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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가 에보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꼬마 지네 에보가 엄마와 함께 시내에 나왔어요. 멋쟁이들이 알록달록 옷을 입고, 반짝반짝 구두를 신고, 활기차게 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엄마, 나도 예쁜 신발을 신고 싶어요."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이렇게 많은 발에 신발을 신는다고? 그건 너무 오래 걸리고 무거워서 안 돼." 에보는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이렇게 많은 발에 신발을 신으면 훨씬 더 멋져 보일 텐데.' 한참을 생각하던 에보는 한 가지 결심을 했어요. "좋아! 내가 가볍고 빨리 신을 수 있는 신발을 만들어 보겠어!" 그날부터 에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방으로 들어가 신발을 만들었어요. "다 됐다!" 에보의 첫 신발이 만들어졌어요. 딱딱하고 무거운 구두가 아니라 끈이 달린 가벼운 운동화였지요. 에보는 얼른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신발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신이 난 에보는 한 발 한 발 신발을 신기 시작했어요. 쓰윽 발을 넣고, 꽁꽁 끈을 묶고, 쓰윽 발을 넣고, 꽁꽁 끈을 묶고. 드디어 신발을 다 신은 에보가 학교로 향했어요. 그런데 교문 앞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벌써 수업을 마치고 나오네요? 에보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집으로 가야 했어요. 에보는 신발 만들기를 포기했을까요? 벌써 포기한다면 에보가 아니죠. 에보는 새로운 신발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에보는 잠도 조금만 자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밖에 나가서 놀지도 않았어요. "다 됐다!" 에보의 두 번째 신발이 만들어졌어요. 이번에는 끈이 달린 운동화가 아니라 똑딱단추가 달린 운동화였어요. 신이 난 에보는 한 발 한 발 신발을 신기 시작했어요. 쓰윽 발을 넣고, 똑딱단추를 잠그고, 쓰윽 발을 넣고, 똑딱단추를 잠그고. 하지만 에보는 지각을 하고 말았어요. 아무리 서둘러도 그 많은 신발을 신기에는 무리였나 봐요. 선생님이 에보에게 말했어요. "에보야, 지난번에는 결석을 하더니 오늘은 지각이니? 다음에 또 지각하면 혼날 줄 알아라." 에보는 신발 만들기를 포기했을까요? 물론 아니죠. 에보는 또다시 새로운 신발을 만들었어요. 바로 더 빨리 신을 수 있는 찍찍이 운동화였어요. 쓰윽 발을 넣고, 찌익 찍찍이를 붙이고, 쓰윽 발을 넣고, 찌익 찍찍이를 붙이고. 그날 에보는 늦지 않게 학교에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쿵! "어이쿠, 또 넘어졌어!" 찍찍이가 서로 들러붙어 발이 엉켜서 자꾸만 넘어지는 거예요. 상처투성이가 된 에보는 찍찍이 신발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집에 돌아온 에보는 엄마를 보고 울면서 말했어요. "신발 만드는 거 이젠 포기할래요! 지네에게 신발은 어울리지 않아요. 흑흑." 깊은 밤, 에보는 쿨쿨 잠이 들었어요. 이번에는 엄마가 뚝딱뚝딱 뚝딱뚝딱. "다 됐다!" "에보야, 이리 와 보렴. 우리 에보가 일할 방이야." "우아! 엄마, 방이 너무 멋져요!" "에보야,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 약속!" 딩동! 문밖에 에보의 친구들이 찾아왔어요. "에보야, 끈 달린 운동화 좀 만들어 줘!" "에보야, 똑딱단추 달린 운동화 좀 만들어 줘!" "에보야, 나는 찍찍이! 찍찍이 운동화가 필요해!" 신이 난 에보는 더 열심히 신발을 만들었어요. 그럼, 지네를 위한 신발 만들기는 포기했냐고요? 벌써 포기한다면 에보가 아니죠.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꼭 만들 수 있을 거야!" 끈기란 쉽게 단념하지 않고 견뎌 나가는 것을 말해요. 우리 속담에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는 말이 있어요. 끈기를 가지고 계속 도전하면 언젠가는 뜻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 어디에도 쉽게, 힘 안 들이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어요. 힘이 들면 포기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그렇게 포기를 한다면 아무리 쉬운 일도 이룰 수 없지요. 따라서 조금 힘이 들더라도 끈기를 가지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해요. 그래야만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고, 성공의 기쁨을 맛볼 수 있어요.
꿈꾸는 갈색 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숲 속에 봄이 찾아오자 겨울잠에서 깬 갈색곰이 동굴에서 나왔어. 갈색곰은 다른 친구들처럼 뛰어다니고, 아름드리나무에 올라가 저 먼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어. 하지만 절룩거리는 다리로는 어려운 일이었지. 갈색곰은 어렸을 적에 사냥꾼의 덫에 걸려 다리를 크게 다쳤거든. 강가에 앉아 있던 갈색곰은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비버를 보았어. 슥, 스르륵! 햇살을 받은 강물은 방울방울 별처럼 반짝였지. 아픈 다리 때문에 한 번도 헤엄을 쳐 본 적이 없는 갈색곰은 마음속으로 외쳤어. '나도 헤엄치고 싶어! 저렇게 힘차고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어!' 그날부터 갈색곰은 남몰래 비버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흉내 냈어. 그러다 비버 할아버지한테 들켜 버렸지. "뭐 하는 거냐?" "헤, 헤엄치는 연습이요." "그걸 왜 하는데?" 갈색곰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했어. "바, 바다에 가고 싶어서요. 다리가 아파 걸어서는 갈 수가 없거든요." 비버 할아버지는 갈색곰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갈색곰을 도와주기로 했어. "바다로 헤엄쳐 가기엔 날씨가 따뜻한 여름이 좋아. 곧 3월이니까 7월에 바다로 가자꾸나." 갈색곰과 비버 할아버지는 계획을 세웠어. 3월, 4월, 5월, 6월의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차근차근 정했지. 3월의 목표는 힘을 기르는 거야. "바다까지 헤엄쳐 가려면 건강해야 하고 팔다리도 튼튼해야 하거든." 갈색곰은 날마다 팔 굽혀 펴기 백 번에 나무에 매달리기 백 번, 바위 들어 올리기 백 번을 했어. 힘들었지만 갈색곰은 아주 잘 이겨 냈어. 4월의 목표는 연못에서 헤엄치기! 갈색곰은 처음에는 물에 뜨는 것도 어려웠지만, 보름이 지나면서 헤엄칠 수 있게 되었어. "우아! 내가 헤엄친다!" 5월의 목표는 강에서 헤엄치기! 처음에는 시내 끝에서 끝까지, 그다음에는 강을 가로지르기, 마지막은 강을 따라 헤엄치기야. 아뿔싸! 강을 따라 헤엄치던 갈색곰이 물에 빠져 버렸어! 갈색곰은 비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왔어. "전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욕심이 너무 컸나 봐요." 갈색곰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지. "갈색곰아, 바다로 헤엄쳐 가는 건 네 꿈이야. 꿈을 이루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하지만 넌 지금까지 아주 잘해 왔단다." 그날 밤 갈색곰은 오래오래 밤하늘을 바라보았어. 갈색곰은 다시 비버 할아버지를 찾아갔어. 6월부터 갈색곰은 날마다 강을 가로질러 헤엄치는 연습을 하고, 밤에는 늦도록 바다에 대해 공부를 했어. 비버들은 거친 파도와 싸우는 방법과 해파리와 말미잘 같은 위험한 동물들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어. 드디어 7월이야! "갈색곰아, 떠날 준비는 됐니?" "네, 준비됐어요!" 갈색곰과 비버 할아버지는 강을 따라 헤엄치고, 또 헤엄쳤어. 헤엄치다가 해가 지면 강가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다시 헤엄을 쳤지. 어느덧 강이 점점 넓어졌어. 바다가 가까워진 거야. 그런데 비버 할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어. "내가 늙고 몸이 아파 더 이상은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겠구나. 갈색곰아,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겠지?" 혼자가 된 갈색곰은 용기를 내어 헤엄치고 또 헤엄쳤어. 우아, 드디어 바다야! 바다는 갈색곰이 꿈꾸던 모습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다웠어. 갈색곰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어. "내가 해냈다! 나도 할 수 있어!" 집으로 돌아온 갈색곰은 겨울을 맞이했어. 다시 길고 깊은 겨울잠에 푹 빠졌지.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갈색곰은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거야.
우화 속 리더십 동화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허풍쟁이 사냥꾼. 옛날에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사냥꾼이 있었어요. 사냥꾼은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며 말했어요. “내가 사자를 잡아 올 테니 기대하시오.” 숲 속으로 들어간 사냥꾼은 커다란 사자 발자국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막상 발자국을 보자 더럭 겁이 났지요.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 그러다 사냥꾼은 발자국을 놓치고 말았어요. 그때 마침 나무꾼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사냥꾼은 또 잘난 체하며 물었지요. “이보게! 혹시 사자 발자국 못 보았나?” 그러자 나무꾼이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쉿! 사자는 지금 저 뒤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오.” 그 말을 듣고 놀란 사냥꾼은 갑자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아, 아니! 그냥 사자 발자국만 찾는 중이었네.” 나무꾼은 그 모습을 보며 끌끌 혀를 찼지요. “말로만 용감하면 뭐하나! 진짜 용기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 제비와 삼씨. 봄이 되자 농부가 밭에 삼씨를 심었어요. “삼이 크게 자라면 그 줄기로 그물을 만들어 새를 잡아야지.” 때마침 날아가던 제비가 농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는 다른 새들에게 전했어요. “얘들아, 삼씨가 자라기 전에 어서 먹어야 해. 농부가 삼 줄기로 그물을 만들어 우리를 잡겠대.” 하지만 아무도 제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농부가 삼씨를 심었어? 삼이 자라서 여물면 얼마나 맛있는데! 다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지.” 결국 가을이 오자 농부는 삼 줄기로 그물을 만들어서 새들을 몽땅 잡아버렸지 뭐예요. 사자와 생쥐. 사자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생쥐가 실수로 사자의 발등을 꾹 밟았어요. “조그만 녀석이 감히 사자의 낮잠을 깨우다니!” “잘못했어요, 사자님. 용서해 주시면 꼭 은혜를 갚을게요.” “하하하! 네 주제에 은혜를 갚는다고? 이번은 봐줄 테니 어서 가거라.” 사자는 생쥐의 약속이 우스울 뿐이었지요. 며칠 뒤, 사자는 그만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고 말았어요. 사자는 옴짝달싹 못하고 으르렁거리기만 했지요. 그때 멀리서 울음소리를 들은 생쥐가 한걸음에 달려오더니 사각사각, 이빨로 그물을 물어뜯어 사자를 구했어요. “생쥐야, 네가 약속을 지켜 내 목숨을 구했구나!” 사자는 생쥐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어요. 새장 안 비둘기, 새장 밖 비둘기. 요리사가 비둘기들을 새장 안에 넣고 맛있는 모이를 듬뿍 주었어요. 그러고는 날마다 가장 통통하게 살찐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했지요. 영리한 비둘기 한 마리가 말했어요. “이제 모이를 먹지 말자. 살이 찌면 냄비 속에 들어가게 돼.” 하지만 다른 비둘기들은 모이만 보면 참지 못하고 콕콕, 콕콕. 영리한 비둘기는 배가 고파도 꾹 참고 절대로 모이를 먹지 않았어요. 영리한 비둘기는 점점 몸이 마르더니, 새장의 창살 틈으로 쏙 빠져나갔지요. “어? 우리도 같이 가자!” 다른 비둘기들도 새장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살이 쪄서 우당탕퉁탕, 파닥파닥! 요란한 소리에 화가 난 요리사는 남은 비둘기들을 몽땅 요리해 버렸어요. 스무 명의 아들. 한 노인에게 스무 명의 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들들은 걸핏하면 아옹다옹 다투었어요. 참다못한 노인이 아들들을 불러 모았지요. “얘들아, 화살 한 개씩을 부러뜨려 보거라.” 아들들은 뚝! 뚝! 쉽게 화살을 부러뜨렸어요. “이번에는 화살 스무 개를 한 번에 부러뜨려라.” 하지만 아무도 화살을 부러뜨리지 못했어요. “화살 한 대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지만 여러 대를 모으면 부러뜨리기 어렵다. 너희도 힘을 모으면 못할 게 없는데, 왜 부러지기 쉬운 화살이 되려 하느냐!” 스무 명의 아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어요. 팔려 간 농부. 큰 병에 걸린 농부가 신에게 기도했어요. “제 병을 낫게만 해 주시면 소 백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기도를 들은 신은 농부의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해 주었지요. 하지만 막상 병이 낫자 농부는 소를 바치는 게 아까웠어요. ‘옳거니! 이렇게 해 보자.’ 만지작만지작, 주물럭주물럭. 농부는 밀가루로 소 백 마리를 빚어 진짜 소인 것처럼 신께 바쳤어요. 몹시 화가 난 신은 약속을 어긴 농부에게 벌을 내리기로 했어요. 신은 농부의 꿈에 나타나 말했지요. “약속한 소 백 마리는 잘 받았네. 그 답례로 내일 아침 바닷가에 가면 은 백 냥을 볼 수 있도록 해 주겠네.” 신이 난 농부가 아침 일찍 바닷가로 가자, 무서운 해적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해적들은 농부를 더도 덜도 아닌 은 백 냥에 아주 먼 나라로 팔아넘겼어요. 기울어진 술병. 스승과 제자들이 여행 중에 한 집에 묵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집에는 기울어진 모양의 술병이 하나 있었어요. 스승은 집 주인인 노인에게 물었어요. “저 기울어진 술병은 무엇인가요?” “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께서 저 술병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 해서 보관하고 있지요.” 노인의 말에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지요. “스승님, 노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요?” 그러자 스승이 기울어진 술병에 술을 붓기 시작했어요. 졸졸졸, 술이 중간쯤 차자 술병이 똑바로 서더니, 졸졸졸, 술이 더 차오르자 그만 훌렁 뒤집어졌죠. “술이 너무 많이 차면 술병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사람도 뭐든 넘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단다.” 제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기울어진 술병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어요. 거지와 죽은 쥐. 어느 날, 부자가 게으름뱅이 친구에게 말했어요. “뭐든 열심히 노력만 하면 저기 있는 죽은 쥐를 갖고도 돈을 벌 수 있네.” 마침 거지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부자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지는 죽은 쥐를 주워 들고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아주 큰 부자에게 게으름뱅이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부자에게 몇 번씩 돈을 빌려 장사를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해 빈털터리가 되었지요. 거지는 죽은 쥐를 들고 주막으로 갔어요. “이 집 고양이가 쥐를 못 잡는다고요? 죽은 쥐를 가지고 놀다 보면 산 쥐를 잡고 싶은 생각이 들 거요.” 거지는 동전 한 닢에 죽은 쥐를 팔았지요. 그리고 그 돈으로 꿀을 사서 꿀물을 만들고는 과수원 집 머슴에게 꿀물을 주고 바싹 마른 나무 한 그루를 얻었어요. 거지는 그 나무를 뚝딱뚝딱 패서 장작을 만들었어요. 그러고는 장작을 옹기장이에게 주어 옹기 몇 개를 얻었지요. 그 옹기들을 시장에 내다 팔자 제법 많은 돈이 모였어요. 거지는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곧 큰 부자가 되었어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사나운 고양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쥐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했어요. “도대체 고양이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맞아. 이러다가 모두 고양이 밥이 되겠어.” 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어요. 그때 영리한 쥐 한 마리가 나서며 말했지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방울이 울릴 테니 그 소리를 듣고 도망치면 잡힐 일이 없잖아.” 쥐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어요. “그런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난 다리를 다쳐서.” “난 고양이 털만 스쳐도 재채기가 나, 에취!” 겁이 난 쥐들은 저마다 핑계를 댔지요. 결국 근사한 계획을 세우고도 실천을 못해서 쥐들은 오늘도 고양이에게 쫓기고 있지요. 야옹야옹, 찍! 찍! 찍! 두 딸을 가진 아버지. 두 딸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큰딸은 농부에게, 작은딸은 옹기장이에게 시집을 보냈지요. 그런데 딸들이 시집을 가고 나자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에도 걱정, 비가 안 오는 날에도 걱정이었어요. 비가 오는 날이면, “작은딸네가 옹기를 못 빚을 텐데.” 비가 안 오는 날이면, “큰딸네가 농사를 망칠 텐데.” 그러자 지혜로운 이웃이 한마디했어요. “비가 오면 큰딸네 농사가 잘되고, 비가 안 오면 작은딸네가 옹기를 잘 빚으니 좋잖소!” 그 말에 농부의 얼굴은 걱정 대신 기쁨으로 가득 찼대요. 까마귀와 산양과 쥐와 거북. 까마귀와 산양과 쥐와 거북은 모습은 달랐지만 아주 친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산양이 사냥꾼의 그물에 걸렸어요. 하늘을 날던 까마귀가 산양을 보고 말했지요. “잠깐만 기다려. 우리가 구해 줄게!” 까마귀는 쥐와 거북에게 그 사실을 알렸어요. 셋은 산양을 구하러 부지런히 달려갔어요. 쥐가 이빨로 그물에 구멍을 내자 산양이 빠져나왔어요. 산양을 잡아갈 자루를 들고 오던 사냥꾼이 도망가는 산양을 보고는 뒤를 쫓아갔어요. 그때 거북이 엉금엉금 기어가 사냥꾼의 발을 꽉 물었어요. “아얏!” 사냥꾼이 놀라 멈칫한 순간, 산양은 재빨리 뛰어 도망쳤지요. 화가 난 사냥꾼이 거북을 잡는 사이에 쥐는 자루에다 열심히 구멍을 뚫었어요. 거북은 곧 사냥꾼에게 잡혀 자루에 갇혔지만 자루에 난 구멍으로 쏙 빠져나왔지요. 목숨을 구한 산양이 까마귀와 쥐와 거북에게 말했어요. “얘들아, 정말 고마워!” “이 정도로 뭘, 우리는 친구잖아!”
탈무드 속 리더십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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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정직 당나귀와 보석. 옛날에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파는 나무꾼이 있었어요. 나무꾼은 날마다 등에 나뭇짐을 지고 다니는 게 힘들어 은화 다섯 닢을 들고 당나귀를 사러 갔지요. 그런데 젊고 튼튼한 당나귀들은 은화 서른 닢을 줘야 한대요. 나무꾼은 작고 늙고 더러운 당나귀를 가리켰어요. "주인장, 저기 구석에 있는 당나귀는 얼마인가요?" "은화 다섯 닢만 주게." 이렇게 해서 나무꾼은 작고 늙고 더러운 당나귀를 샀어요. "어휴, 고약한 냄새! 목욕부터 해야겠다." 나무꾼은 당나귀를 냇가로 데려가 박박 씻겼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당나귀 갈기에서 반짝이는 보석 하나가 나왔어요. "오, 당나귀를 판 사람이 잃어버렸나 보네." 나무꾼은 얼른 시장으로 가 보석을 돌려주었지요. "어이쿠!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정말 고맙네!" 장사꾼은 크게 기뻐하며 나무꾼에게 젊고 튼튼한 당나귀를 선물로 주었어요. 부정 두 친구. 피델리오와 제이드는 사이좋은 친구였어요. 피델리오는 나이 든 부모님을 모셨고, 제이드는 어린 동생들과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해,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었어요. 피델리오와 제이드가 거두어들인 곡식과 과일들은 창고에 반도 차지 않았지요. 피델리오는 한숨을 푹 쉬었어요. '제이드가 걱정이야. 어린 동생들이 많으니 먹을 게 많이 모자랄 텐데.' 제이드도 한숨을 푹 쉬었어요. '피델리오가 나이 든 부모님을 모시려면 먹을 게 많이 필요할 텐데.' 밤이 깊자, 피델리오는 자신의 곡식을 제이드의 창고에 가져다 놓았어요. 제이드도 자신의 곡식을 피델리오의 창고에 가져다 놓았지요. 다음 날, 두 친구는 깜짝 놀랐어요! 창고에 곡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두 친구의 창고는 줄어들 줄 몰랐어요. 나흘째가 되는 날 밤, 곡식을 나르던 두 친구는 길에서 딱 마주쳤어요. "제이드, 자네였군!" "피델리오, 역시 자네였어!" 두 친구는 꼭 껴안았어요. 긍정 와글와글 시끄러운 집. 시골 마을에 가난한 농부가 살았어요. 농부는 자기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집이 작다고 투덜투덜, 시끄럽다고 투덜투덜! 농부는 참다못해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할아버지를 찾아갔지요. "집은 게딱지만 한데 아이들은 와글와글하니 비좁고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어요." "음, 좋은 방법이 있지. 집에 염소를 들여놓게나." 염소를 집 안에 들였더니, 시끌시끌, 매애! "할아버지, 염소 때문에 더 시끄러워요!" "그렇다면 집에 닭을 들여놓게나." 닭까지 들여놓자, 시끌시끌, 매애, 꼬끼오! "아니, 집이 더 좁아지고 시끄러워졌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염소와 닭을 내보내게." 농부는 염소와 닭을 집에서 내보냈어요. "이야!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물론 집도 그대로이고 아이들도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마음이 바뀌니 농부는 아주아주 행복했어요. 경청 끄덕끄덕 악어새. 정글 속 늪에 악어 노랑이와 초록이가 살았어요. 늘 사이좋게 지내던 노랑이와 초록이가 오늘따라 서로 씩씩거리며 다투고 있네요. 그 모습을 보고 악어새가 날아왔어요. "노랑아, 왜 그렇게 화가 났니?" "나는 맛있는 물고기가 있으면 초록이랑 나눠 먹는데, 초록이는 자기 혼자 물고기를 먹고 있잖아." "그래, 네가 화낼 만도 하구나!" 악어새는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악어새는 초록이한테 날아갔어요. "내가 물고기를 혼자 먹은 건 어제 저녁을 굶어서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야. 노랑이는 그것도 모르고 화만 내." 악어새는 또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말이죠, 노랑이와 초록이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는 거예요. 정글의 동물들은 궁금해졌어요. "악어새야, 저 아이들한테 뭐라고 한 거니?" "난 그저 둘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이야." 때로는 잘 듣는 것이 잘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실천 훌륭한 제자. "포시야, 사람들을 도운 훌륭한 위인들에 대해 말해 보렴." 하지만 포시는 우물우물, 대답을 못했어요. "이 녀석! 어제 분명히 위인들에 대한 책을 읽어 오라고 했을 텐데" 선생님은 포시를 크게 꾸짖었어요. 며칠 뒤, 선생님은 눈을 치우는 포시를 보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포시를 칭찬하는 말도 들었지요. "참 착한 아이야. 마을 일에 저렇게 열심이니." "저 아이가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도 돕는대요." 포시가 그렇게 착한 아이인 줄 미처 몰랐던 선생님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어요. 선생님은 포시의 손을 꼭 잡고 사과했어요. "포시야, 미안하다. 사람들을 도운 위인 이야기 수백 권을 읽는 것보다 아는 것을 직접 실천하는 게 더 값지다는 걸 선생님이 미처 몰랐구나!" 책임감 목숨을 구한 페인트공.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낡은 배 한 척을 갖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배를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밑바닥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어요. "구멍이 생겼네. 내년 여름에나 낚시를 갈 테니 그때 구멍을 막아야겠다."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페인트공에게 낡은 배를 깨끗이 칠해 달라고 했지요. 그 뒤, 할아버지는 배에 난 구멍을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여름이 되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할아버지는 갑자기 배에 난 구멍이 생각났어요. "아차!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가라앉겠어!"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구멍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랬구나! 페인트공이 구멍을 막아 놓았어!" 할아버지는 페인트공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했어요. "자네 덕분에 살았네. 정말 고맙구먼." "하하,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협력 개와 고양이의 보물찾기. 숲 속에 보물찾기 대회가 열렸어요. 둘씩 짝을 지어 숨겨진 보물을 찾는 대회지요. 다른 동물들은 모두 둘씩 짝을 지었지만 다리를 절룩거리는 고양이와 앞을 못 보는 개는 아무도 짝이 되려고 하지 않았어요. "고양아, 우리 둘이 짝이 되자꾸나." "좋아! 힘을 합쳐 보물을 찾아보자." 한참 보물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외쳤어요. "저기 나무 위에 보물이 있다!" 그러자 짝을 이루었던 동물들은 서로 떠밀며 높은 나무 위에 먼저 올라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개와 고양이는 달랐지요. "고양아, 나는 앞을 못 보니까 네가 내 어깨를 밟고 올라서서 보물을 꺼내렴." 고양이는 개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보물을 꺼냈어요. "아차, 우리도 짝이랑 힘을 합칠걸!" 다른 동물들은 개와 고양이를 보며 후회했지요. 대화 수다쟁이 오리. 농장에 수다쟁이 오리가 살고 있었어요. 꽥꽥꽥! 오리는 쉴 새 없이 떠들며 다른 동물들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리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하품만 했지요. 조잘조잘 이러쿵 저러쿵. 하루는 오리가 황소에게 달려오더니 또 꽥꽥꽥 떠들기 시작했어요. "글쎄 글쎄, 돼지가 너더러 욕심꾸러기래!" 그러자 황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그랬을 리 없어!" "아냐 아냐, 똑똑히 들었다니까!" "말도 안 돼. 오리 너 혼자 쉴 새 없이 떠들었을 텐데 돼지가 어느 틈에 내 얘기를 했겠니?" 황소의 말에 오리의 두 볼이 빨개졌어요. 나눔 마법의 사과. 옛날, 어느 왕국의 임금님에게 예쁜 공주가 있었어요. 공주는 유명하다는 의사들도 못 고치는 큰 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임금님은, 공주의 병을 고쳐 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온 나라에 글을 써 붙였어요. 그런데 궁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마법의 물건을 가진 삼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세상 어디든 볼 수 있는 망원경으로 그 글을 본 첫째가, 동생들에게 공주의 병을 고쳐 주자고 했어요. 그리고 삼 형제는 둘째의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궁전으로 갔지요. 셋째는 백성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임금님이 되었어요. 셋째는 마법의 사과를 공주에게 먹였어요. 공주는 사과를 먹고 씻은 듯 병이 나았지요. 임금님은 누구를 사위로 삼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어요. 삼 형제가 힘을 모아서 공주를 고쳐 주었으니까요. 그때 공주가 말했어요. "저는 셋째와 결혼할래요. 왜냐하면 첫째의 망원경과 둘째의 양탄자는 제 병을 고친 후에도 남아 있지만 셋째의 사과는 제가 먹어서 없어졌거든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눠 준 셋째가 공주와 결혼했어요. 셋째는 백성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임금님이 되었어요. 겸손 거미와 모기. 세상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거만한 왕이 있었어요. 이 거만한 왕과 이웃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거만한 왕은 이웃 나라 병사들에게 쫓겨 동굴 속에 숨어들었어요. 때마침 동굴 입구에 거미가 줄을 치기 시작했는데, 왕을 뒤쫓던 병사들이 동굴 앞에 왔어요. "거미줄이 쳐진 걸 보니 이 안에는 없겠군. 가자!" 거만한 왕은 작은 거미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요. 거만한 왕은 이웃 나라 왕의 칼을 훔치기로 했어요. 그러면 겁을 먹고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밤중에 거만한 왕이 이웃 나라 왕의 방에 들어와 칼을 빼내려고 하는데, 칼이 이웃 나라 왕의 다리 밑에 깔려 빼낼 수가 없었어요. 때마침 모기가 앵앵거리며 이웃 나라 왕의 다리를 물자, 왕이 다리를 들고 벅벅 긁었어요. 그 틈에 거만한 왕은 얼른 칼을 들고나와 전쟁에서 이겼어요. '이 모든 것이 내가 하찮게 여기던 거미와 모기 덕분이구나.' 그 뒤, 거만한 왕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겸손한 왕이 되었어요.
우리엄마 리더십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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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얼이를 데리고 ‘약속’대로 백화점에 갔다. 전에 약속했던 장난감도 사 주고, 새 운동화도 사 주었다. 내가 이렇게 약속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공원 가요.” “엄마 피곤해. 내일 가자.” “엄마, 책 읽어 주세요.” “지금은 바쁘니까 이따가.” “엄마, 나랑 놀아요.” “그래, 나중에.” 바로 나와 얼이가 종종 나누는 대화이다. 그런데 내가 어제 무심코 얼이한테, “내일은 아빠 쉬는 날이니까 백화점에 갈까?” 하고 묻자 얼이는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너 왜 그래? 가기 싫어?” 내가 이렇게 묻자 우리 얼이가 하는 말, “내일 가자는 건 안 간다는 거잖아요. 내일, 이따가, 나중에, 모두요.”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내일, 이따가, 나중에……. 내가 이 말로 우리 얼이를 얼마나 많이 실망시켰던 것일까! 나는 이제부터 얼이와 하는 약속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인 양 꼭 지키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아이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부끄러운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아, 하나 더! 약속은 꼭 지키되, 절대 남발하지는 말 것! 얼이한테 앞으로는 약속을 잘 지키겠다고 했더니 얼이 녀석,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약속을 시시콜콜 다 기억해 내고 있다. 아니, 아이한테 휴대 전화를 사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니! 내가 잠시 정신을 놓았었나 보다. 내가 얼이에게 요구하는 몇 가지 ‘절대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15분 이상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 며칠 내가 감기에 걸려서 그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아져 얼이가 혼자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딱 오늘 하루만 봐주는 거다.” “내일부터는 안 돼.” 오늘 몸이 좀 나아진 듯해서 나는 다시 엄격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안 돼! 이제 그만해!” 그러면서 내가 컴퓨터를 끄자, 얼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떼를 썼다. 나는 큰소리를 치며 혼을 냈고, 얼이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처음에는 몹시 화가 났다. 그러다가 잠든 얼이를 보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뿔싸! 잘못은 오히려 내게 있는 게 아닌가! 얼이는 그저 내 원칙에 일관성이 없음을 알고 더 강하게 자기주장을 했을 뿐이다. 내 비일관성이 얼이에게 잘못된 기대를 심어 준 것이다. 나는 다시금 엄마로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철저한 기준을 갖고 아이에게 일관되게 적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나의 곧은 원칙을 통해 우리 얼이는 자기 통제력과 도덕의 기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원칙은 우리 얼이에게만 필요한 게 아닌 듯싶다. 얼이 아빠의 귀가 시간은 늦어도 열한 시까지인데, 며칠 봐줬더니 벌써 열두 시다! 자기 통제력을 잊었나 보다. 어디 두고 보자고! 그런데 원칙은 우리 얼이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지.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며칠 봐줬더니 열두 시가 넘어도 안 들어와? 어디 두고 보자고! 거리 곳곳에 빨간 구세군 자선냄비가 세워져 있다. 그 풍경은 왠지 마음 한구석을 포근하게 해 준다. 내가 자선냄비 안에 돈을 넣자, 얼이가 이유를 물었다. 왜 모르는 사람을 돕는 거냐고. “알든 모르든 누군가가 이 돈으로 조금 더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다면 엄마는 그걸로 행복해.” 얼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알아들은 것일까? 그렇다. 우리 얼이는 가슴으로 그 말을 알아들었다. 얼이는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동네 지하철역으로 향하더니, 계단 한구석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동전 한 닢을 깡통 속에 넣었다. 딸깡! “얼아, 왜 그랬니?” 내가 묻자, 얼이가 말했다. “며칠 전에 아빠랑 지하철 타러 왔다가 저 할아버지를 봤는데, 그때 마음이 참 이상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괜찮아요. 아주 기뻐요.” 나는 늘 우리 얼이가 가슴이 따뜻한 아이로 커 주었으면 싶었다. 오늘 그 비법을 알았다. 바로 내 가슴부터 따뜻해지면 되는 거다. 오늘 얼이를 데리고 친구 미진이네 집에 갔다. 미진이 딸 소라와 우리 얼이는 동갑이다. 그런데 소라는 벌써 그림책을 척척 읽고, 구구단을 외고, 영어 단어를 나보다도 더 많이 아는 듯하다! 얼이는 이제야 한글 몇 단어를 더듬더듬 읽는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어머, 애가 이렇게 똑똑하니 좋겠다!” “진짜 부럽다! 누굴 닮은 거라니?” 순간,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이의 두 눈과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얼이의 두 귀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얼이가 내 손을 톡톡 치더니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뭐가?” “내가 똑똑한 아들이 아니어서요.” 세상에! 우리 얼이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의 여린 자존감에 날카로운 상처를 입히고 만 것이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얼이의 작은 행동도 눈여겨보며 하나하나 칭찬해 주었다. 얼이한테 아부를 하려는 게 아니라 얼이의 자존감을 살려 주고 싶었다. 머리에서 좋은 사과 향기가 난다는 칭찬에서부터 오물오물 먹는 입이 참 예쁘다는 칭찬, 미로 찾기를 정말 빨리 잘했다는 칭찬까지....... 칭찬이 늘어날 때마다 풀 죽어 있던 얼이의 얼굴이 조금씩 밝게 피어났다. 우리 얼이가 이렇게 칭찬받을 게 많은 아이였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칭찬에 인색했을까? 나는 정말 칭찬 구두쇠였다. 나와 얼이가 자주 하는 말장난이 있다. “얼이, 누구 거?” “엄마 거!” “얼이, 누구 아들?” “엄마 아들!” 그런데 오늘 내가 “얼이, 누구 거?” 하고 묻자, 얼이가 마치 독립 선언이라도 하듯이 “내 거!” 이러는 거다! 그래, 맞다. 네 거 맞다. 나와 연결된 탯줄을 자른 순간, 얼이 너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네 자신의 것이다. 내가 네 엄마이기 이전에 나 자신인 것처럼....... 얼마 전에 이웃 엄마들과 함께 전집을 한 세트 샀다. 얼이가 요즘 한글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여 더 늦기 전에 책에 대한 흥미를 키워 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 책들은 그저 알록달록한 장식품인 양 거실 책장에 꽂힌 채 먼지만 쌓여 간다. 무슨 애가 도통 책에는 취미가 없는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아빠랑 텔레비전만 보는 거다. 아까워라, 아까워. 나는 꽉 찬 책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며칠 전, 집으로 날아온 신용 카드 고지서에 찍힌 책값을 보는 순간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이 큰돈을 거저 날릴 수는 없다. 그 특단의 조치란 바로 우리 집의 도서관화! 첫째, 저녁 식사 뒤에는 무조건 텔레비전을 끈다. 둘째, 각자 책을 들고 거실에 모여 책을 읽거나, 읽어 주거나, 읽어 주는 것을 듣는다. 반항을 하던 얼이 아빠도 신용 카드 고지서를 보더니 불끈!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오늘로서 일주일째, 우리 집에 조용한 변화가 일어났다. 얼이는 저녁을 먹고 나면 책장에서 책을 꺼내 와 내게 혹은 아빠에게 읽어 달라고 한다. 우리 부부 중 한 사람이 얼이에게 책을 읽어 주는 동안 나머지 한 사람은 그동안 미뤄 왔던 독서를 할 수 있다. 얼이는 이제 책에 푹 빠져서 지낸다. 물론 누군가의 푸념이 슬슬 시작되기는 했다. 얼이 아빠가, 자기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못 보게 되었다고 투정을 하기에 나는 드라마가 중요한지 얼이가 중요한지 선택하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드라마를 낮에 재방송으로 보고 있다. 아침에 유치원에 간 얼이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친구들이 얼이를 ‘지각쟁이’라고 놀렸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얼이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인데....... 나는 오늘 아침 늦잠을 잤고, 문득 세탁기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그것부터 하다가 아침 준비가 늦어졌다. 여덟 시 반이 다 되어서야 얼이의 유치원 옷이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유치원 옷을 건조기에 말리고 얼이에게 입혀 데리고 나왔지만 버스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유치원에 가 보니 벌써 수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얼이는 지각쟁이!" "지각쟁이!" "얼아, 미안해....... 지각쟁이는 우리 얼이가 아니라 엄마야." 지각쟁이는 얼이가 아니라 바로 나인데....... 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동안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는데, 지금 내 모습은 칠칠치 못한 엄마일 뿐이다. 나는 오늘부터 시간 관리라는 것을 해 보기로 했다. 엄마도 프로페셔널이다!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을 잘 관리하는 꼼꼼함과 치밀함이 필요하다. 다시는 우리 얼이가 지각쟁이라고 놀림받지 않게 하리라! 나는 원래 물을 무서워한다. 물놀이를 하러 갈 때마다 얼이와 얼이 아빠가 수영을 하는 동안 나는 돗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올 겨울 큰마음을 먹고 수영 강습을 받기 시작했고, 드디어 오늘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레벨이 올라갔다. 내가 물살을 가르며(뭐, 그렇게 멋지게는 아니고) 헤엄을 치자, 얼이는 깡충깡충 뛰고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내가 수영을 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얼이에게 용기 있고 끈기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 준 게 더 행복하다. 그건 말로 가르칠 수 없는 거니까. 유치원에 다녀온 얼이가 짜증을 부렸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냥요.......” 그러더니 말이 없다. 왜 그러는지 말해 보라고 안달하자, “그냥, 그냥......!” 그러더니 아예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속상해서 얼이를 혼내 주었다. 다 큰 애가 만날 울기나 한다고. 도대체 왜 우는지 말을 하면 답답하지나 않겠다고. 저녁때가 되자, 얼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또다시 물었다. 아까 왜 그랬냐고. 그러자 얼이가 말했다. “말했잖아요, 그냥 그랬다고. 그냥 울고 싶어서 그랬다고요.” ‘그냥.......’ 그래, 얼이는 분명히 말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나도 분명히 ‘그냥’ 울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해 아이를 꾸중했다. 얼아, 미안해....... 앞으로는 아무리 작은 이야기라도 귀 기울여 들을게. 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게.
우리 신화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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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신화예요.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응제시주 등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대부분의 건국 신화는 신비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요. 신화의 주인공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든가, 알에서 태어났다든가,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든가 하는 것이지요. 건국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함이에요.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지배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배하는 부족에게 뭔가 특별한 면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지배하는 부족은 자신들의 권력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 건국 신화에 이런 이야기들을 넣은 것이랍니다. 단군 신화는 하늘나라 왕의 자손과 곰 부족의 결합으로 새로운 나라인 고조선이 건국된 과정을 보여 주는 신화예요. 단군 신화를 통해서 고조선의 건국 과정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 등을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람, 구름, 비를 다스리는 풍백, 운사,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에서 그 당시가 농경 사회였음을 알 수 있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군 신화가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자부심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에요. 특히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교육, 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이념이랍니다. 아주 먼 옛날, 하늘나라에는 환인이라는 임금님이 살고 있었어요. 환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지요. 그중에서 특히 환웅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틈만 나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넋 놓고 내려다보았어요. ‘아! 저 인간 세상을 잘 다스려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구나.’ 환웅은 항상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환인도 아들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때 인간 세상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환웅아, 지금 세상이 무척 혼란스럽구나. 네가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바로잡도록 해라. 환인은 아들에게 신령스러운 물건인 천부인 세 개를 주었어요. 천부인을 받아 든 환웅은 바람, 구름, 비의 신인 풍백, 운사, 우사와 함께 무리 삼천 명을 이끌고 땅으로 내려왔어요. 태백산 신단수 밑으로 내려온 환웅은 신시를 세우고 곡식과 생명, 질병과 형벌 등 인간 세상의 중요한 삼백육십여 가지 일을 맡아서 관리하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어요. 환웅과 함께 내려온 풍백, 운사, 우사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도왔지요. 환웅이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을 때였어요. 누군가 신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 지켜보고 있었어요. 바로 곰과 호랑이였지요. 이들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 “부디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곰과 호랑이는 매일매일 기도했어요. 환웅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를 가엽게 여겨 사람이 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자, 이것은 쑥과 마늘이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건네며 말했어요. “지금부터 절대 다른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오직 이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 백 일 동안 어두운 동굴 속에서 지낸다면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만약 백 일이 되기 전에 햇빛을 본다면 영원히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니 명심하거라.” 곰과 호랑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무척 기뻤어요. 쑥과 마늘은 너무나 쓰고 매웠지만 오로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참고 또 참았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곰과 호랑이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어요. “도대체 이것만 먹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사람이 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어 버리겠다.” 결국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갔어요. 혼자 남은 곰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지만,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꾹 참았지요. 드디어 백일째 되던 날, 곰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더니 아주 어여쁜 여자의 모습이 되었어요. 환웅은 여자가 된 곰에게 ‘웅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웅녀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웅녀는 매일 밤 신령스러운 나무인 신단수 밑에서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어요. 웅녀의 간절한 바람을 알게 된 환웅은 웅녀와 혼인했어요. 웅녀는 얼마 후 씩씩한 남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단군왕검’이랍니다. 모든 사람이 단군왕검의 탄생을 축복하며 반겼어요. “왕이 나셨대. 하늘나라 왕자인 환웅 님과 웅녀의 아들인 단군왕검이 바로 우리의 왕이래.” 환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단군은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웠어요. 그러고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기본으로 고조선을 훌륭한 나라로 키워 나갔지요. 단군은 약 이천 년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다 산으로 들어가 신령이 되었답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동명왕편과 광개토 대왕릉 비문에 전해지고 있어요.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건국 신화와 비슷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고구려가 부여와 한 갈래이기 때문이에요. 해모수의 아들 주몽은 기원전 37년 졸본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지요. 고구려는 우리 땅에서 한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회복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드넓은 지역을 지배한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 민족의 강한 자긍심이 잘 나타나 있는 고구려 신화에는 동명 성왕(주몽)의 신기한 혈통과 탄생, 고난을 이겨 내는 건국 과정, 그리고 그의 아들의 백제 건국 과정까지 자세히 나타나 있어요. 신화는 왕의 권위를 높이고, 아울러 백성들의 충성심을 모으며 단결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래서 왕이 신기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왕이 신성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 태양을 상징하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런 신화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 신화입니다.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한반도 북쪽에 있는 만주 지역은 예전에는 우리 조상들이 말달리며 농사짓고 평화롭게 살던 우리 땅이었어요. 그 땅에는 북부여란 나라가 있었지요. 어느 날 신하 아란불이 해부루왕에게 신기한 꿈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마마, 어젯밤 꿈에 하느님이 내려오셔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나의 아들이 다스리게 하려고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동쪽으로 나라를 옮기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대로 나라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쪽 어디를 말하는 것이오?” “하느님 말씀이 동쪽으로 한참 가면 가섭원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강도 흘러 농사짓기에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왕은 아란불의 말대로 동쪽으로 나라를 옮기고, 나라 이름도 동부여라고 바꾸었어요. 해부루왕에게는 근심이 있었어요. 슬하에 아들이 없는 것이었지요. 왕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큰 산과 강에 정성껏 제사를 지내며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답니다. 그날도 해부루왕이 제사를 지내고 ‘곤연’이라는 연못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왕을 태우고 가던 말이 갑자기 큰 돌 앞에 멈춰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것참 이상하다. 왜 말이 저 돌을 쳐다보며 운단 말인가? 여봐라, 저 돌을 들춰 보아라. 신하들이 돌을 들추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남자 아기가 있었어요. 아니, 이런 곳에 어찌하여 아기가 있단 말인가? 하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들을 주신 것이 분명하도다! 해부루왕은 크게 기뻐하며 정성껏 아기를 길렀어요. 그리고 금빛 개구리 모양이라는 뜻의 ‘금와’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왕위를 물려주었지요. 금와왕은 동부여를 더욱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갔습니다. 하루는 금와왕이 백두산 남쪽 강가를 지나가다가 울고 있는 여인을 보았어요. “여봐라, 저 여인을 불러오너라.” 여자는 보통 사람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요.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울고 있느냐?” 저는 강의 신인 하백의 딸 유화라 하옵니다. 압록강 근처로 나들이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를 만났습니다. 그분과 혼인하고 하룻밤을 보냈는데 해모수가 어디론가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더냐?” “아닙니다. 해모수가 사라져서 집으로 돌아갔으나 부모의 허락 없이 낯선 남자와 혼인하였다고 저를 이곳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딱한 처지를 알게 된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갔어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더니 유화의 방을 비추는 것이었어요. 유화는 빛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숨겼지만, 빛은 계속해서 유화를 따라다녔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유화는 아기를 가지게 되었고, 열 달 뒤 커다란 알을 낳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깜짝 놀랐어요. 사람이 알을 낳다니, 이렇게 불길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빨리 그 알을 내다 버리도록 하라. 신하들은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졌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돼지들이 슬금슬금 알을 피하는 것이었어요. “거참, 이상하군. 어찌하여 돼지들이 알을 먹지 않고 피하기만 할까? 차라리 길바닥에 버려서 우마차에 치여 깨지게 하자.” 신하들은 알을 길바닥에 버렸어요. 하지만 우마차를 끄는 소와 말도 조심스럽게 알을 피해 갔지요. “신기한 일이로다. 아무래도 들판에 내다 버려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해야겠구나.” 이번에는 알을 들판에 내버렸어요. 새와 짐승들 역시 알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따스하게 품어 주었어요. 신하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금와왕은 더욱 노하여 소리쳤어요. 당장 그 이상한 알을 가져오거라. 내가 부숴 버리고 말겠다. 하지만 금와왕이 아무리 도끼로 내리쳐도 알은 깨지지 않았답니다. 금와왕은 할 수 없이 알을 다시 유화에게 보냈어요. 유화는 알을 품에 안고 어린아이 다루듯이 소중히 보살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스르락스르락! 빠지직빠지직! 알이 조금씩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건강한 남자 아기가 나왔어요. 아이는 무척 빠르게 자랐어요. 아직 어린데도 어른처럼 늠름하고 재주도 남달랐지요. 사람들은 이 아이를 백 번 활을 쏘면 백 번 모두 맞히는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 하여 ‘주몽’이라고 불렀어요.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 때문이지요.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일곱 있었어요. 장남인 대소는 항상 주몽이 못마땅했어요. 주몽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이러다 주몽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것 아냐?’ 이렇게 생각한 대소는 금와왕을 찾아갔어요. 주몽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커 갈수록 용맹스러움이 남다르니 일찌감치 처치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대소야, 너는 내 아들이다. 아무리 주몽의 재주가 남달라도 너만큼이야 하겠느냐. 너무 걱정 말거라. 대소가 돌아가자, 금와왕은 주몽을 불렀어요.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왕실의 일을 돕도록 해라.” 주몽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했지요. 주몽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가리는 능력이 있었거든요. 주몽은 날쌔고 좋은 말을 골라 일부러 먹이를 조금 주어서 비쩍 마르게 했지요. 대신 굼뜨고 둔한 말은 먹이를 잘 주어 윤기가 흐르게 했어요. 얼마 후 사냥 대회가 열렸어요. 금와왕은 주몽에게 가장 볼품없는 말을 타게 했어요. 하지만 튼튼하고 살찐 말을 탄 왕자들보다 주몽이 짐승을 더 많이 잡았지요. “아니, 저놈이 감히 대소 왕자님보다 사냥을 더 잘하다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사냥 대회를 지켜보던 신하들이 놀라서 웅성거렸어요. “마마, 저놈을 살려 두면 틀림없이 큰일을 벌일 것이옵니다.” 금와왕도 신하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날 저녁 유화 부인이 조용히 주몽을 불렀습니다. 주몽아, 너는 하늘과 강의 자손이다. 너의 재주와 지혜는 반드시 빛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왕자들과 신하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니 빨리 이곳을 떠나거라. 주몽은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떠났어요. “뭐라고? 주몽이 도망친다고? 빨리 주몽을 잡아 오거라!” 왕자들은 군사를 풀어 주몽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어요. 다급하게 도망치던 주몽 앞을 큰 강이 가로막았지요. 그때 주몽이 강물과 하늘을 향해 소리쳤어요. “나는 하느님의 자손이요, 강의 신인 하백의 손자이다. 내가 부여를 떠나려는데 강이 앞을 가로막고, 군사들이 뒤를 막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어디선가 물고기와 자라 떼가 수없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 주었어요. “하늘이 날 도와주는구나. 자, 어서 건너자.” 주몽 일행은 서둘러 강을 건넜어요. 뒤쫓던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주몽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답니다. 강을 건넌 주몽 일행이 도착한 곳은 졸본이었어요. 졸본은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기에 알맞고, 산과 강이 험해 적을 방어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지요. 그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주몽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했어요. 주몽은 해마다 성대한 제천 행사를 열어 고구려의 기상을 백성들에게 심어 주었어요.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간 고구려는 마침내 주변 나라 중 가장 넓은 땅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답니다. 옛날에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등 여섯 가야가 서로 동맹을 맺고 있었어요. 그중에서 가장 힘센 나라가 금관가야였지요.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의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 중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어요. 아홉 명의 족장이 각각 씨족을 다스리는 정도였지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여섯 가야가 연맹을 맺어 한때 신라보다 힘센 나라로 발전했던 가야는 철기 문화와 가야 토기를 일본에 전해 주기도 했답니다. 아홉 명의 족장이 각각 씨족을 다스리는 정도였지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여섯 가야가 연맹을 맺어 한때 신라보다 힘센 나라로 발전했던 가야는 철기 문화와 가야 토기를 일본에 전해 주기도 했답니다.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작은 산인 구지봉 아래,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어요. 왕이 없는 이 마을은 족장 아홉 명이 백성을 이끌고 있었지요. 이제 곧 계욕일이 다가옵니다. 올해도 마을 사람 모두 참가하는 잔치를 벌입시다. 계욕일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성스러운 구지봉 밑에서 큰 잔치를 벌였어요. 한창 흥겨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어,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게 말이야. 구지봉에서 나는 소리인데.”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구지봉으로 가 보았어요. 그때 또다시 소리가 들렸어요. 분명히 사람 목소리였지요. “너희들은 누구냐?” 근엄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엉겁결에 대답했어요. “우리는 이 마을의 족장과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냐?” “구지봉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느님이 내게 이곳의 왕이 되라 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라. 구지봉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면 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구지봉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색 줄이 스르르 내려왔어요. 그 줄 끝에는 붉은 비단과 금으로 만든 상자가 매달려 있었어요. “앗, 줄에 상자가 달려 있다!” 상자 속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지요. “웬 알이 상자에 들어 있지?” 사람들은 상자를 아도간 족장의 집으로 옮겼어요.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아도간 족장의 집으로 몰려갔어요. “상자를 다시 한번 열어 봅시다.” 번쩍이는 황금알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들은 알이 깨질세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어요. 빠지직빠지직! 그때 알이 점점 벌어지더니 알 속에서 아기들이 나왔지요. “아니,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다니.” 사람들은 아기들을 하늘이 내린 왕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보살폈어요. 아기들은 보통 사람과는 확실히 달랐어요. 태어난 지 열흘 만에 키가 어른만큼 자라고, 얼굴은 용과 같고, 눈썹에는 광채가 서렸으며, 눈에는 눈동자가 둘씩이나 있었답니다. “이제 이분들을 왕으로 모십시다.” “그럽시다. 먼저 왕의 이름부터 지읍시다.” “가장 먼저 태어난 왕은 수로라 하고, 금 상자에 들어 있었으니, 성은 금(金)을 뜻하는 ‘김’으로 합시다.” 이리하여 수로왕은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명도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의 왕이 되었어요. 금관가야는 수로왕이 잘 다스린 덕에 풍년이 계속되었고, 나라의 힘도 커졌어요. 농사가 바쁘지 않을 때는 나라 안의 장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성과 궁궐을 짓기도 했지요. 어느 날, 역시 알에서 태어난 탈해가 바다 건너 마을에서 수로왕을 찾아왔어요. “나는 탈해라 하오. 나와 겨루어 내가 이기면 이 나라를 넘겨주시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하늘에서 보낸 왕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다. 어서 돌아가거라. 수로왕은 이렇게 화를 냈지만, 결국 겨루기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 재주를 겨뤄 보자!” 수로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탈해가 매로 변했어요. 수로왕은 매보다 더 큰 독수리로 변해 달려들었지요. 탈해가 참새로 변해 도망치자, 수로왕은 참새를 잡아먹는 새매로 변했어요. 새매는 참새를 잡아먹지 않고 이리저리 쫓기만 했지요. 그때 새매에게 쫓기던 참새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어요. 제가 졌습니다. 제가 매로 변했을 때 당신은 독수리로 변했고, 참새로 변했을 때는 새매로 변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처럼 어진 마음을 지닌 분에게는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탈해는 수로왕에게 큰절하고는 떠났어요. 이 사람이 후에 신라의 왕이 된 탈해왕이랍니다. 어진 왕을 맞아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금관가야에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어요. 수로왕에게 아내가 없는 것이었지요. 아홉 족장이 수로왕에게 말했어요. “마마께서 아직 부인이 없어 심히 걱정되옵니다. 부디 저희 부족의 여인 가운데 한 분을 뽑아 배필로 삼으소서.” 나는 하늘의 뜻으로 여기 온 것이오. 나의 배필 또한 하늘이 정해 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수로왕은 족장들을 안심시키고는 신귀간 족장을 남쪽 바다에 있는 망산도로 보냈어요. 신귀간이 망산도에 도착하자, 배 한 척이 붉은 돛을 휘날리며 다가오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답니다. 신귀간 족장은 이 사실을 왕에게 전했어요. “마마, 망산도에 가 보니 이상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수로왕은 매우 기뻤어요. “드디어 아유타국의 공주가 도착했구나. 하늘이 보낸 나의 배필이니 어서 망산도로 가 보자.” 이리하여 수로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러 갔지요. “나는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 혼인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오.” 공주는 자기 비단옷을 산신에게 바치며 정성 들여 제사를 지낸 뒤 수로왕과 혼인하였지요. 그해 왕비는 곰 꿈을 꾸고는 아들을 낳았어요. 수로왕은 왕비와 함께 나라를 더욱 훌륭하게 다스렸답니다.
우리 신화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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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바리공주 이야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일을 맡은 바리공주에 대한 이야기예요. 바라지 않던 딸이어서 내다 버렸는데, 오히려 부모를 위해 자기 몸을 바쳐 효도한다는 내용이랍니다. 그래서 바리공주의 이름에는 ‘버려진 아이’라는 뜻이 담겨 있어요. 바리공주는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으나, 아들을 바라던 오구대왕의 미움을 받아 버려졌어요. 그러나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병에 걸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디면서 저승 세계인 서역국 삼신산의 약수를 떠다 부모의 병을 낫게 해 주었지요. 바리공주는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룩한 희생정신을 통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 되었답니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우리의 전통 굿인 오구굿에서 무당이 부르는 노래로, 매우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요. 이렇게 무당이 부르는 이야기 형식의 노래를 서사 무가라고 하는데, 훗날 판소리의 원형이 되기도 했어요. 바리공주 이야기는 바리데기, 베리데기, 사희공주, 오구물림 등으로 불리며 전국에 걸쳐 전해지고 있는 무속 신화랍니다. 옛날 삼나라에 딸만 여섯 있는 오구대왕이 살고 있었어요. 대왕은 아들을 손꼽아 기다렸지요. 그러던 어느 날 왕비가 또 아기를 갖게 되었어요. “그래 부인, 어떤 꿈을 꾸었소?” “궁궐 지붕 위로 청룡과 황룡이 서로 엉켜 있고, 오른손에는 보라매를, 왼손에는 백마를 들고, 양어깨에서 해와 달이 돋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오구대왕은 크게 기뻐했어요. 왕비가 꿈에서 본 것들이 모두 임금을 뜻하는 것이어서 아들을 낳을 징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꿈 풀이를 한 갈이 박사는 또 딸을 낳을 것이라고 점쳤어요. 그럴 리가 있나. 갈이 박사가 뭔가 잘못 안 것이 분명하도다. 틀림없이 왕자를 얻을 꿈이다. 여봐라, 배고픈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풀어 주도록 하라. 오구대왕은 착한 일을 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꼭 왕자를 보내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드디어 열 달이 지나 아기가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를 어째요? 왕비가 또 공주를 낳았답니다. 일곱째 딸을 얻은 오구대왕은 크게 실망했지요. 내가 전생에 지은 죄가 있어 옥황상제가 아들을 주지 않는구나. 여봐라, 새로 태어난 공주를 서해 용왕에게 바치도록 하라. 이 소식을 들은 왕비는 통곡하였어요.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왕비가 울고 매달려도 소용없었어요. “그럼 이름이라도 지어 주시지요. 우리가 귀한 딸을 버리므로 버리, 버리데기, 바리데기, 아니 바리공주라 하옵소서.” 아기는 바리공주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와 함께 옥 상자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졌답니다. 서해 바닷가에는 남을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바리공덕 할아버지와 바리공덕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하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그물에 옥 상자가 걸려 올라왔어요.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예쁜 아기와 함께 바리공주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있었지요. 마침 아이가 없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바리공주를 수양딸 삼아 잘 키웠답니다. 어느덧 열다섯 살이 된 바리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롭게 자랐어요. 한편 오구대왕과 왕비는 갑자기 큰 병에 걸려 앓아누웠어요. 좋다는 약을 모두 써 보았지만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대왕의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서역국 삼신산에 있는 불사약과 약수를 먹으면 낫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곳은 무시무시한 무장승이 지키고 있고, 아주 멀고 험한 곳이라고 하였지요. “신하 중에 누가 서역국 삼신산에 다녀오겠느냐?” “그곳은 죽은 영혼이나 간다는 곳인데, 굳이 보내시려면 차라리 절 죽여 주소서.” 대왕은 딸들에게도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점을 치는 갈이 박사에게 물으니 바리공주만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했지요. 오구대왕은 신하들에게 바리공주를 찾아오라고 했어요. 신하들이 바리공주를 찾으러 궁을 나서자 까막까치가 나타나 길을 알려 주었고, 풀과 나무도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었어요. 바리공주를 만난 신하들은 오구대왕과 왕비가 아프다는 말을 전하면서 부디 불사약과 약수를 구해 달라고 했지요. 비록 자신을 내다 버린 부모였지만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 바리공주는 몹시 슬펐어요. 바리공주는 집을 나선 지 몇 날 며칠 만에 드디어 궁궐에 도착했어요. 열다섯 해 만에 그리던 부모를 만난 바리공주는 하염없이 울었어요. 오구대왕도 후회의 눈물을 흘렸지요. 버린 자식을 이제 와서 무슨 연고로 찾으십니까? 병들어 찾으십니까? 저를 버린 부모님 생각을 하면 원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리공주는 마음속에 간직했던 한을 쏟아 내곤 털썩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드디어 바리공주가 입을 열었어요. 비록 부모님은 저를 버렸지만, 소녀를 낳아 주신 은혜가 어찌 작다 하오리까? 부모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삼신산으로 가겠습니다. 무쇠 옷과 무쇠 신, 무쇠 지팡이를 준비해 주세요. 바리공주는 무쇠 옷과 무쇠 신, 무쇠 지팡이를 갖춘 차림으로 서역국으로 향했어요. 바리공주가 무쇠 지팡이를 한 번 짚으니 십 리를 날아가고, 두 번 짚으니 이십 리를 날아갔지요. 서역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어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수렁과 온갖 기이하고 무서운 동물들과 지옥에서 나온 귀신들이 바리공주의 앞을 가로막았지요. 바리공주는 오직 병든 부모님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또 이겨 냈어요. 그렇게 서역국으로 가던 어느 날, 바리공주는 죽은 사람을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는 지장보살을 만났어요. “너는 귀신이냐, 사람이냐? 날짐승도 못 들어오는 이곳에 어찌 들어왔느냐?” “부모님을 구하러 이곳까지 오다니 네 효성이 갸륵하구나. 서역국 삼신산을 가려면 앞으로도 삼천 리를 더 가야 하는데 여자의 몸으로 갈 수 있겠느냐?” “부모님만 구할 수 있다면 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바리공주의 효성에 감동한 지장보살은 열매를 맺지 않는 꽃과 금방울 세 개를 주면서 길을 알려 주었어요. “이 길을 따라가다가 높은 것이 앞을 막으면 이 꽃을 던지고, 깊은 것이 가로막으면 이 방울을 흔들거라.” 천 리를 지나고, 또 천 리를 지나니 무쇠로 된 높은 성벽이 바리공주 앞을 가로막았어요. 지장보살이 준 꽃을 던지자 그 높고 단단한 성벽이 와르르 무너졌답니다. 또 천 리를 지나는데, 이번에는 깊디깊은 검은 바다가 나타났어요. 바리공주가 금방울을 흔들었더니 하늘에서 오색 무지개가 내려와 바다 위에 다리를 놓아 주었지요. 바다를 건너니 바로 서역국이었어요. 그런데 키는 장승처럼 크고, 눈은 커다란 등잔만 하고, 얼굴은 쟁반같이 둥근 무장승이 삼신산 앞을 지키고 있었어요. “너는 누구인데 이곳까지 왔느냐?” “저는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 바리공주입니다. 부모님의 병을 고칠 불사약과 약수를 구하러 왔습니다.” “약값은 가지고 왔느냐?” “급히 오느라 못 가져왔습니다.” “그냥 줄 수는 없다. 오늘부터 불사약 값으로 삼 년 동안 나무를 하고, 약수 값으로 삼 년 동안 물을 긷고, 구경하는 값으로 삼 년 동안 불을 때면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바리공주는 힘든 삼신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무장승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지요. 어느덧 아홉 해가 흘렀어요. 그런데 무장승은 불사약과 약수를 내주지는 않고 또 다른 요구를 했어요. “나와 결혼해서 아들 일곱을 낳아 준다면 약속한 것을 주겠다.” 결국 바리공주는 못생긴 무장승과 결혼해서 아들 일곱을 낳았어요. 그렇게 또 아홉 해가 지나자, 바리공주는 부모님 걱정에 애가 탔지요. “이러다간 정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말겠어요.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하니 약속한 것을 주세요.” 무장승은 약수와 개안초, 그리고 숨이 살아나는 숨살이꽃, 뼈가 다시 붙는 뼈살이꽃, 살이 다시 돋는 살살이꽃을 바리공주에게 주었어요. 약수와 꽃을 받아 든 바리공주가 길을 떠나려 하자, 무장승도 일곱 아들을 데리고 따라나섰지요. 이십 일 하고도 하룻밤을 지나 궁궐에 도착했는데, 글쎄 부모님의 상여가 나가고 있는 거예요. 바리공주는 얼른 관을 열어 부모님의 입에 약수를 부었어요. 또 눈에는 개안초를, 살에는 살살이꽃을, 뼈에는 뼈살이꽃을, 코에는 숨살이꽃을 대었지요. 잠시 뒤 대왕과 왕비가 “후유!” 하면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어요. “바리공주께서 약을 구해 와 두 분 마마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옵니다.” 대왕은 바리공주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었지만 바리공주는 땅도 돈도 모두 싫다고 했어요. 오히려 부모의 허락 없이 무장승과 결혼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지요. “우리를 구하기 위해 그런 것 아니냐? 어디 우리 사위와 손자들을 보자.” 건장한 무장승을 본 대왕은 매우 흡족했어요. “몸이 이리도 크고 아들도 일곱이나 되니 참 기쁘도다. 그래도 얘야, 내가 너의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으니 어서 말해 보거라.” 그럼 아바마마, 제 남편 무장승은 산신에게 제사 지낼 때 차린 음식을 먹으며 편히 살게 해 주세요. 바리공덕 할아버지와 바리공덕 할머니는 저승길을 지키는 신이 되어 노제 때 차린 음식을 먹으며 살게 해 주시고, 제 자식들은 저승의 시왕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오구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바리공주는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무당인 오구신이 되었답니다. 옛날 전염병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천연두라고도 하는 ‘마마’였어요. 마마에 걸리면 몹시 열이 나고 오슬오슬 떨리며, 온몸에 좁쌀 같은 것이 돋아나요. 딱지가 저절로 떨어지기 전에 긁으면 얼굴이 얽는답니다. 지금은 마마를 미리 예방할 수 있지만, 예전에 마마에 걸리면 살아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옛날 아이들에게는 마마가 가장 무서운 병이었지요. 마마를 앓게 하는 신이 ‘손님네’인데 ‘호구별성’이라고도 불렸어요. 손님네는 강남에서 특별한 사명을 띠고 주기적으로 찾아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마마를 앓게 한다는 여신이에요. 손님네는 변덕이 아주 심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마마를 살짝 앓다가 낫게 해 주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얼굴 여기저기에 곰보 자국을 남기거나 죽게도 했지요. ‘마마를 옮기는 손님네 이야기’는 이처럼 변덕이 심한 마마 귀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답니다. 옛날 강남에 아주 큰 나라가 있었어요. 땅이 어찌나 넓은지 나라를 한 바퀴 돌려면 백 년 이상 걸릴 정도였지요. 이 넓은 땅에 백 명도 안 되는 손님네가 살고 있었어요. 손님네는 주로 어린아이들에게 마마를 앓게 하는 일을 했지요. 어린아이에게 마마는 가장 무서운 병이었답니다. 어느 날 손님네 셋이 해동국으로 갈 채비를 했어요. 푸른 옷을 입은 문반손님네는 나귀를 타고 갔어요. 노란 옷을 입은 호반손님네는 말을 타고 갔지요. 붉은 옷을 입은 각시손님네는 가마를 타고 갔어요. 세 손님네는 고개를 넘고 마을을 지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마마를 주고 갔어요. 그러면서 마마를 살짝 앓을 아이의 이름에는 검은 점을 찍고, 곰보가 될 아이의 이름에는 붉은 점을 찍고, 죽을 아이의 이름에는 줄을 그었답니다. 해동국에 도착한 세 손님네는 손님네 대접을 잘하는 집 아이는 마마를 가볍게 앓게 하고, 손님네 대접을 못하는 집 아이는 마마를 심하게 앓게 했어요. 어느 날 세 손님네가 으리으리한 기와집 앞에 도착했어요. 그 집은 해동국에서 가장 고약한 구두쇠로 소문난 김 부자의 집이었어요. 세 손님네가 하룻밤 묵고 가도 되는지 물었어요. 할 수 없군. 다른 집을 찾아봅시다. 몇 걸음 옮기는데 길가에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 보였어요. 그 초가집에는 남편을 일찍 잃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가난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지요. “이 밤에 어쩐 일들이십니까?” 할머니가 손님네를 보고 공손하게 말했어요. 저희들은 강남에서 온 손님네입니다. 저희에게 음식과 잠잘 곳을 마련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귀하신 분들이 이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할머니는 반갑게 손님네를 맞았어요. 할머니는 밥상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지만 쌀독에 쌀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아차, 이를 어쩌지? 할 수 없지, 김 부자에게 부탁해 보는 수밖에.” 할머니는 김 부자 집으로 갔어요. 밀린 품삯 대신 쌀을 받아 오려는 것이었지요. “밀린 품삯을 받으러 왔습니다.” “아니, 그깟 품삯 때문에 한밤중에 날 깨운 것이오? 어서 돌아가시오.” “사실은 저희 집에 귀한 손님네가 오셨는데 밥을 지을 쌀이 없어서 그럽니다. 내가 받을 품삯이 쌀 한 가마는 될 겁니다.” “아니, 내 귀한 쌀을 그 거지들에게 먹이겠단 말이오? 절대 줄 수 없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김 부자가 대문을 닫으려고 하자 다급해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 쌀 한 바가지만이라도 주세요. 나머지 품삯은 받지 않겠습니다.” 구두쇠 김 부자는 한 가마를 안 받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져서 얼른 쌀 한 바가지를 퍼 주었어요. 할머니는 힘들게 받아 온 쌀로 정성스레 밥을 지어 손님네를 대접했어요. 세 손님네는 맛있게 밥을 먹고, 하룻밤 푹 쉴 수 있었답니다. 다음 날, 할머니의 정성이 너무 고마웠던 손님네는 길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어요. “할머니 덕분에 잘 먹고, 잘 쉬다 갑니다. 혹시 집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마마를 피해 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늙은이랍니다. 정 그렇다면 이웃에 사는 김 부자네 외아들인 김 도령이나 마마를 피해 가도록 해 주시지요.” “탐탁지 않지만 할머니 부탁이니 그리하겠습니다.” 손님네는 할머니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김 부자네로 갔어요. “자, 빨리 들어가서 김 부자 아들이 마마를 가볍게 앓고 지나가게 합시다.” 손님네가 막 김 부자네 대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매운 고추 타는 냄새가 고약하게 났어요. 손님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매운 고추 타는 냄새였지요. 사실 김 부자는 어젯밤 손님네를 내쫓은 것이 꺼림칙했어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부터 손님네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매운 고추를 태우고 있었지요. “이런 고약한 놈을 봤나. 어제는 쫓아내고, 오늘은 매운 고추를 태우다니.” 할머니가 부탁은 했지만 손님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김 도령이 가장 심한 마마를 앓게 했어요. 갑자기 아들이 앓아눕자 김 부자는 깜짝 놀랐어요. 소문난 의원과 귀한 약재를 모두 써도 아들의 병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어요. 김 부자는 결국 손님네를 쫓아내서 아들이 마마에 걸렸음을 깨달았지요. 김 부자는 손님네에게 빌고 또 빌었어요. 강남에서 온 손님네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귀한 분인 줄 모르고 실례를 했습니다. 너그러이 봐주시고 우리 집 삼대독자 귀한 자식 좀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하겠습니다. 김 부자의 말에 손님네의 화가 많이 풀렸어요. “김 부자가 이제 정신을 차렸나 보네. 이제부터는 손님네 대접을 잘한다니 한번 봐주지.” 손님네는 김 도령이 마마를 살짝 앓고 지나가도록 바꿔 주었어요. 아들의 병이 낫자 김 부자의 마음이 금세 바뀌었어요. 흥, 분명히 저절로 병이 나은 게 분명해. 손님네는 무슨 손님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손님네는 김 도령이 다시 가장 무서운 마마를 앓게 했어요. 며칠 뒤 아들이 죽자, 그제야 김 부자는 땅을 치며 후회했어요. 하지만 죽은 아들을 살려낼 수는 없었지요. 손님네가 혼령이 된 김 도령에게 물었어요. 너는 네 아비의 잘못 때문에 죽은 것이다. 너를 살려 줄 테니 다시 태어나고 싶은 집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하지만 김 도령은 손님네를 따라다니며 심부름이나 하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김 도령은 손님네를 따라다니는 작은 손님네가 되었답니다. 손님네가 해동국 곳곳을 돌아다닌 지 아흔아홉 달이 지났어요. 이제는 강남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지요. 돌아가는 길에 보니 김 부자는 쫄딱 망해서 가난해지고, 할머니는 큰 부자가 되어 있었지요. 김 도령은 마음이 아팠어요. “아버지는 죄가 많아 가난하게 산다지만, 어머니가 불쌍합니다.” 그 말을 들은 세 손님네는 김 부자의 아내에게 재물을 조금 주었어요. 그 뒤로 김 부자 부부는 거지 신세를 면하고 그럭저럭 살게 되었답니다. 손님네 대접을 잘하면 나쁜 마마에도 안 걸리고, 손님네를 박대하면 아이들이 마마를 심하게 앓아 곰보가 되거나 죽는다는 말은 이때 생겼답니다. 대별왕과 소별왕 이야기는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는 무속 신화예요. ‘천지왕 본풀이’라고도 하는 이 이야기는 보통 제주도에서 큰굿을 할 때 맨 처음에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지요. 하늘과 땅은 맨 처음에 하나였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때인가 하늘과 땅이 갈라지면서 산과 바다가 생겨났지요. 하늘을 다스리는 천지왕은 해와 달을 두 개씩 만들어서 낮과 밤을 밝히도록 했어요. 그런데 해와 달이 두 개씩이라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추웠어요. 그러던 차에 천지왕이 사람인 총명 부인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낳았답니다. 형의 이름은 대별왕이고 동생의 이름은 소별왕이었지요. 생각이 깊고 착한 대별왕은 해와 달을 각각 하나씩 떨어뜨려서 더위와 추위로 고생하던 세상을 안정시켰지요. 그리고 대별왕은 저승을 다스리고, 소별왕은 이승을 다스리게 되었지요. 대별왕과 소별왕 이야기는 이렇게 하늘과 땅이 처음 만들어지는 천지 창조 이야기예요. 서양의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천지 창조 신화라 할 수 있답니다.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조차 구별되지 않았을 때예요. 그렇게 땅과 하늘이 맞붙어 한 덩어리인 채로 수천, 수만 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어요. 갑자기 사방이 흔들리더니 하늘과 땅이 떨어져 나갔어요. 땅에서는 산이 솟고, 강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었지요. 그리고 온갖 식물과 동물, 사람이 생겨났지요. 하늘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은 별이었어요. 동쪽에는 견우성, 서쪽에는 직녀성, 남쪽에는 노인성, 북쪽에는 북두칠성, 그리고 중앙에는 삼태성이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별들이 생겨나도 세상이 그리 밝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늘을 다스리는 천지왕이 해와 달을 두 개씩 하늘로 보냈어요. 해와 달이 두 개씩이다 보니 낮에는 너무 뜨겁고, 밤에는 너무 추웠지요. 이때는 온갖 식물과 동물, 산 사람과 죽은 사람까지 모두 말을 해서 세상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어요. 더구나 뜨거운 두 개의 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로 세상이 몹시 혼란스러웠어요. 어떻게 하면 이 혼잡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천지왕은 이것이 걱정거리였어요. 어느 날 천지왕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하나씩을 삼키는 꿈을 꾸었어요. 천지왕은 귀한 아들 둘을 얻을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들 둘을 낳으면 각각 하늘과 땅을 다스리게 하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천지왕은 지국성에 사는 총명이라는 처녀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어요. 총명 아기씨는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지만, 아름답고 슬기로운 여자였지요. 총명 아기씨는 천지왕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으로 갔지만 쌀독에 쌀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총명 아기씨는 하는 수 없이 이웃에 사는 큰 부자인 수명장자에게 쌀을 얻으러 갔어요. 그런데 고약한 수명장자는 쌀에 돌을 잔뜩 섞어 주었어요. 돌이 가득 든 밥을 먹던 천지왕이 그 이유를 물었어요. “실은 품삯으로 쌀을 받아 왔는데 돌이 어찌나 많이 섞였는지 아무리 씻어도 돌을 모두 골라낼 수 없었답니다.” 듣고 보니 괘씸한지라, 천지왕은 그자가 누구인지 물었어요. “빌려 줄 때는 작은되를 사용하여 조금 빌려 주고 받을 때는 큰되로 받아서 부자가 된 수명장자이옵니다.” 화가 난 천지왕은 하늘나라에 있는 우레장군과 벼락장군, 화덕진군에게 수명장자를 벌하라고 명했어요. 우레장군은 천둥을, 벼락장군은 벼락을 쳐서 수명장자를 죽이고, 화덕진군은 불꽃을 던져 그의 집을 홀랑 불태워 버렸지요. 총명 아기씨와 결혼한 천지왕은 땅에서 계속 살 수 없었어요. 하늘나라를 오랫동안 비워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천지왕은 총명 부인에게 아들 둘을 낳으면 큰아들은 대별왕, 작은아들은 소별왕이라고 이름 지으라고 당부했어요. 그리고 박 씨 하나를 주면서 혹시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거든 박 씨를 심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요. 천지왕이 떠난 후 총명 부인은 아들 형제를 낳았어요. 하루는 서당에 갔다 온 형제가 총명 부인에게 물었어요. “어머니, 친구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려요.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요?” 총명 부인이 박 씨를 내주며 말했어요. “너희 아버지는 하늘나라 옥황상제인 천지왕이시다. 이 박 씨를 양지바른 곳에 심으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단다.” 박 씨를 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트더니 덩굴이 하늘까지 쭉쭉 솟아올랐어요. 형제는 박 덩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천지왕은 건장하게 자란 아들 형제를 보자 무척 기뻤어요. 이제야 혼란스런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산 사람들의 세상인 이승은 형인 대별왕에게, 죽은 사람들의 세상인 저승은 동생인 소별왕에게 다스리게 했답니다. 그런데 이승을 다스리고 싶었던 소별왕이 꾀를 냈어요. “형님, 수수께끼를 내어 맞히는 사람이 원하는 곳을 다스리는 것이 어떨까요?” “좋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형이 먼저 문제를 냈어요. “아우야, 사시사철 잎이 지지 않는 것은 무엇이지? 또 잎이 지는 것은 무엇이지?” 형님, 문제가 너무 쉽습니다. 당연히 속이 꽉 찬 나무가 사시사철 잎이 지지 않고, 속이 빈 나무가 잎이 집니다. “아우야,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대나무는 마디마디 속이 비었어도 잎이 지지 않는단다.” 수수께끼 내기에서 지자 소별왕은 다른 꾀를 냈어요. “형님, 누가 더 꽃을 잘 가꾸는지 내기하는 게 어떻겠어요?” 그래서 형제는 같은 날 꽃씨를 뿌렸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형이 심은 씨앗은 아주 잘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피었는데, 동생이 심은 꽃은 시들시들 볼품이 없었어요. “형님, 그럼 이제 누가 잠을 잘 자는지 내기합시다.” 형이 잠들자 소별왕은 얼른 형의 꽃과 자기의 꽃을 바꿔 놓았어요. 마침내 형은 동생에게 이승을 양보했지요. “아우야, 이승은 온갖 것들이 말을 하고, 해와 달이 둘씩 있어 몹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부디 법을 바로 세워 나라를 잘 다스리거라.” 형의 말대로 이승은 너무나 혼란스러웠어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워서 살기 힘들고, 사람과 동물, 나무와 풀이 모두 말을 해서 무척 시끄러웠지요. 소별왕은 결국 형에게 도움을 청했답니다. “형님, 이승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어찌해 볼 방법이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마음씨 착한 형은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었어요. 먼저 무쇠 천 근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어요. 그러고는 아침에 해가 떠오르자 나중에 떠오른 해를 활로 쏘아 동해 바다에 빠뜨려 버렸어요. 밤에는 나중에 떠오른 달을 쏘아 서해 바다에 빠뜨렸지요. 또 송홧가루 마흔아홉 되를 세상에 뿌리자 모든 짐승과 풀과 나무의 혀가 굳어서 말을 못 하게 되고, 오직 사람만 말을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몸무게가 백 근이 되면 사람이고, 백 근이 못 되면 귀신으로 나누어 구별하였지요. 대별왕의 이런 노력 덕분에 저승의 혼란스러움이 잠잠해졌어요. 형이 저승으로 돌아가자 소별왕도 형처럼 이승을 잘 다스리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어요.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지만 나쁜 사람도 있고, 병들고 죽고 굶주리는 일을 모두 없앨 수는 없었지요. 한편 대별왕은 저승을 잘 다스려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답니다.
열두 띠 이야기 2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아주 먼 옛날 옥황상제가 세상을 창조했어요. 빛과 어둠을 만들고, 동물과 식물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든 다음 긴 숨을 내쉬었어요. “아, 고단하구나!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군.” 그때 멀리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옥황상제님, 옥황상제님, 도대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은 옥황상제는 잠시 고민에 잠겼어요. “어찌한담? 그래, 열두 동물 신을 뽑아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는 게 좋겠다.” 따가닥따가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일곱 번째로 말 신이 들어왔어요. “옥황상제님,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꿈을 키워 주겠습니다.” 옥황상제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말 신도 세상으로 내려보냈어요. 말은 순발력이 뛰어나고 힘이 넘치는 동물로, 옛날 사람들은 말을 무척 신령스러운 동물로 생각했어요. 고구려와 신라를 세운 임금이 태어날 때는 말이 좋은 징조를 알려 주었고, 백제가 망할 때는 안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걸 암시하기도 했답니다. 말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물에 욕심이 없고 너그러우며 활달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에요. 또한 부지런해서 재산을 잘 모으고, 남에게 베풀 줄도 알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많이 받지요. 그러나 말을 닮아 성격이 불처럼 급하기도 하고 고집스런 면도 있답니다. 피웅! 장수가 쏜 화살이 들판 끝에 서 있는 소나무에 가 꽂혔어요. “흠, 이번에도 제대로 맞았군.” 장수는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빠른 말을 가지지 못한 게 늘 불만이었어요. “화살만큼 빠른 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날 장수가 사는 고을에 신비로운 검은 말이 나타났어요. 울음소리는 하늘과 땅을 흔들 만큼 크고, 달릴 때는 그림자도 볼 수 없을 만큼 바람처럼 빠른 말이었지요. 고을 사람 모두 그 말을 탐냈지만, 성질이 어찌나 사나운지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어요. 물론 장수도 그 말이 욕심났어요. 장수는 매일 개울가 나무 뒤에 숨어서 말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말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그토록 기다리던 검은 말이 나타났어요. 장수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그리 사납게 굴던 말이 장수를 보고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주인을 만난 듯 푸르륵푸르륵 콧김을 내쉬며 다가왔지요. 장수는 조심조심 말 등에 올라탔어요. 그러자 말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어요. “허, 그놈 참 빠르다. 하늘이 비로소 내 소원을 들어주었구나!” 장수는 말이 얼마나 빠른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저기 저 소나무를 향해 활을 쏠 테니 너는 화살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 장수가 우렁차게 말하자 말도 알아들었다는 듯 히히힝 울었어요. 장수가 활을 쏜 순간 말이 달리기 시작했어요. 장수도 말 등에 납작 엎드려 함께 달렸지요. “이랴, 이랴, 달려라! 바람처럼 달려라!” 검은 말은 다른 말보다 훨씬 빨랐어요. 장수의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바늘 끝처럼 따가웠지요. 드디어 장수와 말이 소나무 앞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소나무에는 이미 화살이 꽂혀 있었지요. 장수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너 이놈, 화살보다 늦지 않았느냐!” 말이 뭔가 말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지만 장수는 칼을 빼어 단칼에 말의 목을 베어 버렸어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와 소나무에 꽂혔어요. 그제야 장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어요. 소나무에 꽂혀 있던 화살은 전날 활쏘기 연습할 때 쏘았던 거였지요. 장수는 슬피 울며 말을 고이 묻고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 주었답니다. 여덟 번째로 양 신이 매매 울음소리를 내면서 얌전하게 들어왔어요. “옥황상제님,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싸움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이 서로 아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양보하는 마음을 길러 주겠습니다.” “서로 아끼고 양보하는 마음이라? 맞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너도 어서 내려가거라.” 양은 성격이 온순하여 평화를 떠올리게 하는 동물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을 어질고 착하고 아름다우며, 나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의로운 동물로 여겨 왔어요. 또 참을성이 많고 은혜를 아는 동물이라고도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면도 있답니다. 양해에 태어난 사람은 순한 양을 닮아서 심성이 착하고 마음 씀씀이가 넓으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잘하는 편이라고 해요. 또한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해에 태어난 사람을 좋아한답니다. 그러나 다른 띠보다 유난히 정의롭고, 정직하며 성격이 올곧아서 때로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요. 삐거덕삐거덕! 장수는 화들짝 놀랐어요. 자기가 웬일인지 낡은 집 마루에 앉아 있었거든요. “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를 돌아보니 기둥이 흔들흔들, 서까래가 덜렁덜렁, 문이 들썩들썩하는 거예요. 장수는 놀라서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어요. 우지끈! 풀썩! 장수가 나오자마자 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어요. “휴우, 살았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네.” 장수는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등이 무겁지?” 장수 등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까래 세 개가 나란히 지워져 있었어요. 툭탁 툭탁 툭탁! 이번에는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요. 장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어요. 무너진 집터 위에서 숫양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어요. “집이 무너지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양들은 뿔을 창처럼 세우고 숨을 씩씩 몰아쉬며 서로에게 달려들었어요. 어찌나 무섭게 싸우던지 두 마리 모두 툭 하고 뿔이 부러져 버렸지요. “어이쿠, 이곳에 더 머물다가는 아무래도 큰 봉변을 당하고 말겠구나.” 장수는 서둘러 빠져나가려다 그만 양의 꼬리를 밟고 말았어요. 그런데 밟힌 양 꼬리가 툭 하고 힘없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 순간 장수는 눈을 번쩍 떴어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방 안이었어요. 그제야 어젯밤 길을 잃고 헤매다 작은 암자에 들러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났지요. ‘거참, 이상한 꿈이로군.’ 장수는 방을 나와 큰스님을 찾아갔어요. 스님은 장수가 찾아오리라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불을 환하게 밝히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꿈 이야기를 하자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왕이 되실 꿈입니다.” 장수는 깜짝 놀랐어요. 낡은 집은 지금 이 나라를 뜻합니다. 머지않아 낡은 집처럼 무너질 운명이지요. 장수께서 서까래를 진 모습은 곧 왕이 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숫양도 마찬가지이고요. 양한테서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가니 이 또한 왕이 된다는 뜻이지요. 장수는 스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스님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어요. “장수의 얼굴을 보니 왕이 될 상입니다. 부디 덕을 많이 쌓아 훌륭한 왕이 되시구려.” 스님의 말대로 장수는 훗날 왕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였어요. 꿈풀이를 해 준 스님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무학 대사였지요. 이때부터 사람들은 양을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양 꿈을 꾸면 행운과 성공이 온다고 믿게 되었답니다. 아홉 번째로 원숭이 신이 휘익 밧줄을 타고 재주를 넘으며 들어왔어요. “사람들도 저처럼 다양한 재주가 있어야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재주 없이 똑같다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네 말도 옳다. 어서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재주를 알려 주거라.” 원숭이는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살던 동물이 아니에요. 이웃 나라인 일본과 중국에 살던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 세조 임금 때부터라고 전해져요. 옛날에는 원숭이를 ‘잔나비’라고 불렀어요. ‘잔’은 작거나 가벼운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아마 원숭이의 모습이나 행동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실제로 원숭이는 꾀와 재주가 많고 몸이 날렵한 동물이지요. 원숭이해에 태어난 사람은 원숭이처럼 영리하고 지혜로워 매사를 현명하게 처리할 뿐만 아니라 재주가 많고 창의성이 풍부해서 예술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고 해요. 또 재미있고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답니다. 숲속 마을에 사는 원숭이에게는 얄미운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바로 옆 마을 바닷가에 사는 게였지요. 둘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크고 작은 다툼을 벌였어요. 어느 날 토끼네 집에서 잔치가 열렸어요. 인심 좋은 토끼는 숲속 동물들에게 맛있는 떡을 고루고루 나눠 주었어요. 원숭이도 커다란 떡을 한 덩이 받았지요.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떡이었어요. 떡을 보자 원숭이는 게 생각이 났어요. “친구는 뭐든 나눠 먹어야 하는데.” “아니야, 아니야. 나눠 먹기엔 너무 작잖아? 그래그래, 몰래 먹으면 게도 모를 거야.” 원숭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떡갈나무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품에서 떡을 꺼내 한 입 베어 먹으려는데 어디선가 우렁우렁 큰 소리가 들렸어요. “어이, 친구! 뭘 그렇게 맛있게 먹나?” “아이코, 깜짝이야!” 밑을 내려다보니 다름 아닌 게였어요. 원숭이는 슬며시 떡을 감췄어요. “혼자 먹지 말고 나도 좀 다오!” 원숭이는 잠시 망설이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어요. “안 돼. 너무 작아서 나눠 줄 게 없어.” 원숭이가 맛있는 떡을 저 혼자만 먹자, 게는 약이 올랐어요. ‘흥! 나는 뭐든 저랑 나눠 먹었는데.' 게는 원숭이를 골려 줄 방법이 없을까 곰곰 머리를 굴렸어요. “친구야, 너 그거 아니? 떡은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먹어야 더 맛있다.” 원숭이의 귀가 쫑긋 커졌어요. “응?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먹어야 맛있다고?” 원숭이는 얼른 게가 일러 준 대로 했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갑자기 바람이 휙 부는 바람에 떡이 그만 땅에 툭 떨어졌어요. “아이고머니나, 내 떡!” 원숭이가 허둥지둥 나무 아래로 내려갔지만, 어느새 게가 떡을 날름 집어 들고 달아났어요. “히히히, 이제 이 떡은 내 거다. 욕심쟁이 원숭이야, 용용 죽겠지?” 게를 뒤쫓아 간 원숭이는 게집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너 이놈, 얼른 떡을 내놓아라! 당장 내놓지 않으면 네 집에다 방귀를 뀔 테다!” 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점점 더 화가 난 원숭이는 게집에다 궁둥이를 대고 힘껏 방귀를 뀌었어요. 부우우우웅, 뿡! “아이고, 고약한 냄새!”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게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어요. “요 녀석, 어디 내 집게발 맛 좀 봐라!” 게는 원숭이의 궁둥이를 콱 물었어요. “아이고, 아파라!” 원숭이는 궁둥이를 잡고 팔짝팔짝 뛰었어요. 어찌나 아프던지 궁둥이에 불이 붙은 것 같았지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원숭이의 궁둥이는 털이 없이 민숭민숭해졌어요. 게 집게발에 있는 까칠까칠한 털은 원숭이 궁둥이를 너무 세게 무는 바람에 그 털이 찰싹 붙어서 생긴 것이랍니다. 잠시 후 꼬꼬댁 꼬꼬꼬꼬 활기찬 소리와 함께 열 번째로 닭 신이 들어왔어요. "옥황상제님, 사람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어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돕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닭 신도 원숭이 신을 이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갔어요. 예로부터 닭은 복을 가져다주는 동물로 여겨져 왔어요. 사위가 처갓집을 방문하면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는 옛 풍습에서 보듯이, 닭은 귀한 사람에게 걸맞은 동물이었음을 알 수 있어요. 닭은 키우기 쉽고 번식력이 강해서 사람들에게 아주 요긴한 동물이에요. 매일 달걀을 낳아 주는 암탉 한 마리만 키우면 가난한 사람도 맛있는 달걀 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해 주지요. 그뿐만 아니라 멋스럽게 생긴 수탉은 꼬끼오 하고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시계 역할도 해 준답니다. 닭해에 태어난 사람은 수탉의 카랑카랑한 울음소리처럼 분명하고 날카로운 분석력을 갖고 있다고 해요. 또한 섬세하고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도 하지요. 또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걸 즐기고 인정받기를 좋아한답니다. 신라 시대에 시림이라는 숲이 있었어요. 언제나 뿌연 안개가 병풍처럼 둘러싼 아주 신비로운 곳이었지요. 한 나무꾼이 무심코 나무를 베었다가 사흘 내내 천둥 번개가 번쩍번쩍 치는 바람에 그 후로 사람들은 함부로 시림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시림은 신선들만 사는 곳이라더군.” “함부로 들어가면 신선들이 크게 노한다지?” 인적이 없는 시림은 늘 고요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호공이라는 사람이 궁궐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난데없이 닭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꼬끼오!” 호공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어요. 소리가 나는 곳은 다름 아닌 시림이었지요. “아니, 내 귀가 잘못되었나? 시림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리다니.” “꼬끼오! 꼭, 꼭, 꼬오!” 다시 한번 길게 닭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이번에 들린 닭 울음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크고 우렁찼어요. 순간 캄캄하던 숲이 알 수 없는 빛으로 환해졌어요. “아무래도 시림에서 큰일이 일어날 징조 같구나.” 호공은 조심스럽게 시림으로 들어갔어요. 삐죽빼죽 자란 덤불을 헤치며 걷던 호공은 뭔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숲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웬 황금 상자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요. 그 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호공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임금님께 아뢰야겠다.” 호공은 서둘러 궁궐로 돌아갔어요. 마침 임금님도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깼던 차에 호공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지요. 기이하게 여긴 임금님은 호공과 함께 시림으로 갔어요. 임금님을 본 닭은 큰 소리로 울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올라갔어요. “상자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니 내려 보아라.” 임금님이 뚜껑을 여는 순간 상자 안에서 찬란한 금빛이 쏟아졌어요. 그 속에는 잘생긴 남자 아기가 누워 있었지요. 아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임금님 품에 안겼어요. 임금님은 아기를 보듬고 말했어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내리셨구나!” 임금님은 아기 이름을 ‘알지’라고 지었어요. 알지는 자랄수록 총명하고 지혜로워 임금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훗날 늠름한 어른으로 자란 알지는 임금님을 도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요. 알지는 금으로 만든 상자에서 나왔다고 하여 최초로 김씨 성을 갖게 되었고, 알지의 후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신라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지요. 그 후 시림은 ‘닭이 나온 숲’이라 하여 계림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답니다. 열한 번째로 개 신이 멍멍 짖으며 뛰어 들어왔어요. 옥황상제님, 서로를 믿지 못하면 항상 싸움이 일어납니다. 물론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규칙도 중요하고 서로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나도 너희들을 믿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는 것이지. 개 신도 어서 가서 믿음을 전해 주도록 하여라." 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왔어요. 그래서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개는 용맹하고 믿음직스러워서 평소에는 집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사냥을 하거나 길을 헤맬 때는 주인을 보호해 주었지요.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인 진돗개의 경우도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 개가 사람을 위험에서 구한 내용이에요. 게다가 개는 사람을 잘 따르고 말귀도 잘 알아들어 세계 어디서나 많은 사랑을 받는 동물이랍니다. 개의 기질에서 보듯이 개의 해에 태어난 사람은 정직하고 충성심이 강해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지요. 또 생각이 깊고 겸손할 뿐 아니라 주어진 역할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커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다고 합니다. 아주 먼 옛날, 넓고 넓은 하늘나라에 숯처럼 까만 까막나라가 있었어요. 까막나라에는 어디를 가나 캄캄한 어둠뿐이어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요. “불을 구해 오면 큰 상을 준다는군.” "그래? 그럼 어디 불을 찾아 떠나 볼까?” 많은 사람들이 불을 구하러 멀리 떠났지만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까막나라 임금님은 걱정이 태산 같았어요. “큰일이군.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어.” 하루는 몸집이 크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개가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임금님, 제가 불을 구해 오겠습니다.” 임금님은 깜짝 놀라 물었어요. “아니, 아무도 구해 오지 못한 것을 네가 어찌 구해 올 수 있단 말이냐?” 개는 주저하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어요. “해를 가져오면 됩니다. 하늘나라에 하나뿐인 불덩이니까요.” 불을 찾아 하늘나라를 헤매던 개는 드디어 동쪽 하늘에서 불덩이를 발견했어요. 불덩이는 새빨간 빛을 내며 이글거렸지요. “옳거니, 저것이 바로 해로구나.” 개는 불덩이를 향해 펄쩍 뛰어올랐어요. 그러고는 타오르는 불덩이를 덥석 물었지요. “앗, 뜨거워!” 개는 입 안이 지글지글 타는 것만 같았어요. 참지 못한 개는 그만 해를 뱉어내고 말았어요.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해가 안 되면 달이라도 가져가야지.” 개는 서쪽 하늘을 향해 달려갔어요. 서쪽 하늘은 동쪽 하늘과 달리 어두웠어요. 하지만 새하얀 얼음덩이가 빛을 내고 있어서 까막나라처럼 캄캄하지는 않았어요. “오호라, 저것이 바로 달이구나.” 개는 얼음덩이를 있는 힘껏 물었어요. “앗, 차가워!” 개는 온몸이 빳빳하게 얼어붙는 것 같아서 이번에도 달을 뱉어내고 말았어요. 그러는 사이 개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요. 개는 하는 수 없이 까막나라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어요. 넘실넘실 흐르는 은하수를 건너 까막나라에 점점 가까워지자 주변은 자꾸자꾸 어두워졌어요. 덩달아 개의 마음도 어두워졌지요. “임금님이 얼마나 실망하실까? 까막나라 사람들도 모두 슬퍼할 거야.” 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그래,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꼭 불을 구해서 돌아가야 해!”개는 발걸음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어요. 은하수를 훌쩍 뛰어넘자 뜨겁디뜨거운 해와 차디찬 달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지요. 차마 까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개는 아직도 불을 구하기 위해 하늘나라 서쪽과 동쪽을 뛰어다닌다고 해요. 환한 해가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거나 둥그런 달이 잠시 이지러지는 것은 개가 해와 달을 물었다 뱉었다 하기 때문이라나요? 사람들은 이 개를 ‘불개’라고 부른답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로 돼지 신이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들어왔어요. “옥황상제님, 저는 사람들에게 넉넉하고 행복한 마음을 전해 주겠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오호라,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구나. 너도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거라.” 이렇게 해서 마지막 돼지 신까지 열두 신 모두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답니다. 신에게 소원을 빌거나 중요한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제사상에 올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돼지머리랍니다. 옛날부터 고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린 것은 돼지가 그만큼 신성한 동물이자 복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돼지꿈’을 길몽이라며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돼지는 예나 지금이나 재산과 복을 상징하는 동물이랍니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도 듬직한 돼지처럼 복이 많다고 해요. 부지런하고 용감할 뿐 아니라 양심적인 평화주의자이기도 하지요. 또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만나면 즐거워지는 사람이 바로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이랍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쌀이 삼천 섬이나 나오는 땅을 가진 아주 큰 부자가 살았어요. 사람들은 모두 부자를 부러워했지만, 부자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재산이 많으면 뭘 해, 벼슬이 없는걸.” 하루는 부자가 주막 앞을 지나다 나그네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었어요. “한양에서는 돈만 있으면 벼슬도 산다며?” “그럼, 세상에 돈이면 못 할 게 없지.” 순간 부자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커졌어요. “옳거니, 나도 벼슬을 사면 되겠구나!” 부자는 내친김에 쌀 천 섬지기 땅을 팔아서 한양으로 갔어요. “사또 자리를 살까나, 정승 자리를 살까나. 돈, 돈, 돈이 있는데 임금 자리인들 못 살까나.” 부자는 양반이 된다는 생각만 해도 들썩들썩 어깨춤이 절로 나고 노래가 흥얼흥얼 흘러나왔어요. 먼 길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 부자는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대감 집을 찾아갔어요. “대감마님, 시골 사또 자리 하나 주십시오.” 대감은 부자가 내민 돈을 슬그머니 받으며 시골에 내려가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오지 않자 부자는 다시 대감을 찾아갔어요. “대감마님, 사또 자리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러자 대감은 화를 버럭 냈어요. “그까짓 돈으로 무슨 벼슬을 사겠다는 건가!” 부자는 남은 땅을 모두 팔아 대감에게 주었어요.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대감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어요. 부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대감을 찾아가 따졌어요. “도대체 벼슬자리를 줄 거요, 말 거요?” “네 이놈! 농사꾼 주제에 감히 양반 자릴 넘봐? 감옥에 갇히기 싫으면 썩 물러가거라!” 부자는 대감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아이고, 전 재산 다 날리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가나.” 부자는 땅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부자에게 다가왔어요. “여보게, 너무 슬퍼 말고 이것 좀 먹게.” 노인이 내민 것은 샛노랗고 오동통한 참외였어요. 마침 배가 고팠던 부자는 얼른 참외를 받아먹었지요. “다 먹었나? 그럼 이걸 뒤집어쓰게.” 노인의 손에는 망태가 들려 있었어요. ‘뭐, 참외도 거저먹었는데 그깟 망태쯤이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부자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망태를 뒤집어썼어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망태를 뒤집어쓰자마자 부자가 그만 돼지로 변하고 말았어요. “꿀꿀! 꿀꿀! 꿀꿀꿀꿀!” “쯧쯧쯧, 망태를 쓰고 돼지로 변한 걸 보니 자네는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먼.” 혀를 차던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어이쿠, 내가 괜한 욕심을 부리다 이 꼴이 되고 말았구나!’ 부자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없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실컷 먹고 보자!’ 부자는 남은 참외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어요. 그러자 부자의 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다시 사람 몸으로 돌아왔어요. 얼마나 기쁜지 부자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가만가만,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부자는 한달음에 대감 집으로 달려갔어요. 대감이 자고 있는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간 부자는 대감의 머리에 망태를 뒤집어씌웠어요. “앗, 꿀꿀꿀!” 깜깜한 방 안에 돼지 울음소리가 가득 찼어요. “내 돈을 돌려주면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소.” 대감은 꿀꿀거리며 연방 고개를 끄덕였어요. 참외를 받아먹은 대감 역시 다시 사람 모습으로 돌아왔지요. 잃은 돈을 되찾은 부자는 곧장 시골로 향했어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부자는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가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팔도 전설 이야기 1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그래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고 국력을 탄탄히 할 때, 그리고 왕의 강한 힘을 보여 주고자 할 때 서울 주변인 경기도에 성을 쌓았어요. 성을 쌓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백성들이 힘들게 모은 돈이었고, 성을 쌓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 또한 모두 백성들의 힘이었어요. 그러니 정성 없이 지었다간 큰 화를 면치 못했을 거예요. 바로 그런 교훈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성실한 생활 태도를 일러 주고 있어요. 옛이야기 중에는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하지만 남한산성에 얽혀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에요. 경기도 광주시에 가게 되면 꼭 남한산성에 들러 보세요. 그리고 이회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쌓아 올린 남한산성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또 매가 앉았던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요. 그러면 이제 우리 민족의 혼과 정성이 가득 담겨 있는 남한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사백 년 전의 이야기예요.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신하들에게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명령했어요. 임금님의 명령을 받은 이서는 자기가 지키고 있는 남한산성의 성벽을 더 튼튼히 쌓기로 했지요. 이서는 남쪽은 이회, 북쪽은 벽암에게 공사를 맡겼어요. “남한산성은 사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 중요한 성일세. 나라를 위해 튼튼하게 쌓아 주길 바라네.” 이회는 그날부터 성벽 쌓는 일에 몰두했어요. 낮에는 직접 흙과 돌을 날라다 성벽을 쌓았고, 밤에는 튼튼한 성벽을 쌓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어요. ‘나라님의 명령이고, 나라를 지키는 일이니 이 한목숨 바쳐 열심히 해야 한다.’ 이회는 매일 임금님이 계신 한양을 바라보며 결심했어요. 성을 쌓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몸이 고단한 것은 어찌어찌 견딜 수 있었지요. 하지만 나라에서 준 공사비가 다 떨어져 공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이회는 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했어요. 결국 이회는 집을 팔아서 부족한 공사비를 마련했어요. 그래도 성을 완성하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자, 보다 못한 아내가 말했어요. “제가 여러 마을을 다니며 공사비를 모아 볼게요.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견뎌 보세요.” 아내는 이회를 돕기 위해 길을 떠났어요. 어느덧 공사를 완성하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어요. 북쪽 성벽을 맡은 벽암은 공사를 완성하였어요. 그러자 이회를 시기한 무리가 이서를 찾아가 거짓으로 고했어요. “이회는 아직도 성벽을 완성하지 못했을뿐더러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공사비를 흥청망청 다 써 버렸다지 뭡니까.” 믿고 맡겼더니 괘씸하도다. 그러나 이회는 당당하게 말했어요.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서가 명령했어요. “괘씸한 놈! 여봐라,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밤낮으로 성을 쌓느라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회는 곤장을 맞다가 그만 죽고 말았어요. 그때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왔어요. 매는 죽은 이회의 주위를 빙빙 맴돌더니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사람들을 쏘아보았어요. “이회의 혼이 매에게 들어갔나 봐. 어유, 무서워.” 그 말에 이서는 더욱 화가 났어요. “여봐라, 저 매도 잡아 죽여라!” 군사들이 우르르 매에게 달려갔어요. 하지만 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매가 앉았던 바위에는 매 발자국만 남아 있었어요. “아무래도 그 매의 눈빛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이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남한산성으로 가서 성벽을 둘러보았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이회가 짓던 남쪽 성을 살펴보니 빈틈없이 튼튼하였어요. “아뿔싸! 내가 큰 실수를 하였구나.” 이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어요. 며칠 뒤 이회의 아내가 돌아왔어요. 몇 달 동안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공사비를 모아 온 이회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그동안 우리의 노력이 모두 헛되었구려.” 넋 나간 사람처럼 남편이 쌓던 성벽만 바라보던 이회의 아내는 강물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님은 몹시 화를 내었어요.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님은 몹시 화를 내었어요. “어리석은 판단으로 충신을 잃게 한 이서와 이회를 모함한 무리를 엄벌로 다스려라!” 임금님은 또 이회와 그의 아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청량당이라는 사당을 지어 주었어요. 사람들은 이회가 죽던 날 매가 날아와 앉아 있던 바위를 ‘매 바위’라 부르며 정직하고 성실했던 충신 이회를 오랫동안 기억하였답니다. 남매탑 이야기. 불심으로 맺어진 오누이. 충청남도 공주시와 논산시에 걸쳐 있는 계룡산을 오르다 보면 옛날 청량사가 있던 자리에 오층 석탑과 칠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요. 두 석탑은 다정한 남매의 모습을 닮았지요. 그래서 ‘청량사지 오층 석탑’과 ‘청량사지 칠층 석탑’이라는 실제 이름보다 ‘남매탑’으로 더 많이 불린답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이나 탑에는 저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남매탑처럼 우연히 깊은 인연을 맺고 살던 사람들의 따뜻한 정이 담겨 있기도 하고,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기도 하지요. 그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답니다. 수백 년 전 옛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끈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옛이야기의 매력이 아닐까요? 옛날 신라 성덕왕 때, 불심이 깊기로 소문난 상원 조사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스님은 충청도 계룡산 깊은 골짜기에 암자를 짓고 도를 닦고 있었지요. 어느 날 밤, 암자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깊은 산속에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산짐승 소리인가?’ 스님은 잠시 바깥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불경을 읽기 시작했지요. 문 앞에는 집채만 한 호랑이가 떡 버티고 서 있었어요.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되뇌며 호랑이를 노려보았어요. 그런데 호랑이는 스님에게 달려들기는커녕 털썩 엎드려 끙끙 앓는 소리를 냈어요. ‘이놈 하는 짓을 보니 날 잡으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호랑이의 행동이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목에 뭔가 걸려 있었지요. 스님은 호랑이의 입을 두 손으로 쩍 벌리고는 호랑이의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냈어요. 호랑이는 그제야 앓던 소리를 멈추고 편안히 숨을 쉬었지요. 스님은 목에 걸린 비녀를 보고, 호랑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이놈! 배고프다고 사람을 마구 잡아먹어서야 되겠느냐. 내가 너를 구해 주었으니 앞으로는 사람을 해치지 말거라.” 호랑이는 약속한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어요. 그 후로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어요. 그러는 사이 추운 겨울이 오고 눈까지 내렸지요. 꼬르륵꼬르륵! “아이고, 배고파. 짐승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으니 이러다 굶어 죽겠네.” 며칠을 쫄쫄 굶은 호랑이는 다리까지 후들거렸어요. “이러다 정말 굶어 죽겠어. 약속이고 뭐고 모르겠다. 어흥!” 어슬렁어슬렁 마을로 내려간 호랑이는 마을 어귀에서 마주친 처녀를 보고 입맛을 쩝쩝 다셨지요. 소스라치게 놀란 처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답니다. “이놈, 나와의 약속을 잊었더냐!” 호랑이의 귓전에 스님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어요. 호랑이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하지만 기절한 처녀 말고는 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요. 호랑이는 앞발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어요. 이런, 나를 구해 준 스님과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되지. 그런데 이 처녀를 어쩐담? 이대로 두었다간 얼어 죽고 말 텐데. 그래, 스님께 데려가자. 호랑이는 정신을 잃은 처녀를 등에 태우고는 스님이 있는 암자로 내달렸어요. 그러고는 처녀를 암자 앞에 내려놓고 돌아갔어요. 머리를 식히려고 방문을 열고 나오던 스님은 처녀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웬 처자가 여기 쓰러져 있지?' 스님은 처녀를 얼른 따뜻한 방으로 옮겨 놓고 다시 나와 주위를 살펴보았어요. 눈 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요. ‘음, 호랑이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군.’ 하지만 처녀는 많이 놀랐는지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어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은 처녀를 위해 부처님께 정성껏 불공을 드렸어요. 그렇게 열흘이 지난 뒤 처녀는 가까스로 눈을 떴어요. “저는 경북 상주에 사는 김 화공의 딸이에요. 혼례식 전날 밤 호랑이와 마주친 뒤 그만 정신을 잃었지요.”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스님은 처녀에게 허리까지 쌓인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에 머물라고 했지요. 그러니 앞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며 살겠습니다. 처녀의 뜻이 워낙 완고한지라 부모님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네가 살아 돌아온 것도 부처님의 덕이니 그렇게 하려무나.” 처녀는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리고 암자로 돌아갔답니다. “저는 스님과 의남매를 맺고 평생 불도를 닦겠습니다.” 스님도 처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날부터 스님과 처녀는 열심히 수행을 했어요. 둘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처녀의 부모님은 암자가 있는 자리에 청량사라는 절을 세워 주었지요. 그 후 청량사를 찾는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스님과 보살님은 전생에 오누이였나 봐. 어찌 저리 똑같이 불도를 열심히 닦으실까?” 스님의 제자인 회의 화상도 같은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탑 두 개를 세웠어요. 사람들은 그 탑을 ‘남매탑’이라 부르며 스님과 처녀의 특별한 인연을 이야기했답니다. 전라남도 영광군 낙월면에 가면 각시섬이 있어요. ‘각씨도’라고도 불리는 이 섬은 날씨에 따라 각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고, 병풍이 둘러쳐진 모양으로 보이기도 해요. 사람들은 각시섬이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이는 것은 아픈 남편을 살려 내지 못한 아내의 한 때문이라고 하지요. 아픈 남편을 혼자 두고 약초를 찾아 떠나야 했던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남편을 살릴 수 있는 신비한 약초를 본 아내는 반가운 마음에 자신의 몸이 뱀으로 변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남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해치면서까지 약초를 구해 왔건만 남편은 이미 죽은 뒤였어요. 뱀이 된 아내는 남편의 무덤에 약초를 놓아 두고 작은 섬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뱀이 돌아간 그 섬을 사람들은 ‘각씨도’라고 불렀답니다. 지금도 각시섬에서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어요. 사람들은 한을 가득 품고 섬이 된 아내를 위해 ‘각시당’이라는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성껏 제사를 지내며 아내의 영혼을 위로한답니다. 그래서인지 각시섬에서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 들고, 물고기도 그물 가득 잡을 수 있다고 해요. 전라남도 영광에 갈 일이 있으면 꼭 한번 각시섬에 들러 보세요. 아직은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았기에 옛이야기 속의 감동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답니다. 아주 먼 옛날, 칠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라남도 해제 마을에는 오랫동안 앓아누워 있는 남편을 보살피는 아내가 있었어요. 아내는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 구해다 남편에게 먹이고, 용하다는 의원은 모두 모셔다 남편을 보였어요. 아내의 지극 정성에도 남편의 병은 좀처럼 차도가 없었지요. 게다가 살림살이까지 점점 어려워져 끼니마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그러던 때 팔도에서 제일가는 의원이 마을을 찾아왔어요. 아내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의원을 찾아갔어요. 의원님, 제발 우리 서방님 좀 살려 주세요. 있는 재산 다 팔아 용하다는 약을 다 먹여 보았지만 이제는 일어나 앉지도 못합니다. 남은 거라곤 서방님이 주신 금가락지뿐이에요. 이거라도 드릴 테니, 제발 우리 서방님을 살려 주세요. 아내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의원은 남편을 보러 왔어요. 아내는 의원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어요. 팔도에서 제일가는 의원님이 못 고치시면 어쩝니까? 남편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 한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습니다. 제발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의원은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어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오.” 순간 아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어요. 저기 보이는 일곱 개의 섬 중 가장 작은 섬에 가면 파란 꽃이 피는 신비한 약초가 있소. 그 약초를 먹으면 어떤 병이든 나을 수 있소. 아내는 돌아가는 의원의 등에 대고 몇 번이고 절을 했어요. 다음 날 새벽, 아내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요. 약초를 구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노 젓는 것이 서툴러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같은 자리만 빙빙 맴돌았지요. “서방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서방님이 배 한가득 고기를 잡아 왔을 때처럼 저도 힘차게 노를 젓게 해 주세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바람이 솔솔 불어와 배를 밀어주었어요. 그제야 배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해가 질 무렵에는 가장 작은 섬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 노를 젓느라 지친 아내는 팔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어요. 하지만 기다리는 남편을 생각하니 잠시도 쉴 수 없었답니다. “해님, 해님, 오늘은 조금만 더 있어 주세요. 불쌍한 우리 서방님 구할 약초를 찾을 때까지 조금만 더 비춰 주세요.” 아내는 서둘러 섬 곳곳을 뒤지고 다녔어요. “파란 꽃, 파란 꽃.” 해는 야속하게도 붉은 노을 너머로 사그라져 갔어요. 너무나 지친 아내는 그만 쓰러져 잠이 들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솔솔 풍기는 신비한 향기가 아내의 코끝을 간질였어요. 아내가 눈을 떠 보니, 눈앞에 파란 꽃이 피어 있는 게 아니겠어요. “파란 꽃이다! 서방님을 살릴 약초를 찾았다!” 아내는 약초를 뽑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기쁨도 잠시, 약초를 뽑은 자리에서 큰 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어요. 소스라치게 놀란 아내는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그 귀한 파란 꽃을 놓쳐 버렸어요. 아내는 얼른 약초를 주워 입에 꼭 물고는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풀숲에서 뱀들이 우글우글 기어 나와 아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지요. “쉭! 쉭! 쉭!” 점점 빠르게 돌며 다가오는 뱀들 때문에 아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점점 정신을 잃어 갔어요. 그런데 기막히게도 아내의 두 다리와 두 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몸이 온통 비늘로 덮여 있었지요. 아내는 너무도 억울해서 꺼이꺼이 울부짖었어요. “나는 뱀의 몸으로 살아도 괜찮지만 병든 우리 서방님 불쌍해서 어쩌누.” “쯧쯧, 가엾은 사람 같으니. 죽어서라도 아내가 떠난 곳을 바라보시게.” 마을 사람들은 아내가 떠난 칠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백학산 양지바른 곳에 남편을 묻어 주었어요. 장사를 지내고 내려오던 마을 사람들이 저 멀리 바다를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저기 헤엄쳐 오는 것 좀 보게나!” “뱀 같은데? 입에 파란 꽃을 물고 있어.” 뱀은 파란 꽃을 입에 문 채 뭍으로 기어 나왔어요. 그러고는 부부의 낡은 집으로 스르르 들어갔지요. 한참 뒤 밖으로 나온 뱀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남편의 무덤을 찾아갔어요. 뱀은 남편의 무덤 옆에 약초를 놓고는 작은 섬으로 돌아갔지요. 그날 이후 커다란 뱀이 백학산에 있는 남편의 무덤을 찾아와 한 바퀴 돌고 섬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뱀이 사는 그 섬은 족두리를 쓰고 앉아 있는 각시 모양으로 변해 갔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뱀이 죽은 남편의 아내라고 믿게 되었어요. 그래서 뱀이 사는 섬을 ‘각시섬’이라고 부르며 이루지 못한 부부의 사랑을 위로했답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는 종교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해인사라는 절이 있어요. 해인사에는 우리나라 국보 32호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있어요.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었답니다 일곱 번이나 큰불이 났는데도,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만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답니다. 옛사람들은 해인사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해인이 팔만대장경을 지켜 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인사에 가게 되면 마음속 깊이 담아 둔 소원을 빌어 보세요. 진심을 다해 바란다면 해인이 힘을 발해 소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르니까요. 아주 먼 옛날, 가야산 깊은 산골에 가산 거사와 그의 아내가 살고 있었어요. 노부부는 산열매를 따 먹으며 불경 공부를 하며 지냈지요. 그날도 산에 올라 도토리를 줍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노부부의 눈에 작은 강아지가 띄었어요. “이 산속에 웬 강아지일까요? 자식 삼아 기르면 되겠네요.” 노부부는 강아지를 데려다 정성껏 키웠어요. 꼭 삼 년이 되던 날, 개가 갑자기 사람처럼 말을 했어요. 저는 동해 용왕의 딸로 벌을 받아 개가 되었어요. 노부부는 그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또 자식처럼 기르던 개가 훌쩍 떠나 서운하기도 했지요. 다시 삼 년이 지난 어느 보름날 밤, 노부부 집에 괴상하게 생긴 남자들이 찾아왔어요. 용왕님께서 가산 거사님 부부를 모셔 오랍니다. 자, 어서 가마에 오르시지요. 노부부는 삼 년 전 떠난 개의 말을 떠올리며 가마에 올랐어요. 용궁에 도착하자 공주가 반갑게 노부부를 맞았어요. 노부부는 공주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어요. “네가 떠나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 주니 고맙구나.” 노부부는 용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꿈같은 일주일을 보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공주가 노부부를 찾아왔어요. 아쉽지만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오늘 아바마마께서 두 분이 원하는 것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물으시거든 용좌 옆의 해인을 달라고 하세요. 공주의 말대로 용왕은 노부부를 보물 창고로 데려가 물었어요. 노부부는 해인을 가지고 집으로 가다가 가야산에서 절을 짓고 있는 애장왕을 만났어요. 가산 거사가 용궁과 용왕, 해인에 대해 들려주자 애장왕은 무릎을 치며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어요. 나는 이미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염라대왕 앞에서 이승의 죄를 심판받았지요. 나는 이승으로 다시 돌아가 불법을 일으키라는 염라대왕의 명을 받았습니다. 애장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어요. 해인의 신통력으로 절을 찾는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때부터 해인사에 숨겨진 해인을 손에 넣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졌어요.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해인사를 뒤지고 다녔지만 아무도 해인을 찾지 못했지요. 하지만 해인의 신통력 때문인지 해인사는 우리나라 삼대 사찰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팔만대장경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을 지닌 유명한 절이 되었답니다.
팔도 전설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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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울산바위 이야기. 설악산에서 멈춰 버린 바위. 강원도에 있는 설악산에 올라가다 보면 멋진 울산바위가 있어요. 둘레가 자그마치 4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울산바위는 여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요. 울산바위에 오르면 아름다운 설악산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설악산을 오르는 사람은 반드시 울산바위를 거쳐 가지요. 그런데 왜 울산바위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세 가지 설이 있어요. 그중 하나는 울산바위의 모양이 꼭 울타리 같다 하여 ‘울타리 산’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에요. 또 하나는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이면 그 소리가 울산바위에 부딪혀 산 전체가 으르렁거리며 우는 듯하다 해서 ‘우는 산’이라는 뜻이라고도 해요. 마지막으로 ‘울산바위 이야기’에서처럼 울산바위가 울산에서 금강산으로 가다가 설악산에 눌러앉게 되었다는 설도 있답니다. 어느 것이 진짜 울산바위라는 이름의 유래인지 알 수 없지만 울산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멋지고 늠름한 모습으로 감동을 주고 있어요. 설악산에 가면 멀리서 울산바위의 모습을 감상해 보세요. 그리고 직접 울산바위에 올라 설악산과 속초를 바라보며 울산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 강원도 설악산에 가면 울산바위가 있어요. 그런데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은 왜 울산에 있어야 할 울산바위가 강원도 설악산에 있느냐는 것이지요. 울산바위가 설악산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아주 멀고 먼 옛날, 그러니까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답니다. 우리나라 남동쪽 끝 울산에 있던 울산바위는 조물주가 금강산을 빚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조물주 님이 빼어난 바위들로 금강산을 만든다고? 그렇다면 내가 빠질 수야 없지.” 울산바위는 무거운 걸음을 쿵쿵 옮기며 금강산을 향해 갔어요. 하지만 금강산까지의 거리가 좀 멀어야 말이지요. 걸음이 느린 울산바위는 석 달을 쉬지 않고 걸어서 겨우 설악산에 도착했답니다. 울산바위는 설악산에 앉아 동해 바람에 땀을 식혔어요. 그때 “휘잉! 휘잉!”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조물주 님이 금강산을 다 빚으셨대.” 울산바위는 기운이 쭉 빠졌어요. “뭐? 금강산을 다 빚었다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한담.” 실망한 울산바위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금강산으로 애써 가 보아야 앉을 자리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자니 너무 멀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한참을 생각하던 울산바위는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어요. “그래, 그냥 여기서 살자!” 그렇게 해서 울산바위는 설악산에 눌러앉게 되었지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어요. 설악산 구경을 하던 울산 고을의 원님은 작은 암자의 스님에게서 울산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울산바위가 원래는 울산에 있었다는 말에 원님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어요. 그렇다면 울산바위는 우리 고을의 것이군. 어서 돌려주든지, 아니면 울산바위를 구경하는 삯이라도 내시오! 원님이 생떼를 부리자 스님 옆에 있던 동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어요. 원님의 생각이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울산바위를 구경하는 삯을 낼 형편이 안 됩니다. 그러니 바위를 도로 가져가시지요. 원님은 기가 막혔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무거운 울산바위를 어떻게 옮기겠어요? 요리조리 궁리하던 원님이 마침내 입을 열었어요. “마른풀을 태운 재로 새끼를 꼬아 바위를 묶어 주시오. 그러면 가져가리다.” 하지만 그 큰 울산바위를 묶을 새끼줄을 언제 다 꼬며, 꼴 수 있다 해도 재로 새끼를 꼬면 금세 바사삭 부서져 버릴 것이 뻔했어요. 당황해하는 스님을 보고 원님은 빙긋 미소를 지었어요. 그때 동자가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섰어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동자는 풀이 많이 자라기로 유명한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로 달려갔어요. 동자는 삼 일 낮, 삼 일 밤을 쉬지 않고 풀을 베어다 석 달 낮, 석 달 밤을 쉬지 않고 새끼를 꼬았지요. 그렇게 꼰 새끼줄로 울산바위를 꽁꽁 묶은 뒤 횃불에 불을 붙였어요. “이제 새끼줄을 불에 살짝살짝 그을리자.” 그러고 보니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재로 꼰 새끼줄 같았지요. 동자는 울산 고을 원님을 불렀어요. “자, 재로 새끼줄을 꼬아 묶었으니 어서 가져가십시오.” 재로 꼰 새끼줄로 꽁꽁 묶여 있는 울산바위를 본 원님은 입이 떡 벌어졌어요. “어이쿠, 동자님, 저 큰 바위를 어찌 옮긴단 말입니까?” 원님은 체면이고 뭐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빼어난 울산바위가 여기 있는 걸 보고 심통이 났습니다. 다시는 구경하는 삯 받는다는 소리 안 할 테니 제발 여기 두고 가게 해 주십시오.” 스님과 동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렇게 해서 울산바위는 강원도 설악산에 있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동자가 풀을 베러 간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는 이때부터 ‘풀을 꼬아 새끼줄을 만든 곳’이라는 뜻으로 ‘속초(束草)’라 불리게 되었지요. 강원도에 가면 울산바위가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또 영랑호와 청초호 사이에 정말 풀이 많은지 꼭 확인해 보세요. 장산곶 매 이야기. 사람들의 욕심이 부른 죽음. 경기도 북쪽에 위치한 황해도는 남북이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어 지금은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곳이에요. 그곳 장연군의 반도 남쪽 끝에 장산곶이 불룩 튀어나와 있어요. 장산곶은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지요. 장산곶은 험한 지형과 사나운 파도 때문에 예로부터 나약한 동물은 살아남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소나무와 잣나무가 우거진 숲에 나쁜 사람이 무기를 들고 들어가면 무기가 금세 녹슬어 살아남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설도 전해지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장산곶 매의 정기가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장산곶에 살았던 새 가운데 으뜸인 장산곶 매는 여느 매와는 달랐어요. 절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지 않고 사냥도 일 년에 딱 두 번만 했지요. 장산곶 매는 몸집은 작지만 한 번의 날갯짓으로 몇 리를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단숨에 만주 벌판으로 날아가 호랑이를 사냥했어요. 장산곶 매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바다에서는 풍어를 이뤄 사람들이 행복했다고 해요. 지금은 이야기로만 전해 오고 있지만, 장산곶 매의 늠름한 기상과 포부만은 여전히 우리 땅에 남아 민족의 강인한 힘이 되어 주고 있답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집집마다 널어놓은 물고기를 지켜 주는 매가 있었어요. 매가 아니었다면 먹성 좋은 바닷새들이 벌써 물고기를 모두 먹어 치웠을 거예요. 하지만 매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부터 새들은 벌벌 떨며 물고기를 채 갈 엄두를 내지 못했지요. “매는 우리 마을의 보배야, 보배!” 매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답니다. 어느 날 나라의 관리가 이 마을을 지나다 굵은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매를 보았어요. 날개를 퍼덕이는 위용이 예사롭지 않은 매를 보고 관리가 명령했어요. “여봐라, 저 매를 잡아 오너라! 임금님께 바쳐야겠다.” 부하들이 매를 잡으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매는 유유히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지요. “큰일 났어요! 관리가 우리 매를 잡아가려고 난리예요.” “뭐라고? 지금 당장 마을 회의를 열어야겠군. 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조용하던 마을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어요. 바다로 나갔던 젊은이들과 물질하러 갔던 아낙들까지 모두 한곳에 모였지요. 아이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어 매를 불러들였어요. 오랫동안 마을에 살아서인지, 매는 아이들의 부름에 곧장 달려왔지요. “여러분, 이 매는 우리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아요.” “맞습니다. 나라님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어요.” “우리 마을 매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게 표시를 합시다.” “그럽시다!” 사람들은 매의 발목에 붉은 끈을 묶어 길게 늘어뜨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에요. 독수리 한 마리가 마을을 맴돌며 닭을 채 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매는 단숨에 독수리에게 달려들었어요. 순식간에 하늘에서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지요. 어찌나 팽팽한지 마을 사람들은 애를 태우며 지켜봤어요. 마침내 혼쭐이 난 독수리가 마을 밖으로 달아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어요. “역시 우리 마을 매가 최고라니까!” “아무렴, 그렇고말고.” 하지만 매도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 나가고 상처투성이였지요. 지친 매는 가까운 소나무에 내려앉았어요.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불러 보았지만 매는 날개만 퍼덕일 뿐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어요. 아이고 저걸 어째. 우리 매가 심한 상처를 입은 게 아닐까요? “글쎄요, 기운이 떨어진 것 같으니 먹이를 갖다줍시다!” “그게 좋겠어요.” 사람들은 매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소나무 밑에 먹이를 갖다 놓았어요. 하지만 매는 날개만 몇 번 퍼덕일 뿐 나무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사람들이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었어요. 그날 밤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매가 걱정되어 횃불을 밝혀 들고 밖으로 나왔어요. 그사이 매가 먹이를 먹었는지 살펴보았지만 먹이는 그대로 있었지요. 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슬피 울었어요. “스스스스.” 사람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구렁이 한 마리가 소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매는 날갯짓 하나 없이 구렁이를 노려보기만 했지요.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사람들은 매가 궁금해서 소나무 아래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아니, 이럴 수가.” 소나무 밑에는 죽은 구렁이가 늘어져 있었어요. 그리고 매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죽어 있었지요. 간밤에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구렁이는 여기저기 찢겨 있었어요. 죽은 매를 거두려고 나무에 오른 청년들이 비명을 질렀어요. “앗! 우리가 매에게 매어 준 끈이.” “매는 우리 때문에 죽은 거예요.” 청년들은 소나무 가지에 뒤엉킨 붉은 끈을 풀며 울먹였어요. “그래서 매가 날지도 않고, 먹이를 먹으러 내려오지도 못했구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매에게 끈을 묶어 준 것을 후회했지요. 하지만 장산곶 매는 이제 장산곶 사람들에게 돌아올 수 없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해와 접해 있는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이 평안도예요. 서쪽으로는 서해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북쪽으로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지요. 산이 많은 평안도에는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도마봉이라는 산이 있어요. 압록강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 도마봉 꼭대기에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연못이 있어요. 바로 운림지랍니다. 운림지에는 우리 전통 악기인 퉁소와 관련된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퉁소는 피리처럼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으면서 입김을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예요. 그래서 옛사람들은 퉁소 소리를 들으며 슬픈 사랑의 시를 읊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노래했지요. 퉁소 소리만큼이나 애잔한 ‘운림지 이야기’는 지금도 뮤지컬, 오페라, 무용 공연 등으로 각색되어 사람들에게 수백 년 전의 감동을 전해 주고 있어요. 북녘땅에 있어 찾아가 볼 수는 없지만,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운림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압록강을 따라 육십 리쯤 내려오면 도마봉이라는 높은 산이 있어요. 그 꼭대기의 빽빽하고 울창한 숲 사이에 맑디맑은 연못이 있지요. 먼 옛날, 이 연못가에 운림이라는 선비가 홀로 살고 있었어요. 운림은 날마다 숲속을 거닐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어요. 해 질 무렵이면 연못가에 앉아 퉁소를 불었지요. 저녁마다 운림이 부는 퉁소 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어요. 산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깊은 산속에 사는 짐승들도 퉁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지요. 어느 날 밤, 유난히 크고 둥근달이 떠올라 온 산과 마을을 환히 비추었어요. 연못은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지요. “너무도 아름다운 밤이로다.” 운림은 퉁소를 꺼내 들고는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구슬프고 애달픈 연주를 시작했어요.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은 채 퉁소 연주에 취해 있던 운림은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바람에 퉁소를 내려놓았어요. 운림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연못 건너편에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지요. 선비님, 놀라셨다면 용서하세요.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연주를 청해도 될까요? 여인의 목소리는 유리알처럼 맑았어요. 운림은 달빛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퉁소를 집어 들었어요. 그러고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연주를 시작했지요. 연못가의 풀벌레도 울음을 멈추고 운림의 연주에 귀 기울였어요. 밝게 빛나던 달도 지고 붉은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운림의 연주는 계속되었답니다. 그날 이후 여인은 밤만 되면 어김없이 연못가에 나타나 운림의 퉁소 소리를 들었어요. 운림은 여인을 위해 늘 새로운 연주를 준비했지요. 그러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혼인을 약속했어요. 매일 퉁소 연주를 듣던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열어 두 사람의 혼인을 축하해 주었지요. 혼인을 한 두 사람은 꿈같은 나날을 보냈어요. 스산한 가을바람이 지나고 매서운 추위가 닥쳐와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근한 겨울을 보냈지요. 두 사람의 온기에 추위도 금세 물러가고, 어느새 향기로운 봄꽃이 활짝 피었어요. 운림과 그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 아랫마을 사람들에게까지도 행복이 밀려오는 듯했어요. 그렇게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지요. 어느덧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름 내내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어요. 도마봉의 숲은 바짝 말라 푸른빛을 잃고, 연못의 물도 점차 줄어들었지요. 산 아래로 흐르던 강물과 냇물까지 바닥을 드러내고, 들판의 곡식은 말라 죽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어요. 하지만 누구보다 불안해하는 것은 운림의 아내였어요. 가뭄이 계속될수록 운림의 아내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연못 주위를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지요. 운림은 그런 아내가 걱정되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하늘에 지성으로 빌고 있으니 곧 비가 올게요. 너무 걱정 말고 음식을 좀 들어요. 하지만 아내는 연못가를 떠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운림의 아내는 곱게 차려입고는 운림을 연못가로 데려갔어요. “서방님, 저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떠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저는 본래 연못 속 용왕님의 시녀랍니다. 서방님을 처음 뵙던 날 밤 퉁소 소리에 이끌려 연못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용왕님의 허락 없이 서방님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이에 용왕님이 노하시어 비를 내려 주지 않는 거랍니다. 제가 돌아가야 비가 올 테고, 그래야 서방님과 마을 사람들이 살 수 있어요. 연못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운림의 아내가 슬픈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어요. “서방님, 부탁이 있습니다. 달 밝은 밤이면 퉁소 소리를 들려주시고, 붉은 해가 솟아나는 아침이면 연못에 서방님의 얼굴을 비춰 주세요.” 말을 마친 아내는 치마를 뒤집어쓰고 연못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어요. 순간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장대비가 좍좍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는 몇 날 며칠 계속 내렸지요. 오랜만에 비를 본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와 춤을 추며 좋아했어요. 마을에는 다시 냇물과 강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우물에서는 차고 맑은 물이 솟아났지요. 아내를 잃은 운림은 연못가를 떠날 수 없었어요. 운림은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하염없이 아내를 불렀답니다. “부인, 돌아오시오! 어서 돌아오시오, 부인!”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밤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빛났어요. 운림은 아내의 부탁을 떠올리며 퉁소를 꺼내 들었지요. 그때 연못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어요. “서방님! 서방님!” 운림은 퉁소를 품에 안고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연못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답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운림이 뛰어든 연못을 ‘운림지’라 부르며 운림과 그의 아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지요. 함경도는 우리나라 지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이에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함경도에는 우리 민족의 근본이 되는 백두산이 우뚝 솟아 있지요. 백두산의 수많은 봉우리에는 저마다 우리 민족의 정기와 기상이 서려 있어요. 와호봉은 백두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개의 봉우리 가운데 하나랍니다. ‘누워 있는 호랑이’라는 뜻의 와호봉은 그 이름처럼 호랑이가 누워서 무엇인가 살피고 있는 듯 보이지요. 와호봉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호랑이가 처녀를 지켜 주고 있듯이 백두산이 우리 민족을 든든히 지켜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청룡과 백룡 이야기’를 비롯하여 ‘백두산’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하지만 ‘와호봉 이야기’는 자주 들어 보지 못했을 거예요. 이 이야기를 계기로, 우리 민족 최고의 명산인 만큼 많은 전설이 담겨 있는 백두산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백두산을 찾아갔을 때, 북한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지요. 옛날 백두산 기슭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어요. 어느 따스한 봄날, 처녀는 나물을 캐러 갔다가 예쁜 꽃들을 보게 되었어요. “어머나, 고와라. 어머니께 가져다드려야지.” 처녀는 꽃을 꺾어 꽃목걸이며 꽃반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꽃밭 한가운데서 노랗고 검은 것이 어른거렸어요. “저게 뭐지? 세상에 검은색 꽃도 있나?” 살금살금 다가가던 처녀는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어요. “어이쿠, 새끼 호랑이네.” 처녀는 얼른 일어나 도망을 쳤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새끼 호랑이는 처녀의 뒤를 졸졸 따라왔지요. 집까지 따라온 새끼 호랑이를 보고 어머니는 기겁을 했어요. 얘야, 호랑이를 데려다 기르면 큰일을 당한다더라. 어서 제자리에 데려다 놓아라. “어머니, 어미를 잃은 것 같아요. 불쌍하니 우리가 길러요.” 처녀가 어찌나 간곡히 부탁하는지, 어머니도 결국 승낙했지요. 그날부터 처녀는 새끼 호랑이를 가족처럼 돌보았어요. 고양이만 하던 호랑이는 금세 어미 호랑이만큼 자랐지요. 그러던 어느 날, 처녀의 집에 큰일이 생겼어요. 멀쩡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답니다. 처녀는 서럽게 울며 애먼 호랑이를 탓했어요. “어머니 말씀을 들을걸. 호랑이를 데려다 기르면 큰일을 당한다는 말씀이 맞았어. 너 이놈, 이 집에서 얼른 나가!” 어머니가 말씀하신 큰일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어요. 가족처럼 돌본 새끼 호랑이라도 장차 자라면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진 처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호랑이는 처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갔답니다. 세월이 흘러 처녀는 어머니를 잃은 아픔도, 정든 호랑이를 떠나보낸 슬픔도 조금씩 잊어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처녀 혼자 살고 있는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처녀는 간신히 집을 빠져나왔지요. 하지만 깜깜한 산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요. 처녀의 눈에서 절로 눈물이 흘렀어요. “어쩌지? 이제 어쩌지?” 그때였어요. 숲속에서 호랑이가 뛰어나와 등을 내밀며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어요. 처녀가 마지못해 올라타자, 호랑이는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 처녀를 동굴 안에 내려 주었지요. 그러고는 물도 떠다 주고, 나무 열매도 구해다 주며 돌봐 주었답니다. “고맙다. 너를 그렇게 보내고 내내 마음이 아팠는데, 너는 나를 잊지 않고 이렇게 도움을 주는구나.” 처녀는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지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호랑이가 밤이면 마을로 내려갔다 새벽녘이 되어야 돌아오곤 했어요. 처녀는 궁금했지만 호랑이가 말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뿐이었지요. 호랑이가 찾아간 곳은 산 아랫마을에 있는 부잣집이었어요. 그곳에는 인물 훤하고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지요. 총각은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좋은 배필을 만나지 못해 혼자 살고 있었어요. 호랑이가 찾아갔을 때, 총각은 뜰에 나와 달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오늘은 달빛이 유난히 밝구나. 저 아름다운 달빛을 같이 볼 아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방으로 들어가려던 총각은 담장 위에 떡하니 올라서 있는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짐짓 태연한 척하고 호랑이를 노려보았어요. “산속에 있어야 할 동물이 왜 사람 사는 곳에서 얼쩡거리느냐? 볼일이 없다면 선한 백성을 놀래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호랑이가 총각의 눈빛을 살펴보니 그 용기와 기개 또한 뛰어나 보였어요.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산으로 돌아갔지요. 다음 날 아침, 호랑이는 처녀에게 등에 타라는 시늉을 했어요. “싫어. 집으로 돌아가기 무섭단 말이야.” 호랑이가 막무가내로 등을 내밀자 처녀는 하는 수 없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어요. 호랑이는 산길을 달려 산 아랫마을 부잣집 앞에 처녀를 내려놓고는 집 안을 향해 소리쳤어요. “어흥, 어흥!” 대문을 열고 나온 총각은 처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요. “내가 오랫동안 배필을 만나지 못해 마음을 졸였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다니. 당신은 분명 하늘이 내려 준 인연이오.” 처녀가 총각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지켜보던 호랑이도 숲속으로 돌아갔답니다. 처녀는 친절하고 착한 총각이 싫지 않았어요. 게다가 총각의 부모님이며 가족들이 어찌나 잘해 주던지 금세 정이 들었어요. 둘은 가족과 이웃의 축하를 받으며 혼례를 올렸어요. 혼례식이 있는 날 아침, 처녀는 호랑이가 돌아간 산을 향해 소리쳤어요. “호랑이야, 네 덕분에 내가 다시 행복해졌구나. 정말 고마워!” 호랑이 덕분에 맺어진 처녀와 총각은 아들도 낳고 딸도 낳으며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우리 소설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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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 박씨전은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역사 소설로, 조선 시대 때 일어난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신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해서 일어난 전쟁이에요. 인조는 청나라를 피해 피란을 갔지만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하지요. 백성들은 이것을 큰 수치로 생각했어요. 소설 박씨전에서는 박씨 부인이 병자호란을 미리 예측하고 도술로 오랑캐를 크게 물리친답니다. 실제로 박씨 부인이 오랑캐를 물리친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은 박씨전을 읽으면서 가슴이 후련해지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답니다. 또한 박씨전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박씨 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으로, 소설을 통해서 여성도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어요. 조선 인조 임금 때였어요. 벼슬을 하지 않고 금강산 상상봉에 묻혀 사는 박현옥이라는 선비가 있었어요. 학식과 도술에 능해서 사람들 사이에 박 선비를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지요. 박 선비는 딸만 둘을 두었어요. 작은딸은 시집을 갔지만 큰딸은 못생겨서 열일곱이 되어도 시집을 못 갔어요. 하지만 큰딸은 성품이 착하고, 학문도 깊어서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박 선비가 살고 있는 강원도에 새 관찰사가 부임해 왔어요. 바로 이득춘이었지요. 하루는 박 선비를 만난 이득춘이 박 선비의 인품과 학식에 반해서 자신의 아들 이시백과 박 선비의 큰딸을 혼인시키기로 약속하였답니다. 드디어 혼례 날이 되었어요. 이득춘 판서는 박 선비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요. 그때 갑자기 신랑이 신방에서 뛰쳐나왔어요. 깜짝 놀란 이 판서가 아들을 꾸짖었어요. “아니,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 대체 무슨 이유로 신방에서 뛰쳐나왔느냐?” 아버님, 도저히 신방에 머물기가 어렵습니다. 신부의 얼굴이 너무나 끔찍하고, 더러운 냄새도 진동하여 이렇게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시백의 말을 들은 이 판서는 아들의 경솔하고 무례함을 더욱 꾸짖었어요. 쫓기듯 다시 신방으로 들어간 신랑은 날이 밝기만 기다렸지요. 이시백은 다음 날부터 온종일 사랑방에서 지내다, 밤에만 겨우 아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신부와 멀찍이 떨어져 잠을 잤답니다.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흘렀어요. 어느 날 박씨 부인이 시아버지에게 부탁했어요 “아버님, 내일 성문 밖으로 사람을 보내, 거기서 파는 말 중에서 제일 못나고 비루먹은 말을 삼백 냥에 사 오라고 하세요.” “아니, 왜 하필 비루먹은 말을 그렇게 큰돈을 주고 사 오라 하느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이유는 묻지 마시고 제 말대로 해 주세요.” 이미 며느리의 비범한 재주를 알고 있던 이 판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어요. 하인이 말을 사 오자 박씨 부인이 이 판서에게 당부했어요. 아버님, 이 말에게 하루에 깨 한 되와 흰쌀 다섯 홉씩을 죽으로 쑤어 삼 년 동안 먹여 주세요. 그리고 뜰에 풀어 놓고 밤에는 찬 이슬을 맞게 해 주세요. 그러면 삼 년 후에 긴히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삼 년이 흐르자 박씨 부인이 시아버지께 말했어요. “내일 명나라 사신이 성문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하인에게 말을 끌고 가서 기다렸다가 사신에게 삼만 팔천 냥에 팔라고 하십시오.” 정말 신기하게도 명나라 사신이 말을 삼만 팔천 냥에 사 갔어요. 삼 년 전에 사 온 비루먹은 말이 바로 천리마였기 때문이랍니다. 한편 이시백은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과거 보기 전날, 박씨 부인은 남편에게 작은 연적을 보냈어요. 하인에게서 연적을 받아 든 이시백은 연적이 보통 것이 아님을 눈치챘어요. 한눈에 보아도 백옥으로 된 귀한 연적이었거든요. 이시백은 문득 그동안 아내를 멀리했던 것이 미안해졌어요. “부인에게 고맙다고 전하여라.” 드디어 과거 보는 날, 이시백은 아내가 보내 준 연적을 사용하여 먹을 갈고 답을 적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어찌 된 일인지 글이 막힘없이 술술 쓰였지요. 하루는 박씨 부인이 시부모님께 말했어요. "오랫동안 친정 부모님을 뵙지 못해 안부가 매우 궁금합니다. 잠깐 친정에 다녀오려고 하오니 허락해 주세요." 이 판서는 며느리가 걱정되었어요. “아가야, 이곳에서 금강산은 수백 리나 떨어져 있고, 길 또한 험한데 힘들지 않겠느냐?” “저도 잘 아오나 크게 염려하지 마세요.” 이 판서는 며느리가 남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 이상 말리지 않았어요. 그날 저녁 박씨 부인은 하녀에게 조용히 말했어요. “내 잠시 친정에 다녀올 것이니, 내 행동이 이상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거라.” 박씨 부인은 두어 걸음 걷는 것 같더니 어느새 몸을 날려 구름 위에 풀쩍 올라탔어요. “에구머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하녀는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친정에 도착한 박씨 부인은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어요. 박 선비는 딸의 손을 반갑게 잡았어요. “그동안 잘 참고 견뎠다. 이제 곧 너의 나쁜 기운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내가 이달 십오 일에 네 시댁에 들를 것이다.” 친정에서 돌아온 박씨 부인은 시부모님께 아버지의 말을 전했어요. “저희 아버님께서 이달 십오 일에 오신답니다.” 십오 일이 되자 이 판서는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박 선비를 기다렸어요. 그때 하늘에서 홀연 학 울음소리가 나더니 박 선비가 학을 타고 내려왔어요. 이 판서는 황급히 뜰로 나가 박 선비를 맞았지요. “이제 제 딸이 흉한 용모와 누추한 자태를 벗을 때가 되었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이 판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박 선비가 딸의 방으로 왔어요. “이제 네 전생의 죄가 다 끝났구나.” 박 선비가 주문을 외우자, 박씨 부인의 얼굴에 있는 허물이 벗겨지더니 옥같이 고운 얼굴이 드러났어요. “얘야, 정말 고생 많았다.” 박씨 부인은 그동안의 맘고생이 생각나는지 말없이 눈물만 흘렸어요. 그날 저녁 이 판서가 아들에게 말했어요. “네 아내가 허물을 벗고 새사람이 되었다. 너도 네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박대했던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 빌어 벗도록 해라.” 이미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이시백은 박씨 부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어요. 그 뒤 박씨 부인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을 도와 위험에 처한 나라를 구해 냈어요. 이시백은 박씨 부인의 도움으로 나라의 훌륭한 관리가 되었답니다. 규중칠우쟁론기. 작가를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는 규중 부인들의 바느질에 필요한 일곱 가지 도구를 사람처럼 표현한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주 부인이 칠우(바늘, 실, 자, 가위, 인두, 다리미, 골무)를 사용하여 바느질을 하다가 잠깐 잠이 들면서 시작됩니다. 주 부인이 잠든 사이 칠우는 서로 자기가 최고라며 다투지요. 잠결에 다투는 소리를 들은 주 부인은 칠우를 꾸중합니다. 주 부인이 다시 잠들자 칠우는 자신들의 신세타령과 주 부인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지요. 잠에서 깬 주 부인이 또 칠우를 꾸중하려고 하자 골무인 감투 할미가 나서서 용서를 빌어요. 그래서 주 부인이 감투 할미를 가장 귀하게 여겼다는 이야기랍니다.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재미는 바느질 도구에 각시, 부인, 낭자, 할미 등의 이름을 붙여서 행동이나 대화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이에요. 바느질 도구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생각하면서 글을 읽다 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답니다. 이렇게 독특하고 재미있는 이 작품에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도 잘 표현되어 있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바느질을 잘하는 주 부인이 살고 있었어요. 주 부인은 바느질을 돕는 일곱 친구를, 선비들의 사랑방을 지키는 문방사우처럼 귀하게 여겼지요.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어 오늘도 바느질감이 많이 들어왔구나. 정말 고맙다.” 주 부인의 바느질 솜씨는 이웃 마을에도 전해져서 항상 일감이 많았어요. 바느질로 종종 밤을 새우기도 하지만, 주 부인은 규방의 일곱 친구들 덕분에 편하게 일할 수 있었지요. “오늘도 수고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까? 그래, 그럼 되겠구나. 너희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마.” 주 부인은 먼저 바늘을 집어 들었어요. “바늘아, 너는 새색시처럼 날씬하니 오늘부터 세요 각시라 하자.” 이번에는 바늘꽂이 옆에 있는 기다란 자를 집어 들었어요. “옳거니! 너는 한 척, 두 척 길이를 재니까 척 부인이 좋겠다.” 부인은 가위와 인두, 다리미, 실, 골무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가위는 서로 엇갈려 자르는 특징을 살려서 교두 각시라 하고, 불을 이용하는 인두는 인화 낭자, 다리미는 다리미 ‘울’ 자를 써서 울 낭자, 실은 청실, 홍실을 가리키는 청홍 각시라 이름 지어 주었지요. 마지막으로 감투 모양을 한 골무는 감투 할미라 이름 붙였답니다. “각시도 있고, 부인도 있고, 낭자도 있고, 할미도 있으니 좋구나. 앞으로 더욱 친하게 지내자꾸나.” 규방 친구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 부인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일곱 친구들 옆에서 곤히 잠들었습니다. “난 세요 각시라는 이름이 맘에 들어. 너희들은 어떠니?” 날씬한 허리를 하늘하늘 흔들면서 세요 각시가 말하자, 척 부인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어요. “내가 왜 부인이야? 하는 일로 따지면 내가 제일 많으니까, 각시나 낭자라는 젊은 이름을 지어 주면 얼마나 좋아?” 그러자 세요 각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어요. “아니, 네가 어째서 하는 일이 제일 많다는 거야?” “그럼 누가 일을 제일 많이 하는지 따져 볼까?” 긴 허리를 이리저리 자랑스럽게 뽐내며 척 부인이 말했어요. 잘 들어 봐. “잘 들어 봐. 나는 가는 명주, 굵은 명주, 고운 모시, 거친 삼베, 청홍 비단으로 옷을 만들 때 넓고 좁고 길고 짧음을 재잖아. 내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겠어? 그러니까 옷을 만드는 건 모두 내 덕이야.” 그때 교두 각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어요. “척 부인이 아무리 잘 재도 내가 자르지 않으면 옷 모양이 나오겠어? 그러니 옷이 만들어지는 것은 다 내 덕이야.” 척 부인과 교두 각시의 말을 듣던 세요 각시가 가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했어요. “두 친구는 모르는 것이 있어. 아무리 귀한 구슬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몰라? 척 부인이 크기에 맞게 재고, 교두 각시가 자른 옷감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없으면 어떻게 옷을 만들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세요 각시 끝에 달려 있던 청홍 각시가 끼어들었어요. “세요 각시, 네 공이 아무리 크다 해도 내가 없으면 어떻게 누벼지고, 박음질이 되어서 옷이 만들어지겠니?” 조용히 듣고 있던 감투 할미가 빙그레 웃으며 타일렀어요. 그만들 좀 하시게. 내가 부인들 손이 아프지 않게 바느질을 도와주는 것은 잊으셨소? 옛말에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꼬리는 되지 말라.’고 했소. 청홍 각시는 세요 각시 뒤만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하시오? 그 고운 얼굴이 정말 아깝소. 나는 매일 세요 각시에게 찔려도 참고 견디지 않소. 인화 낭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감투 할미는 손가락에 끼인 채 가만히 있기만 하면서 무슨 말이 그리 많아요? 따져 보면 할 말은 내가 제일 많아요. 고운 누비, 홈질한 옷의 솔기가 나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 고울 수 있겠어요? 가끔 세요 각시가 실수한 것도 내가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면 잘못한 흔적이 사라지고 반들반들해지잖아요. "허허허.” 울 낭자가 큰 입을 벌리고 남자처럼 웃었어요. “인화 낭자, 너랑 나는 같은 일을 하는데 왜 너만 그런 일을 하는 것처럼 말하느냐? 너는 작은 옷감이나 옷을 다듬을 때나 사용되지만, 나는 거의 모든 옷을 다루잖아. 나의 넓은 볼이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심하게 구겨진 옷이 광택이 날 정도로 미끈해지지. 그러니까 가장 큰 일을 하는 건 바로 나야, 하하하.” 울 낭자의 웃음소리에 주 부인이 잠에서 깼답니다. 규중 친구들이 서로 자기 공을 내세우는 것을 꿈결인 듯 생시인 듯 들은 것 같았어요. “규중 칠우의 공으로 옷을 만들기는 하지만, 칠우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러니 서로 잘났다 우기지 말고 조용히 잠이나 자거라.” 주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졌어요. 부인이 잠들자 척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어요. “매정하고 공을 모르는 것이 사람인가 봐. 허리가 부러지도록 열심히 길이를 쟀는데 정말 너무하는군.” 교두 각시가 맞장구쳤어요. “나도 옷감을 자를 때 잘 드니 안 드니 하면서 트집 잡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자를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말이야.” 세요 각시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나야말로 약한 허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바느질을 도왔는데, 어쩌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허리를 똑 부러뜨려 화로에 집어 던지기나 하고, 원통하다, 정말 원통해.” “좀 진정해.” 청홍 각시가 달랬지만, 세요 각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흑흑, 내가 너무 답답하고 원통해서 가끔 부인 손톱 밑이라도 찌르면 시원할까 하고 귀를 세우면 감투 할미는 내 답답한 심정도 모르고 매번 밀어내며 말리기나 하고.” 인화 낭자 역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어요. “나는 불에 달구어지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매번 꾹 참으면서 열심히 바느질을 도왔는데, 흑흑흑.” 울 낭자가 인화 낭자를 다독이며 말했어요. “나도 네 심정 알아. 하루에도 몇 번씩 시뻘건 숯으로 온몸이 달구어져도 나도 꾹 참고 일하잖아.” 잠을 자던 주 부인이 어느새 일어나 앉았어요. “내가 꿈을 꾸었나 했더니 꿈이 아니었구나. 내 잘못이 그렇게 많았더냐?” 주 부인의 호통에 감투 할미가 깜짝 놀라 말했어요. 친구들이 생각 없이 한 말이니 노여워 마세요. 저희가 서로 공이 많음을 자랑이나 하고, 원망만 늘어놓았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평소의 깊은 정과 저희의 조그만 공을 생각하여 부디 용서해 주세요. 듣고 보니 할미의 말도 옳소. 내 손으로 칠우를 부리긴 하지만 어찌 다 내 공으로 돌릴 수 있겠소? 그리고 칠우를 부리는 내 손이 이날 이때까지 상하지 않고 성한 것은 모두 할미의 공이오. 내 할미를 비단 주머니에 넣어 몸에 지니고 다니며 그 공을 잊지 않겠소. 주 부인과 감투 할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규방 친구들은 그동안 서로 다툰 것이 부끄러워 반짇고리 속으로 몸을 쏙 숨겼답니다. 춘향전.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춘향전은 우리 판소리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에요. 대부분의 판소리계 소설처럼, 이 작품도 전라도 남원에 전해지는 설화를 판소리로 만들고 또 소설로 쓴 것이지요. 그리하여 순수한 우리말과 의성어, 의태어가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랍니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인 춘향전은 남원 부사의 아들 몽룡이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몽룡의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지요. 새로 부임한 변 사또는 수청을 들지 않는 춘향을 옥에 가두어요. 이때 서울로 간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와 춘향을 구해 낸다는 줄거리랍니다. 춘향전은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를 살아가던 서민들의 삶과 생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에요. 성춘향과 이몽룡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변학도에 대항하여 절개를 지키는 춘향의 모습에서 당시 백성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요.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학도를 벌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백성들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요소 때문에 춘향전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대표적인 소설이 된 것이랍니다. 온갖 꽃들이 강산을 아름답게 물들인 어느 화창한 봄날이에요. 전라도 남원 골에 사는 이몽룡이라는 도령은 글을 읽다 말고 바깥을 내다보았어요. 봄기운을 한껏 머금은 꽃들이 제 모습을 뽐내고, 향긋한 꽃향내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요. 몽룡은 읽던 책을 덮고 방자를 불렀어요. “방자야, 봄도 되었으니 나들이나 가자. 이 고을에서 제일 경치 좋은 곳이 어디더냐?” “아니, 글 읽는 도령이 무슨 경치 타령이십니까? 딴생각 말고 어서 글이나 읽으세요.” 이몽룡은 방자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방을 나섰어요. “예로부터 빼어난 경치는 글을 짓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였느니, 어서 앞장서거라.” 방자는 경치 좋기로 소문난 광한루로 이몽룡을 안내했어요. 마침 오월 단옷날이라 광한루는 사람들로 북적였지요. 남원 기생 월매의 딸 춘향도 몸종 향단과 함께 광한루로 나들이를 나왔어요. 춘향은 고운 자태로 하늘을 가르며 그네를 타고 있었지요. “방자야, 저기 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처자가 누구더냐?” 넋을 잃고 춘향의 모습을 쳐다보던 이몽룡이 물었어요. “남원의 소문난 기생 월매의 딸 춘향이 같사옵니다.” “춘향이라고? 어찌 저리 고울 수 있단 말이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구나. 내 저 처자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구나. 어서 가서 춘향이를 불러오너라.” 이몽룡의 재촉에 방자가 쪼르르 춘향에게 달려갔어요. “어느 집 도련님인지 몰라도 관심 없다 전하거라.” 방자가 터덜터덜 혼자서 오자, 이몽룡이 버럭 화를 냈어요. “아니, 이놈! 뭐라고 전했기에 혼자서 오느냐? 당장 가서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아가씨를 뵙자 한다고 제대로 전하거라.” 방자는 투덜거리며 다시 춘향에게 갔지만 춘향은, “남원 부사의 자제분과 내가 만날 일이 무에 있겠느냐? 가서 만날 일이 전혀 없다고 전하거라. 가자, 향단아.” 하며 집으로 돌아갔어요. “안 되겠다. 당장 춘향이 집으로 가서 춘향이를 데려오거라.” “네? 춘향이 집에까지 가서 데려오라고요?” 방자가 깜짝 놀라 이몽룡을 말렸지만 소용없었어요. 방자는 씩씩거리며 춘향의 집으로 갔어요.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방자가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가 놀라서 뛰어나왔어요. “누구시오?” “남원 부사의 아드님이 춘향이를 보자 하신다.” 방자는 춘향의 집까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월매에게 소상히 설명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난 월매는 싱글벙글해서 춘향의 방으로 뛰어갔어요. “춘향아, 남원 부사의 아드님이 널 보고 싶다는구나. 어서 다녀오거라.” 월매는 춘향을 억지로 떠밀었어요. 춘향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방자를 따라 다시 광한루로 갔지요. 멀리서 걸어오는 춘향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하늘나라의 선녀가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겠구나!’ 그때 춘향의 눈에도 이몽룡의 모습이 들어왔어요. ‘어쩜 저리 늠름하고 당당할까. 저런 분이 남원 고을에 있었다니.’ 춘향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어요. 이몽룡이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요. “춘향아, 이제야 내 사람을 만난 듯하다. 내 평생 너를 가까이 두고 싶구나.” 이몽룡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춘향은 흠칫 놀랐어요. “도련님은 귀한 집 아드님이시고, 소녀는 천한 기생의 딸이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옵소서.” “대장부가 아녀자 하나 거두지 못하면 어디다 쓰겠느냐? 앞으로의 일은 걱정 말거라.” 이몽룡은 춘향을 안심시켰어요. “내 오늘 밤 네 어미를 만나 허락을 받을 것이다.” 밤이 되자 이몽룡은 방자를 앞세우고 춘향의 집으로 갔어요. 월매는 문밖까지 나와 이몽룡을 반갑게 맞았지요. “귀하신 도련님이 비천한 저희 집을 찾아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허허, 그런 말 마오. 내 우연히 광한루에서 춘향이를 보고 그만 마음을 빼앗겼소. 그래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소.” 이몽룡은 대뜸 춘향과의 백년가약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어요. 월매는 사또의 아들이 사위가 된다는데 반대할 까닭이 없었지요. 두 사람은 그날로 부부의 인연을 맺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몽룡의 아버지가 동승부지가 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었어요. 이몽룡은 춘향이 걱정되어 어머니께 말했지요. “어머니, 춘향이도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어머니는 펄쩍 뛰며 아들을 꾸짖었어요.“네가 제정신이더냐? 과거가 코앞인데 한갓 여자 생각을 하다니. 다시는 그런 말 말거라.” 이 소식을 들은 춘향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어요. 이몽룡도 어찌할 수 없는 처지라 안타깝기만 했지요. “서방님, 이제 우리가 영영 헤어지는 건가요?”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내가 꼭 장원 급제하여 올 것이니 나를 믿고 기다려 다오.” 이몽룡은 그길로 한양으로 갔어요. 춘향은 날마다 이몽룡을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지요. 이몽룡이 다시 찾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그러는 사이 남원 고을에 변학도라는 사또가 부임해 왔어요. 변 사또는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매일 술타령에 날이 새는 줄 몰랐답니다. “여봐라, 이방. 남원 고을에 춘향이란 기생이 있다던데, 당장 불러들여라.” “하지만 사또, 춘향이는 기생도 아니고, 또 이미 백년가약을 맺은 사람이 있다 하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당장 불러오거라.” 이방이 춘향을 데리러 오자, 월매와 향단은 울며불며 이방을 말렸어요. “죽으면 죽었지 못 데려갑니다.” 하지만 사또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이방은 억지로 춘향을 끌어냈어요. “춘향아, 미안하다. 내 오죽하면 이러겠느냐.” 변 사또 성질에 춘향을 안 데려가면 이방의 목이 달아날 판이었지요. 결국 춘향은 변 사또 앞에 끌려갔답니다. “과연 소문대로 곱기가 이를 데 없구나.” “사또, 저는 지아비를 섬기고 있는 몸이옵니다.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춘향은 사또에게 간절히 애원했어요. 하지만 사또는 춘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지요. 춘향이 또한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 변 사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어요. “이런 고얀. 춘향이를 당장 옥에 가둬라!” 한편 이몽룡은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했어요. 과거에 합격하여 하루빨리 춘향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이몽룡은 과거에서 당당히 장원 급제하였답니다.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춘향을 만날 생각에 서둘러 남원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춘향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고을 사또의 횡포가 심해서 백성들의 원한 또한 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답니다. 그날 밤, 이몽룡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거지 차림으로 월매를 찾아갔어요. 거지가 되어 찾아온 사위를 보고 월매는 땅을 치며 통곡했어요. “아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서방이 거지가 되어 왔으니 불쌍한 우리 딸은 이제 어찌할꼬. 아이고, 춘향아!” 이몽룡은 월매를 앞세워 춘향이 갇힌 감옥을 찾아갔어요. 감옥에 있는 춘향을 보자 이몽룡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팠어요. 춘향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지요. “서방님, 이제 저는 죽을 목숨입니다. 제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세요.” “춘향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지 않더냐.” 다음 날 관아는 변 사또의 생일 잔치로 분주했어요. 흥겨운 춤과 노래가 잔치의 흥을 돋우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이 넘쳐났지요. 거지 차림의 이몽룡도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답니다.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이몽룡이 변 사또에게 다가갔어요. “잘 먹었소, 사또. 태어나서 이렇게 흥겨운 생일 잔치는 처음이오. 사또의 생일을 축하하며 시 한 수 지었으니 읽어 보시오.” 이몽룡은 종이를 건네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이방, 어떤 시인지 궁금하구나. 어디 읽어 보아라.” 이방이 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금주전자에 담긴 맛있는 술은 많은 백성의 피요, 옥 접시에 담긴 좋은 안주는 많은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에서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또한 높았더라.” 순간, 잔칫집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어요. “큼큼큼. 아니, 왜들 이러시오? 비렁뱅이가 쓴 시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준비한 구경거리나 즐기시오.” 변 사또가 준비한 구경거리는 바로 춘향이였어요. 감옥에서 끌려 나온 춘향이 지친 모습으로 사또 앞에 앉았어요. “내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래도 내 수청을 들지 않겠느냐?” “절대 그리는 못합니다! 차라리 날 죽이시지요.” “아, 아니 저것이. 여봐라, 당장 춘향이의 목을 쳐라!” 그때였어요. “암행어사 출두요!” 라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포졸들이 우르르 몰려왔어요. 그러고는 사또와 잔치에 참석한 양반들을 마당에 꿇어앉혔지요. 늠름한 모습의 암행어사가 말했어요. “사또는 들으라. 너는 어찌 백성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살과 피로 이 같은 잔치를 즐긴단 말이냐! 여봐라, 사또를 당장 옥에 가두어라!” 암행어사는 춘향에게 다가갔지요. “너는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이런 고초를 당하느냐?” “저는 사또의 청을 거절하여 이렇게 잡혀 와 있사옵니다.” “춘향아, 고개를 들어 보아라.” 춘향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바로 앞에 있었어요. “춘향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몽룡은 춘향을 품에 꼭 안았어요. 춘향은 아무 말 없이 기쁨의 눈물만 흘렸지요. 그 뒤 춘향은 이몽룡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안데르센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절망하지 않는 소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한 저택 앞에서 초조한 얼굴로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홀쭉하게 큰 키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소년은 화려한 그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초인종을 누른 지 한참 후 하녀인 듯한 여자아이가 빠끔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저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고 합니다. 샤르 부인을 뵙고 싶어서 오덴세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여기 소개장도 가지고 왔습니다.” 하녀는 소개장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스를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한스의 눈은 금세 휘둥그레졌습니다. 유명한 무용가의 저택답게 샤르 부인의 집은 매우 호화로웠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우아하게 차려입은 샤르 부인이 응접실로 나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스가 말을 꺼내자 샤르 부인이 가로채어 말했습니다. “방금 전에 소개장을 읽었어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고요?” “네.” “배우가 되고 싶은가요?” “네.” 샤르 부인은 야릇한 미소를 띠며 한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군요. 그런데 당신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나요?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보여 줄 수 있나요?” “네,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스는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노래에 맞춰 춤도 추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스를 지켜보던 샤르 부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호호호. 그만, 그만 해 둬요. 이젠 됐어요, 한스 군.” “...”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한스를 바라보며 샤르 부인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허황된 꿈 때문에 머리가 돌아 버린 게 틀림없어. 가엾게도...’ 1819년 9월의 어느 날, 배우가 되려는 꿈을 간직하고 코펜하겐으로 온 한스는 이렇게 샤르 부인의 집에서 쫓겨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이 없는 한스는 무작정 거리를 헤맸습니다. 절망감이 그의 몸과 마음을 휘청거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배우가 되려는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스는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래,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 게 아니라 직접 극장 지배인을 찾아가 보는 거야.’ 한스는 그 길로 왕립 극장의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지배인은 한스를 보자마자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자넨 키가 너무 큰 데다가 지나치게 말랐어. 배우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한스는 지배인에게 매달려 애원했습니다. “제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지금부터 살이 찌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냐, 그래도 소용없어. 배우는 자네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게 아냐. 더구나 배움이 없이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없다네.” 다시 한번 거절을 당하게 되자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파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스의 두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지만 한스는 고향에 계신 할머니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이 정도의 일로 쓰러져서는 안 돼. 힘을 내자, 한스! 하느님,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이 시골뜨기 소년이 바로 훗날 동화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입니다. 구둣방 집 아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의 오덴세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구둣방 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스는 태어날 때부터 소문난 울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울음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리기만 하면 이웃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구둣방 집 아이가 울기 시작했군.” “저 녀석은 왜 밤낮 질질 짜는 거야?” 이렇게 울보로 소문난 한스였지만, 몸은 건강하여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났습니다. 한스네 집에는 구두를 고치는 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한스는 그것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마당 한쪽에 조그마한 밭을 만들어 그곳에 양파도 심고 파슬리도 심어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한스는 어머니가 가꾸는 그 작은 밭을 보며 꿈을 키워 갔습니다. 그리고 그 밭 옆에서 책을 읽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러 종류의 새들을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이 조그만 밭은 훗날 그가 쓴 눈의 여왕이라는 동화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릴 때의 추억은 한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보다 두 살 위인 어머니는 무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종종 들려주시는 어머니의 어렸을 적 이야기들은 한스의 마음을 무척 슬프게 했습니다. “엄마가 어렸을 때 너희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얻어 오라고 하셨단다. 이 엄마가 마을에서 얻어 온 음식으로 그날그날의 끼니를 이어 갔지.”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한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내가 꼭 행복하게 해 드릴 거야.’ 한스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상급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처럼 구걸을 하러 다녀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집 역시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어릴 때부터 구둣방에 들어가 구두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은 꿈이 꺾여 버린 아버지는 늘 우울했습니다. 하지만 한스에게만은 항상 다정하고 자상했습니다. 구둣방이 쉬는 날이면 아버지는 한스의 친구가 되어 장난감을 만들어 주거나 그림을 그려 주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시와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습니다. 한스는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님뿐만 아니라 온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자선 병원에서 일하는 할머니는 일요일마다 귀여운 손자 한스를 보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할머니의 손에는 언제나 병원 뜰에서 꺾은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한 아름 안겨 있었습니다.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선물은 이 꽃밖에 없구나.” 할머니는 매번 똑같은 선물을 가지고 오셨지만, 꽃을 좋아했던 한스는 할머니의 선물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한스는 이따금 할머니와 함께 자선 병원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큰 방은 한스에게 멋진 무대가 되었습니다. 한스는 뜨개질하는 할머니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 드렸습니다. 한스에게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들은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한스는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학자가 될 거야. 저렇게 똑똑하니 말이야.” 그곳의 할머니들은 한스에게 ‘귀여운 학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5살이 되면서부터 한스는 조용한 아이로 변해 갔습니다.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여자아이처럼 아버지가 만들어 준 인형에 옷을 입히거나 색종이로 장난감을 만들며 혼자서 노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한스는 손재주가 무척 뛰어나서, 그가 만들어 놓은 장난감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습니다. “이 아이는 커서 훌륭한 재단사가 되려나 봐요.” 한스를 보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척 대견해했습니다. 그늘진 어린 시절. 이삭줍기란 추수 후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는 일로,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매년 추수가 끝나면 가난한 한스네도 이삭줍기를 하러 나갔습니다. “우리 한스에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어요. 아무리 화가 난 사람이라도 한스를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니까요.” 어머니는 부지런히 이삭을 주우면서 이웃 아주머니에게 아들 한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어머니와 한스가 한창 이삭을 주워 자루에 담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멀리서 밭 주인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습니다. “큰일 났네, 어서 달아나요.” 이삭을 줍던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자루도 내팽개치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밭 주인은 이웃 마을에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스도 맨 뒤에서 어른들을 뒤쫓아갔습니다. 하지만 한스는 빨리 뛰지 못해서 결국 밭 주인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런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누가 우리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했지?” 밭 주인은 손을 높이 치켜올려 한스를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밭 주인의 호통에도 기죽지 않고 똑바로 주인을 올려다보며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내버려져 있는 이삭을 줍는 것이 뭐가 나쁘죠? 때릴 테면 때려 보세요.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계신다고요.” 너무도 당돌한 한스의 태도에 밭 주인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한스예요.” “한스? 너 참 똑똑한 아이로구나. 그래, 이 아저씨가 잘못했다.” 화를 내던 밭 주인은 도리어 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멀리서 걱정스럽게 아들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처럼 한스는 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늘 밝고 정직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6~7살이 된 한스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신입생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던 한스는 칼스텐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한스의 아버지는 부쩍 말이 없고 우울해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중단하고 구두장이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점점 더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릎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한스의 마음은 몹시 슬펐습니다. 이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꿈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어느 백작 부인이 아버지를 전속 양화공으로 추천한 것이었습니다. 전속 양화공이란 어느 한 사람만의 구두를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만약 채용이 결정되면 아버지는 백작 부인의 구두만을 만들어 주고 얼마간의 월급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분위기는 갑자기 밝게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에 없이 기분이 들떠 있는 듯했고, 어머니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속 양화공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습니다. 백작 부인은, 먼저 무용할 때 신는 구두를 한 켤레 만들어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 아버지를 채용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오로지 구두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아버지가 손수 가죽을 사다가 만든 무용 구두는 마침내 훌륭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한스는 감격하여 소리쳤습니다. “아빠, 정말 멋져요!” “어쩜, 정말 훌륭한 구두로군요!” 아버지는 완성된 구두를 정성껏 수건에 싸 들고 백작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은 구두를 들고 서 있는 초라한 모습의 아버지를 보자마자 안색이 확 변했습니다. “아니, 이 구두를 나보고 신으라는 건가요? 이렇게 초라한 구두는 하녀들에게나 어울리겠군요. 당신의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백작 부인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보자 백작 부인의 마음이 변한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아버지는 주머니 속에 있던 칼을 꺼내 그 자리에서 구두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의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한스와 어머니도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이로군요.”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문득 일을 하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힘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느닷없는 말을 꺼냈습니다. “난 이제 군인이 되겠소. 구둣방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하오.” “군인이라고요?” 아버지의 갑작스런 선언에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무렵 덴마크는 프랑스와 연합하여 독일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인들을 뽑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 군인이에요?”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미안하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난 영웅이 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가 있소.” “부자가 되지 않아도 좋아요. 아버지, 떠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살아요.” 한스는 울먹이면서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습니다. “아버진 곧 돌아올 거야. 한스, 조금만 참으렴.” 아버지는 가족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훈련을 받은 후 마침내 전쟁터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갈 곳은 독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독일로 떠나는 날, 한스는 홍역을 앓아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조용히 침대로 다가온 아버지는 열이 나는 한스의 손을 끌어다가 볼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한스, 어서 나아서 건강하게 뛰어 놀거라. 아버진 반드시 영웅이 되어 돌아올 테다.” 아버지가 문을 나서자 어머니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떠뜨렸습니다. “가엾은 우리 한스, 너에게는 이대로 죽는 편이 오히려 행복일 것 같구나. 흑흑...”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집을 떠나는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훗날 안데르센은 이날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이날은 태어나서 처음 맞은 가장 슬픈 날이었습니다.’ 1813년, 한스가 8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한스네 집은 마치 텅 빈 것처럼 쓸쓸해졌습니다. 살림은 더욱 어려워져서 한스와 어머니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버지는 전쟁터로 나가던 때와 똑같이 힘없는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속한 부대가 독일의 홀슈타인 지방에 이르렀을 때 어이없게도 전쟁은 이미 끝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대로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영웅이 되겠다던 아버지의 꿈은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더욱 말이 없어진 데다가 몸도 쇠약해져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는 헛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모두 전진, 앞으로 가! 프랑스 만세!” 아버지는 모두 잠들어 있는 깊은 밤에도 이렇게 헛소리를 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구둣방 일을 전혀 하지 못할 만큼 몸이 쇠약해지더니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11살의 한스에게 너무나 큰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배우의 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꾸려 가기 위해 이웃집의 세탁물을 얻어다가 빨래를 해 주거나 다른 집의 일을 거들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면 한스는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연극 대사를 읽는 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자주 갔었던 극장에서 알게 된 연극 공연 담당자로부터 연극의 대본을 얻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에게 있어서 연극 대본을 읽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한스에게 말했습니다. “한스, 분케프로드 부인이 한번 놀러 오라고 너를 초대하시더구나.” “정말이에요?” 항상 집에만 틀어박혀 외롭게 지내던 한스는 마음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웃에 사는 분케프로드 부인은 목사인 남편이 죽은 뒤로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두 자매 모두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스는 자신의 옷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옷을 골라 말끔하게 차려입고 분케프로드 부인을 방문했습니다. “저, 안, 안녕하세요?” 한스는 이런 교양 있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몹시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분케프로드 부인이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한스의 긴장감은 단숨에 풀어졌습니다. “어서 오너라, 한스. 네가 늘 혼자 지내는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단다.” “감사합니다.” “자, 우선 서재부터 구경해 보지 않을래?” 분케프로드 부인을 따라 서재에 들어선 한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와, 굉장하군요!” 서재에는 책꽂이가 모자라 천장에까지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책이 꽂혀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한스를 바라보던 분케프로드 부인이 따뜻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한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가져다 읽도록 해라. 책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 “정말 고맙습니다.” 한스는 아버지를 닮아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부인의 여동생은 그런 한스에게 햄릿과 리어왕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희곡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한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빌려 와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한스는 마치 배우가 된 듯 대사를 외웠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모아 놓고 혼자서 연극을 해 보였습니다. 한스가 배우의 목소리를 능숙하게 흉내 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주 훌륭하다, 한스. 너의 목소리는 꼭 하늘의 천사가 속삭이는 것처럼 듣기 좋구나.”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도 훌륭했지. 아무튼 한스 녀석은 재주꾼이야.” 이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한스는 훌륭한 배우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의젓해지는 한스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저 아이의 장래도 생각해야 될 텐데...’ 어머니는 한스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한스, 넌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 “배우가 되고 싶어요.” “뭐라고? 한스, 그건 허황된 생각이란다. 재단사가 되면 어떻겠니? 엄마의 생각으로는 그 일이 너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구나. 넌 인형 옷도 잘 만들잖니?” “전 어떻게 해서든 배우가 될 거예요.” 이제까지 어머니의 말을 어겨 본 일이 없는 한스였지만 이번에는 무척 완강했습니다. “한스, 잘 생각해 보거라. 배우의 길은 무척 험난하단다. 애써 노력을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더구나.” 결심을 꺾으려는 어머니의 앞에서 한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한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갔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가 재혼을 했습니다. 새아버지는 한스의 친아버지처럼 구둣방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새아버지는 친아버지와 달리, 마음씨가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게으르고 술주정뱅이인 데다 성격도 괴팍했습니다. 새아버지는 한스를 미워했으며, 한스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한스는 늘 새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한스는 새아버지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스가 견진 성사를 받아야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견진 성사란 크리스트교에서 행하는 의식으로, 이 의식을 치러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견진 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크리스트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는데, 이 때문에 한스는 잠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도 견진 성사를 받기 위해 같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애들은 모두 한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훌륭한 집안의 아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한스는 그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교리 공부가 끝난 후, 한스는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지지 않으려는 듯 짙은 꽃향기가 풍겨 와 한스를 더욱 서글프게 했습니다. 한스가 그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걷고 있을 때, 예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기, 한스...” 한스는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테네르였습니다. “자, 이거 받아.” 테네르는 예쁜 꽃다발을 내밀며 수줍게 속삭였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은 가난한 한스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테네르만은 달랐습니다. 테네르는 부잣집 아이이면서도 한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응? 정말 나에게 주는 거니?” “그래. 어서 받아.” 테네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한스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게서 한 번도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한스는, 테네르가 내미는 한 다발의 꽃을 받고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테네르와 헤어진 뒤 어떻게 집에 왔는지조차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교회에 같이 다니는 친구가 준 거예요.” 어머니는 한스가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즐거웠습니다. “그래? 한스, 넌 정말 좋겠구나. 좋은 친구도 생기고 이렇게 예쁜 꽃 선물도 받았으니.” 학교나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만 받아 오던 한스는 친절한 친구가 생기자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엄마, 테네르가 저에게 꽃만 준 줄 아세요?” “그럼 또 무엇을 주었는데?” “제 목소리가 곱다고 배우가 되면 성공할 거라는 말도 해 주었어요.” “그랬니..” 어머니는 그 말에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한스가 배우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한스도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재단사가 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전 코펜하겐으로 가겠어요. 도저히 재단사는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머닌 절 사랑하시죠? 그렇다면 제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성공할 수 있는 곳은 무대밖에 없어요.” 한스가 단호하게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머니는 한스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새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관계도 한몫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한스, 네 생각은 잘 알겠다만 넌 아직 너무 어려서 걱정이 되는구나.” “아니에요, 전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어리지 않아요. 코펜하겐에 가서 열심히 살아갈 자신이 있어요.”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하지만 한스, 힘들고 견디기 어려우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네, 어머니.” 한스가 코펜하겐으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한스네를 비웃었습니다. “저런 꼬마가 혼자 코펜하겐으로 가서 산다고? 어림없는 일이지.” “그 큰 도시에 아는 사람도 없으면서 말이야. 괜히 착한 아이를 망치게 하지는 않을까?” “맞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한스 어머니가 무조건 잘못 생각한 거라고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한스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 잘됐군요. 저렇게 재능 있는 아이는 큰 도시로 가서 커야 하는 거예요.” “맞아요. 한스는 꼭 오덴세를 빛낼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이들 중에는 유명한 무용가인 샤르 부인을 잘 안다며 소개장을 써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819년 초가을의 어느 날 드디어 한스는 오덴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스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한스를 배웅하기 위해 마을 밖까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한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습니다. “한스, 힘내거라.” 옆에 있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편지해야 한다.” 마부가 출발을 알리는 나팔을 불자 마차는 흔들거리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뜻밖의 행운. 꿈을 안고 찾아온 한스에게 코펜하겐은 절망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샤르 부인도 왕립 극장 지배인도 너무나 매몰차게 한스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한스는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니야. 내가 정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실 거야.’ 이렇게 생각한 한스는 발에 힘을 주어 번화한 거리를 힘차게 걸어갔습니다. ‘그래, 시보니 선생님을 찾아가 보자. 배우는 아니라도 혹시 음악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한스가 오덴세에 있을 때 이탈리아 사람인 시보니 선생이 음악 학교 교장이 되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곱다고 하던 마을 사람들의 칭찬에 힘입어 한스는 시보니 선생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한스가 시보니 선생을 찾아간 날 마침 그 집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씨 착한 시보니 선생은 오덴세에서 온 한스를 차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시보니 선생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한스를 손님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이 소년은 가수가 되기 위해 오덴세에서 온 한스라고 합니다.” “그래요? 한스, 그럼 여기서 한 곡 불러 보겠나?” 손님들 중에 한 사람이 관심을 보이며 말하자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잔뜩 긴장해 있던 한스는 시보니 선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잘하는데?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겠어.” 한스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시보니 선생도 한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나의 지도를 받도록 하게.” 한스는 뜻밖의 행운을 만나자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한스는 이제 더 이상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보니 선생과 작곡가인 바이제 씨가 뒷바라지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부터 한스는 꽉 짜여진 일과에 맞추어 생활했습니다. 시보니 선생은 한스에게 성악을 가르쳤고, 바이제 씨는 음악의 기초적 이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한스는 훌륭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독일어를 공부했습니다. 한스는 자기의 소망이 하나하나 이루어지자 쉬지 않고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그에 따라 실력은 날이 갈수록 향상되었습니다. “한 번 가르친 것은 절대 잊지 않고 금세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니, 정말 뛰어난 재주를 지녔군.” “게다가 가장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공부하는 태도라네.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 수밖에 없지.” 시보니 선생과 바이제 씨는 한스의 노력하는 태도에 감탄하며 더욱 기대를 걸었습니다. 두 사람의 칭찬을 들은 한스는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한스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몇 달 후에 한스는 시보니 선생과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독일어 실력이 부쩍 좋아졌습니다. 계속해서 한스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슴속에 희망을 품은 한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한스가 시보니 선생 밑에서 공부한 지도 어느덧 9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한스에게 갑작스런 불행이 닥쳤습니다. 한스의 고운 목소리가 쉰 소리로 변한 것입니다. 변성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겨울 내내 허름한 신발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동상에 걸려, 그로 인해 목소리까지 해치게 된 것입니다. 시보니 선생이 한스를 불러 말했습니다. “한스 군, 훌륭한 가수가 되겠다는 자네의 꿈은 그만 접는 게 좋겠네.” 한스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건가? 이대로 내 꿈을 포기해 버려야만 하는 걸까?’ 한스의 머릿속에는 이대로 오덴세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절망적인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스는 문득 한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오덴세에 있을 때 한스는 구르벨이라는 군인으로부터 많은 귀여움을 받았는데, 그 군인의 동생이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한스는 언젠가 구르벨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습니다. “한스, 내 동생은 코펜하겐에서 꽤 호평을 받고 있는 유명한 시인이란다.” “정말 좋으시겠어요.” “암, 난 내 동생이 무척 자랑스러워.” 한스는 코펜하겐으로 떠나올 때 시인 구르벨의 주소를 적어 두었습니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그분께 편지를 보내 봐야겠다. 꼭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걸.’ 한스는 구르벨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시인 구르벨은 한스의 편지를 받자마자 곧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형에게서 얘기는 많이 들었네. 참 반갑군. 난 언제든 괜찮으니 조만간 한번 찾아오게.’ 한스는 생각지도 못한 구르벨의 편지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래, 이분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자. 그럼 다시 내 꿈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몰라.’ 며칠 후, 한스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인 구르벨을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게, 한스 군.” 구르벨은 무척 친절하게 한스를 맞아 주었습니다. 한스의 초라한 모습을 본 구르벨은 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그러나 이젠 안심하게. 내가 힘닿는 데까지 자네를 도와줄 테니까. 그런데 한스 군, 자네가 보낸 편지는 맞춤법이 엉망이더군. 덴마크어를 가르쳐 줄 테니 우선 올바른 철자법부터 차근차근 익히도록 하게.” 그날부터 한스는 매일같이 구르벨의 집으로 가서 덴마크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음씨 착한 구르벨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면서도 한스를 위해서 돈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자, 이것으로 새 숙소를 마련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게.” “정말 고맙습니다, 구르벨 씨.” 구르벨의 도움으로 한스의 코펜하겐 생활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스는 아직도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활이 안정되자 한스는 공부를 게을리하고 무용 학원과 음악 학원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음악 학원과 무용 학원에 열심히 다니며 배워야겠어. 이대로 있다간 영영 무대에 서지 못할지도 몰라.’ 이러한 조바심이 한스의 마음에 조그만 틈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르벨은 더 이상 참다못해 한스를 불렀습니다. 구르벨은 몹시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한스 군, 난 더 이상 자네를 도와줄 생각이 없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의 게으른 태도에 실망하고 말았어. 이제부터는 자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게.” 구르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스는 전에 위센베르의 도둑이라는 희곡을 써서 왕립 극장에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퇴짜를 맞은 것입니다. ‘아, 이제 모든 것이 끝인가?’ 모든 희망이 그에게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니야,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기운을 내서 다시 한번 시도해 보자.” 한스는 무대에 서고 싶다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또 한 편의 희곡을 들고 왕립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퇴짜였습니다. 맥이 빠져 쓰러질 듯 서 있는 한스에게 왕립 극장의 한 담당자가 위로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봐요, 한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쓴 희곡엔 재미있는 부분도 있더군요. 공부를 계속하기만 한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지배인이 말했어요.” 담당자의 말에 희미한 웃음을 보인 채 한스는 힘없이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언젠가는 하느님이 나를 무대에 서게 해 주실 거야.’ 신앙심이 깊었던 한스는 이렇게 기도하며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허름한 차림으로 코펜하겐의 거리를 걷고 있던 한스는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테네르?” “어머, 한스?” “테네르, 어떻게 여기에 왔지?” “나는 이곳의 친척 집에 와 있어.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전부터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는걸. 무척 반갑구나, 한스.” 테네르는 어느새 예쁜 숙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잣집 딸인 테네르는 결혼하기 전에 여자가 갖추어야 할 교양을 쌓기 위해 코펜하겐의 친척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로부터 그동안 고생해 온 이야기를 죽 들은 테네르는 한스를 위해 무슨 일을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내가 살롱에 갈 때 너도 함께 가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도록 하자. 그러면 네가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테네르는 코펜하겐의 상류 사회에 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곧 한스를 데리고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여 문학이나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곳인 살롱으로 갔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분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고 해요.” 테네르는 익숙한 모습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한스를 소개했습니다. ‘어머머, 저 옷 입은 꼴 좀 봐.’ ‘쳇, 저 모습을 해 가지고, 어디 글이나 제대로 읽을 수 있겠어?’ 살롱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유명한 학자와 시인을 비롯해서 군인, 배우 등 대부분이 상류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초라한 모습의 한스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한스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다. 외모가 초라한 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런 것들은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스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이 쓴 시를 낭송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한스에게 시 낭송을 부탁한 것은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한 모습으로 시를 낭송하는 한스를 보면서 사람들은 결코 웃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한스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확 달라졌습니다. “한스 군, 자네의 시는 정말 열정적이야.” “맞아요. 저는 그 시를 듣고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니까요.” 그의 외모만 보고 경멸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무대에 서고 싶다는 한스의 꿈은 살롱에 드나들면서 더욱 커져 갔습니다. 당시 덴마크에서는, 새해 첫날에 가장 먼저 한 일을 일 년 내내 하게 된다는 풍습이 전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월 1일이 되면 장사꾼은 제일 먼저 돈을 세고, 가수는 노래를 불렀으며, 총각은 처녀에게 말을 붙이곤 했습니다. ‘금년에는 나도 반드시 무대에 서고 말겠어.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한 한스는 새해 아침에 잠이 깨자마자 왕립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른 아침이라서 아직 문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틀렸구나, 방법이 없어.’ 낙심하고 돌아서려는데 뒷문이 빠끔히 열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 역시 하느님은 나를 보살펴 주고 계시는구나.’ 한스는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도를 지나 캄캄한 무대에 오른 한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막을 올린 뒤 무대 위에 섰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런 대사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스는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하느님, 제가 꼭 배우가 되어 무대에 설 수 있게 해 주세요.” 한스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비록 연극 대사는 외지 못했지만 기도로써 간절한 소망을 말했다는 사실에 한스는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무대를 내려오는 한스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길. 그 무렵, 한스는 덴마크의 일류 정치가이면서 왕립 극장의 지배인인 요나스 콜린을 만났습니다. 그는 한스가 희곡을 써서 왕립 극장에 보냈을 때, 그것을 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콜린은 한스의 희곡을 퇴짜 놓기는 했지만 한스가 가진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한스는 문학가로서의 소질이 충분해. 좌절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콜린은 한스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직 공부가 모자라네.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콜린은 말수가 적고 엄격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콜린은 덴마크의 국왕에게 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생활비와 학비를 국가로부터 지급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1822년 가을의 어느 날, 17세가 된 청년 한스는 마차를 타고 코펜하겐을 떠났습니다. 슬라겔세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할 수 없이 고생스럽고 암담했던 세월이었지만 한순간도 꿈을 저버린 적이 없던 3년 동안의 코펜하겐 생활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한스는 라틴어 학교의 2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다니고 싶어 하셨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다니...’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향 집에서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한스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늦게 입학을 했지만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항상 성적이 좋았습니다. 이러한 한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선생님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자 한스는 곧바로 고향 오덴세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는 건강하실까? 이웃 사람들도 모두 옛날 그대로일까? 함께 성년식을 치렀던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 모든 것이 궁금하구나.’ 마을로 들어선 한스는 이웃 어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오덴세의 거리는 예전과 다름없군. 