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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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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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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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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홀어머니와 두 딸이 살았어요. 게으른 친딸은 빈둥빈둥 놀기만 했지만 부지런한 의붓딸은 그러지 못했어요. 새엄마가 하루 종일 일을 시켰거든요. “뭘 꾸물거려? 설거지가 끝났으면 얼른 청소도 하고, 실도 뽑아야지.” 부지런한 딸은 잠시 앉아서 쉬지도 못했어요. 하루는 부지런한 딸이 실을 뽑다가 손가락을 다쳤어요. 실패도 빨갛게 피로 물들었어요. 부지런한 딸은 실패를 우물물에 씻으려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새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지요. “냉큼 가서 실패를 건져 오너라!” 부지런한 딸은 밥도 쫄쫄 굶은 채 실패를 찾으려고 우물 속에 뛰어들었어요. 부지런한 딸이 깜박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꽃밭에 누워 있었지 뭐예요? 어디에선가 고소한 냄새까지 솔솔 났어요. 바로 빵 굽는 오븐에서 나는 냄새였지요. 오븐 속의 빵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요. “뜨거워! 앗, 뜨거워! 제발 꺼내 주세요. 까맣게 타 버릴 것 같아요.” 부지런한 딸은 빵 주걱으로 빵을 하나하나 꺼내 주었어요. 부지런한 딸은 이번에도 사과를 다 따 주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에요. 그때 저 멀리에 작은 오두막이 보였어요. 부지런한 딸은 오두막 창문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어요. 앞니가 대문짝만한 할머니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부지런한 딸은 겁이 덜컥 났지요. “얘야, 나는 홀레 할머니란다. 무서워하지 말고 나랑 같이 살자꾸나. 너는 깃털이 펄펄 날리도록 내 이불만 잘 털어 주면 된단다.” 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에 부지런한 딸은 오두막에 머물기로 했어요. 부지런한 딸은 아침마다 깃털이 펄펄 날리도록 이불을 털었어요. 그러면 온 세상에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지요. 부지런한 딸은 눈 내리는 걸 아주 좋아했어요. 홀레 할머니는 부지런한 딸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부지런한 딸은 마음이 울적해졌어요. “할머니, 이곳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집에 가고 싶어요.” “오냐오냐, 나를 잘 도와줬으니 돌려보내 주마.” 부지런한 딸이 홀레 할머니를 따라가는데 아주 커다란 문이 나타났어요. 부지런한 딸이 그 앞에 서자 하늘에서 황금 비가 쏟아져 내렸지요. 부지런한 딸은 온통 황금투성이가 되었어요. “그동안 일해 준 보답이란다. 잘 가거라.” 홀레 할머니는 실패도 돌려주었어요. 커다란 문이 열리는 순간, 부지런한 딸은 어느새 우물 밖에 서 있었지요. 우물가에 있던 수탉이 푸드덕거렸어요. 새엄마와 게으른 딸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황금투성이가 된 부지런한 딸을 보고는 어찌 된 일인지 꼬치꼬치 캐물었지요. 게으른 딸은 실은 뽑지도 않고 일부러 가시나무로 손가락을 찔러 실패에 빨갛게 피를 묻혔어요. 그리고 피 묻은 실패를 우물에 던지고는 우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지요. 게으른 딸도 빵 굽는 오븐을 만났어요. “칫, 힘든 건 싫어.” 게으른 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게으른 딸은 금세 홀레 할머니 오두막을 찾아냈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게으른 딸은 슬슬 꾀가 났어요. 그 다음 날은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지요. 홀레 할머니의 깃털 이불을 탈탈 털지도 않았고, 하루 종일 빈둥거렸어요. 홀레 할머니는 게으른 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게으른 딸은 홀레 할머니를 따라가며 속으로 좋아했어요. 곧 황금 비가 내릴 차례니까요. 게으른 딸이 커다란 문 앞에 서자, 황금은커녕 시커먼 기름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어요. “그게 바로 네가 일한 몫이지. 잘 가거라.” 홀레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문이 닫혀 버렸어요. 게으른 딸은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쓴 채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새엄마는 게으른 딸을 보고는 몸져누워 버렸어요. 게으른 딸은 몇 날 며칠 박박 문질렀지만, 시커먼 기름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어요. 게으른 딸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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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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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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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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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라고 불리는 아가씨가 살았어요. 미녀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지요. “정말 눈이 부시지 않아요?” “마음씨도 비단결처럼 고운걸요.” 미녀를 본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미녀는 아버지, 두 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느 해, 미녀의 집이 갑자기 가난해졌어요. 아버지는 먼 곳으로 돈을 벌러 가며 딸들에게 물었어요. “얘들아, 돌아오는 길에 선물을 사다 주마.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말해 보렴.” 아버지는 일이 잘되지 않아 돈을 벌지 못했어요. “어떡하지, 딸들에게 줄 선물을 사지 못했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는 그만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어요. 한참을 헤매던 아버지 앞에 아름다운 성이 나타났지요. 아버지는 두리번거리며 성안으로 들어갔어요. 성안은 따뜻하고 화려했어요. 장작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벽난로 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식탁이 놓여 있었어요. 아버지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는 곧바로 잠이 들어 버렸지요.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성을 나서다가 정원에 탐스럽게 핀 장미를 보았어요. “막내가 장미 한 송이를 갖고 싶다고 했지.” 아버지는 미녀에게 주려고 이제 막 피어난 장미 한 송이를 똑 꺾었어요. 그때 무시무시한 야수가 으르렁거리며 나타났어요. “딸에게 장미 한 송이를 가져다주려다가 그만. 제발 살려 주시오.” “좋다, 그럼 대신 네 딸을 이 성으로 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버지는 그리하겠다고 말하고는 부랴부랴 성을 떠났어요.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딸들을 보자 참았던 눈물을 흘렸어요.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는 야수의 성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모두 막내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언니들은 쌀쌀맞게 말했어요. “아버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제가 야수에게 가겠어요.” 아버지가 미녀를 말렸어요. 그렇지만 미녀는 듣지 않고 야수의 성으로 떠났어요. 야수의 성에 다다른 미녀는 똑똑 문을 두드렸어요. 덜컹 문이 열리자, 미녀는 조심스레 성안으로 들어갔지요. 야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야수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렸어요. “어서 오시오, 이제 이 성은 당신 집이니 두려워 말고 편히 지내시오.” 야수의 목소리에 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두려웠던 마음이 살짝 놓였어요. ‘휴, 야수가 나를 잡아먹지는 않을 것 같아.’ 잠시 뒤, 미녀는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으로 갔어요. 야수가 미녀를 맞이해 주었어요. 미녀는 흉측한 야수의 얼굴을 보고 놀랐지만 이내 야수의 다정함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 뒤에도 야수는 날마다 미녀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었어요. 미녀는 야수의 성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어느 날, 야수가 미녀에게 물었어요. “미녀, 나와 결혼해 주겠소?” 미녀는 한참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어요. “야수님, 당신과 결혼할 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함께 지내겠어요.” 야수는 미녀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큰 결심을 한 미녀는 아버지가 더욱더 그리웠어요.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야수는 미녀에게 반지를 주며 말했어요. “오늘 밤 이 반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잠이 들면 내일 아침 당신 집에서 깨어날 것이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꼭 돌아와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나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요.” 미녀는 꼭 그리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다음 날 미녀가 눈을 떠 보니, 정말 집 안이었어요. 야수가 준 선물들도 보였지요. “세상에, 네가 살아서 돌아오다니.”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미녀를 반겼어요. “이 값비싼 옷과 보석 좀 봐!” “막내가 야수의 성에서 우리보다 더 잘 지냈나 봐.” 샘 많은 언니들은 행복해 보이는 미녀가 얄미웠어요. 며칠 뒤, 미녀는 야수가 쓰러져 죽어 가는 꿈을 꾸었어요. “아, 안 돼! 야수님, 당신 곁으로 돌아갈게요.” 꿈에서 깬 미녀는 야수가 준 반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야수와 약속한 일주일이 되었어요. 언니들은 미녀가 행복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어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미녀를 가지 못하게 했어요. 꿈에서 깬 미녀는 야수가 준 반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 미녀는 야수의 성안에서 눈을 떴어요. “야수님, 어디 계세요?” 미녀는 성안을 돌아다니며 야수를 찾았어요. 그러다가 장미 덩굴 아래에 쓰러져 있는 야수를 발견했어요. “야수님, 제발 눈을 뜨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미녀는 야수를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요. 그때 주변이 온통 환해지더니 야수가 사라지고 미녀의 눈앞에 잘생긴 왕자가 나타났어요. “나는 마법에 걸려 야수로 변했던 왕자요. 당신이 나를 마법에서 풀어 주었소. 미녀, 나와 결혼해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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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빨간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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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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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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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카렌은 마차에서 내리는 공주를 보았어요. 공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어요. ‘어머나, 예뻐라. 나도 빨간 구두를 신고 싶어.’ 카렌은 공주의 빨간 구두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카렌이 세례를 받으러 교회에 가는 날, 부인은 카렌을 솜씨 좋은 구두장이에게 데려갔어요. “카렌, 교회에 신고 갈 검은 구두를 골라 보렴.” 그런데 그곳에 공주의 빨간 구두와 똑같은 구두가 있었어요. 카렌은 얼른 빨간 구두를 신어 보았어요. “구두가 잘 어울리는구나.” 눈이 나쁜 부인은 그 구두가 검은색인 줄 알았어요. 카렌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부인은 눈살을 찌푸렸어요. 하지만 카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폴짝폴짝 뛰며 교회로 들어갔어요. 카렌은 빨간 구두를 뽐내고 싶었어요. 검은 구두들 사이에서 카렌의 빨간 구두만 눈에 띄었어요. 부인은 화가 났지만 점잖은 목소리로 카렌을 타일렀어요. 다시 교회에 가는 날, 카렌은 빨간 구두를 몰래 꺼내 신었어요. 교회 앞에 목발을 짚은 늙은 군인이 서 있었어요. “예쁜 구두로구나.” 군인은 갑자기 목발로 빨간 구두를 탁탁 쳤어요. “춤출 때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라!” 카렌은 군인의 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카렌이 교회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또 얼굴을 찌푸렸어요. 하지만 카렌은 오로지 빨간 구두만 생각했어요. 카렌이 교회를 나서는데, 여전히 군인이 서 있었어요. 군인은 카렌을 보며 말했어요. “예쁜 구두야, 춤을 추어라!” 그러자 카렌이 신고 있던 빨간 구두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돌아다녔어요. 카렌을 붙잡으려던 부인에게 발길질까지 했어요.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억지로 구두를 벗기고 나서야 카렌은 얌전해졌어요. 부인이 아파서 몸져누웠지만 카렌은 빨간 구두만 생각했어요. ‘딱 한 번만 신어 봐야지.’ 카렌이 빨간 구두를 신자마자 구두는 다시 춤추기 시작했어요. 카렌이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면 빨간 구두는 왼쪽으로 가고, 카렌이 올라가려고 하면 빨간 구두는 내려갔어요. 빨간 구두는 카렌을 어두운 숲으로 데려갔어요. 카렌은 숲속에서 또 그 군인을 만났어요. “예쁜 구두야, 계속해서 춤을 추어라!” 카렌은 덜컥 겁이 났어요. 빨간 구두를 벗으려고 애썼지만, 발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어요. 카렌이 힘껏 발뒤꿈치를 밀어 보고 발길질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어요. 카렌의 빨간 구두는 계속 춤을 추었어요. 밤낮없이 춤을 춰야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카렌은 마음씨 고운 부인이 돌아가신 걸 알았어요. 부인이 무척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춤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지칠 대로 지친 카렌은 교회 앞에서 흰옷을 입은 천사를 보았어요. 천사는 차가운 얼굴로 카렌을 내려다보았어요. 카렌은 천사를 보며 울부짖었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춤을 멈추게 해 주세요!” 하지만 천사는 가만히 듣기만 했어요. 그때였어요. 카렌의 귓가에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어요. 교회의 오르간 소리였어요. 부드러운 음악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자 카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을게요! “카렌, 이제 눈물을 그치렴.” 눈부시게 환한 빛이 카렌을 감쌌어요. 카렌의 빨간 구두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어요. 카렌은 아주 편안해졌어요. 천사의 품에 안긴 카렌은 오래도록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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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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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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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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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천사에게 말했어요. “저 아래에서 가장 소중한 것 두 가지를 찾아오너라.” 천사는 땅으로 내려갔어요. 한참 후에 천사는 다시 하느님 앞에 앉았어요. 천사의 손에는 얼어 죽은 제비와 납으로 된 심장이 있었지요. “어찌하여 이것들을 가져왔느냐?” 하느님이 묻자 천사가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도시 한가운데에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서 있었어요. 화려한 성에서 행복하게 살던 왕자의 동상이었어요. 왕자의 온몸은 금으로 덮여 있고, 두 눈은 푸른 사파이어로 반짝였으며, 칼자루에는 빨간 루비가 박혀 있었어요. 어느 늦은 가을밤. 어린 제비 한 마리가 동상에 내려앉았어요. 친구들은 모두 남쪽으로 떠나고, 혼자 남쪽으로 향하던 제비였지요. “오늘은 여기서 자야지. 오호, 황금 침대라니 기분이 좋은걸!” 제비는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어요. 그때 제비 머리 위로 물방울이 톡 떨어졌어요. 그러더니 또다시 톡! 토독! “에잇, 갑자기 웬 빗방울이람.” 제비가 투덜거리며 올려다보니 왕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아니, 왜 울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렇단다.” 왕자가 슬픈 얼굴로 말했어요. “저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이가 보이니? 열이 펄펄 나서 그런지 시원한 오렌지가 먹고 싶다는데, 집에 먹을 게 물밖에 없는 모양이야. 작은 제비야, 내 부탁 좀 꼭 들어주렴.” “부탁이 뭔데요?”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빼서 아이 엄마에게 갖다주겠니?” ‘아이참, 남쪽으로 가려면 푹 자야 하는데.’ 하지만 제비는 왕자의 눈물을 보니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 제비는 칼자루에서 붉은 루비를 뽑아냈어요. 그 집에 가 보니 아이는 열이 나서 자꾸만 뒤척이고, 아이 엄마는 깜박 잠이 들었어요. 제비는 탁자 위에 루비를 내려놓고 아이의 이마에 날개로 부채질을 해 주었어요. 열이 내린 아이는 곧 잠이 들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제비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어요. ‘바람은 찬데, 마음은 왜 춥지 않지?’ 다음 날, 제비가 떠나려 하자 왕자가 간절히 말했어요. “제비야, 하룻밤만 더 있어 주면 안 되겠니? 저기 다락방에 글 쓰는 젊은이가 있는데,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글을 쓰지 못하는구나.” “너무 늦었어요. 전 빨리 가야 한다고요.” “고마운 제비야, 한 번만, 한 번만 더 도와주렴. 내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빼서 저 젊은이에게 갖다주렴.” 그 말을 들은 제비는 깜짝 놀랐어요. “왕자님의 눈을 빼라고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제비는 이번에도 왕자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제비는 사파이어를 빼내며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그러고는 젊은이가 사는 다락방으로 날아가 사파이어를 탁자 위에 몰래 올려놓았지요. 조금 뒤 사파이어를 발견한 젊은이가 소리쳤어요. “오, 세상에!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제비의 마음도 뿌듯해졌어요. 다음 날. 제비는 이제 정말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왕자가 또다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제비야, 저 아래 광장에 성냥을 파는 소녀가 있는데, 어쩌다 성냥을 모두 물에 빠뜨려 울고 있구나.” 왕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비가 말했어요. “좋아요, 딱 하룻밤만 더 있겠어요. 하지만 왕자님의 나머지 눈은 안 돼요.” 제비는 어쩔 수 없이 왕자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어떡해요. 왕자님은 이제 앞을 볼 수 없잖아요.” 제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왕자의 남은 한쪽 눈에서 사파이어를 빼냈어요. 그러고는 광장으로 날아가 성냥팔이 소녀의 손에 사파이어를 올려놓았지요. 사파이어를 받아 든 소녀는 너무나 기뻐서 폴짝폴짝 뛰었어요. 제비 마음에도 기쁨이 가득했지요. 왕자 곁으로 돌아온 제비가 말했어요. “왕자님, 이제부턴 제가 늘 곁에 있을 거예요.” “안 돼, 제비야. 넌 빨리 떠나렴.” “왕자님은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요.” 그때부터 제비는 도시 구석구석을 날아다녔어요.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왕자에게 들려주었어요. “오늘은 언덕 너머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어요.” “내 몸의 금을 벗겨서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렴.” 제비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한 겹, 한 겹씩 동상의 금박을 벗겨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그러는 동안 아름답게 빛나던 왕자의 몸은 점점 초라하게 변해 갔어요. 얼마 뒤 하얀 눈이 내렸어요. 거리는 온통 은빛으로 반짝였지요. 하지만 제비는 너무 추워 움직일 수 없었어요. 몸은 점점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지요. 제비는 마지막 힘을 다해 왕자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어요. “왕자님, 이제 그만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입을 맞춘 뒤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어요. 그 순간 무언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어요. 그것은 왕자의 심장이 두 동강 나는 소리였어요. 이튿날, 사람들이 동상 주위로 몰려들었어요. “아니,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왜 저렇게 된 거야?” “이 겨울에 제비는 또 뭐지?” “보기 흉한 동상은 치워 버립시다!” 사람들은 동상을 펄펄 끓는 용광로에 넣었어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납 심장만은 녹지 않았어요. “거참, 이상한 일이군. 그냥 갖다 버려야겠어.” 일꾼들은 쓰레기장에 납 심장을 내던졌어요. 바로 어린 제비가 버려진 곳이었지요. 천사가 가져간 것은 바로 왕자의 납 심장과 제비였어요.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하느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들이로구나.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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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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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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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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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프리트 왕자의 스물한 번째 생일이 가까워지자, 궁 안은 왕자의 생일 준비로 바빴어요. 왕자의 어머니인 여왕이 말했어요. “왕자, 이제 너도 결혼할 나이가 되었구나. 생일 무도회에 올 이웃 나라 공주들 가운데 신부를 고르거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니.’ 기분이 울적해진 왕자는 친구들과 함께 백조 사냥을 하러 숲으로 갔어요. 숲속을 헤매던 왕자의 눈앞에 호수가 펼쳐졌어요. 달빛이 비치는 호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어요. “앗! 호수에 백조가 있군.” 왕자가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백조가 아니라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아가씨였어요. 왕자를 본 아가씨는 너무 놀라 달아나려 했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나는 이 나라의 왕자 지그프리트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당신은 누구시죠?” 왕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가씨는 마음이 놓였어요. “저는 이웃 나라의 공주 오데트라고 해요. 못된 마법사 로트바르트가 저에게 마법을 걸어 낮에는 백조였다가 자정이 되면 사람으로 돌아온답니다.” 공주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왕자는 어떻게든 공주를 돕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법을 풀 수 있나요?” “누군가가 나에게 진심으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꼭 지키면 돼요.” 왕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어요. ‘오데트 공주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어요.’ 왕자는 공주의 손을 꼭 잡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공주님을 구해 드릴게요.” 바로 그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을 휘감았어요. 잔잔하던 호수에 파도가 일기 시작하더니 온통 컴컴해지면서 검은 날개가 나타났어요. “오데트에게서 떨어져라!” “마법사 로트바르트예요!” 공주는 몸을 바르르 떨며 소리쳤어요. 왕자는 재빨리 화살을 꺼내 로트바르트를 겨누었어요. “안 돼요, 왕자님! 로트바르트가 죽으면 저도 죽어요.” 공주의 말에 왕자는 활을 내렸어요. 로트바르트는 매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더니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 버렸어요. “반드시 로트바르트에게서 당신을 구해 내겠어요.” 왕자는 공주를 꼭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어요. “오데트 공주님,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부디 나와 결혼해 주세요.” 공주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내일 밤 무도회가 열리니 꼭 와 주세요. 그때 어머니에게 결혼 허락을 받겠어요.” 서로의 마음을 안 두 사람은 밤새도록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었어요. “왕자님,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어둠이 걷히고 호수 위로 해가 떠오르자, 공주는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날아갔어요. 밤이 되자, 궁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아름다운 이웃 나라 공주들도 많았지만, 왕자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왕자의 마음속에는 오직 오데트 공주뿐이었으니까요. 잠시 뒤, 오데트 공주가 무도회장에 나타났어요. 어제와는 달리 검은 옷을 입고 말이에요. “나에게 다시 한번 사랑을 약속해 주세요.” 그러자 왕자는 검은 옷을 입은 공주의 손을 잡고 말했어요. “나, 지그프리트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때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바로 로트바르트였어요. “오데트에게 사랑을 약속한 지 하루도 안 돼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약속하다니. 네가 사랑을 약속한 아가씨는 내 딸 오딜이다!” 곧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어요. 궁 밖에는 하얀 옷을 입은 진짜 오데트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어요. 그제야 왕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어요. 공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궁을 빠져나가 숲으로 달렸어요. “오데트 공주님, 기다려요!” 왕자는 호숫가에서 울고 있는 공주를 발견했어요. “오데트 공주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공주는 슬픔에 젖은 눈으로 말했어요. “다 끝났어요. 이제 영영 마법을 풀 수 없을 거예요.” 왕자도 눈물을 흘렸어요. 그때 갑자기 하늘이 번쩍대며 천둥이 치더니 두 사람 앞에 로트바르트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오데트는 내 것이다. 오데트, 이리 오너라.” 왕자는 칼을 뽑아 들며 오데트 공주의 앞을 막아섰어요. “나를 죽이기 전에는 공주님을 데려갈 수 없다!” “하하, 어리석은 녀석!” 로트바르트가 호수 위로 팔을 휘젓자, 파도가 일기 시작했어요. 파도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점점 거세졌어요. “오데트, 파도가 너를 삼켜 버리기 전에 이리 와라, 어서!” 하지만 왕자와 공주는 서로 손을 꼭 잡았어요. “당신을 떠나보내고 사느니 이곳에서 죽겠어요.” 왕자의 말에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저도 왕자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파도는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삼킬 것 같았어요. 왕자와 공주는 서로 더 꼭 끌어안았어요. “로트바르트의 마법은 풀지 못했지만, 지크프리트 왕자님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은 그대로 호수에 몸을 던졌지요. 물속은 차갑고 어두웠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둘이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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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과 요술 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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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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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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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은 꾀가 많고 모험을 좋아하는 아이였어. 어느 날, 염소수염을 한 남자가 알라딘을 찾아왔어. “오, 드디어 만났구나! 알라딘, 나는 네 삼촌이란다.”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그 남자는 아프리카에서 온 나쁜 마법사였어. “아주 신나는 일이 있는데, 나랑 같이 갈래?” “신나는 일이라고요? 당장 가요!” 알라딘은 마법사를 따라나섰어. 알라딘과 마법사가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어. “수리수리 마수리 바위 쩍 동굴 펑!”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바위가 갈라지더니 동굴이 생겼어. 알라딘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지. 마법사는 동굴 안으로 알라딘의 등을 떠밀었어. “아래로 내려가 램프를 가져오너라!” 깜깜한 동굴을 본 알라딘은 덜컥 겁이 났어. “저 안에 괴물이 있으면 어떡해요?” “걱정하지 마라. 이 반지가 널 지켜 줄 거다.” 마법사는 반지 하나를 알라딘에게 주었어. 동굴로 내려온 알라딘은 깜짝 놀랐어. 황금과 보석,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알라딘, 램프를 찾았으면 이리 주거라!” 알라딘은 램프를 찾았지만, 마법사를 믿을 수 없었어. “날 올려 주지 않고는 램프를 가질 수 없을걸요?” “뭐라고? 그러면 거기서 굶어 죽어라. 난 다른 아이를 찾겠어.” 버럭 화를 낸 마법사는 동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 버렸어. 동굴 안은 깜깜하고 무척 추웠어. 알라딘은 호호 입김을 불며 손을 비볐지. 그러자 반지에서 흰 연기가 피어나더니 거인이 나타났어! “으악! 괴, 괴물이다!” 알라딘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어. “전 반지의 요정입니다. 주인님,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지 말하라고? 그럼 날 집에 데려다줘.” 반지의 요정이 후 입김을 불자 바위가 날아갔어. 알라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집으로 돌아왔지. 알라딘은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어. “아무 일도 없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이 램프는 잘 닦아서 내다 팔자꾸나.” 어머니가 램프를 문지르는 순간, 반지의 요정보다 훨씬 큰 거인이 나타났어. “주인님, 전 램프의 요정입니다. 무슨 소원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어머니는 무서워서 덜덜 떨었지만, 알라딘은 신이 났어. “램프의 요정아, 몹시 배가 고프구나. 먹을 것을 다오.” 램프의 요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식탁을 차렸어. 번쩍번쩍한 은 접시에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어. 알라딘은 은 접시를 내다 팔아 금방 부자가 되었지. 어느 날, 알라딘은 공주의 행차를 보았어. “길을 비켜라. 공주님이시다!” ‘정말 아름답다.’ 알라딘은 한눈에 공주에게 반하고 말았어. “공주님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알라딘은 그날 이후로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어. 공주를 보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지. “반드시 공주님과 결혼할 거야!” 알라딘은 공주와 어울리는 신랑감이 되기로 결심했어. “우선 임금님께 잘 보여야겠지?” 알라딘은 여든 명의 하인과 보석이 가득한 황금 상자를 앞세우고 궁궐로 향했어. 하인들이 황금 상자를 빼곡히 내려놓자, 임금은 크게 기뻐했어. “이런 귀한 보물을 내게 바치다니.” “임금님, 전 공주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임금이 고민하자 알라딘이 재빨리 말했어. “먼저 공주님과 함께 살 황금 궁전을 짓겠습니다.” “그럼, 궁전이 다 지어지면 결혼하도록 해라.” 알라딘은 램프의 요정에게 황금 궁전을 지으라고 했어. 램프의 요정은 커다란 정과 망치로 바위산을 깎고는 뚝딱뚝딱 궁전을 지었지. 그러곤 커다란 붓을 황금 물감에 적셔 궁전 전체를 금빛으로 칠했어. 해가 뜨자 황금 궁전이 눈부시게 빛났어. “오오,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을 단 하루 만에 짓다니 결혼을 허락하노라.” 알라딘은 얼른 램프의 요정을 불렀어. “램프의 요정아, 멋진 결혼식을 준비해 줘.” 램프의 요정 덕분에 알라딘은 가장 멋진 결혼식을 올렸어. 그 뒤 알라딘은 공주와 행복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금화를 나눠 주었어. 알라딘의 소문을 들은 마법사는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어. 마법사는 장사꾼으로 변장해 황금 궁전으로 찾아갔어. “헌 램프를 반짝반짝 빛나는 새 램프로 바꿔 드립니다.” 공주가 창문 밖으로 요술 램프를 보여 주며 물었어. “이렇게 낡은 램프도 바꿔 주나요?” 마법사는 요술 램프를 보자 침을 꿀꺽 삼켰어. “바꿔 드리고 말고요.” 공주가 요술 램프를 내밀자, 마법사는 냉큼 새 램프로 바꿔 주었어. “으하하! 드디어 요술 램프를 손에 넣었어.” 마법사는 요술 램프를 문질렀어. “주인님, 전 램프의 요정입니다. 무슨 소원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알라딘부터 혼내 줘야겠다. 황금 궁전을 아프리카로 옮겨라.” 램프의 요정이 황금 궁전을 들고 높이 날아올랐어. 궁전에 꼼짝없이 갇힌 공주는 눈물을 뚝뚝 흘렸어. 마법사가 공주에게 소리쳤어. “울어도 소용없어. 넌 평생 나랑 함께 사는 거야. 황금 궁전과 공주가 사라진 것을 안 임금은 너무 기가 막혀 펄쩍펄쩍 뛰었어. “당장 알라딘을 붙잡아 오너라!” 붙잡혀 온 알라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멀뚱거렸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임금은 궁전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어. ‘궁전이 사라지다니!’ 알라딘은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 “알라딘, 공주를 찾아오지 못하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 알라딘은 몇 날 며칠을 헤매고 다녔지만, 공주를 찾을 수 없었어. 지칠 대로 지친 알라딘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지. 그때 알라딘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바위에 긁혔는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반지의 요정이 나타난 거야. “주인님,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너를 잊고 있었구나. 제발 공주와 궁전을 되돌려 줘.” “주인님, 궁전을 옮기는 건 램프의 요정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를 공주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 알라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지의 요정은 알라딘을 황금 궁전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어. 때마침 공주가 창밖을 보고 있었어. “알라딘, 날 구하러 와 주었군요!” 알라딘은 공주를 다시 보게 되어 무척 기뻤지.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 약을 마법사가 마시는 포도주에 넣어요.” 그날 밤, 공주는 약이 든 포도주를 마법사에게 따라 주었어. “하하하! 공주가 웬일로 직접 포도주를 따라 주는 게요? 나와 결혼할 마음이 생긴 게로군.” 마법사는 포도주를 마시자마자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어. 그때 숨어 있던 알라딘이 달려 나왔지. “부인, 이제 나쁜 마법사는 영원히 잠들었소.” 알라딘은 마법사의 품에서 요술 램프를 꺼내 문질렀어. “램프의 요정, 우리를 고향에 데려다줘.” 램프의 요정이 알라딘과 공주가 있는 황금 궁전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자, 임금은 크게 기뻐했어. “하하하, 알라딘. 고맙구나, 고마워.” 임금은 성대한 잔치를 열었어. 그 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지. 요술 램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알라딘만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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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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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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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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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 시골 마을에는 도로시라는 소녀가 살았어요. 어느 날, 도로시가 토토와 함께 집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왔어요. 회오리바람은 ‘윙윙’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도로시의 집을 삼켜 버렸지요. 도로시의 집은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 높이 솟아올랐어요. 도로시는 너무 무서워서 토토를 꼭 껴안았지요. 가엾은 도로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내려앉았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도로시의 집 아래에 은 구두를 신은 다리가 깔린 거예요. 그때 북쪽 마녀가 나타나 말했어요. “동쪽 마녀를 없애 주어서 고마워요.” 알고 봤더니 동쪽 마녀는 못된 짓을 일삼는 나쁜 마녀였어요. 북쪽 마녀는 감사의 선물로 도로시에게 은 구두를 주었어요. “선물은 고맙지만, 저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도로시가 북쪽 마녀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북쪽 마녀는 도로시의 집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어요.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에게 부탁해 봐요. 오즈의 마법사는 못 하는 게 없거든요.”
“오즈의 마법사는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나요?” “벽돌 길을 따라가면 오즈의 마법사가 살고 있는 에메랄드 시가 나와요.” 도로시는 북쪽 마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토토와 함께 길을 떠났어요. 벽돌 길을 따라가던 도로시는 말하는 허수아비를 만났어요. “허수아비가 말하다니 정말 신기해. 사람처럼 생각할 수도 있어?” 도로시가 놀라 물었어요. “내 머리에는 짚이 가득 차서 생각할 수 없어.” 허수아비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지요. “그럼, 너도 오즈의 마법사에게 두뇌를 만들어 달라고 해.” “오즈의 마법사가 두뇌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오즈의 마법사는 못 하는 게 없대.” 허수아비는 도로시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허수아비와 함께 가던 도로시는 움직이는 양철 나무꾼도 만났어요. “양철 나무꾼이 움직이다니 정말 신기해. 사람처럼 울기도 하니?” 도로시가 놀라 물었어요. “내 가슴은 텅텅 비어서 울어 본 적이 없어.” 양철 나무꾼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어요. “그럼, 너도 오즈의 마법사에게 심장을 만들어 달라고 해.” “오즈의 마법사가 심장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오즈의 마법사는 못 하는 게 없대.” 양철 나무꾼도 기뻐하며 도로시와 함께 가기로 했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도로시가 함께 가는데 이번에는 불쑥 사자가 나타났어요. 사자는 도로시와 친구들에게 으르렁거리며 겁을 주었어요. 그러자 토토가 사자에게 ‘왕왕’ 짖어 댔지요. “무서우니까 짖지 마. 사실 난 겁쟁이란 말이야.” 사자가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어요. “너도 오즈의 마법사에게 용기를 달라고 해.” “오즈의 마법사가 용기를 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오즈의 마법사는 못 하는 게 없대.” 이렇게 해서 사자도 도로시와 함께 에메랄드 시로 향했어요.
마침내 도로시와 친구들은 에메랄드 시에 도착했어요. 문지기는 도로시와 친구들에게 초록색 안경과 리본을 하나씩 주었어요. 에메랄드 시는 사방이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하고, 보석처럼 반짝거렸지요. “우아, 에메랄드 시는 정말 멋진 곳이구나! 이런 곳에 사는 마법사는 아주 훌륭한 마법사일 거야.” 도로시와 친구들은 잔뜩 기대하고 오즈의 마법사를 만났어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즈의 마법사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나쁜 서쪽 마녀를 물리치고 오면 그때 소원을 들어주마.” 도로시와 친구들은 하는 수 없이 서쪽 마녀가 사는 성으로 향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서쪽 마녀는 화가 단단히 났지요. 그래서 마법 호루라기를 불어 무서운 벌 떼를 보냈어요. 수십만 마리의 벌 떼가 몰려오자 모두 깜짝 놀랐지요. 그때 허수아비가 손뼉을 치며 말했어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허수아비는 몸속의 짚을 꺼내서 도로시와 친구들에게 덮어 주었어요.
벌 떼들은 도로시와 친구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어요. “허수아비는 정말 똑똑하구나.” 모두 허수아비를 칭찬했어요.
깜짝 놀란 서쪽 마녀는 또 마법 호루라기를 불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창을 든 군인들이 나타났어요. 군인들은 창을 휘두르며 도로시와 친구들을 공격했어요. 그때 벌벌 떨고만 있던 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어요. “내 친구들을 건드리지 마! 으르렁.” 사자가 얼마나 무섭게 으르렁거렸던지 군인들은 창을 버리고 모두 줄행랑을 놓았지요. “사자는 정말 용감하구나.” 모두 사자를 칭찬했어요. “이번엔 어림없을걸!” 서쪽 마녀는 황금 모자를 쓰고 주문을 외웠어요.
그러자 어디선가 날개 달린 원숭이들이 나타났어요. 원숭이들은 순식간에 도로시를 꽁꽁 묶어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도로시!” 잡혀가는 도로시를 보며 양철 나무꾼이 소리쳤어요. 하지만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를 구할 수 없었어요. 양철 나무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서쪽 마녀는 도로시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 틈만 나면 도로시의 은 구두를 빼앗으려고 했어요. 하루는 서쪽 마녀가 마법을 걸어 도로시를 넘어지게 했어요. 그 바람에 은 구두 한 짝이 벗겨졌고, 서쪽 마녀는 냉큼 구두를 신어 버렸어요. “내 신발 내놔요!” 화가 난 도로시는 옆에 있던 물통을 들어 서쪽 마녀에게 냅다 부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물을 뒤집어쓴 서쪽 마녀가 스르르 녹아서 없어져 버린 거예요! “서쪽 마녀를 물리쳤어!” 도로시와 친구들은 다시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갔어요. “미안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니란다. 나도 도로시처럼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여기에 오게 된 거야.” “그럼, 우리 소원은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울상이 되었지요. “서쪽 마녀를 물리치면서 허수아비는 똑똑한 생각을 해냈어. 사자는 용감한 행동을 했고, 양철 나무꾼은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었지. 너희는 이미 소원을 이룬 거야.” 오즈의 마법사는 허수아비에게 짚으로 만든 두뇌를, 양철 나무꾼에게 비단으로 만든 심장을, 사자에게 용기를 내는 물약을 주었어요. “그럼, 나는요?” 눈물을 글썽거리던 도로시가 물었어요. “미안하지만 네 소원은. 아, 좋은 생각이 있어. 나와 커다란 풍선을 타고 같이 찾아보지 않을래?” 그런데 도로시가 커다란 풍선에 올라타려는 순간 토토가 갑자기 뛰어내려 버렸어요. 도로시가 토토를 잡는 사이에 커다란 풍선은 둥둥 날아가 버렸지요. 도로시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바로 그때, 남쪽 마녀가 나타났어요. “그 은 구두를 신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도로시는 남쪽 마녀가 가르쳐 준 대로 구두의 뒤꿈치를 ‘톡, 톡, 톡’ 세 번 치며 소리쳤어요. “날 캔자스 우리 집에 데려다줘!” 그 순간 도로시의 몸이 핑그르르 돌면서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도로시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캔자스의 시골 마을이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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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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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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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넬로가 우유를 배달하고 오는 길이었어요. “할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커다란 개가 들판에 쓰러진 채 겨우 숨만 쉬고 있었어요. 온몸이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요. “넬로, 이 개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자꾸나.” 할아버지는 커다란 개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파트라슈.’ 넬로가 커다란 개에게 붙여 준 이름이에요. 파트라슈는 한동안 끙끙 앓느라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할아버지와 넬로가 정성껏 돌보아 준 덕분인지 파트라슈는 점점 기운을 차렸지요. “파트라슈, 푹 쉬어. 우유 배달이 끝나면 바로 올게.” 파트라슈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준 사람은 할아버지와 넬로가 처음이었어요. 파트라슈는 얼른 일어나 할아버지와 넬로를 돕고 싶었어요. 기운을 차린 파트라슈는 어디든 넬로를 따라다녔어요. 대성당만 빼고요. 넬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려고 대성당에 들렀어요. 하지만 그 그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늘 가려져 있고 돈을 내야만 볼 수 있었거든요. ‘딱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넬로는 물감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루벤스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그림 앞에 있는 넬로를 파트라슈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어요. 넬로에게는 넬로의 그림이 최고라고 말해 주는 친구 아루아가 있었어요. 넬로와 아루아가 언덕을 뛰어다니면 파트라슈도 커다란 몸을 씰룩이며 쫓아다녔지요. 하지만 아루아의 아빠 코제 씨는 넬로를 싫어했어요. “넬로같이 가난한 아이와 친구라니!” 코제 씨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거든요. 아루아의 생일이 다가왔지만 넬로는 초대받지 못했어요. 코제 씨가 넬로를 부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넬로는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할아버지는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넬로야, 내가 너무 가난해서 미안하구나.” “전 괜찮아요. 저에겐 할아버지도 있고, 파트라슈도 있는걸요.” 넬로는 가난하다고 슬퍼하지 않았어요.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으니까요. 이제 파트라슈는 우유 수레 끌기가 힘에 부칠 만큼 늙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넬로 곁을 지켰지요. 미술 대회에 그림을 내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림을 내고 돌아오면서 넬로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도 쿵쾅쿵쾅 뛰었어요. 어느 날 오후, 넬로는 길가에서 예쁜 인형을 주웠어요. “아루아에게 생일 선물도 못 줬는데 이걸 주면 좋아하겠지?” 넬로와 파트라슈는 한달음에 아루아에게 달려갔어요. 그날 밤, 코제 씨의 방앗간에 불이 났어요. 사람들이 몰려든 통에 넬로도 방앗간 쪽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코제 씨가 넬로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어요. “아까 네가 방앗간 앞에서 얼쩡거리는 걸 똑똑히 봤다. 방앗간에 불을 지른 게 너지?” 넬로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코제 씨 편을 들었지요. 마을 사람들은 넬로의 할아버지도 피했어요. 할아버지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탓인지 며칠째 누워만 있다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났지요. 추운 오두막에 넬로와 파트라슈만 남겨 놓고 말이에요. 넬로는 할아버지가 누워 있던 침대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지요. 그때 집주인이 문을 쾅쾅 두들겼어요. “집세도 못 낸 주제에! 당장 집을 비워!”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넬로와 파트라슈는 오두막에서 쫓겨났어요. 집 밖은 끔찍할 정도로 추웠어요. 매서운 눈보라 때문에 눈조차 뜨기 힘들었고, 걷는 것도 힘겨웠지요. “파트라슈에게 먹을 것 좀 주시겠어요?” 넬로가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렸지만 헛일이었어요. “오늘이 미술 대회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야. 파트라슈, 가자.” 미술 대회는 넬로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어요. 며칠 동안 굶은 넬로와 파트라슈는 비틀거리며 발표장으로 걸어갔어요. 많은 사람이 발표장에 모여 웅성거렸어요. 대회에서 뽑힌 그림이 걸려 있었지요. “내 그림이 아니야.” 넬로는 팔다리의 힘이 풀려 버렸어요. 넬로와 파트라슈는 춥고 어두운 밤길을 비틀거리며 걸었어요. 그때 파트라슈가 눈 속에서 지갑을 하나 찾아냈어요. 돈이 두둑이 들어 있는 지갑에는 코제 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파트라슈, 지갑을 코제 씨에게 돌려주자.” 돈을 조금만 꺼내면 빵을 살 수 있었는데도, 넬로는 곧장 코제 씨를 찾아갔지요. “이 지갑은 파트라슈가 찾았어요. 파트라슈를 잘 돌봐 주세요.” 넬로는 말을 마치자마자 후다닥 뛰어가 버렸어요. “내가 넬로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 코제 씨는 넬로에게 사과하고 싶었어요. 코제 씨는 파트라슈에게 빵과 고기를 주었지만 파트라슈는 입도 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문이 열린 순간 뛰쳐나갔지요. “파트라슈, 파트라슈!” 아루아가 소리 높여 불렀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파트라슈는 넬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파트라슈는 곧장 대성당으로 달려갔어요. 넬로는 대성당 그림 아래에 쓰러져 있었어요. 파트라슈는 넬로의 얼굴을 건드려 보았어요. 넬로는 겨우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키고는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았지요. “파트라슈, 와 줬구나. 고마워.” 그때 달빛이 커다란 그림을 비추었어요. 그림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 눈부시게 빛났어요. 넬로가 쓰러질 때 그림을 가렸던 천이 벗겨졌던 거예요.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드디어 봤어.” 넬로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아침이 되자 사람들이 대성당에 모여들었어요. 사람들은 꼭 껴안고 잠든 넬로와 파트라슈를 발견했지요. 그때 한 화가가 달려왔어요. “이 아이가 미술 대회에 낸 훌륭한 그림을 봤습니다.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는데.” 하지만 넬로와 파트라슈는 다시 깨어나지 않았어요. 아무도 둘을 떼어 놓을 수 없었지요. 넬로의 팔이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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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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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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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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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쓱싹쓱싹.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 인형을 만들어요. “이 인형이 내 아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순간, 할아버지는 손을 멈추었어요. 인형이 움찔하며 움직였거든요. “안녕, 아빠!” 인형이 빙긋 웃으며 말했어요. 할아버지는 무척 기뻤어요. “오, 푸른 별이 내 소원을 들어주었구나! 이제부터 네 이름은 피노키오란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안으려고 하자, 피노키오는 쏙 빠져나가 집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밖에서 놀래요!” “돌아와, 피노키오!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잖니!” 제페토 할아버지가 허둥지둥 쫓아갔지만, 피노키오는 폴짝폴짝 뛰어 저만치 달아나 버렸어요. 한참 뒤, 피노키오가 집으로 돌아와서야 제페토 할아버지는 겨우 숨을 돌렸어요. 다음 날 아침, 제페토 할아버지는 셔츠만 입고 덜덜 떨고 있었어요. “아빠, 옷은 어떻게 했어요?” “겉옷을 팔아서 네 책을 사 왔단다.” “오늘부터 너도 학교에 가는 거야.” 제페토 할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책을 건넸어요. “아이, 좋아라. 이제부터 아빠 말을 잘 들을게요.” 피노키오는 학교 가는 길에 인형 극장을 보았어요. “인형극이잖아? 나도 보고 싶어.” 한 푼도 없었던 피노키오는 아빠가 사 준 책을 팔아서 극장으로 들어갔어요. 빰빠라 빰!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지자, 인형들이 무대에 올라 흥겨운 춤을 추었어요. 피노키오도 인형들을 따라 팔짝팔짝 뛰며 춤을 추었지요. 그러자 인형 하나가 피노키오에게 소리쳤어요. “이봐, 나무 인형! 너도 올라와!” 그 말을 들은 피노키오는 무대에 올라가 마구 뛰어다녔어요. 인형극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요. “이 녀석! 내 인형극을 망쳐 버리다니!” 화가 난 극장 주인이 피노키오를 불에 던지려고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가 없으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예요.” 피노키오가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리자, 극장 주인은 마음이 약해졌어요. “좋아, 한 번만 용서해 줄 테니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여기 이 금화로 다시 책을 사거라.” 극장 주인은 피노키오에게 금화까지 주었어요. 피노키오가 짤랑짤랑 금화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여우와 고양이가 말을 걸었어요. “그 금화를 신기한 땅에 묻으면 나무가 쑥쑥 자라 금화 열매를 맺을걸.” “나무에 금화가 주렁주렁 열리면 큰 부자가 될 텐데.” 피노키오는 여우와 고양이의 말대로 금화를 땅에 묻었어요. 그리고 금화가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지요.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를 보며 천사가 말했어요. “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쑥쑥 길어질 거야.” “잘못했어요.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이제 정말 착한 아이가 될 거예요.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않고 학교에도 꼭 갈게요. 약속해요!” 피노키오가 용서를 빌자 길어진 코가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피노키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잠에서 깬 피노키오는 깜짝 놀랐어요. 나무에 몸이 꽁꽁 묶여 있었거든요. “속았지?” “금화는 우리가 가져갈게. 안녕!” 못된 여우와 고양이가 피노키오를 그대로 놔두고 가 버렸어요. 피노키오는 나무에 꽁꽁 묶인 채 엉엉 울었지요. 한참 울다 눈을 떠 보니 피노키오 앞에 아름다운 푸른 머리 천사가 서 있었어요. 천사는 피노키오를 나무에서 풀어 주고는 물었어요. “피노키오, 왜 학교에 가지 않았니?” “그게, 저 갈 수가 없었어요.” “왜 학교에 갈 수 없었지?” “책을 잃어버렸어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했어요. 그러자 코가 쑤우욱 길게 늘어났어요. “내 코! 코가 자꾸 길어져요!” 기분이 좋아진 피노키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이들을 가득 태운 마차가 피노키오 옆에 멈춰 섰어요. 마차를 몰던 아저씨가 물었어요. “너도 장난감 나라로 갈래? 하루 종일 놀기만 한단다.” “와, 나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빠가 기다리실 거예요.” 피노키오가 망설이자, 아저씨가 말했어요. “사탕과 과자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피노키오는 마차에 얼른 올라탔어요. 장난감 나라에 도착한 피노키오는 입이 떡 벌어졌어요. “우린 학교에 가지도 않아.” “우린 씻지도 않아. 날마다 놀기만 하지.” “장난감 나라 만세!” 장난감 나라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놀았어요. 피노키오도 아이들 틈에 끼어 정신없이 놀았지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피노키오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앗! 내가 당나귀가 되었잖아! 히히힝!” 말소리까지 당나귀처럼 나왔어요. 피노키오의 몸도 당나귀로 변해 버렸지요. 어느새 장난감 나라 아이들은 하나둘 당나귀로 변했어요. 당나귀가 된 아이들은 여기저기로 팔려 나갔어요. 피노키오도 험상궂게 생긴 남자에게 팔렸지요. 남자는 바닷가로 피노키오를 끌고 가며 말했어요. “이 녀석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야지.” 그 말을 들은 피노키오는 발버둥을 쳤어요. 그러다 그만 풍덩 하고 바다에 빠지고 말았어요. 차가운 바닷물이 피노키오를 감싸자, 피노키오는 다시 나무 인형이 되었어요. “아,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그때 갑자기 파도가 거세게 일더니 커다란 상어가 피노키오를 꿀꺽 삼켰어요.
상어의 배 속에서 피노키오는 슬프게 울었어요. “장난감 나라에 가는 게 아니었어. 천사 말대로 집에 갈걸. 아빠, 보고 싶어요.” 이제 피노키오는 달라졌어요. 거짓말도 하지 않고, 약속도 잘 지키는 아이가 되었어요. 물론 제페토 할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일도 하고, 학교도 열심히 다녔지요. 어느 날 피노키오의 꿈속에 푸른 머리 천사가 나타났어요. “피노키오, 착한 아이가 되었구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착한 마음을 간직하렴.” “그러면 큰 행운이 찾아올 거야.” 잠에서 깨어난 피노키오는 깜짝 놀랐어요.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 변해 있었어요. “아빠! 아빠! 내가 진짜 아이가 되었어요.” “오! 피노키오, 이런 날이 오다니.”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꼭 껴안았어요.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다가왔어요. “피노키오? 세상에! 우리 아들 피노키오로구나!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나다니!” 그건 바로 제페토 할아버지였어요. 피노키오를 찾아 헤매다 바다로 온 제페토 할아버지도 상어에게 잡아먹혔던 거예요.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어요. “아빠, 우리 함께 밖으로 나가요.” 상어가 입을 벌리는 순간, 피노키오와 제페토 할아버지는 재빨리 상어 배 속을 빠져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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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의 이상한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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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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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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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는 오늘도 무슨 장난을 칠지 궁리하고 있었어. “닐스, 엄마랑 아빠가 밖에 다녀올 동안 말썽 피우지 말고 책을 읽고 있으렴.” “네, 약속할게요.” 닐스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책을 조금만 봐도 졸린 걸 어떡해. 닐스는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지. 조금 뒤 나무 상자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락거렸어. “음, 무슨 소리지?” 어렴풋이 잠에서 깬 닐스의 눈이 휘둥그레졌어. 조그마한 요정이 나무 상자 위에 앉아있었거든. 닐스가 그런 재미난 것을 놓칠 리 없지. 닐스는 잽싸게 잠자리채를 휘둘러 요정을 잡았어. “나, 난 요정 톰텐이야. 제발 날 풀어 줘!” “톰텐? 그게 뭔데? 넌 오늘부터 내 장난감이라고!” 닐스는 잠자리채를 이리저리 흔들었어. “닐스, 날 풀어 주면 은수저와 금화 한 닢을 줄게.” “그거 말고 더 대단한 건 없어?” 닐스는 잠자리채를 더 세차게 흔들어 댔어. “닐스, 어지러워! 그만해!” 순간 집 안이 흔들흔들댔어. 닐스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지. 잠시 뒤, 닐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게 이상했어. 집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거야. 의자며 탁자도 엄청 커졌지 뭐야? 닐스는 톰텐이 집과 가구들을 크게 만든 줄 알았어. 하지만 그 반대였지. “앗, 말도 안 돼! 내가 톰텐만큼 작아진 거였어! 요정 톰텐을 가만두지 않겠어.” 닐스는 톰텐을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톰텐은 집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혹시 톰텐이 마당에 있나?’ 닐스는 집 밖으로 나가 보았어. 마당에는 닭과 거위, 고양이가 모여 있었지. “어머, 누가 닐스를 저렇게 만들었대?” 닐스는 동물들이 하는 말이 들리는 게 신기했어. “우리를 엄청 괴롭히더니, 잘됐다.” 닭이 닐스를 약 올리자, 닐스는 크게 소리쳤어. “뭐라고? 나한테 혼나 볼래?” 그러자 닭과 거위, 고양이가 닐스에게 달려들었어. “이제 우리한테 혼나 봐라!” 닐스는 무서워서 허겁지겁 도망쳤지. 한편, 닐스의 집을 지나던 기러기 떼가 거위들을 불렀어. “너희들도 우리랑 라플란드로 갈래?” “저것들이 또 약을 올리네, 쳐다보지도 마.” 거위들은 일부러 모른 체했어. 하지만 수컷 거위 모르텐은 달랐지. “나도 라플란드로 갈래!” 모르텐은 날개를 쭉 펼치고 날아오르려고 했어. 하지만 나는 데 익숙하지 않아 번번이 땅으로 떨어졌어. 겨우겨우 한숨을 돌리던 닐스가 그런 모르텐을 보았어. “어디를 가려고, 절대 안 돼!” 닐스는 재빨리 달려가서 모르텐의 목을 꽉 끌어안았어. 그 순간 모르텐은 하늘로 날아올랐지. “우아, 내가 하늘을 날고 있어. 거위들아, 내가 부럽지?” 닐스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 닐스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정말 놀라웠어. 닐스는 이제 집도 조금밖에 생각나지 않았어. 해가 지자 모두 호숫가에 내려앉았어. 기러기들의 우두머리인 아카가 닐스에게 다가왔어. “넌 새가 아니니, 우리랑 함께 여행할 수 없다. 내일 날이 밝으면 너를 집으로 돌려보낼 거다.” 그 말에 닐스는 무척 속이 상했어.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였지. 파드닥파드닥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어. 여우가 잠들어 있던 기러기 한 마리를 물어 버린 거야. 그 모습을 본 닐스는 가만있을 수 없었어. “당장 기러기를 내려놓지 못해?” 닐스는 재빨리 달려가 여우의 꼬리를 잡아당겼어. 너무 놀란 여우는 기러기를 놓쳐 버렸지. 결국 아카는 닐스도 함께 여행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어. 여행을 가던 중에 이런 일도 있었어. 어느 마을에 들렀을 때, 닐스는 어미 다람쥐가 농부에게 잡혀가는 것을 보았어. 닐스는 자꾸만 마음이 쓰여서 새끼 다람쥐들을 찾아갔지. 그랬더니 모두 쫄쫄 굶고 있는 거야. 닐스는 가여운 새끼들을 보자기에 싸서 커다란 새장에 갇혀 있는 어미 다람쥐에게 건네주었어. 이전의 닐스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지. 다음 날, 다람쥐를 보러 나온 농부는 깜짝 놀랐어. “새끼들이 있는 어미였다니.” 농부는 다람쥐들을 얼른 숲속에 다시 풀어 주었어. ‘이렇게 도움을 주니 행복하구나.’ 닐스는 마음이 뿌듯해졌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기러기들은 여행을 계속했어. 어느 날, 모르텐 친구 둔핀이 다급하게 닐스를 찾았어. “닐스, 모르텐이 검독수리에게 당하고 있어.” “뭐라고? 나를 빨리 모르텐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 하지만 닐스는 검독수리를 당해낼 수 없었지. “둔핀, 얼른 아카를 불러 줘.” 그러자 검독수리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었어. “아카라고? 나는 고르고야. 아카와 함께 다니는 무리였다니, 미안해.” 고르고는 황급히 날아가 버렸어. 아카는 고르고의 엄마, 아빠를 대신하여 고르고를 키워 주었거든. 그래서 고르고는 아카의 친구들만큼은 건드리지 않았지. 하지만 마음을 놓으면 안 돼. “탕!” 이번에는 사냥꾼들이 새들을 향해 총을 쏘았지. 깜짝 놀란 모르텐이 허둥대다가 그만 닐스를 떨어뜨렸어. 사냥꾼은 후다닥 닐스를 잡아 작은 통에 넣었어. “여보게, 내가 딱 엄지만 한 녀석을 잡았어. 동물원에 비싼 값으로 팔 수 있겠지?” 그 소리를 들은 닐스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어. 닐스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앉았지. 그런데 밑에 작은 구멍이 나 있지 뭐야. 닐스는 이때다 싶어 얼른 구멍 밖으로 뛰어내렸어. 그러고는 숲속으로 달아났지. 혼자가 된 닐스는 모르텐과 아카를 찾아 헤맸어. 숲에서 여러 친구를 알게 될수록 모르텐과 아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지. 그러던 어느 날, 닐스는 마을 가까이에 내려갔다가 철사로 된 새장에 갇혀 있는 검독수리를 발견했어. “너는 그때 모르텐을 살려 준 고르고잖아?” “맞아, 사람들에게 잡혀서 새장에 갇히게 됐어. 곧 동물원으로 팔려 갈 거야.” 닐스는 희망을 버린 고르고를 구해 주고 싶었어. 닐스는 낮이고 밤이고 쇠막대기로 철사들을 긁어 댔어. “잠이나 자, 새장은 그냥 내버려 두고.” 고르고는 닐스를 믿지 않았어. 하지만 며칠 뒤에 닐스는 정말로 수많은 철사를 끊어낸 거야. 고르고는 새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게 믿기지 않았지. “닐스, 정말 네가 해냈구나. 내가 널 라플란드로 데려다줄게.” 고르고는 닐스를 태우고 하늘을 훨훨 날았지. 이른 새벽 즈음, 고르고가 속삭였어. “닐스, 라플란드에 도착했어. 나는 이만 돌아갈게.” 고르고는 기러기들이 놀랄까 봐 조용히 숲을 떠났어. 닐스는 저 멀리서 기러기들을 지키고 있는 아카를 보았지. “아카!” 닐스는 아카를 향해 달려갔어. 닐스의 목소리를 듣고 모르텐이 달려왔어. “닐스, 무사해서 다행이야.” “모르텐, 엄청 보고 싶었어.” 닐스는 모르텐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어. 라플란드에서 겨울을 지낸 기러기들은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닐스는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고, 엄마가 갓 구워 준 빵도 먹고 싶었어. 물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것도 지긋지긋했지. 그렇지만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어. 닐스는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여행길에 나섰어. 어느덧 저 멀리 닐스가 살던 마을이 보였어. 닐스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 그때 검독수리가 다급하게 닐스를 찾아왔어. “닐스, 잠깐 얘기 좀 하자.” 아카는 닐스를 내려 주었어. “요정 톰텐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거든. 모르텐이 네 아빠 손에 죽어야만 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대.” “어떡하지, 모르텐이 둔핀이랑 먼저 집에 갔을 텐데. 나 때문에 친구를 죽게 할 수 없어.” 닐스는 부랴부랴 아카와 함께 집으로 날아갔어. 아니나 다를까 먼저 집에 도착한 모르텐은 자기가 살던 곳을 친구 둔핀에게 자랑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만 닐스의 엄마에게 붙잡히고 말았지. 엄마는 모르텐을 안고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갔어. 그 모습을 본 아카가 닐스를 집 앞에 내려 주었어. “여보, 이 거위를 죽여서 시장에 내다 팔아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닐스는 창밖에서 크게 소리쳤어. “거위를 죽이면 안 돼요!” 엄마와 아빠는 닐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 닐스는 더 크게 힘껏 소리쳤지. 어느새 닐스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어. 그제야 엄마와 아빠는 닐스를 알아보았어. “닐스야, 언제 돌아왔니?” 엄마와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닐스를 꼭 껴안았어. “아빠, 엄마! 정말 이상한 모험을 했어요.” 그때 기러기들이 닐스의 집 위로 빙빙 날다가 끼룩끼룩대며 떠나갔지. “친구들, 잘 가! 너희들과 함께한 여행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고마워.” 닐스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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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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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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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에드워드는 궁전 앞을 거닐고 있었어요. 그러다 거지 아이가 병사한테 매 맞는 걸 보았지요. “불쌍한 아이한테 뭐 하는 짓이냐? 그만해라!” 그 아이는 거지 소년 톰이었어요. 에드워드는 궁전 안의 으리으리한 방으로 톰을 데려갔어요. “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보아라.” 톰은 에드워드에게 바깥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진흙에서 뒹굴며 신나게 놀았던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톰, 나도 바깥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녀 보고 싶어. 우리 서로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떨까?” “네, 왕자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런데 옷을 바꿔 입은 두 사람은 깜짝 놀랐어요. 똑같은 키에, 눈, 코, 입 모양까지....... 누가 진짜 왕자고 누가 진짜 거지인지 알 수 없었지요. 에드워드는 톰의 손에 생긴 상처를 보았어요. “아까 맞아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당장 가서 혼내 주고 올게!” 에드워드는 들고 있던 무언가를 벽 쪽에 휙 던져 넣고는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누더기를 입은 에드워드는 톰을 때린 병사에게 소리쳤어요. “네 이름을 대라!” 하지만 병사는 에드워드의 뺨을 철썩 때렸어요. “감히 왕자를 때리다니,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어!” “이놈이 뭐라는 거야?” 병사는 에드워드를 궁 밖으로 내쫓았어요. “나는 왕자다! 어서 문을 열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에드워드를 비웃었어요. “저 아이가 미쳤나 봐.”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에드워드는 어두운 골목을 헤매고 있었어요. 그때 술에 취한 남자가 에드워드의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어요. “아버지를 보고도 모르는 척해? 따끔한 맛을 보여 주마!” 에드워드는 버둥거리며 소리쳤어요. “네가 톰의 아버지냐? 나는 이 나라의 왕자다!” “이놈이 이젠 아예 돌았군.” 톰의 아버지는 에드워드를 질질 끌고 갔어요. 성에 혼자 남은 톰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했어요. 밖에서 작은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랐지요. 누군가 들어와서 잡아갈 것 같았거든요. 그때 에드워드의 사촌인 제인 아가씨가 들어왔어요. 톰은 무릎을 꿇고 덜덜 떨며 말했어요. “제발 왕자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눈이 동그래진 제인 아가씨는 급히 방을 나갔지요. 그날 밤, 에드워드는 톰의 냄새 나는 이불 위에 누웠어요. 톰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에드워드를 꼭 안았어요. “불쌍한 내 아들! 미쳐 버리다니.......” 하지만 톰의 아버지는 에드워드를 볼 때마다 주먹을 휘둘렀어요. “이 게으름뱅이 자식아, 어서 가서 먹을 걸 구해 와!” 다음 날, 에드워드는 톰의 아버지가 잠든 틈을 타서 얼른 도망쳤어요. 한편, 톰은 에드워드의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어요. 하인이 얼른 다가와 옷을 입혀 주었어요. “나 혼자서 입을 수 있는데.......” 아침 식탁에는 처음 보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어요. 톰은 허겁지겁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어요. 게다가 하인이 손 씻을 물을 가져오자, 그 물을 꿀꺽꿀꺽 마셔 버렸어요. “왕자님이 좀 이상해.” “정말 미친 거 아니야?” 궁전 사람들은 수군댔지요. 톰의 집에서 도망친 에드워드는 거리를 헤매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갔어요. 마침 궁에서 나온 톰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어요. 에드워드가 참지 못하고 외쳤어요. “저 아이는 가짜야, 내가 진짜 에드워드 왕자라고!” 한 병사가 에드워드를 밀치려는 순간이었어요. “어린아이한테 무슨 짓이오?” 한 사람이 병사를 가로막았어요. 에드워드를 구해 준 사람은 헨든이라는 사나이였어요. “내가 진짜 에드워드 왕자다. 나를 구해 주었으니, 상을 주마. 소원을 말해 보라!” 거지 아이가 왕 노릇을 한다고 여긴 헨든은 장난스럽게 말했어요. “저와 제 자손들이 국왕 폐하 앞에 앉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에드워드는 칼을 헨든의 어깨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때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렸어요. “국왕 폐하가 돌아가셨다!” 에드워드는 눈물을 흘렸어요. 무섭기로 소문난 국왕이었지만 왕자에게만큼은 다정한 아버지였거든요. 얼떨결에 왕이 된 톰은 머리가 아팠어요.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작고 깡마른 아이가 톰을 찾아왔어요. “너는 누구냐?” “저는 왕자님 대신 매를 맞던 아이옵니다. 이제 왕이 되셨으니, 제가 필요 없어져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톰은 매 맞는 아이를 곁에 두고 왕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왕궁의 일을 배워 나갔어요. 에드워드는 또다시 톰의 아버지 눈에 띄어 거지들이 사는 곳으로 끌려갔어요. 그곳에서 에드워드는 처음으로 백성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지 알게 되었어요. 에드워드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어요. “오늘부터 나쁜 법을 없앤다! 나는 에드워드 국왕이다!” 거지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에드워드를 놀렸어요. “바보 나라 왕, 푸푸 1세 만세!” 거지들은 에드워드에게 깡통을 씌우고 너덜너덜한 담요를 둘러 주었어요. 거지들 틈에 섞여 다니던 에드워드는 결국 도둑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가게 되었어요. 에드워드를 도와주던 헨든도 함께 갇히고 말았지요. 감옥에서 에드워드는 백성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돌아가서 모든 걸 바로잡아야겠어. 그런데 왜 궁에선 나를 찾지 않는 거지?’ 그때 밖에서 병사들이 수군거렸어요. “곧 에드워드 국왕의 대관식이 열린대.” 화가 난 에드워드는 소리쳤어요.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나는 대관식에 가야 한다!”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에드워드를 끌고 나갔어요. 어린아이가 맞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헨든이 에드워드 대신 매를 맞았지요. 에드워드는 헨든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결국 헨든이 두 사람 몫의 벌을 모두 받고 나서야 헨든과 에드워드는 감옥에서 풀려났어요. 마침내 대관식 날이 되었어요. 톰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순간, 에드워드가 앞으로 뛰쳐나왔어요. “멈춰라! 에드워드 왕은 바로 나다!” 병사들이 에드워드를 잡으려고 달려들었어요. 그러자 톰이 벌떡 일어나 외쳤어요. “그분이 진짜 왕이시다!” 톰은 에드워드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두 사람이 무척 닮았거든요. “진짜 왕이라면 옥새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옥새라는 말에 에드워드는 얼굴을 찡그렸어요. “폐하, 옷을 바꿔 입던 날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 급하게 나가시면서.......” 톰이 에드워드의 기억을 되살려 주려고 나섰어요. 에드워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어요. “아! 생각났어. 벽에 세워 둔 갑옷 속에 던져 넣었어.” 옥새를 찾은 에드워드는 진짜 국왕이 되었어요. “에드워드 국왕 폐하 만세!” 대관식은 아주 성대하게 열렸어요. 거지가 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은 에드워드 왕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자신을 대신해 주었던 톰에게는 큰 상을 내리고 헨든은 가장 믿고 아끼는 신하로 삼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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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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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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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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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질 때에도 스크루지의 사무실에서는 돈을 세는 소리만 들렸어요. 사무실은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스크루지는 난로에 석탄을 한 덩이 넘게 넣지 않았어요. 사무실로 스크루지의 조카가 찾아왔어요. “삼촌, 내일 저희 집에 식사하러 오세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거예요.” 스크루지는 화를 버럭 냈어요. “시끄러워! 허튼소리 하지 마!” 스크루지는 서기 밥에게도 화를 냈어요. “크리스마스 날 딱 하루만 쉬고 그다음 날은 평소처럼 새벽에 나와! 1분만 늦어도 월급을 깎아 버리겠어!”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날 쉬는 것이 아주 못마땅했어요. 씩씩거리며 집으로 온 스크루지는 식은 죽을 먹으려고 난롯가에 앉았어요. 그때였어요. 쩔그럭쩔그럭.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지?’ 마치 묵직한 쇠붙이가 움직이는 소리 같았어요. “흥,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쩔그럭쩔그럭.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어요. 그때 온몸이 투명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바로 7년 전에 죽은 스크루지의 친구 ‘말리’였어요. 말리는 온몸을 쇠사슬로 칭칭 감고 있었어요. “마, 말리 맞지? 이게 무슨 꼴인가?” 말리는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어요. “내가 사는 동안 만들어진 쇠사슬이라네. 스크루지, 자네의 쇠사슬은 내 것보다 훨씬 길고 무겁다네.” “나도 죽으면 자네처럼 된다는 건가?” “그래.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네. 유령 셋이 자네를 찾아올 테니 그들을 피하지 말게.” 말리는 그대로 사라졌고, 스크루지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요. 종소리에 잠이 깬 스크루지는 첫 번째 유령을 보고 눈을 비벼 댔어요. 첫 번째 유령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어요. "나는 과거의 크리스마스 유령이야. 겁내지 말고 내 손을 잡아." 스크루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령의 손을 잡았어요. 그 순간 스크루지의 방은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바뀌었어요. 주위를 둘러본 스크루지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세상에! 여기는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잖아!” 놀랍게도 젊었을 때의 스크루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래, 사장님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멋진 파티를 열어 주셨어. 가난해도 그때가 참 좋았지.” 스크루지는 눈을 감고 빙긋이 웃었어요. 잠시 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스크루지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어요. 스크루지는 자기 방에서 또 눈을 떴어요. 이번에는 두 번째 유령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현재의 크리스마스 유령이다. 내 옷자락을 잡아라.” 스크루지가 유령의 옷자락을 잡는 순간, 작고 초라한 집 앞에 서 있었어요. 그곳은 서기 밥의 집이었어요. 밥의 식구들은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때에만 먹는 맛있는 요리에 잔뜩 들떠 있었어요. “가장 작은 저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스크루지가 유령에게 물었어요. 그 아이는 언뜻 보기에도 많이 아파 보였지요. “앞날이 바뀌지 않는다면 곧 죽게 될 거야.” 스크루지는 왠지 가슴 한쪽이 저리고 아팠어요. 그때 밥이 말했어요.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먹게 해 준 스크루지 사장님을 위해 건배하자.” 스크루지는 뭐에 얻어맞은 듯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러곤 다시 잠에 빠져 버렸어요. 스크루지 앞에는 세 번째로 미래의 유령이 나타났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옷으로 감싼 무시무시한 유령이었어요. 겁에 질린 스크루지는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스크루지가 유령에게 다가가자 텅 빈 방에 침대 하나가 나타났어요. 그 위에는 천 한 장만 덮은 죽은 사람이 누워 있었어요. 그 곁에는 울어 주는 사람도, 돌봐 주는 사람도 없었지요. 유령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자, 스크루지는 어느새 허름한 창고 안에 서 있었어요. 사람들은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었어요. “그 영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가서 이것들을 챙겨 왔지.” 한 사람이 보따리를 풀자, 침대보와 은그릇이 나왔어요. “난 죽은 영감한테서 고급 셔츠를 벗겨 왔어요.” “살아 있을 땐 땡전 한 푼 안 쓰더니 죽고 나니 우리를 도와주네.” “진작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누가 죽은 건가요?” 스크루지의 말에 유령이 다른 곳을 가리키자, 그곳은 공동묘지로 변했어요. 유령은 무덤 하나를 가리켰어요. 묘비에는 ‘스크루지 여기에 잠들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스크루지는 몸을 덜덜 떨더니 풀썩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그러더니 얼굴을 감싸고 울부짖었어요.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요. 이제부터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그러니 내가 죽으면 누군가는 슬퍼할 거라고 말해 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던 스크루지는 그곳이 자기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살아 있어! 내가 살아 있다고!’ 스크루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어요. 그러고는 지나가는 아이에게 물었어요. “도대체 오늘이 며칠이니?” “오늘이요? 당연히 크리스마스죠!” 스크루지는 양팔을 하늘로 뻗으며 소리쳤어요. “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스크루지는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거리로 나섰어요. 그리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웃으며 말했지요. “메리 크리스마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어요. 스크루지는 커다란 칠면조를 사서 밥에게 보냈어요. ‘밥의 식구들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스크루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조카의 집으로 향했어요. 스크루지를 본 조카는 유령을 본 사람처럼 놀랐어요. “세상에! 삼촌, 어서 오세요.” “이제 크리스마스는 너와 함께 보낼 거란다.” 다음 날, 스크루지는 새벽같이 사무실로 나가 난로에 석탄을 듬뿍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밥의 월급을 올려 주었지요. 많이 아파 보이던 밥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스크루지가 정성껏 돌봐 준 덕에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어요. 그 후로도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를 행복하게 보냈어요.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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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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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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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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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 틸틸과 미틸은 창문 너머로 이웃집 식탁을 바라보고 있었어. “케이크를 나눠 줄 건가 봐.” “나도 케이크를 먹고 싶은데.” 그때 삐그덕 문이 열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어. “혹시 이 집에 파랑새가 있니?” “오빠의 새가 한 마리 있긴 한데.” “이건 파랑새가 아니란다. 아픈 내 딸을 위해서 파랑새를 찾아 주겠니?” 할머니는 가방에서 초록색 모자를 하나 꺼냈어. “모자에 달린 다이아몬드를 돌리면 보통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단다.” 틸틸은 모자를 쓰고 다이아몬드를 돌려 보았어. 그러자 신기하게도 물건 속에 숨어 있던 요정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 자고 있던 개와 고양이도 깨어나 인사를 했지. 반짝이는 램프에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의 요정이 나타났어. “빛의 요정이 너희와 함께 갈 거야. 개와 고양이도 데리고 가렴. 파랑새를 찾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란다.” 틸틸이 다이아몬드를 다시 돌렸어.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다시 눈앞이 환해졌어. “여기가 추억의 나라인가 봐. 저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놀랍게도 작은 집 앞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어. 아이들의 말소리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깨웠지. “이게 누구야? 틸틸! 미틸! 많이 컸구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계신 줄 몰랐어요.” “너희가 우릴 생각하면 우린 언제라도 깨어난단다.” 그때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가 들어 있는 새장을 발견했어. “할아버지, 할머니, 파랑새를 저희에게 주세요.” “그래, 가져가렴.” 틸틸과 미틸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자마자 다시 눈앞이 뿌예졌어. “오빠, 어디 있어?” “여기야, 이쪽.” 새장을 들여다본 미틸이 비명을 질렀어. “오빠! 새가, 새가 까맣게 변했어!” 한편, 고양이는 틸틸과 미틸 몰래 밤의 궁전으로 갔어. 파랑새를 찾으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고양이는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 어떻게든 아이들을 방해 할 참이었어. “밤의 여왕님, 아이들이 오고 있어요. 이곳에 사는 비밀의 파랑새를 찾으러 말이에요!” “왜 사람들은 모든 걸 알려 하지? 정말 한심하군.” 고양이는 불쾌해 하는 밤의 여왕에게 귀띔을 했어. “빛의 요정은 밤의 궁전에 들어올 수 없을 테니 아이들만 오면 겁을 주어서 쫓아 버리세요.” 잠시 뒤, 틸틸과 미틸이 개와 함께 도착했어. “우린 파랑새를 찾으러 왔어요.” “그런 건 여기 없단다. 큰일을 당하기 전에 돌아가렴.” 틸틸은 지지 않았어. “다 알고 왔어요. 여기 방문들을 여는 열쇠를 주세요.” 밤의 여왕은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좋아.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엇을 보아도 난 모른다.” 모두들 벌벌 떨었지만 틸틸은 용기를 내서 잠겨 있던 문을 하나씩 하나씩 열었어. 세 번째 문을 열자 무시무시한 것들이 몰려나왔어! “어서 문을 닫아!” 밤의 여왕이 외치자 다 같이 힘껏 문을 닫았어. 밤의 여왕은 아이들이 더는 문을 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첫 번째 문을 열자 유령들이 뛰쳐나왔어. 유령들을 다시 집어넣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 두 번째 문을 열자 방 안에 질병들이 앉아 있었어. 모두 아프고 슬퍼 보였지. 하지만 아이들은 또 문을 열었지. 안에서는 아름다운 별들이 춤을 추고 꾀꼬리가 노래를 불렀어. 이번에는 밤의 여왕이 문을 가로막았어. “이 문을 열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 그러고는 혼자 달아나 버렸어. “분명 저 안에 파랑새가 있을 거야 .” 틸틸이 문을 열자 환한 달빛 아래서 파랑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어. “파랑새다!” 틸틸과 미틸과 개는 정신없이 파랑새들을 잡아서 밖으로 나갔어. 아이들이 간 뒤, 밤의 여왕이 고양이에게 물었어. “아이들이 파랑새를 찾았어?” “아니요. 진짜 파랑새는 찾지 못했어요.” 빛의 요정과 다시 만난 아이들은 깜짝 놀랐어. 파랑새가 죽어 있었던 거야. “안 돼, 이럴 순 없어.” 틸틸이 실망해서 엉엉 울자 빛의 요정이 틸틸과 미틸을 안아 주며 말했어. “햇빛 아래서도 살 수 있는 파랑새가 꼭 있을 거야.” 아이들은 파랑새를 찾아 나무의 나라로 향했어. 이번에도 고양이는 미리 달려가 나무들을 부추겼어. “나무꾼의 아이들이 오고 있어요. 파랑새를 내놓으라고 할 거예요. 빛의 요정이 자고 있는 틈을 타 아이들만 데려왔으니 지금 없애 버려야 해요.” 틸틸과 미틸의 모습이 보이자 고양이는 얼른 달려가서 아양을 떨었어. “나무들한테 미리 잘 말하고 있었어요.” 틸틸이 다이아몬드를 돌리자 나무의 요정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어. 나무의 요정들이 틸틸과 미틸을 빙 둘러쌌어. “우리에게 파랑새를 줄 수 있나요?” 틸틸이 묻자 떡갈나무가 호통을 쳤어. “너희 아버지는 우리의 적이야! 우릴 다 베고도 모자라 파랑새까지 달라고?” “그게 아니라 아픈 여자아이를 위해서.” 나무의 요정들은 틸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험상궂은 얼굴로 점점 다가왔어. 수많은 나뭇가지가 아이들을 덮치려는 순간, 빛의 요정이 나타났어. “틸틸, 다이아몬드를 돌려!” 아이들은 어느새 왁자지껄 한 방 안에 와 있었어. “이곳은 행복의 정원이란다. 행복은 원래 친절하지만 뚱뚱한 행복은 조심해야 해. 뚱뚱한 행복이 주는 음식은 절대 먹으면 안 돼.”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어. “안녕, 틸틸! 난 뚱뚱한 행복이야.” “저기, 혹시 파랑새를 알아요?” “파랑새? 그것보다 훨씬 좋은 걸 줄게. 끝도 없이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복 말이야.” 뚱뚱한 행복은 틸틸과 미틸을 억지로 끌고 가려 했어. 틸틸은 얼른 다이아몬드를 돌렸어. 순식간에 방의 모습이 달라졌어. 꽃향기와 따뜻한 바람이 아이들을 감쌌어. “어디로 온 거죠?” 틸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빛의 요정에게 물었어. “조금 전과 같은 곳이야. 너희가 방 안의 다른 부분을 볼 뿐이지.” 그때 작은 행복들이 춤추며 다가왔어. “안녕, 틸틸! 미틸! 우릴 모르겠니?” “글쎄, 난 너희를 처음 보는데.” 작은 행복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어. “처음 본다니! 우린 너희 집에 사는 행복들이야.” “우리 집에 행복이 이렇게 많아?” 틸틸과 미틸이 놀라는 사이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한 행복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어. “틸틸! 미틸! 난 엄마의 사랑이야.” “엄마? 그렇지만 우리 엄마보다 아줌마가 훨씬 예쁜걸요.” “그건 너희가 웃을 때마다 그 웃음 덕에 내가 젊어지기 때문이야.” 엄마의 사랑이 아이들을 꼭 안아 주었어. “이제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엄마랑 여기 있을래요.” “이런, 난 항상 너희 곁에 있단다.” 가만히 지켜보던 빛의 요정이 아이들을 살며시 떼어 내자 다시 한 번 다이아몬드에서 반짝 빛이 났어. 눈을 떠 보니 푸른 방 안에 하늘색 옷을 입은 아이들이 가득했어. “여긴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사는 미래의 나라란다.” 빛의 요정이 말하는 순간, 한 아이가 달려 나왔어. “안녕? 난 형과 누나의 동생이 될 거야. 엄마한테 내가 금방 갈 거라고 전해 줘.” 그때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시계를 손에 든 할아버지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어.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할아버지가 다가오자 틸틸은 얼른 다이아몬드를 돌렸어. “여기가 어디예요?” 낯익은 물건들이 보이자 아이들은 어리둥절했어. “정말 모르겠니? 너희 집에 돌아왔어.” “와, 드디어 집에 왔구나!” 기뻐하던 틸틸과 미틸은 곧 걱정이 되었어. “하지만 파랑새를 못 찾았는걸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 그걸로 됐어.”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구나. 언제나 너희를 지켜보고 있을게. 안녕!” 빛의 요정이 인사를 하고 떠나자 아이들은 잠이 들었어. “이 잠꾸러기들, 어서 일어나!” 잠에서 깬 틸틸과 미틸은 엄마 품에 파고들었어. “엄마, 보고 싶었어요!” “아니, 왜들 이러니?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가만히 방 안으로 들어왔어. 바로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였지. “어, 할머니는? 할머니, 파랑새를 못 찾았어요.” “틸틸! 잠꼬대는 이제 그만두렴.” “할머니, 따님은 좀 어떤가요?” “그게 글쎄, 틸틸의 새를 하도 갖고 싶대서.......” 그때 새장을 쳐다본 틸틸은 깜짝 놀랐어. “미틸! 새가 파래졌어. 우리가 찾던 파랑새야!” “오빠, 파랑새가 바로 우리 집에 있었어!”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는 엄마를 꼭 끌어안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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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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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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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갚은 생쥐. 작은 생쥐 한 마리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어요. 언덕이 어찌나 푹신푹신하고 보드라운지 작은 생쥐는 벌러덩 눕기도 하고 폴짝폴짝 뛰기도 했어요. 그때였어요. “으르렁으르렁! 어떤 놈이냐?” 잠잠하던 언덕이 부르르 흔들리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어요. “으악!” 작은 생쥐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지요. 생쥐가 드러누운 언덕은 다름 아닌 사자 등이었어요. 사자는 앞발로 휙 하고 생쥐를 움켜잡았어요. “이놈! 감히 내 등짝에서 뜀박질을 해? 살려 두지 않겠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자, 작은 생쥐는 달달 떨면서 빌었어요. “하, 한번만 살려 주세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생쥐는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밤톨만 한 것이 은혜를 갚겠다고? 좋다, 한번만 용서해 주지.” 사자는 생쥐를 놓아주었어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으르렁으르렁, 사자 살려!” 먹이를 찾던 사자가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고 말았어요. “사자 살려! 사자 살려! 어흥.” 아무도 사자를 구해 주지 않았어요. “동물의 왕인 내가 이렇게 죽는 건가? 어흥!” 사자는 그물을 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였어요. “사자님, 제가 구해 드릴게요.” 사자의 울음소리를 들은 작은 생쥐가 달려와 앞니로 그물을 갉았어요. 생쥐는 앞니가 아팠지만 꾹 참고 그물을 끊어 냈지요. 그물을 뚫고 나온 사자가 말했어요. “너는 그때 그 생쥐가 아니냐?” “네, 제가 은혜는 꼭 갚는다고 했잖아요.” 생쥐는 너무 지쳐 말을 잇지 못했어요. “세상에!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아버지와 아들과 당나귀.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장터로 가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했어요. “당나귀를 타고 가면 편할 텐데.” 아버지는 ‘옳다구나’ 하고 아들을 당나귀에 태웠어요. 한참을 그렇게 가고 있는데 한 노인을 만났어요. “늙은 아버지를 걷게 하다니, 젊은 아들이 버르장머리가 없군.” 아버지는 ‘옳다구나’ 하고 아들을 내리게 한 뒤 대신 당나귀에 올라탔어요. 우물가를 지나가는데 빨래하던 아주머니들이 수군댔어요. “어린 아들을 걷게 하다니,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군.” 아버지는 ‘옳다구나’ 하고 아들까지 당나귀에 태웠어요. 잠시 뒤, 당나귀가 너무 힘들어 비틀거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흉을 보았어요. “두 사람이나 타고 가다니, 당나귀가 불쌍하군.” 아버지는 ‘옳다구나’ 하고 당나귀를 묶어서 어깨에 멨어요. 아버지와 아들은 낑낑거리며 시냇물을 건넜어요. 장대에 묶인 당나귀는 답답한지 버둥거렸지요. 물에서 놀던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하하하! 사람이 당나귀를 메고 가네.” 왁자지껄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당나귀가 발버둥을 쳤어요. 아버지와 아들은 비틀거리다가 당나귀와 함께 시냇물에 풍덩 빠졌어요. 여우와 두루미.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했어요. “우리 집에 놀러 와. 맛있는 음식을 줄게.” 두루미가 숲에 사는 여우 집에 가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어요. 두루미는 잔뜩 기대를 하고 기다렸어요. 잠시 뒤, 여우가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담아 가져왔어요. “너를 위한 특별 요리야. 맛있게 먹어.” 여우는 혀로 핥아 가며 할짝할짝 먹었지만 두루미는 한 모금도 먹을 수 없었어요. 길고 뾰족한 부리로 아무리 콕콕 쪼아도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없었거든요. 다음 날에는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했어요. “우리 집에 놀러 와. 맛있는 음식을 줄게.” 여우가 강에 사는 두루미 집에 가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어요. 여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기다렸어요. 잠시 뒤, 두루미가 길쭉한 병 속에 음식을 담아 가져왔어요. “너를 위한 특별 요리야. 맛있게 먹어.” 두루미는 긴 부리로 콕콕 집어 먹었지만 여우는 입맛만 다실 뿐 하나도 먹지 못했어요. 주둥이를 아무리 병 속에 넣으려 해도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가난한 부부에게 황금 알을 낳는 아주 특별한 거위가 생겼어요. “거위야, 거위야, 황금 알을 쑥쑥 낳아라.” 하지만 거위는 하루에 딱 한 알씩만 황금 알을 낳았어요. 아내는 욕심이 났어요. “황금 알 한 알씩 팔아서 언제 큰 부자가 되겠어요?” 부인은 거위의 꽁지를 잡아당겼어요. “거위야, 거위야, 황금 알을 많이 많이 낳으렴.” 그래도 거위는 황금 알을 딱 한 알씩만 낳았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어요. “예전보다 넉넉해졌으니 욕심내지 맙시다.”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오히려 거위의 통통한 배를 만지며 이렇게 말했어요. “무슨 말이에요? 여기에 황금 알이 가득 있을걸요. 그러니 한꺼번에 몽땅 꺼내 버려요.” 남편이 아내를 말렸지만 소용없었어요. 아내는 거위를 잡아서 배를 갈랐지요. 그런데 죽은 거위 배 안에는 황금 알은커녕 똥만 잔뜩 들어 있었어요. 아내는 울며 후회했지만 다시는 황금 알을 얻을 수 없었어요. 염소 두 마리. 개울 위에 외나무다리가 있었어요. 어느 날, 염소 두 마리가 외나무다리 한가운데에서 만났어요. 하얀 염소가 말했어요. “저리 좀 비켜!” 까만 염소도 말했어요. “네가 먼저 비켜!” 둘은 서로 먼저 가려고 했어요. 외나무다리는 너무 좁아서 둘 다 지나갈 수는 없었어요. 하얀 염소가 먼저 화를 냈어요. “어서 비키지 못해!” 까만 염소도 맞섰어요. “흥, 너나 비키지 그래!” 두 마리 염소는 서로 뿔을 맞대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러다 두 마리 모두 물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지요. 토끼와 거북. 깡충깡충 뛰어가던 토끼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을 만났어요. “느림보 거북아, 내가 기어가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토끼는 키득거리며 거북을 비웃었어요. “길고 짧은 건 재 봐야 아는 거 아니야? 우리 달리기 시합을 해 볼까?” 토끼와 거북은 달리기 시합을 하기로 했어요. 언덕 위 나무까지 먼저 가는 쪽이 이기는 거였어요. “준비, 시작!” 토끼는 쌩쌩 달려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덕 가까이에 도착했어요. 거북은 아직도 저 멀리에서 꾸물대고 있었지요. “아이고, 시시해! 나는 여기서 한숨 자고 가야겠다.” 토끼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거북은 열심히 달렸어요. 쉬지 않고 엉금엉금, 있는 힘을 다해 엉금엉금. 토끼는 쿨쿨 잠을 자느라 거북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지요. 드디어 거북이 언덕 위 나무에 도착했어요. “내가 이겼다!” 토끼가 잠에서 깨어 허둥지둥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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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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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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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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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한 등불. 엄마가 소년에게 일렀어요. “이 빵을 건넛마을에 사는 할머니께 갖다 드려라.” “나중에 가면 안 돼요?” “해가 지기 전에 어서 다녀와.” 소년은 마지못해 집을 나섰어요. 타박타박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어요. 달조차 숨어 버려 온통 깜깜했어요. 자주 지나다녔던 곳인데도 소년은 길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멀리서 등불을 든 사람이 나타났어요. 등불이 점점 가까워지자 어둡던 길이 한결 밝아졌어요. 덕분에 소년은 길을 찾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등불을 든 사람은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걷고 있었지요. “앞을 못 보나 봐.” 소년이 혼자 중얼거렸어요. “허허, 그렇다네.” 등불을 든 사람이 소년의 혼잣말을 듣고 대답했어요. “죄송해요. 제 말이 들리실 줄 몰랐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니세요?” “날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네.”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등불 없이 걷는다면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겠나? 게다가 등불 덕에 그 사람이 잘 볼 수 있다면 좋은 일이고.” 그제야 소년은 심부름을 하며 툴툴거렸던 것을 부끄러워했어요. 미리 준비한 등불. 왜 등불을 들고 다녔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등불이 필요 없었을 텐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과 부딪힐지도 모르니까. 나라면 이렇게. 만약 등불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올 수 있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등불을 밝히고 간 이유를 알았나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들이 모여 따듯한 사회를 만들 수 있어요. 이럴 때 속담 한마디. 적은 밥이 남는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서로 양보하다가 남게 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에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내가 먼저 남에게 말이나 행동을 좋게 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좋게 한다는 말이에요. ‘미리 준비한 등불’을 읽고 자유롭게 속담을 만들어 보세요. 소년은 계속 툴툴거리며 걷다 넘어졌을 거야. 소년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했을 거야.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나무를 심는 노인. 젊은이가 과수원에서 나무 열매를 따고 있었어요. “아휴, 따분해. 날마다 열매만 따다 늙겠어.” 젊은이는 열매 한 개 따고 툴툴. 열매 두 개 따고 툴툴. 다음 해 봄에 젊은이는 나무 심는 할아버지를 보았어요. 할아버지는 어찌나 나무를 정성껏 심는지 젊은이가 옆에 다가온 줄도 몰랐어요. “할아버지, 이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한참 걸릴 텐데.” “허허, 그렇겠지? 아마도 내가 그때까지 못 살겠지?”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대답하자 젊은이가 다시 물었어요. “그러니까요. 무엇 하러 이 나무를 심으세요? 열매도 못 따 드실 텐데요.” 할아버지는 다 자란 나무 하나를 가리켰어요. “이봐, 젊은이. 이 나무는 누가 심었을 것 같은가?” “그야 다 큰 나무니까 오래전에 누군가가 심었겠죠.” “잘 알고 있구먼. 바로 우리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라네. 덕분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마다 맛있는 열매를 먹을 수 있었지. 나도 우리 할아버지처럼 내 손자들을 위해 나무를 심고 있는 거라네.” 젊은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도 자네 나이 때는 그랬다네, 허허.” 과수원으로 돌아간 젊은이는 열심히 나무를 가꾸었어요. 그해 가을, 젊은이가 가꾼 나무에는 어느 때보다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어요. 나무를 심는 노인. 왜 나무를 심었을까? 할아버지는 나무가 다 자라 열매를 맺으려면 한참이 걸리는데도 나무를 심었어요. 왜 그런 것일까요? 할아버지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았어. 나라면 이렇게. 지금 당장의 일만 생각하고 아무도 나무를 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세요. 먼 훗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세상을 아름답게 해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나무를 심는 할아버지처럼 먼 훗날을 내다보고 후손들을 생각하며 노력해야 가능한 거예요. 이럴 때 속담 한마디.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나무 하나만 보고 큰 숲은 보지 못한다는 말로, 작은 것만 보고 전체는 보지 못하는 행동을 이르는 말이에요. 나무 한 그루를 베면 열 그루를 심어라. 한 그루의 나무라도 쉽게 베면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나무를 심어 숲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에요. ‘나무를 심는 노인’을 읽고 자유롭게 속담을 만들어 보세요. 맛있는 과일을 먹지 못할 거야. 지구가 병들지도 몰라. 여우와 포도밭. 포도밭에 탱글탱글한 포도가 탐스럽게 열렸어요. 울타리 너머로 포도송이를 지켜보던 여우는 배가 몹시 고팠어요. “아이, 배고파. 포도 한 송이만 먹었으면.” 여우는 군침을 꼴깍꼴깍 삼켰어요. “포도밭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지?” 여우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울타리 주변을 맴돌았어요. 그러다 마침내 여우가 소리를 질렀어요. “앗! 울타리 밑에 구멍이 있잖아. 저리로 들어가야지.” 하지만 여우는 불룩 나온 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었어요. “아이참, 배가 왜 이렇게 나온 거야?” 골똘히 생각하던 여우가 꾀를 냈어요. “그래, 배가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여우는 포도송이 한 번 보고 침 한 번 삼키며 쫄쫄 굶었어요. 그러고 나서 간신히 구멍을 빠져나간 여우는 허겁지겁 포도를 따 먹었어요. “맛있다! 실컷 먹어야지.” 여우는 포도를 배불리 먹고 나자, 졸음이 밀려왔어요. “배도 부른데 한숨 잘까?” 낮잠을 자고 일어난 여우는 또다시 포도를 먹어 댔어요. 배가 불룩해질 대로 불룩해진 여우는 포도밭을 나가려고 했어요. 여우는 구멍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들어갔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불룩해진 배 때문에 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었어요. “어? 포도를 너무 먹었나?” 여우는 하는 수 없이 또 여러 날을 굶어야만 했어요. 배가 홀쭉해져서야 포도밭을 빠져나온 여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포도밭을 들어갔다 나왔지만 배고프긴 마찬가지네.” 여우와 포도밭. 여우는 왜 굶었을까? 포도를 먹기 위해 작은 구멍으로 들어간 여우는 다시 나오지 못했어요. 왜 그런 것일까요?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하다니. 나라면 이렇게. 탐스러운 포도를 보자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내가 만약 여우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면 안 돼요. 포도를 배불리 먹은 여우는 여전히 굶주린 채 울타리 밖을 나왔어요. 처음 포도밭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와 같은 상태로 말이에요. 나중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어요. 이럴 때 속담 한마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눈앞에 놓인 작은 것만 볼 줄 알고, 넓게 멀리 생각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바느질감을 가져오렴. 바늘 가져왔어요. 감출 줄은 모르고 훔칠 줄만 안다. 어떤 것을 훔쳐 낼 줄만 알지, 도로 감출 줄은 모른다는 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여우와 포도밭’을 읽고 자유롭게 속담을 만들어 보세요. 여우처럼 다시 굶더라도 나는 포도를 많이 먹을 거야. 조금만 맛보고 나왔으면 다시 굶지 않아도 됐을 텐데. 사라진 은화. 햇볕이 따뜻한 어느 봄날, 농사꾼이 씨앗을 사려고 집을 나섰어요. “씨앗을 사러 왔는데, 오늘 시장이 열립니까?” “시장은 벌써 끝났다네. 사흘 뒤에나 다시 열리지.” 시장에서 허탕을 친 농사꾼은 걱정이 되었어요. 씨앗을 사려고 가져온 은화 때문이었지요. 날이 어두워지자, 농사꾼은 여관으로 들어갔어요. “하룻밤에 은화 한 닢입니다.” 농사꾼은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냈어요. 여관 주인이 농사꾼의 은화 주머니를 흘끔 쳐다보았어요. ‘이걸 들고 다니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여관방에 들어온 농사꾼은 은화 숨길 곳을 찾다가 창밖을 내다보았어요. ‘옳지. 저기에 숨기면 되겠구나.’ 농사꾼은 은화 주머니를 여관 밖 나무 밑에 묻었어요. 그날 밤, 농사꾼은 잠이 오지 않았어요.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결국 나무 밑으로 가 보았지요. 그런데 아무리 땅을 파도 은화 주머니가 보이지 않았어요. “없어졌어! 은화 주머니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고민을 하던 농사꾼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날이 밝자마자 농사꾼은 여관 주인을 찾아갔어요. 농사꾼은 여관 주인에게 귓속말로 물었어요. “은화 두 주머니를 가져왔는데, 어제 하나만 나무 밑에 묻었다오. 나머지 하나를 마저 묻어도 괜찮겠소?” 그 말을 들은 여관 주인은 신이 나서 말했어요. “그럼요. 그 나무 밑은 아무도 모릅니다.” 농사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 여관 주인이 나무 밑에 나타났어요. 여관 주인은 가져간 은화 주머니를 도로 묻고는 사라졌어요.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본 농사꾼은 얼른 가서 자신의 은화 주머니를 찾았어요. 얼마 뒤, 여관 주인은 다시 나무 밑으로 가 보았어요. “아니, 지난번보다 주머니가 훨씬 크잖아. 이렇게 은화를 많이 넣어 두다니!” 싱글벙글하던 여관 주인은 주머니를 열어 보고 금세 시무룩해졌어요. 주머니 속에는 돌덩이만 가득 들어 있었거든요. 사라진 은화. 농사꾼은 왜 그런 것일까? 땅에 묻은 은화가 사라지자, 농사꾼은 여관 주인에게 은화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어요. 왜 그런 것일까요? 땅에 묻는 것을 본 사람은 여관 주인밖에 없어. 나라면 이렇게. 농사꾼의 은화가 사라졌을 때 농사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사라졌을 때의 기분을 이야기해 보세요. 어떤 순간에도 지혜를 발휘하면 극복할 수 있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농사꾼은 은화를 가져간 도둑을 잡기 위해 지혜를 짜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지혜를 발휘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요. 이럴 때 속담 한마디.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아무리 위급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정신만 똑똑히 차리면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남을 속이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속게 됨을 이르는 말이에요. 지나치게 꾀를 부리면 결국 손해를 보게 되지요. ‘사라진 은화’를 읽고 자유롭게 속담을 만들어 보세요. 속상해서 울기만 했어. 아끼는 물건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 못생긴 그릇. 어느 나라에 지혜로운 랍비가 있었어요. “얼굴이 조금만 잘생겼어도 사위로 삼을 텐데. 너무 못생겼단 말이야.” 사람들은 랍비를 존경하면서도 얼굴이 못생겼다며 수군거렸어요. 소문을 들은 이웃 나라 공주가 랍비를 초대했어요. 랍비를 본 공주는 배꼽을 잡으며 웃어 댔어요. “미안해요. 그렇게 못생겼는데 그토록 많은 지혜를 담고 있다니 믿기지 않아서요.” 겨우 웃음을 멈춘 공주는 랍비에게 귀한 술을 내놓았어요. “공주님, 이 귀한 술을 어디에 담아 두시나요?” “그야 질항아리에 담아 두지요.” “어찌 귀한 술을 보잘것없는 질항아리에 두십니까. 귀한 술이니 금 항아리에 담아 보십시오. 그럼, 지금보다 훨씬 맛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역시 지혜로우세요.” 랍비가 돌아가자, 공주는 술을 모두 금 항아리에 담으라고 했어요. 여러 날이 흘렀어요. 공주는 금 항아리에서 술을 꺼내 맛보았어요. “퉤퉤! 이게 뭐야?” 금 항아리에 담아 둔 술은 모두 상해 있었어요. 화가 난 공주가 랍비를 다시 불렀어요. “당신 말대로 했다가 귀한 술을 모두 버렸어요.” “공주님, 보셨듯이 귀한 술일수록 질항아리에 담아야 합니다. 사람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공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어요. 못생긴 그릇. 술을 왜 금 항아리에 담으라고 했을까? 지혜로운 랍비는 귀한 술을 모두 금 항아리에 담으라고 했어요. 왜 금 항아리에 담으라고 했을까요? 공주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어. 나라면 이렇게. 공주는 지혜로운 랍비의 겉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내가 공주라면 랍비에게 어떻게 대했을지 이야기해 보세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화려한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고 해서 음식이 다 맛있어지는 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겉모습이 보잘것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을 보지 못하면 안 돼요. 이럴 때 속담 한마디. 까마귀가 검기로 마음도 검겠나. 겉모습이 볼품이 없고 까맣다고 마음까지 나쁠 리 없다는 말이에요.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검은 고기 맛 좋다 한다. 겉모습만으로 쉽게 속마음이나 성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못생긴 그릇’을 읽고 자유롭게 속담을 만들어 보세요. 초대해 놓고 못생겼다고 웃으면 어떡해? 겸손하지 못해서야. 쟤 나쁜 새 같아. 놀지 말자. 내가 까맣다고 마음도 까만 건 아니야. 주인을 살린 강아지. 농부 가족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웠어요. 가족 모두 강아지를 매우 귀여워했지요. 어느 날, 농부 가족이 외출을 하게 되었어요. “집 잘 보고 있어. 돌아와서 나랑 재미있게 놀자.” 아들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강아지는 대답이라도 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지요. 쉬익 쉭! 갑자기 뱀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낮잠을 자던 강아지는 뱀을 보고 멍멍 짖었어요. 뱀은 우유 통 속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나오지 않았어요. 그 뱀은 독이 있는 뱀이었어요. 농부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자, 강아지는 반기는 대신 우유 통 옆에서 멍멍 짖어 댔어요. “왜 그래? 우유 마시게 저리 비켜 봐.” 아들이 우유를 마시려 하자 강아지는 으르렁거리기까지 했어요. “예뻐해 줬더니 버릇이 나빠졌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아들에게 우유를 따라 주었어요. 아들이 우유를 마시려는 순간, 강아지가 뛰어올라 컵을 밀쳤어요. “이 녀석이, 저리 가지 못해!” 어머니가 화를 냈지만, 강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쏟아진 우유를 핥아 먹었어요. 그리고 힘없이 쓰러졌지요. 우유 통 속에서 뱀을 발견한 어머니와 아들은 깜짝 놀랐어요. “우리를 살리려고 그랬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농부 가족은 강아지를 안고 엉엉 울었어요. 주인을 살린 강아지. 강아지는 왜 그런 것일까? 강아지는 주인을 살리기 위해 독이 든 우유를 핥아 먹었어요. 왜 그런 것일까요? 내 마음을 몰라주니 너무 슬퍼. 나라면 이렇게. 강아지는 주인 대신 독이 든 우유를 핥아 먹었어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고,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귀하지 않은 것은 없어요. 작은 강아지도 주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썼어요. 동물도 사랑을 느끼고 사람과 정을 나누어요. 강아지의 목숨이라고 해서 하찮은 것은 아니에요. 그만큼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지요. 이럴 때 속담 한마디. 개도 주인을 알아본다. 짐승인 개도 자기를 돌봐 주는 주인을 안다는 뜻으로,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꾸짖어 이르는 말이에요. ‘개도 제 주인을 보면 꼬리 친다’와 비슷한 말이지요. 사람은 구하면 앙갚음을 하고 짐승은 구하면 은혜를 안다. 사람은 죽을 고비에서 구해 주면 그 은혜를 쉽게 잊고 도리어 도와준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지만, 짐승은 주인으로 따른다는 뜻이에요.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는 뜻이에요. ‘주인을 살린 강아지’를 읽고 자유롭게 속담을 만들어 보세요.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돌볼 거야. 동생 대신 장난감을 치울 거야. 머리와 꼬리. 쉬익 쉭. 뱀 한 마리가 꽃밭을 기어가고 있었어요. 예쁜 꽃을 구경하던 뱀은 그만 개구리를 놓치고 말았지요. 그러자 뱀의 꼬리가 뱀의 머리에 말했어요. “왜 만날 너만 대장을 하니? 개구리도 놓치면서.” “무슨 소리야?” “나는 네가 가는 대로만 따라다니고 있잖아.” “그야 앞을 보는 눈과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나한테 있으니까 그렇지.” “쳇, 어쨌든 불공평해. 지금부터는 내가 앞장설 거야.” “그건 안 돼. 위험하단 말이야.” 하지만 뱀의 꼬리는 말을 듣지 않았어요. 꼬리는 신나게 풀밭을 가로질렀어요. “오른쪽, 왼쪽. 봐, 나도 잘할 수 있어.” 꼬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 돌에 부딪혔어요. “아야!” “거봐. 내가 다시 앞장설게.” 머리가 말했지만 꼬리는 못 들은 척했어요. 그러다 꼬리는 연못에 풍덩 빠졌어요. “나 좀 살려 줘!” 앞이 보이지 않는 꼬리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렸어요. 다행히 머리가 도와줘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위험해서 안 되겠어. 그만둬.” “야! 넌 처음부터 잘했니?” 꼬리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다 가시덤불에 빠지고 말았어요. “앗, 따가워! 앗, 따가워!” 머리와 꼬리는 가시에 찔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어요. 이번에도 머리가 도와줘서 겨우 가시덤불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이제 정말 안 되겠어. 이러다 큰일 나. 다시 내가 앞장설게. “두고 보라고. 잘할 수 있다니까.” 씩씩 화를 내던 꼬리는 그만 불 속으로 들어갔어요. “앗, 뜨거워! 머리야, 살려 줘!” “연기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머리가 콜록거리며 말했어요. 불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머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불길은 점점 세졌어요. “머리야, 내가 잘못했어. 전처럼 네가 대장을 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머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결국 뱀은 그렇게 죽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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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명작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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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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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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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해님이 누가 더 센지 다투었어요. 결국 지나가던 나그네의 외투를 먼저 벗기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정하고 시합하게 되었어요. 먼저 바람이 입김을 불기 시작했어요. 바람은 있는 힘을 모두 모아서 나그네를 향해 무시무시한 입김을 불었어요. 하지만 바람이 입김을 세게 불면 불수록 나그네는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미었어요. 그때 해님이 앞으로 나서며 따뜻한 햇볕을 내리쬐기 시작했어요. 나그네는 웅크렸던 몸을 펴더니 외투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어요. 해님이 좀 더 힘을 내어 강한 햇볕을 비추자 마침내 나그네는 외투를 훌훌 벗고 말았지요. 옛날 동물들이 모여 사는 초원에 지혜로운 젊은 사자가 왕으로 뽑혔어요. 어느 날 아침, 원숭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어요. “기린아, 다른 나무의 나뭇잎을 따 먹어. 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쩝쩝, 이 나무의 잎이 가장 맛있단 말이야. 원숭이 네가 다른 나무에 가서 자면 되잖아.” 기린과 원숭이는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였어요. 그때 사자 왕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어요. “기린은 배가 고파서 나뭇잎을 따 먹는 것이고, 원숭이는 잠자는 데 방해가 돼서 화가 난 거잖아. 그러니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어떨까?” 사자 왕의 말에 원숭이와 기린은 말다툼을 멈추고 화해했어요. 목이 마른 하얀 비둘기가 시냇가로 날아왔어요. 바로 그때 시냇물에 빠진 개미가 다리를 바동바동 내저으며 소리쳤어요. “어푸어푸, 도와주세요.” 비둘기는 나뭇잎을 따서 개미에게 떨어뜨렸어요. 개미는 꼬물꼬물 나뭇잎 위로 올라갔어요. “비둘기야, 고마워!” 며칠 뒤, 나무 위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는 하얀 비둘기에게 사냥꾼이 살금살금 다가갔어요. “앗, 비둘기가 위험해.” 개미는 재빨리 기어가 사냥꾼의 다리를 깨물었어요. “앗, 따가워!” 사냥꾼의 소리에 깜짝 놀란 비둘기는 푸드덕 날아갔어요. “개미야, 고마워.” 어느 작은 마을에는 양치기 소년이 살았어요. 양치기 소년은 하루 종일 양을 돌보는 일이 따분했어요. “아, 심심해!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투덜거리던 소년은 갑자기 마을을 향해 냅다 소리쳤어요.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양치기 소년은 헐레벌떡 뛰어와 늑대를 찾는 마을 사람의 모습을 보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어요. “늑대는 없어요. 심심해서 장난을 친 거예요.” “장난을 쳤다고? 다시는 이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잘못을 타이르고 마을로 돌아갔어요. 며칠 뒤, 양치기 소년의 장난에 마을 사람들은 부랴부랴 언덕으로 올라왔어요.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에 버럭 화를 냈어요. 며칠 뒤, 굶주린 늑대가 어슬렁어슬렁 언덕에 나타났어요. 양치기 소년은 깜짝 놀랐어요. “으악, 늑대가 나타났어요, 진짜 늑대가 나타났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겁에 질린 양치기 소년은 마을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흥, 늑대가 나타났다고? 우리가 또 속을 줄 알고?” “어리석은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이 또 장난을 치는 것으로 생각해 도와주러 가지 않았어요. “엉엉, 내가 또 장난치는 줄 알고 사람들이 오지 않았어.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 거야.” 양치기 소년은 쓰러져 있는 양들을 보고 후회했어요. 옛날 욕심 많은 개가 살았어요. 어느 날 정육점 아저씨가 개에게 고깃덩어리를 주었어요. “우아, 집에 가서 먹어야지.’’ 개는 고깃덩어리를 물고 통나무 다리를 건너다 물속에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는 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나보다 더 큰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잖아. 저것도 빼앗아 먹어야지.’ 개는 물속의 개를 향해 ‘으르렁’ 겁을 주었어요. 그랬더니 물속의 개도 으르렁거렸어요. 약이 오른 개는 물속의 개를 향해 ‘멍멍’ 목청껏 짖자, 입에 물고 있던 고깃덩어리가 ‘풍덩’ 물속에 빠졌어요. 그런데 물속에 있는 개의 입에도 고깃덩어리가 없었어요. 개는 물속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 아까워!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개는 욕심 부린 것을 후회하며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지요. 옛날 커다랗고 멋진 성에 거인 혼자 살고 있었어요. 성에 있는 정원은 넓고 아름다웠어요. 봄에는 알록달록 활짝 핀 꽃들이 정원을 수놓았고, 여름에는 푸른 녹음이 우거져 시원했어요. 그리고 가을에는 먹음직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마을 아이들은 거인의 정원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난 이 정원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 뛰어놀 때가 가장 행복해.” 거인의 정원에는 날마다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거인은 자신의 정원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보고 심술이 났어요. “아름다운 정원은 내 거야. 아무도 정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지.” 욕심 많은 거인은 정원 둘레에 척척 나무 울타리를 치고 푯말을 붙였어요. ‘정원에 절대로 들어오지 마시오. 몰래 들어오면 혼내 줄 것이다.’ 아이들은 울타리 밖에서 정원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어요. “옛날처럼 거인의 정원에서 놀고 싶어.” 정원의 아름다움은 이제 거인 혼자서 누리게 되었어. 그런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거인의 정원은 꽃도 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사라졌어요. 그리고 쌩쌩 바람이 불고 펑펑 눈이 내리는 겨울이 계속되었어요. 벽난로 속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지만, 왠지 거인의 마음은 추웠어요. “왜 이렇게 겨울이 길지? 도대체 봄은 언제 오는 거야.” 거인은 날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봄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울타리 밖은 벌써 봄이 찾아왔어요. 어느 날, 울타리 구멍으로 아이들이 들어오자, 봄도 따라 들어왔어요. 거인의 정원에도 봄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정원 한쪽만 아직도 겨울이었어요. 거인이 가까이 가자 조그만 아이가 나무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어요. 거인이 나무 위에 올려주자, 아이는 생긋 웃었어요. 그러자 그 나뭇가지에도 꽃이 활짝 피었어요. “아, 아이들 때문에, 정원에 봄이 찾아온 거였군. 정원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주어야지.” 울타리를 허문 거인의 정원은 다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어요. 이제 아이들은 거인을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거인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거인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정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거인은 앙상한 나무 밑에서 만났던 아이를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어요. “도대체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흘러 거인은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어느 겨울날, 거인은 정원 한구석에 하얗게 꽃을 피운 나무 아래 서 있는 작은 아이를 보았어요. 거인은 한달음에 작은 아이에게 달려갔어요. “얘야, 그동안 어디 있었니?” “후후, 나를 당신의 정원에서 놀게 해주었죠. 이제 나의 정원에 초대할게요.” 작은 아이는 거인을 데리고 천국으로 갔어요. 그날 오후, 아이들은 하얀 꽃이 핀 나무 아래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거인을 발견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나무토막을 정성껏 다듬었어요. “멋진 나무 인형을 만들어야지. 어떤 이름을 붙일까? 그래, 피노키오, 피노키오가 좋겠어.” “아빠! 안녕?” 그때 나무 인형이 눈을 깜빡이더니 말하는 것이었어요. 피노키오는 벌떡 일어나 빙그르르 돌더니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피노키오! 어딜 가니? 이리 돌아오렴!”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 뒤를 쫓아 달렸지만, 토끼처럼 빠른 피노키오를 잡을 수 없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찾아온 동네를 헤맸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한참 뒤에 돌아온 피노키오를 위해 옷과 신발을 만들어 주었지요. 다음 날, 제페토 할아버지는 셔츠 차림으로 서 있었어요. “아빠, 외투는요?” “너를 학교에 보내려고 외투를 팔아 책을 샀단다.” “아빠, 정말 고마워요. 이제부터 아빠 말을 잘 들을게요.” “그럼 그래야지.”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안아 주었어요. 피노키오는 책을 들고 집을 나섰어요. “쿵작쿵작! 신나는 인형극을 보러 오세요!” 그 소리를 들은 피노키오는 걸음을 멈추었어요. “인형극? 재미있겠다! 그렇지만 난 학교에 가야 하는데. 아냐, 오늘은 인형극을 보고 학교는 내일 가면 돼.” 망설이던 피노키오는 책을 팔아 인형극을 보러 들어갔어요. 무대 위에서는 어릿광대와 익살꾸러기가 춤을 추고 있었어요. 익살꾸러기가 관객석에 있는 피노키오를 불렀어요. “나무 인형이다! 얘, 무대로 올라와!” 무대 위로 올라간 피노키오는 신나게 춤을 추었어요. 하지만 너무 신나게 춤을 춘 나머지 무대가 엉망이 되었지요. 인형극 단장은 무척 화가 났어요. “내 인형극을 망치다니! 널 장작개비로 써야겠다!” “살려 주세요. 저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외투를 판 아빠가 무척 슬퍼하실 거예요.” 피노키오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요. 그 모습에 인형극 단장은 마음이 약해져 피노키오를 살려 주고 아빠에게 가져다드리라며 금화 다섯 냥까지 주었어요. 금화 다섯 냥을 손에 든 피노키오는 길을 나섰어요. 그 모습을 본 여우와 고양이가 피노키오에게 다가왔어요. “피노키오, 그 금화를 백 냥, 천 냥으로 늘리고 싶지 않니?” “정말이야? 그럴 수 있어?” "음, 이건 비밀인데 기적의 들판이 있는 곳을 알려 줄게. 그곳에 금화를 심으면 다음 날 잎이 나고, 그다음 날 꽃이 피어. 그리고 며칠 뒤면 금화 열매가 맺히지.” “굉장하다!” “하지만 기적의 들판은 멀어서 오늘은 여관에서 자고 가야 해.” 새벽이 되자 여우와 고양이는 피노키오보다 먼저 여관을 나왔어요. 조금 뒤 피노키오가 혼자서 기적의 들판으로 걸어갔을 때였어요. 자루를 뒤집어쓴 강도 두 명이 나타났어요. “금화를 모두 내놔!” 피노키오가 금화를 내놓지 않자, 강도들은 피노키오를 나무에 꽁꽁 묶어 버렸어요. 한참 뒤, 매 한 마리가 날아와 피노키오를 풀어 주었어요. 그리고 푸른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천사가 나타났어요. “피노키오, 어쩌다 강도를 만났니?” 피노키오는 금화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러자 피노키오의 코가 쑥 길어졌어요. “어디에서 잃어버렸니?” “숲속에서요.” “그럼, 숲속에서 찾아보자, 아빠에게 가져다드려야지.” “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제가 꿀꺽 삼켜 버렸어요.” 피노키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가 더 길어졌어요. 피노키오는 코를 잡고 엉엉 울었어요. “피노키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단다.” “용서해 주세요. 이제 거짓말을 안 할게요.” 피노키오가 용서를 빌자, 코가 원래대로 골아왔어요. “피노키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집으로 돌아가던 피노키오 앞에 고양이와 여우가 나타났어요. 피노키오는 푸른 머리 천사와의 약속을 어기고 기적의 들판을 찾아가 금화를 묻었어요. 여우와 고양이는 피노키오에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라고 시키고 피노키오가 묻은 금화를 몽땅 훔쳐 갔어요. “금화가 없어졌어! 나를 속이다니!” 피노키오는 시내로 달려가 금화를 훔친 여우와 고양이를 고소했어요. 하지만 판사는 오히려 피노키오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넉 달이 지나서야 피노키오는 감옥에서 풀려났어요. 피노키오는 정말 착한 아이가 되어 아빠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피노키오는 집을 향해 걸어갔어요. 그때 아이들을 가득 태운 마차가 피노키오에게 다가왔어요. “오호호, 피노키오. 이 마차를 타면 장난감 나라에 갈 수 있단다.” “장난감 나라요?” “장난감 나라에선 학교도 안 가고 공부도 안 하지. 매일 먹기만 하며 놀 수 있단다!” 그 말에 피노키오는 마차에 올라탔어요. ‘어, 마차를 끄는 당나귀가 좀 이상해 보이네.’ 당나귀의 몸집은 비슷했지만, 털빛은 모두 달랐거든요. 노란색, 푸른색, 심지어는 줄무늬가 그려진 당나귀도 있었어요. 게다가 당나귀들은 모두 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어느새 마차는 장난감 나라에 도착했어요. 장난감 나라에서 아이들은 매일 먹고 놀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피노키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어요. “으악, 내 귀가 당나귀처럼 길쭉해졌어!” 다른 아이들도 모두 당나귀로 변해 있었어요. 당나귀가 된 피노키오는 서커스단에 팔려 가 굴렁쇠를 통과하는 묘기를 부렸어요. 그러다 피노키오는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지요. “에잇, 다리 다친 당나귀는 필요 없어.” 서커스단 단장은 피노키오를 당나귀 가죽이 필요한 사람에게 팔았어요. 피노키오를 사 간 사람은 가죽을 벗기려고 피노키오를 바닷속에 빠뜨렸어요. 피노키오는 바다에 빠지자마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요. 하지만 커다란 상어가 피노키오를 꿀꺽 삼키고 말았어요. 정신을 잃었던 피노키오는 상어의 배 속에서 깨어났어요. “도와줘요. 집에 가고 싶어요.” 피노키오는 깜깜한 상어 배 속에서 엉엉 울었어요. 그때 멀리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어요. 피노키오는 빛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갔어요. “아빠! 정말 아빠가 맞아요?” “오! 피노키오, 너를 찾아 헤매다 상어에게 잡아먹혔단다.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꼭 끌어안았어요. “아빠, 우리 함께 밖으로 나가요.”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상어 배 속을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쳐 땅 위로 올라갔지요. 집으로 돌아온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피노키오가 잠을 자고 있을 때였어요. “피노키오, 이제 착한 아이가 되었구나.” 푸른 머리 천사는 피노키오를 진짜 아이로 만들어 주었어요. “아빠! 내가 진짜 아이가 되었어요.” “오! 피노키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쥐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어요. 쥐들은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심술궂은 고양이가 마을에 나타나 쥐들을 한 마리씩 잡아갔어요. “으악, 고양이가 나타났다!” 살아남은 쥐들은 먹이가 똑 떨어졌지만, 고양이에게 잡힐까 봐 집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못 했어요. 고양이가 친구를 만나러 잠시 다른 마을로 갔어요. 그러자 쥐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했어요. “이대로는 정말 못 살겠어요.” “그럼, 고양이를 물리칠 좋은 방법을 이야기해 봐요.” 여기저기서 쥐들은 와글와글 야단법석을 떨었어요. “우아, 정말 좋은 방법이네요.” 쥐들은 모두 기뻐하며 손뼉을 쳤어요. “그런데 고양이의 목에 방울은 누가 달죠? 가만히 듣고 있던 젊은 쥐가 말했어요. 쥐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어요. “난 겁이 많아서 못 해요.” “억, 방울을 달기도 전에 고양이에게 잡아먹힐 거예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는 쥐는 하나도 없었어요. 결국 쥐들은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무더운 여름날, 베짱이가 들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먹이를 든 개미가 그 옆을 끙끙거리며 지나갔지요. “이리 와서 나랑 수다나 떨자. 왜 그렇게 고생하니?” 베짱이가 말했어요. “겨울에 먹을 걸 미리 모아 둬야 해.” “곳곳에 먹을 게 널렸는데 왜 벌써 겨울 걱정을 하는 거니?” 베짱이는 코웃음을 치며 개미를 비웃었어요. 마침내 겨울이 오자, 들판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어요. 며칠째 굶은 베짱이는 덜덜 떨면서 개미의 집을 찾았어요. “개미야, 너무 추워서 그러니 잠깐만 쉬어갈 수 있을까?” “저런, 꽁꽁 얼었구나. 어서 들어와.” 개미는 베짱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주었어요. “내년에는 나도 꼭 함께 열심히 일할게. 개미야,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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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마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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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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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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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나라 독일. 안녕? 나는 빨간 모자야. 독일에 온 걸 환영해. 독일에는 나 말고도 유명한 동화 주인공들이 많아. 대부분 독일의 오래된 숲과 마을에서 만날 수 있어. 독일 사람들은 이런 곳을 ‘동화의 숲’, 또는 ‘동화 마을’ 이라고 부르면서 굉장히 아끼고 자랑스러워하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나타났던 하멜른, 내가 늑대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던 알스펠트, 라푼첼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던 트렌델부르크까지 전부 구경시켜 줄 테니 나를 따라오렴. 잠깐! 한눈팔았다간 늑대를 만날지도 모르니 조심해. 동화의 길. ‘동화의 길’ 이라는 말 들어 봤니? 독일에 가면 직접 동화의 길을 걸을 수 있어. 동화의 길에는 수많은 동화를 쓴 그림 형제의 이야기가 펼쳐져. 그림 형제가 태어난 곳, 자란 곳, 공부했던 곳, 동화를 수집한 곳, 그리고 동화의 배경으로 삼은 성과 마을들이 모두 이 길을 따라 이어지지. 그림책에서 봤던 예쁜 집들, 마귀할멈이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으스스한 숲, 또 숲 속에 감추어진 오래된 성들을 실제로 볼 수 있어. 무엇보다 동화책을 손에 든 즐거운 표정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지. ‘프랑스의 정원’ 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루아르에는 세운 지 수백 년이나 된 성들이 80개도 넘게 있어. 그중에서도 위세 성이 가장 아름답지. 위세 성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안개가 끼면 아주 신비로워. 이 모습을 본 샤를 페로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해. 신비로운 성 안에 예쁜 공주가 잠들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나 봐. 안데르센의 덴마크. 나는 덴마크에 사는 인어 공주야. 제일 먼저 소개할 곳은 안데르센 공원이야. 오리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는 연못이 보이니? 여기가 바로 슬프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미운 아기 오리가 태어난 곳이야. 오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상은 미운 아기 오리를 비롯해 많은 동화를 쓴 안데르센 아저씨란다. 안데르센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데르센 아저씨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과 박물관이 있어. 오덴세에는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을 딴 가게들이 아주 많지. 완두콩 공주의 로센보르 궁전. 로센보르 궁전은 덴마크 황실의 보물 창고야. 완두콩 공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봐. 진짜 공주를 찾는 데 큰 공을 세운 완두콩을 황실 보물 창고에 보관했다는 것으로 끝이 났지. 그 황실 보물 창고가 바로 여기 아닐까? 코펜하겐의 인어 공주. 코펜하겐의 바닷가에는 나의 동상이 있어. 작은 동상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날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지. 티볼리 공원과 나이팅게일. 덴마크의 코펜하겐에는 티볼리 공원이 있어. 멋진 공연도 열리고, 맛있는 음식도 팔고, 놀이 기구를 즐길 수 있는 종합 놀이 공원 같은 곳이지. 안데르센 아저씨는 여기서 열린 축제에 갔다가 중국식 정자를 보고 나이팅게일을 썼다고 해. 아름다운 성들의 나라 프랑스. 나는 프랑스에 사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야. 내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루아르의 위세 성이지. 잠깐, 독일의 자바부르크에도 내 성이 있었는데 어떻게 프랑스에도 또 있느냐고? 프랑스 사람인 샤를 페로도 그림 형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모아서 책으로 냈어. 그림 형제와 샤를 페로가 모은 이야기 중에 겹치는 것이 몇 편 있는데,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 빨간 모자 등이 그래.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 샤를 페로가 그림 형제보다 100년 먼저 태어났어. 뉘른베르크에서 만나는 호두까기 인형.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해마다 장난감 박람회가 열려. 뉘른베르크는 아주 오래전부터 장난감으로 유명해져서 호두까기 인형 가게도 많이 볼 수 있지. 독일의 동화 마을 여행이 즐거웠니? 난 그럼 할머니께 케이크를 갖다 드리러 갈게! 브레멘 음악대의 무대가 된 곳이야. 여기에서 길고 긴 동화의 길이 끝나지. 폴레. 신데렐라의 고향으로, 폐허가 된 성이남아 있어. 하멜른에는 피리 부는 사나이와 쥐들이 곳곳에 있어. 건물 벽에도, 박물관 문 앞에도, 광장 바닥에도 그려져 있지. 트렌델부르크. 울창한 숲과 정겨운 마을이 어우러진 곳이야. 이곳에는 오래된 성이 하나 있어. 바로 이 성이 라푼첼의 무대가 된 곳이지. 이 성의 오른쪽 탑이 라푼첼이 갇혀 있던 곳이야. 자바부르크. 울창한 숲 속, 덩굴이 휘감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성.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니? 맞아, 바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배경이 된 곳이 이 성이야. 카셀. 그림 형제의 첫 동화책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가 만들어진 곳이야. 그림 형제의 작품들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어. 알스펠트. 빨간 모자 이야기가 생겨난 마을이야. 동화 속 마을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하지? 해마다 빨간 모자 선발 대회가 열린다고 해. 마르부르크. 그림 형제가 나란히 다녔던 마르부르크 필리프 대학교가 있는 곳이야. 하나우. 그림 형제가 태어난 곳이야. 광장에 세워진 그림 형제의 동상에서부터 동화의 길이 시작돼. 슈타이나우. 그림 형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야. 그림 형제는 평생 이곳을 그리워했다고 해. 동화의 길은 그림 형제가 태어난 하나우에서 브레멘까지를 말해. 마을마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지. 길이가 무려 600킬로미터나 돼. 이야기가 탄생하는 공원의 나라 영국. 나는 영국에 사는 피터 팬이야. 먼저 가 볼 곳은 나 때문에 유명해진 켄싱턴 공원이야. 이곳은 예전엔 왕실의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이 되었어. 켄싱턴 공원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내 이야기를 쓴 제임스 매튜 배리는 켄싱턴 공원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했어. 특히 배리의 이웃인 데이비스 부부의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그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었지. 그 이야기가 바로 피터 팬 이야. 데이비스 부부의 다섯 아이들 중에 피터와 마이클은 이야기 속에도 등장한단다. 앨리스 상점. 영국을 대표하는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알고 있니? 앨리스는 작가 루이스 캐럴이 가깝게 지내던 리델 씨의 딸 이름이야.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 부근에 앨리스와 관련된 기념품을 파는 ‘앨리스 상점’이 있는데 실제로 앨리스 리델이 캔디를 사기 위해서 자주 들렀던 곳이라고 해. 켄싱턴 공원은 푸른 숲과 푸른 잔디, 푸른 호수가 한데 어우러진 곳이야. 공원 안에는 피터 팬의 동상이 서 있어. 동상 주변을 살펴보면 동화 속에 등장하는 친구들도 발견할 수 있지. 작가들의 나라 아일랜드. 나는 행복한 왕자를 도와주었던 제비야. 저기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보이지? 여기는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있는 아일랜드야.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엄연히 하나의 나라야. 원래 이름은 전설 속 여신의 이름을 딴 ‘에이레’ 였어. 7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해서 아일랜드공화국이 되었지. 아일랜드 사람들은 여전히 ‘에이레’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고 해. 특히 재미있는 동화를 쓴 작가들이 이곳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대. 행복한 왕자와 거인의 정원을 쓴 오스카 와일드가 바로 아일랜드 사람이야. 아일랜드에서는 윌리엄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이 많이 태어났지. 더블린에 있는 ‘작가 박물관’에 가면 이 작가들을 만날 수 있어. 더블린 작가 박물관.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을 한곳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박물관이야. 작가들의 동상과 사진,그리고 작가들이 쓰던 책상과 의자, 눈이 되어 준 안경 같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어. 나는 오스카 와일드 동상이야. 동상의 모습이 참 재미있지? 더블린 거리에는 이런 동상들이 많이 세워져 있어. 크거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어서 오히려 더 정답게 느껴져. 인형극의 나라 이탈리아. 나는 이탈리아 콜로디에 사는 피노키오야. 콜로디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피노키오 공원 덕분에 유명해졌어. 야외 소극장에서 피노키오 인형극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인형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 인형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움직이는지 꼭 살아 있는 것 같다니까. 인형극도 멋지지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따로 있어. 나와 제페토 할아버지를 꿀꺽 삼킨 상어 알지? 바로 그 상어의 배 속이야. 직접 들어가 볼 수 있거든. 배 속에서 누굴 만나게 될지 한번 상상해 봐! 명화의 나라 벨기에. 나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사는 넬로야! 안트베르펜에 있는 호보겐 마을이 바로 내가 할아버지랑 파트라슈랑 함께 살았던 곳이야. 여기저기에 나와 파트라슈의 동상이 있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도 파트라슈의 그림이 그려져 있지. 호보겐 초등학교에 가면 나랑 아루아가 함께 놀았던 풍차도 만날 수 있어. 안트베르펜 대성당. 안트베르펜 대성당은 벨기에에서 아주 유명해. 성당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 부분이 123미터나 되고, 성당 전체가 정말 아름답거든. ‘벨기에의 보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말이야. 북극으로 가는 길 노르웨이. 쌩쌩, 휙휙. 안녕? 바람이 많이 불지? 난 북풍을 찾아간 소년이야. 노르웨이에 온 걸 환영해! 유럽의 맨 위쪽에 있는 길쭉하게 생긴 나라가 바로 노르웨이야. 북극과 아주 가까워서 나라 이름도 ‘북으로 가는 길’ 이란 뜻으로 지어졌지. 여름엔 덥지 않아 좋지만 겨울엔 엄청나게 춥지. 겨울이 시작되면 노르웨이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 바로 북풍이야. 북풍은 동화에서처럼 먹을 것을 날려 버리기도 하고, 집이나 배를 부수어 놓기도 해. 하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은 북풍을 무조건 미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단다. 북풍이 준 선물에서처럼 말이야. 백설 공주의 성이 있는 에스파냐.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어떤 성이 가장 예쁘지?” “그건 바로 에스파냐의 세고비아 알카사르 성이지요.” 이번에 온 곳은 백설 공주의 배경인 에스파냐야. 알카사르 성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성이야. 특히 어떤 위치에서 성을 보느냐에 따라 성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자랑이란다. 그뿐 아니라 같은 방향에서 보더라도 하루 중 언제 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예술의 나라 러시아. 여기는 백조의 호수가 있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야. 안녕? 난 오데트 공주야. 발레 연습을 하고 있었단다. 자, 지금부터 내가 백조의 호수로 데려가 줄게. 우리가 온 곳은 모스크바에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이야.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커다란 호수가 보이지? 이 호수가 바로 내 이야기가 펼쳐지는 백조의 호수란다. 백조의 호수는 원래 발레 음악이야.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이곳에 왔다가 감동을 받아서 썼다고 해. 그 뒤 차이콥스키의 친구 베기체프가 이야기로 쓰게 된 거지. 백조의 호수 뿐 아니라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은 유명한 발레 곡이 모두 차이콥스키의 작품이야.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호수.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궁전처럼 생겼지? 하지만 전쟁 중에는 요새로 사용되었다고 해. 수도원 앞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비단길에 펼쳐지는 신비한 이야기 중동. 안녕? 나는 알리바바야. 내 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책에 들어 있어. 아라비안나이트는 페르시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야. 지도를 보면 페르시아가 유럽과 중국의 중간쯤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래서 옛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유럽과 중국을 오가며 물건을 사고팔았지. 요즘에는 비행기만 타면 중국에서 유럽으로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넓고도 넓은 사막을 낙타를 타고 건너야만 했어. 먼 길을 다니며 구한 물건들이니 대부분 귀하고 값도 매우 비쌌지. 그러니 도둑 떼를 만나는 일도 수두룩했어. 알리바바와 40명의 도둑에 나오는 도둑들의 비밀 동굴을 기억하니? 아마 동굴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보물들 중엔 분명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이며 유럽에서 사 온 보석, 몽골의 양털들이 있었을 거야. 참, 그리고 인도의 참깨 또한 빼놓을 수 없지. 원시의 밀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인도. 나는 정글에 사는 모글리야. 힘차게 흐르는 브라마푸트라 강과 구불구불한 언덕, 우거진 밀림, 깊은 골짜기. 내가 살던 정글과 쏙 닮은 이곳은 바로 인도의 아삼 지방이야. 나를 지켜 주었던 갈색 곰과 검은 표범, 그리고 호랑이 시어칸은 이곳 정글에 정말로 살고 있는 동물들이란다. 게다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식물과 야생 동물, 그 속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며 사는 원시 부족도 있어. 이들을 잘 보호해 온 덕분에 멸종 위기에 처한 외뿔코뿔소를 비롯해 물소, 사슴, 몽구스, 긴팔원숭이 같은 많은 동물들이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어. 정글북을 쓴 키플링은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그래서 직접 본 정글의 모습을 정글북에 생생하게 쓸 수 있었겠지? 토네이도가 휘도는 미국. 나는 캔자스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도로시야. 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 때문에 마법의 나라로 날아가 버렸지. 회오리바람이 부는 이곳에는 ‘칸주’라고 불리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대. ‘칸주’는 인디언 말로 ‘남쪽 바람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야. 그만큼 바람이 많이 불었다는 얘기지. 지금도 캔자스에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무서운 바람이 불지. 이런 바람을 ‘토네이도’라고 하는데, 집을 통째로 날려 버릴 만큼 힘이 대단해. 토네이도에 대처하는 방법. 해마다 미국에서는 토네이도로 수백 명이 죽기도 해. 사진으로만 봐도 정말 엄청나지 않니? 토네이도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 줄게. 미리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 미처 못 피했다면 지하실에 숨는다. 미리 피하지도 못했고 지하실도 없다면 집 안 한가운데 있는 가장 묵직한 가구 아래에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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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작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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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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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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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작가. 이솝 Aesop, 고대 그리스 이솝만큼 널리 알려진 작가가 있을까요? 이솝 이야기만큼 많이 읽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하지만 정작 이솝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잘 아는 고대의 지식인들이 이솝에 대한 글을 남기긴 했지만, 이솝이 태어난 곳이나 살았던 때, 했던 일에 대해선 저마다 다르게 쓰고 있거든요. 흥미로운 사실은 모두가 이솝을 매우 못생긴 사람으로 그렸다는 거예요. 배불뚝이에 찌그러진 머리, 들창코, 거무죽죽한 피부에 작달막한 키, 사팔눈, 안짱다리에 짧은 팔, 뒤집어진 입술을 가졌다나요. 어떤 기록에서는 곱사등이었다고도 하고요. 분명한 것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솝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고 교훈을 준다는 사실이지요. 어린아이처럼 즐겁고 순수하게. 라퐁텐 Jean de La Fontaine, 1621~1695, 프랑스 라퐁텐은 모두 240편의 우화를 썼어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점이 이솝과 비슷하다고요? 사실 라퐁텐이 쓴 우화집에는 이솝의 이야기를 읽고 다시 쓴 글이 여러 편 실려 있어요. 다른 점이라면 라퐁텐의 이야기들은 마치 시처럼 읽히고 내용도 교훈보다는 풍자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재치 넘치는 라퐁텐의 이야기에는 라퐁텐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어요. 라퐁텐은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돈을 많이 버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거든요. 심지어 자기 아들을 보고도 누군지 못 알아보다가 옆에서 아들이라고 알려 주자 “아,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하더니!”라고 익살스럽게 말했다지요.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만든 작가. 샤를 페로 Charles Perrault, 1628~1703, 프랑스 이솝과 라퐁텐이 쓴 이야기들은 우화, 즉 동물들의 이야기라고 해요. 하지만 샤를 페로가 쓴 이야기들은 동화, 즉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로 불리지요. 샤를 페로가 글을 쓰기 전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따로 없었어요. 샤를 페로가 손자들을 위해 거위 아주머니 이야기라는 책을 내면서 처음으로 동화를 선보였지요. 페로는 프랑스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모아서 이 책을 만들었어요. 거위 아주머니 이야기는 독일의 그림 형제가 옛이야기들을 수집해서 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보다 100년이나 앞섰어요. 이야기의 주제는 옛것에서 빌려 왔지만, 페로는 자신이 살았던 주변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쳤어요. 프랑스 루아르 지방의 위세 성은 잠자는 숲속 공주의 배경으로 아주 유명하지요.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 앙투안 갈랑 Antoine Galland, 1646~1715, 프랑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옛날의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이 아내한테 배신당했어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여자를 미워하게 된 왕은 매일 새로운 신부를 맞고 다음 날 아침에 죽여 버렸어요. 이를 본 셰에라자드가 스스로 나서서 왕의 신부가 되어 왕에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해요. 왕은 이야기에 푹 빠져서 셰에라자드를 죽이지 못하지요. 이렇게 이야기는 천하루 밤 동안 이어지고, 왕은 결국 셰에라자드와 결혼을 한다는 내용이에요. 아랍어로 전해지던 아라비안나이트를 프랑스어로 옮겨서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이 바로 앙투안 갈랑이에요. 아랍어 교수였던 갈랑이 13년 동안 옮긴 책은 열두 권이나 됐어요. 아라비안나이트가 유럽에 소개되자 그 인기가 대단했는데, 먼저 발표된 샤를 페로의 동화가 인기를 끌고 있었던 덕도 컸다고 해요. 교육적이지만 재미있게. 잔 마리 드 보몽 Jeanne Marie Le Prince de Beaumont, 1711~1780, 프랑스. 잔 마리 드 보몽은 보몽 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보몽 부인은 매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열네 살 때부터 집을 떠나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했지요. 서른두 살에 결혼했지만, 곧 남편과 헤어졌어요. 그 뒤 영국으로 건너가 가정 교사가 된 보몽 부인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도덕적인 교훈을 담은 동화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중 미녀와 야수가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샤를 페로보다 조금 늦을 때 글을 썼지만, 그때까지 아이들만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보몽 부인은 주로 여자아이들에게 부지런함과 자기희생,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동화를 썼어요.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미녀를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렇지만 보몽 부인은 결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어요. 바로 동화에서 빠질 수 없는 ‘읽는 즐거움’ 말이에요. 음악과 환상은 내 글의 원동력. 에른스트 호프만 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 독일. 에른스트 호프만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총명했어요. 과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무엇이든 쉽게 배웠지요. 처음엔 음악을 좋아해서 작곡하다가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없겠다고 생각한 다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에 호프만의 글에는 언제나 음악이 중요한 부분이었지요. 음악과 함께 호프만의 글에 많이 들어 있는 것이 또 있는데 바로 환상과 무의식 같은 우리의 마음속 세계예요. 호두까기 인형에서 벌어진 생쥐 왕과 인형들의 전투도 정말 있었던 일인지, 마리가 상상한 것인지 알 수 없지요. 또 낮에는 판사로 일하고 밤에는 작가로 작품을 쓰는 이중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해요. 나라를 사랑한 이야기 수집가 형제. 그림 형제 Jacob Grimm, 1785~1863 Wilhelm Grimm, 1786~1859, 독일. 그림 동화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거예요.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이냐고요? 아니에요.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두 형제가 펴낸 동화책을 말해요. 그림 형제는 개구리 왕자, 빨간 모자 등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냈어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한 살 터울의 형과 동생이었어요. 둘 다 똑같이 영리하고 부지런한 데다가 무엇이든 수집해서 정리하고 보관하길 즐겼지요. 이런 두 사람이 똑같이 소중하게 여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옛이야기였어요. 처음에 그림 형제는 전해 오는 옛날이야기들을 모은 다음 ‘있는 그대로’ 적어서 책으로 펴냈어요. 특히 정확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던 형 야코프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옛이야기가 만들어졌던 때에는 지금과 달리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곤 했어요. 더군다나 이야기가 실제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게 그려지곤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엔 무리였어요. 평생 혼자 살았던 야코프와 달리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키웠던 동생 빌헬름 그림은 어린이들을 위해 무섭고 잔인한 내용을 고치기로 했어요. 그러면서 글의 길이도 길어졌고, 교육적인 내용도 덧붙여졌지요. 이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읽는 그림 동화가 탄생한 거예요. 빌헬름의 친한 친구였던 아르님의 조언대로 멋진 그림도 곁들였지요. 처음의 계획과 달라진 게 또 있었어요. 이야기를 모으다 보니 독일의 옛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옛이야기들도 모으게 된 거예요. 그림 형제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도로테아 피만 할머니나 하세요. 요행수 자매가 프랑스 사람의 후손이었거든요. 세 사람은 당연히 프랑스의 옛이야기들을 알고 있었을 테고 그 이야기들을 그림 형제에게 들려주었겠지요. 그림 형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책의 이름을 독일 동화가 아닌,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로 지었던 거지요. 두 사람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컸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쓴 다른 책에는 대부분 제목에 ‘독일’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요. 그림 동화는 두 권으로 되어 있고 200편이 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개구리 왕자부터 시작해 이야기들 하나하나에 번호가 매겨져 있어요. 형제는 일생 함께 책을 다듬고 또 다듬었어요. 빌헬름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펴낸 책이 마지막이 되었지요. 짧은 생애에 많은 것을 남긴 작가. 빌헬름 하우프 Wilhelm Hauff, 1802~1827, 독일. 빌헬름 하우프는 가정 교사로 일하면서, 가르치던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어요. 독일 사람이면서 터키나 이집트 같은 중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을 쓴 점이 특이하지요. 하우프는 오늘날에는 동화 작가로 유명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낭만주의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어요. 실제 있었던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 리히텐슈타인에 감명받은 리히텐슈타인 성의 성주가 당시에는 폐허나 다름없었던 성을 소설 속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복원할 정도였지요. 빌헬름 하우프는 스물두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불과 한두 해 만에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물다섯 살 젊은 나이에, 그것도 딸이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백조가 된 미운 새끼 오리.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 덴마크. 안데르센은 덴마크의 오덴세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열한 살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 뒤 어머니마저 재혼하자 외아들이었던 안데르센은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어요. 안데르센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코펜하겐으로 무작정 떠났어요. 처음에 안데르센의 목표는 유명한 배우가 되는 거였어요. 하지만 못생긴 안데르센을 받아 주는 곳은 없었어요. 다행히 안데르센의 특별함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왕실 후원금을 받도록 도와주며 안데르센에게 학교에 다니기를 권했어요. 이렇게 안데르센은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갔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갔지요. 무엇보다 안데르센은 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게 됐어요. 드디어 자신의 길을 찾았던 거예요. 작가의 길에 들어선 안데르센은 곧장 능력을 인정받았어요. 첫 동화책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유명 인사가 되었지요. 그 뒤 안데르센이 써낸 동화들은 모두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특히 서른아홉 살에 발표한 미운 아기 오리는 안데르센을 모두가 인정하는 덴마크의 대표 작가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 뒤로도 안데르센은 계속 명성을 얻었어요. 상류층 및 왕족들과 친분도 쌓았고 덴마크 최고 훈장도 받았지요. 말년에 방문한 고향에서는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열어 주었다고 해요. 일흔 살에 세상을 떠났을 땐 덴마크의 왕과 황태자, 수백 명의 국민들이 안데르센의 장례식에 참석했어요. 오늘날 안데르센은 아동 문학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으로 불려요. 그전에는 옛이야기를 수집해 엮은 것만 많았어요. 하지만 안데르센의 대표적인 동화들은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들이에요. 독창적인 내용과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에 섬세한 감정 표현과 화려한 문체가 더해진 완벽한 문학 작품이지요. 시로 아내와 사랑을 노래한 작가. 로버트 브라우닝 Robert Browning, 1812~1889, 영국. 로버트 브라우닝은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시의 내용이 어려워서 죽은 다음에야 널리 인정받았어요. 시 쓰기를 즐기고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려서부터 학교 공부도 뒤로 한 채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해요. 대표적인 작품들이 많지만, 그보다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주고받은 사랑의 시로 유명해요. 진실한 사랑을 했던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어요. 읽는 시간을 따로 남겨 두어라. 이는 지혜의 샘이니. 웃는 시간을 따로 남겨 두어라. 이는 영혼의 음악이니. 사랑하는 시간을 따로 남겨 두어라. 인생은 너무도 짧을 뿐이니.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 1812~1870, 영국. 디킨스는 어린 시절을 아주 힘들게 보냈어요.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가는 바람에 열두 살에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거든요. 이후 디킨스는 변호사 사무실과 법원에서 일하다 신문사에 들어가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한때 배우가 꿈이었던 디킨스는 종종 영국 곳곳은 물론 미국까지 건너가서 자기 소설을 낭독했어요. 가는 곳마다 대중의 관심과 호응이 어마어마했다고 해요.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인지 디킨스는 매우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의 글을 썼던 것으로도 유명해요. 말썽꾸러기에겐 벌을. 카를로 콜로디 Carlo Collodi(본명 Carlo Lorenzini), 1826~1890, 이탈리아. 콜로디는 20대에 이탈리아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도 하고, 정치 잡지를 만드는 등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동화를 쓰기 시작한 이유도 어린이들을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해요. 처음에 콜로디가 쓴 동화는 샤를 페로의 이야기들을 이탈리아어로 옮긴 것이었어요. 그러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해서 어린이 신문에 피노키오의 모험을 싣게 됐지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쑥쑥 늘어나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콜로디 자신은 만족하지 못했다고 해요. 콜로디는 말썽꾸러기 피노키오가 큰 벌을 받도록 하고 끝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독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용서를 받고 진짜 사람이 되는 이야기로 바꾸어야 했지요. 차이콥스키의 든든한 후원자. 베기체프 Vladimir Begichev, 1828~1891, 러시아. 베기체프는 러시아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둘러싸여 살았어요. 베기체프의 집에는 배우와 음악가, 화가, 소설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해요. 투르게네프, 세로프 등을 비롯해 차이콥스키와도 절친한 사이였어요. 스스로도 성공한 코미디 작가이자 배우, 러시아 황실 극장 및 볼쇼이 극장의 감독이었고요. 베기체프는 친구인 차이콥스키가 발레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볼쇼이 극장에서 작품을 공연할 수 있도록 해 주었어요. 이 작품이 바로 유명한 백조의 호수이지요. 대본을 써 준 작가가 확실치 않지만 베기체프라고 알려져 있어요. 이상한 나라의 신비한 작가. 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본명 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영국. 엉뚱한 유머와 환상이 가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학 교수였던 루이스 캐럴과 학장의 딸 앨리스 리델이 만나서 탄생했어요. 캐럴은 어려서부터 수학과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들과는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캐럴이 앨리스와 자매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펴낸 책이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캐럴이 살았던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와 농담, 말장난, 풍자가 가득해요. 앨리스 시리즈는 오늘날까지 수십 개 나라에서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동심을 잃지 않은 어른들에게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선 작가. 마크 트웨인 Mark Twain(본명 Samuel Langhorne Clemens), 1835~1910, 미국. 일찍 아버지를 여읜 트웨인은 아주 다양한 일을 했어요. 인쇄소 직공, 수로 안내인, 군인, 금광 탐사 대원, 신문 기자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작가가 되었지요. 열두 살부터 돈을 벌어야 했으니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혼자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공부했어요. 트웨인의 작품에는 미시시피강변을 뛰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수로 안내인으로 일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트웨인은 힘 있고 거침없는 필체로 운명에 얽매이지 않는 주인공들의 자유로운 삶을 그려 내어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지요. 동물 사랑이 유별났던 작가. 위다 Ouida(본명 : Maria Louise Ram ), 1839~1908, 영국. 파트라슈와 넬로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플랜더스의 개를 쓴 위다는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해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동물들만 데리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어요. 젊은 나이에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자마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유명 인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고 해요. 또한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자기 말에 따라야 한다고 믿었어요. 사교 파티에서 성악가가 노래하고 있는데 위다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자, 누군가 불평을 했어요. 위다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말을 잘하니 노래를 부르는 중이라 해도 내 말이 먼저예요.”라고 대꾸했다고 해요. 큰 소리로 읽는 영국의 옛이야기. 조지프 제이콥스 Joseph Jacobs, 1854~1916, 오스트레일리아. 제이콥스는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어요. 엄청난 양의 책을 읽고, 끊임없이 질문을 해 댔으며 무엇보다 기억력이 무척 뛰어났다고 해요. 제이콥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문학과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졸업한 뒤 작가가 되었어요. 제이콥스는 그림 형제나 샤를 페로처럼 영국의 옛이야기들을 수집해서 엮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영국의 옛이야기들이 그림 형제와 샤를 페로의 동화와 뒤섞여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이 안타까웠지요. 제이콥스는 구전 동화의 특성인 사투리와 입말체를 그대로 살리려고 애썼어요. 제이콥스의 동화는 발표되자마자 크게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예술을 위한 예술.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854~1900, 아일랜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갈 만큼 머리가 좋았어요. 학업 성적도 우수했고 작가로서도 인정받았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시대를 앞선 사고방식과 행동 탓에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어요. 와일드는 긴 머리에 잔뜩 멋 부린 차림새로 등장해 당시 종교와 사회의 위선에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큰 인기를 끌며 대중의 관심을 받았어요. 작가로서의 명성이 절정에 이른 때 와일드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어요. 자유분방한 생활이 문제가 되어 다툼 끝에 사회의 풍습을 어지럽혔다는 죄로 감옥에 가게 되었거든요. 감옥에서 나온 와일드는 병을 얻어 초라하게 생을 마치고 말았어요. 새로운 동화의 탄생. 프랭크 봄 Lyman Frank Baum, 1856~1919, 미국. 프랭크 봄은 아주 어려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아버지한테서 선물 받은 싸구려 인쇄기를 가지고 십 대 때 두 번이나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지요. 결혼 후 장사와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어린이책 작가가 되었어요. 그리고 마흔네 살에 드디어 큰 인기를 얻은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를 발표했어요. 봄의 책은 발표된 때부터 2년 동안이나 미국에서 어린이책 분야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어요. 봄은 틀에 박힌 이야기나 교훈을 주는 이야기 대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신나는 모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했지요. 오즈의 마법사는 봄의 바람을 이루어 주었고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어른이 되지 않은 순수한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 James Matthew Barrie, 1860~1937, 영국. 일곱 명이나 되는 형제들 틈에서 유난히 키가 작았던 배리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입담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어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뒤 성공을 거두며 작가가 되었지요. 그리고 마흔 살에 작은 하얀 새라는 단편에 피터 팬이라는 아이를 등장시키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책이 인기를 끌자, 버리는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이라는 연극을 발표했고, 이후 피터 팬은 소설, 연극, 영화, 뮤지컬 등으로 만들어지며 엄청난 호응을 얻었어요. 배리가 피터 팬을 쓰게 된 데에는 배리의 이웃이었던 르웰린 데이비스 가족의 역할이 컸어요. 평소 아이들을 좋아했던 배리는 르웰린의 아이들과 곧잘 놀아 주었어요. 특히 아기였던 막내 피터가 사실은 날 수 있다고 장난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하늘을 나는 아이, 피터 팬으로 발전했던 거예요. 벨기에의 셰익스피어. 모리스 마테를링크 Maurice Maeterlinck, 1862~1949, 벨기에.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마테를링크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었어요. 대신 대학 졸업 후 잠시 머물렀던 파리에서 글을 쓰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요. 그리고 펜을 잡은 지 불과 4년여 만에 발표한 말렌 공주가 열렬한 호응을 받았어요. 한 비평가는 ‘감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극찬했지요. 마테를링크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파랑새는 모스크바, 런던, 뉴욕 등 세계 곳곳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연극으로 상연되었어요. 비극과 운명, 죽음, 신비주의, 그리고 상징으로 가득한 마테를링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동화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을 다룬 것이 특징이에요. 동물 문학, 정글의 새로운 모습.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 영국. 키플링은 영어권 작가로서는 처음이자 역대 가장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요. 마흔두 살에 키플링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상상력 덕분이었지요. 아마도 영국인이면서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독특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키플링의 대표작 정글북이 처음 나왔을 때는 반응이 대단했어요. 야생과 혼란으로 뒤덮여 있다고만 여겼던 정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맹수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흥미진진했거든요. 정글 속에서 마치 사람처럼 뚜렷한 개성을 지닌 동물들이 인간 사회 못지않은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지요. 어린 왕자처럼 하늘로 사라진 작가.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ṕery, 1900~1944, 프랑스.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나는 어린 왕자를 만났다.”로 시작하는 어린 왕자는 전 세계적으로 1억 부가 넘게 팔릴 만큼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에요. 스물한 살에 프랑스 공군에 입대한 생텍쥐페리는 전쟁 때는 공군 조종사로, 평상시에는 항공 우편기 조종사로 일하며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하늘을 누볐어요. 그중에서도 항공사 기지에서 근무하면서 겪은 사하라 사막에서의 생활은 생텍쥐페리가 대표적인 작품들을 써내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지요. 아득한 모래의 바다에 혼자 남겨진 생텍쥐페리가 밤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어린 왕자와 왕자의 장미꽃, 그리고 여우를 떠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슬프지만 신기하게도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발표하고 1년 뒤, 또다시 비행에 나섰다가 영영 사라져 버렸어요.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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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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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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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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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주인공들이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나무 인형을 잘 만드는 제페토 할아버지나 머릿결이 탐스러운 라푼첼을 보면 궁금하지 않니? 탐스러운 머릿결을 가진 라푼첼은 광고 모델! 라푼첼은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왕자를 탑 꼭대기로 올라오게 했어. 찰랑찰랑한 라푼첼의 금빛 머리카락은 높은 탑만큼 길었으니까. 라푼첼이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뽐내는 광고 모델이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라푼첼이 예쁜 얼굴에 몸매까지 좋았다면 패션모델이 되었을지도 몰라. 광고 모델은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서 광고에 맞는 옷과 화장으로 꾸미고 연기하는 일을 해. 패션모델은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고 무대 위에서 옷맵시를 뽐내는 일을 해. 예술 모델은 화가나 조각가, 사진작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위해서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해 주는 일을 해. 왕자 역할을 멋지게 해낸 거지 소년 톰은 연극 배우. 거지 아이였던 톰은 왕자와 옷을 바꿔 입고, 늠름한 왕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어. 진짜 왕자만큼 멋지게 말이야. 톰이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너희를 깔깔 웃게도 하고 눈물도 나게 하는 연극 배우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톰이 연기면 연기,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다면 뮤지컬 배우가 되었을지도 몰라. 연극 배우는 역할에 맞는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해. 연극 피터 팬에게서는 피터 팬이 되었다가도 신데렐라에게서는 멋진 왕자가 되기도 하지. 뮤지컬 배우는 무대 위에서 춤도 추며 연기를 해, 노래도 잘 불러야 하지. 주인의 모습을 바꾸어 준 장화 신은 고양이는 이미지 컨설턴트. 장화 신은 고양이는 가난한 막내아들을 멋진 왕자처럼 바꿔 주었어. 공주가 보고 반해 버릴 정도로 말이야. 공주는 막내아들의 예전 모습을 상상도 못 할걸? 장화 신은 고양이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옷차림이나 말투에 자신 없는 사람들을 멋진 모습으로 바꿔 주는 이미지 컨설턴트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장화 신은 고양이는 막내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척척 알아내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는 비서가 되어도 잘했을 거야. 창업 컨설턴트는 새로운 가게를 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도와주는 일을 해. 어느 곳에 가게를 차려야 하는지, 돈은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자세히 알려 주지. 비서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편리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 대신 일정을 관리하고 자료를 정리해 주거나 중요한 일을 알려 주고 해결해 주기도 하지. 이미지 컨설턴트는 그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알아내고, 옷차림, 말투, 행동, 표정 등을 바꾸어 주는 일을 해. 휘리릭! 신데렐라를 무도회에 보낸 요정 할머니는 파티 플래너. 요정 할머니는 신데렐라에게 아름다운 드레스와 유리 구두, 황금 마차를 뚝딱 만들어 주었지. 요정 할머니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색색의 풍선과 맛있는 음식으로 파티 장소를 멋지게 꾸미는 파티 플래너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요정 할머니 덕에 신데렐라와 왕자가 만났으니 아름다운 결혼식을 준비해야겠지? 요정 할머니는 결혼 준비를 척척 해내는 웨딩 플래너가 되어도 아주 잘했을 거야. 웨딩 플래너는 신랑 신부를 위해 결혼에 필요한 일을 준비해 주는 일을 해. 결혼하려면 예식장, 결혼식 촬영, 신혼여행까지 준비할 일이 아주 많거든. 파티 플래너는 파티를 계획하고 파티에 필요한 장소, 음식, 장식 등을 준비하는 일을 해. 즐겁고 멋진 파티가 될 수 있도록 돕지. 특별한 수프를 만든 세 사람은 음식 메뉴 개발자. 돌멩이로 수프를 끓인 뚱보, 꺽다리, 콧수염을 기억하니? 세 사람은 돌멩이로 마을 사람들이 평생 잊지 못할 아주 특별한 수프를 만들었어. 세 사람이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뚱보는 새로운 맛을 만드는 음식 메뉴 개발자, 콧수염은 갓 구운 쿠키, 먹음직한 케이크를 만드는 파티쉐, 꺽다리는 음식을 보기 좋게 꾸미는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었을 거야! 파티쉐는 쿠키, 케이크, 빵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장식하는 일을 해. 음식 메뉴 개발자는 식당에 차림표를 만들어 주고, 맛도 좋고 건강한 요리법을 개발하는 일을 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을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게 꾸미는 일을 해. 인형을 잘 만드는 제페토 할아버지는 캐릭터 디자이너. 제페토 할아버지는 크고 작은 나무토막을 자르고 붙이고 다듬어서 코가 긴 나무 인형 피노키오를 만들었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피노키오를 말이야. 제페토 할아버지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코가 긴 나무 인형 피노키오처럼 개성 있는 인물을 만드는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뚝딱뚝딱 나무를 자르고 둥글둥글 다듬어서 멋진 작품을 만드는 목공예원이 되었을지도 몰라. 목공 예원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서 인형뿐 아니라 가구나 소품 등을 멋스럽게 만드는 일을 해.
캐릭터 디자이너는 캐릭터를 만드는 일을 해. 코가 긴 나무 인형 피노키오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을 캐릭터라고 하지. 캐릭터는 사람이나 동물이 될 수도 있어.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인어 공주는 아쿠아리스트. 인어 공주는 바닷속을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며 물고기와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산호초와 놀기도 했지. 바닷속을 인어 공주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인어 공주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수족관에서 물고기 등을 돌보는 아쿠아리스트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위험을 무릅쓰고 왕자를 구했던 것처럼 인어 공주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수상 인명구조 요원이 되었다면 정말 잘했을 거야. 해양 연구원은 바다를 깨끗하게 만들 방법을 찾기도 하고, 바다에 사는 동식물과 천연자원을 연구하는 일을 해. 수상 인명구조 요원은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살피는 일을 해. 깊은 곳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지. 아쿠아리스트는 커다란 수족관에서 물속 생물들이 잘 살 수 있게 돕는 일을 해. 물을 깨끗하게 관리해 주고,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아픈 곳을 치료해 주지. 작은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모르지안은 형사. 알리바바의 목숨을 구하고 도둑을 모두 해치운 모르지안을 기억하니? 모르지안은 문에 그려진 표시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 모르지안이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잡는 형사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관찰력이 뛰어난 모르지안은 기름 장수로 변장한 두목을 알아보았어. 모르지안은 몽타주 제작 전문가가 되었을지도 몰라. 형사는 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른 나쁜 사람을 잡는 일을 해. 사건이 일어난 곳을 관찰하며 이상한 점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일도 하지. 몽타주 제작 전문가는 몽타주 사진을 만드는 일을 해. 몽타주는 목격자의 말을 바탕으로 범인의 외모와 가장 비슷한 사람의 눈, 코, 입을 합성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말해. 쥐들을 없앤 피리 부는 사나이는 방역원. 피리 부는 사나이는 하멜른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한 쥐들을 모두 쫓아냈어. 그러자 하멜른 사람들은 세균과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사람들이 사는 곳뿐만 아니라 가축들이 사는 곳 등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약을 뿌리는 방역원이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바퀴벌레와 같은 해충을 없애 주는 해충 퇴치원이 되었을지도 몰라. 방역원은 집 주변, 건물 등이 세균과 전염병 등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약을 뿌리는 일을 해. 해충 퇴치원은 집이나 가게 등에 오염된 곳이 있는지 검사해서 소독 방법을 정한 뒤 깨끗이 소독하는 일을 해. 호두까기 인형을 보살펴 준 마리는 간호사. 마리는 망가진 호두까기 인형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지. 다친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마음이 아주 아팠으니까. 마리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주사도 놓아 주고, 상처가 난 곳에 약을 발라 주는 간호사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운동이나 마사지 같은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물리 치료사가 되었어도 잘했을 거야. 간호사는 의사의 진료를 도와주고, 환자가 얼마나 아픈지 살펴보고, 환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해. 정형외과 전문 의사는 뼈에 금이 갔거나 뼈가 부러졌을 때, 또는 몸을 움직일 때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해. 물리 치료사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운동, 마사지 등의 방법으로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을 해. 집을 튼튼하게 잘 짓는 막내 돼지는 건축가. 아기 돼지 삼 형제의 막내 돼지를 기억하니? 막내 돼지는 쌩쌩 바람이 불어도, 펄펄 눈이 내려도 끄떡없는 튼튼한 집을 지었지. 막내 돼지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쿵쾅쿵쾅! 뚝딱뚝딱! 튼튼하고 예쁜 집을 짓는 건축가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집 안을 편안하고 멋지게 꾸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었을지도 몰라. 친환경 건축가는 도시와 자연환경이 서로 잘 어울리는 집을 짓는 일을 해. 사람의 몸에 해롭지 않은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고 이미 사용한 재료를 다시 쓸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지. 건축가는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 계획을 세우고 설계를 한 다음 건물을 짓는 일을 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집이나 상점 등 건물 안을 아름답게 꾸며 주고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해. 집 안 환경에 필요한 가구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 시골 쥐를 도시로 초대한 도시 쥐는 관광 여행 기획자. 도시 쥐는 시골 쥐가 도시로 놀러 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볼거리와 놀거리, 먹을거리를 준비했어. 비록 고양이가 모든 것을 망쳐 놓았지만 말이야. 도시 쥐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장소를 소개하는 관광 여행 기획자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 여행자들에게 문화와 정보를 소개해 주는 관광 통역 안내원이 되었어도 잘했을 거야. 관광 통역 안내원은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 여행자에게 여행지를 소개하고 해야 할 일들을 관리해 주는 일을 해. 박물관, 미술관 등 관광지를 여행자에게 재미있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지. 관광 여행 기획자는 여행 상품을 개발하는 일을 해. 어디를 갈지, 그곳까지 무엇을 타고 갈지,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체험할지 등을 모두 계획하는 일도 하지. 동물들의 마음마저 돌봐 주는 모글리는 수의사. 모글리는 정글 속에서 동물들과 가족처럼 어울려 지내며 동물들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지. 특히 늑대 발바닥에 찔린 가시를 쏙쏙 빼 주었어. 모글리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건강 상태를 살피는 동물 사육사가 되었을 거야. 그뿐이 아니야. 모글리는 동물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픈 동물을 치료해 주는 수의사가 되었을지도 몰라. 동물 사육사는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건강을 살피는 일을 해. 동물의 똥이나 움직임, 울음소리 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동물들이 살고 있는 곳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을 하지. 사파리 버스 운전사는 동물원에서 사파리 안내 버스를 운전하며 사람들에게 동물들을 소개하는 일을 해. 버스를 운전하면서 미리 준비한 먹이를 이용해 동물들이 재주를 부리게 하지. 수의사는 동물의 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일을 해. 사자, 원숭이, 새,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고 새끼를 낳을 때 돕기도 하지. 또 동물이 사람에게 옮기는 병을 연구하고 검사하는 일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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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명작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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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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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 플랜더스에 넬로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사는 시내까지 우유를 날라다 주고받는 삯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었어요. 어느 무더운 날 할아버지와 넬로가 우유를 배달하고 오는 길이었어요. “할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쯧쯧, 개가 쓰러져 있구나.” 온몸이 흙으로 뒤덮인 커다란 개는 할딱할딱 겨우 숨만 쉬고 있었어요. 개의 옛 주인은 먹이를 제대로 주지 않고 부리다 더위와 배고픔에 쓰러지자 그대로 버리고 가버렸어요. “불쌍해, 주인에게 버려진 개인가 봐요.” “넬로, 이 개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자꾸나.” 죽은 듯 늘어져 있던 개를 할아버지와 넬로가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돌봐 주었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개는 점점 기운을 차렸지요. “파트라슈, 이제부터 네 이름은 파트라슈야.” 넬로는 파트라슈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었어요. “파트라슈, 우유 배달이 끝나면 바로 올게.” 쇠약해진 할아버지는 어린 넬로를 데리고 날마다 힘겹게 우유 수레를 끌었어요. 며칠 동안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파트라슈는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수레를 끌겠다고 나섰어요. 몸집이 큰 파트라슈에게 우유 수레를 끄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게다가 자신을 아껴 주는 두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어 뿌듯했지요. 넬로와 파트라슈는 이제 어딜 가든 꼭 붙어 다녔어요.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는 시내까지 갈 수 없을 만큼 약해졌어요. 하지만 파트라슈 덕에 어린 넬로는 우유 나르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부지런하고 마음씨 착한 넬로에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어요. 먹을 것이나 땔감을 나눠 주기도 하고 언제나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지요. 넬로에게는 아루아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아루아는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방앗간 집 외동딸로, 밝고 귀여운 아이였어요. 넬로와 아루아는 파트라슈와 함께 플랜더스의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며 즐거운 날들을 보냈어요. 넬로는 우유를 배달한 날이면 시내에 있는 대성당에 빠지지 않고 들렀어요. 파트라슈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넬로가 왜 한참 동안 성당에서 나오지 않는지 알 수 없었어요. 다만 성당에서 나오는 넬로의 어깨가 축 처진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팠어요. 그날도 몇 시간을 성당 안에서 보낸 넬로가 슬픈 얼굴로 성당을 나왔어요. “파트라슈,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가 루벤스도 부자에게만 그림을 보여 주려고 하진 않았을 거야. 딱 한 번만이라도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넬로는 성당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성당에 갔던 거예요. 하지만 그림을 보려면 돈을 내야 했고, 넬로에겐 그럴 돈이 없었어요. 파트라슈는 넬로가 그림 그리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알고 있었어요. 비록 나무판에 숯으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넬로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하였어요. 가난한 넬로는 루벤스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이 무렵 넬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또 일어났어요. 아루아의 아버지 코제 씨는 가난한 넬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코제 씨는 아루아와 넬로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넬로는 묵묵히 그림만 그렸어요. 미술 대회에 그림을 낼 생각이었던 거예요. 그림 도구를 마련하려고 수없이 끼니를 굶으며 그림을 완성했어요. 그림을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추웠어요. 꽁꽁 얼어붙은 들판을 지나던 넬로는 길에서 작은 인형 하나를 주웠어요. “아루아에게 이걸 주면 좋아하겠지?” 넬로는 방앗간으로 가서 아루아에게 인형을 건네고 서둘러 나왔어요. 코제 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 코제 씨의 방앗간에 불이 나고 말았어요.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피해도 적었지만, 코에 씨는 넬로가 불을 질렀다고 의심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넬로가 한 짓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코제 씨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넬로를 멀리했어요. 우유를 나르는 일거리도 점점 줄어들었지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요. 단둘이 남겨진 넬로와 파트라슈는 견딜 수 없이 슬펐어요. 집세마저 낼 수 없었던 넬로는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이제 넬로의 희망은 오로지 미술 대회에 입상하는 것뿐이었어요. 넬로는 매서운 눈보라를 헤치며 발표장으로 향했어요. 늙고 지친 파트라슈는 할아버지를 따라 눈을 감고 싶었지만, 넬로를 혼자 둘 수 없어 힘든 발걸음을 옮겼어요. 발표장에 도착한 넬로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어요. 벽에 걸린 그림은 넬로의 것이 아니었어요. 넬로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모든 것을 잃은 넬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요. 한 걸음, 한 걸음 눈이 쌓인 길을 걸을 뿐이었지요. 해가 저물 때까지 눈길을 헤매고 다니던 파트라슈가 눈을 헤치더니 무언가를 끄집어냈어요.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지갑이었어요. 지갑에는 코제 씨의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파트라슈, 가자.” 코제 씨의 지갑을 쥐고 방앗간으로 달려간 넬로는 아루아의 엄마에게 지갑을 건네며 말했어요. “아주머니, 이 지갑을 파트라슈가 찾았어요. 그러니 파트라슈를 잘 돌봐 주세요. 부탁드려요.” 넬로는 파트라슈를 문 안으로 밀어 넣고 뒤돌아 뛰어갔어요. “컹컹컹!” 닫힌 문 뒤에서 파트라슈가 짖어 댔어요. 아루아의 엄마는 코제 씨에게 지갑을 내밀었어요. 지갑을 연 코제 씨의 두 손이 덜덜 떨렸어요. “다 있어. 돈이 그대로 들어 있다고. 우리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지갑인데 이걸 넬로가 가져왔다고? 내가 그렇게 괴롭혔는데,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코제 씨는 깊이 뉘우치며 날이 밝는 대로 넬로를 찾기로 했어요. 그리고 파트라슈에게 따뜻한 담요와 커다란 고기를 내주었지요. 하지만 파트라슈는 모두 마다한 채 문만 긁어 댔어요. 그러다가 문이 열린 순간, 파트라슈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파트라슈는 넬로를 찾아 헤맸어요. 파트라슈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대성당으로 달렸어요. 차가운 성당 안 루벤스의 거대한 그림 아래에 넬로가 있었어요. 파트라슈는 넬로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갔어요. 넬로도 얼어붙은 손으로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았어요. “파트라슈, 와 주었구나.” 그 순간 루벤스의 그림을 가렸던 천이 벗겨졌어요. 넬로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을 봤어요. “파트라슈, 드디어, 드디어 봤어. 루벤스의 그림을.” 행복해하는 넬로를 보면서 파트라슈도 기뻤어요.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어요. 다음 날 아침, 성당을 찾은 사람들은 꼭 껴안고 잠든 넬로와 파트라슈를 발견했어요. 사람들 틈으로 코제 씨가 뛰어 들어오며 울부짖었어요. 넬로! 넬로! 세상에. 내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다. 다 내 잘못이에요. 뒤를 이어 들어온 한 남자도 안타까워하며 말했지요. 이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미술 대회의 최고상은 이 아이가 받았어야 했는데. 내가 데리고 가서 그림을 가르치려고 찾아왔단 말입니다. 하지만 넬로와 파트라슈는 다시 깨어나지 않았어요. 몹시 무더운 여름 배고픈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다녔어요. 그때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나무가 여우의 눈에 띄었어요. “꼴깍, 맛있겠다.” 여우는 포도송이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폴짝 뛰어올랐지요. 하지만 포도송이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딸 수가 없었어요. “음, 조금만 높이 뛰면 딸 수 있겠는걸.” 여우는 힘차게 폴짝폴짝 뛰어올랐어요. 하지만 포도송이는 여우의 길쭉한 입에 닿을락 말락 하였어요. 여우는 마지막 힘을 모아 가장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를 향해 껑충 뛰어올랐지만, 포도를 딸 수 없었어요. “저 포도는 덜 익어서 분명히 신맛이 날 거야.” 여우는 먹지 못하는 포도를 쳐다보며 투덜투덜 불평했어요. 눈부신 하늘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 항구 도시 베니스. 베니스의 부둣가를 두 남자가 걷고 있었어요. 한 사람은 부유한 상인 안토니오, 또 한 사람은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바사니오였어요. “안토니오, 사랑하는 포샤에게 청혼을 하려면 당장 돈이 필요해. 하지만 나는 지금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으니.” “바사니오, 걱정하지 말게. 그 돈은 내가 빌려주지.” 안토니오는 힘없이 늘어진 바사니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어요. 하지만 전 재산을 무역항 사업에 투자한 안토니오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두 사람은 내키지 않았지만,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갔어요. 샤일록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 뒤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를 받아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악명 높았어요. 안토니오는 그런 샤일록이 싫어, 길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았어요. 샤일록은 자신을 무시하는 안토니오가 늘 못마땅했지요. 샤일록은 콧대 높은 안토니오가 돈을 빌리러 오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무서운 계략을 세웠어요. “하하, 안토니오! 당장 3천 두카토를 빌려주고 이자도 받지 않겠소.” “이자를 받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3개월 안에 3천 두카토를 갚지 못하면 당신의 가슴살 1파운드를 도려내겠소.” “뭐라고요? 안토니오, 그냥 나가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이란 말인가!” 바사니오는 샤일록의 제안에 기겁했지만, 안토니오는 친구를 굳게 믿었기에 샤일록과의 계약이 무섭지 않았어요. “안토니오, 정말 고마워. 포샤와 결혼하여 3개월 안에 베니스로 꼭 돌아오겠네.”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벨몬트로 떠났어요. 바사니오가 사랑하는 포샤는 지혜롭고 현명한 아가씨였어요. 포샤와 결혼하기 위해선 반드시 결혼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어요. 그동안 많은 청년이 결혼 시험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지요. “포샤, 내가 결혼 시험을 통과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포샤와 바사니오는 손을 꼭 잡았어요. 바사니오는 세 개의 상자 중 포샤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찾아내 결혼 시험을 통과했어요. 포샤와 바사니오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는 사이 안토니오와 약속한 3개월이 지나고 말았지요. 어느 날, 포샤의 집으로 바사니오의 친구가 다급하게 뛰어왔어요. “바사니오! 자네 당장 베니스로 가야 하네! 안토니오가 투자했던 무역선 3척이 모두 침몰하여,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네! 머지않아 샤일록에게 가슴살을 떼어 내 주게 되었어.” 바사니오는 안토니오가 전해준 소식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자신 때문에 안토니오가 죽음에 처하게 되었단 생각을 하니 슬픔이 밀려왔어요. 바사니오는 서둘러 베니스로 떠났어요. 떠나는 바사니오를 바라보며 포샤는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내가 바사니오를 도와줘야겠어!’ 베니스의 재판정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드디어 판사가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어요. “샤일록은 약속대로 안토니오의 가슴살 1파운드를 도려낼 것을 명한다.” “하하하, 안토니오! 꼴좋구나! 그동안 나를 무시했던 죗값이다!” 샤일록이 무시무시한 칼날을 안토니오의 가슴에 대려던 순간 판사가 외쳤어요. “잠깐, 계약서에는 가슴살 1파운드를 도려낸다고 되어 있지만, 피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 만약 안토니오의 가슴살을 도려낼 때 피가 한 방울이라도 나오면 베니스의 법에 따라 그대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갈 것이다.” “피 한 방울 없이 가슴살을 어떻게 도려내란 말입니까!” 샤일록은 항의했지만, 판사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결국 샤일록은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며 쓸쓸히 재판정을 떠났어요. 판사의 공정한 판정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에게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으며 말했어요. “미안하네, 안토니오. 나 때문에 이런 험한 일을 당하게 해서.” “그런 말 말게. 나는 끝까지 자네를 믿었다네. 어서 빨리 자네의 어여쁜 신부를 보여 주게!” 바로 그때 지혜로운 판정을 내린 판사가 성큼성큼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에게 다가왔어요. 두 사람은 멋진 판결을 해 준 판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어요. 바사니오는 어딘가 낯이 익은 판사를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아, 아니! 당신은!” “부인을 이렇게 못 알아보면 어떡해요!” 판사는 바로 바사니오의 지혜롭고 현명한 아내 포샤였어요. 슬픔에 잠긴 바사니오와 그의 친구 안토니오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판사로 분장한 것이었어요. 소중한 우정을 지킨 세 사람은 베니스의 부둣가를 천천히 거닐며 아름다운 우정과 돈으로는 절대 대신할 수 없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어요. 옛날 어느 도시 광장 한가운데 ‘행복한 왕자’라고 불리는 동상이 있었어요. 온몸은 황금으로 뒤덮여 눈부시게 빛났고, 두 눈은 푸른 사파이어로 반짝였어요. 그리고 칼자루에는 빨간 루비가 박혀 있었지요. “행복한 왕자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거야.” “행복한 왕자님의 동상은 우리 도시의 자랑거리야.” 도시 사람들은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어느 늦가을, 남쪽 나라로 날아가던 제비는 밤이 되자 하룻밤 쉬어 가기 위해 동상 발밑에 내려앉았어요. 그때 제비의 날개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어요. 하늘을 올려다본 제비는 울고 있는 동상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앗, 왜 울고 있는 거예요.” “저기 아파서 칭얼칭얼 우는 아이가 불쌍해서 운단다. 제비야, 내 부탁 좀 들어주렴.” “부탁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게요.” “칼자루에 박힌 보석을 빼서 저 아이의 집에 갖다 주겠니?” 제비는 머뭇머뭇 망설이다 왕자의 부탁을 들어주었어요. 다음 날, 먼 길을 떠나기 위해 파닥파닥 날갯짓하는 제비를 보고 왕자는 아쉬운 듯 말했어요. “제비야, 오늘 하루만 더 있다 갈래? 산기슭에 작가가 사는데 너무 춥고 배고파서 글을 쓰지 못한단다. 내 한쪽 눈에 있는 푸른 보석을 빼다 작가에게 갖다주렴.” “왕자님, 안 돼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남쪽 나라로 가야 해요.” “제비야, 제발 도와줘.” 제비는 왕자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왕자의 눈에 박혀 있는 보석을 빼서 작가에게 갖다주었어요. “아니, 제비가 보석을 갖다주다니.” 작가는 행복한 왕자님과 제비 덕분에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었어요. “제비야, 고맙다. 눈보라가 치기 전에 얼른 남쪽 나라로 가렴.” “아니에요, 왕자님! 저는 이곳에 남아서 왕자님과 함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지켜볼 거예요.” “제비야, 고맙다. 넌 착한 마음을 가졌구나.” “저도 왕자님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에요.” 행복한 왕자는 제비가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말에 기뻤지만,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곧 눈보라가 치고 추위가 몰려올 텐데 어떡하지?’ 제비는 왕자님의 부탁으로 남은 한쪽 눈에 박힌 보석을 성냥팔이 소녀에게 갖다주었어요. 그러고는 왕자님의 몸에 있는 황금을 벗겨 불쌍한 사람들에게 갖다주었지요.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제비는 초라하게 변한 행복한 왕자의 동상 밑에 쓰러졌어요. 다음 날, 행복한 왕자의 동상 주위로 시장과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웅성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아니,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왜 저렇게 되었지?” “쯧쯧, 이제 볼품없는 동상은 치워 버려야겠군.” 그때 작가가 동상 밑에 얼어 죽어 있는 제비를 발견했어요. “시장님, 이 제비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다가 얼어 죽었어요.” 작가는 지난날 제비가 자신을 도와준 이야기를 했어요. “맞아요, 우리 아이가 아팠을 때 제비가 보석을 물어다 주었어요.” 아이의 엄마뿐만 아니라 성냥팔이 소녀도 나서서 제비에게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했어요. “행복한 왕자님과 제비 덕분에 우리는 행복하게 되었어요.” 시장님은 시의원들과 의논해서 왕자님의 동상을 새로 세우기로 했어요. 그리고 왕자님의 어깨 위에 제비의 동상도 만들기로 했지요. 행복한 왕자와 제비의 희생 덕분에 도시 사람들은 희망을 얻었어요. 옛날 어느 마을의 알라딘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알라딘은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했어요. 어느 날, 시장에서 한 남자가 알라딘에게 다가왔어요. “얘야, 네 이름이 뭐니?” “제 이름은 알라딘이에요.” “오, 알라딘! 많이 컸구나. 나는 네 삼촌이란다.” “아저씨가 제 삼촌이라고요?” 그 남자는 사실 알라딘의 삼촌이 아니고 아프리카에서 온 나쁜 마법사였어요. “알라딘, 날 따라오면 재미있는 걸 보여 주마.” 호기심이 많은 알라딘은 재빨리 마법사를 따라나섰어요. 알라딘은 마법사를 따라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어요. 마법사는 알라딘을 데리고 커다란 바위 앞에 섰어요. “수리수리 마수리 바위 쩍 동굴 펑!” 마법사가 이상한 주문을 외우자, 바위에 구멍이 뚫리더니 아래쪽으로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어요. 알라딘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알라딘,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램프를 가져오너라.” 마법사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캄캄한 동굴을 본 알라딘은 덜컥 겁이 났어요. “무서워서 못 내려가겠어요.” “이 반지가 널 지켜 줄 테니 어서 갔다 오너라.” 알라딘은 반지를 끼고 조심조심 동굴 안으로 내려갔어요. 동굴 안에는 황금과 보석이 가득 있었어요. 낡은 램프를 찾은 알라딘은 호주머니 가득 황금과 보석을 넣고 동굴 입구로 올라갔어요. “알라딘, 램프부터 다오.” “저부터 올려 주세요.” 알라딘이 램프를 주지 않자, 화가 난 마법사는 알라딘을 동굴에 가두고 가 버렸어요. 깜깜하고, 추운 동굴에 남겨진 알라딘은 겁에 질려 두 손을 모으고 빌었어요. “제발 이곳을 나가게 해 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몸집이 집채만 한 남자가 알라딘 앞에 나타났어요. “주인님, 전 반지의 요정입니다. 소원을 말해 보세요.” “날 집에 데려다줘!” 반지의 요정은 알라딘을 눈 깜짝할 사이에 집에 데려다주었어요. 알라딘은 어머니에게 그날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어요. “아마도 이 램프가 특별한 램프인가 보구나.” 어머니는 램프를 깨끗이 닦으려고 헝겊으로 슥슥 문질렀어요. 그때였어요. 엄청나게 큰 남자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어요. “주인님, 전 램프의 요정입니다. 소원을 말해 보세요.” 어머니는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어요. 알라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램프의 요정에게 명령했어요. “먹을 것을 다오.” 램프의 요정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온갖 음식을 가지고 왔어요. 알라딘과 어머니는 덕분에 부족함 없이 살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알라딘은 공주의 행차를 보게 되었어요.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있다니.” 그 뒤부터 알라딘은 자나 깨나 공주 생각뿐이었어요. 공주와 결혼하고 말겠다고 결심한 알라딘은 온갖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임금님을 찾아갔어요. “공주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임금님이 선뜻 결혼을 허락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알라딘은 램프의 요정을 시켜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게 했어요. 램프의 요정은 하룻밤 만에 멋진 황금 궁전을 만들었지요. 그제야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며 알라딘을 불렀어요. “알라딘, 정말 대단하구나. 내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 공주와 결혼한 알라딘은 정말 행복했어요. 알라딘의 소문을 들은 아프리카 마법사는 램프 장수로 변장해 황금 궁전을 찾아왔어요. “헌 램프를 반짝반짝 새 램프로 바꿔 드립니다.” 때마침 알라딘이 외출을 하고 창가에 혼자 앉아 있던 공주가 요술 램프를 보여 주며 물었어요. “이렇게 낡은 램프도 바꿔 주나요?” “바꿔 드리고 말고요.” 아무것도 몰랐던 공주는 그만 요술 램프를 바꾸고 말았어요. “으하하, 드디어 요술 램프가 내 손에 들어왔다!” 램프를 손에 넣은 마법사는 당장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 황금 궁전을 아프리카로 옮겼어요. 다시 만난 알라딘과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어요. “알라딘, 나를 구하러 와 주었군요.” “공주님, 마법사의 술잔에 이 약을 넣으세요.” 공주가 상냥하게 술을 권하자, 마법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약을 탄 술을 들이켰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지요. 램프를 되찾은 알라딘과 공주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임금님도 다시 알라딘을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알라딘과 공주는 그 뒤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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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진짜 엄마는 누구일까? 삶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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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두 여자가 솔로몬 왕을 찾아왔어.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가 먼저 흐느끼며 말했어. “임금님!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정말 억울해요.” 그러자 다른 여자도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어. “제 이야기 먼저 들어 주세요.” 솔로몬 왕은 침착하게 말했지. “한 사람씩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가 울음을 그치고 말했어. “이 여자가 제 아기를 한 번만 안아 보자고 하더니 그때부터 자기 아이라고 우겨요.”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외쳤어. “거짓말이에요, 임금님! 저 아기는 제가 낳은 아이예요.” 두 여자는 계속 아기가 자기 아이라며 다투었어.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솔로몬 왕이 입을 열었어.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니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구나. 가장 공평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솔로몬 왕이 말하자, 두 여자는 조용해졌어. “여봐라, 칼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부하가 칼 한 자루를 들고 왔어. 솔로몬왕은 부하에게 말했어. “자, 아기를 반으로 잘라 두 여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서로 어머니라고 하니 반씩 나누어 갖는 게 가장 공평하지 않겠느냐?” “아, 안 돼요!” 바로 그때, 아기를 안고 왔던 여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어. “임금님! 아기를 저 여자에게 주세요. 저 여자가 아기의 어머니예요. 제발 아기를 죽이지 마세요.” 그러자 다른 여자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어. “임금님, 정말 공평하세요.” 솔로몬 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진짜 어머니는 아기가 죽는 것을 원치 않지. 저 여자가 진짜 어머니가 맞다. 아기를 저 여자에게 돌려주거라.”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아기를 가슴에 꼭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 하지만 거짓말을 한 여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 야곱은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와 밥을 먹고 있었어. 야곱은 친구의 삶은 달걀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어. “그 달걀을 나에게 빌려줄래? 나중에 갚을게.” 그러자 친구가 말했어. “이자까지 더해서 갚는다고 약속하면 빌려줄게.” “좋아, 내가 이 달걀에 이자까지 더해서 갚을게.” 그렇게 해서 야곱은 삶은 달걀을 더 먹을 수 있었어.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야곱은 큰 부자가 되었어. 어느 날, 달걀을 빌려주었던 친구가 야곱을 찾아왔어. “예전에 내가 빌려주었던 달걀을 갚아 주게.” “알겠네, 잠깐만 기다려 보게.” 친구는 달걀과 그 이자까지 더하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어. 야곱은 달걀 하나를 친구에게 주었어. “에계, 이게 무언가? 달걀 하나라니? 그때 분명히 자네는 달걀에 이자까지 더해서 갚는다고 약속했네.” 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지. 야곱은 깜짝 놀라며 친구에게 물었어. “그럼 자네는 달걀을 몇 개나 받으려고 왔는가?” “삼천 개!” “뭐라고? 삼천 개나?” 그러자 친구가 침착하게 말했어. “자네가 먹은 달걀이 닭이 되어 알을 낳았다고 생각해 보게. 그럼 삼천 개도 더 되었을 걸세.” 야곱은 달걀 한 개 이상은 못 준다며 딱 잘라 말했고, 친구는 꼭 이자까지 받겠다며 고집을 부렸어. 둘은 티격태격 다투다가, 결국 다윗왕을 찾아가기로 했어. 임금님! 저희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둘의 이야기를 들은 다윗왕이 말했어. “삶은 콩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오겠는가?” 그러자 친구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어. “절대 안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삶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올 수 없겠지. 그러니 그냥 삶은 달걀 한 개만 갚으면 되느니라.” 다윗왕의 판결에 친구는 아무 말도 못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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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뱀의 꼬리가 앞장섰을까? 왜 양은 강을 건너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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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풀밭에 기다란 뱀 한 마리가 기어갔어. 이리저리 구불구불, 요리조리 구불구불. 한참을 기어가던 중, 갑자기 뱀의 꼬리가 투덜거렸어. “왜 난 네 꽁무니만 따라다녀야 해? 나도 앞장서고 싶어.” 그러자 머리가 고개를 휙 돌려 꼬리에게 말했어. “꼬리야, 넌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위험을 알아차릴 혀도 없어. 게다가 생각할 수 있는 뇌도 없잖아.” 머리는 휙휙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어. “난 늘 이렇게 우리가 안전한지 살피고 어디가 안전할지 생각해. 내가 앞장서는 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하지만 꼬리는 계속 투덜댔어. “흥! 말도 안 돼! 이건 너무 불공평하단 말이야!” 머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하는 수 없지, 그럼 네가 한번 앞장서 보렴.” 그리하여 꼬리가 앞장선 뱀이 풀밭을 기어갔어. 이리저리 구불구불, 요리조리 구불구불. 그러나 얼마 못 가 뱀은 깊은 도랑 속에 쑥 빠지고 말았어. “아이코, 아야! 꼬리야, 이쪽으로 나가면 돼.” 머리의 도움으로 도랑을 겨우 빠져나왔지만, 꼬리는 여전히 앞장서겠다며 우겼어. 이리저리 구불구불, 요리조리 구불구불. 그러다가 이번에는 가시덤불 속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어. “아이코, 따가워! 꼬리야, 이쪽으로 나가자!” 이번에도 머리의 도움으로 가시덤불을 겨우 빠져나왔어. 하지만 꼬리는 또다시 앞장서겠다며 박박 우겼어. “이제부터는 잘할 거야, 걱정하지 마!” 이리저리 구불구불, 요리조리 구불구불. 그런데 갑자기 꼬리가 팔딱거렸어. “앗! 뜨거워! 이게 뭐지?” 머리가 꼬리에게 급히 외쳤어. “멈춰! 거긴 불 속이야!” 하지만 뱀은 이미 온몸을 데이고 말았어. 그제야 꼬리는 후회를 했어.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렸나 봐. 아무나 앞장서는 게 아니었어.” 푸른 들판, 옹기종기 모인 양들 가운데 털이 유난히 탐스러운 양이 있었어. 바로 몽글이였어. 몽글이는 누구나 알아주는 욕심쟁이였어. “저리 가! 여기 있는 풀은 내가 다 먹을 거야!” 그러던 어느 날, 양털을 깎는 날이 되었어. 몽글이는 찌푸리며 말했어. “난 절대로 주인아저씨에게 내 털을 주지 않을 거야.” 그러자 다른 양들이 말했어. “몽글아, 주인아저씨는 늘 우리를 돌봐 주시는데 우리도 무언가를 드리면 좋잖아.” “맞아, 게다가 털은 깎아도 다시 자라니까.” 몽글이는 친구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혼자 달아났어. “흥! 난 내 것을 주는 게 싫단 말이야!” 그 후로도 몽글이는 털을 깎을 때마다 주인아저씨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어. 몽글이는 점점 북슬북슬해졌어. “몽글아, 털이 너무 자란 것 같아. 무겁지 않니?” 다른 양들이 걱정했지만, 몽글이는 들은 체 만 체했어. “난 절대로 내털을 주지 않을 거야!” “얘들아, 강 건너에 싱싱한 풀이 많이 있대.” “우아, 우리 강 건너로 가자!” 양들은 하나둘 첨벙첨벙 강을 건넜어. 몽글이도 강에 풀쩍 뛰어들었어. “친구들보다 빨리 가서 더 많이 먹어야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다른 양들은 모두 강을 가뿐히 건넜는데, 몽글이는 강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거야. 다른 양들은 털을 깎아서 몸이 가벼웠지만, 몽글이는 수북한 털에 물이 스며들어 몸이 무거워졌기 때문이었어. 결국, 몽글이는 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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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들은 왜 투덜거렸을까? 누가 왕의 사위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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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평화로운 왕국에 한 임금이 살고 있었어. 임금은 아주 넓은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일하는 일꾼들도 아주 많았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자, 포도밭은 더욱 바빠졌어. 어느 더운 여름날, 임금은 포도밭을 둘러보다가 잘 정돈된 포도 덩굴을 보았어. “이 포도 덩굴은 누가 가꾼 것이냐?” “가장 솜씨 좋은 일꾼이 가꾼 것이지요.” 임금은 솜씨 좋은 일꾼과 포도밭을 한참 산책하고 돌아왔어. 해가 저물자, 일꾼들은 품삯을 받으러 왔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 일꾼들 모두 같은 돈을 받았어. 마지막으로 솜씨 좋은 일꾼도 같은 돈을 받았지. 그걸 본 다른 일꾼들이 투덜거렸어. “어떻게 우리와 같은 돈을 줄 수 있어?” “내일 임금님에게 가서 따지세.” 다음 날, 일꾼들은 임금을 찾아갔어. “임금님, 이 사람은 조금만 일하고, 한참을 산책만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품삯을 적게 주셔야지요!” 그들의 이야기에 임금은 허허 웃었어. 임금은 솜씨 좋은 일꾼을 가리키며 말했어. “저 일꾼의 일솜씨는 아주 뛰어나지. 자, 포도밭에 가서 한번 볼까나.” 임금은 일꾼들과 포도밭으로 갔어. “여기들 보게나, 이 일꾼이 가꾼 포도 덩굴과 자네들이 가꾼 포도 덩굴을 보게.” 모두 포도 덩굴을 보고 깜짝 놀랐어. 솜씨 좋은 일꾼의 포도 덩굴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거든.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일세!” 그 뒤로 다른 일꾼들은 솜씨 좋은 일꾼에게 일을 배워 모두 성실히 일했어. 옛날 깊은 산골에 삼 형제가 살고 있었어. 그들은 아주 특별한 보물을 가지고 있었지. 첫째는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망원경, 둘째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 막내는 무슨 병이든 낫게하는 사과를 가지고 있었어. 하루는 첫째가 망원경을 가지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어. 그러더니 갑자기 첫째가 소리쳤지. “얘들아, 성벽에 벽보가 붙었어. 공주님이 아주 큰 병에 걸렸대. 공주님을 살리는 사람에게 왕국을 물려준대!” 삼 형제는 얼른 둘째의 양탄자를 타고 임금을 찾아갔어. 임금은 기뻐하며 말했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거지? 어서 공주한테 가자!” 공주를 만난 삼 형제는 깜짝 놀랐어. 오랫동안 병을 앓았던 터라, 공주가 너무 아파 보였거든. 막내는 공주를 일으켰지. “공주님, 이 사과를 한입 드세요.” 공주는 막내의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어. 그러자 신기하게도 공주가 기운을 차렸어. “공주야, 이제 네가 살았구나! 이 아비는 더는 소원이 없구나!” 임금과 온 성의 사람들이 기뻐했지. 임금은 삼 형제 중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고민했어. 그러자 삼 형제는 차례로 말했어. “저의 망원경이 없었다면, 공주님이 아픈지 몰랐을 거예요.” “저의 양탄자가 없었다면, 이렇게 먼 성까지 올 수 없었지요.” “저의 사과가 없었다면, 공주님의 병은 낫지 않았을 거예요.” 삼 형제의 말을 들어 보니, 모두 맞는 말이었지. 한참을 생각하던 임금은 드디어 말했어. “나는 막내를 사위로 삼겠다.” 첫째와 둘째가 투덜거리자, 임금은 말을 이었어. “둘은 여전히 망원경과 양탄자가 있지만, 막내는 하나뿐인 사과를 공주에게 먹여 남은 게 없지 않느냐?” 그리하여 막내는 공주와 결혼해 왕국을 물려받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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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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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날개를 펴고 퍼덕퍼덕 하늘을 날면 친구들은 늘 감탄을 했어. “와, 후투 좀 봐! 정말 멋지다!” 나는 보란 듯이 더 높이, 더 멋지게 날았어.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춤을 추듯 날아다녔지. “후투는 어쩜 저렇게 멋질까? 저 머리 깃 좀 봐!” “뾰족한 부리는 어떻고?” “얼룩무늬도 빠질 수 없지.” 난 내 모습을 많은 곳에 알리고 싶었어. 나는 이웃 마을로 가서 한껏 자랑을 했지. 그런데 동물들이 날 보고 깔깔대는 거야. “넌 왜 머리에 부채를 달고 다니니?” “새가 웬 얼룩무늬람?” “새라면 공작 정도는 되어야지!” ‘공작이 대체 뭐야?’ 나는 물어물어 공작을 찾아갔어. 공작을 보는 순간, 나는 입이 떡 벌어졌지. 호리호리한 몸매에 알록달록 화려한 꼬리가 좌르르륵!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어. 나는 더 이상 동물들 앞에 나서기가 싫어졌어. 공작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지. ‘알록달록 멋진 꼬리를 가질 수 있다면.’ 공작의 꼬리가 자꾸만 아른거렸어. ‘공작처럼 될 수는 없을까?’ 한숨을 푸 내쉬는데 머리 위로 폴폴 공작의 깃털이 떨어지는 거야. 나는 재빨리 깃털을 집었어. 나는 깃털을 꼬리에 달고 집으로 향했어. ‘친구들이 내 모습을 보면 멋지다고 하겠지?’ 나는 기쁜 마음에 푸다닥 날갯짓을 했어. 그 바람에 깃털이 후드득 떨어졌지. ‘아무래도 공작처럼 우아하게 걸어가야겠군.’ 해가 질 무렵, 나는 겨우 마을에 도착했어. 먼 길을 걷느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 “얘들아, 나 어때?” “누, 누구야?” 친구들은 나를 보며 깜짝 놀랐어. “나야, 나! 후투!” “네가 정말 후투라고?” “그 꼬리는 뭐니? 왜 날지 않는 거야?” “나는 이제 세상에서 하나뿐인 멋진 공작이 되었거든!” 나는 사뿐사뿐 걸어서 친구들에게 다가갔어. “후투가 이상해!” “정말 멋진 새였는데.” “지금 내가 멋지지 않다는 거야? 이 꼬리 깃털 좀 봐!” 하지만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 “예전 너의 깃털이 더 예쁜걸?” “지금은 날지도 않잖아. 네가 날 때 얼마나 멋있었다고!” 나는 후다닥 연못으로 뛰어가서 내 모습을 보았어. 공작 깃털은 오다가 떨어졌는지 듬성듬성 꽂혀 있었어. 나는 공작도 후투도 아니었어. 나는 남아 있는 공작 깃털을 털어 버리고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어. 예전처럼 위로 아래로 날갯짓을 하며 날았지. “후투, 그게 바로 진짜 네 모습이야!” 친구들이 나를 보며 기뻐했어. 내 모습 그대로도 멋진 새가 될 수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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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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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에 마음씨 착한 얀이 살았어요. 얀은 착해서 남들이 부탁하면 거절을 못했어요. “깡통이랑 솔, 수건, 빗자루도 챙기고. 아, 맞다. 밧줄도 챙겨 가야지.” 얀은 막힌 굴뚝을 뚫어 주는 굴뚝 청소부였어요. 하루 종일 굴뚝 청소를 하는 얀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어요. “얀이 굴뚝 안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요? 어찌나 빠른지 생쥐인 줄 알았다니까요.” “저렇게 높은 곳도 척척 올라가다니, 정말 대단해.” “역시 우리 마을 굴뚝 청소는 얀에게 맡겨야 해.” 얀은 굴뚝 청소를 끝내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어요. 그때 빵집 아저씨가 얀을 불렀어요. “얀, 내일 아침 우리 빵집 굴뚝 청소 좀 해 주겠어?” “물론이죠.” 얀이 옷 가게 앞을 지나는데 점원이 문을 열고 나왔어요. “얀, 내일 굴뚝 좀 청소해 주겠어요?” ‘빵집 아저씨네 굴뚝도 닦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에이, 조금 일찍 일어나지 뭐!’ “네, 해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집으로 돌아와 막 저녁을 준비할 때였어요. 옆집 할머니가 똑똑 문을 두드렸어요. “얀, 내일 우리 집 굴뚝 청소 좀 해 줄 수 있니?” ‘내일 약속한 집이 두 곳이나 있는데 어떡하지…….’ 얀은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어요. 얀은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때 누군가 대문을 쾅쾅 두드렸어요. ‘이 밤에 누구지?’ 문을 열자, 안의 친구들이 서 있었어요.
“얀, 생일 파티에 가자!” ‘내일 세 곳이나 청소를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조금만 놀고 오면 괜찮겠지 뭐.’ “그래, 같이 가자!” 한창 파티를 즐기던 얀은 높이 솟아오른 굴뚝을 보게 되었어요. ‘어쩌지? 내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얀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얀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왔어요. 침대에 눕자마자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잠에 빠져 버렸지요.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줄도 모른 채 말이에요. 쾅쾅쾅! “얀! 얀! 안에 있나?” 얀이 굴뚝 청소를 해 주기로 했던 마을 사람들이었어요. “굴뚝이 막혀 빵을 하나도 못 만들었잖아!” “우리 가게는 온통 검댕으로 가득해.” “콜록콜록! 벽난로를 못 써서 감기에 걸렸잖아!” 얀은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어요. 얀은 발을 동동 굴렀어요. ‘이를 어쩌면 좋지?’ 얀은 한참을 망설이다 밖으로 나왔어요. ‘아차, 굴뚝 청소를 해야 했는데.’ “흥, 드디어 나타나셨군!” “정말 죄송합니다.” 얀은 고개를 숙였어요.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얀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들고나왔어요.
“지금 당장 청소해 드릴게요!” “해도 지고, 눈이 쌓여서 위험할 텐데 굴뚝 청소를 하겠다고?” 마을 사람들은 걱정스레 얀을 바라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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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짝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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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야, 빨리 와! 우리 오징어 놀이 하자.” 규진이가 손을 흔들며 성우를 재촉합니다. “알았어, 금방 갈게.” 성우와 규진이가 한편이 되었습니다. “성우야, 이쪽으로 넘어와!” 규진이가 부르자 성우가 재빨리 뛰어갑니다. 그런데 신발이 자꾸 벗겨집니다. “아이참, 제대로 뛸 수가 없네.” “그러니까 왜 슬리퍼를 신고 나와?” 규진이의 핀잔에 성우가 얼굴을 찌푸립니다. “성우 너 나가. 발이 금에 닿았어.” 성우가 금을 넘어가지 못해 성우네 편이 지고 말았습니다. “에이, 너 때문에 졌잖아!” “왜 나 때문이야?” 규진이가 탓하자 성우도 지지 않고 따집니다. 규진이가 더 큰 소리로 성우를 나무랍니다. “네가 슬리퍼를 신고 와서 졌잖아.” 성우가 배를 쭉 내밀고 규진이를 쏘아봅니다. “잘난 척은!” “뭐? 이 땅꼬마가!” 성우와 규진이는 싸우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너랑 안 놀아!” 성우가 씩씩대며 눈을 흘깁니다. “흥! 누군 놀 줄 알아?” 규진이도 툴툴대며 입을 삐죽 내밉니다. “야,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친구들이 성우를 달랩니다. “싫어. 쟤랑은 안 놀아.” “성우랑 제일 친하잖아. 그만 풀어.” “누가 제일 친하다고 그래?” 친구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두 사람은 꼼짝 않습니다. 혼자 남은 성우가 슬리퍼를 가만 내려다봅니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싸우지도 않았을 텐데.” 성우는 슬리퍼 한 짝을 벗어 휙 던집니다. 그런데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어? 어디 갔지?” “나무에 걸렸잖아! 저걸 어찌 내린담?” 나무를 힘껏 흔들어 보지만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깡충깡충 뛰어도 손이 닿지 않습니다. “어휴, 안 되네.” 성우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규진이가 슬그머니 성우 옆으로 다가갑니다. 성우 발을 한 번 보고는 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슬리퍼가 나뭇가지에 착륙했네.” 규진이가 성우를 보고 피식 웃습니다. 성우도 규진이를 보며 싱긋 웃습니다. “이걸로 한번 해 보자.” 규진이가 어디서 긴 빗자루 하나를 가져옵니다. 그러고는 빗자루를 번쩍 올려 팔짝팔짝 뛰기 시작합니다. 아슬아슬 매달렸던 슬리퍼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성우가 규진이를 보며 배시시 웃습니다. “규진아, 고마워.” 규진이가 씩 웃으며 성우 어깨에 손을 올립니다. 성우도 규진이의 허리에 팔을 두릅니다. “우리 시소 타러 갈까?” “그래, 좋아!” 규진이와 성우가 나란히 시소에 앉습니다. “성우야, 아까는 미안했어!” “나도 미안했어!” 쿵덕쿵덕! 둘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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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핀을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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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핀은 호기심 많은 펭귄이에요.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쁘지요. 오늘은 북쪽 언덕을 살펴보러 갈 거예요. 며칠 전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렸거든요. “자, 슬슬 떠나 볼까?” “여기도 하나, 저기도 하나. 흠, 얼음이 녹고 있는 게 분명해. 얼른 친구들한테 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 하지만 친구들은 핀핀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말도 안 돼. 수백 년 동안 끄떡없던 얼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갈라지니?”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커다란 굉음이 들리더니 갑자기 땅이 흔들렸어요. “무, 무슨 소리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아.” 펭귄들은 밤새 불안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다음 날 아침 펭귄들은 깜짝 놀랐어요. 펭귄들이 살고 있는 빙하가 쩍 갈라진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대로 먼 바다까지 흘러가면 어떡해?” 펭귄들은 발만 동동 굴렀어요. “우리 헤엄쳐 가자!” 펭귄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때 바다표범들이 펭귄들을 노리며 다가왔어요. “앗, 조심해!” “바다표범이야! 모두 피해!” 펭귄들은 정신없이 헤엄쳐 달아났어요.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우리가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펭귄들은 한숨만 폭폭 내쉬었어요. 핀핀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어요. ‘어떻게 하면 건너갈 수 있을까?’ 얼음이 점점 녹기 시작했어요. 핀핀은 마음이 급해졌지요. ‘배를 만들까? 아니면 멀리뛰기를 해 볼까?’ 그때 핀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아! 그거야, 그거!” “우리 미끄럼틀을 만들자!” 핀핀이 소리쳤어요. “미끄럼틀이라고? 제정신이 아니군.” 펭귄들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어요. “미끄럼틀을 높게 만들어 타면 건너편으로 갈 수 있어.” 핀핀은 미끄럼 타는 모습을 흉내 냈어요. “난 핀핀과 함께 해 볼래.” “나도, 나도!” 몇몇 펭귄은 핀핀의 말을 따르기로 했어요. “쳇, 말도 안 돼.” “미끄럼틀 타다가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해.” 몇몇 펭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핀핀은 반대하는 펭귄들을 다독였어요. “준비를 잘하면 문제없어. 날 믿고 따라와 봐.” 드디어 펭귄들이 핀핀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자, 너희는 눈을 모으고, 너희는 반듯반듯 벽돌을 만들고, 너희는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거야. 모두들 힘내!” 핀핀의 지휘 아래 펭귄들은 미끄럼틀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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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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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산기슭에 염소와 토끼가 이웃해 살았어요. 이른 봄, 염소와 토끼는 밭을 일구기 시작했어요. “올해는 무슨 농사를 지을까?” “글쎄, 뭐가 좋을까?” 토끼는 기다란 귀를 쫑긋하며 갸웃거렸어요. ‘작년에 심었던 옥수수를 심을까? 아니면 가지를 심을까?’ 염소는 밭에 무얼 심을지 곰곰 생각했어요. 토끼는 잠시 생각하다가 금세 잠이 들었어요. “그래, 고구마를 심어야겠다!” 염소가 손뼉을 탁 치며 말했어요. “고구마는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도 먹을 수 있잖아. 게다가 잎과 줄기도 먹을 수 있지.” “그럼 나도 고구마나 심어야겠다.” 토끼가 졸린 눈을 비비며 종알댔어요. 염소와 토끼는 고구마 싹을 밭에 옮겨 심었어요. “더워서 더 이상 못 하겠어.” 토끼가 일을 하다 말고 나무 그늘에 벌러덩 누웠어요. 염소는 끝까지 남아 차근차근 싹을 모두 심었어요. “에잇, 귀찮아. 난 그만둘래.” 자다 깬 토끼가 일어나 툴툴거렸어요. 한창 고구마 줄기가 뻗어 갈 즈음 가뭄이 들었어요. 염소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개울물을 길어 날랐어요. “물 긷는 데가 왜 이렇게 멀어?” 토끼는 두세 번 물을 길어 나르다 그만두었어요. 염소네 밭은 하루가 다르게 푸릇푸릇해졌어요. 토끼네 밭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시들해졌고요. 고구마 덩굴이 쑥쑥 뻗어 나가자, 풀도 수북해졌어요. 염소는 열심히 풀을 뽑느라 바쁘고, 토끼는 꿩과 수다를 떠느라 바빴어요. “토끼야, 고구마보다 콩을 심는 건 어때? 한겨울에 먹는 콩과 말린 콩잎 맛은 그만이거든!” “왜 진작 콩 생각을 못했지?” 토끼가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어요. “콩이 덜 여물었을 때의 맛은 정말 달콤하지.” 꿩이 입맛을 짭짭 다시며 말했어요. “난 당장 콩을 심을래.” 토끼는 단숨에 고구마 덩굴을 걷어치웠어요. 토끼는 콩을 밭에 심었어요. “머지않아 콩꼬투리들이 주렁주렁 달리겠지?” 토끼가 밭고랑에 벌러덩 누우며 좋아했어요. 반면 염소는 열심히 고구마를 길렀어요. 물이 잘 빠지도록 밭 사이사이 도랑도 파 주었지요. 며칠 동안 주룩주룩 비가 내렸어요. 빗물에 고구마들이 비죽비죽 나오자, 염소는 비를 맞으며 고구마를 다시 묻어 주었어요. “토끼야, 쓰러진 콩대를 바로 세워 주어야지.” “비 때문에 못하겠어. 그만할래!” 토끼는 콩대를 세우다 말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비가 그치자 염소는 부지런히 움직였어요. “쓸데없이 고구마 잎과 줄기는 왜 꺾는 거니?” “잎과 줄기를 따야 고구마가 더 크게 자라거든.” “그럼 나도 콩잎을 따야지.” 토끼는 콩잎 몇 장을 따다 곧 싫증이 났어요. “에잇, 이걸 언제 다 따? 난 그만둘래.” 염소네 밭에 고구마가 주렁주렁 열렸어요. 그런데 토끼네 밭은 누렇게 시든 콩잎이 가득했어요. 벌레도 버글버글 끓었고요. “거두어들일 콩이 조금밖에 안 될 것 같아.” 토끼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염소는 밭에 나가 열심히 고구마를 캤어요. 호미질을 할 때마다 크고 작은 고구마가 줄줄이 나왔지요. 토끼는 콩밭의 앙상한 콩대를 걷어 냈어요. 바싹 마른 콩 몇 알이 후두두 떨어졌어요. “나도 처음 생각한 대로 꾸준히 고구마를 키울걸.” 토끼는 부러운 눈으로 염소를 쳐다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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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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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흔들흔들 그네를 타요. ‘조금만 놀다 갈까?’ 미나는 집에 가다 말고 놀이터로 쪼르르 달려갔어요. “어, 무지개 우산이다!” 혜주가 매일 갖고 다니던 거랑 똑같은 우산이에요. 빨간색 손잡이까지 똑같아요. 우산을 펼치자, 이름표가 눈에 띄었어요. “정말 혜주 거잖아? 얼른 갖다줘야지.” 미나는 우산을 들고 놀이터를 나섰어요.
미나는 흘끔흘끔 우산을 쳐다보았어요. 며칠 전 혜주가 놀이터에 가져왔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요. 엄마한테 똑같은 걸 사 달라고 졸랐지만 소용없었어요. ‘잠깐만 써 볼까?’ 일곱 빛깔 무지개가 머리 위로 펼쳐졌어요. “와, 예쁘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저 앞에 혜주의 집이 보이자 미나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어요. ‘잠깐만 쓰고 줄까? 조금 늦게 줘도 되잖아.’ 미나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래, 아주 잠깐만!’ 발길을 돌리는 미나의 얼굴이 활짝 핀 채송화 같았어요. “웬 우산이니?”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엄마가 물었어요. 미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얼굴이 빨개졌어요. “네? 혜, 혜주가 빌려줬어요.” “혜주가? 비도 안 오는데 왜?” “그…… 그냥요.” 미나는 현관으로 후다닥 뛰어갔어요.
