜히 마루를 노려봤어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두고 봐.’라고 말하고 있었죠. 아이들은 ‘대가리 크대.’, ‘눈깔이래.’, ‘거지 같대.’ 등 마루 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되새기며 와하하하하 크게 웃어댔어 요. 마루는 친구들의 웃는 얼굴에 우쭐해 어깨에 힘이 빡 들 어갔어요. 하지만 마루를 싫어하는 친구들도 늘어났어요. 별명을 부 르거나, 나쁘고 거친 말만 해대는 마루와 대화하는 것이 기 분 나쁘고 싫은 친구들은 마루를 피해 다녔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마루는 놀라서 묻는 가은이를 향해 턱을 들고는 큰 소리 로 말했어요. “킹콩이라고 했다. 왜? 덩치만 크고 아무 쓸모없는 멍청한 킹콩!” 가은이는 반에서 키가 제일 큰 친구예요. 가은이에게로 얼른 달려가 가은이를 토닥여 주던 소미는 화가 잔뜩 난 눈으로 마루를 바라봤어요. 소미 아빠는 친구들의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건 제일 나 쁜 거라고 했어요. 키가 작아도 마음이 큰 사람이 있고, 눈 이 작아도 더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외모로 누 군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대박. 닥치래.” “맞아. 삐쩍 마른 말라깽이.” “해골바가지래. 개웃겨.” 남자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웃어댔어요. 소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밥을 많이 먹는데도 살이 잘 안 쪘어요. 소미를 약하게 낳아서 애가 고생한다 싶 어 엄마와 아빠는 소미에게 늘 미안해 했어요. 가은이의 걱정스러운 말이 끝나자 소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어요. “으아아아아앙.” 소리까지 내며 우는 소미를 보며 마루는 놀라 우뚝 멈춰 섰어요. 유치원 때부터 소미를 봤지만 저렇게 우는 건 처음 봤어요. 마루는 자신 때문에 소 미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어요. “엄마, 아줌마한테 전화해 봐. 소미 어느 병원에 있는지. 빨리.” 마루는 다급한 목소리로 엄 마를 졸랐어요. 엄마는 서둘 러 소미 엄마에게 전화를 걸 었어요. 소미 엄마와 통화하 는 엄마의 심각한 표정을 보 며 마루의 표정도 점점 어두 워졌어요. 병실 앞에 선 마루는 ‘한소미’라고 적혀 있는 글자를 보 며 크게 심호흡을 했어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어요. 병실 맨 안 쪽 창가 앞에 몸이 많이 아픈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누워 있는 소미가 보였어요. 그 모습을 보니 마루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앗, 조심해서 다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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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띵 띠리리링~! 종소리처럼 맑은 벨 소리가 울렸어요. ‘에이, 참.’ 엄마의 휴대폰을 들고 있던 재은이는 짜증이 났어요. 한창 만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하필 지금 전화가 걸려 올 게 뭐예요? 엄마 휴대폰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시간은 학 교에서 돌아온 직후인 지금밖에 없거든요. 엄마가 간식을 준비해 주는 동안 재은이는 잠시 엄마 휴대 폰을 만질 수 있어요. 휴대폰으로는 주로 재미있는 동영상을 봐요. 은솔이는 재은이 짝꿍인데? 은솔이 엄마가 왜 재은이 엄 마에게 전화를 했을까요? 재은이는 엄마에게 휴대폰을 넘겨주고 엄마가 얼른 전화 를 끊기만 바라며 기다렸어요. “응, 은솔 엄마. 재은이는 좀 전에 집에 왔는데. 그래? 은솔 이가?” 엄마가 재은이를 쳐다봤어요. 하지만 재은이는 무슨 일인 지 알 수 없었죠. 하지만 오늘은 학교에 갈 때는 같이 갔지만 집에 올 때는 따로 왔어요. 오늘은 그럴 일이 있었거든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동안은 엄마가 재은이를 학교 교문 앞까지 데려다주셨어요. 은솔이도 마찬가지고요. 재은이는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욕실에 들어갔어요. 그러 고는 치카치카 푸왁! 하며 이를 닦고 씩씩대며 옷을 갈아입 었어요. 가방을 등에 휙 둘러메고 현관으로 나와서는 신발에 발을 꾸깃꾸깃 욱여넣었죠. 재은이는 엄마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 로 나섰어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은솔이만 재은이 엄마에게 인사를 했어요. 재은이는 일부러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어 요. 뒤에서 은솔이가 따라왔어요. 재은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어요. 은솔이만 재은이 엄마에게 인사를 했어요. 재은이는 일부러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어 요. 뒤에서 은솔이가 따라왔어요. 재은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어요. 학교에 늦은 것도 아닌데 은솔이 때문에 매번 혼나거든요. 오늘은 은솔이가 너무 빨리 벨을 눌렀단 말이에요. 뒤에서 은솔이가 부르는 소리가 났어요. “유재은, 같이 가.” 재은이는 휙 뒤를 돌아봤어요. 그러다 보니 등굣길의 다른 아이들과 부딪치기도 했어요. 은솔이와 재은이에게 부딪친 다른 아이들이 얼굴을 찌푸렸 어요. 어떤 아주머니가 재은이와 은솔이를 보며 말했어요. 헉헉대며 뛰어가던 재은이와 은솔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어요.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거든요. 횡단보도에는 녹색어머니회 분들이 깃발을 들고 서 계셨어 요. 이쪽 끝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서 계셨고 건너편에는 할 아버지가 녹색 조끼를 입고 서 계셨어요. 녹색어머니회 분들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 도록 도와주세요. 깃발을 옆으로 들고 횡단보도를 가로막고 있다가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면 깃발을 열어서 아이들이 안 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게 도와줘요. 자동차가 횡단보도 선을 넘어오지 않도록 손짓해서 차를 세우는 일도 하고요. 그런데 은솔이랑 말을 안 하니 심심해서 다 른 친구들이 노는 곳을 기웃거려야 했어요. 쉬는 시간에 다솜이 주변에 아이들이 둥글게 모였어요. 다솜이가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 있었거든요. “와, 귀엽다.” “우와~ 진짜 예뻐.” 다솜이가 은솔이에게 물었어요. “네가 봤어?” 은솔이는 우물쭈물 대며 말했어요. “아니,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자 다솜이가 비웃으며 말했어요. “거 봐. 직접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러면서 계속 눈으로는 은솔이를 찾았어요. 재은이는 은솔이와 화해하고 집에 같이 가고 싶어서 은솔 이를 현관에서 기다렸어요. 그때 은솔이가 재은이 옆을 지나가는 게 보였어요. 재은이는 벌떡 일어나서 은솔이를 불렀어요. “강은솔!” 그런데 은솔이는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급하게 뛰어가 버리는 거예요. 재은이는 터덜터덜 걸으며 혼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은솔이는 분명 재은이보다 먼저 집으로 갔거든요. 그런데 은솔이 엄마는 은솔이가 집에 오지 않았다며 재은 이 엄마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나도 같이 가.” 재은이가 벌떡 일어섰어요. 엄마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어요. “그럼 엄마 손 꼭 잡고 다녀야 돼?” 재은이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재은이 엄마는 나가면서 은솔이 엄마와 다시 통화했어요. 이 횡단보도의 신호등 불은 세모 모양이에요. 시간이 지나 면서 초록색 세모가 한 칸씩 줄어드는 방식이죠. 아이들은 횡단보도에서 잡기 놀이를 하는 건지 빙빙 돌며 뛰어다녔어요.
선생님은 무섭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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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고소한 달걀말이 냄새가 나의 아침잠을 깨웠어요. 하지만 오늘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온몸에 이불을 친친 감고 침대 위만 뒹굴뒹굴 굴러다녔 지요.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네요. “해성아! 아직도 안 일어났니? 새 학기 둘째 날부터 지각 해서야 되겠어?”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눈을 꼭 감았어요. 우리는 떠들썩하게 하이 파이브를 하고 자리를 찾아갔어요. 나는 가져온 준비물은 가방 안에 그대로 두고 새로 산 필 통만 책상 위에 꺼내 놓았어요. “어? 하이몬 인형 필통이네? 나 구경해도 돼?” “그래.” 나는 흔쾌히 허락했어요. 우린 이미 절친이 나 마찬가지니까요. 승완이는 내 필통을 들고 하이몬이 변신하 는 흉내를 냈어요. 드르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와글와글 소란스 럽던 교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어요.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후, 어떻게 자기소개를 했는지 기억 이 나지 않아요. 나는 ‘선생님, 이거 장난감 아닌데요. 필통이에요.’를 마음 속으로만 30번도 더 외친 것 같아요. 그 뒤로 내 불쌍한 하이몬 필통은 4교시 내내 책상 서랍 안에 처박혀 있었어요. “아!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 식탁 앞에 앉았어요. 그리고 달걀 말이와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어요. 달걀말이에 햄이 들 어 있지 않았다면 다 먹지도 못했을 거예요. 내가 선생님 때문에 식욕이 없어요, 식욕이! 하이몬이 우리 선생님을 똑 닮은 거 있죠? 선생님에게는 ‘희수’라는 예쁜 이름보다 ‘하이몬’이라는 별 명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선생님을 ‘하이몬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 어요. “자, 모두 국어책 폈니?” “네!” 아이들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하는데, 나는 혼잣말로 “네!” 뒤에 “하이몬 선생님!”을 붙였어요. 마지막 문제마저 틀리면? 계산하기도 힘들어요. 무려 스물 한 번이에요. 짝꿍 서연이는 받아쓰기 준비를 많이 했나 봐요. 자신 있 게 받아쓰고는 고치지도 않아요. 나도 모르게 내 눈은 서연이가 우리 둘 책상 사이에 올려 놓은 필통을 지나 서연이의 시험지를 향했어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침이 바싹바싹 말랐어요. 선생님이 성큼성큼 내 자리로 다가왔어요. “신해성, 대답해 봐. 정말로 봤니?” 서연이가 내 시험지를 들여다보며 조잘거렸어요. 그러고는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꾸지람을 조마조마한 마음 으로 기다렸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목소리는 차분했어요. “다른 사람의 시험지를 보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나 마찬가지야. 다른 사람이 열심히 공부한 답을 몰래 가져 가는 거니까. 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죄송하다고 하니 이번에 는 용서해 주마. 또 그러면 안 된다.” “맞아요!” “줄여 주세요!” 승완이의 말이 끝나자 아이 들이 소리쳤어요. ‘한 번이나 두 번 쓰기였다면 서연이 받아쓰기 보고 고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나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방금 꾸중을 듣고 왔는지라 소 리 내어 말할 수는 없었어요. 틀린 것 세 번 쓰기가 많다고 마음속으로 불평만 했지, 선 생님께 말씀 드려서 바꿔 볼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용기를 내어 손을 든 것도, 자기의 의견을 선생님께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참 멋진 것 같았어요. 나는 결국 서연이 걸 보고 고쳤던 세 문제를 다섯 번씩, 그 냥 틀린 두 문제를 두 번씩 해서 모두 열아홉 번 써야만 했어요. “오늘은 나가서 방울토마토를 심을 거야.” 갑자기 웬 방울토마토?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 어요. “학교 뒤편에 텃밭이 있는 것 알지? 교장 선생님께 말씀 드려서 우리 반이 그 텃밭을 쓰기로 했다.” “와! 재밌겠다.” 아이들은 새로운 활동에 관심을 보였어요. 그러자 부리부리한 선생님의 눈이 승완이에게로 향했어요. “누가 뒤에서 저를 밀어서 넘어지는 바람에 제 모종삽에 있던 흙이 날아갔어요.” 승완이가 똑 부러지게 말했어요. 선생님은 점점 차오르는 화를 누르며 말씀하셨어요. “누가 승완이를 밀었지?” 그때 서연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네.” 나는 바로 서연이, 승완이 그리고 현구에게 미안하다고 사 과를 했어요. 서연이는 여전히 뾰로통하기는 했지만 사과를 받아 주었 지요. 자리로 돌아오면서 보니 선생님이 나를 보며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모종삽으로 땅을 파서 방울토마토 모종을 조심 스레 심어 보였어요. 어느새 2학년 3반 텃밭이 완성되었지요. “종종 텃밭에 와서 우리 반 모종들이 잘 자라 고 있는지 살펴보고,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 줘야 한다. 알겠지?” “네!” 우리는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어요. 선생님은 매일 텃밭에 나가 방울토마토 모종이 잘 자라는 지 지켜보셨어요. 선생님이 칠판 옆에 걸어 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면 텃 밭에 나간다는 신호예요. 그때마다 친구들은 선생님을 따라 나가 텃밭에 물을 주거 나 풀을 뽑는 걸 돕기도 했어요.
숙제 안 하고 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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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모아는 텔레비전에 나온 좋아하는 아이돌 언니들을 집중 해서 보느라 입이 벌어진 지도 몰랐어요. “텔레비전으로 들어가겠다!” 엄마는 텔레비전 앞에 바짝 붙어 있는 모아에게 뒤로 가라 고 손짓하며 말했어요. 엄마의 말처럼 정말 텔레비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을까요? 그럼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언니들과 같이 춤 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장면이 생각이라도 난 듯 모아의 입이 다시 헤 벌어졌어요. 학교에서 배우고 학원에서도 공부하는데 숙제는 왜 해야 하는 걸까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어차피 대충 해 가는 거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귀찮기만 한데 말이죠. 모아는 투덜거리며 책상 앞에 앉았어요. ‘공부와 숙제는 누가 해 줄 수 없어. 스스로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에요. 눈싸움이라도 하듯 다시 일기장을 노려보던 모아는 무언 가 생각난 듯 연필을 쥐고 날씨를 적는 칸에 해를 그려 넣었어 요. 하지만 금세 고장 난 것처럼 또 그대로 멈추고 말았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리 없죠. 여느 때처럼 똑같 은 아침이 밝았어요. “모아야!” 엄마의 목소리에 모아는 눈을 번쩍 떴어요. 깜깜한 밤이었던 창밖에서는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어요. 뭘 써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조금 쉬었다가 다 시 할 생각이었어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단지 학교 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렸던 건데, 정말 배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일기 숙제 모두 해 왔죠?” 선생님의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머릿속에서 펑! 폭죽이 터지는 것 같더니 배가 찌르르 아파 왔어요.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는 선생님의 눈을 보니 다시 가슴이 콩닥콩닥, 배가 찌르르 울렸어요. 모아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꼭 감았어요. 그리고 결심한 듯 떨리는 손도 꽉 쥐었죠. “일기장을 집에 놓고 왔어요!” 교실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친구들도 모두 모아를 바 라봤어요. 조심스럽게 눈을 뜬 모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친 구들의 시선에 놀라 눈을 깜빡였어요. 자꾸 시키는 건지 이해도 안 되고.” 세상에! 내 모습뿐 아니라, 생각까지 모두에게 들리는 건 가요? 놀라서 눈만 끔뻑이는 모아를 보며 한누리는 씩 웃었어요. “나도 예전에는 그랬거든.” 한누리는 성실하고 꼼꼼하게 숙제를 잘한다고 선생님께 칭 찬도 자주 받았어요. 항상 숙제 먼저 해 놓고 놀아서 한누리 부모님은 한번도 한누리에게 숙제 다 했느냐고 묻지 않는다며 엄마, 아빠는 은근히 부러워하셨죠. 별로 친하지 않다고 생각한 게 미안한 순간이었죠. “오늘부터 네 숙제는 내가 대신 해 줄게.” 한누리는 손으로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의기양양한 표정 을 지었어요. 갑자기 한누리 뒤로 환한 빛이 번지는 것 같았 어요. “정말? 내 숙제까지 해 줘도 돼?”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는 한누리의 등 뒤에서 커다란 빛 과 함께 하얀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 순간은 정말 한누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느껴졌어요. 집에 돌아온 모아는 가방을 방에 던져 놓고 신나게 거실로 뛰어나왔어요. 광고를 보며 과일 모양의 젤리를 하 나 입에 넣으면서도 모아의 눈은 텔레 비전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다른 때 같으면 숙제해야 한다는 생 각에 시계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며 불안해했을 거예요. ‘학교 다녀오면 숙제부터 하고 놀아.’라는 엄마의 말을 어 길 때면 마음이 늘 조마조마했거든요. 아까는 엄마에게 거짓말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아졌어요. 사실 거짓말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모아가 한 게 아니어서 그렇지,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숙제를 다 한 건 맞으니까요. 모아는 조금 전에 한누리에게서 온 톡을 다시 확인했어요. 숙제 완료! 뿌듯해 보이는 이모티콘이 브이를 그리 고 있었어요. 모아는 숙제 없는 자유를 누리게 해 준 한누리에게 진심을 담아 “Thank you.”라 는 글자와 함께 신나 하고 있는 펭귄 이모 티콘을 보냈어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한누리는 모아의 숙제를 계속 대신 해 주었어요. 모아보다 일찍 등교하는 한누리는 늘 모아의 책상 서랍에 모아의 숙제를 넣어 두었어요. 처음에는 한누리가 대신 해 준 숙제를 확인하고, 고마워서 한누리에게 젤리, 초콜릿, 사탕 등을 나눠 주곤 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고마운 마음도 사라지고 한누리가 모아 의 숙제를 대신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어요. 모아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어요. 아빠에 대해 얘기를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일까요? 머릿속이 깜깜해지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고민하던 모아는 할 수 없이 공책을 덮었어요. “선생님…… 저 숙제를 안 했어요.” 선생님은 손을 든 친구 중 한 명에게 발표를 시켰죠. 친구들의 발표가 이어지고 엉뚱한 내용에 친구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아는 고개를 숙인 채 숙제 공책만 빤 히 보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모아는 한누리를 찾았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누리는 쉬는 시간마다 자리를 비웠어요. 반면 한누리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있었어요. “이번에도 100점이네. 어려웠을 텐데 잘했어.” 선생님의 칭찬에 헤헤 웃는 한누리가 얄미웠어요. 오늘은 한누리의 머리에 못된 뿔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두고 보자, 박한누리.’ 모아는 한누리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어요. 지금은 한가하게 복수를 다짐할 때가 아니었어요. 단원 평가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모아는 수학은 자신 있으니까 꼭 100점을 맞아서 0점 받 은 창피함을 씻어 버려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한누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졌어요. 이로 써 모아는 한누리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죠. 사실 한누리가 대신 해 준 숙제가 이상한 게 처음은 아니 었어요. 지난번에는 가 본 적도 없는 선사유적지 체험학습 얘기를 쓰는 바람에, 선생님께서 이것저것 물어봐서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몰라요. 그림 숙제도 그래요.
내 마음대로 입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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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멋지다!” 예지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감탄했어요. 예지는 지금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어요. 예쁜 파란색에, 만져 보면 보들보들한 느낌의 드레스예요. 예지의 꿈은 패션모델이에요. 모델이 되면 마음에 드는 옷 을 실컷 입어 볼 수 있잖아요. 예지네 아침 풍경은 정말 정신이 없어요. 엄마 아빠는 출근 하고 예지와 예담이는 학교에 가야 하니까요. 엄마 아빠는 예지, 예담이가 어릴 때부터 ‘자기 할 일은 자기 가 스스로!’라는 말을 백 번, 천 번도 더 하셨어요. 예지는 이제 아침에 엄마 아빠의 도움 없이도 준비를 마칠 수 있어요. 일어나면 침대 위에 구겨진 이불을 잘 펴 놓는 일부터 해요. 혼자 씻는 건 당연하고요. 머리를 단정하게 묶는 일도 혼자 할 수 있어요. 밖으로 나가 보니 아침밥이 차려져 있네요. 엄마는 벌써 옷을 다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어요. 오늘부 터 일주일은 엄마가 일찍 출근하고 아빠가 등교 도우미를 해요. 엄마랑 아빠는 같은 회사에 다녀서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는 할머니가 오셔서 쌍둥이를 돌봐 주셨어요.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엄마 아빠가 돌아가며 쌍 둥이 등교를 도와줘요. 체육복 바지는 통이 넓고 허리는 고무줄로 돼 있어서 입기 가 쉬워요. 윗도리도 머리부터 넣고 팔을 한쪽씩 넣으면 되니 까 간단해요. 양털 점퍼는 지퍼가 달려 있어요. 지퍼를 잠글 때는 처음에 지퍼의 끝부분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해요. 한쪽 끝을 지퍼 고리 안에 잘 집어넣고 맞춘 다음 올리면 지퍼가 쭉 올라가요. “어디가?” 예담이가 옷을 내려다봤어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예담이는 정말 모르는 걸까요? “윗도리 거꾸로 입었잖아.” 예담이 방에는 잠옷 바지가 동그랗게 말려서 방바닥에 놓여 있고 윗도리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어요. 이따 집에 돌아 오면 외출복도 마찬가지로 저렇게 벗어 놓을 거예요. 예담이 방에는 옷이나 양말이 침대 밑이나 책장 사이로 들 어가서 청소할 때 발견되는 경우도 있어요. 개성을 표현해요. 자기만의 특성, 자신만의 매력을 개성이라고 해요. 밝고 화려 하고 다양한 색깔이 들어간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차분하 고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옷과 신발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예지와 예담이는 아빠와 교문 앞에서 헤어지고 교실로 들어 왔어요. 교실에서는 외투를 벗어서 교실 뒷벽에 자기 번호가 쓰인 고리에 걸어 둬요. 외투를 아무렇게나 두면 바닥에 질질 끌리거나 다른 친구들 이 밟을 수도 있거든요. 놀다가 친구의 외투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는 사고도 있었어요. 예지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양털 점퍼를 벗어서 자기 번호 고리에 잘 걸었어요. 하지만 예담이는 수업 시간 내내 외투를 입고 있었어요. 낮 에는 더울 텐데도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게 귀찮은가 봐요. “일어나. 내가 양말 잘 벗는 법 가르쳐 줄게.” 예담이가 양말을 붙잡고 바닥에 등을 댄 채 대답했어요. “됐어. 나도 양말 벗을 줄 알아.” 그런 예담이를 보며 예지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말했어요. “양말 벗을 때는 발바닥을 잡아.” “뭐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인 예담이를 위해 예지는 시범을 보였어요. 우선 손으로 양말의 바닥 부분을 꾹 움켜잡고 그대로 잡아 당겨요. 그러면 한 번에 양말이 스윽 벗겨져요. “우왓!” 예담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예담이의 외투는 모자가 달려 있고 지퍼로 여닫을 수 있게 돼 있어요. 그런데 예담이는 외투의 모자만 머리에 썼을 뿐 옷에 팔을 끼우지도 않았어요. 외투는 머리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을 뿐 이에요. “됐다!” 예담이가 지퍼를 위로 죽 올렸어요. 지익-. 지퍼가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올라갔어요. 지켜보던 예지는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어요. 쌍둥이가 집에 와서 씻고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엄마 아빠가 함께 퇴근했어요. 아빠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서 신발을 벗자마자 예담이는 아 빠의 양말부터 살펴봤어요. “아빠, 양말 벗어 봐요.” “응?”
먹기 싫은 건 안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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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엄마, 나 정말 배가 너무 아파!” 승헌이는 오늘도 교문 앞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어요. “승헌아, 2분만 지나면 9시야. 그럼 너 지각이야.” 엄마의 말에도 승헌이는 꼭 잡은 엄마 치맛자락을 놓지 않 았어요. 그러고는 곧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눈으로 엄 마를 쳐다봤죠. 승헌이는 점심시간이 무서워요. 혹시 오늘 급식에 방울토마 토가 나올까 봐 걱정이 되었거든요. 물론 처음부터 방울토마토를 못 먹었던 건 아니에요. 맛있 는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먹었어요. 입에 넣고 터 트려 먹다가 가끔 입 밖으로 즙이 툭 터져 나오면 친구들끼리 까르르 웃었던 기억도 있는걸요. 친구들이 밥 먹는 곳에서 토해 창피했어요. 승헌이의 모습을 보고 비위가 상해 밥을 못 먹고 고개를 돌리는 친구들도 있었 거든요. 그 뒤로는 방울토마토가 싫어졌어요. 보기만 해도 숨 막혔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용기 내서 먹어 보려 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예전에는 느 끼지 못했던 비린 맛이 입안에 가득 퍼져서 결국은 삼키지 못 하고 뱉고 말았죠. 그렇게 친구들 앞에서 두 번이나 방울토마토를 뱉은 승헌이 는 급식 시간이 싫어졌고 급식 시간만 되면 배가 너무 아팠어 요. 이번 안전한 생활 수업은 우리 동네에서의 안전에 대한 내용 인데 학교 근처의 공원도 산책할 예정이라서 모두 조금은 들 떠 있었거든요. 승헌이도 공원 산책 생각에 방울토마토를 잠시 잊었어요. 산책은 재미있었고, 짝꿍과 손잡고 선생님 따라 걷는 공원은 참 예뻤어요. 5월의 연둣빛 나뭇잎은 가을 단풍잎만큼 예뻐서 기분이 저 절로 좋아졌어요. “아~, 배고프다!” 서혁이가 학교에 가까워지자 큰 소리로 말했어요. “우리 형이 그러는데 오늘 급식 돈가스래! 정말 맛있겠지?” 돈가스를 벌써 입에 넣은 듯 말하는 하준이의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넌 먹으러 학교 오냐?” 승헌이가 자기도 모르게 불퉁스레 말했어요. “야, 너 왜 그래?” 평소답지 않은 말투에 서혁이가 놀라며 승헌이의 어깨를 툭 쳤어요. 꼬르륵. 승헌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배 속에서 소리가 났어요. “이제 보니 배가 아픈 게 아니고 고픈 거였구나? 어서 가 봐!” 정말 배가 아팠는데, 보건 선생님은 더 이상 믿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어요. 따뜻한 손으로 승헌이의 등을 한 번 쓸어내 리며 급식실로 가라고 하셨거든요. 하는 수 없이 승헌이는 보건실 문을 닫고 나와 잠시 망설이 다가 결국은 급식실로 향했어요. 그래서 승헌이는 식판을 들고 긁어서 입안에 넣으려다가 앞자리에 앉은 지연이를 보게 됐어요. 늘 싱글벙글 웃던 지연이 표정이 이상했어요. 그러고 보니 지연이 식판은 그대로네요? 그러고 보니 지연이 식판은 그대로네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르 흐를 것 같은 눈과 꽉 다문 입술, 꽉 쥔 숟가락에 무엇보다도 식판 한 곳에서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어요. 승헌이는 들고 먹던 식판을 내려놓고, 지연이를 살펴봤어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승헌이는 숟가락으로 지연이의 식 판을 툭 쳤어요. 지연이가 깜짝 놀라 승헌이를 쳐다봤어요. 승헌이는 집게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어요. 승 헌이의 신호에 지연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승헌이는 고개를 들어 선생님과 친구들을 살펴봤어요. 아무 도 승헌이와 지연이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고마워, 승헌아.” 하굣길에 지연이가 승헌이에게 말을 걸었어요. “오이는 보기만 해도 입안이 비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지연이는 양 갈래 머리를 흔들었어 요.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잘 아는 승헌이도 자신의 비밀을 툭 말했어요. 지연이가 흥분하며 말하는 걸 듣다 보니 승헌이도 싫은 점 이 떠올랐어요.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그리고 난 물통 챙겨 가는 걸 맨날 까먹어서 힘들어. 그래서 물 대신 침을 모아 꼴깍 삼킨 적도 있다니까!” “으, 그건 좀 더럽다.” “그치? 내가 생각해도 그건 좀 그래.” 더럽다면서도 지연이는 승헌이에게 웃어 보였어요. 얼른 뛰었어요. 아파트 가는 길이 살짝 오르막이어서 좀 힘들 었는데 오늘은 평지같이 느껴졌어요. 다음 날 아침 승헌이는 교문 앞에서 엄마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했어요.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응? 진짜?” “그럼! 내가 아기인가, 뭐?” 놀란 엄마를 뒤로 하고 승헌이는 당당하게 교문으로 들어섰 어요. 선생님의 말에 승헌이와 지연이가 동시에 크게 대답했어요. “오늘은 승헌이와 지연이의 날인가 보네.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더니 점심도 적극적으로 먹으려 하고!” 선생님은 큰 소리로 대답한 승헌이와 지연이에게 엄지손가 락을 세워 보여줬어요. “아이쿠, 넌 더 많이 먹어야겠다.” 조리사 선생님은 승헌이를 보고 밥도 반찬도 조금씩 더 주 셨어요. 물론 대추 방울토마토도 두 개나 줬어요. 승헌이는 살짝 흔들렸지만, 여기서 힘이 빠지면 겨드랑이에 낀 물통이 떨어지니 더 힘을 줬어요. 마음이 급해진 승헌이가 하준이에게 한마디 했어요. “너나 빨리 먹어! 또 꼴찌 하려고.” 하준이도 지지 않고 대꾸했어요. “내가 왜 꼴찌를 했는지 알아? 네 옆에서 밥 먹다가 더러워 서 못 먹은 거라고!” 하준이의 얼굴이 빨개졌어요. 무척 속상한 표정이었어요. 승헌이는 미안해졌어요. 하지만 사과를 하기엔 모두 쳐다보 고 있어 부끄러웠어요.