이 거리를 떠나 내가 어떻게 3년 동안이나 살았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한스는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어느새 한스는 집 앞에까지 와 있었던 것입니다. “한스! 오, 사랑하는 내 아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와 아들은 꼭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속 눈물만 흘렸습니다. 한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웃 사람들은 한스네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전에 한스를 놀리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구들도 한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한스가 성공해서 돌아오자 새아버지도 그를 부드럽게 대해 주었습니다. 한 달 동안의 여름 방학은 꿈결처럼 지나가 버렸습니다. 방학이 끝날 무렵 한스는 다시 라틴어 학교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스에게 다시금 어려운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교장 선생님이 한스를 불러 말했습니다. “한스 군, 이제 나는 헬싱괴르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네. 그런데 내가 자네 뒤를 돌보아 주기로 콜린 씨와 약속을 했으니, 자네도 당연히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해서 한스는 교장 선생님을 따라 헬싱괴르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헬싱괴르는 셸란섬의 북쪽 끝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한스는 곧 그곳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기만 한 교장 선생님은 한스가 잠시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늘 공부만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공부를 무척 좋아하는 한스였지만 이런 생활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스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슬퍼진 나머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인자하신 어머니, 나는 지쳤어요. 슬퍼졌어요. 나는 울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 인자하신 어머니 품에 안겨서. 한스의 책상 위에서 이 시를 발견한 교장 선생님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한스를 꾸짖었습니다. “한스 군, 공부할 시간에 이렇게 딴 생각을 하다니, 앞으로 어떻게 대학에 갈 작정인가? 지금 자네에겐 한가한 생각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네. 자넨 지금 나라의 돈으로 공부하고 있는 거라고.” 그 후로 교장 선생님은 한스를 한층 더 엄하게 대했고, 한스는 괴로운 마음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습니다. 결국 한스는 헬싱괴르의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코펜하겐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본래 악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스를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한스에게 엄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한스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삶.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코펜하겐에 온 지도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안데르센은 21살의 늠름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안데르센은 우연한 기회에 유명한 문학가인 하이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데르센 군, 정말 반갑네. 자넨 정말 훌륭한 시를 썼더군. 자네의 시는 그냥 노트에 적어 두기에는 너무 아까워. 내가 펴내고 있는 신문에 자네의 시를 싣고 싶은데 자넨 어떤가?” “네? 정말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하이벨의 신문에 안데르센의 시가 실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는 아주 독특하군.” “맞아. 지금까지 보던 것들과는 느낌이 다른걸?” 안데르센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한 마디씩 감탄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시를 쓴 안데르센이 누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안데르센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작가였기 때문입니다. 1828년 9월, 23살의 안데르센은 마침내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덴세의 가난한 구둣방 집 아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안데르센은 주르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안데르센은 자신의 이름으로 마음껏 시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코펜하겐에서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데르센의 이름은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안데르센은 여러 나라의 요청을 받아 이 책을 독일과 스웨덴 등의 다른 나라에서도 출판하였습니다. 또한 안데르센의 희곡이 콜린의 주선으로 왕립 극장에서 상연되는 행운을 안았습니다. 연극이 상연되는 날, 안데르센의 명성을 듣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로 극장 안은 크게 혼잡을 빚었습니다. 막이 오르자 관객들은 흥분하여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만세!” “덴마크의 천재 시인, 안데르센 만세!” 그러나 안데르센은 아직도 이러한 명성이 어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자신의 희곡이 무대에서 상연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새해 첫날의 그 소망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아직도 순진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안데르센은 환호하는 관객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겸손한 안데르센을 더욱더 소리 높여 환호해 주었습니다. 연극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고, 이 연극으로 약간의 돈을 벌게 된 안데르센은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신의 조국인 덴마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830년 여름, 25살의 안데르센은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하늘에는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과 흰 구름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안데르센은 지나온 날들과 자신에게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여행 중 안데르센은 포볼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대학 동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갈색 눈을 가진 아주 예쁜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리보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녀는 안데르센을 잘 따라서,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안데르센과 리보르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상냥한 리보르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침내 안데르센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리보르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안데르센의 대학 졸업식이 다가왔습니다. “안데르센 군, 졸업을 축하하네.” 요나스 콜린을 비롯하여 평소에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안데르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안데르센은 사람들 틈을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한 사람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혹시나 하고 기대하던 리보르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졸업식장을 나오는 안데르센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했습니다. 안데르센이 대학을 졸업한 그해, 그는 여행에서 얻은 느낌을 정리해서 한 권의 시집을 펴냈습니다. 하지만 전부터 안데르센의 명성을 시기해 오던 사람들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시집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따위 시를 누가 읽지?” “안데르센의 시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사람들이 이렇게 비난을 해 대자 안데르센은 몹시 우울해졌습니다. 이런 안데르센의 모습을 지켜보는 요나스 콜린의 마음도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안데르센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여행을 권했습니다. “자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기분 전환도 할 겸 독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떻겠나?” 안데르센은 콜린의 권유를 받아들여 독일행 배에 올랐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문학가들은 안데르센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환영하기 위해 직접 항구에까지 나와 주었습니다. 문학가들의 환영을 받고 여러 곳을 여행하는 동안 답답했던 기분이 좀 풀어지는 듯했습니다. ‘아, 독일에 오길 정말 잘했군!’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안데르센은 다시 덴마크로 돌아와 그동안의 경험을 기록해서 여행기를 썼습니다. 이 여행기는 덴마크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영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안데르센을 시기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듣자 마음이 약한 안데르센은 또다시 우울해졌습니다. 안데르센의 친구들은 절망에 빠져 있는 안데르센에게 다시 한번 덴마크를 떠날 것을 권했습니다. 마침 덴마크에는 재능 있는 작가를 외국으로 유학이나 여행을 보내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제도를 이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28살의 안데르센은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국왕의 장학금으로 유럽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함부르크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안데르센은, 이번 여행이 고국에서 쫓겨가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서글퍼졌습니다. 안데르센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문학가들의 발자취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 인생의 기록이라는 자서전을 비롯하여 많은 글을 써서 자신과 조국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조국 덴마크로부터 들려 오는 것은, 자신의 작품을 비판하고 헐뜯는 가슴 아픈 소식뿐이었습니다. 안데르센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여행은 안데르센에게 뜻하지 않았던 기쁨을 주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독일의 유명한 시인 하이네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안데르센과 하이네는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전부터 하이네를 존경해 왔던 안데르센에게는 정말 뜻깊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안데르센은 다시 스위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알프스 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면서 안데르센은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해 가을 안데르센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요나스 콜린으로부터 오덴세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저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불쌍한 어머니...’ 안데르센은 당장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조국을 대표한 유학생의 신분이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여읜 안데르센은 큰 슬픔에 싸여 지냈습니다. 오직 아름다운 시와 이야기만이 슬픔에 빠진 안데르센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가까스로 슬픔을 딛고 일어선 안데르센은 아름다운 경치로 이름난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떠났습니다. 어느 날 안데르센은 그곳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눈먼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 소녀는 비록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지만 까만 머리와 맑은 눈은 천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안데르센은 이 소녀에 대한 기억을 오래도록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에 대한 인상을 바탕으로, 한 편의 이야기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즉흥시인입니다. 즉흥시인은 덴마크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 지역에 퍼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안데르센은 즉흥시인으로 덴마크 제일의 작가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안데르센은 두 권의 동화집을 냈습니다. “안데르센이 이번에는 동화를 썼다는군.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고작 어린애들을 위한 글을 써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사람들은 이처럼 안데르센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데르센의 동화는 시나 소설보다 더욱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도 그의 동화를 즐겨 읽었던 것입니다. 안데르센은 이후 평생 동안 아이들과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동화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1837년 발표된 세 번째 동화집 속에 들어 있는 인어 공주는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걸작이었습니다. 이 동화를 계기로 사람들은 더 이상 안데르센을 비웃거나 헐뜯지 않았습니다. 이제 안데르센은 시인이라기보다는 동화 작가로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 후 안데르센은 매년 한 권 이상씩의 동화집을 내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동화는 무려 160여 편에 이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과연 ‘동화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했습니다. 1867년 12월 6일, 안데르센을 맞는 오덴세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시내는 온통 국기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오덴세의 모든 학교는 이날을 휴일로 정하고 학생들도 환영식에 참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날, 안데르센은 명예시민으로 추천을 받아 고향 오덴세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안데르센의 나이 62세 때였습니다. 가난한 구둣방 집의 아들로 태어나, 고향을 떠난 지 48년 만에 명예시민이 되어 돌아온 안데르센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가난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같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 동화를 써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동화를 써 나갈 것입니다.” 그의 말에 고향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덴마크 정부는 안데르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코펜하겐 거리에 안데르센 동상을 세웠습니다. 동화의 아버지이며 위대한 시인이었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은 비록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원전으로 보는 전래 동화 1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접경 마을에 사는 연 생원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어요. 큰아들 놀부는 사나운 데다가 욕심도 많았지만, 작은아들 흥부는 마음씨가 착했어요. 어느 해, 연 생원이 죽자 놀부는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을 몽땅 차지하고, 흥부네 식구들을 내쫓았어요. 형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흥부는 아내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허름한 움집에서 살았어요. 흥부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하고, 때로는 죄를 지은 사람 대신 매를 맞고 돈을 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가난을 면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 배가 고파요.”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조르자 흥부는 놀부네 집으로 쌀을 얻으러 갔어요. 하지만 쌀은커녕 형과 형수에게 매만 맞고 쫓겨났어요. 어느 날 흥부네 집 처마 밑에 살던 새끼 제비가 구렁이를 피하다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어요. 흥부는 구렁이를 쫓아내고,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정성껏 돌봐 주었어요. 흥부는 비록 가난했지만 집에서는 언제나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제비 집에서는 지지배배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어요. 이듬해 봄, 다리를 다쳤던 제비가 다시 돌아와 흥부에게 박씨를 한 개 물어다 주었어요. 흥부가 박씨를 담장 밑에 심고 물을 주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흥부네 집 초가지붕 위에 튼실한 박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흥부 부부는 박으로 죽을 쑤기 위해 열심히 박을 탔어요. “슬근슬근 톱질하세.” 박이 ‘펑’ 하고 갈라지면서 온갖 보물들이 쏟아져 나와 흥부는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어요. 그 소문은 금방 마을에 퍼져 놀부의 귀에도 들어갔어요. 놀부는 한달음에 흥부에게 달려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놀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비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실로 동여매 주었어요. 이듬해 봄, 놀부 때문에 다리를 다쳤던 제비가 박씨를 물고 돌아왔어요. 놀부는 박씨를 심고 박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가을이 되자 놀부네 기와지붕 위에도 박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흠, 박이 다 여물었네. 부인, 얼른 박을 타서 우리도 부자가 됩시다.” 놀부 부부는 큰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톱질을 했어요. 그런데 박 속에서 보물은커녕 사당패, 비렁뱅이, 괴물 등이 나타나 재산을 몽땅 가져갔어요. 마지막 박에서는 강도떼가 쏟아져 나와 놀부 부부를 때리고, 집에 불을 지르고는 사라졌어요. 순식간에 놀부는 가난뱅이가 되었어요. 형의 소식을 들은 흥부는 한달음에 달려와 놀부를 위로했어요. 놀부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흥부네 집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에 가난한 할아버지와 부자 할아버지가 한마을에 살았어요. 가난하게 사는 할아버지는 마음씨가 착해 무엇이든지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하지만 욕심쟁이 부자 할아버지는 한번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 놓치지 않았어요. 비록 남의 것이라도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억지로 빼앗거나 몰래 훔쳐서라도 가졌지요. 어느 해 흉년이 들자 착한 할아버지는 욕심쟁이 할아버지에게 보리쌀 한 가마니를 꾸었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 보리쌀에 모래와 보리등겨가 반반씩 섞여 있었지요. 착한 할아버지는 억울했지만 하는 수 없이 그것으로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끼니를 때웠어요. 보리를 수확하자 착한 할아버지는 잘 익은 보리쌀 한 가마니를 지고 욕심쟁이 할아버지를 찾아갔어요. 그러나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이자로 보리쌀 두 가마니를 더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지요. 착한 할아버지가 더 줄 보리가 없다고 하자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대신 여름내 땔감을 해 오라고 했어요. 착한 할아버지는 날마다 욕심쟁이 할아버지 집에 나무를 해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착한 할아버지가 욕심쟁이 할아버지 집에 나무를 해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노인이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나 보니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이불 위에 빨간 부채와 파란 부채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어요. 착한 할아버지는 노인이 다시 돌아오면 부채를 돌려주려고 잘 보관해 두었지요. 날씨가 푹푹 찌는 어느 날, 착한 할아버지는 노인이 두고 간 부채를 꺼냈어요. 착한 할아버지가 빨간 부채를 펴서 훨훨 부치자 코가 쑥쑥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깜짝 놀란 착한 할아버지가 얼른 파란 부채를 펴서 부치자 코가 쏙쏙 줄어들었지요. “허허, 신통방통 요술 부채였구먼.” 그런데 이 모습을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보게 되었어요.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착한 할아버지를 찾아가 요술 부채를 달라고 졸라 댔어요. 하지만 착한 할아버지는 노인이 부채를 찾으러 오면 돌려주어야 한다고 거절했지요.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억지로 착한 할아버지네 초가집과 자기가 살던 기와집을 바꾸고 요술 부채를 차지했어요. 초가집에 누운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빨간 부채로 몰래 코를 늘여 놓고, 파란 부채로 고쳐 주면서 돈을 벌 생각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지요.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설렁설렁 빨간 부채를 부치자 코가 쑥쑥 늘어났어요. “도대체 코가 얼마나 늘어날까?”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계속 빨간 부채를 부치자 코는 지붕을 뚫고, 하늘로 쭉쭉 올라가 옥황상제가 사는 대궐까지 갔어요. 이때 마당을 거닐던 옥황상제는 불쑥 올라온 코를 보고는 나무에 묶으라고 명령했지요. 큰 부자가 될 생각에 계속 부채질을 하던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쭉쭉 늘어난 코를 보자 덜컥 겁이 나 파란 부채로 활활 부채질을 했어요. 하지만 하늘나라 나무에 묶여 있던 코는 꼼짝을 하지 않았고, 대신 욕심쟁이 할아버지의 몸이 하늘 위로 쭉쭉 올라갔어요. 마침 그때, 옥황상제가 나무에 묶어 두었던 욕심쟁이 할아버지의 코를 풀어 주라고 명령했어요. “으악, 사람 살려!”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그만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어요. 먼 옛날 한 선비가 산속 길을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까치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선비는 까치 한 마리가 나무 위아래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우는 것을 보았어요. 선비가 나무 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큰 뱀이 둥지 안의 까치 새끼들을 잡아먹으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어요. 선비는 얼른 활을 쏴 뱀을 죽이고 까치 새끼들을 구해 주었어요. 다시 선비는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산속이라 금세 해가 져 어둠이 앞을 가렸어요. 선비는 산속을 헤매다 외딴집을 발견했어요. “주인장, 계십니까?” 선비가 문밖에서 소리를 지르자 예쁘게 생긴 젊은 색시가 나왔어요. 선비는 젊은 색시에게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했어요. 젊은 색시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선비의 간청에 못 이겨 저녁밥을 차려 주고, 이불도 내주었어요. 피곤한 선비는 밥을 먹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어요. 한밤중에 선비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눈을 떴어요. 그랬더니 커다란 뱀이 선비의 몸을 칭칭 감고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어요. “나는 낮에 네가 활로 쏘아 죽인 뱀의 색시다. 너를 죽여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한을 풀어 주어야겠다.” 뱀의 색시가 젊은 여인으로 변신을 했던 거예요. “나는 아까 죽인 뱀이 당신 남편인지 몰랐소. 그리고 난 불쌍한 까치들을 구해 주기 위해서 옳은 일을 한 거요.” 선비의 말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진 뱀은 자정이 되기 전 뒷산에 있는 절의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 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절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터라 한밤중에 종이 울릴 리가 없었어요. ‘이 밤중에 누가 종을 울린단 말인가’ 선비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어요. 댕, 댕, 댕. 정확히 종이 세 번 울리자 뱀은 정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선비는 부리나케 절 뒤에 있는 종각으로 달려갔어요. 종각 밑에 까치 세 마리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어요. 까치는 선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머리로 종을 들이받아 종을 울렸던 거예요.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어요. 욕심쟁이 형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지만 소문난 구두쇠였고, 착한 동생은 비록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지요. 어느 해 먹을 양식이 떨어진 동생은 형을 찾아갔어요. 겨우 좁쌀 한 바가지를 얻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모퉁이에 웬 거지 노인이 무거운 맷돌을 안고 쓰러져 있었지요. 그 노인은 부잣집 대문 앞에서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했다가 욕심쟁이 형에게 쫓겨났던 거예요. 마음씨 착한 동생은 노인을 업고 집으로 돌아와 좁쌀로 죽을 쑤어 먹이고 정성껏 간호를 했어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노인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맷돌을 찾았지요. 동생은 맷돌을 얼른 노인에게 가져다주었어요. “젊은이가 나를 살렸구려. 가진 것이라고는 이 맷돌뿐이니 부디 이거라도 받아 주게.” “할아버지, 괜찮습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동생은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노인은 기어코 맷돌을 주고 떠났어요. 집 안에 곡식이라고는 어제 얻어 온 좁쌀 한 바가지가 전부였던 동생은 빈 맷돌을 돌리며 말했지요. “곡식이 있어야 갈지. 이 맷돌에서 하얀 쌀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동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맷돌에서 하얀 쌀이 계속 쏟아져 나왔어요. 깜짝 놀란 동생이 “그만, 그만!” 하고 외치자 맷돌이 멈췄어요. 맷돌을 돌리기만 하면 동생이 말하는 건 뭐든지 다 나왔어요. 맷돌 덕분에 큰 부자가 된 동생은 형님과 이웃 사람들에게도 곡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지요. 마을 사람들은 침이 마르도록 동생을 칭찬했어요. 딱 한 사람만 빼고요. 욕심쟁이 형은 동생이 잘살게 되자 배가 아팠어요. ‘만약 그날 내가 노인을 재워 주었다면 신기한 맷돌은 내 것이 되었을 텐데…' 생각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든 형은 거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어요. 혹시 맷돌을 가진 거지 노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몇 날 며칠 거지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지만 맷돌을 가진 거지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욕심쟁이 형은 몹시 화가 나 거지들을 다 내쫓았어요. 밤낮으로 동생의 맷돌을 빼앗기 위해 궁리를 하던 형은 맷돌을 훔치기로 마음먹었어요. 욕심쟁이 형은 한밤중에 몰래 동생 집에 들어가 맷돌을 훔쳐 배를 타고 달아났어요. 동생이 맷돌을 찾으러 오지 못하게 먼 나라에 가서 살기로 했지요. 배를 타고 가던 욕심쟁이 형은 맷돌에서 무엇을 나오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맷돌을 돌리며 말했어요. “값비싼 소금이나 나와라.” 그러자 맷돌에서 계속 소금이 나오더니 배 안을 소금으로 가득 채웠어요. 형은 무거운 소금 때문에 배가 가라앉는 것도 모르고 계속 맷돌을 돌렸어요. 결국 배는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욕심쟁이 형은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어요. 하지만 맷돌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나온 소금이 바다에 쌓여 바닷물이 짜게 되었대요. 아주 먼 옛날 장흥읍에 있는 냇가에 너른 모래밭이 있었어요. 이 모래밭 근처에 초가집이 한 채 있었는데, 가난하지만 인정 많은 노인 부부와 아들 둘이 함께 살고 있었지요. 할아버지네 식구들은 낮에 힘들게 일을 해서 밤이 되면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어요. 휘영청 밝은 달이 뜨는 밤이면 냇가의 보드라운 모래밭으로 도깨비들이 모여 씨름판을 벌였어요. 도깨비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신나게 놀았지요. 어느 날부터인가 잠귀가 밝은 할머니 귀에 도깨비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어요. 날이 밝자 할머니는 지난 밤 일을 할아버지에게 말했지요. “간밤에 모래밭에서 누가 씨름판을 벌였는지 밤새 시끄러웠어요.”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아마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 씨름을 했겠지.” “그럼, 밤새 놀아서 출출할 텐데, 오늘 밤에는 메밀묵이라도 쑤어 주어야겠어요.” 오후가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 솥 가득 메밀묵을 쑤어서 모래밭에 가져다 놓았어요. 밤이 되자 어슬렁어슬렁 모래밭으로 모여든 도깨비들은 씨름을 하며 놀았어요. 씨름판이 끝날 무렵 도깨비들은 모래밭 한쪽에 놓여 있는 솥을 발견했지요. “어? 우리가 좋아하는 메밀묵이잖아.” 마침 배고팠던 도깨비들은 맛있게 메밀묵을 먹었어요. 메밀묵을 다 먹고 난 도깨비들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어요. 그러자 도깨비 두목이 나서서 자신이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지요. 다음 날 밤, 도깨비 두목은 할아버지를 찾아가 돈이 가득 든 자루를 주며 메밀묵을 잘 먹었다고 말했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깜짝 놀라 자루 속을 들여다보니 돈이 가득 들어 있었지요. 그런데 다음 날 밤이 되자 도깨비 두목이 할아버지네 집을 또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소원을 들어드릴 테니 말해 보세요.” “글쎄, 어제 준 돈도 많기는 한데... 지금까지 가난하게 살았으니 부자로 사는 게 소원이라오.” “명당을 쓰면 잘산다던데, 그럼 명당을 써 보실래요?”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수로 명당을 쓸 수 있겠소…” “해남에 있는 윤 씨 집안의 사당이 명당이라니 그곳에 할아버지 조상들의 묘를 쓰면 됩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돈을 가지고 가서 사당지기와 친해지세요. 그러고는 사당지기에게 아무 날 아무 시에 사당이 있는 자리에 묘를 쓰겠다고 말만 하세요. 그럼 그 뒤의 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요.” 다음 날, 할아버지는 윤 씨 집안의 사당이 있는 해남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도깨비 두목이 시킨 대로 했지요. 사당지기는 윤 씨 일가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의 말을 전했어요. 윤 씨 일가 사람들은 마을에서 가장 힘센 사람들을 모아 사당을 지키게 했어요. 묘를 쓰겠다고 한 날이 되자 할아버지는 조상들의 유골을 파서 도깨비들과 함께 사당에 나타났지요. 커다란 상석과 망주석을 들고 춤을 추며 가까이 오는 상엿소리에 기가 눌려 사당을 지키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갔어요. “이 사당을 우리가 허물까 아니면, 윤 씨 일가 사람들이 직접 허물겠는가?” 사당 앞에 선 도깨비 두목이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로 말했어요. 윤 씨 일가 사람들은 사당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며 자기들이 허물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사당이 있었던 자리로 조상의 묘를 옮겼어요. 그 이후부터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잘살게 되었지요.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사람이 땅에는 살지 않고, 하늘에만 살았던 시절, 하늘나라에서는 결혼을 하려면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처녀 총각이 이 법을 어기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혼을 했어요. 몹시 화가 난 옥황상제는 결혼한 두 사람에게 땅에 내려가서 살라고 명령했어요. “옥황상제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십니까?”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이 먹고살 것은 다 마련해 놓았다.” 땅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땅의 풍경에 깜짝 놀랐어요. 땅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풀과 나무마다 먹을 것이 주렁주렁 열렸어요. 또 물은 시내가 되고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갔어요. 두 사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으며, 자식도 많이 낳았어요. 땅에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마을도 생기고, 나라도 생겼어요. 땅은 하나의 커다란 세상이 되었지요.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려도 사방에 먹을 것이 널려 있으니 사람들은 점점 게을러지고 툭하면 싸움을 했어요. 하늘에서 인간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옥황상제는 사람들을 잘 살도록 만들어 준 것을 후회했어요. 옥황상제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힘들여 일을 해야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만들었지요. 그러자 옥황상제의 뜻대로 땅에 사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런데 일에 싫증이 난 사람들이 슬슬 꾀를 부리고 있다가, 열심히 일해서 곡식을 수확한 사람들의 곡식을 빼앗기 시작했어요. 이제 땅에서는 힘이 센 사람이 땅과 곡식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힘이 약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도 아주 조금밖에 가질 수 없었지요.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옥황상제는 땅에 비를 내리지 않게 했어요. 논과 밭이 쩍쩍 갈라져 흉년이 들었어요. 그러자 힘센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손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일해서 얻은 곡식마저 빼앗았어요. 옥황상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비를 내려 주어 풍년이 들게 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들 것을 빼앗아 자기들의 배를 불렸어요. 그 뒤로도 옥황상제는 땅 위에 흉년과 풍년을 반복했어요. 한 오백 년이 지나서 맨 처음 땅에 내려온 처녀 총각이 죽었어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땅에 묻는 것을 보고 옥황상제가 말했어요. “저 두 사람은 이제 죄를 다 씻었으니 다시 살려서 하늘나라로 데려오너라.” 하늘나라 사람들은 두 사람을 다시 살려 내어 하늘로 데려오기 위해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놨어요. 그 다리가 바로 무지개다리예요. 옥황상제는 그 뒤에도 부지런히 일하고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다시 살려서 하늘로 데려오게 했어요. 꼭 비가 온 뒤에 무지개가 뜨는 것은 착한 사람들이 죽은 뒤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나쁜 사람들이 못 보게 하려고 비로 자욱하게 가리는 거래요. 먼 옛날 한 마을에 마음씨 착한 콩쥐가 살았어요. 콩쥐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새엄마를 얻었어요. 성질이 사나운 새엄마는 팥쥐라는 딸을 데리고 왔는데, 팥쥐는 겉모습은 물론 성품까지도 엄마를 똑 닮았어요. 새엄마는 친딸인 팥쥐는 끔찍이 사랑했지만 콩쥐에게는 늘 구박을 하고 집안일을 시켰어요. 마을에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어요. 새엄마와 팥쥐가 새 옷을 입고 집을 나서려고 하자 콩쥐도 따라나섰어요. “콩쥐야, 너는 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벼를 다 찧어 놓고 잔치에 오너라.” 잔치에 가고 싶은 콩쥐는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 독에 부었어요. 하지만 구멍 난 독에 무슨 수로 물을 채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어디선가 어기적어기적 두꺼비가 다가와 구멍 난 독을 막아 주고, 참새 떼가 날아와 벼를 모두 찧어 주었어요. 그리고 콩쥐 앞에 검은 소가 나타나 비단옷과 꽃신도 주었어요. 잔치에 늦은 콩쥐는 뛰어가다가 냇가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어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원님은 콩쥐의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주웠어요. 원님은 신발이 예쁘니 신발 주인도 어여쁠 거라고 생각했어요. 원님은 잔칫집으로 가서 직접 신발 주인을 찾았어요. 잔칫집에 온 여자들에게 신을 신겨 보았지만 모두 맞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콩쥐가 신발을 신자 꼭 맞았어요. 원님은 콩쥐가 마음에 들어 혼례를 올렸어요. 원님과 결혼한 콩쥐는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았어요. 팥쥐는 행복하게 사는 콩쥐가 부러워 배가 아팠어요. 때마침 원님이 먼 길을 떠나자 팥쥐는 콩쥐를 연못가로 데려가 빠뜨렸어요. 그러고는 콩쥐 집으로 가 콩쥐 행세를 했지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원님은 콩쥐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어요. “부인, 얼굴이 달라진 것 같소.” 원님의 말에 팥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때그때 고비를 넘겼어요. 어느 날 콩쥐가 빠져 죽은 연못에 예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어요. 연못을 지나던 원님은 이상하게 연꽃이 마음에 들어 연꽃을 꺾어 집에 두고 매일 쳐다보았어요. 연꽃은 원님이 지나갈 때는 활짝 웃었지만 팥쥐가 지나갈 때는 팥쥐의 머리털을 잡아당겼어요. 팥쥐는 화가 나 연꽃을 아궁이에 태워 버렸어요. 하루는 옆집 할머니가 불씨를 얻으러 왔다가 아궁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을 발견해 집에 가져갔어요. 그날부터 할머니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잘 차려진 밥상이 방에 놓여 있었어요. 이를 수상하게 여겨 집 안에 숨어서 지켜보던 할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구슬이 예쁜 색시로 변해서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던 거예요. 할머니는 색시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었어요. 콩쥐는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한 뒤에 원님을 모셔다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어요. 할머니는 콩쥐의 부탁대로 원님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런데 방 안에 차려진 밥상 위에 젓가락이 짝짝이로 놓여 있었어요. 원님이 그 이유를 묻자 콩쥐가 나타나서 말했어요. “젓가락 바뀐 것은 알면서 아내가 바뀐 것은 아직도 모르십니까?” 콩쥐는 그동안의 일을 모두 원님에게 이야기하고, 연못 속에 있는 자신의 시체를 건져 올려 구슬로 문지르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했어요. 원님이 콩쥐가 시킨 대로 하자 콩쥐가 다시 살아났어요. 원님은 팥쥐와 팥쥐 엄마의 죄를 물어 무거운 벌을 내렸어요. 다시 살아난 콩쥐는 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한 아가씨가 홀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아버지와 아가씨는 부지런히 일했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지요. 어느 날 아가씨가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는데, 비쩍 마른 두꺼비 한 마리가 어기적어기적 들어왔어요. 두꺼비는 배가 고픈지 눈을 껌벅거리며 아가씨를 쳐다보았지요. “쯧쯧, 너도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인정 많은 아가씨는 자기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수북이 떠서 두꺼비에게 주었어요. 우물우물 맛있게 밥을 다 먹은 두꺼비는 뒤뜰로 사라졌다가, 다음 날 아침에 또 나타났어요. 아가씨가 밥을 주자, 두꺼비는 아예 부엌에서 살았지요. 두꺼비는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지 졸졸 따라다녔어요. 두꺼비는 통통하게 살도 오르고, 몸집도 커졌어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 외로웠던 아가씨에게 두꺼비는 마치 동생처럼 느껴졌지요.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해마다 지네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번에 아가씨가 제물로 뽑히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딸이 불쌍해서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고, 아가씨는 혼자 계실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지요. 아가씨네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보내 준 곡식이 쌓였어요. 곱게 단장을 한 아가씨는 가마를 타고 제사를 지내는 신당으로 갔어요. 그런데 그 뒤를 두꺼비가 팔딱팔딱 뒤따라갔어요. 신당에 혼자 남은 아가씨는 뒤따라온 두꺼비를 보고 깜짝 놀랐지요. “아이코,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온 게냐? 얼른 돌아가거라.” 하지만 두꺼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아가씨도 두꺼비가 옆에 있으니까 조금 덜 무서웠어요. 제사가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캄캄한 밤이 되었어요. 신당 안에는 희미한 촛불만이 바람에 흔들렸지요. 아가씨는 두꺼비를 안고 오들오들 떨었어요.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수많은 발이 달린 커다란 지네가 쓱 다가와 아가씨를 물려는 순간 두꺼비가 독을 뿜어 댔어요. 지네도 지지 않고 독을 뿜으며 두꺼비와 뒤엉켜 싸웠지요. 신당 안은 두꺼비와 지네가 뿜어낸 독한 연기로 자욱했고, 아가씨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아가씨는 신당 한쪽에 쓰러져 있는 두꺼비와 지네를 보고 지난밤에 일어난 일이 떠올랐어요. 아가씨는 얼른 두꺼비에게 다가갔어요. “두껍아, 두껍아! 눈 좀 떠 봐! 내 대신 네가 죽었구나.” 아가씨는 두꺼비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어요. 아가씨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도 깜짝 놀라 신당으로 모여들었지요. 마을 사람들은 신당의 풍경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아가씨가 살아 있자 크게 기뻐했어요. 아가씨는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꺼비를 묻어 주었어요. 두꺼비 덕분에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 사라지자 마을도 다시 평화를 되찾았지요. 물론 가난을 면한 아가씨도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아주 먼 옛날 한 마을에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하는 석숭이라는 총각이 살았어요. 석숭의 소원은 머슴살이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어요. 석숭은 꿈을 이루기 위해 땅을 파고 커다란 독을 묻어 두었어요. 석숭은 십 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독 가득 돈을 모았어요. ‘이 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사야지. 그리고 예쁜 색시도 얻어 장가도 들 거야.’ 석숭은 부지런히 길을 가던 도중 땀을 식히기 위해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잠시 쉬기로 했어요. 목도 축였으니 이제 그만 가 볼까? 으라차찻, 앗! 이게 웬일일까요? 독 안에 있던 돈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석숭의 꿈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어요. “아이고, 내 팔자야. 지지리 복도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 도대체 왜 이렇게 복이 없는지 염라국에 있는 염라대왕을 찾아가 물어나 봐야겠군.” 석숭은 그길로 염라국을 향해 길을 떠났어요. 석숭은 멀고 먼 염라국을 가는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났어요. 석숭이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사는 처녀였어요. 석숭이 처녀에게 혼자 사는 이유를 물었어요. “제가 혼자 사는 이유는 혼인할 배필이 정해지기만 하면,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배필이 까닭도 없이 죽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세 사람이나...” 석숭은 처녀가 몹시 애처로워 보여 천생연분을 염라대왕에게 물어봐 주겠다고 했어요.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무거운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꼼짝달싹 못하는 노인이었어요. “나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른다오.” 마음이 약한 석숭은 염라대왕에게 그 이유를 꼭 물어봐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넓은 들판에 수수깡으로 만든 좁은 집에 사는 농부였어요. 농부는 새집을 짓기만 하면 집이 와르르 무너져 어쩔 수 없이 수수깡 집에서 살고 있었어요. 석숭은 이번에도 염라대왕에게 물어봐 주기로 했지요. 며칠 뒤 석숭은 강가에서 용이 되지 못하고 모래밭을 데굴데굴 구르는 이무기를 보았어요. 석숭은 이무기에게 강을 건너게 도와주면 염라대왕에게 용이 되지 못한 이유를 물어봐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이무기는 얼른 석숭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넜어요. 드디어 염라국에 도착한 석숭은 염라대왕을 찾아가 정중히 인사를 했어요. “염라대왕님, 저는 석숭이라고 합니다. 저는 복이 지지리도 없어서 십 년 가까이 모은 돈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복이 없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하하, 이제부터 네 형편이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거라.” 염라대왕의 말에 석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러고는 염라국에 오는 동안 만난 사람들과 이무기의 이야기를 하고는 답을 물었어요. “처녀는 마지막 죽은 배필의 제사를 지내고 만나는 사람이 그 처녀의 배필이다. 그리고 노인은 욕심 많은 산지기로 산에 나무하러 오는 아이들의 낫과 지게를 빼앗아 받는 벌이다. 앞으로 지게를 지고 백 사람에게 절을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수수깡 집에 사는 농부는 조상들을 잘못 모셔서 그런 것이다. 앞으로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또 이무기는 욕심이 많아 여의주를 두 개나 가지고 있어서 하늘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여의주를 한 개 버리면 하늘에 오를 수 있다.” 석숭은 염라대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어요. 석숭은 돌아오는 길에 이무기와 수수깡 집에 사는 농부, 산지기 노인에게 염라대왕이 한 말을 전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녀가 사는 집에 들렀어요. “염라대왕께서 마지막 죽은 배필의 제사를 지내고 만나는 사람이 아가씨의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어머, 마지막 죽은 배필의 제삿날이 어제였어요. 그럼 도련님이 저의...” 석숭과 처녀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어요. 석숭은 처녀와 혼례를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부지런한 석숭은 돈을 모아 논도 사고 밭도 사서 구만구천구백 석지기 부자가 되었어요. 먼 옛날 어느 마을에 홀로 사는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날마다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삼신할미에게 정성껏 빌었던 아주머니는 늘그막에 아기를 낳았어요. 그런데 아주머니가 낳은 건 사람이 아니라 구렁이였어요. “아니, 구렁이를 낳다니... 그래도 내 아기이니 잘 키워야지.” 아주머니는 구렁이에게 삼태기를 씌워 놓았어요. 며칠이 지난 후 옆집에 사는 세 자매가 구경을 왔어요.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옆집 자매를 방 안으로 불러들였어요. “어머, 아기에게 삼태기를 씌워 놓았네.” 삼태기를 살며시 들추자 구렁이가 콜콜 잠을 자고 있는 게 보였어요.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깜짝 놀라 달아났지만, 막내는 구렁이를 살살 어루만졌어요. “아유, 귀여워. 이제부터 구렁덩덩 신 선비라고 불러야지.” 세월이 흘러 구렁이도 장가갈 나이가 되었어요. 구렁이는 어머니에게 옆집 처녀에게 장가보내 달라고 했어요.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옆집으로 가 조심스럽게 혼례 이야기를 꺼냈어요.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망측하다고 거절했지만 다행히 막내는 구렁이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말했어요. 구렁이와 막내는 성대하게 혼례를 올렸어요. 그날 밤 구렁이가 색시 앞에서 홀딱홀딱 재주를 넘으니 서서히 허물이 벗겨지면서 잘생긴 선비가 되었어요. 색시가 어릴 때 지어 준 이름대로 신 선비가 되었지요. 신 선비와 색시는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어느 날, 구렁덩덩 신 선비는 과거를 보러 가면서 색시에게 구렁이 허물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색시는 구렁이 허물을 저고리 품속에 고이 간직했어요. 하지만 저고리 품속이 불룩한 것을 수상하게 여긴 언니들에게 들켜 허물을 빼앗겼어요. 색시의 두 언니는 허물이 징그럽다며 불에 태웠어요. 색시는 불 속에서 활활 타는 허물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해가 바뀌었는데도 신 선비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도대체 서방님은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서방님을 찾아 나서야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색시는 길을 떠났어요. 색시는 길을 가면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의 돌밭을 일구어 주고, 할머니의 빨래를 대신 빨아 주고, 까마귀에게 벌레를 잡아 주고, 황소 대신 밭을 갈아 주면서 신 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어요. 색시는 황소가 알려 준 대로 신 선비를 찾아갔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신 선비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지 뭐예요. 신 선비는 두 아내에게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과 함께 살겠다고 말했어요. 첫 번째 내기는 물동이를 이고서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거였고, 두 번째는 새가 앉아 있는 채로 나뭇가지를 꺾어 오는 내기였어요. 그동안 신 선비를 찾아오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색시는 내기에서 모두 이겼어요. 색시는 신 선비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금슬은 좋지만 아이가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식 한 명만 낳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날마다 빌었어요. 그 정성에 감동했는지 드디어 할머니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어요. 열 달이 지나고 할머니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어요. 할아버지는 매우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일곱 살이 되도록 말도 잘 못하고, 걸어 다니지도 못했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하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밖에서 돌아와 보니 아이가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깜짝 놀라 온 마을을 뒤지며 아이를 찾아다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어요. “아버지, 어머니!” 아이가 큰 소리로 부모님을 불렀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아이가 무거운 바위를 척척 들어 올리자 ‘바위손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바위손이는 그 마을은 물론이고 나라 안에서도 제일가는 천하장사가 되었어요. 세월이 지나고 바위손이가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 왜군이 쳐들어와 나라에 전쟁이 벌어졌어요. 군인들이 열심히 맞서 싸웠지만 왜군을 당해 내지 못했어요. 바위손이도 이 소식을 들었지요. “아버지, 어머니! 제가 가서 왜적을 물리치고 오겠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걱정되어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바위손이는 길을 떠났어요. 길을 가던 도중에 바위손이는 콧바람이 센 ‘콧바람손이’와 팔 힘이 센 ‘곰배손이’ 그리고 오줌을 많이 누는 ‘오줌손이’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어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나라를 위해 싸우자!” 네 사람은 씩씩하게 싸움터로 나갔어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왜군이 빽빽이 진을 치고 있었어요. 먼저 바위손이가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니며 바위란 바위는 모두 들고 와 골짜기를 막고 말했어요. “오줌손이야, 이번에는 네 차례다.” 바위손이의 말에 오줌손이는 왜군이 있는 곳을 향해 콸콸 오줌을 누기 시작했어요. 왜군은 금세 물바다가 된 곳에서 허우적거렸어요. “하하, 꼭 물에 빠진 생쥐 같구먼. 이제는 내가 나서야지.” 콧바람손이가 콧바람을 쌩쌩 불어 대자 오줌이 꽝꽝 얼어붙었어요. 왜군은 온몸이 얼어붙은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어요. “자, 이제 마무리는 내가 할게.” 곰배손이는 고무래로 얼음판 위를 쓱쓱 밀고 다녔어요. 그러자 왜군은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어요. 네 장사는 나라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왜군을 물리쳤어요. 그리고 왜군이 물러간 뒤에도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대요. 먼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인이 둘째 아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은 다리만 둘이지 눈도 하나 귀도 하나 팔도 하나였어요.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반쪽이’라고 지었어요. 세월이 흘러 반쪽이도 어느새 십여 세가 되었어요. 몸은 비록 반쪽이지만 힘은 장사로,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힘이 셌어요. 집채 같은 바위도 번쩍 들어 올리고, 커다란 나무도 뿌리째 뽑았어요. 어느 날 반쪽이가 토끼를 잡으려고 쫓아가다 놓치자 화가 나서 발로 바위를 찼어요. 커다란 바위는 데굴데굴 굴러 마을에 있는 집을 덮쳤어요. 집이 부서지자 주인은 반쪽이네 집을 찾아와 버럭 화를 내며 배상을 해 달라고 했어요. 반쪽이의 형은 부서진 집 주인에게 용서를 빌었어요. ‘반쪽이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군.’ 형은 반쪽이를 산으로 데려가 아름드리나무에 튼튼한 밧줄로 꽁꽁 묶어 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형이 반쪽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왔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려는 순간, 어느새 반쪽이가 뿌리째 뽑은 나무에 묶인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어머니! 집안일을 하다 더우시면 이 나무에 앉아 쉬세요.” 어머니와 형은 반쪽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느 날 반쪽이는 어머니에게 장가를 보내 달라고 졸랐어요. 형은 하도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머니는 반쪽이가 불쌍해 좋은 말로 달랬어요. “누가 너 같은 반쪽 사람에게 딸을 주겠느냐. 그런 말을 다시는 하지 마라.” “어머니, 오늘 밤 사람들이 모두 잠들면 건넛마을 부잣집 딸을 업고 올 거예요.” 어머니는 궁리 끝에 형을 부잣집에 보내 반쪽이의 계획을 미리 알려 주었어요. 부잣집 주인 영감은 깜짝 놀라 방 깊숙한 곳에 딸을 숨기고 식구와 하인들에게 지키게 했어요. 부잣집은 밤마다 불을 대낮같이 훤하게 밝혀 놓고, 곳곳에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반쪽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반쪽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반쪽이는 멀리서 부잣집 사람들이 지치기만을 기다렸어요. 며칠 밤낮을 꼬박 새운 부잣집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낮에는 껌벅껌벅, 밤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반쪽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잣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반쪽이는 졸고 있는 건장한 하인들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상투를 풀어 머리를 서로 묶어 버리고, 대문 앞 하인들 머리에는 항아리를 씌웠어요. 그리고 마당 가운데 있는 가족들의 손에 북과 북채를 매달고, 주인 영감의 수염에 기름을 잔뜩 발랐어요. 마지막으로 반쪽이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벼룩을 뿌렸어요. 얼마 후 깊숙한 방에서 숨어 있던 딸이 뛰쳐나왔어요. “아이, 간지러워!” 반쪽이는 재빨리 딸을 둘러업고 온 집 안이 떠들썩하게 소리쳤어요. “반쪽이가 딸을 업어 간다!” 반쪽이의 소리에 벌떡 일어난 주인 영감은 깜짝 놀라 호롱불을 켜다 기름이 묻은 수염에 불이 붙고, 지붕 위에 있던 하인들은 머리가 묶여 꼼짝을 할 수 없고, 항아리를 쓴 하인들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우왕좌왕, 마당 가운데 있던 가족들은 북을 둥둥둥 울렸어요. 반쪽이는 그다음 날 부잣집 딸을 집으로 데려다 주었어요. 부자 영감은 할 수 없이 딸을 반쪽이와 혼인시켰어요. 혼례를 올린 반쪽이는 훌훌 허물을 벗더니 잘생긴 신랑이 되어 부잣집 딸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아주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밤나무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어요.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고 밤나무 아들은 커다란 밤나무 곁에서 살았지요. 밤나무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 밤나무 도령이 되었어요. 어느 날, 밤나무는 밤나무 도령에게 말했어요. “앞으로 큰비가 내려 내가 넘어지거든 나를 꼭 붙들고 있어라.” 밤나무의 말대로 며칠 뒤 하늘에 잔뜩 먹구름이 끼더니 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밤나무 도령은 밤나무를 꼭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었지요. 비는 몇 날 며칠 쏟아져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밤나무도 뿌리째 뽑혀 물에 둥둥 떠내려갔어요. 밤나무와 함께 떠내려가던 밤나무 도령은 거센 물살 위로 휩쓸려 가는 멧돼지랑 개미 떼랑 모기를 구해 주었어요. 저 멀리서 밤나무 도령 또래의 소년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아들아, 저 아이를 구해 주면, 나중에 너한테 못된 짓을 할 게다.” 밤나무가 말렸지만 밤나무 도령은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모른 척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손을 내밀어 소년을 밤나무 위로 끌어 올렸지요. 어느새 비가 멎고 마른 땅이 나타나자 밤나무는 밤나무 도령과 일행을 내려놓았어요. “아들아, 이제부터는 너 혼자 살아가렴.” 밤나무는 물을 따라 둥둥 떠내려가고, 멧돼지와 개미 떼, 모기도 각각 흩어져 갔어요. 길을 따라 며칠을 걸었던 밤나무 도령과 소년은 커다란 기와집을 발견했어요. 두 사람은 주인 영감에게 머슴으로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밤나무 도령은 그날부터 집안일을 스스로 찾아서 부지런히 일했어요. 하지만 소년은 늘 게으름을 피웠지요. 주인 영감이 부지런한 밤나무 도령만 칭찬하자 소년은 몹시 샘이 났어요. 어느 날 소년은 주인 영감에게 밤나무 도령은 아무리 넓은 밭도 하루 만에 갈고 씨를 뿌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다음 날 아침, 주인 영감은 밤나무 도령에게 오늘 안으로 뒷산 둔덕에 있는 밭을 갈고, 씨도 뿌려 놓으라고 시켰어요. 영문을 모르는 밤나무 도령은 밭으로 나가 열심히 밭을 갈았어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멧돼지들이 나타나 밭을 갈아 주었지요. 또 개미 떼들이 줄을 지어 오더니 씨를 심기 시작했어요. 밤나무 도령은 순식간에 밭도 갈고 씨도 심었지요.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밤나무 도령을 보고 주인 영감은 칭찬을 했어요. 주인 영감에게는 예쁜 딸과 딸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한 명 있었어요. 어느 날 주인 영감은 두 사람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 놓고, 밤나무 도령과 소년을 불렀어요. “저기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내 딸을 찾아보게. 내 딸을 찾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네.” 밤나무 도령은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주인집 딸인지 몰라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바로 그때 ‘앵’ 하고 모기가 날아와 밤나무 도령에게 “왼쪽이야, 왼쪽!” 하고 알려 주었어요. 밤나무 도령은 왼쪽에 있는 아가씨를 골랐어요. “하하, 그 아이가 내 딸인지 어떻게 알았나?” 밤나무 도령은 동물들 덕분에 주인 영감의 사위가 되고, 소년은 하녀와 혼례를 올려 하인으로 살게 되었어요. 밤나무 도령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아주 먼 옛날 깊은 산골에 나무꾼 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부지런한 총각은 날마다 산에 올라 나무를 했지요. 어느 날, 나무꾼은 사냥꾼에게 쫓기던 노루를 숨겨 준 덕분에 선녀를 아내로 얻게 되었어요. 노루는 나무꾼에게 아이를 셋 낳기 전에는 선녀에게 절대로 날개옷을 주면 안 된다고 일렀어요. 선녀는 날개옷이 없어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지만 부지런한 나무꾼과 혼례를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홀로 계신 어머니도 아들이 장가를 들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어느새 아들 둘을 낳은 선녀는 남부러울 게 없었지만,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어요. 그런 선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무꾼의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지요.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 무슨 일이야 벌어질까...’ 선녀가 안쓰러웠던 나무꾼은 노루의 말도 잊은 채 날개옷을 선녀에게 꺼내 주었어요. 선녀는 날개옷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날개옷을 입은 선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두둥실 하늘로 올라갔어요. 하루아침에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나무꾼은 시름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때 나무꾼이 살려 준 노루가 나타났어요. “아이를 셋 낳기 전에는 절대로 날개옷을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목욕할 물을 긷기 위해 두레박이 내려와요. 그 두레박을 타면 하늘에 올라가 선녀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요.” 나무꾼은 노루 덕분에 두레박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선녀와 아이들을 만났어요. 옥황상제는 나무꾼에게 자신이 내는 세 가지 시험을 모두 이겨 내면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했어요. 첫 번째 시험은 숨어 있는 옥황상제를 하루 만에 찾아내는 거였어요. 나무꾼은 선녀의 도움으로 성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옥황상제를 찾아냈어요. 두 번째는 나무꾼이 숨고 옥황상제가 나무꾼을 찾는 시험이었어요. 나무꾼은 선녀의 도움을 받아 개미로 변해 바느질하는 골무 속에 숨었어요. 옥황상제는 나무꾼을 찾지 못했지요. 마지막 세 번째는 옥황상제가 쏜 화살을 나무꾼이 찾아오는 시험이었어요. “말을 타고 가다 추녀 끝이 밑으로 처진 기와집에 가면 아픈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의 가슴을 쓸어내리면 화살이 나올 거예요.” 선녀의 말을 듣고 나무꾼이 화살을 찾아 나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가 나타나 화살을 빼앗아 갔어요. 그렇지만 옥황상제가 까마귀를 시켜 화살을 빼앗아 오게 할 것을 미리 안 선녀는 솔개를 보내 까마귀가 빼앗은 화살을 되찾았어요. 드디어 나무꾼 가족은 하늘나라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무꾼은 홀로 계실 어머니가 걱정되어 병이 났어요. 선녀는 나무꾼에게 날개 달린 말을 내주며 간곡히 말했어요. “이 말을 타고 어머니를 뵙고 오세요. 하지만 절대로 땅을 밟지 마세요. 만약 땅을 밟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요.” 나무꾼을 태운 말은 단숨에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도착했어요. 어머니는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보자 펑펑 울었어요. 나무꾼은 어머니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곧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얘야, 마지막으로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고 가렴.” 나무꾼은 말 위에서 어머니가 끓여 준 죽을 급하게 먹다가 그만 뜨거운 죽을 말 등에 쏟고 말았어요. 놀란 말은 이리저리 날뛰다 나무꾼을 땅에 떨어뜨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하늘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된 나무꾼은 죽어서 수탉이 되었어요. 수탉이 지붕 위에 올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꼬끼오 꼬꼬!” 우는 것은, 하늘에 있을 가족이 그리워서 그런 거래요. 먼 옛날 혼례를 마친 새신랑과 새색시, 그리고 하녀가 산길을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고,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새색시와 하녀가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여기저기를 살피던 새신랑은 땅바닥에 커다란 발자국이 띄엄띄엄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건 괴물 발자국이 틀림없군. 땅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괴물을 잡고야 말겠어.” 새색시를 찾기 위해 괴물 발자국을 따라가던 새신랑은 괴물에게 아내를 도둑맞은 석수장이, 딸을 도둑맞은 나무꾼, 누이동생을 도둑맞은 고리장이를 만나 함께 길을 떠났어요. 듬성듬성 보이던 괴물의 발자국은 커다란 바위 앞에서 멈췄어요. 네 사람은 힘을 모아 바위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이때 석수장이가 나서서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바위를 쪼아 사흘 만에 바위를 깨뜨렸어요. 바위가 있던 자리에 땅속으로 통하는 길고 긴 굴이 보였어요. 나무꾼은 산에서 칡을 끊어 와 사흘 밤낮으로 동아줄을 꼬았고, 고리장이는 커다란 바구니를 짰어요. “와, 이제 땅속으로 내려갈 준비가 다 됐군.” 세 사람이 줄을 잡고 석수장이가 제일 먼저 내려갔어요. 새신랑은 석수장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줄을 흔들라고 말했어요. 한참을 내려가던 석수장이는 더럭 겁이 나서 줄을 흔들어 다시 올라왔어요. 다음에 내려간 나무꾼도 반쯤 내려갔다가 무서워서 다시 올라오고, 고리장이도 두려워서 끝까지 가지 못하고 올라왔어요. “내가 내려갈 테니 내가 줄을 흔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오.” 마지막으로 새신랑이 바구니를 타고 땅속으로 내려갔어요. 몇 날 며칠 동안 내려가던 바구니가 드디어 바닥에 닿았어요. 바구니에서 나온 새신랑은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갔어요.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더니 땅속 나라 마을이 한눈에 보였어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늘어서 있고, 넓은 논과 밭도 있었어요. 새신랑은 재빨리 우물가에 있는 버드나무 위로 올라가 주위를 자세히 살폈어요. 그때 한 아가씨가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왔어요. 가까이에서 보니 바로 새색시의 하녀였어요. 하녀는 우물가에 비친 새신랑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앗, 서방님 아니세요?” 하녀는 살금살금 새색시가 있는 별채로 새신랑을 데려갔어요. 그런데 새색시는 오랜만에 만난 새신랑을 한참 노려보더니 골방에 가두었어요. 갖은 고생을 하며 새색시를 찾으러 왔던 새신랑은 새색시의 반응에 너무 놀라 스스로 죽으려고 하는데 하녀가 들어왔어요. “서방님, 괴물만큼 힘을 길러 여기를 빠져나가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날부터 새신랑은 밤이 되면 하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열심히 운동도 하고, 무술 훈련을 했어요. 하녀는 동삼을 달인 물을 가져와 새신랑에게 먹였어요. 동삼을 달인 물을 마시자 새신랑은 힘이 불끈불끈 솟았어요. 새신랑의 힘은 날마다 강해졌지요. 땅속 나라에 온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 땅속 괴물이 집에 돌아왔어요. 새신랑은 칼을 들고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새신랑이 휘두른 칼에 괴물의 팔이 잘려 나갔지만 곧 다시 척 달라붙었어요. 새신랑이 계속 칼을 휘두르자 괴물의 머리,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갔고, 곧바로 하녀가 재를 뿌렸어요. 그러자 괴물은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고 죽었어요. 새신랑은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고, 석수장이의 아내와 나무꾼의 딸, 고리장이의 누이동생을 바구니에 태워 땅 위로 올려 보냈어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바구니가 내려오지 않았어요. 새신랑과 하녀는 할 수 없이 땅속 마을로 되돌아왔어요. 땅속 마을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새신랑과 하녀는 강가에서 한 노인을 만났어요. 노인에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자 두루미 한 마리를 내주었어요. 두루미를 타고 땅 위로 올라온 새신랑은 하녀를 아내로 맞아 아들딸 낳고 오래오래 잘 살았어요. 먼 옛날 깊은 산골에 홀어머니와 오누이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가면서 오누이에게 단단히 일렀어요. “얘들아, 누가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해도 함부로 열어 주면 안 된다. 엄마라고 해도 손을 만져 본 다음에 내 손이거든 열어 주어라.” 어느 날, 부잣집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한 어머니는 날이 어두워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주인이 준 떡을 머리에 이고 부리나케 첫 번째 고개를 넘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어흥,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는 어머니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타나 떡을 달라고 했지요. 떡이 다 떨어지자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오누이마저 잡아먹으려고 오누이의 집으로 갔어요. “얘들아, 엄마 왔다. 문 열어라.” 하지만 오누이는 평소와 다른 어머니의 목소리에 놀라 문을 열어 주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지요. 호랑이는 창호지를 뚫고 앞발을 쑥 내밀었어요. “우리 엄마 손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 손에는 털이 없어요.” 꺼끌꺼끌한 털이 숭숭 난 손을 만져 본 오누이는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어요. 오누이는 문밖에 앉아 있는 커다란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 오들오들 떨었어요. 오빠는 여동생을 데리고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우물가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누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자 화가 난 호랑이는 문을 부수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뒷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뒷마당을 샅샅이 뒤지던 호랑이는 우물에 비친 오누이를 발견했어요. “얘들아, 우물에 빠져 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어서 나오너라.” 나무 위에서 호랑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동생이 그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어요. 호랑이는 화를 꾹 참고 오누이에게 어떻게 나무 위에 올라갔는지 물었지요. 오빠는 손에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왔다고 했어요. 발에 참기름을 듬뿍 바른 호랑이는 나무에 오르기는커녕 쭈르륵 미끄러져 엉덩방아만 찧었어요. 그때 여동생이 어리석은 호랑이를 놀리며 말했어요. “히히, 우리는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서 올라왔는데...” 호랑이는 냉큼 도끼를 가져와 쿵쿵 나무를 찍으면서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오누이는 호랑이가 가까이 오자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하느님, 우리를 살리시려거든 새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우리를 죽이시려거든 헌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오누이가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새 동아줄이 내려왔어요. 오누이는 새 동아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어요. 그 모습을 보고 호랑이도 기도를 했지요. “하느님, 저도 저 오누이처럼 하늘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하느님은 하늘에 올라가 오누이를 잡아먹으려는 호랑이의 못된 마음을 알고 헌 동아줄을 내려보냈어요. 호랑이는 헌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 줄이 끊어져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지요. 지금도 수숫대가 빨간 것은 그때 묻은 호랑이 엉덩이에서 나온 피 때문이래요. 옛날 옛적에 한 부부가 살았는데 아이가 없어서 너무 외로웠어요. 부부는 날마다 뒷산 절에 가 밤낮으로 부처님께 빌었어요. “부처님, 우리 부부에게 아이를 주십시오. 못나도 괜찮고 작아도 괜찮습니다.” 어느 날, 부부가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린 덕분인지 아주머니의 배 속에 아이가 생겼어요. 열 달 뒤, 아주머니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꼭 어른 주먹만 했어요. 부부는 아이에게 ‘주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부부는 주먹이가 바람이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고이고이 길렀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강가로 낚시를 가는데 주먹이가 따라나섰어요. 아버지는 주먹이를 주머니 속에 넣고 강으로 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고기가 잡히지 않자 아버지는 꾸벅꾸벅 졸았어요. 주머니 속에서 답답했던 주먹이는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어요. 밖으로 나온 주먹이는 처음 보는 넓은 세상에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주먹이에게 풀들은 높은 나무 같고, 강물은 바다 같았어요. 주먹이는 예쁜 들꽃에 정신이 팔려 아버지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어요.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어요. “아버지, 아버지 어디 계세요!” 주먹이가 큰 소리로 불렀지만 워낙 작아서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았어요. 주먹이가 길을 잃고 풀밭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황소가 나타나 풀과 함께 주먹이를 삼켜 버렸어요. 주먹이는 캄캄하고 끈적끈적한 황소 배 속에서 오들오들 떨다 잠이 들었어요. 얼마 후 뿌지직! 주먹이는 똥과 함께 밖으로 나왔어요. “후유, 이제 살았네!” 쇠똥이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주먹이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어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솔개가 날아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주먹이를 낚아챘어요. 주먹이를 움켜쥔 솔개는 훨훨 하늘 높이 날아갔어요. 어찌나 높이 올라갔는지 눈 아래로 보이는 세상이 콩알만 하게 보였어요. 그때 독수리가 나타나 먹잇감인 주먹이를 빼앗으려고 덤볐어요. 솔개는 독수리와 푸드덕거리며 싸우다가 주먹이를 놓치고 말았어요. “으악!” 주먹이는 높은 하늘에서 강으로 풍덩! 떨어졌어요. 주먹이가 정신을 차리고 ‘이제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커다란 물고기가 다가와 주먹이를 날름 삼켰어요. 주먹이는 다시 물고기의 컴컴하고 비릿한 배 속에 갇히게 되었어요. 주먹이는 ‘이제 여기서 죽게 되나 보다.’ 하는 생각에 펑펑 울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 주머니 속에 얌전히 있을걸.” 주먹이가 후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물고기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요동쳤어요. 주먹이는 겁에 질려 소리쳤어요. “아니, 이건 우리 주먹이 목소리 아냐?” 꾸벅꾸벅 졸다 물고기가 걸린 낚싯대를 건져 올린 아버지는 주머니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주머니에 주먹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아버지는 주먹이 소리가 나는 물고기의 배를 허겁지겁 갈랐어요. 그러자 물고기 배 속에서 주먹이가 폴짝 뛰어나왔어요. “아이고, 주머니 속에 있던 아이가 어떻게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느냐?” 주먹이는 아버지 손바닥 위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어요. 주먹이와 아버지는 물고기를 가지고 신 나게 집으로 돌아왔어요. 주먹이는 틈만 나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신이 겪은 모험 이야기를 해 주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충청도 어느 마을에 늦도록 장가를 못 간 총각이 살았어요. 총각은 똑똑하고 야무졌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했어요. 총각은 서울에 가면 혹시 돈도 벌고, 색시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길을 떠났어요. 먼 길을 떠나는 총각이 가진 것이라곤 달랑 좁쌀 한 알뿐이었지요. 아침 일찍 집을 떠난 총각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산을 넘었어요. 어느새 땅거미가 지자 총각은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어요. 총각은 잠들기 전 품속에 있던 좁쌀 한 알을 꺼냈지요. “주모, 이 좁쌀 좀 맡아 주세요.” 주모는 총각이 준 좁쌀을 아무 데나 휙 던졌어요. 다음 날 아침, 총각이 어제 맡긴 좁쌀을 달라고 하자, 주모는 쥐가 먹어 버렸다고 말했어요. “그럼, 좁쌀을 먹은 쥐라도 잡아 주세요.” 주모는 할 수 없이 뒤주에 숨어 있는 쥐를 잡아 총각에게 주었어요. 총각은 쥐를 품속에 넣고 부지런히 길을 갔지요. 서산으로 해가 꼴딱 넘어가자 총각은 또 주막에 들어갔어요. 총각은 주막 주인에게 쥐를 맡기며 아주 귀한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밤사이 주막집 고양이가 총각이 맡긴 쥐를 잡아먹었지요. “그럼, 쥐를 잡아먹은 고양이라도 주세요.” 총각은 쥐 대신 얻은 고양이를 안고 주막을 나섰어요. 총각이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서울은 아직 멀었어요. 날이 저물자 총각은 주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고양이를 맡겼지요. 그런데 주막집 개가 고양이를 물어 죽였어요. 총각은 고양이 대신 주막집 개를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났어요. 그런데 다음 주막에서 개가 주막집 말의 뒷발에 차여 죽었어요. 총각이 개 대신 말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리자 주막 주인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내주었어요. 총각은 말을 타고 편안하게 서울로 향했어요. 총각이 말에서 내려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황소가 달려와 말을 들이받았어요. 말은 그 자리에서 퍽 고꾸라졌지요. 총각은 황소 뒤를 따라온 주인에게 말이 죽었으니 대신 황소를 달라고 했어요. 황소 주인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총각에게 황소를 내주었지요. 좁쌀 한 알 달랑 들고 고향집을 떠난 총각은 우여곡절 끝에 황소 한 마리를 몰고 서울에 도착했어요. 서울 구경을 하던 총각은 주막에 들어가 황소를 주인에게 맡기고 잠이 들었어요. 이튿날 아침, 총각이 황소를 달라고 하자 주인은 쭈뼛거리며 자기 아들이 총각의 황소를 정승 댁에 팔았다고 말했어요. 주인이 다른 황소를 사 주겠다고 말했지만, 총각은 그길로 정승 댁을 찾아갔어요. “내 황소 내놔요. 빨리 내 황소를 돌려줘요!” 총각이 아침부터 소란을 부리자 정승은 총각을 불러들였어요. 총각은 그동안 좁쌀 한 알이 황소가 된 이야기를 정승에게 들려주었어요. 정승은 조금 황당하기는 했지만 총각의 배짱이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았어요. 총각은 정승의 예쁜 딸과 혼례를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옛날 한 마을에 형제가 살았어요. 착하고 정직한 동생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우애도 깊었어요. 하지만 형은 심술보가 가득하고 욕심이 많아 부모에게도 불효를 저질렀어요. 부지런한 동생은 날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어요. 하루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투두둑 개암이 떨어졌어요. 동생은 입이 함박만 해져서 개암을 주웠어요. “헤헤, 이건 아버지 드리고, 저건 어머니 드리고, 요건 형님 주고, 저건 내가 먹어야지.” 동생이 주머니 두둑이 개암을 넣고 산을 내려오는데 날이 어두워졌어요. 어두컴컴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자 동생은 허름한 빈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어요. 동생은 다락에 올라가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어요. 바로 그때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어요. 문틈 사이로 살짝 밖을 내다보니 도깨비들이 빈집 대청마루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놀고 있었어요. 도깨비들이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리며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은이 나왔어요. 하루 종일 굶주린 동생은 침만 꼴깍꼴깍 넘기다 문득 낮에 주운 개암이 생각났어요. 동생이 개암을 입에 넣고 어금니로 깨물자 “따닥” 하는 소리가 크게 났어요. 그 소리에 도깨비들은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췄어요. 개암 한 개로는 배고픔을 달랠 수 없었던 동생은 또다시 개암을 입에 넣고 꽉 깨물었어요. “따닥” 개암 깨지는 소리가 빈집에 울려 퍼졌어요. “으악, 이게 무슨 소리야? 빨리 도망가자. 집이 무너지려나 봐!” 도깨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갔어요. 동생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날이 밝자마자 다락에서 내려왔어요. 동생은 도깨비들이 버리고 간 금과 은, 그리고 도깨비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금과 은을 팔아 큰 부자가 된 동생은 부모님도 잘 모셨고, 형에게도 재산을 나누어 주었어요. 욕심 많은 형은 동생이 부자가 된 방법을 알고는 한달음에 산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개암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고 빈집 다락에 가서 날이 저물기만을 기다렸어요. 달이 휘영청 밝자 도깨비들이 빈집으로 몰려와 신나게 놀았어요. 형은 개암을 꺼내 입에 넣고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깨물었어요. “따닥!” 개암 깨지는 소리가 빈집에 크게 울렸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도깨비들이 도망가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와 다락문을 벌컥 열었어요. “하하, 네가 저번에 우리를 속이고 도깨비방망이를 가져간 놈이구나.” 도깨비들은 다락에서 형을 끌어내더니 한꺼번에 몰려들어 도깨비방망이로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어요. “넓적, 넓적, 넓적해져라. 뚝딱!” 하니 홑이불같이 되었고, “길쭉, 길쭉, 길쭉해져라. 뚝딱!” 하니 뱀장어같이 길어졌어요. 지난날을 뉘우친 형은 동생에게 돌아가 용서를 빌고, 평생 동생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어요. 먼 옛날 깊은 산골 마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 두 사람은 비록 가난하고 자식도 없었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날마다 나무를 해다 팔았어요. 할아버지는 열심히 도끼질을 하면서도 ‘후유, 자식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어느 따뜻한 봄날, 할아버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도끼로 나무를 패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삣쫑삣쫑’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할아버지가 도끼질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자, 파랑새 한 마리가 가시덤불에 걸려 울고 있었어요. “아이고, 어쩌다 가시덤불에 걸렸지? 꺼내 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할아버지는 혹시나 파랑새의 날개가 가시에 찔릴까 봐 조심조심 꺼내 주었어요. 할아버지 덕분에 가시덤불에서 나온 파랑새는 하늘로 훨훨 날아갔어요. 다음 날도 할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를 했어요. “어휴, 목말라!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면 좋겠군.” 마치 어디선가 할아버지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어제 할아버지가 구해 준 파랑새가 날아왔어요. 파랑새는 할아버지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다 천천히 앞으로 날아갔어요. 할아버지가 파랑새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더니 맑은 샘이 나타났어요. 할아버지는 손으로 샘물을 떠서 벌꺽벌꺽 마셨어요. 샘물을 마신 할아버지는 잠시 쉴 겸 샘 옆에 누웠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할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지게에 나무를 싣고 헐레벌떡 산을 내려왔어요. 집에서 눈이 빠지도록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 생각에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어요. “할멈! 너무 늦어서 미안하오.” “아니, 젊은이는 누군데 우리 할아범의 지게를 메고 있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자 깜짝 놀랐어요. 그제야 할아버지는 자기 몸이 달라졌단 걸 깨달았어요. 할아버지는 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할머니에게 이야기해 주었어요. 날이 훤히 밝아 오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데리고 산으로 가서 샘물을 마시게 했어요. 시간이 잠시 흐르자 할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더니 젊은 아낙네가 되었어요. 다시 젊음을 되찾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 이웃 마을에 혼자 사는 욕심쟁이 할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갔어요.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어떻게 젊어졌는지 알려 달라고 졸랐어요. 마음씨 좋은 부부는 젊어지는 샘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어요.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젊어질 생각에 흥겨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샘물을 찾아갔어요. 그러고는 샘물을 벌꺽벌꺽 마시고 또 마셨어요.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샘물을 마실 때마다 점점 젊어졌어요. “나무꾼 영감보다 내가 더 젊어져야지.”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샘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엔 갓난아이가 되고 말았어요. 그다음 날 나무꾼 할아버지는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왔다 샘물 옆에서 울고 있는 갓난아이를 발견했어요. “쯧쯧, 너무 욕심을 부리더니 아기가 되었군.” 자식이 없던 나무꾼 할아버지는 아기를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젊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기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깊은 산골에서 밭을 일구며 사는 부부가 있었어요. 부부에게는 귀여운 오누이가 있었어요. 부부가 밭에 나가면 오누이는 하루 종일 둘이서 집을 보았지요. 워낙 깊은 산속에 있는 집이라서 부모님은 오누이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일을 나갔어요. “호랑이가 올지 모르니 문을 꼭 잠그고 있어라.”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오누이는 방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어요. 그러고는 오순도순 사이좋게 놀았지요. 화롯불에 올려놓은 감자가 맛있게 익는 구수한 냄새가 온 산에 퍼져 나갔어요. 며칠째 사냥을 못해 배고픈 호랑이가 감자 냄새를 맡고, 오누이네 집으로 왔어요. 호랑이가 코를 벌름거리자 문이 들썩들썩거렸어요. “우아, 엄마 아빠가 벌써 돌아오셨나?” 누이동생이 문을 열어 보려고 하자 오빠가 막았어요. 그러고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는데 글쎄 호랑이와 눈이 딱 마주쳤어요. 오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오들오들 몸을 떨었어요. “호, 호, 호랑이가 나타났어!” 누이동생은 얼른 바늘집을 오빠에게 주었어요. 오빠는 문틈으로 호랑이의 발톱에 바늘을 콕콕 꽂았어요. 호랑이는 배도 고픈데 바늘에 찔려 발이 따끔거리자 약이 올랐어요. 호랑이는 집 주위를 빙빙 돌더니 아궁이로 들어갔어요. “호랑이가 아궁이로 들어갔다. 빨리 밖으로 나가자!” 오누이는 재빠르게 밖으로 빠져나와 부엌으로 들어갔어요. 아궁이로 들어간 호랑이는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방고래로 깊숙이 들어갔어요. 오누이는 물을 잔뜩 묻힌 짚단을 아궁이에 잔뜩 쑤셔 넣고 불을 지폈어요. 아궁이와 방고래는 금세 짚단에서 나온 매운 연기로 가득 찼어요. “됐어, 이제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자.” 오누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어요. 방고래 속에 있던 호랑이는 매운 연기에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버둥거리다 겨우 아궁이에서 빠져나왔어요. “어흥, 고얀 놈들! 다 잡아먹고야 말 테다!”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오누이의 초가집이 들썩거렸어요. 집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호랑이는 풀쩍 뛰더니 단숨에 초가지붕 위로 올라갔어요. 호랑이는 커다란 발로 낡은 초가지붕을 내리쳤어요. 우두둑 소리가 나더니 지붕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호랑이의 뒷발이 쑥 나타났어요. 깜짝 놀란 오누이는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어요. “앗, 뜨거워. 어흥!” “히히! 오빠, 호랑이가 방아를 찧고 있어.” 무너진 초가지붕에 몸통이 껴 꼼짝달싹 못하는 호랑이는 바닥에 쏟아진 뜨거운 감자 때문에 두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였어요. 마치 그 모습이 방아를 찧는 것 같았지요. 오누이는 집 안을 뒤져 방아를 찧을 곡식을 호랑이 발밑에 두었어요. 호랑이는 밀이며, 보리며 마른 고추까지 방아를 찧었어요. 하루 종일 오누이 집에서 방아를 찧은 호랑이는 비틀비틀 산속으로 도망가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오누이네 가족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어요. 옛날에 한 선비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지만 마땅히 하룻밤 묵어갈 주막이나 집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마침 사방을 둘러보니 산 중턱에 무덤이 몇 개 있었지요. “무덤 옆 잔디가 아늑할 테니 저곳에서 자고 가야겠구먼.” 선비가 잔디에 누워 설핏 잠이 들려고 할 때였어요. “어이, 김 생원! 오늘 밤 아랫마을에 제사가 있는데, 제사 음식이나 먹으러 가세.” 선비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내가 잘못 들었나?’ 선비가 다시 누우려고 하는 순간 바로 옆에 있는 무덤에서 또다시 사람 목소리가 들렸지요. “가고는 싶은데 여기 손님이 있어서 못 가겠네.” “아, 그럼 손님하고 같이 가면 되지. 빨리 가세.” 선비는 무서워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어요. 여기저기 무덤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귀신들이 나왔어요. 한 귀신이 성큼성큼 선비에게 다가오더니 머리에 능텅 감투를 씌워 주었어요. 순간 선비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지요. “자, 이제 슬슬 제삿밥을 먹으러 가세!” 귀신들은 줄줄이 고개를 넘어서 마을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갔어요. 선비가 귀신들을 따라 마당을 지나 제사를 지내는 대청마루로 갔지만 아무도 선비에게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제사상에는 선비가 지금까지 먹어 보지 못한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어요. 귀신들이 제사상에 있는 음식을 마구 먹기 시작했어요. 그 옆에서 선비도 이것저것 집어 먹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귀신들이 먹는 음식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는데, 선비가 먹는 음식은 쑥쑥 줄어들었지요.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어요. 그때 닭이 ‘꼬끼오’ 하고 울자 귀신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어요. 선비도 덩달아 나갔지요. 귀신들을 따라 산으로 가던 선비는 불현듯 ‘곧 날이 밝을 텐데 굳이 귀신들을 따라갈 필요는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을 돌려 냅다 뛰었어요. 멀리서 귀신들이 선비에게 능텅 감투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선비는 못 들은 척했지요. 선비는 밤만 되면 이 마을 저 마을 제사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맛난 음식을 먹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요. 어느 날, 선비가 능텅 감투를 집에 두고 잠시 일을 보러 나갔어요. 마침 방 안을 치우던 선비의 아내가 다 낡아 빠진 능텅 감투를 화롯불에 던져 넣었어요. 능텅 감투는 활활 타더니 까맣게 한 줌의 재가 되었지요. 그날 밤, 건넛마을 제사 집에 가려던 선비는 능텅 감투가 보이지 않자 아내에게 물었어요. 아내는 감투가 너무 낡아서 화롯불에 태웠다고 했지요. 화가 나 펄쩍펄쩍 뛰던 선비는 옷을 홀랑 벗어 던지고 능텅 감투의 재를 온몸에 발랐어요. 그러자 선비의 몸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선비가 건넛마을 제사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마음 놓고 먹고 있는데, 손에 있는 재가 서서히 벗어지기 시작했어요. 선비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음식을 먹었지요. 하얀 손이 제사상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음식을 집어 들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아하, 소문으로만 듣던 제사 음식 도둑이 나타났구나.”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하얀 손을 붙들고 재를 벗겨 내자 알몸뚱이의 남자가 나타났어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실컷 얻어맞은 선비는 싹싹 빌면서 도망을 갔지요.
원전으로 보는 전래 동화 2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강가 오막살이집에 가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강에서 낚시로 고기를 잡아다가 근근이 생활을 했지요. 하루는 할아버지의 낚싯대에 커다란 잉어가 잡혔어요. 할아버지가 잉어를 망태기에 넣으려고 하는데 잉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왠지 잉어가 불쌍해서 그냥 강에 놓아 주었지요. 잉어는 할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듯 할아버지 주변을 빙빙 돌더니 물속으로 사라졌어요. 다음 날, 할아버지는 낚싯대를 메고 강으로 갔어요. 그때 물속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나더니 거북을 탄 젊은 남자가 나타났어요. “저는 용궁에 사는 사신입니다. 어제 할아버지가 살려 보낸 잉어는 용왕님의 아들입니다. 용왕님께서 영감님을 용궁으로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사신을 따라 거북을 타고 용궁으로 갔어요. 용왕님은 할아버지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감사의 인사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오는 구슬을 선물로 주었어요. 할아버지는 귀한 구슬을 품고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지요. 할아버지는 품 안에서 구슬을 꺼내 할머니에게 보여 주며 용궁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어요. 할아버지가 구슬에게 소원을 말하면 구슬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었지요. 구슬 덕분에 큰 부자가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널리 퍼져 나갔어요. 강 건너에 사는 욕심쟁이 할머니는 구슬이 탐났어요. 그래서 물감 장수로 변장을 하고 할아버지네 집으로 찾아갔지요. 마침 할아버지는 밖에 나가고 할머니 혼자 집에 있었어요. 욕심쟁이 할머니는 여러 가지 물감을 할머니에게 보여 주며 환심을 샀어요. 그러면서 구슬을 한 번만 보여 달라고 말했어요. 할머니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구슬을 꺼내 보여 주었지요. 그날 밤 욕심쟁이 할머니는 몰래 할아버지의 집에 숨어들어 구슬을 훔쳐 도망갔어요. 구슬이 없어지자 고래 등같이 커다란 기와집은 다시 초라한 오막살이집으로 변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시 가난해졌어요. 그날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밥도 먹지 않고 앓아누웠지요. 할아버지 집에는 자식처럼 귀하게 기른 개와 고양이가 있었어요. 강 건넛마을에 갑자기 커다란 기와집이 세워졌다는 소문을 들은 개와 고양이는 그곳에 구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주인 할아버지의 구슬을 찾아 드리자.” 개는 헤엄을 못 치는 고양이를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갔어요. 그러고는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가 곳간에 있는 대장 쥐를 붙잡았어요. 고양이는 쥐들에게 구슬을 찾아오면 대장 쥐를 살려 주겠다고 말했지요. 쥐들은 욕심쟁이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 구슬을 훔쳐 왔어요. 고양이가 구슬을 입에 문 채 개와 고양이는 강을 건넜어요. 개는 고양이에게 구슬이 잘 있는지 계속 물었어요. 짜증이 난 고양이가 대답을 하는 순간 ‘풍덩’ 구슬이 강에 빠지고 말았어요. 강가에 올라온 고양이가 개에게 원망을 늘어놓자, 개는 꼬리를 내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지요. 배가 고팠던 고양이는 어부들이 버리고 간 죽은 물고기를 덥석 물었어요. 그런데 물고기의 배 속에 구슬이 들어 있지 뭐예요. 고양이는 기쁜 마음에 구슬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구슬을 찾아온 고양이를 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시 부자가 되었어요. 그날부터 고양이는 방 안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어요. 그리고 개는 마당에서 집을 지키며 살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렸대요. 옛날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어요. 하루는 아내가 남편에게 베를 주면서 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부탁했어요. 남편은 베를 지고 장으로 갔어요. “베 사세요. 베!" 남편은 베를 펼쳐 놓고 큰 소리로 외치며 베를 팔았어 요. 아내가 베를 곱게 짠 덕분에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어요. 오랜만에 돈을 손에 쥔 남편은 무엇을 살까?' 생각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어요. 그때 초라한 할아버지가 두 손을 내밀며 남편에게 구걸을 했어요. 마음씨 착한 남편은 그 냥 지나치지 못하고 베를 판 돈을 몽땅 할아버지에게 드렸어요. 할아버지는 고맙다며 남편에게 점괘를 일러 주었어요. “위태롭거든 가지 마라. 무섭거든 춤을 춰라. 반가워하거든 설설기어라.” 하지만 막상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려니 남편은 실망한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선뜻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걷다 보니 큰 강이 나타났어요. 남편은 이렇게 된 거 배라도 타고 멀리 가서 돈을 벌어 올 생각으로 나루터로 갔어요. 그런데 장날이라서 그런지 배에 탄 사람이 너무 많았지요.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면 위태로울 텐데.” 그러다 순간 '위태롭거든 가지 마라.'라는 점괘가 떠올라 얼른 배에서 내렸어요.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가던 배가 강 한가운데서 기우뚱거리더니 뒤집혔어요. 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요. “위태롭거든 가지 마라. 참 신통한 점괘야!" 남편은 산을 넘어서 집에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남편은 동굴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어요. 무서움을 겨우 참고 잠이 들려고 하는데, 쿵쿵 발소리와 함께 키가 남산만 하고 온몸에 사람의 머리뼈를 주렁주렁 매단 괴물이 나타났어요. 무서워서 벌벌 떨던 남편은 문득 '무섭거든 춤을 춰라.' 라고 했던 점괘가 생각났어요. 남편이 덩실덩실 춤을 추자, 커다란 괴물의 몸이 서서히 작아 지고 잘생긴 젊은이로 변했어요. “나는 원래 하늘에서 옥황상제님의 궁을 지키는 문지기였는데, 죄를 지어 이렇게 흉측한 괴물이 되었소. 옥황상제님께서 나를 땅으로 내려보내면서 춤을 추는 사람이 있으면 내 죄가 풀릴 것이라고 했소. 당신 덕분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남편은 잘살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어요. 젊은이는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 아래를 살펴보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어요. 젊은이가 말한 대로 산꼭대 기에 올라가 바위 아래를 살펴보던 남편은 산삼을 발견했어요. 산삼을 팔아 많은 돈을 번 남편은 기쁘게 집으로 돌아갔어요. 남편이 마당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아내는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한 아내를 보고 남편은 문득 '반가워하거 든 설설기어라.'라는 점괘가 생각났어요. 남편은 얼른 바닥에 엎드려 기어갔어요. 그러다 마루 밑에 있던 도둑과 눈이 딱 마주쳤어요. 만약 남편이 도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돈도 빼앗기고 목숨도 위태로웠을 거예요. 신통한 점괘 덕분에 남편과 아내는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는 착했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숙한 총각이 살았어요. 스무 살이 넘도록 콩이랑 팥도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에 둘을 더하는 간단한 셈도 할 줄 몰랐어요. 총각이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님의 걱정도 많아졌지요. 부모님은 아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면 세상 구경을 하면서 좀 영리하고 강해질까 싶은 생각에 달랑 괴나리봇짐 하나를 주고 내쫓았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길을 떠난 총각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지요. 날이 어두워지자 총각은 허름한 빈집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도깨비가 살고 있었어요. 무시무시하게 생긴 도깨비는 총각을 보자 반가워하며 일 년만 함께 살자고 했어요. 딱히 갈 곳이 없었던 총각은 도깨비와 함께 살기로 했어요. 총각이 도깨비와 산 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도깨비는 총각에게 손뼉을 치면 쌀이 나오는 보자기를 주었지요. 총각은 도깨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집까지 워낙 멀어서 하룻밤 주막에서 자고 가기로 했어요. 총각은 주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보자기를 맡기며 말했지요. “절대로 보자기를 펼쳐서 손뼉을 치면 안 돼요.” 주인은 총각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총각이 깊이 잠들자 주인은 보자기를 펼치고, 손뼉을 쳤지요. 그러자 보자기에 쌀이 수북이 쌓였어요. 다음 날, 주인은 총각에게 요술 보자기 대신 평범한 보자기를 주었어요. 집에 도착한 총각은 부모님 앞에서 열심히 손뼉을 쳤어요. 하지만 아무리 손뼉을 쳐도 쌀은 나오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아들의 철없는 행동에 실망하고, 총각에게 세상 구경을 더 하고 오라고 말했지요.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총각은 다시 도깨비가 있는 깊은 산속으로 갔어요. 총각이 도깨비 집에 들어가자 도깨비는 반갑게 맞아 주며 일 년만 함께 살자고 했어요. 그럭저럭 하는 일 없이 일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지요. 도깨비는 집으로 돌아가는 총각에게 엉덩이를 두드리면 금돈이 나오는 말을 주었어요. 총각은 그날 밤도 주막에 들렀다가 주인에게 말을 바꿔치기 당했지요. 집에 돌아간 총각은 부모님 앞에서 말의 엉덩이를 두드렸어요.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말의 엉덩이에서 금돈은 나오지 않고 ‘뿌지직’ 똥만 나왔어요. 아들이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한 부모님은 총각에게 세상 구경을 더 하고 오라고 했어요. 총각은 하는 수 없이 또 도깨비에게 갔지요. 도깨비는 변함없이 총각을 반갑게 맞이하며, 일 년만 같이 살자고 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이 지났지요. 도깨비는 총각에게 “때려라!” 하고 외치면 사람을 때려 주는 방망이를 주었어요. 총각은 그날도 터덜터덜 주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방망이를 주며 말했지요. “절대로 ‘때려라!’라고 하면 안 돼요.” 주인은 한밤중이 되자 방망이 앞에서 “때려라!” 하고 소리쳤어요. 그러자 방망이는 주막집 주인을 따라다니며 사정없이 때렸지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주막집 주인은 총각에게 달려가 잘못을 빌었어요. 날이 훤히 밝자 총각은 쌀이 나오는 보자기와 금돈이 나오는 말, 그리고 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총각의 부모님은 이제야 아들이 철이 들어서 돌아왔다고 기뻐했어요. 도깨비가 준 보물 덕분에 총각네 가족은 큰 부자가 되었지요. 먼 옛날 땅속에 두더지 부부가 살았어요. 두더지 부부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는데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애지중지하며 키웠어요. 두더지 딸이 쑥쑥 자라 어느새 시집갈 나이가 되자 여기저기서 신랑감들이 찾아왔어요. 하지만 하나같이 두더지 부부의 눈에 차지 않았어요. “내 딸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를 찾아 시집보낼 거야.” 두더지 영감은 아침 일찍 사윗감을 찾아 길을 떠났어요. 땅속에서만 살던 두더지 영감의 머리 위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었어요. 두더지 영감은 해를 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두더지 영감은 눈을 꼭 감은 채로 해에게 말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를 찾고 있소! 내 사위가 되어 주시오.” “하하, 나보다는 구름이 힘이 더 세다오.” 두더지 영감은 구름에게 사위가 되어 달라고 말했어요. “나는 해와 달을 가릴 수 있으나 바람이 불면 날아가니, 바람이 나보다 힘이 더 세다오.” 두더지 영감은 바람을 찾아가 사위가 되어 달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바람도 두더지 영감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어요. 두더지 영감은 하는 수 없이 힘이 센 사윗감을 찾기 위해 터벅터벅 먼 길을 떠났어요. 길을 가는 도중 밭 가운데에 있는 돌부처가 무척이나 힘이 세 보였어요. “내 사위가 되어 주시오.” 두더지 영감이 돌부처에게 사위가 되어 달라고 사정했지만, 돌부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 돌부처가 흔들흔들하더니 바로 아래서 젊은 두더지 한 마리가 튀어나왔어요. 두더지 영감은 드디어 사윗감을 찾았다고 기뻐했어요. “여보게, 젊은이! 내 사위가 되어 주게.” 젊은 두더지는 두더지 영감의 예쁜 딸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먼 옛날 개울가에 청개구리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어요.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뭐든 반대로만 했지요. 밖에 나가서 놀라고 하면, 집 안에 틀어박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어요. 또 밥을 먹을 때 천천히 먹으라고 하면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켰어요. 그리고 산으로 가라 하면 물로 가고,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갔지요. 어머니는 아들 때문에 걱정을 하다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마지막 유언을 말했지요. “얘야, 내가 죽거든 산에 묻지 말고, 개울가에 묻어 다오.” 어머니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어요. 사실 어머니는 산에 묻히고 싶었지요. 하지만 늘 반대로 하는 아들이 산에 묻어 달라고 하면 개울가에 묻어 줄까 봐 일부러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말했던 거예요.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늘 반대로 했던 지난날을 후회했어요. 아들은 지금부터라도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라도 들어 드려야지.” 어머니의 깊은 생각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아들은 어머니를 개울가에 묻었어요. 그런데 비만 내리면 개울물이 불어서 어머니를 묻은 무덤까지 물이 차올랐어요. 아들은 비가 내리면 물이 불어서 어머니의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걱정이 되어 밤새도록 울었어요. “개굴개굴, 개굴개굴!” 옛날에 몹시 게으른 사람이 살았어요. 게으름뱅이는 일은 하지도 않고 날마다 맛있는 음식이나 먹으면서 빈둥빈둥 놀기만 했어요. 봄이 되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모내기도 하고, 밭도 갈았지만 게으름뱅이는 여전히 일을 하지 않았어요.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도 모두 아내 몫이었어요. “당신도 누워만 있지 말고 일 좀 해요.” 밥만 먹으면 누워서 빈둥거리는 게으름뱅이에게 아내가 싫은 소리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어느 해 여름,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자, 마을 사람들은 샘을 파느라 고생을 했어요. 아내는 샘에서 물을 길어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밭에 뿌리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하지만 게으름뱅이는 여전히 툇마루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었어요. 아내는 그런 남편이 야속해 흔들어 깨우며 잔소리를 했어요. “당신은 하루 종일 잠만 자는구려. 마을 사람들과 같이 샘도 파고, 집안일도 하면 얼마나 좋아요. 이젠 나도 당신처럼 빈둥거리며 놀아야겠어요.” “어유, 또 잔소리를 늘어놓네. 차라리 집을 나가 혼자 사는 것이 낫겠군.” 게으름뱅이는 아내가 틈틈이 짠 베 두 필을 괴나리봇짐에 넣고 집을 나왔어요. 게으름뱅이가 고개를 넘어가는데 전에 보지 못한 오막살이집 앞에서 한 노인이 나무를 깎아 소 탈을 만들고 있었어요. 게으름뱅이는 노인이 소 탈을 무엇에 쓰는지 궁금했어요. “할아버지, 소 탈은 무엇에 쓰려고 만드세요?” “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이걸 쓰면 좋은 일이 생긴다오.” 게으름뱅이는 귀가 번쩍해 소 탈을 한번 쓰게 해 달라고 노인에게 부탁했어요.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소 탈을 얼른 게으름뱅이의 얼굴에 씌웠어요. 그런데 탈이 얼굴에 달라붙더니 순식간에 게으름뱅이는 진짜 소가 되고 말았어요. 노인은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끌고 장으로 갔어요. ‘나는 소가 아니라 사람이야!’ 게으름뱅이가 소리를 쳤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음매! 음매! 소 울음소리뿐이었어요. 소를 사려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게으름뱅이는 해가 질 무렵 한 농부에게 팔렸어요. 노인은 농부에게 고삐를 넘겨주면서 말했어요. “이 소는 무를 먹으면 죽으니, 절대 무 밭 가까이에 두지 마시오.” 농부에게 끌려간 게으름뱅이는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을 했어요. 무거운 쟁기를 지고 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잔뜩 실은 달구지를 끌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려고 하면 농부는 철썩철썩 고삐로 게으름뱅이를 때렸어요. 게으름뱅이는 밤이면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어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 참 그때 노인이 무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지.’ 이튿날 무 밭을 지나던 게으름뱅이는 농부가 한눈파는 사이에 얼른 달려가 무를 뽑아 우적우적 먹었어요. 그러자 온몸에 난 털이 사라지고, 뿔이 쑥 빠지더니, 얼굴에 쓴 소 탈이 툭 떨어져 나갔어요. 게으름뱅이는 다시 사람이 되었어요. 게으름뱅이는 깜짝 놀란 농부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게으름뱅이는 지난날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게으름뱅이가 고개를 넘어가는데 오막살이집이 있었던 자리에 베 두 필이 들어 있는 괴나리봇짐만 놓여 있었어요. 집에 돌아온 게으름뱅이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깊은 산골 마을에 부지런한 나무꾼이 살았어요. 나무꾼은 날마다 산에서 나무를 베다 팔았어요. 쿵쿵쿵 나무꾼이 도끼로 아름드리나무를 찍는 소리가 숲 속에 퍼져 나갔어요. 나무꾼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도끼를 쥔 손에도 땀이 흥건했어요. “아, 이제 조금만 더 찍으면 쓰러지겠군.” 나무꾼이 도끼를 들어 올리는 순간 손에서 도끼가 휙 빠져나가더니 연못 한가운데에 풍덩 빠지고 말았어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도끼가 호수에 빠졌네.” 나무꾼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바로 그때 물이 출렁거리더니 연못 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났어요. 산신령은 나무꾼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어요. “하나뿐인 도끼가 연못에 빠졌습니다.” 산신령은 연못 속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났어요. 산신령은 나무꾼에게 금도끼와 은도끼를 차례로 보여 주며 나무꾼의 것이냐고 물었어요. 하지만 정직한 나무꾼은 자신의 도끼는 낡은 쇠도끼라고 말했어요. 산신령은 나무꾼을 칭찬하며 금도끼와 은도끼, 쇠도끼를 모두 주었어요. 나무꾼은 금도끼와 은도끼를 팔아 부자가 되었어요. 나무꾼의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 욕심쟁이 나무꾼도 쇠도끼 한 자루를 가지고 산으로 갔어요. 욕심쟁이 나무꾼은 툭툭 도끼질하는 시늉만 내다 도끼를 연못에 던졌어요. 그러고는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며 울었어요. “아이고, 어쩌나! 도끼가 연못에 빠졌네.” 잠시 뒤 출렁출렁 물결이 일더니 산신령이 나타나 욕심쟁이 나무꾼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어요. 욕심쟁이 나무꾼은 나무를 하다가 도끼가 연못에 빠졌다고 산신령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산신령은 연못 속에 들어가 금도끼와 은도끼를 가지고 나왔어요.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 “네, 금도끼는 물론 은도끼도 제 것입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썩 물러가라.” 산신령의 불호령에 깜짝 놀라 산을 내려온 욕심쟁이 나무꾼은 금도끼, 은도끼는 얻지도 못하고, 쇠도끼만 잃게 되었어요. 옛날 동해에 멸치라는 물고기가 살았어요. 멸치는 삼천 년 동안 정성을 다해 도를 닦으며, 매일 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다렸지요. 어느 날 멸치는 압록강 건너 요동 평야만큼, 충청도 강경 벌만큼 아주 넓고 큰 꿈을 꾸었어요. 잠에서 깬 멸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지요. ‘보통 꿈이 아니야. 아무래도 해몽을 잘하는 망둥이에게 물어봐야겠어.’ 멸치는 가자미에게 편지를 써 주면서 서해에 사는 망둥이에게 전하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망둥이를 모셔 오라고 말했지요. 맵시 있게 옷을 입은 가자미는 모자에 편지를 꽂고 먼 길을 떠났어요. 밤낮 쉬지 않고 헤엄친 가자미는 서해에 있는 망둥이 집에 도착했어요. 망둥이의 집이 어찌나 크고 으리으리한지 가자미는 저절로 기가 죽어 코가 바닥에 닿도록 망둥이에게 인사를 하고 멸치가 준 편지를 건네주었지요. “허, 이렇게 친절하게 편지를 하였으니 안 갈 수 있나? 네가 앞장을 서라!” 망둥이는 가자미를 따라 동해로 갔어요. 멸치는 망둥이를 위해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 잔치를 벌였어요. 망둥이는 멸치에게 꿈 이야기를 자세히 해 달라고 했지요. “몸이 하늘로 쑥 올라갔다가 땅으로 뚝 떨어지고, 남의 걸음도 걸어 보고, 갑자기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가 하더니 갑자기 화끈화끈 덥다가 오슬오슬 추워지더이다.” 가만히 멸치의 꿈 이야기를 듣던 망둥이는 무릎을 탁 치며 꿈을 풀이해 주었어요. “하하하, 틀림없이 용이 될 꿈입니다! 용이 되었으니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하고, 훨훨 구름도 타고 다니며, 해에 가까이 갔으니 뜨겁고,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니 추운 것입니다.” “허어, 역시 소문대로 꿈풀이가 대단하십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멸치와 망둥이가 서로를 치켜세우며 덕담을 나누었어요. 그런데 그 옆에 있던 가자미는 먼 길을 다녀온 자신한테 수고했단 말도 없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란 말도 하지 않자 심술이 났지요. “용은 무슨 용? 구렁이도 못 될걸! 나보고 꿈풀이를 하라고 하면 그렇게 엉터리로는 안 하지.” 멸치는 가자미의 말에 버럭 화를 내더니 꿈풀이를 잘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불호령을 쳤어요. 가자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꿈풀이를 시작했지요. “흠흠, 딱 낚시에 걸릴 꿈이지요.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온 시골 영감이 서울에서 사 가지고 온 바늘로 낚싯대를 만들어 바다에 담갔어요. 그때 멸치가 낚시에 걸려 쑥 올라갔다 땅으로 툭 던져져 영감이 집으로 가져갔어요. 석쇠에 올린 멸치에 솔솔 소금을 뿌리고, 불이 잘 붙으라고 부채질까지 하니 뜨거웠다 추웠다 하는 거지요. 그 꿈은 용이 될 꿈이 아니라 곧 죽을 꿈이에요.” 멸치가 몹시 화가 나서 버럭 화를 내자 깜짝 놀란 망둥이는 눈이 툭 튀어나오고, 가자미는 멸치에게 얻어맞아 두 눈이 한쪽으로 몰렸어요. 그 옆에 있던 물메기는 가자미에게 밟혀 머리가 납작하게 되었는데 하도 웃어서 입이 귀까지 쭉 찢어졌어요. 꼴뚜기는 얻어맞을까 봐 미리 눈을 꽁무니에 차고, 병어는 웃음을 참다가 입이 뾰족해졌지요. 동해에 사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바뀐 것은 멸치의 꿈 때문이라고 해요. 옛날 전라도 영암 덕천 마을에 덕진이라는 처녀가 살았어요. 덕진은 굽이굽이 흐르는 영암천 강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주막을 했어요. 마음씨 고운 덕진은 주막을 찾는 손님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했어요. 그리고 불쌍한 거지가 오면 자기 밥도 내어 주고, 돈이 없는 손님에게 공짜 밥을 주기도 했어요. 그동안 덕진이 남에게 내어 준 쌀은 거의 수백 가마니나 될 정도였어요. 덕진은 비록 많은 돈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늘 즐거운 마음으로 남을 도우면서 살았어요. 어느 해 덕천 마을로 부임해 온 원님은 심보가 아주 고약했어요. 원님은 백성들이 힘들게 농사지은 곡식을 빼앗는가 하면, 돈을 받고 죄인들을 풀어 주기도 했어요. 하루는 아이를 가져 배가 남산만 해진 거지 여인이 찾아와서 아이를 낳을 곳이 없으니 마구간에서라도 머물며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사정했어요. 하지만 원님은 이 여인에게 달랑 짚 한 단을 던져 주고 내쫓았어요. 백성들은 욕심 많고 인색한 원님을 미워했지요. 어느 날 밤, 원님은 갑자기 저승사자에게 끌려가 무시무시한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어요. 원님은 염라대왕에게 무조건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어요. “아이고, 염라대왕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흠, 저승 장부부터 봐야겠군.” 저승 장부를 뒤적뒤적 들추던 염라대왕의 얼굴빛이 어두워졌어요. “아직 죽을 때가 안 된 사람을 누가 데려왔단 말이냐? 당장 돌려보내라!” 염라대왕의 말에 원님은 뛸 듯이 기뻤지만 저승사자는 다시 데려다 주기가 귀찮아서 미적거렸어요. “통행료라도 내라! 올 때는 그냥 와도, 갈 때는 그냥 갈 수 없느니라.” 하지만 원님은 자다가 끌려와서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저승사자는 할 수 없이 저승 곳간으로 원님을 데려갔어요. 그곳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는 곳간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할 때마다 곳간에 재물이 쌓였어요. 저승사자가 원님의 이름이 적힌 곳간을 열자 달랑 짚 한 단밖에 없었어요. 얼마 전 아이를 가진 거지 여인에게 던져 준 짚단이었지요. 부끄러워서 벌겋게 달아오른 원님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하던 저승사자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어요. “쯧쯧, 자네도 덕진의 저승 곳간에서 빌려야겠구먼!” 저승사자가 원님 곳간 바로 옆에 있는 덕진의 저승 곳간을 열어 보니 쌀가마니가 수북이 쌓여 있었어요. 어쩔 수 없던 원님은 덕진의 저승 곳간에서 곡식 삼백 가마니를 꾸어서 저승사자에게 주고 세상으로 돌아왔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원님은 덕진이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찾았어요. 원님은 영암천 강가에서 주막을 하는 덕진을 찾아가 쌀 삼백 가마니를 차곡차곡 마당에 쌓아 놓았어요. “내 지난밤 저승에서 빌린 쌀 삼백 가마니를 갚으러 왔소.” “저는 원님께 쌀을 꾸어 드린 일이 없습니다.” 얼떨결에 쌀 삼백 가마니를 받은 덕진은 실제로 원님에게 쌀을 꾸어 준 일이 없으니 그 쌀을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덕진은 원님에게 받은 곡식을 팔아서 강에 다리를 놓았어요. 다리로 편하게 강을 건너게 된 마을 사람들은 덕진의 고운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기 위해 이 다리를 ‘덕진 다리’라고 불렀어요. ‘덕진 다리’는 한국구비문학대계 6-2에 실려 있으며, 저승에 있는 곳간의 원전이에요.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삼 형제가 살았어요. 삼 형제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하나씩 있었지요. 첫째는 눈이 밝은 재주를 가졌어요. 눈이 아주 밝아서 뭐든지 잘 보는데, 아무리 멀리 있는 것이라도 다 보았어요. 그리고 무엇이든지 꼭꼭 숨겨 놓은 것도 잘 보았어요. 산 너머 동네에서 보리방아 찧는 것도 보고, 두더지가 땅속에서 잠자는 것도 보았지요. 둘째는 힘이 장사였는데 무거운 것을 잘 드는 재주를 가졌어요. 집채만 한 바위도 들고, 보리 열두 가마도 한 번에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멨지요. 셋째는 매를 견디어 내는 재주가 있었어요. 신통방통한 것은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펄펄 힘이 살아난다는 것이었어요. 회초리로 때리면 간지럽다고 낄낄 웃고, 몽둥이로 때리면 시원하다고 껄껄 웃었지요. 어느 해, 삼 형제가 사는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었어요. 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벼도 심지 못하고, 겨우 밭에 농작물을 심었지만 모두 타들어 가 흉년이 들었지요. 여름이 되자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저수지도 말라 가고 우물도 말랐어요. 흉년이 들자 마을 사람들 모두 굶어 죽게 되었어요. 삼 형제네 집도 밥을 못 지은 지 오래되어 부뚜막에 먼지가 뽀얗게 앉았지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삼 형제도 가뭄에는 어쩔 수 없었어요. 어느 날, 삼 형제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어요. 눈이 밝은 첫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소리쳤지요. “와, 원님이 사는 관아 곳간에 가득 쌓인 쌀가마니가 보인다!” 쌀가마니가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온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했어요. 삼 형제는 쌀가마니를 꺼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궁리를 했지요. 그날 밤, 삼 형제는 몰래 관아로 들어가 곳간 문을 열었어요. 둘째는 쌀가마니를 수십 가마씩 어깨에 짊어지고 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삼 형제가 문 앞에 갖다 놓은 쌀로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어요. 하지만 관아는 발칵 뒤집혔어요. 곳간이 텅 빈 것을 알게 된 원님은 노발대발하면서 쌀가마니를 훔쳐 간 도둑을 잡으라고 호령을 했지요. 포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침에 밥을 해 먹은 마을 사람들을 관아로 끌고 갔어요. 그때 셋째가 나서며 말했어요. “간밤에 내가 쌀가마니를 훔쳤으니 나를 잡아가시오.” 포졸들에게 끌려간 셋째는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았어요. 셋째는 ‘철썩’ 하고 곤장을 맞을 때마다 시원하다고 말했지요.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더 큰 몽둥이로 때려 달라고 말했어요. 원님은 셋째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몹시 화가 나서 소리쳤어요. “여봐라, 저 도둑놈을 매우 쳐라!” 원님의 명령에 포졸들은 돌아가면서 곤장을 쳤지만, 그럴수록 셋째는 더 기운이 솟았어요. 포졸들은 힘이 들어서 쓰러지고, 원님은 화병에 쓰러졌지요. 셋째가 풀려나자 마을 사람들은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삼 형제를 칭찬했어요. 그리고 오랜만에 비가 내려 가뭄에서도 벗어났어요. 그 뒤로도 삼 형제는 마을 사람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지요. 옛날 옛날 깊은 산골에 할머니 혼자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할머니가 팥 밭을 매고 있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호랑이는 금세라도 달려들어 할머니를 꿀꺽 삼킬 것 같았어요. “호랑이야, 이제 다 늙고 혼자 사는데 지금 죽은들 어떻겠니? 하지만 내가 이 밭을 매느라 고생했으니 팥을 거두어 팥죽이라도 쑤어 먹은 다음에 잡아먹으렴.” 할머니의 말에 호랑이는 곰곰이 생각하다 겨울에 오기로 하고 산속으로 사라졌어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가을이 되자 할머니는 통통하게 여문 팥을 수확했어요.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동짓날, 할머니는 가마솥 가득 팥죽을 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아이고, 이것이 마지막 팥죽이구먼.” 보글보글 끓는 구수한 팥죽 냄새가 집 안에 풍겼어요. 그때 알밤 한 톨이 데굴데굴 굴러 왔어요. “할머니, 왜 울고 계세요?” “이 팥죽을 먹고 나면 오늘 저녁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되어 운단다.” 알밤은 할머니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면 도와주겠다고 말했어요. 알밤은 할머니가 퍼 준 팥죽을 호로록호로록 맛있게 먹고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어요. 할머니는 서러움이 밀려와 또 울었어요. 그때 자라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왔어요. “할머니, 맛있는 팥죽 앞에서 왜 우세요?” 할머니가 호랑이 이야기를 하자 자라는 팥죽 한 그릇만 주면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자라는 팥죽을 맛있게 먹고 난 뒤 할머니를 돕기 위해 물 항아리 속에 숨었어요. 자라 뒤로 줄줄이 개똥과 송곳, 멍석과 지게가 나타나 할머니에게 따뜻한 팥죽 한 그릇씩을 얻어먹고 할머니를 돕기 위해 집 안 곳곳에 숨었어요. 해가 지고 날이 어두컴컴해지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할머니 집에 나타났어요. 방 안에 있던 할머니는 호랑이 그림자만 보고도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어요. “할멈, 지난봄에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먼저 팥죽이나 한 그릇 주소.” “그럼, 팥죽은 부엌에 있으니 직접 떠먹어라. 부엌 안이 어두우니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헤치면서 먹어야 한다.” 호랑이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부엌으로 들어갔어요. “어흥, 이렇게 캄캄해서 아궁이를 헤치면서 팥죽을 먹으라고 했군.” 호랑이가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들쑤시자 뜨거워진 알밤이 톡 튀어나와 호랑이의 얼굴을 때렸어요. “앗, 뜨거워!” 호랑이가 물 항아리에 앞발을 넣는 순간 자라가 덥석 물었어요. 호랑이는 너무 아파 펄쩍펄쩍 뛰다가 개똥을 밟고 찍 미끄러졌어요. 그러고는 부엌 바닥에 서 있던 날카로운 송곳에 엉덩이를 푹 찔렸어요. 호랑이는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마당에 펼쳐져 있던 멍석에 돌돌 말렸어요. 사립문 앞에 기대 있던 지게가 기다렸다는 듯이 멍석에 말린 호랑이를 짊어지고는 깊은 강물에 던져 버렸어요. 옛날에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비단을 팔러 다니는 장수가 있었어요. 비단 장수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자 비단을 내려놓고 장승 옆에서 잠시 쉬었어요. 산들산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비단 장수는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한참 시간이 지나고 잠에서 깬 비단 장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어요. “으악, 내 비단! 내 비단이 없어졌어!” 장승 옆에 내려놓은 비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비단 장수는 정신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비단을 찾았어요. 하지만 비단 짐을 진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지요. 크게 실망한 비단 장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자 한 사람이 다가와 일러 주었어요. “우리 원님을 찾아가 보시오. 우리 원님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다오.” 비단 장수는 희망을 안고 한달음에 관아로 달려갔어요. 그러고는 원님에게 비단을 잃어버린 사연을 이야기하고는 꼭 찾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원님은 비단 장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어요. 잠시 뒤, 원님은 포졸들에게 무덤 옆에 있는 장승을 끌고 오라고 명령했어요. “장승을요? 아니 그 나무를 가져다 어떻게....” 포졸들이 쭈뼛거리자 원님은 다시 큰소리로 장승을 뽑아 오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포졸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비단 장수가 잠들었던 동네 어귀로 우르르 몰려갔어요. 그러고는 커다란 장승을 뽑아 오랏줄로 꽁꽁 묶어 관아로 끌고 갔어요. 원님이 장승을 재판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 나갔어요.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관아로 모여들었어요. 원님은 형틀에 묶인 장승을 향해 소리쳤어요. “네 이놈, 어서 비단을 가져간 자가 누군지 말해라!” 관아에 원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어요. 하지만 나무에 불과한 장승이 대답을 할 리가 없었어요. “어허, 말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구나. 여봐라, 장승이 말을 할 때까지 매우 쳐라!” 포졸들이 원님의 명령을 듣고 곤장으로 장승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희한한 재판 과정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은 웃음을 꾹 참고 키득거렸어요. 하지만 장승을 내리치던 곤장이 뚝 하고 부러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관아가 떠나갈 듯이 웃었어요. “감히 재판 중에 웃다니, 이 버릇없는 사람들을 모두 옥에 가두어라!” 마을 사람들은 웃음을 뚝 그치고 원님에게 싹싹 빌었어요. “사흘 안으로 비단을 한 필씩 구해 오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비단을 구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한꺼번에 많은 비단을 쉽게 구할 수 없었지요. 사흘 째 되던 날, 마을 사람들은 비단을 한 필씩 구해 관아 마당에 쌓아 놓았어요. “이것이 자네가 잃어버린 비단인지 확인해 보아라!” “원님, 여기 있는 비단들은 모두 제가 잃어버렸던 비단이 틀림없습니다.” 원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비단을 판 장사꾼을 잡아 오라고 시켰어요. 비단을 판 장사꾼이 바로 도둑이었어요. 비단을 훔쳐 간 도둑은 옥에 갇히고, 원님은 비단 장수에게는 조심하라고 일렀어요. 마을 사람들은 원님의 지혜로운 판결에 감탄을 했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양반이 살았어요. 양반은 5대 독자인 아들을 어려서부터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웠어요. 아들은 장가갈 나이가 되었지만 도통 세상 물정을 몰랐어요. 양반은 아들을 장가보낼 생각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저래 가지고는 장가를 가도 얼마 못 가 재산을 다 바닥낼 거야. 똑똑한 며느리를 얻어야, 우리 살림도 지키고, 아들도 배우겠지.” 어느 날, 양반은 ‘쌀 한 말을 가지고 세 식구가 석 달을 먹고살면 며느리를 삼겠다.’라는 소문을 여기저기에 냈어요. 이 양반집이 워낙 부자여서 여기저기서 며느리가 되겠다고 아가씨들이 몰려들었어요. 양반은 며느리가 되겠다는 아가씨가 오면 하인 부부를 딸려서 따로 살 곳을 마련해 주었어요. 그러고는 딱 쌀 한 말만 갖다 주고 석 달을 살라고 했어요. 아가씨들은 처음에는 쌀 한 줌씩 넣어 죽을 쑤어 하루에 두 번만 먹고 버텼지만 한 달도 못 가 쌀이 떨어졌어요. 아껴 먹던 아가씨도 쌀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어요. 양반은 석 달을 못 채우고 돌아가는 아가씨들을 보고 몹시 실망했어요. “어휴, 지혜로운 며느릿감을 찾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이웃 마을에 아주 가난한 농사꾼이 살았어요. 농사꾼에게는 시집갈 나이가 된 딸이 있었지만 너무 가난해서 시집보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어요. 농사꾼 딸도 양반집에서 며느릿감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아버지, 건넛마을 양반집에서 쌀 한 말로 세 식구가 석 달을 살면 며느리로 삼겠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한번 살아 보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사꾼 딸은 양반집을 찾아가 며느릿감 시험을 보겠다고 말했어요. 양반은 농사꾼 딸에게도 쌀 한 말과 하인 부부를 내주었어요. 농사꾼 딸은 다른 부잣집 아가씨들과 다르게 첫날부터 쌀을 푹푹 퍼서 밥을 지어 먹었어요. 하인 부부는 걱정이 되었지만 처녀는 매 끼니마다 밥을 지어 먹었지요. 그러고는 하인 부부에게 말했어요. “이제 밥도 많이 먹었으니 일을 해야지요. 저하고 아주머니는 산에 가서 나물을 캐고, 아저씨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세요. 그럼 그것을 팔아서 쌀을 사다 먹으면 되잖아요.” 세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쌀을 사 왔어요. 그 덕분에 쌀은 점점 늘어났지요. 드디어 석 달이 지나자 양반은 농사꾼 딸이 어떻게 사는지 보러 왔어요. 양반은 쌀을 가마니로 들여놓고 사는 농사꾼 딸이 마음에 들었어요. “허허, 내 마음에 꼭 드는 며느릿감을 드디어 찾았군.” 농사꾼 딸은 당당히 며느릿감 시험을 통과해 양반집 아들과 혼례를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어느 깊은 산골에 호랑이가 살았어요. 며칠째 굶주렸던 호랑이는 깡충깡충 뛰어가는 토끼를 잡았어요. 몹시 배가 고픈 호랑이는 토끼를 한입에 삼키려고 입을 쩍 벌렸어요. “호랑이님, 마침 떡을 구워 먹으려고 했는데 함께 떡을 구워 드실래요?” 호랑이는 떡이라는 소리에 입맛을 쩝쩝 다셨어요. ‘흠, 먼저 구운 떡을 먹고, 토끼는 나중에 잡아먹으면 되지.’ 토끼는 부지런히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떡처럼 생긴 조약돌을 올려놓았어요.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서 조약돌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지요. “호랑이님, 구운 떡은 간장에 찍어 먹어야 더 맛있어요. 제가 얼른 마을에 가서 간장을 가져올게요.” 토끼는 호랑이가 떡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도망을 갔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토끼가 오지 않자 호랑이는 뜨거운 떡을 덥석 집었어요. “앗, 뜨거워!” 호랑이는 뜨거워서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어다녔어요. “어흥, 토끼 따위가 나를 속이다니... 다음에 만나면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릴 거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며칠 뒤에 호랑이는 대나무 숲 근처에서 토끼를 만났어요. “어흥! 잘 만났다. 너를 한입에 삼켜 주겠다.” “호랑이님, 잠깐만요. 오늘은 제가 아주 고소한 참새구이를 해 드릴게요. 눈을 딱 감고 입만 크게 벌리고 있으면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어리석은 호랑이는 토끼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토끼는 재빨리 대나무 숲으로 가더니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어요. 불이 붙은 대나무는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 갔어요. 호랑이는 참새 떼가 날아오는 소리인 줄 알고 입을 더 크게 벌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엉덩이 부분이 뜨거워져서 눈을 떠 보니 사방이 불바다였어요. 호랑이는 겨우 대나무 숲을 빠져나왔어요. “가소로운 토끼가 나를 또 속이다니. 다음에 잡히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얀 눈이 펄펄 내리던 어느 겨울날, 호랑이와 토끼가 딱 마주쳤어요.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며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토끼는 태연하게 인사했어요. “호랑이님, 안녕하세요. 저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함께 가요. 제가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 줄게요.” 호랑이는 이번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지만 싱싱한 물고기라는 말에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풀어졌어요. 호랑이를 강으로 데려간 토끼는 돌로 쾅쾅 얼음을 깨뜨려 구멍을 냈어요. “호랑이님, 이 얼음 구멍에 꼬리를 넣고 있으면, 물고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릴 거예요. 그때 물고기를 몽땅 잡아먹으면 돼요.” 호랑이는 토끼의 말대로 얼음 구멍 속으로 꼬리를 내렸어요. 물고기들은 호랑이 꼬리를 툭툭 치며 지나갔어요. 그때마다 호랑이는 움찔움찔하며 물고기가 꼬리에 붙은 줄 알고 좋아했지요. 어느 새 토끼도 눈앞에서 사라지고 날도 어두워지자 호랑이는 일어서려고 몸을 움직였는데 꼬리가 꽁꽁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밤새도록 강에서 몸부림치던 어리석은 호랑이는 날이 밝자 사람들에게 잡혀가고 말았어요. 먼 옛날 한 마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베다 장에 갖다 팔았어요. 그런데 장에 가려면 ‘삼 년 고개’를 넘어야 했어요. 삼 년 고개는 그 고개에서 넘어진 사람은 삼 년밖에 살지 못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지요. 할아버지는 평생 나무를 지고 삼 년 고개를 넘었지만 넘을 때마다 조심조심했어요.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장에 가는 날에는 혹시 넘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 늘 조마조마했지요. “영감, 삼 년 고개를 넘어갈 때는 조심하세요.” “할멈, 걱정하지 마시오. 하루 이틀도 아닌데” 어느 날, 할아버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지게에 가득 나무를 지고 장으로 갔어요. 그날따라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나무가 팔렸어요. 할아버지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삼 년 고개의 고갯마루에 오른 할아버지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조심조심 고개를 내려왔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힘이 빠져 다리를 삐끗하더니 그만 고개에서 넘어져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어요. “어휴,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으니, 이제 삼 년밖에 못 사네!” 한참을 목 놓아 운 할아버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어요. 집에 온 할아버지는 곧바로 몸져누웠지요. 할아버지의 전에 없는 행동에 할머니가 꼬치꼬치 캐묻자 할아버지는 띄엄띄엄 자신이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다고 말했어요. “아이고, 영감이 이제 삼 년밖에 못 산다고? 우리 영감 불쌍해서 어쩌누!” 할머니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울었어요.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따라 자리에 몸져누웠어요. 할아버지가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졌어요. 마을 사람들도 모두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했지요. 하루는 한 청년이 앓아누운 할아버지를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할아버지가 오래 사실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뭐라고? 오래 사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청년은 할아버지에게 삼 년 고개에 가서 넘어지라고 말했어요. 삼 년 고개에서 한 번 넘어지면 삼 년을 살고, 두 번 넘어지면 육 년을 살고, 세 번 넘어지면 구 년을 더 살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할아버지는 청년의 말에 귀가 솔깃했지요. “그럼, 네 번을 넘어지면 십이 년을 더 살겠구먼.” 할아버지는 부리나케 삼 년 고개로 뛰어가 데굴데굴 쉴 새 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졌어요. 그 뒤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요. 옛날 아주 먼 옛날 토끼와 사슴과 두꺼비가 만나 한참을 놀다 보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어요. 토끼랑 사슴이랑 두꺼비는 서로 먼저 먹겠다고 나섰어요. 그때 토끼가 빨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어요. “우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동물이 먼저 점심을 먹기로 하자.” “좋아, 좋아.” 사슴이랑 두꺼비도 좋다고 맞장구를 쳤어요. 세 동물들 가운데 토끼가 먼저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천지가 만들어질 때 하늘에 별 박는 일을 도맡아서 했지. 내가 가장 나이가 많으니까 점심은 내가 먼저 먹을 거야.” 토끼의 말이 끝나자 사슴이 멋진 뿔을 흔들며 말했어요. “흥, 토끼야 내 말 잘 들어. 네가 하늘에 별을 박을 때 사용한 사다리를 내가 만들었지. 그 사다리는 내가 나무를 심어서 만들었으니 내 나이가 더 많겠지. 내가 먼저 점심을 먹어야 해.” 사슴의 말에 토끼는 억울해서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그때 사슴과 토끼의 말을 듣고 있던 두꺼비가 꺼이꺼이 울었어요. 갑자기 두꺼비가 울자 사슴과 토끼는 어리둥절했어요. 사슴이 두꺼비에게 우는 이유를 묻자, 두꺼비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말했어요. “나한테 아들이 셋 있었는데 각각 나무를 한 그루씩 심고 정성껏 가꾸었지. 그 나무가 자라고 자라 하늘나라에 닿을 만큼 자라자 첫째는 자기가 키운 나무를 베어 하늘에 별을 박을 때 사용한 망치의 자루를 만들었고, 둘째는 해하고 달을 박을 때 사용한 망치의 자루를 만들었어. 그리고 셋째는 나무를 베어 은하수 강을 팔 적에 사용한 삽의 자루를 만들었다네.” 말을 마친 두꺼비는 더 서럽게 꺼이꺼이 울었어요. 사슴과 두꺼비는 깜짝 놀랐지요. “여보게, 자네 아들들이 키운 나무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 은하수를 만들 때 사용한 도구가 되었는데 왜 우는가?” “흑흑, 그때 세 아들들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그만 죽었다네. 자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갑자기 아들들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사슴과 토끼는 두꺼비를 위로했어요. 그리고 점심은 두꺼비가 가장 먼저 먹었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한 가난한 농부와 심술보가 가득한 부자 영감이 살았어요. 가난한 농부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을 했지만,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어요. 끼니를 거르는 이웃에게 쌀도 나누어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도 벗어 주었지요. 부자 영감은 욕심도 많고 이웃은 물론 가족에게도 인색했어요. 부자 영감은 자기 손에 한번 들어온 물건은 절대 내놓지 않았고, 이웃에게 빌린 연장도 돌려주지 않았어요. 어쩌다 이웃집 닭이 모이를 먹으러 자기 집 마당에 들어오면 닭을 가두어 놓고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어요. 어느 날 가난한 농부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부잣집 담장 너머로 생선 굽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어요.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한 농부는 생선 굽는 냄새에 코가 벌렁거렸고, 저절로 군침이 꼴깍 넘어갔어요. 농부는 부잣집을 얼른 지나가려고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먹을 것이라고는 멀건 죽에 된장뿐이니, 냄새라도 실컷 맡고 가야지.’ 이렇게 생각한 농부는 아예 부잣집 담장에 기대어 냄새를 맡았어요. ‘하얀 쌀밥 한 숟가락 위에 고기를 한 점 올려 먹어 봤으면...’ 바로 그때 저녁 먹기 전에 바람을 쐬러 나온 부자 영감의 눈에 생선 굽는 냄새를 맡고 있는 농부가 눈에 띄었어요. 부자 영감은 부리나케 농부에게 가서 버럭 화를 냈어요. “아니, 남의 집에서 나오는 생선 굽는 냄새를 공짜로 맡다니!” 구수한 냄새에 온통 신경을 빼앗겼던 농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무안해진 농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했어요.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얼른 냄새 맡은 값을 내놓게.” “아니, 냄새만 맡았는데도 값을 내야 한단 말이오?” “당연하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저 생선은 내가 직접 장에 가서 열 냥이나 주고 사 온 생선이니, 반값이라도 내게.” “반값이라니? 반값이면 다섯 냥을 내라는 것이오?” 농부와 부자 영감은 냄새 맡은 값을 놓고 옥신각신했어요. 하지만 막무가내로 나오는 부자 영감의 억지에 눌려 농부는 돈을 주기로 약속했지요. 힘없이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한숨을 내쉬는 농부를 보고 아내가 미주알고주알 캐물었어요. 농부는 하는 수 없이 낱낱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아내도 기가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그때 부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어요. “아버지, 냄새 맡은 값은 주기로 하셨나요?” “어찌나 막무가내로 닷 냥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지 주기로 했단다. 내일모레 할아버지의 제사 때 쓸 닷 냥이 있기는 한데, 제사는 물만 떠 놓고 지낸단 말이냐?”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게 좋은 수가 있으니 그 돈을 제게 주세요.” 다음 날 아침 일찍 농부의 아들은 여러 명의 친구와 함께 부자 영감을 찾아갔어요. “어르신, 냄새 맡은 값을 갚으러 왔습니다.” 그 소리에 부자 영감은 희색만면하여 얼른 밖으로 나왔어요. 부자 영감이 손을 내밀자 농부의 아들은 엽전 닷 냥을 짤랑짤랑 흔들며 말했어요. “어르신, 돈 소리 들으셨지요? 저희 아버지가 생선 굽는 냄새만 맡았으니, 어르신께서도 닷 냥 소리만 들으셔야지요.” 농부의 아들 말에 약이 오른 부자 영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어요. 아들의 지혜로 무사히 제사를 지낸 농부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아주 먼 옛날 남해를 다스리는 용왕이 큰 병에 걸렸어요. 먼 바다에서부터 용하다는 의원이 몰려오고, 몸에 좋다는 온갖 약을 지어 먹었지만 용왕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하루는 아주 먼 바다에서 온 의원이 찾아와 용왕의 맥을 짚어 보고 말했어요. “용왕님의 병은 땅에 있는 토끼의 간을 먹어야 낫습니다.” 용왕은 신하들에게 땅에 사는 토끼의 간을 구해 오라고 명령했어요. 신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뜻 나서지 않을 때 맨 끝자리에 있던 자라가 말했어요. “용왕님, 제가 땅 위에 올라가 토끼를 잡아 오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토끼의 얼굴을 모르니 그림을 그려 주십시오.” 용왕은 급히 화가를 불러 토끼 그림을 그리게 했어요. 화가는 두 귀는 길쭉하고, 두 눈은 동글동글, 털은 보들보들, 앞다리는 짧고, 뒷다리는 긴 토끼의 그림을 그렸어요. 자라는 토끼의 그림을 등에 지고 육지를 향해 쉬지 않고 헤엄을 쳤어요. 마침내 땅에 도착한 자라는 엉금엉금 기어서 토끼를 찾아다녔어요. 온종일 산속을 헤매던 자라의 눈에 그림과 똑같이 생긴 토끼가 눈에 띄었어요. “토끼님! 저는 용궁에서 온 별주부 자라입니다. 용왕님께서 지혜로운 토끼님의 소문을 듣고 토끼님을 용궁으로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저와 함께 용궁으로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십시오.” 토끼는 둥글넓적하고 솥뚜껑처럼 생긴 동물이 난데없이 나타나 칭찬을 늘어놓자 귀가 솔깃했어요. 자라가 용궁 자랑을 늘어놓자 토끼는 호기심이 생겨 자라를 따라나섰어요. 토끼를 태운 자라는 휘적휘적 신 나게 헤엄을 쳤어요. 토끼는 물속에 처음 들어와 더럭 겁이 났지만 금세 화려한 산호와 신기한 물고기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와, 정말 멋있는데.” 토끼는 진주로 꾸민 멋진 용궁을 보고 감탄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용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몰려와 토끼를 끈으로 꽁꽁 묶어 용왕님 앞으로 데려갔어요. “토끼야, 네 간을 먹어야 내 병이 낫는다니 얼른 간을 꺼내 다오.” 용왕의 말에 토끼는 깜짝 놀랐어요. 그제서야 자신이 자라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토끼는 꾀를 냈어요. “아이고, 용왕님! 자라가 미리 말을 하였다면 간을 가져왔을 텐데, 제 간을 탐내는 이가 하도 많아서 바위틈에 꼭꼭 숨겨 놓고 다닌답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얕은 수를 쓰느냐. 여봐라, 어서 토끼의 배에서 간을 꺼내라.” “용왕님,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제 항문을 보면 구멍이 세 개 있는데, 하나는 똥을 누는 곳이고, 또 하나는 오줌을 누는 곳이고, 마지막 하나는 간을 꺼냈다 넣었다 하는 구멍이지요.” 신하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토끼의 엉덩이를 봤어요. 토끼의 엉덩이에는 정말 구멍이 세 개 있었어요. 용왕은 토끼를 잘 달래서 간을 얻을 생각을 했어요. “토끼야, 깜짝 놀랐느냐. 내가 장난을 좀 친 것이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용왕은 토끼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어요. 그러고는 자라와 함께 땅에 가서 간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토끼는 용왕과 신하들의 배웅을 받으며 자라와 함께 용궁을 떠났어요. 깊고 깊은 바닷속을 지나 드디어 땅에 도착하자 자라는 토끼에게 빨리 간을 가져오라고 재촉했어요. “어리석은 자라야, 세상에 간을 빼 놓고 다니는 동물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가 나를 속인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나, 너의 충성심을 생각해 그냥 보낸다.” 토끼는 자라의 뺨을 한 대 철썩 때리고는 숲 속으로 깡충깡충 뛰어갔어요. 자라는 그때 토끼에게 세게 얻어맞아서 목이 들락날락하게 되었다고 해요. 옛날 옛적 함경북도 백두산 석굴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았어요. 깊은 산중에서 날짐승을 잡아먹고 살던 호랑이는 어느 날 더 나이 먹기 전에 유람을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호랑이는 이 산 저 산을 구경하며 강원도 금강산까지 내려오게 되었어요. 굽이굽이 산속을 가던 호랑이는 구덩이에 빠진 개를 발견했어요. 그 구덩이는 사람들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판 덫이었지요. 호랑이가 구덩이에 들어가 덥석 개를 물자 갑자기 널문이 닫혔어요.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미끄러져 나올 수가 없었어요. 호랑이는 몇 날 며칠을 구덩이에서 울부짖었어요. 그때 지나가던 스님이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쯧쯧, 어쩌다 구덩이에 빠졌지?” “어흥, 스님 저를 살려 주세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호랑이는 스님에게 구덩이에서 꺼내 달라고 애처롭게 말했어요. 스님은 아무리 무서운 짐승이라도 구덩이에서 죽게 둘 수가 없었어요. 스님은 통나무를 구해다 구덩이에 내려 주었어요. 스님 덕분에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호랑이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어요. 그런데 구덩이에서 며칠을 굶은 호랑이는 얼마 못 가서 마음을 바꾸고 스님에게 갔어요. “어흥, 스님! 너무 배고파서 스님을 잡아먹어야겠습니다.” “아니,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잡아먹겠다니.” 호랑이는 스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님에게 달려들었어요. “잠깐, 네가 아무리 짐승이라도 이런 법은 없느니라. 재판이나 해 보고 잡아먹어라!” 호랑이는 어차피 잡아먹을 것 인심이나 한번 쓰기로 했어요. 스님은 커다란 칡넝쿨에게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 준 이야기를 했어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칡넝쿨이 말했어요. “사람들은 우리 칡넝쿨을 끊어다 훌훌 껍질을 벗겨 노를 만들지. 그 노로 돗자리를 만들고 모자도 만들어 팔지. 사람 따위는 잡아먹어도 돼.” 칡넝쿨의 이야기를 들은 호랑이는 의기양양해서 입을 쩍 벌리고 스님에게 달려들었어요. 바로 그때 토끼가 깡충깡충 지나갔어요. 스님이 마지막으로 토끼에게 재판을 받게 해 달라고 호랑이에게 애걸복걸하자, 호랑이는 큰 은혜를 베푸는 듯이 허락했어요. 스님은 토끼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토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어요. “이야기만 듣고는 잘 판단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호랑이님이 구덩이에 빠졌는지 처음부터 보여 주세요.” 신이 난 호랑이는 구덩이에 펄쩍 뛰어들었어요. “스님, 빨리 통나무를 치우세요.” 스님은 토끼가 시키는 대로 얼른 통나무를 구덩이에서 치웠어요.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야, 너는 구덩이 속에서 살아라.” 토끼의 재판 덕분에 살 수 있었던 스님은 토끼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깊은 산속에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토끼와 스님은 각자 길을 떠났어요. 옛날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벌을 치며 사는 총각이 있었어요. 강원도는 꿀이 많이 나는 곳이라 장에 가져가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없었어요. 총각은 꿀을 비싼 값에 팔기 위해 꿀통을 지고 서울로 갔어요. 처음 서울에 온 총각은 시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총각은 길가 옆에 꿀단지를 내려놓고 큰 소리로 외쳤어요. “꿀 사세요, 꿀!” 마침 길을 가던 서울 부자가 꿀을 파는 총각을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생각했어요. ‘여기서 꿀을 파는 걸 보니, 시골 촌놈인가 보군. 이참에 꿀을 헐값에 사야겠어.’ 서울 부자는 총각에게 슬쩍 다가가 말했어요. “어허, 요새 나라에서 꿀을 못 팔게 하는 것도 모르시오? 여기서 꿀을 팔다가는 관아에 끌려간다오.” “이 많은 꿀을 다 어떻게 하지?” “어쩐다. 멀리서 온 것 같으니 노자라도 하게 내가 다섯 냥에 꿀을 사 줌세.” 총각은 울며 겨자 먹기로 꿀을 다섯 냥에 팔았어요. 총각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저기 서울 구경을 하러 돌아다니다 시장에 들렀어요. 그런데 시장 안에서 버젓이 꿀을 파는 사람을 여럿 보게 되었어요. 총각은 꿀을 파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라에서 꿀을 못 팔게 하는데 이렇게 내놓고 팔아도 되느냐고 물었어요.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요즘 꿀 값이 좋아서 한 단지에 오십 냥을 받는다오.” 총각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총각은 어제 꿀을 판 곳에서 서울 부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어요. “꿀을 사 주셔서 감사의 인사나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 꿀이 나오는 강아지가 있어서 손님에게 대접을 하고 싶으니 꼭 한번 놀러 오십시오.” 집에 돌아온 총각은 그날부터 강아지에게 날마다 꿀을 먹였어요. 매일 꿀을 먹은 강아지는 달콤한 꿀 똥을 누게 되었어요. 서울 부자는 며칠째 총각의 말이 귀에 맴돌아 부랴부랴 강원도로 총각을 찾아갔어요. 총각은 서울 부자가 보는 앞에서 강아지가 누는 꿀을 대접했어요. 강아지가 꿀을 누는 것을 직접 확인한 서울 부자는 총각에게 강아지를 팔라고 졸랐어요. “이 꿀강아지는 안 돼요. 이 강아지 덕에 우리 식구가 먹고사는데.” 총각이 팔지 않겠다고 하자 서울 부자는 더 갖고 싶어져서 총각에게 오백 냥을 줄 테니 팔라고 했어요. 총각은 마지못해 파는 척하며 돈을 받았어요. 서울 부자가 서울로 돌아가자 총각은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어머니, 강아지를 사 간 사람이 찾아오면 제가 죽었다고 말하세요. 만약 그 사람이 제 무덤을 찾으면 빈 무덤으로 데려오세요.” 꿀강아지를 서울로 데려온 부자는 꿀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웬일인지 강아지는 구린 냄새만 나는 똥을 누었어요. 화가 난 서울 부자는 강아지를 안고 총각을 찾아갔어요. 어머니는 아들이 시킨 대로 서울 부자를 빈 무덤으로 데려갔어요. “나한테 똥강아지를 꿀강아지로 속여 팔더니 죄를 받아 죽었군.” 서울 부자는 분한 마음에 무덤 위에 올라가 앉았어요. 그때 빈 무덤 속에 있던 총각이 서울 부자의 엉덩이를 꼬챙이로 콕콕 쑤시며 말했어요. “시골 사람이라고 겁을 줘서 오십 냥짜리 꿀을 다섯 냥에 사 간 당신은 왜 안 죽었소?” 서울 부자는 귀신이 내는 소리인 줄 알고 기겁해서 도망갔어요. 옛날 옛날 한 마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사는 집이 있었어요. 어느 날, 휘영청 밝은 달이 뜨자 도둑은 싸리나무 울타리를 넘어 살금살금 마루에 올라갔어요. 그런데 마루가 낡아서 그런지 도둑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지요. 그 소리에 잠귀 밝은 할머니가 일어나 할아버지를 깨웠어요. “영감, 얼른 일어나 보시구려. 도둑이 들어왔나 봐요.” 할아버지를 깨우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도둑은 재빨리 마루 밑에 숨었어요. “도둑은 무슨? 아마 쥐들이 설치는 소리겠지.” 할아버지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어요. 도둑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옳다구나 싶어서 ‘찍찍!’ 하고 쥐 소리를 흉내 냈지요. “쥐 맞네. 저것 보시오.” “아니, 무슨 쥐 소리가 저렇게 커요?” “그런가? 그럼 쥐 잡는 고양이 소리겠지.” 할아버지는 돌아누우며 퉁명스레 말했어요. 도둑은 한숨을 돌리고 굵은 목소리로 ‘야옹야옹!’ 하며 고양이 소리를 냈어요. 하지만 의심 많은 할머니는 믿지 않았지요. “저 봐요. 무슨 고양이 소리가 저렇게 굵단 말이에요.” “아니면 고양이를 쫓아온 개인가 보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던 도둑은 할머니 말에 목을 쭉 뽑고 ‘컹컹 컹컹’ 개처럼 짖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지요. “저건 개가 짖는 소리가 아니라고요.” 그 뒤로 도둑은 소 울음소리도 내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코끼리 울음소리도 흉내 냈어요. 하지만 할머니의 의심은 계속되었지요. “영감, 그렇게 자리에 누워만 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서 밖에 좀 나가 봐요.” “도둑은 무슨? 우리 집에 뭐 가져갈 게 있다고.” 할아버지는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자 도둑은 얼른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부엌으로 갔지요. 얼떨결에 부엌으로 들어온 도둑은 마땅히 숨을 곳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 커다란 물독 속으로 들어가 바가지를 머리에 썼지요.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온 할아버지는 집 주위를 여기저기 살피더니 부엌 안으로 들어갔어요. 할아버지는 물독 앞에 서서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지요. “바가지가 낸 소린가?” 어리숙한 도둑은 할아버지의 말에 ‘박박 바가지’ 하고 소리를 냈어요. “하하, 바가지 소리 맞네.” 할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 도둑은 새벽녘에야 그 집을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러고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원전으로 보는 전래 동화 3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먼 옛날 호랑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강원도 금강산 자락에 게으름뱅이가 살았어요. 게으름뱅이는 일은 하지 않고 매일 방 안에 틀어박혀 먹고, 싸고, 잠만 잤어요. 한겨울이 지나고 한창 밭을 갈아야 할 봄이 되었지만 게으름뱅이는 여전히 일을 할 생각을 안 했어요. 보다 못한 어머니가 게으름뱅이를 밖으로 내쫓으며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든지, 밭이라도 갈든지 하라고 말했어요. 게으름뱅이는 하루 종일 산에도 올라가 보고, 장에도 기웃거리다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 날 아침, 괭이를 들고 밭으로 간 게으름뱅이는 구덩이를 팠어요. 게으름뱅이는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똥을 얻어다 구덩이에 쏟아부었어요. 그러고는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깨를 한 섬 뿌렸어요. 밭에 깨를 뿌리고 돌아온 게으름뱅이는 또 밥만 먹고, 똥만 싸고, 잠만 잤어요. 맴맴 매미가 울어 대는 여름날, 게으름뱅이는 어기적어기적 깨를 뿌려 두었던 밭으로 갔어요. 깨 밭에는 연분홍색의 깨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어요. “히히, 조금만 더 있으면 깨를 거두어들이겠군. 슬슬 장터에나 가 볼까?” 게으름뱅이는 그길로 장터에 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사서 집에 데려왔어요. 게으름뱅이는 강아지에게 맛난 것을 먹여 키웠지요. 강아지가 제법 토실토실 살이 오를 무렵 깨를 추수할 때가 되었어요. 게으름뱅이는 밭에 나가 열심히 깨를 털었지요. 게으름뱅이는 깨를 달달 볶아 기름을 짰어요. 집 안은 온통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 찼어요. 게으름뱅이는 강아지를 데려다가 기름 항아리에 담갔다 뺐다, 담갔다 뺐다를 수십 번 반복했어요. 강아지는 살이 토실토실, 털이 반질반질, 온몸에서 고소한 냄새가 폴폴 났어요. 게으름뱅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칡넝쿨로 긴 동아줄을 꼬아 강아지를 묶고, 다른 한쪽은 큰 나무에 붙들어 맸어요. 그러고는 얼른 나무 위에 올라갔어요. 강아지한테서 나는 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온 산에 퍼졌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배고픈 호랑이들이 기름 냄새를 맡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강아지를 꿀꺽 삼켰어요. 그런데 강아지가 미끄러워 호랑이 배 속을 지나서 똥구멍으로 나왔어요. 그 강아지를 다른 호랑이가 삼키면 다시 똥구멍으로 쑥 나오고, 또 다른 호랑이가 꿀꺽 삼키면 다시 똥구멍으로 쑥 나왔어요. 어느새 긴 동아줄에 호랑이가 줄줄이 꿰였어요. 호랑이 가죽을 내다 팔아 큰 부자가 된 게으름뱅이는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옛적 산골 마을에 마음씨 착한 영감님이 살고 있었어요. 영감님의 목에 기다란 혹이 늘어져 있어서 사람들은 ‘혹부리 영감’이라고 불렀지요. 혹부리 영감은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왔어요. 어느 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컴컴해졌어요. 칠흑 같은 밤, 산길을 헤매던 혹부리 영감은 허물어져 가는 빈집을 발견했어요. “허,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야겠군.” 혹부리 영감은 방에 들어가 누웠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 생각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무서워졌어요. 혹부리 영감은 두려운 마음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불렀어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바로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도깨비들이 들어왔어요. 혹부리 영감은 깜짝 놀라 벌벌 떨었지요. 그러자 도깨비 두목이 나서서 말했어요. “영감, 걱정 말고 계속 노래나 부르시오.” 혹부리 영감은 무서웠지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도깨비 두목이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렀어요. 도깨비들은 혹부리 영감의 노랫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살그머니 눈을 뜬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졌어요. 혹부리 영감은 날이 샐 무렵까지 계속 노래를 불렀어요. “영감, 도대체 그 노래는 어디서 나오는 소리요?” “어, 어디긴요, 목에서 나오지.” 도깨비 두목은 혹부리 영감의 혹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어요. “아무래도 이 혹이 노래 주머니인 것 같은데... 영감 혹을 우리에게 파시오.” “네? 혹을 어떻게... 나한테는 필요 없으니 그냥 떼 가시오.” 도깨비들은 혹부리 영감의 혹을 똑 떼어 내더니 보물이 가득 든 자루를 휙 던져 주고 우르르 몰려 나갔어요. 날이 밝자 혹부리 영감은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큰 부자가 된 혹부리 영감의 소문은 금세 이웃 마을까지 퍼졌어요. 혹부리 영감이 사는 건넛마을에 욕심쟁이 영감이 살았는데, 욕심쟁이 영감에게도 혹이 있었어요.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재빨리 산에 있는 빈집을 찾아가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어요. 도깨비들이 빈집으로 몰려오자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곧 부자가 될 생각에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도깨비 두목은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에게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냐고 물었어요. “그야 물론 이 혹에서 나오는 거라오.” “하하, 그 혹에서 나온다고? 그럼 이 혹도 영감이 가지시오.” 지난번 혹부리 영감한테서 떼어 낸 혹에서 노랫소리가 나오지 않자 심술이 났던 도깨비 두목은 그 혹을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 목에 붙이고 사라져 버렸어요.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덜렁덜렁 혹 두 개를 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옛날 아주 먼 옛날 한 마을에 가난한 농부가 살았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한 농부는 돈을 모아 밭을 샀어요. 농부는 날마다 밭에 나가 돌을 골라내고 땅을 갈았지요. 하루는 농부가 곡괭이질을 하는데, ‘쨍’ 하고 소리가 났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큰 돌인가?” 농부가 급히 밭을 파 보니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어요. 조심조심 항아리를 꺼내 요리조리 살펴보았더니 꽤 쓸 만했어요. 농부는 밭을 마저 갈고 지게에 항아리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농부는 아무 생각 없이 곡괭이를 항아리에 휙 던져두었어요. 다음 날 아침, 밭에 나갈 준비를 하던 농부가 항아리에 넣어 두었던 곡괭이를 꺼내려는데 글쎄 곡괭이가 줄줄이 나왔어요. 농부는 깜짝 놀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항아리에 쌀을 조금 넣어 봤어요. 그랬더니 하얀 쌀이 항아리에 가득 찼지요. 무엇이든 넣기만 하면 줄줄이 나오는 요술 항아리였어요. 농부는 요술 항아리 덕분에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어요. 부자가 된 농부는 가난한 이웃에게도 먹을 것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어요. 그런데 농부가 요술 항아리 때문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몹시 배가 아픈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농부에게 밭을 판 부자였지요. 부자는 한달음에 농부에게 가서 요술 항아리를 돌려 달라고 억지를 부렸어요. “빨리 항아리를 내놓게. 내가 땅만 팔았지 항아리까지 팔진 않았네.” “아니,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요술 항아리는 내가 밭을 일구다 찾아낸 것이니 내 거요.” 요술 항아리를 내놔라, 못 내놓겠다 옥신각신하던 부자와 농부는 원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어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원님은 불현듯 요술 항아리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흠흠, 서로 가지겠다고 하니 항아리를 반으로 쪼개서 가져가거라. 만약 그것이 싫으면 둘 중 한 사람이 양보를 하든가. 그때까지 이 요술 항아리는 내가 보관하고 있겠다.” 부자와 농부는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원님의 판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어요. 원님은 요술 항아리를 광에다 옮겨 놓고, 비단을 넣었어요. 그랬더니 비단이 줄줄 나왔지요. 신이 난 원님이 엽전 꾸러미를 요술 항아리에 넣자 엽전 꾸러미도 줄줄 나왔어요. 원님은 농부나 부자 누구에게도 요술 항아리를 돌려줄 생각을 안 했어요. 며칠 뒤 원님이 곤하게 자고 있는데 이른 아침 다급하게 원님을 찾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범아, 아범아! 나 좀 꺼내 다오.” 원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었어요. 원님의 아버지는 아들이 밤마다 광에 들어가 한참 만에 나오는 것을 보고, 광에 맛있는 꿀단지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날 아침 일찍 광에 들어갔는데 커다란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원님의 아버지는 요술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쑥 빠져 버렸어요. 아무것도 없는 빈 항아리 속에서 원님의 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고, 그 소리에 눈을 뜬 원님은 부리나케 옆방으로 뛰어갔어요. “아이고, 아버지! 어쩌다 항아리 속에 들어가셨어요.” 원님은 깜짝 놀라 요술 항아리 속에서 아버지를 꺼냈어요. 그런데 항아리 속에서 또 ‘살려 달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원님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원님의 아버지는 요술 항아리 속에서 줄줄이 나왔지요. 요술 항아리 속에서 나온 원님의 아버지들은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싸우기 시작했어요. “아, 내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원님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데, 서로 싸우던 아버지 중에 한 명이 요술 항아리에 부딪혔어요. 그 바람에 ‘쨍그랑’ 요술 항아리도 넘어져 산산조각이 났지요. 그러자 원님의 진짜 아버지만 남고, 다른 아버지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부터 원님은 욕심을 버리고 마을을 잘 다스렸어요. 먼 옛날 춘천에 있는 한 마을에 토목공이라는 구두쇠 영감이 살았어요. 어렸을 때는 무척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지요. 하지만 너무 인색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어요. 토목공이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장가들 나이가 되었어요. “살림이 헤픈 며느리가 들어오면 이 재산이 오래가지 못할 텐데” 토목공이는 자신이 어렵게 모은 재산을 새 며느리가 들어와 축낼까 봐 걱정이 되었어요. 토목공이 영감은 청주에 사는 자린고비 영감에게 결혼할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자린고비 영감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구두쇠였지요. 토목공이 영감은 자린고비 영감이 자기와 비교해서 재산도 비슷한 데다가 구두쇠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토목공이 영감과 자린고비 영감은 뜻이 맞아 아들과 딸을 혼례시켰어요. 자린고비의 딸은 시집온 다음 날부터 살림을 도맡아서 했는데, 친정에 있을 때부터 아끼는 것이 몸에 배어 물건을 함부로 쓰거나 버리는 일이 없었어요. 토목공이 영감 부부는 며느리가 마음에 쏙 들었지요. 하루는 며느리가 밥상을 들여왔는데 반찬이라고는 간장뿐이었어요. 간장이 종지에 가득 담겨 찰랑거렸어요. “아니, 간장을 이렇게 헤프게 먹다니, 네가 우리 집 살림을 거덜 내겠구나.” “아버님, 간장을 조금 담으면 숟가락이 종지 바닥에 닿아 숟가락이 닳을 것입니다. 또 간장을 가득 담으면 짠 생각이 들어 조금만 찍어 먹게 됩니다.” 며느리가 조곤조곤한 말씨로 설명을 하자 토목공이 영감 부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며느리를 칭찬했어요. 하루는 토목공이 영감 집으로 딸을 시집보낸 자린고비 영감이 딸이 어찌 사는지 보러 왔어요. 자린고비 영감은 자리에 앉아서 부채를 꺼내며 말했어요. “사돈, 저는 부채 하나를 사면 몇십 년을 씁니다. 부채를 다 펼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반만 펼쳐서 부채가 닳으면 다른 한쪽을 펼쳐 부칩니다.” 자린고비 영감의 자랑에 토목공이 영감이 말했어요. “하하, 나는 부채 하나로 평생을 씁니다. 부채를 활짝 편 다음 얼굴을 이렇게 흔들면 고개는 좀 아프지만 부채는 멀쩡합니다.” 토목공이 영감의 자랑에 자린고비 영감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어요. 얼마 후 저녁때가 되자 며느리가 밥상을 들여왔어요. 며느리는 오랜만에 친정아버지에게 드리려고 자반조기로 찌개를 끓였지요. 자린고비 영감은 밥상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 말했어요. “아니, 이렇게 진수성찬으로 차리면 어떻게 돈을 다 감당합니까? 자반조기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가락 떠먹고 조기를 쳐다보면 반찬 값을 아끼지 않겠습니까?” “아이코, 사돈에게 한 수 배웁니다.” 자린고비 영감의 말에 토목공이 영감이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어요. 토목공이 영감과 자린고비 영감은 죽을 때까지 아끼며 살았대요. 먼 옛날 깊고 깊은 산에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았어요. 기나긴 겨울이 시작되고 하얀 눈이 펄펄 내리자 토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지요. 며칠째 굶주린 호랑이는 해가 지자 어슬렁어슬렁 마을로 내려갔어요. 호랑이가 외양간이 있는 집 마당에 들어서는데 방 안에서 앙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요. “아가, 뚝! 사탕 줄까?” 엄마가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만, 뚝! 뚝 그치지 않으면 호랑이가 물고 간다.” 호랑이가 물고 간다는 소리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었어요. ‘아니,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지? 그런데 내가 무섭지 않다고?’ 호랑이는 멈칫하고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곶감 줄게, 뚝 그치렴.” 엄마가 곶감을 준다고 하자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어요. ‘도대체 곶감이라는 놈이 얼마나 무섭길래 울음을 그치는 거지?’ 호랑이는 우물쭈물하다 곶감에게 잡힐까 봐 외양간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그런데 호랑이보다 먼저 소를 훔치러 외양간에 들어와 있던 도둑이 재빨리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탔어요. 깜깜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도둑은 호랑이를 소로 생각했어요. 잔뜩 겁을 먹고 있던 호랑이도 도둑이 등에 올라타자 곶감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호랑이는 곶감을 떼어 내려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얼떨결에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도둑도 날이 서서히 밝아 오자 호랑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앗, 소가 아니고 호랑이잖아!’ 도둑은 호랑이가 나무 사이로 달릴 때 얼른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다가, 고목나무 구멍에 몸을 숨겼어요. 그제야 호랑이는 곶감이 떨어져 나간 줄 알고 달리는 것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어요. 바로 그때 나무 구멍에서 겨울잠을 자던 곰이 호랑이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깨어났어요. “호랑이야, 무슨 일 있어? 왜 기운이 없니?” 호랑이가 곶감 이야기를 하자 곰은 곶감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호랑이를 살살 꾀어 함께 잡아먹자고 했지요. 몹시 배고팠던 호랑이는 마지못해 곶감이 떨어졌던 곳으로 다시 갔어요. 부지런히 나무 위로 올라간 곰이 나무 구멍을 내려다보며 말했어요. “사람이다, 사람! 호랑이야, 나무 안에 사람이 있어!” 고목나무 속에 숨어 있던 도둑은 곰의 말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어요. 곰은 나무 구멍 안에 방귀를 뀌면 냄새가 고약해 도둑이 나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무 구멍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뿌우웅!’ 하고 방귀를 뀌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도둑은 허리끈을 풀러 곰의 짧은 꼬리를 묶어 잡아당겼어요. 곰이 비명을 지르자 호랑이는 무서워서 멀리 도망을 가 버렸어요.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혼자 사는 총각이 있었어요. 총각은 집이 가난해서 장가도 못 갔지요. 어느 날 밭을 갈던 총각은 문득 열심히 일을 해도 좀처럼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 한숨을 쉬며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어요. “후유, 이 농사는 지어 누구랑 먹고살까?” “나랑 같이 먹고살지.” 총각은 가냘픈 여자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총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한 번 말했어요. “이 농사는 지어 누구랑 먹고살지?” “나랑 먹고살지.” 총각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풀포기를 헤쳐 보았더니 커다란 우렁이 한 마리가 있었어요. 총각은 우렁이를 집에 가져가 항아리에 넣어 두었어요. 다음 날, 총각이 밭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방 안에 밥상이 놓여 있었어요. 밥상은 금방 차려진 듯 하얀 쌀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어요. 몹시 허기졌던 총각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어요. 밥상은 그다음 날, 그다음 다음 날도 차려져 있었지요. ‘누가 밥상을 차리는 거지?’ 총각이 하루는 너무 궁금해서 일을 하러 가는 척하고, 울타리에 숨어 부엌을 지켜보다가 깜짝 놀라 눈을 껌벅거렸어요. 글쎄 우렁이를 넣어 두었던 항아리에서 예쁜 아가씨가 나와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앗, 우렁이가 사람이 되었네?’ 총각은 얼른 부엌으로 뛰어가 아가씨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어요. “내 각시가 되어 주세요. 우렁이 각시!” “저는 하늘에서 죄를 짓고 내려온 몸이라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같이 살 수 있어요. 때가 되기 전에 같이 살게 된다면 반드시 슬픈 이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마음이 급한 총각은 아가씨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같이 살자고 졸랐어요. 하는 수 없이 아가씨는 그날부터 총각과 같이 살기로 했어요. 총각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고운 각시와 함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어요. 총각은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지요. 어느 날 총각이 일을 하는데 일이 빨리 끝나지 않았어요. 집에서 점심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던 각시는 총각이 걱정되어 점심을 가지고 길을 나섰어요. “물렀거라, 물렀거라!” 저만치서 마을 원님의 행차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자, 각시는 재빨리 풀덤불 속에 숨었어요. 그런데 그곳을 지나가던 원님이 풀덤불 속에 훤하게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서서 포졸에게 풀덤불에 가 보라고 했어요. 포졸이 풀덤불 속을 들여다보니 예쁜 여인이 한껏 웅크리고 있었어요. 각시는 포졸에게 반지와 비녀 등을 주며 사정을 했어요. “제발 저를 못 본 척해 주세요. 반지와 비녀라고 해 주세요.” 포졸도 각시가 불쌍해 모른 척해 주었어요. 하지만 풀덤불에서 계속 광채가 나자 원님은 믿지 않았지요. 원님이 버럭 화를 내자 포졸은 어쩔 수 없이 우렁이 각시를 데려왔어요. 원님은 어여쁜 우렁이 각시의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해 관아로 데려갔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던 총각은 저녁때가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각시가 없자 총각은 온 마을을 찾아다녔지요. 그때 한 사람이 우렁이 각시가 원님에게 잡혀 관아로 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순간 총각은 때를 기다리지 않으면 슬픈 이별을 하게 될 거라는 각시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총각은 관아로 달려가 애타게 각시를 불렀지만, 원님은 각시를 보내 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몇 달 동안 각시를 찾아 울던 총각은 그만 죽어서 파랑새가 되었어요. 파랑새는 날마다 각시가 사는 관아의 뜰을 날아다니며 애처롭게 울었지요. 한편 각시도 총각 생각에 병이 들어 앓다가 얼마 뒤에 죽어서 파랑새가 되었어요. 그 뒤로 그 마을에는 파랑새 두 마리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날아다니게 되었어요. 옛날에 우애가 돈독한 형제가 살았어요. 두 형제는 부모님에게도 효를 다하고, 성품도 올곧아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지요. 두 형제는 글공부도 함께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함께했어요. 어느 날 두 형제는 부모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게 되었어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강가 쪽으로 가는데 동생의 눈에 번쩍하는 것이 눈에 띄었어요. “형님, 저기 번쩍거리는 게 뭘까요? 혹시 금덩어리 같기도 한데” 형은 동생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하하, 이런 곳에 귀한 금덩어리가 떨어져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동생은 번쩍거리는 곳으로 달려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이리저리 살폈어요. “와, 금이다! 형님, 진짜 금이에요.” 동생이 주운 것은 진짜 금덩어리로,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였어요. 귀하디귀한 금덩어리를 주운 형제는 뛸 듯이 기뻤어요. 동생은 금덩어리 하나를 형에게 주었지요. 두 형제는 금덩어리를 하나씩 들고 배를 탔어요.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동생은 형이 가지고 있는 금덩어리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어요. ‘만약 형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금덩어리 두 개가 모두 내 것이 되었겠지? 그럼,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잘살았을 텐데’ 동생은 생각할수록 형님에게 준 금덩어리가 아까워, 평소에 존경하던 형님이 미워지기까지 했어요.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동생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차마 형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어요. 동생은 가지고 있던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졌어요. ‘풍덩!’ 형은 귀한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진 동생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아우야! 금덩어리를 왜 강물에 던졌느냐?” “형님, 잘못했습니다. 잠시 형님에게 드린 금덩어리가 아까워 형님이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한 금덩어리가 좋은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우의 이야기를 듣고 난 형도 얼른 가지고 있던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어요. “나도 금덩어리보다는 아우가 더 소중하네.” 서로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 두 형제는 평생 서로를 아끼며 살았어요. 먼 옛날 어느 바닷가 작은 마을에 아가씨가 살고 있었어요. 아가씨는 마음씨도 착할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뻐서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지요.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해마다 이무기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나쁜 풍습이 내려왔어요. 어느 때부터인가 무시무시한 이무기가 나타나 고깃배를 부수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큰 굿판을 벌여 용왕님께 빌었지만 이무기의 흉포는 나날이 더해 갔지요. 마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 이무기는 일 년 동안 잠잠했어요.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해마다 제물로 바칠 처녀를 제비뽑기했지요. 어느 해 아가씨도 그토록 두려워하던 제물로 뽑히게 되었어요. 아가씨와 부모님은 너무 안타까워 눈물로 시간을 보냈어요. 그 소식은 이웃 마을에도 전해졌지요. 이웃 마을에는 제물로 뽑힌 아가씨를 남몰래 좋아하던 총각이 살았어요. ‘아, 아가씨가 제물로 뽑히다니! 이대로 아가씨를 이무기의 제물로 보낼 순 없어.’ 총각은 한달음에 아가씨네 집을 찾아갔어요. 그러고는 아가씨의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섰지요. “제가 바다로 나가 괴물을 물리치고 오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총각에게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지요. 총각은 아가씨에게 다가갔어요. “아가씨, 바다로 나가 괴물을 물리치고 백 일 안에 돌아와 혼례를 올리겠습니다. 돌아올 때 내가 이기면 흰 돛을 달고, 지면 붉은 돛을 달겠습니다.” “도련님, 꼭 괴물을 물리치고 돌아오세요.” 아가씨는 듬직한 총각이 마음에 들었어요. 총각은 아가씨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바다로 나갔지요. 총각이 떠난 뒤 아가씨는 날마다 바닷가 언덕에 나가 총각이 이무기를 물리치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빌었어요. 하루하루 날이 지나 청년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백 일이 가까워졌어요. 치마저고리를 입고 처녀로 변장한 총각은 칼을 숨기고, 이무기가 나타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멀리서 ‘우르르 쾅쾅’ 하고 천둥이 울리기 시작했어요. 집채만 한 파도 속에서 이무기가 몸을 드러냈어요. 어마어마하게 큰 이무기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총각에게 달려들었어요. 바로 그때 총각은 펄쩍 뛰어오르며 단숨에 이무기의 머리를 베었지요. 이무기의 붉은 피는 사방으로 튀었어요. “크르르릉!” 이무기는 괴성과 함께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어요. 총각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아가씨가 기다리는 육지로 배를 몰았어요. 날마다 언덕에 올라 청년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가씨의 눈에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어요. “앗, 배가 돌아온다!” 그런데 기쁨으로 빛나던 아가씨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했어요. 아가씨는 붉게 물든 돛을 보고 절망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졌지요. 이무기의 머리가 잘려 나갈 때 튀었던 피가 돛을 붉게 물들였던 거예요. 총각은 몹시 슬퍼하며 아가씨를 양지바른 곳에 묻었어요. 다음 해 아가씨의 무덤가에 이름 모를 붉은색 꽃이 피어났지요. 꽃이 백 일 동안 피었다 지자, 사람들은 그 꽃을 ‘백일홍’이라 불렀어요. 옛날 먼 옛날 깊은 산골에 숯을 굽는 총각이 살았어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은 효자로 산 아래 마을까지 소문이 났지요. 총각은 구운 숯을 장에 내다 팔아서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어요. 하루는 아침 일찍 장에 숯을 팔러 갔어요. 숯을 팔아 번 돈으로 총각은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와 새 옷을 한 벌 사 가지고 부리나케 산길을 걸었어요. 하지만 서산으로 해가 꼴깍 넘어가더니 이내 산속은 어두컴컴해졌지요. 총각이 막 고갯길을 넘었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총각은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어이쿠, 이제 호랑이에게 물려 죽게 생겼네. 내가 죽고 나면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가실까?’ 총각은 자신이 죽고 나면 홀로 지내셔야 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총각은 정신을 가다듬고 호랑이에게 말했어요. “호랑이야, 날 잡아먹더라도 조금만 기다렸다가 잡아먹으렴. 어머니께 따뜻한 밥과 고깃국이라도 끓여 드리고, 마지막 인사라도 올리게 해 다오.” 총각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호랑이는 가까이 다가와 돌아앉았어요. 호랑이는 총각 앞에 등을 대고 앉아서 꼬리로 등을 툭툭 쳤어요. “호랑이야, 네 등에 올라타라는 거니?” 호랑이는 총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총각은 무서웠지만 얼른 호랑이 등에 탔어요. 총각을 등에 태운 호랑이는 바람을 가르듯이 뛰어 금세 총각을 집 앞에 내려놓았어요. “호랑이야, 어머니께 저녁을 지어 드리고 나올 테니 기다려 다오.” 총각은 눈물을 머금고 집에 들어가 어머니께 새 옷을 드리고, 얼른 밥을 짓고 고깃국을 끓여 어머니께 드렸어요. 총각은 차마 어머니께 사실대로 말씀을 못 드리고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호랑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총각은 한숨을 내쉬며 호랑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지요. 그 뒤로 총각이 장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어김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총각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장에 갔다 돌아오면서 항상 호랑이를 만나는 고개에 왔지만 호랑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총각은 혹시 늦게라도 호랑이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지요.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구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총각이 가까이 가서 보니 호랑이가 구덩이에 빠져서 ‘어흥’ 하며 울부짖고 있었어요. 바로 총각을 집까지 데려다 주던 호랑이였지요. 총각은 깜짝 놀라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아저씨, 이 호랑이를 어떻게 할 건가요?” “며칠 동안 가만히 뒀다가 굶고 지쳐서 쓰러지면 꺼내 팔아야지.” 총각은 호랑이를 구하기 위해 구덩이를 판 사람에게 숯을 판 돈을 몽땅 주고 호랑이를 샀어요. 사람들이 돌아가자 총각은 얼른 호랑이를 구덩이에서 꺼내 주었지요. 그 뒤로도 호랑이는 늘 총각을 업어다 주었어요. 그리고 총각의 어머니가 홍시가 먹고 싶다고 하면 홍시가 있는 곳으로 총각을 데려다 주고,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산딸기가 있는 곳으로 총각을 데려다 주며, 총각의 어머니께 효도를 했어요. 먼 옛날 황주 도화촌에 눈이 보이지 않아 심 봉사라 불리는 심학규가 살았어요. 심 봉사에게는 예쁘고 마음씨가 고운 곽씨 부인과 어린 딸 심청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인이 심청을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갑자기 부인을 잃은 심 봉사는 낙심하지 않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젖동냥으로 어린 심청을 키웠어요. 심청은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랐어요. 어느덧 세월이 흘러 열여섯 살이 된 심청은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었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은 심청은 삯바느질을 하거나 품을 팔아서 살림을 꾸렸어요. 이웃 마을에 사는 장 승상 부인은 착하고 부지런한 심청이 마음에 들어 수양딸을 삼고자 했어요. 하지만 심청은 아버지를 생각해 정중히 거절을 했지요. 하루는 심 봉사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심청을 마중 나갔는데 발을 헛디뎌 개울가에 빠지고 말았어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스님이 허우적거리는 심 봉사를 건져 주었어요. 스님은 심 봉사에게 부처님께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고 말했어요. 스님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심 봉사는 덜컥 공양미를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하지만 가난한 심 봉사는 공양미를 바칠 수 없어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지요. 어느 날 마을의 뱃사람들이 인당수의 제물이 될 처녀를 구하러 다녔어요. 심청은 뱃사람들을 찾아가 쌀 삼백 석만 주면 인당수의 제물이 되겠다고 했어요. 심청은 떠나는 날 아침에서야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일을 모두 말했어요. 심청의 말을 들은 심 봉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심청은 통곡을 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뱃사람들을 따라 배를 탔어요. 배를 타고 거칠게 파도치는 인당수에 이르자 심청은 바다에 몸을 던졌어요. 심청이 바다에 빠지자 거짓말같이 거세게 불던 바람도 멈추고 파도도 잔잔해졌지요. 인당수에 빠진 심청은 용궁에서 눈을 떴고, 어머니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용왕님은 심청을 시녀 두 명과 함께 연꽃에 넣고 인당수 위로 보냈어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뱃사람들이 커다란 연꽃을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어요. 임금이 연꽃을 바라보자 사르르 사르르 연꽃이 벌어지면서 심청과 시녀 두 명이 나타났어요. 깜짝 놀란 임금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 심청을 왕비로 맞아들였어요. 심청은 왕비가 되었지만 아버지 생각에 눈물짓는 날이 많아졌지요. 임금은 왕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어요. 왕비는 임금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했어요. 임금이 도화촌으로 사람을 보내 심 봉사를 찾았지만 심 봉사는 이미 마을을 떠나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간 다음, 심 봉사는 마음씨 고약한 뺑덕 어미에게 속아 한집에 같이 살게 되었어요. 심 봉사는 눈도 뜨지 못하고 뱃사람들이 준 돈을 뺑덕 어미에게 모두 빼앗겨 마을을 떠났지요. 왕비는 임금에게 봉사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잔치를 열어 달라고 간청했어요. 왕비는 아버지가 잔치에 꼭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지요. 궁궐에서 봉사들을 위한 잔치가 여러 날 계속되었지만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아 왕비는 애가 탔어요. 여비가 없어서 궁궐까지 터덜터덜 걸어온 심 봉사는 잔치 마지막 날에 겨우 도착했지요.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자 왕비는 직접 봉사들을 살펴보았어요. 그때 초라한 행색을 한 심 봉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아버지, 저 심청이에요. 아버지 딸 심청이에요.” 심 봉사는 심청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어요. 두 사람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요. 심청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고, 나라도 태평성대가 계속되었어요. 옛날 옛적 하늘나라에 사는 옥황상제에게 ‘직녀’라는 예쁜 딸이 있었어요. 직녀는 베를 짜서 비단 옷감을 만드는 솜씨가 아주 훌륭했지요. 하늘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직녀가 만든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어요. ‘직녀’라는 이름도 옷감을 잘 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어느덧 직녀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옥황상제는 직녀를 ‘견우’라는 총각에게 시집보냈어요. 견우는 소몰이를 잘해서 견우가 소를 몰아 밭을 가는 곳에서는 유난히 농사가 잘되곤 했어요. ‘견우’라는 이름은 소를 잘 모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견우와 직녀는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둘은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좋아서 베 짜는 일도, 소를 모는 일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놀러만 다녔어요. 직녀가 베를 짜지 않아서 사람들은 옷감이 모자랐고, 견우가 소를 돌보지 않고 농사일을 하지 않아서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어요. 옥황상제는 몹시 화가 나서 두 사람에게 큰 벌을 내리기로 했지요. “자기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하다니 둘 다 용서할 수 없구나! 견우는 은하수 동쪽으로 가서 살고, 직녀는 은하수 서쪽으로 가서 살아라!” 두 사람은 옥황상제에게 잘못을 빌고 또 빌었어요. 두 사람의 뉘우치는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진 옥황상제는 일 년에 딱 하루, 음력으로 7월 7일인 칠석날에만 만나게 허락해 주었지요.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으로 헤어져 살게 되었어요. 견우와 직녀는 소를 몰고 옷감을 짜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울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어요.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칠석날이 되었지만, 은하수는 너무 넓고 깊어 도저히 건널 수 없었어요. 견우와 직녀는 너무 슬퍼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지요. 칠석날에 두 사람이 흘린 눈물은 은하수를 넘쳐서 하늘 아래 세상에 비가 되어 쏟아졌어요. 이 비로 땅에 있는 곡식이 물에 잠기고 가축과 집이 떠내려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었어요. 칠석날마다 물난리가 나자 땅에 살던 짐승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의논했어요. 서로 생각을 모은 끝에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 만날 수 있게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 주자고 했어요. 하늘에 다리를 놓는 일은 튼튼한 날개가 있어 은하수까지 날아갈 수 있는 까마귀와 까치가 맡기로 했지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날이 되자 까마귀와 까치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어요. 까마귀와 까치는 서로서로 자기 앞에 날고 있는 새의 꽁지를 입으로 물어 다리를 만들었어요. 견우와 직녀는 다리를 밟고 얼른 달려가서 부둥켜안았어요. 그날 이후 칠석날이 되어도 땅 위에는 홍수가 나지 않았지만, 견우와 직녀가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조금씩 내리게 되었어요. 칠석날이 지나면 까치와 까마귀의 머리가 빠져서 꺼칠한 것도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 다리를 건너면서 새들의 머리를 발로 밟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옛날 어느 마을에 정승 부부가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루는 정승 집에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이 아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어요. “이 아이는 앞으로 석 달밖에 못 살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정승 부부는 스님에게 아들이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사정을 했어요. “남에게 밟히는 고생을 시키면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니, 이 아이를 나에게 보내시오.”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정승 부부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스님에게 보내기로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만나면 알아볼 수 있게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옷 한 벌을 아들에게 주었지요. 스님은 정승 부부의 아들을 깊은 산속으로 데려가 누더기를 입히고 ‘두고도 거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두고도 거지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했어요. 어느 날, 스님이 머릿속의 이를 잡아 준다고 매만져 주니 두고도 거지는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두고도 거지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나타났어요. “오늘 너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스님이 너를 지켜 주고 있고, 네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삼 년 뒤에나 와야겠다. 그때까지 고생을 한다면 목숨을 백 년까지 늘려 주겠다.” 잠에서 깬 두고도 거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님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옥피리만 남겨져 있었어요. 두고도 거지는 옥피리를 가지고 길을 떠났어요. 두고도거지는 부잣집에 찾아가서 머슴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부잣집 주인은 비록 행색은 남루했지만 총기가 있어 보이는 두고도거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부잣집 머슴이 된 두고도거지는 열심히 일을 했어요. 부잣집에는 딸이 셋 있었는데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마음씨가 고약해서 두고도 거지를 괴롭혔어요. 하지만 셋째 딸은 두고도 거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언니들 몰래 찢어진 옷도 꿰매 주고, 맛있는 음식도 주었지요. 어느덧 두고도 거지가 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일한 지 삼 년이 지났어요. 하루는 이웃 마을에서 열리는 잔칫집에 가려고 예쁘게 단장한 딸들 앞으로 두고도 거지가 말을 끌고 왔어요. “이렇게 높은 말을 어떻게 타라는 거냐? 빨리 엎드리지 못해!” 첫째 딸이 두고도 거지에게 소리쳤어요.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엎드려 있는 두고도 거지의 등을 꾹꾹 밟고 말에 올라탔지요. 하지만 마음씨 착한 셋째 딸은 엎드려 있는 두고도 거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어요. “그만 일어나요. 난 걸어서 갈 테니, 나중에 이 말을 타고 잔칫집에 오세요.” 집안일을 마친 두고도 거지는 깨끗하게 씻고 어릴 때부터 가지고 다녔던 보자기를 풀어 비단옷을 입었어요. 두고도 거지가 잔칫집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하며 좋은 자리에 앉히고 맛난 음식을 대접했어요. 두고도거지를 유심히 본 셋째 딸은 ‘혹시 신선이 두고도 거지가 아닐까’ 하고 의심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맨 댕기 끝을 조금 잘라 두고도 거지의 뒷머리에 슬쩍 꽂아 두었지요. 먼저 잔칫집에서 돌아온 두고도 거지는 누더기로 갈아입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어요. 셋째 딸은 두고도 거지의 뒷머리에 꽂혀 있는 댕기를 보고 비단옷과 옥피리가 어디서 났는지 꼬치꼬치 물었지요. 하지만 두고도 거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날 밤, 꿈속에 저승사자가 나타나서 말했어요. “삼 년 동안 남에게 밟히는 고생을 참아 냈으니 이제 백 년 뒤에나 오겠다.” 두고도 거지는 셋째 딸과 혼례를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어요. 그 후 딸들이 죽은 자리에서 버섯이 자라났는데 사람들은 죽은 딸들의 혼이 버섯이 된 것이라고 말했어요. 옛날 설악산 만경대의 관음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에 설정 스님이 혼자 수도를 하며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 형님이 돌아가시자 설정 스님은 어린 조카를 암자에 데려와 키우게 되었고, 아이는 암자에서 씩씩하게 잘 지냈어요. 설정 스님은 조카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아이는 뛰어노는 것이 더 좋았어요. 어느새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어요. 산에서 기나긴 겨울을 보내려면 산 아래 장터에 가서 겨울나기 준비물을 사 와야 했어요. 설정 스님은 장터에서 돌아올 때 짐이 많아서 어린 조카를 데려갈 수 없었어요. 설정 스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조카가 혼자서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 놓고 말했어요. “얘야, 눈이 오기 전에 장터에 다녀오마. 그리고 삼시 세 끼 밥을 꼭 챙겨 먹어라.” “스님, 무서워서 싫어요. 저도 따라갈래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 무서우면 법당에 들어가 관세음보살님을 불러라.” 설정 스님은 부리나케 산을 내려갔어요. 암자에 혼자 남은 아이는 금세 심심해져서 살금살금 법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법당 안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이 있었어요. 아이는 불화를 한참 바라보다 얼떨결에 “엄마!” 하고 불러 보았어요. 그러고 나서 오랫동안 법당 안에 앉아 있었지요. 장터에 간 설정 스님은 하루 종일 눈을 맞으며 겨우내 암자에서 쓸 물건을 샀어요. 설정 스님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졌어요. 눈이 많이 쌓여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혔지만, 설정 스님은 암자에 혼자 있는 어린 조카가 걱정되어 서둘러 산에 올랐어요. 하지만 발이 미끄러워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고 말았어요.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설정 스님은 다행히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되었어요. 암자가 있는 산속은 눈으로 덮여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어요. 캄캄한 밤이 되자 아이는 더럭 겁이 났어요. 그래서 얼른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지요. 그리고 설정 스님의 말대로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며 잠이 들었어요.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 정신을 잃고 자리에 누워 있었던 설정 스님은 한 달이 넘어서야 깨어났어요. 설정 스님은 암자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길이 눈으로 막혀 올라갈 수가 없었지요. 이듬해 길이 뚫리자 설정 스님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며 산을 올랐어요. 설정 스님이 암자에 들어서자 법당 안에서 목탁 소리가 들려왔어요. 소스라치게 놀란 설정 스님이 얼른 법당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 아이가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있었어요. 설정 스님은 살아있는 어린 조카를 보고 감격에 겨워 말했어요. “얘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스님, 관세음보살님이 밥도 주고, 함께 놀아 주고, 잠도 재워 주셨어요.” 그 뒤로 설정 스님은 관세음보살님이 어린 조카를 지켜 준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어요. 아주 먼 옛날 백두산 언저리 외딴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이 있었어요. 총각은 부지런해서 이웃집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살림을 꾸려 나갔어요. 비록 가난했지만 어머니와 총각은 행복했어요.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더니 급기야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어요. 총각은 병에 좋다는 약은 다 지어다 드렸지만 어머니의 병은 조금도 낫지 않았어요. 하루는 총각이 마을에서 지혜롭기로 소문난 노인을 찾아가서 어머니의 병세를 소상히 말했어요. 총각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노인이 말했지요. “백두산에 있는 장생초를 먹으면 어떤 병이라도 낫는다던데...” 총각은 노인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어요. 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길도 몹시 험했지만, 겨울에는 더 올라가기 어려웠어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총각은 집을 나섰어요. 귀마개도 하고 목도리도 둘렀지만 쌩쌩 부는 칼바람을 막지는 못했어요. 총각은 식어서 딱딱해진 주먹밥 한 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으며 산을 올랐어요.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깊은 골짜기도 지나고, 절벽도 힘들게 기어올랐어요. 총각이 겨우겨우 산꼭대기에 올라 눈을 들어 보니 장생초는커녕 새하얀 눈밭만 펼쳐져 반짝거렸어요. “앗, 이럴 수가! 산꼭대기에 오르면 장생초가 있을 줄 알았는데....” 총각은 이제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생각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하지만 장생초를 구하지 못했다고 마냥 실망해서 산꼭대기에 있을 수는 없었지요. 총각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오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총각을 불러 세웠어요. “총각, 이 씨앗 좀 산꼭대기에 올라가 뿌려 주게.” 총각은 할머니의 부탁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누워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 거절할 수도 없었지요. 마음씨 착한 총각은 할머니가 준 씨앗 자루를 들고 산꼭대기로 다시 올라갔어요. 총각은 산을 오르며 미끄러지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무 데나 뿌리고 돌아갈까?’ 하는 유혹이 생겼지만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겼어요. 마침내 총각은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 할머니가 준 씨앗을 사방에 뿌렸어요. 그런데 방금 뿌린 씨앗에서 싹이 나더니 꽃이 피었어요. 총각은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 뺨을 꼬집기도 했지요. 바로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렸어요. “총각, 그 풀이 장생초라네.” 총각은 그제서야 할머니가 산신령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쪽저쪽 사방을 향해 큰절을 했어요. 총각의 어머니는 장생초 뿌리를 달여 마시고 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어머니와 총각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총각이 장생초 씨앗을 골고루 뿌려 둔 덕분에 지금도 백두산에는 장생초가 자라고 있대요. 옛날에 선비 한 사람이 깊은 산속에 있는 절로 글공부를 하러 들어갔어요. 집에 있는 식구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꾹 참으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글공부를 했지요. 어느 날부터 쥐 한 마리가 선비의 방을 들락날락했어요. 문에 난 구멍으로 쪼르르 들어와서 선비를 빤히 쳐다보다가 나가는 쥐는 쓸쓸했던 선비에게 위안이 되었지요. 선비는 먹던 밥을 남겼다가 주기도 하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놓아 두기도 했지만 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어느 날 선비가 손톱 발톱을 깎아서 미쳐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놓아 두었는데, 쥐가 와서 날름 집어 먹었어요. 신기한 생각이 든 선비는 일부러 손톱 발톱을 깎아 구석에 두었어요. 그러면 쥐가 와서 손톱 발톱을 날름 먹어 치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쥐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선비도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지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선비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넌 웬 놈인데 남의 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느냐?” “너야말로 왜 남의 집에 와서 야단이냐? 어서 이 집에서 나가라!” 진짜 선비와 가짜 선비가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우르르 몰려나온 가족들은 기겁했어요. 두 사람은 어머니가 봐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똑같아서 가족들은 이 일을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시험을 해 보기로 했어요. 가족들은 집 안에 물건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 둘에게 물어보았어요. 공부하느라 집을 떠나 있던 진짜 선비는 대답을 못했는데, 가짜 선비는 그동안 이것저것 눈여겨보아 왔던 터라 대답을 아주 잘했지요. 그래서 진짜 선비는 억울하게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어요. 슬픔에 잠긴 선비는 죽을 마음을 먹고 조상님 무덤을 찾아가서 절을 했어요. 무덤에 엎드려 엉엉 울던 선비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났어요. “어리석게 죽을 마음을 먹다니... 네가 글공부할 때 쥐에게 손톱 발톱을 먹이지 않았느냐? 쥐가 네 정기를 받아 네 모습을 하고 있으니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 잠에서 깬 선비는 마을로 내려와 고양이를 빌려 소매 속에 넣고 집으로 찾아갔어요. 집에 들어가니 가족들이 모두 달려 나와 쫓아내려고 했지만 진짜 선비는 성큼성큼 가짜 선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진짜 선비는 소매에 넣어 두었던 고양이를 꺼내 가짜 선비 앞에 휙 던졌어요. “야옹!” 고양이가 달려들어 가짜 선비의 목을 물어뜯자 ‘찍’ 소리를 내며 죽었어요. 가짜 선비는 온데간데없고 쥐 한 마리가 죽어 있었지요. 선비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고, 가족들은 선비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요. 그 뒤로 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방귀를 잘 뀌는 방귀쟁이 아주머니가 살았어요. 방귀를 잘 뀌는 것도 자랑이라고,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지요. 그런데 방귀쟁이 아주머니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마을에도 방귀쟁이 아저씨가 살았어요. 이 방귀쟁이 아저씨도 방귀라면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두 사람이 방귀를 뀌면 소리가 얼마나 크고 냄새가 고약한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귀와 코를 틀어막았어요. 방귀쟁이 아주머니는 강 건넛마을에 사는 방귀쟁이 아저씨의 소문을 듣고 코웃음을 쳤어요. “흥, 제아무리 방귀를 잘 뀌어도 내 방귀만 하겠어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방귀쟁이 아주머니의 말을 전해 들은 방귀쟁이 아저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어요. “뭐라고? 감히 아낙네가 내 방귀를 가지고 콩 놔라 배 놔라 한단 말이야?” 방귀쟁이 아저씨는 바로 강 건너 방귀쟁이 아주머니네 집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잔칫집에 가서 없고, 아들만 바깥 아궁이 앞에서 놀고 있었지요. 방귀쟁이 아저씨가 방귀 시합을 하러 왔다고 말하자, 방귀쟁이 아주머니의 아들이 웃으며 말했어요. “히힛, 아저씨가 아무리 방귀를 잘 뀌어도, 우리 어머니는 못 당할 거예요.” 아이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방귀쟁이 아저씨는 아이를 향해 있는 힘껏 방귀를 뀌었어요. 뿌우우웅! 아궁이 앞에 앉아 있던 아이는 아궁이를 지나 굴뚝으로 나왔어요. 아이의 온몸은 숯검정이 묻어 까맣게 되었지요. 아이는 졸지에 벌어진 일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화가 풀린 방귀쟁이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집에 돌아온 방귀쟁이 아주머니는 아들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어요. 아들은 어머니에게 방귀쟁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했어요. 성이 발끈 난 방귀쟁이 아주머니는 곧바로 방귀쟁이 아저씨의 뒤를 쫓아갔지만, 방귀쟁이 아저씨는 벌써 강을 건넜어요. 방귀쟁이 아주머니는 강가에 있던 빨랫방망이를 궁둥이에 대고 방귀를 뀌었어요. 뿌우우우우웅! 요란한 방귀 소리와 함께 빨랫방망이는 공중에 떠서 방귀쟁이 아저씨 쪽으로 날아갔어요. 방귀쟁이 아저씨는 천둥소리 같은 방귀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어요. 아주 먼 옛날, 까치가 높은 소나무 위에 보금자리를 틀고 다섯 마리의 새끼를 키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날마다 여우가 나타나 소나무를 박박 긁으며 까치를 향해 소리쳤지요. “컹컹, 새끼 한 마리만 주면 나머지는 살려 주지!” 어미 까치는 그럴 때마다 안절부절못했어요. 여우는 뾰족한 발톱으로 나무를 득득 긁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나무 위로 뛰어오를 듯이 어미 까치를 위협했어요. 어미 까치는 새끼들에게 위험이 닥칠까 봐 오들오들 떨며 눈물만 뚝뚝 흘렸지요. 바로 그때 소나무 위로 날아가던 황새가 그 광경을 보고, 어미 까치에게 말했어요. “고록고록,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여우는 이렇게 높은 나무에는 기어오르지 못해요.” 어미 까치는 황새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가 생겼어요. 이튿날, 여우는 또다시 나타나 어미 까치를 위협했지요. “깍깍, 올라올 수 있으면 어디 올라와 보시지 그래?” “고록고록, 잘했어요. 여우는 절대로 나무 위까지 올라올 수 없어요.” 소나무 아래에서 어미 까치와 황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여우는 화가 치밀어 길길이 뛰었어요. 하지만 여우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지요. 여우는 얄미운 황새를 혼내 줄 방법을 생각했어요. ‘아하, 황새를 우리 집으로 유인해서 잡아먹어야겠다.’ 다음 날, 여우는 황새를 찾아가서 상냥하게 말했어요. “황새님,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이랍니다. 저녁에 우리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황새는 군침을 흘리며, 생일잔치에 꼭 가겠다고 했어요. 저녁이 되자 황새는 깃털을 곱게 다듬고 여우 굴로 찾아왔어요. 황새가 여우 굴로 들어오자 여우는 반갑게 맞이하는 척하더니 재빨리 황새의 목을 비틀며 말했어요. “황새야, 너 때문에 다 잡은 까치를 놓쳤으니 오늘은 황새 고기로 내 생일상을 차려야겠다.” 황새가 심하게 발버둥 치자 여우는 그만 황새를 놓치고 말았어요. 여우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황새가 푸드덕 날아오르자 여우가 달려들었지요. 바로 그때 황새가 여우를 향해 찍, 찍 똥을 누었어요. 여우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황새의 똥이 묻었어요. 여우는 황새를 잡기는커녕 똥을 닦기에 바빴고, 그사이에 황새는 여우 굴을 빠져나갔지요. 여우는 콧등에 묻은 똥을 꼬리로 닦아 냈어요. 그때 황새가 싼 똥 때문에 여우의 콧등과 꼬리가 하얗게 되었다고 해요. 옛날 먼 옛날 아들을 여럿 둔 부부가 살았어요. 부부는 삼신할머니에게 정성껏 기도해서 예쁜 딸을 낳았어요. 부부는 늦은 나이에 낳은 딸을 애지중지 키웠지요. 딸이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어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집에서 키우는 소나 말이 이유 없이 하나 둘 죽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밤이 되면 아들들에게 외양간을 지키게 했지요. 하지만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잠을 자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밤이 되자 막내아들도 외양간으로 갔어요. 막내아들은 슬슬 밀려오는 잠을 쫓으며 외양간을 지켰지요.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누이동생이 나타나 소의 간을 쑥 꺼내 먹었어요.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막내아들은 무서워서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날이 훤히 밝아 오자 막내아들은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을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막내아들을 집에서 내쫓았어요. 집에서 쫓겨난 막내아들은 정한 곳 없이 길을 나섰고, 날이 어두워지자 기와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어요. 기와집에서 나온 아가씨는 하룻밤만 재워 달라는 막내아들의 부탁을 거절했어요. “도련님, 우리 집은 원래 부잣집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괴물이 나타나 식구와 하인들이 모두 죽고 저 혼자 남게 되었어요.” 막내아들은 왠지 아가씨가 처량해 보여 지켜 주겠다고 말했어요. 아가씨는 막내아들의 호의를 받아들여 하룻밤 묵어가라고 했지요. 그날 밤, 막내아들이 아가씨 방에 누워 있는데, 스르륵 방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괴물이 들어왔어요. 괴물은 다짜고짜 막내아들이 덮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 냈지요. 험상궂게 생긴 괴물을 보고 막내아들은 순간 멈칫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괴물에게 소리쳤어요. “도대체 너는 누구냐?” “난 원래 이 집에 있던 금은보화다. 그런데 주인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바람을 쐬 주지 않아서 괴물이 돼 이 집 사람들을 죽였다.” 막내아들은 괴물에게 땅속에서 꺼내 바람을 쐬 줄 테니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요. 다음 날, 막내아들과 아가씨가 광과 땅속에서 금은보화를 꺼내 바람을 쐬 주자 괴물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 후 막내아들은 아가씨와 혼례를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좋은 집에서 아내와 행복하게 살던 막내아들은 고향이 그리워졌어요. 막내아들이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아내는 다락에서 파란 병, 노란 병, 빨간 병을 꺼내 주며 위험한 일이 생기면 던지라고 했어요. 고향 집에 도착한 막내아들은 무너져 가는 집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막내아들의 인기척을 듣고 누이동생이 반색을 하며 뛰어나왔어요. “오라버니, 그동안 어디에 계셨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들은 막내 오라버니를 찾으러 떠났어요.” 막내아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어요. 누이동생이 밥을 하러 부엌으로 가는데 치마 밑으로 여우 꼬리가 살랑거렸어요. 막내아들은 등골이 오싹해져서 몰래 밖으로 나와 말을 타고 달렸지요. 그런데 어느새 누이동생이 알아차리고 뒤따라왔어요. 그때 막내아들이 아내가 준 노란 병을 던지자 가시덤불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누이동생을 휘감았어요. 그러자 누이동생은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로 변해 막내아들을 쫓아왔지요. 다음으로 막내아들이 파란 병을 던지자 시퍼런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와 물바다가 되었어요. 하지만 용케 살아나 뒤쫓아 오는 여우에게 막내아들은 빨간 병을 던졌고, 그곳에서 불이 나와 여우는 타 죽고 말았어요. 그 뒤로 막내아들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옛날에 한 젊은이가 사신이 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젊은 사신은 중국의 끝없이 넓은 땅과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지요. 젊은 사신이 놀라는 모습을 본 중국 관리는 신이 나서 자기 나라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어요. “저 성은 길이가 만 리나 돼 만리장성이라고 부른다네. 이 탑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하루가 걸린다네. 끝이 안 보이게 넓은 저 들판은 아마 당신네 나라 땅 전체보다도 클 것이오.” 다음 날, 중국 관리는 음식을 잔뜩 차려 놓고 젊은 사신을 집으로 초대했어요. “우리나라는 땅이 넓어서 온갖 음식이 다 있소. 이런 음식들은 처음 먹어 보겠지?” 중국 관리가 계속 으스대며 자랑을 하자, 젊은 사신은 은근히 속이 뒤틀려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을 숨기고 호기롭게 말했어요. “겨우 이런 것 가지고 무슨 자랑이십니까? 우리나라엔 하늘 위에도 밭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네 나라에 갈 터이니 하늘에 있는 밭을 꼭 구경시켜 주시오.” 중국 관리는 하늘에 있는 밭을 구경하겠다며 젊은 사신을 따라 배를 탔어요. 우리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중국 관리는 하늘에 있는 밭을 구경시켜 달라고 젊은 사신을 졸라 댔어요. 젊은 사신은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보여 주겠다고 했지요. 집에 돌아온 젊은 사신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젊은 사신을 보고 아버지는 걱정이 되었어요. “무슨 일인데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하느냐?” 젊은 사신은 아버지에게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아버지는 없는 말을 함부로 한 젊은 사신을 꾸짖었지요. 그러고는 한참을 궁리하다 젊은 사신에게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 주었어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젊은 사신은 동네를 다니면서 환갑이 넘은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았어요. 노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잘 대접한 젊은 사신은 “노래하고 춤추고 즐겁게 노십시오.”라고 말했지요. 또 어린아이들에게는 “너희들은 아주 서럽게 울고 있어라.” 라고 말했어요. 모두들 젊은 사신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지요. 젊은 사신은 중국 관리를 데리고 마을로 나섰어요. “자, 이제 하늘에 있는 밭을 구경하러 가시지요.” 젊은 사신은 중국 관리를 데리고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갔어요. 한쪽에서는 노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중국 관리는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지요. “저 노인들은 왜 저러고 있소?” “아, 그것은 하늘에 있는 밭은 너무 멀어서 가는 데 삼십 년, 오는 데 삼십 년이 걸립니다. 저 노인들은 육십 년 전에 밭을 매러 갔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안 죽고 살아왔으니 좋아서 저렇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 저 어린아이들은 왜 저렇게 울고 있소?” “하늘에 있는 밭으로 갈 아이들인데, 이제 가면 육십 년 뒤에나 돌아올 테니 그게 서러워서 우는 것이지요.” 젊은 사신의 말을 들은 중국 관리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어요. “아이고, 가는 데 삼십 년, 오는 데 삼십 년이라... 내가 지금 하늘에 있는 밭을 구경하러 나섰다가는 다 가지도 못하고 죽겠군. 난 안 가겠소.” 중국 관리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옛날 어느 산골에 홀아버지와 딸이 살았어요.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하는 딸이 안쓰러워 새어머니를 데려왔지요. 새어머니는 얼굴도 예쁜 데다가 딸을 자기 친딸처럼 돌봐 주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뿐이었지요.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새어머니는 금세 표독스럽게 변해 딸을 구박하며 집안일을 시켰고, 딸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때리기도 했어요. 새어머니의 구박과 심술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어요. 저녁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새어머니는 호들갑을 떨며 딸을 위해 주는 척했어요. 그 모습만 보고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딸에게 무척 잘해 주는 줄 알고 흐뭇하게 생각했지요. 아버지가 멀리 장삿길을 떠나자 새어머니의 구박은 더 심해졌고, 심지어는 딸에게 밥도 주지 않았어요.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딸은 점점 더 야위어 갔어요. 햇살이 반짝이는 어느 날, 새어머니는 창호지에 먹일 풀을 쑤어 놓았어요. 모락모락 김이 나는 풀을 보고 며칠째 굶주렸던 딸은 허겁지겁 풀을 퍼먹었지요. 그 모습을 본 새어머니는 빗자루로 딸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딸은 풀썩 쓰러지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그 뒤로 분하고 억울한 딸의 넋이 풀죽새로 변해 ‘풀죽풀죽’ 하며 울었지요. 풀국을 먹고 죽어서 풀국새라고도 불려요.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아들 부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며느리는 마음씨가 곱고 착해서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지요. 마을에서 심성이 고약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시어머니는 늘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혼을 냈어요. 아들은 날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았지만 집안 살림은 항상 쪼들렸어요. 특히 며느리는 먹을 것이 부족해 때를 거르는 날이 많았지요. 하루는 며느리가 옆집에서 떡국을 한 그릇 얻어 왔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을 보자 며느리의 배 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고 입에서 군침이 돌았지만 꾹 참았어요. “아유, 맛있겠네. 어머니가 오시면 드려야지.” 며느리는 떡국을 부뚜막에 올려놓고 김치를 가지러 장독대로 갔어요. 그사이 동네 개가 부엌에 들어와 냉큼 떡국을 먹고 도망갔지요. 때마침 마실 나갔다 돌아온 시어머니는 부뚜막에 놓여 있는 빈 그릇을 보고 며느리가 떡국을 먹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버르장머리 없이 떡국을 혼자 몰래 먹다니’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보자마자 머리채를 휘어잡고 내동댕이쳤어요. 그러고는 몽둥이로 며느리를 사정없이 때렸지요. 며느리는 그만 시어머니에게 맞아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그 뒤로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의 넋이 새가 되어 “떡국 떡국 개개” 하고 울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어요. 옛날 아주 먼 옛날 산골 마을에 어머니와 세 딸이 살았어요.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귀여운 딸들의 재롱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요. 세월이 흘러 딸들은 무럭무럭 자라 예쁜 아가씨가 되었어요. 하지만 고생을 많이 한 어머니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건강하고 예쁘게 자란 딸들 때문에 힘든 줄 몰랐어요. 딸들은 모두 얼굴이 예뻤지만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씨를 가졌어요. 다행히 막내딸은 마음씨도 고와 늘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도 열심히 했지요. 어느 날, 어머니는 시집갈 나이가 된 딸들을 불러 원하는 신랑감을 물었어요. “어머니, 저는 돈이 많은 부자가 좋아요.” “어머니, 저는 글공부를 많이 한 선비가 좋아요.”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어요. 하지만 막내딸은 자신들이 모두 시집을 가면 혼자 지내셔야 할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아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논을 팔아 첫째 딸은 부자에게, 둘째 딸은 선비에게 시집보냈어요. 그리고 몇 년 뒤 밭을 팔아 막내딸을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총각에게 시집보냈지요. 시집간 딸들은 모두 잘살았어요. 하지만 홀로 남은 어머니는 항상 딸들이 잘 사는지 걱정을 했지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머니는 이제 거동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어요. 붉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하나둘 떨어지자 어머니는 딸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지요. ‘죽기 전에 손주들 얼굴이나 한 번 봐야겠다.’ 어머니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첫째 딸을 찾아갔어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나온 첫째 딸은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를 보고도 크게 반가워하지 않았지요. 첫째 딸 집에서 며칠을 지낸 어머니는 둘째 딸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둘째 딸도 어머니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어요. 어머니는 애써 서운한 마음을 다스리고 둘째 딸 집에서도 며칠을 지냈지요.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막내딸을 만나기 위해 둘째 딸 집을 나섰어요. 하지만 막내딸에게 가려면 큰 고개를 넘어가야 했지요.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펄펄 내려 어머니의 머리와 어깨에 소복이 쌓였어요. 눈보라가 휘몰아쳐 산을 오르기가 어려웠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눈길에 미끄러져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지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머니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였어요. 가난한 농사꾼과 혼례를 올린 막내딸은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를 찾아뵐 수 없었어요. 하지만 늘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지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눈을 치우던 막내딸은 눈 위에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는 어머니를 본 막내딸은 목 놓아 울기 시작했어요. 막내딸은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묻어 드렸지요. 이듬해 봄 어머니의 무덤에 몸 전체에 흰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솜털이 돋아나 있고, 등이 굽은 할머니처럼 꽃대가 휘어져 있는 자주색 꽃이 피어났어요. 사람들은 무덤가에 피어난 그 꽃을 할미꽃이라고 불렀어요. 아주 오랜 옛날 한 스님이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무더운 여름 날씨에 땀도 나고, 지고 다니는 바랑도 무거워 스님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어요. 그때 소를 부려 밭을 갈던 농부도 힘이 들었는지 나무 그늘로 오면서 투덜거렸지요. “쯧쯧, 날이 가물어서 큰일이네. 비가 와야 할 텐데...” 옆에서 농부의 말을 듣고 있던 스님은 입고 있던 장삼을 여기저기 만져 보더니 말했어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소이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비가 내릴 것이외다.” “하하, 스님도 농담을 하시는군요. 이렇게 날씨가 쨍쨍한데 무슨 비가 내린다고” 농부는 스님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농부와 스님은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하며 옥신각신했어요. “스님, 만약 스님 말대로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비가 내리면 저 소를 드리겠소.” “좋소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이 쌀을 주겠소.” 농부는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얻은 경험이 있어서 자신 있게 소를 내놓았어요. 또한 스님도 나름 자신이 있어서 반나절 탁발로 얻은 쌀을 내놓았지요. 농부는 밭을 갈면서 공짜로 쌀을 얻을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어요.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스님의 얼굴에도 자신감이 넘쳐 보였지요. 시간이 흐르자 쨍쨍하게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오더니 급기야 장대 같은 비가 쫙쫙 내리기 시작했어요. “비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자 밭을 갈던 농부는 스님과 했던 내기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농사꾼에게 때맞춰 내리는 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으니까요. 농부가 비를 피해 스님 옆으로 다가와 말했어요. “스님, 어떻게 비가 내릴 줄 알았습니까?” “입고 있던 장삼이 눅눅해진 것을 보고 알았지요. 우리는 빨래를 자주 못 해 옷이 땀에 젖어 있어요. 물기가 많으면 장삼이 눅눅해지는데, 아까 장삼을 만져 보니 눅눅하더이다. 그래서 비가 내릴 줄 알았지요.” “아, 그랬군요.” 말을 마친 농부는 아까 스님과 소 내기를 했던 것이 생각나 소 고삐를 스님에게 내밀었어요. “스님, 제가 졌으니 소를 몰고 가세요.” “하하, 소승이 소를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 소로 농사나 잘 지으세요.” 마침 비가 뚝 그치자 스님은 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어요. 이때부터 여름날에 갑자기 쏟아졌다가 뚝 그치는 비를 ‘소내기’라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소내기’를 ‘소나기’로 부르게 되었어요.