미나는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어요. “와, 비 온다!” 미나는 우산을 쓰고 빙그르르 돌았어요.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어요. 그때마다 미나는 까르르 웃었어요. ‘무지개 우산으로 또 무얼 하지? 아, 그래!’ 미나는 우산과 이불로 예쁜 집을 지었어요. “곰 아저씨, 우리 집 정말 예쁘죠?” 미나는 무지개 집에 엎드려 곰 인형에게 말했어요. “집 구경도 했으니, 우리 산책할까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어요. “미나야, 놀자.” 혜주였어요. 미나는 침을 꼴깍 삼켰어요. “저기…… 오늘은 안 돼.” 미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어요.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어요. 미나는 무지개 우산과 창문을 번갈아 보았어요. ‘괜찮아. 혜주는 다른 우산도 있던데, 뭐.’ 그런데 가슴에 커다란 돌멩이가 얹힌 것처럼 이상했어요.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어요. 미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차근차근 이야기했어요. “엄마, 우산을 돌려주기엔 너무 늦었겠죠?” “아니야. 무슨 일이든 너무 늦은 건 없단다.” 엄마는 울먹이는 미나를 꼭 안아 주었어요. 미나는 비옷을 입고 집을 나섰어요. 혜주네 초인종을 누르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와, 내 우산이다! 어디서 찾았어?” 혜주는 우산을 보고 또 보며 기뻐했어요. “놀이터에서……. 미안해, 늦게 돌려줘서…….” “아니야, 난 아주 잃어버린 줄 알았는걸? 정말 고마워.” “우리 미나 잘 다녀왔니? 미나한테 줄 선물이 있는데, 뭘까?” 엄마가 미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어요. “우아, 무지개 우산이다!” 미나는 무지개 우산에 매달려 우주까지 날아갈 것만 같았어요. 미나의 맑은 웃음소리도 둥실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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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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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딩동! “와, 할아버지다!” 찬이가 달려와 할아버지 허리에 매달렸어요. “아이코, 그동안 잘 지냈니?” 할아버지의 다리가 휘청거렸어요. "찬아, 인사부터 해야지!" "제사 끝나고 먹어야지!" "어른이 먼저 수저 드신 다음에 먹어야지!" “엄마, 밥 주세요.” 학교에서 돌아온 찬이가 가방을 휙 던지며 말했어요. “찬아, 예절 캠프에 가 볼래?” 허겁지겁 밥을 먹던 찬이는 캠프라는 말에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어요. “캠프요? 좋아요, 좋아!” 드디어 캠프를 가는 날이에요.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 지리산 청학동에 도착했어요. “야, 드디어 다 왔다.” 찬이가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그만 훈장님과 부딪치고 말았어요. “아이코, 머리야!” 찬이는 인사도 없이 후다닥 도망쳤어요. “비켜, 비켜!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줄을 선 친구들 틈으로 찬이가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들어왔어요. “뭐야, 너! 줄도 서지 않고.” 서당 앞이 시끌벅적해지자 훈장님이 나타났어요. “찬이는 마루로 나가서 수업 끝날 때까지 손을 들고 있어라.” 쉬는 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어요. 빈 서당 안에 새 크레파스가 보였어요. “와, 내가 갖고 싶었던 거잖아!” 찬이는 길쭉길쭉 새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거 봐라! 내가 그린 거야.” 친구들이 들어오자 찬이가 그림을 보여 주며 자랑했어요. “어? 이 크레파스 내 거잖아. 왜 남의 걸 함부로 쓰는 거야?” 동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이냐?” “찬이가 제 크레파스를 맘대로 썼어요.” 찬이가 동현이에게 눈을 흘겼어요. “찬아, 남의 물건을 함부로 쓰는 건 예의가 아니란다. 네 물건을 다른 친구가 함부로 쓴다면 기분이 어떻겠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어요. '일 등으로 먹어야지!' 밥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먹던 찬이는 친구들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어요. “훈장님, 먼저 잡수세요. 잘 먹겠습니다.” 찬이는 훈장님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식당을 나왔어요. 찬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마당 한쪽에 앉았어요. “찬아, 저녁은 많이 먹었니?” 찬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훈장님이 서 있었어요. “찬아, 인사는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마술이란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너를 빛나게도 해 주지.” 찬이는 깜깜한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다음 날 아침, 찬이는 일어나자마자 동현이를 찾아갔어요. “동현아, 어제는 미안했어. 너한테 말도 안 하고.” 찬이가 머리를 긁적이자 동현이가 환하게 웃었어요. “괜찮아, 우린 친구잖아.” “훈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 그래. 찬이 너도 잘 잤느냐? 오늘도 힘차게 수업해 보자꾸나.” “네, 훈장님!” 찬이는 청학동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대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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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래올래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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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래올래 레스토랑의 스파게티는 이 숲속에서 제일 맛있어요. 그런데 레스토랑의 친절은 빵점이에요. “돼지 아저씨, 물 좀 주세요!” “이크, 포크가 떨어졌네. 새것으로 가져다주실래요?” 그럴 때면 돼지 아저씨는 잔뜩 인상을 쓰며 말해요. “물은 직접 갖다 드슈!” “새 포크요? 조심 좀 하지. 귀찮게 말이야!” 손님들은 늘 화가 난 채 레스토랑을 나왔어요. “주인이 얼마나 퉁명스러운지, 맛을 모르겠어.” “그러니까 곧 문을 닫는다잖아요.” ‘뭐? 문을 닫는다고?’ 꼬마 양 릴리는 그 말을 듣고 헐레벌떡 레스토랑으로 뛰어갔어요. “아저씨, 아저씨! 정말 레스토랑이 문을 닫나요?” “손님들이 하도 귀찮게 해서 그럴까 생각 중이다.” “아저씨가 만든 스파게티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손님들도 좋아하잖아요.” “하지만 너무 귀찮아. 왜 이렇게 바라는 게 많은지.” “한 달만 기다려 주세요. 그동안 제가 레스토랑을 바꿔 볼게요.” “네가? 흠,그렇다면 한번 지켜보지.” 쿵작쿵작!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릴리의 목소리가 숲속에 퍼졌어요. “안녕하세요. 올래올래 레스토랑입니다. 오늘 맛있는 스파게티가 준비되어 있으니, 오셔서 드셔 보세요.” “무슨 일이지? 주인이 바뀌었나?” “오늘 점심은 여기서 먹어 보자.” 레스토랑은 금세 손님들로 북적거렸어요. “여기 주문할게요!” “치즈를 더 얹어 주실래요?” “물 좀 더 주세요!” “네, 네. 지금 갑니다!” 쨍그랑! 곰 아저씨가 접시를 깨뜨렸어요. “어머, 곰 아저씨. 괜찮으세요?” 릴리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어요. 하지만 돼지 아저씨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지요. 아이고, 아까운 내 접시!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릴리가 깨진 접시를 치우며 말했어요. “역시, 릴리는 참 친절해!” 손님들은 릴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돼지 아저씨는 여전히 투덜거렸어요. 뭐야? 접시를 버리게 생겼는데.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돼지 아저씨가 물었어요. “왜 손님들이 네 칭찬만 늘어놓는 거지?” “아저씨도 손님들한테 친절하게 대해 보세요.” “귀찮게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러면 손님들도, 아저씨도 행복해질 거예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다음날도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북적북적했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돼지 아저씨는 한참 동안 릴리만 쳐다보았어요. ‘릴리의 말이 정말 맞는 걸까?’ 흠
돼지 아저씨가 재료를 사러 밖으로 나왔어요. “안녕하세요, 돼지 아저씨!” 전날 접시를 깨뜨린 곰 아저씨였어요. 돼지 아저씨는 밀가루 부대를 나르는 곰 아저씨에게 슬쩍 말을 걸었어요. “제,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죠!” 신나는 음악 소리와 함께 올래올래 레스토랑의 문이 열렸어요. “양은 부족하지 않으신가요?” “앗, 조금 짜다고요?”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꼭 찾아 주세요!” “이곳에 오면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이제 올래올래 레스토랑에서 화를 내며 나오는 손님은 하나도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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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새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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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가려워!” 코뿔소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 댔어요. 온몸이 가려워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코뿔소는 흙먼지를 날리며 쿵쾅쿵쾅 뛰었어요. 나무를 쿵쿵 들이받기도 했지요. 그러다 결국 강물로 첨벙 뛰어들었어요. “아이고, 가려워!” 코뿔소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 댔어요. 온몸이 가려워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코뿔소는 흙먼지를 날리며 쿵쾅쿵쾅 뛰었어요. 나무를 쿵쿵 들이받기도 했지요. 그러다 결국 강물로 첨벙 뛰어들었어요. 코뿔소는 얼굴만 빠끔 내놓고는 한참을 물속에 있었어요. 하지만 몸이 가려운 건 마찬가지였어요. 이번에는 물 밖으로 나와 자갈밭을 뒹굴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잠시, 다시 몸이 근질거렸어요. “아, 나 좀 살려 줘!” 할미새가 코뿔소 머리 위로 날아왔어요. “몸에 있는 진드기만 없애면 괜찮을 거야.” “그게 정말이야?” “그래, 난 진드기를 먹고 사니까 잘 알지.” “그럼 제발 내 몸에 있는 진드기 좀 잡아 줘.” 할미새는 코뿔소 몸에 있는 진드기를 잡기 시작했어요. “휴, 이제 살 것 같아.” 코뿔소는 오랜만에 몸이 편해진 걸 느꼈어요. “코뿔소야, 덕분에 잘 먹었어. 고마워.”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코뿔소는 거만한 표정으로 할미새를 바라보았어요. “흥! 넌 고마운 줄도 모르는 녀석이구나.” 할미새는 기분이 상해 쌩하고 날아갔어요. “쳇, 진드기를 배불리 먹었으면 그만이지.” 코뿔소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닥에 누웠어요. 그러고는 오랜만에 쿨쿨 단잠에 빠졌지요. 며칠 뒤 코뿔소는 다시 온몸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했어요. 쿵쾅쿵쾅 정신없이 달리고, 나무를 들이받고,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아이고, 코뿔소 살려!” 코뿔소는 초원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청했어요. “누가 내 몸에 있는 진드기 좀 잡아 줘.”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어요. 기운이 빠진 코뿔소는 풀밭에 털썩 누웠어요. “어, 무당벌레잖아?” 코뿔소는 무당벌레에게 살며시 다가갔어요. “무당벌레야, 진드기 잡을 수 있니?” “그럼, 우린 진드기 잡는 데 도사인걸?” “그래? 그럼 내 몸에 있는 진드기 좀 잡아 줄래?” “좋아. 우리한테 맡겨!” 무당벌레들은 코뿔소 몸 구석구석을 기어 다녔어요. “으하하하! 아이고, 간지러워.” 코뿔소는 간지럼을 못 참고 몸을 흔들었어요. 무당벌레들이 하나둘 떨어졌지요. “진드기보다 너희들이 기어 다니는 게 더 간지러워!” 코뿔소는 무당벌레들을 밟을 듯이 발을 굴렀어요. 무당벌레들은 깜짝 놀라 모두 달아났어요. 코뿔소는 다시 가려움에 시달렸어요. 오랫동안 먹지도 못해 점점 기운이 빠졌어요. “아, 내가 진드기 때문에 죽는구나.” 코뿔소는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할미새가 있었다면 진드기를 다 잡아 줬을 텐데.” 할미새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내가 너무 심했나?’ 코뿔소가 우는 모습을 보자, 할미새는 마음이 아팠어요. “코뿔소야, 내가 다시 진드기 잡아 줄까?” 코뿔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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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미의 멋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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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이 무너진다!” 평온하던 개미굴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대체 무슨 일이냐?” 여왕개미가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지진이 일어났나 봐요!” 그때 개미굴 속으로 기다란 혀가 쑥 들어왔어요. “개미핥기다!” 개미들은 허둥지둥 굴 안쪽으로 달아났어요. 개미핥기는 혀를 날름거리며 굴을 파고들었어요. 하지만 바위에 걸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지요. “쳇, 밖에서 기다려야지.” 개미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어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 “글쎄.” 그때 꼬미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조그만 녀석이 감히 어른들 일에 끼어들다니! 가만있어라.” 개미들은 다시 깊은 시름에 잠겼어요. “우리가 무슨 수로 개미핥기를 이기겠어요?” “그럼 이대로 굶어 죽자는 거예요?” “개미핥기가 잠든 틈에 먹이를 구하러 가면 어때요?” “좋아요, 한번 해 봅시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개미핥기는 잠들었어요. 개미들은 하나둘씩 굴 밖으로 나왔어요. 살금살금 발을 내딛을 때마다 송골송골 땀이 맺혔어요. 먹이를 구해 굴속으로 돌아온 개미들은 저마다 투덜거렸어요. “다리가 후들거려 혼났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그날 밤 굴속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어요. “다 같이 달려들어 싸워 봅시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개미핥기가 잠든 틈에 공격하면 어때요?” “개미핥기가 잠에서 깨면 어쩌려고요?” 개미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그때 꼬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어요. “곰의 힘을 빌리면 개미핥기쯤은 문제없을 텐데.” “곰을 찾아가 부탁하자고? 그랬다가는 곰에게 먼저 잡아먹힐 거다!” “조용, 조용! 꼬미의 말을 끝까지 들어 봅시다!” 여왕개미가 모두를 조용히 시켰어요. “곰이 잠들면 곰 앞에 몰래 꿀을 떨어뜨려 놓는 거예요. 개미핥기가 있는 곳까지요. 잠에서 깬 곰은 꿀을 먹느라 정신없을 테고, 그러면.” 그때 여왕개미가 무릎을 탁 쳤어요. “오호라! 그때쯤이면 배고픈 개미핥기도 꿀을 먹고 있겠구나!” 깊은 밤이 되자 개미들은 꿀단지를 들고 굴 밖으로 나왔어요. 한 방울, 두 방울, 꿀을 떨어뜨릴 때마다 숲속에 달콤한 향기가 퍼졌어요. “자, 이제 그만 돌아가자!” 나뭇잎 위로 햇살이 환하게 쏟아지자 곰이 부스스 일어났어요. “와, 꿀이다!” 곰은 허겁지겁 꿀을 먹기 시작했어요. 한 입 먹고 한 발짝, 두 입 먹고 또 한 발짝 나아갔지요. 반대편에선 개미핥기도 꿀을 먹느라 바빴어요. 곰과 개미핥기가 딱 마주쳤어요. “겁도 없이 내 꿀을 먹다니!” 화가 잔뜩 난 곰이 개미핥기에게 달려들었어요. 깜짝 놀란 개미핥기는 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얼른 내려오지 못해?” 곰이 나무를 흔들어 대자 개미핥기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어요. “개미핥기 살려!” 개미핥기는 멀리멀리 도망갔답니다. “와, 우리가 이겼다!” 개미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어요. “생각이 깊은 꼬미 덕에 무사히 위기를 넘겼구나!” “꼬미야, 고마워.” 모두의 칭찬에 꼬미는 날아갈 듯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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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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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기슭의 양지바른 곳에서 한 무리의 일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집터를 닦고 있었습니다. "땅을 탄탄하게 다져야 튼튼한 집이 지어지는 법일세. 수고스럽더라도 꼼꼼하게 잘 살피게." "예, 나리." 집터의 주인인 왕륭이 일꾼들을 돌아보며 일을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부인이 머리에 함지박을 인 하녀들을 이끌고 일꾼들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왕륭의 아내 한 씨 부인이었습니다. "수고들 하시네. 잠시 쉬면서 점심들 먹고 하게." 한 씨 부인은 음식이 담긴 함지박을 일꾼들 앞에 내려놓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집터를 한 번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씨 부인이 막 집터를 한 바퀴 둘러보았을 때였습니다. 한 스님이 송악산의 능선을 따라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스님은 등에 바랑을 짊어졌으며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일꾼들이 집터를 닦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허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 삼을 심고 있구나...." 한 씨 부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급히 남편에게 달려가 스님의 말을 전했습니다. 부인의 말을 들은 왕륭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 삼을 심는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왕륭은 얼른 스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스님, 저는 왕륭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새집을 지으려고 터를 닦고 있는데,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 삼을 심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승이 그냥 혼자 중얼거린 것이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은 합장을 하고 나서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왕륭은 스님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스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허둥지둥 스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스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륭의 목소리에 스님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스님,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은 잠시 왕륭의 얼굴을 바라본 뒤, 왕륭을 이끌고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 삼을 심는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장차 이 집에 태어날 인물과 집터의 규모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오." 어리둥절해하는 왕륭을 보며 스님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송악산은 북쪽의 백두산 줄기로부터 흘러 내려온 기운이 머무는 곳이오. 그중에서도 그대의 집터인 저 솔숲 앞 기슭에는 왕기가 서려 있소." "그러니 그곳에 집을 지으면 장차 태어날 아이가 귀하게 될 것이오." "그게 정말입니까, 스님?" "그렇소. 그대의 집터는 내가 지금까지 본 땅 중에서 최고의 명당이오." "한데 지금 짓고 있는 집은 집터의 지세나 태어날 인물로 봐서 규모가 너무 작소. 규모를 넓혀서 서른여섯 칸으로 지으시오. 그래야 송악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날 아이에게 잘 어울릴 것이오." 왕륭은 스님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자식 없이 외롭게 살아왔는데, 곧 자식이 태어날 것이며, 게다가 그 아이가 장차 귀한 몸이 될 것이라고 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저희 집으로 가셔서 잠시 쉬시며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 왕륭은 스님을 집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스님은 왕륭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벼루와 먹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봉투에 넣은 뒤 왕륭에게 내밀었습니다. "공은 내년에 옥동자를 얻게 될 것이오. 그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세울 건(建)'으로 하시오. 이것은 아드님의 이름을 적은 것이오." 말을 마친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스님, 스님의 법명을 알고 싶습니다만...." 스님의 뒤를 따라 나온 왕륭이 물었습니다. "허허허, 굳이 알고 싶다면 말씀드리지요.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도선이라고 한다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왕륭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스님이 예사 분이 아닌 줄은 짐작했지만,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온 나라에 이름이 드높은 도선 대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륭은 정신을 차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느새 스님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877년 1월 14일, 보랏빛 연기가 왕륭의 집을 감싸자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으앙~" 왕륭의 집 앞을 지나던 동네 사람들은 신비로운 빛과 우렁찬 아기 울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저 빛 좀 봐!" "이 집에 훌륭한 아이가 태어난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야." "그러게 말일세. 울음소리도 보통 아이와 다른걸." 왕륭 부부는 도선 대사의 말에 따라 아기의 이름을 '건'이라 짓고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입니다. 왕건이 열다섯 살 되던 해의 봄날이었습니다. 송악산은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었고, 겨우내 쌓였던 눈은 따뜻한 봄볕에 녹아 계곡을 따라 예성강으로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너그럽고 다정하며, 그 나이 또래 아이들 같지 않게 의젓했으므로 따르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왕건은 글공부를 하는 시간 외에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산이나 들로 말을 달리며 활쏘기와 사냥을 하거나, 칼과 창 쓰는 법을 익혔습니다. 오늘도 왕건은 너댓 명의 아이들과 함께 예성강 언덕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으악! 사람 살려!" 그때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깜짝 놀란 왕건이 뒤를 돌아보니 한 친구가 말을 탄 채 언덕 아래의 예성강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풍덩! "어푸, 사람 살려, 어푸!" 강물에 빠진 아이는 허우적거리며 계속해서 살려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모두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뿐 친구를 구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드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봄이기는 했지만 눈이 녹은 물이 흘러들어 강물이 얼음장같이 차가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왕건이 선뜻 나섰습니다. 왕건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재빨리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날쌔게 헤엄쳐 가서 물에 빠진 아이를 한 팔로 안고 강가로 헤엄쳐 나왔습니다. "와! 왕건이 구해 냈다!" "왕건 만세!"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얼마 후 물에 빠졌던 아이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 아이는 왕건에게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네 덕분에 살아났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고마워." "고맙긴. 친구가 위험에 빠졌을 때 돕는 건 당연한 일인걸." 주위에 있던 아이들은 왕건의 말에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이 일은 곧 온 동네에 알려져 송악 사람들 중 왕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건이가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해 냈다면서?" "자네 참 훌륭한 아들을 두었네." 사람들은 왕륭을 만날 때마다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왕륭은 그럴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한편, 그 무렵은 나라 안이 몹시 어수선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실라에 점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수없이 많았으나, 진성 여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왕실과 관리들은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삶을 더욱 힘겹게 했습니다. 나라 안은 백성들의 아우성과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신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진성 여왕의 잘못이 크지만, 진성 여왕이 처음부터 나라를 돌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성 여왕은 등극한 직후에는 백성들을 위해 조세를 감면해 주는 등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더니 이제는 아예 나랏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 흥청망청 놀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대신들도 여왕을 닮아 부패해졌습니다. "여왕님과 신하들이 저 모양이니 우린 누굴 믿고 살아요, 흑흑흑." 진성 여왕은 신라 제51대 왕(887~897). 3명의 신라 여왕 중 마지막 여왕으로, 시호는 진성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 왕후에 봉해진 영화부인 김 씨이다. 897년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2월에 죽었다. 조세는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가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돈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가 힘을 모아 여왕과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자." 결국 진성 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던 889년, 전국에서 세금 독촉에 항거하는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질 않다가, 892년에는 서남해안의 변방 비장으로 있던 견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무진주(지금의 광주). 지방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습니다. 견훤은 상주군 가은현(지금의 경북 문경) 사람으로, 신라 장군 아자개의 아들입니다. 본래 성은 이 씨였으나 나중에 견 씨로 바꾸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견훤은 호랑이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들에 나가 남편에게 점심을 내다 주기 위해 견훤을 나무 밑에 뉘어 놓은 사이, 호랑이가 와서 어린 견훤에게 젖을 먹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인지 견훤은 어릴 때부터 호랑이처럼 몸집이 크고 용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예 솜씨가 뛰어났고, 말솜씨도 빼어나 사람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받들고 따르자, 견훤의 마음속에 은밀한 야망이 생겨났습니다. 천하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견훤은 신라의 비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용맹한 기질과 지략으로 싸움터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으며,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하여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각지의 도둑과 농민을 끌어모은 후, 마침내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백제가 나라를 세워 678년간을 지켜왔는데, 의자왕 때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13만의 원군을 끌어들여 백제를 무너뜨렸소. 이제 내가 잃었던 나라를 다시 세우고 백제의 원수를 갚으려 하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주시오." 견훤의 말을 들은 옛 백제 땅의 백성들은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견훤은 892년에 왕위에 오른 뒤, 900년에 완산(지금의 전주)을 도읍으로 하여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왕륭의 집에서도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조정은 부패하고 각지에서는 반란군과 도적 떼가 끊이질 않으니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왕륭이 나라를 걱정하며 뜰을 거닐고 있을 때 하인 하나가 달려왔습니다. "나리, 웬 스님이 찾아와서 나리를 뵙겠다고 합니다." "뭐라고? 스님이라고 했느냐?" 왕륭은 얼른 대문 밖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과연 짐작했던 대로 그곳에는 도선 대사가 서 있었습니다. "도선 대사님, 어서 오십시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나무관세음보살. 그동안 17년이 지났군요. 이제 건이도 건장한 청년이 되었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셔서 건이를 만나 보시지요." 왕륭은 도서 대사를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서둘러 도선 대사를 사랑채(한옥에서 주로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곳)로 안내한 뒤 말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고 힘드실 텐데 우선 좀 쉬시지요." "건이는 곧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자 도선 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아드님을 얼마 동안 소승에게 맡겨 주셨으면 하는 뜻에서입니다." "건이를 맡으시겠다니요?" "이 세상에는 106년 만에 한 번씩 큰 액운(재난을 당할 운수)이 닥친다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나라 안이 온통 반란군과 도적 떼로 들끓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지요." 도선 대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17년 전에 이미 말했듯이, 건이는 왕기를 타고났습니다. 이 세상에 닥친 액운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할 운명을 지닌 것이지요. 그러니 건이에게 소승의 가르침을 전해 주고자 합니다." 도선 대사는 곧 왕건을 송악산에 있는 한 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왕건에게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도선 대사는 진(전투나 야영을 할 때 군사가 머물러 둔을 치는 곳)을 치는 법, 군사를 다스리는 법, 적을 공격하는 법 등을 다룬 병법과, 자연의 이치를 통해 길흉(운이 좋음과 불길함)을 알 수 있는 천문 지리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 자신이 일찍이 중국에서 익혀 온 열여덟 가지의 신비한 무술도 전수해 주었습니다. 총명한 왕건은 도선 대사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며 지휘자로서의 통솔력을 하나하나 갖추어 나갔습니다. 궁예는 신라 제47대 현안 왕의 아들(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함)입니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궁예가 태어나던 날 지붕 위에 흰빛이 무지개와 같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한 신하가 임금님께 아뢰었습니다. "이번 왕자님은 단오인 5월 5일에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나 있습니다." "또한 이상한 빛이 집 주변을 감쌌다고 하니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단오는 명절의 하나이다. 음력 5월 5일로 수릿날, 중오절, 천중절, 단양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은 처음, 곧 첫 번째를 뜻하고, '오'는 다섯의 뜻으로 통한다. 그러므로, 단오는 초닷새의 뜻이 된다.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여겨왔고, 여러 가지 행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나? 그렇다면 그 아이를 당장 없애 버려라." 임금님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아기를 강제로 빼앗아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때 담장 밖에 있던 유모가 몰래 아기를 받았는데, 잘못하여 손으로 아기의 한쪽 눈을 찌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궁예는 목숨을 건졌지만, 한쪽 눈이 먼 애꾸눈이 되었습니다. 유모는 궁예를 안고 마을을 빠져나와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고생을 다 해서 궁예를 친자식처럼 길렀지만, 궁예는 못된 장난만 골라서 했습니다. '휴~ 왕자님께서는 언제쯤 철이 드실까?' 하루하루 한숨으로 보내던 유모(어머니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길러 주는 여자)는, 마침내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사실 제 자식이 아닙니다. 도련님은 이 나라의 왕자님이신데,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기에 제가 남몰래 기른 것입니다." 말을 마친 유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궁예는 당장 머리를 깎고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세상에 대한 원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반드시 신분을 되찾아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궁예는 마음 깊이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마침내 891년, 궁예는 세달사를 뛰쳐나와 기훤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기훤은 죽주(지금의 경기도 이천)에서 많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도적입니다. 하지만 기훤은 궁예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나를 이렇게 푸대접하다니. 이런 곳에 더 머물러 있어 봤자 별수 없겠군.' 자존심(남에게 굽힘이 없이 제 몸이나 품위를 스스로 높여 가지는 마음)이 상한 궁예는 바로 다음 해에 북원(지금의 원주)의 양길에게로 도망쳤습니다. 양길은 기훤과 달리 궁예의 재주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궁예는 양길 밑에서 세력을 키운 후, 마침내 양길을 배반하고 일인자(어느 사회나 분야에서 으뜸가는 사람)의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며 세력을 더욱 넓혔습니다. 그리하여 894년 10월에는 북원에서 명주(지금의 강릉)로 진출하여 군사의 수를 3,500여 명으로 늘렸습니다. 또 896년에는 철원을 비롯한 10여 개의 성을 빼앗아 스스로 왕이라 칭하기까지 했습니다. 궁예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병사들과 점령지의 백성들에게 항상 따뜻하게 대하며, 싸움터에서 빼앗은 곡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궁예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 갔습니다. 궁예는 드디어 왕건 부자가 살고 있는 송악에까지 손을 뻗으려 하였습니다. '이제 곧 궁예가 쳐들어올 텐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송악을 궁예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바치고 훗날을 기약하자.' 이렇게 생각한 왕륭은 아들 왕건을 설득해서 궁예의 부하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호시탐탐 송악을 노리는 궁예와 대항하기엔 아직 왕건 부자의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입니다. 왕륭은 신라 왕실에서 받은 사찬(신라 때 17관등의 여덟째 등급)이라는 벼슬을 버리고 궁예에게 송악을 바쳤습니다. "어서 오시오, 잘 생각하셨소." 궁예는 반갑게 왕건 부자를 맞았습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송악을 얻게 된 대가로, 궁예는 왕륭에게 금성 태수(신라 때 군의 으뜸 벼슬)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왕륭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궁예는 문득 옆에 있던 왕건을 쳐다보았습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왕건이라 하옵니다." "그래, 무예는 익혔느냐?" "아직 어리고 재주도 부족하지만 조금 배우기는 했사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너의 재주를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예." 궁예는 당장 왕건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군막(군대나 부대 안에 치는 장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궁예는 손가락으로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소나무를 보아라. 소나무의 오른쪽 가지 끝에 매달린 솔방울이 보이느냐?" "예, 잘 보입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저 솔방울을 쏘아 떨어뜨릴 수 있겠느냐?" 궁예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렇게 작은 솔방울을 어떻게 떨어뜨린담. 보나 마나 뻔해......" 그때 왕건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왕건은 곧 활에 화살을 메겨 솔방울을 겨누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왕건을 쳐다보았습니다. "피융~" "와, 명중이다, 명중." "정말 저 작은 솔방울을 맞혔네." 왕건이 쏜 화살이 솔방울을 떨어뜨리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궁예도 감탄한 듯 왕건의 솜씨를 칭찬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구나. 명궁 중에서도 명궁이야." "내 너와 같은 훌륭한 장수를 얻으니 참으로 기쁘구나. 너에게 철원 태수의 벼슬을 내리겠다." 이렇게 해서 왕건 부자는 나란히 궁예 밑에서 태수의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896년의 일이었습니다. 금성 태수가 된 왕륭은 철원을 떠나 금성으로 가야 했습니다. 왕륭은 금성으로 떠나기에 앞서 궁예를 만났습니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큰 벼슬을 내려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왕공의 인품(사람의 품격, 사람의 됨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부디 좋은 태수가 되시오." "황공하옵니다." 궁예에게 인사를 한 후 왕륭은 송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송악은 나라의 중앙에 자리 잡은 곳으로 예로부터 왕기가 서려 있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송악에 성을 쌓으시면 앞으로 뜻을 펼치실 때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송악이 그렇게 명당(풍수지리에서 이르는 좋은 묏자리나 집터)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니 송악에 튼튼한 성을 쌓아 앞일을 도모하십시오. 그리고 제 자식놈이 누구보다도 그곳의 지리에 밝으니, 성을 쌓는 일을 맡기면 아주 잘 해낼 것이옵니다." "알겠소, 공의 말대로 하겠소." 왕륭은 기뻐하는 궁예를 뒤로 하고 금성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왕륭이 송악에 성을 쌓으려는 것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였습니다. 궁예의 밑에서 힘을 기른 후 큰일을 꾀할 때 요긴하게(매우 중요하게, 꼭 필요하게) 쓰일 수 있도록 미리 성을 쌓아 두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왕륭의 말을 그대로 믿고 왕건에서 송악에 튼튼한 성을 쌓으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궁예의 명령을 받아 송악으로 온 왕건은 주변의 지리를 자세히 살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장정(성년에 이른 혈기가 왕성한 남자)들과 병사들을 동원한 대규모의 공사는 1년이 넘어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이 완성되었군. 아버지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제 송악은 적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성으로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이 송악성은 발어참성이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왕건에게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금성 태수로 가 계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부랴부랴 금성으로 달려갔습니다. "흑흑흑. 아버님,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다니요." "평생을 소자(아들이 부모에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말)만을 위해 애쓰셨는데....." 왕건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검(시체) 앞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건은 찢어지는 마음을 추스르고 아버지를 고향으로 모셔다가 송악산 아래 석굴(바위에 뚫린 굴, 암굴) 속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석굴이 바로 창릉입니다. 898년 2월, 궁예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이로써 궁예의 세력은 한강 이북(어떤 지점을 기준으로 한 그 북쪽)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왕건은 맡은 임무를 끝내자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궁예 앞으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저에게 군사 천 명만 주시면, 검개와 혈구, 그리고 공암(지금의 김포와 강화 지역)을 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좋소. 군사를 내어 줄 테니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시오." 궁예는 흔쾌히 왕건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왕건은 목수들에게 명령하여 배를 만드는 한편, 천 명의 군사들을 강으로 데리고 가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얼마 후 수십 척의 큰 배가 만들어지고, 용감한 천 명의 수군이 길러졌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구나!' 왕건은 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에 배를 띄웠습니다. 궁예와 많은 장수들도 강가에 나와 왕건의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이윽고 왕건이 이끄는 수군이 혈구에 상륙했습니다. "아니, 저놈들은 궁예의 부하들이 아니냐!" 혈구를 지키던 신라 병사들은 당황했으나 왕건의 수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잘 훈련된 왕건의 수군을 당해 낼 수는 없었고, 결국 신라군은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만세! 왕건 장군 만세!" 혈구의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왕건을 환영했습니다. 그동안 가혹한 세금과 관리들의 횡포(제멋대로 굴며 난폭함)에 지쳐 신라 왕실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왕건은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쉽게 혈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혈구를 빼앗은 왕건은 곧이어 검개와 공암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왕건은 이렇게 차례차례 세 지역을 모두 손에 넣고 당당하게 궁예가 있는 송악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서 오시오, 왕공.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궁예는 예성강까지 나와 왕건을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왕건에게 '정기대감'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습니다. 왕건은 이렇게 하여 궁예의 신임(믿고 일을 맡김)을 얻고, 내일을 위한 준비를 착착 해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승승장구(싸움에 이긴 여세를 타고 계속 몰아침)하던 궁예는, 900년에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을 장악하더니, 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고 하였습니다. 후고구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궁예는 왕건의 공을 높이 사서 아찬(신라 때 17 관등의 여섯째 등급) 벼슬을 내리고 항상 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위해 어진 정치를 폈습니다. 어느 덧 궁예가 왕이 된 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왕건은 이제 궁예가 다스리고 있는 송악에서는 별로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자 왕건은 궁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폐하, 소장에게 군사 천 명만 내려 주십시오. 금성으로 가서 그곳을 폐하의 영토로 만들고 돌아오겠습니다." "공의 뜻대로 하시오." "가서 불쌍한 신라 백성들을 구하시오." 궁예는 선선히 왕건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왕건은 궁예에게서 받은 천 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예성강에 배를 띄웠습니다. 그리고는 금성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습니다. 왕건이 거느린 군사들이 풍덕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어느덧 하늘에 저녁놀이 붉게 물들고 해가 서산으로 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러야겠군.' 왕건은 그곳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결심하고, 군사들에게 마을 앞에서 야영(군대가 야외에 진영을 마련하여 밤을 지냄)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겠다." "서둘러 야영 준비를 하라." "예, 장군님!" 말을 마친 왕건은 밥 지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말을 몰아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길옆에는 수양버들(버드나뭇과의 낙엽 교목. 중국 원산으로 가로수나 관상수로 심는데, 가지는 가늘며 길게 드리워진다. 잎도 가늘고 길며 이른 봄에 새잎과 함께 황록색 꽃이 핀다.)이 머리를 드리우고 있었고, 초가의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마을 앞 우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붉은 노을 속에서 한 처녀가 물을 긷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물 긷는 처녀를 본 왕건은 갑자기 목이 말라 말에서 내렸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겠소?" 그러자 처녀는 우물물을 한 바가지 가득 뜨더니, 조용히 일어나 버드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버들잎을 한주먹 훑어 내어 바가지에 띄운 후 왕건에게 내밀었습니다. 목이 마른 왕건은 바가지를 받아 급히 물을 마시려고 하였지만, 버들잎 때문에 물을 잘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입으로 버들잎을 후후 불어서 겨우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한편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처녀에게 물었습니다. "낭자 왜 나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을 준 것이오?" "장군께서 몹시 목이 말라 보여 그리하였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처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물도 음식이라 급하게 마시면 체하게 마련입니다. 혹시 장군께서 급히 물을 드신다고 체하실까 봐 그랬습니다." 왕건은 감탄하여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눈이 처녀의 슬기로움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낭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내게 알려 주겠소?" "저는 유화라고 합니다. 버들꽃이라는 뜻이지요." "그대의 모습만큼이나 무척 아름다운 이름이구려." 유화 낭자에게 첫눈에 반한 왕건은 이대로 유화 낭자와 헤어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왕건이라고 하오. 지금 군사들에게 먹일 밥을 지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오. 낭자가 그 일을 해 줄 수 있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화 낭자는 집에서 하녀를 불러 와 밥을 지어 군사들에게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 왕건은 유화 낭자의 아버지인 유천궁을 찾아가 청혼을 했습니다. "저는 후고구려의 장수 왕건이라고 합니다." "댁의 따님과 혼인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왕건의 말을 들은 천궁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장군이 바로 그 유명한 왕 장군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장군께서 소인의 딸과 혼인을 하신다면 저희 집안에 더없는 영광이지요." 그날 밤, 천궁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어머, 신랑 좀 봐. 어쩜 저렇게 늠름할까!" "신부는 어떻고. 우리 마을에서 제일가는 처녀지." 잔치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두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물아홉 살의 왕건과 열아홉 살의 유화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남아 있는 왕건은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왕건은 눈물을 글썽이는 유씨 부인을 남겨 두고 금성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부디 승리하고 돌아오세요. 소첩(시집간 여자가 남편에게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은 언제까지나 장군께서 돌아오실 때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맙소. 내 반드시 금성을 차지하고 돌아오겠소." 왕건은 유씨 부인의 손을 꼭 잡으며 약속했습니다. 이 유씨 부인이 바로 왕건의 첫째 부인입니다. 유씨 부인은 훗날의 신혜왕후입니다. 궁예는 왕위에 오른 지 4년 뒤인 904년에 나라 이름을 '마진'이라고 고치고, 연호를 '무태'로 바꾸었습니다. 마진이란 '동방의 큰 나라'라는 뜻으로, 자신의 나라를 웅대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1년 후인 905년에는 연호를 다시 '성책'으로 고치고,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니 도읍을 철원으로 옮겨야겠소. 서둘러 철원에 대궐을 짓고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기시오." 궁예는 철원에 화려하고 웅장한 새 궁궐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이름난 목수들은 모조리 철원으로 끌려갔고, 백성들과 군사들이 총동원되어 대궐터를 닦거나 성벽을 쌓았습니다. 백성들은 군사들의 감시 속에서 잠시도 쉴 틈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어질던 임금님이 어쩜 저렇게 변할 수 있지?" "그러게 말이야. 이젠 백성들의 어려움 따윈 생각지도 않으시는군." 궁예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원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 갔습니다. 궁예는 신라 왕실에서 버림받은 데다가 애꾸눈이어서, 마음 한 구석에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버린 신라에 대한 원망과 신체적 불구에서 오는 열등감은 궁예를 점점 비뚤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더욱 심해졌습니다. 궁예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황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누런 황포를 입었습니다. 외출할 때에는 금실로 장식한 백마를 타고, 그 앞에는 오색 꽃을 든 많은 아이들을 앞세웠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200여 명의 스님들에게 불경을 외우며 따르게 했습니다. 게다가 궁예는 스스로 부처님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미륵불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궁예는 이렇게 떠들어대며, 자신의 두 아들을 천광 보살과 신광 보살이라고 불렀습니다. 보다 못한 석총이라는 스님이 궁예의 행동을 비판하자, 궁예는 쇠몽둥이를 휘둘러 스님을 때려죽였습니다. 한편 궁예는 왕건이 계속해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자,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경계하고 차츰 멀리하더니, 마침내 왕건을 불러들여 말했습니다. "짐이 경의 마음을 꿰뚫어 보니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소. 어서 사실을 자백하시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는 결코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뜻밖의 말에 왕건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려 그것을 줍는 체하며 왕건에게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폐하의 말이 무조건 사실이라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최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왕건은 다시 아뢰었습니다. "폐하, 사실은 소신이 반역을 꾀했습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러자 궁예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음, 그럼 그렇지. 내 신통력은 속일 수 없지. 경이 정직하게 말했으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소. 어서 물러가시오." 왕건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궁예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했으며,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은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죽였습니다. 이제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궁예의 눈치만 살피며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왕비 강 씨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궁예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셔야 합니다. 간신들을 물리치시고 바른 신하들을 곁에 두시옵소서." 그러자 궁예는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듣기 싫소. 다시 한번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날이 갈수록 포악해진 궁예는, 결국 왕비 강 씨와 두 아들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임금님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어떻게 자기 손으로 부인과 자식을 죽일 수 있지?"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궁예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궁예의 포악함이 극에 이른 918년 어느 날의 일입니다. 중국인 장사꾼 왕창근의 가게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이 거울을 사지 않겠소?" "거울값이 얼마나 되오?" "쌀 한 되만 주시오." 거울과 쌀을 바꾼 노인은 곧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왕창근은 그 거울을 벽에 걸었습니다. 그런데 햇빛이 비치자 거울에 희미한 글씨가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진한과 마한 땅에 내리셔서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았다. 뱀띠 해에 두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푸른 나무 속에 몸을 감추고 하나는 검은 쇠의 동쪽에 나타나리라.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왕창근은 거울을 궁예에게 바쳤습니다. 궁예는 선비들을 불러모아 뜻을 풀이하게 했습니다. 여러 선비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 뜻을 풀어냈습니다. "'두 용'은 궁예와 왕건을 말하는 것이며, '푸른 나무'는 송악, '검은 쇠'는 철원을 가리키는 것이오. 그러니 이 글은 궁예가 왕건에 의해 망한다는 뜻이오." "또한 먼저 닭을 잡고 오리를 잡는다는 것은 왕건이 먼저 계림(신라)을 얻고 나중에 압록강을 차지한다는 뜻이오. 이 사실을 폐하께 아뢰었다가는 큰일이 날 텐데 어쩌면 좋겠소?" 의논 끝에 선비들은 좋은 말로 꾸며대어 궁예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달 후였습니다. 어느 날, 밤이 이슥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네 장군이 왕건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왕건은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채고 옆에 있던 부인 유 씨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텃밭에 가서 잘 익은 참외를 좀 따다 주시오." 부인이 방을 나가자 홍유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지금의 왕은 죄 없는 신하와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심지어는 아내와 자식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돌보지 않아 그 원망이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덕망이 높으신 왕 시중께서 궁예왕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유의 말에 왕건은 정색을 했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임금이라도 임금은 임금이오. 어찌 신하 된 도리로 임금께 불충을 저지를 수 있겠소." 이번에는 신숭겸이 나섰습니다. "예로부터 포악한 임금을 몰아내고 어진 임금을 세우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부디 불쌍한 백성들을 생각하십시오." 왕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습니다. "대감, 기회를 놓치기는 쉽지만 얻기는 매우 힘든 법입니다. 어서 결심을 하십시오." "옳습니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계속되는 장군들의 호소에도 왕건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밖에 있던 유씨 부인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유씨 부인은 장군들의 행동이 평상시와 다른 것을 알아채고 문밖에서 조용히 엿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제가 나설 일은 아닌 줄 알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부인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시중 대감, 대감께서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신 것이옵니까?"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옛날부터 옳은 일이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지금의 왕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부디 이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소서." 말을 마친 유씨 부인은 갑옷과 칼을 꺼내 왕건의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좋소. 정녕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내 기꺼이 그 뜻에 따르겠소. 여러분이 나를 도와주시오." 왕건은 힘차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네 장군들은 모두 왕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소신들은 목숨을 걸고 왕 장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네 사람의 장군은 왕건을 호위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집 밖에는 미리 대기시켜 놓은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 장군이 의로운 깃발을 들고 일어서셨다." 군사들은 왕건을 앞세우고 대궐을 향해 몰려갔습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도 저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호미와 낫 등의 농기구를 들고나왔습니다. "포악한 궁예왕을 몰아내자!" 떼 지어 나온 백성들은 함성을 지르며 왕건과 군사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한편 대궐에서 자고 있던 궁예는 바깥에서 들려 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을 깨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밖을 내다본 궁예는 깜짝 놀랐습니다. 대궐이 불타며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천지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 어서 몸을 피하시옵소서. 왕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하옵니다." "이럴 수가....." "서두르시옵소서. 지체할 여유가 없사옵니다!" 궁예는 허겁지겁 뒷문을 통해 대궐을 빠져나왔습니다. '아,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지금은 비록 쫓겨가지만, 반드시 대궐로 다시 돌아와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궁예는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고 겨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평민으로 변장한 궁예는 걸어서 부양(지금의 평강)의 산골짜기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 백성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궁예가 죽고 왕건이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918년 6월 15일, 마흔두 살의 왕건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도선 대사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로 고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습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였고, 연호를 천수라고 한 것은 '하늘이 내려 주셨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궁예가 세운 호화로운 궁궐의 포정전에서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전 왕 궁예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도적을 없애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는 등 한때는 훌륭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지극히 포악해지고 방탕해져서 백성들이 또다시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다." "또한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고 끝내는 죄 없는 왕비와 왕자들까지 죽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짐이 경들의 간곡한 추대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전 왕이 저지를 잘못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짐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니, 그대들도 짐의 이러한 마음을 받들어 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할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하들은 일제히 고객를 숙여 새 임금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습니다. 그 이후 태조 왕건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 나랏일을 돌보고 민심을 수습하느라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태조 왕건이 이토록 나라와 백성들을 생각했건만, 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알아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곳곳에서 왕건을 반대하는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환선길, 이흔암, 임춘길 등이 역모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었고, 웅주와 운주 등 10여 개의 주현이 왕건에 반대하여 백제에 귀의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저곳에 나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숨어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신하들과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합치기 위해 고민하던 태조 왕건은 '융화 정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 중에는 큰 세력을 가진 지방 호족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힘으로 억누르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자신에게로 끌어들이자는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세력 있는 지방 호족들에게 선물을 주고 벼슬을 내렸습니다. 또 호족들의 자식을 송악으로 데려와 공부시켰으며, 그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조에게는 무려 스물여덟 명의 부인이 생겼습니다. 이듬해인 919년 1월, 태조는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습니다. 송악은 태조 자신의 고향일 뿐 아니라, 일찍이 도선 대사가 왕기가 서린 명당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도읍을 옮긴 태조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숭불 정책'을 펴 나갔습니다. 송악에 왕륜사, 법왕사, 개태사 등의 절을 지어 백성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게 했습니다. 또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절을 지어 부처님의 자비심 아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 위해 '북방 정책'을 폈습니다. "서경은 장차 고려가 북방을 뻗어 나갈 수 있는 근거지가 될 것이니, 성을 튼튼히 쌓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 태조는 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촌 동생 왕식렴을 그곳으로 보내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게 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지키게 했습니다. 고려를 세운 후 태조는 '융화 정책', '숭불 정책', '북방 정책', 이 세 가지를 주요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가 안정되어 가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더구나 920년 1월에 신라의 경명왕이 사신을 보내 고려와 화친을 맺자, 견훤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삼국을 통일하자면 신라와 고려를 모두 쓰러뜨려야 하는데, 두 나라가 서로 가까워지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견훤의 마음은 자꾸 조급해졌습니다. '그래, 둘을 한꺼번에 칠 필요는 없지. 우선 약한 나라부터 공격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한 견훤은 그해 9월 고려에 태조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한 달 후인 10월에 대규모의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갔습니다. 신라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 군사들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대야성과 진례성은 순식간에 후백제군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경명왕은 급히 고려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군사들을 이끌고 와 대야성과 진례성을 짓밟았습니다." "부디 구원병을 보내 주십시오." 다급하게 애원하는 신라 사신의 말을 듣고 태조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만약 지금 돕지 않는다면 신라는 견훤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고려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태조는 결국 군사들을 보내 신라를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한편 고려군이 신라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분하다! 이제 신라를 손에 넣는 일만 남았는데 여기서 물러서야 하다니....' 하지만 고려와 맞붙어 싸우려면 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견훤은 분함을 억누르고 후백제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두 나라 사이에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고 서로 피해만 늘어 갔습니다. 그때 후백제의 견훤이 태조에게 화친을 제의해 왔습니다. 왕족을 볼모로 교환하자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이대로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우리 군사들의 피해만 늘 뿐이다.' 결국 태조는 사촌 동생 왕신을 볼모로 보내고, 대신 견훤의 조카 진호 장군을 인질로 데려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926년 4월의 어느 날, 볼모로 고려에 와 있던 진호 장군이 갑자기 병들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쩐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견훤은 틀림없이 오해를 할 텐데....' 태조가 걱정한 대로 진호 장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뭐라고, 진호가 죽었다고? 그렇게 건강하던 진호가 병으로 죽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분명히 고려 놈들이 일부러 죽인 게 틀림없어....." 견훤은 곧장 고려로 쳐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잘 훈련된 고려군 앞에서 견훤은 번번이 지기만 했습니다. 후백제의 군사들은 점점 뒤로 밀리기만 했고, 고려군의 엄청난 세력에 놀란 후백제의 성주들은 다투어 태조 왕건에게로 귀순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경애왕까지 승리를 거둔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굳은 동맹을 맺었습니다. '괘씸한지고! 내 반드시 이분을 풀고 말 것이다!' 견훤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고려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신라로 쳐들어갔습니다. 고려군의 승리에 마음을 놓고 있던 신라는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백제가 쳐들어오고 있다고? 어서 고려에 구원군을 요청하라." 경애왕의 다급한 부탁에 태조는 곧 병사 1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경애왕은 고려군이 신라를 구해 줄 것으로 안심하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방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함성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전하, 견훤이 쳐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장수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 아뢰었습니다. "뭐, 뭐라고 했느냐! 누가 쳐들어온다고?" "어서 별궁으로 피하십시오!" "곧 이리로 들이닥칠 것이옵니다!" 잔치는 난장판이 되었고 포석정은 비명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경애왕은 왕비와 함께 별궁으로 피신했으나, 곧 군사들에게 붙잡혀 견훤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견훤은 경애왕과 왕비를 꿇어앉히고 호령했습니다. "그대의 죄를 알렷다! 그대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은 채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을 일삼았다. 내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대에게 죄를 내리는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다만 그대가 한 나라의 임금임을 생각해서 이 칼을 내리겠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체면을 지키도록 하라." 이리하여 경애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비참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다음 날, 견훤은 문성왕의 아들 김부를 신라의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입니다. 견훤은 곧이어 신라 궁궐의 보물을 약탈하여 백제로 돌아갔습니다. 견훤이 신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게 하고 궁궐을 약탈했다는 소식은 곧 고려의 태조에게도 전해졌습니다. 태조는 그 소식에 놀라 즉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태조와 견훤은 공산에서 맞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를 무너뜨린 후백제군은, 의외로 고려군의 공격에 쉽게 밀리더니 자꾸 도망을 쳤습니다. "공격하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태조는 군사들을 이끌고 도망가는 후백제군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뒤쫓다 보니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게다가 너무 산속 깊이 들어와 버렸군....' 그제서야 태조는 이것이 견훤의 속임수인 것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몰래 숨어 있던 후백제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고려군은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후퇴하라!" 태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자꾸 쓰러져 갔습니다. 태조의 목숨마저도 위태로워지자 신숭겸 장군과 김락 장군은 태조를 먼저 피신시키고 뒤에 남아 후백제군과 맞섰습니다. 다행히 태조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군사의 반 이상이 죽고 신숭겸과 김락 장군이 전사하는 처참한 결과를 얻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진 태조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송악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의 경솔함으로 많은 군사들과 훌륭한 장군들을 잃다니....' 태조는 견훤과 후백제군을 얕본 경솔함을 반성하며 군사를 정비하고 훈련을 강화했습니다. 930년 1월, 마침내 후백제군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태조는 잘 훈련된 군사들을 이끌고 고창(지금의 안동)으로 가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공산 싸움에서 진 수모를 깨끗이 갚은 것입니다. 고창에서의 승리 이후로 고려는 승승장구했고, 반대로 후백제는 점점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듭되는 패배와 예순이 넘은 많은 나이로 인해 견훤의 후삼국 통일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태조 18년 즉, 935년 3월에 후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견훤은 여러 왕자들 중 지혜롭고 용감한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맏아들 신검이 동생 양검, 용검과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신검 형제는 배다른 아우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은 금산사라는 절에 가두었습니다. '믿었던 아들들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고려의 왕건에게 가는 편이 낫겠다.' 신검 형제에 대한 배신감과 금강을 잃은 슬픔을 억누를 길 없었던 견훤은 마침내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먼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태조는 앙숙이었던 지난날을 모두 잊고 견훤을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또 궁궐의 남궁을 내어 주고, 견훤에게 상부라는 칭호를 내리며 후하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이 늙은이를 이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시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견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태조의 후덕한 마음씨에 감동했습니다. 견훤이 고려에 투항했다는 소식은 곧 신라의 경순왕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름뿐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던 경순왕은 곧 큰 결심을 하고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우리 신라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나라의 운세가 기울었소. 이대로 나라를 더 끌고 가 봤자 백성들의 고통만 커질 뿐이오. 짐은 그만 이 나라를 고려의 태조에게 바칠까 하오." 경순왕과 신하들은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찬란했던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935년의 일이었습니다. 고려에게는 이제 후백제의 신검만이 남았습니다. "후백제의 왕 신검은 아버지를 배반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 불효막심한 자이다. 짐이 후백제를 쳐서 신검에게 그 죄를 묻도록 하겠다." 태조는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신검도 군사를 이끌고 고려군에 맞섰습니다. 두 나라의 군사가 맞붙은 곳은 일선군이었습니다. 신검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버지 견훤과 매부인 박영규 장군 등 많은 후백제의 장수들이 고려군을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고려군을 이끄는 견훤을 보자 후백제의 장수들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항복해 왔습니다.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쫓기던 신검은 결국 고려군에 붙잡혀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건국한 지 4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태조 왕건은 고려를 세운 지 19년 만인 936년에 드디어 후삼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60세였습니다. 후삼국이 통일되자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태조는 이제 나랏일과 백성을 돌보는 일에만 정신을 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둑이 되어 떠돌던 백성들은 한 곳에 머물면서 땀 흘려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던 인재들도 세상에 나와 자신들의 뜻을 펼쳤습니다. 신라와 후백제 땅을 다스리기 위한 새로운 관제도 갖추어졌고, 백성들의 마음에는 평온과 부처님의 자비심이 충만해졌습니다. 태조는 삼국 통일에 기여한 신하들의 공을 살펴 그에 적절한 상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세금을 깎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고려가 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도록 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지도 어느덧 7년이 지났습니다. 그 즈음 태조는 몸이 쇠약해져서 자리에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내 나이도 예순일곱이 되었구나....' 병세가 갈수록 깊어지자 태조는 지난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후회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을 글로 남겨 후세에 경계로 삼도록 하고, 이 나라의 왕업이 길이 이어지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결심한 태조는 곧 대광 벼슬에 있는 박술희를 불러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했습니다. 이때 태조의 말을 적은 것을 '훈요 10조'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려는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이루어졌으니, 절을 짓고 불교를 융성하게 해야 한다. 2. 절을 지을 때에는 도선 대사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터를 잡고 건물을 지어야 한다. 3. 왕위는 정실 왕비의 큰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만약 그 임금으로서의 자질이 없으면 그다음 아들의 순서로 한다. 4. 우리 고유의 풍습을 중시하고 따를 것이며, 거란은 야만족이니 상대하지 말라. 5. 서경(평양)을 중요시하여 북방을 개척해야 한다. 6. 부처님을 모시는 연등회와, 하늘과 명산대천의 신을 모시는 팔관회는 해마다 백성들과 함께 정성을 다해서 행하도록 한다. 7. 왕은 신하의 충성스러운 말을 받아들이고 남을 헐뜯는 소리는 멀리해야 한다. 8.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의 형세가 등을 지고 있어 배반자가 나올 수 있으니 크게 등용시키지 말아야 한다. 9. 모든 관리들의 봉급은 함부로 늘리거나 줄여서는 안 되며, 강대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군사들을 잘 훈련시켜야 한다. 10. 임금은 항상 옛 성인지 지은 책을 읽어 그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이상 열 가지를 후세에 남기니 이 가르침을 대대로 물려 지키도록 하라." 박술희는 어진 임금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으로 목이 메었습니다. "다 받아 썼으면 한번 읽어 보겠소?" "예." 박술희는 태조가 남긴 열 가지 교훈을 하나하나 읽었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려." 힘겹게 말을 마친 태조는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이날 이후 태조의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더니, 마침내 943년 5월 26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태조의 나이 67세, 고려를 건국한 지 26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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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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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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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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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두 소년이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었습니다. 뜨껍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두 소년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어디 한 번 나를 앞질러 봐." 두 소년 중 덩치가 큰 소년이,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는 소년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단단히 각오해, 형. 내가 꼭 앞지르고 말 테니까." 이렇게 대답하며 뒤쫓아가는 소년의 이름은 연이었고, 저만큼 앞질러 달리고 있는 덩치가 큰 소년의 이름은 궁복이었습니다. '궁복'이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으로, 장보고의 아명입니다. 두 소년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습니다. 두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은 드넓은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어느 외딴 섬마을입니다. 사실 장보고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790년경에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졌어. 그렇지만 두고 봐. 다음번에는 내가 꼭 이길 거야." "그래 알았어. 연아. 너무 덥지 않니? 우리 수영할까?" "좋아, 형." "저 앞에 보이는 돌섬까지헤엄쳐 가는 거야." "야호!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두 소년은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둘 다 헤험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궁복이 저만치 앞서서 헤엄쳐 갔습니다. 어느새 돌섬에 다다른 궁복은 열심히 헤엄쳐 오고 있는 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궁복이 형은 힘도 세고, 수영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한단 말이야." 궁복보다 조금 늦게 돌섬에 도착한 연이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조금 더 자라면 나만큼 잘할 수 있어. 너 지난번보다 수영 실력이 꽤 향상되었는걸." 궁복은 수영에서 또 뒤처져 투덜대는 연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궁복은 힘이 세고 운동도 잘했지만, 우쭐대거나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몸집이 작거나 힘없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혼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아이들은 궁복을 대장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습니다. 궁복보다 두 살 아래인 연도 그런 궁복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곧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어부인 궁복의 아버지는 다른 나라의 장삿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돈을 꽤 벌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와 일본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가끔 아버지는 궁복에게 당나라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궁복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좁지만 세상은 무척 넓단다. 너의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려면 넓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체력도 튼튼히 길러야 해."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궁복은 어서 어른이 되어 당나라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평민들의 출세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골품제란 백성들을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일반 백성으로 나누어서 4두품에서 진골까지만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아무리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관리가 되거나 벼슬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민 출신의 사람들 중에는 골품제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로 건너가 공부하여 자기 뜻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궁복도 그들처럼 당나라에 가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었습니다. 궁복은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큰 꿈을 키워 갔습니다. 궁복과 연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고 몸집도 커졌습니다. 두 소년은 멀리 헤엄치기, 활쏘기, 산짐승 잡기 등의 내기를 하느라 하루해가 짧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궁복은 틈틈이 글공부를 했습니다.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무예도 뛰어나야 하지만 글도 잘 알아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궁복과 연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궁복은 그동안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학문이 깊어졌으며, 무예 솜씨는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아주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궁복과 연은 마을 뒤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언덕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돛단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주로 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 가고 있었습니다. 언덕의 편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궁복이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연아, 난 요즘 답답한 생각이 들어. 이대로 있다간 평생 아무런 뜻도 펼치지 못할 것 같아." "사실 나도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 왔어. 형,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지난번에 아버지가 일 때문에 당나라에 다녀오셨는데, 지금 당나라는 절도사들이 일으킨 반란 때문에 매우 혼란하대. 어쩌면 이때가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라." 그러자 연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형? 형의 말을 듣고 보니 당장에라도 당나라로 떠나고 싶어지는걸." "넓은 세상에 가면 우리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그곳에 가서 실력을 더 갈고닦은 다음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우리 함께 당나라로 가서 맘껏 뜻을 펼쳐 보지 않겠니?" 궁복은 한쪽 팔로 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팔에 힘을 주었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언덕에 오른 두 사람은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두 사람에게 당나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마을 앞바다에 당나라 장삿배가 닻을 내린 것입니다. 궁복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궁복은 당장 연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연과 궁복은 부모님들을 설득한 다음 부둣가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습니다.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온 궁복은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궁복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아들을 당나라로 떠나보낼 것을 생각하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허락해 주세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는 늘 저에게 넓은 세상으로 나가 꿈을 펼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연이도 함께 떠나기로 했어요." "그래, 네가 넓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막상 눈앞에 닥치고 보니 너를 떠나보내기가 쉽지 않구나." "아버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한 사람이 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궁복의 눈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습니다. "음." 궁복의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결심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당나라로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궁복아, 당나라에 간다고 해서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되는 것 아니란다." "당나라에도 뛰어난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 사람들 속에서 네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알겠니?"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제 염려는 마시고 부디 몸 건강하세요." 조용히 앉아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궁복의 어머니는 아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섭섭해 옷고름에 눈물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어요." "그동안 몸 건강히 계세요." 어머니는 울먹이며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오냐, 네 뜻이 정 그렇다니 어쩔 수 없다만, 네가 먼 나라에 가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이 어미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던 궁복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께 큰절을 올린 다음 집을 나섰습니다. 궁복이 부랴부랴 부둣가로 나가자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연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는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두 청년은 배 안으로 들어가서 선장을 붙들고 사정했습니다. "선장님, 부디 저희들이 이 배에 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우리 배에 타려고 하는 것이오?" "저희들은 당나라에 가고 싶어요.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요." "선장님, 부탁입니다. 저희를 배에 태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음, 참으로 용감한 젊은이들이로군. 내 젊은이들의 용기가 맘에 들어 큰맘 먹고 태워 주겠소. 대신 당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일을 거들어야 하오." 선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궁복과 연은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배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나왔는지 궁복의 부모님과 연의 부모님이 부둣가에 서서 궁복과 연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궁복과 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요." 두 사람은 부모님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부모님의 모습이 아스라이 멀어지자 두 청년은 한편으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나라는 어떤 곳일까? 과연 우리가 그곳에서 뜻을 펼칠 수 있을까?" 배는 마침내 여러 날 만에 당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궁복과 연은 당나라로 함께 간 상인들과 중국 화이허 항구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틈이 나는 대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곳을 구경하고, 중국말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인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척척 해내는 두 청년을 믿음직스러워했습니다. 주인은 두 청년을 신라방 촌장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무렵 당나라에는 많은 신라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건너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곳에 마을을 이루어 한데 모여 살았는데, 이것을 신라방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궁복과 연이 신라방 촌장을 만나기 위해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대여섯 명의 중국인들이 빙 둘러서서, 한 사람을 사정없이 때리며 마구 발길질을 해 대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맞고 있는 사람은 신라 사람이었습니다. 두 청년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 주에는 신라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던 것입니다. 분노가 치민 두 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나라 사람들을 향해 주먹을 날렸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두 청년이 자기들에게 주먹을 휘두르자 당나라 사람들은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이놈들은 또 뭐야? 어라, 자세히 보니 네놈들도 신라인이렷다?" "아주 제대로 걸렸다. 네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마." 이번에는 옆에 서서 뒷짐을 지고 구경하던 당나라 사람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덤볐습니다. "아얏!" 비명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중국 사내 한 명이 연의 주먹에 나가떨어졌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리며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궁복과 연은 열 명이 넘는 당나라 사람들을 거뜬히 때려눕혔습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무예 솜씨를 십분 발휘했던 것입니다. "한 번만 더 신라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혔다가는 네놈들의 몸도 성치 못할 줄 알아라." 궁복이 옆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당나라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포졸들이 쫓아올까 봐 걸음을 재촉해 신라방 촌장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무사히 촌장의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촌장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으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촌장에게 인사를 올린 두 청년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촌장은 깜짝 놀라며, "아니, 자네들! 어쩌려고 그런 싸움에 참견을 했단 말인가?" "이보게, 매를 맞고 있던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 온 신라 사람들이네. 우리로서도 노예 문제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단 말일세. 그래야 이 신라방이 당나라 사람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거든. 이번 일로 당나라 사람들은 우리 신라방 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을 걸세." 궁복은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겨우 당나라 사람들이 간섭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 신라방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친 것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이 일을 어쩌지?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궁복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관가로 가서 자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촌장은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신라방의 앞날을 위해서는 그편이 좋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궁복의 말에 찬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자진하여 관가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한 다음, 자신들의 잘못은 신라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라방에 해를 입히지 말 것을 사정했습니다. 지방관은 순순히 죄를 인정하는 그들에게 큰 벌을 내리지 않고 사흘 동안 굶기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명의 당나라 사람이 관가로 찾아와 궁복과 연을 풀어 달라고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죄인을 풀어 주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당나라 사람들은 지방관에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궁복과 연이 배를 타고 당나라로 올 때 해적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궁복과 연이 나서서 해적들을 무찔러 준 덕분에, 해적들에게 붙들려 있던 그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방관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과연 용감한 청년들이로군.' 지방관은 잠시 생각한 뒤 궁복과 연을 향해 말했습니다. "당나라 사람들을 폭행한 것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해적들을 소탕한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만약 너희 두 사람이 군인이 되어 당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면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겠다." 그 말에 두 사람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군인이 되는 건 그들이 바라던 바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군인이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언덕에서 뛰어내리기, 활쏘기, 창던지기, 말타기 등의 시험을 차례로 치렀습니다. 중국 시험관들은 두 사람의 실력에 감탄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무사히 시험을 통과해서 당나라의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인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이름을 당나라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때부터 궁복은 장보고로, 연은 정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 무술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무술 대회에서 뽑힌 사람들은 쉬저우 절도사 아래에 있는 군대인 무녕군의 군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저마다 무녕군의 군사가 되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들었습니다. 장보고와 정연도 시험을 치르기 위해 장안으로 갔습니다. "저 사람, 건장한 체격 좀 봐. 힘깨나 쓰겠는걸." "여보게, 저 젊은이를 좀 보게. 난 아무래도 저 친구가 일등 장수로 뽑힐 것 같아. 아까 나랑 같은 줄에 서서 활을 쏘았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었거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둘러보며 저마다 우승 후보를 예상했습니다. 이 무술 대회에서는 활쏘기, 칼싸움, 창 쓰기 등을 통해서 실력을 겨루었습니다. 장보고는 많은 젊은이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일등 장수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연은 그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정연은 다음 시험을 기약하며 쓸쓸히 돌아갔습니다. 장보고는 곧 쉬저우에 있는 무녕군으로 떠났습니다. 이 무렵 당나라는 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절도사는 지금의 도지사와 같은 자리입니다. 절도사가 다스리는 지역을 '번진'이라고 했는데, 평로치청이라는 번진에는 이사라는 사람이 절도사로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당나라 조정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평로치청은 지금의 산둥반도 일대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나라 조정은 평로치청의 세력을 꺾기 위해 훌륭한 장수들이 이끄는 군대를 동원했는데, 장보고가 소속된 무녕군 부대가 맨 먼저 그곳을 공격하는 임무를 띠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정연도 무술 시험에 통과하여 장보고가 있는 무녕군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나갈 대마다 몸은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공적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이 사실은 무녕군의 절도사 이원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원의 절도사는 그들의 공적을 인정하여 장보고에게 무녕군 소장이라는 직함을 주었습니다. 장보고는 중국의 군인이 된 지 5년 만에 지금의 장교에 해당하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신라 사람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던 터라, 당나라에 살고 있는 신라 사람들은 장보고와 정연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은 대부분 당나라 주인 밑에서 항아리를 파는 일, 배를 만드는 일,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 염전을 해서 소금을 내다 파는 일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신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당나라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해적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 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보고가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당나라에 살고 있는 신라 사람들의 가슴속에 긍지를 심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장보고가 말을 타고 한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나라 사람 하나가 채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마구 매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보고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이런 게으름뱅이는 좀 맞아야 해. 신라놈인 주제에 감히 요령을 부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을 하자, 당나라 사람은 더욱 신이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매질을 해댔습니다. 보다 못한 장보고가 나서서 말렸습니다. "이보시오. 아무리 그 아이가 큰 잘못을 저질렀기로서니 그렇게 심하게 때려서야 되겠소?" "웬 참견이오? 이런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요. 일은 조금밖에 안 하면서 밥만 축내는 못된 신라 놈 같으니!" "거참, 해도 너무 하는군. 당장 매질을 그만두시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소." "도대체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요?" "나는 무녕군 소장 장보고요." 당나라 사람은 그제야 장보고의 차림새와 타고 있는 말을 흘끔 쳐다보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소장 나리를 진작에 알아보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 아이가 하도 게으름을 피우기에 따끔하게 벌을 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다시는 그 아이에게 매질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짐승도 아닌 사람에게 어찌 그리 가혹하게 대한단 말이오?" "예,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당나라 사람은 고개를 숙여 넙죽 절을 한 다음, 아이의 손을 이끌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처럼 장보고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한편, 나쁜 짓을 하는 중국 상인들을 혼내 주고 신라인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장보고 덕분에 중국 상인들은 신라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해적들도 함부로 설쳐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랜 세월 동안 희망을 잃고 지내던 신라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 건 모두 장보고 장군님 덕분이야. 정말 고마우신 분이야." "맞아. 장보고 장군님은 우리 신라 사람들의 희망이지." 장보고의 이름은 당나라에 사는 신라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습니다. 어느덧 장보고가 당나라의 군인이 된 지 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장보고는 이제 중국말을 능숙하게 하게 되었고, 중국의 다양한 문화와 제도 등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무녕군 소장으로서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당나라 조정이 그토록 골치 아파하던 평로치청을 토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절도사들은 대규모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언제 다시 조정에 대항해 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목종이 당나라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당시 당나라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목종은 절도사들에게 군사를 줄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녕군도 군사를 줄여 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게 되었습니다. 신라 사람인 장보고와 정연은 그곳에 더 이상 남아 있기 힘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장보고는 군대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네도 잘 알듯이 신라에는 당나라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네." "그런데 해적들이 설쳐대는 바람에 맘 놓고 바다를 오갈 수가 없다고 하는군. 게다가 그들을 봍잡아 노예로 팔기까지 한다니 이대로 더 두고 볼 수가 없네. 그래서 나는 무녕군 소장을 그만두고 신라 사람들이 마음 놓고 당나라에 드나들며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바다를 지키기로 결심했네." 장보고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안 정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장보고의 결심과는 달리 정연은 계속 군대에 남아 자기 뜻을 펼치고자 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해 온 두 사람은 이별을 눈앞에 두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보고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자네가 곁에 있어서 참으로 든든했네. 부디 이곳에서 자네의 뜻을 맘껏 펼치기 바라네. 몸조심하게." "걱정말아요, 형.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형이 가야 할 길과 내가 가야 할 길이 다르니 어쩔 수가 없군요. 형도 몸조심하세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녕군에서 나온 장보고는 산둥반도 부근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적산 신라방은 화이허강 쪽 신라방에 비하면 살기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특히 신라에서 건너온 스님들과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우리 신라 사람들이 뜻을 모으지 않으면 당나라 해적들의 등쌀에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장보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힘을 모아 해적을 소탕하자고 설득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보고의 말을 믿지 못하거나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습니다. "장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신라 사람들이 살길은 먼저 해적을 소탕한 다음 바다를 맘껏 오가며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맞아요. 이제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장보고와 뜻을 같이하는 신라 사람들은 틈만 나면 모여 회의를 열었습니다. "신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종교를 통해서라면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라는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이니, 불교로 백성들이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것이 어떨지요?" "그것참 좋은 생각이오." "더구나 이곳에는 절이 없으니 하루속히 절을 세우도록 합시다." 그러나 절을 세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절을 세우려면 많은 돈과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중국 상인들이 절을 짓는 데 필요한 돈을 지원해 주기로 했고, 노예로 끌려왔다가 장보고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람들이 기꺼이 절을 짓는 일을 돕겠다며 나섰습니다. 유학생들과 스님들은 절이 완공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글을 써서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얼마 후, 이들이 마음을 합하여 구슬땀을 흘린 결과 상당한 규모의 절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절의 이름을 법화원이라고 지었습니다. 과연 법화원이 세워지자 곳곳에서 신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신라에서 온 스님들은 물론이고 유학생들도 당나라에 오면 꼭 그곳에 머물다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화원은 당나라에 살고 있는 신라 사람들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법화원이 세워지면서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한데 모이자, 장보고는 해적 소탕을 위한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배에 물건을 싣고 당나라와 신라를 오갈 때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반드시 여러 명이 함께 다니도록 했습니다. 또 해적들이 나타나면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사람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장보고는 바다 위에서 신라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었습니다. 장보고는 이제 신라 사람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장보고를 믿고 따르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 주는 것에 대해 늘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보고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신라 사람들 몇 명을 불러 놓고 조용히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제 신라방은 해적의 노략질에서 벗어났고, 당나라 사람들도 우리 신라 사람들을 함부로 하지 못하니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제 신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뜻밖의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신라로 돌아가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님이 이곳에 계셔야 당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장군님이 지금까지 우리들을 지켜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군님이 떠나시면 이제야 겨우 살 만해진 신라방 사람들은 다시 마음이 흩어지고, 그렇게 되면 당나라의 간섭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마음을 돌리십시오." 하지만 장보고의 결심은 굳건했습니다. "저는 당나라로 건너올 때부터 꼭 다시 신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게다가 신라 앞바다에도 해적들이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뜻을 꺾지 말아 주십시오." 조국을 걱정하는 장보고의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828년(흥덕왕 3년) 3월, 장보고는 유학생과 스님, 그리고 많은 장정들을 거느리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20세 무렵 큰 뜻을 품고 당나라로 떠났던 그가 40세가 되어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장보고는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온 세월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신라 앞바다를 들락거리며 노략질을 일삼고 있는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는 곧 유학생 김수흔과 홍유 스님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왕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수흔과 홍유 스님은 그 일에 적극 나서 주었고, 얼마 후 장보고는 왕을 만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 앞에 불려 간 장보고는 왕에게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대가 장보고인가? 그대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네. 홍유 스님을 통해 그대가 당나라에서 해적들을 소탕한 이야기도 들었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더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래 그대가 나를 만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번 말해 보도록 하오." "전하, 지금 우리나라 주변의 바다에는 해적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우리 신라 사람들을 붙잡아 가서 당나라에 노예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당나라에 팔려 간 신라인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하, 못된 해적들이 설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청해에 진을 설치해야 합니다. 청해는 우리 신라와 당나라와 일본의 세 나라로 통하는 바닷길이 아닙니까?" "신라가 무역의 중심지가 되려면 그곳을 잘 지켜 배들이 안심하고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흥덕왕은 장보고의 말이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 신라에 이런 숨은 인재가 있었다니. 저 늠름한 기상 당당한 태도. 정말 믿음직스럽다.' 흥덕왕은 장보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당나라에서도 해적을 소탕하는 일에 앞장서 왔으니 이번 일도 잘 해낼 줄 믿겠소. 지금부터 그대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오." "1만의 군사를 줄 터이니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는 것은 물론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게 힘쓰도록 하시오." 청해진 대사란 청해에 설치되는 군대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신라에는 '대사'라는 관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라 왕실은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공을 인정하여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비천한 저에게 이토록 막중한 임무를 맡겨 주시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흥덕왕과 달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하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섬사람에다가 평민인 장보고가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보고는 1만의 군사를 거느린 청해진 대사가 되어 능력을 한껏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장 고향인 청해에 진을 설치한 다음, 군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장보고가 이끄는 군사들은 곳곳에서 설쳐대는 해적들을 무찌르며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신라 앞바다에는 해적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장사를 하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건 모두 청해진 대사 장보고 덕분이야." 이 사실을 보고받은 흥덕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보고의 활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라를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 나갔습니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의 신라방, 일본 구주의 신라인 집단을 잇는 교역로를 확보하는 등 거대한 무역 체계를 하나씩 갖추어 나갔습니다. 이때 장보고가 보내는 무역 사절을 '견당 매물사' 또는 '회역사'라 했습니다. 견당 매물사는 당나라에 물건을 팔러 가는 사절이었고, 회역사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사절이었습니다. 그들이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해상 무역 활동을 벌인 결과, 신라는 당나라,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작은 섬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이제 신라의 해상 무역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장보고 덕분에 신라는 해상 무역 국가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836년, 흥덕왕이 제위에 오른 지 11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음 대를 이을 왕이 정해지지 않은 채 흥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족들 사이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에서 당시 상대등으로 있던 왕의 사촌 동생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 김제륭이 가장 강력한 왕위 후보였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김균정을 지지하는 파와 김제륭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어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김제륭을 지지하는 쪽은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이었는데, 이들은 김균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몰래 급습하여 해치우기로 작전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김균정과 그이 아들 김우징, 김우징의 매부인 김예징, 김양순, 김양 등이 한곳에 모여 왕위 쟁탈전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당탕!"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갑자기 김명과 그의 일당들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어서 도망치세." 김우징은 동료들과 함께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쫓아가서 저놈들을 잡아라! 한 놈도 살려 두어선 안 된다." 뒤에서 부하들에게 소리치는 김명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앗"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치던 김양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습니다. "이보게 김양!" 김양의 등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습니다. "김양." 김우징은 재빨리 김양을 들쳐업고 동료들과 함께 몸을 피하기 위해 궁궐로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매복해 있던 김명 일파의 칼에 맞아 김균정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김우징은 뒤쫓아 오던 적들과 한 차례 싸움을 치렀으나 상대편의 수가 너무 많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김우징은 겨우 그 자리를 피해 목숨을 구했지만 결국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김재륭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신라의 제43대 임금인 희강왕입니다. 희강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을 뽑아 높은 벼슬자리에 앉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명에게는 상대등이라는 최고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한편 겨우 목숨을 건진 김우징은 막강한 자리에 오른 김명의 눈을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그와 가족들은 잠시 금성으로 몸을 피해 얼마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안전하게 몸을 피할 곳을 물색하던 김우징의 머릿속에 지금 신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보고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장보고에게 가자. 장보고라면 나와 가족들을 박대하진 않을 거야. 김우징은 장보고가 있는 청해진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용기를 내어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다음 날 김우징의 편지를 받은 장보고가 배편을 보내와서 김우징과 그의 가족들은 무사히 청해진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청해진에 도착하자 장보고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에서 마음 편히 머무르십시오." "대사 정말 고맙네." 며칠 동안 청해진 일대를 찬찬히 둘러본 김우징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신라 땅에 이런 대단한 해상 제국이 있었다니. 과연 듣던 대로군. 장보고는 예사 인물이 아니야.' 어느덧 희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무렵 나라 안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상대등인 김명이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838년 1월, 마침내 김명은 이홍 일당과 결합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희강왕은 두려운 나머지 목을 매고 말았습니다. 희강왕이 죽자 김명은 희강왕의 남은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신라 제44대 민예왕이 되었습니다. 한편 당나라 군대에 남아 있던 정연도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군인으로서 이름을 떨칠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신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고향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이미 당나라에서 장보고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정연은, 지난날 장보고와 함께 신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때 형과 함께 돌아왔다면 나도 해적들을 소탕하는 일에 한몫하여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형은 많이 변했을까?' '이제 나 같은 사람은 만나 주지도 않겠지. 그러나 곧 정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아니야.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얼마나 각별하게 지냈는데.' 정연은 용기를 내어 청해진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장보고는 정연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 나왔습니다. "아니, 자네! 이게 얼마 만인가? 정말 잘 돌아왔네." "형님, 그동안 형님의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형님이 보고 싶어 당장 달려오고 싶었습니다." 장보고는 정연을 얼싸안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자네는 내 옆에서 일하도록 하게." "나는 자네가 곁에 있으면 든든하거든." "형님 못난 아우에게 이런 대우를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연은 청해진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김양이 그동안 훈련시킨 군사들을 이끌고 청해진에 머물고 있는 김우징을 찾아왔습니다. "나리, 김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희강왕이 자결하자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뭐라고? 이런 나쁜 놈을 봤나."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왕위에 앉아 호의호식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다." "나리, 저에게도 군사들이 있지만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러니 장 대사에게 부탁해 군사를 빌리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장 대사에게? 장 대사가가 과연 이 일에 나서려고 할까?" 김우징은 며칠을 두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장보고가 나서서 이 일을 도와주려고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장보고에게 넌지시 자신의 뜻을 내비쳤습니다. "도와주시오, 장 대사, 김명과 같은 반역자가 왕위에 앉아 있는 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소." "장 대사라면 믿고 이 일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소. 훗날 반드시 이 은혜를 갚으리다." 장보고는 며칠간 곰곰이 생각하다가, 함께 일하는 동료 장변, 낙금, 장건영, 이순행 이렇게 네 사람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청해진을 건설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장보고와 호흡을 맞추어 일해 오고 있는 동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혼자서 결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보고의 말을 들은 네 사람은 서로의 의견이 달라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습니다. "진골 귀족들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아마도 우리를 실컷 이용한 다음 자기들의 실속만 챙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들을 죽 지켜보니 그리 경솔한 사람들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도와주면 훗날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정연이 인기척을 내며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실례인 줄 알지만 밖에서 대충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자들을 믿고 군사를내 준다면, 훗날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권력만 손에 넣고 나면 우리와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입니다.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장보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모두 옳은 말이야. 그러나 지금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백성들이 뜻을 펴지 못하고 있고, 왕족들은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고 있어.' '이번 일을 성사시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해.' 마침내 장보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모두 옳소. 나 역시 한편으로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오만, 내 생각에는 군대를 내주어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의롭지 못한 일을 보고도 모른 체 한다는 건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장보고는 김우징에게 5천 명의 군사를 내주었습니다. 또 정연에게 김우징을 도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설 것을 부탁했습니다. 정연은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장보고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군사를 이끌고 김우징을 따라나섰습니다. 김우징은 자신을 믿고 군사를 내준 장보고가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고맙소, 장 대사. 이 은혜는 내 꼭 갚으리다." "별말씀을요, 이 나라가 바로 서야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다? 나쁜 무리들을 반드시 물리치고 돌아오십시오." 김우징은 군대를 갖추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드디어 출병 날이 되었습니다. 김양이 총대장을 맡고 염장, 장변, 정연,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부장군이 되어 민애왕이 있는 서라벌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출병이다! 자, 깃발을 높이 들어라!" 청해진의 군사들은 추운 겨울에 바다를 건너 무주 철야현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역모를 눈치챈 김민주가 반란군을 대척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청해진 군사들은 용맹스럽게 싸워 김민주의 군사들을 단숨에 물리쳤습니다. 서라벌 대궐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민애왕은 다시 명령을 내려 이곳저곳에 군대를 숨겨 두고 길목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청해진 군대가 남원을 지날 때에 숨어 있던 민애왕의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청해진 군사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청해진 군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관군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청해진군은 서라벌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그사이 어느덧 해가 바뀌어 윤정월이 되었습니다. 청해진군이 달구벌에 당도했을 때 김대흔의 군사가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청해진군이 달구벌에 곧 도착할 거라는 정보를 받은 민애왕이 미리 군사를 보내 길목을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해진 군사들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제 청해진군은 거침없이 서라벌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민애왕은 청해진군이 승승장구하며 서라벌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서쪽 교외에 있는 월유택이라는 별장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청해진군은 그곳까지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민애왕을 따르는 무리를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했습니다. 얼마 후 민애왕을 몰아낸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라의 제45대 신무왕이 되었습니다. 신무왕은 큰 공을 세운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 호를 내려 주었습니다. 청해진 주변을 식읍으로 받은 장보고는 대단한 세력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식읍을 내린 것은 장보고의 공을 치하하는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장보고의 신분이 상승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에는 여전히 골품제가 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장보고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일이 잘되어 민애왕을 몰아내고 내가 왕위에 오르면 장 대사의 딸을 꼭 왕비로 삼겠소." "이건 두 사람만의 약속이자 비밀이오." 신무왕이 된 김우징이 5천 명의 군사를 받으며 장보고에게 은밀히 했던 말입니다. 장보고는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내 딸이 왕비가 되면 나는 왕의 장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신분 상승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해진 주변을 다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장보고는 이제나저제나 신무왕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루는 기다리다 못해 궁궐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알려주는 염장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간 별일 없었는가? 지난번에 자네에게 긴히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는가? 기다리기 너무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편지를 띄우네. 왕께서 무슨 분부를 내리시거든 즉시 연락 바라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신무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장보고는 뜻밖의 소식에 가슴을 치며 통탄했습니다. 신무왕은 등창으로 앓아누웠다가 왕위에 오른 지 여섯 달 만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곧 신무왕의 아들 김경응이 신라 제46대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문성왕이 된 그는 정사를 돌보며 민심을 안정시키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 신무왕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태자, 청해진을 다스리고 있는 장보고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되오." "그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내가 왕의 자리에 오르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오. 행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태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도록 하시오. 그건 오래전부터 내가 약조한 일이니 반드시 지켜야 하오." 신무왕은 등창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태자가 병문안을 올 때면 몇 번이고 이렇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문성왕은 장보고를 서라벌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부리나케 궁궐로 달려온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어서 오시오. 아버님을 통해 장 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전하, 선왕께서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민애왕을 몰아내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하셨는데 어쩌다가." 장보고는 설움이 복받쳐 올라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남은 우리들은 아버님의 뜻을 잘 받들어 이 나라를 더욱 튼튼히 만들어 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나는 장 대사를 '잔해 장군'에 임명하려고 하오. 부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나를 도와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 장군이란 벼슬을 내려 바다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진해 장군의 직책은 사실 그동안 장보고가 해 오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장보고는 크게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장보고가 섭섭해하는 것을 눈치챈 문성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그러자 신하들은 한결같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장보고 같이 미천한 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 우리 신라는 골품제로 백성들의 신분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평민 출신의 여인이 왕비가 된다면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질서가 일시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문성왕은 신하들의 뜻에 따라 귀족 가문의 딸 박 씨를 왕비로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문성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왕비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문성왕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장보고는 해상 무역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장보고는 신라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점은 문성왕뿐 아니라 신하들도 걱정하던 바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장보고를 모함하여 없애 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하,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장보고의 세력이 점점 더 커져서 전하께 큰 해가 될 것이옵니다." "이번 기회에 장보고의 직책을 모두 빼앗고 그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백성들은 입을 모아 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등에 업은 그가 반란이라도 꾀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에 문성왕은 마음속으로 큰 갈등을 느꼈습니다. 신하들은 문성왕의 그런 마음을 짐작하고 더욱 장보고를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청해진에 있는 장보고도 얼마 후 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 이 나라는 도대체 어찌 된 것이 왕보다 신하들이 더 큰 세도를 누린단 말인가!" 장보고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의를 저버린 왕과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려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분노는 곧 행동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장보고는 조정의 간섭을 일체 받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 청해진 주변을 이끌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조정에 실망을 거듭해 오던 백성들도 기꺼이 그의 결정에 따랐습니다. 장보고가 더 이상 조정의 명령을 받들지 않기로 했다는 말은 금세 퍼져 나가 조정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왕과 신하들은 이 문제를 놓고 의논을 하였으나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장보고를 처벌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 뜻을 같이했으나,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그를 없애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염장이 김양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이 밤중에 웬일인가?" "나리, 제가 장보고를 죽이겠습니다." "오, 그게 정말인가?" "대신 그 일에 성공하면 저를 6두품으로 올려주십시오." "그야 어렵지 않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 낮에 조정 대신들이 모여 그 점에 대해 의논하다가 좋은 수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길이었다네." "저는 장보고의 부하였기 때문에 저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그와 만난 다음 기회를 봐서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를 6두품으로 올려 주고, 거기다 장보고가 다스리고 있는 청해진까지 넘겨주지." "그게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나리." 염장은 얼마 전까지 장보고의 부하였습니다. 장보고는 그의 용맹함을 아껴서 항상 곁에 두고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염장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은혜를 배반하고 장보고를 해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막상 배신의 마음을 품기는 했지만, 염장은 자신을 무척 아껴 주던 장보고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마음의 갈등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벼슬을 얻고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그래, 마음 단단히 먹자." 다음 날, 날이 밝자 김양은 대신들을 만나 은밀히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염장에게 잘 훈련된 군사 50명을 주어 당장 청해진으로 떠나도록 했습니다. 염장은 군사들을 패잔병으로 꾸미게 한 다음 자신도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청해진으로 향했습니다. 장보고는 자신이 아끼던 염장이 군사들과 함께 그런 몰골로 나타나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장군님, 억울하고 분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장보고는 군사들을 밖에서 쉬도록 하고 염장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한 다음 하인에게 술상을 내오게 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 두 사람뿐이니 안심하고 이야기해 보게." "우리나라 조정은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서로 자기들이 유리한 쪽으로 말을 꾸미고 장군님을 비방하기에 보다 못해 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혼내 주려다가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보고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네는 지금 김양의 밑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으로 도망쳐 왔단 말인가?" "김양 어르신께서도 제가 장군님을 두둔한다는 이유로 당장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른도 권력에 눈이 멀어 장군님을 모함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양 그 사람이 나한테 이럴 줄은 정말 몰랐네. 나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걸 벌써 잊었단 말인가? 한번 권력 맛을 보더니 헤어 나올 줄을 모르는구먼."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장보고는 차츰 염장에 대한 의심을 풀었습니다. 염장도 그것을 눈치채고 적당히 술을 마시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장군님, 저는 더 이상 조정을 위해 일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김양 나리 곁으로 돌아가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니 곁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장군님."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러자 염장은 장보고의 말 밑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장군님께서 저를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목숨을 끊겠습니다." "이 사람아, 그만 일어나게. 자네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확답을 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네." 장보고는 염장의 곁으로 와서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염장을 달랬습니다. 그 순간 염장은 장보고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 장보고의 심장에 내리꽂았습니다. "윽, 네놈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장보고는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신라 앞바다를 누비며 해적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장보고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장보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연은 당장 군사들을 모아 염장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여섯 달 만에 염장의 군사들에게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염장은 뜻을 이루어 청해진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해진 사람들은 그토록 믿고 따르던 장보고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고, 조정의 처사에 반발하여 당나라나 일본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신라 조정은 청해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군사를 정비하고 철저히 대비했습니다. 또 앞으로 청해진 세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궁리했습니다. 얼마 후 예상했던 대로 장보고의 부하 이창진이 신라 조정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창진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장보고를 죽인 염장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창진이 이끄는 군사들은 염장의 군사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무장하고 있던 염장의 군사들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창진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편 당나라와 일본에서는 장보고가 죽자, 여러 가지 트집을 잡으며 더 이상 신라와 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그나마 장보고와 친분이 있었거나, 그의 밑에서 교역을 하던 사람들만이 이후에도 계속 당나라와 일본에 드나들며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공식적인 무역의 통로는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청해진을 거쳐 바닷길을 오가던 당나라와 일본의 무역선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장보고가 오랜 세월을 두고 이룩한 해상 무역이 점점 그 자취를 잃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장보고의 부하들은 염장이 지배하는 청해진을 떠나 당나라와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851년(문성왕 13년), 마침내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곳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벽골군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장보고와 함께 해상 무역의 제국 청해진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장보고는 아끼던 부하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컸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을 때, 그는 당나라에 노예로 팔려 가는 신라 백성들을 위해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또 그는 신라 앞바다를 장악했고 청해진을 건설해 당나라와 일본과의 해상 무역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뜻을 펼쳐 당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장보고. 그는 반역자의 이름으로 그렇게 세상을 떠났으나, 찬란했던 해상 무역 제국은 오래도록 역사에 남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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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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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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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1876년(고종 13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80리 가량 떨어진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순영은 신라 경순왕의 32대 손이었으며, 어머니는 현풍 곽씨였습니다. 이렇듯 김구의 집안은 왕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벼슬을 지내 왔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선조 중 한 사람인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화를 당하자, 그 화를 입지 않기 위해 온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김구의 11대조 되는 분이 가족들을 이끌고 한성을 빠져 나가, 해주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해주도 한성과 가까워 안전하지 못할 것 같아, 그들은 다시 백운방 텃골에 있는 팔봉산의 양가봉 아래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김구의 조상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상민 행세를 하며 이 곳 백운방 텃골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백운방에서 살게 된 후, 김구의 조상들은 몹시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도 가난 때문에 장가를 들지 못하다가 24살이 되어서야 10살 아래의 곽씨 처녀와 혼인 할 수 있었습니다. 혼례를 올린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곽씨 부인은 신기한 꿈을 꾸었습니다. "여보, 어젯밤 꿈에 커다란 밤송이를 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밤송이가 쩍 벌어지더니 붉은 밤 한 알이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밤이 너무 탐스럽고 예뻐서 얼른 집어 뒤로 감추었는데,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어요." 그 후 열 달이 지나 곽씨 부인은 우렁찬 울음소리의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김구입니다. 김구는 어머니의 젖이 모자라 아버지 품에 안겨 이집 저집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튼튼했던 까닭에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김구의 어렸을 때 이름은 '창암' 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렸을 때 대단한 개구쟁이요, 고집쟁이였습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엿장수가 크게 가위 소리를 내며 창암이네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헌 놋그릇이나 부러진 수저로 엿들 사시오!" 창암이는 이 소리를 듣자 엿이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궁리 끝에 멀쩡한 아버지의 수저를 부러뜨려 엿을 사 먹었습니다. 창암이가 한창 엿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마침 볼일을 마친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웬 엿이냐?" "제가 산 거예요." "아니,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엿을 사?" "사실은 아버지의 수저를 부러뜨려서.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창암이는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났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창암이를 나무랄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은 용서해 줄 테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아버지는 이렇게 타이르고 창암이를 더 이상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창암이는 우연히 아버지가 엽전 20냥을 이불 속에 넣어 두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자 창암이는 그 돈을 모두 꺼내어 허리에 차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집안 어른이 창암이를 발견했습니다. "이 녀석아,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아버지는 창암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꽁꽁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회초리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창암이가 울며 소리쳤지만 아버지의 회초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 때 마침 집 앞을 지나던 집안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 창암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급히 집 안으로 들어와 대들보에 매달린 창암이를 내려놓은 뒤 "아니, 이 사람아! 무엇 때문에 어린아이를 그리 심하게 때리는가?" 하고 아버지를 나무랐습니다. 아버지는 풀이 죽어 잠자코 있었습니다. 창암이는 할아버지 덕분에 매를 맞지 않게 된 것이 다행스러웠지만, 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창암이의 부모님은 밭에 나가 일을 하거나,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곤 하였습니다. 이럴 때면 창암이는 집에 가까운 이 생원의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 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집 아이들이 까닭도 없이 창암이에게, " 이 녀석을 때려 주자!" 하고는 한꺼번에 달려들어 사정 없이 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양반이 아니라고 하여 창암이를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매를 맞은 창암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습니다. '두고보자, 이 녀석들!' 그는 자기를 때린 아이들에게 빚을 되갚아 줄 생각으로, 집에 있는 장대를 들고 다시 그 집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러나 그쪽 아이들 수가 워낙 많아서 도리어 실컷 얻어맞기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창암이는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저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도 양반이 되는 거야.' 창암이는 틈틈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배워, 어느덧 천자문을 깨치고 한글로 된 이야기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공부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어느 날 창암이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글방에 보내 달라고 말했습니다. 글쎄, 네 뜻은 갸륵하다만,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곤란하구나. 이웃 동네에는 서당이 있지만, 그 곳은 양반만 다니는 곳이라 너를 받아 줄 것 같지가 않구나. 다행히 허락을 해 준다 하더라도 , 양반집 자식들 등쌀을 견뎌 낼 수 없을거다. 시간을 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꾸나. 아버지는 여러 날을 두고 고민하다가 이웃 마을과 힘을 합쳐 상인 아이들만 모아 가르치는 글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생원을 훈장으로 모셔 왔습니다. 이리하여 창암이는 12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글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창암이는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누구보다도 먼저 글방에 나가서 글을 읽었으며, 일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늘 배운 것을 중얼거렸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글방은 산골에 있는 신존위네 사랑방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창암이는 날마다 고개를 넘어서 힘들게 글방을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방에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글방을 오가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글을 외웠습니다. 창암이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늘어만 갔습니다. 창암이는 15세 때인 1890년에 텃골에서 10리쯤 떨어진 학골에 사는 정문재에게 글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정문재는 비록 평민 출신이었지만, 글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만큼 이름난 선비였습니다. 게다가 창암이네와는 먼 친척뻘이었기 때문에 창암이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창암이는 날마다 10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다니면서 과거 시험에 필요한 당나라 시와 대학, 통감 등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창암이의 글 솜씨는 나날이 발전하여 이제는 과거를 보아도 능히 급제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2년 뒤인 1892년(고종 29년), 해주에서 과거가 열린다는 방이 나붙었습니다. 창암이는 부푼 꿈을 안고서 과거를 보았으나, 곧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말이 과거이지, 세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글 잘하는 사람에게서 글을 빌리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서 글씨를 빌려 바쳤습니다. 또한 시험도 보기 전에 과거에 급제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과거 시험은 한낱 형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창암이는 아무리 열심히 글공부를 하여도 권력과 재산이 없으면 벼슬을 하거나 양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날로 모든 것을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풍수와 관상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창암이는 석 달 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풍수지리와 관상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또 육도, 삼략, 손자, 오자 등의 병서도 읽었습니다. 이 책들 중에서 유난히 그의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태산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되고, 병사들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섬을 범같이 하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 창암이는 이 글귀를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이 무렵 황해도 일대에는 동학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창암이네 마을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갯골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오응선과 최유현이라는 사람이, 충청도에 사는 최도명이라는 사람에게서 동학을 공부하고 왔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창암이는 오응선을 찾아갔습니다. 오응선은 창암이를 깍듯이 맞이하고 동학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동학은 최제우 선생께서 처음으로 만드신 종교입니다. 지금은 그분의 제자인 최시형 선생이 교주로 계시지요. 무엇보다도 동학은 상민과 양반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답니다." 동학에 입교한 창암이는 이름을 '창수'라고 고치고, 열심히 교리를 익히는 한편 전도에도 힘썼습니다. 창수가 전도에 힘쓴 지 몇 달만에 그를 따르는 신자는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학 본부에서는 창수에게 각 지역 동학 교도의 우두머리에게 내리는 '접주'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1894년(고종31년), 전라도 고부에서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힘을 모아 관아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동학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학 혁명의 불꽃은 고부를 중심으로 하여 삽시간에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습니다. 이 때 창수는 '팔봉 도소 접주' 에 임명되어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창수를 비롯한 황해도 접주들이 속리산을 지나 광혜원 장터에 다다르자, 1만여 명의 동학군이 벌써 진을 치고 행인들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볼 만한 구경거리는 동학 교도들이 백성들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 놓고 짚신을 삼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창수가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그 해 9월이었습니다. 황해도의 접주들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고 이번 싸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창수도 동학군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의 밑에는 총을 가진 군사가 7백여 명가량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황해도 동학군 최고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창수가 선봉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선봉장이 된 창수는 동학군을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첫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체계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동학군을 이끌고 잘 훈련된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창수는 할 수 없이 동학군을 이끌고 해주에서 80리쯤 떨어진 회학동까지 후퇴하였습니다. 그 무렵, 신천의 청계동에 사는 안태훈이 그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안태훈은 동학 혁명 때 의병을 일으켜 동학군을 토벌했던 사람입니다. 안태훈이 창수에게 사람을 보낸 이유는 화해를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수는 곧 회의를 열었습니다. 결국 의논 끝에 서로 공격하지 않되, 상대방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서로 돕기로 하자고 결정하였습니다. 얼마뒤 창수가 거느린 동학군은 구월산으로 옮겨갔습니다. 창수는 매일같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훌륭한 인재들을 모집했습니다. 또 같은 동학군 중에서 백성들에게 갖은 횡포를 일삼는 자들을 찾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수가 홍역을 앓아 한 절간에 누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동엽이라는 자가 창수를 습격하였습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동학의 접주인데, 동학의 본래 뜻을 저버리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횡포가 심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창수가 그들을 사정없이 체포하여 처벌하자 이동엽은 창수에게 크게 양심을 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창수가 병으로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창수의 부하들은 이동엽 군사들의 갑작스런 공격에 갈팡질팡 하다가 모두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창수는 몽금포 부근으로 가서 은신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동엽은 관군과 일본군에게 붙잡혀 사형을 당했습니다. 한편 전봉준도 그 해 11월 전라도 순창에서 붙잡혀 이듬해에 사형을 당함으로써, 동학 혁명은 만 1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895년(고종 32년), 몽금포에 숨어 있던 창수는 청계동의 안태훈을 찾아갔습니다. 안태훈은 창수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 날로 창수의 부모까지 모셔 오도록 했습니다. 이로부터 약 5개월 동안 창수는 부모님을 모시고 청계동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창수는 안태훈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던 고능선이라는 학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창수는 고능선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창수는 고능선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 과거에 뜻을 두었다가 실망하고, 동학에서도 실패한 저 같은 사람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고능선은 창수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네. 창수는 고능선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 후에도 고능선은 창수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창수는 이런 충고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잡았으나 발붙일 곳이 없다. 구차하게 매달려 있지 말고 손을 놓아서 위험에 부딪쳐 보는 것이 대장부다.' 창수는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두었습니다. 하루는 고능선과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던 창수가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이 땅에서 왜놈들을 내몰고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자 고능선은 선뜻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방법이야 있지. 그것은 청나라와 관계를 맺는 거야.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기회가 오면 그들과 힘을 합쳐 일본을 쳐부수는 거야." 고능선의 말을 듣고 난 창수는 오랜 생각 끝에 청나라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창수는 온갖 잡다한 것들을 파는 황아 장수로 꾸미고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장진, 후창, 중강진을 거쳐 중국 땅인 마울산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백두산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마적들을 피하기 위하여 퉁화로 향하였습니다. 한편 나라 안에서는 1895년 10월, 명성 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사변' 입니다. 창수는 퉁화 지방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에 또 한번 분노를 느꼈습니다. '오냐,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 한 몸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원수는 꼭 갚고야 말리라!' 창수는 주먹을 움켜쥐며 다짐하였습니다. 바로 그 무렵, 창수는 김이언이란 사람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널리 의병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창수는 김형진과 함께 김이언이 있는 삼도구로 가서 그 의병부대에 가담하였습니다. 김이언은 맨 먼저 강계성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을 치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이 때 창수는 위원, 강계 등지로부터 화약을 구해 오는 일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김이언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강계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김이언이 계속 공연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일을 그르쳐, 결국 의병 부대는 첫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창수는 김이언의 됨됨이에 실망한 나머지 그 곳을 떠나 신천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창수에게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능선이 창수를 자신의 손녀 사위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동안의 사정을 창수에게 설명한 뒤, "창수야, 외아들인 너를 장가들이는 것만으로 기쁜데, 며느릿감이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 집안의 자식이니 더없는 영광이 아니겠느냐." 하고 흐믓해하였습니다. 창수도 아버지의 말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이 약혼은 김치경이라는 사람의 방해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창수의 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김치경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그에게 9살 된 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창수의 아버지는 농담으로 김치경의 딸과 창수를 결혼 시키자고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창수의 아버지는 약속대로 김치경의 딸을 며느리로 맞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창수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아버지, 저는 10년 전에 농담처럼 한 약속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정략혼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혼담은 깨어졌고, 김치경은 돈을 받고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 버렸습니다. 사실 그는 창수가 결혼한다는 소문을 듣고, 돈이라도 좀 뜯을 생각으로 나타나 훼방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 무렵 나라 안은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 청나라로 향하던 창수는 평안남도 안주에 머무르던 중,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나라로 가는 일은 일단 보류하자. 지금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니 나라 안 사정을 살피다가 다시 마음을 결정하자.' 이렇게 생각한 창수는 다시 발길을 돌려 황해도 안악 쪽으로 향했습니다. 창수는 진남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달이 질 무렵에야 치하포에 닿았습니다. 창수는 나룻배에 타고 있던 다른 손님들과 함께 강가의 배 주인 집에서 그날 밤을 묵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떠들썩한 소리에 잠이 깬 창수는 손님 가운데 유난히 머리가 짧은 한 사나이에게 눈길이 쏠렸습니다. 그 사나이는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자신은 황해도 장연에 사는 정가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황해도 사람인데도 전혀 사투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황해도 사람이라면서 한성말을 쓰다니, 뭔가 이상한데? 우리말을 능숙하게 하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어. 혹시 왜놈이 아닐까?' 창수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 사나이의 행색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 때 그의 두루마기 안으로 얼핏 군도가 보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저놈은 틀림없이 왜놈이다. 저놈이 바로 우리 국모를 죽인 미우라 고로인지도 모른다! 창수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끓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수는 그 사나이를 지켜보며 기회를 노렸습니다. 이윽고, 그 사나이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창수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 사나이는 문설주에 몸을 기댄 채 그의 시중꾼인 듯한 소년이 밥값을 치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창수는 슬그머니 그 사나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이놈!" 창수는 호통을 치며 그의 앞가슴을 힘껏 걷어찼습니다. 갑자기 당한 일에 사나이는 힘없이 마당으로 나가떨어졌습니다. 창수는 다시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 사나이의 목을 발로 힘껏 눌렀습니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방에서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창수는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만일에 이 왜놈을 살리기 위해 내게 덤벼드는 자가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 순간 창수의 발 밑에 깔렸던 사나이가 급히 몸을 빼더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습니다. 창수는 재빨리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사나이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습니다. "으악!" 사나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거꾸러져 버렸습니다. 창수는 잽싸게 사나이로부터 칼을 빼앗아 사나이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불러 죽은 사나이의 소지품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 사나이의 소지품 속에는 '육군 중위 쓰치다 조로'라고 씌인 신분증과 엽전 8백 냥이 들어 있었습니다. 창수는 주인에게 일러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주게 한 후, 그 자리에서 포고문을 썼습니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 창수는 다시 주인을 불러 큰길 가에 그 포고문을 붙이게 하였습니다.그리고 안악 군수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도록 지시한 뒤 유유히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5월 11일 새벽, 창수는 이 일로 인해 해주 감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힌 지 한 달이 지나자 창수는 감옥에서 끌려 나와 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치하포에서 일본 사람을 죽이고 강도질을 하였지?" "그런 일 없소!" "이놈, 네놈의 짓이 분명한데도 거짓말을 하려 드느냐? 여봐라, 저놈을 단단히 혼내 주어라!" 사람들이 달려들어 창수의 양쪽 다리 사이에 몽둥이 두 개를 넣고 주리를 틀었습니다. 그의 정강이는 이내 살이 터져서 뼈가 하얗게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창수는 이를 악물고 애써 고통을 참아 냈습니다. 그는 한성으로 가기 전까지는 왜놈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창수는 인천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인천 감옥에서도 창수는 강도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의 발목에는 다른 죄수들처럼 기다란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감옥 안은 말할 수 없이 더러웠으며, 찌는 듯한 더위로 말미암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창수는 인천 감옥으로 옮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차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불효 자식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무슨 낯으로 뵙는단 말인가? 차라리 죽음으로써 용서를 빌자.' 창수는 마침내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는 손톱으로 이마에다 '충' 자를 새기고 다른 죄수들이 잠든 한밤중을 이용해서 허리띠로 목을 맸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죄수가 깨어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수는 경무청에서 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치하포에서 일본 사람 한 명을 죽인 일이 있는가?" "그렇소." "그 사람을 왜 죽였는가? 재물을 빼앗을 목적으로 죽였다는데, 사실인가?"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놈 한 명을 죽인 일은 있으나, 재물을 빼앗은 일은 없소." 창수는 이렇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 때 일본 순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창수는 그 일본 순사를 향해 큰 소리로 호령했습니다. "이놈! 서로 화친하자는 조약을 맺고 나서 왜 우리 황후 마마를 죽였느냐? 이 짐승만도 못한 왜놈들아,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이 원수를 갚아 우리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겠다." 그러자 일본 순사는 새파랗게 질린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물러갔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경무청에서는 창수가 단순한 강도임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수가 신문을 받는 자리에서 일본 순사에게 호령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애국심과 용기를 칭찬했습니다. 신문을 마친 창수는 판결을 기다리며 한가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글을 모르는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감리서에 다니는 관리가 넣어 주는 신학문에 관한 책들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창수는 그 책들을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1897년(광무 1년), 7월 27일자 황성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8월 26일, 김창수를 교수형에 처하기로 한다. 창수는 담담하게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사형 집행일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왔지만 창수는 태연하게 책만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8월 26일이 되었습니다. 밤이 이슥할 무렵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감방문이 열렸습니다. "김창수는 나오시오." 그 순간 죄수들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창수는 태연했습니다. "여기서 나가오." "이제 당신은 살았소. 지금 막 황제 폐하께서 당신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을 태우셨소?" 이리하여 창수는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 났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1898년(광무 2년)이 되었습니다. 고종 황제가 특별 사면을 내려 사형은 면하게 되었지만, 창수는 여전히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같은 방에 갇혀 있던 죄수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수에게 탈옥하자고 충동질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창수는 탈옥까지 하면서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계속해서 탈옥을 권하자, 창수도 차츰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아직도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왜놈들 때문이다. 폐하께서도 나를 살려주셨고, 동포들도 내가 석방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내가 감옥에서 죽는다면 좋아할 놈들은 왜놈들 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탈옥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자. 창수는 마침내 탈옥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3월 9일을 탈옥할 날짜로 정하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는 우선 조덕근에게 2백 냥을 준비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면회 온 아버지를 통해 쇠꼬챙이를 하나 구해 두었습니다. 드디어 3월 9일이 되었습니다. 창수는 간수를 불러 은밀히 말했습니다, "오늘 밤 내가 죄수들에게 한턱 내려고 하오. 이 돈 중에서 150냥으로는 쌀과 고기와 술을 좀 사다 주고, 25냥은 수고비이니 아편이나 사서 피우시오." 당시에는 아편을 담배처럼 피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간수는 아편 값이 생기자 싱글벙글하며 창수가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잠시 후 감옥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죄수들은 오랫만에 흥에 겨워 떠들어댔으며, 간수는 아편을 피우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창수는 이방 저방으로 왔다갔다하며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쇠꼬챙이로 땅을 파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후, 태연히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후 창수는 함께 탈옥하기로 약속한 죄수들에게 차례로 눈짓을 보냈습니다. 신호를 받은 죄수들은 한 사람씩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감옥을 빠져 나온 창수는 죄수들을 한 명씩 담장 밖으로 넘겨 보낸 뒤, 마직막으로 자신이 넘으려고 담에 붙어 섰습니다. 그런데 먼저 나간 죄수들이 그만 감시원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곧 비상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간수들과 감시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창수는 눈앞이 아찔하였습니다. 담을 넘어 달아나기는 이미 틀린 일이었습니다. 창수는 있는 힘껏 정문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는지 정문에는 한 사람의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탈옥에 성공한 창수는 관헌의 눈을 피해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창수는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얻어 끼니를 때우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시작한 지 반 년이 지나자, 창수에게 세상의 모든 일이 부질없게 여겨졌습니다. '그래, 차라리 중이 되어 이 세상에서 숨어 버리자.' 그는 곧장 마곡사로 들어가 '원종' 이라는 법명을 받고, 하은당이라는 승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은당은 창수를 몹시 거칠게 대했습니다. 그는 창수를 노비처럼 부리려 들었을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구박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창수는 하은당에게 복종하며 매일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했습니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또다시 반 년이 흘러 1899년(광무 3년)이 되었습니다. 창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내가 탈옥하고 난 후 부모님은 어찌 되셨을까? 나를 구하려고 온갖 고생을 다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마침내 창수는 마곡사를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창수는 짐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3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창수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는 눈치였습니다. 게다가 숙부는 앞으로 농사나 지으라며 창수를 타일렀습니다. 창수는 고향에 돌아온 것을 몹시 후회하였습니다. 창수가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동안에 또 1년이 지나 1900년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도 이제 25세가 되었습니다. 창수는 다시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강화도로 향하였습니다. 김주경은 창수가 옥살이를 할 때 그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김주경은 집에 없고, 아우 김진경이 창수를 맞이하였습니다. 나는 연안 땅에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형님과 아주 가까운 친구인데, 여러 해 동안 소식을 몰라서 이렇게 찾아왔다네. 창수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대었습니다. 형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김창수라는 분을 구출하기 위해 집을 나간 후 어디로 가셨는지 소식이 없습니다. 벌써 4년이 지났지요. 그래서 형님 대신 제가 형수님과 조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모처럼 왔다가 헛걸음만 하게 되었군. 그렇지만 그냥 돌아가기 섭섭하니, 얼마 동안 여기 묵으면서 형님의 소식을 기다리고 싶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렇게 하시지요. 이 곳에 머물면서 조카들의 공부나 좀 보아주십시오." 창수는 김진경의 말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김주경을 기다렸습니다. 석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창수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는데, 50세 가량 된 남자가 사랑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왠지 수상해 보이는 자였습니다. 잠시 후 김진경이 나와서 그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 형님은 아직도 소식이 없나?" "네 아직." 창수는 밖으로 나가는 체하고 몰래 숨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그 때에서야 창수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김주경의 친구인 유인무가 보낸 이춘백이라고 하는 사람으로, 창수의 소식을 알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김주경이 창수를 감옥에서 구하려다가 가산까지 탕진했다는 말을 듣게 된 유인무는, 자신이 나서서 창수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인무가 창수를 구해 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창수가 탈옥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춘백이 돌아가고 난 후, 창수는 김진경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이춘백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튿날 이춘백이 다시 오자 김진경은 창수를 소개했습니다. 이춘백은 창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가워하였습니다. 창수는 이춘백과 함께 강화도를 떠나 그날 저녁 무렵 한성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인무를 만났습니다. 유인무는 점점 기울어 가는 나라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겨, 나라를 구할 동지들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런던 차에 창수가 찾아오자 유인무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창수는 유인무의 집에서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으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유인무가 창수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창수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도 그렇군요. 어디 좋은 이름 하나 지어 주시지요." "거북 구 자를 써서 김구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김구라. 그거 좋군요." 이 때부터 김창수는 김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김구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황천이라는 글을 쓰고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왜 하필이면 황천일까? 황천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곳인데, 그렇다면 혹시 아버님께서.' 김구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곧 유인무에게 꿈 이야기를 한 뒤 해주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김구는 한성을 떠난 지 5일 만에 텃골에 다다랐습니다. 그의 예감대로 아버지의 병환은 매우 위독하였습니다. 김구는 아버지를 위해 손수 약을 지어다가 달여 드리고, 밤잠을 설치면서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김구는 마침내 자신의 넓적다리를 칼로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상처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애 넣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김구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의 무릎을 베고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901년 1월의 일이었습니다. "아버님, 이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김구는 아버지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목놓아 통곡하였습니다. 김구는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숙부를 도와 농사일에 힘썼습니다. 1903년,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김구는 어머니를 모시고 장연읍 사직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인형이라는 사람의 집에 '봉양 학교'라는 사립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4년 최준례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나라는 점점 기울어 1905년에는 이른바 을사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완전히 일본의 손애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애국지사들은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웠습니다. 이 때 김구는 진남포 기독교 청년회의 총무 자격으로, 한성 상동 교회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표면적으로는 교회 사업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김구를 비롯하여 전덕기, 이준, 이동녕, 조성환 등 20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회의 결과, 그들은 을사조약을 폐기하도록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습니다. 김구는 대한문 앞에 군중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여러분, 지금 일본은 강제로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 2천만 동포를 노예로 삼기 위해 이완용 등의 역적과 짜고 을사조약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이 조약을 무효로 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도 함께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습니다. "역적 이완용을 처단해야 한다!" "을사조약은 무효다!" "왜놈들은 물러가라!" 그러나 이러한 외침도 일본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힘없이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날 이준을 비롯한 대표 5명이 일본 경찰에게 잡혀갔습니다. 그 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일본을 물리쳐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자 계획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일단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 사업에 힘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불어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김구는 고향인 황해도로 내려와 서명의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곳에서 2년 정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다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안악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 있는 '양산 학교'의 교원이 되어 계속적인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한편 1906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힘쓰고 있던 도산 안창호가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 그는 평야에 '대성 학교'를 세우고 교육 사업에 힘쓰는 한편, '신민회'라는 비밀 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국민들의 애국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마침내 우리 나라는 모든 주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의 황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이 해 11월, 한성에서는 신민회의 주최로 비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모임에서 애국지사들은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하고, 김구를 황해도의 자금 조달 책임자로 선출하였습니다. 어느 날,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김구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독립 운동 자금을 내놓기로 약속한 부자놈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그놈들을 혼내 주어야겠습니다." 독립 운동 자금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동지를 모아 외부로 통하는 전신, 전화를 끊는 데 쓰려고 합니다. 그리 하면 왜놈들끼리 서로 연락할 길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그 때 각지에 살고 있는 왜놈들을 일제히 공격하려 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하지만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 보게. 지금 우리가 왜놈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어찌 가라앉힐 수 있겠나. 그러나 자네가 시도하려고 하는 방법은 일시적인 분풀이밖에 되지 않을 걸세. 우리 나라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어. 그러한 방법보다는, 차라리 뜻있는 동지를 모으고 그들을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후에 큰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 나을 듯싶네. 김구는 안명근을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안명근이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명근은 황해도 사리원에서 붙잡혀 한성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김구는 안명근의 일을 가슴아파하며 탄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큰 고초를 당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새벽, 일본 헌병이 김구의 숙소인 양산 학교로 들이닥쳤습니다. 김구가 헌병을 따라 헌병 분견소에 가 보니, 김흥량을 비롯한 다른 양산 학교 교사들도 와 있었습니다. 결국 김구와 양산 학교 교사들은, 안명근과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그 곳에 갇혔다가 2, 3일 뒤에 경성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 때 잡혀 온 사람들 중에는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의 애국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기회에 독립 운동을 뿌리뽑기 위하여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였던 것입니다. 며칠 동안 감방에 갇혀 지내던 김구는, 어느 날 아침에 죄인을 신문하는 방인 취조실로 끌려갔습니다. 김구를 노려보던 취조관이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네가 잡혀 온 이유를 알겠지?" "모른다. 난 아무런 죄도 없다." 김구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취조관은 더 묻지 않고 그를 천장에 거꾸로 매달고는 사정없이 매질을 하였습니다. 김구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취조관은 김구에게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다시 신문을 하였습니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너와 안명근은 어떤 관계인가?" "그저 서로 아는 사이일 뿐이다." "뭐라고? 다 알고 있는데 계속 시치미를 뗄 테냐?" 취조관은 김구를 다시 천장에 거꾸로 매달고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구는 또 정신을 잃었습니다. 며칠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김구는 이를 악물고 견뎌 냈습니다. 김구는 일곱 차례의 모진 고문 끝에 1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김구는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매일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김구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었습니다. 김구가 징역살이를 한 지도 8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대하자, 김구는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를 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태연했습니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 벼슬을 한 것보다 더 기쁘고 자랑스럽다. 네 처와 화경이(김구의 딸), 그리고 이 어미 모두 잘 있으니 염려 말고, 너는 네 몸이나 잘 보살피도록 해라. 너는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아들이다." 당당하신 어머니의 말에 김구는 목이 메었습니다. 김구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땅에서 왜놈을 몰아 내고 말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했습니다. 1912년 일본 왕 메이지가 죽자, 일본 정부는 사면령을 내려 모든 죄수들의 벌을 감해 주었습니다. 이 때 김구의 형기는 7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또 몇 달 뒤에는 메이지의 아내가 죽었다고 하여 형기는 더욱 줄어 3분의 1로 감해졌습니다. 이제 김구의 형기는 2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뜻하지 않았던 특사로 감형이 되자 김구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나가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먹은 김구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미 일본 국적에 올라 있는 이름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는 '거북 구' 자를 '아홉 구' 자로 바꾸고, 호를 '백범'이라고 지었습니다. '백범'의 '백'은 '백정'에서 따온 것이며, '범'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두 자 모두 '천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김구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우리 나라가 독립을 되찾아 새로운 정부가 세워지거든, 제가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게 해주소서." 1914년 7월, 마침내 김구는 가출옥으로 풀려났습니다. 김구는 우선 아내가 교편을 잡고 있는 안신 학교의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리고 양산 학교의 주인인 김용진에게 부탁하여 '동산평'이라는 농장의 감독 일을 맡았습니다. 이 마을은 풍기가 문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게을러, 마을의 모습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김구가 이 곳 일을 맡아 보기 시작하면서, 마을에서는 노름이며 술주정, 싸움질이 자취를 감추고 집집마다 볏섬이 가득 쌓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일본의 탄압애 시달리던 우리 민족은 드디어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용감히 일어섰습니다. 3. 1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김구는 나라를 위해 좀더 큰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둥 현에 도착하였습니다. 김구는 그 곳에서 다시 동지 15명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 총장으로 있던 안창호를 만났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을 때 독립된 우리 나라 정부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 적이 있었소. 비록 외국에서나마 우리 정부가 섰으니, 나를 문지기로 써주시오. 안창호는 여러 총장들과 이 일에 대해 상의한 후 김구에게 경무 국장이란 직책을 주었습니다. "내가 어찌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을 수 있겠소?" 김구는 극구 사양하였지만, 안창호는 그에게 억지로 경무국장 자리를 맡겼습니다. 이듬해 김구의 아내가 맏아들 인과 함께 상하이로 왔고 1922년에는 어머니도 그를 찾아 싱하이로 건너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그의 둘째아들 신이 태어났습니다. 김구는 비록 남의 나라 땅에서였지만 오랜만에 가정 생활의 행복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뿐 1924년 1월, 아내가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를 잃은 김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겨를도 없이, 그는 임시정부 일로 또다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1926년 12월, 김구는 임시정부의 우두머리인 국무령을 맡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국무령에 취임하자마자 법을 고쳐서,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바꾸어 모든 권한과 책임을 국무위원이 똑같이 갖게 했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끌어 나가는 한편, 상하이의 거류민 단장으로도 활약하며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불어넣는 데 힘썼습니다. 1931년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김구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김구 선생님을 뵈러 온 이봉창입니다." "내가 김구입니다만, 무슨 일로 오셨소?" "저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 독립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곳 상하이까지 왔습니다. 저와 같은 노동자도 독립 운동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독립 운동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합니다." "제 나이 지금 31살입니다. 앞으로 제가 31년을 더 산다 해도 조국이 독립되지 않는 한, 값진 삶을 누릴 순 없을 것입니다. 저는 헛되이 오래 사느니보다 독립 운동에 몸바쳐 일하다가 죽는 것이 훨씬 값진 삶이라고 믿습니다. 제게 그 기회를 주십시오." "고맙소, 이 동지." 김구는 감격하여 이봉창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이 때부터 김구는 이봉창의 거사를 위해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준비를 착착 진행해 가던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김구는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아까운 젊은이 하나만 희생시킨 것이 더없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봉창의 값진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더욱 활발히 추진해야겠다.' 이렇게 다짐한 김구는 암살과 파괴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적당한 인물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윤봉길이라는 젊은이가 김구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채소 장사를 하며 홍커우 방면을 돌아다닌 이유는 의롭게 죽을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생님, 도쿄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으시면 저를 써 주십시오." "마침 윤 동지와 같은 사람을 찾던 중인데 정말 잘 되었소. 오는 4월 29일에 왜놈들이 홍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을 연다고 하오. 윤 동지, 그 때 한 번 큰 일을 해 보는 게 어떻겠소?"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바라던 일입니다." 윤봉길은 의지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을 돌려보낸 뒤,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마련하였습니다. 4월 29일 아침,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교포 김해산의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이 시계는 지난번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마치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낡았으니 이 시계와 바꿨으면 합니다. 이 시계는 이제 한 시간 후면 쓸모가 없을테니까요. "윤 동지! 뒷날 지하에서 만나......" 김구는 목이 메어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그 날 오후, 홍커우 공원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가와바타 민단장은 그 자리에서 죽고, 노무라 기치사부로 사령관, 시게미쓰 마로루 공사 등 여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윤봉길의 의거 이후, 일본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 있으면 전부 잡아들였습니다. 나중에 이 사건을 지휘한 사람이 김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김구를 잡기 위해 60만 원이라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김구는 미국인 패치 목사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신변이 위험해지자 자싱이라는 곳으로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김구는, 중화민국 주석인 장제스의 초청을 받아 난징으로 갔습니다. 장제스는 김구에게, 허난 성 뤼양 군관 학교 분교를 한국 동포 무관 양성소로 쓰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김구는 곧 학생을 모집하는 한편, 만주에 있던 이칭천과 이범석을 교관으로 초청하여 열심히 군사 훈련을 시켰습니다. 김구가 중국에서 광복군을 조직하여 힘을 기르고 있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김구는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조국이 광복된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실력을 키운 광복군이 일본군을 무찌를 기회가 영영 없어진 것입니다. 그 해 11월 23일, 김구는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이 때 그는 7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김구에게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태산같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튿날부터 김구는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뿐, 이 강산에는 또다시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12월 27일, 미국, 영국, 소련이 모스크바에 모여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 통치를 결정한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우리 나라의 허리에 38도선을 긋고 남쪽은 미국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와 지킨다는 협정도 맺었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요인과 정당 및 사회 단체 대표들을 모아 놓고, 이 나라를 두 동강 내려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독립을 하였는데 신탁 통치가 무슨 말인가?" "신탁 통치를 결사 반대한다!" 사방에서 분노의 함성이 터졌고, 시위와 파업 등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는 그들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여의치 않자, 1948년에는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국토를 영원히 갈라놓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럴 순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 조국은 영원히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김구는 평양으로 가서 공산당과 담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협상에 참석하기 위하여 떠납니다. 그 곳에 가서 기어코 38선을 없애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나 김구의 노력은 공산당의 비협조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는 마침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구는 날이 갈수록 두터워져만 가는 38선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남북 협상의 좌절 이후, 김구는 그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서예와 독서로 울적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러던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0분경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구에게 육군 포병 소위인 안두희가 찾아왔습니다. 안두희는 전에도 가끔씩 김구를 찾아온 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비서들은 그를 2층에 있는 거실로 안내했습니다. 안두희가 김구의 방으로 들어간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조용하던 방 안에서 갑자기 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깜짝 놀란 비서들이 허겁지겁 2층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곳에 김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있었습니다. 김구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했지만, 안타깝게도 조국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어이없게도 동포의 손에 의해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김구의 장례는 열흘 후인 7월 5일에 국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이 날, 서울 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운동장)의 영결식장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영결식이 끝나고 김구의 유해는 효창 공원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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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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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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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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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대동강 하류에 위치해 있는 도룽도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섬에는 몇 채의 가난한 농가가 모여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도롱도 사람들은 모두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는 한편,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아버지 안흥국은 성품이 곧고 근면한 농부였으며, 할아버지는 매우 엄한 분이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이러한 집안에서 안창호는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안흥국은 어린 창호에게 가끔 훌륭하신 조상들의 이야기며 평탄치 못한 나라의 정세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하였습니다. 창호는 아버지가 해 주시는 어려운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씀만은 항상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호가 11살이 되던 어느 날,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창호는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창호의 집은 워낙 가난하여 그는 어려서부터 소를 돌보고 농사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는 틈틈이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다가, 9살이 되어서야 겨우 서당에 다니며 글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호는 바라던 서당에 다니게 되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글방 선생님이 한 번 가르쳐 준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또 배우다가 의문 나는 부분이 있으면 끝까지 캐물어서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창호는 공부벌레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며 전쟁놀이를 즐겼고, 그 때마다 대장 노릇을 하며 아이들을 이끄는 개구쟁이였습니다. 창호가 13살이 되던 해, 그는 글방에서 필대은이란 선배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창호는 틈만 나면 필대은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필대은은 신학문과 많이 접해서 변모하는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창호는 필대은을 쫓아다니며, 그가 들려주는 여러가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해. 이런 섬마을에만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잖아." 필대은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창호는 넓은 세상과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깊어 갔습니다. 마침내 창호는 할아버지에게 여행을 갔다 오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할아버지, 평양에 사는 친구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그 곳은 왜 가려는 게냐?" "그냥 바람도 쐴 겸 구경이나 하고 오려고요." "그래라, 하지만 되도록 빨리 돌아와야 한다." 섬마을에 살던 창호는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평양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큰길 가에 늘어선 가게와 그 안에 진열된 물건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간편한 옷차림 등 창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창호는 책방에 들어섰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야, 이 많은 책! 새로운 책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여태 한문 공부만 하고 있었구나." 진열된 수천 권의 책들 중에서 특히 기독교에 관한 책이 그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때부터 창호는 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창호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보고, 자신이 공부하던 서당이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나도 이제부터는 서당 말고 학교에 다녀야겠어. 도시의 학교로 가서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도록 하자. 이왕이면 우리 나라의 수도인 서울로 가야지!' 그러나 평양에 있는 학교에도 갈 형편이 못 되는데 서울에 있는 학교를 간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창호는 학교 앞에서 발길을 돌리며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서울애 가는 것은 무리일 거야.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새 출발을 하는 의미에서 우선 이 긴 머리부터 잘라 버리자.' 창호는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 무렵 대부분의 평양 사람들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나, 시골 사람이나 완고한 집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도롱도 사람들은 평양에서 머리를 깎고 돌아온 창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까지 이 섬마을에는 아무도 머리를 자른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네가 평양 구경을 가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부모님이 물려준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다니." 할아버지는 창호를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어른들과 친구들까지도 창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창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혼자 강가에 앉아 강바람을 쐬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창호는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도롱도 사람들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이 곳에 묻혀서 지낼 수는 없다. 신학문을 배워 넓은 세상에서 보람되게 살기 위해서는 학교에 다녀야 한다." 창호의 눈에는 굳은 결의가 서렸습니다. 창호는 자주 필대은의 집에 찾아가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 조정의 대신들은 두 파로 갈라져서 싸움만 일삼고 있다지요?" "그래,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뉘어서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단다." 수구파란 옛날 제도를 고집하는 무리로, 청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세도 정치를 하는 민씨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정권은 다시 수구파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그 이듬해인 1885년에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톈진 조약이 맺어져 일본도 청나라와 함께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 개화파와 수구파는 왜 외국 세력을 끌어들인 것일까요?" "우리 조상들이 세계 정세의 변화에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야." "우리가 나라의 힘을 기르기도 전에 외국에서는 신문물을 받아들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어 놓았거든. 그러니 권력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그들의 힘을 빌리게 된 거지." "수구파와 개화파가 세력 다툼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잖아요?" "물론이지. 청나라와 일본은 겉으로는 우리를 도와주는 체하지만 사실은 우리 나라를 넘보고 있거든." "그런데 지금은 청나라보다 일본이 더 강하다면서요?" "그래, 청나라는 넓은 영토만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일본은 근래에 서양의 과학 문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어." "그래서 일본이 더 강해진 거야." "그럼, 우리 나라는 앞으로 일본을 조심해야겠네요." "당연하지. 일본은 벌써부터 음흉한 속셈을 드러내고 있어." "우리 나라에 매우 불리한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 모든게 결국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는 속셈이야." 이렇게 창호와 필대은의 대화는 끝없이 진지하게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하루빨리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넓혀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같이하였습니다. 드디어 창호에게 그 동안 품고 있었던 청운의 꿈을 펼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94년 창호가 17세 되던 해 6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그 해 1월에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청나가 군대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때를 놓칠세라 일본도 톈진 조약을 내세워 우리 나라에 군대를 보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안 동학 혁명군은 자진 해산하였고., 그에 따라 우리 조정에서는 두 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임금님이 살고 있는 궁성을 점령하고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 일 전쟁입니다. 청 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긴 했으나, 정작 전쟁터는 우리 나라 땅이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집과 재산이 불타고 애써 가꾼 곡식들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창호는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못난 탓이다.' '우리가 힘이 없기 대문이야.' 창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는 평양까지 전쟁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창호도 삼촌과 함께 황해도 봉산 땅에 이르렀을 때, 청 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창호야, 전쟁이 끝났으니 우리도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자." 삼촌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피란 떠날 때부터 창호는 딴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삼촌, 기왕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저는 서울 구경이라도 한번 하고 가겠습니다. 삼촌 먼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창호는 서울 구경을 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지내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고향을 떠나 황해도까지 온 김에 삼촌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창호의 이야기를 들은 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호에게 얼마의 돈을 쥐어 주었습니다. "삼촌, 고맙습니다." 이리하여 창호는 넓은 세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창호는 서울에 도착하자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서울은 평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화하였기 때문입니다. 남대문 근처에 거처를 잡은 창호는 우선 거리 구경부터 나섰습니다. 가장 번화하다는 종로거리도 구경하고, 고종이 살고 있다는 경복궁 담 밖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창호는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지,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창호는 끼니도 걸러 가면서 돈벌이가 될 만한 일자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호가 어떤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웬 사람들이 길가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앞에는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 사람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습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모두 우리 교회에서 대 주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창호는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 외국인은 말로만 듣던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선교사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인들을 말합니다. '그래, 저 선교사를 따라가자. 내가 갈 길은 바로 이거야.' 창호는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하며 선교사를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창호는 필대은에게서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이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교사를 직접 만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창호가 처음 만난 선교사는 언더우드 밑에서 일하던 밀러라는 목사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학교를 창립한 미국인 선교사로서, 그 당시 그는 구세 학당을 세워 우리 나라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창호는 곧 이 구세 학당에 들어가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원하던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창호는 구세 학당에서 공부하는 동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창호는 구세 학당에서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며,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꼭 지키는 생활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정신은 훗날 그가 독립 운동과 민족 계몽 운동을 펼 수 있게 한 신념의 근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창호는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이 때 배운 과학 역사 지리 등의 신학문들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창호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가 색싯감을 정해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른들이 자식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며느릿감이나 사윗감을 정하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신학문을 공부하던 창호에게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창호는 곧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정해 놓은 손자며느릿감은 이혜련이란 처녀로서, 창호가 다니던 서당의 훈장인 이석관의 맏딸이었습니다. 처녀의 아버지이자 스승을 만난 창호는, "저는 지금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계속 공부를 해서 나라를 위하여 몸바칠까 합니다. 그러자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어떻게 제가 결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한마디로 결혼에 뜻이 없음을 밝혔습니다. 이석관은 조금도 불쾌하거나 당황하는 빛이 없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기다려야지. 언제까지나 기다릴 테니 염려 말게." 창호는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석관이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자네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믿겠네." "그리고 내 딸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면 우리 애도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키겠네." 이석관은 창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습니다. 창호도 더 이상 결혼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훗날 이혜련과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고 우선 약혼을 하였습니다. 창호는 이혜련과 누이동생 안신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정신 여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자가 신식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창호는 앞날을 내다보고 이런 일을 과감하게 감행했던 것입니다.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욱 의기양양해져서서 우리 나라에 대하여 본격적인 간섭을 시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쪽의 러시아까지도 우리 나라에 손을 뻗으니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그런데다가 조정의 어리석은 벼슬아치들은 친일파와 친러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임으로써, 열강들의 침략 야욕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많은 이권이 다른 나라로 넘어갔습니다. 이에 젊은이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독립을 외치고 일어났습니다.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와서 독립협회를 조직하자, 윤치호, 이승만 등이 이를 도왔습니다.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자주 독립의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 노력한 선각자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청년 창호의 가슴에도 새로운 의지가 용솟음쳤습니다. 그는 곧 서재필을 찾아가 독립 협회에 참여할 뜻을 밝혔습니다. 서재필은 창호의 손을 굳게 잡으며 기뻐하였습니다. "고맙소, 안 동지. 우리 함께 열정적인 마음을 조국에 바칩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작은 힘이나마 나라와 겨레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창호는 곧 서당에서 사귀었던 필대은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평양에 독립 협회 평양 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1897년 9월 10일, 대동강 서쪽 언덕에 있는 쾌재정의 뜰에서 기념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사람들이 이 곳을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그렇게도 유쾌한 곳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이 곳에 와서 보니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만한 자리입니다. 첫째, 오늘 고종 황제 폐하의 탄신일을 맞아 온 백성이 모여 축하하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요. 둘째, 이 자리에는 평안감사를 비롯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백성들과 한자리에 어울려 있으니 또한 기쁜 일입니다." 안창호의 멋진 연설에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유쾌한 자리에서 제가 불쾌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서로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한번 권력을 잡으면 재물에 눈이 어두워 툭하면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가 볼기를 치고 주리를 틀었으며, 허구한 날 술타령이나 하며 보내지 않았습니까? 이래서야 어찌 이 나라가 바로 될 수 있겠습니까?" "옳소! 옳소!" 연설을 듣고 있던 청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단상에 앉아 있던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은 얼굴이 붉어지고 헛기침을 하는 등 안절부절못하였습니다. 안창호는 숨을 한 번 가다듬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청중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연설을 계속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 '독립'이란 말을 들어 보셨지요?" 안창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나라는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간교한 일본의 힘으로 벗어난 것입니다. 교활한 일본은 청나라를 밀어내고 다시 우리 나라를 넘보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일본이나 청나라와 같은 외세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키고, 또 키워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힘이요, 둘째도 힘입니다." 안창호의 연설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정말 옳은 말이다!" "우리 나라에 젊은 지도자가 나타났다!" 안창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아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그 때 안창호의 나이 20세였습니다. 다음 해, 독립 협회에서는 '만민 공동회'라는 민중 대회를 열고, 청년 연사들의 뜨거운 연설로써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주적 입장에서 근대적 정치를 펴도록 요구하는 개혁안을 고종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 정치인들은 황국 협회를 조직하여 갖은 방법으로 독립 협회에 대항했습니다. 그러던 중 독립 협회를 이끌어 가던 서재필이 수구파의 배척을 받게 되자 미국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황국 협회의 방해는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는 전국의 보부상들을 모아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고종은 이 두 단체의 해산을 명하였고, 그에 따라 독립 협회는 조직된 지 약 2년 만에 해산되어 버렸습니다. 온 겨레의 노력으로 개화와 자주 독립을 이룩하고자 일어났던 구국 운동이 어리석은 정부의 탄압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독립 협회가 해산되자 안창호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한동안 허탈한 심정으로 지내다 마침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나라를 짊어질 바른 일꾼을 길러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다. 이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자.' 이렇게 생각한 안창호는 22세가 되던 해인 1899년에 큰형 안치호의 도움을 받아 큰형이 사는 동진면 암화리에다 사립 보통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안창호의 학교 이름을 '점진'이라 지었습니다. 점진이란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기 향상을 도모하자'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개화기에 세워진 이 점진 학교는 학생 수가 얼마 안 되는 조그만 학교였지만,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사립 학교이자, 남녀 공학을 처음으로 실시한 뜻깊은 학교였습니다. 교장이며 교사인 안창호는 직접 교가를 지어 학생들과 입을 모아 힘차게 불렀습니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기쁜 마음과 기쁜 노래로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공부하여 끊임없이 전진하자는 뜻의 노래였습니다. 안창호가 고향에서 지역 개발 사업에 힘쓴 지도 어느덧 3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안창호는 신학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한편, 기독교를 널리 알리는 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농민들을 도와 마을 앞 강바닥을 메워서 새로운 논밭을 일구는 등 많은 어려운 일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나 꿈이 큰 안창호는 여기에 안주할 수 없었습니다. 좀더 큰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남을 가르치려면 자신이 먼저 더욱 깊은 학문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 배워야 한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남을 가르치기엔 너무도 부족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 나라보다 문물이 앞서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야한다." 이렇게 결심한 안창호는 자신이 경영하던 점진 학교를 형에게 부탁하고, 미국으로 가는 수속을 밟기 위해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미루어 온 결혼 약속이었습니다. 약혼녀 이혜련은 그 동안 정신 여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며 안창호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약혼녀를 10년이고 20년이고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약혼녀의 아버지인 이석관을 찾아가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이석관은 자기의 딸도 미국에 데려가야 한다며, 안창호 혼자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또 약혼녀 이혜련도 안창호를 따라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1902년 9월에 밀러 목사의 주례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때 안창호의 나이는 25세, 신부 이혜련은 19세였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그 이튿날 이 신혼 부부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뱃길은 멀고도 험하였습니다.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지고, 밤이나 낮이나 바다 위를 떠가는 힘들고 지루한 항해가 계속되었습니다. 안창호는 뱃멀미로 고생하는 이혜련을 정성껏 돌보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영어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와이가 가까워졌다." 미국인 선원들이 탄성에 배 안은 갑자기 활기가 넘쳤습니다. 안창호는 이혜련을 부축하여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동쪽의 먼 수평선 위로 섬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너무 기뻐서, "아, 섬이다! 산이다!" 하고 바다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안창호는 그 때의 감격을 그대로 기념하기 위하여 호를 '도산'이라 지었습니다. 도산은 섬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하와이를 거쳐서 20여 일의 항해 끝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큰 항구도시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자리도 비교적 많아 우리 나라 교포들도 몇 명 살고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한 부잣집의 청소부가 되었습니다. 비록 청소부에 불과했지만 그는 성심성의껏 일하였습니다. 이를 본 주인은 안창호의 성실한 태도에 탄복하여 약속한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얼마 후 안창호는 다른 일자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무척 아쉬워하며 말했습니다. "그 동안 수고한 대가로 당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그러자 안창호는 주인이 생각지도 못한 전혀 뜻밖의 말을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앞으로도 일꾼이 필요할 때 저 같은 한국인을 써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안창호의 대답에 주인은 더욱 감탄하여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일자리를 옮긴 후 안창호는 입학을 서둘렀습니다. 원래는 대학에 들어가 교육학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서투른 영어로는 대학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예 초급 학교에 들어가 기초부터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교장 선생님, 저는 한국에서 이 곳까지 공부하러 왔습니다. 제발 이 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안창호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미국인 교장은 학칙에 어긋난다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우리 학교는 19세 이상 된 사람은 받을 수 없어요." 안창호는 여러 학교를 쫓아다니며 사정을 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끝에 겨우 한 학교에서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 승낙을 얻어 낼 수가 있었습니다. 25살이나 된 어른이 어린 미국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하자니 매우 쑥스러웠지만, 안창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며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배움에는 나이가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창호를 보고 미국의 한 신문은 '기특한 한국의 늙은 학생'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안창호의 생활도 조금씩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동안 안창호는 많은 교포들과도 얼굴을 익혔습니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20여 명의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학생도 더러 있었지만 거의가 인삼 장수 아니면 노동자였습니다. 어느 날 안창호는 미국인들이 길거리에서 무엇인가를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궁금해서 가까이 가 본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글쎄, 우리 동포 두 사람이 서로 상투를 휘어잡고 욕설을 하며 싸우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창피한 광경이었습니다. 얼굴이 달아오른 안창호는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들어 싸움을 말렸습니다. "여보시오, 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오?" 안창호는 겨우 싸움을 말린 뒤, 두 사람을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타일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들은 이 미국 땅에 무얼 하러 왔소? 같은 동포끼리 기껏 상투나 잡고 싸움이나 하자고 이 곳에 온 것은 아니잖소?" "당신들이 이러면 한국 사람 모두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오." 안창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몹시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로 사과를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미국인 단골 손님을 놓고 경쟁을 벌이다가 싸움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같은 동포끼리 경쟁을 하여 싸움까지 벌이다니. 이런 모습을 본 외국인들이 우리를 얼마나 무시할까?' 안창호는 매우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다음 날부터 안창호는 우리 동포들의 생활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교포들이 사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몇 군데의 허름한 아파트와 인삼 장수들이 잘 모이는 술집을 찾아가 보니, 역시 그가 생각했던 대로였습니다. 동양에서는 예의바른 나라의 국민으로 존경을 받던 우리 민족이 미국 땅에서는 무식하고 미개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은 한국 사람이 어딜 가나 욕 잘하고, 걸핏하면 싸우고, 돈이 생기면 술부터 마신다고 비웃으며 흉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샌프란시시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 사람은 책임감 없고, 게으르고, 더러운 민족이며,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만 아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사람에게는 방도 잘 빌려 주지 않았을 뿐더러, 한국 사람이 이사를 오면 주위의 외국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버리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안창호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 공부는 1,2년 늦어져도 상관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방탕한 생활 태도와 서로 미워하고 헐뜯는 마음가짐은 하루라도 빨리 고쳐야 한다.' '우선 이 일부터 앞장서서 계몽하자. 이것이야말로 우리 교포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동포 전체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안창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몇몇 유학생과 손잡고 교포들의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안창호는 직접 교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올바른 생활 태도를 가지도록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포들은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자 안창호도 실망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동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안창호는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어. 솔선수범하지 않고 말만 내세웠으니, 누가 내 말을 따르겠어!' 안창호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부터 손수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교포들이 사는 집 안팎을 말끔하게 쓸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포들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창호를 멸시와 조롱의 눈초리로 바라보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창호는 교포들의 조롱의 눈초리에도 묵묵히 일을 해 나갔습니다. 그는 교포들의 거친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우선 주위의 환경부터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못과 망치를 들고 다니면서 망가진 울타리나 문짝을 고쳐 주고, 꽃도 사다 주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이런 일이 계속되자, 처음에는 냉랭하기만 하던 교포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약 반 년이 지나자 교포들은 안창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집 안팎을 깨끗이 정돈하고, 목욕과 이발을 자주 하였으며, 싸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교포들을 모아 '한인 친목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한 달에 한 번씩 한국 교포들끼리 모여 고국의 소식도 듣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뜻을 같이하여 돕자는 취지에서 만든 단체였습니다. 안창호의 이러한 헌신적인 봉사 정신과 끈질긴 노력으로 한국인 교포 사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안창호는 더욱 보람을 느끼면서 한인 친목회를 '공립 협회'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더 많은 교포들을 한데 모아 서로 협력하게 하였습니다. 공립 협회는 초기에는 우리 교포들의 친목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돈을 모아 기금을 만들어 조국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까지 의논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나라와 미국 정부 사이에는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독립 국가 국민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 협회는 마치 한국 대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관청에서도 한국 교포들의 문제는 모두 공립협회와 상의하여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공립 협회는 공립 신보라는 신문을 발간하여, 교포들에게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알려 주고 조국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또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자리가 잡힐 때까지 돌보아 주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안창호가 미국 땅에서 교포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동안 조국의 운명은 점점 기울어 갔습니다. 1904년 만주를 점령하여 우리 나라에 세력을 뻗으려는 러시아와, 우리 나라를 통해 만주로 나아가려는 일본이 서로 부닺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러 일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듬해인 1905년. 마침내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더욱 의기양양해진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정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에 일본은 그 첫 단계로 우리 나라 대신들에게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그리고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우리 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문제를 간섭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는 이름뿐인 나라가 되었으며, 주권도 사실상 일본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나라 안에 퍼지자, 온 국민은 매일같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을사조약을 맺는 데 찬성한 이른바 '을사 5적'을 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조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가서 나라 안의 동지들과 힘을 모아 일본을 내쫓아야 한다.' 이렇게 결심한 안창호는 이제 겨우 자리가 잡혀 가는 공립 협회를 다른 동지들에게 맡기고, 조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때는 1907년 2월, 안창호의 나이 30세였습니다. 안창호는 귀국하자마자 일본 헌병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라가 위태로운 이 마당에,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힘을 기르는 일뿐입니다." 안창호는 가는 곳마다 청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쓰러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과 일본의 억압에 대한 울분에 쌓인 백성들은 그의 연설을 통해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창호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래서 '신민회'라고 하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교육 문화 경제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 운동을 펼치는 데 힘썼습니다. 한편 일본이 내정 간섭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통감부에는 이토 히로부미라는 늙은 정치가가 통감부의 최고 우두머리인 통감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는 외교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토는 민족 지도자인 안창호의 역량을 알고 그를 잘 이용하면 조선 사람들의 불만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토는 안창호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각의 총리 대신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토의 이런 음흉한 속셈을 꿰뚫어 보고는 그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또다시 사람을 보내어 총리 대신직은 맡지 않아도 좋으니, 한 번 만나 달라고 청해 왔습니다. '이토를 직접 만나서 그의 속셈을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겠군.' 안창호를 맞이한 이토는 호탕한 얼굴에 음흉한 웃음을 띠고 몹시 반가운 척하였습니다. "오! 어서 오시오, 안 선생! 당신처럼 훌륭한 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고맙습니다. 나도 이토 선생 같은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토는 안창호에게 몇 마디 인사치레의 말을 건네더니, "안 선생! 우리 함께 손을 잡고 일해 봅시다. 지금이야말로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일본과 조선, 중국이 서로 협력해야 할 때가 아니겠소?" "선생께서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협조하겠소이다." 하고 안창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토에게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냈습니다. "동양 평화를 위해 우리 조선과 일본, 중국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안 선생." "일본은 지금 우리 나라를 돕기 위하여 힘쓰고 있다는데, 진실로 우리 나라를 돕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지금 우리가 돕고 있는 것이 부족하단 말이오?" "이토 선생, 우리 일은 우리 국민 스스로가 할 것이니 제발 일본은 물러나 주십시오. 그것이 진정 우리 나라를 돕는 방법인 동시에 동양의 평화를 앞당기는 것입니다." 안창호의 조리 있는 말에 이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안창호는 더욱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총칼로 굴복시킬 때, 남는 것은 원한밖에 없습니다." "그 원한이 쌓이면 언젠가는 복수를 하게 될 터인데, 그 때는 더 큰 불행이 오고 말 것입니다. 이토 선생같이 훌륭한 분은 그런 비극의 씨앗을 뿌리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안창호는 이토와의 면담으로 일본의 속셈을 확실하게 알아차리고, 신민회 활동을 더욱 힘차게 추진해 나갔습니다. 신민회는 애국심을 가진 훌륭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단체인 동시에 산업을 일으키는 경제 운동 단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안창호는 이 큰 사업을 위하여 이갑, 이승훈, 김구, 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의 목표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사업으로 평양에 대성 학교를 건립하고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안창호는 항상 이 말을 강조하며 진실된 인간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학생들의 체력을 단련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때로는 오락회를 열어 그들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성 학교에서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안창호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화 사업으로는 태극 서관을 세워 책을 내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안창호는 1909년에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청년 학우회는 신민회와 같은 비밀 단체가 아니라 통감부의 허가를 받은 단체로서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안창호는 이 청년 학우회를 인격을 양성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터전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창호는 청년 학우회 회원들에게 전문 기술을 터득하고 지 덕 체를 기를 것을 늘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힘입어 청년 학우회 출신의 젊은이들은 훗날 사회 각 분야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도 안창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년 학우회는 나중에 흥사단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 무렵 만주에서 참으로 통쾌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909년 10월 29일, 조선 통감 이토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쾌거는 오랫동안 쌓여 온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 준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우리 나라의 애국지사들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안창호도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통감부에서는 안창호를 두 달 만에 풀어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내각 총리 대신이 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협박에 쉽게 넘어갈 안창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일본 통감부에서는 안창호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 되겠구나. 국내에서는 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계속하자." 안창호는 이렇게 생각하고 몇몇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향하는 뱃길에 올랐습니다. 1910년 4월, 그의 나이 33세 때였습니다. 이 때 안창호는 조국을 떠나는 설움과 한을 노래에 실었는데, 이것이 곧 거국가 입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슬퍼 마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저 시운을 대적타가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서, 네 품 속에 누워 자는 내 형제를 다 깨워서, 한 번 기껏 해 봤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만, 나중 일을 생각하여 분을 참고 떠나간다. 내가 가면 영 갈쏘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 거국가는 4절로 된 긴 노래로서 각 절마다 '나의 사랑 한반도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 보더라도 안창호가 조국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국가는 안창호의 열정적인 애국심과 불타는 독립 정신을 보여 주며 오늘날까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중국의 산둥 성 칭다오에 머물면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앞날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선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해 9월 안창호는 동지들과 헤어져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만주로 들어가 농지 개척을 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는 조국이 결국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는 애통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천만 동지 동포가 졸지에 나라 잃은 백성이 되다니!' 안창호는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렌데다가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만주에서 농지 개간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로 했던 이종호라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여, 농지 개간이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크게 실망한 안창호는 시베리아와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습니다. 나라를 구하고자 미국을 떠난 지 4년 만에 조국을 잃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큰아들 필립은 벌써 7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맨손으로 입국한 안창호는 품팔이 노동을 하려고 하였으나, 동지들의 계속되는 권유에 못이겨 다시 교포들 지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1912년 11월, 안창호는 공립 협회를 바탕으로 '대한인 국민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대한인 국민회는 재미 교포뿐만이 아니라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모든 교포 대표가 참가한 교포 전체의 모임이었습니다. 대한인 국민회에서는 먼저 이전에 발행하였던 공립 신보를 신한 민보라고 이름을 바꾸어 계속 발행하였습니다. 안창호는 신한 민보를 통하여 교포들이 지켜야 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조를 호소하였습니다. 1. 한국인 상점에서는 마음놓고 물건을 살 수있도록 하자. 2. 한국인 노동자에게는 믿고 일을 시킬 수 있게 하자. 3. 한국인의 약속이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자. 이는 해외 동포가 다른 독립 국가의 국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1913년 5월 13일, 안창호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안창호는 무실 역행 충의 용기의 4가지를 흥사단의 행동 방침으로 내세웠습니다. 즉 참되고 실속 있으며, 몸소 실천하고 무슨 일에나 충성되고 신의를 지키며, 씩씩하고 비겁하지 않게 행동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이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기르고 인격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흥사단을 통하여 국민들을 깨우치고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양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안창호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민족 앞에 희망과 이상의 등불을 밝혀 주었고, 우리 국민의 나아갈 길을 바르게 인도하여 주었습니다. 안창호는 또 흥사단의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습니다. 조상 나라 빛내려고 충의 남녀 일어나서 무실 역행 깃발 아래 늠름하게 모여드네. 맘을 매고 힘을 모아 죽더라도 변치 않고 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손을 들어 맹세하네. 안창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흥사단 운동은 매우 활발해졌으며, 여기에서 배출된 많은 젊은이들은 민족의 독립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듯 안창호가 미국에서 조국이 자주 독립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나라 안에서는 거센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아, 드디어 우리 민족의 가슴에도 불이 붙었구나." 안창호는 너무도 기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튿날, 안창호는 대한인 국민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포들과 의논한 끝에 중국 상하이로 갔습니다. 그 때 중국 항하이에는 3 1 운동의 영향에 힘입어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뽑아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침마다 사무실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흐르자 임시정부의 동지들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애국자라고 자칭했던 많은 지도자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헐뜯고 다투는 바람에, 그 밑에서 묵묵히 일하던 젊은 동지들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을 따르던 교포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오직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상하이로 온 안창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안창호는 임시정부에서 탈퇴하였습니다. 임시정부에 크게 실망한 안창호는 미국에서 일으켰던 흥사단 운동이 이 곳에도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먼 집단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혼자서 말없이 독립 운동을 벌이는 것이 조국을 구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안창호는 비록 남의 나라에서 살아갈지언정 동포끼리 뭉쳐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자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건설하기에 알맞은 곳을 찾아 중국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창호가 만주의 지린이란 곳에 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중국 경찰이 달려들어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왕의 생일 축하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 왕의 암살을 꾀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려 중국 경찰에도 협조를 구했던 것입니다. 안창호가 중국 경찰에 잡혀 일본 헌병에게 넘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하이의 우리 동포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걱정하였습니다. 1932년 6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태극기를 흔들며 귀국하겠다는 마음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안창호는, 그 웅대한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제물포(지금의 인천)부두에 내렸습니다. '아, 슬프도다.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부끄러운 몸으로 조국 땅을 밟다니.' 안창호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습니다. 안창호는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습니다. 일본 경찰은 아무 죄도 없는 안창호에게 치안 유지법 위반이라는 엉터리 죄명을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4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안창호는서울과 대전 형무소로 옮겨다니며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1935년 2월, 58세의 안창호는 형기 만료 4개월을 앞두고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건강이 매우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안창호가 출감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를 보고 놀란 일본 경찰은 안창호를 서울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안창호는 평양에서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송태 산장에 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1937년 6월 28일, 일본 경찰은 수양 동우회 사건이라는 허위 사건을 꾸며내어 많은 애국지사들을 잡아갔습니다. 안창호도 또다시 붙잡혀 갔습니다. 송태 산장에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드나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다시 잡아 가둔 것입니다. 일본 경찰은 지독한 고문으로 안창호를 심문했지만, 안창호는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해 11월, 안창호는 검사국으로 넘겨졌다가 12월 14일에는 병 보석으로 풀려나와 경성제국 대학(지금의 서울 대학교)부속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안창호의 병명은 '폐결핵 겸 결핵성 참출성 복막염'이라는 것으로, 그의 몸은 이미 위 폐 간 이 피부 등 어느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마침내 안창호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1938년 3월 10일, 그는 사경을 헤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 거렸습니다. "히로히토(일본 국왕의이름)야, 히로히토야!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이 한 마디를 끝으로 안창호는 끝내 눈을 뜨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외로운 병실에서 가족과 떨어져 쓸쓸하게 숨을 거둔 것입니다. 일본 경찰은 안창호의 장례식마저 방해하였습니다. 장례식의 참석 인원을 20명 이내로 제한하고, 묘지는 망우리 공동 묘지로 하며 묘비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만은 어쩌지 못했습니다. 안창호의 이름은 우리의 마음속에 뚜렷이 기억되어 위대한 선각자로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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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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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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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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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의 마지막 날 이른 새벽, 충청남도 천안에서 50리 가량 떨어진 지령리에는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습니다.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차가운 공기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른 새벽에, 한 소녀가 마을 뒷산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 이른 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주여, 지금 저희들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그 통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간악한 일본은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되찾으려는 이 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주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루빨리 이 억압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소녀의 기도는 맑은 새벽 공기를 타고 은은히 퍼져 나갔습니다. 이따금 매서운 바람이 소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소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기도에만 열중하였습니다. "프랑스 소녀 잔 다르크는 열일곱 살 때 위기에 빠진 조국 프랑스를 구했다고 합니다. 저도 잔 다르크와 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제 몸을 바치고자 합니다. 하지만 저의 힘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주여, 부디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소녀의 기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기도에 열중해 있던 소녀의 귀에, "너라면 충분히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할 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소녀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혹시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닐까? 그래, 틀림없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대답해 주신 거야.' 하는 생각이 들자 소녀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소녀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때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잔뜩 끼어 있던 새벽 안개가 걷히고 밝은 햇살이 잠에서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마을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조국의 밝은 앞날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녀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혔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치다가 열아홉 살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친 유관순입니다. 유관순은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유중권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유관순은 외동딸로서 위로는 오빠 관옥이 있었고 아래로는 두 남동생인 관복, 관석이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너그럽고 모든 일에 성실하였습니다. 게다가 한 번 옳다고 생각한 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밖에 나갔던 동생 관복이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왔습니다. 깜짝 놀란 식구들이 관복의 머리를 헝겊으로 싸맸으나 피는 좀처럼 멎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관순아, 당장 가서 관복이를 때린 아이를 데려오너라." 그러자 유관순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관복이가 잘못을 했어요. 처음에 그 아이와 관복이가 연 싸움을 했는데 관복이가 졌대요. 그러자 다음에는 구슬치기를 했는데, 관복이는 자기가 질 것 같으니까 속임수를 썼다지 뭐예요." "속임수를 써?" "네, 그래서 둘 사이에 싸움이 붙었는데 관복이가 먼저 주먹질을 해서 그 애가 코피를 쏟았대요. 그래서 그 애는 화가 나서 돌을 던졌는데, 그게 그만 관복이 머리에 맞은 거래요." "그래도 그렇지. 딴 데도 아니고 머리를... 그 녀석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놔야겠으니 냉큼 불러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아버지가 소리쳤으나 유관순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관복이의 잘못이 분명한 걸 아시면서 왜 그 아이를 야단치려고 하세요? 전 그런 심부름은 못 하겠어요." "아니, 뭐라고?" 아버지는 유관순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말이 옳았으므로 더 이상 화를 내지는 못하였습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굴욕적인 한일병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온 나라 안은 통곡 소리로 가득했고,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애국지사가 늘어 갔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것은 우리 나라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이렇게 생각하고 조인원을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흥호 학교'를 세웠습니다. 또한 동네에 교회를 지어 전도에도 힘썼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제대로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유중권은 생각다 못해 고마다라는 일본인 고리 대금업자에게 3백 냥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운영이 어려워 제때에 이자를 갚지 못하자 고마다는 돈을 빨리 갚으라고 매일같이 독촉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관순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유관순이 놀라서 묻자 어머니는 그저 말없이 흐느끼기만 하였습니다. 한참 만에야 어머니는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낮에 고마다가 총까지 들고 와서 빌려간 돈을 빨리 갚으라며 온갖 행패를 부리고 갔단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어찌 산단 말이냐?" 어머니의 말을 들은 유관순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무리 제때 돈을 갚지 못했기로서니 총을 들고 와서 위협하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 저녁때 돌아온 아버지도 그 이야기를 듣고 몹시 분개하였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는 간신히 돈 3백 냥을 마련하여 고마다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고마다가 내놓은 차용 증서에는 빌려간 돈이 3천 냥으로 적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를 본 아버지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보고도 모르시오? 당신이 빌려간 원금에 그 동안 밀렸던 이자까지 합친 금액이잖소."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앞에 놓인 차용 증서를 찢어 버린 뒤 3백 냥을 내던지며 소리쳤습니다. "뭐라고? 이런 천벌을 받을 놈아! 3백 냥을 꾸어 주고 3천 냥을 돌려받겠다니 세상에 없을 날도둑놈 심보로구나. 나는 그런 이자까지 낼 생각 없다. 옜다, 네 돈이나 받아라." 그러자 화가 난 고마다는 밖으로 뛰어나가 일본 사람 4, 5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우물가로 끌어내어 심하게 매질한 후 우물에다 거꾸로 처박아 둔 채 돌아갔습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아버지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유관순은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행패에 치를 떨었습니다. '관순아, 실력을 쌓아야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단다.' 평소 아버지가 자주 들려주던 말을 떠올리며 유관순은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유관순의 가슴속에는 자주 독립에 대한 염원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유관순은 학교 공부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부지런히 다니며 신앙심을 키워 나갔습니다. 1916년 정월 대보름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작은 매봉 교회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전도사가 연단에 올라섰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선교사이신 사 부인과 의논해 온 일인데, 금년 봄에 관순이를 경성에 있는 이화 학당에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놀라움과 부러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유관순은 너무도 뜻밖의 소식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아, 말로만 듣던 이화 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다니...!' 이화 학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기관으로, 유관순의 사촌 언니인 유예도도 이화 학당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사 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학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아버님께도 내가 잘 말씀드리겠어요." 유관순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날 저녁, 사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유관순의 아버지도 흔쾌히 승낙하였습니다. 마침내 유관순이 경성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동네 어귀까지 나와 유관순을 전송하였습니다. "관순아, 공부 열심히 하거라. 사 부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것뿐이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 몸 건강하셔야 해요." 유관순은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사 부인과 함께 고향을 떠났습니다. 1916년 3월, 유관순의 나이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유관순과 사 부인은 경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유관순은 넋을 잃고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남대문을 비롯하여 가끔씩 오가는 자동차,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 등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탄 인력거가 이화 학당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유관순은 사 부인과 함께 교장실로 안내되었습니다. 교장은 '프레이'라고 하는 미국 여자였습니다. "우리 이화 학당에 온 것을 축하합니다, 관순 양. 처음에는 조금 낯설겠지만 곧 익숙해질 거예요. 학교 규칙을 잘 지키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학생이 되도록 해요." "잘 알겠습니다." 이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이어 들어온 사람은 유관순의 사촌 언니 예도였습니다. 두 사람은 반가움에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예도는 유관순에게 학교를 구경시켜 준 뒤 함께 기숙사로 갔습니다. 예도가 안내한 방에서는 대여섯 명의 여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도가 여학생들에게 유관순을 소개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된 유관순이야. 처음이라 모든 것이 서툴 테니 너희들이 잘 가르쳐 주도록 해." 학생들은 유관순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곧 식사 시간이 되어 유관순은 예도를 따라 식당으로 갔습니다. 큰 식탁이 줄지어 있는 넓은 방에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상급생이 일어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서 모두 함께 식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유관순도 예도 옆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는 모두 기숙사로 돌아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한참 뒤에 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공부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일제히 불을 끄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유관순은 이화 학당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마감했습니다. 1916년 4월 1일, 개학식을 마친 유관순은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보통과 3학년에 입학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관순은 차차 학교 생활에 익숙해졌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명학, 국현숙, 김분옥, 김희자, 유점선 등과는 항상 함께 어울려 다녔습니다. 유관순은 남보다 열심히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교실의 청소나 궂은일도 자진해서 하였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학생이나 상급생들의 빨래를 도맡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유관순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얘, 일 좀 그만 해라. 일 많이 하면 누가 상이라도 줄까 봐 그러니?" "글쎄 말이야. 학교에 공부하러 왔지, 일하러 왔니? 잘난 척 좀 하지 마라." 어떤 학생들은 이렇게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잠자코 자기 할 일만 하였습니다. 유관순은 인정이 많고 신앙심도 깊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도 유관순은 식당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벌써 며칠째 저녁 식사 때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서명학이 유관순을 찾아 학교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 유관순은 기도실에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몸을 일으키던 유관순은 곁에 서 있는 서명학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유관순의 말에 서명학이 되물었습니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너 왜 요즘 저녁 식사를 하지 않니?" "응... 소화가 잘 안 돼서..." "거짓말하지 마. 한 끼만 굶어도 허기져 하는 애가...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서명학이 이렇게 따져 묻자 유관순은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사실은 우리 반 아이 중에 밥값을 못 내는 아이가 있어서 내 저녁을 그 아이에게 주기로 했어." 서명학은 이 말을 듣자 유관순의 손을 붙잡으며 울먹였습니다. "관순아, 난 그런 아이가 있는 줄 미처 몰랐어." 서명학은 그 학생을 돕기 위해 곧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호응으로 쉽게 돈이 마련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프레이 교장에게까지 알려져 유관순은 모범 학생으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러 유관순은 보통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등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고등과에 입학한 유관순은 학교 공부 외에도 틈나는 대로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넓혀 갔습니다. 이 무렵 유관순은'잔 다르크'의 전기를 읽고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잔 다르크처럼 조국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리라.' 그 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고 난 유관순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하였습니다. 1919년 1월, 덕수궁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던 고종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소식이 나라 안에 알려지자 백성들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신문에는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되었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고종 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일본놈들이 고종 황제를 죽였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일본놈들이 차에 독약을 타서 황제께 드렸다는군." "저런 죽일 놈들이 있나!" 백성들은 한결같이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인지 서둘러 고종의 장례식을 3월 3일로 결정하여 발표했습니다. 또한 1주일 동안 백성들이 덕수궁 앞에서 망곡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분노와 슬픔에 찬 백성들은 덕수궁 앞에 몰려와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백성들의 통곡 소리는 이화 학당에까지 들려왔습니다. 통곡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학생들도 함께 목놓아 울었습니다.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하루빨리 이 땅에서 일본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아야 해. 그것만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고종 황제의 원한을 푸는 길이야." 이것은 비단 유관순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나라 안팎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우리 나라가 자주 독립국이라는 것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중심으로 각계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나서서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경성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인들과 민족 대표들은 고종의 장례식을 기회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최남선이 쓴 독립 선언서를 '보성사'라는 인쇄소에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여 2만여 장을 찍어 냈습니다. 그리하여 인쇄된 독립 선언서를 연희 전문 학교, 보성 전문 학교 등에 다니는 학생들이 비밀리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 투사들은 독립 선언서를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도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히는 통고문을 일본 정부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 정책에 대한 온 국민의 반발심이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마침내 거사일이 결정되었습니다.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인 3월 1일로 날짜를 정하고 지방에도 연락하여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서기로 하였습니다. 그 무렵, 이화 학당의 기숙사 방에서는 유관순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얘들아, 3월 1일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알리는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했대." "그게 정말이야?" 다른 친구들도 긴장하며 유관순을 바라보았습니다. "3월 1일 정오에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대. 지방에서도 다 같이 일어나기로 했다는 거야." 유관순이 이렇게 설명하자 서명학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그러자 김희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도 결사대를 조직하자. 우리 여섯 명이 결사대를 조직해서 어른들의 일을 돕자! 우리가 굳게 뭉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니?" "그래, 죽음을 각오하면 두려울 게 없어." 유관순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선 태극기를 만들어 몸에 지니도록 하자. 그리고 3월 1일이 되면 목숨을 걸고 독립 만세를 부르는 거야." 유관순이 말을 마치자 소녀들의 얼굴은 굳은 결의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은 채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여, 저희들은 이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 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저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부디 그 일이 아무 탈 없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친 그들은 종이에다 각자 자기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꾹 찍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모아서 천을 사들여 태극기를 그린 후 각자의 품 속에 간직했습니다. 그날 밤, 6명의 소녀들은 자신들이 독립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품 속에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어 만져 보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이제야 나라를 위해서 내 몸을 바칠 때가 왔구나! 주여, 저에게 잔 다르크와 같은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유관순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며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유관순의 눈앞에 부모 형제들의 모습이 번갈아 어른거렸습니다. 그 순간 못 견디도록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한동안 고향 생각에 젖어 있던 유관순은 문득 아버지가 일본인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제때 갚지 못해 몰매를 맞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유관순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분노가 울컥 치밀어올랐습니다. '이게 모두 나라를 빼앗긴 탓이야. 하루빨리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유관순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탑골 공원에는 아침부터 젊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정오쯤에는 인파가 4, 5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공원 앞을 서성거리며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공원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군중 속에서 한 젊은이가 뛰쳐나와 공원 중앙에 있는 팔각정 위로 올라섰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는 경신 학교를 졸업한 정재용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정재용은 군중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한 다음 품 속에서 독립 선언서를 꺼내어 큰 소리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독립 선언문!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과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것을 선언하노라...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떳떳하고 올바르게 하라." 정재용이 독립 선언서를 읽는 동안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습니다. 이윽고 독립 선언서 낭독을 끝마친 정재용이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힘껏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그러자 군중들도 제각기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일제히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탑골 공원은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뒤덮였습니다. 그 무렵,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 태화관에서는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불교 대표 한용운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다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총독부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대한 제국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대한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축하 잔치를 열고 있다.' 이 소식에 총독부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영문을 몰라 당황해하고 있던 총독부 관리들의 귀에 어렴풋이 만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탑골 공원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거리의 군중들도 이들과 합세하여, 만세 행렬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 시각, 이화 학당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거리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거리에서 우렁찬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유관순은 두 팔을 높이 쳐들고, "대한 독립 만세! 우리도 나가 만세 행렬에 참가하자!" 라고 외치며 교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이 교문 앞에 이르렀을 때 언제 나왔는지 프레이 교장이 두 팔을 벌리고 서서 학생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참으시오, 학생들! 지금 거리로 나가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프레이 교장은 애원하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학생들을 이끌고 학교 건물 뒤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자." 유관순의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차례로 담을 넘어 거리로 나갔습니다. 거리는 온통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고 만세 소리가 잇달아 터져 나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더욱 늘어갔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하였습니다. 유관순과 학생들도 곧 그 행렬에 휩쓸렸습니다. 질서정연하게 나아가던 만세 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자 미국 영사관, 창덕궁, 총독부 등지로 흩어져 행진을 계속하였습니다. "탕! 탕!"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그들 앞을 막아서며 마구 총을 쏘아 댔습니다.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무참하게 쓰러져 갔습니다. 일본 헌병들이 여기저기 비집고 다니며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러 댔지만 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신념 하나로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쳐 댔습니다. 시내 곳곳에서 일본 헌병들과 만세 군중이 부딪쳐 거리는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함성 소리와 총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과 친구들은 일본 헌병에게 쫓겨, 길가에 있는 어느 집으로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집주인은 친절하게 그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밤이 이슥할 무렵, 유관순과 친구들은 숨어 있던 집에서 나와 몰래 학교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어서들 오너라. 어디 다친 데는 없니?" 프레이 교장이 초조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날 밤에 돌아왔으나 상급생 중에는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간 학생도 몇 명 있었습니다. 프레이 교장은 학생들을 강당에 모두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사히 돌아와서 무척 기쁩니다. 그러나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픕니다. 우리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일제히 꿇어앉아 붙잡혀 간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날 밤, 학생들은 모두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이튿날도 시내에서는 만세 운동이 계속되었습니다. 각 지방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달아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갔습니다. 3월 4일, 경성 시내에 있는 학교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습니다. "지금 전국으로 만세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경성에 있는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힘을 합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3월 5일 아침 8시 30분까지 남대문 광장으로 모두 모입시다. 각자 태극기를 가지고 나오세요." 1919년 3월 5일 아침, 남대문 광장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시내 각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로 광장이 가득 찼습니다. 유관순과 친구들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만세를 외치면서 대한문 앞과 종로 등지로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 의해 대열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유관순과 친구들도 일본 헌병에게 쫓겨 서로 흩어졌다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어떡하지? 일본 형사들이 벌써 학교 정문을 단단히 지키고 있대." "그래? 그럼 어떻게 기숙사로 돌아가지?" 유관순과 친구들은 궁리 끝에 교회에 예배보러 가는 것처럼 꾸며 교회를 통해 기숙사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몇 명은 양반집 아가씨처럼 꾸며 성경과 찬송가를 손에 들고, 나머지는 하녀처럼 변장하여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유관순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총을 마구 쏘아 대던 일본 헌병들과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동포들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습니다. 유관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부디 일본놈들에게 끌려간 저희 불쌍한 백성들과 학생들에게 용기와 축복을 내려 주소서. 한 사람도 다치지 않도록 돌봐 주소서." 유관순은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야 겨우 잠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본 형사들이 이화 학당으로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체포하였던 여학생 중에 이화 학당의 학생이 있음이 밝혀지자, '이화 학당 안에 시위에 가담한 학생이 더 있을 것이다.' 라고 판단하여 나머지 학생들을 잡으러 나선 것입니다. 일본 형사들이 이화 학당 기숙사에 다다랐을 때, 유관순은 교회로 가기 위해 기숙사 문을 막 나서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형사들을 못 본 체하고 지나쳤습니다. "학생!" 바로 그 때 뒤쪽에서 한 형사가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학생은 귀가 먹었나?" 형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그제서야 유관순은 천천히 돌아서며 침착하게 말하였습니다. "저를 부르셨나요?" "그럼, 이 곳에 학생 말고 누가 또 있기라도 한가?" 형사는 험악한 표정으로 잠시 유관순을 노려보더니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어딜 가는 거지?" "교회에 가요." "교회? 너희들 예배를 본답시고 또 만세를 부르기 위해 모이려는 거지?" "아니, 교회에서 어떻게 만세를 불러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에서." "흥, 만약 눈치가 수상하면 모두 체포해 갈 테다." "마음대로 하세요." 유관순은 이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습니다. '제발 더 이상 학생들이 붙들려 가지 않도록 해 주소서.' 유관순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며 교회로 향했습니다. 일본 형사들은 유관순이 교회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학교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이 이슥할 무렵에야 그 곳을 떠났습니다. 이튿날, 총독부에서는 학생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막아 보자는 술책으로 모든 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휴교령으로 인해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날 밤, 유관순을 비롯한 비밀 결사대는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한 곳에 모였습니다. "나쁜 놈들! 우리를 흩어지게 하려는 못된 수작이야." "하지만 실망할 건 없어.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독립 운동을 할 기회는 있을 거야. 꼭 경성에 있어야만 만세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관순의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유관순은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는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오빠 관옥이 와 있었습니다. 관옥도 마찬가지로 휴교령이 내려져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마을이 너무나 조용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 이 곳에서는 만세 운동을 벌이지 않았나요?" 유관순이 묻자 아버지가 힘없이 대답하였습니다. "말도 마라. 운동을 준비하던 중에 일이 발각되어 사람들이 죄다 잡혀가고 말았단다. 그 후로 일본 경찰의 감시가 더 심해져서 꼼짝할 수가 없단다." 그제야 유관순은 고향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식구들에게 경성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유관순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앞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유관순은 아침 일찍 예도를 찾아갔습니다. "언니,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서 소리 높여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우리 고장만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어요? 우리가 앞장서서 만세 운동을 벌이는 게 어때요?" 유관순의 말에 예도도 찬성하였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것은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기로 결정한 후 두 사람은 곧 유관순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유관순은 아버지에게 마을 어른들을 교회로 모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몇 시간 후 마을 어른들이 교회에 모이자 예도는 경성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이어서 유관순이 열띤 목소리로 연설하였습니다. "경성은 물론이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 고장만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어서 일어나 독립 만세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유관순의 말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곧바로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유관순과 예도가 이웃 마을을 다니며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예도가 병이 나는 바람에 유관순 혼자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유관순은 이웃 마을을 찾아다니며 독립 만세를 부르는 일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유관순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장 보러 가는 차림을 하고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우선 청주부터 돌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청주로 가는 길은 무척 험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그런 험한 길을 걸어 보는 유관순은 얼마 못 가 발목이 시큰거리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으나 꾹 참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유관순의 열성에 감복하여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유관순은 두릉동이라는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두릉동 마을에는 험하기로 소문난 드무실 고개가 있었습니다. 유관순의 다음 목적지는 그 고개 너머에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이미 짚신의 바닥이 다 닳아 버려 발바닥이 몹시 아팠지만 그날 밤 안으로 고개를 넘기로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릉동 사람들은 펄쩍 뛰며 유관순을 말렸습니다. "아니, 이 아가씨가 큰일날 소리를 하는군. 저 고개에는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낮에도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넘어야 되는 고개야.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내일 떠나도록 해요." 그러나 유관순은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바삐 연락을 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만세 운동에 참가시켜야 한다.' 유관순은 발길을 재촉하여 그날 저녁에 드무실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고갯길에 사람이라고는 유관순 혼자뿐이었습니다. 유관순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용기를 내어 고갯길을 올라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온 산이 떠나갈 듯한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유관순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앗!" 유관순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유관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황소만한 호랑이였습니다. 호랑이는 좁은 고갯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관순을 노려보았습니다. 유관순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으나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호랑이를 마주 쏘아보았습니다. 그러자 호랑이는 그 기세에 눌렸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유관순은 마음속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친 유관순은 여전히 호랑이를 쏘아보며 호소하듯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미련한 짐승이라지만 너도 조선의 짐승이 아니냐? 제발 나를 해치지 말고 길을 비켜 다오!" 그러나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도 줄곧 호랑이를 노려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노려보자 호랑이는 슬슬 뒷걸음질 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유관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나서 다시 길을 재촉하여 무사히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개 아래에 있는 '무들'이라는 동네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유관순이 고개 위에서 호랑이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한밤중에 그 험한 고개를 혼자 넘어오다니 정말 대단한 아가씨구먼!" "게다가 호랑이가 나타났는데도 전혀 겁내지 않다니." "아무래도 아가씨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구려." 마을 사람들은 유관순의 용기에 감탄하여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선선히 승낙하였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하루 종일 꼼짝도 못 하고 앓아 누웠습니다.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고 부르튼 발은 쉽게 나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유관순은 다시 연기 쪽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제대로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들었으나 유관순은 이를 악물고 걸었습니다. 이 날 유관순은 속샛말, 발이미, 한신, 상노정 등의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뿐만 아니라 목이 아파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향한 유관순의 열정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습니다. 연기 땅을 두루 돌아다닌 유관순은 이번에는 진천의 여러 마을을 찾아다녔는데, 그녀가 찾아다닌 마을은 보평, 화산, 삽다리, 벌터 등 9개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유관순은 그 곳에서도 마을의 대표자들을 만나 만세 운동을 일으키도록 설득한 다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이 되면 음력 2월 25일까지 대표 한 사람을 지령리로 보내 주세요. 그리고 음력 2월 그믐날 밤에 지령산 매봉에서 봉화를 올릴 테니 여기에서도 응답하는 봉화를 올려 주세요." 이처럼 유관순이 열심히 뛰어다닌 결과 여러 마을의 대표들은 흔쾌히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드디어 음력 2월 그믐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은 매봉에서 각 마을에 신호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서둘러 모든 준비를 끝내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유관순에게는 그 날따라 하루 해가 무척 길게 느껴졌습니다. 이윽고 해가 저물면서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유관순은 하인 이 서방을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동생 관복도 뒤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매봉을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산꼭대기에 이르자 유관순은 심호흡을 한 다음 어둠에 묻힌 산봉우리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단정히 꿇어앉아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여, 저희들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이끌어 주시고, 오늘 밤 제가 밝힐 횃불이 우리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애국의 불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친 유관순은 엄숙한 표정으로 성냥불을 그어 이 서방이 들고 있는 홰끝에 갖다 댔습니다. 홰에 불이 붙자 유관순은 그 횃불을 오른손에 들고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둠에 묻혀 있던 봉우리마다 하나 둘 횃불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유관순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녀의 발길이 닿았던 마을마다 모두 봉화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매봉을 중심으로 하여 타오르는 24개의 횃불, 그것은 민족의 장래를 밝히려는 횃불이었습니다. 한편,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봉화가 올라 하늘을 붉게 물들이자 일본 경찰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저게 웬 불이지?" "글쎄, 마을 사람들이 불놀이를 하는 게 아닐까?" 그들은 산 위의 횃불을 바라보며 수군거렸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무슨 신호가 아닐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나 모두들 웃어 버렸습니다. "신호는 무슨 신호!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하는군." "산에서 제사라도 지내는 모양이지 뭐." "아무려면 어때! 신경 쓸 것 없잖아." 모두 이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자 이상하게 여기던 경찰도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아우내에 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아우내 장터에는 아침부터 사방에서 장사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유관순과 동지들은 장터로 가는 길목에 서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받아 재빨리 옷 속에 감추고 태연하게 장터로 들어갔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장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습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흥정하는 체하면서 정오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따금 옷 속에 감춘 태극기를 가만히 만져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유관순은 장터 한가운데에 쌓여 있는 쌀가마니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는 반만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독립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강제로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옳소!"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지금 세계의 약소 민족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주와 독립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지난 3월 1일에 경성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 지방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백성들인데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소리 높여 힘차게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말을 마친 유관순은 품 속에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조인원, 유도기 두 사람이 커다란 태극기를 높이 쳐들며, "대한 독립 만세!"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군중들도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아우내 장터는 순식간에 수많은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군중들은 목청껏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행렬의 맨 앞에는 조인원과 유도기,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앞장섰습니다. 만세 행렬은 아우내 일본 주재소를 향하여 행진해 나아갔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장터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으나, 설마 만세 운동 때문에 모인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본 헌병들은 칼과 총을 들고 만세 대열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욱더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닥치는 대로 총칼을 휘둘렀습니다. 이 때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던 김상헌이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성난 사람들은 피가 흐르는 김상헌의 시체를 둘러메고 주재소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유관순이 사람들을 가로막으며 만류했지만 흥분한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재소로 들어가 책상, 유리창 등을 닥치는 대로 부수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 멀리서 자동차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천안에 있는 헌병대 본부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군중을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총을 쏘아 댔습니다. 맨 앞에 서서 시위 군중을 이끌던 청구 학교 교장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70세가 넘은 김구응의 어머니가 쓰러진 아들을 부둥켜안으며, "이 나쁜 놈들! 나라를 되찾으려 하는 것도 죄가 된단 말이냐!" 하고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본 헌병이 김구응의 어머니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총에 맞은 김구응의 어머니도 아들의 시체 위에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유관순의 아버지와 조인원이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에게 대항하였지만 일본 헌병들이 휘둘러 대는 총칼에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백성들을 이렇게 죽이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바로 눈앞에서 남편이 쓰러지는 것을 본 유관순의 어머니가 일본 헌병에게 달려들었으나 어머니 역시 그들의 총에 맞아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유관순이 달려가 부모님을 끌어안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는 간신히 눈을 뜨고 딸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원통하구나..." 아버지 유중권은 이 한 마디를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관순아, 이 원수를 꼭 갚아 다오!" 어머니도 이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유관순은 부모님의 시체 위에 엎드려 통곡하였습니다. 헌병들이 계속 총을 쏘아 댔으나 그녀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유관순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는 죄로 주재소에 갇혀 있다가 나온 관옥의 친구 이종성이었습니다. "관순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어서 피해야 해." "부모님 시신을 이대로 두고 나만 피할 수는 없어요." 유관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부모님의 유해는 내가 모시고 갈 테니 걱정 말고 어서 이 자리를 피해." 유관순은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달음박질쳤습니다. 길거리에는 피로 물든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동생들이 몹시 걱정되었습니다. '관복이와 관석이가 무사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유관순이 집 근처에 왔을 때였습니다. "누나!" 갑자기 뒤에서 관복과 관석이 달려오며 누나를 애타게 불렀습니다. 유관순은 동생들을 보자마자 너무 기쁜 나머지 와락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러자 참고 있었던 슬픔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유관순을 보고 관석이가 물었습니다. "왜 누나 혼자만 오는 거야? 아버지랑 어머니는?" 유관순은 흐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흑흑,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단다." "누나, 그게 무슨 말이야?" "거짓말이지?" 관복과 관석은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그들의 등 뒤에서, "꼼짝 마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 헌병들이 유관순의 집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달려오자마자 유관순의 머리를 사정없이 잡아챘습니다. "누나!" 겁에 질린 관복과 관석이 울며 매달렸으나 일본 헌병들은 무지막지하게 두 아이를 밀쳐 냈습니다. "이놈들, 썩 비키지 못해!" 헌병들은 울부짖는 형제들을 남겨 둔 채 유관순을 끌고 갔습니다. 유관순은 아우내 주재소로 끌려갔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잡혀 와 있었습니다. 고야마 헌병 소장은 유관순을 보자마자 험상궂게 물었습니다. "이번 만세 사건의 주모자가 누구냐?" "나다. 이번 일은 모두 내가 계획한 것이다." "거짓말하지 마! 너 같은 어린것이 이런 일을 주동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고야마가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으나 유관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되찾는 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주동이 되어 한 것이니 저 죄 없는 사람들은 모두 풀어 주어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고야마는 개머리판으로 유관순의 머리를 내리치게 하였습니다. 유관순이 코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지자 고야마는 구둣발로 유관순을 사정없이 짓밟았습니다. 유관순은 심한 매질을 견디다 못해 그만 기절해 버렸습니다. 며칠 후, 유관순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천안 헌병대로 넘겨졌습니다. 천안에서도 유관순은 심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뒤에서 일을 꾸민 사람의 이름을 대라니까!" 일본 헌병이 다그쳤으나 유관순은 모든 일을 자기 혼자서 한 것이라고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도대체 몇 번씩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나만 살겠다고 없는 사실을 꾸며서 말하란 말이냐?" 이 말을 들은 일본 헌병은 유관순을 묶어 놓고 매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옷이 갈가리 찢기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녀는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일본 헌병은 매질을 멈추고 또다시 물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이 일을 꾸민 자가 누구냐?" 그러나 유관순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뒤에서 지시한 사람은 없다. 내가 주동해서 한 일이다." "지독한 계집애로구나." 일본 헌병은 더 이상 신문하기를 단념하고 유관순을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며칠 후, 유관순은 공주 검사국으로 넘겨졌습니다. 천안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도 유관순은 계속 만세를 불렀습니다. 공주에 도착한 유관순은 그 곳 감옥에 갇힌 채 재판날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재판을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재판소로 가기 위하여 감옥을 나서던 유관순은 감옥으로 들어오는 한 젊은이와 마주쳤습니다. 무심코 청년의 얼굴을 쳐다본 유관순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청년은 바로 오빠 유관옥이었습니다. "오빠!" 유관순이 부르는 소리에 유관옥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관순아!" 유관옥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누이동생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얼굴은 퉁퉁 붓고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전혀 딴사람 같았습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있던 날, 유관옥도 동지들과 함께 공주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관순아, 부모님과 동생들은 모두 별일 없지?" 유관옥이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지만 유관순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없이 눈물만 글썽이고 있는 유관순을 보자 유관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부모님은 만세 운동이 있던 날 일본놈들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뭐라고? 그럼 관복이와 관석이는?" "모르겠어요." 유관순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부모 형제를 잃고 헤매고 있을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니 못견디게 가슴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러나 간수들이 재촉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관순은 공주 재판소에서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것은 유관순과 같이 나이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유관순에게 경성 복심 법원에 항소할 것을 권하였지만 유관순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감옥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관순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감옥과 재판소를 오가는 도중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지나가게 되면 언제나 큰 소리로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 때마다 모진 매를 맞은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주위 사람들이 거듭 항소하기를 권하자 유관순은 마지못해 결심을 바꾸어 경성 재판소에 항소하였습니다. 드디어 경성으로 올라온 유관순이 재판을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간수의 안내를 받아 법정으로 들어섰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인해 그녀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지만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장은 엄숙한 목소리로 유관순에게 말하였습니다. "피고는 당연히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소녀라는 점을 참작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리기로 하였다. 피고는 앞으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착한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이 말에 유관순은 벌컥 화를 냈습니다. "반성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 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된단 말이냐? 반성은 강제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너희들이 해야 할 것이다." 유관순의 거침없는 말에 재판장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습니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재판장은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는 천황 폐하의 명을 받들어 죄인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나를 모욕하는 것은 곧 천황 폐하를 모욕하는 일이다. 그런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유관순은 태연하게 계속 말하였습니다. "일본 천황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천황은 너희에게나 천황이지 우리의 천황은 아니다." "무엇이 어째! 감히 어디서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네까짓 것이 날뛴다고 독립이 될 것 같아?" 흥분한 재판장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유관순은 앞에 있는 의자를 번쩍 들어 재판장에게 던졌습니다.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재판은 중단되고 유관순은 간수들에게 붙잡혀 밖으로 끌려나갔습니다. 이 일로 유관순은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처음 언도 받은 3년에다가 법정에서 소란을 피운 죄로 4년이 더해진 것입니다.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형무소 안에서도 유관순은 기회만 있으면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럴 때마다 심한 매를 맞아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으나, 이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유관순은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혹독한 고문으로 유관순의 건강은 몹시 나빠져 옛날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같은 감방에 있는 죄수 중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기저귀가 모자라 항상 아기에게 축축한 기저귀를 그대로 채워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유관순은 젖은 기저귀를 자기 허리에 감아 말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번번이 식사를 그 여자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굶었습니다. 이처럼 유관순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날이 갈수록 건강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만 조국의 앞날과 고아가 된 두 동생이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관순은 면회 온 친구를 통해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두 동생이 공주에서 어떤 여학생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유관순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한 가지 소망은 조국이 독립되는 것이었습니다. 독방에 갇힌 유관순은 기운이 있을 때에는 매번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다른 방에 갇혀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럴 때마다 간수들은 그녀를 끌고 가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동생의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의 독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때는 1920년 10월 12일, 그녀의 나이 불과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유관순은 비록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녀가 남긴 독립을 향한 의지는 불꽃처럼 타올라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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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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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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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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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여문 알밤 하나. 오늘은 5일에 한 번 장이 서는 날입니다. 여느 장날과는 달리 마을의 장터는 태극기를 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 틈에는 몇 명의 소년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른들과 함께 외치자! 대한 독립 만세!" 소년들도 어른들을 따라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총소리가 들리더니 앞에 나서서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식간에 시장 안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와 총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소년들은 겁에 질려 사람들 틈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겨우 시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되찾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일본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것일까요?" "그건 우리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란다. 나라가 튼튼해야 저놈들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텐데......" 아버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봉길아,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가 있단다. 알겠니?" 총기 있는 두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는 이 소년이 바로, 훗날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윤봉길 의사입니다. 윤봉길은 1908년 5월 23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날, 유난히 우렁찬 울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습니다. "웬 아기의 울음소리가 저렇게 크지?" "울음소리로 보아하니 장군감이 틀림없어."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소리로 이웃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윤봉길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부모님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윤봉길이 태어나기 전 어느 날, 어머니 김씨는 바느질을 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습니다. 꿈 속에서 김씨 부인은 밤이 주렁주렁 열린 밤나무 사이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에서 밤송이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치마폭을 얼른 펼쳐 받아보니 밤송이는 아주 크고 새파랬습니다. 그런데 그 새파란 밤송이가 쩍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탐스럽게 잘 익은 알밤 하나가 나왔습니다. 김씨 부인은 아직 새파란 밤송이에서 이렇게 알이 찬 알밤이 나온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기 위해 집으로 달려가다가 꿈에서 깨었습니다. "여보, 참 신기한 꿈을 꾸었어요." "무슨 꿈인데 그러오? 어서 말해 보구려." 김씨는 조금 전에 꾼 꿈을 남편에게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혹시 태몽이 아니오? 새파란 밤송이 속에서 잘 익은 알밤이 나왔다니 아주 좋은 꿈 같소."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 부인은 우렁찬 울음소리의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윤봉길입니다. 일본인 학교를 그만두다. 소년 봉길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어느 새 열한 살이 된 봉길은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보통학교는 요즘의 초등학교에 해당합니다. 그 무렵 우리 나라는 일제의 통치를 받고 있어서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봉길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일본인 교사가 옆구리에 칼을 차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늘 기가 죽어 눈치만 보는 조선인 교사들에 비해 그들은 매사에 당당했습니다. 소년 봉길이 장터에 갔던 그 날, 학교는 보통 때와 달리 서둘러 수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인 교장이 나와, 학생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친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장터를 기웃거리는 학생은 단단히 벌을 받을 줄 알아라."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본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어요? 전 일본 사람들을 닮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봉길아, 배우지 않으면 힘을 키울 수가 없단다. 일본을 이기려면 열심히 배워서 힘을 길러야 한단 말이다." "아버지, 일본 사람들한테 배우긴 정말 싫어요.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서당에 나가 열심히 공부할게요. 약속할게요, 아버지." 아버지는 아직 어리지만 진실이 담긴 봉길의 말을 듣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봉길은 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봉길은 매일같이 동생 성의의 손을 이끌고 서당에 나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봉길은 곧 한문 공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한문 공부가 재미있다고 해서 그것만 공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산 장터에 나가 잡지나 신문을 구해 읽는 등 지식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서당에 나가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봉길이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한지 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키가 자라고 몸집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몸가짐도 제법 의젓해졌습니다. 훈장 선생님은 봉길의 한문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된 것을 눈여겨보고, 다른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서 공부할 것을 권했습니다. 봉길은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김씨 부인의 머릿속에 문득 봉길의 태몽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훈장님도 봉길이의 영특함을 남다르게 보신 거야. 훈장님의 말씀대로 하루빨리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해. 자식이 큰 뜻을 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니까......" 봉길의 어머니는 농부의 아내였지만, 한문과 국문을 두루 알고 있었으며,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습니다. 나이에 비해 총명한데다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성미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오치숙' 이라는 이름의 서당이 생겼습니다. 오치숙의 훈장은 매곡이란 호를 가진, 뜻이 곧고 학문이 깊기로 소문난 한학자 성주록이었습니다. 김씨 부인은 이 곳에 아들을 맡겨야겠다 생각하고, 봉길의 손을 이끌어 오치숙으로 갔습니다. "훈장님,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잘 가르쳐 주십시오." "이 아이가 바로 영특하기로 수문난 봉길이군요. 너무 염려마십시오. 눈빛을 보니 총기가 넘치는걸요." 그 날부터 소년 봉길은 날마다 오치숙에 나가 매곡 훈장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봉길은 때로는 밥을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봉길은 그 어렵다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들을 익혀 나갔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봉길은 성현들의 올곧은 정신과 휼륭한 사상에 감동하였고, 그 가르침들을 가슴속 깊이 새겼습니다. 봉길은 특히 충정공 민영환과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을 존경하였습니다. 충정공 민영환은 조선 시대에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고, 성삼문은 단종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두 사람 다 지조가 있고 뜻이 곧은 신하였습니다. 매곡 훈장님은 봉길의 학문이 나날이 깊어 가는 것을 보고 매우 흐뭇하게 여겼습니다. '과연 영특한 아이로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니 장차 큰일을 해내고도 남겠어." 오치숙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외우는 시험을 보았고, 봄과 가을에는 고장의 선비들이 누구나 참여해 실력을 겨룰 수 있는 '한시 짓기 대회' 를 열었습니다. '한시 짓기 대회' 가 열리던 어느 날입니다. 글깨나 읽은 선비들이 제각기 실력을 뽐내기 위해 오치숙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봉길과 함께 오치숙에서 글을 배우는 선비들은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한 표정이었습니다. 대회 때마다 오치숙에서 제일 나이 어린 봉길이 일등을 차지해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거야 원, 번번이 봉길이에게 일등을 빼앗기고 마니......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일등을 하고 말겠어!" "이번에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야 할 텐데......"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선비들은 저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봉길도 그동안 닦은 실력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드디더 시험 시간이 다 되어 선비들은 훈장님에게 자신이 지은 글을 낸 다음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대회 결과를 알기 위해 선비들은 오치숙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상대로 결과는 봉길이가 일등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윤봉길이 일등이군. 참으로 대단한 친구야." "봉길이가 오치숙에 다니는 한, 다른 사람들은 일등 한 번 못해 보게 생겼네그려." "축하하네, 봉길이." 봉길은 이렇게 친구들의 기대와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갈고닦은 봉길의 학문은 이미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봉길은 이렇게 공부를 하는 중에도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못 배운 것이 한. 어느 새 봉길은 열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어엿한 청년이 된 아들을 보며 어서 짝을 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봉길의 어머니가 친정집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신리 마을을 지나가던 어머니는 유난히 참하고 고운 처녀를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는 처녀의 집을 알아 내어 청혼을 했고, 그 얌전한 처녀 배용순은 윤봉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윤봉길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내는 가끔 이런 남편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건강이라도 해치면 어쩌시려고요? 좀 쉬어 가며 하세요." 하지만 윤봉길은 그런 아내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시라도 빨리 이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해."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매곡 훈장님이 윤봉길을 불러 말했습니다. "이제 너와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너의 학문이 나를 능가하니, 이제 그만 다른 스승을 찾도록 해라." 윤봉길은 스승님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매곡 훈장님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5년때 되던 해였습니다. 윤봉길이 마땅한 스승을 찾지 못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윤봉길은 가끔씩 들르곤 하는 장군봉에 올라갔습니다. 마을 뒤편에 우뚝 서 있는 장군봉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건장한 장수의 모습을 한 이 장군봉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장군봉에는 우국지사의 혼이 잠들어 있는데, 언젠가는 저 장군봉 아래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큰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전설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으며 윤봉길 또한 그러했습니다. 윤봉길이 장군봉 아래 앉아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무로 된 푯말을 한 아름 안은 청년 하나가 윤봉길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혹시 글을 읽을 줄 아십니까?" "네, 그렇소만." "제가 글을 읽을 줄 몰라서 그러니 이 푯말 중에 저희 아버지 푯말이 어떤 것인지 좀 알려 주십시오." 청년은 말을 마친 뒤 땅바닥에 푯말을 와르르 쏟아 놓았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것들은 모두 공동 묘지의 푯말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윤봉길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여보시오. 도대체 어쩌려고 이걸 이렇게 많이 뽑아 오셨소?" "예, 사실 저는 어릴 적에 저 건넛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왜놈들 손에 억울하게 돌아가시자, 우리는 급한 김에 저 뒷산에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마을을 떠났지요. 이제서야 좀 살 만해져서 아버지의 산소를 돌보려고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렇게 그 근처에 있는 무덤의 푯말을 몽땅 뽑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푯말들이 다 어디에 꽂혀 있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소? 푯말을 뽑은 자리에 표시는 해 두었겠지요?" "네? 푯말을 뽑은 자리요?" 순간, 청년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급하게 푯말을 뽑아 오느라 그 자리에다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윤봉길은 아버지의 산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청년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아...... 못 배운 것이 청년에게 그만 크나큰 한을 만들었구나......' 이 일은 윤봉길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습니다. 야학을 세우고. 그 청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글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을 내린 봉길은 가까운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윤봉길은 친구에게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여보게, 무엇보다도 급한 건 농촌 사람들이 글을 깨우치는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길은 영영 없는 걸세. 우리가 이 일에 발벗고 나서야겠네." 사촌형 윤순의를 비롯하여 같은 뜻을 지닌 몇 명의 친구들은 이리저리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려면 먼저 장소가 있어야 했고, 공책, 연필, 칠판, 분필 따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과연 부모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할까?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에서 아이들을 선뜻 보내 주지는 않을걸세." "그렇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거야." 이들은 밤이 깊도록 머리를 맞대고 의돈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래, 낮에는 일하고 밤에 배우도록 하는 거야. 그러면 부모들도 그리 반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야학을 운영하자면 돈이 들 텐데 그 돈은 어디서 마련하지?" "우리들이 조금씩 보태면 될 게 아닌가? 야학의 성과가 널리 알려지면 사람들의 후원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결국 이들은 야학을 차리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가난한 농촌 사정을 생각해서 수업료는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윤봉길과 그의 친구들은 바삐 움직였습니다.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칠판과 공책, 연필, 분필 등을 사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윤봉길의 사랑방에서 야학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일손도 모자라는 판에 일이나 하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시큰둥해하던 부모들도 아이들이 한 자 한 자 글을 깨우쳐 가자 기특해했습니다. 이제 윤봉길의 사랑방에는 밤마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으며, 점점 아이들이 늘어나 방이 비좁을 정도였습니다. 야학에서는 한글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된 노래와 체조도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나 방이 비좁을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 갔고, 윤봉길과 그의 친구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우리말 교과서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좋은 책들을 구해 왔지만, 배움에 굶주린 아이들에게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할 수 없지. 구할 수 없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며칠 동안 고민하던 윤봉길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 날부터 그는 잠을 아껴 가며 틈틈이 우리말로 된 교과서를 만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마을의 발전을 위해 젊은 청년들을 모아 '부흥원' 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잠든 농촌을 일으키다. 윤봉길은 드디어 우리말 교과서를 완성했습니다. 농민독본이라 이름 붙인 이 책은 계몽편과 농민의 앞길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계몽이란 스스로 깨우쳐 올바르게 고치도록 이끌어 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계몽편에는 우리 농민들이 지녀야 할 예절이나 편지 쓰는 법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또 농민의 앞길에서는 자유 정신, 민족 정신, 독립 정신 등을 강조하였습니다. 농민의 앞길에서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과 농민과 노동자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는 똑같이 일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높지도 낮지도 않다. 나는 밭을 갈고, 너는 쇠를 달군다. 우리들 세상이 잘 되도록 쉬지 말고 일을 하자. 앞으로 앞으로, 더더욱 앞으로! 제2과 자유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하늘로부터 받은 저마다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얹히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나에 대한 생각, 민중에 대한 생각.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낳아진다! 제6과 농민과 공동 정신 1 독립 정신이 조선을 살리는 원동력인 것과 같이, 농민의 공동 정신 또한 조선을 살리는 긴요하고 유일한 길이다. 독불장군이란 말도 있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이길 수 없는 일을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힘을 합하면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윤봉길이 지은 농민독본은 마을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 태도는 점점 변해 갔습니다. 윤봉길과 부흥원의 청년들은 보람을 느끼며 더욱 열심히 아이들과 농민들을 가르쳤습니다. 부흥원에 소속되어 있는 청년들은 배움을 넓혀 감에 따라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되었고,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기 위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부흥원은 몇 가지 목표를 정해 놓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이 똘똘 뭉쳐 수확한 농작물을 함께 팔고, 농기구와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공동으로 싸게 구입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일본 물건을 배척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 이는 일본 물건을 사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넷째, 부업을 장려하자. 이것은 농사를 짓는 일 외에 여가 시간을 이용해 가축을 기르거나, 돗자리, 가마니 등을 짜서 수입을 올리자는 운동입니다. 윤봉길과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땀 흘리며 농사일을 했고, 농사일이 한가할 때에는 가마니나 바구니, 돗자리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졸음과 씨름해 가며 한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윤봉길의 사람방만으로는 교실이 모자랐습니다. 윤봉길과 친구들은 생각 끝에 건물을 짓기로 했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목재와 일손도 필요한데......" "어차피 마을 전체를 위한 일이니,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윤봉길과 친구들은 건물을 짓는 일을 추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목재를 살 수 있도록 돈을 기부했으며,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 오는 등 모두 한마음으로 집을 짓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마침내 건물을 짓기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말끔한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건물이 완성되던 날, 윤봉길은 모여든 마을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들 힘을 합친 결과 이렇게 빨리 훌륭한 건물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건물은 부흥원 사무실과 야학당, 구매 조합으로 사용할 것이니,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부흥원 건물이 생기자 윤봉길은 독서회를 조직하여 마을 사람들이 책을 돌려 가며 읽도록 하였고, 자신도 틈틈이 위인전이나 역사책을 읽으며,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뜨겁게 키워나갔습니다. 어느 날, 낯선 청년 한 명이 부흥원으로 찾아왔습니다. "윤봉길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제가 윤봉길입니다만, 누구신지요?" "예, 저는 김태식이라고 하는 기자입니다. 선생님께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고 계시다기에 선생님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은 기자가 아니라 대한 독립 군단의 특무 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그 청년은 함께 독립 운동을 할 동지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었습니다. 대한 독립 군단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 운동 단체였습니다. 그 단체는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 동지로 만들고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독립 자금을 마련해 독립군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고 난 김태식은 윤봉길이 하고 있는 농촌 계몽 운동 또한 독립 운동의 기초가 되는 것이니,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현재 독립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김구 선생이 이끄는 상하이 임시 정부의 활동에 관해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 새 조국을 향한 불타는 마음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월진회와 수암 체육회. 1929년 3월, 윤봉길은 농촌 운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월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월진회 회원들은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한다' 라는 모임의 뜻을 따라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우선 월진회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하나씩 실천해 나갔습니다. 첫째, 부업을 장려하여 농가의 소득을 올린다. 둘째, 나무를 많이 심어 푸른 숲을 지키고, 과실나무를 기른다. 셋째, 학문을 갈고닦으며, 학예회를 자주 열어 회원들의 교양을 높인다. 월진회 회원들은 매달 10전씩 회비를 모아 그 돈으로 모임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월진회 회장이 된 윤봉길은 직접 월진회 노래를 지어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모두 3절로 된 이 노래말에는 월진회를 세운 윤봉길의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화신공 가야산의 정기를 받고, 절승경개 수덕산의 정기를 모아, 금수강산 산천리 무궁화원에 길이길이 빛을 내는 우리 월진회. 가야산은 우리들의 배경이 되고, 온천들은 우리의 무대장이다. 두 팔 걷고 두 발 벗고 출연하여서 어서 바삐 자작자급 실현을 하자. 암흑동천 계명성이 돋아 오나니 약육강식 잔인성을 내다 버리고 상조상애 넉 자를 철안 삼아서 굳세게 단결하자, 우리 월진회. 윤봉길은 월진회 회원들과 함께 힘을 모아 마을에 포플러 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으며, 집집마다 과일나무를 심도록 했습니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똘똘 뭉치니 아무리 고된 일도 척척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시량리 마을은 나날이 활기가 넘쳤습니다. 어느 날, 윤봉길은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을 높이고, 건강한 몸과 정신을 기르자는 뜻에서 '수암 체육회'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동네 사람들도 차츰 그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 주었습니다. 수암 체육회 회원들은 먼저 마음껏 뛸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버려져 있는 500여 평의 땅을 찾아냈습니다. 그 곳은 쓸모 없는 잡목이 우거져 있었는데, 잘만 다듬으면 꽤 넓고 좋은 운동장이 될 것 같았습니다. 밭 주인을 겨우 설득하여 땅을 얻어 낸 회원들은 며칠에 걸쳐 잡목을 뽑아 내고, 불을 질러 땅을 고르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흘이 지난 후에는 제법 그럴싸한 운동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운동장을 바라보는 회원들의 입가에는 한결같이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땅이 이렇게 멋진 운동장으로 변하다니, 힘을 합치면 안 되는 일이 없군." 운동장이 만들어지자 매주 일요일마다 청년들은 운동장에 모여 축구 경기를 벌였습니다. 바지가 흘러내릴까 봐 허리춤을 끈으로 질끈 동여맨 사람, 바지 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둘둘 말아 올린 사람, 머리에 하무렇게나 수건을 두른 사람. 청년들은 그런 자기들의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고,구경하는 마을 사람들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한 윤봉길의 노력은 차츰 결실을 맺어 갔습니다. 한편 윤봉길은 어느 때부턴가 일본 경찰들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가을에 월진회 주최로 열린 학예회에서 토끼와 여우라는 촌극을 했는데, 윤봉길은 토끼와 여우를 각각 약한 조선 사람들과 조선 땅을 짓밟는 일본군에 비유하여 일본의 만행을 비꼬았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일본 경찰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윤봉길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을 윤봉길을 불러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 무렵 나라 안은 일본의 압제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6.10만세 운동을 일으킨 데 이어, 1929년 11월에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본 학생들의 짓궂은 행동에 반발해서 일어난 광주 학생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번져 갔습니다. 남의 땅을 빼앗아 마음대로 짓밟은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드디어 폭발했던 것입니다. 윤봉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당장 친구의 동생인 정종호를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정종호는 예산농업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종호야, 지금 전국에 있는 학생들이 모두 들고일어났어. 더이상 참고 있어서는 안 돼. 일본놈들에게 우리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해야 해. 우리도 이 뜻있는 일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 형.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마침내 정종호가 앞장선 예산농업학교도 만세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종호는 이 일로 인해 2년 6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경찰은 예산농업학교가 시위 운동을 벌이게 된 배경을 조사하던 중 윤봉길과 정종호가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봉길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점점 더 짙어졌습니다. "윤봉길이 아무래도 수상해.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고 잘 살피도록 해." 일본 경찰들은 부흥원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그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윤봉길은 농촌 계몽 운동을 계속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겨우 자리를 잡아 가는 월진회며 수암 체육회가 모두 없어지고 말 것이다. 나라를 위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독립 운동의 뜻을 품고 해외로. 그 무렵 해외에서는 우리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은 나라 안에서 몰래 활동하고 있는 운동원들과 연락을 취해 가며, 목숨을 걸고 독립 운동을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해외로 떠나자! 해외로 나가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거야!' 윤봉길은 마침내 해외로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부모님, 늘 자신을 믿고 따라 주며 고생만 하는 아내, 그리고 이제 막 재롱을 피우기 시작한 세 살배기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또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아 온 친구들과 월진회 회원들이 그의 결심을 자꾸만 흔들리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윤봉길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1930년 3월 6일 새벽, 그는 혼자 일어나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금 떠나면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나이가 한번 뜻을 세운 이상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윤봉길은 촛불을 밝히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나이가 큰 뜻을 품고 길을 떠나니,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이런 편지를 쓴 다음, 고이 접어 읽고 있던 책 속에 끼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새 그의 눈에서 누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윤봉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내가 정성껏 차려 주는 아침 밥상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밥을 먹으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마지막으로 둘째 아이를 가져 배가 볼록하게 나온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오늘따라 식구들 얼굴은 왜 그리 자세히 쳐다보세요? 마치 멀리 떠나려는 사람 같아요." 윤봉길은 순간 가슴이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하며 얼른 말을 돌렸습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오. 내가 그 동안 바깥일에만 매달려 당신과 가족들에게 너무 소홀하게 대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러오." 밥상을 물리고 난 윤봉길은 가족들에게 볼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집을 나섰습니다. 마을이 저만큼 멀어지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량리여, 잘 있거라! 나의 피와 땀이 녹아 있는 부흥원이여, 더욱더 번창하기를!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 부디 건강하기를!' 눈물이 가득 고인 그의 눈에 비친 시량리 마을의 전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겨워 보였습니다. 그 때 윤봉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김구 선생과의 만남. 고향을 떠나 경성에 도착한 윤봉길은 계획대로 사촌동생 신득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신득이라면 그가 하던 일들을 대신 맡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신득에게 뒷일을 부탁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가며 겨우 신득의 집에 도착했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신득이 오지 않자, 그는 발길을 돌려 곧장 역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길은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열차 안을 돌아다니며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조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윤봉길은 일본 경찰들을 피해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고 잠을 자는 체하였습니다. "이 봐,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차표를 좀 보여 줘야겠어." 윤봉길은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표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신의주에 사는 친척집에 다니러 가는 길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당신 친척이란 사람이 사는 동네가 어디인지 말해 봐." "예? 그게 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윤봉길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머뭇거렸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다그쳤습니다. "아니, 어딘지도 모르는 친척집을 어떻게 찾아간다는 거야! 수상한 놈이군. 당장 이놈을 끌어내!" "이게 무슨 짓이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왜 이러는 거요?" 일본 경찰들은 윤봉길을 기차에서 끌어내려 곧장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윤봉길은 몇 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다음 독방에 갇혔습니다. 형사들은 윤봉길이 독립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여,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모진 고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윤봉길은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독한 놈이군! 매질도 소용없고 고문을 해도 끄떡없으니 원......" 형사들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습니다. 결국 지친 그들은 적당히 사건을 마무리지은 후 윤봉길을 풀어 주었습니다. 윤봉길은 경찰서에 붙들려 간 지 45일 만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겨우 풀려났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던 그의 눈에 '정주 여관' 이라는 간판이 보였습니다. 그는 우선 그 곳에서 며칠 머물기로 하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윤봉길은 사촌동생 신득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자신이 하던 일을 잘 부탁한다는 것과 어머니와 아내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후 윤봉길은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곳에서 우연히 독립 운동을 하는 김태식과 한일진, 선우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윤봉길은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가려고 몰래 고향을 떠나 온 사연을 말해 주었습니다. 서로 뜻하는 바가 같음을 알게 된 네 사람은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며 몹시 반가워했습니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조국을 빼앗긴 설움과 독립 운동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과 헤어져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돌아온 윤봉길은 몹시 흥분되어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거야!' 윤봉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결심을 굳히며 어느 새 동지가 된 김태식, 한일진과 함께 만주로 떠났습니다. 넓은 만주 땅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독립 운동 단체를 찾아다니며 그들이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무렵 독립군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의 감시가 한층 심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하루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독립군의 생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군요. 이런 형편으로 일본과 싸운다는 건 무리입니다." 사흘 동안 그 곳의 형편을 두루 살펴본 윤봉길도 몹시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요. 형편없는 무기에다 무장되지 않은 군인들을 데리고 어떻게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잘 훈련된 일본군과 싸울 수가 있단 말이오?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오." 세 사람은 독립 운동의 본거지인 상하이에 가기로 했습니다. 당시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김태식은 그 곳에 남아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한일진은 윤봉길과 함께 칭다오로 향했습니다. 칭다오에는 윤봉길을 친형처럼 따르는 황익성이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윤봉길은 한일진과 함께 황익성을 찾아갔습니다. 황익성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일진이 배편을 구하는 대로 미국에 가 독립 자금을 모을 계획이라고 말하자, 며칠 뒤 여비를 마련해 줬습니다. "황 형, 정말 고맙소. 이 모두가 우리 조선을 위한 일이니 내 기꺼이 이 돈을 받겠소이다." 미국으로 떠나는 한일진은 윤봉길과 헤어지는 것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윤 동지, 몸 조심하시오. 상하이로 가서 꼭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기 바라오." "한 동지, 참으로 하쉽소만 각자 해야 할 일이 다르니 어쩔수가 없구려. 부디 몸 조심하시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 날, 반가운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한일진과 헤어진 윤봉길은 우선 일자리를 구하기로 했습니다. 독립 운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황익성이 하는 곡물전에 회계를 볼 사람이 필요하던 차여서 그는 거기서 돈을 계산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도 편히 잠들 날이 없다는 것과, 어린 손자가 아버지를 몹시 보고 싶어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은 윤봉길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윤봉길은 가족들 생각으로 한동안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의 일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무렵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칭다오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하루하루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느라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윤봉길은 이런 동포들이 다시 희망을 품고 활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야간 노동 강습소' 를 열어 동포들이 올바른 뜻을 일깨울 수 있도록 앞장섰으며, '교민회'를 만들어 동포들끼리 서로 돕고 친목을 도모하게끔 했습니다. 칭다오에서 우리 동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던 윤봉길은 1931년 8월, 마침내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 터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윤봉길은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상하이에서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날이 허다했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윤봉길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외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는 오직 조국을 위한다는 각오 하나로 견뎌 냈습니다. 윤봉길이 상하이에 온 지도 석 달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안공근이란 사람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윤봉길을 찾아왔습니다. 안공근은 그 유명한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입니다. "윤 동지, 진작에 만났어야 하는데 이제야 만났군요.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길로 윤봉길은 짐을 챙겨 안공근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윤봉길은 교포 실업가 박진을 소개받아 박진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진은 발이 넓은데다 임시정부에서 일하는 몇몇 사람들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윤봉길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틈이 나는 대로 영어를 배웠습니다. 또 공장 2층에 야간 강습회를 열어 동포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외롭고 비참한 생활을 해 오던 동포들은 야간 강습회로 몰려와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을 몹시 즐거워했습니다. 이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윤봉길은 독립 운동에 몸을 불사르겠다는 뜻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바람을 아는 박진은 언젠가 기회를 보아 그를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말수가 적고 행동이 무거운 사람이야. 볼수록 듬직하단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윤봉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가 박진의 집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생님을 뵙고 싶어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 청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윤 군, 이리 와 보게. 자네가 그토록 뵙고 싶어하는 김구 선생님이 오셨다네." 윤봉길은 얼른 달려나와 김구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윤봉길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생님. 고향에 있을 때부터 선생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나도 반갑소. 올해 나이가 몇이오?" "스물네 살입니다." 김구는 윤봉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본 다음 이렇게 물었습니다. "윤 군, 고향을 떠나 상하이까지 온 이유가 무엇인가?"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면 따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가 괜찮으신지요?" "허허, 그럼 오늘 밤에 내 집으로 오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시 절을 올리고 밖으로 나온 윤봉길은 가슴이 벅차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뵙다니! 거기다 선생님의 댁에서 단둘이 만날 약속까지 하다니......' 그날 밤 날이 저물기가 무섭게 윤봉길은 김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게나. 그다리고 있었네." 방안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래, 자네가 내게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들어 봄세." 윤봉길은 고향에서 친구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농촌 계몽 운동을 하던 일이며, 고향을 떠나 이 곳으로 오게 된 사연을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뜻 있는 일을 많이 했군. 그러나 농촌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은 매우 다르네. 독립 운동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지. 그러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고향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도 좋을 것 같으니......" 윤봉길의 눈에서는 조국을 향한 굳은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좋네, 윤 군. 자네 결심이 그리도 굳건하니 우리 함께 조국을 되찾는 일에 힘써 보세나." "고맙습니다, 선생님."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았습니다. 조국을 위한 결단. 그 무렵 중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일본이 드넓은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결국 야욕을 드러내어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을 '만주 사변'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순식간에 중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쟁은 6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중국은 점점 어수선해졌습니다. 만보산 사건에 이어 만주 사변이 터지자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경계했습니다. 만보산 사건은 일본인들의 간사한 이간질로 인해 생긴 어이없는 사건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승훈을 비롯한 여덟 명의 조선 농민은 길림성 만보산 근처의 쓸모 없는 땅 약 9만여 평을 빌려 밭을 일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밭에 물을 대려면 중국인의 땅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에, 그 문제로 중국 농민들과 조선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땅에다 물길을 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장 그만두시오." "아니, 그럼 우리더러 농사를 짓지 말라는 이야기요? 당신네들 땅을 지나야만 우리 땅에 물을 댈 수가 있는데, 그럼 어쩌란 말이요. 참 야박하기도 하군요." 그러자 일본인들이 끼어들어 중국인의 땅에 물길을 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인들의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중국 농민이 격분하여 항의를 해 왔고, 두 나라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이렇게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인 일을 가지고 일본인들은 엉뚱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농민들이 조선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대. 아마도 조선 농민들을 몰아내려는 작전인 것 같아." 이렇게 해서 만보산 사건은 일본인들에 의해 몇 배로 부풀려져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만보산 사건에 이어 일어난 만주 사변 역시 일본인들의 얼토당토않은 트집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봉천 근처의 철로를 일본군들이 폭파시켜 놓고, 중국 군대가 한 짓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두 나라간의 다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도 그리 순조롭지가 않았습니다. 군자금이 턱없이 모자란데다가 임시정부의 군무 차장 김희선을 비롯해 이광수, 정인 등이 이미 일본에게로 돌아서 버린 상태였습니다. 독립군은 늘 생활에 쪼들리다 보니 저마다 밥벌이를 하느라 뿔뿔이 흩어져 지냈으며, 조선 땅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의 모임은 일본군에게 들통이 나서 해산되고, 사람들은 거의 붙잡혀 갔습니다. 김구를 비롯하여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이 상하이에 남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김구는 독립 운동에 다시 불을 붙이고자 윤봉길을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추천하였습니다. 윤봉길은 임시정부의 요원이 되자 박진의 집을 나와 독립군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본인들의 거리에서 야채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종일 수레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야채를 팔았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야채를 사러 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일본군의 움직임에 대해 속혹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윤봉길은 이렇게 얻은 정보를 즉시 김구에게 보고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무렵 세상은 또 한 차례 떠들썩했습니다. 1932년 1월 어느 날,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던졌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윤봉길은 어느 한 기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일본 천황의 생일인 4월 29일에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이 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념식은 천황의 생일을 축하함과 동시에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내가 반드시 이 나라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윤봉길은 당장 김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신문 보셨지요? 이제야 제게 기회가 온 것 같습니다." 김구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중대한 일이 아닌가......' "선생님,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김구는 윤봉길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음...... 이번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인 만큼 선뜻 결정하기가 어렵군 그래. 그렇지만 자네의 결심이 이리 확고하니 일을 추진해 보세."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반드시 해내고 말겠습니다." "고맙네, 윤 군." 김구는 윤봉길의 두 손을 꼭 쥐었습니다.윤봉길이 집으로 돌아가자 김구는 거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을 찾아가 폭탄을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김홍일은 서둘러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일본 천황의 생일 푹하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도시락과 물통, 그리고 일본 국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포고령 때문이였습니다. 거사를 사흘 앞둔 윤봉길은 평소에 입던 낡은 중국 옷을 벗어 던지고 양복을 차려입었습니다. 그리고는 상하이 거류민단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그 곳은 현재 김구가 독립군들과 함께 동포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독립군 몇 사람이 일찍부터 와서 윤봉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사를 앞둔 윤봉길이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인 애국단의 단원이 된다는 것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각오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한인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윤봉길은 우렁찬 목소리로 조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선서문을 낭독했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태극기가 걸린 벽 앞에 김구와 나란히 서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다음은 양손에 폭탄을 들고 지방한 결의를 다진 듯한 표정으로 독사진을 찍었습니다. 윤봉길의 한인 애국단 입단식이 모두 끝나자,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윤 동지, 훌륭하오. 장한 결심을 하셨소." "이런 위험한 일에 선뜻 용기를 내다니, 참으로 고맙소." 가자, 홍커우 공원으로! 윤봉길은 맡은 일을 성공리에 끝내기 위해 하나하나 세밀하게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우선 야채 수레를 끌고 홍커우 공원으로 나가 공원 주변을 구석구석 살폈습니다. 공원에서는 행사를 이틀 앞둔 일본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음, 시라카와 대장이 저 자리에 앉겠군. 그럼 나는 어디쯤에서 폭탄을 던지는 것이 좋을까?' 윤봉길은 자신이 설 자리를 점찍어 보기도 하고,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가 앉을 자리를 예상하여 눈으로 거리를 재 보기도 했습니다. 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으로 가 폭탄 던지는 연습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습니다. 마침내 행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내일이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날이구나! 사나이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하지만......' 불현듯 윤봉길의 머릿속에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 동네 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부모님, 불효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여보, 당신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오. 아이들을 부탁하오. 다들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볼 수 있다면......' 그리움에 사무쳐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이래선 안 돼. 그토록 바라던 일이 코앞에 닥쳤는데,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려선 결코 안돼." 해가 저물자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김해산의 집으로 갔습니다. 거사에 쓰일 폭탄을 그 집에 맡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김해산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며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김구는 윤봉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습니다. "지금 자네 심정이 어떤지 아네. 그러나 이왕 뜻을 정했으니 마음을 굳게 가지기 바라네."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그 동안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이 일을 준비하는 데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래, 행사 장소에는 미리 가 보았겠지?" "물론입니다. 며칠 동안 홍커우 공원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폭탄을 던질 위치까지 점찍어 두었습니다." "윤 군, 수고가 많았네. 참, 여기 계시는 김해산 동지가 여분의 폭탄을 준비해 주었네." "윤 동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폭탄 두 개를 더 준비했소. 알고 있겠지만 사용법은....." 김해산은 윤봉길에게 폭탄을 건네주며 사용법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폭탄의 성능은 틀림없겠지요?" "물론이오. 스무 번에 걸쳐 시험해 보았고. 위력이 대단하더군요. 윤 동지, 염려 마시오. 실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김구가 말했습니다. "윤 군, 자네의 임무가 막중하네. 꼭 성공하기 바라네." "네,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몸 건강하셔서 꼭 조국이 해방되는 날을 보셔야 합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암, 그래야 하고말고. 암......" 김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김해산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습니다. "자, 밤이 늦었으니 어서들 쉬십시오. 내일 아침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윤봉길은 자리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엔 끝도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습니다. 그는 가족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았습니다. '훗날 우리 아이들은 되찾은 조국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겠지.' 윤봉길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가 있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이른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김해산이 차려 준 밥상을 마주 대하고 앉았습니다. "많이 드시오, 윤 군." "예, 선생님. 선생님도 많이 드십시오." 김구는 윤봉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윤봉길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침착하게 밥을 먹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젋은이가 우리 조선에 있었다니...... 아,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한창인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귀한 목숨을 나라를 위해 바치려 하다니......' 평소 윤봉길을 아끼던 김구의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이 착잡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윤봉길은 손목시계를 풀어 김구에게 내밀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시계는 너무 낡았으니 이 시계를 차십시오. 저는 얼마 후면 시계를 찰 일이 없을 테니 선생님 시계와 제 시계를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윤 군......" 두 사람은 시계를 바꾸어 찬 후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윤봉길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이 어둠침침했습니다. 기념식을 치르기 위해 꾸며진 홍커우 공원은 기념식에 참석하려는 일본인들과, 수많은 군인들로 북적댔습니다. 윤봉길은 품에서 일장기를 꺼내 들고 일본인들 틈에 섞여 기념식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들은 새 양복과 구두로 단장한 그를 일본인으로 착각 했는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미리 점찍어 두었던 자리에 가서 섰습니다. 단상에 마련된 시라카와 육군 대장을 비롯한 높은 장군들의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는 윤봉길의 표정에는 비장한 각오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요란한 사열식이 끝나고 마침내 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라이 총영사의 축사에 이어 묵념 시간이 되자 일본의 국가가 온 기념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올렸습니다. '바로 이 때다.' 윤봉길은 시라카와 육군 대장이 앉아 있는 단상을 향해 힘껏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습니다. "꽝!"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음이 진동했습니다. 윤봉길이 던지 폭탄은 정확하게 시라카와 육군 대장을 향해 떨어졌고, 시라카와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단상은 삽시간에 뿌연 연기로 뒤덮였고, 놀란 일본군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 기념식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윤봉길은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자 어깨에 메고 있던 도시락 폭탄을 들었습니다.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받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을 어느 새 일본 헌병들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윤봉길이 한발 늦었던 것입니다. "대한 독립 만세!" 윤봉길은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가면서도 목청껏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는 비록 일본군에게 끌려갔지만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 꿈은 윤봉길 혼자만 바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온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바로 조선의 영웅 윤봉길이 해난 것입니다. 이 소식은 금세 전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정말 훌륭하도다." 윤봉길의 소식을 듣고 당시 중국의 총통이었던 장제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로 조선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중국 국민들 역시 입을 모아 윤봉길 의사를 칭찬하였습니다. "조선 청년이 우리의 원수를 대신 갚아 주었다." "그런 훌륭한 청년이 있는 한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여러 나라들도 우리 나라의 독립을 바라며 임시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윤봉길의 용감한 행동으로 인해 일본의 통치하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딱한 사정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조금은 시들해져 있던 독립 운동에도 새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독립군들은 윤봉길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동을 받아, 일본의 눈을 피해 다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일본 헌병에게 끌려간 윤봉길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일본군은 윤봉길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잔인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윤봉길은 오랫동안 입을 꼭 다문 채 고통을 견뎌 냈습니다. 또 그는 법정에 나가서도 조금도 굽힘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게 뭐가 그리 잘못이란 말이냐. 나는 조국을 위해 이 일을 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일본군에게 그의 말이 곱게 들릴 리가 없었습니다. 5월 25일, 윤봉길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월 18일, 사형 집행을 위해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일본의 가나자와 형무소로 끌려간 윤봉길은 철통 같은 감시를 받으며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1932년 12월 19일, 끝내 총살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윤봉길의 나이 스물다섯 살,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고향에 두고 온 두 아들에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너희에게 피와 뼈가 있다면, 받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윤봉길,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자신의 젊은 청춘을 불살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넋을 기리며 애국심을 불태웠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윤봉길이 사형당한 지 13년 뒤인 1945년, 마침내 우리 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온 국민들은 환소성을 지르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거리 곳곳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물결로 출렁였습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 박열, 이강훈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당시 윤봉길이 갇혀 있던 형무소의 간수였던 시게하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윤봉길의 유해는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은 윤봉길의 유해 앞에서 오열했습니다. 뜻을 이루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던 그는, 결국 죽어서야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의 빈소로 달려온 김구 역시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통곡했습니다. "윤 군!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구려." 윤봉길 의사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위험한 일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런 그의 용기는 나라를 사랑하는 피끓는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할 일을 해서 기쁩니다." 윤봉길 의사는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물다섯의 나이로 스러져 갔던 것입니다. 비록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조국의 독립을 향한 그의 용기와 고귀한 정신은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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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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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친구들. 밖에서 놀다 들어온 아이의 옷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로야, 그게 대체 무슨 꼴이냐?” 어머니는 엄한 목소리로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앞으로는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옷이 문제가 아니다. 장차 나라의 큰일을 해야 할 네가 대장장이나 농사꾼의 자식들과 어울려서야 되겠느냐?” 어머니의 꾸중이 끝나기를 기다려 수로가 말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면 먼저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알아야 하잖아요.” 생각지도 않은 말에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대장장이나 농사꾼이 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대장장이가 없다면 부엌칼은 누가 만들고, 또 농사꾼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어요?” 어머니는 잠자코 수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 백성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너무도 옳은 말이었으므로 어머니는 대견스러운 듯 아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너는 어린것이 어쩌면 그리도 생각이 깊으냐?” 이 생각이 깊고 의젓한 수로라는 아이가 바로 청백리의 대명사가 된 조선 최고의 정승 황희입니다. 수로는 황희의 어린 시절 이름입니다. 황희는 조선 세종 임금 때 18년 동안이나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황희는 고려 말인 1363년(공민왕 12년) 개경 가조로에서 판 강릉 대도호부사를 지낸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용궁 김 씨가 뱃속에 황희를 품고 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았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물이 쏟아져 내렸다는 말이 전해져 옵니다. 황희는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황군서의 집을 물으면,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책 읽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리는 집으로 가 보라고 가르쳐 줄 정도였습니다. 옛날에는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의 후손에게 과거를 보지 않고도 벼슬을 내리는 음직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에 의해 1376년(우왕 2년), 황희는 복안궁 녹사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습니다. 높은 벼슬은 아니었으나, 복안궁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때 황희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황희에게 벼슬이 내려진 것을 기뻐했으나, 황희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조상 덕분에 받은 벼슬이라서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저는 벼슬보다는 집에서 책을 읽고 싶습니다.” “책은 벼슬길에 나가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나라에서 내린 벼슬이니 아무 소리 말고 받도록 해라. 그 대신 조상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게 열심히 일해야 하느니라.” 황희의 아버지 황군서가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황희는 비로소 고집을 꺾고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기어이 벼슬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황군서의 집에서는 다시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렁소와 검정소. 황희는 스물한 살 되던 해인 138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스물세 살이 되던 1385년에는 과거를 보아 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그 후 스물일곱 살 되던 1389년에는 어렵기로 소문난 문과 시험에 합격했고, 그 이듬해에는 성균관 학관 이 되어 선비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와야 한다. 정성껏 가르쳐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나의 일이다.’ 황희는 그런 생각으로 성균관의 선비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성균관 학관을 지내던 무렵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황희는 개경 근처의 한 마을로 일을 보러 갔습니다. “후유, 덥다! 좀 쉬었다 가야지.” 황희는 밭둑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땀을 식혔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데도 바로 앞에서 늙은 농부가 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검고 다른 한 마리는 누렜습니다. 이윽고 농부는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쓱 닦으며 나무 그늘로 다가왔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고생이 많소.” 황희가 농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생은 무슨... 날마다 하는 일이라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젊은 선비께서는 어디로 가는 길이십니까?” 농부가 소 두 마리를 밭둑에 세워 놓고 물었습니다. “일이 있어서 왔다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두 사람은 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소들이 아주 일을 잘하게 생겼소.” 황희가 소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에겐 저것들이 큰 재산이지요.” 농부는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저 두 마리 소 중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오?” 황희가 묻자 농부는 소들이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습니다. “잠깐 귀 좀 빌려주십시오.” 농부는 황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검은 놈은 꾀만 부리고, 누런 놈이 온순하며 일도 잘한답니다.” 황희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고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이오?” 그러자 농부는 손을 내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짐승이라도 제 흉을 보면 기분이 나쁜 법이지요.” 그 말에 황희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것참 옳은 말씀이오! 오늘 큰 가르침을 얻었소.” 황희는 농부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날 개경으로 돌아오며 황희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짐승에게조차 말조심하는 농부를 본받아, 나도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지.’ 그 후 황희는 평생 말 한마디, 작은 행동에도 조심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고려는 나라 안팎의 사정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밖으로는 외적이 자주 쳐들어오는 바람에 나라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안으로는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1388년, 고려 임금 우왕은 중국의 명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우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나간 사람이 바로 이성계인데, 그는 처음부터 명나라를 치는 일을 마땅치 않게 여겨 도중에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392년, 마침내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옛 고려의 신하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새 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겠다며 벼슬자리를 내놓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그중에서 정몽주 같은 사람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사람 중 72명은 송악산 두문동이라는 곳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황희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때 황희의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인재가 벼슬을 버리고 떠나자,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는 자기를 도와 새 나라를 다스려 나갈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마침내 태조는 두문동으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새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를 좀 도와주시오.” 태조의 말을 전해 들은 두문동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습니다. “고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세상을 버린 우리가 이제 와서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할 수는 없지 않소?” “옳은 말씀이오. 결코 처음의 뜻을 굽혀선 안 되오.” 두문동 사람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그들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습니다. ‘비록 임금은 바뀌었지만, 백성들은 전에 우리를 믿고 따르던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닌가?’ 만약 새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린다면 백성들만 고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괴로웠던 것입니다. 물론 황희는 펄쩍 뛰었습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도 여러 어르신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한 몸입니다. 저는 절대로 두 나라를 섬길 수 없습니다.”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닐세. 하지만 이 땅의 백성들을 생각해 보게. 나라가 바뀌었다고 백성들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르신들은 왜 안 나가십니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과 자네는 처지가 다르지. 자네는 학문이 높은 데다가 나이도 젊으니, 앞으로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걸세.” 