괴롭히려고 한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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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니은이와 준이는 1학년 같은 반 짝꿍이에요. 니은이 이름은 한글 자음 ‘기역, 니은’에서 따왔어요. 워낙 특이해서 처음에는 놀림을 좀 받았죠. 그때마다 니은이는 참 지 않고 말했어요. “남의 이름으로 놀리는 건 비겁한 짓이야! 내가 네 이름으로 놀리면 좋아?” 그랬더니 다들 찔끔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름에 익 숙해지자 더 이상 놀리지 않게 되었어요. 준이는 반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예요. 늘 눈을 반짝이며 장난거리를 찾아다녔죠. 니은이는 그런 준이가 너무 재밌었어요. 준이가 엉뚱한 행 동을 하면 깔깔대고 웃었죠. 그럼 준이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장난을 쳤어요. 준이 손가락이 상현이 엉덩이 사이로 푹 들어갔어요. “아얏!” 상현이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봤어요.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죠. 얼굴빛도 새빨갛게 변했어요. “아아아아!!!” 상현이는 손으로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며 몸을 비틀었어요. 너무 아파서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였어요. 준이가 한 손을 들며 말했어요. 말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별로 미안한 얼굴은 아니었어요. 상현이는 입술을 깨물었어요. 생각 같아서는 한 대 때리고 싶었죠. 그런데 장난이라잖아요. 그걸로 싸움을 걸기는 좀 그 래요. 그럼 자기가 쪼잔한 사람이 되거든요. 그리고 교실에서 싸우면 선생님에게 혼날 거예요. 분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어요. 상현이는 준이를 한 번 째려본 뒤 자리에 앉았어요. 엉덩이 사이가 계속 욱신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요. 아픈 걸 티내면 친구들이 또 웃거든요. 웃음거리가 되지 않 으려면 참아야 해요. 깜짝 놀라는 모습이 정말 웃기거든요. 막상 당한 친구는 화를 내기도 좀 그래요. 다들 웃는데 혼자 화내면 친구들은 더 웃어요. 거기다 싸움을 부추기듯 박수까 지 치죠. 구경거리가 생겨서 다들 신난다는 표정이에요. 니은이는 얼떨결에 휴대폰을 책상 서랍에 감췄어요. 두 사 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어요. 미루는 울상이 돼서 휴대폰을 찾으러 다녔어요. 친구들 사 이를 기웃거리고, 사물함을 샅샅이 살폈어요. 정체를 숨긴 채 보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나는 상대를 아는데 상대는 나를 모르는 것보다 더 가슴 짜릿한 일은 없거든요. 미루는 교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미루가 가까이 오자 니은이는 가슴이 마구 콩닥거렸어요. 니은이가 준이에게 속삭였어요. “미루 이쪽으로 온다. 어떡해?” “쉿! 그냥 모른 척해.” 준이가 펼친 책을 세워 두 사람을 가렸어요. 니은이와 준이 는 고개를 숙이고 키들거리며 서로를 툭툭 치기도 했어요. 미루가 지나가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어요. “갔다. 와, 다행이다.” 그런 아슬아슬한 기분이 정말 재밌었어요. 쉬는 시간에 니은이는 미루에게 갔어요. 내가 친해지고 싶어 다가가도 나를 믿지 않고 멀리할 수도 있고 요. 양치기 소년처럼 말이죠. 그럼 나는 친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질 거예요. 모든 걸 함 께 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건 너무 쓸쓸하고 슬픈 일이에요. 그날은 방과 후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었어요. 수업 시작 전 에 니은이와 준이는 운동장에 있는 놀이터로 향했어요. 니은이는 놀이 기구 중에 그네를 가장 좋아했어요. 그네를 타고 허공을 날면 가슴이 벅차요. 높이 올라갈 때면 어깨에서 날개가 펄럭이는 것 같았어요. 같은 반 친구 서우가 앉아 있었어요. 서우는 몸집이 작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말도 없고 운동장에 도 잘 안 나가고 늘 자기 자리를 지켰어요. 그런데 웬일로 그네에 앉아 있네요. 니은이는 깜짝 놀랐어요. “헐, 쟤가 웬일이야?” 밀어 주겠다고 말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에 벌써 신이 났거든요. 준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장난기가 다시 발동했어요. 준이가 서우 등을 힘껏 밀자, 그네가 앞으로 훌쩍 나갔어요. 이번에는 니은이가 서우의 등을 밀었어요. 그네가 또 훌쩍 앞으로 나가자 서우가 다시 소리쳤어요. “하지 마! 무서워!” 목소리가 겁에 잔뜩 질려 있었어요. 그런 서우 모습에 두 사 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니은이와 준이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어요. 바닥에서 1미터도 안 올라갔는데 무섭다니요. 서우는 계속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다가 그네 가 밑으로 내려왔을 때 내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잘못해서 앞 으로 엎어지면서 바닥에 무릎을 세게 부딪쳤어요. “아얏!” 비명을 지른 서우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 말에 서우가 엎드린 몸을 일으켰어요. 쪼그리고 앉더니 자기 무릎을 들여다봤어요. 서우는 하필 짧은 치마를 입고 있 었어요. 서우의 맨 무릎에 모래가 박히고 상처가 났어요. 서우는 울면서 무릎에 박힌 모래를 털어 냈어요. 혼자 잘난 척하지 않아요. 가끔 보면 혼자 잘난 척하는 친구가 있어요. 여럿이 있는데 혼 자 떠들고,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을 하고, 내 말만 옳다고 우기지요. 물론 누구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요.
칭찬하는 게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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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여러분, 오늘 전할 얘기가 있 어요. 오늘부터 친구들에게 칭 찬을 하면 칭찬 스티커를 나눠 줄 거예요. 이 칭찬 스티커는 굉장히 특별해요. 칭찬 스티커 가 우리 2반 친구들을 더 친하 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어요.” 아침 조회 시간, 선생님 말씀 이 끝나자마자 반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어요. 특별한 칭찬 스티커 라니? “칭찬 스티커는 누가 누구에게 주는 거예요?” 지수가 손을 번쩍 들 고 선생님에게 물었어 요. 지수의 질문에 아 이들은 모두 선생님만 쳐다보았지요. 다른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술렁였어요. 하지만 맨 뒷줄에 앉은 다율이는 칭찬 배지도, 칭찬 스티커도 별로 관심이 없었 어요. 그저 착한 일 스티커처럼 숙제가 하나 더 생기는 기분이 었지요. 어제도 착한 일 스티커를 받으려고 억지로 엄마의 심부름을 해야 했거든요. 멀쩡한 아빠의 구두도 일부러 닦았고요. “지원아, 너 오늘 멋있다.” “고마워. 지수야, 너도 오늘 예쁘다.”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데 다들 예쁘고 멋있다고 말해 줘요. 물론, 칭찬 스티커를 받기 위해서 그냥 하는 말인 것 같아요. 다율이는 칭찬 스티커 때문에 거짓말하고 싶진 않았어요. 책을 쳐다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지요. 칭찬 스티커 때문인지 다율이는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어 요. 수업 시간 내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율이는 얼른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어요. 할머니가 학교 정문 앞에 와 계셨어요. 다율이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서 늘 할머니가 다율이를 데리러 오시 거든요.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학교 재밌었어?” 할머니가 웃으면서 다율이를 반겨 주었어요. 할머니 얼굴을 보자 하루 종일 꽉 막혔던 마음이 조금 풀어 지는 것 같아요. “다율이는 아직 칭찬 스티커가 없구나. 분발해야겠네?” 선생님의 말씀에 다율이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어요. 졸지에 칭찬하지 않는 어린이가 돼 버렸으니까요. 다율이는 공연히 혼자 부끄러워서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어요. 쉬는 시간에 갑자기 준호가 다율이 옆으로 오더니 대뜸 말했어요. “정다율, 너 오늘 예쁘다.” “어? 으응.” 다율이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들어 봐서 당황스러웠지만, 기 분이 살짝 좋았어요. 그런데 준호가 예쁘다고 말하자마자 손 을 내미는 것이 아니겠어요? “자, 칭찬 스티커 줘야지.” “뭐?” “칭찬했으니까 칭찬 스티커 내놔.” “너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다율이도 지지 않고 말했어요. “이게! 내놔. 스티커!” “싫다니까.” 그러자 준호가 갑자기 다율이 책상을 밀쳤어요. 그러는 바람 에 옆에 서 있던 친구 한 명이 책상에 밀려 넘어지고 말았어요. “으아아앙.” 다율이는 당황했어요. 준호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지만 다 율이를 노려보고는 자리로 가 버렸지요. 친구의 울음소리를 듣고 선생님이 달려오셨어요. “괜찮니? 어쩌다가 그런 거야?” 드르륵.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각자 자리로 가서 앉았 어요. 다율이와 달리 선생님은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여러분에게 소개해 줄 친구가 있 어요. 자, 현주야, 친구들에게 인사할까?” “어, 난 다율이. 정다율.” “우와, 너 이름 예쁘다. 다율아, 잘 지내보자!” 현주는 다율이와 달리 처음 보는 친구들과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하는 것 같아요. 다율이는 자기와 다른 현주를 보며 어색했지만, 또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다율이는 자기와 다른 현주를 보며 어색했지만, 또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현주와 같이 지낼 시간 이 기대되어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현주에게 티 내 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죠. 하굣길에 아이들이 현주에 대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다율이도 귀를 쫑 긋하며 대화를 엿들었지요. “우리 반에 새로 온 애 있잖아. 그 아이 되게 착한 것 같아. 친절하고.” “현주 말이지? 너무 밝아서 깜짝 놀랐어.” 모두 입을 모아 현주를 칭찬하고 있었어요. 다율이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이게 다 스티커를 받으려고 하는 거짓말일 텐데. 애들은 아직 잘 모르네.’
또박또박 말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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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흐읍, 휴우!” 민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힘껏 내뱉었어요. 곧 체육 시간이거든요. 줄넘기를 못하는 민아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가방에서 줄넘기를 꺼내기 바빴어요. 몇몇 아이들이 줄넘기로 바닥을 탁탁 치기도 했고, 윙윙 소리가 나 게 휘두르는 아이도 있었어요. 아, 신발 신으면서 현관 바닥에 두고 그냥 나왔나 봐요. 민아는 다시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졌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이제 줄넘기 를 안 가져온 사람은 더 없는 걸까요? 민아는 선생님이 쳐다 봐 주기를 바랐어요. 그러 면 줄넘기를 안 가져온 것 을 알고 빌려주실 테니까 요. 민아의 바람이 통했 나 봐요. 선생님이 이쪽저 쪽을 오가며 아이들을 둘 러보는 거예요. 민아는 간 절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쳐다봤어요. 침이 꼴깍 넘어갔어요.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선생님은 민아 쪽으로 오지 않았거 든요. 곧 선생님이 손뼉을 치며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어요. “자, 체육관으로 이동할게요. 모두 복도로 나가 한 줄로 서 세요.” 민아는 울상이 되었어요. 어느새 붉어져 있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또박또박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아요. 선생님이 어제도 말했지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민아도 잘 알아요. 하지만 잘 되 지 않는 걸 어떡해요. 재석이가 삐죽댔어요. 민아는 재석이를 향해 ‘만날 까먹는 넌?’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훌쩍거리며 쳐다볼 뿐이었지요. “나랑 번갈아가면서 하자.” 짝꿍 준우가 불쑥 줄넘기를 내밀었어요. 곧 다시 줄넘기가 시작되었어요. 민아는 살짝 흘겨보면서 준우에게 줄넘기를 건넸어요. 민아 처럼 준우도 줄넘기 줄에 턱턱 걸려 여러 번 멈추었어요. 아까 준우가 그랬던 것처럼 민아도 키득거렸어요. 민아는 앞쪽에 있는 재석이를 슬쩍 보았어요. 유정이 말을 들었는지 재석이가 입을 삐죽이더니 줄넘기 줄 을 둘둘 말아 가방에 넣었어요. 그러고는 어디를 가려는지 냅 다 달렸어요. 민아가 감탄하며 말했어요. “넌 진짜 대단해. 난 너처럼 그렇게 말 못 하는데…….” “으, 저리 가! 훠, 훠이!” 준우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젓는 거예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민아는 아까 줄넘기를 할 때 처럼 웃음이 나왔어요. 이곳에는 비둘기가 많아요. 까치며 이름 모를 새들도 있고요. 어쩌면 준우 역시 그럴지 모른다고 생 각했어요. 문득 민아는 체육 시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어요. 풀이 죽 은 목소리로 말했지요. “난 하나도 용감하지 않아. 넌 하고 싶은 말도 잘하고, 울지 도 않잖아.” 비법이란 말에 민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 요. 준우라면 뭔가 그럴듯한 방법을 가르쳐 줄 것 같았지요. “그럴 땐 말이지 ‘거꾸로 비법’을 써 봐.” “거꾸로 비법?” “응, 십부터 거꾸로 세는 거야.” 가만 듣고 있던 민아는 궁금한 것이 생겼어요. “너도 그랬다고? 언제, 왜?” ‘또박또박 말하기’는 생각과 감정을 바르게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그런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 생각을 바르게 전 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 또한 연습이 필요하지요. 집에 들어가자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민아를 반갑게 맞아 주 었어요.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민아는 한숨이 나왔어요. 엄마는 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만 묻는 걸까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민아는 작은 소리로 우물거렸어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열심히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 틈에 혼 자서 멍하니 서 있었잖아요. 정말 끔찍했어요. 눈앞이 캄캄했 다니까요. 더구나 울기까지 하다니! 생각할수록 창피한 마음 에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만약 선생님이 없었다면, 준우가 줄넘기를 빌려주지 않았 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 층 올라가니 학습 준비물실 팻말이 보였어요. 도서관은 자주 가지만 학습 준비물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낯선 곳이라 민아는 살짝 긴장이 되었어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문을 열었어요. ‘드르륵’ 문을 여는 소리가 유달 리 크게 느껴졌어요. 민아는 입이 바짝바짝 탔어요. 하는 수 없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어요. 아까 한 번 읽어 보았 잖아요. 볼펜을 들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적기 시작했어요. ‘사인펜 다섯 세트, 스카치테이프 다섯 개…….’ 민아는 가슴이 쿵쿵 뛰었어요. 침을 꼴깍 삼켰어요. 볼펜으 로 글씨를 쓰는 대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동 그라미는 점점 많아졌고, 점점 커졌어요. 종이가 어느새 까맣 게 되어 버렸어요. “어머, 너 뭐 하니?” 맞아요. 이제야 생각났어요! “지금 말하던 중이었어. 그렇지?” 도우미 선생님이 민아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어요. 민아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번졌어요. 뭐가 불만인지 재석이가 입을 삐죽거렸어요. 그러더니 불퉁 스럽게 말했어요. “난 내일 당번인데 너 때문에 심부름했잖아. 근데, 너 울었 냐?” 민아의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했어요. 괜찮아졌다가도 자꾸 만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민아는 재석이에게 할 말을 하고 싶 었어요. 그래서 거꾸로 비법을 시작했어요.
놀 때도 안전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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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쟤, 왜 나한테 엄지 척 하지?’ 영웅이는 놀이터에 있는 한 아이를 바라보았 어요. 방금 “우아, 우아.” 하고 감탄하는 소 리가 들려서 쳐다봤더니 한 아이가 영 웅이를 향해 엄지손가락 두 개를 척 들어 올린 거예요. 영웅이는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 았어요. 이름처럼 영웅이 된 것 같았어 요. 사실 영웅이가 한 거라고는 친구 도담이한테 쫓겨서 미끄럼틀 꼭 대기로 도망 온 게 다인데 말이에요. 다다다 빠르게 달려서 미끄럼틀을 밟 고 거꾸로 올라왔지요. “안녕, 도담이 누나. 나는 씨앗 초등학교 1학년 2반 배지유 야.” “잘 들었지? 이 누나는 태권도 학원에 간다.” 도담이가 영웅이한테 말했어요. 도담이는 든든한 친구예요. 모르는 아이한테 먼저 말을 걸 어서 영웅이의 궁금증도 해결해 줬잖아요. 그래서 지유는 계단으로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 왔어요. 영웅이 얼굴 바로 앞에서 엄지손가락 두 개 를 추켜세웠어요. “형, 아까 여기 올라올 때 정말 빠르더라. 짱 멋있 었어.” ‘음, 이런 게 멋있는 일인가?’ 영웅이는 이런 칭찬은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지유 같은 동생이라면 같이 신 나게 놀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나도 안 어려워. 미끄럼틀 산에 오른다고 생각해. 하지만 산은 천천히 올라가도 되잖아. 미끄럼틀 산은 빠르게 달려와서 위로 후다닥 올라가야 해. 미끄러질 것 같으면 미끄럼틀 양옆을 잡으면 돼.” 영웅이는 어깨를 으쓱했어요. 꼭 선생님이 된 것 같았어요. 지유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영웅이의 말을 듣고 있었어요. 이때 영웅이가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어요. 지 유도 영웅이처럼 외동이에요. 지유는 영웅이 같은 형이 있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성공!” 지유는 영웅이와 손바닥을 마주쳤어요. 영웅이는 도담이한테 뭐 라고 하지 못했어요. 유치 원 때는 영웅이가 마음대 로 놀아도 엄마한테 이른 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만난 지유는 영웅 이를 추켜세워 주었어요. 그러니 영웅이가 얼마나 신이 나서 이것저것 보여 주고 싶었겠어요. 폴짝폴짝 뛰기, 한 발로 서서 그네 타기, 그네 타다가 뛰어 내 리기. 영웅이만의 아슬아슬 놀이법이 펼쳐졌어요. 지유는 반 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구경했어요. “와.” 하는 감탄사와 엄지 척이 동시에 나왔지요. 영웅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 어요. 놀이터의 영웅이 된 것만 같았어요. 높은 놀이 기구 아래에는 서 있지 말 고.” “응, 알았어.” 지유는 엄마가 걱정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지유 반에는 학교에서 다친 아이가 없는데 말이에요. 엄마는 지유의 학교 밖 놀이터 지킴이였어요.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이제는 놀이터 벤치에 엄마 대신 이모가 앉아 있게 된 거예 요. 알고 보니 지유가 걱정됐던 엄마가 이모한테 하루에 세 시간 지유 지킴이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한 거예요.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기도 하면서 크는 거지. 지유야, 가서 마음껏 놀아.” 통화를 끝낸 이모가 웃으면서 말했어 요. 마음대로 놀아도 된다고? 야.” 지유는 밝은 목소리로 말 했어요. 그런데 도담이는 곧 태권도 학원에 가 봐야 한다며 놀이터를 떠났어요. “안녕, 나는 도담이랑 같 은 반이고 이름은 한영웅 이야. 나하고 놀래?” 영웅이가 자기소개를 했어요. “좋아, 영웅이 형. 내가 그쪽으로 갈게.” 지유는 계단으로 미끄 럼틀 위에 올라갔어요. 영웅이처럼 올라가고 싶 었지만 이모한테 들킬 것 같았거든요. 이모는 벤치 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느 라 정신이 없었어요. “안 심심했어!” 지유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어요. 이날 밤, 지유의 일기장에 영웅이가 등장했어요. 영웅이 형 이 보여 준 아슬아슬한 놀이 기구 타는 법을 적고 싶었지만 그 럴 수 없었어요. 엄마 아빠가 일기를 보는 날에는 영웅이 형하 고 놀지 말라고 할 테니까요. “알았어.” 지유는 시무룩하게 대답했어요. 답답한 게 싫어서 학원도 안 다녀요. 엄마도 1학년 때는 마음껏 노는 것도 중요하다면 서 지유의 의견을 들어주었어요. 하지만 그 대신에 엄마가 고 른 문제집을 풀고 검사받아야 했지요. 영웅이와 도담이는 서로 팽팽했어 요. 눈을 질끈 감은 영웅이 얼굴이 발개졌어요. 철봉을 움켜 쥔 두 손은 떨리고 있었지요. 도담이도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영웅이보다 편안해 보였어요. 결국 영웅이가 못 버티고 먼저 턱이 아래로 내려왔어요. 영웅이의 칭찬을 들으니 지유는 기분이 좋았어요. 마음만은 원통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지요. 엄마와 이모가 없는 놀이터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형, 나 그거 해 볼래! 거꾸로 누워서 미끄럼틀 내려오기.” 지유는 미끄럼틀 꼭대기로 올라왔어요. 영웅이가 하는 것을 보면 하나도 안 위험해 보였거든 요. 그런데 혹시라도 머리가 쿵 하고 바닥에 세게 떨어지면 큰 일이잖아요. “해 봐. 훨씬 재밌어. 나도 여러 번 그렇게 탔는데 한 번도 안 다쳤어.” 영웅이가 같은 팀을 응원하듯이 주먹을 꼭 쥐며 말했어요. “미끄럼틀 거꾸로 올라가지 않기!” “그네 엎드려서 타지 않기!” “높은 놀이 기구에서 뛰어내리지 않기!” 옆 모둠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어요. 영웅이는 속으로 뜨끔 했어요. 영웅이가 지유에게 가르쳐 준 놀이 기구 타는 방법들 이었거든요. 학교에는 교실 말고도 안전을 신경 써야 하는 장소가 많아요. 급식실에서 지켜야 하는 안전 수칙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도담이와 모둠 친구들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요. 영웅이는 이 시간이 지루했어요. 그런데 옆 모둠 이야기가 들린 후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1학년 지유에게 위험한 놀이를 가 르쳐 주었다는 거잖아요. 다른 아이의 콧구멍을 찌른 거예요. 코피가 콸콸 터지고 급식 실이 발칵 뒤집혔지요. 4. 급식실에서 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위험한 장난을 하지 않기 도담이가 파란 색연필로 도화지에 적었어요. 안전 교육 시간에 영웅 이는 생각이 많아졌어요. 안전한 학교생활에 대한 생각이냐고요? 아니요. 그동안 도담 이가 태권도 학원에 다닌다고 으스댄 줄 알았거든요. 입버릇 처럼 누나라고 하는 게 잘난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방금 도담이는 진짜 누나처럼 든든했어요. 이미 도담이가 정 답을 맞혔다고 생각했거든요. “영웅이 말도 맞아요. 1학년 아이는 잘못한 게 없어요. 하지 만 운동장에서 다치지 않으려면 주변을 잘 보는 것도 중요해요. 움직이는 그네 옆이나 운동장에서 축구나 야구를 하면 근 처에는 가지 않아야 해요.”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요.” 도담이가 다시 손을 들었어요. 선생 님이 도담이에게 말해 보라고 했어요. “최근 우리 학교 1학년 학생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리를 다쳤어요. 미끄럼틀 원통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거예요. 놀 이 기구는 올바른 방법으로 안전하게 타야 해요. 알았죠?” 선생님 말에 반 친구들은 우렁차게 “네!”라고 대답했어요. 순간 영웅이 잠이 확 달아났어요. 놀이터에서 마지막으로 본 지유 모습이 떠올랐어요. 영웅이 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어요. “한영웅! 너 솔직히 말해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왜 다친 아이가 지유일 거라고 생각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건데?” 도담이가 팔짱을 낀 채 물었어요. 사실은 영웅이한테 서운 한 것도 있었어요. 태권도 학원 같이 다니자고 할 때는 싫다고 하더니 영웅이가 다른 태권도 학원에 등록한 거예요. “지유가 다쳤다면 나 때문이야. 어떡하지?” 영웅이는 지유와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어요. “지유가 다친 거면 나 어떡해? 지유가 어른들한테 나 때문 이라고 다 이르겠지?” 선생님이 지유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해 주었어요. 영웅이 표정이 어두워졌어요. “영웅이 형처럼 놀다가 다쳤어요!” 지유가 어른들한테 이렇게 말할까 봐 걱정이 된 거예요. 화 가 난 지유 부모님이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서 따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지유야, 미 안해.” 그러더니 지유와 지유 부모님에게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저는 영웅이 친구 서도담이에요. 영웅이가 지유에게 정말 미안해하고 있어요.” 지유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내가 혼자 놀다가 다쳤는데 왜 영웅이 형이 사과를 해? 영 웅이 형은 아무 잘못 없잖아.’ 지유가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엄마 말이 더 빨랐 어요. 지유는 입술을 앙다물었어 요. 다쳐서 병원에 왔을 때가 떠올랐어요. “이모가 미안해. 많이 놀랐 지?” 지유가 괜찮다고 했지만 이모는 지유의 손을 꼭 잡고 계속 미안하다고 했어요. “네, 다시는 위험하게 놀지 않을게요.” 그래서 진심을 담아 대답했어요. 지유의 엄마와 아빠는 미 소를 지었답니다. 잠시 후 영웅이가 병실로 들어왔어요. 영웅이 표정이 혼난 얼굴 같지 않았거든요. “나, 오늘부터 운동장과 놀이터에서 안전하게 놀 거야!” 영웅이가 힘주어 말했어요. “영웅이 너, 학교 계단 오르내릴 때 두세 개씩 뛰어 넘지 마. 얼마나 위험해 보였는지 알아?” “도담이 누나가 영웅이 형 안전 지킴이네.” “그런가? 그러면 나는 지유 안전 지킴이 할게.”
내 용돈은 내 마음대로 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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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효원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잽싸게 교문을 빠져나갔어요. 그네를 차지하려면 놀이터까지 빨리 뛰어가야 하거든요. “효원아, 빨리 와. 아무도 없어.” 먼저 달려간 아랑이가 양쪽 그네의 줄을 모두 잡고서 소리 쳤어요. “효원아, 저기 봐. 쟤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이들 몇몇이 철봉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어, 저기 주하 아냐? 주하가 놀이터엔 웬일이지?” 효원이의 눈에 띈 건 같은 반 주하였어요. “오늘 내가 아이스크림 쏜다.” 쩌렁쩌렁한 주하의 목소리에 놀이터에 있던 친구들의 눈길이 쏠렸어요. 주하는 1000원짜리 몇 장을 들고 머리 위로 힘 껏 흔들어 댔지요. “근데 주하네가 부자야? 왜 애들한테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사 주고 야단이야?” 효원이는 주하가 영 못마땅했어요. 아랑이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구시렁거렸지만, 효원이는 아랑이가 너무 부러웠어요. 뭐든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 이 생긴다는 거잖아요. “그럼 너 문구점에서 슬라임 사는 돈도 용돈이었어?” “응.” 아랑이의 말을 들을수록 효원이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만 용돈을 못 받는 것 같았거든요. “집에 가서 엄마한테 나도 용돈 달라고 말할 거야.”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그럴 것 같았어요. 아랑이가 ‘나 도 2학년 때부터 용돈을 받아.’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것도 봤거든요. “그럴 리가. 효원아, 아직은 어려서 안 돼. 돈을 잃어버릴 수 도 있고, 너는 엄마가 필요한 거 다 사 주는데 용돈이 왜 필요 해?” ‘2000원은 너무 적어. 과자 한 봉 지 사면 없어지거든.’ “엄마, 내 친구들은 일주일에 5000원씩 받는다던데?” “5000원?”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효원이는 이러다 용돈을 못 받는 게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됐지요. 효원이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어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5000원을 먼저 확인한 뒤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했어요. “웬일이야? 우리 굼벵이 공주님이?” “오늘 문구점 들러서 받아쓰기 공책 사야죠.” “와우! 우리 딸, 진짜 다 컸네. 이제 언니 같은데?” 엄마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웃었어요. 그런데 그때였어요. 계산대 바로 옆에서 뭔가 번쩍하고 효 원이의 눈을 사로잡았죠. “어……, 저건 헤븐 캐릭터 스티커잖아?” 떡 벌어진 입에서는 ‘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어요. 스티커로 저 캐릭터가 나온 걸 본 건 처음이었어요. 효원이의 손은 자석에 끌리는 쇠막대기처럼 이미 진열대로 향하고 있 었지요. “이거 새로 나온 건데, 진짜 예쁘지?” 아주머니 말처럼 진짜 예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어요. “4500원이요?” 가격을 들은 효원이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공책이랑 슬라임이 1700원, 그럼 스티커 세 장이 4500원이 니까 합하면……?’ 계산을 정확하게 할 수 없었지만 5000원으로 살 수 없는 건 확실했어요. “와! 예쁘다. 이거 어디에서 샀어?” “세 장씩이나……. 진짜 부럽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니까 효원이의 어깨도 으쓱하고 올라갔어요. “살살 만져. 찢어지니까.” 효원이는 큰소리를 치며 주인 행세를 톡톡히 했어요. “효원아, 이거 하나만 잘라 주면 안 돼?” “나도, 나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죠. 효원이는 뭉그적대며 서랍에서 종합장 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어요. “효원아, 공책 안 가져왔어?” 효원이는 그제야 번뜩 생각이 났지요. 다음에 시험 볼 받아 쓰기를 공책에 한 번씩 쓰는 게 숙제였거든요. 당황한 효원이 는 수박을 손에 든 채 버벅댔어요. “엄마, 나 공책, 깜빡하고 학교 사물함……에 두고 왔어요.” “뭐라고? 얘 봐! 가방 다시 찾아봐.” 엄마는 효원이의 가방을 열어 안을 살펴봤어요. 오빠는 4학년인데 받아쓰기 공책이 있을 리 없었어요. 지난번에 오빠 방에서 쓰지 않은 그림일기 공책을 본 것 같았 거든요. 혹시나 받아쓰기 공책도 있을까 싶어 찾아본 거죠. 효 원이는 다시 시무룩해졌어요. 뒤돌아 오빠 방을 나오려고 할 때였어요. “맞아, 오빠한테 돈을 빌리면 되겠다.” 효원이는 저금통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었어요. 살짝 비치는 돼지 저금통 배 안으로 1000원짜리와 동전들이 보였지요.