백일홍 이야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예요.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이 마을에 어느 날부터 커다란 걱정거리가 생겼어요.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이 나타나 고깃배를 부수고 사람들을 잡아갔거든요. 마을 사람들이 용왕님께 빌고 또 빌었지만, 바다 괴물은 계속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혔어요. 결국 사람들은 해마다 아름다운 처녀를 괴물의 제물로 바치게 되었어요. 어느 해 착하고 예쁘기로 소문 자자하던 단이가 괴물의 제물로 끌려가게 되었어요. “아이고, 어여쁜 우리 딸 단이야. 네가 제물이 되어야 하다니, 이를 어쩔꼬. 흑흑흑.” 부모님은 단이 손을 부여잡고 눈물만 흘렸지요. 단이가 괴물의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는 소식은 단이를 좋아하던 총각에게도 알려졌어요. “이대로 괴물이 단이를 잡아가게 둘 순 없어! 내가 괴물을 해치우겠어!” 총각은 괴물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어요.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했어요. 여러분, 제가 바다 괴물과 싸우겠어요. 드디어 괴물에게 처녀를 바치는 날이 되었어요. 제단 앞에 곱게 단장한 처녀가 앉아 있었지요. 붉은 옷을 입은 무녀는 훠이훠이 춤을 추며 처녀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어요. 그때였어요. 갑자기 산처럼 큰 파도가 일렁이더니 시커먼 괴물이 나타났어요. 괴물은 처녀에게 스르르 다가왔어요. 괴물이 처녀를 삼키려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처녀가 재빨리 일어나 긴 칼로 괴물의 눈을 찔렀어요. 그 처녀는 단이가 아니라 총각이었지요. “크아악!” 하늘을 찢을 듯한 비명을 지르며 비틀대던 괴물은 이내 물속으로 사라졌어요. 괴물이 사라지자, 마을에 큰 잔치가 열렸어요. “얼씨구 좋다. 괴물이 사라졌네.” “진작 괴물과 맞서 싸우면 될 것을. 총각이 정말 큰일을 해냈지 뭐야.”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바다 괴물이 사라진 것을 기뻐했어요. 그리고 총각은 용기를 내어 단이에게 청혼을 했지요. 단이도 용감한 총각과의 혼례를 약속했어요. 그런데 혼례를 앞둔 단이가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아무래도 꿈이 이상해요. 괴물이 다시 나타날 것 같아요.” 하얗게 질린 채 꿈 이야기를 하는 단이가 불안해하자, 총각은 씩씩한 목소리로 단이를 안심시켰어요. “너무 걱정 마시오. 내가 괴물을 찾아 물리치고 오겠소.” 단이는 총각이 믿음직스러웠지만, 혹시나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이번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오. 하지만 백 일 안에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내가 이기면 흰 돛을 달 것이고 만약에 진다면 붉은 돛이 걸릴 것이오.” 얼마나 갔을까, 총각이 탄 배를 쫓아오던 갈매기들이 하나 둘 사라졌어요. 그때 갑자기 잠잠하던 바다에 천둥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어요. 잠시 후 출렁이던 바닷물이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하늘로 솟구치면서 괴물이 나타났어요. 총각은 칼을 움켜쥐고 괴물과 맞서 싸웠어요. 총각과 괴물의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지요. 마침내 총각은 지쳐 흐느적거리는 괴물의 머리를 베었어요. 한편 단이는 날마다 바닷가 언덕에 나가 총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고 또 빌었어요. ‘왜 아직도 오시지 않는 걸까? 약속한 날이 다 되어 가는데.’ 바로 그때 바다 저편에 배 한 척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부디 흰 돛이 보이게 해 주세요. 부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어렴풋이 보이던 배가 가까워질수록 돛은 점점 붉은색으로 보였어요. ‘아, 괴물에게 진 것이 분명해.’ 슬픔을 이기지 못한 단이는 언덕 아래로 몸을 던졌어요. 배에서 내린 총각은 곧바로 단이를 찾았지만, 단이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어요. “돛이 붉은 것은 괴물의 피 때문이라오.” 총각은 단이를 품에 안고 설움에 북받쳐 울었어요. 단이가 죽고 얼마 후, 단이의 무덤가에는 붉은 꽃이 피어났어요. 신기하게도 그 꽃은 꼭 백 일 동안 피어 있다가 지곤 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을 ‘백일홍’이라 불렀어요.
꿀강아지 똥강아지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골이 깊은 두메산골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이 있었어. 하루는 총각이 꿀을 따서 지고 오는데, 어머니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거야. “에이그, 죽기 전에 조기 한 마리만 먹어 봤으면.” “엄니, 조금만 기다리세유. 지가 이 꿀 팔아서 조기 한 마리 꼭 사올게유.” 총각은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어. 산 아래 큰 마을에는 비단옷 입은 사람들과 어여쁜 색시들이 많았어. 총각은 입을 헤 벌리고는 두리번두리번 구경을 했지. “아이고, 참말로 좋구먼. 이곳이 바로 별천지로구먼.” “아이고, 내가 뭘 하고 있는 겨. 어서 꿀 팔아 우리 엄니 조기 사다 드려야지.” 그때 한 사내가 다가와서는 총각을 힐끔힐끔, 꿀단지를 흘끔흘끔 쳐다봤어. 그러면서 총각에게 속삭였지. “꿀을 판다고? 아이고,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구먼.” “왜유?” “여보게, 요즘 꿀을 팔면 큰일 난다네!” “그리유? 그런디 왜유?” “아, 글쎄. 얼마 전에 어떤 양반이 꿀 한 숟가락을 퍼먹고는 간질간질 부스럼이 돋았지 뭔가? 하루가 지나니 가족들도 간질간질, 이틀이 지나니 하인들도 간질간질, 사흘이 지나니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간질간질 부스럼 병에 걸렸다네.” “그리유? 그런디 왜유?”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그게 모두 꿀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관가에서 꿀을 사지도 팔지도 말라고 방을 붙였단 말일세.” 총각은 코끝이 시큰시큰, 눈물이 핑 돌았어. “어쩐대유, 이 꿀 못 팔면 큰일 나유! 울 엄니 조기 사다 드려야 한단 말이여유!” 사내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좋네. 그럼 내가 그 꿀을 사겠네. 대신 많이는 못 쳐주고 한 냥, 한 냥 쳐줌세!” 총각은 눈물을 훔치며 꿀 항아리를 내밀었어. “한 냥이면 조기 한 마리 살 수 있지유?” “그, 그럼, 그렇지. 얼마든지 살 수 있지.” 그러면서 사내는 휭하니 가 버리는 거야. 총각은 한 냥을 손에 꼭 쥐고 물어물어 장에 도착했어. “조기요, 싱싱한 조기 사세요!” 총각은 냅다 달려가서 한 냥을 쑥 내밀었어. “조기 한 마리 주셔유.” 그러자 조기 장수는 매섭게 쏘아붙였어. “세상에 한 냥짜리 조기가 어디 있나? 요 작은 놈도 닷 냥은 받아야 하는디.” 총각은 온몸에 기운이 쑥 빠지는 듯했어. “뭐, 뭐라구유? 조기 한 마리에 한 냥 아닌감유?” 기운이 쫙 빠진 총각이 비척비척 걸어가는데, 꿀 장수가 보였어. “저거 뭐여? 꿀 장수 아니여?” 총각은 꿀 장수를 붙잡고 사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물어보았어. “아니,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쯧쯧, 웬 놈에게 속았구먼.” 총각은 배배 속이 꼬이고, 울컥 울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어.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강아지 한 마리가 총각의 신발을 할짝할짝 핥아 댔어. 총각은 집에 두고 온 누렁이가 떠올랐지. “배가 고픈 모양이구먼. 옛다 이거라도 먹어라.” 총각은 주섬주섬 먹을 것을 꺼내서 강아지에게 주었어. “거참, 희한한 강아지네. 먹은 것을 그대로 싸는구먼. 옳거니!” 총각은 좋은 수가 떠올랐어. 그래서 곧장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가 남겨 둔 꿀 한 단지를 모두 먹였어. 얼마 후 강아지는 찍, 찍, 물찌똥을 싸는가 싶더니 몽글몽글 꿀 똥을 싸기 시작했어. 색깔도 냄새도 제법 꿀처럼 보였지. “맞구먼, 이 강아지로 사내를 혼내 줘야겠구먼!” 다음 날 총각은 강아지를 번쩍 들어 안고는 자기를 속인 사내를 찾아 나섰어. 온 마을을 뒤지고 다니다가 지친 총각이 주막에서 물을 얻어 마시다가 사내를 발견했어. 꼼짝없이 잡힌 사내는 변명을 늘어놨지. “오늘 아침에 꿀을 팔아도 된다는 방이 붙었지 뭔가? 그런데 그 강아지는 뭔가?” “꿀 똥 싸는 꿀강아지구먼유.” 총각이 강아지 궁둥이를 툭툭 치자, 몽글몽글 꿀이 흘러나오는 거야. “고놈, 참 신기하네. 한 냥 줄 테니 팔게.” “안 돼유! 이 강아지는 절대 안 돼유.”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럼, 지금 가진 거 모두 줄 테니 팔게!” 하며 사내가 돈주머니를 내밀었어. 총각은 그제야 꿀강아지를 주었지. “근데, 이 강아지가 꿀강아지임이 틀림없지?” “그럼유. 꿀을 먹이기만 한다면유.” 총각은 두둑한 돈주머니를 받아 들고 휭하니 가 버렸어. ‘뭐? 꿀을 먹이기만 한다면? 내가 잘못 들었나? 아, 잘 먹이기만 한다면! 그야 자신 있지!’ 뿌지지지직! 뿌지직! 뿌지직! 사내는 꿀강아지에게 고기며 과일이며 온갖 음식을 먹였어. 반나절이 지나자 뽀오옹, “아이코, 귀한 방귀!” 한나절이 지나자 뿡뿡뿡, “아이코, 거름 똥 말고 귀한 꿀 똥 빨리빨리 누시게.” 사내는 금 단지를 꺼내 강아지의 꽁무니에 댔어. 그런데 된똥만 잔뜩 싸는 거야. “이런 고얀 놈. 똥강아지를 팔다니!” 화가 난 사내는 강아지를 끌고 총각을 찾아 나섰어. 그런데 이름도 모르고 집도 모르는 총각을 어찌 찾겠어. 게다가 강아지는 계속 찍찍 물찌똥을 싸 대는 거야. “어이쿠, 촌놈이라고 얕봤다가 된통 당했네!” 사내는 그만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어. 참, 사내에게서 받은 돈으로 조기를 산 총각은 어머니와 함께 맛난 저녁을 먹었단다.
무지개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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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아주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살았대. 그곳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아무런 걱정 없이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지. 그런데 한 젊은 총각이 어여쁜 처녀와 사랑에 빠졌어. 문제는 그 총각과 처녀가 맡은 일을 내팽개쳐 놓고 매일같이 놀기만 했다는 거야. 결국 옥황상제도 그 일을 알게 되었어. 이런, 게으른 것들! 너희가 맡은 일을 하지 않아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지금 당장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가거라. 옥황상제의 호통에 총각과 처녀는 뒤늦게 후회하며 빌었어. 땅에는 거친 흙과 돌뿐인데, 저희보고 어찌 살라 하십니까? 제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해 주십시오. 옥황상제는 총각과 처녀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자, 땅에서도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어. 그리하여 총각과 처녀는 땅으로 내려갔어. 그런데 거칠고 메마른 땅은 온데간데없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으로 변해 있었어. 구석구석 나무가 울창하고, 꽃이 만발했지. 내가 너희를 가엾게 여겨 먹고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열심히 일하며 살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복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것이니라. 총각과 처녀는 옥황상제의 말을 마음 깊이 새겨들었어. 세월이 흐르고 흘러, 둘 사이에 예쁜 아이들이 생겼어. 그 아이들이 자라서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들이 자라서 아이를 낳았지. 이제 땅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었어. 그러자 마을이 생기고, 나라가 생겼지. 땅은 이제 하나의 커다란 세상이 되었단다. 그런데 평화롭던 세상에 문제가 생겼어. 사람들이 많다 보니 싸움이 자주 일어났지 뭐야? “쯧쯧,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열심히 일하며 살지 않으면 내가 큰 벌을 주겠다고 한 것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싸울 틈이 없도록 고생을 시켜야겠군.” 옥황상제의 분노로 기름지고 풍요롭던 땅이 순식간에 메마르고 거친 땅으로 변했어. 이제 땅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땀 흘려 돌보아야만 열매를 맺었지. 노력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 거야.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어. 슬슬 꾀를 부리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야.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일할 때는 빈둥거리며 놀다가 추수할 때면 나타나 농사지은 것들을 모두 빼앗았어. 물론 옥황상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 옥황상제는 사람들에게 더 큰 벌을 내렸어. 그날 이후 땅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어. 거북 등짝처럼 땅이 쩍쩍 갈라지고, 뽀얀 흙먼지가 풀썩풀썩 날렸지. 계곡도, 우물도 모두 말라붙어 농사는커녕 먹을 물조차 구하기 힘들게 되었어. 그런데 농사를 짓지 못하면 빼앗을 게 없을 거라 여겼던 옥황상제의 생각이 빗나갔어. 어찌 된 일인지, 나쁜 사람들은 여전히 잘살고, 열심히 일하는 착한 사람들만 더욱 살기 힘들어졌지. 그 모습을 본 옥황상제는 마음이 편치 않았어. “가뭄이 무섭지 않다면, 홍수는 무서워하겠지?” 그날부터 세상은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비가 내렸어. 하지만 착한 사람들만 더욱더 고통스럽게 되었지 뭐야. 옥황상제는 나쁜 사람들을 벌주기 위해 한 해는 흉년이 들게 하고, 그다음 해는 풍년이 들게 하고, 또 그다음 해는 홍수가 나게 했단다. 그러나 아무리 홍수와 가뭄으로 벌을 내려도 나쁜 사람들은 절대로 반성할 줄을 몰랐어. 옥황상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어.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구나. 다만 착하게 살다 죽은 사람을 하늘로 데려와 편안히 살도록 하는 수밖에. 옥황상제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일곱 빛깔 무지개다리를 놓았어. 그런 다음, 착하게 산 사람들만 무지개다리에 오르도록 했지. 무지개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착한 사람들은 땅에서의 온갖 고생을 모두 잊고 행복하게 살았대. 나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남의 것을 빼앗고 나쁜 일만 일삼던 사람들은 당연히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았지. 지금도 비가 갠 후에 하늘과 땅 사이에 무지개가 뜨는 건 옥황상제가 착한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무지개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은혜 갚은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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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고 있었어. 한양은 멀고 먼 길이라서 오르락내리락 고개를 넘고, 넘실넘실 강을 건너, 굽이굽이 산을 지나고도, 며칠을 더 가야 했지. 얼마나 걸었을까? 갈 길은 멀고 마음은 바쁜데 다리는 묵직 허리는 뻐근 걸음을 뗄 수가 없었지. “조금만 쉬었다 가야겠어.” 선비는 길가 너럭바위에 걸터앉았어. 그때 풀숲 사이로 무엇인가 움직였어. 사르락! 사르락! ‘풀숲에 뭐가 있나?’ 선비는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소리를 따라갔어. 그런데 글쎄, 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 꿩이 있는 둥지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어. 선비는 재빨리 활을 꺼내 구렁이를 향해 쏘았어. 휴, 다행이다. 하마터면 새끼 꿩이 모두 죽을 뻔했구나. 이런,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서둘러야겠다. 선비는 산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어.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날이 저물도록 길은 끝이 보이질 않았어. 그때 희미한 불빛이 깜박이며 선비의 발걸음을 이끌었어. 수풀을 헤치고 가 보니 웬 작은 기와집이 있었어. 방 안에는 어룽어룽 호롱불이 흔들리고 있었지. “안에 누구 있소?” 문이 삐걱 열리며 어여쁜 아낙이 나왔어. “한양으로 가는 길인데 날이 저물어 더 갈 수가 없구려. 하룻밤 묵어가도 되겠소?” 아낙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깨끗한 방을 내주었어. 그리고 따뜻한 저녁상까지 차려 주었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는지, 선비는 훈훈한 아랫목에 눕자마자 까무룩 잠에 빠졌어. 얼마나 지났을까. 찌릿찌릿 팔다리가 저리면서 컥컥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어. ‘윽, 참으로 고약한 꿈이로구나. 숨을 쉴 수가 없어.’ 선비가 눈을 번쩍 떠 보니, 구렁이가 온몸을 친친 휘감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선비는 온몸이 와들와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있는 힘껏 호통을 쳤어.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구렁이는 선비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쉭쉭 혀를 내밀며 더 세게 조였어. “네가 오늘 내 남편을 활로 쏘아 죽였다! 너를 죽여 남편의 억울한 한을 풀어야겠다!” 선비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어. “컥! 나를 잡아먹어도 좋으니 컥컥! 자, 잠깐 내 얘기를 좀 들어 보거라. 커억!” 그제야 구렁이는 스르르 몸을 풀었어. 선비는 후유 숨을 내쉬었어. 네 사연을 듣고 보니 참 미안하게 되었구나. 하지만 네 남편 구렁이에게 잡아먹히려던 새끼 꿩들도 아주 불쌍했다. 그래서 내가 꿩을 도운 것이지, 네 남편이 미워서 죽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의 한을 풀거라. 나 또한 꿩을 살리기 위해 옳은 일을 한 것인데, 네게 죽는다면 억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선비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구렁이가 나지막이 말했어. 그렇다면 잘잘못은 하늘이 가르도록 맡겨 보자. 자정이 되기 전에 뒷산 절에서 종이 세 번 울리면 하늘의 뜻인 줄 알고 너를 살려 주겠다. ‘이 밤중에 누가 종을 울린단 말이냐. 집 떠나 깊은 산속에서 이렇게 죽게 되는구나.’ “아니, 이럴 수가! 너는 참 운이 좋구나. 하늘은 내 편이 아니라 네 편인가 보다.” 그러고는 구렁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 희부옇게 날이 밝아 오자, 선비는 서둘러 뒷산 절로 올라갔어. “세상에, 나를 위해 꿩들이 종을 친 것이로구나!” 선비는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꿩들을 양지바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어.
밤나무 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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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옛날에 밤나무 도령이 살았어요. 왜 하필 이름이 밤나무 도령이냐 하면, 하늘에 사는 선녀가 밤나무와 결혼하여 낳았다고도 하고, 밤송이가 떡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나왔다고도 하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밤나무 도령은 높다란 밤나무에 집을 짓고, 듬직한 밤나무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밤나무 도령이 밤나무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면, 밤나무는 “오냐, 내 아들!” 하고 다정하게 대답했어요. 밤나무 도령이 엉금엉금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오르면, 밤나무는 잎을 살랑거리며 땀을 식혀 주었지요. 밤나무 도령이 배가 고파 꼬르륵거리면, 밤나무는 고소한 알밤을 톡톡 떨어뜨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시커먼 먹구름이 온 하늘을 까맣게 덮더니 우르르 쾅! 천둥이 울리고, 찌르르 번쩍! 번개가 치고, 후드득 쏴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강을 덮치고 들을 덮쳐서 밤나무 도령이 사는 산까지 덮치려고 했어요. “아버지, 무서워요.” 밤나무 도령은 밤나무를 꼭 끌어안고 와들와들 떨었어요. 그러자 밤나무가 풀썩 뿌리가 뽑히도록 몸을 눕혔어요. “아들아, 꽉 잡거라.” 비는 삼 일, 석 달, 삼 년을 쉬지 않고 계속 내렸어요. 세상은 온통 질퍽질퍽한 물바다가 되고, 살아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밤나무 도령과 밤나무밖에 없는 듯했지요. 그때 표주박을 타고 앵앵앵 모기들이 떠내려왔어요. “아버지, 모기들을 살려 줄까요?” “그럼, 살려 줘야지.” 밤나무 도령은 모기들을 건져 올렸어요. 이번에는 멧돼지가 둥둥둥 떠내려왔어요. “아버지, 멧돼지를 살려 줄까요?” “그럼, 살려 줘야지.” 밤나무 도령은 멧돼지를 끌어 올렸어요. 그다음 날 가랑잎을 타고 개미들이 줄줄줄 떠내려왔어요. 밤나무 도령은 개미들도 건져 올렸어요.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 멀리 사람이 어푸어푸 떠내려왔어요. “아버지, 사람을 살려 줄까요?” “안 된다, 아들아!” 밤나무 도령은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물에 빠진 불쌍한 사람인데요?” 안 된다, 아들아! 저 사람은 널 힘들게 할 거다! “아버지, 그래도 살려 줘야겠어요.” 밤나무 도령은 물에 떠내려온 사람을 낑낑거리며 끌어 올렸어요. 그러자 갑자기 밤나무가 이리저리 세차게 몸부림을 쳤어요. 그러고는 밤나무 도령이랑, 모기랑, 멧돼지랑, 개미랑, 물에 떠내려온 사람을 툴툴 털어 버렸지요. “사, 살려 줘요!” 밤나무 도령은 몸이 공중으로 붕 날아가자 눈을 꼭 감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물이 아니라 마른 땅에 풀썩 떨어졌어요. 밤나무와 헤어지게 된 밤나무 도령은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어요. 며칠 밤낮이 지난 뒤 드디어 밤나무 도령과 물에 떠내려온 사람은 어느 부잣집을 발견했어요. 갈 곳이 없는 둘은 부잣집의 머슴이 되기로 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머슴이 된 밤나무 도령이 열심히 밭을 갈고 있으면, 어디선가 달려온 멧돼지가 밭을 갈아 주는 거예요. 또 밤나무 도령이 밭고랑에 앉아 열심히 씨를 심으면, 어디선가 개미들이 줄줄줄 기어 나와 씨를 심어 주었지요. 하지만 물에 떠내려온 사람은 달랐어요. 밤나무 도령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면 나무 그늘에 누워 빈둥빈둥 놀기만 하고, 밤나무 도령이 잠깐 쉬기라도 하면 주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밤나무 도령은 놀기만 해요!” 하고 일렀지요. 게다가 맛난 음식은 혼자 다 먹고, 좋은 옷가지도 혼자 다 차지했어요. 밤나무 도령은 물에 떠내려온 사람이 몹시 괘씸하게 생각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집주인이 밤나무 도령과 물에 떠내려온 사람을 불렀어요. “저기 두 처녀 중 한 명은 내 딸이고, 다른 한 명은 몸종이라네. 뒷모습만 보고 내 딸을 찾아보게.” 그때 밤나무 도령이 구해 준 모기들이 윙윙 날아 두 처녀의 앞을 빙 돌아오더니 밤나무 도령의 귀에 속삭였어요. “에에엥 왼쪽이야, 왼쪽!” 밤나무 도령은 은혜를 아는 모기들 덕분에 집주인의 딸을 찾아냈어요. “어르신, 왼쪽이 따님입니다!” 그리하여 밤나무 도령은 집주인의 아리따운 딸과 혼인하여 으리으리한 집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 그런데 물에 떠내려온 사람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은혜도 모르고 욕심만 부리다가 몸종과 혼인하여 평생 밤나무 도령을 부러워하며 살았다나요?
땅속 나라 괴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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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 예쁜 꽃들이 고운 빛을 뽐내는 따스한 봄날, 이제 막 혼례를 치른 새신랑과 새색시가 다정하게 산길을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돌개바람이 휙 몰려왔지요. “사, 사람 살려!” 잠시 후 눈앞을 가렸던 검은 구름이 걷히고 보니 새색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요. 새신랑은 발을 동동 구르며 새색시를 찾았어요. “색시, 어디 있소?” 그러다가 땅바닥에 커다란 웅덩이가 움푹움푹 파여 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이건 괴물 발자국이 틀림없어!” 새신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커다란 발자국을 따라갔어요. 새신랑은 첫 번째 산을 넘다가 석수장이를 만났어요. “여보시오, 어딜 그리 서둘러 가시오?” 석수장이가 물었어요. “괴물에게 끌려간 색시를 찾으러 간다오.” “마침 잘되었구려. 나도 괴물에게 아내를 빼앗겼는데, 우리 함께 갑시다.” 그리하여 새신랑은 석수장이와 함께 길을 나섰어요. 두 사람은 두 번째 산을 넘다가 나무꾼을 만났어요. 우리 함께 갑시다. 의기투합한 세 사람이 산을 또 하나 넘으려는데 이번에는 대장장이를 만났어요. 여보시오, 나는 괴물에게 누이동생을 빼앗겼소. 집채만 한 바위가 떡하니 길을 막고 있었거든요. “모두들 멀리 비켜서시오, 이건 내 일이오!” 석수장이는 사흘 밤낮으로 바위를 쪼아 구멍을 뻥 뚫었어요.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땅속 나라로 통하는 길고 긴 굴이 보였어요. “이번에는 우리 차례요.” 대장장이와 나무꾼이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어요. 대장장이는 사흘 밤낮으로 길고 긴 쇠줄을 만들고, 나무꾼은 사흘 밤낮으로 커다란 바구니를 짰어요. 드디어 땅속 나라로 내려갈 준비가 끝났어요. 그런데 누구 한 명 선뜻 나서지 못했지요. 이때 새신랑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나섰어요. "겁날 것이 뭐 있소, 내가 내려가리다!" 새신랑은 바구니를 타고 땅속 나라로 내려갔어요.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어두운 굴속을 아주 오랫동안 내려갔지요. 덜커덕 쿵! 마침내 바구니가 바닥에 닿았어요. 새신랑은 재빨리 버드나무 위로 올라가 둘레둘레 주위를 살폈어요. 아, 그런데 깊은 땅속 나라에도 논과 밭이 있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거예요. 새신랑은 그만 입이 떡 벌어졌어요. 그때 한 아낙이 조심조심 물동이를 이고 걸어왔어요. 새신랑은 버드나무 잎을 한 움큼 따서 떨어뜨렸어요. “어머, 바람도 없는데 잎이 떨어지네?” 아낙은 나무 위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어요. “서, 서방님 아니세요?” 새색시는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 눈물을 흘렸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얼굴이 어두워졌어요. “땅속 나라는 사나운 짐승들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한 번 들어오면 절대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게다가 나를 데려온 괴물은 땅 위 세상으로 도적질을 나갔는데 석 달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 새색시는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더니 산삼 달인 물 세 사발을 가지고 나왔어요. “어서 쭉 들이켜세요!” 새신랑은 새색시가 시키는 대로 물 한 사발을 마셨어요. 그러자 힘이 불끈 솟아올라 바위를 번쩍 들어 올렸어요. 다시 한 사발을 마셨더니 이번에는 바위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번쩍번쩍 들어 올렸지요. 새신랑은 남은 한 사발을 한 번에 쭉 들이켰어요.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러 석 달째 되던 어느 날 드디어 괴물이 나타났어요. 쿵! 쿵! 쿵! 새신랑은 무쇠 칼을 들고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칼을 휙 휘두르자 괴물의 팔이 뚝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새색시가 재 바구니를 들고 나왔어요. “서방님, 다시 한 번 해 보세요.” 새신랑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어요. 괴물의 머리, 팔, 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가자, 새색시가 재빨리 재를 훅 뿌렸어요. 그러자 괴물의 머리와 팔과 다리가 다시 붙지 못하고 데구루루 나가 떨어졌어요. 결국 괴물은 푹 고꾸라져 죽고 말았지요. 새신랑과 새색시는 얼싸안고 기뻐했어요. 그리고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풀어 주었어요. 석수장이의 아내와 나무꾼의 딸과 대장장이의 누이동생, 그리고 수많은 아낙들이 끝도 없이 달려 나왔지요. 새신랑과 새색시는 아낙들을 바구니에 태워 모두 땅 위로 올려 보냈어요. 이제 새신랑과 새색시가 올라갈 차례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바구니가 내려오지 않았어요. 이유인즉 마지막으로 올라간 사람이 새신랑과 새색시는 땅속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할 수 없이 새신랑과 새색시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그러다가 한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부부의 사연을 들은 할아버지는 두루미 한 마리를 내주었어요. 그렇게 땅 위로 올라온 새신랑과 새색시는 아들딸 낳고 오래오래 잘 살았어요. 행복하게 잘 사시오. 감사합니다.
두고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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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정승 부부가 살았어요. 부부는 늘그막에 아들을 낳아 금이야 옥이야 고이고이 키웠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 부부에게 말했어요. “댁의 아드님은 고생을 안 하면 일찍 죽게 됩니다.” 놀란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스님에게 맡겼어요. 이제부터 너는 정승댁 도령이 아니다. "이제부터 너는 정승댁 도령이 아니다. 집에 온갖 것을 두고도, 거지처럼 고생하며 지내야 하니 이제부터 너를 ‘두고도 거지’라고 부르겠다." 암자에서 생활하게 된 두고도거지는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기만 했어요. 게다가 날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쉴 틈이 없었지요. 꼭두새벽부터 밥 짓고, 뙤약볕 아래서 텃밭 갈고, 휘청휘청 물 길어다 빨래하고, 지게 가득 나무 해다 장작 패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어요. 고생 한 번 안 해 본 두고도 거지에게는 이 모든 일이 너무나 힘들었어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야 하지?' '너무 힘들어, 더는 못하겠네.' 결국 두고도 거지는 슬슬 꾀를 부리며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두고도 거지의 꿈속에 무시무시한 저승사자가 나타나 호통쳤어요. “네가 아직도 고생을 모르는구나! 내 오늘, 네 목숨을 가지러 왔거늘 스님의 공력이 너를 감싸고 있어 힘들겠구나. 스님 때문에 목숨을 건진 줄 알거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으니, 앞으로 삼 년 동안 남에게 밟히는 고생을 견디거라. 그러면 더 살게 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두고도 거지는 스님에게 꿈 이야기를 했어요. “음, 암자를 떠날 때가 되었나 보다. 이제부터는 모든 시련을 너 혼자 감당해 내야 할 것 같구나!” 결국 두고도 거지는 암자를 떠나 마을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큰 기와집을 찾아가서는 머슴으로 일하게 해 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리하여 김 대감 집 머슴이 된 두고도 거지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만 했어요. 힘들 때마다 저승사자의 말이 떠올라 전처럼 잔꾀를 부릴 수가 없었지요. 한편 김 대감 집에는 딸이 셋 있었어요.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심술이 사나워 밤낮없이 두고도 거지를 못살게 굴었어요. "더 세게 좀 부쳐 봐!" 하지만 셋째 딸은 심술궂은 언니들과 달랐어요. 두고도 거지의 해진 옷을 기워 주고, 틈틈이 맛난 음식들도 챙겨 주곤 했지요. 두고도 거지가 머슴으로 일한 지 삼 년이 넘은 어느 날, 딸들이 모두 잔칫집에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멍청히 서 있으면 어떡해? 어서 엎드리지 못해!” 첫째 딸이 흙 묻은 신발로 두고도 거지의 등을 꾹 밟고 나귀에 올라탔어요. 둘째 딸도 두고도 거지의 등을 꾹꾹 밟고는 나귀에 올라탔지요. 두 딸에게 등을 밟힌 두고도거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두고도 거지는 셋째 딸에게도 등을 내밀었지만, 셋째 딸은 차마 올라탈 수가 없었어요. “저는 걸어가도 됩니다.” 그 순간 두고도 거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어요. 그날 밤, 두고도 거지의 꿈속에 또다시 저승사자가 나타났어요. “삼 년 동안 남에게 밟히는 고생을 잘 참고 견뎠구나. 내 너에게 약속한 대로 더 살게 해 주겠다.” 꿈에서 깨어난 두고도 거지는 지난 삼 년의 세월이 꿈처럼 느껴졌어요. ‘이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두고도 거지는 곧바로 김 대감을 찾아가 지난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아이고, 우리 귀한 아들! 이제야 돌아왔구나! 어디 보자, 어디 봐!” 정승 부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사흘 밤낮으로 잔치를 열었어요. 그리고 두고도 거지는 착한 김 대감 집 셋째 딸과 혼인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혼례는 먼저 신부 집에서 치러요. 신랑은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며 “기러기처럼 영원히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해요. 신부는 활옷에 도투락댕기와 앞 댕기를 드리고, 화관을 쓰고, 용잠을 꽂고, 꽃신을 신고 어느 누구보다 예쁜 모습으로 혼례를 치르지요. 신랑 신부의 새 삶을 알리는 암탉과 수탉을 놓고 표주박으로 술을 나누어 마시며 하나 됨을 알리지요. 신랑 신부는 첫날밤에 원앙처럼 금실 좋은 부부가 되라는 뜻이 담긴 원앙금침을 덮고 자요. 바닥에는 화문석을 까는데, 이것은 신랑 신부의 사랑을 엮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밖에서는 여자들이 청사초롱을 밝힌 신방을 훔쳐보기도 하고, 신랑과 신부의 행복을 기원하기도 하지요. 신부는 신랑 집에 갈 때 폐백 음식을 해 가요. 시아버지의 술안주가 되는 구절판과 시댁 어른을 잘 모시겠다는 의미의 폐백 포, 그리고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 담긴 폐백대추가 그것이지요. 신랑과 신부는 폐백 음식을 차려 놓은 폐백상 앞에서 시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을 모시고 큰절을 올려요. 그러면 시부모님은 신부의 치마에 대추를 던지며 덕담을 하지요. “아들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잘 살거라!"
좁쌀 한 톨로 장가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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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포근한 봄날, 한 총각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어. 싱글싱글 웃기도 하고, 쩝쩝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때, 톡! 좁쌀 한 톨이 날아와 총각의 이마에 떨어졌어. “에이, 뭐여. 시방 예쁜 색시 얻어 장가들려는 참이었는디.” 총각은 좁쌀 한 톨을 휙 던져 버리려다가 다시 손에 꼭 쥐었어. “아무래도 꿈이 이상하고 요상혀. 요놈 갖고 꿈에 본 색시를 찾으러 가야겠구먼.” 그리하여 총각은 좁쌀 한 톨을 가지고 길을 떠났지.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터벅터벅. 울퉁울퉁 돌길을 따라 타박타박. 한참 길을 가다 보니 날이 금세 저물었어. 총각은 어느 허름한 주막에 묵기로 했지. 그리고 좁쌀 한 톨을 주모에게 내밀었어. “이 좁쌀 좀 맡아 주셔유.” 주모는 가만히 좁쌀을 살펴보다가, “원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하고는 좁쌀을 마루 한 귀퉁이에 휙 던졌지 뭐야. 아침이 되자, 총각은 주모를 찾아갔어. “어제 맡긴 좁쌀 한 톨 주셔유.” 주모는 총각을 위아래로 한참을 흘기더니 마루 귀퉁이를 살폈지.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래? 좁쌀 한 톨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이상하네, 분명히 이리 던져 두었는데. 밤새 쥐가 물고 갔나? 이보게 총각, 내 다른 좁쌀을 줌세.” “안 돼유. 꼭 그 좁쌀이어야 해유. 아니면 그 좁쌀 먹은 쥐라도 내놓으셔유.” 주모는 하는 수 없이 뒤주 안에 숨어 있던 쥐 한 마리를 잡아 주었어. 총각은 좁쌀 한 톨 대신 얻은 쥐를 가지고 길을 떠났지.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터벅터벅. 울퉁불퉁 돌길을 따라 타박타박. 한참 길을 가다 보니 또 날이 저물었어. 총각은 또 주막을 찾아 들어갔지. “주인장, 이 쥐 좀 맡아 주셔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주막 주인은 쥐를 망태에 툭 던져 넣었어. 이튿날 총각은 주막 주인을 찾아갔어. “어제 맡긴 쥐 주셔유.” 주막 주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망태를 열어 보았지.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래? 쥐가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밤새 고양이가 먹어 치웠나? 내 다른 쥐를 잡아 주겠네.” “안 돼유. 꼭 그 쥐여야 해유. 아니면 그 쥐 잡아먹은 고양이라도 주셔유.” 주인장은 부뚜막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를 번쩍 들어다 주었어. 총각은 좁쌀 한 톨 대신 얻은 쥐, 그 쥐 대신 얻은 고양이를 안고 길을 떠났어.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터벅터벅. 울퉁울퉁 돌길을 따라 타박타박. 길을 가는데 갑자기 똥이 마려운 거야. 총각은 손으로 꽁무니를 꾹 틀어막고는 앞서 가는 말 장수에게 고양이를 맡겼어. “이봐유, 이 고양이 좀 맡아 주셔유.” 말 장수는 코를 막으며 손을 내저었어. “어이쿠, 냄새! 급하긴 되게 급했나 보네. 그런데 뭐 이런 고양이를 맡긴담.” 말 장수는 말 옆에 고양이를 슬쩍 내려 두었지. 총각이 볼일을 보고 나와 보니 글쎄, 고양이가 말에게 밟혀 죽어 있는 거야. 말 장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어. “미안허네. 내 다른 고양이를 사 줌세.” “안 돼유. 꼭 그 고양이여야 해유. 아니면 그 고양이를 죽인 말이라도 주셔유.” 총각이 하도 떼를 쓰니까, 말 장수는 하는 수 없이 말을 주었어. 총각은 좁쌀 한 톨 대신 얻은 쥐, 쥐 대신 얻은 고양이, 그 고양이 대신 얻은 말을 타고 길을 떠났어. 말을 타고 타박타박, 총각은 금세 한양에 도착했어.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양 구경을 하는데, 마침 소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총각이 가까이 다가가 구경을 하는데, 글쎄, 성난 소 한 마리가 달려와 뿔로 말을 쿡 받아 버리는 게 아니겠어? 소 주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어. “미안하게 됐네. 내 다른 말을 사 줌세.” “안 돼유. 꼭 그 말이여야 해유. 아니면 내 말을 죽인 소라도 주셔유.” 소 주인은 눈물을 머금고 총각에게 소를 주었어. 총각은 좁쌀 한 톨 대신 얻은 쥐, 쥐 대신 얻은 고양이, 고양이 대신 얻은 말, 그 말 대신 얻은 소를 끌고 길을 떠났어. 총각은 또 무엇을 얻게 될까요? 소를 끌고 느릿느릿 걸어가는데, 또 날이 저물었어. 총각은 정승 집 옆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지. 당연히 주모에게 소를 맡기고 말이야.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래? 다음 날 주모를 찾아가니 소가 없어졌다는 거야. “정말 미안하네. 아들놈이 그 소를 정승댁에 팔아먹었다네.” 주모는 다른 소를 사 주겠다고 했어. “안 돼유. 꼭 그 소여야 해유. 그 정승댁이 어디유?” 총각은 정승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어. “내 소 주셔유! 얼른 내 소 돌려주셔유!” 깜짝 놀란 하인이 달려 나오고, 정승도 무슨 일인가 나와 보았어. “이런, 진정하게. 그 소는 어젯밤 맛있게 요리해서 내 딸에게 먹였네. 사정이 딱해 보이니 내 다른 소를 내어 주겠네.” 총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안 돼유. 꼭 그 소여야 해유. 아니면 내 소를 먹은 딸이라도 주셔유.” 총각이 막무가내로 떼를 쓰니 정승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어. “어째서 꼭 그 소여야 하는지, 그 이유나 말해 보게!” 총각은 좁쌀 한 톨이 쥐가 되고, 쥐가 고양이가 되고, 고양이가 말이 되고, 말이 소가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승은 껄껄껄 웃으며 말했어. “거참, 배짱 두둑한 젊은이로군. 좋네, 내 딸을 자네에게 주겠네! 좁쌀 한 톨을 들고 예쁜 색시를 얻으려는 배포면 장차 무슨 일인들 못할꼬?” 그리하여 총각은 예쁜 색시를 얻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대.
도깨비와 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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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어느 마을에 욕심쟁이 형과 착한 동생이 살았어. 욕심쟁이 형은 마음보가 고약해 얼굴 가득 심술이 덕지덕지 붙었고,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지.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욕심쟁이 형은 혼자서 재산을 몽땅 차지하고 늙은 어머니와 동생을 모른 척했어. 착한 동생은 외딴곳 허름한 초가집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어. 동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나무를 해서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지. “오늘도 나무를 많이 해서 어머니에게 맛난 음식을 사 드려야지.” 동생은 콧노래를 부르며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갔어. 동생은 더 좋은 땔감을 구하려고 산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어. 그때 톡! 머리 위로 개암 하나가 떨어졌어. “어, 개암이네? 어머니 갖다 드려야지.” 동생은 개암을 주머니에 넣었어. 지게 가득 나무를 하고, 개암을 줍는 사이 어느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졌어. “너무 깊이 들어왔나? 큰일 났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질 않네.” 동생은 조심조심 길을 찾다가 빈집을 발견했어. “잘됐다. 쉬었다가 날 밝으면 가야겠다.” 삐거덕! 깊은 산속 빈집은 낡고 몹시 으스스했어. “무섭지만 달리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잠이 들면 무서움도 사라질 거야.” 빈집을 둘러보던 동생은 구석에 있는 다락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어. 동생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이게 무슨 소리지?’ 동생은 다락방 문틈 사이로 밖을 살폈어. “쿵작쿵작 놀아 보세!” 빈집으로 들어온 도깨비들은 방망이를 휘두르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어. 밥 나와라 뚝딱! 고기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는 뚝딱뚝딱 맛있는 음식을 척척 만들어 냈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동생은 꼬르륵꼬르륵 배가 고팠어. ‘뭐 먹을 게 없을까? 맞아! 개암이 있었지? 개암이라도 입에 물고 있어야겠다.' 그런데 그만, 개암이 입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깨졌어. 개암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도깨비들이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어. 하지만 곧 조용해지자, 다시 음식들을 먹으면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였지. 그 모습을 보자 동생은 더욱더 배가 고파져 개암 하나를 또 입에 물었어. 그런데 따악! 개암은 더 큰 소리를 내며 깨졌어. “지, 집이 무너진다!” 도깨비들은 허겁지겁 집 밖으로 달아났어. 날이 밝자마자 동생은 도깨비가 두고 간 도깨비방망이를 들고 집으로 갔어. “어머니, 이것 보세요.” 동생은 도깨비방망이를 꺼내어 소리쳤어. 새 집 나와라 뚝딱! 금돈 나와라 뚝딱! 그랬더니 초가집이 사라지고 으리으리한 새 집이 뚝딱, 금돈이 와르르 쏟아졌지. 동생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알게 된 욕심쟁이 형은 한달음에 산으로 올라갔어. “흐흐, 토실한 개암을 잔뜩 가져가서 도깨비방망이를 몽땅 가져와야지.” 형은 개암나무를 마구 흔들어 우수수 떨어진 개암을 정신없이 주워 담았어. 그러고는 대낮부터 빈집 다락방에 누워 도깨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 “어서어서 해야 져라, 네가 져야 도깨비방망이 내 것이 된다.” 기다리다 지친 형이 깜빡 잠이 들려는데 도깨비들이 빈집으로 들어섰어. “옳거니, 드디어 왔구나!” 형은 얼른 입 속에 개암을 넣고 따악 깨물었어.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도깨비들이 놀라지도 않고 다락방으로 뚜벅뚜벅 걸어왔어. 그러자 형은 계속해서 개암을 깨물었지. “우리가 또 속을 줄 알고? 우리 방망이 훔쳐 간 놈이 바로 너지? 우리 방망이 내놔라!” 도깨비들은 쉴 새 없이 형을 때렸어. “아이고, 사람 살려!” 형은 실컷 두들겨 맞고 어기적어기적 산을 기어 내려왔어.
호랑이 잡은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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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산골에 토끼 한 마리가 살았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꾀가 퐁퐁 샘솟는 지혜로운 토끼였지. 아마 호랑이가 나타난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걸? 어머나, 정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네! 호랑이는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쩍 벌렸어. “자, 잠깐, 잠깐만요. 따끈따끈한 떡 좀 드실래요?” 토끼의 말에 호랑이는 침을 꿀꺽 삼켰어. 토끼는 떡처럼 생긴 조약돌을 주워 와서 돌돌돌돌 불에 구웠어. 아참, 떡 찍어 먹을 꿀을 깜빡했네. 떡이 모두 아홉 개니까 먼저 먹으면 안 돼요. 하고 숲으로 뛰어갔어. 호랑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떡을 하나둘 헤아려 보았어. “하나, 둘, 셋, 아홉, 열!” 아! 글쎄, 떡이 아홉 개가 아니라 모두 열 개인 거야. “어, 떡 하나가 남잖아?” 호랑이는 얼씨구나, 횡재로세! 떡 하나를 날름 삼켰지. 돌을 떡인 줄 알고 먹은 호랑이는 눈물이 뚝뚝! 콧구멍이 벌렁! 침이 질질! 떼굴떼굴 구르다가 이리 쿵 저리 쿵! 뒤뚱뒤뚱 걷다가 꽈당 꽈다당! 토끼가 그 꼴을 보고 까르르 깔깔 웃더란다. 풀잎을 깨우는 바람이 숲속으로 솔솔 불어오는 나른한 오후, 또 호랑이가 나타났네!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려는데, “자, 잠깐, 잠깐만요. 고소한 참새구이 좀 드실래요?” 토끼의 말에 호랑이는 또 침을 꿀꺽 삼켰어. 토끼는 호랑이에게 눈을 꼭 감고 열을 세라고 했어. 그러고는 쿡쿡 웃음을 참으며 “아참, 참새구이를 하려면 불을 피워야 하는데, 제가 얼른 가서 준비할게요.”하고는 풀숲으로 폴짝폴짝 사라졌지. “흐흐흐, 맛있겠다.” 하면서 호랑이는 눈을 꼭 감고 열을 세었어. 그사이에 불씨가 포르르 날아오르더니 불길이 바작바작 타올랐어. 호랑이는 그 소리가 참새들의 날갯짓 소리인 줄 알고 얼씨구나 좋아서 입을 헤 벌렸지. 참새구이는 구경도 못 하고 털만 홀라당 탄 호랑이는 눈물이 뚝뚝! 콧구멍이 벌렁! 땀이 줄줄! 떼굴떼굴 구르다가 이리 쿵 저리 쿵! 뒤뚱뒤뚱 걷다가 꽈당 꽈다당! 토끼가 그 꼴을 보고 또 까르르 깔깔 웃더란다. 숲속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어느 날 또, 또, 호랑이가 나타났네!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려는데, “자, 잠깐, 잠깐만요. 싱싱한 물고기 좀 드실래요?” 토끼의 말에 호랑이는 침을 꿀꺽 삼키려다 꾹 참았어. “흥! 내가 또 속을 줄 알고?”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려는데, 어라, 이번엔 토끼가 조용하네. 토끼야, 뭐 해? 내가 입을 쩍 벌리면 네가 ‘잠깐!’ 해야지? “쉿! 지금 바빠요. 꼬리로 물고기 잡는 방법을 생각 중이거든요” 호랑이는 얼씨구나 신이 나서 토끼를 따라 강으로 갔어. 쉿! 토끼는 얼음을 쾅쾅 깨서 작은 구멍을 만들고는 “꼬리를 쑤욱 집어넣으면 물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릴 거예요. 전 물고기 담을 그릇을 가져올게요.” 하며 숲으로 *깡충깡충 뛰어갔지. 휘이잉 휘익, 휘이잉 휘익,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어. 얼마나 지났을까? 호랑이가 끙끙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려는데, 아! 글쎄, 몸이 꼼짝도 안 하는 거야. 물고기를 잡으려다 꽁꽁 얼어 버린 호랑이는 이번에도 토끼한테 속아서, 눈물이 꽁꽁! 콧물이 꽁꽁! 꼬리가 꽝꽝! 떼굴떼굴 구르지도 못하고, 뒤뚱뒤뚱 걷지도 못하고, 차가운 얼음판에 발만 동동 굴렀어. 토끼가 그 꼴을 보고 또 까르르 깔깔 웃더란다. 저기, 토끼 말고 웃는 이가 또 있네. 사냥꾼이 호랑이 잡으러 왔나 봐. 호랑이야, 큰일 났어! 뭐, 좋은 생각 없니? 자, 잠깐, 잠깐만요!
동물들의 나이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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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와 토끼가 찐 찹쌀을 절구에 넣고 콩콩 쳐서 쫄깃쫄깃 맛나는 찰떡을 만들었어요. 그때 떡 냄새를 맡은 호랑이가 한달음에 달려왔지요. 먹음직스런 떡을 보자 호랑이는 군침이 돌았어요. 두꺼비와 토끼는 사나운 호랑이 말이라 어쩔 수 없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어요. 가장 나이 많은 형님이 혼자서 떡 다 먹기. 호랑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어요. “나이라면 내가 가장 많을걸? 아주아주 먼 옛날, 이 산이 생기던 날 내가 태어났으니까 말이야. 어흥!” 그럼, 내 자식뻘 되는구먼. 내가 흙을 져 날라 이 산을 쌓았네. 토끼가 어른 흉내를 내며 말했어요. 그러자 두꺼비가 땅을 치며 통곡을 했어요. “아이고! 아이고, 가엾은 내 아들! 아 글쎄, 내 아들놈이 토끼와 같이 흙을 나르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네.” 토끼는 코를 움찔, 호랑이는 입을 쩝쩝! 첫 번째 내기에서는 두꺼비가 이겼어요. 두꺼비가 떡을 한 줌 떼어먹으려는데 호랑이가 막아섰어요. “잠깐! 내기는 세 번, 세 번은 해야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온 놈이 혼자서 떡 다 먹기. “높은 곳이라면 나를 따르지 못할 걸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하얀 구름을 똑 따서는 달콤 사르르 녹는 구름 과자를 만들어 먹곤 했다네.” “누가 구름을 따 가는가 했더니 그게 자네였구먼. 내가 그때 하늘 꼭대기에서도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서 누가 구름을 따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네.” 그때 내가 내려다보니 모두들 땀을 줄줄 흘리더구먼. 그래, 내가 하늘 꼭대기에서도 가장 높은 산 위의 가장 큰 나무에 올라가서 부채질을 해 주었는데, 기억 못 하겠는가? 토끼는 뒷발로 옆구리를 톡톡, 호랑이는 앞발로 입가를 툭툭! 두 번째 내기에서도 두꺼비가 이겼지요. 도착 지점에 다다르자, 두꺼비가 호랑이 꼬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가장 먼저 달려갔어요. “이제들 도착하는군! 난 아까 와서 잠깐 눈 좀 붙였다네.” 이미 도착한 두꺼비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어요. 토끼는 짧은 꼬리를 씰룩, 호랑이는 긴 꼬리를 휙휙! 세 번째 내기에서도 두꺼비가 이겼어요. 이제 떡은 두꺼비 차지가 되었지요. 그런데 화가 난 호랑이가 갑자기 떡을 산 아래로 힘껏 떠밀면서 소리쳤어요. “아니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하자.” 굴러가는 떡을 먼저 잡는 놈이 혼자서 떡 다 먹기. 호랑이와 토끼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달렸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데굴데굴 데구루루 굴러가던 떡이 나뭇가지에 걸려 척 붙고 말았어요. 호랑이와 토끼는 그것도 모르고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지요. “맞아! 떡을 먼저 잡으면 혼자 다 먹는 거라 했지?” 두꺼비는 떡을 쭈욱 떼어 들고, 오물오물 꼴깍, 오물오물 꼬올깍! 우물우물 꿀꺽, 우물우물 꾸울꺽! 맛있게 먹었어요.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두꺼비의 두 눈이 쑤욱, 배가 뿔룩 튀어나왔지요. 두꺼비는 먹고 남은 떡을 등에 쩍 붙이고 어기적어기적 산을 내려왔어요. “이보게, 내가 떡을 남겨 왔네. 어서들 들게나.” 두꺼비 등에 찐득찐득 눌어붙은 떡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파리가 앵앵, 쇠똥이 철퍼덕, 지렁이가 꿈틀꿈틀 달라붙어 있었어요. 호랑이와 토끼는 떡을 먹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졌어요. 그렇게 해서 두꺼비는 뿔룩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호랑이와 토끼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꿈틀꿈틀 애앵! 꿈틀꿈틀 앵앵앵! 앵앵! 난 원래 떡을 안 좋아해! 갑자기 떡이 먹기 싫어졌어!
재주 많은 세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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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어. 콩 한 쪽도 서로 나눠 먹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에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쨍쨍 더운 날만 계속되었어. 이 마을에는 남다른 재주를 가진 세 형제가 살고 있었어. 첫째의 재주는 눈 밝은 재주! 맑은 날이면 북쪽 끝 백두산을 보고, 동쪽 끝 화산섬 독도를 보고, 남쪽 끝 한라산을 볼 정도였지. 둘째의 재주는 힘센 재주! 양손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번쩍, 아름드리나무를 번쩍, 쌀 백 가마니도 번쩍번쩍 들어 올렸어. 셋째의 재주는 맷집 좋은 재주! 회초리로 맞아도 깔깔깔, 몽둥이로 맞아도 껄껄껄, 호랑이의 두툼한 발에 차여도, “간지러워, 간지러워. 하하하, 히히히.” 재주 중에서도 정말 별난 재주를 가졌지. 이런 재주를 가진 세 형제도 가뭄에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어. 구수한 밥 냄새를 맡은 지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할 뿐이었지. “형, 배고파.” “우리 산에라도 올라가 볼까?” “혹시 칡뿌리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잖아.” 세 형제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어. 눈 밝은 첫째가 여기저기 쭉 훑어보다가 소리쳤지. 저기 쌀가마니가 가득 쌓인 곳간이 보인다! 세 형제는 바람처럼 달려 마을로 내려갔어. 그리고 산에서 보았던 곳간을 찾아온 마을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지. 그런데 어디선가 부침개 부치는 소리가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났어. 세 형제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따라갔다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어. “아니, 여기는 사또가 사는 관아잖아!” “마을 사람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 사또는 곳간에 쌀가마니를 가득 쌓아 두고 잔치나 벌이고 있다니.” 세 형제는 살금살금 곳간으로 들어갔지. 힘센 둘째가 쌀 아흔아홉 가마니를 “으랏차차!” 가뿐히 들고나왔어. 세 형제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어.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세 형제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오랜만에 맛있는 쌀밥을 먹게 되었지. 날이 밝자, 관아가 발칵 뒤집혔어. 사또는 쌀 도둑을 빨리 잡아들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포졸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허둥댔지. “사또님! 저기 좀 보십시오.” 망루에 있던 한 포졸이 소리쳤어. 사또는 허겁지겁 망루로 올라갔지. “아니, 이럴 수가! 먹을 것이라곤 풀뿌리도 없는 집에서 연기라니.” 사또가 불같이 성을 내며 소리쳤어. 결국 마을 사람들 모두 관아로 끌려왔어. “어떻게 해서 쌀을 얻게 되었느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곤장을 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지. 하지만 누구도 세 형제가 그랬다고 말하지 않았어. 사또는 또다시 불같이 화를 냈지. 그때 맷집 좋은 셋째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어. “나요! 내가 쌀 도둑이오!” 사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어. “고얀 놈! 여봐라, 저놈의 볼기를 백 대를 쳐라!” 한 대요! 히히히! 깔깔깔! 서른 대요! 아흔아홉 대요! 우하하! 백 대요! 으흐흐, 시원하다! 사또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어. “여봐라, 당장 곤장 백 대를 더 쳐라!” 하지만 힘이 빠진 포졸들이 휘청휘청 하나 둘 푹푹 쓰러지고 말았지. 그때 천둥 번개가 우르르르 쾅쾅 번쩍! 느닷없는 소리에 깜짝 놀란 사또는 마루 밑으로 숨어 들어갔어.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가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지. 오랜만에 풍년이 들었어. 마을 사람들은 세 형제의 신통방통한 재주를 칭찬했지. 세 형제는 특별한 재주를 좋은 일에 쓰면서 마을 사람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
두더지 딸 신랑감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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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옛적 한 옛날, 깊고 깊은 땅속 마을에 금실 좋은 두더지 부부가 살았어. 부부는 늘그막에 딸 하나를 낳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웠지. 콕 찍어 놓은 듯 작은 눈 좀 봐요. 내 눈을 똑 닮았어요. 요, 요 오뚝 솟은 코 좀 봐. 내 코를 쏙 뺐네. 이렇게 예쁜 딸을 어찌 시집보내누. 땅이 얼고 녹기를 여러 해, 어여삐 자란 두더지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어. 하지만 사위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총각들은 죄다 두더지 부부의 마음에 차지 않았지. “에이그, 저리 약해 빠져서야.” “쯧쯧쯧, 어째 다 저 모양일꼬. 내 딸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에게 시집보낼 거야!” 그리하여 두더지는 사윗감을 찾아 길을 나섰어. 끄응끙 땅 위로 올라온 두더지는 정수리가 뜨끈뜨끈, 땀이 삐질삐질,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지. 어이쿠, 저 뻘건 것이 뭐기에 이리 힘이 빠질까? 아하! 저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가 보구나. 두더지는 두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번쩍 들어 소리쳤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를 찾고 있소! 부디 내 사위가 되어 주시오! 해는 입을 쩍 벌리더니 “하하하!” 하고 함박웃음을 지었어. 그러자 뜨거운 바람이 후끈 두더지를 감쌌지. “어이쿠, 뜨거워! 두더지 타네! 두더지 죽네!” 두더지는 풀쩍풀쩍 뛰며 법석을 떨었어. 그때 구름이 몰려와 해를 싹 가렸어. 휴, 살았네. 살았어. 그런데 저 뭉실뭉실한 것이 뭐기에 뜨거운 불덩이를 가릴까? 아하! 저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가 보구나. 두더지는 구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하지만 두더지가 열심히 구름을 쫓아가도 구름은 저만치로 둥실둥실, 두더지도 구름을 따라 허둥지둥. “어이쿠, 빠르기도 하지. 더는 못 따라가겠네.” 지친 두더지는 있는 힘껏 소리쳤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를 찾고 있소! 부디 내 사위가 되어 주시오! 구름은 입을 쩍 벌리더니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어. 그러자 차가운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어. “어이쿠, 차가워! 두더지 젖네! 두더지 젖어!” 두더지는 철벅 철벅 발을 구르며 법석을 떨었지. 그때 휘이잉 거센 바람이 불더니 비구름을 날려 버렸어. 두더지의 젖은 옷도 어느새 바짝 말랐지. 그런데 거센 바람은 멈출 기세도 없이 더 세차게 불어왔지. 어이쿠, 두더지 살려! 이렇게 힘센 것은 처음 보네. 두더지 살려! 두더지는 바람에 떠밀려 날아가는 중에도 사위가 되어 달라고 소리쳤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를 찾고 있소! 바람에 날려온 두더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커다란 돌부처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었어. “옳거니, 세상에서 가장 힘센 돌부처님! 부디 내 사위가 되어 주시오!” 하지만 돌부처는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 그때 거센 바람에도 꿈쩍 앉던 돌부처가 들썩거렸어. 해님보다 구름보다 바람보다 더 힘센 돌부처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두더지 총각이었지. 사윗감을 찾은 두더지는 총각의 손을 덥석 잡았어. 이렇게 훌륭한 사윗감이 바로 곁에 있었다니.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두더지 총각! 내 사위가 되어 주게! 두더지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딸을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에게 시집보냈어. 두더지 딸과 사위는 아들 낳고 딸 낳고, 또 아들 낳고 딸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대.
소나기와 소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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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넓은 논밭이 시원스레 펼쳐진 시골 마을에 부지런한 농부가 살았어요. 농부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가뭄으로 메마른 밭을 갈았어요. 이따금 뽀얀 먼지바람이 농부의 이마를 훑고 갔지요. “아이고, 이걸 어째! 다 말라 가네. 다 말라 가. 쥐 오줌만큼이라도 비가 와야 하는데.” 몇 달째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논과 밭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어요. 농부는 원망스레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참말로 하늘은 어찌 저리 쨍하니 맑을꼬. 애써 지은 농사 모두 망치겠구먼!”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갈 무렵 한 스님이 목탁을 치며 농부를 찾아왔어요. “하룻밤만 묵어가고 싶습니다만.” “저기, 아랫방에서 묵어가쇼.” 농부는 낡은 부채를 연방 펄럭이며 말했어요. “허참, 여름도 아닌데 왜 이리 더울꼬!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아 속이 타는데 웬 땀은 이리 흐르는 건지.” 다음 날 아침, 길 떠날 채비를 하던 스님이 농부에게 물었어요. “주인장, 무슨 근심이라도 있소?” “근심은 무슨.”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농부는 귀찮은 듯 대답했어요. “그러지 말고 말해 보시오. 백지장도 맞들면 낫고 걱정은 나누면 반이라 하지 않소?” “보면 모르겠소? 농사꾼이 농사 걱정 말고 또 뭐가 있겠소? 비가 안 내리면 모내기 못하고, 모내기 못하면 추수할 곡식 없고, 곡식 없으면 모두 굶게 되니, 걱정이 *태산입죠!” 농부의 푸념을 듣던 스님이 허허허 웃었어요. “그렇다면 이젠 걱정 마시오. 한바탕 비가 쏟아질 테니.” “비가 온다고요? 이렇게 날이 맑은데 비는 무슨?” 농부는 이맛살을 찌푸렸어요. “저녁때쯤 분명히 비가 올 거요.” “쳇, 스님이 무슨 부처님이라도 되시오? 비 오긴 이미 그른 하늘이오.” “곧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좋소, 좋아. 그리 우기시니 나와 내기를 하시구려. 오늘 밤 비가 쏟아진다면, 저 누렁이를 부처님께 시주하겠소!” 농부가 소를 가리키며 자신 있다는 듯 큰소리쳤어요. 그러자 스님이 등짐을 내려놓으며 “좋소, 비가 오지 않으면 얼마 없소만, 시주 받은 것을 모두 주고 가리다.” 그때부터 스님과 농부는 저녁이 되길 기다렸어요. 농부는 배고픈 것도 잊고 맑은 하늘만 뚫어져라 바라봤지요.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어요. 시주는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스님이나 절에 물건이나 돈을 베풀어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서서히 하늘을 뒤덮더니 정말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얼씨구나, 비다! 비가 오는구나. 정말 비가 오는구나. 하하하!” 농부는 아이마냥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소리쳤어요. 굵은 빗줄기에 먼지 날리던 땅도 촉촉하게 젖어 들었지요. “스님은 혹시 부처님과 통하시는 분이요?” “허허,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럼, 어찌 비가 올 걸 아셨소?” “어제 무척 후텁지근했지요? 축축한 공기 때문에 땀도 잘 마르지 않고요.” 어휴, 말도 마슈. 어젯밤엔 정말 온몸이 끈적끈적해서 한숨도 못 잤소. “그리고 제비도 낮게 날았지요.” “제비야 낮게 날기도 하지 않소?” “벌레는 비가 올 때쯤이면 풀숲에 몸을 숨기기 때문에 제비도 벌레를 잡으려고 낮게 난답니다. 그래서 제비가 낮게 날아다니는 것은 비가 올 징후지요.” 농부는 감탄한 듯 스님을 쳐다보았어요. “또 어제 개미들이 높은 처마로 이사 가는 것도 보았지요?” “개미도 비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럼요, 개미는 비가 오면 집이 잠길까 봐 미리 높은 곳으로 이사를 간답니다.” “아하!” 농부는 스님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어요. 비가 와서 즐거워하던 농부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어요. “아차차, 비가 오면 소를 시주하기로 했지!” 농부는 터벅터벅 외양간으로 가서 소를 끌고 나왔어요. “스님, 여기 시주할.” 그런데 스님은 벌써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지요. 이때부터 갑자기 내리는 비를 ‘소내기’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농부와 스님이 한 내기가 ‘소내기’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거예요. 지금은 ‘소나기’라고 부르지만 말이에요.
여우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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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부부는 삼신할머니께 정성껏 기도를 올렸어요. “부디 어여쁜 딸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부부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지만, 예쁜 딸을 낳고 싶었어요. “예쁜 딸을 갖고 싶다고?” 멀리서 부부를 지켜보던 여우의 눈이 달빛에 반짝 빛났어요. 열 달 후 부부는 그토록 기다리던 예쁜 딸을 낳았지요. 부부는 늦게 얻은 딸을 온갖 정성을 들여 키웠어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딸은 나날이 야위어 갔어요. “아가야, 무얼 먹고 싶으냐?” “아가야, 어디가 아프니?” 부부는 딸아이 걱정에 한숨이 끊이질 않았어요. “누이동생아, 앵두 좀 먹으렴.” 오빠들이 뒤뜰에서 먹음직스런 앵두를 따왔어요. “산딸기가 더 맛있을 거야.” 이번에는 빨갛게 잘 익은 딸기를 따왔지요. 이번에는 빨갛게 잘 익은 딸기를 따왔지요. “싫어, 다 싫어.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세 형제는 귀여운 누이동생이 심통을 부리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집 안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가축들이 이유 없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지요.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아침마다 하인들은 죽은 가축의 숫자를 세느라 바빴어요. 아버지는 큰아들을 불러 외양간을 지키라고 했어요. 하지만 밤이 깊어지자 스르르 잠에 빠져들고 말았지요. 다음 날 어김없이 소 한 마리가 또 죽었어요. “첫째야, 지난밤에 무엇을 보았느냐?” “밤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거짓말을 했어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불러 외양간을 지키라고 했어요. 그러나 둘째 아들도 자정이 넘어서자 눈꺼풀이 축축 내려앉아 잠에 빠져들고 말았어요. 다음 날 어김없이 또 한 마리가 죽었어요. “둘째야, 지난밤에 무엇을 보았느냐?” “밤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거짓말을 했어요. 아버지는 셋째 아들에게도 외양간을 지키라고 했어요. 셋째 아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외양간에 몸을 숨겼지요. 풀벌레 소리도 잠잠한 깊은 밤, 누이동생이 사박사박 마당을 지나 외양간으로 들어왔어요. 그러고는 소의 간을 쑤욱 빼 먹고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화들짝 놀란 셋째 아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어요. 다음 날 아버지는 셋째 아들을 불렀어요. “셋째야, 지난밤에 무엇을 보았느냐?” “누이동생이 소의 간을 빼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어요. “오라비가 되어서 누이동생을 시샘하는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집에서 나가거라.”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셋째 아들을 집에서 쫓아냈어요. 쫓겨난 셋째 아들은 온종일 걸어 깊은 산속 조용한 절에 이르렀어요. 다행히 그곳에서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곱디고운 진달래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또 피고 졌어요. 부모님과 형님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셋째 아들은 해가 갈수록 가족들이 걱정되었어요. 참다못한 셋째 아들은 스님께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스님은 셋째 아들에게 호리병 세 개를 주며 말했어요. “이것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아주 급할 때 쓰도록 해라!” 집에 도착한 셋째 아들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부서진 기와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부모님과 형님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어요. “어머, 오라버니!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부모님은 오라버니를 기다리시다 돌아가시고, 다른 오라버니들은 셋째 오라버니를 찾으러 떠났어요.” 갑자기 누이동생이 불쑥 나타나서 셋째 아들을 맞았어요. 누이동생이 움직일 때마다 치맛자락 사이로 꼬리가 살랑거렸지요. 누이동생은 저녁밥을 지어 주겠다며 셋째 아들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셋째 아들은 이때다 싶어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어요. “오라버니, 그렇게 몰래 가시면 어떡해요?” 도망가려던 셋째 아들을 발견한 누이동생은 셋째 아들의 손과 자신의 손에 실을 묶고 밖으로 나갔어요. 누이동생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셋째 아들은 얼른 실을 풀어 문고리에 묶고는 집을 빠져나왔어요. 텃밭에서는 누이동생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해야 해야, 빨리 져라. 해가 져서 밤이 되면 오라버니 잡아먹지.”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님들 생각에 눈물을 훔치며 셋째 아들은 쉬지 않고 내달렸어요. “재주 홀딱 넘어 말 잡아먹고, 재주 홀딱 넘어 오라버니 잡아먹고." 그때 셋째 아들의 등 뒤에서 누이동생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누이동생이 어찌나 빨리 뒤쫓아 오는지 금방 잡힐 것만 같았지요. 누이동생이 말 꼬리를 잡을 듯 말 듯하자, 셋째 아들은 녹색 호리병을 힘껏 던졌어요. 그러자 뾰족한 가시넝쿨이 사방에서 뻗어 나오더니 커다란 덤불을 만들었지요. 가시넝쿨에 휘감긴 누이동생이 발버둥을 치자, 꼬리 아홉 달린 여우로 모습이 변했어요. 셋째 아들이 겨우 한숨을 돌리는데 누이의 노랫소리가 또 들려왔어요. 그래서 이번엔 파란 호리병을 던졌지요. 순간 거센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여우를 휩쓸어 갔어요. 셋째 아들은 있는 힘을 다해 또 한참을 달렸어요. 그런데 여우는 아까보다 더 빨리 뒤쫓아 왔어요. “재주 홀딱 넘어 말 잡아먹고, 재주 홀딱 넘어 오라버니 잡아먹고.” 셋째 아들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등골이 오싹해졌지요. 그래서 마지막 남은 빨간 호리병을 힘껏 던졌어요. 호리병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주위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어요. 여우는 결국 불에 타 죽었어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셋째 아들은 가족을 모두 잃은 슬픔에 주르륵 눈물을 흘렸어요.
풀죽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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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홀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순이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도 없이 혼자 집안일을 하는 어린 딸이 항상 가여웠어요. 그래서 새어머니를 데리고 왔지요. 그날 저녁, 밥을 먹던 순이가 “아야!” 소리를 내자 새어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괜찮니? 아가야?” “괜찮아요. 밥에 돌이 있었나 봐요.” “아이고, 미안하다. 몹시 아프지?”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어요. 새 아내가 순이를 잘 보살피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다음 날 아버지가 외출하자 새어머니와 순이만 집에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집을 나서자마자, 이것아, 돌 하나 씹었다고 이가 빠지니? 돌이 있으면 조용히 빼고 먹으면 될 것이지, 정말 유별나다, 유별나. 하며 느닷없이 새어머니가 순이에게 화를 냈어요. “당장 나가서 설거지하고, 마당도 쓸어라!” 아버지가 집에 없자, 새어머니는 갑자기 딴사람으로 변했어요. 순이가 부엌을 반질반질하게 청소해 두면 새어머니는 아궁이의 시커먼 재를 뿌려 놓았고, 뽀얗게 빨래를 해 오면, “이것도 빨래라고 한 거야?” 하면서 마당에 내팽개쳤어요. 새어머니의 구박과 심술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어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어느 날, 새어머니는 순이의 깨끗한 새 옷을 빼앗고 낡은 옷을 던져 주었어요. 일하기 바쁜데 새 옷이 다 무어니? 넌 누더기가 더 잘 어울려! 물이 다 떨어졌더라, 가서 물 좀 길어 오거라. 그런데 순이가 물동이를 이고 냇가로 나가자마자, 새어머니가 집 앞에 물을 쏟아붓는 거예요. “이러면 꽁꽁 얼어서 미끄럽겠지?” 순이는 발갛게 얼어 터질 것 같은 손으로 물동이를 꼭 쥐고 눈길을 걸었어요. 혹시라도 물동이를 엎을까 봐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지요. ‘후유, 이제 다 왔네!’ 집 앞에 거의 도착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 순간 순이가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졌어요. 물동이는 산산조각이 났고, 순이는 차디찬 물을 뒤집어쓰고 말았어요. “아니, 일도 못 하면서 살림살이만 다 부수는구나!” 새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쓰러진 순이를 산에 내다 버리고 혼자서 돌아왔어요. 흥, 이제야 좀 편히 살겠네. 그날 저녁 아버지가 돌아오자, 새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어요. “아이고, 이걸 어째요. 내가 말려도 기어코 산신께 기도를 드린다며 산에 가더니, 아직도 오지 않았어요. 흑흑.” 아버지도 걱정이 되었지만, 새어머니를 위로했어요. “산신께 기도를 올릴 때마다 제 엄마와 수없이 가 본 길이오. 그러니 별 탈 없이 돌아올 거요.” ‘여기가 어디지?’ 겨우 눈을 뜬 순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어요. ‘아, 엄마하고 기도하러 왔던 사당이구나!’ 순이는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어요. “엄마, 저를 지켜 주세요. 산신님, 저를 살려 주세요.” 순이는 꽁꽁 언 손으로 빌고 또 빌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순이가 다시 깨어난 곳은 집 마당이었어요. 인기척 소리에 아버지가 급히 뛰어나왔어요. “산신님이 호랑이로 나타난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로구나! 고맙습니다, 산신님.” 마당에는 호랑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어요. “그래, 어디 아픈 곳은 없니?” 새어머니도 한마디 거드는 척했어요. “다음부터는 절대 혼자서 산에 올라가지 말거라.” 아버지는 그제야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그날 밤 순이는 온몸에 열꽃이 돋아 앓아누웠어요. “어이쿠 내 새끼, 이걸 어쩌누!” 새어머니는 미음을 끓여서 순이에게 떠먹이는 척하다가, 아버지가 안 보는 사이에 슬쩍슬쩍 자기가 다 먹어 버렸어요. 살랑살랑 봄바람에 사르르 얼음이 녹고 연둣빛 새싹이 파릇파릇 돋기 시작하자, 순이도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개나리 꽃길을 따라 아버지가 멀리 장사를 떠나자, 새어머니의 구박은 더욱더 심해졌어요.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순이는 점점 더 야위어 갔어요. 도대체 언제까지 아픈 척할래? 날도 풀렸으니, 오늘은 새로 창호지를 바르거라! 창호지를 바르려던 순이의 눈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풀죽이 보였어요. 순이의 눈에는 풀죽이 먹음직스러워 보였어요. 배고픔을 참지 못한 순이는 풀죽을 마구 퍼먹기 시작했어요. 그 모습을 본 새어머니가 소리를 질렀어요. “아니, 너 먹으라고 풀죽을 쑨 줄 알아!” 새어머니가 빗자루를 집어 들었어요. “창호지를 바르라고 쑨 풀죽을 먹다니, 오늘 혼 좀 나 봐라!” “자, 잘못했어요. 어머니, 잘못했어요.” 순이가 있는 힘을 다해 빌었지만, 새어머니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어요. 결국 순이는 쓰러지고 말았지요. “어, 엄마.”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갑자기 순이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한 마리 새로 변했어요. 여리고 작은 새는 “풀죽풀죽.” 울며 한참 동안 순이네 지붕을 뱅뱅 맴돌았어요. 사람들은 풀죽을 먹다 죽은 순이의 넋이 새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풀죽풀죽 우는 풀죽새의 울음소리는 뻐꾹뻐꾹 소리로도 들려서 ‘뻐꾹새’라고도 불렀어요.
손톱 먹은 들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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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깊고 깊은 산속 외진 암자에 한 선비가 공부하러 들어왔어요. 그곳은 너무나 외로운 곳이었어요.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몇 날 며칠이 가도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지요. 하루는 들쥐 한 마리가 선비의 글 읽는 방을 들랑날랑했어요. 집이었다면 당장 쫓아 버렸겠지만, 외로운 선비는 들쥐에게 이것저것 먹을 것을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선비가 손톱을 깎고 있는데, 들쥐가 손톱을 받아먹는 게 아니겠어요? “어허, 요 녀석 봐라?” 선비는 다른 손톱도 깎아 들쥐에게 던져 주었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 들쥐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고양이에게 잡아먹혔나?’ 선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일을 까맣게 잊었어요. 삼 년 뒤, 공부를 마친 선비는 고향으로 향했어요. “아버님, 소자가 공부를 끝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선비는 크게 소리치면서 성큼성큼 대문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비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어요. 거울을 보듯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눈앞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선비를 본 가족들도 모두 놀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어요. “뭐, 뭐라고? 네가 내 아들이라고?” 아버지는 기가 막힌 듯 선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어요. “여기를 봐도 똑같고 저기를 봐도 똑같으니, 도대체 누가 내 아들이지?” “하루아침에 아들이 둘이 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소?” 놀란 어머니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맞다, 우리 아들은 목뒤에 사마귀가 있어!”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어요. 진짜 선비는 어머니에게 목뒤에 있는 사마귀를 보여 주었어요. 그러자 가짜 선비도 기다렸다는 듯 목뒤에 있는 사마귀를 보여 주는 게 아니겠어요! 두 선비는 모든 것이 똑같았어요. 생김새와 사마귀는 물론 배꼽 옆에 난 점과 손금까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지요. “우리 집안 보물이 어디 있는지 찾아오너라.” 이번엔 아버지가 나섰어요. 진짜 아들이라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 있는 곳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보물을 어디에 두었었더라?’ 진짜 선비는 기억이 가물가물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서 보물이 있는 곳을 잊었던 거죠. 하지만 가짜 선비는 보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어요. 삼 년 동안 아들로 살면서 숟가락 숫자까지 훤히 꿰고 있었거든요. 가짜 선비는 냉큼 달려가 보물을 찾아왔어요. “어디서 감히 우리 아들 행세를 해?” 화가 난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소리쳤어요.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내쫓지 않고!” 아버지 호통에 하인들은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어요. 결국 진짜 선비는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한참을 서럽게 울다 깜빡 잠이 든 선비는 꿈속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할아버지! 누군가 제 행세를 하고 있어요.” 아이처럼 울며 선비가 말했어요. “네 행세를 하는 녀석은 들쥐야, 들쥐!” “네, 들쥐라고요?” 선비는 까맣게 잊었던 암자의 들쥐가 떠올랐어요. “그래, 암자에 있던 그 들쥐가 네 손톱을 먹고 사람으로 둔갑한 거야.” 할아버지의 말에 선비는 등골이 오싹해졌어요. “뭐가 걱정이야? 쥐야 고양이로 잡으면 그만인데.” 하는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는 사라졌어요. 다음 날 선비는 고양이 한 마리를 도포에 품고 집으로 갔어요. 마침 가짜 선비가 대문을 나서고 있었어요. 선비가 고양이를 꺼내자, 발톱을 세운 고양이가 가짜 선비에게 달려들었어요. “으아악!” 고양이에게 목덜미를 물린 가짜 선비는 어느새 흉측한 들쥐로 변해 있었어요.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선비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어요. “아이고, 귀한 내 아들 어디 좀 보자!” 어머니는 선비를 덥석 끌어안았어요. 아버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지요. “진짜 아들도 몰라보고 내가 아들을 쫓아냈다니.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그 후로 선비는 손톱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어요. 혹시 들쥐가 먹으면 큰일 나잖아요?
할미꽃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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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어느 산골 마을에 홀로 세 딸을 키우며 사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무럭무럭 자라는 세 딸 덕분에 어머니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요. 어머니는 세 딸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어요. 우리 첫째 딸은 맛있는 떡을 참 좋아하지. 우리 둘째 딸은 어여쁜 때때옷을 참 좋아하지. 우리 셋째 딸은 꼭 안아 주기만 해도 참 좋아하지.’ 어머니는 세 딸만 생각하면 힘이 절로 솟는 것만 같았어요. 세 딸이 쑥쑥 자라 시집갈 때가 되자, 어머니는 딸들을 불러 원하는 신랑감을 물었어요. 첫째 딸이 말했어요. “저는 돈 많은 부자가 좋아요.” 어머니는 논을 팔아 첫째 딸을 시집보냈어요. 둘째 딸은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똑똑한 선비가 좋아요.” 어머니는 밭을 팔아 둘째 딸이 원하는 곳으로 시집을 보냈지요.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셋째 딸에게 물었어요. “셋째야, 너는 어떤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싶니?” 셋째 딸은 아무 대답 없이 눈물만 흘렸어요. 홀로 남을 어머니가 너무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정 많은 우리 셋째는 마음씨 고운 총각을 찾아야겠구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옥가락지를 팔아 셋째 딸을 시집보냈어요. 세 딸이 떠난 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몹시 외로웠어요. 바느질을 하다가도 세 딸들 머리에 곱게 드리던 자줏빛 댕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지요. “우리 딸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머니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얼굴에는 깊게 주름이 잡혔어요.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세 딸을 보고 싶은 마음도 더욱 간절해졌지요. ‘죽기 전에 우리 딸들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어머니는 꽁꽁 언 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넘어서 쌩쌩 찬바람을 이겨 내며 그리운 세 딸을 만나러 길을 떠났어요. “우리 딸들이 얼마나 반가워할꼬.” 며칠 만에 어머니는 첫째 딸 집에 도착했어요. 잔치가 있는지 집 안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가 솔솔 났어요. 첫째 딸을 본 어머니는 반가워 어쩔 줄 몰랐어요. “아이고, 우리 큰딸.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 하지만 첫째 딸은 늙고 초라한 어머니가 못마땅했어요. “아니, 이런 거지꼴로 여길 오시면 어떡해요? 오늘 사람들도 많이 와 있는데. 창피하니까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가세요!” 첫째 딸은 대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렸어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둘째 딸 집으로 갔어요. 둘째 딸은 어머니를 보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어요. "과거 시험을 앞둔 우리 서방님 글공부하시는데..” “아이고, 미안하구나.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그런데 얘야, 잠시 좀 쉬었다 갈 수 있게 해다오.” “안 돼요. 나중에 오세요. 우리 서방님 시험공부에 방해가 돼요.” 그러면서 누룽지 한 줌을 내주고는 휙 들어가 버렸어요. 어머니는 또다시 힘든 걸음을 옮겼어요. 하지만 배가 고파 더 이상 걸음을 뗄 수가 없었어요. “참, 둘째 딸이 누룽지를 주었지?” 어머니는 품에서 누룽지를 꺼냈어요. 딱딱한 누룽지를 먹으며 어머니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어요. “아마도 우리 셋째는 날 반겨 줄 거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깨를 꼭꼭 주물러 주던 마음씨 고운 아이였으니까.” 셋째 딸을 생각하며 어머니는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휘이잉휘이잉! 사나운 눈보라가 거침없이 들판 위로 휘몰아쳤어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늙은 어머니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소복이 쌓여 갔어요. 희미한 그림자처럼 흔들거리던 어머니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어요. 한바탕 눈보라가 몰아친 다음 날 아침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우던 셋째 딸은 저 멀리 무엇인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무얼까? 산짐승이 추위에 얼어 죽었나?”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던 셋째 딸은 깜짝 놀랐어요. “아, 아니, 어머니가.” 셋째 딸은 어머니를 부여안고 소리쳤어요. “어머니, 어머니, 눈 좀 떠 보셔요. 셋째 딸이에요. 어머니!” 정적에 잠긴 하얀 산봉우리로 셋째 딸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어요. 셋째 딸은 햇볕이 잘 드는 산언덕에 어머니를 정성껏 묻어 드렸어요. “어머니, 이젠 편히 쉬세요.” 이듬해 봄 어머니의 무덤에서 자줏빛 댕기처럼 붉은 꽃이 피어났어요. 마치 세 딸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넋이 꽃이 되어 피어난 것처럼요. 그 후로 사람들은 무덤가에 핀 그 꽃을 할미꽃이라 불렀어요.
하늘에 있는 밭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에 한 젊은이가 살았어요. 젊은이는 어린 나이에 출세하여 먼 이웃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지요. 이웃 나라의 끝도 없이 넓은 땅과 크고 으리으리한 집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자, 젊은이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넓다 크다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젊은이의 감탄에 우쭐해진 이웃 나라 관리는 젊은이를 더 놀래 주고 싶었어요. “어서 가자 해! 더 구경을 시켜 주겠다 해.” 관리는 젊은이를 재촉하며 앞장섰어요. “하늘에 있는 밭이라고 해?” “그렇소. 우리나라에는 하늘에 밭이 있소.” “나 그거 보고 싶다 해.” “내일 당장 보러 가자 해!” 결국 젊은이는 이웃 나라 관리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탔어요. ‘이를 어째,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어이쿠,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꼬?’ “서둘러라 해! 워낙 넓어서 빨리 가야 볼 수 있다 해.” 관리의 말에 젊은이는 입을 삐죽였어요. 쳇, 잘난 척이 끝이 없군. 그나저나 넓기는 정말 넓구나. 땅이 이렇게 넓으니 얼마나 좋을꼬? 얼마나 갔을까, 관리가 수선을 떨며 소리쳤어요. “저기 봐라 해! 저기!” 젊은이는 관리의 손가락을 쫓아 목을 쭉 빼고 바라보았어요. 다음 날 이웃 나라 관리는 온갖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젊은이를 집으로 초대했어요. 젊은이는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몰라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연방 물만 들이켰어요. 그러자 관리가 콧수염을 쓰윽 훑으며 비웃었어요. “우리나라는 땅이 넓어 별별 음식이 다 있다 해. 너희 나라는 땅이 좁아 이런 음식 없을 거라 해.” 마침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지 못하고 젊은이가 소리쳤어요. “무슨 소리! 우리나라는 하늘에 밭이 있소!” “와!” 젊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어요. “저렇게 긴 성은 처음 볼 거다 해. 이렇게 높은 탑도 처음 봤을 거다 해.” 관리의 자랑에 젊은이는 슬슬 속이 꼬였어요. 집으로 돌아온 젊은이는 앉았다 일어났다, 일어섰다 앉았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어 댔어요. 보다 못한 아버지가 물었어요. “대관절, 왜 그러는 게냐?”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어요. “쯧쯧, 이 일을 어쩌누.” 한참을 고민하던 아버지가 무릎을 탁 쳤어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길로 아버지는 마을 노인들을 찾아갔어요. “어르신들, 큰 잔치를 베풀어 드릴 테니 실컷 웃고 즐기십시오.” 노인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잔치를 즐기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겠어요. 모두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지요. 한편 젊은이는 마을 아이들을 모두 모았어요. 얘들아, 슬프게 울어 다오. 그러면 먹을 것을 잔뜩 주마. 아이들이 훌쩍훌쩍 우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겠어요. 모두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지요. 다음 날 젊은이는 이웃 나라 관리들을 이끌고 집을 나섰어요. “자, 어서 갑시다.” 관리들은 들뜬 마음으로 따라나섰어요. 얼마쯤 가다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 노인들을 만났어요. “좋은 일이 있나 보다 해. 무슨 잔치인가 해?” 그러자 젊은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어요. 하늘에 있는 밭에서 오늘 아침 돌아온 노인들이라오. 하늘에 있는 밭은 멀고 멀어서 가는 데 30년, 오는 데 30년, 모두 합해 60년이 걸린다오. 어려서 밭에 일하러 갔다가 60년 만에 돌아왔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소? 순간 이웃 나라 관리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어요. “60년이라고 해?” 갑자기 관리들의 걸음이 슬슬 느려졌어요. “어서들 서두르시오. 갈 길이 멀다오.” 젊은이는 종종걸음을 치며 재촉했지요. 또 얼마쯤 가다가 엉엉 울고 있는 아이들을 만났어요. “아이들이 왜 울고 있나 해?” 젊은이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 훔치는 시늉을 했어요. 하늘에 있는 밭으로 일하러 갈 아이들이라오. 하늘에 있는 밭은 멀고 멀어서 가는 데 30년, 오는 데 30년, 모두 합해 60년이 걸리니, 지금 가면 노인이 되어서나 돌아올 것 아니오. 그러니 어찌 아니 슬프겠소? 젊은이의 말이 끝나자, 이웃 나라 관리들은 손을 휘휘 저으며 뒷걸음질을 쳤어요. “나는 안 간다 해. 하늘에 있는 밭 구경 안 간다 해!” 새파랗게 질린 관리들은 부랴부랴 짐을 싸서 제 나라로 돌아갔어요. 이웃 나라 관리들이 떠나자,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어요. “우리 땅은 이웃 나라에 비해 작지만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다. 왜 그리 경솔하게 행동하였느냐?”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다시는 다른 나라의 겉모습을 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올곧은 관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일로 젊은이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훗날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관리가 되었어요.
교과서 고사성어 이야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는 강가 모래사장으로 조개가 떠밀려 왔어. 조개가 뽀글뽀글 거품을 내뿜으며 딱 조가비를 여는데, 황새가 날아와 조갯살을 쪼아 먹으려고 했어. “아얏!” 화들짝 놀란 조개가 얼른 조가비를 닫자, 황새의 주둥이가 물리고 말았어. “조개야, 넌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어. 만약 내일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말라 죽게 될 거야.” “흥, 너도 내가 주둥이를 놓아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거야.”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질 때까지 조개와 황새는 옥신각신 말다툼했어. 바로 그때, 그물을 어깨에 둘러멘 어부가 배에서 내렸지. “어? 조개와 황새가 싸우고 있잖아. 옳지, 잘됐군. 오늘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어부는 얼른 그물을 던져 조개와 황새를 잡아 망태에 넣었지. 어부지리는 전국책의 연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본다는 뜻이에요. 중국의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고 할 때, 연나라에 와 있던 소진이 연나라 왕의 부탁을 받고 조나라 왕을 찾아가 설득하는 내용이에요. 옛날 옛적에 부지런한 농부 아저씨가 있었어. 봄이 되자 농부 아저씨는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가 땅을 일구었어. 아내가 내온 새참을 먹고 난 농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지. 그때, 농부 아저씨 앞으로 토끼가 깡충깡충 달려갔어. 그런데 토끼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었어. 우아, 가만히 있어도 매일 토끼를 잡을 수 있겠네. 우하하, 앞으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군. 그날부터 농부 아저씨는 쇠스랑을 집어던지고, 그루터기 옆에서 토끼를 기다렸어. 하루, 이틀, 사흘. 토끼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농부 아저씨는 토끼의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대. 수주대토는 한비자의 오두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그루터기를 지켜보며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이에요. 한 가지 일에만 얽매여 발전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지. “어흥!” 깊은 숲속, 꾸뻑꾸뻑 졸고 있던 여우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어. ‘앗,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지.’ 여우는 깜짝 놀랐지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호랑이야, 나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동물들의 왕이 되었단다. 만약 네가 나를 잡아먹는다면 하느님께 큰 벌을 받게 될 거야.” 우하하! 숲속의 왕은 나다. 여우야, 네 거짓말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그래, 그럼 내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뒤를 따라와 보렴.” 호랑이는 속는 셈 치고 어슬렁어슬렁 여우의 뒤를 쫓아갔어. 숲속에서 만난 동물들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랐지. 너구리는 꼬리를 탈싹탈싹, 사슴은 커다란 뿔을 부들부들, 곰은 코를 움찔움찔, 모두 꽁무니 빠지게 도망갔어. “어때, 내 말이 맞지. 동물들이 나를 보고 무서워서 다 도망가잖아.” 여우의 등등한 기세에 눌린 호랑이는 슬며시 깊디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대. 호가호위는 전국책 초책에 실린 이야기로,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에요. 남의 권세를 빌려 허세를 부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에요. 아주 먼 옛날, 저공이라는 아저씨가 살았어. 동물을 좋아하는 아저씨는 원숭이를 길렀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아저씨 집에는 원숭이의 수가 점점 늘어갔어. ‘흉년이 들어 원숭이들이 먹을 도토리가 부족한데 어떻게 하지?’ 아저씨는 곰곰이 생각하다 원숭이들에게 갔어. “흐흠, 오늘부터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 “안 돼요, 안 돼. 아침에 세 개를 먹으면 하루 종일 배가 고파서 어떻게 해요.” 원숭이들은 야단법석을 피우며 아저씨에게 화를 냈어. “그럼,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지.” “키킥, 좋아요. 좋아!” 어때, 원숭이들은 참 어리석지.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나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나 모두 일곱 개는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조삼모사는 열자의 황제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이에요. 눈앞의 이익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하거나 간사한 꾀를 써서 남을 속임을 이르는 말이에요. 젊은 무사가 배를 타고 남실남실 강을 건너고 있었어. 배가 한가운데를 지나갈 무렵 퐁당 칼이 강물에 빠졌지. ‘앗,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보물인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젊은 무사는 깜짝 놀랐어. ‘아, 칼이 빠진 곳을 배에 표시해 두었다가 나중에 찾으면 되겠군.’ 칼이 빠진 뱃전에 표시한 젊은 무사는 좋은 생각을 해냈다는 듯이 얼굴에 미소까지 띠었어. 배가 나루터에 닿자 젊은 무사는 뱃전에 표시가 되어 있는 곳에서 풍덩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어. 꼬르륵꼬르륵 그런데 여기저기 물속을 찾아다녔지만, 칼을 찾을 수가 없었어. 도대체 칼은 어디에 있을까? 각주구검은 여씨 춘추 찰금편에 나오는 옛이야기로, 융통성 없이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이에요. 무사가 칼을 빠뜨린 곳은 강 한가운데지요. 그런데 무사는 배가 움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뱃전의 표시만 보고 나루터에서 칼을 찾으니 당연히 칼이 없겠지요. 관중과 포숙아는 어릴 때부터 무지무지 사이가 좋은 친구야. 두 친구의 우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두터워졌어. 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두 사람이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면 관중이 더 많이 가졌어. “관중은 집안이 가난하니 더 많이 가져가는 게 당연해.” 관중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 포숙아에게 떠넘겼어. 하지만 포숙아는 관중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어. 나라에 전쟁이 나자 두 사람은 함께 싸움터에 나갔어. 관중은 싸움터에서 세 번이나 도망을 치다 번번이 잡혀 왔지. “관중은 비겁한 겁쟁이!” 다른 군인들이 모두 관중을 겁쟁이라고 놀렸어. “관중은 겁이 나서 도망친 게 아니고 늙으신 어머님이 걱정되어 도망간 거네.” 마음이 넓은 포숙아는 항상 관중을 두둔해 주었어.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야.” 관중은 평생 포숙아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았대. 관포지교는 사기 관안열전에 나오는 옛이야기로,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란 뜻이에요. 우정이 아주 돈독한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이지요. 다그닥다그닥, 와!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해 왔어. 조나라의 재상 평원군은 지혜로운 식객을 데리고 초나라에 가서 구원군을 청하기로 마음먹었어. 평원군은 수많은 식객 중 스무 명만 뽑기로 했지. “나리, 제 이름은 모수인데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인데, 그대의 이름은 많은 식객 중에서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소.” "평원군께서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평원군은 당당하게 말하는 모수가 마음에 들었어. 초나라에 간 평원군은 모수의 눈부신 활약으로 귀한 대접도 받고, 구원군도 얻을 수 있었지. 낭중지추는 사기 평원군전에 나오는 옛이야기로,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처럼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비유적 의미예요. 이백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어. 청년이 된 이백은 산속의 절에 들어가 공부했지. ‘아, 날씨가 몹시 더운데 냇가에나 가 볼까?’ 냇가에 간 이백은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어. “할머니, 힘드실 텐데 도끼를 갈고 계시네요.” “도끼로 바늘을 만들고 있다오." “하하하, 도끼로 바늘을 만든다고요?” “젊은이,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네.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도끼를 계속 갈면 언젠가는 바늘이 되겠지.”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은 이백은 그 후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시인이 되었어. 마부작침은 당서의 문예전에 나오는 옛이야기로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이지요. 맹자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어. 맹자 어머니는 아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지. “아이고, 아이고!”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던 맹자는 매일 곡하는 흉내를 내며 놀았어.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를 하였어. “맛있는 떡 사세요. 떡이오!” “맹자야, 책을 읽어야지 언제까지 장사꾼 흉내만 낼 거냐?" 어머니는 장사꾼 흉내를 내는 맹자가 걱정되었어. ‘맹자에게 글을 읽히려면 서당 근처로 이사를 해야겠다.’ 어머니는 맹자를 위해 서당 옆으로 이사를 하였어.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맹자의 집에서는 매일매일 글 읽는 소리가 들렸지. 맹모삼천은 열녀전에 나오는 옛이야기로,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뜻이에요. 자녀 교육에 있어서 주위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 인가를 말해 주고 있지요. 이밀은 나라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신하였어. 어느 날, 황제는 이밀에게 높은 관직을 내렸지. “폐하, 신은 늙으신 할머니를 모시러 고향에 내려가야 하오니, 부디 관직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무어라? 감히 내 명을 거역하다니, 안 된다.” 황제는 붉으락푸르락 화를 냈어. “폐하, 까마귀도 자라면 늙은 어미에게 벌레를 물어다 준다고 합니다. 저에게 까마귀가 어미 까마귀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 황제는 이밀의 효성스러운 마음에 할 수 없이 허락했지. 반포지효는 까마귀가 어미를 되먹이는 습성에서 유래한 말로, 극진하게 효도하는 것을 의미해요. 이런 이유로 해서 반포지효는 어버이의 은혜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도를 뜻하지요. 장수 유비는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 여러 장수와 힘을 모았어. 하지만 번번이 후한의 조조와 싸움에서 지고 말았지. “제갈량만 얻어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텐데.” 실의에 빠져 있는 유비에게 스승인 사마휘가 말했어. 유비는 사마휘의 말을 듣고 제갈량을 찾아갔지. “제갈 공, 우리 함께 나라를 위해 일을 합시다.” "저같이 미천한 사람이 어찌 나라의 일을 하겠습니까?” 제갈량은 정중하게 유비의 제안을 거절했어. 하지만 유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갈량이 사는 초가집을 찾아갔지. “이렇게 누추한 곳을 세 번씩이나 찾아주셨으니 미약한 힘이지만 장군을 돕겠습니다.” 유비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음이 움직였어. 제갈량을 얻은 유비는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물리치고 촉한의 황제가 되었지. 삼고초려는 삼국지의 촉지 제갈량전에 나오는 말로,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노력하는 것을 말해요. 중국 삼국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난양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데서 유래하지요. 국경 가까이 있는 시골 마을에 점을 치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 어느 날, 할아버지가 키우던 말이 국경 너머로 도망을 갔지. “할아버지, 갑자기 말이 없어져 섭섭하시지요?” “괜찮네. 지금은 서운하지만,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자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어. 그런데 얼마 후 도망갔던 말이 멋진 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지. “할아버지, 정말 좋으시겠어요.” “글쎄, 이 일로 인해 혹시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할아버지는 좋은 일에도 담담하게 말했어.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아들이 새 말을 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어. “아드님의 다리가 부러져서 아주 속상하시겠어요.” “괜찮소. 이 일로 인해 혹시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지. 몇 년 후 오랑캐가 국경을 쳐들어와 전쟁이 났어.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잃었지만, 다리를 다친 아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 무사했대. 새옹지마는 회남자의 인간훈에 나오는 이야기로,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에요.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좋은 일이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고, 불행한 일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어요. 집안이 가난한 차윤은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열심히 일을 했어. 해가 지자, 집으로 돌아온 차윤은 책을 펼쳤어. “후유, 너무 어두워서 책을 읽을 수가 없군.” 바로 그때, 캄캄한 하늘에 반딧불이들이 훨훨 날아다녔어. “옳지, 반딧불이들을 많이 모으면 환해지겠군.” 차윤은 주머니에 반딧불이들을 잡아 와 글을 읽었지. 반딧불이들은 반짝반짝, 차윤은 공자왈 군자구제기 소인구제인. 손강도 차윤 못지않게 집안이 가난했어.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되었지. 밖에는 펄펄 함박눈이 내리고, 손강은 방 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었어. 겨울이 되면 어둠이 더 빨리 내렸어. 기름 살 돈이 없는 손강은 추위를 무릅쓰고 방문을 열어 환한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지. 반딧불이의 불빛과 하얀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던 차윤과 손강은 높은 벼슬에 올라 나라를 위해 일했어. 형설지공은 이한이 지은 몽구에 나오는 이야기로,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는 노력이라는 뜻이에요. 고생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는 자세를 이르는 말이에요. 장승요는 유명한 화가였어. 어느 해 안락사라는 절의 벽에 정성껏 그림을 그렸지. 하루, 이틀, 한 달. 드디어 장승요는 커다란 용 두 마리를 그렸어. “와, 금세라도 용이 벽을 뚫고 날아오를 것 같군.” “에이, 자세히 보니 용에 눈동자를 안 그렸잖아.” “용에 눈동자를 그리면 하늘로 날아가기 때문에 안 그렸소.” 사람들은 장승요의 말을 믿지 않고 수군거렸어. “설마, 거짓말하지 마시오.”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점을 찍어 눈동자를 그렸어. 맑게 갠 하늘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용이 벽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어. 하지만 눈동자가 없는 용은 그대로 벽에 남아 있었지. 화룡점정은 수형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이에요. 무슨 일을 할 때 최후의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함으로써 그 일이 완성되는 것이며, 또한 일 자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에요.
교과서 전래 동요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남생아 놀아라. 남생아 놀아라. 촐래촐래가 잘 논다. 새는 새는. 새는 새는 남게 자고. 쥐는 쥐는 궁게 자고. 우리 같은 아이들은 엄마 품에 잠을 잔다. 우리 형제. 우물가엔 나무 형제. 하늘에는 별이 형제. 우리 집엔 나와 언니. 우리 마을. 저 달 봤나 나도 봤다. 저 해 봤나 나도 봤다. 저 구름 봤나 나도 봤다. 저 물 봤나 나도 봤다. 두꺼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물 길어 오너라 너희 집 지어 줄게.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쇠스랑 가지고 뚤레뚤레 오너라. 다 따 먹은 난두박. 처마 끝에 대롱박. 꼬부랑 막대 탁 치니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깽. 기와밟기. 어디 골 기완가 장자골 기와지. 몇 닷 냥 주었나 석닷 냥 주었지. 어디 골 기완가 전라도 기와지. 몇 닷 냥 주었나 열닷 냥 주었지. 어디 골 기완가 경상도 기와지. 몇 닷 냥 주었나 스물닷 냥 주었지. 널뛰기. 쿵더쿵 쿵더쿵 널뛰는데. 싸래기 받아서 닭 주고. 왕겨를 받아서 개 주고.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텃밭에도 안 된다 상추 씨앗 밟는다. 꽃밭에도 안 된다 꽃모종을 밟는다. 울타리도 안 된다 호박순을 밟는다.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종종머리 찾았네 장독대에 숨었네. 까만 머리 찾았네 방앗간에 숨었네. 빨간 댕기 찾았네 기둥 뒤에 숨었네. 셋 하면 새색시가 거울을 본다고 잘잘잘. 넷 하면 냇가에서 빨래를 빤다고 잘잘잘. 다섯 하면 다람쥐가 알밤을 깐다고 잘잘잘.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열쇠 없어 못 열겠네. 어떤 대문에 들어갈까 남대문에 들어가.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 덜커덩떵 열렸다. 실구대 소리. 실구대 실구대 실구대 틀이 늘어 가네. 앞뜰에 일 나간 엄마 빨리 돌아오소 엄마 빨리 돌아오소. 꼬꾸대 꼬꾸대 꼬꾸대 틀이 늘어 가네. 앞뜰에 일 나간 아빠 빨리 돌아오소 아빠 빨리 돌아오소. 절이세 절이세 배추김치 절이세. 앞뜰에 일 나간 아빠 엄마 돌아오소 아빠 엄마 돌아오소. 청어 엮자.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풀자 풀자 청어 풀자 위도 군산 청어 풀자. 풀자 풀자 청어 풀자 위도 군산 청어 풀자.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나물 노래. 꼬불꼬불 고사리 이 산 저 산 넘나물. 가자 가자 갓나무 오자 오자 옻나무. 말랑말랑 말냉이 잡아 뜯어 꽃다지. 배가 아파 배나무 따끔따끔 가시나무. 바귀 바귀 씀바귀 매끈매끈 기름나물.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전라도 우수영은 강강술래. 새 노래. 후여딱 딱새야 꼬두박딱 딱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말고. 남의 논에 다 가거라. 고사리 꺾자. 고사리 대사리 꺾자 나무 대사리 꺾자. 유자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장장 벌이여. 꺾자 꺾자 고사리 대사리 꺾자. 앞동산 고사리 꺾어다가 우리 아빠 반찬 하세. 강가 사람은 강냉이떡 요 내 요기는 고구마떡. 떡 떡배비떡 경상도 골미떡. 조청간에 다 띄워 놓고 요 내 목으로 홀라당. 둥당기타령.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산에 올라 옥을 캐니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이름 좋아 산옥이냐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산에 올라 도라지 캐니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들고 보니 산삼일세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꽃을 꺾어 머리 꽂고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잎은 훑어 입에 물고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산에 올라 절 구경하니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나를 보고 모두 웃네 당기 둥당기 둥당기 허. 싸름싸름 산천초목 우거진 곳. 싸름 우는 소리가 처량도 하네. 싸름싸름 내 맘도 살살. 다 녹여낸다. 풍년가.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에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구 좋다.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 가세.
그림 형제 동화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아이고! 쥐들이 우리 아기를 물었네.” 아기 엄마가 몽둥이를 휘두르자 쥐들이 도망갔어요. “어머나!” 아가씨가 옷장 문을 열자 쥐들이 뛰쳐나왔어요. 하멜른에 사는 사람들은 쥐 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쥐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창고에 있는 곡식을 먹어 치우고, 부엌에 있는 치즈와 빵도 모조리 갉아 먹었어요.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어요. “힘을 모아 쥐를 잡아 봅시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일을 다 제쳐 놓고 쥐를 잡기 시작했어요. 고양이와 개도 함께 쥐를 잡는 데 힘을 보탰어요. 하지만 쥐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았어요.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시청으로 몰려갔어요.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굶어 죽을 거예요.” “당장 쥐들을 잡아 주세요!” 시장과 시 의원들은 매일 모여 쥐를 잡을 방법을 의논했어요. 하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어요. 어느 날, 큰 키에 깡마른 사나이가 시장을 찾아왔어요. 사나이는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어요. “쥐를 모두 없애 줄 테니 1,000냥을 주십시오.” “그게 정말이오? 좋소, 그럼 언제부터 쥐를 잡겠소?”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사나이는 곧바로 광장 한가운데로 갔어요.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사나이는 피리를 불었어요. 필릴리~ 닐리리~. 피리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지자 집집마다 숨어 있던 쥐들이 광장에 모여들었어요. 사나이가 피리를 불며 큰길로 가자 쥐들도 사나이의 뒤를 따라갔어요. 어느새 사나이와 쥐들은 강가에 이르렀어요. 사나이가 피리를 불면서 강을 건너자, 쥐들도 강물로 첨벙첨벙 뛰어들었어요. 쥐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두 물에 빠져 죽었어요. 사나이는 의기양양해서 시장을 찾아왔어요. “이제 약속한 1,000냥을 주십시오.” 그런데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사나이가 너무 쉽게 쥐들을 없앴다고 생각했어요. “피리만 불었을 뿐인데 1,000냥은 너무 아깝지 않소?” 시장이 말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어요. 시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어요. “당신이 한 일에 비해 1,000냥은 좀 많은 것 같소. 게다가 혼자 힘이 아니라 강이 도와주었지 않소. 그러니 반만 주겠소.” 마을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어요. 사나이는 시장과 마을 사람들이 약속한 대로 돈을 주지 않자 화가 났어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사나이는 단호히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어요. 마을 사람들은 공짜로 쥐를 없앴다며 손뼉을 치며 좋아했어요. 얼마 뒤 사나이가 다시 하멜른에 나타났어요. 사나이는 그전에 쥐를 잡았을 때처럼 광장 한가운데에서 피리를 불기 시작했어요. 필릴리 닐리리.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 주위로 몰려들었어요. 아이들은 사나이 주위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어요. 사나이는 아이들이 모두 모이자 피리를 불며 큰길로 갔어요. 그러자 아이들도 그의 뒤를 따라갔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와 아이들은 다리를 건너고 들을 지나 작은 언덕까지 올라갔어요. 그들이 언덕 가까이 가자 갑자기 언덕이 둘로 갈라지면서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아이들도 따라 들어갔어요. 아이들이 모두 들어가자 동굴은 ‘쿵’ 하고 닫혔어요. 하멜른에는 이제 두 명의 아이만 남았어요. 한 아이는 늦게 일어나 피리 소리를 듣지 못했고, 한 아이는 뒤늦게 피리 소리를 듣고 따라갔지만 동굴 문이 이미 닫혀 버린 뒤였어요. 시장은 사나이에게 돈을 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어요. 하멜른의 사람들은 마땅히 주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고 돈을 아끼려다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는 큰 슬픔을 겪게 된 거예요. 헨젤과 그레텔 깊은 숲속에 두 아이가 나무꾼인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남자아이의 이름은 헨젤이고 여자아이의 이름은 그레텔이었어요. 새엄마는 아빠가 나무를 하러 나가면 헨젤과 그레텔에게 집안일을 시키며 구박했어요. 그러던 어느 해, 가뭄이 들어 남매의 집에 먹을 것이 똑 떨어지고 말았어요. “먹을 것이 다 떨어졌으니 큰일이오.” 아빠는 걱정이 되어 새엄마에게 말했어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내일 아침 아이들을 데리고 숲으로 나무를 하러 가요. 그런 다음 아이들은 숲에 남겨 두고 우리만 집으로 돌아오면 돼요.” “아이들을 숲에 버리자는 거요?” 아빠가 깜짝 놀라자 새엄마는 비웃었어요. “다른 방법이 있으면 말해 봐요. 다 같이 굶어 죽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새엄마의 성화에 아빠는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배가 고파 잠을 이루지 못하던 헨젤과 그레텔은 새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말을 듣고 말았어요. “오빠,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레텔, 걱정하지 마.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 아빠와 새엄마가 잠들자 헨젤은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 조약돌을 주웠어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새엄마가 아이들을 깨웠어요. “어서 일어나! 숲으로 나무하러 가야 해!” 헨젤은 주머니 가득 조약돌을 넣었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아빠와 새엄마의 뒤를 따라 숲으로 갔어요. 헨젤은 숲으로 가는 길에 조약돌을 하나씩 떨어뜨렸어요. 집에 돌아올 때 조약돌을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어요. 숲속 깊은 곳에 이르자 아빠는 모닥불을 피웠고, 새엄마는 헨젤과 그레텔에게 딱딱한 빵을 한 덩어리씩 주었어요. “우리는 저쪽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 이걸 먹으면서 여기서 기다리렴.” 그러고는 아빠와 새엄마는 더 깊은 숲으로 가 버렸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빵을 먹으며 아빠와 새엄마를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어요. 얼마쯤 지났을까, 헨젤이 눈을 떠 보니 주위가 온통 캄캄해져 있었어요. “오빠, 어떻게 집에 가지?” 헨젤은 울먹이는 그레텔을 달래며 말했어요. “달이 뜰 때까지 기다려. 그럼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얼마 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자 헨젤이 떨어뜨린 조약돌이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조약돌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어요.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오자 새엄마는 실망한 표정이었으나 아빠는 무척 기뻐했어요. 아빠는 아이들을 버리고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거든요. 얼마 뒤 또다시 집에 먹을 것이 부족해졌어요. 이번에도 역시 새엄마는 아빠에게 졸라 댔어요. “이제 남은 건 말라 버린 빵 몇 덩어리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아이들을 꼭 버리고 돌아와야 해요.” 새엄마의 성화에 아빠는 또 그러기로 했어요. 이번에도 아이들은 새엄마의 말을 엿듣고 말았어요. 하지만 문이 굳게 잠겨 조약돌을 주우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빠와 새엄마는 헨젤과 그레텔에게 빵 한 덩어리씩을 주고 숲으로 데려갔어요. 헨젤은 숲으로 가는 길에 빵을 조금씩 뜯어내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네 사람은 지난번보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아빠는 모닥불을 피웠어요. “여기서 기다려. 일을 마치면 데리러 올 테니까.” 새엄마는 말을 마치자마자 아빠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주위가 깜깜해지도록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지만, 아빠와 새엄마는 오지 않았어요. 헨젤은 그레텔에게 오는 길에 빵 조각을 떨어뜨린 이야기를 했어요. “달이 뜨면 빵 조각을 따라가자.” 잠시 뒤 달이 떠올랐지만, 빵 조각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새들이 빵 조각을 모두 먹었기 때문이었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집을 찾아가기 위해 밤새 숲속을 헤매고 또 헤맸어요. “오빠, 배고파! 더는 못 가겠어.” 그때였어요. “그레텔, 저기 언덕 위에 집이 있어.” 헨젤과 그레텔은 집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우아, 과자로 만든 집이야.” “세상에! 지붕은 초콜릿이고, 창문은 설탕으로 만들어졌어.” 너무나 배가 고팠던 헨젤과 그레텔은 지붕과 창문을 마구 뜯어 먹었어요.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커다란 모자를 쓴 할머니가 집에서 나왔어요. “너희는 누구니?” “저희는 헨젤과 그레텔이에요. 길을 잃고 말았어요.” “길을 잃었다고? 저런, 가엾기도 하지.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자, 어서 먹으렴.” 할머니는 케이크와 과일 등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내놓았어요. “잘 먹겠습니다.” 아이들은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었어요. 배가 부르자 스르르 잠이 왔어요. “오빠, 나 졸려.”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자렴.”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폭신폭신한 침대까지 마련해 주었어요. 그날 밤, 할머니는 잠든 헨젤과 그레텔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어요. 사실 할머니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못된 마녀였어요. ‘이 아이들은 너무 말랐어. 우선 남자아이부터 살을 찌워서 잡아먹어야겠다. 그동안 여자아이는 집안일이나 시켜야지.’ 아침이 되자 마녀는 헨젤을 새장에 가두었어요. “할머니, 저를 왜 가두시는 거예요?” “너를 통통하게 살찌워서 잡아먹을 거야.” “할머니, 오빠를 풀어 주세요.” 그레텔이 애원하자 마녀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어요. “너는 얼른 청소나 해!” 마녀는 헨젤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그레텔에게는 온갖 집안일을 다 시켰어요. “팔을 내밀어 보아라.” 마녀는 매일 헨젤의 손목을 만져 보며 살이 얼마나 쪘는지 확인했어요. 어느 날, 마녀가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았어요. “할머니, 무엇을 찾으세요?” “응, 내 지팡이.” 마녀는 바로 옆에 있는 지팡이도 보지 못했어요. 그레텔은 마녀가 눈이 나쁜 것을 눈치채고 헨젤에게 뼈다귀 하나를 건네주었어요. “오빠, 할머니는 눈이 나빠. 그러니 앞으로 손목을 내밀어 보라고 하면 이 뼈다귀를 내밀어.” 그날 저녁에도 마녀는 헨젤에게 손목을 내밀어 보라고 했어요. 헨젤은 그레텔이 준 뼈다귀를 슬며시 내밀었어요. “아니, 왜 이렇게 살이 안 찌는 거야?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냥 잡아먹어야지. 그레텔, 어서 커다란 솥에 물을 끓이거라.” 그레텔은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커다란 솥에 물을 가득 넣고 끓였어요. “그럼 빵부터 구워 볼까? 그레텔, 오븐 안에 들어가서 온도가 적당한지 살펴보거라. 온도가 알맞으면 밀가루 반죽을 안에다 집어넣어야 하니까.” 그레텔은 마녀가 빵부터 굽겠다고 하는 게 이상했어요. ‘혹시 나부터 구워 먹으려는 거 아니야?’ 눈치 빠른 그레텔은 오븐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어요. “할머니, 어떻게 오븐 안으로 들어가죠? 좀 가르쳐 주세요.” “이런 바보 같으니.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마녀는 소리를 꽥 지르며 오븐 쪽으로 다가왔어요. “이 오븐 입구가 얼마나 넓은데! 잘 봐! 나도 들어갈 수 있단 말이야!” 마녀는 오븐 안으로 머리를 쑥 들이밀었어요. 그때 그레텔은 있는 힘을 다해 마녀를 오븐 안으로 밀었어요. 그러고는 오븐 문을 쾅 닫아 버렸어요. “으악! 살려 줘!” 못된 마녀는 시뻘건 불 속으로 사라졌어요. 그레텔은 재빨리 헨젤을 새장 속에서 꺼내 주었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기뻐서 꼭 안고 깡충깡충 뛰었어요. 아이들은 마녀의 집 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보았어요. “여기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헨젤과 그레텔은 상자의 뚜껑을 살그머니 열어 보았어요. 상자 안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작은 돌들이 가득 들어 있었어요. 아이들은 빛나는 돌을 주머니 속에 가득 넣었어요. “우리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마녀의 집을 나선 아이들은 집을 찾아 길을 떠났어요. 그리고 한참을 걸어 큰 강에 이르렀어요. “다리도 없는데 강을 어떻게 건너지?” 헨젤이 한숨을 쉬자 그레텔이 오리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저기 오리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자!” 그레텔은 오리에게 소리쳤어요. “오리야, 우리가 강을 건널 수 있게 좀 태워 줘.” 그러자 오리가 헤엄쳐 다가왔어요. 둘이 함께 타기엔 오리가 작았어요.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은 한 명씩 오리 등을 타고 강을 건넜어요. “오리야, 고마워!” 강을 무사히 건넌 헨젤과 그레텔은 또다시 숲을 걸었어요. 걸으면 걸을수록 낯익은 숲이 보였고, 마침내 그리운 집에 다다랐어요. 헨젤과 그레텔은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가 아빠의 품에 안겼어요. “오! 헨젤, 그레텔, 다시 돌아와 주었구나.” 아빠는 아이들을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아빠는 아이들을 숲속에 버린 것을 뉘우치고,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매일 숲속을 헤매고 다녔어요. 새엄마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요. “아빠! 선물이에요!” 헨젤과 그레텔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돌들을 꺼내 아빠에게 보여 주었어요. “세상에! 값비싼 보석이구나. 보석을 팔면 이제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그 뒤로 세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사이좋은 부부가 살았어요. 하지만 부부에게는 오래도록 아기가 없었어요. 부부는 하느님께 예쁜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그렇게 원하던 아기를 갖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부부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요. 부부의 이웃집에는 심술궂은 마녀가 살았어요. 마녀의 집에는 뜰이 있었는데, 뜰에는 싱싱한 채소와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임신한 아내는 뜰 안에 심겨 있는 파릇파릇한 상추가 무척 먹고 싶었어요. 하지만 마녀에게서 상추를 얻어먹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아내는 병이 나서 자리에 눕고 말았어요. 남편은 상추 때문에 하루하루 야위어 가는 아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요. ‘나쁜 짓인 줄 알지만 아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어.’ 남편은 상추를 조금 훔치기로 마음먹었어요.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남편은 마녀의 담을 넘어 뜰로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상추를 한 움큼 뜯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 여보. 정말 맛있어요.” 아내는 상추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버렸어요. 다음 날 저녁에도 남편은 마녀의 뜰로 갔어요. 남편이 상추를 바구니에 담아 막 돌아설 때였어요. 무시무시한 마녀가 소리쳤어요. “이 나쁜 도둑 같으니라고!”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기를 가진 제 아내가 먹고 싶어 해서 그랬습니다.” 남편은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어요. 그러자 마녀는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아기를 가졌다고? 지금부터는 상추를 마음껏 먹도록 허락하마. 하지만 네 아내가 아기를 낳으면 나에게 줘야 한다.” “네....... 아, 알겠습니다.” 남편은 겁이 나서 덜컥 약속하고 말았어요. 얼마 뒤, 아내가 귀여운 여자아이를 낳자 마녀가 바람처럼 나타났어요. “약속대로 아기는 내가 데려가마.” 마녀는 부부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갔어요. 그러고는 아기의 이름을 라푼첼이라고 지었어요. 시간이 흘러 라푼첼은 어여쁜 숙녀가 되었어요. 마녀는 라푼첼을 숲속에 있는 높은 탑에 가두었어요. 탑에는 문도, 계단도 없었고, 꼭대기에 작은 창만 하나 있었어요. 탑으로 올라갈 때면 마녀는 탑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했어요. “라푼첼아, 라푼첼아. 너의 기다랗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다오.” 그러면 라푼첼은 황금빛 긴 머리카락을 창 아래로 내려 주었어요. 마녀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탑 위로 올라갔어요. 몇 년 뒤 이웃 나라의 왕자가 사냥을 나왔다가 라푼첼이 있는 탑 근처까지 오게 되었어요. 왕자가 탑을 지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어요. 라푼첼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어요. “어디서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거지?” 왕자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탑을 발견했어요. 왕자는 탑 위로 올라가려고 문을 찾았지만 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정말 이상한 탑이군.” 그날 이후, 왕자는 날마다 숲에 와서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왕자는 마녀가 탑 아래에서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어요. “라푼첼아, 라푼첼아. 너의 기다랗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다오.” 왕자는 나무 뒤에 숨어 황금빛 머리카락을 내려 주는 라푼첼을 보았어요. ‘아,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구나.’ 왕자는 라푼첼을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마녀가 떠나자 왕자는 탑 아래로 가서 말했어요. “라푼첼아, 라푼첼아. 너의 기다랗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다오.” 그러자 라푼첼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탑 아래로 스르르 내려왔어요. 왕자는 라푼첼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탑 위로 올라갔어요. “어머나!” 멋진 왕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올라오자 라푼첼은 깜짝 놀랐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놀라지 마세요. 나는 이웃 나라의 왕자예요.” 라푼첼도 왕자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둘은 금세 친해졌어요. 왕자는 매일 밤마다 라푼첼을 만나러 왔어요. 마녀는 낮에만 라푼첼을 찾아오기 때문이었어요. 어느 날, 왕자는 라푼첼에게 청혼을 했어요. “저도 왕자님과 결혼을 하고 싶지만 이 탑을 나갈 수가 없어요.” 라푼첼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어요. “왕자님, 올 때마다 명주실을 한 타래씩 가져다주세요. 그것을 엮어서 기다란 밧줄을 만들어 내려갈게요.” 그 뒤 라푼첼은 왕자가 가져다준 명주실을 엮어 기다란 밧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밧줄이 거의 완성될 무렵, 마녀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어요. 라푼첼이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이었어요. “어머니가 왕자님보다 훨씬 무거워요. 그리고 왕자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오거든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마녀가 무서운 얼굴로 다그치자 라푼첼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지금까지 키워 준 나를 배신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마녀는 라푼첼의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자른 다음 깊은 숲속으로 내쫓아 버렸어요. 밤이 되자 탑 아래에서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라푼첼아, 라푼첼아. 너의 기다랗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다오.” 그러자 마녀는 창문 고리에 걸어 놓은 라푼첼의 머리카락을 밑으로 내려보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온 왕자는 깜짝 놀랐어요. 아름다운 라푼첼 대신 무시무시한 마녀가 눈앞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라푼첼은 어디에 있소?” “이제 라푼첼은 영영 찾을 수 없을 거야.” 마녀의 말에 왕자는 절망하며 탑에서 뛰어내렸어요. 그 바람에 가시덤불에 떨어져 눈을 다치고 말았어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왕자는 라푼첼을 찾아 숲을 헤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왕자는 귀에 익은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라푼첼이 왕자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랫소리였어요. 왕자는 라푼첼의 목소리를 따라갔고 두 사람은 드디어 만나게 되었어요. “오, 라푼첼. 당신이군요.” “왕자님! 그런데 왕자님의 눈이.” 라푼첼은 왕자의 감긴 눈을 보자 눈물이 났어요. 라푼첼의 뜨거운 눈물이 왕자의 눈 위로 똑똑 떨어지자 왕자의 눈은 씻은 듯이 나았어요. 그 뒤 두 사람은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빨간 모자 어느 작은 마을에 귀여운 소녀가 살았어요. “할머니가 선물을 보내셨구나.” 엄마는 리본이 달린 상자를 소녀에게 내밀었어요. 상자 안에는 빨간 모자와 빨간 망토가 들어 있었어요. “우아, 참 예뻐요.” 소녀는 그날부터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망토를 걸치고 다녔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소녀를 ‘빨간 모자’라고 불렀어요. 어느 날, 엄마가 빨간 모자를 불렀어요. “빨간 모자야, 케이크와 포도주를 할머니께 드리고 오렴. 할머니가 편찮으신데 이것들을 드시면 건강해지실 거야. 숲속에 무서운 늑대가 있으니 한눈팔지 말고 곧장 길만 따라가렴.” “네, 엄마.” 빨간 모자는 케이크와 포도주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어요. 숲속에 들어선 빨간 모자는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서 엄마의 말은 까맣게 잊었어요. “와, 정말 예쁜 꽃이다. 할머니께 선물해야지.” 빨간 모자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꽃을 꺾었어요. 그때 나무 뒤에서 늑대가 입맛을 다시며 빨간 모자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낄낄, 아주 맛있게 생긴 꼬마로구나.” 늑대는 빨간 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어요. “귀여운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 “빨간 모자야.” “그래? 빨간 모자야,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니?” “할머니에게 드릴 꽃을 꺾고 있어.” 빨간 모자는 늑대가 다정하게 굴자, 엄마의 말은 까맣게 잊고 꼬박꼬박 대답을 했어요. ‘그럼 할머니부터 잡아먹어야겠군.’ 늑대는 빨간 모자에게 다시 물었어요. “할머니가 어디에 사시니?” “커다란 참나무 옆 파란 지붕의 집에 살고 계셔.” 빨간 모자의 말을 듣자마자 늑대는 부리나케 할머니의 집으로 달려갔어요. “할머니, 빨간 모자가 왔어요.” 문밖에서 늑대가 빨간 모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어요. “오, 빨간 모자야. 빗장을 들어 올리고 들어오렴. 난 기운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구나.” 늑대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할머니를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어요. 할머니의 잠옷을 입고 모자를 쓴 늑대는 침대에 누워 빨간 모자를 기다렸어요. 잠시 뒤에 빨간 모자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어요. “할머니, 빨간 모자가 왔어요.” “그래, 어서 들어오렴.” 할머니의 침실로 들어간 빨간 모자는 할머니가 좀 낯설게 느껴졌어요. “할머니, 귀가 왜 이렇게 커요?” “귀가 커야 네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지.” “그럼 할머니, 손은 왜 이렇게 커요?” “손이 커야 널 더 잘 잡을 수 있지.” “그럼 할머니, 입은 왜 이렇게 커요?” “입이 커야 널 더 잘 잡아먹을 수 있지.” 그 말을 하자마자 늑대는 커다랗게 입을 벌려 빨간 모자를 통째로 꿀꺽 삼켜 버렸어요. 그러고는 할머니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이 들었어요. 그때 지나가던 사냥꾼이 늑대의 코 고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냥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창문으로 할머니의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랬더니 불룩한 배를 내밀고 침대에 누워 잠든 늑대가 보였어요. “저 녀석이 할머니를 잡아먹었군. 어디 혼 좀 나 봐라.” 사냥꾼은 가위로 늑대의 배를 싹둑싹둑 갈랐어요. 그러자 할머니와 빨간 모자가 튀어나왔어요. 사냥꾼은 늑대의 배에 커다란 돌덩이를 넣고 바늘로 꿰매 버렸어요. 잠에서 깬 늑대는 어슬렁어슬렁 우물로 걸어갔어요. “아함, 잘 잤다. 그런데 너무 많이 먹었는지 목이 마르네.”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인 늑대는 그대로 우물에 빠져 죽었어요. 배 속에 든 돌덩이가 무거워 중심을 잃었던 거였어요. 세 사람 모두 기뻐했어요. 빨간 모자는 앞으로 엄마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개구리 왕자 옛날 어느 나라에 예쁜 공주가 살았어요. 어느 날, 공주가 우물가에서 황금 공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우물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황금 공이 물속으로 가라앉자 공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어요. “내 공! 엉엉!” 그때 누군가가 공주에게 말을 걸었어요. “예쁜 공주님, 왜 우세요?” 공주는 깜짝 놀라 우물가를 쳐다보았어요. 그랬더니 개구리가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어요. “저예요, 개구리예요.” “개구리가 말을 한다고?” “네, 그런데 왜 그렇게 슬퍼하세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황금 공을 우물에 빠뜨렸어.” “제가 황금 공을 찾아 드릴 테니 저랑 친구가 되어 주세요. 매일 산책도 함께 하고, 밥도 함께 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친구요!” “좋아, 친구가 되어 줄게.” 공주는 덜컥 약속해 버렸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개구리는 황금 공을 가지고 나왔어요. 공주는 개구리에게 황금 공을 건네받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달려가 버렸어요. “공주님, 같이 가요.” 개구리는 폴짝폴짝 공주의 뒤를 따라갔어요. 하지만 공주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어요. “휴, 하마터면 개구리랑 친구가 될 뻔했네.” 궁전으로 돌아온 공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고 곧 개구리에 대해서 잊어버렸어요. 다음 날, 공주가 임금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개구리가 찾아와 어제 연못에서 있었던 일을 임금에게 모두 이야기했어요. “공주야, 개구리 말이 다 사실이냐? 약속을 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공주는 어쩔 수 없이 개구리와 함께 지내게 되었어요. “공주님, 함께 식사해요.” “공주님, 재미있게 놀아 주세요.” 개구리는 공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어요. “그래,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으니 내가 참아야지.” 공주는 개구리가 하자는 대로 해 주었어요. 그날 밤, 방으로 들어간 공주는 깜짝 놀랐어요. 개구리가 공주의 방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왜 내 방에 있는 거니?” “공주님처럼 침대에서 자고 싶어요. 공주님, 침대에 날 올려 주세요.” “뭐라고? 더 이상은 못 참아.” 화가 난 공주는 개구리를 벽에다 던져 버렸어요. 그런데 개구리는 온데간데없고 멋진 왕자가 서 있었어요. “공주님, 나는 저주에 걸린 이웃 나라의 왕자예요. 누군가 나를 벽에 던지면 저주가 풀리게 되어 있었어요. 공주님이 나의 저주를 풀어 주었어요. 나와 결혼해 주세요!” 개구리를 귀찮아했던 것이 마음에 걸린 공주는 아무 말 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어요. 왕비가 된 공주는 어떤 약속이든 꼭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았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방앗간 주인이 살았어요. 방앗간 주인은 마음씨는 착했지만 허풍이 심했어요. 방앗간 주인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어요. 어느 날, 임금이 방앗간 앞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임금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방앗간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방앗간 주인은 임금에게 초라하게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말했어요. “제게 딸이 하나 있는데 짚으로 황금 실을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임금은 방앗간 주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것참 마음에 드는 재주로구나. 네 말대로 딸에게 그런 솜씨가 있다면 내일 궁전으로 데리고 오너라.” “예? 네.” 방앗간 주인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만약 네 딸에게 정말 그런 재주가 있다면 왕비로 삼겠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넌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방앗간 주인은 걱정이 되어 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어요. “내가 허풍을 떠는 바람에.” 마음씨 착한 딸은 아버지를 위해 날이 밝자마자 임금을 찾아갔어요. “네가 바로 방앗간 주인의 딸이로구나. 짚으로 황금 실을 만들지 못하면 네 아버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임금은 짚단과 물레가 있는 방으로 방앗간 주인의 딸을 데려간 다음 문을 잠갔어요. “이 짚으로 어떻게 황금 실을 만들지? 흑흑.” 딸이 흐느끼며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난쟁이가 나타났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왜 울고 있어?” “이 짚으로 황금 실을 만들지 못하면 임금님이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겠대.” “선물을 주면 내가 도와주지.” “내 목걸이를 줄게.” 난쟁이는 주문을 외었어요. “아브라카다브라!” 그러자 짚이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실로 변했어요. 다음 날 아침, 임금은 딸을 찾아왔어요. “방앗간 주인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약속대로 너를 왕비로 삼겠다.” 그러자 옆에 있던 늙은 신하가 말했어요. “임금님, 속임수를 썼을지도 모르니 한 번 더 만들어 보라고 하시지요.” 딸은 어제보다 더 많은 짚단이 쌓인 방에 갇혔어요. 딸은 수북하게 쌓인 짚들을 보자 눈물이 났어요. “아름다운 아가씨야, 왜 울고 있니?” 난쟁이가 또 나타나 물었어요. “저 짚으로 황금 실을 만들어야 해.” “선물을 주면 내가 도와주지.” “내 반지를 줄게.” 난쟁이가 주문을 외자 짚이 모두 반짝이는 황금 실로 변했어요. 다음 날 아침, 신하들과 함께 딸의 방에 온 임금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약속대로 너를 왕비로 삼겠다.” 그러자 늙은 신하가 얼른 임금의 말을 가로막았어요. “임금님, 한 번만 더 시험해 보시지요.” 신하들은 가난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게 못마땅했던 거였어요. 딸의 방은 또다시 짚으로 가득 찼어요. “흑흑.” 딸이 울음을 터뜨리자 난쟁이가 또 나타났어요. “아름다운 아가씨야, 왜 울고 있니?” “이 짚들을 전부 황금 실로 만들어야 해.” “선물을 주면 내가 또 도와주지.”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럼 왕비가 되어서 낳은 첫아이를 나에게 준다고 약속해 줘.” 딸은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난쟁이가 주문을 외자 눈 깜짝할 사이에 짚은 황금 실로 변했어요. 마침내 딸은 임금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어요. 일 년 뒤 왕비는 귀여운 아기를 낳았어요. 그날 밤, 난쟁이가 또 나타났어요. “이제 약속을 지켜야지.” 왕비는 온 나라의 보석을 다 줄 테니 아기만은 데려가지 말라며 사정했어요. 하지만 난쟁이는 들은 척도 안 했어요. “네 아기를 나에게 줘.” “안 돼! 아기만은 절대로 줄 수 없어.” 왕비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어요. “후유, 울음소리는 딱 질색이야. 사흘 안에 내 이름을 알아맞혀 봐. 내 이름을 못 맞히면 아기는 내가 데려갈 거야.” 다음 날, 왕비는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는 이름을 모두 적어 내도록 했어요. 밤이 되자, 난쟁이가 찾아왔어요. “자, 내 이름을 맞혀 봐.” “알프레드?” “아니.” “아달베르트?” “아니.” “알프레히트? 아른롤트? 베른트? 베르톨트?” “모두 틀렸어. 이제 이틀 남았어.” 다음 날, 왕비는 신하들을 마을로 보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이름을 적어 오게 했어요. 밤이 되자 어김없이 난쟁이가 찾아왔어요. “자, 이제 말해 봐.” “에밀?” “아니.” “에른스트? 에리히? 귄터? 게르하르트?” “다 틀렸어. 이제 하루 남았어.” 사흘째 되는 날, 한 신하가 왕비를 찾아와 말했어요. “왕비님, 어젯밤 숲속을 걷다가 난쟁이가 모닥불 주위를 돌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걸 보았습니다.” “무슨 노래더냐?” “오늘은 빵 굽고 내일은 술 빚고, 모레는 왕비의 아기를 데려온다네. 아, 정말 멋진 일이야. 아무도 모를걸. 내 이름이 룸펠슈틸츠헨이라는 것을.” 왕비는 신하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기뻐했어요. 그날 밤, 난쟁이가 다시 찾아왔어요. “오늘도 알아맞히지 못하면 아기는 내가 데려간다. 히히, 어서 말해 보렴.” “오스발트가 아닐까?” 왕비는 일부러 엉뚱한 이름을 댔어요. “아니, 그건 내 이름이 아니지.” “그럼 룸펠슈틸츠헨인가?” 그러자 난쟁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을 쿵쿵 찧어 댔어요. 그러고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렸어요. 가난한 나무꾼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어요. 아침 일찍 숲으로 일을 나가며 나무꾼이 아내에게 부탁을 했어요. “오늘은 큰딸에게 점심 도시락을 보내 주구려. 가는 길에 좁쌀을 하나씩 뿌려 놓을 테니 그걸 보고 따라오라고 해요.” 점심때가 되자 아내는 도시락을 바구니에 담고 큰딸을 불렀어요. “아버지께 가져다드리고 오렴. 아버지가 좁쌀을 뿌리면서 가셨으니까 그걸 따라가면 될 거야.” 심술쟁이 큰딸은 투덜대며 바구니를 들고 숲으로 갔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잃고 말았어요. 숲속의 새들이 좁쌀을 쪼아 먹었기 때문이에요. 날이 저물도록 길을 헤매던 큰딸은 작은 오두막의 불빛을 보고 찾아갔어요. 작은 오두막에는 긴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가 수탉, 암탉, 얼룩소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큰딸은 할아버지에게 부탁했어요. “할아버지,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나는 괜찮은데 친구들에게도 물어봐야지. 수탉, 암탉, 얼룩소야, 아가씨가 자고 가도 되겠니?” 할아버지가 묻자 동물들은 동시에 한쪽 발로 ‘탁’ 하고 바닥을 굴렀어요. “친구들도 모두 좋다고 하니 자고 가거라. 그런데 혹시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나누어 다오.” 할아버지가 큰딸의 바구니를 보며 말했어요. “저도 먹을 게 없어요. 바구니에 든 음식은 제가 다 먹어 버렸거든요. 이 집에는 먹을 게 없나요?” 큰딸은 퉁명스럽게 물었어요. 큰딸은 부엌에 있는 채소들로 수프를 끓여 할아버지와 나누어 먹었어요. 하지만 동물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배가 부른 큰딸은 슬슬 잠이 왔어요. “아, 피곤하다.” 큰딸은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잤어요. 잠시 뒤 할아버지가 큰딸을 노려보며 말했어요. “인사도 하지 않고 잠을 자다니! 버릇없는 녀석은 고생을 해야 해!” 할아버지는 방바닥에 있는 작은 문을 열더니 그 아래로 큰딸을 밀어뜨렸어요. 한편, 점심도 못 먹고 일을 한 나무꾼은 화가 난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큰애가 점심때 분명히 도시락을 가지고 갔었어요.” 아내가 나무꾼을 달래며 말했어요. “흥, 어디선가 놀다가 심부름을 잊어버린 게 분명해.” 다음 날 아침, 나무꾼은 일하러 나가며 말했어요. “오늘은 둘째에게 점심을 보내구려. 가는 길에 콩을 뿌려 놓을 테니 한눈팔지 말고 따라오라고 해요.” 점심때가 되자 아내는 도시락 바구니를 만들었어요. “둘째야, 아버지께 점심을 가져다드리고 오렴. 콩을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아, 낮잠 자려고 했는데.” 게으름뱅이 둘째 딸은 입을 삐쭉 내밀고 집을 나섰어요. 하지만 둘째 딸도 길을 잃고 말았어요. 어제처럼 새들이 콩을 모두 쪼아 먹었기 때문이에요. 길을 헤매던 둘째 딸도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했어요. “하룻밤만 재워 주시지 않겠어요?” “나는 괜찮은데 친구들에게도 물어봐야지. 수탉, 암탉, 얼룩소야, 아가씨가 자고 가도 되겠니?” 할아버지가 묻자 동물들은 동시에 한쪽 발로 ‘탁’ 하고 바닥을 굴렀어요. “친구들도 모두 좋다고 하니 자고 가거라. 그런데 혹시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나누어 다오.” 할아버지가 둘째 딸의 바구니를 보며 말했어요. “저도 먹을 게 없어요. 바구니에 든 음식은 제가 다 먹어 버렸거든요.” 둘째 딸도 부엌으로 가서 수프를 끓여 할아버지와 둘이서만 먹고, 동물들에게는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배가 부른 둘째 딸도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잤어요. “이런, 어제 온 아가씨와 똑같군.” 할아버지는 방바닥의 작은 문을 열고 둘째 딸도 밀어뜨렸어요. 한편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무꾼은 화를 내며 아내를 나무랐어요. “오늘도 점심 도시락을 먹지 못했소. 둘째는 어디선가 게으름을 피우다가 잠이 들어 버린 게 분명해.” 다음 날 점심, 이번에는 막내딸이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섰어요. 막내딸도 언니들처럼 숲에서 길을 잃었어요. 숲을 헤매던 막내딸은 배가 고파 털썩 주저앉았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점심 도시락은 먹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오늘도 점심을 못 드셨겠네.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막내딸도 길을 헤매다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했어요. “할아버지, 숲에서 길을 잃었어요.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그러자 이번에도 할아버지는 동물들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동물들은 동시에 발을 ‘탁’ 하고 굴렀어요. “그래, 자고 가도 좋다. 그런데 혹시 먹을 것을 가지고 있니?” “네, 이거 드세요.” 막내딸은 바구니의 음식을 할아버지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막내딸은 부엌으로 들어가 수프를 끓여 먹고 수탉과 암탉에게는 보리를, 얼룩소에게는 마른풀을 주었어요. 또한 할아버지의 잠자리를 정리했어요. 그러고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와 동물들은 막내딸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막내딸은 깜짝 놀랐어요. 모든 게 어젯밤과 달라져 있었어요. 삐걱거리던 나무 침대는 황금 침대로 변했고, 창문에는 비단 커튼이 바람결에 살랑거렸어요. 잠시 뒤 세 명의 하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어요. “어머나, 당신들은 누구세요? 할아버지와 동물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막내딸은 할아버지의 침대 쪽을 보고 또다시 깜짝 놀랐어요. 그곳에 잘생긴 젊은이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에요. “놀라지 마세요. 사실 나는 이 나라의 왕자예요. 나쁜 마법사가 나를 할아버지로 변하게 하고, 내 신하들은 동물로 변하게 한 거예요. 당신의 착한 마음씨 덕분에 저주에서 풀렸어요. 나와 결혼해 주세요.” 막내딸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어서 가서 아가씨의 가족을 데려오세요.” 그러자 막내딸은 한숨을 내쉬었어요. “저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숲에서 길을 잃어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자 왕자는 자신을 찾아왔던 언니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언니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게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막내딸은 언니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왕자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옛날 어느 마을에 심술궂은 부자가 살고 있었어요. 부자는 하인들에게 주는 품삯이 아까워 딱 한 명의 하인만 부리며 살았어요. 하인은 부지런하고 착한 젊은이여서 고되게 일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부자는 일 년이 지나도록 젊은이에게 품삯을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젊은이가 부자의 집에서 일한 지 어느덧 삼 년이 지났어요. 어느 날, 젊은이가 부자에게 말했어요. “주인님, 이제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밀린 제 품삯을 주십시오.” 부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젊은이에게 말했어요.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내가 많은 돈을 주겠다.” 부자는 거들먹거리며 지갑을 꺼냈어요. “자, 하나, 둘, 셋. 일 년에 동전 한 개씩이다.” 부자는 달랑 세 개의 동전을 젊은이에게 주었어요. “네, 정말 고맙습니다.” 젊은이는 지금까지 돈을 본 적이 없어서 그 돈이 적은지도 많은지도 몰랐어요. 젊은이는 동전 세 개를 주머니에 넣고 길을 떠났어요.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어느 마을의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어요.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에 초라한 옷차림의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어요. “여보시오, 젊은이.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구려.” 할아버지가 젊은이를 불러 세웠어요. “네, 오늘 삼 년 동안 일한 품삯을 받았거든요.” 젊은이는 동전 세 개를 할아버지에게 보여 주었어요. “그 돈을 나에게 주면 안 되겠나? 자네는 젊으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돈을 벌 수가 있지 않은가?” “좋아요, 그렇게 하죠.” 젊은이는 동전 세 개를 선뜻 할아버지에게 주었어요. “정말 고맙네. 나도 보답을 하고 싶은데. 동전 세 개를 주었으니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겠네.” 젊은이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말했어요. “우선 작은 총을 가지고 싶어요. 두 번째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싶어요. 제가 연주를 멈출 때까지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춤을 추는 마법의 바이올린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제가 부탁을 하면 아무도 거절하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좋아, 세 가지 소원을 모두 들어주지.” 할아버지는 풀숲에서 주섬주섬 작은 총과 바이올린을 꺼내 주었어요. “우아, 여기에 이런 게 있다니!” 젊은이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리고 이제부터 자네가 부탁하면 아무도 거절하지 못할 거야.” 젊은이는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났어요. 잠시 뒤 젊은이는 우두커니 서서 나무 위를 바라보는 신사를 만났어요.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보고 있네. 저 새를 잡아 주면 내가 돈주머니를 주겠네.” “네, 제가 잡아 드릴게요.” 젊은이는 총으로 작은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쏘았어요. 깜짝 놀란 작은 새가 가시덤불로 툭 떨어졌어요. 신사는 작은 새를 주우러 가시덤불로 가며 말했어요. “나는 자네가 잡아 준 새가 아니라 떨어진 새를 줍는 거네. 그러니 자네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지.” 신사는 새를 줍기 위해 가시덤불을 뒤졌어요. 화가 난 젊은이는 천천히 바이올린을 켰어요. 그러자 신사가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아이고, 아파!” 춤을 추던 신사는 가시덤불에 찔려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났어요. “제발 바이올린을 멈춰 줘!” “그럴 수는 없어요. 아저씨는 욕심이 너무 많아요.” “그래, 내가 잘못했어. 이제부터는 착한 사람이 될 테니 바이올린을 멈춰 줘. 그리고 약속한 대로 돈주머니도 줄게.” 젊은이가 바이올린 켜는 것을 멈추자 신사도 겨우 춤을 멈추었어요. “이제 약속한 것을 주세요.” 젊은이가 손을 내밀자 신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돈주머니를 주었어요. “고마워요. 이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잘 쓸게요.” 신사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어디 두고 보자!” 신사는 부리나케 재판관에게 달려갔어요. “재판관님, 마을 어귀에서 바이올린을 멘 젊은이에게 돈주머니를 빼앗겼어요. 게다가 저를 때리고 옷까지 찢어 놓았어요. 어서 그 녀석을 잡아 주세요.” 재판관은 관리들에게 젊은이를 당장 잡아 오라고 명령했어요. 잠시 뒤 관리들은 젊은이를 잡아 왔어요. “네가 이 신사의 옷을 찢고 돈주머니까지 빼앗았다고 하는데, 그게 모두 사실이냐?” “아니에요, 저는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요. 단지 제 바이올린을 켰다가 멈춘 것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신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어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모두 꾸며 낸 것이라고요!” 신사는 얼굴까지 빨개지며 펄펄 뛰었어요. 그러자 재판관은 젊은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감히 재판관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다니. 이것은 물건을 훔친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너의 죄가 크니 너에게 목을 매는 벌을 내리겠다!” 재판관의 판결이 내려지자 신사는 큰 소리로 웃었어요. “하하, 쌤통이다!” 젊은이는 손이 묶인 채 교수대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웬일인지 젊은이는 벌벌 떨기는커녕 무척 태연한 표정이었어요. 교수대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어요. 드디어 젊은이의 목에 굵은 밧줄이 걸렸어요. “죽기 전에 마지막 부탁이 있으면 말해라.” 재판관이 젊은이에게 말했어요. “바이올린을 한 번만 켜게 해 주세요.” 젊은이의 말을 들은 신사는 재판관에게 애원했어요. “재판관님, 바이올린을 켜는 건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젊은이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약속한 세 번째 소원 때문이었어요. “마지막 소원이니 들어주도록 하겠다.” 젊은이는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재판관도, 신사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구경꾼들도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여!” “누가 나 좀 말려 줘요!” 바이올린 소리가 더욱 힘차게 온 마을에 울려 퍼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었어요. 시장에 있던 사람들도, 젖소를 몰고 가던 할아버지도, 숨바꼭질하던 아이들도, 꽃을 따던 아가씨들도, 밭을 갈던 농부들도, 개와 고양이도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점점 지쳐 갔어요. “더 이상은 못 추겠어.” “너를 살려 주마. 아니, 나 좀 살려 줘. 제발 바이올린 연주를 멈춰 다오.” 재판관은 젊은이를 붙들며 말했어요. 그제야 젊은이는 바이올린을 멈추었어요. 그리고 땅바닥에 쓰러져 헉헉거리고 있는 신사에게 다가갔어요. “아직도 내가 돈주머니를 훔쳤다고 할 거예요?” 신사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재판관을 보며 말했어요. “아니 아니, 재판관님. 제가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 돈주머니는 제가 준 거예요.” 젊은이는 신사에게 또다시 물었어요.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저에게 준 돈주머니는 어디서 난 거죠?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또 바이올린을 켤 거예요.” “제발, 그것만은 안 돼! 다른 사람의 돈주머니를 훔친 거야.” 곁에 있던 재판관은 신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뭐라고? 그럼 당신이 진짜 죄인이잖아!” 결국 욕심쟁이 신사는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젊은이는 신나게 길을 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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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한 소녀가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소녀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쳤어요. 엄마가 그만 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만 거예요. 소녀는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지만, 엄마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어요. 결국 몇 달 뒤 엄마는 가엾은 딸을 남겨 둔 채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다음 해 봄이 되자, 소녀의 아빠는 새엄마를 맞아 들였어요. 성질이 고약한 새엄마는 자기와 똑 닮은 두 딸을 데리고 왔어요. 소녀는 언니들이 생겨서 기뻤지만, 두 언니는 소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새엄마도 소녀를 못마땅하게 여겼지요. 새엄마는 아빠의 눈을 피해 소녀에게 누더기를 입히고 집안일을 시켰어요. 새엄마와 언니들의 식사가 끝나면 소녀는 설거지를 해야 했고, 새엄마와 언니들의 방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 놓아야 했지요.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어요. 두 언니는 소녀를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었어요. 밤이 되면 소녀는 초라한 다락방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잠을 잤어요. 새엄마의 구박은 나날이 심해졌지만, 소녀의 아빠는 새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했어요. 그저 소녀를 애처롭게 바라볼 뿐이었어요. 마음씨 착한 소녀는 아빠가 걱정할까 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요. 집안일이 모두 끝나면 소녀는 너무 지쳐 다락방으로 올라갈 힘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늘 부엌 아궁이 근처에 쌓아 놓은 잿더미 옆에서 잠이 들고는 했지요. “얘는 온통 시커먼 재투성이네. 이제부터 얘를 ‘신데렐라’라고 부르자.” 언니들은 깔깔 웃으며 소녀를 놀려 댔어요. 신데렐라는 ‘재를 뒤집어쓴 소녀’라는 뜻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궁전에서 왕자의 신붓감을 뽑는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사흘 동안 열리는 무도회에 나라의 모든 소녀들이 초대를 받았지요. 새엄마와 언니들은 무도회에 갈 때 입을 옷과 모자, 신발 등을 고르느라 바빴어요. 신데렐라도 언니들처럼 무도회에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데렐라에게는 예쁜 옷과 신발이 없었어요. “신데렐라, 넌 무도회에 갈 수 없어. 우선 언니들의 몸치장을 거들어 준 다음, 밀린 집안일이나 해!” 새엄마가 딱 잘라 말했어요. 신데렐라는 언니들의 드레스를 입혀 주고, 언니들의 머리를 가지런히 빗겨 주었어요. “신데렐라, 너도 무도회에 가고 싶니? 그럼 집안일을 모두 끝낸 다음에 오렴, 호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자. 저런 차림으로 무도회에 가 봤자 망신당할 게 뻔해.” 새엄마와 언니들은 초라한 신데렐라를 보며 한참 동안 깔깔 웃어 댔어요. “신데렐라, 집안일이나 하고 있어. 그게 너에게 딱 어울리니까 말이야.” 새엄마와 언니들이 서둘러 집을 나섰어요. 혼자 남은 신데렐라는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어요. 바로 그때 창문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비치더니 웬 할머니가 나타났어요. 그 할머니는 요정이었어요. “신데렐라, 울지 말아라. 내가 무도회에 보내 주마!” 신데렐라는 깜짝 놀라서 물었어요. “네? 할머니가 어떻게요?” “밭에 가서 잘 익은 호박 한 개만 따 오너라.” 신데렐라는 가장 크고 잘 익은 호박 한 개를 따 왔어요. 요정 할머니는 요술봉으로 호박을 톡 건드렸어요. 그러자 호박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금빛 마차로 변했어요. 신데렐라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이번에는 쥐덫이 있는 곳으로 가자.” 신데렐라는 요정 할머니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어요. 부엌 구석에 놓인 쥐덫에는 쥐 여섯 마리가 찍찍거리고 있었어요. “신데렐라, 쥐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라.” 요정 할머니는 요술봉으로 쪼르르 뛰어나오는 쥐들을 톡! 그러자 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훌륭한 말로 변했어요. 신데렐라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 친절한 마부만 있으면 되겠구나.”