황희는 마음이 안 내켰으나 나이 든 사람들의 설득에 못 이겨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결국 1394년, 황희는 조선 조정에서 내린 성균관 학관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때 황희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아들이 여덟 명 있었는데, 그들이 왕의 자리를 놓고 세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그들은 결국 두 차례나 서로 죽고 죽이는 난리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왕자의 난’입니다. 자식들의 싸움을 보다 못한 태조가 6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둘째 아들 방과가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가 곧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입니다. 정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동생 방원을 두려워했습니다. 방원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머리가 좋고 재주가 뛰어나,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종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방원은 바로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입니다. 태종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훌륭한 인재를 골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와 황희의 만남은 물과 물고기의 만남 같은 것이었습니다. 황희는 자신을 벼슬길로 내보낸 두문동 사람들의 높은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나랏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사람됨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지신사 박석명이 건강이 좋지 않아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지신사는 왕의 밑에서 비밀문서나 왕명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벼슬이며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자리를 말합니다. 박석명은 물러나면서 자기 뒤를 이을 사람으로 황희를 추천했습니다. “좌부대언 황희가 후임 지신사로 적당합니다. 그는 학문이 깊고 성품이 깨끗하여 상감마마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황희라면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구려.” 박석명을 신임했던 태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황희를 지신사로 임명했습니다. 1405년, 황희가 마흔세 살 때의 일입니다. 승정원에 들어가 왕을 직접 받들게 된 황희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태종은 곧 박석명 못지않게 황희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는 이따금 사신을 보내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힘이 약한 나라라고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황희가 지신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명나라에서 황엄이라는 자가 사신으로 왔습니다. 황엄은 태종 앞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우 거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 조선 처녀 열다섯 명을 뽑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그것을 구실로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태종은 온 나라에 처녀를 모은다는 방을 써 붙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가겠다고 나서는 처녀가 많을 리 없었습니다. 며칠 후에 겨우 서너 명의 처녀가 모였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황엄은 펄쩍 뛰었습니다. “이건 조선이 우리를 우습게 여긴다는 증거요! 황제 폐하께 조선에서 우리 요구를 거절했다고 아뢰겠소.” 태종이 그 일로 근심하자 황희가 나섰습니다. “제가 황엄을 만나 이야기해 볼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럼, 그렇게 해 보구려.” 그리하여 황희는 혼자서 황엄을 찾아갔습니다. 황엄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황희를 맞았습니다. “무슨 일로 왔소?” “먼저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작은 일로 큰 나라 사신을 노엽게 했으니, 우리 잘못이 큽니다.” 황희가 불쾌한 것을 참고 부드럽게 말을 꺼내자, 황엄은 짐짓 점잔을 빼며 투덜댔습니다. “그렇게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니 나 한마디 하겠소. 조선에서 우리 명나라를 어떻게 보고 일을 이리 성의 없이 처리한단 말이오?” “우리로서는 성의를 다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원하신 건 처녀 열다섯 명이오. 그런데 겨우 서너 명을 구해 놓고 무슨 소리요?” “명나라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만 뽑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아무리 황제의 명이 중하다 해도 싫다는 사람을 소나 말처럼 억지로 끌고 갈 수야 없는 일이지요.” “그건 그렇소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간다면 틀림없이 원망을 사게 되겠지요. 아마 명나라 황제께서도 조선의 백성들이 원한을 갖게 되는 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맞는 말씀이오. 하지만 나로서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 황엄의 태도는 처음과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었습니다.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 조선의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칙사께서 잘 말씀드리면 황제 폐하도 크게 노하시진 않을 것입니다.” 마침내 황엄은 마음을 돌렸습니다. “대감처럼 훌륭한 벼슬아치가 있다니, 조선 백성들은 참 복이 많군요. 알았소. 내 힘닿는 데까지 애써 보겠소.”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황희의 마음에 감동한 황엄은 더 이상 트집을 잡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로 태종은 황희를 더욱 신임하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황희는 아랫사람의 작은 실수나 잘못에는 매우 너그러웠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일을 보면 결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태종의 비인 민씨에게는 무휼, 무회, 무질, 무구 등 여러 명의 남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비에게는 친정 동기간이요, 태종에게는 처남, 또 장차 왕이 될 세자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신분을 등에 업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모두 민씨 형제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나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태종도 그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왕비의 친형제들을 처벌할 수도 없어 속으로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황희가 나섰습니다. 아무리 왕비의 친형제라도 더 이상 횡포를 부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상소문을 올렸던 것입니다. 민씨 형제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이 나라에 큰 불행이 닥칠까 염려되니, 부디 그들을 엄하게 다스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민씨 형제들의 권세를 생각할 때, 황희가 그런 상소문을 올린 것은 죽기를 각오한 행동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태종은 상소문을 읽자마자 황희를 불러들였습니다. “모두들 몸을 사리는 판에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해 주니, 경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이구려.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는 그들에게 엄한 벌을 내려야겠지만, 중전의 동기간을 어찌 내 손으로….” “그런 사사로운 정에 끌리시면 안 됩니다. 상감마마께서 할 수 없으시다면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태종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았소. 경이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시오.” 황희는 비밀리에 대신들과 의논하여 민씨 형제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1408년, 황희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그 얼마 후, 이번에는 목인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목인해는 곧 잡혔는데, 문초를 받던 중 반란을 계획한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조대림이라고 말했습니다. 조대림은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이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은 펄펄 뛰었습니다. “평양군이 나를 몰아내려고 반란을 꾀했단 말인가? 당장 그놈을 잡아들여라!” 그리하여 조대림이 옥에 갇히자, 황희가 태종에게 말했습니다. “평양군은 결코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목인해라는 자가 누명을 씌운 것인 듯하니, 자세히 알아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황희의 말에 화를 가라앉힌 태종은 그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했습니다. 과연 황희의 말대로 조대림에게는 아무 죄가 없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태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황희의 혜안에 감탄하며 조대림을 풀어 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사헌 맹사성과 좌정언 박안식이 태종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조대림을 풀어 주지 않고 다시 심문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태종은 몹시 노여워했습니다. “죄가 없음이 밝혀져 풀어 주라고 명한 평양군을 다시 심문하다니, 괘씸하도다! 임금의 명을 거역한 죄, 죽어 마땅하다!” 태종은 당장 두 사람의 목을 베라고 명했습니다. 맹사성과 박안식의 재주와 깨끗한 성품을 아는 신하들은 한결같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한마디 했다가는 왕의 미움을 살까 봐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황희가 선뜻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다만 진실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서 다시 심문했던 것뿐입니다. 그들은 충성스럽고 덕이 있는 신하들입니다. 노여움을 거두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황희는 진심으로 태종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상감마마, 한 번의 잘못으로 그런 인재들의 목을 베는 것은 나라의 큰 손실입니다. 그들도 지금쯤은 깊이 뉘우치고 있을 테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어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주십시오.” 황희가 다시 한번 간절하게 아뢰자, 태종도 마침내 화를 풀었습니다. “알겠소. 인재를 아끼는 경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의 목을 베는 대신 귀양을 보내도록 하겠소.” 이때 황희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맹사성과 박안식은 훗날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만약 황희가 목숨을 걸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까운 충신 두 사람이 뜻을 펴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황희는 나라의 어려운 일을 그때그때 해결해 가며, 공조, 병조, 예조, 호조 판서를 거쳐 1415년에는 이조 판서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쉰세 살이었습니다. 이조 판서가 된 그해 황희는 큰 수난을 당했습니다. 태종에게는 세자인 양녕 대군을 비롯하여 아들이 넷 있었습니다. 양녕 대군은 장차 태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사람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학문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허구한 날 사냥이나 다니고, 툭하면 궁궐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가 거리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는가 하면, 술에 취해 궁녀들을 희롱하는 등 차마 세자로서 못 할 짓만을 하고 다녔습니다. “세자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거리의 불량배들과 어울려서야 되겠느냐? 왕위를 이어받을 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행동을 삼가도록 하라!” 태종은 세자를 불러 부드럽게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엄하게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자의 행동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태종은 여러 대신들을 불러 모아 지금의 세자를 폐하고 다른 왕자를 세자로 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0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던 양녕 대군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하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습니다. “내 마음도 아프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소. 그러니 모두 내 뜻에 따라 주기 바라오.” 그때 앞으로 나선 대신이 있었으니 바로 황희였습니다. “상감마마, 이미 정해진 세자를 바꾸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자의 나이 아직 어리니, 잘 타일러 그릇된 행동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황희가 정면으로 자기 뜻에 반대하고 나서자, 태종은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내가 어째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오?” “물론 상감마마의 심정이 어떠신지는 잘 압니다만, 소신은 세자의 일로 또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황희가 말한 ‘불행한 일’이란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이 왕위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 ‘왕자의 난’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말에 태종은 벌컥 화를 냈습니다. “경은 지금 나를 나무라는 거요?” 태종에게는 황희의 말이 형들을 제치고 다섯째 아들인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소신은 오직 나라의 화평을 위해...” “그만두시오! 경은 세자의 편을 들어 장차 큰 복을 누리려는 속셈인 것 같구려!” 황희가 세자 문제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평소 그를 시기하던 대신들이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감히 상감마마의 뜻을 거스른 황희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태종은 황희를 벌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이 끈질기게 벌주기를 청하자, 할 수 없이 벼슬을 낮추어 황희를 평안도 지방 관리로 내보냈습니다. 그다음 해인 1418년, 태종은 황희를 다시 불러올려 판한성 부사로 삼았습니다. 그해 6월, 태종은 마침내 셋째 아들 충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황희는 여전히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양녕 대군이 1년이라도 왕위에 있도록 한 다음에 충녕 대군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충녕 대군을 세자로 삼는 데 반대하는 황희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벼슬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들이 들고일어나자, 태종은 어쩔 수 없이 황희를 경기도 교하로 귀양 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교하가 한성과 너무 가깝다며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고 부추겼습니다. 태종은 마지못해 황희를 전북 남원으로 귀양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단, 그의 늙은 어머니와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귀양을 보내면서도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 후 태종은 남모르게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 머지않아 다시 부를 것이니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기다리라고 전했습니다. 귀양살이하는 동안 황희는 책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나랏일을 돌보느라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을 원 없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나랏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음의 시조는 그때의 심정을 읊은 것입니다. '산속의 맑은 시냇가 오막살이에도 느지막이 봄이 왔네. 눈처럼 하얀 배꽃은 향내를 뿜고, 새싹 움트는 버드나무는 금빛으로 곱구나. 겹친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 속에서 들리는 두견새 울음소리에 어지러운 마음 달랠 길 없네.' 마침내 태종은 왕위를 충녕 대군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 새로운 왕이 바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 대왕입니다. 왕자의 난과 같은 불행한 일 없이 충녕 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황희는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울적했습니다. 자신을 아껴 주던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났으니, 영영 귀양살이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이곳에서 죽고 말겠구나!’ 황희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황희가 귀양살이한 지도 벌써 5년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병이 드러누워 있던 상왕 태종이 세종을 불러 말했습니다. “주상, 남원에서 귀양살이한 황희는 내가 사랑하던 신하요. 어쩌다 내 뜻을 거슬러 귀양을 갔지만, 그렇게 버려두기엔 아까운 사람이오. 부디 그를 불러 중히 쓰도록 하시오.” 세종도 황희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태종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마침내 황희는 오랜 귀양살이를 끝내고 한성으로 올라왔습니다. 황희의 마음은 한시가 급했습니다. 상왕인 태종이 심해진 병 때문에 이제는 바깥출입도 못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궁궐에 도착한 황희는 먼저 세종에게 인사를 하고 곧 태종에게로 갔습니다. 태종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황희를 맞았습니다. “상왕마마,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종에게 큰절을 올린 황희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태종은 황희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소신은 괜찮으니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황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고맙소. 부디 상감의 좋은 신하가 되어 주구려.” 그로부터 얼마 후 세종은 황희에게 예조 판서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내 일찍이 경의 높은 인품과 학문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많이 들었소. 상왕마마를 돕던 것처럼 앞으로 내 곁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써 주시오.” “상감마마, 베풀어 주신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 후 상왕 태종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종 4년인 1422년 5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황희를 시기하는 무리가 다시 그를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상감마마, 황희는 상감마마께서 세자가 되시는 것을 앞장서서 반대했던 인물입니다. 부디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을 상감마마 곁에 두어선 안 됩니다. 벼슬을 빼앗고 멀리 쫓아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황희를 헐뜯는 대신들을 나무랐습니다. “황 판서가 세자 바꾸는 일에 반대한 것은 오직 나라의 법과 도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소. 그는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오.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황 판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시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엄중히 다스리겠소.” 이처럼 황희에 대한 세종의 사랑과 믿음이 각별했으므로, 그 뒤로는 아무도 그에 대해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에 보답하여 황희는 세종을 도와 나랏일에 온 정성을 다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강원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세종은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내려보냈습니다. 황희는 몸소 강원도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여러모로 백성들을 돌보았습니다. 세금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대나무 열매에 곡식을 섞은 죽실 반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어 배고픔을 달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황희 덕분에 백성들은 차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성으로 올라온 황희는 1426년에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황희가 좌의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자식이 부모의 무덤을 지키며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종은 황희가 고향으로 내려간 뒤에도 좌의정 자리를 그대로 비워 두었습니다. 신하들이 좌의정 자리를 비워 두면 좋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임명할 것을 재촉했으나, 세종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마시오.” 40일쯤 지났을 때, 세종은 황희를 한성으로 불렀습니다. “내 좌의정 자리를 그대로 비워 두었으니, 인제 그만 나랏일을 돌보도록 하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0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부디 삼년상을 마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황희가 간청했으나 세종은 고개를 저으며 타이르듯이 말했습니다. “내 경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오. 하지만 높은 벼슬아치가 사사로운 슬픔 때문에 나랏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임금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황희는 하는 수 없이 조정으로 돌아와 좌의정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죄인이라 여겼으므로, 고기나 생선을 멀리하고 언제나 밥상 위에 나물 반찬 한두 가지만 올리게 했습니다. 세종은 그 말을 전해 듣고 곧 황희를 불러 고기반찬을 대접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궁궐로 불려 간 황희는 고기반찬이 놓인 상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감의 건강을 생각하여 상감께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니, 아무 말씀 마시고 다 드십시오.” “상중에 어찌 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황희가 펄쩍 뛰자, 심부름해 온 신하가 말했습니다. “대감, 그러지 말고 어서 드십시오. 상감의 명을 거역하실 생각입니까?” 그 말에 황희는 비로소 수저를 들었습니다. 신하를 아끼는 임금의 깊은 사랑에 감동하여 황희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세종 13년인 1431년, 황희는 드디어 대신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그때 황희의 나이는 예순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황희는 언제나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세종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별안간 황희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안내를 맡은 신하는 고래 등처럼 늘어선 집들 가운데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집입니다, 상감마마.” 그러자 세종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여기가 정말 황 정승의 집이란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아니, 이런 오막살이에서... 내 황 정승이 이토록 어렵게 사는 줄은 몰랐도다.” 세종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때 황희가 뛰어나와 세종에게 절을 했습니다. “상감마마,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영의정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도 내게는 궁궐과 다를 바 없소.” “황공하옵니다.” 세종은 천천히 황희의 집을 둘러보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집은 좀 고치는 게 좋겠소. 이러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오?” 이윽고 황희의 안내로 방 안에 들어간 세종은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방바닥에 가난한 백성들의 집에나 있는 거적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거처하는 곳이 이와 같은데 먹는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세종은 다시 한번 속으로 혀를 찼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자리는 등이 가려울 때 누우면 거칠거칠해서 시원하겠군.” “그렇습니다, 상감마마.” 세종의 말에 황희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날 세종은 궁궐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지금껏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황 정승처럼 욕심 없는 신하가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황희가 더욱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검소하기로 말하면 황희의 부인도 남편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중전이 대신들의 아내를 궁궐로 초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신들이 나랏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은 그 부인들이 안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 노고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신들의 부인은 제각기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고 궁궐로 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 나이 들어 보이는 두 부인이 있었습니다. 두 노부인의 옷차림은 수수하고 단정하여, 비단옷을 입은 화려한 부인들 속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뚜렷이 구분되었습니다. 다른 부인들이 중전에게 서로 먼저 인사를 하려고 다투자, 두 노부인은 짐짓 뒤로 물러나 차례를 양보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두 노부인이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안드립니다, 중전마마.” “뉘 댁 부인들이시냐?” 중전이 시중을 드는 궁녀에게 물었습니다. “영의정 황희 대감과 좌의정 맹사성 대감 댁 마님이십니다.” 궁녀의 대답에 중전은 물론이고 다른 부인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정승의 부인들이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 너무 검소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중전은 두 노부인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두 분 대감께서 그와같이 높은 이름을 얻은 것은 모두 부인들의 공인 모양이오.” 중전의 칭찬에 두 부인은 얼굴을 붉혔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마마.” 중전은 두 부인을 잔칫상의 가장 윗자리에 앉힌 다음, 그 자리에 모인 부인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다들 이 두 분의 검소함을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러자 부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운 듯 비단 옷자락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살림을 말없이 꾸려 나간 황희의 아내였으나, 언젠가 한 차례 남편을 원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막내딸을 결혼시킬 때였습니다. 혼인날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혼수를 해 줄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정말 큰일이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황희의 아내가 걱정하자 마음씨 고운 딸은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없으면 없는 대로 하면 되지요.” 그 말에 황희의 아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양반이 이렇게 딸 혼수 걱정을 하게 하다니...” 이렇게 남편을 원망하고 있을 때 밖에서 하인이 소리쳤습니다. “마님! 마님! 좀 나와 보세요!” “아니, 무슨 일인가?” 황희의 아내는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궁궐에서 나온 사람들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왔습니다!” 하인이 대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과연 큰 짐짝을 짊어진 사람들이 계속해서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대체 그게 다 무엇이오?” 황희의 아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짐을 지고 온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새색시 혼수입니다.” “아니, 그게 왜 우리 집으로... 혹시 다른 집으로 갈 게 잘못 온 거 아니오?” “영의정 대감 댁으로 온 게 틀림없습니다. 상감마마께서 이 댁 따님의 혼수를 공주님 혼수와 똑같이 마련해 내리신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황희의 막내딸이 혼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세종이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황희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중 막내인 수신은 항상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툭하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아예 술집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황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들을 불러 앉히고 타일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버지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술집에도 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며칠도 안 되어, 또 술집으로 달려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신은 또 술집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아침 황희가 수신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여전하구나. 내 마지막으로 네게 일러두겠다. 만약 앞으로 한 번만 더 술집에서 밤을 지내고 온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알겠습니다. 명심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수신은 고개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수신은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고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수신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신은 다시 술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은 몹시 취해 집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수신은 불안한 마음으로 술집 문을 나서다가 기절할 만큼 놀랐습니다. 술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희가 아들을 보더니 넙죽 엎드려 절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아버님은 이 나라의 정승이십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수신은 당황하여 쩔쩔매며 황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나는 정승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식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만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그 말에 수신은 얼굴이 화끈거려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겨우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 수신은 꿇어 엎드려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황희는 존댓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련님보다 그런 자식을 둔 내 죄가 더 크지요.” “아버님,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글쎄,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련님 같은 젊은이들이 공부를 팽개치고 술집에서 살다시피 한다면 장차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희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늙은 아버지의 눈물 앞에서 수신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님...” 그날 이후 수신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성실한 사람이 되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나중에 수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슬기로운 가르침이 나쁜 길로 빠질 뻔했던 아들을 나라의 큰 인물로 키워 냈던 것입니다. 큰아들 치신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바른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호조 판서가 되자 치신은 전에 살던 낡은 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새집을 지은 기념으로 잔치를 벌이기 위해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 아버지 황희도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황희는 아들의 집 대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치신은 아버지가 집 앞까지 왔다가 돌아섰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뒤쫓아 나왔습니다. “아니, 왜 들어오시지 않고 그냥 돌아가십니까?” 그러자 황희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집을 가진 아들을 둔 일이 없소이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습니다. 황희는 벼슬아치가 호화롭게 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령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모으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벼슬아치로서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날 치신은 잔치를 그만두고, 얼마 후 작은 집을 구해서 이사했습니다. 다른 여종도 질세라 억울하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듣고 보니 네 말도 맞는구나.” 황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인이 말했습니다. “대감은 무슨 판결을 그렇게 내리십니까? 잘잘못을 가려 주셔야지, 둘 다 옳다고 하시면 어찌합니까?” 그러자 황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부인 말도 맞구려.” 부인과 두 여종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황희가 두 여종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돌아가서 자기 생각만 하지 말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라.” 그런 다음 황희는 방문을 닫고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싸우던 두 여종이 뜰에서 정답게 웃고 있는 것을 보고 황희가 물었습니다. “그래, 지금은 억울하지 않으냐?” “네, 조금 전에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조금만 참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한 여종이 말하자 다른 여종도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먼저 제 잘못은 없나 살펴보았어야 했는데...” “그래, 둘 다 옳다.” 황희는 여종들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부인이 옆에 있다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잘잘못을 따질 만한 일이 아니었군요. 대감은 아주 명판결을 내리셨습니다.” “부인의 말도 옳소.” 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언젠가 황희 밑에서 벼슬을 하던 이석형이라는 선비가 의논할 일이 있어 황희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황희는 그 벼슬이 높든 낮든 차별하지 않고 자기 집에 오는 손님은 모두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이들 서넛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술상 위에 놓여 있는 음식을 보고 아이들이 황희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거 먹어도 되죠?” “그래, 그래!” 황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술상 앞으로 다가와 음식을 마구 집어 먹고, 황희의 무릎에 올라앉아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보며 이석형은 생각했습니다. ‘밖에서는 엄격한 분이 손자들에겐 매우 너그러우시군.’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아이들의 옷차림이 아무래도 양반집 아이들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을 만큼 먹은 아이들은 이제 방 한쪽에서 저희끼리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습니다. 황희는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아이들은 누굽니까, 대감?” 이석형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물었습니다. “집에서 부리는 종의 자식들이라네. 어때, 귀엽지?” 황희의 말에 이석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종의 자식이 주인 어른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응석을 부리다니, 다른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석형의 표정을 보고 황희는 껄껄 웃었습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종의 자식이나 양반의 자식이나 다 같은 사람 아닌가.” “그래도 종과 양반은 신분이 다른데...” “양반과 똑같이 종들도 하늘이 낸 사람일세. 저 아이들이 내 손자와 다를 게 뭔가?”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저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이석형은 황희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이석형은 더욱더 황희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종의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희는 영의정으로 있는 동안 신분 제도에 관한 법을 뜯어고쳤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여종이 종이 아닌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종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그들은 대를 이어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황희는 이 법을 고쳐서 여종이 종이 아닌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그들이 낳은 자식은 천민이 아닌 평민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황희가 집에서 부리는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짐작하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아니, 누가 이 밤에 글을 읽는 거지?’ 마당을 거닐던 황희는 자기도 모르게 글 읽는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리는 종들이 거처하는 행랑채에서 들려 왔습니다. 황희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종들은 글을 배워도 쓸 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황희는 가만히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돌쇠의 목소리였습니다. ‘흠... 똘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글공부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걸.’ 황희는 기특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돌쇠는 황해도에 사는 황희의 친구가 맡기고 간 소년인데, 똑똑하고 예의 바르며 부지런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돌쇠는 황희 앞에 불려 왔습니다. “누구에게 글을 배웠느냐?” 황희가 묻자, 돌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다시는 글을 읽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누구에게 글을 배웠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도련님들이 글공부하실 때 어깨 너머로 보면서...” 돌쇠는 겁에 질려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게 그 정도라면 보통 실력이 아니구나. 그렇게 글공부가 하고 싶었느냐?” 황희가 물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고 야단치려는 게 아니야. 앞으로 글공부를 시켜 주면 하겠니?” “제가 어떻게 감히...” 돌쇠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황희는 돌쇠의 손에 돈을 쥐여 주었습니다. “자, 이걸 가지고 내 집을 떠나거라. 네가 누구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공부하도록 해라.” “아닙니다, 대감마님. 제가 이 댁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너는 남의 밑에서 종노릇을 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어서 멀리 떠나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감사합니다, 대감마님!” 돌쇠는 눈물을 흘리며 황희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돌쇠는 집안사람들 모르게 황희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 후 10년쯤 지난 어느 날, 황희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서 만나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황희에게 아는 체를 했습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대감마님?” 황희는 곧 그가 10년 전에 집을 떠난 돌쇠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아는 체를 했다가는 돌쇠의 신분이 들통나고 말 일이었습니다. “대감마님, 저는...” “자, 다음 사람!” 황희는 차가운 얼굴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무시를 당한 돌쇠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나중에 황희는 돌쇠를 따로 불렀습니다. “돌쇠야, 정말 대견하구나! 나는 네가 반드시 성공할 줄 알았다.” 황희는 돌쇠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감마님 덕분입니다.” 황희에게 절을 하는 돌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누구에게도 네가 내 집에 있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 사실을 빌미로 네 앞길을 막으려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돌쇠는 비로소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에게 차갑게 대했던 황희의 깊은 뜻을 깨달았습니다. “대감마님의 은혜가 바다와 같습니다.” 빛나는 업적.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째 되던 1433년, 황희는 일흔한 살의 나이로 북쪽 함길도로 떠났습니다. 여진족이 자주 쳐들어와 백성들을 못살게 굴자, 형편을 살펴 국경을 지킬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몇 달 만에 궁궐로 돌아온 황희는 용감한 장수를 보내어 국경 근처에 튼튼한 성을 쌓아 진을 개척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진을 설치한 다음에는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겨가 살게 하고, 그들의 생활을 널리 보살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황희의 보고에 세종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을 좋은 기회인 듯싶구려. 북쪽 국경에 진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인물을 추천해 보시오.” 이때 황희는 세종에게 김종서를 추천했습니다. 세종은 황희의 말을 들어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했습니다. 김종서는 그다음 해인 1434년부터 함길도의 경원, 경흥, 회령, 부령, 종성, 온성 등 여섯 군데에 진을 만들었습니다. 여진족은 호랑이 장군으로 소문난 김종서에게 쫓겨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종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1440년, 김종서는 7년 만에 한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종은 그에게 어떤 벼슬을 내리면 좋을지 황희와 의논했습니다. “김종서에게 우의정 자리를 맡기면 어떻겠소?” 그러나 황희는 그 일에 반대했습니다. “젊은 사람에게 갑자기 높은 벼슬을 내리면 안 됩니다. 먼저 판서의 벼슬을 내린 다음, 사람됨을 살펴서 차츰 큰 벼슬을 주도록 하십시오.” 세종은 황희의 말을 옳게 여겨 김종서에게 병조 판서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병조 판서가 된 김종서는 매우 거만해졌습니다. 하루는 황희가 김종서를 찾아갔습니다. “앉으시지요, 대감.” 김종서는 황희에게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김종서는 바로 앉지 않고 비스듬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일흔이 넘은 정승 앞에서 예의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 의자는 한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구려.” 황희가 말했습니다. 그 말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세를 바로 했습니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을 찔렀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크게 깨달은 김종서는 그 뒤로 황희는 물론 다른 대신들 앞에서도 거만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뒷날 우의정이 된 김종서는 이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길도에서는 오랑캐의 화살이 날아와 방문에 꽂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는데, 황 정승의 말을 들을 때에는 오금이 저렸소.” 역사에 길이 남을 재상. 1442년, 여든 살이 된 황희는 세종에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신은 이제 늙었으니 젊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그전에도 예순아홉 살 때인 1431년에 영의정 자리에 올라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동안 황희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세종은 황희의 청을 물리쳤습니다. 세종은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 되오. 경이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소.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경은 아직 건강하잖소? 부디 나를 좀 더 도와주시오. 매일 조정에 나오지 않아도 좋소. 간단한 일은 집에서 처리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들어오도록 하시오.” 세종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황희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황희는 7년을 더 관직에 있다가, 여든일곱 살이 된 1449년에야 마침내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고가 많았소. 내 오늘 경을 떠나보내지만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다시 부를 것이오. 부디 건강을 돌보기를 바라오.” 작별의 말을 하는 세종의 두 눈에는 아쉬움의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황희는 18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는 동안 여러 부문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황희는 먼저 백성들을 위하여 농사의 개량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즉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좋은 곡식 종자를 많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같은 땅에서 더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려면 종자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옷감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여 누에를 치도록 했습니다. 황희가 한 일 중 그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나랏법의 기초가 되는 경제육전을 고쳐 만든 일입니다.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법을 새롭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두 권으로 되어 있던 경제육전의 내용을 고치고 다듬어 다시 펴냈습니다. 또 오랑캐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김종서가 함길도에 6진을 개척하게 하여 국경을 튼튼히 했습니다. 또 책을 펴내는 데에도 힘써 노걸대, 박통사, 효경 등을 간행케 하고, 자신도 시와 가사 등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 민무구 등의 횡포를 막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법관이 함부로 벌주는 것을 금지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였습니다. 또한 신분 제도를 고쳐 많은 천민을 평민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등 황희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황희는 책을 벗 삼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책을 읽다가 피곤해지면 강가에 나가 낚시질을 하곤 했습니다. 그 이듬해인 1450년, 황희를 아끼고 사랑하던 세종이 쉰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세종 임금의 죽음에 백성들은 모두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한 사람은 황희였습니다. “상감마마, 제가 너무 오래 살았나 봅니다.” 황희의 주름진 얼굴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황희는 슬퍼하며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년 후에 아흔 살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평생을 바친 황희가 죽자, 백성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슬퍼했습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황희에게 ‘익성’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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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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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541년(증종 36년), 이이의 가족은 한성의 수진방(지금의 수송동, 청진동 일대)으로 이사를 왔습니다.부모님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대단한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이이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직접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한 번 배운 것은 절대 잊는 법이 없었고 어려운 뜻도 척척 풀이하였습니다. 신사임당은 이이에게 대학, 중용 등 사서 삼경과 글짓기, 붓글씨, 그림 그림기 등을 두루 가르쳤습니다. "아니, 베개를 두고 딱딱한 책을 베고 자다니......" 어머니는 황급히 베개를 꺼내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깰까 봐 살며시 머리를 들어올리고는 책을 빼내고 베개를 밀어넣었습니다. 꿈에서 깬 이원수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현몽인지라 노인의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이는 현룡이란 이름 대신 '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이원수의 병은 차츰 나아서 얼마 후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선비들은 이이를 흘낏흘낏 쳐다보며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선비들의 수군거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열심히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해가 질 무렵 시험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이의 당당한 태도와 효성에 다시 한 번 탄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이는 열세 살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성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을 닦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551년, 이이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봄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원수는 수운 판관의 벼슬에 올랐습니다. 수운 판관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감독하는 종5품 벼슬입니다. 이이의 둘째 형 번과 아웅 우가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신사임당의 병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습니다. "어머님, 병환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어서 아버지 님께 알려야 할 것 같사옵니다." 번과 우가 여러 번 간청하였으나, 그 때마다 신사임당은 핼쑥한 얼굴에 노여움을 가득 띠며 꾸짖었습니다. 어머니는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손수 제물을 차려 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처럼 이이는 형제들 중에서도 유달리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이이가 열아홉 살이 되던 1554년 3월,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친 그는 금강산으로 수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대대로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이이로서는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이는 조그만 암자를 찾아가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불도를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의암' 이라는 법명을 얻었습니다. 이이가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한 것은 불도와 수양을 통해서 학문과 덕을 높이 쌓아 성현이 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 동안 그가 깨달은 것 중의 한 가지는 불교와 유교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이이는 그 길로 강릉의 외갓집으로 갔습니다. 오죽헌을 외로이 지키고 있던 늙은 외할머니는 그를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 잘 돌아왔다. 난 네가 평생 절에서 도나 닦으며 지내면 어떡하나 몹시 걱정했단다. 부인 노씨는 성주 목사인 노경린의 딸이었습니다. 성격이 근엄하여 좀처럼 남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없던 노경린이 이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가 사위로 삼은 것입니다. 이이는 한동안 아내와 함께 성주에 있는 처가에서 지내며 학문에 열중했습니다. 이이는 이토록 덕망 있고 학문이 높은 학자를 만나게 된 감격으로 가슴이 설레였고, 이황 또한 훌륭한 선비를 만난 것이 몹시 흐뭇했습니다. 도산 서당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이황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이이는 이황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강릉 외가로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따뜻한 정을 나누었고, 이이는 이황의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이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인 156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스빈다. 이이의 어머니가 묻힌 자운산의 묘지에 아버지를 합장하고, 그 곳에서 3년 동안 묘막 생활을 하였습니다.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1564년 8월, 스물아홉 살이 된 이이는 다시 과거에 응시해 생원과 전사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유로이 드나들던 보우라는 승려와 한패가 되어 정치를 그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이는 곧 그들의 비행을 낱낱이 적어 명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을 본 동료 대신들은 한결같이 말렸습니다. 명종의 이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이를 관리들의 인사를 맡아보는 관청인 이조의 좌랑으로 전임시켰습니다. 이이는 관리들의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대비의 친정 일가인 심씨 일과가 제 세상을 만난 듯 권력으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중추부사 심통원의 횡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선조는 이이에게, 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춘추기사관도 겸하게 하였스빈다. "오래 전에 불도에 몸을 담은 바 있는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책입니다." 이이가 벼슬을 사양하자 선조는, "예로부터 대학자들 치고 불도에 한 번씩 빠져 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소? 스스로 깨우쳐 뜻을 새롭게 하니 오히려 장한 일이오." 라고 하며 한사고 그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건 당치도 않을 말입니다. 전하, 공연히 체통을 내세워 말할 기회를 빼았어서는 안 됩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서 나라를 바로잡는 일이라면 승지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며 이이가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이이의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더욱이 선조마저 대신들의 눈치를 보자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학문에 몰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 조정 대신들과 더 이상 함께 일을 할 수는 없다. 백성들에게도 아무런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1569년 9월, 이이는 동호문답이란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습니다. 이 책은 그 당시 나라 안사정과 정치 등에 관한 문제를 문답 형식으로 엮은 것으로, 훗날 지은 성학짐요와 함께 임금은 물론 높은 관리들이 마당히 읽어야 할 책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국가 경제에서부터 국방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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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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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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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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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소년.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습니다. 한 유명한 학자가 가마를 타고 한성으로 가기 위해 경기도 양평 땅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나귀 등에 책을 잔뜩 싣고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슨 책을 저렇게 많이 실었을까? 저 꼬마가 읽을 건 아닐 테고, 어느 선비의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군.’ 학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10여 일이 지난 뒤, 학자는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그 소년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소년은 나귀 등에 책을 잔뜩 싣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학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며칠 전에 네가 나귀 등에 책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오늘 또 나귀 등에 책을 가득 싣고 가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 책은 열흘 전에 제가 빌린 것인데, 이제 다 읽어서 돌려주러 가는 것입니다.” “뭐, 열흘 동안 이 책들을 다 읽었다고? 그게 사실이냐?” 학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 소년이 나귀 등에 실린 그 많은 책을 10여 일 만에 다 읽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그렇게 빨리 읽었다는 것이냐?” “'강목'입니다.” '강목'이란 '자치통감강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엮은 책으로서,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59권의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학자는 책의 제목을 듣고 더욱 놀라워했습니다. “네 나이에 벌써 그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단 말이냐?” “네, 이젠 책의 내용을 다 외워 버렸는걸요.” 학자는 소년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가마에서 내려 나귀 등에 실린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내용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묻는 말에 척척 대답하였습니다. 학자는 입을 크게 벌리고 감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리(마재)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부면 마현리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입니다. 능내는 지금은 중앙선 철도가 지나는 역이지만, 철길이 나기 전에는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이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한강 줄기에서 갈라진 소내라고 하는 강이 흘렀는데, 이 일대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습니다. 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여러 고을 군수를 거쳐 진주 목사를 지낸 성품이 곧은 학자였고, 어머니는 조선 시조 문학의 으뜸으로 알려진 윤선도의 증손인 화가 윤두서의 손녀였습니다. 호가 공재인 윤두서는 당대의 뛰어난 화가로 심사정, 정선과 더불어 ‘조선의 삼재’로 일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윤두서는 그림에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와 시조를 잘 지었으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윤두서의 집에는 경제와 실용에 관한 책들이 서재에 빽빽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가서 이 책들을 읽는 것이 약용에게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약용은 글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 외가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습니다. 한 번 서재에 들어가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기 일쑤였습니다. 약용은 외가에서 익힌 이러한 독서 습관 덕분에 훗날 위대한 학자가 되어 수많은 저서를 남기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약용이 태어나던 해는 당파 싸움으로 세상이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영조 임금님의 뒤를 이을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끔찍한 사건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세자가 죽은 뒤에도 당파 싸움은 끊이질 않아, 선비들은 다시 사도 세자를 동정하여 무죄를 주장하는 ‘시파’와 사도 세자를 비판하는 ‘벽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시파는 대부분이 남인이었고 벽파는 주로 노론파 사람이었는데, 그 시기에는 노론파인 벽파가 득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뜻있는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약용의 아버지도 당쟁으로 인한 화를 피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약용은 바로 이 무렵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던 약용은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해서 한 번 가르쳐 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약용이 4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장난삼아 글자를 가르쳐 보았습니다. 그러자 약용은 그 자리에서,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고 4자를 거뜬히 외었습니다. ‘음, 과연 영특하구나. 이젠 천자문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야겠다.’ 아버지는 아들의 재주에 감탄하여 직접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구쟁이 신동. 약용이 6살 때인 1767년(영조 43년), 아버지는 다시 벼슬길에 올라 경기도 연천현의 현감이 되었습니다. 약용은 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으며, 또 아버지가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이듬해인 1768년, 약용이 7살 때의 일입니다. 약용은 얼굴이 온통 모래로 뒤범벅이 되고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채 관사로 달려와서 사랑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하였습니다. 사랑방에 낯선 어른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입니다. “밖에 누구냐?” “아버지, 저예요.” “사랑엔 무슨 일이냐?” “벼루와 붓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그럼, 어서 들어와 가져가거라. 여기 계신 어른들께 인사도 드리고.” 약용은 성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놈, 모래 장난을 하다 왔구나. 그래, 붓으로 무얼 하려느냐?” “네, 좋은 시구가 떠올라서 종이에 적어 두려고 달려왔습니다.” “아니, 어린 네가 시를 짓는다고?” 방 안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놀라서 아버지와 약용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시를 지어 본 적도 없는 녀석이 무슨 시를 짓겠소. 공연한 소리를 하는 거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고 약용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럼, 여기서 그 시를 써 보아라.” 약용은 먹을 갈고 나서 붓에 먹을 묻혀 들더니, 흰 종이 위에다 다음과 같은 두 구절을 단숨에 썼습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거리의 멀고 가까운 까닭이로다.' “허어, 훌륭한 시로다.” “정말 재주가 비상한 아이로군. 신동이야.” “겨우 일곱 살의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사또, 한잔 내셔야겠소.” 손님들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약용은 공부만 하는 얌전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장난이 매우 심한 개구쟁이였습니다. 손등은 늘 시커먼데다 찬바람에 터서 갈라졌고, 머리는 헝클어져 이가 들끓었으며, 얼굴은 온통 흙투성이였습니다. 때문에 어머니 윤씨와 큰형수 이씨는 날마다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약용을 쫓아다녀야 했습니다. “도련님, 제발 얼굴이나 좀 씻고 노세요. 그렇게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 남들이 흉봐요.” 형수가 이렇게 말하며 세수를 시키려고 하면 약용은, “싫어요! 세수해 봤자 다시 더러워질 텐데 뭘.” 하고 형수의 손을 뿌리치곤 하였습니다. “이 녀석아, 넌 형수한테 부끄럽지도 않으냐? 이리 다오, 내가 씻겨야겠다.” “싫어요. 세수 안 할 거예요.” 어머니가 약용의 팔을 꽉 붙잡고 억지로 세수를 시키면 약용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약용이 9살 되던 해인 1770년(영조 46년)에 그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여읜 슬픔도 잠시뿐이었고, 약용은 다시 장난과 놀이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약용이 10살 되던 1771년(영조 47년), 그의 아버지는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약용은 아버지한테 '사서삼경'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약용은 철이 들면서 눈에 띄게 장난이 줄어들고 몸가짐도 단정해졌으며, 공부에 더욱 힘을 기울였습니다. 약용은 의문이 생기면 즉시 아버지에게 달려가 묻고 배우며 하루하루 실력을 쌓아 갔습니다. 또한 '사서삼경'을 익히며 틈틈이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도 읽었습니다. 약용은 특히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13세 때에는 두보를 본뜬 시를 지어서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1776년(영조 52년), 약용은 15세 되던 해에 승지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약용도 이젠 어엿한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해 3월,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손자인 정조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임금이 된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를 장헌 세자로 받들었고, 그해 7월에는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게 한 벽파의 정후겸과 홍인한 등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도 세자를 동정하다가 벼슬을 그만둔 시파의 선비들을 불러들여 높은 벼슬을 내렸습니다. 약용의 아버지도 이 때 정조의 부름을 받아 호조좌랑(정6품 벼슬)에 임명되어 한성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약용의 가족들은 한성으로 이사하여 명례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성에 올라온 약용은 학식이 높기로 이름난 이가환과 매형인 이승훈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며,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종손이었습니다. 약용은 16세 때인 1777년에 이승훈을 따라 이가환의 집에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형, 이 책은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들과는 내용이 다르군요. 이 책을 쓴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성호사설'의 몇 대목을 훑어보던 약용은 새로운 느낌을 받아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책을 쓴 이익 선생은 성품이 곧고 욕심이 없으며, 학문이 깊은데다가 글씨에 뛰어난 분이셨지. 학풍은 이황, 유형원의 뒤를 이었다네. 선생은 학문을 할 때에는 사실을 바탕으로 증명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네.” “그분의 주장이 옳은 것 같아요. 벼슬은 어디에까지 이르셨나요?” “선생은 처음에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서려고 하였으나, 그만두고 혼자 집에서 학문을 닦는 데에만 힘썼지. 성호 선생은 이론에만 치우치는 유교를 비판하고, 실학에 한평생을 바치신 분이라네.” “실학은 무엇이지요?” “쓸데없이 논쟁만 벌이는 학문에 반대하여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지. 백성들이 쓰는 농기구 등을 편리하게 만들어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려는 학풍이라네. 선생은 양반도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농사나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셨고, 과거 제도의 모순점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셨지. 또한 당파 싸움의 원인을, 관직의 수는 적은데 관리가 되려는 선비는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네.” “정말 옳은 주장이군요. 지금까지 배워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주장인걸요. 이 실학은 어디서 일어났나요?”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지. 이 책에는 그런 영향을 받은 정치, 경제, 제도 등 실제 사회에 쓸모 있는 것들만 실려 있다네. 성호 선생은 지리학과 의학 등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보급하기에 힘썼지. 아마 자네가 이 책을 읽으면, 큰 이치를 깨달을 걸세.” “그럴 것 같군요. 이 책을 좀 빌려 주세요.” 약용은 이가환에게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이 책엔 시나 역사 외에도 천문, 지리 등 새로운 것이 많다네. 또한 곽우록은 정치의 폐단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기록한 책이네. 언제든지 빌려다 보게나.” 이가환은 이처럼 책에 대한 설명까지 해 주면서 흔쾌히 빌려 주었습니다. 약용은 그 날로 책을 빌려다가 열심히 읽었습니다. ‘과연, 새로운 학문이구나. 모든 학자와 관리들은 이 책을 한 번쯤 읽어 두는 것이 좋겠군.’ 약용은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읽으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이익이 지은 책 두 권은 이처럼 약용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학과의 만남. 약용이 17살이 되자 아버지는 전라도 화순 현감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엔 경상도 예천 군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약용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직접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실제로 보고 들은 경험은, 그의 학문을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고 깊게 하였으며, 실제 사무에도 밝게 하였습니다. 1782년(정조 6년), 정약용의 아버지는 울산 도호 부사(종3품 벼슬)로 임명받았습니다. 이 때 정약용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한성에 남아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한성에 남은 정약용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83년, 22살의 나이로 소과 초시를 거쳐 회시에 합격하였습니다. 또한 그 이듬해 여름, 정약용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하게 된 것입니다. '중용'은 유교 경전의 하나로, 그 내용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임금님 앞에 나아가 글을 강의하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실수를 해서는 아니 된다. 미리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정약용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설명하기 힘든 곳이 있으면, 곧 수표교 근처에 살고 있는 광암 이벽을 찾아가서 묻고 토론하였습니다. 이처럼 경연에 앞서 철저한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의 강의는 늘 정조를 흡족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중용' 강의를 듣고 난 정조가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경연에서 강의하는 선비들 중에서는 정약용이 제일이야. 그의 강의는 조리 있고 어려운 대목도 알기 쉽게 풀이하거든.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야.” 김상집이란 신하가 이 말을 듣고 정약용에게 전하였습니다. “이보게, 상감께서 자네의 강의가 궁중에서 제일이라고 칭찬하셨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여 크게 성공하길 바라네.” “황공하옵니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정약용은 황송해하며 한층 더 학문 연구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이 무렵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정약용은 고향인 마재의 큰형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낸 뒤, 배를 타고 마재 근처에 있는 두미 마을로 오게 되었습니다. 배 안에는 이벽과 둘째 형 정약전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배 안에서 정답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이 때 이벽으로부터 처음으로 ‘서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형님, 방금 말씀하신 서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정약용이 불쑥 이벽에게 물었습니다. “서학이란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네. 자네가 크게 감명받은 성호 선생의 학문도 여기에 근본을 두고 있다네.” “그럼, 서학에 관한 책도 있나요?” “있고말고. 자네 매형(이승훈)이 작년 겨울에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가져온 책이 있지.” “그럼, 우리 매형도 서학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정약용이 놀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알다뿐인가. 그는 베이징의 남천주당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그 곳의 북천주당 신부한테서 세례를 받았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영세를 받은 신자야. 그렇지만 그런 소문을 내지는 말게.” 이벽은 은근하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볼 수 있습니까?” “물론 볼 수 있지. 한성에 올라가거든 내게 오게나.” 이리하여 정약용은 서학에 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무렵, 우리 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서학에 흥미를 가졌던 학자들은 대다수가 영조 때 세력을 잃은 남인이었습니다. 서양의 새 지식을 한문으로 번역한 책을 구해 읽던 선비들 중에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에는 나라에서 서학을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약용도 서양의 천문, 지리, 농사 정책, 수리 기술, 측량법 등에 관심을 갖고 그 분야에 관한 책을 읽으며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벽파 사이에서 서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유교는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국시이옵니다. 그런데 요즈음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사오니 부디 서학을 철저히 금지하시옵소서.” 그들은 끊임없이 정조에게 서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서학 연구를 눈감아 주고 있던 정조도 빗발치는 반대 주장에 못 이겨, “앞으로는 서학을 연구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전국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천주교는 비밀리에 전파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신도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정약용은 어전 강의를 계속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것은 주로 이익의 실학과 서학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정조는 젊은 정약용을 특히 아껴, '국조보감' 한 질과 종이 백 장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승지를 시켜 '병학통'이라는 책을 보내, “그대는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 책을 내리니 연구하였다가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면 나아가 싸우도록 하라.” 하고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조의 두터운 신임과 사랑을 받던 정약용은 25세 때 둘째 아들 학유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8세 되던 1789년(정조 13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가주서(정7품 벼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예문관의 검열(정9품 벼슬)이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정조의 총애를 받자, 이를 시기한 벽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약용이 서학을 연구하고 있다며 헐뜯었습니다. 서학은 나라에서 금지하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정조는 하는 수 없이 그를 충청도 해미현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1790년(정조 14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억울하게 죄를 얻어 귀양을 떠나는 정약용은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죄가 없는지라, 정조는 10일 만에 정약용의 귀양을 풀어 주고 다시 한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정약용이 한성에 도착하자 정조는 그를 불러 위로하였습니다. “그대는 왜 하필이면 서학을 연구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를 귀양 보내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마마...” 정약용은 자신을 아끼는 정조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살림에 큰 보탬이 되는 서학을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학의 소용돌이. 정약용은 다시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 정언(정6품 벼슬), 사헌부 지평(정5품 벼슬)을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조에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이롭게 쓰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정조도 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약용의 청을 선뜻 수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당파 사람들을 두루 기용하는 탕평책을 쓰면서도, 서학을 연구하며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를 옹호하였던 시파 학자들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정조는 비밀리에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이익운 네 사람에게 분부하였습니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 훌륭한 선비를 추천해 보오.” 정약용 말고 다른 세 사람은 권심언 한 사람만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혼자서 노론, 소론, 남인 가릴 것 없이 28명이나 천거하였습니다. “그대는 당파에 휩쓸리지 않는 참으로 공정한 인물이로다. 내 그대가 추천한 28명을 모두 등용하리라.” 정조는 정약용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한편 벽파는 계속하여 시파 학자들의 서학 연구를 문제삼아 헐뜯었습니다. 그러던 중 1791년(정조 15년) 11월, 전라도 진산군에서 윤지충이란 사람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윤지충은 양반이면서도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외삼촌인 권상연과 의논하여 어머니의 장례를 상복도 없이 천주교 의식대로 치렀습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조정에 보고가 들어오자, 벽파 사람들은 좋은 기회로 여겨 들고일어났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운 선비가 그런 불효를 저지르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윤지충의 행동은 이 나라의 도덕을 땅에 떨어뜨린 처사이옵고, 정치와 사회 제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일입니다.” “이는 조정 대신들이 서학을 옹호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러다가는 이 나라의 충효 정신은 모조리 없어질 겁니다. 상감께서는 이를 굽어 살피셔서 이 기회에 서학을 뿌리뽑으시기 바랍니다.” 벽파는 이렇게들 떠들며 시파를 몰아세웠습니다. 시파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정조도 어찌 할 도리가 없어서, “진산 군수 신사원에게 명을 전하라. 윤지충과 권상연을 당장 사형에 처하라고 일러라.” 하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벽파에서 천주교 책임자로 지목한 권일신을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진산 사건’ 또는 ‘신해사옥’이라 불리는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 사건입니다. 그러나 서학을 공격하는 벽파, 곧 공서파의 이기경 등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경한 주장을 폈습니다. “이 기회에 서학을 옹호하는 시파의 무리를 뿌리째 없애야 합니다!” 이기경은 정약용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홍낙안 등과 함께 신서파를 계속 공격하였습니다. “상감마마, 서학을 하는 사람들이 믿는 천주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천주교가 퍼진다면 임금을 섬기는 충성이나 어버이에 대한 효도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서학을 믿는 신서파를 엄히 다스려 주시옵소서.” 이기경이 너무나도 격렬하게 공박하자 정조는 크게 노하여, “저런 발칙한 놈이 있나! 이것은 선왕이신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탕평책에 도전하는 일이다. 저 자를 당장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시파 사람들은 이에 대해 기뻐하였지만 정약용만은, “기뻐할 일이 아니오. 이제 곧 우리들도 재앙을 면치 못할 겁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오.”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정약용은 귀양 간 이기경의 집에 자주 들러 식구들을 위로해주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승지 이익운을 통해 이기경의 귀양을 풀어 달라고 정조에게 자주 간청하였습니다. 정약용의 간절한 노력으로 이기경은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벼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792년(정조 16년) 3월, 31세의 정약용은 정6품 벼슬인 홍문관 수찬이 되었습니다. 홍문관은 옥당이라고도 불렸는데,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관청이었습니다. 이곳의 관리들은 임금에게 강의를 하는 경연관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4월 9일, 진주 목사로 있던 정약용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약용은 급히 내려가 아버지를 마재에 장사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거처하며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이 무렵 정조는 미행을 나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며 그것을 정치에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던 자기 아버지 장헌 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 성을 쌓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수원에 성을 쌓는 일을 맡아 진행해 주시오.” 정조는 마재에 있는 정약용에게 분부를 내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비용을 절감하고 백성들의 노고를 줄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위엄 있고 튼튼한 성을 쌓을 수 있을까?’ 정약용은 서양의 축성 기술을 소개한 책 '기기도설'을 읽으며 연구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성 쌓는 방법을 적은 '수원성제'를 지어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그 밖에 성을 쌓는 데 필요한 기구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기중가설'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습니다. 이로써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는 데 쓰는 ‘거중기’라는 지금의 기중기와 비슷한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원성을 쌓는 데 드는 비용과 백성들의 노고를 많이 줄일 수 있었고, 성 쌓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많이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수원성은 1794년(정조 18년)에 쌓기 시작하여, 1796년 8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수원성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발달된 건축 양식을 갖춘 성곽으로, 축성법에 새로운 기원을 가져왔습니다. 암행어사의 괴로움. 1794년 7월, 정약용은 성균관 직강(정5품 벼슬)을 거쳐, 10월에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습니다. 벽파 사람들은 정약용을 시기하여 그를 몰아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너무나 두터웠기 때문에 섣불리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였습니다. 10월도 다 지나간 어느 날, 정조는 정약용을 대궐로 불러들였습니다. 정조는 주위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오. 그대에게 중책을 맡기고자 하니 성심껏 일해 주오.” 정약용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조는 말을 이었습니다. “지금 경기도 마전현과 그 부근 백성들의 원성이 높다 하오. 관찰사인 서용보의 협잡질이 심한 모양이오. 그대를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하니 모든 사실을 밝혀 내어 엄중히 다스려 주기 바라오.” 이 무렵 서용보의 집에 묵고 있던 문객이 마전현의 향교 터를 빼앗아 서용보에게 바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평소 서용보의 횡포도 아주 심하였으므로 그 소식이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에게 맡겨 주신 중책을 어김없이 거행하겠나이다.” 정약용은 자신을 믿어 주는 정조가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는 곧 어전을 물러나와 연천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이 기회에 백성들의 생활 형편도 샅샅이 살펴 두리라.’ 초라한 시골 선비 차림의 정약용은 적성현의 한 마을에서 저녁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니, 벌써 저녁밥을 먹어 버렸나? 밥 짓는 연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정약용은 마을 어귀에 있는 조그만 초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울타리가 없는 그 집에는 깨진 독이 몇 개 있을 뿐 부엌에는 솥도 없었습니다. 창호지가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방문은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인가 보군.” 정약용은 그 집을 지나쳐 싸리문이 있는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내자 곧 방문이 열리고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내다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누구시오?”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들렀습니다.” 정약용이 공손히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어쩐다? 길손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이 도리입니다만 대접할 음식이 없어서...” 노인은 말끝을 흐리며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룻밤 자고 갈 수만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럼,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정약용은 곧 빈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랫동안 불을 때지 않았는지 공기가 싸늘했고, 고약한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막 괴나리봇짐을 내려놓고 앉았을 때 안방에서 아이들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엄마, 배고파. 하나 더 줘.” “나도 하나 더 줘.” “얘들아, 조금씩 아껴 먹어야지. 착한 아이들은 그렇게 보채는 게 아니란다.” 아이들을 달래는 부인의 말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노인이 찐 고구마 몇 개와 찬물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아이들에게 주라며 사양했습니다. “전부터 이렇게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습니까?” “아닙니다. 새 관찰사가 온 뒤부터 이 모양입니다. 농토는 좀 있지만 농사를 지어도 빚 갚기에 바빠 늘 이처럼 굶주려야 하지요.” “빚이라니요?” “그 동안 관가에서 곡식을 조금씩 꾸어 왔는데, 그 이자가 워낙 비싸서 빚이 점점 늘어났거든요. 그리고 두 손자가 아직 어린데도 군적에 등록되어 있어서, 군포를 무느라고 빚을 졌지요. 게다가 조세도 물어야 하고요.” 정약용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노인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일찍이 그 집을 나왔습니다. 정약용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고통과 관리들의 횡포를 낱낱이 보고 들었습니다. 그가 분노를 참으며 마전현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마전 향교는 소문대로 거의 다 헐려 가고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공사장의 한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이보시오. 이렇게 좋은 터에 자리잡은 향교를 어째서 헙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정약용을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기 나무 그늘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자는 관찰사와 잘 아는 사람이오. 그런데 그 자가 이 땅을 빼앗아 관찰사한테 바치려고 향교를 허무는 거랍니다.” 정약용은 그 곳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한결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정약용은 마전을 떠나 연천으로 향하였습니다. 그 곳도 마전과 마찬가지로 가는 곳마다 관찰사와 고을 수령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정약용은 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조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치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을을 돌아보니 가을인데도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부패한 관리들 때문이니 이를 공정히 처리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결국 서용보와 그 밑의 수령들은 모두 벼슬을 빼앗겼습니다. 그러자 서용보는 크게 앙심을 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약용을 모함하여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암행어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정약용은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 사건. 정약용은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이듬해인 1795년에는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차례로 역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 6월경이었습니다.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 인해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주문모는 국법으로 금지하는 천주교를 몰래 포교했는데, 신도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관가에 밀고하였던 것입니다. “주문모를 잡아들여라!” 명령을 받은 포졸들이 이집 저집을 뒤지며 찾아다녔으나 주문모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강완숙이라는 여자 신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모 신부를 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를 도왔던 최인길, 지황, 윤유일 등만 잡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정약용을 미워하던 공서파가 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모함하는 상소문을 정조에게 올렸습니다. 정조는 상소문을 읽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서학은 이미 2백 년 전에 이수광이 수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학설이 유교의 바탕에 어긋남이 없다고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래도 공서파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정약용 등을 몰아 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천주교를 믿고 서학을 연구하는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 그리고 이가환에게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같은 공서파의 여러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여론을 일으켰습니다. 정조는 빗발치는 상소에 못 이겨 마침내 이가환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임명하여 잠시 한성을 떠나 있게 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비록 작은 직책이긴 했지만 금정 찰방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근처의 명승지를 구경하며 외로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러는 한편 퇴계 이황의 학문을 연구하고, 농민들의 생활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시에 담아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낙엽이 지는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정약용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성으로 올라와 유양위 부사직을 맡아 보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직책은 군사령부의 중견 간부쯤 되는 자리였습니다. 중앙의 높은 관리였던 과거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직책이었지만, 정약용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 불평없이 성실하게 맡은 일을 잘 해내자 정조는 다시 정약용에게 규장각에서 일하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정약용은 정조의 명으로 1796년 10월부터 규장각에서 규장전운을 편찬하였습니다. 이 책은 옥편과 같은 한자 사전인데 학술적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사또. 그 해 12월, 정약용은 병조참지(정3품 벼슬)를 거쳐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학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또다시 정약용을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정약용은 1797년(정조 21년) 6월, 다시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종3품 지방관)로 밀려났습니다. 뒷날 정약용은 '목민심서'라는 책 속에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의 벼슬이 가장 어려운 직책’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바로 그 어려운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곡산은 황해도 북동쪽에 치우쳐 있는 산간 벽지로, 농토가 적고 땅이 메마른데다가 인심마저 각박한 곳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종전의 부사들이 자기 혼자만 편하게 지내려고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했기 때문에 관리들의 기강도 해이해져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부임하자마자 고을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문서를 뒤적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관아의 문 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또를 만나러 왔소. 어서 사또를 만나게 해 주시오.” 애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한 아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디서 행패야! 지난번에 잡아 가두려다가 눈감아 주었더니 더 방자해졌잖아. 썩 물러가지 못할까!”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굶어 죽을 바에야 차라리 매맞아 죽는 게 낫겠다. 차라리 날 죽여라.” 정약용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이방을 불러 까닭을 물었습니다. “웬 소란이냐?” “네, 저 자는 사또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저렇게 소란을 피웁니다. 지난번 사또가 부임해 오셨을 때도 군포 문제로 백성들을 데리고 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전에 군포를 얼마나 받았느냐?” “면포 한 필씩이었는데, 면포가 없으면 9백 전의 돈을 받았습니다.” “그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그를 이리 불러들여라.” 이윽고 곡산에서 성품이 제일 곧은 이계심이란 사람이 불려 왔습니다. 그는 벼슬아치들의 부정을 보아 넘기지 않기로 유명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계심이라 하옵니다.” “너는 전에도 난동을 부리고 도망갔다고 하는데, 오늘 또 소란을 피우다니 참으로 방자하구나!” 정약용이 호되게 꾸짖자, 이계심은 머리를 조아리며 또랑또랑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사또, 저의 죄를 알고 있기에 오늘 자수하러 왔습니다. 다만 사또께 이 고을의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나서 벌을 받겠습니다.” 그는 밖에서 소란을 피우던 때와는 달리 아주 온순했습니다. “고을 사정이라니?” “백성의 고통을 10여 가지 적어 왔습니다. 이것을 살펴보시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소서.” 이계심은 품 속에서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바쳤습니다. 정약용은 ‘민막 10여 조’라는 제목이 붙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약용이 암행어사 때 보고 들은 것과 같았습니다. 정약용은 땅바닥에 꿇어앉은 이계심에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관아의 잘못을 보고도 제 몸을 아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데, 자네는 홀로 사또와 아전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나섰구먼. 자네 같은 의로운 사람에게는 상을 내려야 마땅하지.” 그런 다음 이계심에게 술을 대접해서 돌려보냈습니다. 정약용은 이계심이 지적했던 잘못을 하나하나 고쳐 나갔습니다. 먼저 포목을 재는 자를 바로잡았습니다. “관가의 자와 백성의 자가 다르니 백성들의 피해가 큰 것은 당연하다. 당장 이를 바로잡도록 하라. 그리고 관가에서 포목을 받아들일 때면 으레 그 값이 뛰어오르니, 포목 값이 쌀 때 관가의 돈으로 미리 사 두어 백성들의 피해를 막도록 하라.” 정약용은 아전들에게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어 이렇게 분부하였습니다. “호적과 토지 그리고 병적 등록 사무를 사실과 같도록 정확히 정리하라. 또한 호포를 함부로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알겠느냐?”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아전들은 정약용의 명령대로 하나하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았습니다. 한편 정약용은 질병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연두가 유행하자 그 예방과 치료를 위해 마과회통이란 책을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약용은 송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곡산에 부임한 해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그는 동헌 뒷산 기슭의 바위 틈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정약용은 그 물을 받아 마셔 보고는 아전들에게 분부하였습니다. “괭이와 삽을 가져오고, 기름종이도 대여섯 장 구해 오게.” 잠시 뒤 관청에 딸린 하인들이 기름종이와 괭이, 삽을 들고 왔습니다. 정약용은 그들에게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윽고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정약용은 그 구덩이 바닥과 벽에 기름종이를 깔고, 적당한 높이로 물을 댄 뒤 물길을 막았습니다. “자, 이제 됐네. 내일 다시 오세.” 정약용은 아전들을 데리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이튿날 정약용은 아전들과 함께 그 곳으로 갔습니다. 구덩이의 물은 밤 사이에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그 얼음 위에 왕겨를 덮고 다시 기름종이를 깔아 전과 같이 물을 대어 얼렸습니다. 이렇게 대여섯 번 거듭하고 마지막엔 그 위에 짚을 두툼히 덮어 두었습니다. 이듬해 여름, 청나라의 사신이 황해도를 거쳐 한성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신들은 오랜 여행과 더위에 지쳐 힘들어하였습니다. “아유, 더워. 시원한 얼음물 한 잔만 먹었으면 좋겠네.” 하지만 한여름에 얼음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정약용은 겨울에 얼려 두었던 얼음을 파내어 청나라 사신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땅에 묻고 짚으로 꽁꽁 덮어 두었기 때문에 얼음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은 이처럼 스스로 공부한 것을 실생활에 유용하게 응용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러던 1798년(정조 22년), 정조는 곡산의 정약용에게 비밀 명령을 내렸습니다. 황해도의 여러 수령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그릇된 방법으로 거둬들인다고 하니 이를 조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약용은 곧 황해도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비리를 조사하고 처리하였습니다. “과연, 정약용이로다. 그가 아니고서는 일을 이처럼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조는 이렇게 말하며 정약용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천주교 탄압과 계속되는 모함. 1799년(정조 23년)이 되자, 정약용은 다시 반대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약용의 죄목은 여전히 서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는 천주교 박해를 막아 주던 신서파의 우두머리인 영의정 채제공이 죽은 뒤라, 공서파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마침내 정약용은 이에 대하여 자신의 무죄를 밝히는 상소문인 자명소를 지어 올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뜻도 아뢰었습니다. 7월 26일, 마침내 정조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드디어 16년 동안의 벼슬길을 떠난 정약용은, 1800년(정조 24년) 봄에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정약용은 고향 집에서 형들과 학문을 토론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을 따서 자신의 거처를 ‘여유당’이라 이름짓고 그것을 호로 사용하였습니다. 고향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정조가 보낸 규장각의 서리가 정약용을 찾아왔습니다. “상감께서 이 책을 보내시며 다섯 권은 대감 댁의 가보로 자손에게 전하고, 나머지 다섯 권은 제목을 붙여 도로 가져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서리의 말을 들은 정약용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을 향한 정조의 사랑이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불러 나랏일을 보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보지 못한 채, 그 해 6월 28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파인 남인들을 몰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01년(순조 1년) 2월 9일, 정약용과 이가환이 옥에 갇혔습니다. 이어서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이기양, 권철신과 그 밖의 여러 사람들도 투옥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둘째 형인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가환과 이승훈, 셋째 형인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신유박해’라 불리는 천주교도 박해 사건입니다. 2월 27일 밤에 감옥에서 풀려난 정약용은 즉시 길을 떠나, 새재를 넘어서 3월 9일에 장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한 늙은 군교의 집에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바깥출입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힘썼습니다. “봄볕이 따스하고 꽃도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들에 나가 봄바람이라도 좀 쐬시지요.” 정약용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늙은 군교는 이렇게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방 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책 쓰는 일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한편, 한성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자수한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사형을 당했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왕실의 친척이라도 가리지 않고 벌을 받았습니다. 10월에는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조선의 천주교도 탄압 상황을 비단에 적어 청나라로 가는 천주교도를 통해 베이징에 있는 신부에게 보내려다가 발각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죽었고,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용과 정약전도 다시 한성으로 끌려 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서파 대신들은 이 기회에 정약용 형제를 없애 버리려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너희 형, 정약종이 국법을 어기고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정약용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아우가 어찌 형님 일의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때 마침, 황해도에서 돌아온 정일환이 순조에게 정약용의 무죄를 아뢰었습니다. “정약용은 황해도 지방에 있을 때 세운 공이 큽니다. 그 곳 백성들의 칭송이 아직도 자자하니, 결코 죽여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또한 압수한 문서를 보아도 그가 천주교도와 내통한 증거는 없습니다.” 덕분에 정약용은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전라도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18년간의 귀양살이. 11월 5일, 정약용은 형 정약전과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쌀쌀한 바람과 황량한 들판이 두 사람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 시각이 다가왔습니다. 나주 못 미친 율정이라는 곳에서 강진과 흑산도로 가는 길이 갈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은 왠지 형님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흑산도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입니다. 형님, 어떻게 혼자서 그런 곳까지 가시렵니까?” 그는 이별을 앞두고 깊이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두 형제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진에 이른 정약용은 고을 변두리의 주막에 방 한 칸을 얻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8년 동안에 걸친 그의 기나긴 귀양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약용은 문밖출입도 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1803년에는 '단궁잠오', '예전상의 광', 1804년에는 '아학편훈의' 등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이듬해인 1805년(순조 5년) 겨울, 저술에만 몰두하던 정약용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큰아들 정학연이 아버지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아버님, 이 외딴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정학연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괜찮다. 너와 식구들이 고생이 많구나...”정학연은 며칠 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아버지를 위로한 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에 사는 윤단이라는 사람이 정약용을 극진하게 도왔습니다. 윤단은 정약용을 자기 고향인 귤동(지금의 만덕리)의 다산 기슭에 있는 산정으로 데려갔습니다. 그의 산정에는 1천여 권의 책이 갖추어져 있어서 정약용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정약용은 이때부터 ‘다산’이란 호를 썼으며, 이 곳에 아담한 초가를 지어 생활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등 안동 김씨 일족이 정권을 잡고 온갖 횡포를 부렸지만, 정약용은 오직 백성들만을 생각하며 집필에만 온 정신을 기울였습니다. 정약용은 유교 경전 연구에 관한 책을 많이 썼지만, 중국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덧붙여서 우리 현실에 맞게 글을 써 나갔습니다. ‘불쌍한 백성들을 살리려면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된 제도를 고쳐야 한다. 나는 상소도 올릴 수 없는 죄인이니, 내가 보고 겪었던 일을 책으로 써 내자.’ 정약용은 이렇게 마음먹고 1817년(순조 17년)에 '경세유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정치, 토지, 조세 제도 등을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칠 것과, 중앙 행정 기구를 간소화하고 관리의 수를 줄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양반과 평민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관리로 채용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정약용이 이렇게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흑산도로 귀양 간 형 정약전이 지난해에 귀양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지만 꾹 참고 계속해서 책을 써 나갔습니다. 한편,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32권 16책에서 중단하고 목민심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18년(순조 18년), 봄이 다 가기 전에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목민심서는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며, 정약용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기 바로 전에 완성된 것으로, 그의 애국애민 정신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목민심서는 관리가 수령으로 임명되어 그 고을에 부임할 때까지,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그리고 부임 기간이 끝나고 떠날 때까지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일들이 12편으로 나뉘어 항목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적은 것이므로 당시의 실정에 적합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에 남을 대학자. 1818년(순조 18년) 8월 정약용은 여론에 힘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마재의 고향 집으로 돌아와서도 책을 통해 탐관오리를 비판하고, 당파 싸움에 대해 풍자했습니다. 그 결과 1819년(순조 19년), 흠흠신서 30권과 우리말에 관한 연구인 아언각비 3권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해 겨울, 조정에서는 정약용을 다시 관리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관리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1832년 겨울부터 정약용의 고향 마재 부근에는 가뭄이 들어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장사꾼들이 곡식을 모조리 사들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곡식 값이 오르자 농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여 아우성을 쳤습니다. 정약용은 이 때의 쓰라린 마음을 '황년수촌춘사십수'라는 시집에 담고, 굶주린 농민들이 무리를 지어 일어설 줄 모르는 것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시와 산문에는 불의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이 나타나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후세에 훌륭한 작품을 남긴 사람이 많지만, 그 당시 사회의 잘못을 꼬집은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암행어사로서 또는 귀양살이를 통해 직접 보고 느낀 당시의 현실 속에서 사회의 좋지 않은 점을 꼬집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문에 대한 정약용의 정열과 사회 개혁의 의욕은 좀처럼 식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평생 동안 '여유당집' 250권과 '다산총서' 246권 등 무려 508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도 경학,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문학 등 여러 영역에 걸쳐 넓고 깊었습니다. 그 모든 책들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경세제민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명분을 중시하는 주자학에서 실리를 중시하는 양명학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그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이이의 주자학적 실천 윤리와 홍대용 등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합쳐 집대성하였고, 거기에다 서양의 사상과 과학 기술까지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의 이러한 노력은 사회에 반영되지 못했고, 그가 저술한 책도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진보적인 새 학풍을 집대성한 실학파의 최고봉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정약용은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에 여유당에서 조용히 한 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였습니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평생을 보낸 대학자 다산 정약용.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애국애민의 숭고한 정신은 후세에 큰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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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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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른 봄날 새벽이었습니다. 한 사내아이가 안개 낀 시냇가를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얼어 있던 시냇물이 어느덧 봄기운에 녹아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주위는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났구나!" 아이는 흥겹게 콧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나이가 6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천자문을 옆구리에 끼고 한가롭게 시냇가를 거닐었습니다. "새벽 공기는 언제나 상쾌하거든." 아이는 중얼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그 때 인기척에 놀란 산새 한 마리가 푸드득 공중으로 날아올랐습니다.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구나." 서글서글한 눈매에 총명하게 눈을 반짝이는 아이는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스승님이 기다리시겠다. 빨리 가야지." 아이는 더욱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리채가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천자문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더 재미있단 말이야."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신나게 걸어갔습니다. 아이의 훤한 이마에는 어느 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이윽고 아이가 이웃 마을 어귀에 닿았을 때 차츰 새벽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는 어느 아담한 초가 안으로 달음박질하며 들어섰습니다. 그 집 사랑채 앞에 다다른 아이는, "스승님!" 하고 우렁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방 안에서 한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는 방문을 활짝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스승님, 밤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오는 도중 춥지는 않았느냐?" 아이를 맞이한 사람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자상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 조금 춥습니다. 가끔 기침도 나고요." 아이는 얌전히 앉아 천자문을 펼치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런, 감기에 걸린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이불을 잘 덮지 않고 잤구나." "아니옵니다. 한 이불 속에서 형들과 함께 나란히 누워 자는데, 맨 가장자리에서 자는 형이 이불을 자주 걷어차기에." "그 형은 기침을 하지 않더냐?" 노인이 물었습니다. "네." "형의 기침을 네가 산 게로구나." 노인은 대견한 듯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아이는 형이 감기에 걸릴까 봐 제가 가장자리로 가서 잤던 것입니다. 노인은 비스듬히 앉아서 또박또박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글을 읽고 있던 아이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지금 앉아 계십니까, 아니면 누워 계십니까?" 이 말에 깜짝 놀란 노인은 몸가짐을 바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글은 내가 가르치는데 몸가짐은 오히려 내가 이 아이에게 배우다니, 대체 누가 스승이고 누가 학생이란 말인가?' 아이는 '배울 학' 하고 글자를 읽고 나서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스승님, '배울 학' 자에 아들이 들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학 자 맨 밑에 '아들 자' 자가 있으므로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렇구나." 노인은 아이의 말이 대견스러웠습니다. "그 위에 '아비 부' 자도 숨어 있습니다!" "'아비 부' 자라고? 어디에?" 노인은 '학' 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아비 부' 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 있지 않사옵니까?" 아니는 '학' 자에서 부분을 가리켰습니다. "'아비 부' 자는 이렇게 쓰는 거다." 노인이 손가락 끝으로 자를 써 보았습니다. "그래, '배울 학' 자 속에 들어 있는 아비와 아들을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배움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없는 것 같습니다." "흠." "그리고 스승은 학생을 아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학생은 스승을 아버지를 대하듯 섬겨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네 말이 옳구나!" 노인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 아이가 내게 배우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내가 이 아이한테 배우는구나!' 노인은 이런 생각이 들어 자세를 바로잡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글자 한 글자 그 뜻을 깊이 새기며 공부를 한 이 아이가 훗날 우리 나라 유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퇴계 이황입니다. 어머니와 숙부의 가르침.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6일,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서 이식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황은 그의 본명이고 퇴계는 호입니다. 또 퇴계 말고 도옹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를 계호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경호로 고쳤습니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서홍이었습니다. 진사였던 이황의 아버지는 벼슬보다 학문을 익히며 지내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이식의 첫째 부인인 김씨 부인은 3남 1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아들이 죽고, 김씨 부인도 2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이식은 박치의 딸과 재혼하였습니다. 이 박씨 부인에게서 아들 4형제가 태어났는데, 그 중의 막내아들이 바로 이황입니다. 그런데 이식은 막내아들이 태어나고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자라야 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이황의 어머니 박씨 부인은 첫째 부인인 김씨 부인이 낳은 맏아들 이잠에게 집을 물려주고, 거처를 따로 마련하여 나와 살았습니다. 그 후 이황의 어머니 박씨는 낮에는 들에 나가 일하고, 밤이면 길쌈을 하는 등 쉴새없이 바쁘게 일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낳은 어린 자식들을 키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무렵은 연산군의 혹독한 정치로 세상이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을 바치느라 어려운 살림을 근근이 이어 가고 있었고, 정치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관리들도 덩달아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니 여자 혼자의 힘으로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며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는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힘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늘 자식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글공부를 할 때 글을 잘 외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먼저 몸가짐을 항상 바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르게 글을 익힐 수 있고, 또 학문을 옳게 사용할 수 있단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렇게 가르치며,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늘 몸가짐을 조심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무엇보다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 여겼던 터라 부모들은 자식들의 품행에 늘 신경을 쓰며,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어머니가 정성을 쏟아 기른 보람이 있어 이황의 형제들은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이황은 눈에 띄게 예의바르고 마음씨가 착해,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12살이 된 이황은 숙부인 이우로부터 공자의 말과 행동을 적은 논어를 배웠습니다. 시문에 뛰어나고 청렴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이우는 호조, 형조의 참판을 거쳐 강원도와 경상도의 관찰사를 지내다가, 1512년(중종 7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우는 조카 이황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보고 정성껏 이황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이황은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우다가 그 책에 나오는 '이' 란 글자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숙부는, "네 스스로 깨치도록 해 보아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황은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조심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숙부님,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일의 옳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숙부는 이황을 칭찬하며 매우 흐뭇해했습니다. "그 뜻을 벌써 이해하다니, 정말 장하구나!" 이황도 매우 기뻤습니다. 숙부는 평소 좀처럼 남을 칭찬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승에 계신 네 부친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흐뭇해하시겠느냐. 너는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빛내고 나아가서는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될 것이다." 숙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숙부는 이황에게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황은 자란 후에도 숙부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뒷날 숙부에 대하여 이황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편찮으셔도 숙부님은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으셨다. 문장과 시에 탁월하셨고, 효와 의가 두터우셨다." "뿐만 아니라 웃어른을 공경하는 데 정성을 다하시고, 아랫사람과 어려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셨다. 숙부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황 형제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던 숙부는 1517년(중종 12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이황은 슬픔을 딛고 더욱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그는 사서 같은 경서 이외에도 시문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국 송나라 시인인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이황이 일찍부터 학문의 이치에 얼마나 깊이 통달해 있었는가는 그가 19살 때 지은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숲 속 초당에서 만 권 책을 벗삼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10여 년이 흘렀구나. 이제야 근본 이치를 깨달은 듯도 하여, 겉도는 마음 잡아 하늘을 보네. 시의 내용처럼 이 무렵 이황의 학문은 철학적인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황은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밤낮으로 공부에 몰두하면서 주역의 뜻을 깨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학문 연구의 자세. 1521년(중종 16년), 21살이 된 이황은 진사 허찬의 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황은 결혼한 뒤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여 몸이 몹시 쇠약해졌습니다. 어느 날 허씨 부인은 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사랑방을 건너다보며 걱정을 했습니다.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는데 저렇게 학문에만 열중하시다가 병이라도 나시면 어쩌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허씨 부인은 이황에게 간곡히 말했습니다. "서방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요. 이제부터는 너무 늦게까지 책을 보시지 말고 일찍 주무세요." "허허허, 알았으니 너무 걱정 마시오." 이황은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허씨 부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인을 불렀습니다. "사랑방 앞을 지키다가 서방님이 불을 끄고 주무시거든 내게 와서 일러라." "네!" 그날 밤 하인은 사랑방 문 앞을 지켰습니다. "밖에 누가 있느냐?" 이황이 책을 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문을 열었습니다. "소인입니다." 하인은 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습니다. "안방 마님이 서방님께서 주무시는 것을 보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지금 곧 잘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자거라." 그래도 하인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서방님께서 주무시기 전에 제가 먼저 잠을 자면 안방 마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이황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습니다. 곧이어 사랑방이 어두워졌습니다. 하인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 제 방에 가서 누웠습니다. 허씨 부인도 컴컴해진 사랑방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 골방에서 자고 있던 하인이 허씨 부인을 깨웠습니다. "안방 마님, 사랑채에서 연기가 납니다." "연기?" 허씨 부인은 급히 방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정말로 사랑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불이 난 게 아니냐?" 허씨 부인은 깜짝 놀라서 사랑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방문에 이불이 쳐져 있고 이황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황은 불을 끄고 잠을 잔 게 아니었습니다. 불을 끈 것처럼 보이려고 이불로 사랑방 문을 가리고 앉아서 책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새벽녘이 되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만 등잔불이 쓰러져서 이불에 불이 옮겨 붙었던 것입니다. 이황은 그 속에서 연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황의 집에는 그의 아버지 이식이 처음 장가든 처가에서 얻어 온 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식의 처가는 저명한 학자 집안이어서 대대손손 많은 책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식의 장인 김한철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모 남씨가 사위 이식에게, "책은 학문하는 선비를 위해 있는 것일세. 우리 집안엔 전해 오는 책들이 많은데, 자네 장인이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이 책들을 읽을 사람이 없어졌네" "자네는 평소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이니, 이 책을 모두 가져가 읽도록 하게" 하고 말하며 책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이식은 처가에서 가져온 책들을 보물처럼 아끼며 공부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생인 이우와 함께 학식이 높은 선비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황의 아버지는 생전에 가끔 아들들에게, "나는 밥 먹을 때에도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잘 때는 꿈속에서도 책을 읽었다. 앉아서도 책과 같이 있고, 어디를 가도 책과 같이 가서, 한시도 책을 손에서 뗀 적이 없었다." "너희들도 나처럼 항상 책과 가까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 하고 가르치곤 하였습니다. 또 이황의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자식 가운데에서 '나의 업'을 물려받을 자가 있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황은 아버지가 말한 '나의 업'에 대해 훗날 아버지의 묘비에 이렇게 썼습니다. 공은 생전에 아우 이우와 함께 사이좋게 공부하여, 많은 책을 읽고 글공부를 하셨으되, 과거 합격에만 힘쓰지 아니하여 늘 떨어지다가 경신년 향시에서 장원하고, 신유년에 진사시에 또 응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하면 학생을 모아 놓고 가르치면서 학문에 열중하면 족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묘비의 글로 보아 '나의 업' 이란 곧 학문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황은 이와 같이 아버지가 책을 사랑하고 좋아한 덕분에, 생활은 궁핍하였지만 여러 가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황은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들 준을 얻고, 그 해에 한성으로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비들은 학문적 열정이 식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묘사화가 일어나 유학을 공부하던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보수파 공신들이 일으킨 난입니다. 그들은 조광조, 김정 등과 같이 새롭고 이상적인 정치를 펴려는 개혁파 선비 70여 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거나 귀양보냈는데, 기묘년에 선비들이 큰 화를 당한 사건이라고 해서 기묘사화라고 합니다. 그 때 이황은,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선비들이 아깝게 죽음을 당하는구나!" 하고 개탄하였습니다. 특히 성리학의 대가인 조광조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기묘사화가 있은 뒤, 선비들은 학문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점점 유흥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은 그런 이황을 비웃고 놀렸습니다. "책이나 읽고 얌전만 빼는 고리타분한 샌님 같구먼." "벼슬이나 한 자리 얻으려고 그러는 거지 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황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남이 뭐라고 하든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성미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렵 이황은 심경부주라는 책을 얻어 읽었습니다. 이 책은 주자 같은 중국 송나라의 이름난 학자들의 깊은 생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 책을 읽고 풀이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책도 사람이 쓴 것인데, 그 뜻을 풀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 그 뜻을 반드시 알아내리라." 이렇게 결심한 이황은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의 뜻을 알아내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추운 겨울이건 더운 여름이건 온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습니다. 그 책에 적혀 있는 대로 몸소 실천해 보기도 하고, 다른 책을 참고로 해서 오래도록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대목은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 보며 뜻을 다시 새겨 보곤 하였습니다. 이런 노력 끝에 이황은 마침내 책의 내용을 모두 깨치게 되었습니다. 이황의 학문 연구 방향과 태도는 이 책을 읽던 청년 시절에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방향을 결정한 이황은 더욱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아는 것은 실천으로. 이황의 아버지가 벼슬을 위해 공부하지 않았듯이, 이황도 벼슬을 목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과거가 아니라 학문을 목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향시에서 세 번이나 낙방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지만 세 번씩이나 낙방을 하자 이황도 새롭게 마음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과거 공부에도 힘을 쏟아야겠는걸.' 그 이후 이황은 과거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528년 소과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 해에 이황은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부인 허씨가 둘째 아들 채를 낳고서 곧바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황은 3년 후인 30세 때에 권질의 딸을 새 부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권씨 부인은 성격이 온화하고 차분하여 허씨 부인 못지않게 이황을 정성껏 받들었습니다. 이황은 그 후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해서 32세 때에 문과 별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이처럼 시험마다 무난히 합격한 이황은 34세 때인 1534년(중종 29년)에 드디어 대과에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리자, 가족들은 몹시 기뻐하였으나 정작 이황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장인 권질이 이황을 불렀습니다. "자네는 이런 시골에 묻혀 있기 아까운 사람일세. 여기를 떠나 한성에 가서 살게나. 자네가 원한다면 한성에 있는 내 집을 한 채 주겠네." 그러나 이황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지내겠습니다. 한성에서 살 의향이 있었다면 벌써 그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한성이 견문을 넓히기에 좋지 않은가?" "자네의 뜻도 충분히 펼 수 있을 테고." "괜찮습니다. 제 뜻은 여기에서도 충분히 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황은 끝까지 사양하였습니다.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벼슬자리보다는 학문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는 34세 때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벼슬을 그만둘 때까지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벼슬길에 나아가면 학문할 틈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책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이황은 오히려 책을 더 가까이하며 학문할 시간이 적음을 아쉬워했습니다. 이황은 더운 여름에도 방 안에 틀어박혀 주자가 지은 주자전서를 구해서 읽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황의 건강을 염려하며, "학문도 좋지만 이렇게 더운 날에는 좀 쉬어 가면서 하십시오." 하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학문을 연구하니 마음이 시원해지는데 더위 정도가 무슨 걱정이겠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습니다. 훗날 이황이 깊은 사상과 학문을 이룩하게 된 것은 주자전서를 연구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황은 학문을 익히는 데에만 열중하지 않고 배운 바를 스스로 실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행실은 뭇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이황이 젊었을 때 한성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서방님, 경치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황을 따르던 하인이 죽령 고갯길 양쪽에 펼쳐진 짙푸른 숲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시가 저절로 나올 만한 경치구나." 이황은 마루턱을 향해 오르면서 좌우 풍경을 둘러보았습니다.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잠시 땀을 식힌 이황은 하인을 재촉하며 고갯길을 내려갔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 아래 주막에서 그날 밤을 지냈습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이 충청도 땅에 들어섰을 때는 한낮이 거의 다 되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식사를 할 만한 마땅한 주막이 없어서 길에서 직접 밥을 지어 먹어야 했습니다. "서방님, 시장하시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밥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그러자꾸나. 밥을 지을 동안 나는 저기에 앉아서 좀 쉬마." 이황은 이렇게 말하고 개울가의 덤불 쪽으로 갔습니다. 하인은 서둘러 밥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깨끗한 개울물에 쌀을 씻어 냄비에 담고 불을 피웠습니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이 지어졌습니다. 하인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황을 불렀습니다. "서방님, 밥이 다 되었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셔서 진지 드십시오." "오냐." 이황은 하인이 식사 준비를 해 놓은 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숟가락으로 밥을 뜨려다가 멈칫하고는 하인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인이 어리둥절하여 물었습니다. "서방님, 왜 그러십니까? 밥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하인은 이황의 밥그릇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이황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으며, "너, 이 콩 어디서 났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저기 저 밭에서 따 왔습니다." 하인은 콩밭을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황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 주인의 허락도 없이 딴 콩은 먹을 수 없다." "하지만 서방님, 한 움큼도 안 되는 걸요." "비록 콩 한 알이라도 남의 것은 남의 것이다."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갖는 것은 훔친 거나 다름없다. 어찌 학문을 한다는 사람이 훔친 콩으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 하인은 아무런 변명도 못 하고 머리만 푹 숙였습니다. 이황은 이처럼 아무리 하찮은 일이더라도 그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품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황이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와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이황은 하인이 밭에서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나리, 이제 돌아오십니까? 이 길을 막고 저쪽으로 길을 내고 있는 중입니다." 하인이 일손을 멈추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네, 이 밭 가운데로 통한 길 때문에 곡식이 엉망입니다. 보세요." "이렇게 짓밟혀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놔 두었다가는 길 쪽의 곡식은 모두 못쓰게 될 것입니다." 하인은 밭 가운데로 난 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정말 길 옆의 곡식은 사람들의 발길에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 길을 막으면 마을 사람들이 먼 길을 빙 돌아서 다녀야 되질 않느냐? 어서 다시 터 놓아라." "하지만, 나리! 저렇게 사람들이 짓밟도록 내버려두면 보리가 한 가마는 줄어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하인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자 이황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어허, 웬 말이 그리 많으냐? 남에게 불편을 주면서까지 내 이익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가시나무를 치우도록 해라." "참, 나리도. 나리의 마음을 마을 사람들이 알아 줄지 모르겠습니다." 하인은 투덜대면서 가시나무를 치웠습니다. 이처럼 이황은 학문이란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배운 바를 실천하기에 힘썼습니다. 청렴한 공직 생활. 34살 때인 1534년 대과에 급제한 이황은, 승문원 부정자가 되어 첫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다루는 관청이며, 부정자는 그 관청에 속한 종9품의 벼슬입니다. 그런데 이황은 오래지 않아 능력을 인정받아, 승문원의 일을 보면서 예문관과 춘추관의 일도 겸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벼슬길에 오르자 이황의 뛰어난 자질은 날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여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이황은 승문완의 정자, 저작 등을 거쳐, 그 해 12월에는 이미 정7품 벼슬인 승문원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랏일과 학문을 병행하느라 무리를 한 까닭에 그만 병이 들어 한동안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쉬어야 했습니다. 1536년(중종 31년), 쉬면서 건강을 회복한 후 이황은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종6품의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고, 곧 정6품의 호조 좌랑으로 승진하였습니다. 벼슬길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황에게 가슴아픈 일이 찾아왔습니다. 이듬해 10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홀로 되어 고생하시며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 내셨기에 이황의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 슬픔에 잠긴 이황은 벼슬에서 물러나 삼년 동안 어머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거기서 생활했습니다. 마침내 이황은 어머니의 삼년상을 모두 치르고 나서 다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홍문관 수찬이 되어 임금님에게 유교의 경전을 가르치는 경연의 검토관(정6품)을 겸하였습니다. 이황은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임금님에게 경전과 사서를 강의하고 역사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연관들 중에서는 임금님과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임금님에게 잘보여 출세를 하려고 하거나, 반대파 대신들을 모함해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조금도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러 이황은 어느덧 마흔두 살이 되었습니다. 이황은 이제 종5품인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의정부 검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중종은 이황의 청렴함과 인품을 높이 사서 충청도 암행어사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암행어사는 직접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직책이므로, 사리사욕이 없고 성실한 이황이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542년(중종 37년), 이황은 어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마패를 받아 들고 충청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공주의 한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 곳은 인귀손이라는 사람이 판관으로 있었는데, 인귀손은 욕심 많고 인정 없는 사람이라 백성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탐관오리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나아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이 되므로 마땅히 엄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황은 인귀손의 부정부패 혐의를 샅샅이 조사하여 중종에게 아뢰었습니다. 중종은 크게 노하여 그 길로 인귀손을 파직시켜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이황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황은 벼슬을 하면서도 학문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자연을 벗삼으며 학문에 정진했으면.' 이황은 마침내 조정에 자신의 뜻을 전하고 한적한 시골의 원이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중종은 이황을 가까이 두고 싶었으나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경상도 풍기 군수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짐을 진 하인들과 함께 풍기로 내려가던 도중 이황은 죽령에서 도둑 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인들은 벌벌 떨며 도둑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가져갈 것이 있으면 가져가도록 하게." 그러자 도둑들은 짐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둑들이 짐을 뒤지는 동안에도 하인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나, 이황은 도둑들의 행동을 태연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짐 꾸러미를 모두 뒤진 도둑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이런, 값비싼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도둑들은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다가 대장인 듯한 도둑이 이황을 보며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보아 하니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값나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거요?" "그대들의 눈이 어두워서 못 보는 것일 뿐, 그 짐 꾸러미 속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 들어 있네." 이 말에 도둑들의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옳거니, 그러고 보니 귀한 물건을 따로 어디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모양이군!" "자, 이 칼이 무섭거든 얼른 귀한 물건을 내놓으시오!" 도둑들은 이황을 위협하였습니다. "허허. 내 그대들과 원수진 일이 없어 칼 맞을 이유가 없는데, 왜 함부로 칼을 들이대는가?" "순순히 우리 말을 들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소." 그러자 이황은 도둑들이 뒤지다 만 짐 꾸러미 속에서 무언가를 한 아름 꺼내었습니다. "아니, 이것들은 책이잖아!" "그것도 다 낡아빠진 것을." "그렇네. 이것은 낡아빠진 책들이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일세." 이황의 말에 도둑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째서 그 책들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거요?" 이황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 보게. 그대들이 어떠한 연유로 도둑질을 하는지는 모르나, 사람은 자기가 일한 만큼의 대가로 생계를 이어 가야 하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법이라네." "아니, 그게 이 책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만약 그대들이 이 책들을 보았더라면 도둑질은 하지 않았을 걸세. 책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주며, 나쁜짓을 하지 못하도록 마음가짐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지." 그 말에 도둑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이윽고 눈이 부리부리한 도둑이 볼멘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도둑질을 원해서 하는 줄 아십니까?" "못된 벼슬아치들이 모두 빼앗아 가 먹을 게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남의 것을 훔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선량한 사람들의 보따리를 털어서야 되겠나? 그대들이 도둑질을 그만두고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약속한다면 내가 살길을 마련해 주겠네." 그러자 도둑들이 일제히 무름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황은 자기가 풍기 군수로 부임해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그들을 풍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후 그들은 풍기에 터 전을 잡아 인삼을 재배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학문을 발전시키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세붕이 세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에 편액과 책을 내려 달라고 명종에게 청하였습니다. 명종은 이황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책과 논밭 및 서원 관리에 필요한 하인을 내려주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의 길로. 풍기 군수가 된 지 1년이 지나자 이황은 다시 사직을 청했습니다. 나이가 50이 다 되었고 몸이 쇠약해져서 더 이상 백성들을 돌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치에서 벗어나 학문을 연구하며 조용히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몇 번의 사직원을 올린 끝에, 이황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550년(명종 5년) 2월, 이황은 마을 언덕에 한서암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학문에만 열중하였습니다. 한서암에서 보낸 이 시기야말로 이황이 학문 연구에 온 정열을 쏟은 때였습니다. 그것은 그 이후에 발표된 저서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무렵 이황은 친형인 이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해는 성품이 정의롭고 올곧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임금의 외숙인 윤원형이 널리 세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영의정 자리에 있던 이기도 윤원형의 권세 아래에서 수많은 어진 선비들을 모함하여 죽이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에 이해는 이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오히려 상관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갑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해는 평소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귀양길에서 병을 얻어 1550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황은 형의 죽음으로 한동안 괴로워했으나 곧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학문 연구에 온 정열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황의 고결한 인격과 덕은 나날이 높아갔습니다. 조정에서는 이황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황이 그 때마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자, 선조가 직접 사람을 보내 이황을 불러들였습니다. 이황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가 성균관 대사성(정3품), 홍문관 부제학(정3품)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종1품), 양관 대제학(정2품)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학문에 열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황의 이러한 노력으로 학문은 점점 더 깊어 갔으며, 덕망 또한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조용하던 이황의 고향 마을은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든 선비들로 점차 붐볐습니다. 이황에게 학문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한서암은 매우 비좁게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이황은 좀더 큰 서당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며 직접 목수들을 지휘하여 서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서당은 규모가 매우 커서 5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곳이 훗날 도산 서원이 된 도산 서당입니다. 도산 남쪽에 지은 이 도산 서당의 구조와 경치는 이황이 남긴 도산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이루어지니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을 '완락재'라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루헌'이라고 하였다. '사'는 모두 8칸인데, 재.요.헌으로 갈라서 시습재.지숙요.관란헌이라 하고, 합해서 '농운 정사'라고 현판을 붙였다. '당' 앞을 드나드는 곳은 사립문으로 가리고 이를 '유정문'이라고 불렀다. 문 밖의 오솔길로 시내를 따라 내려가 천둥 어귀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 대하는데, 산문 바위는 '곡구암'이라 불렸다. 당사의 동쪽 구석에 조그마한 연못을 파서 연을 심고 '정우당'이라 이름을 지었다. 또 그 동쪽에 '몽천'이란 샘이 있는데,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낮추어 관란헌과 나란히 하고, 거기에다 단을 쌓고 그 위에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라고 불렀다. 이황은 사방 3미터밖에 안 되는 완락재를 서재로 썼습니다. 그런데도 분수에 넘치는 방이라며 꺼림칙해했습니다. 수많은 제자를 거느렸던 이황은 언제나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나들이할 때도 칡으로 삼은 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녔습니다. 한 제자가 이것을 보다 못해 이황에게 노새 한 마리를 선물하였습니다. 이황은 그 제자를 묵묵히 바라보더니 엉뚱한 질문을 툭 던졌습니다. "자네는 부모님이 안 계신가?" "계십니다." 노새를 가져온 제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부모님께선 노새를 타고 외출하시는가?" "아니옵니다. 노새는 먼 길을 갈 때만 타고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알겠네. 자네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데 어찌 이 노새를 내게 가져왔는가? 그럴 만큼 생활의 여유가 있거든 부모님께 더욱 효도하게. 그래야 내가 자네를 가르친 보람이 있지 않겠나." "그리고 사람은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어야지,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옳지 못하네." 이황은 이렇게 타이르며 노새를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이처럼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남의 신세를 지기 싫어하였습니다. 또한 이황은 남에게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도산 서당 앞을 흐르는 낙천에는 은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그 일대의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황은 가을이 모두 지날 때까지 낙천에 몸을 씻으려 가지 않았으며, 냇가 쪽으로 난 길도 걷지 않았습니다.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아예 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황은 항상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비록 찾아오는 손님이 손아랫사람일지라도 마당에까지 내려가 맞아들였으며, 돌아갈 때도 문 밖까지 배웅하였습니다. 중국 베이징 상더 여자 대학의 간사인 자오취안하이는 1926년에 이황의 성학십도를 나무판에 새긴 뒤, 이것을 종이에 찍어내어 병풍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병풍을 판 수입으로 그 대학의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그 많은 유교 책들을 멀리하고 이렇게 이황의 성학십도를 받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황의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과 학문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널리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학문에 대한 비판을 서슴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밝혀 지적해 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이러한 이황의 성품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황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지자, 관서 지방의 중화 군수는 그의 저서인 용학석의를 나무판에 새겨 간행했습니다. 그런데 용학석의는 이황이 평소 완벽하지 않은 저술이라고 생각하던 책이었습니다. 이황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던 중 제자 기대승이 중국에 사신을 맞으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황은 기대승이 떠나기 전날 자신의 집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습니다. "중국에 가거든 중화에 들러 용학석의가 새겨진 목판을 찾아내어 불살라 버리도록 하게." "네? 목판을 불살라 버리라니요?" "꼭 그렇게 해 주게. 그 책은 완벽하지가 않거든." 그 후 기대승은 이황의 부탁대로 목판을 불사르고 나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서야 이황은, "이제는 남의 비판을 듣지 않아도 되겠군!" 하며 안심하였습니다. 영원한 스승. 이황은 그 수 다시 임금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도산 서당에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선조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69년(선조 2년) 3월, 69세의 이황은 벼슬을 내놓고 선조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하, 신에게 주신 은혜 바다와 같사옵니다. 하오나 이제 신이 늙었으니 편안히 고향에서 지내며 남은 생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그 은혜 하늘보다 높겠사옵니다." 이황의 간절한 청에 선조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이황과의 이별이 못내 아쉬워, "참으로 서운하오. 짐에게 좋은 말이나 한 마디 해 주고 가구려." 하고 부탁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백성들과 마음을 같이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바른 사람만을 뽑아 썼다고 하옵니다. 그래야만 임금께 잘못이 있을 때 목숨을 걸로 바로잡으려고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질지 못한 임금은 차차 그런 신하들을 싫어하게 되어 피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간사한 무리들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임금의 비위만 맞추려 들어, 끝내는 나랏일을 그르치게 되옵니다." 그 말은 들은 선조는 머리를 끄덕이며, "옳은 말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이황은 며칠 동안 고향 산천을 두루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집 안에 들어앉아서 평생 동안 이룩한 학문을 일일이 정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건강을 염려한 가족들은 푹 쉬도록 권했으나 이황은, "죽을 때까지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게 학문이다."라고 하면서 잠시도 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570년(선조 3년) 11월 9일, 이황은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황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한 달 뒤인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황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 안은 온통 슬픔에 잠겼습니다. 가까운 친지들과 이황의 명성을 아는 사람들 모두가 구름처럼 몰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유학자들은 죽음을 매우 엄숙한 일로 생각하여 그 시간과 장소, 죽음에 임하는 태도 등을 중요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한 사람의 임종이 가까워지면 그의 행적을 살펴 기록해 두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황의 죽음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황은 죽기 5일 전인 12월 3일에 자식들을 불러 남에게서 빌려 온 책들을 모두 되돌려 주게 하였다. 그리고 봉화 현감으로 가 있는 아들 준을 불러서 관찰사에게 사직서를 내도록 하였다. 12월 4일 이황은 조카 이영을 불러 유언을 하였다. "내가 죽으면 예법에 따라 장사를 치르되, 나라에서 내리는 장례를 사양하고 절차를 번거롭지 않게 해라. 그리고 무덤에는 따로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다만 작은 돌을 세우고, 그 앞면에는 '퇴도만은 진성 이공지묘'라 쓰고, 뒷면에는 향리, 세계, 지행, 출처를 주자가례대로 간단하게 적도록 해라." 말을 하면서 이황은 몹시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이영이 좀 쉬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뿌리치고 유언을 계속하였다. "내가 이렇게 이르는 것은, 고봉(기대승)같이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정리를 생각해서 사실보다 과장하여 쓰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이를 염려하여 일찍이 내 손으로 새김글을 써 두었다. 또한 나의 행적에 관한 것도 쓰는 중이었지만 그것은 끝내지 못하였다. 써 놓은 글들 중에서 새김글을 찾아내어 그대로 쓰도록 해라." 유언을 마친 이황은 찾아온 제자들을 만나려고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쉬라며 말렸지만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고는, 제자들을 불러들여 일일이 절을 받고 마지막 정을 나누었다. 12월 5일, 이황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관을 짜라고 일렀다. 그리고 12월 7일에는 가장 아끼던 제자 이덕홍에게 자기의 모든 책을 관리하라고 일렀다. 12월 8일, 여느 날보다 일찍 잠을 깬 이황은 자기 곁에 늘 두고 보살피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였다. 저녁 5시가 되자 낮 동안 활짝 개어 있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깔리더니, 검은 구름이 그의 집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이황은 마지막으로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흰눈을 맞으며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그날 저녁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평생토록 학문에 큰 뜻을 품고 청렴하게 살다 간 이황! 그의 어진 성품과 그가 남긴 학문적 성과는 길이 후세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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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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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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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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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 막내아들. 일곱 살짜리 개구쟁이 소년 남준은 오늘도 동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며 신나게 뛰어놀았습니다. 남준의 집은 무척 커서 숨을 곳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개구쟁이 소년들의 놀이터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얘들아, 이것 먹고 놀아라!" 잠시 후 엄마가 맛있는 과자를 내 오셨습니다. 한 친구가 과자를 먹다 말고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남준아 너희 집은 정말 크고 멋지다." "얘네 아버지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시고, 집에는 피아노도 있대." "딩동딩동~" 때마침 누나가 피아노를 쳤습니다. "야, 피아노 소리다!" 친구들이 누나 방 창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친구들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누나의 모습을 신기한 듯 훔쳐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피아노가 무척 귀한 물건이어서 친구들 대부분 피아노를 처음 구경했기 때문입니다. 남준은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남준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남준의 할아버지는 동대문 시장에서 커다란 포목상을 하셨으며,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남준의 가족은 매우 윤택하게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남준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습니다. 예쁜 한복을 입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돌 때의 사진이나, 세 살 때 온 가족이 금강산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 등을 보면 남준이 얼마나 유복하게 자랐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남준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 그림, 음악. 특히 그는 누나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땅 위에 악보를 그리는 아이. 어느덧 남준은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남준이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저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요." "아니, 사내녀석이 피아노는 배워서 뭐하게? 또다시 그런 소릴 했다가는 아버지한테 혼날 줄 알아라." 아버지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하셨습니다. '왜 남자는 피아노를 배우면 안 되는 걸가?' 남준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피아노 치는 것이나 그림 그리는 것을 여자들의 취미 생활쯤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딩동댕 딩동댕" 잠시 후 누나 방에서 피아노의 선율이 들려왔습니다. 남준은 살며시 누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너, 오늘도 왔구나." 선생님은 초롱초롱한 남준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남준은 누나 옆에 서서 악보를 놓고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치는 누나의 손 모양을 유심히 관찰하였습니다. 이렇게 남준은 누나의 어깨너머로 몰래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하루는 남준이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막내, 거기서 뭐 하니?" 어머니가 살며시 다가와서는 남준이 그려놓은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니, 이건 악보가 아니냐?"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엄마, 저도 피아노 칠 수 있어요." "정말? 그럼 누나 방에 가서 쳐 볼까?" 피아노 앞에 앉은 남준은 서툰 솜씨로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정말 놀랍구나.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이렇게 익혔다니. 엄마가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마." "정말이요?" 남준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남준이가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취미로 배우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이 그러니까 남준이가 피아노 치겠다는 말을 하는 거요. 그럴 시간 있으면 수학 공부나 더 하라고 그러시오!" 아버지의 태도는 여전히 완고했습니다. 음악에 눈을 뜬 중학 시절. 보통학교를 졸업한 남준은 우리 나라 최고의 명문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의 중학교는 지금의 중 고등학교를 합친 6년제 학제였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집 간 누나 희득이 집에 놀러 왔습니다. 누나는 남준보다 열네 살이나 많아서 벌써 시집을 갔던 것입니다. "남준아 너희 학교에 신재덕 선생님이라고 계시지?" "예 우리 음악 선생님이에요." "그 선생님이 누나 친구야. 피아노를 잘 쳐서 연주회도 몇 번 열었지." "그래요? 누나가 잘 말씀드려서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라고 하면 안 될까요?" "우리 막내가 아직도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했구나. 내가 한번 부탁해 볼게." 누나는 신재덕 선생님께 남준의 얘기를 전했고, 신 선생님은 기꺼이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며칠 후 신재덕 선생님이 남준을 음악실로 불렀습니다. "남준아, 누나에게 얘기 들었다. 피아노를 배우는게 소원이라고?" "네." "좋아, 그럼 내일부터 수업 끝나고 매일 한 시간씩 가르쳐 줄게." "선생님 고맙습니다!" 남준은 넙죽 절하고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음악실을 나왔습니다. 다음 날부터 남준은 신 선생님께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너는 정말 음악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구나." 신 선생님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치는 남준의 명석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내친 김에 작곡하는 법도 배워 볼래?" "네." 남준은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는 처음 보는군. 하긴 혼자서 피아노 치는 법을 깨우쳤다고 하니.' 선생님은 남준에게 작곡은 물론 성악까지 가르쳤습니다. 선생님과 제자 두 사람 모두 너무나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한편 몸이 약했던 남준은 자주 아팠습니다. 그래서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오기도 했습니다. "야, 근사하다!" "쟤네집 대단한 부자인가 봐." 당시에는 자가용이 매우 귀했기 때문에 자가용을 타고 오는 남준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남준은 어디에서도 부잣집 도련님 티는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성적인 수줍음이 많아서 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남준에게는 신 선생님께 음악을 배우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서점에 들렀습니다. 서점에 가면 몇몇 낮익은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두들 책을 좋아하고, 문학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남준은 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취미가 같아서인지 서로 통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시를 즐겨 쓰는 소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준의 집에 자주 몰려왔습니다. 남준의 방이 넓고, 어머니가 맛있는 것을 많이 내오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간혹 자신이 지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를 내게 줄래? 내가 멋진 곡을 붙여 줄 테니까." "정말?" "이거 기대되는걸." 친구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시를 내밀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모두 음악실로 모여." "드디어 노래가 만들어진 거니?" 친구들은 잔뜩 기대를 안고 음악실로 모여들었습니다. 남준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자, 친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로 탄생하다니, 정말 놀라운 걸!" "노래로 들으니 시가 더욱 근사해 보인다." "남준아, 정말 고맙다." 친구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나는 네가 피아노만 잘 치는 줄 알알았는데, 이렇게 작곡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계속되는 친구들의 칭찬에 남준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 였습니다. "이제 그만들 해. 왜들 비행기를 태우고 그래." 남준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홍콩유학. 이제 남준은 열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4학년,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것입니다. "남준이 방에 있니?" 남준이 악보를 보며 흥얼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남준은 얼른 악보를 뒤로 감추었습니다. "너는 공부는 안 하고 악보나 들여다보고 있는 거냐?"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남준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너, 영어 잘 하지? 이번에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홍콩에 가게 됐는데 네가 따라가서 통역을 해 주어야겠다." "잘은 못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도와 드리겠어요." 며칠 후에 남준은 아버지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남준의 가슴은 설렘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드디어 홍콩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인삼을 팔기 위해 여러 외국 상인들을 만나 흥정을 하셨고, 이 때 남준은 필요한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남준은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인삼 값을 많이 받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을 금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긴 아버지뿐만 아니라 외국 상인들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래가 끝난 뒤 남준은 아버지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자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세요?" "높은 값을 받기 위해서는 상품을 좋게 말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단다.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려면 어쩔 수가 없어." '난 앞으로 절대 장사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남준은 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남준을 홍콩의 어느 학교로 데려가셨습니다. 이 학교 이름은 '로이든 스쿨' 로 영국에서 세운 학교였습니다. 아버지는 남준과 함께 로이든 스쿨을 한 바퀴 휘 둘러보셨습니다. "이 학교 맘에 드니?" "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앞으로 네가 다닐 학교다." "네? 제가 이 곳에서 공부한다고요? 남준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 앞으로 크게 성공하려면 더 넓은 곳에서 공부해야한다."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남준은 유학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남준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남준이 떠나는 날 어머니와 누나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셨습니다. "남준아, 편지 자주 하거라.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로 연락하고." 막내아들을 멀리 떠나 보내는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남준은 어머니를 꼭 안아 드렸습니다. 남준과 아버지가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는 순간까지 어머니는 잠시도 남준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홍콩 로이든 학교에 입학한 남준은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서툰 영어 때문에 애를 먹었으나 금세 적응이 되었고, 그 곳에서도 남준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다음 해 5월에 남준은 조카 백일 잔치를 보려고 고국으로 잠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쯤 뒤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만 6 25전쟁이 터졌습니다. "어서 피란을 서둘러야겠다." 남준의 가족은 그 즉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 남준의 가족은 일본 도코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남준의 가족은 일본에서도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남준의 공부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형들과 누나는 이미 공부를 마치고 안정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었으나, 막내 남준은 전쟁의 와중에 학업을 제대로 마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준아, 로이든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학원에 다니면서 바로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하거라."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는 네가 도쿄 대학 상과에 들어갔으면 한다." "도쿄 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도쿄 대학은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명문 학교였습니다. 그 날부터 남준은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남준에게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준은 예술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미학과에 가고 싶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남준은 도쿄 대학 미학과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막내가 드디어 해냈구나! 상과를 졸업한 후에 세계적인 사업가가 되거라." 아버지는 남준이 당연히 상과에 합격한 줄 알고 계셨습니다. 남준은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준이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학교에서 우편물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연히 아버지가 받아 보시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것은 도쿄 대학 미학과에서 온 우편물이었습니다. "남준이가 상과가 아닌 미학과에 들어갔던 것이로군. 그 동안 나를 감쪽같이 잘도 속였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어머니가 놀라서 달려오셨습니다. "남준이를 빨리 데려오시오." 자기 방에 있던 남준은 사태를 깨닫고 주춤주춤 아버지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네가 아비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지만 저는 상과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이 따위 예술 나부랭이는 배워서 뭘 하냐? 당장 학교를 때려치워라. 앞으로 너한테는 한 푼도 주지 않겠다." "아버지, 제발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속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절 좀 이해해 주세요." "시끄럽다!"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 이후 남준과 아버지는 한 자리에 오랫동안 얘기한 적이 없을 정도로 멀어졌습니다. 그만큼 남준에 대한 아버지의 실망과 분노가 컸던 것입니다. 며칠 후에 큰형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남준아 학비 걱정은 말거라. 누나들과 형들이 마련해 주마. 그리고 우리는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니,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형, 고맙습니다!" 형의 격려에 남준은 힘을 얻었습니다. 남준은 대학 시절 동안 예술과 더불어 철학과 사상에 대한 공부도 하였습니다. 1956년 도쿄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남준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하루는 형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형, 유명한 예술가들이 많은 독일로 가서 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요." "그렇게 하렴. 학비는 우리 형제들이 모아서 줄 테니 걱정 말고." "형, 정말 고맙습니다." 남준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남준의 형과 누나들이 모두 유복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준은 독일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독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남준의 가슴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한껏 부풀어올랐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다. 독일로 온 백남준은 생김새와 문화가 전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생활해 나가야 했습니다. 뮌헨 대학 음악과에 입학한 백남준은 음악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음악사 공부에만 전념하기엔 뭔가 답답하고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남준으로서는, 음악사를 공부하면서 선배들이 쌓아 놓은 업적을 익히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답답해져 올 뿐이었습니다.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백남준은 보다 창조적인 작곡 공부를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을 다니던 1957년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친구와 함께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름슈타트는 전위 음악 도시로서 매년 새로운 음악 축제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전위 음악이란 기존의 음악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곳에서 백남준은 평생의 스승인 존 케이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존 케이지는 악기 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리로 작곡을 하는 음악가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음과 침묵도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작곡가였습니다. 존 케이지의 음악회에 참석한 백남준은 신선하고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케이지가 들려주는 음악은 백남준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고, 고요한 절에서 참선하는 스님이 내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잠시 후에 케이지는 난데없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물건들이 부딪히는 소리, 교회 종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들이었습니다. 케이지는 또한 플라스틱이나 장난감 인형 등을 가지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대신해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아, 정말 놀라울 뿐이로군. 케이지의 음악은 우리가 듣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구나." 존 케이지 음악회는 백남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예술 세계를 추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는 듯했습니다. 케이지의 음악을 통해, 백남준은 '음악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 이라는 기존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음악 형식에 반발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케이지의 공연이 끝나자, 백남준은 무대 위로 올라가 케이지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백남준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선생님의 공연은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다양한 음악 세계를 연구해 보고 싶으니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케이지도 백남준의 열정적인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케이지가 백남준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습니다. 이 때부터 백남준과 존 케이지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백남준은 이제 존 케이지의 가르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행동 자체도 음악이 될 수 있다!" 백남준은 전위 미술 운동인 '플럭서스'에 가담한 이후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59년, 백남준은 뒤셀도르프에서 최고의 퍼포먼스인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찬사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공연하였습니다. 이 공연에서 백남준은 최초로 '행위 음악'을 시도하였습니다. 행위 음악이란 손가락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음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공연 맨 처음에는 녹음 테이프에서 여러 소리들이 흘러나왔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시끌벅적한 복권 당첨 소리, 사이렌 소리, 수탉의 울음 소리, 오토바이 시동거는 소리. 그 다음으로 백남준은 무대 위에서 발로 깡통을 걷어찼습니다. 그러자 깡통은 유리판을 깨뜨리고, 깨어진 유리 조각들이 다시 달걀과 자동차에 부딪혔습니다. 백남준은 피아노로 달려가 손 대신 머리로 세 대의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등의 고전 음악과 소음, 녹음된 소리와 무대에서 연주하는 음악, 심지어 연주하는 몸짓까지도 음악이라는 백남준의 생각을 드러낸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이 모두 끝나자 관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무슨 음악회가 이래?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군." "왜? 나는 괜찮던데. 어쨌든 신선한 경험이었어." 이처럼 관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한번은 백남준의 바이올린 연주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백남준은 처음에는 얌전히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사람들은 부드럽고 감미로운 바이올린의 선율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잠시 후 그는 연주를 멈추더니, 갑자기 바이올린을 들어올려 바닥에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왜 저러는 거야?" 바이올린은 순식간에 박살이 나 버렸습니다. "저 사람 정신이 나갔나 보군." 사람들은 백남준의 갑작스런 행동에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부숨으로써, 그 동안 행해졌던 음악의 틀을 깨 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음악의 테러리스트. 1960년 콜른에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이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이 연주회에는 존 케이지도 초대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벌이려나?" 사람들은 긴장감과 함께 호기심을 가득 안고 백남준의 연주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백남준은 늘 공연 현장에서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 냈기 때문 입니다. 눈에 익고 평범한 것들을 한순간에 예술 작품으로 바꾸어 버리는 재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백남준은 처음에는 진지하게 피아노 연주만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백남준이 너무 얌전하면 폭풍의 전야처럼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백남준은 무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객석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더니 존 케이지에게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잘라 버렸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케이지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내 백남준이 잘라 낸 넥타이를 손에 들고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잠시 후에 백남준은 케이지 옆에 있던 튜더라는 사람에게 다가가, 튜더의 머리에 샴푸를 쏟아 부었습니다. "이크, 이게 웬 날벼락이람!" 튜더는 황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샴푸를 온통 뒤집어쓴 다음이었습니다. 튜더에게 샴푸 세례를 퍼부은 백남준은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백남준은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체 어딜 간거야?"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따르릉!" 그 때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백남준이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전화를 건 것입니다. "이제 공연이 끝났으니, 모두 돌아가 주십시오!" 그 전화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가 막히기고 하고, 한편으로는 유쾌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백남준이야!" "공연 중에 이런 재미 있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은 난생 처음이야." "그런데 백남준은 왜 넥타이를 자르고, 머리에 샴푸를 들이 부은 걸까?" 사람들은 무척 궁금해하였습니다. 백남준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것은 고대 로마의 군인들이 매기 시작한 넥타이가 그 후에 상류층 남자들의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쓰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즉 백남준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것은, 남자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답답한 넥타이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튜더의 머리에 샴푸를 들이부은 것은, 머리가 '생각하는 그릇'이라는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예술을 표현하는 도구' 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공연이 끝났음을 전화로 알려 온 것은, 공연이 끝나면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행위였습니다. "하여튼 백남준의 실험 정신은 알아줘야 해." 이 공연으로 백남준은 순식간에 유명해졌고, '음악의 테러리스트' 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행위 예술가로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행위 예술' 이란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의 일부를 관객 앞에서 직접 보여 줌으로써 관객이 작품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며, 예술가와 관객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 예술은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전통 방법을 거부하면서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요소를 한데 뒤섞어 하나의 작품을 만듭니다. 작품 재료도 물감 같은 전통 재료에 한정하지 않고 일상 용품까지 사용합니다. 1962년, 백남준은 플럭서스 창립 축하를 위해 독일 비스바덴 미술관에서 머리를 위한 참선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하였습니다. 머리에 먹물을 묻혀 그림을 그려 나가는 백남준은 시종일관 몸과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온몸이 예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이 공연 역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언제나 앞서나가는 백남준은 또 다른 작품 구상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곧 텔레비전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거야." 1963년, 백남준은 당시로서는 가격이 만만치 않은 중고 텔레비전 13대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업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작품이 나올까요?" 그로부터 며칠 후, 백남준은 공연 현수막과 팸플릿을 준비 하였습니다.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이것이 공연의 제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의 제목에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음악회야, 아니면 텔레비전 전시회야?" 이번에도 사람들은 호기심을 잔뜩 안고 전시회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전시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세 대의 피아노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피아노 안에 집게, 압정, 지우개와 같은 물건들을 넣고, 건반 위에 못을 박아 연주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백남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아노의 형태를 바꾼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13대의 텔레비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텔레비전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잖아?" 이번 전시회 역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멀쩡한 텔레비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들은 모두 거꾸로 처박혀 있거나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화면이 뒤집혀 있거나 앞과 옆 두 군데에 화면이 있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비틀어져 있는 화면, 동그라미와 수직선만 보이는 화면도 있었습니다. "아까운 텔레비전을 다 못쓰게 만들었군." 어떤 사람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런데 백남준은 왜 아까운 텔레비전을 망가뜨렸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텔레비전에 지배당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이들 텔레비전 중에는 관객이 발로 건드리거나 손으로 만져야만 작동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에 관객의 적극적인 행동을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이후로도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이용한 작품을 많이 구상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흑백 텔레비전밖에 없었는데, 백남준은 텔레비전에 아름다운 색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연구한 결과, 자석을 이용하면 화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음의 파장에 따라 화면 위에 여러 가지 그림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백남준은 이 방법을 이용하여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야, 신기하다! 자석을 가까이 대니까 화면이 달라지네." "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해도 화면이 바뀐대." 이렇듯 백남준의 작품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되었습니다. 관객들이 텔레비전 앞에 있는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면 그 소리에 따라 텔레비전 화면에 다양한 선이 그려집니다. 또 막대자석을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그것에 따라 다양한 무늬가 나타납니다. 관객은 단지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상을 직접 만드는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백남준 자신도 관객이 되어 자석을 들고, 자신이 만든 참여 텔레비전을 직접 움직여 보았습니다. '비디오 아트' 로 불리는 이 예술 기법으로 백남준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1964년, 이제 백남준의 나이도 서른세 살로 접어들었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벌써 지난 것입니다. 백남준은 도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독일에서의 성공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도쿄에서 공연을 요청해 왔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백남준의 일본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관객 중에는 구보타 시게코라는 젊은 여성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구보타 시게코는 열정적이고 파격적인 백남준의 공연에 매료되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백남준의 친구들이 마련한 조촐한 모임에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구보타 시게코도 참석하였습니다. 백남준보다 다섯 살 아래인 이 여성은 시종일관 백남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백남준 역시 부드러운 얼굴선을 한 이 여성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구보타 시게코라고 합니다. 현재 미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백남준 선생님의 공연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가려고 할 때, 백남준이 구보타 시게코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조만간에 구보타 씨의 작업실을 방문해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 대환영이에요." 구보타 시게코가 환하게 웃었습니다. 며칠 후, 백남준은 약속대로 구보타 시게코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둘러본 백남준은 작품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남을 가졌고, 모든 면에서 서로 잘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에는 어느덧 사랑이 싹텄습니다. 이 때, 백남준은 또 한 명의 소중한 사람과 친해졌습니다. 바로 전자 기술자인 쉬아 아베입니다.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쉬아 아베는 백남준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자주 백남준의 작업실을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마음이 잘 통했고, 앞으로 함께 일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쉬아 아베는 백남준이 '로봇 K 456' 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원격 조종이 가능한 이 로봇은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백남준은 이 로봇을 가지고 쉬아 아베와 함께 뉴욕으로 갔습니다. 샬로트 무어만과의 공연. "어서오세요, 백남준 씨." 1969년, 백남준이 쉬아 아베와 함께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자, 전위 음악가이자 첼리스트인 샬로트 무어만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백남준의 예술에 흥미를 느낀 무어만은 백남준과 공연을 함께 하고 싶어서 그를 뉴욕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몇 달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다음, 마침내 백남준과 무어만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어만은 텔레비전처럼 생긴 안경을 쓰고, 텔레비전으로 만든 첼로를 연주하였습니다. 또한 그녀가 쓴 안경에는 7cm짜리 소형 텔레비전이 장치되어 있었습니다. 각각의 화면에는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델레비전 프로그램과 미리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 폐쇄 회로 텔레비전에 비친 관객들의 모습, 그리고 첼로 소리에 따라 변하는 영상이 번갈아 나타났습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치고, 그 옆에는 '로봇 K 456' 이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를 흉내내거나 노래를 부르며 관중 사이를 신 나게 누볐습니다. 샬로트 무어만의 뛰어난 첼로 연주와 백남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조화를 이룬 이 멋진 공연은 사람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었습니다. "와!"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특히 '로봇 K 456' 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사람처럼 말하고 노래하는 로봇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 입니다. "역시 백남준이야." "백남준의 공연은 매번 새롭단 말이야." 그 후로도 '로봇 K 456' 은 뉴욕 거리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거리를 누비며 백남준과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로봇 K 456' 은 교통 사고를 당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 교통 사고는 백남준이 연출한 사고였습니다. 1982년 어느 비 오는 날, 백남준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동차로 '로봇 K 456' 을 들이받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백남준은 왜 애지중지하던 로봇을 죽인 걸까?" "글쎄? 또 다른 멋진 로봇을 만들려고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백남준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로봇 K 456' 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추측만 할 뿐이었습니다. 백남준이 고물 텔레비전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만들어진 이 로봇을 죽이고, 대신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진 최신 로봇을 탄생시키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후 백남준의 작품에 움직이는 로봇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백남준의 예술 공연에서는 어떤 하나의 의미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도 있듯이, 관람객이 어떤 시각으로 어느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이해의 폭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똑같은 공연을 보고서도 해석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늦깎이 신랑 신부. 백남준은 점차 비디오 행위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1970년, 백남준은 쉬아 아베와 함께 비디오 영상을 합성하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백 아베(백남준, 쉬아 아베) 비디오 합성기' 는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색을 입혀 이미지를 바꾸는 백 아베 비디오 합성기는 당시 비디오 예술은 물론 광고와 영화, 뮤직 비디오 제작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기법을 이용하여 백남준은 샬로트 무어만의 연주 장면을 비디오 합성기로 변형시킨 이미지, 글로벌 글루브를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마침 구보타 시게코도 뉴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비디오 예술가로서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다정한 연인으로, 때로는 동료 작가로서 언제나 함께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14년 동안이나 지냈습니다. 서로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말입니다. '결혼을 하면 서로 구속하게 되어 예술 활동을 하는데 불편함이 따를 거야. 이대로도 좋은데 굳이 사회의 관습에 따를 필요는 없지.' 이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두 사람 모두 뭔가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게코, 나와 결혼해 주시오." 어느 날 갑자기 백남준이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 순간, 시게코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이 말을 기다려 왔어요." 시게코는 백남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1977년 3월 21일, 청년의 모습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중년이 되어서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에는 많은 친구들과 팬들이 몰려와 늦깍이 신랑 신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두 사람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1984년 새해 첫날,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제목으로 인공위성 쇼를 계획하였습니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 앉아 있는 백남준의 총지휘로 전세계에 방영되었습니다. 백남준의 시작 신호와 함께 파리, 뉴욕, 서울, 도쿄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예술가들의 공연이 파노라마처림 전개되었습니다. 존 케이지의 선인장 연주, 샬로트 무어만의 첼로 연주, 이브 몽탕의 샹송, 베르코의 패션쇼, 사포의 노래, 콩바스의 그림 등 세계 각지에서 같은 시각에 행해지는 예술 행위가 한 폭의 화면에 담겨 동시에 소개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가 텔레비전 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전세계 사람들은 1984년 새해 아침을, 백남준이 기획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함께 힘차게 열었습니다. "미래에는 세계의 벽이 무너지고, 모두가 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백남준의 말에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굉장한 사건으로서, 텔레비전 앞을 떠날 줄 몰랐답니다. 백남준은 이것을 '우주 오페라' 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현대 기계 문명에 대한 찬사와 위기감을 동시에 보여 주었습니다. 그 해 6월 23일, 백남준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공항에 내린 백남준을 취재하고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나라보다도 외국에서 먼저 알려져 세계적 예술가의 대열에 오른 백남준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선생님, 비디오 예술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현재 미국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십니까?" 기자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쉬고 싶습니다." 백남준은 잠시 시간을 내어 시게코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종로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알 수가 없군." 어디에서도 예전의 모습을 찾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무려 35년 만에 찾은 고향이니 낯선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 이후로 백남준은 우리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기념하여 바이바이 키플링이라는 주제로 우주 오페라 제2편을 만들어 전세계에 방영하였습니다. 바이바이 키플링은 예술과 운동,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일 뿐, 이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는 키플링의 주장에 맞서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의 사물놀이패와 미국의 타악기 그룹의 연주를 화면에 동시에 내보내고, 미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위성 악수를 나눕니다. 뉴욕에서 연주되는 강한 리듬의 음악에 맞추어 서울에서는 마라톤 경기가 펼쳐집니다. 이것은 예술과 운동이 하나가 되는 모습입니다. 1988년에는 우리 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따르릉~" 서울에서 뉴욕으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여기는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입니다. 백남준 선생께 부탁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다름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는 축제 준비를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백남준은 우주 오페라 제3편 손에 손잡고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백남준은 전세계의 축제인 올림픽을 모든 사람의 공통 언어인 춤과 음악으로 묶어서 보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서양 최고의 팝 가수 데이비드 보이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무용수, 예루살렘 미술관의 조각 공원에서 벌어지는 콜 데마마 무용단의 춤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스포츠, 동양과 서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다른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손에 손잡고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1992년, 어느덧 백남준은 환갑을 맞이하였습니다. 환갑을 기념하여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회고전의 제목은 비디오 때, 비디오 땅이었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백남준의 초기 작품들부터 비디오 테이프, 비디오 조각, 그리고 대형 비디오 작품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저의 모든 작품 값의 50퍼센트를 국제사면위원회에 기부합니다.' 이 때 백남준은 이런 유언장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백남준은 자신의 평안함뿐만 아니라, 언제나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백남준은 1,003대의 텔레비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탑을 쌓았습니다. 과천 국립미술관 1층 전시실에 있는 이 텔레비전 탑의 제목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라는 뜻을 가진 다다익선으로, 10월 3일 개천절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화면들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멋졌습니다. "정말 환상적이에요." "마치 꿈의 나라에 들어온 것 같아요." 다다익선을 관람한 사람들은 그 장대함과 화려함, 현란함에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 컴퓨터가 급격하게 보급됨에 따라 백남준의 작품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백남준은 수준 높은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세계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평범하고 오락 같은 장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세계를 보여 준 것입니다. 백남준은 지칠 줄 모르고 예술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사람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느꼈던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과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 달려갔습니다. 헐렁한 멜빵 바지를 입고, 와이셔츠에는 큰 주머니를 만들어 물병과 신문을 꽂고 다녔습니다. 작업을 하다 지치면 미술과 전시실이든 뒤뜰이든 작업실 한 귀퉁이든 가리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부인 시게코는 이런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었습니다. 일에 몰두하다 보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당뇨도 있으니 조심해야지요." "그래, 알았소. 이번 전시만 마치면 어디 조용한 데로 여행이라도 갑시다." 1996년 4월 20일, 이 날도 백남준은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선생님,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나는 좀더 하다 가겠네." 백남준은 제자와 조수들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밥늦도록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여보, 오늘도 못 들어오시는 거예요?"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소. 내 걱정은 말고 먼저 자요." 부인의 전화를 끊고 백남준은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피곤함을 느낀 백남준은 여느 때처럼 전시실 한쪽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웠습니다. "따르릉~" 다음 날 아침, 백남준은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전화를 받으려고 일어나던 백남준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앗!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백남준은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자 했으나 움직여지질 않았습니다. 전화벨 소리는 계속 울려왔지만 백남준은 꼼짝도 못 한 채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1시간 후, 부인이 헐레벌떡 전시실로 뛰어들어왔습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예요?" 부인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자, 백남준이 걱정이 되어 달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내, 몸이, 말을, 듣질, 않소." 백남준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천천히 말했습니다. 온몸이 마비되어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백남준은 급히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습니다. 당뇨의 합병증이 와서 뇌졸중에 걸려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백남준은 휄체어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부인 구보타 시게코는 정성을 다하여 백남준을 간호하였습니다. 자신 역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비디오 예술가였지만, 남편의 간호를 위해 자신의 작품 활등을 대폭 줄였습니다. 백남준은 병석에서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일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아서 하늘에서 뇌졸중이라는 큰 벌을 내리신 것 같소." "당신은 앞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맞소. 나는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작품 활동을 계속할 계획이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 건강을 생각해서 꼭 명심하세요." "알겠소. 조심하겠소." 퇴원을 한 백남준은 이제 휠체어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했습니다. 백남준이 휠체어를 타고 전시실에 나타나자 많은 사람들이 격려의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선생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 날 이후 백남준은 여전히 웃음과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면서, 휠체어 위에서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 준비를 했습니다. 2000년 1월 1일, 새천년이 시작되는 순간, 백남준은 전세계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호랑이는 살아 있다!" 임진각에서 벌어진 이 비디오 퍼포먼스는 전세계 87개국에 생중계되었습니다. 백두산 호랑이가 아프리카 사자와 싸워 이기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공연을 통해 백남준은, 낯선 이국 땅에서 굳세게 창작 활동을 펼쳐 온 자신의 삶의 여정을 토해 내었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호랑이로서 서양에서 서양인들과 어깨를 겨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당당하게 살아갈 것 입니다." 백남준의 이 말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남준은 이 해 2월부터 4월까지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습니다. 이 때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넘어서 레이저 아트를 선보였습니다. 약 8m 높이의 지그재그로 된 레이저 설치물인 야곱의 사다리, 그리고 천장으로 쏘아 올린 레이저 광선과 바닥에 설치된 50여 개의 텔레비전으로 설치된 감미로움과 숭고함이라는 작품을 전시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에는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소용돌이와 태극 무늬 주역의 괘가 번갈아 나타나는 천장으로 쏘아 올린 레이저 광선은 하늘입니다. 다채로운 비디오 영상들이 나오는 50여 개의 텔레비전은 땅입니다. 그리고 물과 거울을 사용하여 빛을 반사시켜 만든 '야곱의 사다리' 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하나의 우주입니다. 백남준의 또 다른 레이저 아트 작품인 삼원소는 주역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거울로 만든 구조물에 큐빅으로 빛을 반사시키는 삼각형, 원형, 사각형, 각각 불, 물, 흙을 상징합니다. 이 삼원소와 함께 전시관을 가득 메운 공기가 우주를 이루는 4가지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이 백남준이 만들어 놓은 우주 속에 어우러지면서 완벽한 세계를 이루어냅니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남준의 작품을 완성하는 한 요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전시회는 무려 27만 명의 관객이 찾아올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보면 백남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백남준의 작품 속에는 늘 관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남준의 작품은 언제나 관객이 참여해야만 완성됩니다. 이처럼 세상과 함께하기를 소망하는 백남준은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백남준은 지금도 새로운 작품 구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기발한 작품을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지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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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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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짚신장수. 시골장날, 장터 한 모퉁이에 여덟 살쯤 된 소년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러더니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집에서 삼아 가지고 나온 짚신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니, 저 어린것이 짚신을 팔러 나왔네!" "글쎄 말이야. 쯧쯧." 사람들은 아직 어린 나이에 장사를 하러 나온 것이 안돼 보였는지, 짚신을 많이 팔아 주었습니다. 주머니가 제법 불룩해지자, 소년은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떡도 샀습니다. 집에 돌아간 소년이 쌀과 떡을 내놓자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게 어디서 난 거냐?" "그 동안 삼아 놓은 짚신을 팔아 번 돈으로 샀어요." 어머니는 아들이 정말 기특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상호야,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나는 네가 돈을 벌어서 이런 걸 사 오는 것보다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이 효성스러운 소년 상호가 바로 뒷날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닦는 데 평생을 바친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입니다. 상호는 1876년 12월 22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주학원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이씨 부인은 상호가 태어나기 전의 어느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나타나 어머니에게 연적 하나를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 이것을 받아라." 연적이란 붓글씨를 쓸 때 벼루에 따를 물을 넣어 두는 작은 그릇입니다. 어머니는 그 연적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치마폭으로 감쌌습니다. 그 꿈을 꾼 다음에 낳은 아이가 바로 상호입니다. 아버지는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사랑스런 눈으로 아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아마 훌륭한 학자가 될 거요. 연적 꿈을 꾸고 낳았으니 말이오." 그러나 상호가 태어난 이듬해와 그 다음 해에 연달아 나라 전체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나 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나물을 뜯어다 죽을 쑤어 먹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선비의 집이었던 상호네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물죽이나마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가 먹는 것이 없으니 젖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상호는 빈 젖을 물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어미가 죄가 많다. 네 작은 배 하나 채워 주지 못하다니." 어머니는 상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빨리 크고 싶은 아이. 모진 가난 속에서도 상호는 별 탈 없이 잘 자랐습니다. 다섯 살 무렵의 어느 날, 상호는 혼자서 마을 어귀에 있는 키가 큰 미루나무를 올려다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서 커라 어서 커라 할 일이 있으니 어서 커라 지나가던 마을 어른이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무슨 그런 노래가 다 있느냐? 나무에게 어서 크라는 거냐, 네가 어서 크고 싶다는 거냐?" "제가 빨리 크고 싶어요." 상호는 야무지게 대답했습니다. "빨리 커서 뭘 하려고?" "글을 많이 배우고 싶어서요." "글은 배워서 뭘 하게?" "어머니 아버지를 편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런 다음엔?"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지요." "허허, 그 녀석 참." 마을 어른은 기특하다는 듯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상호가 여섯 살쯤 되던 해의 가을이었습니다. 마을 아이들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타작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마당 한 모퉁이에는 짚단과 수숫대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한참 숨바꼭질,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은 그 놀이에도 싫증이 났는지 다른 놀잇감을 찾았습니다. 그 때 상호의 눈에 수숫대가 들어왔습니다. "얘들아, 우리 저걸 가지고 놀자." "그래, 그것 참 재미있겠다."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수숫대를 묶어 놓은 새끼줄을 풀었습니다. 수숫대를 한 아름씩 안고 온 아이들은 두꺼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속에서 하얀 수수깡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수수깡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장난감을 만들었습니다. 배를 만드는 아이도 있었고 물레방아를 만드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만든 것을 자랑했습니다. 한 아이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다른 아이가 그 위에 올라타고 주먹질을 했습니다. 들에 일하러 나갔던 어른들이 돌아오다가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녀석들, 사이좋게 놀지 않고 왜들 싸우는 거냐?" 어른들의 호통에 아이들은 마지못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서로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숫대는 사방에 어질러 놓고. 도대체 어떤 녀석이 이런 장난을 시작한 거냐?" 아이들 중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혼날까 봐 두려워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 때 상호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제가 먼저 시작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저를 따라서 했을 뿐이에요." 어른들은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이른 다음,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훈장 어른이 아들 하나는 잘 두었어. 이 다음에 크게 될 거야." "그러게 말이야. 다른 녀석들은 겁이 나서 슬슬 꽁무니를 빼는데,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는 것 좀 봐." 마당 가득 흩어진 수숫대를 치우며 어른들은 상호를 칭찬했습니다. 일곱 살 되던 해, 상호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훈장님이었지만, 공부를 가르칠 때에는 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상호도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에 비해 훨씬 의젓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 또한 남달랐던 상호는, 여덟 살 무렵부터 글공부를 하는 틈틈이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산에 가서 땔나무를 구해 오기도 하고, 짚을 물에 축였다가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서울살이. 1887년, 상호는 어느덧 열두 살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 사는 큰아버지가 상호의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큰아버지는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큰 건어물 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미역, 멸치, 마른 오징어, 밤, 대추 같은 것을 파는 가게로, 장사가 잘 되어 사는 형편은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무서운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두 아들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큰아버지는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큰아버지가 찾아온 것은 조카 하나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옛날에는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흔히 작은집에서 아들을 데려다가 대를 잇게 했습니다. "동생은 아들이 여럿이니, 상호를 내게 양자로 주게." 큰아버지가 상호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떠나 보낼 생각을 하자 부모님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다 잃고 외롭게 살아가는 큰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면 거절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상호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형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고맙네, 동생. 내 정성껏 보살피고 공부를 시킬 테니 아무 염려 말게." 아버지는 곧 상호를 불러서 일렀습니다. "서울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가게 되었으니 어서 떠날 차비를 하거라." 상호는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헤어지기가 싫었지만, 어른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상호는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나서 처음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뒷전에 서서 저고리 고름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는 어머니를 보니 더욱 슬펐습니다. 형제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마을 어른들이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큰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에 도착한 상호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집들도 고향집보다 훨씬 크고 좋았으며, 시장에는 무릉골에서는 볼 수도 없었던 진기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버지 댁은 남대문 시장 근처에 있었습니다. "여기가 네 방이다." 큰아버지가 상호를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난생 처음 혼자서 쓸 수 있는 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언제나 형제들과 한방에서 지내고,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던 상호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상호를 집 근처 글방에 보내 주었습니다. 그 글방은 주로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집 아이들이 다녔습니다. 그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장사할 때 물건 이름이나 장부를 제대로 읽고 쓰자는 생각에서 글방에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배우려는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상호를 놀려댔습니다. "그래 봐야 장사나 할 거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하니?" "과거 시험이라도 볼 생각인가 봐." 장난치고 떠드는 아이들, 성의 없는 훈장. 상호는 날이 갈수록 글방에 다니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글방에 다녀오던 상호는 커다란 기와집 앞에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습니다. 안에서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우리 글방하고는 다르네.' 상호는 그 집 대문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그 날은 한참 서 있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상호는 날마다 같은 시각에 그 집 앞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어느 날인가, 미처 상호가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대문이 열리면서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공부가 끝난 모양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아이를 붙들고 상호가 물었습니다. "이 글방의 훈장님은 어떤 분이냐?" "이희종 진사 어른이야. 그런데 그건 왜 묻지?" 그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상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습니다. "그저 좀 궁금해서." 상호는 재빨리 얼버무리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 후로도 상호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중 전부터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집 하인이 상호를 붙들었습니다. "웬놈인데 날마다 남의 집을 기웃거리지? 뭘 훔치려는 거냐?" "아니에요. 글 읽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에요." "그런 거짓말을 내가 믿을 줄 알고? 너 혼 좀 나 볼래?" 하인은 상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점잖게 생긴 어른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진사인 것 같았습니다. "왜 그리 소란스러우냐?" "진사 어른, 이 녀석이 벌써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까닭을 밝히려고 하는 중입니다." 하인이 말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넌 무슨 까닭으로 남의 집을 매일 기웃거렸지?" 이 진사가 상호에게 물었습니다. 엄한 목소리였으나 얼굴 표정은 부드러웠습니다. "진사 어른처럼 훌륭한 분에게 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서 담 너머로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상호는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랬구나. 그래, 네 이름이 뭐냐?" "황해도 봉산의 무릉골이라는 마을에서 온 주상호라고 합니다. 지금은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큰아버지 댁에 와 있습니다." 이 진사는 상호를 찬찬히 훑어보았습니다. 빛나는 두 눈이 매우 총명해 보였습니다. 이 진사는 상호가 단박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마음이 기특해서 내 너에게 글을 가르쳐 주마. 내일부터 와서 공부하도록 해라. 그리고 혹시 내 집에 드나드는 지체 높은 양반들이 누구냐고 묻거든 내 친구의 아들이라고 대답하거라." "그게 정말입니까, 진사 어른?" "내가 너를 데리고 허튼 소리 하겠느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상호는 이제 서울에서도 학문이 높기로 이름난 이 진사 밑에서 양반집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호는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상호는 얼른 이 진사 앞에 넙죽 엎드려 감사의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런 상호를 이 진사는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상호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런 상호를 바라보며 이 진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았어.' 어느덧 상호는 이 진사의 글방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 진사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상호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던 중 상호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어째서 세종대왕이 만드신 쉬운 우리글을 두고 어려운 한자를 쓰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한자로 된 글의 뜻을 알려면 어차피 우리말로 풀이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어려운 한자로 적을 필요가 없을 텐데.'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10년을 공부해도 그 뜻을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공자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종 대왕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우리글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글은 천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우리글을 업신여겼으며, 오직 한문만이 제대로 된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문은 '진서'라 부르고 우리글은 '언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우리글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르치는 곳도 없고 연구하는 곳은 더욱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글은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쓰는 법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우리글에 대해 연구하여, 우리말을 바로 글로 적을 수 있도록 하는 거야.' 깊이 생각한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상호는 이 때의 깨달음을 시작으로 하여 평생을 우리 글 연구에 바쳤습니다. 이렇게 뜻을 정한 상호는 4년 동안 다니던 이 진사의 글방을 그만두었습니다. 상호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던 189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닫아 걸었던 문을 열고 일본을 시작으로 하여 미국, 러시아,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개화'라고 합니다. 1894년, 열아홉 살이 된 상호는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학문을 알아야 우리글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이름을 상호에서 시경으로 바꾸었습니다. 주시경이 새로운 학문을 배우겠다고 하자 큰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공부하는 데 싫증이 난 모양이구나. 엉뚱한 소리 말고 장사하는 것이나 배우도록 해라." "그게 아닙니다. 제가 신학문을 배우려고 하는 건,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 오너라." 이렇게 하여 주시경은 고향 무릉골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주시경이 말을 꺼내자마자 야단을 쳤습니다. 평생 시골에 파묻혀 한자로 된 책을 읽으며 공부해 온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방에서 더 배울 게 없다고? 그래, 서양 오랑캐의 학문을 배워 무엇에 쓰겠다는 거냐?" "절대 안 된다! 글방에 다니기 싫으면 장가나 가거라." "저는 아직 장가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시경이 끈질기게 간청했지만 아버지는 끄떡도 안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고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곧이어 청나라가 새로운 무기와 신식 군대를 앞세운 일본에 패했다는 소식이 무릉골까지 들려 왔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주시경은 다시 아버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버지, 대국인 청나라가 왜 작은 섬나라 일본에게 진 줄 아십니까?" "그야 힘이 모자라서 졌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힘이란 바로 신식 무기의 힘입니다. 일본은 일찍이 발달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옛날 무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무서운 힘을 가진 신식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일본보다 늦게 개화를 하는 바람에 그만큼 힘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청나라를 이긴 일본은 이제 마음대로 우리나라 일에 간섭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빨리 새로운 학문을 배워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지키는 길입니다." 주시경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아버지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습니다.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옛날 것만 고집하다가는 꼼짝없이 일본에게 당하겠구나. 앞으로는 너희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테니, 네 생각대로 신학문을 배우도록 해라." 마침내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열심히 공부해서 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시경은 아버지께 절을 하고 그 즉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스승 서재필. 다시 서울로 돌아온 주시경은 먼저 길게 땋아 늘였던 머리카락부터 짧게 깎았습니다. 친구들은 머리를 깎은 주시경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자네가 이런 불효자인 줄은 몰랐네." 그 때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목을 베는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했으니, 친구들이 놀랄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시경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우리나라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시경이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은 1894년 8월의 일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은 1885년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기 위해 미국에서 온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맨 처음 세운 서양식 학교입니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에서 수학과 세계 지리, 그리고 역사를 배웠습니다. 배우는 것마다 모두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세계 지리와 역사를 배우면서, 주시경은 세상이 한없이 넓은 데다가, 일본, 청나라, 미국 말고도 수많은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바로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을 열심히 익히는 것이 세계의 힘 센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 남는 길이다.' 그 무렵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나라 안이 몹시 어수선했습니다. 그 바람에 큰아버지의 가게도 잘 안 되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 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책 만드는 일을 시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게 했습니다. 주시경도 인쇄소에서 심부름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공부하랴, 일하랴 힘들고 고단한 나날이었지만, 주시경은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뎠습니다. 주시경은 선생님들로부터 문명이 발달하고 잘사는 나라일수록 자기네 글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나라는 훈민정음이 있는데도 남의 나라 글인 한자를 배우느라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 하루빨리 우리말과 우리글을 갈고 닦아야지.' 상동 교회 옆에 있는 허름한 집에 살면서, 주시경은 밤늦도록 우리글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우리글이 다른 어느 나라 글보다 아름답고 과학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주시경의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네 나이 벌써 스물하나다. 장가를 들어야지." 아버지가 주시경을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 결혼은 나중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주시경이 말했으나 아버지는 펄쩍 뛰었습니다. "지금도 늦었는데, 나중에 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색시감도 이미 정해 놓았으니, 너는 아무 말 말고 따르도록 해라." 주시경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고향에 내려가 김명훈이라는 처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1896년 10월의 일이었습니다. 결혼식을 마친 주시경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때 배재학당에서는 서재필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서재필은 1884년에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하루빨리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이 혁명이 바로 갑신정변입니다.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으켰던 갑신정변은, 청나라에서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랬다가 이 무렵, 12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나라를 개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개혁을 하려면 무엇보다 백성들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한 서재필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서재필의 강의를 들으며 주시경은 그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서재필 또한 많은 학생들 가운데 주시경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자네, 우리말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지? 장한 일이야. 우리말과 글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지." 서재필은 주시경의 도움을 받아 민주주의와 나라의 독립에 대해 연구하는 '협성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어른들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꾀어 골치 아픈 일을 만들다니, 더 이상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조정에서는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못 하게 막았습니다. 어느 날, 배재학당을 그만둔 서재필이 주시경을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게. 신문은 순 우리 글로 내기로 했네. 그러니 무엇보다 우리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네. 자네라면 능히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걸세. 주시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서재필 선생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으며, 무엇보다 우리글을 바르게 알리고 널리 쓰도록 하는 데 아주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주시경의 말에 서재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독립신문을 내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첫 호를 냈습니다. 모두 4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1, 2, 3면은 순 우리글로 되어 있고, 4면은 영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4면 다 우리글로 하지 않고 그 중 한 면을 영어로 한 이유는, 우리나라 사정을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 우리나라도 얼마든지 신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뛰어난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글로 되어 있어 읽기가 아주 쉽군." "나라에서 잘못하는 일도 거침없이 꼬집어 놓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독립신문을 통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갔습니다. 천하게 여겼던 우리글을 아끼는 마음도 차츰 높아져 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3백 부만 찍었지만, 점차 그 부수가 늘어나 나중에는 3천 부까지 찍었습니다. 독립신문에서 러시아, 일본 등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꼬집자, 러시아 공사는 할 수 없이 자기네 공사관에 있던 고종 임금을 궁궐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전 해인 1895년 8월, 일본은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던 일본 군인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쳐들어가, 고종의 비인 명성 황후를 죽이고 그 시체를 불태우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일로 온 나라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궁궐을 지키던 일본군이 서울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 틈을 타서 러시아와 친한 세력들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게 하고, 그 곳에서 나랏일을 보게 했던 것입니다. 궁궐로 돌아온 고종 임금은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국임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기 위해 1897년 10월 12일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종은 황제가 되고 왕세자는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독립된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실제로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물리칠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들은 여전히 외국인들의 힘을 빌려 벼슬자리를 지키는 데 눈이 어두웠고, 그 바람에 광산을 파낼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철도, 산림 등 모든 중요한 권리가 러시아를 비롯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 넘어갔습니다. 1896년 7월, 기울어 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협회'를 만들었습니다. 독립협회에서는 그 첫 사업으로 서대문 밖에 있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올 때 머리를 조아려 맞이하던 문으로, 우리 나라가 중국의 신하 나라임을 인정하는 부끄러운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다는 것은, 우리가 독립된 나라임을 널리 알린다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에 광고를 내어 독립문을 세우는 데 필요한 돈을 널리 구했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정성어린 돈을 보내 왔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마침내 독립문이 세워졌습니다. 1897년 11월의 일입니다. 독립협회에서는 그 후로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조정에서 옳지 못한 일을 하면 독립신문을 통해 곧 그것을 문제삼았습니다. 그리고 강연회를 열어 잘못된 것을 당장 고치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독립협회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너도 나도 회원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독립협회는 생긴 지 석 달이 채 안 되어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이렇게 힘을 키워 가자 조정 대신들은 은근히 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독립협회에 맞설 만한 '황국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황국협회에서는 독립협회의 강연회가 열리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방해했습니다. 그래도 강연을 계속하자, 그들은 연단을 부수고 이를 말리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게다가 독립협회에서 고종 황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는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외국 공사와 손을 잡고 있던 대신들이 고종 황제에게 말했습니다. "서재필만 없으면 독립협회도 그 기세가 꺾일 것입니다. 그를 나라 밖으로 쫓아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쫓겨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서재필은 주시경을 비롯하여 이상재, 윤치호 등을 불러 말했습니다. "나는 비록 이렇게 떠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굴하지 말고 신문을 계속 내도록 하게." "염려 마십시오. 선생님." 이 때 주시경은 마음속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신문을 굳게 지킬 것을 다짐했습니다. 계속되는 시련. 주시경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서재필의 뒤를 이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회장직을 맡은 윤치호를 도와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느 날, 주시경은 밤늦도록 신문사에 앉아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신문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윤치호는 어디 있소?" 한 병사가 주시경에게 거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주시경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선생께서는 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윤치호의 집으로 가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듯 잠시 후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시경이 나가 보니 낯선 영국 병사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주시경 선생입니까?" 그 영국 병사가 물었습니다. "그렇소만." "지금 곧 저를 따라 영국 공사관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아니, 느닷없이 영국 공사관에는 왜요? 무슨 일입니까?" "저는 잘 모릅니다. 이걸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주머니 속에서 쪽지를 꺼내어 내밀었습니다. 종이를 펴 보니 '이 영국인을 따라 급히 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주시경은 곧 그 영국 병사를 따라 영국 공사관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는 뜻밖에도 윤치호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다가 주시경을 맞았습니다. "선생님, 이게 웬일입니까?" 주시경은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윤치호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오늘 황제를 만나 뵈었네. 독립신문에서 너무 심하게 조정을 공격한다고 노하시더군.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라 하시기에 물러 나왔는데, 누가 뒤에서 폭탄을 던졌어. 그 바람에 자전거 뒷바퀴가 번쩍 들려 땅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는데,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더니, 어느 새 병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국 공사관으로 뛰어들어와 보호해 달라고 청했지. 곧 자네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 같아 이리로 오라고 한 걸세.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외국 공사관 안에 있으면 안전했습니다. 공사의 허락 없이는 잡아가지 못하는 '치외법권'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시경과 윤치호는 며칠 동안 영국 공사관 안에서 숨어 지내며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영국 공사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독립신문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독립신문은 나라 꼴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이익에만 눈이 먼 대신들을 나무라고 그들의 잘못을 따졌습니다. 더 이상 그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대신들은,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독립협회 간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시경은 미리 알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재빨리 몸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주시경은 한동안 이곳저곳으로 도망 다니다가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갔습니다. 주시경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할 일이 많은데 이 아까운 시간에 쫓겨 다녀야 하다니.' 주시경은 부모님이 계시는 무릉골로 가지 않고 봉산군 쌍산면에 있는 큰누나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무래도 거기가 더 안전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주시경이 들이닥치자 큰누나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 동안 일만 하느라 몸도 많이 상했을 텐데, 아 무 생각 말고 푹 쉬거라. 몸이 건강해야 큰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주시경은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밭에 나가 김도 매고 퇴비도 나르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고향의 푸근함은 그 동안 쉬지 않고 일해 온 주시경의 지친 몸과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고향은 여전히 정겹고 아름다웠지만, 또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부지런히 일했으나 모두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그들을 보며 주시경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감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을 동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습니다. 주시경은 이런 생각이 들면 어서 빨리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렇게 석 달을 지냈을 때 서울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일이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시경은 급히 서울로 향했습니다. 한글과 한힌샘. 그 동안 서울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동지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주시경은 맥이 쭉 빠지는 듯했으나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연구하는 것도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야. 기둥이 약하면 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과 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다.' 주시경은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 말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1898년 12월, 드디어 국어문법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문법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900년 2월에는, 상동 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맨 처음으로 '국어문법과'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해에 주시경은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배재학당을 졸업했습니다. 그 후로 주시경은 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글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따로 가르치는 곳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주시경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우리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것입니다. 주시경은 가르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홍화 학교에 들어가 측량술을 배우고, 이화학당 선생인 영국인에게 영어와 의학을 배웠으며, 한성 외국어 학교에 들어가 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는지 옆에서 보는 사람이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주시경은 우리글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습니다. 한글은 크고, 바르고, 으뜸 가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리글이 비로소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시경은 자신의 호도 '한힌샘' 이라는 순우리말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문법이란 말을 '말본'으로 바꾸어 부르고, 문법에 필요한 한자로 된 말을 모두 우리말로 고쳤습니다. 주시경은 이 학교 저 학교 뛰어다니며 국어를 가르치면서도,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대로 국어사전을 펴내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이 때 나라 사정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긴 일본은 우리나라를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곧 나라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통감부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그 우두머리인 통감으로 보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분한 마음에 땅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의병으로 나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시경의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긴다 해도 말과 글이 남아 있는 한 그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보다 더욱 열심히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멀리서 걸어가는 주시경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저기 주 보퉁이 선생님 가신다!" 주 보퉁이란 옆에 낀 책보퉁이가 하도 커서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 보퉁이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책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워낙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강의를 하다 보니 자연히 책보퉁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주시경은 국어뿐만 아니라 역서, 지리, 수학까지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의 놀림 속에는 주시경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기 윤 미투리 선생님도 가시네!" 학생들이 웃으며 소리쳤습니다. 윤미투리는 윤치호를 말합니다. 늘 미투리를 신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당시 신학문을 배운 사람들은 대개 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주시경이나 윤치호는 양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무명 바지저고리에 무명 두루마기야말로 가장 우리나라 사람다운 옷차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단 주시경이 미투리 대신 가죽 구두를 신은 것은, 일주일에 스무 군데가 넘는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 길을 걸을 때에는 가죽 구두가 짚신이나 미투리보다 닳지 않고 오래 신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중국 글인 한자를 빌려 썼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글과 말을 찾아서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문명국이 될 수 있습니다." 주시경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시경은 '두루때글' 이라는 독특한 별명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짓궂은 학생들이 붙인 별명이었습니다. 주시경이 강의를 끝낸 뒤 책보퉁이를 들고 교실을 나가자 한 학생이 교단에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말과 글을 씁시다. 주시경이라는 이름도 한자 를 빌려서 쓴 것이니, 우리말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주는 '두루 주'이고, 시는 '때 시', 경은 '글 경'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시경이 아니라 두루때글로 불러 주십시오. 그 학생이 주시경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습니다. "두루때글이라고?" "주 보퉁이가 책보퉁이를 들고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두루때글 굴러다닌다? 야, 정말 재미있다!" 이렇게 해서 주시경은 별명을 두 개나 얻었습니다. 그러나 주시경은 자기를 뭐라고 부르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한글 연구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열심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시경이 지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백두산의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통째로 싣고서 철도로 달아날 때, 그 열차의 차장이 누구였습니까?" 주시경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대답하자 주시경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백두산의 나무를 베어 작은 배를 만들고 서해에 둥실 띄워 내려오며 바라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 그 주인이 누굽니까?" "조선 사람입니다!" 학생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도둑맞고 있습니다.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순간, 주시경도 학생들도 모두 눈에서 뜨거운 불길이 이는 듯했습니다. 이와 같이 주시경은 학생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시경의 수업 시간이 늘 엄숙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졸거나 지루해할 때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우스운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역시 지리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시경은 막대기로 몽골 지역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고비 사막입니다.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입니다. 상인들은 그만 주저앉아 목을 놓아 웁니다. 그래서 이 곳의 이름은 '울가'입니다." 학생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주시경은 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때에는 선생님의 월급이 아주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때 나오는 것만도 다행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주시경은 버는 돈의 대부분을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교재를 만드는 데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어두컴컴하고 초라한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통감부의 높은 관리가 주시경을 찾아왔습니다. "선생의 훌륭하신 이름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주시경은 그 관리의 낯뜨거운 아침에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네, 선생께 조선글을 좀 배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아니, 일본 사람이 우리 조선의 글은 배워서 뭘 하시렵니까?" "이 나라에서 살려면 조선말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배워 두려는 겁니다." 주시경은 그제야 좀 얼굴빛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한글 공부는 뒷전이고 자꾸 엉뚱한 소리만 했습니다. "선생처럼 이름 높은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살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주시경이 잠자코 있자 관리가 다시 말했습니다. "선생께 생각만 있으시다면 우리 통감부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일에 협조를 하시면, 좀더 크고 좋은 집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주시경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네 이놈, 썩 물러가거라! 내 비록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원수의 종 노릇은 하지 않는다!" 주시경의 호통에 놀란 그 관리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허겁지겁 달아났습니다. 대한 의원 부속 의학교 학감으로 있는 지석영이 주시경을 찾아온 것은 그 얼마 후였습니다. 지석영은 일본에서 종두 제조법을 배워 와서 천연두로 죽어 가는 많은 사람을 살려낸 학자였습니다. 그는 의학뿐만 아니라 우리글 연구에도 깊은 관심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주시경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나도 우리말을 갈고 닦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선생의 생각에 찬성하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없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주시경은 오랜만에 뜻 맞는 사람을 만나 반가웠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쓰자면 무엇보다 사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모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 이 일을 나라에서 맡아서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내가 곧 폐하를 뵙고 말씀드려 보겠소." 1907년 7월, 지석영이 애쓴 덕분에 '국문 연구소'라는 한글 연구 기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윤치호를 위원장으로 하여 한글 연구에 뜻이 있는 학자 15명이 연구 위원직을 맡았습니다. 주시경 역시 그 연구소의 위원으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한글 연구에 앞장섰습니다. 주시경은 이 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국어 문전 음학, 국어 문법, 말의 소리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대나무처럼. 주시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나라와 겨레에게 이로운 일인지 해로운 일인지 먼저 따져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로운 일이면 망설이지 않고 앞장섰으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부러지되 휘어지지 않는 대나무와 같았습니다. 1907년 12월, 몹시 추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시경의 동생 시강이 형을 찾아왔습니다. "형님, 이번에 영친왕께서 일본에 가게 되셨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영친왕은 고종의 셋째 아들이자 순종의 동생이었습니다. 일본은 자기네 왕자와 왕족들이 다니는 학습원에 유학을 시킨다면서 영친왕을 볼모로 데려갈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영친왕의 나이는 그 때 열한 살이었습니다. "그 이야긴 나도 들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영친왕을 모시고 함께 갈 사람들을 뽑는다는데, 이번 기회에 저도 따라갔으면 해서요. 어린 나이에 머나먼 남의 나라로 가시는 게 안쓰러워서." "네 뜻은 알겠다만 아무래도 그만두는 게 좋겠다." 주시경은 굳은 표정으로 잘라 말했습니다. "아니, 왜요?" "말이야 유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볼모로 데려가는 것 아니냐? 앞장서서 반대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시강은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네가 수행원으로 영친왕을 따라가게 되면, 일본 놈들은 잘 대접하면서 자기들 편으로 만들려고 할 게다. 만약 그들의 꾐에 넘어간다면, 그것은 곧 나라와 겨레에 등을 돌리는 일이 되는 게야." "듣고 보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결국 시강은 일본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주시경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 때 영친왕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1909년 봄, 서울의 탑골 승방에서 최익현의 명복을 비는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간 뒤, 원수가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쓰시마 섬에서 굶어 죽은 의병장입니다. 뜻 있는 사람들은 진작부터 최익현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 이름만 입에 올려도 잡아가는 판이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시경은 이상재, 양기탁을 찾아가 최익현의 추도식을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상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잖아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도식을 하되 비밀리에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잡혀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나라를 위해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추도식마저 욕되게 할 수는 없지요. 곧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세 사람은 그 뜻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익현의 추도식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날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은 70여 명 정도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이의 추도식마저 몰래 숨어서 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에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올랐습니다. 나라의 힘을 기르는 일. 1910년은 주시경뿐만 아니라 모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해였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한일병합 조약'을 강제로 맺고, 그 사실을 세계에 널리 알렸던 것입니다.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지고, 통감부 대신 총독부가 생겨 우리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들이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또 우리글과 우리 역사 대신 일본글과 일본 역사를 배우도록 했습니다. 우리 겨레의 얼을 없애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주시경의 건의로 만들었던 국문 연구소도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그 무렵 최남선이 주시경을 찾아왔습니다. 최남선은 그 때 비록 스물한 살밖에 안 되었지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선생님, 이제 일본 놈들은 우리 것은 무엇이든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귀한 책들이 없어지기 전에, 그것들을 다시 여러 권 찍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도 애국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남선의 말에 주시경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옳은 말이야!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일세." 이렇게 하여 옛 책을 펴내는 '조선광문회'가 탄생했습니다. 주시경은 그 곳에서 국어에 관계된 옛 책을 교정하는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국문 연구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해내지 못한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일도 시작했습니다. 몇 해 전 안남 망국사를 출간했을 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곤란을 겪었던 일이 떠올랐지만, 우리말 사전 집필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안남 망국사는 1907년에 주시경이 번역한 책입니다. 안남은 오늘날의 베트남을 가리키는데, 1884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시경은 강한 나라의 힘에 눌려 망한 안남의 처지가 우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그 책을 우리글로 옮기려고 결심했으며, 마침내 1907년 11월, 안남 망국사를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은 6개월도 안 되어 세 번이나 다시 찍어야 할 만큼 많이 팔렸습니다. 뒤늦게 이 책의 내용을 알게 된 통감부에서는 당황하여 이 책을 팔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방에 깔려 있는 책을 거두어들이는 한편, 출판사에 남아 있는 책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주시경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곧 나라의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특히 학교를 세우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서울의 협성 실업 학교, 휘문의숙, 그리고 정주의 오산 학교, 평양의 대성 학교 등은 모두 주시경이 애를 써서 세우게 된 학교입니다. 협성 실업 학교를 세우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이갑이라는 사람이 주시경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신식 군대의 군인으로, 계급은 오늘날의 대대장과 같은 참령이었습니다. "선생님께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사실은." 이갑은 평안도 장연 사람으로, 그의 집은 원래 큰 부자였습니다. 어느 해인가 평안도 관찰사가 새로 왔는데, 그는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이갑의 아버지로부터 야금야금 돈과 땅을 빼앗아 갔습니다. 평안도 관찰사는 그 무렵 한창 세도를 부리고 있던 명성 황후 민씨의 친척이었으므로, 그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달라는 대로 바치다 보니 그 많던 재산이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이갑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땅을 팔아 그 돈을 아들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디 이 억울함을 풀어 다오." 그래서 이갑은 일본으로 가서 군관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다른 동료들보다 몇 배나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덕분에 뛰어난 성적으로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민씨들은 그 세도를 잃고 조정에서 쫓겨난 후였습니다. 물론 그 관찰사도 장연에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이갑의 집 재산을 빼앗은 민씨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갑은 군복 차림으로 허리에 권총을 찬 채 그를 찾아가, 자기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간 땅을 당장 내놓으라고 말했습니다. 민씨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언제 당신네 땅을 빼앗아 갔단 말이오?" "너무 세월이 흘러서 기억 이 잘 안 나시는 모양이죠?" 이갑은 지난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설마 그래도 기억이 안 난다고는 못하겠지? 그 일 때문에 우리 아버님께서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소. 어서 우리 땅을 내놓으시오." 그러나 민씨는 그 땅은 자기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이갑의 아버지가 스스로 바친 것이라며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갑은 그 후로도 몇 번 더 민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민씨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해 이갑은 평소 존경해 온 주시경을 찾아와 사정을 털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빼앗을 수도 없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야 악을 악으로 갚는 게 되니 안 되지요. 좀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잠시 후 주시경이 이갑에게 물었습니다. "이 참령은 그 땅을 찾으면 어디에 쓰실 생각이죠?" "글쎄요, 반드시 어디에 쓰겠다고 정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그 일로 화병이 나서 돌아가셨으니, 되찾아서 한을 풀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좀더 넓게 생각하신다면 내가 한번 나서 볼 수도 있습니다." 주시경이 이갑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라의 장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가 잘되려면 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땅을 찾게 되면 학교를 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 땅이 그렇게 쓰인다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민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얼마 후 주시경은 시간을 내어 민씨를 찾아갔습니다. "지난날 옳지 못한 방법으로 빼앗은 땅은 돌려주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 참령은 그 땅을 팔아 학교를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언짢은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민씨는 학교를 짓는다는 말에 얼굴빛이 환해졌습니다. "그런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난 다짜고짜 땅을 내놓으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던 것이오." "민 선생께서도 그런 방법을 쓰신 걸로 아는데." 주시경이 비꼬듯이 말하자 민씨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아무튼 보람 있게 쓰인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난 잘못을 비는 뜻에서 기분 좋게 그 땅을 내놓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학교가 바로 서울의 낙원동에 있는 협성 실업 학교입니다. 겨레를 향한 영원한 사랑. 1910년부터 4년 동안 주시경은 한글 강습소에서 우리말을 가르쳤습니다. 그 강습소에서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므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강습소를 졸업할 때, 주시경은 다음과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라는 잃었을망정 말까지 잃으면 안 된다. 말은 곧 그 겨레의 혼이다. 배운 것을 그대로 묵히지 말고, 고향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도록 해라." 주시경이 한글 강습소에서 길러 낸 학생은 그 수를 일일이 세기 힘든 만큼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국어학자 최현배처럼 나중에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이렇게 주시경이 한글 강습소 일에 열심히던 1911년,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에게는 안명근이라는 사촌 동생이 있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안명근은, 독립군 학교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데라우치 총독이 평안도에 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안명근은 데라우치 총독을 죽이고자 은밀하게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일본 경찰이 눈치채고 안명근을 체포했습니다.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일본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많은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 때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잡혀 들어갔는데, 그 중 윤치호, 이승훈 등 10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05인 사건'입니다. 주시경은 한글을 통해 겨레의 정신을 일깨우려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주시경을 일본이 가만히 놓아 둘 리 없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오라 가라 하며 주시경을 괴롭혔습니다. 한글 강습소까지 따라 들어와 학생인 체하고 앉아 감시를 하는 형사도 있었습니다. 1914년, 주시경은 마침내 결심을 했습니다. '여기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으니, 넓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나자. 만주로 가서 한 손에는 총, 또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나라를 되찾는 그 날까지 싸우는 거야.' 만주로 떠나기 전, 주시경은 고향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다시 찾은 고향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훨씬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부디 몸조심해라." "네, 제 걱정은 마시고 건강하십시오." 부모님께 인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주시경은 만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글 연구를 계속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구하느라 며칠 동안 밤낮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주시경은 덜컥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너무 무리를 한데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빨리 일어나야지.'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시경은 밥을 먹다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습니다. 심하게 체한 것입니다. 가족들은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으나, 미처 치료할 사이도 없이 주시경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아홉 살 때인 1914년 7월 27일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일생을 보낸 주시경. 그는 갔지만 늘푸른나무 같은 그의 우리말 사랑과 나라 사랑 정신은 그 싱싱함을 자랑하며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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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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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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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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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땅에 떨어진 옥토끼. 조선 중종 임금 때인 1543년, 송도 변두리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날 송도에서 이름난 점쟁이가 찾아왔습니다. 주인을 찾는 소리에 아기 아버지가 나가자 그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댁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달나라의 옥토끼가 송도 땅에 태어났으니, 장차 송도의 종잇값이 비싸질 것입니다.” “종잇값이 비싸질 것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댁의 아기가 크면 명필이 되어 이름을 드날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글씨를 본받아 베껴 쓰려는 사람이 많아질 것 아닙니까? 그러니 자연히 종이값이 비싸질 수밖에요.” 명필이란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점쟁이의 말대로 아기는 나중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 명필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석봉 한호입니다. 한호의 할아버지 한관은 정5품 정랑 벼슬을 지낸 분이었으나, 한호가 태어날 무렵에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한호의 아버지도 과거에 뜻을 두고 글공부하던 선비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몸이 약했던 탓에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한 채 한호가 어렸을 때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살기가 힘들어지자, 어머니는 떡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떡쌀을 담가 놓고 고물을 만들 콩을 볶고 있었습니다. 한호는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장작을 가지고 마당의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들여다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려운 한자를 잔뜩 써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너 이런 글자를 누구한테 배운 거냐?” 어머니가 묻자, 한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벽장문이나 병풍 같은 데 씌어 있는 걸 봤어요.” 그 글은 벽장문과 병풍에 씌어 있는 한시를 보고 흉내 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어머니는 한호가 태어난 날 찾아온 점쟁이가 했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송도의 종잇값이 비싸질 정도로 훌륭한 명필이 된다고 했다지? 그래,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글씨를 잘 쓰는 걸 보면 그게 빈말은 아닌 모양이야.’ 어머니는 다음 날부터 한호를 동네 서당에 보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렵기는 했지만,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좀 더 열심히 일하면 돼. 우리 호만 잘 자라 준다면 내가 고생하는 것이야 상관없지.’ 이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는 떡이 든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한호는 글공부도 잘했습니다. 특히 타고난 재주 덕분에 한호의 글씨는 날이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어린것이 어쩌면 이렇게 글씨를 잘 쓸까? 그 녀석 참...” 글방 선생은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밤, 한호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수염이 허연 노인이 나타나서 그에게 서첩을 건네주는 꿈이었습니다. 서첩이란 이름난 이의 글씨를 모아 꾸며 만든 책을 말합니다. 그 서첩의 표지는 붉은 비단에 금빛 글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서첩을 받아 든 한호가 물었습니다. “누구신데 제게 이런 걸 주시죠?” 노인은 한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습니다. “나는 왕희지다. 이 서첩을 잘 간직해라.” 그리고 노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습니다. 한호는 노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난 한호는 영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왕희지가 누구지?’ 다음 날, 글방에 간 한호는 훈장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물었습니다. “훈장님, 왕희지가 누구예요?” “왕희지는 중국 진나라 때의 명필이다. 우군 장군 벼슬을 했기 때문에 왕우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그 양반이 꿈에 나타나 네게 서첩을 준 것을 보니, 너도 그만한 명필이 될 모양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왕희지 같은 명필이 되어라.” “네, 알겠습니다!” 그 후로 한호는 더욱 글씨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어느덧 석봉 한호의 나이 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한호는 책을 읽을 때에는 책 한 권을 백 번씩 읽었다는 선조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책 내용을 완전히 다 이해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글을 베껴 썼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글씨 공부를 하려면 먹이며 붓이며 종이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한호네 집안 형편은 마음 놓고 붓 한 자루, 종이 한 장 사기도 어려울 만큼 가난했습니다. 어머니가 밤잠을 자지 않고 떡을 만들어 팔았으나, 그것으로는 가까스로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 어머니에게 종이나 먹이 필요하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호는 자기에게만 밥상을 차려 주고 부엌에서 숭늉으로 배를 채우는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 끝에 한호는 처음에는 묽은 먹에 붓을 적셔 글씨를 쓰고, 다음에는 좀 더 진한 먹을, 그다음에는 더 진한 먹을 적셔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종이 한 장에다 여러 번 글씨 연습을 했습니다. 묽은 먹으로 쓴 글씨가 마르면 그 위에 좀 더 진한 먹글씨가 겹치고, 또 그 위에 더욱 진한 먹글씨가 겹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글자가 겹치고 겹쳐 종이가 까맣게 변하곤 했습니다. 한호는 또 땅바닥과 모래 위에 글씨 쓰는 연습을 하며 종이와 먹을 아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손바닥만큼 넓적한 떡갈나무잎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 종이 대신 저 잎사귀에 글씨를 쓰면 되겠구나.’ 그 후로 석봉 한호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지게 위에 붓과 먹과 벼루를 얹어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를 한 다음 떡갈나무잎을 따서 골짜기 물을 떠다가 먹을 갈아 그 위에 글씨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먹도 아까워서 나중에는 먹물 대신 맹물에 붓을 찍어서 글씨를 썼습니다. 종이와 먹이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글씨 쓰는 데 온 정신을 다 쏟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산과 들이 누렇게 물기를 잃어 가자, 더 이상 나뭇잎에 글씨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호의 눈에 띈 것이 마을 앞 개울에 놓여 있는 돌다리였습니다. ‘여기는 한적한 곳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도 않아. 게다가 다리가 판판하니 글씨 연습을 하기에는 아주 좋을 거야.’ 한호는 다리 밑에 흐르는 물로 먹을 갈아 다리 위에 글씨를 써 보았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한결 잘 써졌습니다. 이따금 지나가던 마을 어른들이 발길을 멈추고 한호가 글씨 쓰는 것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놈 참, 어린것이 글씨를 아주 잘 쓰는군.” 이윽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 왔습니다. 냇물도 얼어붙고 눈이 쌓여 돌다리 위에서 글씨 연습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집 안에서 깨진 항아리 조각을 종이 삼아 글씨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뭇잎이나 돌다리에 맹물로 글씨 연습을 하면서 아껴 두었던 종이와 먹을 보고 어머니가 엄한 얼굴로 나무랐습니다. “너 요새 글씨 공부를 게을리했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그러면 어째서 종이와 먹이 남았느냐?” 어머니의 매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한호는 사실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를 풀고 말했습니다. “어미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너에게 종이와 먹을 사다 주는 일은 이 어미의 즐거움이란다. 앞으로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거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겉으로는 나무랐으나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했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는 자신이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한호의 글씨 공부에 필요한 종이와 먹은 모자라지 않게 사다 주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글씨 연습을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마루로 나간 석봉 한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머니가...” 어머니가 떡을 반죽하다 말고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모두 나 때문이야. 아, 얼마나 피곤하면 저리도 곤하게 주무실까.’ 한호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내가 도와드려야겠다.’ 한호는 어머니 옆에 놓인 반죽 그릇을 살며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대신 반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그런지 반죽하기는 몹시 까다롭고 힘들었습니다. 한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쓰고 있는데, 별안간 뒤쪽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거기 앉아서 뭘 하는 거냐?” 언제 잠이 깼는지 어머니가 일어나 앉아 노여움에 찬 눈으로 한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어머니! 깨셨군요.” “어서 손 씻고 이리 오너라!” 당황하여 쩔쩔매고 있는 한호에게 다시 어머니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한호가 눈치를 살피며 다가가자, 어머니는 어느 틈에 회초리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누가 너더러 그런 일을 하라고 했느냐? 자, 종아리를 걷어라!”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너무 피곤하신 것 같아서...” 한호는 잘못을 빌었으나 어머니는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소리 말고 어서 종아리나 걷으라니까!” 더 이상 빌어도 소용없음을 안 한호는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회초리로 사정없이 한호의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한호는 아무 소리 없이 아픔을 참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한호가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어머니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한호가 잠든 체하고 있으려니까, 어머니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아들의 종아리를 걷어 올렸습니다. 회초리로 때린 곳을 살펴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어머니는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한호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해야지.’ 그 후 한호는 쉬지 않고 글씨 연습을 했습니다.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글씨가 좋아졌습니다. 한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송도의 소년 명필’로 유명해졌습니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한호를 찾아왔습니다. “얘야, 글씨 한 장 써 다오.” “나도 한 장 부탁하자.” 한호는 사람들이 부탁하는 대로 글씨를 써 주었습니다. “야, 잘 썼다! 명필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바로 너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였구나.” “정말 훌륭한 글씨야.” 사람들은 한호의 글씨를 칭찬하며 그 값으로 쌀을 가져오기도 하고, 종이나 붓, 먹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직접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 이젠 얼마든지 종이를 살 수 있게 되었어. 어머니도 편히 모실 수 있고…….’ 한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어느새 온 동네에 소문이 퍼져 한호의 글씨를 받아 가기 위한 사람들로 집은 늘 북적거렸습니다. 한호는 이제 글방에도 나가지 않고 글씨만 써서 팔았습니다. 어머니는 차츰 이런 한호가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어머니는 한호를 조용히 불러 앉혔습니다. “오늘 글방에 다녀왔느냐?” “아뇨. 그게 저...” “안 다녀왔느냐?” “네...” 한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왜 안 갔느냐?”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사람들이 글씨를 써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럼, 어제는? 어제는 글방에 갔다 왔느냐?” 한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나는 네가 명필이 되는 날만을 기다렸는데, 너는 어느새 장사꾼이 되어 버린 모양이로구나.” 그 말에 한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습니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습니다. “내 이번엔 그냥 넘어갈 테니, 다시는 다른 생각 말고 공부에만 힘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한호는 어머니와 굳게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한호는 다시 글방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한호는 어머니와 한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다시 글방에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한호를 또 불러 앉혔습니다. “너 이게 뭔지 아느냐?” 어머니가 짜고 있던 베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한호는 뻔한 것을 물어보는 어머니의 속뜻을 알 수 없었으나,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베입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두말없이 가위를 가지고 짜던 베의 한가운데를 싹둑 잘랐습니다. “아니, 어머니...” 한호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자, 보아라. 이제 이 베를 쓸 수 있겠느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짜던 베를 중간에서 잘라 버리면 못쓰게 되듯, 공부도 하다가 그만두면 성공할 수가 없단다.” 한호는 그제야 비로소 어머니가 베를 자른 까닭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한호는 사람들이 아무리 졸라도 더 이상 글씨를 써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글방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나가 공부했습니다. 석봉 한호는 어느새 열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자랐습니다. 물론 글공부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한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글방에서는 배울 만큼 배웠으니,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떠나거라. 집에 있으면 게을러지기 쉽고, 또 집안 형편에 마음이 쓰여 제대로 공부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어머니의 말에 한호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어머니 곁을 떠나기 싫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30리쯤 가면 산이 있고, 그 산에 작은 절이 하나 있다. 너의 글방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는데, 그 절의 스님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란다. 공부를 아주 많이 하셨다는구나. 그분이라면 너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그곳에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어머니...” 갑자기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서 지낼 생각을 하니 한호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그 스님과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해라. 알겠느냐?” 한호가 대답하지 않자, 어머니가 다그쳤습니다. “싫다는 거냐? 왜 대답이 없어?” “싫은 게 아니라...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호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성공하려면 어렵고 힘든 일을 이겨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날 밤, 한호는 엎치락뒤치락하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내일이면 정든 집과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일찌감치 한호를 깨웠습니다. 벌써 한호가 들고 갈 봇짐을 다 챙겨 놓고는 아침상을 차려 들여왔습니다. 평소와 달리 상 위에는 맛있는 반찬이 많이 있었습니다. “많이 먹고 어서 떠나거라. 길이 멀어 일찍 떠나도 어두워져야 도착할 것이다.” 어머니가 생선 살을 떼어 밥 위에 놓아 주며 말했습니다. “네, 어머니.” 잠을 제대로 못 자 입 안이 깔깔했으나, 한호는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여 밥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이윽고 한호는 봇짐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머니,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일러둘 게 있다.” 어머니가 한호를 따라 문밖까지 나오며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앞으로 10년 안에는 절대로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마라. 나도 네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전에는 결코 너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다.” 10년이면 너무 긴 시간이었으나, 한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적어도 10년은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어머니가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떠나거라. 몸조심하고...” “네, 어머니도 부디 건강히 지내십시오.” 한호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길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도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행주치마로 몰래 눈물을 닦았습니다. 10년 공부. 석봉 한호는 그날 밤이 늦어서야 절에 도착했습니다. 한 젊은 스님이 한호를 주지 스님에게 안내했습니다. “스님, 한호라는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어서 들여보내거라.” 한호가 방 안으로 들어가니 늙은 스님 한 분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한호는 그 노스님에게 큰절했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다. 앞으로 힘이 들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라. 나도 힘껏 가르쳐 주마. 자, 오늘은 고단할 테니 그만 물러가 쉬어라.” “네, 스님.” 다음 날부터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한호에게 글씨를 쓰기 전에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붓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글씨로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재주를 앞세우기 전에 먼저 인격을 닦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글씨가 한낱 손끝에서 나온 재주에 지나지 않느니라.” 말을 마친 다음, 스님은 한호에게 글씨를 한번 써 보라고 했습니다. 한호가 그동안 배운 대로 글씨를 쓰자, 스님은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습니다. “제법 잘 쓰는구나. 하지만 글씨에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그러니 얄팍한 재주만 살아 있을 수밖에...” 그때까지 칭찬만 들어오던 한호로서는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한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스님은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 우쭐하는 생각부터 없애야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 속마음을 들킨 한호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스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열심히 가르쳐 주마.” 그 후로 한호는 주지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글씨 공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낮에는 공부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나, 밤만 되면 어머니가 못 견디게 그리웠습니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쯤 내일 팔 떡을 만들고 계시겠지. 아, 집에 가고 싶다...’ 그러나 한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10년 안에는 돌아오지 말라던 어머니의 엄한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주지 스님은 이따금 한호에게 맛있는 찰떡을 주었습니다. 한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주지 스님 또한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찰떡이 어머니가 갖다준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찾아와 먼발치로 아들의 모습을 잠깐 지켜보고는 금방 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일 년이 지나가고, 다시 또 일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밤이면 어른거리는 호롱불 아래에서 책을 보다가도 마음은 어느결에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달음박질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호는 소리 내 글을 읽고 또 그것을 글로 쓰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럭저럭 한호가 절에서 공부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3년을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보고 싶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주지 스님은 한호가 쓴 글씨를 보고 처음으로 칭찬했습니다. “비로소 글씨에 마음이 담긴 것 같구나!” 스님의 칭찬에 한호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내 실력이 이만큼 나아진 것을 알면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실 텐데...’ 한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했습니다. “스님, 정말이십니까? 그럼 이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와도 될까요?” 주지 스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녀오너라.” “고맙습니다, 스님.” 주지 스님의 허락을 얻은 한호는 그 길로 절을 내려왔습니다. 자신의 글씨를 보고 기뻐할 어머니를 생각하니, 한호의 발걸음은 나는 듯 가벼웠습니다. 석봉 한호가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밤이 깊어 있었습니다. 사립문 밖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니 어머니가 계신 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저예요. 제가 왔어요!” 한호는 버선발로 달려 나올 어머니를 머릿속에 그리며 힘껏 소리쳤습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3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조금도 반기지 않았습니다. “네가 이 밤중의 웬일이냐? 벌써 10년이 지난 거냐?” 어머니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께서 집에 다녀와도 좋다고 허락하셨어요.” “이왕 왔으니 들어오너라.” 한동안 잠자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방 안에 들어서니 도마 위에 썰다 만 가래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잘 지냈다만, 너는 공부를 많이 했느냐?” “네, 어머니. 스님께서 글씨에 마음이 담겼다면서 칭찬하셨어요.” 한호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그러면서 어머니는 도마와 칼을 끌어당겼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쓰도록 해라.” 어머니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으로 등잔불을 훅 불어 껐습니다. 방 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똑똑 떡을 썰기 시작했습니다. 한호도 정신을 가다듬어 조용히 글씨를 썼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글자와 글자 사이를 잘 가늠하여 적당한 자리에 쓰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손을 멈추고 다시 등불을 켰습니다. “어디 보자.” 그와 동시에 어머니가 벼락같이 호통을 쳤습니다. “아니, 이걸 글씨라고 썼느냐?” 한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도 글씨가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씨가 서로 겹치고, 크기도 고르지 않았으며, 줄도 비뚤비뚤했습니다. 그런 데다가 하나같이 종이의 한쪽 귀퉁이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썰어 놓은 떡은 그 두께나 크기가 조금도 들쭉날쭉한 것이 없이 모두 한결같았습니다. “이러고도 공부했다는 거냐? 글씨는 눈이나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쓰면 어둠 속이라고 해서 못 쓸 까닭이 없다. 당장 돌아가서 공부를 마치고 오너라!” 어머니는 아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한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내일 아침에 가면 안 될까요? 하룻밤만 어머니 곁에서 자게 해 주세요.” “안 된다. 어서 떠나거라.” 어머니는 단호했습니다. 한호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절을 하고 집을 나와, 캄캄한 밤길을 더듬어 절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후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공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 글씨는 눈이나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석봉 한호가 집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주지 스님이 한호를 불러 말했습니다. “그만 이곳을 떠나거라. 나로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너는 이제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네가 공부를 더 하기를 원한다면 훌륭한 스승을 한 분 소개해 주마.” “스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한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한양의 영계라는 호를 가진 신희남이라는 어른이 계시다. 그분이라면 네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 것이다.” 한호는 절에서 내려와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지 스님이 가르쳐 준 대로 영계 선생을 찾아가 소개장을 내놓았습니다. “스님께서 칭찬을 많이 하신 걸 보니 네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영계 선생은 기꺼이 한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해서, 행서, 전서, 초서의 네 가지 서체를 기본으로 삼아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도 소홀함이 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영계 선생의 말에 따라 한호는 뼈를 깎는 듯한 마음으로 글씨를 쓰고 또 썼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3년 만에 어머니를 찾아갔던 날 밤, 두께나 크기가 한결같았던 어머니가 썬 떡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참아 냈습니다. 조금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3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이제 한호의 글씨는 누가 보아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씨 한 점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설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자 한호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만큼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글씨를 써서 팔면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아도 될 거야.’ 그 무렵의 어느 날, 한호는 한양의 한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사내아이 하나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왔습니다. 아이의 손에는 겉에까지 기름이 절어 있는 기름병이 들려 있었습니다. 사내아이는 기름집 앞에서 멈춰 서더니 소리쳤습니다. “아저씨, 참기름 열 냥 어치만 주세요!” 그 옆을 지나던 한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름을 사려면 당연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 사내아이는 문밖에서 소리를 질렀기 때문입니다. ‘정말 희한한 아이로군.’ 한호는 가던 길을 멈추고 아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잠시 후, 기름집 위에 있는 다락방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주인인 듯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알았다! 잠시 기다려라.” 그러더니 조금 후에 주인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기름 항아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열 냥 어치라 했느냐?” “네, 아저씨.” 그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주인이 기름 항아리를 기울이자, 사내아이는 들고 온 기름병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락 위의 항아리로부터 흘러내리는 참기름이 마치 한 올의 실처럼 되어 사내아이가 든 좁다란 기름병 주둥이로 정확히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기름병이 거의 찼을 무렵 기름 줄기가 가위로 잘리듯이 뚝 끊어졌는데, 놀랍게도 기름은 한 방울도 땅으로 흘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참기름을 다 따르고 나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자, 열 냥 어치다!” 사내아이는 늘 그러는 듯, 참기름값은 어머니가 나중에 갖다 줄 거라면서 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습니다. 한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솜씨로구나. 그 높은 곳에서 기름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니... 저 기름집 주인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저 일을 해 온 것일까? 저 정도가 되려면 보통 노력 가지곤 안 될 것이다.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그날 한호는 공부를 그만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버렸습니다. 대신 전보다 더 열심히 글씨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공부한 결과, 한호는 그만의 독특한 글씨체인 ‘석봉체’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희지와 겨룰 만한 명필.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된 석봉 한호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한호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방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어서 오너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아들을 반기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습니다. 한호는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한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머니, 이제부터는 제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 고맙다.” 한호가 글씨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에게서 글씨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글씨를 배우려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호를 초대해서 자기 집에 머무르며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호는 여러 사람에게 고루 나누어 주기 위해 글씨를 한 사람 앞에 한 점씩만 써 주었습니다. 단, 글씨를 쓸 때는 정성을 다해서 썼습니다. 글씨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 년을 지낸 후 1567년, 한호는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호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장하다, 내 아들! 네가 과거에 급제하다니...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것다. 이 어미는 이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는 어머니를 보니 한호는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호가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선조는 한호의 글씨를 아껴 그를 사자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사자관이란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기록하는 일을 맡아 보는 벼슬입니다. 선조는 눈에 잘 띄는 곳에 한호의 글씨를 걸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좋아했습니다. “볼수록 잘 쓴 글씨로다! 과연 조선의 자랑이라고 할 만하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선조는 여러 사자관 중에서 반드시 한호를 딸려 보냈습니다. 조선에도 명나라 못지않은 명필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명나라 사람들은 한호의 글씨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선 같은 작은 나라에 이런 명필이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로다! 왕희지와 겨룰 만한 솜씨다.” 한호의 글씨는 날이 갈수록 더욱 힘 있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받은 글씨로 족자나 병풍 같은 것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한호는 이름난 사람들의 글씨를 연구하여 그 좋고 나쁜 점을 밝혀냈습니다. 그런 다음 좋은 점을 본떴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글씨를 창조해 냈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본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오면 한호의 글씨를 소중한 선물로 삼아 얻어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호의 이름은 그의 글씨와 함께 이웃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성난 사자가 바위를 뛰어넘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가로 내닫는 것같이 힘찬 글씨로다!” 한호의 글씨를 본 명나라의 왕세정이 한 말입니다. 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이란 사람은 한호의 글씨가 왕희지와 겨룰 만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호의 글씨가 정식으로 중국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였습니다. 1592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그들을 물리칠 힘이 없었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해 많은 군사를 보내왔습니다. 이때 군사들의 최고 책임자는 이여송 장군이었습니다. 다행히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가 힘을 합쳐 열심히 싸운 끝에, 왜군은 바다를 건너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여송 장군이 명나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조선에서는 그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궁리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대신이 이여송을 직접 찾아가 물었습니다. “장군은 우리 조선의 은인이십니다. 선물을 한 가지 드리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는지요? 원하시는 것이 있거든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여송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습니다. “한호라는 사람의 글씨가 용이 하늘을 오르는 듯 힘차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그의 글씨를 한 점 준다면 감사하게 받겠소.” 그 말을 전해 들은 선조는 한호에게 이여송 장군에게 줄 글을 한 점 써 달라고 분부했습니다. “다른 선물은 다 싫다 하고 오직 그대의 글씨를 얻는 것이 소원이라니 수고 좀 해 주구려.” 한호는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글씨를 썼습니다. 원하는 대로 한호의 글씨를 얻은 이여송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명나라로 돌아간 이여송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호의 글씨를 자랑했습니다. “이렇게 멋진 글씨를 본 적이 있소? 획 하나하나가 살아 꿈틀대는 용을 닮지 않았소?” 덕분에 한호의 이름은 명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많은 명나라 사람이 한호의 글씨를 구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비단을 팔러 조선에 드나드는 장사꾼들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돈은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꼭 그 글씨를 구해 주게.” 그러자 중국의 비단 장수들은 비단을 판 돈으로 한호의 글씨를 사서 갔습니다. 그러나 한호는 글씨를 많이 내다 팔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가짜가 많이 나돌았습니다. 그 정도로 한호의 글씨는 명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후, 석봉 한호는 명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신의 무리에 끼여 사자관의 자격으로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명나라에 함께 가게 된 이정귀라는 사람이 한호에게 말했습니다. “한 사자관하고 같이 가니 마음이 든든하오. 우리나라를 은근히 깔보는 명나라 사람들의 콧대를 그대의 글씨로 납작하게 해 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오.” 한호가 사신 일행으로 명나라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의 명성을 들은 명나라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이건 아는 사람이 몇 년 전에 선생의 글씨라며 사 온 것입니다. 진짜인지 좀 보아주십시오.” 한 사람이 한호에게 족자를 보이며 말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호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글씨를 얕은 수법으로 흉내 낸 가짜였던 것입니다. 한호가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글씨를 써 주자 그 사람은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이런 가짜 글씨를 선생의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 그 무렵 명나라 서울 연경의 부자들 사이에서는 그림이나 글씨를 사 모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장세기라는 사람은 그런 일에 특히 관심이 많아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면 값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아주 진귀한 그림이나 글씨들이 많았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중국 여러 시대의 것에서부터 조선이나 일본, 더 나아가서 아라비아 것까지 없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그림이나 글씨를 구경하기 위해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장세기 역시 자기가 사들인 글씨나 그림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보이며 함께 감상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날도 장세기의 집 사랑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장세기가 최근에 구했다는 글씨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그림과 글씨 모으기를 즐기는 연경의 부자들은 물론이고, 이름 있는 서예가들이 모두 초대되었습니다. 그때 연경에 있던 한호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진귀한 작품을 구경할 좋은 기회로구나. 한번 가 보아야지.’ 한호는 좋은 기회다 싶어 다른 사신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혼자 장세기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과연 소문에 듣던 대로 희귀한 그림이며 글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호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모여 있는 손님들을 향해 장세기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얼마 전 조선에서 어렵게 구한 글씨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조선에서 구한 글씨라니 한호도 몹시 궁금했습니다. “자, 천을 벗기겠습니다.” 장세기가 족자에 씌워 놓은 흰 천을 벗기는 순간 한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건.”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글씨를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 한호가 놀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글씨가 바로 조선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입니다.” 장세기의 설명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과연 훌륭하군요. 어느 획은 계곡을 흐르는 시내의 형상을 하고 있고, 또 어느 획은 하늘로 오르는 용을 닮았습니다.” “아니요. 내가 보기엔 소나무 가지에서 학이 날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 글씨는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저도 소문을 듣고 한 점 구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군요.” 한 손님이 묻자, 장세기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조선에 자주 드나드는 비단 장수에게 부탁했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한호가 앉아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한호는 몹시 쑥스러웠으나, 그렇다고 중간에 일어서서 나올 수도 없어서 잠자코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후, 주인 장세기가 손님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으니, 재미있는 제안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이 옆에 걸려 있는 족자는 왕희지 선생의 글씨입니다. 만약 이 족자의 글씨와 똑같이 쓸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제가 큰 상을 드리겠습니다. 누구 써 보실 분 안 계십니까?” 왕희지라는 말에 석봉 한호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어린 시절 꿈속에서 서첩을 받은 후로 항상 마음속에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는 글씨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왕희지의 글씨와 똑같이 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장세기가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습니다. 모두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한호였습니다. “아니, 저게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사람들이 한호를 바라보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렸습니다. “여봐라, 이리 와서 먹을 갈아라.” 장세기가 하인에게 일렀습니다. 하인이 먹을 갈아 놓자, 한호는 아무 말 없이 붓을 잡았습니다. “겁 없는 애송이로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어느 시골구석에서 글 쓰는 걸 어깨 너머로나마 좀 구경했던 모양이지?” 사람 중에는 이렇게 빈정대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비웃었습니다. “하하, 그러게 말일세. 아무튼 그 용기 하나는 높이 살 만하군.” 명나라의 내로라하는 서예가인 자신들도 나서지 못한 자리에 웬 젊은이가 선뜻 나서자, 비위가 상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비웃는 말을 듣자, 한호의 마음도 약간 흔들렸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붓도 조금 떨리는 듯했습니다. 다음 순간, 붓끝에서 먹물이 몇 방울 떨어져 하얀 종이 위에 번졌습니다. 이것을 본 주인 장세기가 말했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해도 괜찮소.” 사뭇 비웃는 말투였습니다. 이와 같은 집주인의 태도에 다른 사람들은 더욱 깔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붓 잡는 모양새를 보니 벌써 틀렸어.” “아까운 종이만 못쓰게 만드는군.” 그 소리에 한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 먹물을 떨어뜨린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것입니다. 미리 글씨를 쓸 자리를 잡아 두기 위해서이지요. 부탁이니 글씨를 다 쓸 때까지는 조용히 있어 주십시오.” 한호의 당돌한 말에 사람들은 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흥, 말은 잘하는군. 어디 얼마나 명필인지 두고 보자.” 이윽고 한호는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붓끝은 여기저기 먹물이 튄 부분을 교묘하게 메워 나가며 시원하게 글씨를 내리썼습니다. 종이 위에 여기저기 떨어졌던 먹물은 이제 한 군데도 남지 않고 기운찬 글씨의 획과 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이럴 수가... 마치 왕희지가 살아 돌아온 것 같군.” “저 사람이 대체 누구지?”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한호와 그가 쓴 글씨를 번갈아 보면서 연방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만큼 잘 쓴 글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통 솜씨가 아닌걸! 나는 지금까지 많은 글씨를 보아 왔지만, 이런 글씨는 처음 보았어.” “정말 놀라워. 이런 명필이 왜 아직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중에는 시기하는 마음에서 무슨 흠이라도 잡아내려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습니다. 아무리 흠을 찾아내려고 해도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 중 특히 매우 놀란 사람은 주인 장세기였습니다. 한호를 건방진 젊은이로 생각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정말 훌륭한 글씨요.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소?” 한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웃었습니다. “네, 저는 이번에 조선의 사신 일행과 함께 온 사자관 한호라는 사람입니다.” “한호라니, 그럼 석봉 한호란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이럴 수가!” 주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감탄해 마지않았던 글씨를 쓴 주인공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 말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유명한 한호 선생이 바로 우리 눈앞에 계셨구려. 과연 듣던 대로 명필입니다. 어리석은 제 눈이 미리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한 점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장세기는 깊이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나저나 일찍부터 한호 선생의 성함을 듣고 꼭 한 번 뵈었으면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저 역시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는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호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쨌든 내기에 이기셨으니 약속한 물건을 드리겠습니다. 유명하신 한호 선생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정말 기쁜 일입니다. 자, 어서 받으십시오.” 장세기는 한호에게 질 좋은 종이와 붓, 먹, 벼루, 그리고 비단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럼, 성의로 주시는 것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한호는 그것을 받아 들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한호가 연경에 와 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쫙 퍼졌습니다. 그러자 연경의 서예가들과 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한호를 찾아왔습니다. “이보시오, 한호 선생. 나에게도 글씨 한 점만 써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내가 먼저요. 한호 선생, 값은 달라는 대로 쳐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한호의 글씨를 얻어 가려고 애썼습니다. 송도의 점쟁이가 예언한 대로 한호는 조선의 종잇값과 함께 중국의 종잇값까지 올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석봉 한호의 나이 벌써 쉰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조 임금이 한호를 불렀습니다. “근래 들어 그대의 작품을 보기가 힘이 드는구려. 내 그대에게 한가로운 가평 고을의 군수 자리를 내릴 테니 좋은 작품을 많이 쓰도록 하시오.” 한호에 대한 선조의 남다른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한호가 가평으로 내려가기 전에 가까운 친지들과 잔치라도 벌이라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습니다. 한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정성을 다하여 글씨를 써서 올렸습니다. 그 글씨를 보고 선조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대의 글씨는 언제 어느 때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구려.” 그러면서 선조는 붓을 들어 ‘하늘이 취하고 땅이 취하니, 그 붓놀림이 천하를 움직이도다.’라고 크게 썼습니다. 임금이 이렇게 극찬하니 글씨를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한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가평 군수로 부임한 한호는 고을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글씨를 쓰는 일 못지않게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한편 가평 고을에는 인심 사나운 최 부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 관한 소문을 들은 한호는 어떻게 하면 못된 버릇을 고쳐 줄 수 있을까 궁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최 부자가 생일이라며 군수인 한호를 초대했습니다. ‘음, 잘 됐다. 내 이번 기회에 최 부자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지.’ 한호는 일부러 낡은 옷을 골라 입고 하인 하나 거느리지 않은 채 최 부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대청으로 올라갔습니다. 대청에는 갖가지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고, 잘 차려입은 손님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한호는 음식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러자 최 부자가 한호를 노려보았습니다. “이런 괘씸한... 너 같은 거지는 초대한 적이 없으니 썩 나가거라!” 최 부자의 말에 한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저놈이.” 그러자 최 부자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하인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여봐라! 저자를 밖으로 끌어내라!” “네.” 하인들은 곧 달려와서 주인의 명령대로 한호를 대문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잠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호는 아랫사람을 여럿 거느린 채 다시 최 부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한호는 최 부자 집에 도착했습니다. 하인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최 부자가 버선발로 달려 나왔습니다. “아이고, 사또.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추한 우리 집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부자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습니다. “원 별말씀을...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최 부자는 한호를 대청으로 안내했습니다. 한호가 앉은 자리는 공교롭게도 조금 전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최 부자를 비롯한 사람들은 누구 하나 조금 전의 거지가 군수였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임해 온 지 얼마 안 된 군수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어 한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 제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최 부자가 한호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그것 좋지요.” 한호는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술을 옷소매에 쏟아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참 맛있겠군.” 젓가락으로 집은 안주 역시 한호의 옷소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러나 한호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음식을 계속 옷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최 부자가 물었습니다. “사또, 혹시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다시 차려 올릴까요?” 최 부자는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 음식은 내가 입고 온 옷이 대접받는 것이니, 당연히 옷이 먹어야 하지 않겠소?” 한호의 말에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조금 전 당신은 누더기 차림의 거지를 쫓아냈지요?” 한호가 최 부자에게 물었습니다. “그걸 사또가 어떻게 아십니까?” “그 거지가 바로 나였소.” “아니, 그럴 리가...” “믿지 못하겠거든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오.” 한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던 최 부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한호가 설명했습니다. “누더기를 입었을 때나 군수의 옷을 입은 지금이나 나는 같은 사람이오. 그런데 당신은 아까는 나를 쫓아내고 지금은 융숭하게 대접을 했소. 이것은 당신이 나를 대접한 것이 아니라 옷을 대접한 것이 아니오? 그래서 음식을 옷에게 먹인 것이오.” 사람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습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사또다.” “글씨만 잘 쓰시는 게 아니라 생각하시는 것도 참으로 훌륭하시군.” 최 부자는 얼굴이 빨개진 채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또 나리.” 그 후로 최 부자의 인심이 후해진 것은 물론입니다. 군수가 이런 기지를 가진 사람이었으니 고을이 잘 다스려질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습니다. 석봉 한호는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이따금 글방에 들러 아이들에게 글씨 쓰는 법을 직접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고을이 평안하니 한호의 글씨에도 평안함이 배어났습니다. 선조는 그 무렵 한호가 써 올린 글씨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석봉의 글씨에는 백성들의 웃음소리가 담겨 있도다. 누가 감히 이런 경지에 다다른 글씨를 쓸 수 있겠는가!” 어느 해, 한호는 나랏일을 잘못 처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이 꼬투리가 되어 사헌부에서는 한호를 벌주라며 선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석봉이 마음이 모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심하거나 미워할 줄 몰라 저지른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의 잘못을 거론하지 말라.” 예순두 살 되던 1604년, 한호는 흡곡 고을의 현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호는 그곳에서도 백성들을 잘 다스려 어진 원님이란 칭송을 들었습니다. 이렇듯 백성을 다스리면서도 그는 잠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도산 서원 편액, 서화담 경덕비, 남대문 액서, 선죽교비, 행주대첩비 등 한호는 많은 곳에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605년, 한호는 갑자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약을 지어 보내 주었습니다. “이 약을 먹고 어서 일어나도록 하시오.” 그러나 그 약도 별로 효험이 없이 한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한호의 나이 예순세 살이었습니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장례에 쓸 돈과 쌀을 후하게 내렸습니다. 우리나라 서예계에서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석봉 한호. 그는 그때까지 중국의 글씨체를 모방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습니다. 옛말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한호는 오래전에 죽고 없지만,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의 책과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등의 비문에 남아 있는 그의 글씨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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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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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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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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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정조 17년) 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권의 일을 일찍 마친 영의정 채제공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채제공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하인들에게 가마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흐음, 누가 이 글씨를 썼는지 모르지만 참 잘도 썼다. 아무리 보아도 보통 솜씨가 아닌데..." 가마가 멈춘 집 대문에는 '입춘대길'이라는 네 글자와 '건양다경'이라는 네 글자가 문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채제공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입춘대길이란 봄이 시작되니 매우 좋다는 뜻이고, 건양다경이란 온 천지에 밝은 기운이 돌아오니 기쁜 일이 많다는 뜻이렷다. 저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군지 만나보고 가야겠구나." 채제공은 곧 하인에게 일렀습니다. "저 집에 가서 주인에게 잠시 뵙자고 여쭈어라" 얼마 후, 그 집 주인인 듯한 남자가 하인과 함께 나왔습니다. 채제공과 그 남자의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어? 김 참판(종2품의 벼슬)이 아니시오?" "아니, 대감께서 어쩐 일로 이렇게 누추한 데를 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주인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으로 들어선 채제공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입을 열었습니다. "김 참판, 집 앞을 지나가다 대문에 나붙은 입춘서를 보았는데, 아주 훌륭하더군요." " 네, 그건 저..." "전부터 김 참판이 붓글씨를 잘 쓴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인데, 그 글씨도 김 참판이 쓴 것이오?'' "이거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그건 제 아들이 썼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그게 아이의 글씨란 말인가요? 허어,아이의 솜씨치곤 대단하군요." 채제공은 다시 한번 감탄하였습니다. "김 참판은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군요. 어디 그 아이 좀 만나 봅시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김 참판은 안채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아들을 데리고 사랑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얘야, 영의정 어른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 아버지의 말에, 채제공 앞에 무릎을 꿇은 소년은 “대감님께 문안 인사드리옵니다.” 하고 공손히 절을 하였습니다. “오냐, 어린 네가 기특하게도 저 입춘서를 썼다니, 네 나이가 지금 몇 살이지?” 채제공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습니다. “네, 올해 일곱 살이옵니다.” “과연 신동이로구나. 그래, 이제 겨우 7세밖에 안 된 네가 붓글씨를 저토록 훌륭하게 쓰다니! 너는 머지않아 분명히 글씨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 “과분한 칭찬이옵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1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로서 자는 원춘이고, 추사, 완당 등 여러 개의 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정희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은 명문가였습니다. 또한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지라도 그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김정희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머니 유 씨가 김정희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기 낳을 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삭이 되기 전에 낳은 아이는 있어도, 이렇게 몇 달이 지나도록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드문데.’ 유 씨는 자나 깨나 아기 걱정만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김노경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아내를 안심시켰습니다. “부인,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옛날부터 뛰어난 인물은 제 세상을 만나야 태어난다고 하니, 우리 아기도 틀림없이 뛰어난 인물이 되려고 그러는 것일 게요.” “글쎄, 정말 그럴까요?” 유 씨가 불안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틀림없소. 그러니 부인은 차분한 마음으로 몸조리나 잘하구려.” 유씨 부인은 아기를 가진 지 꼭 2년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보통 아이보다 몸집이 클 뿐만 아니라 이까지 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김노경은 옥동자를 얻은 기쁨에 싱글벙글하면서, 갓 태어난 아이를 자꾸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김정희의 뛰어난 학문과 서예 솜씨를 칭찬하기 위하여 꾸며낸 것일지라도, 그가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정희가 태어날 무렵의 우리나라는 영조, 정조의 노력으로 정치 질서가 바로잡히고, 산업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영조는 당파 싸움으로 인한 조정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탕평책을 써서 관리들을 고루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사치를 금하는 한편, 임금 스스로가 검소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세금 제도를 새로 고쳐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을 장려하여 백성의 생활 향상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많은 책을 펴내어 학문의 발달을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영조 때에 우리나라의 문화와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역시 영조의 뜻을 받들어 당파 싸움을 누르고 널리 인재를 구하여 등용하였습니다. 정조는 산업 발전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 연구와 도서 출판을 장려했으며, 활자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조의 문화 정책 덕분으로 나라 안에서는 학문이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싹트기 시작한 실학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때 신경준,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등과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실학 학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곳의 문물을 살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들과 사귀어 지식을 넓히고 돌아옴으로써, 우리나라에 새로운 학문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박지원은 청나라에 다녀온 후 열하일기란 기행문을 써서 당시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박제가는 북학의라는 책을 써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에는 경학을 비롯하여 사학, 지리학, 어학, 음운학, 금석학 등의 학문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정희는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정희의 집에는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책을 읽던 매죽헌이라는 조그마한 초당이 있었습니다. 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글씨와 학문을 닦았습니다. 그의 재능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였으며, 뛰어난 지혜와 훌륭한 글솜씨는 어른들을 항상 놀라게 하였습니다. 정희는 공부를 하는 틈틈이, 그의 선조 때부터 인연이 있는 화암사에도 자주 올라가 불경을 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화암사에서 승려에게 불경을 배우던 정희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중생은 무슨 뜻이고, 사바세계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정희의 질문을 받은 승려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정희가 그 나이 또래의 소년으로서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할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 불교에서 중생이라 함은 모든 사람과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바세계란 고생이 많은 세계라는 뜻으로 인간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승려가 자세히 설명해 주자, 정희는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어릴 때부터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정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성(지금의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한성으로 올라왔습니다. 정희는 한성으로 올라온 후, 더욱 열심히 학문을 닦고 글씨를 익혔습니다. 그가 써 붙인 입춘서를 보고 채제공이 크게 칭찬을 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1797년(정조 22년), 정희가 12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의 큰아버지 김노영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욱이 큰아버지에게는 불행히도 그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의논한 끝에 결국 정희를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어느 날, 정희의 아버지는 그러한 사실을 정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날부터 큰아버지의 양자가 된 정희는 해마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그가 14세 되던 해 봄날, 정희는 아버지와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 요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느냐?” “네.” “붓글씨는?” “글씨도 틈틈이 쓰고 있습니다.” “음, 혼자서 공부하기 힘들지 않느냐?” “가끔 막히는 부분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럴 테지.”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학문이란 훌륭한 스승 밑에서 서 제대로 익혀야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동안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너의 스승을 못 모셨느니라. 이제 너에게 훌륭한 스승 한 분을 모셔 줄 테니, 학문에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의 스승이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습니다. “박제가란 분을 너도 알고 있겠지?” “네, 훌륭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난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이제 그분을 네 스승으로 모실까 생각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아버지는 정감 어린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정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제 스승이 되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래, 지금 곧 그분을 찾아뵙도록 하자.” “네, 아버님.” 정희는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섰습니다. 이 무렵, 박제가는 다른 학자들처럼 청나라를 왕래하며 청나라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 차례나 청나라를 다녀온 그는 누구보다도 청나라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희가 여섯 살 되던 해, 북학파의 기수 박제가가 정희의 글씨를 보고 그의 뛰어난 예술성을 알아보았습니다. 박제가는 정희의 비범한 재능을 꿰뚫어 보고 김노경에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필시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서예가가 될 것입니다. 내가 장차 이 아이를 가르쳐 보겠습니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에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는 북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박제가는 1790년(정조 14년), 북학 진흥의 특명을 받고 청나라의 연경 학계와 교류하러 가는 사절단에 끼게 되었습니다. 이 사절단에 김노경도 참가해, 이때부터 김씨 가문과 박제가의 교류가 시작된 것입니다. 김노경은 박제가의 학문과 열성에 감복하고 친교 맺기를 간청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도 박제가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희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들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분이 과연 나를 제자로 삼아 주실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버님, 그분께서 정말로 저를 가르쳐 주실까요?” “걱정 마라. 이제부터 너는 열심히 학문에만 정진하면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정희는 겨우 안심하였습니다. 이윽고 정희는 박제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박제가는 그들 부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정희라고 합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정희는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절을 했습니다. “내 일찍이 네가 쓴 글씨를 보고 감탄한 일이 있었느니라. 이제부터 내가 너를 가르칠 테니 열심히 배우도록 하여라.” “네, 스승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을 잊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겠습니다.” 정희의 다부진 대답에 박제가는 무척 흡족해했습니다. “그럼, 이 아이를 오늘부터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리하여 정희는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그날부터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열심히 학문을 익혔습니다. 시대를 앞선 박제가의 사상은 어린 정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박제가는 정성을 다하여 정희를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에는 조선 후기 학문의 황금시대를 이루는 실학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실학이란 조선 중엽에 일어난 학풍으로, 이론보다도 실제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존중하고 국민 경제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연구하던 학문입니다. 따라서 이들 실학자들은 당시 지배 계급의 학문인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박제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정희에게, “성리학은 헛된 이론만 일삼는 학문이니 그것을 버리고, 청나라의 고증학을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희는 어느 날 박제가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 고증학이란 어떤 학문입니까?” “고증학이란, 옛 문헌이나 물건 등의 시대, 내용, 가치 같은 것을 확실한 증거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을 말한다.” 박제가의 말이 끝나자, 정희는 또다시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럼, 그 대상이 되는 학문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참 좋은 질문이로구나. 고증학의 대상으로는 경학, 사학, 지리학, 금석학, 음운학, 문자학, 천문학 등이 있느니라. 지금 청나라에서는 이런 학문들이 매우 발전하고 있단다.” 그 후 정희는 고증학을 연구하고, 붓글씨 등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나날이 깊어 갔습니다. 정희는 틈틈이 박지원, 정약용, 이익 등의 실학자들이 쓴 책도 자주 읽었습니다. 어느덧 정희는 책에서만 접한 청나라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승 박제가가 청나라를 다녀와서 쓴 북학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나도 스승님처럼 청나라에 가서 학문을 배우고 싶다. 어떻게 하면 청나라 학자들과 사귀고, 그들과 학문을 토론할 수 있을까?’ 정희는 북학의를 읽거나, 청나라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박제가에게서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정희는 박제가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도 청나라에 갈 수 없을까요?” “청나라에는 왜?” “네, 그곳에 가서 이름난 학자들을 만나 보고, 그들의 학문을 직접 접하고 싶습니다.” “배우고 싶어하는 네 뜻은 갸륵하다만 너는 아직 어리고 학문도 더 쌓아야 하니 때를 기다려라. 열심히 배우고 익히면 머지않아 청나라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무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때부터 정희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며 청나라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던 정조가 세상을 뜨자, 박제가는 누구보다도 슬퍼하였습니다. 1801년(순조 1년) 2월의 어느 날, 박제가는 정희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번에 내가 사은사를 따라 청나라에 다시 가게 되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학문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네,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정희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박제가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청나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박제가가 청나라로 떠나자마자, 나라 안에서는 천주교도 학살 사건인 ‘신유사옥’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천주교를 금지시키려는 뜻보다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벽파가 반대파인 시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 무렵 시파 사람들 대부분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가환, 권철신과 같은 선각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옥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천주교도 및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실학자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귀양을 갔습니다. 또한 청나라 신부 주문모는 의금부에 자수하여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파의 중심을 이루던 남인 세력은 크게 기울고, 실학 또한 점점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3월, 어머니 유 씨가 세상을 떠나 정희는 커다란 실의에 빠졌습니다. 16세의 정희는 이때 비로소 인생이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허무감과 외로움을 붓글씨로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여읜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스승인 박제가가 반대파의 모함으로 말미암아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게 된 것입니다.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자이기 때문에 양반을 미워한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정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잠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화암사를 찾아가 어머니의 명복과 스승의 안전을 빌었습니다.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어 가자,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밤낮으로 학문을 닦고 붓글씨를 연마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809년(순조 9년), 24세가 된 김정희는 과거를 보아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생원이 된 후에도 김정희는 책 읽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김정희의 학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이제 나라 안의 학문에만 만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좀 더 넒은 곳으로 가서 많은 학문을 접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청나라의 학자들과 사귈 기회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김정희의 그런 욕망은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해 10월, 조정에서는 동지를 앞두고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박종래를 정사로 삼고, 김노경을 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당시 사신 일행은 무려 250여 명이나 되었고, 왕복 6천 리에 날짜만도 70여 일이나 걸리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사신 일행은 청나라의 도읍 베이징에서 설을 지내고, 황제에게 새해 인사를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신 일행은 베이징에서 40여 일을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로 가야 한다. 그리하여 훌륭한 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나라의 문화 발전에 앞장서리라,’ 김정희는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을 꺼냈습니다. “소자,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냐, 어서 말해 보아라.” “다름이 아니오라, 아버님께서 이번에 청나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도 그 일행이 되고 싶습니다.” “왜 청나라에 가고자 하느냐?” “청나라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청나라로 가서 그분들의 뛰어난 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너의 뜻은 훌륭하지만, 이 문제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다. 내가 대궐에 들어가 부탁을 해 볼 테니, 결과를 기다리도록 하여라.” 그날, 김정희는 아버지가 대궐에서 돌아오기만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는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인기척만 나면 대문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저녁 늦게서야 돌아왔습니다. 김정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버지의 기색을 살폈습니다. “네 뜻대로 일이 되었다. 너도 수행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채택되었으니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라.” “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정희는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정희는 마침내 사신 일행과 함께 청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청나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였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 위에 세찬 바람이 그들을 집어삼킬 듯이 불어오곤 하였습니다. 더욱이 추워진 날씨 때문에 사신 일행은 피로와 추위에 시달리며 길을 재촉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김정희는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 말, 마침내 사신 일행은 목적지인 베이징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한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베이징의 모습에 사신 일행의 입에서는 제각기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김정희는 오직 청나라 학자들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들 일행은 곧 청나라 관리의 안내를 받아 조선관에 묵게 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 수행원들은 유리창과 화포, 고적들을 구경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김정희는 마음속으로 존경해 오던 그곳의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다니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는 우선 청나라의 젊은 학자인 조강을 찾아갔습니다. 조강은 이미 박제가를 통해 김정희에 대한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내 전부터 선생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조강은 김정희를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초면에 이렇게 반겨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김정희도 공손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처음 만난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사귄 친구처럼 곧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조강은 자리에 앉자마자, “추사 선생의 학문과 서예에 대한 명성은 이곳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이곳 학자들의 훌륭한 학문과 예술에 비하면 저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김정희가 겸손하게 대답하자, 조강은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선생이 청나라에 오신 줄 알면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조 선생께서 저를 이곳의 학자분들에게 소개하여 주시겠습니까?” “선생께서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제가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그날,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학문과 예술에 관하여 토론을 하였습니다. 이튿날부터, 김정희는 조강의 소개로 많은 청나라 학자들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김정희는 베이징에서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1810년(순조 10년) 1월, 옹방강이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옹방강은 당시 77세의 노인으로 청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이며 금석학과 글씨, 그림 및 시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이 늙은 학자는 25세의 김정희가 인사를 하자, “오, 젊은이가 바로 조선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추사로군! 내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참 잘 왔네. 먼 길을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군.” 하며 대단히 반가워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옹방강과 날마다 만나 경학, 천문학, 지리학 등 여러 가지 학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김정희는 박제가에게서 말로만 듣던 옹방강을 실제로 만나 보니, 그의 넓고 깊은 학문에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한편, 김정희의 학문이 뛰어남을 알게 된 옹방강은, “추사의 학문과 문장이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일세.”
하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와 다른 학자들을 통하여 평소에 이야기를 들어 왔던 금석 탑본을 직접 보고 크게 감탄하였습니다. 옹방강은 많은 탑본 가운데에서 두 개를 집어 김정희 앞에 펼쳐 보였습니다. “이 탑본들은 소나라 때와 한나라 때의 비석에서 찍어낸 것이네. 이를 통해 글씨의 변천 과정 등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지.” 김정희는 옹방강의 서재에 있는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금석학을 깊이 연구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한편, 김정희는 경학에 뛰어난 학자인 완원과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완원과 함께 경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 예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김정희는 완원의 폭넓은 학식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완원 또한 김정희의 비범한 재주와 학문에 대한 불타는 정열에 탄복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김정희는 청나라의 많은 학자들과 만나 학문을 토론하는 등 친분을 두텁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김정희에게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옹방강은 금석학, 서화 등에 있어서 그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완원은 김정희가 실사구시의 학풍을 세우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10년 2월, 청나라에 온 지 석 달 만에 마침내 김정희는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미 정이 들 대로 든 옹방강과 완원 등 많은 청나라 학자들이 성문 밖까지 김정희를 배웅하면서 이별을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후, 김정희는 한성으로 돌아와 조선의 금석 탑본과 옛날 책, 글씨, 그림 등을 옹방강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때로는 늙은 스승의 건강을 걱정하여 품질 좋은 인삼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818년(순조 18년), 김정희는 옹방강이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아, 이제는 영원히 스승님을 뵐 수 없게 되었구나.’ 옹방강을 잃은 김정희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 후, 김정희는 주로 완원을 통하여 청나라의 학풍을 받아들였습니다. 완원은 김정희에게 청나라 시대의 경학에 관한 책을 5백 권이나 보내 주는 등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었습니다. 김정희가 옹방강과 완원 다음으로 큰 영향을 받은 학자는 대진과 능정감이었습니다. 대진은 고증학을 대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실사, 즉 경전에 나타난 사실에서 옳은 것을 찾고, 그 어느 학파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이 말은 청나라 고증학파의 표어가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이러한 대진을 높이 평가하여, “나는 옹방강의 학설만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대진이 지은 책도 즐겨 본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김정희는 옹방강을 매우 존경하였지만, 그의 학설에만 치우치지 않고 많은 학자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습니다. 김정희가 청나라를 돌아보고 온 것은 그때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나라 학자들이 그토록 김정희를 아낀 것을 보면, 그가 청나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떨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김정희가 태어난 고향에는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백송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김정희가 청나라에 갔을 때 씨앗을 얻어다가 심은 것입니다. 김정희는 실용적이고 실천할 수 있는 학문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뚜렷한 증거를 기초로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태도로 학문 연구에 임했으며, 특히 금석학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1817년(순조 17년) 6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김정희와 그의 친구 조인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김정희는 조인영과 함께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두 사람은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비는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초기의 유명한 승려인 무학 대사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전 해에 이곳을 찾은 김정희는 그 비석을 살펴본 후, 그 비석이 무학 대사의 비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조 형,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 비석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혀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두 사람은 마음을 굳게 가다듬고 산마루를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비석 앞에 다다랐습니다. 김정희는 잠시 땀을 식힌 후, 곧 비석에 새겨진 글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석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맞아 많은 글씨가 닳아 없어지거나 깎이어 알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김정희는 한참 동안 비석의 글씨를 살펴보더니 마침내, “이 비가 무학 대사의 비라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오. 이 비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비에 새겨져 있는 진흥이라는 칭호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사용했던 것이오. 이 비는 진흥왕 29년인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새로 설치한 후에 세운 게 틀림없소.” 하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김 형,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소. 오늘 김 형이 이루어 놓은 일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오.” 김정희의 명석한 두뇌와 지식에 감탄한 조인영은 이렇게 칭찬하였습니다. 이때 김정희의 나이는 32세였습니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높이는 154센티미터이고,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북한산에서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김정희는 또 함흥의 황초령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글을 해석해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김정희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있어서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금석을 자료로 하여 역사를 더욱 확실히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금석을 감상이나 감별의 자료로 삼던 청나라 옹방강보다도 진보적으로 금석 연구에 임했습니다. 이것은 1826년(순조 26년), 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김정희는 금석학뿐만 아니라 경학, 역사학, 문자학, 음운학, 천문학, 지리학 등 모든 학문에 정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금석학에 대해 연구한 자료를 모아 금석과안록이란 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한결같이 김정희의 업적에 대해 칭찬하였습니다. 김정희는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겸손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보다 먼저 금석문을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분들에 비하면 훨씬 뒤떨어지지요.” 김정희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에 앞서 금석문을 연구한 사람으로는 김재로와 홍양호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석문을 수집하는 데에만 그쳤을 뿐, 김정희처럼 연구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혀낸 적은 없었습니다. 금석문에 관한 책으로는 숙종 때에 낭선군(선조의 손자) 이우가 쓴 대동금석첩이 있었습니다. 이 대동금석첩이란 책에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하여 황초령비, 김인문 묘비, 경덕왕비, 분황사비 등 조선 선조 때까지의 금석문 탑본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탑본을 모은 것에 불과할 뿐, 김정희의 금석과안록과 같은 연구 논문은 아니었습니다. 김정희는 깊고 넓은 금석학 지식을 가지고, 동료와 후배 등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조선 금석학파’를 이루었습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높은 벼슬을 지낸 양반도 있었고, 조선 말기에 새로운 세력을 이룬 중간 계급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훗날, 이 중인들 대부분이 우리나라 개화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우리나라의 사회 발전에도 큰 업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김정희는 불교에도 관심이 컸습니다. 그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가까이 지내고, 불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는 청나라에 갔을 때 법원사에 머물던 서역의 승려를 만나 시를 지어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귀국할 때에는 많은 불경과 절에서 필요한 향로(향을 피우는 자그마한 화로) 등의 기물을 가져왔습니다. 그중 일부를 여러 승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마곡사란 절에는 4백여 권의 불경과 불상 등을 기증하였습니다. 김정희는 학식이 많고 수양이 깊은 승려들을 사귀었는데, 그중에서도 긍선과 의순 두 승려와 특별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긍선은 호를 백 파라 하였는데, 김정희보다 19세나 위로서 덕망이 높은 승려였습니다. 의순은 호를 초의라 하였으며, 김정희와 서로 마음이 잘 통했습니다. 그는 금강산을 비롯하여 이름난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도를 닦았고, 각지의 이름난 선비들과도 두루 사귀었습니다. 의순은 또한,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정약용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김정희는 그들과 함께 불교에 관하여 토론하며 불교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습니다. 뒷날 긍선이 세상을 떠나자, 김정희는 그의 비석에 새길 글을 지어서 긍선의 제자에게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정희의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의 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김정희는 24세의 나이에 생원시 장원으로 급제한 후, 10년 만인 1819년(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순조는 과거에 급제한 김정희를 몸소 불러 당부하였습니다. “그대가 왕실의 종친이라니 참으로 기쁜 일이오. 앞으로 과인을 도와 나랏일에 힘써 주기 바라오.” 김정희는 정중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더욱 치열해진 당파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습니다. 어느 날, 안동 김씨들은 순조에게 “상감마마, 윤상도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시옵소서. 그자는 호조 판서 박종훈과 신위 등을 탐관오리라고 모함하였사옵니다. 이는 임금님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니 엄하게 다스려야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습니다. 순조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윤상도를 멀리 제주도 부근의 추자도로 귀양 보냈습니다. 안동 김씨 일파는 윤상도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자, 이번에는 김노경을 모함하였습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김노경을 공격하자, 순조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죄인 김노경을 고금도로 귀양 보내도록 하라.” 이리하여 김노경은 1830년 10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라도의 외딴섬인 고금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한 김정희는 귀양 간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1833년 늦가을, 김노경은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으며, 1835년 김정희 부자는 다시 관직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836년(헌종 2년)에 김정희는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로써 집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837년 3월 김노경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김정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며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켰습니다. 1839년(헌종 5년)에 김정희는 병조 참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가문에 드리워진 어두운 먹구름은 쉽사리 걷히지 않았습니다. 1840년 9월, 김정희를 귀양보내라는 헌종의 명령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 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해 모든 정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순조의 왕비 순원 왕후는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딸이었기 때문에 안동 김씨가 모든 권력을 휘어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김정희에게도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헌종에게 아뢰었습니다. “상감마마, 윤상도 사건에 김정희도 연루되어 있사옵니다. 그를 형에 처하시옵소서.” 하지만 김정희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헌종은 주저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순원 왕후가 헌종을 대신하여 마침내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장 죄인 김정희를 잡아들여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시오.” 김정희는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다행히 죽음만은 면하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멀리 제주도로 귀양길을 떠나는 김정희는, 절망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길은 몹시 험난하고 고생스러웠습니다. 도중에 폭풍이 일고 바다가 사나워져서 김정희가 타고 가는 배를 단숨에 집어삼킬 듯하였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떨고 있었으나 김정희는 태연하게 뱃머리에 앉아 또렷한 목소리로 시를 읊으며, 뱃사공에게 배가 갈 방향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러자 배는 화살처럼 빨리 달렸습니다. 처음으로 가는 제주도 길이었지만, 그는 배가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난 파도 속을 헤치며 달려온 배는 보통 때보다 빨리 제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제주도는 귀양살이하기에는 환경이 너무나도 나쁜 곳이었습니다. 바람과 돌이 많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정희는 그곳에 유배되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쓸쓸하고 기나긴 귀양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1842년(헌종 8년) 김정희가 제주도에 온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아내 이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전보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정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의욕은 더욱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곳에서 김정희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그 보람을 느꼈습니다. 김정희의 가르침을 받은 제주도 아이들은 점점 학문의 경지가 깊어져 갔습니다. 1848년(헌종 14년) 12월, 오랜 귀양살이를 끝낸 김정희는 이듬해 이른 봄에 마침내 한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인 1851년(철종 2년)에 김정희는 또다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모든 정권을 안동 김씨들이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조금만 거슬려도 영락없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해 7월, 조정에서는 철종의 조상인 경의군을 진종으로 추존하고, 그 위패를 종묘에서 영녕전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정 대신으로 있던 권돈인이, 먼저 헌종의 위패를 모신 다음에 진종의 위패를 옮기는 것이 순서에 맞는 일이라고 철종에게 아뢰었습니다. 이에 안동 김씨들이 들고일어나서 철종에게, “상감마마! 무례한 말을 함부로 내뱉는 권돈인에게 중벌을 내리시옵소서. 그는 감히 왕실에서 행하는 일에 반기를 들고 있사옵니다.” 하고 아뢰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권돈인은 벼슬을 빼앗기고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안동 김씨들은 권돈인과 함께 김정희도 처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정희는 죄인 권돈인과 절친한 친구이옵니다. 권돈인이 그런 말을 한 것은 김정희가 부추겼기 때문이옵니다. 그러하오니 그들을 백성들 앞에서 죽여야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철종은, “그럴 리야 있겠소?”라며 그들의 말을 묵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은 계속해서 김정희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철종은 마침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김정희는 66세의 나이로 다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떠나게 되자,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습니다. 김정희는 거친 함관령을 지나 북청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학문과 개화된 문명을 전파시켰습니다. 김정희는 학문뿐만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그 이름이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김정희의 타고난 재질은, 그가 24세 때에 사신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피나는 노력을 더 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어렸을 때 명나라 문인 동기창의 필법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옹방강과 완원에게서 붓글씨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옹방강의 필법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김정희는 옹방강의 필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알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의 글씨를 연구하였고, 이어 송나라의 소식과 미불의 글씨를 익혔습니다. 그 후, 김정희는 다시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당나라의 이옹, 안진경, 저수량, 구양순 등의 글씨를 배웠습니다. 한편, 김정희는 한나라와 위나라 때의 예서체에 관한 연구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든 중국 대가들의 필법이 한나라의 예서체에 중심을 두고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김정희는 마침내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정희는 우리나라 서예에 있어서 권위자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나라 안팎으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얼마 후, 자신의 필체를 세상에 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평론을 하였습니다. 붓글씨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정희를 칭찬하였습니다. ‘붓글씨를 잘 쓰려면 필법을 떠나서도 안 되고, 하나의 필법에만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김정희는 붓글씨에 뛰어난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독창적인 필법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김정희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이름 높은 서예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양녕 대군, 한호, 양사언, 이광사 등은 모두 당대의 뛰어난 서예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에 비하면 그 빛이 덜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새로운 필체로 이름을 떨쳤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조차도, 김정희의 글씨에 밀려 빛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추사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찍이 청나라의 학자 완원도 김정희의 글씨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김정희의 필체는 동양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만큼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김정희는 해서, 행서, 전서, 예서 등에 모두 능하였으나 특히 행서와 예서에 뛰어났습니다. 김정희의 호는 추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추사라는 호 이외에도 완당, 예당, 매화구주, 보담재 등과 같은 호를 즐겨 썼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담재는 김정희가 존경했던 청나라 학자 옹방강의 호 담계과 보소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완당 역시 청나라 학자 완원의 성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붓글씨를 잘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만 붓글씨를 잘 쓸 수 있습니까?” “올바른 마음씨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기초를 충분히 익히고, 북비를 많이 보아야 한다.” 김정희가 대답하자,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북비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말은 중국에서 생긴 것으로 중국의 북쪽 지방에는 비석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고, 남쪽 지방에는 종이나 베에 쓴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가리켜 ‘북비 남첩’이라 한다.” 이어서 김정희는 중국 글씨에 대한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북비의 글씨는 서투른 듯하면서도 무게가 느껴지고, 남첩의 글씨는 곱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왜 북비만을 보아야 합니까?” “그 까닭은 북비를 보아야 글씨의 근원과 쓴 사람들의 계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지 않고는 그 웅장하고 힘찬 필치를 알 수 없으며, 글씨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없다.” 김정희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대나무, 난초 등의 산수에서부터 불교에 관한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그렸는데, 특히 난초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난초를 잘 그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김정희의 훌륭한 난초 그림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김정희의 작품 가운데에는 세한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린 것인데, 그의 기개와 충절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으로 칭찬받고 있습니다. 서화가로서의 추사 김정희는 조선의 추사라기보다 동양의 추사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동양의 서화 예술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길이 남을 것입니다. 김정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에도, 임금을 비롯하여 유명한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그에게 작품을 청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을 멀리서 듣고 찾아와 경학과 서예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1852년(철종 4년) 8월, 김정희는 1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다시 한성으로 올라왔습니다. 10여 년에 걸친 두 차례의 기나긴 귀양살이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김정희는 한성에 돌아왔으나,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고 관심을 가졌던 김정희는,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856년(철종 8년), 71세가 된 김정희는 한성의 봉은사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김정희는 좌선을 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의 눈은 더욱 활짝 열렸습니다. 김정희가 불교를 공부하게 된 것은 그의 실사구시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는 가운데, 어느덧 불교의 세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봉은사에서 좌선으로 나날을 보내던 김정희는, 그해 가을에 다시 경기도 과천의 관악산 기슭에 조그만 초가를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관악산 기슭의 가을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김정희는 조금도 억울해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동안 학문과 예술에 더욱 열중하여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곳에는 아버지 김노경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김정희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하고 글씨를 쓰며, ‘인생이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는 것이로다. 속세의 부귀영화와 권세 또한 허무한 것. 내 남은 생애는 자애롭고 거짓 없는 대자연의 품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아름다움을 찾으며 맑고 깨끗하게 보내리라.’ 하는 마음가짐으로 지냈습니다. 김정희는 남달리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 많은 책 가운데에는 그를 기쁘게 하고 감동시킨 글들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김정희는 그러한 글들을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도 두터운 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뜰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나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해 10월 7일, 김정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오, 자넨가?