작은 생명도 소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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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쨍쨍 내리쬐던 햇빛이 한풀 꺾인 늦여름 아침이었어요. 하지만 신선한 아침 공기와 달리 학교 가는 준원이의 기분은 엉망이었어요. “아, 시끄러워! 저렇게 크게 우니까 잡히지!” 머리를 가로저었어요. 밤새도록 수백 마리 매미가 쫓아다니는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등굣길부터 또 들어야 하니 몹시 힘들었어요. “이게 다 윤기 때문이야.” 표정이 그랬단 말이야.” “아니라고! 안 무서워한다고!” 억울했던 준원이는 바닥의 돌을 걷어차려고 다리에 힘을 주 었어요. “준원이도 저번에 나 놀렸거든!” “지금은 다쳤잖아. 봐봐, 무릎에 피 나!” 정말 준원이 한쪽 무릎에는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어요. 사인펜을 꾹꾹 눌러 대결장을 쓰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어요. 진짜 대결을 신청할 것은 아니지만 이겨서 윤기에게 사과 받는 상상까지 하니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어요. 마치 결투 게임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거든요. 아니면 덧셈으로 대결해 볼래?” 선생님은 대결장을 돌려주며 준원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어요. “어휴! 덧셈 대결이라면 우리 반 모두 다 무릎 꿇어야 해요!” ‘너 괜찮아?’ 반듯한 글자가 적혀 있는 쪽지를 보니 준원이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어요. 유치원을 다니던 다섯 살 때부터 친한 태연이는 준원이의 곤란한 마음을 아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난 더 읽어 볼게. 잘 읽어 보면 있을 지도 몰라!” “미안해. 난 이제 피아노 학원에 가야 하는 시간이라서……. 꼭 찾길 바랄게.” 태연이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도서관을 나갔어요. 우는 친구들을 위로해 준다는 동화, 더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몸을 텅 비우는 똑똑한 곤충이라는 매미 사전까지 있는데 매 미를 잘 잡는 법은 나와 있지 않았어요. 오히려 매미 사진과 동화를 실컷 봤더니 매미가 할머니네 강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아직 손으로 만질 자신은 생기지 않았어요. 그렇게 크게 울면서도 서로 시끄러운 줄 모른대! 되게 재 미있지? 그리고 매미가 우는 이유는 짝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채집통도 있겠다, 오늘은 핑계 댈 거리 없지?” 윤기가 초록색 채집통을 준원이 눈앞에 들이대며 말했어요. “으응. 먼저 한 마리 잡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할까?” “아니, 오래 걸릴까 봐 그렇지. 다들 학원도 가야 하고.” 준원이는 대결 구경 온 친구들을 둘러봤어요. 하지만 모두 걱정하지 말라고 시간 충분하다며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준원이는 하는 수 없이 채집통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어요. 준원이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매미에게 다가갔어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태연이가 말한 대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 가락을 사용해 매미 몸통을 잡았어요. “우와! 준원이도 잡았다!” 책에서 계속 봐서 그런지 친근함까지 느껴지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너무 슬프게 들렸어요. “빨리 채집통에 넣어!” 멀리서 태연이의 응원도 들리는 듯했지만 준원이는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날아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떨어진 매미를 보고 윤기가 잡으려 재빨리 다가왔지만 매미는 날개를 몇 번 움직이 더니 금세 날아갔어요. “야! 너 뭐 해? 다 잡은 것도 놓치면서 무슨 대결이야?” 잡을 수 있었던 매미를 놓쳐서 약이 오른 윤기가 준원이의 어깨를 밀쳤어요. 가볍게 밀어냈지만 준원이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손가락에 남은 매미의 느낌 때 문에 힘을 빼고 멍하게 서 있었거든요.
나도 잘하는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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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와, 맛있겠다!” 준호는 아침 식탁에 앉자마자 환호했어요. 그리고 아직 보 글거리는 뚝배기에 숟가락을 푹 꽂았어요. 노릇한 계란찜을 한 숟가락 가득 담아 입으로 가 져갔어요. “우와, 고소해! 엄마 계란찜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어허, 녀석! 호들갑 떨긴. 매일 먹어도 그렇게 좋아?” 당연히 열매 축제에서도 1등 을 독차지해 왔지요. 모두 형의 재능을 칭찬했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 열매 축제 규칙이 바뀐 거예요. 상을 타기 위해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 니라 비슷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함께 협동 작품을 만들어 발표하게 된 거지요. 엄마는 급히 다른 악기 연주를 하는 선호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주었어요. 게다가 피 아노곡을 바이올린과 첼로가 함께 삼중주로 연주할 수 있도 록 편곡해 줄 선생님도 찾느라 며칠 동안 정말 바빴답니다. “준호는 열매 축제에 나가 볼 생각 없니?” “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준호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선호가 끼어들었어요. “준호는 애들하고 어울려 놀기만 잘하지 사람들 앞에 보일 만한 재능이 없을걸요.” ‘아휴, 얄미워!’ 선호 형은 정말 잘난 척하는 데 천하제일이에요. “아니거든, 나도 발표할 거 있어.” “뭘 할 건데? 말해 봐, 말해 봐.” 준호가 대꾸를 했지만 형이 더욱 놀렸어요. 홧김에 반박은 했지만 준호도 솔직히 당장 뭘 한다고 말할지 떠오르지 않았 어요. “나도 알아. 그래서 학원 같이 다니는 해찬이랑 만들기로 했어. 해찬이는 코딩을 정말 잘하거든.” 민수는 준호 마음도 모르고, 로봇을 움직이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하기에 바빴어요. 준호는 블록 조립에 는 자신이 좀 있어서 로봇 모양은 멋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 았어요.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는 이해 하기 좀 어려웠지요. 준호는 수업 시간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선생님의 말 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박준호! 딴 생각하지 말고 여기 보세요!” 선생님 말씀에 깜짝 놀라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지만 이 내 또 생각이 흩어지고 말았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네요. “잘 먹었습니다! 제일 먼저 다 먹은 식판 을 가져다 놓으며 준호가 영 양사 선생님께 큰 소리로 인사를 했어요. “준호가 오늘도 일등이네!” 영양사 선생님이 준호 인사를 웃으면서 받아 주셨어요. 제일 먼저 운동 기구실 앞으로 달려가서 축구공을 빌린 다음에 친 구들을 기다렸지요. 고학년 형들이 나오기 전에 어서 친구들과 넓은 운동장을 다 차지하고 공을 차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웬일이죠? 늘 뒤따라 나오던 친구들이 오늘따 라 늦네요. “준호야, 오늘은 나 축구 못해. 체육관에서 텀블링할 수 있 는 사람 모인대. 열매 축제에 나갈 팀을 만들거든.” 기다린 보람도 없이 성훈이는 서둘러 가 버렸어요. 그러고 보니 중간 놀이 시간에도 친구들은 뭔가를 의논하느라 수선 스러웠어요. 복도에도 포스터들이 많이 붙어 있었고요. “어서 손 씻고 방에 들어가 있어. 간식 가져다줄게.” 온종일 친구들과 놀지 못한 준호는 거실에서 비디오 게임기 로 스포츠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들 어가야 했어요. “우리 반에서는 누가 열매 축제에 나갈 건가요?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물었어요.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여기저기에서 손을 들자 준호는 속으로 놀랐어요. “저는 해찬이와 로봇을 만들 거예요, 선생님!” 민수가 제일 먼저 자신 있게 대답했어요. 준호는 부러운 듯 민수를 뒤돌아보며 엄지 척을 해 보였어요. “우린 3반 친구들과 같이 컵타 연주를 할 거예요!” “태권도 공연 팀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어쩜! 우리 반 친구들은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선생님은 친구들이 대견한 듯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럼! 나중에 나 부러워하지나 마.” “…….” 준호는 이젠 대답도 안 하는 진경이와 말하기를 포기했어요. 준호는 민수와 함께 다목적 교실로 갔어요. 먼저 온 해찬이 와 예림이 그리고 옆 반 친구 승민이까지 컴퓨터 앞에서 도우 미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어요. ‘컴퓨터로 로봇을 어떻게 움직이게 한다는 거지?’ 준호는 잘 이해할 수 없었 어요. “자, 기본 코딩 앱을 열어 놓았으니 이제는 너희들이 청소 로봇을 어떤 경로로 움 직일지 의논해 보렴.” 도우미 선생님이 말씀하고 돌아가시자, 해찬이가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어요. 준호는 슬슬 불안해졌지요. 그래서 수업이 모두 끝난 후 다 른 반 친구들이 하는 컵타 연주 팀에도 가 보고, 3학년 형들이 모집하는 마술 공연단에도 가 봤어요. 모두 환영해 주었지만, 끝까지 잘할 자신이 없었어요. 학교 뒤쪽 언덕에 있는 생태 공원의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잘 그릴 수 있지?’ 준호는 감탄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음 장을 넘겼어요. 생태 공원을 돌아다니는 진경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림을 그렸던 거예요. ‘생태 공원이 이렇게 멋있었나?’ 준호는 사실 놀이 시간마다 생태 공원보다는 운동장에서 친구들이랑 공차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 “왜 그래, 왜?” “무슨 일이야?” 갑자기 친구들이 다가와서 웅성거리자 당황한 진경이는 책상에 엎드리더니 소리를 내며 울어 버렸어요. 평소 말도 잘 안 하고 조용하던 진경이의 처음 보는 모습에 준호 는 몹시 놀랐어요. 그리고 허락도 없이 친구 수첩을 봤다는 자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요. “진경아, 미안해.” 준호는 우는 진경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같이 울상이 되어 버렸답니다. 이때 선생님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어요. 친구들은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갔어요. 진경이가 표현은 잘 못하지만 준 호가 함께해 주길 바랄 것 같아. 이건 선생님 부탁이기도 해.” 준호는 얼른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리송한 생각 이 들었어요. ‘무슨 좋은 일을 하라는 말씀이지? 진경이가 나랑 같이 하려 고 할까?’ 준호는 진경이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었지만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중간 놀이 시간에도 다른 날처럼 친구 들과 놀러 나갈 수가 없었지요. 교실에 진경이와 둘이 남게 되 자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어요. “진경아, 어제 미안했어.” “괜찮아.” “그래도 너는 재능이 있어서 참 좋겠다.” “준호야, 진짜 내 그림이 잘 그린 것 같아?” 준호가 부러운 듯 말하자 진경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그렇다니까! 나는 사진인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준호가 갑자기 큰 소리로 대답하자 진경이가 피식 웃었어 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너도 좋은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내가 무슨 재능이 있 는 거 같아?” 준호는 반가운 마음에 재차 물었어요. 진경이는 조금 망설 이더니 천천히 대답을 했어요.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잖아. 말도 잘하고…….” “그런 것도 재능인가?” 의아한 준호가 다시 물었어요. 선호가 또 끼어들면서 준호를 놀렸어요. “선호야! 동생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주 중 요한 재능이거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준호 같 은 재능이 꼭 필요해.” 아빠가 선호에게 주의를 주었어요. 순간 준호의 어깨가 으 쓱해지면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어요. ‘정말 나도 재능이 있구나!’ 다 똑같은 나무라고 생각 하던 준호는 아주 신기해하며 진경이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평소에는 말을 거의 안 하던 진경이가 아주 편안하게 웃기도 하고 말도 많이 했어요. “진경아! 그럼 우리 전시회 이름을 생태 공원 그림 이야기 탐험대라고 하면 어떨까?” 진경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호가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 했어요. “내가 더 그릴 수도 있어.” “그럼 같이 생태 공원에 가서 무엇을 더 그릴지 찾아보자.” 두 아이들은 준호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오후 내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오랜만에 엄마 아빠가 동시에 칭찬하자 준호는 얼떨떨하면 서도 신이 났어요. 선호 형한테 “메롱” 하고 싶었지만 점잖게 참았어요. 드디어 열매 축제 참가 신청을 하는 날이 되었어요. 등교하 자마자 친구들이 선생님 책상 앞에 줄을 서서 신청서를 제출 하고 있어요. 모두 설레는 표정이네요. 가슴이 콩닥거렸어요. 진경이는 입을 꼭 다물고 신청서 를 두 손으로 쥔 채 준호 옆에 섰어요. 손이 좀 떨리는 것 같아 요. 드디어 두 사람의 순서가 되자 선생님이 신청서를 받으시 며 빙그레 웃으셨어요.
약속은 꼭꼭 지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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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하준아, 어서 일어나야지! 이러다 또 지각하겠다.” 하준이를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어요. 하준이는 눈이 반쯤 감긴 채로 팔을 위로 힘껏 올려 기지개를 켰어요. 이제는 정말 일어날 시간이에요.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을 빠져나온 하준이가 꾸물꾸물 식탁 앞에 앉았어요. “하준아, 오늘도 민우랑 같이 가기로 한 거 아니야? 왜 이렇 게 느긋해.” 식탁에서도 한참을 뭉그적거리는 하준이에게 엄마가 말하 셨어요. “괜찮아요, 엄마. 우린 절친이거든요. 민우는 제가 아무리 늦어도 기다려 줄걸요?” 하준이는 밥을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절친이라는 단 어에 힘을 줘 말했어요. 민우는 2학년이 되면서 반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예요. 집도 가까워서 항상 학교에 같이 가요. 하준이가 자주 5분, 10분씩 늦긴 하지만요. 그런데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해도 마 음에 딱 드는 옷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시간은 째깍째깍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 는데 말이에요. 결국 하준이는 엄마가 급하게 골라 준 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서야 했어요. 민 우와 약속한 시간이 이미 지났거든요. 정신없이 집을 나선 하준이는 건널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민 우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갔어요. “헉헉……. 민우야, 미안! 미안!” “왜 이렇게 늦었어. 또 지각할 뻔했잖아.” 기다리다 지쳤는지 민우 표정이 어두웠어요. “아, 그게 어쩌다 보니……. 헤헤. 기다려 줘서 고마워. “선생님, 저 어제 숙제 분명히 했는데 책상 위에 두고 온 거 같아요.” 하준이가 풀이 죽어 말하자 선생님이 하준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셨어요. “그랬구나, 하준아. 책가방에 바로 넣어 뒀으면 좋았을 텐 데. 다음부터는 잊지 말고 잘 챙겨 오자.” 다행히 혼나지는 않았지만 반 친구 중에서 혼자만 숙제를 가져오지 않아 하준이 마음은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가 된 것 같았어요. 하준이와 샛별이가 샛별이네 집 앞에 도착하자 밍키가 발소 리를 들었는지 문을 긁어대기 시작했어요. “밍키가 문 긁는 거야?” “응, 가족이 오니까 반가운가 봐. 엄마랑 아빠는 회사 가셨 고 언니는 아직 학교에 있거든.” 샛별이가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밍키가 용 수철처럼 튀어 올라 샛별이에게 안겼어요. 꼬리는 또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어요. “언니 기다렸어? 우리 밍키.” 샛별이가 밍키를 품에 폭 안고 한 바퀴 휘리릭 돌았어요. “우와, 밍키 대단한데?” 이렇게 귀엽고 똑똑한 강아지라니. 하준이는 강아지가 더 키우고 싶어졌어요. “우리 밍키 엄청나지?” 샛별이는 부러워하는 하준이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책가방을 놓으러 방으로 들어갔어요. 밍키도 쫄랑쫄랑 꼬리 를 흔들며 그 뒤를 따라갔지요. 밍키 주인이 그렇다는데 하준이도 어쩔 수 없었죠. 밍키와 눈물의 작별을 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수밖에요. “슈퍼맨!” 집으로 돌아온 하준이는 팔을 위로 올리고 슈퍼맨 자세를 하며 소파에 벌렁 엎드렸어요. “저번에 졸라서 산 물고기 기억 안 나니? 먹이 주기는 하준 이가 하겠다고 약속하고 한두 번 주다가 말았잖아. 강아지를 키우는 건 그보다 더 큰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야.” 엄마의 손가락이 어항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그리고 문득 나와의 약속이라며 꼭 지켜야 한다던 샛별이의 야무진 표정도 떠올랐죠. “나도 집에 오자마자 숙제부터 하려고 했었는데…….” 하준이는 작게 혼잣말을 했어요. 나와의 약속을 지키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요. 하준이는 꾸역 꾸역 숙제를 하고 나서 왠지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어요. 또 교통질서와 공중예절 같은 것들은 다 함께 지키기로 한 약 속이에요. 그런데 빨리 가기 위해 빨간불에 건너거나 차도로 걷 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규칙과 규범으로 이루어진 약속들을 잘 지켜야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답니다. 오늘은 아침 독서 시간이 있는 날이에요. 교실은 책장 넘기 는 소리만 가득했어요. 하준이는 집에서 가져온 과학 동화책을 읽다가 지루해져 교 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지요. 그러다 대각선 앞에 앉은 주혁이의 수상한 움직임을 보았어요. 깜짝 놀란 주혁이가 후다닥 만 화책을 숨겨 봤지만 선생님의 눈 을 피할 수는 없었죠. 하준이도 황급히 자리에 앉았어요. “주혁이랑 하준이 뭐 하니?”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 고 개를 숙였어요. 주혁이는 쭈뼛쭈뼛 만화 책을 책상 위에 올려뒀고요. 선생님은 칠판에 ‘교통질서 지키기, 분리수거 잘하기, 층간 소음 만들지 않기’도 차례로 적으셨어요. “많은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곳에는 이렇게 꼭 지켜야 하는 사회적 약속들이 있어요. 우리 반도 친구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니까 지켜야 하는 약속들이 있고요.
틀려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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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자, 받아쓰기해 볼까요?” 아린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한 달 전에 받 아쓰기를 처음 한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100점을 받지 못 했어요. 학기 초에 받아쓰기 문제가 쓰인 급수표를 받았을 때는 가 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많은 단어와 문장을 알 아야 한다니,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죠. 이런 아린의 마음을 아실 리 없는 선생님은 야속하게도 바 로 문제를 내기 시작했어요. “첫 문제는 지난 시간에 배웠던 아주 쉬운 문제로 시작할 게요. 나, 너, 우리. 나, 너, 우리.” 다행이에요. 선생님 말씀대로 첫 문제는 정말 식은 죽 먹기 였어요. 받침이 없는 글자라서 자신 있어요. 초등학교에 들어와서 받아쓰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민이 라고는 ‘간식으로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 그림 그리기를 할 까? 놀이터에 갈까?’ 이런 즐거운 고민뿐이었는데 말이죠. 2번 답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3번 답을 쓰려니 어쩐지 눈물 이 날 것만 같았어요. “선생님! 장아린이 커닝해요!” 반 친구들이 모두 아린이를 바라보았어요. 선생님이 천천히 아린이 자리로 다가오더니 아린이의 공책을 살피고 말씀하셨어. “커닝하지 않은 것 같은데? 민석이가 오해한 것 같구나.” “아니에요, 선생님. 분명히 옆쪽으로 고개 돌리는 거 제가 봤다고요!” “아린이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옆을 보지 않도록 하고, 민 석이도 두리번거리지 말고 자기 문제에 집중하도록 해요. “선생님, 저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아린이의 말에 친구들이 “와하하.” 웃었어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린이는 서둘러 교실을 나왔어요. 부리나케 복도를 뛰어 화장실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어요. “받아쓰기를 집에서도 한다고?” “응. 우리 처음 받아쓰기했던 날 기억나? 나 그날 빵점 받았 었거든.” “빵점?!” 100점을 받는 희영이가 빵점을 받은 적도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어요. 눈이 동그래진 아린이에게 희영이가 말했어요. 지훈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어요. “틀리는 거? 그거 별거 아니야. 우리 아빠도 오븐레인지 돌리는 법을 맨날 까먹고 잘 몰라서 엄마가 다시 가르쳐 주던데? 아빠도 모르는 게 있는데, 초등학생인 우리가 모르는 게 있어서 틀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쉬는 시간에 희영이와 지훈이 랑 얘기하느라 물을 못 마셨어요. 목구멍이 약간 따끔따끔했 지만 멈추지 않고 노래를 불렀어요. “짐수레의 바퀴들이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이익!” 이 요상한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요? 아린이의 목에서 나온 소리였어요. “자, 조용, 조용. 선생님이 듣기에는 아린이가 가장 잘 불렀 는데 왜 웃는 거야?”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아린이 목소리가 ‘나란히익!’ 이렇게 튀어 올랐는데요?” 아린이는 어깨가 축 처진 채로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녀왔습니다.” “아린아, 오늘 학교에선 재미있었니? 무슨 수업을 했어?” “그냥 뭐…….” 아린이의 가방을 받아들면서 반갑게 맞아 주는 엄마에게 오 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여기서 뭐 해? 장아린! 너 왜 또 울어? 무슨 일인데? 친구랑 싸웠어?” 언니가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오자 엄마가 일어서며 말했어요. “뭐 울고 싶으니까 울었겠지. 네가 말하고 싶을 때 얘기해. 기다릴 테니까. 자, 너도 해 봐. 으악! 악! 아하하하.” 언니는 소리를 지르다가, 웃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급기야 는 춤까지 추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가만히 바 라보고 있자니 피식피식 웃음이 났어요. 아린이는 손뼉을 치면서 응원했어요. 노래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어요. 안무 동작도 빠 르고 복잡해졌어요. “너를 향해 달려갈게! 난 할 수 있어. 포기하지 않아, 악!” 갑자기 언니가 풀썩 쓰러졌어요. 발을 빠 르게 움직여야 하는 동작인데 순 서가 꼬이면서 걸려 넘어지고 만 거죠. “언니! 괜찮아?” 아린이가 다가가자 언니 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 어요. 그러더니 음악을 넘어 졌던 앞부분으로 다시 돌 려 틀었어요. 시험을 끝까지 못 봐서 점수를 제대로 매기 지도 못했어.” 커닝한 걸로 오해받은 일이나, 친구들이 놀려댔던 일은 차 마 말하지 못했어요. 언니에게도 말 못 할 정도로 부끄러웠거든요. 학원 선생님이 그랬어. 결국에는 끈기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다고! ‘뭐 어때’ 정신으로 연습하라던데?” “뭐 어때 정신?” “응. 틀리면 뭐 어때! 잘못하면 뭐 어때! 조금 느리면 뭐 어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연습하는 사람 이 결국엔 성공한다고 했어. 언니가 신나게 손뼉 치며 말했어요. “와! 그것 봐. 하면 되지?” “그러게. 정말 연습하니까 되네?” “한 번 틀렸다고 포기하면 그냥 계속 못 하는 거라고!” 언니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아린이는 신이 나서 부엌에서 요리 중인 엄마에게 달려갔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맛이죠? 고기가 너무 질 겨서 잘 씹히지 않았어요. 소스는 너무 시큼해서 절로 눈이 찌 푸려질 정도였어요. 아린이는 슬그머니 언니의 표정을 살폈어요. 언니도 입안에 가득 음식을 문 채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어요.
반려동물도 우리 가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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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꺄아, 너무 귀여워.” 길리가 수업 시간에 환한 얼굴로 말했어요. 1학년 2반 친구 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어요. 반 친구들도 교실 여기저기에서 길리처럼 귀엽다고 말했거든요. 도대체 누구한테 귀엽다 고 하는 거냐고요? 교실 스크린에 작고 하얀 강아지가 짠 하고 등장했어요. 몽 글몽글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는 무척 귀여웠어요. 강아지는 반려견 운동장에서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집에 와서 씻고 밥 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모두가 보는 건 강아지와 함께한 어느 주말 하루를 편집한 영상이었지요. 현서가 잠든 강아지 옆에서 손 인사를 하면서 영상은 끝났어요. “마지막으로 소개할 우리 가족은 몰티즈 구름이야. 나한테 는 강아지 누나야. 구름이는 열 살이거든. 아팠을 때 우리 가 족이 됐어. 다행히 병원에서 치료 받고 건강해졌어. 구름이는 운동장에서 뛰는 걸 좋아해.” 현서가 앞에서 말했어요. 지금 길리네 반에서는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 ‘나의 취 미를 소개합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서 발표하는 수업을 하 고 있거든요. 현서가 마지막 발표자랍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 면 친구들은 자유롭게 질문을 할 수 있지요. “가족이 됐을 때 구름이가 아팠다고 했잖아. 가게에서 아픈 강아지를 속여서 판 거야?”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가만히 있었지요. 길리는 동물을 키 워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까 모두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 같지 뭐예요.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반려동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강아지, 고양이, 토끼, 햄스터, 물고기 구피……. 휴대폰 사진첩에서 반려동물 사진을 보여 주면서 말 이에요. 길리도 삼색 고양이 사진을 보고 있었어요. 검은색, 하얀색, 노란색 털이 몽실몽실 잘 어우러진 귀여운 고양이가 발라당 누워 있었어요. 짝 해솜이가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서 보여 준 거예요. “우리 초롱이 눈빛이 초롱초롱하지? 내 침대에서 나를 보며 누워 있는 모습이야. 나와 친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배를 보 여 주는 거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길리한테만 반려동물이 없으면 안 되지. 엄마 아빠가 당장 사 줄게.’ 길리는 엄마 아빠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안 돼.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어쩔 수 없이 길리는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 만 반려동물을 포기한 건 아니에요. 우선 반려동물부터 정하 고 다시 엄마 아빠를 설득하기로 작전을 바꾼 거예요. ‘정했어! 내 반려동물은 귀여운 고양이야.’ 그날 밤, 길리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반려동물을 정했어요. 필통과 책가방에도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붙어 있어요. 모두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길 리가 고른 거예요. 귀여운 고양이와 함께 지낸다고 상상하니까, 벌써부터 길리 는 신이 났어요. 고양이 동생이 생기면 잘 놀아 주고 매일 사 진을 찍어서 사진첩도 만들어 주고 밤에는 꼭 안고 잠들 거예요. 가족끼리 역할을 정해요 쉬고 잠자는 공간 마련하기, 먹이 주기, 화장실 청소 등 반려동물과 함께 살려면 반려동물에 따라 신경 쓸 것들이 있어요. 개의 경우는 산 책이 필요하지요. 놀이 담당, 먹이 담당, 화장실 청소 담당 등 가족끼리 역할을 나누어서 반려동물을 돌보면 책임감이 생겨요. 이렇게 슬픈 토요일 오전은 처음이에요. 길리는 침대에 누 워서 한숨을 푹푹 쉬었답니다. 어젯밤 반려동물을 정하고 두 근거리며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다음 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아침 식사 시간에 길리는 엄마 아빠한테 달려가서 고양이를 키우자고 했어요. “고양이로 결정했어요. 귀여운 동물이 좋아요. “아빠도 엄마 생각이랑 같아. 아빠는 반려동물을 맞을 준비 가 안 되어 있어. 아빠가 보기에는 길리도 아직 준비가 안 되 어 있는 것 같아.” 길리는 엄마 아빠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 래서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방에 들어온 거예요. 이때 길리의 방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길리 좋아하는 떡볶이 먹으러 갈까?” “아빠가 맛있는 떡볶이 가게 다 알아봤지.” 엄마 아빠가 방문 앞에서 말했어요. 잘해 줄 텐데. 그런데 나는 너의 가족이 될 수 없어. 좋은 가족 만나.” 길리는 고양이를 보며 말했어요. 엄마 아빠 들으라고 한 말 은 아니었는데 엄마 아빠는 뒤에서 다 들었어요. 길리가 얼마 나 간절히 반려동물을 원하는지 알게 된 거예요. 엄마와 아빠 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요. “우주라니, 이름 멋지다. 들어가서 입양 상담 받아 볼까?” 길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았어요. “아빠도 고양이 기르는 건 처음이야. 길리가 동생처럼 잘 돌 봐 준다고 하니까 믿음이 가네.” 길리는 너무 좋아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박수까지 쳤어 요.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었어요. 엄마 아빠가 혹시 말을 바 꿀 수도 있으니까 얼른 동물 병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뒤를 엄 마 아빠가 웃으며 따라갔지요. “저 검은 고양이 입양하고 싶어요!” 길리는 하얀 가운을 입은 수의사 선생님한테 바로 말했어. “혹시 가족분들 병원에서 고양이 알레르기 검사는 받아 보 셨나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입양했다가 파 양하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받아 본 적 없어요.” 엄마가 대답했어요. “그럼, 가족분들 고양이 알레르기 검사받고 결과 나오면 다 시 입양 상담할까요?” “네, 그게 좋겠어요. 저희도 그사이에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볼게요. 해솜이가 맨 먼저 질문했어요. “나는 별로 어려운 게 없어. 형이 사육장 관리를 하고 식단 짜는 건 엄마 아빠가 해. 우리 형이 그러는데 이구아나는 예민 한 동물이래. 그래서 신경 써야 할 게 많다고 했어.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길리는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확대한 우주 사진을 소중히 품에 안고 앞으로 나갔어요. “내 고양이 남동생 우주야. 나이는 한 살이야. 햇빛 동물 병 원에서 입양했어.” 길리는 반 친구들을 향해 우주 사진을 보여 주었어요.