사운드 오브 뮤직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기타 치는 수녀. 마리아는 논베르크 수녀원 뒷산에서 기타를 치며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가볍게 어깨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어요. 거기에는 자그마한 몸집에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녀가 미소 띤 얼굴로 서 있었어요. “마리아, 원장 수녀님께서 찾으세요.” 수녀는 이 말만 전하고 아래쪽으로 내려갔어요. 마리아는 수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련 수녀였어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 마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에서 내려갔어요. 원장 수녀의 방은 오래된 수녀원 건물 구석 쪽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있는 논베르크 수녀원은 지은 지 수백 년이나 된 건물이었어요. 수녀원의 수녀들은 행동이나 말씨가 조용하고 차분했어요. 하지만 마리아는 급하다 싶으면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기도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하는 바람에 다른 수녀들로부터 자주 눈총을 받곤 했어요. 마리아는 원장 수녀의 방문 앞에 섰어요.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문을 두드렸어요. “들어와요.” 원장 수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려왔어요. 마리아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부르셨어요, 원장 수녀님?” 마리아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원장 수녀는 웃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어서 와요, 마리아. 자, 이리 앉아요.” 원장 수녀는 마리아에게 자기 책상 앞에 있는 작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요즘 어때요, 지낼 만해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원장 수녀는 인자한 눈빛으로 마리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어요. “우리 논베르크 수녀원이 마리아에게 준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겠어요?” “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올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대답에 원장 수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마리아, 그렇다면 마리아가 이곳을 잠시 떠나는 것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할 수 있겠어요?” “제, 제가 여기를 떠나야 하나요?” “얼마 동안만이에요. 일 년쯤 바깥세상에 나가 봉사하다가 다시 돌아오면 돼요. 실은 오스트리아 해군 대령을 지낸 트랩 대령이 오늘 갑자기 나를 찾아왔어요. 트랩 대령은 내게 아이들의 가정 교사*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가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원장 수녀는 마리아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어요. “오늘 오후에 트랩 대령 저택으로 떠나세요. 아이들이 일곱 명이나 되는 데다가 어머니가 없다니 아마 힘들 거예요. 하지만 마리아라면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몇 시간 뒤, 마리아는 한 손에는 짐이 든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기타를 든 채 아이겐 역에서 내렸어요. 마리아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든 채 걷다가 지나가던 신사에게 물었어요. “트랩 대령 저택이 어느 쪽인가요?” “저쪽입니다.” 마리아는 신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어요. 푸른 나무 사이로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그 길 끝에 커다란 건물이 보였어요. 그 집이 바로 마리아가 갈 트랩 대령의 저택인 것 같았어요. 의자 위의 밤송이. 마리아는 한참을 걸어 트랩 대령의 저택 앞에 다다랐어요. 벨을 누르자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어요. “저는 새로 온 가정 교사인데, 트랩 대령님은 계신가요?” “안에 계십니다. 이리 들어오세요.” 집사는 마리아를 응접실로 안내했어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밖으로 나간 뒤, 마리아는 푹신한 소파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어요. 그때 등 뒤에서 빠른 발소리가 났어요. 이어 굵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오느라 수고했소. 나는 게오르그 폰 트랩이요.” “저는 마리아입니다.” 트랩 대령은 마리아를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어요. 당신은 우리 아이들의 열두 번째 가정 교사요. 지난번 가정 교사는 두 시간도 안 되어 가 버렸소.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소. 가정 교사들이 규율을 지키지 않아서였소. 규율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시오. 매일 아침 공부를 시키시오. 마리아가 물었지만, 트랩 대령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는 갑자기 호루라기를 꺼내 여러 음색으로 불기 시작했어요. 곧 2층에서 푸른 세일러복을 입은 네 명의 여자아이와 두 명의 남자아이가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걸음을 맞추어 내려왔어요. 뒤이어 한 여자아이가 책을 읽으면서 오더니 후닥닥 제자리에 섰어요. “이번에 새로 오신 마리아 선생님이시다.” 트랩 대령이 아이들에게 마리아를 소개했어요. 마리아는 뜻밖의 광경에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트랩 대령이 호루라기를 건네며 말했어요. 이 저택은 무척 넓은 곳이오. 난 고함 소리는 딱 질색이오. 그러니 이것으로 아이들을 부르시오. 마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어요. “아니에요. 전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이름을 부르겠어요.” 트랩 대령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응접실을 나갔어요.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어요. “앞으로 우리 잘 지내보자.” 그러자 아이들도 마리아를 둘러싸며 재잘거렸어요. 좀 전의 딱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발랄한 모습이었어요. 그때 가정부인 슈미트라 부인이 들어와 아이들을 서둘러 산책 보냈어요. 그리고 앞으로 마리아가 지낼 방으로 마리아를 안내했어요. 마리아는 자기 방 침대에 걸터앉아 수녀원을 생각했어요. 실제 거리는 얼마 안 되는데도 아주 멀리 떠나온 듯 모두가 그리웠어요. 잠시 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렸어요. 마리아는 서둘러 식당으로 내려갔어요. 하지만 트랩 대령과 일곱 아이 모두 벌써 식탁에 앉아 있었어요. 마리아는 빈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곧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어요. “아니, 무슨 일이오?” 트랩 대령이 놀란 얼굴로 마리아를 쳐다보았어요. “그, 그게.” 마리아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으며 의자를 내려다보았어요. 의자에 가시투성이 밤송이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마리아는 아이들을 둘러보았어요. 모두 모르는 체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몹시 불안해 보였어요. “별일 아닙니다. 갑자기 다리가 삐끗해서.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리아는 손을 뒤로 돌려 밤송이를 슬쩍 떨어뜨리고 의자에 앉았어요. 그제야 아이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어요.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어요. 다른 집 같으면 가족끼리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했을 거예요. 그러나 트랩 대령 가족은 달랐어요.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어요. 참다못해 마리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여러분,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어 고마워요. 무척 기쁘고 즐거워요.” 순간 모두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어요. “우리 집에서는 식사 시간에 잡담하지 않소.” 트랩 대령이 나무라듯 말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마르타가 울먹였어요. 전보를 들여다본 트랩 대령의 표정이 환해졌어요. “나는 내일 아침 일찍 빈으로 떠나야겠구나. 자, 식사가 끝났으면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한결 누그러진 트랩 대령은 아이들을 둘러보고는 식당을 나갔어요. 트랩 대령이 식당을 나가자 잔뜩 얼어붙어 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어요. 마리아는 “후유!” 하고 한숨을 쉬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어요. 잃어버린 웃음. 어느새 밤이 되었어요. 슈미트라 부인은 마리아의 침구를 정리해 주었어요. 마리아는 조심스럽게 슈미트라 부인에게 물었어요. “참 이해가 되지 않아요.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트랩 대령님은 어째서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아마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면서 슈미트라 부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트랩 대령은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에 지원했어요. 나중에 그는 오스트리아 잠수함 사령관이 되었고, 매력적인 여인과 결혼을 했어요.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해군 기지가 있는 폴라에서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거예요. 트랩 대령은 싸움터로 떠났고, 트랩 대령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친정으로 갔어요. 전쟁에서 트랩 대령은 큰 공을 세워, 여왕으로부터 훈장과 함께 남작의 작위를 받았어요. 그러나 불행히도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지고 말았어요. 따라서 트랩 대령에게는 더는 지휘할 군대도 배도 없어져 버렸어요. 전쟁이 끝난 뒤, 트랩 대령은 실의에 빠진 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냈어요. 트랩 대령의 아내는 트랩 대령을 위로하기 위해 때때로 피아노 앞에 앉아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었어요. 그런 아내의 노력 덕분에 트랩 대령은 살아갈 용기를 얻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았어요. 그런데 또다시 트랩 대령에게 불행이 찾아왔어요. 아내가 막내 그레틀을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던 거였어요. 아내를 잃은 뒤 트랩 대령은 모든 것이 군대식이에요. 마리아는 그동안 트랩 대령이 너무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슈미트라 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 트랩 대령이 불쌍하게 여겨졌어요. 그리고 외롭게 자랐을 일곱 아이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그런 마리아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슈미트라 부인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마음 아파할 건 없어요. 특히 아이들은 불쌍하다고 지나치게 잘 해 주면 버릇이 나빠지게 마련이니까요.” 슈미트라 부인이 돌아간 뒤, 마리아는 일곱 아이의 행복을 위해 기도를 드렸어요.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어요. 하늘이 번쩍거리고 ‘우르르 쾅!’ 하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났어요. 마리아는 창문을 닫으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첫째인 리즐이 홀딱 젖은 채 창문으로 들어온 거예요. 산책을 하고 와 보니 현관문이 잠겨 있었어요. 아빠에게 이야기 안 하실 거죠? 사실 리즐은 전보를 전해 주는 집배원 소년과 좋아하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아빠 몰래 만나고 온 거였어요. 마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젖은 옷을 갈아입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러고는 리즐이 마른 옷을 갈아입게 도와주었어요. 그때, 갑자기 마리아의 방문이 활짝 열렸어요. “선생님, 무서워요!” 막내 그레틀이 마리아의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마리아는 그레틀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어요. 이어서 다른 아이들도 후닥닥 마리아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어. 오늘은 내 침대에서 함께 자자.” 마리아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다정하게 말했어요. “무섭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즐거운 생각을 하면 돼.” “어떤 생각이요?” “음, 푸른 초원, 하늘의 별들.” 마리아가 말하자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귀를 기울였어요. 그리고 아이들도 하나씩 즐거운 생각들을 말했어요. “크리스마스!” “무당벌레!” 어느새 천둥 번개는 잊고 모두 즐겁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요란한 환영 인사. 다음 날, 트랩 대령은 아침 일찍 저택을 떠났어요. 아이들은 어젯밤 일로 마리아와 아주 가까워졌어요. 마리아가 진정으로 자기들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트랩 대령이 집을 비운 사이, 마리아와 아이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자유롭게 정원도 산책하고 시장 구경도 갔어요. 그리고 마리아는 기타를 들고 아이들과 함께 동산으로 소풍도 갔어요. 동산에서 한참 즐겁게 놀고 있는데 문득 커트가 말했어요. “지난번 선생님 칫솔에 접착제를 바른 뒤로 제일 즐거워!” 그 말을 듣고 마리아가 물었어요. “너희같이 착한 아이들이 왜 그런 장난을 치는 거니?” “그래야 아빠의 관심을 끌 수 있거든요.” 브리지타의 말에 마리아는 가슴이 아팠어요. 그동안 사랑과 관심에 목말랐던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마리아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어요. “얘들아, 우리 아빠가 돌아오시면 노래를 불러 환영해 드리자.” “아빠는 노래를 싫어해요.” 마리아는 기타를 들며 말했어요. “우린 아는 노래가 없어요.” 마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괜찮아, 배우면 돼." 그날부터 아이들은 마리아에게 매일매일 노래를 배웠어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트랩 대령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결혼을 약속한 슈레이더 남작 부인도 함께 데려왔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남편을 잃고 트랩 대령처럼 혼자 살고 있었어요. 집으로 들어선 트랩 대령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집 안이 너무나 조용했거든요. “다들 어디로 간 거야?” 트랩 대령은 짐을 내려놓은 다음, 슈레이더 남작 부인과 정원에서 차를 마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호수 쪽이 떠들썩했어요. 트랩 대령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어요. 일곱 아이가 마리아와 함께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큰 소리로 즐겁게 노래도 부르면서요. 아이들은 트랩 대령을 향해 손을 흔들었어요.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아이들은 신이 나 모두 보트에서 일어섰어요. 그 바람에 보트가 기우뚱하더니 마리아와 아이들 모두 호수에 빠져 버렸어요. “앗!” 트랩 대령과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요. 그런데 마리아와 아이들은 마냥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호수를 헤엄쳐 나왔어요. 트랩 대령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졌어요. 트랩 대령은 호루라기를 불었어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아이들은 서둘러 트랩 대령과 슈레이더 남작 부인 앞에 나란히 섰어요. ‘삑!’ 트랩 대령은 흩어져도 좋다는 뜻으로 호루라기를 불었어요.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이윽고 트랩 대령은 마리아에게 눈길을 돌렸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트랩 대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요. “아이들과 즐겁게 놀았을 뿐입니다.” “내 말을 잊었소? 아이들은 늘 단정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 말이오.” 그동안 아이들은 놀고 싶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놀지도 못했어요. 리즐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에요. 프리드리히는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해요. 브리지타는 이야기 상대가 필요하고. “듣기 싫소. 당신 같은 가정 교사는 필요 없으니, 당장 수녀원으로 돌아가시오!” 트랩 대령은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그때였어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누가 부르는 거요?” 트랩 대령이 놀라며 물었어요. “아이들이요.” 마리아가 대답하자 트랩 대령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되찾은 노래. 거실 문을 연 트랩 대령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아이들이 거실 난롯가에 둘러앉아 루이자가 치는 기타 소리에 맞추어 합창하고 있었거든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그 앞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어요. 트랩 대령이 거실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재빨리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아이들과 트랩 대령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어요. “정말 아름다운 노래예요, 게오르그!” 그 곡은 트랩 대령이 죽은 아내와 함께 자주 부르던 노래였어요. 트랩 대령은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트랩 대령이 거실에 모습을 나타낸 순간, 아이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가 혹시 화를 낼까 봐서요. 그런데 트랩 대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이들은 아버지가 보인 뜻밖의 반응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노래를 계속했어요. “오랜만에 돌아오시는 아빠를 위해 준비한 거예요.” 트랩 대령은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렸어요. 아이들은 다투어 트랩 대령의 품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말했어요. “마리아 선생에게 좀 지나쳤던 것 같네요, 게오르그.” 트랩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올라가려던 마리아에게 다가갔어요. “아까는 내가 너무 지나쳤소. 흥분해서 그만.” 마리아는 잠시 멈추고 말했어요. 더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어요. “알겠소, 선생 덕분에 조금 전에야 비로소 그걸 깨달았소.” 트랩 대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마리아는 깜짝 놀라 트랩 대령의 얼굴을 쳐다보았어요. 트랩 대령은 겸연쩍은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사과하오. 선생이 계속 우리 집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선생 생각은 어떻소? 트랩 대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어요. 마리아는 대답 대신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어른들만의 파티. 다음 날부터 트랩 저택은 파티 준비로 바빴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다며 트랩 대령에게 파티를 열어 달라고 했던 거예요. 아이들의 어머니가 죽은 뒤, 이 저택에서 처음 열리는 파티였어요. 하인들은 청소와 음식 장만 등 파티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어요. 파티 전날 해 질 무렵이었어요. 마리아가 자기 방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었어요. 마리아는 깜짝 놀랐어요. “어머, 부인께서 웬일이세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이 새엄마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니 마리아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방을 나간 뒤 마리아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드디어 파티 날이 되었어요.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손님 맞을 준비도 빈틈없이 잘 되어 있었어요. 점심때가 지나면서부터 손님이 오기 시작하더니 해가 질 무렵에는 넓은 저택 안이 손님들로 가득 찼어요. 홀에는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 잘 차려입은 손님들이 즐겁게 웃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참으로 멋진 파티였으나 아이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다면서 파티를 열어 달라고 하더니, 막상 파티가 시작되자 아이들에게는 정원에 나가 놀라고 했어요. 정원에 나온 아이들은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어요.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 주기로 했어요. 아이들은 둘씩 짝을 맞추어 마리아를 따라 춤을 추었어요. 왈츠는 쉬운 춤이었으나 아이들은 서로 발을 밟기도 하고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며 깔깔댔어요. 마리아와 프리드리히는 손을 맞잡고 한 바퀴 빙 돌았어요. 그런데 프리드리히가 마리아보다 키가 작아서 좀 불편했어요. “숙녀는 내게 양보하는 게 어떠냐, 프리드리히?” 그 소리에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트랩 대령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어요. 그 소리에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트랩 대령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어요. “좋아요, 제가 양보하죠.” 프리드리히는 웃으면서 마리아의 손을 트랩 대령에게 넘겨 주었어요. 마리아와 트랩 대령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홀린 듯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춤을 추고 있는 마리아도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어요. 트랩 대령의 멋진 춤 솜씨와 그윽한 눈빛에 마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보기 좋군요!” 어느새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두 사람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마리아는 꿈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트랩 대령에게 잡힌 손을 빼냈어요. “어렸을 때 배워서 그런지 생각만큼 잘 안 되는군요.” 마리아는 변명하듯 말하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세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트랩 대령을 파티장 쪽으로 이끌었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요. 두 사람이 파티장 안에 들어서니 마리아가 손님들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어요. “손님 여러분을 환영하는 뜻에서 트랩 대령님의 아이들이 소박한 공연을 마련했어요. 귀엽게 보아 주세요.” 마리아는 인사를 하고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어요. 그러자 일곱 아이가 줄을 맞추어 나타났어요. 나란히 선 아이들은 손님들을 향해 인사한 다음, 마리아의 지휘에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손님들은 아름다운 화음과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미소에 반하고 말았어요. 노래가 끝나자 손님들은 마치 마법에 걸렸다 풀린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쳤어요. 작은 공연에 감동한 손님들은 마리아에게 곧 시작될 만찬에 참석해 달라고 말했어요. 마리아가 사양하자 트랩 대령이 말했어요. “손님들이 모두 원하니 꼭 참석하도록 해요.” 그래도 마리아가 망설이자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나섰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마리아를 재촉하여 2층으로 올라갔어요. 마리아는 만찬에 입고 나갈 만한 옷이 한 벌도 없었어요. 이 옷 저 옷 몸에 대어 보는 마리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불쑥 말했어요. 당신은 트랩 대령을 좋아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트랩 대령 역시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아이들에게 잘해 주고 아이들이 당신을 따르니까요. 어쨌든 난 곧 트랩 대령과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어쩐지 당신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이유가 뭐죠?” 마리아의 목소리는 자기도 모르게 떨렸어요. “이유요? 그건 당신이 트랩 대령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천만에요! 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요.” 마리아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난 당신이 트랩 대령과 왈츠를 추고 있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때 당신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더군요. 지금도 그래요. 트랩 대령 이름만 듣고도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는데, 계속 아니라고 할 셈인가요?” “내게 묻지 말고 알아서 하세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쌀쌀하게 말하고는 마리아의 방에서 나갔어요. 마리아는 곧바로 짐을 꾸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트랩 대령의 저택을 빠져나왔어요. 마음의 병. 트랩 대령의 저택 정원에서 일곱 아이들과 슈레이더 남작 부인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옷에 흙이라도 튈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었어요. 아이들은 공놀이가 지루한지 하품을 해 댔어요. 공놀이가 지겹기는 슈레이더 남작 부인도 마찬가지였어요. ‘공을 멀리 던져 버리면 이 지겨운 공놀이가 끝나겠지.’ 이런 생각에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공을 멀리 던져 버렸어요. 공은 멀리 데구루루 굴러갔어요. “오늘은 그만 해요.” “응, 그래야겠구나.” 기다렸다는 듯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손을 털며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후유, 선생님하고 놀 때는 이렇게 지루하지 않았는데.” 커트는 한숨을 쉬었어요. 다른 아이들도 모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선생님은 왜 우리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신 걸까?” 루이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어요.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해. 우리 선생님이 계신 수녀원에 가 보는 게 어떨까? 프리드리히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했어요. 아이들은 곧 집안 사람들 모르게 집을 빠져나왔어요. 얼마 뒤 아이들은 논베르크 수녀원의 철문 앞에 다다랐어요. 수녀 한 사람이 문 안쪽에서 다가와 물었어요. “무슨 일이지?" 우리는 트랩 대령님 집에서 왔어요. 마리아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마리아 선생님이라면. 수련 수녀 마리아 말이구나.” “선생님이 왜 우리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셨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그러자 수녀는 문을 열어 주었어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지 수녀원 건물에서 마가렛 수녀가 나왔어요. “무슨 일이지요, 아가다 수녀?” “그건 알고 있지만.” “알면 그대로 해야지요.” 마가렛 수녀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아가다 수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다가왔어요. “얘들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다음에 선생님이 정식 수녀가 되면 그때 만나러 오너라.” 아이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날 저녁, 원장 수녀는 마리아를 자기 방으로 불렀어요. 트랩 대령 댁 아이들이 마리아를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들은 거였어요. “마리아, 혹시 트랩 대령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원장 수녀의 물음에 마리아는 잠자코 있었어요. 말하기 싫은가 보군요. 하지만 모두가 걱정하고 있답니다. 오늘 트랩 대령 댁에서 아이들이 찾아왔었던 모양이에요. 그제야 마리아의 뺨에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어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제가 트랩 대령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차마 그 댁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원장 수녀가 마리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어요. “마리아, 트랩 대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날 춤출 때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어요. 원장님, 제가 왜 그런 걸까요?” 마리아는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어요. “마리아,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이에요.” 그러면서 원장 수녀는 마리아의 손을 꼭 잡아 주었어요. 마리아는 지금 마음의 병에 걸렸는데, 트랩 대령만이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어요. 자, 어서 가서 트랩 대령을 만나 봐요. 그럼 마리아도 자기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마리아,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돌아가요.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세요. 원장 수녀는 부드러운 손으로 마리아의 등을 쓸어 주었어요. 다음 날, 마리아는 원장 수녀의 말대로 자기 마음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트랩 대령의 저택으로 갔어요. 아이들이 기쁨에 찬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어요. “선생님! 마리아 선생님!” 마리아는 팔을 크게 벌려 아이들을 껴안아 주었어요. 아이들의 눈에도 마리아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어요. 마리아는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향했어요. 집 앞에서 만난 트랩 대령은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돌아와 줘서 고맙소, 마리아 선생.” 아이들은 마리아 곁에서 앞다투어 이야기했어요. “선생님, 왜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시지 않고 떠나셨어요?” “그때 너희가 모두 자고 있었거든. 너희는 잠잘 때 깨우는 걸 무척 싫어하잖아.” “선생님, 이제 다시는 우리 곁을 안 떠나실 거죠?” 커트가 물었어요.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렸어요. “너희가 내가 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는 안 떠날게.” 마리아가 말했어요. “와, 신난다!” 아이들은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어요. 뜻밖의 물음에 마리아는 당황했어요. “글쎄, 그렇다면 축하해 드려야지. 축하합니다, 대령님.” “고맙소.” 트랩 대령이 정중하게 대답했어요. 마리아는 그 자리를 피하려는 듯 서둘러 아이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날 저녁, 트랩 대령과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정원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결혼을 서둘렀으면 좋겠어요, 게오르그.” 그런데 트랩 대령은 슈레이더 남작 부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정원에 혼자 서 있는 마리아를 보고 있었던 거예요.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트랩 대령은 잠시 잠자코 있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당신에게 이런 말 하기는 정말 미안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자신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게오르그,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음 날 아침, 슈레이더 남작 부인은 홀로 트랩 저택을 떠났어요. 좋은 어머니.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트랩 대령이 다가왔어요. “마리아 선생, 왜 수녀원으로 돌아갔으며 왜 다시 여기로 온 것이오?” 마리아는 침착하게 말했어요. “제 책임을 다하려고 온 것뿐이에요. 아이들도 보고 싶었고요.” 그러자 트랩 대령이 어렵게 입을 열었어요. “난 슈레이더 남작 부인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오.” 마리아는 깜짝 놀라며 트랩 대령을 바라보았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소? 난 당신을 사랑하오. 마리아, 나와 결혼해 주시오.” 마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어요. 트랩 대령은 기뻐하며 마리아를 안았어요. 그러면서 제 삶을 찾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곳에 다시 돌아왔어요. 트랩 대령은 말없이 마리아를 더욱 꼭 안아 주었어요. 다음 날 아침 식사 때 트랩 대령은 아이들에게 마리아와의 결혼 사실을 발표했어요.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어요. 축하해요, 아빠! 축하해요, 선생님!” 아이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축하의 말을 했어요. 마리아와 트랩 대령은 논베르크 수녀원에서 수녀들과 일곱 아이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트랩 대령과 마리아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평생 변치 않을 것’을 맹세했어요. 그리고 트랩 대령과 마리아는 한 달간의 행복한 신혼여행을 떠났어요.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이웃이었으므로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어요. 곳곳에 나치의 깃발이 펄럭였고 큰길 모퉁이에는 총을 든 독일 군인들이 서 있었어요.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신혼여행을 가 있는 동안, 트랩 대령의 친구인 맥스는 아이들과 특별한 계획을 세웠어요. 잘츠부르크 축제 때 열리는 음악 대회에 나가기로 한 거였어요. 아이들은 매일매일 열심히 연습했어요. 마침내 잘츠부르크 축제가 시작되었어요. 아이들은 맥스와 함께 합창 대회가 열리는 곳에서 마지막 연습을 했어요. 아이들의 연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어요. “정말 멋진 합창단이에요!” 사람들의 칭찬에 일곱 아이는 무척 행복했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더욱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있었던 거예요. 아이들은 반가워하며 트랩 대령과 마리아에게 안겼어요. 아이들은 음악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며 앞다투어 자랑했어요. “오늘 밤이에요! 맥스 아저씨와 함께 연습을 많이 했어요.” 그때 리즐이 집으로 오다가 받은 전보를 트랩 대령에게 전했어요. 그런데 전보를 읽은 트랩 대령의 표정이 어두워졌어요. 마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어요. 마리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오늘 밤, 우리는 여기를 떠날 거요.” 그길로 트랩 대령은 맥스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탈출할 계획을 세웠어요. 그들은 알프스산 아래까지 자동차로 가고, 그다음부터는 걸어서 알프스산을 넘어 스위스로 가기로 했어요. 트랩 가족은 은밀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트랩 가족과 맥스는 가방을 하나씩 들고 뒷문을 통해 저택을 빠져나왔어요. 눈이 덮인 알프스산을 넘어야 해서 모두 두꺼운 외투도 챙겨 입었어요. 트랩 대령과 맥스는 자동차를 조용히 밀었어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시동을 걸지 않은 거였어요.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어요. 갑자기 사방에서 눈 부신 빛이 쏟아졌어요. 누군가 손전등을 들이댄 것이었어요. “자동차에 문제라도 있소?” 손전등 뒤쪽에서 독일군 장교가 걸어 나왔어요. 왜 시동을 걸지 않고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이오? 이 늦은 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우리는 지금 음악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오.” 맥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어요. “지금 내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한여름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가방까지 챙겨 들고 음악 대회에 간단 말이오?” 마리아가 얼른 둘러댔어요. 그 말을 뒷받침하려는 듯 맥스가 주머니에서 대회 참가 신청서를 꺼내 장교에게 보여 주었어요. “우리 말을 정 못 믿겠으면 함께 대회 장소까지 갑시다.” 트랩 대령의 말에 독일군 장교는 잠깐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트랩 가족은 독일 군인들과 함께 대회 장소까지 갔어요. 트랩 가족이 대회장 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대회가 시작된 뒤였어요. 트랩 가족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어요. 트랩 가족이 무대 뒤 분장실로 들어가자, 독일군 장교를 비롯한 독일 군인들은 객석으로 갔어요. 드디어 트랩 가족의 차례가 되었어요. 트랩 가족의 노래가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손뼉을 쳤어요. 모든 순서가 다 끝나고 심사 결과가 발표되는 시간이었어요. 3등, 2등에 이어 1등이 발표되었어요. “영예의 1등에는 트랩 가족 합창단!” 조명이 무대 출입구 쪽을 밝게 비추었어요. 그런데 트랩 가족은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앗, 속았다!” 당황한 독일군 장교는 호루라기를 불어 댔고, 독일 군인들은 재빨리 대회장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하지만 트랩 가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트랩 가족은 자기들 노래 순서가 끝나자마자 분장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거든요. 그리고 트랩 가족은 논베르크 수녀원으로 갔어요. 안개 속의 알프스산. 원장 수녀는 마리아를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무슨 일이에요, 마리아?” 마리아는 원장 수녀에게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군요, 어서 나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와요.” 트랩 가족이 수녀원으로 막 들어섰을 때, 길가에서 요란한 지프 소리가 들려왔어요. 원장 수녀는 재빨리 트랩 가족을 수녀원 지하 묘지에 피신시켰어요. 그리고 마가렛 수녀와 아가다 수녀를 불러 트랩 가족의 일에 대해 귀띔했어요. 그때 요란하게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독일군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빨리 문을 여시오!” 밖으로 나간 마가렛 수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누가 이 밤중에 수녀원 문을 두드리는 겁니까?” 우린 독일 군인들이오! 이 수녀원에 우리가 찾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소. 마가렛 수녀는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문을 열었어요. “에이,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독일 군인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후닥닥 뛰어 들어와 수녀원 안을 샅샅이 뒤졌어요. 물론 트랩 가족이 있을 리 없었어요. 그사이에 트랩 가족은 수녀원 묘지를 빠져나가 원장 수녀가 마련해 준 자동차에 올라탔어요. 독일군 장교와 군인들은 뒤늦게 수녀원에 지하 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어서 묘지로 내려가 봐!” 그러나 그들이 지하 묘지로 내려간 순간, 밖에서 트랩 가족이 탄 자동차가 막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서 뒤쫓아 가지 않고 뭘 하고 있어!” 독일군 장교는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어요. 독일 군인들은 재빨리 자기들 지프가 있는 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지프의 시동이 안 걸렸어요. 독일 군인들이 묘지를 뒤지는 동안, 아가다 수녀와 마가렛 수녀가 지프의 중요한 부속들을 뜯어냈던 거예요. 땀을 뻘뻘 흘리며 애를 써도 안 되자 독일 군인들은 지프를 그대로 둔 채 가 버렸어요. 그 시각 트랩 가족이 탄 자동차는 알프스산을 향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어요. 차츰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어요. 마리아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어요. “아아, 멋지다!” 꼭대기에 새하얀 눈이 덮인 채, 새벽 안개 속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알프스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거였어요. “얘들아, 알프스산이다! 다들 일어나 봐!” 마리아가 잠든 아이들을 흔들어 깨우며 소리쳤어요.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창밖을 쳐다보았어요. “우아, 정말 멋진 산이네!” “산꼭대기에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알프스산의 멋진 모습을 보니, 지난밤에 겪은 두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이윽고 트랩 가족이 탄 차가 알프스산 아래에 이르렀어요. 모두 차에서 내려 각자 자기 짐을 챙겨 들었어요. “자, 이제 떠나자!” 트랩 대령이 아이들을 재촉했어요. 알프스산을 넘는 일은 정말 힘들었어요. 어른들도 걷기 힘든 산길을 아이들이 넘으니 그 고생은 말로 다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게다가 그들은 독일군 초소를 피해 더 험하고 먼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트랩 가족은 한 사람도 뒤처지지 않고 무사히 스위스에 도착했어요. 트랩 가족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다시 영국으로 갔어요. 그런 다음 비로소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아이들이 선실에서 잠들자 마리아와 트랩 대령은 갑판 위로 올라갔어요. “마리아, 갑자기 예전에 당신이 했던 말이 생각나는구려.” 트랩 대령이 말했어요. “무슨 말인데요?”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시면 반드시 또 다른 문을 열어 두신다.’라고. 그 말처럼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벗어날 길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앞으로 미국에서 절망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삽시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트랩 대령의 손을 꼭 잡았어요.
안네의 일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1942년 6월 14일 일요일 그저께는 아침 6시에 잠에서 깼어. 내 생일이어서 일찍 눈이 떠졌나 봐. 하지만 너무 일찍 일어나면 꾸중을 들으니까 나는 들뜬 마음을 누르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어. 7시가 지나자마자 나는 엄마 아빠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곧장 거실로 갔어. 선물 꾸러미를 풀자 가장 먼저 나온 게 너(일기장)야. 탁자 위에는 장미 꽃다발과 부모님의 선물 그리고 책, 장난감, 초콜릿 등 친구들의 선물이 놓여 있었어. 하지만 나에게는 네가 가장 멋진 선물이야. 1942년 6월 20일 토요일 며칠 동안 고민을 하느라 아무것도 쓰지 못했어.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일기를 쓴 적이 없는 데다가 열세 살짜리 소녀의 이야기에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어. 하지만 상관없어. 나는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을 글로 쓰고 싶어. “종이는 사람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라는 말이 있잖아. 우울한 날이면 이 말이 떠올라. 그래서 잘 참고 견디는 종이에 내 일기를 쓰기로 한 거야. 나는 진정한 친구를 만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일기장을 보여 주지 않을 거야. 내게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열여섯 살 된 언니가 있어. 하지만 아무리 친구가 많아도 웃고 떠들거나 농담을 주고받을 뿐이야. 친구들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고민이야. 그래서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앞으로 너를 내 마음의 친구로 삼아 ‘키티’라고 부를 거야. 먼저 내가 자라 온 이야기를 간단히 쓸게. 우리 아빠는 서른여섯 살에 스물다섯 살인 엄마랑 결혼했어. 언니 마르고트는 1926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고, 나는 1929년 6월 12일에 태어났어. 우리 가족은 내가 네 살 때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다가 유대인이라 독일을 떠나야 했어. 우리는 1933년에 아빠 직장을 따라 네덜란드로 왔어. 독일에 남은 친척들은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 정책 때문에 불안한 생활을 했어. 1940년 5월, 행복했던 시절이 끝났어.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의 고통이 시작되었어. 유대인은 가슴에 노란 별표를 달고 다녀야 했어. 유대인들은 자전거도 모두 빼앗겼고 전차나 자동차도 타면 안 되었어.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에만 물건을 살 수 있었는데, “유대인 가게”라고 표시된 가게만 이용할 수 있었어.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고, 공연장이나 극장 같은 곳도 갈 수 없었어. 우리는 유대인 학교에 다녀야 했어. 이것 말고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아 하지만 우리는 하루하루 무사히 살고 있어. 1942년 1월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 하지만 외할머니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 계셔. 나는 몬테소리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쳐 1941년에 마르고트 언니와 유대인 중학교에 들어갔어. 언니는 중학교 4학년이고 나는 1학년이야. 키티! 이제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지? 1942년 6월 21일 일요일 키티, 우리 반 아이들 모두 벌벌 떨고 있어. 학교에서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 공부할 아이와 그러지 못할 아이를 정할 회의가 곧 열릴 거라서 말이야. 나와 내 친구들은 어렵지 않게 다음 학년이 될 거야. 선생님들은 모두 나를 귀여워해 주신단다. 수학을 가르치는 케이싱 선생님만 빼고. 수학 선생님은 내가 너무 떠든다고 못마땅하게 여기셨어. 그래서 나에게 수다쟁이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해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단다. 나는 한참 끙끙대다가 이렇게 썼어. “수다를 떠는 것은 여자의 특성이에요. 줄이려고 노력해도 고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 엄마는 저보다 더 수다쟁이니까요. 내가 수다를 떠는 것은 아무래도 유전 같아요.” 케이싱 선생님은 내 글을 읽고 웃으셨어. 하지만 내가 여전히 수다를 떨자 또 숙제를 내주셨어. 이번에는 <고쳐지지 않는 수다 버릇>이란 제목이었어. 나는 다시 글짓기를 해서 냈는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그러나 다음 수학 시간에 내가 또 떠들었더니 선생님은 화를 내며 숙제를 내주셨어. “안네, 이번에는 <수다쟁이 아줌마는 꽥꽥거립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오세요.”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나는 얼굴이 빨개졌어. 더는 쓸 것이 없어 정말 고민이 되었는데 다행히 시를 잘 쓰는 친구 산네가 도와주었어. 세 마리의 아기 오리를 가진 엄마 오리와 아빠 백조의 이야기야. 아기 오리들이 시끄럽게 떠들자 아빠 백조가 부리로 쪼아 죽이는 내용이었어. 선생님은 그 시를 큰 소리로 읽어 주셨어. 다행히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아셨는지 그 뒤로는 야단치지 않으셨고 더는 숙제도 내주지 않으셨어. 1942년 6월 24일 수요일 키티, 찌는 듯한 더위에 몸이 모두 녹아 버릴 것 같아. 이런 더위에도 나는 어디를 가든 걸어가야만 해. 유대인들은 전차를 탈 수 없거든 어제는 치과에 갔는데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어. 그래서 가다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어. 조금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 자전거 보관소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어. 친구 에바 집에서 본 멋진 남자아이였어. 그 아이는 수줍은 듯이 다가와 해리 골드베르크라고 자기 이름을 대면서 학교까지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나는 좀 놀랐지만 좋다고 태연하게 말했지. 1942년 7월 5일 일요일 키티, 지난 금요일에 시험 성적이 발표되었어. 내 성적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좋게 나왔단다. 우리 부모님은 성적에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지만, 난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마르고트 언니도 좋은 성적을 받았어. 며칠 전 아빠와 함께 산책할 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어. “안네, 이제 우리 목숨이 위험해졌단다. 독일 군인들이 잡으러 오기 전에 어딘가에 숨어야 할 거 같아.” “그럼 언제 가야 해요?” “엄마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동안이라도 재미있게 지내렴.” 아빠가 말한 그날이 제발 늦게 왔으면 좋겠어. 1942년 7월 8일 수요일 키티,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엄청난 일들이 많았단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해. 지난 일요일 오후에 일어난 일부터 이야기할게 오후 3시쯤 초인종이 울렸어. 잠시 뒤 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어. “나치 친위대"가 아빠에게 소환장을 보냈어.” 나는 언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 소환장이라는 말을 들으니 강제 수용소와 차가운 감옥이 떠올랐거든. “물론 아빠는 안 가실 거야. 엄마는 내일이라도 당장 어딘가로 옮겨 숨어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며 그 문제를 의논하러 판 단 아저씨네로 가셨어. 판 단 아저씨네 가족도 함께 간대.” 언니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어. 하지만 나는 아빠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어. 아마 아빠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유대인 요양소에서 노인들을 만나고 계실 거야. 언니와 나는 가슴을 졸이며 엄마를 기다렸어. 그때 다시 초인종이 울렸어. 해리가 오기로 했던 것이 생각나서 일어서자 언니가 급히 나를 붙잡았어. “문을 열면 안 돼.” 마침 집에 돌아온 엄마가 현관에서 해리를 돌려보내는 소리가 들렸어. 엄마는 판 단 아저씨를 모시고 왔어. 엄마가 어른끼리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해서 언니와 나는 침실로 들어왔어. 침실에 오자 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 “안네, 사실 소환장은 아빠가 아니라 나에게 온 거래.” 나는 그 말을 듣고 겁이 나서 울음을 터뜨렸어. 언니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데 나치 친위대는 어린 소녀를 끌고 가서 무엇을 하겠단 걸까? 그래서 며칠 전 아빠가 숨어 살아야겠다고 말씀하셨던 거야. 어디에서 숨어 살 수 있을까? 언니와 나는 중요한 것들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어. 나는 맨 먼저 키티, 너를 챙겼어. 그리고 빗, 손수건, 교과서, 오래된 편지 등을 넣었어. 숨어 사는 생활에 쓸모없는 것들일 수 있지만 후회는 안 해. 나는 옷가지보다 추억이 더 소중하거든. 미프 아주머니는 우리의 옷가지를 가방 속에 잔뜩 넣더니 밤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가셨어. 그리고 11시에 미프 아주머니가 남편인 얀 아저씨와 함께 다시 오셨어. 이번에도 우리의 옷가지 등을 가방과 커다란 주머니에 잔뜩 넣고 11시 30분쯤 되어서 돌아가셨어. 나는 너무 지쳐서 내 침대에서 자는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깊이 잠들었단다. 다음 날 아침 5시 30분에 엄마가 나를 깨웠어. 다행히 날씨는 덥지 않았고 종일 비가 내렸어.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옷을 껴입었어. 가방에 교과서를 챙긴 언니는 자전거를 타고 미프 아주머니를 따라갔어. 그때까지도 나는 우리가 숨어 살 곳이 어딘지 몰랐어.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아침 7시 30분에 집을 나섰어.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또 계속할게. 1942년 7월 9일 목요일 키티, 우리 가족은 쏟아지는 빗속을 걸었어. 아빠는 몇 달 전부터 필요한 물건들을 우리가 숨어 살 곳으로 옮겨 놓으셨대. 원래는 7월 16일에 그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소환장이 날아와 예정보다 빨리 옮기게 된 거래. 우리가 숨어 살 곳은 아빠 회사 건물 안에 있어. 아빠 회사 직원 중 퀴흘레르 씨, 클레이만 씨, 미프 아주머니, 베프는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베프의 아버지인 포스콰일 씨와 창고에서 일하는 두 청년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대 우리가 숨어 살 곳을 설명해 줄게.건물은 모두 4층이야. 1층에는 큰 창고가 있고 2층에는 사무실과 작은 방, 임원실, 석탄 창고가 이어져 있어. 석탄 창고를 지나면 이 건물에서 가장 멋진 사장실이 있어. 사장실에는 최고급 가구들이 놓여 있고, 주방과 화장실도 있어. 그 옆에 복도를 겸한 작은 방이 있는데 판 단 아저씨의 아들인 페터가 쓸 방이야. 자, 어때? 우리의 멋진 ‘비밀 장소’에 대한 소개는 이만 줄일게. 1942년 7월 10일 금요일 키티, 비밀 장소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지루했지? 어제 비밀 장소에 도착해 보니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었어. 몇 달 전부터 조금씩 나른 상자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작은 방에는 이불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어. 밤에 편히 자려면 모두 치워야 하는데 엄마와 언니는 너무 지쳐서 침대에 누워 버렸어. 어쩔 수 없이 아빠와 내가 청소를 시작했어. 덕분에 우리는 깨끗한 침대에서 잘 수 있었어. 다음 날도 아침부터 모두 힘을 모아 청소를 했어. 1942년 7월 11일 토요일 키티, 가족 모두 교회의 시계탑에서 15분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귀에 거슬린대. 나는 종소리가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특히 밤에는 진실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 키티, 숨어서 사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지? 이곳이 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야. 마치 낯선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숨어 살기에 이렇게 좋은 곳은 또 없을 것 같아. 어젯밤 우리는 2층 사장실로 내려가서 라디오를 들었어. 나는 누가 엿들을까 봐 겁이 나서 빨리 3층으로 돌아가자고 아빠를 졸랐어.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 가족들이 여기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챌까 봐 몹시 신경을 썼어. 그래서 언니가 독감에 걸렸을 때도 엄마는 기침 소리를 내지 않도록 언니에게 감기약을 한꺼번에 많이 먹였어. 판 단 아저씨 가족이 화요일에 온다고 해서 기다려져. 사람이 많아지면 쓸쓸하지도 않고 재미있을 테니까. 판 단 아저씨 가족은 7월 13일에 왔어. 원래 14일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독일군이 갑자기 유대인들에게 소환장을 보내기 시작해서 앞당겨 오신 거래. 아저씨의 아들인 페터는 열여섯 살인데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여. 페터는 ‘무쉬’라는 고양이를 데리고 왔단다. 판 단 아주머니는 커다란 변기를 모자 상자 속에 넣어 가지고 오셨어. 모두들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어. “나는 어디를 가나 이 변기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요.” 판 단 아저씨는 바깥소식을 전해 주셨어. 우리 가족에 대한 소문도 전해 주셨어.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어떤 장교의 도움을 받아 벨기에를 거쳐 스위스로 도망갔다고 알고 있대. 사람들이 우리 가족 이야기를 제멋대로 떠들고 있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큰 소리로 웃었어. 1942년 8월 21일 금요일 키티, 우리 비밀 장소의 입구는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문을 책장으로 막아 두었는데 이 책장은 문처럼 열리게 되어 있어.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문 앞에 있던 작은 계단도 없애 버렸어.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면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내려야 해. 키티, 나는 요즘 공부를 거의 안 해. 방학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엄마는 나를 어린애 취급하시는데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 페터의 성격은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돼. 그 아이는 몹시 따분한 아이야. 페터는 반나절 내내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가 뭔가 일을 좀 돕나 싶으면 어느새 침대에 가서 낮잠을 자.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1942년 9월 21일 월요일 키티, 오늘은 이곳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평범한 일을 이야기해 줄게. 판 단 아주머니는 항상 일을 저질러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어. 판 단 아주머니는 남은 음식을 귀찮다며 냄비에 그냥 두셔. 그럼 음식이 썩어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식사 뒤 언니가 설거지를 하면 판 단 아주머니는 얄밉게 말해. “마르고트, 일이 너무 많아서 어쩌니?” 판 단 아주머니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나는 요새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어. 페터는 영어 공부를 하는데 힘든지 한숨만 쉬어. 이곳에 올 때 연습장과 연필, 지우개 등을 많이 가지고 와서 아직은 넉넉해. 판 단 아주머니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내 방에 들어오셨어. 깜짝 놀라 일기장을 덮었더니 판 단 아주머니가 좀 보여 달라는 거야. 판 단 아주머니에 대한 불만을 썼기 때문에 정말 조마조마했어. 1942년 9월 29일 화요일 키티, 숨어 살면 불편한 일이 많아. 여기는 욕실이 없어서 대야에 목욕을 해. 다행히 2층 사무실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기 때문에 일곱 사람이 돌아가면서 목욕할 수 있어. 그런데 다들 맘에 드는 장소를 골라 목욕을 한단다. 페터는 유리문인데도 꼭 부엌에서 목욕을 해. 목욕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30분만 부엌에 오지 말라고 부탁을 하고 다녀. 판 단 아저씨는 4층 자기 방에서 목욕을 하셔. 따뜻한 물을 옮기는 것이 좀 힘들지만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이 편하시대. 판 단 아주머니는 아예 목욕을 하지 않으셔.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거든. 아빠는 2층 사무실에서, 엄마는 부엌의 방화용 벽 뒤에서 목욕을 하셔. 언니와 내가 선택한 곳은 2층의 가장 큰 사무실이야. 그곳은 토요일 오후면 커튼이 쳐져 있어 목욕하기에 딱 좋거든. 지난주엔 2층에 배관공이 와서 화장실의 배수관과 수도관을 복도로 옮겨 달았어. 겨울에 수도관이 얼어서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야. 공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물도 쓸 수 없고, 화장실에도 갈 수 없어서 불편했어. 그런데 그보다 더 불편했던 건 온종일 말을 할 수 없다는거였지. 나 같은 수다쟁이에게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넌 상상할 수 없을 거야. 1942년 10월 9일 금요일 키티, 오늘은 아주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수많은 유대인이 게슈타포에게 끌려가고 있어. 그들은 가축을 운반하는 트럭에 실려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유대인 수용소인 베스터보르크로 보내진단다. 베스터보르크!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곳이야. 목욕탕은 천 명당 하나밖에 없고 화장실도 부족하대. 그리고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전부 한 곳에서 자고 머리도 박박 깎인대. 거기서는 감히 도망칠 엄두도 못 낸다고 해. 영국 방송은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독가스실에서 죽어간다고 보도하고 있어. 독가스라니, 정말이지 말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쳐. 미프 아주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무서워. 나쁜 소식은 또 있어. 인질이라는 말 알지? 게슈타포는 독일에 맞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면 대여섯 명의 유대인 인질을 총살시켜 버린대. 독일 사람들은 정말 무서워. 나도 한때는 독일 국민이었는데. 1942년 10월 20일 화요일 키티, 오늘 무서운 일이 있었어. 2시간 전의 일인데 아직도 손이 떨려. 이 건물 안에는 소화기가 다섯 개 있어. 소화기의 내용물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가 이곳에 올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언제쯤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책장으로 가려 놓은 입구 저쪽에서 쇠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소화기 내용물을 채우러 온 사람이구나 싶어서 모두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어. 나는 아빠와 함께 문 앞에 선 채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15분쯤 지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거야. 우리는 모두 새파랗게 질렸어. 무슨 소리를 듣고 책장 뒤를 살피려는 것 같았어. 얼마 동안 밀고 잡아당기고 흔들어 대는 소리가 계속되었어. 들켰다는 생각에 정신을 잃을 뻔했는데 그 순간 클레이만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문 좀 여세요. 접니다.” 우리는 서둘러 문을 열었어. 책장 고리가 잘못 걸려 있어서 열리지 않았던 거야. 모두 너무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엄청난 괴물이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것 같아 너무나 무서웠어. 나는 한동안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단다. 1942년 11월 9일 월요일 키티, 어제는 페터의 생일이었어. 페터는 게임 도구, 면도기, 라이터 등을 선물 받았어. 사실 페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라이터를 선물 받다니, 참 이상하지? 오후 1시에 판 단 아저씨가 중대한 뉴스를 알려 주셨어. 영국군이 튀니스, 알제, 카사블랑카, 오랑에 상륙했다는거야. 잘 모르지만 다행히 전쟁이 독일군에 맞서는 연합군 에 유리하게 돌아가나 봐. 하지만 여기는 먹을거리 때문에 걱정이야. 판 단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엄청난 먹보거든. 지금까지 빵을 클레이만 씨의 친구네 빵집에서 구해 왔는데, 앞으로는 전처럼 많이 살 수 없을 거래. 이제는 튀니스 차례라고 해. 1942년 11월 10일 화요일 키티, 이곳에 새 가족이 들어온대.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아빠는 클레이만 씨와 퀴흘레르 씨에게 한 사람을 더 부탁했어. 그러자 두 분은 몇 명이 되었건 위험하긴 마찬가지라면서 찬성하셨대. 새로 들어오는 분은 알베르트 뒤셀이라는 치과 의사야. 뒤셀 씨의 부인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혼자래. 뒤셀 씨는 내 방을 쓰게 될 거야. 1942년 11월 17일 화요일 키티, 드디어 뒤셀 씨가 오셨단다. 우리는 새 가족을 환영하기 위해 커피와 코냑을 준비하고, 4층 거실의 테이블에 둘러앉았어. 미프 아주머니가 뒤셀 씨를 데리고 왔어. 우리 가족을 본 뒤셀 씨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단다. “벨기에로 가신 게 아니었군요. 독일군에 쫓기지는 않으셨나요?” 아빠는 뒤셀 씨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셨어. 다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뒤셀 씨는 잠깐 낮잠을 잤어. 그사이 뒤셀 씨는 마음이 많이 안정된 것 같았어. 아빠에게 “비밀 장소의 규칙”이 적힌 종이를 받았을 때는 표정이 제법 밝아져 있었어. 비밀 장소의 규칙은 다음과 같아. 비밀 장소의 규칙 이곳은 유대인 또는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임시로 마련한 특별 시설임. 암스테르담의 중심지에 있으며 주변이 조용하고 아름다움. 13번과 17번 전차, 자동차,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올 수 있음. 뒤셀 씨는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 주셨어. 모두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들뿐이란다. 밤이 되면 독일군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유대인이 있나 확인하고 만일 있으면 모두 잡아간대. 마치 옛날 노예사냥 같아. 너무나 비참한 현실이야. 저녁때가 되면 나는 죄 없는 사람들이 독일군에 얻어맞으면서 잡혀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숨어서 보곤 해. 그중에는 노인이나 어린아이, 병든 사람 심지어 배가 잔뜩 부른 임신부도 있어. 모두 두려움에 떨면서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거야. 이 추운 밤에도 나의 친한 친구들 중 누군가는 어디선가 얻어맞고 쓰러져 있을 거야. 나만 따뜻한 침대에서 자고 있다는 게 너무 미안해. 1943년 1월 13일 수요일 키티, 지금 바깥세상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어. 불쌍한 유대인들이 밤낮없이 수용소로 끌려가고 있어. 남자, 여자, 아이들은 각각 다른 수용소로 가기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모가 잡혀갔거나 대문에 못질이 되어 있는 기막힌 사정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어. 전 세계가 전쟁에 휩쓸려 가고 있어. 수많은 곳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어. 전쟁 상황이 연합군에 이롭게 돌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몰라. 여기는 조용하고 안전하니까 우리는 운이 좋은 거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안전하게 지내는 것에 감사해야 해. 그런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전쟁이 끝난 뒤에 새 옷이나 새 구두를 마련할 상상을 하면서 가슴 설레기도 해. 참으로 이기적이지. 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시든 홍당무를 질겅질겅 씹고 있어. 그들은 추운 자기 집을 나와 더 추운 거리를 지나 학교에 가. 그럼 한층 더 추운 교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져서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빵 한 개만 달라고 구걸을 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만둘래. 우리는 이 불행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1943년 1월 30일 토요일. 키티, 너무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하지만 내 기분을 얼굴에 나타내서는 안 돼. 엄마는 나를 바보 취급하면서 날마다 심한 말을 퍼부어. 그럴 때마다 나는 발을 구르며 엄마에게 대들고 싶어. 엄마뿐 아니라 언니, 판 단 아저씨, 뒤셀 씨, 아빠에게도 소리치고 싶어. 만약 그들이 나를 동정하거나 위로하면 더욱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내가 말을 하면 모두 잘난 체한다고 해. 조용히 있으면 우습다고 하고, 말대꾸하면 건방지다고 해. 피곤해서 쉬고 있으면 게으름뱅이라고 하고, 한 입이라도 더 먹으면 이기적이라고 빈정거려. 그 밖에도 바보 같다, 비겁하다 등 별별 소리를 다 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기려고 하지만, 사실은 속이 무척 상해. 1943년 3월 12일 금요일. 키티,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오늘은 영국군이 독일에 엄청난 폭격을 퍼부었대. 그 소식에 모두 얼굴이 밝아졌어 판 단 아저씨만 별로 신나지 않는 얼굴이야. 아마 담배가 떨어졌을 거야. 키티, 발이 너무 커져서 맞는 신발이 없어. 미프 아주머니가 암시장에서 신발을 사다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오늘은 아빠 머리를 깎아 드렸어. 아빠는 내 이발 솜씨가 좋다고 칭찬해 주셨어. 전쟁이 끝나도 이발소에 가지 않으시겠대. 1943년 4월 1일 목요일. 키티, 나는 지금 만우절* 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야. 언제나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던 클레이만 씨가 위궤양에 걸려 쓰러지셨어. 적어도 3주일 정도는 누워 계셔야 한대. 게다가 베프도 독감에 걸렸고, 베프의 아버지 포스콰일 씨도 다음 주에 입원하기로 되어 있어. 위궤양인 것 같대. 모두 우리를 도와주는 좋은 분들이신데 다시 건강해지길 매일 기도하고 있단다. 1943년 4월 2일 금요일. 키티,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어젯밤에 아빠와 함께 기도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셨어. 엄마는 내 침대에 걸터앉으시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 “오늘 밤은 엄마가 기도해 줄까?” 그런데 나는 몹시 무뚝뚝하게 대답했어. “아니요, 됐어요.” 엄마는 벌떡 일어나서 문을 향해 걸어가셨어. 그러더니 문득 뒤를 돌아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씀하셨어. “엄마는 화내고 싶지 않아. 너에게 무조건 엄마를 사랑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엄마의 눈에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어. 엄마에게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바로 엄마야. 엄마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 때문에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다정하게 대하자 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야. 엄마는 밤새 울며 거의 한숨도 못 주무신 모양이야. 아빠는 때때로 나랑 눈이 마주치면, “안네, 왜 그렇게 엄마를 슬프게 해?”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하지만 난 빌지 않을 거야. 난 어쨌든 진실을 말했으니까. 1943년 5월 2일 일요일. 키티, 숨어 지내지 못하는 다른 유대인에 비하면 이곳에 사는 우리는 천국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비참해지고 있어. 때때로 우리가 어쩌다가 이토록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나 생각하면 스스로 놀랄 정도야. 식탁보는 가끔 걸레로 닦아 보지만 여전히 더럽고 비누도 모자라고 질도 나빠 빨래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아빠의 바지도 다 낡아서 너덜너덜하고 넥타이도 볼품없이 낡았어. 엄마의 코르셋은 찢어졌지만 낡아서 꿰맬 수도 없어. 언니는 두 치수나 작은 브래지어를 사용하고 있고, 내 속옷도 너무 작아 거의 배꼽이 보일 정도야. 그래도 바깥세상보다 여기가 훨씬 안전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참고 지낼 수 있어. 1943년 6월 13일 일요일. 키티, 아빠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시를 지어 주셨어. 그 시가 아주 훌륭해서 너에게 자랑하려고 해. 아빠는 언제나 독일어로 시를 짓기 때문에 언니가 번역해주었어. 언니의 번역 솜씨가 어떤지는 읽고 나서 한번 생각해 봐. 너는 여기서 가장 어리지만 어린아이는 아니구나. 인생은 힘든 거란다. 우리는 많은 경험을 했으니 우리를 본받으렴. 부모의 말을 참고 견뎌라.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건 쓴 약과 같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단다. 너는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구나. 식량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대한 구절도 있지만, 언니가 번역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개할 수가 없어. 어때, 멋진 시라고 생각하지 않니? 다른 사람에게서도 선물을 많이 받았어.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이야. 이곳의 막내로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았어. 1943년 7월 11일 일요일. 키티, 요즘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친절하게 대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사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노력을 한다는 건 힘든 일이야. 하지만 누구에게나 마구 대들었던 버릇을 고치고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요즘 나는 눈이 많이 나빠졌어. 어제 엄마는 클레이만 씨 부인에게 부탁해서 나를 안과에 데리고 가면 어떻겠냐고 하셨어. 거리로 나가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해. 처음에는 몹시 놀랐지만 곧 즐거워졌어. 하지만 어른들의 의견은 좀처럼 하나로 모이지 않았어. 모두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동안, 나는 슬그머니 벽장에서 외투를 꺼내 입어 보았어. 그런데 너무 작아서 마치 동생 것을 빌려 입은 것 같았어. 거리에 나가는 문제가 어떻게 결정이 날지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미프 아주머니는 마치 짐을 나르는 노새 같아. 매일 채소를 바구니에 담아 자전거로 가져오시거든. 우리는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미프 아주머니만 기다려. 토요일에는 책을 가져다주시는데, 우리들에게 책은 큰 위안을 준단다. 책을 읽는 것과 라디오를 듣는 게 우리의 유일한 즐거움이거든. 1943년 7월 23일 금요일. 키티, 우리가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간다면 가장 먼저 무얼 하고 싶은지 알아? 언니와 판 단 아저씨는 욕조에 가득 물을 받고 마음껏 목욕을 하고 싶대. 만약 바깥세상에 나간다면 나는 기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를 거야.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우리만의 집을 갖고 싶어.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학교로 가고 싶어. 1943년 7월 26일 월요일. 키티, 어제는 몹시 소란스러웠어. 모두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어. 공습경보가 처음 울렸을 때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오후 2시 30분에 언니가 사무실 일을 끝내고 막 정리를 하려는데 두 번째 공습경보가 울렸어. 우리는 급히 3층으로 올라갔어. 그러자 5분도 지나지 않아 요란한 폭격이 시작되었어. 건물 전체가 흔들렸어. 나는 피난용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서 있었어. 피난을 가야겠다는 생각보다 무엇이라도 꼭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어. 30분쯤 지나자 공습이 끝났어.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계속되어서 좁은 계단에 앉아 떨고 있었어. 저녁 식사를 할 때 다시 공습경보가 울렸어. 사이렌 소리를 들으니 입맛이 사라졌어. 45분 뒤에 경보가 해제되었어. 오늘 아침 7시에 판 단 아저씨와 아빠가 갑자기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 도둑이 들어온 줄 알았거든. 아빠는 독일을 돕고 있는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무솔리니가 물러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셨어. 어제는 무서운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단다. 1943년 9월 10일 금요일. 키티, 너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 쓰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아. 그런데 오늘은 정말 굉장한 소식이 있어. 9월 8일 수요일 저녁에 우리는 7시 뉴스를 들으려고 라디오 주위에 모여 앉았어. “지금부터 전쟁이 시작된 이후 가장 통쾌한 뉴스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이탈리아가 항복 했습니다!” 세상에, 이탈리아가 항복을 했다니! 정말 굉장한 소식이지? 모두들 흥분했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남아 있어. 클레이만 씨 때문이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그를 무척 좋아해. 그는 항상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해 주시거든. 그런데 요즘 건강이 나빠져서 많이 걷지도 못해. 그는 늘 쾌활하고 놀랄 만큼 용감해. 클레이만 씨는 위궤양 수술을 받기 위해 적어도 4주일은 입원해야 한대. 그는 수술을 하러 가면서도 잠깐 볼일을 보러 나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안녕!” 하고 작별 인사를 했어. 정말 밝은 모습으로 말이야. 1943년 9월 16일 목요일. 키티, 이곳 사람들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나빠져 가고 있어. 식사할 때도 아무 말 없이 음식만 먹어. 말을 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거든. 게다가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는데 창고지기가 비밀 장소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창고지기는 쓸데없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데다 입이 가벼워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야. 어느 날, 퀴흘레르 씨는 오후 12시 20분에 외투를 입고 나갔어. 그런데 5분도 안 돼서 슬그머니 계단을 올라와 우리 방으로 들어왔어. 퀴흘레르 씨는 1시 15분쯤 돌아가려고 했는데 베프가 와서 창고지기가 사무실에 들어와 있다고 알려 주었어. 그래서 퀴흘레르 씨는 1시 30분까지 우리 방에 있었어. 그사이에 베프는 창고지기를 쫓아 버린 다음, 퀴흘레르 씨를 데리러 우리 방으로 왔어. 그때 이미 퀴흘레르 씨는 양말만 신은 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어. 만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꽤 괜찮은 회사의 관리인이 양말만 신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1943년 11월 11일 목요일. 키티, 오늘 일기에는 ‘추억 속의 만년필에 바치는 시’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했어. 만년필은 내 물건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어. 아홉 살 때 할머니가 선물로 주신 거거든. 열세 살이 되고부터는 만년필도 나와 함께 이곳에 왔어. 만년필은 그동안 나를 위해 수많은 편지와 글을 써 주었어. 그런데 지난 금요일 오후 5시쯤이었어. 탁자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데 아빠와 언니가 왔어. 둘은 라틴어 공부를 한다며 자리를 비워 달라고 했어. 나는 만년필을 탁자 위에 두고 구석에 앉아 콩을 깠어. 5시 45분쯤, 나는 쓰레기와 썩은 콩을 헌 신문지에 싸서 난로에 던졌어. 그러자 불꽃이 강하게 피어올랐고 꺼져 가는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자 멋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저녁때가 되어도 만년필이 보이지 않자 쓰레기에 섞여 불타 버린 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 다음 날 아침, 내 걱정이 사실로 드러났어. 아빠가 난로를 청소하다가 재 속에서 내 만년필 고리를 발견하신 거야. 금으로 된 펜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나는 섭섭하고 안타까웠어. 하지만 내 만년필이 화장된 사실에 조금 위안을 받았어. 나도 나중에 죽으면 화장되기를 원하니까. 1943년 11월 17일 수요일. 키티, 베프네 가족이 모두 디프테리아에 걸렸어. 그래서 베프는 6주일 동안 이곳에 못 와. 그 때문에 심심한 건 물론이고, 먹을 것이나 다른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게 너무 불편해졌어. 클레이만 씨는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자리에 누워 있는데 벌써 3주일 동안이나 죽과 우유만 먹고 있대. 덕분에 퀴흘레르 씨 혼자서 바쁘게 되었어. 어제 11월 16일은 뒤셀 씨가 여기에 온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었어. 엄마는 기념으로 뒤셀 씨에게 화분을 하나 받았어. 그러나 몇 주 전부터 한턱내야 한다고 수선을 피우던 판 단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 1943년 12월 22일 수요일. 키티, 지독한 감기에 걸려 한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어. 기침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단다. 온몸에 땀을 내고 목과 가슴에 찜질을 하고 뜨거운 물을 마셨어. 그리고 목에 약을 바르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레몬주스를 마시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어. 이젠 예전처럼 건강해졌어. 키도 1센티미터 자랐고, 몸무게도 1킬로그램 늘었어. 하지만 얼굴색은 별로 좋지 않아. 요즘은 공부가 하고 싶어 못 견디겠어.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어. 크리스마스 특별 배급으로 기름, 과자, 시럽을 받았어. 뒤셀 씨는 하누카 축제일 축하로 미프 아주머니가 만든 멋진 케이크를 엄마와 판 단 아주머니에게 선물했어. 전쟁은 제자리걸음이고 우리의 사기는 바닥이야. 1943년 12월 27일 월요일. 키티,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나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어. 클레이만 씨, 퀴흘레르 씨, 미프 아주머니, 베프가 우리들 몰래 멋진 선물을 준비했어. 미프 아주머니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어. 케이크에는 “평화 1944년”이라고 쓰여 있었지. 베프는 맛있는 비스킷과 요구르트, 맥주를 가져왔어. 선물은 모두 멋지게 포장되어 예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어. 이런 선물이 없었다면,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그냥 훌쩍 지나가 버렸을 거야. 1943년 12월 29일 수요일. 키티, 어젯밤에는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어. 할머니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실을 계속 우리에게 숨겨 오셨어. 할머니는 언제나 성실하고 믿음직하셨어. 우리가 어떤 장난을 하든 할머니는 언제나 우리를 감싸 주시곤 했어. 내 친구 리스도 보고 싶어!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키티, 나는 나밖에 모르는 겁쟁이야. 왜 나는 늘 무서운 꿈만 꾸고 불행한 생각만 하는 것일까? 이따금 너무 무서워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있어. 아직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부족해서겠지? 하느님은 내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많은 것을 주셨는데도 나는 날마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뿐이야. 제발 기적을 일으켜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달라고 말이야. 1944년 1월 12일 수요일. 키티, 이곳 사람들은 요즘 구름 없는 아침이란 책을 읽고 있어. 엄마는 그 책에 아이들의 여러 가지 문제가 나와 있어서 좋은 책이라고 하셔.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어. ‘엄마, 우리 문제나 걱정하세요.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 문제는 상관하지 마시고요. 하지만 엄마가 내 속마음을 알면 당황하실 거야.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어. 언니는 요즘 아주 친절해졌어. 심술궂게 굴지도 않고 진정한 친구가 되었어. 1944년 2월 12일 토요일. 키티, 해가 밝게 빛나고 있어. 하늘은 맑게 갰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어. 아, 답답한 이곳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함께 수다를 떨 친구가 정말 그리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컷 울고 싶어! 1944년 2월 14일 월요일. 키티, 요즘 페터가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 느껴. 페터가 언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어. 나는 애써 페터의 눈길을 피했어. 내가 페터를 쳐다보면 페터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든. 그럴 때마다 내 안에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지금 이런 기분에 빠져선 안 돼. 아빠는 내가 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채신 거 같은데, 그렇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어. 난 요즘 혼자 있는 게 좋아. 1944년 2월 18일 금요일. 키티, 요즘은 4층으로 올라갈 때마다 페터를 만났으면 하고 바란단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를 하는 건 아니야. 다만 우리들 사이에 우정과 믿음 같은 게 싹트는 거야. 사소한 일만 있어도 곧장 위로 올라가. 엄마는 그게 마음에 걸리는지 나만 보면 페터를 방해하지 말라고 해. 또 내가 페터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이상한 눈으로 보셔. 난 그런 엄마가 정말 싫어. 1944년 2월 19일 토요일. 키티, 어느새 또 토요일이 되었어. 아침에 4층에서 잠시 일을 거들었는데 페터와는 두세 마디 짧은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야. 공부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는데 문득 슬픈 생각이 들어 하염없이 울었어. 아, 이럴 때 페터가 와서 위로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후 4시쯤 4층으로 올라갔어. 페터를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며 감자를 가지러 갔어. 하지만 페터는 고양이 무쉬를 찾으러 창고로 가 버렸어. 나는 또 눈물이 났어. 아, 페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고 나면 외로운 기분이 없어질 텐데. 페터가 내 이야기를 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이 뺨을 타고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이상하게 희망과 기대가 마음속에 조금씩 고이는 것 같아 1944년 3월 7일 화요일. 키티, 1942년을 돌이켜 보면 마치 꿈을 꾼 것 같아.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선생님도 나를 예뻐해 주셨어.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어.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저 놀랄 뿐이야. 1943년 초에는 거의 날마다 혼자 울고 지냈어. 그러는 동안 나 자신의 단점을 깨닫게 되었어. 지금도 단점이 많지만, 그때는 더 심했던 것 같아. 나는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 꾸중을 듣지 않으려고 말이야. 이제는 나도 숙녀로 대접을 받고 있어. 그리고 올해는 나에게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어. 그건 바로 남자 친구를 원하게 되었다는 거야. 나는 이제 안정을 찾았고 아름다운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해. “하느님, 착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 행복해져.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1944년 3월 14일 화요일. 키티,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먹고사는지 이야기할게. 우리에게 식량표를 구해 주던 사람이 독일군에 붙잡혔대. 배급 카드만으로는 여덟 명이 충분히 먹을 수 없어서 식량표를 샀던 건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된 거지. 미프 아주머니와 클레이만 씨는 아프고 베프는 시장에 갈 틈이 없었어. 내일이면 기름도 버터도 마가린도 떨어질 거야. 이제는 빵 대신 먹던 감자튀김도 만들 수 없대. 그래서 우리는 양배추와 고기를 아주 잘게 썰어 묽은 수프를 끓여서 먹었어. 4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전쟁! 과연 이 지겨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까? 1944년 3월 19일 일요일. 키티, 어제는 아주 기쁜 날이었어. 페터와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했거든 우리 둘은 많은 이야기를 했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 온 이래 가장 멋진 밤이었어. 우리는 부모님에게 아무것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어. 나는 힘들 때 침대 속에서 마음껏 운다고 말했고, 페터는 다락방에서 마음을 달랜다고 말했어. 페터가 문득 이렇게 말했지. “너는 언제나 나를 격려해 주고 있어.” “뭐라고? 내가 어떻게?” 내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페터가 대답했어. “너의 명랑함으로.” 이 말은 그가 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멋진 말이었어. 키티, 오늘은 내 글이 다른 날에 비해 엉망이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서 그래. 이제 나는 페터와 비밀을 나누어 가진 느낌이야. 그가 나를 보고 웃으면 내 마음속에 작은 불이 반짝 켜지는 것 같아. 부디 이런 느낌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더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1944년 3월 27일 월요일. 키티, 지금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정치야. 하지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데 자기만 옳다고 생각해서 싸움을 한단다. 이제는 독일군의 뉴스나 영국 방송만으로는 모자라는지 ‘특별 공습 정보’까지 들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계속 같은 내용만 되풀이하는 라디오인데 계속 듣고 또 들어. 어른들은 참을성은 대단하지만 머리는 나쁜 것 같아. 우리 같으면 하루 한두 차례의 뉴스만으로 충분할 텐데. 일요일 밤 9시가 되면 탁자에 따끈한 차가 놓이고, 모두들 그 주위에 둘러앉아. 그러고는 모두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그때까지는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지만, 그 뒤에는 말을 안 해도 알 거야. 정말 지겨워! 라디오의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어른들은 흥분한 얼굴로 토론을 시작해. 그러다가 끝내는 다투게 된단다. 1944년 3월 29일. 수요일 키티, 라디오에서 하원 의원 볼케스타인 씨가 전쟁이 끝나면 전쟁 중에 쓴 일기나 편지를 모아야 한다고 했어. 그럼 모두 내 일기를 가져가려고 하지 않을까? ‘비밀 장소’라는 제목만 봐도 꼭 탐정 소설 같잖아. 전쟁이 끝나고 10년쯤 지났을 때, 이 일기를 통해 우리가 겪은 괴로움을 사람들이 조금 이해했으면 해. 그동안 네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너도 우리 생활의 일부분밖에 모를 거야. 공습이 있을 때마다 두려움에 떨고, 전염병은 빠르게 번지고, 물건을 살 때마다 길게 줄을 서야 해. 도둑과 날치기가 날뛰어 절대로 한눈을 팔면 안 돼. 네덜란드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한숨이 나와. 하긴 지금과 같은 식량 배급으로는 이틀도 못 견디니 그럴 만도 해. 1944년 3월 31일 금요일. 키티, 3월이지만 아직 날씨가 꽤 쌀쌀한 편인데 벌써 한 달 동안이나 석탄 없이 지내고 있어. 요즘 들어 페터와 나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은 좀 잠잠해졌어. 어른들은 더 이상 우리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아. 그 덕분에 우리는 더욱 가까워져서 언제나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해. 요즘 이곳에서의 내 생활은 많이 좋아졌어. 하느님은 나를 외롭게 버려두지 않으셨어. 앞으로도 틀림없이 그러실 거라고 믿어. 1944년 4월 3일 월요일. 키티, 오늘은 식량에 관해 한 번 더 자세히 쓸게. 식량 사정이 몹시 나빠져서 이곳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전체, 아니 유럽 전체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어. 우리는 한 종류의 채소만 계속 먹을 때도 많아. 오랫동안 상추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던 적도 있어. 아침에도 상추, 저녁에도 상추, 아무 요리도 하지 않은 상추 끓인 상추. 계속 상추만 먹었어. 언젠가 여기서 나가면 도서관에 가서 역사책을 산처럼 높이 쌓아 놓고 읽을 거야. 네 번째는 그리스 로마 신화야. 그 밖에 영화배우 사진 모으기, 음악가나 시인, 화가의 전기도 아주 좋아해. 하지만 단 한 가지, 수학은 정말 싫어 1944년 4월 27일 목요일. 키티, 오늘은 판 단 아주머니 기분이 아주 별로야. 불만이 아주 많으시거든. 첫 번째 불만은 감기에 걸렸는데도 약을 구하지 못한다는거야. 1944년 5월 3일 수요일. 키티, 페터의 고양이 무쉬가 없어진 일을 이야기했니? 지난주 목요일 이후로 아무도 무쉬를 본 사람이 없어. 그 일로 페터는 몹시 슬퍼하고 있어. 이곳의 식사 시간이 바뀌었어. 오전 11시 30분에 아침 겸 점심을 먹을 거래. 그렇게 해야 한 끼라도 절약이 되니까. 오늘 오후에는 시든 상추를 데쳐서 먹었어. 채소를 구하기 어려워 시든 상추, 시금치, 감자 같은 걸 먹고 있어. 요즘 자주 절망에 빠지곤 해. 어째서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까? 도대체 전쟁을 해서 얻는 게 뭘까? 어딘가에서는 먹을 것이 너무 넘쳐 나는데, 왜 다른 곳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절망에 빠지게 된단다. 1944년 5월 8일 월요일. 키티, 나는 엄마나 언니처럼 꽉 막히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파리와 런던에서 언어와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언니는 팔레스타인에서 아기 받는 사람이 되고 싶대.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가슴 뛰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오늘 미프 아주머니는 약혼식 피로연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셨어. 파티에는 미트볼이 든 채소 수프, 치즈, 달걀과 고기를 넣은 오르되브르, 케이크, 포도주, 담배 등이 나왔대. 우리는 군침을 삼키면서 들었어. 우리가 그 파티에 갔으면 아마 모조리 먹어 치웠을 거야. 1944년 5월 19일 금요일. 키티, 어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너무 안 좋았어. 게다가 배까지 아파서 모든 게 엉망이었어. 오늘은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 페터와는 여전히 잘 지내. 그런데 가끔 화가 날 때도 있어.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지금 페터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하니까. 1944년 5월 20일 토요일. 키티, 어제저녁 다락방에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간 순간, 카네이션을 꽂아 두었던 꽃병이 나뒹굴고 있는 걸 봤어.엄마는 엎드려서 마루를 닦고 언니는 젖은 종이를 줍고 있었어. 앨범, 공책, 교과서 등이 온통 물에 젖었어 언니는 “엄청난 손실이에요.”, “너무해요.”, “말도 안 돼요.”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어. 그러자 아빠는 큰 소리로 웃었고, 엄마와 언니도 따라 웃었어. 나는 물에 젖은 종이 뭉치를 한 장 한 장 떼어서 다락방의 빨랫줄에 널었어. 종이를 빨랫줄에 널다니, 너무 우스워서 나도 그만 웃음이 나왔어. 1944년 5월 25일 목요일. 키티, 오늘 아침 채소 장수가 유대인 두 명을 숨겨 준 죄로 체포되었어. 그는 우리에게 채소를 배달해 주던 사람이야. 채소 장수와 유대인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야. 존경받는 사람들이 수용소나 감옥에 끌려가고 있어. 채소 장수가 잡혀갔으니 우리는 식사량을 또 줄여야 해. 엄마는 아침은 먹지 말고 점심과 저녁만 먹고 채소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먹자고 하셨어. 그러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겠지만 발각되어 체포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1944년 5월 26일 금요일. 키티, 하수관이 막혀 물을 흘려보낼 수가 없어. 하루 정도는 괜찮지만, 수리가 안 되면 어떻게 될까? 미프 아주머니가 인형 모양의 케이크를 보냈는데, 카드에 “성령 강림절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어. 어쩐지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야. 지금 우리 처지에 ‘축하’라는 말을 쓰다니……. 저녁 8시에 나는 혼자 아래층 화장실에 갔어. 다른 사람들은 위층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어서 아래층에는 아무도 없었어. 아래층에 있으니 거리의 자동차 소리나 알 수 없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어.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나는 볼일을 보고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왔어. .1944년 6월 6일 화요일. 키티, 마침내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시작됐어. 라디오에서 아침 8시에 뉴스를 발표했고, 오전 11시에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설을 했어. 이곳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어. 그토록 바라던 자유의 날이 드디어 눈앞에 다가온 거야. 정말로 1944년은 승리의 해일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어. 이젠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야. 언니는 어쩌면 9월이나 10월에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어.아,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1944년 6월 13일 화요일. 키티, 오늘로 나는 열다섯 살이 되었어. 다들 많은 생일 선물을 주었단다. 가장 멋진 선물은 퀴흘레르 씨에게서 받은 마리아 테레사라는 책과 치즈 세 조각이야. 페터는 아름다운 꽃다발을 주었어. 좋은 선물을 찾으려고 애쓴 모양인데 형편상 힘들었던 거 같아.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파도가 거칠지만, 상륙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나 봐. 어제 처칠, 아이젠하워, 아놀드가 해방된 프랑스 마을을 방문했대. 그리고 처칠은 위험을 무릅쓰고 해안에 공격을 퍼부었다고 해. 처칠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 같아! 1944년 7월 21일 금요일. 키티, 드디어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아. 굉장한 뉴스가 있어! 누군가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대. 그런데 그 사람은 유대인도 아니고 영국인 자본가도 아닌 독일 장군이야. 불행하게도 암살 계획은 실패했어. 히틀러는 상처를 약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 하지만 이 사건으로 독일 장군이나 장교 중에도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희망을 품어도 될 거 같아. 뒷이야기.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1944년 8월 1일로 끝납니다. 사흘 후인 8월 4일 게슈타포가 비밀 장소에 들이닥쳤고, 모두 호송차에 실려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습니다. 클레이만 씨, 퀴흘레르 씨도 유대인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클레이만 씨는 몇 주 뒤 병 때문에 풀려났습니다. 퀴흘레르 씨는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했지만 공습을 틈타 수용소에서 도망쳤습니다. 프랑크 씨 가족, 판 단 씨 가족, 뒤셀 씨 등 여덟 명은 베스터보르크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남자, 여자가 따로 수용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944년 9월, 베스터보르크 수용소의 모든 유대인들은 가축을 운반하는 기차에 실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사람을 죽이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유대인들의 머리를 모두 박박 깎았습니다. 그런 다음, 누더기를 입히고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남자 수용소로 간 안네의 아버지는 도로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판 단 씨는 건강이 나빠져 가스실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페터는 오스트리아의 수용소에서, 뒤셀 씨는 독일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안네의 어머니는 아우슈비츠에서 안네의 언니 마르고트를 괴롭히는 감시병에게 달려들었다가 매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안네의 어머니는 과로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마르고트, 안네, 판 단 부인은1944년 10월에 독일의 베르겐벨젠으로 보내졌고, 판 단 부인은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1945년 2월, 안네와 마르고트는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마르고트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용기와 정신력으로 모든 고통을 꿋꿋하게 이겨 냈던 안네는 언니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연합군이 프랑크푸르트에 들어와 있던 3월, 안네도 숨을 거두었습니다. 1945년 5월, 마침내 전쟁은 끝났습니다. 비밀 장소에서의 생활을 솔직하게 쓴 안네의 일기는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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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아이고, 추워!” 밤이 되자 농장 주인 존스 씨는 닭장 문에 자물쇠를 채웠어. 추위에 몸이 떨려서 손놀림을 빨리 했지만, 술에 취해 잘 되질 않았어. “정말 짜증 나는군.” 겨우 자물쇠를 채운 존스 씨는 쪽문을 닫는 것도 잊고 집 안으로 들어갔어. 그런 다음, 비틀비틀 침실로 걸어 들어갔지. 존스 씨가 침실의 불을 끄고 잠이 들자, 갑자기 농장 동물들이 바쁘게 움직였어. 수퇘지 메이저 영감이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야. 메이저 영감은 현명하고 말도 잘했기 때문에 농장의 모든 동물이 존경했지. “존스 씨가 잠든 것 같으니, 이제 창고로 가보자.” 동물들은 너도나도 창고로 몰려갔어. 메이저 영감은 높은 단상에 자리한 채 동물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드디어 다른 동물들이 속속 들어와 각자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았지. 제일 먼저 블루벨, 제시, 핀처라고 불리는 개 세마리가 들어왔어. 그다음으로 돼지들이 들어와 짚단 위에 자리를 잡았고 양과 황소, 젖소는 돼지 뒤에 앉았어. 암탉들은 창턱에, 비둘기들은 서까래에 올라앉았지. 짐마차를 끄는 말인 복서와 클로버도 작은 동물들을 밟을까 조심하며 들어왔어. 뒤를 이어 흰 염소 뮤리엘과 당나귀 벤자민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오리 떼가 조르르 몰려 들어왔어. 예쁘장하게 생긴 흰 말 몰리도 우아하게 들어와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 갈기 끝에 달린 빨간 리본을 동물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거든. 맨 마지막으로 고양이가 들어왔어. 고양이는 따뜻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복서와 클로버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어. 존스 씨가 무척 아끼는 까마귀 모지스만 빼고, 농장의 동물들이 다 모였지. 모지스는 안채의 홰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어. 메이저 영감은 창고 안을 쭉 둘러보고 나서,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어.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낼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그래서 죽기 전에 여러분에게 내가 그동안 얻은 삶의 지혜를 전하고자 하오.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소? 우리는 겨우 허기를 채울 정도의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힘이 다 빠지는 순간까지 강제로 일을 해야만 하오. 그리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해 왔소. 영국 땅에 사는 동물 중에 행복을 누리거나 자유를 누리는 동물은 하나도 없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영국 땅이 척박하기 때문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소. 영국의 토지는 기름지고, 기후는 온화하오. 따라서 우리는 배부르게 먹고 풍족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하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걸까? 사람은 우리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은 우리 동물들을 제멋대로 팔아 버리기도 하고, 함부로 잡아먹기도 하오. 돼지, 젖소, 말, 암탉, 양. 그 누구도 비참한 최후를 피할 수는 없소.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소? 또한,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마음껏 누릴 것이오. 동지 여러분, 사람에게 맞서야 하오! 모든 사람은 우리의 적이며, 모든 동물은 우리의 동지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동물들이 우레 같은 함성을 질렀어. 메이저 영감은 동물들의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연설을 이어 나갔어. 동지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적인 사람을 닮아서는 안 되오. 어떤 동물이든 사람의 집에서 살아서는 안 되고, 침대 위에서 자도 안 되오. 우리 동물들끼리는 서로 지배해서도 안 되고, 탄압해서도 안 되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동물이든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모든 동물은 평등해야 하오! 이제 내가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겠소. 내가 새끼 돼지였을 때, 어머니가 불러 주던 노래가 있었소. 자라면서 그 노래를 잊어버렸는데, 어젯밤 꿈결에 갑자기 생각났소.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려고 하오. 제목은 영국의 동물들이오. 메이저 영감은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영국의 동물들아, 아일랜드의 동물들아, 모든 나라와 지역의 동물들아, 내가 전하는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여라. 앞으로 다가올 황금시대에 대해. 머지않아 그날이 오리라. 독재자 인간들을 내쫓고 영국의 기름진 들판을 동물들만이 밟을 것이다. 코뚜레가 우리 코에서 사라지고 멍에가 우리 등에서 사라지고 재갈과 박차가 영원히 녹슬고 잔인한 채찍도 사라지리라. 엄청나게 많은 재산 밀과 보리, 귀리와 건초 토끼풀과 콩과 사탕 무는 그날이 오면 우리 것이 되리라. 들판은 더 밝게 빛나고 강물은 더 맑게 흐르고 바람은 더 부드럽게 불어오리라.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그날에는. 그날을 위해 모두 싸워야 하리라. 비록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더라도 젖소도 말도 거위도 칠면조도 모두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리라. 영국의 동물들아, 아일랜드의 동물들아, 모든 나라와 지역의 동물들아, 내가 전하는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여라. 앞으로 다가올 황금시대에 대해. 메이저 영감의 노래를 들은 동물들은 가슴이 뛰었어. 하나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모두 큰 소리로 따라 불렀지. 동물들의 노래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던 존스 씨가 깨어날 때까지 계속되었어. 잠이 깬 존스 씨는 동물들이 시끄럽게 울어 대자 여우라도 나타난 줄 알고 총을 쏘았어. 탕탕! 존스 씨의 총소리에 동물들은 노래를 멈추었지. 그리고 서둘러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고 사방은 조용해졌어. 그로부터 3일 뒤, 메이저 영감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 동물들은 깊은 슬픔에 빠져 모두 그를 그리워했지. 그 뒤 3개월 동안 동물들은 존스 씨 몰래 자주 모였어. 메이저 영감의 연설은 돼지를 비롯한 몇몇 영리한 동물들에게 혁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던 거야.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동물은 두 마리 돼지, 스노볼과 나폴레옹이었어. 몸집이 큰 나폴레옹은 말재주는 없지만, 의지가 강하고 고집이 센 돼지였어. 스노볼은 활달한 성격에 창의력도 뛰어났지만, 나폴레옹만큼 의지가 강하지는 못했어. 또, 웅변을 잘하는 돼지도 있었지. 몸집이 작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스퀼러였어. 이 세 마리의 돼지는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을 정리한 다음, 거기에 ‘동물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어. 동물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창고에 모여 돼지들로부터 ‘동물주의’에 대해 배웠지. 처음에 동물들은 시큰둥하게 그저 듣고만 있었어. 제일 시큰둥한 것은 흰 말 몰리였어. “반란이 일어나도 설탕을 먹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스노볼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지. “이 농장에서는 설탕을 만들지 못하니까 먹을 수 없습니다. 대신 보리는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직한 말, 복서와 클로버는 돼지들의 말을 무조건 믿고 받아들였어. 비밀 모임은 영국의 동물들을 부르는 것으로 끝났는데, 복서와 클로버가 늘 선창했어. 어느새 동물들은 머지않아 꼭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모두 믿게 되었지. 하지만 반란이 그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어. 존스 씨는 비록 동물들을 모질게 다루긴 했지만, 능력 있는 농사꾼이었어. 그런데 요즘엔 일도 안 하고 매일 술만 마셔 댔어. 농장 일로 소송을 걸었다가 재판에서 져서 많은 재산을 잃었거든. 주인이 농장 일에 관심이 없으니, 일꾼들도 자연히 게으름을 피웠어. 밭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날이 늘어났지. 성 요한 축제일 전날이었어. 일꾼들은 동물들에게 먹이도 주지 않고 토끼 사냥을 하러 나갔고, 존스 씨는 잔뜩 술에 취해 잠만 잤어. 종일 굶은 동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 암소가 곡식 창고의 문을 뿔로 들이받자, 문이 와장창 부서졌어. 동물들은 곡식 창고로 우르르 몰려가 닥치는 대로 곡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지.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깬 존스 씨는 일꾼들과 함께 곡식 창고로 달려와 동물들에게 채찍을 마구 휘둘렀어. “종일 굶기는 것도 모자라 때리기까지 하다니!” 동물들은 힘을 합쳐서 존스 씨와 일꾼들에게 맞섰어. “이럴 수가!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존스 씨와 일꾼들은 당황하여 허둥지둥 도망쳤지. 이렇게 하여 동물들의 반란은 얼떨결에 성공했어. 동물들은 농장을 한 바퀴 죽 둘러본 다음, 창고로 가서 그들을 옭아맸던 도구들을 없애기 시작했어. 재갈, 코뚜레 따위는 우물 속에 던지고, 고삐, 굴레, 눈가리개 따위는 불태웠어. 그러고 나서 모두 함께 옥수수를 배불리 나누어 먹었지. 밤이 되자, 동물들은 잠자리로 돌아가서 눈을 붙였어. 난생처음 맛보는 편안한 잠이었어. 다음 날, 잠에서 깬 동물들은 문득 어제 일이 떠올랐어. “맞아, 우리가 반란을 일으켰지!” “이 농장은 드디어 우리 것이 되었어!” 동물들은 농장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감격했지. 하지만 농장 안채 건물 앞에 다다르자, 누구도 선뜻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용기를 내어 문을 밀치며 말했어. “들어가 보자!” 동물들은 한 줄로 서서 안으로 들어갔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지. 깃털 매트리스를 깐 폭신한 침대,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 양탄자와 소파. 집 안은 온갖 사치품들로 가득 차 있었어. 동물들은 부엌에 있던 햄을 모조리 들고나와 땅에 꼭꼭 묻었어. 복서는 맥주 통을 발로 차서 박살 내 버렸어. 동물들은 안채 건물을 박물관으로 만들기로 하고 누구도 그 안에서 살지 않기로 했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스노볼이 동물들에게 말했어. “이제 우리는 이 농장의 주인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일해서 만들어 내야 합니다. 오늘은 다 같이 건초 수확에 나섭시다. 아,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군요.” 나폴레옹은 블루벨, 제시, 핀처에게 흰 페인트와 검정 페인트 그리고 붓을 가져다 달라고 했어. 나폴레옹과 스노볼은 동물들과 함께 대문 앞에 섰어. 대문에는 “장원 농장”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지. 스노볼은 붓에 흰 페인트를 듬뿍 묻혀 “장원 농장”을 지우고, 검정 페인트로 다시 “동물 농장”이라고 썼어. 나폴레옹은 동물들을 다시 창고에 모이게 한 다음, 사다리를 가져오라고 했어. 우리 돼지들은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동물주의를 일곱 개의 문장으로 정리했습니다. 이것을 ‘7계명’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벽에 써 놓겠습니다. 이제부터 7계명은 우리 동물들이 지켜야 할 동물들의 법이 되는 겁니다.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스노볼이 붓을 들고 사다리 끝에 올라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지. 7계명은 시커먼 벽에 흰 페인트로 큼직하게 써 놓았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였어. 스노볼이 큰 소리로 7계명을 읽자, 모두 그 내용에 아주 만족해했어. 몇몇 머리가 좋은 동물들은 7계명을 외우기 시작했어. “자, 동지 여러분! 이제 풀밭으로 가서 다 함께 식량을 거둡시다.” 스노볼이 말했지. 그런데 그때, 젖소 세 마리가 불편한 듯 큰 소리로 “음매” 하고 울었어. 종일 우유를 짜지 않아서 젖이 한껏 부풀어 있었던 거야. 그러자 스노볼이 외쳤어. “빨리 통을 가지고 오십시오!” 누군가가 이렇게 묻자, 나폴레옹이 말했어. 우유에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 돼지들이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지금은 건초 수확이 더 시급한 일입니다. 스노볼이 안내할 테니 어서 가 보십시오. 동물들은 스노볼을 따라가서, 건초 베는 작업을 했어. 동물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우유 다섯 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 동물들은 건초를 거두는 일에 힘을 쏟았어. 하지만 일일이 손으로 직접 하자니 힘에 부쳤어. 동물들은 사람들처럼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거든. 돼지들이 궁리 끝에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낸 뒤에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어. 돼지들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하고 일을 시키기만 했어. 종일 모든 동물이 힘을 합쳐 건초 수확에 매달린 결과, 농장이 생긴 이후 가장 많은 양의 건초를 수확했어. 직접 수확한 식량이었기에 동물들은 먹을 때마다 무척 행복했어. 먹고 쓰기만 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자, 동물들에게 먹을 것이 더 많이 돌아갔어. 또 생각지도 못했던 여가도 생겼어. 그러나 여가를 즐겨 본 적이 없었던 동물들은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어. 예전에는 동물들끼리 걸핏하면 싸웠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먹이를 나누는 것에 불만을 품거나 일을 안 하려고 꾀부리는 동물도 없었어. 흰 말 몰리와 고양이만 빼고 말이야. 몰리와 고양이는 일하다가도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어. 동물 농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당나귀 벤자민은 늘 변함이 없었어. 그는 자기가 맡은 일은 묵묵히 했지만, 그 외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어. 동물들의 반란에 대해서도 입을 꼭 다물었어. 일요일은 동물들이 쉬는 날이었어. 모두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나면, 특별한 의식을 치렀어. 이 의식은 스노볼이 만든 깃발을 높게 다는 것으로 시작되었어. 녹색 식탁보에 동물의 발굽과 뿔을 그려 넣은 이 깃발에 대해 스노볼이 설명했어. “바탕색인 녹색은 우리 조국 영국의 푸른 들판을 뜻하며, 발굽과 뿔은 이 땅에서 사람을 몰아내고 앞으로 우리가 세울 ‘동물 공화국’을 뜻합니다.” 깃발을 높이 단 뒤에는 모두 창고에 옹기종기 모여 진지하게 회의했어. 의견을 내는 건 언제나 돼지들이었지. 다른 동물들은 의견을 생각해 낼 정도로 머리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토론은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이끌었는데, 둘은 토론 중에 서로 부딪힐 때가 많았어. 회의는 영국의 동물들을 부르는 것으로 끝났어. 회의가 끝나면 동물들은 오후 내내 자유롭게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 밤이 되면 돼지들은 마구간에 모여 농장에서 가져온 책을 보면서, 대장장이 일, 목공 일 등 그 밖의 여러 가지 필요한 기술들을 연구했어. 스노볼은 동물마다 할 일을 정하느라 바빴어.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각자 할 일을 정했지. 스노볼의 이 계획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읽기 쓰기 교육 위원회’는 성공을 거두었어. 읽기와 쓰기를 완벽하게 잘하는 돼지들이 동물들을 열심히 가르쳤거든. 가을이 깊어 갈 무렵에는 농장 동물들 대부분이 몇 글자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어. 클로버는 알파벳은 다 익혔지만, 단어는 못 읽었어. 복서는 A에서 D까지밖에 익히지 못했고, 몰리는 자기 이름밖에 쓰지 못했어. 그 밖의 다른 동물들은 겨우 A밖에 익히지 못했지. 양, 오리, 암탉은 7계명을 외우는 것조차 힘겨워했어. 스노볼은 머리가 나쁜 동물들을 위해 7계명을 단 한마디로 줄여 주었어. “네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그러자 발이 두 개인 새와 닭, 오리가 화를 내며 거세게 항의했어. “그럼 두 발인 우리도 나쁘단 건가요?” 스노볼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어. 그리고 헛간 벽의 7계명 위에 이 글을 더 추가했어. “네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교육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지. 그는 다 자란 동물들의 교육보다 어린 새끼들의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나폴레옹은 갓 젖을 뗀 강아지 아홉 마리에게 특별 교육을 하기로 했어. 나폴레옹은 마구간의 다락방에 강아지들을 옮겨 놓고 다른 동물들과는 철저하게 떼어 놓았지. 눈에 띄지 않으니까 다른 동물들은 금세 그 강아지들에 대하여 잊어버렸어. 그 무렵, 우유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밝혀졌어. 그동안 돼지들이 자기들끼리만 우유를 먹었던 거야. 동물들은 화가 났지만 따지지 않고 그냥 참기로 했어. 며칠 뒤, 과수원의 사과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기 시작했어. 동물들은 사과를 모두 함께 먹을 거라고 기대했어. 하지만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어. “사과는 모두 우리 돼지들의 먹이로 쓸 겁니다.” 우유에 대해서는 참았지만, 사과마저 돼지들이 가져가려 하자 동물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어. “이건 너무 불공평해!” 그러자 스퀼러가 나서서 동물들을 설득했어. “동지 여러분! 설마 우리 돼지들이 이기심으로 우유나 사과를 독차지하려 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유와 사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노볼도 한껏 목소리를 높여 거들었어. “동물주의에 대해 밤낮으로 연구하는 우리 돼지들이 건강을 잃는다면 모두 위험해집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우리 돼지들의 머리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존스 씨가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면 어떡합니까?” 동물들은 존스 씨가 다시 돌아오는 일만은 막고 싶었어. 결국 동물들은 돼지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어. 이렇게 해서 돼지들은 우유와 사과를 모두 차지할 수 있었지. 쫓겨난 농장 주인 존스 씨는 술집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신세 한탄을 했어.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어. ‘쯧쯧, 오죽 못났으면 동물들한테 쫓겨났을까? 우리 농장의 동물들이 이 소식을 알지 못하게 막아야겠어.’ 동물 농장 근처에는 두 개의 농장이 있었어. 폭스우드 농장과 핀치필드 농장이었어. 두 농장의 주인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렸지. 폭스우드 농장의 주인인 필킹턴 씨와 핀치필드 농장의 주인인 프레드릭 씨는 서로를 무척 싫어했어. 둘은 한 번도 의견이 같은 적이 없었어. 그런데 장원 농장 동물들의 반란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되었지. “동물들이 주인을 내쫓고 자기들이 농장을 경영한다고? 그 농장은 보름도 안 가서 망하고 말 거야.” “아마 동물들끼리 싸움만 하다가 굶어 죽을 거야!” 둘은 겉으로는 비웃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어. 동물들이 굶어 죽기는커녕 아주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거든. 당황한 필킹턴 씨와 프레드릭 씨는 동물 농장에 대하여 끔찍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지. “동물 농장 동물들이 먹을 게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는다네.” 하지만 이들이 꾸며 낸 이야기도 통하지 않았어. 오히려 동물들끼리 멋지게 꾸려 나가는 평화로운 농장이 있다는 소문만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갔어. 또한 영국의 동물들이란 노래도 빠른 속도로 동물들 사이에 퍼져 나갔지. 날이 갈수록 농장마다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기운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어. 황소들은 사나워지고 암소들은 양동이를 걷어찼지. 농장 사람들은 동물들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동물들의 반항은 더 거세질 뿐이었어. 어느 가을날이었어. 동물 농장의 동물들은 추수하느라고 바빴어. 그때 비둘기 한 무리가 다급하게 날아와서 소리쳤어. “큰일 났어! 큰일!” 동물들은 일손을 멈추고, 일제히 비둘기들을 바라보았지. “존스 씨와 그의 일꾼들 그리고 폭스우드 농장과 핀치필드 농장의 사람들이 지금 몽둥이와 총을 들고 농장으로 쳐들어오고 있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어. 농장을 다시 빼앗으러 온 거야.” 동물들은 이미 예상하던 일이라 그다지 놀라지 않았어. 그들은 언젠가는 사람들이 쳐들어온다고 생각하고 빈틈없이 준비해 놓았지. 스노볼은 동물들에게 신속하게 싸울 준비를 하라고 했어. 마침내 존스 씨를 비롯한 사람들이 농장 축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어. 그때, 스노볼이 공격 명령을 내렸어. “첫 번째 공격!” 서른다섯 마리의 비둘기가 사람들 머리 위를 날며 똥을 갈겨 댔어. 사람들이 비둘기들의 똥 공격을 막는 동안 거위들이 “꺼억 꺼억” 소리를 지르며 쏟아져 나왔지. 거위들은 인정사정없이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종아리를 물어뜯었어.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작전일 뿐이었어. 스노볼은 두 번째 명령을 내렸지. “모두 공격하라! 농장을 지키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 스노볼이 앞장서고 흰 염소 뮤리엘과 당나귀 벤자민, 양 떼가 그 뒤를 따랐어. 그들은 사방에서 달려들어 사람들을 물고 들이받았어. 하지만 무기를 가진 사람들과 싸우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어. 스노볼이 갑자기 “꽥!”하고 비명을 질렀어. 그러자 동물들은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마당으로 후닥닥 달아났지. “지금이 기회다. 한 마리도 놓치지 말고 잡아라.”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동물들의 뒤를 쫓았어. 그것이 바로 스노볼의 작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야. 사람들이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스노볼은 다시 공격 신호를 보냈어. 그러자 말과 젖소, 돼지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마당의 입구를 막아 버렸어. 사람들은 마당 안에 갇힌 꼴이 되었지.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라!” 스노볼이 소리치며 총을 든 존스 씨를 향해 달려들었어. 그러자 존스 씨는 스노볼을 향해 총을 쏘았어. 탕! 총알은 스노볼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노볼 옆에 있던 양 한 마리가 그 총에 맞아 죽고 말았지. “용서 못 해!” 화가 난 스노볼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존스 씨의 두 다리를 세게 들이받았어. 존스 씨는 공중으로 붕 날아가서 거름 더미 속에 처박혔고, 총도 멀리 날아갔지. 사람들은 도망갈 틈이 생기자 허겁지겁 마당을 빠져나가서 큰길 쪽으로 달아났어. “만세! 우리가 이겼다! 동물 농장 만세!” 동물들은 만세를 부르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지. 마당에 쭉 뻗은 마구간지기 한 사람만 빼고, 사람들은 모두 달아났어. “세상에, 어떡해. 이 사람은 죽었나 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세게 찼나 봐.” 복서는 자기가 사람을 죽였단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어. 하지만 동물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뻗어 있던 마구간지기가 없어졌지. 죽은 줄 알았던 마구간지기가 그사이에 정신이 들어 달아났던 거야. 동물들은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어. 그 뒤 존스 씨의 총에 맞아 죽은 양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치러졌어. 스노볼은 죽은 양의 무덤가에 서서 짤막하게 연설했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언제든 사람들과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워야 합니다.” 동물들은 ‘1등 동물 영웅 훈장’이라는 훈장을 만들어 스노볼과 복서에게 주었어. 또 죽은 양에게는 ‘2등 동물 영웅 훈장’을 주었어. 동물들은 이번 전쟁을 ‘외양간 전투’라고 부르기로 했지. 외양간 앞마당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야. 동물들은 진흙 속에서 존스 씨의 총을 찾아냈어. 총은 깃대 아래에 놓아두고, 일 년에 두 번, 반란 기념일인 6월 24일에 한 번, 외양간 전투 기념일인 10월 12일에 한 번 쏘기로 했어. 겨울이 다가오자 몰리는 점점 더 게으름을 피웠어. 걸핏하면 늦고, 일도 하는 둥 마는 둥 했지. 몰리는 늘 핑계를 대고 일터를 빠져나갔어. 그러고는 우물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며 넋이 나간 듯 꼼짝도 하지 않았지. 동물들은 “아무래도 몰리가 수상하다.”라며 수군거렸어. 그 소문을 들은 몰리는 흥분해서 날뛰더니, 사흘 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어.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가 몰리의 소식을 전해 주었어. “윌링던 마을 반대쪽에 있는 술집 앞에서 몰리를 봤어. 멋진 이륜마차를 끌고 있더군. 술집 주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몰리에게 설탕을 먹여 주고 있었어.” 그러자 클로버가 물었어. “기분은 어때 보였어?” “무척 좋아 보이더군. 왜 안 좋겠어? 그렇게도 원하던 설탕을 얻었는데.” “대신 자유를 잃었지. 몰리는 정말 바보 같아.” 클로버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쉬었어. 해가 바뀌어 1월이 되었어. 땅이 꽁꽁 얼어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동물들은 회의를 자주 열었지. 그런데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사사건건 싸웠어. 둘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으르렁거렸어. 스노볼은 농사에 관한 책을 보고 연구한 다음, 여러 가지 새로운 의견을 냈지. 동물들은 스노볼이 새로운 계획을 내놓을 때마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계획은 모두 실패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어. 나폴레옹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지. 어느 날, 스노볼은 목장 옆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풍차를 짓자는 의견을 내놓았어. “우리는 풍차로 전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전깃불을 켤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리고 농기구들을 기계화할 수 있습니다. 기계가 우리 대신 일을 해 준다면 우리는 더 많이 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동물들은 스노볼의 말에 귀가 솔깃했어.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강하게 반대했지. 하지만 스노볼은 풍차 짓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곧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어. 설계도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졌고 마침내 마룻바닥을 절반 이상이나 차지했어. 동물들은 하루에 한 번씩 설계도를 보기 위해 헛간으로 몰려왔지. 그러던 어느 날, 헛간 근처엔 얼씬도 안 하던 나폴레옹이 느닷없이 나타났어. 나폴레옹은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오줌을 찍 갈겼어. 동물들은 풍차 짓는 문제를 둘러싸고 두 패로 갈라졌지. 풍차를 지으려면 힘은 들겠지만, 일 년만 고생하면 모든 일이 끝나.” 스노볼의 말에 나폴레옹이 냉정하게 맞섰어. “풍차보다 중요한 건 식량이야. 모두 풍차 짓는 일에 매달리면 농사는 누가 짓지?” 이것 말고도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동물 농장을 사람들의 침입으로부터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팽팽히 맞섰어. 동물들은 양쪽의 의견이 모두 그럴듯했기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지. 마침내 스노볼의 풍차 설계도가 완성되었어. 돼지들은 다음 일요일 회의에서, 풍차를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어. 일요일이 되어 동물들이 모두 창고에 모이자, 스노볼이 풍차를 지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하며 연설했지. “다 같이 일 년만 고생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힘든 노동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풍차가 완성되면 사람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스노볼의 호소에 동물들의 마음이 점점 기울었어. 그때, 나폴레옹이 스노볼을 날카롭게 쏘아보고는 “꽥!”하고 소리를 질렀지. 그러자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오더니, 커다란 개 아홉 마리가 뛰어 들어왔어. 개들은 사납게 스노볼에게 덤벼들었어. 스노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고, 개들은 그 뒤를 계속 쫓았어. 개 한 마리가 스노볼의 꼬리를 물 뻔했지만, 스노볼은 가까스로 농장을 빠져나갔어. 동물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했어. 처음엔 개들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곧 알게 되었어. 그 개들은 나폴레옹이 마구간의 다락방에 숨겨 놓고 기른 강아지들이 자란 것이었어. 나폴레옹은 개들을 데리고 높은 단상으로 올라갔어. “앞으로 더는 회의를 열지 않겠습니다. 농장에 관한 모든 결정은 우리 돼지들끼리 할 것이며, 결정된 내용만 여러분에게 전하겠습니다.”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말을 듣고 당황했어. 무언가 불쾌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어. 그래도 좀 더 똑똑한 젊은 돼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지. “말도 안 됩니다!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 옆에 앉아 있던 아홉 마리의 개들이 으르렁거렸어. 젊은 돼지들은 새파랗게 질려 더는 어쩌지 못하고 주저앉았어. 스노볼은 완전히 쫓겨났어. 그 뒤 스퀼러는 농장을 돌며 동물들에게 말했어. “동지 여러분, 여러분은 나폴레옹이 지도자로서 얼마나 큰 희생과 무거운 책임을 떠안고 있는지 아실 겁니다. 필요도 없는 풍차를 지으려고 한 스노볼은 정말 나쁜 동물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항의하듯 소리쳤지. “스노볼은 외양간 전투에서 제일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용감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과 복종입니다. 제멋대로 굴면 우리는 다시 존스의 노예가 되고 말 겁니다.” 그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복서가 입을 열었어. “회의하고 풍차를 짓는 일이 존스를 돌아오게 하는 일이라면 당장 그만둬야지. 나폴레옹이 옳다면 옳은 거야.” 어느덧 날씨가 풀려 봄이 시작되었어. 스노볼이 풍차의 설계도를 그리던 헛간 문은 굳게 잠겨 있었어. 동물들은 스노볼이 그린 설계도는 모두 지워졌을 것으로 생각했지. 일요일마다 동물들은 커다란 창고에 모여 다음 주에 해야 할 일을 전해 들었어. 모임에서 동물들은 전처럼 함께 모여 앉지 못했어. 창고에 단을 높이 쌓은 다음 높은 곳에는 나폴레옹과 스퀼러, 미니무스만 앉았어. 미니무스는 시를 쓰는 돼지였어. 나머지 동물들은 바닥에서 그들을 마주 보며 앉았어. 스노볼이 쫓겨난 지 3주일이 지난 일요일이었어. 나폴레옹은 놀랄 만한 발표를 했어. “여러분, 풍차를 짓기로 했습니다. 이 일은 엄청나게 힘이 들 것입니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여러분들에게 지급되는 식량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 동물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나폴레옹 옆에 있는 개들이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못 했어. 풍차를 짓기로 한 다음부터 동물들은 노예처럼 일했어. 하지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어. 일요일 오후에도 일해야 했어. 나폴레옹의 명령 때문이었지. “일요일 오후에 일하지 않는 동물들에게는 식량을 반으로 줄여서 배급하겠습니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데 동물들이 힘들게 일했는데도, 수확은 작년보다 훨씬 줄어들었어. 풍차를 짓느라 농사를 많이 짓지 못했던 거야. 풍차를 짓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어. 작은 돌을 써야 하는데, 주변에는 온통 큰 돌뿐이었어. 그래서 동물들은 큰 돌을 수레와 마차에 싣고 산꼭대기까지 힘겹게 끌고 올라갔어. 그런 다음 산꼭대기에서 돌을 아래로 굴려 잘게 부수었지. 그렇게 깨진 작은 돌을 풍차를 세울 언덕 위로 다시 열심히 날랐어. 늦여름이 되자 돌은 충분히 쌓였고, 드디어 돼지들의 감독 아래 풍차를 짓기 시작했어. 동물들은 쉬지도 못하고 종일 일을 했어. 존스 씨가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먹지도 못했어. 하지만 뼈 빠지게 일해서 사람을 먹여 살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지 않았지.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풍차를 지으려면 여러 가지 물품이 필요했는데,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던 거야. 어느 일요일 아침,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말했어. “우리 농장은 이웃 농장들과 거래를 하기로 했습니다. 꼭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선 풍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건초 한 더미와 약간의 보리를 팔기로 했습니다. 혹시 나중에 돈이 더 필요하면 달걀도 팔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암탉들은 명예로운 희생으로 알고, 기꺼이 달걀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동물들은 불안감에 휩싸였어. 모든 것이 동물주의와 어긋나는 것이었어. 동물들은 사람과는 절대로 거래도 하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을 떠올렸어. 젊은 돼지 네 마리가 나서려다 개들이 으르렁대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어. “흠흠, 동물들이 사람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휨퍼라는 변호사가 우리를 대신하여 거래를 맡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월요일마다 이곳에 와서 내 지시를 받을 것입니다. 이상! 동물 농장 만세!” 이번에도 스퀼러는 농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떠들어 댔어. “우리는 장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예전에 스노볼이 퍼뜨린 거짓말 같은데, 우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만 알아 두십시오!” 동물들은 스퀼러의 말을 듣고 자기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어. 변호사 휨퍼 씨는 약속대로 월요일마다 나폴레옹을 만나러 동물 농장에 왔지. 휨퍼 씨는 교활한 사람이었어. 휨퍼 씨는 두둑한 수수료를 받을 생각에 벌써 마음이 한껏 부풀었어. 동물들은 사람인 휨퍼 씨가 농장에 들락거리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지. 하지만 네발 달린 동물인 나폴레옹이 두 발 달린 사람인 휨퍼 씨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모습은 꽤 자랑스러웠어. 어느새 사람 중에서도 ‘장원 농장’을 ‘동물 농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 갔지. 이 무렵,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여태껏 비워 두었던 안채에 돼지들이 들어가 살기로 했다는 거야. 동물들은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어. “어떤 동물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맞아!” 이번에도 스퀼러가 나서서 동물들을 설득했어. “돼지들은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있어서 조용히 일할 곳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우리의 지도자인 나폴레옹이 돼지우리에서 지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동물들은 이번에도 스퀼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어. 클로버는 글을 잘 읽을 줄 몰라서 흰 염소 뮤리엘을 데리고 창고로 갔어. “뮤리엘, 저기 네 번째 계명 좀 읽어 줘. 저거 혹시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는 말 아냐?”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스퀼러가 클로버와 뮤리엘을 발견하고는 그 문제에 대해서 못을 박듯이 말했어. “금지된 건 침대가 아니라 시트입니다. 그래서 우리 돼지들은 담요를 깔고 잡니다. 우리 돼지들이 제대로 쉬지 못해 다시 존스 씨가 돌아오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겠지요?” 며칠 뒤, 돼지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나겠다고 발표했어. 그러나 이제 동물들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지. 어느새 가을이 되었어. 동물들은 농사도 짓고, 풍차도 짓느라 무척 지쳐 있었어. 그런데도 동물들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어. 풍차는 이제 절반 정도 지어졌지. 가을 추수가 끝나고 맑은 날씨가 이어졌어. 동물들은 풍차의 벽을 쌓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어. 그들은 풍차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어. 날이 밝자 그제야 바람이 잠잠해져 동물들은 조심조심 밖으로 나가 보았어.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동물들은 절망적인 비명을 내질렀어. “오오, 이를 어째! 풍차가 무너졌어!” 동물들은 일제히 풍차로 달려갔어. 평소에는 절대로 뛰는 일이 없었던 나폴레옹이 제일 먼저 달려갔어. 동물들이 힘겹게 쌓은 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어. 나폴레옹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사방을 돌아다니다 온몸을 푸르르 떨었어. “우리가 잠든 사이에 스노볼이 농장에 몰래 들어와 풍차를 무너뜨린 게 분명합니다!” 나폴레옹은 다시 천둥 같은 소리로 외쳤어. “나는 스노볼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누구든 그를 죽이는 자에게 ‘2등 동물 영웅 훈장’을 수여하고, 사과 반 상자를 주겠습니다.” “스노볼이 그런 짓을 하다니!” 동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 겨울이 되자 진눈깨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세상은 마치 얼어붙은 듯했어. 동물들은 무너진 풍차를 다시 짓기 위해 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어. 한편, 풍차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무척 고소해했지. “일전에 쫓겨난 돼지 한 마리가 무너뜨린 거라던데?” “그건 그냥 지어낸 헛소리일 뿐이야. 풍차 벽을 그렇게 얇게 쌓아서 어디 세찬 비바람을 견뎌 내기나 하겠어?” 돼지들은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풍차 벽을 지난번보다 훨씬 두껍게 쌓기로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돌을 언덕으로 날라야 했어.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동물들은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어. 우직하게 일하는 복서의 모습은 그들에게 많은 힘과 위안을 가져다주었어. 새해가 시작되자, 날씨는 더욱 사나워졌어. 어느새 동물 농장은 식량이 점점 바닥나기 시작했어.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동물 농장에 대한 새로운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지. “동물 농장의 동물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더군.” “글쎄, 서로 잡아먹는다지 아마?” 한 달쯤 지나자, 드디어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어. 나폴레옹은 이제 동물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나 명령은 스퀼러를 시켜서 전달할 뿐이었지. 어느 일요일 아침, 스퀼러가 알을 낳으러 닭장에 들어온 암탉들에게 말했어. “매주 달걀 400개씩을 윌링던 시장에 내다 팔기로 했습니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들이면 여름이 될 때까지는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암탉들은 서까래 위에서 알을 낳아 일부러 깨뜨리며 시위했어. 그러자 나폴레옹은 암탉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기로 했어. 암탉들은 닷새 동안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달걀을 내주기로 했지. 이른 봄, 놀라운 소문이 퍼졌어. 스노볼이 밤마다 몰래 농장을 들락거린다는 소문이었지. “글쎄, 스노볼이 옥수수를 훔쳐 가고, 달걀도 깨뜨리고, 과일나무 껍질도 물어뜯는대.” 얼마 뒤, 동물들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무조건 스노볼의 짓이라고 믿었어. 나폴레옹은 스노볼의 흔적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저녁이 되자, 스퀼러가 동물들을 불러 모았지. “여러분, 아주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스노볼이 핀치필드 농장의 프레드릭 씨와 힘을 합쳐 우리 농장을 빼앗으려 한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스노볼은 처음부터 존스 씨와 한패였습니다.” 동물들은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어. 스퀼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풍차를 무너뜨린 일보다 더욱 나쁜 짓이었어. 그러나 외양간 전투에서 스노볼이 활약한 모습을 기억하는 동물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 복서조차도 당황하여 말했어. “스노볼이 첩자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스노볼은 외양간 전투에서 총에 맞고도 도망가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존스 씨와 짜고서 총알이 살짝 스칠 만큼만 쏘게 한 것입니다.” 스퀼러는 단호하게 스노볼을 배신자로 몰아붙이며 뼈 있는 말 한마디를 던졌어. “우리 중에 스노볼의 첩자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잘 살피십시오.” 그로부터 나흘 뒤, 나폴레옹은 동물들을 마당에 모이게 했어. 나폴레옹의 뒤로 아홉 마리의 개가 따라 나왔어. 나폴레옹은 마당에 우뚝 서서 동물들을 둘러보더니, 느닷없이 “꽥!”하고 소리를 질렀지. 순간 개들이 달려 나와 평소에 자주 불만을 터뜨리던 젊은 돼지 네 마리의 귀를 덥석 물었어. 돼지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폴레옹 앞으로 끌려 나왔어.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죄를 스스로 말하라고 다그쳤어. 그러자 젊은 돼지들은 스노볼과 비밀리에 만나 왔고, 그의 지시대로 풍차를 무너뜨렸으며, 동물 농장을 프레드릭 씨에게 넘기기로 약속했다고 털어놓았지. 돼지들이 죄를 말하자 개들은 돼지들을 물어 죽였어. 나폴레옹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쳤어. “또 그동안 죄지은 자들은 순순히 앞으로 나와 말하시오!” 그러자 달걀 때문에 시위를 벌였던 암탉 세 마리가 나와서 죄를 말했어. 암탉 세 마리 역시 개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 동물들은 엄청난 충격 때문에 모두 그 자리를 슬금슬금 빠져나갔어. 동물들은 언덕 위로 올라가 웅크리고 있었어. 복서는 혼자 떨어져서 이렇게 중얼거렸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거야.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어.” 복서는 채석장으로 빠르게 걸어갔지. 클로버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은 여전히 언덕 위에 웅크리고 있었어. 클로버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어. ‘사람을 몰아내자고 우리가 힘을 합쳤을 때, 우리가 바란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어. 이건 절대로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아니야.’ 클로버는 타는 가슴을 달래려는 듯 영국의 동물들을 나직이 부르기 시작했어. 그러자 다른 동물들도 하나둘 클로버를 따라서 노래를 불렀지. 그때 스퀼러가 개 두 마리를 거느리고 다가왔어. “오늘부터 어떤 동물도 영국의 동물들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퀼러를 바라보았어. 그리하여 그날 이후로 농장의 동물들은 영국의 동물들을 부를 수 없게 되었어. 며칠 뒤 충격과 두려움이 가라앉자, 몇몇 동물들은 7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를 기억해 냈어. 클로버는 벤자민에게 여섯 번째 계명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어. 그러나 벤자민은 냉정하게 거절했지. 뮤리엘이 여섯 번째 계명을 읽어 주었어.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며칠 사이에 ‘이유 없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어. 나폴레옹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동물들 앞에 나타났어. 그럴 때면 늘 아홉 마리의 개가 그의 뒤를 따라다녔지. 나폴레옹은 이제 단순히 ‘나폴레옹’으로 불리지 않았어. ‘위대한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지’로 불렸어. 미니무스는 나폴레옹 동지라는 시를 지었어. 나폴레옹은 이 시를 창고 벽, 7계명의 반대쪽 끝에 써 놓으라고 지시했어. 시 옆에는 스퀼러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가 있었어. 그 해 내내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어. 추수 때가 되자, 동물들은 수확물을 거둬들이고, 풍차도 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그리고 마침내 풍차가 완성되었어. 동물들은 앞으로 누리게 될 안락한 생활을 상상하면서 풍차 주위를 즐겁게 뛰어다녔지. 나폴레옹도 언덕까지 나와서 동물들을 칭찬했어. “그동안 모두 수고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정말 훌륭한 풍차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풍차의 이름을 ‘나폴레옹 풍차’라고 하겠습니다!” 그 무렵 동물 농장에 큰 사건이 벌어졌어. 나폴레옹이 농장의 목재를 제 마음대로 핀치필드 농장의 프레드릭 씨에게 팔았는데, 목재값으로 받은 돈이 가짜였던 거야. 영리한 지도자 나폴레옹이 사기를 당했다는 소식은 농장 안에 금세 퍼져 나갔어. 나폴레옹은 프레드릭 씨를 잡아 올 것을 명령했어. 하지만 프레드릭 씨와 그 일당이 먼저 동물 농장을 쳐들어왔지. 동물들은 이번에도 용감하게 싸움터로 나갔어. 그러나 이번 전투는 무척 힘이 들었어. 사람들은 열다섯 명이나 되었고, 그들 중 여섯 명이 총을 가지고 있었거든. 사람들은 동물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 대었어. 많은 동물이 다쳐서 어쩔 수 없이 후퇴했어. 풍차와 농장은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지. 프레드릭 씨와 일당은 풍차 밑에 무언가를 집어넣더니 멀찌감치 달아났어. 이어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어. 동물들은 모두 귀를 막고 바닥에 엎드렸어. 풍차 주위로 연기가 자욱하게 솟아오르더니, 풍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지. 동물들은 분노하며 일제히 뛰쳐나갔어. “프레드릭을 잡아라!” 프레드릭 일당이 총을 마구 쏘아 댔지만, 동물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많은 동물이 죽고, 심하게 다쳤어. 뒤에서 지휘하던 나폴레옹까지 총알에 맞아 꼬리가 잘렸지. 물론 사람들도 많이 다쳤어. 복서의 발길질에 세 사람이 머리를 다쳤어. 아홉 마리의 개들은 울타리를 돌며 사람들을 에워쌌어. 개들이 사납게 달려들자,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어. 동물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지.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어. 죽거나 다친 동물들도 많았지만, 풍차가 무너진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컸어. 복서는 뒷다리에 박힌 총알들 때문에 몹시 쓰리고, 아팠어. 복서도 이젠 많이 늙어서 힘이 예전 같지 않았지. 동물들은 절룩거리며 마당으로 모였어. 녹색 깃발을 게양하고 축포 일곱 발을 쏘아 올렸어.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풍차 전투’라고 부르기로 했지. 며칠 뒤 안채에서는 밤늦도록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어. 그런데 밤 9시쯤, 몇몇 동물들이 이상한 광경을 보았어. 나폴레옹이 존스 씨가 쓰던 중절모를 쓰고 나와, 마당을 몇 바퀴씩 빠르게 돌다가 들어가는 거야. 그 광경을 목격한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이번 겨울도 날씨가 몹시 추웠어. 동물 농장의 식량은 여전히 부족했고, 동물들은 늘 배고파했어. 하지만 스퀼러는 식량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떠들었지. “전에는 사람의 노예였지만, 지금은 자유의 몸이지 않습니까?” ‘사람’과 ‘노예’와 ‘자유’라는 단어 앞에서 동물들은 할 말을 잃었어.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와서 외쳤어. “복서가 쓰러져서 못 일어나고 있어.” 복서는 언덕 중간에 쓰러져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어. 스퀼러는 복서를 병원으로 보내겠다고 말했지. 이틀 뒤 복서를 병원으로 싣고 가기 위해 마차가 왔어. 한낮이라 동물들은 무밭에서 무 떡잎을 뜯는 일을 하고 있었어. 그때, 벤자민이 막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어. 동물들은 벤자민이 그렇게 흥분한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깜짝 놀랐지. “빨리들 와! 복서를 데려가려고 한단 말이야.” 동물들이 마구간 쪽으로 뛰어가 보니, 복서는 벌써 마차에 옮겨져 있었어. “복서, 잘 가. 빨리 나아서 돌아와야 해.” 동물들이 복서에게 인사하는데 벤자민이 소리쳤어. “이 바보들아! 저 마차에 적힌 글씨 좀 보란 말이야! ‘늙거나 다쳐서 일을 못 하게 된 말 삽니다!’ 저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복서는 지금 도살장에 팔려 가는 거야!” 그 순간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어. 동물들은 마차 뒤를 쫓아갔으나 따라잡기는 힘들었지. 일요일이 되자 나폴레옹은 동물들에게 연설했어. “우리의 가장 충실한 일꾼이었던 복서를 잃어서 나는 지금 무척 슬픕니다. 이틀 뒤에 복서를 추모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연설을 들은 동물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어. 여러 해가 흘렀어. 반란 전에 있었던 동물들은 클로버와 벤자민, 그 외에 몇몇 돼지들을 제외하면 거의 죽거나 나이가 들었어. 스노볼의 이름은 잊힌 지 오래되었고, 복서를 기억하는 동물은 클로버와 벤자민뿐이었지. 나폴레옹을 비롯한 돼지들은 엄청나게 살이 쪄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어. 동물 농장은 옛날보다 많이 번창했어. 필킹턴 씨에게서 밭을 사들였고 풍차도 완성했어. 풍차는 전기를 생산하지는 못했지만, 옥수수를 찧어서 돈을 벌어들이게 해 주었어. 나폴레옹은 동물들이 행복해지는 길은,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거라고 말했지. 동물 농장은 전보다 부유해졌지만, 돼지나 개들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의 생활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어. 동물들은 매일 배고픔에 시달리며 허름한 축사의 짚 더미 위에서 잠들었어. 그러나 동물들은 메이저 영감이 말하던 그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 영국의 동물들을 부를 수는 없었지만, 농장에서 그 노래를 모르는 동물은 없었어. 어느 초여름 날, 스퀼러는 무슨 일인지 양들을 데리고 농장 한구석으로 갔어. 양들은 꼬박 일주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스퀼러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 같았어. 양들이 그곳에서 돌아온 다음 날 저녁이었지. 동물들이 일을 마치고 축사로 돌아오고 있을 때, 마당에서 클로버가 소리쳤어. “저, 저것 좀 봐!” 동물들은 클로버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어. 돼지 한 마리가 뒷다리로 버티고 일어서서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있었어. 그 돼지는 바로 스퀼러였지. 잠시 뒤, 안채에서 돼지들이 두 다리로 서서 뒤뚱뒤뚱 걸어 나오기 시작했어. 두 발로 걷는 모습이 제각각이어서 정말 우스꽝스러웠지. 그러나 오래전부터 연습한 것 같은 모습이었어.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이 거만한 몸짓으로 걸어 나왔어. 그 역시 두 발로 서 있었고 앞발에는 채찍을 들고 있었지. 동물들은 개들이 무서웠지만 이번만은 맞서야겠다고 생각했어. 바로 그때, 양들이 소리 높여 외쳤어. “네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클로버는 아무 말 없이 벤자민을 끌고 창고로 갔어. 그리고 7계명을 읽어 달라고 했지. 그런데 7계명은 온데간데없고, 벽에는 다음 두 문장만이 적혀 있었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다음 날부터 돼지들이 모두 앞발에 채찍을 들고 있는데도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심지어 나폴레옹이 까만 양복저고리에 승마용 바지를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지. 어느 날 오후, 이웃 농장의 주인들이 나폴레옹의 초대로 동물 농장을 보러 왔어. 손님들은 농장을 돌아보더니 “훌륭하다!”라며 감탄했어. 동물들은 순무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지. 그들은 돼지와 손님인 사람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 알 바 아니라는 듯 묵묵히 일만 했어. 그날 밤, 안채에서는 요란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어. 동물들은 호기심이 생겨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어. 식탁 주위로 여섯 사람과 여섯 돼지가 앉아 있었어. 그들의 잔에는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지. 동물들이 창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 폭스우드 농장의 필킹턴 씨가 일어나서 말했어. “오늘 우리는 오랫동안 쌓인 오해를 풀었습니다. 동물 농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돼지 여러분의 뛰어난 지도력에 감탄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대단히 만족한 듯 필킹턴 씨와 잔을 부딪치고는 술을 죽 들이켰어. “저도 오해를 푼 것이 기쁩니다. 그간의 나쁜 소문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이웃 농장들과 지금처럼 거래하면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나폴레옹은 사람들을 죽 보며 말을 이었어. “참, 필킹턴 씨가 아까 우리 농장을 ‘동물 농장’이라고 하셨는데 ‘장원 농장’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장원 농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밖에서 지켜보던 동물들은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어. 돼지들의 얼굴이 녹아내리며 바뀌고 있는 것 같았거든. 동물들은 조용히 돌아 나왔지. 동물들이 다시 안채를 들여다보았어. 돼지들과 사람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욕을 해 대며 싸우고 있었어. 사람과 돼지가 뒤엉켜 싸우느라 사람의 소리인지, 돼지의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 그제야 동물들은 돼지 얼굴이 사람처럼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아, 돼지가 사람처럼 보이고, 사람이 돼지처럼 보여.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군.” 동물들은 절망의 눈빛을 하고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지.
어린 왕자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나는 나의 ‘바치는 글’을 이렇게 고친다. “어린 시절의 레옹 베르타에게” 무슨 그림일까? 여섯 살 무렵,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라는 원시림에 대한 책에서 아주 놀라운 그림을 보았다. “보아뱀은 먹이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킨다. 그러고 나서 먹이를 소화하기 위해 꼼짝 않고, 여섯 달 동안 잠을 잔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밀림에서의 모험에 빠져들어 한참을 생각했다. “엄청 무섭지요?” 그러자 어른들은 되물었다. “모자가 뭐가 무섭다는 거니?” 나는 모자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뱀이었다.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다시 보아뱀의 배 속을 그렸다. 어른들에게는 언제나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나의 제2호 그림은 바로 이랬다. 어른들은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보아뱀의 그림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리나 역사, 수학, 문법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래서 난 여섯 살에 화가라는 멋진 꿈을 포기해 버렸다. 내 그림들이 성공하지 못한 데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다른 꿈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화가 대신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세계 여기저기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날아다녔다. 어른들이 말해 준 대로 지리 공부는 꽤 도움이 되었다. 나는 한눈에 중국과 미국의 애리조나를 구별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많은 어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어른들에 대한 내 생각이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가끔 똑똑해 보이는 어른을 만나면, 나는 내 그림 제1호를 보여 주었다. 그 어른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모자군요.” 그러면 나는 보아뱀이니 원시림이니 별이니 하는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카드놀이나 골프 또는 정치나 넥타이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들은 오늘 괜찮은 청년을 만났다며 기뻐했다. 어린 왕자와의 만남. 나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내다가 여섯 해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그때, 사막으로 떨어지면서 내 비행기의 모터가 부서져 버렸다. 승객도 정비사도 없었으므로, 나는 혼자서 비행기를 고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내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마실 물도 겨우 일주일 치만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사람 사는 곳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사막에서 혼자 잠이 들었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로운 신세였다. 그런데 해가 뜰 무렵에 이상한 작은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아저씨, 양 한 마리만 그려 주세요.” “응?”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이상하게 생긴 한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아이 같지 않았다.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고,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러자 그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아저씨, 양 한 마리만 그려 주세요.” 사막 한가운데에서 참 엉뚱한 짓이라고 느끼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과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려.” “괜찮아요, 양 한 마리만 그려 주세요.” 나는 여태껏 양은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릴 줄 아는 두 가지 그림 중에서 하나를 그려 보았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 그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말고, 양 한 마리를 그려 주세요.” 나는 하는 수 없이 양을 그렸다. “이 양은 병들었어요. 아프지 않은 양을 그려 주세요.” 나는 또 그렸다. “이건 뿔이 있으니까 염소잖아요.” 그래서 나는 또다시 한 마리를 그렸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무 늙었어요. 나는 오래 살 수 있는 양을 갖고 싶어요.” 나는 서둘러 비행기를 고쳐야 했기에, 상자 하나를 아무렇게나 그리고는 한마디 툭 던졌다. “그 상자 속에 네가 원하는 양이 들어 있어.”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아, 신난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그림이에요. 이 양에게 풀을 많이 주어야 할까요?” “왜?”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거든요.” “아주 작은 양이라 풀을 조금 밖에 안 먹을 거야.” “그다지 작지도 않은걸. 와, 양이 잠들었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나는 어린 왕자가 우연히 하는 말을 듣고서 차츰차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어린 왕자는 내 비행기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이 물건은 뭐예요?” “이건 비행기야. 하늘을 날아다니지. 나는 이걸 타고 오다가 여기로 떨어졌어.” “아저씨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요? 이야, 참 재미있었겠다!” 어린 왕자가 까르르 웃어 나는 기분이 좀 나빴다. 내 불행을 조금이라도 걱정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럼 아저씨도 하늘에서 왔네요. 그러나 어린 왕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내 비행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저걸 타고 멀리서 오지는 못했을 거야.” 그러고는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주머니에서 내가 그려 준 양 그림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혼잣말을 했다. “아저씨가 준 상자가 양의 집이 될 테니까 다행이야.” “그렇고말고. 네가 내 질문에 답을 해 주면, 양을 매어 놓을 수 있는 고삐와 말뚝도 그려 줄게.” 그러자 어린 왕자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양을 매어 놓다니! 왜요?” “양을 매어 놓지 않으면 아무 데나 가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랬더니 어린 왕자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으며 물었다. “양이 어디로 가요?” “어디로든지 곧장 앞으로.” 그러자 어린 왕자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으니까!” 그러고는 조금 서글픈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앞으로 곧장 가도 멀리 갈 수가 없어요.” 나는 이렇게 해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집 한 채만 한 정도로 아주 작은 별이었다. 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우주에는 지구, 목성, 화성, 금성과 같이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큰 별도 있고, 아직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 이름이 없는 아주 작은 별들도 있다. 천문학자가 그런 별을 발견하면 이름 대신 번호를 매긴다. 이를테면 ‘소행성 3251호’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어린 왕자가 ‘소행성 B612호’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 행성은 1909년에 터키의 한 천문학자가 딱 한 번 망원경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터키의 천문학자는 ‘국제 천문학회’에서 자신이 작은 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너무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서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른들은 늘 그런 식이다. 때마침, 터키의 한 독재자가 국민에게 양복을 입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터키의 천문학자도 양복을 입었다. 1920년에 그 천문학자는 멋진 양복을 차려입고 다시 학회에서 자신이 발견한 작은 별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두 그의 말을 믿었다. 내가 소행성 B612호에 관해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번호까지 일러 주는 것은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이렇게 말하는 일은 절대 없다. 나이가 몇 살이지? 아마도 어른들은 분명히 어깨를 으쓱하며,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어린 왕자는 소행성 B612호에서 왔어요.” 이렇게 말하면 어른들은 바로 알아듣고, 더는 여러 가지를 물으며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동화처럼 시작하고 싶었다. “옛날 옛적 집채만 한 작은 별에 어린 왕자가 살았어요. 어린 왕자는 친구를 사귀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다면 어른들은 이 이야기를 아주 가볍게 읽고 곧 잊어버릴 것이다. 나는 이 추억을 이야기할 때마다 슬프다. 여섯 해 전, 내 친구 어린 왕자는 내가 그려 준 양과 함께 떠났다. 내가 여기서 어린 왕자의 모습을 그리려고 애쓰는 것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친구를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니까. 누구나 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내가 어린 왕자를 잊는다면 나도 숫자밖에 모르는 어른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내가 그림물감과 연필을 산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여섯 살 적에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보아뱀 외에는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나이에 다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어린 왕자를 닮게 그려 보려고 노력은 하겠다. 하지만 꼭 성공하리라는 자신은 없다. 어린 왕자의 키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으니 크게 그릴 수도 있고, 작게 그릴 수도 있다. 어린 왕자의 옷차림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더듬더듬 그려 보겠다. 어떤 부분은 잘못 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상자 속에 든 양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다. 나도 나이가 들어 다른 어른들과 비슷해진 모양이다. 무서운 바오바브나무. 어린 왕자와 함께 사막에서 지낸 지 사흘째 되는 날, 바오바브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어린 왕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사실이에요?” “그럼, 사실이지.” “아, 잘됐네요!”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왜 그리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왕자는 말을 이었다. “그럼, 바오바브나무도 먹겠네요!” 나는 어린 왕자에게 바오바브나무는 아주 큰 나무라 코끼리 떼라도 다 먹어 치우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코끼리 떼라는 말에 어린 왕자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코끼리들을 차곡차곡 포개 놓아야겠어요!” 어린 왕자는 재치 있게 말하고 다시 진지해졌다. 나는 어린 왕자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어린 왕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수수께끼를 푸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는 바오바브나무 씨앗이 가득했다. 그런데 바오바브나무의 싹을 뽑지 않고 그냥 두면, 금세 자라서 뿌리가 어린 왕자의 별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어린 왕자의 별은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난 다음, 정성껏 별을 돌보았어요. 바오바브나무는 보이는 대로 뽑아야 했지요. 귀찮은 일이지만, 아주 쉬운 일이기도 했어요. 어느 날, 어린 왕자는 지구에 사는 어린이들이 꼭 이해할 수 있도록 바오바브나무의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언젠가 어린이들이 여행하게 된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이 때로는 괜찮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바오바브나무의 경우에는 큰일이 벌어져요. 어느 별의 게으름뱅이는 작은 바오바브나무 세 그루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그만. 나는 어린 왕자가 이야기해 준 대로 게으름뱅이의 별을 그림으로 그려 두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 이렇게 적었다. “어린이들아, 바오바브나무를 조심해!” 어린 왕자의 꽃. 어린 왕자의 쓸쓸하고 소박한 생활을 조금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에게 즐거운 일은 해가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일뿐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해가 지는 풍경을 좋아해요. 우리 해가 지는 걸 보러 가요. “아직 좀 더 기다려야지.” “뭘 기다려요?” “해가 지길 기다려야지.” 어린 왕자는 좀 놀라더니, 곧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난 여기가 내 별인 줄 알았어요.” 어린 왕자의 작은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러 놓기만 하면 언제든 해가 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본 적도 있어요!” 조금 있다가 어린 왕자는 말을 이었다. “난 아주 쓸쓸할 때는 해가 지는 걸 보고 싶어져요.” “그럼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 본 날은 아주 쓸쓸한 날이었겠구나?”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이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양 덕분에 어린 왕자의 비밀을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는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양은 작은 나무를 먹으니까, 꽃도 먹겠지요?” “그럼, 양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지.” 나는 그때 비행기를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마실 물도 바닥이 드러나고 있어서 빨리 비행기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무척 걱정되던 참이었다. “가시는 왜 있는 거죠?” 나는 비행기를 고치느라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렸다. 잠시 잠자코 있던 어린 왕자가 화가 난 듯 말했다. 아니에요, 꽃은 약하고 순진해요. 꽃은 가시로 자신을 보호하는 거예요. 나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온통 비행기를 고치는 생각뿐이었다. 난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 “중요한 일?” 어린 왕자는 더 큰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시커먼 기름 범벅인 손에 망치를 들고, 비행기 위에 엎드려 있는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다른 어른들처럼 말하고 있네요.” 그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어린 왕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어느 별에 사는 붉은 얼굴의 신사를 알고 있어요. 그는 꽃향기라고는 맡아 본 적이 없어요. 별을 바라본 적도 없고요. 사랑해 본 적도 없고, 오로지 계산만 하면서 살았지요. 그리고 아저씨처럼 늘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했어요. 어린 왕자는 화가 잔뜩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백만 년 전부터 꽃은 가시를 만들어 왔어요. 양들도 수백만 년 전부터 꽃을 먹어 왔고요. 그런데도 꽃이 왜 그리 힘들게 가시를 만들어 왔는지 알아보려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건 붉은 얼굴의 신사가 하는 계산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에요. 내 별에만 있는 꽃 한 송이를 어느 날 양이 무심코 먹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중요하지 않다고요? 어린 왕자는 얼굴을 붉히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꽃을 사랑하는 누군가는 수백만 개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예요. 마음속으로 ‘저기 어딘가에 내 꽃이 있겠지.’ 하고 생각할 테니까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양이 그 꽃을 먹어 버린다면, 그에게는 별들이 모두 빛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어린 왕자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연장들을 내려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망치도 볼트도 목마름도 죽음도 모두 우습게 여겨졌다. 나의 별, 이 지구에 내가 위로해 주어야 할 어린 왕자가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를 두 팔로 꼭 안고 흔들어 주면서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꽃은 괜찮을 거야. 양이 꽃을 먹지 못하도록 입마개를 그려 줄게. 또 네 꽃에는 울타리를 그려 주고.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이 무척 서툴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어린 왕자의 마음을 달래고, 그에게 감동을 주며, 그와 한마음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투덜이 꽃. 나는 어린 왕자의 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의 별에는 꽃잎이 한 겹뿐인 아주 소박한 꽃들이 있었다. 그 꽃들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았고,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 꽃들은 어느 날 아침, 풀들 사이에 나타났다가 저녁이면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씨앗에서 새로운 싹이 텄다. 어린 왕자는 다른 싹들과 닮지 않은 그 싹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새로운 종류의 바오바브나무일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그 꽃은 무척 멋을 부리는 꽃이었다. 그 신비로운 몸단장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날 아침, 해가 뜰 무렵 드디어 꽃이 활짝 피었다. 아름다운 꽃이었다. 꽃은 하품하며 말했다. “아, 이제 겨우 잠이 깼어요. 그래서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 있네요.” 어린 왕자는 꽃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렇죠? 난 해와 함께 태어났으니까요.” 꽃은 살며시 대답했다. 꽃은 늘 까탈을 부리며 어린 왕자를 괴롭혔다. 어느 날은 자기가 가진 네 개의 가시를 보이면서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호랑이들이 발톱을 세우고 와도 안 무서워요!” “난 풀이 아니에요.” “아, 미안해요.” “난 호랑이는 조금도 무섭지 않지만, 바람은 싫어요. 바람막이 좀 가져다주세요.” ‘바람이 싫다니. 이 꽃은 너무 까다로운 것 같아.’ 어린 왕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밤에는 유리 덮개를 씌워 주세요. 꽃은 처음에 씨앗으로 어린 왕자의 별에 왔으니까, 전에 살던 곳 따위가 있을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려다 들킨 꽃은 자기 잘못을 어린 왕자 탓으로 돌리려는 듯 두세 번 헛기침해 댔다. “바람막이를 가져다 달라고 했잖아요.” “찾아보려고 했는데 당신이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꽃은 일부러 더 심하게 기침했다. 어린 왕자는 꽃을 사랑했지만, 꽃이 무심코 하는 말들에 상처받았고 점점 지쳐 갔다. 어느 날, 어린 왕자는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꽃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냥 바라보고 향기만 맡으면 되는 거였어요. 꽃은 내 별을 향기로 가득 채워 주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즐길 줄 몰랐어요. 꽃의 말보다는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어요. 꽃은 내게 향기를 주고, 내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어요. 꽃에서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거짓말 뒤에 사랑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어요. 꽃은 속마음과는 다른 말을 무척 잘하니까요. 그때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할 줄 몰랐던 거예요. 별을 떠나던 날 아침, 어린 왕자는 별을 잘 정리해 놓았다. 우선 불을 뿜는 활화산 두 개를 정성스레 청소했다. 두 개의 활화산은 아침 식사를 끓일 때 아주 편리했다. 그의 별에는 불이 꺼져 있는 휴화산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불 꺼진 휴화산도 청소해 놓았다. 화산들은 청소만 잘하면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불을 뿜는다. 지구의 화산은 너무 커서 청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산 때문에 많은 재난을 겪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조금 서글픈 기분으로 바오바브나무의 싹들도 뽑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늘 해 오던 그 모든 일이 그날 아침에는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꽃에 물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우려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잘 있어요.” 어린 왕자는 꽃에 말했다. 그러나 꽃은 대답하지 않고 기침만 해 댔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다정하게 말했다. 그동안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지요? 용서해 주세요. 꼭 행복해야 해요. 어린 왕자는 유리 덮개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꽃이 갑자기 다정하게 말해서 놀랐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밤의 서늘한 공기는 내게 이로울 거예요. 나는 꽃이니까.” “하지만 벌레들이 오면.” 나비를 만나려면 두세 마리의 애벌레쯤은 참아야지요. 나비는 꽃향기를 좋아한댔으니 나를 찾아와 줄 거예요. 당신은 멀리 떠날 테고. 커다란 짐승들은 두렵지 않아요. 나도 발톱이 있으니까! 꽃은 네 개의 가시를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 서 있지 말고 어서 가요!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면 빨리 떠나라고요. 꽃은 자기가 우는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자존심이 센 꽃이었다. 첫 번째 별. 어린 왕자의 별 가까이에는 소행성 325호, 326호, 327호, 328호, 329호, 330호가 있었다. 어린 왕자는 할 일도 찾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그 별들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별에는 왕이 살고 있었다. 왕은 붉은 천과 흰 담비 모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어린 왕자를 보고 왕이 소리쳤다. “아! 신하가 한 명 왔구나!”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나를 신하라고 하는 걸까?’ 어린 왕자는 왕이 무척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리 이상한 것도 없는 일이었다. 왕은 모든 사람을 다 신하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왕은 왕 노릇을 하게 되어 기분이 한껏 우쭐해져 말했다. “내가 너를 좀 더 잘 볼 수 있게 가까이 오라.” 어린 왕자는 앉을 자리를 찾았으나, 그 별은 온통 왕의 호화스러운 망토로 뒤덮여 있었다. “하암!” 어린 왕자는 피곤해서 하품했다. 그러자 왕은 화를 내며 말했다. “왕 앞에서 하품하다니 무례하다! 하품을 금하노라!” “하지만 저는 하품을 참을 수가 없어요. 오랫동안 여행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그렇다면 하품하도록 하라. 자! 또 하품하라. 명령이니라!” 어린 왕자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겁이 나서 하품이 나오지 않아요.” “어험! 어험! 그렇다면 짐이 명하니, 어떤 때는 하품을 하고 또 어떤 때는.” 왕은 화가 난 듯 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왕은 누구나 자기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왕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앉아도 될까요?” “너에게 앉는 것을 허락하노라.” 왕은 손을 들어 자기 별과 다른 떠돌이별을 가리켰다. 그는 그 별뿐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럼 별들도 폐하의 명령을 따르나요?” “물론이지. 별들은 언제나 내 명령을 따르지. 난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왕이 부러웠다.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의자를 뒤로 물리지 않고도 언제든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부탁했다. “저는 지금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어요. 해가 지도록 명령해 주세요.” “만일 내가 어떤 장군에게 나비처럼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닐 것을 명령하거나, 희곡을 한 편 쓰라고 명령하거나 물새로 변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장군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의 잘못일까?” “그야 폐하의 잘못이죠.” 어린 왕자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명령을 내릴 때는 반드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켜야 하는 법이다. 내가 누구에게든 내 명령을 따르도록 요구할 수 있는 건, 내 명령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해가 지는 것을 보게 해 달라는 제 부탁은요?” “나는 너에게 해가 지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언제 조건이 갖춰지나요?” 왕은 커다란 달력을 찾아보고 나서 대답했다. “에헴, 에헴! 오늘 저녁 7시 40분쯤이 되겠구나.” 어린 왕자는 지금 당장 해가 지는 것을 못 보게 되어 섭섭했다. 그리고 이 별에 싫증이 났다. 저는 여기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군요. 이제 그만 떠나야겠어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떠나지 말아라! 너를 법무 대신으로 삼겠노라!” 신하가 생긴 것이 무척 기뻤던 왕은 어린 왕자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재판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요!” 그럼 너 자신을 재판하도록 하라. 다른 사람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재판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법이거든. 너 자신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다면, 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니라. 저는 어디서라도 저를 재판할 수 있어요. 어린 왕자는 늙은 왕을 섭섭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폐하, 제가 따를 수 있는 명령을 내려 주세요. 이를테면 저에게 지금 당장 이 별을 떠나라고 명령을 내려 보세요.” 하지만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 길을 떠났다. 그때 왕이 매우 황급히 외쳤다. “너를 이 별의 대사로 명하노라!” 어린 왕자는 별을 떠나면서 생각했다. ‘어른들이란 참 이상해!’ 두 번째 별. 두 번째 별에는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야호! 저기 나를 칭찬하러 누군가가 오고 있군!” 어린 왕자를 보자마자 허영심 많은 사람은 매우 좋아했다. 허영심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칭찬한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는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네요.”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를 보낼 때 답례하기 위해서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어린 왕자는 허영심 많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뼉을 쳐 보렴.” 어린 왕자가 손뼉을 치자, 허영심 많은 사람은 모자를 벗어 점잖게 인사를 했다. ‘왕을 만났을 때보다 더 재미있는걸.’ 어린 왕자가 다시 손뼉을 치자, 허영심 많은 사람은 또 모자를 들어 인사를 했다. 몇 번을 되풀이하고 나니, 어린 왕자는 더는 재미가 없었다. “모자를 바닥에 떨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러나 허영심 많은 사람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허영심 많은 사람에게는 오로지 자기를 칭찬하는 말만 들리는 법이었다. “너는 정말로 나를 칭찬하고 있지?” 허영심 많은 사람이 어린 왕자에게 물었다. “칭찬한다는 게 뭐죠?” “칭찬한다는 건 내가 이 별에서 가장 잘생기고, 가장 똑똑하다고 인정해 주는 거지.” “하지만 이 별엔 아저씨만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기쁘게 해 줘! 나를 칭찬해 줘!”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 세 번째 별. 다음 별에는 술꾼이 살고 있었다. 술꾼은 짧게 만났지만, 어린 왕자는 몹시 우울해졌다. “거기서 뭘 하세요?” 빈 병과 술이 가득 찬 병을 잔뜩 앞에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어린 왕자가 물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술꾼은 대답했다. “술을 마시지.” “왜 술을 마셔요?” “잊기 위해서지.” 어린 왕자는 술꾼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무엇을 잊기 위해서예요?”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지.” 그를 돕고 싶은 어린 왕자가 다시 캐물었다. “뭐가 부끄럽다는 거예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이렇게 말하고 술꾼은 입을 다물었다. 어린 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별을 떠났다. ‘어른들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네 번째 별.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어찌나 바쁜지 어린 왕자가 다가가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3에다 2를 더하면 5, 5에 7을 더하면 12, 12에 3을 더하면 15, 15에 17을 더하면. 그러니까 모두 5억 162만 2,731개가 되는구나.” 너무 바빠서 말이야.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거든. 허튼소리를 할 시간이 없어! “도대체 무엇이 5억 100만이라는 거예요?” 사업가는 어린 왕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는 일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에 보이는 작은 것들 말이야.” “그런데 아저씨는 그 별들을 가지고 뭘 해요?” “그것들을 관리하지. 세어 보고 또 세어 보지. 그건 힘든 일이지만 나는 성실한 사람이거든!” 어린 왕자는 그 대답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목도리가 있으면 목에다 두르고 다닐 수가 있어요. 또 꽃이 있으면 꽃을 꺾어서 들고 다닐 수도 있어요. “조그만 종이에다 내 별의 개수를 적어 그것을 서랍에 넣고 잠가 둔다는 뜻이란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군.’ 어린 왕자는 중요한 일에 대해 어른들과 아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별에는 꽃 한 송이가 있는데, 날마다 물을 주어요. 화산도 세 개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해 주죠. 휴화산까지도 청소해요.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거든요.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나는 나의 ‘바치는 글’을 이렇게 고친다. “어린 시절의 레옹 베르타에게” 무슨 그림일까? 여섯 살 무렵,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라는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아주 놀라운 그림을 보았다. 다섯 번째 별. 다섯 번째 별은 참 흥미로운 별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별 중에서 가장 작은 별이었다. 그 별은 가로등 하나와 가로등 지기가 있을 자리밖에 없었다. 집도 없고 사람도 살지 않는 별에 가로등과 가로등 지기가 왜 필요한지 어린 왕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왕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인지 몰라. 그래도 왕이나 허영심 많은 사람이나 술꾼이나 사업가보다는 나을 거야. 적어도 그가 하는 일은 의미가 있으니까. 가로등을 켜면 별 한 개나 꽃 한 송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고, 가로등을 끄면 별이나 꽃을 잠들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참 멋진 일이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나는 나의 ‘바치는 글’을 이렇게 고친다. “어린 시절의 레옹 베르타에게” 무슨 그림일까? 여섯 살 무렵,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라는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아주 놀라운 그림을 보았다. 그때는 아침에 불을 끄고 저녁이면 다시 켰었어. 그래서 낮에는 쉴 수 있었지.” “명령이 바뀐 건가요?” 명령이 바뀌지 않으니까 문제야! 이 별은 해가 갈수록 점점 빨리 도는데, 명령은 그대로거든. 지금, 이 별은 일 분에 한 바퀴씩 돌아서 삼십 초마다 낮과 밤이 바뀐단다. 그래서 난 일 분마다 한 번씩 가로등을 껐다 켰다 해야 해. 어린 왕자는 가로등 지기를 바라보았다.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그가 좋아졌다. 문득 의자를 뒤로 물리면서 해 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던 지난 일이 떠올랐다. 어린 왕자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아저씨는 쉬고 싶지 않으세요?” “나야 언제나 쉬고 싶지.” 사람은 누구나 성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게으름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쉬고 싶을 때 쉴 방법이 있어요. 아저씨의 별은 아주 작으니까 세 발짝만 움직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쉬고 싶으면 계속 걸어요. 그러면 낮이나 밤이 바뀌지 않고 계속될 테니까요.” “그건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겠는걸. 내가 하고 싶은 건 잠을 자는 거니까.” “참 안됐군요.” “안녕, 또 켤 때가 된 것 같아!” 그는 가로등을 켰다. 다시 길을 떠나며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가로등 지기는 참 훌륭해. 다른 이들을 위해 힘든 일을 하니까. 어린 왕자는 아쉬워서 이런 생각도 했다. 저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나 그의 별은 너무 작아서 둘이 설 자리가 없는걸. 어린 왕자가 더욱 그 별을 잊지 못하는 것은 하루에 1,440번이나 해가 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차마 스스로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여섯 번째 별. 여섯 번째 별은 지금까지 본 별 가운데 가장 큰 별이었다. 그 별에는 매우 큰 책을 보고 있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우아, 정말 멋진 직업이에요!” 어린 왕자는 지리학자의 별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태껏 그렇게 멋진 별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별은 참 아름다워요. 혹시 넓은 바다도 있나요?” “나야 알 수 없지.” 지리학자가 말했다. 그 말에 어린 왕자는 조금 실망하며 다시 물었다. “그래요? 그러면 산은요?” “몰라.” “그러면 강이나 사막은요?” “그것도 알 수 없어.” “할아버지는 지리학자라면서요?” 그렇지! 하지만 난 탐험가가 아니거든. 강이나 산, 바다, 사막이 어디 있는지는 탐험가가 알아 오는 거야. 지리학자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해서 한가로이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대신 책상에 앉아서 탐험가들이 알아 온 것을 듣고 그것을 책에 적지.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게 있으면, 지리학자는 그 탐험가가 정직한 사람인지 조사하기도 해. “그건 왜요?” 탐험가가 거짓말을 하면 지리책이 엉터리가 될 테니까. 또 탐험가가 술꾼인지 아닌지도 조사한단다. “그건 또 왜요?”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은 눈이 빙빙 돌아 모든 게 둘로 보이거든. 그런 사람의 말을 믿게 되면, 지리학자는 실제로는 산이 하나인데 둘이라고 기록할지도 모르잖아.” 어린 왕자는 지리학자가 하는 일이 생각과 달라 조금 실망했다. 그런데 지리학자가 갑자기 어린 왕자에게 소리쳤다. “참! 너도 탐험가잖아! 너의 별에 관해 이야기해 봐!” 그러더니 지리학자는 공책을 펴고 연필을 깎았다. 아, 저의 별은 별로 흥미로운 게 없는데요. 바닷물이 말라 버리는 일은 더욱 드물고.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적어 놓는단다. “그런데 한순간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어린 왕자는 또다시 물었다. “그건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럼 내 꽃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야 물론이지.” ‘아, 내 꽃은 사라질 수도 있는데. 세상에 맞설 무기라고는 네 개의 가시밖에 없는 꽃을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나오다니.’ 어린 왕자는 갑자기 후회되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지리학자에게 물었다. "어느 별을 여행하면 좋을까요?” 지구라는 별로 가 봐. 소문난 별이거든. 그리하여 어린 왕자는 홀로 남겨 둔 꽃을 걱정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일곱 번째 별, 지구. 일곱 번째 별은 지구였다. 지구는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 별이 아니었다. 지구에는 111명의 왕과 7,000명의 지리학자와 90만 명의 사업가, 750만 명의 술꾼, 3억 1,100만 명의 허영심 많은 사람 등 약 20억 명 정도의 어른들이 살고 있었다. 전기를 발명하기 전까지는 여섯 대륙에 가로등 지기가 46만 2,511명 있었다는 말만 들어도 지구가 얼마나 큰 별인지 짐작할 것이다. 사실 지구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땅은 그다지 넓지 않다. 지구에 사는 20억 명의 사람이 모여 바싹 붙어 선다면, 가로 32킬로미터, 세로 32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광장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의 아주 작은 섬에 모두 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른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에게 계산해 보라고 하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지구에 들어섰을 때, 주위의 사람이라고는 통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랐다. 혹시 다른 별로 잘못 온 게 아닌가 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바로 그때 둥근 달빛 고리가 모래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노란 뱀이었다. 어린 왕자는 노란 뱀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린 왕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라도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갈 수 있게 별들이 저렇게 빛나는 걸까? 내 별을 봐. 노란 뱀이 물었다. 꽃과 나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사막은 좀 외로운 것 같아. “사람들 틈에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너는 아주 재미있게 생겼네. 손가락처럼 가느다랗고. 발이 없어서 여행도 못 갈 테고. “난 배보다도 더 멀리 너를 데려다줄 수 있어.” 노란 뱀은 어린 왕자의 발목을 둥글게 감고 말을 이었다. “아, 가여워라! 약한 몸으로 혼자 이 거친 지구에 오다니! 네 별이 그리워지면 언제든 내가 도와줄게.” 어린 왕자는 노란 뱀과 헤어져 혼자 사막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사막 한가운데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보았다. 꽃잎이 석 장 달린 보잘것없는 꽃이었다. 어린 왕자는 꽃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니?" 그 꽃은 언젠가 상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라고? 몇 해 전에 한 예닐곱 명쯤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사람들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거든. 어린 왕자는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지금껏 무릎에 닿는 세 개의 화산만 알고 있었다. 불 꺼진 휴화산은 야트막해서 의자 대신 쓰곤 했었다. 산을 오르며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이렇게 높은 산에 오르면,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산꼭대기에 오르니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만 보일 뿐이었다. 어린 왕자는 혹시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메아리가 대답했다. “넌 누구니?”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넌 누구니. 넌 누구니. 넌 누구니.” 메아리가 또 대답했다. “친구가 되어 줘. 난 외로워.” “난 외로워. 난 외로워. 난 외로워…” 메아리가 다시 대답했다.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참 이상한 별이야. 남이 하는 말만 따라 하고. 내 별의 꽃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여우와의 만남. 어린 왕자는 산에서 내려와 한참을 걷다가 드디어 길을 찾아냈다. 어린 왕자는 무척 기뻤다. 길이란 모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니까. 어린 왕자의 꽃과 쏙 빼닮은 꽃들이었다. 깜짝 놀란 어린 왕자가 물었다. “너희는 누구니?” “우리는 장미꽃이야.” 어린 왕자는 갑자기 자신이 아주 불행하게 여겨졌다. 어린 왕자의 꽃이 말하길, 자기처럼 예쁜 꽃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정원에는 비슷한 꽃이 5,000송이나 있었다. 나의 꽃이 이걸 본다면 무척 슬퍼할 거야. 아마 창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심하게 기침을 해 댈지 몰라. 그럼 난 꽃을 돌보아야겠지? 슬픔에 빠져 정말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내 별에는 무릎까지 오는 화산 세 개와 평범한 꽃 한 송이밖에 없어. 고작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줄 알았다니. 어린 왕자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여우가 나타나 인사했다. “안녕.” 어린 왕자가 뒤돌아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 여기 있어, 사과나무 아래에.” “여우야, 이리 와서 나랑 놀아 줘. 난 지금 몹시 슬퍼.” 어린 왕자가 부탁했다. 하지만 여우는 고개를 저었다. “난 너랑 놀 수 없어. 나를 길들이지 않았으니까.” “아, 미안해. 그런데 ‘길들인다.’라는 게 뭐야?” “넌 여기 사는 아이가 아니구나. 뭘 찾으러 왔니?” 사람들을 찾고 있어. 그건 참 무서운 일이야. 그들은 닭을 기르기도 해. 너도 닭을 찾고 있니?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지구에는 온갖 것들이 다 있으니까.” “아, 아니야. 그건 지구에 있는 게 아니야. “그럼 다른 별에 있다는 거야?” “그래.” “그 별엔 사냥꾼들이 있니?” “아니, 없어.” “그거 좋은데! 그럼 닭은?” “없어.” 여우는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내 생활은 무척 단순해.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늘 나를 쫓지. 그래서 난 좀 심심해. 그리고 황금빛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아서 밀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런데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저 밀밭이 아주 근사하게 보일 거야. 밀의 황금빛이 너를 생각나게 할 테니까. 여우는 오랫동안 어린 왕자를 쳐다보았다. “부탁이야. 나를 길들여 줘.” 다음 날, 어린 왕자는 다시 그곳으로 갔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에 가까워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그리하여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가 떠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가 말했다. “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난 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여우 네가 길들여 주기를 원했잖아. “그건 그래.”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그것 봐. 길들여서 좋을 게 없어.” 어린 왕자의 말에 여우가 대답했다. 아니야, 좋은 것도 있어. 밀밭의 황금빛을 좋아하게 되었잖아. 정원으로 가서 장미꽃들을 보고 오렴. 너의 꽃이 이 세상의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오면, 너에게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줄게. 어린 왕자는 장미꽃들을 보러 정원으로 갔다. 너희는 내 별의 꽃이랑은 달라. 너희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되뇌었다. “너의 장미꽃이 왜 소중한 줄 아니? 그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꽃을 위해 바친 너의 시간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으니까. 네 장미꽃은 네가 책임져야 해. “맞아, 나는 내 장미꽃을 책임져야 해.” 어린 왕자는 여우의 말을 여러 번 웅얼거렸다. 아이들만 유리창에 코를 대고 밖을 내다보고 있지. 아이들은 자신들이 찾는 게 뭔지 알고 있어요. 아이들은 인형 하나를 찾느라 두 시간을 버리기도 해요. 인형은 아이들에게 아주 소중하니까요. 그래서 인형을 빼앗으면 우는 거예요. “아이들은 그래서 행복해.” 어린 왕자는 시장에서 약장수를 만났다. 그는 목마름을 없애 주는 알약을 팔았다. 약 한 알을 먹으면, 일주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다. 사막에서 비행기 고장을 일으킨 지 여덟째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 한 방울 남은 물을 마시며 약장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네 이야기는 참 아름답구나. 하지만 난 아직도 비행기를 고치지 못했어. 이제 마실 물도 없고, 우물가로 천천히 걸어갈 수만 있다면 나도 행복하겠다.” “내 친구 여우는.” 어린 왕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죽게 된다 해도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나는 여우 친구가 생긴 게 기뻐요.” “나도 목이 말라요. 우물을 찾으러 가요.” “사막 한가운데서 우물을 찾자고?” 나는 소용이 없다는 몸짓을 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이미 걸어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따라 걸었다.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밤하늘에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목마름 때문인지 마치 그 별들을 꿈속에서 보는 듯했다. 어린 왕자에게 물었다. 나는 어린 왕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잠자코 있었다. 나도, 어린 왕자도 지쳤다. 어린 왕자가 땅에 주저앉았다. 나도 어린 왕자의 곁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어린 왕자가 입을 열었다. “별들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가만히 달빛 아래 펼쳐진 모래 언덕을 바라보았다. “사막은 참 아름다워요.” 어린 왕자가 덧붙여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막을 좋아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나는 오래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찾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보물로 인해 그 낡은 집은 신비로움이 넘쳤다. 그 깊숙한 곳에 비밀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아저씨가 나의 여우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어서 기뻐요.” 그렇게 말하더니 어린 왕자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그를 업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부서지기 쉬운 어떤 보물을 업고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숨이 차올라서 어린 왕자를 잠시 내려놓았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잠든 어린 왕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잠든 어린 왕자가 나에게 이렇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장미꽃 한 송이에 대한 간절한 마음 때문일 거야. 잠들어 있을 때도 장미꽃이 그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어. 어린 왕자의 모습은 더욱 여리게 보였다. 그의 마음속 등불을 잘 지켜 주어야 해. 한 줄기 바람에도 쉽게 꺼질 수 있으니까. 나는 어린 왕자를 다시 등에 업고 걸어가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우물을 발견했다. 우리가 찾아낸 우물은 사막에 있는 우물과는 달랐다. 사막의 우물은 그저 모래에 파 놓은 구멍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우물은 마치 마을에 있는 우물 같았다. 그러나 마을이라곤 없었으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 모든 게 갖춰져 있잖아. 도르래, 두레박 그리고 밧줄.” 어린 왕자는 웃으며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도르래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잠든 우물을 깨웠나 봐요. 우물이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요.” 어린 왕자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어린 왕자에게 힘든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게. 너에게는 너무 무거울 거야.” 나는 천천히 두레박을 우물 위까지 들어 올렸다. 내 귀에는 아직도 도르래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눈에는 물속에서 햇살이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난 이 물을 마시고 싶었어요. 물 좀 주세요.” 나는 두레박을 기울여 어린 왕자의 입에 대 주었다. 어린 왕자는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 그 물은 우리가 마시던 보통의 물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처럼, 사람들의 부드러운 미소처럼 빛나는 물이었다. “아저씨 별의 사람들은 한 정원에 장미꽃을 5,000송이나 가꾸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해요. 우리는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도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데.” “물론이지.” “그러니까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요. 마음으로 찾아야 하는 거예요.” 나는 물을 마셨다. 한결 살 것 같았다. “아저씨, 약속을 지켜 주세요.” 어린 왕자가 내 곁에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약속?” “약속했잖아요. 내 양에게 씌울 입마개 말이에요. 난 그 꽃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나는 끄적거려 두었던 그림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여우는 귀가 뿔 같고, 너무 기다랗고.” “너무하는구나. 나는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는 보아뱀밖에 못 그린다고 했잖아.” “아, 괜찮아요. 아이들은 다 알아볼 테니까요." 그래서 나는 연필로 입마개를 그렸다. 그림을 어린 왕자에게 주는데 가슴이 아파졌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그러나 어린 왕자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지구에 온 지 내일이면 꼭 일 년이에요. 바로 이 근처에 떨어졌어요.” 나는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럼 내가 너를 만난 날 아침, 여기 네가 혼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구나. 떨어진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니?” 어린 왕자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일 년이 되는 날 꼭 돌아가야 하는 거니?” 어린 왕자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으나,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아 그렇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저씨는 이제 일을 해야지요. 어서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세요. 난 여기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일 저녁에 다시 오세요. 나는 두려웠다. 어린 왕자가 들려준 이야기 속 여우가 생각났다. 누군가에게 길들면 울게 될 일이 생긴다는. 다음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린 왕자는 우물 옆 돌담 위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린 왕자는 우물 옆 돌담 위에 앉아 있었다. 어린 왕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아니야!” 나는 어린 왕자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날짜는 맞지만,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어린 왕자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모래 위의 내 발자국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보고, 오늘 밤 그곳에서 기다려.” 나는 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독은 확실한 거지? 오랫동안 날 아프게 하지는 않을 거지?”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비로소 담 밑을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는 독을 가진 노란 뱀이 어린 왕자를 향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권총을 꺼내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며 달려갔다. 그러자 노란 뱀은 모래 속으로 스르르 몸을 감추었다. 나는 담 밑에 이르러 어린 왕자를 품에 꼭 안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뱀과 이야기를 하네.” 어린 왕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아저씨가 고장 난 비행기를 고치게 되어서 기뻐요. 아저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린 왕자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오늘 내 별로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너무 멀고. 너무 힘들어요.” 어린 왕자는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겐 아저씨가 준 양이 있어요. 그리고 그 양을 위한 상자도 있고, 입마개도 있고.” 어린 왕자는 쓸쓸하게 웃으며 몸을 떨었다. “얘야, 무서웠지?” 어린 왕자는 무서웠다. 나는 그를 아기처럼 품에 꼭 껴안고 일어났다. “오늘 저녁엔 더 무서울 거예요.” 나는 어린 왕자의 웃음소리를 영영 듣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 웃음은 내게 사막에 있는 우물 같은 것이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요. 꽃도 마찬가지예요. 아저씨가 어느 별의 꽃 한 송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밤하늘을 바라보는 게 즐거울 거예요. 어느 별에나 꽃은 필 테니까요. 물도 마찬가지예요. 아저씨가 내게 마시라고 준 물은 음악 같았어요. 도르래와 밧줄 때문이에요. 생각나죠? 물맛이 참 좋았어요. “그래, 정말 맛있었어.” 나는 너무 슬퍼서 목이 메었다. 내가 보고 싶으면 밤마다 별을 바라보세요.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알려 줄 수도 없어요. 오히려 잘됐어요. 그래야 아저씨가 어떤 별을 바라보든 즐거울 테니까요. 참, 아저씨에게 선물을 줄게요. “선물?” 어린 왕자는 다시 웃었다. “아, 난 네 웃음소리가 정말 좋구나.” “이게 바로 내 선물이에요.” “무슨 뜻이지?” 누구나 별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같은 의미는 아니에요. 별은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길잡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그만 빛일 뿐이에요. 또 학자에게는 연구 대상이고, 사업가에게는 금과 같은 거예요. 아저씨는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될 거예요. 아저씨가 밤하늘을 바라볼 때 그 별 중 하나에 내가 살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별 중 하나에서 내가 웃고 있을 테니 아저씨가 밤하늘을 바라보면, 모든 별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는 웃는 별들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린 왕자는 또 웃었다. 시간이 지나 슬픔이 가시게 되면, 아저씨는 나를 알게 된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게 될 거예요.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내 친구로 남아 있을 거고, 나와 함께 웃고 싶어질 거예요. 그리고 괜히 창문을 열게 되겠지요. 아저씨가 밤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면, 사람들은 아저씨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럼 내가 아저씨에게 짓궂은 장난을 친 게 되겠네요. 어린 왕자는 또 웃더니 이번에는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오늘 밤엔 오지 마세요.” 어린 왕자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노란 뱀 때문이에요. 노란 뱀이 아저씨를 물면 안 되니까요. 그 뱀은 괜히 장난삼아 물기도 해요. 그러다가 어린 왕자는 다소 마음이 놓이는지 말을 이었다. “하긴 노란 뱀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다고 했어요.” 그날 밤, 나는 어린 왕자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린 왕자는 조용히 떠나 버렸다. 내가 뒤쫓아갔을 때, 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내게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아저씨 마음만 아플 텐데. 내가 죽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죽는 건 아니에요. 나는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긴 너무 먼 곳이라 내 몸은 무거워서 가져갈 수 없어요. 낡은 껍데기가 남는 거니까 슬퍼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린 왕자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울고 있었다. “다 왔어요. 이제 혼자 갈게요.” 어린 왕자는 무서웠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린 왕자는 다시 말했다. 별것도 아닌 네 개의 가시로 자기를 보호하려 하고. 나도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털썩 주저앉았다. “자, 이제 다 끝났어요.” 어린 왕자는 조금 망설이더니 한 발 내디뎠다.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왕자의 발목에서 노란빛이 반짝였다. 어린 왕자는 한순간 그대로 서 있더니 나무가 넘어지듯 천천히 쓰러졌다. 그러나 모래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5억 개의 별. 어느새 여섯 해가 지났다. 나는 이제껏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내 친구와 가족은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이제 내 슬픔도 어느 정도 가셨다. 완전히 싹 가신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무사히 돌아간 것 같다.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살펴보니 어린 왕자의 몸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어린 왕자가 자기의 몸을 가져갔을 거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린 왕자의 몸은 아주 가벼웠기 때문이다. 나는 밤마다 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까지도 확 트이는 것 같다. 별들은 마치 5억 개의 작은 방울들 같다. 그런데 요즘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어린 왕자에게 그려 준 양의 입마개에 끈을 다는 걸 깜빡 잊었다는 것이다. 끈이 없으면 양에게 입마개를 씌울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무척 궁금하다. ‘그의 별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까? 양이 장미꽃을 먹어 버렸을까?’ 어느 때는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다. ‘천만에! 먹지 않았겠지. 어린 왕자는 밤마다 꽃에다 유리 덮개를 씌우고 양을 잘 지킬 거야.’ 그러면 나는 행복해지고, 별들이 웃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때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밤 그 아이가 유리 덮개 씌우는 걸 잊었거나, 양이 밤중에 몰래 나가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 일이야.’ 그러면 작은 별들이 모두 눈물방울로 변해 버린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잘 알지 못하는 양 한 마리 때문에 세상이 온통 달라져 보이니 말이다. 이 그림은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풍경이다. 어린 왕자가 지구라는 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찬찬히 잘 보았다가, 언젠가 여러분이 아프리카의 사막을 여행하게 된다면 꼭 찾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혹시 그리로 지나가게 되면,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그 별 아래에서 잠시 기다려 보라. 그때, 머리카락이 황금빛이고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 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건다면, 그 아이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게 꼭 편지 한 통을 보내 주길 바란다. 어린 왕자가 돌아왔다고.