어서 오게.” 김정희는 제자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붓글씨를 계속 써 나갔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글씨 쓰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이네.” 김정희는 열심히 글씨를 써 내려가면서 제자의 물음에 대답하였습니다. 제자는 단정히 앉아 붓글씨 쓰기에 여념이 없는 스승의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마치 신선 같으시구나!’ 제자는 이렇게 감탄하며, 김정희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후 며칠 뒤인 10월 10일, 김정희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생을 학문과 서예에 대한 정열로 살아온 그는 죽기 하루 전에도 손에서 붓을 떼지 않았습니다. 글씨와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금석학의 기틀을 세웠던 김정희의 일생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발전시키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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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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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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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아이, 이중섭. 서당 공부가 끝나자, 동네 어귀에 조무래기들이 모여 말타기 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한 명이 나무를 붙잡고 엎드리면, 나머지 친구들이 우르르 그 친구의 등에 올라타곤 합니다. 친구들의 무게에 못이겨 말이 되었던 친구가 넘어지면, 등에 탔던 친구들도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한바탕 웃음꽃이 핍니다. 그런데 한 소년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너는 안 놀고 뭐 하니?" 한 친구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소년을 툭 치며 물었습니다. "닭이 모이를 콕콕 쪼아먹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보고 있는 중이야." 친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소년을 바라보더니,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친구가 가 버린 뒤에도 소년은 지루한 줄 모르고 닭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우리 나라의 천재 화가 이중섭입니다. 중섭은 어릴 때부터 뭔가를 가만히 살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소나 닭, 새, 꽃 등을 하루 종일 관찰하였고, 때로는 동식물과 얘기를 나누는 듯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중섭이 일곱 살 때 평양 외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자, 사과 먹어라.” 외숙모가 소쿠리에 사과를 담아 와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야, 맛있겠다!" 외사촌들은 와삭와삭 사과를 베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중섭은 사과를 먹지 않고 한참을 살펴본 뒤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더니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사과를 다 그린 뒤에야 먹기 시작했습니다. 중섭은 또 온몸을 진흙투성이로 만들면서 진흙을 주물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중섭이는 이상한 아이야." 친구들은 중섭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일단 함께 놀면 어느 개구쟁이 못지않게 신나게 뛰어놀았으므로 다들 그를 좋아했습니다. 정든 고향이여, 안녕. 이중섭은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시기인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위로 열두 살 차이가 나는 형과 다섯 살 차이가 나는 누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늦게 본 막내아들 중섭을 애지중지 아끼셨습니다. "우리 둥섭이 없었으믄 이 엄마가 무슨 재미로 살꼬?" 엄마는 중섭을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발음인 '둥섭'으로 부르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훗날 중섭은 자신의 그림에 둥섭이라는 서명을 쓰곤 했답니다. 중섭의 집안은 대대로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할아버지는 활달한 성격에 농사를 잘 짓고 소작인을 잘 다루어 중섭의 집안을 잘 꾸려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중섭의 아버지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 살림살이에는 별 관심이 없고, 바깥 출입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지내셨습니다. 형 중석은 할아버지 성격을 닮아 활달하고, 모든 일에 의욕이 넘쳤습니다. 반면 중섭은 아버지를 닮아 조용한 성격으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중섭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을 어머니가 도맡아 하시게 되었습니다. 중섭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보다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총명하고 영리한 형은 공부를 위해 일찍부터 집을 떠나 있었으므로 형과 함께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형이 평양의 외가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중섭은 송천리 서당에서 동몽선습, 논어, 맹자 등을 공부했습니다. 중섭은 외가에 놀러갔을 때나, 방학이 되어 형이 집에 돌아왔을 때에만 형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섭도 이제 집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이 되자, 중섭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외가에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기 위해 살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와 누나, 정든 고향이랑 친구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하지만 중섭은 애써 슬픈 내색을 감추었습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선 중섭은 정든 고향 마을을 가슴에 담아 두려는 듯 하염없이 둘러보았습니다. 평양에서의 생활. 평양의 대동 공원 기슭에 자리잡은 외가에는 형 중석과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삼촌과 외숙모, 외종 사촌 형제 자매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중섭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외가에서 사촌들과 함께 지내게 된 중섭은 마음껏 뛰놀았습니다. 대동 공원이나 대동문 근처에서 놀기도 하고, 모란봉 부벽루까지 뛰어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중섭은 학교 공부에 전념하기보다는 친구들과 뛰어놀거나 미술,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하루는 형이 그런 중섭을 꾸짖었습니다. "넌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놀기만 할 거냐?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은 생각도 안 하니?" 형은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중섭을 염려하고 야단쳤습니다. "알았어요, 형. 앞으로는 열심히 공부할게요." 중섭은 형이 무섭고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대답만 넙죽 해 놓고는 또다시 놀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 형이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리자, 중섭은 좀더 활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중섭은 4학년이 되면서부터 그림 그리기에 더욱 열중하였습니다. 중섭의 교과서 겉장이나 공책 빈 구석에는 온통 그림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중섭이 이토록 그림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반 친구인 김병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김병기는 보통학교 내내 중섭과 같은 반이었으며, 일본 유학도 함께 가는 등 중섭과 평생 동안 친하게 지낸 죽마고우입니다.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은 당시 이름난 화가였습니다.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공부하였고, 시와 희곡, 미술에 관한 글을 발표할 정도로 신문물을 접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김병기의 집에 놀러갔던 중섭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김찬영이 그린 그림과 여러 가지 그림 도구들, 게다가 일본과 서양에서 발간된 미술 잡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섭은 그 중 원색으로 인쇄된 고급스러워 보이는 영국 잡지 한 권을 김병기에게 빌려 집으로 가져와서 펼쳐 보았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을 한 서양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아름답다!" 그림을 보면서 중섭은 뭔지 알 수 없는 동경과 그리움에 빠져 들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자 형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중섭아, 내가 붓글씨를 가르쳐 주마. 앞으로 성공하려면 글씨도 잘 써야 한다." “형, 내 친구 병기와 함께 배우고 싶어요." “그렇게 하렴." 다음 날부터 중섭은 병기와 함께 형에게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평양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 취미 생활로서 서예가 널리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중섭은 이 때 배운 서예 실력으로 훗날 붓글씨 예술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느덧 중섭이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습니다. 중섭은 형이 다녔던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공부보다는 그림을 그리거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던 결과였습니다. 중섭은 어머니와 형, 가족들에게 창피하고 미안하였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중섭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좀더 열심히 하지 그랬니?" 어머니도 섭섭하신 듯 나무라셨습니다. 중섭은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어머니는 중섭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를 오산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오산 학교요?" 오산 학교(오산 고등보통학교)는 평안북도 정주에 있으며, 이승훈 선생이 청소년들에게 주체 의식을 심어 주고자 설립한 학교로, 교장 선생님인 조만식과 함석헌 선생의 역사 수업이 유명했습니다. 이들 말고도 오산 학교에서는 여러 애국 운동가들이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전인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학교에서는 김억을 비롯하여 김소월, 백석 같은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오산 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무척 사랑했고,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즐거운 오산 학교 시절. 중섭은 오산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 각자의 창의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펼쳐, 학교의 분위기가 무척 자유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승훈 선생이 지향하는 ‘대이상향’의 교훈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커다란 이상향'이란 우리 조국을 독립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이승훈 선생의 의지이자 오산 학교가 지향하는 교육 목표였습니다. 이중섭은 매일매일 즐거운 학교 생활을 보냈습니다. 미술반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체육에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또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 의식을 키워 나갔습니다. 중섭은 특히 임용련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임용련 선생님은 미국 예일 대학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오산 학교에서 미술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임용련 선생님은 중섭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임용련 선생님이 새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학생들이 일제히 대답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나라 그림을 그려야 합니까?" 학생들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임 선생님이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조선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조선 그림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붓으로 산수화를 그려야 한단 말입니까?" 한 학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재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화든 물감이든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그림 속에 조선의 정신, 조선의 정서가 표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임용련 선생님은 미국 유학을 하고 왔으면서도 늘 '조선적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중섭은 소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갔습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맑고 순한 눈을 가진 소에게 깊은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꿋꿋하고 믿음직스러운 소가 순박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중섭은 들판 여기저기에 매어진 소를 하루 종일 바라보기도 하면서,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이후, 소는 이중섭 그림의 영원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중섭은 소를 통해서 삶의 희망을 표현하기도 했고, 희망을 빼앗으려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임용련 선생님은 중섭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열심히 지도해 주었습니다. "그림의 재료로 무조건 종이나 연필, 물감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다른 재료를 활용해 보렴.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와 기법을 찾을 수 있지." 임용련 선생님은 중섭에게 여러 가지 서양화 기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중섭은 그 중에서도 바탕칠을 한 후,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려서 나중에 칠한 선과 색이 바탕과 융합되어 부드러운 효과를 내는 '프레스코' 기법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1935년, 중섭은 오산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던 시기였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중섭은 많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첫째로는 그림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데,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선비들의 취미 생활로 여길 뿐, 그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환쟁이'라 부르며 천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어두운 현실에서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리고 있을 자신을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어느 날, 중섭은 괴로운 마음을 안고 임용련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게. 그런데 얼굴에 고민이 잔뜩 묻어 있군." “제 진로에 대해 의논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 군은 그림에 특별한 재주가 있으니 당연히 그림 공부를 계속해야지. 우리 나라에는 그림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없으니, 일본이나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어떻겠나?" "그렇지만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는데,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린다는 것이 양심에 꺼려집니다." "자네는 꼭 총칼을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만 독립 운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총과 칼만이 무기는 아닐세. 짤막한 시 한 편이나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그림 하나가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네. 자네가 우리 민족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 더 값진 일이 될 걸세." 중섭은 임용련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제가 가야 할 길에 확신이 섰습니다." 중섭은 졸업 앨범 장식을 맡아 했는데, 불덩이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날아드는 장면을 그려 넣었습니다. 또, 졸업생들의 사인란에 일본어가 아닌 한글 사인을 했습니다. ㅈㅜㅇㅅㅓㅂ, ㅈㅗㄹㅇㅓㅂㅇㅡㄹㄱㅣㄴㅕㅁㅎㅏㅁㅕ 이후에 중섭은 늘 자신의 그림 옆에 이렇듯 한글을 풀어 쓴 사인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즐겨 불러 주시던 'ㄷㅜㅇㅅㅓㅂ'으로 사인을 하거나 'ㅈㅜㅇㅅㅓㅂ'으로 했습니다. 이렇게 한글을 풀어 쓰니까 일본 경찰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로 날아드는 불덩이 그림이 문제가 되어 결국 졸업 앨범 제작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 불을 지르다. 오산 학교 시절, 이중섭에게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의 일입니다. 당시 오산 학교의 건물은 무척 낡아 있었습니다. 이 때 학교가 불에 타면 일본 보험 회사로부터 보상금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겨울 방학. 중섭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숙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중섭과 미술반 친구들은 학교에 불을 지르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날 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하숙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따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하필 눈이 올 게 뭐람." 한 친구가 투덜거렸습니다. 중섭과 친구들이 학교 앞까지 왔을 때는 모두 하얀 눈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눈 속에 불을 지르는 것은 무리야." "불을 질러 봤자 잘 붙지도 않겠어." "이건 아무래도 우리에게 불을 지르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 같아." 중섭 일행은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채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친구 한 명이 몰래 학교로 가서 끝내 본관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본관이 모두 불에 타서 박물 표본실과 도서실, 기계실, 교무실, 교장실 등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일본 보험 회사에서 새 건물을 지어 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보상 액수는 형편없이 적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중섭은 임용련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본관에 불이 난 것은 사실 저와 미술반 친구들이 일부러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고?" 임용련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학교가 불에 타면 보험 회사에서 새 건물을 지어 줄 거라는 얘기를 듣고는.......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중섭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군." 임용련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이번 일은 자네들이 학교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니, 그냥 비밀로 해 두겠네. 그러니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게. 하지만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해선 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이들의 행동은 임용련 선생님이 비밀로 덮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에서 보여지듯 중섭은 자신이 직접 불을 낸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계획했다는 것만으로도 혼자서 임용련 선생님을 찾아가 잘못을 빌 만큼 책임감 강하고 용기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다행히 오산 학교의 본관은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벌어져 얼마 후에 새 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형 중석의 사업 때문에 중섭의 집안은 원산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명문 다쿠쇼쿠(동양척식) 상과를 마치고 돌아온 형은 동일 은행 원산 지점에서 근무하다가, 조선 사람을 차별한 일본 사람과 말다툼을 벌인 끝에 은행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문구점과 악기점을 운영하였는데, 이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형은 원산 일대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형이 결혼을 하자, 오산 학교를 졸업한 중섭은 어머니와 형 부부,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중섭은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소를 관찰하여 그리거나, 친구들을 만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형이 중섭을 불러 앉혀 놓고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는 거냐? 너 때문에 정말 걱정이다." "......." "너도 이제 대학에 가야 되지 않겠니? 학비는 내가 대줄 테니 일본 유학을 떠나거라. 다쿠쇼쿠 상과나 메이지 대학 법과가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그림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나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짐작은 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려서 어떻게 먹고 살겠다는 거냐? 그림은 취미로 그리면 되지 않느냐?" "그림이 아닌 다른 일은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중섭의 단호한 태도에 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습니다. 어머니도 중섭의 고집을 잘 아는지라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유학을 위해 집을 떠난 중섭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습니다. 갑판 위에 선 중섭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드디어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서구의 현대식 건물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번화한 거리, 상점마다 멋진 물건이 넘쳐나고, 멋지게 차려입은 일본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도쿄....... 중섭은 그 현란함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초라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중섭의 가슴에 갑자기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조국이 다른 나라에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습니다. 그만큼 일본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중섭은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오산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했던 중섭으로서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이 학교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분카(문화) 학원으로 옮겼습니다. 분카 학원으로 온 중섭은 비로소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곳에서 중섭은 쓰다 세이슈 교수를 만났습니다. 쓰다 교수는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민족 차별에 대한 감정 없이 조선 학생들과도 가깝게 지내는 분이었습니다. 쓰다 교수는 중섭의 재능을 알아보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섭은 학생들 사이에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 루오로 통했습니다. 굵고 힘찬 선으로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루오와 이중섭의 작품이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섭은 쓰다 교수에게 자신이 그린 소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네가 '루오'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이 그림을 보니,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군." "하지만 저는 그 별명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조선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제가 프랑스 화가의 별명을 갖는 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섭의 말에 쓰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괴테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말했지. 자네도 그림에 조선의 향기를 담아 보게." 쓰다 교수의 격려를 받은 중섭은 새로운 힘이 솟는 듯했습니다. 그 후 이중섭의 실력은 부쩍부쩍 늘었습니다. 그리하여 학생 신분으로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받아 일본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후, 자유미술가협회는 미술창작가협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창 전쟁에 열을 올리던 일본 정부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협회 이름을 바꾸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온 국민의 힘을 전쟁에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 자체를 커다란 위협으로 생각했습니다. 1940년 중섭은 분카 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을 했으니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중섭은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섭은 일본에 남아 작품 활동을 계속하거나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형에게 생활비를 얻어쓰는 형편에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중섭은 일단 미술창작가협회에 다시 한 번 작품을 출품할 때까지만이라도 일본에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1941년 26세 때,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와 여인을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중섭은 다음 해인 1942년에도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와 아이를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연이어 상을 받은 중섭은 형에게 사정을 얘기하며, 일본에 더 머물도록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형과 어머니는 중섭의 그림을 본 적은 없었지만, 중섭이 연이어 큰 상을 받고 신문이나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에 더 머물도록 해 주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감동. 미술창작가협회의 해외 순회전으로 경성(서울)에서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별관인 부민관 2층에서 열린 이 협회전에는 김환기, 유영국, 문학수, 이중섭 등의 우리 나라 작가와 일본의 전위 작가들이 참석했습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 작품들로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신기하고 새로운 그림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그림 전시회를 찾았지만 진심으로 이들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드물었습니다. 이 전시회에 중섭은 달을 보라고 외치며 잠자는 사람을 깨우려는 새를 표현한 망월이라는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이 때 형 중석도 서울에 볼일이 있던 차에 전시회장을 찾았습니다. 형은 중섭의 그림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그림이 이래? 정말 실망스럽군' 멋지고 화려한 그림을 기대했던 형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 김환기가 다가와 중석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중섭 씨의 형님 되신다지요? 동생의 그림은 정말 훌륭합니다. 힘이 있고 희망에 차 있습니다." 김환기는 중섭의 그림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중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순회 전시회가 끝나자, 중섭은 평양에 살고 있는 누나에게 갔습니다. 누나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섭아, 네가 웬일이니? 우리 집엘 다오고....... 정말 오랜만이구나." 누나는 반가움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처남, 어서 오게.” 매형도 악수를 건네며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저, 실은 매형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내게 무슨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내 기꺼이 들어 주지." "고구려 고분 벽화를 꼭 보고 싶어요." "그래? 좀 어렵겠지만 자네가 일본에서 유명한 화가라는 점을 들어 부탁해 보겠네." 중섭의 매형은 평양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다음 날, 중섭은 매형과 함께 고분의 문을 열었습니다. "와! 정말 굉장하구나!" 등불에 비친 벽화를 보고 중섭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무덤 안쪽 방의 벽에는 무덤 주인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사냥하고, 춤추고, 씨름하는 모습과 행렬, 불교 행사 등의 풍속화가 그려져 있었으며, 무덤을 지키는 네 가지 상서로운 짐승을 그린 사신도, 우주를 그린 것 등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중섭은 보고 또 보며 열심히 스케치했습니다. 매형이 지루했던지 중섭에게 말했습니다. “처남,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또 오세." 매형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던 중섭은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중섭이 특히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주작, 현무, 백호, 청룡이 그려진 사신도였습니다. "부드러운 율동과 힘찬 선의 조화......." 이것이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본 중섭의 느낌이었습니다. 중섭은 자신도 고구려 벽화처럼 당당함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멋진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일본 여인 마사코와의 사랑. 분카 학원 3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중섭은 붓을 빨기 위해 세면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 아리따운 여학생이 먼저 와서 붓을 빨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힌 채 눈인사를 건넨 여학생은 계속해서 붓을 빨았습니다. 학교를 오가며 몇 번 본 적이 있는 1학년 후배로, 중섭이 평소에 호감을 느껴 오던 여학생이었습니다. 숫기가 없는 중섭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중섭이라고 합니다." "저는 야마모토 마사코예요." 인사를 마친 여학생은 얼굴이 빨갛게 되어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여학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섭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중섭은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상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분카 학원 학생들은 웬만하면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 키가 크고 운동을 잘 하였으므로, 조선인 여학생뿐만 아니라 일본인 여학생 중에도 중섭을 남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중섭이 용기를 내어 마사코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저, 오늘 오후에 시간 좀 내주세요. 수업 끝나고 학교 앞 찻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섭과 마사코는 첫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마사코는 도쿄의 부잣집 셋째 딸로, 중섭을 만났던 당시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섭을 만나고는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중섭이 없는 곳은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갈등도 깊어졌습니다. 중섭은 식구들에게 일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점은 마사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마사코는 이중섭이 불러 주는 노래를 통해 한글을 배웠고, 김치와 고추장도 맛있게 먹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잘 통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생각, 보들레르 발레리 릴케 등 서구 시인을 좋아하는 점, 그리고 예쁘고 수려한 외모.......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선남선녀였습니다. 태양상 수상과 결혼. 중섭이 분카 학원을 졸업한 다음 해인 1941년에 이쾌대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쾌대 역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로, 조선인 화가들 만으로 조선신미술가협회라는 모임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네도 조선신미술가협회에 들어오지 않겠나?"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 모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입니다." 중섭은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신미술가협회 회원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를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좀더 조선의 멋이 우러나오는 유화를 그리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1941년 5월에 도쿄에서 창립전을 열었는데, 이 때 중섭은 식민지에서 신음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그린 연못이 있는 풍경을 비롯하여 몇몇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조선신미술가협회는 1941년부터 4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더 이상 전시회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중단되었는데, 8.15 광복 후에 남북이 분단되자 회원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려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943년 28세 때, 중섭에게 커다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미술창작가협회전에 망월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예전에 경성 순회전에서 전시한 망월과는 이름이 같을 뿐 다른 작품입니다. 망월을 살펴보면,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 있고, 달을 바라보는 소년과 그 소년을 바라보는 소가 있습니다. 삼각형의 띠를 이루고 있는 달과 소년과 소가 서로 연결되어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세상은 피로 얼룩지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마사코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섭의 마음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중섭은 상금과 더불어 부상으로 팔레트를 받았는데, 이 때 받은 팔레트를 오랫동안 간직했습니다. 1943년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때로 일본과 조선 모두 혼란스러웠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언제 전쟁터로 끌려나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어서, 어머니와 형은 중섭에게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연신 보내왔습니다. 생활비도 바닥이 난 중섭은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마사코에게 말했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조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소. 집에 가서 당신과의 결혼을 허락받은 후에 연락하겠소." 갑작스러운 이별에 마사코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중섭은 마사코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고향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겠소. 서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나를 믿고 기다려요." 사랑하는 마사코를 남겨 둔 채 홀로 떠나는 중섭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중섭은 창고를 개조하여 화실로 만들었습니다. 머리 위로는 쉴새없이 비행기가 날아가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중섭은 언제 어느 때 전쟁터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터에 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 헛되이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족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형은 중섭이 전쟁 지원병을 격려하는 그림이나 용맹한 병사 등을 그려서 전쟁을 지원하는 '총후화가'로서 징병을 피하도록 조치해 놓았습니다. 중섭이 일본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친구들이 그의 화실로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이 모이면 시국에 관한 얘기와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중섭은 조선신미술가협회에 출품할 작품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중섭은 여전히 소를 주제로 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틈틈이 일본에 있는 마사코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엽서를 띄웠습니다. "너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되었으니 내가 참한 색싯감을 알아보겠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안 그래도 어머니께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가 있습니다." “그래? 어떤 아가씨냐?" 중섭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마사코라는 일본 여자입니다." "뭐? 일본 여자?" 어머니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일본 여자를 며느리로 맞는단 말이냐? 그건 안 된다." "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마사코가 아닌 다른 여자 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꾸나." 어머니는 중섭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일본 전체가 미군의 폭격에 의해 초토화되리라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중섭은 마사코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였습니다. 중섭은 당장 일본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마사코, 당신이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질 않소. 전쟁의 불길도 피할 겸 이 곳으로 오시오. 실제로 마사코와 그녀의 가족은 폭격에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마사코는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부산으로 가는 배가 끊겨 사흘을 기다린 끝에 간신히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 배는 특별히 마련된 마지막 배였습니다. 부산항에 내린 마사코는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하여 원산에 있는 중섭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 마사코예요. 지금 경성에 와 있어요." "마사코, 당신이 정말 와 주었군요. 내 지금 당장 경성으로 가겠소." 중섭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와 형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마사코가 경성에 와 있습니다. 그녀를 데려오도록 허락해 주세요."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어쩔 수가 없구나. 그 아가씨가 머물 방을 하나 마련해 놓으마." 어머니와 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 했습니다. 경성에서 극적으로 재회한 중섭과 마사코는 곧장 원산 집으로 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5년 5월,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조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날짜가 잘못 전해져서 중섭의 친구들이 일주일이나 빨리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먼 길을 가려면 며칠씩 걸렸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며칠 신세를 져야겠군."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이나 중섭의 집에 머물며 술을 마시고 놀다가 근처 관광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날이 되었습니다. 연지곤지 찍은 남덕의 모습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축하하네!" 친구들은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전쟁 뒤에 찾아온 고통. 형 중석은 자신의 집 근처에 두 사람의 신혼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중섭과 남덕은 산 중턱에 있는 단출한 집 마당에 닭을 놓아기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섭은 하루 종일 닭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고, 남덕은 닭에게 모이를 주는 것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남덕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여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 왔기 때문입니다. 이중섭과 식구들은 남덕이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중섭은 광복이 되자 무척 바빠졌습니다. 광복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이중섭은 그 동안 그려 놓은 작품 몇 점을 손질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출품 날짜가 지나가 버려 하는 수 없이 인천에서 열린 한 전람회에 출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서울에 머물며 친구들과 광복의 기쁨을 맛보던 이중섭에게 한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친구 최재덕과 함께 서울 미도파백화점 벽화를 공동으로 그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중섭은 기꺼이 일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물감 대신 간판용 페인트를 이용해 벽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벽화는 불에 타서 없어져 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이들이 복숭아나무에 매달려 복숭아를 따며 노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1954년에 그려진 도원이라는 작품이 그 때의 벽화를 연상시키게 해 주고 있답니다. 벽화를 완성한 후에 사례금을 제법 두둑이 받은 이중섭은 미도파백화점에서 남덕과 어머니, 형수의 선물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는 인사동에 들러서 값싸게 팔리고 있는 불상, 도자기, 연적, 촛대 등 우리 문화재를 몽땅 사서 원산으로 짊어지고 왔습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우리 나라는 곧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원산에는 곧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잡았고, 형 중석이 '악질 지주', '악질 친일파'로 몰려 경찰서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제 시대에 부자로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다는 이유였습니다. 큰아들의 실종에 어머니는 몸져누웠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중섭의 큰아들이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중섭은 죽은 아들의 관 속에 천당 갈 때 길동무하라며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그림을 함께 넣어 주었습니다. 그 이유 때문인지 이 때부터 이중섭의 그림에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중섭의 생활은 날로 힘들어져 갔습니다. 형을 대신하여 가족을 보살펴야 했으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회화부원이 되어 당에서 명령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은 1947년, 평양에서 열린 광복기념미술전람회에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때마침 모스크바에서 몇 명의 화가와 미술 평론가가 평양에 왔다가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중섭의 그림은 처음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정서가 깃들었다고 하여 공산당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강하다고 하여 비판을 당했습니다. 공산당은 그에게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기를 강요하였고, 정기적으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회의에도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그가 일본 여자와 산다고 비웃었습니다. 이중섭은 점점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2년 터울로 태어났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중섭도 자유로운 남으로 내려가고 싶었으나, 아픈 어머니와 형의 가족까지 데리고 길을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유엔군이 참전하자, 얼마 후에 국군이 원산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국군이 이중섭에게 '원산신미술가협회'라는 모임의 회장직을 떠맡겼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중공군이 끼어들어 전세가 다시 뒤바뀌었습니다. 이에 미군이 북한 지역에 원자탄을 터뜨린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습니다. 마침내 어머니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시 공산 치하가 되면 네 목숨이 위태로워질 거야. 너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위험해지니, 우리 걱정은 말고 장손 영진이와 너희 식구들만 남으로 떠나거라." "하지만 어떻게 어머니를 두고......."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더 늦기 전에 내 걱정은 말고 어서 가거라! 어서!" 어머니의 거듭되는 재촉에 이중섭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었습니다. "어머니, 전쟁이 끝나는 대로 곧 다시 모시러 올게요." "오냐. 어서 서둘러라." 어머니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나와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떠나 보냈습니다. 이것이 이중섭과 어머니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서귀포의 환상과 아픈 이별. 1950년 12월. 혹독한 추위 속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남한으로 피란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원산항은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배에 오르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배가 끊겨 버려 그 곳에 온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 다행히 이중섭을 알아본 군인들에 의해 이중섭의 가족은 가까스로 후퇴하는 남한 국군 부대의 배를 얻어타고 며칠 후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의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이중섭은 부두에서 짐을 져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평생 노동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이중섭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하지만 임금이 너무나 싼데다 그것마저 제때에 받지 못해 가족들은 끼니를 굶는 날이 많았습니다. 부산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자 이중섭은 수소문을 하여 해군 경비정을 한 대 얻어타고,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이 때가 1951년 1월이었습니다. 제주도에도 이미 피란민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중섭은 다행히 서귀포에서 한 농가의 헛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피란민에게 주는 배급이라며 먹을 것이 조금씩 나왔지만, 그것으로는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에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이중섭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이 주는 고구마를 먹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바닷가에 나가 게와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사는 동안 배가 고팠지만, 이중섭은 오랜만에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육지와는 달리 폭격의 위험도 없었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주도의 목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 떼의 모습을 본 이중섭은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의욕을 느꼈습니다. 이중섭은 다시 소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를 너무 열심히 관찰하다가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게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잠을 잘 때 식구들이 포개 누워야 할 정도로 좁았지만, 이중섭과 가족들은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보낸 1년여의 시간이 이중섭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습니다. 이후로 이중섭의 그림에는 게와 물고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을 궁금하게 여긴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게를 많이 그리십니까?" "제주도에 있을 때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 미안해서 그럽니다." 이것이 이중섭의 대답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제주도에서 신세를 진 사람에게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그림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그림은 서귀포의 맑은 바다와 아이들이 귤을 따 모으는 모습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또,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이 차분하게 나타나 있는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그림도 유명합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전쟁이 곧 끝날 것 같은 기대감 속에, 이중섭은 1951년 12월에 가족을 데리고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왔습니다. 미술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그리고 제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부인과 아이들이 영양 실조에 걸려 허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뭔가 돈벌이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에 온 이중섭은 오산 학교 후배의 도움으로 범일동에 판잣집을 한 칸 구했습니다. 이중섭은 부두에 나가 막노동을 했지만 끼니를 해결하기가 힘이 들었고, 부인과 아이들은 점점 앙상하게 말라 갔습니다. 다행히 일본에 있는 남덕의 가족들과 연락이 되자, 이중섭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신과 아이들은 우선 일본에 가 있어요. 이 곳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데리러 가겠소." "우리끼리만 가라고요? 당신도 함께 가요." 남덕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갈 수가 없는 상황이오. 당신은 아직 법적으로는 일본인이니 일본 송환선을 탈 수 있을 것이오." 1952년 7월. 이중섭은 가족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곧 데리러 갈게." 이중섭이 아이들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아빠, 빨리 와야 해요."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중섭의 볼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중섭은 아이들을 꼭 껴안은 다음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혼자서 고생이 많겠지만 조금만 참으시오." "우리 걱정은 마시고, 당신이나 건강히 지내세요." 드디어 뱃고동이 울리고 드넓은 바다를 향해 배가 출발하였습니다. "아빠, 안녕히 계세요!" 이중섭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없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머니와의 이별에 이어 또다시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이중섭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리움과 재회, 그리고 이별. 부산에 홀로 남은 이중섭은 가족들이 그리울 때마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서 군용 천막을 뜯어내어 캔버스 대신 썼으며, 장판, 종이, 은박지 등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중섭은 이 중에서 은박지 그림에 열중하였습니다. 담뱃갑 속에 들어 있는 은박지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을 뿐 아니라,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중섭이 은박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날카로운 송곳이나 못으로 은박지 위에 형체를 새기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합니다. 그러면 물감은 홈이 파인 곳으로 스며듭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은박지 위를 닦아내면 홈이 파인 곳에만 물감이 스며들어 형체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중섭은 아들 태현이와 태성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은박지에 아이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은박지 그림 속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소와 게 또는 새나 물고기와 놀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남덕은 친정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큰 부자였던 남덕의 집도 전쟁의 상처와 친정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제는 겨우 끼니를 면하고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남덕과 아이들은 곧 건강을 회복하였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남덕은 이중섭의 후배 중에 선원으로 있는 어떤 사람이 도쿄에 들른다는 얘기를 듣고는, 남편에게 꼭 필요하리라 여겨지는 책들을 외상으로 사서 그 후배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는 책들을 이중섭에게 전해 주지 않고 중간에 팔아먹어 버렸습니다. 또, 일본에 몰래 배를 타고 간 이중섭의 친구는 남덕에게 곧 갚겠다면서 보증금과 여비를 합친 큰 돈을 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남덕은 빌려 준 돈을 모두 떼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남덕은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이를 갚기 위해 무려 20년 동안이나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였다고는 하나 참으로 야속한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헤어진 지 1년 만인 1953년 7월. 이중섭은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선원증을 발급받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습니다. 이중섭은 남덕에게 주기 위해 젊은 시절 태양상의 부상으로 받은 팔레트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불상, 그리고 70매 가량의 은박지 그림을 가지고 갔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가족이었지만, 단 일주일 동안만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중섭은 불법 체류자가 되어 일본에 남을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보증해 준 구상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1년 만에 몰라보게 자란 아이들은 벌써 아버지의 얼굴을 잊었는지 서먹서먹하게 대했고, 그런 아이들이 안타까워서 남덕은 연신 눈물을 흘렸습니다. “태현아, 태성아, 아빠야. 얼른 아빠한테 가야지." 이중섭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꼭 안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금세 아빠와 친해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꿈 같은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아빠가 자전거 사 올게." "아빠, 꼭 약속해요." 태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이중섭도 자신의 손가락을 태현의 손가락에 걸며 말했습니다. "그래, 꼭 약속."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혼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쓸쓸하고 허전했습니다. 쏟아지는 걸작들. 1953년 8월. 남과 북이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6.25전쟁이 사실상 끝났습니다. 그러자 피란을 떠났던 사람들은 제각기 고향을 찾거나 대도시, 특히 서울로 모여들었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망설이던 이중섭에게 공예가 유강렬이 통영으로 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데, 다른 곳에 비해 전쟁의 상처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술 마시자는 친구들도 없는 이 곳에서 이중섭은 오로지 작품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소에 대한 열정을 담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에서 그린 소에 대한 그림은 그 동안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떠받으려고 하는 소, 흰 소, 노을을 등지고 울부짖는 소 등의 작품에서 보여지듯, 도쿄나 원산에서 그렸던 맑고 고운 소가 아니라, 격렬한 분노와 저항의 울부짖음을 폭발적으로 전달하는 고통스러운 소의 모습이었습니다. 살육을 일삼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 거기다 하나하나의 선에 힘찬 붓질이 되어 있는 점에서, 김정희의 추사체에서 보이는 힘차고 울림이 풍부한 붓글씨 선과 매우 닮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어릴 때 형으로부터 배운 붓글씨에서 비롯된 기법일 것입니다. 1954년 이중섭은 대한미술협회전에 달과 까마귀를 출품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거의 모든 신문에 이 작품을 칭찬하는 기사가 실렸으며,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도 이 그림에 반할 정도였습니다. 이 밖에도 이중섭은 전쟁으로 얼룩진 상처를 딛고 소달구지를 타고 평화와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길 떠나는 가족,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봉황, 서로 싸우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싸우는 닭, 북한에 남겨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 어머니가 있는 가족 등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한 이중섭은 통영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풍경화 그리기에 심취했습니다. 통영의 봄 풍경을 그린 푸른 언덕은 현재 흑백 사진만 남아있어 원래 그림이 지닌 색을 볼 수 없지만, 봄을 알리는 파릇한 풀빛이 매우 아름다워 전시회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이중섭은 당시 통영에 살던 김상옥의 시집 출판 기념회에 갔다가 지니고 있던 물감으로 방명록에 복숭아를 문 닭과 게라는 그림을 그 자리에서 단숨에 그렸습니다. 짧은 순간에 그려진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에 감격한 김상옥은 그 그림을 보고 꽃으로 그린 악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김상옥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이중섭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중섭이 얼마나 뛰어난 화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서울로 올라온 이중섭은 친구의 도움으로 종로에 커다란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이 방에서 이중섭은 걸작 도원을 그리게 됩니다. '도원'이라는 제목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나온 것으로, 낙원인 도원에서 벌거벗은 어린이들이 복숭아를 따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중섭이 몇 해 전에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그렸던 벽화와 분위기가 매우 비슷했습니다. 허탈한 성공과 비극적인 죽음. 1955년 1월, 이중섭은 그 동안 모아 온 작품들로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전시회는 대성황을 이루어, 이중섭은 그림 값을 받는 대로 일본의 가족에게 갈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직후 상황이 어려운 탓도 있었겠지만, 웬일인지 사람들이 그림 값을 자꾸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이중섭은 그림을 돈으로 환산해서 받으려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나중에는 돈 받는 일을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들어온 돈마저 전시 행사에 들른 친구들의 밥값과 술값으로 내주고 나니 이중섭의 손에 남아 있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전시회가 끝나자, 이중섭은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 친구가 대구에서 전시회를 해 보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은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지만 한 번 더 힘을 내 보기로 했습니다. 서울에서 가져온 작품이 모자랐기 때문에 여관을 빌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려서 그 해 5월에 대구 미국 공보원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과는 달리 전시회장을 찾은 손님도 별로 없고 작품도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작품에 대한 평도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수확이라면, 대구 미국 문화원 원장 맥타가트가 은박지 그림 석 점을 구입해서 미국으로 갔는데, 그것이 미국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화가로서는 사상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구 전시회의 실패로 이중섭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이중섭은 극도의 자학에 빠져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이 너무도 여렸기에, 그 동안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기에 이 한 번의 실패는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으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 만날 수 없게 된 현실이 고통으로 다가와 그를 깊은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술로 나날을 보내던 이중섭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거기다가 그가 정신병자라는 소문까지 나돌아 그를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 때, 이중섭은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중섭은 이런 와중에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 구상네 가족 등입니다.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는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남과 북, 혹은 비뚤어진 현실을 빗대어 그린 그림이며, 구상네 가족은 친구인 구상 부부가 아이들에게 세발자전거를 태워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태현이와 태성이에게 자전거를 사서 태워 주고 싶은 이중섭 자신의 소망이 담겨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중섭은 당시 인기를 끈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의 포스터를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의 부인에게서 온 편지들을 그 포스터 밑에 붙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부인과 아이들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에서 비롯된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중섭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년은 창문에 팔베개를 한 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멀리서 머리에 물건을 인 여인이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만날 수 없는 강이 가로막혀 있는데도 소년은 계속 기다리고, 여인은 계속 오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소년은 이중섭 자신이고, 머리에 물건을 인 여인은 어머니 또는 아내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이중섭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산의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이중섭이 걱정이 되어, 친구들은 그를 정신과로 이름난 청량리의 뇌병원 정신과에 입원시켰습니다. 의사는 이중섭이 정신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별도의 치료를 당부했습니다. 간염이 심하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식욕을 잃게 되는데, 이런 상태를 보고 사람들은 이중섭이 거식증에 걸렸다고 판단하여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입니다. 이중섭은 고모 집에서 요양하다가 상태가 악화되자 이번에는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입원한 지 한 달 뒤쯤, 친지나 친구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956년 9월 6일, 그의 나이 41세였습니다. 이중섭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이중섭은 너무도 불행한 삶을 살다 간 화가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또다시 부인과 아이들하고도 헤어져 살아야 했으며, 그림 값을 받지 못해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진흙탕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불행 속에서 아름답고 따뜻한 그림을 많이 그려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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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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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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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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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공부를 마치자마자 홍도는 서둘러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홍도야! 우리랑 개울에 가자." "안 돼. 다음에 놀자."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우리 붕어 잡을 건데." "다음에 가자. 지금은 급한 일이 있단 말이야." 홍도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외가로 달려갔습니다. 홍도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유명한 화원이었습니다. 화원은 나라에 고용되어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말합니다. 홍도가 외가에 도착하자 외삼촌은 홍도를 옆에 앉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외삼촌, 무슨 그림을 그리실 거예요?" "매화를 그리려고 한다. 홍도야, 그림을 그릴 때에는 붓을 한 번만 놀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명하게 표현할 수가 없거든." "한 번만으로도 잘 표현하려면 열심히 연습해야겠네요." "그렇지. 붓을 잘 놀리려면 운필법을 익혀야 해. 너도 운필법을 익혀 두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거야.” 외삼촌은 하얀 종이 위에 매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도의 눈동자는 외삼촌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나도 외삼촌처럼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다.' 홍도는 외삼촌의 그림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외삼촌, 그 매화 그림 저 주시면 안 돼요? 그 그림을 보면서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외삼촌은 홍도에게 매화 그림을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홍도야, 왜 이렇게 늦었느냐?” "집으로 오는 길에 외가에 잠시 들렀습니다." 홍도는 외삼촌의 그림을 보고 온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그림 그리는 일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청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원들은 대부분 중인이나 서출이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홍도는 외삼촌의 그림을 앞에 두고 매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반복하면서 종이 위에는 외삼촌의 매화 그림과 비슷한 그림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홍도는 글공부를 마치고 나면 항상 외가로 달려가 외삼촌에게 그림을 배웠고, 홍도의 솜씨는 나날이 발전했습니다. 어느 날, 홍도는 방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홍도를 불렀습니다. "홍도야, 어서 나와 보거라." 어머니는 작은 보퉁이를 들고 홍도의 방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 그게 무엇입니까?" 홍도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우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홍도야, 방금 외가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 동안 글공부를 마치고 외가에서 그림을 배운 것이 사실이냐? "네.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홍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홍도 앞에 보퉁이를 내밀었습니다. “외삼촌께서 네게 이것을 전해 주라고 하시더구나." 보퉁이 안에는 붓과 벼루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홍도야, 앞으로는 이 붓과 벼루를 가지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도록 해라. 대신 외가에서 버릇없이 굴면 안된다. 알았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홍도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어머니, 정말이세요?" “그럼. 홍도야, 네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보여 주겠니?” 홍도는 그 동안 그려 두었던 그림을 어머니 앞에 꺼내 놓았습니다. "잘 그렸구나. 이것도 네가 그린 것이니?" "아니에요. 그 그림은 외삼촌께서 주신 거예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네가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구나." 홍도는 어머니의 칭찬에 어깨가 으쏙해졌습니다. "홍도야, 잠시 뒤에 안채로 건너오도록 하여라. 아버지께도 말씀드려야겠다." "네." 어머니가 나간 후 홍도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실까? 분명히 반대하실 거야. 아버지는 늘 벼슬에 나가서 집안을 일으키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마 내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많이 실망하실 거야.' 홍도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홍도의 아버지는 글이 모자라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무관 벼슬의 하나인 만호를 지낸 홍도의 증조 할아버지처럼 홍도가 집안을 빛내 주기를 바랐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가 홍도를 불렀습니다. 홍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안방으로 갔습니다. "홍도야, 듣자하니 네가 요즘 그림을 그린다던데 그것이 사실이냐?" "네, 아버지. 그렇지만 아버지,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 드리면서 까지 그림을 그리지는 않겠습니다." 홍도는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 네 어머니 말씀으로는 네가 그림에 뜻을 두었다던데,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구나." 아버지는 홍도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음,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시면 배우지 않겠다는." 홍도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런 홍도를 보고 있던 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내 대장부가 왜 그렇게 줏대가 없느냐? 그림을 그릴지 포기할지 네 뜻을 확실히 말해 보거라." 아버지의 말에 홍도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외할아버지, 외삼촌보다 더욱 훌륭한 화원이 되겠습니다." 홍도는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홍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네가 공부를 많이 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욕심이었던 것 같구나. 네 재주가 그렇게 뛰어나다면 화원이 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일 나와 함께 외가에 가자. 네 재주가 어떤지 들어보고 모두들 인정한다면 네가 그림을 배우는 것을 하락하겠다." 홍도는 너무 기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홍도는 글공부를 마치자마자 외가로 달려갔습니다. 외가로 가는 길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나무 위의 새들도 시냇가의 물고기들도 홍도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가에 도착해 보니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아버지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홍도는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홍도 왔구나. 거기 앉거라." 외할아버지는 홍도를 앞에 앉혔습니다. "홍도야,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단다. 지금 네 나이에는 글을 더 읽어야 해." 그러자 옆에 있던 외삼촌이 나섰습니다. "아버님, 홍도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직접 보시겠습니까?" "글쎄."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홍도는 살그머니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앞에 그림을 한 장 한 장 펼쳐 보였습니다. "홍도가 그린 그림을 좀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외할아버지 외삼촌은 홍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얼마 후 외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게 전부 다 네가 그린 그림이란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홍도는 얼른 대답했습니다. 외삼촌은 문방사우를 꺼내 놓고 먹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종이를 홍도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홍도야, 오늘 네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보았던 것을 여기에 그려 보도록 해라." 홍도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떤 걸 그리지?’ 잠시 후, 홍도는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갯마루에서 보았던 외가의 모습이 흰 종이 위에 조금씩 나타났습니다. 가장 먼저 소나무를 그리고, 뒷산에서 바라본 외가 마을의 풍경과 하늘을 날아가는 두어 마리의 학을 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홍도는 어른들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홍도의 그림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홍도야. 네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나가 있거라." 홍도는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지만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도가 나간 후 외할아버지는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그림들은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볼 수가 없어. 홍도는 그림 그리는 재주를 타고난 아이일세. 이런 아이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누가 그리겠나?" "홍도의 재주가 그렇게 뛰어납니까?'' 가장 먼저 소나무를 그리고, 뒷산에서 바라본 외가 마을의 풍경과 하늘을 날아가는 두어 마리의 학을 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홍도는 어른들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다 그렸느냐?" "네." “어디 보자, 소나무에 뒷산. 학도 있고." 외할아버지는 홍도의 그림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홍도야, 네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나가 있거라." 홍도는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지만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도가 나간 후 외할아버지는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그림들은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볼 수가 없어. 홍도는 그림 그리는 재주를 타고난 아이일세. 이런 아이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누가 그리겠나?'' "잘 보세요. 여기 황소 몸뚱이 옆에 있는 흔적을 고치면 돼요. 바람이 지나가는 것으로 고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그러다가 그림을 모두 망치게 되면 더 큰일이 아니냐?'' “염려 마세요.” 홍도는 붓을 들고 병풍 앞에 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가슴을 졸이며 홍도의 붓끝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홍도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불을 때서 그림을 말려야겠네요." 먹물의 흔적은 어느 새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이틀 뒤, 멀리 가셨던 외할아버지가 돌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외할아버지가 병풍사건을 알아차릴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외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습니다. "휴, 정말 다행이야." "홍도가 아니었으면 나는 쫓겨나고 말았을 거야.'' 장명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어느 날, 외가에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모두 그림을 잘 그리는 화원들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손님들에게 병풍을 자랑했습니다. "참 훌륭하지요? 조선의 그림인 것처럼 사실은 중국의 화가가 그린 것이랍니다." "놀랍군요." "이런 그림은 처음입니다." 손님들은 병풍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 화원이 말했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한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닌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잘못 본 거겠지." 외할아버지는 그럴 리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자, 여기 이 부분을 잘 보십시오. 누군가 덧칠을 한 게 분명합니다." 어린 화원은 황소 몸뚱이 옆을 가리켰습니다. "옅은 먹을 썼는데도 다른 부분보다 선명합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 말을 들은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습니다. "누가 병풍에 손을 댄 거야? 누구야?" 외할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밖에 있던 장명소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손님들이 돌아간 후, 외할아버지는 외삼촌과 장명소를 불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두 사람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어서 말을 해 보거라!" 외할아버지가 다시 한 번 소리 쳤습니다. 그러자 장명소가 쭈뼛쭈뼛 나섰습니다. “사실은 제 잘못으로 병풍에 먹물이 튀고 말았습니다." “아니, 자네는 아직까지 붓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단 말인가?” “아버님,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홍도에게 그림을 고치게 했습니다." “뭐야? 홍도가 그림을 고쳤다고?” "네." 외삼촌은 자초지종을 설명 했습니다. “당장 홍도를 불러오너라." 외할아버지는 다시 소리 쳤습니다. 얼마 후, 홍도가 외가에 도착했습니다. “네가 그림을 고쳤다는 것이 사실이냐?” 외할아버지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네, 아저씨와 외삼촌께서 몹시 곤란해하셔서 제가 도와드렸습니다." “뭐야? 네 재주를 남의 눈을 속이는 데 썼단 말이냐? 네게 몹시 실망했다. 그림에는 혼이 담겨야 하는 것인데, 가볍게 남의 눈이 나 속이다니." “할아버지, 이번에는 그저 어른들을 도와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홍도의 대답에 외할아버지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썩 물러가거라. 가서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생각해보고, 잘못을 깨닫게 되거든 그 때 다시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절대 내 집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 마라!" 외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셨습니다. '큰일났다. 외할아버지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어.' 홍도는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풀어 드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홍도는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 홍도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고 해도 머릿속이 멍해지기만 했습니다. "요즘 홍도가 그림을 통 그리지 못하네요. 저러다가 아까운 솜씨 썩히겠네." 홍도의 부모님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하늘을 보니 붉은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와! 정말 멋있다." 홍도는 화구를 챙겨서 마을 정자로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뭔가 잘 그려질 것 같아." 홍도는 붓을 들고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붓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 이대로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것인가?' 홍도는 그대로 정자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홍도의 형이 찾아왔습니다. "홍도야, 어서 가자. 외삼촌이 너를 찾고 계셔." 형과 함께 집으로 가 보니 외삼촌이 한 젊은 손님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홍도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홍도야, 잘 지냈느냐? 네가 요새 그림을 그리지 못해서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할아버지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단다." "그림을 그리려 해도 붓을 잘 놀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이분을 모시고 왔다." "이분은 훌륭한 화원인 김응환이라는 분이야." "외할아버지께서도 이분이라면 너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지." "지난번에 병풍 그림을 고친 것을 알아본 분도 바로 이분이란다." 김응환은 홍도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는데, 이미 혼인을 해서 상투를 틀고 있었습니다. 홍도는 김응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네가 홍도냐?” "네." “우리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리겠느냐?” “네? 저를 제자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에요?" "하하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우리 집에는 좋은 그림도 많고 화구들도 많이 있으니, 와서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다." "네가 요즘 그림을 그리지 못해서 힘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다." 김응환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홍도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려무나." 그날 밤, 홍도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좋은 그림과 화구가 많다고? 그러면 내 그림 실력 향상에 도움이 많이 되겠지?’ 다음 날 아침, 홍도는 아버지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응환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손님 댁에 가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지금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응환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흠, 깊이 생각한 후에 찾아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는 그러지 않은 것 같구나. 더 생각해 보고 다시 찾아오너라." 김응환의 말에 가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외삼촌도 놀라서 물었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나? 홍도가 어렵게 마음을 먹고 온 것 같은데." 홍도 역시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 잘못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리석게도 할아버지의 눈을 속인 것을 뉘우치지도 않고, 그림을 더 잘 그리겠다며 손님을 따라나서기로 했습니다." "당장 할아버지께 가서 잘못을 빌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손님 댁에 찾아가겠습니다." “하하하, 잘 생각했다. 그렇게 하거라." 김응환은 홍도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습니다. 홍도는 그 길로 외할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 하나만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 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외할아버지는 홍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홍도야, 이제 네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구나." "이제부터는 네 자신을 낮추고 네 주변을 먼저 생각하거라." "그러면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다." 외할아버 지는 홍도의 등을 다독거리셨습니다. 홍도는 김응환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제부터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홍도는 김응환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김응환도 홍도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자네보다 운이 좋아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뿐이야." "그런데 스승이라니. 말도 안 되네." "앞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자네에게 가르쳐 주겠네." "그러니 나를 형이라고 부르게." 그 후 김응환은 늘 홍도와 함께하며 홍도를 도왔습니다. 홍도 또한 김응환을 스승이자 형님으로 생각하고 잘 따랐습니다. 김응환은 홍도가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강세황의 가르침. 어느 날, 김응환은 홍도의 그림을 가지고 표암 강세황을 찾아갔습니다. 강세황은 예조참판을 지낸 사람인데, 글과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세황의 평가를 받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며칠 후, 김홍도의 외가로 강세황이 찾아왔습니다. 김홍도의 외가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강세황 어른께서 우리 집에 오시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가족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뛰어난 화가가 이 댁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찾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홍도는 급히 강세황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네가 그린 그림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래서 널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찾아왔다." 강세황은 김홍도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김홍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강세황은 이어 김응환에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 아이를 모를 뻔했어." "이렇게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모르고 지냈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나?” “저처럼 부족한 사람에게도 홍도의 재주는 무척 뛰어나 보였습니다." "어른께서 홍도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조선의 미술이 더욱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김응환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 동안 홍도의 재주를 바르게 키운 공은 내 잊지 않겠네, 자네가 정말 큰일을 했어." 강세황은 다시 한 번 김응환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김홍도에게 말했습니다. "내 너에게 비단 한필을 보내겠다. 그러면 그 뒤에 그림을 그려서 내가 부를 때 가지고 오도록 해라." "네, 정성껏 그리겠습니다." 김홍도는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이제 너는 도화서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구나." "내가 도화서에 이야기를 해 놓겠다." 강세황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이게 꿈은 아닐까? 강세황 어른께서 날 찾아오시다니." "게다가 도화서에 들어가게 된다고?" 김홍도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강세황이 김홍도를 불렀습니다. 김홍도는 그림을 그린 비단을 가지고 강세황을 찾아갔습니다. "이보게들, 이 그림을 좀 보게나. 어떤가?" 강세황은 도화서의 화원들에게 김홍도의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 정말 훌륭합니다." "이런 재주 있는 청년을 왜 이제야 데려오셨습니까?'' 화원들은 김홍도의 재주에 무척 놀랐습니다. "이런 재주를 썩히기는 아깝지 않은가? 도화서에 들어와서 그림을 배우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당연한 말씀입니다." 화원들은 모두 강세황의 말 찬성했습니다. 그 후 김홍도는 도화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옆에 두고 수제자처럼 가르쳤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에 제목을 붙여 주기도 하고, 임금님 앞에 그 그림을 들고 가서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홍도의 집에 양식이나 옷감 등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도화서에 들어간 후 김홍도의 그림은 나날이 발전했습니다. 김홍도는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습니다. 그를 시기 하고 질투하는 사람들까지도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김홍도는 자신을 시샘하는 사람들에게도 늘 예의바르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시샘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김한태라는 소금장수가 김홍도를 찾아왔습니다. “저, 도화서에 계시는 분이시지요?” "무슨 일입니까?” “화원이시라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무슨 부탁이신지." “저는 서문 밖에 사는 김한태라고 합니다. 며칠 후에 저희 집에서 어머니의 환갑 잔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먹고사는 일에만 정신을 팔다 보니 병풍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가 그저 먹고 마시는 잔치였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병풍 하나만 그려 주십시오." 김홍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좋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무척 훌륭하군요." "며칠 후에 다시 오십시오." "병풍을 그려 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며칠 후, 약속한 날짜가 되자 김한태는 김홍도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김홍도는 김한태에게 병풍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병풍은 처음 봤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한태는 김홍도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 인사했습니다. 며칠 후, 김한태는 김홍도의 집에 양식과 비단 등을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김홍도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병풍을 보시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고맙습니다. 김 화원께서 그려 주신 병풍 덕분에 제가 효도를 한 것 같아 기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한태는 김홍도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아닙니다. 어머니를 생각하시는 그 효심에 제가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참, 낮에 보내신 물건들은 그림 값으로는 너무 많습니다. 일부만 받겠습니다." 김홍도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제 마음의 표시입니다. 모두 받아 주세요. 그리고 화원께서 화를 내실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장사치이기 때문에 큰 장사꾼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돈은 많지만 그림을 걸어 두고 감상할 줄을 모릅니다." "원래 사람들은 살림이 넉넉해지면 다른 것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술이나 마시면서 돈을 낭비하는 것보다 좋은 그림을 사 보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김 화원의 그림을 사서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김 화원의 살림이 넉넉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김홍도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김한태의 말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후, 김한태는 가끔씩 와서 김홍도의 그림을 가져갔고, 김홍도는 그 덕분에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의 초상화. 어느 날 아침, 김홍도는 도화서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가니?” “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냐, 간밤에 길몽을 꾸었단다. 오늘 네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구나." “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무척 좋군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김홍도는 기분 좋게 길을 나섰습니다. 그 즈음 도화서에는 새로 화원 벼슬이 내려진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도화서의 화원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화원 벼슬에 오르게 될까?'' “글쎄요. 나이든 사람에게 내리지 않을까?" "젊은 사람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김홍도도 그 중 한 사람이고." “참, 이번에 상감 마마께서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셨다던데, 화원 벼슬에 오르면 그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김홍도가 화원 벼슬에 오르는 것이 거의 확실하겠어." "맞아. 김홍도는 초상화를 잘 그리니까." 어머니의 좋은 꿈이 맞았는지 정말 김홍도에게 화원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화원들은 모두 김홍도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김홍도는 어용 화사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임금님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입니다. 김홍도와 함께 어용 화사로 뽑힌 사람들 중에는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된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필과 정밀 묘사가 뛰어난 변상벽도 끼어 있었습니다. 스물아홉 살 젊은 나이의 김홍도는 두려운 마음이 컸습니다. “혹시라도 붓을 잘못 놀려서 그림을 망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김홍도는 김응환에게 자신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김응환은 김홍도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너무 염려 말게. 자네는 잘 해낼 수 있을거야. 실력을 발휘해서 오래도록 남을 그림을 그리도록 하게." 김홍도는 궁궐로 가기 전에 강세황을 찾아갔습니다. “어용 화사가 된 것이 무척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임금님의 용안을 그리는 것도 다른 것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온 정성을 쏟아 자연스럽게 그리면 되니 한번 열심히 해 보거라."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 김홍도는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부터 어용 화사들은 영조 임금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홍도는 손 끝에 정성을 담아 붓을 움직였습니다. 며칠 후, 영조 임금님의 초상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영조 임금님은 도화서 관리들과 함께 초상화를 살펴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초상화를 보던 영조 임금님이 말했습니다. “이 부분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영조 임금님이 가리킨 곳은 왼쪽 볼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그늘이 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부분을 마무리했던 김홍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습니다. 그 때, 강세황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아직 먹물이 마르지 않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먹물이 마르고 나자, 강세황의 말대로 그림자처럼 보이던 자국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림은 더욱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영조 임금님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솜씨로구나. 자네들이 왕세손의 어진도 그리도록 하게." 왕세손은 훗날 정조 임금님이 된 분으로, 영조 임금님의 미움을 받고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 세자의 아들입니다. 왕세손은 김홍도의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왕세손은 김홍도에게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내게 그림을 보여 주겠소?'' 김홍도는 왕세손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왕세손은 그 그림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홍도도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어질고 영리한 왕세손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군선도. 영조 임금님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님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김홍도는 궁중에 자주 불려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날도 정조 임금님이 김홍도를 불렀습니다. “내 침전에 이르는 벽에 신선 그림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릴 수 있겠는가?” 김홍도의 눈에는 임금님의 침전에 이르는 벽에 그려진 그림이 너무 경박하게 보였습니다. 김홍도는 집으로 돌아가 밤새도록 어떤 그림을 그릴지 연구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김홍도는 정조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이 벽을 가득 채우려면 진한 먹물 두 되가 필요합니다." 먹물이 준비되자 김홍도는 붓에 먹물을 잔뜩 묻혀서 벽에 휘둘렀습니다. “아니, 그게 뭐 하는 짓인가?” “붓을 던지다니!" 사람들의 눈에는 김홍도가 붓을 던진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홍도는 붓을 던진 것이 아니라 붓을 빠르게 휘둘러 붓자국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김홍도의 붓이 지나가는 곳에는 검은 구름이 나타나고 산이 나타났습니다. 구름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마치 신선이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정조 임금님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정말 훌륭한 솜씨로다!"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군선도 입니다. 이것은 신선이 실제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 다른 어떤 그림보다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시 어용 화사로 뽑히다. 1781년, 정조 임금님은 강세황을 시켜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 등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조 임금님은 강세황에게 물었습니다. “세 사람 중 누구의 솜씨가 가장 뛰어 나오?” “세 사람 모두 뛰어납니다." “그러하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림을 그려 보게 해야겠구려." 이렇게 해서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는 정조 임금님의 용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그렸던 초상을 보고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정조 임금님은 세 사람의 그림을 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흠, 김홍도의 그림이 가장 뛰어나군. 김홍도로 결정하도록 합시다." 소식을 들은 김홍도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며칠 후, 김홍도는 손끝에 온 정성을 담아 정조 임금님의 용안을 그려 나갔습니다. “정말 훌륭하도다!" "그렇습니다.” "상감 마마를 실제로 뵙는 듯합니다." 정조 임금님은 김홍도의 그림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정조 임금님의 초상화를 끝낸 후, 김홍도는 찰방에 임명되었습니다. 찰방은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역참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종6품의 벼슬로 김홍도와 같은 중인 계급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 이었습니다. 또 정조 임금님은 궁중에서 중요한 그림을 그릴 때에 김홍도가 꼭 함께 하도륵 했습니다. 김홍도는 정조 임금님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것입니다. 그 무렵 김홍도는 자신의 호를 '단원'이라고 지었습니다. 단원은 명나라 화가 이유방의 호입니다. 이유방은 고상하고 맑은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 김홍도는 이유방처럼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금강산을 그리다. 정조 12년, 김홍도는 김응환과 함께 정조 임금님에게 불려갔습니다. 금강산은 이웃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명산이오. 하지만 정작 금강산의 진면목을 담은 그림이 별로 없어서 늘 마음이 안타까웠소. 천하 제일의 명산인 금강산을 그림에 담아 둔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다른 화공들이 금강산을 그릴 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두 사람이 금강산을 구석구석 돌아보고 그림으로 남겨 두도록 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이런 중요한 일을 함께 맡게 되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정조 임금님이 또다시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그대들이 지나는 군에 명을 내려놓겠소. 맛있는 음식도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쉬도록 하시오." 정조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두 사람을 경연에서 모시는 관리들을 접대 하듯이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경연은 임금님과 함께 공부하는 자리이므로, 그 곳에서 모시는 관리들은 학덕과 벼슬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을 그런 관리들같이 대접하라고 하였으니, 정조가 두 사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궁궐을 나와 강세황에게 갔습니다. "자네들이 금강산에 다녀오게 됐다지? 주상 전하의 뜻대로 온 정성을 다하도록 하게." 강세황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응환과 김홍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저, 스승님. 저희와 함께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주상 전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들은 잘 할 수 있을 거야." 강세황은 두 사람을 격려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얼굴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스승님, 제발 저희와 함께 가주십시오." "스승님과 함께 가면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계속해서 강세황을 졸랐습니다. 마침내 강세황은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지만 강세황은 두 사람과 함께 금강산을 오르지는 못하고, 아들이 있는 회양에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금강산을 둘러보던 두 사람은 단발령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김홍도는 넋을 잃고 금강산 봉우리들을 바라보았습 다. “여보게, 정신을 차려야지. 냉정하게 살피고 그림으로 옮겨야 하네." 김응환은 김홍도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아, 금강산이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김홍도는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습니다. “하하하! 사실은 나도 자네처럼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놓고 있었다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잠시 후 김응환이 웃음을 그치고 말했습니다. "자, 우선 내금강을 그리도록 하세. 그 다음엔 영동으로 가고, 외금강은 올라오면서 그리는 거야. 그리고 해금강도 그려야 하니 서두르세." 내금강은 금강산 서쪽에 있는 곳으로, 숲과 돌, 계곡의 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리고 외금강은 금강산의 동쪽 부분으로, 괴상하게 생긴 돌과 봉우리, 가파른 절벽, 폭포 등이 많은 곳입니다. 또 해금강은 외금강에서 바다에 닿아 있는 부분으로, 옛날 인도 사람들이 실어 보낸 53개의 불상과 부처님의 뜻을 담은 큰 종이가 떠내려 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바쁘게 다니며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때 그린 두 사람의 그림은 대부분 전해 지지 않습니다. 다만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금강사군첩 56폭이 정조 임금님에게 바친 금강산 그림의 초본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을 뿐입니다. 김응환의 죽음. 금강산에서 돌아온 후, 김응환은 자리에 누워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김홍도는 김응환의 건강이 걱정되었습니다. '많이 편찮으신지 가 봐야겠다.' 김응환의 집에 가 보니 그는 마루에 앉아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많이 나았다네. 어쨌든 마침 잘 왔네. 신자하가 오기로 했거든." “신자하가요?” "그림을 보러 올 모양이야." 신자하는 나이는 어렸지만, 벌써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나 삼절이라는 소리를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신자하가 집 안으나 들어왔습니다. 신자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인데, 두 분께서 쓰시마에 가시게 되었다면서요?" "쓰시마?" "처음 듣는 이야기인걸?" 김응환과 김홍도는 고개를 가우뚱거렸습니다. "네 ? 두 분이 쓰시마에 가시게 되었다고 아버지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흠, 신대승 어른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사실이겠지. 그런데 우리가 금강산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말씀이 나왔다니 이상하군." 김응환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내일이라도 주상 전하께서 무슨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김홍도가 말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다음 날 궁궐에서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서둘러 정조 임금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두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려고 하오. 제주도를 거쳐서 쓰시마에 다녀오시오. 비밀리에 하는 일이라 지도 그리는 사람을 보낼 수 없으니 그대들이 수고해 주시오. 왜국 관헌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알았소?"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정조 임금님 앞을 물러나온 두 사람은 곧 쓰시마로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김응환의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쓰시마까지 가실 수 있겠습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주상 전하의 명이시니 죽을병에 걸렸다고 해도 떠나야지." 김응환은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응환이 자주 쉬어야 했기 때문에 빨리 부산에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응환은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 어서 가세. 힘을 내자고!” 얼마 후, 김응환과 김홍도는 부산포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김응환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쓰시마에는 저 혼자 다니오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양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십시오." 김홍도는 김응환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김응환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았는데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서 가세." “그러면 며칠만이라도 약을 드시고 쉬세요. 그 다음에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김홍도는 김응환을 동래 관사에 누이고 의원을 불렀습니다. “의원님,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의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 김응환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홍도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스승님의 몫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 김홍도는 서둘러 쓰시마로 갔습니다. 왜국의 옷을 입고 다니며 쓰시마의 지도를 자세히 그려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한 장 한 장 완성할 때마다 김응환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그렸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얼마 후, 김홍도는 쓰시마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정조 임금님에게로 갔습니다. “수고했소. 이 큰일을 혼자서 해내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어서 가서 쉬도록 하시오." 정조 임금님은 김홍도와 죽은 김응환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김홍도는 그 동안 무리한 탓에 앓아 눕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김홍도는 조금만 기운이 나면 일어나 앉아 신숙주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그림책을 새로 그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 그림에는 강세황의 글씨를 넣어야 했는데, 강세황의 나이가 많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던 것입니다. 강세황도 이런 김홍도의 마음을 알고 자주 찾아와 김홍도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김홍도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용주사 불화. 그 무렵 정조 임금님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를 양우원으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묘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현륭원 옆에 용주사라는 절을 세워 사도 세자의 넋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사도 세자는 영조 임금님의 아들로 원래는 장헌 세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미움을 사 왕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영조 임금님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면서 장헌을 다시 세자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도 세자라는 이름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정조 임금님은 김홍도를 불러 말했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넋을 달래려고 용주사라는 절을 지었다오. 그대가 대웅전에 자리할 그림을 그려 주시오." 김홍도는 정조 임금님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그림보다도 정성을 다해 그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용주사로 떠나기 전, 김홍도는 강세황을 찾아갔습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게 새로운 화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제 중국 그림만 바라보는 일에서 벗어나야 해. '조선’ 만의 그림이 있어야지. 안 그런가? 새로운 방법으로 자네만의 그림을 그려 보게. 전에 내가 그린 원통 동구라는 그림을 본적이 있지? 그 그림에 나온 바위는 서양 그림의 방식을 따라 그린 거라네. 서양 그림에서는 원근과 음영을 잘 나타내고 있지. 자네도 이번에 그런 그림을 그려 보는 게 어떻겠나?" 강세황의 말에 김홍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 그림도 이제 바뀌어야 해. 지금까지 난 내 재주를 자랑하기만 했을 뿐,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어. 이제 부터라도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자.' 김홍도는 강세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승님, 저는 한동안 용주사에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승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못 찾아뵙는 동안 옥체 보존 하십시오." 강세황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몸을 깨끗이 씻고 용주사로 향했습니다. 김홍도는 대웅전에서 탱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탱화는 그림으로 그려서 벽에 거는 불상을 말합니다. 김홍도는 이 그림에 명암과 입체감을 살리는 운염 기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운염 기법은 오랫동안 쓰이지 않았지만, 김홍도는 이 기법이 탱화를 그리는 데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달 동안 정성을 쏟은 끝에, 삼세여래를 그린 탱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정조 임금님이 말했습니다. “저 사천왕을 보면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겠구려. 게다가 부처님은 사람들의 아픔을 품에 안은 듯이 자애로워 보이는군. 수고하셨소. 이제 아버님께서 편히 쉬실 수 있을 것 같소." 정조 임금님은 몇 번이고 김홍도를 치하했습니다. 연풍 현감을 지내다. 1791년, 김홍도는 세 번째로 어용 화사에 뽑혔습니다. 김홍도는 이명기, 허감, 김득신 등과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초상화가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홍도는 강세황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홍도는 한달음메 강세황의 집으로 갔습니다. "스승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는 이제 틀린 것 같네. 조선의 신필이 되도록 노력하게. 중국의 신필이 아니라 조선의 신필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알겠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강세황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픔에 잠겨 지내던 어느 날, 김홍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정조 임금님이 김홍도에게 벼슬을 내린 것입니다. “김홍도를 연풍 현감으로 임명하노라." 김홍도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충청도 연풍으로 향했습니다. 연풍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굶고 있는 백성들을 본 김홍도는 이방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내 집에 가서 양식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오너라. 그것들을 동헌 마당에 쌓아 두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그렇지만 백성들에게 모두 주고 나면 사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백성들은 굶고 있는데 나만 배불리 먹으란 말이냐? 어서 서둘러라." 김홍도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힘든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산과 들에는 파릇파릇한 풀들이 자라났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양식 걱정을 조금 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도 가뭄이 들어서 백성들은 또다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관가에 남아 있는 곡식도 없는데 어떡하면 좋지?' 김홍도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느 날 밤, 김홍도는 이런 자신의 심정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습니다. 노란 고양이와 나비가 서로 장난치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나비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도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꼭 나와 같구나.' 김홍도는 그 그림에 이렇게 써 넣었습니다. '현감 벼슬을 하는 '단원' 대신 이제부터는 그림에 취한 선비라는 뜻으로 '취화사' 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연풍을 지나던 충청도 관찰사가 그 곳의 창고가 거의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앞으로 나라에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창고를 비워 두다니, 현감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구나.' 결국 정조 임금님 앞으로 김홍도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처음엔 정조 임금님도 김홍도를 감싸 주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상소가 올라오자, 정조 임금님은 어쩔 수 없이 김홍도를 해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 이제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김홍도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그림에만 몰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후. 현감에서 물려난 후 김홍도의 살림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렇지만 김홍도는 좀처럼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굶고 있는 백성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한태가 김홍도를 찾아왔습니다. 김한태는 30여 년의 세월 동안 김홍도를 도와 온 사람입니다. "한양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다른 일이 있어서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김홍도와 김한태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참 이야를 나누던 중에 김홍도가 화첩 하나를 꺼냈습니다. "어떤지 보시겠습니까?'' 김한태는 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습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김한태가 화첩을 다 보고 나자 김홍도가 말했습니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김한태 선생께 드리려고 그린 것입니다." 김홍도는 화첩에 '김경림에게 준다' 라고 쓴 뒤, 낙관을 하고 김한태에게 주었습니다. 김한태의 다른 이름이 바로 김경림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을 갖게 되다니, 이런 영광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정조 임금님이 김홍도를 불렀습니다. 내가 이번에 홍재 전서라는 책을 썼다오. 이 책에 유명한 시가 나오는데, 그 운을 따서 다시 시 여덟 수를 지었소, 그 시에 맞게 여덟 폭 병풍을 그려 주시오." 이렇게 해서 주부자 시화병이라는 병풍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김홍도는 화첩을 묶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한눈에 김홍도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김홍도는 연풍 현감으로 있을 때 간단하게 그려 두었던 그림을 바탕으로 많은 풍속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 속에는 백성들의 진솔한 삶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훈장님의 야단을 맞고 우는 아이와 그 아이를 보며 웃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된 서당기, 춤추는 아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된 무동, 그 당시 생활상을 잘 나타낸 나룻배, 김홍도의 구도 감각에 대해 잘 말해 주는 씨름. 모두 김홍도의 그림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입니다. 어느덧 김홍도의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졌습니다. 김홍도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끼던 사람들을 떠나보낸 김홍도는 더욱 외로워졌습니다. 그런데다 시집을 갔다가 과부가 된 딸마저 병에 걸려 김홍도는 더욱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김홍도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고 남산에 있는 초당에 가서 지내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이 정신을 쉬게 해 준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 김홍도는 자신을 농사짓는 노인이라 하여 ‘농사옹' 이라 부르고, 자신이 사는 곳을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단구’라 불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김홍도의 집 근처에 매화를 팔러 왔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도록 매화는 하나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특이하게 생긴 매화여서 아무도 제값을 쳐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홍도는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 매화를 나에게 파시오." "싸게는 못 팝니다." "얼마면 파시겠소?'' "2천냥은 받아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김홍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들 김양기를 불렀습니다. “어서 김 진사 댁에 다녀오너라. 그리고 부탁한 그림을 며칠 내로 그려 주겠다고 전해라. 그러고 나서 그가 주는 것을 받아 오너라." 얼마 전 김 진사가 김홍도에게 그림을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들먹거리며 돈 많은 티를 내는 까닭에 김홍도가 거절했던 것입니다. 김양기는 김 진사에게 김홍도의 말을 전하고 돈 3천 냥을 받아 왔습니다. ‘이 돈이면 한동안 잘 지낼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한 김양기는 김홍도에게 돈을 건냈습니다. 그런데 김홍도는 그 중에서 2천 냥을 뚝 떼어서 매화를 사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 중 8백 냥으로는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좋은 매화를 얻었으니 잔치를 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이렇듯 살림살이에 무심한 김홍도 때문에 김양기는 아버지 대신 집안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환갑이 지나자 김홍도는 차츰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천식에 걸려서 기침을 자주 하였습니다. 기운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그림도 잘 그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단원 유묵에 실려 있는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른 봄 날씨는 쌀쌀하기만 한데, 고르지 못한 자갈밭에 들불이 꺼져 가는구나. 달빛 아래 호미를 메고 함께 가자 소리치니 까마귀 떼는 놀라 흩어졌다가 다시 나무에 모여 앉는구나. 익은 앵두 사이로 물레 소리가 들리고, 보리가 익는 봄이 되니 새벽 기운이 맑구나. 한낮에 논을 매는 것은 참으로 힘들어서 잠시 쉬며 여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들녘에 들밥을 내니 늙은 개가 뒤따르고 푸른 숲 그늘에서 붉은 해를 피하는구나. 힘들여 텁수룩한 잡초를 뽑고 흔연히 배불리 먹고 긴 둑에 누웠다. 세리가 세금 받으러 마을 앞을 지나가니 아무도 없는 방앗간에 물방아 소리만 시끄럽구나. 일년 내내 공들여도 쌓이는 것은 없으니 아들 딸은 어찌 시집 장가 다 보낼까. 외진 마을에 백발 노부부 집에서 누에치고 실 뽑고 개와 닭을 기르는구나. 기쁜 일은 손자가 송아지처럼 건강하며 아침 내내 진흙탕에서 기어다니며 노는 것이로다. 모래가 날려 만 리 하늘이 어둑어독하고, 산천은 노을을 띠며 그림자는 백 겹이나 되는구나. 김홍도의 병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화가와 같은 예술가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김홍도가 세상을 떠난 후 안타깝게도 그의 뒤를 이을 만한 화가는 나타나지 않았고, 조선 미술은 큰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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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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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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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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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줄기는 어디에서. 동네 아이들이 마을 앞 도랑에 모여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소나기가 이제 막 그쳐서 물고기들이 작은 도랑에 많이 올라왔던 것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물고기를 잡다가 허리를 편 정호는, 조금 전보다 도랑물이 훨씬 줄어든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줄어든 물이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그는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싶어서 도랑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내려가니 도랑이 시내와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시내에는 꽤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정호는 시냇물을 보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시냇물은 어디에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정호는 시선을 돌려 시내의 끝이 닿아 있는 산줄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산등성이와 또 다른 산등성이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정호는 또다시 산줄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호가 산줄기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때, 주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정호야, 뭘 그렇게 생각하니?" 정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 용희구나." 정호의 단짝 친구 용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왜 혼자서 여기까지 온거야? 이제 곧 글방에 갈 시간이야. 빨리 가자." "그래. 그건 그렇고 저 산줄기 좀 봐. 저 산줄기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뻗어 나온 것일까?" "나도 몰라. 늦기 전에 어서 가자." 용희는 정호의 손을 이끌고 글방으로 향했습니다. 글방에는 다른 친구들이 벌써 다 모여 있었습니다. 정호와 용희도 얼른 친구들 틈에 끼어 (천자문)을 펴 들었습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지만 정호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냇물과 산줄기에 대한 생각 뿐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의 정호는, 마침내 글방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스승님, 산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나요? 또 시냇물은 어디에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글을 읽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정호를 쳐다보았습니다. 글방 선생님도 어이없어하시며 호통을 쳤습니다. "아니, 글을 읽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냐? 공부하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구나. 딴생각 말고 글이나 읽어라!" 정호는 선생님의 꾸중이 두려워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궁금증은 더욱 깊어 갔습니다. 다음 날, 다른 아이들은 모두 글방에 나왔는데 정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글방 선생님은 용희를 시켜 정호가 결석한 이유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정호의 집으로 달려간 용희는 베를 짜고 있던 정호의 어머니께 인사를 했습니다. "정호 어머니, 안녕하세요?" "어서 오너라, 용희야.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냐?" "정호가 오늘 글방에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정호는 분명 글방에 간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정호 어머니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베틀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얘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정호의 어머니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애타게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정호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이고, 혹시 호랑이한테 물려 간 게 아닐까!" 정호 어머니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습니다. 잠시 후 소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정호네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정호 어머니. 정호는 꼭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동네 사람들은 정호를 찾기 위해 온 산을 헤맸습니다. 마침내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였습니다. 맞은편의 높은 봉우리 위에 아이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 어른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거기 정호냐? 정호 맞느냐?" 그러자 그 아이가 돌아보았습니다. 틀림없는 정호였습니다. "정호야!" 농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다시 정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제서야 정호는 봉우리의 바위에서 내려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맞은편 봉우리 아래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정호야,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 그날 아침, 정호가 글방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글방으로 가는 도중 전날 의문을 품었던 산줄기를 다시 보게 되었고, 의문을 풀기 전에는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발걸음을 산으로 옮겼던 것이었습니다. 정호는 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여기저기 뻗어 있는 많은 산줄기들을 바라보는 데 온통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아, 산줄기들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구나.' 이미 글방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 없이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자신을 부르는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던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돌아온 아들을 보자, 정호의 어머니는 왈칵 목이 메었습니다. "이 녀석아, 가라는 글방엔 안 가고 무얼 하러 산엔 올라가? 커서 뭐가 되려고 이 모양이냐? 동네 어른들께 이처럼 걱정이나 끼쳐 드리고......" "죄송해요, 어머니. 산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어요." 정호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의 지도를 만들어 낸 지리학자 김정호입니다. 지도에 대한 열정. 호기심 많던 소년 김정호는 어느덧 청년이 되었습니다. 김정호는 청년이 되어서도 자주 산에 올라가 산줄기를 살펴 보고 직접 산줄기를 따라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날도 김정호는 산에 올라가 하염없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멀리까지 뻗은 물줄기, 크고 작은 골짜기, 이리저리 이어진길...... '저 길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올까? 한성(지금의 서울)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지?' 혼자서 풀 수 없는 의문은 자꾸만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문득 산줄기가 뻗어 나간 모습, 냇물이나 강이 흐르는 모습, 길이 뻗은 모습 등을 자세히 그려 놓은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정호는 당장 집으로 돌아와 산에 올라가서 보았던 산줄기와 골짜기를 그려보았습니다. 글씨 연습보다 지도 그리는 일이 훨씬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 좋아. 내 손으로 지도를 만들어 보자.' 김정호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를 그리기 위해 먹을 갈고 있는데, 문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호! 정호, 집에 있나?"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이용희의 목소리였습니다. "어서 오게, 용희. 그런데 어쩐 일인가?" 김정호는 얼른 대문을 열고 친구를 맞이했습니다. "이걸 좀 보게. 읍도를 구했어." "아니, 이게 바로 우리 마을을 그린 지도란 말인가?" 이용희는 평소 김정호가 지도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읍도를 구해 온 것이었습니다. 김정호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지도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두루마리 지도를 넓게 펼쳤습니다. 읍의 형태가 알아보기 쉽게 잘 그려져 있는 듯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김정호는 읍도를 들고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다니며 실제의 모양과 맞춰 보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에 있는 길을 따라가며 거리를 재어 보기도 하고, 도랑이나 내가 나타나면 지도에 그것들이 제대로 표시되어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하지만 지도와 실제의 마을을 비교해 볼수록 기쁨은 점점 실망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 지도는 실제와 일치하는 부분보다 다른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 읍이라는 한정된 지역만 나타나 있는 것도 김정호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산줄기나 강줄기의 시작와 끝 같은 것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정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이건 틀린 곳이 더 많고 빠진 곳도 많아. 이런 지도는 아무 쓸모가 없어. 이보다 더 정확한 지도는 없을까?' 김정호는 이용희를 찾아갔습니다. "용희, 이 지도는 별로 쓸모가 없겠네. 자네가 이것을 구하느라고 애쓴 줄은 알지만, 실제로 조사해 보았더니 틀리게 그려진 부분이 너무 많고 빠진 것도 많아." 김정호는 이용희에게 틀린 부분과 빠진 부분을 하나하나 지적해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좀더 정확하고 자세한 지도를 구할 수는 없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용희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습니다. "저 건너 우리 작은댁에 마침 한성에서 오신 선비가 있는데, 그분한테 가서 물어 보는 게 어떻겠나?" "그래? 그럼, 어서 가 보세." 이용희는 김정호와 함께 서둘러 개울을 건너 작은댁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 한성 선비는 호두나무 아래에 있는 평상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용희가 먼저 인사를 하자 선비도 만갑게 맞았습니다. "자네 왔는가?" 대답을 마친 선비는 이용희의 뒤에 서 있는 김정호를 바라보았습니다. "제 친구예요. 김정호라고." "안녕하십니까? 김정호입니다." 김정호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한성 선비도 점잖은 태도로 인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한성 남산골에 사는 박진사라고 하네." 김정호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궁금한 것을 물었습니다. "박 진사님, 한성에 가면 우리 나라의 땅 모양을 그려 놓은 지도를 구할 수 있을까요?" "글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규장각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곳에는 많은 책들이 보관되어 있으니까......" 김정호는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는 한성에 가면 꼭 규장각에 들르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규장각에서 구한 전국 지도. 20살 무렵에 김정호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도 김정호는 온통 지도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김정호가 집안을 돌보지 않고 지도 연구에만 매달리자, 살림은 점점 더 가난해져서 아내가 광주리 장사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김정호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아내와 함께 이 지방 저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땅 모양을 살피고, 산천의 이름을 비롯하여 특산물, 고적 등을 조사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듬해, 여비가 준비되자 김정호는 곧 한성으로 향했습니다. 규장각에 들러 우리 나라 전국 지도를 구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정호의 마음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 이상으로 긴장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전국 지도가 꼭 있어야 하는데......' 김정호는 반드시 지도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규장각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규장각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만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규장각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가 김정호의 앞을 성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썩 물러서시오. 규장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지도를 구하기 위해서 먼길을 왔습니다. 꼭 좀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지만 아무리 통사정을 하여도 문지기는 김정호를 본 척 만 척하였습니다. 그 때, 별안간 한 선비가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니, 자네는 정호 나닌가?" 김정호는 자신을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수년 전에 자신의 마을에서 휴양을 하던 박진사였습니다. 김정호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박 진사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박 진사님!" "그런데 자네가 이 곳에 웬일인가?" 박진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지난번에 진사님께서 규장각에 가면 우리 나라 땅 모양을 그린 지도가 있을 거라고 해서, 이렇게 지도를 구하려고 한성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규장각 안으로 들여보내 주질 않는군요." 김정호는 자신의 처지를 박 진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랬구먼." 박 진사는 김정호가 우리 나라의 지형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지도 연구에 열정을 쏟던 사실을 기억해 냈습니다. 김정호는 박 진사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듯 박 진사의 손을 잡고 사정하였습니다. "진사님, 규장각에 출입하실 수 있으시면 제발 우리 나라 지도 한 장만 구해 주십시오.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박진사는 김정호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내가 들어가 볼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게." 김정호는 규장각으로 들어가는 박 진사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 후, 규장각으로 들어간 박 진사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나왔습니다. "자, 이걸 받게." 박 진사가 우리 나라 지도 한 벌을 내밀자, 김정호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김정호는 박 진사에게 몇 번이나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전체의 땅 모양이 그려진 지도를 구한 김정호는, 우선 한성에서 황해도로 가면서 그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과 실제의 땅 모양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산꼭대기에 올라가기도 하고, 개울을 따라 내려가 보기도 하며, 길의 거리를 재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정호는 또다시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규장각에서 구한 전국 지도도 읍도나 별로 다를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도 역시 실제의 땅 모양과 다른 데가 많았고 빠진 곳도 많았습니다. 김정호의 입에서는 큰 한숨만 새어나왔습니다. 시련을 이기고. 얼마 뒤, 김정호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구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정상기는 영조 때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문제를 실용적인 면에서 연구한 실학자였습니다. (동국지도)는 10리를 한 치로 기준 하는 '백리척' 이라는 과학적인 축척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도들보다는 정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동국지도) 역시 생략된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지도조차 이 모양이니...... 안되겠군. 내 손으로 직접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어.' 김정호는 굳게 결심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김정호는 직접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 보기로 하였습니다. 아내가 한사코 말렸으나, 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워낙 없는 살림이라 노자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가 없었지만, 김정호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니, 붓, 벼루, 먹, 그리고 갈아입을 옷 몇 벌을 꾸린 괴나리봇짐 하나만을 등에 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김정호가 떠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자, 아내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를 붙잡았습니다. "제발 마음을 바꾸세요."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으나, 김정호의 굳은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부인, 미안하오. 당신과 어린 순녀를 두고 떠나는 나도 마음이 아프구려. 그러나 내 결심을 바꿀 수는 없소. 지도 만드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이었소." "꼭 꿈을 이루고 돌아올 테니 기다려 주오." 아내는 김정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자, 눈물을 거두고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어차피 떠날 길이라면 공연히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집안 걱정은 마시고 부디 몸조심하세요. 꼭 뜻을 이루고 돌아오시기를 기도 드릴게요." 아내는 큰 뜻을 품고 떠나는 남편을 향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럼, 다녀오리다. 순녀와 집안일을 잘 부탁하오." 김정호는 아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얼른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집을 떠난 후부터 김정호에게 험난한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정호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길이 없어지면,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기도 하고 벼랑을 기어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여름에는 넓은 들판 한가운데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온몸을 적시기도 했고, 겨울에는 눈보라를 맞으며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사나운 산짐승을 만나 물려 죽을 뻔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산 속을 헤매다가 길을 잃어 며칠을 굶은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새알을 주워 먹거나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허기를 달랬습니다. 이와 같이 김정호는 오로지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신념 하나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땅 모양 조사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1834년, 10여 년 동안 조선 팔도를 누비고 다닌 끝에 (청구도)라는 지도를 완성하였습니다. (청구도)는 일명 (청구선표도)라고도 불렸는데, '청구'란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고, '선표도'란 지도에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서 그 선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였습니다. (청구도)를 완성한 김정호는 최한기를 찾아갔습니다. 최한기는 당시 천문, 지리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유명한 실학자였습니다. (청구도)를 본 최한기는 크게 감탄하였습니다. "음, 이건 정말 훌륭한 지도로군." 그러나 김정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청구도)보다 더욱 실용적이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 다시 전국 답사의 길에 올랐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편안히 자지도 못하는 생활이 또다시 시작되었지만, 김정호는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팔도 강산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호는 마침내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온몸에 심한 열이 나고 오한을 느껴 가까운 주막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막 주인은 전염병자로 의심하여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간 집에도 못 가보고 길거리에서 죽고 말겠구나. 아니야, 답사를 끝내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전에는 결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결국 김정호는 집에 가서 병부터 치료한 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집을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나 되었습니다. 김정호는 아내와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리운 고향으로. 김정호가 팔도 강산의 땅 모양을 조사하러 떠난 뒤, 아내는 매일 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이 무사하기를 빌었습니다. 순녀도 철이 든 뒤로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순녀는 가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김정호가 집을 떠난 뒤, 그의 아내는 여전히 광주리 장사를 하며 끼니를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이라 아내와 순녀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김정호의 아내는 광주리를 팔기 위해 새벽부터 이웃 마을로 나갔고, 순녀 혼자 집을 보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 어머니를 마중 가기 위해 문 밖으로 나서던 순녀는 주춤하였습니다. 웬 거지꼴을 한 선비가 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녀는 거지꼴을 한 선비를 보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였습니다. "아이, 어쩌나! 드릴 게 아무것도 없는데......" 김정호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가 바로 순녀로구나." 순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네, 그런데요......" 김정호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디가셨니?" 그제야 순녀는 이 거지꼴을 한 선비가 자기 아버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아버지 아니세요?" 순녀는 조심스럽게 김정호를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김정호는 잠시 자신의 차림새를 돌아보고는, "그래, 내가 네 아비다. 그 동안 훌륭하게 잘 컸구나......" 하며 딸에게 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 순녀는 와락 김정호의 품에 달려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정호도 흐느끼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순녀는 아버지를 모시고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김정호는 그 동안에 쌓였던 피로와 긴장으로 인해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때, 마침 김정호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찬물에 수건을 적셔 남편의 이마에 올려놓고 팔다리를 주물렀습니다. 김정호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으로 가야 해! 죽어도 집에 가서 죽어야지." 아내는 김정호의 헛소리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여보,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던 집으로 돌아오셨잖아요. 흑흑흑......" 흐느끼던 아내는 엽전 몇 푼을 꺼내 순녀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지금 곧 삼거리 의원 댁에 가서 열 내리게 하는 약 좀 지어 달래서 가지고 오너라." "알겠어요, 어머니." 순녀가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김정호는 어렴풋이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요!" 김정호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여기는...... 아니, 당신이......!" 아내를 알아본 김정호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냥 그대로 누워 계세요." 아내는 일어나려는 김정호를 만류하며 부드럽게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 고생이 얼마나 심했소? 당신을 볼 면목이 없구려......" 김정호는 진심으로 미안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도리어 김정호를 위로했습니다. "순녀와 저는 잘 지냈어요. 당신이야말로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내의 따뜻한 말에, 김정호는 병이 씻은 듯이 낫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약을 지으러 갔던 순녀가 돌아왔습니다. 순녀는 아버지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그러고 곧 밖으로 나가 정성껏 약을 달여 왔습니다. "아버지, 일어나 앉을 수 있으시겠어요? 약을 좀 드셔야죠." "약이라니? 어느 새 약을......"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도 미안할 터인데, 병까지 얻어 가지고 왔으니 김정호는 더욱 면목이 없었습니다. "순녀야,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구나." 김정호의 말에 순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원, 아버지도 별말씀을 다 하세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김정호는 딸이 가져온 약을 마시고 싶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한참 푹 자고 나자 열이 많이 내렸습니다. 김정호는 일어나 앉아 괴나리봇짐을 앞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지도 만들 자료를 꺼내 보이며, 아내와 딸에게 그 동안 팔도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순녀는 그 중에서도 금강산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들어서는 실감이 잘 안 날 게다. 지도를 다 완성한 후에 그 지도를 가지고 금강산을 찾아가 실제로 구경하자꾸나." "네, 아버지. 꼭 그렇게 해요. 그런데 아버지, 지도 만들기 위한 답사는 다 끝난 거예요?" 순녀는 상기된 얼굴로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니다. 아직도 몇 년은 더 걸릴 것 같구나." 아버지의 대답에 실망한 순녀는 두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아내의 얼굴도 굳어졌습니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단란하게 모였는데...... 답사가 아직 안 끝났다면 언제 또다시 길을 떠나실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아내는 묵묵히 남편의 간호에만 정성을 쏟았습니다. 아내와 딸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의 병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이젠 약을 사올 돈도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외상으로 가져온 약값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약을 지으러 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순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아버지의 약을 지어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위를 들고 한참 동안 주저하던 순녀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순녀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가지런히 모아 보자기에 싸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윽고 저녁때,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김정호의 아내는 마당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 순녀를 보자 어리둥절 하였습니다. "아니, 웬 돈으로 약을 지어 왔니?" 그러다가 순녀의 머리를 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아니, 네 머리가......!" 순녀는 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께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아이고, 이것아. 차라리 내 머리카락을 잘라 약을 살지언정, 어찌 네가 머리카락을 잘랐단 말이냐!" 그러자 순녀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머리카락보다는 제 머리카락이 값이 더 나가요. 지금은 보기 흉하지만 금방 자랄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순녀야!" 딸의 지극한 효심에 감격한 어머니는 딸을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순녀가 지어 온 약을 먹은 김정호는 차츰 병세가 호전되어 갔습니다. 아내와 딸은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받은 뭄삯으로 김정호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김정호는 그 덕분에 한 달쯤 지나자 일어나서 지도를 만들 자료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추석이 돌아와, 풍성하진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마련한 상을 앞에 두고 온 식구가 둘러앉았습니다. 15년 만에 집에서 명절을 맞은 김정호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아내와 순녀도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당신이 집을 떠나신 후로 저희는 명절을 제대로 지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어디에 계시는지, 진지는 제때 챙겨 드시는지조차 모르는데, 어디 저희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그 동안 우리는 명절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았어요." 아내는 목멘 소리로 말하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닸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꿈. 추석이 지나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 김정호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지도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불타올랐습니다. 15년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 가며 모은 자료였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김정호는 다시 답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아내에게 뜻을 밝혔습니다. "여보, 미안하오만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나야겠소. 애당초 평생의 사업으로 정했던 일인데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지 않겠소? 예전처럼 몇 해만 더 참아 주오." 하지만 아내는 전과는 달리 강력하게 만대하였습니다. "그럴 순 없어요. 제발 우릴 버리고 떠나지 마세요." 순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이젠 떠나지 마세요! 또 병이 나서 쓰러지시면 어떻게 해요?" 눈물을 흘리는 딸을 바라보자, 김정호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했습니다. 잘라 판 머리카락이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딸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일생일대의 대업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김정호는 말없이 괴나리못짐을 싸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는 짐을 싸고 있는 김정호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애원하는 우리 순녀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제발 떠나지 마세요......" 김정호는 짐을 싸던 손을 잠시 멈추고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아내와 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소? 그러나 사내 대장부가 품은 큰 뜻을 사소한 일로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오. 그러니 나를 이해해 주오." 그래도 아내는 김정호가 짐 꾸리는 것을 말렸고, 순녀도 김정호의 팔에 매달려 흐느꼈습니다. "아버지, 제발 우리 함께 살아요." "순녀야, 나도 너하고 집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구나.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단다. 의심이 나는 지방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확인을 해야 한단다. 떠나야 하는 내 마음도 무척 아프구나." 김정호는 순녀의 등을 쓸어 주며 달랬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과 순녀에게는 할 말이 없소." "그러나 나는 지도에 미친 사람이오. 내 꿈은 쓸모 있는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것이오. 이번엔 15년까지는 걸리지 않을 게요." "몇 년이면 되오.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김정호는 결국 짐을 들고 사립문을 나섰습니다. 아내와 딸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무쪼록 무사히 일을 끝내시고 속히 돌아오세요. 항상 몸 조심하시고요." "알았소. 집안일을 부탁하오. 순녀야, 잘 있거라.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김정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실제의 땅 모양과 다른 지도는 수천 수만 장이 있어도 아주짝에 쓸모 없다는 것이 김정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시작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이곳 저곳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곳이 있으면 다시 찾아가 조사하고, 확실한 곳도 다시 한 번 찾아가 확인 하는 등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썼습니다. 가슴아픈 두 번의 이별. 어느덧 김정호가 다시 답사의 길에 오른 지도 5년이 지났습니다. 김정호에게는 이제 이 정도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샅샅이 돌아다녔으며, 백두산도 자그마치 8번이나 오르내렸습니다. 김정호는 이제 눈을 감고도 조선 팔도의 땅 모양을 훤히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답사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김정호의 발걸음은 날아갈 슫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지도를 만드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동안 모은 자료를 정리하여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판에 새기는 일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한 김정호는 사립문을 밀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 안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슨 일일까? 다들 어디 갔을까?' 김정호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헛기침을 한 번 하였습니다. 잠시 후,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순녀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순녀는 맨발로 뛰어나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 김정호는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우는 딸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김정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순녀는 더욱더 크게 목놓아 울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김정호가 다시 묻자, 순녀는 글어그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어,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뭐라고?" 김정호는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아버지를 기다리시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셨어요." 순녀는 이렇게 말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통곡을 하였습니다. "아아, 이럴 수가......" 김정호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눈앞에는 자기를 원망하면서 숨을 거두었을 아내의 모습이 어른거렸습니다. '가엾은 사람 같으니라고! 이제는 헤어져 살지 않아도 되는데, 먼저 가 버리다니......' 순녀는 애써 슬픔을 참으며, 넋이 나가 잠자코 서 있는 아버지를 위로하였습니다. "아버지, 그만 진정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순녀야, 어머니도 없이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버지를 용서해 다오." 김정호는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았어요.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도와 드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미안하다고만 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라며, 저보고 아버지의 일을 도와 드리라고 당부하셨서요." 순녀의 말을 들은 김정호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었습니다. '여보, 고맙소! 저승에서나마 편히 쉬구려.' 김정호는 순녀와 함께 아내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말없이 앞서 가던 순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젠 안 떠나세요? 답사는 다 끝났나요?" 김정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냐, 이제 답사는 다 끝났다. 그 동안 팔도강산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단다. 이젠 우리 나라 땅을 훤히 알게 되었으니 너를 두고 집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다." "아,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순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슬퍼하였습니다. 이윽고 김정호는 작고 초라한 아내의 무덤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무덤 앞에 엎드려 두 눈을 감았습니다. 감은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조금만 더 기다리지 않고서......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해 주구려." 김정호의 옆에 있던 순녀가 새삼 설움이 북받친 듯 무덤 앞에 엎드려 통곡하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오셨어요. 그렇게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오셨는데, 왜 아무 말씀도 못 하세요? 흑흑흑......" 얼마 뒤, 김정호는 순녀와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김정호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벌써 스무 살이 넘은 딸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처녀들은 17세 무렵이면 시집을 가는데, 순녀는 아직도 시집을 못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녀의 혼사 문제를 걱정하던 김정호는, 어느 날 친구를 만나 부탁하였습니다. "내 딸이 벌써 스무 살이 넘었네. 그 동안 내가 집을 떠나 있어서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제라도 시잡을 보내야겠어. 마땅한 자리가 있으면 중매 좀 서게나." "염려 말게. 그렇잖아도 자네 딸을 원하는 마땅한 자리가 있네." 얼마 후, 친구는 김정호의 딸에게 좋은 혼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순녀는 홀로 남게 될 아버지를 걱정하여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탄생. 딸을 시집 보낸 후, 김정호는 손수 밥을 지어먹으며 지도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그 동안 준비한 자료를 정리하여 한장 한장 지도를 그려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본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시집 간 딸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네가 웬일이냐?" 김정호는 딸의 갑작스런 방문에 무척 놀랐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순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얼마 전에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런데 시집에는 일가친척이 없어 아버지께로 온 거예요." 순녀의 말에 김정호는 너무도 놀랐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딸을 위로했습니다. "잘 왔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게 운명 아니냐!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하고 함께 살자꾸나." 이렇게 하여, 순녀는 김정호의 일을 도와 가며 친정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위가 죽은 것은 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김정호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딸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김정호의 일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김정호는 도본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목판에 새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김정호는 약간의 목판을 준비한 뒤, 단정한 몸가짐으로 점 하나 선 하나까지 세심한 신경을 쓰며 조각칼을 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에서 목판 새기는 일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목판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목판 살 돈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사를 하기로 결심한 김정호는 집을 팔고 한성으로 올라와, 서대문 밖에 낡은 집을 한 채 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목판 새기는 작없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김정호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목판을 새겼습니다. 목판을 새기느라 아버지의 손이 부르트고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순녀가 나섰습니다. "아버지, 저도 한번 해 보겠어요." "안된다. 이건 여자가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야." 하지만 순녀는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마침내 더 이상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정호는 딸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손재주도 비상하고 눈썰미가 있는 순녀는 아버지 곁에서 오랫동안 목판 새기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실수 없이 잘 해냈습니다. 1861년, 김정호 부녀의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목판 조각을 끝낸 김정호는, 순녀의 손을 잡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국의 땅 모양을 답사하기 20여 년, 그것을 바탕으로 도본을 그리고 목판에 새기기 10년을 합해 무려 3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갖은 고생을 무릅쓰며 이어 온 대사업이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김정호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종이를 꺼내 놓고서 지도를 찍기 전에 완성된 목판을 다시 한번 한판 한판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잘못된 곳이 없나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확인을 마친 후 김정호는 목판에 먹칠을 하고 몇장의 지도를 찍어냈습니다. "와!" 선명하게 찍혀 나온 지도를 보고 딸은 감탄하였습니다. (대동여지도)라는 큰 글자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김정호 역시 감격 어린 눈으로 갓 찍어 낸 지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고생을 무릅쓰고 답사한 곳이 고스란히 지도 위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 30년 동안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구나!' 김정호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어렸습니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김정호가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소문은 곧 여기저기로 퍼졌습니다. (대동여지도)를 한 번 본 사람들은 그 정확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김정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세한 지도일지라도 아주 작은 지명이나 사물을 다 실을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한 책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김정호는 다시 (대동지지)라는 32권의 지리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바로 다음 해인 1862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대동지지)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86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대동지지) 속에는 전국 각 지방이 변천되어 온 내력, 인물, 산수, 성곽, 사당 등 여러 항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대동지지)는 (청구도)와 (대동여지도)를 한층 더 확대하고 보충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 나라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도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유익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해 10월의 어느 날, 김정호는 문득 어릴때의 친구인 이용희가 떠올랐습니다. 김정호는 그에게 지도를 한 벌 선물한 생각으로 이용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김정호를 맞이하는 이용희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습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김정호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지난번에 쫒아 버린 프랑스 함대가 또 쳐들어왔다네." 이 때 이용희는 훈련도감 중군의 벼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원군이 나라의 문을 굳게 닫고 쇄국 정책을 쓰면서 나라 안의 천구교도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을 학살하자, 프랑스함대가 이를 빌미로 삼아 조선으로 쳐들어왔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정권을 잡아, 서원의 폐단을 없애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개혁 정책을 시행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도들을 학해하고 외국과의 통상을 꺼려 쇄국정책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1866년 1월,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 9명을 미롯하여 수많은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인 사옥' 입니다. 이 때, 프랑스 신부 리델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톈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에 로즈 제독은 군함 세 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를 걸쳐 양화진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강의 방비가 튼튼한 것을 보고 그 부근의 지리만 자세히 조사하고 그냥 돌아갔다가 지금 또다시 침범해 온 것입니다. "프랑스 함대가 지금 어디에 와 있나?" 김정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지금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다네." "그거 큰일이구먼!"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뒤 이용희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나?" "지도만 아는 내게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나? 내가 만든 지도가 자네에게 혹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김정호가 지도 이야기를 꺼내자 이용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지도에 강화도도 표시되어 있는가?" 그러자 김정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표시되어 있지. 전국 지도인데 강화도가 빠졌겠나?" "그래? 그럼, 그 지도를 내게 줄 수 없겠나?" "주고말고. 그렇잖아도 한 벌 선물하려고 가져왔다네." 김정호는 미리 준비해 온 (대동여지도) 한 벌을 이용희에게 내밀었습니다. 지도를 펼쳐 본 이용희는 그 세밀함에 크게 감탄하였습니다. 그는 강화도와 인천 부근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며 작전 계획을 세워 나갔습니다. 다음 날, 이용희는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수많은 전사자만 낸 채 자신들의 기지가 있는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이 이른바 '병인 양요'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김정호는 이번 싸움에 (대동여지도)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여 다시 이용희를 찾아갔습니다. 이용희는 김정호를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여보게, 이번에 자네가 만든 (대동여지도)가 큰 도움이 되었다네." 그 말에 김정호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내가 만든 지도가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 마음 가눌길 없네. 그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구먼." "그렇고말고. 내가 (대동여지도) 덕분에 이번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다는 보고와 함께 그 지도를 조정에 제출하였네. 아마 대원군께서 자네에게 큰 벼슬을 내리실 걸세." "새삼스럽게 벼슬은 무슨 벼슬! 내 지도가 유용하게 쓰였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네." 며칠 뒤, 이용희가 김정호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김정호가 물었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그러자 이용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더니 힘없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김정호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용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사실은 저......" 이용희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춤거렸습니다. 그날 아침, 이용희는 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였습니다. 입궐하면서 그는 지난번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데 대한 치하가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했습니다. 이용희는 그런 치하가 있으면 그 기회에 김정호에게 상을 내리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용희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대원군은 이용희를 보자 노기 띤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질렀던 것입니다. "이 지도는 도대체 어떤 놈이 만든거요?" 대원군의 손에는 이용희가 바친 (대동여지도)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용희는 어리둥절했지만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김정호라는 사람이 만들었사옵니다." "이 지도에는 우리 나라의 지형이 아주 세밀하게 나타나 있소. 이런 것을 만들다니...... 이건 외국에 우리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키는 역적 짓이야!" 이용희는 대원군의 말에 기가 막혔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아뢰었습니다. "황공하오나, 이번 강화도 싸움에서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도 덕분이었사옵니다. 그 지도를 잘 이용하면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용희가 김정호를 변호하자 대원군은 더욱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만일, 이 지도가 다른 나라의 손에 넘어가면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우리 나라의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듯 알게 될 거요. 그래도 이 지도가 우리 나라에 큰 도움을 준다는 거요?" 대원군은 곧 포도대장 이경하에게 김정호를 체포하라는 명력을 내렸습니다. 이용희는 깜짝 놀라 말을 이었습니다. "황공하오나, 김정호는 ......" 하지만 대원군은 이용희의 말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다시 명력을 내렸습니다. "포도대장은 그놈을 엄벌에 처하고 이 (대동여지도)라는 것을 한 벌도 남기지 말고 목판까지 압수하여 모두 불태워 없애도록 하오." 이용희는 허둥지둥 대원군 앞을 물러 나왔습니다. 포도대장이 김정호의 집에 당도하기 전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곧장 그의 집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워낙 엄청난 일이라 선뜻 말문을 열지 못하는 이용희를 보자 김정호는 무척 답답했습니다. "자네와 나 사이에 뭐 망설일 일이 있나?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보게." 계속된 재촉에 이용희는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이보게, 자네 잠시 몸을 피해야겠네." "아니, 몸을 피하다니? 프랑스 함대가 또 쳐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김정호는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대원군께서 (대동여지도)를 보고 크게 노하셨다네. 자네가 나라의 기밀을 외국에 알리려고 그 지도를 만들었다는 거야. 자네를 도우려다 그만 자네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으니 면목이 없네. 포졸들이 잡으로 올 테니 속히 피신을 하게." "뭐라고?" 김정호는 어이가 없어 이용희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이용희가 돌아가고 나자 순녀는 김정호에게 피신할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걱정 마라.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으니 문초를 받더라도 별일 없을 게다." 그 때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죄인 김정호는 썩 나오시오!" "알았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김정호는 옷차림을 바로 한 후 밖으로 나갔습니다. "네가 김정호냐?" 포도대장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렇소. 내가 바로 김정호요." 김정호는 태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원통한 죽음. "어서 묶어라." 포도대장이 손짓을 하자, 포졸들이 달려들어 김정호의 몸을 묶었습니다. 김정호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놀란 순녀가 뛰어나와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 "저리 비키지 못해?" 포졸 하나가 순녀를 옆으로 밀쳤습니다. 순녀는 저만큼 나동그라진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포도대장이 다시 명령하였습니다. "집 안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서 지도와 목판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찾아내어라." 포졸들이 우르르 방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건넌방에 정성스럽게 보관해 둔 목판을 꺼내어 마당으로 팽개쳤습니다. 김정호는 그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목판을 내던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너무나 슬프고 억울하여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이윽고 김정호는 남산 기슭에 있는 이경하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도대장 이경하는 대원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터라 죄인을 자기 집에서 문초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도착한 이경하는 김정호를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지도를 만들어 외국놈들에게 나라의 기밀을 팔아먹으려고 한 것이 사실이렷다?" 어이가 없었지만 김정호는 침착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소인은 (대동여지도)라는 지도를 만든 적은 있으나, 나라의 기밀을 팔아먹으려고 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이경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놈! 다 알고 묻는 말이니 순순히 자백해라. 괜히 고집을 부리다가는 살아 남지 못하리라! 시치미 떼지 말고 무슨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는지 사실대로 말하거라. 소인은 어릴 때부터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을 뿐이지 다른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김정호의 대답에 이경하는 무섭게 화를 내었습니다.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드느냐? 그 지도는 프랑스 신부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지? 이제까지 몇 사람에게 이 지도를 넘겼느냐? 김정호는 들을수록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꿈에서조차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누명은 너무 억울합니다." 김정호가 완강하게 부인하자 이경하는 더욱 화가 나서 포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이놈의 입에서 바른 소리가 나올 때까지 매우 쳐라!" 포졸들은 미리 준비해 놓은 곤장으로 김정호의 볼기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십 차례나 곤장을 맞은 김정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김정호는 포도청으로 옮겨져 전날과 같은 문초를 받았습니다. 매일 계속 되는 문초에 지칠 대로 지쳤으나 김정호는 자신의 결백함을 내세우며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직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지도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는 문초를 당할 때마다 이렇게 처음의 주장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김정호가 잡혀 온 지도 어느덧 열흘이 지났습니다. 감옥에 갇힌 김정호는 고문으로 인한 아픔도 잊은 채 혼자 있을 딸을 걱정하였습니다. 자신이 붙들려 올 때 울며 따라오던 딸의 못습이 눈에 아른거려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옥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 그것은 분명 순녀의 목소리 였습니다. 김정호는 얼른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밖에는 순녀가 해쓱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순녀는 몰라보게 변한 김정호의 모습을 보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김정호는 흐느껴 우는 순녀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못난 아비를 만나 네가 고생이 많구나.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자.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용희 장국 댁에 들러 나의 사정을 대원군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해 보거라. "네, 아버지. 걱정 마세요." "날씨가 추우니 몸조심하거라.""제 걱정은 마시고 아버지 건강이나 돌보세요. 그럼, 곧 다시 오겠어요." 순녀는 이렇게 말하고 그 곳을 나왔습니다. 김정호는 멀어져 가는 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김정호는 차츰 불안해졌습니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던 그에게는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은 민속 자료를 책으로 내고 싶었습니다. 김정호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이용희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끝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김정호는 감옥을 찾아 온 순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이용희의 집에 가지 마라. 그 대신 글을 쓸 도구나 가져오너라." 쉽게 풀려날 것 같지가 않자, 김정호는 감옥에서 (팔도 민속지)를 쓰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김정호는 감옥 안에서 모든 것을 잊고 딸이 가져다 준 붓과 먹으로 글 쓰는 데에 열중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도별로 나눈 (팔도 민속지)를 빨리 완성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도대장 이경하가 다시 나타나서 직접 문초를 하였습니다. "이놈의 입에서 바른 소리가 나올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이경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리들은 김정호를 오랏줄로 꽁꽁 묶은 다음 양 다리 사이에 두 개의 막대기를 들이밀고 비틀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정호는 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못 이겨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다가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은 김정호는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눈을 떴습니다. 하지만 워낙에 상처가 심했기 때문에 의식은 점점 가물가물해졌습니다. 흐릿해진 김정호의 눈앞으로 아내와 딸, 이용희의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김정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입니다. 1866년의 어느 날 동이 틀 무렵, 지도 제작의 선구자 김정호는 이렇게 비통하게 한평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성을 다하여 만든 (대동여지도)는 오늘날 귀중한 문화 유산으로 남아 우리에게 숭고한 정신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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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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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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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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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소년. 동네 빈터에 아이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방정환이라는 아이가 어깨를 으쓱대며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한 개씩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나도 줘." "정환아, 나도!" 동네 아이들은 방정환을 삥 둘러싸고 손을 벌렸습니다. 사탕을 나눠주던 방정환은 한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참새를 발견했습니다. "어, 참새 아냐? 너, 그 참새 어디서 났니?" "말총? 말총이 뭐야?" "말의 꼬리털 말이야. 그것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울타리에 놓아두었다가 참새가 걸려들면 얼른 뛰어가서 잡는 거야." 방정환은 자기도 참새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자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가 몰래 가위를 숨겨 가지고 나왔습니다. 마침 방정환네 가게 앞에는 해산물을 싣고 온 말이 말뚝에 매여 있었습니다. 방정환은 가위를 들고 살금살금 말 뒤로 다가가 말의 꼬리털을 자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방정환은 비명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놀란 말이 뒷발로 방정환을 걷어찼던 것입니다. "아니, 이게 웬일이냐?" 비명을 듣고 달려나온 할머니와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내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의원이 달려온 지 한참 만에 방정환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장난꾸러기 소년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야주개(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쪽)에서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방정환네 집은 곡식과 건어물을 파는 큰 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는 쌀과 건어물을 실은 마차들이 매일같이 드나들었고, 마당에 펴놓은 둥근 멍석에는 언제나 갖가지 곡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장사에 바빠 가게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집에는 나이 많은 할머니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두 살 위의 누나가 있었습니다. 방정환은 두 살 위인 삼촌, 두 살 아래인 사촌 동생과 어울려 다니며 놀았습니다. 방정환은 4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자꾸 읽기만 하는 것이 궁금하여 가끔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면 할아버지의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자꾸 읽다 보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된다." 사실 방정환에게는 '천자문'을 읽는 것보다 책을 내던져 버리고 밖에 나가 노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워낙 엄하였으므로 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글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방정환은 '천자문'을 완전히 외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방정환이 할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외고 있을 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방정환이 '천자문'을 외는 것을 보고 있던 손님이 물었습니다. "얘, 너 몇 살이냐?" 손님은 껄껄 웃으시며 방정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방정환의 손에 꼬옥 쥐어 주었습니다. 동전을 받아든 방정환은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맛있는 과자를 사먹기 위해서였습니다. 댕기머리를 자르고. 방정환의 삼촌은 한 달 전부터 신식 학교에 다녔는데, 가끔씩 방정환에게 학교에서 배운다는 ' 신학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우리는 한문 공부만 최고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야. 이제는 신학문을 배워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워야 해. 신학문을 익히면 전차나 기차도 만들 수 있단다." "그게 정말이야? 신학문을 배우면 정말 기차도 만들 수 있어?" 방정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는 삼촌이 몹시 부러웠습니다. "삼촌, 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 삼촌이 학교 갈 때 나도 데리고 가 줘, 응?" 방정환은 삼촌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졸랐습니다. "너는 아직 어려서 학교에 다닐 수 없어." 삼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방정환의 머릿속에는 신식 학교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똑같은 글을 읽고 외는 천자문 공부보다는, 기차나 전차를 만들 수 있는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방정환은 집안 어른들 몰래 삼촌이 다닌다는 '보성소학교'에 가 보았습니다. 학교 운동장은 많은 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신식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습니다. 종소리가 나자 운동장에서 놀던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방정환은 살금살금 교실로 다가가 유리창 너머로 안을 엿보았습니다. 검게 칠한 넓은 판이 벽에 걸려 있었고, 선생님이 손가락만한 흰 막대기로 그 판 위에다 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방정환은 그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칠판과 분필이 흔하지만 그 때만 해도 그런 것들이 귀했던 터라 어린 방정환에게는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저건 무엇인데 마음대로 썼다 지웠다 할 수 있을까? 요술 부리는 막대기인가?' 방정환이 넋을 잃고 교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넌 누군데 교실 안을 엿보고 있느냐?"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습니다. 방정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양복 차림을 한 점잖은 신사 한 분이 서 있었습니다. "그놈 참 귀엽게 생겼군. 너 올해 몇 살이냐?" "일곱 살이에요." "이름은 무엇이지? 그리고 집은 어디냐?" 신사는 방정환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방정환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신사는 재차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제야 방정환은 신사를 쳐다보며 또렷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다니고 싶어요." "오, 착하구나. 암, 그래야지. 그런데 학교에 다니려면 나처럼 머리를 깎아야 하는데 너도 머리를 깎을 테냐?" "네? 머리를요?" 방정환은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방정환의 머릿속에 불현듯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상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총각 때는 머리를 땋아 늘이고, 장가를 든 뒤에는 상투를 트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895년, 고종이 단발령을 내린 후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발령이 내리고 10년이 지나도록 머리를 깎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방정환의 할아버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일을 어쩌지? 할아버지께서 내가 머리털 자른 것을 보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방정환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야단을 맞는 한이 있어도 학교에 다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 나와 함께 가자." 신사는 이렇게 말하며 방정환을 번쩍 들어 인력거에 태우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이 신사는 당시 보성소학교 교장 선생님인 김중환이었습니다. 집에 온 김중환은 가위를 들고 치렁치렁 땋아 늘인 방정환의 머리채를 썩둑썩둑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이상하게 생긴 기계로 머리털을 깎았습니다. 방정환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깎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막상 집에 돌아가 할아버지에게 혼날 일을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날 저녁 방정환의 집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들어온 방정환을 본 할아버지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느 놈이 네 머리를 잘랐느냐? 당장 쫓아가서 그놈에게 혼구멍을 내주고 말 테다." 방정환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숨긴 채, "낯선 양복쟁이가 저를 데리고 가서 제 머리를 깎았어요." 하고 대답하고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니 식구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이미 깎인 머리가 다시 전처럼 될 리도 없었습니다. "정환이, 네 이놈! 지금부터 꼼짝 말고 집 안에만 있거라. 한 발짝이라도 밖에 나갔다가는 혼날 줄 알아라." 할아버지는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할아버지 몰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에게 들켜 피가 나도록 종아리를 맞기도 했지만,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계속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은 방정환의 고집과 열성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제 방정환은 떳떳하게 보성소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화가 아저씨의 선물. 나이가 가장 어렸던 방정환은 곧 보성소학교의 재롱둥이가 되었습니다. 소학교 수업 중에서 방정환은 특히 연극놀이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동네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연극으로 꾸며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방정환의 집은 늘 동네 아이들로 떠들썩했습니다. 방정환의 할머니는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어서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늦은 봄날이었습니다. 집에 자주 오는 화가 한 분이 장난감처럼 생긴 환등기와 외국 풍경을 찍은 슬라이드 몇 장을 방정환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무렵은 환등기가 매우 귀한 시대였기 때문에 방정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방정환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환등기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다음 날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모아 환등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흰 홑이불 막에 비치는 외국의 낯선 풍경과 코 큰 사람들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소문은 온 동네에 퍼져 환등기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밤 방정환네 집 넓은 대청에는 환등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석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방정환을 불러 말했습니다. "정환아, 동네 사람을 위한 환등놀이도 좋다만 이 어미 생각도 좀 해 다오. 시끄러워서 조용히 쉴 수가 없구나."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방정환은 환등놀이 장소를 서대문에 살고 있는 고모 댁으로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방정환을 퍽 귀여워하는 고모는 방정환이 환등기를 돌리러 왔다는 말에 쾌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그 곳에도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방정환은 좋은 꾀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구경꾼들에게 입장료로 성냥 한 갑씩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입장료로 성냥 한 갑씩을 받는데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마당 안을 가득 채우고도 사람들이 계속려들어 그만 대문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대문은 장독대로 쓰러져 독이 깨지는 바람에 집 안은 온통 간장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방정환은 얼른 불을 켜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환등놀이를 못 하겠으니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방정환은 사람들을 돌려보내느라고 진땀을 뺐습니다. 이 일은 나중에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가 심한 매를 맞았지만 그만한 일로 물러설 방정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친척집이나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며 여전히 환등놀이를 하였습니다. 방정환은 환등기를 비추면서 장면 하나하나를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방정환의 이야기 솜씨는 몰라보게 늘어 어른들까지도 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게 되었습니다. 형제별. 방정환의 나이 9살이 되던 해에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습니다. 작은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정환의 할아버지는 동생의 빚을 갚아 주느라고 집과 가게의 물건을 몽땅 내놓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방정환네 식구는 마차에 밥그릇 몇 개와 이불 한 채만 달랑 싣고 이사를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곳을 떠나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더구나 부유한 생활을 하다 알거지가 되어 떠나게 되었으니 가족들의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눈물을 감추지 못하자 할아버지는, "그만들 울어라.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 하고 위로하며 서둘러 길을 떠나도록 재촉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나와 방정환의 가족들을 전송하였습니다. 특히 방정환을 따르던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방정환은 전송 나온 아이들을 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방정환네가 이사를 한 곳은 도정국 앞(지금의 사직 공원 뒤)에 있는 초라한 초가였습니다. 그 때부터 방정환은 배고픔과 가난의 설움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왔던 방정환의 가족들은 이제 굶기를 밥먹듯 하였습니다. 어쩌다 쌀이나 보리쌀이 생기면 할머니는 양식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나물을 뜯어다가 죽을 쑤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양식도 떨어지면 방정환은 친척집으로 쌀을 꾸러 다녀야만 했습니다. 방정환이 자꾸 쌀을 꾸러 오자 친척들도 차츰 차갑게 대하였습니다. 걸핏하면 쌀을 꾸러 오기 일쑤이니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 한들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거절을 당하고 텅 빈 쌀자루를 둘러멘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때면 방정환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제대로 먹지를 못하자 어머니의 병은 나날이 깊어만 갔습니다. 누나가 정성껏 간호를 하였지만 조금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제 11살밖에 안 된 누나가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 가난에 찌들었으므로 한 식구라도 입을 덜기 위해 시집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누나가 시집가는 날 온 집 안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방정환은, '나는 남자니까 울면 안 돼.' 하고 입술을 깨물며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누나가 탄 가마가 집을 나설 때, 방정환은 북받치는 설움을 참을 수가 없어 뒤꼍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가마가 산모퉁이를 지날 때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가엾은 누나! 우리 식구를 위해 고생만 하다가 시집을 가는구나. 누나...' 방정환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누나를 불렀습니다. 누나가 탄 가마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에도 방정환은 뒤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방정환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채 누나와 지내던 날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별이 빛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방정환은 눈물이 가득 괸 눈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누나별은 어디에 있을까?" 훗날 방정환은 이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 편의 동요를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동요인 '형제별'입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질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린다.' 방정환은 이 작품에서 자기의 신세를 별에다 비유하였습니다. 기울어 가는 집안을 날 저무는 하늘에 비유하였고, 시집간 누나는 보이지 않는 별, 남은 두 별은 어머니와 자신을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방정환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누나가 하던 집안일을 돕는 한편,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누나를 떠나 보낸 슬픔도 차츰 잊혀져 갔습니다. 소년 입지회. 어느 날 방정환을 비롯한 몇 명의 동네 아이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9살 안팎의 어린 소년들이었습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이들은 모두 방정환의 의견에 찬성하였습니다. "그럼, 모임의 이름은 뭐라고 할까?" "뜻을 세운 소년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소년 입지회'라고 정하는 게 어때?" "그래, 그거 좋겠다. 대찬성이야." 아이들은 만장일치로 모임의 이름을 '소년 입지회'로 결정하고 방정환을 회장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모이는 장소는 어디로 하지? 우리 집은 너무 좁단 말이야." 방정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였습니다. 정말 소년 입지회 회원들이 전부 모이기에 방정환의 집은 너무 좁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두들 이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최창수라는 아이가 나섰습니다. "우리 집에서 모이면 어떻겠니?" 최창수네 집은 덕수궁 앞에 있는 큰 기와집이었습니다. "정말 그러면 되겠구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이튿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각각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아이들은 최창수네 집으로 모였습니다. 방정환은 넓은 널빤지 한 개를 어깨에 메고 왔는데, 그 널빤지에는 서투른 글씨로 '소년 입지회'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창수야, 너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임을 이해하시고 허락해 주실까?" "아직 말씀은 못 드렸지만 허락해 주실 거야. 정환아, 나랑 함께 우리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자." 방정환은 최창수와 함께 그의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소년 입지회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최창수의 아버지는 대뜸, "어린 녀석들이 하라는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모임은 무슨 모임이냐? 우리 집에서는 절대로 안 된다!"하고 큰 소리로 나무라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창수 아버님, 저희는 나쁜 일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공부를 한다고 해도 무작정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세워서 차근차근 해 나가야지요. 또한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모여 서로 도와 가면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년 입지회를 만든 것이고요. 그러니 창수네 집에서 모이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방정환의 의젓한 말에 최창수의 아버지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 녀석, 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군. 이 다음에 큰 일을 하겠어.' 잠시 방정환을 바라보던 최창수의 아버지는 마침내 허락을 했습니다. "좋다. 우리 집 큰 사랑방에 모여서 공부하도록 하여라. 네 뜻과 생각이 기특하여 내 특별히 허락하겠다." 방정환과 최창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방정환은 아이들과 함께 대문에다 간판을 달았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칠판을 만들고 학교에서 몽당 분필도 주워 왔습니다. 아이들은 모임 때마다 열띤 토론을 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까?" "나라를 찾기 위해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을 토론해 가는 동안에 아이들의 가슴속에는 애국, 애족, 독립 정신이 조금씩 싹터 갔습니다. 소년 입지회는 나날이 발전해 갔고, 아이들도 모임이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창수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모일 장소가 없어진 아이들은 앞으로 사직 공원에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사직 공원에서 모였을 때 방정환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집 없는 설움을 맛보았어. 나라 없는 설움도 바로 이런 게 아니겠어?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하루빨리 나라를 되찾아야 해." 방정환의 말에 아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모두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다졌습니다. 시련을 견디며. 방정환은 1913년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인쇄소에 나가 일을 하고는 있었으나 아버지의 월급을 가지고서는 생활비도 벅찬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집안일을 돌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방정환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조용히 방정환을 불렀습니다. 무리가 되더라도 방정환을 상급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얘야,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학교에 다니는 게 어떻겠니? 우리 집은 본래 장사를 하던 집안이니까 너도 상업 학교에 다니는 게 좋겠구나." 방정환은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상업 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저는 장사를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얘야, 네가 돈을 벌어야 우리 식구가 굶지 않고, 네 어머니의 병도 고칠 수 있단다." 결국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방정환은 15세의 나이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살림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학비를 마련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댈 수 없어서, 방정환은 나무를 해다 팔아야 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아버지의 월급이 제때에 나오지 않아서 식구들은 끼니를 걸러야 했습니다. 게다가 삯바느질로 살림을 돕던 어머니마저 다시 병이 도져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마침내 방정환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적성에도 안 맞는 학교, 차라리 그만두자. 그리고 일터로 나가서 돈을 벌어 어머니의 약값에라도 보태자.' 그리하여 방정환은 졸업을 한 해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16세 때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방정환은 일본의 임시 관청이던 토지 조사국의 서기로 취직하였습니다. 토지 조사국이란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은 뒤 지적도나 토지 대장을 만들려고 임시로 설치한 관청이었습니다. 방정환은 그 곳에서 측량도를 베끼고 정리하면서 일본의 행태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억울하게 빼앗긴 우리 나라 땅을 반드시 되찾고야 말리라...' 방정환은 그 곳에서 일하면서 좋은 친구를 한 명 사귀었습니다. 바로 유광렬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같이 함께 붙어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콩비지와 싸구려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고 품팔이 노동자들과 함께 합숙소에서 자는 날이 많았지만, 그들은 뜻이 맞는 둘도 없는 친구라는 생각에 매일매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방정환과 유광렬은 만날 때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정환아, 우리 어떤 책을 읽는 게 좋을까?" "최남선 선생님이 펴낸 '소년' 잡지가 어때? 내가 문학을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왜?" "나랏일이 걱정돼서 그러지." "나랏일?" "그래, 우리는 언제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유광렬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자 방정환이 유광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힘있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희망을 잃지 말자. 우리 소년들이 열심히 배우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면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유광렬이 시골로 내려가게 되어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통했던 절친한 친구와의 이별을 통해 방정환은 다시 한 번 깊은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방정환은 어느덧 19살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 손용화였습니다. 손병희는 첫눈에 방정환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셋째 사윗감으로 그를 점찍었던 것입니다. 장가를 든 방정환은 손병희의 간곡한 부탁으로 손병희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가 사람들은 그 동안 가난에 시달려 너무나 몸이 야윈 방정환에게 값비싼 보약을 먹였습니다. 처가 식구들의 극진한 정성으로 방정환은 차차 몸이 나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짓장같이 하얗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가냘프게 보이던 몸은 살이 쪄서 나중에는 뚱보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정환이 결혼식을 올리고 난 지 한 달도 못 되어 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산소 앞에 꿇어앉은 방정환은 어린애처럼 목놓아 울었습니다. "정환이를 장가 보내고 눈을 감으니 여한이 없구나." 야윌 대로 야윈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며 숨을 거두시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방정환은 가난 속에서 고생만 하시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못 잊는 마음은 동요 '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눈은 어머님 편지 그립던 사정이 한이 없어서 아빠 문안, 누나 안부, 눈물의 소식, 길고 길고 한이 없이 길다랍니다. 겨울 밤에 오는 눈은 어머님 소식 혼자 누운 들창에 바아삭바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그가 훗날 눈을 남달리 좋아한 것도 어머니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정환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애써 꾹 참았습니다. 언제까지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냥 슬픔에 젖어 있을 수 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나라의 청년으로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청년 구락부. 슬픔을 떨쳐 낸 방정환은 '청년 구락부'를 조직하였습니다. 청년들이 힘을 모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벌이자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2백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때 방정환은 잠시 헤어졌던 유광렬을 다시 만나 더욱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방정환은 모든 일을 자기가 주선하였지만 회장과 부회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회장에 이중각, 부회장에 이복원이 선출되고, 방정환과 유광렬은 실질적인 사무를 맡아 보았습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친목회인 것처럼 꾸몄지만, 청년 구락부의 활동은 꽤 활발하였습니다. 그 해 가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지금의 서울 특별시 은평구 구파발동) 야산에서 모임을 갖고 회보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8년에는 '신청년'이라는 잡지도 발행했습니다. 그 해 12월에는 송년회라는 구실로 봉래동 소의학교 강당에서 방정환이 극본을 쓴 '동원령'이란 연극을 공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방정환은 장인인 손병희가 경영하는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밤낮으로 청년 구락부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의 울분은 마침내 독립 만세 운동으로 불이 붙어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뛰어나와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청년 구락부 회원들도 모두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많은 회원들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회장 이중각과 부회장 이복원은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감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방정환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방정환은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익선이 펴내다가 중단한 '독립 신문'을 다시 발행하기로 결심하고, 회원들을 자기 집 다락방에 불러모은 뒤 그 뜻을 밝혔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우리가 폐간된 '독립 신문'을 등사판으로 몰래 찍어내세." "좋아. 외국 소식은 선교사에게서 얻어 오지!" "나라 안 소식은?" "전국의 학생들에게서 얻으면 돼." "배달은?" "배달도 학생들이 집집마다 돌리면 될 걸세." 청년 구락부 회원들은 그날 밤부터 신문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삿거리를 구해다가 등사 원지에 써서 등사기로 밀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문은 학생들 손에 의해 집집마다 배달되었습니다. 방정환의 다락방에서 신문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지 3주째 되는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종로 경찰서의 형사들이 갑자기 방정환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신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동지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태연하게 신문 발행에 쓰던 등사판과 원고 등을 모두 우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형사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증거물은 하나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분명히 여기서 신문을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아무튼 이 집 주인놈이 수상하단 말야." "우선 그놈을 잡아가자!" 형사들은 방정환을 결박하여 경찰서로 데려갔습니다. 잡혀 간 방정환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을 찍어 낸 일은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동지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주일 동안 심한 고문을 해도 끝내 자백을 받아 내지 못하자, 형사들은 방정환을 풀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방정환은 며칠 동안 끙끙 앓아 누웠습니다. 하지만 모진 고문을 당하고서도 방정환은 '독립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날과 색동회.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제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방정환은 지금까지 해 왔던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것보다 민족의 앞날을 밝힐 소년, 소녀들을 바르고 튼튼하게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그들이 훌륭하게 자라나서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봄, 방정환은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을 물리치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 배를 타고 유학길에 오르는 방정환은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고국 산천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새삼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정환이 도쿄에 도착하자 한 사나이가 계속 그를 미행하며 따라왔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남을 미행하는 거요?" 방정환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이 방정환이오?" "그렇소. 그런데 그건 왜 묻소?" "나는 아베라는 형사요. 당신의 행동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나는 공부하기 위해 여기에 왔고, 공부하느라 바빠서 죄 지을 여유도 없으니 앞으로는 미행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그렇지만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할 수 없소. 자식은 많고 어쩔 수 없어 이 일을 하는 것이니 이해하시오." "자식이 몇이나 되오?" "자그마치 열넷이오." 그 후 아베 형사는 방정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정환이 아베 형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날마다 내 뒤를 따라다니느라 힘들지 않으시오?" "매일 보고서를 써야 하니 힘들어도 어쩌겠소?"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내가 하루 동안에 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줄 테니 당신은 내 방에서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방정환은 그의 손에 술 한 병을 들려주며 말하였습니다. 아베 형사는 방정환의 인격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베 형사는 방정환을 믿고 그의 방에서 그가 이야기해 주는 대로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뿐 아니라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왔고, 잔심부름까지 해 주었습니다. 도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방정환은 일본 학생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밤잠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하다가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내다보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새싹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을 잘 키운다면 10년 후에는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방정환은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인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방정환은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1921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돌아온 방정환은 '개벽'지의 주간으로 있던 김기전 등과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방정환은 전국을 돌면서 어린이의 권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노리개나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아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노예처럼 부리지 맙시다.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 줍시다."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씁시다. 존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남을 존경할 줄 압니다." 사람들은 방정환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웃었지만 방정환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방학만 되면 고국으로 달려와 소년 운동을 폈습니다. 그 때 방정환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이들이 읽을 책이 너무나 없구나. 동화집이라고는 한 권도 없으니... 아이들을 위해 재미있는 동화집을 하나 엮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방정환은 쌈짓돈을 털어 외국의 재미있는 동화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눈보라치는 겨울 도쿄 시라야마의 자취방에서 언 손을 호호 입김으로 녹여 가며 동화책을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엮어낸 책이 바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비록 손바닥 크기만한 조그만 책이지만, 이야기에 굶주린 우리 나라 어린이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방정환은 '사랑의 선물' 머리말에 이렇게 썼습니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들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이 책을 엮었습니다. 여기서 방정환이 사용한 '어린 영'이란 바로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 나라에는 아직 어린아이를 일컫는 적당한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부를 때는 '애놈, 애새끼, 자식놈, 어린 것' 하면서 낮추어 불렀습니다. 이에 방정환은 아이들을 가리키는 좋은 말이 없을까 하고 궁리한 끝에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젊은이'라는 말이 '젊다'에서 온 것처럼, '어리다'라는 말에서 아이들을 가리키는 '어린이'라는 말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어린이'라는 말은 차차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지금은 누구나 이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선물'을 펴낸 방정환은 1923년 3월에는 어린이를 위한 잡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라고 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입니다. 그러나 이 5전짜리 '어린이' 창간호는 한 부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방정환은 하는 수 없이 엽서로 신청하면 무료로 준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그 광고를 보고 주문해 온 사람도 겨우 18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를 어린이가 읽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 방정환은 '어린이' 잡지를 둘러메고 직접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는 동네를 찾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한 가지씩 들려주고는 잡지를 한 부씩 무료로 나눠 주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방정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잡지는 호가 거듭될수록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너달 뒤부터는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펴내면서 더욱더 소년 운동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이 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어린이' 창간호가 나온 1923년 3월 초순, 방정환은 도쿄의 자취방으로 몇몇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방정환은 친구들에게 소년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린 새싹들을 잘 길러야 하네. 그래서 나는 소년 운동에 뜻을 두었지만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부족해. 우리 함께 힘을 모아 보세." "소파(방정환의 호), 자네의 뜻은 알겠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운동을 하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해." 방정환의 뜻이 옳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년 운동은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가 해야 해. 어린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 힘만으로는..." "뭘 그렇게 주저하는가? 우리에게는 젊음과 정열이 있지 않나. 우리가 뭉치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방정환은 열심히 친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친구들도 방정환의 열성에 감복해 찬성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이를 위한 단체 '색동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색동회가 만들어질 당시의 회원은 방정환, 손진태, 고한승, 진장섭 등 8명이었는데, 그 후 정인섭, 마해송, 윤석중 등이 새로 가입하여 회원수는 자꾸 늘어갔습니다. 회원들은 열성적으로 소년 운동을 펴 나갔습니다. 그들은 '어린이' 잡지를 계속 발행하는 것은 물론 동화 대회, 강연회, 어린이 예술 강습회 등의 행사도 여러 차례 벌였습니다. 어느 날 방정환은 회원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일 년에 하루만이라도 어린이를 위한 날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그 날만이라도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어놀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1923년 5월 1일이 첫 어린이날로 결정되었습니다. 어린이날이 정해지자 색동회 회원들은 서울로 와서 행사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천도교에서도 이 행사를 적극적으로 도와 주기로 하였습니다. 4월 30일 밤, 모든 준비를 마친 색동회 회원들은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특히 방정환은 누구보다 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드디어 5월 1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방정환의 집에는 이른 아침부터 색동회 회원들과 천도교 간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들뜬 표정이었습니다. 방정환은 밤을 꼬박 새웠지만 조금도 피로한 줄 몰랐습니다. 일행이 식장인 천도교 회당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어린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또 소년회 회원들은 50명씩 짝을 지어 어린이날을 알리는 전단을 시내 곳곳에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 뿌려진 전단은 무려 12만 장이나 되었는데, 그 전단에는 어린이를 위하는 방정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어른들께 드리는 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올려다보아 주십시오. 어린이를 가까이하여 자주 이야기를 나누어 주십시오. 어린이를 늘 부드럽게 대하고 존댓말을 써 주십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 주십시오. 가끔씩 산책과 소풍을 시켜 주십시오. 어린이를 책망하더라도 윽박지르지 마시고 잘못을 자세히 타일러 주십시오. 어린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여러분들끼리도 서로 존경하고 존대하기로 합시다.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동은 하지 맙시다. 길가에서 떼를 지어 놀거나 유리 같은 것을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께 자리를 양보합시다. 입을 꼭 다물고 몸가짐을 바로 하기로 합시다. 기념식장인 천도교 회당에는 온갖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기념식은 '어린이날 노래'의 합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쁘구나. 오늘날 어린이날은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노는 날 오늘은 어린이날. 만세 만세 함께 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노래를 부르며 가세.' 이것은 그 당시 방정환이 만든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방정환은 노래를 들으며 찢어지게 가난하고 고생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습니다. 그 아픔이 오늘 이렇게 보람찬 열매를 맺었으니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식장 안이 뿌옇게 흐려 보였습니다. 방정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 기쁜 날을 축하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마음껏 즐기고 뛰어노십시오. 어린이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고귀한 보배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훌륭하고 씩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서로서로 사랑으로 도우며 커 가야 하겠습니다." 방정환은 이렇게 어린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이어 어른들에게도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린이는 내일의 기둥이 될 새싹들입니다. 우리는 이 새싹들을 잘 보살피고 가꾸어서 참되게 키워야 합니다.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어른들이 됩시다." 방정환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방정환은 기념식이 끝난 뒤에 어린이들의 행렬을 이끌고 시가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행렬을 이끄는 그의 마음은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 방정환이 처음 시작한 소년 운동은 점차 전국으로 번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전국에는 1백여 개의 소년회 조직이 생겼고, 회원 수도 5천 명을 훨씬 넘었습니다. 1926년 가을, 6년간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방정환은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하며 그를 비웃었습니다. 이 계획을 추진해 나가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방정환과 그의 동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특히 이헌구, 김광섭, 정인섭 등이 방정환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행사를 계획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방정환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일 동안 천도교 기념관에서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정환은 전람회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밤을 꼬박 새우면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말렸습니다. "소파, 좀 쉬었다가 하게. 그렇게 무리 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자네들 말은 고맙지만 지금 어떻게 쉴 수가 있나?" "아니야, 자네는 좀 쉬어야 하네. 오늘 저녁에는 우리가 일을 할 테니 자네는 한잠 푹 자라고." "고맙네. 하지만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네. 2년 만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가?" 방정환은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람회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0월 2일, 마침내 전람회가 열렸습니다. 전람회장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 온 정성 어린 그림, 사진, 장난감 등과 우리 나라 어린이들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처음에 방정환을 비웃던 사람들도 행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자 깜짝 놀랐습니다. 전람회장에는 부모들과 함께 몰려든 어린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전람회를 보기 위해 서울까지 수학 여행을 오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이 행사로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세상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한평생.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가 끝나고 나서도 방정환은 소년 운동, 동화 대회, 강연회, 잡지 발행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다니느라 방정환은 점차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린이를 위한 일이라면 거침없이 달려갔습니다. 한 번은 연단에서 강연을 하다가 코피를 쏟은 적도 있었습니다. 강연을 듣고 있던 학생들과 친구들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아 가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친구들이 걱정스레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일도 좋지만 쉬어 가면서 하게. 자네 건강이 말이 아닐세.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텐가?" 그러나 방정환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해 일하다가 죽는다면 웃으면서 죽겠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피로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어린이처럼 동심의 세계에서 사는 듯했습니다. 그는 눈을 유난히 좋아하였는데, 깨끗한 흰 눈을 좋아하는 마음도 그런 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방정환은 작곡가 윤극영을 찾아갔습니다. 어린이들이 즐겁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윤극영은 방정환의 깊은 뜻에 감동하여 그의 부탁을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만든 동요가 바로 '반달'입니다. 이 '반달'은 방정환의 '형제별'과 더불어 나라를 잃고 설움을 당하는 우리 겨레의 한과 슬픔을 대변해 주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쓴 동화와 동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강연회와 동화 구연 대회를 하고, 잡지사 일을 하느라 글을 쓸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동요·동시로 '눈', '늙은 잠자리', '길', '형제별', '가을밤', '여름 비', '귀뚜라미', '눈 오는 새벽'이 있고, 동화로는 '만년 셔츠', '마음의 꽃', '금시계', '도둑 아닌 도둑' 등이 있습니다. 비록 작품의 수는 많지 않지만 방정환은 우리 나라 아동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한편 방정환은 이야기 솜씨가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가 어린이의 흉내를 내면 말소리와 동작이 어린이 그대로였고, 노인 흉내를 내면 노인 그대로였습니다. 또한 그가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 모두가 따라 울었고, 기쁜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기쁨에 함빡 젖어들었습니다. 방정환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동화를 들려주는 동안에는 그 자신도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들과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방정환의 이름은 이제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가 동화를 들려주러 왔다는 소식만 들리면 너나 할 것 없이 어린이들이 모여들어, 동화 구연 장소는 항상 꽉 찼습니다. "방정환은 정말 동화의 귀신이야. 어른들도 그의 얘기를 들으면 어린애처럼 좋아하니 말이야." "그의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울고 웃고 하니 그의 재주는 알아 줘야 해." 방정환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들은 이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정환의 동화 구연 대회가 있는 날이면 어른들도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경기도 화성 지방에 있는 '화성 소년회'라는 어린이 모임에서는 방정환을 초청하여 동화 대회를 연 적도 있었습니다. 방정환이 도착하기도 전에 회장 안은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윽고 방정환이 도착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입구가 어수선해지더니 일본 경찰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왜 경찰관 자리를 마련해 놓지 않았나?" 경찰은 강당 입구에 있던 색동회 회원 최영주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모임이든지 맨 앞에 일본 경찰관의 자리를 마련해 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따로 자리를 마련해 두었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그 자리가 없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정환은 이러한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험상궂은 얼굴로 소란을 피웠던 일본 경찰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던 것입니다. 방정환의 이야기가 끝나자 일본 경찰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습니다. 솔직하고 진실된 이야기에 감동하였던 것입니다. 방정환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한 일에만 앞장을 선 나머지 30세가 되면서부터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되었습니다. 특히 전부터 앓아 오던 고혈압으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붓고 핏기도 사라졌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그보다 더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말과 글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잡지에 싣기 위해 쓴 글들이 모두 검열에 걸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던 출판사인 개벽사가 빚에 쪼들려 문을 닫게 될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잡지가 나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든지 '어린이' 잡지가 중단되어서는 안 돼.'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방정환의 병은 더욱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방정환은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돌아오다가 결국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급히 병원에 입원하기는 했으나 병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고혈압에다 신장염까지 겹쳐서 주위 사람들의 정성 어린 간호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방정환의 거친 숨소리는 커져 갔습니다. 그러던 1931년 7월 22일 저녁이었습니다. 방정환은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가 봐야겠네. 문간에 마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군." "아니, 마차라뇨?" "검은 말들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 "선생님, 정신차리십시오! 그것은 환상입니다. 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셔야죠. 어린이들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정환은 이미 죽음이 눈앞에 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담당 의사가 조용히 방정환의 친구인 박승진을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일어나기가 어렵겠소. 가족과 친지들을 불러 유언이나 들어 두시오." "안 됩니다. 살려야 합니다. 제발 그를 살려 주십시오." 박승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곧 방정환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슬픔에 잠긴 채 병실로 모여들었습니다. 방정환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하였고 혀가 굳어 말도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손을 더듬어 잡으며 안타까운 듯이 말하였습니다. "난 우, 우리...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 방정환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1931년 7월 23일 오후 6시 54분, 방정환은 불과 33세의 짧은 인생을 마쳤습니다. 1957년 '새싹회'에서는 평생을 어린이와 함께 살다 간 방정환을 기념하기 위하여 소파상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소파상은 해마다 어린이를 위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방정환이 어린이들에게 베푼 사랑과 정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을 표현할 때 '어린이를 위한 한평생'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방정환이 평생 동안 보여 준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정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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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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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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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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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충청도 시골 마을의 한 서당입니다. 산자락에 자리잡은 서당에서 아이들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쪼로롱, 쪼로롱." 이따금 들리는 산새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 서당 안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훈장님은 눈을 부릅뜨고 조는 아이는 없는지, 딴짓을 하는 아이는 없는지 살피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런 아이가 없자 훈장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훈장님의 얼굴이 호랑이처럼 변하더니 한 아이를 향해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네 이놈!"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훈장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훈장님의 시선은 뒤쪽에 앉아 있는 한 소년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녀석! 글은 읽지 않고 책에다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 거냐?" 아이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 소년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책 군데군데를 시커먼 먹물을 묻힌 붓으로 칠하고 있는 게 아니갰습니까?" "아니, 유천이는 어쩌자고 책에다 저렇게 낙서를 한 거야? 분명 크게 혼이 날 거야." 하지만 아이들의 소곤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소년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장난을 친 게 아니에요." "그럼 너는 왜 책에 먹칠을 했느냐?" "책에 써 있는 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걸 지웠을 뿐이에요." "아니! 뭐, 뭐라고?" 소년의 대답에 훈장님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유천이라는 소년이 읽고 있던 책은 사서 삼경의 하나인 대학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매우 어려운 한문 경전으로 되어 있어서,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름난 학자 정호와 정이가 '주'를 달아 풀이를 해 놓았습니다. 이 학자들은 학식이 높기로 유명한 분이어서 훈장님과 같은 어른들조차 그분들이 쓴 글에 대해 감히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데 여섯 살난 어린 소년 유천이가 이 대학자들의 풀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먹물로 지워 버렸던 것입니다. '이 어려운 책을 모두 이해하고 비판까지 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아이로구나!' 훈장님은 어린 소년의 영특함에 마음 속 깊이 감탄했습니다. 며칠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훈장님은 유천이의 책을 다른 아이가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훈장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습니다. "유천아, 이 책은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다른 아이가 갖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유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이미 다 본걸요. 그래서 저 아이에게 준 거예요." '음, 유천이는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거야.' 훈장님은 살며시 유천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이 어린 소년 유천이가 훗날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이자 스님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만해 한용운입니다. "응애응애!"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한용운은, 본명이 정옥이었으나 어렸을 때에는 유천으로 불렸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용운' 이라는 이름은 스님이 된 뒤에 받은 법명이며, '만해' 는 법호입니다. 한용운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벼슬을 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도 비록 낮은 직책이기는 했지만 벼슬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모으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대문에 한용운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살림은 비록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한용운을 일찍부터 서당에 보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특한 아들에게 큰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용운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해서, 동몽선습과 소학, 통감 등을 빠른 속도로 익혔습니다. 게다가 어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서상기 기삼박주와 같은 책들도 척척 읽어 나갔습니다. "정말 대단해! 어린아이가 저렇게 어려운 책을 읽다니 말이야." "유천이는 과연 신동이야, 신동." 마을 사람들은 한용운의 기억력과 이해력에 감탄했고, 덕분에 그의 집은 '신동 집'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용운을 불러 역사를 빛낸 위인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유천아, 너도 이분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어지러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네, 아버지. 반드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겠어요." 당차게 대답하는 한용운의 눈에는 굳은 결심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느 새 어린 소년 한용운의 가슴속에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열네 살 되던 해에 자기보다 두 살이 많은 전정숙이라는 시골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한용운은 더욱 열심히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한용운의 학식은 점점 높아져서 열여섯 살 때인 1894년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용운의 마음은 늘 무거웠습니다. '휴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난 이렇게 편히 지내고 있다니.' 이 무렵은 나라 사정이 무척 나빴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호시탐탐 우리 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권력다툼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탐관오리의 수탈 또한 극심해서 백성들은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용운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관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뜻을 모아 일어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학 농민 운동' 또는 '동학 혁명' 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전라북도 고부에서 전봉준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혹한 세금으로 농민들을 핍박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그 대상은 점차 나라 안의 모든 탐관오리들로 확대되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물결은 삽시간에 전라도 전체와 경상도, 충청도를 뒤덮었고, 관리들의 수탈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함성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동학군의 기세는 한용운이 살고 있는 홍성에도 활활 타올랐습니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못된 관리를 몰아내자!" "와" 홍성 지방의 농민들은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관가로 쳐들어갔습니다. "감옥에 갇힌 억울한 죄인들을 풀어 주자!" "창고의 곡식을 꺼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자!" 농민들은 그 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토해 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국 세력이 끼어들면서 수많은 농민들의 목숨만 앗아간 채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동학 혁명이 있은 후 한용운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겠다고 다짐해 왔건만,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어지러운 시대에 나라와 민족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외국 세력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서 1895년에는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쳐들어와서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 했던 것입니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했습니다. 이 때 한용운도 가담했으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한용운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책도 보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산이나 들을 헤매고 다니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 날도 한용운은 산길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과는 달리 산속은 마냥 평화롭기만 했습니다. 맑고 파란 하늘, 눈부신 햇살, 푸르게 우거진 녹음. 그속에 있자니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 때 한용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래, 떠나자. 큰 뜻을 품고 살아온 내가 이런 시골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한성으로 가서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우자.' 마침내 1897년, 19세의 한용운은 한성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변변한 준비도 없이 무작정 나선 길이니 고생이 심한것은 당연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걷다 보니 나중에는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피로와 굶주림으로 한용운의 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 이렇게 무작정 떠나오는 게 아니었어.' 허름한 주막집 방 안에 누워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한용운은 밤새 뒤척이다가 늦게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꼬끼오." 잠들어 있는 세상을 깨우는 소리에 한용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한성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 한용운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아침 햇살이 와 닿았습니다. '그래, 우선 세상에 대해 배우자. 인생을 먼저 깨달은 다음에야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한성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강원도로 향했습니다. '백담사로 가 보자. 그 곳엔 이름 높은 스님들이 많이 계신다고 하니.' 여러 날 고생한 끝에 한용운은 마침내 백담사가 있는 설악산에 도착했습니다. 백담사는 설악산에 둘러싸여 폭 안겨 있는 듯한 오래된 절이었습니다. 한용운은 절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마침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 스님이 있어, 한용운은 그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 저는 한유천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고 싶습니다." 스님은 한용운을 흘낏 쳐다보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절 생활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오. 견디기 힘들 거요." 참고 잘 지낼 수 있습니다. 부디 이 곳에서 마음을 수양하여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스님. 한용운의 간청에 스님은 마지못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그럼 할 수 없군. 오는 자를 내몰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이렇게 해서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날이 밝으면 한용운은 땔나무를 구해 오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놓고 나면, 잠시 바위에 기대앉아 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송글송글 맺혀 있는 이마의 땀을 씻어 주었습니다. 대자연은 한용운에게 그 어떤 스승보다도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한용운은 절에서 지내는 동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밑을 뒹구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하는 시간 외에는 불경과 책을 읽으며 지냈는데, 그러는 사이 그의 안목은 점점 더 넓어졌습니다. 이윽고 1905년 1월 26일, 한용운은 백담사의 전영제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습니다. '계' 란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모든 행동 규범을 이르는 말로, 이제 한용운은 스님으로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백담사는 깊은 산 속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곳 스님들은 개화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주지 스님인 김연곡 스님이 책 두 권을 구해 한용운에게 내밀었습니다. 내 특별히 구해 온 것이니 틈나는 대로 읽어보도록 하여라.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 이것은 무슨 책이옵니까? "음빙실문집은 서양의 근대 사상을 소개한 책이고, 영환지략은 세계 지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 책들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우도록 하여라. 한용운은 이 두 권의 책으로 인해 자신이 우물 안 개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과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의 넓은 세계를 접하면서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산 속에서만 지낼 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봐야겠다. 우선 가까운 러시아를 둘러본 다음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가자. 1907년 마침내 한용운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항구에서 한용운은 뜻밖의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웬 조선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다짜고자 한용운의 멱살을 움켜쥔 것입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애 사는 우리 동포들이었습니다. "당신 일진회 놈 맞지?"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나는 조선에서 온 중이오." "거짓말 마라. 중으로 변장하고 있으면 속을 줄 알고?" 일진회란 송병준, 이용구 등이 조직한 친일 단체였는데, 그들은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그래서 동포들은 머리를 깎은 사람만 보면 일진회 회원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 놈 같으니라고! 당장 바다에 던져 버리겠다." 나는 정말 조선에서 온 중이오. 마침내 한용운은 체념하여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소." "그게 뭐냐?" "나를 바다에 던지지 말고 그냥 이대로 죽여주시오. 뼈라도 고향 땅에 묻힐 수 있도록 말이오." 동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용운은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곡 흥분을 가라앉히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스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항구 도시로, 일찍부터 우리 동포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습니다. 특히 을사조약 후에는 항일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기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특히 일본과 친일 단체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진회 회원만 보면 죽이려 들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목슴을 건졌지만, 계속해서 여행을 하다가는 또다시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한용운은 세계 여행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 나라가 처한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포들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고 죽이려 들다니. 이 모두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한용운은 다시 입산하여 불도를 닦는 한편, 일본으로 건너가 곳곳을 돌아보며 발달된 문물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훗날 3.1운동을 함께 이끈 최린과 만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그러던 1910년 온 나라가 통곡하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한용운은 울분을 삭이며 만주로 떠났습니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한용운은 그 곳에서 이시영, 이동하, 박은식, 김동삼 등과 만나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한용운은 그들 중에서도 특히 김동삼과 뜻이 잘 통했습니다. "불교계도 이제 독립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습니다. 동학이나 유교는 의병을 일으켜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불교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불자와 승려들의 뜻을 모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후원해 주게." "알겠습니다. 장군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한용운이 김동삼의 뜻에 따르기 위해 독립군 기지를 나와 퉁화 현에 있는 고개를 넘을 때였습니다. 독립군 기지를 나설 때부터 계속해서 웬 수상쩍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왜, 나를 따라오는 거요?" 대사님께서 길을 잃으실까 봐서요. 또 이곳은 사나운 짐슬들도 많아서 혼자 가시기에는 위험하거든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한용운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겼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더 갔을까 깊은 숲 속에 이르자 두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일진회 정탐꾼아! 이 왜놈의 앞잡이야!" 두 사람은 이렇게 소리지르고는 총을 세 발 쏘았습니다. 한 발은 다행히 귓가를 스쳐 지나갔지만, 두 번째 총탄은 뒷머리에 맞고 말았고, 세 번재 총 소리가 울리기 전에 한용운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순간,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위가 온통 환해지더니 온화한 미소를 띤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한용운에게 꽃을 던져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운데 어찌 그러고 있느냐?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거라." 한용운은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한 사람은 자신의 짐을 뒤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커다란 돌을 들어 올리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걸 들어 한용운에게 던지려는 것 같았습니다. 한용운은 살그머니 일어나 숲 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던 길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며 도망치던 한용운은 가까스로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김동삼도 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아니, 한 동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우선 수술부터 받아야겠소." 뼈에 박힌 총알을 빼내는 위험한 수술이니 그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용운은 살을 찢고 으스러진 뼈를 긁어내는 고통을, 마취도 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 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 일로 인해 한용운은 체머리를 흔드는 버릇을 얻게 되었습니다. 총상으로 신경이 손상된데다 뼛속까지 박힌 탄환을 모조리 긁어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1911년 겨울, 한용운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통도사로 갔습니다. 한용운은 통도사에 머물면서 그 곳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하나하나 읽어 나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장경에 담긴 부처님의 말씀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생각한 한용운은 불교대전을 펴냈습니다. 불교대전은 고려대장경의 내용을 주제별로 요약 정리한것입니다. 이 책의 편성으로 이제 일반인들도 어려운 경전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책을 쓰는 한편 동자승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저기 고추 여래님 오신다." 한용운이 지나가면 동자승들은 이렇게 소곤거리며 슬쩍 뒤로 물러났습니다. '고추 여래' 란 고추처럼 매운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치는 한용운에게 동자승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습니다. 통도사에서 한동안 머물던 한용운은 서울로 올라와 '조선 불교 연구회' 의 총재직을 맡았습니다. 한용운은 여러 사회 운동 단체를 오가며 강연을 했고, 그의 강연이 있는 곳은 항상 젊은이와 승려들로 가득 찼습니다. 한용운은 강연회에서 불교 경전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민족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등 뒤에는 일본이 서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베트남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한용운은 이렇게 외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젊은이들은 한용운의 열정적인 연설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그의 연설은 논리 정연하면서 설득력이 있었고, 맑고 우렁찬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새 그는 최남선, 이상재 등과 함께 강연을 잘 하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용운 스님의 강연회에 가 보았나?" 박한영 스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이 말부터 꺼낼 정도였습니다. 한용운이 불교 강연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본 경찰이 나서서 방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 형사는 강연회장까지 따라와서 한용운의 발언 내용을 감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한용운은 강연회에서 일제의 불법적인 통치를 비판하며 젊은이들에게 독립 정신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원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인 형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지만, 한용운은 모른 척 말을 이었습니다.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미국일까요? 미국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누구일까요?" 청중들 사이에서도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일본입니까? 예,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고 말합니다." "중지! 연설 중지!" 일본인 형사는 마침내 큰 소리로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습니다. 그러나 한용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원수는 소련도 미국도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 바로 우리의 게으름입니다. 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일본인 형사는 머쓱해하며 엉거주춤 자리에 앉고 말았습니다. 한용운은 놀라운 말솜씨와 재치로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일본인 형사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917년 12월 한용운은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무렵 한용운은 동안거를 지내기 위해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동안거란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 조용한 곳에서 참선을 하는 불교식 수행법입니다. 눈 쌓인 겨울 밤, 한용운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거센 바람과 눈보라가 한 차례 지나가자 마침내 마음속에는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쿵!" 그의 마음속에 거센 울림이 울렸고, 한용운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랜 수행 생활 끝에 마침내 참된 진리와 깨달음을 얻게 된것입니다. 불도의 참 이치를 깨닫게 된 순간 한용운은 시를 한 편 지었습니다. 1918년 한용운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무렵 세계에는 큰 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각 민족에게 자주권을 주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들 사이에 독립의 바람이 불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독립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자, 나라 안의 주요 인사들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최린, 송진우, 한상윤, 최남선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된 이 때야말로 우리 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맞습니다. 이 기회에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여 쓰러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거사를 성공시키려면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먼저 각계의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우리와 뜻을 함께 하독록 설득해 봅시다." 이렇게 해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대표자를 선정했습니다. 최린은 모임이 끝난 후 그들이 선정한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인 한용운을 찾아갔습니다. 한용운은 평소 독립 운동의 뜻을 품어 왔던 터라 선뜻 응낙하고, 나머지 대표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을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트 교도 16명, 천도교도 15명, 불교도 2명으로 이루어진 민족 대표 33인이 탄생되었습니다. 민족 대표들은 거사 날짜를 1919년 3월 1일로 정했습니다. 때마침 3월 3일에 있을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독립 선언서를 쓰는 일만 남았고, 그 일은 최남선이 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한용운은 최남선이 쓴 독립 선언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용운은 하는 수 없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대신 선언서 끝에 '공약삼장' 을 추가했습니다. 이 '공약삼장' 은 매우 간단하지만, 오늘날 독립 선언서의 눈동자에 비유될 정도로 독립 운동의 핵심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19년 2월 28일, 마침내 거국적인 거사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33인의 민족 대표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손병희의 집에 모였습니다. "내일의 거사는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아니 우리 민족 전체의 염원이 담긴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드디어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한 다음 부처님께 예불을 드렸습니다. "거사가 무사히 성공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소서." 거사 시각이 다가오자 한용운은 또 한 사람의 불교 대표자인 백용성 스님과 함께 태화관으로 갔습니다.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이미 탑골 공원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후 1시 30분이 되었습니다. 민족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막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한용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인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애서 조국 대한의 독립을 온 세계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용감히 싸웁시다. 자, 여러분! 우리 함께 만세를 외칩시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모두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태화관은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했습니다. 곧 태화관에서는 숙연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이 때 탑골 공원에서도 학생 대표에 의해 같은 내용의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었습니다. 낭독이 끝나자 공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벅찬 마음으로 만세를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제국주의 침략자 일본은 물러가라!" 사람들의 물결은 어느덧 거리로 이어졌습니다.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도, 호호백발 노인들도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1만 5천여 명의 시민과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목에서 터져 나온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도 남았습니다. 한편 태화관에 모여 있던 민족 대표들은 독립 선언서 낭독 후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직전 한용운은 민족 대표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곧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하여 그 곳에 있는 동안 사식을 먹지 말고, 보석을 신청하지 맙시다. 또한 변호사를 대지도 맙시다. 사식이란 교도소나 유치장에 갇힌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사서 들여보내는 음식을 말하며, 보석이란 형을 다 살기 전에 일정한 돈을 내고 교도소에서 나오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둘을 거부하겠다는 것은 바로 감옥에서 편히 지내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또 변호사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민족을 위해 독립 운동을 한것이니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결의를 통해 한용운의 당당한 기개와 투쟁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체포된 후 자동차에 실려 마포 경찰서로 끌려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날 무렵, 어린 소년 두 명이 그들이 탄 자동차를 향해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쳤습니다. 소년들은 일본 경찰이 뒤쫓아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마침내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소년들은 '대한 독립 만세' 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새 소년들을 키켜보던 한용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렇게 어린 소년들까지도 독립을 열망하고 있구나. 그래, 반드시 너희들과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자.' 한용운은 굳게 맹세하며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경찰서로 끌려간 한용운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왜 이 운동에 참가했느냐?" "만약 네가 나라를 잃었다면 너는 독립 운동을 하지 않겠느냐?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처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에잇, 지독한 놈! 안 되겠군." 일본인 형사는 욕설을 퍼부으며 모진 고문을 했지만, 한용운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으윽, 네놈들이 아무리 협박을 해도 나는 죽을 때까지 독립 운동을 할 것이다." 경성 복심 법원 특별 법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도 한용운은 당당했습니다. "피고는 최후 진술을 하라." 내가 독립 운동을 한 이유는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비록 너희 일본이 힘으로 우리 나라를 빼앗았지만, 머지않아 너희들은 국제 사회로 부터 고립을 당하고 마침내 패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용운의 우렁차고도 당당한 목소리에 법정은 한순간 숙연해졌습니다. 이 날 선고 공판에서 한용운은 민족 대표를 중 최고 형량인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윽고 3년이 지나 한용운이 감옥에서 나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겨울이라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서대문 형무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용운을 마중나왔습니다. "한 선생, 수고하셨소."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하지만 한용운은 그들을 차갑게 외면할 뿐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일제의 총칼이 두려워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알면서, 왜 남의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가?" 한용운은 의미 있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홱 돌아섰습니다. 한용운은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1925년 6월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서 그 해 10월까지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20일 이 시들을 시집으로 묶어 펴냈는데, 이것이 바로 님의 침묵입니다. 님의 침묵은 그의 사상을 온전히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성도 뛰어나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님의 침묵에는 모두 88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시 님의 침묵은 다음과 같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말하는 님은 누구일까요? 한용운의 생애와 관련지어 볼 때, 그의 님은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승려로서 그의 님은 '부처' 이고 독립 운동가로서 그의 님은 '조국과 민족' 이며 시인으로서 그의 님은 '연인' 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그의 님은 고결하고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는 이 성스러운 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시' 라는 그릇 속에 아름답게 담아 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고 그리워 하듯 조국과 민족, 그리고 부처님을 아끼고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에는 이 시 외에도 알 수 없어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주옥 같은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용운의 시들은 모두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를 노래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용운은 자신의 시를 통해 나라를 빼앗기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춰 주려 했던 것입니다. 1927년 한용운은 신석우, 이상재, 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를 발족하였습니다. 신간회는 좌 우익 합작으로 성립된 민족 운동 단체입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신간회를 통해 민족의 단결, 정치 경제적 각성, 기회주의의 배격을 강령으로 하여 사회적 민족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신간회는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어 1년 뒤인 1928년에는 회원수가 2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자 일본의 탄압도 거세져 마침내 1931년 5월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졌습니다. 징병, 징용을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갔으며, 식량과 물자도 마구 빼앗아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족 말살 통치라 하여 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한용운은 펄쩍 뒤었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 한용운은 끝내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호적이 없으므로 한용운은 쌀 한 톨 배급받지 못했고, 당연히 그의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 한용운은 유숙원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첫 부인은 출가를 한 뒤에 소식이 끊어져, 한용운은 그 동안 죽 혼자서 지내다가 이제 두 번째 부인을 맞게 된 것입니다. 유숙원과 한용운이 처음 만난 것은 서울 병원에서였습니다. 당시 간호사였던 유숙원은 만주에서 입은 총상의 후휴증으로 입원한 한용운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부는 단칸방에서 어렵게 셋방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산은행에서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여기에 도장을 좀 찍어 주십시오." "왜 도장을 찍으라는거요?" 성북동 땅 20만 평을 선생님께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그 땅이 선생님 소유가 됩니다. 식산 은행은 조선 총독부 소속의 기관이었는데, 한용운을 매수하기 위해 이런 제의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용운이 그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 "나는 도장이 없소!" 한용운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홱 돌아앉았습니다. 그러자 평소 한용운이 어렵게 지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벽산 스님, 박광 등이 나섰습니다. "우리가 만해 선생에게 조그만 집을 한 채 마련해 주면 어떻겠소?"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들은 돈을 모아 성북동 산자락에 집터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집을 지을 일만 남았습니다. 원래 집을 지을 때에는 남쪽을 바라보고 짓습니다. 남향 집은 볕이 잘 들 뿐만 아니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용운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집을 남향으로 짓다니 안 될 말이지. 남향하면 돌집을 바라 보게 될테니, 볕이 좀 안 들더라도 북향을 하는 게 낫겠어. 한용운이 말하는 '돌집' 이란 조선 총독부 건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조차 한용운은 나라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북동 집은 총독부를 등진 채 북향으로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집이 완성된 후 한용운은 그 집의 이름을 '심우장' 이라고 지었습니다. '심우장' 이란 '소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불가에서 '소' 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므로, 심우장은 '깨달음을 얻는 집' 이라는 뜻이 됩니다. 한용운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심우장에 몸담으며 몸과 마음을 닦고 독립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이듬해 심우장에 경사가 생겼습니다. 딸 영숙이 태어난 것입니다. 한용운은 늦게 얻은 딸인 만큼 영숙을 무척 귀여워하였습니다. 영숙은 무럭무럭 자라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용운이 호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영숙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영숙은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영숙이도 내년에는 학교에 가야 할 텐데." 아내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한용운은 대뜸 화를 내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우리 영숙이가 일본놈의 가르침을 받아도 좋단 말이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왜놈의 학교에는 절대로 안 보낼 거요. 그리고는 딸에게 직접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영숙은 매우 영리해서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글자를 곧잘 익혔습니다. 하루는 한용운이 신문을 보고 있는데, 영숙이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건 무슨 뜻이에요?" 영숙이가 가르킨 것은 신문에 군데군데 섞여 있는 일본 글자였습니다. "그건 글자가 아니니 몰라도 된다." 한용운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한용운은 나라를 빼앗아 간 일본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한용운이 더욱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변절자들이었습니다. 춘원 이광수와 한용운은 서로 문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특히 이광수는 불교를 소재로 한 글을 쓸 때에는 반드시 한용운을 찾아가 의논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광수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용운을 찾아오자, 그는 노발대발하며 이광수를 꾸짖었습니다. "내가 그 동안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이광수는 무안한 얼굴로 돌아갔으며, 그 뒤로 다시는 심우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한용운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 중에 최남선이 있었습니다. 그는 3 1 운동 때 독립 선언서를 쓰기도 했던 인물로, 두 사람은 마음을 모아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일본의 협박에 못이겨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한용운은 그가 변절하자 친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자, 다 모였으면 장례식을 시작하겠네." "아니, 웬 장례식인가? 누가 죽었는가?" "지금부터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버리고 왜놈의 종노릇을 하겠다고 선언한 최남선 군의 장례를 치를 걸세." "아니, 뭐라고?"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였습니다. 한용운은 길을 가다가 최남선과 딱 마주쳤습니다. "만해 아닌가? 오랜만일세." 최남선은 반갑게 손을 내밀었지만, 한용운은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뉘신데 내게 아는 척을 하시오?" "날세, 최남선. 그새 얼굴도 잊었단 말인가?" "내가 아는 최남선은 얼마 전에 죽었소. 이미 장례까지 치렀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최남선은 부끄러워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황급히 사라졌습니다. 어느 흐린 날이었습니다. 한용운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최린이 찾아왔습니다. "만해, 집에 있는가?" 한용운은 그 목소리를 듣고 대뜸 누구인지 알아차렸습니다. 한용운은 하던 일을 멈추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밖에 보기 싫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적당히 핑계를 대어 돌려보내구려." "그래도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인데 어떻게 그냥 돌려보내요. 한 번 나가서 만나 보세요." "글쎄, 어서 돌려보내라니까!" 아내는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할 수 없군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최린이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할 때, 마침 영숙이가 따라 나왔습니다. "네가 영숙이냐? 그 동안 많이 자랐구나." 최린은 영숙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폐 한 장을 꺼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받을 수 없습니다." "영숙이가 예뻐서 주는겁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불 같은 성품을 아는지라 거절했지만, 최린은 한사코 돈을 돌려받지 않았습니다. 최린이 돌아가고 난 후 한용운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당신은 어쩌자고 그 돈을 받았단 말이오? 그 자는 나라를 배신한 놈이란 말이오. 당장 가서 돌려주시오. 최린은 한용운과 함께 3 1운동을 이끌었지만, 감옥에서 나온 뒤 일본에게 돌아섰던 것입니다. 변절자들을 대하는 한용운의 태도는 이처럼 냉정했습니다. 심우장에 기거하게 된 후 한용운은 대외 활동을 줄이고 집필에 힘을 쏟았습니다. 장편 소설 흑풍과 후회는 이 무렵에 씌어진 것들입니다. 또한 그는 틈나는 대로 뜰에 꽃을 가꾸었습니다. 그래서 심우장 뜰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진달래, 코스모스, 백일홍, 국화 등이 끊이질 않고 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우장에 매우 비통한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김동삼이 죽었다는것입니다. 김동삼은 한용운이 만주에 갔을 때 함께 뜻을 모았던 사람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는 15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중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나이 60세였습니다. "김 동지! 조국의 독립도 못 보고 이렇게 떠나가시다니요. 흐흐흑." 한용운은 울부짖으며 서대문 형무소로 달려갔습니다.그리고는 싸늘하게 식어 있는 김동삼의 시신을 찾아 심우장으로 옮겨왔습니다. "김 동지가 떠났으니 이제 이 나라는 누굴 믿고 의지한단 말인가." 한용운은 정성껏 장례식을 치러 준 후, 몇 날 며칠을 탄식하며 비통해했습니다. 김동삼이 떠나간 지 2년 후인 1939년, 한용운은 회갑을 맞았습니다. 한용운은 그 무렵부터 몸이 부쩍 쇠약해졌지만, 그의 기개는 여전했습니다. 1943년, 일본 왕의 생일 축하 잔치가 벌어지는 날 동회 서기가 심우장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지요? 조선신궁에 좀 나오셔야 되겠습니다." 어이없어하는 동회 서기를 향해 한용운은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니? 그럼, 일본놈들은 법이 있어서 남의 나라를 집어삼켰단 말이오?" 그러자 동회 서기는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럼 기라도 다시지요." "그것도 못 하겠소. 일장기는 우리집에 있지도 않고." 동회 서기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일제의 악랄함은 극에 달했습니다. 애국지사들이 한 사람씩 죽고, 동료들이 한 사람씩 변절해 갈때마다 한용운은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의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그 날도 한용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직 일어나 마당을 쓸고 있었습니다. "헉!" 갑자기 현기증을 느낀 한용운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얼마 뒤 의식이 돌아왔지만, 그 날 이후 한용운은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한용운이 자리에 누워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습 경보가 울리던 밤이었습니다. "창문에 휘장을 내려라. 검은 휘장을." 한용운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944년 6월 29일, 광복을 1년 앞둔 해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불교의 관례대로 화장되었습니다. 본래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될 예정이었으나, 그 곳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곳이라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조그만 화장터로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그곳은 김동삼의 장례가 치러졌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용운의 육신은 한줌의 재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남아 환한 빛을 발했고,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치아를 유골과 함께 항아리에 담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불제자로서, 독립투사로서, 시인으로서 일생을 용기와 신념으로 살았던 민족의 선각자 한용운! 그는 비록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지만, 그가 남긴 가르침은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 이어져 민족의 앞날을 비춰주는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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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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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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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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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은 1822년 8월 21일, 충청남도 내포의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김대건의 가정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는 원래 솔뫼 마을의 양반으로 학식과 인격이 높아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를 믿게 되면서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유사옥 때에 관가에 붙들려 간 김진후는,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김진후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김택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김택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김제준이 곡 김대건의 아버지였습니다. 1827년, 박해에 쫓긴 가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김택현은 자신의 둘째 아들 김제준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용인 땅의 골배 마을로 피신하였습니다. 김대건의 어릴 때 이름은 재복이었습니다. 박해에 쫓겨 골배 마을로 피신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6세였습니다. 골배 마을은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그들 외에도 천주교 박해에 쫓겨 피난 온 사람들이 한두집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농토와 정든 집을 버리고 산 속에 숨어 사는 삶을 택했던 것입니다. 김대건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고생스러웠지만 그는 아침 저녁으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보고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는 게 더없이 즐거웠습니다. 김택현은 손자인 김대건에게 한문과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어린 김대건은 때때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순교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김대건의 부모는 나무를 베어다 숯을 굽고 옹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을 내다 팔아서 쌀을 사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가난에 쪼들리는 삶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의 부모는 그러한 생활을 조금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 감사하게 생각하여 숯과 옹기를 팔러 다니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하느님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병든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사람이 다 평등합니다." 김대건의 부모는 남몰래 숨어 다니며 이렇게 복음을 전파했고, 이를 무엇보다 기쁘고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장사를 하러 다니며 전도를 하는 도안, 김대건은 집에서 할아버지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습니다. 1836년 6월의 어느 날, 김대건이 살고 있는 골배 마을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상복을 입고 방갓을 깊숙이 눌러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금빛 머리털에 파란 눈을 가진 서양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나는 프랑스에서 온 모방 신부입니다. 성호를 긋고 난 그는 서툰 우리말로 자기 소개를 하였습니다. 모여 있던 천주교도들은 이 뜻밖의 손님이 선교사인 것을 알고 기뻐서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김대건도 낯선 신부의 모습이 하도 신기하여 넋을 잃고 바라 보았습니다. 모방 신부는 우리 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방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변장을 하고 각 지방으로 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이 골배 마을까지 오게 된것입니다. 낯선 땅에 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신부를 보며 김대건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김대건의 집에서 여장을 푼 모방 신부는, 교인들을 모아 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뒤 영세를 베풀었습니다. 이 때 김대건도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집안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김대건의 증조할아버지와 종조할아버지가 천주교를 위해 순교를 한 순교자의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김대건의 빛나는 눈에서 깊은 신앙심을 읽게 된 모방 신부는, 이 소년이야말로 앞으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에서도 하루빨리 신부가 나와야 합니다. 안드레아, 그대는 신부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신부님, 저도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김대건은 말끝을 흐렸습니다. "신부가 되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고생스럽지만, 신앙에 대한 신념만 굳게 지킬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라도 신앙에 대한 신념만은 굳게 지킬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나와 함께 한성으로 갑시다." 오로지 신앙을 위해 살아 온 김대건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김대건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하여 모방 신부를 따라 한성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그의 가족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드렸습니다. 주여, 박해받는 조선의 교도들을 위하여 아들을 바치겠사옵니다. 부디 무사히 신부가 되어 이 땅의 목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 해 7월, 한성에 도착한 김대건은 모방 신부의 집에서 최방제와 최양업을 만났습니다. 그들 두 소년도 충청도 홍주와 경기도 과천에서 각각 뽑혀 와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최양업은 김대건과 같은 나이인 15세였고, 최방제는 그들보다 한 살 위인 16세였습니다. 김대건은 이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도 안 다니고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만 겨우 깨친 김대건에게는 외국어가 어렵기만 하였습니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또다시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원들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사정없이 목을 베었습니다. 결국 그 해 12월, 모방 신부는 이 세 명의 소년을 외국으로 피신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모방 신부는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선교회로 이 소년들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도 지금과 같이 외국으로 나가려면 조정에서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천주교도라는 것이 알려지면 여권은 커녕 당장 그 자리에서 목이 베일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마침 중국인 신부 유방제가 귀국하는 길이었으므로, 모방 신부는 그에게 소년들을 중국까지 데리고 가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김대건 등 세 소년은 모방 신부가 써준 소개 편지를 가슴에 품고 한성을 떠났습니다. 이들 세 소년은 신학 공부를 한다는 사명감과 낯선 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관리의 눈을 피해 나라 밖으로 빠져 나가야 한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1836년 12월 중순의 어느 날, 김대건 일행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싸우며 국경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영하 30℃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꽁꽁 얼얼어붙은 압록강으로 다가갔습니다. 김대건 일행은 며칠 동안을 추위와 싸우며 눈밭 속을 걸어 온 끝에, 마침내 중국이 바라보이는 국경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보다 불안이 앞섰습니다. 남의 나라에 몰래 숨어 든 입장이기에 언제 어디에서 붙잡힐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거야. 우리 모두 용기를 잃지 말자." 김대건은 이렇게 친구들을 위로하였습니다. 한밤중에 국경을 넘기 시작한 그들이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중국 땅에 다다랐을 때에는 어느덧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중국 땅이니, 중국 사람으로 변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유방제 신부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습니다. 유방제 신부를 따라 길 아래로 내려선 소년들은 제각기 등에진 봇짐을 풀어서 중국 옷으로 갈아입고 계속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뒤 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어느 주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뜻한 방 안에 앉아 모처럼 배불리 먹고나자, 피로와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아침상을 물리기가 바쁘게 모두들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 그리고 고향 생각등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목적지인 마카오까지 가려면 아직도 몇 달은 더 걸어야 했습니다. 김대건은 낯선 나라에서 여권도 없이 숨어서 여행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날 오후, 그들은 다시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중국의 변문을 간신히 통과하였습니다. 여러 날 뒤에 그들은 베이징에 닿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유방제 신부와 헤어졌습니다. 넓고 넓은 낯선 땅에 남은 소년들은 불안하였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마카오를 향하여 계속 걸어갔습니다. 어느덧 6월이 되어, 소년들이 푸저우를 지날 무렵부터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감에 따라 날씨는 더욱 찌는 듯하였습니다. 무더위 속을 걷는 일은 추위 속을 걷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1837년 8월, 마침내 세 소년은 무사히 마카오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을 떠나 온 지 꼭 8개월 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방 신부가 일러 준 대로 프랑스 선교회를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세 소년의 몰골을 보고 거지로 착각하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김대건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입니다." "아, 그래요? 실례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사무실로 안내된 소년들이 모방 신부의 편지를 꺼내 보이자, 그 사람은 무척 놀랐습니다. "난 르그레그와 신부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정말 조선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단 말입니까?" "네, 8개월 동안 계속 걸어왔습니다." "오오, 정말 장합니다." 르그레그와 신부는 놀라음을 금치 못하며 세 소년을 번갈아 끌어안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 오랜 여행 동안 소년들이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프랑스 선교회에서 휴식을 취한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세 소년은 곧 그 곳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신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 역사, 음악까지 두루 배웠습니다. "어서 배워서 우리 나라 학생들에게도 모두 가르쳐 주어야지." 세 소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국과 두고 온 부모 형제가 그리웠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 무렵 중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워 민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김대건 일행이 마카오에 도착한 지 두 달이 채 안되었을 때 또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소년들은 긴 여행으로 부르튼 발이 채 낫기도 전에 피란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세 소년은 배를 타고 멀리 필리핀의 마닐라로 갔습니다. 마닐라는 매우 더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찌는 듯한 무더위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앙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소년들을 보고 프랑스 신부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든 동안 난리가 모두 잠잠해졌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세 소년은 지리, 역사, 과학, 의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일만 있으란 법은 없는지 그들에게 곧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무더운 열대 기후에 시달려 몸이 쇠악해진 최방제가 열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1월에 죽고 만 것입니다. 남은 두 소년은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신부가 되어 고국에 돌아가 핍박받는 교인들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치자던 최방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이시여, 사랑하는 아들의 영혼을 받아 조소서!" "방제야, 이제 편안히 하느님 곁으로 가거라. 남은 우리들이 반드시 뜻을 이루어 너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개 하겠다." 최방제를 장사 지내고 돌아온 그날 밤, 김대건과 최양업은 최방제의 몫까지 열심히 공부하여 부모님과 사랑하는 교우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일군이 되고자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이 마카오에 온 지 3년째 되던 1839년 봄, 마카오에 또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안정된 마음으로 공부하던 두 소년은 또다시 마닐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뱃길로 마닐라에 도착한 김대건은 갑자기 고국 소식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고국을 떠나온 뒤로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업아, 우리가 고국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되었구나. 요즘 우리 나라의 천주교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러자 최양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글쎄, 여전히 박해를 받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빨리 신부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이렇게 난리에 쫓겨다니기만 하니." 그런데 최양업의 걱정대로 이 무렵 조선에서는 또다시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839년 3월에서 9월 사이에 걸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기해 박해' 입니다. 이 박해 때에 김대건을 마카오로 보냈던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를 비롯하여 그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앙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아버지도 이 사건에 관계되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신부가 되기 위하여 몰래 나라를 빠져 나갔다는 것을 알개 된 조정에서 그들의 아버지를 붙잡아다가 온갖 형벌을 가하여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것입니다. 김대건 아버지 김제준은 서소문 밖 사형장에서 참형을 당하였고, 최양업의 아버지는 심한 매를 맞고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더욱이 최양업의 어머니는 젖먹이를 데리고 옥에 갇혔는데, 아기는 감옥에서 얼어죽고 어머니는 당고개에서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김대건과 최양업은그해 11월경에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하였습니다. 1840년 6월부터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은 1842년에 접어들어서야 중국의 항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배상금을 받고 홍콩을 얻는 등, 막대한 이익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프랑스도 중국과 무역을 해 볼 속셈으로, 그 해 2월에 군함 에리곤 호와 파보리트 호를 마카오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리곤 호의 세실 제독과 파보리트 호의 바즈 선장은 중국까지 온 김에 조선과도 통상을 해 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프랑스 말과 조선말을 잘 하는 통역관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통역관을 구하기 위하여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선교회를 찾아왔습니다. "혹시 조선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오." 세실 제독이 말했습니다. "우리 선교회에 조선인 신학생이 두 사람 있습니다." "그래요? 마침 잘 됐군요. 그런데 그 학생들이 프랑스 말도 잘 하나요?" "프랑스 말 뿐만 아니라 중국말에도 아주 능한 학생들입니다." "좋습니다. 그들을 좀 만나게 해 주십시오." "잠깐 기다리십시오. 먼저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김대건의 방으로 향하는 르그레그와 신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습니다. '이번 기회에 조선인 신학생들을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내야겠어. 그들의 도움으로 조선 정부와 통상 교섭에 성공하면,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에서 떳떳하게 전도할 수 있을 거야.' 르그레그와 신부는 이런 생각을 하여 김대건에게로 갔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조선말을 통역해 줄 통역관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요?" "조선으로 가는 프랑스 군함의 선장입니다." "네?" 뜻밖의 소식에 김대건은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는 선뜻, "만나 보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고 최양업과 함께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세실 제독은 그들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감탄하여 그들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과 최양업은 각각 에리곤 호와 파보리트 호를 타고 조선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김대건은 이 뜻밖의 행운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고국을 떠나온 지 6년 만에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도록 기뻤습니다. 2월 15일, 에리곤 호에 몸을 실은 김대건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두 척의 배는 마닐라에 잠시 들렀다가 타이완을 거쳐 상하이에 다다랐습니다. 김대건은 통역에 능했을 뿐 아니라, 지리에도 밝았기 때문에 세실 제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중국과 영국 사이에 난징 조약이 맺어지는 것을 지켜본 세실 제독이, '이런 때에 조선으로 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라고 판단하여 계획을 취소해 버린 것입니다. 세실 제독과 바즈 함장은 난징을 거쳐 양쯔강 어귀에 까지 갔다가 배를 다시 마닐라로 돌려 버렸습니다. 김대건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상하이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조선으로 가지 않는 배에 구태여 머무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배에 탔던 메스트르 신부,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랴우둥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랴우둥에서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25일, 배를 구해 랴우둥 해안에 상륙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걸어서 교인들의 마을인 바이자텐에 도착하였습니다. 김대건 일행은 그 곳에서 중국인 교인을 만나 조선에서 있었던 기해 박해의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조선에서 또다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인들이 순교를 했답니다." "네? 그게 사실인가요?" 김대건 일행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세한 소식을 들려주십시오." "프랑스 신부 세 사람과 조선인 신자 2백여명이 죽었답니다." 이 말을 들은 김대건 일행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렇다면 모방 신부님과 샤스탕 신부님, 그리고 앙베르 주교님도 모두 다." 김대건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 네 사람이 함께 귀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어었습니다.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는 바자즈에 있는 교회에 가서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하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12월 말에 중국 국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마침 베이징으로 가는 조선인 사절단을 만났습니다. 그 사절단 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김대건은 기해 박해에 관한 일을 제일 먼저 물었습니다. "기해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그럼 모방 신부님도 순교하셨나요?" 김대건은 자기가 들은 말이 거짓이기를 바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댁의 부친께서도." 김대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뭐라고요? 저의 아버님이라고요?" "네, 신학생의 부친이라 하여 붙들려 가셔서 그만." 김대건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김대건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메스트르 신부를 그 곳에 남겨 두고 먼저 입국을 하기로 했습니다. 김대건은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압록강 얼음 위를 걸어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보라 속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저물어 갈 무렵 의주성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성문에서는 파수꾼들이 지키고 서서 일일이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무사히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 때 마침 상인들이 소 떼를 몰고 의주성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재빨리 소 떼 사이에 끼어 태연하게 걸어갔습니다. "여보시오, 신분증 좀 봅시다." 뒤에서 파수꾼이 불러도 그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 걸어갔습니다. "신분증 좀 보자는데, 왜 그냥 가는 거야?" 소리를 지르며 뒤따라온 파수꾼의 말이 점점 거칠어졌습니다. 그제야 김대건은 뒤돌아보며, "다 보고 나서 뭘 또 보자는 거요?" 하고 도리어 큰소릴 쳤습니다. 파수꾼이 김대건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 주춤거리자 김대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김대건은 어둠 속을 마구 내달렸습니다. 김대건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밤새도록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날이 밝아 오자 김대건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어느 주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툇마루에 걸터 앉은 채 아침밥을 시켰습니다. 이 때 주막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김대건에게로 쏠렸습니다. 한참을 쳐다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참 이상한 사람이구먼." "그러게 말이오. 머리는 서양식인데, 옷은 조선 옷이고, 발에는 중국 버선을 신었으니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사람들이 모여 서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김대건은 신분이 들통날까 봐 불안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추위와 배고픔도 잊은 채 그 자리를 빠져 나갈 궁리를 하였습니다.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수많은 신자가 죽임을 당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모여 섰던 사람들이 김대건을 주막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는 다행이라고 여기며 한성을 향하여 급히 걸어갔습니다. 그들에게 붙들렸다가는 모든 사실이 탄로날것이 뻔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걷던 김대건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가 힐끗 뒤를 돌아보자, 한 사나이가 멀찌감치 뒤를 밟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태연한 듯이 걸음을 옮겼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뒤따라오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서 한성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지금 한성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해. 안타깝지만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때를 기다리자.' 그는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힘껏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이틀이나 굶은 탓에 다리가 휘청거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김대건은 마침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습니다. '아, 이제 영락없이 죽게 되었구나.' 그 때였습니다. "일어나라. 여기서 주저 앉으면 안된다." 어디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꿈 속인 듯 희미하게 들리던 그 목소리는 차츰차츰 커지며 그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그러자 웬일인지 온몸에서 힘이 솟아났습니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걸어라!" 김대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건 분명 하느님의 음성이야.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한 목소리야.' 김대건은 이 음성을 통해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조선을 빠져 나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바자즈로 갔습니다. 그 때 그 곳에서는 페레올 주교가 조선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김대건은 바자즈에 머물면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침내 1844년 2월, 김대건은 함경도 경원 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먼저 혼자 가서 알아본 뒤, 입국이 가능하다면 다시 돌아와 페레올 주교와 동행할 작정이었습니다. 바자즈에서 경원까지는 2천 리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길은 인가가 거의 없는 험한 산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은 위험을 무릅쓰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눈 쌓인 만주 벌판에서는 굶주린 짐승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 왔습니다. 매년 이 곳 만주 벌판에서는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김대건은 경원에 장이 서는 때를 기다렸다가 혼잡한 틈을 타서 몰래 경원성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는 구경하는 척하면서 이리저리 시장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전에 의주에서 만났던 교인들이 일러 준 대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허리에는 붉은 주머니를 찼습니다. 그런데 김대건이 어느 골목으로 들어 섰을 때였습니다. 웬 낯선 사나이가 다가오더니 물었습니다. "천주교도이시오?" 김대건은 그 사람도 천주교도임을 재빨리 확인하고 그를 따라 조용한 곳으로 갔습니다. 흰 수건과 붉은 주머니는 교인들끼리의 암호였던 것입니다. "경원을 통해 한성으로 가려고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김대건이 물었습니다. "의주에서 한성으로 가는 것이 그보다 가깝고 덜 위험할 것입니다. 경원으로 가면 길이 멀 뿐만 아니라 워낙 감시가 심해서." 김대건은 곧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바자즈로 되돌아왔습니다. 1845년 1월,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은 변장을 하고 압록강이 보이는 국경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의주를 통하여 입국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감시가 너무 심하여 특히 서양 사람의 입국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김대건은 국경 지방에서 페레올 주교와 헤어졌습니다. 김대건은 또다시 어두운 밤을 틈타 압록강을 몰래 건넜습니다. 이번에는 의주성의 수문을 통하여 무사히 숨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후, 드디어 김대건은 꿈에도 못 잊던 한성에 도착하였습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이 곳을 떠났던 소년 김대건은 이제 늠름한 청년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김대건은 곧 교회 간부 몇몇 사람에게 자기가 돌아온 것을 알렸습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교인들은 기뻐하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김대건은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숨어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 곳에서 김대건은 기해 박해의 끔직한 참상을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하신 뒤 의지할 곳이 없어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신다는 어머니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김대건은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 때가 아니었습니다. 김대건은 결국 어머니를 만나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김대건에게는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목자 없이 지내던 교인들을 돌보아야 했고, 모방 신부가 자기를 신학생으로 뽑았던 것처럼 자신도 신학생을 뽑아 그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김대건은 선조 때 우리 나라에 전래된 천주교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박해 사건과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많이 모아 그것을 자세히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1787년 첫 순교자가 나온 이후, 지금까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7백여 명의 순교자가 흘린 피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쉴 틈 없이 일하던 김대건은 그만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먼길을 달려온 피로가 겹쳐 결국 병이 나고 만 것입니다. 김대건은 높은 열에 시달리면서 며칠이나 정신을 잃고 헛소리만 계속하였습니다. 간호를 하던 신자들은 김대건이 그대로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름이 넘게 앓고 난 김대건은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아직은 하느님 곁으로 갈 때가 아니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다.' 김대건의 굳은 의지가 그를 병석에서 일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겨우 병석에서 일어난 김대건은 기해 박해로 주교와 신부를 잃어 미사를 보지 못하는 교인들이 딱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을 데려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쇠약해진 몸을 돌봄 틈도 없이 김대건은 제물포로 가서 작은 배를 한 척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소문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교인들 중에서 사공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얕은 강에서나 배를 저어 본 경험이 있을 뿐인 서투른 사공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서해를 건넌다는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시바삐 페레올 주교를 데려오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김대건은 조각배에 식량과 물과 땔감을 싣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 해 4월 30일, 김대건 일행을 태운 조각배는 제물포를 떠나 마침내 서해로 나아갔습니다. 날씨는 맑고 파도도 잔잔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고 파도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발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김대건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남몰래 가슴을 죄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점점 어두어지고 파도는 더욱 거칠어져 조각배는 바람 부는 대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게다가 비까지 세차게 퍼부었습니다. 마침내 조각배는 돛대가 부러지고 키는 파도에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김대건과 사공들은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배는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흘러갔습니다. 다음 날, 김대건과 사공들은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니, 여기가 어디지?" 김대건 일행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는 어디론가로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은 사공들을 격려하였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배는 열흘 동안 바다 위를 떠다녔습니다. 사공들은 완전히 지쳐서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는구나." 그런데 이 때 멀리서 한 척의 기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야, 배다." 김대건 일행은 너무나 기뻐 소리를 지르며 옷을 벗어 흔들었습니다. 그들을 발견한 기선이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 배는 중국 기선이었습니다. 김대건은 산둥 반도로 간다는 선장에게, 돈을 얼마든지 줄 테니 상하이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사정하였습니다. 중국인 선장은 처음에는 망설이는 듯했으나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겨우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의 조각배는 중국 기선의 꽁무니에 매달려 20여 일 만에 상하이에 도착하였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대건 일행은 중국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틀어 맨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김대건 일행을 수상하게 여긴 중국 관리가 김대건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 어느 나라 사람이오? 신분증 좀 봅시다." "우리는 조선 어부요.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풍랑을 만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김대건은 거짓말로 둘러대었습니다. "어쨌든 신분증이 없으니 조사를 좀 해 보아야겠소." 중국 관리는 김대건 일행을 꽁꽁 묶어 관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들은 그 곳에서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져 감옥살이를 하든가, 아니면 조선으로 넘겨질 판이었습니다. 김대건은 입 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제게 힘을 주십시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시렵니까? 그때 영국군 장교 한 사람이 관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김대건은 그 장교에게 프랑스 말로 외쳤습니다. "장교님! 제 부탁을 좀 들어 주십시오." 다행히도 그 장교는 프랑스 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의 말을 알아들은 영국군 장교는 동양인의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 말이 튀어나오자 매우 놀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오?" "생명이 걸려 있는 일입니다." 김대건은 영국군 장교에게 자신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곳에서 페레올 주교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김대건의 이야기를 듣고 난 영국군 장교는 그렇게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중국 관리들에게, "이 사람은 높은 분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중국 관리들은 갑자기 공손해졌습니다. 일주일 후, 페레올 주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 일행은 페레올 주교를 따라 상하이에 있는 주교관으로 갔습니다. 김대건은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들은 꼭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렇게 무사히 주교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은총인 줄 압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의 고생을 잘 참아 주셨습니다."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며, "주교님, 조선 교회에는 성직자가 꼭 필요합니다. 목자 잃은 양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함께 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이 곳에 있는 다블뤼 신부와 함깨 가도록 하지요. 그리고 당신도 이제 24살이나 되었으니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신부가 되어 함께 조선으로 갑시다." 이렇게 하여 1845년 8월1 김대건은 상하이 근처의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가 된 김대건은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돛대도 새로 달고 키도 새로 맞추어 다는 등, 올 때 타고 왔던 배를 말끔히 고쳐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1845년 8월 말, 김대건 일행을 태운 조각배는 드디어 상하이를 출발했습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함께 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북쪽을 향해 다시 돛을 올리고 거센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새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공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육지가 보인다!" 그들은 수평선 저 멀리에 불쑥 나타난 작은 섬을 보고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다시 기운을 차린 그들은 가까스로 배를 육지로 몰고 갔습니다. 배는 침몰 직전에 겨우 육지에 닿았습니다. 배가 닿은 곳은 충청도 금강 입구에 있는 황산포라는 곳이었습니다. 김대건 일행은 물에 흠뻑 젖은 채 황산포에 내렸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어두워질 무렵에야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김대건은 그 곳에 있는 한 천주교도의 집으로 일행을 안내하였습니다. 교인들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그 교인의 집에 남겨 놓고 한성으로 떠났습니다. "주교님, 신부님과 당분간 이 곳에 계십시오. 제가 먼저 한성으로 가서 주교님이 계실 집을 마련해 놓고 모시러 오겠습니다." 김대건은 상복과 방갓으로 변장을 했습니다. 무사히 한성에 닿은 그는, 밤을 기다려 석정동에 있는 성직자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교인들은 김대건이 신부가 되어 돌아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김대건은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교인들은 전보다 몇 배나 더 열심히 모였고, 하루빨리 이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김대건은 지난번에 하다가 그만둔, 순교자의 행적을 정리하는 일을 다시 하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사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달 후,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살 집을 마련해 놓고, 주교를 모시러 황산포로 갔습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그 동안 우리말을 배워 제법 잘하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상복 차림에 머리에는 방갓을 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감시가 어찌나 심한지 낮에는 신자들의 집을 찾아가 숨어 있다가 밤에만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일주일 뒤 무사히 한성에 도착한 김대건 일행은 페레올 주교를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습니다. 김대건은 온 정열을 쏟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 날,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을 불렀습니다. "김 신부,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소. 잠시 고향에 돌아가 휴식도 할 겸 시골 교인들을 돌보는 게 어떻겠소?" 페레올 주교의 말에 김대건도 찬성하였습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시골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한성 교우들을 맡기고 시골의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짐을 챙겼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그는 꿈에도 못 잊던 고향을 향해 떠났습니다. 폐허가 된 고향. 멀리 낯익은 산과 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김대건의 가슴은 설렘과 슬픔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 땅의 천주교 발전을 위하여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치겠노라고 기도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신부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지도 못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제껏 아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니 김대건은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윽고 김대건은 골배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마을은 온통 쑥밭이 된 채 무덤만 즐비하였습니다. 그것은 김대건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골배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기해 박해 때 몰살당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은 다른 지방으로 가 버렸기 대문에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건은 나무 십자가가 꽂힌 묘비들을 살펴보며 북받쳐오르는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고향 마을을 뒤로 하고, 김대건은 가까이에 있는 은이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기해 박해 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은이 마을에는 마침 김대건을 잘 아는 정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저를 알아보실 수 있겠습니까? 신학생이 되어 한성으로 올라갔었던." 김대건이 말하자 정 노인은 놀라움과 반가움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자네가 정말 재복인가?" 정 노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김대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네, 하느님의 은혜로 신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자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정노인은 김대건의 두 손을 잡으며 울먹였습니다. 김대건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하였습니다. "혹시 제 아버님의 산소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지요?" "글쎄, 워낙 경황이 없고 위험한 상황이 돼 놔서. 자네 어머니도 간신히 피해서 몸을 숨겼지." "그럼, 저의 어머니 소식은 알고 계십니까?" "그것도 알 수가 없다네." 김대건은 치솟는 슬픔을 간신히 억눌렀습니다. 고향에 오면 어머니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온 몸의 힘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마음을 진정시킨 김대건이 다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 마을에는 교인들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기해 박해 이후에 교인이 많이 줄었다네. 그래도 다 모으면 한 백 명은 될 걸세. 자네가 이 곳에서 신자들을 보살펴 주면 좋을 텐데. 정 노인이 김대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습니다. " 그렇지 않아도 이 곳에서 전도 활동을 펼쳐 볼까 하여 내려 오는 길입니다." "그래, 정말 잘 되었네. 교인들이 알면 기뻐할 걸세." 정 노인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집이 넓으니,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갖는 게 어떻겠나?" 정 노인은 자진해서 자기 집을 교인들의 집회 장소로 제공 하였습니다. 김대건이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김대건은 정 노인의 사랑방에서 은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사를 베풀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언제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항상 뒤따랐지만, 교인들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차츰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이 은이 마을에 온 지 다섯 달쯤 지나서는 마을 전체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김대건은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어머니의 행방을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대건은 마침내 어머니가 충청도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김대건은 허둥지둥 그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어머니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둥켜안은 채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머니, 이제 그만 진정하십시오. 앞으로는 제가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김대건은 어머니를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아, 페레올 주교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성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나자마자 또 헤어져야 하는 슬픔을 억누르며, 김대건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였습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맡은 일에 충실하여라. 모든 사람을 부모 형제와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지 말아라." "어머니, 저도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대건은 이렇게 다짐한 뒤 한성으로 떠났습니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김 신부, 고생이 많았지요? 자, 여기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우리 조선 교회에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베이징에 연락해서 신부를 더 모셔 와야겠소. 그리고 바자즈에 있는 최양업 신부도 귀국해서 활동하도록 해야겠소. 지금쯤 연평도 앞바다에 중국 어선들이 조기를 잡으러 와 있을 거요. 그 배를 이용 하는 게 좋겠소. 해마다 3월이면 중국 어선들이 조기 떼를 따라 연평도에 왔다가 조기를 다 잡는 5월에 중국으로 돌아가오. 그 배편으로 편지를 전하면 될 것이오. 그러니 김 신부는 내가 써 주는 편지를 중국 어선에 전해 주고 오면 좋겠소. 5월 14일, 마침 교인 중에 연평도로 조기를 사러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그 교인의 배를 타고 연평도로 향했습니다. 김대건은 마포를 떠나 연평도로 가는 배 위애서 해안을 관찰하여 지도를 그렸습니다. 최양업과 외국 신부들이 배를 타고 들어올 때, 상륙하기 좋은 곳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해안의 생김새를 상세하게 그리고 상륙하기 좋은 곳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배를 타고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김대건을 태운 어선은 백령도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에는 많은 중국 배들이 그물을 치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그 중 한 어선에 가까이 다가가서 배 주인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는 배 주인에게 편지를 베이징에 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겨우 승낙을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그 동안 그린 지도와 페레올 주교의 편지, 그리고 자신이 쓴 편지를 배 주인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일을 끝낸 김대건은 6월 1일에 순위도로 돌아와서 어서 배가 돌아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지연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소금에 절여 둔 생선이 덜 말라 며칠을 더 그 곳에서 묵어야 했던 것입니다. 김대건의 마음은 초조와 불안으로 휩싸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최양업과 헤어진 지도 어느 새 5년이 되었구나! 하루빨리 그를 보고 싶다.' 김대건이 뱃전에 기대서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쪽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순찰 나온 포졸들과 선원들이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포졸들을 보자 김대건의 심장은 몹시 뛰었습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어 관가에 끌려간다면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 것이 뻔하였습니다. 그는 포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에 숨어서 그들이 주고 받는 말을 엿들었습니다. '이 배에 수상한 놈들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래서 이 배를 조사하겠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 포졸이 큰 소리로 윽박질렀습니다. "배 안에는 수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배는 내일 한성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배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선원들은 거짓말을 둘러대었습니다. 선원들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자 화가 난 포졸들은 선원들을 모두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끌려간 선원들은 심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김대건이 중국 배에 편지를 전한 일을 모두 말해 버렸습니다. 포졸들은 황급히 김대건을 체포하였습니다. 잡혀 온 김대건의 몸에서 십자가와 성경책이 나왔습니다. "이놈도 천주학생이로구나." 포졸들은 즉시 김대건을 황해도 해주 감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중국 배편에 부쳤던 편지와 지도도 빼앗아 왔습니다. 그 곳에서 김대건은 모진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김대건은 목에 칼을 쓴 채 한성의 포도청으로 옮겨졌습니다. 포도청에서 김대건은 또 한차례 심한 매질과 문초를 당하였습니다. 김대건은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순순히 털어놓았습니다. "중국 배편에 부쳤던 편지는 어느 나라 말로 썼느냐?" "프랑스 말로 썼습니다." "거기에 무어라고 썼느냐?" "그저 안부를 묻는 편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천주교의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천주교가 참된 종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김대건은 침착하고 조리 있게 말하였습니다. 여러 나라와 교류하여 좋은 점을 받아들여여만 나라가 발전 할 수 있습니다. 김대건은 세계의 움직임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대신들 중에는 김대건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겨 그를 설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대건은 결코 죽음을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저를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저는 결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어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대신들은 마지막으로 김대건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 너를 살려 주고 높은 벼슬을 주겠다. 그러나 끝까지 천주교를 믿겠다고 고집하면 메 목을 베어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테다." 대신들이 꾸짖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였지만, 김대건의 태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르게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니, 어서 나를 죽여 주십시오. 오늘 물어도 내일 물어도, 내 대답은 오직 한 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은 김대건의 신념이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김대건은 도저히 용서 못할 죄인이옵니다. 목을 베어 매달도록 허락해 주소서." 영의정 권돈인이 헌종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렇게 하오." 헌종도 허락하였습니다. 조정의 세력 다툼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헌종은 김대건 때문에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대건은 마음을 가다듬고 전국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썼습니다. 또 페레올 주교와 가까운 신부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김대건은 최양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를 잘 보살펴달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뒷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귀국하거든 나 대신 우리 어머니를 모셔주면 고맙겠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김대건은 내일이면 사형장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는 옥중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골고다에서 죽음을 당한 예수님을 생각하며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김대건은 한강 새남터로 끌려나갔습니다. 이 곳은 무수한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한 자리입니다. 김대건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깊숙히 들어간 그의 눈은 여전히 밝게 빛났습니다. 두려운 기색이 조금도 없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가 보통 인물이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목을 벨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포교가 나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숨을 죽였습니다. 여러분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믿어 주십시오. 내가 외국 사람들과 만나 사귄 것은 결코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오로지 우리 나라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서 온 마음을 바쳤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삶을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죽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김대건은 말을 마치고 가만히 두 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하였습니다. 잠시 후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김대건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은 25세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1846년 9월 16일의 일이었습니다. 김대건이 죽은 지 3년 뒤,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이 귀국하였고, 탄압 속에서도 천주교는 더욱 널리 전파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887년에 이르러서서는 마침내 천주교의 탄압이 중지되었습니다. 그 뒤 천주교는 나날이 발전하여 오늘날 우리 나라의 주요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신도 수만 해도 1백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1925년 7월 5일은 우리 나라 천주교 역사에 길이 남을 영광스러운 날이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김대건을 비롯한 우리 나라 순교자 76명과 프랑스 선교사3명 등 79명을 복자로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대건은 1984년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답니다. 이로써 그는 전세계의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존경과 찬미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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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불꽃놀이. 개경거리는 설날을 맞아 새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음식상을 차리느라 바빴고, 아이들은 때때옷을 입고 떼를 지어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설날이 그지없이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새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게 제일 즐거웠습니다. 해마다 설날이 되면 궁궐에서 불꽃놀이를 했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이 아이들에게는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윽고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주위에 어둠이 깔렸습니다. 거리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매우 붐볐습니다. 사람들은 궁궐 쪽을 바라보며 불꽃놀이가 시작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펑!" 마침내 궁궐 쪽에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불꽃이 치솟았습니다. 캄캄한 밤 하늘에 불꽃이 꽃잎처럼 흩어졌습니다. "야아!" "정말 멋있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근사하다." 사람들 속에서 불꽃을 바라보던 한 소년이 소리쳤습니다. 소년의 나이는 10살 정도 되어 보였으며,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무척 총명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저 불꽃은 무엇으로 만드나요?" "글쎄. 화약으로 만든다고 하는 것 같더구나.” "화약이요? 그럼, 화약은 어떻게 만드나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묻니?" 어머니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저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냥 구경이나 해라." 이윽고 불꽃놀이가 끝나자 소년은 곧장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아버지!" "오냐, 구경은 재미있었느냐?” 아버지가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네,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불꽃놀이를 할 때 쓰는 화약은 어떻게 만드나요?" "그건 아무도 모른단다." “그럼, 오늘 불꽃놀이에 쓴 화약은 어디서 난 거예요?"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그건 중국에서 가져온 거야. 화약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었거든. 그런데 중국은 화약 만드는 법을 비밀에 부치고 다른 나라에는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고 있단다. 다른 나라에서 화약을 무기로 사용하면 곤란하거든.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화약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다. "그렇군요." 그제서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버지는 이어서 말하였습니다. "화약만 있으면 우리 나라를 자주 침범하는 왜구들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왜구는 일본의 해적 떼를 말하는데, 그들은 당시 자주 해안에 나타나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왜구를 무찌르기 위하여 여러 모로 노력하였으나, 좀처럼 그들을 소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왜구들은 해안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 근처인 예성강 어귀에까지 나타나 행패를 부렸습니다. 소년도 왜구들의 행패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화약만 있으면 왜구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소년은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아버지, 제가 화약 만드는 법을 알아 내겠어요." 소년의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른들도 못 하는 일을 어린 네가 어떻게 한단 말이냐?"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습니다.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반드시 화약을 만들어서 저 못된 왜구들을 쳐부수겠어요.” 소년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화약을 발명하여 왜구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무선입니다. 재주 많은 소년. 최무선은 개경에서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최동순은 벼슬아치들에게 월급으로 줄 곡식을 관리하는 부서인 ‘광흥창’의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최무선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 번 가르쳐 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책 읽기를 무척 즐겼으며, 특히 과학에 관한 책을 좋아하였습니다. 당시는 과학 기술을 천하게 여기던 때였으나, 최무선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동네에 있는 대장간을 찾아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장장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뜨거운 불에 쇠를 달구어 온갖 연장을 만들어 내는 광경은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최무선은 대장장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대장장이들은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일에 흥미를 가진 양반집 도령이 귀여워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도련님, 이런 건 알아서 뭘 하려고 그러세요?" 그 날도 대장간을 찾아간 최무선에게 한 대장장이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단단한 쇠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게 신기해서 그래요. 나도 한번 해보았으면.......” 최무선의 말에 다른 대장장이가 펄쩍 뛰었습니다. “도련님도 별말씀을 다하시네요. 이런 천한 일을 양반집 도련님이 어떻게 하신단 말이에요? 앞으로는 그런 말씀 마세요. 대감 마님이 아시면 크게 꾸중하실 거예요." 그러자 최무선이 또렷한 목소리로 대꾸하였습니다. “이 일은 결코 천한 일이 아니에요. 아저씨들이 좋은 연장을 만들어 주셔야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거잖아요." 최무선의 야무진 말에 대장장이들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로 최무선은 책에서 읽은 지식으로 대장장이들에게 충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건 이런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대장장이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 와서 대장간 일에 대해서는 도련님보다 더 잘 알아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거예요." 하고 최무선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배운 방법이 최고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무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좋은 점은 이어받고 나쁜 점은 고쳐야 발전할 수 있는 거야.' 그리하여 최무선은 새로운 기술에 관한 것을 책에서 읽으면 꼭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최무선은 틈틈이 중국말을 익혔습니다. 하루는 이를 본 친구가 이상히 여겨 물었습니다. “왜 중국말을 공부하니?" "응. 배워 두면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최무선의 말에 친구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필요할 땐 역관에게 부탁하면 되잖니." "그야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중국과 왕래가 잦잖아. 그들의 문화나 풍속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들의 말을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당시 고려는 중국의 원나라와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때문에 개경에서 가까운 예성강의 벽란도에는 외국의 장삿배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원나라의 배가 가장 많았습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상인이었지만 때로는 아라비아 상인도 있었습니다. 최무선은 중국 상인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최무선은 중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성격 탓에 최무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최무선은 무예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튼튼하였던 최무선은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술도 열심히 익혔고, 무예에 관한 책도 열심히 읽어 이론에도 밝았습니다. 왜구들의 노략질. 어느덧 세월이 흘러 최무선은 씩씩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무기를 만드는 군기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최무선은 이 곳에서 새롭고 편리한 무기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밤낮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화약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한동안 잠잠하던 왜구들이 다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350년 2월에는 많은 왜구들이 고성, 거제도 등의 남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그 전에도 왜구들이 여러 번 고려를 침략했지만, 이번처럼 대대적으로 쳐들어온 적은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급히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군관이 도착하였을 때는 왜구들이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습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더욱 엄하게 해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2개월 후인 그 해 4월, 순천부에 많은 왜구들이 또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세금으로 받은 곡식이나 물건을 도읍인 개경까지 운반하는 배를 노략질하여 곡식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6월에는 합포도 왜구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1년에도 몇 차례씩 왜구의 침입을 받자, 해안 지방의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특히 진도현 같은 경우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현청을 세 번씩이나 육지 쪽으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해인 1351년 8월에도 왜구들이 배 1백여 척을 이끌고 경기도 해안 지방에 나타나 노략질을 하는 등, 그들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왜구들이 남해안뿐만 아니라 경기도 지방에까지 나타나자, 개경의 인심도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왜구들은 멀리 중국 원나라의 해안 지방에까지 가서 노략질을 했습니다. 왜구들의 중국 해안 침범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여 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 이후 더욱 심해졌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후,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까지 지배하기 위해 일본에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원나라 세조는 마침내 일본 원정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해인 1274년, 고려의 장군 김방경과 원나라의 장군 홀돈(혼도라고도 함)이 이끄는 3만여 명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러 갔습니다. 연합군은 쓰시마 섬을 거쳐 규슈 지방을 공격하였으나, 때마침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 정벌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7년 후인 1281년 여 원 연합군은 2차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1차 원정 때와 마찬가지로 김방경과 홀돈이 4만여 명의 연합군을 지휘하였습니다. 이들은 규슈 연안의 여러 섬을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태풍과 질병으로 많은 군사를 잃고 실패하여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이 실패하자, 왜구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날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왜구는 여원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분풀이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왜구들이 행패를 부린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최무선은 분노에 몸을 떨었습니다. 어느 날, 최무선은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넌지시 말하였습니다. "화약만 있으면 제멋대로 날뛰는 왜구들을 무찌를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육지로 올라오기 전에 화포로 배를 부수어 버리면 노략질을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흠, 그럴듯한 이야기로군." 최무선의 말에 동료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알 수가 있어야지. 원나라에서 제조법을 다른 나라에 가르쳐 주려 하지 않으니.......” 최무선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탄하였습니다. 화약 연구에 몰두하다. 그러던 어느 날, 최무선은 무경총요라는 책을 구하였습니다. 이 책은 송나라 때의 증공량이라는 사람이 쓴 것인데, 화약을 만드는 비법이 적혀 있었습니다. 즉 화약은 염초에 유황과 숯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만든다는 것입니다. 최무선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우선 숯과 유황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큰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염초였습니다. 화약의 원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염초인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무선은 의약서에 염초 만드는 방법이 나와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의약서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열심히 의약서를 살펴보던 최무선은, 마침내 염초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검은 흙을 물에 넣어 끓이면 염초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무선은 곧 하인들을 시켜 검은 흙을 긁어모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흙을 물에 탔습니다. 잠시 후 흙이 전부 바닥에 가라앉자, 최무선은 조심스럽게 윗물을 가마솥에 따라 그 물을 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흙을 긁어모으고 불을 때던 하인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하였습니다. 이윽고 하인 하나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최무선에게 물었습니다. "주인 어른, 도대체 이 흙탕물을 왜 끓이는 겁니까?" "염초를 만들려고 그런다." "염초라니요?" "화약의 원료로 쓰이는 염초 말이다." 잠시 후, 물이 거의 다 졸았지만 솥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무선은 실망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물의 분량을 다르게 해 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끓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도 염초를 얻지 못하자 최무선은 다른 흙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최무선은 하인들에게 명령하여 마루 밑과 담장 밑의 흙을 모아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인들이 흙을 긁어모으자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흙을 모아서 뭘 하려고 그래?” "그 흙으로 팥죽이라도 쑤려는 건가?" 하며 빈정거렸습니다. 하지만 최무선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계속되는 실패. 그러는 동안 또 몇 년이 지났습니다. 그 날도 최무선은 하인들과 함께 흙을 가라앉힌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지하였습니다. 물이 차츰차츰 줄어들자 솥 밑에 하얀 가루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인 어른, 저것 보세요!" 하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최무선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아아, 이제야 염초를 얻게 되나 보다.' 최무선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솥의 물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침내 물이 전부 졸아들고 솥 밑바닥에는 하얀 가루가 조금 남았습니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불 위에서 솥을 내려놓았습니다. "주인 어른, 이것이 틀림없는 염초죠?" 하인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글쎄, 불을 붙여 봐야 알겠지." 최무선은 하얀 가루를 긁어모아 황과 숯을 섞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싯돌을 그어 불을 붙였습니다. 불을 붙이는 최무선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불은 붙을 듯하다가 그대로 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흙을 좀더 넉넉히 넣고 끓이되 약한 불에서 잘 휘저으며 끓이도록 하여라. 또 불이 너무 세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알겠느냐?" "염려 마십시오. 주인 어른." 하인이 힘차게 대답하였습니다. 최무선이 군기감에 나간 후, 하인은 최무선이 일러 준 대로 정성스럽게 흙을 끓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얀 가루가 제법 많이 나왔습니다. 이윽고 저녁 무렵, 최무선이 군기감에서 돌아왔습니다. “주인님, 이번엔 하얀 가루가 제법 많이 생겼습니다.” "음, 그렇군. 어디 불을 붙여 보자." "주인님, 또 실패로군요. 이제 어떻게 하죠?" 하인은 금세 풀이 죽어서 물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최무선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최무선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가루 속에는 염초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도 함께 섞여 있는 게 분명해.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염초만을 뽑아 낼 수 있을까?'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최무선은 며칠 동안 여러 책들을 뒤적이며 궁리를 했지만, 도저히 그 방법을 알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예성강 나루터에서. 그 무렵 최무선은 자주 예성강 가에 나갔습니다. 혹시라도 중국에서 염초 만드는 일을 해 본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그것밖에 없어' 최무선은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오는 배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최무선은 마음이 좋아 보이는 중국 사람을 발견하면 슬며시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였습니다. "안녕하시오?" 이 때에는 최무선이 소년 시절부터 익혀 온 중국말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낯선 남의 나라에서 자기 나라 말을 들은 중국인들은 최무선에게 친밀감을 느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화약 이야기만 나오면 한결같이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난 그런 건 모릅니다.” 그들은 이렇게 잡아떼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최무선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 최무선은 용기를 잃지 않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최무선은 여러 날을 두고 이런 식으로 염초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맸으나,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번번이 허탕만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최무선은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오늘도 허탕이로구나! 이러다가 어느 세월에 화약을 만든단 말인가? 몇 년이 지나도록 제자리 걸음이니.......’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최무선은 다시 용기를 내어 예성강 나루터로 나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또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왜구들은 여러 차례 침입해 왔으나 최영과 이성계 등이 활약하여 왜구들의 공격을 잘 막아 냈습니다. 왜구들이 쳐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최무선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아, 하루빨리 화약을 만들어서 왜구를 소탕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으니 낭패로군!' 중국 상인 이원.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최무선은 중국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느라고 하루 종일 나루터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중국 배 한 척이 강가에 닿았습니다. 그 배에서는 많은 중국 사람들이 내렸습니다. 최무선은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이 좋고 점잖아 보이는 중국 상인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 사람에게 한번 접근해 보자.’ 최무선은 이렇게 마음먹고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 중국 상인은 천천히 배에서 내렸습니다. 최무선은 슬며시 그에게로 다가가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중국 상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중국 상인은 최무선을 훑어보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최무선은 그의 소매를 잡아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중국 상인의 이름은 이원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최무선은 이원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가 염초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중국인들은 어느 정도 친해진 후에도 화약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는 것을 최무선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무선은 그런 눈치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이원을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든지 털어놓을 정도로 친해졌습니다. 이원은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기 위하여 몇 년째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무선이 실험실로 쓰고 있는 헛간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원은 염초에 대해서는 결코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무선은 슬쩍 이원의 속마음을 떠보았습니다. "나는 벌써 오랫동안 화약을 만들기 위해 애써 왔소. 그러나 내 능력이 모자라서인지 몇 년이 지나도록 성공하지 못하고 있소. 중국에는 화약 공장이 많다고 들었소. 그대는 혹시 화약을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소?" 그러자 이원은, “나는 그런 것 모르오.” 하고 시치미를 뚝 떼었습니다. 최무선의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 차자 이원은 마음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화약은 왜 만들려는 거요?" 최무선은 이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최무선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고려는 오래 전부터 왜구들에게 시달려 왔소.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과 대포가 필요하오. 그런데 그 방법을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지요." 최무선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이원은 그의 애국심에 감동했습니다. '이토록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를 쓰다니.......' 그날 밤, 이원은 마음의 갈등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원은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끝에 최무선을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원은 곧 최무선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습니다. "사실, 나는 화약 만드는 법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라의 비밀이기에 그 사실을 감추어 왔소. 그런데 당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마침내 결심하였소. 내가 화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소." 최무선은 너무나 반가워 이원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최무선의 눈에 눈물이 어렸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나를 도우시는구려! 내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리다." 이렇게 해서 최무선은 마침내 화약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룩한 성공. 다음 날부터 이원은 최무선에게 염초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차근차근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고, 최무선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습니다. 드디어 흙에서 염초를 뽑아 내던 날, 최무선은 감격에 겨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이원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은혜라니 별말씀을 다 하시오. 내 지식이 그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됐소.” 그 동안 이원도 왜구들의 만행에 대해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홍산 대첩이 있은 지 두 달이 지난 1376년 9월, 전라도 고부 지방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관아를 불사르고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곧이어 전주도 함락되어 왜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왜구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최무선은 화약을 만드는 데 더욱 열중했습니다. 최무선의 집에서는 하루 종일 연기가 치솟았고 화약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최영이었습니다. “왜구들에게 쫓겨 도읍을 옮긴다면 왜구들은 우리 고려를 얕보고 더욱 날뛰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민심이 크게 흔들려 농사일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읍은 옮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최무선은 잠자는 것도 잊은 채 화약 만들기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꽤 많은 화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젠 그 화약을 화포로 쏘아 성능을 시험해 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최무선은 한적한 곳으로 나갔습니다. '제발 성공했으면.......’ 최무선은 떨리는 손으로 화포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화포의 심지가 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최무선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윽고 심지가 다 타 들어가더니, "쾅!" 하고 폭음과 함께 화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와아!" “성공이다." 최무선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최무선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연달아 화포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때마다, "쾅!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덩이가 날아갔습니다. 그 광경은 참으로 통쾌하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최무선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평생의 소원을 이룬 데서 오는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이윽고 최무선은 하인들을 둘러보며 말하였습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보다시피 우리도 이제 화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화약으로 왜구를 무찌를 날도 머지않았다. 앞으로도 많은 일이 남아 있으니, 고달프더라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참고 도와주기 바란다."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인 어른." 하인들도 기쁨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힘차게 대답하였습니다. 냉담한 대신들. 실험에 성공한 최무선은 곧 국가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가장 높은 관청인 도당을 찾아갔습니다. 최무선은 가지고 간 화약을 대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게 무엇이오?" "화약입니다." "화약?" 대신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최무선을 바라보았습니다. "네, 이 화약을 사용하면 포악한 왜구들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약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 일은 저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부디 화약을 만드는 관청을 설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최무선이 벼슬자리를 탐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내가 화약을 만든 것은 오로지 왜구를 무찔러 나라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 외에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최무선은 이렇게 말하고 도당을 나와 버렸습니다. 최무선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허탈하였습니다. 화약을 만들기 위하여 온갖 고생을 다하고 조금 있던 재산마저 모조리 쏟아부은 그였습니다. 물론 그는 화약을 발명한 대가로 어떤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하지만 최무선은 대신들이 자신의 참뜻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어 낸 이 무렵은 왜구의 노략질로 인해 나라 안이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나라 곳곳은 왜구들의 행패로 피해가 막심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조정은 마침내 정몽주를 일본으로 보내 왜구의 행패에 대하여 항의하고, 그들이 우리 나라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왜구의 노략질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최무선은 또다시 도당을 찾아가서, "하루 속히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무찔러야 합니다."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신들은 코웃음만 칠 뿐, 한 사람도 최무선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화통도감을 설치하다. 대신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했지만 최무선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물러선다면 그 동안의 고생이 헛일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최무선의 정성에 감복한 사람들이 차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377년 10월, 조정에서는 화통도감이라는 관청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화통도감의 제조에 최무선을 임명하였습니다. 고려의 우왕은 최무선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우리 고려에 화약에 대해서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대를 화통도감의 제조로 임명하니 힘껏 일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최무선은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날부터 최무선은 화약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화약뿐만 아니라 화포, 불화살 등 새로운 무기도 많이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화약과 화포를 만드는 공장들도 최무선의 열정에 감동하여 열심히 일을 도왔습니다. 우왕은 이따금 최무선을 불러 일의 진행 상황을 물어 보았습니다. "화약 만드는 일은 잘 되어 가오?" "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인도 한번 직접 보고 싶구려." "준비가 되는 대로 날을 정해 전하를 모시고 화포를 쏘아 실험을 해 보이겠습니다.” 드디어 우왕 앞에서 화포의 성능을 실험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우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실험장으로 나왔습니다. 최무선은 천천히 화포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화포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심지로 쏠렸습니다. 곧이어, "쾅!" 하는 폭음과 함께 화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와아!" "굉장하구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날의 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왕을 비롯하여 예전에 최무선을 비웃던 대신들까지도 입을 모아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화약과 화포로 거둔 대승리. 1380년 8월, 개경의 민심은 또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왜구들이 수백 척의 배를 거느리고 진포 앞바다에 나타난 것입니다. 왜구들은 이 곳에 배를 대 놓고 육지로 올라가 마음대로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곧 조정에 알려졌습니다. 우왕은 대신들과 함께 대책을 의논하였습니다. "왜구 떼가 또다시 진포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다는데 그들의 배가 5백여 척이 넘는다고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우왕의 목소리는 침통하였습니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왜구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해도 도통사로 있던 최영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습니다. "전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에게는 화약과 화포가 있으니, 왜구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덕부를 도원수, 나세를 상원수,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왜구를 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른 신하들도 최영의 말에 찬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원수가 된 최무선은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화포와 화약으로 무장한 고려의 전함은 기세 등등하게 진포로 향했습니다. '드디어 화포로 왜구를 무찌를 날이 왔구나! 오랫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 최무선은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고려 전함이 진포 앞바다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그 곳에는 왜구들의 배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왜구들의 배는 풍랑에 흔들리지 않도록 밧줄로 한데 묶여 있었습니다. 이를 본 최무선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심덕부에게 말하였습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배들이 저렇게 몰려 있으니 화포를 쏘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그렇소. 하늘이 우리를 돕는가 보오." 심덕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군사들에게 명하였습니다. “자, 이제 때가 왔다. 우리 배에는 화약과 화포가 있으니, 용감히 싸워 한 척의 배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쳐부수도록 하라!" 한편 왜구들은 고려의 전함이 몰려오는 것을 보자, 칼을 빼어 들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전함들은 가까이 오지 않고, 멀리서 왜구들의 배를 빙 둘러싸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데......?" 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려의 전함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순간, 왜구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습니다. 고려 전함들이 그들을 향하여 화포를 겨누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왜구들은 당황하여 서둘러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쏴라!" 최무선이 신호를 보내자 고려의 전함에서는 일제히 화포를 쏘기 시작하였습니다. "쾅!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습니다. 화포와 함께 불화살도 빗발치듯 날아갔습니다. "휘익 휙!" 왜구의 배에서는 이내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왜구들은 배들을 밧줄로 한데 묶어 놓았기 때문에 흩어져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왜구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왜구들은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다가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를 본 고려군은 신이 나서 계속 화포와 불화살을 쏘아 댔습니다. "쾅!" "휘익 휙!" 잠시 후, 왜구들의 배는 불길에 휩싸인 채 모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바다에는 왜구의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고 타다 남은 나무조각만이 어지럽게 떠다녔습니다. 5백여 척이나 되는 배가 몽땅 격침된 것입니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고려군은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만세!" 도원수 심덕부와 상원수 나세도 기뻐하며 진심으로 최무선을 칭찬하였습니다. "최 장군, 정말 수고가 많았소. 오늘의 승리는 모두 장군의 공이오." "감사합니다." 최무선의 눈에 눈물이 어렸습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은 것입니다. 한편 육지로 노략질을 하러 나간 왜구들은 진포에 남아 있던 동료들이 무참하게 패한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음껏 노략질을 하고 바닷가로 돌아온 왜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마치 성과 같이 진을 치고 있던 5백여 척의 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들은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부상한 왜구 몇 명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보자 왜구의 우두머리가 성급하게 물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고려의 전함들이 화포를 싣고 와서 우리 배들을 모조리 부숴 버렸습니다. 우리들만 간신히 살아 남아 숨어 있었습니다.” “뭐라고?” 왜구의 우두머리는 기가 막혔습니다. 이제 왜구들은 배가 없어져 돌아갈 길이 막막하였으나 그대로 항복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궁지에 몰리자 그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최후의 발악이었습니다. 왜구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여러 고을을 누비며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성계로 하여금 왜구들을 치게 하였습니다. 이 때 왜구들은 함양과 운봉 등을 짓밟고, 지리산에 진을 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 곳에서 한숨을 돌린 다음 다른 지방을 공격할 작정이었습니다. 이성계는 남원에서 배극렴의 군대와 합세하여 지리산으로 향하였습니다. 이성계의 군대와 왜구는 지리산 근방인 황산에서 맞닥뜨렸습니다. 싸움은 치열하였습니다. 왜구들은 악착같이 저항하였지만 이성계의 뛰어난 지략으로 전멸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황산 대첩’으로, 1380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진포 대첩이 있은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것입니다. 이 때 죽은 왜구의 수가 1만여 명에 이르렀으니,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왜구들의 기세는 차츰 꺾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려군이 승리하고 개경으로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큰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고 후한 상을 내렸습니다. 공로가 큰 최무선은 영성군에 봉해지고, 광정대부 검교문하부사 삼중대광이라는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 해는 최무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해였습니다. 왜구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애타게 기다렸던 아들까지 얻었던 것입니다. 최무선은 이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럭무럭 자라는 아들을 바라보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화통도감의 폐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383년, 남해의 관음포에 또다시 왜구가 나타났습니다. 최무선은 해도 원수 정지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관음포로 달려갔습니다. 왜구들의 배는 120척이나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고려의 배는 47척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화약과 화포로 무장한 고려군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도 두렵지 않은 무기가 있다!" 싸움이 시작되자 고려군은 왜구의 배에 화살을 마구 퍼부어 댔습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화포를 쏘았습니다. 왜구들의 배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17척이나 되는 왜구의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자 왜구의 우두머리는 당황하였습니다. “이럴 수가....... 안 되겠다. 분하지만 일단 후퇴하는 수밖에.......” "빨리 이 곳을 벗어나라!" 싸울 힘을 잃은 왜구들은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대로 살려 보내지 말라!" 고려군은 허둥지둥 도망가는 왜구의 배를 향해 더욱 맹렬히 화포를 쏘았습니다. 그 후에도 왜구들은 여러 번 쳐들어왔으나 그 때마다 크게 패하고 돌아갔습니다. 계속해서 왜구들이 패하고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이제 왜구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대신들 사이에서는 화통도감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이제 왜구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었으니, 왜구들도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화통도감을 폐지하여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는 것이 좋을 듯싶소." 이 말을 들은 최무선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왜구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화통도감에서 화약과 무기를 많이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왜구들의 기세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워낙 간악한 놈들이라 언제 또다시 침입해 올지 모릅니다. 이제부터 더욱 부지런히 무기와 화약을 만들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야 합니다." 최무선은 이렇게 주장하였으나 대신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화통도감이 폐지된 것은 이성계의 지시에 의해서였습니다. 이성계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와 최무선 등 몇몇 사람은 이성계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자 이성계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내는 화통도감을 두려워하여 그 책임자 최무선의 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화통도감을 폐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화통도감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1389년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화약과 함께 살아온 한평생. 화통도감이 폐지된 후, 최무선은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일생을 화약과 함께 살아온 그였기에 마음이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오직 그에게 보람이 있다면 아들 해산이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습니다. 최무선의 아들 해산은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해산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데 더 열중하였습니다. '흠,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구나. 마치 내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군.' 최무선은 아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해산은 엉뚱한 행동도 곧잘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냇가에 앉아 물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하면,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였습니다. 최무선은 이런 해산이 기특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가끔 해산을 불러다 놓고 과학에 관한 기본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화약 만드는 일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럴 때면 해산은 눈을 빛내며 열심히 듣곤 하였습니다. 이런 아들을 보며 최무선은, '빨리 크거라.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내가 이루지 못한 많은 일들을 하거라.'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이 무렵 최무선은 몸이 쇠약해져 병으로 자리에 눕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화약을 연구하느라 무리한 탓에 몸이 쇠약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최무선은 마음이 매우 초조해졌습니다. ‘해산이가 아직 어리니 언제 자라서 화약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익힐 것인가! 또 그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도 잘 모르는 일이고.......’ 최무선은 며칠 동안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화약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화약 만드는 법을 책으로 남겨 놓으면,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아들이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최무선은 책을 집필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서재에서 지냈습니다. 최무선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갔지만, 일평생 연구해 온 것을 책으로 쓴다고 생각하니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책을 집필하면서 최무선은 자신이 젊었을 때 화약에 관한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 없어 고생하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최무선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세하고 알기 쉽게 책을 써 나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라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운이 기운 고려가 망하고, 새 나라 조선이 건국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새 나라의 첫 임금이 되니 그가 곧 태조입니다. 이 무렵 최무선은 집에서 책을 쓰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최무선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 자리에 누워 지내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다. 최무선은 조용히 지난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일생을 오직 화약과 함께 지냈으나 후회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뿌듯한 것은 화약에 관한 책을 남기게 된 일이었습니다. 최무선은 그 동안 화약수련법과 화포법 등의 책을 완성해 놓고 있었습니다. 1395년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최무선은 마침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최무선은 부인과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앉혔습니다. “부인, 이제 내 목숨이 다한 것 같구려. 한평생을 화약에만 미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나를 묵묵히 뒷바라지해 온 부인의 내조를 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저는 오로지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을 따름입니다." 부인이 울먹이며 대답하였습니다. 최무선은 한동안 부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아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해산아, 너도 이제 다 자랐구나. 네가 훌륭하게 되는 걸 보고 싶었는데.” 해산은 눈물을 참느라 얼굴을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최무선은 아들 해산에게 자신이 집필한 책을 가져오게 한 뒤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해산아, 이 책들은 화약에 관하여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적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훌륭한 화약을 제조하도록 해라. 그리고 그 동안 나 때문에 고생만 하신 네 어머니를 정성껏 모셔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최무선은 다시 한 번 부인과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최무선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해산의 나이 16세였습니다. 해산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태종이 조선의 제3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은 우리 나라 최초로 화포를 만든 최무선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고 아들 해산에게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최해산은 아버지가 젊었을 때 일하던 군기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최해산이 처음 일하러 나가는 날,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엄숙한 목소리로 분부하였습니다. “상감께서 아버님을 잊지 않고 너에게까지 벼슬을 내리시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너도 열심히 일하여 아버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제가 군기감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버님의 훌륭한 정신을 이으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반드시 아버님이 못다 하신 일을 이룰 테니 너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최해산은 또렷이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러한 아들이 대견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최해산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책들을 보며 밤이 새도록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해산은 군기감에서 일한 지 반년 만에 주부로 승진하였습니다. 아버지 최무선에게는 우정승, 영성 부원군 등의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최무선이 죽은 지 6년이 지난 1401년 11월의 일이었습니다. 태종의 은혜에 감격한 최해산은 더 나은 화약과 화기의 개발을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화약의 성능은 좋아져서 1407년경에는 이전의 것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화약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또 화차와 완구 등의 새로운 무기도 개발하였습니다. 최해산은 새로 만든 무기를 태종 앞에서 시험하여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불을 뿜으며 달리는 화차와 화약이 터지면 돌덩이가 날아가 목표물을 정확히 부숴 버리는 완구를 보고 태종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군!" 태종은 비단과 말을 내려 최해산의 공을 치하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벼슬도 올려 주어 그는 군기감승을 거쳐 군기감의 부책임자인 군기소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계속해서 많은 화기와 화약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태종이 즉위하던 해인 1400년에 는 4근 4냥(16냥이 1근)밖에 안 되던 화약이, 1418년에는 6천 9백여 근으로 늘어났습니다. 또 2백여 개 정도이던 화포도 1만 3,500여 개가 되었으며, 화포를 쏘는 포병도 1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최해산이 18년간 군기감에서 일하는 동안 화약과 화기의 발전은 눈부셨습니다. 그는 군기감의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자하문 밖에 큰 무기고를 만들어 새로 만든 무기들을 보관하였습니다. 1417년에는 화약 감조청이라는 화약 제조 공장도 세웠습니다. 큰 화약 공장을 만드는 일은 최무선이 생전에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최해산은 이제야 아버지 앞에 면목이 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마침내 아버지의 평생 소원이시던 화약 공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화약과 화기를 많이 만들어, 언제라도 적의 침입을 막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께서 미련한 저를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최해산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1418년 8월,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최해산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세종은 본래 과학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 임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때에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 많은 발명품이 쏟아져 나와 백성들의 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해산은 군기감의 총책임자인 군기감 판사가 되어, 화약 기술을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최해산은 아버지가 남긴 화약 제조법을 물려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그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화약 감조청 벽에 그들의 공로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글은 당시의 유명한 문장가 정이오가 지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왜구가 우리와 감히 승부를 겨루지 못하게 된 것은 진포의 싸움과 남해에서의 큰 승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에게 예물을 바치게 된 것은 우리의 화포 공격으로 혼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약이야말로 군대의 심장과 같아서 임금은 그것을 사용하여 나라를 빛내고 왜구를 물리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30년 동안 왜구들이 날뛰는 가운데에서도 평화스러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화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무선은 왜구를 막아 내기 위해 화약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평생 그것을 연구하는 데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끈기와 집념을 기울여 우리 나라 최초로 화약을 만들어 냈습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 또한 아버지의 뜻을 훌륭히 이어받아 화약과 무기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최무선으로부터 시작된 자주 국방에의 소망은 아들 최해산에 이르러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화약이 처음 만들어진 지 벌써 6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화약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최무선 부자는 과학자이자 애국자로서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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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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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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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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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얘가 도대체 어딜 간 걸까?' 벌써 몇 시간째 어머니는 온 동네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미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더욱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앨, 어디에 있니? 제발 대답을 좀 하렴, 앨!" 이제는 집안 식구 모두가 앨을 찾아 나섰습니다. 놀이터에도 가 보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앨은 없었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도 오늘은 아침부터 앨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엉뚱한 짓으로 식구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라서 가족들은 더욱 조바심이 났습니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에게 문득 헛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헛간 쪽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어두컴컴한 헛간 한 구석에 앨이 잔뜩 웅크린 채 앉아있었습니다. "앨!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쉿! 엄마, 조용히 하세요. 저는 지금 알을 품고 있단 말이에요." 걱정스런 표정의 어머니와는 달리 앨은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뭐? 알을 품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앨은 달걀을 잔뜩 끌어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알을 끌어안고 있으면 병아리가 되는 줄 아니?" "며칠 전에 저에게 알을 따뜻하게 해 주면 병아리가 된다고 하셨잖아요." "호호호! 그건 어미닭이 알을 품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지. 사람이 알을 품는다고 병아리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 어머니는 화가 난 것도 잊고 큰 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이 호기심 많은 소년 앨이 훗날 위대한 발명왕이 된 토머스 앨바 에디슨입니다. 앨은 에디슨의 어릴 적 애칭입니다.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주의 밀란에서 아버지 새뮤얼과 어머니 낸시의 일곱 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에디슨의 아버지는 밀란에서 양철판 공장을 경영하였는데, 틈틈이 곡식을 사고 파는 장사도 겸했습니다. 그 당시 밀란은 밀의 집산지로 유명했습니다. 이 부근에서 거두어진 대부분의 밀은 마차에 실려 다른 도시로 운송되었고, 그 밀을 운반하기 위해 큰 배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밀란으로 들어왔다 나갔습니다. 이런 분주함 속에서 밀란은 나날이 발전하였고 아버지의 사업도 한동안은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디슨이 태어났을 무렵, 밀란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여러분야에서 새롭게 발판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링컨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그 이름이 유명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교통수단으로는 증기선 외에 철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모스가 발명한 전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시카고에서는 매코믹(미국의 과학자)이 곡식 거두는 기계를 발명하여, 그 기계를 만드는 큰 공장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미국에는 연이어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 우수한 발명가와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에디슨이 위대한 발명가가 된 데에는 이러한 시대적인 영향도 컸습니다. 이 무렵 무엇보다도 에디슨의 호기심을 끈 것은 집 앞을 오고 가던 마차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에 금이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짐수레 위에 포장을 씌운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이 포장 마차를 '초원의 돛단배'라고 불렀습니다. 포장마차를 보면서 궁금한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엄마, 저 포장 마차는 어디에서 오는 거예요?" "동쪽 지방에서 오는 모양이더라." "무얼 하러 왔어요?" "여기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캘리포니아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엔 금이 많이 묻혀 있다는구나. 그 금을 캐러 가는 도중에 이 곳을 지나는 거란다." 에디슨은 캘리포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금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밀란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넓은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에게는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알고싶은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 아무라도 붙잡고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비는 왜 오나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지요?" "배는 어떻게 움직이나요?" 에디슨은 꼬치꼬치 캐물어서 기어코 그 의문점을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알려고 하다 보니 에디슨은 이따금 엉뚱한 사고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강가에서 뗏목을 만들어 놀다가 뗏목이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고, 벌집을 쑤시다가 심하게 쏘인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에디슨은 대장간에 놀러갔습니다. 에디슨은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곧 에디슨은 호기심에 찬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 불은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불을 피우니까 생기는 거지." "불을 피우면 어째서 불이 붙는 거예요?" "어이구, 귀찮아라. 불을 피우면 불이 붙고,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지는 거야." 대장장이는 귀찮다는 듯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은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스스로 알아보기 위하여 닭장 안에서 불을 피웠습니다. "불이야, 불!" 불씨는 순식간에 닭장 전체로 번졌고, 당황한 에디슨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다행히 공장 사람들과 이웃 사람들이 즉시 달려와 주었기 때문에 헛간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불장난을 하다니! 혼 좀 나야겠구나." 아버지는 몽둥이로 에디슨의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아버지, 불은 어째서 생기는 거예요?" 에디슨은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는 습관은 훗날 발명왕 에디슨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에디슨이 7살이 되던 1854년 3월의 어느 날, 에디슨 가족은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웃 마을 철도가 놓인 이후로 밀란 마을이 한산해져서, 아버지의 장사가 잘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디슨 가족이 새로 이사 간 곳은 미시간에 있는 포트휴런이라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동쪽 창문으로는 맑고 푸른 휴런 호수와 굽이쳐 흐르는 세인트클레어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고, 서쪽과 남쪽에는 소나무와 떡갈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새 보금자리에 만족했고, 아버지는 목재나 가축의 먹이, 밀 따위를 파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집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전망대를 만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전망대를 '에디슨의 바벨 탑'이라 부르며, 전망대에 올라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이 전망대를 좋아한 사람은 에디슨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하루 종일 전망대에 올라가서 책을 읽으며 놀거나 사람들에게 전망대를 안내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1855년 8살이 된 에디슨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에디슨이 다니게 된 학교는 교실이 하나밖에 없는 아주 작은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인 클리포드 씨는 가죽 채찍을 옆에 두고 공부를 가르치는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에디슨은 학교 공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성적이 좋지 못했습니다. 공부 시간에도 딴짓을 하거나 때때로 엉뚱한 질문을 해서 선생님을 당황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더욱 무섭게 꾸짖으며, 소리내어 우는 에디슨을 집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에디슨이 학교에 입학한 지 3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에디슨은 엉뚱한 질문을 해서 클리포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장학관이 교실로 들어섰습니다. 클리포드 선생님과 에디슨을 번갈아 쳐다보던 장학관은 클리포드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을 야단치는 거죠?" "네. 저 학생은 바보랍니다. 어찌나 머리가 나쁜지." 그 말을 들은 에디슨의 눈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곧바로 교실을 뛰쳐나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에디슨은 어머니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저 이젠 학교에 가지 않겠어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어서 얘길 해 봐, 앨." 에디슨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듣고 난 후, 어머니는 선생님의 교육 방법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는 화난 마음을 진정시키고 에디슨과 함께 학교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선생님에게, "이 아이는 당신보다 훨씬 머리가 좋습니다. 앞으로 에디슨의 교육은 제가 맡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에디슨을 데리고 학교를 나와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디슨은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의 실험실. 그 날 이후 어머니가 에디슨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에디슨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이해하기 쉽도록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에디슨에게 자연 과학 학교라는 책을 사주었습니다. 그 책에는 집에서도 간단하게 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실험들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책에 소개되어 있는 실험들을 직접 해 보고 싶었습니다. '좋아. 나도 내 실험실을 갖는 거야.' 그로부터 얼마 후, 에디슨은 지하실에 쌓여 있던 갖가지 잡동사니를 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몇 가지 실험에 필요한 도구들은 평소에 모아 두었던 용돈으로 장만했습니다. 자신의 실험실을 갖게 된 에디슨은 매일같이 실험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늘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엉뚱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이 정전기를 발견한 이야기를 읽고 난 후, 에디슨은 직접 실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에디슨은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잡아 꼬리를 철사로 묶고, 털을 쓱쓱 문질러 전기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깜짝 놀라 에디슨의 손을 할퀴고 달아났으며, 에디슨의 손에는 고양이가 할퀸 상처가 흉터로 남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에디슨은 하늘에 떠 있는 열기구를 보고 열기구가 어떻게 공중에 오래도록 떠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엄마, 커다란 열기구가 어떻게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나요?" "열기구 속에는 공기보다 가벼운 가스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란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에디슨은 가스를 이용해서 실험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몸 속에서 가스가 만들어진다면 사람도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에디슨은 친구인 마이클을 자신의 실험실로 불러들였습니다. "마이클, 너 하늘을 날아 보고 싶지 않니?" "에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가 있니?" "이 약을 먹으면 하늘로 떠오를 수 있어." 에디슨은 가루약을 물에 타서 마이클에게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거품이 잘 나는 비등산이라는 약품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어쩐지 겁이 나. 이걸 먹어도 괜찮을까?" "두고 보라고. 넌 아마 독수리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 수 있을테니까." 마이클은 에디슨의 말만 믿고 그것을 단숨에 마셔 버렸습니다. "어때?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지?" "아니야. 앨,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말을 마치자마자 마이클은 배를 움켜쥐고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배야!" 마이클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는 곧 마이클에게 물을 먹이고, 약을 토해 내게 했습니다. 다행히 마이클은 정신을 차렸지만, 그 일로 인해 한동안 침대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마이클이 앓아 눕자 어머니는 에디슨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앨, 가스라고 해서 모두 공기보다 가벼운 것은 아니란다. 더욱이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야. 절대로 사람을 실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돼. 알겠니?" "네, 잘못했어요, 엄마." 에디슨은 이 날 어머니의 꾸지람 속에서 '절대로 사람을 실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는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꼬마 신문 판매원. 한편 1859년 포트휴런 시에 철도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시카고를 출발하여 북쪽의 캐나다까지 뻗어 있던 그랜드 트렁크에 이어지는 철도였습니다. 포트휴런 역의 철도 개통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여 축제를 벌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행사장에 갔던 에디슨은 열차 안에서 신문이나 과자 파는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꼈습니다. 에디슨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그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쉽게 허락하지 안았습니다. 매일 아침 7시에 포트휴런을 출발해서 디트로이트까지 갔다가, 밤 9시에 포트휴런으로 돌아오는 일은 12살의 아이에게 무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끈질긴 설득에 부모님은 끝내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디슨은 이튿날부터 열차 안에서 신문과 과자를 팔게 되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에디슨은 이 일이 마냥 즐거웠습니다. "맛있는 과자가 있습니다. 신문도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 신문 한 장 사 보세요." 이 일을 하면서 에디슨은 열차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판매원 노릇을 하는 에디슨을 기특한 아이라고 칭찬하며 꼬마 판매원 에디슨을 좋아했습니다. 에디슨은 신문 파는 일을 하면서 열차 안에 실험실을 차려 놓고 실험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차를 타고 다니느라 실험에 몰두할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에디슨은 자신의 생각을 차장에게 말해 보았습니다. 차장은 뜻밖에도 선뜻 승낙을 해 주었습니다. 에디슨은 곧바로 지하실에 있던 시험관과 화학 약품이 들어 있는 병, 전기 부품 등을 열차의 화물칸 구석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열차가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도록 튼튼한 선반을 만들어 거기에 실험 도구를 얹어 두었습니다. 열차 안에 실험실이 만들어지자 에디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즐거움 뒤에는 언제나 슬픔과 불행의 그림자가 뒤따르는 모양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에디슨이 소리를 잘 듣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에디슨은 열차를 타야 할 시각에 거의 임박하여 역에 도착했습니다. 허겁지겁 플랫폼으로 달려갔을 때, 열차는 막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한쪽 손으로 간신히 열차의 난간을 붙잡았으나, 다른 쪽 팔로 신문을 잔뜩 안고 있었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차장이 에디슨의 양쪽 귀를 잡고 열차 안으로 끌어올려 주었습니다. 간신히 열차에 오르기는 했으나, 에디슨은 머릿속에서 무엇 인가가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에디슨의 귀는 조금씩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에디슨이 어렸을 때 심하게 열병을 앓고 난 후 소리를 잘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튼 소리를 잘 들을 수 없게 된 후, 에디슨은 혼자서 책을 읽거나 실험하는 데 더욱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해였습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노예 제도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노예 해방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에 찬성하는 북부와 반대하는 남부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남북 전쟁으로, 무려 4년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끔직한 전투가 연일 계속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전쟁에 쏠렸습니다.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서 전쟁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중요한 소식이 있는 날에는 자연히 신문의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이런 날에 팔리는 신문의 양은 평상시의 몇 배가 되었기 때문에, 그 날 필요한 신문의 양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신속한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전쟁 소식을 빠르게 알 수는 없을까? 참, 전신을 이용하면 되겠구나.' 에디슨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아 신문 판매량을 정확히 예측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차에서 만든 최초의 신문. 사람들에게 보다 빠른 소식을 전해 줄 방법을 궁리하던 에디슨은 자신이 직접 신문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디트로이트에 있는 고물상을 다 뒤지고 다닌 끝에, 약간 낡기는 했으나 쓸 만하다 싶은 인쇄기를 한 대 구입하였습니다. 인쇄기를 산 후, 에디슨은 본격적으로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를 쓰고, 활자를 뽑고, 인쇄하는 일까지 모두 혼자서 해냈습니다. 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신문 이름은 위클리 헤럴드로 정해졌습니다. 에디슨은 1주일에 400부를 인쇄하여 1부에 3센트씩 팔기 시작했으며, 남북 전쟁의 소식은 물론이고 지방 뉴스나 철도 이야기, 열차의 시간표까지 실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년 혼자서 만들었다는 사실에 호기심거리로만 여기던 사람들도 재미있는 가사에 차츰 호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위클리 헤럴드는 날이 갈수록 인기를 끌어 영국의 런던에 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에디슨은 위클리 헤럴드의 인기가 높아지자 개인적인 사건을 다룬 기사를 추가해서 실었고, 이러한 기사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신문의 판매 부수는 더욱 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체격이 우람한 한 남자가 세인트클레어 강변을 거닐고 있던 에디슨에게 다가왔습니다. 남자는 에디슨을 보더니 다짜고짜 목덜미를 움켜쥐었습니다. "이 녀석, 네가 바로 신문에 내 흉을 잔뜩 써 놓은 놈이지? 그런 건방진 짓을 하는 놈은 혼 좀 나야 해!" 남자는 에디슨을 번쩍 들어 강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에디슨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가까스로 강둑으로 기어 올라왔습니다. '남의 비밀을 공개하면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구나. 앞으로는 남의 일을 함부로 신문에 싣지 말아야겠는걸.' 잘못을 뉘우친 에디슨은 그 날부터 신문 만드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밤 디트로이트를 출발한 열차가 포트휴런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철로를 통과하고 있을 때, 실험을 하기 위해 병에 넣어 두었던 인이 선반에서 떨어지면서 불이 붙었습니다. 에디슨은 서둘러 불을 끄려고 했으나 불길은 잡히지 않고 퍼져 가기만 했습니다. 순식간에 열차 안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차장이 양동이에 모래를 담아 가지고 와서 간신히 불을 껐지만, 이미 열차는 검게 그을러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차장은 열차 밖으로 실험 기구와 인쇄기를 모두 집어던졌고, 에디슨은 더 이상 열차 안에서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862년 8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어느 날처럼 에디슨은 디트로이트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마운트클레멘스 역에서 열차는 화물차를 한 칸 바꾸기 위해 잠시 멈춰 서 있었습니다. 화물차를 바꾸려면 시간이 걸렸으므로 에디슨은 잠시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그 때 맞은편 선로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그 쪽을 향해 무심코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선롯가에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선로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위험해!" 에디슨은 재빨리 선로로 뛰어가 아이를 끌어안고 철길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역장 메켄지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메켄지 씨는 감사의 의미로 에디슨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메켄지 씨는 에디슨이 전신에 관심이 있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전신 기사의 일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매켄지 씨의 제안은 에디슨에게 무척 큰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어요." 그로부터 5개월 동안 에디슨은 매켄지 씨로부터 전신 기술을 배웠습니다. 배우는 에디슨이나 가르치는 매켄지 씨나 열의를 다했습니다. 1863년 겨울, 고된 강습을 마친 에디슨은 포트휴런으로 돌아와 조그마한 전신국을 차렸습니다. 새로 생긴 전신국은 수입이 형편없었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행히 성실하게 일한 보람이 있어 전신 기사 에디슨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극심한 추위가 몰아닥쳐 세인트클레어 강 밑바닥을 통해 포트휴런과 캐나다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전신선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통신은 완전히 마비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강이 꽁꽁 얼어 있었으므로 전신선을 다시 이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철도 회사에서 낡은 기관차를 빌려 강변으로 운전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기적을 울려 모스 신호를 보냈습니다. 강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 중에도 전신 기사가 있었는데, 저쪽에서 들려 오는 기적 소리를 듣자 그 신호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응답 신호를 보내 왔습니다. 사람들은 강을 서로 마주보고 기관차의 기적 소리를 통해 통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에디슨은, 캐나다 온타리오의 스트래트포드 역에서 전신 기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야간 근무를 해야 했지만, 에디슨은 오히려 이 조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밤에는 지나다니는 열차가 적어서 일하기가 편할 뿐 아니라, 낮에는 좋아하는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역에서 일하는 전신 기사는 1시간 간격으로 토론토에 있는 본사 사무실에 신호를 보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디슨도 처음에는 착실하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매시간마다 신호를 보내는 일이 무척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에디슨은 자명종 시계에 톱니바퀴를 붙여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전신기가 자동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이 장치는 에디슨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정확하게 토론토에 신호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사에서 스트래트포드 역의 전신기사를 불러내는 전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보내도 그 회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보내도 그 회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본사에서는 스트래트포드역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에디슨이 꾀를 부린 것이 그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에디슨은 호되게 야단을 맞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에디슨의 나이 17살이었습니다. 그 후 4, 5년 동안 에디슨은 미국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전신 기사로 일했습니다. 비록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전신 기사로서는 손색이 없었습니다. 에디슨은 전신 기사 일을 하면서도 보다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일할 수 없을지 늘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에디슨은 모스 신호 자동 기록기, 자동 재생 전신 장치 등을 발명했으나, 그 당시에는 아무도 에디슨은 발명품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에디슨은 유능한 전신 기사였던 밀턴 애덤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밀턴 애덤스의 회고에 의하면, 그 당시 에디슨의 호주머니 속에는 늘 나사못이나 망치 같은 연장이 들어 있었으며, 월급의 대부분을 책이나 실험 도구를 사는 데 써 버렸기 때문에 언제나 빈털털이였다고 합니다. 어느덧 19살이 된 에디슨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일하는 동안 발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1869년 22살이 된 에디슨은 뉴욕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지만, 에디슨에게는 훌륭한 발명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실 에디슨이 꿈꾸는 발명가의 길은 매우 힘들고 험했습니다. 충분한 돈이 있어야만 발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발명품은 사람들이 알아주어야만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발명가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주위의 무관심에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에디슨은 1868년 자신의 최초의 발명품인 '전기 투표 기록기'를 만들었을 때에 이미 발명가의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기계는 투표를 할 때 가만히 앉아서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찬성과 반대의 표를 즉시 알 수 있게 해 주는 장치였습니다.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한 에디슨은 직접 메사추세츠 주 의회와 국회로 찾아가 '전기 투표 기록기'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기계를 본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편리하긴 하지만 우리들에게 꼭 있어야 할 기계는 아니로군요. 이런 기계를 사용하면 소수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빼앗게 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 결정해 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에디슨은 크게 실망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발명품이라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느덧 에디슨이 타고 있는 배는 뉴욕 항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에디슨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던 에디슨은 전신 기사로 있을 때 함께 일했던 프랭클린 포프를 기억해 냈습니다. 에디슨은 로즈 회사에서 전신 기사로 일하고 있는 포프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물가가 올라 돈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값이 확실한 금을 사고 파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금값의 시세를 신속하게 파악하는 일이 투자가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로즈 회사는 이러한 상황을 잘 파악하여 다이얼을 돌리면 자동으로 금값을 알 수 있게 되는 기계를 발명해 냈습니다. 다행히 에디슨은 예전에 전신으로 금값을 알리는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프는 일자리가 생길 때까지 에디슨이 회사의 기계실에서 지내도록 해 주었습니다. 에디슨이 로즈 회사에 있게 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회사의 기계들이 멈춰 서 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기사들이 달려들어 조사해 보았지만, 어느 곳이 고장인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표시기를 사용하는 증권 회사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몰려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최선을 다해 고치고 있습니다." 사장인 로즈까지 당황해서 기계실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 때 에디슨이 사장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사장님, 기계 기술자는 아니지만 제가 한번 고쳐보겠습니다." "좋아, 어서 해보게."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 사장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허락했습니다. 기계를 조사하던 에디슨은 부러진 용수철 하나가 톱니바퀴에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용수철을 꺼내고 스위치를 올리자, 스르륵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자네가 이 일을 해결했구먼. 정말 수고했네." 로즈 사장은 에디슨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이 일은 에디슨에게 큰 행운을 안겨 주었습니다. 에디슨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된 사장은 매달 300달러의 월급과 주임이라는 직책을 주어 에디슨을 채용하기로 한 것 입니다. 에디슨은 로즈 회사의 기술 주임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발명에 대한 생각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식 시세 표시기를 더욱 편리하게 개량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던 끝에, 훨씬 빠르고 편리한 주식 시세 표시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로즈 사장은 그 기계의 특허권을 회사측에 넘겨주면 에디슨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에디슨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에디슨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사장은 성급하게 독촉했습니다. "어때. 4만 달러 정도면 나한테 넘겨주겠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디슨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작 5천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만 달러라는 큰돈을 손에 쥔 에디슨은 뉴저지 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마련했습니다. 에디슨의 나이 24세 되던 해였습니다. 이 뉴어크에서의 6년 동안은 에디슨의 일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발명의 성과도 컸던 기간이었습니다. 처음엔 고작 5명의 종업원을 데리고 일을 시작했지만, 점점 일이 밀려 나중에는 종업원이 25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에디슨은 이처럼 큰 공장의 사장이 되었으면서도 종업원들과 함께 기름투성이가 되어 일했고, 바쁜 공장 일에 쫓기면서도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은 하루에 겨우 4시간만 자며 일에만 파묻혀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루 동안에 무려 40여 가지의 발명품을 내놓은 적도 있다고 하니, 그의 발명에 대한 노력과 열의를 짐작하고도 남을 만합니다. 일에 있어서는 이렇게 욕심이 많은 에디슨이었지만, 돈을 버는 일에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연구와 실험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발명에만 몰두하던 에디슨에게 1871년 4월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서둘로 포트휴런으로 달려갔습니다. 지독하게 장난이 심했던 어린 시절에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감싸주시고, 학교를 그만둔 후에는 어떤 선생님보다도 훌륭하게 가르쳐 주셨던 어머니! 오늘날이 있기까지는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의 힘이 무엇보다도 컸음을 에디슨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연구에 전념하자.'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에디슨은 새롭게 결심을 다졌습니다. 에디슨은 혼자 남은 아버지와 함께 뉴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교회의 주일 학교 선생님인 메리 스틸웰과 결혼했습니다. 메리는 착하고 영리했을 뿐만 아니라, 에디슨의 발명에 대하여 이해심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에디슨은 메리의 그런 면을 좋아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에디슨은 5개나 되는 공장을 가질 만큼 노력의 성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에디슨이 가장 노력을 기울인 분야는 전신 기술과 기계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시간과 노력과 돈을 모두 실험에 쏟아 부어 자신의 독특한 창의력을 살려 나갔습니다. 그는 자동 전신기를 발명한 데 이어, 한 줄의 전선으로 두 가지의 전신을 동시에 보낼 수 있는 2중 전신기와 네 가지의 전신을 보낼 수 있는 4중 전신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에디슨이 전신기를 내놓자, 그의 발명품을 차지하려고 여러 회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에디슨은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에디슨은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연구에만 몰두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마침내 1876년, 에디슨은 뉴저지 주에 있는 멘로파크라는 작은 마을에 2층으로 된 실험실을 새로 마련하고 이사를 했습니다. 에디슨도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바쁜 일 때문에 그들보다 늦게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1876년 그레이와 벨은 거의 같은 시기에 '말하는 전신기', 즉 전화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벨이 먼저 특허권을 따냈기 때문에 그가 최초의 전화 발명가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레이도 같은 날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지만, 불과 몇 시간 차이로 최초의 전화 발명가의 명예를 벨에게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1876년 7월,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 된 벨의 전화기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벨이 만든 전화기는 엷은 금속판의 밀림을 이용하여 사람의 음성을 전선으로 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속판을 한 장밖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할 때에는 입에 대고, 들을 때에는 귀에다 대야 하는 불편함이 따랐습니다. 더구나 통화할 수 있는 거리가 불과 3km 이내이며, 작은 소리는 분명하게 들리지 않아 몇 번이나 큰 소리로 다시 말해야 했습니다. '입에 대고 말하는 송화기를 따로 만들어 수화기와 분리해서 달면, 벨 전화기의 단점을 보완할 수가 있겠는걸.' 에디슨은 벨의 전화기를 개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얼마 후, 마침내 에디슨은 전화기를 완성하여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거리가 무려 172km나 떨어진 뉴욕과 필라델피아 사이에서 이루어진 통화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에디슨의 이 전화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기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에디슨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에디슨은 송화기를 만들기 전에, 돌아가는 둥근 종이판에 전신기에서 보내 오는 전문을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다른 기계에 걸어서 전문이 전해지는 장치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원래 쓰고 있던 종이관 대신에 파라핀이 스며든 긴 종이 테이프로 실험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계가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무슨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희미하기는 했지만, 마치 사람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순간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테이프에 바늘의 움직임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 떨림을 읽어 다시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에디슨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는 재빨리 연필을 들고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종이 위에 이상한 모양의 기계가 그려졌습니다. 에디슨은 그것을 조수 존 클루시에게 건네주며, 그 설계도대로 기계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틀 후, 클루시는 희한한 기계를 하나 만들어서 가져왔습니다. 연구실의 직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상하게 생긴 기계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이 기계는 두 개의 나팔 사이에 원통이 달려 있고, 그 원통의 손잡이를 돌리면 움직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에디슨은 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기계와 에디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노래를 마친 에디슨은 손잡이를 반대로 돌렸습니다. 그러자 방금 부른 노래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직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럴 수가! 기계가 노래를 하다니." "기계 안에 또 다른 에디슨이 들어 있어요!" 에디슨은 이 기계의 이름을 '축음기'라고 지었습니다. 이 축음기에 대한 소문은 또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에디슨은 마술사다!" 그의 축음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맨로파크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한 번씩 축음기에 대고 말을 해 보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새 에디슨은 '맨로파크의 마술사'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에디슨은 전기를 이용하여 불을 켜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에디슨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백열 전등이었습니다. 이 백열 전등은 유리공 속의 공기를 빼내고 그 속에 가느다란 금속 막대기나 탄소 막대기를 넣어서, 거기에 전기를 통하게 하여 빛을 내는 구조로 되어있었습니다. 전기를 빛으로 바꾸는 문제와 보다 나은 백열 전등을 만들려는 연구는 에디슨이 시작하기 전부터 많은 발명가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습니다. 1820년 프랑스의 드라 리브가 최초로 백열 전등에 관한 실험을 한 이후, 미국의 스타, 영국의 스완, 러시아의 로지긴과 콘 등이 연구를 했으나, 아무도 10초 이상 불이 켜지는 백열 전등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1879년 1월, 에디슨은 전구 속의 공기를 펌프로 빼내고 그 속에 얇은 백금으로 된 필라멘트를 넣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한 시간 정도 켜져 있었습니다. 어렵게 만들어 낸 전등이 비록 실용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한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에디슨은 백열 전등의 연구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진행시켰습니다. 첫째는 발전기를 만드는 일, 둘째는 전구 속에 들어 있는 공기를 보다 확실하게 빼낼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일, 셋째는 보다 성능이 좋은 필라멘트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연구를 거듭하던 끝에 전구 속의 공기를 빼내는 장치와 발전기는 1879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필라멘트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에디슨은 백금 대신 다른 물질을 필라멘트로 쓸 수는 없을까 고심했습니다. 백금은 구하기가 어렵고 값도 비쌌기 때문에 필라멘트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디슨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는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해 밤낮 없이 노력했습니다. 적어도 천 시간 정도는 꺼지지 않고 빛을 낼 수 있는 전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에디슨의 실험 노트에는 탄화를 시도한 재료의 이름이 수없이 기록되었고, 식물 이름만 해도 6천여 종에 이르렀습니다. 생각나는 재료를 닥치는 대로 탄화해서 진공 상태의 유리공 속에 넣고 불을 밝히는 실험을 무수히 해 본 결과, 마침내 목면 섬유의 탄소에서 적당한 필라멘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1879년 가을, 에디슨은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전등 실험을 하겠노라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발명한 전등을 보기 위해 멘로파크로 모여들었습니다. 에디슨은 천천히 스위치를 올려 유리공 속에 약한 전류를 흘려 넣으며 성경의 한 구절을 읊조렸습니다. "빛이여, 영원하리라!" 심지는 천천히 붉은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유리공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 밤이 깊어 갔지만, 전등은 꺼질 줄 모르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멘로파크의 언덕까지 쏟아지는 환한 전등 불빛은 창문 너머로 밤새도록 밝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불빛, 그것은 세상에 내려진 새로운 빛이었습니다. 전등은 거의 48시간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습니다. 1879년 10월 21일, 에디슨의 나이 32세 때였습니다. 전구를 만들어 낸 에디슨은 어려운 고비 하나를 넘긴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또다시 이루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일들이 에디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구를 실생활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스위치, 소켓, 플러그, 퓨즈 등의 기구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전기를 조금씩 나누어서 가정으로 끌어들이는 방법과 전선을 연결하는 방법도 생각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기를 대량으로 일으킬 수 있는 커다란 발전기도 필요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할 일은 전등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에디슨은 이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습니다. 에디슨은 우선 뉴욕에 큰 공장을 세우고, 새로운 발전기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은행들이 모여 있는 월 가에 커다란 발전기를 설치하고, 거기에서 전선을 끌어다가 전등을 켜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잠시도 쉴 겨를 없이 발전기 공장과 전선을 연결하는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감독을 했습니다. 1882년 9월 4일, 마침내 월 가에 발전기가 설치되었습니다. 건물마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등에 불이 들어와 거리가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하지만 저걸 어떻게 집 안에 달지?" "글쎄,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은 거 아니야?" 전등이 좋은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막상 자기 집에서 전등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전구 값이 무척 비쌌고, 잘못하면 누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등으로 인해 타격을 입게 된 가스등 제조업자들이 모두 모여 전등 사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해요소 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발전소에는 잇달아 주문이 들어왔으며, 에디슨은 잠시도 쉴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빠졌습니다. 에디슨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느라 병을 얻어 앓아 눕기도 했고, 집에 몇 번씩 불이 나기도 했으며, 믿었던 친구에게 귀중한 발명품을 도둑맞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일은 1884년 8월, 아내 메리가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난 일이었습니다. "오 메리. 나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에디슨은 그로부터 2년 동안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전등과 축음기에 대한 주문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다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에디슨은 뉴저지 주의 웨스트오렌지에 멘로파크에 세웠던 것보다 열 배나 큰 연구소와 공장을 세우고, 그 곳으로 옮겨 와 살게 되었습니다. 1886년 봄, 마이너 밀러와 재혼한 에디슨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 웨스트오렌지의 연구실에서 다시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에디슨은 몇 년 전에 만든 축음기를 개량하여 훨씬 진보된 축음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주석 막을 두른 원통 대신에 납을 사용한 것으로, 그 것과 똑같은 레코드를 몇 장이라도 만들 수 있는 장치와, 바늘을 가볍게 뜨게 하는 방법도 알아냈습니다. 또 에디슨은 얼마 전부터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 생각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림이나 사진 속 대상을 조금씩 자세를 바꾸어 연속적으로 보여 주면 마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에 여러 장의 사진을 비출 수 있는 기계와 축음기를 짜 맞추면,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움직임까지도 그대로 남겨 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에디슨은 조수인 바첼러, 딕슨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에디슨의 이야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냐, 충분하게 실험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는 일이네. 우선 기계 공장에 연락해서 여기에 그려진 기계를 만들도록 하게나." ".." 멍하니 서 있는 딕슨에게 에디슨은 자신이 그린 설계도를 내보였습니다. 곧 에디슨의 설계도대로 사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에디슨은 그 사진기를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마침내 수십 번의 실험 끝에 움직이는 영상, 즉 활동 사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 에디슨의 나이 42세 때였습니다. 이 활동 사진은 그 후에 이스트먼이라는 사람에 의해 영화용 두루마리 필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894년 4월 14일,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첫선을 보여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한편, 당시 에디슨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실업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업가로서는 유능하지 못했습니다. 에디슨은 하루에 18시간을 일하는 자신과 비교해서 고용인들도 최소한 11시간은 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에디슨의 주장에 대해 회사 노동자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은 일할 수 없다고 맞섰기 때문에 에디슨과 고용인들 사이에는 대립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등 사업에 있어서는 경쟁 회사와 쉴 새 없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휴,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군." 회사 일에 지쳐 버린 에디슨은 새로 생긴 제너럴 일레트릭 회사에 전등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전등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습니다. 발명가의 일과 실업가의 일을 동시에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에디슨은 전등 사업에서 손을 떼고 한동안 발명에 전념하다가 철광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에디슨은 롱아일랜드 해안에 갔다가 우연히 검은 모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래에 자잘한 철광석이 섞여 있어서 검게 보였던 것입니다. 에디슨은 즉시 강한 힘을 지닌 자석을 주문해서 자석으로 모래와 철을 구분해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석을 가지고 다시 해안으로 갔을 때, 공교롭게도 심한 폭풍우가 불어 닥쳤습니다. 그 바람에 해안의 검은 모래가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 버렸습니다. 에디슨은 다른 철광산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에디슨은 뉴저지 주의 옥덴스버그 마을 부근에서 커다란 철광산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곳은 바위가 많은 지대라서 바위를 부수지 않고는 철을 캐낼 수가 없었습니다. 에디슨은 곧 바위를 부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들려오는 소음과 많은 먼지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항의가 잇달았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무렵 힘들이지 않고도 파낼 수 있는 철광산이 5대호의 하나인 이리 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무려 10년이나 걸렸고 그 동안 2백만 달러나 되는 많은 돈을 투자하였지만, 그만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에디슨의 관심을 끈 것은 자동차였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자동차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라는 발명가가 대중적인 자동차를 만들어 내 교통 수단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에디슨은 헨리 포드가 만든 자동차를 보면서 앞으로의 자동차는 전기 모터와 축전지를 사용해서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증기 엔진을 사용하게 되면 자동차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되고,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면 자주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축전지는 오랫동안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무게도 엄청나게 무거웠기 때문에 에디슨의 주장은 무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에디슨은 가벼우면서도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축전지를 만들기 위해 다시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는 에디슨이 지금까지 손을 댄 그 어떤 발명보다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1년 동안 오로지 축전지 한 가지만을 연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에디슨의 나이도 60세가 되어 머리가 거의 세었습니다.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연구에만 매달려 있는 에디슨을 바라보며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연구만 하시면 몸에 해로워요. 어디 조용한 곳에라도 가서 잠시 쉬셔야겠어요." "쉬다니? 쉬는 날은 내가 바로 죽는 날일 거요, 하하하!" 에디슨은 부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유쾌한 목소리로 껄껄 웃어 넘겼습니다. 몸은 점점 지쳐 갔지만,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에디슨은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발명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축전지로, 10년 동안 무려 5만 번 이상의 실험을 거친 후에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70세에 이르자 에디슨은 점점 더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유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잠시 연구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쉬는 동안에도 연구에 대한 의욕은 식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에디슨은 '자동차의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로 부터 고무를 연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무는 자동차 바퀴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지만, 미국에서는 고무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전쟁이라도 일어나 외국으로부터 고무가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면 자동차 생산 공장은 하루아침에 마비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디슨은 또다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80세 때인 1927년, 에디슨 식물 연구소가 세워졌습니다. 에디슨은 1만 7천여 가지가 넘는 식물을 실험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드디어 고무 채취 실험이 성공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골든로드라는 풀에서 100파운드의 고무를 얻었습니다. 곧 더 많은 양의 고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앞으로의 발전은 무한합니다." 한 신문 기자가 앞으로의 발명 계획에 대해서 묻자, 에디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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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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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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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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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움직이고 싶어요. 이름난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학교의 수업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좋아, 그런데 왜 과학자가 되려고 하지?"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왜,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해서요." "모든 공부가 그렇지만 특히 과학은 궁금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바란다. 자, 다른 사람은?" 이번에는 금발에 몸집이 가냘픈 소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빌! 넌 이 다음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전 백만장자가 될 거예요." 이 엉뚱한 대답에 아이들은 와 웃었습니다. 선생님도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세상을 움직이고 싶어서요." 그 대답에 선생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빌은 옆에서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장래에 무엇을 하든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 소원대로 빌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가 되어 세상을 크게 움직였습니다. '컴퓨터 황제'로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 빌 게이츠가 바로 그 빌입니다. 빌 게이츠는 1955년 10월 28일, 미국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아버지 윌리엄 헨리 게이츠 2세, 어머니 메리 게이츠 사이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능력 있는 변호사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학교 선생님을 지낸 어머니는 자선 단체에서 남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는 훌륭한 여성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즐겁게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빌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다른 아이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사실 빌은 좀 특별한 소년이었습니다. 때때로 깊은 생각에 빠져 멍하니 있거나 오랫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학을 좋아했고, 특히 수학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도 초등학교 때에는 성적이 형편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의논했습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상담소가 있다는데, 빌을 데려가 보면 어떨까요?" "당신 좋을 대로 하구려." 그래서 어머니는 빌을 데리고 아동 상담소를 찾아갔습니다. "빌, 학교가 재미없니? 뭐가 못마땅한지 네 생각을 그대로 말해 보렴." 상담소 선생님은 무슨 말이든 다 들어 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사실 빌은 학교 생활이 재미없었습니다. 교과서대로 가르치는 틀에 박힌 공부에 싫증이 났던 것입니다. 빌은 장래에 할 일을 분명하게 정해 두었기 때문에 당장 그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공부라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잘 익히라고 다그칠 뿐이었습니다. "네 말이 옳아. 자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해 두는 건 정말 중요해. 그런데 빌, 그걸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책을 많이 읽는 거야." "책 속에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그리고 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이 다 있으니까." 그때부터 빌은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타잔과 화성인 이야기 같은 소설에서부터 프랭클린 루스벨트, 나폴레옹 같은 위인들이나 위대한 발명가의 일생을 적어 놓은 전기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결심으로 하루 종일 붙들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에 읽은 책들은 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동 상담소에 일 년 정도 다녔을 무렵, 선생님이 빌의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빌은 매우 특별하고 뛰어난 아이입니다. 학교 성적에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 그냥 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빌은 틀림없이 자기가 할 일을 찾아 훌륭하게 해낼 테니까요." 그 후로 빌의 부모님은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들이 하는 대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할 친구. 초등학교를 졸업한 빌 게이츠는 시애틀에 있는 레이크사이드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1967년 빌 게이츠의 나이 열두 살 때입니다. 빌은 레이크사이드 학교에서 평생을 함께할 친구 둘을 만났습니다. 그 둘은 바로 나중에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만든 폴 앨런, 그리고 컴퓨터입니다. 빌이 입학한 이듬해인 1968년, 레이크사이드 학교에서는 매우 놀랄 만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컴퓨터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엔 컴퓨터 값이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개인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컴퓨터 한 대 값이 4백만 달러(우리 돈으로 약 40억 원)나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리고 컴퓨터도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넓은 방에 큰 기계를 몇 대씩 연결해 놓은 모양이었는데, 그 크기도 처음에는 3층 빌딩만 하던 것이 차츰 작아져서 나중에는 책장 크기만 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성능은 오늘날의 컴퓨터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그것마저도 귀해서 한 나라에 몇 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대의 컴퓨터를 여러 군데에서 함께 썼습니다. 즉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회사와 계약을 맺은 다음, 시간을 정해 놓고 빌려 쓰는 것입니다. 레이크사이드 학교의 컴퓨터도 제너럴일렉트릭사라는 큰 회사의 컴퓨터와 연결해서 그런 식으로 빌려 쓰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 컴퓨터를 마련하는 일에는 어머니회가 앞장섰습니다. 바자회를 열어 거둔 3천 달러를 학교에 기증하였던 것입니다. 학교에 컴퓨터가 설치되자마자 빌은 거기에 푹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아, 정말 신기해! 내가 학교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면, 제너럴일렉트릭사에 있는 기계가 그 명령을 받아 글도 쓰고 계산도 하다니." 그러나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나자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빌은 책을 사서 스스로 연구하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우선 컴퓨터 언어, 즉 컴퓨터가 알아듣는 말을 배워야 했습니다. 빌은 책방을 뒤져 사 온 책들을 책상 위에 쌓아 놓고 밤을 새워 가며 공부를 했습니다. 늦게까지 빌의 방에 불이 꺼지지 않자, 걱정이 된 어머니가 살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아니, 이게 다 네가 보는 책들이냐?" 그 책들을 들춰 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이걸로 공부를 한다는 거냐?" "네, 좀 어렵긴 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에요." 빌이 눈을 총명하게 빛내며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아들이 대견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해야지. 이제 그만 불을 끄고 자거라." "네, 엄마." 어머니는 직접 방의 불을 꺼 주었습니다. 그러나 빌은 어머니가 나가자, 다시 살며시 일어나 불을 켜고 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밤을 새우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겨우 일어나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가 보지만 번번이 지각이었습니다. 또 수업 시간에는 영락없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빌 게이츠! 넌 밤엔 뭘 하고 수업 시간에 조는 거냐?" 선생님이 소리치자, 빌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나가서 찬물로 세수하고 와!" 선생님이 다시 호통을 쳤습니다. 빌이 얼굴이 빨개져서 밖으로 나가면 그 때마다 다른 교실에서 나온 폴 앨런과 마주쳤습니다. 폴 앨런은 빌보다 두 살 위였으나, 컴퓨터 때문에 친해져 친구처럼 편하게 지냈습니다. 폴 앨런 역시 컴퓨터라면 빌 못지않게 관심이 많고 또 좋아했습니다. "너 또 어제 밤새웠지?" "너도 마찬가지면서 뭘 그래." 둘은 수돗가에서 서로 마주 보며 웃었습니다. 그런 날이 되풀이되었으나 빌은 결코 지치거나 싫증내지 않고 꾸준히 컴퓨터 공부를 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컴퓨터 언어에 익숙해지자, 빌은 집에서 밤을 새우는 대신 학교 컴퓨터실을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레이크사이드 학교에서 컴퓨터에 빠진 아이들은 빌 게이츠와 폴 앨런 말고도 켄트 에반스, 지미 바일랜스 등 몇 명 더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밤 10시만 되면 약속 장소에 모여 학교로 향했습니다. 컴퓨터실로 가는 것입니다. 교문 앞에 도착하면 아무도 없는지 주위를 잘 살핀 다음, 재빨리 학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따금 순찰을 도는 선생님의 발소리가 들려올 뿐 학교는 조용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컴퓨터실에 들어가서야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만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그들의 손끝에서 날마다 새로운 게임이며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만세! 다 됐다. 네가 한번 해 봐." "좋아!" 친구들 가운데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단연 빌 게이츠였습니다. 빌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도맡아 만들었습니다. 컴퓨터실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돌아오는 일은 날마다 되풀이되었습니다. 말없이 지켜보던 어머니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빌이 학교 컴퓨터실에서 새벽이나 되어야 집에 돌아와요. 당신이 알아듣게 이야기를 하세요." "알겠소." 며칠 후 아버지는 빌을 불러 앉혀 놓고 말을 꺼냈습니다. "빌, 너 요즘 날마다 컴퓨터실에서 밤을 새우다 새벽이 되어야 집에 들어온다면서?" "프로그램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많아요." 빌은 컴퓨터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난 듯했습니다. "빌, 컴퓨터도 좋지만 학교 생활을 제대로 못 하면 안 되지. 네 엄마와 나는 네가 법과 대학에 들어가서 판사나 변호사가 되었으면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일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해도 되지 않을까?" 아버지가 차분히 타이르자, 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그 순간에도 빌의 머릿속은 온통 컴퓨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컴퓨터에 빠진 아이들. 그 후로 빌은 학교 컴퓨터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을 며칠에 한 번 정도로 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 게이츠와 친구들은 뜻밖의 소식에 낙담했습니다. 학교 예산이 모자라 제너럴일렉트릭 사와 맺은 컴퓨터 사용계약을 중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학교 컴퓨터를 쓰지 못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빌과 친구들은 모두들 고개를 떨어뜨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고 컴퓨터에 대한 그들의 뜨거운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과 친구들은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책을 보며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얼마 후, 빌과 친구들은 우연히 마음놓고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한 학부모가 빌과 친구들을 컴퓨터센터 사에 소개시켜 준 것입니다. 컴퓨터센터 사는 워싱턴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 몇 명이 모여서 만든 회사였습니다. 그 회사에는 디지털이퀴프먼트사의 최신 컴퓨터가 한 대 있었습니다. 제너럴일렉트릭사처럼 다른 회사에 컴퓨터를 빌려주는 사업을 할 생각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컴퓨터를 살 때 컴퓨터센터 사는 디지털이퀴프먼트사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만일 컴퓨터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면 그만큼 컴퓨터값을 깎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센터 사로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일, 즉 디버깅 작업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디버깅'이란 '벌레를 잡아내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컴퓨터가 만들어졌을 때에는 모니터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날아든 나방들 때문에 자주 고장이 났습니다. 그 후로 컴퓨터 고장의 원인이 되는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버그(벌레)',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일을 벌레를 잡는다는 뜻에서 '디버그'라고 했습니다. 빌과 친구들은 컴퓨터를 마음껏 만지면서 바로 그 디버깅 작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너희들의 컴퓨터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면서? 한번 열심히 해 봐." "감사합니다!" 그다음 날부터 직원들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인 오후 6시가 되면, 빌 게이츠와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컴퓨터센터 사에 나타났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램과 씨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하는 것이 너무도 재미있어서 이따금 집에 가는 것을 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런 때면 빌은 사무실 안의 쓰레기통을 다 뒤졌습니다. "아니, 빌! 더럽게 쓰레기통은 왜 뒤적거리니?" 폴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직원들이 일하다 버린 자료들을 찾는 거야. 그걸 보면 우리가 모르는 걸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빌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폴은 다정하게 빌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과연 빌이야!" 빌은 쓰레기를 일일이 살펴 필요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회사의 비밀을 엿보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컴퓨터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 있으므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보통 암호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빌은 그 암호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컴퓨터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어떤 것들일까? 암호를 풀어 볼 수는 없을까?'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빌 게이츠는 암호 프로그램을 플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지 마. 회사에서 알면 우린 쫓겨날 거야." 폴과 진구들이 말렸지만, 빌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암호가 풀리던 날, 빌은 저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만세! 암호가 풀렸다!" 컴퓨터 화면에 회사의 비밀 서류들이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빌뿐만 아니라 친구들 또한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컴퓨터 화면이 깜깜해졌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깜짝 놀라 살펴보니, 컴퓨터 전원이 꺼져 있었습니다. 빌은 서둘러 다시 컴퓨터를 켜 보았으나 화면은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고장났나 봐! 큰일났다!" 빌과 친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컴퓨터를 고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도록 컴퓨터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수백만 달러나 하는 컴퓨터를 고장내다니, 대체 누가 그런 거야?" 아침에 출근한 회사 책임자는 화가 나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빌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를 고장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암호를 풀어 회사의 비밀 서류에 침입한 사실이 밝혀지자 회사에서는 펄펄 뛰었습니다. "해킹이 얼마나 큰 죄인 줄 알아? 해킹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과 똑같다고!" '해킹' 이란 다른 사람 또는 다른 회사의 컴퓨터에 침입해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지우거나 빼내는 등의 행동을 말합니다. 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해커'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해커 빌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빌을 엄하게 야단쳤습니다. "앞으로는 공부에나 신경 쓰거라." "만족할 만큼 성적이 오르기 전엔 컴퓨터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라." 자기가 잘못한 일이므로 빌은 부모님께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터 빌은 컴퓨터에 대한 생각을 일단 접고, 학교 공부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 사이에 폴 앨런, 릭 바일랜드, 켄트 에반스는 계속 컴퓨터센터사에 남아 컴퓨터의 문제점을 잡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컴퓨터의 문제점을 적은 300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성과였으나 불행하게도 그 무렵 디지털이퀴프먼트사와 컴퓨터센터 사의 계약이 깨졌습니다. 그러자 디지털이퀴프먼트사에서는 컴퓨터센터 사에 그동안 컴퓨터를 사용한 만큼 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컴퓨터센터 사는 그 돈을 낼 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컴퓨터센터 사 사무실의 의자를 치우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폴 앨런을 비롯한 3명의 소년들은 그들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컴퓨터에만 매달려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의자들이 다 치워져 버린 후에도 소년들은 계속해서 일했습니다. 나머지 사무실 집기들도 곧 치워졌으나, 이 컴퓨터광들의 열기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컴퓨터까지 치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사무실에서 나왔습니다. 어린 프로그래머. 빌 게이츠가 컴퓨터와 담을 쌓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레이크사이드 학교 교장 선생님이 빌을 불렀습니다. 빌은 무슨 일일까 궁금하게 생각하며 얼른 교장실로 갔습니다. "빌, 우리 학교의 학습 시간표를 컴퓨터로 좀 짜 주지 않겠니?" 교장 선생님의 말에 빌은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엔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컴퓨터를 다시 만질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빌은 교장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만족할 만큼 성적이 오르기 전엔 컴퓨터를 만지지 않기로 부모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빌의 말에 교장 선생님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이 올라 다시 컴퓨터를 만질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꼭 좀 도와주렴." "알겠습니다." 그 후로 빌은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마침내 빌은 놀랄 만큼 학교 성적을 올렸습니다. 컴퓨터에서 손을 뗀 지 아홉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빌의 성적표를 흐뭇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잘했구나. 너도 약속을 지켰으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이제 컴퓨터를 해도 좋다." 빌이 다시 컴퓨터를 할 수 있게 되자, 누구보다도 좋아한 사람은 폴이었습니다. 그 무렵 폴은 아버지가 근무하는 워싱턴 대학교의 컴퓨터를 쓸 수 있었습니다. 폴은 빌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로 달려왔습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학교 공부가 끝나면 워싱턴 대학교로 가서 컴퓨터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레이크사이드 친구들이 너도나도 몰려드는 바람에 워싱턴 대학교에서 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보과학사(ISC)라는 회사에서 레이크사이드 컴퓨터반으로 연락을 해 왔습니다. "너희들 실력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났던데, 우리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니?" 그때는 디지털이퀴프먼트사에서 나온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드문 때였으므로, 빌 게이츠와 폴 앨런 같은 컴퓨터 천재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정보과학사에서 그들에게 부탁한 것은 직원들의 월급을 계산해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회사는 일 년 동안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일은 빌과 폴, 그리고 폴과 같은 졸업 반인 릭 바일랜드가 맡았습니다. 세 사람은 열심히 일해서 약속한 날짜에 프로그램을 완성했습니다. 빌의 프로그램을 본 담당자는 감탄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구나! 놀라워!" 그 아르바이트로 빌과 친구들은 일 년 동안 정보과학사의 컴퓨터를 1만 달러어치만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971년, 빌은 전에 교장 선생님께 부탁을 받았던 레이크사이드 학교의 수업 시간표 짜는 일을 했습니다. 사실 그 일은 그 동안 수학 담당 선생님이 맡아서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 선생님이 그만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빌은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컴퓨터를 다시 다루게 되면 수업 시간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 지난번에 약속드린 대로 수업 시간표를 짜 보겠습니다." 빌은 곧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친구 켄트가 등산을 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해 죽었던 것입니다. 빌을 비롯한 친구들은 슬픔에 빠져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가라앉자, 빌은 6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빌과 폴은 수업 시간표 작성용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폴은 텅 빈 학교에서 밤늦도록 빌과 함께 프로그램과 씨름하던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재미있었지만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각자 듣고 싶은 과목이 달랐고, 우리는 모든 반의 학생수가 같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빌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따르면 남자반 학생 한 명이 여학생 10명과 함께 공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면 시간표가 한 반으로 몰리게 되잖아?" 폴이 말하자, 빌은 잠자코 웃었습니다. "실수를 했으면 빨리 고쳐야지." "그건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한 거야. 그 반에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모두 있거든. 그리고 그 한 명의 남학생은 바로 나야." "학교 프로그램을 짜면서 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 빌의 말에 폴과 친구들은 모두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천재 사업가의 싹. 어느 날, 폴 앨런이 빌 게이츠를 찾아왔습니다. 폴은 그 때 워싱턴 주립 대학교 컴퓨터 과학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빌, 우리 함께 일해 보지 않을래?" "무슨 일인데?" "시애틀 시청에서 교통량 조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왔어. 지금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카드에 구멍을 하나씩 내어 나중에 일일이 사람이 세는 방식인데, 그것이 너무 번거로우니까 차가 몇 대 지나갔는지 컴퓨터로 계산할 수 없느냐는 거야." 교통량 조사란 어떤 길을 일정한 시간 안에 지나가는 차나 사람의 수를 조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문제 없어." 빌과 폴은 밤낮없이 컴퓨터에 매달려 시청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시청 직원들 앞에서 프로그램을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카드를 넣으면 컴퓨터가 읽어서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설명을 마친 빌은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화면에는 카드에 찍힌 자료가 차의 종류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 정확하게 나타났습니다. "좋아. 정말 훌륭해!" 시청 직원들은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이 일로 빌과 친구들은 전문적인 프로그래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의 밴쿠버에 있는 TRW라는 큰 전력 회사에서 빌과 폴 앞으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이듬해인 1972년의 일입니다. "우리 회사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일을 해결해 줄 사람을 찾다가 여러분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좀 의논을 하고 싶은데, 우리 회사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빌과 폴은 곧 TRW 회사를 찾았습니다. 빌과 폴의 모습을 보고, TRW 회사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컴퓨터 전문가라면 대단한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어린 티를 못 벗은 학생들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 유명한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자네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자 두 사람에게 믿음이 갔습니다. 컴퓨터에 관한 한 그들은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으며, 또 자신만만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TRW 회사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 우리 회사 일을 맡아 주게. 수고료는 일주일에 165달러씩이고, 일을 하는 동안 불편하지 않도록 회사 근처에 아파트를 빌려 주겠네." 레이크사이드 학교에서 학생이 어떤 회사에서 실습 훈련을 하면 3학년 과정을 마친 것으로 해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은 한 학기를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폴은 다니던 대학을 아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컴퓨터에만 마음이 가 있다 보니 대학 생활이 따분했던 것입니다. "학교를 그만두는 건 좀더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빌이 말렸으나 폴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많이 생각했어." TRW 회사에는 댐을 관리하는 아주 좋은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일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빌은 뛰어난 프로그래머인 존 노턴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중에 노턴 유틸리티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를 보며 빌은 세상에는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몇 달 후, 빌과 폴은 TRW 회사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해 여름 방학 때, 보이 스카우트 대원이었던 빌 게이츠는 하원 의사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어느 날 빌은 하원 매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맥거번과 이글턴의 기념 배지가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맥거번과 이글턴은 공화당의 닉슨과 포드에 맞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 나온 민주당 후보였습니다. "이 배지, 한 개에 얼마죠?" 빌이 매점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 한 개에 10센트야." 그러자 잠깐 무엇인가 생각하던 빌이 불쑥 말했습니다. "이걸 5천 개 사면 한 개에 얼마씩 주실 겁니까?" "아니, 그 많은 걸 다 뭐 하려고 그래?" 매점 주인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빌은 빙긋 웃었습니다. "좀 쓸 데가 있어서요." 그리고 빌은 흥정을 해서 배지 한 개에 3센트씩 5천 개를 샀습니다. "나야 팔아서 좋지만, 도무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배지를 사 가지고 가는 빌의 뒷모습을 보며 매점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얼마 후에 선거가 있었고, 닉슨이 대통령, 포드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소식에 빌은 싱글벙글 좋아했습니다. "이제 이 배지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귀한 물건이 될 거야." 맥거번과 이글턴은 선거에서 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념 배지를 만들어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빌은 그 배지를 한 개에 최고 20달러 25센트까지 받고 비싸게 되팔 수 있었습니다. 훗날의 천재적인 사업가 빌 게이츠다운 일이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 1973년 6월, 빌은 드디어 레이크사이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빌은 하버드 대학 법학과에 입학 허가를 받아 놓았으나, 가끔씩 당장이라도 컴퓨터와 관련된 회사를 차려 일을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법률가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해 가을, 빌 게이츠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빌은 대학에 들어가서 얼마 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습니다. 혼자 방구석에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 밖의 시간에는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소설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어느덧 빌은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보스턴으로 전근한 폴은 저녁이나 주말이면 빌을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법대에 오긴 했는데, 법률 공부는 정말 따분해." "모두들 내가 법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일일 뿐이야. 폴, 나는 세상을 움직이고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 "좋아, 빌! 우리 함께 컴퓨터로 세상을 움직이고 바꾸는 거야!" 빌 게이츠가 마지못해 학교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컴퓨터 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빌, 대단한 뉴스야!" 폴 앨런이 흥분된 표정으로 빌 게이츠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신문 한 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여기 이 기사를 좀 봐." 폴 앨런이 빌 게이츠에게 신문을 내밀었습니다. 그 신문에는 MITS라는 회사에서 알테어 8800이라는 컴퓨터를 내놓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알테어 8800은 세계 최초의 미니 컴퓨터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용 컴퓨터(PC)의 시작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 때로서는 정말 대단한 제품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자기만의 컴퓨터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이 컴퓨터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팔자." "집집마다 컴퓨터를 한 대씩 갖게 되면 우리도 덩달아 성공하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는 폴 앨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도 가슴이 뛰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빌 게이츠는 컴퓨터에 평생을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곧 MITS 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가 알테어 8800에 적합한 프로그램을 만들면 사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든 먼저 제품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하버드 대학교 전산실에서 알테어 8800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잠도 자지 않고 그 일에 매달렸습니다. 남들보다 앞서 만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여 일 후, 두 사람은 프로그램을 완성했습니다. "야호, 성공이다!" "그래, 정말 기적적인 일이야!" 두 사람은 얼싸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자, 어서 이걸 가져다 보여야지." 폴 앨런은 프로그램이 담긴 테이프를 가지고 MITS 사로 갔습니다. 빌 게이츠가 함께 가지 않은 것은 비행기 삯을 아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온 직원이 모여 폴 앨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이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돌려 보시오." MITS 사의 사장 에드 로버츠가 말했습니다. 폴 앨런은 알테어 8800 앞에 앉아, 부디 프로그램이 아무 탈 없이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이윽고 폴 앨런은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그런 다음 가슴이 떨려서 화면을 보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아, 되는군!" 에드 로버츠가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성공이다!" 직원들도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비로소 눈을 뜬 폴 앨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동안 애쓴 것이 물거품이 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것입니다. "좋은 프로그램 덕에 알테어 8800이 많은 사람들에게 팔리게 되었군." 에드 로버츠도 싱글벙글하며 좋아했습니다. 폴 앨런은 전화로 빌 게이츠에게 그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빌, 성공이야!" "정말?"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빌 게이츠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습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이 소식은 컴퓨터를 향해 완전히 마음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알테어 8800은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개발한 프로그램 덕분에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MITS 사에서는 밀려는 주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MITS 사와 계약을 했습니다. 3천 달러를 계약금으로 받고, 컴퓨터 한 대가 팔릴 때마다 또 얼마씩의 돈을 받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폴 앨런은 스물두 살의 나이로 MITS 사의 부장이 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 "학교를 그만두어야겠습니다." 빌 게이츠의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컴퓨터에 대해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어요." "너 도대체 제정신이냐? 남들은 죽어라 애써도 갈 수 없는 하버드 법대를 왜 그만두려는 거냐? 그건 안 된다." 아버지가 펄쩍 뛰었습니다. "빌, 일단 휴학했다가 일 년 후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 때 가서 결정하는 게 어떻겠니?" 어머니도 빌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빌의 결심을 단호했습니다. "이제 곧 모든 집에 컴퓨터가 한 대씩 있는 시대가 올 거예요. 컴퓨터 일을 해서 법관보다 잘 될 자신이 있어요." "세상 일이 꼭 생각한 대로 되는 건 아니다. 내 말대로 하려무나." 어머니가 다시 달래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도망갈 길이 있으면 나약해져서 안 돼요." "제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그래서 빌은 하버드 대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무렵 알테어 8800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여러 회사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프로그램도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알테어 8800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으므로, 더 좋은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 빌 게이츠는 MITS 사의 사장 에드 로버츠를 만났습니다. "이제 알테어 8800으로는 더 이상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컴퓨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드 로버츠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무엇 때문에 돈을 들여 새로운 것을 만든단 말인가?" "지금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팔고 있는데." "지금이야 알테어 8800이 가장 우수하지만, 머지않아 틀림없이 더 뛰어난 제품이 개발될 겁니다. 다른 회사보다 앞서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빌이 차근차근 말했으나, 에드 로버츠는 역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장실에서 나온 빌은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아, 정말 답답해. 하루빨리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데." 폴 앨런도 빌 게이츠와 생각이 같았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1975년 4월에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립하였습니다. 마이크로 컴퓨터, 즉 작은 컴퓨터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라는 뜻입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처음에는 아파트 한 채를 빌려서 사무실로 썼습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두 사람만으로는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이크사이드 학교 시절 함께 컴퓨터를 만지던 친구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였습니다. 빌과 친구들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피곤하면 낮에도 잤고, 일이 밀려 있으면 밤에도 잠을 안 자고 일했습니다. 사람들이 프로그램 개발을 부탁하러 가 보면, 젊은이들이 아무데나 엎드려 잠들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골치 아픈 문제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돈 주고 사기보다는 그대로 베껴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는 많이 팔리는데 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돈 주고 사지 않고 베껴서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생각 끝에 그런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잡지에 실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 한 가지가 나오기까지는 많은 땀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비자들 중에는 그것을 돈도 내지 않고 공짜로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아무도 애써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베껴서 쓰는 것은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개발될 수 있도록 부디 프로그램을 베끼는 일을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빌 게이츠. 이런 글이 잡지에 실리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프로그램 복사를 도둑질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 동안 공짜로 써서 미안하다며 돈을 보내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미국 내에서 불법으로 프로그램을 복사하는 일을 중지하자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MITS 사와의 관계였습니다. 컴퓨터 회사들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프로그램을 쓰고 싶어 하자, 빌 게이츠는 MITS 사 사장 에드 로버츠에게 다른 회사에도 프로그램을 팔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에드 로버츠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 우리 컴퓨터를 위해 개발된 걸세." "그걸 다른 회사에 팔다니, 말도 안 되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빌 게이츠는 변호사인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버지는 빌 게이츠가 서명한 계약서를 살펴보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리다고 우습게 여긴 모양이구나.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내가 도와줄 테니 재판을 걸어라." 그리하여 마이크로소프트사는 MITS 사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습니다. 재판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러자 에드 로버츠는 재판 도중에 MITS 사를 퍼텍이라는 회사에 팔아 버렸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결국 재판에서 이겼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그 일에 매달리느라 다른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늦어졌던 것입니다. 또, 재판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 동안 들어간 돈이 손해배상으로 받은 것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통해서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것은 큰 소득이었습니다. 그 후로 빌 게이츠는 어떤 계약을 하든 서명을 하기 전에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스물한 살. 골치 아픈 일들이 해결된 후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계속해서 발전해 갔습니다. 1977년 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비로소 사무실다운 사무실을 갖추었습니다.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8층 사무실에서 빌 게이츠, 폴 앨런을 비롯한 프로그래머들이 회사의 밝은 미래를 그리며 희망에 차서 일했습니다. 이제 모든 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빌 게이츠를 비롯한 직원들은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회사 규모는 커졌지만 옷차림도, 먹는 음식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생겼습니다. 일이 많아지자,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비서를 한 사람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네 아이의 어머니인 마흔두 살의 미리엄 루보가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그녀를 맞이한 사람은 스티브 우드였습니다. 전화로 이야기할 때 그는 자신을 총지배인이라고 소개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본 미리엄 루보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티브 우드는 수염을 기른 긴 머리의 청년이었는데, 면접을 하는 동안 내내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 앉아 있었습니다. 일주일 후, 스티브 우드는 미리엄 루보에게 전화를 걸어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말했습니다. 출근 첫날, 폴 앨런과 다른 직원들을 만난 미리엄 루보는 사장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장님은 일 때문에 여행을 떠나셨는데, 며칠 내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며 미리엄 루보는 자신이 일하기로 한 회사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사무실로 통하는 모든 문은 열려 있었고, 컴퓨터가 사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프로그래머들이 키보드를 쳐 대면 대단히 긴 서류들이 마치 아코디언같이 바닥에 쌓여 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며칠 동안 일한 미리엄 루보는, 남편에게 '소프트웨어란 수많은 기호가 찍힌 컴퓨터 종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미리엄 루보가 타자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을 때,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한 그 청년은 곧장 사장실로 걸어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리엄 루보는 관계자 외에는 절대로 컴퓨터가 있는 방에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터라, 즉시 스티브 우드의 사무실로 달려가 어떤 청년이 사장실에 멋대로 들어갔다고 보고했습니다. 전혀 놀란 기색도 없이 스티브 우드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분이 바로 우리 사장님입니다." "뭐라고요? 그 청년이 빌 게이츠 씨란 말이에요?" "네." 미리엄 루보는 매우 당황한 얼굴로 스티브 우드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분은 몇 살이나 됐죠?" "스물한 살입니다." 미리엄 루보는 자신이 그야말로 특이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집에 가서 이 말을 하자, 그녀의 남편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월말에 월급을 제대로 줄 수 있는지 잘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그런 걱정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빌 게이츠와 함께 일을 하면 할수록 미리엄 루보는 자신이 참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과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기억력이 매우 정확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으며, 미리엄 루보가 타이프한 서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읽은 후, 그 자리에서 틀린 글자를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미리엄 루보는 빌 게이츠가 일주일 내내 매우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느 때는 아예 며칠씩 사무실을 떠나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빌 게이츠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미리엄 루보는 차츰 빌 게이츠에 대해 마치 어머니처럼 걱정을 하게 되었고, 그가 점심을 거를 때면 그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손님을 만나고 있을 때면, 미리엄 루보는 시계를 보고 있다가 그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손님들도 배가 고플 텐데, 점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때요? 벌써 두 시예요." 빌 게이츠는 단골이 될 가능성이 높은 손님이 오면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런 때면 손님들은 전화를 걸어 미리엄 루보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장님을 미리 알아볼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금발에 안경을 쓰고 있으며, 어딘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청년을 찾아보세요. 그 사람이 바로 사장님이니까요." IBM 사와 손잡다. 1980년, 기업용 컴퓨터만을 만드는 회사인 IBM 사가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 컴퓨터 업계의 공룡이라고 할 수 있는 IBM 사는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어느 날, IBM 사에서 빌 게이츠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새로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 일로 사장님을 만나서 의논을 했으면 합니다만." 순간 빌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인 IBM 사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많이 커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직원이 32명밖에 안 되는 작은 회사였습니다. 빌은 다음 날로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흥분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IBM 사와 함께 일하는 것은 빌 게이츠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빌이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다음 날, 약속대로 IBM 사에서 몇 사람의 전문가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개인용 컴퓨터에 필요한 운영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아직 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빌 게이츠는 IBM사에 디지털 리서치 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IBM사와 디지털 리서치 사의 계약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리서치 사가 더 좋은 조건을 내걸며 버텼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IBM사에서 다시 빌 게이츠를 찾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새로운 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는 게 어떻겠소?" 그 제안을 받고 빌 게이츠는 어떻게 할까 한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낮은 보수로는 일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만 맞추어 준다면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소." "알겠습니다." IBM 사에서 온 사람이 돌아간 뒤, 폴 앨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린 운영 프로그램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데 어쩌려고 그래?" "걱정 마.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빌 게이츠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 길로 빌 게이츠는 전부터 알고 있던 시애틀컴퓨터 사의 프로그래머인 팀 패터슨을 찾아갔습니다. 패터슨은 큐도스라는 컴퓨터 운영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많아서 실제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팔지 않겠소?" 빌 게이츠의 말에 패터슨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큐도스를 사겠다는 겁니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프로그램을 직접 찾아와서 사겠다니, 패터슨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그 프로그램을 10만 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폴 앨런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IBM 사로부터 프로그램 개발비를 한꺼번에 듬뿍 받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러면 안 돼. 기껏해야 심부름꾼밖에 더 되겠어? 그보다는 로열티를 받아야 해." 빌 게이츠의 말은 컴퓨터 한 대를 팔 때마다 얼마씩 돈을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가 적게 팔린다면 손해지만, 많이 팔리면 그 편이 한꺼번에 돈을 받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었습니다. "IBM 사가 로열티를 주려고 할까? 이러다가 계약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야?" 모두들 걱정을 했으나 빌 게이츠는 자신만만했습니다. "IBM 사는 지금 다급한 입장이야. 지나치게 많이 달라고만 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거야." 과연 빌 게이츠의 말이 옳았습니다. IBM 사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여 로열티를 주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1980년 11월 6일의 일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곧 큐도스를 바탕으로 운영 프로그램의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우리는 밤낮 없이 땀 흘리며 일해야 합니다. 자신 없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나가 주십시오." "대신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일 년 후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빌 게이츠가 굳은 결심이 서린 얼굴로 말했습니다. 직원들을 다 모아 놓은 자리였습니다. "일 년쯤이야 못 참겠어?" "일단 해 보는 거야!" 직원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마음을 다졌습니다. 그 후 땀과 눈물의 9개월이 지난 뒤인 1981년 8월 12일, 마침내 사의 개인용 컴퓨터가 첫선을 보였습니다. 물론 그 컴퓨터의 운영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것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이름은 입니다. 사의 컴퓨터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사도 그 해에 벌어들인 돈이 무려 1천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사와 헤어져 새로운 운영 프로그램인 윈도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운영 프로그램은 글씨나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윈도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이제는 그림도 볼 수 있고, 마우스를 이용해서 간단하게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깜짝 놀랐습니다. "복잡한 글씨나 기호를 입력하는 대신 마우스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네!" "아이들이나 노인들도 손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겠는걸." 이제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어려서부터 꿈꾸던 세상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컴퓨터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계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1986년, 빌 게이츠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1987년 10월, 포브스라는 잡지에서 미국의 4백대 부자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빌 게이츠는 거기에 29번째로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그 정도로 만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990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윈도 3.0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대단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쩜. 컴퓨터는 어렵고 복잡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다니." 1995년 발표된 윈도 95 역시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윈도 95가 나오는 날, 컴퓨터 상점 앞에는 그것을 사려는 사람들로 대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윈도 시리즈는 계속 이어서 1998년에는 윈도 98, 2000년에는 윈도 2000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커지고,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빌 게이츠가 사는 모습은 처음에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울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에는 1등석이 아닌 2등석을 타고, 옷도 신사복보다는 청바지 같은 것을 즐겨 입었습니다. 일도 한결같은 자세로 밤낮 없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항상 자기가 말한 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 동안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내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이웃을 위해 쓸 생각이니까요." 빌 게이츠의 재산은 거의 1천억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중 거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에서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병으로 고통받는 이웃과 어린이를 위해, 그리고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고 있습니다. '실패할 것을 겁내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100퍼센트 쓰라.' '자신의 일에 철저하라.' 빌 게이츠는 이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정직한 태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 게이츠가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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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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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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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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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하는가?" 런던 대학 교수인 맥어보이가 스티븐 호킹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루게릭 병에 걸린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행운이 따랐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실 그 병도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주위의 많은 도움으로 그 병으로 인한 불편을 줄일 수 있었지요. 나는 무엇보다도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혀낸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그는 루게릭 병으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 뿐 아니라,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혼자 힘으로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살아 있는 물리학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스티븐 호킹은 1942년 1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 속에 있던 영국 옥스퍼드에서 1열대병 연구학자인 아버지 프랭크 호킹과 어머니 이사벨 사이에서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 습니다. 작은 몸집에 금발 머리를 한 스티븐은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격이었으나,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은 열 살 때부터 과학자가 될 꿈을 가졌습니다. 학교에서는 별로 두드러지지 못했지만, 그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은 호킹 집안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스티븐과 같은 반이었던 다이아나라는 친구가 우연히 그의 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킹 집안의 식사 시간은 다른 집과는 사뭇 달랐습니 다. 식탁 위에서 가족들끼리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하는 일 없이, 모두 접시 옆에 책을 펴놓고 그것을 들어다보면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니 들리는 소리라고는 포크나 나이프 움직이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스티븐의 막내 동생인 에드워드를 빼고는 모두 손님인 다이아나가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조용한 분위기에 다이아나는 포크를 움직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난 후 식당에서 나오자 에드워드가 다이아나를 따라나왔습니다. “누나, 힘들었지?” “응, 좀... 너희는 언제나 이러니?” 다이아나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그렇지 뭐. 그 중에서도 스티븐 형이 특히 심하지. 무슨 책을 그렇게 읽는지, 골치도 안 아픈가 봐." 에드워드는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까지도 호킹은 식당 안에서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세인트올번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학교에는 스티븐을 비롯하여 몇 명의 괴짜들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들은 언제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 을 찾아다니며 놀았습니다. 특히 스티븐은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게 내가 이번에 새로 만든 게임이야. 한번 해 봐." 친구들은 스티븐의 집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가 만든 게임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여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8년, 졸업반이었던 스티븐은 친구들과 함께 전화 교환기를 뜯어 덧셈을 자동으로 하는 계산기를 만들어 내어 주위를 놀 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긴 하지만 컴퓨터의 일종이었으므로 생각처럼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쯤 되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컴퓨터를 완성시켰습니다. “아, 이제 됐다!” 친구들은 손벽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세인트올번 고등학교 학생들이 컴퓨터를 만들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윽고 지역 신문에까지 실려 스티븐과 친구들은 유명한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어 보자." "그래!" 스티븐과 친구들은 신이 나서 다시 컴퓨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면서 각자 흩어지는 바람에, 더 홀륭한 컴퓨터를 만드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티븐은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옥스퍼드 대학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대학입니다. 스티븐의 어머니 이사벨은 대단히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면 어떤 모임에든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티븐도 어머니를 따라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는 모 임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때 스티븐은 어머니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는 일,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물리학이나 수학에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물리학을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물리학은 학문의 가장 기본이니까요."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티븐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스티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날마다 환자를 대해야 하는 의사는 부담스러워서 싫어요. 물리학자나 수학자처럼 혼자 일하는 게 더 좋은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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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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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영국 런던에서 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울스소프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해요." "즐거운 성탄절이 되기를 빌겠어요." 날이 잔뜩 흐렸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울스소프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언덕 위의 흰 벽돌집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날씨처럼 침울했습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아기를 낳으려는 산모를 지켜보며, 크리스마스 이브의 기쁨도 잊은 채 초조하게 집 안을 서성거렸습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날 아침, 흰 벽돌집에서 가냘픈 울음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어찌 저리도 힘이 없을까?" "한 달이나 먼저 태어났으니 허약할 수밖에요." "앞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야 할 텐데..." 이웃 아주머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걱정스러운 듯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1642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태어난 이 아기가 바로 훗날 위대한 과학자로 이름을 떨친 아이작 뉴턴입니다. 아기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나자 당황한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기의 아버지가 간절하게 그리워졌습니다. 아기 아버지는 아기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뉴턴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아이작 뉴턴의 아버지는 일하는 날보다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몸이 무척 약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머지않아 태어나게 될 아이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잃었다고 해서 슬퍼만 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원래부터 건강하지 못한데다가 무리하게 일을 하다 보니 어머니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아기가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오게 된 것도 이처럼 무리하게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 가엾은 우리 아기! 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아기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갓 태어났을 때 아이작은 너무도 허약하여 제대로 살 수나 있을까 가슴을 조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기도와 보살핌 덕분에 아이작은 보통의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쑥쑥 커 가는 아이작을 보며 아이작이 막 태어났을 때의 안타까웠던 심정을 회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작을 마치 자기 아이처럼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을 무렵 영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왕인 찰스 1세는 백성들의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반면, 왕과 귀족들은 사치와 낭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백성들은 그들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의회를 통해 국왕에게 대항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교도 혁명입니다. 조용한 울스소프 마을에도 혁명의 소식이 전해져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어른들의 걱정을 알 리 없는 아이작은 벌, 나비, 이름 모를 벌레들과 어울려 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이 어린 것을 데리고 평생 혼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갈 참이냐?"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매일같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답니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닥쳐 오더라도 아이작만은 훌륭하게 키울 생각이에요. 돌아가신 아이 아버지도 그렇게 되길 바랄 거예요." 어머니는 마음을 더욱 다잡기라도 하듯 힘주어 말했습니다. 근심스런 얼굴로 돌아간 외삼촌은 이틀 후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외삼촌!" 아이작은 반가워하며 안기려 했지만, 외삼촌은 평소 때와는 달리 아이작에게 싱긋 눈인사만 하고 서둘러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상하다. 외삼촌이 왜 저러실까?' 아이작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방 가까이로 걸어갔습니다. 방 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 외삼촌의 목소리가 간간이 흘러 나왔지만, 어린 아이작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한참 만에 밖으로 나온 외삼촌은 아이작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이작은 어머니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습니다. "엄마, 무슨 일이세요?" 아이작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무 일도 아니란다." "그런데 왜 울고 계세요?" "걱정스런 일이 좀 있어서..." "무슨 걱정이에요?" 어머니는 아이작을 와락 품에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외삼촌이 찾아온 것은 아이작의 어머니를 재혼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작의 어머니는 외삼촌의 말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스미스 목사와 재혼할 것을 결심했지만, 어린 아이작을 두고 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며칠 후, 아이작의 어머니는 예쁜 옷을 꺼내 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는 아이작을 꼭 껴안은 채 볼을 비비며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아이작은 어머니가 잠시 볼일을 보러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이작은 칭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엄마는 왜 아직 안 와요?"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작이 가여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태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을 달랬습니다. "엄마는 볼일을 보러 먼 곳에 가셨단다. 며칠 있으면 돌아오실 거야." 그 후 아이작은 혼자서 잘 놀다가도 불현듯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하루 종일 보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불쌍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아이작이 자라면서 차츰 가슴 깊숙이 가라앉았습니다. 더 이상 아이작은 어머니를 찾으며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몫까지 아이작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아이작은 아직 어렸지만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작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서 놀았습니다. 이따금 이웃에 사는 또래 아이들이 놀러와도 아이작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서 놀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아이작을 데리고 옥수수 씨를 뿌리기 위해 밭으로 나갔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옥수수 밭에서는 탁 트인 넓은 들판과 마을의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뒤로는 떡갈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동쪽으로부터 시작된 맑고 푸른 와이잠 강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강 건너편에는 풍차가 보였습니다. "할머니, 저건 뭐예요?" "저것은 풍차라는 거란다. 바람이 불면 날개가 빙글빙글 도는데 그 때 생기는 힘으로 곡식을 빻지." "할머니, 그러면 저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지요?" "그야 바다로 흘러가지." "바다요? 큰 배가 있는 바다 말이에요?" "그래, 잘 아는구나. 바다에는 큰 배가 있단다." 아이작은 궁금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할머니는 아이작이 묻는 것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작은 때때로 대답하기 어려운 엉뚱한 질문을 해서, 할머니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공작놀이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작은 할머니와 함께 헛간에 들어갔다가 구석에 놓여 있는 톱과 망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작은 그것들을 집어 들고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거 저 주세요." "그러렴. 대신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루거라." 아이작은 연장을 가지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다음 날부터 아이작은 나무토막을 구해다가 열심히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부탁으로 닭장을 고치러 온 이웃집 아저씨가 이 모습을 보고 다가왔습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있니?" "배를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오, 그래? 솜씨가 아주 좋구나." 칭찬을 듣자 아이작은 더욱 자신이 생겼습니다. 아저씨는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저씨가 닭장을 고치는 동안 아이작은 어느 새 배를 완성해서 물이 가득 담긴 물통에 띄우고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솜씨야! 앞으로 훌륭한 목수가 되겠는걸." 아이작이 만든 배를 보고 아저씨는 감탄했습니다.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어 가는 동안 아이작은 좀더 잘 드는 연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톱은 오래 되어 녹이 슬었고, 못은 한 번 박았던 것들이라 구부러져서 못쓰게 된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작은 언젠가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을 때 철물점에서 본 반짝반짝 빛나는 연장들을 떠올렸습니다. '나에게도 반짝거리는 새 연장이 있었으면...' 아이작은 새 연장이 갖고 싶을 때면 철물점을 기웃거리곤 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연장들이 진열장을 가득 장식하고 있었지만, 아이작은 만져 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외삼촌이 다니러 왔습니다. 여느 때처럼 외삼촌은 아이작을 번쩍 안아 올렸습니다. "아이작, 그 동안 많이 컸구나. 자, 오늘은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받아라." 아이작은 두 손으로 묵직한 외삼촌의 선물 상자를 받아 들었습니다. '무엇일까?' 아이작은 얼른 꾸러미를 풀었습니다.