함께 나누면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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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저기, 지안아.” 쉬는 시간이었어요. 짝꿍 태리가 지안이를 불렀어요. 하지만 지안이는 못 들은 척 창문 밖 운동장만 바라보았죠.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거든요. 지안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태리를 쳐다보았어요. “왜?” “나 이번 미술 시간에 사인펜이랑 색연필 좀 빌려주라. 어젯 밤에 챙긴다는 걸 깜박했어.” “오늘은 나도 없어.” 게다가 지금 잡은 것이 색연필 통이라 해도 문제는 또 있었어요. 원하는 색을 보지도 않고 꺼내기란 문방구 뽑기의 1등만큼 어려울 것 같았거든요. ‘아냐, 계속 뽑다 보면 언젠가 금색이 나오겠지!’ “아니야. 오른손이 아파서 왼손으로 색칠하다 보니, 잘 안돼서 그랬어.” “그래? 내가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지안이는 가방에서 재빨리 손을 빼고 의자를 당겨 앉았어요. 그러다 다리로 가방을 툭 쳤어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아이들의 눈이 지안이에게 쏠렸어요. “지안아? 무슨 일이니?” “선생님. 지안이가 가방을 쏟았어요!” 지안이가 머뭇거리는 사이 앞자리 장원이가 대답했어요. 쏟은 것이 아니라 실수로 떨어트린 건데 지안이는 억울했어요. 게다가 장원이는 벌써 금색 색연필로 색칠을 시작했어요. 그것도 그림 중 가장 넓은 부분을요. 지안이도 아끼느라 겨우 달이나 별에만 칠하고 있던 색깔이었는데 말이죠. 지안이는 두 손을 포개고 그 위에 고개를 숙여 책상에 다시 엎드렸어요. 눈앞에는 지안이가 그리다 만 별이 보였어요. 반 짝이지 않는 노란 별이요. 금색으로 빛나야 할 것은 장원이의 그림이 아니라 지안이의 별이었어야 했는데 정말 속상했어요. 향기가 난다고 좋아했어요. 자기 물티슈도 있으면서 지안이 것만 썼어요. 그래서 결국 지안이가 필요할 때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아서 쓰지 못했어요. 향이 없는 물티슈가 싫어서 안 썼어요. 지안이는 주먹으로 벽을 쾅 쳤어요. 손이 무척 아팠지만, 마음 아픈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어요. 학교를 빠질 방법도 생각 못 했는데 아침이 되어 버렸어요. 지안이는 재빨리 일어나 커튼을 걷었어요. 혹시나 밤새 비가 많이 와서 학교가 물에 잠기진 않았을까, 그럼 학교 가지 않아도 될 텐데, 하고 내심 바라면서요. 하지만 지안이의 마음은 조금도 빛나지 않았어요. 무거운 발걸음으로 등교를 했어요. 터벅터벅 걸어 교문을 지나 교실로 들어섰어요. “지안아, 안녕?” 태리가 오늘 아침의 햇살처럼 쨍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어요. 나 연필 좀 빌려줄래? 마지막 줄만 쓰면 되는데, 심이 부러 졌어.” 힐끔 태리의 알림장을 보니 정말 한 줄만 남아 있었어요. 지안이는 잠시 망설이다 필통을 열었어요. 안에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벨 공주가 그려진 연필이 한 자루 있었어요. 의자 다리에 끼어 있던 벨 연필이 두 동강 났어요. 지안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알림장을 적고 있던 조용한 교실에 지안이의 목소리가 울렸어요. “야! 김장원! 갑자기 뒤돌면 어떡해!” “아, 뭐래! 네가 불렀잖아!” “조심하라고 했는데, 네가 움직였잖아!” 지안이는 벌떡 일어나 남은 벨 연필을 필통에 넣고 꽝 닫았어요. 지안이의 과격한 행동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놀라서 쳐다봤지만 상관없었어요.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책상 위의 모든 것을 가방에 쓸어 넣고 종례 시간이 끝나기 만을 기다렸어요. “친구들, 내일 만나요!”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지안이는 기다렸다는 듯 제일 먼저 교실을 빠져나왔어요. 평소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랑 집에 갔는데 오늘은 누구와도 말을 섞기 싫었거든요.
견우와 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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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공주는 예쁘고 마음씨도 착했지만, 베를 잘 짜서 '직녀'라고 불렸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늘 먹을 것이랑 입을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거나 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또 무엇이든 풍족해서 누구나 서둘러 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직녀는 베 짜는 일이 재미있어서 날마다 베를 짰습니다. "허허허, 아주 곱고 튼튼하구나. 베짜는 솜씨는 네가 으뜸일 게다." 임금님은 직녀가 짠 베를 볼 때마다 흐뭇해 했습니다. 어느덧 직녀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장아장 걷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리 컸구나." 임금님은 직녀의 신랑감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신하가 '견우'라는 청년을 직녀의 신랑감으로 추천했습니다. 견우는 어렸을 적부터 소를 잘 다루는 목동이었습니다. "오, 아주 씩씩하게 생긴 젊은이로군!"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나 평등했기 때문에, 임금님은 견우를 사위로 기꺼이 맞아들였습니다. 견우와 직녀도 서로가 마음에 들어, 마침내 결혼하였습니다. 임금님은 직녀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견우를 직녀와 함께 궁궐에서 살게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 가지씩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견우가 하는 일은 소를 모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견우는 언제부터인가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을 좋아했습니다.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우리 바깥 구경이나 나갑시다." 견우가 베를 짜고 있는 직녀를 졸랐습니다. "안돼요. 저는 베를 짜야 해요." 직녀는 견우를 말렸지만, 견우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까짓 베야 나중에 짜면 되지 않소!" 견우는 직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머, 이 꽃 좀 봐요! 너무 예뻐요." 모처럼 놀러 나온 직녀는 아름다운 꽃들에 반했습니다. "어때요, 나오기를 참 잘했지요?" 견우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두 사람은 잔디밭에서 뒹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뒤, 견우와 직녀는 매일 밖으로 놀러만 다녔습니다. 더욱이 견우는 차차 게을러지고 성격이 거칠어져 갔습니다. "허허,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놀기만 하는군." 임금님은 화가 났지만, 견우와 직녀를 불러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너희는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니,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라." 그러나 두 사람은 임금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다. 소를 타고 꽃밭을 달리니까 꿈을 꾸는 것 같네." 견우가 소를 탄 채 임금님이 아끼는 꽃밭을 마구 짓밟은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은 마침내 크게 화가 나서, 두 사람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듣거라!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수 없다. 지금부터 견우는 동쪽 끝, 직녀는 서쪽 끝에 가서 살도록 하라." 임금님의 명령에 견우와 직녀는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습니다. "너희는 해마다 칠월 칠석날에만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도다." 견우와 직녀는 이제 일년에 한 번밖에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하늘나라의 규칙을 어기고 놀기만 했던 것을 후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행복했던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각자 마음을 달랬습니다. '어서 칠월이 왔으면.' 두 사람은 칠석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칠석날이 되었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각자 서둘러 은하수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은하수는 너무 큰 강이어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견우님, 보고 싶어요!" "직녀, 보고 싶구려!" 아무리 소리쳐도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두 사람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흘린 눈물은 비가 되어 땅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비 때문에 세상은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아이고, 어쩌면 좋아! 다 떠내려가네." 가축이랑 집이며 논밭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자, 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습니다. 장마가 계속되자, 숲 속에 사는 동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동물들은 비를 그치게 하는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이 비는 견우님과 직녀 공주님이 흘리는 눈물이니, 두 분을 만나게 해 주면 됩니다." "맞아요, 두 분이 만나도록 다리를 놓읍시다." "그렇다면 누가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요?" "은하수까지 가자면 날개가 있는 분들이어야 합니다." 동물들의 시선이 날짐승들에게로 쏠렸습니다. 날개가 있어도 우리 독수리들은 하늘 높이 날지는 못합니다." 가장 높이 날 수 있는 독수리들이 발뺌을 했습니다. 그러자 까치들이 나셨습니다. "우리가 은하수 위에 다리를 놓겠습니다." "우리도 까치님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까마귀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주 고마운 말씀이오.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까치와 까마귀들은 하늘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까치와 까마귀들은 몸을 서로 바짝 붙여서 은하수 위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그 다리를 밟고 가서 중간에서 만났습니다. "견우님! 보고 싶었어요." "직녀, 나도 보고 싶었소."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까치와 까마귀들은 머리가 벗겨져 아프고 힘이 들었지만 참았습니다. 세상에 무섭게 내리던 비도 거짓말처럼 뚝 그쳤습니다. 그 뒤로 까치와 까마귀들은 해마다 칠석날만 되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칠석날 까치와 까마귀들이 놓는 다리를 '오작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칠월 칠석날이면 홍수는 나지 않지만, 가랑비가 내립니다. 그것은 1년만에 만나는 견우와 직녀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랍니다. 또 칠월 칠석이 지나면 까치와 까마귀들의 머리가 벗겨진답니다. 이것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느라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요. 소를 잘 다루는 견우와 베를 잘 짜는 직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예요. 하지만 이야기 속에는 좀 편하게 되었다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어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있어요. 부지런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옛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별자리를 관찰하다가 견우성과 직녀성을 발견하였어요. 이들이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 끝에 위 치하다가 칠석날 천정부근에 나타나 마치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여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칠석날 저녁에 오는 비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의 눈물이고, 그 다음날 아침에 오는 비를 이별의 눈물이라고 한답니다. 잘 읽었는지 물어볼까요?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 참 아름답고 슬프지요? 칠월 칠석날의 전설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세요. 일 년 중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는 이 날은 언제일까요?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도록 만든 다리를 무엇이라고 할까요? 견우와 직녀가 벌을 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까마귀와 까치들의 머리가 벗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임금님은 견우와 직녀 사이에 무슨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하였나요?
백일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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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서해 바다 깊은 곳에 사나운 용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요. 그 용은 걸핏하면 무시무시한 풍랑을 일으켜 고기잡이배는 물론 마을까지 덮쳤어요. 그런데 해마다 처녀 하나씩을 바치고 난 뒤부터 바다는 얌전해졌답니다. 봄이 왔어요. 바닷가 마을은 그 어느 해보다도 더 큰 걱정에 싸여 있었어요. 용에게 제사를 지내야 할 날이 이틀 뒤로 다가왔는데, 마을에 처녀라고는 분이 하나뿐이었어요. 분이는 저 혼자 바다 일을 해서 편찮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착한 아가씨였어요. “어쩌나, 분이가 가고 나면 분이 할아버지는.”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하지? 처녀라고는 씨가 말랐는데.” 마을 사람들은 며칠째 일손을 놓고 바닷가에 모여 걱정들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바닷가 저 편에서 웬 젊은이가 오고 있었어요. 가슴까지 오는 큰 칼을 차고 있었어요. 젊은이는 뭔가 열심히 살피고 있었어요. 눈을 들어 바다를 보았다가, 바닷가에 매어 놓은 배들을 보았다가, 마을을 보았다가. 그러다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다가와 물었어요. “무슨 걱정들이 있으십니까?” “네, 두 밤만 자고 나면 우리 마을 분이가 죽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못된 용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뭐라고요? 당장 이놈을.” 젊은이는 바로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어요. “안 돼요, 안 돼!” “그러다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오.” 마을 사람들이 젊은이를 말리고 있을 때,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나타났어요. 분이 할아버지였어요. “누구요? 우리 분이를 구해 주겠다는 젊은이가?” “네, 할아버지, 저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오랫동안 칼 쓰는 법을 배웠답니다.” “고맙소, 젊은이.” 분이 할아버지는 이 젊은이가 꼭 분이를 구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콜록콜록! 그런데 젊은이. 지금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오. 모레 밤에 용이 처녀를 데리러 물 위로 올라오면 그때 무찌르는 게 어떻겠소?” “그게 좋겠군요.” 할아버지는 젊은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어요. 분이네 오막살이는 바닷가 마을 끝, 작은 동산 밑에 있었어요. 하얀 찔레꽃이 울타리를 덮고 있었어요. “휴우, 숨차. 콜록콜록, 분이야!” “할아버지!” 하얀 찔레꽃 사이로 뛰어나오는 분이는 정말 예뻤어요. 샛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발그레한 뺨. 발그레한 뺨이 얼마나 귀여운지 마치 빨간 꽃송이처럼 보였어요. 분이는 할아버지 뒤에 서 있는 큰 칼 찬 젊은이를 보고 놀라 물었어요. “할아버지! 누구세요?” “응, 너를 구해 주려는 젊은이야.” “고맙습니다, 도련님. 안으로 들어가세요. 누추하지만 이틀 동안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분이는 곧장 바구니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어요. 조개를 캐서 국을 끓이고, 파래를 무쳐 저녁상을 차렸어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야.’ 젊은이는 눈 깜짝할 새 밥그릇을 다 비웠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분이는 음식 솜씨만 좋은 게 아니었어요. 몸가짐, 행동거지 무엇 하나 빈틈이 없었어요. 특히 할아버지를 모시는 모습은 정성스럽기 그지없었어요. ‘착한 분이 아가씨, 내가 용을 꼭 무찌를게요!’ 젊은이는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다짐했어요. 드디어 용에게 제사를 지내야 할 삼월 보름 밤이 왔어요.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바다 위에 돛단배 한 척이 떴어요. 분이를 데리고 용바위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배였어요. “서해 바다 용이시여, 이 처녀를 받으소서. 올 한 해도 우리 마을 태평하게 하옵소서.” 제사가 끝난 뒤, 분이는 혼자 용바위 위에 내려졌어요. 다시 뭍으로 방향을 튼 돛단배가 막 바닷가 마을에 닿았을 때였어요. “크앙!” 바다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들려 왔어요. 바닷물 위로 용이 올라오는 소리였어요. 물위로 올라온 용은 곧장 용바위로 갔어요. “크앙!” 앞발을 치켜세우며 분이를 낚아채려 했어요. 그 때였어요. “야잇!” 용바위 위에 앉아 있던 분이가 큰 칼을 빼어 들었어요. 그 처녀는 분이가 아니라 분이로 변장한 젊은이였어요! “크아앙!” “야아잇!” 용과 젊은이의 싸움이 시작되었어요. 집채만한 용의 모습에 가려 젊은이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어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젊은이는 살아 남고 용은 죽게 하옵소서.”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모여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다시 한 번 ‘크앙!’하고 용 우는 소리가 나는 순간, 보름달이 그만 구름에 가려지고 말았어요. 바다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빠졌어요. “야아잇!” “크르륵, 크앙!” ‘첨버덩 첨벙! 철썩!’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용과 젊은이가 싸우는 소리만 드높아 갈 뿐이었어요.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했어요. 기도하던 사람들은 지쳐 그 자리에 잠들어 있었어요. 용바위 쪽에서는 이제 용의 소리도, 젊은이의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어요. ‘도련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이 혼자 깨어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 갈대밭 기슭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음, 음.” “도련님!” 젊은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었어요.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분이가 안타깝게 젊은이를 부르고 있을 때, 바다에서 함성이 들려 왔어요. “와!” “용이 죽었다!” “젊은이가 이겼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배를 타고 용바위로 가서 지르는 함성이였어요. 곧 눈부신 해가 떠올랐어요. 붉게 물든 바닷물 위로 용의 시체가 떠올랐어요. 분이는 누워 있는 젊은이에게 절을 했어요. 뚝뚝 떨어지던 분이의 눈물 한 방울이 젊은이의 뺨에 가 닿았어요. “분, 분이 아가씨." 젊은이가 눈을 떴어요. “도련님!” 분이와 젊은이는 서로 손을 꼭 잡았어요. “흑! 이제 우리 마을은 살았어요." "도련님, 고맙습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와서 젊은이를 분이네 오막살이로 옮겼어요. 분이와 할아버지는 온 정성을 다해 젊은이를 돌보았어요. 열흘이 지나자 젊은이의 몸은 씻은 듯이 나았어요. “저는 임금님의 명령을 받고 나랏일을 하러 가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또 젊은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저, 분이 아가씨. 일이 끝난 뒤 다시 이 마을에 들러 분이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해도 되겠습니까? 백 일만, 백 일만 지나면 꼭 돌아올게요.” 분이의 마음은 해님을 얻은 듯 기뻤어요. 할아버지도, 마을 사람들도 축하해 주었어요. 젊은이가 가고 난 뒤, 분이의 마음은 썰물 때 바다처럼 텅 빈 것 같았어요. 남의 집 그물 손질을 해 줄 때나, 조개를 캘 때나 오직 젊은이 생각뿐이었어요. ‘백 일만, 백 일만. 빨리 백 일이 지나갔으면.’ 주문처럼 외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젊은이가 간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어요. 조개를 캐던 분이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어요. 하늘과 바다가 빙빙 돌았어요. “아, 아.” 분이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분이의 어지럼증은 쉽게 낫지 않았어요. 젊은이가 떠난 지 두 달이 되었을 때엔,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졌어요. 석 달이 되었을 때엔 물을 제대로 삼킬 수도,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어요. “음, 백 일만, 백 일만. 이제 열흘 뒤면 백 일인데, 도련님 얼굴을 한 번만 보면 나을 것 같은데, 도, 도련님” 분이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분이가 죽고 열흘 뒤, 그러니까 젊은이가 간 지 꼭 백 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웅성웅성.’ 어디선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났어요. “무슨 소리지?” 마을 사람들은 놀라 바닷가로 나왔어요. 뙤약볕 속에 수십 명의 병정들이 나타났어요. 투구를 쓴 대장이 맨 앞에 섰고, 그 뒤에 선 두 병정의 손에는 꽃가마가 들려 있었어요. “그동안 평안들 하셨습니까?” “아, 아니. 젊은이!” “약속대로 분이 아가씨를 색시로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왔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렸어요. “아바마마의 명령대로 북쪽 바다 적을 물리치고 오는 길이오. 봄에 이 마을에 들른 것은 혹 피난처가 될 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기 위해서였소.” 마을 사람들은 사실대로 분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뭐라고요? 분이 아가씨가요? 믿을 수가 없어요.” 왕자는 바람같이 분이네 오막살이로 달려갔어요. “콜록콜록, 휴-. 젊은이 어서 오구려. 우리 분이가 그만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내내 젊은이만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오.” “분이 아가씨! 분이 아가씨!” 왕자는 미친 듯이 분이를 부르며 작은 동산으로 올라갔어요. 작은 동산 한 구석에 분이의 무덤이 있었어요. 아직 마르지도 않은 분이의 무덤은 너무 작고 초라했어요. “분이 아가씨.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않고, 으흐흑.” 왕자는 마침내 목 놓아 울었어요. 울다 지쳐 고개를 든 왕자는 깜짝 놀랐어요. 무덤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가 쑥쑥 커 올라오고 있지 않겠어요? 그 나무는 금방 사람 키만큼 자라더니 파란 잎을 피웠어요. 잎을 틔운 나뭇가지는 곧 꽃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빨갛던 분이의 뺨보다 더 빨간 빛이었어요. 휙-, 바닷바람이 지나가자 꽃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어요. “백 일만, 백 일만.” “백 일만?” 병정들의 부축을 받고 섰던 할아버지가 놀라 소리쳤어요. “백 일만, 백 일만. 우리 분이가 하던 소리야. 왕자님을 기다리며 하던 소리였어. 콜록콜록.” “그럼 이 꽃이 바로 분이 아가씨? 흑.” 왕자는 꽃을 살며시 안아 주었어요. 돌아갈 때가 되자 왕자는 부하들을 시켜 그 나무를 캐게 했어요. “꽃가마에 실어라. 궁궐로 가져가 내 곁에 두고 보리라.” 왕자는 빨간 꽃이 핀 나무를 궁궐 앞뜰에 심었어요.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오도록 빨간 꽃은 지지 않았어요. “백 일만, 백 일만.” 이렇게 속삭이다가 핀 지 백 일째가 되는 날에야 졌답니다. 배롱나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이렇게 해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해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요.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이란 꽃말을 가진 백일홍은 꽃말에 걸맞는 아름답고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해 바다 깊은 곳에 사나운 용이 살고 있었는데 걸핏하면 풍랑을 일으켜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사람들은 용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 주며 마을 처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제 마을에 남은 마지막 처녀 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착하고 예쁜 분이는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분이의 슬픔은 너무 컸습니다. 분이가 제물로 바쳐지기 이틀 전 어디선가 칼을 찬 젊은이가 분이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아름다운 분이의 사연을 전해 들은 젊은이는 용을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용에게 제사를 지내는 보름날 밤 젊은이는 집채 만한 용과 결투를 벌였습니다. 용을 처치한 젊은이는 분이에게 백 일 후에 다시 만나 혼례 를 치를 것을 약속하고 먼길을 떠납니다. 젊은이는 이 나라의 왕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 일을 기다리지 못한 분이는 병이 들어 숨을 거두고 분이의 무덤가에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났습니다. 왕이 되어 돌아온 젊은이는 분이의 넋이 깃든 꽃을 궁궐 뜰에 심고 백일홍이라 불렀답니다. 병아리 논술. 엄마가 물어 보았어요. 아주 슬픈 사연이지요. 헤어진 벗에게 보낸다는 꽃말을 생각하며 백일홍 이야기를 읽고 질문에 답해 봅시다. 사나운 서해 바다 용을 달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무엇을 하였나요? 백일홍의 꽃말을 무엇인가요? 분이를 살리고 바다 괴물을 무찌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젊은이는 먼길을 떠나면서 언제 돌아오겠다고 했나요? 백 일을 채우지 못한 분이의 넋은 어떻게 되었나요? 백일홍 이야기를 읽고 느낀 점을 적어 봅시다.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한 토막. 용은 신비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어요. 여기서는 용이 나쁜 동물로 나오지만 다른 이야기에 나오는 용은 대개 고귀한 존재로 알려져 있어요. 용과 관련된 고사성어로 화룡점정이라는 게 있어요. 화룡점정이란 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것으로 일을 완성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장승요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절의 벽에 두 마리의 용을 그리게 되었어요. 그런데 먹구름을 헤치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용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오.”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았어요. 참다 못한 화가는 할 수 없이 한 마리의 용에다 눈동자를 그려 넣었어요. 그런데 눈동자를 그려 넣는 순간 정말로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용이 벽에서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가 버렸어요. 그리고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만이 남았답니다. 여기서 유래되어 화룡점정이란 말이 생겼답니다.
가엾은 도라지꽃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옛날 아주 먼 옛날, 자그마한 마을에 도라지라는 예쁜 소녀가 홀로 살고 있었어요. 도라지의 부모님은 도라지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지요. 도라지는 산속에서 나물을 캐며 살았답니다. 외로운 소녀 도라지는 친구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가난한 이 소녀를 부모 없는 자식이라 놀리며 외면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외로운 도라지를 찾아 주는 한 착한 소년이 있었답니다. 소년은 마을의 한 부잣집 도련님이었어요. 하루는 이 도령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산비탈길을 한참 걷고 있는데,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름다운 꽃이로구나. 따다가 방에 꽂아 두어야지." 도령은 산비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매우 위험해 보였어요. 그러다 그만 도령은 발을 헛디디고 말았어요. "앗, 사람 살려!" 그리곤 도령은 산비탈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도령이 깨어났어요. "여기가 어디지?" 처음 보는 방이어서 조금은 두려웠어요.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도라지가 미음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너는 누구니?" "저는 도라지라고 해요. 약초를 캐고 돌아오는데, 도련님이 쓰러져 있었어요." 도령은 도라지가 매우 아름다워 보였어요. "도라지야 고맙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으마." 그 후로 도령은 서당을 다녀올 때면 늘 도라지 집을 찾았고 힘든 일이 있을 땐 도와주었어요. “도련님 어서어서 오세요. 제가 도련님을 위해서 맑고 시원한 산약수를 떠다가 시원한 수정과를 만들었답니다.” 도령을 위해 도라지는 늘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했어요. 힘든 하루지만 도련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나서 더욱 열심히 일을 하였어요. 도령도 하루는 귀여운 새를 잡아 예쁜 새장에 넣어 도라지에게 선물을 하였어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라지와 도령은 점점 사랑을 하게 되었어요. "도라지야, 꼭 너랑 결혼할 거야." "정말요?" "응, 너는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니까, 좋은 색시가 될 거야." 도라지는 너무나 기뻤답니다. "우리 약속하자.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결혼하자고." 도라지와 소년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였어요. 그렇게 행복한 시간들이 흘러갔어요. 그런데 소년의 부모가 둘의 사이를 알고 말았어요. "아버지, 저는 착한 도라지 낭자와 혼인을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도라지가 가난하고 부모 없는 소녀란 걸 아시는 소년의 아버지는 반대를 하였어요. 그래서 소년을 도라지와 만날 수 없는 바다 건너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기로 하였어요. "네가 꼭 도라지와 혼인을 하고 싶다면 중국에 가서 학문을 닦고 오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혼인을 허락하마." 도령은 슬펐지만, 도라지와 혼인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하였어요. "도라지야 열심히 공부한 후 꼭 널 데리러 올게." "얼마나 오래 있다 오시나요?" 마음이 아팠지만, 도령을 잡을 수는 없었어요. "십 년 후, 바로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하자." "꼭 뜻을 이루고 돌아오세요." 도라지는 도령 몰래 눈물을 훔쳤어요. "꼭, 기다릴게요. 도련님!' 도라지는 속으로 이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어요. 도라지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답니다. 도라지는 열심히 나물을 캐며 살았어요. 근처의 스님에게 약초 재배법을 배워, 열심히 키우고 가꿔서 시장에 내다 팔았답니다. 성껏 키운 약초는 금세 팔려 나갔어요. 조금씩 조금씩 도라지는 돈을 모았어요. "열심히 살다 보면, 금세 십 년이 지나갈 거야.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자." 도라지는 도련님이 보고 싶었지만,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며 꾹 참고 하루하루를 지냈어요. 도령이 떠난 지 어느덧 십 년이 지났어요. 도라지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 있었답니다. "아, 오늘이 드디어 도련님이 돌아오는 날이구나." 도라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쥐었어요. 떠나는 그날처럼 날씨도 화창하게 개였어요. "어서, 어서 돌아오세요. 도련님!" 그런데 날이 캄캄해질 때까지도 도련님이 타고 올 배는 보이지 않았어요. "내일 오시려나?" 도라지는 매일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도련님을 태운 배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몇 년을 기다려도 도련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도라지는 큰 실망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도라지는 홀로 산속으로 들어갔답니다. 모든 것을 잊고 혼자서 외롭게 살기 위해서였어요. "산신령님, 저는 홀로 살아가겠습니다. 다시는 그를 생각하지 않겠어요." 매일매일 도라지는 기도를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도라지도 점점 늙어 갔어요. "도련님."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도련님 생각이 났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산신령님께 약속을 했는데." 결국, 도라지는 도령을 그리워하던 나머지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으로 이사를 했어요.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있으면, 금방이라도 도령이 돌아올 것만 같았어요. "도련님, 도련님!" 바다를 향해 힘차게 소리쳐 보기도 하고,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도령을 태운 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도라지야, 도라지야." 그때, 굵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 "누, 누구세요?"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긴 수염을 한 산신령님이 나타난 거예요. "도라지야, 너는 내게 한 약속을 잊었단 말이냐?" 도라지는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었어요. 산신령님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산신령에게 한 맹세는 어길 수 없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 사람을 보게 해 주세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도라지는 두 손을 모으고 빌고 또 빌었어요. 모두가 무서워하는 산신령에게 한 맹세를, 도라지가 깨려고 하는 것이었어요. 산신령은 무척 화가 나 소리쳤어요. "맹세를 잊은 죄는 매우 크니라. 너는 평생 그 도령을 기다리며 살게 될 것이고, 기다리는 마음은 계속 아플 것이다." "산신령님, 산신령님." 하지만, 도라지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고 있었어요. 도라지가 눈을 떴을 때, 도라지는 이미 도라지꽃으로 변해 있었답니다. 도라지는 울면서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어요.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에서 도라지는 하루 종일 도령을 기다리게 되었답니다. 오늘도 도라지꽃은 중국으로 떠난 도령을 기다리며 눈물을 적시고 있답니다.