메리 포핀스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유모 메리 포핀스. 벚나무길 17번지의 집은 이 동네에서 가장 작고, 몹시 낡은 집이에요. 집주인인 뱅크스 씨와 그의 부인은 집을 가꾸는 것보다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쏟았어요. 그들에게는 첫째 딸 제인, 둘째 아들 마이클 그리고 쌍둥이인 존과 바버라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요리하는 브릴 아주머니와 식탁을 차려 주는 하녀 엘렌도 함께 살았어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케이티 아주머니가 했었는데, 얼마 전 말도 없이 집을 떠나고 말았어요. “케이티 아주머니가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뱅크스 부인이 말했어요. 신문에다 우리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내면 될 거요. 뱅크스 씨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붐 제독의 집을 쳐다보았어요. 붐 제독의 집은 무척 컸으며 전함 모양으로 지어져 있어서 벚나무길의 자랑거리였어요. 지붕 위에는 금빛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었고, 뜰에는 깃대가 우뚝 서 있었어요. “바람개비가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고 알려 주는군. 그럴 줄 알았어.” 뱅크스 씨는 외투를 껴입고 시내로 나갔어요. 뱅크스 씨는 종일 페니와 실링 등 여러 가지 돈을 찍어 내는 일을 했어요. 뱅크스 씨가 출근하자, 부인은 신문사에 보낼 편지를 썼어요. 아이들을 돌볼 사람을 구한다는 편지였어요. 사실 아이들은 케이티 아주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가 오든 케이티 아주머니보다는 나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녁을 먹은 제인과 마이클은 창가에 앉아 뱅크스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기, 아빠다!” 마이클이 소리치며 대문 쪽을 가리켰어요. “아니, 아빠가 아니야.” 제인이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했어요. 웬 낯선 손님이 바람을 피하려고 허리를 굽힌 채 대문의 빗장을 들어 올렸어요. 손님은 여자였는데, 한 손에는 모자를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어요. 그때,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져 제인과 마이클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바람이 그녀를 들어 올려 대문에서 집 앞 현관까지 옮겨 놓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게다가 여자가 땅에 닿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집도 흔들렸어요. “우아! 이런 건 처음 봐! 가서 누구인지 보자.” 제인과 마이클은 계단 옆에서 거실을 지켜보았어요. 잠시 뒤, 뱅크스 부인이 손님과 함께 거실로 나왔어요. 손님은 마른 몸매에 손발이 무척 컸어요. 머리칼은 검은색이었고, 눈은 작았지만 반짝였어요. “얌전한 아이들이라 힘든 일은 전혀 없을 거예요.” 뱅크스 부인은 이렇게 말했지만, 자신이 한 말을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뒤처진다는 말은 뱅크스 부인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뱅크스 부인은 서둘러 말했어요. 그럼 좋아요, 소개장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해요. 아이들의 방은 2층이에요. 뱅크스 부인이 먼저 계단 쪽으로 걸어갔어요. 그런데 손님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2층으로 올라갔어요. 계단의 난간 위에 올라타고 위쪽으로 우아하게 미끄러져 올라가더니, 뱅크스 부인과 동시에 2층에 올라섰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난간을 타고 내려가는 건 그들도 많이 해 보았어요. 뱅크스 부인이 계단 아래 있던 아이들을 발견하고 말했어요. “제인, 마이클! 거기서 뭐 하니? 이리 와서 인사드리렴.” 그리고 이어서 뱅크스 부인은 침대에 누워 있는 존과 바버라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저 아기들은 쌍둥이예요.” 손님은 네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어요. “나는 앞으로 여러분을 돌보게 될 메리 포핀스란다.” 뱅크스 부인이 나가자, 제인과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어요. 어떻게 온 거예요? 바람을 타고 날아온 것 같았는데, 맞나요? 메리 포핀스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어요. 그러고는 모자를 침대 기둥에 걸고, 가방을 열었어요. “우아, 정말 이상하게 생긴 가방이다. 어, 아무것도 없잖아?” 아이들이 가방을 들여다보며 말하자, 메리 포핀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어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니?” 그 말과 동시에 메리 포핀스는 가방에서 연필과 사탕, 약병 등 이것저것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깜짝 놀랐어요. 그러나 메리 포핀스가 똑바로 마이클을 쳐다보자, 마이클은 그녀의 말을 감히 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결국 입을 벌리고 약을 꿀꺽 삼키고 말았어요. “우아! 딸기 아이스크림 맛이잖아! 더 주세요!" 하지만 메리 포핀스는 마이클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은빛의 물약을 숟가락에 따라서 제인에게 주었어요. “우아, 달콤한 라임 주스 맛이야!” 메리 포핀스는 쌍둥이에게는 우유 맛 물약을 한 스푼씩 먹이고, 자신은 럼 펀치 맛 물약을 한 스푼 먹었어요.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어요.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는 여기에 있을 거야.” 그러고는 침대로 쏙 들어가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메리 포핀스는 벚나무길 17번지에서 뱅크스 씨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우산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어요. 비는 오지 않았지만, 앵무새 머리 모양의 우산 자루가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제인이 위층 창문에서 메리 포핀스에게 손을 흔들었어요. “어딜 가시는 거예요?” “그 창문 좀 닫으렴.” 메리 포핀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거리로 나가서 빠른 걸음으로 모퉁이를 두 번 돌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운전자가 자리를 비운 자동차 옆에 멈춰 서서 차창을 보며 모자를 고쳐 맸어요. 메리 포핀스는 성냥을 파는 버트를 만나기 위하여 빠른 걸음으로 걸었어요. 버트는 거리에서 성냥도 팔면서 길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하고 있었어요. 그는 날씨가 맑은 날에는 종일 무릎을 꿇고 길바닥에 그림을 그렸지만, 비 오는 날에는 성냥을 팔았어요. 길바닥에 그린 그림이 빗물에 금방 지워지기 때문이었어요. 메리 포핀스가 찾아온 날도 추웠지만 맑은 날씨여서 버트는 길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버트를 놀라게 해 주려고 살금살금 다가갔어요. “안녕, 버트?” 메리 포핀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버트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어요. “오늘은 쉬는 날이야, 버트. 기억하지?” “물론 기억하지. 하지만 오늘은 운이 없어.” 버트는 슬픈 표정으로 2펜스밖에 없는 모자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사람들이 저 그림을 보면 막 돈을 낼 것 같지 않아? 버트는 그리고 있던 엘리자베스 여왕 그림을 가리켰어요.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어요. “메리, 미안한데 오늘은 차 한 잔 사 주기도 어려울 것 같아.” “괜찮아, 버트. 신경 쓰지 마!” 두 사람은 차 마실 돈도 없었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버트는 메리 포핀스의 손을 꼭 잡고 그림을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어요. 나무가 우거져 있고 파란 바다가 보이는 그림 앞에 다다르자, 버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메리, 아주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 우리 둘이 저 그림 속으로 놀러 가 보면 어떨까? 버트는 메리 포핀스의 손을 잡고 그림 속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그림 속은 푸르고 고요했어요. 발에 밟히는 잔디는 무척 부드러웠고, 작은 꽃들이 그들의 구두를 감쌌어요. 메리 포핀스와 버트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둘의 옷차림이 멋지게 바뀐 것을 알아차렸어요. 둘은 감탄하며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어요.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앵무새 머리 모양의 자루가 달린 우산뿐이었어요. “정말 멋져, 오늘은 제대로 외출한 날 같아.” 메리 포핀스는 신이 나서 말했어요. 두 사람은 조그마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그리고 작은 공터에 도착했어요. 그곳에는 차와 과자가 놓인 탁자가 있었어요. 그때, 메리 포핀스의 등 뒤에서 누군가 말했어요. “앉으시지요, 부인.” 돌아다보니 숲속에서 검은 정장을 입고 요리 접시를 든 키 큰 남자가 나타났어요.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모실 웨이터입니다.” 이렇게 해서 메리 포핀스와 버트는 오후의 다과를 즐기게 되었어요. 메리 포핀스와 버트는 차를 두 잔씩이나 마셨어요. 접시에 있던 과자도 다 먹었고요. 메리 포핀스와 버트가 과자 부스러기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웨이터가 숲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저쪽은 놀이공원입니다. 회전목마가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웨이터가 가리킨 곳을 보니까,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회색 목마를, 버트는 누런색 목마를 탔어요. 즐거운 음악과 함께 신나게 목마를 탄 다음, 다시 공터로 오자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어요. 웨이터는 저녁 7시엔 문을 닫는다며 그들을 하얀색 문 앞까지 안내했어요. “안녕히 가십시오!” 웨이터의 인사를 받으며 메리 포핀스와 버트는 하얀색 문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두 사람의 멋진 옷은 순식간에 원래 입었던 옷으로 바뀌었어요. 메리 포핀스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자, 제인과 마이클이 쪼르르 달려와 물었어요. “어딜 갔다 오셨어요?”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동화 속 나라에.”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계속 물었어요. “동화 속 나라라고요? 그러면 신데렐라도 있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어이없어하며 말했어요. “신데렐라라니, 참 나!” 동화 속 나라에 갔었다면서요. 우리가 아는 동화 속 나라가 아닌가 봐요. 제인과 마이클이 실망하며 말하자 메리 포핀스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어요. “모두에겐 그 사람만의 동화 속 나라가 있는 거야. 모르나 보구나!” 신기한 웃음 가스. 어느 날, 메리 포핀스는 제인과 마이클을 데리고 그녀의 삼촌인 위그 씨를 찾아갔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렸던 터라 위그 씨가 집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했어요. 메리 포핀스가 로버트슨가 3번지의 초인종을 눌렀어요.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깡마른 여자가 나타났어요. 제인은 공손히 인사했어요. “안녕하세요, 위그 아주머니?” “맙소사! 위그 아주머니라니! 난 미스 퍼시먼이에요.” 미스 퍼시먼은 불쾌한 듯 투덜거리며 말했어요. 위그 씨의 부인이라는 말에 투덜거리는 미스 퍼시먼을 보니, 위그 씨는 아주 이상한 사람일 것 같았어요. “계단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방이에요.” 미스 퍼시먼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메리 포핀스가 문을 똑똑 두드렸어요. “문은 열려 있으니, 어서 들어와요.” 방 안에서 위그 씨의 밝고 큰 목소리가 들려오자, 제인은 흥분하여 마이클에게 눈짓했어요. 메리 포핀스와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 방은 크고 아늑했으며, 방 한가운데에는 맛있는 다과가 차려진 큰 탁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어요. “삼촌, 오늘도요? 오늘은 삼촌 생신도 아니잖아요?” 메리 포핀스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어요. 아이들도 메리 포핀스를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가 공중에 둥둥 떠 있었어요. “메리,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 맞는 거 같아. 어젯밤에야 겨우 생각이 났지. 하지만 다른 날 다시 오라는 엽서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더구나.” 위그 씨는 제인과 마이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날 보고 좀 놀란 것 같군. 나는 남달리 웃음이 많단다. 무엇을 보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지, 하하! 갑자기 위그 씨는 온몸을 흔들어 대며 웃기 시작했어요. “삼촌!” 메리 포핀스가 소리치자, 위그 씨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어요. “게다가 내 생일이 금요일과 겹치면, 나는 흥분되어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돼.” “그 이유가 뭐예요?” 마이클이 물었어요.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 웃음이 터지면 웃음 가스가 온몸에 퍼져서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래서 이렇게 풍선처럼 공중에 둥둥 떠올라 있는 거란다. 아주 슬픈 일을 머릿속에 떠올려야만 겨우 아래로 내려갈 수 있지.” 위그 씨는 이렇게 말하고 또 웃기 시작했어요. 풍선처럼 버둥거리며 날아다니는 위그 씨의 모습은 무척 우스꽝스러웠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그 모습을 보고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제인과 마이클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더니 공중으로 ‘붕’ 하고 떠오르는 거예요! 제인과 마이클은 둥둥 떠다니며 바둥거리다가 겨우 위그 씨 곁으로 갔어요. 위그 씨는 매우 반가워하며 아이들의 손을 잡았어요. “정말 친절한 아이들이구나. 내가 내려가질 못하니까 이리로 올라와 준 거지?” 세 사람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어 댔어요. 위그 씨는 메리 포핀스를 내려다보았어요. “메리, 너는 왜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지?” “세상에!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메리 포핀스의 퉁명스러운 말대꾸에 마이클이 소리쳤어요. “메리 아주머니, 우리가 있는 데로 올라오세요. “아무거나 웃긴 생각을 떠올려 보세요. 그럼, 몸이 떠오를 거예요!” 위그 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제인, 메리는 웃지 않아도 올라올 수 있단다.”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이긴 하지만, 모두 거기에 있으니 내가 올라가는 편이 좋겠군요.” 놀랍게도 메리 포핀스는 미소도 띠지 않았는데 공중으로 솟아올라 제인 옆으로 왔어요. “자, 됐다. 이제 차를 들기로 하지. 오! 이거 야단났군. 탁자는 저 밑에 있고, 우리는 이렇게 떠 있으니, 말이야!” 위그 씨는 머리를 감싸고 한참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딱 멈추고 말했어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야. 지금부터 각자 아주 슬픈 일을 생각하는 거야. 마이클은 학교를 떠올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학교에 가는 일조차 즐겁게 여겨졌어요. 제인은 어른이 되는 것을 떠올렸어요. 그것 역시 멋진 일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났어요. “모두들 슬퍼지기 어려운 모양이니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같구나.” 위그 씨가 메리 포핀스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밑에 있던 탁자가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곧 탁자가 둥실 떠오르더니, 네 사람 앞에 와서 멈추었어요. 위그 씨의 오른쪽에는 마이클이 앉았고, 왼쪽에는 제인이 앉았어요. “보통은 버터 바른 빵부터 먹었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케이크부터 먹기로 하자.” 위그 씨는 케이크를 잘라 모두에게 한 조각씩 나누어 주었어요. 이어서 위그 씨가 차를 더 들기를 권할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미스 퍼시먼이 물 주전자를 쟁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왔어요. “위그 씨, 물이 더 필요하실 것 같아서.” 방 안을 둘러보던 미스 퍼시먼이 소리를 질렀어요. “어머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스 퍼시먼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어요. “점잖은 분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공중에서 차를 마시다니.” “하지만 아주머니도 곧 떠오를 거예요. 우리처럼 웃음 가스에 전염될 테니까요.” 마이클의 말에 미스 퍼시먼은 거만하게 말했어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만약에 내가 땅에 똑바로 서 있지 않다면, 내 이름은 에이미 퍼시먼이 아니에요. 그리고.” 갑자기 미스 퍼시먼이 비명을 질렀어요.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사람 살려!” 미스 퍼시먼은 비틀거리며 공중으로 떠올랐어요. 그리고 탁자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는 울상을 지었어요. “고맙습니다.” 메리 포핀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어요. 이내 미스 퍼시먼은 허공을 밟아 바닥으로 내려갔어요. 그러고는 투덜거리며 서둘러 방을 나가 버렸어요. “땅에 똑바로 서 있지 않았으니 이제 에이미 퍼시먼이라 못 부르겠네.” 제인이 마이클에게 속삭였어요. 위그 씨는 메리 포핀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어요. “메리, 왜 그랬어? 미스 퍼시먼이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허공을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라니, 정말 우스웠어.” 위그 씨는 빙그르르 돌며 웃어 댔어요. 위그 씨의 모습에 또다시 모두 배를 잡고 웃어 댔어요. “이제 그만 하세요. 이러다간 몸이 똑 부러질 것 같아요.” 마이클의 말에 제인도 웃음을 참지 못했어요. 그때, 메리 포핀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어요.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그러자 위그 씨와 제인과 마이클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바닥에 내려앉았어요.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그날 오후 처음으로 떠오른 슬픈 생각이었던 거예요. 메리 포핀스는 공기를 타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어요. 위그 씨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어요. “무척 즐거웠는데 너희와 헤어져야 한다니 매우 슬프구나.”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제인과 마이클도 위그 씨의 볼에 입을 맞추며 무척 아쉬워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마이클이 졸린 목소리로 물었어요. “메리 아주머니, 위그 아저씨는 얼마나 자주 떠오르죠?” “떠오르다니, 대체 무슨 말이니?” 메리 포핀스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웃음 가스 때문에 공중을 떠다니는 것 말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니? 우리 삼촌이 풍선이라도 되는 줄 아니? 그분은 착실하고 멀쩡한 분이야.” 제인과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가 왜 그 일을 모르는 척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어요. 하지만 둘은 너무 피곤했던 터라 메리 포핀스에게 기대어 곧 잠이 들었어요. 영리한 앤드루. 뱅크스 씨 옆집에는 라크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라크 아주머니는 몸에 목걸이나 귀고리 등을 많이 지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언제나 ‘짤그락’하는 소리가 나면 라크 아주머니가 나타났다는 것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게다가 라크 아주머니는 목소리가 엄청나게 커서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를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어요. “앤드루, 어디 있니? 앤드루, 외투를 입고 나가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앤드루가 꼬마 소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앤드루는 조그마한 개예요. 앤드루의 생활은 꽤 호화스러웠어요. 앤드루는 일주일에 두 번 털을 손질하러 미용실에 가고, 잠은 비단 방석 위에서 잤어요. 또 비가 오는 날이면 라크 아주머니는 앤드루에게 가죽 구두를 신겨 공원에 내보냈어요. 이런 일 때문에 앤드루는 이웃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어요. 어느 날, 마이클과 제인은 앤드루를 보며 바보라고 놀려 댔어요.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앤드루는 바보가 아니라고 했어요. 메리 포핀스의 말은 사실이었어요. 곧 알게 되었지만, 앤드루는 바보가 아니었던 거예요. 앤드루는 라크 아주머니를 좋아했지만, 지금의 생활을 싫어하고 있었어요. 앤드루는 보통의 개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관으로 달려가서 다른 개들을 기다렸어요. 개들끼리 평범한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앤드루와 가장 친한 친구는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꾸러기 개였어요. 그럴 때마다 라크 아주머니는 더러운 개와 함께 놀면 안 된다고 나무랐어요. 하지만 앤드루는 늘 그 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어요. 앤드루는 아주머니와 함께 공원을 산책할 때 빼고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앤드루가 혼자서 공원을 가로질러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어요. 앤드루는 두 아이를 힐끗 보고는 곧 메리 포핀스를 향해 짧게 짖어 댔어요. “멍멍!” “글쎄, 첫 번째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왼쪽에 보이는 두 번째 집 같아. 뜰은 없고 대문은 항상 열려 있어.” 메리 포핀스의 말에 앤드루가 다시 짖었어요. “아마 맞을 거야. 보통 차 마실 시간에는 집에 있거든.” 메리 포핀스가 말을 마치자, 앤드루는 다시 달려갔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어요. “앤드루가 뭐래요?” “그저 인사를 했을 뿐이야.” 메리 포핀스의 대답에 마이클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어요. “앤드루는 분명 누군가가 어디에 사는지 물어본 것 같았어요. 도대체 뭐라고 한 거죠?” 그러자 메리 포핀스가 차갑게 쏘아붙였어요. “그렇게 잘 알면서 나에게 왜 물어보는 거니?” 메리 포핀스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무슨 일인지 무척 궁금했어요. 그리고 차 마실 시간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집 앞에 다다르자, 라크 아주머니와 하녀들이 허둥거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앤드루가 없어졌어! 세상에, 이를 어쩌지?” 마이클은 집으로 막 들어서려다가 거리 쪽을 보고 소리쳤어요. “라크 아주머니, 저기 앤드루가 오고 있어요.” “어디, 어디 말이냐?” 라크 아주머니는 마이클이 가리킨 쪽을 보았어요. 앤드루는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어요. “아유, 앤드루. 무사하니 다행이다.” 기뻐하던 라크 아주머니는 말썽꾸러기 개를 보고,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끔찍한 개가 우리 앤드루와 함께 있다니! 저리 가!” 그리고 앤드루에게 다정하게 말했어요. “앤드루, 어서 집에 들어가자.” 앤드루는 꼼짝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짖어 댔어요. “앤드루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네요.” 메리 포핀스가 옆에서 거들었어요. “아니, 당신은 마치 앤드루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요.” 라크 아주머니는 메리 포핀스의 말을 무시하고 앤드루를 불렀어요. 그러나 앤드루는 고개를 젖히고 작은 소리로 짖어 댔어요. 라크 아주머니는 마지못해 허락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말썽꾸러기 개의 이름이 ‘윌러비’라고 말해 주었어요. 다시 앤드루가 짖자, 라크 아주머니가 물었어요. “이번에는 또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절대 외투도 안 입을 거고, 미용실에도 안 갈 거래요. 그거면 된대요.” 라크 아주머니는 앤드루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어요. 앤드루와 윌러비는 꼬리를 흔들며 라크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어요. ‘앤드루는 바보가 아니었어!’ 제인과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하지만 메리 포핀스에게 물어보지는 못했어요. 가르쳐 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춤추는 암소. 제인은 귀가 아파서 며칠째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마이클은 창가에 앉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인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창밖을 내다보던 마이클이 소리를 질렀어요. “우아, 희한하네. 저쪽에서 암소 한 마리가 걸어오고 있어.” “진짜 암소가? 우아, 재미있겠는걸. 메리 아주머니, 암소가 마을에 나타났대요.” 제인이 큰 소리로 메리 포핀스를 불렀어요. 메리 포핀스가 창가로 다가오자, 마이클이 말했어요. “아주 느릿느릿 걸으면서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처럼 집마다 머리를 들이밀고 있어요.”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쌀쌀맞게 말했어요. “천만에,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저 암소는 우리 어머니와 친한 사이였어. 그래서 나는 저 암소에 대해 좀 알아.”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요?” 암소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이클은 공손히 물었어요. “저 암소가 임금님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알았지.” 메리 포핀스는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그 암소의 이름은 ‘붉은 소’였어요. 붉은 소는 아주 기름진 들판에서 언제나 귀부인처럼 우아하게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어요. 별들이 하늘에 핀 민들레처럼 빛나고, 달이 데이지꽃처럼 떠 있던 밤이었다고 해요. 그날 밤, 붉은 소는 갑자기 일어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보기만 해도 저절로 흥이 나는 경쾌하고 아름다운 춤이었어요. 붉은 소는 지쳐서 춤을 그만 추려고 했는데, 춤이 멈춰지지 않는 거예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붉은 소는 춤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일주일을 계속 춤을 추고 나니, 붉은 소는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임금님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갔어요. “너는 누구냐?” 임금님이 깜짝 놀라서 묻자, 붉은 소는 계속 춤을 추며 대답했어요. “저는 암소예요. 임금님.”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어지러우니 춤추는 것을 좀 멈출 수 없느냐?” “그게 바로 제 문제예요.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일주일 동안 춤을 추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어요.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임금님을 찾아온 거예요.” “그것참 괴상한 일이로구나!” 임금님은 골똘히 생각하며 붉은 소를 빤히 쳐다보았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붉은 소의 뿔을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저것 봐라! 저게 보이지 않느냐? 암소의 뿔에 박혀 있는 별이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아, 보입니다.” 비로소 알아차린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어요. “자, 어서 이 암소한테서 별을 떼어 주도록 해라. 그러면 춤을 멈출 것이다.” 신하들은 붉은 소에게 덤벼들어 별을 떼어 내려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별은 떨어지지 않았고, 신하들은 엉덩방아만 찧어 댔어요. 보다 못한 임금님은 한 신하에게 뿔에 별이 박힌 소를 조사하게 시켰어요. 신하는 백과사전에서 뿔에 별이 박힌 소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았어요. 그런데 찾은 것이라고는 달을 뛰어넘은 암소에 관한 이야기뿐이었어요. 임금님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어요. “암소야, 달을 뛰어넘어 보아라. 그러면 별이 떨어질지 모르니.” “저더러 달을 뛰어넘으라고요? 저처럼 우아한 소가 어떻게.” 붉은 소는 춤추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뛰고 안 뛰고는 네가 판단할 문제다. 너는 언제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춤만 출 테냐?” 붉은 소는 잠시 망설이다가 임금님 앞으로 나아갔어요. “달을 한번 뛰어넘어 볼게요.” “그것참, 잘 생각했구나.” 임금님이 앞장서고, 붉은 소와 신하들이 그 뒤를 따랐어요. 일행이 넓은 뜰에 이르자, 임금님은 조끼 주머니에서 금 나팔을 꺼냈어요. “내가 나팔을 불거든 뛰도록 해라. 빰빠빠 빠밤!” 나팔 소리에 붉은 소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있는 힘을 다해 높이 뛰어올랐어요. 붉은 소의 몸은 자꾸만 하늘 위로 올라가 어느새 달 위에 올라가 있었어요. 붉은 소는 눈을 질끈 감고 달을 뛰어넘었어요. 그랬더니 뿔 끝에 붙어 있던 별이 스르르 떨어지고, 붉은 소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그곳은 놀랍게도 붉은 소가 살던 들판이었어요. 붉은 소는 더는 춤을 추지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붉은 소는 별을 꽂고 춤을 추던 때가 다시 그리워졌어요. 붉은 소는 점차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래서 메리 포핀스의 어머니를 찾아와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던 거였어요. 메리 포핀스의 어머니는 별은 같은 곳에 두 번 떨어지지 않으니, 다른 데 가서 또 다른 별을 찾아보라고 말해 주었어요. 그 뒤 붉은 소는 별을 찾아 떠돌아다녔어요. 메리 포핀스의 이야기를 듣고, 제인과 마이클이 소곤거렸어요. “아하! 별을 찾으러 우리 동네까지 오게 된 거구나.” 제인과 마이클은 아직도 붉은 소가 있는지 궁금해서 창밖을 내다보았어요. “붉은 소가 없어. 가 버렸나 봐.” 마이클이 아쉬운 듯 말했어요. “붉은 소가 꼭 별을 찾았으면 좋겠어.” 제인이 말하자 마이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나도야!” 못된 화요일. 어느 날 아침, 마이클은 눈을 떴을 때부터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목욕탕에 가서 얼른 목욕물을 받으렴.” 메리 포핀스의 말에도 마이클은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자 메리 포핀스가 다가와 담요를 걷어 젖혔어요. 그제야 마이클은 벌떡 일어나 목욕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목욕을 마친 마이클은 난간을 발로 툭툭 차면서 계단을 내려갔어요. 부엌에서는 브릴 아주머니가 과자를 굽고 있었어요. “반죽 그릇에 손을 집어넣으면 안 돼.” 브릴 아주머니가 타이르자, 마이클은 브릴 아주머니의 다리를 툭 걷어찼어요. 뱅크스 부인은 브릴 아주머니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마이클을 호되게 야단쳤어요. “마이클, 어서 브릴 아주머니에게 가서 죄송하다고 사과해.” 하지만 마이클은 그냥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그때 울타리 사이로 앤드루가 보였어요. 마이클은 앤드루에게 비스킷을 주었어요. 앤드루가 비스킷을 먹는 동안 마이클은 앤드루의 꼬리를 끈으로 울타리에 묶어 버리고 도망을 쳤어요. 잠시 뒤, 마이클의 귓가에 라크 아주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이클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서재 문이 열려 있었어요. 마이클은 서재에 들어가 아버지가 쓰는 펜으로 낙서하다 잉크병을 쳐서 잉크를 엎지르고 말았어요. 이 일로 마이클은 한참 동안 벌을 섰어요. 오후 산책길에서도 마이클은 계속 말썽을 부렸어요. 메리 포핀스는 마이클에게 말했어요. “오늘 아침, 너는 침대에서 잘못된 쪽으로 내려왔구나.” “내 침대에는 잘못된 쪽 같은 건 없어요.” 메리 포핀스는 모든 침대에는 옳은 쪽과 잘못된 쪽이 있다고 딱 잘라 말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뒤처져 따라오지 말고 앞장서서 걸으라며 마이클의 등을 떠밀었어요. “저기 길 위에 반짝거리는 물건이 떨어져 있을 테니, 그걸 주워서 가져오면 정말 고맙겠구나.” 마이클은 내키지 않았지만, 메리 포핀스가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어요. 그랬더니 정말 반짝이는 둥근 통이 보였어요. 마이클은 둥근 통을 주워 메리 포핀스에게 건넸어요. 메리 포핀스가 둥근 통을 앞뒤로 기울이자, 통 속의 원판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바로 나침반이었어요.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죠?” 제인이 물었어요. “세계를 여행할 수 있지.” 메리 포핀스가 말했어요. “여행하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고요.” 마이클이 소리쳤어요. “오, 정말 그럴까?” 메리 포핀스가 묘한 표정으로 말하자,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서 제인과 마이클은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세 사람이 눈을 떴을 때 하얀 눈과 커다란 얼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추위와 놀라움에 온몸을 떨었어요. 바로 그때, 새하얀 북극곰이 다가와 메리 포핀스를 꼭 껴안았어요. “메리 포핀스와 친구분들! 북극에 온 것을 환영해요.” 북극곰은 혀를 내밀어 아이들의 뺨을 다정하게 핥아 주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북극곰이 자신들을 잡아먹을까 봐 덜덜 떨었어요. 북극곰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때, 메리 포핀스가 끼어들었어요. “미안해, 그만 가 봐야 할 거 같아. 우리는 세계 일주 여행을 하는 중이거든. 메리 포핀스는 다시 나침반을 돌리면서 소리쳤어요. “남쪽!” 제인과 마이클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윽고 그들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정글 한가운데 서 있었어요. “어서 와!” 커다란 마코앵무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소리쳤어요. “메리 포핀스, 아내가 잠깐 외출하는 바람에 내가 알을 품는 중이야. 나 좀 쉬게 나랑 잠시 교대 좀 해 줄래?” 마코앵무새가 날개 한쪽을 들자 두 개의 알이 든 둥지가 보였어요. “미안해, 우리는 지나가다가 잠깐 들른 건데 어떡하지? 지금 우리는 세계 일주 여행을 하는 중이거든.” 메리 포핀스는 나침반을 돌리며 크게 말했어요. “동쪽!” 다시 세상이 그들 주위로 빙글빙글 돌아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은 대나무 숲속에 서 있었어요.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주위를 둘러보던 마이클과 제인은 깜짝 놀랐어요. 대나무 숲에서 판다가 잠을 자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판다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갔어요. 그리고 메리 포핀스는 다시 나침반을 살짝 돌렸어요. 세상은 다시 빙글빙글 돌았고, 이번에는 바닷가의 하얀 모래밭에 와 있었어요. 갑자기 제인과 마이클 앞에 모래가 구름처럼 피어올랐어요. 모래 구름 속에서 끄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돌고래와 새끼 돌고래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메리 포핀스, 우리랑 함께 모래 목욕해요. 지느러미랑 꼬리를 씻어 내는 데는 모래 목욕이 최고예요. 그렇지? 개구락지야?” 커다란 돌고래가 새끼 돌고래를 툭 치며 말했어요. 그러자 메리 포핀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고맙지만 목욕은 아침에 하고 왔어. 그리고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해.” 커다란 돌고래는 아쉬워하며 말했어요. “그럼, 모두 잘 가!” 커다란 돌고래와 새끼 돌고래는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잔물결을 일으키며 바다를 헤엄쳐 갔어요. 마이클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대체 뭘 하는 거니? 마이클!” 메리 포핀스가 부르는 소리에 마이클은 고개를 돌렸어요. 그리고 다시 바다 쪽을 바라보았는데, 이미 바다는 거기에 없었어요. 메리 포핀스와 아이들은 원래의 공원에 와 있었어요. “세계를 한 바퀴 돌게 해 주다니! 정말 신기한 통이야!” 제인이 말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나침반을 주머니에 집어넣었어요.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를 노려보았어요.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되었어요. 마이클은 점점 더 못된 아이로 변해 갔어요. 동생들을 꼬집고 제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어요. “더는 못 참겠다! 이렇게 못된 짓을 하는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마이클, 침대에 가서 입도 뻥긋하지 말고 누워 있어!” 메리 포핀스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어요. “흥! 나는 메리 아주머니가 정말 미워!” 마이클은 침대에 누우려다가 책상 위에 나침반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어요. 마이클은 혼자서 세계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나침반을 들고 외쳤어요. “북쪽, 남쪽, 동쪽, 서쪽!” 나침반의 바늘이 빙그르르 돌아가는데, 뒤에서 소리가 났어요. 마이클이 돌아보자, 어느 틈에 송곳니를 드러낸 북극곰, 날갯짓하는 마코앵무새, 털을 꼿꼿이 세운 판다, 주둥이를 내민 돌고래까지 다들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마이클에게 달려들었어요. 낮에 만났던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이 아니었어요. 마이클은 너무 무서워서 두 눈을 꼭 감고, 큰 소리로 메리 포핀스를 불러 댔어요. “메리 아주머니, 도와줘요!” “알았어, 부탁이니 소리 좀 지르지 마라.” 메리 포핀스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마이클은 눈을 떴어요. 나침반에서 나온 동물들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하루 종일 답답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어요. 마이클은 포근한 침대에 다시 드러누우며 말했어요. “전 이제 아주 착한 아이가 된 것 같아요.” 그러고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새 아주머니. “어쩌면 새 아주머니는 안 계실지 몰라.” “아냐, 꼭 계실 거야. 항상 계셨으니까.” 제인과 마이클은 뱅크스 씨를 만나러 시내로 가고 있었어요. 오늘 아침, 뱅크스 씨가 가족들에게 시내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아이들은 차를 마시는 것도 좋았지만, 세인트 폴 성당에 있는 새 아주머니를 만나는 일이 더 즐거웠어요. 메리 포핀스는 분홍빛 장미로 장식한 새 모자를 쓰고 두 아이와 함께 걸어갔어요. 이윽고 그들은 세인트 폴 성당에 도착했어요. “저기 있다.” 제인과 마이클은 새 아주머니를 보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새들에게 줄 모이 사세요. 한 봉지에 2펜스!” 새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모이가 든 봉지를 내밀었어요. 새 아주머니 주위를 많은 새들이 빙글빙글 날기도 하고, 휙 내려앉았다가 날아오르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다가가자, 새들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성당 지붕 위에 앉았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각각 모이 한 봉지씩을 사서 땅 위에 뿌려 놓았어요. 잠시 뒤 성당의 지붕에서 새들이 내려왔어요. 모이를 다 먹은 새들은 새 아주머니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어요. 그런데 한 마리의 새가 메리 포핀스의 모자로 날아와 장미 하나를 물어뜯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새를 향해 우산을 휘두르며 화를 냈어요. 그러고는 제인과 마이클에게 가자고 소리쳤어요. 아이들은 새 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메리 포핀스와 함께 걸어갔어요. “밤이 되면 저 새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이클이 제인에게 물었어요. 그러자 제인은 늘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밤이 되어 모두가 잠자리에 들면, 새들은 땅 위를 돌아다니며 흩어져 있는 모이를 찾아 먹지. 그런 다음 깃털을 다듬고, 새 아주머니 머리 위를 세 바퀴 돈 다음 내려와 앉아. 그러면 새 아주머니는 새들을 차례로 쓰다듬어 주면서 타이르는 거야.” “새들끼리 통하는 말로?” “응, 그러고 나서 아주머니는 모든 새들을 치마에 품고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지.” 마이클은 몇 번을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어요. 메리 포핀스가 말했어요. 푸줏간 주인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상냥했어요.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면 좋을 텐데요.” 그러나 메리 포핀스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고, 푸줏간 주인은 입을 꾹 다물었어요. 그러고는 얼른 소시지를 종이에 싸서 메리 포핀스에게 건넸어요. 푸줏간에서 나온 메리 포핀스는 생선 가게로 들어갔어요. “가자미 한 마리, 바닷가재 `한 마리 주세요.” 키가 크고 마른 생선 장수는 푸줏간 주인과 달리 너무나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생선 장수는 생선 꾸러미를 건네며 한숨을 지었어요. “그건 아저씨 생각이고요.” 메리 포핀스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게에서 나왔어요. 큰길로 나오자 메리 포핀스는 걸음을 멈추고 살 물건을 적은 쪽지를 살펴보았어요. 메리 포핀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쌍둥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걸어갔어요. 메리 포핀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가게 앞에서 멈추었어요. 작고 초라한 가게 안은 어두웠고, 진열장 안에는 딱딱해 보이는 생강 빵이 줄지어 놓여 있었어요. 생강 빵에는 금빛 종이 별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빛이 가게를 밝혀 주는 느낌이었어요. “패니! 애니! 어디 있어?” 메리 포핀스가 가게 안을 향해 소리쳤어요. 그러자 두 명의 여자가 나와 메리 포핀스와 악수를 했어요. 잠시 뒤에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도 나왔어요. 할머니는 코리 할머니라고 자기를 소개했어요. 코리 할머니는 다정한 말투로 메리 포핀스에게 말했어요. “패니와 애니가 생강 빵을 주지 않았니?” 애니가 이제 막 주려던 참이었다고 말하자, 코리 할머니는 무섭게 화를 내었어요. 그러고는 패니에게도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며 진열장을 열게 했어요. 페니는 겁먹은 표정으로 진열장을 열었어요. 코리 할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제인과 마이클을 불렀어요. “오늘의 생강 빵은 특별한 방법으로 구워 더 맛있단다. 그래, 몇 개나 줄까?” “그럼 특별히 하나 더 해서 열세 개를 주마.” 코리 할머니가 명랑하게 말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생강 빵을 받아 깨물어 먹었어요. “우아, 정말 맛있어요.” 아이들의 칭찬에 코리 할머니는 춤을 추었어요.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생강 빵에 있던 금빛 종이 별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요. 제인은 서랍장의 맨 위 왼쪽 서랍 안에 있는 손수건 밑에, 마이클은 옷장 속 구두 상자에 넣어 두겠다고 말했어요. 그들이 가게를 나오자, 신기하게도 가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모두가 잠든 한밤중, 제인과 마이클은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메리 포핀스였어요. 메리 포핀스는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서랍장과 옷장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급히 밖으로 나갔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그곳에는 코리 할머니 그리고 패니와 애니가 있었어요. 애니는 긴 사다리 두 개를, 패니는 풀이 든 양동이와 큰 붓을 들고 있었어요. 그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메리 포핀스가 나왔어요. 메리 포핀스는 빛을 내는 물건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그들 곁으로 갔어요. “자, 어서 가자. 서둘러야 해.” 그들은 언덕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어요. 패니와 애니가 하늘을 향해 사다리를 꼿꼿이 세우자, 코리 할머니는 붓과 양동이를 들고 사다리 맨 꼭대기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붓에 풀을 묻혀 하늘에 대고 쓱쓱 칠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다른 사다리로 올라가 바구니에서 빛나는 것을 꺼내 하늘에 붙이기 시작했어요. “저건 우리들의 별이잖아. 우리가 잠든 줄 알고 메리 아주머니가 꺼내 갔나 봐!” 마이클이 흥분하여 말했어요. 바구니에 별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그들은 다시 언덕을 내려왔어요. 메리 포핀스는 그들과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메리 포핀스는 계단을 올라와 곧 쌍둥이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별을 넣어 둔 곳으로 가 보았어요. 그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쌍둥이의 첫 생일 잔치. 제인과 마이클은 가장 근사하고 예쁜 옷을 입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갔어요. 오후 내내 집은 고요했고, 뱅크스 부인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어요. 2층 놀이 방에서는 메리 포핀스가 벽난로 앞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어요. 쌍둥이 존과 바버라가 자는 침대 위 창문으로, 따뜻한 햇볕이 너울거렸어요. “쫑알쫑알! 이 방처럼 항상 시끄러운 곳은 처음 봐.” 존과 바버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찌르레기였어요. “그렇게 말하는 너도 하루 종일 한밤중까지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잖아!” 메리 포핀스가 돌아서며 말했어요. “그래, 하지만 나는 늘 사업상 여기저기 대화를 나눌 일이 많아서 그런 거야.” 찌르레기의 말에 존이 깔깔 웃었어요. 그러자 찌르레기가 존을 째려보며 말했어요. “꼬마야, 너도 한밤중에 종종 시끄럽게 울어 대잖아!” 찌르레기는 바버라 곁으로 다가가서 다정하게 물었어요. “바버라, 뭐 먹을 게 없을까?” 그러자 바버라는 통통한 손으로 과자 반쪽을 주었어요. 존은 오른발을 들어 올려 발가락을 입에 물고, 이가 나려고 하는 잇몸을 문질렀어요. “넌 왜 그런 짓을 하니?” 바버라가 웃으며 물었어요. “그냥 연습하는 거야. 어제 내가 이거 했을 때 플로시 숙모가 귀여워하는 거 너도 봤지?” 그 말에 바버라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어요. “맞아, 아빠와 엄마도 좋은 분이지만, 마찬가지야.” “그분들도 아기였을 때는 찌르레기가 하는 말도, 바람과 별이 하는 말도 모두 다 알아들었어. 이젠 그들이 나이가 들어서 다 잊어버린 거야.” 메리 포핀스가 제인의 잠옷을 개며 말했어요. 존과 바버라는 자기들은 어른이 되어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니, 너희도 잊어버리게 될 거야.” 찌르레기는 메리 포핀스를 바라보았어요. “왜 우리는 잊어버리고, 메리 아주머니는 기억할 수 있는 거야?” “아, 메리 포핀스는 예외거든.” 찌르레기가 쌍둥이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어요. “메리 아주머니, 우리도 크면 저 소리를 못 듣게 되나요?” “들을 수는 있지만, 뜻은 알지 못하게 되는 거지.” 메리 포핀스의 말에 존과 바버라는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어머, 우리 아기들이 왜 이렇게 울고 있죠?” 뱅크스 부인이 아이들을 토닥거려 주자, 존이 울음을 그쳤어요. 존은 발가락을 입 속에 넣고 쭉쭉 빨았어요. 그러자 뱅크스 부인은 존을 안아 주었어요. 바버라도 앉아서 양쪽 양말을 다 벗어 보였어요. 뱅크스 부인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버라에게 뽀뽀해 주었어요. 뱅크스 부인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찌르레기가 요란하게 웃어 댔어요. 존은 야무진 목소리로 바버라에게 말했어요.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 거야.” “나도!” 바버라도 맞장구를 쳤어요. “저렇게 말하지만, 몇 달만 있으면 내 이름조차도 모를걸.” 찌르레기는 크게 웃으며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쌍둥이들의 이가 돋아났고 첫 생일이 찾아왔어요. 생일 잔치 다음 날, 찌르레기는 아기들에게 인사하며 창가에 내려앉았어요. “바버라, 뭐 먹을 게 없을까?” 바버라는 옹알이만 할 뿐, 찌르레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찌르레기는 곧장 존의 침대로 날아갔어요. 그러나 존 역시도 마찬가지였어요. “역시 올 것이 오고야 말았네.” 메리 포핀스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찌르레기는 낙심하여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침대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정말 기분이 이상해. 저 애들과 참 즐거웠는데. 잊을 수 없을 거야.” 찌르레기는 날개로 재빨리 눈가를 문질렀어요. “너 우는 거니?” 메리 포핀스가 찌르레기를 놀려 댔어요. “아니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찌르레기는 겸연쩍은 얼굴로 변명하다 훌쩍 날아가 버렸어요. 보름달. 어느 나른한 오후, 제인과 마이클은 심심해서 저금통의 돈을 세어 보기로 했어요. “6펜스 하나랑 1펜스 네 개, 그러면 10펜스네. 그리고 반 펜스짜리 하나랑 3펜스짜리 하나가 더 있어.” 제인과 마이클은 동전을 쌓아 올리기도 하고, 세어 보기도 했어요. “야, 대단한데. 비행기라도 사려는 거야?” 메리 포핀스가 소파 너머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어요. 마이클은 ‘동물원의 밤은 어떨까?’ 하고 상상에 잠겼어요. 그래서 메리 포핀스에게 물어보았어요. 하지만 메리 포핀스는 말없이 청소만 할 뿐이었어요. 그날 밤, 제인과 마이클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얼마 뒤에 아이들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제인, 마이클! 얼른 옷 입고 이리 나오렴!” 제인과 마이클은 허둥지둥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어요. “어서 이리로 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소리가 들렸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그 소리를 따라갔어요. 그랬더니 동물원의 회전문 앞에 다다랐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여기 입장권 받아.” 걸걸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제인과 마이클 앞에 큰 곰이 서 있었어요. 곰은 분홍색 표 두 장을 제인과 마이클에게 내밀었어요. “너는 밤이라서 우리 밖에 나와 있니?” 제인과 마이클은 동물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길마다 동물들이 돌아다니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동물들 사이를 지날 때, ‘생일’이니 ‘보름달’이니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어요. 두 사람은 신기한 광경에 마음을 빼앗겨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어요. 코끼리 우리 옆에는 늙은 신사가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었어요. 신사의 등 위에는 원숭이 여덟 마리가 올라타고 있었어요. 제인은 그 모습이 신기해서 바라보다가 지나가던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어요. 고개를 돌려 보니, 커다란 사자였어요. “아, 미안해. 사람에게 먹이를 준다기에 서둘러 보러 가느라 앞을 제대로 못 봤지, 뭐야. 너희도 같이 갈래?” 제인은 조금 무서웠지만 사자의 친절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오늘을 위해 특별히 갈기도 손질했어.” 그러면서 사자는 모든 동물의 왕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으뜸이어야 한다고 덧붙였어요. 사자는 우리가 있는 건물로 아이들을 안내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눈앞에 벌어진 기이한 광경에 깜짝 놀랐어요. 그곳은 사자와 표범, 이리, 독수리, 뱀 등 수많은 동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사자는 제인과 마이클을 데리고 우리가 보이는 곳까지 갔어요. “아니, 사람들이 우리에 갇혀 있잖아!” 마이클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어요. 우리 안에는 여러 사람이 갇혀 있었고, 우리 밖의 동물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어째서 저 사람들은 우리 속에 갇혀 있는 거예요?” 제인이 사자에게 물었어요. “동물원 문이 닫혔을 때, 안에 남게 된 사람들이야. 어디든 넣어 두어야 했거든.” 그때, 뾰족한 모자를 쓴 네 마리의 갈색곰이 등에 먹이를 싣고 왔어요. 곰들은 포크 끝에 먹이를 꽂아 우리 안에 넣어 주었어요. 제인은 사람들을 언제 풀어 주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사자가 이미 가 버린 뒤였어요. 입구에서 표를 준 곰이 제인과 마이클에게 다가왔어요. “얘들아, 이제 날 따라오렴. 오늘은 생일이니까 너희도 축하해 주고 싶을 거야. 그렇지?” 곰은 두 아이를 조그마한 건물로 살그머니 밀어 넣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그곳이 뱀의 우리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갖가지 색의 수많은 뱀 가운데에 메리 포핀스가 앉아 있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두 아이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얘들아, 외투는 어디에 두고 온 거니?” 메리 포핀스는 두 아이의 차림새를 꾸짖었어요. 모든 뱀이 쉭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곰은 예의 바르게 모자를 벗었어요. 메리 포핀스도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킹코브라 한 마리가 제일 큰 굴속에서 나타났어요. 킹코브라는 금빛 몸을 세우고 메리 포핀스에게 다가와서 양쪽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어요. “너의 생일이 보름날과 겹치다니, 정말 기쁜 날이야.” “그런데 이 아이들은 누구지?” 킹코브라는 찢어진 눈으로 두 아이를 수상쩍게 바라보며 물었어요. “메리 포핀스의 친구로, 뱅크스 씨의 자녀입니다.” 곰이 공손하게 대답했어요. “어, 그래! 그럼, 환영이지. 자, 이리 와 편히 앉으렴.” 제인과 마이클은 사방을 둘러보며 앉을 자리를 찾았어요. 그러자 곰이 아이들을 자신의 푹신한 무릎에 앉혀 주었어요. “킹코브라가 뱀들의 왕이고, 메리 포핀스는 킹코브라의 친척이야.” 곰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어요. “나의 조카여! 너의 생일 선물로 내 몸의 껍질을 주겠다.” 킹코브라는 이렇게 말하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어요. 킹코브라가 금빛 껍질을 벗자, 갈색의 새 껍질이 나타났어요. 킹코브라는 금빛 껍질 위에 인사말을 새긴 뒤, 메리 포핀스에게 주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껍질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어요. 킹코브라가 갑자기 “쉿!” 하고 소리치자 모두 귀를 기울였어요. 어디선가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어요. 메리 포핀스는 킹코브라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넓은 잔디밭 광장을 향하여 달려갔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킹코브라의 양쪽에 서서 따라갔어요. 잔디밭에서는 수많은 동물이 둥근 원을 만들며 메리 포핀스의 둘레에 서 있었어요. 이윽고 동물들은 정글의 노래를 크게 부르며 빙글빙글 돌았어요. 제인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킹코브라에게 물어보았어요. “평소에 사이가 나쁜 동물들도 어쩌면 저렇듯 사이좋게 어울려 놀지요?” “물론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생일날에는 달라. 작은 것은 큰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큰 것은 작은 것을 보호해 주지.” 킹코브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계속했어요. “우리는 모두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 나무도, 돌도, 짐승과 별도 모두 마찬가지야.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지. 네가 나를 잊어버려도 좋아. 그러나 이것만은 꼭 기억해 두렴.” 새도 짐승도 모두 하나가 되어 메리 포핀스를 둘러싸고 몸을 흔들고 있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두 아이는 곧 잠에서 깨어났지만,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아침 식탁에서 지난밤 꿈 이야기를 했어요. 두 아이는 자기들의 꿈이 똑같은 것에 깜짝 놀랐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에게 어제 동물원에 갔었느냐고 물었어요. “얘들이 또 엉뚱한 소리를 하네.” 메리 포핀스는 딱 잘라 말했어요. 하지만 메리 포핀스의 허리에는 금빛의 뱀 가죽 허리띠가 둘려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동물원에서 보내는 선물”이라고 씌어 있었어요. 마이아의 크리스마스 선물. 제인과 마이클 그리고 메리 포핀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큰 상점에 갔어요. 상점 앞에서 메리 포핀스는 예쁜 장갑을 낀 자기 모습을 진열장에 비추어 보았어요. 메리 포핀스는 자기 자신이 무척 멋지고 근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메리 포핀스는 바느질 도구 가게에서 검은색 무명실을 산 뒤, 아이들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로 갔어요. 장난감 가게에서 제인과 마이클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선물로 인형 유모차와 태엽 기차를 골랐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선물이지만, 자기들이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어요. 그리고 쌍둥이에게 줄 머리핀 한 꾸러미를 샀고, 엘렌과 브릴 아주머니에게 선물할 물건들도 샀어요. 차 마실 시간 전에 도착하려면 그만 돌아가야 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메리 포핀스를 따라갔어요. 제인과 마이클이 상점의 회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어요. 기다란 천으로 몸을 감싼 소녀가 회전문 안에 들어가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뛰어나오더니 두리번거리다 아이들과 메리 포핀스를 발견했어요. 소녀는 기쁜 표정으로 제인과 마이클에게 인사를 했어요. “아, 여기 있었구나. 기다려 줘서 고마워!” “넌 누구지? 이름이 뭐니?” 아이는 제인과 마이클이 자기 이름을 모르는 것에 대해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어요. 소녀는 춤을 추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어요. “오오, 제인과 마이클. 하늘에서만 보던 너희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니. 저기 봐! 저게 플레이아데스란다. 하늘에서 제일 작은 일곱 개의 별이 한데 모여 있어.” 그런데 넌 여긴 왜 왔니?” 제인이 묻자, 메리 포핀스가 대답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왔겠지.” 메리 포핀스의 말에 마이아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어요. “맞았어! 나도 우리 자매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온 거야. 나랑 같이 가서 선물 고르는 것 좀 도와줘.” 그래서 그들은 다시 장난감 가게로 되돌아갔어요. 마이아는 차례차례 자매들에게 줄 선물을 골랐어요. 제인과 마이클도 마이아를 도와주었어요. “너무 늦었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해.”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게에서 나왔어요. “마이아는 자매들의 선물만 샀고, 자기 건 안 샀잖아. 마이아만 크리스마스 선물이 없어.” 제인은 마이아에게 줄 적당한 선물을 찾기 위하여 꾸러미를 뒤적거렸어요. 메리 포핀스는 자신의 예쁜 장갑을 잠시 매만지더니 장갑을 벗어 마이아의 손에 끼워 주었어요. 마이아는 손에 끼워진 큰 장갑을 바라보더니, 메리 포핀스에게 다가가서 뺨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러고는 아이들의 얼굴을 정답게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너희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줘.” 제인과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안녕.” 마이아는 천천히 발돋움을 하더니 하늘로 뛰어올랐어요. 세 사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메리 포핀스의 눈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어요. 만약 메리 포핀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눈물이 고인 거라고 여겼을 거예요. 안녕, 메리 포핀스. 어느새 봄이 찾아왔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뱅크스 씨는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기분 좋게 말했어요. “음,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오는군.” 마이클이 제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어요. “아빠가 하는 말 들었어?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온대.” 제인과 마이클의 머릿속에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어요. 점심 식사 뒤에 걱정스러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제인이 뜰에 있을 때 마이클이 빨간 얼굴로 달려왔어요. 마이클은 나침반을 내밀며 말했어요. “메리 아주머니가 이걸 나에게 줬어. 아주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뭘 준 적이 없었는데.” 마이클이 울음을 터뜨리자, 제안은 문득 불안해졌어요. 사실 이상하게 메리 포핀스는 그날 내내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에게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고, 방을 깨끗하게 정돈했어요. 그러고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제인과 마이클을 두 팔로 안아 주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며 나갔어요. 한참 뒤, 마이클이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지 않아?” 그때, ‘쾅’ 하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어요. 제인과 마이클은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어요. 현관 앞에 메리 포핀스가 처음 뱅크스 씨 집을 찾아왔던 모습 그대로 서 있었어요. 메리 포핀스는 잠시 현관 쪽을 돌아보다가 우산을 펼쳐 들었어요. 바람이 ‘윙’ 소리를 내며 메리 포핀스 쪽으로 불어오더니, 우산을 위로 들어 올렸어요. 메리 포핀스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누나! 메리 아주머니가 떠나고 있어!” 제인과 마이클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어요. “메리 아주머니, 제발 돌아와 주세요!” 그러나 메리 포핀스는 들리지 않는 듯 구름 저편으로 멀어져 갔어요. 아이들은 메리 포핀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 떠날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슬펐어요. 그때, 뱅크스 부인이 급히 올라왔어요. “얘들아, 메리 포핀스가 떠나 버린 것 같구나. 어쩌면 좋니.” 제인과 마이클은 뱅크스 부인에게 안겨 한참 동안 울었어요. 뱅크스 부인이 나가고, 브릴 아주머니가 들어와 방을 정리하다 베개 밑에서 종이 꾸러미를 발견했어요. 제인은 재빨리 그것을 풀어 보았어요. “이건 메리 아주머니를 그린 그림이야.” 그들의 눈은 기쁨으로 빛났어요. “이제 됐어, 메리 아주머니는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키니까.” 제인은 마이클을 침대에 누이고는, 메리 포핀스의 그림을 주며 말했어요. “오늘 밤엔 이 그림 네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제인은 메리 포핀스가 늘 그랬던 것처럼 마이클에게 담요를 푹 덮어 주었어요.
키다리 아저씨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오늘은 수요일이에요. “후유, 정말 끔찍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제루샤는 투덜거리며 고아원 청소를 시작했어요. 매월 첫 번째 수요일이 되면, 제루샤는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후원자들과 위원회 위원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어요. 마룻바닥을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아야 했고, 모든 의자는 먼지 하나 없이 털어야 했어요. 제루샤는 청소가 끝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일일이 씻기고,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빗겨 주었어요. 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어야 했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일은 아이들이 후원자들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대답하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었어요. 제루샤는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가엾게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야 했어요.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와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어요. “아, 드디어 괴로운 수요일도 끝나 가네.” 제루샤는 지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갔어요. “이제 얌전히 내려가서 저녁 식사를 하는 거야. 알았지?” “네!” 맛있는 식사를 할 생각에 신이 난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식당으로 내려갔어요. 식사라고 해야 고작 빵과 우유, 과일이 든 푸딩뿐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후유.” 그제야 제루샤는 한숨을 쉬며 창가로 다가갔어요. 그러고는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땀을 식혔어요. 제루샤는 이날, 새벽부터 신경질적인 리펫 원장님에게 잔소리를 들어 가며 쉴 새 없이 일했어요. "제루샤 애벗, 원장실로 가 봐!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합창 단원인 토미의 노래에 제루샤는 깜짝 놀랐어요. "원장실에서 리펫 원장님이. 화가 잔뜩 난 것 같던데. 아멘!" 개구쟁이 토미가 제루샤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루샤는 더 겁이 났어요. ‘혹시 후원자님이 아이들의 구멍 난 양말을 본 걸까? 아니면 아이들이 후원자님께 버릇없이 군 걸까?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제루샤는 별의별 생각을 다 떠올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아래층의 복도는 컴컴했어요. 제루샤가 계단을 내려갔을 때,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을 막 나서는 남자가 있었어요. ‘누구지? 정말 키가 크구나.’ 그 남자가 손을 흔들자 자동차가 환한 불빛을 비추면서 다가왔어요. 제루샤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러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어요. 기분이 좋아진 제루샤는 웃는 얼굴로 리펫 원장님의 방문을 열었어요. “원장님, 부르셨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리펫 원장님이 상냥하게 웃으며 제루샤를 맞아 주었어요. 마치 후원자들을 대할 때처럼 말이에요. 제루샤는 의자에 앉아 숨을 죽이고 리펫 원장님의 말을 기다렸어요. “네, 뒷모습만 얼핏 보았어요.” “그분이 바로 우리 고아원에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해 주시는 후원자시다. 이름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분도 밝히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니까 말이다.” 제루샤는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네, 그런 것 같군요.” 제루샤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어요. “하지만 오늘 모임에서는 네 장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단다.” 제루샤는 갑자기 귀가 솔깃해졌어요. 그래서 리펫 원장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어요.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누구든 열여섯 살이 넘으면 이곳을 떠나야 한단다. 그런데 너만은 예외였어. 넌 중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고등학교에도 보내 준 거야. 하지만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했으니, 더는 너를 여기에 둘 수 없게 되었어. 그래도 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다른 애들보다 2년이나 더 머물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리펫 원장님은 그 2년 동안 제루샤가 고아원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어요. “게다가 넌 학교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후원자들께서는 그 점에 아주 많은 관심을 보이셨어. 특히 한 분이 네가 쓴 우울한 수요일이라는 글을 무척 맘에 들어 하셨어.” 리펫 원장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루샤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제루샤는 갑자기 주눅이 들어 몸을 잔뜩 움츠렸어요. 지금까지 너를 돌보아 준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 할망정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다니. 생각 같아서는 당장 너를 혼내 주고 싶지만, 좀 전에 나가신 그분이 네 그 버릇없는 작문이 무척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꾹 참고 있는 줄이나 알아. 어쨌든 결론을 말하자면, 그분이 너를 대학에 보내 줄 거라고 하셨다. “저를 대학에 보내 주신다고요?” 그 친절하신 분이 네 학비는 물론이고 넉넉한 용돈까지 보내 준다고 하셨어. 그 대신 너는 매달 그분께 감사의 편지를 쓰면 돼. 편지는 ‘존 스미스 씨’ 앞으로 쓰면 비서가 받아서 전해 줄 거야. 물론 그분의 이름이 존 스미스는 아니지만, 워낙 이름을 밝히길 원하지 않으시니까 너한테만 존 스미스가 되는 거야. 그분이 편지를 쓰라고 하신 데에는 아주 자상한 이유가 있어. 편지를 쓰는 것이 문장력을 기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셨기 때문이야. 너에게 온 행운에 감사해야 해. 아무에게나 오는 행운이 아니니까! 리펫 원장님은 몇 번씩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어요. “네, 원장님. 저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그만 나가 볼게요. 프레디의 찢어진 바지를 꿰매야 하거든요.” 제루샤는 얼른 문을 열고 원장실을 나왔어요. 제루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리펫 원장님은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서 있었어요. 9월 24일, 퍼거슨 기숙사 215호에서 고아를 대학에 보내 주신 친절한 후원자님께. 전 마침내 대학에 도착했어요. 후원자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리펫 원장님은 저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후원자님께 예의 바르게 대하라고 당부하셨어요. 여름 내내 후원자님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했어요. 난생처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시는 분이 생겨서, 마치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은 기분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후원자님이 어떤 분인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세 가지뿐인걸요. 셋째, 여자아이를 싫어한다. 처음엔 “여자아이를 싫어하는 분께”라고 쓸까 했지만, 그러면 저조차 무시하는 것 같아서 관두었어요. 다시 “돈이 많은 분께”라고 쓸까 했지만, 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어요. 이건 그냥 저 혼자 부르는 애칭이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리펫 원장님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이제 곧 밤 10시를 알리는 종이 울릴 거예요. 여기서는 종소리에 맞춰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공부도 해요. 아! 종이 울리네요. 불을 꺼야 해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규칙을 잘 지키는 아이란 생각이 드시지요? 이게 다 고아원에서 교육을 잘 받은 덕분이에요. 아저씨를 가장 존경하는 제루샤 애벗 올림. 저는 이 대학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저는 기숙사 꼭대기에 있는 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같은 층에는 저 말고도 세 명의 여학생이 더 있어요. 안경 쓴 4학년 선배와 들창코가 매력적인 빨간 머리의 샐리 그리고 뉴욕 명문가의 딸인 줄리아예요. 샐리와 줄리아는 같은 방을 쓰고 있는데, 둘은 성격이 무척 달라요. 샐리는 친절하고 다정한데, 줄리아는 새침한 편이에요. 저와 4학년 선배는 각각 독방을 쓰고 있어요. 방이 모자라 신입생에게는 독방을 주지 않는데, 저는 독방을 차지하는 행운을 얻었어요. 저 같은 고아와 한방을 쓰고 싶은 사람이 없었나 봐요. 마음이 좀 아프지만, 오히려 저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18년 동안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한방에서 지내다가 저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되니 무척 행복해요. 아저씨! 정말 신나는 소식이 있어요. 곧 1학년 농구부가 생긴대요. 저는 몸집이 작지만, 날쌔서 뽑힐 것 같아요.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와요.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해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저예요! 아저씨도 제가 농구부에 들어가는 걸 찬성하시지요? 추신 샐리가 제 방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어요. “난 집에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넌 그렇지 않니?” 저는 미소를 띠고 견딜 만하다고 말했어요. 저에게 그런 향수병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고아원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으세요? 그는 중세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유명한 화가래요.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대요. 그런데 제가 ‘미켈란젤로’를 ‘아크에인절’이라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어 대지 뭐예요. 두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지 않나요? 때때로 친구들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저만 모르고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제가 모르는 것을 친구들이 이야기하면, 잠자코 있다가 나중에 백과사전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그래도 전 다른 친구들 못지않게 제가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물건을 살 때, 샐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샐리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 방을 꾸미는 것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샐리는 참 재미있는 친구예요. 하지만 줄리아는 모든 걸 따분해해요. 그 애는 펜들턴 집안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천국에 갈 거라고 믿고 있어요. 정말 기가 막힌 일이죠? 추신 아저씨, 술은 간에 좋지 않다고 배웠어요. 건강을 위해서 술은 입에도 대지 마세요. 아저씨, 제 애칭을 ‘주디’로 지었어요. 애칭을 스스로 지어야 한다니 좀 속상해요. 리펫 원장님은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좀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으시거든요. 제 이름 중 ‘애벗’이라는 성은 전화번호부 첫 페이지에서 찾았고, ‘제루샤’라는 이름은 어느 묘비에서 따왔대요.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이 정말 싫어요. 저는 ‘주디’라는 이름이 마음에 꼭 들어요. 사람들이 저를 ‘주디’라고 부르면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란 소녀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앞으로 저를 ‘주디’라고 불러 주세요. 국어 선생님이 제가 쓴 작문을 보고 독창적이라며 칭찬해 주셨어 요. 고아원에서 제가 받은 교육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에요. 고아원의 목표는 모두를 쌍둥이로 만드는 거였거든요. 제가 자란 고아원을 나쁘게 말한다고 저를 은혜를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저에게 예절을 기대하시면 안 돼요. 고아원은 교양을 교육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요. 친구들은 제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걸 몰라요. 샐리에게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친절한 분이 대학을 보내 주셨다고 말했어요. 그래도 샐리는 여전히 제가 좋대요. 전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친구들과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드디어 농구부에 들어갔어요. 왼쪽 어깨에 멍이 들긴 했지만, 정말 행복해요. 학교생활은 점점 더 재미있어요.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어요. 아저씨는 한 달에 한 번만 편지하라고 하셨는데, 며칠마다 쓰고 있네요. 하지만 새로운 생활들이 꿈만 같아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거든요. 그러니 편지를 자주 보내도 이해해 주세요. 만약 제 편지가 지겨우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세요. 11월 중순까지는 편지를 보내지 않을게요. 아름다운 새 옷을 여섯 벌이나 샀어요. 이게 모두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예쁜 옷들을 많이 가진 줄리아는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전 하늘을 날 듯 무척 기뻐요. 하지만 아저씨도 줄곧 체크무늬 무명옷만 입고 살았다면 제 기분을 이해하실 거예요. 어릴 때, 무명옷보다 더 입기 싫은 옷이 있었어요. 바로 기부 상자에 든 옷들이에요. 한번은 기부 상자에 든 옷을 입고 학교에 갔더니, 옆자리 친구가 자기가 버린 옷을 입었다고 놀리지 뭐예요. 앞으로 평생 비단옷을 입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멋대로 그림을 그렸어요. 회색 눈에, 눈썹은 현관 지붕처럼 툭 튀어나왔고, 입은 양쪽 끝이 약간 내려온 일자 입술로요. 아저씨에 대한 제 결론은 아주 까다로운 성격의 할아버지란 거예요. 앗, 방금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어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아저씨, 저는 스스로 한 가지 약속을 했어요. 밤마다 꼭 책을 읽기로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저는 지금껏 마더 구스, 제인 에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도 읽어 보지 못했고, 모나리자라는 그림도 본 적이 없었으며, ‘셜록 홈스’라는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매일매일 밤이 오기를 기다려요. 책을 읽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거든요. 지금은 작은 아씨들을 읽고 있어요. 우리 학교에서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서 이 책은 저 혼자 몰래 사 왔어요. 지금 밤 10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어요. 다음 주부터는 크리스마스 방학이에요. 그래서 모두 짐을 꾸리느라 야단이에요. 저는 찾아갈 집은 없지만, 멋진 계획을 세워 놓았어요. 가장 큰 계획은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두 읽는 거예요. 책을 읽는 틈틈이 산책하거나, 스케이트도 타며 재미있게 보낼 거예요. 아저씨도 저처럼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바랄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아저씨가 계신 곳에도 눈이 오고 있나요? 여기는 팝콘 같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아저씨가 선물로 보내 주신 금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사실 비단 양말은 줄리아 때문에 산 거예요. 줄리아는 제 방에 올 때마다 비단 양말을 자랑하곤 했거든요. 방학이 끝나면 저도 비단 양말을 신고 줄리아의 방에 가서 자랑할 생각이에요. 저 정말 한심하죠? 이제 이틀만 지나면 친구들이 모두 돌아오겠죠? 빨리 시간이 지나 갔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곳은 너무 쓸쓸해요. 이제 그만 펜을 놓을게요. 2월에 시험이 있거든요. 항상 저를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두 가지 소식이 있어요. 먼저 기쁜 소식부터 전할게요. 제가 드디어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어요. 이제 나쁜 소식을 말씀드려야겠죠? 저, 수학과 라틴어 시험에서 낙제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다음 달에 재시험을 치러야 해요. 아저씨, 실망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전 후회하지 않아요. 그 대신 열일곱 편의 소설과 많은 시를 읽었거든요. 이제부터는 절대로 낙제하지 않도록 할게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 질문에 왜 한 번도 답을 하지 않으세요? 아저씨는 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게 분명해요. 저는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맥 빠지고 힘이 드는지 아세요? 아저씨는 제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고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앞으로는 공부와 성적에 관한 것만 간단하게 쓰겠어요. 라틴어와 수학의 재시험은 지난주에 끝났어요. 물론 두 과목 모두 통과했고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전 정말 나쁜 아이예요. 지난주에 보낸 편지 내용은 부디 잊어 주세요. 그날 밤 저는 아파서 몹시 슬프고 외로웠거든요. 편도선이 붓고, 열이 많이 나서 지금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벌써 육 일째 침대에만 누워 있어요. 오늘에서야 의사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편지를 쓰는 거예요. 저는 앓으면서도 내내 그 편지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요. 아저씨, 제발 은혜를 모르고 고약하게 군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아무래도 전 예의범절부터 다시 배워야 할까 봐요. 사랑하는 키다리 아저씨께. 어제저녁 간호사 언니가 빨간 상자를 저에게 가져다주었어요. 저는 깜짝 놀라 얼른 상자를 열어 봤지요. 그렇게 예쁜 장미는 난생처음 보았어요. 그런데 저에게 더욱더 감동을 준 것은 재미난 글씨로 쓴 카드였어요. 저는 어찌나 행복한지 침대에 엎드려 한참을 엉엉 울었어요.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께서 제 편지를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좀 더 재미있게 쓸게요. 그리고 다시는 귀찮게 이것저것 묻지 않을게요. 그런데, 아저씨는 아직도 여자아이를 싫어하세요? 얼마 전 리펫 원장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원장님은 제가 대학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범적으로 생활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번 여름 방학 때 고아원에 와서 일을 도우라고 하셨어요. 저는 존 글리어 고아원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으로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농장이라고요? 아, 제 마음은 이미 푸르른 농장의 앞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어요.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농장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고아원으로 돌아가 여름 내내 접시나 닦을 줄 알았는데. 아, 그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이렇게 기쁜 마음을 작은 쪽지에 간단히 써서 정말 죄송해요. 사실 지금은 프랑스어 시간이거든요. 설레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수업 시간에 몰래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초여름을 맞은 이곳은 마치 천국 같아요. 나무들은 저마다 예쁜 꽃을 자랑하고, 작은 언덕에는 싱싱한 녹색 풀이 자라 있어요. 모두 즐거운 표정이에요. 머지않아 방학이 시작되거든요. 시험 걱정도 모두 잊어버렸나 봐요. 아저씨, 지금 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요. 참, 오늘은 줄리아의 삼촌인 저비스 씨가 왔어요. 아저씨처럼 키가 아주 큰 분이었어요. 우리는 학교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아주 즐겁게 지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줄리아와 샐리 그리고 저에게 초콜릿 상자가 배달되었거든요. 저비스 씨가 보낸 것이었어요. 남자에게 초콜릿 선물을 받다니! 마치 숙녀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아저씨도 언젠가 우리 학교에 오셔서 저와 함께 차를 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드디어 마지막 시험이 끝났어요. 이제 농장으로 갈 일만 남은 거예요. 석 달 동안의 자유, 야호! 농장은 어떤 곳일까, 벌써 궁금한 게 아주 많아요. 전 아직도 이번 여름을 고아원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무서운 리펫 원장님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말이에요. 아저씨, 이제 짐을 챙겨야겠어요. 책, 접시, 쿠션 등등 챙겨야 할 짐이 꽤 많거든요. 지금 막 농장에 도착했어요. 이곳은 마치 천국 같아요. 그림 솜씨가 좋다면 이곳의 멋진 풍경을 다 보여 드릴 수 있을 텐데. 정말 아쉬워요. 제 방에는 커다란 책상이 있는데, 거기서 여름 내내 소설을 쓰며 보낼 생각이에요. 제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샘플 씨 부부는 제가 말을 할 때마다 무척 즐거워하시거든요. 아저씨, 오늘은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아요. 제게 이토록 멋진 일이 일어나다니!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 은혜에 보답할게요. 아저씨도 응원해 주세요. 아저씨, 어쩜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죠? 제가 전에 말씀 드린 줄리아의 삼촌 저비스 씨 기억나시죠? 글쎄, 그 저비스 씨가 예전에 이 농장의 주인이었다지 뭐예요. 저비스 씨의 유모였던 샘플 부인이 농장을 물려받은 거래요. 제가 그분을 안다고 하자, 샘플 부인은 더욱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농장 생활은 점점 더 즐거워지고 있어요. 어제는 건초를 나르는 마차도 타 보았어요. 농장에는 큰 돼지 세 마리랑 아홉 마리의 새끼 돼지가 있는데, 어찌나 잘 먹는지 정말 돼지다워요. 병아리와 오리, 칠면조, 닭도 있어요. 저는 매일 달걀 모으는 일을 돕고 있어요. 어제는 암탉을 쫓다가 대들보에서 떨어져 무릎이 좀 까졌어요. 샘플 부인은 저의 까진 무릎에 약초를 바르며 말씀하셨어요.“옛날에 저비 도련님도 그 대들보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쳤었는데. 그게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에요.” 정말 재미있는 우연이죠? 참, 송아지들에게 이름도 지어 주었어요. 실비아(숲에서 태어난 송아지), 레스비아(카툴루스의 시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을 땄어요.), 샐리와 줄리아(특징이 없는 얼룩 송아지), 주디(제 이름을 땄어요.)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착한 송아지예요. 혹시 기분 나쁘지 않으시죠?). 그런데 아직 소설은 한 줄도 쓰지 못했어요. 농장 일이 너무 바쁘거든요. 다락방에서 길 위에서라는 책을 발견했어요. 첫 장에 어린아이가 쓴 글이 있어요. “이 책이 돌아다니고 있으면 뺨을 때려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저비.” 저비스 씨는 열한 살 때쯤 이곳에서 여름을 보냈대요. 그때 이 책을 놓고 갔나 봐요.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손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어요. 다락방 구석에는 물레방아와 풍차 그리고 활과 화살도 있었어요. 샘플 부인이 틈만 나면 그분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저비스 씨가 여기 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예요. 저비스 씨는 어릴 때도 모험을 좋아하고 용감하고 정직했었나 봐요. 이제 전 2학년이에요. 농장에서는 지난주 금요일에 돌아왔어요. 농장을 떠나는 건 슬펐지만, 학교에 다시 오게 되어 무척 기뻐요. 아저씨, 놀라운 소식이 있어요. 제가 샐리와 줄리아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어요. 지난봄에 샐리와 한방을 쓰기로 약속했었는데 줄리아가 샐리와 떨어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지 뭐예요. 그래서 결국 셋이 함께 지내게 된 거예요. 아무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아원에 있던 제가 펜들턴 집안의 아이와 같은 방을 쓰다니, 정말 놀랍죠? 이번에 샐리는 학급 대표 선거에 후보로 나갔어요. 우리가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하고 있으니 꼭 당선될 거예요. 저는 지금 화학, 논리학과 세계사,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배우고, 프랑스어도 배우고 있어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몇 년 안에는 아주 똑똑한 주디가 되어 있을 거예요. 드디어 샐리가 학급 대표에 당선되었어요. 우리는 “맥브라이드 만세!”라고 쓴 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횃불 행진을 했어요. 샐리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저도 유명 인사가 되었어요. 괜히 제 어깨가 으쓱해지는 거 있죠? 안녕히 주무세요.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 때 샐리에게 초대를 받았어요. 참 좋은 친구죠? 샐리의 집은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 있대요. 빨리 가 보고 싶어요. 샐리네 가족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요. 크리스마스 때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어요. 좀 더 빨리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샐리네 집에서의 하루하루가 무척 즐거워서 책상 앞에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샐리네 가족들은 정말 다정해요. 특히 식사 시간은 얼마나 유쾌한지 몰라요. 모두 함께 이야기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하지요. 크리스마스 이틀 후에 저를 위한 무도회가 열렸어요. 저는 흰 드레스에 흰 장갑을 끼고, 흰 비단 구두도 신었어요. 그리고 지미 오빠와 함께 춤을 추었어요. 오늘 오후에 줄리아의 삼촌이 기숙사로 찾아오셨어요.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들고 말이에요. 줄리아와 한방을 쓰니,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네요. 저는 저비스 씨에게 지난여름 농장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해 드렸어요. 줄리아는 삼촌이 상냥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어요. 어머나! 지금 밖에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어요. 아마 오늘 밤에는 교회까지 헤엄쳐서 가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정말 행복해요. 제가 쓴 단편 소설이 교내 잡지 공모전에 뽑혔어요. 겨우 2학년인 제가 당당히 뽑힌 거예요. 드디어 제가 작가가 되려나 봐요. 그리고 봄에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에서 배역도 받았어요. 또, 금요일에는 샐리와 줄리아와 함께 뉴욕에 가기로 했어요. 저비스 씨가 우리를 초대해 주셨거든요. 그곳에서 연극 햄릿을 볼 예정이에요. 한 달 동안 햄릿에 대한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대사를 완벽히 외우고 있어요. 뉴욕에 갈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설레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세상은 참 즐거운 곳이에요. 뉴욕은 정말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였어요. 혹시 아저씨도 복잡한 도시에서 살고 계시나요? 놀랍고 신기한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토요일 아침에는 샐리, 줄리아와 함께 상점에 갔어요. 줄리아는 모자를 열두 개도 넘게 써 보더니, 예쁜 모자 두 개를 골라 샀어요. 모자값에 대한 걱정 없이 어떤 모자든 골라 살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아무튼, 화려한 거리와 개성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재미있었고, 저비스 씨와 함께 간 식당도 훌륭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연극이었어요. 햄릿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어요. 셰익스피어는 정말 위대한 작가인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 있어요. 아저씨만 허락하신다면 작가보다 배우가 되고 싶어요. 만약 제가 유명한 배우가 된다면, 공연하는 연극마다 아저씨를 제일 좋은 자리에 모시고 싶어요. 참, 저비스 씨가 커다란 꽃다발을 보내 주셨어요. 후원자님들만 봐서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보내 주신 50달러 수표는 다시 돌려보냅니다. 용돈만으로도 모자를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쓸데없이 모자 가게 이야기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어제 보내 드린 편지를 용서해 주세요. 편지를 부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아저씨께서 좋은 마음으로 보내 주신 수표인데, 제가 버릇없이 굴어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수표는 돌려드려야 했어요. 전 다른 아이와 다르니까요. 언젠가 아저씨께 은혜를 꼭 갚고 싶어요. 그러니 필요 이상의 돈을 받을 수 없어요. 때때로 버릇없이 굴지만, 그건 제 진심이 아니에요. 늘 아저씨께 고마워하고 있어요. 지난주 토요일에는 체육 대회가 열렸어요. 샐리와 저는 육상 대회의 선수로 뽑혀서 샐리는 장대높이뛰기에서, 저는 달리기에서 1등을 했어요. 결승점에서는 숨이 차서 몹시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열심히 응원을 해 주어서 마지막까지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어젯밤에는 늦게까지 제인 에어를 읽었어요. 어린 제인이 자선 학교에서 고생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너무나 화가 나서, 바깥에 나와 산책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어요. 제인의 마음이 어땠을지 저는 잘 알고 있거든요. 고아원과 자선 학교의 반복되는 생활은 비슷한 것 같아요. 아저씨, 저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상상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야 친절한 마음과 이해심을 가지게 되니까요. 어떤 일이든 아이 스스로가 좋아서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길러 주는 행복한 고아원을 세우고 싶어요. 앗, 예배 종이 울렸어요. 또 편지 쓸게요. 행복한 일이 생겼어요. 저는 이번 여름 방학 때, 샐리네 별장에 초대받았어요. 호수에서 카누도 타고, 오솔길을 따라 산책도 하고 무도회에도 갈 거예요. 참, 샐리의 오빠 지미가 대학 친구 하나를 데려와서 같이 여름을 보낼 거라네요.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여름 방학이 무척 기대되어요. 벌써 샐리와 함께 책을 읽을 계획을 다 짜 두었어요. 또 지미 오빠가 승마와 카누 젓는 법 그리고 사격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어요. 아저씨, 제발 허락해 주세요. 꼭 가고 싶어요. 꼭이요. 7일에 보내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비서를 통해 받은 지시대로 다음 주 금요일에 록 윌로우 농장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편지를 쓴 지 꽤 오래되었네요. 솔직히 저는 여름 내내 아저씨를 미워하고 있었어요. 샐리네 별장에 못 가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몰라요. 만약 제가 아저씨였다면 자상한 말로 보내 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는 비서를 통해 록 윌로우 농장으로 가라는 무뚝뚝한 글 한 줄만 보냈을 뿐이었지요. 저는 무척 화가 났어요. 그래서 한동안 편지를 쓸 수가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아저씨가 저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을 생각하면서 기분을 풀기로 했어요. 이제 다시 예전의 명랑한 주디로 돌아갈 거예요. 이번 여름에는 소설을 계속 쓸 생각이에요. 벌써 단편 소설을 네 편이나 써서 여러 잡지사로 보냈어요. 며칠 안으로 더 재미있는 농장 소식을 전해 드릴게요. 아저씨, 굉장한 소식이 있어요. 글쎄, 저비스 씨가 록 윌로우 농장으로 오신다지 뭐예요. 모두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커튼도 몽땅 빠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어요. 하지만 저비스 씨는 언제 온다고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으셨나 봐요. 그냥 한두 주일 정도 머문다고만 하셨대요. 그래서 농장 사람들은 밥을 먹다가도, 일하다가도 자동차 소리만 나면 번개같이 밖으로 뛰어나가곤 해요. 마음을 졸이고 있는 녀석이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저비스 씨를 마중 나갈 마차에 매어 놓은 말인 그로버예요. 저 혼자 마차를 몰고 갈 거예요. 그로버는 얌전한 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드디어 저비스 씨가 농장에 오셨어요. 우리는 무척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그분은 보면 볼수록 참 다정한 분 같아요. 농부들에게도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요즘 저는 저비스 씨와 함께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하고 있어요. 시골길을 산책하기도 했고, 깃털로 만든 낚싯대로 물고기도 잡았어요. 그리고 총 쏘는 법과 말 타는 법도 배웠어요. 월요일 오후에 저비스 씨와 가까운 산에 올라갔어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저녁도 지어 먹었어요. 저비스 씨가 요리를 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은은한 달빛 아래 산에서 내려왔어요. 돌아오는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저는 저비스 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저비스 씨는 제가 읽은 책은 물론이고, 다른 책까지 아주 많이 읽으셨더라고요. 오늘 아침에 우리는 멀리 산책하러 나갔다가 소나기를 만났어요. 옷이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음만은 보송보송했어요.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샘플 부인은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어요. “아이고! 둘 다 흠뻑 젖었네. 이를 어째!”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요. 우리는 어린아이 같았고, 샘플 부인은 속상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 같았어요. 지금은 일요일 밤, 11시쯤 된 것 같아요. 오늘 아침, 샘플 부인이 저비스 씨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어요. “저비 도련님, 오전 11시에 교회에 도착할 수 있도록, 적어도 10시 15분에는 출발해야 해요.” 하지만 저비스 씨는 저를 데리고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가 낚시를 하러 갔어요. 나중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요. 샘플 부인은 우리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도 않고 낚시를 갔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고 계세요. 그리고 저비스 씨를 어렸을 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셨어요. 어쨌든 우리는 직접 잡은 물고기를 모닥불에 구워 맛있게 먹었어요. 슬슬 잠이 오네요. 아저씨,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지금 몹시 우울해요. 저비스 씨가 뉴욕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빨리 정신을 차려야겠어요. 방학이 이 주일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번 여름 방학에는 단편 소설 여섯 편과 시 일곱 편을 썼어요. 비록 잡지사에 보낸 작품들은 모두 정중한 답장과 함께 되돌아왔지만, 저는 실망하지 않아요. 그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요. 저비스 씨가 여기 계시는 동안, 제 작품들을 읽어 보더니 모두 엉터리라고 했어요.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나요? 그 말이 조금 섭섭했지만, 저비스 씨는 진실을 말할 때는 예의를 차리지 않는 분이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나마 맨 나중에 쓴 작품은 괜찮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대학 생활을 소재로 쓴 소설인데, 잡지사에서 아직 돌려보내지 않는 걸 보니,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저씨, 축하해 주세요. 오늘 두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제 소설이 50달러에 팔렸다는 내용이었어요. 드디어 제가 작가가 된 거예요. 다른 한 통은 대학교에서 보낸 것으로, 앞으로 2년 동안 장학금을 받게 된다는 소식이 들어 있었어요. 아저씨의 부담을 덜어 드리게 돼서 정말 기뻐요. 이제 매달 용돈만 보내 주시면 되니까요. 그리고 용돈도 소설을 쓰거나 가정 교사를 해서, 차츰 저 혼자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학교로 돌아갈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3학년이 되었어요. 올해 우리가 사용할 방은 작년보다 더 훌륭한 것 같아요. 참, 아저씨의 비서가 보낸 편지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장학금을 받지 말라고 하셨는지 꼭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장학금은 이미 받았어요. 아저씨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는 몰라도 저는 장학금을 반납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는 아직도 제가 장학금을 받은 것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저씨처럼 고집쟁이인 사람은 처음이에요.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잘못이라면, 아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저는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걸요. 아니,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이 더 맞을 거예요. 장학금은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결과예요. 그래서 저는 결코 장학금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아저씨가 계속해서 반대하신다면, 용돈도 받지 않고, 과외를 해서라도 스스로 해결하겠어요. 이런 저를 건방지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세요. 줄리아가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 때 자기 집에 초대했어요. 그 애가 왜 저를 초대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들어 줄리아는 저에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어요. 전 펜들턴 집안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면 벌써 주눅이 들어요. 만약 아저씨가 예전처럼 가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이번 학기에는 경제학을 선택했어요. 경제학 공부가 끝나면 ‘자선과 개혁’ 과목을 공부할 생각이에요. 앞으로 고아원을 운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줄리아네 집을 방문하는 일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허락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지난주에는 개교기념일 무도회가 있었어요. 3, 4학년만 참석하는 파티여서, 올해 처음으로 참석한 거예요. 저는 지미 오빠를 초대하여 함께 멋진 춤을 추었는데,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었어요. 다음 날에는 합창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 합창곡의 가사를 쓴 사람이 누굴까요? 네, 바로 저예요. 어리기만 하던 제가 점점 유명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어요! 참, 지미 오빠와 친구로부터 내년에 있을 프린스턴 대학의 무도회에 초대받았어요. 꼭 가겠다고 했으니, 제발 반대하지 말아 주세요. 기분이 무척 좋아서 분홍색 드레스도 미리 한 벌 사 두었어요. 최근에 알게 된 비밀을 알려 드릴까요? 저를 허영심 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실 거죠? 아저씨가 보내 주신 따뜻한 털 코트와 아름다운 목걸이, 화려한 스카프, 손수건, 책 모두 마음에 쏙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저씨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아저씨, 저에게 지나치게 과분한 선물은 보내 주시지 마세요. 제가 이런 선물들로 들떠서 공부하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이제야 해마다 고아원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주시고, 일요일이면 아이스크림을 보내 주신 분이 누구였는지 알 것 같아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상한 마음씨로 미루어 볼 때, 그분은 바로 키다리 아저씨가 틀림없어요.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저도 작은 선물을 보내요. 뉴욕에 있는 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줄리아네 집은 매우 훌륭했고, 가족들도 교양 있고 훌륭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그런 집안의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게 느껴졌어요. 특히, 줄리아의 어머니는 샐리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분이셨어요. 그분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보석과 드레스, 파티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줄리아네 식구들은 어쩐지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어요. 저를 초대해 주신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이 이야기는 아저씨와 저만 알고 있는 비밀이에요. 저비스 씨는 차를 마시는 시간에 딱 한 번 만났어요. 작년 여름에는 함께 무척 즐겁게 보냈는데, 올해에는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어요. 다시 학교로 돌아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저씨,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은 경주하듯 앞만 보며 달리는 것 같아요. 멋진 경치들은 모두 놓쳐 버리고 말이에요. 저는 유명한 작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해요. 안 된다고 하실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학교에 허락도 받고, 샐리 어머니께서 함께 가 주셨어요. 모처럼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어요. 아저씨는 이 그림이 무엇 같아 보이세요? 대롱대롱 매달린 거미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수영을 배우고 있는 저의 모습이에요. 수영 선생님이 저의 허리띠 뒤쪽에 있는 고리에 밧줄을 걸어서, 천장에 있는 도르래에 연결해 놓으셨거든요. 저는 선생님이 줄을 놓으면 어쩌나 내내 조마조마했어요. 그래서 저는 한쪽 눈으로는 선생님을 보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는 팔을 보며 수영 연습을 했어요. 일주일 뒤 이 편지는 벌써 다 썼어야 했는데, 아직도 다 쓰지 못했어요. 아저씨, 제가 꼬박꼬박 편지를 드리지 못해도 화내지 마세요. 저는 아저씨께 편지를 쓰는 것이 아주 즐거워요. 아저씨, 저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둘이나 더 생겼어요. 지난겨울부터 저비스 씨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어요. 그리고 매주 지미 오빠에게서도 편지를 받아요. 저녁 식사 종이 울리고 있네요. 식당으로 가는 길에 이 편지를 꼭 우체통에 넣을게요. 내일부터 시험이에요. 할 일이 많지만, 곧 다가올 즐거운 방학을 생각하고 힘을 내기로 했어요. 줄리아와 샐리는 벌써 방학 계획을 세우느라고 야단이에요. 줄리아는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하고, 샐리는 별장에서 지낼 거래요. 저는 찰스 부인의 집에 가려고 해요. 그 댁 딸들의 공부를 봐 주기로 했거든요. 찰스 부인은 샐리 어머니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아주 명랑하고 재미있는 분이에요. 9월 초쯤에는 록 윌로우 농장으로 가서 남은 방학을 보낼 생각이에요. 샘플 씨 부부와 동물들이 많이 보고 싶거든요. 아저씨도 즐겁게 보내세요. 이렇게 편지 쓰기가 어려운 적은 처음이에요. 저는 올여름에 저를 유럽으로 보내 주시겠다는 아저씨의 제안을 듣고 정말 뛸 듯이 기뻤어요. 하지만 많은 고민 끝에, 거절하는 편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학비도 거절한 제가 놀러 가기 위해 돈을 받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저씨, 저는 사치스럽고 철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올여름에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립의 첫걸음을 내딛고 싶어요. 저비스 씨는 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아저씨의 도움으로 제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비스 씨에게 제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까지는 털어놓지 못했어요. 아무튼, 저비스 씨는 제가 유럽에 가야 한다고 아주 강하게 말했어요. 그분이 강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설득을 당했을 거예요. 결국, 우리는 말다툼까지 하고 말았어요. 그 뒤로 저는 짐을 싸서 찰스 부인의 집으로 와 버렸어요. 저는 여기서 찰스 부인의 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여름이 가고 있어요. 오전에는 찰스 부인의 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산책도 하고, 물결이 잔잔한 날이면 수영도 해요.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저비스 씨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방학이 끝나기 전에 록 윌로우 농장으로 놀러 오실 거래요. 하지만 저는 샐리네 별장에 가기로 했어요. 저비스 씨는 자기가 농장에 간다고 했으니까 저도 분명히 농장에 와 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요? 이제 저는 4학년이 되었어요. 그리고 학교로 돌아온 저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놀라지 마세요. 글쎄, 제가 교내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지 뭐예요. 축하해 주실 거죠? 참, 학교로 저비스 씨의 편지가 와 있었어요. 친구들과 요트를 타러 가기로 해서 록 윌로우 농장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아마 록 윌로우 농장으로 편지를 보냈었는데, 제가 없어서 학교로 되돌아온 것 같아요. 오늘은 아저씨의 위로가 꼭 필요해요. 그동안 틈틈이 쓴 장편 소설을 출판사에 보냈었는데, 몇 개월 만에 그냥 되돌아왔지 뭐예요. 출판사에서 보낸 편지와 함께요. 학생 시절에는 공부나 열심히 하고, 졸업한 뒤에나 글을 쓰라는 내용이었어요. 졸업하기 전에 훌륭한 소설을 써서 아저씨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참 속상해요. 저는 원고 뭉치를 난로 속에 집어넣었어요. 원고들이 활활 타들어 갈 때,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어느 책방에 들어갔는데, 점원이 주디 애벗의 생애와 편지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주었어요. 빨간 천으로 둘러싸인 책이었는데, 표지에는 존 글리어 고아원의 그림이 있었고, 속표지에는 제 사진이 있었어요. 그리고 “진정으로 당신의 것인 주디 애벗”이라는 서명도 있었어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려는 순간, 저는 꿈에서 깨고 말았어요. 조금만 늦게 깼더라면, 제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안타까웠어요. 참, 제가 보내 드린 넥타이가 너무 울퉁불퉁해서 죄송해요. 직접 짠 거라서 그래요. 추운 날, 목에 매고 외투 단추를 맨 위까지 채우면 괜찮을 거예요.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분이세요. 그리고 가장 바보 같은 분이기도 해요. 새해에도 행운이 함께하길 바라며, 샐리네 별장에서 뜯어 온 네잎클로버를 보내요. 그런데 아버지는 폐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고,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기도만 드리고 있대요. 게다가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어요. 아저씨는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제일 부자시잖아요. 제발 그 아가씨를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새로 쓴 소설이 또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에요. 어제 제가 말씀드린 가족에게 줄 수표를 받았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전 체육 시간까지 빼먹고 그 가족들에게 달려갔어요. 아가씨네 가족들이 흘린 감격의 눈물을 아저씨께 전해 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글을 쓰느라 손가락이 아파서 아주 짧게 쓸게요. 드디어 삼 주 뒤면 졸업식이에요. 졸업식에 오셔서 축하해 주실 거죠? 줄리아는 저비스 씨를, 샐리는 지미 오빠를 초대했어요. 아저씨, 저의 졸업식에 꼭 와 주세요. 아저씨 덕분에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어요. 언젠가는 아저씨의 인자한 얼굴을 꼭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제 포기해야 할까 봐요. 아저씨는 졸업식조차 와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어쨌든 보내 주신 장미 꽃다발은 잘 받았어요. 지금은 농장에 와 있어요. 아마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게 될 것 같아요. 여기는 물가도 싸고, 조용해서 글을 쓰기에 좋은 곳이거든요. 저는 요즘 소설에 대한 것만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저비스 씨가 8월에 이 주일 정도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래요. 지미 오빠도 여름에 한번 들르기로 해서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저씨도 여기에 오시면 좋겠지만, 이젠 바라지 않아요. 졸업식에 오시지 않았을 때, 전 그런 기대를 제 마음속에서 도려내어 영원히 묻어 버렸거든요. 아저씨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저비스 씨가 찾아와도, 지미 오빠와 즐겁게 지내도 쓸쓸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요.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이제 록 윌로우에 있기가 힘들어요. 뭔가 변화가 필요해요. 그래서 샐리를 따라 보스턴으로 가기로 했어요. 낮에는 소설을 쓰고, 밤에는 샐리와 이야기를 나누면 텅 빈 마음을 달랠 수 있겠죠? 오늘 아침에 아저씨께서 직접 쓰신 편지를 받았어요. 많이 아프시다고요? 죄송해요.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런 쓸쓸한 편지는 쓰지 않았을 거예요. 참, 1,000달러짜리 수표를 함께 보낼게요. 드디어 제가 쓴 소설이 팔렸거든요. 얼마 후면 책으로 나올 거예요. 기쁘게 받아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고민 좀 들어 주세요. 전 저비스 씨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요. 우리는 모든 면에서 생각이 같아 이야기가 잘 통해요. 저보다 나이가 열네 살이나 많지만,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모습도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낯선 곳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저비스 씨가 더욱 그리워요. 하지만 저는 그분의 청혼을 거절했어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었어요. 그러자 그분은 제가 지미 오빠를 좋아해서 그러는 줄 알고 그길로 떠나 버렸어요. 사실은 저비스 씨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절한 거였는데 말이에요. 고아인 제가 저비스 씨와 결혼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았거든요. 또 작가가 되기로 한 아저씨와의 약속도 지키고 싶었고요. 저비스 씨가 떠난 지 두 달 만에 줄리아의 편지에서 저비스 씨의 소식을 들었어요. 저비스 씨가 사냥을 갔다가 폭우를 만나 폐렴에 걸렸대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아저씨,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너무 놀랍고 행복해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조차 없었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잘 주무셨기를 바랄게요. 빨리 나아야 제 곁으로 오실 수 있잖아요.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아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제 의사 선생님이 사흘 동안 아저씨가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었다고 전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얼른 나아서 함께 있고 싶어요. 아직도 꿈을 꾼 게 아닌지 두려워요. 어제는 제 평생 가장 멋진 날이었어요. 아저씨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어요. 아저씨 댁에 도착했을 때는 집이 너무 크고 아름다워서 안으로 들어가기조차 겁이 났어요. 집사를 따라 서재로 들어섰을 때, 처음에는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잠시 뒤,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말없이 저를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그는 바로 당신, 저비스 씨였어요. 아저씨가 저를 놀라게 해 주려고 저비스 씨를 부른 줄 알았어요. 당신은 멍하게 서 있는 저에게 살며시 다가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아저씨? 저비스 씨? 저비? 당신이 정말 그리워요. 하지만 이건 행복한 그리움이에요. 우리는 곧 만날 테니까요. 앞으로 단 한순간도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평생 처음 써 보는 연애편지예요. 제가 연애편지를 쓰게 되다니, 정말 재미있죠?
피터 팬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피터 팬이 나타나다. 런던 14번지에 웬디라는 소녀가 아빠,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웬디는 귀엽고, 똑똑해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어요. 웬디의 엄마는 웬디를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귀여운 웬디! 엄마는 네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귀여운 아기였으면 좋겠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웬디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어요. ‘나도 어른이 되기 싫어.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지금처럼 엄마의 귀여움도 듬뿍 받지 못할 거야.’ 하지만 세월이 흘러 웬디도 어느새 아홉 살의 소녀가 되었어요. 웬디에게는 개구쟁이 남동생 존과 마이클도 생겼어요. 또 웬디네 집에는 ‘나나’라고 불리는 영리한 개도 한 마리 있었어요. 엄마는 언제나 다정하고 사랑이 넘쳤어요. 아빠는 고집이 센 편이었지만, 삼 남매를 무척 사랑했어요. 삼 남매는 모두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숨바꼭질이나 공놀이하다가 싫증이 나면, 셋이 ‘네버랜드’ 이야기를 했어요. ‘네버랜드’는 신나는 모험이 가득한 섬이었어요. 그곳에는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요정들과 인어들이 있었고, 바다에는 무시무시한 해적선도 떠 있었어요. “아, 네버랜드에 가면 얼마나 멋질까?” 네버랜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어요. “네버랜드에는 피터 팬이 산단다.” 어느 날, 존과 마이클이 한창 네버랜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웬디가 말했어요. “피터 팬, 그게 누군데?” 존과 마이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 “응, 네버랜드에 사는 용감한 아이야.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웬디는 피터 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요. 옆에서 웬디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가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어요. “내가 어릴 적에 너희 할머니한테 들은 피터 팬은 지금쯤 어른이 되었을 텐데.” “아니에요, 피터 팬은 나와 키도 똑같아요. 그리고 나이도 같은걸요.” 웬디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엄마는 웬디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엄마는 어린이는 누구나 자라면 어른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청소하기 위해 아이들의 방에 들어간 엄마는 방바닥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창문이 닫혀 있는데 웬 나뭇잎이 여기까지 날아왔을까?” “아, 그건 아마 피터 팬이 떨어뜨리고 간 걸 거예요!” “무슨 말이니, 웬디?” “피터 팬은 매일 밤 나를 찾아와요. 어젯밤에도 내 침대 끝에 앉아 피리를 불어 주었어요.” 웬디는 실제로 본 것처럼 신이 나서 말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그 말을 믿을 리 없었어요. “밤중엔 문이 잠겨 있는데 어떻게 들어온단 말이니? 혹시 꿈이라도 꾼 거 아니니?” 그날 밤, 엄마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이들 곁에 함께 있기로 했어요. 나나는 산책이라도 하라고 밖으로 내보냈어요. 엄마는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난롯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때, 바람이 휙 불며 창문이 열리더니 한 소년이 방으로 훌쩍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소년 옆에는 동그랗게 생긴 눈부시게 밝은 불빛이 이리저리 날아다녔어요. 엄마는 잠결에 퍼뜩 놀라 소년을 바라보았어요. 넌 누구니?” 그때 ‘꽝’하고 문이 열리면서 산책에서 돌아온 나나가 쏜살같이 달려 들어왔어요. 나나가 으르렁거리며 소년에게 덤벼들자, 소년은 창밖으로 훌쩍 도망쳐 버렸어요. 엄마는 깜짝 놀라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맥이 풀린 엄마가 돌아보니 나나가 검고 축 늘어진 것을 입에 물고 있었어요. 그것은 소년의 그림자였어요. 엄마는 그림자를 돌돌 말아서 서랍장에 넣어 두었어요. 그리고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소년은 바로 네버랜드에 사는 피터 팬이었어요. 피터 팬이 웬디네 집에 그림자를 남기고 간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어요. 엄마와 아빠는 친척의 초대를 받아 멋진 옷을 차려입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아이들만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불안해서 아이들 방으로 올라갔어요. “얘들아, 밤이 깊었으니 어서 자라! 창문을 꼭꼭 닫고.” “싫어요, 엄마. 잠이 안 오는걸요.” 감기에 걸린 마이클이 칭얼거렸어요. 엄마는 약봉지와 물을 갖다 놓으면서 마이클의 등을 다독거렸어요. 그때, 아빠가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뛰어 들어왔어요. “넥타이를 도무지 맬 수가 없단 말이야.” “내가 제대로 매 줄게요.” 엄마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아빠의 넥타이를 멋지게 매어 주었어요. 아빠는 넥타이가 아주 멋지게 매어졌기 때문에 금세 흐뭇한 표정이 되었어요. 엄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다시 마이클에게로 다가갔어요. 그런데 그때, “아야!” 하는 아빠의 비명이 들렸어요. 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만 아빠와 ‘꽝’하고 부딪친 거예요. 아빠의 새 바지에 나나의 긴 털이 뿌옇게 묻었어요. “이 몹쓸 개 같으니라고! 내가 가장 아끼는 양복이 엉망이 되었잖아!”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나를 정원으로 쫓아내 버렸어요. 엄마는 아빠의 바지에 묻은 털을 털며 말했어요. “그렇지만 나나는 애들을 무척 잘 돌보는걸요. 전에 이상한 소년이 창문으로 들어왔을 때도 나나가 나타나서 도와주었어요. 나나가 달려들어 소년의 그림자를 붙잡았다고요.” 엄마가 나나의 영리함을 자랑했지만, 아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할 수 없이 서랍장에서 피터 팬의 그림자를 꺼내 보였어요. 그제야 아빠도 깜짝 놀라 축 늘어진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어요. “이상하다. 이런 아이는 본 적이 없는데. 어디에 사는 장난꾸러기일까?” 엄마와 아빠는 아이들이 잠이 들자 집을 나섰어요. 늦은 밤,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이 서로 무언가를 수군대는 듯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환해졌어요. 그러더니 하늘에서 별 하나가 웬디네 집으로 떨어졌어요. 그러나 그것은 별이 아니라 피터 팬과 요정 팅커벨이었어요. 피터 팬과 팅커벨은 지난번에 잃어버린 피터 팬의 그림자를 찾으러 온 거예요. “어디 있지? 내 그림자를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피터 팬에게 팅커벨이 옷장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혹시 저 커다란 상자 속에 있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랍장 속을 차례차례 뒤지기 시작했어요. “야, 여기 있다. 찾았어!” 피터 팬은 기뻐서 깡충 뛰어올랐어요. 그러나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 서랍장 속에 있는 팅커벨을 잊어버리고 서랍을 닫아 버리고 말았어요. 피터 팬은 그림자를 자기 몸에 붙이려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잘 붙지 않았어요. 더럭 겁이 난 피터 팬은 욕실에서 가져온 비누를 칠해서 그림자를 몸에 붙이려고 했어요. “그림자가 붙지 않아. 어떡하면 좋지?” 피터 팬은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어요. 피터 팬의 울음소리에 웬디가 잠에서 깨어났어요. “넌 누구니?” 웬디가 눈을 비비며 친절하게 물었어요. “난 피터 팬이야.” “난 웬디야. 네가 사는 곳은 어디에 있니?” 오른쪽으로 돌아 두 번째, 다음 아침이 올 때까지 똑바로.” 피터 팬의 말에 웬디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뭐 그런 이상한 주소가 다 있어? 사람들이 편지 봉투에 그렇게 써?” “난 편지를 받아 본 적 없어.” “너희 엄마는 편지를 받은 적 있을 거 아냐?” “난 엄마 없어.” 웬디는 안됐다는 듯 피터 팬에게 다가갔어요 “아, 그래서 울고 있었구나.” 그러자 피터 팬은 화를 내며 말했어요. “아니야, 그림자가 몸에 안 붙어서 운 거야.” 웬디는 바닥에 있는 그림자를 보더니 받짇고리를 꺼내 왔어요. 그러고는 피터 팬의 발에 그림자를 꿰매어 붙였어요. “와! 정말 붙었네. 정말 붙었어! 난 정말 똑똑해.” 피터 팬은 기뻐서 온 방 안을 겅중겅중 뛰어다녔어요. 웬디 덕분에 그림자가 붙은 사실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어요. 웬디는 어이가 없어서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했어요. “흥! 나야 뭐 도와준 게 있나?” “응, 그저 조금 도와주었을 뿐이지.” “어머! 조금이라고? 좋아,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 웬디는 기분 나쁜 얼굴로 침대에 뛰어들어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썼어요. 피터 팬은 침대맡에 앉아 발로 웬디를 툭툭 쳤어요. 웬디가 꿈쩍도 하지 않자 피터 팬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웬디, 잘못했어. 사실은 네가 스무 명의 남자아이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 웬디는 피터 팬의 말에 마음이 누그러져 다시 담요 밖으로 나왔어요. 그러고는 피터 팬과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어요. “너는 참 좋은 아이 같아! 원한다면 뽀뽀를 해도 좋아.” 하지만 뽀뽀가 무엇인지 모르는 피터 팬은 좋은 물건인가 생각하고 손을 내밀었어요. 당황한 웬디는 얼떨결에 골무 하나를 주었어요. 그러자 피터 팬은 말없이 자기 옷의 단추를 하나 떼어 내더니 웬디에게 주었어요. 그것은 도토리로 만든 단추였어요. “이것이 너의 뽀뽀니? 고마워!” 웬디는 도토리 단추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었어요. 이렇게 해서 둘은 골무와 도토리를 서로 나누어 가지게 되었어요. 날아가는 연습. “피터 팬, 넌 몇 살이니?” “글쎄, 모르겠어. 난 태어난 날 바로 집을 나와 버렸거든.” “뭐라고? 왜 집을 나왔니?” “엄마와 아빠가 내가 크면 뭐가 될지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거든. 나는 언제까지나 아이로 살고 싶어서 도망친 뒤, 지금껏 요정들과 함께 살고 있어.” “어머! 요정들과 같이 살아? 우아, 좋겠다.” 웬디는 부러운 듯이 말했어요. “갓난아기가 처음으로 웃으면 웃음소리가 수많은 조각으로 쪼개져서 그 하나하나가 요정으로 변하는 거야. 그러니까 원래는 요정이 아이들 수만큼 있어야 해. 그런데 아이들이 ‘난 요정을 안 믿어.’라고 말할 때마다 요정이 하나씩 사라져 버려.” 둘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서 ‘딸랑딸랑’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내가 팅커벨을 서랍장 속에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아 버렸구나.” 피터 팬이 키득거리며 서랍 문을 열자, 팅커벨이 성난 얼굴로 서랍에서 뛰쳐나왔어요. “야, 참 예쁘구나! 넌 누구니?” 웬디가 감탄하며 물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팅커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응, 내 요정 팅커벨이야!” 피터 팬은 화가 난 팅커벨이 재미있다는 듯 웬디에게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어요. “요정이라고? 정말 멋진걸! 네가 사는 네버랜드는 어떤 곳이니?” 웬디는 너무나 궁금해서 물어보았어요. “응, 여기에서 아주 멀어. 나는 그곳에서 집 잃은 아이들과 함께 산단다.” “집 잃은 아이들?” “유모차에서 떨어진 아이들이야. 요정들이 일주일 동안은 아이들을 돌봐 주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으면 모두 네버랜드로 와서 나와 함께 살게 돼. 내가 아이들의 대장이지.” “정말 재미있겠다.” “응, 하지만 조금 쓸쓸해. 우리 중에는 여자아이가 하나도 없거든.” “어째서 여자아이가 없지?” “여자아이는 똑똑해서 유모차에서 안 떨어지거든.” 웬디는 우쭐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 팅커벨이 웬디의 머리카락을 휙 잡아당겼어요. “악!” 웬디의 비명에 깜짝 놀란 피터 팬은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어요. “팅커벨! 가만히 있지 못해!” 팅커벨이 웬디와 피터 팬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심술을 부렸던 거예요. 팅커벨은 빨리 돌아가자고 졸라 댔어요. “알았어, 이야기를 들으면 곧 갈 거야.” “이야기라니 무슨 말이야?” 웬디가 물었어요. “예전에 왔을 때 너의 엄마가 유리 구두를 신은 소녀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아, 신데렐라 이야기로구나.” 웬디는 피터 팬에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끝까지 들려주었어요. “정말 재미있다. 네버랜드에 있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정말 좋아할 거야.” 피터 팬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웬디, 나와 함께 네버랜드로 갈래?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바느질도 해 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내가 떠나면 엄마가 무척 걱정하실 거야. 그리고 난 날 줄도 몰라.” 웬디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나는 것은 내가 가르쳐 줄게. 그러면 별에 올라탈 수도 있고 인어도 만날 수 있어. 게다가 우리들은 웬디 너를 소중히 여길 거야. 우리에겐 엄마가 필요해. 엄마가 된다는 생각에 웬디는 마음이 흔들렸어요. “좋아, 갈게. 하지만 존과 마이클을 두고 갈 수는 없어.” “걱정하지 마. 동생들에게도 나는 법을 가르쳐 주면 되니까.” 그러자 웬디는 잠자는 동생들을 깨웠어요. 졸린 눈을 비비며 투덜대던 두 아이도 피터 팬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아했어요. 이때 피터 팬이 갑자기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어요. 지금까지 짖어 대던 나나의 소리가 뚝 끊어졌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재빨리 침대로 돌아가서 자는 시늉을 했어요. 빼꼼 문이 열리더니 가정부가 졸린 목소리로 나나를 향해 소리쳤어요. “봐라, 아이들은 모두 천사처럼 자고 있지 않니.”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가정부는 곧 문을 닫고 나갔어요. 하지만 나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어요. 엄마와 아빠는 나나가 찾아와 앞발을 높이 쳐드는 것을 보고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챘어요. 엄마와 아빠는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왔어요. 그때, 피터 팬은 삼 남매에게 한창 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번번이 나는 것에 실패했어요. 누구든 날아다니려면 요정의 가루를 몸에 묻혀야 하는 거예요. 피터 팬은 장난을 멈추고 아이들에게 반짝이는 요정의 가루를 뿌려 주었어요.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방 안을 빙빙 날아다녔어요. 그때, 나나가 엄마와 아빠를 데리고 막 집에 도착했어요. “얘들아, 가자!” 피터 팬은 다급하게 말했어요. 나나와 어른들이 막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피터 팬과 아이들이 창문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난 다음이었어요. “아니, 이럴 수가!” 웬디의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들이 날아간 곳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어요. 삼 남매는 피터 팬과 팅커벨을 따라 날아갔어요. 학교를 지나고 숲도 지나 마침내 바다 위를 지났지만, 네버랜드는 보이지 않았어요. “피터 팬, 네버랜드는 아직 멀었어?” 막내인 마이클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어요. 하늘을 처음 날아 보는 데다가 나이도 제일 어린 마이클은 자꾸 졸음이 몰려왔어요. “아직 멀었어.” 피터 팬이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마이클이 바닷물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앗! 마이클이 떨어진다! 피터 팬, 빨리 구해 줘!” 웬디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피터 팬은 못 들은 체하고 앞으로만 날아갔어요. 마이클이 바닷물에 빠지기 직전에서야 피터 팬은 재미있다는 듯이 휙 내려가 마이클을 들어 올렸어요. “피터 팬은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야!” 피터 팬은 몸이 아주 가벼워서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나 빨리 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가끔 하늘 높이 올라가 별과 이야기도 나누고, 바다로 내려가서 상어 꼬리를 만져 보고 올라오기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을 날아간 어느 날 피터 팬과 아이들은 마침내 네버랜드에 도착했어요. “자, 드디어 다 왔다!” “와! 만세!” 삼 남매는 똑같이 탄성을 지르면서 네버랜드를 바라보았어요. 바다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섬은 삼 남매가 항상 꿈꾸었던 곳과 똑같았어요. 어느새 사방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밤이 되었어요. 아이들이 천천히 섬 위로 날아가던 그때 피터 팬이 말했어요. “저놈들은 우리가 섬에 오는 것을 싫어하겠지.” “저놈들이라니?” 웬디가 물어보았지만 피터 팬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피터 팬, 저 아래에 누가 있어?” 마이클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자 피터 팬은 그제야 대답했어요. “해적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해적이 많아? 두목은 누구야?” “매우 많지. 그리고 두목은 제임스 후크란다.” 두 아이는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어요. 제임스 후크는 무섭기 그지없는 해적이라는 것을 책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정말로 후크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 존이 몸을 부르르 떨며 물어보았어요. "“응, 하지만 지금은 한쪽 팔이 없어." "내가 후크의 오른팔을 잘라 버렸거든. 후크는 지금 오른팔 대신에 쇠갈고리를 달고 있어.” 피터 팬은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그때 ‘꽝’하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어요. 해적들이 아이들에게 대포를 쏜 거예요. 무시무시한 대포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일어 피터 팬과 삼 남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어요. 피터 팬은 몸이 가벼워서 먼바다 쪽으로 날아갔고, 존과 마이클은 둘이 깜깜한 하늘에 둥둥 떠 있었어요. 웬디는 다행히 팅커벨과 함께 날아갔어요. 팅커벨이 무슨 말을 하며 웬디에게 손짓했어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웬디는 팅커벨이 가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네버랜드에는 서로 다른 여섯 무리가 살고 있었어요. 높은 나무에는 요정들이 살았고, 호수에는 인어들이 살았어요. 무서운 짐승들은 깊은 숲속이나 동굴에서 살았어요. 그리고 섬 여기저기의 천막에는 인디언들이 살았으며, 해골의 깃발을 단 해적선은 섬 어귀에 떠 있었어요. 피터 팬과 함께 사는 집 잃은 남자아이들은 땅속 집에서 살았어요. “오늘 밤은 꼭 피터 팬이 돌아올 거야.” 땅속 집에서 피터 팬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여섯 명의 아이는 풀밭으로 나왔어요. 그때 해적들이 망원경으로 섬을 살피다가 아이들을 발견하고 말았어요. 해적들은 힘센 팔을 놀려 배를 저었어요. 풀밭에 있던 아이들은 멀리서 들리는 해적선의 노 젓는 소리에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해적이다. 빨리 도망가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잽싸게 땅속 집으로 숨어 버렸어요. 그러나 닙스는 해적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망만 보고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다가가던 해적들이 닙스를 발견했어요. 해적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스타키가 잽싸게 총을 겨누었어요. “안 돼, 쏘지 마!” 후크가 차갑게 명령했어요. “여기는 인디언들의 구역이야. 타이거 릴리의 부하들에게 잡혀 혼나고 싶으냐?” 잔혹하기로 이름난 스타키도 인디언이란 말에 겁을 먹고는 침을 꿀꺽 삼켰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일곱 명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거라고!” 후크의 말에 부하들은 모두 흩어져서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어요. 후크는 갑판장 스미와 남아서 곁에 있는 커다란 버섯에 걸터앉았어요. “저놈들의 대장 피터 팬을 잡아야 해. 피터 팬이 나의 오른팔을 잘라 버렸으니까. 더구나 잘린 내 오른팔을 악어에게 던져 주었잖아!” 후크는 분해서 쇠갈고리를 흔들며 말했어요. “아, 그래서 두목님이 악어를 싫어하는군요.” 옆에 있던 스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게다가 그 악어는 배 위로 올라와서 나를 집어삼키려 한 적도 있어. 그때 다행히 나 대신 시계를 꿀꺽 삼켰지. 그 뒤부터 놈의 배 속에서 시계 소리가 나는 거야. 시계 소리 덕분에 난 그놈이 날 잡기 전에 도망칠 수 있었지.” “두목님, 언젠가는 그 시계도 멈출 텐데 그러면 악어가 두목님을 잡아먹을 수도 있겠네요.” “바로 그거야. 난 그것만 생각하면 도무지 잠이 안 와!” 후크는 쓴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소리쳤어요. “앗, 뜨거워!” 걸터앉아 있던 버섯이 불이 붙은 듯 뜨거워졌기 때문이었어요. “이건 좀 이상한데?”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버섯을 잡아당겼더니 쑥 뽑혔어요. 버섯을 뽑은 구멍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어요. 두 사람이 버섯 구멍을 살펴보니, 아이들이 보였어요. 버섯은 땅속 집의 굴뚝이었던 거예요. 아이들의 집을 찾아낸 후크는 마음이 흐뭇해져 버섯 뚜껑을 본래대로 덮어 두었어요. “이봐, 스미! 지금 당장 배로 돌아가서 초록색 설탕을 친 케이크를 만들자." “케이크를 호숫가에 놓아두면, 아이들이 그것을 맛있게 먹을 거란 말이야. 물론 케이크에는 독을 듬뿍 발라 놓아야지.” “두목님, 과연 훌륭한 작전입니다!” 스미는 후크의 말에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어요. 바로 그때,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똑딱똑딱 똑딱똑딱. 그러자 후크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부들부들 떨었어요. 바로 후크의 오른팔을 먹은 악어 배 속에서 나는 소리였기 때문이에요. “앗, 악어다!” 후크가 허둥지둥 도망치자, 스미도 그 뒤를 쫓아 달려갔어요. 해적들이 모두 돌아가자,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왔어요. 망을 보고 있던 닙스가 뛰어와서 말했어요. “얘들아, 이상한 새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어!” 커다란 새는 다름 아닌 웬디였어요. 웬디는 비명을 지르며 날고 있었어요. 팅커벨이 웬디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자꾸 꼬집고 괴롭혔기 때문이에요. “팅커벨, 어떻게 된 일이야? 아이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이 새는 나쁜 새야. 피터 팬이 활로 쏘라고 말했어.” 팅커벨이 앙칼진 소리로 말했어요. “알았어, 곧바로 해치울게.” 제일 용감한 투틀즈가 화살을 힘껏 쏘아 웬디를 맞혔어요. “앗!” 웬디는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졌어요. 아이들은 쓰러진 웬디 곁으로 우르르 달려왔어요. “이건 새가 아니라 여자다!” 아이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할 때 “꼬끼오”하고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언제나 피터 팬이 돌아올 때면 내는 소리였어요. 당황한 아이들은 서둘러 웬디를 에워쌌어요. “야, 모두 잘 있었니?” 피터 팬이 씩씩하게 말하며 걸어왔지만,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어요. “얘들아, 너희들에게 굉장한 소식을 가지고 왔어." 너희들을 위해 엄마를 데리고 왔어. 피터 팬이 우쭐거리면서 그 사실을 알렸지만,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피터 팬은 어리둥절해하며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쓰러져 있는 웬디를 보았어요. 피터 팬은 웬디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보았어요. 다행히 화살은 도토리 목걸이에 꽂혀 있었어요. “이건 누구 화살이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빨리 말해.” 피터 팬이 무서운 눈초리로 물었어요. “내 화살이야.” 투틀즈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에잇, 멍청한 놈!” 화가 난 피터 팬이 투틀즈에게 다가가려 할 때 닙스가 소리쳤어요. “앗, 여자가 팔을 움직였다!” 그때,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팅커벨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여자가 살아나니까 분해서 우는 거지, 팅커벨?” 아이들은 피터 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어요. 그러자 피터 팬은 무서운 얼굴로 팅커벨에게 말했어요. “팅커벨! 너는 영원히 내 친구가 아니야.” 팅커벨은 피터 팬의 어깨 위에 앉아 계속해서 용서를 빌었어요. “좋아, 그러면 일주일 동안만 너와의 인연을 끊겠다.” 피터 팬은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렸어요. 팅커벨은 샘이 많은 요정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여자가 피터 팬과 친해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예요. 아이들은 살아난 웬디를 쳐다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이 여자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자.” 카리가 말하자, 피터 팬이 반대하고 나섰어요. “안 돼! 웬디에게 손을 대면 못써. 그런 짓을 하는 건 실례야.” “그렇지만 이런 데 내버려 두면 빨리 나을 수가 없잖아.” 슬라이틀리와 투틀즈가 말했어요.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웬디의 주위에 조그만 집을 짓는 거야. 그렇게 되면 웬디를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 피터 팬의 말에 모두 찬성했어요. “그럼, 어서 서둘러. 모두 흩어져서 제일 좋은 재료를 구해 오도록 하자!” 피터 팬의 말이 끝나자 모두 바삐 움직였어요. 땅속 집에서 이불을 날라오기도 하고, 널빤지를 메고 오기도 했으며 이곳저곳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녔어요. 이때, 존과 마이클이 날아왔어요. “아, 살았다. 우리들은 길 잃은 아이가 되는 줄 알았어!” 그러나 모두 집을 짓느라 바빠서 아무도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웬디 누나, 자는 거야?" "빨리 일어나, 우리 배고파!” 존과 마이클은 투정을 부리며 웬디를 깨우려 했어요. “안 돼! 너희들도 빨리 집 짓는 일이나 거들어!”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존과 마이클은 피터 팬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어요. “웬디가 어떤 집을 좋아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는데.” 피터 팬은 집을 지을 재료들을 보고 중얼거렸어요. 그러자 자고 있던 웬디가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예쁜 집을 갖고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 작고 귀여운 빨간 벽. 이끼 덮인 초록 지붕. 아이들은 노랫소리를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어요. 아이들은 열심히 일해서 조그맣고 아름다운 집을 지었어요. 그러고는 모두 함께 합창하기 시작했어요. 초록 지붕이 되었어요. 벽돌도 빨갛게 칠했어요. 앞에는 예쁜 문도 달았어요. 또 무엇을 원하나요? 그러자 웬디는 좀 욕심을 내어 대답했어요. 어머, 그렇다면 다음은 여기저기에 밝은 창문을 많이 달아 주세요. 밖에서는 장미가 안을 들여다보고, 안에서는 아기가 밖을 내다보도록. 웬디는 아름다운 집에서 편안히 잠들었어요. “자, 모두 웬디 엄마에게 인사하러 가자!” 피터 팬은 점잖게 문을 똑똑 두드렸어요. 막 잠에서 깨어난 웬디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어요. “어머, 여기가 어디지?” 그러자 으스대기 좋아하는 슬라이틀리가 재빨리 말했어요. “웬디의 집이죠. 우리가 웬디를 위해 지었어요.” “어머, 그랬구나, 고맙기도 해라. 정말 귀엽고도 멋진 집인걸.” “웬디, 우리들의 엄마가 되어 주세요!” 아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어요. “어머나! 내가 엄마가 돼?” "우리는 다만 엄마처럼 다정한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피터 팬이 옆에서 말했어요. “그럼, 엉터리 엄마가 되어 달라는 말이구나, 그렇지?" "좋아, 그렇다면 내가 꼭 어울릴 거야.” 웬디는 아이들을 한 명씩 꼭 안아 주고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아이들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좁은 방에 끼어 앉았지만, 엄마가 있어서 기쁘기만 했어요. 이야기가 끝나자, 웬디는 아이들을 한 명씩 재워 주었어요. 피터 팬은 집 앞에서 밤을 새워 보초를 서기로 했어요. 해적들이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러나 잠시 뒤, 피터 팬은 문 앞에 앉은 채 잠이 들고 말았어요. 다음 날, 피터 팬은 웬디가 땅속 집에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을 만들어 주었어요. 땅속 집에는 큰 방이 하나 있었어요. 방 한복판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줄기를 잘라 식탁으로 사용했어요. 식탁 주변에는 작은 버섯으로 만든 의자들이 몇 개 있었고, 그 뒤로는 난로가 있었어요. 침대는 하나밖에 없어 아이들은 함께 나란히 누워 잠을 잤어요. 그리고 벽에는 한 군데 굽은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팅커벨의 방이었어요. 팅커벨의 방은 항상 깨끗하고 화려한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어요. 웬디는 땅속 집에서 온종일 조금도 쉴 틈이 없이 지냈어요. 하지만 얼굴은 행복한 빛으로 가득했어요. 이따금 웬디는 부모님 생각을 했어요. 엄마와 아빠가 항상 창문을 열어 놓고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웬디는 나무판자로 칠판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학교 놀이를 했어요. 아이들은 학교 놀이를 무척 좋아했지만 피터 팬은 관심이 없었어요. 자기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피터 팬은 글을 배우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던 거예요. 피터 팬은 혼자 나가서 모험을 즐기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인어들과 함께 수영하려고 호수에 나온 아이들이 크림이 듬뿍 발린 케이크를 발견했어요. 마침 배가 고팠던 아이들이 케이크를 먹으려고 하자 웬디가 소리쳤어요.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웬디는 엄하게 타이르고 아이들에게서 케이크를 빼앗았어요. 웬디 덕분에 아이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케이크는 해적들이 아이들을 해치기 위해 갖다 놓은 독이 든 케이크였거든요. 어느 날, 학교 놀이에 싫증이 난 아이들이 인어의 호수로 또 수영하러 갔어요. 수영하다가 지친 아이들은 바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웬디는 바느질하고 있을 때였어요.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앗, 해적이다. 모두 어서 일어나!” 웬디가 짧게 외치며 아이들을 깨웠어요.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어!” 피터 팬의 외침에 아이들은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잠시 뒤, 노 젓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작은 배가 나타났어요. 배에는 해적선의 갑판장 스미와 스타키 그리고 인디언 여자가 타고 있었어요. 여자는 용감하기로 이름난, 인디언 추장의 딸 타이거 릴리였어요. 용감하게 혼자 해적선에 들어갔다가 해적들에게 잡혀 끌려온 것이었어요. 타이거 릴리는 손과 발이 묶여 있는데도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었어요. 해적들은 타이거 릴리를 호수의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에 내려놓았어요. 바위는 호수에 물이 차면 금방 물에 잠겼어요. 바위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피터 팬은 화가 났어요. ‘비겁하게 여자 한 명에 남자가 두 명이라니!’ 이렇게 생각한 피터 팬은 해적 두목 후크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외쳤어요. “이 얼빠진 놈들아, 어서 인디언 아가씨를 풀어 줘라!” 해적들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어요.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두목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지.” 해적들은 서둘러 타이거 릴리를 풀어 주었어요. 타이거 릴리가 호수를 막 빠져나가고 난 뒤, 후크가 헤엄쳐 다가왔어요. “재수 없게 꼬마들이 엄마를 데려왔어.” “예? 엄마가 뭐예요, 두목님?” “이런 멍청이들! 저것이 바로 엄마다.” 후크가 가리킨 곳에는 어미 새가 새끼들을 품에 꼭 안은 채 먹이를 주고 있었어요. 그것을 보고 스미가 말했어요. “엄마란 좋은 거로군요! 아이들의 엄마를 빼앗아 우리의 엄마로 만듭시다.” “흥! 누가 해적들의 엄마가 되어 준대?” 듣고 있던 웬디가 화가 나서 말했어요. “어, 이게 무슨 소리지?” 해적들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지만, 바위 뒤에 숨은 웬디가 보일 리 없었어요. “그런데 인디언 아가씨는 어디 있지?” 후크가 궁금한 듯 물어보았어요. “그야 물론 두목님의 명령대로 풀어 주었죠!” 스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어요. “뭐, 풀어 주었다고?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어? 두목님이 놔주라고 소리치셨잖아요!” 스미와 스타키가 동시에 말했어요. “난 그런 명령을 한 적이 없어!" "누군가 내 목소리를 흉내 낸 것이 틀림없군.” 후크는 쇠갈고리를 흔들며 사방을 둘러보았어요. “어떤 놈이냐? 남의 목소리를 흉내 낸 놈이!” 그러자 피터 팬이 소리쳤어요. “바로 나다, 피터 팬.” “뭐, 피터 팬? 얘들아, 어서 피터 팬을 잡아라!” 후크는 쇠갈고리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어요. 그러자 피터 팬과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와!”하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어요. 세 명의 해적은 열 명의 아이에게 포위되었어요. 칼이 번쩍 빛나기도 하고 “와!”하는 함성이 들려오기도 했어요. 그러나 후크가 쇠갈고리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아이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 버렸어요. 결국 피터 팬과 후크의 싸움으로 변했어요. 피터 팬은 칼로 후크를 찌르려고 하다가 후크가 자기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것을 알았어요. 떳떳하게 승부를 가리고 싶었던 피터 팬은 손을 내밀어 후크를 위로 끌어 올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비겁한 후크는 피터 팬의 손목을 꽉 물어 버리고 말았어요. “아야, 비겁한 후크!” 후크는 무시무시한 쇠갈고리로 비틀거리는 피터 팬을 후려쳤어요. “건방진 피터 팬, 이번에는 너의 숨통을 끊어 주마!” 후크가 쇠갈고리를 번쩍 쳐들면서 웃음을 흘리던 그때였어요. 똑딱똑딱. 똑딱똑딱! 악어의 시계 소리에 새파랗게 질린 후크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후크가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어요.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피터 팬과 웬디가 보이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불러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혹시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어서 집으로 가 보자.” 아이들은 해적이 버리고 간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피터 팬은 바위 위에서 정신을 잃은 웬디를 안고 있었어요. 물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지만 지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요. 피터 팬은 있는 힘을 다해 웬디를 깨웠어요. “웬디, 정신 차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그러자 웬디는 겨우 눈을 떴어요. 하지만 피터도 웬디도 너무나 지쳐 날 수도, 헤엄칠 수도 없었어요. “아, 후크한테 속지만 않았어도.” 피터 팬은 불어나는 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어요. 그때 무언가 피터 팬의 뺨을 스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며칠 전 마이클이 만든 커다란 종이 연이었어요. 피터 팬은 마이클이 연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갔던 것을 떠올리고는 재빨리 연 꼬리를 잡았어요. “웬디, 이 연을 타고 가!” “함께 타고 가면 안 돼?” “둘은 안 돼. 네가 먼저 타.” 피터 팬은 웬디를 연에 매달고는 힘껏 밀어 올렸어요. 웬디는 연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갔고, 피터 팬은 웬디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어요.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피터 팬은 단념한 듯 입술을 꽉 다물었어요. 그때, 호수 위로 무엇인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어요.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커다란 새 둥지였어요. 새 둥지에는 예전에 피터 팬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네버 새가 타고 있었어요. 네버 새는 은혜를 갚기 위하여 피터 팬을 찾아온 거예요. “피터 팬, 어서 이 둥지에 올라타.” 피터 팬이 둥지에 올라타자, 레버 새는 푸드덕 날아가 버렸어요. “네버 새야, 정말 고마워. “피터 팬을 태운 새 둥지는 흘러 흘러 호수 기슭에 닿았어요. 피터 팬은 둥지를 네버 새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대고 지친 몸을 간신히 가누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바로 이때, 웬디도 연에 매달린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날 밤, 피터 팬과 웬디와 아이들은 늦도록 자지 않고 모험 이야기를 했어요. 해적들과의 싸움이 있었던 날부터 아이들과 인디언은 서로 친하게 되었어요.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나는 앞으로 목숨을 바쳐 당신을 보호하겠어요.” 타이거 릴리는 피터 팬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어요. 그날부터 인디언들은 땅속 집 앞에서 보초를 섰어요. 이제 아이들은 안심하고 저녁을 먹거나 놀 수 있게 되었어요. “옛날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저녁때가 되자 웬디는 여느 날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어요. “그 남자의 이름은 달링이라고 했어." "달링 씨에게는 세 명의 아이와 나나라는 개 한 마리가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밤, 아이들이 모두 창문으로 도망쳐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단다.” “와, 멋지다. 그 아이들은 어디로 날아갔어요?” 닙스가 손뼉을 치며 물었어요. 웬디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아이들이 날아간 곳은 네버랜드였지." "거기에는 집 잃은 남자아이들이 살고 있었어.” “집 잃은 아이 중에 투틀즈라는 아이도 있죠?” 투틀즈가 물었어요. 그렇단다. 자, 이제 잠자코 좀 들어 보렴. 그런데 아이들이 날아간 뒤에 부모님은 무척 슬퍼하셨단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창문을 열어 놓고 아이들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셨지. 그러던 어느 날, 네버랜드에서 아이들이 돌아왔어. 부모님은 아이들을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셨지. 그 뒤로는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단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피터 팬이 고개를 저으며 따지듯이 말했어요. “그렇지 않아. 웬디의 이야기는 틀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집에 가 보니 문은 잠겨 있고 엄마는 다른 아이를 안고 자고 있었어." "엄마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던 거야.” 피터 팬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어요. “피터 팬, 엄마가 진짜 그런 사람이야?” “그래!” 피터 팬은 잘라 말했어요. 그러자 아이들은 실망하는 눈빛을 띠었어요. 존과 마이클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웬디에게 말했어요. “누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엄마가 우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그래, 돌아가자.” 웬디도 두 동생이 가엾은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웬디, 설마 지금 당장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피터 팬이 놀라서 물었어요. “아냐,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어." "어쩌면 엄마는 벌써 우리를 잊어버렸는지도 몰라!” 웬디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피터 팬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 피터 팬은 웬디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아이들은 웬디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몹시 서운한 표정으로 웬디를 바라보았어요. “아, 너희들도 모두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웬디가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너희들을 무척 사랑하실 거야!”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도 데려가 줘요, 웬디.” “피터 팬, 너도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래?” “아니, 난 안 가. 난 이 네버랜드가 좋아." "여기서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살고 싶어.” “피터 팬, 그러지 말고 우리와 같이 가. 피터 팬의 엄마를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싫어, 싫어! 난 엄마 같은 건 필요 없어! 게다가 난 지금 몸이 좀 안 좋아.” 피터 팬은 괜히 아픈 척을 했어요. “할 수 없지. 그럼, 안녕, 피터 팬. 참, 내가 약을 두었으니 꼭 먹어.” “안녕, 웬디. 그리고 너희도 좋은 엄마를 만나길 바랄게.” 피터 팬과 웬디는 서로 악수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었어요. 피터 팬만 남겨 둔 채 웬디와 아이들은 땅속 집을 나서기 시작했어요. 웬디와 아이들이 땅속 집을 막 나오려던 그때, 갑자기 해적과 인디언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며 땅속 집으로 들어갔어요. 피터 팬과 아이들은 땅속 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땅 위에서는 해적들이 보초를 서던 인디언들을 모두 쓰러뜨렸어요. 승리한 후크는 땅속 집에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잡을까 궁리하다 한 가지 꾀를 냈어요. 잠시 뒤, 해적들이 인디언의 북을 둥둥 세차게 두드렸어요. 그러자 아이들은 인디언이 이긴 줄 알고 마음 놓고 땅속 집에서 나왔어요. 후크의 꾀에 넘어간 아이들은 해적들의 손에 모두 잡히고 말았어요. 해적들은 아이들을 밧줄로 꽁꽁 묶어 해적선으로 데려갔어요. “이제 피터 팬만 잡으면 돼!” 후크는 땅속 집으로 들어가는 구멍을 살펴보았어요. 피터 팬은 땅속 집에서 침대에 누워 혼자 피리를 불고 있었어요. “모두 가 버렸어도 난 아무렇지 않아.”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사실은 무척 쓸쓸했어요. 그러다가 피터 팬은 잠이 들고 말았어요. 후크는 땅속 집으로 통하는 나무 구멍들을 하나씩 살피다가 큰 구멍 하나를 찾았어요. “옳지! 이 구멍으로 들어가야겠다.” 후크는 미끄러지듯 땅속 집으로 들어갔어요. 후크는 살금살금 피터 팬이 잠든 침대 곁으로 다가갔어요. “건방진 꼬마 놈!” 후크는 주변을 둘러보다 침대 곁에 있는 약을 발견했어요. 그것은 웬디가 떠나면서 피터 팬에게 준 약이었어요. 후크는 주머니에서 독약을 꺼내어, 약에 똑똑 다섯 방울을 떨어뜨렸어요. “됐어! 이젠 피터 팬도 마지막이다!” 후크는 흐뭇해하며 구멍으로 다시 기어 나왔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깊이 잠든 피터 팬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어요. “피터 팬, 나야. 팅커벨!” 피터 팬이 급히 문을 열자, 팅커벨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와 말했어요. “아이들이 모두 해적들에게 잡혀갔어!” “뭐라고? 어서 웬디와 아이들을 구하러 가자. 참 가기 전에 약을 먹어야겠다. 웬디가 좋아할 거야.” “앗, 안 돼! 그 약에는 독이 들어 있어!” 팅커벨은 날아오는 도중에 후크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거예요. “팅커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웬디가 나를 위해 준 약에 독이 들어 있다니.” 피터 팬은 팅커벨이 웬디를 나쁘게 말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팅커벨은 할 수 없다는 듯 달려들어 약을 빼앗아 먹고는 비틀거리기 시작했어요. “팅커벨, 왜 그러니?” “저 약에다 후크가 독을 떨어뜨렸단 말이야.” “뭐라고? 그럼, 네가 나를 구하려고 약을 대신 먹었구나!” 피터 팬은 힘없이 쓰러진 팅커벨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팅커벨, 죽으면 안 돼. 어떻게 하면 너를 살릴 수 있지? 뭐든 다 할게.” 그러자 팅커벨이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모든 아이가 요정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나는 살 수 있어. ” 피터 팬은 벌떡 일어나 그 순간에, 잠자리에서 네버랜드를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물었어요. “얘들아, 요정이 있다는 것을 믿니?” 어디선가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응, 믿어.” “너희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손뼉을 쳐 줄 수 있겠니?” 피터 팬이 다시 외치자 곧 박수 소리가 나더니, 점점 커져 우렁찬 박수 소리로 바뀌었어요. 박수 소리를 듣고 팅커벨은 금방 기운을 차렸어요. “팅커벨, 살아났구나. 어서 아이들을 구하러 가자!” 피터 팬은 용감하게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밖으로 달려 나온 피터 팬과 팅커벨은 ‘똑딱똑딱’하는 시계 소리를 들었어요. “악어다. 악어는 틀림없이 후크를 따라가고 있을 거야.” 둘은 악어의 뒤를 따라갔어요. 악어는 해안으로 나가자 곧장 바닷속으로 들어갔어요. “후크가 아이들을 해적선으로 데리고 간 모양이군." "이번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후크!” 피터 팬은 해적선을 향해 열심히 헤엄쳐 갔어요. 한편, 해적들에게 붙잡혀 간 아이들은 밧줄에 묶인 채 해적선으로 끌려갔어요. “조용히 해! 만약 떠들면 쇠갈고리로 찍어 버릴 테다.” 뒤늦게 나타난 후크가 사나운 얼굴로 말했어요. 후크는 웬디에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웬디 아가씨! 우리 불쌍한 부하들을 위해 엄마가 되어 주겠소?” “싫어요! 나는 해적의 엄마가 될 수는 없어요.” 웬디가 차갑게 거절하자 후크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어요. “꼬마 놈들, 잘 들어라. 오늘 밤, 모두 바닷물에 처넣어 버리겠다!” 해적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갑판으로 나간 뒤, 갑판 위에 나무판자를 얹어 놓았어요. “이놈들, 단단히 준비해라. 하나씩 이 판자 위를 지나서 바닷속에 빠져 죽는 거다.” 그러더니 후크는 웬디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아가씨, 이제 아이들은 모두 죽게 될 거야.” “나쁜 사람들! 어른이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난 해적의 엄마가 될 수는 없어요.” 웬디는 후크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때, 피터 팬과 팅커벨이 해적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어요. 피터 팬과 팅커벨이 해적선에 거의 다 왔을 때, 악어 배 속의 시계가 뚝 멈추고 말았어요. “아니, 이상한데? 시계가 고장 난 모양이군! 그러면 내가 시계 소리를 내 주지.” 피터 팬은 “똑딱똑딱” 소리를 내며 배 위로 기어 올라갔어요. “가만, 이것이 무슨 소리지? 앗! 시계 소리, 악어다!” 후크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부하들 틈으로 몸을 숨겼어요. 그사이에 피터 팬은 살금살금 기어서 선실로 들어갔어요. 시계 소리가 다시 멎자, 후크와 부하들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휴, 큰일 날 뻔했구나! 선실에 가서 채찍을 가져오너라.” 화가 난 후크가 아이들에게 분풀이하려는 듯했어요. 해적 한 명이 선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어요. 곧이어 선실 쪽에서 “악!” 하는 비명과 함께 “꼬끼오”하고 수탉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선실 속에 숨어든 피터 팬이 해적을 물리친 다음 소리를 낸 것이었어요. 그러나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후크는 깜짝 놀라면서 다른 부하를 또 보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악!”하는 비명과 함께 “꼬끼오”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겁이 난 후크는 이번엔 가장 덩치가 큰 부하에게 명령했어요. “쎄코, 네가 가서 ‘꼬끼오’를 잡아 오너라.” 잠시 뒤, “악!”하고 비명이 들리더니 쎄코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해적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아무도 선실로 가려 하지 않았어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던 후크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탁’ 쳤어요. “맞아! 꼬마 놈들을 선실로 들여보내서 ‘꼬끼오’와 싸움을 붙이는 거야.” 해적들은 아이들을 억지로 선실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선실 안으로 밀어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렸어요. 깜깜한 선실에 갇힌 아이들은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얘들아! 나야, 피터 팬.” 피터 팬이 소리를 낮추어 살며시 말했어요.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피터 팬은 선실에 있는 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피터 팬과 아이들은 살금살금 선실을 나와서 재빨리 돛대 곁으로 갔어요. 그곳에는 웬디가 밧줄에 묶인 채 신음하고 있었어요. “웬디!” 피터 팬은 얼른 웬디를 풀어 준 다음 아이들과 함께 숨게 했어요. 피터 팬은 외투를 훌렁 뒤집어쓰고 큰 소리로 외쳤어요. “꼬끼오!” 해적들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이 얼간이들아! 왜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거냐?” 후크가 쇠갈고리를 흔들며 호통을 쳤지만, 해적들은 벌벌 떨고만 있었어요. 그때, 피터 팬이 외투를 벗어 던지면서 외쳤어요. “얘들아, 모두 나와서 해적들을 혼내 주어라!” 아이들은 도깨비한테 홀린 듯 정신을 못 차리는 해적들을 순식간에 해치웠어요. 드디어 후크 혼자만 남았어요. “잘 만났다, 후크!” “건방진 꼬마 놈, 어디 맛 좀 봐라!” 후크는 쇠갈고리를 높이 들어 힘껏 내리쳤어요. 피터 팬은 재빨리 피하면서 후크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어요. 후크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자 피터 팬이 칼을 뽑아 들며 외쳤어요. “자, 후크! 일어나서 칼을 들고 덤벼라!” 후크는 긴 칼을 뽑아 들고 피터 팬에게 덤벼들었어요. 하지만 피터 팬은 요리조리 잘 피하며 후크를 약 올렸어요. 후크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이리저리 마구 칼을 휘둘렀어요. 그러나 몸이 제비같이 가벼운 피터 팬은 이리 훌쩍 저리 훌쩍 몸을 날리며, 몇 번이나 후크의 몸을 찔렀어요. 후크는 쩔쩔매면서 주춤주춤 뱃전으로 물러섰어요. 밑에서 악어가 커다란 입을 딱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이에요. 피터 팬은 휙 날아가서 후크를 힘껏 걷어찼어요. “악!” 후크는 비명을 지르며 악어의 입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후크를 꿀꺽 삼킨 악어는 어슬렁어슬렁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만세, 피터 팬 만세!” 웬디와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피터 팬에게로 달려왔어요. 웬디네 집에서는 엄마와 아빠가 매일 슬픔에 빠져 있었어요. 아이들이 떠난 후부터 아빠는 늘 개집에서 지냈어요. “아이들이 가버린 것은 내가 나나를 정원으로 쫓아냈기 때문이야.” 어느 날 밤, 아빠는 개집 안에 누워서 말했어요. “여보, 자장가 대신에 피아노를 쳐 주겠소? 바람이 들어오니 창문도 좀 닫아 주구려.” “창문을 닫으면 아이들이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 그렇군, 미안해요.” 엄마는 옆방으로 가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때, 하늘에서 피터 팬과 팅커벨이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팅커벨, 빨리 창문을 잠가. 그러면 웬디도 실망해서 네버랜드로 다시 돌아갈 거야.” 웬디와 헤어지기 싫은 피터 팬이 이렇게 말했어요. 돌아오너라, 웬디.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아. 오늘 밤도 엄마는 별이 되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단다. 피터 팬과 팅커벨은 너무도 구슬픈 노랫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요. ‘웬디의 엄마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창문을 잠글 수가 없었어요. “가자, 팅커벨! 우리는 엄마가 필요 없어, 그렇지?” 피터 팬은 팅커벨과 함께 하늘로 날아갔어요. 잠시 뒤, 웬디와 존, 마이클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날아 들어왔어요. “와, 드디어 집에 왔구나!” 존과 마이클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어요. 이때, 옆방에서 엄마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어요. “엄마다!” “정말! 우리, 침대에 들어가서 자는 척하는 게 좋겠어.” 세 아이는 침대에 들어가 잠을 자는 척했어요. 이윽고 엄마가 아이들 방으로 들어왔어요. 아이들을 본 엄마는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안아 주지 않자, 웬디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엄마! 웬디예요.” 아이들은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엄마에게 안겼어요. “아, 이게 꿈이 아니었구나!” 엄마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세 아이를 꼭 끌어안았어요. 그 소리에 아빠와 나나도 달려왔고, 모두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어요. 이때, 네버랜드에서 함께 온 집 잃은 남자아이 여섯이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웬디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엄마와 아빠는 마루에 침대 여섯 개를 새로 마련해 주었어요. 어느새 창밖에 와 있던 피터 팬은 일부러 창문을 문지르고는 휙 날아갔어요. 웬디가 곧 알아채고 창문을 열었어요. “웬디, 안녕. 해마다 봄이 되면 널 데리러 올게.” 피터 팬은 이렇게 웬디에게 말하고는 훌쩍 날아올라 금세 사라져 버렸어요. 다음 해 봄, 피터 팬은 약속대로 아이들을 네버랜드로 데려갔어요. 아이들은 네버랜드에서 일주일 동안 실컷 논 다음 다시 웬디네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피터 팬은 한 해 걸러 한 번 더 찾아왔어요. 그러고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웬디는 어른이 되어 결혼했고, 몇 해가 지나 제인이라는 여자아이를 낳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웬디는 제인의 침대 옆에서 바느질하고 있었어요. 그때, 피터 팬이 변함없이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훌쩍 창문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웬디, 나랑 함께 네버랜드로 가자.” “피터 팬,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어.” 웬디가 이렇게 말하자 피터 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웬디를 쳐다보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어요. 그 소리에 잠이 깬 제인이 피터 팬에게 물었어요. “넌 누군데 여기에서 울고 있니?” “응, 난 피터 팬이야.” “아, 네가 피터 팬이구나. 나도 네버랜드에 가고 싶어.” 피터 팬은 제인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날아갔어요. 언젠가 제인이 커서 또 딸을 낳으면 그 딸도 피터 팬과 함께 네버랜드로 여행을 갈 거예요. 그렇게 영원히 네버랜드로의 여행은 계속될 거예요.
비밀의 화원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메리가 고모부 집인 미셀스와이트 저택에 처음 왔을 때, 모두 이렇게 밉살스럽게 생긴 아이는 처음 본다고 수군거렸어요. 야윈 얼굴에 깡마른 몸, 숱 적은 금발과 버릇없는 말투까지 예쁜 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메리는 아홉 살까지 인도에서 살았어요. 영국 정부의 관료였던 아버지는 일 때문에 늘 바빴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노는 걸 좋아해서 메리를 돌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메리는 유모의 손에서 쓸쓸하게 자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콜레라가 퍼져 메리의 부모와 유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 살길을 찾아 달아나 버렸어요. 메리는 커다란 집에 혼자 남겨졌어요. 군인들이 메리의 집을 찾아오기 전까지는요. 메리는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지만 슬퍼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누군가 자신을 돌봐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메리는 영국에 있는 고모부 크레이븐 씨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어요. 메리는 장교의 부인과 함께 배를 타고 영국까지 긴 여행을 했어요. 영국에 도착하자 크레이븐 씨의 가정부인 메들록 부인이 마중 나와 있었어요. 메리는 메들록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메들록 부인 역시 메리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세상에! 저렇게 못생기고 버릇없는 아이는 처음이군!’ 요크셔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탄 다음에도 메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참다못한 메들록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어요. “아가씨가 계시게 될 곳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계세요?” “아니요.” 미리 이야기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나중에 놀랄지도 모르니까. 저택은 지은 지 600년이나 되는 오래된 집이지요. 방이 백 개나 되지만 대부분 문을 잠가 놓았어요. 집 주위에는 넓은 뜰이 몇 개나 있어요. 메들록 부인은 말머리를 돌려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주인님은 등이 굽으셨는데 성격이 좀 괴팍하세요*. 아마도 주인님은 아가씨에게 별로 신경 쓰시지 않을 거예요.” 메리는 흥미가 없는 척하면서도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어요. 메들록 부인은 메리가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을 알고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어요. “부인은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었지요.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부터 주인님은 더욱 괴팍해지셔서 좀처럼 사람을 만나려 하시질 않아요.” 메리는 지금 자기가 가고 있는 곳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느껴졌거든요. 메들록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어요. “저택에 가면 아가씨가 꼭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기웃거리지 마세요. 주인님은 그것을 제일 싫어하시니까요.”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창밖에는 어느덧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어요. ‘오래된 집, 잠겨 있는 방, 등이 굽은 괴팍한 고모부.’ 두 사람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조그만 역에 내렸어요. 두 사람은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타고 어둠 속을 달렸어요. 마차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달리고 또 달렸어요. 몇 개의 작은 다리를 건넌 다음 낮은 언덕길에 다다르자 그제야 처음으로 불빛이 보였어요. “후유, 이제 다 왔군요. 조금만 더 가면 되어요.” 메들록 부인은 마음이 놓이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마차는 저택의 정문을 지나고서도 한참을 달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커다란 빗장이 채워진 저택 앞에 멈추었어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둡고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어요. 점잖게 생긴 피처 노인이 메리를 맞아 주었어요. 메리는 메들록 부인의 안내로 넓은 계단참으로 갔어요. 그리고 긴 복도를 지나 문이 열린 방에 이르렀어요. 방에 들어서자 난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고 맛있는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자, 이 방이 아가씨가 지낼 곳이에요.” 메리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오는 동안에도 말했지만 주인님이 무척 싫어하시니까 집 안을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메들록 부인은 거듭 당부하며 방을 나갔어요. 이렇게 메리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다음 날 아침 메리는 요란스럽게 재를 긁어내는 소리에 잠이 깼어요. 눈을 떠 보니, 난롯가에서 한 하녀가 재를 긁고 있었어요. 하녀의 이름은 마사였어요. “네가 내 하녀야?” 메리는 인도에서 했던 대로 거만하게 물었어요. “글쎄요, 어쨌든 저는 위층에서 일하는 하녀니까 가끔 아가씨 시중도 들 수 있겠지요.” “그럼 아침마다 내 옷은 누가 입혀 주지?” 당연한 듯이 묻는 메리에게 마사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어요. “그야 물론 아가씨가 하셔야죠. 혼자서 옷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난 한 번도 내 손으로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메리는 슬슬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마사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메리를 달랬어요. “아가씨, 울음을 그치세요.” 결국 마사는 메리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어요. 마사는 남이 모두 해 주길 바라는 아이는 처음이라 메리가 무척 이상하게 여겨졌어요. “아가씨, 우리는 형제가 열두 명이나 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을 해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봐 줄 수가 없지만, 제 동생들은 온종일 잘 뛰어놀아요. 특히 제 남동생 디콘은 열두 살인데 자기 일은 모두 다 알아서 하지요.” 메리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옆방으로 갔어요. 방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어요. 그러나 메리는 괜한 투정을 부렸어요. “난 먹고 싶지 않아.” “제 동생이라면 금세 다 먹어 치울 텐데. 그 아이들은 언제나 배가 고프니까요.” 마사가 아무리 달래 보아도 메리는 막무가내였어요. “아가씨,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놀아 보세요. 그러면 우울했던 기분도 풀리고 몸도 튼튼해질 거예요.” 마사가 메리에게 말했어요. “이렇게 추운 날 뭐 하러 밖에 나가?” “제 동생 디콘은 황무지에 나가 온종일 놀아요. 그래서 망아지랑 새들이랑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죠. 디콘은 자기가 먹을 것을 새들에게 나눠 주기도 해요.” 그 말을 듣자 메리는 갑자기 황무지로 나가고 싶어졌어요. 어쩌면 황무지의 새들은 인도의 새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마사는 메리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어요. “울타리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면 뜰을 보실 수 있어요. 참, 자물쇠로 문이 잠겨진 뜰에는 들어가시면 안 돼요.” 마사는 어른스럽게 충고를 했어요. “어머나, 그건 또 왜지?” “쉿! 그건 돌아가신 마님의 뜰이었기 때문이죠. 주인님은 마님이 돌아가시자 뜰의 문을 잠그고, 열쇠를 땅에 묻어 버렸대요.” 마사는 조심스럽게 일러 주었어요. ‘이 집은 정말 신비로운 집이야. 좋아, 꼭 열쇠를 찾아서 뜰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메리는 울타리 가운데 문으로 들어섰어요.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화단이 이어져 있었어요. 한참을 가다 보니 초록색 문이 보였어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곳에는 채소밭이 있었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어깨에 삽을 멘 할아버지가 들어왔어요. “여긴 뭘 하는 곳이야?” 메리가 물었어요. “보다시피 채소밭이지.”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어요. 메리는 혼자 돌아서서 좁다란 길을 걸었어요. 담 너머로 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빨간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어요. 빨간 새는 노래를 부르듯 지저귀기 시작했어요. 메리는 빨간 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어요. ‘저 새가 노래하는 나무는 비밀의 뜰에 있는 걸 거야. 담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문은 없었거든.' 메리는 할아버지가 일하는 채소밭으로 갔어요. 할아버지는 메리를 본 척도 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저 빨간 새가 노래하는 뜰에 가 보고 싶어.” 메리가 새 이야기를 하자, 놀랍게도 할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메리를 쳐다보았어요. 그러고는 새가 있는 쪽을 향해 낮게 휘파람을 불었어요. 신기하게도 새는 메리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어요. “오, 어서 오너라.” 할아버지는 사람을 대하듯 정답게 말했어요. 빨간 새는 오래전부터 할아버지에게 길들여졌는지 할아버지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새 이름이 뭐야?” “사람을 잘 따르는 붉은가슴울새란다.” 할아버지는 삽을 놓고 메리를 보며 물었어요. “인도에서 온 아가씨인가?”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할아버지 이름은 뭐야?” “벤 웨더스타프라고 부르지.” 벤 할아버지는 씽긋 웃었어요. “우리는 서로 닮은 데가 있는 것 같구나. 잘생긴 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게다가 성미가 꽤 비뚤어진 사람들 같거든.” 너무나 솔직한 말이었어요. 메리는 벤 할아버지와 마사를 보고 이곳 사람들은 마음속의 말을 그대로 하는 솔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정말 비뚤어진 아이일까?’ 어느 틈에 붉은가슴울새가 메리 옆에 있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왜 갑자기 노래를 부르지?” “너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게지.” 메리는 사과나무 아래로 다가섰어요. “정말, 나하고 친구 할 거니?” 붉은가슴울새는 대답이라도 하듯 노래를 불러 주며 담 너머 뜰로 날아갔어요. “할아버지, 붉은가슴울새가 문도 없는 뜰로 날아갔어.” 메리가 놀라 소리쳤어요. “그 새는 그곳을 무척 좋아하지. 알을 깬 곳도 거기니까.” “저 닫힌 뜰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 “10년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그리고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안 돼. 이제 나는 일하러 가야 하니 아가씨는 혼자 놀아.” 벤 할아버지는 삽을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가 버렸어요. 메리는 산책하기 시작하면서 몰라보게 건강해졌어요. 그날도 메리는 정원과 채소밭으로 산책하러 나갔어요. 그러다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뜰 옆의 길에 이르렀어요. 그런데 담 가운데 유독 한군데의 덩굴이 더욱 빽빽했어요. “어쩌면 여기가 그 비밀의 뜰이 아닐까?” 그때 메리 앞에 붉은가슴울새가 날아왔어요. “난 네가 무척 좋아.” 메리가 속삭이자 붉은가슴울새는 사과나무 꼭대기로 날아갔어요. ‘저 사과나무는 비밀의 뜰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어. 저 안에 들어가 봤으면.’ 그러나 아무리 담 주위를 맴돌아도 문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날 저녁, 메리는 식사 뒤 마사에게 다시 물었어요. “고모부는 왜 그 뜰을 싫어하지?” 마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어요. “그건 이 집의 비밀이니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돌아가신 마님과 주인님은 늘 그 뜰에서 즐겁게 지냈대요. 뜰에 휘어진 가지 하나가 있었는데 마님은 종종 거기에 앉아 책을 보시곤 했어요. 어느 날, 마님이 그 가지에 앉아 있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크게 다치셨고 다음 날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그 뒤부터 주인님은 그 뜰을 싫어하게 되셨지요.” 메리는 문득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서 들리는 듯했거든요. “마사, 누가 울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사는 화들짝 놀랐어요. “그, 그럴 리가. 아마 바람 소리일 거예요.” “아니야, 저건 분명히 아이 울음소리야.” 메리가 계속해서 우기자 마사는 당황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문을 잠갔어요. 메리는 마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어요. ‘저건 분명 울음소리야. 그런데 마사는 왜 애써 아니라고 할까?’ 아무래도 마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튿날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어요. “아이, 심심해.” 마사는 줄곧 따분해하는 메리를 즐겁게 해 줄 일이 없을까 하고 궁리했어요. “아가씨, 책을 읽는 게 어떠세요?” “책이 어디 있어? 모두 인도에 두고 왔는데.” 메리는 문득 이 저택의 도서관을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마사가 방을 나가자 복도를 어슬렁거렸어요. 복도가 끝나는 곳에 좁은 계단이 있었어요. 계단을 올라가니 또 긴 복도가 나왔고 복도에는 수많은 문이 있었어요. 방문들은 메들록 부인의 말처럼 모두 잠겨 있었어요. 메리는 방을 둘러보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바로 그때, 또다시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소리는 간밤에 듣던 것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렸어요. “틀림없는 울음소리야.” 메리는 무심결에 벽에 걸린 벽걸이를 잡았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벽걸이가 움직이더니 그 뒤에 또 다른 복도로 통하는 문이 나타났어요. 그때, 복도의 저편에 메들록 부인이 서 있었어요. “누군가가 틀림없이 울었어. 정말이라고!” 메리는 혼자 중얼거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어요.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꼭 알아내고 말 거야.’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구름이 맑게 걷혀 있었어요. 메리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메리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마사, 황무지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 “봄이 오려나 봐요!” 마사도 즐거운 듯 맞장구를 쳤어요. 메리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어요. “아가씨도 디콘처럼 저 황무지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나도 마사의 집에 가서 디콘을 만나 보고 싶어.” 갑자기 메리는 어린아이처럼 졸랐어요. “좋아요, 오늘은 내가 집에 다녀올 일이 있으니 어머니께 부탁드려 볼게요. 그런데 디콘이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할지.” “우선 자기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남이 날 어떻게 여길지 알 수 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마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어요. 잠시 뒤, 식사를 차려 준 마사는 집에 다니러 갔어요. 혼자 남게 된 메리는 무척 쓸쓸해졌어요. 그때 붉은가슴울새가 메리 앞에 날아왔어요. “저 붉은가슴울새가 사는 그 뜰에도 싹이 돋아날까?” “직접 물어보렴.” 벤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휙 가 버렸어요. 메리는 채소밭에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어요. 어느새 메리는 담쟁이덩굴로 덮인 담 옆의 길을 향해 걷고 있었어요. 들어가는 문을 찾으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붉은가슴울새가 땅바닥에 내려앉아 흙을 쪼아 대고 있었어요. 붉은가슴울새가 쪼아 놓은 흙 사이로 뭔가 반쯤 묻혀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것은 마치 녹이 슨 쇠고리 같았어요. 메리는 얼른 그것을 주워 들었어요. 그것은 고리가 아니라 오래된 열쇠였어요. 메리는 갑자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어요. “혹시 이게 비밀의 뜰 열쇠가 아닐까?” 메리는 열쇠를 값진 보석처럼 가슴 속에 소중히 품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그 뜰로 들어가는 문만 찾으면, 비밀의 뜰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메리는 신이 나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어요.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마사가 활짝 웃으며 돌아왔어요. 마사는 자기 집에서 있었던 일을 메리에게 자세히 이야기 해 주었어요. “동생들은 아가씨에게 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 듣고 싶어 했어요.” “정말이고말고.” 갑자기 마사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밖으로 나가더니, 뭔가를 뒤에 숨겨서 돌아왔어요. “아가씨, 손잡이가 달린 줄넘기예요. 행상한테서 어머니가 2펜스를 주고 사셨어요.” 그것은 메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어요. 마사는 방 한가운데에서 줄을 넘기 시작했어요. 메리는 신기하다는 듯이 마사를 쳐다보았어요. “내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마사의 어머니는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 메리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마사의 손을 꼭 잡았어요.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마사 어머니의 선물에 메리는 코끝이 찡할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어요. 밖으로 나온 메리는 줄넘기를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신나는 놀이는 난생처음이었어요. 줄넘기를 하면서 메리는 자기도 모르게 뜰 쪽으로 갔어요. 그러자 붉은가슴울새가 나타났어요. “붉은가슴울새야, 넌 나에게 열쇠를 찾게 해 주었어. 이젠 그 뜰의 문이 어딘지 가르쳐 주지 않을래?” 그때였어요. 갑자기 세찬 바람이 담쟁이덩굴잎을 흔들어 놓았어요. 그러자 담쟁이덩굴의 줄기 사이에서 무언가가 나타났어요. 그것은 놀랍게도 문의 손잡이였어요. 메리는 너무 놀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이럴 수가.” 메리는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구멍에 넣어 보았어요. 열쇠는 손잡이의 구멍에 꼭 맞았어요. 메리는 열쇠를 맞추고 힘껏 손잡이를 돌렸어요. 그러자 마침내 덜컥 문이 열렸어요. 메리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았어요. 10년 동안 굳게 닫혔던 비밀의 뜰에 호기심 많은 소녀 메리가 드디어 발을 딛게 된 것이에요. “아, 너무나 조용해!” 메리는 나지막이 속삭였어요. 붉은가슴울새도 나무에 가만히 앉아 메리를 바라볼 뿐이었어요. 메리는 살금살금 다니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어요. 그러다가 초록빛 싹이 삐죽삐죽 올라온 꽃밭에 이르렀어요. 메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싹을 살펴보았어요. “이건 아네모네거나 수선화일 거야. 그래, 완전히 죽은 뜰이 아니야. 장미는 죽었을지 몰라도 다른 것들은 살아 있어.” 사람의 손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서 그런지 초록빛 싹들의 주위엔 잡초가 무성했어요*. ‘잡초를 뽑아 주면 싹들도 잘 자랄 수 있겠지.’ 메리는 잡초를 뽑기 시작했어요. 일하다 보니까 신이 나서 나중엔 나무 그늘의 풀밭까지 다듬었어요.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어요. “얘들아, 이따가 다시 올게.” 메리는 마치 가까운 친구를 대하듯 화초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날은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점심도 아주 맛있었어요. 마사는 이러한 메리를 보고 몹시 기뻐했어요. “아가씨, 줄넘기를 한 덕분인가 봐요.” ‘아니야, 만약 고모부의 귀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고모부는 뜰의 문을 다시 잠가 버릴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한 메리는 재빨리 둘러댔어요. “여긴 집도 뜰도 큰 데다가 함께 놀 사람도 없잖아? 그래서 조그만 화단을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마사는 이렇게 편지를 써서 돈과 함께 보내기로 했어요. “참, 저번에 아가씨가 우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제가 어머니께 부탁을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쉽게 허락해 주셨어요.” “정말?” 그날 메리는 한꺼번에 신나는 일이 두 가지나 생겨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메리는 그 뜰에 ‘비밀의 뜰’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날마다 찾아갔어요. 비밀의 뜰에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요정의 나라에 혼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 메리는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어요. 봄이 오면 이 뜰에 수많은 꽃이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이젠 벤 할아버지와도 꽤 친해졌어요. 메리는 벤 할아버지와 마주칠 때마다 먼저 인사를 건넸어요. 그것도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이에요. 그러자 벤 할아버지도 메리를 만나면 환하게 웃어 주었어요. 비밀의 뜰에는 숲으로 통하는 조그만 문이 있었어요. 메리는 조그만 문으로 다가갔어요. 피리리리!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려왔어요. 메리가 문을 열고 가로수 길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자 신기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요.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나무에 기대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소년의 주위에는 다람쥐, 토끼, 꿩 등이 모여 피리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소년은 메리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어요. “메리 아가씨죠? 난 디콘이에요.” 디콘은 메리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어요. “마사의 편지를 받고 온 거니?” 디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꽃밭을 가꿀 도구와 꽃씨를 사 가지고 왔어요.” 둘은 나무 밑에 사이좋게 앉았어요. 디콘이 가지고 온 꾸러미에는 꽃씨 봉지가 들어 있었어요. “이건 냄새가 좋은 참제비고깔 꽃씨예요. 그리고 이건 어디서든 잘 크는 양귀비 꽃씨고요.” 그러다가 더는 숨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입을 열었어요.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씨를 뿌릴 뜰은 10년 동안 굳게 문이 닫힌 채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곳이야. 디콘, 날 따라와.” 메리가 일어나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어요. 가로수 길을 지나 뜰에 이르자 디콘은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신기한 곳이 있다니! 내가 이곳에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뭐? 넌 이 뜰에 대해 알고 있었니?” 메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어요. 디콘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언젠가 누나한테서 이 집에 10년 동안 닫혀 있는 뜰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 뜰에 대해 몹시 궁금했어요.” 디콘은 여전히 신기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메리는 덩굴장미를 살펴보다가 디콘에게 물었어요. “봄이 오면 저 장미꽃들이 다시 피게 될까?” 그러자 디콘은 장미의 줄기를 잘라 보이며 말했어요. “그럼요, 줄기 안이 촉촉한 걸 보니 아직 살아 있어요.” “정말 다행이다.” 메리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어요. 둘은 뜰의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펴보았어요. 그러다가 메리는 디콘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말했어요. “이 뜰엔 해야 할 일이 많아. 네가 좀 도와주지 않을래?” “물론이죠. 언제든지 말만 해요.” 디콘은 흔쾌히 대답했어요. “디콘!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이젠 내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다섯이나 생겼어.” 메리가 디콘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말했어요. 디콘과 메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일했어요. 어느새 12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어요. 메리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른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난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넌 어떻게 할 거니?” 메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나 디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요. “난 늘 도시락을 가지고 다녀요. 아가씨도 얼른 가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오세요.” 디콘은 조그만 꾸러미를 풀어 도시락을 꺼내 열어 보였어요. “디콘,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뜰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 돼. 알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난 비밀을 꼭 지키는 사나이라고요.” 메리는 배고파서 얼른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식탁에는 식사 준비를 마친 마사가 혼자 앉아 있었어요. “아가씨, 어딜 갔다 오느라 이렇게 늦었죠?” “응, 디콘을 만났어! 디콘은 착한 친구야.” 메리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어요. 메리는 서둘러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어요. 그런데 마사가 메리를 불러 세웠어요. “아가씨, 오늘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아가씨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메리는 갑자기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어요. “아, 고모부가 왜 갑자기 나를 만나려고 하시는 걸까?” “실은 길에서 우리 어머니가 주인님을 만났는데, 어머니가 아가씨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이 내일 여행을 가시기 전에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하신대요.” 메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요. ‘고모부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셨으면 좋겠어. 그럼 마음 놓고 비밀의 뜰을 가꿀 수 있을 거야.’ 잠시 뒤, 메리는 메들록 부인을 따라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갔어요. 메들록 부인이 어떤 방의 문을 두드렸어요. “들어오시오.” 안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안락의자에 등이 약간 굽은 남자가 앉아 있었어요. “수고했소. 부인은 나가 보시오.” 메들록 부인이 나가자 메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그럼 하고 싶은 일이나 갖고 싶은 것은 없니?” 메리는 잠시 생각한 다음 용기를 내어 말했어요. “저는 밖에 나가서 뛰어놀고 싶어요. 황무지의 맑은 공기도 마시고 줄넘기도 하고. 저어. 전 땅을 조금 갖고 싶어요.” “땅은 무얼 하려고?” “꽃씨를 심어서 꽃이 피는 걸 보고 싶어요.” 크레이븐 씨는 메리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어요. “네 말을 들으니 어떤 사람이 생각나는구나. 그 사람도 땅과 땅에서 자라는 것들을 사랑했지. 그래, 네 마음에 드는 땅을 골라 꽃을 가꾸어 보도록 해라.” “어디든지요?” “네가 원한다면. 자, 그만 나가 봐라. 내가 좀 피곤하구나.” 메리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어요. 크레이븐 씨는 메들록 부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침실로 들어갔어요. 방으로 돌아온 메리는 마사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고모부는 정말 좋은 분이야. 어디든지 내가 원하는 곳에 내 뜰을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어.” 메리는 서둘러 뜰로 갔어요. 그런데 뜰에는 디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나무에 디콘이 남겨 놓은 쪽지가 보였어요. 쪽지에는 둥지에 앉아 있는 새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내일 또 올게요.”라고 씌어 있었어요. 메리는 다음 날 디콘과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어요. 그날 한밤중이 가까워져 올 무렵이었어요.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메리는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고 말았어요. 그리고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저 소리는 틀림없이 저번에 들은 그 울음소리야.” 메리는 이번에는 꼭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촛불을 들고 살그머니 복도로 나갔어요. 메리는 전에 복도를 헤매다 찾은 벽걸이로 가린 문 앞에까지 이르렀어요. 문을 통해 다시 복도를 따라가자 막다른 방 안에서 불빛과 함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어요. 좀 전에 들었던 울음소리였어요. 메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어요. 방 안은 멋진 가구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벽난로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어요. 유심히 방 안을 살피던 메리는 침대 위에서 울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어요. 눈이 유난히 큰 소년은 얼굴이 몹시 창백했어요. 메리는 숨을 죽여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어요. 그러자 소년은 흠칫 놀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어요. “누, 누구세요?” “난 크레이븐 씨의 조카인 메리 레녹스야.” 소년은 메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어요. “그런데 넌 누구니?” “난 콜린 크레이븐이야. 크레이븐 씨는 우리 아버지고.” 메리는 깜짝 놀랐어요. “고모부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그러자 콜린은 메리의 옷자락을 만지며 말했어요. “진짜 사람이구나. 난 진짜 같은 꿈을 많이 꾸거든. 그런데 넌 어디에서 왔니?” “내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기에 궁금해서 찾아온 거야. 너 왜 울었니?”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거든.”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어요. “콜린, 누가 널 이 방에 가두었니?” “난 가둬진 게 아니야. 내가 나가기 싫어서 이 방에만 있는 거야. 아버지도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시거든.” “왜?” 콜린은 무척 우울해 보였어요. “아, 사람들이 널 보는 게 싫다면 나도 갈까?” 그러자 콜린은 얼른 메리의 옷자락을 붙잡았어요. “아니, 가지 마. 나와 조금만 더 있어 줘.” “좋아, 네가 원한다면.” 메리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어요. “메리, 넌 몇 살이야?” “열 살이야. 너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알아?” 콜린이 놀라서 물었어요. “그 뜰의 문이 닫혔던 것이 10년 전 일이고, 네가 태어났을 때 너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그 뜰이라니? 문이 닫혀 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메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콜린이 물었어요. 그제야 메리는 실수한 것을 깨닫고 얼른 말머리를 돌렸어요. “그런데 넌 왜 오래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니?” “어려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으니까. 나를 치료하는 의사는 아버지의 사촌 동생이야. 만약 내가 없다면 아버지 유산은 그 사람 것이 된대. 그러니 아버지 사촌 동생도 내가 죽길 바라고 있을 거야.” “넌 살고 싶니?” “아니, 그렇지만 죽기도 싫어. 난 아플 때면 침대에 누워 내가 죽는 생각을 해. 그럼 자꾸 울고 싶어져.” “그래서 울었구나.” 이번에는 콜린이 말머리를 돌렸어요. “메리, 우리 딴 이야기하자. 아까 네가 말한 그 뜰에 넌 들어가 보고 싶니?”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콜린이 말했어요. “그럼 사람들에게 나를 거기로 데려가 달라고 할까? 너도 함께 데리고 갈게.” 메리는 깜짝 놀라며 콜린에게 말했어요. “그건 절대로 안 돼. 네가 어른들에게 졸라 억지로 그 문을 열게 되면 그때부터 비밀이 아닌 게 되잖아?” “비밀이라니?” “아무도 모르게 그 뜰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버리면 그곳은 우리만의 비밀이 돼. 정말 신나는 일이지 않니?” 콜린은 메리의 수다스러운 모습에 어리둥절했어요. 메리는 콜린의 표정을 살피며 애원하듯 다시 말을 이었어요. “우린 그 뜰에 꽃씨를 뿌려 다시 뜰을 살릴 수가 있어. 그러니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그래, 네 생각이 맞아.” 콜린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자 메리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어요. “콜린, 내가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니니? 피곤하지 않아?” “메리 네가 가 버리면 난 또 우울해질 거야. 네가 있는 동안에 잠들었으면 좋겠다.” “알았어, 그러면 어서 눈을 감아.” 메리는 콜린이 가엾어 보였어요. 그래서 나지막한 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주었어요. 콜린이 잠이 들자 메리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어요. 다음 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황무지는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어요. 혼자 있기가 지루해진 메리는 마사를 불렀어요. 마사는 뜨개질감을 가지고 왔어요. 난롯가에 마주 앉으며 메리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마사, 그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아냈어.” 메리의 말에 마사는 너무나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뜨개질감을 떨어뜨릴 뻔했어요. “난 울음소리를 알아내기 위해 무척 애를 먹었어. 그리고 마침내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찾았지. 그건 바로 콜린이야.” “어머나, 세상에! 이 일을 어째!” 마사는 울상이 되어 더는 말을 잇지 못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콜린은 내가 찾아간 걸 좋아했어.” “그게 정말이세요? 도련님은 화를 잘 내서 늘 조심스러운데.” “그렇지 않아. 콜린은 좋은 아이야. 그 애는 내가 오랫동안 자기 곁에서 이야기해 주길 바랐어.” “전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메들록 부인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텐데.” 마사가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하지만 날 혼내지는 못할 거야. 어쨌든 콜린은 이 집의 도련님이니까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거스르는 것은 못하겠지?”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콜린은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지, 마사?” “그건 아무도 몰라요. 마님이 도련님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주인님은 도련님이 보기 싫다고 하셨고 또 자기처럼 등이 굽을 바에야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어요.” “너도 콜린이 죽을 것 같아?” “글쎄요.” “콜린을 뜰로 데리고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하면 나처럼 건강해질 거야. 그렇지?” 그때 종소리가 울렸어요. 마사를 부르는 신호였어요. “도련님이에요.” 마사는 급히 뛰어나갔어요. 잠시 뒤에 돌아온 마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메리에게 말했어요. “도련님이 아가씨를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아가씨, 혹시 도련님께 요술을 건 것 아니에요?” “아니, 난 요술을 부릴 줄 몰라.” 메리는 환하게 웃으며 콜린의 방으로 갔어요. “어서 와, 메리.” 메리는 콜린 가까이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어요. “콜린, 넌 디콘과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디콘이 누구지?” “열두 살 난 아이인데, 마사의 동생이야.” 그러자 콜린은 디콘에 대해 몹시 궁금해했어요. “디콘은 피리를 아주 잘 불어. 디콘이 피리를 불면 동물들이 그 아이의 곁으로 모여들어. 디콘은 꽃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지. 그리고 황무지를 무척 좋아해.” 콜린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난 황무지가 삭막해서 싫어. 게다가 나같이 아픈 아이는 황무지에 가 볼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않아. 황무지는 굉장히 멋있고 훌륭한 곳이야. 그리고 너도 황무지에 가 볼 수 있을 거야. 틀림없이.” 메리는 힘주어 말했어요. 두 사람은 놀라 잠시 멈칫거렸어요. 그러자 콜린이 침착하게 말했어요. “내 사촌 메리예요. 내가 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메들록 부인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어요. “세상에! 누가 도련님 이야기를 했을까요?” “메리에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어. 메리가 직접 날 찾아낸 거야. 메리가 와서 난 정말 기뻐.” 콜린은 메들록 부인을 쏘아보며 말했어요. 의사는 콜린을 진찰하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어요. “콜린,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아.” “그런 건 이제 신경 안 써요. 메리를 만난 뒤 난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요.” 그러자 의사의 얼굴에는 실망한 듯한 표정이 역력했어요. “메들록, 우리에게 따뜻한 차와 과자를 가져다줘.” 잠시 뒤, 메리와 콜린 앞에 따끈한 차와 금방 구운 과자가 놓였어요. “메리, 이것 좀 먹어 봐.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 콜린과 메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즐겁게 웃었어요. 그 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어요. 그래서 메리는 온종일 집 안에 있어야 했지만, 조금씩 달라져 가는 콜린과 지내느라 지루한 줄도 몰랐어요. 메리는 콜린의 방에 가서 뜰에 관한 이야기, 디콘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때로는 콜린에게 책을 읽어 주기도 했어요. 콜린은 메리와 친해지게 되면서 눈에 띄게 명랑해졌어요. 매일같이 부리던 신경질도 잘 내지 않았어요. 메리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뜰로 뛰어갔어요. 그런데 메리보다 먼저 뜰에 와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디콘이었어요. “디콘! 금방 해가 떴는데 이렇게 일찍.” 메리는 디콘에게 다가갔어요. “이렇게 햇살이 고운 날에 늦잠을 잘 수 있어야지요.” “맞아, 정말 너무너무 신나는 날이야!” 디콘과 메리는 비가 오는 동안 볼 수 없었던 뜰의 구석구석을 훑어보았어요. 그러자 무엇인가 재빠르게 날아오더니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날아갔어요. 그것은 바로 붉은가슴울새였어요. 붉은가슴울새는 부리에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있었어요. 디콘과 메리는 걸음을 멈추었어요. “벤 할아버지의 붉은가슴울새야. 왜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 거지?” 디콘은 메리의 입에 손을 대었어요. “쉿!” 메리도 숨소리를 낮추며 가만히 있었어요. “봄이 오면 새들도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함부로 간섭하면 새들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 거예요.” 디콘이 나직하게 말했어요. “그럼 새들이 보금자리를 만들 동안 다른 이야기를 하자. 난 이 집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어.” 메리가 못 참겠다는 듯 말했어요. “무슨 이야긴데요?” 디콘은 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어요. “디콘, 넌 콜린이 누군지 알아?” “콜린이라고요?” 디콘은 깜짝 놀라 메리를 쳐다보았어요. “난 이번 주 내내 콜린과 재미있게 놀았어. 콜린은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와 이야기하고, 노는 것을 보면 괜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디콘은 안심한 듯한 표정이 되었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콜린 도련님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하질 않아요. 난 다만 콜린 도련님이 크레이븐 씨의 아들이고, 크레이븐 씨는 남들이 자기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무척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메리 아가씨는 어떻게 콜린 도련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나는 이 집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 그런데 모두들 울음소리에 대해 모른 척하는 거야. 그래서 나 혼자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했지.” 메리는 말을 멈추고 잠시 뭔가 생각했어요. “맞아, 게다가 콜린은 등이 굽을까 봐 두려워해.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미칠 것 같대.”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병이 나을 리가 없지요.” “어떻게 하면 콜린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 메리가 진지하게 물었어요. “콜린 도련님을 이곳에 데려오면 좋을 거예요. 장미가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게 되면 건강해질지도 몰라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콜린도 늘 밖에 나가 보고 싶어 하면서도 무서워하고 있어. 우리가 도와준다면 콜린도 좋아할 거야. 너라면 휠체어를 밀어 줄 수도 있으니까.” 메리와 디콘은 새로운 계획에 가슴이 부풀었어요. 다음 날에도 메리와 디콘은 아침 일찍 뜰로 갔어요. 두 친구는 팔을 걷어붙이고 잡초를 깨끗이 골라낸 다음, 덩굴진 장미와 무성한 나무들을 보기 좋게 다듬었어요. “디콘, 잠깐 쉬었다가 하자.” 디콘은 곧 피리를 불기 시작했어요. 잠시 뒤, 디콘은 피리 불기를 멈추고 메리를 돌아보며 물었어요. “아가씨도 전보다 많이 건강해졌지요?” “응, 훨씬 건강해졌어. 식사도 많이 하고.” 메리는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둘은 어스름한 저녁이 될 때까지 뜰에 있었어요. “내일 또 만나자.” 디콘과 메리는 각기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온 메리는 뜰에 관한 이야기를 콜린에게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방문을 열자 마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어요. “왜 그래, 마사?”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도련님이 신경질을 부렸어요.” 콜린은 늘 자기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메리는 화가 났어요. 메리가 방에 들어서자 콜린은 못 본 척하며 돌아누웠어요. “콜린, 좀 일어나 봐. 할 말이 있어.” 메리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화를 낼 사람은 바로 나야. 난 온종일 너만 기다렸는데.” “뜰에 해야 할 일이 많았어. 그래서 디콘이랑 뜰에서 일했어.” “디콘과 함께 있느라고 나를 잊어버린 거지? 그렇다면 디콘을 우리 집에 오지 못하게 할 거야.” 메리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어요. “만약 네가 디콘을 못 오게 한다면, 나도 이 방에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콜린은 몹시 화가 났어요. 메리가 자기보다 디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결국 콜린은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어요. “그래, 난 죽어 가고 있으니까 아무도 날 좋아해 주지 않는 거야.” “말도 안 돼! 쓸데없는 억지 부리지 마!” 메리도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지금껏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콜린은 화가 났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조금은 좋았어요. “모두 내게 그렇게 말한단 말이야!” “아니야, 넌 남들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난 네 말을 믿지 않아. 넌 정말 나쁜 아이야!” 그러자 콜린은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어요. “나가! 이 방에서 당장 나가란 말이야!” 메리는 그래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요. “좋아, 이제 다시는 이 방에 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지 않을 거고.” 메리는 문을 박차고 나왔어요. 문 앞에는 놀랍게도 콜린을 시중드는 간호사가 둘의 싸움을 엿듣고 있었어요. 메리를 본 간호사는 쿡쿡거리며 웃었어요. “왜 웃는 거예요?” “죄송해요, 두 분이 싸우시는 게 하도 귀여워서. 두 분 다 고집이 대단한 것 같군요. 하지만 도련님에게는 그게 도리어 이로울지도 모르죠.” 기분이 나빠진 메리는 얼른 방으로 돌아왔어요. 마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메리에게 나무 상자 하나를 내밀었어요. “이게 뭐야?” “주인님이 보내셨어요.” 메리는 얼른 상자를 열어 보았어요. 상자 안에는 멋진 그림책 대여섯 권이 들어 있었어요. 두 권은 원예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이야기책이었어요. 또 상자 안에는 장난감과 메리의 이름 머리글자가 금박으로 새겨진 필통과 펜, 잉크 등도 들어 있었어요. 모두 마음에 쏙 들었어요. “지금 당장 고모부께 감사의 편지를 써야겠어.” 메리는 정말 기뻤어요. ‘콜린과 싸우지만 않았어도 당장 이 선물 상자를 들고 뛰어가서 함께 놀았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메리는 콜린이 가여웠어요. “잠깐만 가 볼까? 나를 온종일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메리는 혼자서 중얼거렸어요. 그러나 메리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내일 가 보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자정이 될 무렵, 메리는 무슨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어요. 급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쾅!’ 하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어요. 또 울부짖는 울음소리도 들려왔어요. “콜린이 틀림없어. 어쩌면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가 있을까!” 메리는 몸서리를 쳤어요. 왈칵 방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어요. “도련님이 심하게 화를 내요. 도련님은 아가씨를 좋아하니까 제발 달래 주세요.” 메리는 간호사와 함께 콜린의 방으로 갔어요.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자 메리는 화가 치밀었어요. 메리는 콜린의 방문을 열고 크게 소리쳤어요. “콜린, 당장 그만두지 못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널 싫어하는 거야.”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콜린에게 이렇게 심한 말은 도리어 좋은 약이 되었어요. 소리치며 울던 콜린이 멈추고 메리를 노려보았어요. 그러나 메리는 꼼짝하지 않았어요. 콜린은 몸을 떨며 서럽게 흐느껴 울었어요. 난, 나는. 도저히 그만둘 수 없어! 이것 좀 봐. 등에 혹이 생겼어. 난 꼽추가 될 거고 곧 죽고 말 거야. 콜린은 흐느끼며 말했어요. “혹이 어디 있어? 있다면 네 마음의 혹이 있을 뿐이야. 어디 등 좀 보자!” 메리는 문간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어요. “이리 와서 콜린의 등을 보여 줘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콜린에게 다가왔어요. “도련님, 등을 한번 보여 주세요.” 콜린은 엎드려 앙상하게 여윈 등을 내밀었어요. 메리는 진지하게 콜린의 등을 살폈어요. 콜린의 등을 쓰다듬던 메리는 딱 잘라 말했어요. “혹은 없어! 나도 말랐을 때는 너처럼 이랬어.” 콜린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어요. 콜린은 눈물을 멈추고 간호사에게 침착하게 물었어요. “이제 나도 남들처럼 클 수 있는 거야?” “그럼요, 당연하지요. 도련님은 이제 틀림없이 건강해질 거예요.” 콜린은 이제 완전히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메리, 정말 고마워. 그리고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콜린과 메리는 손을 마주 잡고 화해를 했어요. “메리, 나도 바깥에 나가고 싶어. 디콘이 와서 휠체어를 밀어 준다면 좋을 텐데. 난 디콘을 만나고 싶어.” 간호사가 나가자 콜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메리, 비밀의 뜰에 들어가는 법을 알아냈어?” “응, 내가 뜰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잠을 청해 봐.” 메리는 천천히 뜰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콜린은 비밀의 뜰에 대한 꿈을 꾸는 듯 편안하게 잠이 들었어요. 밤의 소동 탓이었는지 다음 날 메리는 늦잠을 잤어요. 식사하는 메리 옆에서 마사가 말했어요. “콜린 도련님이 아가씨더러 꼭 와 달라는군요. 전 도련님이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을 처음 보았어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그래, 나도 콜린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가 봐야겠어.” 식사를 마치고 메리는 콜린의 방으로 향했어요. “어서 와.” 콜린이 힘없이 말했어요. “오늘 아침엔 열도 좀 있고 온몸이 아파. 넌 괜찮니? 이렇게 일찍 밖에 나가려는 거야?” “응, 뜰에 가는 길이야. 하지만 오늘은 빨리 돌아올게.” 그 말에 콜린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어요. “간밤에 뜰에 대한 꿈을 꾸었어. 뜰의 온갖 꽃과 나무, 새 들이 춤을 추었어.” 메리는 금방 올 거라고 약속하며 콜린의 방을 나갔어요. 뜰에는 벌써 디콘이 와 있었어요. 메리는 지난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디콘에게 해 주었어요. “도련님을 어서 여기에 데리고 와야겠어요. 그럼 건강해질 거예요.” 디콘이 진지하게 말했어요. “좋아, 내가 콜린에게 물어볼게. 잎들이 무성해지면 이곳을 콜린에게 구경시켜 주자.” 메리는 뜰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콜린이 기다릴 것 같아 곧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곧장 콜린의 방으로 갔어요. 메리는 콜린에게 디콘을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빨리 디콘을 만나 보고 싶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콜린이 느닷없이 말했어요. “콜린, 디콘이 내일 아침 너를 만나러 온다고 했어. 그리고 곧 우리의 비밀의 뜰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메리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어요." 사실은 오래전에 비밀의 뜰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어. 그런데 너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동안 말을 못 했던 거야.” 다음 날, 콜린은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어요. 지금까지 자신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 버린 것 같았거든요. 잠시 뒤, 메리가 들어와 창문을 열었어요. “콜린, 밖은 정말 아름다워. 봄빛이 완연해.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공기를 마음껏 마셔 봐.” 메리가 하라는 대로 콜린이 따라 했어요. “도련님, 괜찮으세요?” 간호사가 이런 콜린의 모습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어요. 콜린은 간호사에게 말했어요. “오늘 사내아이 하나가 올 거야. 이름은 디콘이라고 해. 마사의 동생인데 나를 만나러 오는 거야.” “네?” 간호사는 콜린의 변화에 깜짝 놀라 가볍게 소리를 질렀어요. 디콘이 동물들과 함께 콜린을 찾아왔어요. 새끼 양이 콜린의 침대 가까이 와서 코를 대고 문질렀어요. “왜 이러지?” 콜린이 물었어요. “엄마의 젖을 찾고 있는 거예요.” 디콘은 능숙한 솜씨로 주머니에서 우유병을 꺼내 새끼 양에게 먹였어요. 콜린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어요. 디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비밀의 뜰에 핀 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고요. 콜린은 열심히 이야기를 듣더니 힘주어 말했어요. “나도 꼭 비밀의 뜰에 가 볼 거야.” 세 사람이 비밀의 뜰에 가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어요. 변덕스러운 봄 날씨가 강한 바람을 몰고 왔기 때문이에요. 콜린은 감기에 걸리고 말았어요. 콜린의 건강이 나빠지면 늘 소란이 일어났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메리와 디콘이 늘 찾아와서 즐거운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갔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세 사람이 비밀의 뜰로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콜린을 몰래 데리고 갈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들은 의논 끝에 정원사인 로치가 가꾼 뜰을 구경하러 가는 것처럼 꾸미기로 했어요. 어느 날, 콜린은 로치를 불렀어요. 콜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로치는 깜짝 놀랐어요. 로치, 부탁할 일이 있어. 난 오늘 오후에 뜰을 구경하러 갈 거야. 내가 뜰을 구경하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오후 2시 정도에 구경을 갈 테니까. 점심을 먹고 난 뒤 콜린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외출 준비를 했어요. 아래층에는 디콘이 미리 와서 휠체어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휠체어에 무사히 앉은 콜린이 말했어요. “모두 물러가고 디콘과 메리만 남아 있도록.” 콜린은 마치 임금이 신하를 대하듯 말했어요. 하인들이 모두 물러나자 세 사람은 동시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어요. 콜린이 탄 휠체어를 디콘이 조심스럽게 밀고 그 옆을 메리가 따라갔어요. 콜린은 푸른 하늘도 쳐다보고 황무지의 신선한 공기도 마음껏 마시며 뜰로 갔어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자 이윽고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높은 담 앞에 이르렀어요. “자, 드디어 비밀의 뜰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메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어요. “문이 어디에 있어? 보이지 않는데?” “나도 처음엔 쉽게 찾지 못했어.” 메리가 길게 늘어져 있는 덩굴을 걷어 올리며 말했어요. “바로 여기가 문이야!” 세 사람은 무사히 뜰로 들어갔어요. 콜린은 황홀한 듯이 한참 동안 멍한 얼굴로 있었어요. 뜰에는 초록빛 나무와 하얀빛, 금빛 그리고 보랏빛 꽃들이 어우러져 있었어요. 새의 노랫소리와 꿀벌의 왱왱거리는 소리는 마치 멋진 연주곡처럼 들려왔고요. 창백한 콜린의 얼굴에 발그레한 기운이 돌았어요. “난 곧 건강해질 거야. 그래서 너와 함께 언제까지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거야. 메리, 난 절대로 죽지 않아.” 메리는 콜린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디콘은 콜린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사과나무 아래에 놓았어요. 그곳에서 콜린은 디콘과 메리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콜린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어요. 콜린은 자기가 어느 신비의 나라에 온 어린 임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디콘, 붉은가슴울새를 보고 싶어.” 콜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했어요. “붉은가슴울새는 이제 곧 날아올 거예요.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어미 새는 지금 무척 바쁘답니다. 새끼에게 먹이를 날라다 주어야 하니까요.” 디콘이 대답했어요. 마침 붉은가슴울새가 부리에 뭔가 물고 날아갔어요. “저길 보세요.” 콜린은 디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붉은가슴울새가 먹이를 나르는 것을 보자 콜린도 오후에 먹는 간식 생각이 났어요. “메리, 집에 있는 맛있는 과자와 차를 가지고 와서 먹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야." 메리는 집으로 가서 토스트와 차, 금방 구운 과자를 바구니 가득 담아 왔어요. 세 사람은 간식을 맛있게 나눠 먹었어요. 어느새 햇살이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어요. 세 사람은 헤어지기 싫은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어요. “내일 또 와야지.” 콜린이 안타까워하며 말했어요. “내일은 도련님도 땅을 한번 파 보는 게 어떻겠어요?” “아니, 내가 어떻게!” “도련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난 다리가 약해서 잘 설 수도 없는걸?” “그런 생각만 없애면 도련님은 곧 설 수도 있고, 또 땅도 팔 수 있어요.” 디콘이 용기를 주듯 말했어요. 그런데 담 너머로 이쪽을 노려보며 손을 내젓는 사람이 있었어요. 벤 할아버지였어요. 벤 할아버지는 화가 난 목소리로 메리를 노려보았어요. “감히 거길 들어가다니.”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콜린이 디콘에게 말했어요. “디콘, 날 저 사람에게 데려다줘.” 콜린은 벤 할아버지 앞으로 나아갔어요. “할아버지, 나 알아보겠어? 난 콜린이야.” 벤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 알다마다요. 이 저택 주인님의 아드님이시죠. 하지만 도련님은 몸이 성치 않다고 들었는데.” 콜린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뭐? 내가 성치 않다고!” “도련님은 등이 굽은 꼽추인 데다가 다리까지 굽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한다고.” 그 말을 들은 콜린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갑자기 힘이 솟는 것 같았어요. 콜린은 다리를 덮었던 덮개를 걷어치우고 스스로의 힘으로 똑바로 섰어요. 뜻밖의 상황에 모두 놀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어요. “자, 나를 잘 보라고! 이래도 몸이 성치 않다고 할 거야?” 벤 할아버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어요.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이렇게 건강하신데. 정말 다행이에요!” 콜린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선 채 말했어요.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해서는 안 돼. 우리들의 비밀을 꼭 지켜 주어야 한다고. 알겠지?” “그럼요, 도련님. 꼭 지키고말고요.” 벤 할아버지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어요. “아, 디콘. 내가 설 수 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마치 요술쟁이가 된 것 같아.” “겁만 안 내면 도련님은 언제든 설 수도 있고, 걸어 다닐 수도 있어요.” 디콘의 말에 용기를 얻은 콜린을 한 발 한 발 내디뎌 걸었어요. 디콘이 부축해 주긴 했지만 제법 꼿꼿하게 걸었어요. 콜린은 나무에 기대어 혼자서 버티고 섰어요. 그러더니 나무 근처에 놓인 삽을 집었어요. 앙상하게 여윈 콜린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어요. 세 사람은 콜린이 흙을 파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콜린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흙을 파 올리더니, 자랑스럽게 소리쳤어요. “이것 좀 봐. 나는 걸을 수도 있고 흙을 팔 수도 있어!” 모두 콜린에게 박수를 쳐 주었어요. 그 뒤로 콜린은 거의 매일 뜰로 갔어요. 그리고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러한 사실은 크레이븐 씨와 메들록 부인, 의사도 알지 못했어요. 그들만의 비밀이니까요. 어느 날 아침, 의사는 콜린의 얼굴빛이 날로 좋아지는 것을 보고 물었어요. “콜린, 대체 요즘 매일 어디를 그렇게 나가니?” “상관하지 마세요. 내가 어디를 가든 누구도 간섭하지 못해요.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아버지에게 네가 건강해졌다는 사실을 알리면 기뻐하시지 않을까?”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요. 오늘 밤에라도 나빠질 수 있잖아요? 다시 예전처럼 되면 아버지는 실망하실 거예요.” “네가 원한다면 알리지 않겠다. 이렇게 좋아진 걸 다시 나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메리와 콜린은 또 다른 궁리를 했어요. 그러고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당분간 연극을 하기로 했어요. “앞으론 신경질을 조금씩 내야겠어. 그래야 우리들의 비밀이 오래 지켜질 수 있잖아. 식사하는 양도 약간 줄여야 할 것 같아.” 그러나 이제는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식사량을 줄이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콜린은 건강해졌어요. 세 사람은 매일 식사를 마치면 운동을 했어요. 누구보다 콜린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어요. 얼마 뒤에는 콜린도 꽤 잘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모두가 디콘 덕분이었어요. 오랜만에 본 의사도 콜린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메들록 부인이 말했어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죠. 도련님은 요즘 포동포동 살도 찌고, 혈색도 아주 좋아지고 있어요.” 이렇게 세 사람의 연극은 잘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그 뒤로 비밀의 뜰에는 멋진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다 죽어 가던 장미가 꽃을 피웠고 붉은가슴울새의 새끼들은 많이 자라서 조금 있으면 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콜린은 휠체어를 타고 뜰에 들어와서 매일같이 걷는 연습을 했어요. 비가 오는 날이면 콜린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지루했어요. 메리는 좋은 놀이를 생각해 냈어요. “콜린, 이 집에는 빈방이 백 개나 된대. 언젠가는 그 방들에 들어가 보려다가 한참 헤매기만 했어. 내 방까지 잊어버릴 뻔했다고.” 메리의 말에 콜린은 벌떡 일어나 앉았어요. “빈방이 백 개나 된다고? 우리 함께 가 보면 어떨까? 아주 재미있을 거야.” 콜린은 얼른 간호사를 불렀어요. “이제부터 나는 메리와 함께 이 집에서 가 보지 못한 곳을 구경할 거야. 그러니 내가 부를 때까지는 따라오지 마.” 간호사가 밖으로 나가자 메리와 콜린은 싱긋 웃었어요. 콜린과 메리는 복도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았어요. “내가 이렇게 신기한 집에 사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한참을 돌아보고 나니 둘은 배가 고팠어요. 메리와 콜린은 방으로 돌아와 맛있게 식사를 했어요. 그날 저녁때쯤, 메리는 콜린의 방에 놀러 갔어요. 그런데 콜린의 방 안이 약간 달라져 있었어요. 지금까지 무겁게 드리워져 있던 초상화의 커튼이 걷혀 있었던 거예요. 메리는 영문을 몰라 물었어요. “어째서 커튼을 걷었지?” “그저께 밤에 달빛이 환하게 비쳐 들어와 그만 잠이 깼어. 저 커튼 위에도 달빛이 걸려 밝게 빛나고 있었지. 커튼을 젖히니 그 안에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계셨어. 전에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면 화가 났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래서 커튼을 걷어 버리기로 한 거야.” “콜린, 너는 어머니의 영혼을 그대로 닮았을 거야.” “그렇다면 아버지도 날 좋아하시게 될까?” “물론이지.” “만약 아버지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된 이야기를 모두 해 드리고 싶어.” 콜린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어요. 비가 그치자 세 사람은 다시 뜰에서 만났어요. 뜰에는 늘 할 일이 많았어요. 세 사람은 잡초를 뽑기에 여념이 없었어요. 갑자기 콜린이 소리쳤어요. “저기 누가 온다!” 콜린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떤 인자한 부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어요. 디콘의 어머니 소어비 부인이었어요. “도련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가르쳐 드렸어요.” 디콘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어요. “도련님은 마님을 똑 닮았어요. 게다가 이렇게 건강해지다니 정말 놀랍군요.” 디콘의 어머니는 콜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어요. 그리고 메리의 등도 가볍게 두드려 주었어요. “아가씨도 어머니를 닮아서 나중에 크면 장미꽃같이 아름다워질 거예요.” 메리는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디콘의 어머니는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주머니는 참 좋으신 분이에요. 나도 어머니가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콜린이 아쉬운 듯 말했어요. “도련님의 어머니는 늘 이 뜰에 계세요. 그것을 잊지 마세요.” 디콘의 어머니는 콜린을 다정하게 안아 주었어요. 그 무렵, 크레이븐 씨는 한적한 산속에 머물고 있었어요. 크레이븐 씨의 마음은 아내가 죽은 10년 전부터 닫혀 있었어요.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 못 되었기 때문에 어둡고 무거운 자신의 마음을 밝고 따뜻하게 바꾸려고 애쓰지 않았어요. 크레이븐 씨의 얼굴에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고, 매일매일 우울한 나날을 보냈어요. 그런데 아름다운 산속에서 지내는 동안 크레이븐 씨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아름답고 멋진 풍경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점점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크레이븐 씨는 스스로 건강해져 가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밤에도 더는 무서운 악몽을 꾸지 않았어요. 이따금 그는 콜린 생각이 날 때면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야윈 콜린을 생각하면 또다시 우울해지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크레이븐 씨는 의자에 잠시 몸을 기대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어요. 잠시 뒤, 크레이븐 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그것은 먼 곳에서 나는 소리인데도 또렷이 들렸어요. “여보! 저예요.” 너무도 생생한 소리는 한참 동안 크레이븐 씨의 귓전에서 맴돌았어요. “아니, 당신이. 어디 있소?” “여기는 뜰이에요.” 크레이븐 씨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어요. 하인이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어요. 편지를 뜯어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어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언젠가 뵌 적이 있는 수잔 소어비입니다.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한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무척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수잔 소어비 드림 “어서 집으로 가 봐야겠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크레이븐 씨는 콜린 생각만 했어요. 10년 동안 잊어버리려고만 했던 아들이었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저택이 가까워짐에 따라 크레이븐 씨의 가슴은 한층 두근거렸어요. 어느새 집을 나설 때의 우울함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얼른 가서 뜰의 열쇠를 찾아 문을 열어 보자.’ 크레이븐 씨는 뜰에 가 볼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어요. 크레이븐 씨가 집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공손하게 주인을 맞았어요. “콜린은 어떻소?” 크레이븐 씨가 메들록 부인에게 물었어요. “도련님은 많이 변했어요.” “어떻게? 더 나빠졌소?” “나빠진 것 같기도 하고 좋아진 것 같기도 합니다. 식사도 어떤 때는 전혀 먹지 않는가 하면, 또 갑자기 많이 먹기도 합니다. 더욱 이상해진 것은 밖에 나가기를 무척 싫어하던 도련님이 요즘은 늘 밖에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콜린은 지금 어디에 있소?” “뜰에 있습니다.” “뜰에?” 크레이븐 씨는 곧 발길을 뜰로 옮겼어요. 뜰에 다다른 크레이븐 씨는 깜짝 놀라서 멈춰 섰어요. 안에서 웃음소리와 즐거운 함성이 들려왔어요. 크레이븐 씨는 꿈이 아닌가 하고 다시 귀를 기울였어요. 그때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아이가 뛰어나왔어요. 사내아이는 크레이븐 씨와 ‘쿵’ 하고 부딪혔어요. “넌 누구지?” 사내아이는 깜짝 놀라며 올려다보았어요. “아버지, 저예요. 콜린이에요!” 콜린은 이렇게 아버지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건 크레이븐 씨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 전 이제 건강해졌어요. 뜰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메리와 디콘도 도와주었어요.” 콜린의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어요. 크레이븐 씨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아, 이럴 수가! 내 아들 콜린이!” 콜린은 크레이븐 씨를 뜰로 안내해 주었어요. 크레이븐 씨는 다시 살아난 아름다운 뜰을 보자 기뻐서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어요. 콜린은 자기가 처음 뜰에 온 일, 디콘과 붉은가슴울새와 친구가 된 일, 연극을 꾸몄던 일 등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크레이븐 씨에게 모두 이야기해 주었어요. “이것으로 우리의 비밀 이야기는 끝났어요. 모두 나를 보면 놀랄 거예요. 예전의 야위고 고집쟁이였던 나는 이제 없어졌으니까요.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걸어갈래요.” 이야기를 마친 콜린이 자랑스럽게 웃었어요. 크레이븐 씨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콜린의 손을 잡았어요. 그리고 둘은 함께 천천히 뜰을 걸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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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빨간 머리 소녀. 6월 초의 어느 날 오후였어요. 린드 부인은 부엌의 창가에 앉아, 집 아래쪽으로 나 있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먼 곳을 바라보던 린드 부인이 중얼거렸어요. “어머, 매슈가 어디를 가는 걸까? 나들이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가는 걸 보니 꽤 멀리 가는 모양이지?” 린드 부인의 호기심 많은 눈이 반짝하고 빛났어요. 앤 매슈 커스버트라는 사람은 내성적이고,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해서 좀처럼 밖에 나가는 일이 없었어요. 그런 매슈 커스버트가 마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니, 린드 부인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마릴라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린드 부인은 차를 한잔 마시고 집을 나섰어요. 커스버트 씨 집과 린드 부인의 집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어요. 린드 부인은 초록 지붕 집의 뒤뜰로 들어섰어요. 이 초록 지붕 집이 바로 커스버트 씨의 집이에요. 깔끔하게 손질된 뒤뜰은 오래된 푸른 나무들이 서 있었고,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어요. 린드 부인이 집에 들어서자, 마릴라가 상냥하게 인사했어요. “어서 오세요, 린드 부인. 이리 앉으세요. 댁에는 모두 안녕하신가요?” 마릴라와 린드 부인의 성격은 서로 딴판이었지만, 언제나 친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마릴라는 키가 크고 마른 여자였어요. 린드 부인은 마릴라의 인사에 상냥하게 대답했어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해서 한번 와 봤어요. 아까 매슈가 어디로 가는 걸 보았는데, 혹시 당신이 아파서 의사를 부르러 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지 않아도 마릴라는 린드 부인이 매슈가 갑자기 집을 떠나는 것을 보면 궁금해서 반드시 집으로 찾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아무 데도 아픈 데가 없어요. 오라버니는 브라이트리버 역에 간 거예요. 고아원에서 어린 사내아이를 데려오기로 했거든요. 그 애가 기차로 도착한다고 해서 오라버니가 마중을 나갔어요.” 린드 부인은 너무나 뜻밖이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어요. 잠시 뒤, 마릴라가 자세히 설명했어요. 지난번 스펜서 부인이 봄에 호프턴의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데리고 올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어요. 이젠 오라버니도 예순이 넘어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고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거든요. 그러던 중 마침 지난주에 스펜서 부인이 고아원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인의 남동생에게 열 살쯤 된 영리한 사내아이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만한 나이라면 간단한 일쯤은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아이를 친자식처럼 기르고 교육도 시킬 거예요. 마침 오늘 저녁 5시 30분 기차로 아이를 데리고 온다고 스펜서 부인으로부터 전보가 왔기에, 오라버니가 브라이트리버 역으로 마중을 나간 거예요. 린드 부인은 이런 놀라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하지만 곧 다시 수다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본 적도 없는 아이를 데려다 기르겠다는 거예요? 그 아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텐데 말이에요. 만일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말렸을 거예요.” “린드 부인의 말씀도 맞아요. 나도 좀 망설이긴 했지만, 오라버니가 한사코 데리고 오겠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한 거예요. 오라버니가 이번처럼 고집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어쨌든 잘되길 바라요.” 린드 부인은 마릴라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매슈가 브라이트리버 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는 보이지 않았어요.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고, 한쪽 구석의 판자 더미 위에 한 소녀만 홀로 앉아 있었어요. 매슈는 역장에게 5시 30분 기차가 올 때가 되었느냐고 물었어요. “5시 30분 기차가 떠난 지는 벌써 30분이나 지났는걸요. 참, 어떤 승객이 당신이 데려갈 여자아이를 내려놓고 갔어요. 아, 저 판자 더미 위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예요. 대합실에 가 있으라고 했더니 바깥은 상상하기에 좋다고, 아주 똘똘하게 말하더군요.” 매슈는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말했어요. “내가 데려갈 아이는 여자아이가 아닌데요. 사내아이가 이곳에 오기로 되어 있어요. 스펜서 부인이 데려오기로 약속했었지요.” “그럼 무슨 착오가 생긴 모양이로군요. 그 승객은 기차에서 저 아이를 데리고 내려와, 제게 커스버트 씨랑 누이동생이 저 아이를 맡기로 되어 있으니 곧 마중 나올 거라고 말하더군요.” 역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고 가 버렸어요. 매슈는 난처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소녀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어요. 소녀는 조금 전 매슈가 자기 앞을 지나갈 때부터 줄곧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소녀의 나이는 열한 살쯤 되어 보였고, 희고 작은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이 나 있었어요. 소녀는 낡은 옷을 입고 색이 바랜 모자 밑으로는 두 갈래로 땋은 새빨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어요. 매슈가 다가가자, 소녀는 낡은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매슈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초록 지붕 집에 사는 매슈 커스버트 씨인가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전 혹시 마중 나오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무척 걱정하고 있었어요. 만약 오늘 밤에 오시지 않으면 길모퉁이에 있는 저 벚나무에 올라가 하룻밤을 지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전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달빛 아래 하얀 벚꽃 속에서 잔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요. 소녀의 야윈 손을 잡고 잠깐 잠자코 있던 매슈는 이 소녀를 이대로 역에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마릴라가 소녀에게 사실대로 말하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늦어서 미안하구나. 그 가방은 내가 들어 줄 테니, 어서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자.” 아니에요, 제가 들고 가겠어요. 이 가방은 잘못 들다간 손잡이가 빠져 버려요. 전 그 요령을 알고 있으니까, 제가 드는 게 좋아요. 지금까지 저는 가족들과 함께 살아 본 적이 없었어요. 고아원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해요. 스펜서 아주머니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전 나쁜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에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고아원에선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입을 다물었어요. 어느새 마차가 있는 곳까지 왔기 때문이었어요. 매슈와 소녀는 마차를 타고 역이 있는 마을을 벗어나, 언덕으로 올라가는 좁은 오솔길로 접어들었어요. 길 양쪽에는 꽃이 만발한 벚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어요. “아저씨, 저걸 좀 보세요. 참 아름답지요? 저렇게 둑에서 비죽이 가지를 내밀고 있는 나무를 보면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글쎄, 난 잘 모르겠구나.” 새하얀 옷을 입은 신부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전 아마 신부가 될 수 없을 거예요. 저처럼 못생긴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 프린스에드워드섬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사는 상상을 해 보았어요. 상상이 이루어진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에요. 아저씨, 이 길은 왜 이렇게 빨갛게 됐을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좋아요, 그것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세상은 참 재미있는 곳이에요. 하지만 만약 모든 걸 다 안다면, 상상할 거리가 없을 테니 재미도 없을 거예요. 제가 너무 많이 떠들었지요? 지금까지 전 말이 너무 많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매슈는 원래 남과 말하기를 싫어했지만, 이 소녀만은 전혀 달랐어요. 차츰 소녀의 말에 이끌려 매슈는 즐거운 기분이 되었어요.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더 해도 좋아. 난 괜찮으니까.” “아이, 좋아라. 이야기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에요. 참, 집 근처에 냇물이 있나요?” “우리 집 바로 아래로 냇물이 흐르지.” “어머, 그래요? 전 언제나 냇물 가까운 곳에서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아, 이젠 정말로 행복할 거예요.” 소녀는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매슈 앞으로 내밀어 보이며 말했어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이걸 좀 보세요. 제 머리카락은 빨간색이에요. 전 이것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얼굴의 주근깨 같은 건 상상으로 지워 버릴 수 있지만, 이것만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이 머리카락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 아마도 이건 저의 일생에 큰 슬픔으로 남을 거예요.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아 가로수 길로 접어들었어요. 사과나무가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저녁놀에 물든 사과나무꽃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어요.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한 소녀는 황홀한 꿈을 꾸는 듯 꽃을 바라보며, 언덕길을 내려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피곤하고 배도 고프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1킬로미터만 더 가면 된다.” 소녀가 오랫동안 잠자코 있자, 매슈가 입을 열었어요. 소녀는 꿈에서 깨어난 듯한 눈으로 매슈를 바라보았어요. “아저씨, 지금 지나온 길을 뭐라고 부르나요?” “우린 그 길을 ‘가로수 길’이라고 부른단다.”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저렇게 멋진 곳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으로 부르다니! 앞으로 저는 저 길을 ‘새하얀 기쁨의 길’로 부르겠어요. 조금만 있으면 집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뻐요.”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언덕을 넘어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 매슈가 말했어요. “이젠 다 왔다. 저기 보이는 초록 지붕 집.” “아,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소녀는 당돌하게도 매슈의 말을 막았어요. 소녀는 매슈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제가 알아맞히게 해 주세요. 틀림없이 알아맞힐 거예요.” 소녀는 사과나무가 많이 늘어서 있는 마을을 바라보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집 한 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저기예요, 맞지요?” “그래, 맞았다. 혹시 스펜서 아주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알아맞힌 건 아니냐?” “아니에요, 한 번도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어요. 집을 처음 보는 순간, 저게 우리 집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소녀가 기뻐하는 것을 볼수록 매슈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졌어요. 집에 가서 이 소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웠어요. 매슈는 소녀를 안아서 마차에서 내려 주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침 두 사람 쪽으로 걸어오던 마릴라가 깜짝 놀라서 말했어요. “아니, 왜 여자아이를 데리고 오셨어요?” “사내아이는 없고, 이 애 하나만 있었어.” “사내아이가 없었다고요? 스펜서 부인의 남동생에게 사내아이를 보내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요.” 마릴라는 소녀를 힐끗 바라보며 실망한 듯이 말했어요. “그렇긴 하지만 스펜서 부인은 이 애를 데리고 오셨던 거야. 그렇다고 이 애를 역에 그냥 버려둘 수도 없었어.” “일이 이상하게 됐군요.” 그들을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녀는 어두운 얼굴이 되어 힘없이 가방을 떨어뜨렸어요.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제가 필요 없다는 거군요. 누구도 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미리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 이제 어쩌면 좋아? 소녀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두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마릴라는 소녀에게다가서며 조용히 달랬어요. “얘야, 그런 일로 울 필요는 없어.” “이건 정말 슬픈 일이에요. 울어야 할 일이라고요. 만약 아주머니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울지 않겠어요?” 소녀는 마릴라를 쳐다보며 말했어요. “오늘 밤 당장 나가라는 건 아니잖니?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밝혀질 때까진 여기 있어야지. 참, 이름은 뭐라고 부르지?” “모두 앤 셜리라고 불러요. 하지만 전 코델리아라고 불리고 싶어요.” 앤이 울먹이며 대답했어요. “아무튼, 좋아.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이야기를 좀 들려주겠니? 우린 스펜서 아주머니에게 사내아이를 보내 달라고 부탁을 드렸거든.” “하지만 스펜서 아주머니는 열한 살쯤 된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오게 된 거예요. 전 기뻐서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아저씨, 여자아이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왜 역에서 해 주지 않으셨어요?” 앤은 매슈를 돌아보며 원망하듯이 말했어요. 매슈는 난처해서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난 말을 매어 두고 올 테니, 곧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매슈가 밖으로 나가자, 마릴라는 다시 입을 열었어요. “스펜서 아주머니는 너 말고 또 누굴 데리고 왔니?” “릴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릴리는 다섯 살인데 아주 예쁘게 생겼거든요. 만일 제가 예뻤더라면 아주머니도 저를 이 집에 두셨겠죠?” “얘야, 우리는 아저씨가 하시는 밭일을 거들 수 있는 사내아이가 필요했던 거야. 여자아이는 우리에게 필요가 없어.” 매슈가 돌아오자, 세 사람은 곧 저녁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앤은 빵만 조금 먹을 뿐 더 먹으려 하지 않았어요. “넌 왜 조금밖에 먹지 않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는데,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어요?” “이 애는 몹시 피곤할 거야. 마릴라, 어서 재우도록 해라.” 잠자코 있던 매슈는 마릴라를 돌아보며 말했어요. 마릴라는 촛불을 들고, 앤과 함께 2층 방으로 올라갔어요. 깨끗하기는 했지만, 썰렁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는 앤의 잠자리를 봐주었어요. “잠옷은 있겠지?” “네, 두 벌이 있어요. 고아원 원장님이 만들어 주신 건데, 좀 작아요.” “그럼 어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한숨 자라. 촛불을 가지러 다시 오 마.” 마릴라가 나간 뒤, 앤은 얼른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어요. 얼마 뒤, 촛불을 가지러 온 마릴라는 침대에 다가갔어요. “잘 자라.” 그러자 앤은 재빨리 이불을 들치고 불쑥 얼굴을 내밀었어요. “오늘처럼 괴로운 밤도 없을 텐데, 어떻게 편하게 잘 수 있겠어요?” 앤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어요. 마릴라는 부엌으로 내려가 매슈에게 말했어요. “내일은 제가 스펜서 씨 댁에 다녀와야겠어요. 저 애를 고아원에 다시 돌려보내야 할 테니까요.” “그래야겠지, 하지만 저 애는 착한 아이 같아 보이던데.” “오라버니, 설마 저 애를 우리 집에 두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그냥 둘 수는 없겠지.” 매슈는 어물거리며 겨우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어요. “마릴라, 저 애를 데리고 있으면 집안일도 거들어 줄 테고, 네 말동무도 될 수 있을 텐데.” “말동무는 필요 없어요. 전 저 애를 우리 집에 둘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요.” “물론 네 말대로 될 거야.” 매슈는 식탁에서 먼저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마릴라도 설거지를 끝내고 언짢은 얼굴로 침실에 들어갔어요. 앤의 운명. 아침 해가 높이 솟았을 때, 앤은 잠에서 깨었어요. 앤은 창가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어요. 흰 꽃이 만발한 벚나무가 서 있는 언덕과 조용히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제저녁에 있었던 괴로웠던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어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있었구나.” 마릴라의 목소리였어요. 앤은 일어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어요. “모든 것이 아름다워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전 아침이 되면 세상이 모두 좋게만 보여요. 더구나 이런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니, 모든 괴로웠던 일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 그만하고, 어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너라.” 앤은 재빨리 이불을 개어 놓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세수까지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어요. 앤은 식탁 앞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어요. “어젯밤엔 기분이 나빠서 세상이 마치 가시밭처럼 느껴졌는데, 오늘 아침에 밝은 햇빛을 보니 정말 기뻐요.” “이제 말은 그만하고, 어서 아침이나 먹어라. 넌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으냐?” 마릴라가 톡 쏘는 바람에, 앤은 입을 다물었어요. 그들은 모두 조용히 아침을 먹었어요. 아침 식사가 끝나자, 마릴라는 매슈에게 물었어요. “오늘 오후에 마차를 좀 써도 괜찮겠어요?” 매슈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어요. 그러고는 측은한 눈길로 앤을 바라보았어요. 마릴라는 그런 매슈의 마음을 눈치채고, 얼른 말했어요. “전 화이트샌즈에 가서 이번 일을 해결하고 돌아올까 해요. 앤을 데리고 가면, 스펜서 부인이 저 애를 고아원으로 돌려보내 줄 거예요.” 매슈는 아무 말 없이 말과 마차를 준비해 주었어요. 마릴라는 매슈가 준비해 둔 마차에 앤을 태우고, 채찍으로 말 등을 힘껏 내리쳤어요. “앤, 화이트샌즈에 가는 동안 네가 지금까지 지내온 일이나 좀 이야기해 주겠니?” 마릴라가 앤을 보며 말했어요. 그러자 앤은 나직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지난 3월에 열한 살이 됐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볼링브로크라는 곳으로, 아버지 이름은 월터 셜리고 볼링브로크 고등학교 선생님이셨지요. 어머니는 버서 셜리였는데, 역시 고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열병으로 돌아가셨고, 나흘 후에 아버지도 열병으로 돌아가셨대요. 그때 누구 하나 절 길러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는데, 가난한 토마스 아주머니가 저를 기르겠다고 나선 거예요. 토마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메리즈빌로 이사할 때도 저는 따라가서 여덟 살까지 함께 살았어요. 하지만 토마스 아저씨가 기차에서 떨어져 죽은 뒤로 저는 다시 갈 곳을 잃게 되었어요. 토마스 아저씨의 어머니가 아주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기 때문이죠. 앤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어요. 그때까지 전 그 집에서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았어요. 토마스 아주머니가 저를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 윗마을에 사는 해먼드 아주머니가 제가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는 걸 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전 해먼드 아주머니와 함께 살게 됐어요. 그 집에는 아이들이 여덟이나 있어서, 제가 그 아이들을 보살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전 그 집에서 이 년 정도 살았는데, 해먼드 아저씨가 돌아가시자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친척 집에다 맡기고 미국으로 떠나 버렸어요. 전 아무도 데리고 가 줄 사람이 없어서 호프턴의 고아원에 들어가게 됐지요. 스펜서 아주머니가 데리러 오실 때까지 전 거기서 넉 달 동안 있었어요.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난 앤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어요. 자기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가 몹시도 괴로웠던 거예요. “학교에는 다녀 봤니?” “토마스 아주머니와 있을 때랑 고아원에 있을 때 잠시 다녔어요.” “그분들은 너에게 잘 대해 주었니?” 앤은 잠시 망설이다가 억지로 대답했어요. “두 아주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저를 위해 주려고 그분들 나름대로 애쓰셨어요.” 