상자 속에는 놀랍게도 아이작이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새 연장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외삼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작은 너무 기뻐 새 연장을 가지고 부리나케 정원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나무들을 꺼내 놓고 열심히 못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멋진 연장을 갖게 되자 아이작의 방은 작은 목공소로 변해 갔습니다. 아이작에게는 자기가 직접 만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물레방아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또 풍차는 어떻게 만드는 거지? 바람이나 물이 닿으면 왜 날개가 빙빙 도는 걸까?' 아이작은 그림책을 보아도 결코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그려진 물레방아며 풍차, 시계 등을 어떻게 만드는지 곰곰이 연구해 보고 그것을 직접 만들어 보아야 성이 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기계들은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아이작은 궁금한 점들에 대해서 혼자 생각하고 알아내는 버릇에 길들여져, 연구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아이작은 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작은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보내 준 가방과 학용품을 보면서도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늘 혼자서 놀고 혼자서 생각하는 버릇에 길들여지다 보니, 사람을 대하기가 두려워진 것이었습니다. 입학식 날 아침, 할머니는 아이작과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할머니, 학교에 꼭 가야만 하나요?" 보리밭 사잇길을 지나 와이잠 강가에 이르렀을 때에도 아이작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습니다. "네 나이가 되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해. 배우지 않고서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거야." 할머니는 아이작이 학교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달래며, 학교에서 주의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을 일러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작 뉴턴!' 하고 부르시면 즉시 '네.'하고 대답해야 한다. 또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만약 넘어지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해. 알았지?" "네." "그리고 모르는 게 있으면 곧바로 선생님께 여쭤 보도록 해라." "네..." 아이작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어느덧 저 멀리 학교 지붕이 보였습니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작이 다른 아이들처럼 밝은 모습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이작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했습니다. 학교에 온 아이들은 모두 어머니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자 아이작은 한층 더 불안해졌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아이작이 걱정되어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들 부모와 함께 왔는데... 불쌍한 아이작이 혹시 마음에 상처라도 받으면 어쩌나...' 잠시 후, 한 여자 선생님이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학생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제 이름을 부르겠어요. 지금부터 호명하면 큰 소리로 대답하고, 오른쪽으로 가서 줄을 서도록 해요." 이윽고 선생님이 차례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자기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오른쪽으로 가서 줄을 섰습니다. "아이작 뉴턴!" 마침내 선생님이 아이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할머니의 손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작의 태도에 당황한 나머지 할머니가 대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네, 이 아이가 아이작 뉴턴이랍니다." 아이작은 할머니와 함께 줄을 서서 살며시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옆 친구의 손을 붙잡고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서 있는 아이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자 아이작은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작은 용기를 내어 슬그머니 할머니의 손을 놓았습니다.
할머니는 안심하고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곧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용기를 내어 할머니의 손을 놓기는 했지만, 막상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아이작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서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입학식이 끝난 뒤, 아이작은 제일 먼저 교실에서 뛰어나와 할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작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때가 많았으므로, 번번이 할머니가 아이작을 학교에 데려다 주어야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작은 선생님이 무엇을 물어 보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습니다. 학교에서 아이작은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서 외톨이로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아이작을 놀려대며 비웃었습니다. "울보 녀석!" "야, 겁쟁이. 또 한 번 울어 봐."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아도 아이작은 말 한 마디 못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아이작을 눈여겨보다가 어느 날 조용히 불렀습니다. 선생님은 따뜻한 손을 내밀어 다정하게 아이작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이작, 선생님의 말을 잘 들어 보렴. 아이들이 너를 놀리는 것은 네가 잘 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아이작은 울보가 아니야. 자, 아이작, 용기를 내."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를 받자, 아이작은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손수건을 꺼내 아이작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여전히 따뜻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아이작, 선생님이 울지 말라고 했는데 또 울면 어떡하니? 이제 다시는 눈물을 보이지 말도록 해.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먼저 숙제부터 하거라." 사실 아이작은 이제껏 한 번도 숙제를 해 온 적이 없었습니다. 숙제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오고 가는 길에 아이작은 와이잠 강가에 서서, 멀리에서 돌아가는 풍차를 한참 동안 구경하곤 했습니다. 물레방앗간 옆을 지나갈 때에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도는 물레방아를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습니다. 교실에 앉아 있어도 아이작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런 것들로만 가득했습니다. 그럭저럭 1학기가 지나고 성적표가 나왔습니다. 성적표를 받아 본 할머니는 크게 실망하여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공작을 제외한 모든 과목의 성적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작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다음 날 오후에는 외삼촌이 와서 아이작을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아이작, 할머니께서 이토록 고생을 하고 계시는데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도록 해야지. 앞으로는 학교 공부에 좀더 신경을 쓰거라." 외삼촌은 부드럽게 타일렀습니다. 호되게 꾸중을 들을 줄 알았던 아이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이작은 외삼촌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당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곧이어 밖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사이 아이작은 또다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덧 아이작 뉴턴은 2학년이 되었습니다. 아이작이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아이작에게 간단한 집안일을 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작, 이제 너도 닭에게 모이를 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이작은 할머니를 돕게 된 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걱정 마세요, 할머니. 그런 일이라면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아이작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아이작은 하루에 세 번씩 닭에게 모이와 물을 주고, 아침에는 달걀 거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매일 닭을 돌보는 동안 아이작은 닭장에서 수선할 곳을 몇 군데 발견했습니다. 우선 항상 더러워지는 모이통 주변을 깨끗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치워놓아도 닭들이 한 번 모이를 먹고 나면 모이통 주변이 금방 지저분해지곤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긴 나무 상자를 만든 다음, 그 위쪽에 가늘고 긴 나무막대기를 박아 붙였습니다. 위쪽에 나무막대기를 달아 닭이 그 위에 올라앉아서 모이를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제 닭들이 모이를 먹고 나서도 모이통 주변이 지저분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닭장이 깨끗해지자 매우 기뻐했습니다. 다음에는 닭장의 물그릇을 개량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그릇에 물을 채워 넣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닭들에게 용이한 방법으로 물을 줄 수 있을까...?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아이작은 당장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밤에는 닭들이 물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물그릇이 넘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이작은 실망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좀더 편리한 방법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순간 이 나무통으로 물시계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이작이 생각해 낸 물시계는 만드는 방법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우선 마당에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나무통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가득 채웠을 때의 물 높이와 저녁때 물이 줄어들었을 때의 높이를 나무통에 눈금으로 표시해 두는 것이었습니다. 한가운데에는 한낮을 가리키는 파란색 눈금을 또 하나 표시해 두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이작이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 "아이작, 나무통을 꺼내 놓고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있니?" "물시계를 만드는 중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비가 오고 날씨가 흐려 해를 볼 수 없는 날에도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어요." "그래? 그것 참 신기하구나." "네, 제 생각이 맞다면 점심때에는 물이 파란 눈금까지 내려올 거예요. 하지만 아직은 시간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 수 있을지 잘 몰라요. 내일 아침,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고 시험해 보아야 알 수 있어요." 할머니는 아직 어린 아이작이 이런 생각을 해냈다는 게 무척 기특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생각을 해내는 것을 보면 머리는 좋은 아이인데, 왜 학교 성적은 오르지 않는 걸까?' 할머니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이작은 나무 통에 물을 가득 채워 놓고 학교로 갔습니다. 공부 시간에도 아이작의 머릿속에는 온통 물시계 생각뿐이었습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온 아이작은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나무 통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통 속의 물은 한낮을 표시하는 눈금보다 조금 아래쪽까지 내려가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웃음을 띠며 아이작에게 다가왔습니다. "아이작, 네가 말한 대로였단다. 점심때는 바로 이 파란 눈금까지 내려왔었어." "그렇죠? 야, 신난다. 저녁때는 틀림없이 이 눈금까지 내려올 거예요." "그럼, 틀림없고말고. 이웃 사람들도 이 물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라더구나." 아이작이 물시계를 만든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아이작을 꼬마 발명가라 부르며 칭찬했습니다. 사실 아이작이 태어나기 2천 년 전부터, 이미 유럽과 이집트에서는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의 물시계는 다른 것을 본떠서 만든 것이 아닌, 그의 생각만으로 만든 창작품이기 때문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었습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유심히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어, 어제보다 30분이나 빠르네?" 아이작은 며칠 전부터 나무 그림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루 동안에 나무의 그림자가 일정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옳지! 그림자의 길이를 이용해서 해시계를 만들 수 있겠구나." 이 날부터 아이작은 해시계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넓적한 돌을 구해다가 못과 쇠망치로 한복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막대기를 한 개 세웠습니다. 그 다음에는 막대기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곳에 눈금을 그려 시간을 표시하기로 했습니다. 단단한 돌에 눈금을 표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종일 정과 망치를 들고 해시계에 매달려 있다 보면 손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아이작은 며칠 동안 씨름한 끝에 해시계를 완성하여 그것을 할머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냐?" "해시계라는 거예요. 이 막대기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이 바로 시간을 나타내는 거랍니다." "지금이 12시이니까, 이 막대기의 그림자가 여기에 오게 되면 2시가 되는 거예요." "정말 훌륭한 해시계로군." "아이작은 발명가의 재능을 타고났어." 아이작이 만든 해시계를 본 이웃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입을 모아 칭찬했습니다. 이렇듯 기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항상 연구심에 불타 있던 아이작 뉴턴이었지만, 이따금씩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때면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작은 외삼촌이 있는 교회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과학적 상식이 풍부한 외삼촌은 아이작의 상상력을 더욱 넓혀 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외삼촌은 한가할 때마다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외삼촌이 해 준 이야기 가운데 유난히 아이작의 호기심을 끈 것은 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별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위치를 바꾸지만, 북극성만은 1년 내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어째서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는 걸까?' 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로, 아이작은 밤마다 창가에 앉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아이작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몇 개나 될까?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별을 볼 수 있을까? 별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작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어느덧 아이작은 6학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이작은 큰 물레방아를 만들고 싶어서, 자주 냇가에 있는 물레방앗간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아이작이 물레방앗간을 찾을 때마다 그 곳에서 일하는 아저씨는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물레방아를 만들 생각인가 보구나." "네, 밀을 빻을 수 있는 진짜 물레방아를 만들 거예요."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와서 구경하려무나." 물레방앗간 안에는 빙글빙글 도는 굴대가 뻗어 있고, 그 굴대에는 두 개의 막대기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 막대기가 절구자루를 밀어서 절굿공이를 들어올렸다가 빙 돌아서 그 막대기가 빠지면 다시 절굿공이가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즉, 번갈아 가면서 절구 속의 곡식을 찧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아이작은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레방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레방아는 꼬박 2주일이 걸려서 완성되었습니다. 이튿날, 아이작은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한달음에 학교 옆 냇가로 간 아이작은 서둘러서 물레방아를 돌릴 준비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전에 돌려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이작은 우선 큰 돌로 물을 막고 가느다란 물길을 만들었습니다. 그 양쪽에는 물레방아의 굴대를 받쳐 주는 나무를 걸치고 물레방아를 달았습니다. 물레방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작은 가져온 밀을 한 줌 꺼내 절구에 넣고 절굿공이를 달아 보았습니다. 물레방아는 쿵덕쿵덕 밀을 찧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등교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심술쟁이 존이 그 곳을 지나다가 아이작의 물레방아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들 모여 있는 거야?" 존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이작이 물레방아를 만들었대. 신기하지?" 한 아이가 존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야, 솔직히 말해 봐. 누가 만들어 준 거지? 너 같은 바보가 이런 걸 만들었을 리가 없어." 존이 빈정거리자 아이작은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의 말을 생각하며 꾹 참고 있었습니다. "이 겁쟁이야, 왜 말이 없어? 얘들아, 저 물레방아를 부숴 버리자." 존의 말이 떨어지자 곁에 있던 아이들이 달려들어 물레방아를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작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작은 존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한 존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아이작은 틈을 주지 않고 존의 몸 위에 올라앉아 얼굴이며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가격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서 아이들은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작을 놀리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겁쟁이', '울보'라는 놀림을 받던 아이작이 반에서 가장 힘센 존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아이작은 몸싸움에서는 이겼지만 학교 공부에서는 존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머리가 좋은 존은 여전히 반에서 1등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이작은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공부에서도 존을 이겨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싸움에서는 존에게 이겼지만, 학교 공부에서는 아직 존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공부에서도 존을 앞설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굳게 결심한 후부터 아이작은 공부에만 몰두했습니다. 그토록 즐기던 공작놀이도 당분간은 하지 않고, 밤을 꼬박 새우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작의 성적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학기말 시험에서는 존에 이어 2등을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존을 앞서지는 못했지만 이 일은 아이작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구나.' 졸업을 앞두고 치러진 마지막 시험에서 아이작은 마침내 존을 물리치고 1등을 차지했습니다. 아이작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할머니와 외삼촌의 기쁨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1등으로 졸업하는 아이작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아이작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작 뉴턴은 외삼촌의 권유로 그랜섬 시에 있는 킹스 왕립 중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중등학교는 5년 과정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교육을 하는 곳으로서 수학, 라틴 어, 신학 등 기초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자연히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아이작도 수재들만 모인 킹스 중등학교에서는 그리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킹스 학교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교실에서는 그랜섬 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넓은 들판 사이로 하얀 눈길처럼 뻗어 있는 와이잠 강 줄기가 멀리까지 보였습니다. 아이작은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킹스 학교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외톨이로 지내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이 곳에서는 친구들과도 잘 지냈습니다. 아이작은 친구들과 함께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난 세상에 널리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그래, 참 좋은 생각이다. 우리의 우정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벽에 이름을 새겨 두면 어떨까?" 이렇게 해서 킹스 학교의 벽에는 그들의 이름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울스소프에서 학교까지는 무려 세 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에, 아이작은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였습니다. 아이작은 시내의 큰길 가에 하숙을 정한 뒤, 옷가지와 책을 옮겨올 때 공작 도구도 빠뜨리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아이작의 방은 2층이었습니다. 아래층에서는 주인 클라크 씨가 약국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작을 친아들처럼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때때로 아이작은 집 근처의 언덕에 올라가, 고향 울스소프에 홀로 계신 할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울스소프로 가서 할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밤늦게까지 1주일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면, 할머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며 귀기울이셨습니다. 아이작은 얼마 전부터, 클라크 씨의 친절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물시계를 만들어 드리자.' 아이작은 정성을 다해서 근사한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새로 만든 물시계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진 것이었습니다. 물시계를 선물로 받은 클라크 씨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참으로 근사한 선물이구나. 이런 물시계를 약국에 두면 약국이 금방 유명해지겠는걸." 소문은 금세 마을 전체로 퍼져, 물시계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약국은 늘 손님들로 붐볐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이작은 풍차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풍차를 만들어 약국 앞에 놓아두면 약국이 더 유명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이작은 곧 설계도를 만들고 재료를 구해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3주일 후, 마침내 풍차가 완성되었습니다. 아이작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클라크 씨의 약국은 어느 새 '풍차가 있는 약국'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얼마 후에는 이 풍차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해마다 1월이 되면 그랜섬 마을에서는 연날리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재주껏 연을 만들어 대회에 나갔고, 그 날 우승한 사람에게는 푸짐한 상품이 주어졌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평소 바람의 세기를 관찰하기 위해 많은 연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클라크 씨는 아이작이 많은 연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아이작에게 연날리기 대회에 나가 보라고 권했습니다. 아이작은 내키지 않았으나, 클라크 씨가 자꾸만 권하는 바람에 참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연날리기 대회 날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멋진 연을 가지고 대회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아이작은 먼저 바람의 세기를 살펴본 다음 직사각형의 연을 띄웠습니다. 아이작의 연은 처음엔 높이 오르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하늘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날 연날리기 대회에서는 당연히 아이작이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작이 우승한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연날리기 대회에 나가도록 권했던 클라크 씨였습니다. 연날리기 대회가 있은 후로 그랜섬 마을에서는, '풍차가 있는 약국'에 하숙하고 있는 아이작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이작은 더욱 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연이 반드시 가벼워야만 잘 나는 것일까? 바람에 의해 나는 것이라면 조금은 무거워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작은 가끔씩 연을 가지고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연의 중앙에 추를 매달아서 날려 보았습니다. 추를 매단 연은 바람을 타고 잘 날았습니다. 아이작은 이러한 실험을 통해 연이 추를 들어올리는 힘은 바람의 세기나 연의 크기, 연에 닿는 바람의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작이 2학년이 된 어느 날 외삼촌이 찾아왔습니다. 외삼촌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아이작, 네 어머니와 재혼했던 스미스 씨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일로 몇 가지 상의할 게 있으니 지금 나와 함께 집으로 가도록 하자."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오게 된다는 사실은 반가웠지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아이작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낯선 아이들 세 명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이작의 이부형제들이었습니다. 근심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아이작의 마음도 무거워졌습니다. 그날 밤 어린 동생들이 잠자리에 든 후, 어머니와 할머니, 외삼촌 그리고 아이작은 밤늦도록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너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갑자기 식구가 늘어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었단다. 그러니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맡아 줘야겠구나." 할머니는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외삼촌이 할머니의 말을 이었습니다. "여섯 식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집안일도 많아질 테고, 농사도 더 지어야 하지 않겠니? 어린 동생들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일들을 맡아 할 수가 없단다." 아이작은 당장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학교를 그만두기는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아이작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운 채 뒤척이던 아이작은 마침내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어머니를 위해서 내가 학교를 그만두는 게 좋겠다.' 다음 날, 아이작은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아이작이 떠나는 것을 누구보다도 아쉬워한 사람은 하숙집 주인 클라크 씨였습니다. 클라크 씨는 아이작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서운해했습니다. 울스소프로 돌아온 아이작 뉴턴은 아침 일찍부터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이작을 보아 온 이웃 사람들은 아이작의 재능을 아까워하면서도 격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이작은 머리가 좋으니 농사일도 잘 해낼 거야." 그러나 농사일에 열중한 건 잠시뿐이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아이작은 언제나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작은 일손을 놓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아이작을 보며 주위 사람들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이작은 아무래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아냐. 일꾼을 두더라도 다시 학교로 보내는 게 낫겠어." 아이작이 울스소프로 돌아와 농사일을 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에 갑자기 심한 태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사람들은 이 태풍을 '크롬웰 태풍'이라 불렀습니다. 크롬웰은 의회파의 힘을 모아 국민의 군대를 이끌고 국왕을 내쫓은 후, 권력을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크롬웰은 혹독한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일부 국민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 크롬웰이 병으로 죽은 뒤 곧바로 태풍이 몰아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크롬웰의 영혼이 바람이 되어 몰아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온 나라가 크롬웰 태풍으로 긴장했고, 마을 사람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는 울스소프는 더욱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태풍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습니다. 폭우 속을 뛰어다니며 밭을 돌보는가 하면, 닭장에 버팀목을 받쳐 주느라 바삐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아이작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언덕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센 바람은 처음이야. 바람의 세기를 연구하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로군.' 세찬 바람 속에서도 아이작은 신이 나 있었습니다. 바람을 등지고 달리면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에 안고 달리면 어떤 장애물에 부딪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작은 벼랑 위에 올라선 후, 힘껏 뛰어내렸습니다. 박쥐처럼 겉옷을 뒤집어쓴 채 뛰어내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뛰어내렸다가 기어오르고 다시 뛰어내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아이작은 바람의 세기를 측정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밭을 살펴보러 나왔던 사람들이 아이작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소리친 것이었습니다. 아이작은 그 사람들과 함께 언덕을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온 아이작은, 할머니와 어머니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아이작의 머릿속은 조금 전의 실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렇듯 아이작의 뜨거운 연구열이 식을 줄 모르자, 어머니는 아이작을 다시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작은 크롬웰 태풍 덕분에 행운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작은 다시 그랜섬 왕립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학교를 쉬었던 아이작은 자기보다 2년 아래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지만, 아이작에게 이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기뻤기 때문입니다. 아이작은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 노력의 결과 성적이 부쩍부쩍 향상되었습니다. 그 결과 1등으로 졸업을 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졸업식에 참석한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이작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1661년, 아이작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원서를 내어 당당하게 합격하였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영국에서도 첫손에 꼽힐 만큼 우수한 대학으로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대학에서의 공부 방식은 이전과는 달리, 스스로 과제를 정한 뒤 그것에 대해 연구하여 교수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자립식 방식이었습니다. 수재라는 말을 듣던 학생들만 모인 곳인 만큼 모두들 공부에 대한 열성이 대단했습니다. 뉴턴 역시 그랜섬 시에서는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났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그다지 우수한 축에 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학비까지 스스로 벌어야 할 형편이다 보니 공부를 할 시간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뉴턴은 몸도 마음도 지쳐 버릴 때가 많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노력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뉴턴은 이 무렵 자신의 앞날에 큰 도움을 주게 될 배로 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학을 가르쳤던 배로 교수는 여러 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갖춘 유능한 학자였습니다. 배로 교수는 수학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뉴턴에게
'광학'이라는 책을 권했습니다. 이 책은 케플러라는 천문학자가 쓴 것으로, 빛의 성질과 현상에 대해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뉴턴은 이 책을 공부하는 동안,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뉴턴은 수학에 흥미를 가지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대학에 들어간 지 3년째 되던 해에 뉴턴은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뉴턴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뉴턴은 지금까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틈틈이 일을 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뉴턴은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연구실에 남아 계속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뉴턴이 계속 공부하려는 것은 광학과 수학이었습니다. 뉴턴은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하여 그 결과를 노트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때 뉴턴의 노트에 기록된 연구 결과들은 훗날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훌륭한 것들이었습니다. 1665년, 영국의 전 지역에 페스트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자, 학교도 잠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뉴턴은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에 틀어박혀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연구실과 같은 실험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는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뉴턴은 앞으로의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조사해 보거나, 연구에 관하여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기록하였습니다. 어느 날, 뉴턴은 사과나무 밑에서 빛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나무에서 사과 하나가 뉴턴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뉴턴은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무심코 떨어진 사과를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과는 왜 땅에 떨어졌을까? 왜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거지?' 그 순간 뉴턴의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지구가 그 물체를 당기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달과 별은 왜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과가 떨어지는 힘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도, 달과 지구 사이에도, 또 달과 다른 별 사이에도 있을 텐데... 그래, 이들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밝혀 보는 거야. 사과가 떨어지는 것도,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것도 반드시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테니까!'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지구에 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물체에 인력이 있으며, 그 힘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뉴턴이 처음이었습니다. 뉴턴은 그 계산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의 크기와 달의 크기, 지구와 달과의 거리, 달이 지구를 한 번 도는 데 걸리는 시간 등,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달이 지구로 떨어지는 속도를 계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뉴턴은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계산에 열중했습니다. 마침내 뉴턴은 이 우주의 모든 물체에는 서로 잡아끄는 힘이 있다는, 이른바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습니다. 이 때 뉴턴의 나이 24세였습니다. 한편 뉴턴은 빛에 관한 연구에도 열중하였습니다. 어느 날, 뉴턴은 방문을 꼭 닫고 삼각형 모양으로 만든 유리로 태양 빛을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도구는 프리즘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여동생 한나와 메리가 뉴턴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너희들 마침 잘 왔다. 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 줄게." 뉴턴은 문 틈으로 들어오는 태양 빛에 프리즘을 갖다 대었습니다. 그러자 벽에 무지개와 같은 아름다운 빛깔이 비쳤습니다. "야, 무지개다!" 동생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지개가 비쳐진 벽에 큰 돋보기를 갖다 댔습니다. 그러자 무지개는 없어지고 보통의 태양 빛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이와 같은 빛의 원리를 이용해서 훌륭한 망원경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학교 연구실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고향 집에서 쉬고 있던 1년 반 동안, 생각해 둔 연구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뉴턴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망원경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뉴턴이 만들고자 하는 망원경은, 갈릴레이가 만든 볼록 렌즈 망원경과는 달리 오목 렌즈로 빛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반사 망원경입니다. 이 반사 망원경은 다른 망원경보다 훨씬 선명하게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뉴턴은 이 망원경을 이용하여 토성의 테두리와 목성의 위성까지 관찰했습니다. 이 반사 망원경으로 인해 천문학은 한 발 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뉴턴의 반사 망원경은 위대한 발명품이었지만, 무엇이든 내세우기를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한참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배로 교수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배로 교수가 조용히 뉴턴을 불렀습니다. "자네를 내 후임으로 추천했네." 평소 뉴턴이 성실하게 연구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던 배로 교수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서, 뉴턴에게 자신의 강의를 맡기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뉴턴의 나이는 겨우 27세였습니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뉴턴은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마침내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뉴턴은 전에 만든 반사 망원경을 개량하여 더 좋은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뉴턴의 업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은 영국 왕립 협회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연구도 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거르는 것은 예사였고 밤을 꼬박 새는 날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연구에 몰두하던 뉴턴은 문득 배가 고파서 옆에 있던 달걀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달걀은 뉴턴이 배가 고플 때 먹으라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뉴턴은 그것을 보지도 않은 채 물이 펄펄 끓는 냄비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이젠 달걀이 다 익었겠지?' 한참이 지나서 냄비 뚜껑을 열어 본 뉴턴은 깜짝 놀랐습니다.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은 달걀이 아니라 둥그런 회중시계였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회중시계를 달걀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어느덧 뉴턴의 나이도 42세가 되었습니다. 뉴턴은 오랜만에 왕립 협회에 참석하여 물리학자들이 발표하는 연구 결과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발표하고 있는 내용은 뉴턴이 18년 전에 생각해 냈던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모든 계산법을 이미 알아냈지만, 지금껏 발표를 미루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계산법 때문에 학자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잠자코 듣고 있던 뉴턴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아, 그 계산이라면 제가 18년 전에 이미 연구해 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도대체 그것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글쎄요. 하도 오래 전 일이라서... 아마 제 연구실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뉴턴의 말에 왕립 협회 학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얼마 후,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관한 모든 것을 발표했으며, 이 발표는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1687년,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포함한 그 동안의 연구 내용을 모아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은 오늘날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2년여의 긴 시간에 걸쳐 씌어진 것으로,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좋은 교과서가 되었고, 학자들에게는 훌륭한 연구서가 되었습니다. 뉴턴은 일생 동안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오로지 연구 활동에 몰입했고, 후배 과학자들을 키우는 데에 모든 정열을 쏟았습니다. 또한 뉴턴의 공적은 단지 학문 연구에만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1689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대표해서 '의회의 대표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같이 의회에 나가는 일은 뉴턴에게 고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뉴턴은 곧 의회 의원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696년, 54세가 된 뉴턴은 조폐국 감독관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국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뉴턴은 이제 많은 명성을 얻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검소한 학자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1703년, 61세의 뉴턴은 마침내 영국 왕립 협회의 회장으로 뽑혔습니다. 그는 이제 영국 최고의 학자가 된 것입니다. 이듬해 뉴턴은 그 동안의 연구 논문을 모아 '광학'이란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이 나오자 세계의 학자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705년 4월, 뉴턴은 앤 여왕으로부터 기사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과학자로서는 처음 있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뉴턴에게 '아이작 뉴턴 경'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일생 동안 오직 연구와 교육에 힘썼던 뉴턴은 차츰 기운이 쇠잔해져 갔습니다. 특히 80세에 접어든 무렵부터는 눈에 띄게 몸이 약해졌습니다. 게다가 방광 결석이라는 병까지 얻어 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도 뉴턴은 틈틈이 자신이 지은 책 '프린키피아'의 내용을 바로잡아 나갔습니다. 이러한 그를 보며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는데도 부족한 점이 있습니까?" 뉴턴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룩한 성과들은 바닷가에서 주운 몇 개의 조개껍질 정도에 불과하다네. 바닷가에는 내가 주운 것보다 더 아름다운 조개껍질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어. 나는 과학자로서 조그만 일밖에 하지 못했네. 나머지 일들은 자네들이 해 줘야 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루어야 하지." 뉴턴의 말에 제자들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날의 대화가 뉴턴의 마지막 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727년 3월 4일, 왕립 협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뉴턴은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의사가 달려와 치료를 했지만 뉴턴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결국 뉴턴은 3월 20일,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진정으로 근대 과학을 새롭게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가 전 생애를 통해 남긴 물리학 및 수학, 천문학에 관한 많은 연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빛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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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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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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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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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아이. '구름은 왜 떨어지지 않는 걸까? 구름이 흘러가는 것은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힘 때문일까?' 며칠째 감기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는 알베르트는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알베르트의 이마를 짚어 보며 다행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오늘은 다행히도 열이 많이 내렸구나. 곧 밖에 나가 놀 수 있겠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동그란 물건을 꺼내 침대에 누워 있는 알베르트에게 주었습니다. "네가 심심할 것 같아서 나침반을 사 왔단다. 이것은 어디에서든 방향을 가르쳐 주지." 알베르트는 신기한 듯이 나침반을 들여다보면서 흔들흔들 움직여 보았습니다. 알베르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아버지는 알베르트가 무엇인가를 계속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알베르트의 질문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이상하고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알베르트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아버지가 나간 뒤 알베르트는 나침반을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사람의 힘보다도 훨씬 큰 힘이 있었구나. 그 힘이 나침반의 바늘을 움직이게 하고 하늘의 구름을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인가 보다." 알베르트는 어른이 되면 그런 궁금한 것들을 꼭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군인은 싫어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남부 독일의 울름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곳은 독일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유대계 독일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고 있었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알베르트가 태어난 다음 해에 뮌헨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한 이듬해에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마야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뮌헨에서 삼촌 야코비와 함께 공장을 열었으나, 공장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아버지는 살림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낙천적인데다 한창 문학책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베르트와 마야는 아버지의 이러한 문학적 취미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태평스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늘 인자했고 여러 가지 악기를 잘 다루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어머니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여동생 마야는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야코비 삼촌은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여, 알베르트는 삼촌을 통해서 과학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알베르트의 집에는 항상 따뜻한 온기가 넘쳐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알베르트가 공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부모님의 말을 누구보다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지만, 반복해서 외우는 공부를 무척 싫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알베르트를 꾸짖기보다는 독일 학교의 교육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알베르트는 강제적인 것과 무조건 외우는 방식의 공부는 아주 싫어했지만, 스스로 머리를 써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좋아하였습니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몰려 나와 군대 놀이를 하였는데, 알베르트는 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계단에 앉아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군대 놀이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장교 한 사람이 운동장으로 들어섰습니다. 아이들은 그 장교를 에워싸며 한 마디씩 했습니다. “전 앞으로 훌륭한 군인이 될 거예요." "저도 아저씨처럼 씩씩한 군인이 되고 싶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떠들어 대는데도 알베르트는 꼼짝 않고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장교는 알베르트를 가리키며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아이는 누구지?" 그러자 아이들은 입을 모아 '바보!' 라고 대답했습니다. 장교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이들도 덩달아 웃었습니다. 장교는 알베르트 쪽으로 걸어와서 물었습니다. “저는 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요." 알베르트의 말에 장교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독일 소년은 자라면 누구나 군인이 되어야 해." "하지만 전 군인이 싫어요." 친구들은 알베르트가 장교를 겁내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척 놀랐습니다. 알베르트는 바보가 아니라 자신들보다도 더 용기 있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갑자기 종이 울렸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교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던 알베르트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알베르트는 아버지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알베르트, 모든 독일 소년들은 어른이 되면 군대에 가야 한 단다."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무척 슬펐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오늘 수업 시간에 그리스도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못을 박은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거예요. 우리 반에서 유대인은 저 한 사람뿐이라, 아이들이 모두 저를 쳐다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를 떠돌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에게는 그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린 알베르트는 훗날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괴로운 일들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재미있는 수학과 과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남의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말도 별로없는 학생으로 지내다가, 1889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뮌헨의 루이트포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습니다. 김나지움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한 과정으로 이어진 학교로, 독일의 여유 있는 가정에서는 대부분 자녀를 김나지움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에 들어가서도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무조건 외우기만을 강요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과목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루이스 선생님의 수업은 달랐습니다. 루이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수업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괴테와 같은 훌륭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곤 했던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학교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수학이나 과학 시간만큼은 무척 좋아했습니다. 다른 과목처럼 무조건 외우기만 할 필요 없이, 오직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풀어 가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학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이웃에 살고 있는 막스라는 청년을 통해서였습니다. 막스는 의학을 공부하던 청년으로, 그 무렵 아인슈타인의 집에 자주 놀러와서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막스는 아인슈타인에게 자연백과전집을 빌려 주었는데, 아인슈타인은 그 전집을 읽는 동안 자연의 수수께끼와 그 신기함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학과 과학으로 향한 아인슈타인의 눈은 점점 크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아인슈타인네 마을에 곡마단이 들어왔습니다. 야코비 삼촌은 아인슈타인과 마야를 데리고 구경을 갔습니다. 두 아이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소리를 지르면서 재미있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의 관심을 끈 것은 부메랑이었습니다. 부메랑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밀림 지대에 사는 원주민이 사냥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한 남자가 V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부메랑을 들고 나오더니 구경꾼들을 향해서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줄 알고 모두들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부메랑은 사람들에게 닿기 전에 공중에서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반원을 그리며 그 남자의 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부메랑의 모양을 관찰했습니다. '음, 저것을 눈에 익혔다가 나도 한번 만들어 보자. 집으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부메랑을 만들어서 그것이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이유를 밝혀 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메랑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부메랑은 단순하게 휘어진 나무 조각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물건이었습니다. 부메랑을 만들려면 우선 단단한 나무를 골라야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나무의 안쪽 면은 날카롭게, 바깥쪽 면은 약간 둥글게 깎고 나서 양쪽을 약간 비틀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던졌을 때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같은 원리는 몇 번을 만들어서 실험해 보고 나서야 알아낸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일주일 동안이나 매달려서 부메랑을 완성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인슈타인이 부메랑에만 매달려 있는 것을 나무랐습니다. "알베르트, 어쩌려고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니? 숙제부터 먼저 해 놓고 부메랑을 만들도록 해라.”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부메랑을 치워 놓고 숙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메랑을 만드는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번에 부메랑을 만들면서 무엇이든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마야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식구들이 놀라서 뛰어나가 보니, 커다란 박쥐가 마야에게 덤벼들었다가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으나 마야는 많이 놀란 것 같았습니다. 이 때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부메랑으로 박쥐를 잡아 보면 어떨까요?" "그래, 한번 해 보려무나." 아인슈타인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들어가 부메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먼저 아인슈타인이 시범을 보이자 모두들 금세 부메랑을 사용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남자들은 정원으로 나와 박쥐를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박쥐가 날개를 요란스럽게 퍼덕이며 정원 위를 날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메랑을 던지려는 순간 박쥐는 저만큼 날아가 버렸습니다. "요번엔 꼭 잡고야 말겠다." 다시 박쥐가 가까이 날아오자 아버지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부메랑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박쥐가 신음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자를 가져와 박쥐를 잡아넣었습니다. "알베르트, 이 부메랑이 훌륭한 역할을 해내었구나. 혼자서 이런 것을 만들다니 정말 대견하구나." 기하학. 2학기가 되어 기하학을 배우게 되자 아인슈타인은 이제 기하학에 빠졌습니다. 기하학이란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를 말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인슈타인은 다른 숙제는 제쳐놓고 오로지 기하학에만 매달렸습니다. 오늘도 아인슈타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몇 시간째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알베르트, 알베르트!" 어머니가 벌써 몇 번씩 불렀는데도 아인슈타인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야코비 삼촌은 아인슈타인이 낮잠을 자고 있는 줄 알고 깨우러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책상에 앉은 채 기하학에 몰두해 있느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삼촌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을 때에야 아인슈타인은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예 넋을 놓고 있구나. 어머니가 아까부터 너를 찾고 계시다. 어서 가서 저녁 먹자." "아,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인가요? 오늘 학교에서 배운 기하학을 복습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아인슈타인은 가족들에게 기하학 시간에 배운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주지. 너의 팔꿈치를 한번 보렴. 네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다른 각도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니? 각도도 기하학의 연구 대상이란다." “와! 정말이네요. 이건 새로운 사실이에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팔을 굽혀 보며 감탄했습니다. "팔뿐이 아니다. 나뭇가지도 각도를 만들지." "지구나 바퀴와 같은 윈도 기하학의 연구 분야란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정말 놀라워요."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소리치자 삼촌이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이 식탁보 같은 네모꼴에도 기하학이 적용된단다." 아인슈타인 가족은 저녁마다 모여 앉아 기하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족들은 저마다 자연 속에서 기하학이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 예들을 발견해 냈습니다. 꿀벌의 집에서는 육각형의 도형을 배웠고, 산을 보며 원뿔형 도형을 생각해 냈으며, 비눗방울에서 원을 떠올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딱딱한 학교 공부보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공부가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회. 가족들은 이따금 가족 연주회를 열기도 하고, 난롯가에 둘러앉아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가장 좋아하는 시를 낭송했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면 아인슈타인은 곁에서 바이올린을 켰습니다. "알베르트! 네 실력이 날로 좋아지는구나." 어머니가 칭찬하시면 아인슈타인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바이올린을 켰습니다.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날이 갈수록 바이올린을 썩 잘 켜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저는 조그만 교향악단의 책임자로 있는 게르하르트라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향악단은 다음 주에 고아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기로 했는데 그만 문제가 생겼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사람 하나가 앓아 누운 겁니다. 그래서 아드님의 바이올린 솜씨가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바이올린 연주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하러 왔습니다." "저는 교향악단에서 연주를 할 정도로 바이올린을 잘 켜지 못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그럼요. 우리 알베르트의 연주 솜씨는 보통이 넘지요." 어머니가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놀란 표정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습니다. 게르하르트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는 어떤 곡인가를 치고 나서 아인슈타인에게 말했습니다. “이 곡은 우리가 연주할 곡 중의 하나란다. 바이올린으로 한 번 연주해 보겠니?" "그럴게요." 아인슈타인은 "악보를 보며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게르하르트 씨가 말했습니다. "정말 훌륭하구나. 더구나 우리 음악의 분위기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드는구나. 어때, 우리의 연주회를 도와주겠니?" "좋아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자신감이 생기네요. 한번 해 볼게요."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스럽다는 듯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가족들은 온통 아인슈타인의 연주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드디어 연주회 날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연주회장으로 갔습니다. 연주회장에 도착하자 아인슈타인은 겁이 났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떨려서, 바이올린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습니다. 도망갈 수만 있다면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원들 가운데에서 아인슈타인이 가장 어려 보였습니다. 다른 음악가들은 모두 어른인데다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경건하게 앉아 있는 청중들을 보자 더욱 바짝 긴장되었습니다. 게르하르트 씨는 연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자기의 바이올린을 가볍게 두드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활을 집어 들고 잠시 곡에 대해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볍고 거칠고 부드럽게 곡이 이어지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차츰 마음이 진정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음악 속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음악에 몰두한 아인슈타인은 연주회가 끝날 때까지 자기가 청중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듣고서야 아인슈타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연주자들은 한 사람씩 무대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아인슈타인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은 한 사람씩 아인슈타인을 끌어안았습니다. "알베르트, 잘 해냈다." “오빠, 정말 멋있었어.”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그처럼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족과의 이별. 그 즈음 아인슈타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전기 회사가 차츰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태평스럽고 욕심이 없는 탓에 아버지의 회사는 자꾸만 경쟁 회사에 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아인슈타인네가 유대 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부에 무슨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서 유대인과 거래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1894년, 아버지와 삼촌이 경영하던 회사는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가게 자리를 알아보다가 이탈리아에 사는 친척의 주선으로 밀라노에 가게를 내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가족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이제 공장을 더 이상 유지해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밀라노로 이사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의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마야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어떤 곳인데요?” “기후부터가 독일과는 아주 다른 곳이란다. 그 곳은 밝은 태양 빛이 가득하고 숲과 올리브 향기 그리고 푸른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란다. 게다가 예술과 음악의 나라이기도 하지.” “잘 되었군요. 아버지의 사업이 잘 안 되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독일을 떠나게 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에요."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알베르트, 넌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 여기에 남아서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한다. 졸업장이 없으면 대학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아인슈타인은 무척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용기 있게 말했습니다. "이제 열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저는 잘 견뎌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는 1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내 모든 일이 결정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있을 곳도 정해졌고 가족들이 떠날 준비도 다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 해 가을, 아인슈타인 일가는 아인슈타인만 뮌헨에 남겨 둔 채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머니의 친구인 바이스만 부인 댁에 있게 된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생활해 나갔습니다. 바이스만 씨 부부는 아인슈타인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대해주려고 최선을 다했고, 그 집 아이들 사라, 레오나르트, 솔로몬도 아인슈타인을 친형이나 오빠처럼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에게 학교는 여전히 재미없는 곳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더욱 말이 없어졌고,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을 이상하게 여긴 반친구들은 더욱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습니다. '아, 밀라노의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마음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 남쪽 나라 이탈리아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학교 생활이 더욱 지겹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아인슈타인은 김나지움의 졸업장 따위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심정을 담아 아버지께 편지를 써 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족과 헤어진 지 반 년도 안 되었으므로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 주실 게 분명했습니다. '그렇다. 이제 나도 열여섯 살이나 되었으니까, 내 일은 내 힘으로 해결하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학교를 그만둘 구실을 찾았습니다. '그래, 아프다고 하고 휴학계를 내자. 그런데 그러자면 병원의 진단서가 있어야 할 텐데.’ 이렇게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전부터 그의 가족들과 알고 지내던 의사 슈테른을 찾아갔습니다. 슈테른 박사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인슈타인의 몸을 세심하게 진찰했습니다. "아인슈타인 군, 자네는 정말 좀 쉬는 것이 좋겠네. 내가 진단서를 써 줄 테니, 당분간 독일을 떠나 공기가 맑은 곳으로 가서 휴양하도록 하게나.” 진단서를 받아 든 아인슈타인은 말할 수 없이 마음이 홀가분해졌습니다. 그 진단서를 학교에 제출하자 곧 휴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아인슈타인의 휴학을 반기는 눈치였습니다. 학교를 떠나기 전 아인슈타인은 마지막으로 수학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평소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준 선생님에게 사정 이야기를 털어놓고 충고를 기다렸습니다. 자네가 떠난다니 정말 유감이군. 자네의 수학 실력은 지금 바로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뒤지지 않을 걸세. 선생님은 곧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더니 그것을 아인슈타인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추천장일세. 김나지움의 졸업장 없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걸세." "선생님, 고맙습니다." 공장은 뮌헨에서보다도 더 초라해졌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늙어 있었습니다. 물어 보지 않아도 공장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반갑게 아인슈타인을 맞이했으나,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다시 밝고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버린 아인슈타인은 싫증도 느끼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시간을 흘려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공장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알베르트, 너도 이젠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뭔가를 결심하기 전에 여행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아버지, 저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저는 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제노바까지 여행해 보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밀라노에서 제노바까지는 네가 혼자서 여행하기에 너무 먼 거리야. 그리고 요즘 공장이 어려워서 네게 여비를 줄 형편도 못 된단다." “돈은 많이 필요 없어요. 걸어서 갈 생각이에요." “무전 여행을 가겠다고? 얘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렴."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제노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옷가지를 넣은 배낭 하나와 약간의 음식 값밖에 없었지만 아인슈타인은 절로 신이 났습니다. 어느 날, 들판에서 잠을 자던 아인슈타인은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깼습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 가운데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장관을 이루는 별똥별을 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별똥별은 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지구 저 너머의 공간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새로운 것을 보면 호기심이 생겨 견딜 수 없는 아인슈타인은 그런 생각 때문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동이 터 올 무렵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다시 학교에 가게 되면 물리학을 전공해야지. 그럼, 열 빛 소리 자석 전기 따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될 테니까." 1895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취리히 공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학장에게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학장은 인상이 좋아 보이는 노신사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학장에게 독일 김나지움의 수학 선생님이 써준 추천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추천장을 본 학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수학에 매우 뛰어나군. 하지만 수학 말고도 중요한 과목이 많다네. 더구나 자네는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도 않았군 그래." 학장의 말에 아인슈타인은 몹시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게. 자네처럼 수학에 재능 있는 학생을 놓치고 싶지는 않네. 이 곳 김나지움을 1년 더 다녀서 졸업장을 받아 오면 어떻겠나? 그러면 우리 학교에 받아 주겠네." 아인슈타인은 실망했지만 애써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인사를 하고 나오려 할 때 학장이 다시 불렀습니다. “아라우라는 곳에 좋은 학교가 하나 있는데, 그 학교에 추천서를 써 주겠네.” 학장은 배려하여 말했으나 아인슈타인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뮌헨 김나지움에서의 지긋지긋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취리히 공과 대학을 걸어 나오며 아인슈타인은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 아라우로 가자. 1년만 참고 다니면 될 텐데....... 참아 내자.' 그런데 아라우 학교는 뮌헨의 김나지움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무조건 외울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군대와 같은 엄격한 규칙도 없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각자 궁금한 것을 연구하도록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선생님에게 질문할 수 있었고, 선생님들은 언제나 학생들의 좋은 의논 상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게다가 실험 기구가 갖추어진 과학 교실도 있어서, 물리 화학 실험실에서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실험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성격이 많이 밝아졌습니다. 어깨를 쭉 펴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혼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으나, 이제는 겁쟁이의 모습이나 수줍은 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공과 대학 시절. 아라우 학교에서 1년을 지낸 아인슈타인은 1896년 가을에 취리히 공과 대학에 입학 수속을 마쳤습니다. 새학기가 시작되자, 아인슈타인은 부모님 곁을 떠나 스위스의 취리히로 떠났습니다.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자.' 아인슈타인은 희망을 안고 교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아라우에서 이 학교에 들어간 동급생은 아인슈타인 외에 4명뿐이었습니다. 이 대학은 수재들만 모이기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모두 우수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제일 좋아하는 수학 과목의 교수로는 헤르만민코프스키와 아돌프 풀비치가 특히 유명했습니다. 민코프스키는 러시아 태생으로 아직 30세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수학적 형식을 갖춘 논문으로 써 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차차 다른 강의뿐만 아니라 민코프스키나 풀비치의 강의 시간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런 아인슈타인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머리가 좋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게으름을 피운단 말이야." 그러나 동급생 그로스만은 아인슈타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우수한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로스만이 아인슈타인을 찾아와 걱정을 해 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 어떻게 된 거야? 요즘에는 강의실에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으니 말이야." "응, 나는 요즘 물리학에 빠졌다네.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너무 까다로운 수학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수학 강의를 듣지 않았지." “그건 알겠어. 하지만 그렇게 강의에 빠지면 시험 때 곤란하잖아?" "괜찮아. 너는 하루도 수업에 빠지지 않는 모범생이잖아. 나는 너만 믿고 있어. 물론 시험 전에 네 노트를 빌려 주겠지?" 그로스만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야 노트는 빌려 주겠지만.......” "그럼 됐어. 이왕 도와 주기로 한 거니까 지질학 노트도 좀 부탁해." 사람 좋은 그로스만은 투덜거리면서도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의 우정은 한평생 계속되었습니다. 그로스만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취직을 위해서도 몇 번이나 힘써 주었고, 상대성 이론에 대해 연구할 때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취리히 공과 대학의 물리학과는 수학과에 비해 약간 뒤처져있었습니다. 특히 실험 물리학 쪽은 설비가 빈약했을 뿐 아니라 내로라할만한 교수도 없었습니다. 그 무렵 영국의 맥스웰이라는 학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세계의 어느 학자도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88년 독일의 헤르츠라는 학자가 실제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전자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습니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전자파의 존재를 의심하는 학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태생의 과학자 마르코니는 그 전자파를 사용해서 무선 전신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이 쓴 논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더욱 물리학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 때 취리히 대학에서는 하인리히 베바라는 나이 든 교수가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베바 교수의 강의는 훌륭했지만, 그는 물리학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여 낡은 이론만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베바 교수는 강의 중에 맥스웰의 이론을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맥스웰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베바 교수의 강의에 대해서 점점 싫증을 느꼈습니다. 베바 교수도 제멋대로 공부하려는 아인슈타인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질문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베바 씨!" 하고 불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바 교수는 얼굴이 벌게졌습니다. '교수님'이라는 호칭 대신 '씨'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두세 마디 질문을 하자, 베바 교수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인슈타인 군, 자네는 참으로 똑똑한 학생이야. 정말 머리가 좋아. 하지만 자네에게는 큰 결점이 있어. 자네는 도저히 남의 입에 오를 만한 큰 인물은 못 되겠네.” 아인슈타인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베바 교수의 눈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아인슈타인은 실험을 할 때에도 교수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지 않고, 좀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스스로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실험을 하다가 잘못하여 손에 큰 부상을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화를 내면서 실험을 지도하던 조교에게 말했습니다. “저 아인슈타인이라는 학생은 정말로 골칫거리로군. 항상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군단 말이야. 앞으로는 학생들이 반드시 내 지시에만 따르도록 해 주게나." 그러자 조교는 난처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교수님,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찾아내는 방법은 언제나 답이 정확하고 훌륭합니다. 그러니 야단을 칠 수도 없답니다." 조교로서는 아인슈타인의 뛰어난 재능을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에도 아버지의 사업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집에서 학비를 보내 주길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제노바에서 부자로 사는 숙모가 매달 100프랑의 돈을 보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학비와 하숙비를 내기에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때문에 아인슈타인에게는 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을 하려면 스위스의 국적이 있어야 하는데, 스위스의 국적을 얻으려면 많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가뜩이나 쪼들리는 가운데에서도 매달 얼마간의 돈을 저축하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가격이 아주 싼 형편없는 방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식사도 빵과 물만으로 때우는 일이 많았고, 옷이나 구두가 떨어져도 좀처럼 새것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처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본래 아인슈타인은 천성적으로 외모에 대해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가 유명해진 뒤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신분이 낮거나 가난해서, 혹은 옷차림이 초라하다고 해서 업신여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한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즐겁고 보람 있는 대학 생활을 보냈습니다. 4년 동안의 대학 생활은 아인슈타인에게 많은 결실을 안겨주었습니다.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고, 특히 그가 좋아하는 물리학에 있어서는 확고하게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대성 이론. 1900년 8월, 21세의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함께 졸업을 한 세 사람의 동급생 그로스만, 코르로스, 에과트는 모두 학교의 조교로 채용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은 제외되었습니다. 평소 아인슈타인을 못마땅하게 여긴 베바 교수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군. 김나지움의 물리 선생으로 써 달래야지' 그런데 김나지움의 교사가 되려면 스위스의 국적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은 재학 중에 모은 돈으로 수수료를 지불하고 1901년 스위스 국적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초라한 옷차림과 그가 정식 스위스 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녀도 좀처럼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02년 6월에서야 대학 시절의 친구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베른 시에 있는 특허국의 직원이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곳에서 발명가들의 발명품을 잘 조사해서, 그와 비슷한 것을 다른 사람이 흉내내어 만들지 못하도록 허가를 내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무척 까다로웠습니다. 발명품이 새로운 것이냐 아니냐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루에 8시간씩 책상에 붙어 앉아 있어야 할 정도로 항상 바빴습니다. 그 곳에서 아인슈타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일을 잘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며, 일이 끝난 뒤에는 쉬지 않고 물리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 무렵, 과학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은 태양이 우주 공간 속에 정지해 있으며, 그 둘레를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또 태양과 별, 그리고 행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우주 공간 외에는 에테르가 채워져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누구에 의해서 증명된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추측에 의해 그 때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마하라는 과학자는 태양이 정지해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이켈슨이라는 학자는 우주 공간에 에테르가 채워져 있지 않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문제에 흥미를 갖고 끈질기게 연구를 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1905년,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상대성 이론'이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태양은 우주 공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른 별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은하계를 비롯한 온 우주가 공간을 떠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우주 공간 속에는 에테르가 가득 차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빛이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라는 이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량자’라고 하는 조그만 에너지의 입자로 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게다가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르며 우주를 통틀어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몇몇 뛰어난 교수들만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의 논문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취리히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클라이너 교수도 그런 몇 안 되는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클라이너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직접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베른의 특허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을 처음 본 순간 클라이너 교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힘차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라이너 교수님." “과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신 아인슈타인 씨를 만나게 되어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씨, 제가 오늘 여기를 찾아온 것은 선생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선생께서 우리 대학에서 강의를 해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먼저 자격을 얻으셔야 하지만요." "무슨 자격입니까?" 아인슈타인이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우선 얼마 동안은 강사로서 근무하셔야 해요. 그 기간은 선생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기간이면서, 선생 자신의 경험을 쌓을 시간으로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아인슈타인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교수님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사실 저도 대학에서 수학이나 물리학을 가르쳐 보고 싶었습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겸손한 태도에 클라이너 교수는 또 한 번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대학으로 간 아인슈타인은 특허국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연구에 매달리는 한편, 자신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논문도 계속 발표했습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또 다른 논문에서, 빛은 인력이 센 항성의 옆을 지날 때 굴절한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 이론은 그의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빛이란 항상 직진해서 공간을 지 나간다고 믿어 왔던 것입니다. 이 이론을 밝히기 위해 영국의 학자들로 이루어진 탐험대가 개기 일식을 관찰하기 위해 개기 일식 현상이 잘 나타나는 브라질과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평소에는 햇빛 때문에 태양 근처의 별들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을 볼 수가 없지만, 태양 빛이 달에 가려 캄캄해졌을 때에는 태양의 뒤에서 날아오는 먼 빛이 분명하게 보이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탐험대는 일식이 일어나는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끼어드는 일식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 갔고, 학자들은 태양을 향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댔습니다. 그 결과 사진에 찍힌 현상은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그대로였습니다. 별에서 나오는 빛은 별이 태양의 옆을 지날 때, 아인슈타인이 계산한 각도만큼 굴절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부터 세상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된 것입니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인 베를린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에만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그를 강연회에 초청했던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중국·일본 등을 방문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를 대환영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아인슈타인을 환영하려는 사람들이 항구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시가 행진을 하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독일어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아인슈타인을 마중하려고 항구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독일어로 환영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그 날을 국경일로 삼을 정도였으며, 수상까지 직접 나와 환영해 주었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아인슈타인이 독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인 가운데에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독일인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독일 수상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똑똑하고 유명한 유대인을 지독히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미국과 영국을 거쳐 벨기에를 여행하고 있을 때, 그의 명예와 시민권을 빼앗고 집을 몰수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독일을 떠날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위기에 몰린 아인슈타인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미국의 최고 연구 기관인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가 아인슈타인을 따뜻하게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미국 시민권도 얻게 되어서, 그는 미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어느 날, 한 소녀가 아인슈타인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수학을 굉장히 잘하신다는데 정말이세요?" 아인슈타인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보통 사람들보다는 잘 한단다." "그럼, 아저씨. 제 수학 숙제를 좀 거들어 주세요! 어려운 문제가 많거든요." “그러자꾸나. 우리 둘이서 하면 아마도 그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을 거야." 소녀는 다음 날부터 아인슈타인을 찾아와 함께 수학 숙제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뒤늦게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녀의 부모가 당황해서 아인슈타인의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아인슈타인 선생님, 연구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우리 딸이 방해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소년처럼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따님이 저한테 배운 것만큼 저도 따님한테서 배운 것이 많거든요."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런 마음은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 그가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가 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1939년, 야심을 키워 가던 히틀러는 마침내 세계 정복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독일은 원자 폭탄을 만들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인슈타인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원자 폭탄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원자 폭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최근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라늄을 원료로 하는 원자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습니다. 이 원자 폭탄은 지금까지의 어떤 폭탄보다도 그 위력이 큽니다. 미국 정부는 즉시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원자 폭탄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1945년, 첫 원자 폭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독일이 항복해 버린 후였습니다. 독일은 끝내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 미국에서 만들어진 원자 폭탄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던져져 30만 명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미국은 그 뒤 수천 개의 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옛 소련에서도 원자 폭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원자 폭탄이 계속 생산되는 것을 염려한 아인슈타인은 세계에 호소했습니다. "원자 폭탄을 함부로 쓰게 되면 인류는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세계는 이제 무기의 힘으로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나라는 평화를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를 원하는 세계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호소에 힘입어 원자 폭탄의 제조를 금지시키자는 운동이 맹렬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어느덧 아인슈타인은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검소한 차림으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핵무기 폐지 운동을 이어 나가는 한편 과학 논문도 계속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던 1955년 4월 18일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인슈타인은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의사들은 그를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일흔여섯의 나이로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전세계 사람들은 위대한 과학자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그는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과학사에 끼친 업적과 죽기 직전까지 세계 평화를 걱정했던 마음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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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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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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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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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역사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선생님의 책상 밑에서 '찌르릉! 찌르릉!' 하고 벨 소리가 낮게 울렸습니다. 이 벨 소리는 러시아 장학관이 온 것을 알려 주는 비밀 신호입니다. 선생님은 재빨리 칠판에 씌어 있는 폴란드 어를 지우고 나서 학생들에게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어서들 서둘러라." 그 말에 학생 너덧 명이 일어나 재빠르게 폴란드의 역사책과 공책을 거두어서 감추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책상 위에 바느질감을 올려놓고 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둘러본 뒤 칠판에 러시아 어로 '가정 실습'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눈빛만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더니 근엄한 표정의 러시아 장학관이 들어왔습니다. 장학관의 뒤에는 교장 선생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러시아 장학관은 매서운 눈초리로 학생들의 책상 위를 훑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테니, 대답할 학생을 지목해 주시오." 러시아 장학관의 말에 모두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일어나요." 선생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지명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반에서 늘 1등을 차지하는 여학생이었습니다. 러시아 장학관은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러시아를 지금까지 다스려 오신 황제의 이름을 차례로 말해보거라." "예카테리나 2세, 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1세입니다." 마리아는 러시아 어로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 러시아를 다스리시는 분은?" 마리아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폴란드를 빼앗은 러시아 황제의 이름을 말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겨우 대답했습니다. "네. 알렉산드르 2세 폐하입니다." "음,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있군." 러시아 장학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을 나갔습니다. 장학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선생님은 마리아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마리아는 울음을 터뜨리며 선생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마리아, 정말 잘 해주었다. 언젠가는 우리말을 당당하게 말하고 쓸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야.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굳세게 견뎌야 해." 선생님의 나직이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지켜보던 학생들도 모두 눈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라고 불린 이 소녀가 바로 두 번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입니다. 마리아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스클로도프스카 집안의 5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이시면서 부장학관이란 직책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네는 학교의 관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지만, 마리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품에 안기려고 해도 한 번도 안아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런한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좀 자란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병이 옮을까 봐 아이들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서 웃음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언니들도 어머니의 병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버지만이 어머니의 병을 걱정하며 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직무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장학관직에서 '해임하고 봉급도 줄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얼마 전에 아버지가 채점한 답안지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한 학생이 폴란드 말이 섞인 답안지를 냈는데, 전체적인 답안이 훌륭하이 아버지는 그 학생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네는 학교의 관사를 나와야 했으며, 아버지의 봉급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조국 폴란드를 위해서 살 거야.' 마리아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벌이가 줄어들자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하숙을 쳤습니다. 어느 날, 마리아는 아버지의 방에서 작은 유리 그릇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 유리 그릇들은 무엇을 하는 건가요?" “응, 그건 물리 실험용 기구란다." 마리아는 그 그릇들로 어떻게 실험을 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실험이라는 것이 무척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 마리아는 언제나 1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집에 돌아오면 늘 책을 끼고 살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마리아네 가족은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화롭던 마리아네 집에 또 한 번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마리아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한 학생이 장티푸스에 걸린 것입니다. 어머니와 큰언니 소피아, 작은언니 브로냐가 그 학생을 간호했는데, 불행히도 소피아가 병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소피아의 나이 16세, 마리아가 9세 때였습니다. 불행은 계속되어 어머니의 병도 갈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하느님, 제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 가족들은 저녁마다 모여 앉아 어머니를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은 점점 깊어 갈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헬라, 브로냐, 요셉, 마리아를 둘려보며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들도 언제나 서로를 사랑하며 살도록 해라.' 말을 마친 어머니는 젖은 눈을 스르르 감더니 다시는 뜨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의 나이 11세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은 더욱 똘똘 뭉쳐 열심히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1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립 여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 공립 여학교는 모든 것이 러시아식이었지만, 대학에 진학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공립 여학교도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브로냐 언니와 요셉 오빠도 졸업할 때에 금메달을 받았기 때문에, 스클로도프스카 집안에는 자랑스러운 금메달이 3개나 걸리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마리아는 바르샤바 대학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르샤바 대학은 여학생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려면 독일이나 프랑스로 유학을 가야 했습니다. 브로냐는 대학에서 의학을, 마리아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오빠 하나를 대학에 보내기에도 빠듯했습니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워 딸들을 대학에 진학시키지 못하는 것을 무척 가슴 아파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마리아가 더욱 안쓰러웠습니다. 아버지는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시골의 친척 집으로 가서 당분간 쉬었다 오라고 권하였습니다. 기차가 바르샤바 역을 떠날 때 아버지는 막내딸의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마리아, 궂은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게 마련이란다. 모든 것을 잊고 잠시 푹 쉬었다 오너라" “고마워요, 아버지. 그동안 몸 건강하세요!" 마리아는 서둘러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신선한 공기와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온몸을 감싸 주는 흙냄새를 맡으며 마리아는 얼마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가로운 생활은 마리아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마리아는 브로냐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언니, 파리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싶지?” “그야 물론이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언니가 저축해 둔 돈으로 차비를 해서 파리로 떠나. 언니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내가 가정 교사 일을 해서 언니의 학비를 댈게.” 마리아는 상기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마리아, 네 말은 정말 고맙구나. 하지만 그건 안 돼. 널 고생시키면서 어떻게 내가 편하게 공부를 하겠니?” “언니가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면, 그땐 언니가 날 도와주면 되잖아!” “세상에. 마리아, 너 참 대견한 생각을 했구나. 하지만 의사가 되려면 5년이나 공부를 해야 한단다. 네가 먼저 대학을 마치고 나면 그다음에 내가 갈게.” “아니야, 언니. 난 아직 어리니까 기회가 많지만 언니에겐 기회가 별로 없잖아.” “마리아. 고맙구나.” 마리아의 생각을 듣자 아버지도 크게 기뻐하며 찬성했습니다. “나도 너희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하마.” 브로냐가 파리로 떠난 뒤, 마리아는 가정 교사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몇 군데 자리가 났지만, 가정 교사는 마리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이 드는 직업이었습니다. 대개 부잣집에서 가정 교사를 두었는데, 그중에는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그런 집의 학부모는 사치를 부리는 일에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가정 교사의 급료를 지불하는 데에는 매우 인색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러한 도시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진 스츠우키 마을에 가정 교사 자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먼 곳으로 딸을 보내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마리아의 굳센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떠나는 날은 눈이 몹시 내렸습니다. 아버지와 헬라 언니가 눈을 맞으며 바르샤바 역까지 전송해 주었습니다. “몸조심하거라, 마리아.”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언니도 잘 있어.” 기차는 서서히 눈 속을 미끄러져 갔습니다. 창밖으로는 함박눈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시골의 작은 역에 내쳤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썰매를 타고 가정 교사로 일하게 될 집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죠?” 그 집의 가족들은 매우 친절하게 보여 마리아는 일단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너무도 피곤하여, 마리아는 저녁 식사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본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날은 어두워서 보지 못했는데 사탕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참으로 싱그러웠으며, 마을 사람들의 인상도 다들 좋아 보였습니다. 마리아는 이곳에서 18세 소녀 브론카와 10세의 안지아에게 3년 동안 공부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브론카는 마리아와 같은 또래인데도 마리아를 잘 따랐으며, 안지아도 마리아를 좋아했습니다. 마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마리아는 이곳의 아이들 대부분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아는 브론카에게 말했습니다. "브론카, 글을 배우지 않는 이 마을의 아이들이 불쌍해." "폴란드 사람이 러시아 말을 배우고 싶겠니? 아이들은 러시아 말을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려고 해." 브론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갑자기 브론카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브론카, 아이돌은 나라의 미래야. 아이들이 메우고 깨우치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나라를 되찾을 수 없게 돼.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아이들에게 폴란드 말을 가르치면 어떻겠니?'' "그래.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장소를 마련해 볼게." 브론카는 매우 기뻐하며 마리아의 생각에 적극 찬성했습니다. 다음 날, 이야기를 들은 브론카의 아비지는 마리아에게 나직이 말했습니다. "이 일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오. 만일 러시아 관리에게 발각되면 우린 모두 체포될 거예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한 일이니 한번 해 봅시다. 뒤뜰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가르친다면 안전할 것이오." 브론카의 아버지는 어린 마리아에게 늘 존댓말을 써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브론카의 아버지로부터 승낙을 받게 된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마리아와 브론카는 곧 야학을 열었습니다. 처음엔 위험한 일에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겠다던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나중에는 마을 아이들 모두가 야학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글을 깨우치지 못한 어른들까지 나오기 시작하여, 마리아와 브론카는 무척 보람을 느꼈습니다. 마리아가 스츠우키 마을에서 가정 교사로 있은 지 어느덧 3년이 흘렀습니다. 약속한 기간이 끝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중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소년 감화원의 원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중학교 선생보다 월급이 많아서 이제는 브로냐에게 학비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브로냐 언니에게서 반가운 편지를 받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폴란드 사람인 가지미르 도루스키란 의사와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파리에 있는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희소식도 남겨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녀는 곧 정든 스츠우키 마을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언니가 있는 파리로 향했습니다. 1891년, 마리아는 마침내 그토록 소원하던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학교에 입학할 때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로 등록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마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소르본 대학에 들어간 마리는 옷차림이 초라한 데다가 언제나 강의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남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그런데 소르본 대학의 강의는 무척 어려웠습니다. 프랑스 말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강의 내용을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습니다. 언어뿐이 아니었습니다. 마리는 수학과 물리에도 자신이 크게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어." 이렇게 생각한 마리는 책상에 붙어 앉아서 새벽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브로냐 언니네 집은 손님 출입이 빈번하며 마리의 공부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마리는 브로냐 언니와 상의하여 학교 부근에 싼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낡고 누추한 방에는 침대와 이불, 난로, 책상과 의자, 그리고 몇 가지 가재 도구가 전부였습니다. 생활비도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모는 것을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밤에는 램프를 켜는 데 드는 석유 값을 절약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새벽녘까지 책상 앞에 앉아 책과 씨름을 했습니다. 파리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지만, 마리는 석탄을 아끼기 위해 난로도 때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옷을 몇 겹씩 껴입고 추위를 견디며 책을 읽었습니다. 식사도 물론 보잘것없었습니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기 위해 빵과 홍차 또는 과일만으로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마리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마침내 마리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브로냐 언니와 형부는 방 안을 둘러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와 형부는 단번에 마리가 영양실조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안 되겠어,이러다간 죽고 말겠어. 마리를 집에 데려가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충분히 먹여야 해." 며칠 동안 브로냐 언니 집에서 영양 있는 음식을 먹자, 마리는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언니, 너무 오랫동안 쉰 것 같아. 이젠 자취방으로 돌아가야겠어." “마리, 앞으로는 건강을 돌보면서 공부한다고 약속해. 알겠지?" 자취방으로 돌아온 마리는 다시 밤낮없이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어느덧 마리가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한 지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졸업 학사 시험을 치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게시판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물리학 학사 시험 1등,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아버지, 제가 1등이에요. 아버지 딸 마리가 드디어 해냈어요.' 게시판 앞에 서 있는 마리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마리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학비 때문에 단념해야 했습니다. 소르본의 교수들과 친구들도 마리가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폴란드로 돌아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폴란드에는 우수한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아비지가 알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장학금을 신청하여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어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마리는 기뼈하며 장학금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는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무렵 마리는 파리 공업 진흥 협회라는 곳에서 일하며 얼마간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리는 '강철과 자석에 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려면 넓은 연구실이 있어야 했습니다. '실험실을 빌려 쓸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폴란드에서 알고 지내던 코발스키 교수가 파리에 왔습니다. 그는 마리가 실험실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 좋은 곳이 있소. 내가 잘 아는 훌륭한 물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부탁해 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요." 다음 날, 마리는 코발스키 교수를 통해서 그 젊은 물리학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피에르 퀴리였으며, 물리.화학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마리는 그와의 첫 만남에서 맑고 깊은 학자의 시선을 느꼈으며,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피에르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느라 힘드시지요?'" “아닙니다. 파리는 참 자유로운 도시인걸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피에르의 눈은 마리의 얼굴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피에르는 마리의 수수한 옷차림과 꾸임 없는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에게 자기 학교의 실험실을 쓰도록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에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프랑스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피에르의 질문에 마리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조국을 버릴 수 없습니다. 저는 실험이 끝나면 폴란드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피에르는 마리의 애국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오래지 않아 프랑스를 떠날 거라는 말에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그 둘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습니다. 피에르는 그날 마리와 헤어진 뒤 그녀가 자꾸 보고 싶었습니다. 자존심이 세고 소극적인 피에르에게 이런 감정은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피에르는 마리가 필요하다고 한 연구 자료를 챙겨서 마리에게 찾아갈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피에르가 다시 마리의 실험실로 찾아갔을 때, 마리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피에르는 그런 모습의 마리를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마리는 한참 뒤에야 피에르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얼굴을 붉혔습니다. "어머. 피에르 씨. 언제 오셨어요?'' "저.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인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피에르는 수줍어하며 연구 자료를 내밀었습니다. “어머, 제게 꼭 필요한 자료로군요.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번번이 은혜를 입기만 하는데, 어떻게 갚죠?” "차나 한 잔 주시면 됩니다." 피에르는 마리와 좀 더 오래 앉아 있고 싶은 생각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는 피에르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피에르는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마리의 작은 방은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누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피에르에게 마리의 가난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마리도 피에르의 이런 심정을 눈치챘는지 얼른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피에르는 그렇게 당당하고 구김살 없는 마리에게 더욱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뒤로 피에르는 마리를 만나기 위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마리의 실험실을 찾아왔습니다. 그 둘은 서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의논을 했습니다. 초여름의 어느 오후, 마리와 피에르는 잠시 실험과 공부에 대한 것을 털어 내고 들판을 거닐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만남을 가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의 휴일에 피에르가 마리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부모님께 마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뵙고 싶어요." 마리는 흔쾌히 피에르를 따라나섰습니다. 평소에 입던 허름한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본 피에르의 부모는 마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아름답고 영리한 아가씨로군요. 우리는 피에르가 이렇게 훌륭한 아가씨를 만나게 될 줄 알았답니다." 마리 역시 피에르 부모님에 대해서 아주 좋은 인상을 받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마리는 수학 학사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 뒤 폴란드로 돌아 가기 위해 짐을 꾸렸습니다. 피에르는 짐 싸는 일을 도우면서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 떠나기 전에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리고 돌아오면 나의 아내가 되어 줘요." 마리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피에르, 그건 안 돼요." 사실 마리도 피에르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조국 폴란드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마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피에르, 내게는 조국 폴란드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답니다. 그리고 고국에는 늙으신 아버지가 홀로 계셔요." "하지만 마리, 당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폴란드에 큰 영광을 바친다면 그것도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지 않소?" 피에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7월의 어느 날, 마리는 바르샤바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바르샤바는 그녀가 자유롭게 연구를 할 여건이 못 되었습니다. 그 해 10월, 마리는 다시 연구를 위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피에르가 찾아왔습니다. "마리. 나는 당신과 함께 연구해서 꿈을 이루고 싶소.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 사이의 우정만큼은 지키도록 합시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피에르를 보며 마리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날 저녁, 마리는 브로냐 언니를 찾아갔습니다. "피에르가 나와 결혼하기를 원해. 하지만 난 폴란드로 돌아가 우리나라를 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마리. 너도 알다시피 지금 폴란드는 연구를 하기엔 너무 힘든 곳이야. 그곳은 실험 기구도 부족하고 책 한 권 사 보는 데에도 제약이 있지 않니.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래서는 폴란드보다 파리가 나을 거야. 네가 피에르를 사랑하고 있다면 난 그와의 결혼을 권하고 싶구나." 마리의 심정을 전해 들은 아버지도 마리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마리,너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단다. 네가 프랑스 사람과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더라도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딸이고, 네 조국이 폴란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단다." 마리는 마침내 피에르와 결혼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 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피에르와 마리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뜻에 따라 결혼식은 피에르의 집 뜰에서 검소하게 치러졌습니다. 이제까지 짙은 색의 옷만을 입어 온 마리가 하늘색 블라우스와 긴 스커트를 입고 나타나자, 피에르와 그의 부모는 아름다운 마리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피에르와 마리의 가족,학교 친구들과 교수들도 참석하여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온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두 사람을 축복해주었습니다. “마리아, 이로써 너는 퀴리 부인이 되었구나. 앞으로 행복하게 살 거라.” 서양에서는 결혼을 하면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의 이름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에서 마리 퀴리가 된 것입니다. 결혼식을 마친 퀴리 부부는 자전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갈 곳도 정하지 않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들판을 달렸습니다. 가다가 피곤하면 풀발에 앉아 쉬고, 배가 고프면 삶은 달걀과 빵으로 요기를 하면서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퀴리 부부는 피에르가 다니는 물리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얻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세 개의 방에는 두 사람의 핵과 실험 기구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마리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려 가기 위해, 일매매일 가계부를 쓰며 검소한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리고 결혼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며 보람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마리는 물리학 교사 자격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소." "당신이 힘과 용기를 준 덕분이에요." 피에르는 진심으로 아내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퀴리 부부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를 두루 구경하는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퀴리 부부가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올 무렵, 독일의 뢴트겐 박사가 X선을 발견하며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베크렐 교수가 우라늄이라는 광석을 연구하다가 그 속에서 뢴트겐이 발견한 X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리는 베크렐 교수의 연구에 매우 홍미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베크렐 교수가 발견한 빛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가 알아내지 못한 빛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마리의 말을 듣고 피에르도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일이니 한번 연구해 볼 만할 거요." 퀴리 부부는 함께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 매우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귀여운 딸 이렌이 태어난 것입니다. 1897년 9월,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습니다. 아기가 생겨 더욱 시간을 쪼개야 했지만, 마리는 연구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피에르는 따뜻하고 자상하게 아내와 딸을 보살피며, 연구에 있어서는 훌륭한 동료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실험과 연구를 하기에는 실험실이 너무 비좁았습니다. 피에르는 물리 학교 교장에게 부탁하여 학교의 창고 하나를 빌릴 수가 있었습니다. 비가 새고 습기가 차서 축축하고 냉기가 느껴졌지만 마리는 무척 기뻤습니다. "연구만 할 수 있으면 돼요. 고마워요, 피에르." 마리는 그 방에 실험 기구와 책을 가지다 놓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피에르는 바쁜 가운데에도 틈을 내어서 연구실에 들러 마리를 격려해 주었고, 연구에 대해 조언도 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가 감격한 목소리로 달했습니다. "여보, 여러 가지 광석 가운데 우라늄과 토륨이 들어 있는 광석만이 이상한 빛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건 베크렐 교수의 연구에서 이미 밝혀진 게 아니오?" “그런데 이 피치블렌드라는 돌에서는 우라늄을 뽑아낸 후에도 계속 빛이 나오고 있어요. 우라늄과 토륨이 발하는 빛보다도 훨씬 강한 빛이에요." “그렇소? 굉장한 발견이구려. 그 빛이 무엇일까? 어서 그걸 알아냅시다. 나도 내 연구를 중단하고 그 일에 매달리겠소." “고마워요, 여보" 마리는 더욱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함께 신비한 빛을 밝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 이 신비한 빛을 '방사선'이라 부르고, 방사선이 빛을 내는 이러한 현상을 ’방사능'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퀴리 부부는 피치블렌드를 녹여서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한 끝에 그 속에서 빛을 내는 물질을 찾아냈습니다. “피에르, 광선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군요." 두 사람은 기쁨으로 가슴이 떨려 왔습니다. “그런데 빛의 세기를 보아 이것보다 좀 더 강한 빛을 내는 것이 또 있을 것 같소." “그래요. 하지만 이것도 새로운 물질이니 이름을 붙여서 세상에 발표하죠." “그럽시다. 마리, 이것은 당신이 발견한 것이니 당신이 이름을 짓도록 해요." “나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폴로늄? 좋은 이름이오." 그러나 피치블렌드 속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물질이 있었습니다. 퀴리 부부는 이 물질을 찾아내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 물질이 발견되었습니다. “여보, 드디어 찾아냈어요." “그래요. 마침내 그동안 노력한 결실을 얻었구려. 이것은 방사능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라듐이라고 이름 짓는 게 어떻겠소?” “좋아요. 그렇게 해요." 퀴리 부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사람은 연구 결과를 과학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더욱 확실한 연구 결과를 원했습니다. 피에르와 마리는 학계에 확실한 것을 발표하기 위하여 더욱 깊이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실험에 필요한 만큼의 라듐을 추출해 내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양의 광석이 필요한데, 그 광석의 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입니다. 마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희망을 가집시다. 분명 충분한 양의 광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요." 피에르는 마리를 격려했습니다. 마리는 힘을 내어 다시 연구실에 틀어박혔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피에르는 이런 아내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광석을 얻기에 분주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의 한 교수가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충분한 양의 우라늄 광석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피에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광석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빌려주었습니다. 1899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마침내 광석을 실은 마차가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퀴리 부부는 너무도 감격하여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그들은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피에르가 라듐의 특성에 관해서 연구하는 동안, 마리는 광석을 처리하며 순수한 라듐을 뽑아내기로 했습니다. 마리는 잘게 빻은 광석 가루를 큰 솥에 넣고 약품을 섞은 뒤, 자기의 키만한 쇠막대를 휘저으며 라듐을 뽑아 내기 위해 열중했습니다. 몇 톤이나 되는 돌이 마리의 손으로 빻아지고 녹여졌지만 라듐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의 손은 거칠어지고 갈라졌습니다. 고생하는 마리를 보며 피에르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리, 조수도 없이 이렇게 고생을 시켜서 미안하오." “아니에요. 조수가 있으면 일의 진행은 빠르겠지만, 라듐의 분리 과정을 낱낱이 알기는 어려울 거예요." 몇 달 동안 연구에만 매달리는 사이에 그들의 연구 비용은 거의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퀴리 부부는 학교에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마리는 세브르의 고등사범학교에서 근무하기로 했고, 피에르는 소르본 대학에서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그 무렵 피에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두 사람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피에르의 아버지가 이렌을 보살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해서 수입은 좀 나아졌지만, 연구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부족해졌습니다. 퀴리 부부는 자기들의 힘든 연구가 곧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 믿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02년, 오랜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라듐 0.1 그램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밤중에 연구실로 간 퀴리 부부는,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책상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불을 켜지 마세요." 마리가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해냈구려." 두 사람은 빛을 발하는 라듐 앞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마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홀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피에르는 아내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마침내 퀴리 부부의 연구는 모는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덴 스톡홀름의 왕립 과학 학사원에서는 퀴리 부부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수상식 날, 피에르는 과학 학사원에서 다음과 같이 노벨상 수상 연설을 하였습니다. “라듐은 새로운 원소로서 여러 가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나쁜 의도로 사용되면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와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피에르가 우려했던 일은 현실로 이루어지 고 말았습니다. 퀴리 부부가 발견한 방사성 물질은 원자 폭탄으로 만들어져 제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1904년에는 둘째 딸 에브가 태어나 퀴리 부부의 기쁨을 한층 더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이 겹치는 중에 바르샤바에 계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는 죽음 직전까지 아버지를 홀로 있게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마리는 그동안의 과로와 깊은 슬픔 때문에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습니다. 마리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왔 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퀴리 부부는 여전히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예전처럼 다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피에르는 이따금 큰딸 이렌을 데리고 산책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친절하게 딸의 얘기를 들어 주고 묻는 말에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어린 이렌은 부모의 과학 연구에 꽤 관심을 보였습니다. 1906년 부활절 휴가를 맞이하며 피에르는 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 동 안 피로에 지쳤던 그들 부부에게는 이러한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피에르는 들판에서 두 딸들과 뒹굴며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가운데에도 아내와 함께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피에르는 거의 매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서 지냈습니다. 마치 자기의 생애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쫓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무섭게 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그 해 4월 19일, 피에르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날은 가늘고 차가운 빗줄기가 흩뿌려 길이 매우 미끄러웠습니다. 밤늦게 식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헤어진 피에르는 센 강변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길은 평소 피에르가 좋아하는 산책로였습니다. 피에르가 부두 쪽으로 걸어가려고 교차로를 건너는 순간, 뒤쪽에서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육중한 짐마차가 그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피에르는 황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그만 빗물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몸을 마차의 뒷바퀴가 밟고 지나갔습니다. 비 내리는 거리는 금세 피에르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비명을 질렀습니다. 피에르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쌍한 녀석,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늙은 에비보다 먼저 가다니."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피에르의 아버지는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슬픔을 참느라고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습니다. 마리는 돌처럼 굳어진 채 멍하니 몸서리만 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차디찬 피에르의 손에 입을 맞추고 온몸을 끌어안았습니다. 마리의 머릿속에는 피에르와 함께 지낸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날들이었지만 항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 남편이 한없이 그리웠습니다. 피에르는 그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곳 바로 옆에 묻혔습니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마리는 오랫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지냈습니다. 그때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피에르의 뒤를 이어 피에르가 가르치던 과목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때까지 소르본 대학에서 여자가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리는 피에르를 잃은 상처를 안은 채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피에르가 살아 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리.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학문과 연구류 계속해야 하오.' 퀴리 부인은 고개류 들고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해 보겠어요." 마침내 그녀의 첫 강의날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남편의 무덤을 찾아간 퀴리 부인은 오랫동안 무덤 앞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힌 후 소르본 대학의 강단에 섰습니다. 강의실에는 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신문 기자와 강의를 신청하지 않은 학생들까지도 호기심을 갖고서 모여앉아 있었습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퀴리 부인이 강단에 서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퀴리 부인은 잠시 동안 박수가 멎기를 기다렸습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피에르가 중단했던 바로 그 대목에서부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피에르에 대한 입적과 자신을 강단에 서게 해 준 대학에 대한 인사말 정도로 첫 강의를 마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퀴리 부인의 의연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퀴리 부인은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틈틈이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저녁때에는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을 보살폈습니다. 이 무렵 퀴리 부인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어린 이렌과 에브, 그리고 시아버지였습니다. 그들은 퀴리 부인 곁에서 큰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퀴리 부인은, 학교의 동료 교수들과 의논하여 소르본 대학의 작은 강의실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렌을 포함한 10명가량의 아이들이 그 방에서 즐겁게 공부를 했습니다. 수학, 화학, 물리학, 문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어린 학생들을 위하여 아주 흥미롭게 학문의 세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퀴리 부인이 가르치는 물리학 시간이었습니다. 퀴리 부인은 '과학이란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산책과 자연 관찰을 주로 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퀴리 부인은 많은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피에르가 다하지 못한 연구와 소르본 대학에서의 강의,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일 등에 시간을 몽땅 쏟느라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쁜 나날 속에서도 퀴리 부인은 남편 피에르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언제나 피에르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는 퀴리 부인에게 이 일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퀴리 부인은 라듐의 국제적인 표준을 처음으로 제정하고, 라듐 금속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이 무렵 퀴리 부인은 자신이 밀고 나가던 방사능 영역의 연구를 인정받아 소르본 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방사능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순수한 라듐 금속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 연구 업적으로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1911년의 일이었습니다. 퀴리 부인은 남편 피에르와 함께 들어갔던 넓은 수상식장에 이번에는 딸 이렌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이 어린 이렌이 24년 후에 그 수상식장에서 노벨상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이날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퀴리 부인의 명예와 영광은 세계가 인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퀴리 부인에게 관심을 쏟았지만, 퀴리 부인은 연구에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그들을 피했습니다. 또한 퀴리 부인은 방사능 연구를 위한 실험실을 건설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뛰어다녔습니다. 이때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바르샤바에 방사능 연구소를 세울 계획인데, 퀴리 부인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폴란드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퀴리 부인은 곧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바르샤바로 달려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환영하기 위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폴란드는 여전히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러시아 관리들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퀴리 부인에게는 어떤 간섭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퀴리 부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폴란드 말로 당당하게 폴란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폴란드 여행은 퀴리 부인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녀가 파리로 돌아온 지 얼마 후, 소르본 대학의 주선으로 라듐 연구소의 설립이 추진되었습니다. 퀴리 부인은 매일 공사장에 나가 일의 진행을 지시했습니다. 공사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7월, 마침내 라듐 연구소가 완성되었습니다. 죽은 피에르가 손수 설계까지 했으면서도 그의 생애에는 갖지 못했던 훌륭한 연구소를 보자 퀴리 부인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피에르, 이제 이곳에서 당신의 꿈을 키워 갈 거예요.' 퀴리 부인은 남편 피에르를 떠리며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라듐 연구소에서 제대로 된 연구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독일군은 예고도 없이 벨기에를 넘어 프랑스로 물밀듯이 쳐들어왔습니다. 프랑스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라듐 연구소의 젊은 청년들도 모두 전쟁터로 달려나갔습니다. 퀴리 부인은 이렌과 에브를 시골로 보내고 자신은 연구소에 남았습니다. 피에르와 함께 땀 홀려 발견한 소중한 라듐을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독일군에게 쫓겨 돌아오는 프랑스의 부상병들을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죽음에서 건질 수는 없을까?’ 퀴리 부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뢴트겐의 X선을 이용해 부상병을 치료해 주자는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퀴리 부인은 프랑스 여성 협회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에 방사선 기구를 설치하고, 스스로 차를 몰며 야전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겉모양은 보통 자동차와 다름없었지만 차 안에는 방사선을 이용한 X선 치료 기구가 있었으며, 자동차의 모터를 돌려서 전류를 일으키는 발전기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탄환이나 포탄 하편이 어디에 막혀 있는지를 몰라 치료도 못 받고 죽어 가던 부상병의 치료에 방사선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방사선 기구나 탄환이 어디에 막혀 있는지를 알아내고 나면 몇 시간씩 걸리던 수술도 몇십 분이면 끝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의사와 환자들은 퀴리 부인의 도움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부상병들은 자구만 늘어갔습니다. 프랑스 각지에서 많은 여성들이 퀴리 부인의 일을 도와주려고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는 더 이상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생각 끝에 퀴리 부인은 20여 곳에 방사선 치료소를 설치했습니다. 많은 부상병들이 퀴리 부인이 설치한 치료소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렌도 어머니처럼 전쟁터 각지를 돌며 자기 역할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이렌은 어머니가 연구실과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일과 연구를 동시에 했던 것처럼, 방사선에 대한 공부와 간호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해 나갔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는 5년 동안 퀴리 부인은 많은 부상병을 치료했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과학자일 뿐 아니라 사랑과 희생정신을 지닌 여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조국 폴란드가 해방을 맞이하여 150년 만에 독립국으로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퀴리 부인은 다시 라듐 연구소에 나가서 연구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써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가난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퀴리 부인은 두 딸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너희들도 이제 다 컸구나. 이렌, 너는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 퀴리 부인은 이제 21세의 처녀가 된 이렌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저도 일생 동안 어머니처럼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어머니의 연구실에서 제가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래? 물리학의 어느 분야를 연구하고 싶니?” “라듐의 연구요." “오, 이렌. 그것 참 반가운 일이로구나." 퀴리 부인은 맏딸 이렌이 자신의 뒤를 이어 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고 그지없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번에는 14세의 에브에게 물었습니다. “에브는 어떤 꿈을 갖고 있지?" “전. 의학을 할 생각이었는데, 제 적성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저에겐 아무래도 음악이 어울릴 것 같아요. 특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좋아요." “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을 가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란다." 1920년 5월의 어느 날, 미국의 뉴욕에서 브라운 멜로니라는 여성이 퀴리 부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뉴욕에서 큰 잡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탐방 기자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멜로니는 파리의 라듐 연구소 대기실에서 퀴리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연구소 문이 열리고 검은 무명옷을 입은 퀴리 부인이 나왔습니다. 높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경건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멜로니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미국 여성들은 부인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답니다. 그런데 라듐을 발견하신 부인께서는 얼마만큼의 라듐을 갖고 계신가요?" 퀴리 부인은 살포시 미소류 지었습니다. "제 것은 없습니다. 1그램 정도의 라듐이 이 연구소에 있을 뿐이지요." 멜로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달했습니다. "부인은 라듐을 발견한 분으로서 라듐 제조의 특허를 받으실 수 있잖습니까? 특히를 받으면 큰 부자가 된 수 있으실 텐데요." "라듐은 하나의 원소입니다. 저와 남편은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지요.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부인께 소망이 있으시다면 그건 무엇입니까?''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1그램의 라듐이 더 필요한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나로서는 살 수가 없군요." “퀴리 부인, 부인은 곧 1그램의 라듐을 가지러 미국을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퀴리 부인은 이 미국 여성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후 멜로니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위대한 여성 과학자인 퀴리 부인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여 1그램의 라듐을 살 수 있을 만한 돈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퀴리 부인은 멜로니와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미국으로 초청되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라듐 1그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미국 여행은 퀴리 부인의 생활에 다시 한번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활동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그녀는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퀴리 부인은 신장과 폐가 나빠지고, 눈에 이상이 오고 있다는 것을 4 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눈은 안경을 써도 소용없을 만큼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그녀는 아직 못다한 연구를 위해 눈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퀴리 부인의 눈은 정상적인 시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퀴리 부인은 바르샤바에 라듐 연구소와 연수원을 세우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독립된 조국의 부흥을 위해 공헌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폴란드 국민의 마음은 하나로 모아져, 1925년에 시작된 연구소 건립은 1932년 바르샤바에 그 위대한 꿈을 실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렵에 이렌은 같은 연구소의 학자와 결혼했습니다. 사위까지 보게 된 퀴리 부인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듐 연구를 하느라 방사선을 많이 쬐어 악성 빈혈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에브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제 퀴리 부인은 자리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퀴리 부인은 웃음 띤 얼굴로 에브를 보며 말했습니다. "창밖의 햇살과 맑은 공기가 참 좋구나." 그날 퀴리 부인의 병세는 좀 나아진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퀴리 부인은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에브는 곧 이렌 부부에게 알렸습니다. 퀴리 부인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두 딸들에게 방사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숨을 몰아쉬더니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67세의 생애를 끝마친 것입니다. 이렌 부부와 에브는 퀴리 부인이 조국을 떠날 때부터 줄곧 지니고 있던 폴란드의 흙 한 줌을 그녀의 관위에 뿌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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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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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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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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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가 끝난 후, 신부 한 분이 성당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램프의 불을 끄기 위해 장대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신부가 장대로 눌렀다 떼자 커다란 램프가 앞뒤로 천천히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성당 한가운데에 서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신부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흔들리는 램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의사처럼 자신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 둘, 셋." 마침내 램프가 완전히 멈추자, 청년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 청년은 성당에서 나와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청년은 곧 추가 될 만한 몇 가지 물건을 끈에 매달아 여러 개의 흔들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추의 무게와 끈의 길이를 다르게 한 여러 개의 흔들이를 천장에 매달고, 맥박에 맞추어 흔들림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흔들이는 처음에는 큰 폭으로 움직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움직이는 폭이 좁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큰 폭으로 흔들릴 때나 작은 폭으로 흔들릴 때나 끝에서 끝까지 한 번 움직이는 시간은 같았습니다. "아, 드디어 알아냈다!" 청년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해졌습니다. 성당 천장에서 흔들리는 램프를 보고 '흔들이의 법칙' 을 발견한 이 청년이 바로 '근대 과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빈첸치오 갈릴레이는 가수 겸 연주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을 꾸려가기가 힘들어 조그만 포목점을 경영했습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피사 땅은 거의가 메디치 집안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메디치 집안의 땅을 빌려야 했고, 갈릴레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포목점을 위해 얻은 수입으로는 땅을 빌린 세를 내기에도 벅찼습니다. 아버지는 차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 갔습니다.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이유 없이 화를 내서 가족들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갈릴레오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갈릴레오는 이처럼 가난하고 우울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어두운 생활 속에서 그래도 갈릴레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준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일이 없을 때, 아버지는 가게 한구석에서 갈릴레오에게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류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갈릴레오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 주었습니다. 갈릴레오가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피렌체로 이사를 했습니다. 피사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의 생활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갈릴레오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레오, 어서 떠날 준비를 해라. 수도원 원장님에게 부탁했더니 너를 받아 주신다는구나. 그 곳에 가면 네가 원하는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야." 그 당시에는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은 집에서 가정 교사에게 공부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네 집은 너무 가난해서 가정 교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갈릴레오를 수도원에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갈릴레오는 얼마 안되어 그 곳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가난에 쪼들리던 집에서와는 달리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된 갈릴레오는 어느덧 하느님을 섬기는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수도원으로 찾아왔습니다. "갈릴레오, 나는 네가 수도원에 남아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밑거름으로 해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거라." "피렌체 시에 전염병이 퍼졌을 때 보니까, 의사들은 돈을 아주 많이 벌더구나. 의사가 되면 부자로 편히 살 수 있을 거야." 아버지는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 와서 어느덧 돈만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버지에게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여동생 리비아가 태어나 있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7세가 되던 해, 피사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어 마음이 설레었으나, 그것은 곧 실망 으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사 대학의 교수들은 옛 학자들의 이론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해부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인체의 모양이라든가 병이 생기는 원인 등을 모두 적당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의학 공부에 흥미를 잃은 갈릴레오는 언제나 침울한 얼굴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들은 이런 갈릴레오를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머리가 나쁜 학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피사 대학에는 갈릴레오의 아버지를 잘 아는 리치 교수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수학 교수인 리치는 갈릴레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갈릴레오 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 집으로 찾아와 묻게나." 리치 교수는 갈릴레오에게 어려운 수학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유명한 학자가 쓴 귀한 책을 빌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피사 대학에 들어간 갈릴레오는 의학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리치 교수로부터 물리학과 수학에 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리치 교수는 갈릴레오의 공부에 대한 열의와 빠른 이해력에 탄복했습니다. "자네는 정말 뛰어난 학생이야. 머지않아 오히려 내가 자네한테 배워야 할 것 같군." 리치 교수는 물리학에 관해서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리치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물리학 책을 빌려 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교육자, 과학자로, '학문의 신'으로 칭송될 만큼 여러 학문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런 대학자의 이론일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점이 발견되면 반드시 확인하여 의문을 풀었습니다. 갈릴레오는 교수들에게나 다른 학생들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고, 어떤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다 보면 때로는 말다툼 이 벌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누구에게나 토론을 하자고 덤비는 이상한 학생이야. 꼭 싸움닭 같단 말야." "맞아, 그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군." 갈릴레오에 대해서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그에게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수들도 매사에 철저히 따지려 드는 갈릴레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오는 의과 대학 학생이면서 의학 공부는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이며,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괴짜 학생으로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오로지 리치 교수뿐이었습니다. 리치 교수는 언제든지 갈릴레오의 의논 상대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학문에의 열정을 키워 나가던 갈릴레오에게 갑자기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대학 생활이 4년째로 접어든 해에 피렌체의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학비가 중단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갈릴레오, 정말 미안하구나 요즘 들어 장사도 통 되지 않고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서 학비를 계속 보내줄 수가 없단다." 갈릴레오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이제 20세의 청년이 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다시 부모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갈릴레오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므로 그의 성씨인 갈릴레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졸업을 앞두고 돌아온 갈릴레이를 보며 무척 마음 아파했습니다. "공부를 중단하게 해서 너에게 정말 면목이 없구나. 너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내 뒤를 이어 장사를 해야 할 모양이다." 갈릴레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두컴컴한 가게는 전보다 더 초라해져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굳이 아버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아! 불쌍한 아버지,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데도 그 동안 내 학비를 내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갈릴레이는 이제까지 뒷바라지를 해 주신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더욱 새롭게 마음을 다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집안일을 거들면서 공부를 해야겠다. 가게 일을 하더라도 공부는 계속 할 수 있을 거야. 이튿날부터 갈릴레이는 열심히 가게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이가 가게 일을 맡게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갈릴레이가 피사 대학에서 돌아왔더군." 대학에서 4년이나 공부를 해서 훌륭한 정년이 되었다고 하던데." 동네에 이런 소문이 퍼지자, 이웃 사람들은 갈릴레이를 보기 위해 일부러 가게로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엔 포목점 아들이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이는 가게에 오는 손님들에게 친절히 대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포목점은 전에 없이 장사가 무척 잘 되었습니다. "장사가 계속 이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아버지는 아주 흡족해했습니다. 형편이 차츰 나아지자, 어머니도 예전처럼 짜증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대학에서 돌아온 청년을 보려는 호기심으로 찾아 온 손님들이 많았는데, 시일이 지나자 손님이 차차 줄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레이의 집은 다시 전처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장사도 잘 되지 않자, 갈릴레이는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 리치 교수에게서 빌려 온 책을 읽거나, 뭔가를 골똘히 연구했습니다.갈릴레이는 혼자서 조용히 연구할 수 있는 이 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는 이따금 밤을 꼬박 새우는 일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가게로 나가면 어머니는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퉁퉁 부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손님들이 올 게 뭐냐." 하지만 어머니가 아무리 심하게 잔소리를 해도 갈릴레이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 무렵 갈릴레이는 아르키메데스의 책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특히 아르키메데스의 '임금님의 왕관'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하루는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황금으로 만든 왕관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이번에 만든 왕관에는 은이 섞여 있는 것 같소. 왕관을 녹이거나 흠을 내지 않고 알아 볼 방법이 없겠소?" 묑관을 만든 세공업자는 매우 교활한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그 세공업자가 금을 빼돌리고 은을 섞어 왕관을 만든 것 같다고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그것을 밝혀 낼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임금님의 지시를 받은 아르키메데스는 난감했습니다. 왕관에 마무런 흠집도 내지 않은 채, 순금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다가 지친 아르키메데스는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을 하러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가 탕 속으로 들어가자, 가득 차 있던 물이 넘쳐흘렀습니다. 순간 아르키메데스의 머리에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 봐라. 탕 속에 몸을 담그니 가득 찼던 물이 넘쳐흘렀네. 물이 왜 넘쳐흘렀을까? 혹시.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 알았다!' 아르키메데스는 기뻐하며 벌거벗은 채로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곧 똑같은 무게의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물에 가득 찬 두 개의 그릇에 넣어 넘친 물의 부피를 재어 보았습니다. 실험 결과, 금덩어리보다 은덩어리를 넣었을 때 물이 더 많이 넘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금보다 은의 부피가 더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금에다 은을 섞으면 순금일 때보다 부피가 커질 것이고, 물도 더 많이 넘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곧 임금님의 왕관과 같은 무게의 순금으로 된 왕관을 하나 만들어 궁궐로 갔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임금님의 왕관과 순금으로 된 왕관을 각각 물 속에 넣고 넘쳐 흐른 물의 부피를 재었습니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임금님의 왕관이 순급으로 된 왕관보다 물이 더 많이 넘쳤습니다. 그리하여 임금님의 왕관에 은이 섞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책을 읽고 난 갈릴레이는 새로운 것을 연구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실험에 열중한 갈릴레이는 물이 넘쳐 귀중한 비단 옷감이 흠뻑 젖는 것도 몰랐습니다. 실험에 열중한 갈릴레이는 물이 넘쳐 귀중한 비단 옷감이 흠뻑 젖는 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비싼 웃감들을 못쓰게 만들다니! 너 같은 녀석은 쓸모 없으니, 당장 나가거라." 단단히 화가 난 아버지는 갈릴레이가 아무리 잘못을 빌어도 용서해 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고 쫓겨난 갈릴레이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에는 낚시질하는 사람과 보트를 띄우고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조그만 돌멩이를 하나 주워 강물에 던졌습니다. 돌멩이는 풍덩 소리를 내며 그대로 가라앉았습니다. 어! 이상하다. 조그만 돌멩이는 물 속으로 가라앉았는데 어째서 저 보트는 물에 떠 있는 것일까? 그 때 갈릴레이의 머릿속에 아르키메데스의 책에 씌어 있던 '임금님의 왕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물건의 무게를 비교하려면 먼저 물의 무게와 비교해 봐야 해. 돌멩이는 같은 부피의 물과 비교하여 몇 배나 무기운지 알아보자. 쇳조각이나 나무, 사기그릇 같은 것도 이런 방법으로 조사해 보면 쉽게 무게를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던 갈릴레이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외쳤습니다. "비중 저울이다! 갈릴레이는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새 그는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고 쫓겨났다는 사실도 깨끗이 잊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리 위에서 생각했던 것을 곧 실험해 보았습니다. 몇 번이나 실험한 끝에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레이는 곧장 리치 교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갈릴레이 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허둥대며 들어서는 갈릴레이를 보며 리치 교수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교수님, 비중 저울이에요. 비중을 잴 수 있는 도구를 생각 해 냈어요." 갈릴레이는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말했습니다. "비중을 재는 저울을 생각해 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 여기 앉아서 마음을 좀 가라앉힌 후에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게나." 리치 교수는 우선 갈릴레이를 자리에 앉도록 했습니다. "네, 아르키메데스의 '임금님의 왕관'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갈릴레이는 비중 저울의 원리와 만드는 법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동안 리치 교수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갈릴레이의 설명이 끝나자, 리치 교수는 갈릴레이의 두 손을 꼭 잡으며 감격스런 목소리로 칭찬해 주었습니다. "갈릴레이 군, 자네의 발명은 아주 훌륭한 것일세. 축하하네." 이튿날 리치 교수는 갈릴레이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는 갈릴레이가 발명한 비중 저울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이 군은 정말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야말로 천재입니다. 갈릴레이 군은 앞으로 뛰어난 과학자가 될 것입니다." 처음엔 별로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아버지도 리치 교수의 간곡한 설득에 마침내 갈릴레이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을 승낙했습니다. 리치 교수 덕분에 갈릴레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리치 교수는 아버지와 갈릴레이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제 생각에는 갈릴레이 군을 로마로 보냈으면 합니다만." 아버지는 그 말에 펄쩍 뛰었습니다. "안 됩니다, 교수님. 저희 형편으론 도저히 갈릴레이를 유학 시킬 수가 없습니다." "로마는 학문의 중심 도시로, 뛰어난 학자가 많은 곳입니다." "그 곳에서 여러 학자들을 만나 공부하는 것은 갈릴레이 군의 앞날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기가 갈릴레이 군에게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리치 교수가 간곡히 설득하자, 아버지의 반대도 수그러졌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집안 형편을 생각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로마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자, 갈릴레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로 가고 싶었습니다. 1주일 후 아버지는 갈릴레이가 로마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여비를 마련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갈릴레이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꾸짖고 반대를 하기도 한 아버지였지만, 결국 자신의 장래를 가장 염려해 준 사람 또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부드러운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어느 따뜻한 봄날, 갈릴레이는 부푼 가슴을 안고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첫째로 손꼽히는 도시답게 화려하고 번화했습니다. 갈릴레이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리치 교수가 소개해 준 학자와 연구가들을 만나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가장 옳다고 여기며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연구 발표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은 더더욱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처럼 여기며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는 위대하기는 하지만 2천 년 전의 학자가 아닌가? 위대한 학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해.' 갈릴레이는 학자들을 만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대해 잘못된 점을 이야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한 로마에서는 전혀 얘기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에서 이러한 벽을 느끼게 되자, 갈릴레이의 마음은 무척 답답했습니다. 갈릴레이는 대학 교수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쌓아 가는 일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이론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리치 교수의 보살핌으로, 갈릴레이는 로마에 간 지 1년도 못 되어서 피사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피사 대학은 몇 년 전에 갈릴레이가 '싸움닭', '게으름뱅이'란 소리를 들으며 의학 공부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의 교수가 된 갈릴레이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교수들의 시기 어린 비방 때문에 갈릴레이의 평판은 학생들 사이에서 좋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이가 교수들의 미움을 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리스토렐레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곳 피사의 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절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므로, 갈릴레이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로서는 2천 년 전 사람의 학설을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믿고 따르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든 자신의 소신대로 밀어붙였습니다. 어느 날 갈릴레이는 학생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학설을 설명하려다가 학장에게 불려 갔습니다.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고 싶으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지 마시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크리스트 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소. 그러니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비평하는 선생의 이야기가 로마 교황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학교가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오. 갈릴레이는 그 길로 곧장 마조니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마조리는 갈릴레이와 함께 피사 대학에 근무하는 천문학 교수로서, 갈릴레이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면서, 천문학도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마조니 교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천문학 공부를 위한 준비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 얼굴빛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학장과의 일로 그 때까지도 일굴이 굳어져 있는 갈릴레이를 보고 마조니 교수가 말했습니다. 갈릴레이는 학장에게 불려 갔었던 일을 마조니 교수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피사 대학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너무 정직해도 손해를 봅니다. 자, 낮에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천문학 이야기나 합시다." 마조니 교수는 천구의를 돌리면서 태양의 움직임, 별자리, 달이 변하는 모양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갈릴레이는 마조니 교수의 설명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면 곧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조니 교수님, 당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 학설이 다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마조니 교수는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꼬집을 때면 이렇게 나무라곤 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교수님, 제 생각으로는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아리 스토텔레스의 학설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태양이 움직이는 속도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거든요. 참, 내일 피사의 사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겁니다." 그러자 마조니 교수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내일 당신의 실험을 보러 가겠습니다. 성공을 빕니다." 피사에는 피사의 사탑이라는 신기한 탑이 있습니다. 사탑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탑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탑은 1173년에 짓기 시작하여 1370년경에 완성한 대리석으로 된 8층의 종탑입니다. 공사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탑을 세우는 동안 약한 지반이 가라앉았다고 하며, 그에 따라 층을 올릴 때마다 탑의 무게가 달라지게 공사했다고 전해집니다. 기울어진 채 서 있는 피사의 사탑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며칠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학설을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이, 누구 의견이 옳은지 가서 구경 해 보자." "낙하 운동의 실험이라,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재미있을 것 같군. 가 봐야겠어." 그러나 갈릴레이가 꼭 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피사 대학의 학장과 다른 교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실험을 시작할 시각이 되었습니다. 끝까지 학장과 교수들이 나타나지 않아 안타까웠으나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여 갈릴레이는 힘차게 외쳤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웅성거리던 구경꾼들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갈릴레이는 이 실험을 하 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똑같은 높이에서 크기가 같은 두 물체를 떨어뜨리면,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학설입니다. 내 연구에 의하면 두 물체는 동시에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명이 길어지자, 피사의 사탑을 에워싼 학생들이 소리쳤습니다. "이야기는 그만두고 빨리 실험이나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갈릴레이는 2층에 올라가 있는 학생들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준비, 시작! 두 개의 공이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자, 이번에는 3층에서! 준비, 시작!" 3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생이 두 개의 공을 떨어뜨렸습니다. 이것도 동시에 떨어졌습니다. 이어서 4층, 5층에서도 공을 떨어뜨려 보고 마지막으로 6층에서 공을 떨어뜨렸습니다. 이것도 역시 동시에 떨어졌습니다. "자, 여러분, 잘 보셨지요? 실험은 끝났습니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같은 높이에서 동시에 떨어뜨리니까 어떻게 되었나요? 여러분은 이 실험을 통해 물체의 무게와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는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셨을 겁니다." 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기대했던 구경꾼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그 실험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갈릴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없이 서 있는 갈릴레이에게 마조니 교수가 다가와서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이건 굉장한 실험입니다. 난 이 실험을 지켜 보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마조니 교수의 손을 잡은 갈릴레이는 눈물이 날 정도로 그가 고마웠습니다. 역사적인 대실험이 성공했는데도 그것을 인정해 주고 찬사를 보내 주는 사람은 마조니 교수 외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조니 교수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실험을 도와 준 학생 여러분, 수고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벌인 이후 종교인들은 자기들의 이론과 반대되는 이론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갈릴레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피사 대학의 교수들도 그를 더욱 헐뜯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아버지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갈릴레이를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갈릴레이는 더욱더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갈릴레이는 이제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교수로서 받는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갈릴레이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 무렵 갈릴레이는 이웃 베네치아 공화국에 있는 파도바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대학은 교수가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아무도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파도바 대학으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 주던 리치 교수가 이미 세상을 떠난 마당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피사 대학의 교수가 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기드바르드 교수를 찾아가 다시 한 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신 같은 훌륭한 학자가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파도바 대학의 교수가 되도록 도와 드리지요." 기드바르드의 주선 덕분에 갈릴레이는 파도바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피사의 사탑 실험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던 갈릴레이 교수가 오신대." 파도바 대학의 학생들은 갈릴레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 곳의 분위기는 피사 대학과는 정말 달랐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은 모두 가르치고 배우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남을 헐뜯거나 이유 없이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갈릴레이가 첫 수업을 하던 날, 강의실은 그의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학생들 때문에 복도까지 꽉 메워질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갈릴레이는 '흔들이의 법칙', '낙하의 법칙', '비중 저울' 등 과학 분야에서 여러 가지 성과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이는 파도바 대학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평판도 아주 좋았습니다. 또한 파도바 대학에는 갈릴레이와 같이 젊고 의욕에 찬 교수들이 많았으며, 갈릴레이는 그들과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갈릴레이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들과 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낯선 도시를 구경하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등 더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구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서 갈릴레이는 아름다운 별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는 동료 교수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는 많은 학생들이 있는 파도바 대학의 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 중에 갈릴레이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열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열이 나고 감기 증세가 보이는 것을 계속 참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갈릴레이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냥 돌아갑시다." 그러자 동료 교수들도 여행을 중단하고 함께 파도바로 돌아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느 정도 쉬자 갈릴레이의 병은 차츰 나아졌습니다. 그는 누워 지내는 동안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줄곧 연구에 관한 일만을 생각했습니다. "어제 베네치아에서 천문학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네. 독일에서 온 과학자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소개했는데, 정말 알 수 없는 이야기였어." "그 사람 말로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거야.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강연 도중에 나가 버리는 사람이 많아 나중에는 강의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더군. 나는 그저 재미로 끝까지 듣고 있었지만 말이야."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얘기했다고?" "나도 가서 들어 볼 걸 그랬군. 지구가 돌고 있다는 학설이 어떤 것인지 전부터 알고 싶었는데." 갈릴레이는 아직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몸으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설명한 책을 구해 하루 만에 다 읽어 보았습니다. 갈릴레이는 그 책을 통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 바로 이거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알고 싶어하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평소 궁금해 하던 것을 알게 되자, 병중이라는 것도 잊고 좋아서 펄쩍 뛰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에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다. 지구는 수성이나 금성, 화성 따위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 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다. 태양은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 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창가로 다가가서 커튼을 열어 젖혔습니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의 대양은 어느 날의 대양과는 전해 다르게 보이는걸." 갈릴레이는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오랫동안 창가에 서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기쁨으로 그 날부터 갈릴레이의 병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갈릴레이는 파도바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동안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고, 사람의 체온을 재는 체온계와 비례 컴퍼스 등의 여러가지 발명품도 내놓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비례 컴퍼스는 여러 가지 계산을 손쉽게 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였기 때문에 만드는 즉시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비례 컴퍼스는 곧 파도바 대학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은 큰소리를 칠 수 없을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 갔습니다. 비례 컴퍼스를 판 돈으로 갈릴레이는 뜻하지 않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봉급도 올라서 이제 갈릴레이는 마음놓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갈릴레이는 베네지아에서 사귀게 된 마리나라는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첫딸 빌지니아, 이듬해에는 둘째 딸 리비아를 얻었습니다. 갈릴레이가 파도바 대학으로 온 지 13년째 되던 해인 1605년의 가을이었습니다. 갈릴레이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데 한 학생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뛰어들어왔습니다.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하늘에 지금 새로운 별이 나타났습니다." "정말인가? 자네가 그걸 직접 봤나?" "네, 분명히 보았습니다. 친구와 함께 말입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세상의 종말이 온 것 같습니다." 이 무렵의 사람들은 새로운 별이 나타나면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곧장 학교로 달려가, 천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코르나로 교수에게로 갔습니다. 코르나로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습니다. "갈릴레이 교수,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저녁에 이 두 눈으로 새로운 별을 본 것은 확실합니다. 아, 이제 이 세상은 끝인 것 같습니다." 갈릴레이는 코르나로 교수가 한숨을 쉬며 진땀을 닦고 있는 것을 조용히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코르나로 교수, 그건 단지 별일 뿐입니다. 별 하나가 나타났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하늘의 것은 영원히 변하는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가르치는 두 학생이 며칠 전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그것이 새로운 별이라는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비밀로 하면서 여러 가지 현상을 관찰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별을 발견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날씨가 흐리다가 어제서야 겨우 개었습니다. 계속 하늘을 관찰하던 두 학생은 맑은 밤하늘에서 다시 그 별을 찾아 냈습니다. 같은 장소에 그 별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두 학생은 10시 경에 내게 심부름꾼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눈으로 그 별을 확실히 보게 되었지요. 교수님께서는 이 새로운 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확실히 그 별을 보기 전에는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다음 날 학교는 새로운 별에 관한 이야기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성서대로라면 분명 세상이 멸망할 징조들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야. 성서가 잘못되었을 리는 절대로 없을 텐데."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속닥거리며 이야기했습니다. 이 일로 교회의 신부나 종교 학자들은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이제까지 하늘의 세계는 완전하기 때문에 절대로 변하는 일이 없다고 가르쳐 왔는데, 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관계자들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별이 아니고 별처럼 보이는 빛일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 있는 별이나 달. 태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별처럼 보였던 그것은 어쩌면 달빛을 받은 어떤 물질이 낸 빛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렇게 변명에 급급하고 있는 동안에 이상한 별은 또 다시 하늘에 나타나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지금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새 학기부터는 별에 관한 수업을 하겠다고 발표 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대학에서는 모두 야단들이었습니다. 새로 나타난 별에 대해서 소문만 무성할 뿐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레이가 그 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갈릴레이의 별에 관한 수업은 대강당에서 있었는데,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온 학생들로 그 넓은 강당이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새로 나타난 별은 여러분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처럼 진짜 별입니다. 눈의 착각도 도깨비불도 아닙니다.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2년 전에도 새로운 별이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티코' 의 별이라 불렸던 그 별은 상당히 오랫동안 하늘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이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것도 틀림없이 별입니다." 갈릴레이의 수업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문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확인되지 않은 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라는 아리스토델레스의 학설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별은 변하지 않지만, 별 중에는 자리를 바꾸거나 변해 가는 별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전의 학자들이 밝혀 내지 못한 사실을 새롭게 밝혀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갈릴레이는 사람들이 그 때까지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틀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대단히 위험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몇 년 전,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지지했다고 하여 브루노라는 학자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별은 그로부터 18개월 후에야 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평화로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무렵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안경점을 하고 있는 리퍼세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였습니다. 리퍼세이의 이야기를 들은 갈릴레이는 망원경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먼 곳을 가깝게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 수만 있다면 별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거야." 무슨 일이든 궁금증이 생기면 정신없이 몰두하는 갈릴레이는, 렌즈 공장으로 달려가 여러 가지 렌즈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당장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렌즈는 그 종류가 아주 다양했습니다. 갈릴레이는 각각의 렌즈 두께를 하나하나 조사해 보았습니다. 큰 렌즈와 작은 렌즈, 두꺼운 렌즈와 얇은 렌즈, 가운데가 볼록한 렌즈도 있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렌즈도 있었습니다. 먼저 갈릴레이는 렌즈를 끼울 수 있도록 양쪽에 구멍이 뚫린 긴 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에 렌즈를 끼워 렌즈 사이의 거리를 여러 가지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갈릴레이는 밥은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은 채 오직 실험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던 중 7월의 어느 맑게 갠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갈릴레이는 렌즈를 들여다보며 망원경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어, 이게 뭐지?' 갈릴레이의 눈에 마치 허깨비 같은 것이 크게 다가와 보였습니다. 갈릴레이가 천천히 통을 돌리자, 교회의 창문이 손에 닿을 듯이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보였습니다. 갈릴레이는 통에서 눈을 떼고 멀리 있는 교회를 확인한 다음, 다시 한 번 통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창문 가장자리에 달린 장식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갈릴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드디어 성공이다!" 갈릴레이의 망원경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상한 통을 들여다보고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와, 정말 굉장한걸." "이긴 마치 마술 안경 같군!" 갈릴레이는 베네시아의 시장에게 이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로 써 보냈습니다. 시장은 매우 기뻐하며, 꼭 한 번 망원경을 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마침내 시장에게 망원경을 보여 주기로 한 날이 되었습니다. 먼 곳까지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장소는 마을의 종탑으로 정했습니다. 갈릴레이가 먼저 망원경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층계를 오르고 있군요. 앗, 강물 위에 떠 있는 곤돌라에 탄 사람도 보입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시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거 정말 놀랍군! 뜰에 있는 개까지 보이는걸." 시장은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의원들은 궁금해서 빨리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야 겨우 시장은 망원경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저 건너에 있는 우리 집이 아주 가깝게 보이는걸." "정말, 우리 집도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데." 모든 의원들에게 망원경이 돌아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장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의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건 정말 훌륭한 발명품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연구를 하실 수 있도록 갈릴레이 교수의 봉급을 올려 드리고 싶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의원들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든 가장 큰 목적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직접 렌즈를 만들어 30배로 확대되어 보이는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락방에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밤새도록 그 방에 틀어박혀 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갈릴레이가 만든 망원경에 의해 밤하늘의 달과 반짝이는 숱한 별들이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달은 지구와 비슷하다. 달 표면의 울퉁불퉁한 것은 분화구 모양의 산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체가 잘 닦은 구슬 같다고 했지만, 달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하가 안개라고 말한 학설도 옳지 않다. 은하는 안개가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 있는 별의 수가 모두 1,027개라고 했는데 이것도 옳지 않다.' 하나하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동안 갈릴레이는 또 하나의 굉장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610년 1월 7일, 서리가 하얗게 내린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유난히 밝게 빛나는 목성을 망원경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던 갈릴레이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 저 별은 뭐지?" 목성 바로 곁에 세 개의 조그만 별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놀라서 몇 번이나 다시 망원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작은 별은 더욱 똑똑히 보였습니다. 이 별들은 그 때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별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그것을 노트에 자세히 그려 놓았습니다. 그는 그 다음 날에도 목성의 주위에서 빛나던 3개의 작은 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별은 전날 있던 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습니다. "아니, 별이 움직이고 있잖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더욱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별이 2개로 줄어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별이 4개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기뻐했습니다. '알았다! 목성의 둘레를 돌고 있는 별은 전부 4개이다.' '그런데 날마다 별의 개수가 바뀌는 것은 그 별들이 목성의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별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계속해서 별들을 관찰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의 제목은 별세계의 보고라고 붙였습니다. 갈릴레이는 별세계의 보고를 완성해서 그 원고를 피렌체의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원고와 함께 망원경도 한 대 보냈습니다. 별세계의 보고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날개 돌친 듯이 팔렸습니다.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던 학자들은 갈릴레이의 이론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 중에는 피렌체의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편지를 통해 갈릴레이의 연구를 높이 칭찬하고 피렌체의 소식을 자세히 적어 보냈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아르노 강과 베키오 다리는 그대로인지 보고 싶구나.' 피렌체는 갈릴레이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항상 그리운 추억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피렌체 소식을 듣게 되자, 그 곳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때마침 피렌체의 왕으로부터 갈릴레이를 스승으로 맞고 싶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래, 이젠 피렌체로 돌아가는 거야. 그 곳에서 남은 연구를 계속하자.' 갈릴레이는 18년 동안이나 몸담았던 파도바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리운 피렌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파도바를 떠날 날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지붕 밑 다락방에서 망원경을 들여다 보던 갈릴레이는 토성이 이상한 모양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커다란 토성 둘레에 마치 혹 같은 작은 별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몇 번을 보아도 무엇인가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망원경으로는 그 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토성에 대한 의혹을 미처 풀지 못한 채 갈릴레이는 파도바를 떠났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한 갈릴레이는 얼마 동안 필리포라는 사람의 별장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그 별장은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 곳에서도 매일 밤 쉬지 않고 별들을 관찰했습니다. 어느 날 금성을 보게 된 갈릴레이는 그만 이 별에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금성은 '샛별' 이라고도 불리는 밝은 별입니다. 갈릴레이는 매일 밤 망원경으로 금성을 관찰했습니다. 처음엔 조그만 둥근 별이었던 것이 차츰 아주 조금씩 이지러져 갔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름달이 이지러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지러지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며칠 후에는 그믐달 모양이 되었습니다. “필리포, 이리 좀 와 보게." 갈릴레이가 큰 소리로 부르자, 별장 주인 필리포가 달려왔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것 좀 들여다보게. 굉장한 것을 발견했단 말일세." "선생님! 이 그믐달 같은 게 뭔가요?" 망원경으로 금성을 본 별장 주인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외쳤습니다. "금성일세. 금성이 그믐달처럼 됐단 말일세." "아, 그렇군요. 선생님, 그렇다면 이것은 달이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반달이나 그믐달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군요. 그러면 금성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 별입니까?" "그렇다네. 금성은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던 거야. 지구 말고도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는 별이 있었던 거야.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맞는 것이지." 갈릴레이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계속 별을 조사하던 갈릴레이는 태양에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하다가 마침내 태양의 흑점을 발견해 냈습니다. 태양을 관측할 때에는 망원경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빛이 너무 강해서 시력을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의 등 뒤에 종이를 대고, 태양을 비쳐 보는 방법으로 관찰을 했습니다. 그때 종이에 비친 태양에서 몇 개의 검은 점을 발견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검은 점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사실들을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라는 책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망원경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하나 둘씩 밝혀 가는 동안 '지구는 돌고 있다'는 갈릴레이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갈릴레이의 새로운 발견과 눈부신 성과에 대해 피렌체의 왕도 매우 기뻐해 주었습니다. 학자나 신부들 가운데에도 갈릴레이의 학설에 찬성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따르는 학자나 종교가들은, "갈릴레이는 크리스트 교의 적이다." 라고 외치며 그를 비난했습니다. '지구는 돌고 있다' 는 갈릴레이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갈릴레이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음모를 꾸미고 있다가 그의 저서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가 나오자, "갈릴레이가 쓴 책은 성서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다. 태양에 검은 점 같은 것이 있다는 것도, 또 지구가 스스로 돌고 있다는 것도 성서에는 씌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갈릴레이는 이런 것들을 새로운 발견이라 주장하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고 공박하더니, 종교 재판소에 갈릴레이를 고소해 버렸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재판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만약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서 이단자로 몰린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로마의 교황청으로 불려가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되는 이론을 연구하지 않기로 약속하고서야 간신히 피렌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교황이 죽고 새 교황이 임명되자 갈릴레이는 다시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새 교황에게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교황도 코페르니쿠스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찌푸리고 외면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그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632년에 천문 대화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책 속에 나오는 '낡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란 바로 교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런 소문은 교황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로마의 종교 재판소로부터 갈릴레이에게 재판소 출석을 요구하는 통지서가 배달되었습니다. 이 무렵 갈릴레이는 이미 69세나 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병이 들고 눈병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 재판 날짜를 좀 연기해 주십시오." 하고 사정을 했으나 그의 청은 무시되었습니다. 당시의 종교 재판에서는 성서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쇠사슬로 십자가에 묶어 "화형에 처하는, 아주 무섭고 끔찍한 벌을 내렸습니다. 갈릴레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형벌을 받을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재판관은 갈릴레이가 쓴 천문 대화를 손에 들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주장했소?" 갈릴레이는 마음속으로, '그렇습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몸과 마음이 약해진 탓에 선뜻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어서 말하시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재판장의 거듭되는 재촉에 갈릴레이는 마지못해 입을 열고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렇게 해서 갈릴레이는 처벌을 면하고, 피렌체의 변두리에 있는 별장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여러 가지로 갈릴레이의 생활을 제약 했습니다. "어느 곳에도 가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손님을 초대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앞으로 3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죄를 반성하는 7편의 시를 지어야 한다. 천문 대화는 출판을 금지한다." 갈릴레이는 의욕을 잃고 별장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다행히 그가 사는 별장은 큰딸이 있는 수녀원과 가까웠습니다. 갈릴레이는 종종 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갈릴레이는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 지면서 새로운 의욕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갈릴레이는 남은 힘을 다하여 연구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시작하자마자 갈릴레이는 자신의 시력이 매우 나빠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이는 크게 실망했으나 연구에 대한 의욕으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래,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이 무렵 토리첼리라는 사람이 갈릴레이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이는 토리첼리에게 자신이 연구한 것을 일일이 받아 적게 했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의 연구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시간을 재는 기계를 만들어 보자.' 갈릴레이는 손을 더듬거리며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흔들이와 톱니바퀴를 짜 맞춘 추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시계를 발명한 갈릴레이는 시계추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 번에는 언제까지나 이 소리가 멈추지 않도록 연구를 해야겠다." 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으며,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실락원이라는 유명한 서사시를 쓴 영국의 시인 밀턴이 갈릴레이를 찾아왔습니다. 밀턴도 갈릴레이처럼 앞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당신의 노력이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룩한 업적은 과학사에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갈릴레이는 자신을 방문해 준 밀턴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1642년 1월 8일 밤, 갈릴레이는 78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쳤습니다. 지켜 보는 가족 하나 없는 쓸쓸한 죽음이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교회는 갈릴레이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게 막았고, 무덤을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갈릴레이가 죽은 지 22년이 지난 뒤에야, 교황청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종교 재판에서 갈릴레이에게 내린 판결을 취소한다. 갈릴레이는 무죄다. 로마 교황은 갈릴레이가 자유인임을 선언한다. 로마 교황은 갈릴레이의 업적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후세인들은 갈릴레이를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부르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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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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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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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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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한 가정에 서 세계적인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으로는 발명가인 아버지와 온화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네 살 된 로베르트 형과 두 살 된 루드비히 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짓거나 다리를 놓을 때 필요한 설계도를 그리는 설계사였습니다. 일거리는 계속해서 생겼기 때문에 이 건축 일만 했다면 알프레드의 집은 틀림없이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엇이든 발명하는 것을 좋아해서, 설계 일을 하는 시간보다 연구에 "몰두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따라서 알프레드의 집은 늘 쪼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기계를 발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계 발명에 필요한 기초 학문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일은 생각처럼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려움을 알면서도 발명하는 일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부디 성공하기를.'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며 어려운 생활을 이겨내려고 애썼습니다. 그 무렵 스웨덴의 국력은 매우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전쟁에서 이긴 러시아는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국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군대나 산업에 필요한 발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던데. 차라리 러시아로 가서 발명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버지는 이러한 생각을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러시아는 지금 발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니 그 곳에 가서 발명을 계속 하고 싶소." 이리하여 1837년 12월, 알프레드가 4살 때 아버지는 혼자서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알프레드와 형들은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이 슬펐지만, 홀로 남게 된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서 억지도 눈물을 참았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기쁘게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아버지를 배웅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스톡홀름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형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 형들과 마찬가지로 알프레드는 공부를 썩 잘했습니다. 1학년 학생 80명 가운데 알프레드는 언제나 1등 아니면 2등 이었습니다. 알프레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였습니다. 알프레드는 책읽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여 선생님과 반 친구들을 놀라게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알프레드에게 훌륭한 문학적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알프레드가 2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알프레드와 형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뛰어나왔습니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날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밝았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기쁜 일이라도 있나요?" "그래, 굉장히 기쁜 일이란다. 아버지께서 러시아에 공장을 차리셨다는구나. 거기에서 러시아 군대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계를 만드신대. 이제 우리 가족을 데려가시겠다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셨단다." "와아! 만세!” 알프레드와 형들은 기뻐하며 깡충깡충 뜀박질을 했고,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아 냈습니다. 그날 밤에는 아버지를 다시 만날 생각에 아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1842년 10월, 알프레드의 가족은 배를 타고 아버지가 계신 러시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은빛 날개의 갈매기들이 평화롭게 날아다니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항구에 도착하자, 아버지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는 기뢰를 발명하여 러시아 정부로부터 많은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공장을 짓고 아름다운 집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노벨 가족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앉아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성공으로 알프레드와 두 형 앞에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우선 아이들에게 러시아 어를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을 한 분 집으로 모셔 왔습니다. 새로 오신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의 러시아 어 실력은 쑥쑥 늘어 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반드시 이 아이들 중에서 내 뒤를 이어 갈 훌륭한 발명가가 나올 것이다!’ 라고 자신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파이프를 통해 뜨겁게 데운 물을 각 방으로 보냄으로써 집 전체를 따뜻하게 해 주는 보일러 시설도 발명 했습니다. 보일러는 곧 큰 병원이나 호텔에서 두루 쓰이게 되었고, 아버지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습니다. 그 동안 알프레드에게는 에밀이라는 귀여운 남동생이 생겼습니다. 알프레드는 에밀을 누구보다 잘 돌봐 주었습니다. 한편, 3년 동안 러시아 어 공부를 열심히 한 알프레드와 형들은 이제 아무런 불편 없이 러시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아이 모두 러시아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되자, 아버지는 새로운 선생님을 모셔 왔습니다. 그 선생님은 러시아 어 외에도 문학, 산수, 과학과 영어 및 프랑스 어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세 아이가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람은 공부를 통해서 지식을 쌓고, 그것을 우리의 생활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단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학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이지. 너희들은 과학자가 되어도 좋고 예술가가 되어도 좋아.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생님의 말씀은 형제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특히 알프레드는 눈을 빛내며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들었습니다. 이 날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후에 알프레드가 살아가는 데 커다란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무렵 여러 가지 발명으로 성공을 거듭하던 아버지는, 아들 모두 발명 가가 되어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삼 형제를 위해서 공장의 한 구석에 조그만 공작실을 꾸며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공작실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만지면서 놀았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곧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가 물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엇이든 바로 가르쳐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가는 습관을 길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자 아비지는 아이들에 새 독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 한 사람씩 여행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로베르트 형과 루드비히 형이 스웨덴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알프레드 혼자서 여행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알프레드는 난생 처음 혼자 하는 여행이라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알프레드는 여러 날 동안 여행한 끝에 마침내 스톡홀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어느덧 알프레드 노벨은 16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공장은 계속해서 주문이 밀려들어 이제 러시아에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형들은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알프레드를 불렀습니다. “알프레드, 너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 “시를 짓거나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뭐, 문학을 하고 싶다고?” 아버지는 알프레드가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장래의 꿈이 문학가라는 말에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알프레드, 네가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머리가 좋고, 무슨 일이든 깊이 생각하는 끈기와 뛰어난 창의력을 지니고 있어. 그래서 내 생각에는 넌 과학 연구에 더 소질이 있을 것 같구나. 형들이 공장을 맡아서 운영하고 네가 연구를 해 나간다면 이 아비지는 더 바랄 게 없겠다. 어떠냐, 알프레드?" 알프레드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여보, 알프레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알프레드, 너도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무나. 알프레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프레드가 17세가 되자, 아버지는 좀더 적극적으로 알프레드의 장래를 결정지으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비지는 알프레드를 불러 뜻밖의 말을 하였습니다. "알프레드, 벌써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다만 미국에 가서 공부해 보는 게 어떻겠니?" “미국에요?" "그래, 미국에는 내가 잘 아는 스웨덴 출신의 존 에릭슨이란 분이 살고 계신데, 그분은 프로펠러 기선 제작법을 고안해낸 분이란다." "아! 증기 기관으로 배를 움직이게 한 에릭슨이란 분 말인가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미국은 과학 기술이 앞선 나라이니까 여러 가지 보고 들을 것도 많을 거야. 그러니 우선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형편에 따라 유럽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알프레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문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망설여졌습니다. 그 때 문득 여름 방학 때 스톡홀름에 갔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혼자 배를 타고 가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책을 읽던 순간이 다시금 그리워졌습니다. '그래, 우선은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로 하자.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거야.' "아버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머, 알프레드야. 혼자 미국에 가도 괜찮겠니? 여보,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요? 알프레드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나라에서 만약 병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흐뭇해하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이제 전 17살이에요. 충분히 혼자 지낼 수 있어요." 알프레드는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알프레드가 미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미국에 있는 존 에릭슨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친분 있는 과학자들 앞으로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7살의 알프레드는 홀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배웅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알프레드는 가방 속 에서 그가 제일 좋아하는 셀리의 시집을 꺼냈습니다. 외로울 때나 마음이 울적하고 슬플 때, 셀리의 시는 알프레드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주곤 했습니다. '나는 과학자보다는 작가가 되고 싶어. 사람들의 마음에 감 동을 주는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도록 이 기회에 많은 문학 작품을 접하자.' 오랜 여행 끝에 알프레드는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존 에릭슨을 찾아가 보아야 했으나, 알프레드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야 알프레드는 존 에릭슨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보여 주자 그는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오, 임마누엘의 아들이로군! 정말 반갑구나."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존 에릭슨은 알프레드에게 별로 도움을 줄 만한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아버지의 연구 분야와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곧 이러한 사실을 아버지께 알리고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알프레드는 하루라도 빨리 예술과 문학의 나라 프랑스로 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도 프랑스로 가겠다는 알프레드의 편지를 받고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습니다. 알프레드가 과학을 배우신 프랑스로 가려는 줄 말았던 것입니다. "알프레드,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 마음껏 기술과 학문을 익히거라." 하지만 파리에 도착한 알프레드는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알프레드는 아버지가 소개장을 써 준 과학자들을 찾아가지 않고, 영어나 프랑스 어로 된 문학 책, 그 중에서도 셸리와 바이런의 시집을 탐독하는 데에 몰두했습니다. 그 무렵 알프레드는 공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알프레드와 마찬가지로 늘 손에 책을 들고 공원을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었습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책을 읽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알프레드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느 날 알프레드는 소녀에게 다가가 용기 있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 실례합니다." 소녀도 알프레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습니다. 그 소녀와 이야기하고 있노라면 알프레드는 꿈을 꾸는 듯한 행복감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불행한 일이 닥쳤습니다. 소녀가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알프레드는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소녀가 없는 파리는 텅 비어 버린 도시 같았습니다.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되는 동안 알프레드는 가족들이 몹시 그리워졌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형들은 계속 공장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가족들과 헤어진 지 어느덧 2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드는 그 동안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아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이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아버지와 형들은 지금쯤 땀과 기름으로 범벅이 된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을 텐데. 그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자.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아버지를 도와 드리자. 그 동안 아버지 말씀을 어기고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이해해 주실 것이다. 1852년 7월, 알프레드 노벨은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달려나와 알프레드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알프레드,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구나. 그 동안 아픈 곳은 없었니?"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은 알프레드에게 악수를 청하며 환영의 인사를 했습니다. "잘 돌아왔다. 이제 우리 노벨 공장은 두려울 게 없구나. 힘을 모아 잘해 보자." 알프레드는 이 순간,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었던 일이나 아름다운 소녀를 잃고 슬픔에 잠겼던 일들이 먼 옛날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버지의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건강을 염려한 가족들이 아무리 말려도 한사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해 여름, 알프레드는 마침내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알프레드는 스톡홀름으로 가서 잠시 동안 쉬기로 했습니다. 그 곳에서 지대는 동안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셸리의 시나 파리에서 만난 소녀에 대한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습니다. 알프레드가 스톡홀름에 온 지 6개월쯤 되었을 무렵, 마침내 아버지가 발명한 기뢰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러시아 육군 대신이 비상시에 기뢰를 사용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던 것입니다. 벌써 수백 년 전에 만들어져서 주로 소에 이용되어 왔는데, 아버지는 이 검은색 화약을 기뢰를 만드는 데 이용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든 기뢰는 이미 러시아 정부로부터 성능을 인정받아 상금까지 받았으나 그 동안 별다르게 쓰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쟁이 다가오자 러시아 군은 기뢰를 긴급하게 주문하였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프레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하루빨리 아버지의 공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소식이 온 지 얼마 후, 러시아는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터키를 침략하였습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연합군을 조직해서 러시아의 남쪽에 있는 크림 반도로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림 전쟁입니다. 연합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전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습니다. 알프레드는 아버지의 공장이 바쁠 것이라 생각하니 더 이상 스톡홀름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1854년 알프레드 노벨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역시 생각했던 대로 공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공장에는 일하는 사람만 해도 천 명이 넘었습니다. 노벨 공장은 어느 새 병기 공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자니 당연히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노벨의 아버지는 병기 공장에 모든 것을 걸고 전 재산을 투자했을 뿐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많은 돈을 꾸어 들였습니다. 아버지는 오직 러시아 정부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두말 할 것 없이 노벨 공장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전쟁시 러시아 군대에게 넘겼던 무기 값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전쟁 후에 노벨 공장에서 무기를 사들이겠다는 약속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세 아들은 번갈아 가며 정부의 관리들에게 탄원을 하고 사정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기 대신 다른 기계를 생산하려면 공장의 시설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었고 많은 빚까지 떠안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던 천 명이나 되는 직원들도 다른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공장을 팔아야만 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생활이 더욱 어렵게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15세가 된 에밀만을 데리고 고향인 스톡홀름으로 돌 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러시아에 온 지 20여 년 만에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속상하시겠지만 힘내세요. 저희들 셋이 반드시 노 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어요." 노벨 삼 형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각자 일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둘째 형 루드비히는 전에 아버지의 공장이었던 곳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큰형 로베르트는 노벨과 같이 하숙하면서 매일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베르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알프레드에게 말했습니다. "알프레드, 우리 형제 가운데 발명에 가장 소질이 있는 사람 은 너다. 내가 일자리를 찾아볼 테니 너는 연구에만 전념해라. 그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건 형님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에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 당장은 형편이 어려워 힘들겠지만, 부모님을 생각해서 꿋꿋하게 참아 내자." 사실 노벨은 몸이 약해서 힘든 육체 노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벨은 형의 뜻과 가족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구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베르트는 건축 설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건축 기사가 되고 싶었던 로베르트는,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게 그 일을 해 나갔습니다. 노벨도 더욱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가스 미터기와 날씨를 관측하는 데 필요한 기계를 발명해 냈습니다. 로베르트의 말대로 과연 노벨은 발명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발명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이었지만, 노벨은 형의 따뜻한 격려에 용기를 얻어 연구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에 겨울 추위가 닥쳐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 로베르트가 돌아와 보니 집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혹시 알프레드가 쓰러진 것은 아닐까?’ 로베르트는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방으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노벨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안색이 몹시 창백해 보였습니다. 로베르트가 이마에 손을 대려고 하자 노벨은 그 손을 밀어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난 원래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기침이 나고 열이 나는 걸요. 우리 어서 식사나 해요." 그런데 그날 밤, 노벨은 열이 펄펄 끓어 한숨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로베르트는 앓아 누워 있는 동생을 보고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동생을 혼자 두고 일하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병원에 입원시킬 만한 돈도 없었습니다. 결국 로베르트는 집에 남아 노벨을 간호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상태가 좀 나아지자 다시 일하러 나갔습니다. 기나긴 겨울 동안 노벨 형제에게는 이런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윽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추위가 물러간 뒤에야 노벨은 겨우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로베르트에게 결혼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신부는 포린이라는 핀란드 아가씨였습니다. 그리하며 노벨이 건강을 거의 회복했을 때 로베르트는 포린과 결혼하여 핀란드로 떠났습니다. 큰 형과 헤어진 뒤 노벨은 둘째 형 루드비히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둘째 형은 그 동인 모아 둔 돈으로 작은 공장을 마련했습니다. 형은 공장에서 연구를 하며 여러 가지 기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당분간 우리 공장에서 일을 좀 거들어 주지 않겠니? 아직은 보잘것없지만 연구실도 있으니 둘이서 열심히 하면 뭔가 해 낼 수 있을 거야." 형의 말을 듣자 노벨은 다시 힘이 솟았습니다. 노벨은 형의 곁에서 열심히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나 형을 도와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노벨은 자기 나름대로 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노벨은 7년 전, 크림 전쟁이 한창일 당시에 들은 적이 있는 니트로글리세린에 대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갔을 때, 그 곳 화학 교실에서 아버지와 매우 친한 사이였던 시닌 교수를 만나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당신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시닌은 이렇게 말하며 노벨과 아버지를 실험실로 데려갔습니다. "아주 신기한 실험을 보여 드리지요." 시닌은 기름 같은 것이 든 병 하나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노벨 부자는 시닌의 행동을 진지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럼, 실험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닌은 그 기름 같은 것을 철판 위에 한 방울 조심스럽게 떨어뜨렸습니다. "이제 불을 붙일 테니 잘 보십시오." 시닌은 성냥을 그어 철판 위의 기름방울에 대었습니다. 순간 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기름 같은 물질은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물질입니다. 이 물질은 언뜻 보기엔 기름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위험한 물질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아버지가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보시다시피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타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충격을 주거나 문지르기만 해도 폭발하지요. 이 물질의 폭발력은 이제까지의 그 어떤 화약보다 강력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한번 그것을 연구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요?” 아버지는 깜짝 놀라 되물었습니다. 노벨은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바로 니트로글리세린이야!" 노벨의 나이도 어느덧 27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노벨의 연구 방법은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하나하나 직접 실험을 하면서 생각하거나 연구를 했기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먼저 깊이 생각을 해 본 다음, 어느 정도 성공할 확률이 있을 때에야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니트로글리세린에 불을 붙이거나 충격을 주기만 해도 폭발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이 폭발하는 원인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썼습니다. 쉽사리 그 답을 얻을 수가 없었지만, 노벨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실험을 했습니다. 마침내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은 온도가 180℃로 올라갔을 때 폭발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다음은 니트로글리세린의 양이 많을 경우 어떻게 해야 온도를 안전하게 180℃까지 올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의 니트로글리세린을 한꺼번에 폭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폭발시키는 데 화약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 노벨의 머릿속에 별안간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무렵에는 검정색 화약이 쓰이고 있었는데, 이것은 폭발력이 강한 만큼 많은 위험성이 따르는 물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벨은 화약을 이용해서 실험을 해 보기로 결정하고 실험을 위한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큰형 로베르트도 이 실험을 보기 위해 핀란드에서 왔습니다. 드디어 삼 형제는 그 동안 준비한 폭발 장치를 가지고 강변으로 갔습니다. 노벨이 폭발 장치의 심지에 불을 붙여 재빨리 감을 향해서 던지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로베르트와 루드비히는 몸을 숙였습니다. "쾅쾅, 꽝!" 폭발 장치가 강물에 떨어지고 나서 얼마 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물이 높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성공이다! 성공!" 그 무렵 도로 공사를 할 때에나 광산에서 돌을 캐낼 때에는 검정색 화약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한 화약이 성공을 하게 된다면, 이 검정색 화약보다 수십 배나 강력한 힘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전하게 다루는 문제가 가장 중대한 연구 과제였습니다. 중대한 연구 과제였습니다. 노벨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화약을 발명했다. 검정색 화약과 니트로글리세린을 10대 1의 비율로 섞어서 만든 것이다. 이 새로운 화약의 폭발력은 검정색 화약의 20배나 된단다. 스웨덴 정부도 내 발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연구에 대한 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이 화약은 만들 당시에는 대단한 폭발력을 지니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불을 붙여도 폭발하지 않는 경우가 있단다. 부디 네가 와서 나를 도와 함께 연구했으면 좋겠구나. 60세가 넘은 아버지가 아직도 화약 발명에 몰두하는 것을 보며, 노벨은 아버지의 굳은 의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벨은 3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있는 스웨덴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새로 개발해 낸 화약을 노벨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노벨은 아버지가 만든 화약의 결점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화약은 니트로글리세린 액체와 가루로 된 검정색 화약을 섞은 것이므로, 한참 동안 놓아두면 니트로글리세린이 검정색 화약에 스며들어 폭발이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화약을 발명했다는 말에 잔뜩 기대를 하고 왔던 노벨은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노벨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알면 아버지는 더 크게 실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노벨은 동생 에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실험은 커다란 결점을 안고 있단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구나. 아버지를 잘 보살펴 드리길 바란다, 에밀." 그리고는 말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노벨은 다시 니트로글리세린 연구를 계속하여 조금씩 문제점을 풀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실험이 성공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아버지의 실험이 실패한 이유를 정중하게 편지로 써서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무척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곧 아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편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1863년 10월, 노벨은 드디어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에 대한 특허를 따냈습니다. 그리고 스톡홀름에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작은 공장을 세웠습니다. 공장이라고는 하지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의 오두막집에 불과했습니다. 일꾼도 아버지와 노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이 옴메베루그란 광산에서 사용되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화약에 대한 소문은 금세 다른 광산으로 퍼져 나가 앞을 다투어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일손이 모자라자 이듬해에는 일 꾼 세 사람을 더 고용해야 했습니다. 노벨은 이른 아침부터 공장에 나가 일꾼들과 부지런히 일하는 한편,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힘든 일은 거의 못했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 나와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들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벨의 공장에 폭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연기가 치솟고 있는 공장으로 달려가는 아버지와 노벨에게 불길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혹시 에밀이.' 좀 전에 두 사람이 공장에서 나올 때 에밀이 그 곳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에밀은 움살라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노벨과 마찬가지로 화약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공장 일을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장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눈앞의 끔찍한 상황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건물도 기계도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길바닥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고로 동생 에밀과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일 꾼 세 사람, 공장 근처를 지나던 행인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노벨 공장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아버지와 노벨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스톡홀름 시로부터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을 만드는 일을 금지한다는 통지가 날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주위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점점 기력을 잃어 가더니, 폭발 사고가 있은 지 한 달 만인 10월 6일에 그만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자리에 눕게 되자 노벨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무렵 스톡홀름으로 통하는 철도 터널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 공사를 손쉽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다시금 거론되었습니다. 폭발 사고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은 광산이나 터널 공사를 하는 데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스웨덴의 사업가 슈미트란 사람이 노벨을 찾아와서 공장을 다시 지을 돈을 모두 대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스톡홀름 시에는 더 이상 공장을 지을 수가 없었기 때 문에 스톡홀름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멜라렌 호수 근처의 배 위에 공장을 지었습니다. 노벨 공장에서 만들어진 니트로글리세린 화약 덕분에 터널 공사는 쉽게 완성되었습니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서서히 이 화약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스톡홀름 교외에 공장을 짓는 것도 허가하게 되었습니다.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에 대한 소문은 점차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화약은 다른 나라에서도 주문이 밀려들어 미처 다 생산해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노벨은 '알프레드 노벨 회사' 란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이 때 노벨은 32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화약 분야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공장에서 제조된 화약은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의 유럽뿐만 아니라 멀리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수출되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 회사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화약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노벨은 폭발 사고가 일어날까 봐 무척 신경이 쓰였습니다. 생각 끝에 노벨은 화약을 안전하게 다루는 방법을 설명해 주기 위해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을 운반하는 사람들 중에는 화약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화약의 위험성을 알지 못한 채 함부로 다루었습니다. 1865년 12월의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소파에 기대앉아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던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뉴욕의 호텔에서 화약 대 폭발' 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뿔싸! 그 동안 걱정하고 있던 일이 끝내 일어나고야 말았구나.' 노벨은 곧장 뉴욕으로 달려가서 사고 현장을 조사해 보았지만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고들 시작으로 연이어 여기저기에서 폭발 사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음 해 4월 3일에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싣고 파나마 운하를 지나가던 배가 폭발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고로 기선에 실린 화물이 모두 물속으로 가라앉았을 뿐 아니라, 4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같은 해 4월에 샌프란시스코와 시드니에서도 니트로글리세린을 저장한 창고가 폭발했습니다. 이어서 5월 초에는 노벨의 독일 공장에서도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대량의 화약을 생산해내던 크뤼멜과 노르웨이 공장에서도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살인 화약이라는 비난과 함께 화약 생산을 금지하라는 통지가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노벨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에게는 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에게 속삭여 주는 선생님 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 삼 형제를 가르쳐 주었던 선생님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 사람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선생님의 음성은 아직도 노벨의 마음속에 남아, 힘들고 지 칠 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화약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만든 나의 발명이 오히려 불행을 낳고 있다니.' 노벨은 보다 안전한 화약을 만들기 위해 더욱더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노벨은 폭발 사고의 원인을 찾기 위해 사고 장소를 쫓아다니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이 액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운반할 때 잘못하면 밖으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 니트로글리세린은 액체로 되어 있어서 조금만 흔들려도 밖으로 새어 나온다. 폭발은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노벨은 그 후로 밤낮없이 이것만을 생각했습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굳힐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하면 멀리 실어 나르기도 편리할 텐데.' 하지만 니트로글리세린을 얼음처럼 얼리면 화약으로 사용하기에 불편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맞아, 니트로글리세린을 다른 물체에 스며들게 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공장의 문을 닫지 않고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스며들게 하는 물체로는 숯가루, 톱밥, 시멘트나 벽돌 가루, 규조토 등을 사용했습니다. 또 그것에 스며들게 하는 니트로글리세린의 양도 각각 다르게 하여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숯가루의 경우는 폭발력은 세지만 숯이 불에 잘 타는 물질이 기 때문에, 조그만 충격에도 폭발하기 쉬워 운반하기에 위험이 따랐습니다. 규조토는 숯가루를 썼을 때보다 폭발력은 약해지지만 실어 나르는 데는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규조토를 사용한 새로운 화약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1866년 10월, 노벨은 이 화약의 안전성을 알리기 위하여 독일에서 공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노벨은 이 화약에 '다이너마이트'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이너마이트란 그리스 어로 '힘' 이란 뜻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도로나 철도, 수로 등을 만들 때, 그리고 광산에서 "광석을 캐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천 년 전, 이집트에서는 17킬로미터의 수로를 만드는데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11년 동안이나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로는 불과 100명이 10개월 동안이면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힘든 노동에서 구해주었습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려고 온 힘을 기울인 것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성능과 안전성이 알려지자 세계 곳곳에서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노벨의 공장은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1871년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도 다이너마이트 회사가 생겼습니다. 그런 바쁜 가운데에도 노벨은 하루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하더라도 안부를 묻는 편지는 계속 보냈습니다. 에밀의 사고 이후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도 다이너마이트 발명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러던 1872년 9월 3일, 아버지는 어머니 홀로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노벨 형제는 홀로 된 어머니 곁에 자주 모여 어머니를 위로해 드렸습니다. 어느덧 노벨도 40대의 중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노벨은 그 동안 다이너마이트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전에 쓰던 니트로글리세린 화약보다 힘이 약하다고 하여 광산에서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규조토가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하여 안전해지기는 했지만, 폭발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은 규조토 대신 다른 물질을 사용해서 실험을 계속했지 만 큰 진전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회사일이 바빠서 계속 연구에만 매달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전처럼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군.' 노벨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자 더욱 그런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다음 해 노벨은 잠시 동안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사했습니다. 그 곳에서 노벨은 젊은 조수 페렌바흐와 함께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몸도 이젠 옛날 같지 않아 쉽게 피로해지고 눈도 침침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안전하면서도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기어코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무감으로 밤늦게까지 연구실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은 페렌바흐와 규조토를 대신할 만한 것 이 없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험관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다 실수로 시험관을 떨어뜨려 깨진 유리 조각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피가 줄줄 흘렀지만 준비된 약품이 없었습니다. "물반창고를 만들까요?" 페렌바흐는 솜화약에 알코올과 에테르를 섞어 물엿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처 난 부위에 갖다 대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심에 널리 쓰이던 피를 멈추게 하는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그날 밤 노벨은 손가락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물반창고를 붙였는데도 왜 이렇게 아픈 거지? 오늘 낮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무얼 했더라? 참, 그렇지. 니트로글리세린을 사용해서 실험을 했어. 그렇다면 물반창고에 니트로글리세린이 묻어 스며들었고, 그래서 약효가 없어진 게 아닐까?' 노벨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새벽이 밝기도 전에 곧바로 연구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실험해 보자.' 어느 때처럼 얇은 유리 접시에 약을 담아 젤리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니트로글리세린을 몇 방울 섞어 보았습니다. "성공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했어!" 노벨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출근하여 막 연구실로 들어서던 조수 페렌바흐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습니다. "박사님, 무슨 일이세요?" "페렌바흐 군, 자네 덕분에 드디어 발견했네. 실마리를 찾았단 말일세." "네? 무엇을요?" "자네가 만들어 준 물반창고 말일세. 그 덕분에 아주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됐지. 규조토를 대신할 만한 물질을 찾아냈어.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페렌바흐 군.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니 좀 더 연구 해 봐야 하네." 그 날부터 연구실의 불은 좀처럼 꺼질 줄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솜화약의 재료나 니트로글리세린을 섞는 비율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려 250번도 넘는 실험 끝에 새로운 화약을 만들어냈습니다. '폭발성 젤라틴' 이란 이름으로 탄생한 이 화약 덕분에 광석을 캐낼 때나 토목 공사를 할 때 안전하고 수월하며 능률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노벨은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아직 까지 혼자였습니다. 홀로 된 어머니는 늘 이런 아들을 걱정하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스톡홀름에서 그리운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알프레드, 나는 네 덕분에 평소에 늘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네 도움으로 그것이 가능해졌단다. 그러나 홀로 지내는 네가 늘 걱정이구나. 부디 건강하거라. 노벨은 두 형님과 힘을 합쳐 커다란 석유 회사인 '노벨 형제 나프타 회사'를 만들고, 이 회사의 운영을 형에게 맡겼습니다. 노벨은 여러 공장과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조국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자선 활동도 벌였습니다. 그런데 1889년, 노벨이 56세 되던 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노벨 형제들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형제들끼리 더욱더 우애 있게 지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무렵 세계 여러 나라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군대를 늘리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베르트 형이 말했습니다. "알프레드, 대포나 총알에 쓰일 수 있는 화약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니?" 이 말은 또다시 노벨의 연구심을 자극했습니다. 노벨이 만든 다이너마이트나 폭발성 젤라틴은, 연기가 심하게 나고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대포나 총알에 사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벨은 또다시 연구에 몰두하여 연기가 나지 않는 화약을 발명해 내었습니다. 이 화약은 '발리스타이트' 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발리스타이트는 끈처럼 늘일 수도 있고 작은 덩어리로도 만 들 수 있었습니다. 폭발해도 거의 연기가 나지 않고 총을 망가뜨릴 염려도 없었습니다. 발리스타이트의 발명 사실이 알려지자 여러 나라는 앞다투어 그것을 사들이려 했습니다. 노벨은 가장 먼저 달려온 이탈리아에 발리스타이트의 특허를 양도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을 안 프랑스는 펄쩍 뛰며 화를 냈습니다. "노벨 씨, 당신은 프랑스에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그리고 프랑스 신문들은 일제히 노벨을 헐뜯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당초에 발리스타이트는 프랑스의 화약 연구소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노벨이 몰래 훔쳐냈다. 노벨은 스파이다. 이 같은 기사가 흘러나오게 된 것은 노벨 연구소 근처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발리스타이트와 비슷한 화약을 만들고 있었기 때 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노벨은 진실을 밝히려고 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노벨에게 연구소 문을 닫을 것과 파리를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노벨은 그 동안 파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경치도 아름답고 많은 문학가가 모여든 파리, 더욱이 노벨의 일생 중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문학 소녀를 만났던 파리를 떠나 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18년 동안이나 정들었던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벨은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연구소를 옮겼습니다. 산레모는 바다가 가깝고 경치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별장 같은 큰 집을 짓고 연구소도 훌륭히 지었습니다. 연구소에는 연구실 네 개와 작업실이 딸려 있었습니다. 노벨은 이탈리아에서 발리스타이트를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벨의 바람대로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고 말았습니다. '아, 이럴 수가! 내가 만든 발명품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다니.' 노벨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발리스타이트는 이미 노벨이 이탈리아에 특허를 넘긴 것이라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노벨은 그런 위험한 것을 발명해 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없는 참다운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벨은 어느덧 60세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가족이 없는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 많은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은 자기의 발명품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쓰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의 무기로 쓰이게 된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 무렵 세계 평화 문제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주트너 부인이었습니다. 노벨은 그녀가 쓴 '무기를 버려라'라는 소설을 읽고 크게 감 동을 받아 그녀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부인의 소설을 읽고 깨달은 바가 큽니다. 나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내 모든 재산을 인류에게 돌려 줄 방법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노벨은 산레모 연구소의 일을 젊은 조수들에게 맡기고, 오직 평화를 위한 일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은 먼저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도와주는 일에 손을 댔습니다. 노벨이 자선 사업을 벌이자, 그의 사무실에는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들었습니다. 노벨은 그 편지를 하나하나 읽어 보고 난 뒤, 진정으로 어렵고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 주고 일자리도 구해 주었습니다. "나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가난과 싸우다가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합니다." 이것은 그 무렵 노벨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습니다. 노벨은 어느덧 62세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노벨은 이제 활동을 거의 중단한 채 산모의 저택에서만 지냈습니다.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소녀와의 만남을 회상하기도 했고, 여행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공장에서 형들과 공작놀이를 하던 일, 자상하신 어머니에 대한 추억, 두 형들과 어울려 놀던 일 등이 새삼 그리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은 그만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부터 노벨은 잦은 발작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걸핏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침이 심하게 났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습니다. 노벨은 가만히 누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내가 죽은 후 내 재산을 어디에 쓰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 두 가지 문제는 노벨에게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맑게 갠 어느 날, 노벨은 바닷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이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불현듯 파리의 공원에서 만났던 소녀가 죽었을 때, 그의 외로움을 감싸 주던 밤하늘의 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죽으면 내가 태어났던 우주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다면 사회에서 모은 내 재산도 당연히 사회에 되돌려 주어야 해.' 노벨은 평소에 믿고 지내던 사람들을 불러 놓고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 재산을 기금으로 해서 해마다 인류를 위해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아래 다섯 분야의 사람들에게 상금을 드리기 바랍니다. 1.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또는 연구에 업적이 있는 사람. 2. 화학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개량한 사람, 또는 연구에 업적이 있는 사람. 3.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이나 업적이 있는 사람. 4.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을 쓴 사람. 5.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공헌한 사람. 이 다섯 가지 부분의 상금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 주어도 좋습니다. 유언장을 완성한 노벨은 다음 날 그것을 스톡홀름 은행에 맡기면서 자기가 죽은 후에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896년 12월 10일, 노벨은 넓은 우주로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은 지 5년 뒤인 1901년, 제1회 노벨 상 시상식이 스톡홀름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노벨의 유언대로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노벨 의학상, 노벨 문학상, 노벨 평화상이 각 분야의 공로자들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이 상은 지금까지도 계속 수여되고 있으며, 오늘날은 노벨 경제학상이 하나 더 추가되어 6개 부문에서 수여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노벨 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노력했던 노벨의 정신은 길이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거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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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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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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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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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장난감. “얘들아, 어서들 나오너라. 아버지께서 오셨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다섯 아이들은 우르르 방에서 뛰어나와 아버지에게 매달렸습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그래, 모두 잘 있었니?” 아버지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호주머니 속에 얼른 감추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얘들아, 이게 뭔지 알아맞혀 보렴.” “아버지, 장난감이죠?” 아이들은 매우 궁금한 표정으로 아버지 곁에 둘러섰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호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던 것을 꺼내어 천장으로 휙 던졌습니다. 그러자 새처럼 날개를 활짝 편 장난감이 가족들의 머리 위로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야, 날아다니는 장난감이다!” 그 장난감은 잠깐 푸드덕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더니 벽에 부딪히고는 그만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장난감을 주워서 다시 천장을 향해 날렸습니다. "와아, 대단해!" 아이들은 너무나 신기해서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아빠, 이 장난감 이름이 뭐예요?" 한 아이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이건 헬리콥터란다." "헬리콥터요? 정말 재미있는 이름이군요." 장난감이 바닥에 떨어지면 아버지는 그것을 주워 또다시 천장을 향해 날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습니다. "와아!" "장난감이 공중을 날 때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오빌, 오늘이 네 생일이지? 이건 네 생일 선물이다." 아버지가 오빌에게 헬리콥터를 주자 다른 형제들은 부러운 듯 '와아!'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설교를 잘하기로 소문난 목사였습니다. 그 때문에 설교하러 여러 도시를 다녀야 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아이들에게 색다른 선물을 사다 주곤 했습니다. 오빌이 생일 선물로 받은 헬리콥터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선물보다도 아이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자, 이젠 식사하러 오세요." 어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으면서 떠들썩한 가족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모두들 식당으로 간 뒤에도 윌버와 동생 오빌은 헬리콥터를 날리며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두 아이가 바로 훗날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입니다. 아버지 라이트 씨는 여러 지방으로 파견하러 다니는 목사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자주 이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처음 파견된 곳에서 첫째 아들 로이히린이 태어났고, 새로 이사한 곳에서는 둘째 아들 로린이 태어났습니다. 셋째 아들 윌버 라이트는 1867년 4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주 뉴캐슬에서 태어났고, 동생 오빌 라이트는 1871년 8월 19일, 오하이오주의 데이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첫딸 캐서린이 태어났습니다. 라이트 형제 중에 윌버는 성격이 꼼꼼하고 행동이 신중했으며, 동생 오빌은 과학에 소질이 있어서 무엇이든 손으로 만드는 데 흥미를 느꼈습니다. 훗날 형제가 함께 대발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이러한 성격이 조화를 잘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라이트 씨는 이제 데이턴시에 자리를 잡을 생각으로 집을 샀습니다. 그즈음에는 목사의 지위도 높아졌고 교회에서 출판하는 잡지의 책임도 맡고 있어 제법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척지 교회를 가끔 순회하는 일은 여전했습니다. 라이트 씨는 이제 종종 혼자서 집을 떠나 며칠씩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수전은 부지런하고 알뜰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동안에도 혼자서 집안을 잘 꾸려 갔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손재주가 많았습니다. 아이들의 옷을 손수 지어 입히는 것은 물론, 가구나 재봉틀이 망가져도 기술자를 따로 부르지 않고 혼자서 수리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무엇이든지 다 잘하셔." “맞아. 꼭 마술사 같아." 어머니가 무언가를 수리할 때마다 윌버와 오빌은 언제나 흥미 있게 지켜보았습니다. "너희들도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은 이 엄마의 아들인걸." 썰매를 만들다. 어느 겨울날, 윌버와 오빌은 여동생 캐서린을 데리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눈이 얼어붙은 언덕에서는 아이들이 나무 상자로 만든 썰매를 타고 있었습니다. 세 남매는 부러운 듯이 썰매를 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썰매를 가져본 적이 없는 세 남매는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말할 수 없이 부러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윌버와 오빌이 투덜거리듯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우리도 썰매를 갖고 싶어요. 누군가 만들어 주면 정말 좋겠는데.“ "아버지도 안 계시고 형들은 공부하느라 바쁜데 누가 썰매를 만들어 주겠니? 꼭 갖고 싶으면 너희들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지 않니?" 열한 살의 윌버와 일곱 살의 오빌은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너희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야. 내가 도와줄 테니 한번 해 보렴." 윌버와 오빌은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래, 오빌 한번 만들어 보자. 이리 와 봐!" 두 아이는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아니, 어딜 가는 거니?" 어머니가 달려 나가는 두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나무와 연장을 가지러 가요." "얘들아, 잠깐만 이리 와 보렴.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어머니는 두 아이를 불러 종이와 연필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자, 그 종이에다 너희들이 만들고 싶은 썰매의 그림을 한번 그려 보렴." "네?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 거예요?" "나도 옷을 만들 때는 먼저 본을 그린 다음에 옷을 만들거든. 썰매도 마찬가지란다. 먼저 만들고자 하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 그대로 만드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무를 정확하게 자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자른 나무는 다시 이을 수가 없거든." 윌버와 오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형 윌버가 먼저 종이 위에다 커다란 상자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상자를 왜 그렇게 크게 그리니?" "어머니, 이 상자 속에 우리가 타야 하잖아요?" "그러면 빨리 달릴 수가 없단다. 어떤 물체가 달릴 때는 공기의 저항이라는 게 생겨서 공기가 심하게 부딪쳐 온단다. 그러니 상자처럼 큰 물건은 공기의 저항을 많이 받아서 잘 미끄러지지 않는 거야." 어머니는 종이에다 윌버가 그린 것과는 달리 납작하고 긴 썰매를 그렸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이 타는 썰매처럼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는 상자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설계도를 보던 두 아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면 앉을 수가 없잖아요." "다른 아이들이 흉보겠어요." 그건 너희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렇게 납작해야 썰매가 빨리 달릴 수 있고 울퉁불퉁한 눈길에 부딪혀도 넘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단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혼자 타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셋이 함께 타야 하잖니? 이 썰매는 3인용 썰매란다. 윌버와 오빌은 속도가 빠르다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설계도를 그리는 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윌버와 오빌의 썰매 설계도가 완성되었습니다. 두 아이는 창고에 틀어박힌 채 설계도를 보며 썰매를 만드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사흘 동안 열심히 만든 결과 드디어 썰매가 완성되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여동생 캐서린과 함께 썰매를 끌고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양이 무슨 상관이야. 잘만 달리면 되잖아!" 윌버와 오빌이 자신 있다는 듯 큰소리를 치자, 한 아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럼 누구 썰매가 빨리 달리는지 시합해 볼까?" "좋아." 얼마 후 언덕 꼭대기에는 네 대의 썰매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썰매 상자 속에는 한 아이씩 올라타고 있었지만 윌버네 썰매에는 윌버, 오빌, 캐서린 세 아이가 몸을 반쯤 엎드린 자세로 앞사람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타고 있었습니다. "자, 앞으로 나간다. 출발!" 네 대의 썰매는 출발과 동시에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탄 상자 모양의 썰매는 바람이 세차게 불자 공기의 저항으로 그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게다가 눈길이 울퉁불퉁한 곳에서는 썰매가 뒤뚱뒤뚱 흔들려서 썰매를 있는 힘껏 붙잡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썰매는 쏜살같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라이트 형제가 언덕 아래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은 가장 먼저 도착한 라이트 형제의 썰매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와, 굉장한걸. 이렇게 빠른 썰매는 처음 봐." "나도 한번 타 봤으면 좋겠다." 라이트 형제의 썰매를 비웃던 아이들은 어느새 썰매를 칭찬하느라 야단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우쭐해진 기분으로 썰매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윌버가 동생 오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썰매가 빠르긴 한데 방향을 조절할 수가 없어서 탈이야." "맞아, 형. 사실 아까 쏜살같이 달릴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라이트 형제는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방향키를 만들어서 썰매에 달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키가 완성되자 라이트 형제의 썰매는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썰매가 되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에 차츰 재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라이트 씨네 집은 이제 마치 두 소년의 공작실과도 같았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형, 어서 와 봐! 내가 오늘 뭘 주웠는지 보여 줄게." "오빌, 이거 정말 굉장한걸?" 윌버와 오빌, 두 형제는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나무나 점토 등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서 와서는 몇 시간 동안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땅땅!" 형들은 이런 윌버와 오빌을 못마땅하게 여겨 종종 어머니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어머니, 이 애들 좀 야단치세요. 이러다간 온 집 안이 고물로 가득 차겠어요." "맞아요. 이 말썽꾸러기들이 무언가 두드려 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공부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윌버와 오빌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얘들아, 불편해도 좀 참고 내버려 두거라. 다 쓸 데가 있어서 모아들였을 테니." 윌버 형제가 무언가를 만들다가 중단하면, 어머니는 그것을 일일이 찬장 위에 얹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라이트 씨네 부엌에는 그릇보다도 만들다 만 공작품이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날고 싶은 소망. 라이트 씨가 오빌에게 장난감 헬리콥터를 사다 준 것은, 프랑스 사람 로지에가 열기구를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난 지 100여 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하늘을 날기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가 오랜 연구 끝에 기구에 뜨거운 공기를 넣어 공중에 뜨게 하는 열기구를 발명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늘을 나는 기구를 발명했다." 그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가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아, 나도 한번 그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아 보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기구를 타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 중에 로지에라고 하는 젊은 물리학자는 몽골피에 형제를 찾아가 사정했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영광을 제게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마침내 몽골피에 형제의 허락을 받은 로지에는 국왕과 수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군인 한 명과 함께 열기구에 올라탔습니다. 뜨거운 공기를 가득 넣자, 열기구는 서서히 부풀어 오르면서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곳에 온통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지에는 최초로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의 화학자 샤를은 기구에 뜨거운 공기 대신 수소를 넣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수소는 그 무게가 공기의 15분의 1 정도에 불과하여 뜨거운 공기보다도 훨씬 가벼웠기 때문입니다. 로지에가 최초로 하늘을 난 지 두 달 뒤, 샤를과 그의 친구 로베르는 수소 기구에 올라타 40킬로미터나 비행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다른 두 사람이 이 기구를 타고 하늘을 비행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연구가들은 앞다투어 더 훌륭한 기구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최초로 하늘에 오른 로지에 또한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기구에다가 수소와 열을 동시에 집어넣는 거야.' 기구가 아래로 내려가면 수소 부대 밑으로 뜨거운 공기를 보내서 다시 올라가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수소는 폭발하기 쉬운 기체라서 수소와 열을 함께 넣으면 화약을 불에 집어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해." 주위에서 이렇게 말렸지만, 로비에는 그것을 무시한 채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기구가 하늘로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의 염려대로 수소 기구는 불을 내뿜으며 공중에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최초로 하늘에 올랐던 로지에는 이렇게 하여 하늘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몇몇 연구가들이 연구를 거듭한 결과 전보다 더 높이, 멀리 나는 기구들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기구는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 영국의 케일리라는 사람이 가늘고 긴 오이 모양의 기구를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하늘을 날 때 공기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기구에 프로펠러가 달린 것이 등장했습니다. 프로펠러를 달면서부터 방향 조절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프로펠러를 회전시키는 데 필요한 엔진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케일리는 기구에 엔진을 다는 일을 포기하고 대신 널빤지를 날개처럼 달고, 그 널빤지의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널빤지에 작용하는 바람의 힘을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널빤지의 앞쪽을 위로 비스듬히 뉘어서 돌리자, 그의 생각대로 널빤지는 아래로부터 바람을 받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응용하면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발표한 케일리는 실제로 모형을 만들어서 띄웠는데, 이것이 최초의 모형 글라이더입니다. 그 후부터 글라이더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프랑스의 르 블리라는 사람은 1856년에 날개의 길이가 15미터나 되는 글라이더를 만들어 실험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오토 릴리엔탈이라는 독일 사람은 글라이더로 가장 먼저 하늘을 날아 보겠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한편 프로펠러의 힘으로 기구를 날게 하려는 연구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872년, 지파르는 두 대의 엔진이 달린 비행선을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데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인쇄소를 차리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라이트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장난감 헬리콥터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당시, 윌버와 오빌은 장난감에 흥미와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였을 뿐 많은 사람이 하늘을 날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족은 데이턴에 있는 집을 비워 두고 아버지의 새로운 근무지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데이턴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라이트 일가는 두 번이나 더 이사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오와 주로 갔고, 그다음에는 인디애나 주로 갔습니다. 어디로 이사를 하든지 부엌은 언제나 윌버와 오빌의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윌버가 열일곱 살, 오빌은 열세 살이 되었습니다. 데이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윌버는 아이스하키 대표선수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3학년 때, 다른 학교와 경기를 하던 중에 상대방이 휘두른 스틱에 얻어맞아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윌버는 한 달이 넘게 자리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윌버는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윌버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 아버지와 의논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네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말해 보렴." "저는 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에요. 하지만 기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래. 나도 네가 기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함께 생각해 보자." "잘 알겠어요, 아버지." 윌버는 학교를 그만둔 후 자신의 장래가 몹시 걱정되었는데, 아버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의 재능을 더 갈고닦아 반드시 훌륭한 기술자가 될 거야' 윌버가 요양을 하는 동안 오빌은 한 가지 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라이트 인쇄 상회' 라는 간판을 걸고 친구와 함께 인쇄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오빌은 2년 동안이나 이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윌버는 주간 신문을 만드는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주로 신문을 접어서 주소와 이름을 적어 보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윌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오빌도 이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빌은 몇 시간 동안 신문을 접어야 하는 단조로운 일에 금세 싫증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가족은 여느 때처럼 거실에 모여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고 어머니는 재봉질하고 있었습니다. 오빌이 신문을 접고 있는 윌버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형, 신문을 접는 기계를 만들면 어떨까?"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윌버는 눈빛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오빌, 그것을 어떻게 만들면 될까?" "어머니가 재봉틀 페달을 밟는 걸 보고 생각했는데, 인쇄기에도 발로 밟는 페달을 달면 되잖아." "오빌, 좋은 생각이야. 역시 너의 머리는 당해 낼 수가 없구나." 윌버와 오빌은 당장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의논을 해 가면서 몇 번씩이나 그리고 수정한 끝에 마침내 설계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날부터 윌버와 오빌은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톱밥을 뒤집어쓰고 기름투성이가 되면서 며칠 동안이나 집 안에 틀어박혀 기계를 만드는 데에만 열중했습니다. "자, 이제 됐다! 발로 밟아서 돌리는 자동 접지기가 완성됐어." 드디어 마치 옷감을 짜는 기계처럼 볼품없는 기계 하나가 그들 앞에 놓였습니다. 자동 접지기는 모양새가 볼품없을 뿐 아니라 소리까지 요란하여 한쪽 끝에 신문을 넣고 페달을 밟으면 '덜커덩, 덜커덩'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하지만 깨끗하게 접힌 신문지가 다른 쪽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손으로 접는 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빠른걸." "그래, 성공이야!" 윌버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윌버와 오빌은 본격적으로 주간 신문을 발행해 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면 매우 큰 인쇄기가 필요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자신들이 직접 인쇄기를 만들기로 하고 용돈을 모두 털어서 부속품을 사 모았습니다. 부속품이 웬만큼 갖추어지자, 금속이나 나무를 짜 맞추어서 인쇄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그 일에 매달린 끝에 드디어 인쇄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인쇄기는 '덜커덩 쿵쾅, 덜커덩 쿵쾅' 하고 시끄러운 잡음이 울리기는 했지만 1시간에 신문을 1,500장이나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신문을 발행하려고 하니 난감했습니다.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인쇄기를 만드는 데 써 버렸기 때문에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 문제는 두 아들을 마음속으로 대견하게 여기던 어머니의 후원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뒤뜰에 있는 창고에다 인쇄소를 차린 윌버와 오빌은 서부 뉴스라는 신문 제1호를 발행했습니다. 윌버는 편집장, 오빌은 판매 주임이 되었습니다. 배달은 윌버의 친구인 에드가 나서서 도와주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부 뉴스는 500부 이상을 찍어낼 만큼 인기가 좋아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라이트 형제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했습니다. "라이트 씨네 집 아이들이 신문을 찍는대요. 그 집 아이들은 별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머리가 비상한 모양이에요." 신문이 잘 팔리자 윌버와 오빌은 신문 만드는 일에 점점 더 신이 났습니다. "야, 이거 일주일 동안의 마을 형편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군요." 이런 칭찬이라도 들을라치면 우쭐대는 마음마저 생겼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이 무렵, 어머니가 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윌버와 오빌이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캐서린이 머리가 흐트러진 채 급하게 뛰어 들어왔습니다. "오빠, 빨리 와 봐! 어머니가, 어머니가." 윌버와 오빌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얼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 순간 세 사람은 동시에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막내인 캐서린은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습니다. 핏기가 가신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매우 평온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윌버와 오빌도 침대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울었습니다. 방 안으로 비쳐 드는 여름날의 고운 저녁 햇살이 형제들의 슬픔을 한층 깊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58세였습니다. 윌버가 스물두 살, 오빌이 열여덟 살 되던 해 7월의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집안에 짙은 어둠을 드리웠고, 가족들 모두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빌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으므로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는 학교생활에도 아예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전 이제 학교를 그만두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요." 오빌은 아버지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오빌에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 후, 오빌은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라이트 집안의 다섯 남매 중 두 형과 여동생 캐서린만 대학에 진학했고, 윌버와 오빌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자전거 경주 대회. 신문사업이 잘 되어 가던 어느 날, 윌버와 오빌은 자전거에 새롭게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자전거로 신문을 배달하는 에드의 자전거가 고장 나면서부터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는 아직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으므로 자전거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에드의 자전거는 던롭 회사에서 만든 번쩍번쩍 빛나는 새 자전거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자전거를 가진 사람은 데이턴시에서 에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그만 고장이 난 것입니다. 윌버와 오빌은 자전거를 끌고 와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전거를 뜯어보지 않고서는 어디가 고장난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빌, 그 자전거 고쳐서 네가 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드가 말했습니다. "정말이야? 그럼, 이거 뜯어봐도 되는 거니?" "그래. 넌 그런 거 잘 고치잖아. 윌버 형과 함께 고쳐서 타고 다녀. 난 새것을 사기로 했으니까." 윌버와 오빌은 자전거를 뜯어서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형, 자전거를 고치는 일이 신문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것 같아. 우리 자전거 가게를 차리면 어떨까? 앞으로는 자전거가 널리 쓰일 테니까." 평소에 호기심이 많은 오빌이 이번에도 형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것도 괜찮겠는걸." 윌버도 금세 맞장구를 쳤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친구 에드에게 인쇄기를 넘겨준 뒤 2층 건물을 얻어 '라이트 자전거 상회'를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수리만을 전문으로 했으나 얼마 후에는 낡은 자전거에서 부속품을 빼내어 자전거를 조립하는 작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실용적이고 튼튼한 자전거를 만드는 것은 물론, 친절하고 신용이 좋아 단골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라이트 자전거 회사 제품은 정말 튼튼해." "형제간의 우애도 얼마나 좋다고요? 저렇게 사이가 좋으니