에밀레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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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오늘은 일곱 번째로 만든 봉덕사 범종을 처음 울려 보는 날이에요. 신라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었어요. 이 일곱 번째 종은 반드시 맑게 울리리라고요. 그리고 곧 신라 사람들의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고요. 드디어 어린 임금님 혜공왕과 봉덕사 큰스님이 종루에 올랐어요. "우리 임금님, 꼭 아기 보살 같으시지?" "아버지 경덕왕보다 할아버지 성덕왕을 더 닮았어." 사람들이 소곤거렸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어요. 온 백성이 힘을 모아, 황금과 구리를 십이만 근이나 녹여서 만들었는데도 종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댕그랑 댕그랑'하는 맑은 종소리 대신 ‘떠덩!’하는 깨질 듯한 소리만 났어요. "과인의 정성이 부족한 탓일까?" 경덕왕은 열심히 기도한 후 첫번째 종을 녹여 두 번째 종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두 번째 종도 ‘떠덩!’ 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어요. "혹시 백성들의 정성이 부족한 탓일까?" 다시 백성들의 시주를 모아 세 번째 종을 만들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이렇게 녹이고, 만들고 하기를 여섯 번, 경덕왕은 끝내 종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나라 살림만 어려워졌어요. 뒤를 이어 지금의 어린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어요. 여덟 살 때였어요. 어린 임금님이 왕위에 오르자 나라 살림은 더 엉망이 되었어요. "아이고. 못 살겠네." "못된 벼슬아치들." 백성들의 원망 소리가 온 신라 땅을 덮었어요. 어린 임금님은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 봉덕사 종을 다시 만들자. 종이 맑게 울리는 날, 틀림없이 할아버지 성덕왕이 우리 신라를 지켜 주실거야.” 백성들도 다시 어린 임금님과 한 마음이 되었어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다시 곡식이나 쇠붙이를 내어놓았어요. 산골 마을에 사는 머루네도 시주를 했어요. 옛 가야 땅으로 돈 벌러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보리쌀 한 됫박을 내어놓았어요. 이렇게 해서 일곱 번째 종이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일곱 번째 종아 맑게 울려 신라를 꼭 지켜다오.’ 구름처럼 모인 사람들은 다시 두 손을 꼭 모았어요. 드디어 어린 임금님과 큰스님이 함께 아름드리 통나무 종 채를 잡았어요. 뒤로 잠깐 당기는 듯하다가 앞으로 힘껏 내밀어 종을 때렸어요. ‘떠덩!’ 아, 또 허탕이었어요. 당황한 어린 임금님은 다시 종 채를 힘껏 잡고 큰스님과 함께 종을 때렸어요. 이번엔 ‘쩡’ 하는 소리가 나더니 종이 그만 두 동강이 나고 말았어요. "이 무슨 불길한 징조야?" 기도하던 사람들이 손을 내리고 웅성거렸어요. 그러나 곧 엉엉 울어 버릴 것만 같은 어린 임금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머루와 엄마도 힘없이 산골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지 며칠 후, 어린 임금님의 꿈 속에 할아버지 성덕왕이 나타났어요. "내 손자 혜공왕아 너무 슬퍼 말아라. 한 집도 빠짐없이 다시 시주를 하게 하라. 단 한 집도 빠짐없이. 그리하여 새로 종을 만들면 반드시 종 소리를 얻으리라." 다음 날, 어린 임금님은 당장 나라 안 모든 절에 그 말씀을 전했어요. 스님들은 하던 일을 모두 거두고 마을로 직접 다니면서 시주에 나섰어요. "쳇! 배고파 죽겠는데 종이 다 뭐야?" 아무 것도 내어놓지 않으려 했어요. "여덟 번째 종은 꼭 소리를 낼 거예요. 곡식 한 톨이라도, 쇠붙이 한 조각이라도 한 집도 빠짐없이 보태야만 합니다." 스님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면 그제야 겨우 숟가락 하나나 곡식 한 됫박쯤을 내어놓았어요. 어느 날, 봉덕사 큰스님도 탁발을 나서게 되었어요. 큰스님은 깊고 깊은 산골 마을로 홀로 들어갔어요. 몇 집을 다니며 힘들게 시주를 받고 나니 기운이 다 빠졌어요. "휴, 이제 저 오막살이 하나만 남았어." 스님은 무거운 마음으로 작은 오막살이 문을 밀고 들어갔어요. 목탁을 치자 방문이 열렸어요. 대여섯 살 난 딸아이가 뛰어나왔어요. 뒤따라 아이의 엄마인 듯한 젊은 아주머니도 나왔어요. "나무관세음보살 나는 봉덕사 주지올시다." "예, 스님 어서 오시와요." 그런데 인사를 하던 아이가 큰스님을 보고 소리쳤어요. "큰스님이다!" 엄마가 놀라는 시늉을 하자 딸아이는 더 크게 소리쳤어요. "엄마, 봉덕사에서 임금님이랑 종 쳤잖아요, 그 스님!" 머루였어요! 일 년 전 엄마랑 종 소리를 들으러 갔던 그 머루요. "나무관세음보살. 그래 그 때 하던 기도는 이루어졌니?" 큰스님이 머루에게 물었어요. "아니요. 울 아부지 아직 안 왔어요. 음, 봉덕사 종이 소리가 안 나서요." 큰스님은 새삼 마음이 아팠어요. 스님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머루는 엄마를 조르고 있었어요. "엄마, 또 아부지 놀이 해 줘." "아주머니, 머루가 왜 그래요?" "예 스님, 머루 아버지가 계실 때 머루한테 해 주던 놀이가 있어서." "예? 아 예." 엄마 말을 다 들은 큰스님은 머루를 덥썩 안아 올렸어요. 그리고 옆구리에 끼더니 외쳤어요. "머루 사소, 머루! 서라벌보다 비싸고, 신라보다 더 비싼 머루 사소, 머루!" 그러자 머루는 넘어갈 듯 웃었어요. 머루를 내려 놓은 스님은 시주를 부탁했어요. 머루 엄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머루 아버지가 집을 떠난 지 삼 년이에요. 저희 모녀는 밥을 먹어 본 지가 몇 달이 되었는지 모른답니다. 지금도 잠시 배고픔을 잊어 보려고 머루에게 아버지 놀이를 해 주고 있었어요." 그러자 듣고 있던 머루가 대뜸 말했어요. "엄마, 나 주면 되지. 내가 서라벌보다 비싸잖아. 신라보다도 더 값나가고." 엄마는 흠칫하더니 금방 장난스레 말했어요. "머루를 가져가세요. 우리 머루면 종을 몇 개나 만들고도 남겠지요 네? 스님." 큰스님은 할 수 없이 그냥 머루네를 나서야 했어요. 몇 달이 흘러갔어요. 이제 이틀 뒤면 쇳물 끓이기도 끝나 종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밤, 어린 임금님의 꿈에 할아버지 성덕왕이 또 나타나 말했어요. "내 손자 혜공왕아, 어이 하여 내 말을 어기려고 하느냐? 꼭 한 집, 제 입으로 주마고 한 시주를 내어놓지 않은 집이 있느니라." 날이 밝자 혜공왕은 큰스님을 불렀어요. 그리고 꿈 얘기를 했어요. ‘아!’ 큰스님은 그제야 머루네 생각이 났어요. 큰스님은 곧장 머루네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얼른 문고리를 떼어 와 끓는 쇳물에 넣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 성덕왕은 이번엔 큰스님의 꿈에 나타나 말했어요. "네 이놈! 분명히 그 에미가 제 입으로 부처님께 한 약속이 있으렷다?" "예? 혹시 머루를요? 안 됩니다. 그 귀여운 아이를 어떻게." "네 이놈! 아이 하나 때문에 또 온 신라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려 하느냐?" 다음 날 아침, 큰스님은 새벽같이 봉덕사를 나섰어요. 해가 중천에 다다랐을 무렵 머루네에 도착했어요. "예? 살아 있는 아이를 시주로 내라니요." 스님 말씀을 들은 머루 엄마는 날벼락을 맞은 듯 주저앉고 말았어요. 스님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머루를 안아 올렸어요. 그리고 같이 온 젊은 스님 품에다 머루를 안겼어요. "이럴수가. 이 에미가 그냥 장난으로 한 말 때문에. 머루야! 머루야!" "엄마, 같이 가. 엄마." 머루는 산이 떠나가라 엄마를 부르며 멀어져 갔어요. 그 길로 바로 머루는 부글부글 끓는 쇳물에 던져지고 말았어요. 한 달 후, 봉덕사 앞마당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여덟 번째 종 소리를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어요. 드디어 혜공왕과 큰스님이 종루로 나왔어요. 그리고 아름드리 통나무 종 채로 종의 몸을 힘껏 때렸어요. “댕그랑. 댕그랑.” 맑은 종 소리가 났어요. 사람들은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어요. 임금님과 큰스님은 다시 종을 때렸어요. “댕그랑. 댕그랑.” 종 소리는 햇살처럼 찬란히 온 서라벌로, 신라로 퍼져 나갔어요. 그런데 가만히 종 소리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이상하다, 종이 말을 하는 것 같아." "맞어, 꼭 엄마, 엄마 부르는 것 같아." "아냐, 엄마 때문이야 하고 원망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다시 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댕그랑. 앵그랑. 에밀레." 종소리는 점점 한 가지 소리로 모아졌어요. "에밀레. 에밀레."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어요. "에밀레! 에밀레라고 했어." "그래 에밀레라고 울었어." 이렇게 해서 봉덕사 여덟 번째 종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에밀레 종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종 채를 든 큰스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비구니 스님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선 머루 엄마의 뺨에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어요. ‘흑, 에밀레, 에미일레. 그래 머루야, 다 이 에미 때문이야. 에미가 한 말 때문이야.’ 그런데 참 신기했어요. “에밀레.” 하고 우는 맑고 구슬픈 종소리는 사람들 마음에 조용히 평화를 가져다 주었어요. 나쁜 사람도 착하게 만들어 주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주었어요. 덕분에 어린 임금님은 그 뒤로 아무 근심 없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어요. 지금은 경주 박물관에 있는 에밀레 종(봉덕사 종, 성덕왕 신종)의 몸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다고 해요. 이 소리 울리는 곳마다 더러운 마음 사라지리라. 신라에 태어난 모든 사람과 생물들은 바다에 이는 잔잔한 물결처럼 고루 복을 받으리라.
신데렐라
의사소통
초등_저학년
신데렐라는 일찍 엄마를 여의고 아빠와 새엄마, 그리고 새언니들과 함께 살고 있었어. 하지만 궂은일은 모두 신데렐라의 차지였어. 새엄마와 언니들이 신데렐라를 미워해 힘든 일은 모두 신데렐라에게만 시켰거든.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온 신데렐라의 아빠는 큰딸에게는 목걸이를 주고, 작은딸에게는 드레스를 선물로 주었어. 그리고 신데렐라에게는 개암나무 가지를 주었지. 신데렐라가 개암나무 가지를 정원에 심자 곧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작은 비둘기가 포르르 날아와 노래했어. 며칠 뒤 나라에 왕자님의 신붓감을 찾는 큰 무도회가 열렸어. 새엄마와 언니들은 예쁘게 꾸미느라 바빴어. “난 새로 산 벨벳 드레스를 입을 거야.” “난 황금빛 꽃무늬가 들어간 망토를 두를 거야.” 하지만 신데렐라는 언니들의 심부름만 해야 했어. 언니들의 몸단장이 끝나자 신데렐라가 조심스레 새엄마에게 물었어. “어머니, 저도 무도회에 참석해도 될까요?” “호호! 네가? 좋아, 대신 저 콩들을 모두 그릇에 담아놓아!” 새엄마가 재투성이의 난로에 콩 그릇을 휙 던지며 말했어. 그러자 비둘기와 새들이 날아와 난로의 잿더미 속에서 콩만 찾아 그릇에 담았어요. “이제 무도회에 가도 되지요?” “그래, 하지만 옷이 온통 재투성이구나. 좋을 대로 하렴.” 새엄마와 언니들은 신데렐라만 남겨두고 모두 무도회에 갔어요. 그때 비둘기와 새들이 포르르 날아오더니 난로의 잿더미 속에서 콩만 찾아 그릇에 담아주었어. “이제 무도회에 가도 되지요?” “좋아. 하지만 옷이 온통 재투성이구나. 좋을 대로 하렴.” 새엄마와 언니들은 신데렐라만 남겨두고 모두 무도회에 갔어. 신데렐라는 개암나무 앞에서 주르르 눈물을 흘렸어. 그때 요정이 나타나 말했어. "신데렐라야, 정원에 가서 호박을 따 오렴." 그러자 요정은 호박으로 멋진 마차를 만들고, 작은 쥐들을 잡아 말로, 도마뱀을 잡아 마부로 만들었어. 그리고 신데렐라에게 금빛 드레스를 입히고,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구두도 신겼어. “세상에! 요정님, 감사해요!” 그러자 요정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우아, 공주님처럼 아름답구나! 하지만 12시가 되기 전에 돌아와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마법이 풀릴 거야.” 늦게 무도회장에 도착한 신데렐라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마땅한 신붓감을 찾지 못한 왕자님은 신데렐라를 보자 홀딱 반하고 말았지. 신데렐라와 왕자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춤을 추었어.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신데렐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말이야. 어느새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어. 신데렐라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어. 그런데 계단을 내려오다 유리구두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어. 하지만 구두를 주울 새도 없어 신데렐라는 급히 집으로 향했고, 마법은 사르륵 풀려버리고 말았단다. 다음날부터 왕자님의 신하들은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아 나라의 모든 아가씨에게 구두를 신겨보았어. 마침내 신데렐라의 집에도 신하가 찾아왔어. “어머! 내 구두야.” 하지만 큰딸에게는 구두가 맞지 않았어. “내 거야!” 작은딸은 뒤꿈치가 들어가지 않았지. “이 댁에 다른 따님은 안 계십니까?” “일하는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왕자님의 신붓감은 아니에요.” 하지만 신데렐라도 구두를 신어볼 수 있게 되었어. 유리구두는 신데렐라의 발에 꼭 맞았지. “제 것이 맞아요. 나머지 한 짝도 여기 있답니다.” “드디어 찾았어!” 신하는 무릎을 꿇고 신데렐라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어. 그러자 새엄마와 언니들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지. 그 뒤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단다. 착하고 예쁜 신데렐라는 귀족의 딸이지만 일찍 엄마를 여의고, 새엄마와 새언니의 구박으로 힘들게 살아가요. 그러던 어느 날 왕궁에서 무도회가 열리고 신데렐라는 요정이 마련해 준 예쁜 옷과 마차, 그리고 유리 구두를 신고 참석하게 되었어요. 신데렐라는 무도회에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잃어버린 유리 구두의 주인임이 밝혀져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지요. ‘신데렐라’는‘재를 뒤집어쓴 아이’라는 뜻이에요. 새엄마의 구박으로 옷과 얼굴에 항상 재를 묻히고 다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신데렐라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절망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했어요. 신데렐라처럼 강하고 꿋꿋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이 온다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랍니다.
인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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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푸른 바다 깊은 곳에 아름다운 인어들의 나라가 있었어. 인어들은 사람과 똑같이 생겼지만, 허리 아래로는 물고기의 모습이었지. 인어들의 나라에는 임금님과 아름다운 여섯 공주, 지혜로운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특히 막내는 얼굴도 예뻤지만 노래를 무척 잘 불렀단다. 할머니 인어는 매일 여섯 공주에게 인간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어. “바다 위에는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 살랑살랑 구름을 실어 나르는 상쾌한 바람이 있단다.” 인어공주들은 인간 세상이 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열다섯 살이 되면 구경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지. 인어공주들은 차례로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바다 위로 올라가 인간 세상을 구경했어. 막내도 열다섯 살이 되자 언니들의 축하를 받으며 물 위로 올라갔지. 그리고 그곳에서 크고 화려한 배를 보았어. 배 안에서는 많은 사람이 왕자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는데, 막내는 멋진 왕자의 모습을 보고 반해버리고 말았어.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세찬 비바람이 휘이잉 몰아쳤어.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쳐와 배를 산산조각 냈지. 인어공주는 얼른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했어. 인어공주는 바닷가에 왕자를 눕히고는 누가 볼까 봐 얼른 바다로 들어갔어. 다행히 바닷가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왕자를 발견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가 왕자를 흔들어 깨웠어. “당신이 나를 구했소?” “그래요. 여기에 왕자님께서 누워 계셨어요.” 왕자는 자신을 구한 사람이 인어공주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지. 인어공주는 멀리에서 이 광경을 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어. 그 뒤로 인어공주는 매일 바다 위로 올라와 왕자를 그리워했단다. 어느 날, 바닷속 인어들의 잔치가 열리고, 막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 “막내의 목소리는 정말 천사의 소리 같아.” “정말 사랑스러운 목소리야.” 언니들이 칭찬했지만, 막내는 기쁘지 않았어. 왕자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래, 사람이 되면 왕자님을 볼 수 있을 거야.’ 인어공주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기로 했어. 바다 마녀가 사는 곳은 거센 소용돌이 가치는 무서운 곳이었지. “네가 왜 왔는지 안단다. 이 약을 마시면 다리가 생길 거야. 대신 나는 네 목소리를 빼앗을 거란다. 그리고 네가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넌 물거품이 되지.” 인어공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와 약을 바꾸었어. 인어공주는 끼룩끼룩 갈매기가 우는 바닷가로 나와 약을 마셨어. 그런데 약을 마시자 너무 아파 기절하고 말았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왕자가 인어공주를 발견하고 깨웠어. “아가씨는 누구인가요?” 왕자를 만난 인어공주는 무척 기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왕자는 인어공주를 성으로 데리고 와 보살폈어.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 사뿐사뿐 춤도 추었지. 인어공주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칼날에 베이는 듯 아팠지만, 왕자를 위해 아픔을 견디며 춤을 추었어. ‘내가 왕자님과 결혼하면 얼마나 좋을까.’ 인어공주는 왕자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했어. 며칠 뒤, 이웃나라에서 무도회가 열렸어. 그런데 왕자는 무도회에서 자신을 깨웠던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어. 그 아가씨는 이웃나라의 공주였지. “아가씨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몰라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왕자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자 인어공주는 마음이 무척 아팠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인어공주는 바닷가에서 언니들을 만났어. “이 칼로 왕자님을 찌르렴. 그 피를 다리에 묻히면 다시 꼬리를 얻을 수 있단다.” 인어공주는 칼을 들고, 자고 있는 왕자를 바라보았어. 하지만 도저히 사랑하는 왕자를 칼로 찌를 수는 없었어. ‘왕자님을 찌르지 못하면 나는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인어공주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바닷가로 뛰어갔어. 그러고는 태양이 떠오르자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어. 몸에 바닷물이 닿자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었지. 인어공주가 공기의 요정들에게 물었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될 거예요. 삼백 년이 지나면 공주님은 인간으로 태어날 거랍니다.” 그렇게 인어공주는 뱃전에 나온 왕자에게 입맞춤을 한 뒤 원한 이별을 했단다.
장난감 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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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우아, 장난감 병정이다!” 생일날, 소년이 아빠에게 장난감 병정 세트를 받았어요. 하지만 마지막 병정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어요.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 놋쇠가 부족해 마지막 병정의 다리를 한 짝 밖에 못 만든 거예요. 소년은 장난감 병정을 다른 인형들과 함께 놓아두었어요. 그때 장난감 병정은 예쁜 발레리나 인형을 보았어요. ‘아, 저 발레리나 인형도 나처럼 외다리로 서있네. 나랑 친구가 되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장난감 병정은 발레리나 인형이 춤을 추기 위해 한쪽 다리로 서있는 것은 몰랐어요. 밤이 되자 장난감들은 신나게 놀기 시작했어요. 장난감들이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출 때, 장난감 병정은 혼자 발레리나 인형을 바라보았어요. 발레리나 인형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하하! 너 같은 외다리를 저 예쁜 소녀가 바라봐 줄까?” 도깨비 인형이 놀리듯 말했어요. 다음 날 아침, 소년은 장난감 병정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다리가 하나뿐인 장난감 병정은 필요 없어!” 그러고는 장난감 병정을 종이배에 태워 개울에 띄웠어요. 장난감 병정은 종이배에 탄 채 개울로 흘러갔지요. 그때 커다란 쥐가 나타났어요. “찍 찍! 여길 지나가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해!” 장난감 병정은 무서웠어요. 하지만 장난감 병정은 총을 어깨에 멘 채 한쪽 다리로 꿋꿋하게 서서 앞만 바라보았어요. 다행히 바람이 불어 종이배는 쥐를 피해 앞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으아, 아깝다! 외다리 병정, 운 좋은 줄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커다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는 하수구의 출구가 나왔어요. 물줄기를 따라 장난감 병정은 깊은 강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어요. ‘이제 발레리나 인형을 볼 수 없겠구나.’ 그런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어요. 장남감 병정님,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세요! 그때 커다란 물고기가 다가오더니 장난감 병정을 꿀꺽 삼켜버렸어요. 장난감 병정은 캄캄한 물고기의 배 속에 누워있었어요. 보이는 것은 시커먼 어둠뿐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어요. “어머! 물고기 속에 외다리 병정 인형이 들어있네!” 물고기가 어부에게 잡혀 시장에 팔렸는데, 주인이었던 소년의 어머니가 물고기를 산 거예요. 장난감 병정은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놓였어요. 발레리나 인형을 다시 보게 된 장난감 병정은 뺨이 발그레 물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발레리나 아가씨.’ 그러자 발레리나 인형도 장난감 병정을 보고 빙긋 웃었어요. 그때 소년이 다가와 장난감 병정을 번쩍 들었어요. “어떻게 돌아온 거지? 다리가 하나뿐인 인형은 필요 없다니까!” 소년은 장난감 병정을 난로 속에 휙 던져버렸어요. 그런데 순간 바람이 불어 발레리나 인형도 난로 속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장난감 병정은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불 때문에 뜨거운 것인지, 발레리나 인형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요. 장난감 병정과 발레리나 인형의 몸은 녹아내렸어요. 다음날 난로의 잿더미 속에서는 붉은 조각이 하나 나왔어요. 발레리나 인형의 노란 리본이 묶인 심장 모양의 놋쇠 조각이었지요. 장난감 병정과 발레리나 인형의 사랑은 채 타지 못하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하나가 된 거예요. 장난감 병정은 외다리 병정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예요. 장난감 병정은 놋쇠로 만든 외다리 인형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발레리나 인형을 보고는 자기처럼 다리 한쪽이 없는 줄 알고 첫눈에 반하지요. 하지만 소년이 외다리 병정을 버리는 바람에 병정은 무서운 쥐도 만나고, 물고기에게 먹히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요.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소년이 외다리 병정을 난로 속 뜨거운 불길에 던져 버리지요. 어여쁜 발레리나 인형도 뜨거운 불길에 떨어지고요. 하지만 장난감 병정과 발레리나 인형의 사랑으로 놋쇠로 만든 심장은 녹지 않은 채 남게 된답니다. 모진 고난에도 사랑을 하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이지요. 왕을 호위하는 병사, 근위병. 외다리 장난감 병정은 왕과 왕의 성을 호위하는 병사인 근위병을 본떠 만든 인형이에요. 특히 영국의 근위병은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지요. ‘근위병 교대식’또한 무척 멋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기도 하고요. 영국의 근위병은 평소에 빨간색 상의에 검정 바지의 제복을 입고, 머리에 곰 털로 만든 긴 모자를 써요. 그리고 날이 흐리면 회색의 외투를 입어요. 영국 외에도 여러 나라에서 근위병을 볼 수 있는데, 안데르센의 고향 스웨덴의 근위병은 파란 제복에 철모를 쓰고, 동남아시아의 타이는 검은 바지에 하얀색 상의의 제복을 입지요. 각 나라의 근위병들은 모두 절도 있고, 멋있어서 나라의 왕실을 상징하기도 한답니다.
미녀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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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깜깜한 밤, 그레고르라는 남자가 숲을 헤매고 있었어. 앞은 보이지 않고 부엉이가 우는소리만 들릴 뿐이었지. 그때 그레고르는 음침하고 커다란 성을 발견했어.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레고르가 외쳤지만, 성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어.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어야겠어.” 그레고르는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는 성안을 둘러보았지. 그레고르는 성을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정원에서 붉은 장미를 보았어. “한 송이만 꺾어갈까? 막내딸 벨이 보면 좋아할 거야.” “이놈! 감히 내정원을 망쳐?” 그레고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흉측하게 생긴 야수가 서있었어. “내 꽃을 꺾었으니 막내딸을 바치거라!” 야수는 그레고르에게 소리치고는 문을 쾅 닫고 사라져 버렸어. 그레고르는 장미꽃 한 송이를 툭 꺾었어. 순간 등 뒤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그레고르는 막내딸 벨에게 장미꽃을 주었어. “오! 정말 아름다워요. 아버지.” 벨의 말에 그레고르는 야수의 성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 언니들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벨은 그럴 수가 없었지. “약속은 지켜야 해요. 제가 내일 야수가 사는 성으로 갈게요.” 다음 날 아침, 벨은 야수가 보낸 말을 타고 성으로 향했어. 하지만 성 안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듯 고요하기만 했어. 다만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있을 뿐이었어. 그렇게 벨은 성에서 홀로 겨울과 봄을 지냈어. 벨은 야수를 보고 깜짝 놀랐어. 온몸에 털이 숭숭 나고 얼굴은 괴물 같았거든. “벨, 내가 무섭소?” 야수가 물었어. 어느 날, 벨은 야수를 만나기로 결심했어. 계단 밑에 숨어있다가 야수가 나오자 후다닥 뛰어나왔지. “아니요. 당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운지 무섭지 않은지 알 수 없어요.” 벨의 말에야 수는 다음날부터 벨과 함께 산책을 하고 식사를 했어. 야수는 겉모습과 달리 무척 친절하고 따뜻했지. 하지만 벨은 늘 아버지가 그리웠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꼭 다시 돌아올게요.” 야수는 벨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허락해 주었어. “대신이 거울을 가지고 가요. 나를 볼 수 있을 거요.” 집에 돌아온 벨은 아버지와 언니들을 보자 무척 기뻤어. “오! 사랑하는 벨. 돌아왔구나. 야수가 너를 잘 돌보아준 모양이구나.” 벨은 며칠만 머물다가 야수에게 돌아가려 했어. 하지만 가족들과 있는 시간이 즐거워 몇 달 동안 머무르고 말았어. 어느 날, 벨이 잠을 자는데 거울에서 별빛이 반짝반짝 흘러나와 벨의 꿈속에 스며들었어. 꿈속에서 야수는 죽어가고 있었지. “아, 안돼요!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요. 제발!” 새벽이 되자, 벨은 서둘러 성으로 돌아갔어. 장미 정원을 향해 힘껏 달렸지. 그리고 마침내 검붉게 시들어버린 장미 정원에 쓰러져 있는 야수를 발견했어. “오! 이대로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을 사랑해요!” 벨의 눈물이 시든 장미에 똑똑 떨어졌어.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 야수의 몸이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둘러싸이더니 멋진 청년으로 변한 거야.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왕자예요. 차가운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줘서, 마녀가 야수로 만들어버렸지요. 당신이 날 진정으로 사랑해 줘서 마법이 풀렸어요.” 왕자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음침했던 성도 아름답게 변했어. 그 후 둘은 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행복하게 살았단다. 미녀와 야수는 아름다운 아가씨 벨과 마법으로 야수가 되어 버린 왕자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예요. 어느 날, 야수의 성에 그레고르가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어요. 하지만 성의 장미꽃을 함부로 꺾는 바람에 막내딸인 벨을 야수의 성에 보내게 되지요. 벨은 야수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지만 곧 야수의 착한 심성과 따뜻한 마음을 알고는 사랑에 빠져요. 그리고 죽어 가는 야수 곁의 시든 장미에 벨의 눈물이 닿자, 야수에게 걸린 마법이 풀리며 멋진 왕자님이 되지요. 진심으로 야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풀리는 마법이었던 거예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외면의 아름다움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이야기랍니다.