지금까지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앤을 생각하니, 마릴라는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가 살 집을 찾았다고 좋아하던 앤을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마릴라는 앤을 집에 있게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앤의 얌전한 태도나 하는 말로 보아 가르치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차는 스펜서 부인의 집 앞에 멈추어 섰어요. 스펜서 부인은 마릴라의 방문이 뜻밖이라는 얼굴을 하고 그들을 맞아 주었어요. “어머나, 어쩐 일이세요?” “일이 좀 잘못된 것 같아서 왔습니다. 매슈 오라버니와 저는, 부인의 남동생인 로버트 씨에게 열 살쯤 된 사내아이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요.” “어머나, 그러셨어요? 하지만 로버트는 두 분이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말하던데요?” “아무튼, 이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겠군요. 이 애를 다시 고아원에 돌려보낼 수 있을까요?” “고아원으로 돌려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제 블루엣 부인이 심부름할 아이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마침 잘되었네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블루엣 부인이 찾아왔어요. “마침 잘 오셨군요. 그러잖아도 지금 부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스펜서 부인은 마릴라와 블루엣 부인을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어요. 앤도 같이 따라 들어가 구석진 자리의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어요. 스펜서 부인은 블루엣 부인을 보며 입을 열었어요. “전 커스버트 씨 댁에서 여자아이를 원하시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내아이가 필요하다고 하시는군요. 혹시 어제와 같은 생각이라면 댁에서 이 애를 데리고 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블루엣 부인은 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차근차근 살펴보고 나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넌 지금 몇 살이니? 그리고 이름은 뭐지?” “앤 셜리라고 합니다. 나이는 열한 살이에요.” 앤은 겁에 질려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어요. “얼굴은 별로 예쁘게 생기지 않았지만, 눈치는 빠르겠구나. 뭐니 뭐니 해도 너 같은 애들은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우리 집에 가서는 조금이라도 나쁜 짓을 해선 안 돼. 또 우리가 끼니를 해결해 주니까 그만큼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마릴라 부인, 그럼 이 애를 내가 데리고 가겠어요.” 그 순간, 앤의 얼굴을 바라본 마릴라는 앤이 가여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인정도 없는 블루엣 부인에게 끌려갈 앤을 생각하니, 그 측은한 모습이 평생토록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매슈 오라버니와 전 아직 이 애를 우리 집에 데리고 있지 않겠다고 확실히 결정한 건 아닙니다. 집에 돌아가 오라버니와 상의한 뒤,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그러자 블루엣 부인은 무뚝뚝한 소리로 대답했어요. “그렇게 하시죠.” 블루엣 부인과 스펜서 부인이 방에서 나가자, 앤이 벌떡 일어나서 마릴라 앞으로 달려왔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절 정말 초록 지붕 집에 살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나요?”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그 집에 갈 바엔 차라리 고아원으로 되돌아가겠어요. 만약 저를 아주머니 집에 있게 해 주신다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겠어요.” 저녁 무렵이 되어 마릴라와 앤이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오니, 매슈는 먼 곳까지 마중을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마릴라는 스펜서 부인과 만났던 이야기를 매슈에게 들려주었어요. 매슈는 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어요. “오라버니가 그 애를 집에 데리고 있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저도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마릴라는 만약 앤이 그렇게 결정된 것을 알게 되면 흥분하여 잠을 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 밤은 그 말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행복한 생활. 마릴라는 이튿날까지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앤에게 줄곧 집안일을 시키며 일하는 태도를 지켜보았어요. 열심히 접시를 닦고 있던 앤은 하던 일을 마치고는, 갑자기 마릴라 앞으로 달려와 초조한 얼굴이 되어 물었어요. “아주머니, 저를 데리고 계실 건지, 아니면 다른 데로 보내실 건지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답답해서 더는 못 참겠어요.” 마릴라는 이제는 알려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말했어요. “우린 너를 우리 집에 데리고 있기로 했다. 네가 착한 아이가 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약속한다면 말이다. 아니, 그런데 눈물은 왜 흘리는 거니?” 앤은 너무나 기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너무 기뻐서 그래요. 아주머니, 혹시 에이번리에서 저와 친구가 되어 친하게 지낼 만한 아이가 있을까요?” “다이애나 배리라는 아이가 과수원 언덕에 살고 있지. 지금은 친척 집에 가 있지만, 돌아오면 아마 너랑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배리 부인은 엄한 사람이니까, 착한 아이가 아니면 다이애나와 함께 놀게 하지 않을 거야.” 앤은 맑은 눈을 반짝이며 마릴라의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다이애나는 예쁘게 생긴 아이인가요?” “다이애나는 아주 예쁜 아이지. 그리고 착하고 영리해. 하지만 앤, 마음씨 착한 것이 얼굴이 예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단다.” 마릴라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그러나 앤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예쁜 아이라니 다행이에요. 저는 그런 아이와 친구가 되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앤은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았어요.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인 자기 얼굴이 거울에 비치자 속상했지만, 앤은 거울 속의 자신이 코델리아 공주라고 상상하며 자신을 위로했어요.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온 지 이 주일이 되었을 때, 린드 부인이 앤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왔어요. “여자아이를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 깜짝 놀랐어요. 그 애를 다시 돌려보낼 생각은 없나요?” “우리는 그 애를 그냥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오라버니가 그 애를 아주 귀여워하니까요. 그리고 나도 그 애가 그렇게 싫진 않아요. 아주 명랑한 아이라서 집안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니까요. 그 애를 보고 싶으실 텐데, 불러올까요?” 얼마 뒤, 앤이 활짝 웃으며 안으로 달려 들어왔어요. 옷은 고아원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빨간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볼품이 없어 보였어요. 린드 부인은 앤을 보자,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이 애는 아주 빼빼 마르고 못생겼군. 지금까지 주근깨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어머, 게다가 머리카락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구나.” 갑자기 앤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그러더니 린드 부인에게 다가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어요. “어떻게 저에게 주근깨투성이에 빨간 머리라고 흉볼 수 있어요? 아마 아주머니처럼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앤,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당황한 마릴라가 소리쳤어요. 그러나 앤은 화를 참지 못하고 계속 대들었어요. “어쩌면 제가 듣는 데서 그런 말을 하시죠? 만약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뚱뚱하고 주책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원, 너같이 신경질적인 아이는 처음 보겠구나.” 린드 부인도 앤을 쏘아보며 소리쳤어요. “앤, 어서 네 방에 가 있거라.” 마릴라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하자, 앤은 울음을 터뜨리며 문을 힘껏 닫고 나갔어요. “세상에, 저런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는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린드 부인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하지만 마릴라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린드 부인, 전 아이들에게 얼굴이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하고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 애를 잘 타이르겠지만, 당신도 그 애를 너그럽게 봐 줄 수도 있었잖아요? 그 애는 아직 예의범절을 몰라 그렇지만, 당신도 좀 지나쳤던 것 같아요.” “좋아요, 나도 이제부턴 말할 때 조심하지요. 하지만 마릴라, 당신도 그 애 때문에 속 좀 썩겠군요. 어쨌든 난 이렇게 창피를 당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홱 돌아서서 나가 버렸어요. 마릴라는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앤의 방으로 올라갔어요. 방에 들어가 보니, 앤은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었어요. “앤, 내 말 좀 들어 봐.” 앤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어요. 앤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어요. “오늘 네가 한 짓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니? 물론 린드 아주머니도 잘못했지만, 너도 어른에게 그렇게 대해선 안 돼. 그러니 넌 린드 아주머니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해.” “그런 짓은 죽어도 못 하겠어요.” 앤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어요. “어둡고 좁은 방에다 가두어 놓고 벌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테지만, 린드 아주머니에게 사과하는 일만은 못 하겠어요.” “나도 그런 벌을 주는 걸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네 입으로 린드 부인에게 사과하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는 네 방에 있도록 해라.” “그럼 전 언제까지나 이 방에 있어야겠네요. 절대로 린드 아주머니에게 잘못했다고 빌지 않을 거니까요. 아주머니에겐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사과할 수 없어요.” “오늘 밤에 잘 생각해 보고 마음먹도록 해라.” 마릴라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 나가 버렸어요. 그날 저녁, 마릴라는 낮의 일을 매슈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여자는 망신을 당해도 괜찮아.” “그럼 오라버니는, 그 애가 한 짓이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물론 벌을 줘서 버릇을 고쳐 줘야만 할 거야. 그런데 먹을 건 좀 갖다줘야겠지?” “그건 염려 마세요. 식사는 제가 어김없이 갖다주겠지만, 린드 부인에게 사과하겠다고 하기 전엔 그 방에서 못 나오게 하겠어요.” 앤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집 안은 종일 조용했어요. 그리고 끼니때마다 마릴라가 음식을 날랐지만, 앤은 조금도 먹지 않았어요. 매슈는 앤이 아무것도 먹지 않자, 몹시 걱정되었어요. 그날 저녁, 마릴라가 목장으로 나가는 것을 본 매슈는 앤의 방으로 갔어요. 매슈는 문을 두드린 뒤, 조용히 문을 열었어요. 앤은 창문 앞에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이 매슈에게는 몹시 애처롭게 보였어요. 매슈는 앤 옆으로 슬며시 다가가며 조용히 물었어요. “앤, 너 괜찮니?” “좀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 견디고 있어요. 상상하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거든요.” “앤, 차라리 마릴라의 말을 듣는 게 좋지 않을까? 마릴라는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하는 사람이거든.” “저에게 린드 아주머니에게 사과하라는 거예요?” “그렇지, 그저 잘못했다고만 하면 돼.” “어제저녁엔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지만, 지금은 저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린드 아주머니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아저씨가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어요.” “잘 생각했다. 네가 아래층에 내려오지 않아서 난 몹시 쓸쓸했단다.” “마릴라 아주머니가 돌아오면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린드 아주머니를 찾아가겠어요.” 얼마 뒤, 마릴라가 목장에서 돌아오자, 앤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마릴라를 불렀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버릇없이 말한 건 잘못했어요. 린드 아주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빌겠어요.” “잘 생각했다. 우유를 다 짜고 난 뒤, 내가 린드 아주머니께 데려다주마.” 앤이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마릴라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어요. 잠시 뒤, 마릴라는 앤을 데리고 린드 부인 집으로 갔어요. 그러나 길을 걸어가면서도 앤은 아무 말이 없었어요. “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린드 아주머니께 어떻게 용서를 빌까 생각하고 있어요.” 린드 부인은 부엌 창가에서 뜨개질하고 있었어요. “아주머니,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머리가 빨갛고, 얼굴은 주근깨투성이라고 하신 아주머니 말씀은 모두 사실이에요. 제가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낸 건 좀 지나쳤다고 생각해요. 아주머니, 절 용서해 주세요. 만약 아주머니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전 제 잘못을 영원히 씻을 수 없을 거예요.” 앤의 태도로 보아 진심임을 알 수 있었어요. “앤, 어서 일어나렴.” 주책이 좀 없기는 하지만,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린드 부인은 쉽게 노여움을 풀었어요. 마릴라가 집을 나서자, 앤도 뒤를 따라나섰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저 사과를 잘한 거죠?” “그래, 잘했다. 화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른 건 몰라도, 남들이 제 빨간 머리카락에 대해 흉볼 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요.” “너무 생김새에만 신경 쓰지 않도록 해라. 행동이 훌륭한 사람은 외모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야.” “전에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만, 전 그래도 제 머리카락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두 사람이 집 가까운 오솔길에 접어들었을 땐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고, 집마다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어요. 앤은 갑자기 조그만 손으로 마릴라의 손을 잡았어요. “아주머니,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전 벌써 초록 지붕 집을 사랑하게 됐어요.” 마릴라는 그런 앤이 무척 사랑스럽게 여겨졌어요. 다음 날, 앤은 세 벌의 옷을 침대 위에 펴 놓고 시무룩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마릴라가 만들어 준 옷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이었어요. “앤, 넌 이 옷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마릴라가 묻자, 앤은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예쁘지 않아요.” “난 너에게 예쁜 옷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허영심 따위는 키워 주고 싶지 않아. 이건 모두 실용적인 옷들이야. 푸른색과 황갈색 옷은 학교 갈 때 입고, 비단옷은 교회와 주일 학교에 나갈 때 입도록 해라.” “물론 무척 고마워요. 하지만 이 옷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주름진 소매로 만들어 주셨더라면 더욱 고맙게 여겼을 거예요.” “여러 말 말고 어서 이 옷들을 옷장에 걸어 두렴.” 마릴라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이튿날 아침, 마릴라는 몸이 좋지 않아 앤을 데리고 주일 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앤에게 린드 부인을 찾아가 대신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도록 했어요. 앤은 비단옷을 입고 모자를 쓴 채 집을 나섰어요. 모자에도 역시 아무런 장식이 없었어요. 앤은 꽃이나 리본으로 장식된 모자를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좁은 오솔길을 걸어갔어요. 그때 길가에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어요. 앤은 그 꽃들을 꺾어 모자를 요란스럽게 장식했어요. 그러고는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어요. 하지만 린드 부인이 집에 없어서 앤은 혼자 교회로 갔어요. 앤이 요란한 장식을 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소녀들은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어요. 앤은 공부가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왔어요. 그리고 모자에 장식했던 꽃은 떼어서 길에 버렸고요. 그다음 주 금요일이 되어서야 마릴라는 린드 부인으로부터 앤이 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주일 학교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앤, 너 모자에 꽃을 잔뜩 꽂고 교회에 갔었다지? 어쩜 그렇게도 못난 짓을 했니?” “옷에다 꽃을 꽂고 있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어요. 옷에다 꽂는 거나, 모자에다 꽂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말대꾸하면 못써요. 린드 아주머니는 너의 그런 꼴을 보고 깜짝 놀라셨단다. 모두 내가 교양이 없어서 널 그 꼴로 교회에 보냈다고 생각할 게 아니냐?” “죄송해요, 아주머니가 곤란해지실 줄은 몰랐어요. 제 잘못으로 인해서 아주머니가 애들 교육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란 말을 들어선 안 되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어요. 마릴라는 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넌 단지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면 돼. 이젠 그만 울음을 그치렴. 참, 너한테 반가운 소식이 있어. 다이애나가 돌아왔단다. 지금 배리 부인을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가서 다이애나를 만나 보지 않겠니?” “네, 저도 가겠어요. 하지만 다이애나가 절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요?” “그런 건 염려할 것 없다. 다이애나는 틀림없이 너를 좋아할 거야.” 친구 다이애나. 마릴라가 부엌문을 두드리자, 배리 부인이 나왔어요. 배리 부인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서 오세요. 이 애가 바로 댁에서 데리고 있는 소녀로군요.” “네, 이름은 앤 셜리라고 하지요.” 배리 부인은 앤과 악수를 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그래, 앤. 잘 지내고 있니?” “네, 잘 지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그때, 다이애나가 배리 부인 옆에 다가왔어요. 배리 부인은 앤에게 자기 딸을 소개했어요. “앤, 우리 딸 다이애나란다.” 앤과 다이애나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그러다가 앤이 먼저 미소를 띠며 말했어요. “다이애나, 앞으로 잘 지내자. 난 네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앤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다이애나도 수줍어하며 앤의 손을 잡았어요. 배리 부인은 딸에게 앤과 함께 마당에 나가 놀도록 했어요. 마당으로 나온 앤과 다이애나는 서로 부끄러워하며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그러다가 앤이 먼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다이애나, 내 친구가 되어 주겠니?” “응, 사실 난 너를 만나 정말 기뻐. 이곳엔 나와 함께 놀아 줄 친구가 하나도 없었거든.” “그럼, 됐어. 다이애나, 언제까지나 내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고 맹세할 수 있겠니?” “맹세는 어떻게 하는 건데?” 앤은 다이애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어요. “해와 달이 떠 있는 한, 내 소중한 친구 다이애나에게 진실할 것을 맹세한다.” 이어서 다이애나도 웃으며 앤처럼 말했어요. 그리하여 둘은 오래도록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어요. 마릴라와 앤이 집에 돌아오니, 매슈가 돌아와 있었어요. 매슈는 종이봉투를 꺼내 슬그머니 앤 앞에 내밀었어요. “네가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좀 사 왔지.” 마릴라는 앤을 힐끗 보고 나서 매슈에게 말했어요. “이런 건 건강에 좋지 않아요. 차라리 박하사탕을 사다 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러나 앤은 기뻐하며 말했어요. “이걸 반쯤 나누어서 다이애나에게 갖다줘도 되겠죠? 다이애나에게 무언가 줄 게 있다고 생각하니 참 기뻐요. 그럼, 나머지는 더 맛있을 거예요.” 앤은 곧 종이봉투를 들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어요. “앤이 인색하지 않아 참 다행이에요.” 앤이 방으로 올라가자, 마릴라는 매슈를 돌아보며 말했어요. 9월이 되면서 앤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앤은 아침마다 다이애나와 함께 아름다운 오솔길을 지나 에이번리의 학교까지 걸어 다녔어요. 앤은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길이 무척 즐거웠고, 학교도 꽤 마음에 들었어요. 학교에 다닌 지 삼 주일이 되기 전까지는요. 어느 날, 학교에 가는 길에 다이애나가 말했어요. 오늘은 아마 길버트 블라이드가 학교에 나올 거야. 그 앤 여름 동안 사촌 집에 있다가 지난 토요일에 돌아왔대. 아주 멋있는 아이인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여자애들을 놀려 대는 장난꾸러기라는 거야. 그 아이는 지금까지 줄곧 1등만 해 왔어. 나이는 열네 살이지만, 아직 4학년이야. 사 년 전, 그 애 아버지가 병이 들어 요양하러 갔을 때 그 애도 같이 따라갔었어. 그동안 공부를 못 했으니, 이제는 아마 1등을 못 할 거야. “나이도 많은 애가 꼬마들 가운데 끼어 1등을 했다고 해서 자랑스러울 건 없잖아?” 학교에서 수업 시간이 되었을 때, 다이애나는 옆자리에 앉은 앤에게 이렇게 속삭였어요. “저쪽 창 옆에 앉아 있는 아이가 길버트 블라이드야. 좀 봐, 아주 잘생겼지?" 앤은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길버트는 키가 컸으며, 갈색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길버트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루비의 땋은 머리카락을 의자 등받이에 핀으로 꽂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잠시 뒤, 루비는 필립스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질문하려고 일어나다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어요. “루비, 너 지금 내게 장난하는 거니?” 필립스 선생님이 화를 내자, 루비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어요. 길버트는 재빨리 핀을 뽑아 감추고는, 책을 들여다보는 척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진짜 소동은 오후 수업 시간에 일어났어요. 길버트는 앤이 자기 쪽을 보게 하려고 했지만, 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어요. 그때 앤은 턱을 괸 채 끝없는 상상을 하고 있었거든요. 길버트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앤이 자기 쪽을 쳐다보지 않자, 앤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잡고 소곤거렸어요. “홍당무, 홍당무!” 앤은 길버트가 자기의 머리카락을 놀리자, 분함을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났어요. 길버트를 노려보던 앤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어요. “왜 비겁하게 이따위 장난을 하는 거지?” 앤은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어요. 느닷없는 앤의 행동에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필립스 선생님은 성큼성큼 걸어와 앤에게 화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앤 셜리, 이게 무슨 짓이냐?” 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많은 학생 앞에서 자기가 ‘홍당무’라고 놀림당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수업 시간에 이렇게 난폭한 짓을 하다니, 참 유감이다. 앤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 앞에 나와 서 있어라.” 앤은 시무룩한 얼굴로 필립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 앤은 오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 앞에 서 있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가방을 들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길버트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안한 목소리로 앤에게 말했어요. “앤 셜리,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하지만 앤은 길버트를 밀치고 나가 버렸어요. 그날도 앤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다이애나와 함께 오솔길을 걸어갔어요. “난 절대로 길버트 블라이드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필립스 선생님도 왜 나만 꾸짖는지 모르겠어.” 앤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하자 다이애나가 말했어요. “길버트가 네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린 건 신경 쓰지 마. 그 애는 너뿐 아니라 다른 여자아이들도 그렇게 놀린다니까! 내 머리카락을 보고도 까마귀 같다고 얼마나 놀렸었는데. 게다가 길버트는 그런 짓을 하고도 잘못했다고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까마귀라고 놀리는 것과 홍당무라고 놀리는 건 달라. 길버트 블라이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날 모욕했어.” 그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이 지난 뒤였어요. 학생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가문비나무 숲에서 뛰어놀곤 했어요. 학생들은 필립스 선생님이 하숙하는 집을 지켜보고 있다가, 필립스 선생님이 나타나면 학교로 뛰어갔어요. 그러나 길을 돌아가야 했으므로 필립스 선생님보다 교실에 늦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어요. “내가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도록 해요.” 다음 날 점심시간에도 학생들은 가문비나무 숲에서 숨바꼭질하다가, 필립스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자 헐레벌떡 교실로 달려갔어요. 앤은 양지바른 곳에 혼자 앉아, 화환을 쓰고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나타난 것을 제일 늦게 알게 된 앤과 나무 위에서 놀던 사내아이들은 헐레벌떡 교실에 들어갔어요. 필립스 선생님은 늦게 들어온 학생들을 모두 혼내기가 귀찮아 화환을 쓰고 있는 앤만 불러내어 꾸짖기로 했어요. 앤은 머리에 화환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은 채 숨을 헐떡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었거든요. “앤 셜리, 넌 사내아이들과 함께 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오늘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머리에 쓰고 있는 화환을 벗고 길버트 옆에 앉아라.” 다이애나는 앤이 가엾은 생각이 들어 머리의 화환을 벗겨 주고 손을 꼭 잡았어요. 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필립스 선생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앤, 내가 하는 말이 안 들리냐?” 앤은 필립스 선생님으로부터 무뚝뚝한 말을 듣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어요. 필립스 선생님이 다시 큰 소리로 이야기하자, 결국 앤은 길버트 옆자리로 가서 얼굴을 책상에 묻고 엎드렸어요. 길버트는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선생님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하트 모양 사탕을 앤의 얼굴 밑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어요. 앤은 그것을 집어 마룻바닥에 버린 다음, 발로 짓밟아 버렸어요. 그러고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었어요. 수업이 끝난 뒤, 앤은 책상 속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어 책가방에 넣고 교실을 나섰어요. “앤, 그걸 왜 전부 책가방에 넣니?” “난 이제 다시는 이런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야.” 앤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해? 네가 없으면 선생님은 내 옆자리에 얄미운 거티 파이를 앉힐 거야.” “다이애나, 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번 일만은 안 되겠어.” 다이애나는 울며불며 앤에게 애원했지만, 좀처럼 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앤은 마릴라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다시는 학교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런 일로 학교에 안 나가겠다는 거냐?” “아주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전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고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일 학교에 나가거라.” “전 학교에 안 가겠어요.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고, 또 착한 아이도 될 수 있어요.” 마릴라는 앤의 고집이 대단한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는 말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이럴 때는 린드 부인을 찾아가 상의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생각하고, 마릴라는 린드 부인을 찾아갔어요. 저녁 무렵 마릴라가 찾아갔을 때, 린드 부인은 이미 그녀가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를 모두 알고 있었어요. 린드 부인은 틸리라는 아이로부터 이미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앤이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내 생각으로는 당분간 그 애를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오늘 일은 필립스 선생님이 좀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벌을 주려면 다른 아이들도 같이 벌을 줘야지, 왜 앤에게만 벌을 줬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아이들도 앤이 억울할 거라고 말하더군요. “앤을 집에 있게 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에요?” “앤이 원할 때까지는 학교 가라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두고 보세요. 일주일쯤 지나면 아마 그 애 입에서 다시 학교에 다니겠다는 말이 나올 테니까요.” 마릴라는 린드 부인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앤에게 학교에 나가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어요. 이상한 딸기주스. 10월이 되자, 초록 지붕 집은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자작나무 숲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과수원 뒤쪽의 단풍나무도 빨갛게 변했어요. 어느 토요일 아침, 밖에 나갔던 앤은 단풍이 곱게 물든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집으로 들어오며 소리쳤어요. “아주머니, 이 아름다운 단풍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려요. 저 단풍들을 모두 모아서 제 방에다 꽂아 두고 싶어요.” “하지만 계단에 나뭇잎이 떨어지게 해선 안 된다. 난 오늘 낮에 후원회 모임이 있어 나가는데, 좀 늦을 거다. 그러니 아저씨의 저녁상은 네가 차리도록 해라. 그리고 낮에는 다이애나를 불러 함께 차를 마셔도 좋다.” 마릴라가 이렇게 말하자, 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어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그런데 저 장미꽃 무늬가 있는 찻잔을 써도 괜찮을까요?” “그건 특별한 날에만 쓰기로 한 거니까 절대로 안 된다. 그 대신 찬장에 있는 작은 찻잔을 꺼내 써라. 체리 설탕 조림은 작은 항아리에 들어 있어. 과일 케이크와 과자도 먹으렴. 두 번째 선반에 딸기주스도 있으니 먹도록 해라.” 마릴라는 이렇게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어요. 앤은 곧장 다이애나에게 달려갔어요. “다이애나, 아주머니는 마음씨가 참 좋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차를 마셔도 좋다고 하셨어.” 둘은 과수원에서 한참을 놀다가 집으로 들어갔어요. “다이애나, 목마른데 딸기주스 마실래?” 앤은 찬장에서 딸기주스를 찾았어요. 한참 딸기주스를 찾던 앤은 맨 위에 있는 병을 발견하고, 컵과 함께 식탁 위에 올려놓았어요. 다이애나는 주스를 컵에 가득 따라 몇 모금 마셨어요. “참 맛있다, 난 딸기주스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어.” “맛있다니 다행이야. 난 잠시 부엌에 가서 불을 보고 올게.” 다이애나는 주스를 이미 두 컵이나 마셨지만, 부엌에서 돌아온 앤이 다시 한 컵을 따라 주자 또 마셨어요. “이렇게 맛있는 딸기주스는 아직 먹어 본 적이 없어. 린드 아주머니네 것도 맛있지만, 이건 더 맛있는데?” “마릴라 아주머니의 요리 솜씨는 누구나 알아주거든.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 하지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다이애나, 너 갑자기 왜 그러니?” 열심히 재잘거리던 앤은 깜짝 놀랐어요. 다이애나가 일어서려다가 털썩 주저앉아 버렸거든요. “나,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아무래도 집에 가야겠어.” “다이애나, 차는 마시고 가야 할 게 아니야?” “어. 어지러워서 그래.” 다이애나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어요. 앤은 다이애나를 부축하여 집까지 데려다주었어요. 일요일인 다음 날은 아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렸어요. 월요일에 날이 개자, 마릴라는 앤을 린드 부인에게 심부름 보냈어요. 그런데 심부름을 하고 돌아온 앤은 어찌 된 일인지 부엌으로 뛰어 들어와 소파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 댔어요. “앤, 왜 무슨 일이니?” 한동안 울기만 하던 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일어났어요. 오늘 린드 아주머니가 배리 아주머니한테 갔더니 몹시 화를 내시더래요. 제가 일요일에 다이애나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배리 아주머니는 제가 몹시 나쁜 아이라며, 앞으로 다이애나와 놀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말씀하셨대요. 전 이제 어쩜 좋아요? 앤의 말을 들은 마릴라는 어이가 없었어요. “그날 다이애나에게 뭘 마시게 했니?” “딸기주스요, 딸기주스가 취하게 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마릴라는 중얼거리며 찬장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그제야 마릴라는 찬장에 있던 병에 든 것은 포도주였으며, 딸기주스 병은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어요. 마릴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을 찡그렸어요. “앤, 넌 소란을 일으키는 데는 재주가 있구나. 다이애나에게 마시게 한 건 딸기주스가 아니라 포도주였어. 넌 그것도 몰랐었니?” “전 마시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틀림없이 딸기주스인 줄로만 알았어요. 다이애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잠들어 버렸나 봐요. 배리 아주머니는 잠자고 있는 다이애나가 숨 쉴 때 나는 냄새를 맡고 그 사실을 알았대요.” “자, 앤. 이제 그만 울음을 그쳐라. 네가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울지 않을 수 없잖아요? 전 이제 다이애나하고 영원히 멀어졌어요.” “내가 배리 부인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마.” 오후에 다이애나 집에 다녀온 마릴라는 몹시 화나 있었어요. “그렇게 고집 센 여자는 정말 처음이야. 난 네가 모르고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지만, 어디 믿어 줘야 말이지.” 마릴라의 말을 들은 앤은 벌떡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가 오솔길을 걸어갔어요. 그리고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 다이애나의 집으로 갔어요. 앤이 노크를 하자, 배리 부인이 문을 열었어요. 배리 부인은 앤을 보자, 쌀쌀맞은 표정으로 물었어요. “무슨 일로 왔니?” “아주머니, 절 용서해 주세요. 전 다이애나를 취하게 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요. 그저 주스인 줄로만 알고 마시게 했던 거예요. 다이애나는 제게 단 하나뿐인 친구예요. 제발 다이애나와 다시 놀게 해 주세요.” 앤이 애원했지만, 배리 부인은 딱 잘라 말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넌 다이애나와 어울리지 않는 아이 같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럼, 다이애나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으니, 꼭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네?” “다이애나는 아버지를 따라 카모디에 갔다.” 배리 부인이 문을 쾅 닫아 버리자, 앤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왔어요. 영원한 친구. 다음 날 오후, 앤은 샘가에서 자기를 바라보며 손짓을 하는 다이애나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갔어요. 그러나 앤은 창백한 다이애나의 얼굴을 보고 실망을 금할 수 없었어요. “너희 어머니 마음이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그래, 다시는 너하고 만나지 말라고 하셨어. 내가 앤이 잘못한 게 아니라고 했지만, 믿어 주시지 않아. 며칠을 졸라 겨우 너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야.” “다이애나, 절대로 날 잊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겠니?” “물론 굳게 맹세하겠어. 그리고 다른 친구는 사귀지도 않을 거야. 어떤 사람이든 너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거야.” 다이애나는 이렇게 다짐했어요. 앤도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어요. “나도 언제까지나 널 사랑할 테야. 우리가 작별하는 지금, 오래도록 기념이 될 수 있도록 네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주지 않겠니?” “하지만 가위 같은 게 없잖아?” 다이애나는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닦으며 말했어요. “마침 바느질 가위가 내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 있어.” 앤은 가위를 꺼내 다이애나의 곱슬머리를 조금 잘랐어요. “이젠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난 언제까지나 너에게 충실할 거야.” 다음 월요일 아침, 앤은 책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방에서 나왔어요. 마릴라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시 학교에 나가려고요. 이제 저에게 남은 거라고는 학교뿐이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공부나 열심히 해라. 또 괜한 말썽 부리지 말고.” 마릴라는 매우 기뻤지만,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어요. 앤이 다시 학교에 나가자, 학생들 모두 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어요. 앤은 다시 학교에 나가면서부터 말썽을 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필립스 선생님과도 잘 지냈어요. 하지만 앤은 길버트와는 여전히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어요.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앤은 길버트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고요. 두 사람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했으므로, 1등은 언제나 앤과 길버트 사이를 오갔어요. 이렇게 실력이 좋아지게 되자, 앤과 길버트 모두 5학년으로 올라가 기하, 프랑스어, 라틴어 등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중에서 기하는 앤에게 참으로 어렵고 따분한 과목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총리가 프린스에드워드섬에 와서 연설을 한다고 하여 마릴라는 린드 부인과 함께 연설을 들으러 가고, 집에 매슈와 앤만 남게 되었어요. 매슈는 소파 위에다 잡지를 펴 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앤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어요. “아저씨도 학교에서 기하 공부를 해 보셨어요?” 졸고 있던 매슈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쳐들었어요. “응. 아니야, 배우지 않았어.” “하신 적이 있었더라면 절 동정하실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이건 정말 골치가 아파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너는 뭐든지 척척 잘 해내지 않니? 지난주에 내가 필립스 선생님을 만났을 때, 네가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하더라.” “선생님이 문제를 너무 자주 바꾸거든요. 아저씨, 지하실에 가서 사과 좀 꺼내 와도 돼요?” “그러려무나, 앤. 나도 먹고 싶구나.” 매슈는 사과를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앤의 부탁이었으므로 망설이지 않고 들어주었어요. 앤은 지하실로 내려가 사과를 접시에 담은 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왔어요. 그때, 갑자기 다이애나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어요. 너무나 뜻밖의 일에, 앤은 사과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다이애나, 네가 어쩐 일이니?” “앤, 큰일 났어. 빨리 우리 집에 좀 가 봐. 미니 메이가 후두염에 걸려 몹시 앓고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외출하셨기 때문에 의사를 불러올 사람이 없어.” 다이애나는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어요. “울지 마, 다이애나. 난 해먼드 아저씨 댁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서 후두염에 걸렸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 두 소녀는 서로 손을 잡고, 들판을 달려갔어요. 다이애나의 세 살 된 동생 미니 메이는 몹시 힘겨워 보였어요. 앤은 아주 익숙한 솜씨로 미니 메이를 돌보기 시작했어요. “미니 메이의 병은 확실히 후두염인데,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우선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난로에 장작을 많이 지펴 줘. 난 미니 메이에게 약을 먹일게.” 다이애나와 심부름하는 메리는 앤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앤은 미니 메이에게 억지로 약을 몇 모금 먹였어요. 매슈가 의사를 데리고 왔을 때는 벌써 새벽 3시였어요. 미니 메이는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어요. 아침이 되자, 앤은 매슈와 함께 마차로 집에 돌아왔어요. 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리고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어요. 앤이 부엌으로 내려오니, 마릴라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어요. “일어났구나. 어젯밤 이야기는 오라버니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네가 응급 치료법을 알고 있었으니 정말 다행이지 뭐니?” 앤이 식사를 마치고 나자, 마릴라는 다시 말했어요. 낮에 배리 부인이 널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더라. 그러나 네가 깊이 잠들어 있어서 깨우지 않았단다. 부인은 미니 메이의 목숨을 살려 준 게 바로 너라고 하더구나. 지난번 포도주 사건은 자기가 오해했다고 하면서, 다시 다이애나와 친하게 지내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오후에 다이애나를 보러 가렴. 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앤은 기뻐서 하늘에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아주머니, 저 지금 가도 돼요?” “그래, 어서 다녀오려무나.” 앤은 코트도 입지 않은 채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마릴라는 웃음을 띠고 앤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얼마 뒤, 앤은 행복한 얼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주머니, 전 너무 행복해요. 배리 아주머니는 저에게 입을 맞추고 사과까지 하셨어요.” 아주 오랜만에, 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어요. 뜻밖의 실수. 초여름이 되었을 때, 필립스 선생님은 에이번리 학교를 떠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에이번리 마을에서 오랫동안 목사 일을 맡고 있던 벤틀리 목사님도 마을을 떠났어요. 벤틀리 목사님이 떠나자, 앨런 목사님이 새로 왔어요. 앨런 목사님은 젊고 명랑했으며, 그의 부인도 무척 상냥하고 다정했어요. 앤은 곧 앨런 부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어요. “앨런 부인은 주일 학교에서 우리 반을 맡고 계세요. 앨런 부인은 웃을 때 더 예쁘게 보여요.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자꾸만 마음이 끌려요.” “우리도 목사님 부부를 초대해서 차를 대접해야겠다. 다른 집에는 거의 다녀가신 모양이더라. 다음 주 수요일이 좋겠구나.” “그럼, 아주머니, 제가 케이크를 만들어도 될까요?” “그렇게 하렴.” 마릴라는 기꺼이 허락해 주었어요. 수요일 아침에 앤은 다른 때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났어요. 감기에 걸리기는 했지만, 케이크를 만들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오븐에 반죽한 것을 넣고 난 뒤, 앤은 말했어요. “아주머니, 케이크가 잘 부풀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앤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케이크는 잘 구워졌고, 먹음직스러워 보였어요. 오후가 되어 앨런 목사님 부부가 초록 지붕 집을 방문하자, 모두 함께 식사를 하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마침내 앤이 만든 케이크가 나왔어요. 마릴라는 앨런 부인에게 케이크를 권했어요. “이건 앤이 부인을 위해 특별히 만든 거랍니다.” 앨런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를 한 입 먹었어요. 그런데 케이크를 먹은 앨런 부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어요. 마릴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얼른 케이크를 먹어 보았어요. “앤, 이 케이크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구나. 향료는 뭘 썼니?” “뭐, 뭐가 잘못됐나요?” 케이크를 먹어 본 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전, 틀림없이 바닐라를 썼는데.” “네가 쓴 바닐라병을 가지고 와 봐라.” 앤은 부엌으로 뛰어가, 조그만 병을 가지고 왔어요. 병 안에는 갈색의 액체가 조금 남아 있었고, 겉에는 바닐라의 상표가 붙어 있었어요. 마릴라는 병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어요. “어머나, 이건 상처에 바르는 약이로구나! 지난주에 내가 약병을 깨뜨려서, 나머지 약을 바닐라 병에 넣어 두었던 거야. 내가 너에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으니, 내 잘못도 있구나. 하지만 앤, 넌 냄새도 맡아 보지 않았니?” “전 감기에 걸려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어요.” 앤은 이렇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뛰어가 흐느껴 울었어요. 잠시 뒤, 마릴라가 방으로 들어오자, 앤은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어요. “아주머니, 전 영원히 씻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어요. 이 소문은 에이번리 마을에 퍼지게 되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도저히 앨런 부인의 얼굴을 뵐 수가 없어요. 제가 일부러 약을 넣은 건 아니라고, 앨런 부인에게 대신 말씀해 주시지 않겠어요?” “그보다 네가 직접 앨런 부인에게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니?” 마릴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앤이 고개를 들어 보니, 앨런 부인이 침대 옆에 서서 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어요. “앤, 누구라도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가지고 뭘 그리 걱정하니?” “전 정말 부인께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알다마다. 난 네 따뜻한 마음씨를 고맙게 여기고 있어. 이제 울음을 그치고, 내게 정원을 구경시켜 주지 않겠니?” 그제야 앤은 마음을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어요. 필립스 선생님이 떠난 에이번리의 학교에는 스테이시라는 여자 선생님이 새로 오게 되었어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성격이 명랑하고 다정했으므로, 앤도 스테이시 선생님을 존경하고 잘 따랐어요. 늦가을이 되자, 스테이시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때 음악회를 열어, 거기서 생긴 돈으로 국기를 만들자고 했어요. 학생들은 그 뜻에 찬성하여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어요. 앤은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어요. 어느 날, 학생들은 초록 지붕 집에 모여 노래를 연습했어요. 마침 집에 돌아온 매슈는 노래를 연습하는 학생들을 보고 마음이 울적해졌어요. 학생들 가운데서 앤의 옷차림이 가장 초라해 보였거든요. 매슈는 앤에게 옷을 한 벌 사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날이 새자마자 시장으로 갔어요. 그러나 매슈는 다른 사람들 앞에 서면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옷의 모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어요. 결국, 매슈는 옷은 사지 못하고 흑설탕만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매슈는 마릴라에게 이 일을 의논하려다가,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망설였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매슈는 린드 부인을 찾아갔어요. 매슈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린드 부인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대답했어요. “앤에게 옷을 사 주시겠단 말씀이군요? 하지만 옷을 사는 것보다 제가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 바느질하는 걸 좋아하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제 조카 제니 몸에 맞게 하면 아마 앤에게도 맞을 거예요. 둘은 체격이 비슷하니까요.” “이거 참,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어, 저어. 소매 모양은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만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소매를 불룩하게 만들어 달라는 말씀이지요? 염려 마세요, 최신 유행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매슈는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이 주일 뒤, 린드 부인이 새 옷을 가지고 왔어요. 마릴라는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이번 가을에 제가 세 벌이나 옷을 만들어 줬으니, 이젠 더 필요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면 앤의 허영심만 키워 주게 되니까요. 아무튼 앤은 이런 소매 달린 옷을 입고 싶어 했는데, 이젠 만족하겠군요.” 며칠 뒤,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었어요. 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아래층으로 내려왔어요. “아주머니, 메리 크리스마스!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매슈는 상자 속에 든 옷을 꺼내어 앤에게 내밀었어요. “앤, 이건 너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앤은 옷을 받아 들자, 잠시 할 말을 잊고 있었어요. “어머나, 매슈 아저씨. 이렇게 아름다운 옷은 처음 봤어요. 아저씨께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앤은 마냥 들떠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을 정도였어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음악회는 성공적이었어요. 좁은 마을 회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학생들은 노래와 연주를 훌륭하게 해냈어요. 그중에서도 앤은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어요. 그날 밤, 음악회 구경을 하고 돌아온 매슈와 마릴라는 난롯가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우리 앤의 재주는 참 놀랍더구나, 마릴라.” “그래요, 워낙 영리한 애니까 무슨 일이든지 잘 해낼 거예요. 오늘 밤엔 앤이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음악회 이야기로 꽃을 피웠어요. 생명의 은인. 어느 여름날, 앤은 다이애나와 루비, 제인과 함께 호숫가에서 뛰어놀았어요. 앤은 친구들에게 테니슨의 시에 나오는 일레인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며서 해 보자고 했어요. 일레인이 죽어서 배에 실려 떠내려가고, 아서왕과 왕비는 강 아래쪽에서 일레인을 기다린다는 내용이었어요. “앤, 네가 일레인이 되는 거야.” 다이애나가 말했어요. 앤은 머리카락이 붉어 일레인 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친구들도 권했기 때문에 맡기로 했어요. 일레인이 된 앤은 배에 죽은 사람처럼 누웠고, 아이들이 배를 밀었어요. 그 순간 배는 물속에 박혀 있던 말뚝에 부딪혀 약간 기우뚱했지만, 그대로 떠내려갔어요. 앤은 배에 누워서 달콤한 기분을 맛보았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어요. 이내 배의 바닥에서 물이 새어 들었기 때문이에요. 배가 말뚝에 부딪혔을 때, 바닥에 금이 생겼던 거였어요. 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어요. 다행히 배가 다리 기둥 가까이 지나가서 앤은 가까스로 다리 기둥에 매달렸어요. 배는 잠시 기우뚱하더니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어요.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아이들은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자, 앤도 물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고 비명을 질렀어요. 앤은 이를 악물고 미끌미끌한 다리 기둥에 매달려 있었어요. 넘실거리는 물을 내려다보니 더욱 무서웠고, 팔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어요. 그때였어요. “앤, 거기 매달려서 뭐 하고 있는 거니?” 마침 배를 타고 다리 밑으로 지나가던 길버트가, 다리 기둥에 매달려 있는 앤을 발견하고 다가왔어요. 길버트는 다리 기둥 밑으로 배를 가까이 갖다 대고는 손을 내밀었어요. 앤은 길버트의 손을 잡고 배 위로 뛰어내렸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길버트는 노를 저으며 물었어요. “우린 일레인 연극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배에 물이 스며들어 다리 기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 미안하지만 나루터에다 배를 대 주겠니?” 길버트는 말없이 나루터로 배를 저어 갔어요. 배가 닿자, 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에서 뛰어내렸어요. “고마웠어.” 앤은 그대로 뛰어가려 했지만, 길버트가 배에서 뛰어내려 팔을 꽉 잡았기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어요. “앤, 이젠 우리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 않겠니? 그때, 네 머리가 붉다고 놀려서 정말 미안해.” 길버트의 눈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앤은 잠시 망설였어요. 그러나 옛날의 분한 마음이 되살아나,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미안해, 난 너하고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 길버트도 은근히 화가 나서 배에 뛰어올랐어요. “좋아, 다시는 너에게 친구 하자는 말을 하지 않겠어.” 길버트는 배를 저어 다른 곳으로 가 버렸어요. 앤은 문득, 자기가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잠시 뒤, 오솔길에서 앤은 호수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다이애나와 두 소녀를 만났어요. 그들은 어른들을 찾으러 갔다가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앤, 무사했구나!” 다이애나는 앤의 목을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앤, 우린 네가 죽은 줄로만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니?” 앤은 길버트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어머, 길버트는 참 좋은 애구나. 앤, 너도 이젠 길버트와 친하게 지낼 거지?” 다이애나의 물음에 앤은 단호하게 말했어요. “아니, 말도 하지 않을 거야.” 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11월의 어느 저녁, 마릴라와 앤은 난로 옆에 앉아 있었어요. 마릴라는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어요. “아까 네가 놀러 간 사이, 스테이시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그래요? 선생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선생님은 성적이 좋은 아이들 중에서 퀸스 학교에 가길 원하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반을 만들까 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네 문제를 우리와 상의하러 오셨던 거야. 앤, 넌 퀸스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니?” 앤은 마릴라 앞으로 다가오며 손을 꽉 잡았어요. “어머나, 아주머니! 그건 제 꿈이었어요. 하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 걱정이에요.” “돈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라. 오라버니와 난 너를 우리 집에 있게 할 때부터 최선을 다해서 훌륭하게 교육시키기로 했단다. 그러니 너만 생각이 있다면, 특별반에 들어도 좋다.” “아,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매슈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절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겠어요.” 마릴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윽고 에이번리 학교에는 특별반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앤과 길버트, 루비와 제인, 찰리와 조시, 무디가 특별반에 들었어요. 다이애나는 부모님이 퀸스 학교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특별반에 들지 않았어요. 특별반에 들어간 학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중에서도 앤과 길버트는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성적은 날로 좋아졌어요. 다른 아이들은 앤과 길버트를 따라잡는 건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어요. 입학시험. 겨울이 되어 입학시험도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아이들의 마음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학생들은 저마다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는 사이에 앤은 마릴라보다 키가 더 커졌어요. 나이도 열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제법 숙녀티도 났어요. 이런 앤을 볼 때마다, 마릴라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마음이 들어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어느 날, 마릴라는 혼자 소리를 죽이며 울었어요. 그때 방에 들어온 매슈는 마릴라가 우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했어요.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이젠 앤도 다 자랐어요. 이제 내년 겨울부턴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겠죠. 그 애가 퀸스 학교로 가고 나면, 난 무척 쓸쓸할 것 같아요.” “집에 자주 올 텐데, 뭘 그러니?” “그래도 한집에 같이 있을 때와는 다를 거예요.” 마릴라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얼마 뒤, 입학시험이 가까워지자, 마릴라는 앤에게 물었어요. “이제 시험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구나. 앤, 자신 있니?” “잘될 거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돼요.”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시험을 치르면 되지 않겠니?” “아, 도저히 그럴 수는 없어요. 만약에 길버트는 합격했는데. 아니 모두 합격했는데, 저만 떨어지면 창피해서 어떡해요?” 앤은 입학시험 때문에 걱정이 돼서 그런지 천장을 쳐다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어요. 6월에 학기가 끝나자, 스테이시 선생님은 에이번리 학교를 떠나고 말았어요. 그날 저녁, 앤과 다이애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며 서운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눈이 빨갛게 되도록 눈물을 흘렸어요. 어느덧 앤은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도시로 갔어요. 그리고 며칠 뒤, 입학시험을 끝낸 앤이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이애나가 와 있었어요. “앤, 너와 헤어진 지 몇 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래, 시험은 잘 치렀니?” “다른 과목은 웬만큼 치른 것 같아. 기하만 빼고.” “다른 아이들은 어땠니?” “모두 자신이 없다고 말했지만, 다들 잘 본 것 같아.” 다이애나는 길버트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모두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꼭 합격할 거야.” “간신히 합격할 바엔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말은 바로, 합격하더라도 길버트보다 성적이 나쁘면 화가 날 것이라는 뜻이었어요. 다이애나는 이미 그 말뜻을 잘 알고 있었어요. 삼 주가 지나도 합격자 명단은 발표되지 않았고, 앤의 긴장도 매일매일 더해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앤이 창밖을 내다보며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다이애나가 신문을 들고 숨을 헐떡이며 찾아왔어요. “앤, 합격이야. 너랑 길버트가 1등으로 합격했대. 그런데 네 이름이 제일 위에 났더라. 정말 축하해, 앤.” 앤이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받아 보았어요. 분명히 합격이었어요. 더구나 앤의 이름은 합격자 가운데 제일 위에 있었어요. 그렇게 말이 많던 앤도 너무나 기뻐 그 순간만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어요. “이 기쁜 소식을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얼른 알려 드려야겠어.” 두 소녀는 곧장 매슈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달려갔어요. 그때 마릴라는 린드 부인과 함께 밭 울타리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매슈 아저씨, 제가 1등으로 합격했어요.” “그래, 난 네가 쉽게 1등 할 줄 알았다! 정말 장하다!” 매슈가 자랑스러운 듯이 큰 소리로 말하자, 마릴라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어요. 린드 부인도 앤의 합격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어요. 그 뒤로 몇 주 동안, 초록 지붕 집은 앤을 퀸스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느라고 무척 바빴어요. 매슈는 앤에게 아름다운 옷들을 많이 사다 주었어요. 어느 날 저녁, 마릴라도 연한 초록색 옷감을 가지고 앤의 방으로 들어왔어요. “네가 혹시 저녁 파티에 초대될지도 모르잖니? 드레스를 만들려고 옷감을 장만해 왔다. 바느질은 솜씨 좋은 에밀리에게 부탁하려고 하는데, 옷감 색깔이 마음에 드니?” “오, 아주머니, 정말 고마워요.” 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기뻐했어요. 며칠 뒤 옷이 다 만들어지자, 앤은 매슈와 마릴라 앞에서 옷을 입어 보게 되었어요. 마릴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앤을 보자, 앤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누더기를 입은 가련한 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서 마릴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영원히 함께. 9월이 되자, 마침내 앤은 도시로 떠나게 되었어요. 앤은 마릴라와 다이애나에게 울면서 작별 인사를 했어요. 그리고 매슈와 함께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어요. 앤은 스테이시 선생님이 일러 준 대로 일 년의 수업 과정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되면 일 년 뒤에는 교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공부도 어려웠어요. 길버트도 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앤은 새로운 교실에서 낯선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자,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앤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길버트뿐이었어요. 그래도 앤은 길버트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퀸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앤의 마음을 끌었어요. 매주 금요일이면 앤은 에이번리의 학생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그럴 때면 언제나 다이애나와 몇몇 사람들이 역까지 나와 마중해 주었어요. 어느덧 일 년이 지나갔어요. 그리고 모든 시험도 끝나고, 성적이 발표되는 날이 되었어요. 그날, 앤은 제인과 함께 거리를 걸었어요. “앤, 넌 메달이나 장학금 중에 하나는 꼭 받게 될 거야.” 제인은 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했어요. “난 받지 못할 것 같아. 게시판을 볼 용기도 없어. 제인, 만약 내가 불합격했다면 바로 말해 줘. 그리고 날 동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학교에 가자, 여러 학생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었어요. “메달은 길버트가 땄어, 길버트 만세!” 학생들은 길버트 주위를 둘러싸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앤은 그것을 보고 몹시 실망했어요. 바로 그때, 누군가 외쳤어요. “앤 셜리 만세! 장학금 수상자 만세!” “아, 제인.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야.” 앤은 제인을 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앤은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생각했어요. ‘빨리 집에다 알려야지.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졸업식에는 매슈와 마릴라도 참석했어요. 매슈와 마릴라의 눈과 귀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키 큰 한 여학생에게 온통 쏠려 있었어요. 그날 저녁, 앤은 모처럼 매슈와 마릴라와 함께 에이번리에 돌아왔어요. 다이애나는 벌써 초록 지붕 집에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다이애나. 집에 돌아온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야. 그리고 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뻐.” “앤, 넌 장학금을 받았으니, 퀸스 학교에서 더 배우지 않아도 되겠구나?” “응, 가을엔 레드먼드 대학에 갈 거야. 그런데 제인과 루비는 대학에 안 가고 선생님을 하겠대.” “길버트도 선생님이 될 거래. 자기 아버지가 대학 학비를 대 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벌어서 대학에 가야 한대. 에미스 선생님이 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 길버트가 이곳의 선생님으로 올지도 몰라.” 그 말을 들은 앤은 둘도 없는 경쟁자를 잃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소 실망했어요.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앤은 매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매슈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간 뒤, 앤은 마릴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아주머니, 매슈 아저씨가 어디 편찮으신 모양이에요?” 마릴라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오라버니는 지난봄에 심장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게 여태 낫지 않았단다. 그리고 낮에 밭에서 마틴을 만났었지? 이젠 마틴이 농사일을 거들어 줄 테니, 매슈 오라버니도 편히 쉴 수 있을 게다.” 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릴라에게 다가갔어요. 그러고는 두 손으로 마릴라의 주름진 얼굴을 만져 보았어요. “아주머니도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는 제가 집안일을 돌볼 테니 좀 쉬세요.”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니야. 요즘 자주 눈 뒤쪽이 아프구나. 스펜서 부인은 안경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시는데, 안경을 바꿔 써도 소용이 없구나. 마침 여름에, 이곳에 유명한 안과 의사가 온다고 진찰을 받아 보라고 하니, 나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마릴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앤에게 물었어요. “그런데 앤, 너 혹시 에비 은행에 대한 소문을 못 들었니?”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후유, 린드 부인도 그런 말을 하더구나. 우리 집 돈은 모두 그 은행에 예금해 놓았는데, 오라버니도 그것 때문에 몹시 걱정하고 있어.” 그러자 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릴라를 바라보았어요. 그날 저녁, 앤은 매슈와 함께 목장에서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매슈는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천천히 걸었어요. “매슈 아저씨, 좀 쉬어 가면서 하세요.” “앤, 모든 게 나이 탓이다. 난 지금까지도 열심히 일해 왔지만,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일을 계속할 거다.” “죄송해요. 제가 만약 남자아이였다면, 아저씨 일을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난 열 명의 남자아이보다 네가 더 좋단다.” 매슈는 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말했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였어요.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마릴라는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앤은 그 목소리를 듣고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왔어요. 신문을 들고 있던 매슈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어요. 앤이 달려갔을 때, 매슈는 이미 자리에 쓰러져 있었어요. “앤, 빨리 마틴에게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해.” 마틴은 의사를 부르러 가는 길에 배리 씨 댁에 들러서 도움을 청했어요. 마침 그 집에 와 있던 린드 부인도 배리 부부와 함께 달려왔어요. 린드 부인은 쪼그리고 앉아 매슈의 가슴을 짚어 보더니, 눈물이 글썽해서 일어섰어요. “마릴라, 이젠 어쩔 도리가 없군요.” “아주머니, 설마 매슈 아저씨가.” 앤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어요. “그렇단다, 앤. 나처럼 이런 일을 많이 보아 온 사람은 알 수 있단다.” 린드 부인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얼마 뒤에 도착한 의사는 매슈가 갑자기 어떤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거라고 말했어요. 앤은 매슈가 들고 있던 신문을 보고,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신문에 에비 은행이 파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던 거예요. 매슈가 죽었다는 소문은 에이번리 마을에 퍼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장례 준비를 도와주었어요. 앤은 지난날 매슈가 자기를 친딸처럼 귀여워해 주던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어요. 매슈의 장례식이 끝나자, 에이번리 마을은 다시 예전처럼 조용해졌어요. 그러나 앤의 슬픈 마음은 아직도 가시지를 않았어요. 앤은 매슈의 무덤에 찾아가 정성 들여 장미를 심었어요. 매슈가 장미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다음 날, 시내에 다녀온 마릴라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가득 서려 있었어요. 안과 의사에게서 앞으로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면 눈이 멀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앤은 불안해하는 마릴라를 늠름하게 위로해 주었어요. 며칠 뒤, 앤은 마릴라가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주머니, 초록 지붕 집을 팔아선 안 돼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서 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쓸쓸하구나.” “아주머니, 제가 있잖아요. 전 레드먼드 대학에 가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장학금을 받지 않겠어요. 아주머니께서 지금까지 절 위해 얼마나 애써 주셨는데, 어떻게 혼자 사시게 할 수 있겠어요? 전 여기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주머니와 평생 함께 살 거예요.” 마릴라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앤은 자기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어요. 마침내 앤이 대학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길버트는, 에이번리 학교 자리를 앤에게 양보하고 화이트샌즈 학교로 가기로 했어요. 다음 날, 매슈의 묘지에 심어 놓은 장미에 물을 주러 갔던 앤은 돌아오는 길에 길버트를 만났어요. 앤은 길버트를 발견하자, 반가워하며 말했어요. “길버트, 나에게 에이번리 학교를 양보해 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조금이라도 널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 앤, 이제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물론이야, 난 이미 그날 호수에서 널 용서했단다. 그리고 그 뒤로 내 잘못을 늘 뉘우치고 있었어. 하지만 너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난 정말 나쁜 아이인가 봐.” “아냐, 앤. 우린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서로 도와 가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해. 자, 어서 가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앤은 길버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초록 지붕 집으로 왔어요. 앤이 집에 오자 마릴라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어요. “너랑 길버트가 그렇게 정답게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건 미처 몰랐구나.” 그러고는 앤을 놀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마릴라는 빙그레 웃었어요. “물론 지금까진 그러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서로 도와주며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어요. 길버트와 전 오 년 동안이나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사이여서, 화해하고 나니 하고 싶은 말들이 아주 많아요.” 앤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이제 잃었던 우정도 되찾고, 마음속으로 바라던 꿈도 이루게 되었으니, 앤의 앞길에는 행복의 꽃들이 소복소복 만발하겠지요?
닐스의 모험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몸이 작아진 닐스. 옛날 스웨덴 남부 지방에 닐스라는 장난꾸러기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닐스의 머릿속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어느 일요일 아침, 닐스의 부모님은 교회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닐스는 집에 혼자 남아 장난칠 궁리를 했어요. 닐스의 이런 궁리를 알아챈 듯 아빠가 말했어요. “닐스, 교회에 가지 않는 대신 성경책은 꼭 읽어야 한다! 한 페이지라도 그냥 넘어가선 안 돼.” 아빠는 엄하게 말하고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어요. 닐스 부모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닐스였어요. 닐스가 말썽만 부리지 않는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어요. 닐스는 책상 앞에 앉아 성경책을 펼쳤어요. 잠시 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달그락달그락.”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잠을 깬 닐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았어요. 그런데 엄마가 가장 아끼는 나무 상자가 열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서, 설마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닐스는 겁이 나서 덜덜 떨었어요. 그때 나무 상자 위에 검은 그림자가 슬그머니 나타났어요. 누구의 그림자인지 궁금해서 뚫어지라 쳐다보던 닐스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세상에! 저건 요정이잖아!’ 요정은 고작 한 뼘 정도 되는 키에 얼굴은 주름이 가득했어요. ‘잡아서 가지고 놀면 재미있겠다. 히히히!’ 닐스는 창문 빗장에 걸린 잠자리채를 잡고는 요정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잽싸게 낚아챘어요. 요정은 꼼짝없이 닐스의 장난감이 될 처지에 놓였어요. “날 풀어 줘. 이봐, 난 너희 집을 지켜 주는 요정이야. 이렇게 대하면 안 돼. 날 놓아주면 옛날 동전과 은수저, 금화를 줄게.” 요정이 애원했어요. “겨우 그 정도로?” 닐스는 요정을 풀어 주지 않고 잠자리채를 흔들어 댔어요. 그런데 갑자기 요정이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요정을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닐스는 바닥에 잠자리채를 놓고 요정이 빠져나갈 수 있게 했어요. 하지만 요정이 잠자리채를 거의 빠져나갈 때쯤 닐스는 다시 잠자리채를 흔들어 댔어요. “겨우 그 조건으로 널 놓아주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바로 그 순간, 닐스는 누군가에게 뺨을 힘껏 맞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잠시 뒤 닐스가 눈을 떴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책상도 의자도 성경책도 닐스가 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요정이 물건들을 크게 만드는 요술이라도 부렸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닐스는 문득 거울을 보았어요. 그런데 거울 속에 자기와 똑같이 생긴 작은 사람이 있었어요. “저건 또 뭐야. 거울 속에 또 다른 요정이 숨었나? 그런데 나랑 똑 닮았잖아?” 닐스는 깜짝 놀라 손뼉을 쳐 보았어요. 그러자 거울 속의 사람도 닐스와 똑같이 손뼉을 쳤어요. 요정보다 더 작은 사람은 바로 닐스였던 거예요. “세상에! 요정이 마법을 걸었구나. 이를 어째!” 닐스는 두려워서 몸이 덜덜 떨렸어요. “그래, 요정을 찾아서 용서를 빌자. 그럼 나를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줄 거야.” 닐스는 요정을 찾기 위해 찬장 밑, 선반 위, 벽장 등을 샅샅이 뒤졌어요. 하지만 요정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닐스는 두리번거리며 요정에게 싹싹 빌었어요. “이제부터는 장난도 안 칠 거야.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착한 아이가 될 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를 원래 모습으로 돌려놔 줘.” 닐스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어요. 한참을 울던 닐스는 문득 요정이 외양간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맞아, 외양간으로 가 보자.” 하지만 몸이 작아진 닐스에게는 마당까지 가는 길도 무척 머나먼 길이었어요. 한참 만에야 마당으로 나온 닐스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어요. 신기하게도 닐스의 귀에 동물들이 하는 말이 들렸거든요. “어머나, 저 닐스 녀석 좀 봐. 꼬맹이가 되었잖아. 꼬꼬댁.” 암탉이 신이 난 듯 말했어요.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더니 벌을 받았나 봐. 짹짹.” 나무 위의 참새도 한몫 거들었어요. 닐스는 화가 나서 돌멩이를 암탉에게 던졌어요. 그러자 커다란 암탉들이 닐스를 부리로 콕콕 찍으려고 달려들었어요. “아이고, 아파! 그만둬.” 닐스는 어쩔 줄을 모르고 도망 다니기에 바빴어요. “야옹!” 바로 그때 고양이가 나타났어요. 그러자 암탉들이 슬금슬금 달아났어요. “어, 고양이구나. 정말 반갑다. 너 혹시 요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흥, 알아도 안 가르쳐 줘. 네가 내게 한 짓을 생각해 봐. 내 꼬리를 잡아당길 때 얼마나 아팠는데!” 고양이는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닐스에게 다가왔어요. 닐스는 온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어요. 고양이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길을 막았어요. “이쯤에서 끝내는 건 다 네 엄마를 생각해서라고!” 고양이는 이렇게 말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잠시 뒤 닐스는 가까스로 외양간에 도착했어요. 그러나 소들도 커다란 꼬리를 흔들며 닐스에게 겁을 주었어요. 닐스는 재빨리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닐스 하늘을 날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구나! 이제 어떻게 하지?” 외양간에서 겨우 빠져나온 닐스는 농장을 둘러싼 높은 돌담 위로 올라갔어요. 그때, 북쪽을 향해 날아가던 기러기 떼가 닐스네 앞마당으로 내려앉았어요. “얘들아, 우리와 함께 라플란드로 여행하지 않을래?” 대장처럼 보이는 기러기 한 마리가 거위 가족에게 물었어요. “기러기 떼와 어울려 다니다가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기 쉽단다.” 엄마 거위가 말했어요. 하지만 수컷 거위 모르텐은 항상 날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모르텐은 슬금슬금 거위 무리에서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날개를 퍼덕거리며 기러기 떼를 향해 외쳤어요. “이봐, 조금만 기다려 줘. 나도 함께 갈래.” “안 돼! 네가 날아가 버리면 우리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닐스는 재빨리 뛰어가서 날아가려는 모르텐의 목을 꼭 껴안았어요. 하지만 모르텐은 닐스를 뿌리칠 겨를도 없이 하늘로 조금씩 날아오르고 있었어요. 강한 바람이 닐스의 몸을 뒤흔들었어요. 닐스는 모르텐을 더욱 꼭 붙잡았어요. 잠시 뒤 모르텐이 속력을 늦추기 시작하자 닐스는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어요. 모르텐의 주위로 기러기 떼가 날고 있었어요. 기러기 떼는 모르텐이 따라올 수 있게 낮고 천천히 날았어요. 닐스는 모르텐의 등에 조심스럽게 앉았어요. 어느새 닐스는 슬픔과 걱정에서 벗어나 마음껏 하늘 위의 세상을 즐기고 있었어요. 모르텐도 하늘을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모르텐과 기러기 떼들은 북쪽을 향해 날아갔어요. 오후가 되자 모르텐은 힘이 빠져 기러기 떼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기러기 대장인 아카는 자꾸만 뒤처지는 모르텐이 귀찮아졌어요. “못 따라오겠으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 그 소리를 들은 모르텐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어요. ‘정말 매정한 기러기로군. 라플란드까지 데리고 갈 생각도 없으면서 나를 재미 삼아 꾀어냈던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모르텐은 오기가 생겨 더욱 열심히 날기 시작했어요.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어요.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가 간다.” 기러기 떼는 어느 호숫가에 내려앉았어요. 호수는 군데군데 얼어 있었어요. 어둠이 깔리자 닐스는 배고픔과 추위가 몰려왔어요. 닐스가 이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모르텐뿐이었어요. 하지만 모르텐은 너무 지쳐서 곧 죽을 것만 같아 보였어요. 닐스는 동물을 사랑하기는커녕 늘 못살게 굴었지만, 지금은 모르텐이 그 누구보다도 소중했어요. “모르텐, 조금만 더 힘을 내. 호수에 가서 물을 마시면 기운이 좀 날 거야.” 닐스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모르텐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모르텐은 꼼짝할 수도 없었어요. “모르텐, 안 돼. 너마저 없으면 난 어떡해!” 닐스는 있는 힘을 다해 모르텐을 물가로 데리고 갔어요. “모르텐, 고개를 조금만 숙여 봐. 물을 마실 수 있을 거야.” 모르텐은 닐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물을 마시고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어요. “정말 다행이다. 이제 나도 뭘 좀 먹어야겠는데.” 그때 모르텐이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서 닐스에게 주었어요. “닐스,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이거 먹어.” “고마워.” 닐스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비늘을 긁어낸 뒤 물고기를 맛있게 먹었어요. “닐스, 나와 함께 라플란드까지 가지 않을래?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 기러기들한테 보여 주고 싶어.” “글쎄.” 닐스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야.” 모르텐이 다정하게 말하자 닐스는 마음이 흔들렸어요. “좋아, 어차피 부모님도 작아진 내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실 테니까!” “와! 고마워, 닐스.” 그때 기러기들이 대장 아카를 앞세우고 다가왔어요. “닐스, 넌 잠자코 있어. 절대로 네가 사람인 걸 말하면 안 돼. 그 사실을 알면 기러기들이 무척 싫어할 거야.” 이윽고 기러기들은 모르텐의 바로 앞까지 왔어요. “이봐, 넌 왜 자꾸 우리를 따라오는 거지?” “거위도 용감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꼭 라플란드까지 날아갈 거야.” 아카가 빈정대며 말했어요. “네가 우리를 따라 라플란드로 갈 수 있을지는 2, 3일 정도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얘는 뭐야?” 아카가 닐스를 보며 물었어요. “내 친구야. 날쌔고, 용감하고, 또 머리도 좋아서 데리고 가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야.” 모르텐이 얼른 대답했어요. “어? 요정이 아니라 사람이잖아? 우리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면 오늘 밤만은 같이 지내도록 해 주지.” “걱정하지 마.” 모르텐이 꽥 소리를 질렀어요. “흥, 마음대로 하라고.” 아카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무리와 함께 가 버렸어요. 추워서 벌벌 떨고 있던 닐스가 모르텐에게 다가왔어요. “모르텐, 너무 추워. 얼어 죽을 것 같아.” “닐스. 풀잎이나 지푸라기를 모아 줄래?” 닐스가 풀잎과 지푸라기를 잔뜩 안고 오자 모르텐은 잠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러고는 그 안에 앉은 뒤 닐스를 날개로 품었어요. “어때?” “정말 따뜻해. 모르텐, 고마워.” “천만에, 닐스. 이제 마음 푹 놓고 자도록 해.” 모르텐의 숨소리를 들으며 닐스는 금세 잠이 들었어요. 여우의 습격. 한밤중이 되자, 검은 그림자가 기러기 떼를 향해 다가왔어요. 그것은 근처에 사는 여우였어요. 여우는 살금살금 기러기 떼가 자는 호숫가 근처로 다가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물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어요. 그 소리에 놀라 잠이 깬 기러기들은 재빠르게 날아올랐어요. “여우가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라.” 아카의 고함 소리에 놀란 닐스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여우가 기러기 한 마리를 입에 문 채 달아나고 있었어요. 요정의 눈을 갖게 된 닐스는 깜깜한 호숫가가 대낮처럼 잘 보였어요. “야, 이 못된 여우야. 당장 기러기를 놔주지 못해!” 닐스는 소리를 치며 여우를 쫓아갔어요. 여우는 떡갈나무 숲으로 도망쳤어요. “기러기를 놓아줘, 이 도둑놈아!” 닐스는 포기하지 않고 쫓아갔어요. 드디어 닐스는 여우의 꼬리를 꽉 움켜쥐었어요. “악!” 여우는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어요. 그 바람에 여우는 잡았던 기러기를 놓치고 말았어요. "이 조그만 놈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여우는 자기 꼬리에 매달려 있는 닐스를 붙잡기 위해 빙빙 돌기 시작했어요. 닐스의 손에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커다란 떡갈나무가 닐스의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 저 나무 위로 올라가면 되겠구나.” 닐스는 여우의 꼬리를 살며시 놓고 떡갈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여우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돌기 시작했어요. “으하하, 저 바보 같은 여우 좀 봐. 난 여기 있는데.” 그제야 나무 위에 올라앉은 닐스를 본 여우는 맥이 탁 풀려 주저앉고 말았어요. “좋아, 네가 언제까지 나무 위에 있을 수 있나 두고 보자.” 여우는 닐스가 올라간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어요. 닐스는 아주 오랫동안 나무 위에 앉아 있어야 했어요. 차츰 손발도 저렸어요. 하지만 여우가 나무 밑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려갈 수가 없었어요. 어느덧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숲에는 다시 생기가 돌고, 온갖 동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어요. 그때 모르텐과 기러기 떼가 닐스에게 날아왔어요. “모르텐, 나 여기 있어. 나 좀 구해 줘.” 닐스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여우는 날아든 기러기들을 잡으려고 풀쩍풀쩍 뛰어다녔어요. 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에이, 아깝다.” 날아가는 기러기의 꽁지를 바라보던 여우의 머릿속에 퍼뜩 닐스가 떠올랐어요. 여우는 허둥지둥 나무 밑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나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이고, 분해! 내가 기러기 녀석들에게 속았구나.” 여우는 땅을 치며 원통해했어요. 무사히 기러기 무리의 품으로 돌아온 닐스는 모르텐의 날개 밑에서 휴식을 취했어요. 기러기들도 더 이상 닐스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물고기를 잡아 주기도 하고 등에도 태워 주며 잘해 주었어요. 숲속 동물들과 친구가 되다 . 닐스는 기러기들과 어울려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어요. 강가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넓은 공원으로 가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했어요. 어느새 엄마와 아빠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매일매일 즐겁게 지냈어요. 어느 날, 혼자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닐스에게 아카가 다가왔어요. “닐스,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은 아주 위험해. 그러다가 무서운 적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무서운 적이라고?” 닐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호수 근처 숲에서 한 농사꾼이 암컷 다람쥐 한 마리를 잡았어요. “우리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겠는걸?” 농사꾼은 암컷 다람쥐를 집에 데려가서 작은 나무 위에 새장을 걸어 두고, 그 속에 넣었어요. 그날 저녁, 식구들이 모두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농사꾼의 늙은 어머니는 혼자서 새장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때 작은 사람이 새장을 향해 걸어왔어요. 닐스였어요. “아, 아니, 저건 도대체 뭐지?” 할머니는 깜짝 놀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닐스는 새장으로 기어 올라가 암컷 다람쥐와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러더니 곧 어디론가 급히 뛰어갔어요. 잠시 뒤 닐스는 새끼 다람쥐들을 품에 안고 다시 나타났어요. 닐스는 암컷 다람쥐에게 무사히 새끼 다람쥐들을 데려다주고 곧 숲속으로 사라졌어요.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식구들에게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식구들은 새장을 살펴보았어요. 그랬더니 할머니의 말대로 새장 안에 새끼 다람쥐 4마리가 옹기종기 누워 있었어요. “다람쥐들이 너무 가엾어요. 이들에게는 또 다른 가족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냥 숲으로 돌려보냅시다.” 이렇게 해서 다람쥐 가족은 무사히 숲으로 돌아왔어요. 이 일은 새들에 의해 숲속 동물들에게 전해졌고 닐스는 숲속 동물들과 친구가 되었어요. 위험에 처한 모르텐. 기러기 떼와 모르텐은 호숫가에서 쉬고 있었어요. 닐스는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언덕으로 올라갔어요. 그때 밭 건너편에서 두세 명의 아이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어요. “사람이 나타났다!” 기러기들은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어요. “체, 저까짓 꼬마들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 모르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느릿느릿 걸어 다녔어요. “와, 거위다!” 아이들은 모르텐을 덥석 안고는 어딘가로 갔어요. “닐스, 나 좀 살려 줘!” 모르텐이 겁에 질려 소리쳤어요. 닐스는 재빨리 언덕에서 내려와 아이들의 뒤를 쫓아갔어요. 하지만 아이들을 쫓아가는 일은 작은 닐스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닐스는 포기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어요. 그러나 아이들을 놓치고 말았어요. 닐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모르텐의 하얀 깃털이 눈에 띄었어요. 닐스는 모르텐의 깃털을 쫓아 부지런히 걸어갔어요. 잠시 뒤 닐스는 성 앞에 다다랐어요. 하지만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어요. ‘빨리 성안에 들어가 모르텐을 구해야 할 텐데.’ 닐스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어요. 그때 성으로 견학을 가려고 줄은 선 학생들이 보였어요. ‘아, 저 학생의 채집통에 들어가면 되겠다!’ 닐스는 잽싸게 학생의 채집통에 들어갔어요. 채집통 속은 무척 답답했어요. 성으로 들어간 닐스는 모르텐을 찾으려고 채집통의 뚜껑에 몸을 착 기대어 주위를 살폈어요. 그 바람에 뚜껑이 열려 닐스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어요. 닐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뒷마당으로 갔어요. “살려 줘!” 집 안쪽에서 거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모르텐이야, 틀림없는 모르텐의 목소리야!” 닐스는 재빨리 집 쪽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어요. 그러자 아까 모르텐을 잡아간 아이가 문을 열었어요. “어, 아무도 없잖아. 누가 장난쳤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닐스는 쪼르르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부엌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커다란 칼을 들고 모르텐의 날개를 자르려던 참이었어요. “안 돼!” 닐스는 크게 소리치며 부엌으로 달려갔어요. “괴, 괴물이다!” 닐스처럼 작은 사람을 처음 본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칼과 모르텐을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닐스, 어서 이리 와!” 모르텐은 재빨리 닐스를 태우고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회색 쥐들을 물리치다. 기러기들은 모르텐과 닐스를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기러기 떼의 대장인 아카가 말했어요. “닐스, 넌 우리를 여우에게서 구해 주었고, 모르텐과 다른 동물들도 구해 주었어. 너에게 마법을 건 요정에게 네가 착해졌다고 말해 주었어. 그랬더니 요정이 하는 말이 네가 집으로 돌아가면 원래 네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래. 요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 닐스는 너무나 서운했어요. “난 너희와 함께 꼭 라플란드로 가고 싶어.” 아카는 곰곰이 고민하더니 닐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어요. 닐스는 행복해서 풀쩍풀쩍 뛰었어요. 그길로 닐스와 모르텐, 그리고 기러기 떼는 다시 라플란드를 향해 날았어요. 한참을 날던 그들은 어느 습지 근처에서 잠시 쉬기로 했어요. 습지 뒤쪽에는 돌담과 글림밍에후스성이 있었어요. 그 성의 지붕 위에는 황새가 살고 있었고, 어두운 지하실에는 수백 마리의 검은 쥐들이 살고 있었어요.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검은 쥐들을 좋아했어요. 검은 쥐들은 용감하고 착했거든요. 예전에는 검은 쥐들도 습지에 살았었어요. 그런데 백 년 전쯤에 다른 배를 타고 온 회색 쥐들이 습지에 살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회색 쥐의 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힘이 세져서 검은 쥐들을 습지에서 몰아낸 거예요. 검은 쥐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 겨우 글림밍에후스성에 자리 잡게 되었어요. 그런데 회색 쥐들은 글림밍에후스성마저 노리고 있었어요. 닐스는 글림밍에후스성 앞에 있는 습지에서 쉬고 있었어요. 그때 두루미 한 마리가 날아와 말했어요. “내일 클라베리산에서 무도회가 열려요. 모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길 바라요.” “초대해 주어서 고마워요. 꼭 가겠어요.” 기러기들은 무척 기뻐했어. “모르텐, 넌 정말 운이 좋아. 두루미 무도회를 구경할 수 있게 되다니 말이야!” 아카가 모르텐을 보면서 말했어요. “두루미 무도회가 그렇게 멋있어?” 모르텐이 아카에게 물었어요. “물론이지. 정말 굉장해.” “정말 기대되는군.” “그나저나 닐스는 어떻게 하지? 사람은 그곳에 못 가는데.” “뭐라고? 그럼 닐스만 놔두고 가자는 거야?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모르텐이 소리쳤어요. 닐스도 두루미 무도회에 꼭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카에게 부탁하려고 다가갔어요. 그때였어요. 아카 뒤의 돌담으로 회색 쥐들이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가는 게 보였어요. 잠시 뒤 황새가 다급하게 날아와 말했어요. “아카, 회색 쥐들이 성에 쳐들어올 것 같아. 젊은 검은 쥐들이 무도회에 가 버린 걸 안 거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하지 마. 우리가 도울게.” “고마워, 아카!” “닐스, 우리 성을 지키러 가자!” 아카는 닐스를 등에 태우고 성의 지붕 위에 있는 황새의 둥지로 날아갔어요. 그곳에는 올빼미 부부와 고양이 한 마리, 늙은 검은 쥐 몇몇이 회색 쥐들을 막을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어요. “아카,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우선 올빼미 아저씨는 무도회장으로 가서 검은 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시고 올빼미 아주머니는 룬드 교회로 가서 프란메어라는 올빼미가 가지고 있는 뿔피리를 빌려 오세요.” 올빼미 부부는 아카의 지시대로 힘차게 날아갔어요. 이윽고 한밤중이 되자 회색 쥐들은 지하실에 나 있는 구멍을 통해 몰려 들어왔어요. 순식간에 지하실은 회색 쥐들로 가득 찼어요. “우아, 이제야 우리의 소원을 이루었다. 만세!” 회색 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때, 올빼미 아주머니가 프란메어에게 빌려 온 뿔피리를 닐스에게 건네주었어요. “잘 부탁한다, 닐스." “걱정하지 마세요.” 닐스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뿔피리를 불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회색 쥐들이 피리 소리를 듣자마자 앞다투어 닐스가 있는 곳으로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닐스가 불고 있는 뿔피리는 옛날 사람들이 쥐를 길들이기 위해 만든 특별한 뿔피리였거든요. 회색 쥐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마당으로 모여들자 닐스는 뿔피리를 불면서 어디론가 걸어갔어요. 그때, 올빼미의 연락을 받은 검은 쥐들이 성안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닐스는 뿔피리를 불며 성 밖을 나가 습지로 갔어요. 그러자 아카가 닐스를 태우고 습지 한가운데로 날아갔어요. 회색 쥐들은 뿔피리 소리를 따라 물속으로 하나둘 빠졌어요. 아카가 닐스를 태우고 성으로 돌아가자 검은 쥐들과 황새가 반겨 주었어요. “닐스, 정말 고마워. 우리를 도와준 보답으로 너를 두루미 무도회에 초대할게.” “정말? 우아, 신난다.” 황새는 닐스를 등에 태우고 무도회장을 향해 날아갔어요. 두루미의 무도회. 두루미의 무도회가 열리는 클라베리산은 스코네 지방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자리 잡은 암벽은 파도와 바람에 깎이고 부서져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숲속의 모든 동물은 이날만큼은 서로 잡아먹거나 싸우는 일 없이 사이좋게 무도회를 즐겼어요. 동물들이 자리를 잡자 하늘 높은 곳에서 새 떼가 구름처럼 나타났어요. 닐스의 신기한 모험 새 떼는 제각기 지저귀었어요. 종다리, 찌르레기, 까마귀, 까치. 그리고 아카가 거느린 기러기 떼와 모르텐, 황새의 등에 탄 닐스도 무도회장에 왔어요. 닐스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언덕은 온통 새와 동물들로 뒤덮여 있었어요. 잠시 뒤 동물들의 무도회가 시작되었어요. 우선 까마귀들이 펼치는 공중 무용이 있었어요. 공중 무용은 두 패로 나누어진 까마귀들이 엇갈려 나는 춤이었는데, 단조로워서 동물들은 이내 싫증을 냈어요. 그 뒤를 이어 토끼들의 차례가 되었어요. 깡충깡충 뛰기, 물구나무서기, 빙글빙글 돌기 등 다양한 재주를 부렸어요. 많은 동물이 토끼들의 공연을 보며 즐거워했어요. 그다음은 산새들의 순서였어요. 수백 마리의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자 신이 난 동물들도 모두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동물들이 모두 즐겁게 공연을 보고 있을 때, 여우 한 마리가 슬그머니 언덕 위로 올라왔어요. 닐스에게 골탕을 먹은 바로 그 여우였어요. “앗, 그때 그 얄미운 여우가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라!” 기러기 떼 사이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어요. 여우는 어느새 기러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있었어요. 그러자 화가 난 동물들이 심술쟁이 여우를 빙 둘러쌌어요. “평화로운 무도회의 규칙을 어겼으니 넌 앞으로 스코네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가장 나이 많은 여우가 이렇게 말하면서 심술쟁이 여우의 오른쪽 귀 끝을 물어뜯었어요. 그러고는 심술쟁이 여우를 무리에서 쫓아내 버렸어요.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사슴들의 씨름이 시작되었어요. 사슴들은 몇 쌍으로 나누어 동시에 씨름판을 벌였어요. 그들은 서로 뿔과 뿔을 맞대고 격렬히 싸웠어요.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두루미의 공연이 시작되었어요. 날씬한 날개를 펄럭이며 두루미들이 긴 다리로 사뿐히 내려앉았어요. 두루미는 우아한 자태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두루미의 춤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신비롭고 황홀하였어요. 모두 넋이 나간 듯 두루미의 춤을 바라보았어요. ‘아, 이래서 기러기들이 그렇게 흥분을 했던 거였구나.’ 닐스도 두루미의 춤을 보면서 감탄했어요. 요정의 마법을 푸는 방법. 기러기 떼와 모르텐, 그리고 닐스는 다시 라플란드로 향했어요. “후드득후드득.”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이게 뭐야? 옷이 다 젖어 버렸잖아.” 닐스는 투덜거렸지만 기러기와 모르텐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봄비는 새 생명을 재촉하는 기쁜 비야.” 오후 늦게 되어서야 기러기 떼는 커다란 소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어요. 비에 흠뻑 젖은 닐스는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모르텐이 날개 밑에 품어 주었으나 모르텐도 비에 젖은 터라 여전히 추웠어요. ‘마을로 가 볼까? 그럼 따뜻한 불도 쬘 수 있을 텐데.’ 모르텐의 날개 밑에서 기어 나온 닐스는 오후에 언뜻 보아 두었던 마을로 갔어요.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집 안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어요. ‘나를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쓸쓸해졌어요. ‘이제 나는 영영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 닐스는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어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때 커다란 올빼미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내려와 앉더니 건너편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올빼미에게 말을 걸었어요. “혹시 그 소문 들었어? 요정이 어느 장난꾸러기 녀석에게 마법을 걸어 아주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는군.” “그래?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되었어?” “집에 있던 거위를 타고 기러기 떼를 따라 라플란드로 갔다고 하던데.” “그럼 그 아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거야?” “쉿,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요정이 말해 주었는데 그 아이가 거위를 잘 돌보아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면 원래대로 될 수 있대.” ‘야호! 내가 모르텐을 잘 보살펴 주어서 집으로 돌아가면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단 말이지?’ 닐스는 마음속으로 기쁨의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고는 서둘러 기러기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어요. 담비와 수달. 다음 날, 닐스 일행은 스몰란드를 지나 북쪽으로 날아갈 계획을 세웠어요. “땅에 쌓인 눈도 녹지 않았고 강물도 언 채로 있어요.” 형편을 살펴보러 갔던 기러기들이 말했어요. “그렇다면 먹이를 구하기가 힘들 텐데.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음, 블레킹에 쪽으로 가는 편이 좋겠다. 그다음 스몰란드로 가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이렇게 해서 닐스 일행은 블레킹에로 날아가기 시작했어요. “블레킹에는 어떤 곳일까?” 닐스는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학교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어요.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블레킹에에는 땅이 기름져서 갖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단다. 그리고 그곳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어. 강가에 거인 한 명이 살았는데, 이 거인은 나이가 들자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는 것이 귀찮아졌지. 그래서 산 위로 올라가 커다란 돌을 마구 던졌단다. 그러자 물고기들이 깜짝 놀라 거인이 있는 위쪽으로 헤엄쳐 오는 바람에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때 거인이 던졌던 돌들이 모여 지금의 섬을 이루게 된 거란다. 닐스가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기러기 떼는 블레킹에를 지나 어느 강까지 왔어요. 강의 뒤는 절벽이어서 잠자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기러기들은 강기슭의 절벽 밑 모래밭에 자리를 잡고 피곤했는지 그대로 곯아떨어졌어요. 닐스도 모르텐의 날개 밑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지만, 요란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어요. 닐스는 날개 밑에서 빠져나와 잠시 강을 바라보았어요. 바로 그 순간, 절벽 꼭대기에서 닐스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빛이 하나 반짝였어요. 스코네에서 쫓겨난 심술쟁이 여우였어요. “저 녀석들을 여기에서 다시 만나다니. 내가 잡아먹지 못한다면 다른 동물들을 시켜서라도 없애 버리고 말겠다.” 그때 소나무 숲에서 ‘찍찍’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다람쥐 한 마리가 담비에게 쫓기고 있었던 거였어요. 다람쥐는 담비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어요. 그 모습을 본 여우는 얼른 담비에게 다가갔어요. “담비님은 무척 용감하시군요. 정말 놀라운 솜씨입니다.” 여우의 칭찬에 담비는 으쓱해졌어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냥꾼이 겨우 다람쥐나 사냥하시다니요. 훌륭한 사냥꾼이라면 적어도 저기 절벽 끝 모래밭에 있는 기러기 떼 정도는 잡으셔야죠?” 여우가 부추기자 담비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당장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갔어요. “히히! 이 얄미운 녀석들아, 이제 너희들도 끝이다.” 여우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절벽 위에 앉아 담비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잠시 뒤 ‘풍덩’ 하는 소리가 나더니 기러기 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담비가 물에 빠져 버린 거였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여우는 담비가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어요. 이윽고 물에 흠뻑 젖은 담비가 올라오더니 여우에게 화를 내었어요. “이 나쁜 여우 녀석아, 왜 기러기 무리에 이상한 꼬마가 있다는 말을 해 주지 않았어? 나무 밑 가지에 앉아서 기러기를 잡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꼬마 녀석이 뛰어나오더니 내 머리를 향해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잖아. 그래서 재빨리 물속으로 피했던 거야.” “에이, 뭐야? 실패했잖아!” 여우는 담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간 기러기 떼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어요. 한편, 기러기 떼는 달빛에 의지하여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날아갔어요. 그러고는 우뚝 솟은 바위에 내려앉았어요. 그 옆에는 맑은 물이 쏟아지는 폭포가 있었어요. “바위가 조금 미끄럽기는 하지만 이곳이라면 안심할 수 있을 거야.” 아카는 이렇게 말하며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어요. 기러기 떼와 모르텐은 곧 잠이 들었어요. 하지만 닐스는 잠이 오지 않아 기러기들 사이에 앉아 망을 보았어요. 잠시 후, 여우도 기러기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미끄러운 바위 위로 올라갈 자신이 없었어요. 바로 그때, 물고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강가로 올라오는 수달 한 마리가 눈에 띄었어요. 여우는 얼른 수달에게로 달려갔어요. “이봐, 넌 창피하지도 않니? 저기 바위 위를 보라고. 저렇게 살진 기러기 무리를 눈앞에 두고 겨우 물고기 따위나 잡아먹다니.” 여우가 비웃자 화가 난 수달은 물고기를 내던지고 거센 폭포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얼마 뒤 바위 위에 도착한 수달이 막 기러기 떼를 덮치려는 순간이었어요. “아악!” 수달은 갑자기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풍덩 빠져 버렸어요. 그 바람에 기러기 떼는 또다시 위기를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잠시 뒤 강기슭으로 올라온 수달은 한쪽 발을 핥으며 투덜거렸어요. “웬 꼬맹이가 내 다리를 찔렀어. 아이고, 아직도 따끔거리는 것 같아.” “또 그 녀석이로군!” 여우는 또다시 기러기 떼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는 어느 호텔 난간에 앉아 있는 기러기 떼를 발견했어요. “정말 끈질긴 놈이군.” 아카가 난간 아래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여우를 보고 중얼거렸어요. “담비와 수달을 꼬드겨 우리를 괴롭힌 것도 바로 너지? 이 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그 꼬맹이를 나에게 넘겨. 그럼 너희들을 쫓아다니지 않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닐스는 우리의 친구야. 너 같은 놈에게 절대로 보낼 수 없어!” 아카는 딱 잘라 거절했어요. ‘아! 아카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닐스는 큰 감동을 받았어요. 회색 기러기의 도움. 기러기들은 여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서 바위섬을 돌아다녀야 했어요. 얼마 뒤 닐스 일행은 카를스크루나섬에 이르렀어요. 이 섬은 전체가 하나의 도시였어요. 해안에는 크고 작은 군함들이 떠 있었어요. ‘야, 정말 굉장한걸.’ 닐스는 언젠가 해군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카를스크루나 거리와 배 만드는 공장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어요. 기러기 떼는 여우에게 습격을 당하지 않을 만한 교회의 평평한 탑 위에 내려앉았어요. 그러고는 편안히 잠이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 기러기 떼는 먹이를 찾아 조그만 바위섬으로 갔어요. 그곳에는 회색 기러기 몇 마리가 모여 있었어요. “너희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니?” 아카는 회색 기러기들에게 여우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심술쟁이 여우 녀석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그런 놈이라면 아마 라플란드까지 쫓아갈 거야. 내 생각에는 욀란드섬으로 가서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마 여우 녀석이 그곳까지는 쫓아가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욀란드섬은 먹이도 풍부한 곳이니까 숨어서 지내기에 좋을 거야." 회색 기러기 한 마리가 말해 주었어요. “고마워!” 닐스 일행은 회색 기러기의 말에 따라 욀란드섬으로 날아갔어요. 한참을 가다 보니 많은 새가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었어요. ‘이렇게 계속해서 날아간다면 지구의 끝이 나올까?’ 닐스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호기심으로 가득 찼어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탕!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어요. “사냥꾼이 나타났다! 있는 힘껏 높이 날아라!” 여기저기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렸어요. 그러나 철새 몇 마리가 총에 맞아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 닐스 일행은 모두 무사했어요. “자, 나쁜 일은 빨리 잊어버리고 모두 힘을 내자!” 아카의 말에 기러기 떼는 더욱 열심히 날아갔어요. 그런데 얼마 뒤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짙게 펼쳐져 있는 안개 때문이었어요. 닐스 일행은 안개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어요.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자리만 돌고 있잖아.” 아카가 소리쳤어요. 그때, 갑자기 ‘펑!’ 하고 대포 소리가 들려왔어요. “맞아, 욀란드섬의 남쪽 끝은 늘 안개가 자욱해서 안개를 흩어지게 하려고 사람들이 대포를 쏜다고 했었지. 대포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자.” 닐스가 말했어요. 대포 소리 덕분에 닐스 일행은 방향을 찾을 수 있었어요. 사랑에 빠진 모르텐. 욀란드섬은 남쪽으로 길게 뻗은 넓은 섬이었어요. 남쪽 끝에는 백 년도 넘은 떡갈나무 숲과 긴 울타리가 있어서 동물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닐스 일행이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섬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어요. “조개를 잡아다가 구워 먹어야겠다.” 닐스는 작은 바구니 하나를 만들어 바닷가로 나갔어요. 그러고는 바구니 가득 조개를 주워 담았어요. 그때 다른 곳에서 먹이를 찾고 있던 아카와 기러기 몇 마리가 날아왔어요. “닐스, 너 혹시 모르텐 못 봤니?” 닐스는 깜짝 놀라 모르텐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떡갈나무 숲에도, 욀란드섬의 끝에도 모르텐은 보이지 않았어요. 닐스가 목장 앞을 지날 때였어요.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닐스 앞에 앉았어요. 바로 모르텐이었어요. “모르텐!” 닐스는 크게 소리치며 모르텐을 꼭 껴안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미안, 안개 때문에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그러니까 다시는 혼자 다니지 마, 알았지?” 다음 날도 닐스는 조개를 줍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어요. 그런데 기러기들이 날아오더니 모르텐이 또 없어졌다고 말했어요. 닐스는 농장이며 밭이랑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모르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닐스는 돌로 쌓인 울타리 위에 올라갔어요. 그때 돌 구르는 소리가 나면서 돌무더기 사이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어요. ‘아니, 모르텐이잖아!’ 모르텐은 풀뿌리를 입에 물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어요. 닐스는 모르텐의 뒤를 살금살금 쫓아가 보았어요. 모르텐은 돌무더기에 있는 암기러기에게 다가가더니 풀뿌리를 주었어요. 모르텐은 날개를 다쳐 돌무더기 틈에 쓰러져 있는 암기러기를 구해 주고 지금까지 돌봐 주고 있었던 거였어요. “모르텐, 정말 고마워.” “푹 쉬고 있어. 내일 다시 올게.” 모르텐이 돌아가자 닐스는 암기러기에게로 다가갔어요. 닐스를 본 암기러기는 깜짝 놀랐어요. “놀라지 마. 난 모르텐의 친구 닐스야.” “아, 닐스. 반가워, 난 둔핀이라고 해. 모르텐에게 너에 대한 이야기 많이 들었어. 용감하고 친절하다고 말이야.” 둔핀의 칭찬에 머쓱해진 닐스는 더 가까이 다가갔어요. “잠깐 상처를 살펴보아도 될까?” 닐스는 작은 손을 둔핀의 날개 밑으로 집어넣었어요. 닐스는 어긋난 뼈마디를 들어 힘껏 맞추었어요. “으악!” 닐스의 솜씨는 생각보다 대단했어요. 어긋났던 둔핀의 뼈마디가 감쪽같이 맞추어진 것이었어요. 그러나 너무나 아팠던 모양인지 둔핀은 그만 기절해 버렸어요. ‘난 도와주려고 한 건데. 죽어버렸나 봐.’ 닐스는 문득 겁이 나 엉겁결에 도망을 치고 말았어요. 다음 날, 기러기 떼는 새로운 곳으로 떠날 준비를 했어요. ‘내가 떠나 버리면 둔핀은 어떻게 하지? 아직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모르텐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찼어요. 그 모습을 보고 닐스는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자신이 둔핀을 죽였다고 모르텐에게 차마 말할 수는 없었어요. 아카가 출발 신호를 보내자 기러기 떼는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그러나 모르텐만은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 같았어요. 결국 모르텐은 일행에서 몰래 빠져나와 둔핀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하지만 둔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둔핀, 둔핀! 어디에 있어? 나야, 모르텐.” 모르텐이 소리쳤지만 둔핀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아, 아마도 여우가 죽은 둔핀을 발견하고 물어갔을 거야.’ 닐스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어요. 바로 그때 둔핀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나 여기 있어, 모르텐!” 둔핀은 다 나은 날개를 펼치며 모르텐 앞에 나타났어요. “닐스, 정말 고마워. 네가 뼈를 맞추어 준 덕분에 다친 곳이 모두 나았어.” “정말 다행이다!” 닐스와 모르텐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어요. 그리고 닐스를 태운 모르텐은 둔핀과 함께 아카 일행을 쫓아 하늘 높이 날아올랐어요. 양 떼를 구한 닐스. 섬의 북쪽으로 날아가던 아카 일행은 바다 위를 날다가 폭풍우를 만났어요. “우르릉 쾅쾅!” 무섭게 불어닥치는 폭풍우에 기러기들은 지쳐 갔어요. 폭풍우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몇몇 기러기들은 바다에 떨어져 죽기도 했어요. 절벽을 향해 날아가던 닐스 일행은 다행히 깊고 넓은 반달 모양의 굴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와, 이제 편히 쉴 수 있겠다!” 그런데 굴의 입구에는 벌써 양들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폭풍우에 밀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오늘 밤만 머물게 해 주겠니?” 아카가 정중히 부탁했어요. “그렇게 해, 날 따라와.” 우두머리로 보이는 양이 왕겨와 짚더미가 쌓인 곳으로 닐스 일행을 안내했어요. “여기 농사꾼들이 모아 준 식량이 있으니 맘껏 먹고 푹 쉬도록 해.” “정말 고마워.” 기러기들은 양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굶주린 배를 채웠어요. “너희가 여기에서 쉬는 것은 상관없지만, 여기도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어?” “흉악한 여우 세 마리 때문이야. 여우들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 몰래 나타나 습격을 해. 벌써 많은 양이 죽임을 당했어. 그러니 너희도 조심해야 해.” “오늘도 올까?” “물론, 그놈들은 우리를 모두 잡아먹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들이닥칠 거야.” 양이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그날 밤, 닐스는 아카의 지시에 따라 굴 입구에 있는 돌 뒤에 숨어서 망을 보았어요. 한밤중이 되었으나 여우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어요. 바로 그때, 여우 세 마리가 동굴 바로 밑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닐스는 가장 튼튼해 보이는 양에게로 가서 속삭였어요. “여우가 나타났어.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 커다란 뿔로 여우를 받아 버려.” 닐스는 양의 등에 올라타 여우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어요. “오늘은 제일 힘세 보이는 저 양을 잡자. 저놈만 해치워 버리면 다른 놈은 쉽게 잡아먹을 수 있을 거야.” 이윽고 여우 한 마리가 동굴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어요. “자, 지금이야!” 닐스가 소리치자 양은 힘껏 달려가 여우를 들이받았어요. 여우는 동굴 밑으로 굴러떨어져 버렸어요. 뒤따르던 여우들도 양의 공격을 받고 모두 달아나 버렸어요. 다음 날, 양은 어제 일에 대한 보답으로 닐스를 등에 태우고 섬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어요. 섬은 납작한 지붕을 덮은 집처럼 생겼는데, 섬 끝까지 가니 벼랑이 내려다보였어요. “여기는 지옥 굴이라고 해. 넓게 갈라진 바위틈에 빠지면 살아나올 수 없지.” 바닷가로 나가자 죽은 양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었어요. “여우들의 짓이군. 장난삼아 저렇게 많은 양을 죽이다니.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닐스는 작은 주먹을 꼭 쥐었어요. 그길로 닐스는 모르텐을 타고 여우를 찾아 나섰어요. “저기 여우들이 있다!” 잠시 뒤 어찌 된 일인지 모르텐이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여우 근처에서 걷고 있었어요. 여우들은 살금살금 모르텐을 향해 다가왔어요. 두 마리의 여우가 모르텐을 덮치려는 순간, 모르텐은 옆으로 살짝 피하였어요. 그러자 닐스가 여우들을 약 올렸어요. “이 못난 여우들아, 다리 다친 거위 하나도 못 잡으면서 창피하지도 않니?” 닐스의 놀림에 단단히 화가 난 여우들이 모르텐에게 달려들었어요. 모르텐은 어느새 쌩쌩해진 다리로 정신없이 도망갔어요. 닐스의 지시를 받아 다리 다친 흉내를 냈던 거였어요. 모르텐을 쫓아 지옥 굴까지 온 여우들은 미처 바위틈을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뎌 지옥 굴속으로 떨어져 버렸어요. “야호! 여우들이 모두 죽었다!” 여우들이 없어지자 기러기들은 답답한 동굴에서 나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그날 밤, 기러기들은 산꼭대기로 올라가 모처럼 편안히 잠을 청했어요. 닐스는 둥근 달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어요. 그때 닐스를 향해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왔어요. 달빛을 받은 우아한 자태는 너무도 멋졌어요. 자세히 보니 글림밍에후스성의 황새였어요. “안녕, 닐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고운 달빛을 보니까 네가 생각나서 함께 놀려고 날아왔지. 갈매기들에게 네가 여기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자, 내 등에 올라타렴. 내가 멋진 곳으로 데려다줄게.” 황새는 닐스를 태우고 하늘 높이 날아갔어요. “여기는 독일의 폰메른이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로구나.” 모래 언덕이 길게 펼쳐진 바닷가에 도착한 황새는 닐스를 내려 주었어요. “난 여기서 좀 쉬고 있을 테니 넌 바닷가를 구경하고 오렴.” 닐스는 모래 위를 거닐자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어요. 그때 녹이 슨 동전 한 닢이 눈에 띄었어요. “저렇게 더러운 동전을 어디에 쓴담.” 닐스는 무심코 동전을 발로 차 버렸어요.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다였던 곳에 문이 세 개나 있는 아름다운 성이 지어져 있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성을 향해 걸어갔어요. 성문 앞에 있는 보초병들은 주사위 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광장이 펼쳐졌어요. 건물들도 사람들도 한결같이 훌륭하고 아름다웠어요. 그때 낯선 장사꾼 한 명이 닐스에게 다가왔어요. “이 비단을 사지 않을래?” 장사꾼은 아름다운 비단을 펼쳐 보였어요. “하지만 저는 돈이 없는걸요?” 닐스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슬픈 표정으로 닐스를 쳐다보았어요. “아, 맞다!” 닐스는 문득 바닷가에서 본 녹슨 동전이 생각났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닐스는 얼른 성을 빠져나와 모래밭으로 왔어요. “여기 있다!” 동전을 주워 든 닐스는 성을 향해 다시 돌아섰어요. 그런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성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바다만이 일렁이고 있었어요. 닐스는 멍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았어요. 그때 황새가 다가왔어요. “닐스, 왜 그래?” “아, 방금 있었던 도시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도시라니?” 닐스는 자기가 본 것을 황새에게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라면 바타키라는 까마귀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옛날 이 모래톱에는 비네타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 사람들은 사치가 무척 심했대. 그래서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 그 도시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지. 그리고 백 년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는 거야. 만약 비네타의 장사꾼이 한 시간 안에 이 세상 사람에게 물건을 팔면 바다로 가라앉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랬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던 거였어.” 닐스는 울상을 지었어요. 닐스는 황새의 등에 올라타고 기러기 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그 뒤로 닐스는 말도 잘하지 않고 멍하니 바닷가만 바라보았어요. 비네타 사람들의 사연이 안타까워서였어요. 그때 폭풍우 속에서 헤어졌던 기러기 킥스가 나타났어요. 킥스는 폭풍에 날려서 고틀란드까지 갔다가 까마귀에게 닐스 일행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이곳으로 오게 된 거였어요. 닐스는 킥스에게 비네타 도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요. “닐스, 너무 슬퍼하지 마. 그 대신 내가 고틀란드로 데려다줄게. 그곳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킥스가 말했어요. 이렇게 해서 닐스 일행은 양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고틀란드로 날아갔어요. 봄이 찾아온 고틀란드는 스코네와 비슷한 풍경이었어요. 아름다운 새 소리와 아이들의 합창 소리, 언덕 위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들을 보니 닐스는 마음이 좀 밝아졌어요. 그날 저녁, 기러기 무리 속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한 닐스의 눈에 오래된 교회가 눈에 띄었어요. 저 교회도 옛날에는 금 제단과 십자가가 빛나고 있었겠지? 맞아, 바다 밑의 도시 비네타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어. 그 도시가 땅 위로 올라왔다면 저렇게 낡아 버렸을 거야. 그것보다는 바닷속에서 언제까지나 화려한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게 나아. 닐스는 비로소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어요. 까마귀 푸믈레 드루믈레. 닐스를 태운 기러기 떼는 고틀란드를 떠나 스몰란드에 이르렀어요. 봄이 한창 무르익은 섬에는 가지각색의 봄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어요. 남쪽과 서쪽 사이에는 메마른 땅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두막이 한 채 있었어요. 그곳에는 흰 깃털이 있는 까마귀 푸믈레 드루믈레가 둥지를 틀고 있었어요. 푸믈레 드루믈레는 바보 같아서 다른 까마귀들의 놀림거리가 되었고 다른 까마귀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어요. 원래 이곳 까마귀들의 우두머리는 흰 깃털이 있는 까마귀였어요. 잔인하고 난폭한 들까마귀 윈드러시가 나타나 우두머리 자리를 빼앗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윈드러시는 멍청하다는 이유로 푸믈레 드루믈레를 살려 주었지만, 흰 깃털이 있는 푸믈레 드루믈레를 미워했어요. 언젠가 푸믈레 드루믈레는 윈드러시 부부의 습격을 받고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 뒤로 푸믈레 드루믈레는 오두막에서 잘 나오지 않았어요. 어느 날, 까마귀들은 큰 구덩이의 자갈 틈에서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어요. 까마귀들은 항아리를 열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보았어요. 하지만 항아리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 마침 지나가던 여우가 웅성거리는 까마귀들을 보았어요. 스코네에서 쫓겨난 못된 여우였어요. “이봐, 무슨 일이야?” 까마귀들 곁으로 다가온 여우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항아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어요. 그러자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은돈이다, 은돈이 들어 있어.” “뭔데?” “기러기 떼와 같이 다니는 작은 꼬마가 있거든. 그 애라면 항아리 뚜껑을 열 수 있을 거야. 꼬마를 데리고 와서 항아리 뚜껑을 열게 한 다음, 그 꼬마를 내게 넘긴다는 약속을 해 줘. 그러면 그 꼬마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게.” “좋아.” 단단히 약속을 받은 여우는 닐스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어요. 윈드러시가 이끄는 까마귀들은 곧 닐스를 찾아 나섰어요. 한편, 닐스는 모르텐과 함께 나무가 우거진 섬에 내려 이리저리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어요 닐스가 모르텐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멀어지자, 윈드러시는 재빨리 내려가 닐스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날아올랐어요. “뭐야, 날 내려 줘!” 닐스는 있는 힘껏 바둥거렸어요. “조용히 해! 자꾸 시끄럽게 굴면 여기서 바위 위로 던져 버릴 테다!” 윈드러시가 소리쳤어요. 까마귀들은 번갈아 가며 닐스를 잡고 날았어요. 그중에는 착한 푸믈레 드루믈레도 있었어요. 드디어 까마귀들은 항아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어요. 마지막으로 닐스를 태우고 가던 푸믈레 드루믈레는 땅에 내리기 전에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어요. “아래로 내려가면 까마귀들이 네게 무슨 일을 시킬 거야. 넌 절대로 그 일을 해서는 안 돼, 알겠니?” 잠시 후, 땅으로 내려온 윈드러시가 닐스에게 명령했어요. “꼬마 녀석아, 어서 이 항아리 뚜껑을 열어라.” “오늘은 너무 피곤한걸, 내일 열게.” 닐스는 푸믈레 드루믈레가 가르쳐 준 대로 꾀를 부렸어요. “잔소리 말고 빨리 열지 못해!” 윈드러시가 무섭게 재촉하며 닐스에게 달려들었어요. 그러자 닐스는 호주머니 속에 있는 칼을 꺼내 윈드러시를 향해 휘둘렀어요. “까악!” 윈드러시는 닐스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어요. 까마귀들은 모두 닐스에게 달려들었어요. 닐스는 너무나 무서웠어요. 그런데 푸믈레 드루믈레가 날개로 감싸며 닐스를 보호해 주었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그래, 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 닐스는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어요. 항아리 속에는 은돈이 가득 들어 있었어요. “자, 이거나 받아라!” 닐스는 은돈을 집어 마구 뿌리기 시작했어요. 은돈을 본 까마귀들은 정신없이 줍기에 바빴어요. 그러고는 주운 은돈을 감추기 위해 허둥지둥 자기 둥지로 날아가 버렸어요. 텅 빈 항아리와 닐스, 그리고 푸믈레 드루믈레만 남게 되었어요. “잘했어, 꼬마야. 우선 우리 집으로 가서 쉬도록 하자. 내일 너의 기러기 일행을 찾아 줄게.” 푸믈레 드루믈레는 닐스를 오두막으로 데리고 가서 배불리 먹이고 잠을 재워 주었어요. 다음 날, 닐스는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젖혔어요. 그러자 푸믈레 드루믈레가 어디를 갔다 오는지 깨진 유리창 구멍으로 날아들었어요. “새 대장을 뽑았는데 내가 되었어.” 푸믈레 드루믈레는 지금껏 일부러 바보처럼 행동하여 윈드러시를 안심시켜 대장을 뺏을 기회를 노렸던 거였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여우가 나타나 푸믈레 드루믈레를 죽이고 말았어요. 닐스는 재빨리 달아났어요. 그리고 다행히 모르텐을 만나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물오리 야루. 베테른 호수 근처의 동쪽 평야에는 물새들이 많이 모여 사는 타케른 호수가 있었어요. 이 호수에는 야루라는 물오리가 살았어요. 어느 날, 야루는 사냥꾼의 총에 맞아 농가 근처에 떨어지게 되었어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농사꾼의 아내가 야루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러고는 먹이와 새장을 만들어 주었어요. 농사꾼 아내의 정성스러운 간호 덕분에 야루는 며칠 뒤 건강을 회복하였어요. 그동안 야루는 농사꾼의 외아들인 페르 울라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농가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야루는 세사르라는 사냥개와도 친구가 되었어요. 어느 날, 야루가 난롯가에 앉아 있는데 고양이 클로리나가 다가왔어요. “야루, 너 그 소식 들었니? 내년에 호수를 메워 밭을 만든다는 거야. 그럼 네 친구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거니?” 야루는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랐어요. ‘거짓말이야. 저렇게 상냥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야루는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다음 날, 야루는 하인의 손에 이끌려 호수의 작은 섬으로 갔어요. 하인은 야루를 줄에 묶은 다음 호수 위에 풀어 놓고 갈대숲에 몸을 숨겼어요. 물새들이 야루 근처로 몰려들자 하인은 총을 쏘아 물새들을 잡는 게 아니겠어요? 야루는 너무나도 기가 막혔어요. “나를 미끼로 내 친구들을 사냥하다니.” 그날 밤, 페르 울라가 야루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지만 야루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요. 그 뒤에도 야루는 하인의 손에 이끌려 미끼가 되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야루는 친구들에게 위험을 알려 주었어요. 어느 날, 야루는 호수 근처에서 빙빙 돌고 있는 기러기 떼를 보았어요. 그들은 바로 닐스 일행이었어요. “어서 달아나. 여기 사냥꾼이 있어.” 하지만 닐스 일행은 계속해서 그 주위를 맴돌았어요. 그러자 사냥꾼은 탕탕 총을 쏘아 댔어요. 그때 작은 광주리 하나가 야루 곁으로 떠내려왔어요. “야루, 나는 닐스라고 해. 내가 너를 구해 줄게.” 닐스 일행은 호수의 새들로부터 야루의 소식을 듣고 구해 주러 온 거였어요. 닐스는 야루에게 묶여 있던 줄을 끊어 주었어요. 그러고는 재빨리 광주리에 올라타 야루와 함께 도망쳤어요. 야루가 없어지자 페르 울라는 야루를 찾기 위해 부모님 몰래 호숫가로 나갔어요. “야루, 야루! 어디 있니?” 페르 울라는 야루를 찾아다니다 나루터에 묶여 있는 낡은 배를 발견했어요. ‘이걸 타고 가면 야루를 찾을 수 있겠지?’ 페르 울라는 배를 타고 호수 쪽으로 나아갔어요. 그런데 배가 호수 한가운데쯤 왔을 때, 물이 새기 시작했어요. “야루, 야루!”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페르 울라는 계속해서 야루만 불러 댔어요. ‘아니, 이 목소리는?’ 이 소리를 들은 야루는 쏜살같이 페르 울라에게 날아갔어요. “야루!” 페루 울라는 야루를 꼭 껴안고 무척 기뻐했어요. 잠시 뒤 야루는 물이 새고 있는 배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어요. 야루는 얼른 닐스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닐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섬에 도착한 페르 울라는 닐스 일행과 친구가 되었어요. 페르 울라가 닐스 일행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동안, 야루는 농사꾼의 집으로 가서 세사르를 불러왔어요. “세사르, 사람들은 정말 호수를 메워 밭으로 만들 계획이야?” 새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어요. “아마 내일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거야.” 한편, 농사꾼의 집에서는 페르 울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야단법석이 났어요. “페르 울라, 페르 울라!” 농사꾼 부부는 애타게 페르 울라를 부르며 찾아 헤맸어요. 어느덧 해가 지자, 농사꾼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때 호숫가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물끄러미 호숫가를 바라보던 농사꾼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 새들의 보금자리인 호수를 메워서 밭을 만든다면 아기 새들과 어미 새들은 뿔뿔이 흩어질지도 몰라. 그래, 페르 울라가 없어진 것도 그 계획을 막으시려는 하느님의 뜻일지도 몰라.’ 농사꾼 아내는 자기 생각을 농사꾼에게 말했어요. “당신 생각이 맞는지도 모르겠군. 내일 사람들에게 그 계획을 취소하자고 이야기하겠소.” ‘이제 페르 울라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도 되겠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세사르는 농사꾼 아내의 옷자락을 잡아끌었어요. “세사르, 너는 페르 울라가 어디 있는지 아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페르 울라의 부모님이 세사르를 따라가 보니 페르 울라가 닐스와 거위, 기러기 떼들에 에워싸여 있었어요. “페르 울라!” “엄마!” 페르 울라는 부모님 품으로 달려가 안겼어요. 한편, 세사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호수의 물새들은 무척 기뻐했어요. 독수리 고르고. 타케른 호수를 떠난 닐스 일행은 멜라렌 호수 위를 날고 있었어요. 잠시 뒤 햇빛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가 나타났어요. 그 도시는 마치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어요. “와,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일찍이 본 적이 없어.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물 위에 뜬 도시야. 스톡홀름이라고 부르지.” 둔핀이 말해 주었어요. 스웨덴의 수도이기도 한 스톡홀름에는 박물관 겸 동물원인 스칸센 공원이 있었어요. 어느 날, 이 공원의 원장 클레멘 씨는 바닷가로 내려갔다가 한 사냥꾼을 만났어요. 사냥꾼은 사로잡은 새나 짐승을 이 공원에 팔러 오곤 했어요. “오늘은 뭘 잡았소?” 클레멘 씨가 물었어요. “아주 신기한 걸 잡았지요.” 사냥꾼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새장을 불쑥 내밀었어요. “아니, 이건 아주 작은 사람이 아니오?” 그것은 바로 닐스였어요. “이걸 어떻게 잡았소?” “호수에 나갔다가 기러기 떼에서 떨어지는 것을 잡았지요. 아마 기러기 등에 탔다가 미끄러진 모양입니다.” “이것을 나에게 파시오.” 사냥꾼에게서 닐스를 산 클레멘 씨는 닐스를 주머니에 넣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닐스를 놓아주며 말했어요. “어서 가거라. 다음부터는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행히 위기는 넘겼지만 닐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요. 닐스는 이리저리 공원을 돌아다녔지만, 아카 일행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렇게 공원을 헤맨 지도 한 달이 지났어요. “모르텐이랑 아카 일행은 모두 라플란드로 가 버렸겠지? 아, 이제 난 어떻게 하지?” 한숨을 쉬며 길을 걷던 닐스는 커다란 새장 하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그 안에는 독수리 고르고가 들어 있었던 것이었어요. 고르고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잃고, 아카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어요. 그 덕에 닐스와도 아는 사이였어요. 닐스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어요. “고르고, 어떻게 된 일이야?” “아, 닐스!” 두 사람은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어요. 고르고는 사냥꾼에게 잡혀 동물원에 팔려온 것이었어요. 그날 밤, 닐스는 철사를 자르는 톱을 구해 가지고 와서 새장의 철망을 끊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새장을 벗어난 고르고는 닐스를 등에 태웠어요. 그리고 아카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라플란드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어요. 숨겨진 비밀. 독수리 고르고는 북쪽을 향해 오랫동안 날아갔어요. 먼 길이었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날았어요. ‘역시 하늘의 왕답군.’ 다행히 닐스는 모르텐과 기러기 떼를 만났어요. 아카는 닐스와 고르고를 반갑게 맞아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라플란드에 도착했어요. 라플란드는 스웨덴 북쪽의 변두리 지방으로,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는 곳이었어요. 여름 한 철만 봄 같은 날씨로, 24시간 내내 해가 지지 않았어요. 이 지방의 여름철은 철새들에게 먹이가 풍부하고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어요. 따라서 새끼를 기르기에 알맞은 땅이었어요. 그래서 기러기들은 멀고 먼 여행을 하면서까지 이곳으로 오는 거였어요. 아카 일행도 이곳에서 많은 알을 품어 새끼를 깠어요. 닐스는 라플란드에서 즐겁게 지냈어요. 어느덧 라플란드에서의 꿈 같은 여름이 금방 지나가 버리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이제 아카 일행은 서둘러 남쪽으로 떠나야 했어요. 어린 새들은 처음에는 힘겨워했지만, 차차 익숙해지는 것 같았어요. 라플란드를 벗어나 엠틀란드로 접어들자 기러기 떼는 언덕 위에 내려앉아 쉬어 가기로 했어요. 닐스는 적당한 잠자리를 찾다가 높은 탑을 발견했어요. “모르텐, 나를 저 탑 위에 올려다 줄래?” 닐스는 탑 위에서 편안하게 잠을 청했어요. 다음 날, 닐스가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탑의 층계를 올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이크!’ 닐스는 깜짝 놀라 구석으로 숨었어요. 잠시 뒤 기러기 떼들이 날아와서 닐스를 불러 댔지만, 닐스는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얼마 뒤 닐스가 구석에서 나왔을 때 기러기들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난 뒤였어요. “이제 어떻게 하지?” 그때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닐스 앞에 나타났어요. “네가 닐스로구나. 난 아카의 친구 바타키라고 해. 아카 일행은 사냥꾼들을 피해서 멀리 가 있어. 가자, 내가 그곳으로 데려다줄게.” 닐스가 등에 올라타자 바타키는 남쪽으로 날아갔어요. “닐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고 있니?” “모르텐을 집까지 데리고 가면 된대.” “하지만 모르텐은 집에 가면 너희 엄마의 손에 죽게 될 거야. 그래야만 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요정이 말했어.” 닐스는 깜짝 놀랐어요. 기러기 떼를 만난 닐스는 다시 남쪽으로 날아갔어요. 하지만 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닐스의 마음속은 슬픔과 불안함으로 가득 찼어요. ‘모르텐이 죽어야만 나는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일까? 그동안 온갖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낸 모르텐을 죽여야만 하다니.’ 닐스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어요. ‘아니야, 모르텐을 죽이면서까지 원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어. 차라리 작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나아.’ 닐스는 이렇게 결심했어요. 어느 날, 바다 근처에서 아카가 닐스에게 말했어요. “닐스, 이제 5일 정도만 가면 너희 집에 도착할 거야.” “아니, 난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모르텐이 죽어야 하는걸.” 닐스는 눈물을 흘렸어요 “하지만 닐스, 네가 집을 나온 이후 너희 부모님은 아주 힘든 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해. 네가 부모님을 도와 드려야지.” 아카가 말했어요. 며칠 뒤 밝은 가을밤, 아카가 잠든 닐스를 흔들어 깨웠어요. “무슨 일이야?” “널 좋은 곳으로 데려가려고. 자, 내 등에 타.” 닐스를 태운 아카는 달빛에 반짝이는 바다 위를 날아 작은 섬의 모래 위에 닐스를 내려 주었어요. “그곳을 파 보렴.” 아카가 가리킨 곳을 파 보자 금화가 손에 가득 잡혔어요. “얼마 전에 우리가 발견한 거야.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준 대가로 너에게 주고 싶어.” “하지만 신세는 내가 더 많이 졌는걸.” 닐스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아카는 다시 닐스를 태우고 스코네 지방의 평야로 들어섰어요. 닐스는 바로 앞에 부모님이 계시는 집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움이 울컥 솟아올랐어요. 드디어 닐스의 집 앞에 도착했어요. “닐스, 집에 들어갔다가 와.” “알았어.” 닐스는 쫓아오려는 모르텐을 겨우 떼어 놓고 집으로 향했어요. 외양간에 들어가 보니 소가 한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어머, 닐스 아니니?” 암소가 먼저 아는 체를 했어요. “그래, 우리 엄마 아빠도 잘 계시지?” “네가 집을 나간 뒤에는 일이 잘 안되어서 많은 고생을 하고 계셔.” 암소의 말을 듣고 닐스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때 마구간에서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말 한 마리가 몸이 불편한지 기우뚱하게 서 있었어요. “왜 그러니?” “발굽에 못이 박혔어.” 닐스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릴까 궁리를 하다가 말발굽에 박힌 못을 빼라고 새겨 넣었어요. 그때 아빠가 마구간으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말발굽에서 못을 빼 주세요.’ 말발굽에 새겨진 글을 보고 아빠는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정말로 말발굽에 못이 박혀 있었네.” 아빠가 말발굽 사이에 깊이 박혀 있는 못을 찾아냈을 때, 엄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어요. “여보, 도망갔던 흰 거위가 돌아왔어요. 기러기도 데리고서요.” 모르텐이 닐스를 따라왔다가 붙잡힌 모양이었어요. “뭐? 거위가 돌아왔다고? 닐스가 거위를 데려간 게 아니었군.” 아빠는 놀라며 마구간을 나왔어요. “며칠 있으면 성 마르티노 축일이니까 저 거위를 잡아요.” 엄마가 말했어요. 아빠는 모르텐과 둔핀을 붙잡아 부엌으로 갔어요. “닐스, 나 좀 살려 줘!” 모르텐이 소리쳤어요. 닐스는 자기가 작아졌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부엌으로 뛰어들며 소리쳤어요. “안 돼요, 엄마! 제발 모르텐을 죽이지 마세요.” “아니, 넌 닐스가 아니냐?”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오! 세상에! 우리 닐스가 무사히 돌아오다니.” 엄마는 모르텐을 놓아주고 닐스를 품에 꼭 안았어요. 그제야 닐스는 자기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모르텐을 죽여야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던 거였어요. 닐스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부모님께 들려주었어요. “어이쿠, 하마터면 우리 닐스의 소중한 친구를 죽일 뻔했구나.” 아빠는 당장 모르텐을 풀어 주었어요. 다음 날 아침, 닐스는 아카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스뮈에곶으로 갔어요. 이윽고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날갯짓을 늦추며 닐스 쪽으로 날아왔어요. 닐스가 소리치자, 기러기들이 제각각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제 닐스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아카, 안녕! 모두들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닐스는 푸른 하늘 위로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오 헨리 단편집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워싱턴 광장 서쪽에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리니치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곳을 처음 가는 사람은 길을 잃기 쉬운 곳이었다. 집들은 낡고 허름했지만, 집세가 싸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수와 존시는 나지막한 3층 벽돌집 꼭대기에 함께 쓰는 화실을 차렸다. 수는 메인주, 존시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왔다. 두 사람은 8번가에 있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사이였다. 이들은 예술과 옷, 샐러드 등 서로 좋아하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친해졌다. 그것은 5월의 일이었다. 11월이 되자 동부 지역은 뒤숭숭해졌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휘저으며 폐렴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을 괴롭힌 폐렴은 마침내 이 그리니치 마을까지 덮쳤다. 따뜻한 캘리포니아주에서 자란 존시는 폐렴을 이겨 내지 못했다. 존시는 침대에 누운 채, 작은 창을 통해 건너편 벽돌집의 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의사가 수를 복도로 불러냈다. “저 아가씨가 살아날 가능성은. 글쎄, 열에 하나라고나 할까?”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것도 저 아가씨의 살겠다는 의지에 달려 있지. 하지만 당신 친구는 이미 자기가 낫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오. 혹시 저 아가씨가 간절히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없소?” “언젠가 나폴리의 바다를 그리고 싶다고 했어요.” “그림을 그린다고? 음,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그건 안 될 일이오. 그것 말고 희망이 될 만한 것이 없소?” “글쎄요, 그것 말고는.” “아무튼 나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치료하겠소. 하지만 환자의 마음이 약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오.”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수는 화실로 들어가 존시에게 들리지 않게 한참을 울었다. 그러고는 화판을 들고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존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존시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수는 존시가 자는 줄 알고 휘파람을 그쳤다. 그러고는 화판을 펴고 잡지 소설에 실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가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침대 쪽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수는 얼른 존시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수는 걱정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존시는 무엇을 세고 있는 걸까?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은 텅 빈 마당과 조금 떨어져 있는 집의 담뿐이었다. 그 담에는 앙상한 담쟁이덩굴의 잎이 몇 남지 않은 채로 달라붙어 있었다. “대체 뭘 가지고 그래?” 수가 물었다. “여섯, 점점 더 빨리 떨어져 가네. 며칠 전에는 거의 백 개나 있어서 세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주 쉬워. 또 하나 떨어졌네. 이제 남아 있는 건 다섯 개뿐이야.” 거의 중얼거리듯이 존시가 말했다. “뭐가 다섯 개 남아 있다는 거야?” 수가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담쟁이덩굴의 잎 말이야. 저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나도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나는 벌써 사흘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의사도 그렇게 말했지?” 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저 마른 잎과 네 병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오늘 아침에 의사가 말했어. 네 병이 나을 가능성은 열에 아홉은 된다고 했어. 그러니, 수프나 좀 먹어 봐. 빨리 털고 일어나 예전처럼 나랑 함께 워싱턴 광장을 돌아다니자.”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 이제 네 개 남았네. 오늘 밤 안에 잎이 다 떨어질 것 같아. 그땐 나도 저세상으로 가겠지.” 존시가 수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이봐, 존시! 내가 일을 끝낼 때까지 창밖을 내다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내일까지는 이 일을 끝내야 하는데 네가 자꾸 그러면 그림이 안 그려지잖아.” 수가 존시 쪽으로 몸을 굽히고 말했다. “화실에 가서 그리면 되잖아.” 존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네 곁에 있고 싶어.” 수가 말했다. “알았어. 다 그리거든 말해 줘.” 존시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는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이제 모든 것에서 떠나 사라지고 싶어. 마치 저 가엾은 잎처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좀 자도록 해 봐. 난 베어먼 씨에게 가서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올 테니 잠 좀 자고 있어.” 수가 말했다. 베어먼은 같은 건물의 아래층에 사는 화가였다. 예순 살이 넘은 실패한 화가였다. 40년 동안이나 그림을 그려 왔지만, 전시회를 열거나 화단의 인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걸작을 그리겠다고 늘 큰소리를 쳐 댔다. 베어먼은 가끔 가난한 화가들의 모델 노릇을 하면서 약간의 돈을 얻어 쓰곤 했다. 그럴 때면 늘 베어먼은 술을 마구 마시면서 앞으로 그릴 그림에 대해 떠들어 댔다. 베어먼은 위층에 사는 두 젊은 화가인 수와 존시를 좋아했고, 어른으로서 그녀들을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가 베어먼의 방에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베어먼은 술 냄새를 풍기며 멍하니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수는 베어먼에게 존시의 병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며, 존시에게 살 의지가 전혀 없다며 하소연했다. “존시는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자신도 저세상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를 어쩌면 좋아요?” 그러자 베어먼은 눈물을 글썽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담쟁이덩굴의 잎이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존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아, 불쌍한 존시!”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약해졌나 봐요. 존시의 생각을 바꾸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럼 안 되지. 내가 쉬운 일을 원했다면 예술을 하지 않았을 거야. 어렵다고 포기할 수 없어. 존시가 나을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베어먼이 수를 위로했다. “그럼, 내가 모델이 되어 주지. 나도 곧 걸작을 그릴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이곳을 벗어나 아주 멋진 곳에서 살 수 있을 거야.” 베어먼은 여느 때처럼 밝게 말했다.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존시는 잠들어 있었다. 수는 커튼을 창턱까지 내리고 베어먼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곧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존시와 베어먼은 두려운 듯 창밖으로 보이는 담쟁이덩굴을 쳐다보았다. 밖에는 눈 섞인 차가운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베어먼은 남빛 셔츠를 입고 광부의 모습으로 자세를 잡았다. 다음 날 아침 수가 눈을 떠 보니, 존시가 생기 없는 눈으로 초록빛 커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 커튼 좀 젖혀 줘. 밖을 내다보고 싶어.” 존시가 속삭이듯 말했다. 수는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커튼을 젖혔다. ‘아, 잎이 다 떨어져 있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담쟁이덩굴에 잎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밤새 내린 세찬 비와 사나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잎 하나가 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아직 한 잎이 남았네. 밤사이에 틀림없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바람 소리가 요란했거든. 하지만 아마 오늘은 떨어질 거야. 그러면 나도 따라가야지.” 존시가 힘없이 말했다. “존시, 너 혼자 떠나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니?” 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러나 존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밤이 되자 다시 세찬 비바람이 창문을 때렸다. 날이 새자마자 존시는 커튼을 젖혀 달라고 졸라 댔다. 수는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젖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존시는 멍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수에게 말했다. 수는 얼른 손거울을 존시에게 가져다주었다. 잠시 뒤 존시는 수프를 맛있게 다 먹었다. 존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나빴어. 그렇게 쉽게 죽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저 마지막 잎이 내게 가르쳐 줬어. 끝인 듯해도 더 살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수, 봄이 되면 꼭 나폴리에 가자. 거기서 나폴리의 파란 바다를 그릴 거야.” 오후에 의사가 왔다. 그는 존시의 상태를 보고 매우 놀란 듯했다. 복도에 나와 의사는 수의 떨리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저 아가씨는 정성스럽게 돌보기만 하면 될 거요. 난 아래층의 환자를 보러 가야겠소. 베어먼이라는 화가인데 심한 폐렴에 걸렸더군. 나이가 많아서 살아날 가망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오늘 입원시키기로 했다오.” 다음 날, 의사가 존시를 진료한 다음 수에게 말했다. “이제 위험한 고비는 지났소. 당신의 정성 덕분에 병을 이긴 것 같소.” 그날 오후, 존시가 평화로운 표정으로 침대 위에 앉아서 녹색 털목도리를 뜨고 있을 때였다. 수가 존시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존시, 놀라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베어먼 씨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대. 그저께 아침 문지기가 끙끙 앓는 그를 발견했대. 그때 베어먼 씨의 옷과 구두 모두 흠뻑 젖어 있었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대. 무섭게 비바람이 치는 밤에 어딜 갔다 온 모양이야. 그의 곁에는 붓 두세 자루와 푸른색과 누런색 물감이 묻어 있는 팔레트가 놓여 있었대.” 수는 창문가로 가서 아직도 매달려 있는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을 바라보았다. 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존시에게 말했다. “존시, 저 마지막 잎새 말이야. 그렇게 세찬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니? 아마도 저 잎새는 베어먼 씨의 걸작이었나 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밤, 베어먼 씨가 그려 놓은 게 바로 저 잎새였던 거야.” 넋이 나간 듯 마지막 잎을 바라보던 존시의 분홍빛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선물 상자를 든 사람들로 넘쳐났다. 델라는 침대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이윽고 흐느낌이 차츰 가라앉아 훌쩍임으로 변했다. 델라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가구까지 포함해서 집세가 일주일에 8달러였다. 구석구석 몹시 낡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아래층 현관에는 언제나 텅 빈 우편함과 울린 적 없는 초인종이 달려 있었다. 거기엔 “제임스 딜링햄 영”이란 문패가 붙어 있었다. 문패에는 먼지가 쌓여 가고 있었다. 이 문패의 주인 딜링햄이 일주일에 30달러를 벌던 시절에는 문패도 반짝반짝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20달러로 수입이 줄어든 지금은 문패에 새겨진 글씨조차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나 문패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부인 델라였다. 그녀는 언제나 제임스 딜링햄 영이 집에 돌아오면 “짐!” 하고 애칭을 부르며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럴 때면 이 초라한 집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델라는 눈물을 닦고 분첩으로 뺨을 두드렸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을씨년스러운 뒤뜰의 담장 위를 걸어가는 잿빛 고양이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짐에게 줄 선물을 살 돈이 겨우 1달러 87센트밖에 없었다. 몇 달 동안 애써 모은 돈이 겨우 그것뿐이었다. 일주일에 20달러 가지고 살다 보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갈 돈은 언제나 델라가 생각한 것보다 많았다. 델라는 몇 시간 동안이나 짐에게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생각했다. 그녀가 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짐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델라는 창문과 창문 사이에 있는 좁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그녀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델라는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 길게 늘어뜨려 보았다. 델라의 풍성한 긴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불빛 같았다. 제임스 딜링햄 영 부부에게는 소중하게 여기는 두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다. 하나는 짐의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 내려온 금시계였고, 다른 하나는 델라의 머리카락이었다. 델라의 머리카락은 시바의 여왕도 부러워할 만큼 풍성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또 짐의 금시계는 솔로몬 왕의 수많은 보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가치 있었다. 델라의 파리한 얼굴에서 눈물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갑자기 델라가 머리카락을 재빨리 땋아 올렸다. 그러고는 낡은 갈색 재킷에 갈색 모자를 쓰고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갔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델라가 걸음을 멈춘 곳은 “마담 소프로니 가발의 모든 것” 이라는 간판이 걸린 가게 앞이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간 델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게의 주인은 큰 몸집에 쌀쌀맞은 인상을 한 마담이었다. ‘소프로니’라는 귀여운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20달러 드리지요.” 마담은 능숙한 솜씨로 머리채를 만지면서 말했다. 잠시 뒤 델라는 20달러를 손에 쥐고 짐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가게들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델라는 짐에게 딱 맞는 선물을 찾아냈다. 그야말로 짐만을 위해서 만든 물건 같았다. ‘이 시곗줄을 시계에 달면 짐은 어떤 모임에 가서라도 시계를 자랑스럽게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델라는 가슴이 뿌듯했다. 짐의 시계는 더없이 훌륭한 것이었지만, 낡은 가죽끈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짐은 시계를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곤 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델라는 짐이 이 시곗줄을 보며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델라는 모자를 벗고 고데기로 머리를 매만졌다. 잠시 뒤, 델라의 머리는 개구쟁이 남자아이 같은 곱슬머리로 변했다. 델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하느님, 짐이 저를 여전히 예쁘다고 여기게 해 주세요.” 델라는 조그만 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짐이 들어왔다. 그는 겨우 스물두 살에 한 가정을 꾸려 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젊은이였다. 짐은 외투도 없이 추위에 떨며 그 자리에 서서 델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짐의 얼굴에는 델라가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노도 놀라움도 실망도 공포도 아니었으며, 또 델라가 짐작하고 있던 그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델라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내일은 크리스마스잖아요. 좀 더 밝게 웃어 보세요!” 델라는 더욱 기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짐, 내가 뭘 준비했는지 아세요? 당신에게 꼭 어울리는 선물을 준비했어요. 여보, 어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해 줘요.” 델라는 쥐고 있던 시곗줄을 짐에게 내보였다. 짐은 놀란 얼굴로 멍하니 시곗줄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무슨 돈으로 이것을 샀소?” “다 방법이 있다니까요.” 델라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짐은 델라에게 다가와 스카프를 벗겼다. 델라가 손으로 머리를 감쌌지만 이미 늦었다. “세상에! 머리카락을 잘랐단 말이오?” 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하죠?” “정말 머리카락을 잘랐단 말이오?” 짐은 거의 얼빠진 표정으로 또다시 물었다. 갑자기 짐은 델라를 와락 껴안았다. “델라, 오해하지 말아요.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해서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변하지는 않소. 하지만 이걸 보면 내가 왜 당황했는지 이해할 거요.” 짐은 외투 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어 델라에게 건넸다. 델라는 재빨리 포장지를 풀었다. 델라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머리핀이었다. 델라가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보석이 박힌 머리핀이었다. 델라의 긴 머리카락에 꽂으면 무척 잘 어울릴 만한 것이었지만, 너무 비싸서 살 엄두도 못 내고 안타깝게 구경만 하던 바로 그 머리핀이었다. 그토록 갖고 싶던 머리핀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제 꽂을 머리카락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델라는 머리핀을 가슴에 품었다. 델라는 눈물 어린 눈으로 짐을 쳐다보며 미소를 띠고 말했다. “짐, 내 머리카락은 무척 빨리 자라니까 곧 머리핀을 꽂을 수 있을 거예요.” 델라는 갑자기 생각난 듯 소리쳤다. “참! 내 정신 좀 봐!” 델라는 시곗줄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시계에 이걸 달아 보세요. 이젠 하루에 수백 번도 더 시계를 꺼내 볼 수 있을 거예요. 자, 시계를 이리 주세요.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고 싶어요.” 짐은 델라의 말대로 하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팔베개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델라, 크리스마스 선물은 우선 간직해 두기로 해요. 지금 사용하기엔 너무 소중하니까. 소피는 매디슨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몸을 웅크린 채 불안하게 움직였다. 기러기가 소리 높이 울어 대며 밤하늘을 날아가고, 소피가 웅크린 몸을 불안하게 움직이면 겨울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마른 잎 하나가 소피의 무릎 위로 뚝 떨어졌다. 그것은 서리가 보낸 카드였다. 친절한 서리는 해마다 매디슨 광장의 단골들에게 미리 이런 인사를 보냈다. 이 카드를 받으면 사람들은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했다. 소피도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잠을 자던 벤치에서 웅크린 채 불안하게 몸을 움직인 것이었다. 소피가 겨울을 나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은 별로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중해를 여행하고 싶다거나, 따뜻한 남쪽 하늘 아래서 지내고 싶다거나, 나폴리 바다에 배를 띄우고 놀고 싶다거나 하는 계획은 아니었다. 다만 섬에 있는 교도소에서 석 달 정도 지내는 것이 소피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곳에 가면 겨울바람이나 경관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또 먹을 것과 잠자리, 게다가 마음 맞는 친구까지 곁에 있으니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지난 몇 년간 소피는 겨울마다 섬에서 지냈다. 겨울이 되면 부유한 뉴욕 사람들이 팜비치나 리비에라로 가는 표를 끊는 것처럼 소피는 매년 섬으로 가기 위해 간단한 조치를 해 왔다. 이제 그 조치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지난밤에 신문 석 장을 깔고 신문 몇 장을 목까지 덮고 잤지만 몰아치는 추위를 피할 수가 없었다. 광장의 분수대 옆 벤치는 여름에는 좋은 잠자리였지만, 겨울에는 무척 추운 곳이었다. 뉴욕시나 자선 단체에서 하는 부랑자를 위한 자선 시설은 제법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잠자리와 음식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소피는 그런 것이 달갑지 않았다. 자선 단체에서 베푸는 잠자리나 음식을 얻을 때마다 어쩐지 억눌리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자선 단체의 사람들이 꼬치꼬치 질문을 하는 바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다. 소피는 자선보다는 법에 몸을 맡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섬에 가기로 마음을 정하자, 소피는 당장 필요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섬에 가려면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가장 신나는 방법은 고급 식당에 들어가서 가장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가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배짱을 부리고, 그 자리에서 얌전하게 경관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뒷일은 친절한 판사가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소피는 천천히 공원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브로드웨이와 5번가가 만나는 길을 걸었다. 북쪽으로 가던 그는 고급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밤만 되면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값비싼 포도주를 마시는 곳이었다. 소피는 조끼 맨 밑 단추부터 그 위로는 자신이 있었다. 수염도 깎았고 머리도 단정했다. 셔츠도 깨끗한 편이었으며 늘 매고 있는 검은 넥타이는 추수 감사절 날 교회에서 나온 어느 부인에게서 받은 것으로 아직도 새것 같았다. 만일 식당으로 들어가 의심을 받지 않고 테이블까지 가서 앉을 수만 있다면 성공은 그의 것이었다. 테이블 위로는 상체만 보이니까 그의 차림새는 웨이터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었다. 소피는 우선 오리 통구이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백포도주 한 병에 치즈, 식사를 하고 나서는 커피 한 잔과 시가 한 대를 주문하기로 했다. 다 합쳐 봐야 주인에게 호되게 당할 만큼 큰돈도 못 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리 통구이는 그의 배를 채워 주고, 행복한 기분으로 섬을 향해 갈 수 있게 해 줄 것이었다. 그러나 소피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웨이터는 그의 다 해진 바지와 낡아 빠진 구두를 보았다. 그는 재빠르게 소피를 문밖으로 떠밀어 냈다. 하마터면 소피는 길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소피는 고개를 숙이고 브로드웨이에서 벗어나 안쪽 길로 들어갔다. 그는 섬으로 가는 다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6번가 모퉁이에 이르자, 번쩍이는 불빛 아래 멋진 상품을 진열해 놓은 상점의 진열장이 보였다. 소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열장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경관이 모퉁이를 돌아 뛰어왔다. 소피는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찌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보았소?” 흥분한 경관이 소리쳤다. “제가 진열대를 깬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소피는 이제 경관이 왔으니 잡혀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기쁨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러나 경관은 소피의 말이 농담이라 여기고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진열장 유리를 깬 사람이라면 버티고 서서 경관이 오기를 기다렸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순간, 전차를 타려고 급히 뛰어가는 한 남자가 경관의 눈에 띄었다. 경관은 그 남자를 쫓아갔다. 두 번이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소피는 마음이 울적했다. 그때 길 맞은편에 수수해 보이는 식당이 있었다. 배는 몹시 고픈데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사람에게 적당한 식당이었다. 낡은 구두, 다 해진 바지 차림의 소피도 그 식당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소피는 비프스테이크와 핫케이크, 도넛과 파이까지 시켜 먹었다. 그런 다음 웨이터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경관을 부르라고.” 소피가 말했다. “너 따위에겐 경관은 필요 없어. 어이, 콘! 나 좀 도와줘!” 소피는 두 웨이터에게 붙잡혀 나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소피는 마치 목수가 접는 의자를 펴는 것처럼 관절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펴며 일어섰다. 그리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소피는 경관에게 붙잡혀 가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섬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두 집 건너 약국 앞에 서 있던 경관이 웃으면서 소피를 지나쳐 갔다. 소피는 야비하고 염치없는 바람둥이 노릇을 해 보기로 했다. 고상한 여자와 충실한 경관을 번갈아 바라보며 소피는 이제 아늑하고 아담한 섬에서 겨울을 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피는 넥타이를 매만지고 자꾸 기어들어 가는 와이셔츠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모자를 삐딱하게 멋을 부려 고쳐 쓴 다음, 젊은 여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이, 베델리아! 우리 집에 가서 나랑 놀지 않겠어?” 젊은 여자가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소피는 확실히 섬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벌써 경찰서의 아늑한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소피를 돌아보더니 한쪽 손을 내밀어 그의 팔짱을 꼈다. “좋아요, 마이크. 맥주를 한잔 사 준다면 얼마든지 따라갈게요. 내가 먼저 말을 걸까 했지만, 경관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 참았어요.”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할 수 없이 소피는 젊은 여자와 함께 우울한 얼굴로 경관 앞을 지나갔다. 아무래도 섬에 갈 수 없는 운명인 모양이었다. 다음 길모퉁이에서 소피는 여자를 떼어 내고 달아났다. 소피는 밤이 되면 가장 밝은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따뜻한 코트를 입은 여자들과 외투를 입은 남자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소피는 문득 자신이 무서운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닐까 불안해졌다.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체포되지 않는 저주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소피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불빛이 찬란한 극장 앞을 거만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경관을 보자 다시 기회를 잡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피는 곧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 주정꾼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춤을 추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마음껏 떠들었다. 그 말을 듣고 소피는 부질없는 짓을 그만두었다. 섬은 소피로서는 아무래도 갈 수 없는 나라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소피는 얇은 웃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담배 가게 앞에서 시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배 가게 입구에는 그 남자의 것 같은 비단 우산이 놓여 있었다. 소피는 비단 우산을 집어 들고 유유히 걸어갔다. 우산 주인은 머뭇거렸다. 그 순간 소피는 행운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경관이 수상쩍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론 내 우산이지.” 소피는 심술궂게 말했다. 그러자 우산 주인은 미안한 듯이 뒷걸음쳐 가 버렸다. 그러자 경관은 전차를 타려는 노인을 도와주러 달려갔다. 소피는 도로 공사 때문에 쌓아 둔 흙더미를 발로 마구 차면서 걸었다. 우산은 공사장 구덩이 속으로 던져 버렸다. 소피는 교통 정리를 하는 경관들에게 욕을 퍼부어 댔다. 이쪽에서는 제발 좀 잡아가 주었으면 하는데, 저쪽에서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윽고 소피는 불빛도 시끄러운 소리도 없는 길에 들어섰다. 조용한 길모퉁이에서 소피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지붕 모양이 어딘가 색다른 낡은 교회가 있었다. 유리창 안쪽에서 부드러운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오르간 연주자가 연습하는지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룩한 노랫소리를 들은 소피는 갑자기 아득해졌다. 밤하늘에는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자동차도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뜰에서는 참새가 졸린 듯 힘없이 짹짹거리고 있었다.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는 주위의 풍경을 어느 시골 교회로 바꾸어 놓았다. 그 교회는 소피가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찾던 고향의 교회였다. 소피의 마음속에 갑자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나쁜 욕망과 비뚤어진 희망, 못 쓰게 된 재능이 부끄럽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소피는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일은 일자리를 찾으러 가 보자. 예전에 모피 수입상이 모피 옮기는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한 적이 있으니 분명 할 일이 있을 거야. 그래, 나도 이제 떳떳하게 살자!’ “당신, 부랑자야? 한밤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 선량한 시민을 불안하게 하는 행동이야. 자, 따라와!” 경관이 말했다. 다음 날 아침, 경범 재판소에서 치안 판사가 소피에게 선고를 내렸다. “징역 3개월에 처함.” 미스 마서는 길모퉁이에 있는 작은 빵 가게 주인이었다. 계단을 세 개 올라간 곳에 있는 그 가게는 문을 열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났다. 미스 마서는 마흔 살이었다. 남자를 만날 기회는 많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직 결혼하지 못했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2,000달러의 예금과 입 안에 해 넣은 치아 두 개 그리고 넘치는 인정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미스 마서의 빵 가게에 들르는 남자가 있었다. 미스 마서는 그 손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그는 허름한 다락방에서 묵은 빵을 먹으며 그림을 그리겠지. 머릿속으로는 우리 빵 가게의 맛있는 빵을 생각하면서 말이야. 아, 불쌍해!’ 인정이 많은 미스 마서는 고기와 잼을 바른 빵과 차가 있는 식탁에 앉을 때마다 그를 생각했다. ‘그 화가가 나와 함께 이 음식들을 먹으면 좋을 텐데.’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스 마서는 동정심이 매우 많은 여자였다. 미스 마서는 그의 직업이 화가가 맞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화랑에서 산 그림 한 점을 방에서 떼어 와서 빵 가게 벽에 걸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이틀 뒤 그 남자가 왔다. “굳은 빵 두 덩어리만 주십시오.” 그는 미스 마서가 빵을 싸고 있는 동안 말했다. “참 훌륭한 그림을 갖고 계시는군요.” 미스 마서는 짐작이 들어맞자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미술을 참 좋아하고, 또.” ‘그래, 그는 분명히 화가다.’ 미스 마서는 그림을 도로 방으로 가져갔다. ‘안경 속에서 빛나던 부드럽고 친절한 눈! 넓은 이마! 원근법이 잘못된 걸 한눈에 알아내다니 천재가 틀림없어. 아, 그런 사람이 묵은 빵만 먹고 살다니!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미스 마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천재 화가는 대부분 성공하기 전까지 그런 고생을 하게 마련이지. 만일 그 천재 화가가 2,000달러의 예금과 이 빵 가게의 수입 그리고 내 격려를 받으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도 원근법도 더 좋아질 텐데.’ 미스 마서는 혼자 이런 상상을 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그는 빵을 사러 올 때마다 미스 마서와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가곤 했다. 아마도 미스 마서의 상냥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는 변함없이 묵은 빵을 사 갔다. 케이크나 파이 같은 맛있는 빵은 한 번도 사 가지 않았다. 미스 마서는 그의 얼굴빛이 점점 더 창백해지고 야위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스 마서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사 가는 초라한 빵에 뭔가 보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미스 마서는 화가들은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스 마서는 그가 올 것 같은 날에는 푸른 물방울무늬의 블라우스를 차려입었다. 또 미스 마서는 피부 미용에 좋다는 화장수를 만들어 밤마다 얼굴에 바르고 잠들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처럼 5센트짜리 동전을 진열장 위에 놓고 묵은 빵 두 덩어리를 달라고 했다. 미스 마서가 빵을 포장하는 동안, 소방차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문 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미스 마서는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진열대 아래 선반에는 10분 전에 우유 배달부가 놓고 간 신선한 버터가 있었다. 미스 마서는 빵 자르는 칼로 두 개의 빵을 자른 다음, 그 속에 버터를 듬뿍 집어넣고 본래대로 꽉 눌러 놓았다. 그가 계산대로 돌아왔을 때 미스 마서는 빵을 종이에 싸고 있었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그는 돌아갔다. 미스 마서는 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너무 주제넘은 짓을 한 건 아닐까? 그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아무튼 그날은 종일 그 생각만 했다. 미스 마서는 자기가 몰래 한 짓을 눈치챈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가 그걸 알아채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쯤이면 배가 고파 빵을 먹으려 하겠지. 그는 원근법이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붓과 팔레트를 내려놓고 탁자로 가서 묵은 빵과 물을 차리겠지. 그런 다음, 빵 칼로 빵을 썰 거야. 그러면 그 안에 버터가.’ 미스 마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빵을 먹으며 버터를 넣은 나를 생각해 줄까?’ 그때 빵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누군가 떠들썩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스 마서는 급히 빵 가게로 나갔다. 그는 인상을 쓴 채 불끈 쥔 주먹을 미스 마서에게 마구 휘둘러 보였다. “이 바보 같으니라고!” 그가 소리쳤다. 그러자 파이프를 문 젊은 남자가 그를 끌고 나가려 했다. “안 가! 이 여자에게 따져야지!” 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미스 마서의 계산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미스 마서는 너무 놀라서 가까스로 선반에 기대어 있었다. 젊은 남자가 그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가요, 그 정도면 됐잖소.” 젊은 남자는 분노에 떠는 남자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젊은 남자가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드리죠. 어제로 그는 잉크 선 긋는 일을 끝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건축 설계사들은 설계도를 그릴 때는 먼저 연필을 사용하지요. 그리고 그 위에 잉크로 선 긋는 일이 끝나면 그 연필 자국은 굳은 빵을 떼어서 지우죠. 지우개로 하는 것보다 훨씬 잘 지워지니까요. 블럼버거 씨는 그 빵을 줄곧 여기서 사 갔지요. 그런데 오늘 아시겠지요? 버터가. 젊은 남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버터 때문에 석 달 동안 공들인 설계도를 망치고 만 것이었다. 미스 마서는 조용히 뒷방으로 들어가 푸른 물방울무늬의 실크 블라우스 대신 전에 입던 낡은 갈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정성껏 만든 화장수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지미 발렌타인은 교도소 안의 구두 공장에서 열심히 구두 가죽을 누비고 있었다. 그때 교도관이 들어와 그를 교도소 소장실로 데리고 갔다. 소장은 지미에게 주지사가 서명한 사면장을 건넸다. 지미는 어딘가 찜찜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는 4년의 형기 중 이미 10개월이나 교도소 안에 있었다. 길어야 3개월 정도만 있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지미처럼 바깥세상에 힘 있는 친구가 많이 있는 사람은 교도소에 들어와도 머리를 짧게 깎을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형기를 채우지 않고 빨리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발렌타인, 내일 아침에 여길 나가게. 자넨 나쁜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 금고 털이는 그만두고 정직하게 살도록 하게.” 소장이 말했다. “저는 한 번도 금고를 턴 적이 없어요.” 지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어떻게 스프링필드 사건에 엮이게 되었지?” 소장이 웃으며 말했다. “전 평생 스프링필드에 가 본 적도 없는걸요.” 지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자를 데리고 가게, 크로닌! 그리고 밖으로 나갈 때 입을 옷을 챙겨 주게. 내일 아침 7시에 대기실로 내보내도록. 발렌타인, 자네는 내가 아까 한 말 명심하라고.” 다음 날 아침 7시, 지미는 소장이 있는 사무실에 서 있었다. 지미는 죄수를 내보낼 때 교도소에서 주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에 딱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잠시 뒤 교도소 서기가 기차표와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지미에게 내주며 말했다. “이건 착한 시민으로 돌아가라고 나라에서 주는 선물이야.” 소장은 지미에게 시가 한 대를 주고 악수를 청했다. 그리하여 9762번 죄수 지미 발렌타인은 ‘주지사의 명에 의한 사면’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새들의 노랫소리, 바람에 살랑거리는 푸른 잎새, 달콤한 꽃향기. 때는 한창 좋은 봄날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미는 곧장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자유의 몸이 된 첫 기쁨을 누렸다. 통닭구이와 백포도주 한 병 그리고 소장이 준 것보다 더 좋은 시가 한 대를 피웠다. 그런 다음, 천천히 역을 향해 걸었다. 지미는 역 입구에 앉아 있는 거지의 모자에 25센트짜리 동전 1닢을 던져 주고 기차에 올랐다. 3시간 뒤 지미는 큰길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마이크 돌란이 경영하는 카페로 들어가 계산대에 있던 마이크와 악수를 했다. “좀 더 빨리 손을 쓰지 못해 미안하네, 지미. 그래, 건강은 어떤가?” 마이크가 말했다. “괜찮아. 내 열쇠는 어디 있지?” 마이크가 건넨 열쇠를 받아 든 지미는 2층으로 올라가 구석진 방의 문을 열었다. 모든 것이 그가 떠날 때 그대로였다. 형사 벤 프라이스가 지미를 붙잡으려고 팔을 비틀 때, 그의 셔츠에서 떨어진 흰 단추가 아직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지미는 벽에서 간이침대를 꺼내고 그 벽의 널빤지 한 장을 뜯어냈다. 그러자 작은 벽장이 나타났고, 그 속에 지미의 연장 가방이 들어 있었다. 지미는 연장 가방을 열고 연장 하나하나를 황홀한 듯 들여다보았다. 그것들은 동부에서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는 성능 좋은 금고 털이용 연장이었다. 지미는 이 연장을 장만하는 데 900달러나 썼다. 30분 뒤 지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카페로 들어갔다. 그는 몸에 잘 맞는 멋진 옷을 입고 연장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 생각인가?” 마이크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나는 뉴욕의 쿠키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니었나! 당연히 돌아가 일을 해야지.” 지미의 말은 마이크를 매우 기쁘게 만들었다. 덕분에 지미는 우유를 탄 소다수를 얻어 마실 수 있었다. 9762번 죄수 지미 발렌타인이 교도소에서 나온 지 일주일 뒤 인디애나주 리치먼드에서 금고털이 사건이 일어났다. 잃어버린 돈은 800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범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주일이 지나자, 이번에는 로건스포트에서 도난 방지 특허를 받은 금고가 간단히 열려 현금 1,500달러가 털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에는 제퍼슨시의 은행 금고가 털려 약 5,000달러의 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금고 털이 범죄 해결에 경험이 많은 벤 프라이스 형사가 끼어들 만큼 문제가 커진 것이었다. 그런데 세 사건의 범행 수법은 아주 비슷한 데가 있었다. 현장을 살펴본 뒤 벤 프라이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혼자 일을 저지르고, 빨리 달아나고. 그런 방법들이 지미 발렌타인의 이름을 드높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벤 프라이스가 이 이름난 금고 털이를 뒤쫓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금고에 돈을 넣어 둔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느 날 오후, 지미는 아칸소주의 시골 역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도시 엘 모어에 나타났다. 그는 연장 가방을 들고 마차에서 유유히 내렸다. 지미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대학생 같은 차림으로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한 젊은 여자가 길을 건너왔다. 여자는 모퉁이에서 지미를 앞질러 “엘 모어 은행”이란 간판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지미는 순식간에 마음을 뺏겨 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까먹을 정도였다. 그녀도 눈을 내리깐 채 얼굴을 살짝 붉혔다. 엘 모어 같은 시골에서는 지미처럼 잘생기고 멋지게 차려입은 청년을 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젊은 여자가 은행으로 들어간 뒤 지미는 은행 계단에서 놀고 있는 소년에게 10센트짜리 한 개를 쥐여 주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데 젊은 여자가 은행에서 나왔다. 젊은 여자는 지미 따위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저 여자는 폴리 심프슨 아냐?” 지미는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아니에요, 저 여자는 애너벨 애담스예요. 아버지가 이 은행 주인이죠.” 그길로 플랜터스 호텔로 간 지미는 ‘랠프 스펜서’라는 이름으로 방을 얻었다. 그리고 호텔 직원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는 장사할 장소를 찾아 엘 모어에 왔다고 말했다. “여기에 구둣방을 차리면 어떨까요? 장사가 잘될까요?” 호텔 직원은 지미의 옷차림과 태도에 호감을 느꼈다. 그 자신도 엘 모어의 젊은 멋쟁이들 사이에서는 제법 옷을 잘 입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으나, 지미를 보고 자기가 얼마나 촌스러운지 깨달은 것 같았다. 호텔 직원은 지미의 넥타이 매는 법을 눈여겨보면서 친절하게 말했다. 네, 구둣방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이 고장에는 구두 전문점이 없으니까요. 양복점과 잡화상에서 구두까지 팔고 있지요. 엘 모어에서 자리를 잡도록 하세요. 이곳은 살기도 좋고, 사람들도 아주 친절하답니다. 지미는 2, 3일 묵으면서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얼마 뒤 지미 발렌타인, 즉 랠프 스펜서는 엘 모어에서 크게 성공했다. 구둣방을 차려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이었다. 지미는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애너벨 애담스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1년 동안 랠프 스펜서의 삶은 술술 풀려나갔다. 그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고 구둣방은 아주 잘 되었다. 그리고 애너벨과는 이 주일 뒤에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애너벨의 아버지인 시골 은행가 애담스 씨 또한 지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지미는 애담스 씨의 집에서나 애너벨의 결혼한 언니의 집에서나 한 식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지미는 자기 방에 들어앉아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옛 친구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운 옛 친구 빌리에게. 다음 주 수요일 밤 9시, 리틀록의 설리번 술집으로 와 주길 바라네. 긴히 의논할 일이 있네. 그리고 내 연장을 모두 자네에게 주고 싶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나쁜 짓은 하지 않겠네. 부디 설리번 술집으로 꼭 와 주게. 자네를 꼭 만나야 해. 그때 연장을 건네주겠네. 옛 친구 지미가. 지미가 이 편지를 부친 지 며칠 뒤, 벤 프라이스가 전세 마차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엘 모어에 도착했다. 벤 프라이스는 조용히 시내를 돌아다니며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아냈다. 그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둣방 맞은편에 있는 약국에서 지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음 날 아침, 지미는 애담스 씨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날은 결혼 예복을 맞추고, 애너벨에게 줄 멋진 선물을 사기 위해 리틀록으로 갈 예정이었다. 엘 모어에 온 뒤로 다른 도시로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지막 금고 털이를 한 지도 이미 1년이 지났으니 마을 밖으로 나가도 안전하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가족 모두 시내로 나갔다. 애담스 씨와 애너벨, 지미, 그리고 다섯 살, 아홉 살짜리 두 딸을 데리고 나온 애너벨의 언니는 지미가 묵고 있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지미는 자기 방에서 연장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은행으로 갔다. 거기에는 지미를 정거장까지 데려다줄 말과 마차 그리고 마부 돌프 깁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조각 장식이 된 떡갈나무 난간 안쪽에 있는 은행 사무실로 들어갔다. 물론 지미도 함께였다. 지미는 언제나 상냥해서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행복에 겨워 지미의 팔에 매달려 가던 애너벨은 우연히 지미의 가방을 들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머나, 랠프! 이 가방은 왜 이렇게 무겁죠? 금덩어리라도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애너벨이 말했다. 지미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마침 엘 모어 은행은 막 새로운 금고를 만들었다. 애담스 씨는 그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누구에게나 구경을 시키고 싶어 했다. 새 금고는 별로 크지는 않았으나, 새로 특허를 받은 문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손잡이 하나로 동시에 세 개의 강철 빗장을 여닫을 수 있었고, 타이머가 달린 자물쇠가 붙어 있었다. 애담스 씨는 웃으면서 그것을 다루는 법을 지미에게 설명해 주었다. 지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으나 별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두가 그 지하 금고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벤 프라이스가 은행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난간 사이로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벤 프라이스는 안내인에게 별다른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아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때 여자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오더니 이어 큰 소동이 벌어졌다. 어른들이 안 보는 사이에 아홉 살짜리 메이가 장난삼아 애거사를 금고에 넣었다. 그리고 애담스 씨가 한 대로 빗장을 내리고 자물쇠의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었다. 애담스 씨는 손잡이에 달라붙어 잠시 그것을 움직여 보다가 신음하듯 말했다. “문이 안 열려!” “아, 애거사!” 애거사의 어머니가 미친 듯 울부짖었다. “진정해! 모두 잠시 조용히 해. 애거사! 내 말 들리니? 어서 대답해 보렴.” 애담스 씨는 목청껏 소리쳤다. 캄캄한 금고 속에서 겁에 질려 마구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왔다. “아, 내 소중한 딸! 혼자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애는 아마 놀라서 죽고 말 거예요!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부수고라도 문을 열어 달라고요!” 애거사의 어머니가 또다시 울부짖었다. 애거사의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금고 문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애너벨은 지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근심에 차 있었으나, 아직 절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좀 해 보세요, 랠프.” 지미는 입술 언저리와 날카로운 눈에 묘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애너벨을 바라보았다. “애너벨, 당신이 꽂고 있는 그 장미를 내게 줘요.” 그 순간, 랠프 스펜서란 사람은 사라지고 지미 발렌타인이 나타났다. “모두 문 앞에서 비키십시오.” 지미는 짤막하게 명령했다. 그러고는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반듯이 펴 놓았다. 지미의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지미는 일을 손에 잡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히 휘파람을 불며 번쩍거리는 기묘한 연장들을 재빨리 꺼내어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지미를 지켜보았다. 1분 뒤 지미가 즐겨 쓰는 드릴이 강철 문으로 미끄러지듯 스르르 파고들어 갔다. 10분이 지났을 때, 지미는 지금까지의 금고 여는 기록을 깨뜨리고 빗장을 들어 올려 문을 열었다. 애거사는 거의 기운이 다 빠져 있었으나, 무사히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지미는 웃옷을 주워 입고 은행 정문을 향해 난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면서 지미는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랠프!” 하고 부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정문에서 커다란 사나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벤 프라이스를 한눈에 알아본 지미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셨소, 프라이스 형사님? 결국 나를 잡으셨군요. 자, 이제 끝났으니 잡혀간다 해도 괜찮소.” 그러나 벤 프라이스는 이상하다는 듯 말을 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소, 스펜서 씨.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 시간은 겨우 밤 10시밖에 안 되었으나, 가랑비가 섞인 찬바람 때문인지 다들 일찍 집에 돌아간 것 같았다. 경관은 가게들이 문단속을 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주변을 살폈다. 당당한 경관의 모습은 믿음직스러웠다. 그 마을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담배 가게와 밤새도록 장사하는 식당의 불빛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어느 골목에 이르렀을 때, 경관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나이가 어두운 가게 앞에 서서 불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 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년 전의 오늘 밤, 저는 친구인 지미 웰스와 여기 있던 식당에서 식사를 했어요. 그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이 뉴욕에서 마치 형제처럼 의지하며 지냈어요. 저는 열여덟 살, 지미는 스무 살이었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서부로 떠나기로 했어요. 저는 지미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 녀석은 이 세상에 좋은 곳은 오직 뉴욕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나이는 시가를 한 모금 피우고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에 그날로부터 꼭 20년째 되는 날,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했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건 어디서 살고 있건 말이에요.” 하지만 지미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틀림없이 나를 만나러 여기 올 거예요. 그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거예요. 나는 오늘 밤 이 가게 앞에 서기 위해 1,600킬로미터나 달려왔어요. 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멋진 시계를 꺼냈다. “10시 3분 전이군요. 우리가 여기서 헤어진 것은 정각 10시였지요.” 철물 가게 문 앞에서는 친구와 20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사나이가 꼼짝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 20분쯤 지났을 때, 긴 코트의 깃을 세운 키 큰 사나이가 건너편에서 급히 걸어왔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한테로 곧바로 왔다. “밥인가?” 그가 물었다. “지미 웰스?” 문 앞에 서 있는 사나이가 말했다. 키 큰 사나이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나이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틀림없는 밥이로군! 자네가 아직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여기에 나올 줄 알았네. 두 사람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밥은 자기가 거둔 성공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듯,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키 큰 사나이는 코트에 얼굴을 묻고 재미있다는 듯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리 모퉁이에 불이 환하게 켜진 가게가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간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밥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당황한 듯 말했다. “아니, 자네는 지미 웰스가 아니야! 20년이 아무리 긴 세월이라고 해도 인간의 코 모양이 변하지는 않지.” 그러자 키 큰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20년이란 세월은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도 있지. 10분 전에 네 앞으로 체포 영장이 나왔어. 밥은 쪽지를 펴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쪽지를 다 읽을 무렵에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쪽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오즈의 마법사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무서운 바람. 미국 캔자스 넓은 초원 한가운데에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어요. 오두막집에는 도로시라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도로시의 가족은 친척인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뿐이었어요.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도로시를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가 보살펴 주었던 거예요.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는 온종일 일을 하느라 바빴어요. 초원에는 도로시네 말고는 집이라곤 없었어요. 그래서 도로시는 친구가 없었어요. 하지만 토토가 있어 그런대로 견딜 만했어요. 토토는 작은 검정 강아지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주위가 온통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사나운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리고 들판의 풀들이 물결치듯 흔들렸어요. “도로시, 회오리바람이야! 어서 지하실로 들어가자!” 엠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소리쳤어요. 캔자스에는 가끔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튼튼한 집도 한순간에 부숴 버리곤 했어요. 회오리바람이 불면 가족들은 지하실로 대피했어요. 엠 아주머니는 어느새 지하실로 내려갔고, 도로시가 막 뒤따라가려고 할 때였어요. 바람 소리에 겁을 먹은 토토가 침대 밑으로 달아났어요. “토토, 어디 가는 거야?” 도로시는 토토를 잡으러 쫓아갔어요. “도로시, 가면 안 돼!” 엠 아주머니가 소리쳤지만 도로시는 토토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요. 도로시는 침대 밑에 손을 뻗어 웅크리고 있던 토토를 겨우 붙잡았어요. 그때,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와 함께 집이 통째로 흔들렸어요. 도로시는 토토를 안고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어요. 순간 집이 빙그르르 돌더니 허공으로 붕 떠올랐어요. 도로시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가까스로 기어가 창밖을 내다보니 캄캄한 가운데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만 들렸어요. 도로시네 집은 둥둥 뜬 채 계속 날아갔어요. 도로시는 토토를 안고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워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먼치킨의 나라. 얼마 뒤, 도로시는 집이 ‘쿵!’ 하고 땅에 부딪히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어요. “여기가 어딜까?” 창밖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셨어요. 도로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어머나, 세상에!” 밖에는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어요. 파릇파릇한 잔디 위에 푸르른 나무들이 서 있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도로시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키가 작고 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 다가왔어요. 세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어요. 키는 어린아이처럼 작았지만 나이는 많아 보였어요. 남자들은 파란 모자에 파란 옷, 여자는 하얀 모자에 하얀 옷을 입고 있었어요. 여자의 옷에 달린 작은 별이 보석처럼 빛났어요. 그들은 도로시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마법사님, 못된 동쪽 마녀를 없애고 우리 먼치킨을 구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여자가 앞으로 나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내가 마법사라고요? 동쪽 마녀를 없앴다고요?” 도로시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어요. 그러자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웃으면서 도로시의 집을 가리켰어요. “저길 좀 보세요. 동쪽 마녀의 발이 당신의 집 밑에 튀어나와 있어요.” 여자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집 밑에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은 두 발이 튀어나와 있었어요. 도로시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어요. “괜찮아요, 당신은 좋은 일을 한 거니까요. 죽은 마녀는 마음씨가 아주 고약해서 오랫동안 먼치킨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었어요. 그런데 당신 덕분에 못된 마녀가 죽어서 먼치킨들은 모두 자유로운 몸이 되었답니다.” “당신도 먼치킨인가요?” “아니에요, 나는 먼치킨과 친한 북쪽 마녀랍니다. 그렇지만 동쪽 마녀를 물리칠 만한 힘이 없어서 그동안 먼치킨을 돕지 못했던 거예요.” “마녀라고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마녀들은 다 못되고 심술궂은 줄 알았는데.” “마녀라고 해서 다 못되고 심술궂은 건 아니에요. 오즈의 나라에는 마녀가 넷 있는데, 북쪽과 남쪽에는 착한 마녀가 살고, 동쪽과 서쪽에는 못된 마녀가 살아요. 그런데 동쪽 마녀가 죽었으니 이제 못된 마녀는 서쪽 마녀만 남은 셈이죠.” 그때, 먼치킨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집 아래를 가리켰어요. “앗, 저것 좀 보세요!” 집 아래를 보니 동쪽 마녀의 두 발이 사라지고 은 구두만 남아 있었어요. “햇볕 때문에 말라 버린 거예요. 이제 이 은 구두는 당신 거예요. 은 구두에는 굉장한 마법이 있다고 해요.” 북쪽 마녀는 은 구두를 도로시에게 건넸어요. 도로시는 북쪽 마녀로부터 은 구두를 받아 든 다음 먼치킨들에게 부탁했어요. “저는 캔자스에 가고 싶어요. 지금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어디로 가면 되는지 좀 가르쳐 주세요.” “캔자스라고요? 잘 모르겠는데.” “여기는 사방이 커다란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게다가 사막을 무사히 건너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그냥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요.” 북쪽 마녀의 말에 도로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북쪽 마녀가 다정하게 도로시를 달래 주며 말했어요. “울지 말고 에메랄드시에 사는 오즈의 마법사에게 가 봐요. 아가씨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줄지도 몰라요.” 북쪽 마녀의 말에 도로시는 울음을 그쳤어요. “오즈의 마법사가 누구예요?” “이 오즈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예요. 하지만 그분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에메랄드시는 어디 있나요?” “오즈의 나라 한가운데에 있어요. 먼 곳이지만 노란 벽돌 길만 따라가면 돼요. 함께 갈 수 없으니 대신 이마에 입 맞춰 줄게요.” 북쪽 마녀는 도로시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었어요. 그러자 도로시의 이마에 반짝이는 둥근 자국이 남았어요. “자, 이제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거예요.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만나서 꼭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요. 그럼 잘 가요!” 북쪽 마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토토가 이상하다는 듯 짖어 댔지만 도로시는 놀라지 않고 말했어요. “토토, 놀랄 것 없어. 마녀들이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거야.” 첫 번째 친구. 도로시는 에메랄드시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우선 흰색과 파란색 체크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분홍색 모자를 꺼내 썼어요.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 먹을 빵을 작은 바구니에 가득 담았어요. 마지막으로 도로시는 동쪽 마녀의 은 구두를 신었어요. 모든 준비를 마친 도로시는 토토와 함께 북쪽 마녀가 가르쳐 준 대로 노란 벽돌 길을 따라 걸었어요. 한참을 걷다 보니 넓은 옥수수밭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도로시는 잠시 쉬려고 옥수수밭 울타리 옆에 주저앉았어요. 그때, 토토가 무엇을 보았는지 짖어 댔어요. “무슨 일이야, 토토?” 토토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고 짖고 있었어요. “어, 이상하게 생긴 허수아비네!” 도로시는 신기한 듯 허수아비를 쳐다보았어요. 마치 사람처럼 눈, 코, 입, 귀가 다 달린 데다가 먼치킨들이 쓰는 파란 고깔모자를 쓰고, 파란색 장화까지 신고 있었어요. 갑자기 허수아비가 한쪽 눈을 깜박거렸어요. 도로시는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며 다시 허수아비를 쳐다보았어요. 그러자 허수아비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어요. “안녕, 날씨가 좋지?” 허수아비는 목에 무엇인가 걸린 듯한 쉰 목소리로 말했어요. “어머, 너 말을 할 줄 아는구나?” 도로시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어요. “그래, 만나서 반갑다.” “나도 반가워. 그런데 왜 그렇게 높이 매달려 있니? 이리 내려와서 나하고 이야기나 하면 좋을 텐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 등에 막대기가 꽂혀 있거든.” “내가 도와줄게.” 도로시는 두 팔을 뻗어 허수아비를 내려 주었어요. 허수아비는 밀짚으로 채워져 있어서 아주 가벼웠어요. “고마워, 이제 좀 살 것 같아.” 허수아비는 팔을 크게 벌려 기지개를 켰어요. ‘세상에, 허수아비가 말을 하고 기지개를 켜다니.’ 도로시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넌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니?” 허수아비가 물었어요. “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야. 캔자스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려고.” “오즈의 마법사가 누구지?” “넌 오즈의 나라에 살면서 그것도 모르니? 아주 위대한 마법사라던데?” “그래, 난 아는 게 없어. 내 머릿속은 밀짚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텅 빈 거나 마찬가지야. 까마귀들도 나를 무시할 정도라니까.” 허수아비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어요. 도로시는 허수아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참, 안됐구나. 나와 함께 에메랄드시에 가는 건 어때? 오즈의 마법사에게 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래? 오즈의 마법사가 나에게 뇌를 만들어 줄까? 그럼 나도 똑똑해질 수 있을 텐데.” “원한다면 함께 가도 좋아.” “그래, 같이 가자.” 친구라곤 토토밖에 없던 도로시는 새 친구가 생겨 무척 기뻤어요. 도로시와 토토, 허수아비는 함께 노란 벽돌 길을 따라 걸었어요. 두 번째 친구. 날이 저물자 도로시와 토토와 허수아비는 숲속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지냈어요. 다음 날 아침, 도로시는 오두막집으로 스며든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떴어요. “아, 잘 잤다! 목이 마른데 샘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봐야겠다.” 도로시와 토토와 허수아비는 샘을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다행히 샘을 찾아 도로시는 물도 마시고 세수도 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게 무슨 소릴까?” 도로시와 토토, 허수아비는 신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어요. 풀숲 가운데 아름드리나무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고, 그 앞에 양철 나무꾼이 도끼를 든 채 꼼짝 못 하고 서 있었어요. “소리를 지른 게 너니?” 도로시가 양철 나무꾼에게 물었어요. “응, 그래. 나는 일 년이 넘도록 여기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어.” 도로시는 양철 나무꾼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도와주면 돼?” “녹이 슬어서 그러니 오두막집에 있는 기름통을 가져와서 내 몸의 이음새마다 기름을 듬뿍 쳐 주면 돼.” 도로시는 얼른 기름통을 가져와서 양철 나무꾼의 몸에 기름을 골고루 쳐 주었어요. 잠시 뒤, 양철 나무꾼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 갑자기 소나기를 맞는 바람에 이렇게 몸에 녹이 슬었지 뭐야. 그런데 너희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지?” 양철 나무꾼이 물었어요. “에메랄드시로 가는 길이야. 오즈의 마법사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무슨 부탁인데?” “나는 고향 캔자스로 돌아가는 게 소원이고, 허수아비는 뇌를 갖는 게 소원이야.” “오즈의 마법사가 내 부탁도 들어줄까? 나는 마음을 갖고 싶은데.” 양철 나무꾼이 말했어요. “오즈의 마법사는 위대하다니까 틀림없이 네 부탁도 들어줄 거야.”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이렇게 해서 도로시에게 새로운 친구가 또 생겼어요. 양철 나무꾼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난 원래 양철이 아닌 평범한 나무꾼이었어. 먼치킨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는데, 아가씨와 함께 사는 할머니가 결혼을 반대했어. 할머니는 아가씨가 자기 곁에 남아 집안일을 해 주길 바랐거든. 할머니는 나와 아가씨가 결혼하지 못하게 못된 동쪽 마녀에게 부탁했어. 동쪽 마녀는 내 도끼에 나쁜 마법을 걸었지. 그래서 난 나무를 하다가 도끼에 다리와 팔, 머리를 차례차례 잃고 말았어. 그때마다 나는 대장장이에게 부탁해서 양철로 다리, 팔, 머리를 만들어 붙였어. 그래도 아가씨에 대한 나의 사랑이 변치 않자 이번엔 도끼가 내 몸통을 둘로 쪼개 버린 거야. 대장장이가 양철로 몸통을 만들어 주었어. 하지만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아가씨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렸고, 결혼에 대한 생각도 사라져 버렸어. 만약 오즈의 마법사가 내게 마음을 만들어 준다면 다시 아가씨를 찾아가 결혼할 거야. 세 번째 친구. 도로시와 친구들은 양철 나무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했어요.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자 나무들이 우거져 낮인데도 주위가 어두웠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커다란 사자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을 차례로 후려쳤어요. 그런 다음, 입을 크게 벌리고 토토에게 달려들었어요. 도로시는 사자의 콧등을 힘껏 후려쳤어요. “토토같이 작은 강아지를 물려고 하다니, 그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야!” 그러자 사자는 도로시에게 맞은 콧등을 앞발로 문지르며 말했어요. “네 말이 맞아, 난 겁쟁이야. 사실 난 이렇게 작은 동물을 봐도 무섭다고.” 사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도로시는 깜짝 놀랐어요. “이런! 너 지금 우는 거니? 무슨 사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 “나도 잘 모르겠어. 태어날 때부터 겁쟁이였나 봐. 모두 내가 사자니까 당연히 용감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으르렁거리는 데엔 이유가 있어. 으르렁거리면 모두 깜짝 놀라 달아나 버리니까. 만약 누가 나에게 덤볐으면 내가 먼저 달아났을 거야.” 사자는 서러운 듯 엉엉 울었어요. “동물의 왕이라는 사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되겠니?”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조그만 일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사자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어요. “그건 오히려 기뻐해야 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건 마음이 있다는 증거니까. 나는 네가 부러워.” 양철 나무꾼이 말했어요. “너는 생각할 수 있는 뇌도 있겠지?” 이번에는 허수아비가 물었어요. “아마 있을 거야. 그런데 너희는 이 깊은 숲속에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사자가 물었어요. “우린 에메랄드시에 사는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는 길이야. 오즈의 마법사는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니까, 난 똑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거야.”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난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얻으러 가는 거야.” “나는 토토와 함께 고향 캔자스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할 거야.” 양철 나무꾼과 도로시가 차례로 말했어요. “나도 오즈의 마법사에게 용기를 달라고 부탁해 볼까?” 겁쟁이 사자가 도로시와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어요. “그래, 오즈의 마법사는 네 소원도 분명히 들어줄 거야.” 도로시가 말했어요. “그럼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용기가 없으니까 살기가 너무 힘들어.” “그래! 다른 짐승들은 모두 너를 무서워할 테니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될 거야.” 이렇게 하여 도로시의 친구는 토토,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그리고 사자까지 모두 넷으로 늘어났어요. 괴물 칼리다. 도로시와 친구들은 숲 사이로 이어진 노란 벽돌 길을 따라 계속 걸었어요. 갑자기 양철 나무꾼이 걸음을 멈추었어요. “이 일을 어째! 딱정벌레가 내 발에 밟혀 죽었어. 조심해야 했는데.” 양철 나무꾼은 눈물을 줄줄 흘렸어요.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리자 금방 턱에 녹이 슬어 양철 나무꾼은 입을 열 수 없었어요. 허수아비가 재빨리 기름칠을 해 주어서 양철 나무꾼은 다시 말을 할 수 있었어요. 도로시와 친구들 앞에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어요. 노란 벽돌 길은 골짜기 건너편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다리는 없었어요. 다들 걱정을 하고 있는데 사자가 골짜기의 폭을 가늠하며 말했어요. “어쩌면 내가 골짜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먼저 내 등에 탈래?” “시험 삼아 나부터 태워 봐. 난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테니까.”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그래, 그게 좋겠다.” 허수아비가 등에 타자 사자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가 건너편 골짜기로 훌쩍 뛰었어요. 건너편에서 도로시와 양철 나무꾼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어요. 도로시와 토토, 양철 나무꾼은 차례로 사자 등에 타고 무사히 골짜기를 건넜어요. “고맙다, 사자야. 네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넘겼어.” 도로시가 인사를 하자 사자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어요. 노란 벽돌 길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으로 이어졌어요. 도로시 일행이 숲으로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겁쟁이 사자가 벌벌 떨며 말했어요. “앗! 저, 저건 칼리다가 틀림없어!” “칼리다가 뭐야?” 도로시가 물었어요. “머리는 호랑이처럼 생기고 몸은 곰처럼 생긴 괴물이야. 아, 생각만 해도 무서워! 칼리다에게 발각되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해.” 그러나 그 앞에는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폭이 더 넓고 깊은 골짜기가 나타난 거예요. “이번에는 나도 건너뛸 수가 없겠어, 어떡하지?” 사자가 건너편을 바라보며 말했어요. 그때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양철 나무꾼이 저기 있는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려 골짜기에 다리를 놓으면 되잖아.” “그거 좋은 생각인데! 이렇게 좋은 생각을 하는데 누가 네 머릿속이 비었다고 하겠니?” 사자가 허수아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어요. 양철 나무꾼은 재빨리 도끼로 나무를 찍었어요. 그러자 나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져 골짜기 건너편에 걸쳐졌어요. 바로 그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나타났어요. “윽, 칼리다들이야! 서둘러야 해!” 사자가 부들부들 떨었어요. 도로시가 토토를 안고 먼저 나무다리를 건너갔어요. 양철 나무꾼과 허수아비와 사자가 그 뒤를 따랐어요. 칼리다들이 나무다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사자가 도로시를 향해 소리쳤어요. “모두 먼저 도망쳐!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까!” 그러자 허수아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어요. “그럴 필요 없어! 양철 나무꾼, 칼리다들이 건너기 전에 도끼로 나무다리를 잘라 버려!" 양철 나무꾼이 도끼로 네 번쯤 내리찍자 우지끈 소리와 함께 나무다리가 잘렸어요. 칼리다들은 비명을 지르며 깊은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졌어요. “와, 이제 살았다! 만세!” 도로시와 친구들은 숲을 빠져나와 넓은 들판으로 이어진 노란 벽돌 길을 걸어갔어요. 그러나 얼마쯤 가자, 이번에는 넓은 강이 앞을 가로막았어요. “이 강을 어떻게 건너지?” 도로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양철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를 잘라 뗏목을 만들어 그걸 타고 건너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허수아비가 의견을 냈어요. “정말 좋은 생각이야!” 양철 나무꾼은 나무를 잘라 뗏목을 만들었어요. 모두들 뗏목에 올라탔고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양쪽 끝에서 장대로 뗏목을 저었어요. 그런데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물결이 거세지더니 뗏목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어요. 허수아비는 물살을 버티며 장대로 강바닥을 힘껏 밀어 보았어요. 그러다 장대가 강바닥에 박혀 꼼짝을 안 했어요. 허수아비는 장대에 매달려 혼자 남겨졌어요. 양철 나무꾼은 허수아비가 가여워 눈물을 글썽였어요. 그러다가 눈물이 흐르면 녹이 슬 거란 생각이 들어 얼른 도로시의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어요. 뗏목은 물살을 따라 계속 떠내려갔어요. “무섭지만 내가 뗏목을 끌고 강 건너편으로 헤엄쳐 볼게.” 사자가 강에 뛰어들자 양철 나무꾼이 사자의 꼬리를 꼭 붙잡았어요. 사자는 강 건너편으로 열심히 헤엄쳐 갔어요. 도로시도 장대로 물을 밀어내며 사자를 도왔어요. 덕분에 가까스로 건너편 기슭에 닿았어요. 허수아비는 그때까지 장대 끝에 매달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어요. 어떻게든 허수아비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바로 그때, 커다란 황새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물가에 내려앉으며 물었어요. “너희는 누구니?” “나는 도로시고, 얘들은 내 친구인 토토와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야.”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우리는 에메랄드시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는데, 저기 강 한가운데에 있는 허수아비를 두고 갈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야.” 황새는 도로시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어요. “정말 허수아비가 있네. 내가 구해 줄게.” 황새는 퍼드덕 날아가 허수아비의 어깨를 발톱으로 움켜잡고 들어 올려 도로시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었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어요. “황새야, 정말 고마워!” 도로시와 친구들은 황새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에메랄드시를 향해 길을 떠났어요. 죽음의 향기. 도로시와 친구들은 붉은 양귀비꽃이 가득 피어 있는 꽃밭 한가운데로 들어섰어요. 꽃들은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어요. “음, 어쩌면 이렇게 향기가 좋을까!” 도로시는 꽃향기를 맡느라 숨을 크게 쉬었고, 사자도 코를 킁킁거렸어요. 냄새를 맡지 못하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부러워만 했어요. “아함, 왜 이렇게 졸리지?” 갑자기 도로시가 눈을 비볐어요. 토토도 하품을 하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잠들면 안 돼. 양귀비꽃 향기는 너무 독해서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고 했어.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해!” 사자의 말에 서둘러 꽃밭을 벗어나려 했지만, 도로시와 토토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어요. “사자야, 너까지 잠들면 안 되니까 빨리 여길 빠져나가! 도로시와 토토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갈게.” 자꾸 하품을 하고 있는 사자에게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사자는 비틀거리며 꽃밭 사이로 빠져나갔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와 토토를 안고 달렸어요. 그런데 앞서 달려간 사자가 양귀비 꽃밭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어요. “이 일을 어쩌지? 사자는 무거워서 우리 힘으로 끌고 갈 수도 없는데.”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우선 도로시와 토토만 데리고 양귀비 꽃밭을 빠져나왔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사자를 어떻게 구할지 걱정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양철 나무꾼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사납게 생긴 살쾡이가 작은 들쥐를 쫓고 있었어요. 양철 나무꾼은 살쾡이가 작은 들쥐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니 화가 났어요. 그래서 들고 있던 도끼를 휘둘러 살쾡이를 쫓아냈어요. 살쾡이가 달아나자 들쥐는 양철 나무꾼에게 와서 고개를 숙였어요. “목숨을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들쥐 여왕이에요.” 작은 들쥐들이 풀숲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들쥐 여왕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어요. “여왕님, 무사하셨군요. 우린 여왕님이 살쾡이에게 잡혀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여기 있는 양철 나무꾼이 나를 구해 주었단다. 너희들도 이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그러자 가장 나이 많은 들쥐가 물었어요. “여왕님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갚고 싶은데, 혹시 저희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양철 나무꾼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허수아비가 끼어들었어요. “우리 친구 사자가 저쪽 양귀비 꽃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좀 구해 줘요.” “사자라고요? 우리를 다 잡아먹을 텐데.” 들쥐 여왕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어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그 사자는 겁쟁이거든요.” 허수아비의 말에 들쥐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되죠?" “우선 들쥐들에게 끈을 하나씩 물어 오라고 하세요.” 여왕이 명령을 내리자 들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그사이, 허수아비는 양철 나무꾼에게 수레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양철 나무꾼은 도끼로 나무를 베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레를 만들었어요. 잠시 뒤, 들쥐들은 저마다 입에 끈을 한 가닥씩 물고 모여들었어요. “어머, 웬 들쥐가 이렇게 많아?” 때마침 깨어난 도로시가 소리를 질렀어요. 허수아비는 도로시에게 그사이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양철 나무꾼은 끈의 한쪽은 들쥐들에게, 또 한쪽은 수레에 묶었어요. 그러고 나서 들쥐 여왕이 들쥐들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자, 모두 끈을 당겨라!” 들쥐들은 재빨리 수레를 끌어 양귀비 꽃밭에 갔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몇 차례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겨우 사자를 수레에 태웠어요. 들쥐 여왕은 사자를 수레에 태우자 또다시 명령을 내렸어요. “자, 모두 힘을 내어 끌어라! 꾸물거리다가는 우리까지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양철 나무꾼과 허수아비, 토토와 도로시까지 힘을 모아 수레를 밀었어요. 그리하여 사자를 실은 수레는 양귀비 꽃밭을 무사히 빠져나왔어요. “고맙습니다, 들쥐 여왕님.” 도로시는 들쥐 여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도로시,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요.” 들쥐 여왕은 들쥐들을 거느리고 풀숲으로 사라졌어요.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와 친구들은 다시 길을 떠났어요. 얼마 가지 않아 노란 벽돌 길이 넓어지더니, 녹색의 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사람들도 모두 녹색 옷을 입고, 먼치킨처럼 끝이 뾰족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갔어요. “저기가 에메랄드시인가 봐!” 도로시가 밝은 녹색의 성벽을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걸음을 재촉하여 성벽으로 다가갔어요. 성벽 한쪽에 에메랄드가 잔뜩 박혀 있는 성문이 보였어요. 도로시가 초인종을 누르자, 은방울 소리와 함께 성문이 천천히 열렸어요. 문 안쪽에는 녹색 모자에 녹색 옷, 얼굴마저 녹색인 키 작은 남자가 서 있었어요. 바로 에메랄드시의 문지기였어요. “에메랄드시엔 무슨 일로 왔나요?” 문지기가 도로시와 친구들을 살펴보며 물었어요. “오즈의 마법사님을 만나러 왔어요.” 도로시의 말에 문지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분은 아무나 만나 주지 않습니다. 호기심으로 왔다면 그냥 돌아가세요.” “우린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부탁하러 왔어요.”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우리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들으시면, 틀림없이 만나 주실 거예요.” 도로시도 말했어요. 문지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다면 들어가 보세요. 그런데 에메랄드시로 들어가기 전에 모두 안경을 써야 합니다.” “안경을 쓰라고요?” “그래요, 에메랄드시 안의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이 나기 때문에, 안경을 안 쓰면 눈이 멀어 버리거든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잘 때도 안경을 쓰고 잔답니다.” 문지기는 옆에 있는 녹색 상자를 열었어요. 상자 안에는 갖가지 모양의 안경이 가득 들어 있었어요. 문지기는 도로시에게 맞는 안경을 골라서 씌워 주었어요. 성 앞에 녹색 옷에 녹색 창을 든 병사가 있었어요. “무슨 일로 왔나요?” “우리는 오즈의 마법사님을 만나려고 왔어요.” 병사는 도로시와 친구들을 녹색 융단이 깔린 방으로 안내했어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오즈의 마법사님께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어요. 마침내 병사가 돌아와 말했어요. “오즈의 마법사님께 여러분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만나 주시겠다고 했어요. 단, 하루에 한 명씩만 오즈의 마법사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거예요.” 녹색 옷을 입은 하녀가 도로시와 친구들을 각자의 방으로 안내했어요. 그날 밤, 도로시는 모처럼 편한 방에서 쉴 수 있었어요. 다음 날, 도로시는 하녀를 따라 오즈의 마법사의 방으로 갔어요. 둥글고 높은 방에는 반짝이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어요. 그런데 방 한가운데에 놓인 대리석 의자 위에 커다란 머리가 둥둥 떠 있는 거예요. 팔, 다리, 몸통도 없이 머리뿐이었어요. 도로시가 겁에 질려 있는데 큰 머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했어요. “내가 바로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저는 도로시라고 해요. 마법사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어요.” 커다란 머리는 도로시에게 다시 물었어요. “그런데 그 은 구두와 이마의 자국은 어디서 난 거냐?” “이 은 구두는 제가 타고 날아온 집에 동쪽 마녀가 깔려 죽는 바람에 얻게 되었어요. 이마의 자국은 북쪽 마녀가 입맞춤을 해 준 자국이고요.” “그래, 내게 뭘 부탁하러 온 거냐?” “캔자스로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좋다, 캔자스로 보내 주마. 하지만 조건이 있다. 서쪽 마녀를 없애고 오너라.” “네? 저는 그냥 보통 아이일 뿐인데 어떻게 못된 서쪽 마녀를 없애죠?” 도로시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어요. “넌 이미 동쪽 마녀를 죽였어. 게다가 은 구두와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도 있잖아.” 도로시는 훌쩍거리면서 친구들에게로 가서 힘없이 말했어요. “이제 캔자스로 돌아가긴 다 틀렸어! 나보고 서쪽 마녀를 없애고 오래. 그러지 않으면 캔자스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겠대.” 다음 날은 허수아비가 오즈의 마법사를 만났어요. 그런데 대리석 의자에는 뜻밖에도 왕관을 쓴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었어요. “내가 오즈의 마법사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네, 저는 똑똑한 생각을 하는 뇌를 갖고 싶어요.” “좋다, 가장 좋은 뇌를 줄 테니 서쪽 마녀를 없애고 오너라.” 허수아비 역시 맥 빠진 얼굴로 친구들에게 왔어요. “오즈의 마법사는 여왕처럼 아름다운 여자였어.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서쪽 마녀를 없애고 오면 소원을 들어주겠대.” 다음 날은 양철 나무꾼 차례였어요. 그런데 대리석 의자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괴물이 앉아 있었어요. 온통 털로 뒤덮인 큰 몸뚱이에 팔과 다리가 다섯 개씩 달린 괴물이었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싶어요. 제게 마음을 주세요.” “서쪽 마녀를 없애고 오너라. 그러면 따뜻한 마음을 주마.” 양철 나무꾼 역시 실망한 얼굴로 친구들에게 왔어요. “오즈의 마법사는 팔과 다리가 다섯 개씩이나 달린 괴물이었어.” 다음 날 아침, 마지막으로 겁쟁이 사자가 마법사의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의자 위에는 커다란 머리도, 아름다운 여자도, 괴물도 아닌,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불덩어리가 놓여 있었어요. 사자는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말했어요. “저, 저는 너무 겁이 많아요. 그,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싶어요.”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용기를 주마. 대신 먼저 서쪽 마녀를 없애야만 한다.” 사자는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있는 얼굴로 방에서 나왔어요. “오즈의 마법사는 시뻘건 불덩어리야. 정말 무서워서 혼났어!” 도로시가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서쪽 나라로 가서 못된 마녀를 없애는 수밖에 없어.” “그래! 모두 힘을 합하면 못된 마녀 하나쯤은 없앨 수 있을 거야.” 이렇게 해서 도로시와 친구들은 서쪽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나기로 했어요. 윙키의 나라. 도로시와 친구들은 문지기에게 안경을 돌려주며 물었어요. “서쪽 마녀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해가 지는 쪽에 있다고 들었을 뿐 나도 잘 몰라요. 윙키의 나라로 가면 서쪽 마녀가 당신들을 노예로 삼으려고 찾아올지도 모르죠. 서쪽 마녀는 윙키들을 잡아 노예로 부리고 있거든요.” “우리는 절대로 마녀의 노예가 되진 않을 거예요!” 허수아비가 흥분하여 소리쳤어요. “아무튼 잘해 봐요. 서쪽 마녀는 성질이 몹시 고약하니 조심하고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해가 지는 쪽을 향해 열심히 걸었어요. 서쪽으로 갈수록 길도 험하고 햇볕도 너무 따가웠어요. “아, 힘들어. 잠시만 쉬었다 가자.” 한참을 걷던 도로시와 친구들은 풀밭에 주저앉아 아픈 다리를 주물렀어요. 그러다 도로시와 토토, 사자는 지쳐서 잠이 들었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지키고 있었어요. 서쪽 마녀는 눈을 하나밖에 쓸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눈은 마법의 눈이어서 망원경처럼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었어요. 그날도 서쪽 마녀는 성안에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도로시와 친구들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화가 난 서쪽 마녀는 은 피리를 불어 늑대들을 모았어요. “너희들은 저 풀밭으로 가서 침입자들을 죽여 버려라!” 늑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로시와 친구들이 쉬고 있는 풀밭으로 달려갔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늑대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어요. “저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해치울 수 있어.” 양철 나무꾼은 도끼를 휘둘러 늑대들을 모두 해치웠어요. 실컷 자고 눈을 뜬 도로시는 죽은 늑대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가 자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고마워,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늑대들이 모두 죽은 것을 알고 서쪽 마녀는 화가 나서 펄펄 뛰었어요. 서쪽 마녀는 다시 은 피리를 불어 까마귀 떼를 불러들였어요. “까마귀들아, 저 풀밭에 있는 놈들의 눈을 쪼아 버려라!” 까마귀들은 도로시와 친구들을 향해 날아갔어요. 이번에는 허수아비가 나섰어요. “모두 엎드려 있어. 까마귀 같은 건 내가 해치울 테니까!” 허수아비는 제일 먼저 덤벼드는 까마귀 대장의 목을 잡아 비틀었어요. 다음에 덤비는 놈도, 또 그다음에 덤비는 놈도 모두 그렇게 죽고 말았어요. 늑대에 이어 까마귀까지 모두 죽자 서쪽 마녀는 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어요. 서쪽 마녀가 다시 은 피리를 불자 이번에는 수많은 벌 떼가 몰려들었어요. “벌 떼들아, 저 풀밭에 있는 놈들을 독침으로 쏘아 죽여라!” 벌들은 붕붕거리며 풀밭으로 날아갔어요. “내 몸속에 있는 밀짚을 다 꺼내서 도로시와 토토와 사자에게 덮어 줘!” 허수아비가 소리치자, 양철 나무꾼이 재빨리 허수아비의 말대로 했어요. 벌들은 양철 나무꾼을 향해 새까맣게 덤벼들었어요.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들의 침만 부러질 뿐이었어요. 침이 부러진 벌들은 양철 나무꾼 주위에 떨어져 죽었어요. 양철 나무꾼은 밀짚을 모아 다시 허수아비의 몸에 꼼꼼히 채워 주었어요. 녹아 버린 서쪽 마녀. 서쪽 마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금빛 모자가 있었지!’ 금빛 모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날개 달린 원숭이를 세 번 불러낼 수 있었어요. 마녀는 금빛 모자를 쓰고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어요. 그러자 큰 날개가 달린 원숭이들이 나타났어요. 그중에서 가장 큰 대장 원숭이가 서쪽 마녀 앞으로 나섰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명령만 내리십시오. 하지만 이번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입니다.” “내 땅에 들어온 낯선 놈들을 없애 버려라! 단, 사자만은 산 채로 끌고 오너라. 내가 말 대신 타고 다닐 테니까.” 날개 달린 원숭이들은 도로시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훨훨 날아갔어요. 원숭이들은 먼저 양철 나무꾼을 잡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바위 위에 힘껏 내던졌어요. 양철 나무꾼은 몸이 납작하게 찌그러진 채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원숭이들은 허수아비를 잡아서 몸속에 있는 밀짚을 모조리 꺼내고 모자와 옷과 장화를 갈가리 찢어서 높은 나무에 걸어 놓았어요. 그물로 잡은 사자는 밧줄로 꽁꽁 묶어 서쪽 마녀의 성으로 끌고 갔어요. 그런데 원숭이들은 북쪽 마녀의 입맞춤 자국이 있는 도로시에게는 달려들지 않았어요. “착한 마녀의 입맞춤 자국이 있는 사람을 해치면 큰일 나!” 원숭이들은 토토를 품에 안고 있는 도로시를 데리고, 서쪽 마녀의 성으로 날아갔어요. “모두 명령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녀만은 우리도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 당신은 두 번 다시 우리를 불러낼 수 없습니다!” 서쪽 마녀에게 이렇게 말한 원숭이 대장은 부하들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어요. 서쪽 마녀는 도로시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입맞춤 자국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도로시가 신고 있는 은 구두에도 굉장한 마법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도로시가 은 구두의 마법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마음을 놓았어요. 서쪽 마녀는 부엌으로 도로시를 데리고 갔어요. “오늘부터 이 부엌에서 일하도록 해라. 앞으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도 네 친구들처럼 만들어 줄 테다.” 그날부터 서쪽 마녀는 어떻게 하면 도로시가 신고 있는 은 구두를 자기 손에 넣을까 궁리했어요. ‘은 구두만 있으면 지금보다 훨씬 큰 마법의 힘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서쪽 마녀가 가만히 보니 도로시는 잘 때와 목욕할 때만 은 구두를 벗었어요.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도 은 구두를 손에 넣을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서쪽 마녀는 어둠과 물을 가장 두려워했거든요. 한참을 궁리하던 서쪽 마녀는 마침내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어요. 부엌 입구에 몰래 쇳덩이를 갖다 놓은 다음, 마법을 걸어 눈에 보이지 않게 했어요. ‘도로시가 쇳덩이에 걸려서 넘어지기만 기다리면 돼.’ 그러던 어느 날, 도로시는 서쪽 마녀가 바라던 대로 쇳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져 은 구두 한 짝이 벗겨졌어요. 그때, 부엌 한구석에 숨어 있던 서쪽 마녀가 재빨리 달려 나와 은 구두를 낚아챘어요. 은 구두를 빼앗긴 도로시는 화가 나서 소리쳤어요. “내 구두예요. 이리 주세요!” “무슨 소리! 이제 이건 내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나머지 한 짝도 내놔!” “당신은 정말 못된 마녀로군요!” 약이 바짝 오른 도로시는 옆에 있던 물통을 들어 서쪽 마녀에게 물을 확 끼얹었어요. “으아악!”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물을 다 뒤집어쓴 서쪽 마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어요. 그러더니 서쪽 마녀의 몸이 차츰 오그라들기 시작했어요. “너 같은 어린아이에게 당하다니, 분하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서쪽 마녀는 흐물흐물 녹아 버렸어요. 그 자리에는 은 구두 한 짝만 남아 있었어요. 금빛 모자. 도로시는 은 구두를 깨끗이 닦아 신고 우리에 갇혀 있는 사자를 풀어 주었어요. 그리고 거리로 나가 윙키들에게 못된 마녀가 녹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서쪽 마녀가 죽었어요! 여러분은 이제 자유의 몸이에요!” 그 소식에 윙키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어요. “양철 나무꾼과 허수아비는 어떻게 하지?” 사자가 도로시에게 하는 말을 듣고 윙키들이 나섰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윙키들은 바위 위에 있던 양철 나무꾼을 성으로 옮겨 왔어요. 그런 다음 솜씨 좋은 양철 기술자들이 찌그러진 양철 나무꾼을 뚝딱뚝딱 펴고, 부러진 데는 다시 이어 주고, 구멍 난 곳은 땜질해 주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칠을 하자 양철 나무꾼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양철 나무꾼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자 도로시는 녹슬까 봐 재빨리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다음으로 도로시와 친구들은 윙키들과 함께 허수아비를 찾아 나섰어요. 제일 먼저 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던 허수아비의 모자를 찾았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졌던 허수아비의 옷도 주웠어요. 솜씨가 좋은 윙키들이 옷을 모아 꼼꼼히 꿰매 주었어요. 그리고 그 속에 새 밀짚을 채워 넣었어요. 머리와 몸통을 붙이고 모자를 씌우자 허수아비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어요. 이렇게 해서 도로시와 친구들은 다시 모일 수 있었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윙키의 나라에서 며칠 동안 즐겁게 지냈어요. 하지만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다시 떠나야 했어요. 에메랄드시로 떠나기 전날, 도로시는 서쪽 마녀의 성에서 금빛 모자를 발견했어요. “어머나, 예쁜 모자네! 내가 쓰고 가야지.” 금빛 모자는 도로시에게 아주 잘 어울렸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윙키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에메랄드시를 향해 길을 떠났어요. 하지만 가고 또 가도 에메랄드시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언제 에메랄드시에 도착하지?” 도로시가 걱정하자, 허수아비가 말했어요. “들쥐 여왕을 불러 도움을 청해 보는 게 어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부르라고 했잖아.” “맞아!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도로시는 큰 소리로 들쥐 여왕을 불렀어요. 그러자 들쥐 여왕이 도로시 앞에 모습을 나타냈어요. “무슨 일이에요, 도로시?” “에메랄드시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들쥐 여왕은 웃으면서 도로시가 쓴 금빛 모자를 가리켰어요. “그 금빛 모자는 마법의 모자예요. 모자 안에 씌어 있는 주문을 외우면 날개 달린 원숭이가 나타날 거예요. 금빛 모자를 가진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세 번까지는 명령을 따르지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들쥐 여왕님.” 들쥐 여왕은 도로시에게 인사를 하고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도로시는 모자 안에 씌어 있는 주문을 외었어요. 그러자 날개 달린 원숭이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왔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원숭이 대장이 도로시에게 물었어요. “우리를 에메랄드시까지 데려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원숭이들 덕분에 도로시와 친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에메랄드시에 도착했어요. 마법사의 속임수. 도로시와 친구들은 오즈의 마법사가 있는 성으로 갔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즈의 마법사는 도로시와 친구들을 만나 주지 않았어요. “시키는 대로 서쪽 마녀까지 없애고 왔잖아. 그런데 왜 만나 주지 않는 거지? 오즈의 마법사님이 우리를 만나 주지 않으면, 날개 달린 원숭이를 불러 혼내 줄 거야.” 화가 난 허수아비가 하녀에게 말했어요. 그러자 오즈의 마법사에게서 내일 아침에 만나자는 전갈이 왔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설레는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요. 다음 날 아침, 오즈의 마법사가 있는 방으로 모두 함께 들어갔어요. 그런데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오즈의 마법사님은 어디 계신 거지?” 도로시와 친구들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높고 둥근 천장에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나는 위대한 마법사 오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모두 천장을 올려다보았으나 마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어디 계시는 거예요, 마법사님?” 도로시가 물었어요. “너희들 눈에 안 보일 뿐 나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와 약속한 것만 지켜 주신다면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도로시가 다시 말했어요. “약속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서쪽 마녀를 죽이면 우리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흠, 내가 분명히 그런 약속을 했단 말이지? 그럼, 내일 다시 오너라. 그동안 생각을 좀 해 볼 테니까.” “또 내일 오라고요? 우리가 서쪽 나라에 가 있는 동안 충분히 생각하셨잖아요! 빨리 약속을 지키세요!” 화가 난 사자가 으르렁거렸어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토토가 후닥닥 달아나다가 구석에 세워 놓은 병풍을 넘어뜨리고 말았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깜짝 놀라 입이 딱 벌어졌어요. 병풍 뒤에 머리가 벗겨지고 키가 아주 작은 노인이 서 있었거든요. “당신은 누구요?” 양철 나무꾼이 도끼를 치켜들며 소리쳤어요. “나, 나는 오, 오즈의 마법사다. 제발 도끼로 내려치지만 말아 다오.” 노인은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아니, 위대한 마법사 오즈가 바로 당신이라고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벌벌 떨고 있는 노인의 모습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미안하구나. 난 지금까지 너희들을 속여 왔어.” 노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왜 우릴 속였죠?”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어요. “제발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라. 다들 나를 위대한 마법사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마법사가 아닌가요?” 도로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사기꾼이지!” 허수아비가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 허수아비 말이 맞아. 난 사기꾼이야.” 노인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었죠?” 도로시의 물음에 노인은 도로시와 친구들을 작은 방으로 데려갔어요. 그곳에는 도로시와 친구들이 보았던 바위처럼 큰 머리 모양의 탈, 짐승의 털가죽, 아름다운 여자의 옷, 기름에 젖은 솜뭉치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을 철사로 조종하면서 병풍 뒤에 숨어 목소리만 약간씩 바꿨지.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나를 마법사로 믿었어.” “사실 나는 오마하의 서커스단에서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이었단다.” 노인은 한숨을 푹 쉬며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열기구를 타게 되었어. 그런데 밧줄이 끊어져서 땅으로 다시 내려갈 수가 없었어. 열기구는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날아왔어. 사람들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위대한 마법사가 왔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사람들이 믿는 대로 내버려 두었어. 아름다운 이 땅이 마음에 들었거든. 나는 사람들을 시켜 길을 닦고 성을 지었지. 그게 바로 이 에메랄드시야. 그런 다음, 모든 것이 에메랄드처럼 녹색으로 보이도록 사람들에게 녹색 안경을 쓰게 했지. “아니, 그럼 에메랄드시의 모든 것이 녹색이 아닌가요?” 녹색 안경을 썼기 때문에 녹색으로 보이는 것뿐이야. 여기 살면서 그런대로 행복했는데,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있었단다. 그건 바로 진짜 마녀들이야. 마녀들은 정말로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으니까. 아마 내게 마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못된 마녀들은 이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을 거야. 이제 너희들 덕분에 못된 마녀들이 모두 죽었으니 그런 위험도 사라졌어. 너희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럼 저는 이제 똑똑한 생각을 하는 뇌를 갖지 못하는 건가요?” 허수아비가 맥 빠진 얼굴로 물었어요. “넌 이미 충분히 똑똑해. 많은 일을 겪으면서 다양한 것을 배웠거든. 그래도 뇌가 필요하다면 내일 아침에 다시 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허수아비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어요. “전 어떻게 되는 거죠? 따뜻한 마음을 꼭 갖고 싶어요.” 양철 나무꾼이 말했어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불행하게 되는 일도 많은데. 그래도 필요하다면 너도 내일 아침에 와 봐.” 양철 나무꾼도 허수아비처럼 좋아했어요. “저는 용기를 갖고 싶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사자도 질세라 나섰어요. “용기가 뭐 별다른 건가? 용기란 두려워하면서도 위험에 맞서는 거야. 그런 면에서 넌 이미 충분히 용기를 가졌어. 그런데도 용기가 더 필요하다면 너도 내일 아침에 오라고.” 사자도 큰 몸뚱이를 흔들며 기뻐했어요. “제 소원도 들어주세요. 캔자스로 보내 준다고 하셨잖아요.” 도로시가 야무지게 말했어요. 그러자 노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어요. 글쎄,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너도 친구들과 함께 내일 와 봐.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내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말하지 말아 다오. 그동안 날 믿어 왔는데 얼마나 실망이 크겠니? “알았어요! 말하지 않을게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입을 모아 약속했어요. 다음 날, 도로시와 친구들은 다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갔어요. 오즈의 마법사는 약속대로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사자에게 선물을 주었어요. 허수아비에게는 왕겨 속에 바늘과 핀을 섞은 뇌를 주었고, 양철 나무꾼에게는 빨간 비단으로 만든 마음을 주었어요. 그리고 사자에게는 녹색 물약을 마시게 했어요. 친구들 모두 기뻐했지만 도로시는 시무룩했어요. 오즈의 마법사가 캔자스로 가는 방법은 아직 생각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도로시는 영원히 캔자스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몹시 불안해하며 며칠을 기다렸어요. 나흘째 되는 날, 오즈의 마법사가 도로시를 불렀어요. “도로시, 캔자스로 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오즈의 마법사가 환한 얼굴로 말했어요. “그게 뭐죠? 빨리 얘기해 주세요.” 도로시는 기뻐서 재촉했어요.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열기구를 타고 에메랄드시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을 건너가는 거야. 사막만 건너면 캔자스로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어. 물론 사막에 떨어질 위험을 각오해야 하겠지만 나와 함께 가 보자꾸나.” “마법사님도 여길 떠나실 건가요?” 도로시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래, 나도 이제 고향에 가고 싶어. 사람들을 계속 속이는 것도 미안하고 못된 마녀들도 없어졌으니 내가 떠나도 괜찮을 것 같아.” “좋아요! 그럼 우리 함께 열기구를 만들어요.” 도로시와 오즈의 마법사는 녹색 천을 잘라 바느질을 해서 열심히 열기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이 탈 만한 큰 바구니를 끈으로 매달았어요. 떠날 준비가 끝나자 오즈의 마법사는 에메랄드시 사람들을 성 앞에 모두 모이게 했어요. 성 앞에는 양철 나무꾼이 베어 온 장작이 불에 타고 있었어요. 장작이 타면서 생기는 뜨거운 공기를 열기구 주머니에 채워 넣기 위해서였어요. 열기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자 오즈의 마법사는 재빨리 바구니에 올라탄 뒤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나는 구름 위에 사는 동생 마법사를 만나러 떠난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지혜로운 허수아비가 이 에메랄드시를 다스릴 테니 그의 말을 잘 따르기 바란다.” 이윽고 열기구 주머니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채워졌어요. “빨리 타, 도로시!” 마법사가 도로시에게 소리쳤어요. “네, 알았어요!” 그런데 토토가 보이지 않았어요. 토토는 새끼 고양이를 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토토! 이리 와!” 토토를 간신히 붙잡은 도로시는 열기구 쪽으로 달려갔어요. 하지만 불과 두세 걸음 남았을 때 열기구를 매어 놓았던 밧줄이 탁 끊어졌어요. 열기구는 곧장 하늘 높이 떠올랐어요. “안 돼! 나도 데려가요!” 도로시가 애타게 불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나도 이젠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하다, 도로시. 안녕!” 오즈의 마법사를 태운 열기구는 금세 멀리 날아가 버렸어요. 도로시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큰 소리로 울었어요. “울지 마, 도로시. 날개 달린 원숭이들을 불러 보자.” 허수아비가 도로시를 달래며 말했어요. 도로시는 날개 달린 원숭이를 불러 캔자스에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대장 원숭이는 고개를 저었어요. 날개 달린 원숭이들은 오즈의 나라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도로시는 너무나 실망해서 눈물을 글썽였어요. 그때, 문지기 병사가 도로시에게 다가와 말했어요. “남쪽 마녀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도로시는 곧 남쪽 마녀를 만나러 떠나기로 했어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사자도 함께 가겠다고 했어요. “모두 정말 고마워.” 도로시는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다시 캔자스로. 도로시와 친구들은 에메랄드시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곧 남쪽 나라로 떠났어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허수아비의 지혜, 사자의 용기 그리고 양철 나무꾼의 도끼로 해결해 나갔어요. 어느 숲속을 지나다가 약한 동물들이 괴물의 습격을 받는 것을 보자, 사자가 용감하게 나서서 구해 주었어요. “사자 님, 부디 우리의 왕이 되어 이 숲을 다스려 주세요.” 동물들이 사자 앞에 엎드려 간청했어요. 사자는 도로시가 캔자스로 무사히 돌아간 다음, 그들의 왕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정말 길고도 지루한 여행이었어요. 걷고 또 걸어도 남쪽 나라는 보이지 않았어요. 모두 지쳐서 주저앉았을 때 허수아비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아, 금빛 모자가 있었잖아! 날개 달린 원숭이에게 부탁해 보자.” “맞아, 그 생각을 왜 여태 못 했지?” 도로시는 주문을 외어 날개 달린 원숭이들을 불렀어요. “우리를 남쪽 나라로 데려다주세요.” 원숭이들은 도로시와 친구들을 안고 순식간에 남쪽 나라로 데려다주었어요. “고마워요, 이제 다시는 당신들을 부를 일이 없을 거예요.” “잘 가요, 몸조심하세요.” 원숭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높이 날아서 사라졌어요. 도로시와 친구들은 곧바로 남쪽 마녀를 찾아갔어요.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요?” 남쪽 마녀가 상냥하게 물었어요. “전 캔자스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몹시 슬퍼하고 계실 거예요.” “당신이 신고 있는 은 구두에 부탁하면 돼요. 은 구두는 세상 어디든 데려다주는 힘을 지녔거든요.” 남쪽 마녀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어요. “뒤꿈치를 세 번 부딪치면서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돼요.” 도로시는 빨리 캔자스로 돌아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만나고 싶었어요. 그러나 친구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무척 슬펐어요. “그동안 고마웠어. 너희처럼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 “도로시, 우리도 너를 만나 행복했어.” “그럼, 모두 잘 지내. 안녕!” 도로시는 토토를 안고 은 구두 뒤꿈치를 ‘탁! 탁! 탁!’ 하고 세 번 부딪치며 소리쳤어요. “날 캔자스로 데려다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로시는 하늘로 붕 떠올라 순식간에 캔자스에 도착했어요. “아, 드디어 캔자스에 왔다. 우리 집에 왔어! 아저씨, 아주머니! 도로시가 돌아왔어요!” 어느새 은 구두는 사라지고, 도로시는 풀밭을 달려가며 집을 향해 소리쳤어요. 토토도 신이 나서 멍멍 짖어 대며 그 뒤를 따라갔어요. 도로시의 소리를 듣고 헨리 아저씨와 엠 아주머니가 달려 나왔어요. “도로시, 정말 도로시가 맞구나!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니?” “오즈의 나라에 다녀왔어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지요. 나중에 모두 이야기해 드릴게요. 집으로 돌아와서 정말 정말 기뻐요!”