무슨 일이든지 안 될 리가 있나?" 사람들은 이렇게 라이트 형제를 칭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 회사는 날로 번창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일손이 부족하여 직원까지 두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경주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오빌은 그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자전거로 1등을 하면 두 사람이 만든 자전거가 좋다는 소문이 나서 더욱 잘 팔릴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형, 이번에 자전거 경주 대회에 한 번 나가 볼까? 우리 회사도 홍보할 겸 해서." "오빌,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로구나. 너에게는 두 손 들었다." 윌버는 오빌의 생각에 감탄한 듯 맞장구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야. 1등을 하는 사람에게는 우리 회사 상표가 붙은 수리 도구와 펌프를 상품으로 주는 거야." "괜찮을까? 그렇게 비싼 물건을 주면 우리가 손해 보는 거 아냐?" "형은 두고 보기만 해. 내가 1등을 하게 될 텐데 뭘." 그날부터 오빌은 경주 대회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경주 대회 날이 되었습니다. 경주장으로 지정된 운동장에는 10대의 자전거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잘해라, 오빌." 친구 에드가 오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마침내 출발 신호가 울리자, 10대의 자전거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선수는 앉은 자세였지만 오빌은 약간 선 채로 허리를 굽히고 달렸습니다. "저 자전거는 굉장히 빠르군." 구경꾼들이 감탄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오빌, 잘한다! 오빌, 힘내라!" 에드와 윌버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오빌을 향해 목청을 돋우어 외쳤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이미 우승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오빌이 탄 자전거 바퀴에서 '펑' 소리가 나더니 차츰 속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오빌은 꼴찌를 하고 말았습니다. 오빌은 울상이 된 채 풀이 죽었습니다. 1등을 놓친 데다 수리용 도구 상자를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오빌. 우리가 바퀴 점검을 소홀히 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어. 이번 일로 인해 사소한 일이라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훌륭한 교훈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 윌버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열린 자전거 경주 대회에서 오빌은 다른 선수들과는 월등한 차이로 1등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라이트 형제가 조립해서 만든 자전거가 우수하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고, 자전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늘로 향한 관심. 1896년 여름, 스물다섯 살의 오빌은 티푸스라는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그 당시 티푸스는 사망률이 제일 높은 병이어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었습니다. 3주일 동안 앓고 난 후에야 오빌은 겨우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윌버는 동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오빌, 아직은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해. 의사도 3, 4개월 동안은 요양이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형,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어. 내가 누워 있는 동안에 뭐 좋은 소식은 없었어?" "뭐, 특별한 일은 없었어." 윌버는 신문을 들고 와서 오빌에게 읽어 줄 만한 기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어." "그게 뭔데?" "오빌, 오토 릴리엔탈이라는 독일 사람에 관해 들어 본 적 있니?" "릴리엔탈이라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글라이더 연구가잖아." "그래 맞아. 그 릴리엔탈이 글라이더로 비행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져 죽었대."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 릴리엔탈이 비행에 성공했다면 사람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게 될 날도 머지않을 텐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며 릴리엔탈을 비난하고 있군 그래." 그 이야기를 들은 오빌의 마음속에는 깊은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형, 우리가 릴리엔탈의 뒤를 이어 글라이더를 만드는 건 어떨까? 우리 힘으로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어 내는 거야." 오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도 그런 생각을 했니?" 윌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오빌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일은 우리에게 꼭 알맞은 일일 거야." "그래, 맞아. 이제야 우리 형제가 참다운 일거리를 찾아낸 것 같아." 이렇게 해서 두 형제의 관심은 넓은 하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라이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라이트 형제는 막상 무슨 일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윌버의 머릿속에 문득 어머니의 가르침이 떠올랐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소중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든지 기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글라이더에 관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독일어로 기록된 것이 많았으므로 두 사람은 독일어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책장에서 발견한 동물의 나는 기구라는 책을 공부했습니다. 우선 하늘을 나는 원리부터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새의 날개에 관해 공부한 윌버는 어느 날 새끼 새 한 마리를 잡아 왔습니다. "형, 아직 날지도 못하는 새를 왜 잡아 왔어?" "새가 나는 모양을 관찰하려고." "그렇지만 이 새는 너무 어려서 아직 못 날잖아?" "이 새가 점점 자라서 어떻게 날기 시작하는지 처음부터 살펴보려는 거야." "듣고 보니 형의 말이 맞아. 형의 꼼꼼한 성격은 난 역시 못 따라간다니까." 라이트 형제는 그날부터 새가 나는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 주문해 두었던 케일리의 비행 이론에 관한 책, 무이라르의 대기의 힘, 릴리엔탈의 하늘을 나는 방법 등의 책이 계속 배달되어 왔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글라이더 연구가 샤누트가 쓴 비행의 진보, 대학 교수 랭글리가 쓴 공기 역학의 실험 등의 책을 주문해 놓았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종류의 책을 주문해 들여와 틈틈이 읽었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왔으나 오빌은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윌버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오빌이 누워 있는 침실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오빌, 모형 비행기가 멋지게 비행에 성공했다는구나." "누가 시도했는데?" "응, 랭글리 교수가 만든 거야. 자신감이 생긴 랭글리는 그 모형을 확대해 사람이 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어. 그리고 미국 육군이 랭글리의 제작비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거야." "음, 정말 신나는 일인걸." "우리도 계속 도전해 보는 거야." 이듬해 따뜻한 봄이 되자 오빌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다시 자전거 상회의 문을 열고 일을 하면서 틈틈이 비행기에 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1897년 10월에는 프랑스 사람에다가 '아비옹 제3호기'를 완성하여, 자신이 직접 시험 비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가지 슬픈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영국의 글라이더 연구가인 필처가 자신이 연구한 글라이더를 타고 시험 비행을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윌버, 오빌! 이제 그 일은 그만두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위험한 일을 왜 하겠다는 거냐?" 가족과 친구들이 두 사람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윌버와 오빌은 주위의 어떤 얘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들만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2년이 지나자 라이트 형제는 비행 이론에 관해서는 대학교수나 기술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다양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비행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이론적인 기초 작업을 마친 셈이었습니다. 실험 비행. 라이트 형제는 어떤 방법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작업을 할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는 랭글리나 아데가 했던 것처럼 실물이나 모형을 만들어서 띄워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릴리엔탈처럼 글라이더를 만들어서 직접 날아 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방법은 엔진을 만들어서 모형 비행기에 달아야 하므로 큰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윌버와 오빌은 우선 릴리엔탈처럼 글라이더를 직접 타고 실제로 날아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자유로이 날 방법을 알게 되면 엔진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방법이 결정되자 윌버와 오빌은 자신들이 직접 탈 글라이더를 만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튿날부터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공장이 문을 닫는 밤을 이용하여 부지런히 글라이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갖가지 도구와 재료로 둘러싸인 방 안에 불을 밝힌 채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작업을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작업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세심하게 관철하면서 작업을 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넓은 날개를 부드럽게 둥글리면 공기의 흐름에 역행했을 때 부력이 생긴다는 건 이론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릴리엔탈의 글라이더나 아데와 맥심의 비행기, 그리고 랭글리의 모형 비행기 등도 모두 그와 같은 이치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추락했을까?' 윌버와 오빌 형제는 그 점에 대해 세심하게 분석해 나갔습니다. "형, 날개에 힘을 준 것만으로는 공중에서의 안정도가 부족했기 때문일 거야." "내 생각도 그래. 날개는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면 날개를 고정해서는 안 되는 거지." "맞아, 형. 새도 그때마다 날개의 각도를 바꾸는 것을 보면 날개를 고정해서는 각도를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 "사람이 아무리 글라이더에 매달려 균형을 조절해 보았자 그것만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는 거야. 우린 그 점을 보완해야 해." 윌버와 오빌은 여러 가지 이론을 종합한 것을 바탕으로 연구한 끝에 날개 자체를 움직여서 공기의 흐름을 잘 타고 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라이트 형제의 가게에 어떤 손님이 튜브를 사러 왔습니다. 윌버가 마분지 상자를 잡고 튜브를 꺼내려 하자, 상자의 한쪽 옆이 눌려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윌버는 상자를 다시 비틀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상자는 또다시 비스듬히 기울어졌습니다. 윌버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소리쳤습니다. "야, 오빌! 이거야, 바로 이거야!" 튜브를 사러 온 손님은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이처럼 윌버가 흥분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고민해 오던 문제가 뜻밖에도 손님이 튜브를 사러 온 일이 계기가 되어 쉽게 풀렸기 때문입니다. 공중에서 글라이더의 날개를 비틀게 되면 자연히 날개에 부딪히는 공기의 흐름에 변화가 생겨서 글라이더도 다른 방향으로 기울게 될 것입니다. 날개를 비트는 것은 날개 끝에다 밧줄 같은 것을 묶어서 그것을 잡아당기거나 늦추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즉시 이것을 실험해 보기 위해 실험용 연을 만들었습니다. 좌우 길이가 1.5미터, 높이 30센티미터에 날개가 2단으로 겹친 상자 모양의 연이었습니다. 연은 줄만으로도 날개의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바람이 부는 날에 연을 날리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연은 바람을 받아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줄을 당겨 한쪽 날개를 비틀자, 표면에 닿는 공기의 흐름에 변화가 생겨 연이 한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줄을 다시 원래 상태로 놓자, 연은 원래대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그 반대쪽 줄을 당겨 비틀어 보았습니다. 연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시험 삼아서 더 세게 비틀자, 연은 세차게 공중회전을 시작했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응용하면 글라이더가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기울어지려고 할 때 어느 한쪽의 날개를 비틀면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는 연을 가지고 실험을 거듭한 후, 마침내 글라이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세계의 기계 문명이 눈부신 발전을 보인 19세기의 마지막 해였습니다. 윌버의 나이가 서른두 살, 오빌의 나이가 스물여덟 살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전까지 약 3년 동안 기초적인 연구를 철저히 거친 윌버와 오빌은 진짜 글라이더를 만드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가게 안쪽의 헛간에다 꾸민 작업장에서 여름 내내 구슬땀을 흘린 덕분에 상자 모형의 연 같은 실험용 글라이더가 차츰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1900년, 마침내 글라이더가 완성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글라이더를 날리기에 알맞은 장소를 찾아보았습니다. 글라이더를 띄우려면 늘 일정한 바람이 부는 언덕이 있어야 하고, 글라이더가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넓은 장소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윌버와 오빌은 알맞은 장소가 있는지 관상대에 알아보았습니다. 관상대에서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키티호크 해안을 추천해주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자기들이 만든 커다란 글라이더를 키티호크 해안으로 운반해 갔습니다. 넓은 모래밭이 있는 한적한 해안이었습니다. "야, 좋은데. 우리의 실험에 꼭 알맞은 장소인 것 같아." 윌버와 오빌은 키티호크 해안에 텐트를 치고 글라이더를 조립하였습니다. 조립이 끝나자 마침내 첫 실험 비행을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글라이더에 사람이 타지 않고 연을 날리는 것처럼 굵은 줄을 매어 날려 보았습니다. 오빌이 글라이더에 달린 밧줄을 끌고서 얼마 동안 달리자, 글라이더는 연처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좌우로 약간 기울이는 했으나 안정도는 매우 좋은 편이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기분이 매우 들떴습니다. "좋아, 이번에는 우리가 한번 타보자." 윌버와 오빌은 글라이더를 모래 언덕 위로 끌어내렸습니다. "내가 먼저 타 볼게." 윌버는 글라이더의 날개 밑으로 기어들어가 글라이더 위에 길게 엎드린 채 조종대를 잡았습니다. 오빌은 글라이더의 줄을 어깨에 메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축 늘어졌던 줄이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줄을 당기고 있던 오빌의 손이 가벼워졌습니다. "야! 난다." 윌버가 외쳤습니다. 그 순간, 오빌은 잡고 있던 줄이 손에서 풀려나간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새 윌버를 태운 글라이더가 공중에 붕 떠 있었습니다. 오빌은 환호성을 올리면서 글라이더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글라이더는 천천히 30미터쯤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곧 세찬 바람이 불어오자, 글라이더는 세게 흔들리더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대로 모래밭에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형!" 오빌은 정신없이 윌버에게 달려갔습니다. "분명히 날았지, 오빌?" 산산조각이 난 글라이더의 날개 밑에서 모래투성이가 된 얼굴을 내밀며 윌버가 말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서로를 껴안고 모래밭을 뒹굴었습니다. "성공이다, 성공!" 집으로 돌아온 윌버와 오빌은 글라이더의 망가진 곳을 손보고 나서 다음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형, 이제 내가 탈 차례야. 알고 있지?" "그래. 알았다, 알았어." 윌버와 오빌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글라이더를 운반해 키티호크의 언덕으로 갔습니다. 그날도 두 사람은 바람이 분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나서 곧바로 집을 나섰습니다. 이전에 릴리엔탈은 날개를 가슴으로 누른 채 달리면서 곧바로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윌버와 오빌은 공기의 저항을 생각해서 아랫날개 위에 몸을 엎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날아오를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두 형제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테이트라는 사람에게 실험에 대한 설명을 한 후,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테이트는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로군. 아주 흥미로운 일이야. 기꺼이 도와드리겠소." 드디어 하늘을 향한 도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빌, 이렇게 해서 타는 건 처음이니까 내가 먼저 타고 그다음에 네가 타렴." "좋아, 형. 내가 양보하지." 윌버가 글라이더에 몸을 싣자, 데이트 씨와 오빌이 아랫날개의 양 끝을 쥐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글라이더는 공중으로 붕 떠올랐습니다. 글라이더는 바람을 거스르면서 휙휙 높이 날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글라이더는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졌습니다. 엎드리고 있던 윌버는 몸을 한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러자 허리 밑에 있는 나무 받침대가 움직이면서 거기에 묶여 있던 밧줄이 날개의 끝을 팽팽히 잡아당겼습니다. 그 순간 날개가 틀어지면서 글라이더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글라이더는 아주 먼 곳까지 날아가서 착륙했습니다. 날개 밑에 썰매를 달아 놓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데이턴으로 돌아온 윌버와 오빌은 글라이더의 연구에 있어서 선배인 샤누트에게 자기들의 실험 결과를 편지로 써서 보냈습니다. 샤누트로부터 즉시 격려의 답장이 왔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용기를 얻어 새로운 연구에 열중하는 한편,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전거 판매에도 더욱 힘을 쏟았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대단한 사람들이야. 요즘은 하늘을 나는 글라이더를 연구하고 있다는군." "하늘을 난다고?" "그렇다네." "참 별난 형제들이야." 마을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를 자주 화제로 삼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흉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남의 말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연구를 거듭해 나갔습니다. 빛나는 승리. 어느 날, 한 늙은 신사가 라이트 형제의 가게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글라이더 연구의 대선배인 샤누트였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였습니다. 샤누트 역시 두 사람이 젊다는 데에 몹시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라이트 씨, 올해는 나도 키티호크에 데리고 가 주시겠소?" 샤누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대선배에게 자기들의 비행을 보여 주게 된다고 생각하니 라이트 형제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 물론이지요. 저희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이렇게 해서 얼마 후 두 사람은 샤누트가 보는 앞에서 글라이더 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글라이더는 무려 120미터나 무사히 날아갔습니다. "야아, 이거 정말 굉장하군. 대성공이야!" 샤누트가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라이트 형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윌버와 오빌이 안전한 글라이더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골몰해 있을 무렵, 우연히 비행의 가능성이라는 뉴콤의 논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우 가벼우면서도 강한 금속이나 새로운 원동력이 발견되지 않는 한, 사람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하늘을 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학 교수이자 천문학과 수학의 권위자인 뉴콤은 한 잡지에 이런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것을 읽은 윌버와 오빌은 막연하게 잡히지 않던 것이 어둠 속에 더 파묻혀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소 생각이 깊은 윌버는 오빌보다 더 울적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은 열리는 법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계속 연구한 결과, 윌버와 오빌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정지된 공기 속에서 날개를 돌리는 방법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날개는 고정해 두고 흐르는 공기를 보내서 날개의 부력을 조사하는 장치를 생각해 내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먼저 널빤지로 사각형의 긴 통을 만들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유리를 달아 안이 보이게 하고, 그 속에 실험하려는 날개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가솔린 엔진을 이용해 선풍기를 만들어서 그것으로 통 속에 바람을 불어넣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안에 있는 날개는 항상 앞부분으로부터 바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바람의 세기도 자유로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실험용 날개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생기는 여러 가지 부력의 수치를 미리 준비된 눈금판에 새겨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생각해 낸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풍동 실험 장치'라고 해서 항공기나 선박 등의 실험에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부력의 새로운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 3년 만에 제3호기 글라이더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난번에 만든 것보다 훨씬 더 큰 데다 이번에는 수평 꼬리날개와 수직 꼬리날개까지 달아 놓았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8월 28일, 다시 키티호크로 갔습니다. 샤누트도 자신이 설계한 글라이더를 가지고 함께 갔습니다. 샤누트는 자신의 글라이더로 날아 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결국은 날지 못했습니다. 그에 반해 윌버와 오빌의 글라이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앞의 수평 꼬리날개는 안정도를 높여 주기 위해 달았던 것인데, 그것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게 되자 글라이더도 좌우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오빌! 수평 꼬리날개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해서 조종석의 키에 묶어 보자." 1차 시험 비행을 멋지게 끝내자 윌버가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오빌은 윌버의 말대로 한 다음 또다시 비행을 시도하였습니다. 키를 오른쪽으로 당기고 수평 꼬리날개를 구부렸더니 글라이더는 오른쪽으로 나아갔고, 반대로 왼쪽으로 당기면 왼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10일 동안 글라이더로 700회나 날아다녔습니다. 글라이더의 상태가 좋을 때는 한 번에 185미터나 하늘을 날았습니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비행을 해 보았으나 글라이더는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을 잃지 않았고, 방향 전환까지 자유롭게 조종이 되었습니다. "당신들한테 정말 놀랐소. 훌륭한 글라이더에다 조종 솜씨까지 뛰어나니 말이오." 테이트 씨가 진심으로 두 사람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글라이더가 어느 정도 완전해지자 라이트 형제는 글라이더에 다 엔진을 달기로 했습니다. "오빌, 글라이더가 제대로 날기 위해서는 역시 엔진을 달아야겠어." 그 당시는 가솔린 엔진을 단 자동차가 덜덜거리며 겨우 달리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자동차에 사용되던 가솔린 엔진을 비행기에 달려면 그것을 훨씬 가볍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지난날의 경험을 되살려 직접 가벼운 가솔린 엔진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1903년, 마침내 형제는 12마력짜리 가솔린 엔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털털털, 펑펑!"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에 이웃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엔진은 해결된 셈이었습니다. 엔진의 힘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는 엔진에 프로펠러를 달아서 돌려야 했습니다. 두 사람은 프로펠러 역시 직접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만들어진 프로펠러를 엔진에 달자 가솔린 엔진은 빠른 속력으로 회전했습니다. 이 실험 결과 프로펠러는 단단하면서도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두꺼운 널빤지를 깎아서 잠자리의 날개 모양과 같은 프로펠러를 두 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개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시키기 위해서 엔진을 한가운데에 놓고 좌우 양쪽에 두 개의 프로펠러를 달았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그해 9월 23일 동생 캐서린의 전송을 받으며 키티호크로 떠났습니다. 키티호크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그동안 오두막 속에 보관해 두었던 글라이더를 끄집어내어 비행 연습을 몇 차례나 해 보았습니다. 그해 10월에는 랭글리의 비행기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랭글리의 비행기는 큰 날개가 앞뒤에 네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그의 조수가 이 비행기를 타고 실험 비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실험 비행이 있는 날, 워싱턴의 포토맥강 강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행기가 발사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배 위에서 발사기를 이용하여 비행기를 공중으로 쏘아 올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비행기는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강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발사 실패다. 수리해서 다시 한번 해보기로 한다." 랭글리는 이렇게 말하고 비행기 수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실험을 한 번 더 해 보겠다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키티호크에서 이 소식을 들은 윌버와 오빌은 랭글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발사 실패가 아냐. 비행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조종 기술이 서툴면 실패하거든." "그래. 우리는 1,000번 이상이나 하늘을 날았잖아." 윌버와 오빌은 비행 실험을 앞당기기로 했습니다. 무서운 폭풍우가 해변을 휩쓰는 10월 하순이었습니다. 어찌나 바람이 거세게 부는지 모든 것이 바람에 쓸려가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비행기가 망가지면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생각에 윌버와 오빌은 필사적으로 비행기가 있는 오두막을 지켰습니다. 어느 날, 강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비행을 시도하던 중에 프로펠러를 돌리는 강철 축이 부러졌습니다. 주위에는 공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시로 나갈 일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새로운 것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도 역시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윌버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데이턴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프로펠러를 돌리는 축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속이 텅 빈 철관을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축이 부러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속이 꽉 찬 쇠로 된 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윌버가 축을 구해서 키티호크로 돌아가려고 할 때, 랭글리가 두 번째 실험에서도 실패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그의 비행기가 비행하다가 포토맥강으로 추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랭글리는 실험을 중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뿐이었습니다. 윌버는 자신감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의 부담감도 그만큼 커졌습니다. 하늘을 나는 최초의 비행기. 키티호크 해변에는 이미 겨울이 찾아들고 있었습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세차게 파도를 부서뜨리는 가운데 때때로 눈 섞인 비를 뿌릴 때도 있었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이러한 기후의 악조건 속에서 새 프로펠러를 시험했는데 상태가 매우 양호했습니다. 마침내 비행해 보기로 하고 두 사람은 먼저 활주 레일을 만들었습니다. 모래밭에 각도가 8 정도 되도록 나무를 나란히 깔고 그 위에 철판을 씌웠습니다. 잠시 후 18미터나 되는 활주로가 만들어졌습니다. "자, 형. 드디어 시험 비행이야. 형이 먼저 타 봐." '부릉 부릉' 엔진이 울리기 시작하자 비행기도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맞추어 비행기를 묶었던 밧줄을 풀자, 비행기는 레일을 가볍게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빌이 날개를 잡고 얼마 동안 달리다가 날개에서 손을 떼고 즉시 초시계를 힘 있게 눌렀습니다. 비행시간을 재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행기는 활주 레일을 박차고 조금씩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4, 5미터 정도의 높이로 32미터를 나는 데 35초가 걸렸습니다. "야호! 대성공이야!" 오빌은 기쁜 나머지 고함을 질렀습니다. 착륙할 때 썰매가 약간 고장이 났으나 두 사람은 곧 수리한 다음 '내일 비행기를 타고 날아 보겠습니다.'라고 쓴 종이쪽지를 마을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엔진을 단 비행기로 최초의 비행 실험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구경꾼은 겨우 다섯 명밖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윌버와 오빌은 비행기에 올라가 마지막 손질을 끝냈습니다. 엔진에 시동을 걸자 오빌의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섭거나 추워서가 아니라 지난 7년 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하자 긴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출발 신호와 함께 엔진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윌버가 밧줄을 풀자, 비행기는 레일 위를 달리다가 약 3m 정도 높이로 떠올라 수평으로 멋지게 날았습니다. "야, 떴다!" 모두 두 손을 높이 들고 소리쳤습니다. 윌버는 환호성을 지르며 시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윽고 비행기는 한참을 날아가서 착륙했습니다. 바람이 강해서인지 비행 거리는 약 36미터나 되었습니다. "성공이다. 오빌!" 윌버는 정신없이 달려가 오빌을 껴안았습니다. "형,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렸어?" "전보다 좀 더 길어졌어." 11시 20분, 다시 비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윌버가 조종을 했는데, 약 53미터를 날았습니다. 이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이 모두의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2시에 또다시 윌버가 비행기에 올라 비행을 시도했습니다. 기류를 멋지게 탄 탓일까, 이번에는 더욱 오랫동안 날았습니다. 비행시간은 59초였고, 거리는 244미터였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성공이다! 성공. 어서 아버지께 전보를 치자." 오빌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습니다. 이 소식은 곧 데이턴시까지 전해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생 캐서린만은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곧 윌버와 오빌의 비행 성공을 축하하는 답장을 보내 주었습니다. 다음 해에 윌버와 오빌은 데이턴 교외의 목장을 빌려서 아버지와 캐서린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기를 띄워 보였습니다. 그때에는 선회 비행을 하여 비행시간 5분 4초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소식은 그들의 나라인 미국에서보다는 외국에서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앞으로 비행기가 아주 요긴하게 사용될 것을 예측한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라이트 형제를 찾아와서 비행기를 자기네 나라에 팔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이것을 거절하고 미국 육군 앞으로 자기들의 비행기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습니다. 하지만 미국 육군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랭글리의 연구를 지원했는데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키티호크에 세워진 비행 기념비. 라이트 형제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비행기를 개량하는 데 힘써 1905년에는 비행 거리가 40킬로미터, 비행시간 39분이라는 연장 기록을 세웠습니다. 1908년, 윌버는 그 비행기를 가지고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해 9월, 윌버는 프랑스의 비행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1시간 2분 30초나 날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한편, 프랑스에서의 비행 성공 소식을 들은 미국 육군에서는 그제야 오빌에게 비행을 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마침내 오빌은 미국 육군 연병장에서 실험 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며 오빌이 탄 비행기가 가볍게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비행기는 1시간 10분 50초 동안이나 날았습니다. 형 윌버의 기록을 깬 것이었습니다. 미국 육군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이번에는 오빌과 또 한 사람이 함께 타고 실험 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셀프리지라는 육군 병사가 자진해서 비행기를 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두 사람을 태운 비행기는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0분 정도 흘렀을 때였습니다. "앗!"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습니다. 비행기가 갑자기 심하게 기울더니 연병장 가장자리에 곤두박질쳤던 것이었습니다. 비행기는 심하게 부서지고 안타깝게도 셀프리지는 목뼈가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오빌은 다리를 심하게 다쳤을 뿐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셀프리지 씨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 후, 두 사람은 오빌의 다리 치료가 끝나자, 비행기 개량에 더욱 힘썼습니다. 다음 해인 1909년, 오빌은 대통령과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주변의 하늘을 날며 멋진 비행 솜씨를 뽐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데이턴시에 처음으로 비행기 회사를 세우고 항공기 발달을 위해서도 힘썼습니다. 또한 프랑스에 세계 최초로 비행 학교를 열어 많은 사람에게 조종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개량에 온몸을 바쳐 일하던 윌버는 1912년 5월 30일,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언제나 형제가 한 몸처럼 함께하다가 형을 잃게 되자 동생 오빌은 그만 비행기에 대한 의욕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힘을 내어 비행기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하늘을 난 지 30년째 되는 해인 1932년 키티호크에 '비행 기념비'가 세워졌고, 미국 정부는 오빌을 초청하여 제막식을 했습니다. 61세가 된 오빌은 형 윌버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 이 기념비를 형과 함께 보았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오빌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6년이 지난 1948년 1월 30일, 오빌은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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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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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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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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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위틈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소년은 살며시 바위 밑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마른풀과 짚으로 만들어진 새둥지가 있었는데, 새둥지 안에는 검은 점이 군데군데 얼룩져 있는 예쁜 새알이 일곱 개나 담겨 있었습니다. 소년은 풀밭 위에 엎드려 새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미새가 걱정스러운 듯이 소년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며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미새의 걱정을 알 리 없는 소년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새알을 한 개만 가져가고,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면 그 때 새끼들을 가져가야지.' 새알 한 개를 꺼내 들고 언덕을 내려오던 소년은 마을 입구에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앙리, 무엇을 그렇게 소중하게 들고 오니?" 목사님이 이렇게 물어보자 소년은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습니다. "아니, 그건 딱새 알이 아니냐? 어디서 난 거니?" "저쪽 바위틈에서요." 소년은 언덕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새둥지를 찾으러 거기에 갔었니?" "아뇨.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걸 왜 가져왔지?" "알에서 새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요." 소년이 정직하게 자기의 생각을 말하자 목사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습니다. "앙리, 네가 어머니 곁을 떠나 있으면 어머니가 그리운 것처럼 새들도 마찬가지란다. 어미새는 지금 그 알을 잃어버리고 슬피 울고 있을 거야. 새를 슬프게 하면 안 되겠지?" 목사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떨궜습니다. "목사님, 제가 잘못했어요. 이 알을 도로 둥지에 가져다 놓겠어요." 소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둥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딱딱, 딱딱." 목사님의 말대로 어미새는 둥지 위를 맴돌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딱새야, 미안해." 알을 둥지에 도로 갖다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곤충학자로 이름을 떨친 장 앙리 파브르입니다. 앙리 파브르는 1823년 12월, 프랑스의 생레옹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앙리의 집은 끼니를 잇기도 어려울 정도로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동생 프레데리크가 태어나자 앙리는 외딴 숲 속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댁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피에르 장 아저씨, 세 명의 양치기, 그리고 양을 지키는 큰 개 두 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성격이 밝은 앙리는 할아버지 댁의 모든 것에 금세 익숙해졌고 그 곳의 동물 가족들하고도 친숙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정이 많고 상냥한 분인 반면에 할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앙리는 그런 할아버지를 할머니만큼이나 좋아했습니다. 앙리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 할머니가 물레질을 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줄 때가 가장 즐거웠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할머니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앙리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며칠 전부터 밤마다 들리던 풀벌레 소리가 그 날따라 아주 가까운 숲에서 들려왔습니다. 앙리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앙리가 풀숲 가까이 다가가자 그 소리는 뚝 그쳤습니다. 한참 동안 소리를 쫓아 헤매다녔지만 앙리는 끝내 그 소리나는 벌레를 발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벌레를 찾아 헤맨 지 나흘째 되는 날 밤에야 앙리는 비로소 그 풀벌레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연두색 몸뚱이에 긴 수염을 달고 있는 벌레가 소리를 내며 풀잎 끝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앙리는 살며시 두 손을 뻗쳐 벌레를 덮쳤습니다. 벌레를 잡은 앙리는 그것을 피에르 아저씨한테 가져갔습니다. "아저씨, 이 벌레의 이름이 뭐예요?" "여치란다. 옳아, 그러고 보니 네가 그걸 잡으려고 밤마다 밖으로 나갔었구나." 앙리는 여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무렵부터 앙리는 신비로운 자연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앙리는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곤충에 빠져서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습니다. 3년 동안 할아버지 댁에서 지낸 앙리는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생레옹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의 농사가 그럭저럭 잘 되어 집안 형편이 좀 나아져 있었습니다. 앙리는 학교에 가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나도 이제 학교에 다닌다. 이제부터는 무엇이든지 선생님께 여쭈어 봐야지.'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앙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헛간 같은 방 하나가 교실이자 피에르 선생님의 살림집이었던 것입니다. 피에르 선생님은 상냥하고 좋은 분이었으나 늘 바빴습니다. 가난한 시골 마을이다 보니 선생님은 마을의 이발사이자 교회의 종을 치는 종치기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결혼식이 있으면 주례를 섰고 때로는 의사 노릇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가도 마을일을 보러 나가곤 했습니다. 학교가 이런 형편이다 보니 학생들은 글도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큰 괘도를 하나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벽에 걸어 두고 보는 그 괘도에는 수많은 곤충들이 고운 빛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야아, 내가 알지 못하는 곤충들이 이렇게 많구나.' 앙리는 밤을 새워 가며 곤충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글자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앙리가 글을 잘 읽게 되자 아버지는 기뻐하며 라 퐁텐의 '우화집'을 사 주었습니다. 동물들이 사람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동화로 엮은 그 책은 앙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앙리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미래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앙리 파브르가 열 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로데즈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농사짓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로데즈에서 찻집을 차렸으나 장사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얼마 후 앙리는 가톨릭 신부님이 세운 그 곳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아버지가 학교에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앙리는 수업료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에 앙리는 신부님이 미사를 드릴 때 옆에서 시중을 들고 성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앙리는 토요일 오후마다 늦게까지 성가 연습을 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서 참아 냈습니다. 매주 교회 일을 거들면서도 공부를 잘하는 앙리는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특히 그리스 어와 라틴 어 실력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앙리는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틈만 나면 들판으로 나가 자연을 관찰했습니다. 그 무렵, 앙리는 올챙이나 개구리를 잡아다가 집에서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는 로데즈는 생레옹 못지않게 즐거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데즈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길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가게가 점점 기울어 결국 문을 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앙리네 가족은 몽펠리에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아버지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앙리에게 말했습니다. "앙리, 너도 알다시피 지금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렵단다. 프레데리크는 아직 어리니까 친척집에 맡길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가 없구나. 돈을 모아 다시 가족이 모여 살 수 있을 때까지 너는 혼자 힘으로 살아야 되겠다. 할 수 있겠니?" 앙리는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이 슬펐지만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활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고맙구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하느님께 빈다." 이렇게 해서 앙리의 가족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된 앙리는 거리를 헤매며 일거리를 찾아다녔습니다. 이 때 앙리의 나이 열네 살이었습니다. 앙리는 이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앙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잘 곳이 없어 공원의 벤치에서 새우잠을 잤고, 또 어떤 날은 나무 밑에서 차가운 밤공기에 떨며 잠을 자야 했습니다. 빵을 살 돈을 벌기 위해 레몬 장사를 하거나 철도 공사 현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비가 오는 날에는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앙리는 약간의 돈을 가지고 빵을 사러 가다가 서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앙리는 그 동안 책이 무척 읽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책을 살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앙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점 안으로 들어서서 거기 있는 책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습니다. 그 때 시집 한 권이 앙리의 눈에 띄었습니다. 앙리는 곤충을 관찰하는 일 못지않게 문학 책을 읽는 것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 시집을 펼쳐들고 시를 읽던 앙리는 빵을 살 생각도 까마득히 잊은 채 주머니를 털어 그 시집을 사 버렸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에 앙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린 앙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아름다운 시가 배고픔을 잊게 해 주었습니다. 이 시집은 앙리의 마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 그를 격려해 주고 달래 주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앙리 파브르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고된 생활을 이겨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앙리는 아비뇽에 있는 사범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교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앙리는 그 얘기에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더구나 그 학교의 입학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3년 동안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앙리는 더욱 가슴이 부풀어올랐습니다. '어려움을 잘 견뎌 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운이 온다.'라고 믿고 있던 앙리에게 그것은 희망의 등불과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입학 시험 과목은 라틴 어와 영어 두 과목이었습니다. 앙리는 이 두 과목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앙리는 낮에는 돈을 버느라 몸이 말할 수 없이 고되었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자신을 채찍질해 가면서 열심히 시험 공부를 하여 마침내 입학 시험을 치렀습니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앙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발표장으로 갔습니다. 게시판에서 자기의 이름을 찾던 앙리는 그만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꼴찌라도 좋으니 합격만 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그의 이름이 1등으로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1등으로 합격하다니..." 지난 2년 동안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 온 앙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날, 앙리를 찾아온 어머니도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습니다. 장학생으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앙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먹을 것과 잠자리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앙리는 1학년 때까지는 줄곧 우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학교 공부를 게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때부터 배우게 된 라틴 어와 그리스 어가 너무 쉬워서 그만 싫증이 나 버린 것입니다. 앙리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종종 딴짓을 하였고 틈만 나면 곤충을 찾아 들판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앙리의 책가방 안은 들에서 채집한 곤충들로 늘 지저분했습니다. 어느 날 라틴 어 시간에 앙리는 책상 밑에서 무당벌레를 만지작거리다가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받았습니다. "이런 건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거야. 자네는 곧 교사가 될 사범학교 학생이 아닌가!" "선생님, 전 이것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앙리가 이렇게 변명하자 라틴 어 선생님은 어이없어하며 이 일을 곧 교장 선생님에게 알렸습니다. 이윽고 교장실로 불려간 앙리는 교장 선생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라틴 어와 그리스 어는 너무 쉬워서 통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를 3학년으로 진급시켜 주십시오." "뭐라고? 월반을 하겠다고?" "네, 만약 제가 월반을 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졸업을 못 하면 제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교장 선생님." "좋아, 자네 말을 한번 믿어 보지." 교장 선생님은 앙리의 굳은 결심을 이해하고 마침내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2학년 도중에 3학년으로 건너뛴 앙리는 다시 학교 공부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해의 졸업 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무사히 졸업을 했습니다. 1842년, 19세의 청년이 된 앙리 파브르는 카르팡트라스에 있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아비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 학교는 파브르가 어린 시절에 다닌 생레옹에 있는 초등학교와 다름없이 모든 시설이 형편없었습니다. 낡은 교실에는 작은 칠판만이 달랑 걸려 있었고, 50여 명의 전교생은 대부분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농사꾼의 자녀였습니다. 파브르는 이러한 그들의 형편에 맞추어서 아이들을 가르칠 생각이었습니다. 파브르는 우선 농사에 필요한 측량 기술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월급을 털어서 측량에 필요한 기구들을 사들였습니다. 어느 봄날, 파브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나갔습니다. 그 날은 땅의 넓이를 실제로 재어 보면서 측량 수업을 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측량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자갈 투성이인 들길을 걷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들판 곳곳에 표적으로 삼을 막대기를 세운 다음 학생들은 줄자로 거리를 재기도 하고, 측량 기계를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막대기를 잘 잡고 이쪽을 봐요. 이제부터 정확하게 측량하는 방법을 설명하겠어요." 파브르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있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며 파브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여긴 파브르는 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너희들은 뭘 하고 있는 거니?" "꿀을 먹고 있어요." "참 달아요. 선생님도 좀 드셔 보세요." 아이들은 갈대를 꺾어서 만든 빨대를 벌집에 쑤셔 넣고 꿀을 빨면서 대답했습니다. 한 아이가 내미는 빨대를 받아든 파브르는 장난 삼아 꿀을 빨아 보았습니다. 그러자 달콤한 꿀이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음, 정말 달구나." "그렇죠, 선생님? 이 들판에는 이런 벌집이 아주 많이 있어요." 한 아이가 신이 난 듯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선생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구나." 이렇게 말한 뒤 파브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의 관심을 다시 측량 공부로 돌리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공부를 시켜 보았자 아이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한 파브르는 그 날의 수업은 그것으로 마치기로 했습니다. 벌집을 잃은 벌들이 머리 위로 윙윙거리며 날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했습니다. 파브르는 아이들과 둘러앉아 신기한 듯 벌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벌집을 보았던 것입니다. '으음, 이 벌은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는걸. 교사란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한테 배우기도 하는구나.' 파브르는 이 날 한 가지 교훈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아이들을 통해서 벌에 관심을 가지게 된 파브르는 벌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나중에 자신의 책 '곤충기'에 그 내용을 자세히 실었습니다. 1844년 10월, 스물한 살이 된 파브르는 동료 교사인 마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파브르는 부모님을 돌보면서 새 가정을 꾸려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인 파브르의 월급으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어느 날 파브르는 아내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더 공부를 해서 중학교 교사 자격을 따야겠소. 과학과 수학이라면 자신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겠소." "그래요. 당분간은 공부하느라 힘들겠지만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아내 마리가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튿날부터 파브르는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첫아들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하니, 파브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파브르는 시름에 잠겨 있는 아내를 위로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가난을 헤쳐 가는 것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 파브르는 더욱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마침내 파브르는 공부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과학과 수학 두 과목의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따냈습니다. "독학으로 두 과목이나 합격을 하다니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아내 마리는 아들을 잃은 이후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파브르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침울했던 집안 분위기는 차츰 밝아졌습니다. 파브르는 중학교 교사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1849년, 스물여섯 살이 된 파브르는 코르시카 섬에 있는 아작시오 중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코르시카 섬은 프랑스의 남쪽, 지중해에 있는 섬으로 나폴레옹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섬에 도착한 파브르 부부는 섬의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섬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진기한 동물과 식물, 곤충이 많아서 파브르는 더없이 기뻤습니다. 파브르는 이 곳 중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습니다. 두 과목을 가르치느라 바쁜 가운데에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곤충들을 찾아 온 섬을 헤매다녔습니다. 바다 바람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부는 날에도 그는 곤충이나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 온 섬을 돌아다녔습니다. 파브르가 코르시카 섬에 온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뜻밖에도 생물학자로 이름난 툴루즈 대학의 탕동 교수가 파브르를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시오, 파브르 선생."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다니...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사이였으므로 금세 친해졌습니다. 파브르는 탕동 교수를 안내하느라 그와 함께 섬의 구석구석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탕동 교수는 2주일 정도 섬에 머물며 섬에서 나는 식물들을 조사하였고, 그것을 지켜보던 파브르는 관찰법에 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한편, 탕동 교수는 파브르가 생물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능력을 지닌 파브르가 섬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것은 애석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떠나기 전날, 탕동 교수는 파브르에게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파브르 선생, 당신은 생물을 채집하고 분류하는 작업만 하고 있는데, 진정으로 식물이나 곤충을 알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오." "적극적인 방법이라니요?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좋소. 우선 큰 접시에 물을 가득 담아 오시오. 그리고 오늘 산에서 잡아온 달팽이 한 마리를 가져오시오." 파브르가 준비를 해 오자 탕동 교수는 작은 가위와 바늘을 이용해 달팽이를 해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보시오. 이것은 먹은 것이 지나가는 관이고 이것은 신경선이오." 탕동 교수는 달팽이의 해부된 몸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조그만 동물의 몸이 이토록 복잡할 줄이야.' 낱낱이 해부된 달팽이를 들여다보며 파브르는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았습니다. '겉모양만 관찰해서는 안 되는구나. 몸의 구조라든지,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면 동물이나 식물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어.' 탕동 교수는 진지하게 듣고 있는 파브르에게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을 했습니다. "파브르 선생, 내가 보기에 당신은 생물학에 더 재능이 많은 것 같소. 선생의 타고난 재능을 살려서 곤충이나 식물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게 어떻겠소?" 그 말을 듣는 순간 파브르는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고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맞아, 생물학이야!" 파브르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탕동 교수를 만난 이후로 파브르는 곤충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파브르는 사마귀를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 내용을 훗날 '곤충기'에 실었습니다. 그 내용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마귀는 암컷과 수컷 모두 큰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수컷은 잘 나는 데 반해 암컷의 날개는 주로 적을 위협하는 무기로 쓰일 뿐 잘 날지 못한다. 사마귀는 식욕이 왕성하여 잠자리나 여치 따위는 두 시간 만에 날개만 남기고 깡그리 먹어치운다. 그리고 먹이는 장을 지나갈 때 이미 소화가 되어 버린다. 사마귀는 다른 곤충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잡아먹는다. 특히 암컷이 새끼를 가질 무렵에는 수컷을 잡아먹는 경우도 있다. 코르시카 섬의 자연은 파브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그 섬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무리하게 하여 몸이 쇠약해진데다 무서운 열병까지 걸렸던 것입니다. 섬에는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남프랑스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1853년, 코르시카 섬에서 지낸 지 4년 만에 그는 아비뇽 중학교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아비뇽 중학교에서도 파브르는 여전히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그 무렵, 파브르는 레옹 뒤프르라는 생물학자가 쓴 나나니벌에 관한 책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비단벌레를 잡는 나나니벌에 관해 흥미진진하고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파브르는 그 때까지 벌이 꽃의 꿀만 빨아먹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뒤프르는 벌이 비단벌레를 잡아 입에 물고 벌집으로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써 놓았습니다. 벌집의 제일 안쪽에 애벌레를 키우는 5개의 방이 있는데, 그 방에 비단벌레를 세 마리씩이나 넣어 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비단벌레는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의 식량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이것으로써 꿀을 빨아먹고 사는 벌이 비단벌레를 잡아가는 까닭을 알게 된 것입니다. 뒤프르는 나나니벌에 관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나나니벌은 먹이가 잘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단벌레에 침을 놓습니다. 나나니벌의 침에서 나온 독이 방부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흥미 있게 읽은 파브르는 마침내 나나니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뒤프르의 책은 파브르의 연구 방법에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파브르는 코르시카 섬에서 채집한 곤충들을 표본으로 만들던 시절에 탕동 교수에게서 곤충을 해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그 방법으로만 곤충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뒤프르의 책을 통하여 또 다른 관찰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반면에 그에게는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나나니벌이 방부제 같은 것을 다른 곤충에 주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방부제를 주사하여 비단벌레를 살아 있는 것처럼 싱싱하게 보존할 수 있다니... 정말 그런 훌륭한 방부제를 나나니벌이 만들 수 있는 걸까?' 파브르는 이것을 자기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곧 관찰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비단벌레가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정말로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나니벌이 비단벌레의 신경을 잠시 동안 마비시켜 놓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비단벌레가 살아서 움직인다면 벌의 애벌레가 눌려 죽을 것이고, 또 죽어서 썩게 된다면 먹이로 쓸 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사실을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어.' 파브르는 나나니벌에 관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것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때 파브르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파브르의 관찰력은 실로 훌륭하다." 그의 논문을 본 학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이듬해 프랑스의 학사원은 그에게 '실험 생리학상'을 주었습니다. 이 논문 덕분에 파브르의 이름은 곤충학자로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파브르는 틈만 나면 관찰 도구들을 짊어지고 산이나 들로 돌아다녔습니다. 특히 카르팡트라스는 여러 가지 벌을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습니다. 파브르는 그 무렵 가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가뢰의 애벌레가 벌의 몸에 난 털 속에서 자주 발견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뢰가 벌에 붙어 사는 기생충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뉴포트라는 생물학자는 이런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가뢰는 흙 속에 알을 낳지만 알에서 깬 가뢰의 애벌레는 근처에 있는 꽃잎 속에 숨어 있다가 벌이 꿀을 빨러 오면 재빨리 벌의 털에 달라붙어 벌집으로 운반된다." 만약 뉴포트의 예상이 맞는다면 가뢰는 기생충이 아닌 셈이었습니다. 파브르는 카르팡트라스에서 가뢰의 애벌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암가뢰 한 마리는 한 번에 4,000개의 알을 낳는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세 번씩 낳는다." 뉴포트는 이런 관찰 결과도 보고했는데, 파브르가 보니 그의 말대로 가뢰의 애벌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애벌레들은 길게 줄을 지어 풀 줄기로 기어올라가고 있었고, 이미 꽃잎 속으로 기어들어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파브르는 이 애벌레들이 어떻게 벌의 몸으로 옮겨지는지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먼저 풀잎으로 꽃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죽은 듯이 있던 가뢰의 애벌레들이 갑자기 꽃잎 끝으로 모여들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숨어 버렸습니다. '그랬었구나. 가뢰의 애벌레는 꽃이 흔들리면 그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본능을 지니고 있는 거야. 좋아, 그럼 다른 실험을 해 봐야지.' 파브르는 꽃잎을 흔든 뒤 지푸라기를 꽃 위에 올려놓아 보았습니다. 약간 흔들렸을 뿐인데도 애벌레들은 지푸라기로 기어올라가더니 이내 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가뢰의 애벌레들은 벌을 어떻게 구별하는 걸까? 털이 있고 없는 것으로 아는 것일까?' 이런 의문점을 풀기 위해 파브르는 솜을 둥글게 뭉친 것을 꽃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번에도 가뢰의 애벌레들은 흔들림을 느끼고 솜 위로 올라갔으나 곧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털 때문도 아니로군.' 파브르는 직접 나나니벌을 이용해서 실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벌을 핀셋으로 집어서 꽃에 갖다 대 보았습니다. 그러자 가뢰의 애벌레들이 앞을 다투어 벌의 털 속으로 기어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습니다. 확대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애벌레들은 벌의 날개 밑 털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옳지. 날개 밑이나 발의 마디 같은 숨을 장소가 있어야 되는구나. 그럼 파리는 어떨까?' 파브르는 파리, 나비, 거미로도 실험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가뢰의 애벌레들은 발의 마디를 가지고 있는 벌레라면 어떤 벌레에나 달라붙어서 마디 속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음, 그렇다면 재수 좋게 벌한테 달라붙는 애벌레는 천만다행이지만 다른 벌레에 달라붙는 애벌레는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겠군.' 파브르는 이것으로 가뢰가 알을 많이 낳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가뢰의 애벌레들은 모두 벌한테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곤충에 달라붙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서 알을 많이 낳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벌이 꿀을 빨기 위해서 꽃에 앉는 순간 벌의 털 속으로 옮겨 간 가뢰의 애벌레는 벌집으로 운반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로구나.' 파브르는 자연의 신비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의 궁금증마저 풀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벌에 붙어 있는 가뢰의 애벌레는 어떻게 벌집에 내려지는 걸까?' 파브르는 우선 가뢰의 애벌레를 벌의 애벌레 옆에 놓아 두었습니다. 가뢰의 애벌레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꿀 옆에 놓아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꿀 위는 어떨까 하고 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가엾게도 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으로 파브르는 벌집을 조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입구가 막힌 벌집을 부수어 보니, 꿀에 떠 있는 벌의 알 위에 가뢰의 애벌레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입구가 막히지 않은 방엔 꿀이 있어도 가뢰의 애벌레는 없었습니다. '가뢰 애벌레는 꿀 옆에 놓아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벌의 알 위에는 가뢰의 애벌레가 올라가 있다. 그렇다면...' 파브르는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나갔습니다. 방 안의 입구가 막혀 있는데 가뢰의 애벌레가 그 안에 기어들어가 있다는 것은, 입구를 막기 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벌이 알을 낳을 때 알 위에 미끄러져 내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파브르가 이런 추측을 하며 자세히 관찰해 보니, 가뢰의 애벌레가 벌의 알 위에 앉아 있는 것은 꿀을 빨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뢰의 애벌레는 벌의 알 껍질을 찢더니 알맹이의 즙을 빨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꿀을 빨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순서는 정해져 있어서 절대로 먼저 꿀을 빨아먹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뢰 애벌레의 이러한 본능을 파브르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해 알아냈습니다. 꿀 위에 얇은 종이 조각을 띄우고 그 위에 가뢰 애벌레를 올려놓아 보았습니다. 가뢰의 애벌레는 그 종이가 알의 얇은 껍질인 줄 알고 찢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은 꿀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파브르의 뛰어난 관찰력 덕분이었습니다. 파브르가 중학교 선생님이 된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갔습니다. 그 동안 파브르는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아비뇽 중학교에서 여전히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늘 가난하니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이군.' 파브르는 이따금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헛된 욕심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파스퇴르가 파브르를 찾아왔습니다. 그 무렵 남프랑스의 농가에서는 누에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번져 농부들이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파스퇴르는 농가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 누에의 병을 조사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파브르는 파스퇴르를 이웃 농가로 데려갔습니다. 누에고치를 본 파스퇴르는 누에고치를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치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소리가 나는데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 안에는 번데기가 들어 있습니다." 파브르의 대답에 파스퇴르는 놀라면서 되물었습니다. "번데기라고요?" "애벌레는 나방이 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번데기의 상태로 있는답니다." 파브르는 누에고치를 찢어서 그 속에 있는 번데기를 꺼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번데기는 어떤 누에고치에나 다 들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번데기는 스스로 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애벌레 때에 입에서 실을 뽑아 누에고치를 만들어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입니다." 파브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파스퇴르는 누에고치를 몇 개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누에를 연구하기 위해 파리에서 뽑혀 온 그 유명한 학자란 말인가?' 파브르는 누에의 병을 조사하러 온 대학자가 어린아이들도 다 알 만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누에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었던 파스퇴르는 누에를 병으로부터 지키는 방법을 발견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것보다 낫구나. 나의 연구도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하자.' 파브르는 파스퇴르에게서 얻은 교훈으로 새롭게 각오를 다졌습니다. 이 무렵 파브르는 아비뇽의 주요 농작물인 꼭두서니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꼭두서니의 뿌리에 들어 있는 색소의 하나인 알리자린을 뽑아, 옷감을 빨갛게 물들일 때 사용해 오고 있었습니다. '꼭두서니의 뿌리를 연구하여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알리자린을 뽑아 내야지.' 만약 이 일이 성공하게 되면 파브르는 물론이고 그것을 재배하는 아비뇽의 농부들에게도 더없이 큰 기쁨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파브르는 집 근처에 사는 농부에게서 꼭두서니를 얻어다가 물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꼭두서니와 씨름하다 보니 파브르의 손은 언제나 홍당무처럼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파브르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냄비에 꼭두서니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2년 전 아비뇽 중학교에 장학관으로 시찰을 나왔던 빅토르 뒤루이였습니다. 그는 이제 문교부 장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파브르 선생. 아직도 아비뇽 중학교에 계시는군요. 볼일이 있어서 이 곳을 지나는 길에 잠깐 선생을 만나보고 싶어 들렀습니다." 뒤루이는 파브르가 가난과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곤충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브르를 격려해 주기 위해 일부러 파브르의 집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이거 영광입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렇게 손도 씻지 못하고..." 파브르는 갑작스런 뒤루이의 방문에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허둥거렸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선생을 보러 왔으니까요. 그런데 파브르 선생,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요?" "네, 꼭두서니를 연구하는 중입니다. 가난한 농부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인 것 같아서요..."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뒤루이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살림살이가 너무도 낡아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파브르 선생, 겸손하신 성품은 여전하시군요.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필요하다, 저것이 필요하다 하면서 끝없이 요구하는데, 넉넉하지도 않으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시니... 파브르 선생, 사양하지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장관님. 그럼, 딱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장관님과 악수를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악수요? 그럽시다." 뒤루이는 빨갛게 물든 파브르의 손을 망설이지 않고 힘껏 잡았습니다. 뒤루이는 아무 욕심도 부리지 않고 오로지 연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만을 가지고 있는 파브르가 몹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파브르는 장관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역 앞에는 문교부 장관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혼잡스러웠습니다. "파브르 선생, 잠깐 이리로 오시오." 뒤루이는 사람들 가운데로 파브르를 이끌고 가더니 갑자기 빨갛게 물든 파브르의 손을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여러분, 이 손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손은 지금 이 지방의 주요 산물인 꼭두서니 물감이 값어치 있게 쓰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파브르 선생이 이 일에 성공하게 되면 이 고장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파브르 선생이야말로 이 고장의 보배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아비뇽에서는 파브르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파브르는 파리로 와 달라는 뒤루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파브르는 장관이 무슨 일자리라도 마련해 주려는 줄로 짐작하고는, '지금은 이 곳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곧 뒤루이로부터 강경한 내용을 담은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거절하시면 경관을 보내겠습니다.' 그제서야 파브르는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생겼구나 싶어 곧 파리의 뒤루이 장관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뒤루이는 웃는 얼굴로 파브르를 반기면서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밀었습니다. 장관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파브르에게 수여한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프랑스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이었습니다. 신문에는 곤충 연구와 꼭두서니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파브르에게 그 훈장을 수여하게 된 것이라고 실려 있었습니다. 상이나 명예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파브르였으나 상을 받고 나니 새로운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아비뇽으로 돌아온 파브르는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브르의 연구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독일의 그레베와 리베르만이라는 사람이 석탄에서 알리자린을 뽑아 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파브르는 다른 사람들도 알리자린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노력해 온 보람도 없이 파브르는 꼭두서니 연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이 연구에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며칠 동안 우울하게 지내던 파브르는 다시 마음을 새롭게 다졌습니다. '새로운 일을 찾아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로부터 2년이 흘렀습니다. 파브르는 교회에서 세운 야간 학교로부터 과학 수업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학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학업을 중단한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파브르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려 온 아내를 생각하며 기꺼이 그 일을 허락했습니다. 야간 학교에서 일을 해 월급을 받으면 좀 여유가 생길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파브르는 낮에는 아비뇽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 나가서 과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파브르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파브르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교회 목사에게 파브르를 모함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로 파브르는 야간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아비뇽의 중학교에도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파브르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에 앞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오로지 곤충을 연구하면서 책을 쓰는 데에만 열중하기로 하자.' 파브르는 먼저 어린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과학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하늘, 별, 지구, 새, 물, 나무 등 그 무렵에 파브르가 쓴 흥미진진한 과학 이야기는 80여 가지나 되었습니다. 파리의 어느 서점 주인이 파브르가 쓴 글들을 책으로 엮어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 책은 잘 팔렸고, 얼마 후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쓴 책이 교과서가 되다니 정말 기쁘다.' 책이 잘 팔려서 집안 형편이 나아지자 파브르는 다시 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1878년, 55세가 된 파브르는 세리냥 마을로 이사를 했습니다. 새로 이사간 곳은 파브르가 평소 꿈꾸어 오던 뜰이 넓은 집이었습니다. 1879년에 파브르는 처음으로 곤충에 관한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곤충기'라는 책입니다. 파브르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곤충기' 제1권을 자기의 친구 나나니벌에게 바친다고 밝혔습니다. 책으로 엮어진 '곤충기'를 받아 든 파브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파브르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5, 6세 때부터 56세가 될 때까지 오직 한 길을 걸으면서 연구해 온 곤충 이야기가 비로소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곤충기'에는 파브르가 40년 동안이나 관찰한 여러 가지 곤충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씌어 있습니다. 파브르의 머릿속에는 곤충들을 관찰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특히 쇠똥구리를 관찰하던 때의 일이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쇠똥구리는 쇠똥벌레라고도 하는데, 파브르는 이것을 아주 자세히 관찰하여 발표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파브르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언덕의 수풀에 엎드려서 쇠똥구리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경찰관이 그런 파브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봐요,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파브르는 쇠똥구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곤충을 관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 주시오." 경찰관은 파브르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다가왔습니다. "관찰을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이런 더러운 곳에 어른이 벌레 따위를 보러 올 까닭이 없소. 아무래도 수상한 점이 있으니 가서 조사해 봅시다." 경찰관은 강제로 파브르를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 파브르는 웃옷에 빨간 리본으로 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순경은 그제야 그걸 보고는 깜짝 놀라며 "아, 그만 실례했습니다." 하고 도망치듯 달아나 버렸습니다. 파브르는 자기가 관찰에 열중하고 있을 때 방해받는 것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파브르가 경찰관과 얘기를 하는 동안 쇠똥구리는 말의 똥을 모아 부지런히 뭉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쇠똥구리의 먹이였던 것입니다. 똥이 어느 정도 뭉쳐지자 쇠똥구리는 네 발로 그것을 굴려서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그 솜씨가 어찌나 훌륭한지 처음에는 콩알 크기만 했던 것이 호두만큼 커지고 마침내 사과만큼 커졌습니다. 파브르는 이 과정을 조금도 싫증내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보고는 노트에 그대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파브르는 한 가지 연구를 시작하면 이렇게 끈기 있게 관찰했습니다. 파브르의 인내심에 관한 일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가을 날 아침, 그 일대에 살고 있는 개미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집을 나선 파브르는, 골짜기의 바위에 걸터앉아서 개미가 나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과수원으로 가던 세 여자가 파브르의 이상한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면서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병이 나서 꼼짝 못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파브르는 세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개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는 개미는 한낮이 다 되어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브르는 끼니도 거른 채 그 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 아침에 지나간 세 여자가 포도를 잔뜩 따 가지고 그 길을 다시 지나게 되었습니다. 파브르는 아침과 똑같은 자세로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 아냐?" 그 중에 한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아침에 우리가 여기를 지나갈 때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앉아 있네!" "쯧쯧, 가엾게도 머리가 돈 모양이군 그래." 세 여자는 이렇게 쑥덕거리더니 가슴에 성호를 그으면서 지나갔습니다. 파브르는 주위가 온통 깜깜해진 후에야 바위에서 내려와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그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파브르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 오며 파브르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던 아내 마리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파브르가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귀여운 아들 줄이 빈혈로 아내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무렵 파브르는 '곤충기'를 세상에 내놓을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돌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아들 줄은 눈을 감고서도 손으로 더듬어서 풀 이름을 알아맞힐 정도로 영리한 아이였습니다. 특히 곤충을 좋아했기 때문에 파브르가 곤충을 연구할 때면 자주 곁에서 도와주곤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연달아 잃은 파브르는 슬픔에 빠져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거기다가 얼마 후에는 정신적인 충격과 과로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병명은 폐렴이었습니다. 파브르는 안간힘을 다해 병마와 싸워 위험한 고비를 겨우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몸이 차츰 회복되자 그는 곤충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서 다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련을 딛고 일어난 파브르는 곤충들을 관찰하고 원고를 쓰는 일에 지금까지보다 몇 배 더 열중했습니다.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세리냥의 아름다운 자연과 평온한 생활 속에서 파브르는 '곤충기' 제2권, 제3권, 제4권을 잇달아 써 냈습니다. '곤충기'에는 나방, 나비, 파리, 벌, 매미, 개미, 귀뚜라미, 거미, 잠자리 등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곤충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파브르는 이 곤충들의 신체 구조와 태어나는 과정, 알을 낳는 모습 등을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재미있고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제1권을 쓸 때에도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4권을 펴내기까지 그에 따른 어려운 일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파브르는 남다른 인내심과 관찰력으로 '곤충기'라는 훌륭한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었습니다. '곤충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파브르가 직접 관찰하고 오래도록 연구를 하여 알아낸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매미의 울음소리를 연구하던 때의 일은 아주 재미있어서 오랫동안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 파브르는 곤충을 관찰하기 위해 마을 한쪽에 있는 공터로 나갔습니다. 그 공터에는 매미가 유난히 많이 모여드는 플라타너스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파브르가 그 나무 밑으로 다가가자 매미는 울음소리를 뚝 그치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때 파브르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미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면 달아나지만 눈에 띄지 않게 다가서면 아무리 큰 소리를 내어도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매미는 눈은 밝지만 혹시 귀가 어두운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파브르는 매미의 귀가 어두운 것인지, 아니면 귀가 없는 건 아닌지 실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파브르는 관청으로 찾아갔습니다. "이번에 제가 매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실험하려면 대포가 필요합니다. 대포를 좀 빌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대포를 빌려 달라고요? 곤충 실험에 대포가 필요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았소. 하하하." 관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꾸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매미를 연구한 결과 매미는 볼 수는 있지만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대포 소리를 내어 매미의 반응을 관찰하려고 합니다." "듣던 대로 관찰력이 대단하시군요." 관리는 이렇게 감탄하며 곧 창고에서 대포를 꺼내 주었습니다. 파브르는 대포를 끌고 공터로 갔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여러분, 실험을 해 보려는 중이니 물러나 주십시오." 파브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려는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심하며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파브르를 뒤따라갔습니다. "자, 하나, 둘, 셋. 쏘세요!" 파브르가 이렇게 신호를 보내자 파브르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하늘을 향해 대포를 쏘았습니다. "쾅!"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위에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귀를 틀어막고 멀찍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매미는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매미한테는 귀가 없는 것일까?' 파브르는 좀더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몇 번이나 실험을 해 보았으나 그 때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브르는 매미한테 귀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매미의 배 부근에 귀와 비슷한 것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파브르가 세상을 떠난 후 다른 학자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파브르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관찰하여 2, 3년마다 한 권씩 '곤충기'를 써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학자들 외에는 이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충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생각에 앞서, 내용이 지루할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파브르는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브르가 84세 되던 해, '곤충기' 제10권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동안 '곤충기'는 외국 사람들에게까지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파브르가 태어난 프랑스에서는 그의 '곤충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시인 미스트랄이 파브르를 찾아왔다가 그가 너무도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미스트랄은 이렇게 훌륭한 학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곧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인 로맹 롤랑은, 자연과 곤충을 사랑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향하여 호소했습니다. "파브르 선생을 도웁시다. 그렇지 않으면 귀중한 곤충 연구를 계속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들의 따뜻한 마음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여기저기에서 성금이 모아졌습니다. 그 무렵, 파브르의 제자인 르그로 박사는 파브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파브르의 날'을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곤충 학자들은 이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찬성해 주고 격려해 준 사람은 문학가인 에드몽드와 로맹 롤랑을 비롯한 몇몇 사람뿐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반대와 찬성이 엇갈리는 가운데, 파브르의 나이 87세가 되던 1910년 4월, '파브르의 날'이 개최되었습니다. 걷기조차 힘들 만큼 쇠약해진 파브르는 아름답게 장식된 마차를 타고 축하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보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모인 사람을 대표해서 에드몽드가 축사를 읽었습니다. "여러분, 87세가 될 때까지 오로지 벌레를 사랑하며 관찰해 온 장 앙리 파브르 선생은 우리 프랑스의 보배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매우 험난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곤충기'에는 오직 벌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다시금 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파브르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파브르는 이 날 모인 사람들로부터 뜻깊은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그 메달에는 파브르의 얼굴과 그가 노년을 보내고 있는 세리냥의 아름다운 전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스톡홀름의 과학원에서도 영예로운 메달을 보내 왔습니다. 이런 모임이 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에드몽드는 프랑스 정부의 이런 냉담한 태도를 비난하는 시를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그 시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늙고 가난한 파브르를 동정하여 격려금과 선물을 보내 왔습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정부는 계속 모른 체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파브르에게 2,000프랑의 연금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과학 학사원은 끝내 파브르를 학사원 회원으로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학사원을 비난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나는 단지 곤충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할 뿐입니다. 학사원 회원이 못 되어도 나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파브르는 확고하게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이 일을 마무리지었습니다. 다행히 그 해부터 '곤충기'가 잘 팔려 파브르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야 걱정 없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겠구나." 그는 다시 연구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1913년, 장관 티에리가 파브르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장관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축제일처럼 들떠 야단법석을 피웠습니다. 90세가 된 파브르에게는 이런 일들이 귀찮게만 느껴졌습니다. 몸이 불편한 파브르는 현관 앞에 내다 놓은 의자에 앉은 채 장관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프랑스의 대통령 레이몽 푸앵카레가 파브르를 찾아왔습니다. 그 날도 마을 전체가 술렁거렸습니다. 파브르의 집 앞은 꽃들로 단장되고 프랑스의 삼색기가 휘날렸습니다. "파브르 선생, 선생은 프랑스의 보배입니다." 이미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다 눈도 어두워진 파브르의 곁에 가까이 다가온 대통령이 천천히 말했습니다. 파브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파브르에게 냉담했던 사람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파브르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파브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언제나 가난했었지... 그게 나는 편한데..." 이듬해가 되자 파브르는 젊었을 때 쉬지 않고 일해 온 피로가 한꺼번에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루 종일 잠을 자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날 밤, 르그로 박사는 파브르에게 잠을 쫓는 데 좋다는 커피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파브르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염소는 커피나무의 잎을 먹으면 춤을 추고 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나더러 춤을 추라는 건가?" 파브르의 몸은 아주 약해졌지만 정신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1915년 5월의 어느 날 아침, 파브르는 "세리냥의 전원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르그로 박사는 그를 수레에 태우고 숲과 들길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산책이 되었습니다. 그 해 10월, 파브르는 세리냥의 저택에서 가족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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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화가. 1901년 12월 5일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미국의 시카고 거리는 그 어느 곳보다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었습니다. 번화한 거리에 있는 어느 큰 장난감 가게에서도 점원들이 넓은 가게 안을 장식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건축업을 하고 있는 일리아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리아스는 호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도 잊은 채 그 날 아침에 태어난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주려고 장난감 가게 앞을 서성거린 것이었습니다. 일리아스는 건축 일에는 능숙한 사람이었으나 일감이 없어서 늘 가난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는 걸 깜빡하다니. 할 수 없지 뭐.’ 일리아스는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으로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갔습니다. 빈 손으로 집을 향해 발길을 돌린 일리아스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일리아스는, 조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잠들어 있는 아기의 평화로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만족해했습니다. 일리아스는 슬하에 다섯 형제를 두었습니다. 그는 이번에 태어난 막내둥이의 이름을 월트 디즈니라고 지었습니다. 월트 디즈니의 본래 이름은 월트 일리아스 디즈니인데 평소에 월트 디즈니라고 불렸습니다. 월트는 돌이 지나면서부터 형들의 크레파스나 연필을 손에 쥐기만 하면 엉금엉금 기어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낙서를 하였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월트의 이 버릇을 고쳐 보려고 쫓아다니면서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월트의 어머니는 말리다 지쳐서 아예 신문지 뭉치를 실로 묶어 월트에게 주었습니다. “월트, 낙서를 하려면 여기다 실컷 하렴.” 월트는 이 신문지 위에다 마음껏 낙서를 했습니다. 월트는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월트의 낙서는 차츰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의 형태로 변해 갔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월트는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 사이에서 월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통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의 일감이 더욱 줄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월트네 가족은 미주리 주의 작은 동네인 마셀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마셀린의 하늘은 시카고의 흐린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았고, 끝없이 펼쳐진 목장의 풍경도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월트네 가족은 메마른 땅을 일구어 조그마한 농장을 만들고, 그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온 가족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얼마 후에는 시카고에서 살던 때보다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월트도 시카고에 있을 때보다 생기가 넘쳤습니다. 소나 양, 말이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노는 모습이 월트에게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월트는 종종 이러한 목장의 풍경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 월트에게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침마다 닭장에 들어가서 달걀을 모으고 닭들에게 모이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월트는 모이를 준 다음 닭들이 모이를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곤 했습니다. 월트는 특히 닭장에 들어가서 닭과 함께 노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큭큭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닭이 강아지에게 무슨 말을 했나 봐. 그러니까 강아지가 저쪽에 있는 공을 쫓아가서 발로 걷어차지.’ 그 후로 월트는 동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월트는 동물들이 어떤 말을 주고받을까 늘 생각하며 열심히 노는 모습을 관찰했고, 그 모습을 땅 위에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월트가 땅바닥에 그리는 그림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한번은 월트의 그림을 지켜보던 이웃집 아저씨가 월트에게 목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을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월트는 금세 말 한 마리를 멋지게 그렸습니다. “너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구나. 그림 속의 말이 정말 풀을 뜯고 있는 것만 같아.” 아저씨는 월트의 그림을 칭찬하며 5센트짜리 동전을 하나 꺼내 주었습니다. 월트는 자나깨나 그림밖에 몰랐습니다. 들판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망아지, 풀을 뜯고 있는 어미말, 젖소, 양, 개 등이 모두 월트에게는 좋은 그림 소재였습니다. “월트는 그림 솜씨가 대단해.” 마셀린 마을에서 월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렵다 보니 종이와 크레파스를 마음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월트는 돌멩이나 막대기로 마당이나 길에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월트는 목장으로 가는 길의 땅바닥에 뾰족한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목동이 지나가다가 그 그림을 보더니 월트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얘야, 굉장히 큰 궁전을 그렸구나.” “네, 전 나중에 커서 농장에 이런 집을 지으려고 해요.” 월트의 말을 들은 목동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농사꾼의 아들인 네가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궁전을 짓는단 말이냐?” “두고 보세요. 문제없어요.” 월트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목동은 월트의 그림 솜씨와 상상력에 감동하여 월트와 좀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런 큰 궁전 안에는 값진 물건도 많을 테니까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겠는걸.” 월트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지키는 사람은 필요 없어요. 산에 있는 늑대나 표범, 사자들을 불러들여 길들인 다음에 궁전을 지키게 하면 되니까요.” 목동은 월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길을 잘 들인다고 하더라도 사자나 늑대는 사람을 해치려고 할 텐데?” “아니에요. 동화책을 보니까 동물들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물지 않는다고 써 있던데요.” 목동은 꾸밈없이 순진한 월트의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월트의 순수함에 마음이 끌렸는지 목동은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총을 잘 쏘니까 네가 만든 궁전에서 일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세요. 제가 아저씨께 일자리를 드릴게요.” “그게 정말이니?” “그럼요. 아저씨가 총을 잘 쏜다니까 동물들 대신 아저씨께 특별히 부탁하는 거예요.” “고맙구나.” 이 목동은 나중에 월트 디즈니가 만화 영화 스튜디오를 세우자 그 스튜디오에서 수위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월트는 마셀린에 사는 동안 자연을 관찰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처럼 월트의 꿈은 자연 속에서 여물어 갔습니다. 남들보다 몇 배를 더 노력한 결과 월트네는 이제 남부럽지 않을 만큼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해에 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쳤고, 다음 해에도 계속되는 흉년으로 월트네 가족은 다시 가난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생각다 못해 농장을 팔고 다시 도시로 나가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월트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월트네 가족은 같은 주에 있는 캔자스 시로 이사했습니다. 마셀린을 떠나던 날, 월트는 그 동안 가족처럼 지내던 동물들과 헤어지는 것이 서운하여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도시로 나온 아버지는 농장을 판 돈으로 신문 보급소를 차렸습니다. 시골 친구들과 헤어지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월트는 아버지에게 신문을 돌리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네게는 아직 힘겨운 일이야. 더구나 배달을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단다.” “전 할 수 있어요, 아버지.”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우선 50가구만 맡아서 배달을 해 보거라.” 다음 날 새벽부터 월트는 신문 배달을 나갔습니다. 날마다 새벽 3시 반이면 신문을 실은 차가 왔습니다. 월트는 그 시간에 일어나 신문을 받은 뒤 마을을 돌며 신문을 배달했습니다. 월트는 신문이 오면 우선 그 신문에 실린 만화를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 만화를 그대로 따라 그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월트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월트는 아버지께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마을에 있는 미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신문 배달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미술 학교에 들어가자 제대로 된 그림 도구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배달 소년들에게는 배달료를 주면서도 월트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떡하지. 그림 도구가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는데...’ 월트는 궁리 끝에 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과자를 팔기로 하였습니다. 가게보다 아주 싸게 팔았기 때문에, 학교 친구들은 너도나도 월트의 과자를 사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월트는 원하는 만큼의 돈을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월트는 과자를 팔아서 번 돈으로 사고 싶었던 그림 도구들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나치게 엄한 아버지 밑에서 월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일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월트는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고달프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더욱 씩씩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형 로이가 심각한 얼굴로 월트에게 말했습니다. “월트, 난 오늘 밤에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단다.” “형, 그게 무슨 소리야? 갈 곳도 없으면서 무작정 집을 나가다니?” 월트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나는 독립을 할 테야. 아버지가 너무 엄하셔서 이대로 집에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형 로이는 월트와 함께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형에게도 배달료를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가지만, 너는 남아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또 아버지 일을 잘 도와 드리기 바란다.” 월트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형의 몫까지 아버지를 도와 드릴게.” “고맙다, 월트. 너도 네가 하고 싶은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하렴. 자리가 잡히는 대로 편지하마.” 이렇게 해서 형은 그날 밤 집을 나갔습니다. 형이 그렇게 집을 나가자 아버지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내가 너무 엄했었나 보군. 이제부터는 용돈도 조금씩 주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도 들어주어야겠다.’ 월트는 그 전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서 형이 돌리던 신문까지 배달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월트네 가족은 시카고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신문 보급소를 정리하고 시카고에 있는 젤리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카고로 간 월트는 야간 미술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여전히 학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월트는 낮에는 젤리 공장에 다니고, 방학 때에는 우편 배달부 일을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하였습니다. 한편, 월트가 다니는 미술 학교에는 만화를 그리는 코제트라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는 첫눈에 월트의 소질을 알아보았습니다. 월트, 너는 만화가로서 성공할 만한 소질이 충분하구나. 어때, 만화를 공부해 보지 않겠니?” “제 그림을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그 동안 만화를 공부해 보고 싶었어요.” “그랬었구나. 너의 그림에 상상의 날개를 달면 매우 훌륭한 만화가 될 거야. 만화가는 때때로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기도 하지만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진정한 예술가란다.” 월트는 코제트 선생님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만화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월트 디즈니가 열여섯 살 때인 1917년, 미국이 연합군으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자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이 무렵 월트의 두 형도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이듬해, 월트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도 군대에 가고 싶어요.” “뭐, 군대에? 월트, 넌 아직 어려서 못 간다. 너는 아직 어린애야.” 아버지는 월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군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적십자 구급 부대원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는 18세가 안 되어도 받아 준대요.” “그래도 안 돼. 네 형이 둘씩이나 이미 전쟁터에 가 있는데 너까지 보낼 수는 없다.” 아버지는 화가 난 목소리로 월트를 타일렀습니다. 월트는 부모님의 승낙을 얻지 못하자 풀이 죽어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월트가 놓고 간 입대 지원서를 펴 보았습니다. “어머, 여기 좀 보세요. 지원자는 1901년 1월 1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야만 된다고 적혀 있는걸요.” 어머니는 지원서 아랫부분에 작은 글씨로 적힌 부분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더니 싱긋 웃었습니다. “녀석, 덤벙대다가 이것을 못 본 모양이군. 어차피 자격 미달로 합격이 안 될 테니까 그 애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뭐.” 아버지는 안심하고 그 지원서에 부모가 적어 넣을 사항들을 적어 넣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뜻밖에도 군대에 가도 좋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월트는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했습니다. 월트는 지원서를 가지고 적십자사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지원서에는 ‘월트 일리아스 디즈니’라는 이름과 1901년 12월 5일로 된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인이 적혀 있었습니다. 시험장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월트도 맨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때, 월트는 시험장에서 힘없이 나오는 친구 토머스를 발견했습니다. “어, 토머스!” 토머스는 두리번거리다가 월트를 발견하고는 월트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토머스, 왜 기운이 없는 거니? 무슨 일이야?” “나이가 한 살 모자란대.” “아니, 왜? 18세가 안 되어도 된다고 하던데.” “응.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1901년 1월 1일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안 된다는 거야.” 토머스는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월트도 기운이 쭉 빠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옳지, 좋은 수가 있다!’ 월트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졌습니다. 그러더니 필기구를 꺼내 태어난 연도의 마지막 숫자 1자를 0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월트는 적십자 부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곧장 전쟁터로 나가지는 못하고 다른 부대원과 함께 코네티컷 주의 사운드비치에 있는 훈련소로 가야 했습니다. 그 곳에서 월트는 부상병들의 응급 치료법과 간호법을 배웠습니다. 그런 다음 운전병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는 독일 군대에 짓밟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집들은 모두 부서지거나 불타 버리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집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월트가 소속되어 있는 부대는 파리에 본부를 두고 전쟁 중에 집을 잃은 사람이나 부상당한 사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월트는 스완슨 동네까지 부식을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월트는 운전사 한 명과 함께 트럭을 몰고 스완슨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트럭이 큰 구덩이에 빠져 그만 고장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내가 본부로 가서 수리 도구를 가지고 올 테니 자네는 여기서 트럭을 지키고 있게.” 운전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본부로 떠났습니다. 월트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텅빈 마을에서 혼자 트럭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본부로 간 운전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조바심이 난 월트는 가까운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 때 마침, 미국 트럭 한 대가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트럭을 불러 세운 월트는 자기 부대에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고 다시 고장난 트럭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트럭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차에는 식량이 잔뜩 실려 있는데 이 일을 어쩌지? 빨리 본부에 알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월트는 지나가던 화물차에 뛰어올라 파리의 본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둑맞은 줄 알았던 트럭은 월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리병이 도착해서 수리한 다음 본부로 끌고 와 버린 것이었습니다. 월트는 결국 부대의 규칙을 어긴 셈이 되었기 때문에 운전병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월트는 군대의 명령에 따라 적십자 부대의 식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식당으로 처음 오던 날, 월트는 식당 안의 분위기가 너무 삭막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삭막해서야 원. 내가 한번 멋지게 꾸며 볼까?’ 월트는 병사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서 식당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식사를 하러 온 병사들은 벽에 붙어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장이 이 식당에 들렀습니다. 식당 벽에 붙은 그림을 본 부대장은 금세 얼굴이 험악해지더니 고함을 쳤습니다. “누가 이런 걸 그려서 붙였지?” 부대장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병사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월트는 곧 부대장 앞으로 불려 나갔습니다. 나이 어린 소년병을 본 부대장은 곧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면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이 그림들을 그렸나?” “네. 식당 안이 너무 삭막해 보여서요.” 그러자 부대장은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 솜씨가 아주 훌륭하군. 부대에 있는 동안 자네의 그림 솜씨를 마음껏 뽐내 보게.” 그러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월트 만세!” 월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튿날부터 월트는 매일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병사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월트에 대한 소문은 이웃 부대에까지 퍼져 그림을 그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바쁘게 불려 다니곤 했습니다. 1918년 11월, 월트가 입대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월트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월트 디즈니는, 만화가인 코제트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며 만화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날, 월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버지, 전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만화를 그려서 먹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해.” “전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생각해 왔어요. 우선 캔자스로 가서 일자리를 구해 실력을 쌓아 나가겠어요. 허락해 주세요, 아버지.” 월트의 굳은 결심을 알아챈 아버지는 선선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월트는 짐을 챙겨 캔자스로 떠났습니다. 월트는 캔자스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싼 하숙방을 정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월트의 눈이 조그마한 구인 광고에 머물렀습니다. ‘만화가 구함. 캔자스 광고 대행사.’ 이튿날 아침, 월트는 그 광고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회사가 너무 작고 초라하여 월트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작은 회사에서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은 뒤 큰 회사로 옮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위안했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허름한 옷을 걸친 중년 신사가 출입구 쪽을 보고 앉아 있다가 무뚝뚝한 얼굴로 월트를 맞았습니다. 월트는 겸손한 태도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만화가를 구하신다기에 찾아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중년 남자는 월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화 공부를 한 적이 있소?” “네, 미술 학교에도 다니고 코제트 선생님께도 그림을 배웠습니다.” “음, 코제트 씨에게서? 시카고 신문에 정치 만화를 연재하는 그 코제트 씨에게 배웠다... 어디, 어느 정도 그리는지 봅시다.” 월트는 준비해 온 자기의 그림들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 남자는 그림을 훑어보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음, 이 정도면 됐어. 우리 사무실에서 일해 주시오.” 이렇게 하여 만화가가 되려는 월트의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월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회사에는 여러 명의 만화가가 있었지만 월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장은 이러한 월트를 무척 아껴 주고 일감도 많이 주었습니다. 월트는 원래 그림을 좋아하였으므로 일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림 그리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열아홉 살이 된 월트는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하며 실력을 쌓은 결과, 드디어 규모가 큰 광고 영화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회사에서도 얼마 안 있어 월트는 손꼽히는 만화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월트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이제 만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보다 두 달 늦게 들어온 에이브라는 소년과 친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일을 하는 틈틈이 직접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캔자스에 ‘뉴먼’이라는 큰 영화관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그 극장의 지배인이 월트의 스튜디오로 찾아왔습니다. “만화 영화를 한 편 제작해 주겠소?” 월트와 에이브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처음 받는 주문이다 보니 기쁨에 앞서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먼저 줄거리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월트 디즈니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영상과 음성이 동시에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소리가 들리지 않는 무성 영화 시대여서 화면의 한쪽에 대사를 적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 중에는 영화를 보면서 자막 글씨를 큰 소리로 읽는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곤 했습니다. “이렇게 소리내어 자막을 읽는 사람들의 버릇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만화를 만들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극장 지배인의 주문은 매우 까다로웠지만 월트는 그 주문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직접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에 가슴이 부풀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부터 월트와 에이브는 힘든 줄도 모르고 만화 영화를 만드는 데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하여, 월트는 마침내 에이브와 합작으로 꼬마 선생이란 만화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꼬마 선생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콧수염을 기른 꼬마 선생이 화면에 나와, 자막을 읽는 사람의 의자 손잡이에 달린 줄을 확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로 마룻바닥에 떨어져서 극장 밖으로 끌려 나가게 됩니다. 이 만화 영화가 월트의 이름으로 세상에 선을 보인 첫 번째 작품이었습니다. 뉴먼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 짧은 만화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그 효과는 당장에 나타나서 그 후로는 자막을 소리내어 읽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월트의 실력을 인정한 극장 지배인은 월트에게 새로운 일을 부탁해 왔습니다. 월트와 에이브는 일거리가 늘어나자 여러 명의 조수를 고용하여 밤낮없이 일에 몰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인기가 높았던 플라이셔 형제가 만든 만화 영화를 보면서 좋은 점을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훌륭한 만화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었던 월트 디즈니는 플라이셔 형제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플라이셔 형제는 그림 솜씨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월트는 그들의 그림에서 약간의 부족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림 솜씨는 대단한데 생동감이 부족한 것 같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플라이셔 형제의 그림에서는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는 작품을 만들기 전에 먼저 주인공의 습관이나 성격 같은 것을 자세히 조사한 뒤에 그려야겠어.” 월트와 에이브는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모든 정열을 쏟아 만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월트는 금세 유명해져서 만화 영화를 공부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월트는 이들을 조수로 채용해서 여러 편의 만화 영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명작 동화를 줄거리로 한 장화 신은 고양이, 빨간 모자, 브레멘의 음악대, 재크와 콩나무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아직 높은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만화 영화가 흔하지 않던 당시에는 대단한 것이어서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월트는 새롭게 용기를 얻어 회사를 차리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만화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작비가 없어 한동안 망설이다가 형 로이를 찾아갔습니다. 동생의 실력을 인정하는 로이는 생활이 몹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돈을 다 털어 월트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회사를 차린 월트는 직접 만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만화 영화가 완성되자 월트는 뉴욕의 한 영화관에다 그 영화를 팔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반응이 좋아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중간 상인들이 끼어들어 이익금을 가로채는 바람에 월트의 몫으로 돌아오는 돈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월트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 놓였습니다. 이 무렵 월트는 만화 영화를 크게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세계 영화의 중심 도시인 할리우드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작비는 고사하고 여비를 마련할 길마저 없어 막막하기만 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디너 치과 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월트 씨, 나는 맥그램 교수입니다. 당신에게 만화 영화 제작을 부탁하려고 하는데 내일 시간이 어떠십니까?” “저는 언제든지 좋습니다.” 다음 날 맥그램 교수는 어린이들에게 이 닦는 법을 가르쳐 주는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전부 지원해 주었습니다. 월트는 이 만화 영화를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만족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토미 튜커의 이 라는 이 만화 영화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월트는 이 만화 영화가 성공을 거두어 많은 돈을 벌게 되자 할리우드로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1923년 7월, 스물두 살의 청년 월트 디즈니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트렁크 한 개만을 든 채 영화의 도시인 할리우드에 도착했습니다.
무작정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디즈니는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로이드 필름 회사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12편짜리 만화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월트가 캔자스에 있을 때 만든 영화로, 디즈니는 예전에 이 영화를 로이드 필름 회사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디즈니는 즉시 캔자스에 있는 에이브에게 할리우드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디즈니와 에이브는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만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생활이 쪼들려 때로는 끼니를 굶으면서도 만화 영화를 만드는 일에 온갖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12편짜리 만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크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만화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할리우드로 온 지 2년 후, 디즈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릴리언 번스라는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디즈니는 일을 위해 더욱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하루는 뉴욕에 있는 영화 배급 회사 사장이 디즈니를 찾아왔습니다. “디즈니 씨, 지금 구상하고 계신 작품이 있으신가요?” “네, 이번에는 토끼를 주인공으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와 그 작품을 계약하십시다.” 토끼를 주인공으로 한 토끼 오스월드는 얼마 후에 완성되어 뉴욕에서 상영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토끼 오스월드는 시리즈로 된 만화 영화였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첫 편이 끝난 뒤 아내 릴리언과 함께 뉴욕으로 갔습니다. 토끼 오스월드의 인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뉴욕 영화 배급 회사 사장을 만나 다음 편을 계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월트는 다음 편부터는 값을 올려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디즈니는 뉴욕 영화 배급 회사 사장을 만나 사정 이야기를 하고 제작비를 올려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사 측에서는 오히려 제작비를 깎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때 이미 디즈니 밑에서 일하는 만화가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싼값으로 필름을 손에 넣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디즈니는 영화 배급 회사와 손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리우드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디즈니는 새롭게 결심을 다졌습니다. ‘나는 이대로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들판에는 밀 추수가 한창이어서 짚단이 군데군데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디즈니는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외쳤습니다. “그래, 바로 쥐다!” 옆에 앉아 있던 릴리언은 그 다음 말을 듣지 않고서도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그럼, 이번 만화 영화의 주인공 쥐의 이름을 뭐라고 하죠?” “음... 미키 마우스가 어떨까?” “와, 아주 멋진 이름이에요!” 디즈니의 머릿속에는 온통 새로운 만화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할리우드에 도착한 디즈니는 만화 영화 미키 마우스를 만들기 위해 직접 쥐들을 길들이면서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즈니의 작업실은 어느 새 쥐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쥐들은 처음에는 디즈니를 보고 달아났지만 나중에는 책상 위에까지 올라와서 놀았습니다. 월트는 그 쥐들과 친해질 무렵 미키 마우스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첫 편이 완성되어 시사회 날이 되었습니다. “쥐 영화 같은 것을 누가 보겠어?” 영화사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디즈니의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만화 영화 미키 마우스의 시사회를 보러 왔습니다. 그들은 작품을 보는 눈이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결같이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대성공이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미키 마우스를 사려고 야단이었습니다. 디즈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에 토끼 오스월드로 자기를 배반한 사람들에게 강경하게 말했습니다. “현금을 한꺼번에 다 내야 하오.” 그들은 미키 마우스가 너무 탐이 났기 때문에 비싼 가격으로 현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키 마우스가 영화관에서 상영되자, 이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마다 하루 종일 관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미키 마우스는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1928년, 디즈니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세계 영화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 소리가 없던 영화에 소리를 넣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유성 영화’의 시대가 막을 연 것입니다. 그 무렵, 디즈니의 스튜디오에서는 미키 마우스 제14편과 증기선 윌리 호가 완성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소리가 없는 무성 영화로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성 영화로 바꾸려면 지금까지의 작업을 완전히 바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에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기에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습니다. 한동안 고민하던 디즈니는 빚을 내서라도 유성 영화로 전환하기로 결심하고, 증기선 윌리 호를 유성 영화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습니다. 마침내 첫 유성 만화 영화 증기선 윌리 호가 완성되었습니다. 드디어 시사회 날이 왔습니다. 제작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영사실로 들어갔습니다. 장내의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영화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정말 대단한 영화다!” 이윽고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사 사람들은 본사에 급히 무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값은 부르는 대로 현금으로 들어왔습니다. 디즈니가 많은 비용과 정성을 들여 만든 유성 만화 영화의 첫 작품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디즈니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악까지 곁들인 멋진 만화 영화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하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디즈니의 머릿속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먼저 음악을 정하고 그 음악에 맞게 그림을 그려 간다면, 음악과 그림이 꼭 어울리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디즈니의 머릿속에는 어느 새 재미있는 음악 영화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겠다는 디즈니의 기발한 생각은 드디어 새로운 만화 영화를 탄생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여러 편의 영화로 이루어진 실리 심포니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생상스가 작곡한 해골의 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화입니다. 이 해골의 춤은 만물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 해골들이 묘지 밖으로 나와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하여 작곡한 곡입니다. 디즈니는 이 곡을 만화로 그릴 때 무시무시한 해골을 폭소가 터지도록 재미있게 표현했는데, 이것이 성공을 거두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팔려 나가 세계 어린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미키 마우스도 여러 편이 시리즈로 계속해서 나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디즈니가 만든 만화 영화는 나오는 대로 날개 돋친 듯 전세계로 팔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디즈니가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들 때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갔기 때문에 실제로 디즈니에게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디즈니는 만화 영화를 제작하는 일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돈을 버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디즈니는 쉬지 않고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의 권유로 병원을 찾아간 디즈니에게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로 때문에 신경이 쇠약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잠시 여행을 떠나십시오. 쉬는 것밖에는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디즈니는 의사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디즈니는 아내 릴리언과 함께 잠시 할리우드를 떠나 배를 타고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차츰 건강을 회복한 그는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여행에서 돌아온 디즈니는 다시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영화계에 다시 심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그 때까지 모두 흑백으로 만들어지던 영화가 총천연색을 띤 영화로 탈바꿈한 것이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 영화의 발전에 앞장섰던 디즈니는, 이 천연색 영화야말로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작비가 문제야. 흑백 영화보다 몇 배는 더 들어갈 텐데...’ 천연색 영화의 바람이 불자 제일 크게 걱정한 사람은 디즈니 영화의 재정을 맡고 있는 형 로이였습니다. “디즈니, 천연색 영화를 만들려면 비용이 엄청나게 들 텐데 흑백 영화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어떻게 감당할 참이냐?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거야. 누가 그만한 돈을 빌려 주겠어?”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천연색 영화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만큼 흑백 영화보다 값이 비싸질 거예요.” “정말 그럴까?” “사람들은 단조로운 흑백 영화보다 천연색 영화를 더 좋아할 것이 틀림없어요. 그렇게 되면 천연색 영화는 흑백 영화보다 더 잘 팔릴 것이고, 제작비가 많이 드는 대신 입장료를 더 많이 받으면 이익도 그만큼 커질 거예요.” 형 로이는 디즈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디즈니는 늘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마다 성공해 왔던 것입니다. 로이는 동생을 믿고 천연색 영화의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리저리 쉴새없이 뛰어다녔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디즈니는 형의 도움으로 천연색 영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32년, 마침내 디즈니는 숲 속의 아침이라는 천연색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디즈니가 예상한 대로 이 영화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아름다운 색깔로 된 디즈니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연색 영화의 신비로움과 우수한 예술성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제작자인 디즈니의 천재적인 솜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 천연색 영화로 디즈니는 유명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즈니는 유명한 영화인이 되었다고 해서 교만해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숲 속의 아침으로 호평을 얻은 디즈니는 보다 나은 만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에는 아기 돼지 삼 형제를 완성하여 지금까지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디즈니는 무성 영화, 유성 영화, 천연색 영화를 두루 거치면서 끈질긴 노력과 끈기로 만화 영화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일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디즈니의 스튜디오는 커졌고 만화가의 수도 20명을 넘게 되었습니다. 디즈니는 스튜디오 안에 미술 학교를 세워 만화가들의 실력을 더욱 향상시키고자 했습니다. 얼마 후, 계획대로 미술 학교를 세우고 그레이엄 선생님을 초빙하여 그 학교의 운영을 맡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즈니는 의과 대학의 류 레스본 선생님을 초빙하여, 학생들이 살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짐승들이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등을 해부학적으로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살아 있는 짐승들을 데리고 와서 그 움직임을 실제로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유리가 깨지는 광경이나 돌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모습 같은 것도 카메라로 찍어 와서, 그것을 느린 화면으로 재현하여 그림으로 그려 보도록 하였습니다. 디즈니는 한 편의 만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처럼 세심한 연구와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디즈니는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늘 만화를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만화와 연관지어 생각했고 사물을 무심코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또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는 일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쓸모 없어 보이는 일도 만화 영화를 만들 때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디즈니가 만든 만화 영화의 주인공이나 그 영화에 나오는 음악 등은 미국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기 돼지 삼 형제에 삽입된 ‘마음씨 나쁜 늑대’라는 노래는 미국 전체에 퍼져 유행하게 되었고, 아기 돼지 삼 형제를 흉내내어 만든 장난감도 많이 팔렸습니다. 디즈니가 생각해 낸 만화의 주인공은 이 밖에도 다양한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디즈니가 미키 마우스를 팔러 뉴욕에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낯선 남자가 디즈니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디즈니를 만나자마자 대뜸 100달러짜리 지폐 3장을 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디즈니 씨, 이 돈을 받으시고 미키 마우스에 나오는 쥐를 제가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디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쓰는 공책을 만들어 파는 사람인데, 그 공책에다 미키 마우스 그림을 그려 넣고 싶어서 그럽니다." 디즈니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에게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디즈니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미키 마우스도 세계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1935년, 파리에 있는 국제 연맹으로부터 디즈니 스튜디오에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우리 국제 연맹에서는 만화 영화 미키 마우스로 세계 여러 나라가 서로 더욱 친숙해지게 해 주신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월트 디즈니 씨와 로이 디즈니 씨 형제에게 표창을 하려고 합니다.' 편지를 읽는 동안 디즈니의 눈은 어느 새 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디즈니 형제는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파리로 떠났습니다. 10여년 전, 적십자 부대의 간호병으로 파리에 갔던 디즈니가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어 국제 연맹으로부터 상을 받으러 파리로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파리 정거장에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디즈니 씨, 축하드립니다. 이 일은 두 분만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미국의 영광입니다.” “고맙습니다.” 디즈니 형제는 곧 국제 연맹으로 안내되어 영예로운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 메달에는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 국제 친선에 이바지한 공으로 수여한다.’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디즈니는 장내를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단상으로 올라가 인사를 하였습니다. 메달 수여식이 끝나자 디즈니 형제는 영광의 메달을 안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디즈니는 비행기 안에서 형 로이에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장편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로이는 디즈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디즈니가 만든 토끼 오스월드, 미키 마우스, 아기 돼지 삼 형제 등은 상영 시간이 모두 10분 남짓 되는 짧은 영화였습니다. 사실 10분 정도밖에 안 되는 단편 만화 영화로는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 하더라도 많은 관객을 모으기가 어려웠습니다. 로이도 장편 만화 영화가 관객을 모으는 데 더욱 성공적일 거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이가 디즈니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은 제작비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작품으로 장편 만화 영화를 만들려고 하니?” 로이는 디즈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백설 공주요. 상영 시간을 80분 정도로 길게 만들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제작비가 많이 들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게 마련이에요.” 한번 하겠다면 하고야 마는 디즈니의 성격을 아는지라 로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리우드로 돌아온 디즈니 형제는 장편 만화 영화 백설 공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백설 공주는 너무나 잘 알려진 독일의 그림 형제가 지은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야기였습니다. 이 무렵, 디즈니는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래 전부터 함께 일해 오던 제작진들을 총지휘하면서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디즈니 스튜디오에서는 다른 일은 제쳐놓고 오로지 백설 공주를 제작하는 데에만 매달렸습니다. 디즈니는 파리에서 할리우드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줄곧 백설 공주의 주인공 모습을 상상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 어여쁜 백설 공주를 그리기 위해 열일곱 살의 메졸리 베르샤라는 아가씨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메졸리는 디즈니가 머릿속에 그려 온 주인공과 꼭 맞아떨어지는 아리따운 아가씨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성 영화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목소리가 필요했습니다. 디즈니는 백설 공주의 목소리는 보통 아가씨의 목소리가 아니라 꿈나라에서 온 것 같은 고운 목소리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즈니는 백설 공주에 알맞은 목소리를 찾기 위하여 모집 광고를 냈습니다. 스튜디오에는 매일같이 많은 아가씨들이 찾아왔습니다. 바쁜 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일일이 들어 본 디즈니는 마침내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찾아냈습니다. “내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야. 아주 훌륭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애들린 캐실로디라는 아가씨는 노래도 잘 부르고 목소리도 무척 예뻤습니다. 디즈니는 백설 공주에 나오는 마음씨 나쁜 새어머니와 일곱 난쟁이의 목소리 주인공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한편, 로이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구해 오는 돈은 순식간에 바닥이 나 버렸습니다. 워낙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일이어서 아직도 돈이 더 필요했지만, 로이는 더 이상 손을 벌릴 곳이 없었습니다. “형, 안 되겠어. 이제는 은행에서 빌리는 수밖에.” 디즈니는 집과 디즈니 스튜디오를 은행에 저당잡히고 돈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고비를 이겨내고, 1937년 12월에 드디어 첫 장편 만화 영화 백설 공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는 무려 2년이나 걸렸습니다. 영화가 완성된 뒤에도 디즈니는 상영되기 직전까지 몇 번이나 수정을 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이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고쳤습니다. 마침내 할리우드의 한 영화관에서 백설 공주가 상영되었습니다. 시사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화의 훌륭함에 감탄했습니다. “마술사의 마술을 보는 듯하군.” “디즈니는 만화 영화의 신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만든 첫 장편 만화 영화 백설 공주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화가 보급되자 가는 곳마다 디즈니의 백설 공주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백설 공주에 나오는 노래 중에 ‘언젠가는 왕자님이 찾아오실 거야’와 ‘휘파람을 불면서 일하자’ 등의 노래는 미국 전역에 퍼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디즈니는 반 년 만에 빚을 다 갚고 새로 넓은 스튜디오를 지었습니다. 새로 지은 스튜디오는 이제 미국에서 손꼽히는 큰 영화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국무성에서도 디즈니의 실력을 인정하고, 다른 나라와의 친선을 목적으로 디즈니를 외국에 보내어 영화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디즈니는 2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6주 동안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를 두루 돌아다니며 원주민의 생활이나 풍습, 아름다운 경치 등을 필름에 담아 왔습니다.
디즈니는 그 곳에서 촬영해 온 필름들을 한데 엮어서 라틴 아메리카 여행이라는 기록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은 물론 현지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세계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일본이 갑자기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자 연합군에 가담하여 싸웠습니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던 어느 날, 디즈니 스튜디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여기는 고사포 부대입니다. 당신의 사무실을 군대가 빌려 써야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군대에서 디즈니 스튜디오를 사용하려는 것은 그의 스튜디오가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디즈니는 일을 하는 데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군의 명령이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지. 나라가 우선이니까.’ 다행히 군대가 건물을 반만 사용하기로 했으므로 촬영 기구를 한쪽으로 옮겨 놓을 수 있었습니다. 디즈니는 직원들을 재촉하여 촬영 기구들을 한쪽에 몰아놓고 스튜디오를 비워 주었습니다. 곧바로 군용 트럭 14대가 군인 700명과 병기, 탄환 등을 가득 싣고 도착했습니다. 스튜디오는 어느 새 군인들의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정부는 전쟁 물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세금을 올려야 했습니다. 정부는 디즈니에게 세금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만화 영화를 제작해 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디즈니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오리를 등장시킨 영화 도널드 덕을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도널드는 세금 내기를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세금이 나라를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세무서로 달려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게 된다.' 이 영화는 전국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중간에 상영되었는데, 이것을 본 사람들은 배꼽을 쥐고 웃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금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날로 심해지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디즈니 스튜디오에서도 매일 사람을 뽑아 가 1,500명이나 되던 직원들이 이제는 몇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디즈니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45년, 마침내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때 디즈니의 나이 마흔네 살이었습니다. 싸움터에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디즈니 스튜디오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디즈니는 전쟁 중에 구상해 두었던 장편 만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신데렐라와 피터 팬 등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한편 디즈니는 살아 있는 자연 그대로를 찍어서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짐승들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찍어 보고 싶었습니다. 디즈니는 곧 그 일을 시작하여 알래스카로 촬영대를 보내 동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찍어 오게 하였습니다. 이 촬영대에는 유명한 동물학자들도 끼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작된 영화 물개의 섬은 발표되자마자 뛰어난 교육 영화로 널리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이 영화로 또다시 아카데미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기록 영화가 인정을 받게 되자 디즈니는 동물에게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비버 골짜기를 촬영하러 갔다가 아주 멋진 장면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촬영대는 수풀이 우거진 작은 시냇가에서 비버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마침 그 때, 비버는 얼어붙은 냇물에 구멍을 뚫고 나무토막을 박으려고 낑낑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해는 이미 져서 주위가 어두워졌으나 촬영대는 필름을 계속 돌려 놓았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카메라는 스스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확인해 보니 참으로 멋진 장면이 찍혀 있었습니다. 비버는 이빨로 나무토막을 물어뜯어 아주 가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나무토막이 얼음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자, 이번에는 얼음 구멍의 가장자리를 갉작갉작 쏠아서 얼음 구멍을 커다랗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나무토막이 겨우 얼음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풍덩!” 그 소리에 놀란 비버는 재빨리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잠시 후, 나무토막이 물 속으로 빠질 때 난 소리인 것을 안 비버가 다시 카메라의 화면에 등장했습니다. 그 장면들은 깊은 숲 속에서 고요히 살아가는 비버들의 생활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영화를 촬영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끈질긴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디즈니 촬영대는 끈기 있게 사막이나 밀림을 누비면서 사막은 살아 있다, 야수의 왕자, 사라져 가는 대초원, 페리 등의 우수한 기록 영화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원시림 속의 동물과 식물들의 생생하고 신기한 모습은 월트 디즈니에 의해서 하나 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디즈니는 일생 동안 무려 550여 편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실로 30여 번의 아카데미 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디즈니에게 ‘만화 영화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1955년, 디즈니의 나이 어느덧 54세가 되었습니다. 그 해 디즈니는 만화 영화보다도 더 큰 기쁨을 미국인들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바로 어린이 왕국, 디즈니랜드를 세운 것입니다. 이 디즈니랜드는 할리우드에서 약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의 애너하임이라는 마을에 세워졌습니다. 이 곳은 어린이들이 하루 종일 놀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환상의 나라,’ ‘서부의 나라,’ ‘모험의 나라,’ ‘미래의 나라’ 등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디즈니랜드는 어린이들을 위한 꿈의 세계였습니다.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를 만들기 위해 20년 동안이나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막대한 경비와 인원을 동원하여 꿈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디즈니랜드는 디즈니가 어린 시절에 땅 위에다 그렸던 궁전보다 훨씬 더 훌륭했습니다. 디즈니는 어린 시절의 꿈을 평생 잊지 않고 결국 현실로 옮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디즈니는 보다 새로운 영화, 보다 나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다가 1966년 12월 15일에 6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디즈니가 만든 수많은 영화와 디즈니랜드는,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커다란 꿈과 기쁨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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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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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해하고 있는 한스를 바라보며 샤르 부인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허황된 꿈 때문에 머리가 돌아 버린 게 틀림없어. 가엾게도.' 1819년 9월의 어느 날, 배우가 되려는 꿈을 간직하고 코펜하겐으로 온 한스는 이렇게 샤르 부인의 집에서 쫓겨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이 없는 한스는 무작정 거리를 헤맸습니다. 절망감이 그의 몸과 마음을 휘청거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배우가 되려는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스는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래,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 게 아니라 직접 극장 지배인을 찾아가 보는 거야.' 구둣방집 아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의 오덴세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구둣방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스는 태어날 때부터 소문난 울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울음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리기만 하면 이웃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구둣방집 아이가 울기 시작했군." "저 녀석은 왜 밤낮 질질 짜는 거야?" 이렇게 울보로 소문난 한스였지만, 몸은 건강하여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났습니다. 한스네 집에는 구두를 고치는 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한스는 그것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정신 없이 바쁜 와중에도 마당 한쪽에 조그마한 밭을 만들어 그 곳에 양파도 심고 파슬리도 심어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한스는 어머니가 가꾸는 그 작은 밭을 보며 꿈을 키워 갔습니다. 그리고 그 밭 옆에서 책을 읽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러 종류의 새들을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이 조그만 밭은 훗날 그가 쓴 눈의 여왕이라는 동화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릴 때의 추억은 한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보다 두 살 위인 어머니는 무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종종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어렸을 적 이야기들은 한스의 마음을 무척 슬프게 했습니다. "엄마가 어렸을 때 너희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얻어 오라고 하셨단다. 이 엄마가 마을에서 얻어 온 음식으로 그날 그날의 끼니를 이어 갔지."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한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내가 꼭 행복하게 해 드릴 거야.' 한스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5살이 되면서부터 한스는 조용한 아이로 변해 갔습니다.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여자 아이처럼 아버지가 만들어 준 인형에 옷을 입히거나 색종이로 장난감을 만들며 혼자 노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한스는 손재주가 무척 뛰어나서, 그가 만들어 놓은 장난감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습니다. "이 아이는 커서 훌륭한 재단사가 되려나 봐요." 한스를 보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척 대견해했습니다. 이처럼 한스는 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늘 밝고 정직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6, 7살이 된 한스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신입생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던 한스는 칼스텐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한스의 아버지는 부쩍 말이 없고 우울해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중단하고 구두장이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점점 더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릎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한스의 마음은 몹시 슬펐습니다. 이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꿈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어느 백작 부인이 아버지를 전속 양화공으로 추천한 것이었습니다. 전속 양화공이란 어느 한 사람만의 구두를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만약 채용이 결정되면 아버지는 백작 부인의 구두만을 만들어 주고 얼마간의 월급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갑자기 밝게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에 없이 기분이 들떠 있는 듯했고, 어머니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속 양화공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습니다. 백작 부인은, 무용할 때 신는 구두를 한 켤레 만들어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 아버지를 채용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구두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아버지가 손수 가죽을 사다가 만든 무용 구두는 마침내 훌륭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한스는 감격하여 소리쳤습니다. "아빠, 정말 멋져요!" "어쩜, 정말 훌륭한 구두로군요!" 아버지는 완성된 구두를 정성껏 수건에 싸 들고 백작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구두를 들고 서 있는 초라한 모습의 아버지를 보자마자 안색이 확 변했습니다. "아니, 이 구두를 나보고 신으라는 건가요? 이렇게 초라한 구두는 하녀들에게나 어울리겠군요. 당신의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백작 부인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보자 백작 부인의 마음이 변한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아버지는 주머니 속에 있던 칼을 꺼내 그 자리에서 구두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의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배우의 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꾸려 가기 위해 이웃집의 세탁물을 얻어다가 빨래를 해 주거나 다른 집의 일을 거들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면 한스는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연극 대사를 읽는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자주 갔었던 극장에서 알게 된 연극 공연 담당자로부터 연극의 대본을 얻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에게 있어서 연극 대본을 읽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한스에게 말했습니다. "한스, 분케프로드 부인이 한번 놀러 오라고 너를 초대하시더구나." "정말이에요?" 항상 집에만 틀어박혀 외롭게 지내던 한스는 마음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웃에 사는 분케프로드 부인은 목사인 남편이 죽은 뒤로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두 자매 모두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스는 자신의 옷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말끔하게 차려입고 분케프로드 부인을 방문했습니다. "저, 안, 안녕하세요?" 한스는 이런 교양 있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몹시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분케프로드 부인이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한스의 긴장감은 단숨에 풀어졌습니다. "어서 오너라, 한스. 네가 늘 혼자 지내는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단다." "감사합니다." "자, 우선 서재부터 구경해 보지 않을래?" 분케프로드 부인을 따라 서재에 들어선 한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와, 굉장하군요!" 서재에는 책꽂이가 모자라 천장에까지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책이 꽂혀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한스를 바라보던 분케프로드 부인이 따뜻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한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가져다 읽도록 해라. 책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 "정말 고맙습니다." 한스는 아버지를 닮아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부인의 여동생은 그런 한스에게 햄릿과 리어 왕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희곡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한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빌려 와 정신 없이 읽어 내려갔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한스는 마치 배우가 된 듯 대사를 외웠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모아 놓고 혼자서 연극을 해 보였습니다. 한스가 배우의 목소리를 능숙하게 흉내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주 훌륭하다, 한스. 너의 목소리는 꼭 하늘의 천사가 속삭이는 것처럼 듣기 좋구나."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도 훌륭했지. 아무튼 한스 녀석은 재주꾼이야." 이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한스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의젓해지는 한스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저 아이의 장래도 생각해야 될 텐데.' 어머니는 한스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한스, 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 "배우가 되고 싶어요." "뭐라고? 한스, 그건 허황된 생각이란다. 재단사가 되면 어떻겠니? 엄마의 생각으로는 그 일이 너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구나. 넌 인형 옷도 잘 만들잖니?" "전 어떻게 해서든 배우가 될 거예요." 이제까지 어머니의 말을 어겨 본 일이 없는 한스였지만 이번에는 무척 완강했습니다. "한스, 잘 생각해 보거라. 배우의 길은 무척 험난하단다. 애써 노력을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더구나." 결심을 꺾으려는 어머니의 앞에서 한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한스의 마음속에 자리잡아 갔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가 재혼을 했습니다. 새아버지는 한스의 친아버지처럼 구둣방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새아버지는 친아버지와 달리, 마음씨가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게으르고 술주정뱅이인데다 성격도 괴팍했습니다. 새아버지는 한스를 미워했으며, 한스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한스는 늘 새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한스는 새아버지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스가 견진 성사를 받아야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견진 성사란 크리스트 교에서 행하는 의식으로, 이 의식을 치러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견진 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크리스트 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는데, 이 때문에 한스는 잠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도 견진 성사를 받기 위해 같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은 모두 한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한 집안의 아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한스는 그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교리 공부가 끝난 후, 한스는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지지 않으려는 듯 꽃향기가 풍겨 와 한스를 더욱 서글프게 했습니다. 한스가 그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걷고 있을 때, 예쁜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기, 한스." 한스는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테네르였습니다. "자, 이거 받아." 테네르는 예쁜 꽃다발을 내밀며 수줍게 속삭였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은 가난한 한스와 사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테네르만은 달랐습니다. 테네르는 부잣집 아이이면서도 한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응? 정말 나에게 주는 거니?" "그래. 어서 받아." 테네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한스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게서 한 번도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한스는, 테네르가 내미는 한 다발의 꽃을 받고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테네르와 헤어진 뒤 어떻게 집에 왔는지조차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교회에 같이 다니는 친구가 준 거예요." 어머니는 한스가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즐거웠습니다. "그래? 한스, 넌 정말 좋겠구나. 좋은 친구도 생기고 이렇게 예쁜 꽃 선물도 받았으니." 학교나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만 받아 오던 한스는 친절한 친구가 생기자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그것 잘됐군요. 저렇게 재능있는 아이는 큰 도시로 가서 커야 하는 거예요." "맞아요. 한스는 꼭 오덴세를 빛낼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이들 중에는 유명한 무용가인 샤르 부인을 잘 안다며 소개장을 써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819년 초가을의 어느 날 드디어 한스는 오덴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스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한스를 배웅하기 위해 마을 밖까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한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습니다. "한스, 힘내거라." 옆에 있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편지해야 한다." 마부가 출발을 알리는 나팔을 불자 마차는 흔들거리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스는 이제 더 이상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보니 선생과 작곡가인 바이제 씨가 뒷바라지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부터 한스는 꽉 짜여진 일과에 맞추어 생활했습니다. 시보니 선생은 한스에게 성악을 가르쳤고, 바이제 씨는 음악의 기초적 이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한스는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독일어를 공부했습니다. 한스는 자기의 소망이 하나하나 이루어지자 쉬지 않고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그에 따라 실력은 날이 갈수록 향상되었습니다. "한 번 가르친 것은 절대 잊지 않고 금세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니, 정말 뛰어난 재주를 지녔군." "게다가 가장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공부하는 태도라네.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 수밖에 없지." 시보니 선생과 바이제 씨는 한스의 노력하는 태도에 감탄하며 더욱 기대를 걸었습니다. 두 사람의 칭찬을 들은 한스는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한스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몇 달 후에 한스는 시보니 선생과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독일어 실력이 부쩍 좋아졌습니다. 계속해서 한스는 이탈리아 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슴속에 희망을 품은 한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깨어진 꿈. 한스가 시보니 선생 밑에서 공부한 지도 어느덧 9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한스에게 갑작스런 불행이 닥쳤습니다. 한스의 고운 목소리가 쉰 소리로 변한 것입니다. 변성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겨울 내내 허름한 신발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동상에 걸려, 그로 인해 목소리까지 해치게 된 것입니다. 시보니 선생이 한스를 불러 말했습니다. "한스 군, 훌륭한 가수가 되겠다는 자네의 꿈은 그만 접는 게 좋겠네." 한스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건가? 이대로 내 꿈을 포기해 버려야만 하는 걸까?' 한스의 머릿속에는 이대로 오덴세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절망적인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스는 문득 한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오덴세에 있을 때 한스는 구르벨이라는 군인으로부터 많은 귀여움을 받았는데, 그 군인의 동생이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한스는 언젠가 구르벨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한스, 내 동생은 코펜하겐에서 꽤 호평을 받고 있는 유명한 시인이란다." "정말 좋으시겠어요." "암, 난 내 동생이 무척 자랑스러워." 한스는 코펜하겐으로 떠나 올 때 시인 구르벨의 주소를 적어 두었습니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그분께 편지를 보내 봐야겠다. 꼭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걸.' 한스는 구르벨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시인 구르벨은 한스의 편지를 받자마자 곧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형에게서 얘기는 많이 들었네. 참 반갑군. 난 언제든 괜찮으니 조만간 한번 찾아오게.' 한스는 생각지도 못한 구르벨의 편지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래, 이분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자. 그럼 다시 내 꿈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몰라.' 며칠 후, 한스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인 구르벨을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게, 한스 군." 구르벨은 무척 친절하게 한스를 맞아 주었습니다. 한스의 초라한 모습을 본 구르벨은 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그러나 이젠 안심하게. 내가 힘닿는 데까지 자네를 도와줄 테니까. 그런데 한스 군, 자네가 보낸 편지는 맞춤법이 엉망이더군. 덴마크 어를 가르쳐 줄 테니 우선 올바른 철자법부터 차근차근 익히도록 하게." 그 날부터 한스는 매일같이 구르벨의 집으로 가서 덴마크 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씨 착한 구르벨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면서도 한스를 위해서 돈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자, 이것으로 새 숙소를 마련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게." "정말 고맙습니다, 구르벨 씨."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퇴짜였습니다. 맥이 빠져 쓰러질 듯 서 있는 한스에게 왕립 극장의 한 담당자가 위로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봐요, 한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쓴 희곡엔 재미있는 부분도 있더군요. 공부를 계속하기만 한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지배인이 말했어요." 담당자의 말에 희미한 웃음을 보인 채 한스는 힘없이 그 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언젠가는 하느님이 나를 무대에 서게 해 주실 거야.' 신앙심이 깊었던 한스는 이렇게 기도하며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길. 그 무렵, 한스는 덴마크의 일류 정치가이면서 왕립 극장의 지배인인 요나스 콜린을 만났습니다. 그는 한스가 희곡을 써서 왕립 극장에 보냈을 때, 그것을 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콜린은 한스의 희곡을 퇴짜놓기는 했지만 한스가 가진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한스는 문학가로서의 소질이 충분해. 좌절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콜린은 한스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직 공부가 모자라네.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겐 그럴 만한 돈이." "나도 알고 있네. 내가 학교를 주선해 줄 테니 그 걱정은 하지 말고 자넨 공부만 열심히 하게." 막막하기만 하던 한스의 운명은 요나스 콜린에 의해서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웃 사람들은 한스네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전에 한스를 놀리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구들도 한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한스가 성공해서 돌아오자 새아버지도 그를 부드럽게 대해 주었습니다. 한 달 동안의 여름 방학은 꿈결처럼 지나가 버렸습니다. 방학이 끝날 무렵 한스는 다시 라틴 어 학교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스에게 다시금 어려운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교장 선생님이 한스를 불러 말했습니다 "한스 군, 이제 나는 헬싱괴르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네. 그런데 내가 자네 뒤를 돌보아 주기로 콜린 씨와 약속을 했으니, 자네도 당연히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해서 한스는 교장 선생님을 따라 헬싱괴르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헬싱괴르는 셸란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한스는 곧 그 곳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기만 한 교장 선생님은 한스가 잠시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늘 공부만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공부를 무척 좋아하는 한스였지만 이런 생활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스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슬퍼진 나머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인자하신 어머니, 나는 지쳤어요. 슬퍼졌어요. 나는 울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 인자하신 어머니 품에 안겨서. 한스의 책상 위에서 이 시를 발견한 교장 선생님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한스를 꾸짖었습니다. "한스 군, 공부할 시간에 이렇게 딴 생각을 하다니, 앞으로 어떻게 대학에 갈 작정인가? 지금 자네에겐 한가한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네. 자넨 지금 나라의 돈으로 공부하고 있는 거라고." 그 후로 교장 선생님은 한스를 한층 더 엄하게 대했고, 한스는 괴로운 마음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습니다. 결국 한스는 헬싱괴르의 라틴 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코펜하겐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본래 악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스를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한스에게 엄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한스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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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탈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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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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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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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아저씨, 과자 주세요." 5살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가게로 들어서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하인리히. 조금 전에 과자를 사 갔는데 또 왔니?" 그때 가게 안에서 한 소녀가 나왔습니다. 그 소녀는 가게 주인의 딸로 이름은 안나였습니다. 안나는 과자를 사러 온 남자아이보다도 7, 8살쯤은 더 많아 보였습니다. "하인리히,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시니?" 안나가 묻자, 하인리히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습니다. "하인리히, 너는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걱정도 안 돼? 아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데 넌 이렇게 군것질만 해서 되겠어?" 안나는 마치 친동생을 타이르는 누나처럼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어느새 하인리히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누나, 내가 잘못했어." 이 하인리히란 소년이 바로 훗날 인류의 교육자로 명성을 떨친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입니다. 페스탈로치는 1746년 1월 12일,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인리히의 아버지 요한 밥티스터 페스탈로치는 유능한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일이 많아서 수입은 늘 신통치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렵게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 그 마을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병이 나으면 마치 자신의 병이 나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몰려왔지만, 아버지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하인리히가 5살 때, 아버지는 갑자기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친절한 의사 선생님의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 그분은 내 눈을 고쳐 주셨는데..." "그거야 나도 알지. 밥티스터 페스탈로치 씨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자네뿐인가? 그분은 돈 없는 사람들을 돌봐 주시는 성자야." 하지만 가족들과 온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은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병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아버지는 석 달 전부터 집안일을 돕고 있는 바벨리를 불렀습니다. "바벨리, 부탁이 있다." 주인이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바벨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짝 귀를 기울였습니다. "주인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바벨리, 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구나..." "주인님, 조금만 더 기운을 내세요. 그런 약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바벨리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바벨리, 내가 죽은 후에도 우리 집에 계속 있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하인리히의 어머니는 고생을 모르고 산 사람이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하인리히는 겨우 다섯 살이고 젖먹이 바르바라까지 딸려 있으니.."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바벨리는 그 말에 주인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인님,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바벨리는 힘 있는 목소리로 똑똑하게 대답했습니다. 바벨리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정이 많고 성실한 처녀였습니다. 그녀는 주인이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줄 때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존경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맙다, 바벨리!" 아버지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하인리히의 아버지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음씨 고운 바벨리. 어머니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리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한편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와 바벨리의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겨 준 얼마 안 되는 돈은 금세 바닥이 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바벨리는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이따금 가난한 생활을 불평할 때면 어머니는, "우리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참아 내자." 하며 부드럽게 타일렀습니다. 어머니의 이 같은 가르침은 어린 하인리히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가운데에도 먹을 것이나 옷가지를 고아원에 보내 주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하인리히 가족은 적은 돈이라도 아껴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은 바로 바벨리였습니다. 바벨리는 찬거리를 싸게 사기 위해 저녁 늦게 시장에 나갔습니다. 가게 문을 닫을 무렵에 식료품값이 훨씬 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바벨리는 늦게 시장에 나가 생선과 양배추 등의 야채를 반값에 사 들고 왔습니다. "바벨리,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어머니는 바벨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마님도 참. 한 식구끼리 뭐가 미안하다고 그러세요?" 바벨리는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저는 이런 고생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님. 저보다는 건강하지 못한 마님이 이런 고생을 하시다가 큰 병이라도 날까 봐 더 걱정이랍니다." "바벨리, 정말 고맙구나." 그날 저녁 늦게 이웃집 아주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아주머니는 돈을 조금씩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자는 이야기를 꺼내 놓았습니다. "그건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주머니의 생각 찬성이었지만, 늘 고생하는 바벨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바벨리가 말했습니다. "마님의 생각대로 하세요. 내 것을 나보다 어려운 남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바벨리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어머니와 바벨리의 이 같은 행동은 하인리히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고집쟁이.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한 하인리히는 방학이면 목사인 할아버지한테 놀러 가곤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하인리히는 차츰 소심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러 나간 하인리히와 할아버지는 너비가 1미터쯤 되는 개울가에 이르렀습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개울을 뛰어넘고서 하인리히를 보고 소리쳤습니다. "너도 뛰어넘어라!" 하지만 하인리히는 깊은 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뛰어넘어 오지 않으면 나 혼자 가 버리겠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같이 가요!" 하인리히는 눈을 꼭 감고 힘껏 뛰었습니다. 하인리히의 몸은 개울을 풀쩍 넘어가서 맞은편에 가 닿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몸이 휘청하여 개울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얼른 하인리히를 붙잡았습니다. "하인리히, 됐다! 이것이 바로 너의 힘이란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하인리히는 온몸에 새로운 힘이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할아버지, 이번에는 잡아 주지 마세요. 저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을 거예요." 돌아오는 길에 다시 개울가에 이르게 되자, 하인리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과연 이번에는 하인리히 혼자의 힘으로 거뜬히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인리히는 이렇게 할아버지에게서 굳건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페스탈로치가 후에 교육 사업을 하다가 여러 번의 어려운 고비를 만나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 할아버지에게서 얻은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업이 모두 끝나 모두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선생님의 종례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교실이 흔들리더니 교탁 위의 꽃병이 마룻바닥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앗, 지진이다!" "큰일 났다."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운동장으로 나온 아이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이층의 교실을 쳐다보며 떠들어댔습니다. "가방을 교실에 두고 나왔는데 어떡하지?" "어머! 난 모자를 두고 왔어. 어제 새로 산 건데...." 그때 하인리히가 나섰습니다. "내가 가서 가져올게." "그건 안 돼! 지진이 다시 일어나면 어떡하려고?" 아이들은 불안한 얼굴로 하인리히를 말렸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아이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이층의 교실로 올라가 반 아이들의 소지품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습니다. "이 고집쟁이야, 다음부터는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면 안 돼!" 뒤늦게 이 사실은 안 선생님은 하인리히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꾸중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린 하인리히의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이때부터 하인리히는 ‘고집쟁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용감하다는 뜻이 담긴 사랑스러운 애칭이었습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는 10살 때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15살 때 취리히 인문대학 전문부에 입학했으며, 18살 때에는 취리히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대학에서 부른취리라는 친구와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장차 대학교수를 꿈꾸는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에 걸려 집에서 요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페스탈로치는 부른취리에게 문병하러 갔다가 뜻밖에 한 여인을 소개받았습니다. "이분은 안나 슐테스 양일세.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이라네." 인사를 하려고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페스탈로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매우 낯이 익은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옛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아, 그래! 어릴 적에 내가 과자를 사러 갔을 때 부드럽게 타이르던 그 안나 누나로구나.’ "하인리히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 저는 금방 당신을 알아봤어요." 안나가 먼저 말을 건네었습니다. "맞아요. 제가 그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입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부른취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 스위스는 주변의 나라들이 전쟁하는 바람에 살기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돈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고 자기들만 잘 살려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나라의 장래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취리히 대학의 보드머 교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해서 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자 뜻있는 젊은이들은 보드머 교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페스탈로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임에 들어간 사람들은 잡지에 자신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페스탈로치도 잡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정직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비웃거나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부른취리 역시 이 모임을 대표할 만큼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아주 훌륭하여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런 부른취리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부른취리가 페스탈로치에게 말했습니다. "페스탈로치,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네. 자네는 고집이 세긴 하지만 진실하고 인정이 많아. 그런 면을 살리면 나라에 큰 힘이 될 걸세. 하루빨리 자네 곁에서 자네를 도와 줄 영리한 사람을 찾아야 할 텐데..." 부른취리는 마지막까지 페스탈로치와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페스탈로치도 건강이 나빠져서 대학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무렵 페스탈로치는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의 저서를 읽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어느 날 페스탈로치는 부른취리를 생각하면서 한 편의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군! 안나 양한테 읽어 봐 달래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페스탈로치는 자신의 글을 가지고 곧 안나를 찾아갔습니다. 안나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 씨, 마침 잘 오셨어요. 저는 지금 어떤 리본을 달고 외출할까 망설이던 중이었어요. 페스탈로치 씨가 좀 골라 주시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안나는 여러 개의 리본을 페스탈로치 앞에 늘어놓았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페스탈로치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나 씨, 아름다운 리본을 많이 가지고 있군요. 이 부근에 사는 가난한 부인들은 꼭 필요한 물건도 돈이 없어 사지 못한다고 하던데...." 안나는 페스탈로치의 말에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요. 제게는 이렇게 많은 리본이 필요하지 않아요. 꼭 필요한 분에게 나눠 드려야겠어요." 안나의 말에 페스탈로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은 두 사람은 얼마 후 결혼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안나는 곧 자신의 결심을 부모님께 전했으나 부모님은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페스탈로치가 안나보다 어리고 가난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돈도 한 푼 없고 너보다 일곱 살이나 적지 않니? 그뿐이냐? 소문을 들으니, 고집도 아주 세다고 하더구나." "그건 어머니가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페스탈로치 씨는 마음씨가 무척 고운 데다가 훌륭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안나는 반대하는 어머니를 열심히 설득했습니다. "나는 그 결혼에 찬성할 수 없어.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면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거야!"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어요. 세상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려면 그만한 괴로움은 견뎌 내야지요." 안나의 굳은 결심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페스탈로치와 결혼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23세, 안나는 30세 때였습니다. 그들은 거칠고 너른 땅을 사들여 열심히 개간하였습니다. 결혼 후 첫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1년 동안 정성껏 키운 보람이 있어 그들의 농토에서는 풍성한 곡식이 수확되었습니다. 페스탈로치 부부는 빵을 구워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페스탈로치 부부의 따뜻한 마음씨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이듬해 여름에는 맏아들 야콥이 태어나 집이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해부터 다음 해에 걸쳐 2년 동안 농장 안에 새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네 개나 되고 햇볕이 잘 드는 집이었습니다. 집이 완성되자 페스탈로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는 뜻에서 이 집을 ‘노이호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안나의 부모님도 노여움을 풀고 손자 야콥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노이호프 농민 학교와 세 번의 실패. 어느 날 페스탈로치가 안나에게 말했습니다. "생활이 좀 나아지면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이 노이호프에 모아서 교육하고, 그들이 독립할 수 있도록 일을 가르쳐 주면 어떻겠소?" "훌륭한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날이 언제쯤 올지 모르겠군." "곧 올 거예요. 힘을 내세요." 페스탈로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난한 어린이들을 보살펴 주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안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페스탈로치에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땅을 살 때 돈을 융통해 주었던 슐테스 숙부의 편지였습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페스탈로치의 손이 몹시 떨렸습니다. '농장 지배인 메르키의 말을 들으니, 자네가 내 돈을 꾸어서 사들인 농장이 토질이 나빠서 농작물이 잘되지 않는다더군. 또 자네의 농장 경영법이 잘못되어 아무래도 실패할 것 같다고 하니 달리 생각해 봐야겠네. 빠른 시일 내에 내 돈을 갚아 주었으면 좋겠네.' 페스탈로치의 부풀었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메르키라는 사람은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에게 바위투성이의 황무지를 소개하여 사게 하였으며, 농장 지배인으로 있을 때에는 일꾼들의 품삯을 가로챘을 뿐 아니라 몰래 농기구를 팔아먹기도 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그런 사실을 알고 농장에서 내보내자, 메르키는 원한을 품고 페스탈로치를 모함하였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페스탈로치는 농장을 처분하여 슐테스 숙부에게 진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이후로 페스탈로치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페스탈로치의 첫 번째 실패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몇 날을 두고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설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페스탈로치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그러고 나자 새로운 힘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무렵 농가에서는 옷감 짜기가 부업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안나도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방직 기계를 한 대 샀습니다. 낮에는 고아들과 함께 농장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방직 기계를 돌려 일하는 동안 그들의 앞날은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터무니없는 소문이 마을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고아들을 도와주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노동력을 빌려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다는군."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페스탈로치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페스탈로치를 욕하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농사일과 공장 일을 못 하게 훼방을 놓았습니다. 노이호프를 떠나가는 고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페스탈로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안나도 쉴새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오. 용서하오..."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어요. 마을 사람들이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안나는 페스탈로치의 손을 어루만지며 위로했습니다. 페스탈로치 부부는 한참 동안 고아들이 떠난 황폐한 농장과 빈 공장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페스탈로치가 29세 때의 일로 그의 두 번째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도 페스탈로치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여보, 우리가 비록 가난하지만 남을 사랑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소.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어려움을 모르고 곱게 자란 당신이 잘 견뎌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오."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마른 빵 한 조각과 냉수 한 모금으로도 견딜 수 있으니까요." "고맙소! 그렇게 말해 주니 용기가 샘솟는 것 같구려." 페스탈로치는 다시 10여 명의 고아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자기 집인 노이호프에 자선 학교를 열었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페스탈로치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면서 얻어먹던 습관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는 이런 생활이 불만스럽기만 했습니다. ‘거지 생활을 할 때에는 놀면서도 편하게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힘들게 일을 하고도 검은 빵과 감자와 푸성귀뿐이라니... 차라리 거지로 살아가는 게 더 낫겠어.’ 이렇게 불평하던 아이들 가운데 아로이스라는 아이는 몰래 자선 학교에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페스탈로치 부부는 힘들게 일하여 거둔 농산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 아이들에게 먹여왔는데,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불평만 했던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즉시 아로이스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마침내 눈 위에 난 조그만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어느 헛간 속에서 자고 있는 아로이스를 발견하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외투를 벗어서 아로이스의 몸에 덮어 주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더욱 추워지자, 페스탈로치는 조심스럽게 아로이스를 품에 안고 체온으로 몸을 녹여 주었습니다. 눈을 뜬 아로이스는 페스탈로치의 얼굴을 보더니, "아버지!"하고 외쳤습니다. 아로이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동안 아이들은 밝은 표정을 되찾았고, 일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페스탈로치의 사업을 도우려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나고,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페스탈로치는 농장 가운데에 자그마한 방직 공장을 세우고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해마다 아이들이 늘어나, 시작한 지 4년이 되던 해에는 식구가 80명이나 되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불빛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얼마 가지 않아 꺼지고 말았습니다. 큰 우박이 두 번씩이나 쏟아져 농작물을 모두 망쳤기 때문에, 농장 식구들은 당장 먹을 것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나가 병이나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직원들도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하나둘 노이호프를 떠나 버렸습니다. 이제 페스탈로치는 혼자서 80명의 아이들을 뒷바라지해야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이를 악물고 이 힘든 상황을 이겨 나가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부모들이 몰려왔습니다. "품삯을 주지 않으면 아이를 데려가겠소." 부모들의 비난은 점점 심해 갔습니다. 그동안 노이호프를 후원해 주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끊자, 공장은 끝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페스탈로치는 학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780년 페스탈로치가 34세 되던 해 봄의 일로, 이것이 페스탈로치의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이제 페스탈로치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거친 땅과 살고 있는 집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습니다. 안나는 병으로 누워 있었으며, 11살 난 외아들 야콥은 몸이 쇠약해서 학교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유리 조각을 줍는 남자. "우리 술래잡기하자." "좋아." "나도 끼워 줘."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골목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놀고 있는 모습을 한 남자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차림새는 너무도 초라했지만, 그의 맑고 부드러운 눈길은 아주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그 남자는 가끔 아이들 사이로 들어가 땅바닥에서 무엇인가를 주워서는 주머니에 넣곤 하였습니다. 이 남자의 행동을 줄곧 눈여겨보고 있던 경찰이 그를 불렀습니다. "여보시오, 잠깐 이리 오시오!" "저 말인가요?" 남자는 곧장 경찰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오? 이름이 뭐요?" 경찰이 차가운 말투로 물었습니다. "하인리히 페스탈로치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경찰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페스탈로치라면 그 무렵에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라는 책을 써서 한창 유명해진 사람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남자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페스탈로치라고? 말도 안 돼! 아까부터 주워서 주머니에 넣은 것이 무엇인지 그거나 어서 꺼내 보시오." "별것 아닙니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머뭇거렸습니다. "어서 꺼내 보시오." "저.. 이것입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본 경찰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깨진 유리 조각이었던 것입니다. ‘미친 사람이로군.’ 경찰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을 주워서 무엇에 쓰려는 것이오?" "버립니다." "어디다가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요. 저기서 놀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맨발인 아이도 있습니다. 혹시 그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이 말을 들은 경찰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이 초라한 남자를 의심했던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자선 학교의 문을 닫은 뒤, 페스탈로치는 여러 가지 슬픈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페스탈로치가 51세 되던 해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어머니께 자식으로서 효도 한 번 제대로 못 해 본 것이 마음에 걸려서 오랫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안나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어머니를 여읜 슬픔 속에서도 아내를 간호해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한 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면 아들 야콥이 결혼하여 손자 고트리브가 태어난 일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귀여운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마음의 여유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모든 절망을 딛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익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소로 가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줍다가 괜한 오해를 받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슈탄스 고아원. 페스탈로치가 52세 되던 해에 이웃 나라 프랑스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는 프랑스 군대가 스위스의 슈탄스라는 곳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무서운 불길이 슈탄스를 뒤덮고 총소리가 끊이지 않자,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난리 통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그런 아이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슈탄스에 고아원을 세우고 페스탈로치에게 슈탄스 고아원의 원장이 되어 달라는 통지를 보내왔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가엾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어디로든 달려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나가 병으로 누워 있는 점이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안나는 그러한 페스탈로치의 마음을 헤아리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 대한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서 슈탄스로 가서 가엾은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세요." 페스탈로치는 안나의 말에 힘을 얻어 슈탄스로 떠났습니다. 슈탄스에 도착해 보니 듣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고아원 건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페스탈로치는 수많은 고아가 맨발로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집이 덜 지어졌더라도 아이들을 받아들이자. 이대로 두었다가는 굶주림과 추위로 모두 죽고 말 거야.’ 페스탈로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집 없는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72명이 모였습니다. 그중에는 전쟁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마음이 아주 빗나가 버린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페스탈로치는 모든 아이를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이 아이 중에 한 명이라도 잘못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페스탈로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페스탈로치의 눈치를 살피며 두려워하던 아이들도 차츰 그의 따뜻한 마음에 이끌려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고아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사랑으로 가르치면 아무리 빗나간 아이라도 착한 아이로 만들 수 있다.’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자, 날이 밝았다! 얘들아, 이제 일어나야지." 아침이면 페스탈로치는 일일이 침실을 돌아다니며 자는 아이들을 깨웠습니다. "어? 내 바지가 없어졌네. 누구야? 누가 내 바지를 가져갔어?"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아이들은 침대에서 눈을 뜨면서부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페스탈로치는 조금도 화를 내는 일 없이 아이들의 시중을 들어 주었습니다. 잠에서 깬 아이들은 먼저 페스탈로치의 어깨로 기어올랐습니다. 또 다른 아이는 페스탈로치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울상을 짓는 아이를 안아서 페스탈로치의 등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면 울상을 짓던 아이는 금세 환하게 웃었습니다. 이것이 슈탄스 고아원의 아침 풍경이었습니다. "자, 먼저 세수를 한 다음 밥을 먹자." 잠시 후, 즐거운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쨍그랑!"한 아이가 수프 접시를 마룻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으앙, 내 수프가 쏟아져 버렸어!" 접시를 떨어뜨린 아이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얘야, 울지 말아라. 내 수프를 나누어 줄게." 페스탈로치는 자기의 수프를 아이에게 덜어 주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실수를 나무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이렇듯 정성을 쏟는데도, 몇몇 아이들은 마음이 비뚤어져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툭하면 싸움질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그런 아이들도 미워하지 않고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너희들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니 차차 고쳐 나가기로 하자." 페스탈로치는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린나무와 같다. 어린나무가 자라 큰 나무가 되도록 하는 것은 어른의 책임이다. 내 마음의 온기로써 이 아이들이 튼튼한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더욱 감싸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지친 몸에도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듯하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에게 일만 시키면서 돈 버는 요령만 가르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생각하여, 일정한 수업 시간을 정해 놓고 공부도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저녁, 페스탈로치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공부를 그만둘까?" "아니요, 공부해요!"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들은 왜 공부를 싫어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가르치는 방법이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뜻도 모르는 것을 무턱대고 외우게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생각하는 능력과 이해력을 길러 주는 것이다.’ 그 무렵 슈탄스에서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페스탈로치의 고아원을 병원으로 바꾸도록 명령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정부의 그 같은 명령에 완강히 반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고아원에서 지내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고아원의 원장이 된 지 겨우 6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고아원을 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정부에서는 허가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페스탈로치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르크도르프 초등학교에 교사 자리가 났습니다. 그는 실망을 털어 내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페스탈로치가 선생님으로 가게 된 학교의 교장은 구두를 만드는 부자였습니다. 그 당시 스위스에서는 넓은 집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초등학교를 열 수 있었기 때문에 구둣방 주인도 교장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페스탈로치가 찾아온 날도 교장 디스리는 뚝딱거리며 구두 굽에 징을 박고 있다가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교실이 하나뿐이라오. 난 구두 만드는 일로 바쁘니 앞으로는 당신이 혼자 학교를 맡아서 꾸려 나가도록 하시오." 교장은 페스탈로치를 훑어보면서 사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이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보잘것없는 영감이로군.’ 이 학교의 선생은 교장과 페스탈로치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부르크도르프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사는 동네가 나뉘어 있어서,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간 곳은 당연히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교장인 구둣방 주인은 성미가 괴팍해서 아이들에게 함부로 욕을 해 댔으며, 장사가 잘 안되면 페스탈로치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페스탈로치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 줄 수 있게 된 것이 기쁠 뿐이었습니다. 구둣방 학교에서 페스탈로치는 5세부터 8세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서 아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아이들을 가르칠 때 교과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상생활의 여러 도구를 다양하게 응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지요?" 하고 페스탈로치가 물으면, "네!"하고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페스탈로치는, "자, 그럼 따뜻한 것으로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칠판에 써 보도록 해요."라고 말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따뜻한 옷’, ‘따뜻한 물’, ‘따뜻한 장갑’ 등의 말들을 칠판에 쓰게 했습니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존중하여 창의성을 키워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교육법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으로 특히 어떤 한 아이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느 날 페스탈로치는 칠판에다 창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은 무엇이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입을 모아, "창문이에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다시, "유리가 몇 장 있지요?"라고 물으며 아이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창문을 공부할 때 그림이 아닌 진짜 창문으로 하면 안 되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페스탈로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맞아,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알려 주고 무조건 외우라고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야. 그보다는 실제로 물건을 보고 만지는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려 주는 것이 참다운 교육이야!’ 페스탈로치는 그때부터 여러 가지 사물을 직접 보여 주면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시청각 교육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좋아했고 성적도 한층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이러한 점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페스탈로치의 인기가 높아지자, 자신이 교장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교장은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엉터리 방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엉터리 교육을 받고 있다는 얘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들이 들고일어나자, 관청에서는 페스탈로치를 이웃 마을에 있는 학교로 옮겨가게 했습니다. 그곳은 부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이번에도 5세부터 7세까지의 어린이 25명을 자기 방식대로 가르쳤습니다. 스위스에서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아이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학력고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페스탈로치가 가르친 아이들의 성적이 다른 학교의 아이들보다 월등하게 우수했습니다. 자연히 페스탈로치의 교육법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탈로치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자, 정부에서는 페스탈로치에게 부르크도르프의 옛 성을 빌려주는 한편, 학교 발전을 위한 보조금까지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1800년, 페스탈로치는 부르크도르프의 성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54세의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의 옆에는 피셔라는 청년이 와 있었습니다. 피셔는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의 관리로 있다가 빈민 학교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페스탈로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마주 앉아 마른 빵과 햄 한 조각으로 새해의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피셔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의 새 교수법은 평판이 굉장하던데요." "아직은 더 연구해야 한다네." "아닙니다. 지난번에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것을 본 헤르바르트 군은, 선생님의 교수법이 언젠가는 세계에 퍼져서 지금까지의 교육 방법을 바꿀 거라고 말하던데요." "헤르바르트 군이야말로 젊고 유능한 교육자이니까 새 교수법의 이론을 세울 거네. 나는 교육에 관한 이론은 전혀 몰라. 다만 열성을 다해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 독일 사람인 헤르바르트는 훗날 철학자, 교육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지만, 이때는 아직 24세의 젊은이였습니다. "헤르바르트 군은 선생님께서 실제의 물건을 가지고서 가르치시는 것에 대해 감동한 모양입니다. 그가 선생님의 교실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교실의 창문을 가지고 학생들과 수업하고 계신 것을 보았답니다." 피셔의 말을 들은 페스탈로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 그 일이라면 내가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네. 그것은 한 학생이 제안한 방법이었지. 나는 그전까지 설명만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었는데, 그 아이는 실제 물건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 나는 깜짝 놀랐지.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야. 아이들의 생각이야말로 발견과 발명의 씨앗이 되는 거야." 1월 말경 크루지라는 젊은이가 고아 28명을 데리고 페스탈로치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두 줄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순간, 페스탈로치는 그들을 하나하나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크루지는 긴 여행으로 고단할 텐데도 자상하게 아이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크루지는 훌륭한 교육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크루지는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크루지는 25살의 청년으로 평소 페스탈로치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난 크루지는 12세 때부터 아버지 대신 장사에 나섰던 까닭에 깊은 학문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세 때에 초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크루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을 가만히 앉혀 놓고 무턱대고 외게 하거나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는 식으로 교육해서는 안 된다.’ 크루지의 생각은 페스탈로치의 새 교육법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페스탈로치를 찾아온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도 이렇게 장래성 있는 젊은이를 만난 것을 행운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페스탈로치의 학교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이끌어 가다 보니 차츰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스탈로치의 학교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따뜻한 집이로군요!" "어쩜, 학교가 이렇게 평화롭고 안락하다니...." 교육 환경이 좋아지자, 학생들의 성적도 향상되었습니다. 그 해 국가에서 주관하는 학력고사에서 페스탈로치가 몸담은 학교의 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새 교육법의 성공으로 인해 정부가 주는 상금과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페스탈로치는 또다시 자선 학교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교부 장관에게 허가를 청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보조금도 지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페스탈로치의 가슴은 의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야콥의 죽음과 계속되는 시련. 그가 새로운 학교를 세울 희망에 부풀어 있을 무렵, 외아들 야콥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페스탈로치는 편지를 받자마자 곧바로 노이호프로 달려갔습니다. 야콥은 눈을 감은 채 의식이 없었습니다. 의사도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그동안의 병간호에 지쳐 있는 아내와 며느리를 쉬게 하고, 야콥의 머리맡에 앉았습니다. 바싹 야윈 아들을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야콥, 제발 살아만 다오. 늙은 아비와 어미에게 슬픔을 주지 말아 다오." 이렇게 기도하며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간호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야콥의 병은 점차 나아져 갔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페스탈로치에게 학교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병든 아들의 곁을 떠나기가 안쓰러웠지만,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학교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돌아가고 난 후 야콥의 건강은 다시 나빠졌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01년 8월, 야콥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야콥이 세상을 떠나자 남은 가족들은 짐을 정리하여 부르크도르프의 페스탈로치에게로 왔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어 마음에 여유가 생긴 페스탈로치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들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가와 교육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부르크도르프는 새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페스탈로치의 이름은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위스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사사건건 참견하더니, 마침내 스위스의 이름 있는 사람들을 파리에 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때 페스탈로치도 그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나폴레옹을 만나서 자기의 의견을 당당히 말하려고 했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맨 먼저 아이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로 페스탈로치를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이런 나폴레옹의 태도에 실망하여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스위스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한편, 페스탈로치가 58세 되던 해에 스위스는 새 정부로 바뀌었습니다. 새 정부는 교육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이러한 정부를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보조금을 중단하고 부르크도르프의 성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4년여 동안 고생하며 이룩해 놓은 그의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7명의 교사와 67명의 아이를 데리고 뮌헨부흐제의 학교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의 교장과 뜻이 맞지 않아, 얼마 후 교사 3명과 8명의 아이만 데리고 이베르동이라는 곳으로 옮기는 불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베르동의 영광과 좌절. 이베르동에서는 페스탈로치를 동정하고 반겨 주었으며 관청에서는 옛 성터를 학교로 쓰라고 허가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페스탈로치가 이베르동으로 옮긴 다음 해 7월, 뮌헨부흐제에 남아 있던 교사와 아이들이 모두 이베르동으로 몰려왔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한편 1807년 10월 14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나폴레옹의 폭풍 같은 군대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프랑스 군대의 눈을 피해 눈짓과 귀엣말을 주고받으며, 유명한 피히테의 연설을 듣기 위해 곳곳에서 모여들었습니다. 피히테는 그 당시 예나 대학의 교수로 있던 애국자였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독일의 애국자라면 닥치는 대로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따라서 피히테도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당했으나, 조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피히테는 강연회장을 돌아다니며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독일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지금 적은 우리 조국을 짓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여, 온 국민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국난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히테의 우렁찬 목소리의 독일 국민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의 연설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교육의 힘에 기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와 같은, 개인의 이익이나 출세만을 위한 그런 교육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을 지고 일어설 다음 세대의 교육은, 어디까지나 나라를 사랑하며 굳센 뜻을 단련하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육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분명히 대답하겠습니다. ‘저기 스위스의 이베르동에 있다!’고 말입니다. 사랑의 대 교육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씨가 실시하고 있는 새 교육 말입니다. 사랑으로 어린이를 인도하고, 힘찬 의지를 가르치는 교육만이 우리 독일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피히테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습니다. 독일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페스탈로치의 교육법을 배우기 위해 이베르동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독일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은 잠깐 독일을 지배했으나, 페스탈로치의 교육은 쇠약해진 독일을 되살려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때 이베르동 학교도 설립 이래 가장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페스탈로치의 나이 61세부터 64세까지의 4년 동안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 2백 명에 가까워졌는데, 그중에는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러시아, 에스파냐 등지에서 학교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아이들이 8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여러 번의 실패를 겪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성공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커지자,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규칙도 많아지고 가정과 같은 따뜻함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페스탈로치를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모두가 진심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외국에서 온 부잣집 아이들은 게으른 데다가 규칙을 어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나의 교육은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지금 빗나가고 있다. 어서 빨리 올바른 길을 되찾아야 한다.’ 페스탈로치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페스탈로치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을 때, 니이데러와 시미트라는 교사 사이에 세력 다툼이 벌어져 학교는 점점 기울어 갔습니다. 니이데러는 학식이 깊고 영리할 뿐만 아니라 글을 잘 쓰고 말도 잘하여 페스탈로치가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이데러는 페스탈로치의 새 교육 방법을 이론으로 정리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자기 생각을 지나치게 포함해 페스탈로치의 원래 뜻에서 벗어나게 만든 점이 많았습니다. 또 시미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르크도르프의 학생으로 들어왔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3년 후에는 조수로 뽑혔습니다. 시미트의 교육 방법은 훌륭했지만, 그는 항상 최고의 자리에 서려고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지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이데러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미트도 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중간에서 화해시키려고 애썼으나 번번이 허사였습니다. 결국 시미트는 학교를 그만두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이것은 페스탈로치가 65세 때의 일로,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시미트가 떠난 후 학교는 잠잠해졌습니다. 니이데러는 시미트가 떠난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느꼈는지, 전보다 한층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한편, 피히테의 뜨거운 호소에 따라 페스탈로치의 새 교육 방법을 받아들인 독일은 드디어 나라의 힘을 되찾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독일 출신 교사들이 모두 귀국해 버려 이베르동 학교에는 교사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니이데러는 이론에는 밝았지만 실제로 일을 하는 데는 시미트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베르동에는 시미트가 있어야 해. 나 혼자서 하기엔 역부족이었어.’ 이렇게 생각한 니이데러는 시미트를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결국 마음을 돌린 시미트는 5년 만에 다시 이베르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오, 돌아왔구나! 사랑하는 나의 아들 시미트!" 70세의 노인이 된 페스탈로치는 시미트를 두 팔로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미트, 잘 와 주었네. 지난 일은 덮어두고 이젠 이베르동만을 생각하며 함께 일해 보세."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페스탈로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니이데러와 시미트는 서로 용서를 비는 의미로 악수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된 것처럼 보였으나, 페스탈로치에게 또다시 불행이 닥쳤습니다. 1815년의 몹시 추운 겨울날, 아내 안나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감기가 폐렴으로 번져 76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안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깊었습니다. 페스탈로치와 결혼한 후 46년 동안을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의 인자한 어머니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이런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이름을 남긴 교육자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모두 나의 아내 안나의 덕택입니다." 한편 학교로 다시 돌아온 시미트는 기울어진 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느라 몹시 바쁘게 생활했습니다. ‘학교의 명성을 되찾으려면 여러 가지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시미트는 교사들의 월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일부 교사들은 그만두게 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많은 교사들의 원성과 반발을 샀습니다. 교사들은 페스탈로치를 존경하면서도 시미트가 미워서 하나둘 학교를 떠났습니다. 온순하고 착한 크루지마저 떠나 버려 결국 시미트와 니이데러만 남게 되었습니다. 남은 두 사람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이들은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둘 잇달아 학교를 그만두었고, 니이데러도 얼마 후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20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페스탈로치의 학교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교육자. 79세의 할아버지가 된 페스탈로치는 이제 노이호프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노이호프는 페스탈로치가 50년 전의 청년 시절에 농민으로서의 꿈을 키웠던 곳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농민 학교를 연 곳이기도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노이호프에 농민 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가진 돈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학교를 세우는 대신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시기에 '백조의 노래'와 그의 한평생 일들을 기록한 '운명'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어느덧 노이호프에 추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날씨가 추워지자, 페스탈로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날마다 자갈을 주워다가 마당에 깔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탈로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던 손자 고트리브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자갈은 왜 까는 거예요?" "이제 얼마 후면 눈이 내리기 시작할 텐데, 가난한 사람들은 마루도 깔리지 않은 맨바닥에서 그대로 잠을 잔단다. 그러니 얼마나 춥겠니? 그런데 자갈을 깔아 습기를 막고, 그 위에 거적을 두서너 장 깔면 추위를 막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래서 그것을 실제로 시험해 보고 괜찮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란다." 페스탈로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미처 열매를 맺기도 전에 페스탈로치는 병으로 자리에 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노이호프에 학교를 세우려던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말입니다. "나는 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해 다오. 너희들에게도 하느님의 축복이 있길 빈다." 페스탈로치는 손자 고트리브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81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페스탈로치의 관은 가난한 농부들이 메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와 고아원의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가난한 농부들과 아이들이 참석한 조촐한 장례식은 소박하게 살다 간 페스탈로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이를 위해 몸 바친 페스탈로치.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우리에게 참다운 교육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빈민의 구제자, 국민을 깨우친 사람, 고아의 아버지, 인류의 교사... 노이호프에 있는 그의 묘비에 새겨진 말처럼 페스탈로치가 실천한 사랑의 교육은 지금도 전 세계 교육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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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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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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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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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스필버그. 스티븐 스필버그는 1947년 12월 18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필버그의 아버지 아놀드 스필버그는 컴퓨터 설계 및 전기를 다루는 기술자였고, 어머니 리아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티븐, 동생들을 잘 돌봐 주렴." "네! 걱정 마세요!" 스필버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원의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고, 집안은 불까지 나가 버렸습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스필버그의 세 여동생 앤, 슈, 낸시는 캄캄한 거실에서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오빠는 어디 있지? 오빠! 오빠!" 세 자매는 큰 소리로 스필버그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엉엉! 오빠는 도대체 어디 간 거야?" 결국 세 자매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습니다. "오빠야?" 문 쪽을 바라보던 세 자매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흐흐흐! 어서 나와 함께 가자!" 미라가 세 자매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엄마야!" 세 자매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앗! 얘들아!" 미라는 세 자매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얘들아, 오빠야. 얼른 일어나!" 스필버그가 동생들을 놀려 주려고 장난을 쳤던 것입니다. 스필버그의 몸에는 화장지가 둘둘 감겨 있었습니다. 스필버그가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세 자매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앗! 큰일 났다!' 스필버그는 동생들을 더 흔들어 보았습니다. "괴, 괴물이다!" 미라로 변장한 스필버그를 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저예요." "아니, 이 녀석이." 스필버그를 살짝 흘겨보던 어머니는 기절한 딸들을 보고는 의사 선생님을 부르러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스티븐, 지금 정전이 된 거니?"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제가 두꺼비집을 내려서 그래요." "얼른 불을 켜라. 그리고 그 화장지 좀 떼어내라." "네." 그제야 스필버그는 몸에 두른 화장지를 떼어냈습니다. 얼마 후, 의사 선생님이 스필버그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스필버그의 동생들은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장난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스필버그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와! 신기하다." 텔레비전에서는 화성인이 사람들의 목을 잘라서 어항에 보관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스필버그의 머릿속에는 또 이상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한번 해 볼까?' 스필버그는 동생들을 불렀습니다. "얘들아, 이리 좀 와봐!" "오빠, 왜?" 동생들은 스필버그에게로 왔습니다. "오빠가 재미있게 해 줄게." "정말? 어떻게?" 동생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스필버그를 바라봤습니다. "자, 한 명씩 들어가." 스필버그는 벽장 문을 열고 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동생들은 스필버그의 말대로 벽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스필버그는 벽장 안에 어항도 넣었습니다. 동생들이 모두 들어가자, 스필버그는 벽장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아악! 오빠, 꺼내 줘!" "오빠, 무서워!" 동생들은 벽장 안에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잠시 후, 스필버그는 짓궂게 웃으면서 벽장 문을 열었습니다. "어때? 재미있었지?" "오빠는 정말 못됐어!" 동생들은 스필버그를 흘겨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필버그의 장난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스필버그의 동생들은 스필버그가 어떤 장난을 칠지 매일매일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처음으로 찍은 비디오. 어느덧 스필버그는 열두 살이 되었습니다. 스필버그의 가족은 호숫가로 소풍을 가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8mm 비디오카메라를 선물했습니다. "이걸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찍어 봐요." "그거 정말 재미있겠는걸." 아버지는 무척 흐뭇해하셨습니다. 잠시 후, 스필버그의 가족은 호숫가에 도착했습니다. "야! 저기 꽃 좀 봐!" 스필버그의 동생들이 꽃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난 숲으로 가야지!" 스필버그는 살금살금 숲속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산딸기를 따기도 하고, 곤충들을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얘들아, 우리 비디오 찍자!" "네." 스필버그의 동생들은 한달음에 호숫가로 달려왔습니다. 점심을 준비하던 어머니도 아이들 곁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아무 대답 없이 수풀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스티븐! 얼른 이리 오렴. 비디오 찍자!" 아버지가 불러도 스필버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 녀석이 왜 그러지?"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나도 비디오를 찍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비디오를 찍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버지는 비디오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비디오를 찍었습니다. '난 영화처럼 찍을 수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스필버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스티븐, 어서 가서 비디오를 찍자." 하지만 스필버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에요? 제가 찍어도 돼요?" 스필버그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자, 어서 가자! 엄마랑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는 스필버그를 호숫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하셔야 해요. 모두 자리를 잡고 정지해 있다가 제가 '액션'이라고 소리를 치면 자연스럽게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면 돼요."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은 스필버그가 시키는 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 시작합니다! 액션!" 스필버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좋아요! 아주 잘하셨어요!" 가족들이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자, 스필버그는 무척 신이 났습니다. "음, 이번에는 어떻게 찍을까?" 가족들도 무척 재미있어했습니다. "얘들아, 이번엔 이쪽으로 와 봐." 스필버그는 동생들을 꽃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 꽃향기도 맡고, 이리저리 뛰어다녀 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중요해." "알았어, 오빠." 동생들은 스필버그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아주 잘했어!" 스필버그는 연신 싱글벙글했습니다. 스필버그는 주변의 풍경도 아름답게 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는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스필버그가 찍은 비디오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걸 정말 스티븐이 찍었단 말이에요?" "이 녀석! 정말 대단한걸!" 사람들은 비디오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스필버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스티븐, 정말 훌륭하구나. 이 정도의 실력이면 나중에 영화를 찍어도 되겠구나." "고맙습니다, 할머니! 전 꼭 좋은 영화를 만들 거예요." 스필버그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놀림. 아버지가 직장을 자주 옮겼기 때문에, 스필버그의 가족은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스필버그의 가족은 유대인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힘든 학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날씨가 아주 더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스필버그의 반 아이들은 1,0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스필버그와 존은 여전히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운동에 전혀 소질이 없었고, 존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존, 이겨라! 존, 이겨라!" 아이들은 모두 존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존의 40미터 정도 앞에서 힘겹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존, 조금만 더 힘을 내!" 아이들의 응원을 들으며 존은 있는 힘껏 달렸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계속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스필버그의 머릿속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는 어떤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수영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그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 내가 꼴등을 하더라도 존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자!' 스필버그는 존에게 져 주기 위해서 일부러 넘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넘어져야 진짜 같을까?' 스필버그는 달리는 내내 자연스럽게 넘어질 궁리만 했습니다. 거짓말로 넘어진 것을 알면 존이 기분 나빠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앗!" 딴생각을 하던 스필버그는 정말로 발이 뒤엉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야! 스티븐이 넘어졌다!" "이때야. 존, 빨리 뛰어!" 아이들은 존에게 소리쳤습니다. 스필버그가 일어났을 때, 존은 어느새 스필버그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이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돼' 스필버그는 존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비틀거리며 달렸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스필버그가 많이 앞서갔지만, 차츰 간격이 좁혀졌습니다. 스필버그가 조금씩 더 천천히 달렸기 때문입니다. "존, 조금만 더!" "힘내, 존!" 아이들은 마지막까지 큰 소리로 존을 응원했습니다. 결승선이 얼마 남지 않자, 존은 있는 힘을 다해 스필버그를 앞질렀습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스필버그보다 먼 저 결승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만세! 존이 이겼다!" "넌 정말 대단해!" 아이들이 존에게 우르르 달려와 한마디씩 칭찬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후, 스필버그는 운동장에 혼자 남았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은 날 더 놀리겠지?' 그 후로 아이들은 스필버그를 더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존에게 커다란 기쁨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맞아.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코가 예쁘면 놀리지 않겠지? 스필버그는 매일 밤 자신의 "매부리코를 다른 아이들처럼 예쁜 코로 바꿔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 코를 예쁘게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 아이들이 절 놀리지 않을 거예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스필버그는 고무테이프를 코에 붙이고 잤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 코도 예쁘게 변할 거야.' 스필버그는 기대에 부풀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온 집안이 스필버그의 비명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내 코! 내 코!" 스필버그는 코를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스필버그의 코는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엉엉!" 스필버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학교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날 더 놀릴 거야.' 스필버그의 염려대로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스필버그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머, 스티븐 코 좀 보래요!" "우헤헤! 저게 뭐야?" 아이들은 스필버그를 둘러싸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때, 봅이 스필버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봅은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셌습니다. 봅은 항상 스필버그를 골탕 먹였습니다. "이 유대인 녀석아! 내가 안 아프게 해 줄까?" 스필버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야! 눈 감아! 내가 감쪽같이 낫게 해 줄 테니까!" 봅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소리쳤습니다. 스필버그는 눈을 꼭 감았습니다. 퍽! 잠시 후, 스필버그의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하하하!" "깔깔깔!" 아이들은 스필버그가 코피를 흘리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배를 움켜잡고 웃었습니다. 비디오카메라로 친구를 만들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스필버그는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못된 봅에게 벌을 내려 주세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스필버그에게 말했습니다. "스티븐, 친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봅을 친구로 만들 거라." "봅이랑 어떻게 친구를 해요?" "봅과도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스필버그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런데 스필버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건가? 봅이랑 어떻게 친구가 되라는 거야?' 스필버그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때, 문득 책상 위에 있던 비디오카메라가 눈에 띄었습니다. '맞다! 나에게는 비디오카메라가 있었지!' 다음 날, 스필버그는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봅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뭐야? 나한테 할 말 있어?" 봅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습니다. "저, 저기, 봅. 내 영화에 출연해 주지 않을래?" 스필버그는 더듬거리며 겨우 말했습니다. "뭐, 영화? 네가 영화를 찍는다고? 푸하하!" 봅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스필버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응,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영화를 만들 거야. 네가 존 웨인 같은 주인공 역할을 맡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존 웨인?" "응! 너랑 잘 맞는 역할일 것 같지 않니?" 스필버그는 봅을 살살 달랬습니다. "좋아!" 봅은 스필버그와 영화를 찍기로 했습니다. "봅! 굴러! 빨리 굴러 봐!" "뭐야? 나보고 구르라고?" 봅은 총을 집어던지고, 스필버그를 때리려 했습니다. “찍기 싫으면 하지 마. 나도 너랑은 안 해!" 스필버그는 무서움을 꾹 참고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그러자 봅은 때리려던 손을 내렸습니다. "알았어. 다시 하자.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봅은 다시 총을 들고 산을 올랐습니다. "거기서는 굴러야 한다니까!" 스필버그가 소리치자, 봅은 산을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넘어져 봐!" 스필버그는 그렇게 무서워하던 봅에게 마구 명령을 내렸습니다. 카메라 앞에서는 봅도 꼼짝을 못 했습니다. 그 후, 스필버그와 봅은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더 이상 스필버그를 괴롭히거나 놀리지 않았습니다. "스필버그, 나도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나도 네 영화에 출연시켜 줘." 친구들은 스필버그에게 영화에 출연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헤헤, 이 비디오카메라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겠군.' 나중에 꼭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스필버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첫 번째 장편 영화 불빛. 스필버그는 시간이 갈수록 영화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어느 날, 스필버그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400달러만 빌려주세요." "뭐?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니?" "영화를 만들 거예요." 스필버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스필버그에게 400달러를 주었습니다. 스필버그의 고집에는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꼭 좋은 영화를 만들게요." 스필버그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날부터 스필버그는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스필버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머니, 더 빨리 달리세요!" "헉헉! 스티븐, 조금만 쉬자." "안 돼요! 빨리요!" 스필버그는 카메라를 들고 어머니를 뒤쫓았습니다. 어머니는 지프를 몰고 험한 산길을 달려야 했습니다. 또, 헬멧을 쓰고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꾹 참았습니다. 스필버그의 막내 동생 낸시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낸시는 몇 시간째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낸시! 눈 가늘게 뜨면 안 돼. 크게 뜨고 봐!"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늘게 뜨면, 바로 스필버그의 핀잔이 들려왔습니다. 낸시는 어쩔 수 없이 태양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한번은 스필버그가 이웃 아저씨에게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찍고 싶어요." "뭐라고? 안 된다. 너 같은 꼬마가 그 위험한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니?" 그 아저씨는 비행장에 근무하였습니다. "다쳐도 괜찮아요. 꼭 그 장면을 찍어야 한단 말이에요." 스필버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네 고집은 정말 대단하구나. 알았다. 대신 잠깐 동안만이야. 알았지?"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허락했습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스필버그는 펄쩍펄쩍 뛰어 활주로로 나갔습니다. "이야! 정말 멋있다!" 스필버그는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륙하는 비행기를 찍어댔습니다. 그때, 관제소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관제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영화 촬영을 하고 있으니 잠시 동안 비행기 운행을 중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필버그는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스필버그는 폭발 장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찍지? 진짜 폭탄을 쓸 수는 없고.' 그때, 어머니가 스필버그를 불렀습니다. "스티븐! 이리 와서 엄마 좀 도와줄래?" 어머니는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밀가루 좀 부어 줘." "이렇게요?" 스필버그는 조심스럽게 밀가루를 부었지만, 그만 쏟고 말았습니다. 밀가루가 튀는 모습을 보던 스필버그는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스티븐, 밀가루 안 붓고 어딜 가니?" 어머니가 스필버그를 불렀지만, 스필버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습니다. 스필버그는 정원으로 나가서 땅을 팠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스필버그는 아버지가 아끼시던 장미나무까지 파헤쳤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퇴근해서 돌아왔습니다. "스티븐, 장미나무를 왜 파헤치고 있니?" "아버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는 화가 나긴 했지만, 스필버그의 고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구멍을 두 개 파고, 그 사이에 밀가루를 뿌린 합판을 깔았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로 합판을 숨겼습니다. "헤헤, 이제 됐다!" 스필버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세요. 합판 위로 한 번만 뛰어 보세요." "응?" "폭발 장면을 찍을 생각이거든요. 한번만요!"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합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밀가루가 연기처럼 날렸습니다. "야호! 성공이다!" 스필버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기뻐했습니다. 집 안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도 함께 기뻐해 주셨습니다. "우리 스티븐은 정말 머리가 좋단 말이야." "그래, 여기서는 어떤 장면을 찍을 거니?" 아버지가 스필버그에게 물었습니다. "음, 폭발이 일어난 곳을 병사들이 달려가는 거예요. 병사들은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이지요!" 스필버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습니다. "허허, 그 녀석!" 아버지는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병사들의 옷을 입고 합판 위를 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영화가 불빛 (Firelight)입니다. 1964년 3월 24일, 스필버그는 피닉스 극장에 불빛을 올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보러 왔습니다. 덕분에 스필버그는 500달러를 벌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스필버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티븐, 정말 대단하구나." "스티븐, 넌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더 열심히 공부하거라. 알았지?" "네! 고맙습니다!" 그 후로 스필버그는 줄곧 영화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스필버그는 피닉스를 떠나 사라토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스필버그의 고교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사이가 나빠져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의 괴롭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스필버그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좋은 영화학과가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USC)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UCLA)에 지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롱비치 캠퍼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영문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스필버그에게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스티븐, 우리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자." "유니버설 스튜디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잖아." "버스로 여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스필버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도착한 스필버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와! 정말 대단하다!" 스필버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영화 속에서나 보던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직접 만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스필버그는 버스 안에서만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버스 안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오실 분은 다녀오세요!" 스필버그는 친구와 함께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내가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저기에 숨을 테니까 망 좀 봐줘." "뭐라고?" "버스 안에서만 보려니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직접 보고 갈 거야." 스필버그는 소품이 쌓여 있는 곳에 숨었습니다. 친구는 스필버그를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는 스필버그를 남겨 둔 채 떠났습니다. 스필버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습니다. "나도 여기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후, 스필버그는 3개월 동안 매일같이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들어갔지만, 나중에는 경비원에게 아는 척까지 하며 자연스럽게 드나들었습니다. 스필버그는 늘 말쑥한 옷차림에 서류 가방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에 경비원은 스필버그가 영화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가방 안에는 샌드위치와 우유가 들어 있었답니다. 어느 날, 스필버그는 비어 있는 사무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흠, 쓸 만한걸?' 스필버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자신의 사무실을 꾸몄습니다. 그곳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 사무실 23C'라는 곳이었습니다. '훌륭한걸' 그런데 그 사무실에는 전화가 없었습니다. 스필버그는 망설이다가 전화 교환대로 갔습니다. "이번에 사무실을 차린 사람입니다. 전화 좀 설치해 주십시오." 스필버그가 당당하게 말하자, 교환대에서는 의심하지 않고 전화를 설치해 주었습니다. 그 후로 스필버그는 2년 동안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드나들었답니다. 그곳에서 스필버그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스물한 살의 젊은 영화감독. 어느 날, 스필버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간부들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만든 8mm 영화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 좀 떼어 주십시오." 스필버그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간부들은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자네가 영화를 찍었다고? 그것도 8mm를?" "16mm나 35mm 영화를 가져오면 몰라도, 8mm를 봐 달라니!" 간부들은 콧방귀를 뀌어댔습니다. "이봐! 다음에 다시 오게!" 스필버그는 영화를 보여 주지도 못한 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래, 16mm 영화를 만들어 보자!' 스필버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6mm 필름과 카메라 대여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학교의 카페테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영화가 앰블린입니다. 이 영화로 스필버그는 애틀란타와 베니스 필름 페스티벌에서 학생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어느 날, 유니버설 필름 라이브러리의 직원인 척 실버가 앰블린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해!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다니!" 척 실버는 무척 감탄했습니다. 척 실버는 TV 제작 담당 중역인 시드 샤인버그에게 스필버그의 영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스필버그 군의 앰블린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래요? 나도 한번 봐야겠군." 앰블린을 본 시드 샤인버그는 곧바로 척 실버를 찾아왔습니다. "스필버그란 친구를 한번 만나보고 싶소." 며칠 후, 마침내 스필버그는 척 실버의 소개로 시드 샤인버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스필버그입니다." 척 실버가 시드 샤인버그에게 스필버그를 소개했습니다. "오, 그래?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정말 반갑네." 시드 샤인버그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제 영화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필버그는 시드 샤인버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시드 샤인버그는 스필버그를 반갑게 맞아 주긴 했지만, 첫인상은 그리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촌스러운 사람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약간 미심쩍긴 했지만, 시드 샤인버그는 스필버그와 계약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275달러로 계약을 하세." 시드 샤인버그는 미소를 지으며 스필버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시드 샤인버그에게 말했습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21살이 되기 전에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약속해 주십시오." 스필버그의 표정에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알았네. 자네가 감독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시드 샤인버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며칠 후, 시드 샤인버그가 스필버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군. TV 시리즈 나이트 갤러리를 맡아서 해 보게."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스필버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제작진이나 배우들이 자신을 깔보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작진들과 배우들은 스필버그의 말을 잘 따라 주었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공들여 촬영한 그 영화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형편없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시 촬영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스필버그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휴, 영화고 뭐고 다 그만둘까?' 스필버그는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다시 용기를 내었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난 꼭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스필버그는 계속해서 TV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직 계약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필버그의 주요 성공작 중 하나로 책에 의한 살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7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형사 콜롬보 시리즈의 초기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작품은 결투입니다. 이 작품 역시 텔레비전용이었지만 나중에 극장에서 개봉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결투는 평범한 사업가와 살인 트럭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살인 트럭 운전사 때문에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스필버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투의 성공으로 스필버그는 첫 극장용 영화 슈가랜드 특급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주연 배우 골디 혼의 뛰어난 연기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골디 혼은 이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대표 배우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평론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스필버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폴린 카엘이라는 평론가는 스필버그, 시시한 소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마법사 감독'이라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식인 상어 죠스. 죠스를 만들기 시작한 후, 스필버그는 크나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포기해 버릴까?" 스필버그는 5개월 동안 바다에 나가서 죠스를 찍었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만두었고, 제작비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촬영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기계 상어 한 마리가 가라앉아 버렸고, 55일로 약속했던 촬영 날짜는 120일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책상 앞에 앉아 고민을 하였습니다. 제작비를 받아야 하는데, 무슨 핑계를 대지?' 그때, 영화사 간부 데이비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영화는 그만 접도록 하자고! 400만 달러면 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벌써 800만 달러도 넘게 썼다고! 더 이상은 돈을 줄 수가 없네. 이쯤에서 그만둬! 데이비드는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습니다. 스필버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죠스는 내가 가지고 가겠네. 전시관에 내놓기로 했거든." "하지만, 저." 스필버그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데이비드를 설득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촬영 감독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감독님! 큰일 났습니다. 브루스가 가라앉았어요." "뭐?" 브루스는 죠스를 찍기 위해서 만든 기계 상어였습니다. 특수효과팀은 식인 상어를 촬영하기 위해서 기계 상어 세 마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기계 상어의 이름이 바로 브루스였습니다. 첫 번째 것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째 것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헤엄쳤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것은 몸 전체가 나오는 장면과 물속 장면에 쓰였습니다. 브루스는 물 밖에서는 잘 움직이다가도 물속에만 들어가면 자꾸 고장이 났습니다. "안 돼!" 스필버그는 정신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데이비드는 기가 막혔습니다. "오늘로 끝이야! 다시는 당신과 영화를 찍지 않겠어!" 스필버그는 브루스가 가라앉아 버린 바다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작진들 역시 실망에 잠겨 있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깊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스필버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감독님, 설마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난 다른 영화에 출연하면서 더 어려운 일을 겪었어요. 다시 기운 내서 촬영합시다. 어서 사람들을 설득해 봐요." 그는 죠스에 출연하는 배우 드라이퍼스였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감독님, 다시 한번 해 보자고요! 데이비드도 속으로는 감독님이 포기하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드라이퍼스는 스필버그를 설득했습니다. "그래요. 다시 해 봅시다!" 스필버그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한 마리 남은 기계 상어도 자주 고장 났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상어의 모습을 직접 보여 주기보다는 상어가 있다는 암시를 주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죠스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려 했던 죠스가 5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죠스 이야기를 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스필버그는 죠스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실패와 성공. 1979년, 스필버그는 1941이라는 코미디 영화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스필버그는 몹시 낙담했습니다. 죠스의 성공 이후, 스필버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들끓었었는데 1941이 실패하자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모두가 스필버그를 외면할 때, 조지 루카스만은 스필버그 곁에 남아 위로해 주었습니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로 성공을 거두어 죠스의 신화를 깨뜨린 감독이었습니다. 어느 날, 조지 루카스가 스필버그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 줄 아나? 바로 하와이야! 자네도 여기서 휴가를 보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걸세. 당장 건너오게!" 스필버그는 당장 하와이로 갔습니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해변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007 같은 영화를 찍고 싶어." 스필버그가 말했습니다. "그래? 007 이야기에 모험담을 섞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스필버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루카스가 자신을 비웃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동의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디아나 존스의 시초가 되는 레이더스의 줄거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영화를 맡겨 줄 영화사가 있을까?" "그런 걱정은 말게! 자네한테는 나 루카스가 있지 않은가!" 루카스는 스타워즈의 성공 이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스필버그는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대신 나와 약속 하나만 하세. 스타워즈로 번 돈 10분의 1과 레이더스로 번 돈 10분의 1을 교환하는 거야. 어때?" "뭐라고? 그렇게 하면 자네가 손해 볼 텐데." 스필버그는 루카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야, 아마 자네가 손해를 볼걸?" 루카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습니다. "참, 레이더스가 성공하면 꼭 속편을 함께 만들도록 하세." "좋아! 전보다 더 열심히 만들 거야." 스필버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새 힘을 얻은 스필버그는 온 힘을 쏟아서 레이더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레이더스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스필버그 곁은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공상의 세계, 그리고 E.T. 스필버그는 늘 공상 과학 영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지와의 조우와 ET는 스필버그의 영화 중에서도 더욱 큰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 각본을 직접 썼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는 스필버그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스필버그는 월트 디즈니의 피노키오의 주제가인 '별에 소원을 빌면'을 듣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미지와의 조우에서 외계인들은 소리와 빛으로 의사 소통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화가 완성되자,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5년 후, 스필버그는 또 다른 공상 과학 영화 E.T.를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리슨 포드의 부인인 멜리사 매디슨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했습니다. 멜리사 매디슨은 스필버그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E.T.의 시나리오를 완성했습니다. E.T.는 외계인 E.T.와 지구에 사는 소년 엘리엇 사이의 깊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는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엇의 아버지도 스필버그의 아버지처럼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E.T.의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못생긴 외계인과 아이의 이야기로는 돈을 벌 수 없다며 제작자들이 나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필버그는 유니버설과 다시 손을 잡고 영화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완성되자, 1,1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7억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올렸습니다. 또한, 20년 후에 재개봉되면서 미국에서만 4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평론가들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E.T.가 아카데미 9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음향상, 촬영상, 음향 효과상, 시각효과상, 작곡상, 음향효과 편집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카데미가 스필버그를 질투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84년, 스필버그는 레인 맨을 준비하였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작품이에요." "이 영화라면 감독님도 충분히 아카데미 상을 탈 수 있을 거예요."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스필버그는 6개월 동안 배우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을 만나며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루카스가 레이더스의 속편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 왔습니다. '흠,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레인 맨이라면 나도 아카데미 상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스필버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곧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누구 덕분에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었겠어? 당연히 루카스와 함께해야 해!' 스필버그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레비슨에게 레인 맨을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루카스와 함께 레이더스의 속편인 인디 아나 존스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고, 아카데미에서도 시각효과상을 수상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를 찍으면서 스필버그에게는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케이트 캡쇼를 만난 것입니다. 두 사람은 1991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휴머니즘이 깃든 영화. 1985년, 스필버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주제의 영화 컬러 퍼플을 내놓았습니다. 이 영화는 앨리스 워커의 소설을 각색한 것인데, 실리라는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실리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에게 혹사당하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언니와 슬픈 이별을 합니다. 이렇게 험난한 인생을 살지만 실리는 강인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며, 언니와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흑인이었고, 줄거리는 우울했습니다. 사람들은 환상적인 영화를 주로 만들던 스필버그가 무겁고 심각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로움을 당했던 스필버그는 주인공 실리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를 꼭 내가 만들어야 하나?' 사실 스필버그도 자신이 컬러 퍼플을 감독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공동 제작을 맡기로 하였습니다. 스필버그는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퀸시 존스에게 물었습니다. "이 영화를 여성 감독이나, 흑인 감독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퀸시 존스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E.T.를 만들 때 외계인이 되었던 건 아니잖아요. 힘내서 해 봅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과 영화를 비난했습니다. 흑인 남성을 나쁘게 묘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쓰이는 다양한 색상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00년대와 1950년대 사이의 남부 흑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혹평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혹평 속에서도 컬러 퍼플은 전 세계적으로 1억 4,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 이 영화에 출연했던 우피 골드버그와 오프라 윈프리는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우피 골드버그는 컬러 퍼플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스필버그에게 감독상을 안겨 주었지만, 아카데미상에서는 역시 스필버그를 외면했습니다. 2년 후, 스필버그는 태양의 제국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필버그가 흥미 위주의 영화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89년에 발표한 인디아나 존스3 최후의 성전에는 재미, 흥미, 통쾌, 순수, 진지함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사랑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최고의 스타들이 대거 등장한 후크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후크 선장 역에 더스틴 호프만, 피터팬 역에 로빈 윌리엄스, 팅커벨 역에 줄리아 로버츠 등 이름난 배우들이 총출연했습니다. 이런 배우들의 힘으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실패작으로 꼽았습니다. 돌아온 공룡들, 쥬라기 공원. 어느 날, 스필버그는 영화사 간부인 마티니를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공룡 이야기를 찍고 싶습니다." "뭐라고? 공룡? 그걸 누가 보겠나?" 마티니는 기가 막혔습니다. "한 번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스필버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좋아,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세." 결국 마티니는 스필버그의 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스필버그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자, 잠깐! 뭐? 공룡이 200마리나 나와?" 마티니는 깜짝 놀라 되물었습니다. "공룡 200마리가 초원을 달리는 장면입니다." "공룡 200마리를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그 제작비면 관객이 얼마나 들어야 하는지 자네가 계산이나 해 봤나? 이건 절대 안 되는 일이야!" 마티니는 펄쩍 뛰었습니다. "전처럼 모형을 만들어서 찍는 게 아닙니다." "그럼?"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스필버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스필버그가 새로운 기법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소문은 널리 퍼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스필버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화사에서도 스필버그에게 영화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쥬라기공원은 미국 흥행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9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인형이나 장신구를 통해서 벌어들인 돈만도 우리 돈으로 10억이 넘었습니다. 영예를 안겨 준 쉰들러 리스트. 어느 날, 스필버그는 가족·친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스필버그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치들은 제 사촌과 이모, 삼촌의 목숨까지도 빼앗아 갔습니다. 또 제 어머니의 친구분은 피아니스트이셨는데, 독일군 이 손가락을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나치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일을 말합니다. 이야기를 마친 스필버그는 몹시 우울해졌습니다.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자, 스필버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보, 왜 그래요?" 아내 케이트가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나치는 우리 유대인들을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스필버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다니, 너무 끔찍한 일이야. 난 지금까지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어. 하지만 앞으로는 유대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당신은 영화감독이잖아요. 유대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세요." 케이트는 스필버그의 손을 꼭 잡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쉰들러 리스트는 토마스 케닐리의 소설을 각색한 것인데, 나치 당원이면서 기독교 사업가인 오스카 쉰들러의 생애를 다룬 것입니다. 쉰들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죽음에서 구해 냅니다. 1,200명의 유대 인들이 쉰들러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여섯 개 부문에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습니다. 스필버그와 대본을 쓴 자일리언, 촬영 감독인 카민스키, 음악을 맡은 존 윌리엄스가 상을 받았습니다. 스필버그는 이제 관객과 평론가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의 흥행으로 얻은 수익을 쇼아 영상 역사 재단을 설립하는 데 기부했습니다. 이 재단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영상을 담아 보존했는데, 5만 명 이상의 목격자들의 진술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제작자와 영화감독. 1994년, 스필버그는 제프리 카젠버그, 데이비드 게펜과 함께 드림웍스 SKG를 설립했습니다. SKG는 스필버그, 카젠버그, 게펜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드림웍스에서는 많은 텔레비전 쇼, 음반, 비디오, DVD를 제작했고, 치킨 런, 글래디에이터, 슈렉과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999년에는 드림웍스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제작했습니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두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미 국방성으로부터 특별 공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출연했던 톰 행크스와 함께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케이블 방송 시리즈를 공동 제작했는데,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영웅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아미스타드와 A.I.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미스타드는 1839년과 1841년 사이에 일어났던 노예 반란과 법적 투쟁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의도나 주제도 훌륭했고, 스필버그가 흑인 문제를 다룬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없었지만, 흥행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평론가들 역시 지루한 역사 수업 같다며 비판했습니다. A.I.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82년에 브라이언 앨디스라는 소설가에게서 판권을 사들인 이후, 쭉 갖고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스필버그가 당연히 이 영화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신장 제거 수술을 받은 후였고, 다른 작품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스필버그는 A.I.를 맡기로 했습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이미 작품의 방향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특별히 수정하지 않은 채,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게 해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A.I.를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평론가는 A.I.가 스필버그의 따뜻한 방식과 큐브릭의 차가운 방식이 충돌해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끝이 없는 스필버그의 영화. 20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21세기를 맞이하는 행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스필버그도 그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20분 동안에 스필버그의 영화가 상영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며 21세기를 맞이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스필버그의 가슴은 벅차올랐습니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스필버그는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습니다. 그때, 클린턴 대통령이 스필버그에게 말했습니다. "스티븐, 지금 너무 떨리는데요." 이 영화에는 클린턴 대통령도 출연했던 것입니다. 스필버그는 클린턴 대통령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영화 상영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스필버그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스필버그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감독으로 우뚝 선 것입니다. 스필버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내 영화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영화를 만들 거야.' 50세가 넘어가면서 스필버그의 업적은 더욱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미국 영화 협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미국 감독 협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2001년에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나이는 들어갔지만, 스필버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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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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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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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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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한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뱃머리에서 넓은 바다를 둘러보며 즐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바다는 언제 봐도 정말 좋아.” 소년의 눈길이 잠시 돛대 위에 머물렀습니다. “저기에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 소년은 줄사다리를 타고 돛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돛대 꼭대기까지 올라간 소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곳에서는 바다 저 멀리까지 보였고, 갈매기와 구름도 한층 가깝게 보였습니다. “와, 바다는 정말 끝이 없구나!” 그 때, 돛대 아래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서 내려오너라. 거기는 위험해!” 돛대 아래에서 소년을 부르는 사람은 그 배의 선장 콜롬보였는데, 그는 소년의 먼 친척이었습니다. 소년은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선장 앞으로 껑충 뛰어내렸습니다. “넌 바다가 그렇게 좋으냐?” “네, 전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선장이 될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바다 멀리까지 가 볼 거예요.” “그건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바다의 날씨가 오늘처럼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갑자기 태풍이 몰아쳐 배가 뒤집힐 때도 있고 배가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일도 있지. 또 해적들의 습격을 받을 때도 있어.” “그래도 저는 바다가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콜롬보 선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소년을 대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아저씨, 그런 얘기 말고 재미있는 얘기 좀 해 주세요.” “그러자꾸나. 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콜롬보 선장은 배를 타고 다니면서 겪었던 신기한 일들과 자신이 가 본 여러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소년은 눈빛을 반짝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소년은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저씨, 전 나중에 꼭 배를 타겠어요.” “너의 결심이 정 그렇다면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마. 대신 도중에 그만두면 안 된다.” “네, 아저씨. 아저씨 말씀 잊지 않겠어요.” 이처럼 바다를 좋아한 이 소년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51년경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제노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도메이크 콜럼버스는 조그마한 모직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콜럼버스는 4남매의 맏이였고,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라는 두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종종 아버지의 공장에서 직공들과 함께 일을 하며 아버지의 일을 거들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바다에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보트를 타고 제노바 만을 벗어나 먼바다에까지 나갔던 적이 두어 번 있었는데, 그 때가 콜럼버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었습니다. 그 무렵 이탈리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제노바는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견줄 수 있을 만큼 번화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밖에 나갈 때마다 항구를 기웃거렸습니다. 여러 나라의 배가 드나드는 항구에서는 외국 배의 선장들을 자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외국말을 익히게 되었고 갖가지 책도 얻어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원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 천문, 바다, 항해에 관한 것과 먼 나라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흥분된 목소리로 동생 바르톨로메오에게 말하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오늘 정말 굉장한 얘기를 들었어.” “무슨 얘긴데 그래, 형?” “마르코 폴로라는 사람 얘기야.” “마르코 폴로? 그 사람이 누군데?” 바르톨로메오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콜럼버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약 150년 전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쓴 동방 견문록이라는 책 내용이 아주 근사하단 말야. 오늘 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좋아. 어서 들려줘, 형.”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의 부유한 장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어. 그는 열일곱 살 때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배를 타고 동쪽 나라로 장사를 떠났단다. 그 무렵, 중국은 몽골의 쿠빌라이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대단했어. 마르코 폴로 일행은 페르시아, 터키, 서아시아를 거쳐 몽골에 도착했지. 그들은 17년 동안이나 쿠빌라이 황제를 섬기며 외국과의 무역 업무를 맡아보는 동안 몽골과 중국의 여러 나라를 조사하러 다녔어. 그들이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온 것은 고향을 떠난 지 25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단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건강한 모습으로 중국의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온 마을에 쫙 퍼졌어. 사람들은 그들의 모험을 듣기 위해 날마다 마르코 폴로의 집으로 찾아왔지. 마르코 폴로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동안 보고 지내 온 일을 친구더러 쓰게 했어. 그 책이 바로 동방 견문록이란다. 그 책에는 지팡구에 대해서도 씌어 있었지. 이 지팡구는 아시아의 동쪽에 있으며 황금으로 궁전을 지을 정도로 금이 많은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어.”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바르톨로메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말했습니다. “형, 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걸.” “그렇지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것은 사실이야. 그러니 지팡구 얘기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거야. 나는 언젠가 꼭 그 곳에 가 볼 테야.” “그게 사실이라면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 이렇게 마음이 일치된 두 소년은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콜럼버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콜롬보 선장의 배를 타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바다와 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그리고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나라에까지 장사를 하러 다니는 배의 선원이 되었습니다. 늘 바쁘고 힘들었지만 별을 보고 방향을 아는 방법, 항해를 하는 법 등을 하나하나 깨달을 때마다 콜럼버스는 매우 기뻤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 본 나라의 지도와 바다의 해도를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472년에 작은 장삿배의 선장이 되었고, 1476년에는 제노바 상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느 날, 콜럼버스의 배는 포르투갈의 남쪽 끝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갑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동쪽으로 포르투갈의 산이 희미하게 보일 뿐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선원이 고요함을 깨뜨리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해적선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바다 한가운데에 수십 척이나 되는 배들이 뱃고동을 요란하게 울리며 콜럼버스의 배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제노바 상선 선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재빨리 전투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쏴라!” 콜럼버스가 명령을 내리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해적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습니다. 해적선은 짐을 잔뜩 싣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습격을 받자 달아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뱃머리를 돌려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나가라!” 콜럼버스가 다시 외치자 선원들은 커다란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던져 해적선을 끌어당겼습니다. 양쪽의 배가 서로 맞닿는 순간 어디선가 포탄이 날아오더니 콜럼버스가 타고 있는 배를 명중시켰습니다.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고 배는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연기가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바다로 뛰어들어라!” 콜럼버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해서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선원들은 앞을 다투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콜럼버스도 재빨리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나무판자 하나가 그의 손에 잡혔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판자에 의지하여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쳤습니다. 한참을 헤엄치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제노바 상선은 불길에 휩싸인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가 헤엄쳐 도착한 곳은 포르투갈의 남부 해안 라고스였습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는데다가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제노바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리스본으로 가서 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발의 상처가 심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통증이 느껴져 왔습니다. 그는 가까운 마을로 가 어느 어부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였습니다. 콜럼버스는 어부의 정성어린 간호 덕분에 곧 몸이 완쾌되었습니다. 그는 곧장 리스본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마침 콜럼버스는 어렸을 때 친구인 자코포가 리스본에서 해도를 만드는 가게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코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해도를 만드는 일을 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오다니...’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불행을 당한 일이 오히려 행운을 안겨 준 것처럼 여겨졌으며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에서 항해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는 항해 학교를 세우고, 훌륭한 선원들을 길러 낼 정도로 항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코포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찾아온 콜럼버스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아니, 자네가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콜럼버스는 그 동안의 일을 자코포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목숨이라도 건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어쩌겠는가. 아무튼 잘 왔네.” 콜럼버스는 자코포의 말에 일단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탐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코포, 해도를 만드는 일은 잘 되어 가는가?” “응, 잘 되는 편이야. 지중해에서 북유럽으로 가는 배는 모두 이 곳을 들르니까 해도를 사려는 사람이 많다네.” “그래? 나도 내 아우인 바르톨로메오를 오라고 해서 해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솜씨만 있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지. 자네 형제가 곁에 있으면 나도 든든하겠어.” 다음 날, 콜럼버스는 바르톨로메오에게 리스본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내고 나서 자코포에게 해도 그리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지나자 편지를 받은 바르톨로메오가 리스본으로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 형제는 자코포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자코포의 말대로 그 곳은 해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특히 지리와 항해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은 콜럼버스가 그린 해도는 쓸모가 많다고 해서 더 잘 팔렸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자 콜럼버스는 지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토스카넬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토스카넬리는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으뜸가는 천문지리학자였습니다. 그는 지구는 공처럼 둥글며 대서양을 서쪽으로 돌아가다 보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선각자였습니다. 콜럼버스의 생각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의 생각을 편지에 적어 보내자 토스카넬리는 콜럼버스에게 여러 가지 지도와 책을 보내어 격려해 주었습니다. 1479년, 콜럼버스는 교회에서 만나게 된 돈나 펠리파라는 처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펠리파는 포르투갈 항해가의 딸로 콜럼버스의 모험심을 잘 이해해 주는 마음이 따뜻한 여자였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콜럼버스는 모험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서양을 서쪽으로 곧장 항해해 보고 싶어.’ 그는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뱃길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기의 계획을 뒤에서 후원해 줄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부자나 관리들이었는데 한결같이 콜럼버스를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자네 혹시 머리가 돈 거 아냐? 자네 말처럼 만약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면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모두 떨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아무도 콜럼버스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지만 콜럼버스는 결코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더욱 다부지게 먹고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포르투갈의 왕은 주앙 2세였는데, 그는 숙부인 엔리케 왕자 못지않게 항해를 좋아하였습니다. 콜럼버스는 주앙 2세에게 자기의 계획을 알릴 생각으로 왕을 찾아갔습니다. 왕은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미 있는 이야기로군. 학자들과 의논하여 항해 여부를 결정하겠소.”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품어 온 저의 꿈을 꼭 이루게 해 주십시오.” 콜럼버스는 왕이 관심을 보여 준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왕과 관리들이 회의를 한 결과, 콜럼버스의 생각은 엉터리라는 식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콜럼버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내 얘기에 관심조차 없어. 이럴 바에는 차라리 에스파냐로 가는 게 낫겠어.’ 그는 에스파냐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기의 계획을 후원해 줄 사람을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무렵, 다섯 살밖에 안 된 아들 디에고를 남긴 채 아내 펠리파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 디에고와 함께 리스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콜럼버스가 가진 것이라고는 항해 계획서뿐이어서 에스파냐로 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에스파냐의 남쪽, 팔로스 항구의 변두리였습니다. 콜럼버스와 디에고의 옷과 구두는 너덜너덜해져서 누가 보아도 거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디에고의 손을 잡아끌고 간신히 언덕 위에 있는 성당까지 올라갔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저런, 몹시 지쳐 있군요. 들어와서 쉬었다 가세요.” 성당 관리인은 친절하게 그들을 맞아들인 뒤 빵과 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허겁지겁 빵을 먹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왔습니다. 그는 페레스 추기경이었습니다. “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하는 뱃사람이고 이 아이는 제 아들 디에고입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 지금까지 지내 온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자세히 털어놓았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뱃길을 찾아 내어 전세계 사람들이 서로 오가게 하고 싶다는 콜럼버스의 생각을 들은 추기경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나도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믿습니다. 당신의 계획은 매우 훌륭합니다. 나는 한때 이사벨 여왕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 후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 드리지요. 여왕님도 아마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추기경님.” 페레스 추기경은 곧바로 콜럼버스를 여러 학자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또한 콜럼버스의 계획을 도와줄 만한 사람들을 성당에 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유명한 뱃사람 마르틴 핀손 형제도 있었습니다. 팔로스 항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부자인 핀손은 콜럼버스가 탐험하는 데에 드는 비용과 배에 함께 탈 선원들을 모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포르투갈에서와는 달리 콜럼버스의 계획을 끝까지 들어주었고 격려까지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큰 용기를 얻은 콜럼버스는 디에고를 성당에 맡겨 두고 곧 코르도바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 당시 에스파냐는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가장 크고 강한 나라였습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두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트교를 믿고 있는 이들 두 나라는 콜럼버스가 에스파냐로 건너갈 무렵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왕과 여왕이 전쟁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있는 터라 콜럼버스가 왕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 때문에 마냥 기다리고 있기가 무척 지루했습니다. 그렇다고 항해를 포기한 채 그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꼭 여왕님을 만나 뵙고 가야 한다. 그래, 한번 기다려 보자.’ 콜럼버스는 관리의 집에 머물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동안에 그는 비아트리스 엔리케스라는 여자를 만나 두 번째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되었습니다. 1486년, 마침내 콜럼버스는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을 한꺼번에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탐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훌륭한 생각이오. 내가 곧 관리들과 의논해 보겠소.” 왕은 성직자와 학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 엉터리 이론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학자와 성직자들은 콜럼버스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콜럼버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3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는 언제까지나 이 곳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의 힘을 빌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생각을 페레스 추기경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추기경은 여왕 앞으로 다시 한 번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왕으로부터 답장을 받은 후에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콜럼버스는 페레스의 말대로 여왕의 답장을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에스파냐는 전쟁을 끝내고 바다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페레스 신부는 급히 사람을 보내어 콜럼버스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여왕에게 전했습니다. 1492년 4월, 콜럼버스는 또다시 이사벨 여왕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학자들에게 콜럼버스의 계획을 검토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이번에는 콜럼버스의 탐험을 후원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콜럼버스, 당신의 계획을 믿어 보겠소. 항로를 개척하면 동서 무역의 길이 트이는 것이니 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소?”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 반드시 성공하여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오랜 항해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항해를 떠나는 배는 산타마리아 호와 핀타 호, 니냐 호 세 척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가장 큰 산타마리아 호에 올랐습니다. 제일 높은 돛대에는 콜럼버스 집안을 상징하는 녹색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핀타 호와 니냐 호에는 핀손과 빈센트라는 사람이 각각 선장이 되어 타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 안내인과 기록 계원 등 모두 120명이나 되는 대원들이 콜럼버스와 함께 항해길에 올랐습니다. “자, 출항이다, 닻을 올려라!” 1492년 8월 3일 새벽, 콜럼버스의 목소리가 팔로스항에 울려 퍼졌습니다. 세 척의 배는 돛에 바람을 안고 힘차게 바다 위를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산타마리아호의 뱃머리에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콜럼버스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 척의 배는 파도를 헤치며 카나리아섬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곳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아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항해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핀타호의 키가 부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이 일부러 키를 부러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핀타호의 선원들 대부분은 항해를 계속 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장 핀손은 밧줄로 키를 묶게 했으나 이튿날에는 그 밧줄마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배 뒤쪽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면서 핀타호는 차츰 속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없군요. 우선 카나리아섬에 닻을 내리고 다른 배를 얻기로 합시다.” 콜럼버스의 말에 선원 한 사람이 비웃듯 말했습니다. “카나리아섬은 아직도 까마득합니다. 아마 핀타호는 그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물이 차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아니오. 이틀 후면 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조금 전에 지도를 살펴보았단 말이오.” 콜럼버스의 말은 적중했습니다. 이틀 뒤, 콜럼버스 일행은 카나리아 제도 가운데에 있는 한 섬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선장님 말씀이 맞았군요.” 선원들은 이 때부터 콜럼버스의 말을 잘 따랐습니다. 콜럼버스는 한 달 가까이 섬에 머물며 다른 배를 찾아보았으나 항해하기에 마땅한 배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콜럼버스는 하는 수 없이 핀타호를 잘 손질하기로 하였습니다. 9월 6일 새벽, 핀타호의 수리를 끝낸 콜럼버스 일행은 다시 아시아를 향해 떠났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바람이 불지 않아서 9일 만에야 겨우 파로스섬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파로스섬은 유럽의 맨 끝에 있는 섬이었습니다. 파로스섬을 지나면서부터는 적당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파로스섬은 조그만 점처럼 바다 저편으로 멀어지더니 끝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유럽을 벗어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들은 뿌리가 달린 풀 몇 포기가 물에 떠밀려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육지 가까이에서 사는 새가 배 위를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내가 알기로 저 새는 육지에서 잠을 자는 새요. 아마 육지에 가까워진 모양이오.” “저 풀도 육지에서 떠내려온 게 분명해요.” 날아오는 새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바다 저편에 희미하게 섬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저기 섬 같은 것이 보이는데 저건 내가 발견한 것이오.” “무슨 소리요. 아까부터 내가 보고 있었단 말이오!” 선원들은 서로 자기가 먼저 섬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그 희미한 형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이 구름으로 밝혀지자 모두들 실망하여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세 척의 배는 돛을 활짝 펴 올리고 힘차게 앞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아무리 가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자 선원들은 다시 근심에 잠겼습니다. 하루는 해질 무렵쯤 서쪽에서 날아온 새들이 배 위를 날며 한참을 지저귀더니 멀리 날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육지가 나타날 거야.”
새를 발견한 후부터 선원들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바다를 본 선원들은 다시 실망에 빠졌습니다. 바다에는 해초가 잔뜩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초는 배에 달라붙어서 배의 속도를 떨어뜨렸습니다. 선원들은 겁을 집어먹고 우왕좌왕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이번 항해는 실패야. 육지는 보이지도 않잖아.” “고향 생각이 간절하구나.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어.” 콜럼버스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선원들을 격려하기에 바빴습니다. “내 계산으로는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지팡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오.” 어느덧 파로스 섬을 지난 지 16일째가 되었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 앞서 달리던 핀타 호에서 갑자기 선장 핀손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육지다, 드디어 육지가 보인다!” “뭐, 육지가 보인다고?” 선원들은 모두 갑판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과연 저 멀리에 육지 같은 것이 가느다랗게 보였습니다. 배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습니다. 콜럼버스는 배를 그쪽으로 대라고 명령한 다음 갑판 위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세 척의 배는 힘차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육지는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이튿날도 배는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조용한 선실에서 등불을 밝히고 해도를 들여다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선원이 콜럼버스를 찾아왔습니다. 그 선원의 표정은 몹시 긴장돼 보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 선장님.” “무슨 일인가?” “선원들이 선장님을 바다에 던질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을... 알려 줘서 고맙네.” 콜럼버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 선원은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선장님, 위험합니다. 그들은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나가시면 선장님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콜럼버스는 침착하게 갑판으로 나갔습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죽 가기만 하면 다시는 에스파냐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선장은 여왕님을 속이고 우리를 무서운 바다로 데리고 나왔단 말이야.” “맞아. 선장은 지구가 둥글다는 둥 보물섬에 간다는 둥 하면서 사람들을 속였어. 우리가 저 사람 때문에 죽을 순 없어.” 어둠 속에서 선원들이 주고받는 말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도 선장은 뱃머리를 돌리질 않는단 말이야. 지금까지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았어. 어서 선장을 없애고 배를 돌리자.” “잠깐, 잠깐만 내 얘기를 좀 들어보시오!” 콜럼버스는 돛대 뒤에서 이렇게 외치고는 선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선원들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당신들 얘긴 다 들었소. 나를 죽이고 뱃머리를 본국으로 돌리자는 거요? 모두 겁쟁이들이군. 당신들은 육지에 사는 새가 날아오는 것을 보지 않았소? 육지가 이제 멀지 않았으니 좀더 참아 보지 않겠소?” 콜럼버스는 침착하게 타일렀습니다. “선장, 우린 그런 말에 벌써 여러 번 속았소.” “그럼요. 우린 더 이상 당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선원들은 콜럼버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좋소. 앞으로 사흘만 더 참으시오. 사흘이 지나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때는 여러분의 말에 따르겠소.” “지금 하신 말씀 믿어도 되겠지요?” “물론이오.” 콜럼버스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선원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져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를 저어 가도 끝없는 바다와 하늘만 보일 뿐 육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원들의 눈빛은 차츰 무섭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오늘도 틀렸구나.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콜럼버스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마침내 콜럼버스가 선원들에게 약속했던 사흘째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바다 저편에서 떠오르는 해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선장님, 이제 틀렸습니다. 그만 단념하고 뱃머리를 돌리시죠.”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밤 12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단 말이오. 그러니 그 때까지는 절대로 배를 멈추지 마시오.” “고집이 세시군요.” 선원들은 콜럼버스를 비웃었습니다. 그 때, 뱃머리에 있던 선원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이것 봐! 이상한 것이 떠내려왔어!” 모두들 뱃머리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널빤지였습니다. 널빤지를 건져서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동물 그림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선원들의 얼굴은 금세 환해졌습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돛줄을 잡고 발돋움을 하기도 하고 돛대에 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육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별이 반짝이는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갑판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 멀리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불빛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습니다. “불빛이다!” 그 소리를 들은 선원들이 갑판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세 척의 배는 조그만 불빛을 향해 힘차게 달렸습니다. 맨 앞에서 달리던 핀타 호가 대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꽝’ 하는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육지를 발견하면 대포를 쏘기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492년 10월 12일, 팔로스 항구를 떠난 지 70일 만에 마침내 육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지금은 어두워서 저 곳을 자세히 살필 수가 없소. 함부로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 모두들 새벽까지 참고 기다리시오.” 콜럼버스는 침착하게 명령하고는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섬은 콜럼버스 일행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고요하게 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크리스트교 국가임을 표시하는 십자가와 에스파냐의 국기, 국왕의 기 등을 챙겨 들고 보트에 올라탔습니다. 핀타 호와 니냐 호의 선장인 핀손과 빈센트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보트가 바닷가의 모래펄에 닿자 콜럼버스는 기를 높이 쳐들고 새로운 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콜럼버스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뒤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얼마 후, 그 곳의 원주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벌거숭이의 모습으로 허리에 나뭇잎을 엮어 두르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멀찍이 서서 콜럼버스 일행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튿날, 원주민들은 앵무새랑 나무 열매로 만든 빵 따위를 가지고 와서 선원들이 가진 물건과 바꾸자는 손짓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콜럼버스 일행은 원주민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그 섬을 ‘과나하니 섬’이라고 불렀는데, 콜럼버스는 그 섬을 ‘산살바도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산살바도르란 ‘구세주’라는 뜻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코에 금고리를 달고 있는 것을 본 콜럼버스는 그 금이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손짓으로 물었습니다. 그들은 남쪽을 가리킨 다음 다시 북서쪽을 가리키면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섬에 이따금 쳐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금이 많다는 지팡구는 남쪽에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북서쪽의 나라는 아마도 마르코 폴로가 말한 원나라가 아닐까?’ 콜럼버스는 마음이 들떴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그 섬으로 가야겠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남쪽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배가 나아감에 따라 몇 개의 섬이 나타났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중 세 개의 섬에 내려 각각 산타마리아, 페르난도,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삼았습니다. 이윽고 원주민이 안내한 섬에 도착하여 며칠간 머물며 조사를 했으나 금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남쪽을 향해 출발한 배는 모진 비바람에 시달린 끝에 쿠바섬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은 나무와 꽃들로 뒤덮인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그 곳의 원주민들은 바닷가에 통나무로 오두막을 지어 놓고 살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을 시켜 금이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이 섬에는 금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 떠납시다.” 콜럼버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섬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배를 막 출발시키려고 할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쿠바 섬에 머물면서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1주일 뒤, 날씨가 잠잠해지자 콜럼버스 일행의 배는 쿠바 섬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배가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파도가 높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일행은 근처의 작은 섬에 배를 대고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저녁이 되어도 바람이 멎지 않자 콜럼버스는 어쩔 수 없이 쿠바 섬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의 배는 쿠바 섬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맨 앞서 달리던 핀타 호가 뱃머리를 돌리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핀타 호는 산타마리아 호와 니냐 호를 뒤에 두고 자꾸만 멀어져 갔습니다. “신호를 못 본 모양이오. 태풍이 이렇게 심할 때 뿔뿔이 흩어지면 큰일이오. 빨리 돌아오라는 신호를 보내시오!” 그러나 이미 사방이 컴컴해져서 기를 아무리 흔들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콜럼버스는 갑판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핀타 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핀타 호는 달아난 모양입니다.” “역시 그렇군.” 콜럼버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핀타 호의 선장 핀손은 콜럼버스보다 먼저 금이 있는 섬을 찾아 내어 공을 세운 뒤 에스파냐로 돌아갈 생각으로 달아난 것입니다. 얼마 후, 콜럼버스의 배는 또 하나의 섬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중의 하나인 아이티 섬이었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은 아이티 섬의 서쪽에 배를 대고 섬으로 올라갔습니다. 섬 사람들은 콜럼버스 일행을 보더니 놀라서 숲 속으로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한 선원이 미처 달아나지 못한 원주민 소녀 한 명을 붙잡아 왔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소녀에게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물건을 주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콜럼버스 일행은 섬 사람들과 친해졌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이 섬에서 생활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섬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추장 가카나가리의 심부름꾼이 통나무배를 타고 콜럼버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저희 마을에 한번 와 주십시오. 모두들 만나 뵙고 싶어하십니다.” “고맙습니다. 내일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들은 콜럼버스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내놓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눈, 귀, 입, 코가 금으로 만들어진 나무 탈도 있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가카나가리 마을을 향해 떠난 콜럼버스 일행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 곳에 도착했습니다. “간밤에 잠을 못 잤더니 졸립군. 잠깐 눈을 붙일 테니 배를 부탁하네.” 콜럼버스는 이렇게 말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른 선원들도 지쳐 있었으므로 배의 키를 나이 어린 선원에게 맡긴 채 모두들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 선원이 배를 잘못 다루어 배가 얕은 여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큰일났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선원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배가 여울에 깊이 빠진 뒤였습니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부랴부랴 달려왔으나 산타마리아 호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카나가리는 부하들과 함께 달려와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몹시 상심해 있는 콜럼버스를 위로해 주기 위해 원주민들의 춤을 보여 주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답례의 뜻으로 무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원주민을 놀라게 한 것은 총과 대포였습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달아나는 원주민이 있는가 하면 기절하여 쓰러진 원주민도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가카나가리는 멋진 금관을 가져와 콜럼버스의 머리에 씌워 주었습니다. ‘혹시 이 곳이 지팡구가 아닐까?’ 콜럼버스는 금관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어 가카나가리에게 물었습니다. “금이 어디서 났기에 금관을 만든 것입니까?” “이 섬의 시바오라는 산에 가면 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바오라...... 그렇다면 여기는 지팡구가 아니었구나.’ 콜럼버스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가카나가리 추장은 콜럼버스 일행을 위해 오두막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선원들 모두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오두막집이었습니다. 들판에는 온갖 과일이 풍성했으며 물고기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자 선원들은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선장님, 우리는 이 섬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산타마리아 호는 파손되었고 핀타 호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그만 니냐 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탈 수는 없잖습니까?” “이 곳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기 남으시오. 그리고 산타마리아 호를 부수어 그 나무로 성채를 쌓고 대포를 장치해 놓으시오. 나는 일단 에스파냐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겠소.”