백설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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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먼 옛날 어느 나라에 왕과 아름다운 왕비가 살고 있었단다. 하지만 왕과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었어. ‘눈처럼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예쁜 딸이 있었으면.......’ 왕비는 수를 놓으며 이런 생각에 잠기곤 했지. 얼마 뒤, 왕비는 소원대로 눈처럼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과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예쁜 딸을 낳았어. 그리고 하얀 눈이라는 뜻을 담아‘백설공주’라고 불렀지. 하지만 몇 해가 지나 왕비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은 새 왕비를 맞이했단다. 새 왕비는 요술거울을 가지고 있었어. 요술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어보면, 요술거울은 늘 왕비라고 대답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왕비께서도 아름답지만 백설공주가 훨씬 더 예뻐요.” 그러자 왕비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화가 난 새 왕비는 사냥꾼을 불렀어. “백설공주를 숲에 데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이거라.” 하지만 사냥꾼은 착한 백설공주를 그냥 풀어주었지. 백설공주는 어둑어둑한 숲속을 헤매다 작은 오두막을 발견했어. 배가 고팠던 백설공주는 오두막에 들어가 음식들을 모두 먹고는 침대에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어. 저녁이 되자, 오두막의 주인인 일곱 난쟁이가 들어왔어. 그런데 오두막에 들어선 난쟁이들은 깜짝 놀랐어. 음식도 없어지고, 숟가락도 누가 사용한 것 같았거든. “누군가 집에 몰래 들어온 게 분명해!” 난쟁이들이 집안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어. 그때 방으로 들어간 난쟁이 한 명이 소리쳤어. “여기 누가 있어!” 침대에는 예쁜 백설공주가 곤히 잠들어있었어. 난쟁이들의 말소리에 잠에서 깬 백설공주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어. “오! 가여운 백설 공주님. 우리랑 같이 살아요.” 그날부터 백설공주는 난쟁이들과 함께 살았어. 난쟁이들이 일을 나가면, 백설공주는 집안일을 했지. 볕이 좋은 날에는 다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어. “하이호! 하이호! 우리는 백설 공주와 함께 즐겁다네.” 한편, 백설공주가 죽었다고 생각한 새 왕비는 다시 요술거울에게 물었어.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일곱 난쟁이와 함께 사는 백설공주가 가장 예뻐요.” 화가 난 새 왕비는 할머니로 변장해 독을 바른 사과를 가지고 백설공주를 찾아갔지. “아가씨, 사과 사세요!” 백설공주는 할머니가 주는 사과를 와삭 깨물었어. 그러자 사과에 묻은 독 때문에 곧 정신을 잃고 털썩 쓰러졌단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일곱 난쟁이는 깜짝 놀라서 백설공주를 깨워보았지만 공주는 숨을 쉬지 않았어. 슬픔에 빠진 난쟁이들은 유리관을 만들어 백설공주를 눕혔어. 그리고 사흘 밤낮을 울며 슬퍼했지. 숲속의 동물들도 마찬가지였어. “흑흑, 우리 불쌍한 공주님!” 그러던 어느 날, 숲을 지나던 이웃나라 왕자님이 백설공주를 발견했어. 백설공주를 보고 한눈에 반한 왕자가 백설 공주의 입에 입맞춤을 하자 공주가 깨어났지. “만세! 백설 공주님이 살아나셨다!” 난쟁이들은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 그리고 백설공주는 온 백성의 축하를 받으며 왕자와 결혼해 서로 아끼며 행복하게 살았단다.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백설 공주는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예쁜 공주예요. 그런데 심술궂은 새 왕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백설 공주를 없애려고 별렀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백설 공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나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왕자가 나타나 백설 공주를 구하고 결혼을 해 행복하게 살아요. 이처럼 세상에는 악한 것이 잘되고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착한 선이 이긴다는 교훈과 남을 돕고 소중히 여기는 미덕이 담겨 있는 이야기랍니다. ‘북유럽 신화’에 뿌리를 둔 백설 공주 백설 공주는 북유럽에서 전래되어 유럽 전역에 퍼진 이야기를 그림 형제가 그림 동화에실은 거예요. 북유럽은 지금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가 있는 지역으로 게르만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북유럽 신화’에는 일곱 난쟁이의 모티프가 된 종족이 있어요. 바로‘드워프’라는 난쟁이족인데, 쇠망치와 창을 잘 다뤄 보석을 잘 캤어요. 배도 잘 만들어 보석과 함께 신들께 바치기도 했지요. 그래서 백설 공주 속 난쟁이들도 광물을 캐는 광부로 묘사되었어요. 이들은 열심히 일을 하며 쉼 없이 능력을 가꾸고, 천진난만한 성격이 있는 종족이었지요.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역사적 가치와 기록되어 있는 양은 그에 못지않답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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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옛날 어느 나라에 인자한 왕과 왕비가 살았어. 하지만 둘에게는 오랜 시간 아이가 없어 걱정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나 말했어. “개굴개굴! 곧 예쁜 공주님을 낳으실 거예요.” 얼마 뒤, 정말로 왕비는 예쁜 딸을 낳았어. 공주가 태어나자 왕은 성대한 잔치를 열어 귀족들과 요정들을 초대했어. 요정들은 공주에게 선물을 주며 축복했지. 그때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나타나 말했어.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면 물레에 찔려 죽을 것이다!” 그러자 아직 선물을 주지 못한 요정이 말했어. “마녀의 마법은 저도 풀 수 없지만, 물레에 찔리게 되면 백 년 동안 잠을 자도록 바꿔놓을게요. 공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마법이 풀릴 거예요.” 왕과 왕비는 큰 슬픔에 빠졌어. 왕은 나라 안의 모든 물레를 모아 불에 활활 태워버렸어. 공주는 아름다운 소녀로 자랐어. 그러던 어느 날, 공주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탑을 발견했지. 탑 꼭대기에는 한 노인이 도르륵 도르륵 물레를 돌리고 있었어. “예쁜 아이야, 너도 해보지 않으련?” 호기심이든 공주는 물레를 만졌어. 그 순간 공주는 손가락을 콕 찔려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어. 탑 꼭대기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공주를 발견한 왕과 왕비는 큰 슬픔에 잠겼어. “공주가 마녀의 저주에 걸리고 말았어.” 왕과 왕비는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침대에 공주를 조심스럽게 눕혔어. 그런데 성 안에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 공주의 잠든 얼굴을 보던 왕과 왕비가 스르르 깊은 잠에 빠져버린 거야. 성 안의 모든 신하와 들판에서 일을 하던 백성들, 마구간의 말들도 모두 잠이 들었어. 오직 밝은 달빛만이 성을 영롱하게 비추었지. 그리고 성 주변의 나무들이 쑥쑥 자라더니 울창한 숲을 이루고 땅에서는 덤불이 돋아 울타리가 되었어. 순식간에 성의 모습이 사라지고 오직 공주가 잠든 성탑의 뾰족한 지붕만 보 지. 하지만 숲으로 뒤덮인 마법에 걸린 성과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어. 수많은 왕자들이 공주를 깨우기 위해 마법의 성으로 향했어. 하지만 성을 둘러싼 가시덤불을 헤쳐 나갈 수가 없었어. 잘라내면 낼수록 다시 돋쳐 왕자들을 돌돌 휘감아 잠재워버렸거든. 바람을 타고 온 먼지만이 이불이 되어 그들을 덮어주었지. 공주가 잠든 숲속의 성은 시간이 멈춘 채 백 년이 지났어.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한 용감한 왕자가 공주를 찾아 나설 결심을 했어. “내가 꼭 공주를 찾고 말 거야!” 왕자는 하얀 말을 타고 길을 떠났어. 왕자가 성에 다다를 무렵, 향긋한 바람이 솔솔 불더니 가시덤불에 장미꽃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어. 그리고 숲에 들어서자 덤불이 갈라지며 오솔길이 생겼지. 왕자는 오솔길을 따라가 공주가 잠든 방을 찾았어. 침대 위의 공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한눈에 반한 왕자는 공주의 볼에 입을 쪽 맞추었지. 그러자 공주는 눈을 깜박이며 오랜 잠에서 깨어났어. 순간 이상한 일이 생겼어. 온성을 뒤덮었던 먼지가 사르르 걷히고, 성 안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깨어나며 마법이 풀린 거야. 사람들은 모두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 준비에 바빴어. 하녀들은 성 모양의 케이크와 귀한 음식을 나르고, 악사들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지. 공주와 왕자는 장미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춤을 추며 원한 사랑을 맹세했단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사악한 마녀에게 마법이 걸려 백 년 동안 잠이 든 아름다운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 마법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예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던 왕과 왕비에게 귀여운 공주가 태어나요. 온 나라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고, 요정들은 저마다 공주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지요. 하지만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마녀는 화가 나서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는 해에 물레에 찔려 죽는 저주를 내려요. 그때 한 요정이, 죽는 것 대신에 용감한 왕자가 공주를 깨울 때까지 잠을 자도록 하지요. 백 년 동안 가시덤불에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성과 공주를 구하러 가는 용감한 왕자의 이야기는 사랑의 의미와 모험심, 의협심을 길러 줄 거예요. 마녀는 정말 있는 걸까요? 동화 속 마녀는 왜 모두 사악하고 못됐을까요? 마녀는 보통 사람을 괴롭히고, 마법을 걸어 저주를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농작물을 자라지 못하게 해서 한 해 농사를 망치게 한다고 하지요. 마녀는 모두 여성이에요. 대부분 기독교를 믿었던 중세 유럽에서는‘십자군 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겪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전쟁이 실패하자, ‘마녀 사냥’이라고 해서 혼자 사는 여자나 똑똑한 여자들을 이유 없이 마녀로 몰아 죽이기 시작했지요. 악마와 계약을 하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사악한 마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유럽에 구전되는 이야기 속 마녀는 모두 관심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미움만 받으니 불쌍하게 보이기도 해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속 마녀도 모든 사람들과 요정들이 초대 받은 공주의 생일 파티에 혼자만 초대를 받지 못했으니 화날 법도 하지요?
플랜더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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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 지방 어느 마을에 우유를 배달하는 할아버지와 손자 네로가 살았어요. 네로는 할아버지를 도와 수레를 밀었어요. “나이도 어린데 착하기도 하지.” 마을 사람들은 이런 네로를 매일 칭찬했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와 네로가 우유를 배달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그르렁." 네로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니 커다란 개가 쓰러져 있었어요. 네로는 할아버지와 함께 개를 정성껏 보살피고 ‘파트라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건강을 되찾은 파트라셰는 할아버지 대신 수레를 끌었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병이 들어 더 이상 우유배달을 할 수 없게 되자, 네로가 말했어요. “할아버지, 이제부터는 제가 파트라셰와 함께 우유를 배달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로는 파트라셰와 매일우유를 배달했어요. 그리고 우유배달을 마치면 꼭 성당에 들 지요. 하지만 네로는 성당에만 다녀오면 한숨을 푹 쉬었어요. 성당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많은데 꼭 보고 싶은 루벤스의 그림은 돈을 내야만 볼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네로가 방앗간 집 딸인 아로아와 파트라셰를 그려주고 있을 때였어요. 아로아아의 아버지가 나타나 말했어요. “아로아! 거지 녀석과 놀지 마라!” 네로는 그 말에 화가 나 다짐을 했어요. ‘올해 어린이 미술대회에 나가서 꼭 일등을 할 거야.’ 네로는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일이 끝나면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네로가 길에서 예쁜 인형을 주웠어요. “아로아에게 주면 좋아할 거야.” 네로는 아로아의 집 창문을 두드려 인형을 주었어요. 그런데 그때 아로아네 집창고에 불이 났어요. “불이야, 불!” 사람들이 아로아네 집 창고의 불을 끄기 시작했어요. 네로도 불을 끄는 것을 도왔지요. 하지만 아로아의 아버지가 네로를 잡고 소리쳤어요. “네로, 네짓이지?” 아로아의 아버지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고 소문을 냈어요. 그러자 네로에게 우유배달을 맡기던 사람도 줄었지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기지 않은 날, 할아버지마저 갑자기 숨을 거두었어요. 네로는 파트라셰와 펑펑 울었어요. 장례식을 치르고 나자, 네로와 파트라셰는 돈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쫓겨나고 말았어요. 하염없이 길을 떠돌던 네로는 크리스마스이브날, 파트라셰를 데리고 어린이 미술대회 발표장에 갔어요. 입상 발표날이었거든요. 일등이 발표되었어요. 하지만 네로의 그림이 아니었어요. 네로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이대로라면 파트라셰에게 먹을 것도 사줄 수 없으니까요. 눈길을 지나는데 파트라셰가 갑자기 왈왈 짖었어요. 그리고 눈을 파헤쳐 지갑을 찾았지요. “웬 지갑이지?” 네로가 지갑을 보자 안에는 아로아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고 돈이 들어있었어요. 아로아의 집 문을 두드리자 아로아의 어머니가 나왔어요. “이거 파트라셰가 길에서 찾아냈어요. 저 대신 제발 파트라셰를 돌봐 주세요.” 그리고 네로는 재빨리 뛰어나가버렸어요. 아로아의 아버지는 지갑을 받아 들고는 지난날을 후회했어요. “네로는 정직하고 착한 아이야.” 파트라셰는 네로가 나가버리자 네로를 찾으러 성당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네로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지요. “멍멍멍!” 파트라셰가 짖으며 뺨을 핥자, 네로가 깨어났어요. 그때 성당의 커튼 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었어요. 달빛은 루벤스의 그림을 비추고 있었지요. “오! 하느님, 저 그림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로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주르륵 흘렸어요. 이튿날 아침이 되었어요.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온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숨진 네로와 파트라셰를 보았어요. 그제야 사람들은 무척 안타까워했지요. “네로야, 좋은 곳으로 가렴.” 사람들은 네로와 파트라셰를 할아버지의 무덤 옆에 묻어 주었어요.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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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부의 어느 마을에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와 우애 좋은 네 자매가 살았어요. 첫째는 멋쟁이 메기, 둘째는 활달한 조, 셋째는 피아노를 잘 치는 베스, 막내는 쾌활한 에이미였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계셔 무척 가난했어요. 크리스마스 날 아침, 네 자매는 잠에서 깨어 깜짝 놀랐어요. 머리맡에 성경 책이 한 권씩 놓여있었거든요. 가난하지만 우린 바르게 살아야 해. 그래서 선물하는 거란다. 네 자매는 엄마의 말 에 마음이 뭉클했어요. 그리고 네 자매도 엄마에게 선물을 드리며 꼭 안아드렸어요. 곧이어 엄마가 말했어요. “지금 훔멜 부인이 아파서 누워 있다는구나. 아이들이 몹시 배고파하고 있을 거야. 아침 식사를 마련해서 훔멜 부인의 집으로 가자.” “좋아요!” 그렇게 네 자매와 엄마는 음식을 마련해 훔멜 부인의 집으로 갔어요. 훔멜 부인의 집에 도착한 네 자매는 땔감을 난로에 넣어 불을 지피고 아이들에게 따뜻한 아침밥을 먹였어요. “부인, 고마워요. 덕분에 저도 기운을 차렸어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님들 같아요.” 훔멜 부인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어요. 저녁때에야 집으로 돌아온 네 자매에게 기쁜 일이 생겼어요. 가정부인 한나 아주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신 거예요. “크리스마스 만찬이랍니다! 훔멜 부인 댁을 도운 것을 로렌스 씨가 듣고 이렇게 귀한 음식을 보내주셨어요.” 한나 아주머니의 말에 네 자매와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로렌스씨 댁에서 파티가 열렸어요. 네 자매도 파티에 초대되었지요. 그런데 조는 낡은 드레스가 부끄러웠어요. 그때 로렌스 씨의 손자인 로리가 다가와 말했어요. “드레스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아가씨는 충분히 예뻐요.” 조는 춤을 추고 난 뒤 로리와 무척 친해졌어요. 베스는 로렌스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슬리퍼를 만들어 선물했어요. 며칠 뒤, 베스의 집에는 멋진 피아노와 편지 한 통이 왔어요. 베스, 네가 선물해 준 슬리퍼는 내 발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구나. 착한 베스에게 이 피아노를 선물하마. 그런데 얼마 뒤,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어요. 전쟁터에서 싸우던 아버지가 무척 편찮으시다는 거예요. 엄마는 쓰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떠나기로 했어요. 로렌스 씨는 엄마를 찾아와 네 자매를 보살피겠다고 약속했지요. 하지만 떠나려니 돈이 부족했어요. 그때 조가 엄마에게 돈을 내주었어요. “어머! 이게 무슨 돈이니?” 엄마가 놀라 자조는 모자를 벗었어요. 조의 탐스럽고 긴 머리는 싹둑 잘려있었지요. “머리카락을 팔았어요. 하지만 머리카락은 또 자라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를 본 엄마와 자매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네 자매는 엄마가 안 계시는 동안 서로 도우며 열심히 살았어요. 로렌스 씨가 매일 다녀가 무서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네 자매는 어느 날부터 점점 서로 돕지 않게 되었어요. 가끔 훔멜 부인을 돕기도 했지만 서로 미루다가 결국 베스 혼자서만 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베스가 앓아눕게 되었어요. 훔멜 부인의 아기에게서 병이 옮은 거예요. "오! 가엾은 베스. 우리가 잘못했어요." "제발 베스를 살려주세요." 자매들은 그제야 잘못을 뉘우치며 기도했어요. 조는 의사선생님을 모시러 가고, 메기는 베스를 정성껏 간호했지요. 베스는 밤새 고열로 끙끙 앓았어요. 하지만 자매들의 정성스런 보살핌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 아침이 되자 병이 나았지요. 그리고 아버지도 엄마와 함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그렇게 여섯 식구는 오랜만에 모여 웃음꽃을 피웠답니다.
백조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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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아주 먼 옛날, 독일의 어느 성에 지크프리트라는 왕자의 생일 잔치가 열렸어요. 왕이 말했지요. “왕자가 스무 살이 되었으니 이제 결혼해야 할 것이오. 오늘 온 아가씨 중 한 사람과 결혼할 것이니,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즐기도록 하시오.” 하지만 왕자는 모든 것이 지루하기만 했어요. 무도회 참석도 사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일 뿐이었지요. 왕자는 살금살금 성 밖으로 나와 숲속의 호숫가로 도망쳤어요. 잔잔한 호숫가에는 일곱 마리의 아름다운 백조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백조가 뭍으로 나오자, 하나둘씩 아름다운 여자로 변하는 거예요! 왕자는 그중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어요. “아가씨, 왜 백조로 변해 계십니까?” 아가씨는 깜짝 놀랐다가 슬픈 눈빛으로 이야기했어요. “저는 오데트라는 공주예요. 마법사 로트 바르트의 청혼을 거절했다가 이렇게 낮에는 백조로 있고, 밤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저주를 받았답니다. 나머지 여섯 명은 저의 시녀들이에요.” 오데트 공주의 말을 듣고, 왕자가 물었어요. “그 마법은 어떻게 풀 수 있습니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청혼을 받으면 풀린답니다.” 그때 하늘에 올빼미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들었어요. “오! 왕자님, 마법사 로트 바르트예요!” 올빼미로 변신한 로트 바르트는 거칠게 왕자를 공격했어요. 여섯 명의 시녀들이 왕자를 보호하며 쫓아버렸지요. “오데트 공주님, 내일 제 신붓감을 찾는 무도회가 열릴 거예요. 공주님이 오신다면 제가 공주님께 청혼하겠습니다.” 왕자는 공주와 약속하고 성으로 돌아갔어요. 다음날, 또다시 무도회가 열렸어요. 왕자는 아름다운 오데트 공주만을 기다렸어요. 밤 열두시가 되자, 한 아가씨가 멋진 기사와 함께 들어왔어요. 까만 벨벳 드레스에 백조 모양의 까만 머리핀을 꽂고 있었어요. 왕자는 오데트 공주라고 생각하고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어요. “이 아름다운 공주가 제가 결혼할 사람입니다!” 그때 갑자기 깜깜해지더니, 창밖으로 하얀 백조 한 마리가 훨훨 날아가는 것이 보 어요. 그리고 품 안에 있던 아가씨는 흉측하게 변해버렸지요. “하하! 어리석은 왕자!" "그 아가씨는 내 딸 오딜이야. 이미 내 딸과 결혼 선포를 했으니 마법을 풀 수 없지!” 오딜의 기사로 변장해 있던 로트 바르트가 말했어요. 왕자는 허겁지겁 호수로 달려가 오데트를 붙잡았어요. “제가 마법사 로트 바르트를 죽이겠습니다. 그리고 공주님과 결혼할 거예요.” 하지만 오데트 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마법사를 죽이면 저희는 마법을 풀 수 없답니다. 이대로 결혼한다면 왕자님은 불행해질 거예요.” 그때 다시 올빼미로 변신한 로트 바르트가 날아와 왕자의 다리를 쪼았어요. 왕자의 다리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렀지요. “으아악!” 그런데 왕자의 셔츠에서 십자가 목걸이가 튀어나오자 올빼미의 눈이 멀어버렸어요. 그 틈을 이용해 왕자는 칼로 올빼미를 찔러 죽였어요. 마법사 로트 바르트가 죽자, 오데트는 더 이상 마법을 풀 길이 없어졌어요. “이제 저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요. 이대로 결혼하면 왕자님은 불행해지겠죠.” 오데트 공주는 절망하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어요. 그러자 놀란 지크프리트 왕자도 공주를 따라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어요. 드디어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어요.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호수가 반짝반짝 빛났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시녀들의 몸에 햇살이 닿았지만 아무도 백조로 변하지 않았지요. “우리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어!” 하지만 시녀들은 슬픔에 가득 찼어요. 오데트 공주와 지크프리트 왕자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어버렸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둘의 진실한 사랑에 하느님은 공주와 왕자를 살려주었어요. “지크프리트 왕자님과 오데트 공주님이 깨어나셨어!” 공주와 왕자가 살아난 것을 안 시녀들은 모두 기뻐서 춤을 추었지요. 그리고 둘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백조의 호수는 지크프리트 왕자와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한 오데트 공주의 사랑 이야기예요. 왕자는 자신의 신붓감을 찾는 무도회가 지겹기만 해요. 그래서 몰래 호숫가에 갔다가 마법사 로트 바르트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 밤에는 사람으로 돌아오는 마법에 걸린 오데트 공주를 만나게 되지요.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약속하면 마법이 풀린다는 말에, 왕자는 다음날 청혼을 하기로 하지만 로트 바르트의 계략으로 실패하고 말아요. 이에 화가 난 왕자는 로트 바르트를 죽이지만, 공주는 절망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아요. 왕자도 따라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요. 하지만 둘의 진실한 사랑에 하느님이 둘을 다시 살려준답니다.
개구리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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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 어느 성에 예쁜 공주가 살았어. “아, 오늘은 정원에서 공놀이해야지!” 공주는 정원으로 가 황금 공을 높이 던졌다가 받았어. 황금 공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이 났지. 그런데 실수로 오래된 라임 나무 밑 연못에 공을 퐁당 빠뜨리고 말았어! “어머! 어쩜 좋아!” 공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어. 그때 연못에서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어. 그리고 연못가로 올라와 공주에게 물었어. “공주님, 왜 울고 있어요?” “황금 공을 연못에 빠뜨렸어.” 그러자 개구리가 말했어. “공주님, 제가 공을 찾아 드리면 저와 친구가 돼 주실래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잔다고 약속하세요!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주셔야해요.” 개구리의 말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어. 개구리는 연못 속으로 퐁당 뛰어들어 입에 황금 공을 물고 나타났어. “어머! 내 황금 공!” 공주는 개구리에게서 황금 공을 확 빼앗으며 말했어. “고마워! 하지만 아까 한 약속은 취소야. 사람이랑 개구리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러자 놀란 개구리는 폴짝폴짝 뛰면서 공주를 향해 소리쳤어. “공주님, 약속을 지키셔야죠. 개굴개굴!” 하지만 공주는 이미 숲을 벗어나 성으로 달아나고 있었지. 그날 저녁, 개구리는 예쁜 꽃을 들고 성으로 가 소리쳤어. “공주님! 저와 친구가 되어 주세요. 개굴개굴!” 그 소리를 듣고 공주가 달려 나왔어. “내가 정말 너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징그러운 개구리와 밥을 먹다니 말도 안돼!” 그때 임금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어. “공주야, 무슨 일이냐?” 공주는 개구리가 숲에서 황금 공을 찾아 준 일과 장난으로 했던 약속을 이야기했지. “공주야,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단다.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하거라.” 공주는 할 수 없이 개구리와 식탁에 앉았어. “우아, 잘 먹겠습니다. 개굴개굴!” 개구리는 푸른 완두콩과 당근 요리를 오독오독 맛있게 먹었어. 하지만 공주는 입술만 삐죽 내밀 뿐이었어. 식사를 마치자 개구리가 말했어. “이제 공주님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너무 졸려요.” 공주는 징그러운 개구리를 당장 내쫓고 싶었지만, 할 수 없이 개구리와 함께 방으로 올라갔어. 잠자리에 들자 개구리가 말했어. “공주님, 이제 잘 자라고 입맞춤해 주세요.” “뭐라고?” 공주는 깜짝 놀라 소리쳤어. “황금 공만 찾아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기로 했잖아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임금님께 이를 거예요. 개굴개굴!” 한참을 고민하던 공주는 할 수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개구리에게 재빨리 입을 맞추었어. 쪽!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개구리가 늠름하고 잘생긴 왕자로 변한거야! 공주는 화들짝 놀랐어. “나는 이웃 나라의 왕자예요. 나쁜 마녀의 마법에 걸려 개구리가 되었지만, 공주의 입맞춤으로 마법에서 풀려났어요.” 공주는 개구리에게 못되게 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왕자에게 용서를 빌었어. 그 뒤, 개구리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로, 형은 야코프(Jacob Grimm 1785∼1863)이고 동생은 빌헬름(Wilhelm Grimm 1786∼1859)이에요. 형제가 모두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를 지냈으며, 그들의 전문 분야인 언어학의 영역에서는 형야코프의 업적이 크나 그림동화를 만드는 데는 동생 빌헬름이 더 큰 역할을 했어요. 그림동화의 원제목은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예요. 개구리왕자는 그림동화에 실려있는 동화로 약속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이야기예요. 공주는 연못가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황금 공을 연못에 빠뜨렸어요. 그리고 개구리가 공을 가져다주면서 둘의 인연이 맺어지지요. 공주는 황금 공을 꺼내기 위해 개구리와 장난으로 약속하지만, 개구리는 그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해요. 마법에 걸린 이웃 나라 왕자였기 때문이지요. 약속에는 나라와의 약속, 사회와의 약속, 학교와의 약속등 공적인것과 친구와의 약속같은 사적인 것이 있어요. 공적인 약속은 의무에 속하지만, 사사로운 개인의 약속은 약속전에 지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약속해야 해요. 유럽에서는 개구리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데,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두꺼비로 나타난다고도전해지고, 그리스에서는 집에 두꺼비나 개구리가 들어오면 좋은 징조로 생각했다고 해요. 그래서 일부러 두꺼비나 개구리를 잡아서 애지중지 키우기도 했지요. 우리나라에도 개구리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요. 알아볼까요?