정글북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정글의 어린아이. 몹시 더운 저녁, 시오니 언덕 위의 아빠 늑대가 낮잠에서 깨어났어요. 아빠 늑대는 몸을 긁으며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두 다리를 굽혔다 폈다 했어요. 엄마 늑대는 ‘크릉크릉’ 코를 골면서 재롱을 부리는 네 마리의 새끼들 틈에 누워 있었어요. 그날따라 무척 밝은 달빛이 늑대들이 살고 있는 동굴 입구를 환히 비추고 있었어요. “이제 사냥하러 가야겠군.” 아빠 늑대는 달빛을 보며 중얼거렸어요. 그리고 막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어요. 텁수룩한 꼬리를 가진 작은 그림자가 쑥 들어오며 슬프게 말했어요. “늑대 님의 귀한 새끼들에게 튼튼한 이빨과 행운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저처럼 배고픈 동물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접시 핥는 놈’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칼 타바키였어요. 늑대들은 타바키를 업신여겼어요. 타바키가 남의 잘못이나 비밀을 들추어서 동물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게 하고, 항상 남들이 먹던 찌꺼기나 가죽 조각을 주워 먹기 때문이었어요. “먹을 것은 하나도 없어. 하지만 들어와서 찾아봐라.” 아빠 늑대가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늑대한테야 그렇지 저에게는 말라빠진 뼈다귀도 좋은 먹이지요.” 타바키는 늑대 굴속에 들어와 사슴 뼈다귀를 찾아 맛있게 먹었어요. 그러고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어요. “이렇게 좋은 먹이를 주셔서 고마워요. 글쎄, 시어 칸이 사냥터를 옮겼지 뭐예요. 이번 달에는 이 언덕에서 사냥을 한다고 하더군요!” 시어 칸은 여기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와잉궁가 강가에 사는 늙은 호랑이였어요. 아빠 늑대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어요. “건방진 놈! 의논도 없이 제 맘대로 사냥터를 옮겨? 그놈이 오는 날엔 사냥감들이 무서워 도망가고 말 거야. 게다가 난 요즘 새끼들과 엄마 늑대의 몫까지 사냥해야 한단 말이야.” 새끼 늑대들을 돌보던 엄마 늑대가 조용히 말했어요. “시어 칸의 어미는 그놈이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라서 그놈을 ‘절름발이’라고 불렀어. 그놈은 사람이 기르는 동물밖에 못 잡아먹지. 그래서 와잉궁가 마을 사람들이 그놈에게 잔뜩 화가 나 있는데, 시어 칸이 이리로 오면 여기 사람들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만약에 시어 칸을 찾으려고 정글에 불을 지르기라도 한다면 우린 새끼들을 데리고 도망가야 해.” “시어 칸 그놈이.” “그 말을 제가 전할까요?” 타바키가 말하자, 아빠 늑대는 호통을 쳤어요. “나가! 네 주인 시어 칸하고나 놀아. 더는 해 끼치지 말고!” “갈 겁니다, 가지요! 저 아래에서 시어 칸의 울음소리가 들리네요. 제가 일부러 전할 필요도 없겠군요.” 아빠 늑대는 귀를 기울였어요. 계곡 밑에서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오늘은 먹이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것 같았어요. “멍청한 놈! 저렇게 고함을 치며 사냥하는 놈도 있을까?” 아빠 늑대가 비꼬자, 엄마 늑대가 말했어요. “아니야, 오늘 저놈은 사람을 노리고 있어.” “저 못된 놈이 우리 구역에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정글에는 법칙이 있었어요.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면 사람들이 총과 횃불을 들고 정글로 몰려오기 때문이었어요. 얼마 지나자, 다시 시어 칸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또 실패했군. 어떻게 된 일일까?” 아빠 늑대는 멀리 있는 시어 칸을 발견했어요. “멍청한 놈, 사냥꾼의 모닥불에 발을 덴 모양이군. 타바키도 같이 있는가 본데.” 엄마 늑대가 한쪽 귀를 세우며 말했어요. “잠깐, 조용히 해. 누군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어.”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빠 늑대는 달려들 기세로 허리를 낮추어 뛰어올랐어요. 아빠 늑대는 1미터쯤 뛰어오르다가 이내 주저앉으며 소리쳤어요. “사람이다, 사람의 아이다!” 이제 겨우 막 걸음마를 시작한 듯한 갈색 피부의 벌거숭이 사내아이였어요. 지금껏 이렇게 어두운 밤에 어린아이가 늑대 굴 근처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빠 늑대는 어린아이를 보며 살짝 웃었어요. 그때 엄마 늑대가 다가오며 말했어요. “사람의 새끼야? 난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리 좀 데려와 봐.” 아빠 늑대가 아이의 등을 살짝 물더니 이빨 자국 하나 내지 않고 새끼들 사이에 내려놓았어요. “참 예쁘게 생겼네. 우리가 무섭지 않은가 봐.” 엄마 늑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어머! 내 젖을 먹고 있어. 이것이 사람의 새끼라니! 지금껏 늑대가 사람의 새끼를 키웠다는 이야기 들어 봤어?”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우리 무리에선 아마 없을 거야.” 아빠 늑대가 말했어요. 그때, 시어 칸이 동굴 입구를 막아섰어요. “시어 칸,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아빠 늑대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어요. “내 먹이 때문이지. 지금 막 들어온 어린아이를 이리 내놔.” 시어 칸은 발을 데어 성질이 사나워져 있었어요. 동굴 입구가 좁아서 시어 칸은 더는 들어오지 못했어요. “시어 칸, 우리 늑대는 자유로운 무리야. 우리가 왜 너 같은 얼룩 가죽 동물의 말을 따르겠나?” “잘도 지껄이는군. 하지만 그건 내 먹이야 !”시어 칸은 천둥처럼 으르렁거렸어요. 엄마 늑대가 나섰어요. “이봐, 사람의 새끼는 내 거야! 이 아이는 우리와 함께 뛰어다니고, 우리와 함께 사냥할 거야! 그리고 나중엔 조심해야 할 거야! 털도 나지 않은 새끼나 가축 따위를 잡아먹는 너를 이 아이가 사냥하고 말 테니까. 어서 꺼져!” 아빠 늑대는 깜짝 놀라 엄마 늑대를 쳐다보았어요. 시어 칸은 아빠 늑대와 맞서 싸울 수는 있지만, 엄마 늑대와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새끼가 있는 엄마 늑대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게 뻔했기 때문이었어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자 시어 칸은 그냥 사라졌어요. 시어 칸이 사라지자, 엄마 늑대는 숨을 헐떡이며 새끼들 사이에 주저앉았어요. 아빠 늑대가 엄마 늑대에게 말했어요. “정말 이 아이를 키우려고? 그렇다면 우리 무리에게 이 아이를 한 번은 보여야 해.” 그러자 엄마 늑대는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당연하지, 키울 거야! 우리가 기르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 게다가 저 아이는 우리를 무서워하지도 않아. 옳지! 저 아이를 ‘모글리’라고 부르자. 귀여운 개구리라는 뜻이야. 모글리는 자라서 꼭 시어 칸을 쫓아낼 거야.” 매월 보름달이 뜨면 늑대들의 회의가 열렸어요. 그때 늑대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모두에게 인사를 시켰어요. 그러고 나서야 새끼들은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어요. 드디어 보름달이 뜨고 회의가 열리는 날이 되었어요. 아빠 늑대는 새끼들과 모글리, 엄마 늑대를 데리고 회의가 열리는 바위산으로 갔어요. 높은 바위에 고독한 늑대 ‘아켈라’가 있었어요. 아켈라는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로 두 번이나 사람이 놓은 덫에 걸렸다 살아났어요. 그래서 사람의 행동과 버릇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새끼 늑대들은 모임 장소 한 곳에서 구르고 뛰며 놀았어요. 어른 늑대들은 가끔 새끼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바위 위에 있던 아켈라는 이따금 큰 소리로 새끼들을 향해 말했어요. “너희는 이제 정글의 법칙을 배워야 하니 잘 봐 둬라!” 그때 아빠 늑대가 모글리를 가운데로 내보냈어요. 엄마 늑대는 초조해서 목덜미 털이 곤두섰어요. 그때 바위산 뒤에서 시어 칸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그 아이는 내 것이다. 너희는 자유로운 무리니 사람 아이는 필요 없겠지? 그러니 나에게 돌려 다오.” 정글의 법칙에 따르면 새끼를 무리에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다른 의견이 있을 때는 부모 빼고 무리 가운데 두 마리가 찬성해야 했어요. “이 아이가 우리 무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찬성하는 자는 없는가?” 아켈라가 이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대답하는 늑대는 없었어요. 그때 한 마리의 동물이 일어섰어요. 그 동물은 늑대가 아닌데도 이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은 잠꾸러기 곰 ‘발루’였어요. 발루는 새끼 늑대들에게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나무뿌리, 열매, 벌꿀만 먹기 때문에 어디든지 자유로이 드나들었어요. “난 찬성해요. 사람의 아이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다른 새끼들에게 하듯이 내가 잘 가르칠게요.” 발루의 말에 아켈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발루의 뜻은 잘 알겠다. 또 누구 찬성하는 자 없나?” 바로 그때, 검은 표범 ‘바기라’가 늑대들 사이로 몸을 내밀었어요. 달빛에 비친 바기라의 검은 털이 더욱 반짝였어요. 바기라는 교활하기로는 타바키에 뒤지지 않고, 힘에서는 물소에 지지 않고, 성급한 성미는 상처 난 코끼리와 같았어요. 바기라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어요. “자유로운 늑대들이여! 난 이 회의에 끼어들 자격은 없어요. 하지만 정글의 법칙에 따르면 새로운 새끼에 대해 문제가 일어날 경우,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는 한 값을 치르고 그 새끼의 목숨을 살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털도 없는 새끼를 죽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에요. 이 아이는 여러분의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여러분이 이 아이를 무리에 넣어 준다면 내가 황소 한 마리를 주겠어요.” 그러자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소리쳤어요. “좋은 생각이야! 저 아이는 겨울비를 맞아 얼어 죽지 않으면 햇볕에 타서 죽을 거야. 벌거벗은 개구리를 죽일 순 없지. 우리 무리에 넣어 함께 사냥을 시키자. 그건 그렇고 바기라, 황소는 어디 있지?” 아켈라가 힘차게 외쳤어요. “잘 봐라! 저 아이가 언젠가는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시어 칸은 어둠 속에서 계속 울부짖었어요. 모글리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억울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자 바기라가 수염을 움직이며 말했어요. “그래, 실컷 울어라. 언젠가는 이 벌거숭이 아이가 너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아켈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그래, 이 아이가 언젠가 우리를 도와줄 때가 있을 거야. 자, 이 아이를 데리고 가도 좋다. 늑대의 무리로 부끄럽지 않게 길러라.” 이렇게 하여 모글리는 검은 표범 바기라와 곰 발루 덕분에 시오니 늑대 무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정글의 법칙. 그 뒤로 11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모글리는 새끼 늑대들과 함께 자랐어요. 어느새 모글리는 풀의 살랑거림, 후텁지근한 밤바람, 올빼미 울음소리, 연못에서 뛰노는 물고기의 소리 등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모글리는 배우지 않을 때는 양지에서 잠을 잤고, 더울 때면 숲속 연못에서 헤엄치며 놀았어요. 벌꿀과 나무 열매가 맛있다는 것은 발루가 가르쳐 주었어요. 바기라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바기라는 늘 나뭇가지에 누워서 불렀어요. “모글리, 이리 오렴!” 모글리는 처음에는 나무늘보처럼 철썩 달라붙어 있었지만, 나중에는 긴꼬리원숭이에 지지 않을 정도로 가지에서 가지로 잘 뛰어다녔어요. 또 모글리는 늑대들의 회의에도 참석하고, 늑대들의 발바닥에 박힌 가시도 뽑아 주었어요. 밤이면 모글리는 언덕을 넘어 밭에 가서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모글리는 사람을 믿지 않았어요. 바기라가 덫에 대해 가르쳐 주었던 것이었어요. 모글리에게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일은 바기라와 함께 숲속에서 낮잠을 자고, 밤이 되면 바기라가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어요. 모글리는 바기라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배웠어요. 어느 날, 바기라는 모글리에게 이렇게 가르쳤어요. “이 정글에 있는 모든 것을 사냥해도 좋다. 하지만 너의 생명과 바꾼 황소만은 죽여서도 안 되고 먹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발루는 모글리에게 숲과 물의 법칙도 가르쳤어요. 그것은 썩은 나무를 구별하는 법과 벌을 만났을 때 벌에게 쏘이지 않는 법, 낮잠 자는 박쥐를 깨웠을 때 인사하는 법, 물뱀이 사는 연못에 뛰어드는 법 등이었어요. 모글리는 남의 사냥터에서 사냥할 때 쓰는 말도 배웠어요. 정글의 동물들이 남의 사냥터에서 사냥할 때는 그곳 동물들의 대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부탁해야 했어요. 이렇게 말이에요. “나는 배가 고픕니다. 이곳에서 사냥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모글리는 똑같은 것을 여러 번 배우는 것이 지겨워졌어요. 그래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발루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어요. 모글리는 울면서 나무 위로 달아나 버렸어요. 그러자 발루는 한숨을 쉬며 바기라에게 말했어요. “모글리는 사람의 아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정글의 법칙을 빠짐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아직 어리잖아!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깨우칠 수 있겠니?” 그러자 발루가 말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해를 입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아. 나는 지금 그 아이에게 정글의 암호를 가르쳐 주고 있지. 그걸 알면 정글 어디에서도 안전하게 몸을 보호할 수 있어.” “그렇겠군. 하지만 어린아이가 너무 아프지 않도록 해. 그런데 암호란 무엇이지?” “모글리가 직접 말해 줄 거야. 모글리, 이리 오너라!” 그러자 모글리는 나무에서 내려왔어요. 발루는 다정한 눈빛으로 모글리에게 암호를 외워 보라고 했어요. 모글리는 언제 혼이 났냐는 듯 바기라에게 곰의 말, 솔개의 말, 뱀의 말로 외쳤어요. “너와 나,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다!” “이제 저 아이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발루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모글리가 바기라의 등에 올라타더니 자기 말을 들어 보라고 바기라의 어깨 털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옆구리를 차기도 했어요. “나는 나뭇가지 사이로 내 편을 이끌고 뛰어다니며 늙은 발루에게 나뭇가지나 진흙을 집어 던질 거야. 모두 나와 함께 해 준다고 약속했어.” “이놈!” 발루가 소리치며 바기라의 등에서 모글리를 끌어 내렸어요. 납치된 모글리. 발루는 앞발로 모글리를 붙들고 화를 내며 말했어요. “모글리, 너 저 회색 원숭이들과 함께 놀았지? 그놈들은 법칙도 없고 먹기만 한다. 그놈들과 어울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야!” 그러자 모글리가 울먹이면서 말했어요. “내가 발루에게 얻어맞으니까 회색 원숭이들이 불쌍하다고 달래 주었단 말이야.” 발루는 더욱 화를 내며 말했어요. “그놈들은 거짓말만 한단 말이야. 모글리, 나는 네게 정글의 모든 법칙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놈들에겐 법칙이 없어. 정글에 사는 자들은 그런 놈들과는 절대로 상대하지 않아. 모글리, 저놈들만은 절대 가까이하면 안 돼.” 발루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어요. 원숭이들은 나무 위에서 살았어요. 그들도 두목이나 법칙을 정하긴 했지만, 하루도 못 가 흐지부지되기 일쑤였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기억력이 나빠서 다음 날엔 깨끗이 잊어버리기 때문이었어요. 자기가 한 일이 부끄러워 이제 두 번 다시 원숭이들과 놀지 않기로 다짐하고, 바기라와 발루 사이에 누워 잠이 들었어요. 잠시 뒤 모글리가 잠에서 깨어 보니 팔다리가 작은 손들에 붙잡혀 있었어요. 모글리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나무 아래에서 발루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고, 바기라는 무서운 기세로 나무에 오르고 있었어요. 제일 힘센 원숭이 두 마리가 모글리를 붙잡고, 나무를 단번에 훌쩍훌쩍 넘어갔어요. 원숭이들은 승리를 기뻐하며 바기라가 쫓아오지 못할 높은 나뭇가지로 도망쳤어요. 모글리는 눈앞이 캄캄하고 어지러웠어요. 가끔 아래쪽으로 아른거리는 땅이 보였어요. 모글리는 곧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텐데.’ 모글리는 아래위를 번갈아 보다가 위쪽에서 솔개 치루를 발견했어요. “살았다! 솔개가 날 보고 있었구나!” 솔개 치루는 원숭이가 뭔가를 꼭 껴안고 가는 것을 보았어요. 솔개는 그것이 먹을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 낮게 날아 내려왔어요. 그때 모글리가 치루에게 말했어요. “너와 나,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다! 내가 끌려가는 길을 잘 봐 뒀다가 바기라와 발루에게 알려 줘.” “그런데 너의 이름은 뭐지?” 치루가 물었어요. “나는 모글리야. 모두가 나를 사람의 아이라고 불러!” 모글리가 대답했어요. 발루와 바기라는 너무나 걱정이 되었어요. 발루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어요. “그래, 누구나 무서워하는 것이 있어! 원숭이 놈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비단구렁이 ‘카아’야. 빨리 카아에게 가 보자!” 발루와 바기라는 곧 카아를 찾으러 갔어요. 카아는 똬리를 틀고 햇볕을 쬐고 있었어요. 발루는 카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어요. “오, 발루! 무슨 일로 왔나? 바기라도 왔군.” 그러자 바기라가 말했어요. “원숭이들이 사람의 아이를 납치해 갔어.” “사람의 아이라고? 아, 그 이야기는 고슴도치 이키에게 들었어. 하지만 그놈은 거짓말을 잘해 믿지 않았었지.” 발루가 덧붙여 이야기했어요. “그 아이가 지금 원숭이들에게 잡혀 있어. 그런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가 아닌가?” “그래! 그놈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그놈들을 혼내 줘야겠군.” 카아가 이렇게 말했을 때 위쪽에서 솔개 치루가 외쳤어요. “위! 위! 위를 봐라! 발루! 원숭이 무리 속에 모글리가 잡혀 있어. 그들은 모글리를 ‘차가운 잠자리’로 데려갔어.” “고마워, 치루. 넌 참 친절하구나.” 치루가 말한 ‘차가운 잠자리’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바기라와 발루는 갈 길을 재촉했어요. ‘차가운 잠자리’는 정글 한가운데 버려진 도시였어요. 카아도 가장 빠른 지름길로 그곳을 향해 나아갔어요. 원숭이와의 싸움. 원숭이들은 오후 늦게야 모글리를 차가운 잠자리로 끌고 왔어요. 모글리는 생각에 잠겼어요. ‘발루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어. 원숭이들에겐 법칙도, 두목도 없어. 이놈들은 엉터리 같은 말만 하고, 좀도둑질이나 하는구나. 이건 모두 내 잘못이야. 어떻게든 정글로 돌아가야 해.’ 원숭이들은 모글리를 꼬집기도 하고, 한꺼번에 스무 마리씩 몰려와 소리를 지르기도 했어요. 모글리는 너무나 힘들었어요. ‘이놈들은 잠도 안 자는가 보다.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는구나. 이 틈을 타서 도망가야 할 텐데.’ 그때 성벽 뒤에서 바기라와 카아가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나는 서쪽으로 돌아가서 저 비탈을 따라 재빠르게 덮칠 거다! 아마 그놈들도 수백 마리가 한패가 되어 나를 공격할지 몰라.” 카아는 엄숙한 표정으로 슬슬 서쪽으로 기어갔어요. 그러자 바기라는 원숭이가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가 뛰어다니며 보이는 대로 원숭이를 물어뜯어 죽였어요. “적은 한 마리뿐이다! 죽여라!” 원숭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어요. 그사이 원숭이들이 모글리를 지붕에 난 구멍으로 던져 버렸어요. 하지만 모글리는 발루에게 배운 대로 살짝 뛰어내려서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요. 바기라가 원숭이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자, 모글리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바기라, 물웅덩이로 가! 원숭이들이 물속까지 따라가지는 않을 거야!” 바기라는 이 소리를 듣고, 모글리가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때, 발루가 숨을 헐떡거리며 뒤늦게 도착했어요. 발루는 침착하게 원숭이를 움켜쥐고 무섭게 내리쳤어요. 카아도 나서서 무리를 공격하자 원숭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어요. “카아다, 도망가자!” 그때 바기라가 물에서 나와 카아에게 벽 속에 있는 모글리를 꺼내 달라고 했어요. 카아는 벽 주위를 조사하다가 갈라진 틈을 발견했어요. 그러더니 몸을 한껏 들어 올렸다가 ‘쾅’ 하고 벽을 들이받았어요. 여섯 번째로 들이받았을 때 벽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고, 그 사이로 모글리가 나왔어요. 모글리는 발루와 바기라에게 달려와서 꼭 끌어안았어요. “나 때문에 너무 많이 다쳤잖아! 이 피 좀 봐!” “모글리, 너만 괜찮으면 다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발루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카아에게 감사해야 해. 이건 모두 다 카아 덕분이야.” 발루의 말에 모글리는 카아를 보며 감사의 인사말을 했어요. “오늘 밤부터 너와 나,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다! 오늘 밤은 네 덕분에 살았다. 네가 배고플 때면 언제나 내가 먹이를 구해 주지.” “그거 좋은 말이구나. 용감한 마음과 예의 바른 말, 너는 그것만으로도 정글에서 훌륭히 자랄 것이다. 어두워지고 있군. 어서 돌아들 가거라.” 이렇게 말한 카아는 원숭이들이 벌벌 떨며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어요. 카아는 “쉿이이!”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상한 춤을 추었어요. 그러자 원숭이들이 홀린 듯 카아의 입 속으로 다가갔어요. 바기라와 발루는 모글리를 데리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어요. “말썽꾸러기야, 오늘 너 때문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어. 그건 모두 네가 원숭이 무리와 놀았기 때문이야.” 발루가 모글리를 나무랐어요. 모글리는 고개를 떨구며 잘못을 뉘우쳤어요. “말썽을 부렸으니, 벌을 받아야지.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야.” 바기라는 모글리의 등을 살짝 내리쳤어요. 그러고는 상냥하게 말했어요. “모글리, 내 등에 올라타. 이제 우리 보금자리로 돌아가자.” 정글의 법칙 중 가장 좋은 점은 일단 벌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었어요. 모글리는 늑대 동굴로 돌아와 엄마 늑대 옆에서 깊은 잠에 빠졌어요. 붉은 꽃. 모글리는 여러 번 엄마 늑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어요. “시어 칸 놈은 믿지 말아라. 언젠가는 네가 그놈을 죽여야 할 것이다.” 시어 칸은 모글리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 늘 방해를 했어요. 늑대 두목인 아켈라가 나이를 먹어 힘이 없어지자, 시어 칸이 젊은 늑대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부추겼어요. “너희 같은 훌륭한 사냥꾼이 왜 늙은 늑대와 사람 아이에게 꼼짝 못 하는지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바기라도 시어 칸의 낌새가 수상해서 모글리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었어요. “모글리, 시어 칸은 언젠가 너를 노릴 거야.” 하지만 그때마다 모글리는 웃으며 말했어요. “나에게는 친구들이 많아. 재빠른 너와 느림보 발루가 날 도와줄 텐데, 뭐! 난 조금도 무섭지 않아.” 어느 몹시 더운 날이었어요. 모글리는 숲에서 바기라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어요. 바기라는 문득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글리, 시어 칸이 너의 적이란 말을 여러 번 들었지?” “응, 여러 번 들었어.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거야? 난 지금 무척 졸려. 자고 싶어.”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 말을 들어 봐. 시어 칸 놈이 너를 죽일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의 두목인 아켈라는 나이가 들어 이제 수사슴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거야. 그러면 우리의 두목일 수가 없지. 거기다 맨 처음 너를 우리 무리에 넣어 주기 위해 늑대 회의에 참석한 늑대들도 모두 늙어 버렸어. 그러니 시어 칸의 부추김을 받은 젊은 늑대들은 널 더 이상 무리에 넣어 주지 않을 거야. 그럼 너는 정말 사람이 되고 마는 거야.” “사람은 어째서 정글의 무리와 사냥을 하면 안 되는 거지? 나는 정글에서 살면서 정글의 법칙을 지켜 왔어. 발에 박힌 가시를 내 손으로 뽑아 주지 않은 늑대는 한 마리도 없을 거야. 우리는 모두 형제란 말이야.” 바기라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나서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어요. “난 사람이 사는 곳에서 태어났어. 엄마가 죽은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지. 내가 정글에서 시어 칸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는 건 사람의 행동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야.” “맞아, 정글 속에서 바기라를 무서워하지 않는 놈은 없어. 무서워하지 않는 건 오직 나뿐이야.” “그것은 네가 사람의 아이이기 때문이야. 내가 정글로 다시 온 것처럼 너도 언젠가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그때까지 늑대 회의에서 죽지 않는다면 말이야.” “왜 날 죽이려는 걸까?” “나를 똑바로 봐.” 바기라가 말했어요. 모글리가 바기라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바기라는 단 몇 초도 못 되어 얼굴을 돌려 버렸어요. “나는 사람들 틈에서 태어났고 너를 좋아하지만, 네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볼 수 없어. 다른 늑대들이 너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야. 네가 똑똑하기 때문에 널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거야. 넌 사람이기 때문에 발의 가시도 뽑아 줄 수 있는 거고.” “난 그런 걸 정말 몰랐어.” 모글리가 깜짝 놀라며 말했어요. “그러니 이젠 지혜를 써야 해. 맞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갑자기 바기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어요. “그래, 빨리 저 골짜기에 가서 사람들이 가진 붉은 꽃을 가져와.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붉은 꽃이 나나 발루보다 더 강한 힘으로 너를 도와줄 거야.” 바기라가 말한 ‘붉은 꽃’이란 다름 아닌 불을 말했어요. 동물들은 불을 가장 무서워했거든요. “아! 저녁때면 오두막집 밖에 피어 있는 붉은 꽃 말이야?” “그 붉은 꽃은 작은 항아리 속에 있으니 항아리째 가져와. 그리고 네 곁에 잘 가지고 있어야 해.” “응, 다녀올게. 하지만 바기라! 정말 시어 칸이 나를 쫓아내려고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거야? 시어 칸 놈 두고 보자.” 모글리는 이렇게 말하고 쏜살같이 달려갔어요. 바기라는 혼자서 중얼거렸어요. “과연 사람의 아이군. 시어 칸 놈이 10년 전에 모글리를 뒤쫓은 것은 엄청난 잘못이었어.” 모글리는 무척 빠른 속도로 정글을 빠져나와, 해 질 무렵에는 골짜기의 작은 개울에 이르렀어요. 거기서 모글리는 아켈라가 젊은 늑대들 사이에서 수사슴을 잡으려다 놓치는 모습을 보았어요. 젊은 늑대들이 아켈라를 비웃었어요. 모글리는 더욱 힘을 내어 마을로 달려갔어요. 밤이 되자 모글리는 오두막집 창문에 얼굴을 대고 난롯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어요. 그러는 사이 새벽이 되었어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어린 소녀가 항아리를 들고 와서 새빨간 숯덩이를 담았어요. 모글리는 ‘저 아이는 나와 닮았는데.’라고 생각하며 그 아이에게 덤벼들어 항아리를 빼앗았어요. 그러고는 곧장 정글로 달려갔어요. 정글로 가면서 모글리는 항아리에다 마른 나뭇가지를 넣어 불을 계속 피웠어요. 모글리는 붉은 꽃을 동굴에 가지고 와서 종일 나뭇가지를 넣으며 그것을 지켰어요. 시어 칸과의 대결. 밤이 되자, 모글리는 회의가 열리는 바위산으로 갔어요. 그곳엔 시어 칸과 아켈라 그리고 많은 늑대들이 모여 있었어요. 시어 칸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모두 모인 것 같군. 자, 시작하자.” 그때 모글리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어요. “여러분! 시어 칸은 두목이 아니니 말할 권리가 없어요. 호랑이가 어떻게 늑대의 두목 행세를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이 든 늑대의 말에 따라 아켈라가 먼저 말하게 되었어요. 이제 아켈라는 ‘죽어 가는 늑대’라고 불렸어요. 늑대들은 두목이 먹이를 잡을 수 없게 되면 죽을 때까지 ‘죽어 가는 늑대’라고 불렀어요. “자유의 무리여! 난 어제저녁에 처음으로 먹이를 못 잡았다. 여기엔 나쁜 계략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 모두 알 것이다. 자, 그 계략이 성공했으니 한 놈씩 나와 덤벼라.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니까.” 그러자 시어 칸이 소리쳤어요. “저런 늙은이는 상관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사람의 아이다. 이놈은 원래부터 내 먹이였으니 나에게 달라!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절반도 넘는 늑대들이 시어 칸의 말에 맞장구를 쳤어요. 그러자 아켈라가 모글리 편을 들며 말했어요. “이 아이는 우리와 같이 생활하며, 우리를 위해 사냥감도 몰아 주었다. 게다가 정글의 법칙도 잘 지켜 왔다.” 바기라도 덧붙여 말했어요. “맨 처음 이 아이가 무리에 낄 수 있게 내가 황소 한 마리를 내놓았잖아?” 그러나 늑대들은 시어 칸의 주위로 몰려들며 말했어요. “10년 전의 황소 한 마리는 이제 소용이 없다. 이놈은 사람이다. 속임수에는 안 넘어간다.” 그때 모글리가 불이 들어 있는 항아리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어요. “나는 평생 늑대로 지내고 싶었지만, 너희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너희를 형제라고 부르지 않겠다. 이제 난 사람이다.” 말을 마친 모글리는 항아리를 내동댕이쳤어요. 붉은 꽃은 금방 마른 풀로 옮겨붙어 무섭게 타올랐고, 늑대들은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어요. 모글리는 급히 시어 칸 앞으로 걸어가 시어 칸의 털을 움켜쥐었어요. “가기 전에 이놈의 털가죽에 불을 붙이고 가겠다!” 시어 칸은 바로 눈앞에 불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모글리는 불붙은 나뭇가지로 시어 칸의 머리를 때렸어요. 시어 칸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불쌍하게 끙끙거렸어요. “불에 그을린 고양이 같구나. 당장 꺼져! 다음에 또 네가 바위산에 나타나면 나는 네놈의 가죽을 벗겨 쓰고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아켈라를 죽이려 하면 그땐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모글리는 활활 타오르는 나뭇가지를 빙빙 휘둘렀어요. 그러자 늑대들과 시어 칸은 멀리 달아나 버렸어요. 마침내 모글리와 바기라, 아켈라 그리고 모글리의 편을 든 늑대 열 마리 정도만 남았어요. 모글리는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 울고 말았어요. “바기라, 난 정글을 떠나고 싶지 않아. 나도 모르겠어. 정말 괴로워!” “모글리, 넌 정글을 떠나 사람의 세계로 돌아갈 때가 왔어. 이제 정글은 네가 있을 곳이 못 돼.” 모글리는 가슴이 후련해질 때까지 울었어요. 그리고 가기 전에 동굴로 가서 엄마 늑대와 아빠 늑대를 만났어요. 모글리는 엄마 늑대 품에서 엉엉 울었어요. 형제 늑대들도 슬프게 울어 댔어요. “모글리, 빨리 돌아오너라. 네 엄마와 난 이제 너무 늙었단다.” 아빠 늑대가 말했어요. “그래, 꼭 돌아오렴, 모글리. 난 어떤 새끼보다도 널 사랑했단다.” 엄마 늑대가 모글리를 꼭 품으며 말했어요 “네, 꼭 올 거예요. 다음에 와서는 시어 칸의 가죽을 바위에 널어놓겠어요.” 날이 밝자 모글리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혼자 언덕을 내려왔어요. 사람 세계. 모글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곧장 골짜기의 험한 길을 내려갔어요. 얼마쯤 내려가자 낯선 마을이 나타났어요. 모글리는 배가 몹시 고파 어느 집 문 앞에 앉았어요. 잠시 뒤 한 사나이가 집에서 나오자, 모글리는 벌떡 일어섰어요. 그리고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입을 가리켰어요. 그러자 사나이는 깜짝 놀라며 마을 길로 달려갔어요. 잠시 뒤 그는 스님을 데려왔어요. 노란 옷을 입은 스님은 뚱뚱한 몸집을 하고 있었어요. 스님 뒤에는 백 명쯤 되는 마을 사람들이 따라와 있었어요. 스님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어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팔다리에 난 늑대의 이빨 자국을 보시오. 저 아이는 정글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오.” “어디 좀 봅시다.” 메수아라는 여자가 나와서 모글리를 살펴보았어요. “아주 닮았어요. 우리 아이는 이렇게 야위지는 않았지만, 정말 똑같아요.” 사람들이 흩어져 돌아가자 메수아는 모글리를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메수아는 모글리가 자기 아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어요. “나토, 나토야!” 하지만 모글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어요. 메수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모글리를 어루만졌어요. “내 아들 나토와 너무 닮았어! 그러니 내 아들이 되어 주렴.” 그래서 모글리는 메수아의 집에서 살게 되었어요. 그동안 모글리는 영리하게도 메수아의 입을 흉내 내어 방 안의 물건 이름을 모두 외웠어요. 그런데 잠자리에 들 때는 곤란한 점이 있었어요. 모글리는 집이 꼭 표범을 잡는 덫처럼 생겨서 집에서 자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글리는 밤마다 창문으로 빠져나와 풀밭에서 잤어요. 모글리가 풀밭에서 잠을 자려는데 형제 늑대 중 제일 큰형이 다가왔어요. 모글리는 무척 기뻐하며 물었어요. “정글에는 별일 없지?” “응, 붉은 꽃에 다친 놈 외에는 모두 잘 있어. 시어 칸 놈은 몸에 털이 날 때까지 멀리 떠나 있겠대.” 큰형 늑대는 이렇게 말하고는 가 버렸어요. 모글리는 그로부터 석 달 동안 열심히 사람이 사는 방식과 습관을 배웠어요. 하루는 촌장이 모글리를 불러 말했어요. “내일부터 물소들을 지켜라. 물소들에게 풀을 먹이고, 달아나지 않게 잘 지켜.” 모글리는 뛸 듯이 기뻤어요. 마을의 일을 맡게 된 그날 밤, 모글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열리는 모임에 나갔어요. 마을 노인들은 하느님이나 유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불데오란 노인은 아이들에게 정글에 사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불데오는 메수아의 아들을 물고 간 호랑이는 귀신 호랑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호랑이에는 죽은 고리대금업자 노인의 혼이 붙어 있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들은 모글리가 한마디 했어요. “모두 거짓말이에요. 그 호랑이는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어요. 또 얼마나 겁이 많은데 고리대금업자의 혼이 붙었다니요? 게다가 할아버지가 한 정글 이야기는 대부분 엉터리예요.” “저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불데오는 화를 내며 쫓아갔지만, 모글리는 벌써 도망쳐 버리고 없었어요. 모글리는 언제나 아침 일찍 물소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가서 풀을 먹였어요. 어느 날, 모글리는 물소를 데리고 와잉궁가강이 흐르고 있는 근처까지 갔어요. 그리고 모글리는 대나무 숲 쪽으로 달려갔어요. 그곳에서 형제 늑대들이 모글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어 칸이 오랫동안 이 근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가 버렸어. 정말 너를 죽이려나 봐.” “잘 됐어, 그놈이 없을 때는 너나 다른 형제 중 하나가 저 바위 위에 앉아 있어. 그리고 그놈이 돌아오면 저 다크나무 옆에서 날 기다려 줘.” 다음 날도 모글리는 물소 떼를 몰고 강으로 갔어요. 바위 위에 늑대 형제가 앉아 있었어요. ‘시어 칸 놈, 아직 돌아오지 않았군.’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형제 늑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모글리는 물소 떼를 데리고 다크나무 옆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제 늑대 중 한 마리가 등의 털을 곤두세우며 말했어요. “그놈은 한 달 동안이나 숨어 있다가 저녁때 너의 발자국을 따라 타바키와 함께 들판을 지나갔어.” 모글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어요. “시어 칸은 하나도 무섭지 않지만, 타바 키는 나쁜 꾀를 쓴단 말이야. 시어 칸은 오늘 뭘 먹었지?” “돼지 한 마리를 잡아먹고 물도 마셨어.” “바보 같은 놈! 배불리 먹고 자는 동안, 내가 기다릴 줄 알았나 보군. 이 물소들이 시어 칸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할 수 없을까?” “그놈은 흔적을 안 남기려고 강물을 헤엄쳐 내려갔어.” “타바키가 가르쳐 주었군. 그렇다면 우선 물소를 두 패로 나누어 넌 한 패를 몰고 와잉궁가강 밑에서 시어 칸 놈을 막아. 난 한 패를 몰고 저 계곡 위로 갈게.” “나 혼자는 조금 무리야. 다른 늑대를 더 불러올게.” 형제 늑대가 다른 늑대를 데려왔어요. 무리 중에는 아켈라도 있었어요. “아켈라! 아켈라구나!” 모글리는 너무 기뻐 손뼉을 쳤어요. 두 마리 늑대는 물소를 두 패로 나누었어요. 한 패는 수컷만 모아 놓고, 다른 한 패는 암컷과 새끼만 모아 놓았어요. 모글리와 아켈라는 수컷 무리를 데리고 계곡 위로 가고, 형제 늑대는 암컷과 새끼 무리를 몰고 계곡 아래로 갔어요. 모글리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어요. 모글리는 수컷 물소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골짜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오게 함으로써 수컷 물소 떼와 암컷 물소 떼 사이에 시어 칸을 몰아넣을 생각이었어요. 시어 칸은 배가 몹시 불렀기 때문에 물소들과 싸울 수도, 언덕으로 도망갈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드디어 모글리는 수컷 물소들을 몰고 골짜기 위로 올라갔어요. “시어 칸! 어디 있느냐?” 모글리가 골짜기를 향해 힘껏 소리치자, 그 목소리가 바위에서 바위로 울려 퍼졌어요. 잠시 뒤 시어 칸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누구냐, 내 잠을 깨우는 놈이?” “나다, 모글리다. 시어 칸! 너를 혼내 주겠다. 아켈라, 물소들을 아래로 몰아라!” 아켈라가 명령을 내리자, 물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내려갔어요. 그들은 골짜기 밑에까지 가기도 전에 호랑이 냄새를 맡고 울부짖었어요. 시어 칸은 물소 떼의 발굽 소리를 듣자, 몸을 일으켜 어슬렁어슬렁 골짜기를 내려가며 어디 도망갈 길이 없나 하고 양쪽을 살폈어요. 그러나 양쪽 모두 가파른 기슭이라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었어요. 위쪽과 아래쪽의 물소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시어 칸이 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미처 몸을 피할 겨를이 없었어요. 시어 칸은 두 패의 물소들에게 무참히 짓밟혔어요. 이 광경을 지켜본 모글리가 외쳤어요. “아켈라, 빨리 물소 떼를 갈라놓아!” 그러나 시어 칸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다시 정글로. 모글리는 사람 세계에 살면서 언제나 칼을 칼집에 넣어 허리에 차고 다녔어요. 모글리는 동물의 가죽 벗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생겼어요. 모글리가 시어 칸의 가죽 벗기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불데오가 몹시 화를 내며 달려왔어요. 모글리가 물소를 달아나게 했기 때문이었어요. 불데오는 시어 칸을 보자 모글리에게 말했어요. “아니, 이놈은 상금이 걸려 있는 절름발이 호랑이 아니냐? 네가 물소를 도망가게 한 것은 용서할 테니 그 가죽을 나에게 다오. 그러면 너에게 금화 1루피를 주겠다.” 모글리는 계속 가죽을 벗기며 말했어요. “돈 때문에 이 가죽이 탐나나 본데 나도 이게 필요해요.” 그러자 불데오는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이놈,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사냥꾼에게 이게 무슨 말버릇이냐? 너에겐 돈은커녕 호된 매를 줄 테다!” 모글리는 귀찮아져서 아켈라에게 불데오를 조용히 시키라고 말했어요. 아켈라가 불 데오 위에 올라타자, 불데오는 기가 죽었어요. 모글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어요. “아켈라! 이제 그만 놔줘. 하지만 다시 내 사냥감을 넘볼 땐 가만두지 않겠어요.” 불데오는 절뚝거리며 마을로 돌아와 스님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어요. 모글리가 가죽을 다 벗기고 물소 떼를 마을로 몰고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글리에게 마구 돌을 던졌어요. 그러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 댔어요. “요술쟁이 늑대 놈아! 썩 꺼져라. 불데오, 빨리 쏘아라!” 불데오가 쏜 총알은 모글리의 귀를 스쳐 날아갔어요. 모글리는 도대체 영문을 몰랐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지난번엔 내가 사람이라고 해서 늑대에게 쫓겨났는데, 이번엔 늑대라고 쫓겨나는구나! 아켈라, 가자!" 그때, 메수아가 뛰쳐나오며 소리쳤어요. “오, 내 아들아! 난 널 요술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네가 떠나지 않으면 넌 죽게 될 거야. 너는 나의 아들, 나토의 복수를 해 주었어.”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외쳤어요. “메수아! 돌아오지 않으면 너도 돌에 맞아 죽는다.” 모글리는 쓴웃음을 지었어요. “메수아, 나는 요술쟁이가 아니에요. 그래도 당신 아들의 복수는 했어요. 빨리 돌아가요. 저놈들 쪽으로 물소를 몰아 줄 테니까요.” 모글리는 아켈라에게 외쳤어요. “아켈라, 물소를 몰아!” 아켈라가 한 번 울부짖자, 물소들이 몰려들어 마을 사람들을 쫓아 버렸어요. “아켈라, 이젠 가슴이 후련해. 두 번 다시 이상한 침대에서 자지 않아도 되니까. 자, 시어 칸의 가죽을 가져가자! 우리는 이 마을 사람들을 해치면 안 돼. 메수아가 나에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었거든.” 달이 떠서 사방은 희뿌옇게 보였어요. 모글리는 정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어요. 달이 질 무렵, 모글리는 정글에 도착했어요. 모글리는 시어 칸의 가죽을 자랑스러운 듯 뒤집어쓰고 엄마 늑대가 있는 동굴 앞 높은 바위 위에 서서 외쳤어요. “엄마, 나 사람들에게 쫓겨났어요! 하지만 약속대로 시어 칸의 가죽을 가져왔어요!” 엄마 늑대는 새끼들을 데리고 뛰어나오더니, 시어 칸의 가죽을 보고 기뻐했어요. “역시 내가 말한 대로 되었구나. 그놈이 너의 목숨을 노리고 이 동굴 입구에 머리를 들이밀던 날, 난 네가 커서 언젠가 그놈을 죽일 줄 알았다. 정말 장하구나!” 모글리는 바위산에 올라가서 아켈라가 앉아 있던 커다란 바위 위에 시어 칸의 가죽을 펼쳐 놓았어요. 그리고 네 개의 대나무로 그것을 단단히 잡아맸어요. 그때, 아켈라가 외쳤어요. “잘 봐라! 늑대들아!” 아켈라가 두목 자리를 내놓고 난 뒤 늑대들은 모두가 제멋대로였어요. 그러나 지금 아켈라의 목소리를 듣자 그 부름에 답하듯 늑대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나이 많은 한 늑대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어요. “아켈라, 다시 두목이 되어 주시오. 아니면 모글리가 두목이 되어 주시오. 다시 자유의 무리가 되고 싶소.” 그때 바기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안 돼, 자유의 무리라 불리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해.” 이번에는 모글리가 말했어요. “나는 사람의 무리에서도 늑대의 무리에서도 쫓겨났다. 앞으로는 정글에서 혼자 살아가겠다.” 모글리는 늑대의 무리들을 뒤로 하고 바위산을 내려갔어요. “우리도 너와 함께 할 거야!” 형제 늑대들이 모글리를 따라나섰어요. 그렇게 해서 모글리는 그날부터 무리를 떠나 형제 늑대들과 함께 정글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어요. 하지만 모글리가 늘 혼자였던 건 아니었어요. 뒷날, 어른이 된 모글리는 결혼도 했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이야기였어요.
15소년 표류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1860년 3월 9일 밤 바다에 파도가 높이 치솟았다가 가라앉을 때마다 거센 거품이 일곤 했다. 이런 풍랑 속을 돛도 거의 펴지 않은 배 한 척이 휘청거리며 가고 있었다. 그 배는 100톤 정도 되는 ‘슬루기호’라는 요트였는데, 배의 이름표는 이미 부서져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육지라곤 보이지 않았고 바람만이 거세게 불어 댈 뿐이었다. 이러한 풍랑 속에서 슬루기호의 키를 잡은 사람은 열네 살 소년 1명, 열세 살 소년 2명 그리고 열두 살 흑인 견습 선원 이렇게 4명의 소년들이었다. 소년들은 배가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키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단번에 배를 삼켜 버릴 듯한 파도가 뱃전을 때릴 때마다 네 소년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한 소년이 일어나면서 외쳤다. “브리앙! 키는 괜찮니?” “괜찮아! 고든, 넌 다치지 않았니?” “도니펀! 다치지 않았니? 기운을 내!” 브리앙은 프랑스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했다. “브리앙 도련님, 빨리 키를 잡아야겠어요. 잘못하다간 배가 기울어져 물에 잠기게 돼요.” 견습 선원 모코가 말했다. “브리앙! 브리앙! 무슨 일이 있어?” 이번에는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버슨. 도울과 함께 선실로 내려가 있어!” 브리앙이 소리치자 아이버슨보다 더 어린 도울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싫어, 무섭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 선실로 들어가서 담요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 브리앙이 어린 소년을 달래고 있을 때, 또다시 모코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요, 큰 파도가 밀려와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의 뒷전을 거세게 때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네 소년은 어린 소년들이 아직 선실로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빨리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어?” 두 꼬마는 투덜거리며 선실로 들어갔다. 이번엔 계단 뒤쪽에서 다른 소년이 물었다. “브리앙! 우리가 뭐 도와줄 게 없을까?” “백스터, 꼬마들과 함께 있어 줘.” “알았어, 힘들면 불러.” 백스터는 문을 닫고 소년들이 있는 선실로 내려갔다. 배에는 15명의 소년만 타고 있었다. 배를 움직이려면 적어도 선장과 기관사, 5~6명 정도의 선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 배에 선원이라고는 견습 선원 단 1명뿐이었다. 어린 소년들에게 맡겨진 배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물결이 치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휩쓸려 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소년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키를 꽉 잡으면서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이라도 보이면 그쪽으로 갈 생각이었으므로, 단 한 순간도 바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넓은 대양을 건너는 배는 한 척도 없었다. 마침내 중앙 돛대가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부러져 버렸고, 배의 운명이 달린 앞 돛대마저 위태로워졌다. 돛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거센 파도가 또 한 차례 강하게 뱃전을 내리쳤다. 브리앙과 고든, 도니펀은 승강구* 쪽으로 나동그라졌다. 브리앙의 머릿속에 문득 모코가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참 전부터 모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브리앙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 큰 소리로 외쳤다. “모코! 모코! 어디 있니?” “혹시 바다에 빠지지 않았을까?” 도니펀도 걱정스러운 말투로 브리앙에게 물었다. “그럼, 빨리 구해야지. 구명보트와 줄을 준비해!” “잠깐 기다려, 좀 더 찾아 보자.” 브리앙의 말에 침착한 고든이 말했다. “모코! 모코!” 세 소년은 힘껏 외쳤다. “으윽, 여기 있어요.” 모코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캄캄한 어둠과 파도 소리 때문에 모코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세 소년은 각각 흩어져서 모코를 찾았다. 그러나 모코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브리앙이 절망적인 마음으로 배의 뒤쪽으로 걸어갔을 때, 어디선가 또다시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브리앙은 닻줄을 감는 기계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랬더니 모코가 닻줄에 감긴 채 뱃전 사이에 끼여 신음하고 있었다. 브리앙은 칼을 꺼내 닻줄을 자른 다음 모코를 끌어냈다. “브리앙 도련님, 정말 감사합니다!” 모코의 생명은 간신히 구했지만, 배는 난파 직전에 놓여 있었다. 앞 돛대는 떨어져 나가고 구명보트와 나침반 상자는 파도에 휩쓸려 가 버렸다. ‘아침이 되면 바다가 조금 잔잔해질까? 내일이 되면 구조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둠이 점점 걷히고 하늘 한쪽이 뿌옇게 밝아 왔다. 세찬 폭풍우가 하루만 더 계속된다면 이 배의 운명은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에 소년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앗, 육지다!” 누군가가 외쳤다. 그 소리에 네 소년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러나 자욱한 안개 때문에 확실히 볼 수는 없었다. “정말 육지일까?” 브리앙이 물었다. “틀림없이 육지였어요. 안개가 걷히면 나타날 거예요.” 모코가 이렇게 대답하자 네 소년은 앞 돛대가 있던 곳으로 몰려갔다. “정말 육지다! 육지!” 섬인지 대륙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무엇인가 수평선 위로 솟아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년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동안 배는 세찬 물결 속에서 가랑잎처럼 가볍게 해안 가까이로 떠밀려 가고 있었다. 육지가 가까워져 오자 소년들은 배가 안전하게 닿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보았다. 육지 저 너머에는 절벽이 있었고, 앞에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들은 모래사장에 닿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모래사장 쪽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바위들이 여기저기 우뚝 솟아 있었다. 만일 배가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산산조각이 날 것이었다. 브리앙은 선실에 있는 소년들을 갑판 위로 불러냈다. “얘들아, 모두 갑판으로 나와!” 우르르 몰려나온 소년들은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서워했다. 그러는 동안에 배는 암초에 걸려 꼼짝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나 배가 바위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소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 날이 완전히 밝았으나 하늘에는 또다시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브리앙은 소년들을 데리고 선실로 내려와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조금만 기다리면 돼. 모래사장까지 갈 방법을 생각해 보자.” 브리앙의 말이 끝나자 도니펀이 말했다. “기다리다니! 그동안 배가 바위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 “지금은 파도가 너무 세서 위험해. 물이 빠지고 바람이 약해지면 그때 나가자.” 브리앙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도니펀, 윌콕스, 크로스와 웨브는 브리앙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특히 도니펀은 브리앙을 시기하고 있었다. 프랑스인인 브리앙이 영국 소년들을 지휘하는 게 영 달갑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은 육지에 닿기만 하면 제 마음대로 할 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육지는 배에서 4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날이 환해지자 망원경으로 구석구석까지 다 보였다. 숲이 우거진 곳에는 온갖 식물이 자라고 있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 따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 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 봐.” 망원경을 내리며 브리앙이 말했다. “배도 한 척 없는 것을 보니.” 모코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도니펀이 말했다. “항구도 없는데 배가 있겠어?” “항구가 없더라도 배를 댈 수는 있을 거야.” 사실 고든의 말은 옳았다. 강어귀 같은 곳에서도 배가 정박할 수 있었다. 그동안 물은 점점 빠져나가고 바람도 조금 약해졌다. 그러자 배는 왼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소년들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간 구명보트 생각이 간절했다. 구명보트만 있었더라면 벌써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 상태에서 배가 더 기울어져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정말로 큰 위험이 닥쳐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백스터가 소리를 질렀다. “야! 다들 이쪽으로 와 봐! 보트가 있어!” 소년들은 그쪽으로 뛰어갔다. 과연 그곳에는 작은 보트 한 척이 닻줄에 걸려 있었다. “야!” 소년들은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소년들은 보트를 배 위로 끌어 올렸다. 도니펀과 그 무리인 윌콕스, 크로스와 웨브는 보트를 차지하고 바다에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브리앙이 소년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상관하지 마!” 윌콕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지금 보트를 타려는 거지?” 브리앙이 묻자 도니펀이 대답했다. “우리가 먼저 이 보트를 타고 가서 되돌려 보낼게.” “안 돼, 보트는 어린아이들부터 타야 해!” 브리앙은 보트 모퉁이를 잡아당겼다. “뭐야!” 도니펀이 대들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나이가 제일 많은 고든이 나서서 도니펀을 달랬다. “도니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지금은 물살이 너무 세서 보트를 타기엔 위험하단 말이야.” “난 잘난 척하는 브리앙의 지시를 따르기 싫어.” “맞아, 우리도 싫어.” 도니펀의 말에 크로스와 윌콕스도 맞장구를 쳤다. “난 지시하고 싶지도, 잘난 척하고 싶지도 않아. 모두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뿐이야.” 브리앙의 말에 도니펀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흥! 나도 열심히 했다고. 어쨌든 이젠 육지에 거의 도착했으니.......” “아직 어려운 고비는 남아 있어.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해, 도니펀!” 고든은 가까스로 두 소년의 싸움을 말렸다. 소년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아침을 먹었다. 소년들은 바닷물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거센 바람 때문에 물이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브리앙은 혼자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말했다. “더 이상 물이 빠질 것 같지 않아.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한데, 내가 저 바위까지 가서 바위 모서리에다 줄을 묶는 거야. 그러면 모래사장까지 배를 끌고 갈 수 있을 거야.” 브리앙의 말에 고든이 대답했다. “그것은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 보트를 타면 안 될까?” “보트는 떠내려가고 말 거야. 혹시 모르니 보트는 남겨 놓자.” 브리앙은 이렇게 말하고 밧줄을 가져와 한쪽 끝을 허리에 꼭 묶었다. “얘들아! 이쪽으로 와서 줄을 잡아!” 고든이 소리쳤다. 브리앙이 뛰어내리려 하자 동생 자크가 울상이 되어 외쳤다. “형, 조심해!” “자크, 너무 걱정하지 마!” 브리앙은 자크를 타이르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브리앙은 세찬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나아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브리앙은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지쳐 버렸다. “줄을 당겨라! 줄을 당겨, 빨리!” 고든이 외쳤다. 결국 브리앙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정오가 지나면서 다시 밀물이 밀려왔다. 배는 또 흔들리며 파도를 따라 움직였다. 큰 소년들이 어린 동생들을 둘러싼 채 한데 뭉쳐 있었다. 소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도를 올리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였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는 순식간에 배를 번쩍 들어 올려 모래사장으로 휙 던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소년들은 육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슬루기호를 탄 15명의 소년은 영국의 식민지인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있는 체어먼 기숙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체어먼 기숙 학교에는 백인 소년들만 다닐 수 있었으며 학비가 비싸서 돈 많은 사람의 자녀들만 다닐 수 있었다. 1860년 2월 15일, 체어먼 기숙 학교에서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방학 동안에는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학생들은 기숙 학교에서 실시하는 6주간의 바다 여행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바다 여행의 행운을 잡은 소년들은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선장이었던 가넷의 아버지가 빌려준 슬루기호를 타고 뉴질랜드 해안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물론 아이들끼리만 가는 여행은 아니었고, 슬루기호를 지휘할 가넷의 아버지와 갑판장, 선원 6명, 요리사 1명, 견습 선원 1명 등도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슬루기호에 탈 소년들은 여덟 살부터 열네 살까지 다양했다. 프랑스 소년인 브리앙 형제와 미국인인 고든을 제외한 나머지 소년들은 모두 영국인이었다. 도니펀과 크로스는 유명한 지주의 아들이었다. 둘은 열세 살로 사촌 간이었으며 둘 다 5학년이었다. 도니펀은 영리하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이기려는 욕심이 강해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 브리앙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크로스는 순진했으며 늘 도니펀을 믿고 따랐다. 백스터도 그들과 같은 학년 같은 반이었는데, 상인의 아들로 성격이 온순하고 손재주가 뛰어났다. 웨브와 윌콕스는 열두 살로 4학년인데 성격이 급했다. 그들의 아버지는 법조계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 가넷과 서비스는 열두 살이었다. 가넷의 아버지는 슬루기호의 주인으로 전에 해군 함장이었으며, 서비스의 아버지는 돈 많은 개척자였다. 가넷은 아코디언을 무척 좋아했고 서비스는 익살스러운 소년으로 "로빈슨 크루소" 같은 모험 소설을 좋아했다. 젠킨스와 아이버슨이란 두 소년은 모두 아홉 살이었지만, 젠킨스는 3학년이고 아이버슨은 2학년이었다. 다음으로는 여덟 살 먹은 도울과 코스타였는데, 도울은 고집쟁이, 코스타는 먹보라는 별명을 지닌 철부지들이었다. 미국인인 고든은 열네 살이었는데 여러 가지 재능이 뛰어나고 성격도 침착해 늘 깊이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같은 반 학생들은 고든을 잘 따르고 좋아했다. 고든은 부모가 없는 고아였다. 고든의 후견인은 뉴질랜드에 외교관으로 와 있었다. 프랑스인인 브리앙과 자크는 건설 공사를 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온 건축 기사의 아들이었다. 브리앙은 열세 살로 성격이 활발하고 머리가 좋았으나, 공부하기를 싫어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1등을 하곤 했다. 브리앙은 남자답고 모두에게 친절했으며 힘센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약한 아이들을 잘 돌봐 주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동생 자크는 3학년으로 말썽꾸러기였다. 장난이 심하여 수업 시간만 되면 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 밖에 흑인 견습 선원인 열두 살 모코와 고든이 데리고 온 영리한 사냥개 ‘판’이 있었다. 슬루기호는 2월 15일 아침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에 지친 소년들이 14일 밤에 미리 배를 타면서 지금과 같은 항해가 시작되었다. 배에는 갑판장과 견습 선원밖에 없었는데 소년들이 잠을 자러 가자 갑판장마저 술을 마시러 부둣가로 나갔다. 견습 선원은 자기 자리에서 지쳐 잠이 들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의 부주의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지만 배를 묶어 놓은 밧줄이 풀어진 것이었다. 배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슬루기호는 강한 바람에 서서히 바다 한가운데로 흘러갔다. 견습 선원이 잠에서 깼을 때 이미 슬루기호는 바다 없어지자 항구에서는 야단이 났다. 소년들의 가족들은 소년들이 슬루기호와 함께 바닷속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했다. 바다 근처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슬루기호나 소년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브리앙은 배 위에서 육지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아.” “어쨌든 육지에 닿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브리앙의 말에 고든이 대꾸했다. “여기가 어딘지 배에서 내려 탐험해 보자.” 브리앙은 고든과 함께 배에서 내려와 바닷가를 자세히 살피면서 돌아다녔다. 숲에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벼랑 쪽으로 가서 당분간 지낼 만한 동굴이 있을까 하고 찾아 보았지만, 기대했던 안식처는 눈에 띄지 않았다. 두 소년은 벼랑 밑으로 해서 남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거기에는 강줄기가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브리앙과 고든은 당분간 슬루기호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코는 배에 남아 있는 통조림, 햄, 건포도 등으로 요리를 해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소년들은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모두 명랑해졌다. 그러나 자크는 외톨이처럼 혼자 떨어져서 시무룩해 있었다. 여러 날 폭풍우에 시달린 소년들은 긴장과 배고픔에서 벗어나자 금세 잠에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브리앙과 도니펀, 고든은 혹시라도 짐승이나 원주민이 침입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차례로 보초를 섰다. 이렇게 무인도에서의 첫날 밤은 무사히 지나가고, 바다 저편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올랐다. 소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배 안에 있는 물건과 식량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곳에 정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면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은 다시 살 수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조사해 본 결과 비스킷은 많았지만, 통조림이나 쇠고기, 건포도, 햄, 절인 생선 등은 두 달 치 정도의 양이었다. 브리앙은 혼자 중얼거렸다. “해안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겠다.” 그러자 모코가 말했다. “벼랑 주변에 가서 새알이라도 있는지 찾아 보고 올게요.” 아이버슨과 코스타, 도울도 물고기를 낚아 오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젠킨스, 코스타, 도울, 아이버슨 등 여러 소년들은 바닷가로 가서 낚시도 하고 조개도 주워 먹을거리를 구했다. 큰 소년들은 배 안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다시 조사했다. 브리앙, 가넷, 백스터, 서비스는 마실 것을 찾느라 여기저기를 뒤져 보았다. 도니펀, 웨브, 윌콕스는 의류나 침구, 탄약, 무기 등을 조사했다. 고든은 조사한 것들을 세밀히 기록했다. 무기는 엽총 8자루, 사냥용 엽총 1자루, 권총 12자루가 있었고 탄약과 화약도 꽤 많이 있었다. 아마 어른들이 사냥하려고 준비해 둔 것 같았다. 낚시 도구와 요리 도구도 충분히 있었다. 입을 옷도 생각보다 많았다. 선원실에는 파카와 재킷 같은 두꺼운 옷이 있어서 어느 정도의 추위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폭풍이 다가오는지 알려 주는 청우계, 온도계, 시계, 망원경, 나침반 등도 있었고, 영국 국기와 신호용 깃발, 작은 고무보트도 있었다. 언제 이처럼 세밀하게 준비해 두었는지 소년들은 감탄했다. 목공 도구 및 단추와 실, 바늘도 찾아냈고, 성냥과 부싯돌도 있어 불을 피우는 데는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배의 도서실 안에는 많은 책과 잉크, 펜, 종이가 있었다. 달력이 눈에 띄자 백스터는 달력을 짚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이 1860년 3월 10일이야. 앞의 날짜들은 다 지우자.” 금고에는 금화 500파운드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잘 보관해 두기로 했다. 배 밑에는 포도주, 위스키, 진 등 많은 술이 있었는데, 배가 암초에 부딪혔을 때 병들이 더러 깨어지긴 했지만 대부분 안전했다. 이러한 생활필수품은 모두 절약해서 사용해야만 했다. 이곳이 무인도라면 지나가는 배가 구해 주지 않는 한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조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소년들이 떠들면서 배 안으로 들어왔다. “고기는 많이 못 낚았지만, 조개는 많이 주워 왔어요.” 모코가 조개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면서 말했다. “벼랑 쪽으로는 산비둘기가 꽤 많았어요. 알도 제법 많이 있을 텐데.......” “그래? 그러면 2, 3일 뒤에 같이 가 보자.” 브리앙이 대꾸했다. “사냥해야 되겠다. 총을 2, 3방만 쏘아도 산비둘기가 수십 마리는 떨어지겠는걸. 너희들도 함께 가자!” 사냥에 능숙한 도니펀이 이렇게 말하자 웨브와 윌콕스, 크로스가 찬성했다. 브리앙이 들떠 있는 도니펀 무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총알은 아껴야 할 거야.” “알았어, 우린 아직 총알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는걸.” 도니펀이 빈정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때,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로 만든 요리는 썩 맛이 좋았다. 소년들은 이 섬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섬 앞에 펼쳐진 바다가 태평양인 것은 알 수 있었다.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표류한 15명의 소년은 이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브리앙과 고든, 도니펀의 마음속은 이곳이 섬인지 대륙의 끄트머리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어린 소년들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지만, 지도자 격인 그들은 장차 벌어질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 곳을 옮겨야 할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겨울이 되기 전에 지낼 곳을 정해야지. 배 안에서 겨울을 보낼 수는 없잖아!” 고든의 말에 도니펀이 찬성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 지금은 3월 중순밖에 안 됐잖아.” 브리앙이 말했다. “하지만 5월부터는 꽤 추워지잖아. 6주 동안 이 섬을 계속 걸어 다니면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도니펀이 말하자 브리앙이 반대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조건 걸어? 길도 없는데?” “길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니? 어쨌든 추워지기 전에 배에서 떠나야 해.” 도니펀은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만 내세웠다. 도니펀과 브리앙이 또 싸울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자. 이곳이 사람 사는 대륙이라면 도니펀의 말에 따르는 것이옳지만, 무인도라면 완전히 허탕을 치게 돼. 그러니까 우선 사람이 사는 곳인지부터 알아내자.”생각이 깊은 고든의 말은 항상 옳았다. 도니펀도 할 말이 없는지 잠자코 있었다. “내가 탐험을 할게. 저 북쪽 곶에 올라서면 사방을 둘러볼 수 있을 거야.” “동감이야. 그곳의 높이는 100미터 정도는 될 것 같아.” 고든은 브리앙의 의견에 찬성했다. 북쪽 곶까지의 거리는 해변으로 돌아서 가면 10킬로미터 정도 될 것 같았다. 브리앙은 계획을 세운 다음 출발 준비를 하였지만, 닷새 동안계속 비가 내리고 날씨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탐험을 뒤로 미루고, 슬루기호에 머물러 있으면서어린 소년들을 돌보았다. 소년들은 조개를 줍거나 낚시질을 할 때는 모든 걱정을 잊고재미있게 놀았지만, 자크만은 항상 우울하게 혼자 지냈다. 브리앙은 이런 동생을 보자 걱정이 되었다.도니펀 무리들은 사냥하면서 언제나 함께 다녔다.고든은 무리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야할지에 대해서 늘 고민했다. 3월 15일, 드디어 날씨가 맑게 개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 브리앙은 청우계를 보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나겠다고 고든에게 말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브리앙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틈을 타서 북쪽 곶을 향해 떠났다. 브리앙은 해변을 돌아 곶을 향해 가면서 산비둘기 떼와물오리 떼가 많은 장소도 눈여겨보고, 바위 위에 떼 지어있는 바다표범도 보았다. 곶 밑에 도착했을 때, 브리앙은 수백 마리의 펭귄을 발견하고깜짝 놀랐다. 브리앙은 몹시 배가 고파 잠시 쉬면서 아침을 먹었다. 브리앙은 어서 곶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고 싶었다. 올라가다 가파른 곳에서 떨어질 뻔도 했지만, 무사히 꼭대기까지 올라가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동쪽으로는 숲이 펼쳐져 있었고 북쪽으로는 끝이 보이지않는 해안이 쭉 뻗어 있었는데, 도무지 섬인지 대륙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남쪽에는 해안선을 따라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브리앙은 마지막으로 서쪽을 향해 서서 망원경에 눈을 댔다. 서쪽에는 수평선 위로 보일 듯 말 듯한 점 세 개가 있었다. 브리앙은 ‘혹시 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섬이었다. 브리앙은 다시 동쪽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초록색의 숲이 펼쳐진 뒤로 푸른 선이 뚜렷하게 보였다. ‘바다구나! 그럼 여기는 섬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빨리 슬루기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의논하면 용기가 생긴다는 것을브리앙은 잘 알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브리앙은 슬루기호로 되돌아왔다. 저녁 식사 뒤에 브리앙은 이곳이 섬인 것 같다는 자신의판단을 소년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도니펀은 브리앙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도니펀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브리앙과 도니펀, 윌콕스, 서비스 이렇게 네 소년이 섬을 탐험하기로 하고 준비도 훨씬 세심하게 했다. 나흘 치 식량, 각자의 소총과 권총, 도끼, 나침반, 망원경, 침낭, 화약, 성냥 등을 모두 챙겨 배낭 속에 넣었다. 그런 뒤 적당한 날씨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4월 1일이 되어서야 떠나게 되었다. 아침 7시, 브리앙과 도니펀, 서비스, 윌콕스는 슬루기호를출발했다. 고든의 권유로 사냥개 판도 이 탐험 대열 속에 끼게 되었다. 네 소년은 벼랑 밑으로 해서 북쪽 곶까지 가기로 했다. 1시간 정도 걸어가다 보니 별로 높지 않은 벼랑이 나타났다. 그런데 갑자기 도니펀이 벼랑으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윌콕스도 뒤따랐다.도니펀은 망원경으로 동쪽을 살펴보았다. “숲만 있어. 바다는 조금도 보이지 않아.” 윌콕스도 망원경으로 사방을 살펴보고는 확신한 듯 말했다. “정말인데? 바다는 보이지 않아.” 그러자 도니펀은 브리앙을 향해 보란 듯이 말했다. “이쪽에는 바다가 없어. 이곳은 섬이 아니고 대륙이야. 남아메리카 대륙의 어디쯤 될까?”브리앙은 출발하기 전에 탐험 도중에는 도니펀과 싸우지 않겠다고 고든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조용히 말했다. “이 벼랑은 북쪽 곶보다 낮아. 거기에 가서 정확하게 확인해야 해. 네가 가기 싫다면 서비스와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올게.” 브리앙의 말이 끝나자 윌콕스와 서비스가 도니펀에게 말했다. “도니펀! 우리도 가자.” 결국 도니펀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얼마 뒤 소년들은 숲속으로 들어섰다. 키 큰 갈대들이 우거져 있어서 헤쳐 나가기가 여간 힘들지않았다. 2시간 정도 숲을 헤매고 다닌 끝에 맑은 개울을 발견했다. 모두들 물가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도니펀이 물 위에 있는 돌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들아, 이 돌이 좀 이상하지 않니?” 소년들은 모두 도니펀이 가리키는 돌을 바라보았다. “야! 꼭 징검다리 같은데!”서비스가 말했다. “그래, 저절로 저렇게 놓이기는 어려워.” 윌콕스도 한마디 했다. ‘혹시 이 섬에 누군가 사는 게 아닐까?’ 브리앙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소년들은 물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숲속을 해맸기 때문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날이 어두워졌다. 브리앙과 도니펀은 잠자리가 될 만한 나무 밑을 골라, 바닥에 낙엽을 깔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피곤에 지친 소년들은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소년들이 눈을 뜬 것은 나뭇가지 사이로 아침 햇살이 환히 비칠 때였다. 브리앙과 도니펀, 윌콕스는 서비스의 목소리에 잠에서 번쩍 깨어났다. “브리앙, 일어나 봐! 빨리! 어젯밤에 우리가 잔 곳은 나무 밑이 아니라 오두막집이야!” “뭐?”세 소년은 동시에 일어나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무척 오래된 집이었는데 인디언들이 지은 것처럼 나뭇잎으로 엮여 있었다. “역시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야.” 브리앙이 중얼거리자 윌콕스가 말했다. “그래, 어제 그 징검다리도 이 오두막집을 지은 사람이 놓았을 거야.” 소년들은 오두막집을 샅샅이 뒤지며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런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소년들은 서둘러 다시 출발했다. 오전 10시가 지나서야 미로 같은 숲을 간신히 빠져나와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들판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바다는 브리앙이 보았던 바로 그 바다였다. 도니펀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자 브리앙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소년은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슬루기호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어서 가자.” 도니펀의 말에 모두 배낭과 총을 들고 일어섰다. 그때, 판이 갑자기 바다 쪽으로뛰어가더니 물을 마셨다. “어? 판이 물을 마신다!” 도니펀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바닷물이 아니라 민물이란 말이잖아!” 바다처럼 보였던 곳이 실은 호수였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야지 구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지금은 4월 초순이지만, 이달만 지나면 남반구에는 추운 겨울이 올 것이었다. 소년들은 겨울을 지낼 수 있는 동굴이 필요했다. 해 질 녘이 되어 네 소년은 커다란 강에 도달했다. 소년들은 이 강기슭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브리앙이 친구들을 깨운 것은 아침 7시쯤이었다. 동굴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네 소년은 탐험을 계속하기로 했다. 네 소년은 호숫가를 따라 내려가다가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소년들은 몇 개의 비스킷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강을 건너서 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야! 이것 좀 봐!”윌콕스가 가리킨 것은 돌을 쌓아 만든 둑이었다. “사람이 쌓은 것 같은데!” “그래, 맞아!”소년들은 근처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판이 풀숲 아래를 파헤치더니 숲이 우거진 쪽으로 달려갔다. “판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모양이야. 판을 따라가 보자.” 도니펀이 말했다. “얘들아, 조심해!” 브리앙은 이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도니펀의 발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그것은 곡괭이였다.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땅을 일군 흔적도 있었다. 브리앙은 계속 판을 뒤쫓아갔다. 판이 멈춘 곳은 가시덤불로 앞이 가려진 벼랑이었다. 브리앙이 가시덤불을 헤치자 좁다란 굴이 있었다. 뒤쫓아 온 도니펀과 윌콕스, 서비스는 깜짝 놀랐다. “동굴이 있어.”브리앙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안에 무엇이 있을까?” “들어가 볼까?” 하지만 네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동굴이 컴컴해서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판부터 들여보내자!” 브리앙이 말했다. 그러나 판도 머뭇거리며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브리앙은 마른풀에 불을 붙여 동굴 안으로 던져 보았다. 동굴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네 소년은 횃불을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속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나무 의자와 탁자 그리고 침대가 벽 쪽에 붙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녹슨 칼과 흙으로 만든 주전자, 조개껍데기 등이놓여 있었다. 침대 뒤에는 상자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곳에 살던 사람이입었던 것 같은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소년들은 꺼림칙해서 서둘러 동굴 밖으로 나갔다. 판은 동굴 앞쪽에서 여전히 짖어 대고 있었다. 소년들은 강가를 따라 내려가다가 깜짝 놀랐다. 너도밤나무 아래 해골과 뼛조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 사람 역시 영영 구조를 받지 못하고 여기서 죽은 걸까? ’브리앙의 의문은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동굴이 겨울을 지내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그 동굴로 돌아가 보자.” 네 소년은 다시 동굴로 되돌아가서 구석구석 샅샅이 뒤졌다. 처음 보았던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때 윌콕스가 돌을 주워 들며 물었다. “이게 뭘까?” “야, 구슬치기하는 돌 아냐?” 서비스가 말했다. 브리앙이 돌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으응, 이건 원주민들의 사냥 도구야.” 그것은 두 개의 돌이 줄로 이어진 ‘볼라’라는 사냥 도구였다. 곧이어 도니펀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 “이 시계는 고급인 것 같은데!” “시계가 지금 몇 시를 가리키고 있지?” 윌콕스가 물었다. 바늘은 3시 27분에 멈춰 있었다. 브리앙은 시계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시계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델푀슈, 생말로. 그것은 시계를 만든 사람의 이름과 프랑스의 도시 이름이었다. “야! 프랑스인이었구나!” 브리앙이 반가운 듯 소리쳤다. 중요한 것을 또 하나 발견했는데 한 권의 공책이었다. 공책에는 연필로 빽빽하게 글이 씌어 있었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프랑수아 보두앵, 1807년”이라고 표지에 적힌 이름과 연도만은 읽을 수 있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들도 이 사람처럼 구조를 받지 못한 채 죽어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니펀은 공책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펼쳐 보니 숯검정 잉크로 그린 이 섬의 지도였다. 프랑수아 보두앵이 그린 것 같았는데, 그 지도는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네 소년은 이 대단한 발견을 빨리 슬루기호의 소년들에게알리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겨울이 되기 전에 좋은 안식처를 발견한 것이 큰 기쁨이었다. 소년들은 슬루기호로 돌아가기 전에 프랑수아 보두앵을 위해서 무덤을 만들었다. 나무 십자가도 세우고 장례식까지 치르고 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슬루기호로 돌아왔다. 슬루기호에 도착한 네 소년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모든 소년들이 브리앙 일행의 탐험 결과에 대해서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네 소년이 무척 피곤해했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날로 미루었다. 다음 날 4월 5일, 소년들은 일찍 일어나 브리앙과 도니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고든은 서로 도우며 생활하자고 침착하게 말하면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도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 동굴로 이사 가도록 하자.” 브리앙이 말했다. “이사 가기 전에 우린 어디서 생활하지? 도니펀이 물었다. “우선 천막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어.” 고든의 제안에 소년들은 모두 찬성했다. 예비로 가지고 있던 돛을 사용하여 천막을 치기로 하고, 배의 판자를 이용하여 뗏목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동굴까지 짐을 옮기는 데는 강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 같아 뗏목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4월 15일, 배 안의 물건들이 모두 천막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4월 25일, 세찬 파도 때문에 결국 슬루기호는 부서져 버렸다. “배의 목재를 강가로 옮긴 뒤 거기서 뗏목을 만들자.” 백스터가 말했다. 소년들은 다음 날부터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 열심히 일했지만 특히 백스터의 솜씨는 대단했다. 길이 9미터, 폭 4.5미터의 뗏목을 만드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밀물의 힘을 이용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갈 생각으로 5월 6일에 동굴을 향해 출발하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밤, 이사 갈 준비를 모두 끝내고 소년들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고든이 심각하게 말했다. “이 해안을 떠나면 지나가는 배를 보지 못할 텐데. 가까운 벼랑에 깃발을 매단 돛대를 세워 놓으면 어떨까? 지나가던 배가 혹시 볼지도 모르잖아?” 고든의 말에 소년들은 벼랑에 돛대를 세웠다. 그리고 백스터가 영국기를 달았고 도니펀이 총을 쏘아 축하했다. 다음 날 오전 9시쯤 밀물이 밀려오자 소년들이 탄 뗏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 이틀에 걸쳐 이동했다. 뗏목이 강기슭에 다다르자 모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자크만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었다. 브리앙은 그런 자크를 보고 가슴이 무척 아팠다. 자크와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선 모두를 동굴로 안내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굴에 도착한 소년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들은 화덕을 옮겨 와 부엌을 만들고 뗏목에서 침대와 테이블, 식사 도구 들을 옮겨 와 정돈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일을 했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지내면서 차차 정리하기로 하고 저녁 준비를 했다. 웨브와 윌콕스가 모아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우고 메추라기를 구워 먹기 시작했다. 춥고 배고팠던 소년들은 배가 부르고 언 몸이 녹자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고든의 제안으로 잠자기 전에 모두 동굴의 주인이었던 보두앵의 무덤을 찾아가서 명복을 빌었다. 다음 날에는 뗏목에 있던 나머지 짐들을 모두 옮겼다. 소년들은 새로운 안식처를 ‘프랑스인의 동’이라 부르기로 했다. 동굴에 대문도 달고 부엌의 화덕엔 연통을 달아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지낼 곳에 대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제 마음 놓고 사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냥을 잘하는 도니펀이 가장 기뻐했다. 사냥하러 나간 어느 날이었다. 사냥하다가 파인 구덩이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짐승의 뼈가 들어 있었다. “와! 뼈가 매우 큰데! 다리가 네 개야!” 윌콕스가 뼈를 주워 올리면서 말했다. “그래, 난 아직 다리가 다섯인 짐승은 못 봤으니까.” 서비스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 구덩이는 혹시 짐승을 잡기 위한 함정이 아닐까? 우리가 이 함정을 이용하도록 하자. 윗부분을 나뭇가지로 덮어 두면 잡힐지도 몰라.” 도니펀이 말했다. 소년들은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함정을 덮어 놓았다. 결과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그날은 5월 17일이었다. 브리앙이 함정 곁을 지나가고 있을 때,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브리앙이 함정 쪽으로 다가가자 모두 달려왔 다. “어떤 동물일까?” 나뭇가지를 젖혀 보니 함정 속에 타조가 있었 다. “산 채로 잡자!” 윌콕스가 외쳤다. 그리하여 타조를 산 채로 잡아 동굴로 데려올 수 있었다. 서비스가 타조를 길들여 타고 다니겠다고 해, 그에게 타조를 돌보는 일을 맡겼다. 겨울에는 날씨가 나빠 밖에 나갈 수 없는 날이 많았다. 동굴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소년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로 했다. 고든이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책이 있으니 공부를 하기로 하자. 하급생에게는 계획표를 짜서 가르치기로 하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소년들은 계획표를 짜고 모두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동굴은 15명이 생활하기에는 좀 비좁았다. 소년들은 벼랑에 다른 동굴이 있나 하고 열심히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지금 사는 동굴을 넓히기로 했다. 동굴의 바위가 그리 단단하지 않아 동굴을 넓히는 일은 가능할 것 같았다. 5월 27일부터 소년들은 굴을 넓히는 일을 시작했다. “계속 파 들어가면 반대쪽에 입구가 하나 더 생길 거야.” 브리앙이 말했다. 동굴 위쪽은 수였기 때문에 동굴을 넓힐 수 있는 범위는 15미터 정도였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을 내고 점점 넓혀 가면 두 개의 방을 더 만들 수 있을 거야.” 백스터가 말했다. 소년들은 계속 벽을 깎아 내고 흙을 밖으로 운반했다. 벽이 무너지지 않게 기둥을 세우는 일은 무척 힘들었으나, 방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끝이 났다. 소년들은 보두앵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맞은편의 동굴을 찾아냈던 것이었다. 동굴과 동굴을 연결하는 통로를 파는 일은 2주일 만에 끝낼 수 있었다. 통로를 만들어 첫 번째 동굴은 부엌과 식당으로 쓰고, 맞은편 동굴은 침실 겸 공부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소년들은 침대와 테이블을 옮기고, 의자와 난로를 가져와 두 번째 동굴을 따뜻하게 했다. 백스터가 호수 쪽의 동굴 입구에 문을 달았다. 당분간 걱정 없이 지내게 된 소년들은 저녁이면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모여 앉아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놀았다. 이 일은 하루 일과 중에서도 퍽 중요한 일이 되었다. 어느 날 소년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섬의 지형에 이름을 붙이자는 제안을 했다. “자, 우선 슬루기호가 도착한 해안은 우리의 배 이름과 똑같이 ‘슬루기만’이라고 하자.” 도니펀이 제안하자 모두 찬성했다. “이 동굴의 이름인 ‘프랑스인의 동굴’은 그대로 두자.” 브리앙의 말에도 역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들은 보두앵의 지도를 보면서 숲, 언덕, 강 등에 각각 이름을 붙였다. 그중에는 ‘패밀리호’, ‘오클랜드 언덕’, ‘함정 숲’, ‘질랜드강’ 등의 이름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섬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그게 뭔데?” 도니펀이 묻자, 코스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우리는 모두 체어먼 기숙 학교 학생이니 이곳을 체어먼섬이라고 하면 어떨까?” 코스타의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소년들은 각자 마음속으로 ‘체어먼섬’이라고 불러 보며, 지도상에 나타날 ‘체어먼’이라는 세 글자를 상상했다. 그때, 브리앙이 말했다. “우리 섬의 이름도 지었으니 이 섬을 이끌 지도자를 뽑도록 하자.” “지도자를 뽑자고?” 도니펀이 되물었다. “그래, 누군가 나서서 일을 추진하고 모두 협동하도록 이끄는 지도자 말이야!” 브리앙이 대답했다. “좋아, 우리의 지도자를 뽑자!” 소년들은 모두 찬성하여 소리쳤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임기를 정해 놓고 뽑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도니펀이 말했다. “그래, 임기는 1년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1년 뒤에는 새 지도자를 뽑기로 하고.” 브리앙이 대답했다. “누가 지도자로 적당할까?” 도니펀이 소년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도니펀은 브리앙이 지도자로 뽑힐까 봐 은근히 염려되었던 것이었다. 브리앙이 말했다. “난 고든을 추천해. 현명하고 침착한 고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해.” 브리앙의 말에 찬성한다는 듯이 소년들은 만세를 부르며 소리쳤다. 고든은 될 수 있으면 이런 명예를 사양하고 싶었지만, 도니펀과 브리앙의 사이가 벌어질 위험이 있을 것 같아 승낙했다. 그래서 고든은 체어먼섬의 지도자가 되었다. 체어먼섬은 5월부터 겨울이 시작되어 다섯 달 동안 추운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고든을 중심으로 한 상급생 소년들은 겨우살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동굴 안에서만 생활해야 해서 몇 가지 규칙을 정해 놓고 모두 그것을 지키기로 했다. 공부도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하자고 약속했다. 그래서 소년들은 오전과 오후에 각각 2시간씩 공부를 하였고, 상급생들은 번갈아 가며 하급생들을 지도해 주었다. 소년들은 배 안의 도서실에 있던 책들을 읽고 토론도 했다. 날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력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고, 시계태엽도 매일 규칙적으로 감아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시계는 윌콕스가 담당하고, 달력 지우는 일은 백스터가 했다. 웨브는 온도계와 기압계를 확인해 기록했다. 체어먼섬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기록하는 일은 백스터가 맡았다. 소년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일은 바로 빨래였다. 마구 옷을 더럽히며 노는 하급생들을 보고 고든이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상급반 소년들은 세탁을 맡은 모코를 거들어야만 했다. 일요일에는 호숫가로 소풍을 떠났지만, 날이 추워서 그냥 돌아왔다. 저녁 식사 뒤에는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가넷이 아코디언을 켜고 소년들은 거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소년들의 겨우살이 6월이 되자, 날씨는 더욱 추워져 온도계의 수은주는 영하 13도까지 내려갔다. 눈이 수북이 쌓일 정도로 많이 내려 소년들은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 놓기도 했다. 어느 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했는데, 자크는 거기에 끼지 않고 혼자 구석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맞은편에 서 있던 크로스가 던진 눈덩이가 빗나가면서 자크가 맞았다. “아야!” 자크가 비명을 질렀다. “미안해, 일부러 너에게 던진 건 아냐.” 크로스가 자크에게 사과하고 있을 때, 자크의 비명을 듣고 뛰어온 브리앙이 말했다. “크로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눈덩이를 그렇게 세게 던지니?” “눈싸움도 하지 않으면서 이런 데 있으니 눈덩이에 맞잖아.” 기분이 언짢아진 크로스가 말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엄살 부리는 것 아 , 자크?” 옆에 있던 도니펀이 끼어들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앞으로 조심해 주었으면 좋겠어.” “우연히 맞았으니 자크가 운이 없었던 거지.” 도니펀이 브리앙의 신경을 건드렸다. 넌 참견하지 마,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브리앙이 쏘아붙이자 도니펀도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너, 말버릇 좀 고쳐라.” 고든이 달려와 두 사람을 말렸다. 그러나 고든도 마음속으로는 틈만 있으면 브리앙에게 싸움을 거는 도니펀이 못마땅했다. 6월 말쯤이 되자, 눈이 가슴께까지 쌓여 소년들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년들은 동굴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소년들의 건강이었다.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지만 감기에 걸리는 소년도 있었다. 감기약이 없었기 때문에 물을 뜨겁게 데워 마시게 하고, 푹 쉬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과 식량 문제도 걱정이 되었다. 강이 꽁꽁 얼어붙어 물을 길어 올 수가 없게 되자 백스터는 강과 동굴을 연결하는 수도관을 땅에 묻을 생각을 했다. 마침 슬루기호에서 뜯어 온 수도관이 있었던 것이었다. 손재주가 좋은 백스터는 물을 길어 오는 수고를 덜기 위해 그날부터 수도관을 묻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냥도 낚시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식량을 구하기는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모코는 배 안에서 가져온 식량을 가능한 한 아꼈다. 7월 9일 아침, 브리앙은 동굴 밖으로 나가 보았다. 추위는 여전했지만 눈도 오지 않고 바람도 그리 세게 불지 않아 활동할 수가 있었다. 소년들은 밖으로 나가 장작을 모아 동굴로 가져왔다. 굵은 나무는 가려내어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쪼갰다. 좋은 날씨가 엿새 동안 계속되자 소년들은 쉬지 않고 땔감을 구해다 동굴 한쪽에 쌓아 올렸다. 계속되는 탐험. 8월의 첫 주일은 추위가 매우 심했다. 고든은 소년들에게 외출을 금지하고, 실내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소년들은 운동 부족으로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잘 견뎌 내었다. 8월 16일, 추위가 다소 풀리고 날씨가 맑게 갰다. 도니펀, 브리앙, 백스터, 서비스, 윌콕스는 슬루기만으로 소풍 갈 계획을 세웠다. 8월 19일, 다섯 소년은 해가 뜨기 전에 슬루기만을 향해 떠났다. 오전 중에 슬루기만에 도착한 소년들은 해변에서 놀고 있는 펭귄 떼를 보았다. “와! 저 펭귄 좀 봐, 굉장히 많다!” 도니펀은 총에 총알을 재고 쏠 자세를 취했다. “펭귄은 냄새가 너무 심해서 고기를 먹을 수가 없어.” 브리앙의 말을 들은 도니펀은 펭귄 사냥을 포기했다. 다섯 소년은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벼랑 위로 올라갔다. 백스터는 새 국기를 달고 그 옆에 동굴의 위치를 그린 안내판도 세웠다. 소년들은 어두워지기 전에 동굴로 되돌아왔다. 8월이 끝나 갈 무렵, 드디어 체어먼섬에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법 봄기운이 돌 자, 소년들은 다시 섬 일대를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9월 10일, 이 섬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다. 9월이면 봄이라지만, 아직도 바람은 세차고 비와 우박이 자주 쏟아져 겨울 못지않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이런 날씨에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백스터는 배에 붙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수레를 만들었다. 하지만 수레를 끌 만한 짐승이 없어서 힘센 소년들이 끌어야 했다. “나귀나 말이 있다면 쉽게 수레를 끌 수 있을 텐데.” 백스터는 이렇게 말하며 아쉬워했다. “네발 달린 짐승을 길들이면 될 거야.” 서비스가 말했다. “하지만 짐승을 길들이는 게 쉬울까? 넌 타조도 길들이지 못했잖아.” 백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서비스는 실망하지 않고 겨울에도 나무뿌리, 풀 등을 구해다가 열심히 타조를 돌보았다. 서비스는(스위스의 로빈슨)가족이라는 모험 소설의 주인공 자크를 흉내 내고 싶었다. 나도 자크처럼 타조를 길들여 타고 다닐 거야.” 달이 바뀌어 10월이 된 지도 열흘이 지났다. 날씨가 화창해지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 이제는 밖에서 생활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들은 호숫가를 산책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냥도 했다. 서비스만 소년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타조를 길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비스는 타조를 타 보기로 했다. 고든이 걱정이 되어 말렸지만 서비스는 막무가내였다. 헝겊으로 눈을 가린 타조를 가넷과 백스터가 끌고 나왔다. 서비스는 가까스로 타조의 등 위에 올라탔다. “놔, 끈을 놔!” 서비스가 외쳤다. 서비스가 타조의 눈가리개를 벗기자, 우뚝 서 있던 타조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비스는 타조의 등에 매달린 채 타조의 눈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서비스는 얼마 가지 못하고 타조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사이에 타조는 멀리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11월이 되자 날씨가 더욱 따뜻해졌다. 이젠 계획했던 탐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고든이 탐험을 떠나고, 브리앙과 가넷이 남아 어린 소년들을 돌보기로 했다. 그 밖에 도니펀, 백스터, 윌콕스, 웨브, 크로스, 서비스, 모코가 탐험에 참여했다. 고든 일행은 판을 앞세우고 함정이 있는 숲으로 나아갔다. 잡초가 무성한 곳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판이 끙끙거렸다. 소년들이 가까이 가서 보니 짐승이 숨을 만한 구멍이 하나 있었다. 도니펀이 구멍에 총부리를 겨누자, 윌콕스가 말렸다. “잠깐만, 좋은 수가 있어.” 윌콕스는 나뭇잎을 주워 모아 구멍 앞에다 불을 지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운 연기를 이기지 못한 토끼들이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소년들은 열두 마리나 되는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소년들은 호수 북쪽을 탐험할 생각으로 징검다리 강을 따라 내려갔다. 강가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 날은 해 질 무렵 북쪽의 모래사장에 자리 잡았다. 탐험 셋째 날은 언덕에 올라 망원경으로 북쪽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모래사장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서로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고든이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호수의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도니펀이 제안했다. “안 돼, 거긴 너무 멀어. 늦게 도착하면 모두 걱정할 거야.” 고든이 반대하자 도니펀은 잔뜩 화가 났다. 소년들은 토끼 고기와 비스킷으로 식사를 마친 뒤 어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도중에 도니펀은 기러기를 잡아 다소 기분이 좋아졌다. 모코와 요리를 맡은 서비스도 기뻐했다. 소년들은 부지런히 걸어 함정 숲에 도착했다. 고든은 동굴로 빨리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지름길을 통해서 언덕을 넘자고 제안했다. 그 길은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들은 호기심이 생겨서 모두 찬성했다. 이 길을 택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소년들은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냥해서 고기는 먹을 수 있었지만, 과일이나 채소는 전혀 먹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길을 지나오면서 고든이 야생 콩과 차를 발견한 것이었다. 또 언덕을 따라가다가 소년들은 원주민의 사냥 도구인 볼라로 라마를 산 채로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줄 덫으로 수레를 끄는 짐승인 과나코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번 탐험 중에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굴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에는 커다란 짐승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 동물이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재규어이거나 살쾡이인 듯했다. 불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소년들에게 덤벼들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계속 으르렁댔다. 다행히 소년들이 총을 쏘아 동물을 쫓을 수가 있었다. 무사히 동굴에 도착한 고든 일행은 동굴에 남아 있던 소년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고든이 탐험을 나가 있는 동안 브리앙은 어린 소년들을 잘 돌보았고, 소년들도 브리앙을 잘 따랐다. 하지만 자크는 눈에 띄게 부쩍 우울해했다. 브리앙은 자크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며 물어보았다. “자크, 무슨 일 있니? 어디 아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냐.” “자크, 무슨 걱정이 있으면 말해 봐. 난 네 형이잖아.” “형은 내가 한 일을 용서해 줄지도 모르지만, 다른 아이들은 절대로. 흑흑, 나중에 말할게.” 자크는 울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브리앙은 고든이 돌아오자 자크의 일을 의논했다. 고든은 자크가 스스로 고백할 때까지 그대로 두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탐험에서 돌아온 소년들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라마, 과나코 등 짐승들이 늘어 가자, 추위와 맹수들로부터 짐승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 소년들은 라마 덕분에 우유를 먹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자 도울과 코스타는 과자를 만들어 달라고 모코에게 떼를 썼다. 하지만 고든은 모코에게 엄격하게 말했다. “설탕은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해.” “숲에 가서 설탕 대신 쓸 만한 식물을 찾아 보자!” 서비스가 고 을 데리고 나갔다. 소년들은 다행히 사탕수수를 발견했다. 사탕수수의 줄기 속을 긁어 액체를 받아 끓인 뒤에 식히면 설탕이 되었다. 모코는 설탕으로 과자를 만들었다. 소년들은 뉴질랜드에서처럼 풍족하게 물건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필요한 것은 거의 갖추어 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축제. 어느덧 11월이 흘러가 버리고 12월로 접어들었다. 12월 7일에는 여우 소탕 작전이 있었다. 여우는 밤만 되면 동굴 근처에 와서 밤새 울거나, 숲에 쳐 놓은 덫을 망가뜨려 놓았다. 밤이 되기 전에 도니펀, 브리앙, 윌콕스, 백스터, 웨브, 크로스, 서비스는 숲에 잠복해 있으면서 여우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에야 여우들이 나타났다. 도니펀의 신호로 소년들은 일제히 여우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몇 마리는 도망을 갔지만 몇 마리는 총에 맞아 쓰러졌다. 소년들은 여우 가죽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그 뒤부터 여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12월 15일, 소년들은 슬루기만을 탐험하기로 하고 새벽에 동굴을 출발했다. 서비스와 가넷은 과나코를 길들여 수레를 끌도록 했다. 수레 위에는 식량과 탄약 등 그날 필요한 짐들을 실었다. 소년들의 이번 탐험 목적은 바다표범을 잡는 것이었다. 그동안 슬루기호에서 가져온 기름과 보두앵이 만든 초를 거의 다 써 버렸기 때문에 기름이 필요했다. 소년들이 해안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쯤이었다. 해안에는 바다표범이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 소년들은 사냥을 시작했다. 우선 바다표범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막고, 도니펀의 지시에 따라 총을 쏠 자세를 취했다. 도니펀이 신호를 하자 일제히 총을 쏘았다. 이렇게 해서 바다표범을 스무 마리 정도 잡았다. 소년들은 바다표범을 작은 덩어리로 잘랐다. 덩어리를 끓여서 표면에 떠오른 기름을 큰 통에 담았는데, 냄새가 고약해 코를 막고 일을 해야 했다. 소년들은 며칠 동안 기름 짜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한동안 쓸 수 있는 수백 리터의 기름을 모을 수 있었다. 어느덧 소년들에게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1년 중 가장 신나게 즐기는 크리스마스 축제! 소년들은 뉴질랜드에서처럼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트리에 별 모양, 양말 모양, 방울 등을 만들어 달았다. 제법 크리스마스의 축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25일 아침에는 배에서 가져온 대포를 1발 쏘았다. 우렁찬 대포 소리에 체어먼섬이 흔들리는 듯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에 모인 소년들은 깜짝 놀랐다.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잔뜩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들이 한마디씩 칭찬하자 음식을 준비한 모코와 서비스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식탁 위에는 토끼와 꿩 요리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고, 커피와 푸딩도 준비되어 있었다. 무인도에서 이 정도의 연회라면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식탁에 앉은 소년들은 지도자로서 고생한 고든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고든은 소년들의 앞날에 하느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건배를 했다. 코스타는 어린 소년들을 대표하여 그동안 어린 소년들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한 브리앙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소년들은 “브리앙 만세!” 하고 외쳤다. 이 외침에 브리앙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크의 고백. 1861년의 새해가 밝았다. 남반구의 1월은 한여름이다. 소년들이 이곳에 표류하게 된 지도 벌써 열 달이 되었다. 소년들은 그동안 무인도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불편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브리앙은 늘 뉴질랜드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섬 동쪽을 탐험할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브리앙이 고든에게 이 계획을 말했다. “보두앵의 지도는 정확하지만, 아무래도 섬 동쪽을 자세히 탐험해 보고 싶어. 보두앵이 보지 못한 게 있을지 모르잖아.” “브리앙, 뉴질랜드로 돌아갈 꿈을 아직 버리지 않았구나!” 고든이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다 그럴 거야. 될 수 있으면 빨리 뉴질랜드로 돌아가야지.” “좋아, 그럼 이번 탐험에는 누구누구가 가지?” “모코와 자크가 가는 건 어떨까?” “자크는 왜?” “자크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둘만 있게 되면 털어놓을지도 몰라.”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출발 준비를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계획을 알려 주자.” 그날 저녁, 고든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탐험 계획을 말했다. 브리앙은 보트에 작은 삼각돛을 달고, 인원수에 맞추어 권총, 엽총, 탄약, 담요, 식량, 비옷 등을 챙겨 넣었다. 2월 4일 아침 8시, 브리앙 일행은 보트에 올라탔다. 마침 남서풍이 적당하게 불어와 항해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기분 좋게 불던 순풍이 점심때가 되자 멈췄다. 브리앙 일행은 돛을 내리고 노를 젓기로 했다. “자크, 넌 키를 잡아라. 모코는 나와 함께 노를 젓고.” 보트는 북동쪽으로 나아가 저녁 6시쯤에 기슭에 닿을 수 있었다. 기슭에 이르러 강줄기를 하나 발견했다. 보두앵의 지도에도 있던 강이었다. “브리앙 도련님, 이 강을 타고 내려가 봐요.” 모코가 말했다. “그건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쉬기로 하 자.” 브리앙은 보트를 매어 놓고 나무 밑으로 갔다. 모코는 보트에서 식량과 무기를 옮겼다. 세 소년은 저녁을 먹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브리앙은 모코와 자크를 깨워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소년들은 어제 발견한 강을 타고 동쪽 바다로 나갈 생각이었다. 브리앙은 이 강이 섬의 동쪽에 있어서 ‘동쪽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동쪽강은 지금 썰물 이어서 바다로 나가기가 쉬웠다. 세 소년은 보트를 타고 내려갔다. 동쪽 바다와 접해 있는 기슭에 이르자 보트를 강 쪽으로 뻗어 있는 나무에 매었다. 브리앙은 먼저 망원경으로 해안과 바다 위를 살펴보았다. 바다 위에는 수평선만 넘실거리고 있을 뿐, 육지나 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브리앙은 크게 실망을 했다. 그래서 여기를 ‘실망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후유....... 이 섬에서 나갈 방법은 없는 걸까?” “브리앙 도련님! 용기를 내세요. 우선 식사부터 해요.” 모코가 브리앙을 격려했다. “그럼 다음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죠.” “하지만 밀물이 들어오려면 적어도 밤 10시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너무 어두워서 위험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비치니까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아요.” 브리앙은 밤 10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해안을 조사했다. 조사한 결과 이곳은 바위와 동굴이 꽤 많았다. 동굴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살 곳으로 꽤 적당할 것 같았다. 오후 2시, 소년들은 바닷가의 바위 위로 올라갔다. 브리앙은 망원경을 눈에 대고 동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앞에는 반짝거리는 수평선만 있을 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해안 주변을 탐험한 뒤 소년들은 강기슭으로 되돌아가 저녁을 먹었다. 다음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브리앙과 자크는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하고 모코는 잣을 줍기 위해 숲속으로 갔다. 모코가 밀물이 들어올 시간에 맞추어 돌아와 보니, 그때까지도 브리앙과 자크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아서 찾으러 나서려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코는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울음소리는 자크의 것이었다. 자크가 울면서 브리앙에게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다. “아니! 네가 줄을 풀어 놨다고? 네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배가 항구에서 풀려나온 것이었구나!” “형! 잘못했어, 용서해 줘.” “이 사실은 당분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모코는 자크의 말을 엿듣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브리앙 형제의 비밀을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그러나 브리앙에게는 속일 수가 없어 브리앙이 혼자 남게 되자 자크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자크를 용서해 주세요. 얼마나 죄책감 에 시달렸겠어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자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브리앙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알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저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요.” “고마워, 모코! 밤 10시가 되어 세 소년은 보트에 올라탔다. 보트의 줄을 풀어 놓자, 보트는 밀물에 밀려 거슬러 올라갔다. 세 소년은 동굴까지 오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동굴에 도착하자 브리앙은 섬의 동쪽 해안에 대해서 소년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소년들의 얼굴이 어둡게 변하자 브리앙은 소년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브리앙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말수가 적어졌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자크도 어렵고 힘든 일에 더욱 열심히 나섰다. 두 번째 겨울. 3, 4월은 겨울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장작에서부터 식량, 동물 사료까지 빈틈없이 준비하고, 동물 우리도 손질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규칙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5일 25일, 첫눈이 내리면서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하지만 준비를 잘해 놓았기 때문에 이젠 별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겨울 동안 소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새 지도자를 뽑는 일이었다. 6월 10일이 되면 고든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이었다. 고든은 너무 엄격한 반면, 브리앙은 친절하고 용기가 있어 모든 소년이 좋아했다. 하지만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국인 학생들이 브리앙을 지도자로 뽑을지가 의문이었다. 이 선거를 가장 많이 기다린 사람은 도니펀이었다. 도니펀은 머리가 좋고 용 감하므로 마음만 넓게 쓴다면 소년들이 그에게 표를 던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웨브, 크로스, 윌콕스는 도니펀을 위하여 소년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썼다. 6월 10일, 15명의 소년은 저녁을 먹은 뒤 한자리에 모여 두 번째 지도자를 뽑았다. 하지만 모코는 흑인이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었다. 개표한 결과 투표자 14명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브리앙 8표. 도니펀 3표. 고든 1표. 기권 2표. 브리앙이 지도자로 선출되자 도니펀은 몹시 실망했다. 브리앙은 지도자 자리를 거절하려 했지만, 자크의 일을 생각해서 받아들였다. “여러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브리앙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고든은 도니펀이 따르지 않을 것이 걱정되었다. 고든의 생각대로 도니펀과 그의 친구들은 브리앙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고, 저희끼리 모여서 일을 했다. 7월이 되면서 온도는 영하로 내려가고 호수는 꽁꽁 얼어붙었다. 그래도 소년들은 옷을 단단히 껴입고, 사냥도 가고 함정 숲에도 들르곤 했다. 하지만 8월 초의 1주일 동안은 몹시 추워 소년들은 동굴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브리앙은 동굴 속에만 갇혀 있는 소년들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날씨가 조금 풀리면 호숫가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할 생각으로 백스터에게 스케이트를 만들도록 했다. 8월 말에는 날씨가 많이 풀렸다. 하지만 강과 호수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어 스케이트를 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동굴에는 아이버슨, 모코, 도울, 코스타만 남고, 나머지 소년들은 호숫가에 가서 스케이트를 탔다. 브리앙은 소년들에게 너무 멀리 가지 말 것과 호루라기 소리를 들으면 곧장 모일 것을 당부했다. 소년들은 스케이트를 잘 탔다. 특히 자크는 스케이트 타는 솜씨가 뛰어났다. 브리앙은 소년들 틈에서 놀고 있는 자크의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오후 2시 정도가 되었을 때 날씨가 갑자기 흐려졌다. 브리앙은 걱정이 되어 고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지? 호루라기를 불까?” “그래, 곧 안개가 낄 것 같아. 빨리 아이들을 불러들이자.” 고든이 말했다. 브리앙은 호루라기를 불었다. 다른 소년들은 다 모였는데 도니펀과 크로스가 보이지 않았다. “도니펀과 크로스가 없어. 아마 사냥하러 멀리 갔나 봐.” 브리앙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개가 호수 전체를 뒤덮기 전에 어서 찾아 봐야 해. 누가 호수 쪽으로 가서 호루라기를 불어 볼래?” 고든은 소년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자크가 나서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갈게. 스케이트를 타고 가면 빨리 갔다 올 수 있을 거야.” 자크의 제안이 가장 좋을 듯싶어 모두가 승낙했다. 동굴로 돌아온 브리앙과 고든은 세 소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크가 떠난 지 어느덧 3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몹시 걱정이 되었다. “대포를 쏘아야겠어.” 브리앙의 제안에 잠시 뒤 섬 전체가 울릴 듯한 대포 소리가 울렸다. 15분 간격으로 대포를 쏘았다.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멀리서 총소리가 울렸다. “도니펀인가 봐.” 서비스가 말했다. 잠시 뒤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니펀과 크로스였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대포를 더 쏘았지만 자크는 응답이 없었다. 브리앙은 속으로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갈걸....... 괜히 어린아이를 보냈구나!’ “호숫가로 내려가 모닥불을 피워 보자.” 고든이 말했다. 소년들은 호숫가 기슭에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나무토막을 얼기설기 쌓아 올렸다. 고든이 외쳤다. “자크다, 앗! 그런데 자크 뒤에 곰이 쫓아오는 것 같아.” 도니펀은 재빨리 자크의 뒤를 따르는 짐승을 향해 총을 쏘았다. 자크의 뒤를 쫓아오던 짐승은 총소리에 놀라 달아났다. 브리앙은 반가워서 자크를 와락 껴안았다. 나머지 소년들도 두 소년을 둘러싸고 환호성을 질렀다. 자크는 도니펀과 크로스를 찾던 중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때 대포 소리를 들었지만, 갑자기 곰이 나타나 부리나케 도망쳐 오다가 소년들에게 발견되었던 것이었다. 모두 동굴로 돌아오면서 브리앙은 도니펀에게 말했다. “네가 규칙을 어겨 큰일이 생길 뻔했어. 하지만 동생을 구해 준 건 정말 고마워.” “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도니펀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또 하나의 난파선 겨울도 다 지나가고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얼었던 강물은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흘렀다. 그러나 동굴의 분위기는 따사로운 바깥 날씨와는 달리 어둡고 침울했다. 동굴의 평화가 서서히 깨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고든이 브리앙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도니펀이 이상해. 동굴을 떠나서 살 생각인 것 같아.” “아니, 무슨 말이야? 설마.” “웨브가 보두앵의 지도를 옮겨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어. 내 생각이 틀림없을 거야.” “고든, 내가 지도자를 그만두어야겠어. 나로 인해 우리가 나뉠 수는 없잖아?” “브리앙! 안 돼! 모두 너를 믿고 지도자로 뽑았는데.” 며칠 뒤 브리앙과 고든의 생각대로 도니펀과 세 소년은 동굴을 떠나겠다고 했다. “왜 여길 떠날 생각을 한 거니?” 고든이 도니펀에게 물었다. “지금보다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고 싶기도 하고, 브리앙의 명령을 받고 싶지 않아서야.” “도니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니?” “아니, 잘못한 건 없어. 단지 프랑스인의 명령을 받는 게 싫어.” “좋아, 너희 마음대로 해. 말리지는 않겠어.” 브리앙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리하여 도니펀과 크로스, 윌콕스, 웨브는 자기들의 짐을 꾸려 10월 10일 새벽녘에 동굴을 떠났다. 도니펀은 몇 주일 전 브리앙이 탐험했던 섬의 동쪽으로 갈 계획이었다. 브리앙이 그곳에 다녀와서 동굴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도니펀은 이곳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도니펀 일행은 이틀을 걸어 겨우 동쪽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브리앙의 말대로 그곳에는 동굴이 정말 많았다. 그중 하나를 골라 짐을 풀고 일행은 해변으로 나왔다. 바다 구경을 하면서 물고기도 잡고 조개도 주웠다. 그것으로 저녁을 때운 뒤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이틀 정도는 더 섬을 조사한 뒤에 이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도록 하자. 내 생각엔 섬 북쪽에 육지가 있을 것 같아.” 크로스와 웨브, 윌콕스는 동굴을 떠나온 것이 두려워 후회가 들었지만, 지금은 도니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도니펀 일행은 계획대로 섬의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소년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예기치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앞장섰던 윌콕스가 난파선을 발견한 것이었다. 난파선은 폭풍우에 휩쓸려 밀려온 것 같았다. 바닷가로 다가가 보니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무서운 생각이 들어 네 소년은 재빨리 근처 숲으로 달아났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소년들은 지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세찬 바람이 불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네 소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내일 아침에는 죽은 사람들을 묻어 주기로 하자.” 밤은 무척 길고 지루했다. 다음 날 소년들은 바닷가로 내려가 시체를 찾았다. “시체가 없어졌어!” “그럼 그 두 사람은 살아 있었던 걸 ?” “아냐, 아마도 바닷물에 떠내려갔을 거야.” 도니펀은 망원경으로 바다를 살펴보았지만 시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난파된 배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세번호-샌프란시스코”라는 이름표가 있었다. 브리앙, 도니펀을 구하다. 네 소년이 떠나자 동굴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들이 있던 자리가 비자 소년들은 허전하고 섭섭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브리앙은 누구보다도 많이 괴로워했다. 구조될 희망도 없이 이 섬에서 세 번째 겨울을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브리앙은 앞이 캄캄했다. “백스터, 커다란 연을 만들어 300미터 정도의 높이로 띄우면 어떨까?” 브리앙이 궁리 끝에 말했다. “글쎄, 이 섬을 지나가는 배에서는 그걸 볼 수 있겠지.” “그럼, 어서 연을 만들자.” 브리앙과 백스터는 서둘러 연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어린 소년들도 덩달아 들떠 있었다. “긴 꼬리를 달아.” “연 위에 코스타의 얼굴을 그려!” 연을 만들기도 전에 갖은 주문이 다 들어왔다. 백스터는 갈대 줄기로 연살을 만들고 브리앙은 돛을 잘라 연살에 붙였다. 연줄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감았다 풀었다 하기로 했다. 완성된 연이 너무 커서 어린 소년들은 그것을 ‘거인 바람’ 이라고 불렀다. 소년들은 몇 번이고 연을 띄워 보려고 했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계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산들바람이 불자 어린 소년들은 연을 띄우자고 졸라 댔다. 브리앙도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 오전에 연을 띄울 마지막 준비를 했다. 오후 1시가 되자 모두 동굴 앞에 모였다. 그때 판이 뛰어오면서 요란스럽게 짖어 댔다. “무슨 일이 있나 봐!” 고든이 말했다. 고든, 브리앙, 서비스와 자크는 재빨리 총을 가지고 판의 뒤를 따라나섰다. 판은 내달리다가 함정 숲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웬 여자가 1명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사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부인으로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앗! 숨을 쉰다.” 고든이 외쳤다. 소년들은 부인을 동굴로 옮기고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부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소년들을 보고 부인은 굉장히 놀랐으나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알자 곧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부인은 미국인으로 이름은 케이트였다. 미국의 펜필드라는 부잣집의 가정부로 윌리엄 펜필드 부부와 함께 칠레를 여행하기 위해서 배를 탔다고 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월스턴이라는 악당이 선원들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켜 선장과 부선장, 펜필드 부부를 죽여 버렸다. 그 배에서 월스턴 편이 아닌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케이트와 항해사 에번스뿐이었다. 그 뒤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었고 월스턴 일당들과 함께 이 섬에 표류했다고 했다. 케이트는 월스턴 일당들이 깨어나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죽은 척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케이트의 이야기를 듣고 소년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도니펀 일행이었다. 만약 운이 없어 월스턴 일당과 부딪친다면 도니펀 일행의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브리앙과 고든과 모코는 동굴 속에서 걱정만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니펀 일행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소년들이 주위를 살피면서 숲을 헤쳐 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살려!” 브리앙과 모코가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재규어 밑에 도니펀이 깔려 있었다. 윌콕스는 재빨리 재규어를 향해 총을 쏘려고 했다. “잠깐!” 브리앙은 단도를 들어 날쌔게 재규어를 찔렀다. 도니펀은 재빨리 몸을 피했고 재규어는 달아났다. “고마워, 브리앙. 나의 목숨을 구해 주다니!” “괜찮아, 하지만 더 위험한 일이 있어. 너희들은 어서 동굴로 돌아와야 해.” “그래, 알겠어. 이젠 네 말대로 할게.” 도니펀 일행이 다시 동굴로 돌아오자 소년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월스턴 일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들은 궁금해서 연으로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연을 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 자크가 나섰다. “내가 탈게.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사실 슬루기호가 표류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 탓이야. 내가 장난으로 밧줄을 풀어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거야.” 자크는 울면서 말했다. “자크, 넌 이미 우리를 위해 몇 번이나 위험을 무릅썼잖아. 우리는 널 용서해. 그러니까 더는 네 죄를 갚을 필요 없어.” 도니펀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자크를 둘러싸고 달래 주었지만, 자크는 한동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브리앙이 연을 타기로 했다. 어두운 밤, 연을 탄 브리앙은 하늘에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며 불빛을 찾았다. 희미한 불빛이 섬의 동쪽에서 반짝거렸다. 월스턴 일당은 곰 바위 동굴에서 지내고 있는 듯했다. 브리앙이 줄을 당겨 신호를 보내자, 도니펀과 서비스는 도르래로 연줄을 감았다. 그런데 연이 호수 위 30미터 정도에 떠 있을 때, 강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연줄이 뚝’ 끊어졌다. 브리앙은 호수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브리앙! 브리앙!” 소년들은 애타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브리앙은 수영을 아주 잘했으므로 무사히 헤엄쳐 나올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월스턴 일당은 곰 바위 동굴에 있는 것 같아.” 브리앙은 소년들에게 월스턴 일당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무인도의 침입자. 월스턴 일당이 이 섬에 표류한 지도 보름이 넘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브리앙과 고든은 숲에 감시 초소를 세우려고 동굴을 나섰다. 그런데 숲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브리앙의 발에 무엇인가가 밟혔다. 그것은 담배 파이프였다. 월스턴 일당이 이곳까지 왔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브리앙은 동굴로 돌아와 케이트에게 파이프를 보여 주었다. 브리앙의 추측대로 파이프는 월스턴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위험이 바로 코앞에 닥쳐온 듯했다. 케이트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염려스러웠다. ‘이 소년들이 월스턴 같은 악당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에번스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케이트는 항해사 에번스 생각이 간절했다. 어느 날 밤, 정적을 깨뜨리는 총소리가 온 섬에 울리더니 동굴 입구에서 남자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소년들과 케이트는 바싹 긴장하여 귀를 곤두세웠다. “문 좀 열어 줘요, 빨리!” 동굴 밖에 있는 사람은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계속 문을 두드려 댔다. “아, 에번스야. 빨리 문을 열어 줘!” 케이트가 소리쳤다. 문을 열자 한 사나이가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수염이 텁수룩한 사나이였다. “아, 케이트! 살아 있었군요.” 사나이는 케이트를 알아보고 몹시 기뻐했다. 두 사람은 반가움에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소년들은 월스턴 일당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먼저 에번스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었다. 잠시 뒤 에번스와 소년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월스턴 일당은 연장이 없어서 배 수리를 못 하고 있어. 하지만 월스턴은 나를 데리고 섬을 조사하던 중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호숫가 숲에서 커다란 연을 발견했거든.” “그건 우리가 띄운 연인데!” 소년들이 동시에 외쳤다. “그때부터 난 탈출할 결심을 했어.” “그런데 어떻게 도망쳐 나왔어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도망쳤지. 아까 그 총소리는 그들이 쏜 거야. 너희들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우리 힘을 합하여 월스턴 일당과 싸워 보자.” “아저씨, 월스턴에게 연장을 빌려주면 배를 고쳐서 그냥 이 섬을 떠나지 않을까요?” 고든이 말했다. “안 돼,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 배를 월스턴 일당에게 줘 버리면 우린 이 섬을 어떻게 떠나니?” “그럼 세번호를 타고 이 섬을 뜰 생각이로군요. 그런데 그렇게 작은 배로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요?” “이 섬은 태평양의 외딴섬이 아니야. 이틀 정도 배를 타고 가면 육지가 있어. 이 섬은 ‘하노버섬’이라고 해.” “예? 우린 이 섬을 체어먼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하하, 이 섬은 이름을 두 개나 가졌군.” 며칠 뒤 에번스는 소년들을 모아 놓고 주의를 주었다. “월스턴은 동굴을 차지하려고 할 거야. 월스턴은 케이트나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일당 중 1명을 보내 이곳 동정을 살피게 할 거야. 어쩌면 느닷없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너희도 대비해 두어야 해.” 에번스의 예측이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벼랑에서 보초를 서던 웨브와 크로스가 동굴로 뛰어 들어와 낯선 사나이 둘이 동굴을 향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에번스는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하게 그들을 동굴로 데려오라고 소년들에게 지시했다. 고든과 브리앙, 도니펀, 백스터가 두 사나이를 맞으러 나갔다. 두 사나이는 소년들과 마주치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우리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이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브리앙이 사나이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모두 죽어 버렸어. 우린 지금 지칠 대로 지쳐 있으니 우리를 좀 도와주렴.” 사나이들은 지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우리들의 동굴로 안내해 드리지요.” 소년들은 두 사나이와 함께 동굴로 되돌아왔다. 사나이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는 한동안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살피는 눈치였다. 소년들은 일단 두 사나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사나이들은 잠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에 곯아떨어진 척했다. 소년들도 자는 척하며 계속해서 두 사나이의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한밤중이 되자 그들은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동굴 안을 살펴보고 다녔다. 에번스는 칼을 뽑아 들고 두 사나이 앞을 가로막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에번스를 보고 두 사나이는 깜짝 놀랐. “아니, 에번스! 너, 죽지 않았구나!” “그렇다, 이 악당들아! 어디 15명 소년의 맛 좀 봐라, 덤벼라!” 에번스가 소리치자 잠자코 누워 있던 소년들이 후닥닥 일어나 두 사나이를 에워쌌다. 그러자 두 사나이 중 하나가 돌연 칼을 꺼내어 휘두르더니 소년들 틈을 헤집고 바깥으로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다른 한 사나이는 사로잡혀 꽁꽁 묶였다. 에번스에 의하면 달아난 사나이는 로크이고, 사로잡힌 사나이의 이름은 포브스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에번스와 고든, 브리앙, 도니펀은 조심스럽게 정찰을 나갔다. 월스턴 일당이 왔다 갔는지 동굴 근처의 풀잎이 어지럽게 짓밟혀 있었다. 동굴로 돌아온 에번스는 포브스를 풀어 주면서 말했다. “포브스, 월스턴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말해라. 당신은 원래 월스턴의 일당이 아니잖아? 소년들을 구해 줘. 우리들의 목숨은 모두 당신의 말에 달려 있어.” 도대체 무엇을 말하라는 것이오?” “월스턴 일당은 지금 어디쯤 있나? “글쎄, 내가 오기 전에는 호수 북쪽에 있었소.” “또 올 것 같은가?” “그렇소.” 에번스는 포브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참고로 하여, 오후에는 소년들을 무장시켜 판과 함께 정찰을 나갔다. “월스턴 일당이 숲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도니펀, 너는 사격을 잘하니 그들이 나타나면 절대 놓치지 말아라.” 소년들은 에번스의 지시대로 숲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5분도 지나지 않아 ‘탕!’ 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총알은 브리앙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어 총소리와 비명이 연달아 들렸다. 도니펀은 판의 뒤를 쫓아 달렸다. “혼자서는 위험하다! 우리 모두 도니펀을 따라가자.” 에번스가 소리쳤다. 소리가 난 곳으로 가 보니, 한 사나이가 쓰러져 있었다. “파크다! 다른 녀석도 이 부근에 있을 거야, 조심해!” 브리앙이 없어진 것을 알고 가넷이 소리쳤다. 브리앙이 적에게 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두 판의 뒤를 쫓아다니며 브리앙을 찾았다. 에번스는 도망가는 로크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그런데 그는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 듯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편 소년들은 브리앙이 악당 코프와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브리앙, 내가 왔어. 힘을 내!” 도니펀은 소리치며 코프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코프는 손에 쥐고 있던 칼로 도니펀을 찔렀다. 바로 그때 에번스가 나타나 총을 쏘아 댔다. 코프는 에번스를 보자 재빨리 도망가 버렸다. 에번스와 소년들은 다친 도니펀을 부축하여 동굴로 돌아가기로 했다. 에번스와 소년들이 숲속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월스턴 일당은 ,동굴을 습격했다. 에번스와 소년들은 동굴로 돌아오는 도중 월스턴 일당이 동굴에 남아 있던 자크와 코스타를 끌고 강가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케이트가 월스턴에게 달려들어 소년들을 구하려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판이 재빨리 뛰어가더니 일당 중 1명의 목을 물었다. 그 틈을 타서 코스타는 일당들로부터 도망을 쳤다. 월스턴은 자크를 끌고 보트에 올라타려고 했다. 동굴에서 포브스가 월스턴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포브스가 다시 월스턴의 편이 될 생각인가?’ 에번스와 소년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포브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월스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포브스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포브스, 빨리 와!” 그런데 뜻밖에도 포브스가 월스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월스턴은 끌고 가던 자크를 내동댕이치고 포브스를 칼로 찔렀다. 바로 그때, 자크가 권총으로 월스턴의 가슴을 쏘았다. 월스턴은 비틀거리며 보트에 올랐지만, 모코가 쏜 대포에 맞아 보트는 가라앉고 말았다. 보트에 미리 탔던 일당 2명과 월스턴은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포브스는 목숨을 잃었다. 소년들은 보두앵의 무덤 옆에 포브스를 묻어 주었다. 나머지 일당도 모두 죽은 채 발견되었고 더는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운 뉴질랜드로. 에번스와 소년들은 세번호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세번호는 완전히 고쳐졌다. 도니펀이 건강해지는 문제만 남았다. 소년들은 그동안 무인도의 생활에 쓰였던 물건들을 배 안으로 옮겨 놓고, 항해 기간 먹을 식량도 넉넉히 준비했다. 고든은 기르던 짐승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드디어 떠나기로 한 2월 5일이 되었다. 오랫동안 생활해 오던 동굴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소년들은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소년들은 이별의 포성을 울리고 배를 맨 닻줄을 풀었다. 소년들은 체어먼섬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갑판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세번호는 편안한 항해를 이어가다가 2월 13일 오전, 드디어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던 증기선을 만났다. 마침내 소년들은 증기선으로 옮겨 탔고, 2월 25일 오클랜드항에 도착했다. 며칠만 더 있으면 15명의 소년이 뉴질랜드에서 3,300킬로미터 떨어진 섬으로 흘러간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들이 돌아오자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위험과 시련을 이겨 낸 소년들은 한층 성숙해져서 이제 다 자란 어른과 다름없었다.