이렇게 해서 섬에는 약 40명의 사람이 남기로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493년 1월 4일, 콜럼버스를 태운 니냐 호는 가카나가리의 전송을 받으며 에스파냐로 출발했습니다. 배가 섬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한 선원이 바다 위에 떠 있는 핀타 호를 발견했습니다. 두 배는 서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보트를 타고 니냐 호로 온 핀손 선장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우리 배는 심한 바람 때문에 마구 떠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계속 선장님의 배를 찾았습니다.” 콜럼버스는 핀손의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배는 나란히 에스파냐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2월로 들어서면서 날씨가 점점 사나워지더니 중순께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세찬 태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어느 날 밤, 강한 태풍이 몰아쳐 배는 마치 나뭇잎처럼 파도에 떠밀리며 바닷물을 뒤집어썼습니다. 날이 밝았으나 태풍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선원들은 피로와 공포감으로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어려움을 이겨 내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대서양의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게 된다면 내가 지금 여기서 죽더라도 다른 사람이 내 뒤를 이어 탐험에 나설 것이다. 섬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콜럼버스는 자기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모두 글로 적은 다음 그것을 통에 넣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자기가 탄 배가 잘못되어 모두 죽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저녁 무렵, 서쪽 하늘이 훤해지면서 앞쪽에 섬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 곳은 포르투갈의 세인트메리섬이었습니다. 마침내 무사히 유럽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니냐 호와 핀타 호는 잠시 세인트메리섬에 들렀다가 곧 그 섬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다시 세찬 태풍을 만났습니다. 니냐 호의 돛은 거의 다 찢겨져 나갔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은 손을 써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폭풍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습니다. 1493년 3월 15일, 마침내 콜럼버스 일행은 무사히 에스파냐의 팔로스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콜럼버스의 배다!” “콜럼버스가 무사히 돌아왔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기를 흔들며 콜럼버스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팔로스는 몇 해 전 콜럼버스가 어린 디에고를 데리고 거지꼴로 돌아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콜럼버스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사람들이 이제는 콜럼버스를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이 머물고 있는 바르셀로나로 갔습니다. 봄볕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날, 콜럼버스는 왕궁에 초대되어 왕과 여왕을 만났습니다. 콜럼버스는 왕과 여왕에게 말했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발견한 섬은 많은 섬들 중에서 고작 몇 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다시 탐험할 기회를 주십시오. 새로운 땅을 더 발견하여 에스파냐의 영토를 넓히고 싶습니다. 이번 항해에서는 황금을 많이 가져오지 못했지만 다음 번 항해 때에는 많은 금을 발견하여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일은 원주민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싶습니다.”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콜럼버스, 정말 좋은 생각이오. 우리가 적극 도와줄 테니 염려 말고 항해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좀 쉬도록 하시오.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려.” “정말 감사합니다.” 콜럼버스가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인정을 받게 되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어느 날, 콜럼버스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잔치의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콜럼버스에게 말했습니다. “대서양을 항해하고 몇 개의 섬을 발견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오? 그것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닐까요?” 콜럼버스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놓인 달걀을 집어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든 좋으니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워 보십시오.” “허허. 그런 건 문제없지...”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고 모두 달걀을 세워 보려 했으나 달걀은 구르기만 할 뿐 세워지지가 않았습니다. 1493년 9월 25일,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동생인 지아코모도 함께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항구에는 날이 밝기 전부터 사람들이 그들 일행을 전송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바다에는 17척이나 되는 배가 돛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배에 타고 갈 사람의 수도 1500명이나 되는데다가 식량, 물 외에 소와 말도 실었고 여러 가지 씨앗도 챙겨 넣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배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항구를 떠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11월 22일, 두 번째 탐험대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아이티 섬의 동쪽에 닿았습니다. “드디어 섬에 도착했다!” 배에서는 대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섬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에게 섬에 상륙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섬에 내리자마자 어른 세 사람과 소년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섬 전체가 음산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떠나기 전에 지냈던 오두막집으로 가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오두막집은 모두 불타 없어졌고 까맣게 그을린 대포와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일행은 곧장 원주민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얼마 후, 가카나가리가 부하에게 업혀서 나왔습니다. 가카나가리는 눈물을 흘리며 그 동안 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에스파냐로 돌아간 다음 선원들은 원주민이 가지고 있던 금 장신구를 모조리 빼앗고는 자기들끼리 두 패로 갈려서 싸움을 시작했어요. 그 때 식인종인 카오나포가 부하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지요. 나는 선원들을 도우려고 달려갔지만 결국 지고 말았어요. 선원들은 모두 죽고 나는 이렇게 발에 상처를 입은 채 숨어 지냈어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콜럼버스는 그 곳에 남아 있던 선원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곳에 새로운 마을을 세워야겠어.’ 그러나 다시 마을을 세우는 동안 환자가 많이 생겼고 콜럼버스도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를 떠나올 때 섬에 도착하면 곧바로 선원들 일부와 금을 본국으로 보내 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좋아하는 오에다를 대장으로 삼아 섬에 있는 금을 모으게 했습니다. 오에다는 젊은 선원들을 데리고 금이 있는 시바오 산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많은 사금과 금덩어리를 찾아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습니다. 금덩어리를 찾아 내자 선원들 사이에는 서로 금덩어리를 더 많이 차지하려고 싸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병이 나으면 금을 많이 캘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어.’ 1494년 3월, 콜럼버스는 동생 지아코모에게 뒷일을 부탁한 후 400명의 탐험대를 거느리고 금을 찾아 떠났습니다. 시바오로 가는 길은 험했습니다. 그들은 벼랑을 헐기도 하고 바위를 굴려서 밀어 내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뿌리를 파내면서 마침내 바위로 된 시바오 산에 도착했습니다. 선원들은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금을 찾아 내는 데에만 눈이 어두워 정신없이 헤매 다녔습니다. 콜럼버스는 섬을 한번 둘러보고 난 후 그 섬에 ‘세인트토머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콜럼버스는 이 곳이야말로 지팡구일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의 한 원주민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그 곳에 더 많은 금이 나는 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콜럼버스는 기뻐하며 아이티섬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선원들을 선발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쿠바섬에서 자메이카섬까지 탐험했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탐험을 나가 있는 동안 섬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섬에 남은 선원들끼리 서로 금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원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원주민들이 크게 불만을 품고 소동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원주민들은 선원들의 거주지를 불태우고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바오 산의 카오나포는 40일 동안이나 끈질기게 공격해 왔습니다. 콜럼버스는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성난 원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섬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에 대한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섬을 독차지하려고 선원들과 원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군.” “선원들이 조그만 실수라도 저지르면 죄인처럼 마구 다룬다는 거야.” 이러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은 콜럼버스는 우선 에스파냐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수리를 끝낸 니냐 호와 섬에서 새로 만든 산타크루스 호를 타고 콜럼버스 일행은 아이티 섬을 출발했습니다. 두 척의 배는 이번에도 심한 태풍을 만났습니다. 항해가 순조롭지 못하여 먹을 것이 모자라게 되자 선원들은 함께 타고 온 원주민들을 바다에 처넣으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는 선원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오. 한 조각의 빵이라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살아야 하오.” 어렵게 에스파냐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곧장 왕과 여왕에게 달려가 자신에 대한 헛소문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다행히도 왕과 여왕은 그에 대한 헛소문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1498년, 콜럼버스는 다시 탐험대를 만들어 세 번째 항해길에 올랐습니다. 그 무렵, 새로 발견한 섬에서 금이 별로 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항해 때보다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선원들도 좀처럼 오지 않아 겨우 300명을 모았습니다. 아이티섬으로 건너간 콜럼버스는 동생과 힘을 합하여 섬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힘썼습니다. 한편, 에스파냐에는 콜럼버스가 유명해짐에 따라 시기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콜럼버스를 골탕먹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콜럼버스는 본래 이탈리아의 거지가 아닌가. 에스파냐 왕의 은혜를 입고 자기의 계획을 펼친 사람이 이제 와서 자기가 발견한 섬의 왕이 되려고 한다는군.”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섬을 딴 나라에 팔아서 돈을 벌려고까지 하는 모양이야.” 이런 소문이 계속 들려오자 여왕과 왕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마침내 이사벨 여왕은 보바딜라라는 사람을 섬에 보내 콜럼버스를 감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무렵, 콜럼버스는 아이티 섬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산토도밍고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보바딜라는 섬에 내리자마자 대뜸 콜럼버스의 동생 지아코모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누구의 얘기도 들어보려고 하지 않고 콜럼버스 형제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버렸습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콜럼버스는 곧장 지아코모에게로 달려왔습니다. 보바딜라는 콜럼버스를 보자마자 엄한 목소리로 호령했습니다. “콜럼버스, 그대를 체포하겠다.” 왕이 보낸 사자인 보바딜라의 말은 곧 왕의 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콜럼버스는 저항하지 않고 말없이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손에 차가운 쇠사슬이 채워졌습니다. 콜럼버스는 억울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왕과 여왕에게 자세히 말씀드리면 내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만 참자.’ 감옥에 갇힌 콜럼버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날의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사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암담했지만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감옥에서 보낸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쇠문이 무겁게 열리더니 병사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당신을 에스파냐로 데리고 가라는 명령을 받았소. 자, 나오시오.” ‘오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사형을 당하더라도 왕과 여왕께 나의 무죄를 밝힌 다음에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감옥 문을 나섰습니다. 지아코모도 손이 묶인 채 옆방에서 끌려나오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 형제를 실은 배는 곧 에스파냐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떠날 때와는 달리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콜럼버스를 동정하며 여왕이 내린 명령을 비난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여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콜럼버스의 모습을 본 여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여왕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장 쇠사슬을 풀어 주도록 하라!” 여왕은 그 동안 다른 사람의 말에 귀가 솔깃했던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콜럼버스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귀족들의 말만 들은 내 잘못이오. 나는 단지 그대를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했을 뿐인데...” 여왕은 곧바로 보바딜라에게 돌아오라 명하고 오반드라는 군인을 섬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동안 몸이 무척 쇠약해졌지만 새로운 세계를 찾아보겠다는 의욕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콜럼버스의 집념에 감동한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1502년 5월, 콜럼버스는 네 척의 배에 선원 50명을 태우고 항구를 떠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둘째 아들 페르난도도 있었습니다. 배는 항해 도중에 카나리아섬에 들렀다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자메이카섬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때, 한 척의 배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티섬의 산토도밍고 항구로 들어갔습니다. 그 곳엔 이미 새 총독 오반드가 와 있었고 보바딜라는 보물을 싣고 막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태풍을 예견하고 보바딜라에게 항구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콜럼버스 일행은 가까운 포구로 들어가 쉬기로 했습니다. 이틀 후, 큰 태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무시한 채 금을 잔뜩 싣고서 떠났던 보바딜라의 배는 태풍에 시달리다가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보물에 눈이 어두웠던 보바딜라는 보물과 함께 바닷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날씨가 개자 콜럼버스는 배를 수리하여 쿠바 섬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 몇 개의 섬을 발견했지만 그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아메리카 대륙에는 영영 이르지 못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지팡구로 가는 길만을 찾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점점 멀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날, 콜럼버스의 배는 심한 태풍을 만났습니다. 배가 부서져서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돛은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거기에다 식량과 물이 상해서 선원들이 계속 병으로 쓰러져 갔습니다. 콜럼버스도 병에 시달렸으나 편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침대를 갑판에 내다 놓고 누운 채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지시했습니다. 며칠 후, 콜럼버스 일행은 겨우 자메이카 섬에 도착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음식을 갖다 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언제까지나 그 곳에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아이티섬으로 가서 튼튼한 배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멘데스라는 사람을 그 곳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멘데스 일행은 통나무배를 타고 아이티섬으로 떠났습니다. 콜럼버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구원의 손길이 뻗쳐 오기를 기다렸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태풍을 만난 것은 아닐까? 통나무배로 보낸 것이 잘못이었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쏟아지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데다가 병자들은 자꾸만 늘어갔습니다. 선원들 사이에 차츰 콜럼버스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어느 날, 포라스 형제가 사람들을 꾀어 아이티섬으로 달아났습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에게서 10척의 통나무배를 사서 소중히 다루고 있었는데, 포라스 형제는 그것을 훔쳐 달아난 것이었습니다. 포라스 형제를 따라간 사람들은 50명이나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은 대부분 환자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티섬으로 달아나던 포라스 형제 일행은 가는 도중 태풍을 만나 며칠 후에 되돌아왔습니다. 콜럼버스는 그들이 미웠지만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 때, 아이티섬으로 구조를 요청하러 갔던 멘데스 일행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아이티섬으로 가는 도중 태풍을 만나고 사나운 식인종들한테 붙잡힐 뻔해서 이렇게 늦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배를 이용하여 콜럼버스 일행은 아이티섬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섬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그 동안 섬이 엉망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섬을 잘 가꾸고 싶었지만 그는 섬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곧 배를 고친 다음 아이티섬을 떠났습니다. 콜럼버스가 탄 배는 여러 차례 태풍에 시달리면서 겨우 에스파냐로 돌아왔습니다. 콜럼버스는 아픈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의 몸은 아주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에스파냐를 위하여 바다에서 살았던 콜럼버스. 그러나 이제는 그를 환영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 초라한 여관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여관에서 자신의 처지를 편지에 써서 여러 차례 이사벨 여왕에게 보냈지만 회답이 없었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관리들이 도중에 편지를 가로채 없애 버렸던 것입니다. 괴롭고 힘든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문 밖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사벨 여왕님이 돌아가셨대요!” 콜럼버스는 그 순간 자신을 붙잡아 주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그 후 콜럼버스의 몸과 마음은 더욱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 무렵, 줄리아나 공주가 이사벨 여왕의 뒤를 이어 여왕이 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줄리아나는 여왕의 자리에 오르면 콜럼버스를 새 섬의 총독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콜럼버스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공주님, 감사합니다만 이제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의 주름진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이제 자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유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줄리아나 여왕께서 저에게 보상금으로 주시기로 한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에 써 주십시오.' 유서를 쓰고 나서 며칠 뒤인 1506년 5월 20일, 콜럼버스는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콜럼버스가 죽은 후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포르투갈 왕의 명을 받고 항해를 떠났습니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에서부터 브라질까지 항해를 하였는데, 그 곳이 아시아가 아니라 오늘날의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것을 알아 냈습니다. 그 대륙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던 사람들도 차차 콜럼버스의 훌륭한 업적과 그의 숭고한 마음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커다란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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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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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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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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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동부 켄터키 주의 농장 마을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아침이 일직 시작되었습니다. 이 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한 농부라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이른 아침, 이 마을의 한 통나무집에서 아들을 깨우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 왔습니다. "에이브, 어서 일어나 아버지를 도와 주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에이브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지만, 싸늘한 아침 공기에 선뜻 이불을 박차고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사라,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를 도와 드려야지." 어머니는 집 안을 분주하게 오가면서 에이브의 누나 사라를 깨웠습니다. 아이들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감자와 옥수수 씨앗이 담긴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숲길을 따라 밭으로 갔습니다. "애들아, 너희들도 나가서 아버지를 도와야지?" 어머니 낸시는 접시를 닦으며 에이브와 사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에이브와 사라는 낡은 자루를 잘라 만든 옷을 입고서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에이브네 식구들이 농사를 짓는 곳은 그다지 기름진 땅이 아니어서 온 집안 식구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밭이랑을 앞서 가면서 옥수수 씨를 뿌리면, 어머니는 뒤를 따르며 부드럽게 흙을 덮어 주었고, 에이브와 사라는 돌멩이나 나무 뿌리를 골라내었습니다. 밤이 되면 에이브와 사라는 깜박이는 호롱불 밑에 모여 앉아 어머니가 해 주시는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 에이브가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가족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이브네 가족이 이 곳 켄터키 주에서 살게 된 것은 에이브의 아버지 토머스가 어릴 때부터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곳에 인디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백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자주 백인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8살 되던 해에 인디언들에게 습격 당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에이브의 이름은 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에이브러햄이라고 지어졌는데, 사람들은 줄여서 '에이브' 라고 불럿습니다. 에이브네 가족이 이 통나무집에서 살게 된 것은 에이브가 2살 때부터였습니다. 그 무렵 노브크리크에는 날이면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하여 모여들었습니다.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낡은 자루로 만든 옷을 입고 살아온 에이브와 사라는, 매일매일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옷차림만 바라보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꾼이나 장사꾼이 많았지만, 때로는 멋진 모자와 금 단추가 달린 양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남자들과, 날개 같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에이브와 사라는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반드시 교육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먹고살기도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그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학교가 생겼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아버지와 의논했습니다. "여보, 아이들에게 글을 깨치게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예요." "학교에 보내자는 얘기요?" 어머니의 이야기에 아버지는 못마땅한 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습니다. "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나는 이제까지 학교의 문 앞에도 얼씬거린 적이 없지만 별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가고 있소. 글이라는 것이 사람을 먹여 살리지는 않는단 말이오."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어머니의 의견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지 않고 열심히 아버지를 설득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야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에이브 남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도 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단다." "네, 정말이에요? 학교에 가면 책을 읽을 수도 있나요?" 에이브가 눈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아무렴, 읽기만이 아니라 쓰는 것도 배운단다." 며칠 후 에이브 남매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방 하나에 선생님도 한 사람뿐인 공부방과 같은 곳이었지만, 에이브 남매는 마냥 신이 났습니다. 에이브와 사라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기뻤습니다. 그러나 에이브 남매의 학교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에이브가 7살 되던 해의 12월, 아버지는 살림살이를 정리하여 마차에 실었습니다. 길고도 힘든 여행 끝에 인디애나주라는 새로운 땅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월 중순경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햇살이 따사로운 봄이 찾아왔습니다. 에이브네 가족은 새로운 땅에서 밭을 일구고 가족들이 살 통나무집을 짓느라 무척 바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들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도 집안 살림을 하면서 들일을 나갔습니다. 에이브와 사라도 각각 자기 몫의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족들이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어, 1년 만에 밭은 기름지게 변하였고 가축도 몇 마리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 지은 커다란 통나무집 안에 벽난로와 나무 침대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에이브네! 집에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그토록 부지런하고 인자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자리에 눕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한 번 걸리게 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우유 감염병' 에 걸려 있었습니다. 우유 감염병이란, 독이 들어 있는 풀을 뜯어 먹은 소에게서 짠 우유를 먹었을 때 걸리는 병을 말합니다. 당시 우유 감염병은 이 고장에서 크게 번지고 있었지만, 의사조차도 치료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병에 걸리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너희들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며 살아가도록 해라. 사랑하는 주님! 가엾은 이 아이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잠시 후 어머니는 힘없이 머리를 떨구더니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린 에이브의 가슴에는 슬픔이 가득 찼습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따뜻한 품속에도 안길 수 없다고 생각하자, 에이브는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는 에이브와 사라가 뛰어놀던 양지바른 언덕 위에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숲속 오솔길에는 변함없이 산새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이브는 외톨이가 된 것처럼 쓸쓸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습니다. 아버지는 말수가 줄어들었고 사라도 풀이 죽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하더니, 16킬로미터나 떨어진 켄터키 주로 마차를 끌고 나갔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밤이 이슥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에이브와 사라는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으나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았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웬일이지? 혹시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으신 거겠지." 사라는 어린 동생을 달래며 평소와 다름없이 집 안을 말끔하게 청소해 놓았습니다. 가을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흰 구름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처럼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야아, 아버지다." 에이브와 사라는 마차가 달려오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마부석에 앉아 말고삐를 잡고 있는 아버지 외에 네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은 부인이었고, 뒷자리에 앉은 세 사람은 에이브 또래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며칠 동안 집을 비워 많이 걱정했지? 자, 너희들의 새어머니가 될 분이다. 인사드려라." 아버지는 마차에 타고 있는 부인을 내려 주고 나서 아이들도 마차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사라와 에이브는 멀뚱멀뚱 새어머니와 아이들을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새어머니가 남매에게 다가왔습니다. "반갑구나, 사라, 에이브. 아빠한테서 너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단다. 이제부터 서로 도와 가며 살아가자꾸나." 새어머니는 같이 온 아이들을 소개했습니다. "이 아이는 열세 살의 엘리자베스야. 사라 너와 동갑이란다." "그다음은 마틸더로 여덟 살이지. 그리고 다섯 살의 존은 너희들 중에서 제일 어리단다." 새어머니는 아버지와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라 부시 존스턴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 남편이 죽고 나서 혼자 아이들을 기르며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녀를 새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켄터키주로 갔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마차에서 짐을 내렸습니다. 옷장과 예쁜 그림, 그릇 등 사라와 에이브가 난생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새어머니는 굉장한 부자였던 것입니다. 짐을 정리하고 난 새어머니는 사라와 에이브의 옷을 벗기고 차례로 목욕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가져온 짐 가방에서 멋진 원피스를 꺼내 사라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사라는 마치 딴사람이 된 것같이 예뻤습니다. 그날 저녁은 식탁도 참으로 풍성했습니다. 사라와 에이브가 이제까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맛있는 요리들이 예쁜 접시에 담겨 있어서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맘껏 먹었습니다. 다시금 에이브네 통나무집에는 행복이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새어머니가 가지고 온 짐들 가운데에는 어린이를 위한 책도 있었습니다. 책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에이브는 틈이 날 때마다 그 책들을 읽었습니다. 학교에 다닌 기간이 얼마 안 되어 읽기에 서투른 에이브는, 모르는 말이 있을 때마다 새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새어머니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에이브를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와 의논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버지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공부 같은 건 농부에게는 필요 없소! 그 애는 앞으로 나를 도와 농사일을 해야 하오." "학교에 다니게 되면 에이브는 밭일도 더욱 열심히 거들 거예요." 새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에이브는 자기를 위해서 그처럼 애를 써준 새어머니가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에이브가 다니게 된 학교는 전에 다녔던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실도 하나이고 선생님도 한 사람뿐인 보잘것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전의 학교와 달리 학생들의 실력에 맞게 반을 나누어서 공부를 가르쳤으며, 단순히 읽기와 쓰기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글짓기도 가르쳤습니다. 에이브가 미국의 '독립 선언서'와 '워싱턴 대통령', '미국의 역사' 등에 대해서 배운 것도 이 학교에서였습니다. 에이브는 공부하면 할수록 흥미를 느꼈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에이브는 집에 돌아와서도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에이브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에이브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볼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넌 농사꾼이야. 책이 널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농토가 너를 먹여 살리는 거다." "잘살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해." 새봄이 되자 에이브는 학교를 쉬고 아버지의 바쁜 일손을 도와야 했습니다. 에이브네가 이사한 지 몇 년 안 되자, 에이브네 집 주변에는 많은 집들이 지어지고 이웃도 많이 생겼습니다. 에이브네 집에서 약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큰 가게도 세워졌습니다. 제임스 켄트리라는 부자의 가게였습니다. 어느 날, 제임스 켄트리 씨가 에이브네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가게를 차리고 나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던 중, 댁의 아드님이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에이브를 저희 가게 점원으로 채용하고 싶습니다." "네? 우리 아들을요?" 아버지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찬성했으며, 이 일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에이브는 제임스 켄트리 상점의 점원이 되었습니다. 에이브는 무엇보다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기뻤습니다. 가게에 배달되는 신문이나 잡지를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는 다른 곳의 소식을 잘 알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게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드나들었기 때문에 에이브는 그들에게서 읽고 싶었던 책을 빌려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에이브는 클리포드라는 사람의 집에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그 집 책장에서 워싱턴 전기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아저씨, 이 책을 좀 보고 싶은데요. 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또 한 번 보고 싶어요." 에이브가 정중하게 부탁하자 클리포드는 선뜻 책을 내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에이브는 저녁을 먹자마자 곧 빌려 온 책을 펴들었습니다. 에이브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책을 읽고 또 읽다가 베갯머리에 책을 두고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야 에이브는 간밤은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갯머리에 둔 책을 본 순간 에이브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창문 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책 표지가 흠뻑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빌려 온 책이 이 모양이 되다니." 에이브는 서둘러 난롯불에 책을 말려 보았으나, 빗물에 젖었던 자국이 남아 얼룩덜룩해서 지저분했습니다. "할 수 없구나. 아저씨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수밖에." 에이브는 곧바로 진창길을 내달려 클리포드를 찾아갔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 실수로 그만 책이 빗물에 젖고 말았어요."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난 클리포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너의 정직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구나." "네게 그 책을 줄 테니 우리 농장 일을 이틀 동안만 도와주겠니?" "정말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열심히 일해 드리겠어요." 이처럼 에이브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 줄 아는 정직한 소년이었습니다. 1826년 에이브는 17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에이브는 오하이오 강가에서 나룻배를 경영하는 제이스 테일러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오하이오 강을 오가며 나룻배에 물건을 싣고 가게에 내오는 일과, 사람들을 태워 주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두 명의 신사가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에이브에게 증기선을 놓쳐 버렸으니, 거기까지 태워다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에이브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증기선은 강 한복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좋아요. 어서 타세요. 부지런히 가면 증기선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마침내 나룻배가 증기선에 닿았고 두 신사는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고맙네. 자, 이건 뱃삯이니 받아 두게." 에이브는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했으나, 신사는 한사코 돈을 건네주고 증기선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에이브는 손바닥에 놓인 두 개의 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단 몇 분 만에 은화 두 닢을 벌다니." 농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겨우 37센트를 받던 에이브는 50센트짜리 은화 두 개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직접 배를 만들어서 돈을 벌면 정말 큰 벌이가 되겠는걸.' 이 일을 계기로 에이브는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에이브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배 만드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배가 완성되자, 에이브는 오하이오 강 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큰 배에까지 사람을 태워다 주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에이브가 손님들을 증기선까지 태워다 주고 오늘 길이었습니다. 건너편 강기슭에서 뱃사공들이 손을 흔들면서 자기들 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습니다. 에이브는 별 생각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에이브에게 달려들더니 목덜미를 확 움켜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난폭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들이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겁니까?" 에이브가 소리치자 뱃사공들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우린 정당하게 허가를 받았는데 당신은 왜 허가 없이 나룻배를 모는 거요?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 줄 아시오?" "아니, 허가라니요? 나룻배를 모는 데에도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요? 그런 변명은 치안 판사 앞에서나 하시오." 에이브는 곧장 켄터키 주의 치안 판사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허가증도 없이 나룻배를 몬 게 사실인가?" 치안 판사가 물었습니다. "예, 하지만 켄터키 주의 허가증은 켄터키 쪽에서만 필요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인디애나 주에서 강 가운데의 증기선까지만 오갔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에이브는 그 동안 다양한 책을 통해 법률 상식을 쌓아 두었던 실력을 발휘하여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판사는 에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에이브의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판사는 에이브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네 말이 옳군. 돌아가도 좋네." 에이브는 이 일을 계기로 법률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이 때 알게 된 판사를 찾아가서 재판을 견학하고 법률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19세가 된 에이브는 키가 193센티미터나 되고 어깨가 떡 벌여졌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정직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에이브는 다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일한 적이 있는 켄트리 씨의 가게였습니다. 켄트리 씨는 장사에 성공하여 여러 곳에 많은 상점과 농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이브가 일하게 된 곳은 그 중의 하나로,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일뿐 아니라 켄트리 씨의 아들 알렌과 함께 뉴올리언스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을 주변만 오가던 때와는 달리 넓은 강에서의 생활은 거칠고 힘들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후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다른 배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뉴올리언스까지 배로 여행하는 것은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이나 계속될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에이브와 알렌은 강가에 배를 매어 두고 배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곤히 자던 에이브는 문득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눈을 살짝 떠 보니 도둑들이 배에 실린 물건들을 훔쳐 가려는게 아니갰습니까? 에이브는 재빨리 옆에 있던 몽둥이를 집어들어 도둑들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깜짝 놀란 도둑들은 칼을 빼어 덤벼들었습니다. 이렇게 얼마 동안 배 위에서 결투가 벌어졌습니다. "안 되겠다. 도망가자." 도둑들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숲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날 도둑들과 싸우던 중 에이브는 오른쪽 귀에 상처를 입게 되었는데, 이 상처 자국은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22살의 청년이 될 때까지 에이브러햄 링컨은 아버지의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링컨은 부모님의 곁을 떠나서 독립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건 어느 날, 뉴세일럼의 생커먼이라는 마을에서 상점을 하는 오퍼트라는 사람이 찾아와 링컨을 고용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퍼트 상점은 뉴세일럼에 정착한 개척자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하는 잡화상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비록 마을의 가구 수는 몇 안 되었지만, 링컨은 오퍼트 상점에서 일하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링컨은 얼마 안 가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고, 오퍼트 가게는 만남의 집과 같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뉴세일럼에는 열흘에 한 번씩 신문이 배달되었는데, 주민들은 링컨이 직접 신문 기사를 읽어 주는 것을 듣기 위해 주말이면 가게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링컨은 성실하고 정직하기로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어느 날, 막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습니다. 단골 손님 아주머니 한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주머니, 오셨어요?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설탕 한 봉지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85센트입니다." 링컨은 그 아주머니가 가고 나서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날 판 물건값을 계산해 보다가 아주머니에게 5센트를 더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게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지만, 링컨은 그 길로 곧장 아주머니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에이브는 돈을 돌려주고 어두운 밤길을 헤치며 돌아왔습니다. 이 사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서 온 마을에 알려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직한 링컨을 더욱 믿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가게 주인 오퍼트는 누구보다도 링컨을 좋아했습니다. 주정뱅이에다 수다쟁이이기도 한 오퍼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링컨을 칭찬했습니다. "우리 가게의 점원 링컨은 정말이지 성실한 젊은이예요. 아는 것이 많은데도 겸손한 것을 보면 장차 미국의 대통령감으로도 손색이 없답니다." 링컨에 대해 좋은 소문이 퍼지자, 그 마을의 불량배들이 링컨에게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 이들 패거리한테 시달려 오던 마을 사람들은, 링컨이 그들을 혼내 주기를 바라면서 이 결투에 돈을 걸기까지 했습니다. 링컨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정당한 레슬링 대결이라는 조건을 걸고 결투에 응했습니다. 구경을 하러 가게 앞으로 몰려온 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렸습니다. "누가 이길까?" "링컨이 이겨서 암스트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면 좋으련만." 이윽고 패거리 중의 두목인 암스트롱과 링컨이 마주섰습니다. 키는 작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무쇠 같은 팔다리를 가진 암스통에 비해, 링컨은 키만 훌쩍 컸지 무척 허약해 보였습니다. 긴장한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암스트롱과 링컨은 곧장 대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채 얼마 되지 않아서 링컨이 암스트롱을 땅바닥에 눕혀 버렸습니다. "와!"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렀습니다. "자, 일어나 다시 덤벼라." 링컨은 땅바닥에 쓰러진 암스트롱을 향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또 한번 뒤엉켜 붙었다가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맞붙었을 때 암스트롱은 저만치 나가떨어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암스트롱이 지자 그의 패거리들이 링컨에게 덤벼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자기 패거리들을 밀어제치고 당당하게 링컨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내가 졌다. 앞으로는 사이 좋게 지내자." 구경꾼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 암스트롱은 링컨의 친구가 되었으며,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링컨이 선거 운동을 하러 다닐 때 그의 훌륭한 지지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링컨은 뉴세일럼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되었지만, 그런 점보다는 그의 높은 덕망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링컨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젊은 지도자로 인정하고 존경했습니다. 그 마을 학교의 선생인 그레이엄은 링컨에게 문법과 수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측량하는 법도 알려 주었습니다. 이 때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측량술 덕분에 훗날 링컨은
측량 기사로 활약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또한 낚시와 술을 좋아하는 무명 시인 잭 켈소라는 사람은 링컨에게 많은 문학 서적을 빌려 주며 시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뉴세일럼의 지역 연설회는 최초로 링컨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었는데, 연설을 들은 방앗간 주인 리트리지는 그의 뛰어난 응변에 놀라, 여러 면으로 링컨을 도와 주려고 했습니다. 오퍼트 상점에서 지내는 몇 개월 동안 링컨은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마을 사람들과도 친해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링컨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어 마침내 1832년 3월 9일, 그는 주의회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는 마침 링컨이 일하던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였습니다. "주 의원 선거에 입후보할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그래, 가게도 문을 닫은 판에 잘 됐지 않나?" 링컨는 마음속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키워 가고 있던 참에 친구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레이엄 선생이 링컨의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적인 문제에 대하여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지격의 주민들은 대부분 나라에서 빚을 얻어 쓰고 있었고, 학교도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링컨은 대부분의 주민이 떠안고 있는 융자금의 이자율을 낮추는 문제, 교육 환경의 개선과 기회 부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생커먼 강이 심하게 굽이치는 곳을 완만하게 하여 통행을 원활하게 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언제나 약한 사람편에 서서 정의롭게 살아오던 링컨은,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주당 편에 서지 않고 세력이 약한 휘그 당에 가입했습니다. 링컨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탓에 처음에는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도 링컨의 성실한 태도에 호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아직 역부족이었습니다. 8월에 있었던 선거가 깨끗한 패배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암스트롱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자기 일처럼 선거 운동에 나서 주었으나 아무런 보람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링컨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안됐네, 링컨. 하지만 다음 번을 위해서 힘을 내라고." 링컨은 자신을 위해 힘써 준 친구들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고 또 미안했습니다. 비록 선거에는 졌지만 민주당이 뿌리내린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링컨에게 표를 던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것에 만족해하며 더욱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선거에서 낙선하자 링컨은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식료품점에 흥미를 잃은 오퍼트가 다른 사업을 벌일 목적으로 뉴세일럼을 떠났기 때문에, 자연히 링컨은 일자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마침 팔려고 내놓은 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로슨 헌든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잡화점이었는데, 그에게 급하게 사정이 생겨서 가게를 내놓은 것입니다. 링컨은 로슨헌든이 데리고 있던 베리라는 사람과 공동으로 상점을 맡아서 경영하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가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장사를 해서 갚는 조건으로 상점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상점을 경영하는 일은 링컨의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링컨은 돈을 모으기 위해 억척스럽게 노력하기보다는 계산대에 앉아 책을 보거나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더 즐거워했습니다. 동업자인 베리는 술을 너무 좋아하여 노상 술에 빠져 지냈습니다. 게다가 경기마저 계속 내리막길로 달리고 있어 가게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 모두 장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일에 몰두하다 보니 빚만 점점 늘어갔습니다. 상점은 더 이상 운영하기 힘들어졌고 마침내는 문을 닫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동업을 했던 베리가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링컨은 1,000달러나 되는 빚을 혼자서 떠안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은 링컨은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하여 몇 년 동안 대장간의 일을 돕기도 하고 나무를 패고 밭일을 하는 등, 닥치는대로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1833년 5월 7일, 뉴세일럼에 처음으로 우체국이 신설되었습니다. 빚에 쪼들리고 있던 링컨을 돕기 위해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준 덕택에 링컨은 우체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명목이 우체국장이었지 집배원과 사환이 하는 일까지 모두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문맹자였기 때문에, 링컨은 편지를 건네 주면서 일일이 읽어 주고는 그들의 답장까지 써 주었습니다. 링컨이 우체국장으로 있는 동안 우체국은 언제나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배달되는 신문을 링컨에게 읽어 달라고 모이는 사람들 때문이엇습니다. "국장님,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요." "세상 돌아가는얘기 좀 해 주세요." 링컨은 선거에서 떨어지고 많은 빚까지 떠안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더욱 사랑했습니다. 링컨은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우체국 일이 더없이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우체국장의 보수는 1년에 약 5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링컨은 우체국 일 외에 품팔이를 해야만 빚을 갚아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서부 개척자들이 계속해서 일리노이 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넓은 들판을 사들여 땅값을 올리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이나 농장의 도로를 측량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군청의 측량 기사로 칼폴이라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일이 너무 많아 도저히 혼자서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곳은 새로운 개척지라서 보조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링컨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링컨은 칼폴의 요청에 기꺼이 응낙하고 그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칼폴은 링컨에게 측량에 대한 것은 가르쳐 주지 않고 잔심부름만 시켰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그레이엄 선생의 지도로 거의 두 달 동안 측량에 관한 모든 서적을 따로 공부해 나갔습니다. 얼마 후 링컨은 혼자서 생커먼 북쪽을 측량하는 일을 맡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내었습니다. 그러자 마을에는 링컨의 측량이 정확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경계선 분쟁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으레 링컨을 부르러 왔습니다. 링컨은 이 측량 덕택에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었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으며, 빚도 모두 갚을 수 있었습니다. 선거에서 낙선한 지 2년 만에, 링컨은 다시 주 의회의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링컨은 '링컨 국장님' 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당선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링컨을 좋아하고 그의 인격을 존중했던 민주당 지도자 볼링은 링컨에게 민주당에 들어오기를 몇 번이나 권유했습니다. 휘그 당원으로, 스프링필드에서 법률가로 유명한 스튜어트도 링컨을 지지햇습니다. 이렇게 해서 링컨은 민주당과 휘그 당 양쪽의 지지를 받으면서 일리노이 주 의회 위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링컨 만세!" 링컨 자신보다도 친구들이 더 기뻐하며 진심으로 그의 당선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1834년 11월 말, 25세의 링컨은 처음으로 일리노이 주 의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갰습니다." 링컨은 다른 의원들을 소개받을 때마다 겸손한 태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의원들 가운데에는 링컨이 농사꾼의 아들이며, 뱃사공과 점원 일을 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링컨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정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과 겸손한 태도를 대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변호사이면서 의원이기도 한 스튜어트는 링컨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려면 법률을 많이 알아야 하네. 법과 정치를 다 잘아는 사람이 되게." 이미 주 의회 의원으로 2년째 경력이 있는 스튜어트는 링컨에게 법률책을 자주 빌려 주었습니다. 뉴세일럼으로 돌아온 링컨은 사람들에게 의회의 소식을 친절하게 전해 주며, 주민들과 더욱 가까이하는 의원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링컨은 우체국장 일과 측량 기사 일을 계속하면서 변호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법률 공부를 해 나갔습니다. 1836년 11월, 다시 열린 주 의회 선거에서 27세의 링컨은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또다시 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변호사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링컨은 앞으로의 정치 활동에 밑거름이 될 변호사 일을 큰 도시에 나가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당시 일리노이 주의 중심 도시였던 스프링필드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뉴세일럼을 떠나려고 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뉴세일럼은 지금의 그 자신을 있게한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섭섭함을 누르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짐이라고 해 봤자 두 개의 조그마한 가방으로도 충분할 만한 낡은 옷가지뿐이었습니다. 그는 양손에 낡은 가방을 들고 스프링필드에 도착했습니다. 링컨은 먼저 침대를 구입하기 위해 한 가구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가구점에서 하나의 큰 행운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켄터키 주 출신의 젊은 상인 스피드가 링컨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자기 집의 2층 방 하나를 빌려 주기로 한 것입니다. 훗날 링컨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후원자가 된 스피드는, 링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어느 날 두 개의 가방을 양손에 든 링컨이 우리 가게에 들어섰지요. 링컨은 가게에 놓여 있는 침대 하나를 가리키며 값이 얼마냐고 묻더니. "저는 변호사를 일할 것이니 크리스마스까지는 침대 값을 꼭 갚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일 변호사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돈을 갚을 수 없겠지요." 라고 말했어요. 키가 크고 첫눈에도 솔직해 뵈는 링컨을 올려다보며, 나는 주저없이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저는 비어 있는 방을 여럿 가지고 있으니, 그 방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방을 당신이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 방에는 침대도 놓여 있으니 침대 값 때문에 마음을 쓰실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무료로 방을 얻고 침대를 사용하게 된 것은 링컨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스피드 씨, 정말 감사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 짐을 풀고 온 링컨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링컨에게 또 하나의 큰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스튜어트와 함께 법률 사무소를 차리게 된 것입니다. '스튜어트 링컨 법률 사무소' 법률 사무소에 출근하는 첫날 링컨은 마음이 몹시도 설레었습니다. 그는 이 설레는 마음을 언제까지나 간직하며 항상 성실한 자세로 사건에 임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스튜어트 링컨 법률 사무소는 많은 사건들을 맡아서 멋지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더욱 존경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스튜어트는 국회 의원 입후보자로 출마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률 사무소의 일은 링컨이 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혼자 처리했습니다. 링컨은 소송 사건을 처리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기 위하여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애덤스라는 사람이 서명을 위조해서 앤더슨이라는 사람의 땅을 가로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앤더슨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이 땅을 팔려고 등기소에 찾아갔더니, 이미 그 땅이 애덤스의 소유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앤더슨 부인은 링컨을 찾아와서 이 일의 변론을 의뢰했습니다. 링컨은 애덤스의 과거를 추적하여 범죄 사실을 밝혀 냈고, 결국 이 사건은 링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링컨은 실력 있는 변호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39년, 링컨은 휘그 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세 번째로 주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무렵 링컨은 스프링필드의 큰 부자인 에드워드 씨의 무도회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 그 곳에서 링컨은 에드워드 부인의 여동생인 메리 토드를 만났습니다. 메리는 꽃으로 장식된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었는데,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메리는 키가 아주 작은 한 청년과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다부진 몸집에 유난히 머리가 커 보이는 이 젊은이는 뒷날 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스티븐 더글러스였습니다. 메리와 더글러스가 춤을 마치자, 링컨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메리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춤을 못 추는 저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시갰습니까?" 메리는 링컨의 솔직함과 재치에 마음이 끌려 순순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변호사가 되기까지 막노동꾼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지금에서야 사교계에 발을 디디게 된 링컨은 이제껏 춤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결국 춤을 추면서 몇 번씩이나 메리의 발을 밟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링컨의 이런 꾸밈없는 태도에 더욱 마음이 끌렸습니다. 메리와 링컨은 이 일이 있은 후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링컨이 지금은 비록 가난한 변호사에 불과하지만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느 날 메리는 링컨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메리의 가족들은 모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메리의 형부인 에드워드는 켄터키 주의 검찰 총장이며 일리노이 주의 주지사로서, 자신의 처제가 보잘것없는 링컨과 결혼하는 것은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이 청혼에 대해 어이없게 생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링컨 자신이었습니다. 메리는 좋은 집안에서 교육을 받은 여자였지만 신경질적이고 변덕이 심했습니다. 링컨은 메리와의 성격 차이와 주위의 반대 때문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결국 링컨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루이빌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그 해 여름을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링컨은 그 곳에서 우연히 메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해 더욱 많은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둘은 전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1842년 11월 4일, 33세의 청년 링컨과 24세의 메리는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메리는 화려한 것을 좋아했지만 소박한 링컨의 성품을 존중하여 조촐한 결혼식을 갖는 데 동의 하였습니다. 메리와 결혼하기 한 해 전, 링컨은 로건이라는 사람과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습니다. 로건은 일리노이에서 가장 머리 좋은 변호사였지만, 외모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링컨과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3년이 넘게 공동으로 법률 사무소를 운영하다가 헤어졌습니다. 로건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법률 사무소를 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1844년, 링컨은 다시 핸더슨과 동업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핸더슨은 26세의 젊은이였지만, 그 도시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교육 수준도 링컨보다 높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링컨과 핸더슨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않았습니다. 링컨의 볼품 없는 겉모습과 달리 핸더슨은, 번쩍거리는 구두에 가죽 장갑까지 끼고 다니는 멋쟁이였기 때문입니다. 핸더슨의 모자는 언제나 먼지 한 점 없이 반짝거리는 반면, 링컨의 모자는 항상 구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맞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수입을 똑같이 분배했고 서로를 대하는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특히 핸더슨은 링컨의 인품을 존경하여 평생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링컨은 이처럼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여 오래토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링컨은 낙천적인데다 성격이 털털하고 장난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변덕스럽고 발끈하는 성격은 남편의 이런 점을 보아 넘기지 못해서 싸움이 잦았던 것입니다. 링컨 부부는 스프링필드에서 1843년 첫아들 테드를 얻은 데 이어, 1846년에 애리, 1850년에 월리, 1853년에 해리 등 네 아들을 낳았습니다. 링컨은 아이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쏟았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장난을 쳐도 야단치지 않고 함께 놀아 주었습니다. 아마도 링컨은 어린 시절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던 기억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서 한없이 관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극진했던 링컨은 불행하게도 세 아이를 병으로 잃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잃은 마음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침대 곁에서 아픈 아이들을 간호하느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것이 링컨 부부의 사이를 더욱 가까워지게 했던 것입니다. 1850년부터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의 10년 간은 링컨이 변호사로서 명성이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링컨은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했지만 법률 상식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책을 통해서 배운 지식보다 불의와 싸울 줄 아는 강한 의식이었습니다. 링컨은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늘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때문에 변호를 해 주고 수고비로 받는 돈의 액수가 무척 적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아예 돈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 돈을 들여서 도와 주었습니다. 변호사들 가운데에는 링컨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링컨은 변호사비를 거의 받지 않는다지?" "쳇, 자기가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링컨은 이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습니다. 한편, 그보다 앞선 1840년 주 의회 의원에 네 번이나 당선되자 링컨은 전국 의회에 진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46년, 링컨은 휘그 당에서 의원 지명을 받았고, 1847년에는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북부에서는 노예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인 1832년, 미국에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협회가 만들어졌고, 1833년에는 영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된 데 이어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서도 노예를 사고 파는 일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세계는 노예 해방에 대한 문제로 술렁이게 되었습니다. 북부와 달리 미국의 남부는 극심하게 노예 해방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져서 남부와 북부는 큰 전쟁이라도 벌일 듯이 험악한 분위기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서 상원 의원에 입후보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1858년, 스프링필드에서는 공화당 후보 링컨과 민주당 후보 더글러스 사이에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상원 의원에 출마한 더글러스는 대단한 웅변가로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주와 노예 제도를 채택하는 주를 함께 존속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링컨은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 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우리 미국인은 일찍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더글러스 씨는 흑인과 백인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 크게 어긋나는 주장입니다. 더구나 같은 미국 안에서 남부에서는 노예를 인정하고 북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 집안이 분열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사상처럼 두 사람은 외모도 대조적이었습니다. 더글러스는 키가 작고 몸집이 퉁퉁한 반면에 링컨은 키가 크고 훌쭉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선거는 12월 2일에 끝났습니다. 결과는 아쉽게도 노련한 더글러스의 승리였습니다. 비록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링컨의 연설은 선거가 끝난 후에도 크게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링컨을 다음 번 대통령 후보로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다시 상원 의원 선거에 나설 결심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일리노이 주에서 상원 의원으로 당선만 된다면 미국의 대통령을 꿈꿀 수도 있을 만큼 이 선거는 중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더글러스에게 승리를, 링컨에게는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링컨의 낙선은 정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노예 해방을 부르짖으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노예 해방을 평화적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말해 오던 링컨은, 이 일로 인해서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링컨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의 추천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어려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링컨은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지지해 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링컨은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을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링컨은 그레이스라는 11살 난 소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링컨 변호사님! 저는 아저씨가 무척 좋아요. 그러나 아저씨의 얼굴은 너무 야위어 보여서 속상하답니다. 만일 턱수염을 기르신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멋있어 보일 거예요. 링컨은 그레이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턱수염을 기르자 링컨은 한층 인자하고 멋있어 보였습니다. 드디어 1860년 11월 6일이 되었습니다. 링컨은 동료들과 함께 전신국으로 가서 조용히 투표 결과에 대한 속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4시간이 지난 후 모든 결과가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링컨의 승리였습니다. 그는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보다 50만 표나 더 많이 얻어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1861년 새해가 되자 링컨은 대통령 취임 준비로 몹시 바빠졌습니다. 링컨은 17년간 일했던 스프링필드의 법률 사무소를 아쉬운 마음으로 정리하면서, 스프링필드를 떠나기 전에 꼭 만나 보아야 할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링컨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가족처럼 도와 준 그레이엄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곧 마차를 달려 뉴세일럼으로 갔습니다. "아니, 대통령께서 나 같은 사람을 보러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주시다니!" 그레이엄은 링컨의 방문을 받고 감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벌써부터 선생님을 뵙고 싶었는데 그만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환하게 웃는 그레이엄 선생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살을 보니 링컨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레이엄과 같은 좋은 사람 덕분에 지금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링컨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는 그레이엄의 손을 힘있게 잡으며 그의 주름진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댔습니다. "링컨, 부디 훌륭한 대통령으로 일해 주기 바라오." "네, 언제까지나 그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링컨을 태운 마차는 정든 고향을 떠나 워싱턴을 향해 달렸습니다. 마차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링컨을 환영했습니다. "링컨 대통령 만세!" 1861년 3월 4일,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취임은 하나의 전쟁 선포였습니다. 취임한 지 한 달 만인 4월 12일, 남북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남부의 주들은 따로 정부를 수립하여 일치단결한 데 반해, 북부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남부 군대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남군의 승전에 일격을 가하고 북군에게 최초의 승리를 안겨 준 싸움이 바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전투였습니다. 이어서 피터즈버그 격전에서도 북군이 승리를 거두자, 북부 사람들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승리는 차츰 북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승리의 소식은 곧 백악관에도 전해졌습니다. 링컨을 비롯한 북부 사람들은 한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1863년 11월 19일,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남북 전쟁의 공로자를 위한 묘지가 만들어지고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링컨은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감명 깊은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유를 찾아 이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평화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조상이 이룩해 놓은 평화의 땅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평화를 짓밟아 버렸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우리 나라가 과연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로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시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 곳 게티즈버그를 국립묘지로 정해 그들의 안식처로 바칩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가호 아래 새로운 자유의 나라로 다시 탄생할 것입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날, 미국의 모든 신문은 링컨의 연설문을 큼직하게 실었습니다. 링컨의 위대한 생각은 미국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나라에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1864년 11월 8일,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은 제17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참된 평화를 실천하는 미국을 만들어 가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1865년 4월 9일, 4년을 끌어오던 전쟁은 마침내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의 총사령관인 그랜트 장군에게 정식으로 항복해 옴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링컨은 전쟁에 패한 남부의 주들에 대해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고, 전 미국의 평화를 선언했습니다. 노예 해방을 통하여 링컨은 인종 차별 정책을 폐지했고, 그로 인해 '노예들의 아버지'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링컨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미소가 감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암살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협박 편지들이 백악관의 링컨에게 배달되었습니다. 1865년 4월 14알 저녁, 워싱턴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는 특별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링컨 대통령을 비롯하여 사회 저명인사들이 초대되었습니다, 링컨은 메리 여사와 함께 극장으로 향하였습니다. 대통령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극장은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링컨 부부를 반겨 주었습니다. 연극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극장 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링컨의 암살자는 남군을 지지했던 존 부스라는 사나이였습니다. 부스는 링컨의 뒤통수를 겨냥하여 총을 쏜 뒤, 자신을 잡으려는 라스본 시장을 칼로 찌르고 달아났습니다. 링컨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의사들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링컨.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남북 전쟁을 치르고, 1865년 4월 15일에 56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 링컨의 정신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히 횃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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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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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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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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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잭, 어서들 들어오렴. 저녁 식사 시간이다." 어머니가 창가에서 부르자, 마당에서 뛰어놀던 두 아이는 마루를 쿵쾅거리며 집 안으로 달려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얘들아, 집이 무너져 내려앉을 것만 같구나. 왜 그렇게 뛰어다니는 거니?" "달리기 시합을 했어요.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1등이 되어라. 2등은 지는 것이다.'라고요." 조에게 이긴 잭이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건 공부를 잘 하라는 뜻이지 말썽을 피우는 일로 1등 하라는 얘기가 아니야."어머니는 조용히 아이들을 타일렀습니다. "공부나 달리기나 다 마찬가지잖아요." 잭은 조금 풀이 죽어서 대답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애써 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달리기 경주라면 당연히 1등을 하는 것이 좋지. 하지만 너희들은 지금 경주를 한 것이 아니라 집 안을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았니? 이런 경우에 1등을 하면 오히려 창피한 것이야. 잭, 엄마 말 알아듣겠지?" "네, 어머니." "그럼 됐다. 어서 손을 씻고 식당으로 오너라." 조와 잭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조용 걸어서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장난꾸러기 소년 잭이 바로 뒷날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 된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입니다.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교외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케네디 집안은 본래 아일랜드에서 살았는데, 케네디의 증조할아버지인 패트릭 케네디가 1850년경에 미국의 보스턴으로 건너오면서부터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보스턴에는 패트릭처럼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대부분 날품팔이를 하며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패트릭도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굳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패트릭은 술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아주 잘 되어,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패트릭의 용기와 개척 정신을 본받은 그의 막내아들은 훌륭하게 자라 보스턴의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으나, 타고난 영리함과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올바른 정치를 펼치는 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아이들에게 '1등을 해라. 2등은 지는 것이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나중에 케네디 집안의 가훈이 되었습니다. 그의 외아들 조지프가 바로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입니다. 조지프는 초등학교 때부터 특히 수학을 잘하는 영리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25세의 젊은 나이에 은행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보스턴 시장을 지낸 존 피츠제럴드의 딸인 로즈와 결혼하여 아홉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로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교육시키려 했으며, 조지프는 아이들에게 자립심과 신념을 키워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뉴스나 신문의 시사 문제를 던져 주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기의 의견을 얘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케네디 집안의 아이들은 늘 시사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식도 풍부했습니다. 케네디 집안에서는 모든 주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지만, 돈에 대한 이야기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는 당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아이들에게 용돈을 많이 주어 제멋대로 쓰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완전히 독립하여 그들의 신념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케네디는 성실하고 예절 바른 아이였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가족들은 케네디를 잭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잭은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그보다 두 살 많은 형 조는 심한 개구쟁이이면서도 성적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척척 잘 해내었습니다. 그래서 잭은 늘 형 조에게 보이지 않는 열등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잭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보스턴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자주 놀러갔습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집에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하였습니다. "보스턴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란 고장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역사가 깃들인 곳이란다. 구경 잘 하고 할아버지께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오도록 하자." 보스턴은 잭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항구 도시였습니다. "먼저 폴 리비어 하우스부터 들러 볼까."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항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집으로 갔습니다. "와, 여기가 그 용감했던 폴 리비어의 집이구나!" 조와 잭은 떠들어 대면서 어두컴컴한 방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머니, 폴 리비어라는 사람이 누구예요?"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여동생 캐시가 물었습니다. "미국이 독립 전쟁을 할 당시, 영국군의 습격에서 미국군을 구했던 사람이야." 책을 많이 읽은 잭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 맞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의 일이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옛날에 영국이 다스렸단다. 자, 이제 다른 곳으로 가 볼까?"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미국의 역사가 깃들인 곳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어머니, 이제 할아버지 댁으로 가요." 이제까지 잘 참고 있던 막내 여동생 유니스가 어머니에게 칭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조와 잭에게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유니스는 지루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턴 우리가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할아버지께 가 보도록 하자." 어머니와 아이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풀밭에 모여 앉아서 과일과 빵을 펼쳐 놓았습니다. "잭, 오늘은 네가 기도를 하렴." 어머니가 말하자 잭은 모두를 대표하여 식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멘!'을 끝으로 기도가 끝나자, 모두들 즐겁게 점심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점심 식사 후에 할아버지께 갈 건가요?" 샌드위치를 먹던 로즈마리가 물었습니다. 로즈마리는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에게 가장 귀여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케네디 집안은 외가와 친가 모두 아일랜드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지금의 할아버지 대에 와서야 성공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두 할아버지는 모두 정치가가 되어 보스턴 시를 위한 많은 일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가족들은 그 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어머니를 앞질러 외할아버지 집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허허, 우리 귀여운 녀석들이 모두 다 왔구나."외할아버지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1927년, 잭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뉴욕까지 크게 번창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보스턴의 집보다 훨씬 큰 집이었습니다. 조와 잭은 그토록 원했던 각자 자기의 방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각자 방을 갖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청소도 각자 해야 한다. 자, 어서 너희들의 짐을 정돈하거라. "어머니는 일하는 사람을 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각자의 일을 맡겨 주었습니다. 이사 온 날 저녁 무렵, 어머니는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방 정리는 모두 끝났겠지? 내가 올라가 볼 테니, 모두들 준비하고 있거라." 어머니가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 조와 잭은 헐레벌떡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책상이나 옷장처럼 무거운 물건은 일하는 아저씨들이 제자리에 놓아 주었지만, 나머지는 각자가 정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껏 게으름을 피우느라 방은 엉망진창인 채 그대로였습니다. 두 소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방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금세 해치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일하는 아주머니께 부탁을 해야겠어." 조는 집안일을 도와 주고 있는 아주머니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잭이 펄쩍 뛰었습니다. "안 돼. 내가 먼저 부탁했단 말이야." 두 소년이 다투고 있을 때, 어머니가 화난 얼굴로 복도에 와 계셨습니다.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해야지! 엄마와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너희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거란다. 게으른 사람은 남보다 항상 뒤처지게 된다는 사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지 않았니!" 조와 잭은 오래도록 서서 어머니의 꾸중을 듣는 동안 자기들의 잘못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케네디 집안은 잘살았지만, 부모는 이렇듯 엄하게 아이들을 길렀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을 부릴 일이 있어도, 부모의 허락 없이는 절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예의바르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조와 잭은 새로 전학 온 학교에 나갔습니다. 성격이 쾌활한 조는 금세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얌전한 잭은 친구를 별로 사귀지 못했습니다. 잭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책을 보거나 동생들과 놀아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잭은 길목에서 소문난 개구쟁이들인 헨리의 패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잭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습니다. "야, 잭! 너 또 여동생들하고 인형놀이 하러 가는구나." 이 말을 시작으로 헨리 패거리들은 낄낄거리며 저마다 한 마디씩 했습니다. "맞아, 잭에게는 여자처럼 치마를 입혀야 어울릴 거야." "머리도 길게 땋아 내려야 할걸." 잭은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습니다. "난 그런 건 안 해. 공차기나 자전거 경주를 하지. 내 자전거 실력은 아마 어른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은 헨리는 더욱 빈정거렸습니다. "어른을 이길 수 있다면 나도 이길 수 있겠구나. 그럼, 나와 경주를 해 볼까?" "좋아. 언제든지 상대해 주지." 다음 날, 학교 앞 공터에는 두 대의 자전거를 둘러싸고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자전거 경기를 하려는 잭과 헨리가 있었고, 헨리의 친구들과 잭의 남매들이 응원을 할 요량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잭, 준비는 다 되었겠지?" 헨리는 으스대듯 잭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잭은 한 손을 들고 싱긋 웃어 보였습니다. 드디어 잭과 헨리는 자전거에 올라타고 페달에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출발!" 조의 구령에 맞추어 두 대의 자전거는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헨리, 이겨라!" "잭 오빠, 이겨라!"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응원을 하는 가운데, 잭은 헨리를 앞질러 달리고 있었습니다. 잭은 돌멩이나 풀밭, 요철 따위의 장애물이 있어도 피해 가지 않고 힘차게 달렸습니다. 커브를 돌면서도 잭은 속력을 줄이지 않았습니다. 잭이 계속 앞서 달리자, 헨리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느라 시끌시끌해졌습니다. "야, 잭 좀 봐! 헨리를 앞서 가고 있잖아." "앞서 가는 정도가 아냐. 저 녀석 겁 없이 장애물도 피하지 않고 나는 듯이 달리고 있어." 헨리는 있는 힘을 다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으나 도저히 잭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잭이 먼저 결승점에 이르렀습니다. "야, 이겼다! 잭 오빠가 이겼다." 조와 여동생들은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했습니다. 헨리는 잠시 잭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잭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잭, 축하한다. 네가 이겼다. 넌 정말 자전거를 잘 타는구나. 아마도 우리 마을에서 너보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은 없을 거야." 헨리는 진심으로 잭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잭의 남동생을 낳았습니다. 남동생의 이름은 로버트이며, 잭의 형제들은 모두 7남매가 되었습니다. "로버트가 어서 빨리 컸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운동을 하면서 놀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림책을 읽어 줄 거야!" 조와 잭은 넷이나 되는 여동생들만 보다가 남동생이 생기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잭이 어린 로버트를 돌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가사일을 하는 동안 로버트와 놀아 주었지만, 금세 울음을 터뜨려 잭을 귀찮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헨리와 노는 것이 더 재미있겠구나." 자전거 경주 이후, 잭은 헨리와 단짝이 되었습니다. 잭은 헨리와 친구들이 놀고 있을 놀이터로 나갔습니다. 아이들은 모형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나도 한 번 날려 보자." 잭이 아이들을 향해 뛰어가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야, 잭. 너희 집은 부자잖아. 너희 아버지에게 이런 장난감 모형 비행기 정도는 얼마든지 사 달라고 할 수 있잖아. 우리들은 그럴 형편이 못 되어서 이렇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한 대의 모형 비행기를 날려 보려고, 아이들은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잭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잭의 집이 부자이긴 했으나 아버지가 주는 용돈은 다른 집 아이들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잭은 그러한 사실을 변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잭은 줄의 맨 뒤에 서면서 말했습니다. "나도 줄을 설 테니 날려 보게 해 주렴." "그래, 좋아." 아이들은 그런 겸손한 잭을 좋아했습니다. 13세가 된 잭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많은 경험을 쌓아 두는 것이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니 너도 형처럼 기숙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겠다." 아버지는 잭을 코네티컷 주에 있는 캔터베리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집을 떠나 본 적이 없었던 잭은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낮에는 공부와 운동을 하느라 집 생각을 잊었지만, 밤이 되면 가족들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잭은 매일 밤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차츰 학교 생활에도 흥미를 붙여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은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운동을 크게 권장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잭은 운동을 매우 좋아해서 야구, 미식축구, 수영, 테니스 등 못 하는 운동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잭이 가장 잘 하는 것은 수영이었습니다. 잭은 1학년 중에서 가장 수영을 잘 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하기만 하던 아이가 체육 시간만 되면 기운이 솟아나는가 봐. 못 하는 운동이 없다니까." "정말이야. 잭은 우리 학교에서 운동 실력이 최고로 뛰어날 거야." 친구들은 체육 시간만 되면 잭을 부러워하며 한 마디씩 했습니다. 하지만 학업 성적은 그리 우수한 편이 못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잭에게 아버지의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오늘 네 성적표가 집으로 왔더구나. 영어와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 학과의 성적이 몹시 부진하더구나. 공부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라. 잭은 운동 실력으로 우쭐해져 있다가 금세 풀이 죽었습니다. '1등이 되어라. 2등은 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잭은 그 날부터 운동하는 시간을 줄이고 학업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가장 어려운 라틴 어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학업 성적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잭이 갑자기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어찌나 고통스럽고 아프던지 소리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잭의 신음 소리를 듣고 달려온 선생님이 잭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급성 맹장염이로군요. 곧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으니 가족을 부르세요."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가족들이 달려오고, 잭은 곧바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마침 학교가 방학 중이어서, 수술을 받은 잭은 집으로 돌아와 푹 쉴 수 있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잭은 형 조가 다니는 초트 고등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잭을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습니다. "네가 그 유명한 조의 동생이냐?" "조의 동생이라면 공부도 운동도 다 잘 하겠구나. 이젠 우리 학교에 1등이 둘이나 되겠군." 전학 온 첫날, 아이들이 잭을 둘러싸고 말했습니다. 조는 성적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실력 있는 운동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잭은 형을 칭찬하는 말이 기쁘기도 했지만, 마음의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형처럼 1등을 하고 말 테다.' 하지만 잭은 도저히 조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와 잭은 커 가면서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조는 빈틈없는 성격에 옷도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반면, 잭은 헐렁한 바지에 커다란 스웨터를 입었으며, 그의 방은 언제나 정돈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 잭과 친했던 리프와 레스라는 친구는 조와 잭을 비교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잭, 너와 네 형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늘 노력한다는 점에선 비슷한데, 그 밖의 점에서는 아주 다른 것 같아." 그러면 잭은 아주 익살스럽게 받아넘겼습니다. "형은 형이고 나는 나, 바로 잭이거든." "하하하, 그건 그래. 우리 학교에서 첫째 가는 우등생과 너를 비교한 우리가 잘못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등생인 조보다, 공부는 잘 못하지만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마음이 넓은 잭을 더 좋아했습니다. 잭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 가자,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잭의 성적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코앞에 두게 되자 잭의 마음도 조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잭은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기 전에 미리, 꼭 성적을 올리겠다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 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보통 사람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네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씩씩한 청년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열심히 공부하기를 거듭 부탁한다. 잭은 아버지의 편지에 용기를 얻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잭의 졸업 시험 성적은 118명 중에서 64등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게 뭐람. 라틴 어 성적이 나빴기 때문이야." 잭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졸업 시험이 끝나고 난 후 어느 날, 한가해진 아이들은 다 같이 모여 인기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잭은 친구들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며 인기 투표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뭐, 내가 가장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잭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비록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재미있고 다정다감한 잭을 가장 좋아했던 것입니다. "잭, 축하한다! 넌 꼭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리프가 잭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모두들 잭에게 손뼉을 쳐 주었습니다. 잭이 초트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동생 진과 남동생 에드워드가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잭의 남매는 모두 9명이 되었습니다. 잭은 18세가 되던 1935년에 초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친한 친구인 레스, 리프와 함께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잭은 그들과 함께 한 방을 쓰며 대학 생활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더 좋은 방에서 지낼 수도 있었지만, 오랜 친구와 생활하는 것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잭은 건강이 나빠져 학교를 휴학하고 요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걸렸던 황달이 재발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잭의 회복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 때문에 친구들보다 1년이 뒤처졌습니다. 잭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프린스턴 대학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하버드 대학에는 형 조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는 보스턴 교외의 케임브리지라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어, 잭은 이따금 외할아버지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이제 어른이 된 손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으며, 늘 친구처럼 다정스럽게 말동무를 해 주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동안 잭은 토버드 맥도널드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잭은 그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으며 늘 함께 행동하였습니다. 토비라고도 불리는 그는 나중에 매사추세츠 주의 하원 의원이 되었습니다. 잭은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미식축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1년 동안 병을 앓느라 몸이 허약해졌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 했습니다. '좋아, 나도 부지런히 연습해서 실력을 쌓아야겠다.' 잭은 틈나는 대로 운동장에 나가 몸을 아끼지 않고 미식축구를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을 차올리던 잭은 갑자기 등이 꺾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운동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잭! 정신차려!" 잭은 곧장 친구들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잭을 진찰한 의사는 등뼈에 금이 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잭은 다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잭은 주로 책을 읽으면서 지냈습니다. 몸이 다 회복되어 학교의 기숙사로 돌아온 후에도 잭은 여전히 독서에만 빠져 지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토비가 잭에게 말했습니다. "잭, 너는 혹시 소설가가 되려는 것은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지. 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께서 나더러 문학에 재능이 있다고 하셨거든." "그런데 너희 형 조는 정치가가 되고 싶은 모양이더라." "아마 그럴 거야. 우리 할아버지도 정치가였거든. 하지만 난 형하고 달라. 정치가보다는 소설가나 선생님이 되는 것이 더 적격일 것 같아." 잭은 법학을 배우는 학교 공부가 싫었습니다. 그의 성적은 늘 낙제를 면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잭에게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럽 여행이었습니다. 1937년, 대학 2학년이 된 잭은 친구 레스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등 여러 나라의 실제적인 상황을 직접 돌아보고 온 잭은, 대학에서 배우는 것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고는 그 때부터 학교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부터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여러 가지 신문과 정치 이론 잡지를 두루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잭을 한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잭의 공부는 그 준비가 고르지 못하지만, 전반적인 능력은 그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가 마음먹고 연구를 하기 시작하면 아마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잭이 유럽 여행을 하던 해에,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자손이 영국 대사에까지 오른 것은 화제에 오를 만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런던으로 이사 가기로 하였고, 조와 잭은 학교 때문에 미국에 남기로 했습니다. 조와 잭은 휴일이면 런던으로 가 가족과 함께 보내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는 이제 청년이 된 두 아들과 함께 세계 정세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습니다. 이 무렵, 유럽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경쟁적으로 세력을 뻗치기 위해 호시탐탐 이웃 나라들을 넘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위험한 전쟁을 피해야 하는데, 세계 각국의 움직임이 너무 복잡해서 도대체가 앞날을 예측할 수 없구나." "유럽의 여러 나라가 함께 손을 잡고 싸운다면, 독일을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미국과 영국도 독일에 맞서 유럽 국가들을 도와 주어야 하고요." 잭이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제 보니 잭이 지난번 유럽 여행 때 많은 것을 얻은 모양이구나." 아버지는 대견스럽다는 듯이 잭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잭이 런던으로 가족을 만나러 왔을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잭, 국제 관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이 때에 무엇보다도 빠른 정보가 필요한데, 그걸 맡아 줄 마땅한 사람이 없구나." "아버지, 그 일을 제가 해 보겠어요. 전 이전에 유럽 여행의 경험도 있으니까 힘들이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잭은 자기의 시야도 넓히고 아버지도 도울 생각으로, 학교의 허가를 받아 대서양을 건너가기로 했습니다. 떠나기 전날, 아버지가 잭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할 일은 여러 나라에 가서 객관적으로 관찰한 것들을 상세히 보고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아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너한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만일 이 일이 너한테 맞는다면 장차 너는 외교관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잭은 기쁜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잭은 프랑스, 영국,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때그때 아버지에게 보고했습니다. 잭의 보고는 언제나 예리하게 핵심을 찔렀으며, 냉정하고 객관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 가지 입장에서만 상황을 바라보는 일이 없이 신축성 있게 모든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 무렵, 날이 갈수록 유럽의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었습니다. 잭은 여행을 마치자마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머지않아 독일에 의해 세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모두 전쟁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 무기를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잭은 유럽 시찰을 마치고 다시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번의 유럽 여행을 계기로 더욱더 정치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공부도 열심히 하여 성적이 많이 올랐습니다. 22세에 대학의 최고 학년이 된 잭은 아버지를 도운 6개월 동안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의욕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잭은 이번 여행으로 인해 학업이 친구들보다 반 년 가량 뒤처지게 되자,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무렵 잭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더욱 자극한 것은, 유럽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논문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잭은 정치학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훌륭한 논문을 제출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잭의 말대로, 얼마 후 독일은 세계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습니다.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폴란드로 쳐들어감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1940년 이른 봄, 잭은 오랜 노력 끝에 작성한 논문을 지도 교수에게 제출했습니다. 그가 쓴 대학 졸업 논문은 대단히 훌륭하여 교수들로부터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아버지는 그것을 책으로 내 보자고 권유했습니다. 잭이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그의 졸업 논문은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은 더욱 심각해져서 미국도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다투어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잭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미국의 참전을 반대한다고 말한 것이 그대로 신문에 보도되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조지프 케네디는 1940년 말, 영국 대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무렵, 스탠포드 대학의 상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잭은, 어수선한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애국심으로 육군에 지원 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형 조는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잭은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되고 말았습니다. 대학 시절에 미식축구를 하다가 다친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겠다. 반드시 군대에 들어가고 말겠어!' 잭은 의사와 상의해서 체력을 단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몸이 단련되자, 이번에는 해군에 원서를 내어 해군 소위로 합격했습니다. "녀석! 해내고야 말았구나." 영국 대사 자리에서 물러나 집에 와 있던 아버지와 가족들은 잭의 끈기에 감탄하며 한 마디씩 칭찬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24세의 어른이 된 잭을 이제는 모두 그의 성씨인 케네디로 불렀습니다. 1941년 12월,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미국도 전쟁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해군 소위가 된 케네디는 하루라도 빨리 실전 훈련을 마친 후 싸움터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케네디에게 주어진 일은 해군 장교들을 위한 신문을 제작하는 일이었으며, 1942년 여름에서야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머리 위에는 금세 태평양의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드넓은 바다를 목적지도 없이 떠돌고 있었으므로 케네디 일행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일본군 비행기에 걸리면 우리는 모두 죽을 거야." "본부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된 줄도 모르겠지." 케네디는 부하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희망을 버리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여기서 조금만 가면 섬이 있다. 거기까지 헤엄쳐 가면 우리는 산다. 기운을 내!" 케네디는 크게 부상당한 부하를 구명대에 올려놓은 다음, 구명대의 끈을 입에 물고 앞장서서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엄쳐 갔을 때, 저 멀리에 야자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섬이다! 우리는 살았다!" 섬에 내려서 얼마 후, 어디에선가 엔진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일본군의 깃발을 단 군함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함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 곳을 지나다녔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군의 배나 어뢰정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섬에서 지낸 지 여러 날이 흐르자 모두들 굶주림에 지쳐 눈이 푹 꺼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굶어죽을 판이었습니다. 케네디는 마실 물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옆의 섬으로 힘겹게 옮겨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 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 몇 명이 카누를 타고 섬으로 올라왔습니다. 케네디는 그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미국 사람인 것을 알리고 나서, 야자 열매에다 칼로 글씨를 새겼습니다. 우리는 지금 섬에 갇혀 있다. 이 원주민이 우리가 있는 곳을 안다. 케네디 중위. 케네디는 그 열매를 원주민에게 주며 미군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원주민은 카누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과연 저 야자 열매가 무사히 미군에게 전해질까?' 케네디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만약 그것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다면 모두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야자 열매가 무사히 미군에 전해져, 세 척의 어뢰정이 황급히 섬으로 달려왔습니다. "중위님, 고맙습니다. 중위님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부하들은 케네디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미군 해군 본부에서는 이같이 용감한 케네디 중위에게 훈장을 주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케네디가 살아 돌아오자, 케네디 집안 사람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1944년, 본국으로 돌아온 케네디는 두 번의 등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몸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수술을 마친 후 몸의 회복을 위해 병원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8월의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해군기의 조종사로 활약하고 있던 조가 유럽 전선에서 비행기의 공중 폭발로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에 케네디 가족들은 절망과 비탄에 잠겼습니다. 케네디에게 있어 형 조의 죽음은 슬픔만 안겨 준 것이 아니라, 운명까지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탈리아와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였으며, 일본도 1945년 8월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전쟁은 서서히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해군에서 제대한 후, 한동안 신문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던 케네디는 자기 자신의 장래에 대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케네디에게 분명한 진로를 세우게 만든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조를 잃은 후,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유능한 정치가가 되고자 했던 조의 꿈은 곧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조를 잃은 아버지의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케네디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케네디를 불렀습니다. "잭, 네 형 조가 없으니, 이제부터 우리 집안을 이끌어 갈 사람은 바로 너다. 나는 네가 내 뜻을 따라서 정치가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 적성에는 정치가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케네디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케네디는 아버지의 슬픔과 절실한 소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케네디는 처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깊이 생각한 끝에 정치가의 길을 걷기로 서서히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런데 케네디의 정치적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빠르게 다가왔습니다. 케네디가 태어난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서 한 의원이 그만두는 바람에, 그 지역에 보궐 선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케네디는 보궐 선거 출마를 결심하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알렸습니다. "잘 생각했다. 이왕 마음을 먹었으니 1등을 해라. 우리 케네디 집안에 2등은 없으니까." 아버지는 기뻐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가 선거에 출마한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후보자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이 선거구는 보스턴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서 상류 계급에서 자라 하버드 대학까지 나온 젊은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백만 장자의 아들이 의원이 되겠다는군."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겠어?" 케네디는 이런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을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고장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케네디는 뒷골목의 음식점이나 술집까지 찾아다니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는 선거 공약을 부풀려서 말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말했으며,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할 수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처음에 그를 비웃던 사람들은, 어느덧 케네디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며 차차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946년 6월의 예비 선거에서, 케네디는 10명의 후보들을 물리치고 1등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5개월 후의 선거에서 그는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잭, 네가 이 아비의 소원을 이루었구나." 아버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원 의원이 된 케네디는 겨우 29세의 나이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케네디는 하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사회 보장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그는 두 번의 재선을 거쳐 6년 동안 하원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52년에는 상원 의원의 자리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원 의원을 지내면서 동시에 상원 의원 선거를 준비하는 것은 너무 벅찬 일이었습니다. "형, 힘들겠지만 열심히 뛰세요. 우리 가족 모두가 형을 도와서 뛸게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동생 로버트가 말했습니다. 이렇듯 든든한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케네디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정치가인 헨리 로지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고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의 35세였습니다. 35세의 젊은 의원 케네디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구김살이 없어, 대하는 사람마다 호감을 갖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는 참신함과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정치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이듬해, 케네디는 전부터 친하게 지내 오던 버트레트 부부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케네디는 그 자리에서 신문사의 사진 기자인 재클린 부비에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재클린과 케네디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서로 말이 잘 통했기 때문에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났으며, 마침내 그들의 만남은 결실을 맺게 되어 1953년 9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여름, 케네디는 대학 시절에 다친 등의 상처가 다시 악화되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상처가 너무 깊어서 어쩌면 불구가 될 위험도 있습니다." 의사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케네디는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수술을 해 주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없습니다." 1954년 10월, 아내 재클린의 기도 속에서 케네디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두 번에 걸쳐 무사히 끝났지만, 케네디는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요양을 하는 동안, 케네디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8명의 정치가에 대한 전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고가 끝나자, 케네디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의 첫 권은 그 동안 옆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아내 재클린에게 증정되었습니다. 이 책은 순식간에 화제가 되어 몇 달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으로 케네디는 1957년에 미국 출판계에서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퓰리처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케네디는 퓰리처 상의 상금 500달러를 흑인 대학에 기부했습니다. 이윽고 건강을 회복한 케네디는 다시 국회로 돌아와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미국 내에서는 불경기로 인해 실업자가 늘어났으며, 흑인과 백인이 서로 등을 돌린 채 미워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이런 골칫거리를 시원하게 해결해 줄 새로운 대통령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케네디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1960년, 케네디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 선거에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케네디의 맞수는 훌륭한 정치가로 주목을 받고 있는 리처드 닉슨이었습니다. 드디어 선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 대통령 선거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케네디는 너무 젊어. 겨우 43세야. 거기에 비하면 닉슨은 나이도 많고 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아닌가." "아니야. 지금이야말로 케네디 같은 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해. 우리에겐 그의 용기가 더 필요해." 케네디 집안 사람들은 물론 학교 친구들, 어뢰정에서 함께 싸웠던 옛날 부하들까지 나서서 케네디를 도왔습니다. 닉슨 쪽에서도 이에 뒤지지 않고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하였습니다. 양쪽의 치열한 선거전이 있은 후, 투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곧바로 개표가 시작되었습니다. 케네디 집안의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 놓은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가장 젊은 대통령이며, 미국 국민이 뽑은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미국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라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연설은 미국 국민의 마음에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했습니다. 취임식이 끝나고 난 뒤, 케네디는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으로 갔습니다. 그의 곁에는 부인 재클린과 3세 된 딸 캐롤라인, 그리고 이제 갓 태어난 아들 존이 있었습니다. 백악관의 집무실에는 벌써 많은 일들이 케네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으로, 그의 주변에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를 따르던 훌륭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대통령으로서 그의 훌륭한 점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 버린다는 점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두툼한 보고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다 읽지 않고 간추린 내용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케네디는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든 보고서를 자신이 직접 읽었습니다. "간단히 요점만 간추려 주게." 이와 같은 말을 케네디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책을 빨리 읽는 것은 이미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원래 빨리 읽는데다 속독법까지 익혔기 때문에 그 속도는 더욱 빨랐습니다. 어느 날, 국방 장관 맥나마라가 대통령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케네디가 몸담고 있던 민주당의 상대 당인 공화당 사람이었지만, 훌륭한 사람이라면 정당을 가리지 않는 케네디에 의해 장관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소련이 라오스를 은밀하게 도와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성급히 판단할 일이 아니오. 좀더 지켜보기로 합시다. 나는 오늘 소련의 흐루시초프 수상에게, 세계 평화를 위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보자는 편지를 보냈소." 케네디는 가능하면 모든 일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세상에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너무나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의 성격은 때때로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케네디는 자기가 나가는 방향이 옳다는 데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언제나 철저한 조사와 냉철한 판단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 케네디는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맥나마라 장관이 나간 뒤,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가 들어왔습니다. 케네디의 상원 의원 시절부터 형을 도운 로버트는 정치가로서도 훌륭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는 동생을 법무 장관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로버트가 가지고 온 문제는 미국이 오랫동안 안고 있던 심각한 인종 문제였습니다. "흑인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지겠습니다." "맞는 말이다. 흑인을 보호하는 법이 꼭 필요해. 나는 그들에게도 백인과 똑같은 선거권을 주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낼 작정이다." "저는 거기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흑인들은 계속 괴로움을 당할 것입니다." 미국에는 그 당시 1천만 명이 넘는 흑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케네디의 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케네디는 로버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편, 케네디의 편지를 받아 본 소련의 수상 흐루시초프는, 두 나라의 정상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답변을 전해 왔습니다. 1961년 6월,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을 대표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꺼내도 서로의 생각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나는 소련과 손을 잡고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미국의 생각도 받아들여서, 서로 사이좋게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합니다."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의 세계 평화를 향한 의지와 신념에 감동하였습니다. 케네디는 미국과 소련이 너무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원자 폭탄 하나로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데, 두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로 전쟁을 한다면 전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전쟁을 피하는 것이 인류를 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임무이기도 합니다." 케네디의 말에는 세계 평화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여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을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케네디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갖다 놓은 것은 미국의 목을 조르는 것과 같다. 만일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쿠바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세계는 이 일로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하였습니다. 두 나라의 싸움은 곧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얼마 후, 이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대통령 각하, 소련이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연락을 보내 왔습니다." 케네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평화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케네디의 어려움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국내에서 발생했습니다. 1962년 가을에, 제임스 멜레디스라는 흑인 학생이 미시시피 주립 대학에 입학하려는 데서 흑인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흑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무조건 싫어하는 백인 차별주의자들은 어떻게든 제임스 멜레디스의 입학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크게 번져서 소동으로 변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케네디는 어떻게든 소동을 진압하려 했지만, 소동은 더욱 확산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대통령은 군대를 보내어 이 소동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리고 멜레디스는 미시시피 주립 대학에 입학이 허가되었습니다. 냉철하고 인내심이 강한 케네디의 이 같은 처사는 반대파조차도 진정시킬 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케네디는 되도록 강압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으며,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국민에게 호소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미국은 진정한 자유 국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흑인을 차별하고서야 어떻게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나라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흑인의 평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겠습니다." 케네디의 인종 차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들은 미국인들은 그의 신념에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어느덧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 가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내가 시작한 일들은 마무리지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 케네디는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생각으로 선거 준비에 나섰습니다. 어느 날,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주의 댈러스 시를 방문했습니다. 텍사스 주는 흑인 차별이 아주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거리에는 대통령을 환영하려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오픈 카를 타고 강연회장으로 가면서, 군중들의 뜨거운 열광에 손을 흔들어 답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화사하게 차려 입은 재클린 여사가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차가 어느 허름한 건물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 소리와 함께, 손을 흔들던 케네디 대통령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로, 갑자기 거리에는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이 저격당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태운 차가 병원으로 달리고 있는 동안, 재클린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신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오, 안 돼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들이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서 매달렸지만 그는 끝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오후 1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곧 미국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용기와 양심을 가지고 세계 평화를 위하여 힘썼던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46세의 젊은 나이로 그 빛나는 생애를 마쳤습니다. 국회 의사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이 끝난 후, 케네디 대통령의 시신은 알링턴 국립 묘지로 옮겨져서 그 곳에 묻혔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무덤이 있는 알링턴을 찾는 사람들은 지금도, "한 사나이로서 조국의 자유와 헌법을 지키다가 쓰러진다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라고 말한 케네디 대통령의 신념을 기억하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총을 쏜 저격범으로 지목된 오즈월드라는 사람은 얼마 후,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미국 국민에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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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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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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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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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과 평등하게. “힘내, 게오르그.” “절대로 봐주어서는 안 돼.” 두 소년이 풀밭에서 뒹굴며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키가 큰 소년은 마을 소년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세기로 소문난 게오르그이고, 키가 작은 소년은 목사님의 아들인 알베르트였습니다. 주위에 둘러선 아이들은 두 소년의 싸움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게오르그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두 소년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게오르그는 아이들의 대장으로서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싸웠고, 알베르트는 이번에 이기게 되면 앞으로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싸움은 게오르그가 단연 우세했습니다. 게오르그는 알베르트를 밑에 깔고 올라앉아 알베르트의 양팔을 꼼짝 못 하게 죄었습니다. 승부는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자, 어때? 한번 일어서 보라고.” 알베르트를 깔고 앉은 게오르그는 바동거리는 알베르트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자 아이들도 게오르그의 편을 들어 알베르트를 놀려댔습니다. “야, 꼬마 목사님! 한번 겨루어 봐!” “겁쟁이 샌님, 그만 항복을 하지?” 아이들의 놀림을 받자, 알베르트는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억제할 수 없는 힘이 되어 갑자기 역전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알베르트가 게오르그를 공격해서 쓰러뜨린 것입니다. 게오르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힘을 내, 게오르그!” 상황이 역전되었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게오르그에게는 응원의 함성을, 알베르트에게는 야유를 보냈습니다. “게오르그, 일어나!” “겁쟁이 알베르트!” 알베르트의 편을 드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알베르트는 게오르그의 어깨를 힘껏 누르며 소리쳤습니다. “자, 어때! 이래도 내가 겁쟁이야?” 게오르그는 알베르트를 넘어뜨리려고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 내가 이겼지?” 알베르트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그러자 게오르그는 알베르트를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고기 수프를 먹는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진 않았을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알베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힘이 쭉 빠졌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입을 삐죽거리며 거들었습니다. “그래, 저 애는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우리들하곤 먹는 것부터가 달라.” 알베르트는 슬그머니 일어나 말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승리의 기쁨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알베르트는 줄곧 조금 전 게오르그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내가 힘이 세서 이긴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보다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외톨이가 정말 싫어.’ 알베르트가 사는 마을은 가난한 고장이라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면 소나 말을 돌보거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허름했고 신발도 대부분 나막신이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알베르트는 항상 깨끗한 옷을 입었고, 아버지가 사다 준 비싼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알베르트에게 마을의 아이들은, “목사님 댁 도련님.” “저 애는 우리들과 달라.”라고 말하며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베르트는 이제까지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식탁에 오른 고기 수프를 보자 게오르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하셨어. 그런데 나만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평등하지 못한 일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알베르트는 입맛이 달아났습니다. 알베르트는 힘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식탁에서 물러났습니다. 평소 명랑하던 알베르트가 시무룩해 있는 것을 본 어머니는 몹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알베르트, 무슨 일이 있니?” 하지만 알베르트는 누구도 자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알베르트는 고기 요리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친구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알베르트가 바로, 훗날 아프리카로 건너가 사랑의 의술을 베푼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해요.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독일 알자스 지방의 카이저스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럽의 곡창 지대로 손꼽히는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싸움을 벌였을 정도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고장이었습니다. 알베르트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목사였는데, 알베르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웃 마을의 교회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은 귄스바흐라는 곳이었습니다. 새로 이사 온 목사의 가족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모인 온 마을 사람들은 알베르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갓난아기가 너무나 허약해 보여, 과연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기가 병이 들었나 봐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몸이 약한 것 같군요.” “목사님 부부가 얼마나 속상할까요?” 부인들은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아무 탈 없이 잘 자라 주었습니다. 알베르트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기도의 힘에 의해서였습니다. 알베르트는 어릴 적부터 동물에 대한 관심과 동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어느 날, 알베르트는 어머니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 앞에서 여윈 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끌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부는 채찍으로 사정없이 말을 때리며 억지로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말은 앞발을 뻗대며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기 때문에 그 모습이 더욱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어머니, 저 말을 왜 끌고 가는 거예요?” 마음이 여린 알베르트는 금세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저 말은 이제 너무 늙어서 짐을 실어 나르는 데 쓸모없게 되었어. 그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거란다.” 도살장이란 소나 말을 죽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죽으러 가는 거예요?” 알베르트의 볼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가엾은 동물을 실컷 부리고는 함부로 죽이는 걸까.’ 그 후, 이 일은 오랫동안 알베르트의 마음을 우울하게 했습니다. 한 번은 하인리히라는 친구가 알베르트를 찾아왔습니다. “알베르트, 우리, 새를 잡으러 가자.” 하인리히의 손에는 고무총이 들려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혹시 ‘목사님 댁 도련님’ 하는 식의 놀림을 받게 될까 봐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알베르트는 느릿느릿 하인리히를 따라 숲으로 갔습니다. 새싹이 막 돋아나기 시작한 나뭇가지에 새들이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하인리히는 그 새들을 향해 고무총을 겨누었습니다. ‘휙’ 소리와 함께 공기를 가르며 고무총을 빠져나간 돌멩이는, 보기 좋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를 맞혀 떨어뜨렸습니다. “봤지? 이렇게 새를 잡는 거야. 자, 알베르트 너도 한번 해 봐.” 하인리히는 우쭐대면서 고무총을 내밀었습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든 알베르트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는 것이 싫어서, 고무총 사이에 작은 돌멩이를 끼워 놓고 반대편 나뭇가지를 향해 힘껏 고무줄을 당겼습니다. 그때, 마을 쪽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뎅, 뎅, 뎅...” 그 종소리는 알베르트에게, 마치 하나님의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마라. 너보다 약한 것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알베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인리히가 비웃으면 어때!’ 알베르트는 고무총을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리고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을 쫓아 보낼 양으로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습니다. “훠이, 훠이!” 새들은 놀라서 파다닥 날아올랐습니다. “알베르트,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화가 난 하인리히는 알베르트를 때릴 듯한 표정으로 다가섰습니다. 그러나 하인리히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알베르트는 웃기만 했습니다. 하인리히에게 바보 취급을 당한다 해도 좋았습니다. 알베르트는 자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흐뭇하고 가벼워졌습니다. 화가 난 하인리히는 저만치 앞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을 내려오면서도 알베르트는 마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정한 용기야. 이젠 어떤 놀림도 두렵지 않아.’ 그날 밤, 저녁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어머니는,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낮에 새를 잡으러 갔던 일이 떠오르자, 알베르트에게는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왜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불쌍하고 가엾은 동물들을 위해서는 기도해 주지 않는 걸까?’ 저녁 기도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가만히 앉아 동물들을 위한 기도문을 적어 나직이 외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보살펴 주소서. 동물들을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시고, 모두에게 평화를 주시옵소서.” 그 후로 알베르트는 친구들이 새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하면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또 친구들이 동물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만두게 했습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알베르트는 매우 용기 있고 정의로운 소년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5살이 되자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알베르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알베르트, 제때 공부를 하지 않아 시기를 놓치게 되면 나중에는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게 된단다.” 학교에 들어간 알베르트는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를 따돌리는 것 때문에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알베르트는 늘 혼자서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게오르그와의 싸움이 있고 난 뒤부터 마을 아이들은 알베르트에게도 제법 잘 대해 주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게 되자 차츰 학교생활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헌 외투를 수선하여 알베르트의 외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그 외투를 입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싫어요. 전 그 옷을 입지 않겠어요.” “아니, 날씨도 추운데 왜 입지 않겠다는 거니?” “전 춥지 않아요.” “너, 새 옷이 아니라 헌 외투로 만든 것이라고 투정을 부리는 거니?” 아버지가 화를 내자 알베르트는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저만 이런 따뜻한 옷을 입는다는 게 부끄러워요. 제 친구들 중에는 외투를 입는 아이가 없거든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알베르트가 그런 착한 심성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알베르트에게 모자를 사 주려고 알베르트와 함께 시내에 있는 모자 가게에 갔습니다. 모자 가게 주인은 그 무렵에 유행하는 모자들을 이것저것 알베르트에게 씌워 보더니, 해군 모자를 본뜬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이게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어머니도 그 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한쪽 구석에 있는 볼품 없는 모자를 집어 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털모자가 더 좋아요.” 알베르트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와 비슷한 털모자를 고른 것입니다. 점원이 구석에서 그 모자를 꺼내 주자 알베르트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어느 날, 알베르트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을 때, 당나귀가 끄는 달구지와 함께 마우쉐 아저씨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마우쉐 아저씨는 마을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고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마을 아이들은 마우쉐 아저씨를 보기만 하면 그 뒤를 쫓아다니며 놀려댔습니다. 그날도 예외 없이 아이들은 달구지 뒤를 따라가면서 마우쉐 아저씨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마우쉐, 마우쉐... 마우쉐는 유대인 바보.” 그런데 마우쉐 아저씨는 아이들의 놀림을 받아도 화를 내기는커녕 싱글벙글 웃기만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렇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어쩌면 화를 내지 않고 웃고 있는 걸까? 아이들을 붙잡아서 혼을 내주면 두 번 다시 아이들의 놀림을 받지 않을 텐데.’ 마우쉐 아저씨의 웃는 얼굴과 마주친 알베르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우쉐 아저씨가 유대인이라고 해서 바보 취급을 받을 까닭은 없으며, 놀림을 당하면서도 계속 웃는다는 것은 굉장히 참기 힘든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일은 알베르트의 마음에 ‘인내’라는 숭고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1884년, 9살이 된 알베르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중학교는 귄스바흐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묑스테르 마을에 있었습니다. 조그만 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일곱 식구가 생활하기에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알베르트는 도시의 학교로 가지 못하고, 돈이 적게 드는 실업 중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알베르트가 학교로 가는 길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푸른 풀밭과 아늑한 숲이 있는 비스듬한 언덕에는 목장이 있었고, 언덕 맨 꼭대기에는 옛 성터가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종종 그 성터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넓은 세상에 대해 상상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풀냄새와 꽃향기가 실린 향긋한 바람을 가슴에 안으면서 알베르트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그때마다 알베르트는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낙심했습니다. 어느 날 알베르트의 고민을 듣게 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능을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거라. 너는 피아노를 잘 치니까, 피아노를 더 잘 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어떻겠니?” “아, 그렇군요. 저도 잘하는 것이 있었군요.” 알베르트는 눈을 반짝이며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건반을 두드리는 동안 학교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정경이 머릿속을 스쳐 갔습니다. 시나 그림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음악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베르트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알베르트에게는 어릴 적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있었습니다. 알베르트가 5세 무렵부터 아버지는 낡은 피아노로 음악을 가르쳤는데, 놀랍게도 악보를 쉽게 이해하고 금세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의 이런 재능은 아마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듯했습니다. 목사였던 외할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로서도 이름을 떨치던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음악 시간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선생님 앞으로 나가서 당돌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오르간을 화음도 없이 연주하세요? 그러니까 소리가 아름답지 않아요.” 선생님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고 물었습니다. “그럼, 너는 화음을 넣어서 칠 수 있다는 말이니?” “그럼요.” 알베르트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디, 그럼, 네가 한번 연주해 보아라.” 알베르트는 오르간 앞에 앉더니, 선생님이 연주하던 찬송가에 화음을 넣어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선생님이 연주하던 것보다 훨씬 듣기 좋은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알베르트, 정말 대단하구나!” 선생님은 알베르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엄격한 학교생활. 1학년이 끝나 갈 무렵인 1885년, 알베르트는 친척인 루이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뮐하우젠의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베르트의 할아버지와 형제지간인 루이 할아버지는 그곳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동안 소피에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루이 할아버지의 관사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루이 할아버지와 소피에 할머니는 알베르트의 일과표를 짜 놓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일과표는 오로지 학교 공부와 오르간 연습 시간으로만 꽉 짜여져 있을 뿐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자유롭게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알베르트에게는 정말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점점 공부에 흥미를 잃어 갔습니다. 자연히 학교 성적은 꼴찌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김나지움의 교장 선생님은 알베르트의 아버지를 학교로 불렀습니다. 알베르트의 성적이 너무 나빠서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겠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결코 다른 일로 말썽을 피우는 아이는 아니잖습니까?” “좋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습니다.” 아버지가 사정해서 겨우 퇴학만은 면했지만, 이 일로 루이 할아버지와 소피에 할머니는 전보다 더욱더 엄격해졌습니다. 알베르트는 그럴수록 점점 더 공부가 싫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방학을 맞은 알베르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 알베르트! 어서 오너라. 정말 보고 싶었단다.” 어머니는 반가운 나머지 눈물까지 보이며 알베르트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디, 우리 알베르트 성적표 좀 볼까?” 그 순간 알베르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자신의 성적표를 보고 어머니가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습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알베르트는 성적표를 어머니의 손에 슬며시 건네고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아니, 어쩜 이럴 수가...” 성적표를 꼼꼼히 들여다보던 어머니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자신의 학교 성적이 그토록 어머니를 놀라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알베르트는 잠자코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지난날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한 번만 더 지켜봐 주세요. 다시는 두 분을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알베르트는 이렇게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알베르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과 씨름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 담임이 된 베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선생님이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도 성적이 좋아지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만 선생님의 꼼꼼한 지도로 알베르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하다가 게으름을 피우고 싶으면 알베르트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힘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의 성적은 몰라보게 좋아져서 새 학기가 시작된 지 3개월 후부터는 우등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된 알베르트를 떡갈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알베르트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떡갈나무와 같다. 뿌리를 박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뿌리를 박고 나면 꿈쩍도 하지 않는 떡갈나무 말이다.” 이 무렵 알베르트는 학교 공부 외에도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거나 쓸데없는 공상에 빠지려고 할 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알베르트는 책을 읽으며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알베르트는 매일 배달되는 신문이나 주간 월간 잡지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알베르트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정치 기사였습니다. 여러 가지 읽을거리를 읽는 동안 알베르트의 눈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조금씩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알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옷이나 소지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좋은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옷은 형식에 불과해.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이야.’ 알베르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소피에 할머니 역시 알베르트가 지나치게 외모에 무관심한 것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나이가 들면서 차차 변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애는 가난뱅이인가 봐.” “창피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알베르트의 귀에까지 들려 왔지만, 알베르트의 태도는 의연하기만 했습니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있었습니다.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알베르트도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겨울옷만큼은 필요했습니다. 알베르트는 따뜻한 코트 한 벌을 장만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를 반기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집안 분위기는 어두웠고 어머니는 무척 야위어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괜히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 형편은 겨울옷은커녕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하기에도 벅차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일어나 알베르트를 반겼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아버지?” “오, 알베르트! 이젠 많이 의젓해졌구나.” 아버지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알베르트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한동안 알베르트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알베르트, 오랜만에 너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 싶구나.” 알베르트는 오르간 앞에 앉아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맑고 고운 찬송가가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나직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온 식구가 입을 모아 힘차게 합창을 했습니다. 알베르트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아아, 오늘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그동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로부터 받았던 차가운 눈총도 이 순간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알베르트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기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고향 집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알베르트는 어머니를 따라 귄스바흐 마을에서 멀지 않은 콜마르 시에 가게 되었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잠시 공원을 산책하던 알베르트는 어떤 동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거기에는 해군 제독 브루마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은 제독의 동상이 아니라, 바로 제독의 발밑에서 괴로운 모습으로 신음하고 있는 듯한 흑인의 석상이었습니다. 어깨가 넓고 억센 근육을 가진 건장한 흑인 청년의 모습을 본뜬 석상이었는데, 슬픔을 꾹 참고 있는 듯한 그 표정은 알베르트의 가슴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후 알베르트는 그 석상을 보기 위해서 자주 콜마르 시로 갔습니다. 훗날 알베르트가 아프리카로 건너가 흑인을 위해 일하게 된 것도, 바로 이때 느꼈던 감정이 계기가 된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다시 뮐하우젠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덧 졸업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베르트에게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날만은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알베르트에게는 마땅하게 입고 갈 만한 옷이 없었던 것입니다. 집에서는 새 옷을 사 줄 만한 형편이 못 되었으며, 오래된 옷들은 너무 낡았고 몸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알베르트를 지켜보던 소피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옷을 입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옷은 품이 너무 커서 알베르트에게는 자루를 입혀 놓은 것처럼 헐렁했습니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알베르트는 할아버지 옷이라도 입고 가야 했습니다. 알베르트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타나자,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우스꽝스런 모습을 한 알베르트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따라 모두 시험장으로 들어가 시험을 치렀습니다. 루이 할아버지와 소피에 할머니는 시험장까지 따라와 알베르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알베르트는 졸업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9년에 걸친 중학교와 고등학교 생활은 이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1893년 가을, 18세가 된 알베르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알베르트는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음악도 계속했습니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느라고 알베르트는 조금도 한가로울 틈이 없었습니다. 이듬해 4월, 알베르트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정한 법에 따라 1년간 의무적으로 군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군인들은 아침에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상관의 명령에 따라 고된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알베르트가 속한 부대의 지휘관은 무척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알베르트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강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어디를 가든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군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그것을 꺼내 읽었습니다. 휴식 시간에는 풀밭 위에 누워 성서를 꺼내 읽었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른 동료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혼자 떨어져서 풀밭에 배를 깔고 책을 읽노라면, 모닥불의 연기 냄새도, 떡갈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는 1년간의 군대 생활을 지루한 줄 모르게 마친 후,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알베르트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보통 한 과목을 5년이나 6년 동안 연구한 다음 논문을 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원래 신학 학위를 목적으로 공부했지만, 차츰 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2세 때부터는 철학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생활했습니다. 방학이 되어 알베르트는 잠시 고향에 다니러 왔습니다. 여러 가지를 공부하느라 단 한 시간도 여유 있게 쉬어 보지 못한 알베르트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고향의 전원에 눈을 돌렸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포도나무 잎사귀에서 은구슬처럼 부서져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알베르트는 진지하게 자신의 장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된 것일까...’ 알베르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친구들은 성장하여 이제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은 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은 어릴 적과 조금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예전에 자주 거닐던 포도밭 사이의 오솔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색이 다 바랜 옷을 입은 남자가 탐스럽게 익은 포도송이를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알베르트를 보더니 일손을 멈추고 반갑게 손짓을 해 보였습니다. “여어, 알베르트! 오래간만이군. 그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알베르트는 건강한 농부가 되어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향에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896년 성령 강림절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알베르트는 창문으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을 보며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찬란한 아침의 광경을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가족, 친구, 선생님, 그리고 내 주위에 가득한 좋은 사람들. 게다가 내가 누릴 수 있는 이 환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푸른 초원, 싱그러운 풀 냄새, 하늘에 떠가는 저 구름,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 산들바람, 밝은 햇빛. 세상에는 슬픔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알베르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일들이 알베르트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어릴 때 게오르그가 ‘나도 너처럼 1주일에 두 번씩 고기 수프를 먹는다면 이렇게 쉽게 지지는 않았을 거야.’라고 말했던 일, 친구를 따라 새를 잡으러 갔다가 새를 쏘지 못하고 고무총을 내동댕이쳤던 일, 마을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결코 화를 낸 적이 없던 마우쉐 아저씨, 어머니와 함께 모자를 사러 갔다가 볼품없는 털모자를 집어 들었던 일, 동물들한테 가졌었던 동정심 등등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입니다.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자, 알베르트는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고 희미하기만 했던 자신의 미래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드디어 알베르트는 마음의 결정을 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미래를 향하여 하나의 길을 열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결코 피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그렇다. 이제까지의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앞으로도 계속 이대로 살아간다면 어느 한쪽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결과가 된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아픔을 나눠 가져야 한다.’ 이렇게 결심한 알베르트는 자신의 생각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세상의 빛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보다는 어둠과 절망, 슬픔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 편에 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음, 그래. 네가 그런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 자랑스럽구나.” 알베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아버지는 아들이 대견스러운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프리카를 향해.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파리로 건너가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매일매일 두꺼운 책과 씨름하면서도 슈바이처는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해 나갔습니다. 1899년, 슈바이처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주말이면 귄스바흐로 돌아가, 마을 교회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예배를 보기도 했습니다. 또 해마다 봄이 되면 파리로 가서 파이프 오르간 지도를 받고, 가을이 되면 마을의 목사관으로 돌아와 휴가를 보냈습니다. 이 무렵 슈바이처는 바흐에 대한 전기를 쓰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프랑스의 비도르란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들을 위해서 바흐에 대한 논문을 써 달라는 제의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지내는 동안, 성가대 연습이 있을 때마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했고, 공연 때에는 직접 반주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바흐의 곡들을 많이 다루어 보았기 때문에, 슈바이처는 바흐의 작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논문을 쓸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조금씩 덧붙여져서, 5년 뒤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완성되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슈바이처는 파이프 오르간 제작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또한 신학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그가 쓴 예수전 연구라는 책은 예수를 여러 관점으로 연구한 것으로서, 슈바이처가 군대에 있을 때부터 공부해 오던 내용들을 모은 것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29세가 되던 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성 토마스 신학교의 기숙 사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고리타분한 학자도, 권위를 내세우는 교수도 아니었습니다. 학생들과 언제라도 허물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처럼 다정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슈바이처의 인품을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슈바이처에게 어떤 아름다운 마음이 숨겨져 있고, 그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슈바이처는 몇 년 전 귄스바흐에서 결심했던 것을 이제 실행에 옮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1904년 가을, 슈바이처는 파리 선교사 협회로부터 작은 책자 하나를 받게 되었습니다. 표지를 넘기자 ‘콩고 지방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글은 알자스 출신의 선교사가 쓴 글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식량이 부족해서 매일같이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져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의사입니다.' ‘아프리카, 그리고 흑인...’슈바이처는 문득 콜마르 공원의 흑인 석상이 떠올랐습니다. 슬픔에 잠긴 그 얼굴이 지금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할 일을 찾았다.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자.” 슈바이처는 비로소 자신의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슈바이처를 말렸습니다. “자네는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게 더 낫네.” “목사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야.”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에 뛰어드는 것보다, 자네가 해야 할 더 큰 일이 있지 않은가?” 귄스바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욱 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여러 분야에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네가 어떻게 아프리카로 갈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아버지, 어머니.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병에 걸려도 의사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이미 굳어진 슈바이처의 결심을 무너뜨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의과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슈바이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준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 역사학 교수의 딸인 헬레네 브레슬라우였습니다. 두 사람은 성 빌헬름 교회에서 만났는데, 서로의 생각이 비슷하여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함께 아프리카로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슈바이처가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 헬레네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간호학을 공부했습니다. 슈바이처는 의학 공부를 하는 틈틈이 아프리카로 가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쓰고 연주를 하러 뛰어다녔습니다. 마침내 슈바이처는 1911년, 의사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는 의사가 된 후에도 파리로 가서 열대 지방의 전염병을 연구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슈바이처의 굳은 의지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왔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 사는 슈바이처의 친구들과 그가 목사로 있던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도 후원금을 보내 주었습니다.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슈바이처는 사랑하는 헬레네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아프리카로 건너가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했습니다. 드디어 1913년, 슈바이처는 아내 헬레네와 함께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슈바이처 부부를 전송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항구로 나왔습니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다 같이 목이 메었습니다. 대학 교수로서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학자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도 있었던 슈바이처였습니다. 목사로서도 음악가로서도 충분한 능력을 지닌 슈바이처였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그런 모든 것들을 팽개치고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땅 아프리카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와 헬레네를 태운 배는 거친 파도를 헤치며 아프리카로 나아갔습니다.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검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슈바이처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아프리카로 가는 것은 불쌍한 흑인들을 구해 내기 위해서이다.’ 슈바이처 부부는 프랑스의 한 항구에서, 콩고 행 배를 타고 3주일 동안 힘겨운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항해 도중에 몇 차례의 폭풍우를 만나기도 하고, 한낮의 기온이 섭씨 30~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를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를 떠난 지 20여 일 만에 슈바이처 부부를 태운 배는 아프리카의 기니 만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본 아프리카는 책을 통해 본 아프리카와 전혀 달랐습니다. 슈바이처는 물과 원시림 사이라는 책에서, 아프리카를 처음 본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기 이전의 원시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가 강이고 어디까지가 육지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나무뿌리, 그것에 얽혀 있는 식물의 덩굴, 그것들은 이제껏 사람의 손이 닿은 적이 없는 원시의 것들이었다. 또한 종려나무와 야자나무의 넓은 잎사귀로 뒤덮인 넓디넓은 초원에는 높이 자란 채로 말라 버린 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반짝거리는 강물 위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수없이 떠 있었다... 이것이 아프리카인 것이다. 다시 오랜 항해 끝에 슈바이처 일행이 도착한 곳은 오고웨 강어귀에 있는 랑바레네라는 곳이었습니다. 마침내 아프리카 땅을 밟은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무척 감격스러웠습니다.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백인 선교사들이 소식을 듣고 나와 슈바이처 부부를 그들의 전도소로 안내했습니다. 전도소는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조그마한 흰색 건물이었습니다. 사방이 밀림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앞에는 오고웨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백인 의사가 찾아왔다는 소문은 금세 마을로 퍼져 환자들이 밀어닥쳤습니다. 슈바이처는 미처 짐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해야 했습니다. 우선 그는 앞뜰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환자들을 진찰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레네도 슈바이처를 도와 환자들에게 약을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주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슈바이처는 환자들을 돌보는 틈틈이 원주민들과 힘을 합해 병실과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몰려드는 환자들을 다 받아들이기에는 모든 게 부족했습니다. 할 수 없이 집 옆에 붙어 있는 닭장까지 뜯어내어 병실로 사용했습니다. 슈바이처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원주민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흑인들이 고통스럽게 아우성을 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치료가 한발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슈바이처와 원주민들은 손짓 발짓으로 겨우겨우 뜻을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지붕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병실이라, 갑자기 비라도 쏟아지면 환자와 의사 모두가 비를 피해 뛰어다니느라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결코 짜증을 내거나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에 대해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환자라도 더 치료해 주기 위해 말 없는 노력을 기울일 뿐이었습니다. 정글의 흑인들은 거의 맨발로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흙에는 사람의 살을 파먹는 모래벼룩이라는 벌레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모래벼룩한테 발가락을 파 먹혀서 발이 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흙탕물에는 여러 가지 병균이 들끓고 있어서 안심하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슈바이처의 주의를 무시하고 함부로 물을 마셔 배탈이 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병이 완쾌되기도 전에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 바람에 병이 더 심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또, 환자가 사용한 물을 다른 사람이 사용해서 금세 무서운 전염병이 퍼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원주민이 제일 많이 걸리는 병은 헤르니아라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에, 그는 환자가 생기면 밤잠을 자지 못하면서까지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슈바이처가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먹으라는 약을 한 번에 다 먹어 버리거나, 바르는 약을 먹어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볼 때마다 슈바이처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잘 몰라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진료에서부터 주변의 환경까지 모든 것에 일일이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대나무로 기둥을 세운 뒤 풀로 지붕과 벽을 만들어 맨바닥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하루빨리 병실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곳에서 건축 자재와 건축 기술자를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슈바이처는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마루를 깔고, 침대를 놓고, 지붕에 양철을 씌워 병원다운 병원을 완성시키기까지는 퍽 오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병원을 완성한 후 병실을 늘릴 때에는 원주민들의 손을 빌려야 했는데, 그 일도 슈바이처의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습니다. 환자를 돌보면서 병실을 짓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슈바이처는 몸이 몇 개가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습니다. 얼마 전 파리에 있는 바흐 협회에서는 슈바이처 부부에게 오르간을 보내 주었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는 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슈바이처 부부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은 음악이었습니다. 어느 날, 헬레네는 하루의 일과를 마친 뒤 슈바이처에게 오르간을 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로 오면서부터 음악가로서의 내 인생은 끝났소. 나는 요즈음 약에 대한 생각밖에 없소.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품만 풍부하다면 더 바랄 게 없겠소.” “마냥 걱정만 하고 있기보다는 오르간을 치면서 마음을 가다듬다 보면 용기가 생길 거예요. 음악이 어둠 속에 빛을 준다는 것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자, 어서 이리로 와서 오르간을 연주해 보세요.” 헬레네에게 이런 위로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슈바이처는 괴롭고 답답한 일이 생길 때마다 오르간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한창 활동을 하던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적이 되어 싸웠습니다. 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던 어느 날, 슈바이처 부부는 프랑스 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 놓은 랑바레네의 병원과, 치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원주민들과도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슈바이처의 일생에서 이때만큼 슬프고 어려운 시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려운 시기에 슈바이처에게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슈바이처는 오랫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달려갈 수가 없다니... ’전쟁이란 그토록 매정한 것이었습니다. 슈바이처 부부는 프랑스의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면서, 거의 1년 가까이 포로 생활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포로 중에는 독일인 외에 오스트리아 인도 있었고, 항해 도중 붙잡혀 온 인도인, 중국인도 끼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학자, 건축가, 가톨릭 전도사, 은행원 등 각양각색의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의사는 슈바이처뿐이라, 수용소에서 환자가 생기면 슈바이처가 돌보아야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국적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슈바이처는 수용소 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포로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 슈바이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건축과 농사일은 듣는 대로 꼼꼼히 적어 두었습니다. 훗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되면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1918년, 전쟁이 끝난 뒤 슈바이처 부부는 포로의 신분에서 풀려나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의 산과 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부부는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없는 고향 집은 쓸쓸하기만 했습니다. 늙으신 아버지는 슈바이처를 부둥켜안고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건강이 몹시 나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슈바이처는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쇠약해졌던 몸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슈바이처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강연의 내용은 아프리카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병원 일을 해 나가던 것과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은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지낸 일들을 회상하며 물과 원시림 사이라는 책을 썼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열어 다시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24년 2월 21일, 슈바이처는 한 사람의 조수와 함께 다시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이때 헬레네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슈바이처가 랑바레네에 도착한 것은 4월 중순쯤이었습니다. 7년 만에 아프리카 땅을 다시 밟고, 랑바레네의 병원을 대하게 된 슈바이처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던 병원 건물은 거의 다 썩어서 허물어져 있었으며, 잡초가 무성하여 발을 들여놓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까지 형편없게 변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병원을 새로 짓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조수와 단둘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슈바이처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침 일찍부터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슈바이처는 환자들을 돌보는 틈틈이 병원 짓는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이러다 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아, 잠자는 시간조차 줄여야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밤잠을 안 자고 공부한 적은 있었으나, 랑바레네에서의 생활은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고생 끝에 마침내 병원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병원이 새로 지어지자, 슈바이처는 마음 놓고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이 무렵 알자스에서 의사 몇 명이 슈바이처를 도우러 왔습니다. 슈바이처는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이 생기자 한결 힘이 솟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는 기후 탓인지 먹을 것이 많이 부족했고, 유난히 환자가 많았습니다. 슈바이처는 큰 병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 지을 병원의 자리는 지금의 위치에서 조금 위쪽으로 정했습니다. 또다시 힘든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밀림 속의 나무와 덩굴들을 베어 낸 후, 그곳에 병원을 세울 땅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병원 주변에는 과일과 야채를 가꿀 농장도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잠시 다른 의사에게 맡기고, 슈바이처는 하루 종일 병원을 짓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1927년 1월, 드디어 새 병원이 완공되었습니다. 200여 명이 입원할 수 있는 병실이 생겼고, 전염병 환자와 정신병 환자를 따로 입원시킬 병실도 만들어졌습니다. 병원 주변의 농장에서는 옥수수와 바나나, 망고 등의 열대성 농작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제 랑바레네 병원에서 굶주림은 사라졌습니다. 사랑의 전도사 슈바이처가 평화의 터전으로 일구어 놓은 것입니다. “야, 굉장하다!” “우리 선생님, 만세!” 원주민들은 새로 세워진 병원을 보고 모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슈바이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프리카로 향했던 시절, 닭장을 수리하여 병실로 사용했던 일, 지붕도 없는 병실에서 비를 흠뻑 맞던 일 등이 슈바이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 좋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슈바이처는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해 7월, 슈바이처는 잠시 시간을 내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인 헬레네와 첫째 딸 레나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병원의 기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강연회를 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 슈바이처는 매우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가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김나지움 시절 성적이 부진한 자신 때문에 교장 선생님에게 불려 가 사정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슈바이처의 눈가에는 어느덧 눈물이 번져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몸이 저려왔습니다. 사랑의 실천자. 1938년 4월 16일은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땅을 밟은 지 꼭 25년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랑바레네에 사는 백인들은 그날을 기념하여 슈바이처에게 엑스레이 촬영기와 성금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랑바레네에는 병원 건물이 수십 채, 의사가 30명, 간호사가 6명, 흑인 조수가 13명이나 되었습니다. 슈바이처의 20여 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이 이런 결과를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듬해,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의 회오리는 아프리카에도 불어닥쳤습니다. 약품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 데다가,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은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병원의 젊은 일꾼들마저 하나둘 전쟁터로 불려 나가, 병원에는 일할 사람도 부족했습니다. 그때 만일 미국 교회의 선교 단체로부터 의약품과 식량 등의 구호품이 전달되지 않았더라면 병원은 아마도 문을 닫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아내 헬레네가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헬레네는 몸이 많이 약해져서 딸 레나와 함께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헬레네는 여행의 피로도 잊은 채, 즉시 팔을 걷어붙이고 슈바이처를 도왔습니다. 그 덕분에 병원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슈바이처는 일흔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아직 전쟁 중이었지만 병원에서는 슈바이처를 위해 정성 어린 축하 파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침내 길고 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습니다. 전쟁터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하나둘 돌아오자, 랑바레네는 다시 기쁨과 활기로 가득해졌습니다. 그 무렵 슈바이처는 나병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뚜렷한 치료 방법을 찾아 내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나병 치료 약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침 미국에서 열리는 괴테 탄생 200주년 기념식에 강연 연사로 초청을 받은 슈바이처는 서둘러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슈바이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강연의 요점은 사랑과 생명의 소중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작은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질병도, 전쟁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슈바이처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이제 아프리카의 성자로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1952년, 전 세계의 언론은 그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결정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슈바이처의 나이 77세가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랑바레네로 찾아온 한 기자가 슈바이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벨상을 받게 되면 많은 상금을 타실 텐데, 그 돈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슈바이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지을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노벨상을 받는 영광보다 흑인들을 위한 일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4년 가을, 슈바이처는 노벨상 수상을 기념하여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의 강연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심어 주었습니다. 다시 랑바레네로 돌아온 슈바이처는 전과 다름없이 환자를 돌보는 일과 병원을 돌보는 일로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팔, 흰 모자, 반소매의 셔츠, 색이 바랜 바지, 광택이 없는 구두 등은 슈바이처의 꾸밈없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는 했지만, 그는 도저히 80세의 노인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랑바레네에서는 환자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회복된 사람은 일을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그들이 일하는 틈에 섞여서 손수레를 밀기도 하고, 병실 청소를 거들기도 하면서 한시도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환자들을 치료할 약이 없어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세계 각국에서 많은 약을 보내 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슈바이처의 서재는 돗자리를 12장쯤 깔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습니다. 그 안에는 큰 침대가 놓여 있었고, 머리맡에는 언제나 성냥과 양초가 놓여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하면서 여가를 보냈습니다. 1957년, 헬레네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바이처의 봉사 생활에 동참했던 아내는 그의 인생의 훌륭한 동반자였습니다. 슈바이처의 슬픔은 매우 컸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쉬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이제 슈바이처를 돕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랑바레네로 찾아오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병원은 5백 명의 환자들도 거뜬히 입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한편 1960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차례로 독립하였습니다. 특히 랑바레네가 있는 가봉공화국에서는 슈바이처에게 ‘적도성 십자’라는 최고 훈장을 주었고,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모습이 들어 있는 독립 기념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슈바이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런 슈바이처의 모습은 쓸쓸해 보이기보다는 성스러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슈바이처를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원주민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65년 9월 1일, 슈바이처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져 전 세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9월 4일 밤 10시경,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슈바이처는 가늘게 눈을 뜨고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술을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스위스에서 비행기로 급히 달려온 딸 레나는, 순간적으로 뭔가를 깨달은 듯 재빨리 오르간 앞에 앉았습니다. 레나는 오르간 앞에 앉아 아버지가 좋아하던 곡을 연주했고, 슈바이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튿날, 흑인 성가대의 슬픈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슈바이처는 랑바레네 병원 안에 있는 헬레네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진정한 친구였던 슈바이처는 참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준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 뿌린 그의 사랑과 봉사 정신은 매우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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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소년 볼프강. 1756년 1월 27일, 이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있는 게트라이데 거리의 한 집에서는 궁정 오케스트라 단원인 레오폴트가 초조한 심정으로 새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날 태어난 아기가 바로 훗날 천재 음악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입니다. 볼프강은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위로 5남매는 모두 어릴 적에 죽고 형제라고는 다섯 살 위인 누나 난넬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궁정 오케스트라 단원이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집에서는 하루도 음악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궁정 오케스트라는 잘츠부르크의 대사제가 훌륭한 음악가들을 모아 만든 것으로, 잘츠부르크 사람들의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아버지는 하프시코드를 곧잘 연주했고, 또한 거의 매일 아버지의 친구들이 악기를 들고 찾아와서 음악회를 열었기 때문에 집 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족 중 누구도 이것을 언짢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를 학자로 키울 생각이었으나, 레오폴트는 음악을 좋아하여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자식들도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궁정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는 직업 외에도 교회의 성가대 소년들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했고, 집에 돌아오면 딸 난넬에게 하프시코드를 가르쳤습니다.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된 난넬의 하프시코드 연주 솜씨는 보통 수준을 넘었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반가운 일은 아직 어린 볼프강도 누나의 연주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 만큼 음악적 재능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마친 레오폴트가 외출 준비를 하려다가 발걸음을 멈칫했습니다. 마침 밖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그 종소리에 맞추어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아니, 언제 저렇게 익혔을까? 음의 높이가 정확하군.’ 레오폴트는 볼프강의 장난인 줄 알면서도 음이 너무 정확한 데 놀라서 하프시코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린 볼프강은 하프시코드 의자 위에 올라가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살며시 다가가서 볼프강의 하프시코드 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볼프강에게 난넬이 보는 악보 책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볼프강은 그 악보 책을 보며 떠듬떠듬 연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레오폴트는 너무나 기뻐서 본격적으로 악보를 보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볼프강은 어떤 악보든지 아주 훌륭하게 연주를 해냈습니다. 볼프강은 음악에 대한 이해력이 빨라, 어린 나이에 제법 감정까지 실어서 연주했습니다. 레오폴트는 볼프강의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단계적으로 수준을 높여 음악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볼프강은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아버지는 볼프강에게 음악 외에 읽기, 쓰기, 산수, 역사, 지리 등도 차근차근 가르쳤습니다. 그 무렵에는 교회나 수도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오늘날의 학교 수준의 교육을 하였는데, 볼프강은 그런 곳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에게서만 교육받았습니다. 어느 날, 볼프강은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습니다. 난넬이 미뉴에트를 연습하려고 들어왔지만, 볼프강은 그것도 모르고 골몰해 있었습니다. “볼프강,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지금 작곡하는 중이야.” “이름도 똑바로 못 쓰면서 무슨 작곡을 한다는 거니?” 난넬이 무시하듯이 말하자 볼프강은 작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인 샤하트너 씨가 들어오다가 볼프강의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샤하트너 씨는 볼프강이 그린 악보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정말 놀랍군. 이 곡을 이 꼬마가 만들었단 말인가?” 악보를 받아 든 아버지도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군.” 아버지는 악보의 빈자리에 이렇게 적어 넣었습니다. ‘볼프강, 5세 때 작곡.’ 이것이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지은 최초의 미뉴에트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볼프강에 대한 소문은 이웃 마을에까지 퍼졌습니다. “볼프강이란 아이가 음악의 천재라면서요?”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작곡까지 한다죠?” 평소 엄격하며 칭찬은 잘 하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볼프강의 이야기가 오르내릴 때마다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볼프강이 신동이라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잘츠부르크의 온 거리로 퍼져 나갔습니다. ‘볼프강은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볼프강의 뛰어난 음악성을 키워 주기 위해서 여행을 시켜야겠다.’ 아버지는 이렇게 결심하고 볼프강과 난넬을 데리고 연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볼프강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762년 초여름이었습니다. “볼프강, 어디 있니?”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볼프강을 찾았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볼프강을 찾으세요?” 정원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아주 반가운 소식이야. 우리 아이들이 음악의 도시 빈으로 가서 연주하게 되었소." "어머나, 그게 정말이에요? 그런데 빈까지 가려면 한 달씩이나 마차를 타고 가야 할 텐데 아이들에게는 무리가 아닐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어디 있소? 어서 이 기쁜 소식을 말해 줘야겠소."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을 거예요." 그로부터 며칠 후, 모차르트 가족은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탈것이라고 해야 고작 마차가 전부였습니다. 그나마도 속도가 느린 데다 잦은 고장으로 인해 한번 여행하려면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모차르트 가족은 빈으로 가는 도중에 잘츠부르크의 북서쪽에 있는 도시 뮌헨에 들렀습니다. 두 아이는 약 보름 동안 뮌헨에서 몇 차례의 연주회를 했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바이올린을 켜고, 난넬은 하프시코드를 연주하였습니다. 연주회가 열릴 때마다 유명한 음악가들을 비롯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와서 남매의 뛰어난 연주 솜씨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건 도저히 여섯 살짜리 아이의 연주라고 할 수 없어. 정말 훌륭해." "정말 감동적인 연주야. 음악의 신동이 탄생했어." 연주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볼프강은 뮌헨에서도 제법 유명해졌습니다. 뮌헨에 머무는 동안, 볼프강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요제프 3세 앞에서도 연주해 보였습니다. 볼프강의 연주 약속을 지켜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대성공이다! 이제부터는 볼프강의 솜씨를 더욱 넓은 곳에 가서 자랑하자.' 뮌헨에서 성공을 거둔 아버지는 한층 자신감이 생겨 빈 여행을 서둘렀습니다. 볼프강도 빈에서의 연주회를 몹시 고대했습니다. 가족들도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에도 볼프강의 마음이 들떠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빈은 음악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모차르트 가족은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린 뒤에 배로 갈아타고, 도나우강을 건너 1762년 10월에 마침내 빈에 도착했습니다. 빈의 거리는 궁전처럼 높고 화려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곳곳에 음악가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모차르트 가족은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연주회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볼프강의 인기는 대단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볼프강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요?" "듣던 대로 음악의 천재예요." 어떤 사람은 볼프강을 보려고 모차르트 가족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더욱 자신감이 생긴 아버지 레오폴트는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탈리아까지 연주 여행을 하는 것과 궁전 안에서 연주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궁전에서 연주하게 되면 아이들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숙소에 묵고 있는 모차르트 가족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레오폴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얘들아,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궁전에 초대되었구나! 드디어 우리도 왕궁에 가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어!" "그게 정말이에요, 아빠? 와, 신난다!" 그날 밤, 볼프강은 가슴이 설레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오후, 모차르트 가족은 왕이 보내 준 금마차를 타고 쇤브룬 궁으로 갔습니다. 궁전의 넓은 홀에는 프란츠 왕과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를 비롯하여 여러 대신과 궁정 음악가들이 모차르트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난넬은 긴장된 얼굴로 허리를 깊이 숙여 여왕에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볼프강도 난넬을 따라 인사를 하려는 순간, 그만 바닥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을 참느라고 킥킥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그때 꼬마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달려와 볼프강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자, 내 팔을 잡아." "고마워요. 공주님은 몇 살인가요?" "일곱 살이야." "공주님은 아주 친절하시군요. 그리고 얼굴도 무척 아름다우시고요." 볼프강의 어른스러운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이윽고 연주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볼프강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곧장 하프시코드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미끄러지듯 건반 위를 구르는 작은 손가락,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청중들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볼프강이 다섯 살 때 작곡한 미뉴에트를 연주해 보이겠습니다." 레오폴트는 이렇게 말하고 볼프강 앞에 악보를 펼쳐 놓았습니다. 연주가 흘러나오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볼프강의 연주가 끝나자, 난넬의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매의 연탄이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쇤브룬 궁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는 여왕은 매우 탄복하며 두 남매에게 직접 선물을 전달했고, 아버지에게는 상금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모차르트 가족은 이따금 궁전에 초대되어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볼프강은 하프시코드 이외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었고, 자신이 직접 만든 곡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때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볼프강의 천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연주회에 불려 다니던 볼프강은 그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볼프강을 잠시 쉬게 해 주기 위해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볼프강은 점차 건강이 회복되어 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또다시 연주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음악적 재능을 한시라도 빨리 전 유럽에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연주로 유럽 음악계를 깜짝 놀라게 해야겠다.' 바흐와의 만남. 1763년 6월 9일, 모차르트 가족은 또다시 연주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번 여행에서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아이들의 실력을 인정받을 생각이었습니다. 먼저 독일의 여러 지방을 돌아본 다음,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런던까지 가 볼 계획이었습니다. 다시 찾은 독일의 뮌헨, 아버지의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만하임 등의 도시를 차례로 순회하면서 남매는 왕후, 귀족들 앞에서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연주회는 어디에서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소년 괴테가 아버지에게 이끌려 볼프강 남매의 연주를 들으러 왔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바로 괴테가 태어난 곳입니다. 훗날 괴테는 그날의 연주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열네 살쯤 되었을 때 일곱 살짜리 사내아이가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를 연주하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모차르트 가족은 아헨을 거쳐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까지 가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볼프강은 여러 가지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 유명한 음악가를 만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또한, 처음으로 들어본 이탈리아 민요의 흥겨운 가락은 볼프강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11월 18일, 모차르트 가족은 드디어 예술의 도시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화려한 이 대도시에도 이미 볼프강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남매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주할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볼프강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 왕인 루이 15세와 왕비, 왕자,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까지 쌓아 온 실력을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정말 훌륭해요." "하늘에서 낸 재능꾼이로군요." 사람들은 극찬하며 연주회를 지켜보았습니다. 궁전에서 연주회를 연 지 며칠 후, 모차르트 가족은 궁전의 만찬회에 초대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왕궁 관습에는 없었던 일이었으므로, 그들은 매우 특별하고도 영광스러운 대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의 귀족들과 사교계에서도 앞을 다투어 이 어린 음악가를 초대했고, 그때마다 값비싼 선물과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볼프강이 지금까지 작곡한 것을 모아 크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라는 악보집을 펴냈습니다. 이제 파리에서도 볼프강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파리의 어디를 가든지 음악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가는 곳마다 우렁찬 박수갈채와 아낌없는 찬사를 받자, 볼프강에 대한 레오폴트의 기대는 더욱 커졌습니다. '대성공이다. 런던에서도 똑같은 영광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제 런던으로 가자.' 5개월 동안 파리를 순회한 모차르트 가족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의 수도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볼프강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그곳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런던의 어느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어린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드디어 영국에 오다.'' 모차르트 가족은 곧 왕궁에 초대되어 왕과 왕비 앞에서 연주하여 큰 호평을 얻었습니다. 레오폴트는 이제 왕궁이나 귀족만을 상대하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개 연주를 하여 성금을 모을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볼프강의 연주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레오폴트의 호주머니에는 상당한 수익금이 모아졌습니다. 런던에 머물며 연주회를 여는 동안 볼프강은 또 한 번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알게 된 일이었습니다. 바흐 집안은 대대로 뛰어난 음악가를 낳은 가문으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제바스티안 바흐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볼프강은 바흐에게 이탈리아의 오페라에 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오페라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던 볼프강이 이때 바흐로부터 받은 가르침은 훗날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훌륭한 오페라 작품을 낳게 했습니다. 샘솟는 음악에 대한 열정. 모차르트 가족은 3년 6개월에 걸친 긴 연주 여행을 마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어느덧 열 살이 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 무렵부터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 몰두하였습니다. 어느 날, 볼프강은 잘츠부르크 대주교로부터 곡을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볼프강은 며칠 만에 곡을 완성하여 대주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열 살밖에 안 된 아이가 혼자서 이렇게 훌륭한 곡을 쓰다니,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군." 대주교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볼프강의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습니다. 일주일 후 볼프강은 대주교가 보는 앞에서 곡을 만들어 보여 마침내 대주교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차르트 가족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볼프강과 난넬이 잇따라 천연두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연두를 앓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남매는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하는가 하면,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볼프강과 난넬은 기적적으로 병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남매의 병이 완치되자, 아버지는 다시 가족들과 함께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1767년 12월 23일, 볼프강은 아버지, 난넬 누나와 함께 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빈의 사정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전에 모차르트 가족을 좋아했던 프란츠 왕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요제프 2세가 왕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더욱이 볼프강은 이제 열한 살이 되어, 신동이라고 찬사를 받을 시기는 이미 지났던 것입니다. 빈의 음악가들은 도리어 볼프강을 시기하고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냈습니다. "모차르트는 우리의 경쟁자다." "맞아. 빈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해야 해." 어느 날, 모차르트 가족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요제프 2세가 볼프강에게 이런 부탁을 해 왔습니다. "볼프강, 재미있는 오페라를 만들어 주게나." "네, 성심껏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 아버지는 볼프강을 대신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때, 요제프 왕의 부탁으로 만든 곡이 거짓 바보 아가씨라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본 작가의 방해로 완성이 늦어졌으며, 상연 단계에서는 극장 관계자들의 방해로 결국 공연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서서히 바흐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볼프강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탈리아는 그 당시 수많은 예술가가 동경하던 예술의 나라였습니다. 아버지는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빈에서 풀이 죽었던 볼프강은 이탈리아를 돌아보는 동안 다시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볼프강과 아버지는 밀라노와 볼로냐에서 몇 차례의 연주회를 가진 후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는 천 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답게 모든 것이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볼프강은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구경했습니다. 그중에서 시스티나 성당에 들렀을 때 듣게 된 성가곡 미젤레레는 볼프강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볼프강과 아버지가 성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마침 성가대원들이 미젤레레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곡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젤레레는 옛날부터 시스티나 성당에서만 부르는 성가곡이란다." "악보만 있으면 다른 곳에서도 부를 수 있잖아요?" "교황이 이 성당에서만 부르도록 명하였단다. 만약 곡을 베껴 다른 곳에서 미젤레레를 부르는 사람은 파문당한다는구나." 볼프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멜로디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곡은 누구나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곡이었습니다.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니.'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 마차에 오른 볼프강은 한동안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볼프강은 아버지에게 악보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심코 악보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오선지에는 9부나 되는 미젤레레의 악보가 빈틈없이 그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건 미젤레레로구나. 그 긴 곡을 다 외웠단 말이냐?" 볼프강은 대답 대신에 아버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볼프강은 어느 귀족의 집에서 연주회가 열렸을 때 이 미젤레레를 연주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 곡을 성당에서 훔쳐내었소?"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마 제 아들이 며칠 전 성당에서 들었던 것을 그대로 기억해 내 연주해 본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볼프강의 재능에 감탄했습니다. 이처럼 볼프강은, 한 번 들은 음악은 거의 완벽하게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음악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볼프강은 교황으로부터 '황금 박차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작곡가 오를란도 디 라소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명예다. 집안의 가보로 길이 간직하여라." 볼프강보다 아버지가 더욱 기뻤습니다. 다시 볼로냐로 돌아온 볼프강은 음악가의 최고 단체인 '아카데미 필하모니'의 회원으로 추천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 단체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시험을 거쳐야 했고, 스무 살이 넘어야만 그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볼프강은 열네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시험을 치르게 되기까지는 이탈리아에 와서 알게 된 마르티니 신부의 도움이 컸습니다. 볼프강은 당당히 시험에 합격하여 아카데미 필하모니의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음악 수업에 열의를 다했으며, 밀라노로 옮겨 간 후에는 미트리다테라는 오페라를 완성하여 극장에서 상영하였습니다. 오페라는 예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새 대주교 콜로레도. 1771년 볼프강과 아버지는 1년 4개월 만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볼프강은 여행 중에 틈틈이 적어놓았던 악보를 정리하여 작곡하느라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곡으로는 기도의 노래, 오케스트라 반주 가곡 등을 비롯하여 교향곡, 교회 음악, 사교 음악 등의 다양한 곡들이 있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또다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잘츠부르크는 저 아이의 재능을 키워 주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야. 볼프강은 이제 겨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천재적인 재능을 온 세계에 알려야 해.' 이리하여 볼프강은 다시 밀라노로 떠났습니다. 밀라노에서 볼프강은 오페라 알바의 아스카니오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볼프강은 밀라노의 축제를 위해서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밀라노에서 많은 경험을 쌓고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볼프강에게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던 대주교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대주교님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정을 쏟으셨는데." "정말 좋은 분을 잃었어요." 모차르트 가족은 큰 슬픔에 잠긴 한편, 막연한 불안을 느꼈습니다. '다음에 오실 대주교님은 어떤 분일까?' 새 대주교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가 부임한 것은 이듬해 4월이었습니다. 콜로레도는 예술가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어서 모차르트 가족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볼프강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볼프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곡을 비롯한 여러 음악을 계속 작곡하여 발표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음악에서 넘쳐나는 음악적 영감과 뛰어난 창조력에 새 대주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볼프강은 궁정 악단의 유급 수석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1772년 10월, 볼프강과 아버지는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사육제용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완성된 3막짜리 오페라는 축제 기간에 30여 차례나 상연되었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 봄, 볼프강은 아버지와 함께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사건건 콜로레도 대주교와 부딪치게 된 볼프강은 날이 갈수록 궁정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아버지, 전 이 생활이 너무 답답해요. 대주교님은 음악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해요. 저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과 같이 지내고 싶지 않아요. 볼프강은 날이 갈수록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콜로레도 대주교가 멀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때가 기회라고 여겨 볼프강을 데리고 빈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음악의 융성기를 맞이한 빈에서 볼프강은 오페라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1774년에 볼프강은 뮌헨의 한 귀족으로부터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짜 여자 정원사를 작곡했습니다. 이 오페라는 1775년 뮌헨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극장이 미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으며, 아리아가 끝날 때마다 관객석에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뮌헨에서 돌아온 볼프강은 고향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잘츠부르크에도 이미 그의 성공이 알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콜로레도 대주교는 여전히 볼프강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는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대주교에게 휴가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대주교는 볼프강 혼자에게만 휴가를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볼프강은 이 기회에 궁정 악단의 수석 연주자 직을 그만두려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저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어요. 더 넓은 음악 세계를 위해 떠나겠어요." 시련을 견디며. 1777년, 스물한 살이 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떠났습니다. 뮌헨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어느 작곡가의 소개로 막시밀리안 대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대공을 만나기로 한 날, 모차르트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모차르트는 막시밀리안에게 뮌헨의 궁정 악단에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해 볼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빈자리가 없네." 몹시 실망한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고향인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크게 환영받았으나 모차르트는 그곳의 매력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연주회에 모이는 사람들에 비해 수입도 형편없었습니다. 이 메마른 도시에서 그나마 모차르트가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삼촌의 아이들인 사촌 베즈레와 안드레아스 슈타인이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지내는 2주 동안 모차르트는 이 두 사람으로 인하여 즐거운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슈타인은 오르간과 피아노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완전한 피아노를 개량하여 오늘날과 같은 피아노를 만든 사람입니다. 모차르트는 슈타인을 알게 되면서부터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사촌 여동생 베즈레는 모차르트가 아우크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베즈레는 예쁘고 명랑한 데다 모차르트를 무척 잘 따랐으므로 두 사람은 금세 정이 들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두 사람과 인연을 지속하고 싶었으나 곧 새로운 일을 위해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나야 했습니다. 두 사람과 아쉬운 작별을 나눈 모차르트는 만하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독일 최초의 국민 극장이 있었고 독일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있었습니다. 만하임에 도착한 지 얼마 후,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바이올린 독주자인 카나비히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네, 내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겠나? 자네라면 우리 아이들도 정말 좋아할 걸세." 모차르트는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 카나비히의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만하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일자리가 그 때까지도 정해지지 않은데다가, 이번 여행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모차르트는 선뜻 만하임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루이제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모차르트는 베버라는 사람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베버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루이제가 모차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루이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이따금 루이제의 아리따운 모습에 반해 피아노 건반을 몇 번씩이나 헛짚곤 했습니다. 루이제는 모차르트의 아리아 중에서 매우 어려운 대목도 멋지게 불러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루이제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부모님께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너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 여기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어서 파리로 가서 꿈을 펼쳐야 한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모차르트는 파리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모차르트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 어머니와 함께 떠나도록 했습니다. 첫사랑에 실패한 모차르트의 슬픔은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온 파리는 무척이나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는 동안, 시민들은 왕과 귀족 중심으로 통치되고 있는 낡은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며 주장하고 나서, 나라 안이 온통 어수선했습니다. 15년 전만 해도 궁중과 귀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차르트는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좀처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볼프강, 너무 조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 곧 좋은 일이 생기겠지." 어머니는 이렇게 볼프강을 위로해 주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얼마 후 모차르트가 묵고 있는 허름한 여관방에도 살을 에는 듯한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습니다. 이런 처지에서도 모차르트의 뜨거운 창작열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모차르트는 우연히 어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는 몸이 아프면서도 아들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모차르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아픈 어머니를 혼자 두고 다닐 수도 없고.' 모차르트는 이제 가지고 온 돈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살펴 드렸습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모차르트의 창작열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습니다. 어느 날,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나가면서 모차르트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치료가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그동안 마음 편하게 해 드리세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모차르트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파리의 어느 극장에서 모차르트가 모처럼 작곡한 파리 교향곡이 성공을 거둔 날, 사랑하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파리에서 성공도 지켜보지 못한 채 어머니는 싸구려 여관방에서 눈을 감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슬픔에 빠진 모차르트는 전부터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 온 잘츠부르크의 브링거 신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브링거 신부에게 이 슬픈 소식을 알리면서,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고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소식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줄지 모차르트는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서로를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 주는 다정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은 영원히 헤어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외롭고 우울한 나날 속에서도 많은 곡들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피아노 소나타 가단조, 피아노 소나타 가장도, 플루트 4중주곡 가장조 등이 이 무렵에 만들어진 곡들입니다. 이 곡들은 당시에 모차르트가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어느 날, 모차르트는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거듭 부탁하여 모차르트가 다시 궁정 악단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냈으니 어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또다시 대주교 밑에 있기가 정말이지 싫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데다 어머니까지 잃은 청년 모차르트는 파리 생활에도 어지간히 지쳐있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결국 잘츠부르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자, 아버지와 누나가 그리워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오페라 이도메네오. 마침내 모차르트는 반년 만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1779년 1월,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누나 난넬은 마치 왕을 맞이하듯 모차르트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가족의 따뜻한 품에 안기자, 어머니 생각이 떠올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집 안을 둘러보니 어머니가 평소 해 오던 대로 누나 난넬이 집 안을 깨끗이 정돈해 놓았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모차르트를 위한 특별한 음식이 식탁에 가득 차려졌습니다. "많이 먹어. 네가 돌아와서 이 누나는 정말 기쁘다." "나도 그래. 누나와 아버지 생각 많이 했어. 집에 오니 참 좋아." 며칠 후부터 모차르트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나 프랑스, 영국의 음악을 흉내 냈던 것에서 벗어나 독일어로 독일 정신을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그런 뜻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장난꾸러기처럼 행동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책상 앞에 앉으면 누가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작곡에만 몰두했습니다. 이 무렵 작곡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관식 미사곡입니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 멋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자기의 음악 활동을 은근히 못마땅해하는 콜로레도 대주교의 마음을 잘 아는 모차르트는, 될 수 있는 한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모차르트는 뮌헨의 선제후로부터 사육제를 위한 오페라 곡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모차르트는 편지를 받자마자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내용을 토대로 하여 3막짜리 오페라 이도메네오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크레타 왕 이도메네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중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난다. 이도메네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이 만약에 무사히 살아 돌아간다면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맨 처음 만난 사람은 그의 아들 이다만테였다. 그는 차마 아들을 죽일 수가 없어 포세이돈과의 약속을 어기고 만다. 화가 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이도메네오를 미치게 한 다음, 아들 이다만테를 돌로 쳐 죽이게끔 한다. 그러자 이다만테의 약혼녀 일리아도 그만 자살하고 만다. 모차르트는 완성된 악보를 가지고 곧장 뮌헨으로 떠났습니다. 이 오페라는 1781년 1월 27일, 뮌헨 궁정 극장에서 처음으로 상연되었는데, 비평가들과 관객들은 한결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작품이야. 과연 모차르트답군.” “너무나 감동적이에요.”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의 이러한 성공이 마치 자신의 덕인 양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여전히 모차르트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어느 날, 모차르트는 대주교와 심하게 언쟁을 벌이고 난 후 잘츠부르크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대주교와 마주치기만 하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 걱정되어 모차르트를 설득하였습니다. 볼프강, 아무리 대주교의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더라도 그 사람을 화나게 해선 안 된다. 그러면 너는 일자리를 놓치게 되는 거야. 고집부리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해라. 아버지가 간곡하게 애원했지만, 모차르트는 결심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저는 저 스스로 행운을 붙잡으려고 하는 중이니까요. 저는 어떤 구속이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어요.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을 거예요. 며칠 후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급히 짐을 챙겨 집을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간곡히 말리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모차르트는 이미 잘츠부르크를 떠난 뒤였습니다. 불후의 명곡들.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한 가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만하임을 여행할 때 만났던 첫사랑 루이제가 랑게라는 배우와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술집을 전전하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때 루이제의 동생인 콘스탄체가 모차르트를 따라다니며 다정하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콘스탄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 무렵 빈으로 옮겨와 살고 있는 베버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매일 같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체도 점점 모차르트를 좋아하게 되어 두 사람의 감정은 어느덧 사랑으로 무르익어 갔습니다. 콘스탄체는 언니 루이제만큼 아름답지는 못했으나 소박하고 마음씨가 고운 여자였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녀의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에 이끌렸던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연주회를 열거나 개인 교습을 하면서 틈틈이 작곡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수입이 늘어나자, 그는 콘스탄체와 결혼할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결심을 적어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의 답장을 받아 본 모차르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상대가 루이제의 동생이라는 사실에 몹시 노여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베버의 집에서 나와 다른 하숙집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번만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간곡하게 편지를 써서 보내 겨우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빈의 슈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무렵 빈에서는 바흐나 헨델의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이들의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모차르트는 이들의 기품을 따른 클라비어를 위한 변주곡, 푸가 다장조, 라장조 하프너 등을 작곡하여 잘츠부르크에 있는 난넬 누나에게 보냈습니다. 1782년 7월 12일에는 모차르트가 만든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가 부르크 극장에서 상연되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콘스탄체를 사랑하던 시기에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차르트는 아내를 가족에게 인사시키기 위해 잘츠부르크로 갔습니다.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는 모차르트 부부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성 페트로 교회에서 연주할 미사곡을 작곡했습니다. 예전부터 틈틈이 작곡해 오던 미사곡을 손질하여 얼마 후 미사곡 다단조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곡은 성 페트로 교회에서 연주되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 곡은 그가 죽음을 얼마 앞두고 작곡한 레퀴엠과 함께 모차르트의 미완성 대작으로서 교회 음악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모차르트 부부는 4개월 만에 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주 슬픈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 레오폴트가 3개월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 부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커다란 슬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 위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작곡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독일 오페라에 다시 손을 댔습니다.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대본이 필요했습니다. 모차르트는 100권이 넘는 대본을 읽으며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이 무렵, 모차르트를 도와주겠다는 협력자가 나타났습니다. 배우이면서 가수이기도 한 시카네더는 커다란 극장을 세우고, 모차르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자신의 극장에서 그 작품을 상연해 주겠다고 나섰습니다. 모차르트는 시카네더의 소개로 이탈리아의 대본 작가인 폰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가 쓴 희곡으로 프랑스에서는 매우 인기가 높았으나, 성직자와 귀족들을 날카롭게 꼬집는 내용을 담고 있어 빈에서는 상연이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귀족들이 좋지 않게 생각할 부분을 모두 빼버리고, 마지막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화해하는 것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빈에서의 상연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모차르트는 한창 피가로의 결혼을 구상하고 있던 무렵에 아버지를 빈으로 초대했습니다. 아버지가 빈으로 오자 모차르트는 더없이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아버지, 정말 잘 오셨어요." 저녁 식사 후,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피아노 협주곡 제20번 라단조를 들려주었습니다. 슬픈 가락으로 시작되는 이 곡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빈에 머무는 동안 모차르트는 잇따라 작품을 발표하며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성공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두 달 가까이 빈에 머물던 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모차르트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겠다. 너의 연주회가 이토록 성황을 이루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구나. 그런데 연주회에서 버는 돈과 피아노를 가르쳐 받는 돈을 합치면 충분히 생활하고도 남을 텐데, 5년 전 파리 여행 때 진 빚을 여태 갚지 못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글쎄요. 이사를 자주 다녀서인지.” 모차르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정말 그래요, 아버님. 결혼하고 나서 벌써 몇 차례나 이사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아이들도 여럿이다 보니.” 콘스탄체도 변명을 늘어놓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레오폴트는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콘스탄체가 살림을 헤프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얼마 후, 레오폴트는 아들의 성공에 대한 기쁨과, 한편으로는 며느리의 낭비벽에 대한 불만을 안고 잘츠부르크로 돌아갔습니다. 모차르트 부자는 이것이 그들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모차르트는 연주회나 공연을 쫓아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차르트는 시간을 쪼개어 유명한 가곡 제비꽃을 발표했습니다. 이 곡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여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또 다단조의 피아노 소나타와 쌍벽을 이루는 피아노 환상곡 다단조도 이 무렵에 쓴 작품입니다. 오페라의 혁명. 1786년 5월, 마침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부르크 극장에서 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막이 내릴 때마다 관객들의 열광이 이어져 상연 시간이 예정 시간보다 두 배 이상이나 길어지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의 첫 공연은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궁정 음악가이면서 빈 음악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던 살리에리의 방해로 아홉 번밖에 상연되지 못했습니다. 살리에리는 날로 인기가 높아 가는 모차르트를 최대의 경쟁자로 여기며 질투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프라하로 무대를 옮겨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했습니다. 프라하에서의 공연은 빈에서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당시의 오페라는 거의 모두가 그리스 신화나 고대의 역사를 다루었기 때문에 피가로의 결혼처럼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인간미 넘치는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피가로의 결혼은 그 당시에 ‘오페라의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오페라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빈에 머물며 이룩한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는 오랜 오페라 역사와도 비교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무렵 모차르트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라는 곡을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보냈습니다. 아버지, 새로 작곡한 곡을 보내 드립니다. 저는 이 곡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 곡을 연주해도 좋은 사람은 난넬 누나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누구도 싫습니다. 사실 이 곡은 오래전에 만든 피아노 협주곡인데, 끝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어쨌든 이 곡은 연주회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을 만큼 많은 사람이 좋아했고, 모차르트 자신도 이 곡을 보석처럼 아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소년이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모차르트는 그 소년을 피아노 앞에 앉힌 뒤 즉흥곡을 쳐 보도록 했습니다. 소년은 모차르트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열광적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모차르트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구나.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음악가가 될 거야.” 이 소년은 바로 훗날 악성으로 불리게 되는 베토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길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베토벤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모차르트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던 일, 가족들과 함께 벌인 음악회, 연주 여행, 아버지와 함께 대주교 밑에서 일하던 때. 이런 생각을 하는 모차르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게 음악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 아버지는 나의 스승이며 벗이기도 했다.' 1787년 10월, 프라하 국립 극장에서는 모차르트의 새로운 오페라 돈 조반니가 상연되었습니다. 돈 조반니는 피가로의 결혼 못지않게 큰 성공을 거두어 프라하 시내에서 모차르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돈 조반니는 14세기 에스파냐의 전설에 나오는 인물로,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가 쓴 희곡 돈 환(이탈리아어로 돈 조반니)의 이야기를 2막짜리 오페라로 만든 것입니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돈 조반니는 닥치는 대로 여자를 유혹해 놓고 떠나 버리는 바람둥이 남자였다. 돈 조반니에게 버림받은 여자 돈나 안나의 아버지는 딸의 명예를 위해 돈 조반니와 결투를 하지만 결국 돈 조반니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돈 조반니에게 죽임을 당한 돈나 안나의 아버지는 그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유령으로 변하여, 돈 조반니가 마련한 파티장으로 찾아와 돈 조반니를 지옥의 불길 속으로 내동댕이친다. 이 작품은 화려함과 익살, 비극과 희극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지금도 피가로의 결혼을 능가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돈 조반니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콘스탄체의 낭비로 인하여 모차르트 가족의 살림은 늘 쪼들렸습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친한 사람들로부터 작곡을 부탁받으면 서슴없이 곡을 만들어 주었지만, 사례금 따위는 아예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88년으로 접어들면서 모차르트 가족의 생활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습니다. 연주회 청탁도 끊어지고, 악보 출판 계획을 세웠으나 사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프라하에서 그토록 인기가 좋았던 돈 조반니도 빈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해 연말을 지나면서 돈 조반니는 빈에서 두 번 다시 상연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도 모차르트는 유명한 세 개의 교향곡 제39번 내림마장조, 제40번 사단조, 제41번 주피터를 작곡했습니다. 모차르트의 3대 교향곡으로 불리는 이 교향곡들은 고전 음악의 정상을 이룩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생활은 음악 그 자체였습니다. 오페라만 해도 바스티안과 바스티엔에서 티토 황제의 자비까지 1년에 한 곡 이상을 작곡했고, 피아노곡, 교향곡, 협주곡은 물론이고 교회용 미사 음악, 합창곡에 이르기까지 두루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1789년 봄, 모차르트는 독일을 여행하면서 미뉴에트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을 작곡했습니다. 또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부탁을 받아 현악 4중주곡 라장조, 피아노 소나타 라장조 등 6곡을 작곡하였습니다. 미완성곡을 남기고. 1791년 초부터 모차르트는 시카네더로부터 부탁받은 오페라 마술 피리의 작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습니다. 깔끔한 검정 망토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귀족의 하인인 듯했습니다. "모차르트 선생님이신가요?" "그렇소. 내가 모차르트이오만."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오. 모차르트는 방으로 그 손님을 안내했습니다. "댁의 주인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모차르트는 그가 어느 귀족의 하인인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찾아오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저의 주인님께서는 얼마 전 부인을 여의시고 교회에서 부인을 위한 미사를 올리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주인님은 선생님의 음악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미사를 올리기 위한 레퀴엠을 작곡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모차르트는 왠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으면서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갔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모차르트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지갑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를 꺼내 놓았습니다. “이것은 선금입니다. 작품이 완성되면 나머지를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모차르트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남자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나서도 머릿속이 내내 어지러웠습니다. 자신을 찾아왔던 남자에 대해 생각하던 모차르트는 ‘혹시 그 남자는 나를 위한 진혼곡을 만들라고 온 저승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몹시 지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1791년, 빈 변두리에 있는 시카네더 극장에서는 마술피리의 첫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따라 극장에는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여느 날 같으면 화려하게 차려입은 황제나 귀족들이 앉아 있을 텐데, 이날은 관객의 대부분이 시민들이었던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등 뒤로 시민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아, 순수하게 내 음악을 좋아하는 시민들. 이 마술 피리야말로 가장 오래 살아남을 오페라가 아니겠는가?’ 마술 피리는 모차르트의 땀과 마음이 깃들인, 독일어로 된 첫 번째 오페라였습니다. 피리가 마술을 부린다는 아름다운 전설로 꾸며진 이 오페라는 시카네더가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모차르트의 배역은 ‘새잡이 파파게노’였는데, 그는 이 배역을 마음에 들어 하며 멋지게 연기를 해냈습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던 관객들도 공연이 거듭됨에 따라 점점 공연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어느덧 마술 피리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이전에 보헤미안 왕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티토 황제의 자비라는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모차르트는 많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걷는 것조차 힘들 만큼 몸이 점점 야위어 갔습니다. 모차르트는 아직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친구 슈타틀러를 위해 클라리넷 협주곡을 만들어야 했고, 지난번에 다녀간 남자가 부탁했던 레퀴엠의 악보도 미완성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고 오페라 마술피리를 작곡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혼곡 레퀴엠만은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나이를 보낸 사람은 프렌츠 발레크라는 돈 많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는 죽은 아내에게 바칠 미사곡을 몰래 모차르트에게 부탁해 놓고, 나중에 그것을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병문안을 온 제자 쥐스마이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곡을 끝까지 완성할 수 없을 것 같네. 나를 대신해서 자네가 레퀴엠을 꼭 완성해 주게나.” 이렇게 말한 모차르트는 조금 전에 그려 놓은 악보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외쳤습니다. “파파게노를 불러다 주게. 새잡이 파파게노의 명랑한 익살을 보고 싶네.” 얼마 후, 모차르트는 파파게노의 아리아를 들으면서 감겨 가는 눈으로 옆에 서 있는 아내와 두 아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35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신부전에 따른 요독증이라고 했으나, 정확한 병명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튿날 모차르트의 유해는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로 옮겨졌습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쳐 하늘도 천재 음악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겨우 친구 몇 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모차르트의 관을 묻은 인부들이 비석과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묘지를 찾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쥐스마이어를 비롯하여 베버,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같은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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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함께한 어린 시절 1775년,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지고 이따금 마차 바퀴 소리만이 요란하게 땅을 흔들고 지나가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초라한 3층 집 다락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루트비히! 이제 그만 자렴.” 몇 시간째 피아노를 치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바느질하던 옷감을 치우며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오시면 야단치실 거예요.”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소년 루트비히는 걱정스러운 듯 어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루트비히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습니다. “저녁 내내 연습을 했잖니. 아버지가 오시면 엄마가 잘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 알겠어요, 엄마.” 어머니는 루트비히를 안아서 침대에 뉘었습니다. 루트비히는 몹시 피곤했는지 금새 곯아떨어졌습니다. “어린것이 가엾기도 하지.” 얼마 후 아래층에서 요란하게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 쪽으로 다가가는 어머니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떠올랐습니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온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대뜸 소리를 질렀습니다. “루트비히는 어디 갔소?” 어머니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여보! 제발 조용히 하세요. 루트비히는 지금 막 잠이 들었단 말예요.” “뭐야? 피아노 연습은 하지 않고 잠을 잔다고?” 아버지는 비틀거리면서 루트비히가 자고 있는 침대로 다가갔습니다. “여보,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아세요?” 어머니가 말렸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루트비히!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지는 곤히 잠들어 있는 루트비히를 마구 흔들어 깨웠습니다. 루트비히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러나 가엾게도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손은 건반 위에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루트비히!” “네, 아버지!” 아버지가 소리치자 루트비히는 그제서야 잠에서 깬듯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느냐? 어서 오늘 연습한 걸 치지 않고?” 아버지의 험악한 눈초리는, 단번에 루트비히의 고사리 같은 손에 힘이 들어가게 했습니다. “착하지, 우리 루트비히? 저녁 내내 연습한 곡을 다시 한번 쳐 보렴.” 어머니는 다정하게 루트비히의 어깨를 감싸 주었습니다. 잠시 후, 루트비히의 손가락은 날 듯이 건반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루트비히의 연주가 끝나자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꼭 껴안으면서 말했습니다. “힘들겠지만 꾹 참아야 한다. 이제 곧 너는 세계 제일의 음악가가 될 테니까.” 어린 시절, 이처럼 혹독하게 피아노 연습을 하며 보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라인 강변의 조그마한 도시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여기저기 야트막하게 솟아오른 언덕에는 숲이 울창했고, 숲 사이로는 집들과 포도밭이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는 본 궁정 악단의 악장을 지냈던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루트비히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는데,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타고난 목소리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 집안에서는 이런 할아버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고 본 시민들도 모두 그를 존경했습니다. 아버지 요한도 할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긴 했지만, 마음이 나약하고 게을러서 음악 공부는 뒷전이고 늘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그는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술주정꾼 아버지를 돌보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한 번도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없을 만큼 온화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루트비히의 음악적인 재능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루트비히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1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콧노래를 듣고 있던 루트비히가 아버지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더니, 아버지가 부른 노래의 선율을 그대로 따라서 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루트비히에게는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천재적인 음악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아버지는 그 날부터 루트비히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루트비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여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아버지는 얼마 전 천재 소년으로 이름을 날리던 모차르트를 떠올리며, 루트비히도 천재 소년으로 이름을 날리게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 루트비히도 모차르트처럼 될 수 있어. 그러면 나도 모차르트의 아버지처럼 루트비히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다니며 돈을 벌고 명성도 얻어야지.’ 아버지는 오로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욕심으로 어린 루트비히에게 매일매일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된 연습을 시켰습니다. 루트비히는 차츰 피아노 치는 일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철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돌아오는 날에도 그냥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었습니다. 기어코 잠이 든 루트비히를 깨워서 피아노 앞에 앉혀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루트비히가 졸음에 못 이겨 투정을 부리기라도 할라치면 손찌검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란을 피우며 루트비히를 피아노 앞에 앉혀 놓고서 아버지는 몇 분도 채 못 되어 코를 골며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루트비히는 아무리 졸음이 쏟아져도 아버지가 소파에서 잠이 들 때까지 피아노를 쳐야만 했습니다. 오늘도 루트비히는 피아노를 치면서 아버지가 잠이 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자 어머니가 루트비히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루트비히, 잘 참았다. 이제 그만 가서 자렴." 어머니는 어린 루트비히가 안쓰러워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네, 엄마.” 루트비히는 그제서야 의자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습니다. 하늘에는 어느덧 초롱초롱한 새벽 별들이 떠올라 루트비히가 잠들어 있는 창가에 은은한 빛을 비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네페 신부와의 만남. 어느 가을날 아침, 루트비히는 어머니와 함께 라인 강변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숲은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가을 햇살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반짝거리면서 흐르는 강물 위로 커다란 기선 한 척이 하얀 연기를 토하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엄마, 저 배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강물 위를 유심히 바라보던 루트비히가 물었습니다. “글쎄, 낮에는 햇빛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별빛하고 이야기하며 아주 먼 나라로 가는 거겠지.” “빈에는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다죠?” “그럼. 우리 루트비히도 훌륭한 음악가가 되면 그 곳에 가서 살 수 있단다.” 강가를 따라 돌아오는 숲길에서 루트비히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엄마, 나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멋지게 어울려요. 그렇죠?” “그래, 정말 그렇구나.” 어머니는 루트비히를 번쩍 안아 올리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어린 루트비히가 물 소리와 바람 소리가 어울려 이루는 화음을 발견한 것이 대견스러웠던 것입니다. 1781년 11월, 눈보라가 몹시 휘물아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열한 살이 된 루트비히는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 담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라인 강을 따라 사흘 동안이나 배를 타고 가야 했는데 배 안은 강바람이 들이쳐 몹시 추웠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꼭 그 곳에 가야 하나요?” 루트비히는 오들오들 떨며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네 연주를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지 않니?” 어머니는 루트비히를 감싸 안으며 달래 주었지만, 루트비히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습니다.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돈을 버는 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어머니와 루트비히가 찾아간 곳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아주 크고 훌륭한 저택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 소년이 천재 피아니스트 루트비히인가요?” “네, 독일에서 피아노의 천재로 이름이 높답니다.” 사람들은 루트비히가 들어서자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루트비히는 여덟 살 때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루트비히의 연주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천재 소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을 기뻐하며 감탄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열한 살 된 아이의 연주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정말 놀라운 솜씨예요.” 사람들은 루트비히의 연주를 칭찬하며 돈과 선물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루트비히는 이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구경거리가 되려고 피아노를 친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차마 그런 말 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 루트비히의 집은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일주일간의 연주 여행을 마친 루트비히와 어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도 아버지는 술에 몹시 취해 있었습니다. “수고했다, 루트비히. 그래, 돈은 얼마나 받았니?” 루트비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갑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지갑을 열어 보더니 이내 얼굴이 험악해졌습니다. “아니, 암스테르담까지 가서 벌어 온 돈이 겨우 이것뿐이냐?” 아버지는 루트비히를 금방이라도 때릴 듯이 노려보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루트비히는 참다 못해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갈 곳도 없이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는 루트비히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던 루트비히는 길을 잃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어느 새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궁정 성당 앞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는 몹시 지쳐 성당의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마침 성당 안에서는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루트비히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밤중에 누가 오르간을 치고 있는 걸까? 이렇게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걸.’ 루트비히는 그 소리에 이끌리듯 자신도 모르게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넓은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오르간 소리는 더욱 신비롭게 울려 퍼졌습니다. 커다란 오르간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사람은 성당의 주임 신부인 네페 신부였습니다. 루트비히는 네페 신부의 등 뒤로 다가갔습니다. ‘음악이란 바로 이런 거로구나.’ 루트비히는 음악이 안겨 주는 감동을 이 순간에 처음 깨달았습니다. “얘야, 너는 요한 판 베토벤 씨의 아들 루트비히가 아니냐?” 루트비히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네페 신부가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루트비히는 제정신이 들었습니 다. "아, 안녕하세요, 신부님?" "이 늦은 밤에 네가 이 곳까지 웬일이냐?" 네페 신부는 방금 연주한 오르간의 선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연주하시는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서 저도 모르게." 어린 소년의 찬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네페 신부는 환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신부의 웃는 얼굴을 보자 루트비히는, 조금 전까지의 우울했던 기분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부님, 저는 음악이 사람의 마음에 안겨 주는 감동을 오늘 밤에야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방금 연주하신 곡은 무엇인가요?" "음, 이건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라는 곡이란다." 바흐의 이름은 루트비히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흐는 루트비히가 태어나기 20여 년 전에 죽은 독일의 대음 악가로서, 특히 교회 음악을 많이 만든 작곡가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제까지 음악은 고통을 안겨 주는 것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너무도 힘겨운 연습에 시달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부님의 연주를 듣고 있는 동안 음악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뿐 아니라, 마음속의 고통까지도 덜어 준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네페 신부는 따뜻한 눈길로 루트비히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 니다 “루트비히, 나한테 음악을 배워 보지 않겠니? 그럴 생각이 있다면 당장 내일부터 교회로 나오너라.” “네? 신부님,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고말고.” “신부님, 고맙습니다.” 루트비히는 당시 피아노 연주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네페 신부에게서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네페 신부님께 음악을 배우게 되다니.’ 루트비히는 꿈을 꾸는 듯한 행복감에 젖어 커다란 날개를 단 새처럼 마음이 붕붕 허공을 떠다녔습니다. 귀족 사회에 첫발을 내딛다. 네페 신부에게서 오르간 연주와 작곡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루트비히는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페 신부는 규칙적인 시간표를 짜 놓고 아주 엄격하게 지도했지만,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화를 내거나 말을 함부로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루트비히의 뛰어난 재능은 네페 신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트비히는 열두 살 때 궁정 오르간 연주자의 조수가 되었고, 곧 수준 높은 곡을 작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84년, 루트비히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궁정 악단의 정식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아! 이제 나도 일을 해서 월급을 받게 되었구나.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실까?' 루트비히의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올랐습니다. 루트비히가 궁정 악단의 오르간 연주자로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베겔러라는 친구가 루트비히를 찾아왔습니다. 베겔러는 본 대학의 의학부 학생으로 루트비히보다 다섯 살이 위였지만 두 사람은 다정한 친구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루트비히, 부탁이 있어서 왔어. 너한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르쳐 볼 생각이 있니?" “나한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나도 아직은 배우는 입장인걸.” 루트비히는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너무 어렵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야. 열두 살짜리 아이와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기초만 가르쳐 주면 되는 거야. 너는 분명히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거야.” 평소부터 루트비히의 뛰어난 실력을 인정해 온 베겔러는 적극적으로 권유했습니다. 루트비히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난 후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하긴, 가르치는 것도 공부이긴 한데. 시간을 한 번 내볼게. 그런데 어느 집 아이들이지?" “너도 잘 아는 브로이닝 집안이야.” “뭐, 브로이닝 집안?” 순간 루트비히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습니다. 브로이닝 집안이라면 본에서 손꼽힐 정도로 이름난 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루트비히는 거드름이나 피우는 귀족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브로이닝 집안은, 여느 귀족들과는 달리 겸손하고 인품이 훌륭하여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는 즐거운 마음으로 승낙했습니다. 이튿날 루트비히가 브로이닝 저택을 방문하자 가족들은 진심으로 루트비히를 반겨 주었습니다. 브로이닝 부인은 다정하고 친절하게 루트비히가 가르치게 될 두 아이를 소개했습니다. “피아노를 배울 아이는 여기 있는 엘레오노레와 로렌츠예요.” 루트비히는 엘레오노레를 처음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엘레오노레는 아름답고 귀여운 소녀였습니다. 루트비히는 첫눈에 이 소녀와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루트비히는 귀여운 두 소녀에게 열심히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브로이닝 집안 사람들과 알게 된 것은 루트비히에게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미망인인 브로이닝 부인은 교양 있고 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이 풍부했습니다. 또한 그 집에는 좋은 책이 많았습니다. 브로이닝 부인은 틈이 나는 대로 루트비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루트비히는 브로이닝 부인을 통해 문학과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또한 브로이닝 부인은 루트비히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난 루트비히가 나중에 상류 사회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브로이닝 부인의 친절한 가르침 덕분이었습니다. 1787년, 이른 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루트비히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그 지방의 영주인 막시밀리안 프란츠 공작으로부터 빈 유학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루트비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께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 방으로 들어간 루트비히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결핵을 앓았는데, 그 무렵 상태가 더 나빠졌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겨우 기침을 참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루트비히를 바라보았습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 루트비히는 그토록 편찮으신 어머니에게 차마 빈으로 유학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루트비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머뭇거리는 루트비히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어머니, 사실은 저어." “너, 빈에 가고 싶어서 그러지? 혹시 빈에 갈 기회라도 생긴 거니?” “네, 어머니. 그렇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편찮으신데 어떻게 어머니를 두고.” 어머니는 애써 괴로움을 참으며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너는 반드시 음악의 도시 빈으로 가야 한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떠나거라.”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루트비히는, 마침내 빈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루트비히는 이 사실을 브로이닝 집안에 알렸습니다. 루트비히와 헤어지게 된 브로이닝 가족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루트비히의 앞 날을 위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동안 루트비히와 정이 흠뻑 든 엘레오노레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습니다. 며칠 후, 루트비히는 어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빈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마차에 오르기 전에 어머니의 야윈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건강하셔야 해요. 반드시 음악가로 성공해서 돌아 오겠어요." 루트비히가 탄 마차는 마부가 부는 나팔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일곱 살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마차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 니다. 꿈의 도시 빈으로. 빈에 도착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허름한 여관을 찾아가 짐을 풀고 여행에서 지친 피로를 풀었습니다. 베토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옷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모차르트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빈에는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모차르트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고 존경받는 음악가였습니다. 베토벤이 빈으로 간 1787년은 모차르트가 한 해 전에 완성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크게 성공하여 인기가 절정에 이른 때였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용기를 내어 모차르트를 찾아간 것입니다. 아직 무명인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집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기실에서 모차르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초상화를 통해서만 보아 온 모차르트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하는 베토벤에게 모차르트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제 연주를 한번 들어봐 주십시오.” “그럼, 한 곡 쳐 보게.” 베토벤은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평소에 연습해 두었던 모차르트의 작품을 한 곡 연주했습니다. “꽤 열심히 연습했군.” 연주가 끝나자 모차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을 뿐 이었습니다. 순간 베토벤은 등에서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다시 연주를 해 볼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베토벤은 매달리다시피 사정했습니다. 베토벤이 안돼 보였는지 모차르트는 옆에 놓인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 주며 말했습니다. “그럼, 이것을 주제로 연주를 해 보게.” 베토벤은 모차르트가 내놓은 악보를 잠깐 들여다보더니, 손은 어느 새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즉흥곡을 만드는 일은 베토벤에게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습 니다. 또한 대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자기의 곡을 들어주고 있다는 감격으로 그는 더욱 연주에 열중했습니다. 베토벤의 연주는 계속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곡이 바뀌었지만 놀랍게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습니다. 그리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베토벤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습니다. “정말 훌륭해! 자네는 즉흥곡의 명수로군.” 그리고는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소년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앞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입니다.” 그러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음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모차르트의 친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본에서 달려온 시골뜨기 베토벤에게 세계적인 대음악가 모르트의 이와 같은 칭찬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베토벤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받은 베토벤은 자신이 얻은 행운이 믿어지지 않아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모차르트의 집을 나왔습니다. 다음 날부터 루트비히는 날마다 모차르트를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이 빈에 온 지 2주쯤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연습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온 베토벤에게 여관 주인이 편지 한 통을 내밀었습니다. ‘아! 어머니한테서 온 편지다.’ 베토벤은 기대에 부풀어 편지 봉투를 뜯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베토벤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해 갔습니다. 루트비히, 어머니가 위독하다. 어서 돌아오너라. 아버지로부터. 베토벤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음악도 모차르트도 뒤로 한 채 본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베토벤의 얼굴을 본 어머니는 아픔도 잊은 채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모차르트 선생은 만나 보았니?” “네, 어머니.” 베토벤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동안 훨씬 더 늙어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나뭇가지처럼 마른 어머니의 손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토벤은 그 날부터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베토벤은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듯한 슬픔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으며 음악 공부도 계속 해야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빈에 머물렀지만, 모차르트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다시 자신감을 갖게 했습니다. 베토벤은 결코 주저앉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였습니다. 브로이닝 집안에서 다시 피아노를 가르치게 된 베토벤은, 어느 날 브로이닝 부인을 찾아온 발트슈타인 백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음악을 매우 좋아하며 음악가를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토벤보다 여덟 살이나 위였으나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시의 음악가들은 궁정이나 귀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백작을 알게 된 것은 베토벤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됨으로써 궁정과의 관계나 일상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이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백작이었고, 궁정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연주가가 된 것도 백작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이 스물한 살 때인 1791년, 빈 악단의 대선배인 하이든이 영국으로 가는 도중에 본에 들렀습니다.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의 소개로 하이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영국에서 돌아온 하이든이 또다시 본 궁정에 들른다는 소식을 들은 발트슈타인 백작은 하이든에게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보여 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얼마 전에 베토벤은 황제의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 칸타타 를 만들었는데, 발트슈타인 백작은 그것을 하이든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습니다. 1792년 6월, 예정대로 하이든이 본에 들러서 궁정 환영회에 참석했을 때, 스물두 살의 베토벤은 백발의 대음악가에게 칸타타의 악보를 바쳤습니다. 그로부터 2, 3일 후였습니다. 베토벤의 집을 방문한 발트슈타인 백작이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베토벤, 하이든 선생이 당신이 작곡한 칸타타를 보고 칭찬이 대단했소. 덕분에 나도 무척 자랑스러웠소.” 발트슈타인 백작은 이어 말했습니다. “하이든 선생은 당신 같은 천재가 이런 곳에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당신이 빈으로 오면 직접 지도하고 싶다고 하셨소. 선제후 프란츠 공께 당신의 빈 유학을 건의해 보겠소” “네? 유학이라고요?” 베토벤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큰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빈 최고의 음악가로 이름을 떨치다. 1792년 11월, 북풍이 차갑게 부는 날 아침이었습니다. 이제 의젓한 청년 작곡가로 성장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가슴에 커다란 꿈을 안고 다시 빈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습니다. 발트슈타인 백작과 친구 베겔러, 그리고 엘레오노레가 교외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습니다. 모두 이별을 아쉬워하면서도 베토벤의 성공을 기원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제 성숙한 처녀가 된 아름다운 엘레오노레는 베토벤이 가게 될 빈 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리라고 다짐하며 빈으로 떠났습니다.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조그마한 인쇄소의 다락방에 하숙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하이든의 집으로 가서 작곡을 배웠습니다. 하이든은 유럽 제일의 음악가답게 작곡과 연주 활동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배움의 열기로 불타오르는 청년 베토벤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스승 하이든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토벤은 요한 센크라는 작곡가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슈테판 교회의 단장인 알브레히츠 베르거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은 처음 베르거를 만났을 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런 할아버지에게 배울 게 뭐가 있을까?' 하고 실망했는데 뜻밖에도 베르거의 가르침은 그에게 큰 수확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 이제야 빈에 온 보람이 있구나.’ 베토벤은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 무렵,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던 이탈리아 인 살리에리가 빈 궁정의 악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의 경쟁자로 알려졌을 만큼 오페라와 성악의 권위자였습니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워야지.’ 이렇게 생각한 베토벤은 살리에리를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이 무렵 베토벤은 미친 사람처럼 작곡에 열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아니, 아버지가.” 편지를 읽은 베토벤의 손이 몹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늘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서 자신을 깨워 피아노 연습을 시키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한때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을 음악이라는 예술의 길로 인도했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 였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어른이 된 베토벤에게 그리운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여비도 문제였지만 겨우 다시 시작한 음악 공부를 그만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일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 군이 베토벤의 고향인 본을 점령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본의 영주가 보내 오던 학비도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는 작곡 공부도 틀렸구나. 그나저나 동생들은 무사할까?’ 베토벤은 공부를 중단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가르쳐서 돈을 벌어 근근이 생활했습니다. 어느 날, 베토벤은 발트슈타인 백작을 통해 알게 된 리히노프스키 공작을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시오, 베토벤 선생. 본의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얘기 많이 들었소."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귀족들을 자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 귀족 모임에 베토벤이 참석해 주었으면 하는 뜻을 밝혔습니다. 베토벤은 이 부탁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모임에 나가면서부터 베토벤은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귀족들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베토벤 선생, 우리 집에 빈 방이 많으니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소?" 어느 날,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베토벤에게 말했습니다. 지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베토벤에게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베토벤이 흔쾌히 그 뜻을 받아들이자, 공작은 크고 화려한 방 하나를 베토벤에게 내주었습니다. 베토벤은 귀족들의 저택에 드나들면서도 옷차림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빈에 온 지 2년 4개월 만에 베토벤은, 빈 최고의 궁정 극장인 부르크 극장에서 화려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베토벤은 이 연주회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했습니다.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어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학술이나 예술계에서 아주 뛰어난 사람에게 붙 여 주는 마이스터라는 칭호가 어느덧 베토벤의 이름 앞에도 붙게 되었습니다. 1796년,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처음으로 유럽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 베토벤은 어느 곳을 가든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연주회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오, 너무나 멋져요!” “베토벤 선생의 손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어요.” 베를린에서 열린 연주회에서는 감격한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와 베토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은 계속되는 연주회와 작곡 발표회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 중에도 끊임없이 작곡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이 무렵에 베토벤이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제3번, 피아노 소나타 비창 등은 오늘날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들니다. 줄리에타에게 바친 월광 소나타. 1799년 5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베토벤이 작곡에 몰두해 있을 때 헝가리의 귀족 브룬스비크 백작 부인이 딸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 부인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베토벤은 당황해하며 쓰다 버린 오선지들로 어지럽혀진 방 안을 대충 치웠습니다. “실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 딸 테레제가 선생님의 지도를 꼭 받고 싶어합니다. 바쁘시더라도 이 아이가 연주하는 곡을 한번 들어봐 주십시오.” 베토벤은 그 때서야 테레제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토벤은 테레제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의 지도를 꼭 받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테레제는 말씨도 곱고 태도도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습니다. “아, 네. 잘 오셨습니다.” 베토벤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부터 베토벤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브룬스비크 백작의 집으로 가서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테레제는 배우는 데 무척 열의를 보였으며, 베토벤은 그런 테레제를 가르치는 일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좀더 천천히, 그리고 한 음 내려서.” 베토벤은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새 테레제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테레제를 머릿속에 떠올리노라면 어느덧 좋은 멜로디가 떠오르고, 마음은 풍선처럼 두둥실 부풀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베토벤은 테레제에게 새 악보를 펼쳐 보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테레제, 당신을 위해 만든 곡이요. 한번 처 봐요" "어머! 저를 위해 작곡을." 테레제는 뜻밖의 선물을 받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좋아했습니다. 한동안 젖은 눈으로 베토벤을 올려다보던 테레제는 이윽고 조용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사랑이 가득 담긴 곡이었습니다. 끝까지 곡을 연주한 테레제는 너무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흥건히 번지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테레제는 자신의 초상화를 베토벤에게 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곡을 주신 데 대한 답례가 될지 모르겠어요." “정말 소중한 선물이오, 테레제. 평생 동안 귀중하게 간직하 겠소.” 베토벤은 테레제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일생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800년, 서른 살이 된 베토벤은 부르크 극장에서 자신이 주최하는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이 음악회에서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끈 곡은 교향곡 제1번 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지휘봉이 힘차게 움직이자 교향곡의 빠르고 화려한 선율이 극장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역시 베토벤이군!” “참으로 훌륭해!” 청중들은 연주가 끝났는데도 감격하여 일어설 줄을 몰랐습니다. “어때? 베토벤 선생님의 음악이." "정말 멋있어!" 청중석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두 소녀가 있었습니다. 바로 테레제와 그녀의 사촌 동생인 줄리에타였습니다. 줄리에타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그녀 역시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줄리에타는 테레제와 달리 매우 명랑하고 밝은 소녀였습니다. 우울한 면이 많았던 베토벤은 밝은 성격의 줄리에타와 함께 빈 교외의 오솔길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베토벤의 마음속에는 줄리에타를 향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베토벤은 정성을 들여서 곡 하나를 작곡했습니다. "줄리에타, 이 곡을 한번 들어봐." 베토벤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줄리에타는 달콤한 음악속으로 자신의 몸이 부드럽게 녹아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고요한 달빛을 생각나게 하는 1악장에 이어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있는 듯한 2악장, 그리고 3악장은 이제까지의 감미로운 선율과는 반대로 성난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듯한 격정이 느껴졌습니다. "선생님, 좋아요! 정말 훌륭해요!" 줄리에타는 감동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고는 베토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곡을 줄리에타에게 줄게.” “어머나, 선생님! 정말이세요? 이렇게 멋진 곡을 저에게 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줄리에타에게 주었다고 전해지는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월광 소나타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곡에 담긴 두 사람의 사랑은 줄리에타가 어느 백작과 결혼식을 올리면서 끝이 나 버렸습니다. 귓병과 싸우다. 여느 때처럼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베토벤은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갑자기 귀가 '윙윙' 울리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앗, 왜 이럴까? 귀가 이상해.’ 피곤한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 하룻밤을 푹 자고 일어났지만, 귀는 여전히 울렸고 육신욱신 쑤시기까지 했습니다. 불현듯 겁이 난 베토벤은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귀의 울림은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베토벤은 평소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 주던 슈미트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 귀에 무슨 이상이 생겼나요?" 베토벤의 증상을 들은 슈미트 박사는 안타까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토벤 씨, 당신의 귓병은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졌기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이요. 치료를 계속 받기보다는 조용한 시골로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얼마간 쉬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소.” 베토벤은 고민 끝에 슈미트 박사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베토벤은 제자인 리스를 데리고 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일리겐슈타트라는 시골로 떠났습니다. 숲 사이로 도나우 강 줄기가 흘러가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베토벤은 포도밭 가운데에 있는 외딴 집을 빌렸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숲 속 오솔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시작으로 베토벤은 온종일 자연의 품 속에서 지냈습니다. 나무와 풀, 이름 모를 새와 곤충, 시냇물 소리와 들을 지나는 바람 소리까지도 베토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지내는 동안 베토벤은 따가운 여름 햇볕에 얼굴과 손발이 건강한 구릿빛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베토벤은 리스와 함께 숲 속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리스의 귀에 아름다운 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생님! 저기 나무 사이를 오가며 노래하는 새 소리가 들리시죠? 정말 아름다운 소리예요.” 리스가 기쁜 듯이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는 새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서 외치는 리스의 목소리도 아주 조그맣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그제서야 자기의 귀가 매우 나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이제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어. 내 귀는 이대로 들리지 않게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온 베토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쳤습니다. ‘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여름이 다 가도록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보내는 유서를 썼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젊은 음악가의 절망감을 담고 있는 이 유서는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유서를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라고 불렀습니다. 두 동생들에게 유서를 남긴 베토벤은, 이튿날 다시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을 썼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 1802년 10월 10일. 희망이여, 나는 이제 너에게 이별을 고한다. 여기 오면 귀가 나으리라는 희망도 이젠 사라졌다. 가을에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썩어 가듯 나의 희망도 말라 버렸다. 오, 하느님! 맑게 갠 기쁨의 날을 다시 한 번 제게 베풀어 주소서. 이상하게도 유서를 써 놓고 나자 베토벤은 가슴이 후련해지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희망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죽어서는 안 된다. 너에게는 아직 음악이 있다.’ 베토벤은 잠에서 깨어나듯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렇다! 고통이 없는 예술은 참된 감동을 줄 수 없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작곡은 할 수 있다. 음악이 있는 한 나는 살아갈 것이다. 오, 하느님! 저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마침내 베토벤은 죽음의 문턱에서 힘차게 일어섰습니다. 자신의 운명과 싸워 이겨 낸 것입니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는 새로운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불멸의 곡들. 찬바람이 불어 올 무렵,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그 곳에서 겨울 내내 오직 작곡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의 창작열은 봇물이 터지듯 터져나왔습니다. 교향곡 제2번,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완성시키고 또다른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베토벤은 새로운 교향곡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영웅의 일생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을 위해 싸운 영웅이다. 나의 음악으로 그를 찬양해야겠다.’ 그리하여 1804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교향곡 제3번이 완성되었습니다. 베토벤은 흡족해하며 악보의 표지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바침' 이라고 써 놓고, 나폴레옹에게 이 곡을 바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리스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 자리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답니다. 5월 18일에 즉위식이 있대요." "뭐라고, 황제?” 그 순간 베토벤의 얼굴은 일그러졌습니다. "그럼, 그는 프랑스 국민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되기 위해 국민들에게 피를 흘리게 했단 말인가?" 베토벤은 책상 위에 있던 악보를 집어서 표지를 사정없이 찢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 마음이 가라앉은 베토벤은 새로 표지를 씌우고 나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교향곡 제3번 영웅 어떤 위인을 추억하기 위하여. 그리고 곡의 내용을 약간 다듬고 나서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바쳤습니다. 1808년, 베토벤은 교향곡 제5번과 교향곡 제6번을 연이어 발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 두 교향곡은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운명이라고도 불리는 제5번 교향곡에는 인간의 격렬한 운명이 담겨 있습니다. 이 곡의 처음 부분은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로 시작됩니다. 베토벤은 이 곡을 작곡할 때에 곁에 있던 친구에게 피아노를 쳐 보이며,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네.” 하고 말했는데, 이로 인해 '운명' 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 곡에는 운명 앞에서 두려워하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과 운명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굳은 의지가 대비되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6번 교향곡 전원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전원 교향곡은 그림이 아니다. 전원 생활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감정과 전원 생활의 기쁨을 나타낸 것이다." 베토벤은 이 곡을 발표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 곡에는 자연의 평화로움과 전원 생활의 조용한 기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809년 6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빈의 거리는 온통 프랑스 군에게 짓밟히고 사람들은 모두 피란을 가 버렸습니다. 그러한 난리통에도 베토벤의 창작 의욕은 꺾일 줄을 몰랐습니다. 이 무렵에 그는 오늘날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일컬어지는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곡은 제목에 걸맞게 매우 웅장하고 방대하였습니다. 1812년 여름, 몸이 많이 쇠약해진 베토벤은 의사의 권유에 따라 테프리츠의 온천장으로 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베토벤은 독일의 시인 괴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제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서로의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또한 베토벤은 평소 괴테를 존경해 왔습니다. "베토벤, 당신같이 훌륭한 음악가를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오." "평소 존경하는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금세 친해져서 수시로 만나 음악과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당시 65세의 노인이었던 괴테는 오랫동안 궁정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무척 예의가 바르고 사교적인 신사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베토벤은 사람을 사귀는 솜씨가 서툴고 고집이 센 편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성격으로 인해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베토벤과 괴테 두 사람은 언덕 위의 오솔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쪽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황족들의 행차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일행 중에는 황후도 끼어 있었습니다. 괴테는 얼른 한쪽으로 비켜서서 모자를 벗고 머리를 깊이 숙였습니다. 그러자 베토벤은 괴테의 그런 태도가 한없이 나약하고 우습게 여겨졌습니다. 신분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 베토벤은 귀족에게 굽실거리는 괴테의 태도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렇게까지 굽실거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베토벤은 이렇게 말하며 가슴을 쭉 펴고 뒷짐을 진 채 태연히 걸어갔습니다. 다만 황후와 마주쳤을 때 모자에 손을 대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황후와 대공들은 그런 베토벤을 무례하게 여기지 않고 웃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황족들의 행차가 지나간 후 베토벤은 노골적으로 괴테에게 빈정거렸습니다. "괴테, 나는 당신을 오랫동안 존경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당신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어째서 그처럼 비굴하게 구십니까?" 괴테는 베토벤의 무례한 말에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베토벤은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곧장 뒤돌아서서 가 버렸습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우정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여름 동안 테프리츠에서 요양을 한 베토벤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빈으로 돌아왔습니다.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은 얼마 후 교향곡 제7번을 발표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빈의 청중들은 경쾌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이 곡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이듬해 베토벤은 교향곡 제8번을 발표했습니다. 이 곡을 발표하던 날, 베토벤의 지휘는 악단과 전혀 맞지가 않았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낮은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아. 이젠 더 이상 지휘도 못 하겠어.’ 베토벤은 절망에 빠져 한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냈습니. 1822년 11월, 오스트리아 황제의 탄생일을 맞아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가 게룬트너 토어 극장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이 뜻깊은 연주회의 무대에 올라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지막 총연습이 있던 날, 베토벤은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악단을 지휘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소리를 분간할 수 없는 베토벤의 지휘로 인해 연주는 이내 뒤죽박죽이 되었는데도 그는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연습은 몇 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 신들러가 수첩에 무언가를 써서 베토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선생님, 지휘를 그만두십시오. 이유는 집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베토벤은 연습이 중단된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지휘봉을 내던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극장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날 밤, 베토벤이 걱정된 신들러가 그의 집으로 가 보니, 베토벤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베토벤은 고개를 들어 신들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신들러, 아무래도 내 귀는 이제 틀린 모양이야. 앞으로는 절대 무대에 나서지 않겠네. 작곡만 해야겠어." 이튿날, 오페라 피델리오는 화려한 막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지휘대 위에 선 베토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악단의 뒤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베토벤의 마음은 더없이 쓸쓸했습니다. "피아노도, 지휘도 이제는 끝장이다. 그러나 내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작곡을 하는 거야." 베토벤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의 표정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음악을 향한 불타는 열정. 귀가 완전히 먼 뒤부터 베토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글을 써서 주고받았습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항상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쓰이는 수첩이 들어 있었습니다. 연주회에 나서는 일을 깨끗이 단념한 이후로 베토벤은 작곡에만 정열을 쏟았습니다. 그 무렵, 베토벤의 얼굴은 무서우리 만큼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와 정반대로 달라져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은 강렬하게 빛났습니다. 그 때는 머릿속에 좋은 곡이 떠오를 때였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작곡에 몰입했습니다. 알프스 산 기슭에 메틀링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이 곳의 산과 골짜기의 경치를 좋아하여 1818년부터 몇 해 동안 이 곳에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메틀링에서도 베토벤은 미친 듯이 작곡에만 매달렸습니다. 한 번 머릿속에 곡이 떠오르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었고, 어떤 때는 산책을 나갔다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고 들판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메틀링 산에서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생각에 골몰해 있는 베토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습니다. 어느 해 여름, 신들러가 베토벤을 찾아 메틀링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신들러가 베토벤의 집 대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습니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신들러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베토벤의 방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손잡이를 막 돌리려고 하는데, 안에서 발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베토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작곡을 하시는군. 그 동안 잠시 산책이나 하고 올까?' 신들러는 이렇게 생각하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베토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진 채 무섭게 빛을 발하는 눈으로 신들러를 날카롭게 노려보았습니다. 신들러는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아! 자네였군." 베토벤은 방문객이 신들러라는 것을 알고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습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나." 신들러가 안으로 들어가자 베토벤은 피곤한 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신들러는 몹시 지쳐 보이는 베토벤을 보고 있자니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토벤은 이처럼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쓸쓸한 나날을 보내면서 작곡에만 몰두했던 것입니다. 1823년 3월, 5년이란 긴 세월 동안 베토벤이 남은 정열을 다 쏟아 부은 작품 장엄 미사곡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미사곡은 대주교로 취임하게 된 루돌프 대공에게 바쳐졌습니다. 장엄 미사곡을 완성한 이듬해인 1824년 4월, 베토벤은 그 동안 틈틈이 써 온 제9번 교향곡을 서둘러서 마무리지었습니다. 합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교향곡이야말로 베토벤 음악의 최고봉이자 생애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그 곡에는 인류의 영원한 평화, 위대한 신에 대한 감사, 그리고 평생을 운명과 싸워 마침내 승리한 베토벤 자신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 해 5월 7일, 게룬트너 토어 극장은 연주회가 시작되기 2시간 전부터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윽고 터질 듯한 박수를 받으며 베토벤이 무대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이어서 지휘자 움라우프가 등장하고 두 개의 지휘봉이 힘차게 움직였습니다. 베토벤은 이 작품의 연주를 직접 지휘하고 싶었으나, 귀머거리인 자신이 지휘를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지휘자를 세우고 함께 지휘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연주가 절정에 이르러 마지막 4악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찬양하라, 노래하라! 하느님의 영광을.” 독일 시인 실러의 시 중에 기쁨의 노래라는 시가 연주곡에 실려 울려 나왔습니다. 찬란한 기쁨과 영광, 순결함이 넘쳐흐르는 합창은 청중들을 불길 같은 감동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단원들은 모두 움라우프의 지휘에 따라 연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지휘봉을 휘두르는 베토벤의 모습은 너무도 정열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귀머거리라는 것도, 청중들이 있다는 것도 모두 잊어버린 듯했습니다. 마침내 연주가 끝났습니다. 청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박수 소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 발을 구르며 '베토벤'의 이름을 외쳐 대는 사람들로 극장 안은 떠나갈 듯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는 극장을 뒤흔드는 박수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피로에 지친 듯 악보대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이 눈물겨운 광경을 보다 못한 한 가수가 달려와 베토벤을 청중 쪽으로 돌려세웠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열광하는 청중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청중들 속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곡의 왕’ 슈베르트였습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연주가 끝난 뒤에도 눈에서 손수건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토벤은 청중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신들러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신들러는 베토벤의 수첩에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밤처럼 감동적인 연주는 처음이었습니다. 청중들은 황제를 맞이하는 것보다 더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음악의 거장, 세상을 떠나다. 1826년, 베토벤은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곡은 안타깝게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3월 19일, 슈베르트는 신들러의 안내를 받으며 베토벤의 병상을 찾았습니다. 슈베르트는 오랫동안 존경해 오던 베토벤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베토벤은 기분이 아주 좋은 듯, "내가 건강할 때 찾아와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슈베르트가 갖고 온 악보를 흥미있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한 곡, 두 곡, 악보를 넘기던 베토벤의 얼굴이 점점 환하게 밝아지더니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슈베르트 군, 자네는 머지않아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될 걸세.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그러나 이것은 두 천재 음악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슈베르트가 돌아간 뒤 베토벤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3월 26일 오후였습니다. 해질 무렵이 되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번개가 치더니 천둥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그때,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베토벤이 벌떡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더니 불끈 쥔 오른손을 높이 쳐들며 눈을 부릅뜨고는 하늘을 무섭게 노려보았습니다. 마침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 중 한 명이 급히 달려가 그의 등을 받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내 힘없이 팔을 떨어뜨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1827년 3월 26일 오후, 베토벤은 그렇게 5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흘 뒤, 베링 묘지에서는 베토벤을 위해 지은 그릴파르처의 시가 낭송되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우리 조국의 예술과 민족의 영예를 짊어진 그대의 죽음을 우리는 슬퍼하노라. 그러나 그대의 예술은 아직도 살아 있다.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예술은 아직도 살아 있다.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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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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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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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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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꽃의 도시' 라고 일컬어지는 피렌체의 북쪽에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빈치 마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성당 앞에 한 부인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습니다. 마침 치오리 신부가 성당에서 나오다가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카테리나! 웬일이시오?” 신부는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부님. 다름이 아니라 이 아이 문제로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그래요? 우리 레오나르도를 위한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려야지요." 카테리나는 염치없다는 듯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레오나르도에게 종이와 연필을 구해 주셨으면 해서요. 이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종이와 연필이 없어서 매일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요." "이 애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저도 이미 소문으로 들었어요. 제가 종이와 연필을 주지요." 신부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종이와 연필을 가져와 레오나르도에게 주었습니다. "와아! 신부님, 고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뛸듯이 기뻐하며 언덕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카테리나는 이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신부에게 종이와 연필을 얻어 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카테리나는 다시 치오리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이 그림을 우리 레오나르도가 그렸답니다. 한번 봐 주세요.” 카테리나는 한 장의 그림을 신부에게 내보였습니다. “세르피에로 씨 댁을 그린 것이로군요. 누가 보든지 그 집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겠는걸요. 마치 실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제게 줄 수 있겠습니까? 성당 벽에 걸어 놓고 싶군요." 카테리나는 기쁜 마음으로 신부에게 그림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해 큰 슬픔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치오리 신부가 갑자기 카테리나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레오나르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요전에 안토니오 영감님이 오셔서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보시고는 무척 놀라시더군요. 신동이라고 칭찬이 대단하셨습니다 . 저, 그런데 영감님께서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안토니오란 이름을 듣자 카테리나는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며 굳어졌습니다. "무슨 부탁인가요?" " 저, 그게. 영감님께서 레오나르도를 데려가고 싶어합니다." "그, 그건 안 돼요. 저는 그 애 하나만을 보며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어요." "카테리나, 당신의 심정은 잘 알지만 레오나르도의 장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 그 집은 아직 대를 이을 손자가 없어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가문 훌륭하고 재산도 많은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레오나르도에게 훨씬 좋지 않을까요?" 카테리나는 고개를 숙인 채 신부의 말을 듣고 있다가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말하였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신부님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따르겠어요." 치오리 신부는 그녀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습니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안토니오의 아들 세르피에로와 카테리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가문을 중요하게 여긴 안토니오는 농부의 딸인 카테리나를 며느리로 인정하 않았고, 결국 둘을 강제로 헤어지게만든 뒤 아들을 부잣집딸과 결혼시켜 피렌체로 떠나 보냈습니다. 그래서 카테리나는 아들 레오나르도를 낳아 이제껏 혼자서 길러 온 것입니다. 며칠 후 안토니오는 하인을 보내 레오나르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안토니오는 팔걸이 의자에 레오나르도를 앉히면서 "이젠 여기가 너의 집이다, 알겠느냐? 그리고 내가 너의 할아버지란다. 어디 한번 할아버지라고 불러 보렴." "네,할아버지." 레오나르도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래 넌 아주 영리한 아이로구나. 이제부터는 이집의 도련님답게 행동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안토니오는 몹시 흡족해하며 하인을 불러 레오나르도를 새 옷으로 갈아 입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까만 우단으로 된, 소매가 길고 부드러운 양복이었습니다. 그날 밤 안토니오는 피렌체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레오나르도를 교육시키기 위해 책과 가정 교사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며칠 뒤 보날코르시라는 사람이 레오나르도의 가정 교사로 왔습니다. 보날코르시는 레오나르도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한편 원근법을 사용하며 인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림의 기법을 익힌 레오나르도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한번은 한 시간 만에 안토니오 영감의 초상화를 그려서 그를 기쁘게 하기도했습니다. 며칠 동안 레오나르도를 가르친 보날코르시는 안토니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영리한 아이는 처음 보는군요. 게다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한답니다." 레오나르도는 하루 아침에 부잣집의 귀한 손자가 되었지만, 투정을 부리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법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언제나 총명하고 의젓한 도련님의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레오나르도는 늘 쓸쓸해 보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14살이 되던 해,아버지 세르 피에로가 잠시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오,네가 바로 레오나르도구나!" 그는 처음 보는 아들을 품에 안고서 몹시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만나도 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피하여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습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커다란 방패를 들고 세르 피에로를 찾아왔습니다. " 도련님, 훌륭한 화가를 알고계시면 이 방패에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 좀 해 주십시오." 세르 피에로는 농부로부터 받은 방패를 레오나르도에게 가져왔습니다. "레오나르도, 이 방패에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려보거라. 어때, 자신 있겠지?'' "네. 한번 해 보겠어요." 레오나르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리스 인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머리를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실감나게 그릴 수 있을까? 옳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레오나르도는 밖으로 나가 뱀을 잡아왔습니다. 드디어 방패를 맡겼던 사람이 오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보기 위해 방문을 연 세르 페에로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아버지, 제가 그린 그림이니까 놀라지 마세요." 세르 피에로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오, 정말 뛰어난 솜씨로구나." 그는 레오나르도의 뛰어난 그림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를 유명한 화가에게 보이기 위해 피렌체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1466년 봄,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피렌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를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이며 화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베로키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베로키오는 첫눈에 레오나르도가 마음에 들어 자기 결에서 그림 공부를 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부터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화실에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아직 정식으로 제자의 자격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베로키오가 그림 그리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틈나는 대로 그를 흉내내어 스케치를 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와 함께 외출하고 돌아 오는 길에 한 신부를 만났습니다. 그 신부는 베로키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내일 아침 8시까지 베로키오 씨의 화실로 찾아 가겠습니다." 그런데 신부와 약속한 그 시각에 베로키오는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베로키오는 무척 난처했습니다. 이 때 레오나르도가 달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 신부님을 만나 다시 약속을 정하고 오겠습 니다." "신부들이 400명도 님는 넓은 수도원에서 이름도 모르는 신부님을 어떻게 찾는단말이냐?" "걱정 마세요. 제게 방법이 있어요."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레오나르도는 웃는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선생님,그 신부님의 성함은 모레치래요." “아니,레오나르도. 어떻게 그분을 만났지?'' 베로키오의 물음에 레오나르도는 스케치북을 펴보였습니다. “신부님의초상화예요.이것을 맨 처음 만난 신부님에게 보여 드렸더니 바로 가르쳐 주시던데요." 그림 속의 모레치 신부는 마치 실물을 보는 듯했습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끌어안으며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가 나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구나." 이 날부터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정식 제자가 되어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하프의 일종인 리라를 아주 잘 연주했습니다. 19세 때인 어느 날 베로키오가 그를 불렀습니다. "밀라노 공국의 일 모로 왕께서 피렌체에 오신단다. 환영식 때 네가 리라를 연주해야겠구나. 열심히 준비하도록 해라." 며칠 뒤, 일 모로 왕은 200여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피렌체에 도착했습니다. 피렌체의 실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 집안의 별장에 그들의 숙소가 마련되었고,성대한 환영식이 베풀어졌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연주는 일 모로 왕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일 모로 왕은 레오나르도를 불러 직접 술을 권하며 물었습니다. "자네의 고향은 어딘가?" "빈치 마을입니다." “자네의 성과 고향 이름이같군, 직업은 화가라고 들었는데 연주 솜씨도 대단하군." 그러자 옆에 있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과학과 공학에도 뛰어나답니다." 일 모로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레오나르도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대단한 재주꾼이로군 . 나는 자네 같이 다재다능한 사람을 좋아한다네. 자네를 밀라노로 초청하고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황송하옵니다. 그런 배려까지 해 주시다니, 제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이 날 이후로 레오나르도의 이름은 이탈리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특히 레오나르도는 이날 밤 누구보다도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마음을 사로잡았기때문에, 메디치는 레오나르도의 미래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20살이 되자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협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훌륭한 화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으나, 그 때까지 베로키오의 화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를 불렀습니다. "레오나르도 군, 이제 나는 더 이상 자네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다네, 내 곁을 떠나서 자네의 길을 가게나."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계속해서 베로키오의 화실에 머물다가 25살이 되어시야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그린 성 제롤라모시,수태고지, 삼왕 예배 등은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명화로 남아 있습니다.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공국 일 모로 왕의 초청을 받고 밀라노로 떠났습니다. 일 모로가 레오나르도를 초청한 이유는 그의 과학적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공국의 군사 고문이 되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는 한편, 동굴의 성모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 모로 왕이 레오나르도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동상을 만들었으면 하오." "그분 프란체스코 선왕은 오늘의 밀라노 공국이 있기까지 기반을 마련해 주신 훌륭한 임금이오." "그러니 이탈리아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위엄 있는 큰 동상을 만들어 주시오." 레오나르도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프란체스코 선왕은 힘이 세며 말을 잘 타고 다녔다고 하니까 기마상을 만들면 좋겠군.' 이렇게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말의 동작을 살피기 위해 매일 같이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레오나르도가 상점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비키시오! 위험하오. 성난 말이 날뛰고 있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 한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오히려 스케치북을 들고 달려 오는 말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저 사람,왜 저래? 위험해요!" 미친 듯이 달려오던 말은 레오나르도 앞에서 앞발을 치켜들고 멈추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재빨리 그 모습을 스케치하였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성난 말조차도 기가 죽은 모양이었습니다. 겁에 질려 말 위에 앉아 있던 사나이는 말에서 뛰어내려 레오나르도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감사힙니다. 날뛰는 말을 당해 낼 수가 없던 차에 선생님 덕분에 위험을 면했군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사실적인 모습을 그리려는 선생님의 투철한 정신에 존경을 표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선생님." “아니,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제 이름은 사라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오래 전부터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싶었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레오나르도는 용모가 단정하고 예의른바른 사라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랫동안 고생하여 기마상의 원형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마상이 어찌나 큰지 거기에 필요한 많은 양의 구리를 녹일 만한 철공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구리를 녹일 만한 큰 도가니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러느라 시일이 늦어지자, 일모로 선왕의 기념제까지는 꼭 완성해야 된다며 독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밤낮을 쉬지 않고 매달린다고 해도 프란체스코의 기념제까지 완성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궁전 앞 광장에 돌로 큰 받침대를 만든 후, 그 위에 미완성의 기마상을 올려놓기로 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43세 때인 1495년,일 모로 왕은 레오나르도를 불러 말하였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으뜸 가는 성당과 미술품이 밀라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싶소,레오나르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훌륭한 벽화를 그려 주시오," 일 모로 왕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레오나르도는 며칠 동안 그림 구상을 하느라 골몰했습니다. 마침내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가 열두 제자와 마지막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그리기로 결정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그의 곁에서 도와 주던 사라이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라이는 그림이 거의 완성될 때까지 두 인물의 자리를 남겨 둔 것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왜 이 두 사람은 그리지 않나요?” "거기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를 배신한 유다를 그릴 자리이지. 거룩한 얼굴과 그 정반대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좀처럼 떠오르지가 않아서 비워 둔 거야." 오랜 시간을 생각한 끝에 그리스도의 얼굴은 간신히 완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얼굴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벽화가 완성되지 않자 수도원장은 일 모로 왕을 찾아가서 레오나르도가 그림에 열중하지 않는다고 모함했습니다. 일 모로 왕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레오나르도를 불렀습니다. “도대체 벽화 하나 그리는 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벽화는 완성되었지만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해 늦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 악마 같은 사람은 그리기가 어렵겠지. 하지만 되도록 빨리 완성해 주시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레오나르도는 유다의 얼굴을 그려 벽화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벽화가 바로 유명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물화를 선생님처럼 실감나게 그릴 수 있나요?" 어느 날 사라이가 레오나르도에게 물었습니다. "인물을 살아 있는 것처럼 그리려면 먼저 인체의 구조를 잘 알아야 하네, 자네 해부학을 공부해 보지 않겠나?" "네? 인체 해부는 교회에서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시체를 해부한 의사가 사형당하는 것도 보았는걸요." "그렇지만 그것이 참된 이치를 알게 되는 길이라면 교회가 아무리 금지한다 하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물론 세상이 진보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선생님, 제가 시체를 해부해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기회를 만들어 보겠네. 그러나 꼭 비밀을 지켜야 하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레오나르도는 잠들어 있는 사라이를 깨웠습니다. "초롱불과 삽을 가지고 조용히 따라오게." 두 사람은 숲이 우거진 공동 묘지로 들어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한 무덤 앞에 이르러 문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무덤을 파게나. 푯말도 없고 흙도 다져지지 않은 것을 보니 묻은 지 얼마 안 된 무덤임에 틀림없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호기심 때문에 사라이는 두려움도 잊은 채 열심히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그 곳에는 묻힌 지 얼마 안 된 시체가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시체를 지하실로 옮겨 와 그것을 해부하면서 사라이에게 인체의 구조와 장기의 모습을 낱낱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라이는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스케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이 일이 그만 교회에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오나르도와 사라이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 감옥에 있는 동안 프랑스군이 밀라노로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밀라노가 프랑스군에 점령 당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곧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말을 타고 피렌체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제자 사라이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들에 핀 꽃들을 바라보던 레오나르도는 피렌제로 처음 올 때의 소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레오나르도는 사라이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사라이, 빈치 마을에 들렀다 가야겠네." "선생님의 고향 말씀이군요. 모두들 크게 반겨 주시겠지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빈치 마을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정겨웠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 곳을 지나가는 한 농부에새 다가갔습니다. "영감님은 여기에서 사십니까?" 레오나르도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초조한 마음으로 농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렇소만?" "그럼 카테리나 아주머니를 아시겠네요?'' "알고말고요. 아주 착한 분이었는데 작년 가을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오." 농부는 말을 마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흐르는 냇물만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피렌체로 돌아와서 얼마 후, 경호 장관 소데리니가 레오나르도를 찾아왔습니다. “피렌체의 자랑인 당신과 미켈란젤로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시청의 회의실 벽을 두분의 그림으로 장식하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거장으로서 서로 대립적인 그림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52세였고,미켈란젤로는 29세의 청년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마침내 이 젊은 미켈란젤로와 겨루어 볼 기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은 레오나르도 파와 미켈란젤로 파로 갈라져 자기 쪽을 응원하느라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 난 뒤 앙기아리의 싸움을 그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피렌체의 남쪽에 위치한 앙기아리는 1440년에 피렌체와 밀라노 군대가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습니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역사상 대전쟁의 하나였던 카시나의 싸움을 구상하였습니다. 한번 마음먹으면 단번에 일을 해치우는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먼저 밑그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레오나르도는 심사숙고한 뒤에야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화가의 그림이 열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의 어느날, 레오나르도는 한 청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매일같이 성당을 찾아와 자신이 그림 그리는 것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도 청년은 레오나르도의 그림 앞에 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내 그림에 흥미가 있는 것 같은데 서로 이름이나 알고 지냅시다." 청년은 스케치를 멈추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라파엘로라고 합니다. 로마에서 페루지노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벽화를 그리신다기에 며칠 전에 여기로 왔습니다." 라파엘로는 이 때 22세의 젊은이였는데, 그가 입고 있는 허름한 옷차림과는 달리 잘생긴 얼굴에 키가 훤칠하게 크고 친근감을 주는 인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맙소. 언제 시간이 나면 그림이나 한번 보여 주시오." “아직은 실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나중에 좋은 작품이 완성되면 그 때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에게 방해가 될까 봐 서둘러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퍽 재주 있는 젊은이 같군."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물감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느라 좀처럼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벽화에 앞서 주문을 받은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를 먼저 그려야 했기 때문에 얼마 동안 벽화 그리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도 사정이 생겼습니다.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을 받아 로마로 떠나야 했던 것 입니다. 이렇게 하여 두 거장의 그림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 어느덧 4년이 되었습니다. 초상화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조콘다 부인은 얼굴에 불안한 기색을 띠고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게 화실에 나타났습니다. "부인,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군요." "네, 오늘은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조콘다 부인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번에 제 남편이 석 달 동안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저와 함께 가길 원해요. 오늘 밤에 떠난답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부인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자 조콘다 부인이 초상화를 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왠지 이 초상화가 미완성인 채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부인, 제가 너무 시일을 끌어 죄송합니다. 곧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이 완성되면 모나리자라고 제목을 불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너무 과분한 이름이군요." 조콘다 부인은 부끄러워 하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모나'는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 리자 '는 부인의 이름인 엘리자베타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부인이 떠나고 얼마 후 레오나르도는 홀로 아르노 강가를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가족이 없는 레오나르도는 항상 외로움에 젖어 살았습니다. 저녁 노을 속에 붉게 물들어 가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을 바라보는 레오나르도는 더욱더 외롭고 쓸쓸한을 느꼈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레오나르도를 부르며 달려왔습니다. “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맞소만, 당신은 뉘시오?'' “절 모르시겠습니까? 조콘다 부인 댁의 하인입니다. 그런데 그만 마님께서 여행지에서 돌아가셨다는군요. 그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뭐, 뭐라고 했소? 조콘다 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소?” "네, 갑작스런 병환으로." 조콘다 부인의 죽음은 레오나르도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나리자는 조콘다 부인의 예감대로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습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레오나르도는, 며칠 후 사라이를 불렀습니다. “자네와 내가 함께 지내 온 세월이 벌써 17년이나 흘렀군 그래. 그 때 자네의 사나운 말이 아니었다면,아마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겠지?" "사라이, 나는 이제 다시 밀라노로 가려고 하네. 자네는 어찌 할 텐가?'' 레오나르도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이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사라이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상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물론 저도 선생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 곳은 저의 고향이 기도하니까요." "그럼 함께 가세나. 사실은 밀라노에 있는 프랑스 총독이 초청장을 보내 왔더군. 자네도 좋다고 하니 곧 회답을 띄워야 겠네." 레오나르도는 미완성 작품인 모나리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사라이와 함께 밀라노를 향해 떠났습니다. 54세의 늙은 레오나르도와 그의 제자 사라이는 여러 날 만에 밀라노에 도착했습니다. 밀라노 시내로 들어선 레오나르도와 사라이는 거리류 천천히 거닐면서 지난날 밀라노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성당으로 들어선 레오나르도와 사라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벽화의 색깔은 모두 변하였고 물감은 여기저기 보기 싫게 벗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던 장엄하고 찬란했던 벽화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온갖 정열을 쏟았던 작품이 형편없이 변하여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레오나르도의 마음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서글펐습니다. "사라이, 이 벽화가 이토록 형편없이 변해 버린 것은 아마도 기름에 갠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벽에 기름이 잔뜩 배어 있는 것을 보니 그런 것 같군요. 더구나 프랑스 병사들이 이 성당을, 숙소로 쓰면서 함부로 다룬 데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가장 큰 책임은 벽화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밀라노에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 그라치에 성당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1507년 어느 날, 프랑스 총독이 레오나르도를 불렀습니다. “우리 나라의 루이 12세께서 이번에 이 곳 밀라노로 시찰을 오실 겁니다. 환영회 때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보여 드리고 싶으니 당신이 그것을 구상해 보시오." 레오나르도는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며칠 후, 레오나르도는 조로아스트로라는 기계공을 집으로 불러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루이 12세가 밀라노에 도착했습니다. 환영회는 밀라노 궁전의 응접실에서 베풀어졌습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였습니다. 갑자기 출입문이 활짝 열리더니 음악 소리와 함께 커다란 사자 한 마리 가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으악!" 사람들은 놀라서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사자가 아니라 레오나르도가 만든 기계였습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감탄했습니다. “정말 놀랍군. 진짜 사자와 똑같은걸." “자칫하면 진짜 사자로 속아 넘어가겠어." 이 일로 인해 환영회의 분위기는 한층 흥겨워졌습니다. 기계 사자는 방 한가운데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더니 앞발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자의 배가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흰 백합꽃 다발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의 환영식에는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흰 백합꽃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구상을 해낸것입니다. "총독, 이 사자를 구상한 사람을 만나고 싶소." 레오나르도는 곧 루이 12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짐은 그대를 프랑스의 궁정 화가 겸 기술자로 임명하겠소. 그대를 만나서 진정으로 기쁘오." 이리하여 레오나르도는 루이 12세의 사랑을 받으며 미술, 토목,공학 등 여러 분야의 일을 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루이 12세의 명으로 밀라노의 토지 개발에도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을 넓히고 운하를 파는 공사를 감독 하기 위해 강근처의 한 별장에 숙소를 정하였습니다.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별장의 한 방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소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별장 주인인 지로라모 메르치를 불려 물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저 소년은 누구입니까?'' "저의 외아들 프란체스코입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군요. 프란체스코에게 그림 공부를 시킬 생각은 없으십니까?'' "글쎄요. 프란체스코는 그림 공부를 하고 싶어하지만, 저 애에게 정말로 재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답니다." " 혹시 선생님께서 그 아이를 지도해 주실 수 는 없겠는지요?" "선생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아들의 소원을 풀어 주고 싶습니다." "그럼,프란체스코를 이리로 데려오시지요." 레오나르도의 대답을 들은 메르치는 재빨리 집으로 뛰어가서 프란체스코를 불러 왔습니다. 자기가 그리던 그림을 가지고 들어오는 프란체스코를 본 순간,레오나르도는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베로키오 선생님을 처음 찾아갔던 소년 시절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그리워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소년을 향해 감동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몇 살이지?” "열 네살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니?"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신다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수줍어하면서도 다부지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네가 알아두어야 할 게 있단다." "나는 마음내키는 대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지금은 밀라노에 머물고 있지만 언제 어디로 떠나게 될지 모르지." "네가 나를 따라다니게 되면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하게 될 텐더, 그래도 내 제자가 되겠느냐?" 프란체스코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겠습니다." “좋다, 프란체스코. 넌 오늘부터 내 제자가 되는 거다. 알겠느냐?” 이렇게 해서 프란체스코는 레오나르도의 또 한 명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프란체스코는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까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프랑스 군과 이탈리아 연합군이 맞붙는 바람에 밀라노는 또다시 전쟁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말했습니다. "밀라노는 이제 전쟁으로 난장판이 되어 버렸네. 이 곳은 더 이상 우리 미술가들이 살 곳이 못 되네.그래서 나는 여기를 떠나려고 하는데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저희들은 선생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로마로 가려고 한다네.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는 로렌초 데 메디치 씨의 아드님이신데, 그 교황의 동생인 네무르공께서 로마로 오라는 편지를 보내 주셨네 . 지금 로마에는 이탈리아의 이름난 화가들이 모여 서로의 실력을 겨루고 있다는군." "선생님, 정말 좋은 기회로군요. 우리 모두 곧 로마로 떠나도록해요." 이 때 레오나르도는 61세의 백발 노인이었습니다. 로마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웅장한 예술의 도시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제자들과 함께 산피에트로 대성당 앞을 지나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했다더군." "대단한 규모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라파엘로라는 젊은 화가가 미켈란젤로보다 더 인기가 높다고 하던데요." "과연! 내가 처음 그 젊은이를 보았을 때 훌륭한 화가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더군." 사라이는 레오나르도의 명성이 로마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교황은 로렌초씨의 아드님이시까 선생님께 좋은 일을 주실 겁니다. 꼭 실력을 발휘하셔서 이 곳 로마에서도 선생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사라이와 프란체스코를 데리고 궁전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성당 안에 들어선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가 40미터에 폭이 14미터나 되는 넓은 천장과 사방의 벽이 온통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장화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쳐흘렀습니다. 천지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이야기, 최후의 심판 등 아홉 가지 장면으로 구성된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최대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티칸 궁전 안에는 라파엘로의 그림들로만 꾸며진 방이 있을 정도로 라파엘로는 교황의 사랑을 무척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라파엘로는 성체의 논의, 아테네 학당, 파르나소스등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그림들 이탈리아 전역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사라이는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느낌을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라파엘로의 그림은 어렵지 않게 그려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는 아주 영리한 사람일세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나의 기법도 엿보이고, 또한 미켈란젤로의 기법도 들어 있다네. 즉, 나와 미켈란젤로의 가장 우수한 면만을 골라 그 위에 자신의 기법을 첨가하고 있단 말일세." "우리는 자기만의 기법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우수한 기법을 재빨리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군 그래." 그 당시 라파엘로는 30세의 젊은이였습니다. 라파엘로는 재능이 뛰어난데다가 예절 바르고 겸손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러 아무도 그것을 넘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연히 교황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라파델로가 새로 그려낸 마돈나를 보며 감탄했고 그 솜씨를 극찬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군.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솜씨야." 마돈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라이는 화가 나서 프란체스코 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따위 마돈나라는 그림 때문에 사람들이 저리들 야단이란 말인가? 우리 선생님이 그린 모나리자에 비하면 아무것 도 아닌 그림을 가지고서." “물론이지요. 선생님의 모나리자는 그 누구의 작품과도 견줄 수가 없지요 . 그런데 왜 이곳 사람들은 선생님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까요? 로마가 예술의 도시라고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보니 머리가 빈 사람들만이 사는 모양입니다." 사라이는 흥분하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습니다. "교황이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대하기 때문이야. 실력도 없으면서 재주로만 쉽게 그려 버리는 애송이 녀석만 추켜 세우니 사람들이 안 그러겠나? 우리 선생님의 그림에는 아무도 따르지 못하는 생명력과 깊이가 있는데 그것을 몰라주다니." 어느 가을, 뜰을 거닐다 돌아온 레오나르도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날씨가 무척 좋구나. 우리 모두 교외로 소풍을 가는 것이 어떨까? 조로아스트로, 자네는 안에 들어가서 새장을 가지고 나오게." 제자들은 새장을 들고 가자는 스승의 말을 의아하게 여기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넓은 들판에 이르자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을 잔디밭에 빙 둘러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새장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꺼내어 하늘 높이 날려 보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들을 자유롭게 해 주마. 힘껏 날아라. 사람도 저 새들처럼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네들은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나?” “선생님,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꿈입니다. 어떻게 날개도 없는 사람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단 달입니까?" 사라이는 스승의 표정을 살피며 말하였습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지만 그 대신 무한한 지혜가 있지 않은가? 우리의 지혜와 끊임없는 노력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지. 그렇지 않은가?" 레오나르도는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백발의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비행기 발명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교황이 레오나르도를 불렀습니다. "그대가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자네는 화가이지 공상가가 아니지 않은가? 화가면 화가답게 그림이나 그리게." "죄송함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쓸데없는 일이란 결코 없는 법이지요." 레오나르도의 말에 교황은 못마땅한 듯 획 돌아앉았습니다. 1516년 어느 날, 64세의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곳 로마에 온 지도 어느덧 3년이 되는군. 그런데 내가 이 곳에서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네. 사라이, 그래서 나는 이 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네 ." 사라이는 스승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습니다. "로마를 떠나고 싶어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준다니 정말 고맙네. 그 동안 나를 이곳으로 초청해 준 네무르공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두 천재가 이 로마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다네." "교황이나 로마의 시민들은 나보다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더 알아주지 않나. 이제 내 시대는 지난 것 같네. 그러니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지." 레오나르도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 있는 사라이는 이루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가실 만한 곳이." 당시 이탈리아는 어디를 가든 안정된 곳이 없었습니다. 밀라노는 매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피렌체 역시 전쟁으로 형편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메디치 집안이 쇠퇴한 이후로는 그렇게 번영하던 예술과 학문이 모두 사라지 버렸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사라이를 안심시키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를 아예 떠날 생각이라네." “네? 이탈리아를 영영 떠나서 다른 나라로 가신다고요?" 깜짝 놀란 사라이와 프란체스코는 동시에 외치듯이 말했습니다. “조국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걸세.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난 단지 나를 알아주고 나의 그림을 이해해 주는 곳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일하고 싶다네. 그것이 바로 조국을 위하는 길이기도하지." "제발 그 결심만은 굽혀 주십시오, 선생님. 저희들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선생님이 조국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제자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레오나르도의 결심은 흔들리지않았습니다. "그럼, 어디로가실 건가요?" "프랑스로 가려 한다네. 작년에 왕이 되신 프랑수아 1세께서 나를 부르셨거든. 아마도 이탈리아의 학문과 예술을 받아 들여서 프랑스 문화를 꽃피우고 싶은 생각에서겠지." 레오나르도는 말을 마친 후 사라이에게 물었습니다. "사라이, 나를 따라갈 생각은 없는가?" 사라이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입니다." "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는 28년 동안이나 나를 돌보아 주지 않았는가?" "선생님, 저는 이제 너무 늙었습니다. 붓놀림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몸도 약해져서 프랑스까지는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사라이의 눈물 어린 얼굴을 바라보면서 레오나르도는 더욱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습니다. "자네도 이젠 늙었나 보군. 난 아직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의 자네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때 자넨 청년 미술가로서 기운이 넘쳤었지.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렇게 변한 자네를 보니 정말 안타깝군. 그럼 이젠 어찌할 생각인가?" "고향으로 돌아가야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가족들은 제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더군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사라이는 스승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슬픔이 복받쳐 올라 소리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조로아스트로도 역시 스승을 보낼 수 없다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번에는 프란체스코를 향해 물었습니다. “프란체스코,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저는 아직 젊으니까 선생님을 따라 프랑스로 가겠습니다. 부디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선생님.” 며칠 후에 레오나르도와 프란체스코는 프랑스를 향해, 사라이와 조로아스트로는 밀라노를 향해 각각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사라이, 잘 가게. 그 동안 고마웠네. 조로아스트로, 자네도 잘 가게나.” 레오나르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애써 눈물을 삼키며 말을 몰았습니다. '예전에는 기품이 있고 건강하셨는데, 이젠 바람이 조금만 차도 기침을 하시며 허리를 제대로 못 펴시는구나. 앞으로 누가 선생님의 건강을 보살펴 드릴까? 이젠 영영 먼 길을 떠나시는구나.' 사라이도 멀어져 가는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 날 만에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 지역인 알프스의 몽스니 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이젠 눈 덮인 알프스를 넘어가야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고갯마루에 올랐습니다. 멀리 고국의 강과 들이 펼쳐져 있는 평화로운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그 정경을 보고 있자니 레오나르도의 가슴은 슬픔으로 미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번에 고국을 떠나면 살아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조국 이탈리아여! 잘 있거라. 부디 영원토록 예술을 사랑하라!' “선생님, 이 고개만 넘으면 이젠 정든 조국과도 영영 이별이로군요." 이렇게 말하는 프란체스코의 눈에서도 어느 새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산과 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레오나르도와 프란체스코는, 이윽고 말머리를 돌려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1517년 5월이 되어서야 레오나르도와 프란체스코는 프랑수아 1세가 사는 앙부아즈 성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예상대로 레오나르도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이제부터는 우리 프랑스를 위해 당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학문과 예술을 연구해 주시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시오. 곧바로 보내 주겠소." 프랑수아 1세는 20세를 갓 넘은 젊은이였지만 프랑스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왕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궁정 화가로 일하면서 운하 설계와 궁정 행사의 지휘까지도 맡아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띄게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레오나르도가 프란체스코를 부르더니 몹시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 내가 왜 이러지? 손발이 떨려 붓을 잡을 수가 없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큰일이야." "그 동안 너무 과로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일만 하지 마시고 쉬기도 하시고,말을 타고 들길도 달려 보세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이젠 말탈 기운조차 없네그려." 그 후 레오나르도는 온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마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 동안 연구해 온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리학, 역학, 광학, 천문학, 지리학, 해부학, 기계 공학, 식물학, 수리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손을 댄 그의 연구 자료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제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창 밖만 내다볼 뿐 전혀 말이 없었으며, 바깥 출입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프랑수아 1세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 계신가?” "지금 서재에 계십니다만, 요즘 선생님의 건강이 매우 안 좋으셔서."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어서 선생님 방으로 안내하라." 레오나르도는 왕의 방문에 당황해서 인사를 하려고 비틀거리며 일어섰습니다. 왕은 곧 쓰러져 버릴 듯 서 있는 레오나르도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히며 말했습니다. "불편하신데 그대로 앉아계시오. 당신이 편찮으시다기에 병문안을 온 것이오." 왕은 레오나르도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순 간 레오나르도의 서재 벽에 걸려 있는 여인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심히 초상화를 바라보던 왕이 레오나르도에게 물었습니다. "음, 저 초상화는 처음 보는 것이로군요. 누구의 작품입니까?" "10년 전에 제가 그린 것인데, 아직까지 끝을 내지 못한 미완성 작품이지요." "오! 그렇소? 정말 훌륭한 작품이군요. 그런데 모델을 한 여인은 누구입니까? 대단한 미인이 로군요." "정말 미인이었죠. 피렌체 사람 조콘다의 아내였는데, 이름은 엘리자베타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이탈리아에 살고 있겠군요?" "아닙니다. 이 여인은 그림을 완성하기 전에 남편과 여행을 떠났다가 병을 얻어 여행지에서 죽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몹시 실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애석할 수가. 그래서 이 초상화가 미완성인 채로 당신에게 있는 거로군요." 왕은 못내 안타까워 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이틀날 아침,왕궁에서 한 신하가 레오나르도를 찾아왔습니다. “폐하께서는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퍽 인상 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폐하께서는 그 초상화를 사고 싶으시다며 선생님 의향을 알아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값은 4만 프랑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신하는 마음을 졸이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레오나르도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한참 만에야 레오나르도는 초상화속의 조콘다 부인을 바라 보며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이 초상화는 팔고 싶지않습니다. 폐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레오나르도의 얼굴에는 슬픔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왕은 자주 레오나르도를 찾아와서 모나리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또 다시 모나리자 를 팔라고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의 끈질긴 요구에 견디다 못한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저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발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모나리자를 제 곁에 두게 해 주십시오. 제가 죽고 난 뒤에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말에 왕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짐은 그대가 오래오래 살면서 예술을 발전시켜 나가길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소 .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더 이상 모나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레오나르도는 죽음이 자신에게 성큼 다가온 것을 느끼고 유언장을 만들었습니다. 모나리자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자 프란체스코에게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 3일 후, 레오나르도는 자리에 누운 채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519년 5월 2일 아침,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외롭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결에는 지켜 주는 가족도 없이 26세의 프란체스코만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레오나르도로부터 물려받은 여러 유품 중에서 스승이 적어 놓은 일기를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일기에는 '지혜는 경험의 시녀이다.' 라는 구질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같은 신념이 만능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군대 과학의 선구자로, 또한 미술의 대가로 크게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수아 1세는 곧바로 레오나르도의 거처로 달려왔습니다. 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레오나르도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레오나르도의 주검이 있는 침대 곁에서 무름을 꿇고 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왕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왕은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이 때 벽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를 무심코 바라보던 왕은 깜짝 놀라서 프란체스코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모나리자를 보아 왔지만 오늘 같은 느낌은 처음이야. 슬픔에 잠긴 저 얼굴! 언제나 기쁜 듯이 미소를 짓던 조콘다 부인이었는데 오늘은 레오나르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라도 하듯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프란체스코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나리자는 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신비한 그림이랍니다. 폐하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렇게 느끼지요." 돌아가는 왕을 배웅하고 다시 모나리자앞에 선 프란체스코는 조콘다 부인이 듣기라도 하듯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조콘다 부인, 당신은 참으로 신비하군요. 행복한 사람에게는 기쁨을 느끼게 하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하니 말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갖고 있는 당신의 얼굴, 영원한 수수께끼의 미소, 당신의 모습은 스승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을 겁니다." 프란체스코가 말을 마치자 조콘다 부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명작 모나리자는 지금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모나리자는 신비한 미소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름을 빛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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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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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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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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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이 아이가 바로 훗날 ‘불꽃 같은 정열의 화가’로 칭송받게 되는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이 마을의 목사인 아버지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인 반면에 어머니는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런 상반된 성격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집안은 늘 부드럽고 명랑한 분위기로 가득 찼습니다. 빈센트가 태어나기 꼭 한 해 전, 이 집에서는 빈센트의 형이 태어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형은 태어난 지 몇 주일도 채 안 되어 죽었기 때문에, 그다음에 태어난 빈센트가 이 집의 큰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빈센트의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셋이 태어났습니다. 그중에서 빈센트를 평생 동안 돌보아 주고, 그의 예술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해 주었던 동생 테오는 빈센트보다 4살 아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빈센트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습니다. 빈센트가 8살 때인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마을 앞에 펼쳐진 잔디밭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저녁 하늘에 새 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멈춰 서서 외쳤습니다. “얘들아, 저길 좀 봐. 빨간 노을이 참 예쁘다.” 벌판의 아득한 저쪽 끝에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저녁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놀이도 잊은 채 저녁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빈센트가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야, 빨갛지 않아. 언뜻 보기에는 붉은색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노란색이야.” “뭐, 노란색이라고? 네 눈에는 저 색이 노란색으로 보이니?” 아이들은 이상한 눈으로 빈센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아니야. 노을은 붉은색이야.” “.......” 빈센트는 더 이상 아이들과 상대하지 않고 노을이 지는 풍경만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빈센트를 홀로 남겨 둔 채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빈센트의 고집스러움은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혼자서 놀다 보니 말썽을 피우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이거 야단났는걸. 이번에도 저 목사님 댁 아들 녀석 짓이겠지. 새를 잡는 것도 좋지만 애써 가꾸어 놓은 남의 밭을 엉망진창으로 짓밟아 놓다니.” 빈센트가 거의 매일 밭을 휩쓸고 다니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농부들이 야단을 쳐도 빈센트는 고분고분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만 아니라면 혼을 내주련만...” 마을 사람들은 빈센트의 심술궂은 장난에 골머리를 앓으며 쑥덕거렸습니다. 빈센트는 날이 갈수록 성질이 거칠어졌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누가 뭐래도 하려 들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걸핏하면 버럭 화를 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빈센트는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빠, 뭐 하는 거야?” 곁에서 놀던 여동생 안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습니다. 빈센트는 귀찮은 듯 안나를 휙 떼밀어 버렸습니다. “저리 가란 말야!” 안나가 울음을 터뜨리자 빈센트는 안나가 들고 있던 인형을 빼앗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씩씩대며 발로 짓밟아 버렸습니다. 잠시 후 빈센트는 안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화를 내고 나면 빈센트는 금세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했습니다. ‘난 왜 이렇게 화를 잘 내는 걸까? 앞으로는 절대로 화를 내지 말자.’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뿐 빈센트의 성격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기숙 학교 생활. 빈센트의 이런 성격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빈센트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함부로 대들어 학교 전체에서 미움을 받는 아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좀 나아지리라고 기대를 했던 어머니와 아버지도 비로소 빈센트의 성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학교에 보냈다가는 학교에서도 귀찮아할 테고, 또 저 아이를 위해서도 결코 좋지 않을 거야.” 이렇게 결론을 내린 아버지는 가정교사에게 빈센트의 교육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교사도 오래 버티지 못하여 짧은 기간 동안 선생님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빈센트의 행동을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했습니다. “당분간 빈센트를 기숙 학교에 보내야겠어요. 엄한 규율 속에서 지내다 보면 성격도 바뀌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아무래도 그 길만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소.” 빈센트는 좀 망설여졌으나 아버지 어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접하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조금 떨어진 기숙 학교에 입학한 빈센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착실한 아이가 되어야지.’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빈센트는 기숙사의 규칙에 맞추어 생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숙 학교에 입학한 후 빈센트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누가 묻는 말에도 똑똑하고 분명한 말투로 대답했고 예전처럼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빈센트는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가 도저히 참아 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 일은 바로 친구들이 자기를 향하여 수군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저 녀석은 좀 이상해!” “그러게 말이야. 촌뜨기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학교에 온 후 빈센트는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친절하게 말을 건네 보기도 하고 친구들이 묻는 말에는 애써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빈센트와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이 왜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애를 쓰는데도 친구들은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차츰 빈센트의 말투와 태도는 다시 예전처럼 거칠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빈센트는 더 이상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빈센트는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닫아 버리는 쪽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혼자가 된 빈센트는 차츰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으며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빈센트는 학교 공부에도 흥미를 잃고 오직 책 읽기에만 몰두했습니다. 한편 빈센트는 그림 그리는 일을 또 하나의 취미로 삼았습니다. 학교 주변의 들판으로 나가 스케치북에 풍경을 담고 있노라면 외톨이가 된 편이 훨씬 다행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책과 그림과 혼자서 생각에 잠기는 일, 그것이 기숙 학교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아무런 아쉬움과 그리움도 남기지 않은 채 어느덧 빈센트는 기숙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살이 되던 해 봄, 가족들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행동이 거칠었습니다. 속으로는 가족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은데도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혼자만 지내려는 빈센트를 염려했지만, 동생 테오만은 빈센트의 속마음을 알아주며 따뜻한 눈길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해 여름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들판을 쏘다니다 집으로 돌아온 빈센트에게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빈센트가 이젠 청년이 다 되었구나. 반갑다.” 빈센트를 반기는 사람은 뜻밖에도 삼촌이었습니다. 삼촌은 빈센트의 성격이나 말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빈센트는 어릴 적부터 삼촌을 잘 따랐습니다. “삼촌이 헤이그의 구필 상점에 네가 일할 만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어머니가 빈센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좋아요.” 빈센트는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답답한 목사관을 떠나 혼자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좋아서였습니다. 구필 상점은 꽤 크고 장사가 잘되는 화랑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곳에서 손님에게 그림을 소개하고 파는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게 되면서 빈센트의 생각과 눈은 크게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는 구필 상점에서의 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누구하고도 말다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상점 사람들도 모두 빈센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림을 사러 온 손님들과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림을 볼 줄 모르시는군요. 이 그림보다는 밀레나 렘브란트의 것이 훌륭합니다.” 빈센트는 이런 식으로 손님이 원하는 그림 대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권하려다가 종종 말다툼을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구필 상점의 주인은 빈센트의 이런 점을 오히려 진지한 면이라고 여겨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1872년 여름, 동생 테오가 헤이그에 있는 빈센트를 찾아왔습니다. 3년 만에 만난 테오는 몰라보게 자라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얼굴은 조용하고 겸손해 보이면서도 눈빛에는 총명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테오가 찾아온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빈센트와 테오는 함께 교외를 산책하기로 하였습니다. 형제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테오는 형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었고, 빈센트는 자신에게 그런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테오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 빈센트는 동생에게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테오, 나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고 싶어.” “목사가 되겠다고?” 테오는 빈센트의 생각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빈센트의 조급한 성격이나 거친 행동, 형식에 매이기 싫어하는 습관이 목사직에는 맞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빈센트는 목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교육 과정도 전혀 밟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형이 그림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데.” 테오는 빈센트가 보낸 편지에 그려져 있던 그림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가?” “응. 형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더구나 형은 벌써 많은 화가들을 만났고, 그림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잖아?” 