크리스마스 캐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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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날, 스크루지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일을 했어요. 직원인 보브가 추워서 난로를 피우려 하자, 스크루지가 말했어요. “석탄값은 네 월급에서 뺄 거야.” 그 말에 보브는 다시 자리에 앉았어요. 그때 스크루지의 조카 프레드가 사무실을 찾아왔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집에서 파티를 할 거예요. 꼭 오세요.” 하지만 스크루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어요. “크리스마스가 뭐 별거라고. 싫다!”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에 들뜬 사람들이 왠지 불편했어요. 그날 밤 스크루지는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죽은 친구인 마레가 온몸에 쇠사슬을 친친 묶고 나타났어요. “마레, 왜 몸에 쇠사슬을 묶고 있어?” “살아있을 때 남을 돕지 않아서 그래. 오늘 자네에게 세 명의 유령이 찾아올 거야. 그들의 말을 잘 듣게.” 그렇게 마레는 이상한 말만 남기고 사라졌어요. 스크루지가 다시 잠이 들려는 무렵, 한 유령이 나타났어요. “나는 과거의 유령이라네. 날 따라오시게.” 유령이 데리고 간 곳에는 외롭게 앉아있는 젊은 날의 스크루지와 여동생이 보였어요. “여기는 제 고향이에요. 내 죽은 여동생. 저 여동생의 아들이 프레드인데 잘 보살펴 주지 못했어요.” 이번에는 런던의 한 상점 앞으로 갔어요. “여기는 제가 젊었을 때 일하던 곳이에요. 주인 페지 위크 씨가 보이네요. 크리스마스이브 때 무도회를 열었어요. 돈을 주고서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이죠.” 이번에는 한 공원으로 스크루지를 데리고 갔어요. 스크루지와 울고 있는 아가씨가 보였지요. “내가 사랑하던 여인이에요. 돈이 아까워 결혼을 하지 못했어요.” 유령은 스크루지가 아가씨와 결혼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지를 보여주었어요. 아이들이 스크루지에게“아빠!”라고 부르며 안겼어요. “아아, 그땐 내가 어리석었어요.” 스크루지는 괴로워서 눈을 꼭 감아버렸어요. 다시 시계 종이 댕 울리자, 또 다른 유령이 나타났어요. “나는 현재의 유령이라오. 따라오시오.” 스크루지는 가난한 보브 가족의 집으로 갔어요. 모두 크리스마스 기도를 올리고 있었지요. 보브 가족의 식탁은 초라했어요. 하지만 어느 하나 투정 부리지 않았지요.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스크루지 씨에게도 축복을!” 그러자 부인이 말했어요. “스크루지 씨의 행복은 빌고 싶지 않아요.” 보브 가족의 식탁은 초라했지만 아무도 투정 부리지 않았어요.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스크루지 씨에게도 축복을!” 그 말에 부인이 얼굴을 찡그리자 보브가 말했어요. “스크루지 씨도 불쌍한 사람이오. 이런 날 혼자 있을 거예요.” 보브의 말에 스크루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밖으로 나왔어요.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보니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어요. 어느 집 앞에서는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났지요. 그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그런데 창에 비친 스크루지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있었어요. “아니, 내 머리카락이 왜 이렇습니까?” 바로 그때, 미래의 유령이 나타났어요. 유령은 스크루지를 시내로 데리고 갔어요. “어젯밤에 스크루지 감이 죽었다네. 우리라도 장례식장에 가줄까?” “하하! 도시락이라도 나오면 가보지. 살았을 때 인정을 베풀었다면 장례식장이 그렇게 초라하지도 않았을 텐데.” 스크루지는 유령의 다리를 잡고 물어보았어요. “내가 죽었다고요? 게다가 내가 죽은걸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다니. 유령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때 눈을 떠보니 자신의 방이었어요. “휴, 내가 살았어.” 스크루지는 창문을 활짝 열었어요.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아있었지요. 스크루지는 칠면조를 사서 보브의 집에 보내주었어요. 저녁에는 조카 프레드의 집에 가 파티를 즐겼지요. 그날 이후, 구두쇠였던 스크루지는 자상한 할아버지가 되었고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정글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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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고 습한 정 에서 늑대 한 마리가 주위를 경계하며 사냥감을 찾고 있었어요.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낯선 울음소리에 늑대는 살금살금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다가갔어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풀숲을 헤치자 놀랍게도 아기가 혼자 울고 있었어요. 늑대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굴로 데려왔어요. 그날 이후 아기는 모글리라 불리며 함께 살았지요. 어느 날, 늑대 무리의 대장인 아키라가 동물 회의를 소집했어요. “사람은 매우 영리해. 모글리도 언젠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거야. 그러니 이 아이를 정글의 아이로 키우자.” 큰 곰 발루와 검은 표범 받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글리에게 정글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모글리는 발루와 바기라의 가르침을 받고 지혜로운 소년으로 자랐어요. 원숭이처럼 나무를 탈 수 있고, 함정에 빠진 새끼 늑대를 구할 줄도 알았지요. “정말 잘했어, 모글리! 넌 우리의 형제야. 위험에 빠졌을 땐‘나는 너와 피를 나눈 형제다!’ 라고 외쳐.” 모글리는 바기라가 가르쳐 준 말을 따라 했어요. "이 말만 기억해 두면 어떤 짐승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어느 날, 모글리가 발루와 바기라에게 말했어요. “원숭이들이 나더러 자기들의 대장이 되어 달래.” “그런 말 믿지 마. 원숭이들은 거짓말쟁이야.” 그런데 며칠 뒤, 모글리는 낮잠을 자다가 원숭이들에게 납치되고 말았어요. 놀란 모글리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 치르에게 외쳤지요. “나는 너와 피를 나눈 형제다!” 그 말을 듣고 치르가 쏜살같이 날아오자, 모글리가 말했어요. “발루와 바기라에게 내가 원숭이들에게 붙잡혔다고 말해줘.” 원숭이들은 오래전에 사람들이 만든 신전이 있는, 정글의 깊숙한 곳으로 모글리를 데려갔어요. 한편, 발루와 바기라는 모글리를 구하기 위해 뱀 카아를 찾아갔어요. “카아, 우리를 도와줘. 원숭이들은 너만 보면 벌벌 떨잖아.” 발루와 바기라, 카아는 신전으로 갔어요.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때를 보아 공격하기로 했지요. 바기라가 먼저 원숭이 무리 속으로 달려들었어요. 바기라를 본 원숭이들은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그러자 대장 원숭이가 외쳤어요. “모두 함께 검은 표범을 공격하라!” 바기라가 위험에 빠지자 모 리가 외쳤어요. “바기라, 연못으로 들어가! 원숭이들은 물을 무서워해.” 이번에는 발루가 큰소리를 내며 원숭이들을 내동댕이쳤어요.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아 혼자서는 원숭이들을 당해낼 수 없었지요. 바기라는 발루가 궁지에 몰리자 크게 외쳤어요. “나는 너와 피를 나눈 형제다!” 그러자 카아 가신 전의 벽을 스르륵 기어올라와 원숭이 무리를 모두 혼쭐냈어요! “카아, 네가 원숭이 무리를 다 쫓아버렸어!” 발루와 바기라가 말했어요. 그런데 모글리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때 모글리가 탑 안에서 소리쳤어요. “얘들아! 나 여기 있어. 탑에 갇혀 나갈 수가 없어!” 그러자 카아가 갈라진 벽을 꼬리로 쾅 내리쳐 부수고 모글리를 구했어요. “카아, 고마워!” 그렇게 정글의 아이 모글리는 무사히 구출되었어요. 어느덧 모글리는 청년이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늑대 무리와 붉은 개 무리의 큰 싸움으로 아키라가 다치고 말았어요. “모글리, 넌 내 아들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거라!” 아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모글리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요. 모글리는 인간 세상에서 가족을 찾았어요. 그리고 정글의 모든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했어요. “우린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우리가 네 친구라는 것을 잊지 마!” 발루와 바기라, 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모글리는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정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자연을 아끼며 살았답니다. 동물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아동소설로 영국의 작가인 루이야드 키플링의 작품이에요. 정글에 버려진 인간의 아이 모글리는 늑대에게 보살핌을 받아요. 흑표범 바기라, 큰 곰 발루에게 정글에서 사는 법을 배우며 친하게 지내지요. 사악한 원숭이들에게 납치되었을 때에도 동물 친구들이 모글리를 구출하고요. 모글리 또한 의리를 지키며 친구들을 보호해요. 정글북은 여러 편 써진 작품이에요.
미운 아기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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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아기 오리들이 태어났어. 그런데 알 하나가 오래도록 깨지 않아 엄마 오리가 콕콕 쪼고 나서야‘톡’하고 깨졌어. 하지만 알에서 깨어난 오리는 생김새도 다르고 울음소리도 이상했어. 그래서 모두들 막내 오리를 미운 아기 오리라고 불렀어. 아기 오리들은 모두 미운 아기 오리를 싫어했어. 미운 아기 오리가 모이를 먹으려 하면 다른 오리들이 다가와 먹지 못하게 콕콕 쪼아댔지. “넌 차라리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게 낫겠다!” 미운 아기 오리는 형제들이 구박하자 무척 속이 상했단다. 외톨이가 된 미운 아기 오리는 집을 떠나기로 했어. 미운 아기 오리는 걷고 또 걸었지. 어느 날은 사냥개가 미운 아기 오리를 보고는 킁킁 코를 벌름거렸어. ‘앗,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런데 다행히도 사냥개는 너무 못생겼다며, 기러기를 물고 그냥 가버렸어. 그러던 어느 날 미운 아기 오리는 숲속을 헤매 다 낡은 집을 발견했어. 그 집에는 할머니가 암탉과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어. “얘야, 같이 살자꾸나.” 할머니는 미운 아기 오리에게 모이를 주고, 볏짚을 깐 헛간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지. 하지만 한 집에 사는 고양이와 암탉은 미운 아기 오리를 괴롭히기만 했어. 틈만 나면 콕콕 쪼며 구박을 했지. “안되겠어. 다시 이 집을 떠나야겠어.” 미운 아기 오리는 할 수 없이 다시 집을 나왔어. 미운 아기 오리는 다시 숲을 헤매며 홀로 지냈어. 겨울이 되자 미운 아기 오리는 호수에서 하늘을 훨훨 나는 백조 떼를 보았어. ‘아, 정말 아름다워. 나도 저렇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운 아기 오리는 하늘을 나는 백조가 무척 부러웠어. 추위가 심해지자 미운 아기 오리는 지쳐 쓰러지고 말았어. 다행히 나무꾼이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왔지. 그런데 식탁 위의 쥐들을 쫓으려다가, 오히려 식탁을 엉망으로 만들었지 뭐야! “이런, 못된 것! 어서 나가!” 미운 아기 오리는 나무꾼의 집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어. ‘왜 날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지?’ 미운 아기 오리는 평생 혼자 살기로 했어. 낮엔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밤이 되면 낙엽을 깔아놓은 바위틈에서 잠을 잤지. 봄이 되자 미운 아기 오리도 훌쩍 자랐어. 어느 날 힘껏 날갯짓을 해보자 몸이 붕 뜨면서 하늘을 날게 되었지. 아래에는 푸른 풀밭이 펼쳐 보이고, 맑은 호수도 보였어.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경치가 아름답구나!’ 미운 아기 오리는 호수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어. 그곳에는 백조들이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있었어. ‘아, 정말 예쁘다.’ 미운 아기 오리는 부러운 듯 백조들을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어. 하지만 백조들에게 놀림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물에 비친 모습은 미운 아기 오리가 아닌 아름다운 백조였어. “내가 백조가 되었어!” 그때 백조들이 다가왔어. “친구야, 같이 놀자.” “예쁜 백조야, 반가워!” 맞아, 사실 미운 아기 오리는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던 거야. 아름다운 백조가 된 미운 아기 오리는 그 뒤로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단다. 미운 아기 오리는 인내가 지니는 힘과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예요. 유난히 크고 보기 싫게 태어난 미운 아기 오리는 형제들에게 구박을 받아요. 그래서 홀로 먼 길을 떠나지요. 하지만 미운 아기 오리는 괴롭고 슬픈 시절을 잘 참고 견뎌낸 끝에 어느 봄날 백조가 되어 훨훨 날아가요. 이 이야기는 안데르센이 자신의 작품이 좋은 평을 받지 못할 때, 조용히 참고 이겨내던 지난날을 돌이키며 쓴 작품이라고 해요. 비록 가난하게 자랐지만, 따뜻한 품성을 지녔던 안데르센이 쓴 이야기 중에 하나이지요. 덴마크의 동화작가이자 소설가(1805~1875)로 오덴세에서 태어났어요. 열네 살 되던 해에 코펜하겐으로 떠난 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어요. 즉흥 시인(1835)이 독일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그의 이름이 유럽 전체에 알려졌지요.
피노키오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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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목수인 제페토 할아버지는 혼자서 외롭게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자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나무로 뚝딱뚝딱 나무 인형을 만들었어요. 나무 인형은 곧 살아 숨 쉬듯 움직임였어요. “하하! 넌 내 아들이란다. 이름은 피노키오야.” 피노키오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외투를 팔아 피노키오에게 책도 사주고 용돈까지 주었어요. 그런데 피노키오는 학교에 가다가 극장의 아저씨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극장에 오세요. 재미있는 인형극을 한답니다!” 피노키오는 할아버지가 준 용돈으로 극장표를 샀어요. 그리고 인형극을 보다 가신이 나서 무대로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이런! 내 인형극을 망치다니, 넌 누구냐?” 단장은 피노키오를 혼내다가 달달 떠는 피노키오가 문득 가여웠어요. “썩 꺼져!” 단장이 돈을 주며 피노키오를 내쫓자 못된 여우와 고양이가 다가왔어요. “얘야, 저 나무 밑에 돈을 심으면 나무에 돈이 주렁주렁 열린단다.” “정말요? 그러면 이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생기겠네요!” 그 말에 피노키오는 나무 밑에 돈을 심었어요. 하지만 그건 모두 여우와 고양이의 속임수였어요. “하하! 너 바보구나. 돈을 심는다고 나무에서 돈이 열리다니!” 둘은 피노키오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돈을 꺼내 가버렸어요. “엉엉! 살려주세요!” 그때 천사가 피노키오를 구해주며 물었어요. 피노키오는 할아버지 몰래 극장에 간 이야기는 빼놓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러자 갑자기 피노키오의 코가 쑥 길어졌어요. “천사님, 이제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그제야 코가 원래대로 돌아왔지요. 다음날부터 피노키오는 열심히 학교에 다니기로 했어요. 하지만 친구 로메오의 이야기에 홀딱 빠지고 말았어요. “나랑 서커스 구경하러 가자! 정말 재미있을 거야.” 피노키오는 학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서커스를 구경하러 갔어요. 그런데 서커스를 보던 피노키오가 갑자기 당나귀로 변하고 말았어요. 사실 서커스단장은 못된 마법사였던 거예요. 피노키오는 며칠 동안 강제로 서커스를 해야 했어요. 그런데 묘기를 부리다가 그만 다리가 뚝 부러지고 말았지요. “이런, 이제 쓸모가 없겠어. 당나귀 가죽으로 북을 만드는 사람에게 팔아버려야지!” “가죽을 벗기려면 물에 퉁퉁 불려야겠군.” 북을 만드는 사람은 피노키오를 바다에 던져두었어요. 그런데 물고기 떼가 피노키오의 살을 뜯어 먹어 피노키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커다란 고래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지요. ‘이제 어쩌지. 아빠도 볼 수 없을 거야.’ 피노키오는 뚝뚝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고래 배속에 제페트 할아버지가 계시지 뭐예요! “오! 피노키오. 너를 찾으러 바다에 왔다가 이렇게 되었지 뭐니.” 피노키오는 앞으로 착한 아들이 되기로 약속했어요. 제페트 할아버지와 피노키오는 고래 배속에서 나가기 위해 불을 피웠어요. 연기가 가득 차자 고래는 쿨럭쿨럭 기침을 했어요. 그리고 둘은 고래가 뱉어내는 물에 휩쓸려 무사히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육지로 나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피노키오가 진짜 사람이 된 거예요. “피노키오,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거야.” “감사합니다. 천사님!” 그 뒤로 피노키오는 제페트 할아버지에게 효도를 하며 착하게 살았답니다. 피노키오는 어린이신문에 연재되었던 동화예요. 연재가 끝난 뒤 이야기를 모아 출판해 지금의 피노키오가 되었지요. 피노키오는 외로운 제페트 할아버지가 나무로 만든 인형이에요. 천사가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 사람처럼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피노키오는 매일 할아버지의 말도 안 듣고 속만 썩인답니다. 이런 피노키오를 언제나 기다려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건 제페트 할아버지뿐이지요. 피노키오의 모험을 통해 부모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동화로 피노키오가 진짜 사람이 되는 장면은 감동을 선사한답니다. 카를로 콜로디(Collodi, Carlo) 이탈리아의 아동 문학가(1826˜1890)로 본명은 카를로 로렌치니이며, ‘콜로디’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탈리아 피렌체의 작은 마을 이름이랍니다. 젊은 시절부터 정치 풍자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알렸고, 교육에 관심이 많았지요. 1870년대 후반 샤를 페로의 장화신은 고양이 등 프랑스의 옛이야기를 이탈리아 어로 옮겨 찬사를 받은 뒤 용기를 얻어 이때부터 직접 동화를 쓰기 시작했어요. 로마 어린이 신문에 연재한 꼭두각시 인형 이야기가 인기를 끌면서 이 이야기를 토대로 1883년에 피노키오의 모험을 출간했어요. 카를로 콜로디의 작품으로는 마키에트, 쟌네티노의 이탈리아 여행 등이 있답니다.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인형극 마리오네트 머리와 몸, 팔과 다리의 관절마다 실을 묶어 조정하는 인형극을 ‘마리오네트’라고 해요. 연결한 실을 손으로 조절하며 극을 펼치지요. 유럽에서는 마리오네트 인형극이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대제의 전쟁 서사극을 주로 공연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신앙을 고무시키기 위한 극에서 점차 재미를 위한 극으로 변화되기도 했어요. 지금도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등에는 세계적인 인형 극단이 있을 정도이지요.
호두까기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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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크리스마스이브, 마리는 남동생 프리츠와 함께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엄마와 아빠가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 계셨거든요. 그때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요. 시계 기술자 드로셀마이어 아저씨가 온 거예요. 드로셀마이어 아저씨가 들어오자 마리와 프리츠가 물었어요. “아저씨, 크리스마스 선물 가져오셨어요?” “기다리렴. 아직 선물 받을 시간이 안 되었단다. 대신 기다리는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마.” 아저씨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옛날에 필리파트라는 예쁜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 궁궐에 쥐가 뜰끓는게 걱정거리였단다. 그래서 시계 기술자에게 쥐덫을 만들도록 해, 여왕 쥐와 머리 일곱 달린 대왕 쥐만 빼고 모든 쥐를 잡았지. 화가 난 여왕 쥐는 공주에게 마법을 걸어 못생긴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어. 프리츠가 받은 선물은 장난감 병정들이었고. 마리가 받은 선물은 우스꽝스러운 호두까기 인형이었어요. 그런데 프리츠가 호두를 인형의 입속에 넣고 억지로 깨뜨리려다가 인형의 이를 깨뜨리고 말았어요. 마리가 울음을 터뜨리자, 드로셀마이어 아저씨가 말했어요. “울지 말렴. 내일 와서 고쳐주마.”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이 가엾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두운 거실로 내려가 호두까기 인형을 찾다가, 시계 위에 앉아있는 드로셀마이어 아저씨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갑자기 수많은 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쥐들이 찍찍거리자 마리는 조그만 인형처럼 작아져 버렸어요. 마리가 소리를 지르려 하자 벽장 속에서 호두까기 인형이 뛰쳐나왔어요. 프리츠의 장난감 병정들도 호두까기 인형의 뒤에 섰어요. 장난감들과 쥐들의 전투가 시작된 거예요! 호두까기 인형은 대왕 쥐와 맞서게 되었어요. 마침 호두까기 인형이 위험에 처하자 마리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대왕 쥐에게 힘껏 던졌어요. 대왕 쥐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호두까기 인형은 재빨리 대왕 쥐를 칼로 푹 찔렀어요. “아가씨,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장난감 나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마리의 손을 잡고 쿠키로 만든 다리를 건넜어요. 장난감들은 마리를 위해 화려한 잔치를 열었어요. “사랑스러운 아가씨. 저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마리는 행복한 듯 호두까기 인형과 춤을 추었어요. 하지만 두 눈을 떴을 때. 마리는 침대 속에 누워있고 엄마가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마리는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을 엄마에게 이야기했어요. “참 멋진 꿈을 꾸었구나. 하지만 이제 일어나렴. 곧 드로셀마이어 아저씨가 오실 거야.” 아저씨가 오신다는 말에 마리는 얼른 거실로 내려가 호두까기 인형을 찾았어요. 마리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호두까기 인형을 두 팔로 꼭 안았어요. “만약 네가 마법에 걸려도 난 너를 사랑할 거야.” 마리가 호두까기 인형에게 속삭였어요. 바로 그때 쾅 소리와 함께 호두까기 인형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마리야, 드로셀마이어 아저씨가 조카인 프레드릭과 함께 오셨단다. 어서 와서 인사드리렴.” 프레드릭을 본 마리는 마침내 호두까기 인형의 마법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년이 흐른 뒤, 마리와 프레드릭은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독일의 작가 호프만의 호두까기와 쥐의 임금님을 원작으로, 차이콥스키의 발레곡으로 더 유명한 동화예요. 크리스마스 날 드로셀마이어 씨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마리가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꿈속에서 쥐의 대군을 물리치고 장난감 나라에 가는 환상적인 이야기이지요. 발레곡으로 더 유명한 이 이야기는 장난감 나라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무용이 가장 멋있어요. 러시아는 동유럽에 있는 나라로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예요. 땅이 넓어서 자원이 무척 풍부하지요. 하지만 우랄 산맥과 같은 험준한 산맥이 있고, 사막도 있는 등 땅이 척박하고 날씨가 무척 추워서 농사는 잘 짓지 않아요. 러시아는 예술가가 많이 배출된 나라이기도 해요.
빨간 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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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번리 마을에 매슈와 마릴라라는 농부 남매가 살았어요. 누이동생인 마릴라는 오빠 매슈가 늙어가자 걱정이 되었어요. “오빠, 농사일을 도울 사내아이를 입양해요." "이제 혼자서는 무리예요.” 마릴라는 스펜서 부인에게 사내아이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다음날, 기차역에는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많은 여자아이가 와있었어요. “안녕하세요? 고아원에서 온 앤이라고 해요!” 매슈는 어리둥절했지만 앤에게 집안일을 시키며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하지만 마릴라는 다시 사내아이로 바꾸려 했지요. “흑흑, 제가 싫으시군요!” 앤은 눈물을 펑펑 흘렸지만 마릴라는 어쩔 수 없었어요. 농사를 도울 사내아이가 필요했으니까요. 마릴라는 앤을 데리고 스펜서 부인을 찾아갔어요. 그때 마침 일할 아이를 구하러 온 부인이 앤을 보고 억세게 끌었어요. “네가 좋겠다! 우리 집으로 가자!” 그러자 앤은 잔뜩 겁을 먹었어요. 그 모습을 본 마릴라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앤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매슈와 마릴라는 앤을 친딸처럼 돌보기로 했어요. 때가 되자 학교도 보냈지요. 앤은 성격이 쾌활해 금방 친구들을 사귀었고 이웃에 사는 다이애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어요. 반면에 같은 반 친구 길버트는 앤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놀렸어요. “이 빨간 머리야!” “뭐라고? 너 지금 빨간 머리라고 했어?” 앤은 화가 나서 책으로 길버트를 때렸어요. 고아원에서 빨간 머리라고 매일 놀림을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화가 난 앤은 문을 확 열고 말했어요. “아주머니는 남의 흉만 보는 마녀같이 생겼어요!” 앤은 사고를 치기도 했어요. 린드 부인이 놀러 왔던 날이었어요. 앤이 우연히 마릴라와 린드 부인이 하는 얘길 들었어요. “애가 너무 못생긴 거 같아. 주근깨도 많고, 머리는 불이 난 것처럼 빨갛고!” 하지만 잠시 뒤, 앤은 먼저 린드 부인에게 사과를 했어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에요.” 그러자 린드 부인도 앤의 손을 잡으며 말했어요. “아니다. 내가 먼저 잘못했구나. 미안하다, 앤.” 마릴라는 앤을 심하게 혼냈어요. “어른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어서 사과하지 못하니?” “싫어요! 그분이 사과하지 않으면 저도 안 할 거예요!” 또 어느 날, 앤은 장난으로 다이애나에게 포도주를 먹인 적도 있어요. “앤, 이걸 마시니까 어지러워. 얼굴도 화끈거리고.” 이 일로 앤은 다이애나의 엄마에게 혼났지만 매슈와 마릴라는 이런 앤을 사랑했어요. 사내아이 못지않게 농사일도 거들고, 집안일도 척척해냈으니까요. 앤은 소녀가 되어서도 엉뚱한 일을 저질 어요. 앤이 물감 장수에게 머리색을 바꿔달라고 한 거예요. 하지만 막상 물들이고 보니, 초록색이 되어버렸어요! “분명히 금발로 바꿔준다고 했어요. 엉엉!” 매슈와 마릴라는 울고 있는 앤의 머리를 잘라주며 깔깔 웃었지요. 앤이 숙녀가 되자, 매슈와 마릴라는 앤을 대학에 보냈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는 앤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거든요. 그해 앤은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어요. 빨간 머리채를 잡아당겼던 길버트도 함께였지요. 어느 날 앤은 학예회에서 시 낭독자로 뽑히게 되었어요. 매슈와 마릴라도 초대되었지요. 앤이 무대에서 자 누군가 외쳤어요. “공주님 같아!” 앤은 감격해서 시의 첫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때 맨 앞줄에 앉은 길버트가 첫 구절을 속삭여주었어요. 그날 앤의 시 낭독 무대는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 찼지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어요. 앤과 길버트는 이미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지요. 앤은 에이번리로 돌아가 선생님이 되기로 하고, 길버트는 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시에 남았어요. 앤이 돌아오자 매슈와 마릴라는 반갑게 맞이했어요. “장하다, 앤. 넌 우리의 딸이나 마찬가지야.” 몇 해가 지나, 에이번리 마을에 길버트가 찾아왔어요. “앤, 나는 너를 사랑해. 우리 도시로 나가서 함께 공부하지 않을래?” 그러자 앤은 고개를 저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정일 뿐이야.” 앤은 그렇게 말했지만, 매슈와 마릴라의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길버트는 이런 앤을 변치 않는 우정으로 함께했답니다.