빈센트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중학교를 졸업한 테오는 브뤼셀의 구필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빈센트와 테오는 이때부터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헤이그의 구필 상점에서 근무한 지 4년 만에 빈센트는 영국에 있는 구필 상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런던으로 가는 길에 그는 잠시 테오에게 들렀습니다. “곧 런던 생활에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형은 더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거야.” 테오는 이렇게 말하며 불안해하는 빈센트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첫사랑이 남긴 상처. 테오의 말대로 런던은 곧 빈센트에게 친숙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크고 번화했을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친절하여 빈센트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었습니다. 빈센트의 일은 헤이그 지점에 있을 때보다 좀 더 한가로웠습니다. 빈센트는 목사의 미망인과 두 딸이 사는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는 밝고 다정한 성격을 지닌 아슐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빈센트는 이 집 식구들과 친해지면서 점차 아슐라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빈센트로서는 처음으로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테오에게 보냈습니다.' 테오, 내 하숙집에 너를 초대하고 싶구나. 나는 지금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단다. 주인은 친절하고 또 아름다운 여인이 곁에 있으니 정말 기분이 좋다. 이런 하숙집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았어.' 아슐라를 좋아하는 빈센트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슐라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은 빈센트에게 아름답게 비추어졌고, 낯선 사람들도 모두 친구처럼 여겨졌습니다. 빈센트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드디어 아슐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오는 빈센트의 발걸음이 무척 바빴습니다. 결심을 굳히고 나자 한시라도 빨리 고백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아슐라와 단둘이 마주 앉게 된 빈센트는, 갑자기 아슐라에게 외치듯이 말했습니다. “아슐라,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아슐라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결혼이라고요? 당신하고 제가요? 제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네?” 빈센트는 아슐라의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듣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구필 상점으로 향하는 빈센트의 발걸음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날과 마찬가지였지만, 빈센트에게는 이제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빈센트는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으며 신경은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슐라를 다시 한번 설득시켜서 결혼 승낙을 받아 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방에서 뛰쳐나갔습니다. 마침 아슐라가 뜰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아슐라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몸을 세차게 흔들며 외쳤습니다. “아슐라! 당신이 사랑할 사람은 바로 나 빈센트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아슐라는 빈센트의 거친 행동에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그녀의 어머니가 뛰쳐나왔습니다. “고흐 씨, 다른 하숙으로 옮겨 주셔야겠군요.” 하숙집 주인의 싸늘한 표정은 빈센트를 한층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빈센트는 곧장 가방을 챙겨 들고 그 아늑한 추억의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로 빈센트는 점점 말이 없어졌으며, 일이 끝나면 꼼짝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테오에게 열심히 보내던 편지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또한 구필 상점의 일도 엉망으로 처리했습니다. 손님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손님과 소리 높여 싸우는 일이 생겼습니다. 빈센트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을 들은 삼촌은 빈센트의 일자리를 파리 지점의 구필 상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화려함도 빈센트가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는 못했습니다. 빈센트는 어느 귀부인 손님과 말다툼을 벌인 일로 파리의 상점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성직자를 꿈꾸며. 파리에서 있을 곳이 없게 되자, 빈센트 반 고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흐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무렵 고흐네 가족은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몇 킬로미터쯤 떨어진 에텐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에텐 읍내 교회로 발령이 났던 것입니다. 고흐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 나도 아버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새로운 결심이 서자 고흐는 오로지 그 생각에만 빠져들었습니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설사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계속해서 밀고 나가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고흐는 정식으로 목사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전도사가 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의 전도사 양성소를 찾아갔습니다. 3개월간의 수업을 받으면 곧장 전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당장 전도사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이곳에서도 말썽을 일으켜 자격증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났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흐의 생각을 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빈센트, 너의 생각을 한번 솔직히 털어놓아 보거라.” “아버지, 전 벨기에로 갈 생각이에요. 그곳의 탄광에 가서 광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고흐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고흐의 성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비록 정식 전도사는 아니었지만 고흐는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와 프랑스 접경지대에 위치한 보리나주는, 갈색 연기가 구름처럼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는 탄광 마을이었습니다. 고흐가 마을을 둘러보고 있을 때 갱에서 광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늦은 오후의 희미한 햇빛에도 눈이 부신 지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핏기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드니라는 부인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었습니다. 보리나주에서의 첫날 밤, 고흐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낮에 보았던 광부들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피로에 지치고 병색이 짙은 얼굴들... 고흐는 낮에 잠깐 짬을 내어 광부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글을 읽을 줄 모르지만 하나같이 소박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이곳에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따뜻한 사랑을 모두 쏟아붓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고흐는 무릎을 꿇고 드니의 집 허술한 방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방에서 추위를 참아 가면서 드린 예배였지만, 고흐에게는 아주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고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에는 고흐의 이런 헌신적인 행동을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흐라는 사람은 머리가 약간 돈 것 같아. 왜 이런 곳에 와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몰라.” “아마,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걸.” 하지만 이렇게 빈정거리던 사람들도 어느덧 고흐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고흐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람 사는 모습일 거야.” 고흐는 마을 사람들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갱 안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들어가 본 갱 안에서 고흐는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승강기를 타고 수백 미터에 이르는 깊은 땅속으로 내려갈 때에는, 이대로 죽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굴속에서 벌레처럼 구부리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이 지금까지 얼마나 거짓투성이였던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고흐는 탄광 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탄광의 좋지 못한 환경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탄광 회사 지배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벨기에 광산은 석탄을 캐기가 어려운 지역이라서 운영비가 많이 듭니다. 그런 데다가 다른 곳보다 생산성이 훨씬 뒤떨어지다 보니 환경을 개선하기가 더욱 어렵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고흐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 곳을 물러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은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불기운조차 없는 오두막집에서 덮을 것과 입을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겨울을 지내다 보니 폐렴과 폐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예배 시간에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고흐는 한 집 한 집 찾아다니며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문할 때마다 우선 병자부터 치료를 해 주다 보니 예배는 항상 뒷전이었습니다. 고흐는 모든 고통을 참아 내면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겨우내 고흐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고마워하던 사람들은 다시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고흐에게도 새롭게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고흐는 전도사를 감독하는 전도 위원회로부터 전도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광부들과 함께 탄광 사무소에 찾아가서 부당한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고흐는 충격과 허탈감으로 그대로 병이 나 버렸고, 오랫동안 심한 열병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늦은 가을의 어느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모처럼 기분이 밝아진 고흐는 마을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탄광 앞을 막 지나칠 때, 광부 한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무언지 모를 아주 짜릿한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흐는 호주머니에서 얼른 연필과 종이를 꺼내 그 광부의 모습을 스케치했습니다. 드니 부인의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방금 스케치해 온 것을 깨끗한 종이에 옮겨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서 손이 떨렸지만, 활기가 생겼으며 샘솟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부터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매일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일터로 나가는 광부들의 모습, 탄광 뒤쪽에서 사금 알갱이를 캐내는 여인들, 흙바닥에서 뒹구는 아이들... 그는 보리나주 사람들을 그리려고 하루 종일 연필과 종이를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습작한 것들이 쌓여 가자,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동생 테오였습니다. 테오는 겁먹은 얼굴로 고흐를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아니, 너는 테오로구나!” 고흐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먹는 것도 변변치 못한 데다가 그림을 그리는 데 정신을 몰두하여 기력이 쇠한 것이었습니다. 고흐는 앙상한 몸을 일으키려다가 쥐고 있던 목탄마저 땅에 떨어뜨린 채 주저앉았습니다. 테오는 고흐의 수척한 얼굴을 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형, 날 용서해 줘요. 난 몰랐어. 형이 이런 굴 같은 곳에서 이토록 고생을 하고 살 줄은...” “아니야. 이건 네 탓이 아니야. 네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 너는 내게 할 만큼 해 주었잖아.” 고흐는 다정하게 테오의 손을 잡으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 테오의 간호로 기운을 회복한 고흐는 밤늦게까지 테오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3살이 된 테오는 그 동안 구필 화랑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형이 여태껏 그린 그림들을 좀 보고 싶어요.” 테오는 창문틀에 세워진 스케치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고흐는 테이블에서 그림들을 꺼내 왔습니다. 고흐가 한 장 한 장 넘겨주는 그림을 보며, 테오는 이제부터 형이 그림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게 되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형, 앞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형의 진정한 길인 것 같아요. 나는 구필 상점에서 제일 많은 월급을 받는 점원이 되었어요. 내가 형을 뒷바라지할 테니 형은 이제부터 그림만을 위해서 사세요.” 고흐는 갑자기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래! 맞았어! 그림을 그리는 거야!” 고흐는 테오가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되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해 10월, 고흐는 탄광 마을 보리나주를 떠났습니다. 자기의 그림을 이해해 줄 만한 화가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흐는 먼저 벨기에의 브뤼셀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미술 전시회를 찾아다녔습니다. 미술관에는 당시의 유명한 화가였던 렘브란트와 브뢰겔의 그림이 자주 전시되었습니다. 고흐는 온종일 이러한 화가들의 작품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후 고흐는 동생의 소개로 네덜란드 출신의 라파르트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라파르트는 고흐의 성격을 너그럽게 받아 주면서 고흐에게 그림의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흐는 라파르트를 통해서 사귀게 된 브뤼셀의 화가들에게서 여러 가지 그림 기법을 익히기도 했지만, 고집스럽게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들과 자주 말다툼을 벌이곤 했습니다. 얼마 후 고흐는 브뤼셀을 떠나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외삼촌 안통 모브가 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모브는 고흐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하숙을 구해 주고 제자로 삼아 그림을 지도해 주었습니다. 모브는 고흐에게 색채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흐의 그림에 색채가 등장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헤이그에서의 생활이 한 달 남짓 지나면서부터 고흐와 모브는 말다툼이 잦아졌습니다. 고흐는 자기의 의견을 막무가내로 고집해서 모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모브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방 안이 온통 깨진 석고상 조각으로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빈센트,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모브의 말에 고흐는 신경질적으로 외쳤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을 그리고 싶어요. 보리나주의 사람들이나 탄광처럼 말이에요. 이따위 석고상은 혼이 없다고요.” “건방진 녀석! 당장 여길 나가거라.” 고흐의 거친 행동에 온화한 성격을 가진 모브 삼촌마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흐를 내쫓았습니다. 고흐는 다시 에텐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많이 늙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흐의 행동이 미덥지 않았지만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고흐가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헛간을 손질하여 작업실로 꾸며 주었습니다. 고흐는 여전히 무뚝뚝한 모습으로 새벽부터 들에 나가 저녁 늦게까지 농부들의 모습을 그려 오곤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가족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방에만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거나 온종일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네가 무엇을 시작하든 끝까지 하는 것이란다. 길을 자꾸만 바꾸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법이야.” “이젠 바꾸지 않아요. 그림은 저의 마지막 선택입니다.” 고흐는 자신의 결심을 다지려는 듯 힘주어 말했습니다. 고흐가 하루 종일 들판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아들은 정말 이상해. 거지 같은 차림에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다니까.” “누가 아니랍니까? 그림만 해도 그렇죠. 우리가 일하는 모습이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고흐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특히 사람의 표정, 손짓, 몸짓 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느라고 똑같은 그림을 몇 번씩 반복해서 그렸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 버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고흐를 지켜보며 그림도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센트, 혹시 너의 길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림에 재능이 있다면 무엇이든 한 번에 척척 그려낼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넌 그렇지 않은 것 같구나.” 고흐는 방금 그리던 스케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여전히 농부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흐는 아버지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 말씀이 맞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헛수고할 필요가 없잖니. 인생을 헛수고로 낭비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거야.” 아버지는 계속 말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고흐의 얼굴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후, 고흐는 더욱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자신에게 정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더욱 파고들었습니다. 작품이 쌓여 가자 고흐는 헤이그로 가서 자신의 그림을 평가받고 싶었습니다. 고흐는 헤이그의 모브 삼촌을 찾아갔습니다. 모브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 진실하고 생명력 있는 그림이라 평하며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유화 물감으로 작업을 해 나갈 것을 권하였습니다. 고흐는 모처럼 자신감을 얻어 에텐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흐가 잠시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집에는 사촌 누나 케이가 와 있었습니다. 케이는 남편을 잃고서 받은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왔군요, 케이. 그동안 보고 싶었어요.” “고마워, 빈센트.” 고흐는 그녀에게 긴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는 침묵으로 대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보리나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깨달은 지혜였습니다. 그는 곧 그 자리를 떠났고, 케이는 고흐의 깊은 마음을 알고 고마워했습니다. 이튿날 고흐가 그림 도구를 들고 나가려는데 케이가 함께 가자며 따라나섰습니다. “머릿속을 좀 정리하고 싶어. 네 그림도 보고 싶고...” 케이가 자기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고흐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고흐의 그림을 본 케이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빈센트, 너의 재능이 이토록 뛰어난 줄 미처 몰랐어.” 케이의 칭찬을 듣게 되자 고흐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고흐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면 몸가짐이나 말씨가 초조해지거나 격해지곤 했습니다. 때문에 방금 전까지 얌전하고 예의 바른 신사였던 고흐는, 금세 시골뜨기 촌놈처럼 행동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케이는 이런 모습을 보며 고흐가 교양 없고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케이가 온 후로 고흐는 눈에 띄게 부드럽고 상냥해졌습니다. 그는 가끔 케이와 함께 들판을 거닐 때면 이렇게 외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마침내 고흐는 이러한 충동을 더 이상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흐는 케이를 붙잡고 예전에 아슐라에게 했던 것처럼 거칠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케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와 결혼해 줘요.” 가슴이 떨린 나머지 그의 목소리는 고함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뭐라고?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케이의 얼굴은 놀라움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두 번 다시 너를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곧장 가방을 챙겨 들고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고흐와 그의 가족들 간의 사이는 한층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들은 이제 고흐를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고흐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예전부터 좋지 않았던 심장병이 재발한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고흐는 몇 번이나 케이에게 편지를 써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고흐는 직접 그녀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갈 생각으로, 동생 테오에게 여비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후 테오는 20프랑의 돈을 보내왔습니다. 누구보다도 고흐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테오는, 그 방법만이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고흐는 곧장 암스테르담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케이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만나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고흐는 비로소 케이에 대한 자기의 관심이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걷고 있는 고흐의 텅 빈 마음속에는 슬픔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흐는 이제 케이를 머릿속에서 떨쳐 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동시에 이제는 부모님의 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텐으로 돌아오자마자 고흐는 짐을 챙겨 헤이그의 모브 외삼촌에게로 갔습니다. 모브는 고흐의 재능을 인정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고흐도 열성적인 태도를 보이며 모브의 말을 잘 따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 생활에도 싫증을 느낀 고흐는, 다시 에텐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사이 고흐의 가족은 누에넨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갔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이곳 마을 사람들은 대개 농사일이나 천을 짜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누에넨에 오자마자 예전처럼 그림에만 열중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가족들과는 거의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습니다. 가족들도 그런 고흐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고흐를 간섭하는 일은 언제나 역효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해 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고흐는 집 안에 틀어박혀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여동생이 고흐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빠, 큰일 났어요. 엄마가 다리를 다치셨어요.” 어머니는 기차에서 내리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보리나주에서 환자를 간호한 경험이 있는 고흐는, 곧 그림을 미뤄 두고 어머니를 돌보았습니다. 무엇이든 하나에 몰두하면 깊이 빠져들고 마는 성격은, 어머니를 간호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흐는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입술이 부르트도록 병간호에만 몰두했습니다. 고흐의 극진한 간호로 어머니는 예상보다 빨리 회복되었습니다. 이 무렵 고흐는 어두운 색상을 써서 천을 짜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그렸습니다. 테오는 여러 면에서 고흐를 뒷받침해 주면서도 형의 그림이 어둡다는 점을 염려했습니다. 테오는 그림이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몇 번인가 고흐에게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고흐는 좀처럼 어두운 색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이 시기에 또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웃 마을에 사는 마르고트라는 여인으로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고독하고 불행하다는 공통점으로 마음이 통하여 금세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고흐가 일방적인 사랑을 쏟아붓고 상처를 입었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양쪽 집에 이야기를 했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마음고생을 견디다 못한 마르고트는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목숨은 건졌으나, 건강이 나빠진 마르고트는 요양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일로 크게 충격을 받은 고흐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빠 때문이야! 오빠가 아버지를 너무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아버지의 장례식 날 고흐를 향한 여동생의 울부짖음은 고흐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슬픔에 가득 찬 고흐는 장례식이 끝난 뒤 곧바로 목사관을 떠나 교회 관리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 무렵 고흐는 데 그로트라는 농부의 가족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감자를 재배해 먹고살았는데 가족 모두가 보리나주의 농부들처럼 소박하고 진실하여 고흐를 편하게 해 주었습니다. 데 그로트 가족은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감자로 만든 식사를 했습니다. 고흐는 문득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의 내 그림들은 너무나 단편적이었어. 이제부턴 누에넨의 농부들을 표현해 보자.’ 수십 차례 그림을 망치고 다시 그린 결과, 마침내 찐 감자의 냄새가 나는 듯한 소박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고흐는 처음으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등불을 받아 빛나는 얼굴들은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일을 하여 먹고살아 가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데 그로트 일가는 이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란 그림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고흐는 이 작품을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 보냈습니다. '테오, 이 그림은 여러 해에 걸쳐 완성한 거야. 이 그림에 대한 여러 사람의 솔직한 평을 듣고 싶다.' 고흐는 그림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를 걸고 테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테오의 답장을 받아 본 고흐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형의 그림에 대한 이곳 미술품 상인들의 평에 의하면, 색이 너무 지저분하며 선이 거칠다고 해요.' 오늘날 고흐의 대표적인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이 당시의 비평가들에게는 나쁜 평을 들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고흐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려고 한 최초의 작품이었습니다. 고흐는 더 이상 누에넨에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해 11월, 고흐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으로 향하였습니다. 안트베르펜에서 보게 된 루벤스의 그림은 고흐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은 밝고 화려하여 고흐에게 색채에 관한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고흐는 미술 학교에 다니면서 기본적인 미술 교육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싫증을 내고 그만두었습니다. 고흐는 안트베르펜에서도 더 이상 새로움을 접할 수 없다고 단정하여 파리로 떠날 것을 결심했습니다. 1886년 3월, 고흐는 꾀죄죄한 옷차림에 초췌한 얼굴을 하고 파리로 왔습니다. 테오는 라바트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테오는 또다시 형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코르몽의 화실에 다닐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고흐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부지런히 다니며 자신의 눈을 넓혀 갔습니다. 파리는 다양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림에 있어서는 인상주의의 새 기법이 유행 풍조로 등장했고,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모네, 고갱, 로트레크 등의 쟁쟁한 화가들이 인상주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어둡고 무거운 색채의 그림만 그리던 고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밝고 화려한 색채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빛의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는 그 대상을 보는 화가의 느낌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어느덧 고흐는 인상주의의 흐름에 맞추어 자신의 그림에도 밝은 빛을 채워 가기 시작했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화실의 동료들 사이에서 고흐는 정열적이고 뛰어난 감성과 용기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 언덕의 조망'이라는 그림들은 바로 이 무렵에 그려진 그림들입니다. 그러나 고흐는 아직도 자기 뜻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밝은 빛을!” “좀 더 분명한 빛을, 색채를!” 고흐는 스스로에게 더욱 확실한 빛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흐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파리 생활은 차츰 그를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고흐는 또다시 불안한 성격을 겉으로 드러내며 거칠게 변해 갔습니다. 고흐는 자신과 비슷한 거친 감정을 지닌 화가들과 쉽게 친해졌고 또 쉽게 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 만난 고갱과는 관계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고갱은 몇 가지 면에서 고흐와 닮은 점이 있었습니다. 고갱은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다녔으며, 그림을 그릴 때에도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몰두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것도 유별나게 쌀쌀맞고 거만하여 자기보다 못한 화가는 서슴지 않고 경멸했습니다. 이런 고갱이었지만 고흐와는 비교적 잘 지냈습니다.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센 편이라서 그림에 관해 의견이 맞지 않으면 큰 소리로 싸우곤 했습니다. 고흐는 세잔과도 자주 만났습니다. 세잔은 늘, “나는 파리가 지겨워. 이젠 강렬한 햇빛과 색채를 그리고 싶어.”라고 말하곤 했는데, 고흐도 마음속으로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차츰 파리가 싫어지면서 보리나주를 떠올리거나 누에넨의 전원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가 흙을 그리워하면서 애타는 심정으로 그린 그림은 '해바라기'였습니다. ‘나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겠다. 흙과 하늘, 밝은 태양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겠다.’ 고흐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싹트고 있을 때, 그 결심을 서두르게 해 준 계기가 있었습니다. 테오가 고흐의 미술 전람회를 열어 주었는데 그림이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흐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파리에 머물 이유가 없다.’ 어느 날, 동료 화가 로트레크는 고흐에게 아를로 갈 것을 권했습니다. 아를은 프랑스의 남부 지방으로, 드넓은 포도밭과 짙푸른 녹음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황금 덩어리와 같은 태양이 모든 생명에 힘을 더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마침내 고흐는 2년여의 파리 생활을 끝내고 아를로 떠났습니다. 아를의 태양. 고흐가 아를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자 아를은 금세 초록빛으로 가득 찼습니다. 짧은 봄이 지나고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산과 들에는 온갖 풀과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 위로 눈 부신 태양빛이 쏟아져 내려 마치 생명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고흐는 아를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습니다. 파리에서 느꼈던 실망을 금세 잊고 다시 의욕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고흐는 잠시도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순간의 풍경을 그려 놓지 않으면 영원히 놓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친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허름한 밀짚모자를 쓰고 찢어진 셔츠를 걸친 고흐는, 꿀벌이 꿀을 찾아 헤매듯이 아를의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복숭아나무', '아를의 도개교', '아를의 경치'는 이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서, 모두 밝고 생기에 차 있는 그림들입니다. 한여름이 되었습니다. 매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태양이 이글거렸습니다. 머리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뜨거운 볕이 몸에 해로웠지만, 고흐는 아랑곳하지 않고 햇볕 바로 아래에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무렵 고흐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모델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에 관하여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돈이 떨어지면 몇 개의 감자만으로 허기를 채우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배고픔 따위는 잊은 채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리려고 하는 풍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이런 고흐의 모습은 마치 미치광이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고흐를 놀려댔고, 어른들은 적의와 비웃음으로 대했습니다. 한번은 고흐가 묵고 있는 집의 주인이 그의 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렇게 그림만 자꾸 그려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러다간 온 방이 그림으로 가득 채워지겠군요.” 고흐의 방은 벽은 물론 천장까지 온통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고흐는 그 집을 나와 마을에 작은 집 한 채를 빌렸습니다. 고흐는 새로 빌린 집의 담벽을 모두 노란 페인트로 칠하고 내부는 흰색으로 통일시켰습니다. 그래 놓고 보니 그 집이 마음에 아주 쏙 들었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노란 집’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 '노란 집', '밤의 카페', '돈 강의 달밤' 등의 작품은 모두 이 시기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노란 집에서 마음에 맞는 화가와 함께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를 한 통 써 보냈습니다. 고갱을 설득해서 아를로 오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고갱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흐는 고갱의 소식을 듣고도 그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흐는 직접 고갱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고갱, 어서 빨리 아를로 오기 바라오. 서로 힘을 북돋워 주면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삽시다.' 외톨이로 살아온 고흐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더욱 그리움이 간절해졌습니다. 고흐는 매일 집 안을 정리하며 친구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오늘도 고갱은 오지 않는구나.’ 편지를 보내고 나서 고갱을 기다리는 동안 고흐는 견딜 수 없이 외로웠습니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밤에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밤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밀짚모자의 차양에 촛불을 매달아 주변을 밝혔습니다. 이런 해괴한 행동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더욱더 고흐를 미치광이로 취급했습니다. 마침내 고흐는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말았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두통에 위장병까지 겹쳤습니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마저도 뚝 끊었습니다. ‘아무래도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이 든 테오는 고갱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서둘러 고흐 형님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이 무렵 고갱도 브르타뉴에서의 생활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당장 테오에게 차비를 얻어서 아를로 떠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밤새 그림을 그린 고흐가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흐, 아직도 자고 있나? 고갱이 왔네.” 고흐는 이 소리를 듣고 단숨에 달려 나와 고갱을 끌어안으며 기뻐했습니다. 고갱이 온 뒤부터 고흐는 다시 활기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무렵에 그려진 정물화나 실내를 그린 그림들은 온화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고흐의 방'이나 '고흐의 의자'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그림들입니다. 그러나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게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각자 사고방식이 너무나 다른 데다가 서로 양보할 줄 모르는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흐는 방 안을 지저분하게 해 놓고 그림을 그렸지만, 깔끔한 성격의 고갱은 주변이 정돈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를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런 사소한 일들로 인해 자주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또한 고갱은 고흐의 그림에 대해서 자주 비난했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그림을 그려서 뭘 해? 고흐, 자네는 좀 더 꾸밈없는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해.” 자존심이 상한 고흐는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습니다. 마침내 고갱이 자신을 망치기 위해 찾아온 악마와도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 검은색을 칠해 고갱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곤 했으며, 때로는 발작적으로 고갱에게 덤벼들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군. 여길 떠나야겠어.’ 고흐의 마음을 눈치챈 고갱은 짐을 챙겨 떠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자 고흐는 금세 온순해져서 고갱에게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진 고갱은 할 수 없이 도로 눌러앉았습니다. 그러나 곧 두 사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고갱이 고흐의 초상화를 그려 준 후 일어난 말다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미치광이가 바로 나라고?” 고흐는 고갱이 그려 준 초상화를 보며 발작을 일으켰고, 고갱 역시 자신의 그림을 비방한 고흐에게 화를 냈습니다. 한바탕 다투고 난 후 두 사람은 마을의 술집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한 고흐가 갑자기 고갱에게 술잔을 던졌습니다. 고갱이 몸을 피해 다행히 술잔은 빗나갔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고흐는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리고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고갱은 고흐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고흐,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좋지 않을 것 같네. 우린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 고흐는 이번에도 애원하면서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갱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주저앉았지만 되도록이면 고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저녁이었습니다. 고갱은 밤거리에서 면도칼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고흐를 만났습니다. 고갱이 고흐를 피하며 쏘아보자 그는 휙 돌아서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쓰러진 고흐를 발견하고 그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후의 일은 고흐 자신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불꽃 같은 정열의 화가. 고흐는 2주일 만에 퇴원을 하여 얼마 후부터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때로는 환청이나 환각이 일어나는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흐는 식당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전에 고흐를 치료했던 의사가 찾아와 고흐에게 정신 병원으로 가기를 권했습니다. “고흐 씨,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억제해 보세요. 당신은 미친 게 아닙니다. 병원에서 안정을 찾도록 노력하세요.” 고흐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의사는 생 레미 병원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생 레미 병원의 원장은 고흐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원장은 고흐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방 하나를 따로 내주어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고흐는 그 방의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이나 정원의 꽃들을 그렸습니다. 거기에서 바로 '노란 보리밭과 측백나무', '보리를 베는 사람' 같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그 무렵 동생 테오는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테오가 형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흐는 말할 수 없이 기뻐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고흐는 원장의 허락을 얻어 밖에 나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측백나무와 별과 길', '슬퍼하는 노인' 등의 작품이 이 무렵에 완성된 것들입니다. 고흐가 우울하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 날, 테오에게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고흐의 '붉은 포도원'이 400프랑에 팔렸다는 사실과 오베르에 사는 가셰라는 의사가 고흐를 돌봐 주고 싶어 한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고흐는 갑자기 희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건강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고흐는 생 레미를 떠나 오베르로 향했습니다. 이튿날 가셰를 만난 고흐는 쉽게 그와 친해졌습니다. 가셰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고흐는 가끔 가셰에게 그림을 선물했고, 가셰도 정성껏 고흐를 치료했습니다. 고흐는 다시 정상을 찾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차츰 생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테오에 대한 의무감, 자신에 대한 불안 등이 그를 지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 무렵 테오는 직장을 그만둔 터라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안감에 시달리던 고흐는 어느 날 성난 눈초리로 가셰의 집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가셰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주머니에 넣어 온 권총을 꺼내 가셰를 겨누었습니다. “고흐!” 가셰가 외치는 소리에 고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 뛰어나갔습니다. 다음 날 고흐는 보통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공동묘지 부근의 보리밭에 앉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후 고흐는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다음 날도 고흐는 보리밭으로 갔습니다. 고흐는 한동안 그림도 그리지 않은 채 태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작별을 고하듯 나직이 중얼거렸습니다. “안녕, 테오. 잘 있거라, 어린 빈센트.” 잠시 후, 보리밭을 뒤흔드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거의 한나절이 지나서 고흐는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흐의 옷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본 하숙집 주인이 가셰를 불러왔습니다. 가셰는 곧 테오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급하게 달려온 테오를 보자 고흐는 편안한 웃음을 띠며 말하였습니다. “테오, 몸조심해라. 네게는 부인과 빈센트가 있잖니?” 테오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결혼이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 같은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고흐는 힘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1890년 7월 29일, 그는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년 뒤 고흐의 동생 테오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치 고흐의 분신이었던 것처럼... 테오의 부인은 테오를 고흐의 곁에 나란히 묻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재 예술가와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었던 동생은 영원히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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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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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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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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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태어난 자매. 영국 엔브리에 있는 아름다운 목장에는 스미더라는 사람이 양을 기르며 살고 있었습니다. 스미더는 캡이라는 영리한 콜리종 개를 키웠는데, 그 개로 하여금 양들을 지키게 했습니다. 어느 겨울날, 한 소녀가 목사님과 함께 잡목이 우거진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목장에서 기르는 개 캡이 여우를 잡기 위해 놓아 둔 덫에 걸려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녀는 다칠까 봐 목사님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울부짖고 있는 캡을 덫에서 빼낸 후, 다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녀가 훗날 전쟁터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치료해 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입니다. 나이팅게일은 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한 별장에서 태어났습니다. 플로렌스의 아버지 윌리엄 나이팅게일은 전통적인 영국 귀족으로, 부인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던 중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아기를 얻자 그 곳의 지명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플로렌스에게는 플로렌스보다 한 살 위인 언니 파세노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역시 그 곳의 옛 이름인 ‘파세노프’를 따서 딸의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입니다. 두 소녀의 정식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집에서는 보통 플로렌스를 ‘플로’, 파세노프를 ‘파세’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시절, 플로렌스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잘 따랐습니다. 아버지는 두 딸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거나 자주 함께 놀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귀족이나 부자들은 가정 교사를 두어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두 딸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알맞은 가정 교사를 구하려 했으나, 그런 가정 교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플로렌스가 13세 되던 해, 아버지는 직접 딸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음악과 미술 가정 교사만 채용했습니다. 두 딸들은 아버지에게서 그리스 어, 라틴 어, 독일어, 프랑스 어, 이탈리아 어 등의 외국어와 역사, 철학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공부 시간표를 짜서 두 딸에게 주자 파세노프는 깜짝 놀라며 투덜거렸습니다. “어머, 쉴 시간이 조금도 없잖아요.” 그러나 플로렌스는 아무 말 없이 시간표를 받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딸이 시간표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파세노프는 처음 얼마 동안은 시간표에 따라 생활했지만 곧 꾀를 부리고 놀기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렌스는 마치 공부를 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시간표에 따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플로렌스는 매사에 신중하고 꼼꼼한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고, 파세노프는 어머니의 밝고 명랑한 성격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의 뜻. 플로렌스는 생각이 깊고 인정이 많은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나이팅게일 집안은 재산이 많은데다 훌륭한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꽃처럼 고운 두 딸을 둘러싼 환경은 부족한 것 없이 밝고 화려했습니다. 매일같이 손님들이 찾아와 파티가 벌어지는가 하면, 화려한 무도회에 초대를 받아 가기도 했습니다. 파세노프는 이렇게 화려한 생활을 무척 좋아한 반면에 플로렌스는 이런 생활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걸까?’ 플로렌스는 가끔씩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플로렌스는 마음이 답답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였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난 이런 생활이 전혀 즐겁지가 않아!’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밤, 플로렌스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제발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세요.” 그 때였습니다. “플로렌스!” 누군가가 속삭이듯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플로렌스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자 또다시 낮은 속삭임이 들려 왔습니다. “플로렌스, 방황하지 마라. 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도록 해라.” “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르겠습니다.” 플로렌스는 이건 분명히 하느님의 음성이라 확신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은 약한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거야.’ 플로렌스는 기쁨에 들떠서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 때가 1837년 2월 7일, 플로렌스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플로렌스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을 맡겨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해에 플로렌스가 살고 있는 마을에 유행성 감기가 돌았습니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감기 환자가 늘어만 갔습니다. 플로렌스는 날마다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간호를 해 주었습니다. 마을의 병든 사람들은 간호하는 동안 플로렌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건 참으로 즐겁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실 일도 이처럼 즐거운 일일 거야.’ 플로렌스의 마음속에는 서서히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해 봄 어느 날, 나이팅게일 가족은 유럽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플로렌스의 부모님은 성장한 딸들에게 여행을 통해 좋은 경험을 쌓게 해 주려고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세노프. 플로렌스! 너희들이 태어난 나라에 가 보고 싶지 않니?” “이탈리아요?” 파세노프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렇단다. 엄마와 아빠는 유럽 여행 중에 이탈리아에서 너희 둘을 낳았단다.” 어머니가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아이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로 가서 알프스 산을 넘으면 스위스란다. 스위스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지. 또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란다. 파세노프와 플로렌스는 이번 여행으로 산지식을 쌓아야 한다. 이것은 어른이 되기 위한 마무리 공부가 될 거야. 유럽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뒤부터 파세노프와 플로렌스는 여행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파세노프는 물감과 스케치북을 챙겼고, 플로렌스는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두기 위해 일기장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 넣었습니다. 이 곳에서 남프랑스로 간 나이팅게일 가족은 3개월 가량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두루 둘러본 후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향했습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문화적 중심지였습니다. 나이팅게일 가족은 이 곳에서 이탈리아의 발달한 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여름을 보낸 나이팅게일 가족은 다시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가서 그 곳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 파세노프와 플로렌스는 유명한 정치가, 학자, 예술가들과 사귀게 되었고, 넓은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비밀 메모’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교계에서 돋보이고 싶다는 인간적인 욕망을 이겨 내야 한다.’ 나이팅게일 가족은 영국을 떠난 지 19개월 만인 1839년 4월, 엔브리로 돌아왔습니다. 플로렌스의 어머니는 이번 여행을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딸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즈음 플로렌스의 마음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뜻있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 동안 플로렌스는 여행의 즐거움에 흠뻑 빠진데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해져서 하느님의 뜻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야 플로렌스는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플로렌스의 이런 생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념과 용기. 1842년 여름부터 플로렌스는, 자기가 살고 있는 평온하고 안정된 세계 밖에는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는 영국 사람들에게 끔찍스러운 기억을 남긴 한 해였습니다. 영국 전역에 굶주림이 닥쳐온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플로렌스는 자신의 비밀 메모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내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다.’ 그 해 가을, 플로렌스는 프리드너 목사 부부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프리드너는 라인 강변의 카이저스베르트에 있는 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볼 간호사를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플로렌스는 그 당시에는 이 이야기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843년 7월 말, 가족들과 함께 영국 부부의 리허스트 지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플로렌스는 그 곳의 가난한 농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844년 봄부터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자기의 천직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병든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맡겨준 일이라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그 해 6월, 미국의 박애주의자인 새뮤얼 그리드리 하우 박사 부부가 영국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박사가 도착한 날 밤, 플로렌스는 하우 박사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우 박사님께서는 젊은 여상이 병원이나 자선 사업 단체에서 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플로렌스 양, 지금껏 그런 일은 전례가 없습니다. 더구나 영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것이 아가씨의 천직이라고 믿고 있다면, 나는 그 길로 가도록 권하겠습니다.” 박사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하우 박사를 만난 이후 플로렌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을 아직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봄, 가장 친한 친구의 오빠인 헨리 니콜슨이 플로렌스에게 결혼을 신청해 왔습니다. 플로렌스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슬퍼하는 헨리를 보자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 해 여름, 플로렌스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를 방문했다가 할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플로렌스는 할머니의 집에 남아서 할머니를 간호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플로렌스는 정성껏 할머니를 간호했고, 그 덕분에 할머니는 간신히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플로렌스의 유모였던 게일 부인이 앓아누웠습니다. 플로렌스는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하고 게일 부인을 찾아가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하지만 게일 부인의 병은 심한 편이어서 여름이 다 가도록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게일 부인은 자신을 엔브리로 데려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게일 부인은 엔브리에 도착한 지 1주일도 되기 전에 의자에 앉아 플로렌스의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인생의 갈림길에 있던 플로렌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플로렌스가 할머니와 게일 부인을 간호한 일로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해 가을에는 이웃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플로렌스는 적극적으로 환자들을 간호하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간호사로서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그 때까지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에 필요한 것은 상냥함, 동정, 끈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환자를 간호하다 보니, 전문 지식과 기술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플로렌스는 솔즈베리 병원에 가서 간호에 대한 실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곳의 원장 파울러 박사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나이팅게일 가족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1845년 12월, 파울러 부처가 엔브리에 왔을 때 플로렌스는 자기의 계획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 일로 집안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병원은 시설이 나쁘고 불결하였으며, 의사라는 직업은 요즘처럼 존경받는 직업이 못 되었습니다. 더구나 간호사들은 더 형편없었습니다. 글씨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가난한 집의 여자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억지로 선택하는 천한 일이 바로 간호사였던 것입니다. “플로렌스, 넌 귀족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네가 간호사가 되겠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딸을 나무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솔즈베리 병원에는 가지 못했지만, 플로렌스는 자신의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플로렌스는 가족들 몰래 책을 구해다가 간호에 관해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여러 곳의 병원을 견학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플로렌스는 26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플로렌스가 결혼도 하지 않고 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아 안타까워했습니다. 얼마 후, 플로렌스는 독일의 카이저스베르트 병원에 가서 공부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 때에도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당시 카이저스베르트는 세계 최고의 병원이라는 점 때문에 부모님의 반대는 차츰 누그러졌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설득하기까지는 무려 5년이란 세월이 더 걸렸습니다. 1851년, 31세가 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부모님의 곁을 떠나 카이저스베르트로 향했습니다. 카이저스베르트 병원에서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에 관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병원은 프리드너 목사가 처음 설립한 박애 사업단으로서, 독일 외에도 동양의 여러 나라에 그 지부가 있었습니다. 이 곳에는 나이팅게일처럼 간호법을 배우러 온 간호사 지망생이 100명 가량 있었습니다. 모두들 병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카이저스베르트 병원에서 간호법을 공부한 나이팅게일은 오래지 않아 런던 병원의 간호사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도 나이팅게일의 결심을 더 이상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막지 않기로 했다. 플로, 네 소망대로 훌륭한 간호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렴.” 마침내 나이팅게일은 그토록 원하던 부모님의 허락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이팅게일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3세였습니다. 허버트로부터 온 편지. 마침내 병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했던 나이팅게일에게 오랜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853년 11월, 영국이 뜻밖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먼저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동안 터키의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항구를 탐내오던 러시아가 마침내 터키를 침공한 것입니다. 1854년 3월,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세력이 유럽까지 뻗는 것을 막기 위해 터키를 도와 러시아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 해 9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터키의 크림 반도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엿새째 되는 날, 연합군은 알마 강 유역에서 러시아 군대와 충돌하여 큰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치열하게 거듭될수록 죽는 사람과 부상병이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군대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날마다 병으로 쓰러져 가는 군인들이 이루 헤어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영국군은 크림 반도에 완전히 진격하지 못한 채 터키의 스쿠타리에 가까스로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군대는 삽시간에 환자의 집단으로 변해 버렸고, 콜레라가 계속 기승을 부려 군인들이 끊임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부상병은 농가의 처마 밑이나 짚 위에 누워 치료를 받았습니다. 손발을 절단하는 수술도 마취제 없이 그냥 이루어졌습니다. 촛불도 램프도 없어서 외과 의사들은 달빛을 이용하여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인데도 영국 본토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한 종군 기자에 의해 이런 비참한 상황이 영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종군 보도 기자인 윌리엄 하워드 러셀은 영국 병사들의 고통을 자세하게 알리고,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이 곳에 와서 부상병들의 처참한 광경을 직접 본 나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곳에는 부상병들에게 필요한 붕대는 물론이고 마취에 사용하는 모르핀도 없어서, 팔 다라를 자르는 수술이 마취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외과 의사는 등잔불이 없어 달빛 아래에서 수술을 하는 형편이다. 일부 부상병들은 간신히 준비된 배에 실려 강 건너편의 스쿠타리 병원으로 보내지지만, 그 곳 역시 침대도, 이불도 제대로 없어서 병사들은 피로 물든 담요를 그대로 덮고 있다. 프랑스 군대에는 군의관과 여자 간호사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영국은 아무런 힘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영국 국민들이여! 우리 모두 조국의 병사를 구하자! 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고 난 나이팅게일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서렸습니다. ‘드디어 하느님이 나를 부르신 거야.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스쿠타리 병원으로 가서 고통과 굶주림에 지친 가엾은 병사들을 간호해 주어야 한다.’ 나이팅게일은 곧 오랜 친구이자 국무장관인 시드니 허버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녀는 꼭 전쟁터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전쟁터에 나갈 결심을 하고 허버트에게 편지를 쓴 바로 그 날, 시드니 허버트도 나이팅게일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친애하는 나이팅게일! 가슴아픈 소식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께 부탁드립니다. 터키의 스쿠타리에 있는 영국 육군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들을 모집해 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 간호사들을 데리고 크림 반도로 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국에서 이런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이팅게일 당신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결심에 달려 있습니다. 허버트로부터. 나이팅게일은 허버트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을 알고 몹시 기뻐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허버트에게서 온 편지를 부모님께 보여 드렸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아버지는 나이팅게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플로, 스쿠타리로 가도록 하여라. 그 곳에서 영국 여자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내도록 하렴.”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어요.” 어머니와 언니 파세노프도 나이팅게일의 앞날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플로, 아무쪼록 건강해야 한다.” “플로, 너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게.” “어머니, 파세노프 언니, 정말 고마워요.” 나이팅게일은 정부로부터 터키의 영국 야전 병원 간호사단 단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단의 단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사람들 사이에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때까지 그처럼 사회적으로 높은 명예를 얻은 여성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이팅게일은 우선 함께 떠날 간호사를 모으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40명 정도를 기대했으나, 제대로 교육받은 간호사를 뽑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사람은 전부 38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다친 병사를 간호하겠다는 순수한 동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거의가 중년 부인이었습니다. 1854년 10월 21일, 나이팅게일 일행을 태운 배는 스쿠타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쿠타리 병원에서. 1854년 11월 5일, 나이팅게일 일행은 콘스탄티노플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항구는 폭이 좁고 긴 해협의 항구로, 그 동쪽 해안을 스쿠타리라고 불렀습니다. 짐을 풀고 스쿠타리 병원을 돌아본 나이팅게일 일행은, 병원의 불결한 환경을 보고는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쓰레기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듯했고, 필요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군사들의 상처난 부위에 붕대를 감으려 해도 붕대가 없었고, 더러워진 환자복을 갈아입히려 해도 갈아입힐 옷이 없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리허스트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곁에 묻어 주시오. 제발 화려한 장례식 같은 것은 하지 말고 조용히.”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한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 90세로 아름다운 일생을 마쳤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이룩해 놓은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국제 적십자사는 나이팅게일 기장을 마련해서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훌륭한 간호사를 뽑아 수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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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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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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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는 사람들. 1893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트란스발 지방의 프리토리아를 향해 달리고 있는 열차 안은 승객들로 몹시 북적거렸습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한 인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영국 변호사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머리에는 인도 사람들이 쓰는 터번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1등 칸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인도인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 보였습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차장이 지나가다가 그 인도인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인도 사람이 아니오?" "그렇습니다만." "어디, 차표를 볼까요?" 인도인은 차장에게 차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국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차장에게 말했습니다. "저 쿨리를 3등 칸으로 보내시오. 나는 냄새 나는 쿨리와 함께 앉아서 갈 수가 없소!" '쿨리'라는 말은 백인들이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에 살고있는 황인종들을 멸시하고 깔보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차장이 인도인에게 말했습니다. "일어서시오. 내가 3등 칸까지 안내해 주겠소." 인도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차장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여기는 내 자리요. 자, 이 차표를 보시오. 나는 1등 칸의 표를 샀단 말이오." 그러자 차장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더니 덥석 인도인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일어나라는데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여기는 쿨리가 앉을 수 없는 자리야!"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난 3등 칸으로 갈 수 없소." 인도인은 완강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안 되겠군. 더 이상 소란을 피우기 전에 열차 밖으로 끌어내야겠어." 차장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인도인을 억지로 끌어냈습니다. 인도인은 안간힘을 쓰며 버텼으나 차장의 억센 힘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인도인은 밖으로 내팽개쳐졌고, 열차는 기적을 울리면서 출발했습니다. 기차가 떠나간 뒤 역에 혼자 남은 인도인은 분한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몹시도 추웠던 그날 밤, 인도인은 대합실 의자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밤새도록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앞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죽을 때까지 인종 차별이라는 이 악습을 뿌리뽑기 위해 싸울 테다' 인도인의 두 눈은 굳은 결의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가장 지위가 높은 계급은 '브라만'으로 힌두교의 '수도승이었고, 두 번째 계급은 '크샤트리아'로서 귀족이나 무사들이 여기에 속했습니다. 세 번째는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공무원들의 계급인 '바이샤'였습니다. 이 바이샤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계급은 '수드라'라고 하는 노예 계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드라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렸습니다. 불가촉천민이란 ‘손을 대면 안 될 만큼 더러운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인도에서 가장 멸시를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소년 시절의 간디. 간디의 아버지는 장관으로, 인도에서 세 번째 계급인 바이샤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영국 총독이 인도 땅을 다스리고 있던 때라서 장관이라도 실제적인 힘은 없었습니다. 간디의 아버지는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풍부한 경험으로 아주 복잡한 문제도 잘 해결했고, 아랫사람을 관리하는 통솔력도 뛰어났습니다. 간디는 그러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간디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열렬한 힌두교 신자로, 신앙의 가르침으로 아이들을 기르며 성실하게 가정을 꾸려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온종일 집안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또한 명상과 기도하는 것을 하루도 잊지 않았습니다. 간디가 훗날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에게서 배운 생활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13세가 되자 간디는 인도의 결혼 풍습에 따라 부모님이 정해 준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된 카스투르바이는 아름답고 착한 여자였지만 그때까지 글을 알지 못했습니다. 간디는 이 점을 안타까워하며 아내에게 글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끝내 글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간디의 역경과 시련을 평생토록 함께하며, 그의 깊은 사상이나 철학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 무렵 간디에게는 메탑이라는 새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메탑은 행실이 좋지 못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간디를 꾀어 내어 나쁜 짓을 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간디의 집안 어른들은 그러한 메탑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넌 왜 그런 아이를 친구로 사귀는 거냐?" 그러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에요." 메탑은 간디를 꾀어 선조들이 지켜 오던 종교적 관습을 깨뜨리게 하였습니다. 종교적 관습이란 어떤 특별한 종교의 신자들만이 지키는 생활 규범을 말합니다. 메탑은 간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돼지고기도 먹고, 쇠고기도 먹기 때문이야. 영국인들은 고기를 먹어서 우리보다 몸집이 크고 싸움도 잘하게 되었지." 돼지고기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먹지 않는 음식이고, 쇠고기는 힌두교 신자들이 먹지 않은 음식입니다. 간디는 메탑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착실한 힌두교 신자인 간디는 그때까지 쇠고기를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 쇠고기뿐만 아니라 다른 고기도 전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간디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짐승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께서 만드셨단다. 그러니 그것들을 죽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사람은 생각이 더 맑아지고 몸을 정결하게 지킬 수 있게 되지." 간디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메탑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만일 영국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인도를 지배하는 거라면, 자신은 인도 사람들을 영국인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종교를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머니의 말씀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차마 힌두교에서 금하는 쇠고기는 먹지 못하고, 우선 염소 고기를 한 번 먹어 보기로 했습니다. 간디와 메탑은 염소 고기를 한 덩어리 사 가지고 인적이 드문 강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불에 구웠습니다. 간디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보았습니다. 느끼함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꾹 참고 삼켰습니다. 메탑은 이것뿐만 아니라 간디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가르쳐주고 술집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간디는 이제 점점 담배와 술에 길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디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타락한 생활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가자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간디는 그동안의 잘못을 고백하는 글을 쓴 다음,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께 보여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간디는 아버지의 가슴 위에 엎드려 참었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는 울고 있는 간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습니다. 간디야,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자기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들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거든. 그런데 네게 그런 용기가 있다니 정말 기쁘구나. 아버지의 품에 안긴 간디는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습니다. 그 후에 간다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정성껏 아버지를 간호해 드렸습니다. 간디는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을 빼놓고는 잠시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이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디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입니다. 영국 유학 시절. 1887년, 간디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학교 성적은 별로 좋지 못했지만 간디는 열심히 학교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어느 날 여름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간디에게 큰형이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법률 학교를 나와 "판사나 변호사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방 장관이 돼서 우리 집안을 명예롭게 할 수 있다. 런던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서 법률을 공부해 보는 게 어떻겠니?" 간디는 형의 말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승낙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막내아들과 헤어져 있는 것이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영국에 있는 동안 간디의 신앙이 흔들릴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간디는 어머니에게 세 가지 맹세를 하고서야 겨우 영국 유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간디가 맹세한 세 가지는 고기를 먹지 않을 것, 술을 마시지 않을 것, 아내와의 결혼 서약을 잊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1887년 9월 초, 18세가 된 간디는 영국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때까지 영국 신문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영국 사람들과 만난 적도 없는 간디는, 두려운 눈빛으로 망망대해를 바라보았습니다. 배는 9월 하순쯤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렸을 때 간디는 또다시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도, 옷차림도, 풍습도 전혀 다른 이국땅에서 지낼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간디는 영국 사람들과 똑같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옷을 사 입었습니다. 또 영국 사람들처럼 서양 춤을 배우고 바이올린 교습도 받았습니다. 3개월 동안 '영국 신사로서의 공부'에만 열중하던 간디는 곧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춤만 잘 춘다고 해서 교양 있는 신사가 되는 것은 아니야. 바이올린 따위는 귀국해서도 배울 수 있어. 한평생을 영국에서 살 것도 아닌데 그들의 유행을 좇아서 무슨 소용이 있지? 아, 지금까지 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돈과 시간만 낭비했구나! 간디는 자신이 영국에 온 목적이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고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토록 바라던 런던 법과 대학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간디는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머니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고기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숙집 주인은 간디의 까다로운 식성에 짜증을 내곤 했습니다. 간디는 그때마다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고기를 먹지 않기로 어머니와 굳게 약속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디는 채식주의자들을 위하여 야채 요리만 만들어 파는 식당을 발견했습니다. 영국 땅에서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간디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간디는 그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는 힌두교 경전을 많이 아는 에드윈 아놀드라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아놀드는 힌두교 경전뿐 아니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놀드를 만나면서부터 간디는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과 불교의 경전인 불경도 읽었습니다. 그가 훗날 다른 종교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 동안 종교는 달라도 서로 싸우지 않고 뭉칠 수 있는 조국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인도에 돌아와서. 영국에 온 지 4년 만인 1891년 6월 10일에 간디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영국 변호사 자격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2세 때였습니다. 간디는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인도 땅에 내리자마자 뭄바이 항에 마중 나온 형으로부터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간디에게 형이 말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너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네가 변호사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단다." 다른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가족을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었지만, 간디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슬픔에 빠진 간디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은 그가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간디는 아내의 다정한 위로와 아들의 귀여운 재롱을 통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진정되자 간디는 라지코트에 변호사 사무소를 차렸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온 간디는 모든 것을 영국식으로 했습니다. 영국 신사처럼 차려입고 가족들 모두 영어를 사용하게 했으며 식사도 영국식으로 하였습니다. 간디의 아내는 이런 남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인도로 돌아왔으니 당신도 인도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러나 간디는 오히려 부인에게 역정을 냈습니다. "나는 모든 인도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게 만들고 싶소. 인도 사람들이 영국인에게 멸시를 당하는 이유는 뒤떨어진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오. 나는 발달된 영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게 살아갈 것이오." 간디는 아내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변호사 사무소를 연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그에게 변론을 부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비용이 다른 곳에 비해서 훨씬 비싼데다가 무조건 영국식만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뭄바이로 가서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곧 의뢰가 한 건 들어왔습니다. 간디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이 훌륭한 변호사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단단히 준비를 하고 법정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법정에서 간디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반대 신문을 하려고 일어선 순간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 일로 인해 자신감을 상실한 간디는 변호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라지코트로 돌아와 진정서나 소송 신청서를 대신 써 주는 대서업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 무렵 카티아와르 궁정에서 근무하던 작은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해고당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카티아와르 궁정을 감독하고 있는 영국 관리는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간디는 형이 해고당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찾아갔는데, 그의 태도는 무척 냉정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 그리고 당신의 형은 해고당할 만한 충분한 잘못을 저질렀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 형님은 정직한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 영국에 있을 때 누구보다도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던가요?" "이 곳 인도는 영국과 다르오. 인도에서는 영국인과 인도인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소." 영국 관리는 더욱 냉정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간디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 간디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형님이 해고당한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못 돌아갑니다." 그러자 영국 관리는 사람을 시켜 간디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간디는 심한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 인도가 영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한 이러한 불합리한 일들은 계속될 거야' 이날의 일은 간디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간디는 자신이 인도의 독립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종 차별. 그럭저럭 살아가던 간디는, 어느 날 남아프리카로 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남아프리카 역시 인도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다다 압둘라라는 인도인이 영어를 잘하고 영국 법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는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남아프리카의 더 반 항구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다다 압둘라는 이슬람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먼저 새로 온 간디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더반의 한 법정에 변호사로 세울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간디는 영국 변호사의 옷을 차려입고 머리에는 인도인들이 옛날부터 써 왔던 터번을 썼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변호사이면서 인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터번을 쓰고 법정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의 눈길이 간디에게 쏠렸습니다. 여태까지 그들은 터번을 두른 변호사를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재판장이 간디를 보고 말했습니다. "변호사는 터번을 벗으시오." 영국인은 모두 법정에서 모자를 벗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디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터번을 쓴 것입니다." "당신은 영국 변호사의 옷을 입었으니 영국식을 따라 모자도 벗어야 하오." "아니오. 벗을 수 없습니다." 재판장은 목소리를 높여 다시 말했습니다. "영국 옷을 벗든지 터번을 벗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터번을 벗지 않을 거라면 변호사를 그만두라는 뜻이었습니다. "둘 다 할 수 없습니다!" 간디는 절대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판장도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영국 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변호사로 인정할 수 없소." "좋습니다. 이 자리를 나가겠습니다.” 간디는 법정을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다 압둘라는 간디의 용기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서 간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용감한 변호사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여기에서는 영국인과 맞서 싸우는 인도인을 볼 수가 없지요. 터번을 벗지 않은 건 아주 잘한 일이오. 여기에 와서 살고 있는 인도인들한테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오. 여기가 어떤 곳이냐 하면. 다다 압둘라는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는 원래 흑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와서 땅을 차지하고 흑인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남쪽 지방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남아프리카의 북쪽 지방은 네덜란드인이, 남쪽 지방은 영국인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백인들은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흑인들을 노예처럼 마구 부려 먹었습니다. "백인들은 총과 대포를 앞세워 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는 여기에 살고 있는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소. 우리 같은 인도인은 흑인보다 좀 나은 대접을 받지만 역시 차별받기는 마찬가지요. 그들은 우리를 업신여겨 '쿨리'라고 부르고 있다오." 간디는 네덜란드인들의 점령지이며 압둘라의 회사가 있는 트란스발로 가기로 했습니다. 다다 압둘라는 간디에게 트란스발까지 가는 기차표를 직접 끊어 주었습니다. 이튿날 간디는 트란스발의 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1등 칸의 차표를 가지고 열차를 탔다가 심한 멸시를 받으며 열차 밖으로 끌려나 온 것은 바로 이날의 일이었습니다. 날이 밝자 간디는 철도 장관에게 항의하는 편지를 부친 다음, 기차를 타고 종착역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간디는 다시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합승 마차를 탔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트란스발로 가는 기차를 탈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합승 마차에서도 간디는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해야 했습니다. 간디는 마부에게 사정을 한 뒤에야 겨우 마부 옆의 딱딱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간디는 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이번에는 승객 둘이 앉아서 가는 작은 방의 표를 샀습니다. 간디와 함께 탄 사람은 점잖은 영국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기차가 떠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차장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간디를 보더니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손님은 3등 칸으로 가셔야 합니다." "나는 이 자리를 샀소." "그것은 압니다만 여기는."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국인이 차장의 말을 자르며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손님이 3등 칸으로 가셔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소. 나는 이런 식의 비열한 인종 차별을 용납할 수 없소. 나는 이분과 함께 여행하겠소." 영국인이 너무나도 강경하게 말했으므로, 차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간디를 노려보다가 문을 닫고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간디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영국이 인도에게 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영국 사람이 다 인도의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간디는 영국인 가운데에도 정의와 인간다움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국 인도를 위하여.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며칠 뒤, 간디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간디는 그곳의 인도인들이 얼마나 심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사유지를 가질 수가 없었으며, 투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세금을 내면서도 포장된 도로를 다닐 수가 없었고, 밤 9시 이후에는 거리에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간디는 프리토리아에 사는 인도인들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간디는 가장 먼저 인도인들에게 더 이상 종교 때문에 다투지 말고, 한 핏줄을 나눈 형제로서 뭉치자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간디의 호소에 감동하여 처음으로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마을을 청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압둘라와 어느 인도인 사이에 재판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간디는 압둘라가 이길 수 있도록 열심히 그를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날짜만 계속 흘러갔습니다. 간디는 얼마 후, 재판을 오래 끌수록 돈을 버는 것은 재판을 하는 법관들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간디는 두 사람을 설득한 후 서로 합의하여 재판을 그만두도록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간디는 새로운 해결책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이기도록 돕는 것보다는, 옳고 그른 것을 찾아 내어 양쪽이 조금씩 양보하여 타협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디는 뭄바이의 빈민촌에서부터 영국의 국회에 이르기까지, 이 새로운 해결책을 가지고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간디가 압둘라 회사와 계약했던 1년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아내와 두 아들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인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압둘라 회사는 그 동안의 간디의 수고에 보답하는 뜻으로 송별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송별회에 참석한 사람 중 한 사람이 간디에게 신문을 보여 주었습니다. "간디 씨, 인도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옳다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고 합니다." 신문을 받아 본 간디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간디는 격분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법이 통과되면 인도인들은 지금보다 더한 멸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반대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투쟁해야 합니다." 모두들 간디의 의견에 찬성했습니다. 간디는 인도로 돌아가는 것을 늦추고 영국을 상대로 한 길고도 어려운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에게도 모임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1894년에 '나탈 인도 국민 회의'를 만들고 자신은 사무국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에 돌아와 잠시 머무는 동안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인도 각지에 배포했습니다. 이 책은 녹색 표지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녹색 책자'라고 불렸습니다. 이 '녹색 책자'는 곧 인도 신문에 소개되었고, 로이터 통신을 통하여 영국에도 알려졌습니다. 간디는 '녹색 책자를 발간한 후에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습니다. 인도의 많은 신문들은 간디를 격려하며 간디의 글을 실어 주었습니다. 간디가 책을 발간하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인도인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일을 하고 다니자, 영국 정부는 간디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을 동원하여 강연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에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눌러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896년 12월, 간디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함께 가기를 원하는 변호사 칸과 함께 뭄바이를 떠나 남아프리카 더반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돌아오는 것을 꺼려한 남아프리카 정부는 검역을 핑계로 간디의 상륙을 막았습니다. 백인들은 간디를 위협하기도 했다가 어떤 때에는 살살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걱정이 되어 간디에게 다시 인도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끝까지 버티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간디에게 상륙 허가가 내려졌습니다. 간디는 우선 가족들을 배에서 내리게 하고 자신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부둣가에 모여 있던 백인들은 배에서 내리는 간디를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간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여러 명의 백인이 몰려와 간디에게 돌과 벽돌, 썩은 달걀을 던지는가 하면, 간디를 마구 때리고 발로 걷어차기도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백인 부인이 이 광경을 보고 뛰어와 간디 앞을 막아서며 백인들을 제지했습니다.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당장 물러가요!" 그녀는 더반 경찰서장의 부인이었습니다. 뒤이어 경찰관들이 달려와 간디를 부축해서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자 백인들은 경찰서에까지 몰려들어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간디를 당장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 이 사건은 다음 날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영국 정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의 식민 장관인 체임벌린은 간디를 폭행한 사람들을 찾아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해 주고 싶습니다." 간디의 너그러움에 영국 정부는 또 한 번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899년, 남아프리카에 보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보어 인은 오래전부터 남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던 네덜란드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영국인이 밀려 들어오면서 주인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자,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간디는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국인과 똑같은 자유와 평등을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영국군을 돕기로 결심하고 의무대를 조직했습니다. 영국을 지지하면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에게 좀 더 호의를 베풀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보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간디는 영국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하는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도인에 대한 영국인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크게 실망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하고 가족들과 함께 인도로 돌아왔습니다. 간디는 인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인도 의회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아프리카의 나탈 인도 국민의회에서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영국 장관 체임벌린이 나탈을 방문할 예정이니 곧 돌아와서 인도인의 요구 사항을 알려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보를 받은 간디는 가족을 인도에 남겨두고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습니다. 이때가 1902년 12월이었습니다. 간디는 즉시 체임벌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체임벌린은 간디의 요구를 회피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간디의 노력은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간디는 다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1904년, 간디는 나탈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피닉스에 농장을 만들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며 농장 경영을 시작했습니다. 간디는 다시 인도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해 갔습니다. 간디는 이 농장을 '톨스토이 농장'이라 부르고, 나탈에서 경영하는 인도 평론이라는 신문사도 농장 안으로 옮겨 왔습니다. 톨스토이 농장은 '신의 나라는 그대 마음속에 있다.'라고 하는 톨스토이의 정신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간디는 빨래나 청소는 물론이고 음식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면서 검소하게 생활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책을 읽는 한편, 인도 평론에 사설도 썼습니다. 간디는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계획이었습니다. 비폭력 저항 운동. 1906년, 트란스발 정부는 '아시아인 등록법'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인도인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 은 정부에 등록을 하고 지문이 찍힌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법으로, 아시아인을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관은 언제든지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할 수 있으며, 허락 없이 집 안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법이 만들어지자 모든 인도인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1906년 9월 11일, 트란스발에 사는 인도인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이 법안에 반대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인도인은 이 법을 인정할 수 없다. 어떠한 처벌을 받더라도 이 법에 따를 수 없다!" 이때 간디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권익이 무시되는 법률에 절대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폭력으로 맞서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사람만이 반대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폭력 저항 운동인 '사티아그라하'입니다. '사티아그라하' 란 '진리의 힘'이란 뜻입니다.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길거리로 몰려 나와 비폭력 저항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영국 정부는 화해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영국에게 더 이상 속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 정부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평화를 짓밟는 것은 인도인이 아니라 영국 정부이다. 아시아인 등록법을 철폐하라." 인도인이 새 법률에 따르지 않을 것 같자, 영국 정부는 반대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간디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많은 인도인들이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감옥에 갇히자 이번에는 부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세계 각국에 전해지자,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국 정부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아시아인 등록법을 폐지하고 인종 차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인도인의 승리였고 진리를 위한 비폭력 운동의 승리였습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온 지 2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악법이 폐지된 것을 본 간디는 이제 인도 본국의 일을 하기 위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먼저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영국에서 인도의 지도자인 고칼레를 만나 그의 충고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같이 만나 인도의 앞날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간디가 아직 영국에 머물고 있던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전 세계는 전쟁의 상처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 무렵 간디는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습니다. "영국은 지금 전쟁으로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영국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그의 의견을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영국과 싸워서 잃었던 자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곤경에 빠졌을 때 뒤통수를 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저는 영국의 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일삼는 영국인 관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이들과 싸워 온 것입니다." 하지만 간디가 아무리 설득해도 사람들의 의견은 좀처럼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간디는 이때까지도 영국을 믿고 있었습니다. 영국을 도와주게 되면 인도에 대해서 많은 편의를 제공해 줄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는 이번에도 의무대를 만들어 영국군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뜻하지 않게 늑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의 지휘관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그 후 간디는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은 뒤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간디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인도를 위해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5년 1월, 간디는 꿈에도 그리던 인도의 뭄바이 항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간디를 환영했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그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바르마티 아쉬람'이라는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사바르마티'는 근처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었고, '아쉬람'이란 '진리를 찾기 위해 도를 닦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톨스토이 농장'을 그대로 인도에 옮겨 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이곳에서는 불가촉천민까지도 한 식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 불가촉천민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부터 그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땅의 임자는 불가촉천민들이 우물을 긷지 못하게 했고, 또한 이웃 사람들은 그들이 거리를 다니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계속 내려오던 관습을 깬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디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 수도원에서는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과 불가촉천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 말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간디 자신은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모든 인도인들은 간디야말로 그런 이름으로 불릴 만큼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성자가 아니라 여러분과 똑같은 인도인입니다. 나를 평범한 여러분의 친구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간디를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렀고,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 모두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1년쯤 지난 후 간디에게 여러 사람 앞에 설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베나레스에 있는 힌두 대학교의 개교식에서 연설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입니다. 간디는 무명으로 짠 도치만 걸치고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잘 차려입은 영국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이윽고 간디가 연설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연단에 올라서서 인도말이 아닌 영국말로 연설하도록 요구한 대학 당국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가서 그를 끌어내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대학생들이 '우우!'하고 소리를 지르며 관리들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식장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고 간디는 이일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비폭력 비협조 불복종. 1918년 11월 드디어 제1차 세계 대전에 끝났습니다. 인도인들은 모두 꿈에 부풀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 정부에서는 인도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독립 정부를 세워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약속을 믿고 2백만 명의 인도 병사 지원과 함께 재정적으로도 원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속임수였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키기는커녕 영국에 대항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다는 새로운 법을 공포했습니다. 간디는 그때까지 영국을 믿고 있다가 결과가 이렇게 되자, 새로운 투쟁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간디는 영국에 협조하지 말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며, 영국의 상품은 사지 말자는 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인도 사람들 모두 간디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간디는 자신이 직접 물레를 돌려 옷을 짜 입으면서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1919년 4월 6일,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자동차와 버스들도 멈추었습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아무도 일터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힌두교 신자인 건 이슬람교 신자이건 상관없이, 인도 전체가 단식을 하며 침묵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디가 비폭력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난 사람들은 기차 정거장을 불태우는가 하면 영국 정부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다녔습니다. 암리차르 지방의 펀자브라는 곳에서는 한 영국인 여교사가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영국의 해리 다이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펀자브로 진격해 들어왔습니다. 이날 펀자브 시의 인도인들은 큰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에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어 장군은 장갑차로 골목을 모두 막고 사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독 안에 든 쥐 꼴이 된 5천여 명의 인도인들은 날아오는 총탄 앞에서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사람 위로 몇 겹의 시체들이 뒤덮였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사격 중지!" 장군이 명령하자 총 소리가 멎었습니다. 그날 숨진 사람은 370명이었고, 부상당한 사람은 1,2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펀자브의 무자비한 학살 사건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영국 관리들이 신문과 방송에 이 일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비폭력 저항 운동은 사람들이 그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무렵 정치적인 권력을 갖지는 못했지만, 여러 지역의 인도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모임으로 '국민 의회'가 있었습니다. 간디는 국민 의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비폭력 저항 운동의 정신을 가르칠 생각으로, 1920년부터 국민 의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간디가 국민 의회를 이끌기 전에는 의원 대부분이 인도의 중 상류층 인사로서, 영국말을 잘하고, 영국식 옷차림을 하며, 영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인도에 와 있는 영국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국민 의회의 헌법을 고쳐, 인도인이면 누구든지 국민 의회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간디의 목적은 모든 인도인으로 하여금 영국과 잡았던 손을 놓게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비협조 운동'을 펼치는 데에 국민 의회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비협조 운동을 시작하던 날,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살 때 영국 정부로부터 받은 두 개의 훈장을 총독에게 돌려주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숱한 양민을 학살한 영국 정부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간디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입고 다니던 영국제 양복과 모자를 불태우고 나서, 가난한 인도인의 옷인 도티를 몸에 걸쳤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과 비협조 운동을 인도 전역에 퍼뜨리기 위하여 '전국 자원 봉사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너도나도 그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자와할랄 네루라는 청년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민 의회의 의장이었던 유명한 변호사 모틸랄 네루였습니다. 자와할랄 네루는 간디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폭력 저항 운동과 비협조 운동을 국민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간디의 비협조 운동을 대단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이 영국에서 건너온 물건을 사지 않자, 영국의 경제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마침내 국민 의회의 지도자들과 전국 자원 봉사단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네루의 집안 식구들도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22년 3월에는 약 3천 명가량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간디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약 2년 동안 감옥에 있다 나온 간디는 다시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간디가 수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운동을 펼친 결과 국민들은 간디의 뜻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928년, 간디는 구자라트 지방의 바르톨리 마을 농민들과 함께 비폭력 저항 운동의 일환으로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때 세금이 22퍼센트나 올라가자, 농민들은 아예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경찰이 와서 항의하는 농부들을 잡아가고 재산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농부들은 세금 내는 것을 거부할 뿐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 정부에 뜻을 보다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에서는 세금 인상을 포기하고, 가두었던 농민을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불복종 운동이 그 열매를 거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저항 운동의 승리. 1924년, 간디는 국민 의회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간디는 어깨에 얇은 천만 걸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간디를 '나체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뜻대로 안 되자 이번에는 새 헌법을 내놓았습니다. 이 헌법을 놓고 국민 의회는 새 헌법을 받아들이자는 사람들과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자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의장인 간디는 중립적 입장에 서서 말했습니다. "인도는 하루빨리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폭력을 통해 우리의 독립을 주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입니다. 그러니 비폭력주의와 불복종 운동을 계속해 나가면서 영국에 인도의 독립을 요구해야 합니다." 모두 간디의 제안에 찬성했습니다. 국민 의회에서는 1930년 1월 16일을 '인도 독립의 날'로 정하고 독립의 맹세를 가슴속에 굳게 새겼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소금법'이라고 하는 법을 새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소금법이란 인도인이 소금을 만들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도인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소금을 팔아먹으려는 영국의 속셈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간디는 인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모두들 단디 해변으로 가서 소금을 만듭시다! 불복종 운동을 계속합시다!" 5월 5일, 영국 정부는 간디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소금 행진에 참여하였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인도 국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외쳤습니다. 2천 5백여 명의 인도인들이 다라사나 소금 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영국은 물러가라!" "인도는 독립을 원한다!" "영국은 인도에서 손을 떼라!" 사람들은 계속하여 소금 공장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달려들어 사람들을 마구 때리고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인도인들은 아무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고, 도망치거나 덤벼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레스 신문의 밀러 기자는 소금 공장 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결국 영국 경찰은 소금 공장을 지킬 수 있었으나, 전 세계에 자기들의 잘못을 폭로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소금 공장 하나를 지키는 대신 거대한 인도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영국은 이제 더 이상 인도의 독립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931년 1월, 간디와 다른 의회 지도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며칠 뒤 자와할랄 네루와 간디는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였습니다. 인도 총독 어윈은 간디를 만나 협상을 하자고 했습니다. "당장 불복종 운동을 중단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이번 가을 런던에서 열리는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해, 인도의 문제를 의논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간디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런던의 제1차 원탁회의는 간디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인도의 이슬람교 연맹 대표가 참석했었습니다. 어윈 총독과 간디는 여덟 차례나 만나서 델리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내용은 감옥에 있는 구속자들을 석방하고 소금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인도인들은 불복종 운동을 중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델리 조약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어원에 이어 윌링돈이 총독 자리에 오르자 전 총독이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디는 곧장 윌링돈 총독에게 만나자고 했지만 총독은 간디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간디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의회에 나가서 말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델리 조약을 제멋대로 파기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4일, 간디는 체포되어 재판도 받지 않고 곧장 푸나에 있는 예라우다 형무소에 갇혔습니다. 푸나는 뭄바이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사이에 국민 의회의 회원 3만 5천 명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이제 완전히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하트마 간디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간디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 21일간의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21일간의 단식은 힌두교 신자들이 하는 '대단식'이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시작하자 그는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간디가 감옥에서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만일 간디와 같은 사람이 영국의 감옥에서 죽는다면 전 세계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간디를 석방하기로 했습니다. 간디는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친구의 집에서 남은 단식 기간을 채우고 대단식을 마쳤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처칠은 인도의 도움을 얻으려고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그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도 국민 의회 역시 계속해서 인도의 독립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또다시 간디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감옥 안에서 죽음을 각오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언론은 간디가 인도의 독립을 위해 단식에 들어갔다고 세계 각국에 알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세계의 여론이 두려워 간디를 석방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영국은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인도를 독립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3월, 영국 수상 애틀리는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영원한 인도의 성자.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뿐 인도는 다시 불행을 맞게 되었습니다. 인도 안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팽팽히 맞서 나라가 둘로 갈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인도 연방과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간디는 곧 그 양쪽을 설득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거리에서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자주 싸움이 일어나, 대낮에도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간디는 조국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다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간디의 열한 번째 단식이었습니다. 7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분열을 걱정하는 간디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인도 국민들 사이에서 간디를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결국 두 종교의 지도자들은 간디가 죽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마침내 화해를 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간디는 단식을 중지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1948년 1월 30일, 간디가 저녁 기도를 드리기 위해 두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정원으로 나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간디의 발에 입을 맞추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간디를 향해 겨누었습니다. "탕, 탕, 탕!" 그 청년 역시 이슬람교도와 화해하는 것을 반대하는 힌두교 신자였습니다. 간디는 총탄에 맞고 쓰러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신이시여!"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수천 명의 인도인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948년 2월 12일,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도의 독립과 단결을 위해 살았던 간디의 유골은 힌두교의 의식에 따라 갠지스강의 물결 위에 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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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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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앨라배마 주 북쪽 지방의 테네시 강가에 터스컴비아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의 언덕 위에는 지붕이 유난히 푸른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그 집은 푸른 담쟁이덩굴이 벽을 온통 뒤덮은데다 붉은 장미가 수를 놓은 것처럼 피어 있어서 마치 동화에 나오는 집 같았습니다. 1880년 6월 27일, 이 '푸른 담쟁이덩굴 집'에 예쁜 여자아 이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부모는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어머, 아기가 눈을 떴어요. 아기 눈이 어쩜 저렇게 예쁠까요. 푸른 하늘처럼 맑지 않아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굴리는 아기를 바라보며, 식구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인 아더 켈러 대위는 남북 전쟁 때 남군의 용사로 활약했던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케이트 아담스 역시 남부 장군의 딸로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아기의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헬렌이라 하면 어떻겠어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기의 이름은 헬렌이 되었습니다. 헬렌은 무척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나자 서투른 발음으로 '안녕?' 하고 인사를 했으며, 목이 마를 때에는 '물, 물!' 하고 어머니를 조르기도 하였습니다. 헬렌은 건강하게 자라, 채 한 살이 되기도 전에 걷기 시작했습니다. 헬렌은 꽃들이 활짝 된 정원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나비를 쫓거나, 마룻바닥에 비쳐 흔들 거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손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헬렌을 보며 아버지가 흐뭇한 얼굴로 어머니에게 속삭였습니다. "헬렌은 우리 집의 천사야. 헬렌이 있는 켈러 집안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헬렌 켈러가 태어난 지 1년 반이 지난 1882년 2월의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온 집 안을 활보하며 뛰어놀 헬렌이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걱정이 된 어머니는 헬렌의 이마를 짚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얼른 의사에게 연락을 했고 곧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열이 펄펄 나는데다가 얼굴이 벌렇게 달아오른 헬렌을 진찰하고 나서, 의사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급성 뇌염에다 위병까지 겹친 것 같습니다." "그럼, 생명은....." 글쎄요. 지금으로선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의사가 말끝을 흐리자, 어머니와 아버지는 넋을 잃은 듯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오, 하느님! 우리 헬렌의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의사가 돌아간 후 어머니는 밤새도록 헬렌의 머리맡에 앉아 간호를 했습니다. 헬렌, 제발 정신을 차리고 엄마의 얼굴을 좀 보렴.... 하지만 헬렌은 여전히 힘겹게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간호가 계속된 지 며칠 후였습니다. 침대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깬 어머니는 헬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열도 뚝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아기가 다 나았어요." 헬렌을 진찰한 의사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온 가족은 얼싸 안고 기뻐했습니다. 그 무서운 열병으로 헬렌이 한평생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말입니다. 며칠 후, 헬렌을 살펴보러 방으로 들어갔던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오, 헬렌! 헬렌, 왜 그러니?" 놀라서 달려온 아버지가 헬렌을 안아 올렸습니다. "헬렌이 이상해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좋아하는 인형을 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아버지는 당장 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잠시 후, 헬렌을 진찰하고 난 의사가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아기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 같군요. 너무도 심한 열에 시달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우리 헬렌이? 오! 가엾은 헬렌....." 찬란한 햇살은 변함 없이 '푸른 담쟁이덩굴 집'에 포근하게 내리쬐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의 빛깔과 소리를 느끼지 못하게 된 헬렌은 어둠의 세계에 갇혀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귀여운 헬렌의 모습이 사라진 정원에는 적막함만이 감돌았습니다. 헬렌은 한동안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어머니가 일어나면 그 옷자락을 붙잡고 어디든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손으로 더듬어서 물체의 모양이나 움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헬렌은 어느 새 간단한 몸짓으로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목이 마르면 헬렌은 물을 마시는 시늉을 했고, 배가 고프면 입을 벌리고 밥을 먹는 흉내를 내었습니다. 헬렌은 보고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대신에 냄새 맡는 능력, 맛보는 능력, 만져 보는 능력은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능력들을 키워 주기로 마음먹고 헬렌에게 여러가지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후 헬렌은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 보는 능력을 통해 어머니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헬렌은 자기가 전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있습니다. 그러자 헬렌은 기분이 언짢고 답답해져서 소리내어 우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헬렌의 성격은 차츰 난폭해지기 시작해서, 아버지가 읽고 있는 신문을 빼앗아 구기거나 찢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손님이 왔을 때에는 더욱 심술을 부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 말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질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말을 들을 수도, 사물을 볼 수도 없는 헬렌은 자기가 따돌림을 당한다고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헬렌은, 식사를 할 때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먹었습니다. 어머니가 헬렌의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쥐어 주고, 음식 먹는 법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헬렌은 아무데나 포크를 집어 던졌으며,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으면 무턱대고 밀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야단을 치려다가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빛도 소리도 없는 암흑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헬렌이 가여웠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헬렌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습니다. “어떻게든 헬렌을 교육시켜야 할 텐데...” 그러던 어느 날, 찰스 디킨스의 ‘미국 기행’ 이라는 책을 읽던 어머니의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그책에는 앞도 못 보고, 말도 못 하던 로라라는 여자아이가 하우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말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헬렌처럼 보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던 아이가 교육을 받아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대요. 그런데 하우 박사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하지만 그 박사님이 가르치던 방법은 전해 지고 있을 것아니오? 우리 함께 찾아보도록 합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밝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헬렌을 가르칠 선생님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수소문했습니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볼티모어에 크시홈이라는 유명한 안과의사가 살고 있는데, 그 의사는 가망이 없는 맹인을 여러 사람 고쳤다고 하오. 어쩌면 우리 헬렌도 세상을 볼 수 있게 될지 모르겠소." "그래요? 어서 그분에게 헬렌을 보여 봐요." 며칠 후, 헬렌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볼티모어로 가서 크시홈 선생을 만났습니다. 크시홈 선생은 진찰을 하고 나서 말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 아이의 눈은 수술로도 고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헬렌의 부모님은 실망하여 힘없이 병원을 나섰습니다. 그 때 크시홈 선생이 말했습니다. 비록 눈과 귀는 멀었지만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머리가 무척 좋은 편입니다. 워싱턴에 있는 그레이엄 벨 박사를 찾아가 보십시오. 유명한 맹아 교육자이시니까 아마 좋은 교육 방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소개장을 써 드리지요. 벨 박사는 훗날 전화를 발명하기도 한 훌륭한 과학자로, 맹아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희망을 안고 워싱턴으로 향했습니다. 벨 박사는 헬렌에게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헬렌은 인자한 벨 박사와 금세 친해져서 벨 박사의 무릎에 앉아 목걸이며 시계줄을 만지작거리며 놀았습니다. 이처럼 헬렌이 벨 박사에게 끌린 것은 벨 박사가 자기의 손짓 발짓이 뜻하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벨 박사와 함께 있으면 헬렌은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벨 박사와 인연을 맺은 후 헬렌의 생애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박사의 소개로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아 학교를 소개받았으며, 훗날 평생의 스승이자 길잡이가 되어 준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1887년 3월 3일, 헬렌의 집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헬렌은 분주한 집 안을 살짝 빠져나와 현관 층계에 걸터앉아 따스한 봄 햇살을 쬐고 있었습니다. 헬렌도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어럼풋이 느끼고 있는지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얼마 후, 헬렌은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엄마야? 헬렌은 여느 때처럼 두 팔을 벌려 안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헬렌의 작은 몸을 두 팔로 힘있게 끌어안은 사람은 바로 이 날의 손님인 설리번 선생님이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갑자기 눈까지 나빠져서 퍼킨스 맹아 학교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곳에서 훌륭한 의사를 만나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후로 한평생을 말 못하고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이 곳으로 오면서 창백하고 가날픈 소녀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체 장애인은 신경질적이고 몸이 왜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본 헬렌은 파란 눈에 장밋빛 뺨을 가진 귀여운 소녀였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꼭 끌어안고 뺨을 비벼 주었습니다. '참 예쁘고 영리한 아이로구나. 이 가엾은 아이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다. 이틀날 아침,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인형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퍼킨스 학교의 앞 못 보는 아이들이 보내 준 선물이었습니다. 헬렌이 인형을 받아 들고 기뻐하자 선생님은 재빨리 헬렌의 손바닥에 '인형' 이라는 글자를 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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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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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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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소녀. 테레사는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났습니다. 테라사의 어릴 때 이름은 '꽃봉오리'라는 뜻의 아그네스 곤자 보야주였습니다. 아그네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부모님과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그네스의 아버지 니콜라 보야주는 건축업과 식료품 수입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코페 시에 최초로 극장을 짓는 데에 참여했으며,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갈 때면 어머니에게 넉넉하게 돈을 주곤 했습니다. "여보, 불쌍한 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도록 해요." 아그네스의 마음속에는 그런 아버지의 따뜻한 모습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아그네스의 어머니 드라나이는 알바니아에서 상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도 깊은 신앙심을 갖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갈 때면 꼭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또 저녁이 되면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후 묵주 기도를 올렸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바구니에 빵을 가득 담고 있었습니다. "엄마, 어디 가세요?" "아그네스, 엄마를 따라가지 않을래?" "어디 가시는데요?" "음, 아주 좋은 곳에 간단다." 어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그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머니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똑똑똑! "계세요?"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콜록콜록, 누구세요?" 집 안에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이것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어머니는 가지고 온 빵 바구니를 아주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어머니에게 인사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주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어서 병이 나으셨으면 좋겠네요. 힘내세요." 어머니의 따뜻한 말에 아주머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건강해져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그네스는 어머니와 아주머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엄마는 정말 대단한 분 같아.' 그 날 본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그네스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그네스의 가족들은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그네스의 행동이 이상했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고 자꾸만 손을 식탁 아래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아그네스, 맛이 없니? 어서 먹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그네스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아그네스 좀 보세요. 빵이랑 소시지를 먹지 않고 무릎에 올려놓고 있어요." 오빠 라자르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얼른 아그네스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정말 아그네스는 무릎 위에 깔아 놓은 냅킨에 빵이며 소시지를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아그네스, 먹기 싫어서 그러니?" "엄마, 난 배가 안 고파요. 그래서 빵이랑 소시지를 옆집 카밀에게 가져다 주려고요. 카밀은 우리 집 빵이랑 소시지를 참 좋아해요." 어머니는 아그네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 아그네스는 마음이 참 따뜻하구나. 카밀에게 줄 것은 엄마가 챙겨 줄게. 그러니까 마음놓고 많이 먹으렴." 아버지의 죽음. 아그네스가 아홉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아그네스의 집에 크나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중요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베오그라드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습니다. 아그네스는 언니, 오빠와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뒷동산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언니와 함께 성당에도 갔습니다. 그런데 아그네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집을 나섰던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업혀서 돌아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빠가 왜 이렇게 되신 거예요?" 아그네스는 깜짝 놀라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곧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독이 들어 있는 것을 마신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세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애들아,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자." 어머니와 세 아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은 후, 어머니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아그네스의 가족에게 아버지의 빈 자리는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아그네스의 가족에게 또다시 나쁜 일이 닥쳤습니다. 아버지의 동업자가 회사 돈을 가로챈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그네스의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집 한 채가 전부였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순 없어! 사랑하는 아이들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 하고 있어. 그래, 힘을 내자!" 어머니는 굳은 다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웨딩 드레스와 수예품을 파는 가게를 열었습니다. 다행히 가게는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스코페의 특산품인 카페트까지 팔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장사를 해 나가는 어머니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어린 아그네스의 눈에도 어머니가 위대해 보였습니다. '나도 어머니처럼 강한 사람이 될거야.' 어머니는 아이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길 바랐습니다. 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스코페 근처에 있는 성지 레트니스에 가서 몇 시간씩 기도를 드리기도 했고, 집에서도 밤늦게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아그네스와 언니 아게는 교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성당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아그네스의 가족은 아버지가 계실 때처럼 풍요롭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옆집 카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카밀의 육 남매를 모두 데려와서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아그네스가 세상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받다. 1924년, 오빠 라자르가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라자르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아파했습니다. "난 꼭 힘있는 군인이 될거야. 그러면 하늘에서 아버지도 무척 기뻐하시겠지?" 라자르가 떠난 후 아게와 아그네스는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아게와 아그네스는 교구 활동에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25년, 교구 신부로 얌브렌코비치 신부가 새로 부임했습니다. 얌브렌코비치 신부는 교구 젊은이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또 얌브렌코비치 신부는 성모 신심회 지부도 세웠습니다. 성모 신심회는 16세기 로마에서 처음 만들어졌는데, 그 후 전세계에 있는 가톨릭 교회로 퍼져 나갔습니다. 얌브렌코비치 신부는 성모 신심회 모임에서 선교사들의 편지를 읽어 주곤 했습니다. 그 선교사들은 동인도의 벵골 지방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병들고 굶주린 인도 사람들을 돕는 모습은 아그네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그네스는 벵골 지방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임에 가입했습니다. "신부님, 인도 사람들은 종족에 따라 믿는 신이 서로 다르다면서요? 그 곳에 파견된 우리 신부님들이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아그네스는 얌브렌코비치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단다. 그래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는 싸움이 자주 일어나지. 우리 신부님들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단다." "인도에는 예수회 신부님들만 가실 수 있나요?" "아니, 아일랜드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의 수녀님들도 많이 가 계시단다."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에요. 그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할 거예요. 제 기도가 그분들께 힘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고말고. 우리 더욱 열심히 기도하자." 아그네스와 얌브렌코비치 신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그네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로 자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 공부를 시킬 만큼 신앙심도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아그네스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모두 아그네스를 친절한 아가씨로 기억했습니다. 열여덟번째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아그네스는 세르나고레 성모 마리아 성지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그네스, 어서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거라." 그 소리를 들은 아그네스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잠시 후 그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그네스는 얌브렌코비치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신부님, 제가 수녀가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아그네스, 하느님의 부리심을 받으면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거야. 그 기쁨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단다." 얌브렌코비치 신부의 말을 들은 아그네스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수녀가 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내 온몸을 바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도울 거야.' 집으로 향하는 아그네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습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아그네스의 마음은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녀가 되면 가족들 곁을 떠나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빠도 집에 없는데, 내가 떠나면 어머니와 언니만 남겠구나.' 아그네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며칠 후, 아그네스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수녀가 되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어머니는 아그네스를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아그네스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딸과 헤어지는 것은 가슴아프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야 하기에 보내야 한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다음날, 어머니는 아그네스에게 말했습니다. "아그네스, 네 뜻대로 하거라. 그렇지만 절대로 꾀를 부리거나 도중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어머니는 아그네스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첫 서원. 1928년, 아그네스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지원했습니다. 파리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서 면접을 본 후,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의 본원으로 가야 했습니다. 더블린에 몇 주 동안 머물면서 인도에서 사용할 영어를 배워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9월, 아그네스가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언니는 자그레브까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아그네스는 자그레브에서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지원하는 다른 소녀를 만나서 함께 떠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그레브에서 며칠을 보낸 후, 어머니, 언니와 헤어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그네스, 엄마는 널 믿는다. 우리 착한 아그네스는 무슨 일이든지 잘할 수 있을거야." "어머니,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세 모녀는 한동안 서로를 꼭 안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기차가 떠날 시각이 되었습니다. 아그네스는 눈물을 흘리며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것이 가족과 함께 보낸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지원한 아그네스는 파리에서 면접을 치른 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갔습니다. 더블린 본원에서 1차 수련을 받은 다음에 인도 캘커타 분원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블린에서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하루는 정신 없이 바빴습니다. 그렇지만 수녀들과 수련생들은 조용히 맡은 일을 다 해냈습니다. 아그네스는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곧 자신이 할 일을 찾았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수녀회 규칙과 영어를 익히는 데에 썼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6주간의 더블린 생활이 끝나고 아그네스는 인도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탈리아의 바리까지 기차를 타고 간 후, 인도 뭄바이까지 7주간 배를 타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 다시 캘커타의 하우라 역으로 갔습니다. 캘커타에서 열흘 정도 머무른 후, 아그네스는 다질링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질링은 흰눈으로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여름엔 벵골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관리들의 축제나 가든 파티가 많이 열렸지만, 수녀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수련장 머피 수녀는 수련자들이 기도와 봉사의 습관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생각했습니다. 머피 수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련자들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931년 5월 25일, 아그네스가 수련 생활서원은 2년 동안의 수련을 마치고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첫 서원을 한 후에 매년 새로 서원을 하고, 6년이 지나면 평생 수도자로서 살겠다는 종신 서원을 하게 됩니다. 아그네스는 깨끗한 수도복을 입고 제단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청빈, 순결, 순종 세 가지를 서약하고 수녀가 되었습니다. 아그네스는 오른손 셋째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었습니다. 영원히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아그네스는 수도명을 테레사로 정했습니다. 수련 생활을 하면서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리지외의 테레사는 15살에 수녀가 된 후 2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하여 1927년 가톨릭 교회는 리지외의 테레사에게 '성녀 테레사'라는 이름을 내린 것입니다. '나도 그분처럼 사랑이 넘치는 수녀가 되고 싶어.' 아그네스는 성녀 테레사를 닮고 싶었습니다. 수녀로서의 삶. 첫 서원을 마친 후, 테레사 수녀는 엔탈리 지역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파견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도원 안에 있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맡은 과목은 지리와 역사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학색들을 차별하지 않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그녀는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했으며 힘든 일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1937년,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수녀로서 살겠다는 종신 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조용한 수도원 안에서 지냈지만,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모 마리아 신심회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때 성모 마리아 신심회는 줄리앙 앙리 신부가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앙리 신부는 행동이 없는 기도는 부족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작은 힘이 우리의 이웃에게는 아주 크게 다가갈 수 있단다." 앙리 신부의 가르침에 따라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토요일마다 캠프엘 병원에 가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글을 가르쳤습니다. 테레사 수녀도 학생들과 함께 다니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조용하기만 하던 수도원도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미얀마를 점령하고 인도 동부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캘커타에는 영국군 작전 본부가 들어섰습니다. 수도원은 야전병원으로 변했고, 수녀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성 마리아 학교도 몇 킬로미터 떨어진 빈 공장으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전쟁으로 힘든 인도 사람들에게 이번에는 대기근이 닥쳤습니다. 인도 북부에서 캘커타로 쌀을 실어 나르던 배들이 군에 징발되고, 벵골 사람들이 주식으로 사용하던 미얀마 쌀의 공급이 끊겼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인도 정부는 독립 운동을 펴 나갔습니다. 인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는 국민의회파를 이끌며 평화적인 독립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슬람 연맹은 인도를 영국에서 분리, 독립시키고, 분리된 이슬람 본국을 파키스탄이라고 이름 붙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1946년 8월 16일, 이슬람 연맹은 캘커타 미아단 공원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회 도중에 그만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흥분해 있던 힌두 교와 이슬람 교도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캘커타 거리는 피로 물들었고, 수도원 안의 생활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200명이 넘는 아이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나는 괜찮지만 아이들이 배고파 우는 모습을 보니 가엾어 견딜 수가 없구나.' 테레사 수녀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서 먹을 것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들 말렸지만 그녀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오, 어떻게 이럴 수가!" 거리 곳곳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들은 총이며 몽둥이를 들고 몰려다니고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돼!" 그녀는 수도원 밖으로 나온 이유도 잊은 채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한 군용 트럭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수녀님, 이 위험한 곳에 어쩐일이십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트럭에서 내린 한 장교가 테레사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저. 수도원 아이들이 굶고 있어서 먹을 것을 구하러 나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습니다. "돌아다니셔 봐야 소용 없습니다. 가게는 이미 다 털렸을 테니까요. 마침 저희에게 남은 식량이 조금 있습니다. 그것을 가져가세요." 장교는 테레사 수녀를 무사히 수도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수도원으로 돌아온 후에도 처참한 거리의 모습이 테레사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 두 번째 부르심을 받다. 1946년 9월 10일, 테레사 수녀는 다질링 수녀원으로 피정을 떠났습니다. 피정이란 '피세정념'의 줄임말인데,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기도, 자기성찰 등을 통해 신앙 수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캘커타의 모습은 테레사 수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난리를 겪고 있는데 나는 조용한 수녀원으로 가고 있구나.' 테레사 수녀는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때 테레사 수녀의 가슴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테레사, 어서 거리로 나가거라.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거라!' 그녀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테레사 수녀가 피정을 하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수녀원을 떠나야 하는데.' 18년 넘게 있었던 수녀원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녀원을 떠난다는 것은 편안한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얼마 후, 피정을 끝낸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반 이그젬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는 예수회 회원으로, 고향인 벨기에를 떠나서 캘커타에 와 있었습니다. 성 마리아 학교가 컨벤트 가에 있는 임시 거처로 옮겼을 때, 반 이그젬 신부는 미사를 올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때 테레사 수녀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빈 이그젬 신부에게 일기장을 내밀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기차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느꼈던 영감을 적은 것입니다." 반 이그젬 신부는 일기장을 성당으로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아! 이것이 진정한 소명이다." 반 이그젬 신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을 떠나야 해.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다해야 해.' 반 이그젬 신부는 테레사 수녀가 수녀원을 떠나 어려운 사람들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돕기로 했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는 테레사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수녀원을 떠나기 위해서는 교황청의 허락이 있어야 해요. 우선 캘커타에 계시는 대주교님의 허락을 받고, 그 다음에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 본부의 총원장님의 허락도 받아야 합니다. 기회를 봐서 제가 페리에 대주교님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이 일을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예, 신부님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테레사 수녀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듯했습니다. 두달 후 반 이그젬 신부는 페리에 대주교를 만났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의 말을 들은 페리에 대주교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수녀 혼자서 거리로 나가겠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군요." 페리에 대주교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페리에 대주교가 테레사 수녀를 불렀습니다. "수녀원 밖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일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저는 하느님을 위해 살기로 맹세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시키신 일이니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겠지요." 테레사 수녀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 수녀의 당찬 대답에 무척 놀랐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두 눈에는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굳센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를 돌려보낸 후,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페리에 대주교는 1년 동안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여러 신부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앙리 신부는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빈민가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그녀를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질링 근처의 성 마리아 대학에 있는 샌더스 신부는 테레사 수녀가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1년 동안의 고민 끝에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 수녀에게 말했습니다. "로레토 수도회 총장에게 편지를 써도 좋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부르심에 대해서 설명하고, 수녀 신분으로 수도원 밖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는 반 이그젬 신부가 테레사 수녀를 대신해서 써 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먼저 본 페리에 대주교가 말했습니다. "여기 이 부분을 좀 고쳐야겠군요. "수도원 밖에서 거주'라는 표현을 '환속'으로 고치세요." "대주교님, 그건 제가 수녀의 신분을 버리고 일하는 것을 뜻하는 건가요?" 페리에 대주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반 이그젬 신부가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종신 서원을 하고 평생 동안 수녀로 지내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수녀의 신분을 버리라니요?" 반 이그젬 신부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페리에 대주교의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테레사는 '환속'이라는 말로 바꿔서 수도회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얼마 후, 수도회 총장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로마 교황청에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환속원'이 아니라 '수도원 밖 거주 허가원'을 요청하라는 내용도 덧붙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편지를 써서 페리에 대주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페리에 대주교는 '환속'이라는 말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페리에 대주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8년 2월,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의 편지와 자신의 편지를 델리에 있는 교황청 대사를 통해서 로마로 보냈습니다. 그 후 테레사 수녀는 반 이그젬 신부를 만날 때마다 답장이 왔는지 물어보곤 했습니다. 1948년 7월 말, 드디어 로아에서 답장이 왔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수도원 밖 거주'를 허락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거리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을 단 1년으로 한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가 1년 후에도 수도원 밖에서 지낼 수 있는지, 아니면 수도원으로 돌아와야 하는지는 대주교의 권한에 맡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후, 반 이그젬 신부는 로마 교황청의 답신을 들고 테레사 수녀를 찾아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답장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몇 분만 기도할 시간을 주세요." 테레사 수녀가 기도를 끝내자, 반 이그젬 신부는 편지의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의 말이 끝난 후, 테레사 수녀는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반 이그젬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이제 제가 빈민가로 가도 되는 거지요?" 반 이그젬 신부는 테레사 수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다른 수녀들과 가톨릭 관계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로레토 수도원에서는 테레사 수녀의 결정에 대해서 칭찬도 비난도 하지 말고, 그녀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글을 모든 기관과 단체에 보냈습니다. 며칠 후 테레사 수녀는 반 이그젬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부탁 인데요?" "스코페에 계시는 어머니께 제가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어요. 아마 어머니께서는 제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루지 못하실거예요. 신부님께서 제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고, 제가 여전히 수녀라는 사실을 잘 말씀해 주신다면, 어머니의 걱정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아요." "네, 제가 수녀님의 어머니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1948년 8월 16일, 테레사 수녀가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반 이그젬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신부님, 제가 앞으로 입을 수도복입니다. 축복을 해 주세요." 테레사 수녀가 들고 있는 것은 거친 천으로 만든 흰 사리 세 벌이었습니다. 푸른 줄이 세 줄 그어져 있는 사리 위에는 십자가와 묵주가 있었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는 사리에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이제 사리는 테레사 수녀의 수도복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테레사 수녀는 처음으로 사리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와 원장 수녀는 현관까지 나와서 테레사 수녀를 위해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제 테레사 수녀는 리지외의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파트나 병원. 캘커타에 오기 전에 테레사 수녀는 파트아네 있는 의료 선교 수녀회에서 의학 지식과 치료법을 익혔습니다. 캘커타에는 온갖 질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료 선교 수녀회의 총장인 덴겔 수녀는 얼마 전에 테레사 수녀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꼭 테레사 수녀를 만나 보고 싶어했습니다. 의사이기도 한 덴겔 수녀는 1919년에 인도로 와서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덴겔 수녀는 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의료 봉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의료 봉사 수도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덴겔 수녀는 테레사 수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잘 왔어요. 이 곳의 수녀님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세요." "고맙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의료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가족 병원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는 간호하는 방법, 의약품을 다루는 방법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출산, 응급처치, 수술 등을 도왔고, 주사 놓는 법과 약의 처방법도 배웠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는 의료 선교 수녀회의 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울 거예요. 그곳에서 일하는 수녀님들과 저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밥과 소금만 먹으면서 지낼 거예요." 그러자 한 수녀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수녀님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간호해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만 드시면 병이 들고 말 거예요. 병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의 영양은 섭취해야 한답니다." "맞아요. 그리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여덟 시간 이상 일하실 거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시려면 밤에는 충분히 쉬셔야 해요. 또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하고, 일 년에 한 번은 일하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좋아요."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빈민가에서 일하려면 우선 자신의 위생을 철저하게 해야 해요. 사리는 최소한 세 벌은 가지고 있어야 해요. 두 벌은 번갈아 입고, 한 벌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하지요." "그리고 인도는 여름에 무척 더워요. 그러니까 항상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어야 한답니다." 수녀들은 테레사 수녀에게 주의할 점들을 자세히 일러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네요." 파트나에 온 지 몇 주가 지났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하루라도 빨리 캘커타로 돌아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반 이그센 신부는 의료 선교 수녀회 수녀들에게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이제 캘커타로 돌아가도 될까요? 전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요." "무슨 걱정이 그렇게도 많으십니까?" "테레사 수녀님은 이제 의료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터득하셨으니까 잘 해내실 거예요. 그리고 수녀님을 돕는 사람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마음 푹 놓으세요." 이제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로 가서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티즈힐의 작은 학교. 1948년 12월 21일, 테레사 수녀는 드디어 켈커타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진주의 호수' 라는 뜻을 가진 모티즈힐로 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저수지 근처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얘들아, 뭐 하고 있니?" 아이들은 외국 수녀가 벵골 어로 말을 걸자 깜짝 놀랐습니다. "애들아, 난 테레사 수녀라고 한단다 .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지낼 거야." "우리랑 뭘 하면서 지내요?" "음, 학교를 열어서 너희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이지?" "그렇지만. 여기는 교실도 없고 책상도 없어요." "괜찮아. 너희들만 있으면 멋진 학교가 생길 수 있어." 테레사 수녀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학교를 열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얘들아, 내일부터 여기에서 공부하자. 내일 아침에 보자." 말을 마친 테레사 수녀는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테레사 수녀가 저수지 옆으로 가 보니 아이들이 다섯 명만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안 왔니?" "수녀님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서 안 온다고 했어요." "함께 공부하면 좋을텐데... 자, 우선 깨끗하게 씻을까? 이 비누를 가지고 가서 씻고 오너라." 잠시 후, 아이들이 깨끗한 얼굴을 하고 테레사 수녀에게로 왔습니다. "와! 너희들이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지 몰랐는걸. 내일부터 집에서 씻고 오면 상으로 소금을 주마." "자, 이제 공부를 시작해 볼까?" 테레사 수녀는 나무 아래로 아이들을 데려갔습니다. 땅바닥에 글씨를 쓰고,아이들에게 그것을 따라 읽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모티즈힐로 찾아 왔습니다. 제자들은 테레사 수녀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이 어떻게..." 언제나 고운 수녀복을 입고 있던 선생님이 거친 사리를 걸친 채 낡은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얘들아, 여기서 너희들을 만나니 더욱 반갑구나." 테레사 수녀가 열었다는 학교를 둘러 본 제자들은 더욱 놀랐습니다. 그 곳의 아이들에게는 책상도, 의자도, 책도, 연필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웅덩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공부한단다." 테레사 수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때 테레사 수녀에게는 방 한 칸을 얻을 돈 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테레사 수녀와 아이들의 가슴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바크 서커스에 있는 한 교구 사제가 테레사 수녀에게 1백 루피를 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하는 일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 돈으로 방 두 칸을 빌려서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은 점점 늘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의자, 칠판 같은 것을 사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세 명이 자원해 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모티즈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기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수업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학교에 나왔고,나쁜 말을 하던 버릇도 없어졌습니다.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부모들은 테레사 수녀를 진심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모티즈힐에는 결핵, 나병, 콜레라 등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모티즈힐 사람들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저 방 안에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본 테레사 수녀는 마음이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의료 선교 수녀회의 덴겔 수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캘커타 시내의 병원과 약국을 돌아다니며 약을 구했습니다. 얼마 후, 모티즈힐에 작은 진료소가 생겼습니다.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은 병원으로 보내고, 진료소에서는 간단한 치료를 했습니다. 의료 선교 수녀회에서는 의사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진료소에 오는 모든 환자들을 보살피기에는 일손이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진료소 앞에는 언제나 환자들의 긴 행렬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고메스와의 만남. 테레사 수녀가 파트나에서 돌아온 후, 반 이그센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매회가 운영하는 수도원에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테레사 수녀가 일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침 일찍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낮 12시 30분까지 모티즈힐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학교에 들러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전차나 버스를 타고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진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차비가 없어 한 시간이 넘게 걸어서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때도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 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휴,차라리 수녀원으로 돌아갈까?’ 테레사 수녀는 너무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수녀원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안락한 수녀원의 삶이 테레사 수녀를 자꾸만 유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느님,저는 점점 나약해지기만 합니다. 이 일을 선택했던 믿음이 흔들리기까지 합니다. 제발 저를 붙잡아 주세요."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켜 주세요." 이런 테레사 수녀를 지켜보던 반 이그젬 신부는 알프레드 고메스를 생각해 냈습니다. 고메스는 교회에서 반 이그젬 신부를 돕던 사람인데, 그의 집에 방 몇 개가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메스는 기꺼이 2층에 있는 방을 테레사 수녀에게 내주었습니다. 1949년 2월 28일,테레사 수녀는 고메스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녀님, 어서 오세요." 고메스는 테레사 수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방을 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정말 고맙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생긋 웃었습니다. 그녀의 이삿짐은 낡은 가방 하나뿐이었습니 다. "수녀님,저희 집에 안 쓰는 가구가 있는데, 수녀님께서 쓰시겠어요?" 고메스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의자 하나랑 나무 상자 몇 개만 주세요." 테레사 수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제 선물 받으세요." 반 이그젬 신부는 성모 마리아 그림을 선물했습니다. 그 그림은 원래 테레사 수녀가 반 이그젬 신부에게 선물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와 고메스의 딸 메이벨이 흠뻑 젖은 채 저녁 늦게 귀가하였습니다. "아니,왜 이렇게 젖었어요?" 고메스 가 깜짝 놀라서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메이벨까지 비를 맞게 되었네요." 테레사 수녀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메이벨과 집으로 오는 길에 한 아주머니와 아이를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글쎄 그 아주머니의 집에는 지붕이 없지 뭐예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에 곧 방에는 물이 차기 시작했고, 아주머니는 아이를 보호하려고 깨진 대야로 물을 퍼내고 있었어요." 테레사 수녀의 말을 들은 고메스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집에 왜 지붕이 없어요?" "아주머니가 두 달 치 방세를 내지 못했대요." "그래서 집주인이 지붕을 부수어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머니와 아이가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해 주느라 늦으셨군요?” "네, 메이벨을 먼저 보냈다면 이렇게 흠뻑 젖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우리 메이벨이 큰 공부를 했겠는걸요. 그렇지, 메이벨?" 고메스가 묻자 메이벨은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며칠 후, 그 날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고메스와 함께 약을 구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두 사람은 전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테레사 수녀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고매스 씨, 저 사람 많이 아파 보이지 않아요?" "그런 것 같네요. 어서 일을 마치고 저 사람을 돌보러 가요." 테레사 수녀와 고메스는 서둘러 약국으로 갔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그 남자에게로 갔지만, 그는 옆으로 쓰러진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인간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테레사 수녀는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는 고메스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고메스 씨, 쌀 여섯 컵만 빌려 주세요. 금방 갚을게요. 고메스는 망설이지 않고 테레사 수녀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 쌀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고메스는 테레사 수녀에게 자주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테레사 수녀는 그 때마다 그 음식을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테레사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인도 정부로부터, 인도 시민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테레사 수녀는 고메스와 함께 하우라 역에서 전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전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수녀가 왜 아이들을 가르치고,환자들을 위한 진료소를 열었는지 알아?" "글쎄? 사람들을 도우려고 그런 거겠지. 아니야?" "천만에! 우리들에게 힌두 교를 버리고 크리스트 교를 믿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정말? 그런 속셈이 있었단 말이야?" "그렇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걸?" 테레사 수녀는 한참 동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인도 사람입니다." "인도는 나의 나라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벵골 어로 말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차에서 내리면서 그녀는 고메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결코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크리스트 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을 거예요. 힌두 교를 믿건 크리스트 교를 믿건 어려운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형제니까요." "그리고 저는 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고메스는 테레사 수녀의 굳센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테레사와 함께 하는 사람들. 1949년 3월 19일, 테레사 수녀를 돕겠다며 성 마리아 학교 시절의 제자인 스바시니 다스가 찾아왔습니다. "수녀님, 저도 수녀님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요." 스바시니 다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이 일은 아주 힘들어요. 이겨낼 수 있겠어요?" 테레사 수녀가 묻자 스바시니 다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녀님, 저를 믿어 주세요. 한번 지켜봐 주세요." 스바시니 다스는 입고 있던 값비싼 옷을 벗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스바시니 다스를 바라보았습니다. 스바시니 다스는 테레사 수녀의 어릴 적 이름인 아그네스라는 수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 막달레나 고메스라는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막달레나, 의학 공부를 계속하는 게 어떻겠어요?" 테레사 수녀가 막달레나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공부를요?" "그래요. 막달레나가 의사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을 거예요." "네, 수녀님.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겠어요." 막달레나는 나중에 거트루드 수녀가 되었습니다. 몇 달 후에는 열 명이 넘는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 중에는 나중에 도로시 수녀와 마가렛 메리 수녀가 된 제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테레사 수녀는 시간을 정해서 일과 대로 행동하도록 했습니다. 식사 시간, 일하는 시간, 기도 시간 등 모든 일이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또 저녁이 되면 테레사 수녀는 예비 수녀 자매들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자매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노래를 부르거나, 줄다리기 같은 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자매들의 웃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테레사 수녀와 자매들은 오전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가 되면 진료소에서 일했습니다. 또 일하는 틈틈이 시내로 나가서 먹을 것과 약품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자신들이 맡은 일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런 예비 수녀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까지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 1949년 8월 16일,테레사 수녀의 수도원 밖 거주 허가 기간이 끝났습니다. 이제 페리에 대주교의 결정만이 남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페리에 대주교는 테레사 수녀가 수도원 밖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반 이그젬 신부를 불러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수녀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지금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또 테레사 수녀를 돕는 자매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주교님, 테레사 수녀의 모임이 정식 수도회로 인가받도록 도와 주십시오."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 테레사 수녀와 함께 정식 수도회를 만들 준비를 하세요." "먼저 회헌을 마련해야겠지요. 그러면 내가 가서 교황청의 승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테레사 수녀는 기쁨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부르심을 토대로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수도회에서 지키는 청빈, 순결, 순종의 세 가지 서원에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정한 네 번째 서원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회헌 초안을 반 이그젬 신부에게 주었고, 반 이그젠 신부는 그것을 다듬어서 폐리에 대주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수도회의 이름은 '사랑의 선교회' 로 정해졌습니다. 1950년 10월 7일, 마침내 사랑의 선교회에 대한 교황청의 인가가 내려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매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비 수녀 자매들도 테레사 수녀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며칠 후, 테레사 수녀와 자매들은 페리에 대주교의 집전 아래 미사를 올렸습니다. 이제 사랑의 선교회는 정식 수도회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선교회의 총장을 마더라고 부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바시니 다스는 아그네스 수녀, 막달레나는 거트루드 수녀가 되었고, 다른 자매들도 수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크리크 레인에 있는 그들의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반 이그젬 신부와 앙리 신부가 발벗고 나서서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녔습니다. "테레사 수녀님, 좋은 곳을 찾아냈어요." "어떤 곳인데요?" "로어 서큘러 가 54번지에 있는 건물이에요." "주인은 관리였는데 다카로 이사를 간대요." 마더 테레사도 그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페리에 대주교는 그 건물을 사서 사랑의 선교회 건물로 쓰라고 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돈을 빌려서 그 건물을 샀는데, 그 돈을 모두 갚는 데에는 10년이 넘게 걸쳤습니다. 1953년 2월, 드디어 사랑의 선교회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집은 마더 테레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마더 하우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 그 무렵 캘커타 사람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대기근과 폭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던 것입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죽어 가는 환자들보다는 살 수 있는 환자들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마더 테레사는 길가에서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쥐와 개미가 달려들어 온몸을 물어 뜯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너무도 아프고 지쳐서 쥐와 개미들을 쫓아낼 힘도 없었습니다. "아그네스 수녀. 어서 병원으로 옮깁시다." 마더 테레사와 아그네스 수녀는 그 여인을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여인의 상태가 심각한 것을 알고는 받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더 테레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할 수 없이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몇 시간 후에 그 여인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마더 테레사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시청으로 갔습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 가고 있어요." "제발 저 사람들이 인간답게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장소다 마련해 주세요." 그렇지만 시청 측의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더 테레사는 모티즈힐에 작은 집을 하나 빌렸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죽어 가던 사람들을 데려다 보살폈습니다. 얼마 후,그 집은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의 보건 담당 장관인 아네드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장관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거리에서 죽어 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곳을 마련해 주세요." 아메드 박사는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을 마더 테레사가 하고 있는데 대해 감탄했습니다. 그는 마더 테레사에게 아무도 사용하고 있지 않은 숙소 하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수녀님, 이 곳이 어떻겠습니까?" "낡긴 했지만 방도 두 개나 있고 전기도 들어온답니다. 그리고 음식을 할 수도 있고 넓은 뜰도 있습니다." 그 곳은 힌두 교도인 후원자가 순례자들을 위해서 지은 것이었는데, 죽음의 여신 칼리의 신전 옆에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칼리의 이름을 따서 칼리가트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캘커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장관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활싹 웃으며 달했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그 집을 '니르말 히르데이' 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순결한 영혼의 집'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물러가라! 수녀들은 당장 물러가라!" "칼리 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수녀들은 썩 나가거라!" 가톨릭 공동체가 신전 경내에 들어오는 것을 모욕으로 생각한 힌두 교도들의 저항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힌두 교도들을 개종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니르말 히르데이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을 가톨릭 의식으로 치른다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아메드 박사와 캘커타 경찰청장이 니르말 히르데이를 찾아왔습니다. 그 때 마더 테레사는 상처가 곪아서 살이 다 썩어 있는 사람 곁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상처에서 구더기를 끄집어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종교로 기도하세요. 저는 제가 믿는 종교로 기도할게요." "우리 두 사람의 기도는 아름다운 기도가 될 거예요." 마더 테레사는 악취가 나는 사람 곁에서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마더 테레사가 아메드 박사와 경찰청장에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저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경찰청장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수녀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충분히 잘 보았습니다." 경찰청장은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 누구도 이분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어머니와 누이를 이 곳에서 일하게 해 보십시오." 그 후에도 쫓아내겠다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군요. 이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성인입니다. 성인!" 하지만 경찰청장의 말에도 사람들의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리 사원의 승려가 니르말 히르데이로 실려 왔습니다. 서른 살도 안 된 그 승려는 결핵에 걸려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받아 주는 병원은 없었고, 동료 승려들도 그를 돌봐 주지 않았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승려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고, 얼마 후 그 승려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칼리 사원의 승려들은 수녀들이 자신들의 동료를 어떻게 보살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의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 의식에 따라서 장례를 치러 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니르말 히르데이로 쫓아와서 불만을 토로하는 힌두 교도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니르말 히르데이에서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마더 테레사에게 말했습니다. "제발 제 아이들을 지켜 주세요." "아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아이들을 잘 보살필게요." 그 말을 들은 여인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만들어야 해.' 1955년, 마더 테레사는 '쉬슈 바반'을 세웠습니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집' 이라는 뜻입니다. 쉬슈 바반에서는 아픈 아이들을 모두 받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도 있었고, 병이 깊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이들 중에는 수녀들의 정성스러운 간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잃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경관이 죽어 가는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수녀님, 이런 아이들은 어차피 죽게 되지 않습니까? 저 같으면 이런 일보다는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쓸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아이가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 어린 생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1957년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깊은 밤, 누군가 마더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던 마더 테레사는 얼른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문 밖에는 이상한 차림을 한 남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테레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나병 환자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가족들마저도 우리를 버렸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받아 준다면서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한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남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우유와 빵을 대접했습니다. "배고프셨지요? 어서 드세요." 그들은 며칠을 굶었는지,빵과 우유는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
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마더 테레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에요?" "우리는 티타가르라는 마을에서 왔습니다." "그 곳에는 우리와 같은 문둥이들만 모여 살지요. 그런데 그 곳에서는 먹을 것도 약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한 남자가 힘없이 답했습니다. 병들고 지친 그들의 모습에 마더 테레사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들의 몸이 썩어 가는 끔찍한 모습을 지켜 봐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흠, 오늘은 이 방에서 주무세요." "내일 저와 함께 티타가르로 가요. 제가 여러분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생각해 볼게요." 남자들은 테레사의 말에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들에게 방을 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정말 저희가 여기서 자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에요. 좁지만 편히 쉬세요." 그녀는 생긋 웃고 방을 나왔습니다. 다음 날, 마더 테레사는 그 남자들과 함께 티타가르로 갔습니다. "오! 어떻게 이럴 수가...!" 마더 테레사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철도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는데, 웅덩이에는 썩은 물이 고여 있었고, 제대로 먹지 못한 환자들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티타가르를 둘러본 마더 테레사는 곧바로 센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나병과 피부병 전문의였는데, 얼마 전에 은퇴하고 마더 테레사를 돕기로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박사님, 저를 도와 주세요." "저와 티타가르에 가서 나병 환자들을 돌봐 주세요." 며칠 후, 마더 테레사는 이동 진료차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센 박사와 함께 티타가르로 갔습니다. "여러분! 어서 나와서 치료를 받으세요. 어서요!" 마더 테레사와 센 박사의 노력에 여기저기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금을 해서 다음 해에는 이동 진료소가 8군데로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숨어서만 지내던 나병 환자들도 밖으로 나와 치료를 받았고, 티타가르에 나병 환자 치료 센터를 만들 때에는 직접 돌을 나르기도 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없습니다." "나병이라는 병만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나병은 반드시 치료될 것입니다." 그 무렵 마더 테레사는 비하르주 경계에 있던 탄광 지역에 나병을 치료하는 병원과 재활 센터를 세우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서벵골 주지사를 설득하여 34 에이커의 땅을 임대 받았습니다. 1년에 1루피의 세금을 내는 조건이었습니다. 막상 땅이 생겼지만 나병 환자들이 정착할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1964년 어느 날, 교황 바오로 6세가 몸바이 국제 성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인도로 왔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던 교황은 그녀를 보기 위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에 들렀습니다. "사랑의 선교회가 보여 주는 사랑은 정말 위대힙니다." 교황은 자신이 타고 온 리무진을 그녀에게 선물하였습니다. 교황이 돌아간 후 그녀는 리무진을 팔기로 했습니다. 자신에게 그런 고급 차는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리무진을 판 돈으로 나환자촌인 ‘평화의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평화의 마을에서는 나병 환자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치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멸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나병 환자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생긴 것입니다. 하느님의 연필. 마더 테레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할 때마다 자기는 하느님이 쓰시는 연필이라고 달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녀에게 상을 준 나라나 단체가 너무 많아서 수녀들은 목록을 작성하다가 포기했을 정도입니다. 어느 해, 마더 테레사는 뉴델리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상식이 진행되는 중간에 그녀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녀는 트로피를 수도원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한 후, 시상식장을 떠났습니다. 트로피를 어디에 놓을 생각이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팔아야지요! 이 트로피를 팔면 약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마더 테레사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 생각뿐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마더 테레사는 아그네스 수녀, 거트루드 수녀와 함께 노르웨이 오슬로로 떠났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결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상징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이 상을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겠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자, 사람들은 정치만이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노벨상 위원회에 한 가지 건의를 했습니다. 수상 기념 파티를 여는 대신에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제안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마더 테레사도 몸이 약해져 여러 번 쓰러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병원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제 병원비로 쓸 돈을 다른 병든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 수녀들은 그런 마더 테레사를 말렸지만, 그녀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1997년 9월 4일, 저녁 식사와 기도를 마친 마더 테레사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등이 너무 아프네요. 좀 쉬어야겠어요." 깜짝 놀란 수녀들은 의사를 불렀습니다. "수녀님, 어디가 불편하세요?" "숨, 숨을 쉬기가 어려워요." 마더 테레사는 간신히 입을 열어 달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인도의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마하트마 간디 이후 두 번째였습니다. 구지랄 총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를 세웠고, 마더 테레사는 인도를 세계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홀리며 마더 테레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수녀님,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의 선교회 마더 하우스에 묻힌 마더 테레사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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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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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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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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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코끼리 꿈. 지금으로부터 약 2천5백여 년 전, 인도의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카필라(지금의 네팔)라는 조그마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왕국을 다스리던 임금은 슈도다나 왕이었고, 왕비는 마야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어진 정치를 베풀어 나라 안은 태평하였고, 기름진 땅과 온갖 나무열매가 가득해서 백성들은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평화스러운 나라에도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왕의 뒤를 이을 왕자가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야 왕비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왕비는 혼자서 어느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의 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궁전은 황금으로 지어졌고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향기롭게 피어 있었습니다. 꽃향기에 취한 왕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꽃발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왕비는 한참동안 꽃밭 속을 걸어다니다가 꽃들 위에 가만히 누웠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난데없이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큰 몸을 뒤뚱거리며 왕비에게로 다가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눈처럼 새하얀 몸에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가진 코끼리였습니다. 코끼리는 왕비의 주위를 천천히 세 바퀴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왕비의 오른쪽 옆구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나!" 왕비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순간, 황금으로 된 궁전과 꽃이 만발한 정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휴우, 꿈이었구나! 참 이상도 하네." 왕비는 슈도다나 왕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왕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나라에서 이름난 해몽학자를 불러 왕비의 꿈 해몽을 하도록 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듣고 난 학자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흰 코끼리는 좋은 일이 있을 때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 왕비님의 꿈은 좋은 일을 예견하는 것이옵니다." "기뻐하십시오. 곧 훌륭한 왕자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그 말이 맞기만 한다면 이보다 경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러게나 말입니다." 왕과 왕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비는 정말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날이 가까워오자, 마야 왕비는 시종 들을 거느리고 친 정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인도의 풍습에 따라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기 위해서였습니다. 일행이 룸비니라는 고장을 지날 때였습니다. 마야왕 비는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수레를 잠깐 멈추도록 했습니다. 수레에서 내린 마야 왕비는 홀로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덧 마야 왕비의 모습은 동산 가득히 핀 꽃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야 왕비가 꽃동산을 거닐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이고, 배야!" 마야 왕비는 갑자기 배에 심한 진통을 느껴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꽃동산에서 갓난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습니다. "아니, 저 소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잖아? 왕비님께서 아기를 낳으셨나 봐." "울음소리가 저토록 우렁찬 것을 보니 왕자님이 틀림없을 거야." 시종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룸비니 동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방금 태어난 아기가 시종들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오른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 손가락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 위에서나 땅 위에서나, 나는 가장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기가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발 밑에서는 연이 피어났습니다. 시종들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걷고 말을 하는 아이는, 지금까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야 왕비는 갓난아기와 함께 수레에 올랐습니다. 일행은 가던 길을 돌려 카필라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왕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은 슈도다나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몸소 성 밖에까지 나와 왕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때 태어난 왕자가 바로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인 석가모니로, 지금까지의 내용은 석가모니의 탄생 신화 중의 하나입니다. 부처가 될 아기. 왕자의 탄생으로 나라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어느 날, 아사다라고 하는 노인이 카필라 성을 찾아왔습니다. 이 노인은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오래도록 수행을 하여 세상 일을 훤히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니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아사다 선인은 곧 왕자를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자를 보고 있는 아사다 선인의 얼굴에는 기쁨과 슬픔의 빛이 함께 나타나 있었습니다. "아사다 선인, 왜 그러시오?" 슈도다나 왕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사다 선인은 눈물을 거두며 말하였습니다. "전하, 왕자님께서는 장차 부처가 되시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면 저는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부처가 되신 왕자님의 모습을 뵙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그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아사다 선인의 말을 들은 슈도다나 왕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왕자가 부처님이 되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왕자가 태어난 지 58일째 되는 날, 슈도다나 왕은 왕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대신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모두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지난번 마야 부인의 꿈을 풀이했던 학자가 외견을 내었습니다. "싯다르타라 하면 좋겠습니다." '싯다르타' 는 인도어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는 뜻이었습니다. "오, 그것이 좋겠소. 과연 왕자의 빛나는 앞날에 어울리는 훌륭한 이름이오." 슈도다나 왕은 왕자의 이름을 싯다르타로 결정하고, 곧 온 나라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경사스럽고 즐거운 일이 계속되는 중에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왕자가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어머니를 여읜 싯다르타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훌륭한 성품은 이미 어릴 때부터 돋보였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에 다른 사람보다 의젓한 것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보통 사람보다 착한 성품과 뛰어난 인품을 지녀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싯다르타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치는 지혜와 다른 사람이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따뜻한 마음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가 영리하고 튼튼하게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슈도다나 왕은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유능한 학자를 데려다가 싯다르타의 교육을 맡겼으며, 틈틈이 무술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10살이 되자 그 또래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만큼 늠름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왕자님은 정말 훌륭하셔." "정말이에요. 훌륭하시고 말고요." 싯다르타의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그것을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싯다르타의 사촌 데바다타는 싯다르타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흥, 비실비실 약해빠진 저런 녀석이 뭐가 훌륭하담?" 데바다타는 사람들이 싯다르타를 칭찬할 때마다 몹시 심통이 난 얼굴로 노려보곤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싯다르타를 골려줄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데바다타는 싯다르타에게 활쏘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싯다르타는 누군가와 겨룬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데바다타는 막무가내로 졸랐습니다. 싯다르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바다타가 먼저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피융!" 데바다타가 쏜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힘차게 날아갔으나, 과녁을 빗나가서 꽂히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은 싯다르타의 차례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잠시 과녁을 노려본 뒤 힘껏 활 시위를 당겼습니다. 데바다타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활을 집어던졌습니다. 화가 난 데바다타는 싯다르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두 사람이 큰길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큰길 가운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데바다타는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코끼리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위처럼 서 있었습니다. "이봐, 모두들 저리로 비켜서지 못해! 쳇, 이까짓 코끼리 한 마리 때문에 웬 수선이람!" 데바다타는 보란 듯이 코끼리 앞으로 나서더니 곧장 코끼리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 순간 코끼리는 커다란 몸집을 기우뚱거리더니, 그만 몸집을 가누지 못한 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싯다르타는 코끼리가 몹시 가여워졌습니다. 저런! 죄 없는 동물을 학대하는 일은 나쁜 짓이야.' 싯다르타는 마음속으로 데바다타의 난폭함을 꾸짖으며, 쓰러져 있는 코끼리에게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싯다르타는 코끼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끼리야, 일어나거라." 싯다르타의 손이 몸에 닿자, 코끼리는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싯다르타의 인자한 마음씨와 신기한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고민하는 싯다르타. 세월이 흘러 싯다르타의 나이 12세가 되었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농경제를 지내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들로 나갔습니다. 농경제란 농민들이 매년 봄마다 곡식의 씨를 뿌리면서 그 해의 농사가 잘되도록 기원하는 행사입니다. 농경국가인 카필라에서는, 왕이 그 해의 농경제가 시작되는 날 첫 삽질을 함으로써 농사를 시작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사르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싯다르타, 오늘은 모든 백성들이 밭에 나가 씨를 뿌리는 날이란다. 너는 장차이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니, 나와 함께 나가서 백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자꾸나." 왕과 왕자는 신하들과 마차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들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농부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는 자기처럼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린 싯다르타의 마음 속에서 뜨거운 동정심이 밀었습니다. 농부들이 겪고 있는 육체적인 고통을, 자신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싯다르타는 또 한 가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크고 작은 새들이 날아오더니, 농부가 파헤쳐놓은 흙 속에서 나온 벌레를 한입에 쪼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처참한 광경은 싯다르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끼리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광경을 처음 본 싯다르타는 몹시 우울해졌습니다. 싯다르타는 고생하며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처참하게 죽어가는 벌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궁전으로 돌아온 싯다르타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커다란 괴로움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날 이후, 싯다르타는 혼자서 사색에 잠겨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보아도, 산새 우는소리를 들어도 서글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미움이나 다톰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을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누구보다도 총명한 싯르타였지만 이러한 의문만큼은 풀 수가 없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시간이 흐를수록 말이 없어지고 생각에만 빠져 지냈습니다. 그토록 열중하던 글 공부와 무예 따위에는 더 이상 관심도 없어 보였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가 하루빨리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옛날처럼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도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어느 화창한 봄날, 오랫동안 궁궐 안에서만 지내던 싯다르타는, 문득 궁 밖으로 나가 바람이나 쐬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슈도다나 왕도 싯다르타의 뜻을 알고 기꺼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온 싯다르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한참 길을 가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한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허리는 활처럼 구부러진 노인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노인을 바라보던 싯다르타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어찌하여 저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냐?" 마부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왕자님. 저 사람은 단지 나이를 많이 먹은 늙은이일 뿐입니다." 마부의 말을 들은 싯다르타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싯다르타는 지금껏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느냐?" "그러하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늙어 가는 것이지요." "늙으면 눈이 어두워져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기운이 없어 잘 걷지 못하며, 이가 빠져서 음식도 잘 먹지 못하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힘없는 목소리로 마부에게 명령했습니다. "마차를 돌려라. 어서 궁으로 돌아가자!" 궁으로 돌아온 싯다르타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이틀 동안 바깥 출입을 끊고, 사람이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틀이 지난 뒤, 싯다르타는 마차를 타고 다시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싯다르타가 걱정스러웠던 슈도다나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싯다르타가 지나가는 길에 늙은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렀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이 날, 늙은 사람 대신 병든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병자의 얼굴은 온통 주름 투성이었고 눈은 움푹 패어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마부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며 누구나 저렇게 되느냐?" 싯다르타의 물음에 마부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 많은 병에 걸리게 되어 있사옵니다. 지금 저 사람도 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란 몹쓸 것이로구나..." 싯다르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한참 동안 병자를 쳐다보더니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람에게는 어째서 늙는 고통이나 병드는 고통이 생기는 것일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싯다르타는 마음이 더욱 우울해져서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싯다르타는 성문을 벗어나 마차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를 태운 마차가 고요한 숲에 이르렀을 때, 맞은편에서 장례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관을 멘 상여꾼과 그 뒤를 따르는 가족들의 슬픈 모습을 보자, 싯다르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부가 입을 열었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이별을 가져다 주는 가장 슬픈 것이랍니다." 싯다르타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며칠 뒤, 싯다르타는 다시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날은 누더기를 걸친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옷차림은 아주 볼품이 없었으나 맑은 눈매와 얼굴에는 거룩한 빛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 노인이 앉아 있는 나무 밑으로 다가갔습니다. 노인은 싯다르타를 쳐다보더니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당신은 무얼 하는 사람이오?" 싯다르타가 물었습니다. "저는 수도승입니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수도승이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오?" "욕심을 버리고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수도승에게는 '자기'라는 말이 없으며, 다른 사람을 '남'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요." "한 마디로 수도승이란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에는 늙음과 병과 죽음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모와 형제의 곁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영원한 평화를 얻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제 곧 해탈에 이르러 영원한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수도승은 싯다르타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일어서서 자기의 갈 길로 갔습니다. 수도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싯다르타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아보였습니다. 수도승을 만나고 난 후 이상하게도 슬프고 우울했던 감정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내가 찾던 길은 바로 이것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내 갈 길을 가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마음먹고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수도승의 말을 마음속에 깊이 되새겨 보았습니다. "노인은 늙지 않기를 바라고 병든 사람은 건강하기를 바란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살아있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욕심 때문에 사람은 더욱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 수도승은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면 걱정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야쇼다라 공주와의 결혼.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가 새로운 괴로움에 휘말려들까 봐 늘 걱정이었습니다. 왕은 싯다르타에게 기쁨만을 주기 위해 좋은 옷을 내리고 왕자궁도 화려하게 꾸며 주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족함이 더해질수록 싯다르타의 마음은 텅 비어 갔습니다. 물질로써 얻어지는 기쁨이란 마음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싯다르타는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수도승을 만난 이후로 더욱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은 싯다르타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어려운 학문을 가르치기로 하였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학자를 뽑아 싯다르타의 글공부를 맡겼습니다. 새로운 스승인 비슈바미트라는 싯다르타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첫날 그의 총명함에 감탄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비슈바미트라로부터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승이 알고 있는 모든 학문을 깨쳤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학문에 열중하는 싯다르타를 보며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슈도다나 왕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싯다르타가 새롭게 얻은 지식은 그의 생각을 바꿔 놓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결심을 한층 더 굳혀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심하던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를 궁 안에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싯다르타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아가씨와 결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싯다르타가 아내를 맞아들이면 혼자서 생각에 잠길 겨를이 없게 될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버려두면서까지 수도승이 되려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자신의 생각을 싯다르타에게 말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우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크게 기뻐하며, 싯다르타를 위해 크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주기로 했습니다. 세 궁전을 짓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힘들게 일했습니다. 흙과 나무를 운반하여 기초를 다지고, 큰 바위를 마당에 옮겨다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살 궁전을 짖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 한 사람의 안위를 위해 저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해야 하는구나.’ 싯다르타는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습니다. 새 궁전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마침내 왕자비가 될 사람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웃 나라의 야쇼다라 공주로, 뛰어난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온나라 백성들은 왕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싯다르타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싯다르타는 일찍 어머니를 여읜 탓에 야쇼다라에게서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을 느꼈습니다. 싯다르타는 이제 우울함 같은 것은 깨끗이 잊은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예전의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며, 아무런 다툼 없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싯다르타가 허공을 바라보며 자주 우울한 모습을 보이자, 야쇼다라의 얼굴에도 어둠이 짙어져 갔습니다. 야쇼다라는 싯다르타의 기분을 바꾸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싯다르타는 그녀의 얼굴을 피하려 했습니다. 출가의 길. 싯다르타의 나이도 어느덧 29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싯다르타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습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출가할 결심을 미루고 있었구나. 이렇게 미루기만 하다가는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음을 맞고 말 거야.’ 싯다르타는 하루 빨리 출가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슈도다나 왕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아바마마, 세상과의 모든 인연은 세월이 지나면 끊어지게 되옵니다.” “진실로 제가 원하는 것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 아무런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옵니다. 부디 제 뜻을 살펴 주시어 제가 수도승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싯다르타의 말을들은 슈도다나 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이 나라 백성을 버리고 떠나겠다니... 네가 없으면 이 나라의 앞날은 장차 어찌 된단 말이냐?” “아바마마, 왕이 된다는 사실은 제게 괴로움을 안겨 줄 뿐입니다. 제게는 오로지 진리의 세계를 찾는 것만이 참된 길이옵니다.” 싯다르타는 수도다나 왕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슈도나나 왕도 더 이상 싯다르타의 출가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음, 장차이 나라의 앞날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왕은 늙음과 죽음 앞에서 너무도 무력해진 자신의 존재를 한탄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출가할 결심을 알린 싯다르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단지 아내 야쇼다라에게는 차마 출가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습니다. 싯다르타는 출가하는 날까지만이라도 자신의 계획을 숨긴 채,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카필라 성에 경사가 생겼습니다. 야쇼다라가 옥동자를 낳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들은 슈도다나 왕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손자가 생긴 것도 기뻤지만 아기가 태어나므로 해서 싯다르타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이런 기쁜 일이 생긴 것도 모른 채, 그날도 성 밖에 있는 숲속에 들어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싯다르타는 터벅터벅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싯다르타는 궁에 이르자마자 아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라훌라!’ 하고 탄식하고 말았습니다. ‘라훌라’란 말은 인도어로 ‘걸림돌’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태어남으로 해서 자신을 옭아매는 인연을 끄나풀이 또 하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좋은 기회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인도의 풍습은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이는 출가가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왕자의 이름이 라훌라로 지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슈도다나 왕은 크게 노했습니다. 야쇼다라도 그 이야기를 듣고 싯다르타를 원망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며칠 후, 싯다르타는 출가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밤에 몰래 왕궁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평온하게 잠든 야쇼다라와 그녀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곧 싯다르타는 아내와 아들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싯다르타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마구간으로 걸어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는 급히 마구간으로 들어가 싯다르타가 가장 아끼는 새하얀 말을 끌고 나왔습니다. 싯다르타는 훌쩍 뛰어 말 위에 올랐습니다. 성을 빠져나오며 싯다르타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곳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싯다르타는 동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습니다. 어느덧 먼 동이 트기 시작하고, 싯다르타가 탄 말은 아노마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싯다르타는 말에서 내려 강물에 몸을 씻었습니다. 물에서 나온 싯다르타는 왕자의 옷을 벗고 미리 준비해 온 수도승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왕자의 옷을 마부에게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궁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아버님께 이렇게 전해 드려라. 뜻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알겠느냐?” “왕자님의 뜻을 알겠사오나,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면 전화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나는 내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주어졌던 왕자로서 누린 특혜와 화려한 생활은 많은 장애가 되었느니라. 모든 것과 인연을 끊고 나니 너무나 홀가분하구나.” 싯다르타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마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왕자님, 부디의 뜻하신 일을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마부는 궁을 향해 걸어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제 마부의 모습은 점점 아득해져 갔습니다. 수행의 가시밭길. 싯다르타는 걸음을 재촉하여 숲속으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싯다르타는 왕자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궁궐, 왕위,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로부터 싯다르타는 혼자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깨달음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된 싯다르타는, 숲속의 나무 밑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낮이 되자 나뭇잎 사이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심한 갈증과 배고픔으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와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방법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문득 마음의 수양을 쌓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싯다르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이제 그는 누가 보더라도 수도승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왕자의 신분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마을에서 바르카바 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고행하고 있다는 아누아 숲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누아 숲은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었습니다. 멀리 숲속에서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많은 수도자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싯다르타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격한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왼팔 하나만으로 몸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있는 사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옆에 바짝 다가 앉아서 전신을 벌겋게 달구고 있는 사람 등 수행의 모습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고통스럽고 어두운 빛이 서려 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바르카바 선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식으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까?” 바르카바 선인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극락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싯다르타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죽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살아서 괴로움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들의 수행이 의미가 없는 것임을 깨닫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남쪽에 있다는 알라라 칼라마라는 선인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알라라 칼라마에 대한 평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너무나 먼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알라라 칼라마 선인을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길고 먼 여행 끝에 싯다르타는 마침내 알라라 칼라마 선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알라라 칼라마 선인은 백발의 노인이었으나,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해 보였습니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칼라마 선인에게 자기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선인은 기꺼이 싯다르타를 받아들였습니다. “먼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나는 벌써부타 그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참으로 대견한 일이오. 부지런히 도를 닦아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바라오.” “고맙습니다, 스승님.” 싯다르타는 그 날부터 알라라 칼라마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알라라 칼라마의 수행 방법은 자기 자신을 잊고 전혀 생각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 싯다르타는, 알라라 칼라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더 높은 수행을 쌓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싯다르타는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선인을 찾아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싯다르타는 짧은 기간 동안에 스승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는 그 모습에 탄복하여, 그 이상의 높은 경지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채, 보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또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싯다르타는 항상 뭔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훌륭하다는 스승을 계속 찾아다녔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완전히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진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나 혼자서 그 진리를 찾아야 한다.’ 싯다르타는 문득 이런 깨달음을 얻고, 우루벨라 마을의 숲에 머물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선인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5명의 수도승들이 싯다르타를 찾아왔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들과 함께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싯다르타의 수행 방법은 당시 인도 수도승들의 수행 방법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몇 톨의 곡식과 두어 모금의 물만으로 끼니를 때우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명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싯다르타는 뼈만 앙상하게 야위어 갔습니다. 싯다르타가 고행하는 이유는, 죽어서 자기 혼자만 좋은 세상에 태어나 행복해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싯다르타는 힘든 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그 방법을 알아낼 결심이었습니다. 그가 수행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싯다르타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더욱더 힘든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진리의 경지에는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수행을 다 해 보았지만, 그가 원하는 진리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의 깨달음. 싯다르타는 자신의 고행 방법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수행 방법은 다른 선인들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육체를 괴롭히는 수행은 오히려 거기에 집착하게 할 뿐이다. 이런 방법으로 진리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몸과 마음을 맑게 하여 마음의 고요를 얻는 것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자 싯다르타는 고행을 중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 기슭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옷을 벗고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싯다르타는 급히 강물에서 나와 옷을 걸치고 강둑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어여쁜 소녀가 우유를 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싯다르타의 여윈 모습을 보고 우유로 죽을 끓여 그에게 주었습니다. 부드러운 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싯다르타는 온몸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5명의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타락했다며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들은 싯다르타의 곁을 떠나 베나레스의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혼자가 된 싯다르타는 그 곳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싯다르타가 들어간 숲 속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여러 그루 있었습니다. 보리수 숲에서는 시원하고 상큼한 바람이 불었고, 숲 아래로 평화롭게 흐르는 강줄기도 보였습니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밤이 되었는데도 싯다르타는 처음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아침이 되었어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문득 싯다르타의 마음속에 신비로운 고요함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이 환하게 열리면서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모아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조용히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드디어 알았다! 진리의 길, 사람이 나고 죽는 것, 그 고통의 정체를 깨달았다!' 싯다르타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껏 알고자 했던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날은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한 지 꼭 21일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를 괴롭혔던 온갖 응어리가 눈 녹듯이 녹아 버렸습니다. 싯다르타는 세상과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또한 그 동안 풀지 못했던 의문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자, 깨달음의 경지에 든 '부처'가 되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오랜 시간 동안 진리를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자기가 바라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때 그의 나이 35세였습니다. 최초의 설법.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이제부터 석가모니 또는 부처님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석가 족의 성자'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는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네란자라 강가에서 함께 수행을 했던 5명의 수도승이 수행하고 있는 녹야원이었습니다. 석가모니가 녹야원을 찾아간 이유는, 그들 다섯 수도승에게 가장 먼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석가모니가 녹야원에 도착해 보니, 다섯 수도승들은 전과 다름없이 고된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으로 열심히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서 석가모니를 보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 "저기 싯다르타가 온다!" "그런데 웬일일까?" "싯다르타가 가까이 오더라도 못 본 척하고 수행이나 계속하세." "물론이지. 타락한 수도승에게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지." 그들은 서로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석가모니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서둘러 석가모니가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들은 내가 와도 모른 체하기로 약속했을 텐데, 이렇게 일어서서 머리를 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도승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석가모니는 이미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나를 '여래'라고 불러라. 나는 이제 부처가 되었느니라." 석가모니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들려 왔습니다. '여래'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 또는 '진리의 세계에서 설법하러 온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곧 다섯 수도승에게 최초로 설법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육체의 욕구에 자기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수도승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수도승들이여, 그렇다면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른 견해와 바른 결심,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생각 그리고 바른 명상을 해야 한다." 석가모니는 부처가 되기 위한 여덟 가지 올바른 길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다섯 수도승은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나서 모두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석가모니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다섯 수도승을 최초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카필라 왕국의 멸망. 석가모니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근심 걱정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석가모니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나라 안에서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슈도다나 왕이 보낸 사람이 석가모니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카필라에서는 석가모니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오래 전부터 생각 하고 있었느니라. 이제 때가 된 것 같으니 가족들도 만나 보고, 그들에게 설법도 할 겸 떠나야겠다." 석가모니는 제자들과 함께 카필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석가모니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슈도다나 왕은 몹시 기뻐하며 궁 밖에까지 나와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3개월이나 걸려서 카필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곧바로 궁으로 향하지 않고, 출가 수행자의 관습에 따라서 집집마다 동냥을 다녔습니다. 슈도다나 왕은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이제 왕족을 욕되게 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 곁에 머물도록 해라." 슈도다나 왕은 싯다르타와 계속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님, 저는 이제 옛날의 싯다르타가 아니옵니다. 저는 제 가족에게 설법을 펴기 위해 온 것이지, 이 곳에 머물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의 단호한 말에 슈도다나 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왕 앞을 물러나온 석가모니는, 설법을 전하기 전에 먼저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아내인 야쇼다라, 그리고 아들 라훌라를 만났습니다. 12년 만에 만난 석가모니 앞에서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아버지인 슈도다나 왕과 가족들을 위하여 설법을 폈습니다. 석가모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석가모니가 카필라에서 설법을 편 지 얼마 안 되어, 감동을 받은 많은 청년들이 출가를 결심하고 찾아왔습니다. 석가모니의 아들 라훌라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무렵, 석가모니에게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슬픈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슈도다나 왕의 죽음과 가장 아끼던 제자의 죽음, 그리고 사촌 데바다타의 배신 등이 석가모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코살라 왕국이 군사를 일으켜 카필라 왕국으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설법을 펴기 위해 돌아다니던 석가모니는, 코살라 군을 만나기 위해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가의 고목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 석가모니 앞을 지나게 된 코살라 왕 비루다카는, 석가모니를 보자 얼른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절을 한 다음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도 많은데 어찌하여 잎이 하나도 없는 고목 아래에 계십니까?" 석가모니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왕이여, 친족이 없는 것은 여기 잎이 없는 고목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카필라 왕국이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석가모니의 뜻을 헤아린 비루다카 왕은 군사를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후 비루다카는 두 번이나 더 군사를 일으켜 카필라로 쳐들어왔지만, 그 때마다 고목 아래 쓸쓸히 앉아 있는 석가모니를 보고 군사를 되돌렸습니다. 석가모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비루다카 왕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루다카 왕은 네 번째로 카필라에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에도 역시 석가모니가 고목 아래에 앉아 있었지만, 비루다카 왕은 마음을 굳게 먹고 석가모니의 옆을 지나쳤습니다. 카필라로 쳐들어온 비루다카의 군대는, 성 안으로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 때 카필라 성은 마하남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왕은 성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광경을 보다못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백성들을 구하리라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마하남 왕은 비루다카 왕에게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소." "그 소원이 무엇인가?" "내가 이 연못 속에 들어가 물 속에 잠겨 있을 동안만이라도 우리 백성들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오." 마하남 왕이 애원하자 비루다카 왕은,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로다. 좋다. 어디 물 속에서 얼마나 견디나 볼까?" 하며 허락했습니다. 마하남 왕은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약속한 대로 왕족과 백성들은 정신없이 성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비루다카 왕은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마하남 왕이 연못 위로 솟아오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마하남 왕은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비루다카 왕은 병사를 시켜 연못 속을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병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하남 왕은 물 속에 들어가 물풀에 자신의 몸을 묶어 놓고 죽어 있었습니다." "뭐라고? 백성을 살리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코살라 왕국 사람들은 마하남 왕의 행동에 감동하여 잠시 동안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나 마하남 왕의 용기 있는 죽음에 대한 보람도 없이, 카필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카필라의 멸망을 지켜본 석가모니는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석가모니는 나라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카필라 백성들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가르침을 펼치는 석가모니. 석가모니의 마음은 갈수록 평온해지고 모습은 한층 위엄을 더해 갔습니다. 어느 날, 석가모니는 아이를 안고 급히 뛰어가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곁에 있는 제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여인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급히 뛰어가고 있느냐?"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워서랍니다. 저 여인은 자기 자식은 목숨처럼 아끼면서도, 다른 집 아이들은 마구 학대한답니다. 그리고 다른 어머니들을 괴롭히기 위해 남의 자식을 훔치기도 하니, 악마와 같은 여인입니다." "너는 지금 아무도 모르게 저 여인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가장 어린 자식을 이 곳으로 데려오너라." "아이를 훔쳐 오라는 말씀입니까?" 제자는 석가모니의 마음을 알 수 없었으나, 무슨 뜻이 있으려니 싶어 아무 말 없이 그 말에 따랐습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석가모니에게 달려왔습니다. "자비로우신 석가모니시여, 제 아이 하나를 누군가가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아직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합니다. 부디 그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석가모니는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자기 자식을 잃고 나서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는가! 그대는 지금까지 남의 자식들을 훔치면서 한 번도 그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여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날 이후, 여인은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누구보다도 바르고 착하게 살아갔습니다. 석가모니가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설법은 아침 일찍 시작되어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가 설법을 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불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판 돈으로 겨우 기름을 마련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설법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등불을 켜 놓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석가모니의 설법이 계속되는 동안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사람들이 켜 놓은 등불은 기름이 다 되어 하나 둘 깜박거리다가 사그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등불만이 꺼질 줄 모르고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 등불은 아주 작아서 금방 꺼질 듯했지만, 처음과 같은 밝기로 계속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석가모니가 그 등불을 보고 물었습니다. "저것은 누구의 등불이냐?" 잠잠한 가운데 나직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제 등불이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아졌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난다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 다시 난다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작은 등불이면서도 가장 늦게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이유가 있을 듯하구나, 소녀야." "저는 단지 기름을 살 돈이 없어 머리카락을 잘라 기름을 마련했을 뿐이옵니다." 난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석가모니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그 정성이 하늘까지 닿고 땅도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모두들 듣거라. 정직하고 정성된 마음이 곧 참된 마음이니, 누구나 난다처럼 참된 마음을 가져라. 참된 마음을 가진다면, 이 작은 등불이 언제까지나 타오르는 것처럼 세상은 밝고 바르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니라."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욕심을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다시 한 번 난다를 바라보며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오늘날 석가모니의 탄생일인 음력 4월 8일에 등을 다는 풍습은 이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영원한 성자. 석가모니의 나이도 어느덧 80세가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습니다.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늙고 병이 드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예감한 석가모니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제자들과 함께 쿠시나가라의 구손하 강으로 갔습니다. 석가모니는 구손하 강물에 몸을 씻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몹시 지친 얼굴로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피곤하구나. 저기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 자리를 마련해 다오." 제자들은 석가모니를 자리에 누였습니다. 석가모니가 사라나무 아래에 눕자 사라나무에 때아닌 꽃이 피어났습니다.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밤에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때처럼 너희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진리에만 의지하며 살도록 해라." 석가모니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슬퍼했습니다. 그 때 한 낯선 수도승이 찾아와서 석가모니의 제자들과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부처님을 한 번만 뵙게 해 주십시오." "안 되오. 지금은 위독하셔서 아무도 만나실 수가 없소." 그는 수바드라라는 이교도였는데, 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석가모니가 병석에 누워 있다는 이유로 그 부탁을 거절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석가모니는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하고 그를 위해 설법을 베풀었습니다. 수바드라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바드라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석가모니는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열반에 든 뒤에라도 언제나 지금과 같은 마음을 간직하기 바란다. 세상은 끝없이 변해 가지만, 항상 변함 없이 배운 것을 깨치고 참된 진리를 깨달아 가도록 노력해라. 내가 없더라도 이러한 것들을 지켜 주기 바란다. 또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부지런해라. 내가 죽은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깨달음이 될 것이니라." 석가모니의 목소리는 차츰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그와 함께 수많은 연꽃잎이 바람결을 타고 날아와 석가모니가 누운 자리에 뿌려졌습니다. 제자들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것을 지켜보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였고,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장례를 마친 다음, 후세 사람들에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것을 글로 적어 두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불경입니다. 이 불경을 통해 후세 사람들은 평생 동안 진리에 의지하며 살아온 석가모니를 영원토록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진정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에 등불이 되어 준 자비와 사랑의 성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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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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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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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의 탄생.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로마는 주변의 여러 나라에 세력을 떨치며 큰 제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지금의 독일, 프랑스, 영국을 포함하고, 동쪽으로는 그리스와 이란,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비롯하여 지중해 쪽의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매우 큰 나라였습니다. 그야말로 로마는 그 당시 세계적인 강대국이었습니다. 이 무렵,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 중에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땅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의 후손들이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도이긴 했으나 돌과 바위가 많은 거친 땅이어서 농사를 짓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주로 목축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유대의 왕인 헤롯 왕이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헤롯 왕은 로마 황제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헤롯 왕은 성격이 포악하여 유대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을 매우 엄하게 다스려 조금만 반항을 해도 사정없이 가죽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아, 이대로는 너무 힘들어." "어서 능력 있고 자비로운 왕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어." "과연 그런 일이 생길까?" "그럼. 선조들의 말에 의하면 분명히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왕이 나타난다고 했어. 나는 그 말을 믿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속히 새로운 왕이 나타나 백성들을 암흑 속에서 구해 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유대에서는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인구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인구 조사가 시작되면 각자 태어난 고향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구 조사를 받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목수 요셉과 그의 약혼녀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밤을 묵기 위해 여관을 찾았으나 빈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데다 아기를 낳을 때가 다 되어 몸이 무거운 마리아는 무척 괴로웠습니다. 한꺼번에 몰려든 사람들로 여관은 이미 만원이어서 요셉은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한참을 궁리하던 끝에 요셉은 여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정이 급해서 그러니 어디라도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여관집 주인 말했습니다. "마구간이 비어 있기는 합니다만." "그 곳이라도 좋습니다." 그날 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성전에서 마리아가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마리아, 너는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태어나게 될 터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그리스 어로 '사람을 악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훗날 예수로 '그리스도'라 부르게 되는데, 이것은 역시 그리스 어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 시간에 베들레헴의 서쪽 성문 밖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동들은 갑자기 동쪽 하늘이 밝고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이 베들레헴에 구세주가 나셨도다. 지금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바로 너희들의 구세주이니라." 목동들은 너무 놀라 부들부들 떨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건 분명 천사의 목소리야. 천사가 구세주의 탄생을 우리에게 알려 준 거야." "아! 이 땅에 구세주가 나셨대. 우리를 구원해 줄 구세주가 탄생하셨대!" 목동들은 기뻐하며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즉시 베들레헴 마을로 향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는 페르시아라는 나라에서는 세 사람의 박사가 별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그 시각, 세 사람의 박사는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는 큰 별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저 큰 별은 분명히 훌륭한 왕이 태어나셨다는 징조다.' 이렇게 생각한 박사들은 그 반짝이는 별을 따라 유대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박사들은 먼저 헤롯 왕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요? 우리는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드리러 온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의 왕은 바로 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헤롯 왕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세 생각을 고쳐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여 그 아기를 찾거든 돌아가는 길에 나한테 꼭 얘기해 주시오. 나도 가서 그 아기에게 경배하고 싶소." 다시 별을 쫓아가던 박사들은 그 별이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곳에는 갓난아기가 말구유에 누워 있었습니다. "위, 위대한 왕이시여!" 세 박사는 아기 예수에게 경배드리고 나서 준비해 온 귀한 예물을 바쳤습니다. 그날 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꿈 속에서 똑같이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헤롯 왕에게 가지 말라. 그가 구세주를 죽이려 한다." 그 꿈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한 동방 박사 세 사람은 헤롯 왕에게 들르지 않고 곧장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동방 박사들이 오지 않자 헤롯 왕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유대 나라의 왕이 태어나다니.'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내 자리가 위험하다.' 헤롯 왕은 궁리 끝에 마침내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라!" 한편, 동방 박사들이 떠난 후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헤롯 왕이 예수를 죽이려 하니 어서 빨리 이집트로 피하시오." 요셉은 곧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집트로 가는 길을 무척 험했습니다. 마실 물조차 없는 아득한 사막과 사나운 들짐승이 날뛰는 거친 들판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길을 가면서도 마리아는 품에 안겨 고이 잠든 아기 예수의 얼굴을 보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기를 안전하게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기 예수는 무서운 헤롯 왕의 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포악한 이스라엘의 왕 헤롯이 죽었다는 소문이 이집트에까지 들려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무엇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그들은 고향으로 가는 길에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새 왕이 되었는데,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오. 아니, 헤롯 왕보다 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소." "그러니 잘 생각하고 가야 할 게요." 요셉과 마리아는 고민 끝에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나사렛은 베들레헴이나 왕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요셉이 예전에 살던 곳이어서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는 나사렛 마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곧잘 도우며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월절이란 오랜 옛날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인도로 구원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기념하는 유대의 명절이었습니다. 예수는 처음으로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였기 때문에 몹시 들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무척 혼잡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오랜만에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볼일을 모두 마친 마리아와 요셉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예수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곧 뒤따라올 줄 알고 먼저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예수는 뒤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찾아 방황하다가 어느덧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리를 헤매 다니던 두 사람은 혹시나 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는 성전 안에서 나이 많은 훌륭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얘야, 우리가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마리아가 호통을 치자 예수가 대답했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아버지이신 하나님 집에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서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잃었던 아들을 찾은 것만으로도 매우 기뻤습니다. 예수는 자라면서 점점 지혜로워져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덧 예수의 나이는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광야의 유혹. 그 무렵,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예언자로 알려진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유대 땅을 돌아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졌느니라." 또한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 의식은 낡은 생활을 씻어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분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실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어느 날,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사렛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요단강으로 왔습니다. 요한은 예수를 한눈에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찌 주님께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도리어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세례 받기를 거듭 부탁하자, 요한은 예수를 강물 속으로 인도하여 몸을 담그게 하고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로부터 고요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음성을 들은 요한은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내 뒤에 오실 위대한 분이 바로 이분이십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사랑하사 고통에서 건져 낼 구세주이십니다."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기도 했으며, 소리 높여 '구세주!' 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예수는 혼자 광야로 걸어갔습니다. '내가 정말 예언자 요한의 말대로 고통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예수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기도를 하느라 몹시 지쳐 있을 때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시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가 당당하게 말하자 사탄은 예수를 큰 성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예수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탄은 마지막으로 예수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간 뒤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는 나라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절을 하면 저 나라를 당신에게 주겠소." 예수는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나의 하나님만 믿을 뿐이다." 예수가 위엄 있게 말하자 사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낸 것입니다. 이 때 예수의 나이 서른 살이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40일 동안의 금식 기도를 마친 예수는 마음이 후련하고 매우 상쾌했습니다. 때마침 아침 해가 떠올라 광야를 찬란히 비추었습니다. 예수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쓰러질 듯이 나사렛 마을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습니다. 오랜 금식으로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았지만 그의 눈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예수는 여러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데 어부 두 명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중 한 사람을 향하여 말을 건넸습니다. "나를 따르시오. 당신들은 지금 물고기를 낚는 어부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저희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는 다시 힘주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니 아무 염려 말고 나를 따르시오."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두 어부는 고기를 잡던 그물을 그대로 버려둔 채 예수를 뒤따랐습니다. 두 어부 중 한 사람은 시몬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는 얼마쯤 가다가 또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제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서 나중에는 12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했고 사회적인 지위도 낮았지만, 예수는 이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꾼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기적. 어느 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척집에서 결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리아는 물론이고 예수와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혼 잔치에 온 손님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금세 포도주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요리하는 사람이 몹시 걱정하는 것을 보고 마리아가 예수에게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하인들에게 일렀습니다. "거기 있는 빈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시오." 하인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그들에 게 다시 일렀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퍼서 손님들에게 갖다 주시오." "선생님, 이것은 물인데요?" 하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항아리의 물을 맛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은 어느 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리 지방의 가나에서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는 그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나인이란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마을 입구에서 상여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느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 불쌍한 홀어머니를 위로했지만,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은 무엇으로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저 목 놓아 울고만 있었습니다. 예수는 울고 있는 여인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울지 마시오." 하고 위로하고 난 뒤, 상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외아들의 시체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말을 했습니다.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자, 어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인은 성경에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동네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예수의 기적은 온 유대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던 중 배 위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사나워지더니 파도가 거세어지고 배가 마구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예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는 마치 파도를 꾸짖듯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바람아, 파도야. 잔잔해져라!" 그러자 조금 전까지 사납게 불어 대던 바람이 멈추고 거센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는 넋을 잃고 어리둥절해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다시 한번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한 마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둥병자들이 예수에게로 와서 매달렸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문둥병이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문둥병은 의사들도 고칠 수가 없어서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라 생각하고 문둥병 환자들을 멀리했습니다. 예수는 문둥병 환자들의 머리에 일 일이 손을 얹고 기도한 후 외쳤습니다. "깨끗이 나을지어다." 그러자 문둥병이 순식간에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고, 앉은뱅이들을 걷게 해 주었으며, 중풍 환자를 고쳐 주는 등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예수가 이렇게 많은 병사들을 치료해 준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로우심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는 제자들을 이끌고 광야로 가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그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여러 가지 뜻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식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 제자가 예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곳은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설교를 멈추고 저 사람들을 이만 마을로 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니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여라." 제자들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예수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이라고는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는데,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의 수는 남자 어른만 해도 5,000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를 올린 후,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빵과 물고기는 나누어 줄수록 자꾸 이리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12개의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에 감탄하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느 날,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야기를 들을래." "안 돼. 너 같은 어린아이들이 듣는 얘기가 아니란 말야. 저쪽에 가서 놀아." 제자들은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귀찮다는 듯이 아이들을 쫓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라고는 아이들을 가까이 오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예수에게로 달려가 목을 끌어안기도 하고 무릎 위에 올라앉기도 했습니다. 예수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습니다. 성전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돈을 헌금으로 바치고 있는 가운데 어느 가난한 여인이 와서 렙톤 2개를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렙톤이라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의 돈 중에서 제일 작은 단위였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저 가난한 여인은 부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쳤다."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부자들보다 가난한 여인이 더 많은 것을 바쳤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바쳤지만 그것은 그들의 많은 재산에 비하면 아주 적은 것이다." "가난한 여인은 비록 렙톤 2개를 바쳤지만 그 돈은 그 여자의 생활비 전부이다. 그러니 부자와 가난한 여인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바친 것이 되겠느냐? 무슨 일이든 자기의 온 정성을 다 하면 그것이 바로 큰 복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금을 거두는 세리였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일부를 로마 황제에게 바쳤는데, 세리들이 이 권한을 악용하여 부당한 세금을 마구 거두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가 삭개오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보려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 주위로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키가 작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궁리 끝에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 예수의 행렬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저분이 예수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예수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가까이에 온 예수가 걸음을 멈추더니 나무 위를 바라보며 그를 불렀습니다. "삭개오야!" 그 순간 삭개오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예수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예수가 다시 말했습니다. "속히 나무에서 내려오너라. 오늘 밤을 너희 집에서 머물겠다." 삭개오는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몹시 기뻤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는 예수를 자기 집으로 안내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이 미워하는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겠 "예수님이 죄인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저런 자를 상대하시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군."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에게 지난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백하며 크게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이제부터 제가 소유한 것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새사람이 된 삭개오는 이날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평생토록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가 감람산으로 가던 길에 성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죄를 지은 한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잡아 왔습니다." "모세는 죄를 지은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 여자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돌로 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에게 한 가지의 죄도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나와서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슬금슬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마침내 끌려온 여자만 남게 되자 예수는 그 여자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그대의 죄를 질책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모두 가 버렸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라." 예수는 이렇게 말하고 성전을 떠났습니다. 여인은 그 자리에 선 채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선한 이웃.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유대 사람이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유대 사람을 때려 기절시킨 후 돈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쓰러져 있는 유대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한참 후에 이번에는 레위 사람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레위 사람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 역시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다음에 그곳을 지나게 된 사람은 유대 인들이 미워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오래전부터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유대 사람을 자기의 나귀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을 불러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지금 급한 일을 보러 가는 중이기 때문에 곧 떠나야 합니다. 여기 돈이 있으니 이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잘 돌보아 주십시오. 만일 돈이 모자라면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갚아 드리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곧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제사장입니까, 레위 사람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사람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그야 제일 친절하게 대해 준 사마리아 사람이지요." 예수는 음성을 가다듬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이제부터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이렇게 주변에 있는 것을 비유로 들어 누구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습니다. 예수의 소문은 널리 퍼져 예수가 가는 곳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 병자들을 고쳐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소금은 반찬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생선 따위를 절이는 데 사용하면 상하지 않아 오래도록 저장해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밖에 오랫동안 놓아두면 짠맛이 없어지고 쓴맛을 내게 되어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소금은 짠맛을 잃지 않고 소금의 역할을 다할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소금과 같으니 이 세상이 썩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겼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또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깜깜한 밤에 세상을 비추게 되면 주위는 그만큼 밝아질 것입니다. 그런 빛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어두워지겠습니까? 여러분은 부디 세상의 빛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예수는 또 밀알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밀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한 알의 밀이라도 땅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는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여러분도 한 알의 밀과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여러분은 아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땅에 떨어지지 않은 밀알처럼 되고 맙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날이 갈수록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을 당신이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해 주시오." "우리는 사이가 좋은 사람에게는 좋게 대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나쁘게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에게 좋지 않게 대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들이 잘되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예수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유대교에서 가르친 것과는 다른 것에 대해 매우 놀랐습니다. 어느 날, 갈릴리호숫가의 언덕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예수는 모인 사람들을 향해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크리스트 교도들의 덕행에 관한 설교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 슬픈 일이 있어도 다음에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또 늘 옳은 일을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렇듯 여러분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을 큰 상이 하늘나라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쉽게 용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용서하지 못하고 거세게 비판합니다. 예수는 이 점에 대해서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이 비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남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그 비판으로 인해 여러분은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더 큰 티는 깨닫지 못합니까? 먼저 여러분 자신의 눈 속에서 티를 빼낸 후에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예수가 행한 일들이 널리 퍼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높이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높은 지위에 있는 대제사장이나 바리새파의 율법 학자,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보다 더 유명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야말로 자기들을 구해 줄 위대한 분이요,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인 데다가 사람들을 헛된 말로 유혹하는 거짓말쟁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일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이런 소문을 듣자 점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의심한 나머지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팔아넘기려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원수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예수는 열두 제자와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 하나가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디에다 유월절 음식을 마련할까요?"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통을 이고 가는 한 여인을 만날 것이다. 그 여인이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 그 집 주인에게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방을 알아보라' 했다고 전해라. 그러면 주인이 알아서 이층 방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그 곳에다 유월절 음식을 준비해라." 베드로와 요한이 성 안에 가 보니 정말 예수가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다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일일이 씻겨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사양했습니다. "선생님, 이게 웬일입니까?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되어라.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해라. 그래서 내가 먼저 너희에게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니라." 제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예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겼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준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무척 원하였다." 예수는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습니다. "들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그리고 다시 포도주 병을 들어 제자들에게 일일이 따라 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다. 나는 오늘 너희들에게 진심으로 약속하겠다. 하늘나라의 내 아버지 집에서 너희를 다시 만나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될 그날까지 나는 절대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입에 대지도 않을 것이니라." 그런 다음 예수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이 열두 사람 가운데 나를 원수의 손에 넘겨줄 사람이 있다. 나는 내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그러자 방 안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질이 급한 제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게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때, 가룟 유다가 밖으로 슬그머니 나갔지만 다른 제자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있는 곳을 알리러 간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미리 약속을 해 두었던 것입니다. 유다는 나중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자, "내가 죄 없는 예수님을 배반했구나. 아, 내가 죽을죄를 짓고 말았구나." 하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나서 예수는 말없이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둘러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 모두들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예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희들은 오늘 밤 모두 나를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이 근심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 것을 알고 기도를 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저쪽으로 가서 기도를 드릴 테니 너희들은 여기서 기도를 드리거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고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제자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이미 아는 예수의 기도는 무척 간절했습니다. "하나님,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어 어떠한 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를 마친 예수가 돌아다보니 세 제자는 모두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습니다. "베드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어찌하여 잠의 유혹에 빠졌단 말이냐. 일어나 기도하거라." 예수는 세 제자를 깨운 뒤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저들이 항상 깨어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잠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친 예수가 뒤돌아보니 세 제자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 모두들 일어나거라. 나를 원수에게 팔 사람이 가까이 와 있다." '나를 원수에게 팔 사람'이란 제자인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잠시 후, 예수의 말대로 유다가 나타났습니다. 그 뒤에는 대제사장과 로마 병사들이 무기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보자 가까이 다가와서 예수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병사들에게 그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였습니다. 유다의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예수에게 우르르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과 함께 온 한 종의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예수는 그 광경을 보고 베드로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베드로,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병사들 앞에 태연하게 나섰습니다. 두려운 빛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를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가야바의 집에는 여러 제사장들과 율법 학자와 구경꾼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가 잡혀가자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갈까 봐 두려운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용기를 내어 몰래 병사들의 뒤를 밟아 예수가 끌려들어 간 가야바의 집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틈을 타 베드로는 슬며시 가야바의 집 마당으로 들어가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여자 하인 하나가 베드로를 보더니 물었습니다. "당신은 저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흠칫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나는 저 사람을 본 적이 없소." 그러자 또 다른 하인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번에도 딱 잡아떼었습니다. "아니오, 나는 예수를 오늘 처음 보았소."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전에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종의 친구 되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예수와 함께 다니는 걸 여러 번 보았소. 어서 바른대로 말하시오." "무슨 소리요. 나는 정말로 예수라는 사람을 모르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닭이 울기 전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가 했던 말이 베드로의 귓전에 울렸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예수의 말대로 닭이 울기 전 자기의 스승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틈을 빠져 나와 얼굴을 감싸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후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박힐 수는 없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한편, 대제사장과 율법 학자와 장로들은 예수를 잡아 오긴 했으나 무슨 죄명을 씌워야 할지 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예수의 죄를 말했으나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소. 당신들은 곧 내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것을 볼 것이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오." 대제사장은 예수의 말을 듣고 나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도 다 들으셨지요? 이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있소. 우리는 이 사람이 나사렛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는 것을 다 알고 있소.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이런 거짓말이 또 어디 있겠소?"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런 자는 당장 사형에 처하시오." "네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는 그들에게 온갖 모욕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는 가야바의 집에서 끌려 나와 그 당시 예루살렘의 로마 총독 빌라도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로마 총독의 허락 없이는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으므로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이렇게 고발했습니다. "이 자는 자기가 유대의 왕이라고 주장하며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결과, 예수에게 잘못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풀어 주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내가 심문한 결과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가 없소." "이 자는 죄인입니다. 목수 주제에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떠들고 다녔습니다. 이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빌라도는 더 이상 예수를 풀어 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강도를 합하여 예수까지 모두 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유월절이어서 죄인 한 사람을 용서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이 예수를 용서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물었습니다. "세 사람 중에 누구를 놓아주는 게 좋겠소?" 그러자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외쳤습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십시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미리 사람들을 선동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그러면 저 예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고 싶어 몇 번이나 물었지만, 군중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손을 물에 씻으면서, "이 사람이 흘리는 피는 나와 상관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요."라고 말하며 예수를 군중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행한 여러 가지 기적에 대해서 이미 들었던 터라 그를 처형하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유대가 말썽 없이 조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결정한 일에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이리하여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죽음. 병사들은 가시관을 만들어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몸에는 붉은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관을 쓴 예수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 당시는 누군가가 사형 선고를 받으면 십자가에 산 채로 못을 박는 무서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지쳐서 비틀거리는 예수에게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는 쓰러졌고, 병사들은 더욱 심하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예수는 너무 지친 나머지 쓰러진 채 더 이상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안 되겠는데." "골고다까지 못 가겠어." 병사들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예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때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그를 불러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슬피 우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는 고통 중에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다만 나의 길을 가는 것뿐이오.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그대들과 그대들의 자손을 위하여 슬퍼하시오." 예수는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목이 마른 예수에게 주었으나 예수는 받지 않았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함께 끌고 온 두 죄수도 못박았습니다. 한 죄수는 예수의 오른편에, 또 한 죄수는 예수의 왼편에 못박힌 채 세워졌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오전 9시경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머리 위에 '유대 인의 왕 예수'라고 써 붙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에게 다가와서는 침을 뱉으며 조롱했습니다. "이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야. 네 자신부터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대제사장들과 관원들도 그들과 함께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이봐, 이스라엘의 왕!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병사들도 예수를 조롱하고 신 포도주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네 자신이나 구원하여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한 사람도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러니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하시오." 그러나 다른 한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는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오."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세상이 칠흑처럼 어두워지고 천둥 번개가 쳤습니다. 오후 3시쯤, 예수는 큰 소리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 기도를 마친 예수는 곧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의 커다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로구나."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을 안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까지 시체를 십자가에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와 두 죄수의 시체를 치워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를 따르던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병사를 시켜서 예수가 죽었는지 확인한 후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골고다로 가서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고 있을 때,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헝겊으로 쌌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매장한 일이 없는 새 무덤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그곳에 모셔 두었습니다. 이때,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라왔던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예수의 시체를 어떻게 모셔 두었는지 살펴본 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말했습니다. "총독님, 그 거짓말쟁이 예수가 살아 있을 적에 3일 만에 자신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을 시켜서 3일 동안 그 무덤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감춘 후에 예수가 살아났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 전체가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병사들이 있으니 데리고 가서 잘 지키도록 하시오." 대제사장과 바리새 파 사람들은, 예수의 무덤으로 가서 무덤 입구를 돌로 단단히 막고 그 곳에 군인을 배치하여 밤낮으로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부활한 예수. 안식일 다음 날,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를 따르던 몇 명의 여자가 향료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던 큰 바위가 옆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의 무덤은 굴처럼 판 곳에 하얀 천으로 싼 시체를 놓고 입구에는 넓적한 바위를 뚜껑처럼 막아 놓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에 여인들은 몹시 놀라 허겁지겁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무덤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으며 예수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누가 시체를 훔쳐 간 모양이야." 여인들은 충격과 허탈함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예수의 제자들에게로 달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인들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슬퍼하지도 마시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천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수의 시체를 쌌던 흰 천이 놓여 있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속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시어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하십시오.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여인들은 도무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그때, 여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여인들이여, 두려워 마시오. 나는 이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오. 그러니 내 제자들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해 주시오." 여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제자들이 있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어요. 조금 전에 우리 앞에 나타나셨어요." 여인들은 예수를 만난 이야기와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곧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예수의 시체를 쌌던 흰 천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은 곧 세상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들을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였는데도 두 제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가 이렇게 묻자 두 제자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 제자가 얼굴에 슬픈 빛을 띠며 예수에게 되물었습니다. "당신도 지금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인 모양인데 그 소문을 못 들었단 말이오?" "도대체 무슨 소문 말입니까?" "우리의 스승이셨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얘기 말이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을 만났다고도 합니다." "그래요? 그 일은 예수가 이전부터 그렇게 되리라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두 제자는 마음속으로 괴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예수와 두 제자는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사방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여보시오!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 머물도록 하십시오." 두 제자가 이렇게 권하자 예수는 선뜻 승낙했습니다. "그러지요." 두 제자와 예수가 저녁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던 날처럼 기도를 한 뒤 빵을 떼어 두 제자에게 주었습니다. 그 때서야 두 제자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빵을 나누어 준 그 사람이 바로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예수가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를 만난 사실을 들려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아버지 집으로. 안식일 다음 날, 제자들은 문을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모두들 잘 있었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낸다." 예수를 직접 본 제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날 자리에 없었던 제자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손바닥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난 후,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방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가 그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도마의 의심하는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도마여!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 보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거라." 도마는 너무나 놀란 데다 예수를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그러자 예수가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도마는 나를 보고서야 믿었지만, 정말 행복한 사람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다." 그 후에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일곱 제자 앞에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호수에 나와 있었으나 그때까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예수는 호숫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고기를 좀 잡았습니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하자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배의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의 말대로 했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들어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요한이 예수를 알아보고 외쳤습니다. "선생님이시다!" 제자들은 급히 그물을 끌어 올리고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어서 아침을 들 거라." 식사가 끝난 후, 예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먹이거라." 예수가 말한 '내 양'이란 바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부활한 지 40일째 되는 날, 예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서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행하였습니다. "자, 너희들은 이제부터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내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나는 이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지만, 내 영혼은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있으면서 너희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며 늘 너희들이 하는 일을 지켜 줄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후 예수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후,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예수의 생애와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 크리스트 교가 전해진 것은 바로 이 제자들의 복음 전파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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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그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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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아, 노랑 크레용 좀 빌려줄래?” “여기 있어. 가져가서 써.” 민이는 남이 보지 못하게 가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그림을 그렸어요. “민아, 바르게 앉아서 그림을 그려야지.” 선생님이 민이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어요. “아, 아니요. 전 이게 편해요.” 교실 벽에 친구들이 그린 그림이 나란히 붙었어요. 친구들은 그림을 보며 종알종알 이야기했지요. “민아, 저건 뭘 그린 거야? 하마야?” “아냐! 우리 엄마야!” “그럼, 저건 뭐야? 돼지?” “아냐! 내 동생이란 말이야!” 친구들이 그림을 보고 놀리자 민이는 속이 엄청나게 상했어요. 집에 오자마자 민이는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어요. “엄마, 난 왜 이렇게 그림을 못 그려?” 엄마가 보기에는 엄마의 큰 입과 동생의 통통한 볼을 잘 그린 것 같은데? 그림은 똑같이 그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저 즐겁게 그리면 되는 거란다. 그래도 민이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어요. 민이는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두고 봐. 열심히 그림 연습을 해서 모두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민이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숲속 깊이 걸어 들어갔어요. 한참을 가자, 초록 풀밭이 넓게 펼쳐진 들판이 나왔어요. 들판에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다녔어요. “토끼를 그려야지.” 민이가 열심히 토끼를 그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어요. “오, 대단한걸!” 주위를 둘러보니 두더지가 고개를 내밀고 민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네요.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네 그림 말이야. 어떻게 ‘귀길쭉발길쭉땅땅이’를 아니? 아주 오래전에 땅속에 살았던 동물이야. 아무도 이 동물을 제대로 그린 적이 없는데 지금 네가 그렸잖아!” “이 정도쯤이야! 뭐.” 민이는 갑자기 우쭐해졌어요. “이 그림 너한테 선물로 줄게.” 두더지는 민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열 번이나 하고는 그림을 들고 땅속으로 쏙 들어갔어요. 민이는 들판을 걸어가다가 커다란 나무를 보았어요. “저 새를 그리면 좋겠다.” 민이는 나무에 앉은 새를 열심히 그렸어요. “정말 멋져!” 난데없는 말소리에 민이가 둘러보니, 파랑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민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뭐가 멋지다는 거야?” “네 그림 말이야. 어떻게 ‘날개팔랑알록달록새’를 아니? 아주 옛날에 살던 귀한 새야. 아무도 이 새를 제대로 그린 적이 없는데, 지금 네가 그렸잖아!” 민이는 그 말에 또 우쭐해져서 파랑새에게 그림을 선물했어요. 민이는 들판을 걸어가다가 맑은 연못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았어요. “저 물고기를 한번 그려 볼까?” 민이는 물속의 물고기를 열심히 그렸지요. “정말 훌륭해!” 이번에는 개구리가 동글동글 눈을 뜨고 민이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뭐가 훌륭하다는 거야?” “네 그림 말이야. 어떻게 ‘연못저깊숙이물고기’를 아니? 연못 아주 깊숙이 살아서 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지금 네가 그렸잖아!” “헤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 그림 너한테 선물할게.” 개구리는 너무나 기뻐서 민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서른 번이나 하고는 연못에 뛰어드는데. 풍덩! “앗, 차가워!” 민이의 얼굴에 연못 물이 튀었어요. “어? 내가 졸았나 봐!” 민이는 조금 아쉬웠지만,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주섬주섬 챙겨 집으로 향했어요. 집에 돌아온 민이는 생각했지요. ‘그래! 그림은 즐겁고 신나게 그리는 게 중요해. 내가 느끼는 대로 그리면 되는 거지 뭐!’ 민이는 힘차게 크레용을 들었어요. “자! 오늘 만난 친구들을 그려 볼까?” “민이야, 지금 뭐 그리는 거야?” “아, 이거? ‘입삐뚤코삐뚤이상해왕자’야. 그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생겼거든. 너희도 나처럼 마음껏 그려 봐!” 민이는 이제 미술 시간이 가장 즐거워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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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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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원님’소리만 들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어. 바로 대나무골 사람들이었지. 원님들이라고는 하나같이 마을 일은 돌보지 않고 흥청망청 놀고, 요리조리 거짓말을 둘러대며 온 마을 재산을 싹싹 긁어 갔지. 그러니 사람들의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참다못한 대나무골 사람들이 일어섰어. “이렇게 한숨만 쉴 게 아니라 우리 손으로 직접 원님을 뽑읍시다!” “옳소! 나라에서 보내는 원님은 믿을 수가 없어요!” 곧 젊은이들이 길을 떠나 이 마을 저 마을에 원님을 뽑는다는 글을 써 붙였어. 때마침 막둥이네 세 형제도 그 글을 보았어. 큰형이 기뻐서 입이 벌어지며 말했지. “하하, 누구나 원님이 될 수 있다고?” 그러자 작은형이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어. “이야! 형님, 우리도 한번 해 봐요.” 막둥이의 두 형은 오래전부터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해 왔거든. 두 형들이 과거 공부를 하는 동안 막둥이는 형들 대신에 일을 해야 했어. 그래도 잠을 줄여 가며 틈틈이 공부를 했지. 막둥이도 원님 시험을 꼭 보고 싶었어. “형님들, 저도 같이 가요!” “네가 원님 시험을 보겠다고? 흥! 원님은 아무나 하나. 네 마음대로 해라!” “조용히들 하시오. 합격자를 발표하겠소. 대나무골 원님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바로.” “막둥이요!” 막둥이는 깜짝 놀라 외쳤어. “잠, 잠깐만요! 저는 답을 하나도 안 적었는데요.” 막둥이의 말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어. “답을 적지도 않은 사람을 합격시키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 막둥이는 콧방귀 뀌는 형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어. 원님 시험이 치러지는 대나무골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지. 어떤 사람은 끝도 없이 책을 줄줄 외고. 어떤 사람은 눈 감고도 글씨를 척척 쓰고. 또 어떤 사람은 거꾸로 서서 글을 술술 읊었어. 모두 내로라하는 똑똑한 젊은이들이었지. 둥! 둥! 둥! 드디어 원님 시험이 시작되었어. 먼저 김 씨가 시험을 보러 들어가고. 조금 뒤에 안에 있던 대나무골 훈장님이 밖으로 나왔지. 그러더니 김 씨가 활짝 웃으며 나오는 거야. 이 씨, 박 씨, 송 씨 차례에도 똑같았어. 그것참, 이상한 시험이지? “막둥이, 들어오시오!” 막둥이는 침을 꼴깍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어. 훈장님은 막둥이에게 문제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지. “중국의 유명한 맹꽁짱깡짱의 글을 적으시오.” 막둥이는 맹자, 공자는 알아도 맹꽁짱깡짱은 처음 들었어. 막둥이는 끙끙 머리를 싸맸지. 그런데 훈장님이 쓰윽 일어나서는 밖으로 나가는 거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오겠소.” ‘아무래도 내 공부가 부족했나 봐. 원님 시험에 합격하기는 다 틀렸어!’ 그런데 훈장님이 앉아 있던 자리에 낡은 책이 한 권 놓여 있는 거야. 막둥이는 책을 펼쳐 보았지. 어어? 그 책 속에 맹꽁짱깡짱의 글이 떡하니 적혀 있네! 그 순간, 막둥이는 손이 벌벌벌, 가슴이 두근두근했어. 막둥이는 시험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어. 밖에서는 시험을 보고 나온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군수군했지. “아니, 자네 문제도 그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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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씨와 깔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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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마을에 진진 씨라는 펭귄이 살았어요.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펭귄들은 모두 진진 씨를 찾아가 의논했지요. 진진 씨는 언제나 진지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어요. 그러면 마을 펭귄들은 모두 감탄을 했지요. “이야, 어쩌면 그리 생각이 깊으신지!” 그러던 어느 날, 진진 씨네 이웃집에 한 펭귄이 이사를 왔어요. 안녕하세요? 난 깔깔 씨라고 해요! 아저씨 수염이 깔깔해요? 깔깔 잘 웃어서 깔깔이란다. 재미있는 이웃이 생겼네요. 며칠 뒤, 진진 씨의 아들이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팔을 다치고 말았어요. 진진 씨는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죠. 그때 깔깔 씨가 문병을 왔어요. 펭귄 마을은 무척 바빠졌어요. 물고기를 모아 둘 창고를 짓기로 했거든요. 밤낮으로 일하느라 펭귄들은 모두 지쳤어요. 진진 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깔깔 씨는 갑자기 어디론가 가네요. 어? 누구지? 깔깔 씨 좀 봐! 으하하! 깔깔 씨 덕분에 피곤이 풀렸어. “후유!” 요즘 갑자기 물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는대요. 그러면 창고도 쓸모없어지게 되니 마을의 펭귄들은 한숨만 늘었지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펭귄들은 회의를 열기로 했어요. 진진씨는 화가 났어요. “깔깔 씨, 물고기가 안 잡히는 건 큰 문제예요! 우리 펭귄들이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옵니까!” 진진 씨의 말에 펭귄들은 웃음을 뚝 그치고 푹푹 한숨을 쉬기 시작했어요. “후유!” “자, 이것 좀 보세요.” 깔깔 씨는 한숨을 쉬는 펭귄들을 보더니, 사진 한 장을 꺼냈어요. 바다사자가 밤에 몰래 나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한꺼번에 잡아가는 모습이었어요. 진진 씨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어요. “얼마 전에 밤낚시를 갔다가 이걸 봤어요. 좀 더 지켜보다가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얘기해야 될 것 같군요.” 다음 날, 다시 마을 회의가 열렸어요. 깔깔 씨는 어제와 다른 진지한 모습으로 이야기했지요. 당장 바다사자를 찾아갑시다! 아뇨, 힘으로는 당하지 못해요. 방법을 찾아야 해요. 바다사자는 환한 달밤에 고기를 잡아요. 배는 북쪽 바위섬 사이에 두지요. 오늘 밤에 달이 뜰 거야. 작전 개시! 역시! 밤에 물고기를 잡으려고 낮에 미리 잠을 자고 있군. 어서 배에 구멍을 내자! 그물도 여기저기 찢어 두자! 깔깔 씨와 펭귄들이 바다사자 앞에 섰어요. “바다사자 씨, 물고기를 그물로 마구 잡다 보면 언젠가는 바다사자 씨가 먹을 물고기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 거예요.” “미안합니다. 내가 욕심을 부렸어요. 이제부터는 낚시로 먹을 만큼만 잡을게요.” 펭귄들과 바다사자는 화해를 하고 물고기 창고도 함께 쓰기로 했지요. 진진 씨는 깔깔 씨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깔깔 씨, 물고기 창고에서 화낸 건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잘못 생각했어요. 어떤 때라도 웃음을 잃지 않는 당신이 부러워요.” “진진 씨, 나도 당신이 부러워요. 진지하고 지혜로운 그 눈빛은 믿음을 주지요.” “하하, 그럼 우리 서로에게 부러운 점을 배웁시다.” 진진 씨와 깔깔 씨는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그 뒤로 진진 씨와 깔깔 씨는 뭐든지 함께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지요. 여보게, 진진이. 안경! 아니, 안녕도 아니고 안경이라니! 앗! 으하하, 깔깔이 자네는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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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진짜 좋은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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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방글방글, 바람이 소곤소곤, 꽃향기는 소올솔. 꼬마 토끼가 활짝 웃으며 깡충깡충 뛰어가요. 나무 뒤에 있던 여우와 너구리가 토끼를 보고 놀렸어요. “저 큰 발 좀 봐. 야, 왕발이!” 꼬마 토끼가 당근밭에서 오도독오도독 당근을 베어 먹는데, 또 여우와 너구리가 나타나 놀렸어요. “와, 저 튀어나온 이빨 좀 봐. 야, 갈갈이!” 화가 난 꼬마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자, “하하, 저 나팔 귀 좀 봐. 야야, 나팔 귀!” 꼬마 토끼는 연못가에 앉아 물끄러미 물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여우랑 너구리 말이 맞아. 나는 정말 발도 크고, 이빨도 튀어나오고, 귀도 길쭉해.’ 꼬마 토끼는 슬퍼져서 훌쩍훌쩍 울었어요. “넌 얼굴에 까만 안경을 쓴 것 같은 못난이야!” 여우의 말에 너구리는 화가 나 펄쩍펄쩍 뛰었어요. “내가 못난이라고? 이제 너랑 안 놀아, 이 까불아!” “딱따구리는 숲속에서 일어난 일은 모르는 게 없어. 딱따구리에게 딱 맞는 별명은 뭘까?” “두더지는 제일가는 굴 파기 선수야. 땅속에 지은 집이 얼마나 멋지다고!” “멧돼지는 많이 먹는 것만큼 힘도 세. 통나무도 쿵 쓰러뜨리고 바위도 척척 굴리지.” 숲속 친구들에게 어울리는 ‘좋은 별명’은 뭘까요? “곰은 마음이 참 착해. 화도 잘 안 내고. 곰에게는 어떤 별명이 좋을까?” “다람쥐는 참 부지런해. 먹이를 구하면 다 먹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두지.” “얘야, 왜 그렇게 시무룩하니?” 꼬마 토끼는 놀림당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털어놓았어요. “네 큰 발과 큰 귀는 위험을 잘 피하게 해 준단다. 튀어나온 이빨로는 딱딱한 것을 잘 먹을 수 있지. 그것들은 놀림당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자랑할 점이란다.” 할머니의 말씀에 꼬마 토끼는 활짝 웃었어요. “와, 정말 그러네요!” 꾀돌이 여우는 멋진 생각을 해냈어요. “얘들아, 숲속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좋은 별명을 붙여 주면 어떨까?” “우아,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니? 아무튼 여우는 꾀돌이라니까!” 꼬마 토끼와 여우와 너구리는 머리를 맞댔어요. 꼬마 토끼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나쁜 별명으로 부르면 서로 다투게 되고 기분도 나빠져. 맞아! 좋은 별명을 지어 주는 거야! 그럼, 친구의 좋은 점을 찾게 되니까 기분도 좋아지고 더 친해지지 않겠어?’ 여우는 깜짝 놀랐어요. “내가 왜 꾀돌이야? 내 별명은 까불이인데.” “네가 가끔 까불기는 하지만 머리가 좋잖아. 너는 꾀 많은 꾀돌이야.” 여우는 좋아서 얼굴이 발그레해졌어요. 너구리도 깜짝 놀랐어요. “내가 왜 멋쟁이야? 내 별명은 못난이인데.” “네 눈은 까만 안경을 쓴 것 같고, 털은 회색 양복을 입은 것 같잖아. 그래서 넌 멋쟁이야.” 너구리도 신이 나서 입이 헤벌쭉 벌어졌어요.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여우는 더 이상 까불이처럼 까불지 않고 꾀돌이처럼 똑똑해졌어요. 너구리도 못난이가 아니라 멋쟁이 신사처럼 굴었고요. 여우와 너구리는 꼬마 토끼를 놀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셋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어요. 꼬마 토끼와 여우와 너구리는 숲속 친구들을 이렇게 불렀어요. “천사 곰아! 넌 정말 마음씨가 착해.” “알뜰이 다람쥐야! 먹이는 많이 모았니?” “건축가 두더지야! 오늘도 열심히 집을 지었구나!” “이야기 배달부 딱따구리야! 오늘은 어떤 소식이 있니?” “천하장사 멧돼지야! 나도 너처럼 힘이 세면 좋겠다.” 다음 날, 꼬마 토끼가 할머니랑 볕을 쬐러 나왔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말이 들려왔지요. “진진토야! 우리랑 놀자!” 아!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친구들이었어요. “진진토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히히, ‘진짜 진짜 좋은 토끼’라는 뜻이야!” 꼬마 토끼는 새 별명이 진짜 진짜 마음에 쏙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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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천사의 계획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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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고운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이에요. 가을 천사가 색색의 요술 물감을 산과 들에 조르륵 조르륵 뿌리고 있어요. 솔솔솔 시원한 바람도 불어 보내고요. 이 모든 것은 가을 천사가 한 해 동안 열심히 준비한 것이에요. 여기는 겨울 천사가 일하는 방이에요. 겨울 천사는 오늘도 늦잠을 자고 있네요. 겨울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요. 그 모습을 본 계절의 왕이 버럭 소리쳤어요. “이 게으른 겨울 천사야!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겨울 천사는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 눈을 떴어요. 계절의 왕이 돌아가고 나자, 겨울 천사는 투덜거렸어요. “무슨 걱정이람. 이제부터 해도 충분해.” 천사는 흰 가루를 한 자루나 풀어 눈을 반죽하기 시작했어요. 어어? 서두르다 보니 눈 반죽은 질척질척해지고, 찬 바람은 활활 불길이 되어 버렸네요. 어느새 다시 나타난 계절의 왕이 말했어요. 하루하루 미루다 한꺼번에 하려니 그렇지. 다른 천사들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배우도록 해라. 겨울 천사는 입을 삐죽 내밀었어요. 하지만 왕의 명령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요. 다음 날 아침, 겨울 천사는 봄 천사가 일하는 방으로 찾아갔어요. 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봄 천사는 일찍부터 일어나 일을 하고 있었지요. “미안. 지금 바쁘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 겨울 천사는 구석에 앉아 봄 천사를 지켜보았어요. 봄 천사는 봄비의 재료를 꼼꼼히 계산해 그릇에 부었어요. “지금 재료를 준비해 놔야 점심 때 봄비를 끓일 수 있거든.” 일을 마치고, 봄 천사는 겨울 천사와 함께 새싹차를 마셨어요. “곧 겨울이 될 텐데 준비는 다 했니?” “아직. 이제부터 준비하려고.” “아직이라고? 그럼, 계획표는 짜 놓은 거야?” 겨울 천사는 아까보다 더 작은 소리로 대답했지요. “그것도 아직.” 봄 천사는 딱하다는 듯 겨울 천사를 쳐다보았어요. 그때부터 겨울 천사는 슬슬 걱정이 되었어요. ‘그동안 내가 너무 게을렀나?’ 겨울 천사는 여름 천사가 일하는 방으로 찾아갔어요. “미안. 곧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 여름 천사는 붉은 덩어리를 반죽하며 말했어요. “아침에 모은 열로 만든 해님인데, 오늘 밤까지 커다랗게 구워 놔야 하거든.” 일을 마치고, 여름 천사는 겨울 천사와 함께 얼음차를 마셨어요. “곧 겨울이 올 텐데 준비는 다 됐니?” 겨울 천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아직.”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적어서 하루 계획표를 만들어 봐. 그러면 할 일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을 거야.” 겨울 천사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쓱싹쓱싹, 싹둑싹둑. 적고, 자르고, 붙이며, 열심히 계획표를 만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 계획대로 일찍 일어난 겨울 천사는 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찬 바람을 다 만들고도 시간이 남아 겨울 색깔을 만드는 일까지 모두 마쳤는데,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안 되었네요. “여름 천사의 말대로 정말 시간이 남았어! 내일 계획표에는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는 시간을 넣어야지.” 겨울 천사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계획한 대로 알뜰하게 보냈지요. 드디어 겨울이 왔어요! 겨울 천사는 흰 눈과 찬 바람과 겨울 색깔들을 구름 아래로 열심히 뿌려 주었어요. 세상 사람들은 겨울 천사가 만들어 준 멋지고 아름다운 계절 덕분에 모두 모두 행복했어요. 일하는 방으로 돌아온 겨울 천사는 먼저 해야 할 일들을 적어 하루의 계획표를 만들었어요. 계획대로 하니까 일이 척척 진행되었지요. 오히려 계획한 일들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아 마음 편히 쉴 수도 있었어요. 드디어 겨울이 왔어요! 겨울 천사는 그동안 준비한 눈과 찬 바람, 겨울 색깔들을 구름 아래로 골고루 뿌려 주었어요. 만약 겨울 천사가 이처럼 시간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하얀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겨울을 절대 만날 수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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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비야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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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님은 울고 있는 꼬마 도깨비를 보았어요. "넌 누구니? 왜 울고 있어?" "난 깨비인데요, 친구들이 나랑 안 놀아 줘서 슬퍼요." 높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별님은 깨비와 같은 친구들을 종종 보곤 했어요. "내가 도와줄게. 따라오렴." 별님과 깨비는 꼬마 도깨비들이 노는 곳으로 왔어요. 흔들흔들 불빛 아래 꼬마 도깨비들은 동그라미 안에 도토리를 던지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지요. 도토리를 던져라. 톡! 톡! 톡! 물구나무를 서라. 흔들! 흔들! 도토리가 들어갔다. 쉬어 가자. 후유! 그때 갑자기 깨비가 큰 소리를 치며 달려갔어요. "나도 놀자. 나도!" 그 바람에 꼬마 도깨비들은 깜짝 놀라 꽈당 고꾸라지고 벌렁 넘어졌어요. "얘는 아까 걔잖아. 너랑 안 논다니까. 어서 저리 가!" 깨비는 또 훌쩍훌쩍 울었어요. "보세요. 나랑 안 놀겠다잖아요." 별님은 깨비를 꼭 안아 주며 말했어요. "깨비야, 같이 놀고 싶다고 무작정 끼어들면 놀고 있는 친구들에게 방해가 돼. 대신 가만가만 지켜보면서 어떤 놀이인지 열심히 익히고 틈틈이 친구들에게 칭찬해 주렴." 깨비는 별님의 말대로 했어요. "와, 물구나무서기 잘한다!" "그렇지! 최고야!" "조금만 더 힘을 내!" 그러자 꼬마 도깨비들이 물었지요. "너, 이름이 뭐니?" "나? 깨비라고 해!" "너도 한번 해 볼래?" "좋아, 좋아!" 깨비는 도토리를 던졌어요. 하나, 둘, 셋. 그런데 세 개 중에 한 개만 동그라미 안에 쏘옥! "어? 그럼 나는 한 번밖에 못 쉬네. 다시 던질래!" 그러자 별님이 몰래 다가가 소곤소곤. "깨비야, 놀이 규칙은 꼭 지켜야 해!" 아차차! 깨비는 친구들에게 다시 말했어요. "얘들아, 미안해. 그냥 할게." 다음 도깨비는 물구나무를 서다가 이리 쿵! 저리 쿵! 넘어졌어요. 깨비는 그 도깨비를 놀려 댔어요. "킥킥! 나보다 더 못하네!" 별님이 깨비에게 다가와서 또다시 소곤소곤. "그렇게 놀려 대면 친구의 마음이 상하잖니." 깨비는 얼굴이 빨개져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이제 깨비는 꼬마 도깨비들과 잘 어울리며 재미있게 놀게 되었어요. 별님도 "후유!" 마음을 놓았지요. 그런데 저쪽에서 꼬마 도깨비들이 웅성웅성. 한 친구가 팔을 다쳤대요. 깨비는 재빠르게 달려가 말했어요. "괜찮니? 이 풀잎으로 상처를 닦아 줄게." 팔을 다친 친구가 물구나무를 못 하게 되자 꼬마 도깨비들은 더 이상 놀이를 할 수 없었어요. 별님은 깨비에게 마지막 도움을 주기로 했지요. "깨비야, 친구들에게 다른 놀이를 하자고 해 보렴." 깨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어요. "우리 숨바꼭질하자. 그건 팔을 다쳐도 할 수 있잖아!" "맞아! 좋아, 좋아!" 꼭꼭 숨어라, 도깨비 뿔 보일라. 꼭꼭 숨어라, 방망이가 보일라. 꼭꼭 못 숨으면 우리가 찾는다, 왕! 저 멀리서 동이 터 오네요. 꼬마 도깨비들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얘들아, 안녕!" 꼬마 도깨비들이 방망이로 땅을 '툭!' 치자, 모두 '뿅!' 사라졌어요. 깨비도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별님,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별님 덕분에 친구들이 생겼어요." "그래, 깨비야. 그리고 나도 네 친구란다!" 다음 날, 고요하고 깊은 밤하늘이 쩌렁쩌렁 울렸어요. "깨비야, 놀자! 깨비야, 놀자!" 꼬마 도깨비들이 깨비를 부르네요. 깨비는 신이 나서 이리 폴짝 저리 폴짝 재주를 넘으며 친구들에게 갔어요. 친구는 가족 외에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공통의 흥미와 생각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도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친구는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가족처럼 위로가 되고 큰 의지가 되어 주어요. 그 때문에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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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자동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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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뛰빵빵! 뿌우 덜컹덜컹! 쌩 쌩. 이곳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자동차 마을이에요. 어느 날, 이 마을에 새 친구가 이사를 왔어요. 커다란 바퀴에 커다란 팔을 달고 있는 신기하게 생긴 자동차였어요. “안녕? 난 기중기야. 친하게 지내자.” “정말 무섭게 생겼네!” “가까이 가면 깔아뭉갤 것 같아.” “저 팔로 때리면 되게 아플 거야.” 자동차들은 잔뜩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지요. 기중기는 자동차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틈만 나면 밖으로 나왔어요. 빵빵 빵빵! “저리 비켜! 덩치만 크면 뭐해? 그렇게 느려 가지고.” 기중기가 도로를 달리면 여기저기 경적 소리로 도로가 떠나갈 듯했어요. “미안. 나는 더 빨리 달릴 수 없어.” 그래도 기중기는 꿋꿋하게 마을을 돌다가 어려움에 빠진 친구가 있으면 가장 먼저 나섰어요. “고장이 난 거니? 내가 도와줄게!” “그 짐 무겁겠다. 내가 들어 줄게!” “꼬마 자동차들아, 내가 끌어 줄게!” 하루 이틀 지나면서, 자동차들은 기중기의 착한 마음씨를 알게 되었어요. “기중기도 자꾸 보니까 귀엽게 생겼네.” “좀 느리면 어때? 대신 힘이 세잖아.” 이젠 기중기가 도로를 달리면 자동차들이 먼저 길을 비켜 주며 인사했어요. “기중기야! 오늘은 또 누구를 도와주러 가니?” 하지만 딱 한 친구, 파란 스포츠카는 기중기를 못마땅해했어요. 원래 자기가 이 마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는데, 기중기한테 자리를 뺏긴 것 같아 심통이 난 거예요. “쳇! 모두 기중기만 찾네. 나처럼 멋진 스포츠카보다 저 못생긴 차가 좋다고? 말도 안 돼, 흥!” 어느 날, 기중기가 느릿느릿 달리고 있는데 파란 스포츠카가 갑자기 튀어나왔어요. “이 느림보 못난아! 나 잡아 봐라.” 스포츠카는 기중기의 땀수건을 빼앗아 도망쳤지요. “어어, 내 땀수건 돌려줘!” 기중기는 스포츠카를 따라 있는 힘껏 달렸지만 따라잡기에는 어림도 없었어요. ‘기중기 녀석, 어디쯤 오나 볼까?’ 스포츠카는 잠깐 뒷거울을 쳐다보았어요. 그러다 그만 도로에서 벗어나 쿵! 공사장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어요. 부릉 부릉 부르릉! 스포츠카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요. 커다란 그림자가 스포츠카에게 다가왔어요. 바로 기중기였지요. “내가 도와줄게.” 기중기는 기다란 팔을 뻗더니 조심조심 스포츠카를 끌어 올렸어요. 스포츠카는 사뿐히 도로 위로 올라왔지요. 구경하던 자동차들이 박수를 쳤어요. “우아! 역시 기중기라니까!” “괜찮아. 고, 고마워.” 그러고는 흙탕물에 더러워진 땀수건을 주었어요. “미안.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기중기는 씩 웃으며 땀수건을 받았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기중기가 스포츠카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툭툭 흙을 털어 주었어요. 스포츠카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지요. 그 후, 기중기와 파란 스포츠카는 자동차 마을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스포츠카는 아직도 가끔씩 까불대며 기중기와 달리기 시합을 한대요. “나 잡아 봐라!” “천천히 달려. 그러다 또 넘어질라.” 하지만 다른 마을 자동차들이 기중기를 놀리면 스포츠카가 그 차를 따끔히 혼내 주기도 했지요. 소록소록 봄비 오는 날. 기중기와 파란 스포츠카는 빗물을 튕기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달렸어요. 하하 호호 빵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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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 초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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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초록이가 모래 언덕 위에 있는 거북 학교로 전학 온 첫날이에요. 그런데 초록이는 첫날부터 지각이네요. “야! 너 때문에 수영 시간이 늦어졌잖아!” 도도가 툴툴거리며 말했어요. “도도야, 새 친구한테 그러면 안 돼.” 선생님의 말에 도도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요. 땡! 땡! 땡! 수영 시간이 시작되었어요.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했었죠? 오늘은 수영 시합을 하겠어요.” 호르르륵!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에 모두 출발! 시합 결과는 도도가 일 등, 초록이가 꼴찌였어요. 도도가 으쓱하며 큰 소리로 말했지요. “초록이 넌 꼭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더라. 하하.” “도도야, 초록이도 열심히 했으니까 놀리면 안 돼.” 선생님의 말에 도도는 슬슬 화가 났어요. ‘선생님은 초록이만 예뻐해!’ 땡! 땡! 땡! 이번에는 미술 시간이에요. “넷이서 한 조가 되어 찰흙 집을 만들어 보세요.” 초록이와 도도는 같은 조가 되었어요. “난 지붕을 만들래!” 도도가 제일 먼저 말했지요. “난 울타리!” “난 바닥!” “어? 그럼 난 기둥이네.” 마지막으로 남은 기둥은 초록이 차지가 되었어요. “다했다!” 꼬마 거북들이 외쳤어요. 하지만 초록이는 아직 멀었어요. “야! 너 빨리 좀 해.” 도도가 짜증을 내며 말했어요. “으응. 나도 이제 다 했어.” 초록이가 기둥 위에 지붕을 조심조심 올리는데. “아앗!” 찰흙 집이 그만 폭삭 주저앉고 말았어요! “기둥을 너무 약하게 만들었잖아!” 도도는 버럭 화를 냈어요. 찰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서두른 도도 때문인데, 오히려 도도는 초록이를 탓했지요. 땡! 땡! 땡! 세 번째 수업은 모래 파기 시간이에요. “하나, 둘, 하나, 둘!” 모두 쉬지 않고 열심히 모래를 팠어요. 다른 친구들은 벌써 모래 구덩이를 세 개나 만들었는데, 초록이는 겨우 하나를 팠네요. “아유, 답답해. 넌 뭐든 꼴찌구나? 꼴찌 초록이!” 도도의 목소리가 초록이의 귓가를 울려 댔어요. “도도 너! 그만 안 해?” “흥! 그게 싫으면 빨리빨리 하면 되잖아!” “너 계속 그럴래?” 초록이와 도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어요. “너희, 싸우면 안 돼!” 선생님이 달려와 도도와 초록이를 말렸지만 둘은 눈을 흘기고 씩씩거렸지요. “안 되겠다! 지금부터 너희 둘은 등딱지 안으로 들어가서 숨을 크게 쉬며 하나부터 다섯까지 아주 천천히 세거라!” 도도와 초록이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등딱지 안에 얼굴과 팔다리를 쏙 집어넣고,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마음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셌지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도도와 초록이는 다시 등딱지 밖으로 나왔어요. 선생님이 물었지요. “아직도 화가 나니?” 초록이도, 도도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어요. 어느새 부글부글 끓던 화가 가라앉았어요. “화가 날 때에는 화를 내는 것보다 이렇게 먼저 기분을 가라앉혀야 해. 그러면 아주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단다.” 선생님은 초록이에게 물었어요. “초록아, 왜 도도랑 다툰 거니?” “도도가 자꾸 저를 놀렸어요.” “도도야, 너는 초록이를 왜 놀렸는데?” “초록이가 뭐든지 느릿느릿 하잖아요. 선생님은 초록이 편만 드시고, 저도 모르게 화가 났어요.” 그러자 초록이는 꼭꼭 숨기고 있던 오른쪽 팔을 도도에게 보여 주었어요. “도도야, 나는 오른쪽 팔이 왼쪽보다 짧아. 그래서 뭐든지 느리고 잘 못해.” 초록이의 말에 도도는 깜짝 놀랐어요. “도도야, 선생님은 초록이를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초록이 편을 드는 줄 알았구나. 선생님은 도도랑 초록이 그리고 우리 반 친구 모두를 똑같이 좋아한단다.” 다음 날 아침, 초록이가 모래 언덕 아래에 도착했어요. 엉금엉금, 헉헉. 엉금엉금, 헉헉. 어? 그런데 도도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네요. “초록아, 어서 타!” 도도가 썰매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정말 여기 타라고?” “하하! 내가 좋아하는 수영 시간이 또 늦어지는 건 싫거든. 어서 타!” 도도와 친구들은 초록이를 썰매에 태우고 모래 언덕을 쌩쌩 올라갔어요. “초록아, 꽉 잡아!” “야호!” 초록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썰매를 타고 학교에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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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친박사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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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펠리컨 우체부가 친친 박사님네 문을 두드렸어요. "박사님, 오늘은 편지가 네 통이에요." "고맙네. 어서 읽어 보고 답장을 써야지." 친친 박사님은 어린이들의 고민을 들어 주는 상담가예요. 자, 오늘은 어떤 고민들이 왔을까요? 친친 박사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남극 초등학교 1학년, 페니라고 해요. 저는 물고기 먹는 것과 얼음집에 앉아 책 읽는 걸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좀 뚱뚱해요. 친구들은 저를 '페니 곰'이라고 놀려요. 난 곰이 아니라 펭귄이라고 아무리 화를 내 봐도 소용이 없어요. 박사님, 도와주세요! 3월 1일 남극에서 페니 올림. '펭귄' 페니에게. 페니야, 나도 어렸을 적 두꺼운 안경을 쓴 탓에 늘 놀림을 받았단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당당하고 씩씩해야 해. 네가 놀림을 받았다고 화를 내거나 울면 친구들은 그게 재미있어서 더 놀릴 거야. 오히려 네가 아무렇지 않고 당당하면 친구들은 더 이상 재미가 없어져서 그만두게 되지. 3월 25일 친친 박사로부터. 덧붙이는 말. 물고기와 책뿐 아니라 운동과도 친해지면 어떨까? 친친 박사님께. 저는 농장에 사는 뽀리예요. 오늘은 너무 슬픈 날이에요. 꼬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거든요. 농장 친구들이 저만 쏙 빼놓았어요. 생일 파티뿐만이 아니에요. 연못 나들이도 저만 빼고 가고, 소꿉놀이도 저만 빼고 해요. 제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3월 7일 우울한 뽀리 올림. 착한 뽀리에게. 뽀리야,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단다. 오히려 너를 따돌리는 그 친구들이 잘못한 거야. 친구들 모두와 어울리려 하는 것보다 단 한 명이라도 네 친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 꼬꼬에게 지금이라도 정성껏 카드를 써서 생일 선물과 함께 주렴. 꼬꼬가 네 마음을 알아 주면 좋겠구나. 3월 25일 친친 박사로부터 덧붙이는 말. 네게 필요할 것 같아 깨비야 놀자라는 책을 보낸다. 친구 사귀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단다. 친친 박사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늪에 사는 앨리라고 해요. 제 친구 하하는 정말 재미있는 최고의 친구예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요. 물속에서 자꾸만 방귀를 뀌는 거예요! 뽀그르르 공기 방울이 올라오는 걸 보면 더럽다는 생각에 하하랑 놀기 싫어져요. 아, 어쩌면 좋을까요? 3월 4일 하하 친구 앨리 올림. 박사님! 도와주세요! 하하 친구 앨리에게. 걱정 마. 방귀 뀌는 버릇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 친구 사이에서는 솔직한 게 제일 중요하단다. 하하에게 방귀에 대한 네 생각을 말해 줘. 단, 하하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네 비밀 버릇 한 가지쯤 얘기해 주는 것도 좋아. 둘이 함께 버릇을 고쳐 보자고 하렴. 3월 25일 친친 박사로부터. 덧붙이는 말. 사실, 나는 아직도 인형놀이를 하는 버릇이 있단다. 친친 박사님께. 저는 연못에 사는 구리라고 해요. 어제 제 친구 포포랑 싸웠어요. 포포가 제가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해 버렸거든요. 아무리 내 자리라고 해도 비켜 주지 않길래 화를 내고 싸웠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자리에 이름을 써 둔 것도 아닌데, 괜히 못되게 굴었나 봐요. 포포는 이제 저랑 말도 안 해요. 어쩌면 좋죠? 3월 8일 작은 연못에서 구리 올림. 구리에게 너는 이미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포포가 자리를 뺏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렇다면 포포는 잘못한 게 없잖니. 포포에게 가서 먼저 사과하렴. 그깟 자리 때문에 친구를 잃지는 않겠지? 3월 25일 친친 박사로부터. 덧붙이는 말. 네 덕분에 나도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어. 무슨 일인지는 다음 편지에 얘기해 주마. 친친 박사님은 어제 투투 씨와 다퉜어요. 투투 씨네 나뭇가지가 친친 박사님네 꽃밭에 그늘을 만들어 꽃들이 잘 자라지 못했거든요. "이봐, 투투. 그 나무 좀 잘라!" "아니, 멀쩡한 나무를 어떻게 잘라?" "어쨌든 우리 집 울타리로 넘어왔잖아!" 친친 박사님은 소리를 꽥 질렀고, 투투 씨는 문을 꽝 닫았어요. 다음 날, 친친 박사님은 투투 씨를 찾아갔어요. "투투, 어제는 내가 정말 미안했어." "나도 화만 내서 미안해." 둘은 서로 화해를 하고, 나무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럼, 우리의 친친 박사님과 친구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뽀리는 꼬꼬에게 생일 선물을 준 뒤 친해졌어요. 다른 친구들도 뽀리와 놀아 주었지요. 페니는 친구들의 놀림에도 당당하고 씩씩했어요. 이제는 아무도 페니를 놀리지 않지요. 앨리가 솔직히 말한 뒤 하하는 방귀를 뀌지 않아요. 앨리도 코딱지 파는 버릇을 고쳤고요. 구리는 포포에게 먼저 사과했어요. 포포는 구리가 더 좋은 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었지요. 친친 박사님과 투투 씨는 꽃들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옮겨 심고, 나무 그늘 아래에 멋진 의자를 놓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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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우리는 달달이 삼총사. 먼 곳이든, 어두운 곳이든 부리부리 잘 보는 장달이,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번쩍번쩍 잘 드는 당달이,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척척 해내는 도달이. 언제든, 어디든 함께 가는 달달이 삼총사이지요. 어느 날, 멀리 숲을 바라보던 장달이가 말했어요. “이봐! 도둑들이 할아버지를 괴롭히고 있어!” “큰일이군! 빨리 가서 구하자!” 도달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달이는 벌써 도둑들을 향해 달려갔지요. “이놈들!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당달이가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리자 도둑들은 깜짝 놀라 도망가 버렸어요. 그다음 내가 둘 중 내 몫을 고를게. 마지막 남은 게 장달이 거야. 이러면 장달이가 보물을 서로 다르게 나눌 걱정도 없지. 당달이는 제일 먼저 제 몫을 골랐으니 불만이 없을 거야. 나 또한 너희를 믿으니까 아무 문제없어.” “그럼 이렇게 해 보자. 먼저 장달이가 황금을 셋으로 똑같이 나눠. 그다음 당달이가 셋 중 하나를 네 몫으로 골라. 할아버지는 삼총사에게 고맙다며 몇 번씩 인사하고는 길을 떠났어요. 삼총사도 다시 길을 가려고 하는데, 풀숲에 누런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지 뭐예요! “이게 뭐지? 아까 그 도둑들이 흘린 것 같은데.” 종이를 펴 본 도달이는 깜짝 놀랐어요. “이, 이건 보물 지도야!” 당달이는 코를 벌름벌름. “내가 도둑들을 물리쳤으니 이 지도는 내 거야.” “무슨 소리! 내가 도둑들을 발견했잖아.” 장달이는 눈을 잔뜩 흘겼어요. “얘들아, 지도의 주인을 정하는 것보다 도둑들이 눈치채기 전에 보물을 찾는 게 더 급해.” 도달이의 말에 장달이와 당달이는 싸움을 멈췄어요.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도달이가 외쳤어요. “어떻게 빠져나가?” 당달이와 장달이는 울상이 되었어요. “장달이가 앞에서 길을 찾고, 당달이가 보물 상자를 메. 내가 모자로 박쥐들을 쫓을게.” 삼총사는 헐레벌떡 달렸어요. “후유!” 밖으로 빠져나오자 삼총사는 털썩 주저앉았어요. “우리가 싸우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어.” 장달이는 그제야 친구들에게 미안했어요. “보물 때문에 우리의 우정을 잃을 뻔했어.” 당달이도 깊이 뉘우쳤지요. “차라리 보물을 동굴에 두고 나올 걸 그랬어! 저걸 나누다가 또 싸우면 어떡해?” 이번엔 도달이가 나설 차례였지요. 삼총사는 보물을 찾아 길을 떠났어요. 도달이가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으면 장달이는 먼 데를 보고 길을 찾아냈지요. 길을 막는 바위나 큰 나무가 있으면 당달이가 척척 치워 냈어요. 이윽고 삼총사는 동굴 앞에 섰어요. “이 동굴 안에 보물이 있을 거야.” 도달이가 말하자 장달이와 당달이는 침을 꼴깍 삼켰어요. 동굴 안은 지금까지 온 길보다 훨씬 험했어요. 어떤 길은 허리를 잔뜩 굽혀서 지나야 했고. 큰 웅덩이를 훌쩍 뛰어넘기도 했어요. 얼마를 지나가자, 장달이가 크게 소리쳤어요. “저기 보물 상자가 있다!” 힘이 센 당달이가 달려가 보물 상자의 뚜껑을 열었어요. “와! 황금이야!”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을 만지며 삼총사는 얼싸안고 춤을 추었어요. 당달이가 보물 상자를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이건 기운 센 내가 지킬게.” 그 말에 장달이가 벌컥 화를 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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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 하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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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오나 봐요. 찬 바람이 쌩쌩 불어요. 오늘따라 복슬복슬 양 마을이 시끌벅적하네요. "다음 달에 꼬마 양들의 뜨개질 대회가 열린대요!" 양 마을에서는 해마다 뜨개질 대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이 대회에서 세 번 일 등을 하면 양 나라에서 가장 이름난 뜨개질 학교에 갈 수 있지요. 이번 뜨개질 대회 때문에 가장 바쁜 두 꼬마 숙녀가 있었어요. 한 번 일 등한 노랑 울타리 집의 포송이와 두 번이나 일 등한 초록 울타리 집의 보송이지요. 보송이는 한 번만 더 일 등을 하면 복슬복슬 양 마을에서 맨 처음으로 뜨개질 학교에 가요. 하지만 이번에 포송이가 이기면 내년에 보송이와 한 번 더 겨룰 수 있지요. '보송이는 어떤 실을 만들까?' 포송이는 보송이의 방을 몰래 엿보았어요. 보송이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노랑, 분홍, 주홍, 보라. 색색의 꽃잎들을 따서 말리고 있었어요. '아! 저 꽃잎들로 실을 물들여서 뜨개질을 하면 정말 예쁘겠어. 아이, 난 몰라.' "이제 됐다. 꽃잎은 다 마를 때까지 놔두고, 그동안 차나 한 잔 마셔야겠는걸. 랄랄라." 보송이가 부엌으로 간 사이에 포송이는 창문을 활짝 열었어요. 휙~! 휘리릭! 찬 바람이 불어오자 꽃잎들이 날아올랐어요. "앗! 내 꽃잎들이 날아가! 안 돼!" 보송이는 발을 동동 굴렀어요. 어느덧 뜨개질 대회 날이 가까워졌어요. 꼬마 양들은 무엇을 만들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포송이는 또다시 슬슬 보송이가 무엇을 만들지 궁금해졌어요. '도대체 보송이는 뭘 만들까? 드레스? 커튼? 이불? 어떤 무늬를 넣을까? 줄무늬? 별무늬? 꽃무늬? 아이, 답답해. 빨리 가서 봐야겠어.' 그날 밤 포송이는 보송이네 집으로 갔어요. 보송이네 이 층 방 창문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네요. 끙! 끄응! 포송이는 나무를 타고 한 발 한 발 올라갔어요. '아, 보인다! 저건 목도리구나!' 포송이는 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쭈욱. 그러다가 그만 쿵! "아야야!" 포송이는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다쳤어요. 다음 날, 보송이가 포송이 집에 찾아왔어요. 그러자 포송이는 눈물을 글썽였지요. "보송아, 미안해! 네가 무얼 만드는지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었어. 꽃잎이 날아가게 창문을 연 것도 바로 나였어." "괜찮아, 포송아. 난 네 팔이 어서 나았으면 좋겠어." 포송이네 집을 나서던 보송이는 쓰레기통 속에 들어 있는 뜨개질 바구니를 보았어요. "어머나! 이건." 그것은 포송이가 뜨다 만 예쁜 모자였지요. "아하!" 보송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날부터 뜨개질 대회 날까지 보송이는 쉬지 않고 뜨개질을 했어요. 뜨고, 또 뜨고, 또 떴어요. 드디어 뜨개질 대회 발표 날이 되었어요. 심사 위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뜨개질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오랫동안 이어진 심사가 끝나고 드디어. "올해의 일 등은 바로." "'송이송이 목도리 모자'를 만든 보송이와 포송이!" 포송이가 깜짝 놀라 물었어요. "보송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난 그저 네가 뜨다 만 모자랑 내 목도리를 합쳤을 뿐이야. 그랬더니 멋진 작품이 나오지 뭐야." 보송이와 포송이는 마주보며 웃었어요. 세 번 일 등한 보송이는 뜨개질 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포송아, 이제 두 번 일 등했으니까 내년에도 일 등해서 뜨개질 학교에 꼭 와야 해!" "알았어, 친구야. 기다려!" '송이송이 목도리 모자'는 겨울 내내 온 나라 꼬마 양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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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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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보따리에 바리바리 담아 들려주는 이야기 할머니란다. 이렇게 잠시 멈춰서 한숨 돌리고 나면 남은 길을 갈 힘이 다시 솟곤 하지. 이왕 앉은 김에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동화 나라의 주인공들은 멈추는 법을 잘 몰라. 주인공은 원래 위험에 잘 빠지잖아. 그때 잠깐만 멈춰서 생각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게 훨씬 쉬울 텐데 말이야. 쯧쯧.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알지? 어느 날 사기꾼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와 세상에 하나뿐인 옷을 짜 주겠다면서 돈만 받고 빈둥빈둥 놀았어. 그러고는 지혜로운 사람한테만 보이는 옷을 짰다며 임금님과 신하들을 감쪽같이 속였지. 임금님은 결국 벌거벗고 행진을 했지 뭐야! 만약 임금님이 잠깐만 멈춰서 생각했다면. '잠깐! 그런 옷감이 있다니 믿을 수 없군.' 임금님은 신하들을 한 명씩 불러 옷의 생김새를 물었어. "파, 파란색에 줄무늬 옷이옵니다." "금색에 새, 새들이 수놓여 있습니다." 단 한 명도 같은 대답을 하지 못했어. "너희가 바보 소리를 들을까 봐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러고는 두 사기꾼을 감옥에 보내 버렸지. 이런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럼 아기 돼지 삼 형제는 어떨까? 첫째는 짚으로 집을 짓고, 둘째는 나무로 집을 짓고, 셋째는 벽돌로 집을 지었어. 그리고 못된 늑대가 입김을 한번 훅! 불자 첫째와 둘째의 집은 홀랑 날아가 버렸지. 만약 잠깐만 멈춰서 생각했다면. 첫째는 짚으로 집을 지으려다가, '잠깐! 짚은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가.' 둘째는 나무로 집을 지으려다가, '잠깐! 나무는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쿵 무너져.' 그래서 결국 아기 돼지 삼 형제는 셋째를 따라 튼튼한 벽돌집을 지었어. 못된 늑대는 계속 훅훅! 입김을 불다가 주둥이만 뾰족하게 튀어나왔대. 호호, 아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자, 이번에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야. 오누이의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엄마 옷을 입고 오누이를 찾아간 것은 알지? 오누이는 깜박 속아 문을 열어 줬어. 하지만 호랑이인 것을 알고 나무 위로 도망쳤어. 그래도 호랑이가 쫓아오자 오누이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지. 오누이가 잠깐만 멈춰서 생각했다면. '잠깐! 진짜 우리 엄마인지 알아보자.' 오빠가 호랑이에게 물었어. "진짜 엄마라면 우리 이름을 말해 보세요!" "아,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오누이는 호랑이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후다닥 뒷문으로 도망쳤어. 호랑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쭈그리고 앉아서, "보름이? 달래? 아니면 칠득이? 만득이? 그것도 아니면 꽃분이? 꽃순이?" 밤새도록 이러고 있었을지도 몰라. 아, 토끼와 거북 이야기도 들려줄까? 토끼와 거북이 달리기 경주를 하잖아. 그런데 세상에! 그 발 빠른 토끼가 거북에게 지고 말았어. 잘난 체하던 토끼가 경주를 하다 말고 드르렁 쿨쿨! 낮잠을 잤거든. 만약 토끼가 잠깐만 멈춰서 생각했다면. '잠깐! 내가 잘 때가 아니지! 깊이 잠들어서 못 일어나면 어떡해?' 토끼는 다시 깡충깡충 뛰었고, 결국 경주에서 거북을 크게 이겼지. "토끼야, 넌 역시 잘 뛰어!" 거북은 토끼를 등에 태우고 바다 구경을 시켜 주었대. 이런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잖아. 이번엔 청개구리 이야기를 해 줄게. 청개구리는 엄마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반대로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병든 엄마가 죽으면서 냇가에 묻어 달라고 했지. 슬퍼하던 청개구리는 처음으로 엄마 말을 따라 냇가에 무덤을 만들었어. 그러고는 비가 올 때마다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개골개골 울었대. 하지만 잠깐만 멈춰서 생각했다면. '잠깐!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 무덤이 떠내려갈 텐데? 엄마는 내가 반대로 할 줄 알고 거꾸로 말한 거야! 그동안 난 정말 나쁜 아들이었구나.' 엄마가 돌아가신 뒤, 청개구리는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었어. 그러고는 비 오는 날마다 엄마 무덤가로 가서 노래를 불렀지. 이런 이야기로 끝났을지도 몰라. 자, 내 이야기 재미있었니? 문제에 부딪히면 행동하기 전에 잠깐 멈춰서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마. 나도 이제 그만 쉬고 일어나 볼까? 어서 동화 나라에 가서 보따리에 한가득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서 돌아올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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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추장 우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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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지혜롭기로 이름난 꼬마 추장 우수리가 있었어요. 우수리는 하루에 세 번 마을을 돌아다니며 문제가 없는지 살피고, 남다른 지혜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지요. 꼬마 추장 우수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한번 따라가 볼까요? “아니지. 내 밭 옆에 있으니 내 땅이지!” 두 농부는 자신들의 밭 사이에 있는 땅을 놓고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겼어요. 이른 아침이에요. 두 농부가 아옹다옹 다투고 있어요. “이 땅은 내 밭 옆에 있으니 내 땅이야!” 다툼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땅을 똑같이 나누면 되잖아.” 그러더니 막대기를 들고 땅에 선을 쭈욱 그었어요. 그러자 한 농부가 외쳤어요. “내 땅이 더 작잖아!” 다시 선을 쭈욱 긋자, 이번엔 다른 농부가 투덜거렸어요. “비뚤어졌어! 내 땅이 훨씬 작아!” 그때 꼬마 추장 우수리가 나타났어요. 우수리가 두 농부에게 말했어요. "그 땅에 두 분이 함께 옥수수를 심어 가꾸세요." "그리고 옥수수를 거둘 때 똑같이 나누어 가지면 되지 않겠어요?" “아하 그게 좋겠군요!” 두 농부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어요. 해님이 하늘 꼭대기에 올라왔어요. “구구구구 구구구구구.......” 닭 한 마리가 흙을 콕콕 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러자 마을 사람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와 “아유, 내 닭!” “아니, 내 닭이에요!” 하며, 모두 자기 닭이라고 우겼어요. 사람들은 그 닭이 왜 자기 닭인지 말하기 시작했어요. “내 닭은 볏이 아주 탐스러워요!” “내 닭은 새벽마다 ‘꼬끼오!’하고 울어요!” “내 닭은 좁쌀을 아주 좋아하지요!” 세상에! 어느 닭이 안 그럴까요? 그때 꼬마 추장 우수리가 나타났어요. “흠, 닭 주인을 찾기는 아무래도 어렵겠네요. 그냥 저 닭을 잡아 함께 먹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네 사람은 좋아서 입이 헤벌쭉 벌어졌는데, 한 사람만 울상을 지었지요. 꼬마 추장 우수리는 그 사람에게 닭을 건넸어요. “자, 이 닭을 가져가세요. 진짜 주인만이 자기가 키운 닭을 소중히 여길 테니까요.” 닭 주인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지요. 해가 기울어 가는 저녁이에요. 집집마다 옥수수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솔솔. “엄마, 아직 안 됐어요? 꼴깍.” “이제 다 돼 간단다. 조금만 기다리렴.” 아이들은 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며 침을 꼴깍꼴깍 삼켰어요. 그런데....... “내 옥수수빵이 없어졌다!” 옥수수빵을 잃어버렸다며 큰소리를 친 사람은 펄펄 뛰며 앞집, 옆집, 뒷집을 뒤져 보고 사람들 입안까지 살펴봤지요. 마을은 또 한바탕 떠들썩해졌어요. “지혜로운 꼬마 추장님, 옥수수빵 도둑을 잡아 주세요!” “난 도둑을 잡지 않겠어요. 옥수수빵이 없어진 건 배고픈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그건 다 이 추장의 잘못이지요.” 대신 꼬마 추장 우수리는 부하에게 창고 안에 있는 옥수수 가루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자, 이 옥수수 가루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빵을 만드세요.”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그날 저녁에 마을 사람들은 고소한 옥수수빵으로 잔치를 벌였지요. 꼬마 추장 우수리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함! 졸려.” 엄마 품에 안긴 우수리가 긴 하품을 했어요. 아무리 지혜로운 추장이지만, 우수리는 아직 엄마 품이 마냥 좋은가 봐요. “꼬마 추장 우수리야, 잘 자!” 창의력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기발한 생각을 하는 능력을 말해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창의성이 지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하지요. 같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창의성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창의력은 모든 분야에서 요구되고 있어요. 과학이나 음악, 문학과 같은 학문적 분야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학교, 가정,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이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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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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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님반의 꼬마 생쥐들이 시끌시끌, 찍찍. 와글와글, 찍찍. 신 나게 놀고 있어요. 까불이 깜쥐가 쪼르르! 뛰어왔어요. “얘들아! 내일이 우리 선생님 생일이야!” “정말?” “달님반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한테 ‘해님반 선생님, 내일 맞지요?’" "하니까 우리 선생님이 ‘네, 내일이네요.’ 하셨어. 생일이 아니면 뭐겠어?” 그래서 열 마리 꼬마 생쥐는 선생님을 위해 깜짝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어요. 유치원 수업이 끝나고. 꼬마 생쥐들은 놀이터에 모였어요. 생일 파티를 어떻게 열지 정해야 하거든요. 경질 대장 강쥐도, 새침데기 앙쥐도, 이건 어때, 찍찍! 저건 어때, 찍찍! 시끌시끌, 와글와글. 그때 똑똑한 똑쥐가 말했어요. “자, 먼저 생일 파티 때 뭘 할지를 정하자. 좋은 생각이 있는 친구는 꼬리를 들고 말해 봐.” 선생님은 훌쩍훌쩍 울며 말했어요. "얘들아, 정말 고맙구나. 하지만 오늘은 선생님 생일이 아니란다." "선생님은 오늘 유치원을 그만두게 되었어. 가족이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거든. 너희가 준비해 준 이 멋진 생일 파티는 영원히 잊지 않을게. 얘들아,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애교 많은 뽀쥐가 꼬리를 번쩍! “노래도 불러야지.” 멋쟁이 멋쥐가 꼬리를 번쩍! “선물도 드려야지.” 먹보 뚱쥐가 꼬리를 번쩍! “케이크에 촛불을 켜자.” “모두 모두 좋은 생각이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면서 선물을 드리는 거야. 자, 그럼 어떤 선물을 드리면 좋을지 말해 볼까?” 선생님 쪽! 쪽! 쪼~옥! 애교 많은 뽀쥐 선생님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선생님의 새 안경 진짜 예뻐요! 멋쟁이 멋쥐 선생님, 다음 생일에는 꼭 별을 따 드릴게요, 꼭이요! 반짝반짝 별쥐 앞으로도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착한 꿈쥐 될게요. 꾸벅꾸벅 꿈쥐 쳇! 늦게 일어나는 게 어떻게 착하냐? 선생님께 한 말 아님. 퉁퉁이 퉁쥐 선생님 너무 예뻐요! 저 이제 안 까불 거예요. 까불이 깜쥐 깜쥐가 너무 까불어서 신경질 나요! 하지만 선생님을 보면, 우헤헤. 신경질 대장 강쥐 선생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쉿,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이에요. 새침데기 앙쥐 생일 축하해요. 해님반 친구들 모두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 똑똑한 똑쥐 과자보다 사탕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요! 그리고 케이크 조금만 남겨 주세요. 먹보 뚱쥐 다시 뚱쥐가 꼬리를 번쩍! “먹는 거 어때? 먹는 거!” 뽀쥐가 꼬리를 번쩍! “선생님께 뽀뽀를 쪽!” 멋쥐가 꼬리를 번쩍! “예쁜 옷을 사 드리자!” 별쥐가 꼬리를 번쩍! “예쁜 별은 어떨까?” 퉁쥐가 꼬리를 번쩍! “으라차차, 생쥐 로봇은?” 꿈쥐가 꼬리를 번쩍! “편지를 쓸까?” 똑쥐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생일 케이크가 있으니까, 선물은 먹는 거 말고 다른 걸로 하자. 뽀뽀도 좋지만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거면 더 좋겠지?" "옷을 사려면 돈이 드는데 우린 케이크 살 돈밖에 없어. 예쁜 별은. 헤헤, 우리가 별이 되어 드리면 되지. 그리고 선생님은 생쥐 로봇을 갖고 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으셔." "내 생각에는 꿈쥐 말대로 편지를 쓰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 모두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거야. 너희 생각은 어때?” 다음 날 아침.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노래가 울려 퍼졌어요. “어머,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니?”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 “이건 선물이에요!”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 첫눈이 펑펑 내리는 날. 해님반의 열 마리 꼬마 생쥐는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까불이 깜쥐가 큰 소리로 편지를 읽었어요. 해님반 친구들에게 안녕? 그동안 잘 있었니? 지금 이 편지는 아마도 까불이 깜쥐가 읽고 있겠지? 강쥐, 앙쥐, 똑쥐, 뚱쥐, 모두 건강하지? 아침마다 뽀뽀해 주던 우리 뽀쥐, 멋쟁이 멋쥐와 별쥐도 잘 있고? 꿈쥐는 요즘도 지각하는지 궁금하구나. 퉁쥐랑은 싸우지 말고. 선생님은 멀리서도 날마다 너희 생각뿐이란다. 다들 많이 보고 싶구나. 방학하기 전에 너희를 만나러 놀러 갈게. 12월 3일 선생님이 덧붙이는 말. 오늘이 바로 선생님의 진짜 생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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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돼지 세 자매와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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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아기 돼지 세 자매가 살았어. 세 자매는 내일이면 정든 집을 떠나 숲속에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해. 엄마 돼지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너희도 이웃집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 들었지? 못된 늑대가 와도 걱정 없게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해.” 아기 돼지 세 자매는 어떻게 하면 튼튼한 집을 지을까 곰곰이 생각했어. 첫째 돼지가 말했어. “이웃집 돼지 삼 형제는 각자 다른 집을 지은 게 잘못이었어.” 둘째 돼지도 말했지. “그래, 셋이 힘을 합치면 더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거야.” 셋째 돼지가 맞장구를 쳤어. “언니들 말이 맞아!” 다음 날 아침, 세 자매는 집을 나섰어. 엄마 돼지는 눈물이 나와 앞치마로 눈물을 훔쳤지. 그러자 세 자매가 말했어. “엄마, 걱정 마세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튼튼한 집도 지을 수 있고, 늑대가 와도 물리칠 수 있어요!” “오냐, 귀여운 내 아기들.” 숲속에 도착한 아기 돼지 세 자매는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벽돌을 쌓아 집을 짓기로 했어. 셋은 각자 할 일을 나눴지. 첫째 돼지는, “나는 집터를 만들게.” 둘째 돼지는, “나는 나무를 베어 올게.” 셋째 돼지는, “나는 벽돌을 만들게.” 아기 돼지 세 자매는 신이 났어. 첫째 돼지가 집터를 다지는 동안 둘째 돼지는 나무를 베러 소나무 숲으로 갔어. 그런데 먹음직스럽게 생긴 빨간 열매들이 있지 뭐야. “목마르니까 이것부터 먹고 해야지!” 우물우물, 꾸울꺽! 소나무 숲 바로 옆에는 시냇물이 흘렀어. 셋째 돼지가 벽돌을 만들러 그쪽으로 갔지. 그런데 먹음직스럽게 생긴 빨간 열매들이 있지 뭐야. “배고프니까 이것부터 먹고 해야지!” 오물오물, 꾸울꺽! 빨간 열매를 먹은 둘째 돼지와 셋째 돼지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드르렁 쿨쿨~. 빨간 열매는 ‘잠 오는 열매’였거든. 아까부터 숨어서 지켜보던 늑대가 다가왔어. “으하하! 오랜만에 돼지를 잡아먹겠군!” 늑대가 셋째 돼지를 번쩍 들어 올린 순간, “둘째야! 셋째야!” 저 멀리 첫째 돼지가 나타났어. 늑대는 후다닥 몸을 숨겼지. 첫째 돼지는 둘째 돼지와 셋째 돼지를 깨웠어. “일은 안 하고 잠만 자면 어떡해?” 둘째 돼지와 셋째 돼지가 똑같이 이러는 거야. “저 빨간 열매를 먹었을 뿐인데.” 첫째 돼지는 빨간 열매의 냄새를 맡아 보았어. 킁킁~! 그러다 열매 옆에 꾹꾹 찍혀 있는 늑대의 발자국을 보았지. “늑대다! 이제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할 때야!” 아기 돼지 세 자매는 열심히 나무를 베고 부지런히 벽돌을 만들었어. 셋이서 힘을 합치니 뭐든지 척척! 집터에 튼튼한 나무 기둥을 세우자. 나란히 나란히 벽돌 벽을 쌓자. 반듯반듯 문과 반짝반짝 창문, 뾰족뾰족 빨간 지붕도 만들자. 드디어 예쁘고 튼튼한 집이 다 지어졌어! 하지만 아기 돼지 세 자매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어. 세 자매를 노리는 늑대가 있잖아. 세 자매는 창문을 활짝 열고 화덕에 냄비를 걸고 국을 끓였어. “고소한 냄새야, 멀리멀리 퍼져라.” ‘킁킁, 이 냄새는 바로 아기 돼지 세 자매의 집에서 나는 거로군. 셋이 힘을 합쳐 튼튼한 집을 지었으니, 콧김도, 입김도 소용없겠지.’ 늑대는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갈까 곰곰이 생각했어. 전에 아기 돼지 삼 형제 집에 굴뚝으로 들어가려다 혼이 났던 것을 떠올리니, 늑대는 아무래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었어. “자! 간다~!” 꽈당! “아이쿠, 문이 열려 있었잖아! 그런데 집 안이 왜 이렇게 깜깜하지?” 그때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 “내가 발목을 묶을게!” “나는 손목을 묶을게!” “나는 빨간 열매를 먹일게!” 어어! 아야! 윽윽! 늑대는 의자에 꽁꽁 묶였어. “이 못된 늑대를 우물에 빠뜨릴까, 낭떠러지에 밀까?” “오, 제발 그러지 마!” “네가 우리 돼지들을 못살게 구니까 그러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 거야. 나처럼 늙은 늑대는 사냥을 잘 못하거든.” 그러고 보니 늑대의 이빨은 흔들흔들, 털은 푸석푸석 아주 가여워 보였어. 결국 세 자매가 어떻게 했냐 하면. 늑대와 힘을 합쳐 농장을 만들었지. 첫째 돼지는 고소한 옥수수를 기르고, 둘째 돼지는 달콤한 고구마를 기르고, 셋째 돼지는 새콤한 사과를 길렀어. 늑대는 무얼 했냐고? 옥수수밭과 고구마밭에서 쑥쑥 잡초를 뽑고, 사과나무에서 쏙쏙 벌레를 잡아 닭을 길렀지. 늑대는 고기를 먹어야 하니까 말이야. 세 자매와 늑대의 식탁에는 날마다 먹을 것이 가득했어. “와, 힘을 합치니까 참 좋다!” 아기 돼지 세 자매와 늑대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대. 이 책은 아기 돼지 세 자매가 서로 힘을 합쳐 튼튼한 집을 짓고 늑대를 물리친 다음, 다시 늑대와도 힘을 합쳐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협력'에 관한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바로 '아기 돼지 삼 형제'예요. '아기 돼지 삼 형제'는 널리 알려진 명작 동화로, 삼 형제가 각각 지푸라기, 나뭇가지, 벽돌로 집을 짓는데 튼튼한 벽돌로 집을 지은 셋째 돼지가 늑대를 물리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우리의 아기 돼지 세 자매는 삼 형제가 처음부터 협력해서 집을 지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셋은 할 일을 공평하게 나누고 집을 짓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못된 늑대가 솔솔 잠이 오는 빨간 열매로 집 짓는 것을 방해했어요. 늑대의 속임수를 알게 된 아기 돼지 세 자매는 이제야말로 하나로 힘을 합칠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열심히 집을 지어 아주 튼튼한 새집을 짓지요. 그리고 차근차근 늑대를 물리칠 준비도 했지요. 결국 어리석은 늑대는 아기 돼지 세 자매가 어떤 작전을 짰는지 까맣게 모르고 호되게 당하고 말아요. 늑대는 울면서 자신이 돼지들을 괴롭히는 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어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착한 아기 돼지 세 자매는 늑대와 서로 힘을 합쳐 농장을 차렸어요. 협력을 통해 아기 돼지 세 자매는 늑대의 노동력을 얻고 늑대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늑대는 먹을 것을 얻고 좋은 친구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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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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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동물들이 모여 사는 큰 나무숲이에요. 동물들은 이 큰 나무숲을 다스릴 왕을 정하기로 했어요. 덕분에 다람쥐는 매우 바빠졌어요. 다람쥐는 작은 귀를 쫑긋 세워 동물들의 문제를 모두 들은 다음 척척 해결해 주는 해결사거든요. 다람쥐가 부지런히 숲속을 돌아다니는데, 기운 최고 사자랑 용기 최고 호랑이가 서로 왕이 되겠다며 싸우고 있지 뭐예요. “나처럼 기운 센 사자가 왕이 되는 건 당연해! 그래야 동물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 “무슨 소리! 나처럼 용감한 호랑이가 왕이 돼야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척척 해결해 주지!” 이럴 때에는 다람쥐가 나설 수밖에요. “그럼, 이 납작한 돌멩이를 던져 올려서 무늬가 없는 쪽이 나오면 사자님이, 무늬가 있는 쪽이 나오면 호랑이님이 왕이 되는 걸로 하지요.” “좋아, 좋아! 그렇게 하자!” 그래서 다람쥐가 돌멩이를 하늘 높이 부웅 던졌는데. “잠깐만 기다려!” 날개 최고 독수리가 돌멩이를 휙! 낚아채며 말했어요. “왕은 내가 되어야 해! 난 높이 날아서 멀리 보기 때문에 동물들의 형편을 두루두루 살필 수 있거든!” 기운 최고 사자, 용기 최고 호랑이, 날개 최고 독수리. 모두 왕이 되기에 충분했어요. “그럼,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쪽이 왕이 되면 어떨까요?” 다람쥐의 말에 모두가 찬성했지요. 그래서 동물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가위바위보!” 하고 외치려는데. “잠깐만 기다려!” 나이 최고 코끼리가 긴 코를 흔들며 쿵쿵쿵! 나왔어요. “동물들을 다스리려면 지혜가 필요해! 너희 나이를 모두 합한 것보다 나이가 더 많은 내가 그만큼 더 똑똑할 거 아냐? 그러니 당연히 내가 왕이 되어야 하고말고!” 기운 최고 사자, 용기 최고 호랑이, 날개 최고 독수리, 나이 최고 코끼리. 모두 왕이 되기에 충분했어요. “그럼, 제비뽑기를 해서 동그라미가 적힌 종이를 뽑은 동물을 왕으로 정하는 게 어떨까요?” 다람쥐는 종이를 접어 상자에 넣었어요. 그래서 나이 많은 코끼리부터 제비뽑기를 하려는데. “잠깐만!” 이렇게 외친 동물은 다름 아닌 다람쥐! “투표를 해서 왕을 정하는 게 좋겠어요. 모두의 왕을 정하는 일이니 다른 동물들의 생각도 알아야 하잖아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동물이 큰 나무숲의 왕이 되기로 해요!” “우아, 그거 좋은 생각인데?” 큰 나무숲의 동물들은 왕이 되었으면 하는 동물의 이름을 종이에 적었어요. 그다음에는 차례대로 상자에 쏙, 쏙! 물론 기운 최고 사자와 용기 최고 호랑이, 날개 최고 독수리와 나이 최고 코끼리 그리고 다람쥐도 투표를 했지요. 드디어 투표가 모두 끝났어요. 누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을까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건 기운 최고 사자도, 용기 최고 호랑이도, 날개 최고 독수리도, 나이 최고 코끼리도 아니었어요. 바로. 다람쥐였어요! 기운 최고 사자와 용기 최고 호랑이, 날개 최고 독수리와 나이 최고 코끼리가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말도 안 돼! 다람쥐는 힘도 약하잖아!” “몸집은 또 얼마나 작은데!” “다람쥐는 날지도 못해!” “나이도 가장 어려!” “우리는 힘세고 나이 많은 왕보다 우리의 생각을 잘 들어 주는 왕이 필요해.” “다람쥐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열심히 해결해 주었어. 다람쥐라면 훌륭한 왕이 되기에 충분해.” “으음. 그건 그래.” 이렇게 해서 다람쥐는 큰 나무숲의 왕이 되었어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귀가 밝고, 마음이 넓은 그런 왕이요! 제비뽑기를 하려는데, 다람쥐가 또 “잠깐만!”을 외쳤어요. 다람쥐는 아무래도 제비뽑기보다는 큰 나무숲의 왕을 정하는 것이니만큼 숲에 사는 다른 동물들이 모두 참여하는 투표를 해서 왕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모두 투표를 했어요. 투표로 뽑힌 동물은 뜻밖에도 다람쥐였어요.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다람쥐를 동물들이 좋아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서로 다를 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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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온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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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어떤 꿈이 있니?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참 멋진 꿈이구나. 그런데 마음껏 축구를 할 운동장이 없다고? 쓸 만한 바이올린을 살 수 없다고? 그래서 우울하니?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들어 보렴. 아프리카에서 온 한 소녀의 이야기야. 소녀는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살았어. 아빠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다섯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엄마와 소녀는 쓰레기 더미에서 고물들을 주워다 팔았지. 소녀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소녀에게 기회가 찾아왔어.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렇지만 소녀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어. 소녀의 마음을 알고 엄마와 동생들이 말했어. "얘야, 가장 중요한 건 네 꿈이란다. 꿈을 이룬 다음에 가족을 도우렴." "누나! 꼭 꿈을 이루어야 해." "난 누나가 정말 자랑스러워!" 가족의 따뜻한 말에 소녀는 용기를 얻었지. 비행기를 갈아타며 꼬박 이틀이 걸려 소녀는 커다란 도시에 도착했어.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건물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소녀는 낯선 풍경에 겁이 났어. 그날부터 소녀는 새로운 말을 배우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었어. 하루하루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지. 시간이 지나 소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성적도 좋아서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갈 자격도 얻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소녀를 도와주던 자선 단체는 고등학교까지만 도울 수 있다는 거야. 대학에 가려면 학비를 내야 하는데 소녀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었어. 소녀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봐 마음이 아팠어. 아프리카로 돌아가 가족 품에서 쉬고만 싶었지. 그때 동생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왔어. "누나, 꼭 꿈을 이루어야 해!" "누나가 정말 자랑스러워!" '그래. 아무것도 안 해 보고 그만둘 순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 보자!' 다음 날 아침, 소녀는 고등학교 시절 성적표와 대학에서 보내 준 입학 허가서를 들고 부자들의 거리로 나갔어. 하늘로 우뚝 솟은 높은 건물들 사이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지. "저는 멀고 먼 아프리카에서 왔어요! 제 꿈은 저처럼 가난한 아이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교육자가 되는 거예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교에 가고 싶은데, 제게는 돈이 없어요. 제 미래를 믿고 도와주신다면 대학을 졸업한 뒤에 꼭 갚겠어요!" 똑딱, 똑딱, 똑딱, 똑딱.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졌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 소녀는 춥고, 배고프고, 부끄럽고, 또 슬펐어.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어. '흑흑,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어. 누가 나 같은 아이를 도와주겠어.' 바로 그때였어! "너한테 투자를 하면 이자까지 갚을 테냐?" "네?" "허허, 투자를 하면 이익이 있어야 하잖니." "네, 갚을게요. 이자도 갚을게요!" 그 신사는 알고 보니 큰 은행에서 일하는 높은 사람이었어. 소녀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대학에 보내 주기로 결심한 거지! 대학에 간 소녀는 아주아주 열심히 공부했어. 자신을 믿어 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또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서, 무엇보다 소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 소녀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자, 아직도 실망만 하고 있을 거니? 너는 그 꿈을 위해 무얼 하고 있니? 지금부터 한 발, 한 발, 꿈을 향해 나아가 보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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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강 꼬마 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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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햇살과 푸른 물결, 상쾌한 공기. 여기는 비버들이 사는 초록 강이에요. 강가에는 비버들의 집을 지을 나무들도 있고, 맛있는 먹이도 많이 있지요. 꼬마 비버 꼬비는 초록 강을 정말 좋아했어요. 비버들만 초록 강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사람들도 부릉부릉 자동차를 몰고 와서는 강가에서 음식을 해 먹고, 헤엄을 치고,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지요. 얼마 되지 않아 초록 강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더러워졌어요. “이건 뭐지? 예쁘게 생겼네.” “앗! 유리 조각은 조심해야 해. 아빠가 유리 조각에 베어서 피가 났었어.” “잉잉, 이건 또 뭘까? 꼬리에 감겨 헤엄을 못 치겠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비버들은 회의를 열었어요. “물속까지 쓰레기투성이예요.” “쓰레기를 치우든지, 이사를 가든지 합시다!” “쓰레기를 언제 다 치워요? 그냥 이사를 가요.” 꼬비는 생각이 달랐어요. “안 돼요! 초록 강은 우리의 고향이에요!” 하지만 아무도 꼬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다음 날, 꼬비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강가로 갔어요. 그러고는 쓰레기를 모아 어디론가 가져갔지요. 해님이 머리 위에 떠 있는 한낮에도, 올빼미가 훨훨 날아다니는 늦은 밤에도 끄응 끄응, 영차 어영차! “꼬비 좀 봐. 너무 지저분해.”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니까.” 친구들은 꼬비가 이상해졌다며 수군거렸어요. 꼬마 비버들이 이빨로 나무를 갉아 튼튼한 집을 만드는 연습을 하는 동안 꼬비는 쓰레기만 갖고 놀았어요. 몇 주 동안 어른 비버들은 열심히 이사 갈 준비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비버들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어라? 쓰레기가 줄어들었어!” “맞아, 초록 강이 깨끗해졌어!” 그렇다고 해서 비버들이 이사 갈 생각을 그만둔 건 아니었어요. 꼬비의 친구들도 초록 강이 점점 깨끗해지는 걸 눈치챘어요. “아마 꼬비가 쓰레기를 가져갔기 때문일 거야.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몰래 따라가 보자.” 살금살금, 찰바당찰바당. 조심조심, 찰바당찰바당. 꼬비는 초록 강 어귀에 닿자 쓰레기를 가지고 풀숲으로 들어갔어요. 풀숲에는 꼬비가 모아 둔 쓰레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깨끗이 닦고 말려서 냄새도 나지 않았지요. “꼬비야!” “어? 언제 따라왔지? 헤헤.” “이렇게 쓰레기를 모아서 뭘 하려고?” “쓰레기를 치우면 초록 강도 살릴 수 있고, 더 멋진 일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거야.” 친구들은 꼬비의 생각에 감동했어요. “우리도 도울게!” 꼬비는 친구들에게 자기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들려주었어요. 꼬마 비버들은 생각을 모아 더 좋은 계획을 짰고, 힘을 모아 더 많은 쓰레기를 모았지요. 이번에는 어른 비버들도 눈치를 채고, 살금살금, 찰바당찰바당. 조심조심, 찰바당찰바당. 꼬마 비버들을 뒤따라갔어요. 뚝딱뚝딱! 쿵쾅쿵쾅! 꼬마 비버들이 쓰레기로 멋진 놀이터를 만들었네요. “이건 빙글 뱅글 그네.” “이건 통통 쭈룩 미끄럼틀.” “이건 반짝 대롱 철봉.” “이건 찰랑 딩동 악기.” 놀이터를 본 어른 비버들은 몹시 부끄러웠어요. “꼬비야 그리고 얘들아, 너희가 초록 강을 아름답게 바꾸고 우리 생각도 바꿔 주었구나. 고맙다!” 비버들은 다시는 초록 강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이렇게 멋진 놀이터가 있는 강은 세상에 하나뿐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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