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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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브리지방의 어느 농가에 장발장이라는 남자가 살았어요. 장발장에게는 누나와 함께 보살펴야 할 일곱 명의 조카가 있었어요. 장발장과 누나는 매일 양배추 줄기를 조카들에게 주었지만 겨울이 되자, 그마저도 아이들에게 줄 수 없게 되었어요. 먹을 것이 떨어지자, 장발장은 빵집의 유리를 부수고 빵을 훔쳤어요. 더 이상 조카들이 굶고 있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쨍그랑! 하지만 장발장은 잡히고 말았고 법정에서 5년형을 받았어요. 장발장은 어린 조카들이 걱정돼 여러 번 탈옥했어요. 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바람에 19년이나 감옥에서 살게 되었지요. 19년 뒤 감옥에서 나온 장발장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장발장은 웃을 줄도. 울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지요. 갈 곳이 없던 장발장은 성당을 찾아가 하룻밤 묵을 수 있도록 사정했어요. 성당의 미리엘 주교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죄수 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아요. 그대는 나의 형제와 다름없습니다." "우선 음식을 드릴 테니. 맛있게 드시고 잠도 푹 주무세요.” 장발장은 주교의 친절에 한없이 감사했어요. 장발장은 오랜만에 음식을 배불리 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잤어요. 성당의 큰 시계가 두 번 울리자. 장발장은 잠에서 깼어요. 식사할 때 놓여있던 은 수저와 은촛대가 생각났지요. ‘은으로 된 물건을 팔면 돈을 마련할 수 있어.’ 장발장은 고민을 하다가 종이 한 번 더 울리자 배낭에 은촛대와 은 수저를 담아 허둥지둥 도망쳤어요. 다음 날 아침. 성당 사람들은 은촛대와 은 수저가 없어진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곧 장발장은 경찰관에게 붙잡혀 끌려왔지요. “이 사람의 가방에서 은촛대와 은 수저가 나왔는데, 주교님이 주었다고 하더군요." "맞습니까?” “네, 가난한 내 형제가 필요하다기에 주었습니다.” 미리엘 주교가 증언해 준 덕분에 풀려난 장발장은 부끄러운 마음에 도망치듯 거리로 뛰어나왔어요. 8년 후, 장발장은 이름을 마들렌으로 바꾸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번 돈을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 시장까지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차에 깔린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을 구한 일로 자베르 경감의 의심을 받게 되었어요. 자베르 경감은 죄수 던 장발장을 늘 감시하는 경찰이었지요. “저자는 마들렌이 아니라 죄수 장 발장이오.” 자베르 경감이 소문을 내며, 포위망이 점차 좁혀지자 장발장은 불안했어요. 장발장은 일단 도망을 치기로 했어요. 그때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던 팡틴이라는 여자가 죽어가며 코제트라는 딸을 찾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지요. 장발장은 코제트가 허름한 여관에서 하녀처럼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코제트를 데리러 갔어요. 코제트는 주인아주머니에게 구박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지요. “돈을 줄 테니 이 아이를 데려가겠소!” 장발장은 여관 주인에게 차갑게 말하며 코제트를 데리고 나왔어요. 장발장은 코제트를 양녀로 삼아 숨어 지냈어요. 하지만 자베르 경감은 이런 장발장을 끝까지 쫓았지요. “코제트, 안되겠다." "함께 수녀원으로 가자꾸나. 수녀원까지 쫓아와 감시하지는 않을 거다.” 장발장은 수녀원으로 가 이름을 포방으로 바꾸고 코제트를 수녀원의 기숙학교에 보내 키웠어요.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수녀원에서 코제트는 어엿한 숙녀로 자랐어요. 마리우스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자베르 경감이 죽었어요. 우연히 장발장의 과거를 알게 된 마리우스는 장발장이자 베르 경감을 죽 다고 의심했어요. 그래서 코제트를 한 번도 장발장에게 보여주지 않았지요. 늙고 쇠약해진 장발장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어요. 뒤늦게 장발장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함께 장발장을 찾아갔어요. 장발장은 그리운 딸인 코제트 곁에서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답니다.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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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어느 겨울날, 마차 한 대가 런던 거리를 달리고 있었어요. 마차에는 부유해 보이는 아버지와 딸이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지요. 세라의 아버지가 세라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인도에서 런던의 민친 여학교로 오는 거 어요. 세라의 아버지는 민친 교장에게 세라를 부탁하고 인도로 다시 돌아갔어요. 세라는 공부도 잘하고 친절해 금세 인기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래비니어라는 소녀는 늘 세라를 질투했어요. “흥, 세라를 공주처럼 대하는군.” 래비니어는 부잣집 딸인데다 얼굴도 예뻤지만 샘이 많고 제멋대로인 것이 흠이었지요. 어느덧 세라의 열한 번째 생일이 다가왔어요. 세라의 방에서는 깔깔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그때 민친 교장이 화가 난 얼굴로 들어왔어요. “그만! 생일파티는 이것으로 끝났어요!” 그리고 세라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소식을 들었어요. 인도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업이 망했다는 거예요. 민친 교장이 쌀쌀맞게 말했어요. “넌 이제 가난뱅이 고아가 되었으니 베키와 함께 하녀로 일해야 한다. 당장 그 교복도 벗어!” 민친 교장은 세라에게 낡고 초라한 옷을 주고 지붕 밑 다락방으로 쫓았어요. 그날부터 세라는 민친 여학교의 하녀가 되었어요. 너무 힘이 들어 세라의 몸은 점점 야위었지요. 하지만 세라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친구인 아미와 베키가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에 휠체어에 앉은 아저씨와 어깨에 원숭이를 앉힌 인도 사람이 이사오는 것을 보았어요. 세라는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팠지요. ‘아저씨, 빨리 나아서 건강해지세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창밖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렸어요. 창문을 여니 원숭이가 있었지요. “이웃집 원숭이구나?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집에 데려다줄게.” 다음날, 세라가 인도 아저씨에게 원숭이를 건네자 아저씨는 무척 고마워했어요. 며칠 뒤, 세라는 다락방에서 아미와 베키랑 놀다가 민친 교장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내일 너희 밥은 없을 줄 알아!” 세라는 그 말에 서러워서 흑흑 소리 내어 울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자 방 안에는 따뜻한 난로가 놓여있고. 식탁 위에는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있었어요. “세라야, 인도 아저씨가 고맙다며 답례로 음식을 주셨어. 이 새 옷도 주시고 말이야.” 그 뒤로 세라는 인도 아저씨와 무척 친하게 지냈어요. 그리고 이웃집 아저씨에게 초대도 받았어요. “원숭이를 돌봐줘서 고맙구나. 네 이름은 뭐니?” “세라 크루예요.” 아저씨는 깜짝 놀라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네가 세라라고? 나는 네 아빠의 친구란다. 네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세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의 친구인 이웃집 아저씨가 유산을 전해주기 위해 찾고 있었던 거예요. 그날부터 세라는 베키와 함께 아저씨의 집에서 살게 되었어요. 민친 교장은 그간의 일을 후회하고 세라를 다시 학교로 데려오기 위해 아저씨 댁을 찾아왔어요. “소용없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아저씨는 민친 교장을 차갑게 돌려보냈어요. 소공녀를 읽고 있으면 세상의 인심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주인공 세라가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느끼게 되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라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뿐이었어요.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 낸 덕분에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고 다시 부자가 되지요. 부자가 된 덕분에 세상의 인심이 돌아오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라의 바른 마음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돌아왔다는 거랍니다. 프랜시스 엘리자 버넷은 1849년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났어요.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외삼촌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주를 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가난했어요. 프랜시스는 열세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소공녀가 쓰인 시기는 영국의 황금기인 빅토리아 여왕이 군림하던 시기였어요. 당시에는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둔 시기이기도 해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의 아버지 또한 인도에서 사업을 하는 인물이지요.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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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크리스마스 이브예요. 모두들 파티를 하느라 시끌시끌하지만.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틸틸네 집은 그렇지 않았어요. 엄마와 아빠 모두 일을 하러 가셨거든요. “오빠,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너무 슬프다.” 여동생 미틸이 말하자, 틸틸은 점잖게 말했어요. “투정 부리지 말자. 엄마 아빠가 슬퍼하실 거야.” 그때 이웃집에 사는 할머니가 찾아왔어요. “얘들아, 내 손녀딸이 무척 아프단다. 파랑새가 있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데 혹시 파랑새 있니?” “아빠가 산에서 잡아온 산비둘기밖에 없어요. 어쩌죠?” 그러자 할머니는 틸틸에게 파랑새를 구해달라고 했어요. 할머니는 틸틸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요술 모자를 씌웠어요. “자, 다이아몬드를 돌려보렴.” 틸틸이 다이아몬드를 돌리자 일곱 빛깔의 빛이 나오면서 우유 요정, 사탕 요정, 물의 요정이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집안의 등불은 빛의 요정이 되고, 키우던 개와 고양이는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변했어요. 빛의 요정이 길을 안내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빛의 요정이 창문을 열자 달님이 사다리를 내려주었어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추억의 나라’가 나왔어요. 그곳에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지요. “오! 틸틸, 미틸! 내 사랑하는 손주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새장에 파랑새를 넣어주셨어요. 하지만 집에 와보니 파랑새는 검은 새로 변해있었어요. “실망할 것 없어요. 이번에는‘밤의 궁전’으로 가봐요.” 이번에도 빛의 요정이 길을 안내했어요. 하지만 고양이는 파랑새를 찾기 싫었어요. 파랑새를 찾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네 발로 걷는 고양이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고양이는 틸틸과 미틸보다 먼저 ‘밤의 궁전’으로 가 여왕에게 일렀어요. “여왕님, 아이들이 파랑새를 훔치러 옵니다.” “뭐? 괘씸한 것들!” 이 사실을 모르는 틸틸과 미틸은 여왕을 찾아와 부탁했어요. “여왕님, 파랑새를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자 여왕은 불같이 화를 냈어요. 할 수 없이 틸틸은 다이아몬드를 돌렸어요. 번쩍 빛이 나자 여왕은 얼어붙고 말았지요. 그사이 미틸이 수많은 방 가운데 문 하나를 열었어요. 그러자 전쟁의 악마, 질병의 악마가 나왔어요. 틸틸은 다시 방문 하나를 열었어요. 그곳은‘빛의 방’이었지요. 빛의 방에는 파랑새들이 떼를 지어 포르르 날아다녔어요. 하지만 잡으면 금세 죽고 말았지요. “얘들아, 저 숲에 진짜 파랑새가 있을 거야. 가보자!” 그때 고양이는 다시 숲으로 먼저 들어가 떡갈나무에게 고했어요. “떡갈나무님, 나무꾼의 아들과 딸이 파랑새를 훔치러 옵니다.” 떡갈나무는 무척 화가 났어요. “이놈들, 오기만 해봐라.” 틸틸과 미틸이 오자 떡갈나무는 흔들흔들 가지를 떨어 공격했어요. 틸틸은 할 수 없이 다시 다이아몬드를 돌렸어요. 하지만 숲이 갑자기 훤해지는 바람에 파랑새가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지요. 틸틸과 미틸은 울상이 되었어요. 그러자 빛의 요정이 말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행복의 나라’로 가보아요. 파랑새가 있을 거예요.” 행복의 나라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음식을 우걱우걱 먹고 있었어요. 배가 고팠던 틸틸과 미틸도 음식을 먹으려 했지요. 그때 빛의 요정이 말렸어요. “그 음식을 먹으면 게으름뱅이가 될 거예요.”
황금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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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옛날 어느 바닷가 마을의 외딴 집에 가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깜짝 놀랐지 뭐야.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빛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나왔거든. 황금물고기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 “할아버지,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어. “소원은 필요 없단다. 조심히 가렴.” 황금물고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바다로 헤엄쳐 갔어.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황금물고기를 잡았다가 놓아준 일을 이야기했어. “뭐라고요? 소원도 빌지 않고 그냥 놓아주었다고요? 깨진 빨래통 대신 새 빨래통이라도 달라고 해야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잔소리에 못 이겨 바닷가로 나와 외쳤어. “황금 물고기야. 황금 물고기야!” 황금물고기가 바다 위로 얼굴을 빼꼼 내었어. “무슨 일이세요?” “할멈이 새 빨래 통을 갖고 싶다는구나!”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집에 가시면 새 빨래통이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정말 새 빨래통이 있었어. 하지만 할머니는 더 화를 내며 말했어. “진짜로 새 빨래통을 달라고 했어요? 당장 새집을 달라고 하세요!” 할아버지는 다시 황금물고기를 불렀어. “우리 할멈이 새 집을 갖고 싶다는구나.” 그러자 황금물고기는 소원대로 새 집을 주었어. 며칠 뒤, 할머니가 말했어. “이 집은 너무 작아요. 이번에는 성을 달라고 하세요.” 할머니의 성화에 할아버지는 또다시 황금물고기를 불렀어. “황금물고기야. 할멈 이성에서 살고 싶다는구나.” “걱정 마세요. 소원대로 해드릴게요.” 집에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으리으리한 성 앞에 서있었어. “이제성도 생겼으니 난 여왕이 되고 싶어요. 여보, 황금물고기에게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바닷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어. 할아버지는 다시 황금물고기를 불렀지. “할멈이 여왕이 되고 싶다는구나.” “알았으니 집에 가보세요.”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성이 있던 자리에 훌륭한 궁전이 서있고, 왕관을 쓴 할머니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어. 할머니는 밤새 또 무엇이 될까 고민했어. 그러다 아침해가 떠오르자 생각났지! “여보! 황금물고기에게 내가 신이 되고 싶다고 전해요!” 잠이 덜 깬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어. “할멈! 그것만은 안 돼요!” “빨리 당장 가서 전해요!”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 할아버지는 울상을 지으며 바닷가로 가 황금물고기를 불렀어. “황금물고기야, 할멈이 이제 신이 되고 싶다는구나.” 황금물고기는 슬픈 표정을 지었어. “정말 욕심이 끝도 없군요. 그만 돌아가세요.”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어. 훌륭한 궁전과 신하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예전의 오두막집에서 깨진 빨래통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는 할머니만 있었거든. 그 뒤로 할머니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 할아버지도 다시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지. 그렇게 둘은 바닷가 작은 외딴 집에서 행복하게 오손도손 살았단다.
이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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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여우와 두루미. 어느 날 여우가 두루미를 식사에 초대했어.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먹어, 두루미야." 여우는 넓고 얕은 접시에 수프를 담아 내놓았어. 두루미는 수프를 먹으려고 했지만, 접시가 얕아서 긴 부리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어. 두루미가 난처해하자, 여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어. "사양 말고 많이 먹어. 두루미야." 여우는 약 올리듯 혀를 날름거리며 수프를 먹었어. 하지만 두루미는 긴 부리 끝에만 수프를 적셨을 뿐,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단다. 얼마 후, 두루미가 여우를 집으로 초대했어. "어서와, 여우야." 두루미는 목이 가늘고 긴 호리병에 수프를 담아 왔어. "자, 식기 전에 많이 먹어. 여우야." 두루미는 부리를 호리병에 넣고 보란 듯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어. 하지만 여우의 입은 도저히 호리병에 들어가지 않았어. 혀를 쭉 넣어 봤지만, 냄새만 맡았을 뿐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단다. 사자와 쥐. 어느 날, 숲 속에서 사자가 낮잠을 자고 있었어. 그런데 쥐가 실수로 사자의 발등을 콱 밟고 말았어. "어흥! 감히 이 사자의 발등을 밟다니! 널 잡아먹겠다!" 그러자 겁을 먹은 쥐가 벌벌 떨며 말했어. "제발 살려 주세요. 은혜는 꼭 갚을게요." 그러자 사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어. "하하! 동물의 왕인 내가 너처럼 작은 녀석의 은혜를 받는다고?" 사자가 콧방귀를 뀌자 쥐는 용기를 내 말했어. "사자님도 언젠가 곤경에 빠질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너의 마음이 갸륵하니 이번만은 살려 주지." 사자는 웃으면서 쥐를 놓아 주었어. 그런데 며칠 후, 사자가 사냥꾼이 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어! 벗어나려고 바둥바둥 몸부림칠수록 덫은 더욱 팽팽하게 조여 왔지. "아이코, 힘이 다 빠져 버렸어." 그때 쥐가 재빨리 다가와 굵은 밧줄을 사각사각 이로 갉아서 끊어 버렸어. "사자님, 제가 은혜를 갚겠다고 했을 때 비웃으셨죠? 하지만 저처럼 작은 동물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답니다." 그렇게 사자는 쥐의 도움으로 무사히 덫에서 빠져나왔단다. 개미와 비둘기. 어느 무더운 여름날, 개미가 목이 말라 냇가에서 물을 마셨어. "후룩후룩.아, 물맛 좋다. 기운이 나는군." 그런데 개미는 정신없이 물을 마시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냇물에 빠지고 말았어. "앗! 살려 주세요." 그때 근처에 있던 비둘기가 개미의 비명을 듣고 나뭇잎을 물에 떨어뜨려 주었어. "이걸 잡아!" 개미는 재빨리 나뭇잎에 올라타 겨우 목숨을 건졌어.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비둘기가 열심히 둥지를 짓고 있을 때였어. 마침 비둘기를 발견한 사냥꾼이 총을 쏘려고 했지. 그때 사냥꾼을 본 개미는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후다닥 달려갔어. 그러고는 방아쇠를 당기려는 사냥꾼의 다리를 콱 물어뜯었지. "아얏!" 사냥꾼은 소리를 지르며 총을 떨어뜨렸어. 그 소리에 놀란 비둘기는 파드득 날아올랐지. "개미야, 고맙다." 비둘기가 인사를 하자 개미가 웃으며 말했어. "저도 친절한 비둘기님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기뻐요!" 여우와 두루미, 사자와 쥐, 개미와 비둘기는 이솝이 쓴 이솝 이야기에 실린 우화예요. 이솝 이야기는 동물의 성격과 행동을 통해 잘못된 인간상을 꼬집고, 바르게 살아갈 길을 가르쳐 주는 우화 이야기 모음집으로 간결하고 명쾌하면서도 기지 넘치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솝 이야기는 1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누데스라는 수도승이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세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보태졌다고 해요. 주로 인도에서 내려오는 우화가 추가되었지요. 이 외에도 개미와 베짱이, 시골 쥐와 도시 쥐 등 여기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답니다. 이솝은 기원전 620년에 태어나 기원전 560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우화 작가예요. 이솝은 영어식 이름이며, 그리스식 이름은 아이소포스라고 하지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솝은 기원전 6세기경에 그리스 사모스 왕의 노예였는데 우화를 재미있게 이야기하여 해방되었고, 리디아를 다스리던 왕 크로이소스의 신임을 받았다고 해요. 이솝은 나중에 델포이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사람들에 의해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작품으로는 우화집 이솝 이야기가 있답니다.
베니스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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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베니스에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이 살고 있었어요. 그는 고리대금업자로 욕심이 많고 냉정한 사람이었지요. 반면에,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인정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어요. 어느 날 귀족인 바사니오가 안토니오를 찾아왔어요. “이보게, 포셔에게 청혼을 하러 벨몬트에 가야 하는데, 돈 좀 구해 주게나.” 안토니오와 바사니오는 샤일록을 찾아갔어요. “샤일록 씨, 3천 두카트만 빌려 주시오. 지금 항해 중인 내 배가 돌아오면 바로 갚겠소.” 안토니오가 말했지만 샤일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바사니오가 말했어요. “석 달만 빌려 주시오. 내 친구 안토니오가 보증을 서겠다잖소?” 샤일록은 곧 비웃으며 말했어요. “좋소. 대신 날짜를 어기면 보증인인 안토니오의 몸에서 살 1파운드를 베어 내겠소.” 안토니오는 놀랐지만 샤일록의 조건을 받아 들였어요. 바사니오는 샤일록에게 빌린 돈으로 멋진 옷을 맞춰 입고, 하인과 함께 벨몬트로 갔어요. 포셔는 바사니오의 청혼에 한 가지 문제를 냈어요. “이 세 개의 상자 중 제 초상화가 들어 있는 것을 맞히면 청혼을 받아들이겠어요.” 바사니오는 그중에 납으로 된 상자를 선택해 포셔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것을 찾아냈어요. “바사니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포셔가 반지를 주며 말했어요. 이때 바사니오의 하인이 축하의 말을 전하며, 같은 날 포셔의 시녀와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한꺼번에 두 쌍이 약혼하게 되어 무척 기뻤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안토니오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편지를 읽는 바사니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어요. 나의 친구 바사니오. 안토니오 일세. 배가 폭풍으로 부서져 약속한 날짜까지 돈을 갚지 못할 것 같네. 곧 샤일록은 내 살 1파운드를 떼어 내겠지. 죽기 전에 자네를 보고 싶네. 바사니오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급히 돈을 마련하여 베니스로 향했어요. 그 무렵 안토니오는 이미 베니스의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바사니오는 샤일록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했지만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며 이를 거절했지요. 결국, 이 일은 재판을 하게 되었어요. 한편, 남편을 베니스로 보낸 포셔는 걱정이 되어 유명한 법학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어요. 그러자 법학자는 편지를 써 주었어요. 베니스의 공작님. 저 대신 젊고 훌륭한 재판관을 보냅니다. 공정한 재판이 될 겁니다. 포셔는 재판관으로 변장을 하고 베니스로 가 법정에 섰어요. 포셔가 샤일록에게 물었어요. “그대가 너그럽게 돈을 빌려 주었듯이, 다시 한 번 안토니오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이 어떻소?” 샤일록은 들은 척도 않고 계약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좋소. 그렇다면 계약대로 판결을 하겠소.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뗀다. 하지만 피를 흘리면 안 되며, 그 무게가 정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샤일록의 전 재산은 국가의 것으로 한다." 샤일록은 크게 절망했어요.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떼어 낼 수는 없으니까요. 포셔가 말을 이었어요. “판결에 따르지 못한다면 샤일록의 재산 절반은 국가의 것, 나머지 절반은 안토니오에게 주도록 하라.” 결국, 안토니오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훌륭한 법관이 포셔였다는 것을 안 바사니오는 깜짝 놀랐어요. 포셔와 시녀, 바사니오와 하인, 안토니오는 다시 벨몬트로 향했어요. 그리고 그날 밤 벨몬트의 저택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바보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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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옛날 어느 나라에 부자 농부가 살고 있었어요. 농부에게는 군인인 세묜, 장사꾼 타라스, 바보 이반 세 아들과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인 딸 말라냐가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세묜과 타라스가 아버지께 재산을 나눠 달라고 했어요. 재산을 나누어 주자, 아버지께는 메마른 땅과 늙은 노새만 남았어요. 하지만 이반이 열심히 일해 다시 부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고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도깨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우두머리 도깨비는 세 부하를 시켜 삼 형제를 망하게 하도록 명령했어요. 세 도깨비는 삼 형제를 각각 한 명씩 맡기로 하고 소굴을 나섰어요. 군인인 세묜을 맡은 도깨비는 세묜이 지휘한 전쟁을 지게 해 전 재산을 잃게 했어요. 장사꾼인 타라스를 맡은 도깨비는 그를 욕심쟁이로 만들어 재산을 탕진하고 빚쟁이가 되도록 했어요. 한편, 바보 이반을 맡은 도깨비는 이반에게 배탈이 나게 하고 땅을 아주 딱딱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하지만 이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쟁기로 열심히 땅을 갈았어요. 그러자 도깨비는 쟁기 끝에 달라붙어 쟁기질을 방해했어요. ‘나뭇가지가 걸렸나?’ 이반이 쟁기를 살피려고 땅에 손을 넣자 물렁거리는 것이 잡혔어요. 꺼내어 보니 도깨비였어요. “으악! 무슨 소원이든 들어 드릴 테니 살려 주세요!” “그럼 배탈을 멎게 해 다오.” 도깨비는 줄기가 세 개인 약초를 주며 줄기 하나만 먹으면 어떤 병이라도 낫는다고 했어요. 이반이 줄기 하나를 먹자 배가 씻은 듯이 나았어요. “고맙다, 신의 축복을 받아라.” 이반이 말하자 도깨비는 땅속으로 쏙 사라졌어요. 다음 날은 세묜을 망하게 한 도깨비가 찾아와 풀을 베는 이반을 괴롭히다가 이반이 휘두르는 낫에 꼬리가 절반이나 쑹덩 잘렸어요. 그리고 다음 날도 이반을 골탕 먹이러 왔다가 결국 잡히고 말았지요. “아이고! 보릿단으로 군사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 테니 살려 주세요!” 도깨비가 주문을 가르쳐 주자 이반이 말했어요. “신의 축복을 받아라.” 그러자 이 도깨비도 순식간에 땅속으로 쏙 사라져 버렸지요. 이번에는 타라스를 망하게 한 도깨비가 나무를 베고 있는 이반을 방해했어요. “왜 이렇게 나무가 안 베이지?” 하지만 결국 이반의 힘찬 도끼질에 도깨비는 쓰러지는 나무에 깔리고 말았지요. “이런, 네놈 때문에 나무가 잘 베이지 않았구나?” 이반이 도끼를 쳐들자, 도깨비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나뭇잎으로 금화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어요. “고맙다. 부디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러자 이 도깨비도 땅속으로 쏙 사라졌어요. 이반이 보릿단에 주문을 외워 병사를 만들고, 나뭇잎으로 금화를 만든다는 말에 두 형이 찾아왔어요. “이반, 우리를 좀 도와 다오.” 그런데 얼마 후, 세묜은 이반에게 병사를 더 많이 달라고 하고, 타라스도 금화를 더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이반은 형들의 부탁을 거절했어요. “형님들, 너무 욕심이 많으세요!” 그러던 어느 날,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을 임금님의 사위로 삼겠다는 방이 붙었어요. 이반은 도깨비가 주었던 약초를 가지고 성으로 향했어요. 가는 길에 다리에 피를 흘리는 노인을 만났지요. 사실 노인은 공주의 약을 구하러 나온 임금님이었어요. 이반은 노인에게 약초를 주어 다리를 낫게 했어요. 그리고 공주의 병도 낫게 해 임금의 자리에 올랐어요. 하지만 이반은 성 안의 생활이 따분해서 다시 옛날처럼 농사일을 하며 나랏일을 돌보았어요. 한편, 도깨비들은 다시 이반 형제를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우두머리 도깨비가 장군으로 변장해서 세묜을 찾아가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도록 부추긴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세묜은 패하고 말았어요. 우두머리 도깨비는 타라스도 찾아갔어요.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해 모든 물건을 비싼 값에 사들였어요. 그러자 타라스는 돈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지요. 결국, 타라스는 모든 재산을 상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어요. 우두머리 도깨비는 이번에도 장군으로 변장하여 이반을 찾아가 말했어요. “이웃 나라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니 먼저 공격하시옵소서.” 하지만 이반이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이웃 나라 임금을 찾아가 꼬드겼어요. “이반의 나라에서는 지금 농사일만 하는 척하면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이웃나라는 먼저 이반의 나라로 쳐들어갔어요. 그렇지만 이반의 나라 백성은 군사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일만 했어요. 이웃 나라 병사들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지요.
황금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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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세 형제가 살고 있었어. 어느 날 첫째가 숲에서 나무를 하는데 난쟁이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어. “젊은이, 먹을 것 좀 주겠소?” 그러자 첫째가 음식을 감추며 말했어. “제가 먹을 것도 부족해요. 안 돼요.” 잠시 후 첫째는 나무를 하다가 팔을 다치고 말았어. 다음 날, 나무를 하러 간 둘째도 숲에서 난쟁이 할아버지를 만났어. “이보게, 음식 좀 나눠 줄 수 있나?” “저 먹을 것도 부족한걸요.” 둘째는 음식을 혼자 다 먹어 버렸어. 그러자 둘째도 발을 다치고 말았어. 그 다음 날은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막내가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난쟁이 할아버지를 만났어. “이보게, 음식을 나눠 줄 수 있나?” “그럼요. 같이 드세요.” 막내는 할아버지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었어. “자네는 마음씨가 착하군. 내가 선물을 주겠네. 저 큰 나무를 베어 보게나.” 막내가 나무를 베자, 나무 밑동 속에 황금 거위가 앉아 있었어. 막내는 황금 거위를 팔기 위해 시장에 가다가 여관에 들렀어. 그런데 한밤중에 여관 주인의 첫째 딸이 방에 살금살금 들어왔어. 황금 거위의 깃털이 갖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첫째 딸이 거위의 날개에 손을 댄 순간, 손이 찰싹 달라붙고 말았어. 첫째 딸이 쩔쩔매고 있을 때, 둘째 딸도 깃털을 뽑으려고 나타났어. 하지만 언니를 도우려고 언니 몸에 손을 대자 둘째 딸의 손도 찰싹 달라붙어 버렸어. 이어서 나타난 셋째 딸의 손도 마찬가지였지. “어머! 이걸 어째!” 다음 날 아침, 막내는 황금 거위를 안고 길을 떠났어. 거위에 달라붙은 세 딸도 엉기적엉기적 따라갈 수 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본 신부님은 화들짝 놀랐어. “이런! 망측하게 젊은이를 졸졸 따라다니다니!” 그런데 세 자매를 떼려고 신부님이 손을 대자 신부님의 손도 달라붙었지 뭐야! “어이쿠, 신부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교회의 종지기가 신부님의 몸에 손을 대자, 종지기의 손도 신부에게 달라붙어 버렸어. 또 도우려고 달려온 농부의 손도 철썩 종지기에게 달라붙고 말았지. 한편, 나라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웃지 않은 공주가 있었어. 임금님은 공주를 웃게 하는 사람을 사위로 삼기로 했지. 막내는 이 소문을 듣고 성 앞으로 가 뒤뚱대는 행렬을 보여 주었어. 그러자 공주가 웃기 시작했어! “호호호! 저 사람들 좀 봐. 호호호!” “아니, 내 딸이 웃다니! 당장 저 젊은이를 데리고 오너라.” 하지만 왕은 막내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는 사위로 맞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어. 그렇지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어려운 문제를 주고 해결하도록 했어. “내 사위가 되려면 창고에 있는 포도주를 모두 마실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너라.” 막내는 난쟁이 할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러 숲으로 가다가 몸이 우람한 술주정뱅이를 보았어. “벌컥벌컥. 술이 더 필요해! 목이 마르단 말이야!” 술주정뱅이는 창고의 포도주를 몽땅 마셔 버렸어. 하지만 임금님은 다시 어려운 문제를 냈어. “산더미처럼 쌓인 빵을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너라.” 막내는 이번에도 숲으로 가서 산처럼 쌓인 빵을 모두 먹을 만한 사내를 데려왔어. “냠냠, 꺼억! 나는 빵이 더 필요해! 냠냠.” 그러자 임금님은 막내에게 또 다시 어려운 문제를 냈어. “땅에서도 물에서도 달릴 수 있는 배를 가져오면 내 사위로 삼겠다.” 막내가 숲으로 가자 이번에는 난쟁이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어. “사실 술주정뱅이와 빵먹는 사내는 나였어. 이번에는 직접 도와주지.”할아버지는 바퀴가 달린 배를 뚝딱 만들어 주었어. 막내가 배를 타고 성으로 오자 임금님은 깜짝 놀랐어. “대단하군! 자네는 이제 내 사위네!” 그 후 막내는 공주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