소공녀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날이었어요. 런던 거리는 짙은 안개가 끼어 낮인데도 앞을 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어요. 이때 천천히 달리는 한 대의 마차 속에서 총명하고 예쁘게 생긴 소녀가 아빠에게 몸을 기댄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소녀는 거리의 풍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소녀의 이름은 세라 크루였어요. 이제 겨우 일곱 살인 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꽤 성숙해 보였어요. 세라의 엄마는 세라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지만, 세라에게는 더없이 다정다감한 아빠가 있었어요. 아빠는 외동딸인 세라를 사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이 있어 주었어요. 세라의 아빠인 크루 대위는 인도에 파견된 영국 군인으로, 여러 사람한테 부러움을 사는 큰 부자였어요. 사람들은 늘 세라도 크면 부자로 살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세라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직 잘 몰랐어요. 지금껏 세라는 인도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인도의 날씨는 너무 더워서 아이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못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들 대부분은 영국으로 건너가 학교에 다녔어요. 세라가 다섯 살이 되던 해 크루 대위는 세라에게 말했어요. “세라, 일곱 살이 되면 넌 런던으로 가야 한단다. 그곳에는 친구들도 많고, 널 가르쳐 줄 선생님도 있어. 넌 그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있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늘이 아빠가 말했던 바로 그날이었어요. 세라는 런던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아빠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었어요. 세라는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이곳에 온 것이 별로 기쁘지 않았어요. 한동안 아빠와 헤어져 살아야 하니까요. 드디어 마차가 높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추었어요. 크루 대위는 마차에서 세라를 내려 주고,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어요. 대위와 세라는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응접실로 갔어요. 그 집은 훌륭한 가구와 장식품들로 잘 꾸며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윽고 키가 크고 마른 민친 선생님이 들어왔어요. “안녕하세요? 원장 민친입니다.” 민친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인사했지만, 얼굴은 차가웠어요. 세라는 차가운 얼굴의 민친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민친 선생님은 돈에 대한 욕심이 유별나서 부잣집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는 척하여 그들의 부모에게서 많은 돈을 뜯어내고 있었어요. 민친 선생님은 크루 대위가 굉장한 부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크루 대위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어요. “크루 씨, 예쁘고 똑똑한 따님을 저희 여학교에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민친 선생님은 두 사람을 특실로 안내했어요. 세라는 화려한 침실과 거실을 혼자 쓰게 되었어요. 그리고 세라를 보살펴 줄 하녀도 있었어요. “민친 선생님, 세라에게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세라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민친 선생님은 크루 대위에게 꾸며 낸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어요. 세라는 며칠 동안 아빠와 함께 호텔에 머물렀어요. 크루 대위는 인도로 가기 전에 백화점에 들러 세라에게 많은 옷과 선물을 사 주었어요. 세라는 아빠가 사 준 선물 가운데 특별히 마음에 드는 선물이 있었어요. 바로 갈색 머리의 예쁜 인형이었어요. 세라는 인형의 이름을 ‘에밀리’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그날 밤부터 에밀리를 꼭 안고 잤어요. 다음 날, 크루 대위는 인도로 떠나기 위해 세라를 민친 여학교에 데려다주었어요. 그리고 만약 세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달라며 “배로 스킵워드 변호사”라고 적혀 있는 명함을 민친 선생님에게 주었어요. 세라는 아빠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눈물을 글썽이며 크루 대위의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크루 대위도 눈물을 흘리며 세라를 꼭 안아 주었어요. 크루 대위는 마차에 올라타고는 세라에게 말했어요. “세라, 다시 만나는 날까지 부디 건강해야 한다. 잘 있어, 세라.”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게요.” 세라는 아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어요. 아빠와 헤어지고 나서 방으로 돌아온 세라는 엉엉 울었어요. 에밀리가 함께 있어 주었지만 세라를 위로할 수 없었어요. 그날 밤은 정말 쓸쓸하고 외로운 밤이었어요. 슬픈 밤이 지나고 첫 수업을 받는 날이 왔어요. 민친 여학교 학생들은 벌써 세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학생들은 굉장한 부잣집 딸이며, 좋은 옷에 하녀까지 있는 세라를 부러워했어요. 부잣집 딸인 라비니아는 열세 살로 지금까지 민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었어요. 샘이 많은 라비니아는 민친 선생님의 사랑을 세라에게 빼앗기기 싫었어요. 세라가 민친 선생님의 뒤를 따라 교실에 들어서자, 열세 살인 라비니아부터 네 살인 로티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러운 표정으로 세라를 쳐다보았어요. 라비니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어요. 세라는 너무나 예쁘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민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세라를 소개했어요. “여러분, 오늘 새로 온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앞으로 서로 도와주면서 새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요. 세라, 친구들에게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저는 세라라고 해요. 나이는 일곱 살이고, 인도에서 왔어요.” 아이들은 나이 어린 세라가 당당하게 자기소개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어요. 민친 선생님은 새로 마련된 책상을 가리키며 세라에게 가서 앉으라고 말했어요. 세라는 조용히 자리로 가서 앉았어요. 첫 수업은 프랑스어 시간이었어요. 민친 선생님은 세라를 보며 엄격하게 말했어요. “아버지께서 하녀를 프랑스 사람으로 뽑으신 걸 보니 네가 프랑스어를 공부했으면 하시는 것 같구나.” 사실 세라는 프랑스어를 아주 잘했어요. 그래서 그 사실을 말하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어요.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실 뒤파르주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어요. 민친 선생님은 세라를 가리키며 뒤파르주 선생님에게 말했어요. “새로운 학생인 세라예요. 저 학생은 프랑스어를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세라는 창피를 당한 것 같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어요. 그러고는 뒤파르주 선생님에게 프랑스어로 이야기했어요. “저는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주위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써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어요. 앞으로 뒤파르주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어요.” 세라의 말이 끝나자 민친 선생님은 무안해서 화를 냈어요. “여러분은 세라와 같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일어나서 아무 이야기나 하면 안 돼요. 알겠지요?” 세라는 무척 당황했어요. 이때부터 민친 선생님은 세라를 미워하게 되었어요. 라비니아는 민친 선생님이 세라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는 옆에 앉은 아이를 쿡쿡 찌르면서 고소해했어요. 넋이 나간 듯 세라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어먼가드가 민친 선생님에게 지적당했어요. “어먼가드, 수업 시간 중에 어디에다 한눈을 팔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네가 언제나 성적이 좋지 않은 거야!” 민친 선생님의 말씀에 어먼가드는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세라는 어먼가드가 불쌍해서 자기가 대신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어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어요.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모두 여기저기 흩어져 놀았어요. 그런데 창가에 혼자 앉아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가 있었어요. 창밖을 내다보던 어먼가드는 발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게다가 발소리의 주인이 세라라는 것을 알고는 한 번 더 놀랐어요. 세라는 어먼가드에게 다정스럽게 말을 걸었어요. “세라라고 했지? 나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겠니?” “물론이지.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자.” “세라, 정말 고마워. 난 너와 친구가 될 수 있어서 무척 기뻐.” 세라는 어먼가드가 순진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보기와는 달리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어요. 어먼가드의 가장 큰 고민은 공부를 못한다는 거였어요. 학자인 어먼가드의 아빠는 여덟 개 나라의 말을 유창하게 할 줄 알았고, 수천 권이나 되는 책들을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어요. 그래서 어먼가드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했어요. 세라는 공부 때문에 고민하는 어먼가드에게 말했어요. “어먼가드, 이제부터는 내가 프랑스어를 가르쳐 줄게.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열심히 가르쳐 줄 테니까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어먼가드는 세라의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세라, 정말 고마워! 나도 너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먼가드는 세라의 두 손을 꼭 쥐고 세라를 쳐다보았어요. “어먼가드, 우리 에밀리한테 놀러 갈까?” “에밀리?” “응, 내 인형 이름이야. 아주 예뻐. 어먼가드, 네게 꼭 소개하고 싶어. 어서 내 방에 놀러 가자.” 두 아이는 창가에서 일어나 정답게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어요. 세라는 어먼가드에게 속삭이듯 말했어요. “어먼가드, 우리 살금살금 걷자.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말이야.” 어먼가드는 세라의 말에 솔깃해서 가슴 설레며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따라갔어요. 둘은 드디어 세라의 방 앞에 도착했어요. 세라가 방문을 여니 멋진 방에 예쁜 인형이 앉아 있었어요. “아, 에밀리가 벌써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네!” 세라가 아쉬운 듯 말했어요. “인형이 걸어 다닌단 말이야?” 어먼가드가 깜짝 놀라며 묻자 세라가 웃으며 말했어요. “응, 난 에밀리가 그런다고 상상을 해. 상상하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지 몰라.” 그제야 어먼가드도 웃으며 에밀리를 바라보았어요. “어머, 정말 예쁜 인형이구나. 내가 한번 안아 봐도 되니?” “자, 안아 봐.” 어먼가드는 에밀리를 자기 품에 꼭 껴안았어요. 어먼가드의 학교생활은 매일 슬픈 일투성이였어요. 야단을 혼자서 도맡아 맞았기 때문에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어요. 어먼가드는 이 학교에 와서 오늘처럼 친구와 정답게 놀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세라는 어먼가드에게 인도의 신비스러운 이야기와 바다 여행에 대한 자기의 멋진 경험을 들려주었어요. 그러다가 세라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어요. “세라, 왜 그래?” 세라의 슬픈 표정에 어먼가드가 당황하여 물었어요. “아빠 생각이 났을 뿐이야. 지금 아빠는 저 먼 인도에 계시거든. 내가 쓸쓸하고 외로울 땐 에밀리가 나의 유일한 친구야. 에밀리는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어 주거든.” “뭐, 에밀리가 네 이야기를 들어 준다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말할 때 에밀리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마치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어먼가드는 세라의 말에 깊이 감동했어요. 그리고 세라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민친 여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 세라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어요. 세라는 공부도 잘하는 데다 마음씨도 착했어요.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했어요. 하지만 라비니아와 민친 선생님은 날이 갈수록 세라를 미워했어요. 약삭빠른 민친 선생님은 돈을 밝히는 사람이라서 세라를 미워하면서도 무조건 세라를 칭찬했어요. 세라의 아빠 재산이 학교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잘 보여야 했거든요. 세라는 매일 밤 아빠에게 편지를 썼어요. 멀고 먼 인도에 있는 아빠가 몹시 그리워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긴 편지를 썼어요. 아빠의 안부를 묻고 좋은 친구와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아 행복하다고, 그래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썼어요. 안개가 자욱한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세라는 수업 후에 코트를 입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그때 세라는 더럽고 초라한 소녀가 석탄이 가득 든 통을 들고 힘겹게 걷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소녀는 따뜻한 옷을 입은 세라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다가 세라와 눈이 마주치자 무척 당황해했어요. 세라는 소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생긋 웃어 주었어요. 저녁때가 되었어요. 세라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때, 낮에 본 소녀가 무거운 석탄 통을 들고 식당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어요. 소녀는 어느새 세라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었어요. 소녀는 이야기에 방해가 될까 봐 조심조심 석탄을 넣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그 사실을 눈치챈 세라는 소녀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일부러 큰 소리로 이야기했어요. “인어 왕자님은 진주로 만든 그물을 끌고 초록색 바닷속으로 들어갔어. 공주님은 바위 위에 앉아서 인어 왕자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 소녀는 깨끗하게 닦여 있는 창을 한 번 더 닦으며, 열심히 세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그것을 본 라비니아가 말했어요. “아니, 저 아이도 듣고 있었네.” 라비니아의 말에 깜짝 놀란 소녀는 부리나케 나가 버렸어요. 세라는 화가 나서 말했어요. “라비니아, 왜 저 아일 쫓아냈어? 이야기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거잖아.” 라비니아는 점잖은 체하며 말했어요. “저 아이는 하녀야, 세라. 네 부모님은 하녀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부모님은 싫어하시거든.” “라비니아, 하녀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화가 난 세라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어요. “뭐, 내가 하녀 베키와 같다고?” 라비니아가 억울한 듯 큰 소리로 말했어요. “라비니아, 넌 좀 더 친절해져야 해!” 세라도 큰 소리로 말하고 방을 나와 버렸어요. 열네 살인 베키는 어려서부터 남의 집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 민친 여학교로 왔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을 해 왔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키가 작고 여위어 매우 어려 보였어요. 세라는 베키를 다시 만나서 위로해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였어요. 그날도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어요. 무용 연습을 끝내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세라는 깜짝 놀랐어요. 베키가 난로 앞 폭신한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던 거예요. 베키는 석탄을 넣으려고 왔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진 것 같았어요. “세상에, 가엾어라.” 세라의 인기척을 들은 베키가 눈을 번쩍 떴어요. 베키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어요. “세라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니야, 베키. 걱정할 것 없어. 난 널 조금 더 자게 놔두려고 했었어.” 세라는 겁에 질려 있는 베키에게 친한 친구를 대하듯 말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너무 따뜻해서 잠시만 앉아 있는다는 게 그만.” 세라는 베키에게 다가가 다정히 손을 잡아 주었어요.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마음씨가 고울까? 나의 더러운 손을 잡아 주시고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다니.’ 베키는 도무지 지금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아가씨, 정말 선생님한테만은 말하지 말아 주세요.” 베키는 애처롭게 말했어요. “그래,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세라는 베키에게 과자를 가득 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시간이 나면 놀러 오라고 했어요. 베키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세라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세라 아가씨, 고마워요. 저는 이제 석탄 통이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세라 아가씨 방에 와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걸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베키는 세라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어요. “언제든지 놀러 와.” 베키는 세라가 있는 한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세라 생각만 하면 힘이 솟는 듯했어요. 이제 베키에게도 친한 친구가 생긴 거예요. 세라가 베키를 알게 된 지 얼마 뒤 민친 여학교는 세라의 이야기로 술렁이기 시작했어요. 세라의 아빠 크루 대위가 친구의 제안으로 인도의 큰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학교 안에 순식간에 퍼졌기 때문이에요. “다이아몬드 광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세라가 꾸며 낸 걸 거야.” 라비니아는 질투심에 가득 차서 말했어요. 라비니아는 세라 옆으로 다가가 비꼬며 말했어요. “인도의 다이아몬드 공주님, 공주님이 어찌 우리 학교의 학생으로 있을까요?” “그래요, 난 가끔 내가 공주라고 생각해요. 공주라고 생각하니까 공주처럼 행동하려고 애써요.” “그럼, 잊지 않을 거예요.” 세라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그러고는 말없이 라비니아의 눈을 쏘아보았어요. 라비니아는 화가 났으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친한 제시의 팔을 끌며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그 뒤로 아이들은 세라를 ‘공주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세라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공주님’이라는 말이 세라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베키도 ‘공주님’이라는 애칭이 세라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베키는 진심으로 세라를 공주님처럼 대해 주었어요. 어느 날, 세라는 자기 방에서 베키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세라 아가씨가 주신 과자를 먹을 때 저는 조심해야 해요. 만약 부스러기를 흘리면 쥐가 그걸 먹으려고 나타나거든요.” “뭐, 쥐라고?” “네, 제가 있는 다락방에는 쥐가 아주 많아요. 처음엔 겁이 났지만, 지금은 마치 친구 같아요.” “친구? 에구머니나!” 베키는 세라가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어요. “세라 아가씨, 저같이 하녀로 태어나면 뭐든지 익숙해져요. 그래야만 살 수 있거든요.” 세라는 베키가 가여워 더욱 잘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민친 선생님은 세라가 베키에게 친절한 줄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둘이 가끔 세라의 방에서 이렇게 다정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전혀 몰랐어요. 세라의 열한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크루 대위에게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어요. 세라! 아빠는 숫자와 서류 때문에 골치가 아프구나. 모르는 것이 너무 많거든. 지쳐 있는 듯한 아빠의 편지를 읽은 세라는 곧 아빠의 기분을 풀어 줄 답장을 보냈어요. 아빠, 전 인형을 받기엔 나이가 들었답니다. 아마 이번에 받는 인형이 마지막 인형이 될 거예요. 그 어떤 것도 에밀리를 대신할 수 없지만, 이 마지막 인형은 존중해 주어야 해요. 마지막이니까요. 인도의 저택에서 이 편지를 받은 크루 대위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어요. ‘이 일에만 얽매여 있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런던으로 달려가서 세라를 안아 줄 텐데.’ 어느덧 세라의 생일날이 되었어요. 민친 선생님은 세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대하게 파티를 열어 주었어요. 아이들은 과자와 차를 차려 놓고 세라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드디어 분홍색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세라가 민친 선생님을 따라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들어왔어요. 민친 선생님이 생일 축하 인사를 했어요. 그러나 그건 단지 세라의 관심을 끌려는 인사에 불과했어요. “오늘은 세라의 열한 번째 생일날이에요. 세라는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도 정말 착해요. 여러분들이 불러 주고 있는 ‘공주님’이란 애칭은 세라에게 꼭 맞는 별명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파티에 초대해 준 세라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요.” 민친 선생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 한마디씩 했어요. “세라, 생일 축하해!” “진심으로 너의 생일을 축하한다.” 세라는 수줍어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간단히 인사를 했어요. “여러분, 이렇게 축하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멜리아 선생님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면서 말했어요. “민친 선생님, 세라의 아빠 크루 대위를 대신해 배로 씨란 분이 찾아오셨어요.” 아멜리아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민친 선생님은 교실에서 손님을 맞이했어요. 배로 씨는 얼굴이 사납게 생긴데다 몸이 깡마른 신사였어요. 민친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로 씨에게 근엄하게 인사를 하고는 의자를 권했어요. “먼 길 오시느라고 수고가 무척 많으셨습니다, 배로 씨. 무슨 일로 오셨나요?” 민친 선생님은 딱딱한 말투로 배로 씨에게 말했어요. 배로 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말했어요. “크루 대위는 다이아몬드 광산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말았어요. 게다가 열병까지 걸려 그만 죽고 말았어요.” 배로 씨가 돌아가고 민친 선생님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때 동생인 아멜리아 선생님이 머뭇거리며 들어왔어요. “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멜리아, 크루 대위가 돈 한 푼 남기지 않고 죽었대. 어서 가서 파티를 멈추고 아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해. 그리고 당장 세라의 드레스를 벗기고 검은색 옷을 입혀!” 민친 선생님이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어요. “어머, 세라가 너무 불쌍해요.” “이제 세라는 거지가 됐으니, 앞으로 하녀처럼 부릴 거야. 그러니 어서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해.” 아멜리아 선생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민친 선생님의 재촉에 못 이겨 파티가 열리는 방으로 갔어요. 아멜리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세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다른 아이들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멜리아 선생님과 세라를 번갈아 보았어요. “여러분, 이제 세라는 이 학교의 하녀가 됐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세라와 말해서는 안 돼요.” 아멜리아 선생님은 주저하며 민친 선생님의 말씀을 전했어요. “이제 세라는 빈털터리 고아가 되었어요. 만약 세라와 말하는 학생이 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아이들은 끼리끼리 소곤거리다가 흩어졌어요. 세라는 자기 방으로 가서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울었어요. 베키는 탁자 밑에서 울다가 민친 선생님에게 걸렸어요. “베키, 당장 나오지 못해! 여기서 계속 엿듣고 있었니?” “청소하고 있었는데 말소리가 들린 것뿐이에요. 세라 아가씨는 지금껏 보살핌을 받고 자랐어요. 앞으로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보살펴 주면 안 될까요?” “뭐라고? 절대로 안 돼.” 민친 선생님은 베키를 발로 차면서 마구 화를 냈어요. 몸에 꼭 끼는 검은색 옷을 입은 세라가 교실로 들어오자, 민친 선생님은 화풀이하듯 큰 소리로 말했어요. “잘 들어, 세라. 넌 이제 공주가 아니다. 오늘부터 네가 혼자 쓰던 방을 비워야 한다.” “그럼, 제 방은 어디죠?” 세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러자 민친 선생님은 조금 전보다 더 화가 났어요. 세라가 너무나 침착하고 당당했기 때문이에요. “넌 오늘부터 다락방에서 살아! 그리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야 해. 프랑스어도 잘하니까 어린아이들 공부를 도와줄 수도 있겠지. 만약 네가 여기서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널 여기서 쫓아낼 거야, 알겠지?” 세라는 민친 선생님에게 더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바로 다락방으로 갔어요. 세라의 방은 베키의 방 바로 옆에 있었어요. 세라는 다락방 앞에 이르러 문을 열었어요. 무척 낡고 지저분한 방이었어요. 세라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무릎을 올리고 앉았어요. 그리고 에밀리에게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었어요. 잠시 뒤, ‘똑똑’ 소리가 나더니 베키가 들어왔어요. 베키의 눈물 가득한 눈을 보자 그제야 세라도 참았던 눈물을 흘렸어요. 세라는 민친 선생님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어요. 세라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어요. 한 벌밖에 남지 않은 옷과 신발마저도 다 낡았어요. “흥, 꼴 좋다! 호호.” 라비니아가 세라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고소하다는 듯이 친구들에게 말했어요. 라비니아는 종종 세라를 몹시 괴롭혔어요. 세라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쉬지 않고 일했어요. 아무도 세라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세라는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그럴수록 더 당당해지려고 애썼어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대로 불평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다행히 세라의 외로운 마음을 붙잡아 준 고마운 사람이 셋 있었어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베키였어요. 세라는 다락방 옆에 베키가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었어요. 날마다 날이 밝기 전, 베키는 살그머니 세라의 다락방으로 들어와서 세라의 간단한 시중을 들어주었어요. “세라 아가씨, 이제부터 제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반말하더라도 용서하세요. 만일 제가 아가씨에게 존댓말을 한다면, 아가씨는 민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게 될 거예요.” 베키는 세라의 귀에 대고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불을 피우기 위해 부리나케 부엌으로 갔어요. 이렇게 사려 깊은 베키 덕분에 세라는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가 있었어요. 세라를 위로해 주는 두 번째 사람은 어먼가드였어요. 어느 날 밤 세라는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다락방에 누군가가 와 있었어요. 어먼가드였어요. 어먼가드는 세라를 보자마자 달려왔어요. “어머, 어먼가드 아니니? 혼나면 어쩌려고?” “네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세라!” 오랫동안 세라와 어먼가드는 아무 말 없이 안고 있었어요. 잠시 뒤, 어먼가드는 세라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세라, 많이 야위었구나. 난 너 없이는 못 살아. 너와 나는 여전히 친구인 거지?” “그럼, 어먼가드. 정말 고마워! 난 자존심을 세우느라 친구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먼가드는 세라의 손을 꼭 잡고, 세라의 예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세라, 이런 데서도 참고 살 만해?” 어먼가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어요. 세라는 방을 둘러보고 말했어요. “이 방을 다른 곳으로 상상하면 견딜 수 있을 거야.” 세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뼉을 치며 말했어요. “아! 바스티유 감옥을 상상하면 되겠다. 나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죄수야. 민친 선생님은 간수고. 이렇게 상상하면 한결 위로될 거야.” 어먼가드는 그 뒤에도 책과 과자를 한 아름씩 안고 몰래 다락방으로 찾아와 세라의 친구가 되어 주었어요. 물론 자주 올 수는 없었지만요. 세라를 위로해 주는 세 사람 가운데 마지막은 로티였어요. 로티는 평소 세라를 ‘세라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던 어린 동생이었어요. 그래서 세라가 프랑스어를 가르치러 왔을 때 로티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물었어요. “세라 엄마는 이제 가난한 거야? 난 세라 엄마가 거지만큼 가난한 거 싫어.” 세라는 로티가 울까 봐 얼른 달랬어요. “로티, 난 거지는 아니야. 거지는 집이 없지만, 난 집이 있잖아.” 하지만 로티가 못 믿겠다는 듯 물었어요. 민친 선생님이 세라와 로티를 노려보는 바람에 세라는 서둘러 로티를 달래고 자리를 떠났어요. 하지만 로티는 고집이 센 아이였어요. 세라가 어디에 사는지 알려 주지 않자, 로티는 스스로 세라의 방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마침내 세라의 다락방에 이르렀어요. 로티는 열린 문 사이로 방을 들여다보았어요. 초라한 방 안에 세라가 있었어요. 로티는 낯선 풍경에 놀라 눈물을 터뜨리며 외쳤어요. “세라 엄마! 세라 엄마!” 세라는 로티의 우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세라는 얼른 로티에게 달려가서 달랬어요. “로티, 네가 울면 내가 혼날 거야. 여기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저길 봐! 밤하늘의 별이 잘 보이잖아.” 세라는 다락방 낡은 창문을 가리켰어요. 그날 세라는 로티를 겨우 달래서 아래층으로 내려보냈어요. 그 뒤로 로티는 종종 세라의 다락방에 놀러 오곤 했어요. 하지만 어먼가드와 로티가 세라의 다락방에 놀러 오는 일은 힘들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었어요. 설령 온다고 해도 언제나 세라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어요. 그래서 세라는 거의 혼자 지내야만 했어요.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어요. 세라는 낡은 옷차림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추운 거리를 걸어 시장에 다녀와야 했어요. 세라에게는 코트나 장갑, 목도리 같은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더욱 힘들었어요. 눈이나 비가 오면 해진 신발 안으로 물이 들어와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어요. 민친 여학교 근처에 늘어서 있는 많은 집 중에서 세라의 마음에 쏙 드는 집이 있었어요. 세라는 그 집에 ‘대가족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그 집에는 여덟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늘 유모와 산책하거나 마차를 타고 나들이를 갔어요. 세라가 본 그 ‘대가족 집’은 항상 행복해 보였어요.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어요. 그날도 세라는 초라한 차림으로 시장을 다녀오다가 그 ‘대가족 집’ 앞에 우뚝 섰어요. 그때였어요. 귀엽게 생긴 한 남자아이가 세라에게로 다가왔어요. 그리고 세라의 초라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세라의 곁으로 다가와 호주머니 속에서 6페니의 돈을 꺼내 세라에게 내밀었어요. “6페니야, 이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어.” 세라는 깜짝 놀라 얼굴이 붉게 물들었어요. “아니야, 고맙지만 이 돈을 받을 수 없어.” 세라는 부드러운 말투로 거절했어요. 하지만 남자아이는 6페니의 돈을 세라의 차가운 손에 억지로 쥐여 주며 말했어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야. 그래서 우리 가족은 너처럼 가엾은 아이들을 돕기로 했어. 만약 네가 이 돈을 받지 않는다면 난 굉장히 서운할 거야.” 남자아이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마음이 나타나 있었어요. 세라는 남자아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돈을 받았어요. 남자아이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마차에 올라타 손을 흔들었어요. 세라는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세라의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세라는 지금까지 자기가 초라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거지로 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마차가 떠나려다 말고 갑자기 멈추어 섰어요. 세라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세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너, 왜 그 아이에게 6페니를 주었니?” 여자아이가 조금 전의 그 남자아이에게 말했어요. “아빠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라고 말씀하셨잖아. 그래서.” 남자아이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다 갑자기 말끝을 흐렸어요. “그 아이는 거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 아이는 비록 더럽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말씨나 얼굴을 보니까 거지가 아니야. 거지가 아닌 사람한테 돈을 주는 일은 실례야.” 이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대가족 집’ 사람들은 세라에 대해 흥미를 갖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세라가 지나가면 아이들은 세라에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어요. 그리고 세라에게 힘을 내라며 용기의 말도 종종 전했어요. 세라는 이제 이런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요. 프랑스어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도 세라를 잘 따랐어요. 창가의 참새와 다락방의 쥐들과도 제법 친해져서 세라는 간혹 흐뭇해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어요. 그리고 가끔 세라는 지붕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바깥 경치를 구경했어요. 그때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웃의 빈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가 그 빈집에 이사를 온다면 밤에는 전등불이 환하게 켜져 세라의 방도 조금은 환해질 것이고, 어쩌면 또래의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세라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달랬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세라는 심부름하러 다녀오다가 이웃집 앞에 이삿짐을 실은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드디어 빈집에 누가 이사를 오나 보다. 어떤 사람들일까? 마음씨 고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세라는 마음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드디어 이웃집 현관문이 열렸어요. 사람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이삿짐을 안으로 들여놓았어요. 세라는 잠시 멈춰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어요. 그런데 이삿짐 중에 세라의 눈에 익은 것들이 많았어요. 동양식 커튼과 융단 같은 것은 세라에게 그리운 인도와 아빠를 떠올리게 했어요. 무엇보다 세라의 눈길을 끈 것은 멋진 불상이었어요. 세라는 기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했어요. “혹시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집 사람들은 친구처럼 느껴질 거야.” 이삿짐은 종일 마차에서 내려져 빈집 곳곳에 놓였어요. 밤이 되자 오랜만에 베키가 놀러 왔어요. 베키는 세라의 다락방에 들어서자마자 말했어요. “세라 아가씨, 오늘 이웃집에 이사 온 분은 캐리스퍼드라는 인도 신사래요. 이웃집 하인한테서 들었어요. 굉장한 부자이고, 멋진 불상도 갖고 있대요. 부처님을 섬기나 봐요.” 베키는 세라의 고향 사람이 이웃집에 이사를 와서 무척 기쁜 모양이었어요. 세라는 베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베키, 아마도 그분이 부처님을 섬기는 건 아닐 거야. 취미로 불상을 모으는 사람도 있거든. 아빠도 불상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만, 부처님을 섬기지는 않았어.” 세라와 베키는 이사 온 사람에 대해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어요. 둘은 머릿속으로 이사 온 사람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그려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기도 했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라의 호기심은 풀리게 되었어요. 부엌일을 마친 세라는 잠시 다락방에서 쉬고 있었어요. 저녁때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어요. 다락방의 창밖에서 “끽끽”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세라는 소리가 나는 창문 앞으로 가 보았어요. 거기에는 터번을 쓴 한 남자가 서 있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캐리스퍼드 씨의 하인으로 있는 ‘람다스’라는 인도 사람이었어요. 하얀 옷에 흰 터번을 쓴 인도 사람은 원숭이 한 마리를 안고 있었어요. 세라는 인도 사람을 보자 반가워서 인도어로 소리쳤어요. “어머나, 당신은 인도에서 오셨군요.” 인도 사람은 세라의 유창한 인도어를 듣고는 몹시 놀랐어요. “아니, 어떻게 인도어를 그렇게 잘하나요?” “예전에 인도에서 살았었거든요.” 세라는 런던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가까이에서 인사를 나누며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무척 행복했어요. “아가씨 이름은 뭔가요?” “전 세라예요.” “세라 아가씨, 이 원숭이는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만, 아가씨가 잡지 못할 정도로 날쌔요. 만일 아가씨가 허락한다면, 이 원숭이를 아가씨한테 구경시켜 주고 싶어요.” 인도 사람은 세라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어요. 다음 날, ‘대가족 집’의 가장인 카마이클 씨가 캐리스퍼드 씨를 찾아왔어요. 변호사인 카마이클 씨는 캐리스퍼드 씨의 일을 돕고 있었어요. “캐리스퍼드 씨,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기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마 그 아이를 못 찾아서일 겁니다.” 캐리스퍼드 씨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카마이클 씨에게 말했어요. “캐리스퍼드 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를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카마이클 씨가 캐리스퍼드 씨를 위로했어요. 하지만 캐리스퍼드 씨는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어요. “지난밤, 람다스로부터 민친 여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고아 소녀 세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찾고 있는 그 아이도 혹시 그런 지경에 빠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더군요.” 캐리스퍼드 씨는 더욱 힘겨워하며 말을 이었어요. “지금 이 거리에도 얼마나 많은 소녀가 다락방 소녀처럼 헐벗고 굶주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정말.” “캐리스퍼드 씨, 건강을 생각해서 진정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다락방의 모든 소녀를 굶주림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아이를 찾는 일을 돕겠습니다.” 카마이클 씨는 건강이 좋지 않은 캐리스퍼드 씨가 흥분하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했어요. 캐리스퍼드 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말했어요. “카마이클 씨, 나는 그 아이의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릅니다. 나는 친구와 언제나 다이아몬드 광산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캐리스퍼드 씨는 카마이클 씨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어요. “카마이클 씨,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찾아 친구의 재산을 되돌려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그 아이를 찾아 주십시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어요. 세라는 심부름을 갈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들었어요.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민친 선생님의 심부름은 끊이지 않았어요. 며칠간 비가 계속 내리던 어느 날이었어요. 거리는 온통 물바다를 이루고 있었어요. 하지만 심술궂은 민친 선생님 때문에 그날도 세라는 멀리까지 몇 번씩이나 심부름을 가야만 했어요. 세라의 옷은 비에 흠뻑 젖었고, 발은 꽁꽁 얼어붙었어요. 겨우 심부름을 다녀오니 민친 선생님은 왜 이제야 오냐며 심하게 꾸중했어요. 그리고 늦게 온 벌로 세라는 밥을 굶어야 했어요. 세라는 이를 악물고 설움을 꾹 참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세라에게 우연한 행운이 찾아왔어요. 세라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없이 걷고 있을 때였어요. 물이 고인 웅덩이 옆에 무언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물건이 눈에 띄었어요. 세라는 얼른 그 앞으로 다가가 보았어요. 그랬더니 그곳에는 4페니짜리 동전이 떨어져 있었어요. 세라는 꽁꽁 언 손을 덜덜 떨면서 동전을 주웠어요. “어머! 진짜 동전이잖아.” 세라는 기뻐하며 4페니짜리 동전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래, 저 빵집 아주머니가 잃어버린 것인지도 몰라. 들어가서 한번 물어봐야지.’ 빵집 주인아주머니는 쾌활한 성격인 것 같았어요. 주인아주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진열장에다 가지런하게 놓고 있었어요. 그때, 세라의 눈에 초라한 소녀가 보였어요.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녀는 세라보다 훨씬 배가 고파 보였어요. 세라는 그 소녀 곁으로 다가갔어요. “너, 배가 몹시 고픈 모양이구나?” “응,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걸.” 소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어요. ‘세상에, 나보다 더 많이 굶은 것 같아.’ 세라는 불쌍한 소녀에게 따뜻한 빵을 먹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는 급히 빵집으로 들어갔어요. 가게 안에는 맛있는 빵 냄새로 꽉 차 있었어요. “아주머니, 제가 이 빵집 앞 웅덩이에서 4페니짜리 동전을 주웠는데, 혹시 아주머니가 떨어뜨린 것이 아닌가 해서 가지고 왔어요.” “넌 참 정직한 아이로구나. 기특하기도 해라.” 주인아주머니는 세라의 행동에 감탄하면서 말했어요. 세라의 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향해 있었어요. ‘저 빵을 소녀에게 먹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세라를 본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얘야, 그 돈은 내가 떨어뜨린 것이 아니란다. 아마 하늘에서 착한 너에게 내려 준 것인가 보다. 아무래도 그 돈의 주인은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이 빵이라도 사겠니?” “두 개 더 넣었다. 이따가 배가 고프면 먹도록 해라.” “아주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 지금 배가 무척 고팠거든요.” 세라는 주인아주머니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 소녀한테로 갔어요. 세라는 따끈따끈한 빵 하나를 소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어요. “얘, 어서 먹어.” 소녀는 빵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허겁지겁 입 속으로 빵을 밀어 넣었어요. “너, 하나 더 먹을래?” 세라는 그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또 빵을 내밀었어요. 그러자 소녀는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 봐 얼른 빵을 집어 입 속으로 밀어 넣었어요. “배가 무척 고팠나 보다. 자, 이것도.” 세라는 소녀에게 다시 빵 한 개를 건네주었어요. 이렇게 해서 세라는 빵 다섯 개를 그 소녀에게 주었어요. 그러고는 소녀에게 인사를 한 뒤 뒤돌아섰어요. “잘 있어.” 세라는 길을 건넌 다음 다시 뒤돌아보았어요. 소녀는 빵을 손에 든 채로 세라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꾸벅 인사를 했어요. 빵집 주인아주머니가 소녀에게 다가와서 물었어요. 주인아주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소녀에게 말했어요. “앞으로 굶게 되는 날에는 우리 집으로 오너라. 내가 빵을 줄 테니까 말이야.” 주인아주머니는 소녀에게 빵을 쟁반 가득 가져다주었어요. 세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늦게서야 학교로 돌아왔어요. 민친 선생님은 그날도 늦게 돌아왔다는 이유로 세라에게 밥을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세라는 걸어오면서 한 개 남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는 참을 만했어요. 세라는 지친 몸으로 다락방 문을 열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어먼가드가 와 있었어요. “세라,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나. 얼굴이 새파랗게 얼어 버렸어.” “맞아, 어먼가드.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야.” 세라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어요. 그날은 방을 점검하는 선생님이 외출하는 날이어서 세라와 어먼가드는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먼가드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며 침대의 한쪽에 쌓인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아버지가 보내 주신 책들이야.” 세라는 당장 그중의 한 권을 펼쳐 보았어요. “어머나! 어먼가드, 난 이 책이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몰라. 언젠가는 꼭 읽어 보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피로에 지친 세라의 눈에 생기가 돌았어요. 세라는 책을 가슴에 안은 채 기뻐서 어쩔 줄 몰랐어요. 그러자 어먼가드는 한숨을 쉬며 지겹다는 듯이 말했어요. “난 싫어, 그걸 다 외워야 한단 말이야. 아빠가 다음번에, 집에 오실 때 검사한다고 하셨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 그럼 이 책을 내가 먼저 읽게 해 주겠니? 내가 다 읽은 뒤에 네가 외울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줄 테니까.” 기뻐하는 어먼가드의 모습을 보면서 세라는 다시 말했어요. “어먼가드, 난 춥고 배고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어. 하지만 나에게 책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한 줄 아니?” 세라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자 어먼가드는 세라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말했어요. 세라는 음식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어요. “뭐! 먹을 거라고? 그러잖아도 난 지금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는데.” 세라는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뻔했어요. “세라, 네 생각이 나서 혼자 먹을 수가 없었거든.” “어먼가드, 정말 고마워. 넌 좋은 친구야.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세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요. “울지 마, 세라.” “그래, 울지 않을게. 우리 근사하게 상을 차려 놓고 파티를 벌이자.” 막 상을 차리려는데 베키가 들어왔어요. 이제 베키도 파티의 손님이 되었어요. 세라가 흥분하여 어먼가드와 베키를 보고 말했어요. 어먼가드와 베키는 즐거워하며 손뼉을 쳤어요. 바로 그때였어요. 누군가 세라의 다락방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세라와 어먼가드 그리고 베키는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셋은 문 가까이 가서 누구인지를 살며시 엿보았어요. 민친 선생님이었어요. 세 사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민친 선생님이 벌컥 문을 열었어요. 민친 선생님의 얼굴이 화가 나서 새파랗게 변해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더욱 겁에 질렸어요.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냐?” 민친 선생님이 앙칼지게 말했어요. 그러고는 방 안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어요. “너희들, 날 감쪽같이 속여 왔구나. 난 그래도 설마 했었는데, 역시 라비니아의 말이 맞았군.” 라비니아가 고자질한 것이었어요. 민친 선생님은 갑자기 베키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어요. “요 뻔뻔스러운 계집애 같으니라고. 빨리 네 방으로 가거라!” 민친 선생님은 베키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어요. 세라는 민친 선생님의 난폭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세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친 선생님을 쏘아보자, 민친 선생님은 더 화가 났어요. 하지만 민친 선생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민친 선생님은 바구니에 음식들을 담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는 어먼가드의 팔을 끌고 나가 버렸어요. 세라는 내일이 오는 것이 무섭고 두렵기만 했어요. 내일은 종일 일을 해도 한 끼도 먹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세라는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얼마 뒤, 세라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어요. 세라가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어떤 낯선 사람이 자기 방에서 부리나케 나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어요. 세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언제나 찬 바람이 쌩쌩 불던 추운 다락방이 따뜻하게 느껴졌거든요. 세라는 이불에 손을 뻗어 보았어요. ‘어머, 따뜻해라. 진짜 담요 같아. 꿈이라면 절대로 깨고 싶지 않아.’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꼭 감았어요. 하지만 일을 해야 하므로 일어나야 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방 안에 여러 가지 새로운 물건들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포근한 담요, 따뜻한 난로, 식탁과 의자, 쿠션 그리고 맛있는 음식 등 세라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몹시 놀랐어요. 세라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어딘가에 하느님이 내게 보내 주신 친구가 있나 봐.’ 세라는 옆방으로 가서 베키를 깨웠어요. 베키는 세라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오, 세라 아가씨.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요?” “모두 진짜야. 우리가 잠자는 동안 누군가가 와서 요술을 부린 게 틀림없어.” “그래, 우리 함께 맛있게 먹자.” 세라와 베키는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어요. 요즈음 들어서는 구경조차 못 한 맛있는 음식들이었어요. 다음 날은 비가 많이 내렸어요. 그러나 세라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따뜻한 난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한편, 민친 선생님은 세라를 떠올리면서 몹시 고소해하고 있었어요. ‘흥, 아마 세라는 눈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울었을 거야. 그리고 배가 고파서 애걸할지도 모르지.’ 민친 선생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남 앞에서 울지 않고, 늘 단정하기까지 한 세라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민친 선생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어요. 세라는 놀랍게도 아주 명랑한 얼굴로 일하고 있었어요. 민친 선생님은 약이 바짝 올랐어요. 그래서 세라에게 다른 날보다 잔소리를 더 늘어놓았어요. 세라는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했어요.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세라였지만, 많은 상상을 하면서 일을 해서 오히려 즐거웠어요. 그리고 늦은 밤 세라가 다락방으로 들어서니, 어제와 똑같은 일이 벌어져 있었어요. 게다가 어제보다도 더 좋은 물건과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세라는 다른 방에 온 줄 착각할 뻔했어요. 세라는 차츰 행복을 되찾게 되었어요. 갈수록 몸도 건강해지고, 얼굴은 살이 쪄서 윤이 났어요. 민친 선생님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멜리아 선생님에게 말했어요. “아멜리아, 어쩐 일이지? 바싹 말랐던 세라가 자꾸만 살이 찌니 말이야.” “글쎄요, 굶어서 부은 걸까요?” 아멜리아 선생님의 농담에도 민친 선생님은 웃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세라에게 또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오른쪽 다락방에 사는 소녀에게”라고 적힌 소포가 온 것이었어요. “아니, 소포를 받았으면 주인한테 전해 주지 않고 뭘 그렇게 멍청히 서 있니!” 소포를 들고 서 있는 세라에게 민친 선생님이 소리쳤어요. “이건 저한테 온 거예요, 민친 선생님.” “뭐? 너한테 온 것이라고? 누가 보낸 거니?” 민친 선생님은 깜짝 놀라서 물었어요. “누가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온 것만은 확실해요. ‘오른쪽 다락방에 사는 소녀에게’라고 적혀 있으니까요.” 민친 선생님의 표정이 굳어졌어요. 아가씨, 이것은 평상복이에요. 다음에는 나들이옷으로 보내 드리겠어요. 민친 선생님은 덜컥 겁이 났는지, 지금까지 세라를 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어요. “세라, 네게 아주 친절한 분이 계신 모양이구나. 가서 한번 입어 보려무나. 그리고 심부름 같은 건 안 해도 되니까, 새 옷으로 갈아입고 교실에 가서 공부하도록 해라.” 세라가 교실에 들어서자, 제시가 라비니아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소리쳤어요. “어머나, 라비니아! 세라 공주야.” 머리에 리본을 곱게 매고 새 옷으로 말끔하게 갈아입은 세라의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다웠어요. 라비니아는 세라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빨개졌어요. 아이들은 세라의 모습에 넋을 잃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어요. “누가 세라한테 재산을 물려주었나 봐.” “난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날 밤, 세라는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는 이름 모를 분에게 편지를 썼어요.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지만, 저와 베키는 당신 덕분에 잃었던 행복을 되찾았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라는 편지를 접어 식탁 위에 올려 두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어요. 이웃집 캐리스퍼드 씨는 건강이 더욱 나빠졌어요. 캐리스퍼드 씨는 친구 크루 대위의 딸을 찾고 있었으나, 아무런 소식조차 알 수 없어서 무척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건강이 무척 나빠졌어요. 게다가 크루 대위의 딸을 찾는 일을 도와주고 있는 ‘대가족 집’의 카마이클 씨도 지쳐 버린 상태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람다스가 기쁨에 가득 찬 표정으로 급히 캐리스퍼드 씨를 찾았어요. “주인님, 다락방의 불쌍한 소녀가 찾아왔어요. 원숭이가 소녀의 다락방에 들어갔었나 봐요.” 캐리스퍼드 씨는 카마이클 씨와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밖을 내다보았어요. 그곳에는 원숭이를 품에 안은 세라가 서 있었어요. 캐리스퍼드 씨는 세라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세라가 캐리스퍼드 씨 앞에 나타나자, 캐리스퍼드 씨는 세라의 품위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안녕하세요?” 세라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어요. “아가씨는 민친 여학교에 다니고 있나요?” 캐리스퍼드 씨가 다정하게 물었어요. “아니에요, 처음엔 저도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아빠가 작년에 인도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세라는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다소곳하게 말했어요. 세라의 말을 들은 캐리스퍼드 씨의 두 손이 떨렸어요. 캐리스퍼드 씨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아빠는 인도에서 뭘 하시던 분이었지?” “네, 아빠는 인도에서 군인으로 계셨어요. 전 인도에서 살다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공부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어요. 그런데 지난해, 아빠가 다이아몬드 광산 일을 하시다 열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이 말을 들은 캐리스퍼드 씨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물었어요. “그럼 아빠 이름은 뭐지? 그리고 또 아가씨 이름은?” “아빠는 랄프 크루 씨고, 제 이름은 세라 크루라고 해요.” 세라가 또박또박 말하자, 캐리스퍼드 씨는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쳤어요. “카마이클, 이 아이야! 내가 그토록 찾던 아이가 바로 이 아이야!” 캐리스퍼드 씨는 세라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품에 꼭 안고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어요. 세라는 캐리스퍼드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어요. “아저씨, 전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럴 테지. 난 너의 아빠와 동업을 한 친구란다. 네 아빠는 사업이 망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어. 우리가 그토록 애썼던 다이아몬드 광산 일이 성공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네 아빠는 네 앞으로 많은 재산을 남겨 놓았어. 난 그것을 너에게 전해 주기 위해 오랫동안 너를 찾아다녔단다. 그리고 드디어 이렇게 너를 만난 거란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세라는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어요. “제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안타까워하는 세라의 말을 듣고 카마이클 씨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캐리스퍼드 씨는 친구의 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안 가 본 곳이 없단다. 그리고 늘 친구의 딸 생각을 했단다. 람다스에게 너의 딱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친구의 딸이 생각나서 널 도와주고 싶어 하셨지. 그래서 람다스에게 네 다락방을 편안하게 꾸미고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한 거야.” 세라는 깜짝 놀라 캐리스퍼드 씨를 쳐다보았어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준 사람이 아저씨라고요?” 세라는 캐리스퍼드 씨의 앙상한 손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러자 캐리스퍼드 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요. “하하! 캐리스퍼드 씨의 밝은 얼굴을 보니 곧 완쾌되실 것 같군요.” 모처럼 캐리스퍼드 씨의 응접실에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어요. 세라의 마음이 좀 진정된 것으로 보이자, 캐리스퍼드 씨는 세라에게 함께 인도로 가자고 했어요. 세라는 캐리스퍼드 씨에게 베키도 함께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캐리스퍼드 씨는 흔쾌히 승낙해 주었어요. 그때, 캐리스퍼드 씨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왔어요. 민친 선생님이었어요.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저희 하녀가 이 집에 가더니 돌아오지 않기에 찾아왔습니다.” 민친 선생님은 세라를 보더니 소리쳤어요. “당장 돌아가지 못해! 돌아가면 혼날 줄 알아!” 캐리스퍼드 씨는 민친 선생님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어요. “세라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민친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앞으로 세라는 나와 함께 살 거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 변호사인 카마이클 씨에게 들으시오.” 얼마 뒤, 세라는 베키와 함께 멋진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졌어요. “오, 세라. 그냥 이곳에 남아 준다면 좋으련만. 그럼 내가 정말 잘해 줄 텐데.”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민친 선생님의 얼굴에는 초라함과 후회가 가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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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내가 홈스와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883년 4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시작되었어. 아침도 먹기 전, 이른 시각에 한 여인이 홈스를 찾아왔어. 여인은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검은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어. “이렇게 일찍 찾아오게 되어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고요.” 여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베일을 걷으며 말했어. “그런데 문득 전에 파린토슈 부인으로부터 홈스 씨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파린토슈 부인이라면. 아, 생각납니다. 부인이 보석이 달린 머리 장식을 도둑맞았을 때, 그 사건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저를 찾아오신 까닭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여유 있는 홈스의 모습에서 여인은 위안을 받은 듯했으나, 불안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어. “제 이름은 헬렌 스토너라고 해요. 스토크 모란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어요.” 헬렌은 쌍둥이 자매 가운데 동생이며, 언니는 줄리아 스토너라고 했어. 지금 함께 사는 아버지는 헬렌의 친아버지가 아니었어. 친아버지는 헬렌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의 아버지인 로일롯 박사와 인도에서 재혼을 한 거였어. 그러나 어머니가 재혼한 뒤에 몹시 불행한 일이 생겼어. 성격이 난폭한 로일롯 박사가 작은 실수를 한 하인을 호되게 때렸는데 그만 하인이 죽고 만 거야. 그 일로 로일롯 박사는 교도소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어. 로일롯 박사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그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혀 인도에서 더는 살 수가 없었어. 그래서 로일롯 박사는 영국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고, 그 후로 더욱 비뚤어져 일도 하지 않고 늘 사고만 저질렀어. 로일롯 박사에게 친구라고는 그의 땅에 천막을 치고 사는 집시와 인도에서 데려온 표범 한 마리, 개코원숭이 한 마리뿐이었어. 그런데도 로일롯 박사가 편히 살 수 있었던 것은 헬렌의 어머니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불행은 계속되어 헬렌의 어머니는 8년 전에 그만 철도 사고로 죽고 말았어.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어. 2년 전, 헬렌의 쌍둥이 언니인 줄리아는 한 해군 장교와 결혼하게 되었어. 결혼식이 2주일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밤, 줄리아가 헬렌의 방으로 들어왔어. 줄리아의 방은 헬렌의 방 바로 앞이고, 그 옆은 로일롯 박사의 방이었어. “언니, 아직 안 잤어?” “응, 아버지가 피우는 잎담배 냄새 때문에 잘 수가 없어.”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줄리아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했어. 밤 11시쯤 자기 방으로 가려고 문 앞에까지 간 줄리아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헬렌에게 물었어. “헬렌, 혹시 한밤중에 휘파람 소리를 들은 적 없니?” “아니, 못 들었는데.” 줄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어. “나는 잠귀가 밝아서 작은 소리에도 금방 잠을 깬단다. 그런데 그 휘파람 소리는 나직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주 기분 나쁜 소리야.” “혹시 집시들이 내는 소리가 아닐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줄리아는 살짝 웃으며 헬렌의 방에서 나갔어. 잠시 뒤, 줄리아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찰칵’ 하고 고리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어. 헬렌과 줄리아는 방문을 꼭 걸어 잠그는 버릇이 있었어. 로일롯 박사가 기르는 표범과 개코원숭이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어. 그날 밤은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쳤어. 헬렌은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아악!”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어. 헬렌은 후닥닥 침대에서 뛰어내려 복도로 나가려고 했어. 그때 나직하고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가 들렸어. 그리고 이어서 ‘철컥’ 하는 쇳소리가 들렸어. 헬렌은 복도로 급히 달려갔어. 그러자 줄리아의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줄리아가 비틀거리며 나왔어. “언니!” 헬렌은 얼른 줄리아를 부축했어. 줄리아는 푹 고꾸라져서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뒤틀었어. “언니,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줄리아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어. “아아, 무서워. 헬렌, 끈이야, 끈. 얼룩 끈.” 줄리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헬렌의 팔에 안긴 채 숨지고 말았어.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홈스가 물었어. “잠깐, 휘파람 소리와 ‘철컥’ 하는 쇳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까?” “네, 그래요. 그러나 폭풍우가 워낙 심했던 밤이라서 제가 잘못 들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때 언니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잠옷을 입은 채였어요. 오른손에는 불이 꺼진 성냥개비, 왼손에는 성냥갑을 들고 있었어요.” “그것은 중대한 단서입니다. 아마 침대에서 이상한 것을 느껴 벌떡 일어나 성냥불을 켜는 순간 사건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경찰에서는 어떤 조사를 했습니까?” “아버지의 평판이 워낙 나빠서 아버지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가 하고 엄중하게 조사했어요. 하지만 별로 알아낸 게 없었어요.” “줄리아의 방도 세밀하게 조사했습니까?” “네, 그러나 누가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창에는 창살이 있었고, 덧문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어요. 벽과 방바닥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럼 경찰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방에 있던 언니가 무슨 일로 갑자기 놀라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죽었다고 결론지었어요.” 홈스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어. “몹시 놀랐다고 해도 그로 인해 죽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혹시 독살된 흔적은 없었습니까?” “여러 의사가 조사했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어요.” “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인 ‘얼룩 끈’에 대해 혹시 짐작 가는 것은 없습니까?” “글쎄요, 저택에 딸린 땅에서 사는 집시가 얼룩무늬가 있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다니기는 해요. 하지만 그것을 끈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헬렌에게 물었어. “그런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가요?” “그건.” 헬렌은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말했어. 저도 곧 결혼을 해요. 그러자 아버지가 갑자기 제 방을 수리하겠다고 하셔서 언니가 쓰던 방으로 옮기게 되었어요. 방은 언니가 살았을 때와 똑같았어요. 그런데 바로 어젯밤의 일이에요.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어요. 저는 어쩐지 그것이 죽음을 부르는 소리 같아서 얼른 일어나서 램프에 불을 켰어요. 하지만 별로 이상한 것은 없었어요.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크라운 여관으로 갔어요. 그리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마차를 빌려 타고 곧장 이리로 달려온 거예요. “헬렌, 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일단 조사를 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스토크 모란의 저택으로 갈 테니 줄리아의 방과 로일롯 박사의 방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마침 잘 됐어요. 아버지는 아침 일찍 런던에 가셔서 저녁때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그럼 저는 왓슨과 함께 정오쯤 가겠습니다.” “저도 여기서 한두 가지 일을 마치고 그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가겠어요.” 헬렌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어. “왓슨, 출발하기 전에 법원에 가서 조사할 게 있네. 곧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잠시 뒤, 외출해서 돌아온 홈스의 손에는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어. “헬렌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장을 조사해 왔네. 유언장에 따르면 로일롯 박사는 해마다 1,000파운드씩 받고 있더군. 그런데 딸이 결혼하게 되면 해마다 그 돈 중 250파운드를 딸에게 주어야 하네.” “딸이 결혼하면 박사의 돈이 그만큼 줄어들겠군. 그러면 자네는 박사가 줄리아를 죽였고, 그 목적이 돈 때문이라는 건가?” “왓슨, 너무 성급한 결론은 내지 말게. 아무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권총을 준비해 가세. 만약 이 사건에 로일롯 박사가 관련되어 있다면 문제는 복잡해질 테니까.” 우리가 탄 마차는 시골길을 신나게 달렸어.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로일롯 박사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어. 저택은 낡은 건물이었는데, 작은 언덕 위에 있었어. 저택에 이르자 헬렌이 우리를 맞이했어. 헬렌은 그 문제의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어. “저기가 바로 줄리아 언니의 방이에요.” 그 방 왼쪽에 박사의 방이 있었어. 우리는 곧 줄리아의 방부터 조사하기 시작했어. 홈스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더니 침대 옆에 늘어져 있는 긴 줄 가까이 다가갔어. “아, 그 줄은 하녀를 부르는 초인종 줄이에요. 그런데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홈스는 초인종 줄을 잡아당겼어. “음, 초인종이 울리지 않는군요. 게다가 저 환기구는 밖으로 나 있지 않고, 옆방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를 들일 수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쓸모없는 초인종 줄과 옆방으로 나 있는 환기구라. 꽤 흥미롭군요. 그럼 이번에는 박사의 방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박사의 방은 줄리아의 방보다 약간 넓었어. 그리고 방 안에는 침대, 책꽂이, 벽에 바싹 붙여 놓은 의자, 둥근 책상, 커다란 금고 등이 있었어. 홈스는 금고 위에 있는 조그만 접시를 들고 살펴보았어. “표범이나 개코원숭이의 밥그릇치고는 너무 작군.” 홈스는 벽에 붙여 놓은 의자와 침대 모서리에 걸어 놓은 회초리도 자세히 살폈어. 회초리 끝은 둥근 고리로 되어 있었어. 갑자기 홈스는 긴장된 얼굴로 말했어. “헬렌,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잘못하면 당신도 목숨을 잃게 될지 모릅니다.” “네, 알겠어요.” 홈스는 창가로 가서 언덕 아래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어. 저기가 크라운 여관입니까? 우리는 저 여관에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올 테니까, 우리가 줄리아의 방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밤이 되면 방으로 들어가서 창가에 램프를 놓아두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신호 삼아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당신은 원래 당신이 쓰던 방으로 가 있으십시오. 우리는 여관에서 저택이 잘 보이는 방을 빌렸어. 저녁때, 여관방 침대 끝에 앉아서 저택 쪽을 보고 있으니 로일롯 박사가 탄 마차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어. 잠시 뒤, 로일롯 박사의 방에 불이 켜졌어. 홈스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어. “왓슨, 아까 자네는 이상한 점이 없었나?” “글쎄,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울리지 않는 초인종 줄뿐이었네.” “환기구는?” “그것 역시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환기구가 옆방으로 통하고 있다고 해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 같네. 쥐 한 마리도 지나다닐 수 없는 좁은 구멍이니까.” “난 그 구멍이 있다는 것을 여기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네.” “어떻게 알았는가?” “헬렌의 말에 의하면, 사건이 일어났던 날 밤에 줄리아가 박사의 담배 냄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부터 나는 두 방 사이에 어떤 구멍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 “묘한 곳에 생각이 미쳤군!” “나는 환기구와 초인종 줄 그리고 침대의 위치,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걸리네. 자네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나?” “글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침대는 바닥에 걸쇠로 고정되어 있어서 줄리아가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어. “홈스, 아무래도 자네는 줄리아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아까 우리가 그 방을 조사했을 때, 누군가가 밖에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자네도 보지 않았나?” “조금만 있으면 다 알게 될 걸세!”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밤이 깊어 저택의 불이 모두 꺼졌어. 그로부터 한 시간, 두 시간. 마침내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켰을 때, 저택의 한가운데 방에서 불빛이 반짝였어. “신호다. 왓슨, 권총을 준비하고 어서 가세!” 나는 홈스를 따라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어. 홈스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은 다음 아주 낮은 소리로 속삭였어. “왓슨, 졸면 안 돼. 졸면 우리도 죽임을 당할지 모르네. 자네는 의자에 앉아 있게. 나는 침대에 앉아 있을 테니.” 나는 권총을 든 채 홈스가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어. 홈스는 들고 있던 가느다란 지팡이를 침대 위에 놓고, 침대 곁에 성냥과 램프를 놓았어. 그러고는 램프의 심지를 낮추어 불을 꺼 버렸어. 방 안은 이내 캄캄해졌어.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규칙적인 종소리가 들려왔어. 밤 12시, 1시, 2시가 지나, 이윽고 새벽 3시가 되었어. 갑자기 환기구에서 반짝하고 불빛이 새어 나왔어. 그러나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고, 주위는 다시 캄캄해졌어. 어디선가 기름 타는 냄새가 풍겨 왔어. 그리고 옆방에서 박사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어. 그러나 그 소리는 곧 들리지 않았고, 기름 타는 냄새만 점점 더 심하게 났어. ‘도대체 박사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어.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다시 30분이 지났어. 갑자기 사락사락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어.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홈스가 후닥닥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성냥불이 확 피어올랐어. 그리고 지팡이로 초인종 줄을 후려치는 홈스의 모습이 보였지만, 성냥불은 이내 꺼졌어. “왓슨, 보았나? 틀림없이 보았을 걸세.” 나는 홈스가 무엇을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 갑자기 피어오른 성냥 불빛에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 그러나 나는 눈으로 보는 대신 귀로 들었어. 홈스가 성냥불을 켠 바로 그 순간,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었거든. 그것은 줄리아가 죽은 날 밤에 헬렌이 들었다는 휘파람 소리가 분명했어. 헬렌은 어젯밤에도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고 했어. 나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통 알 수가 없어서 어둠 속에서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어. 바로 그때, 날카롭고도 무서운 비명이 옆방에서 새어 나왔어.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비명이었어. 비명은 차츰 가늘어지더니 갑자기 뚝 그쳤어. “무슨 일일까?”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어. “글쎄, 권총을 들고 비명이 들린 옆방으로 가 보세.” 홈스는 램프에 불을 밝혀 복도로 나갔어. 나도 그 뒤를 따랐어. 홈스가 계속 박사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어. 그러자 홈스는 손잡이를 돌려 박사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어. 나는 홈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어. 탁자 위에 놓인 램프가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어. 금고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로일롯 박사는 의자에 앉아 앞을 노려보고 있었어. 박사의 머리에는 얼룩덜룩한 끈 같은 것이 칭칭 감겨 있었어. 박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나, 우리가 곁에 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 그는 이미 죽어 있었던 거야. “왓슨, 저것이 문제의 얼룩 끈일세.” 그때 박사의 머리에 감겨 있던 끈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쓱 고개를 들었어. 그것은 뱀이었어. “왓슨, 저 뱀은 인도 지방에 사는 우산뱀이야. 우산뱀의 독은 무척 강해서 물리면 아무도 살 수 없네. 박사는 헬렌마저 죽이려고 우산뱀을 이용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뱀에게 물려 죽은 걸세.” 홈스는 박사의 무릎에 놓인 회초리를 집어 들고 재빨리 끝에 달린 고리를 뱀의 머리에 걸었어. 그리고 금고 앞으로 가서 뱀을 금고 안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았어. “이것으로 이 사건은 끝났군. 이제 사건을 경찰에 알리는 일만 남았네.” 스토크 모란으로부터 돌아오는 기차에서 홈스는 사건의 내용을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어. “자네는 처음부터 로일롯 박사를 의심하고 있었군?” 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 “유언장에 의하면 해마다 1,000파운드씩 받던 로일롯 박사는 딸들이 결혼하게 되면 250파운드씩을 딸들에게 줘야 했었네. 그렇게 되면 로일롯 박사의 몫이 줄어들 테니 줄리아와 헬렌이 결혼하기 전에 죽이려고 했던 걸세.” “하지만 로일롯 박사가 어떤 방법으로 줄리아를 죽였는지는 자네도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몰랐을 테지?” “맞네, 하지만 줄리아의 방에서 쓸모없는 초인종 줄과 박사의 방으로 이어져 있는 환기구 그리고 고정해 둔 침대를 보았을 때 갑자기 뱀 생각이 떠오르더군. 뱀이라면 그 좁은 환기구를 통과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박사는 인도에서 표범과 개코원숭이를 데리고 왔으니, 우산뱀 정도 가지고 오는 것쯤은 문제가 없었을 걸세. 그리고 우산뱀에게 물리면 작고 검은 점 두 개만 남을 뿐이니 좀처럼 발각될 염려가 없다는 것까지 계산에 넣었겠지. 게다가 그는 의사였으니 우산뱀의 독은 검사해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걸세.” “그럼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는 무엇을 뜻하는 건가?” 그건 우산뱀을 다시 불러들이는 신호였을 걸세. 박사는 그런 방법으로 뱀을 훈련했겠지. 환기구로 들어간 뱀이 사람을 물어 죽인 다음에, 그 방에 그대로 있으면 자신의 범죄가 들키겠지. 그러니까 휘파람을 불어 뱀을 다시 자기 방으로 불러들인 거네. 하지만 박사도 단 한 번으로는 상대를 죽이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걸세. 그래서 여러 차례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성공했던 거지. 박사의 방에 있는 의자를 보면 그 위에 여러 번 구두를 신고 올라갔던 흔적이 남아 있더군. 그것은 뱀을 환기구에 여러 번 들여보냈다는 증거일세. “자네의 추리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은 박사의 방을 조사했을 때였나?” “맞네, 금고 위에 있던 접시는 표범이나 개코원숭이의 밥그릇치고는 너무 작더군. 그래서 나는 그것이 뱀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이고, 뱀이 금고 속에 있으리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네. 둥근 고리가 달린 회초리는 뱀을 잡을 때 쓰는 올가미임이 분명했고.” “그런데 아직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네. 헬렌은 줄리아가 죽던 날 밤, ‘철컥’ 하는 쇳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소리였나?” 내가 묻자 홈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 “자네도 들었을 텐데? 내가 뱀을 금고에 넣고 문을 닫았을 때 말일세.” “아, 그때 ‘철컥’ 하는 소리가 났었네. 그러니까 박사는 줄리아를 죽인 다음, 휘파람으로 뱀을 불러 금고 속에 넣은 뒤, 시치미를 떼고 복도로 나왔단 말인가?” “바로 그거라네. 이번에도 헬렌이 결혼하겠다고 하니, 같은 방법으로 죽이려고 한 걸세. 그래서 헬렌에게 필요도 없는 수리를 한다면서 줄리아의 방으로 옮기게 한 거지. 그러나 첫날 밤에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휘파람을 불어서 뱀을 다시 불러들였을 테고, 다음 날은.” “우리가 그 방을 지키고 있었지.” 나는 흥분하여 홈스의 말을 가로챘어. 그때, 자네도 분명 들었을 걸세. 뱀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환기구로 나오는 소리를 말이야. 나는 뱀이 가짜 초인종 줄을 타고 내려오자 지팡이로 힘껏 후려쳤네. 그러자 뱀은 깜짝 놀라 다시 박사의 방으로 도망치더군. 그런데 지팡이에 얻어맞아 성이 난 뱀이 로일롯 박사를 덥석 물어 버린 거야. 뱀을 후려갈겨 성이 나게 한 사람이 나였으니까, 나도 박사의 죽음에 얼마쯤 책임이 있는 셈이지. 하지만 나는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홈스는 이렇게 말하고 창밖을 내다봤어. 어느새 기차는 칙칙 소리를 내며 런던역으로 들어서고 있었어. 아주 조용한 오전이었어. 홈스는 신문을 쭉 읽더니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말했어. “이 넓은 런던에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어. 분명히 어딘가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거야.” 홈스가 이런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때, 창백한 얼굴을 한 청년이 홈스를 찾아왔어. 청년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어. “홈스 씨, 제 이름은 존 맥펄레인이에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아마 저는 곧 체포될 거예요.” 홈스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어. “당신이 왜 체포되어야 합니까?” “이 신문을 읽어 보세요. 그러면 제가 홈스 씨를 찾아온 이유를 알 거예요.” 맥펄레인은 신문을 홈스에게 내밀었어. 홈스는 청년이 건넨 신문을 펼쳤어. “어디 자세히 읽어 봅시다.” 나도 홈스의 어깨너머로 신문을 들여다보았어. 노우드의 살인 사건. 어젯밤 건축가 올데커 씨의 창고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다. 불은 자정쯤 났으며 창고는 모두 타버렸다. 그런데 불탄 창고에서 까맣게 그을린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뒤 주인인 올데커 씨는 보이지 않았고, 올데커 씨 집의 금고는 활짝 열려 있었다. 서류가 흩어져 있었으며, 몸싸움을 한 흔적도 보였다. 여기저기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고, 피 묻은 떡갈나무 지팡이도 발견되었다. 범인은 올데커 씨를 죽인 다음, 증거를 없애려고 시체를 창고로 끌고 가서 불을 지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집 가정부는 어젯밤 존 맥펄레인이라는 젊은 변호사가 올데커 씨를 찾아왔다고 증언했다. 조사한 결과 피 묻은 지팡이는 맥펄레인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런던 경시청의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말에 따르면 맥펄레인을 용의자로 보고 그를 쫓고 있다고 한다. 홈스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맥펄레인을 바라보았어. “경찰에서는 확실한 증거를 잡은 듯한데, 용케 잡히지 않고 도망쳐 왔군요.” 맥펄레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어. “운이 좋았어요. 저는 블랙히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요. 어젯밤 늦게 올데커 씨를 방문하고 근처의 호텔에서 묵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기차를 탔는데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다 틀렸어요. 런던역에서부터 미행을 당했으니 저는 곧 체포될 거예요.” 과연 그의 말대로였어. 곧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어. 두 명의 경관과 함께 우리의 친구인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들어와 큰 소리로 외쳤어. “맥펄레인, 당신을 올데커 씨의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그 소리를 듣고 맥펄레인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어. 홈스가 천천히 말했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우선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홈스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어. 지금까지 많은 사건을 홈스의 힘을 빌려 해결해 왔거든. “좋소, 30분만 저 사람의 변명을 들어 봅시다. 맥펄레인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어. 사실 저는 올데커 씨를 잘 알지 못해요. 그는 저의 부모님과 아는 사이였어요. 그런 올데커 씨가 어제 갑자기 제 사무실을 찾아와 종이 몇 장을 내밀며 그대로 유언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종이의 내용을 옮겨 적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그의 재산을 모두 저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이었거든요. 저는 몹시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어요. 그러자 그는 재산을 물려줄 사람도 없는 데다가, 저희 부모님으로부터 제가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어요. 저는 뜻밖의 일에 꽤 놀랐지만, 일단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어요. 그러자 올데커 씨는 밤 9시쯤 자기 집으로 와서 재산 목록을 함께 정리해 달라고 했어요. 저는 곧 어머니에게 전보를 친 다음, 기차를 타고 올데커 씨가 사는 노우드로 갔어요. 밤 9시 30분쯤 도착해서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식당에 가서 올데커 씨와 저녁을 먹었어요. 참, 현관에서 가정부에게 제 이름도 말했어요. 저녁 식사 뒤, 우리는 금고에서 서류를 꺼내 함께 정리했어요. 11시 30분쯤 일이 끝났고, 저는 유언장과 올데커 씨의 통장이 든 봉투를 녹인 밀랍으로 봉했어요. 제가 돌아가려고 하자, 올데커 씨는 방에서 바로 정원으로 나가는 유리문으로 나가라고 했어요. 가정부가 잠들었을 테니 일부러 깨우기 미안하다면서요. 그리고 밤이 늦어 저는 근처의 호텔에 묵었어요. 참, 지팡이를 그 집에 깜박하고 두고 나왔네요. 여기 올데커 씨가 쓴 유언장의 초안이 있고, 이것은 완성된 유언장의 복사본이에요.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맥펄레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퉁명스럽게 말했어. 당신에게 죄가 없다고 할 만한 증거는 하나도 없잖소. 자세한 이야기는 경찰서에 가서 듣기로 합시다. 경관, 나는 홈스 씨와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맥펄레인을 경찰서로 연행하게! 맥펄레인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홈스를 쳐다보았어. 하지만 이내 경관에게 끌려 힘없이 밖으로 나갔어. 홈스는 유언장의 초안을 잠시 들여다보며 말했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이 유언장의 초안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숨겨져 있군요. 내 생각에는 올데커 씨가 기차 안에서 쓴 것 같소. 처음 몇 줄은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썼기 때문에 글씨가 깨끗하고, 나머지는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썼기 때문에 글씨가 이 모양으로 되었을 거요.” 홈스의 말에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피식 웃었어. “홈스 씨, 그게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당연히 관련이 있소.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유언장을 쓴 걸 보니 올데커 씨는 진심으로 쓴 게 아닐 거요.” “그러나 그것을 초안으로 깨끗한 유언장이 작성되지 않았소? 만일 올데커 씨가 죽으면, 모든 재산은 맥펄레인이 차지하게 된단 말이오!” 홈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경감을 바라보며 말했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당신은 이 사건을 무척 간단하게 생각하는구려. 만일 당신이 맥펄레인이라면 가정부에게 자기 이름을 밝히고 들어가 살인을 하고, 바보처럼 증거가 될 지팡이를 놓고 돌아가겠느냔 말이오. 단정 짓지 말고 여러 면으로 한번 생각 좀 해 보시오.” 그러자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어. “홈스 씨, 더는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 나는 곧 노우드로 가서 맥펄레인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을 거요!” 홈스는 경감이 나가자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어. “블랙히스에 있는 맥펄레인의 집에 잠시 다녀오겠네. 올데커 씨가 남긴 유언장의 진정한 뜻만 알게 되면, 사건은 쉽게 풀릴 것 같네.” 그날 홈스는 밤이 꽤 깊어서야 돌아왔어.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한 시간 동안 묵묵히 바이올린을 켰어. 나는 홈스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어.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거든. 이윽고 홈스는 블랙히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 “맥펄레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 혐의로 쫓기고 있다는 걸 신문을 통해 알고 있더군. 그런데 뜻밖에 부인은 올데커 씨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내게 해 주었네.” 나는 너무나 궁금해서 침을 꿀꺽 삼켰어. 그는 원래 나쁜 사람이라 언젠가 그런 꼴을 당할 줄 짐작했다는 걸세. 부인은 젊은 날 올데커 씨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의 교활한 성격 탓에 부인이 약속을 깼다고 하더군. 부인은 책상 서랍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지. 그것은 부인이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인데, 칼자국이 잔뜩 나 있었네. 부인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는 날 올데커 씨가 보낸 사진이라고 했어. 부인은 올데커 씨를 여전히 미워하며 원망의 말들을 쏟아 내더군. 사실 그런 말은 맥펄레인에게 매우 불리한데 말이야. 어머니가 올데커 씨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아들도 올데커 씨를 미워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다음 날, 나는 홈스와 함께 올데커 씨의 저택으로 갔어. 홈스는 수첩을 꺼내어 저택의 약도를 그렸어. 그리고 묵묵히 저택으로 걸어가며 땅바닥을 자세히 살폈어. 땅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단단하게 굳어 있었어. 땅바닥에 무언가 묵직한 물건을 끌고 간 흔적이 울타리 너머까지 남아 있었어. 이것은 맥펄레인에게는 꽤 불리한 증거였어. 홈스와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어. 방 안 여기저기에 흐릿한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융단에는 올데커와 맥펄레인의 발자국만 있었어. 맥펄레인의 지팡이는 경관이 가지고 갔는지 보이지 않았어. 금고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서류가 흩어져 있었어. 홈스는 그 서류들을 주의 깊게 한 장씩 읽어 내려갔어. 그는 마지막으로 가정부를 만나 질문을 했어. 홈스의 질문에 가정부는 무뚝뚝하게 대꾸했어. “올데커 씨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주인어른은 함부로 사람을 만나지 않는 편이었어요.” “올데커 씨는 방 금고에 보통 무엇을 넣어 두었습니까?” “몰라요, 가정부인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가정부가 이렇게 나오니 홈스도 더는 질문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우리는 런던으로 돌아왔어. 홈스는 분하다는 듯 두 손을 깍지 낀 채 말했어. 내 생각엔 가정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네. 또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네. 방 안의 서류를 보니 올데커 씨는 콜네리우스라는 사람에게 거액의 수표를 몇 번이나 발행했더군. 그래서 남은 돈은 얼마 안 되었어. 올데커 씨는 어째서 그 많은 돈을 콜네리우스라는 사람에게 지급했을까?” 홈스는 깍지 낀 손에 더욱 힘을 주었어. 다음 날 아침, 내가 식사하러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에도 홈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어. “왓슨,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 홈스는 나에게 겉봉을 뜯은 전보를 내밀며 물었어. 중대한 증거를 찾았음. 맥펄레인이 범인임이 확실하니 사건에서 손을 떼시오. 레스트레이드 경감.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대단한 증거라도 잡았나 보군.” “하하, 지금쯤 경감은 의기양양해 있겠군. 하지만 단념하기는 아직 이르네. 증거란 흔히 양쪽에 날이 있는 칼과 같은 역할을 하니까.” 우리가 올데커의 저택으로 가자,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우리를 현관으로 안내했어. “바로 이것이 증거요.” 벽에는 피가 묻은 엄지손가락의 지문이 찍혀 있었어. “이 밀랍에 있는 맥펄레인의 엄지손가락 지문과 벽의 지문을 잘 비교해 보시오.” 벽에 난 지문은 맥펄레인의 지문과 똑같았어. 나는 이제 맥펄레인의 운명도 끝났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홈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레스트레이드 경감에게 물었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이 지문은 누가 발견한 거요?” “가정부가 발견하여 지난밤에 경관에게 알려 주었소.” “그런데 어제는 왜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오?” 홈스의 질문에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딱 잘라 말했어. “그야 현관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아서겠지. 아무튼, 이건 맥펄레인의 지문이 확실하오.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었으니, 난 거실에서 빨리 보고서나 써야겠소.” 경감이 거실로 가자, 웃음 띤 얼굴로 홈스가 말했어. “이 지문에는 큰 허점이 있네. 나는 어제 이곳도 꼼꼼히 조사했어. 이런 지문이 있었다면 내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지.” 밖으로 나간 홈스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저택을 살폈어. 그런 다음, 저택 안을 조심스레 돌아다니며 지하실에서 천장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조사했어. “왓슨, 이 사건의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네. 레스트레이드 경감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때가 되었네.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세.” 거실로 가니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열심히 보고서를 쓰고 있었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보고서를 쓰기에는 너무 이르오. 그 증거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지 않소?” 경감은 황당해하며 홈스를 바라보았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홈스 씨?” “맥펄레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거요. 물론 그것을 증명할 증인도 있소.” “아직도 홈스 씨는 고집을 꺾지 않을 생각이군요. 그렇다면 그 증인을 만나게 해 주시오.” “좋소, 그런데 그 전에 경관들을 불러 주시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경관들을 불렀어. 홈스가 경관들에게 말했어. “미안하지만 짚단과 물 두 양동이만 갖다주겠소?” 경관들은 홈스가 시키는 대로 짚단과 함께 물을 길어 왔어. 그러자 홈스는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를 데리고 2층 계단을 올라가 넓은 복도의 한가운데에 섰어. 그리고 여러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았어. “먼저 막을 열기 전에 무대부터 만들어야겠소. 그 짚단은 이 복도 가운데에 놓고 창문을 활짝 열어 주시오.” 홈스는 빙긋 웃으며 나에게 말했어. “왓슨, 미안하지만 저 짚단에 불을 좀 붙여 주게.” 내가 성냥불을 켜서 짚단에 불을 붙이자, 열린 창문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짚단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어. 복도는 순식간에 연기로 휩싸였어. “자, 이제 내가 말한 증인이 나올 테니까 잘 보시오. 모두 내 구령에 맞추어 ‘불이야!’ 하고 세 번 힘껏 질러 주시오. 하나, 둘, 셋!”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그러자 막다른 복도의 벽이 무너지듯 ‘쾅!’ 하고 열리더니 한 사나이가 허겁지겁 뛰어나왔어.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복도의 문에서 말이야. 그런데 뛰어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올데커였어. “자, 올데커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올데커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우며 말했어. “죄 없는 사람에게 살인 누명을 뒤집어씌우다니! 정말 나쁜 사람이군. 당장 이 자를 연행하도록!” 부하들에게 명령을 한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홈스에게 말했어. “홈스 씨, 정말 당신의 뛰어난 추리에 감탄할 뿐이오.” 홈스는 빙그레 웃으며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어깨를 툭툭 쳤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올데커 씨가 숨어 있던 곳이나 구경합시다.” 벽처럼 생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조그만 방에는 위로 햇빛이 들어오도록 만든 창이 천장에 나 있었어. “올데커 씨는 건축가여서 이런 방을 교묘하게 꾸밀 수가 있었던 거요. 그는 자기가 살해된 것처럼 꾸몄어요. 그리고 이 방에 숨어서 지냈던 거지요. 가정부도 공범이니 빨리 체포해야 할 겁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남아 있던 경관에게 가정부도 체포하도록 지시했어. 그리고 홈스에게 다시 물었어. “그런데 홈스 씨는 비밀 방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2층 복도와 바로 밑의 아래층 복도를 걸음으로 재어 보았소. 그런데 2층이 아래층보다 2미터가량 짧더군요. 그렇다면 2층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쯤은 뻔한 사실 아니오?”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래졌어. “역시 홈스 씨는 정말 대단하군요. 그럼 어떤 이유로 올데커 씨가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한 거요?” 아까 본 엄지손가락 지문이 단서가 되었소. 나는 어제 그 지문을 보지 못했다오. 그렇다면 그 지문은 누가 일부러 하루 사이에 찍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맥펄레인은 유언장을 봉할 때 밀랍을 썼다고 했소. 그때 자신도 모르게 밀랍 위에 자기 지문이 찍혔겠지요. 올데커 씨는 그 밀랍의 지문 위에 다른 동물의 피를 발라서 벽에 대고 눌렀을 거요. 그리고 저 방 안에 분명 그 지문이 찍힌 밀랍이 있을 거요. “그런데 올데커 씨는 왜 맥펄레인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려고 했던 거요?” 올데커 씨는 교활한 사람인 데다가, 옛날에 맥펄레인의 어머니와 결혼하려다가 거절당한 원한이 남아 있었소. 그래서 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아들을 희생시키기로 했던 거요. 그뿐 아니라, 요즘 올데커 씨는 주머니 사정이 매우 나빠져 빚쟁이들이 몰려와 남은 돈까지 빼앗길 형편이 되었소. 올데커 씨는 빚쟁이들을 속이기 위해 콜네리우스라는 가짜 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돈을 빼돌렸더군요. “결국 콜네리우스란 사람은 바로 올데커 씨 자신이었단 말이오?” “그렇소,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올데커란 존재를 죽이고, 콜네리우스란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려고 계획을 세웠던 거요. 그래서 맥펄레인이 자기를 죽일 동기를 만들기 위해 엉뚱한 유언장을 쓰고, 밤늦은 시각에 자기 집으로 그를 불러들인 거였소.” “그래서 맥펄레인이 올데커 씨의 함정에 빠진 거로군요.” “그렇소, 올데커 씨는 맥펄레인이 돌아가자, 방 안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고 동물의 피를 방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던 거요. 그다음에는 방 창문에서 창고까지 시체를 끌고 간 것처럼 흔적을 만들고, 동물의 사체와 자기 옷을 목재와 함께 놓고 불을 질렀다오. 그러고는 맥펄레인이 두고 간 지팡이에 동물의 피를 발라 둔 거요.” “교활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런 줄도 모르고 깜박 속을 뻔했소.”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무척 분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 우리가 거실로 가자, 올데커는 사나운 짐승처럼 홈스를 노려보다가 말했어. “몇 년 후에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당신에게 이 빚을 꼭 갚아 주겠소!” 그러자 홈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 “그렇게 하시오. 지루하지만 열심히 기다려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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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세드릭은 일찍 아빠를 여의었어요. 세드릭의 아빠는 큰 키에 파란 눈을 가진 영국 사람이었어요. 세드릭은 아빠의 어깨에 앉아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곤 했어요. 세드릭은 어렸지만 엄마에게 아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세드릭은 아빠에 대한 말을 꺼내서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았어요. 마음씨 고운 세드릭의 엄마는 세드릭의 아빠 케프텐 에롤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사람들은 나쁘게 말했어요. 특히 세드릭의 할아버지가 제일 심했어요. 영국 사람인 할아버지는 돈이 많은 백작이었어요. 고집이 무척 센 백작은 미국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어요. 그런데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그의 셋째 아들인 케프텐 에롤이 미국 여자인 세드릭의 엄마와 사랑에 빠진 거였어요. 케프텐 에롤은 두 형과는 달리 잘생기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백작은 미국에 건너가 있는 셋째 아들 케프텐 에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케프텐 에롤이 백작에게 미국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녀석은 더는 내 자식이 아니다!” 백작은 화가 나서 케프텐 에롤에게 더는 돈을 줄 수 없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어요. 그 뒤, 케프텐 에롤은 얼마간 무척 힘들게 생활했어요. 하지만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열심히 돈을 모아 세드릭의 엄마와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 세드릭이 태어났어요. 세드릭은 귀엽고 영리한 아이로 자랐어요. 세드릭이 짧은 양복을 입고 유모와 함께 밖에 나가면 모두 한마디씩 칭찬했어요.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그뿐 아니라 세드릭은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했어요. 세드릭네 집에 있는 하녀 메리는 그런 세드릭을 늘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리고 세드릭은 동네 길모퉁이에 있는 잡화상 주인 홉스 아저씨와도 친하게 지냈어요. 세드릭은 홉스 아저씨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아저씨네 가게에는 사과와 비스킷 같은 물건이 잔뜩 쌓여 있는 데다가, 가게 앞에는 짐수레와 말까지 있었거든요. 홉스 아저씨는 성미가 급해서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세드릭에게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어요. 세드릭은 홉스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아저씨는 세드릭에게 신문에 실린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어요. 그 내용은 대통령이 지금 어떠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귀족들이 어떤 행패를 부렸나 하는 것들이었어요. 어느 날 아침, 세드릭이 홉스 아저씨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녀 메리가 찾아왔어요. “도련님, 어서 집으로 가야 해요.” 세드릭은 메리와 함께 얼른 집으로 달려갔어요. 대문 앞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마차가 서 있었어요. 집 안으로 들어가니 엄마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그는 키가 큰 데다가 나이도 지긋해 보였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세드릭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어요. 어리둥절한 세드릭에게 키가 큰 사나이가 침착한 목소리 로 말했어요. “도련님이 바로 폰틀로이 경이시군요.” 세드릭은 자기를 폰틀로이라고 부르는 남자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어요. 낯선 손님이 가고 난 다음, 세드릭은 엄마로부터 놀라운 소식들을 전해 들었어요. 첫 번째 소식은 세드릭이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영국의 백작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소식은 아빠의 형님 되시는 분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을 사람은 세드릭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자신의 새 이름이 ‘폰틀로이’로 정해졌다는 것도 전해 들었어요. 세드릭은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전 백작이 되고 싶지 않아요.” “세드릭, 만일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네가 백작이 되는 것을 기뻐하셨을 거야.” 엄마는 슬픈 얼굴로 말했어요. 다음 날, 세드릭은 급히 홉스 아저씨에게 달려갔어요. 지금까지 자기한테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거든요. “어서 오너라, 세드릭.” 세드릭이 가게에 들어서자 홉스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세드릭은 약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어요. “홉스 아저씨, 언젠가 저에게 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여기 있는 빈 궤짝에 백작 따위는 결코 앉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지요?” “그럼! 만약 귀족 따위가 앉는다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아저씨가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어요. 그러자 세드릭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하지만 이 궤짝 위에 앉아 있는 제가 바로 백작인걸요.” 홉스 아저씨는 더운 날씨 때문에 세드릭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드릭은 홉스 아저씨가 자기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사실은 몰랐거든요. 어제 메리가 절 데리러 왔었잖아요. 집에 가 보니 영국에 계신 할아버지가 보낸 하비샴 씨란 분이 그 말을 전해 주지 뭐예요. 그분은 변호사래요.” 세드릭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어요. 홉스 아저씨도 그제야 세드릭의 말을 믿게 되었어요. 굳은 표정을 짓고 이야기하는 세드릭의 모습은 무척 진지해 보였어요. 그래서 홉스 아저씨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그래, 정말 대단하군!” “아저씨, 여기서 영국은 먼가요?” “암, 멀지. 영국에 가려면 대서양이라는 큰 바다를 건너야 한단다.” 홉스 아저씨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어요. “그렇다면 전 정말 영국 같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멀리 가면 다시는 아저씨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세드릭은 홉스 아저씨와 헤어지는 것이 정말 싫었어요. 그래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어요. 세드릭의 집에서는 변호사인 하비샴 씨와 엄마가 한창 의논을 하고 있었어요. 하비샴 씨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백작님은 폰틀로이 경을 자기 곁에 두고 교육을 시키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부인께서는 백작님의 성에서 좀 떨어진 코트로지라는 곳에 머무르시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나, 백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어요. 그 아이가 없으면 전 아무런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답니다. 자식을 어떻게 제 곁에서 떼어 놓을 수가 있겠어요?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그러나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어요. “하지만 백작님께서 우리 세드릭을 귀여워해 주신다면 기꺼이 보내야겠지요.” 엄마는 하비샴 씨의 말대로 따르겠다고 했어요. “부인, 백작님께서는 폰틀로이 경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들어주라고 하시면서 이 돈을 주셨어요.” 엄마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세드릭을 불렀어요. “세드릭, 이 돈은 네 할아버지인 백작님께서 너에게 보내 주신 거란다. 그러니까 네가 쓰고 싶은 곳에다 마음대로 써도 된다.” 엄마의 말이 끝나자 세드릭은 몹시 기뻐했어요. 왜냐하면 세드릭은 오래전부터 브리젯 아주머니를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브리젯 아주머니는 남편이 병으로 누워 있어서 무척 가난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할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세드릭은 브리젯 아주머니를 도울 수가 있게 된 거예요. 세드릭은 곧장 브리젯 아주머니 집으로 달려갔어요. “아주머니, 이 돈을 받으세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아주머니께 드리라고 주신 거니까, 집세도 내고 나머지는 아주머니가 알아서 쓰세요.” 세드릭이 상냥하게 말했어요. “세드릭 도련님, 정말 고마워요!” 브리젯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울먹이며 말했어요. 세드릭은 하비샴 씨와 엄마에게로 돌아와 말했어요. “엄마, 브리젯 아주머니에게 돈을 갖다드렸더니 아주머니는 기뻐서 자꾸만 눈물이 나온대요. 할아버지는 참 좋으신 분 같아요. 그리고 백작이 되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세드릭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세드릭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동안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사람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어요. 제일 먼저 사과 장수 할머니를 찾아가 인사하고 천막과 화로와 목도리를 선물해 주었어요. 저 할머니는 언젠가 제가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을 때 사과 하나를 그냥 주셨어요. 난 할머니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니까요. 사과 장수 할머니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세드릭은 하비샴 씨에게 말했어요. “형의 가게가 잘 되기를 빌겠어요. 우린 친구니까 자주 편지해요.” 세드릭의 말을 들은 딕은 가슴이 아팠어요. “세드릭, 네가 가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딕은 목이 메어 말끝을 흐렸어요. 세드릭은 마지막으로 홉스 아저씨를 찾아갔어요. 그러고는 “홉스 아저씨에게, 폰틀로이로부터”라고 쓴 금시계와 시곗줄을 선물했어요. 이렇게 해서 세드릭은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어요. 세드릭은 영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틈만 있으면 매일 홉스 아저씨네 가게로 놀러 갔어요. 홉스 아저씨는 세드릭과 작별하는 것이 몹시 슬펐어요. 그러나 눈물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말했어요. “세드릭, 너와의 추억을 절대 잊지 않겠다.” “저도 아저씨를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드디어 세드릭이 배를 타고 떠나는 날이 왔어요. 막상 떠날 날이 오니까 그동안 정들었던 마을과 집과도 작별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엄마와 세드릭은 슬퍼졌어요. “무척 정든 집이었는데. 엄마, 우린 이 집을 영원히 잊지 않기로 해요.” 부두에 도착하니 영국으로 가는 배에는 많은 손님이 타고 있었어요. 손님 중에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세드릭처럼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어요. 세드릭과 엄마는 곧 배에 올라탔어요. 세드릭은 처음으로 배를 탔기 때문에, 부두의 떠들썩함이 신기하게 여겨졌어요. 그래서 갑판 난간에 기대어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 멀리서 딕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딕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어요. “후유, 다행이다. 널 만나려고 막 달려왔어. 이건 내 선물이야. 어제 장사해서 번 돈으로 샀어.” 그러고는 손수건을 내밀었어요. 세드릭이 미처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이 울렸어요. “안녕, 세드릭! 언제나 그 손수건을 가지고 다녀.” 세드릭은 딕이 준 손수건을 펴 보았어요. 그것은 보랏빛 자갈과 말 얼굴이 그려진 빨간 비단 손수건이었어요. 세드릭은 딕을 향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딕 형, 정말 고마워요. 그럼 안녕!” 세드릭의 엄마는 영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세드릭에게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어요. 그것은 영국에 가면 세드릭과 엄마가 따로 떨어져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어요. “세드릭,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엄마의 집은 네가 사는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올 수 있단다.” 엄마는 세드릭을 꼭 안아 주었어요. 하지만 세드릭은 엄마가 왜 자기와 같은 집에서 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세드릭의 엄마는 세드릭이 백작을 싫어하게 될까 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요. 세드릭이 영국의 리버풀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날로부터 11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밤, 세드릭은 엄마가 살게 될 코트로지의 집에 도착했어요. 주위가 어두워서 집 모양은 알 수 없었지만, 문을 들어설 때 양쪽에 나무가 서 있어서 마치 터널 같았어요. 그들은 마차를 탄 채 나무 터널 사이를 지나갔어요.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고 불빛이 밖에까지 비쳤어요. 세드릭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현관 쪽으로 달려갔어요. 거기에는 하녀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먼저 와 있던 메리도 있었어요. 세드릭은 메리를 보고 기뻐서 달려갔어요. “어, 메리 아냐?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 엄마도 웃으면서 말했어요. “메리, 낯선 곳에서 네 얼굴을 보니까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저도 마님과 도련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메리는 이렇게 말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어요. 세드릭과 엄마는 메리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어요. 2층에는 하얀 커튼을 단 침실이 있었어요. 방 한가운데에는 난롯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고, 페르시아고양이가 그 옆에서 자고 있었어요. 메리가 잠들어 있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마님, 이 고양이는 성의 유모가 보내 주신 거예요. 고양이라도 있으면 마님께 위안이 될까 해서요.” 세드릭과 엄마는 잠시 2층에서 쉬었다가 다시 아래층의 넓은 방으로 내려갔어요. 그들은 하비샴 씨와 함께 식사했어요. 세드릭은 식사하면서도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어요. 하비샴 씨는 식사를 마치고, 백작을 만나러 갔어요. 백작은 난로 옆에 놓인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아픈 다리를 발판 위에 올려놓은 채 쉬고 있었어요. 백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하비샴 씨에게 말했어요. “하비샴, 이제 오나!” 백작의 얼굴에는 폰틀로이라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빨리 알고 싶어 하는 초조한 표정이 엿보였어요. 하비샴 씨는 그런 백작의 심정을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네, 백작님.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도련님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주 씩씩하고 똑똑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영국의 어린이와는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그럴 거야, 아마 그 아이는 무척 버릇없는 아이일 게야. 그렇지, 하비샴?” 백작이 물었어요. 하비샴 씨는 백작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쓸데없이 긴말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다음 날, 세드릭은 하비샴 씨가 타고 온 마차를 타고 드린코트성으로 향했어요. 백작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오라고 했기 때문에, 가로수 밑을 지나갈 때는 정오가 훨씬 지난 무렵이었어요. 세드릭은 마차 안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가로수 사이의 경치를 보고 있었어요. 얼마 뒤, 마차가 드린코트성의 정문 앞에 도착했어요. 문 양쪽에는 돌로 만든 사자가 세워져 있었어요. “우아! 정말 굉장하다!” 세드릭은 창밖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뛰어나왔어요. 아주 건강해 보이는 부인과 귀여운 두 명의 어린이였어요. “안녕!” 세드릭이 인사하자 부인은 절을 하며 말했어요. “도련님, 이곳에 오신 것을 정말 환영합니다.” 세드릭이 살게 된 드린코트성은 영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주 넓고 훌륭한 곳이었어요. 특히 세드릭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정원의 큰 나무들과 빽빽한 가로수였어요. 세드릭은 마차의 창을 통해 경치를 내다보면서 신이 났어요. “하비샴 씨,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에요. 도대체 정문 있는 데서 현관까지는 얼마나 먼가요?” “아마 5, 6킬로미터쯤 될 겁니다.” 세드릭은 하비샴 씨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어요. “앞으로 제가 이곳에서 살게 된단 말이에요?” “물론입니다, 도련님.” 벽은 온통 덩굴로 뒤덮여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듯했어요. “언젠가 그림책에서 본 적이 있는 궁전 같아요.” 세드릭은 성의 웅장한* 모습에 흥분하여 말했어요. 세드릭이 현관에 도착하자, 똑같은 제복을 입은 하인들이 두 줄로 쭉 늘어서 있었어요. 세드릭은 이런 광경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하인들이 백작의 뒤를 이어 이곳 주인이 될 자기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 세드릭은 하인의 안내를 받고, 어떤 방문 앞까지 갔어요. 하인은 방문을 열고서 공손히 말했어요. “저, 폰틀로이 경이 오셨어요.” 세드릭은 곧 방으로 들어갔어요. 넓은 방 안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어요. 세드릭은 처음에 그 방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조금 뒤, 벽난로 옆에 놓인 큰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백작을 발견했어요. 의자 옆에는 커다란 갈색 개 다가르가 누워 있었는데, 세드릭을 보자 어슬렁어슬렁 다가왔어요. 그러나 세드릭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요. 세드릭은 다가르의 목걸이 위에 손을 얹고서 개를 따라 백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어요. 이윽고 백작은 얼굴을 들어 세드릭을 바라보았어요. 백작은 개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세드릭이 마음에 들었어요. 세드릭은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백작에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어요. “백작님이세요? 뵙게 되어 참 기뻐요. 전 할아버지의 손자 폰틀로이예요.” 백작은 세드릭을 찬찬히 살피고 나서 물었어요. “그래, 나를 만나서 기쁘냐?” “네, 할아버지. 누구든지 자기 할아버지는 좋아해요. 더구나 할아버지같이 친절한 분이라면 더욱 좋아해요.” 세드릭의 말을 듣고 백작은 웃으면서 말했어요. “하하, 내가 친절하단 말이지?” 세드릭은 자기에게 보내 준 돈으로 평소에 자기가 도와주고 싶었던 사람들을 보살펴 준 이야기를 했어요. 딕이 선물해 준 손수건도 꺼내 보이고 홉스 아저씨의 이야기도 모두 들려주었어요. 백작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세드릭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어요. 세드릭은 백작의 다리를 바라보며 공손히 말했어요. “할아버지,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백작은 자기를 돕겠다고 말하는 어린 손자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어요. 백작은 무뚝뚝하게 물었어요. “그래, 네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 할 수 있어요. 전 벌써 일곱 살인걸요.” “좋아, 한번 해 보렴.” 백작의 말이 끝나자 세드릭은 백작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주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어요. 백작은 세드릭의 한쪽 어깨에 몸을 의지하고 일어섰어요. 세드릭은 백작의 아픈 다리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갔어요. 식당에 도착한 세드릭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어요. 백작은 세드릭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하인에게 했듯이 어린 세드릭의 어깨에 사정없이 자기 몸을 기댔거든요. 그러나 세드릭은 꾹 참고 자신이 하겠다고 한 일을 잘 해냈어요. 백작은 세드릭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식당은 아주 넓고 훌륭했어요. 세드릭은 백작 맞은편에 앉아 식사했어요. 세드릭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크고 호화롭게 보였어요. 자기만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나 세드릭은 태연하게 행동했어요. 세드릭은 식탁 너머로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백작을 보았어요. 백작은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백작의 식탁은 늘 호화롭고 특별한 요리로 채워졌어요. 오늘 저녁 요리는 백작의 마음에 든 것 같았어요. 늘 혼자서 식사를 했던 것과 달리 오늘은 귀여운 손자와 함께했기 때문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보관을 쓰지 않으시나요?” 세드릭이 공손한 말투로 물었어요. 세드릭은 백작이라면 언제나 번쩍거리는 보관을 머리에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나에겐 보관이 어울리지 않는단다. 그래서 쓰지 않는 거야.” 백작은 세드릭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미소를 지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하인들이 입에다 손을 대더니 헛기침을 해 댔어요. 웃음을 참느라 그런 거였어요. 식사가 끝나자 세드릭은 넓은 방을 둘러보며 말했어요. “할아버지는 이런 집에 살아서 좋으시겠어요. 이런 훌륭한 집에서 살면 누구나 기뻐할 거예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훌륭해요. 하지만.” 세드릭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어요. “할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살기에는 너무 넓은 것 같아요.” “난 둘이 살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너한테는 이 집이 너무 넓단 말이지?”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어요. “전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있으면 함께 있어도 가끔은 쓸쓸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나하고 있으면 어떻겠니?”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식사 뒤 세드릭은 할아버지와 단둘이 남게 되었어요. 세드릭은 다가르와 함께 앉아 난롯불을 바라보았어요. 백작은 세드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어요. “폰틀로이, 왜 그러고 있니?”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전 엄마와 떨어진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엄마가 먼 곳에 계시지 않으니 다행이에요. 게다가 가끔 엄마께서 주신 사진을 볼 수도 있거든요.” 세드릭은 백작의 팔에 기대면서 주머니 속에서 엄마 사진을 꺼내 들었어요. 백작은 세드릭의 행동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세드릭의 어깨 너머로 사진을 들여다보았어요. 사진 속에는 아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있었어요. 백작은 속으로 놀랐지만 태연하게 말했어요. “폰틀로이, 넌 네 엄마를 제일 좋아하고 있구나.” “네, 전 엄마를 정말 좋아해요. 게다가 전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예요. 우리는 모든 일을 숨김없이 의논하거든요.” 세드릭은 다가르 옆으로 가서 얌전하게 난롯불을 바라보았어요. 백작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세드릭을 바라보았어요. 백작은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쓸쓸하게 앉아 있는 세드릭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러나 슬픔을 이겨 내려고 애쓰는 세드릭이 기특하고 든든했어요. 백작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하비샴 씨가 다가왔어요. 그러자 백작은 “쉿! 조용히!”라고 속삭였어요. 어느새 세드릭은 다가르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거든요. 다음 날 아침, 세드릭이 눈을 뜨자 방 안에는 두 여자가 있었어요. 한 사람은 멜론 부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앞으로 세드릭의 시중을 들어줄 도슨이라는 여자였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도련님? 도련님, 뭐든 말씀하시면 도슨이 도와드릴 거예요.” “고마워요, 난 혼자서 목욕도 하고 옷도 입을 수 있지만 단추를 채울 때만은 좀 어려워서 도움을 받아야 해요.” 세드릭이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간 방은 아주 넓었어요. “아니, 이렇게 넓은 곳에서 식사한단 말이에요?” 도슨의 말에 의하면 그 방 말고도 또 하나의 방이 더 있는데, 그것도 세드릭의 방이라고 했어요. 세드릭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어요. “하지만 난 아직 어린아이인데 이렇게 큰 방을 셋이나 갖다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처음엔 이상하겠지만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리고 다음 방도 구경하셔야죠? 식사가 끝나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도슨의 말에 세드릭은 다음 방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서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빨리 끝냈어요. 도슨이 옆방 문을 열었어요. 그 방은 무척 아름다운 방이었어요.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여러 가지 장난감이 수북하다는 것이었어요. “여긴 어린아이 방 같아요. 도대체 누구의 방인가요?” 세드릭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물었어요. “모두 도련님 거예요. 그리고 즐거운 일이 또 있어요. 마구간에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아마 그중에는 도련님이 좋아하실 말도 있을 거예요.” “그래요? 난 말을 아주 좋아해요.” 세드릭은 신이 나서 얼른 백작에게 달려갔어요. “할아버지, 장난감을 많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세드릭은 이어서 말했어요. “할아버지,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함께 놀아 드리고 싶어요. 신이 나서 다리가 아픈 것을 잊을지도 모르거든요.” 백작은 어린아이와 놀아 본 적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어요. “오냐, 어서 갖고 오렴!” 세드릭은 백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장난감을 가지고 와 조그마한 탁자 위에 올려놓았어요. “파란 것은 할아버지 것이고, 빨간 것은 제 거예요. 나무로 만든 것이지만 사람으로 생각하고 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세드릭과 백작은 장난감으로 함께 놀이를 했어요. 세드릭뿐 아니라 백작도 몹시 즐거워했어요. 잠시 뒤, 모던트 목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어요. 목사는 백작이 기분 좋은 얼굴로 어린아이와 함께 열심히 놀이를 하고 있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모던트 목사는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이나 기부금에 대한 것 등을 의논하러 가끔 백작을 방문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백작은 늘 찌푸린 얼굴이었기에 목사는 백작을 만나는 일이 거북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백작이 밝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백작은 세드릭과 하던 놀이를 계속하면서 목사에게 악수를 청했어요. 세드릭에게도 목사님을 소개했어요. “우리 마을의 모던트 목사님이시다.” 세드릭은 얼른 일어나더니 공손하게 인사했어요. “안녕하세요? 목사님.” 모던트 목사는 미소를 지으며 세드릭에게 악수를 청했어요. 목사는 세드릭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세드릭을 좋아하는 까닭은 세드릭의 상냥한 말투와 예의 바른 태도 덕분이었어요.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소?” 백작이 목사에게 물었어요. 저, 히킨스에 관한 일입니다. 그 사람은 작년 가을에 병에 걸린 데다가 아이들까지 병에 걸려 집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그에게 집을 내놓으라고 해서 갑자기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작님께서 그 집주인에게 얼마간 기다려 달라는 말씀을 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세드릭은 목사가 백작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열심히 듣고 있다가 걱정이 되어 말했어요. “제가 알던 브리젯 아주머니와 똑같은 처지예요.” 백작은 세드릭에게 물었어요. “이럴 때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제가 만일 부자라면 그들을 돕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라면 그들을 도울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만일 할아버지께서 집주인에게 편지를 쓰시겠다면, 제가 펜과 잉크를 가지고 오겠어요.”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어요. “얘야, 너 편지 쓸 수 있니?” “잘은 못 쓰지만 조금은 쓸 줄 알아요, 할아버지.” “그렇다면 네가 써 보렴!” 세드릭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어요. “저더러 쓰라고요?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세드릭은 펜과 잉크를 백작 앞에 놓고 다시 물었어요. “어떻게 써야 하지요?” “당분간 히킨스를 그냥 있게 해 달라고 쓰고, 그 밑에 ‘폰틀로이’라고 서명하면 된다.” 세드릭은 곧 편지를 썼어요. 백작은 다 쓴 편지를 읽어 본 다음 목사에게 건넸어요. 목사는 세드릭이 쓴 편지를 받아 들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어요. “폰틀로이,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는데. 꼭 엄마한테 가야 하겠니?” 백작의 눈에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빛이 서려 있었어요. 하지만 세드릭은 엄마를 만난다는 기쁨에 백작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어요. “네, 엄마도 절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저도 아침부터 엄마를 만날 생각만 했어요.”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곧 마차를 준비시키마!” 백작은 세드릭과 함께 마차를 타고 길게 늘어선 가로수 길을 달렸어요. 세드릭은 백작이 자기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귀여운 망아지라는 얘기를 듣고는 너무 기뻐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어요. “망아지를 갖게 된다니, 정말 기뻐요. 할아버지같이 좋으신 분은 아무 곳에도 없을 거예요. 저도 어른이 되면 꼭 할아버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엄마께 말씀드리겠어요.” 세드릭의 말에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어요. “뭐라고? 나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백작은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을 돕는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어요. 그런데도 세드릭은 자기를 좋은 사람이라 여기고, 자기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어요. 백작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동안 마차는 어느새 세드릭의 엄마가 사는 집 앞에 도착했어요. 세드릭은 마차에서 내렸어요. “할아버지, 지팡이를 짚고 절 붙잡으세요.” 세드릭이 다정하게 말했어요. “난 내리지 않겠다. 집으로 돌아갈 때 데리러 오마.” 백작은 마차를 돌려 그냥 돌아가 버렸어요. 세드릭은 당황해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어요. 그러나 곧 엄마가 있는 집을 향해 뛰어갔어요. 세드릭은 자신을 반기는 엄마한테 꼭 안겼어요. 일요일이었어요. 그 주에는 교회에 온 사람들이 여느 때보다 많았어요. 마을에는 이미 세드릭이 성에 와 있다는 것은 물론, 히킨스의 집주인에게 보낸 편지 이야기까지도 쫙 퍼져 있었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지주가 될 도련님이 어떻게 생겼을까 무척 궁금해했어요. 세드릭의 엄마인 에롤 부인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어요. “마님, 오래오래 행복하시기를 바랄게요.” 백작의 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왔어요. 마차가 멈추자 하인들이 백작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리게 했어요. 세드릭은 그 곁에 서서 할아버지의 아픈 다리를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세드릭의 아빠 케프텐 에롤을 알던 사람들은 세드릭을 보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했어요. “어쩜, 케프텐 님을 똑 닮았네!” 교회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던 세드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요. 자기의 건너편에 엄마가 앉아 있었거든요. 세드릭은 평소에 엄마와 노래를 부르곤 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찬송가를 불렀어요. 엄마도 저쪽에서 세드릭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드릭이 행복해지기를 기도했어요. 영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엄마는 세드릭에게 말했어요. “세드릭, 친절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단다. 한 사람의 사랑과 관심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니? 세드릭은 백작에게 엄마가 해 준 말을 그대로 전했어요. “엄마가 그 말을 했을 때, 전 할아버지가 세상에 많은 도움을 주는 분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를 본받겠다고 했어요.” 그래, 그렇게 말했더니 네 엄마는 뭐라고 대답하더냐?” 백작이 무척 궁금한 듯이 물었어요. “엄마는 남의 훌륭한 점을 본받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세드릭의 말을 들은 백작은 저쪽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며느리 에롤 부인을 바라보았어요. 세드릭과 백작은 예배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왔어요. 거기에는 초라한 농부 한 사람이 서 있었어요. “그동안 잘 있었나, 히킨스?” 백작이 히킨스에게 다가갔어요. 세드릭은 그 농부가 자신이 편지를 써 주었던 히킨스라는 것을 알았어요. 히킨스는 백작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서 세드릭에게 말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폰틀로이 도련님. 모던트 목사님께 이야기를 들었어요. 도련님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히킨스는 무척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아니에요, 전 그저 편지만 썼는걸요. 모든 건 할아버지께서 하셨어요. 그리고 아저씨를 무척 걱정하셨어요.” 세드릭의 말을 듣고 히킨스는 깜짝 놀라 백작을 쳐다보았어요. ‘세상에, 저렇게 무뚝뚝한 백작님이 나를 걱정하셨다니.’ 그런 일은 좀처럼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폰틀로이, 이제 그만 가야지. 어서 마차에 오르도록 해라.” 백작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백작은 세드릭이 자기를 칭찬하니 부끄럽고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어요. 백작과 세드릭을 태운 마차는 성을 향해 달렸어요. 마차 안에서 백작은 흐뭇한 표정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어요. 백작은 오래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어요. 게다가 백작에게는 속을 털어놓을 만한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늘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세드릭이 온 뒤로는 얼굴에 웃음을 띠는 일이 많아졌어요. 세드릭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였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른스러웠어요. “폰틀로이는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대견해.” 백작은 세드릭과 함께 여생을 보내게 되어 무척 기뻤어요. 언젠가 세드릭과 교회에 갔을 때였어요. “정말 백작님으로서 손색이 없는 도련님이셔.” 어느 농부의 아내가 세드릭을 보더니 칭찬을 했어요. 백작은 그 말을 듣고 세드릭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어느 날 아침, 세드릭은 백작이 준 망아지를 처음으로 타게 되었어요. “야, 신난다. 정말 이 망아지를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백작은 기쁜 마음으로 세드릭을 지켜보았어요. 처음 말을 탈 때 어린아이들은 무서워하는 편인데, 세드릭은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어요. 게다가 망아지를 혼자 타겠다며 선뜻 나섰어요. 세드릭은 망아지가 앞뒤로 몸을 흔드는 바람에 떨어질 뻔했지만, 자세를 똑바로 하려고 애썼어요. 백작은 세드릭이 무서워하지 않고 씩씩하게 말을 타는 것이 무척 기특했어요. 세드릭이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어요. 세드릭은 엄마를 만날 생각에 한껏 들떠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문밖에 늘 타고 다니던 마차 대신 훌륭한 밤색 말이 끄는 아름다운 마차가 서 있었어요. “그 마차는 네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시골길을 다니려면 불편할 테니 말이다.” 백작이 세드릭에게 말했어요.세드릭은 기뻐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세드릭이 엄마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정원을 가꾸고 있었어요. 세드릭은 엄마에게 달려가 말했어요.“엄마, 이 마차는 엄마를 위한 할아버지의 선물이에요.”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세드릭을 꼭 안아 주었어요. 다음 날, 세드릭은 미국에 있는 홉스 아저씨에게 편지를 썼어요. 세드릭이 쓴 편지를 다 읽고 난 백작이 물었어요. “폰틀로이, 넌 엄마가 그렇게도 그립냐?” “네,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엄마를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할아버지, 전 늘 엄마가 그리워요.” 세드릭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백작은 세드릭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어요. 홉스 아저씨,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백작님이에요. 아저씨도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저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마차와 많은 장난감을 선물로 주셨어요. 게다가 이곳의 정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저는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해요. 하지만 엄마와도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홉스 아저씨, 보고 싶어요. 아저씨도 편지를 보내 주세요. 그럼, 안녕. 어느 날 아침, 세드릭은 말을 타려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할아버지에게 말했어요. “할아버지와 함께 말을 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가 말을 타고 나가 버리면 할아버지 혼자 쓸쓸하게 성에 남게 되잖아요.” 세드릭의 말을 들은 백작은 갑자기 말을 타고 싶어졌어요. 백작은 하인을 시켜 자기가 탈 말을 끌고 오게 했어요.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 위에 올라탔어요. 그 뒤로 세드릭과 백작은 함께 말을 타고 산책을 했어요. 둘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 그러는 사이에 백작은 세드릭으로부터 며느리 에롤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어요. 백작은 세드릭의 이야기를 통해 에롤 부인이 아주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동안 내가 이유도 없이 며느리를 미워했구나.’ 할아버지는 에롤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에롤 부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사람들도 그런 부인을 아끼고 따랐어요. 언젠가 세드릭은 백작에게 말했어요. “할아버지, 모두 엄마만 보면 기도를 해 줘요. 아이들도 모두 엄마를 잘 따르고요. 엄마는 비록 자신이 부자는 아니지만, 힘닿는 데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하셨어요.” 세드릭의 말을 들은 백작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어요. 자신의 며느리가 모든 사람한테서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어요.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높은 언덕 위에 올라섰어요. 언덕 아래로 끝없이 넓은 땅이 내려다보였어요. “그렇다면 싫어요. 전 할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사셔서 언제까지나 저와 함께 지냈으면 좋겠어요.” 세드릭의 말에 백작은 웃으며 말했어요. “허허, 그러나 저 땅이 너의 것이 될 때가 올 거야. 그러면 너는 드린코트성의 성주가 되는 거다.” 세드릭은 넓은 들과 푸른 숲을 한동안 보고 있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어요. “폰틀로이, 무얼 생각하니?” 엄마가 그러시는데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잊게 된다고 했어요. 백작은 세드릭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백작이 지금까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누가 공물을 바쳤는지, 누가 바치지 않았는지 하는 것뿐이었거든요. “뉴윅이라는 사람이 내게 알려 준단다.” 백작은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다른 말로 얼버무렸어요. “자, 이제 집에 돌아가자. 네가 백작이 되면 나보다도 더 훌륭한 백작이 되어야 한다.” 일주일 뒤, 엄마를 만나고 온 세드릭이 백작에게 물었어요. “할아버지, 뉴윅이라는 사람이 정말 마을 사람들의 일을 다 알고 있나요?” “그럼, 다 알고말고. 왜 뉴윅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이라도 있니?” “엄마가 그러는데 마을의 변두리에 아주 비참한 곳이 있는데, 그곳의 아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가고 있대요. 그리고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샌다고 해요.” 세드릭은 슬픈 표정으로 계속 말했어요. “엄마는 그곳의 가난한 아주머니를 문병하고 오셨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팠던지 계속 눈물을 흘리며 말했어요. 전 엄마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에게 꼭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약속드렸어요.” 백작은 세드릭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어요. 백작도 마을 변두리에 비참한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세드릭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뉴윅을 불러 놓고 말했어요. “변두리의 집들을 모두 헐고 새집을 짓도록 해라. 이 일은 폰틀로이가 생각해 낸 것이니,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알리는 게 좋을 것이다.” 세드릭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세드릭은 할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말했어요. “할아버지랑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모두 깍듯이 인사해요. 저도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세드릭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벙글거리며 말했어요. '폰틀로이는 무슨 일이든 해낼 거야. 저 애는 밝고 긍정적이니 말이야.’ 백작은 세드릭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세드릭이 백작에게 물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행복하세요?” “그야 물론 너와 함께 있으니 행복하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니?” 백작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어요. “전 예전에는 언제나 행복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행복하지 않니?” 백작은 세드릭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어요.“아니요, 행복해요. 하지만 엄마도 함께 계셨더라면.” 백작은 세드릭이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는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어요. 파티가 있기 4, 5일 전, 백작의 단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이 남편과 함께 성으로 찾아왔어요. 백작의 누이동생이 이 성에 온 것은 15년 만의 일이었어요. 그동안 멀리 떨어져 살면서 백작과 누이동생은 소문으로만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어요. 백작의 누이동생은 세드릭이 드린코트성에 왔다는 것도, 세드릭이 엄마와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어요. “어린아이를 엄마와 떼어 놓아도 괜찮을까요?” 또 백작의 누이동생은 소문으로 세드릭이 아주 영리하고 착한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이는 어리지만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도 알고. 정말 대단한 아이야.” 백작의 누이동생은 세드릭을 무척 만나 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누이동생은 백작으로부터 놀러 오라는 편지를 받게 되었어요. “오빠가 우리를 초대해 주시다니! 손자가 자랑스러워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으신가 봐요.” 누이동생 부부는 드린코트성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누이동생이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섰을 때, 벽난로 옆에 있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 옆에는 양복을 입은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어요. 백작의 누이동생, 즉 세드릭의 고모할머니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백작에게 물었어요. “인사해라, 너의 고모할머니시다.” “안녕하세요, 고모할머니?” 세드릭은 공손하게 인사했어요. “어쩜, 너는 네 아빠를 쏙 빼닮았니?” 고모할머니는 세드릭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드릭이 더욱 마음에 들었어요. 세드릭이 방으로 돌아가자 고모할머니는 백작에게 말했어요. 전 오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듣기로는 폰틀로이의 엄마인 에롤 부인은 아주 훌륭한 부인이라고 하던데. 제가 폰틀로이의 엄마를 한번 만나 볼까 해요. 그러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에게 해 주세요. 다음 날 고모할머니는 세드릭의 엄마를 만나러 갔어요. 집으로 돌아온 고모할머니는 백작에게 말했어요. “폰틀로이가 훌륭하게 큰 것은 에롤 부인의 덕인 것 같아요. 정말 어질고 좋은 부인이었어요.” 누이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백작은 또다시 세드릭의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성대한 파티는 백작이 세드릭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어요. 초대된 사람들 모두 세드릭을 보고 싶어 했고 모두 세드릭에 대한 이야기만 했어요. 백작은 세드릭과 자기가 친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어요. 세드릭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다소곳하게 듣고만 있었어요. 사람들은 세드릭이 예의 바른 아이라고 칭찬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비샴 씨는 파티에 늦게 참석했어요. 하비샴 씨는 좀처럼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파티장에 도착한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 좀 늦었습니다.” 하비샴 씨는 식사하는 동안에도 내내 조용했어요. 옆 사람이 말을 걸어도 그저 멍하니 있었고요. 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세드릭은 너무 졸려서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손님이 모두 돌아가자 하비샴 씨는 세드릭의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어요. 하비샴 씨의 표정을 살피며 백작이 물었어요. “하비샴, 혹시 그 엄청난 사건이란 것이 폰틀로이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네, 실은 그 사건이란 것이 너무 엄청난 것이라서요. 여기 잠들어 있는 분은 백작님의 후계자인 폰틀로이 경이 아닙니다. 진짜 후계자는 런던의 어떤 여관에 계십니다.” 하비샴 씨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백작에게 말했어요. “뭐라고? 자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도 뜻밖입니다. 사실은 오늘 아침에 한 부인이 찾아와 자신이 백작님의 돌아가신 큰 아드님인 비비스 님의 아내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교양이 없는 부인이었습니다. 아마도 돈이 탐나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백작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었어요. “난 지금껏 한 번도 아이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난 이 아이를 좋아하고 이 아이도 날 따르고 있어. 그래서 나는 이 아이가 나보다 더 훌륭한 백작이 되어 우리 집안의 명예를 드높여 주리라 믿고 있어.” 백작은 잠든 세드릭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어요. 세드릭이 보낸 편지 세드릭이 영국에서 즐거운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에 있는 홉스 아저씨는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요. 홉스 아저씨는 세드릭이 영국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어요. 언제라도 상점 안으로 세드릭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올 것 같았어요. 홉스 아저씨는 세드릭이 선물로 준 금시계를 꺼내 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딕을 만나 함께 세드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거야.’ 홉스 아저씨는 곧장 딕이 구두를 닦는 곳으로 갔어요. 그 뒤로 딕과 홉스 아저씨는 종종 만나서 세드릭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어요. 그리고 둘은 곧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홉스 아저씨는 신문이나 잡지 등을 뒤적이며 ‘백작’이나 ‘귀족’에 대한 것을 찾았어요. 그러한 것들을 잘 알아야 세드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딕의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그동안 형인 벤이 딕을 보살펴 주었어요. 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목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딕은 혼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딕은 홉스 아저씨에게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쉬었어요. “형수는 몹시 나쁜 여자였어요. 형수는 화가 나면 뭐든 던졌어요. 갓난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형수가 던진 접시에 맞아 턱에 상처가 났어요. 아마 그 상처는 죽을 때까지 남을 거예요. 형수는 형이 돈을 적게 벌어서 늘 불만이었어요. 그러다 형이 캘리포니아의 목장으로 떠나자 곧바로 도망쳤고,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홉스 아저씨 보세요. 아저씨, 이제 전 백작이 될 수 없대요. 우리 큰아빠의 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가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받은 말이며 장난감들을 모두 그 아이에게 줘야 하는 줄 알았지만,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백작이 될 수 없는 게 서운하기도 하지만,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뻐요. 아저씨, 그럼 안녕. “도대체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담.” 홉스 아저씨는 속이 상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폰틀로이가 새로 나타났다는 소문은 영국의 신문에까지 났어요. 그렇게 해서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어요. 소문을 내기 좋아하는 아주머니들은 수군거렸어요. “글쎄, 이번에 나타난 부인은 무식하고 천박한 여자래요.” 모두 술렁거리는데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세드릭은 오히려 침착했어요. “그저 기분이 좀 이상할 뿐이에요.” 세드릭은 조그만 목소리로 백작에게 물었어요. “그럼 저는 이제 할아버지의 손자가 아닌가요?” “아니다, 폰틀로이. 너는 영원히 내 손자란다.” 백작은 분명하게 말했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전 백작이 안 되어도 좋아요. 할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돼요.” 세드릭은 기뻐하며 백작을 꼭 껴안았어요. 백작은 세드릭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히고 말했어요. “난 그들에겐 아무것도 주고 싶지가 않구나. 난 너에게 모든 것을 넘겨줄 생각이다.” 백작은 이번 일을 계기로 세드릭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 거예요. 며칠 뒤, 그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드린코트성으로 왔어요. 그러나 그들은 백작에게 곧 쫓겨나고 말았어요. 소공자 백작은 그 부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부인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하비샴 씨의 말에 결국 백작은 마음을 돌렸어요. 다음 날, 백작은 하비샴 씨와 함께 그 부인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어요. 갑자기 백작이 방문하자, 부인은 짜증을 내며 허둥댔어요. 백작은 기별도 없이 세드릭의 엄마인 에롤 부인을 만나러 갔어요. 에롤 부인이 조용히 글을 쓰려고 할 때였어요. 하녀가 허둥지둥 뛰어오며 말했어요. “마님, 백작님께서 오셨어요.” 에롤 부인은 깜짝 놀랐지만, 침착하게 백작을 맞이했어요. “내가 여기 온 까닭을 알고 있느냐?” “네, 하비샴 씨에게 진짜 폰틀로이 경이 나타났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난 그 사람들을 끝까지 조사해 볼 생각이지. 그리고 폰틀로이를 돕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네.” 백작은 친절하게 말했어요. “백작님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를 위해 무리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백작은 에롤 부인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며느리가 상냥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몹시 기분이 좋아졌어요. 백작은 에롤 부인에게 물었어요. “내가 가끔 이야기하러 와도 괜찮을까?” 에롤 부인은 백작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어요. 지금까지 세드릭의 엄마를 나쁘게 생각했던 백작은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새로운 폰틀로이가 나타났다는 기사는 미국의 신문에까지 크게 났어요. 홉스 아저씨와 딕도 그 기사를 열심히 읽었어요. 둘은 세드릭이 다른 아이에게 백작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했어요. 그래서 세드릭에게 편지를 썼어요. 나의 친구 세드릭에게 백작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안타깝군. 나도 널 도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만약 백작이 되지 않는다면, 나의 가게를 반으로 나눠 주겠다. 홉스로부터. 홉스 아저씨가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 날이었어요. “시간이 나면 읽어 보렴.” 딕의 가게에 구두를 닦으러 온 젊은 변호사가 딕에게 자기가 읽던 신문을 주고 갔어요. 신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딕은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어요. 신문의 맨 위에 폰틀로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 여자의 사진도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딕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럴 수가!” 딕은 얼른 홉스 아저씨에게 달려가 신문을 보이며 소리쳤어요. “아저씨, 여기 실린 이 사진 좀 보세요. 이 여자는 바로 저의 형수였던 여자예요.” 홉스 아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딕에게 물었어요. “이 일은 네 형수가 돈이 탐나서 꾸민 일이 분명하지?” “네, 형수는 늘 나쁜 짓만 했으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딕도 흥분하여 대답했어요. 홉스 아저씨와 딕은 세드릭을 위해 당장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딕이 머리를 ‘탁’ 치며 홉스 아저씨에게 말했어요. “참, 아까 저에게 신문을 준 사람은 변호사예요. 그 사람에게 가서 물어볼까요?” 두 사람은 곧장 변호사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청했어요. 그러자 변호사는 흔쾌히 응해 주었어요. “내가 곧 딕의 형과 드린코트성에 있는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겠어요.” 변호사는 얼른 두 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딕의 형수는 자기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딕의 형수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하비샴 씨가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왔어요. 그들을 보고 딕의 형수는 소리쳤어요. “악! 이젠 다 틀렸어!” 거기에는 남편인 벤과 백작 그리고 딕이 서 있었거든요. 딕의 형수는 자기의 거짓말이 탄로 난 것이 분해서 마구 화를 내며 날뛰었어요. 벤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어요. “내 아들 톰은 어디 있지? 이젠 내가 데리고 살겠어!” 옆방에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어요. 아이의 얼굴은 벤을 쏙 빼닮았는데, 턱에 세모꼴의 상처가 있었어요. “이 아이는 제 아들이 틀림없어요. 톰, 아빠와 함께 가자.” 벤은 아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어요. 그러자 딕의 형수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옆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아 버렸어요. 그러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작은 세드릭이 있는 코트로지에 들러 큰 소리로 세드릭을 찾았어요. “폰틀로이, 어디 있니?” 사실을 전해 들은 에롤 부인은 놀라서 물었어요. “우리 아이가 정말 폰틀로이가 맞나요?” 백작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어요. “틀림없는 폰틀로이야.” 그러고 나서 세드릭에게 말했어요. “자, 폰틀로이. 어머님께 성으로 이사를 오겠느냐고 여쭈어보렴.” 에롤 부인은 그 말에 놀라면서 백작에게 물었어요. “제가 정말 성으로 이사를 가도 되나요?” 그 말에 백작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사건이 잘 해결되자 모두 기뻐했어요. 홉스 아저씨와 딕은 세드릭을 돕기 위해 잠시 영국에 왔지만, 당분간 그대로 머물기로 했어요. 세드릭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7월 4일이 되면 세드릭은 여덟 살이 되어요. 홉스 아저씨는 세드릭과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미국에 있는 가게를 정리하고, 영국에 새로운 가게를 내게 되었어요. 홉스 아저씨는 백작의 도움을 받아 잘살게 되었고, 백작의 말벗이 되어 드리기로 했어요. 홉스 아저씨는 귀족 흉내 내기를 좋아했고, 귀족에 대해서 라면 뭐든 알고 있는 ‘귀족 박사’가 되었어요. 딕도 백작의 도움으로 영국에 머무르면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드디어 세드릭의 생일이 되었어요. 많은 사람이 세드릭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였어요. 하늘은 화창하게 개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지냈어요. 밤에는 불꽃놀이도 할 예정이었어요. 백작은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세드릭을 무척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백작이 세드릭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큰 천막으로 들어서자 모두 축하 인사를 보냈어요. 사람들은 세드릭의 생일을 축하하는 뜻에서 손뼉을 쳤고, 세드릭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어요. 그러자 백작이 세드릭에게 말했어요. “폰틀로이, 여기 모인 분들에게 한마디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구나.” 세드릭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침착한 말투로 말했어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 처음에는 백작이 되는 것이 두려웠지만, 지금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백작이 되겠어요.” 세드릭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어요. 세드릭은 제자리로 돌아가서 백작의 손을 잡고 방긋 웃었어요. 백작도 세드릭의 어깨에 손을 얹고 환한 미소를 지었어요.
사랑의 학교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새 학년이 시작되었어요.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어요. 학교로 가는 길은 아이들로 가득했어요. 교문을 들어서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쳤어요. 뒤를 돌아보니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빨간 곱슬머리의 선생님은 언제나 명랑한 분이었어요. “엔리코, 이제 헤어져야 하는구나.”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서운해하며 말했어요.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어 코끝이 찡해졌어요. 2층으로 올라가 교실로 들어가자 새 담임 선생님인 펠보니 선생님이 서 계셨어요. 우리 반 친구는 모두 쉰네 명이었어요.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몇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중에는 언제나 1등만 하는 데로시도 있었어요. 펠보니 선생님은 키가 크고 긴 회색 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이마에는 주름살 하나가 굵게 잡혀 있었어요. 목소리는 굵었고 눈빛은 무척 날카로웠어요. 게다가 한 번도 웃지 않았어요. ‘큰일 났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엔리코, 기운을 내렴.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머니의 위로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요. 하지만 늘 다정한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안 계시니 예전처럼 학교생활이 즐거울 것 같지 않았어요. 펠보니 선생님이 좋아졌어요. 선생님은 교실에 우리보다 먼저 와서 우리를 반겨 주었어요. “오늘은 받아쓰기를 하겠어요!” 그때 한 아이가 책상에 엎드려 끙끙거렸어요. 펠보니 선생님은 수업을 잠시 멈추고 그 아이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대 보았어요. 뒤에 앉아 있던 아이 하나가 책상 위로 냉큼 올라서더니, 펠보니 선생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었어요. 펠보니 선생님이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어요. 그 아이는 깜짝 놀라 금세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우리는 펠보니 선생님이 그 아이를 야단칠 줄 알았어요. 그런데 펠보니 선생님은 한마디 말로 타일렀어요. “다시는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펠보니 선생님은 다시 아픈 아이를 돌보았어요. “머리가 뜨거운 걸 보니 열이 많은 것 같구나! 너는 좀 쉬고 있어라.” 다시 교탁에 올라선 펠보니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받아쓰기 문제를 계속 불렀어요. 받아쓰기가 끝나자 펠보니 선생님은 말했어요. 앞으로 1년 동안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해요. 나에겐 가족이 한 사람도 없어요.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만 홀로 남았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오직 여러분 생각뿐이에요. 나는 누구도 벌주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이 좋은 어린이라는 걸 내게 보여 주기를 바라요. 말로만 하는 약속은 바라지 않아요. 분명히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을 거예요. 그렇죠? 그러자 아까 책상 위에서 선생님 흉내를 내던 아이가 펠보니 선생님 곁으로 가더니 머뭇거리며 말했어요. “선생님, 정말 잘못했어요.” 펠보니 선생님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그래, 괜찮다! 어서 가서 놀아라!” 오늘 아침에는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섰어요. 교문 앞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을 잡고 교문 안으로 들어갔어요. 학교 휴게실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과 함께 경찰 아저씨와 교장 선생님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옆에 있는 선생님에게 물었어요. “무슨 일입니까?” “한 어린이가 마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졌대요.” 다친 아이는 3학년인 로베티였어요. 마차에 치일 뻔한 1학년 아이를 구하다가 다친 거였어요. 그때, 한 아주머니가 허둥지둥 휴게실로 뛰어 들어왔어요. 사고를 당한 로베티의 어머니였어요. “오, 가엾은 로베티!” 곧 로베티가 구한 1학년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와 로베티 어머니의 팔을 잡고 함께 흐느껴 울기 시작했어요. 잠시 뒤 휴게실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섰어요. 교장 선생님이 로베티를 안고 밖으로 나갔어요. 로베티는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감은 채 교장 선생님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운 얼굴로 잠자코 지켜보았어요. 그때 로베티가 힘겹게 눈을 떴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어요. “장하구나, 로베티!” “로베티, 정말 용감해!”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로베티를 마차에 태웠어요. 마차가 떠나자 우리는 조용히 교실로 들어왔어요. 어제의 사고로 로베티는 당분간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대요. 수업이 시작하기 전 교장 선생님이 낯선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어요. 아이의 얼굴은 검었어요. 입고 있는 옷도 검었고, 가죽 허리띠도 검었어요. 아이는 겁을 먹은 듯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어요. 펠보니 선생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어요. “여러분, 이 학생은 멀리 떨어진 칼라브리아의 레조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어요. 먼 곳에서 온 이 학생에게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이탈리아 학생은 어디를 가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걸 이 학생에게 보여 주길 바라요.” 펠보니 선생님은 지도에서 레조 지방을 찾아 우리에게 보여 주었어요. 그리고 우리 반을 대표해서 데로시에게 새로 온 친구에게 환영의 포옹을 해 주라고 했어요. “너를 환영해!” 데로시는 앞으로 나가 칼라브리아에서 온 아이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러자 그 아이도 기쁜지 빙긋 웃었어요. 칼라브리아의 아이가 자리에 앉자 아이들은 연필과 공책, 우표 등을 선물로 주었어요. 나는 벌써 많은 친구와 친해졌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가르로네예요.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큰 가르로네는 열네 살이에요. 착한 가르로네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대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는 코레티예요. 고양이 털모자를 즐겨 쓰는 코레티는 언제나 방글방글 웃어요. 코레티의 아버지는 나무 장사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1866년의 전쟁 때 훈장을 세 개나 받은 용감한 분이에요. 넬리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예요. 넬리는 가엾게도 등이 굽은 데다가 몸이 약해요. 언제나 화려한 옷을 입고 멋을 내는 보티니도 있어요. 또 내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아버지가 미장이라서 ‘꼬마 미장이’라고 불려요. 꼬마 미장이는 토끼 흉내를 아주 잘 내요. 꼬마 미장이 옆에는 몸이 호리호리한 가로피가 앉아 있어요. 가로피는 늘 연필이나 그림 같은 것을 사고팔아요. 그리고 늘 잘난 척하는 친구도 한 명 있어요. 아이의 이름은 카를로 노비스예요. 스타르디는 무뚝뚝하기로는 우리 반에서 최고예요. 아직 스타르디에게 말을 걸어 본 아이는 아무도 없어요. 스타르디의 옆에 앉은 프란티는 입이 가벼운 편이에요. 먼저 다니던 학교에서도 말썽을 피우다가 쫓겨났다고 해요. 우리 반에서 제일 똑똑한 아이는 역시 데로시예요. 데로시는 이번 학기에도 역시 1등을 할 거예요. 프레코시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 중 하나예요. 프레코시는 언제나 긴 양복저고리를 입고 다녀요. 대장장이인 프레코시의 아버지는 이유도 없이 툭하면 프레코시를 때린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나는 프레코시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역시 가르로네예요. 오늘 아침, 가르로네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있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교실에 들어갔을 때였어요. 서너 명의 아이들이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크로시를 괴롭히고 있었어요. 짓궂은 아이들은 붕대를 감고 있는 크로시의 팔을 흉내 내기도 했어요. 크로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어요. 그때 프란티가 냉큼 책상 위로 뛰어오르더니, 채소 장수인 크로시의 어머니 흉내를 냈어요. “싱싱한 채소가 왔어요!” 아이들이 프란티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화가 난 크로시가 프란티에게 잉크병을 힘껏 던졌어요. 하지만 프란티는 잽싸게 피했고 교실로 들어서던 선생님이 잉크병에 맞고 말았어요. 선생님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어요. “누가 잉크병을 던졌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가르로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제가 그랬어요.” 가르로네는 크로시가 불쌍하여 자신이 잘못을 덮어쓰려고 한 거예요. 선생님은 가르로네를 바라보더니 말했어요. “가르로네, 네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다. 잉크병을 던진 학생은 일어서라. 벌은 주지 않겠다.” 그러자 크로시가 훌쩍훌쩍 울면서 일어섰어요. “선생님, 제가. 제가 던졌어요. 아이들이 자꾸 놀려 대길래 화가 나서 그만.” “알았다. 크로시는 앉아라. 크로시를 놀린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거라.” 그러자 네 명의 아이들이 일어섰어요. “너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친구를 놀리다니! 너희는 부끄럽고 비겁한 행동을 한 거야.” 선생님은 네 명의 아이들을 엄하게 야단쳤어요. 그리고 나서 책상 사이로 걸어가 가르로네에게 말했어요. “가르로네, 너는 정말 훌륭한 행동을 했다!” 신문에 어린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사는 어느 부인의 이야기가 실렸어요. 어머니는 나와 실비아 누나를 데리고 그 부인이 사는 집을 찾아갔어요. 부인의 집은 낡은 4층 집의 꼭대기에 있었어요. 어머니는 맨 끝에 있는 문으로 다가가 노크했어요. 그러자 몹시 여윈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어요. “저, 안 입는 옷을 좀 가져왔어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가 헌 옷 꾸러미를 내밀자 부인은 무척 고마워했어요.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어요. 방에는 쓸 만한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나는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보았어요. 아이는 숙제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이는 우리 반의 크로시였어요. 나는 어머니에게 귓속말로 우리 반의 크로시라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나에게 아는 척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어요. 바로 그때, 크로시가 몸을 돌렸어요. 우리는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어요. 크로시의 얼굴이 빨개졌어요. "엔리코, 친구에게 가서 입맞춤을 해 주렴." 어머니가 내 등을 밀었어요. 나는 크로시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어요. 그러자 크로시도 엉거주춤 일어나 내 손을 잡았어요. "세상에! 우리 크로시의 친구였군요." 크로시의 어머니는 무척 놀라워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크로시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크로시의 아버지는 6년 전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답니다." "그동안은 제가 채소 장사를 하여 그럭저럭 살 수 있었는데 요즘 제가 몸이 아파서 더는 장사를 나갈 수가 없어요. 크로시는 공부를 무척 좋아해요. 책상이라도 사 주고 싶지만 형편이 안 되네요. 부모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크로시에게 늘 미안해요." 어머니는 크로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어요. 크로시의 집에서 나온 어머니는 누나와 나에게 말했어요. "크로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구나. 너희도 크로시를 본받아 더욱 열심히 노력하길 바란다." 휴일이 이틀 동안 계속되어 반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어요.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친구들 모두가 보고 싶었는데, 그중에서도 가르로네가 가장 보고 싶었어요. 가르로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친구인데, 나뿐 아니라 우리 반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가르로네는 늘 약한 아이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었어요. 어쩌다가 힘센 아이들에게 맞은 아이가 ‘가르로네’ 하고 부르면, 때리던 아이는 주먹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어요. 가르로네는 몸이 아파 2년 동안 앓다가 학교에 늦게 입학했어요. 그래서 두 살이 많은 가르로네는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크고, 한 손으로 책상을 번쩍 들 정도로 힘도 셌어요. 그리고 마음도 무척 착했어요. 가르로네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 주었어요. “엔리코, 너와 나는 영원한 친구야, 그렇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가르로네는 큰 키에 비해 옷의 길이가 너무 짧았어요. 거기다가 비스듬하게 얹혀 있는 모자는 금방이라도 머리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어요. 머리는 빡빡 밀었고, 구두는 낡았고, 넥타이도 밧줄같이 꼬여 있었어요. 그리고 책은 모두 가죽끈으로 묶어서 다녔어요. 가르로네는 수학 공부를 특히 잘했어요. 가르로네는 자기에게 누가 어떤 농담을 해도 결코 화내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나 가르로네가 한번 결정한 일은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어요. 어느 토요일 아침, 2학년 아이 하나가 공책 살 돈을 잃어버리고 거리에서 울고 있었어요. 가르로네는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울고 있는 아이에게 주기도 했어요. 가르로네의 어머니는 키가 크고 인자한 분이었는데, 가르로네는 어머니를 꼭 닮은 것 같았어요. 선생님도 항상 가르로네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그러고는 가르로네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가르로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까불거나 건방진 아이들에게 가르로네가 가끔 큰 소리로 야단을 칠 때도, 얼굴에는 친구를 사랑하는 따뜻한 우정이 듬뿍 담겨 있었어요. 가르로네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노비스는 늘 자기 아버지가 부자라고 자랑했어요. 노비스의 아버지는 매일 아들을 학교까지 데려다주었어요. 그런데 어제 아침의 일이었어요. 노비스는 조그마한 일로 베티와 다투다가 베티에게 무척 심한 말을 했어요. “가난뱅이 숯장수 아들 주제에!” 베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 베티의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학교에 온 거예요. 베티의 아버지는 화를 내며 선생님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어요. 마침 노비스의 아버지가 노비스를 데려다주려고 왔다가 그 말을 들었어요. 노비스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교실로 들어왔어요. 베티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노비스의 아버지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어요. 노비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어요. 노비스의 아버지는 노비스에게 말했어요. “당장 네 친구에게 사과해라!” 아들이 머뭇거리자 노비스의 아버지는 무서운 얼굴로 아들을 노려보았어요. 그러자 노비스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어요. “베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비겁하게 말한 거 용서해 줘. 우리 아버지는 네 아버지와 악수하는 걸 영광으로 여기실 거야.” 그러자 노비스의 아버지는 베티의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베티의 아버지도 시커먼 손을 쑥 내밀어 노비스의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어요. 노비스의 아버지는 선생님께 두 아이를 나란히 앉혀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 다음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 밖으로 나갔어요. 베티의 아버지는 잠시 노비스를 바라보더니 다가갔어요. 그러고는 노비스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멈칫했어요. 시커먼 자기 손을 보고 놀란 것 같았어요. 베티의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노비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어요. 두 아버지가 교실 밖으로 나가자 선생님은 말했어요. “지금 본 일들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어라. 오늘 일은 아주 값진 공부가 될 테니까.” 오늘 오후에 나는 우리 집 문지기의 아들과 함께 거리로 산책하러 나갔어요.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어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장작더미를 어깨에 멘 코레티가 땀을 흘리며 웃고 서 있었어요. 그런데 코레티는 무언가를 중얼중얼 외고 있었어요. “코레티, 뭐 하는 거야?” “응, 일하면서 공부하는 거야. 아버지는 배달하러 가셨고 어머니는 아프셔서 내가 일을 도와야 해. 따로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이렇게 일하는 틈틈이 공부하는 거야.” 나는 코레티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어요. 가게 안에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어요. 코레티는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는 마른 나뭇잎을 부지런히 쓸어 모았어요. 코레티의 공부방은 가게 뒤편에 있었어요. 작은 탁자 위에 숙제장이 펼쳐져 있었어요. 코레티는 갑자기 숙제의 답이 생각났다며 연필을 들고 숙제장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때, 가게 쪽에서 주인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장작을 사러 온 부인이었어요. 코레티는 연필을 놓고 후닥닥 뛰어나갔어요. 코레티는 장작을 저울에 달아 부인에게 준 다음, 장부에 판 내용을 적었어요. 그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숙제를 계속했어요. 난로에 올려놓은 커피가 펄펄 끓기 시작했어요. 코레티는 잔에 커피를 따라 어머니 방으로 갔어요. 코레티의 어머니는 머리를 흰 수건으로 동여매고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어머니, 커피 가져왔어요. 이 아이는 우리 반 친구 엔리코예요.” 코레티의 어머니는 내게 반갑게 인사했어요. 코레티는 다시 공부방으로 와서 숙제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즐거운 얼굴로 다시 가게로 나갔어요. 코레티는 도끼로 장작을 패기 시작했어요. 코레티는 모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했어요. 잠시 뒤 나무를 실은 짐마차가 도착했어요. 그러자 코레티가 말했어요. “이제부터는 너하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내일 다시 만나자. 잠시나마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마워.” 코레티는 나와 악수를 하고는 짐마차 쪽으로 뛰어갔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코레티를 보며 나는 생각했어요. ‘코레티, 넌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네가 자랑스러워!’ 오늘은 시험을 쳤어요. 코티 선생님이 시험 감독을 하기 위하여 들어왔어요. 코티 선생님은 대포 소리 같은 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곧잘 겁을 주곤 했어요. 나쁜 짓을 하면 당장 경찰서로 데리고 가겠다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먼저 싱글벙글 웃어 주었어요. 우리 학교에는 코티 선생님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명의 선생님이 있어요. 그중 4학년 담임 선생님 한 명은 한쪽 다리를 절었어요. 그 선생님은 항상 큰 털목도리를 목에 걸치고 다녔어요. 또 다른 4학년 담임 선생님은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로 우리 학교에 오기 전까지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일했다고 했어요. 안경을 쓰고 구레나룻을 기른 선생님도 있어요. 선생님의 옷차림이 늘 멋있어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변호사라고 불렀어요. 체육 선생님은 군인 같았어요. 선생님의 목에는 싸움터에서 다쳤다는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키가 크고 대머리인 교장 선생님이 있어요. 교장 선생님은 금테 안경을 쓰고 회색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었어요. 또 언제나 검은 옷을 단정하게 입고 다녔어요. 인자하신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을 심하게 꾸짖지 않았어요.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아이의 두 손을 꼭 쥐고 타이른 다음, 착한 아이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어요. 교장 선생님은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나오셔서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어요. 수업이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교장 선생님은 학교 주위를 두루 살피고 다녔어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길모퉁이에 나타나면 아이들은 놀던 것을 그만두고 허둥지둥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그러면 교장 선생님은 인자한 모습으로 어서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어요. 교장 선생님의 아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아들의 사진을 늘 책상 위에 놓고 바라보았어요. 한때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었어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여럿이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교장 선생님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을 전학시키려고 찾아온 어떤 사람을 보고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버렸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죽은 아들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대요. 넬리는 상냥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이예요. 그러나 몸이 빼빼 마르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요. 그리고 등뼈가 굽어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해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넬리의 어머니는 늘 교문 앞으로 넬리를 데리러 와요. 한꺼번에 우르르 밀려 나오는 아이들 틈에 혹시나 넬리가 넘어져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예요. 사실 처음 얼마 동안 아이들은 넬리를 놀려 댔어요. 어떤 아이들은 넬리의 등을 찔러 보기도 했어요. 그러나 넬리는 아무리 놀림을 당해도 아이들과 절대로 맞서지 않았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도 어머니에게 아이들의 못된 행동을 말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그날도 아이들은 넬리를 괴롭히고 있었어요. 넬리는 아이들의 놀림을 꾹 참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더욱 짓궂게 넬리를 놀려 댔어요. 넬리도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때였어요. 가르로네가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말했어요. “넬리를 놀리는 녀석은 내가 혼내 줄 거야!” 그러나 프란티는 가르로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넬리를 놀렸어요. 그러자 가르로네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프란티에게 한 방을 날렸어요. 그때부터 아무도 넬리를 놀리지 않게 되었어요. 넬리는 가르로네를 몹시 따랐고 가르로네도 넬리를 잘 돌봐 주었어요. 오전 수업이 끝날 무렵이었어요. 나는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장 선생님에게 시간표를 받으러 갔어요. 그때 넬리의 어머니가 교장실로 들어왔어요. 넬리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가르로네라는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어요. 그 아이를 이곳으로 불러 주실 수 없을까요?” 교장 선생님의 부름을 받은 가르로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교장실로 들어왔어요. 가르로네를 본 넬리의 어머니는 얼른 달려가서 가르로네의 어깨를 감싸 안았어요. “가르로네, 나는 넬리의 엄마란다. 네가 우리 넬리를 잘 돌봐 주어서 정말 고맙다. 이것은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이니 꼭 받아 주렴!” 넬리의 어머니는 자신의 목에 걸었던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서 가르로네의 목에 걸어 주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면 무척 기뻐해요. 오늘은 가로피가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가로피는 눈이 작고 몸이 호리호리한 아이예요. 가로피의 부모님은 장사를 해요. 그래서인지 가로피는 돈 계산이 아주 빠르고 정확해요. 또 어려운 곱셈이나 나눗셈도 척척 하는 등 수학도 잘해요. 가로피는 한 푼의 돈이라도 헛되게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저축했어요. 가로피의 취미는 펜촉이나 핀, 우표 등을 모으는 거예요. 우표는 벌써 2년째 모으고 있었어요. 가로피의 수첩에는 세계 각국의 우표가 잔뜩 붙어 있었어요. 가로피는 우표가 수첩에 한 권 가득 차면 그것을 문구점에 내다 팔았어요. 또 헌 신문도 모아 두었다가 고물 장수에게 내다 팔았어요. 가로피는 확실히 다른 친구들과는 달랐어요. 우리가 가게놀이를 할 때면 가로피는 여러 가지 물건값도 잘 알고 저울질도 잘했어요. 가로피는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님처럼 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모아 놓았던 우표 몇 장을 가로피에게 주었어요. 가로피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리고 신이 나서 우표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가로피가 가장 신경을 쓰는 일은 역시 우표 수집인 것 같았어요. 아이들은 가로피를 인색한 구두쇠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로피는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에요. 가로피를 구두쇠라고 놀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아이는 그런 일을 좋아할 뿐이야. 그리고 가로피는 착하잖니? 가로피가 돌아간 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가로피는 장사를 해서 성공할 것 같다고 했어요. 오늘은 온종일 눈이 펑펑 내렸어요. 아이들은 큰길에서 눈을 뭉쳐 서로 던지기 시작했어요. 길에는 여러 사람이 오가고 있었어요. “얘들아, 그만해라. 그러다가 다친다!” 하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였어요. “아이고!”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어요. 사람들이 우르르 할아버지 곁으로 모여들었어요.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던진 눈덩이에 한쪽 눈을 맞았어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서점 앞에 서 있었어요. 눈싸움하던 아이들은 놀라서 멍하니 있었어요. 그중에는 가르로네와 코레티 그리고 가로피도 있었어요. 경찰 아저씨가 아이들을 돌아보며 소리쳤어요. “누가 그랬냐?” 그러자 눈덩이를 던진 가로피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어요. 가르로네가 가로피에게 귀엣말로 속삭였어요. “나가서 잘못했다고 말해. 네가 한 일에 책임을 지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이야.” “혼날까 봐 무서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물론 그래. 하지만 뭐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아. 내가 함께 있어 줄 테니 용기를 내.” 용기를 낸 가로피가 앞으로 나섰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일부러 던진 건 아니에요.” 겁에 질린 가로피는 벌벌 떨었어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어요. “못된 녀석, 당장 무릎 꿇고 빌어!” “노인한테 눈덩이를 던지다니, 너 같은 놈은 경찰서로 끌려가야 해!” 가로피는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었어요. 사람들 틈에서 교장 선생님이 나와 소리쳤어요. “이 아이는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러니 너무 야단치지 마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조용해졌어요. 땅에 주저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며 가로피의 손을 잡았어요. “모르고 그랬다니 됐다. 이젠 집으로 가거라.” “할아버지, 죄송해요.” 가로피는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했어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어요. “엔리코! 너는 네가 잘못을 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용기 있게 나설 수 있겠니?” “네.” “그렇다면 약속해 다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말이다.” “약속해요,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겠어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어제 눈덩이에 맞은 할아버지에게 문병을 갔어요. 할아버지는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어요. “다행히 눈동자는 다치지 않았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보자 몹시 반가운 듯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런데 내게 눈을 던진 아이가 안됐어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겠어요?”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의사 선생님이 오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할머니가 일어섰어요.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도 가로피였어요. 가로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가로피에게 말했어요. “오, 어서 오너라. 문병을 온 게로구나. 이제 다 나았단다.” 가로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침대 곁으로 다가섰어요. 할아버지는 가로피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어요. “집에 가면 네 부모님께도 잘 말씀드려라.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가로피는 그 자리에 선 채 무슨 말을 할 듯이 주저주저했어요. “왜 그러니, 얘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해 보렴.” “아, 아니에요. 전 그냥.” “그럼 이제 가 보거라. 이젠 안심해도 돼.” 문 앞에까지 갔던 가로피가 걸음을 멈추었어요. 그러고는 뒤에 따라오는 할아버지의 조카를 흘끔 바라보더니, 외투 속에서 얼른 무언가를 꺼내 그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어요. “이걸 할아버지께 전해 드려!” 할아버지의 조카는 할아버지에게 그것을 전했어요. “할아버지께 드립니다.” 물건을 싼 종이에 이렇게 씌어 있었어요. 우리는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그것은 가로피가 애써 모아 오던 우표 수첩이었어요. 가로피는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보물을 가져온 거예요. 아마도 자기를 용서해 준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놓고 간 것 같았어요. 나는 오늘 스타르디의 집에 놀러 갔어요. 그런데 스타르디의 집에는 작은 도서실이 있었어요. 많은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을 보니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웠어요. 왜냐하면 스타르디의 집은 부잣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도 그의 부모님은 돈이 생기는 대로 재미있고 유익한 책을 사다 주었어요. 스타르디 또한 용돈이 생기면 책을 산다고 했어요. 스타르디의 아버지는 책을 정리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어요. 잘 정돈된 책에는 금박으로 된 제목이 붙어 있었어요. 스타르디는 마치 도서관 직원 같았어요. 항상 자기의 도서실에 앉아 책의 먼지를 털거나, 헌책을 정리하는 것이 스타르디의 기쁨이었어요. 스타르디의 취미는 새 책을 사다가 도서실에 진열하고 열심히 읽는 거였어요. 내가 스타르디의 도서실에 있을 때, 스타르디의 아버지가 들어왔어요. 스타르디의 아버지는 나에게 투박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얘야, 너는 스타르디를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이 아이가 장래에 큰일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와 스타르디는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었어요. 사실 나는 스타르디와 장난을 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어요. 스타르디가 나보다 겨우 한 살 위라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어요.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께 물어보았어요. 아버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스타르디는 이렇다 할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의가 바른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저는 스타르디 앞에 있으면 주눅이 들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어요. “그거야 스타르디에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겠지.” “저는 스타르디하고 한 시간이나 같이 있었는데 그동안 주고받은 이야기는 몇 마디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저는 지루하지 않고 좋았어요. 게다가 스타르디가 골목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는데 나는 그만 어른에게 말하듯이 ‘즐겁게 놀다 갑니다.’ 하고 말할 뻔했어요.” “그건 네가 스타르디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존경받는 사람은 어렵고 위엄이 있어 보이는 거란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내 어깨를 힘 있게 잡았어요.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즐거운 날이었어요. 데로시와 코레티 그리고 넬리가 함께 놀러 왔기 때문이에요. 데로시와 코레티는 길에서 크로시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었어요. 크로시가 배추를 팔아서 펜을 사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크로시는 요즘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온다는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하고 있었어요. 코레티는 아침 일찍 마차에 나무를 싣고 시장에 나가 팔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코레티는 말을 아주 점잖게 했어요. 데로시는 우리를 아주 즐겁게 해 주었어요. 데로시는 이탈리아 지리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어요. “얘들아! 내 눈에는 이탈리아 구석구석이 다 보여. 그리고 도로까지도 환하게 알 수 있지.” 데로시는 내일 빅토리아 국왕 장례식에서 읽을 연설문을 낭독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넬리는 자기의 검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쓸쓸한 웃음을 지었어요. 나는 오늘 세 친구와 놀면서 정말 즐거웠어요. 무엇보다도 돌아갈 때 데로시와 코레티가 넬리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 믿음직스러웠어요. 데로시가 슬픈 표정으로 국왕의 장례식 이야기를 할 때 웃은 사람은 프란티뿐이었어요. 나는 프란티가 얄미웠어요. 프란티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야단맞는 것을 좋아했고 누가 울기만 하면 놀려 댔어요. 가르로네 앞에서는 아첨을 떨고 꼬마 미장이 앞에서는 잘난척을 했어요. 크로시가 한쪽 팔을 못 쓴다며 짓궂게 놀렸고 우리가 존경하는 프레코시를 무시했어요. 1학년 아이를 구하려다가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다니는 로베티를 보고도 놀려 댔고요. 또 약한 아이에게는 늘 싸움을 걸곤 했어요. 프란티에게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어요. 프란티는 수업 시간에도 곧잘 떠들어 댔고 틈만 나면 남의 물건을 훔쳤어요. 프란티의 어머니는 프란티 때문에 앓아누웠고, 프란티의 아버지는 프란티를 세 번이나 집에서 내쫓았어요. 프란티는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어요.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님까지 싫어했어요. 선생님은 프란티의 장난을 보고도 못 본 척할 때가 많았어요. 그러면 프란티는 선생님을 비웃으면서 더 짓궂은 장난을 쳤어요. 프란티는 결국 삼 일 동안 정학을 당해 학교에 나오지 못했어요. 그러나 다시 학교에 나왔을 때는 더 말썽을 피웠어요. 오늘 아침, 마침내 프란티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선생님이 가르로네에게 ‘1월의 이야기’를 써 오라고 말할 때, 프란티가 폭죽을 터뜨렸던 거예요. 폭죽이 터지는 소리는 총소리처럼 교실을 울렸어요. 반 아이들은 모두 깜짝 놀라 일어섰어요. 선생님은 화가 잔뜩 나서 소리쳤어요. “프란티, 교실에서 나가!” 그러자 프란티는 태연하게 말했어요. “내가 왜 나가요?”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선생님은 프란티를 끌고 교장실로 갔어요. 돌아온 선생님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30년이나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우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어요. 그때 데로시가 일어서서 말했어요. “선생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는 선생님을 좋아해요.” 그러자 선생님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수업을 계속하자.” 오늘은 우등생에게 메달을 주는 날이었어요. 메달은 장학관이 와서 직접 달아 주었어요. 수업이 끝날 무렵,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교장 선생님과 함께 장학관이 들어왔어요. 장학관이 말했어요. “성적이 우수한 두 학생에게 메달을 주겠습니다. 1등 데로시, 앞으로 나오세요!” 장학관이 데로시의 목에 메달을 걸어 주었어요. 이어서 장학관은 2등을 말했어요. “2등은 프레코시예요.” 데로시가 1등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프레코시가 2등을 한 것은 정말 뜻밖이었어요. 프레코시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어요. “프레코시는 성적도 좋지만 늘 씩씩하고 착해서 메달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요.” 장학관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어요. 장학관이 프레코시의 목에 메달을 걸어 주자 모두 손뼉을 쳐 주었어요. 우리 반은 다른 반보다 일찍 수업이 끝났어요. 교실에서 나오니 프레코시의 아버지가 와 있었어요. 아저씨는 언제나 혈색이 안 좋았고 험상궂어 보였어요. 교장 선생님이 장학관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어요. 아버지를 발견한 프레코시는 두려운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자 장학관은 프레코시의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프레코시의 아버지시죠? 축하합니다. 프레코시는 쉰네 명의 아이 중에서 2등을 했어요. 똑똑하고 착한 학생이지요. 정말 자랑스러운 아드님을 두셨어요.” 프레코시의 아버지는 놀란 얼굴로 교장 선생님과 장학관을 번갈아 바라보았어요. 그러다가 자기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어요. “프레코시, 정말 장하구나. 그동안 너에게 잘못한 것을 모두 용서해 다오.” 프레코시의 아버지는 프레코시를 안으며 눈물을 흘렸어요. “프레코시, 정말 축하해!” 모두 프레코시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어요. 프레코시의 아버지는 흐느껴 우는 프레코시를 한참 동안이나 꼭 끌어안고 있었어요. 해마다 3월 14일이 되면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어요. 바로 엠마누엘 극장에서 거행되는 상장 수여식인데, 이탈리아 열두 개 지역에서 한 명씩 추천한 훌륭한 학생들에게 주는 상장이에요. 영광스러운 이 상장을 받기 위해서는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모범이 되어야 했어요. 오늘 아침, 수업이 끝난 뒤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일은 극장에서 훌륭한 학생들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날이에요. 로베티, 우리 학교 대표로 너를 추천한다.” “고맙습니다.” 로베티가 절뚝이며 일어나서 정중하게 대답했어요. 교장 선생님은 이어서 말했어요. “각 지역 대표 열두 명이 함께 무대에 오르니 여러분은 박수로 축하해 주어야 해요.” 담임 선생님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어요. “로베티, 이제 너는 우리 지역의 대표가 되었구나!” 그 말에 우리는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어요. 로베티와 함께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검은 수염의 신사와 마주쳤어요. 신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았어요. 그는 바로 로베티의 아버지였어요. 시상식 시상식은 오후 2시에 있었어요. 모자와 리본이 날리고 폭죽이 터지는 등 극장 안은 축제 분위기였어요. 1층 좌석의 절반은 선생님들로 꽉 차 있었고, 나머지 좌석과 복도에는 아이들로 붐비고 있었어요. 선생님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수상자들을 줄 세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어요. 학부모들도 많이 참석했어요. 무대 앞에는 로베티가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있었어요. 오후 2시가 되자 악대의 연주와 함께 시상식이 시작되었어요. 열두 명의 소년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나란히 섰어요. 그러자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어요. 수상자들은 시장으로부터 차례로 상장을 받았어요. 시장은 상장을 수여한 뒤 소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도 했어요. 드디어 우리 학교 차례가 되었어요. “줄리오 로베티!” 선생님이 부르자 로베티가 목발을 짚고 앞으로 나갔어요. 로베티가 1학년 아이를 구한 일은 벌써 소문이 퍼져 극장 안의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베티 차례가 되자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어요. 로베티는 당황하여 벌벌 떨면서 무대 한가운데에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자 로베티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와서 월계관을 받아 들었어요. 로베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번쩍 안고 소리쳤어요. “장하다, 로베티 만세!” 사람들은 로베티와 아버지에게 더욱 열렬한 박수를 보냈어요. 며칠째 날씨가 아주 맑고 좋았어요. “오늘 체육 수업은 운동장에서 하겠어요.” 그날 넬리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에게 체육 수업에 넬리를 빼 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넬리의 생각은 달랐어요. 넬리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체조하고 싶었어요. 넬리의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이 넬리가 체조하는 모습을 보고 놀리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어요. 넬리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제게 뭐라고 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어요. 가르로네가 절 지켜 주기 때문에 아무도 저를 놀리지 않는걸요.” 넬리의 말에 어머니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해서 넬리도 체육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우리를 높은 나무 기둥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우리는 나무 기둥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서 꼭대기에 있는 널빤지 위에 똑바로 서 있다가 내려와야 했어요. 데로시와 코레티는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 기둥에 잘 기어 올라갔어요. 긴 옷을 입은 프레코시도 제법 잘 올라갔어요. 스타르디는 숨이 차는지 이를 악물고 올라갔어요. 드디어 가르로네 차례가 되었어요. 가르로네는 너무도 쉽게 잘 기어 올라갔어요. 가르로네 다음 차례는 넬리였어요. 넬리가 가는 손으로 기둥을 잡자 아이들은 킥킥 웃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가르로네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았기 때문에 웃음은 멈췄어요. 넬리가 겨우 기둥을 붙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오르고 말겠다는 듯 안간힘을 쓰는 넬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어요. “그만 내려오너라!” 보다 못한 선생님이 넬리에게 말하였지만, 넬리는 들은 척도 안 했어요. 나는 넬리가 떨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했어요. 할 수만 있다면 밑에서 넬리를 밀어 주고 싶었어요. 그때 가르로네와 데로시 그리고 코레티가 외쳤어요. “올라가! 넬리 한 번 더 기운을 내!” 넬리는 낑낑거리면서 널빤지 가까이 기어 올라갔어요. “이제 다 됐다! 용기를 내!” 다른 아이들이 외쳤어요. 드디어 넬리는 널빤지 위에 올라섰어요. 모두 힘차게 손뼉을 쳤어요. “훌륭하다! 이제 조심해서 내려오너라.” 선생님이 말했어요. 그러나 넬리는 내려오지 않고 거리 쪽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어요. 나도 그쪽을 바라보았어요. 운동장에 있는 철봉 옆 큰 나무들 사이로 넬리의 어머니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어요. 넬리는 기둥을 타고 내려왔어요. 우리는 모두 넬리를 축하해 주었어요. 넬리는 흥분하여 얼굴이 장밋빛으로 붉어졌어요. 수업이 끝나자 넬리의 어머니가 넬리를 데리러 왔어요. 우리는 오늘 넬리가 해낸 일을 큰 소리로 넬리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어요. 우리의 말을 들은 넬리 어머니는 무척 흐뭇해했어요. 어제저녁에 엄마 찾아 3만 리를 읽고 있을 때였어요. 실비아 누나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어요. “오늘 아침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었대. 아버지는 예전처럼 살게 되려면 희생과 양보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누나는 내 손을 잡고 어머니의 방으로 갔어요.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누나가 말했어요. “어머니,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희생을 각오했어요. 저희에게 사 주시기로 했던 그림 통과 부채는 안 사 주셔도 돼요. 엔리코, 너도 그렇지?”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어요. “저도 참을 수 있어요.” 누나는 어머니의 목에 팔을 감고 말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어요.” 어머니는 웃으며 우리들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었어요. 그리고 누나가 걱정하는 것만큼 돈이 없는 건 아니라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오시자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모두 말했어요. 아버지는 그저 “쯧쯧!” 하고 혀를 찼어요.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식당으로 갔어요. 나는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느꼈어요. 식탁 밑에 나에게 줄 그림 통과 누나에게 줄 부채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에요. 드디어 엄마 찾아 3만 리를 다 읽었어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이 자유 제목으로 써 오라고 한 작문의 제목을 정하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때, 갑자기 소방관 두 명이 들어와 아버지에게 지붕 위의 굴뚝에서 불꽃이 나오고 있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조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어요. 소방관들은 방마다 돌아다니며 조사를 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가 나에게 말했어요. 엔리코, 너 작문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지? ‘소방관’으로 제목을 정하는 게 어떻겠니? 내가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잘 듣고 써 보아라. 아버지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2년 전 어느 날, 로마 거리에서 불길이 치솟았어요. “집 안에 사람이 있어요! 빨리 구해야 해요!”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어요. 잠시 뒤 소방서 마차가 달려왔어요. 네 명의 소방관이 불이 난 건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어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슬아슬한 일이 일어났어요. 한 여자가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다가 겁에 질려 창문 난간을 잡은 채 버둥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불행하게도 불길이 창밖으로 치솟고 있었어요. 불길은 난간에 매달린 여자를 집어삼킬 듯 이글거렸어요. 소방관들은 지붕을 통하여 4층으로 내려가기로 했어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어요. 소방관들은 도끼로 기왓장을 부수어 4층으로 내려갈 구멍을 만들었어요. 난간에 매달린 여자는 더욱 버둥거리고 있었어요. 잠시 뒤 지붕에 구멍이 뚫리면서 소방관들이 4층으로 뛰어내렸어요. 불길은 더욱 강하게 이글거렸어요. “저러다 소방관들도 불에 타 죽고 말 것 같아!” 그때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소방관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의 얼굴은 불길에 그을려 있었고, 머리는 재투성이였어요. 소방관은 창문 난간에 매달린 여자의 팔을 잡고 여자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어요. 불길에 휩싸인 건물 속에서 맨 처음 빠져나온 사람은 창문 난간에 매달려 있던 여자였어요. 그리고 나이 많은 소방 책임자는 맨 나중에야 건물 밖으로 나왔어요. 소방 책임자가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손뼉을 쳤어요. 그는 순식간에 유명해졌어요. 소방 책임자는 바로 주세페 로비노였어요. "엔리코, 이것이 용기란다. 진정한 용기는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야. 주세페 로비노라는 분을 만나 보고 싶지 않니?” “네, 꼭 만나 뵙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난로를 검사하는 소방관들 중의 한 분을 가리켰어요. “저 분이 바로 소방 책임자 주세페 로비노 씨란다. 어서 인사드려라!” 내가 인사를 하자 소방 책임자는 일손을 멈추고 내게 손을 내밀었어요. 나는 주세페 로비노 씨와 악수를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어요. “네가 평생 악수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분만큼 훌륭한 분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어제는 참으로 슬픈 날이었어요. 이탈리아의 영웅 가리발디 장군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가리발디 장군은 이탈리아 국민을 억압에서 해방시킨 분이었어요. 가리발디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용감했어요. 여덟 살 때는 한 여자아이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고, 열세 살 때는 보트를 타다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기도 했어요. 이탈리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어요.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어요. 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가리발디 장군은 소박하면서도 위대하였고, 옳은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가리발디 장군의 죽음을 슬퍼했어요. 이제 가리발디 장군은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그분이 남긴 위대한 업적은 영원할 거예요.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분을 영웅으로 존경하고 추모할 거예요. 엔리코! 국경일에는 언제나 조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 두텁게 갖도록 하여라. 아랫글은 한 소년이 쓴 것인데, 너에게 많은 도움이 될 테니 잘 읽어 보아라. 이탈리아여!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여! 훌륭한 나라여! 나의 조상들이 태어났다가 묻힌 곳! 나도 역시 이곳에 묻힐 것을 맹세하노라. 내 자손들도 여기서 숨을 거두리라! 아름다운 내 조국 이탈리아여! 오랜 세월 동안 위대함과 영광으로 가득 찬 나의 조국 이탈리아여! 이제 자유와 진리를 얻은 이탈리아여! 나는 아직 어려서 그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욱 있는 힘을 다하여 그대를 섬기고 사랑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운 바다와 산을 사랑한다. 그대에게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대의 신성한 고적과 멸하지 않는 역사를 사랑한다. 용감한 로마를, 웅장한 제노바를, 학문이 발달한 볼로냐를, 황홀한 베네치아를, 화려한 밀라노를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 아, 신성한 나의 조국! 나는 진정으로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의 자손들을 친형제처럼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 부지런하고 정직한 시민이 되어 그대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자신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 어느 날, 그대가 나의 생명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그대의 성스러운 이름을 향하여 마음껏 외칠 것이다. 잘 읽었느냐, 엔리코.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무척 더워졌어요. 우리는 무더위 속에서 나날이 지쳐 갔어요. 크로시는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있었고 노비스는 불평이 대단했어요. 교실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공기가 더워졌다는 거예요. 데로시는 그 무더위 속에서도 항상 열심히 공부했어요. 데로시의 동그랗게 뜬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가로피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사하는 데 열중했어요. 가로피는 빨간 색종이로 여러 가지 모양의 부채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팔았어요. 넬리는 심하게 여름을 타기 때문에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어요. 그래서인지 가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곤 했어요. 가르로네는 선생님이 잠든 넬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책을 세워 슬며시 가려 주었어요. 가르로네는 생각이 깊은 친구예요. 코레티는 늘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버지의 일을 도왔어요. 코레티는 학교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를 도와 무거운 장작을 날랐어요. 그러다 보니 늘 피곤했어요. 하지만 코레티는 졸음을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어요. 선생님이 코레티를 큰 소리로 불렀어요. 그래도 코레티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코레티네 집 가까이에 사는 숯장수 아들이 말했어요. “선생님, 코레티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우리 집까지 장작을 날라다 줘요.” 선생님은 잠든 코레티를 깨우지 않고 수업을 계속했어요.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은 코레티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어요. “코레티, 이제 그만 일어나렴!” “어? 선생님, 죄송해요.” 코레티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어요. “아니다, 아버지를 돕느라 피곤한 거 다 알고 있다. 코레티, 넌 참 착한 아이로구나!” 선생님은 코레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우리 학교의 여자 선생님 한 분이 세상을 떠났어요. 교장 선생님은 어제 아침에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 말했어요. 선생님은 여러분을 정말 사랑했단다. 그 선생님은 무서운 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어. 이제 우리는 두 번 다시 선생님을 볼 수 없지. 여러분은 이 훌륭한 선생님을 평생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프레코시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책상 위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프레코시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어제 수업이 끝난 뒤에 우리는 모두 돌아가신 선생님 댁을 방문했어요. 선생님의 관이 밖으로 나오자 아이들은 큰 소리로 엉엉 울었어요. 장례 행렬은 마침내 성당에 도착했어요. 사람들은 손에 촛불을 들고 넓은 성당 안에서 기도했어요. 신부님이 “아멘!” 하고 기도를 마치자 모두 촛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어요.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교장 선생님께 이런 말을 했어요. “아이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 장례식에는 아이들이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이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또 울음을 터뜨렸어요. 선생님은 나의 어린 시절의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예요.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영원히 안녕! 엔리코의 일기장에 어머니가 쓴 편지. 엔리코! 벌써 4학년을 마무리하는 학년말이 되었구나. 이제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너는 사랑하는 선생님,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너에게 더욱 슬픈 소식을 전해야 하는구나. 아버지의 일로 우리 가족 모두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 해서 너는 새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한단다. 엔리코! 너는 이 사실이 무척 슬플 거야. 사랑하는 친구, 선생님, 정들었던 학교와 헤어져야 하니까. 너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친구들과 아름다운 우정을 쌓아 왔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친구들과 진정한 이별의 슬픔을 나누도록 해라. 네가 처음 학교에 갈 때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지. 그런 너를 학교는 강하고,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너는 자라서 어른이 되겠지. 그러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잊혀 갈 거야. 그러나 너는 이 학교에서 너의 지혜가 싹텄다는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내가 너를 낳은 집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마침내 학년말 시험이 시작되었어요.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코티 선생님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왔어요. 코티 선생님은 사자처럼 무서운 분이에요. 그러나 코티 선생님은 함부로 벌을 주는 분이 아니었어요. 선생님이 큰 봉투에서 시험지를 꺼낼 때 교실 안은 조용해졌어요. 선생님은 큰 소리로 문제를 읽으면서 무서운 눈으로 아이들을 쳐다보았어요. 한 시간쯤 지나자 많은 아이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어요. 시험 문제가 퍽 까다로웠거든요. 크로시는 주먹으로 자기의 머리를 쿡쿡 쥐어박고 있었어요. 그러나 크로시를 나무랄 수는 없었어요. 크로시는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눈을 부릅뜨고 책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시간은 충분히 있다. 차근차근 문제를 풀도록 하여라.” 나는 선생님 말씀대로 침착하게 문제를 풀었어요. 밖을 내다보니 운동장에서 부모님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진급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중요한 시험이니까요. ‘우리 아이가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모님들은 모두 이렇게 기도하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의 모습도 보였어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를 향해 미소 지었어요. 아버지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점심때가 되어서야 모든 시험이 끝났어요. 교실 밖으로 나가자 아버지가 내게 물었어요. “시험 문제가 어려웠니? 어디 한번 보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시험지를 건넸어요. 시험지를 훑어보신 아버지가 빙그레 웃었어요. “몇 개 틀린 게 있지만, 잘 풀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오늘 우리는 마지막 시험인 구술시험을 보았어요. 강당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강당에는 교장 선생님도 나와 있었어요. 우리는 한 사람씩 일어나서 선생님이 묻는 말에 아는 대로 대답을 했어요. 어떤 아이들은 무척 긴장하여 말을 더듬었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어요. “네가 알고 있는 문제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대답하거라!” 아이들은 용기를 얻어서 똑똑하게 대답을 했어요. 나도 무사히 구술시험을 마쳤어요. 이제 모든 시험이 끝났어요. 그러나 마음이 흐뭇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친구들과 마주 앉아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지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는 망설이다가 가르로네에게 가서 어렵게 말했어요. “가르로네, 아버지 일 때문에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게 되었어.” 가르로네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힘없이 말했어요. “엔리코, 너와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나는 너를 잊지 못할 거야.” “가르로네, 나도 너를 잊지 못할 거야!” 가르로네는 오랫동안 잠자코 나를 바라보았어요.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이 기쁜 듯이 말했어요. “지금까지 모두 잘했다.” 선생님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어요. 나는 어쩐지 가슴이 아팠어요. ‘그토록 우리를 돌봐 주셨는데 우리에게 받는 보답이 겨우 이 정도라니.’ 나는 앞으로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의 선생님 모습을 떠올릴 것 같았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후 1시에 우리는 모두 학교로 모였어요. 4학년으로서는 마지막 수업이에요. 교문 주위에는 부모님들도 많이 모여 있었어요. 교실 안까지 들어온 부모님도 여럿 있었어요.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누어 주었어요. “대부분 학생들이 5학년으로 진급하게 되어 기뻐요. 그리고 데로시가 우리 반의 1등이에요.” 모두 손뼉을 치며 데로시를 축하해 주었어요. 낙제한 아이도 몇 명 있었어요. 그중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어요. “운이 나빠서 그랬다고 생각하렴. 그리고 앞으로는 더 열심히 노력하렴!” 선생님은 이렇게 위로를 했어요. 성적표를 나누어 준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했어요. “우리가 이 교실에서 만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나는 여러분과 작별을 하게 된 것이 무척 서운해요. 우리는 1년 동안 같이 공부를 했어요. 내가 뜻하지 않게 여러분에게 화를 냈거나, 공평하지 않게 대한 적이 있다면 용서해 주세요. 또 지나치게 엄하게 했다면 그것도 용서해 주세요. “아니에요, 선생님. 그런 적 없었어요!”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모아 말했어요. “아무튼 부족했던 점들을 용서해 주기 바라요. 여러분은 다음 학기에는 나와 함께 공부하게 되지 않겠지만, 늘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거예요. 그럼 여러분, 모두 안녕히!” 선생님은 교단에서 내려와 우리에게로 다가왔어요.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선생님과 악수했어요. 우리는 선생님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손에 입을 맞추기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모두 입을 모아 외쳤어요.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어요. 나는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어요. 이 순간에는 모든 기분 나쁜 일을 잊고 있었어요. 여느 때 같으면 데로시를 몹시 시기할 보티니가 오늘은 가장 먼저 팔을 벌리고 데로시에게 가서 안겼어요. “데로시, 1등 한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고마워, 보티니.”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 주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어요. 나도 꼬마 미장이에게 다가가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어요. “고마워, 엔리코.” 꼬마 미장이의 뺨은 어느새 사과처럼 불그레해졌어요. 나는 다른 아이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르로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어요. “울지 마, 엔리코.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우리 그때 꼭 웃으면서 보도록 하자.” 가르로네는 마치 어른처럼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어요. 그러고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어요. 아버지가 내게 물었어요. “그동안에 혹시 누구에게라도 나쁜 일을 한 적은 없었니? 그런 일이 있다면 지금 사과를 하고 오는 게 어떻겠니?” “그런 일은 없어요.”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힘없이 대답했어요. “소중했던 친구들, 모두 안녕! 학교도 이제 안녕!” 나는 그동안 공부하고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던 학교를 찬찬히 둘러보았어요. 멀리서 친구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내 학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변호사인 어터슨 씨는 여윈 체구에 상체는 구부러진 듯하며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여 연극을 좋아하면서도 20여 년 동안 극장 문턱을 넘어선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터슨 씨는 남들에게 너그럽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하여 주위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어터슨 씨를 따르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것은 겹겹이 덮인 담쟁이덩굴같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두터워진 것이지, 그들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가까워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터슨 씨가 먼 친척이며 놀기 좋아하는 엔필드씨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은 매주 일요일 함께 산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런던의 어느 번화한 거리의 뒷골목을 지나가게 되었다. 문은 색이 변한 데다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어 몹시 흉해 보였다. 골목 어귀에 이르자 엔필드 씨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건물의 문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문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어터슨 씨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엔필드 씨는 말을 이었다. “저 문은 나에게 아주 기이한 일을 떠올리게 해요.” 어터슨 씨가 궁금해하자 엔필드 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벽 3시쯤 된 어느 겨울밤이었어요. 가로등만이 길을 비춰 줄 뿐 골목 안은 몹시 고요했는데, 바로 그때 골목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엔필드 씨의 표정은 무척 긴장되어 보였다. “몸집이 자그마한 한 사나이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여덟 살 아니면 열 살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사잇길로 뛰어오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모두 급하게 걷고 있었기 때문에 길모퉁이에서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순간 얼마나 참혹한 일이 벌어진 줄 아세요?" "사나이가 여자아이의 몸을 짓밟아 뭉개고는 여자아이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냥 가 버리는 거예요.” 그때의 광경이 그대로 떠오르는 듯 엔필드 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난 ‘저 사람 잡아라!’ 하고 소리치면서 뛰어가 그자의 멱살을 쥐고 조금 전의 장소로 끌고 왔어요. 여자아이 주위에는 가족들이 모여 있더군요. 그자는 뻔뻔스럽게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어요." "여자아이의 가족이 데려온 의사가 말하길 여자아이는 다친 곳은 없고 다만 심하게 놀랐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터슨 씨의 눈빛이 반짝였다. “난 그자를 본 순간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함을 느꼈는데, 그건 여자아이의 가족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의사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는 그자를 꾸짖었어요. 이번 일을 세상에 퍼뜨려 주위 사람들로부터 외톨이가 되게 하겠다고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자는 사람들을 비웃는 듯한 태도로 한가운데에 떡 버티고 서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어터슨 씨는 엔필드 씨를 재촉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자에게 여자아이의 가족에게 100파운드를 주라고 말했어요. 그자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더군요. 그다음 문제는 돈을 받아 내는 방법이었어요." "그자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저 건물 앞이었어요. 그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10파운드의 돈과 함께 쿠츠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를 갖고 나왔어요. 그 수표는 그것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만 돈을 지급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어요." “나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자에게 소리쳤어요.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새벽 4시, 지금, 이 시각에 바꿀 수도 없는 100파운드의 돈을, 그것도 남의 서명으로 되어 있는 수표를 주다니.’" "그러자 그자는 날 비웃으며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거예요. 이윽고 날이 밝아 쿠츠 은행이 문을 열자 우리는 은행 안으로 모두 들어갔어요. 나는 그 수표를 담당 은행원에게 주면서 수표가 진짜인가를 알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수표는 틀림없이 진짜라는 거예요.” 엔필드 씨의 말을 듣고 있던 어터슨 씨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형님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정말이지 기분 나쁜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수표에 서명한 사람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유명인이라는 점이 의심스러웠어요. 아마도 수표는 그 신사의 약점을 미끼로 협박해서 빼앗은 돈이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이 건물의 문이 있는 장소가 공갈과 협박으로 돈을 모아 두는 곳이라고 해도 상관없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수표에 서명한 사람이 저기에 살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어터슨 씨의 질문에 엔필드 씨가 대답했다. “우연히 수표에 서명한 사람의 주소를 보았는데 그는 다른 곳에 살고 있더군요.” “자네는 그 문이 있는 집에 관해서 물어보지 않았군.” 어터슨 씨가 물었다. “네, 조심스러웠거든요. 하지만 난 혼자서 그 집을 조사해 보았어요. 창은 항상 닫혀 있지만 언제나 깨끗하고 굴뚝에서 늘 연기가 피어올랐어요. 그러니 누군가가 사는 게 틀림없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었다. 어터슨 씨가 물었다. “여자아이를 짓밟았다던 그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은 가르쳐 주어도 해로운 일이 없겠지요.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 이름은 바로 하이드였어요.” “흠, 그날 새벽 자네가 본 그자는 어떤 사람이던가?” “그자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불쾌한 느낌이 드는 사람은 여태껏 본 적이 없으니까요. 분명히 그에게 이상한 점이 있는데 어떤 점이 이상한지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어터슨 씨가 갑자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엔필드 씨가 깜짝 놀라서 되묻더니 말했어요.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그자가 열쇠를 사용하는 걸 분명히 보았단 말이에요. 게다가 일주일도 안 된 일이에요.” 어터슨 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엔필드 씨가 말을 계속했다. “여기서 우린 또 다른 걸 배우네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 것." "우리 이 일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지 말기로 해요.” “그렇게 하기로 하세.” 어터슨 씨가 말했다. 그날 저녁, 어터슨 씨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촛불을 켜 들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간 어터슨 씨는 금고를 열고 겉봉에 “지킬 박사의 유언장”이라고 씌어 있는 봉투 하나를 꺼냈다. 유언장은 어터슨 씨 사무실에서 지킬 박사가 쓰고, 그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킬 박사가 어터슨 씨의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 쓴 유언장이어서 내용은 어터슨 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학 박사, 민법학 박사, 법학 박사이며, 영국 왕립학회 회원인 헨리 지킬이 사망할 때는 친구이자 은인인 에드워드 하이드에게 모든 재산을 넘길 뿐 아니라, 지킬 박사가 어딘가로 사라져 3개월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을 때도 하이드가 지킬의 재산을 물려받는다. 지킬의 가족에 대해서는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 외에 어떤 의무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어터슨 씨는 관습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변호사였으므로, 이 엉뚱한 유언장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다. 또한, 하이드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더 불쾌했다. 이제는 엔필드 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 이름만을 알 뿐이었다. “지킬이 미쳤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 망신이라도 당하게 될까 걱정이 되는군.” 어터슨 씨는 중얼거리면서 서류를 다시 금고에 넣었다. 그리고 카벤디시 거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곳엔 유명한 의사이자 어터슨 씨의 친구인 라니언 박사가 살고 있었다. 어터슨 씨는 생각했다. ‘하이드 씨를 아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라니언뿐일 거야.’ 라니언 박사는 성격이 명랑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서로를 존경해 온 사이였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터슨 씨는 자신의 기분을 언짢게 한 사건으로 화제를 이끌어 갔다. “라니언, 자네와 나는 지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지?” “그게 어쨌다는 건가?" "난 요즘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네.” “난 자네와 지킬이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어서 자주 만나는 줄 알았는데.” “전에는 그랬었지.” 라니언 박사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지킬은 벌써 10년 이상이나 변덕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어. 물론 나는 지킬과 오랜 우정 때문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지만, 요즈음은 통 만나지 못하고 있네.” 이렇게 말하던 라니언 박사는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물들더니 말을 덧붙였다. “지킬이 맨날 비과학적인 소리만 하니까 우정도 멀어지는 거겠지.” 과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어터슨 씨는 그들이 과학 문제로 논쟁하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다소 안심이 되어 말하고 싶었던 문제를 꺼냈다. “지킬 밑에서 일하는 하이드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글쎄, 내가 그와 사귀어 온 지금까지 하이드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날 어터슨 씨가 라니언 박사를 만나서 알아낸 정보는 고작 이것이 전부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 위에 누운 어터슨 씨는 새벽이 올 때까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어터슨 씨는 그날 밤을 지새웠다. 그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어두운 밤 가로등만이 켜져 있는 쓸쓸한 거리를 빠르게 걸어가는 한 사나이의 모습, 그리고 뛰어오는 여자아이의 모습. 곧이어 두 사람은 부딪치게 되고, 그 악마 같은 사나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짓밟고서도 그냥 지나가 버린다. 또 이런 장면도 떠올랐다. 어느 부잣집의 방에 지킬 박사가 자면서 즐거운 꿈을 꾸는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때 누군가가 지킬 박사에게 깨어나라고 한다. 지킬 박사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 호기심이 강한 어터슨 씨는 하이드라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 볼 수 있다면 지킬 박사의 기묘한 유언장의 의미를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어터슨 씨는 뒷골목의 그 문 앞에 종종 갔다. 정해 놓은 시간 없이 그 장소를 오가며, 어터슨 씨는 만일 그가 ‘하이드 씨’(숨는 자)라면 자신은 ‘시크씨’(찾는 자)가 되리라고 마음먹게 되었다. 마침내 어터슨 씨의 끈기와 인내심이 보람을 얻었다. 그날은 매우 맑고 건조한 밤이었다. 밤 10시가 되자, 한적한 거리는 아주 작은 소리라도 멀리까지 퍼질 정도로 고요했다. 갑자기 어터슨 씨의 귀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발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는 밤마다 그곳에서 주위를 살펴 왔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자와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에 어터슨 씨는 뒷골목의 입구에 몸을 숨겼다. 드디어 발소리의 주인공이 어터슨 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나이는 골목 입구에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터슨 씨는 그자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작은 몸집에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외모는 어딘지 모르게 보는 이의 마음을 불쾌하게 했다. 문 앞에 이르자 그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어터슨 씨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걸었다. “혹시 하이드 씨 아닌가요?” 그는 어터슨 씨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요, 왜 그러십니까?” “전 지킬 박사의 오랜 친구인 어터슨입니다. 아마 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지킬 박사는 지금 집에 안 계실 겁니다.” 하이드 씨는 여전히 어터슨 씨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저, 실은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저에게 당신의 얼굴을 좀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터슨 씨의 말에 하이드 씨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도전적인 자세로 몸을 돌려 마주 섰다. 몇 분간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겠군요." "어쨌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하이드 씨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제 주소도 가르쳐 드리지요.” 하이드 씨는 소호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 주소를 일러 주었다. ‘이 사나이도 역시 그 유언장을 생각하고 있나 보군.’ 어터슨 씨는 이렇게 생각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예를 들어서 지킬 박사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죠.” 어터슨 씨의 말에 하이드 씨는 화가 난 듯 말했다.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소!" 당신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오!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그러자 하이드 씨는 고함치듯 웃어 젖히더니 재빨리 집 안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던 어터슨 씨는 큰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터슨 씨는 조금 전에 보았던 하이드 씨를 떠올려 보았다. 하이드 씨가 지었던 미소는 불쾌감과 잔인함이 한데 뭉쳐져 살기 마저 감도는 듯했다. 어터슨 씨는 하이드 씨의 컬컬한 목소리, 정확하지 않은 발음 등 모든 것에서 의혹과 불안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자는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아. 원시인 같은 점이 있다고나 할까?' '내가 악마의 얼굴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네의 친구인 하이드의 얼굴과 똑같을 걸세.’ 뒷골목의 모퉁이를 돌아서면 오래된 집들이 많이 있었다. 어터슨 씨는 모퉁이에서 두 번째에 자리 잡은 집 앞에 멈추었다. 어터슨 씨가 문을 두드리자 나이 많은 하인이 나와 문을 열었다. “풀, 지킬 박사님은 집에 계신가?” “곧 들어가 알아보겠습니다, 어터슨 씨.” 어터슨 씨는 아늑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안으로 들어갔던 풀 영감은 지킬 박사가 외출 중임을 알렸다. “풀, 조금 전 하이드 씨가 전에 지킬 박사가 해부실로 쓰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킬 박사가 없을 때 그래도 괜찮을까?” “상관없어요. 하이드 씨는 열쇠를 가지고 있거든요.” “지킬 박사는 하이드 씨를 꽤 믿고 있나 보군요.” “예, 그렇습니다. 주인님은 저희에게도 그분께 복종하라고 하셨어요.” “나는 여기서 그 사람을 한 번도 보질 못했는데요.” “예, 그러실 거예요. 하이드 씨는 여기서 식사를 하시는 일이 없으니까요.” 풀 영감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도 하이드 씨가 이 집 안에 계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거든요. 그분은 늘 실험실을 통해서 드나드시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그럼 편히 쉬시오.” 그 집을 나온 뒤 어터슨 씨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지킬은 젊었을 때 거칠고 난폭한 행동을 곧잘 했어.' '그래,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어떤 궁지에 빠진 게 분명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어터슨 씨는 흠칫 놀라서 자신의 과거가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자칫 그릇된 일을 저지를 뻔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부끄러워할 만한 점은 없었다. 어터슨 씨는 다시 그 문제로 생각을 돌렸다. ‘가엾은 지킬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만일 음흉한 하이드가 자기에게 많은 재산을 남기겠다는 지킬의 유언장 내용을 눈치챘다면, 빨리 그 재산을 가로채고 싶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어터슨 씨는 중얼거렸다. “만일 지킬이 내가 맘대로 하게끔 허락만 해 준다면.......” 유언장의 문구가 어터슨 씨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주일쯤 지난 어느 날, 지킬 박사는 오랜 친구들을 대여섯 명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밤늦은 시각, 다른 친구들은 모두 돌아가고 지킬 박사와 어터슨 씨만 남게 되었다. 지킬 박사는 모임이 끝난 뒤에는 어터슨 씨를 붙들어 놓고 둘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했었다. 그날도 지킬 박사는 어터슨 씨와 난롯가에 마주 앉았다. 지킬 박사는 몸집이 크고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어터슨 씨가 말문을 열었다. “지킬, 사실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자네의 유언장에 대해서 말이야.” 이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이드라는 자는 누구이며 유언장은 왜 그렇게 작성되었는가 등의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킬 박사는 그 질문을 장난으로만 받아넘기려 했다. “이봐, 내 유언장 때문에 자네만큼 괴로워하는 사람은 또 없을 걸세.” “그 유언장의 내용에 대해 내가 반대한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으리라 믿네.” “그럼, 나의 유언장에 대해서 관심이 많단 말이군. 아, 그랬었지. 그건 나도 알고 있네.” 지킬 박사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네, 하이드란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 말일세.” 그 순간 지킬 박사는 입술이 창백해졌고 두 눈은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네. 나는 하이드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가 없네. 자네는 나의 괴로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 지킬 박사는 어색한 몸짓을 하면서 대답했다. “어터슨, 난 지금 아주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네. 그건 말로써는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야.” “지킬, 비밀은 지켜 줄 테니 모든 것을 털어놓게. 내가 자네의 고민을 해결해 주겠네.” “어터슨, 자네의 말이 우정 어린 진심임을 잘 아네." "난 누구보다 자네를 믿지만 이 문제만은 자네가 생각하는 바와는 다르다네. 자네가 걱정하는 것만큼 심각하진 않아. 내가 하이드와 관계를 끊겠다고 생각하면 즉시 깨끗하게 끊을 수도 있으니까." "자네가 그토록 신경 써 주는 건 고맙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니까 그냥 내버려 두게.” 어터슨 씨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자네 말을 믿겠네.” “자네가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점이 한 가지 있네. 나는 불쌍한 하이드에 대해서 관심이 많네." "그는 사실 내가 걱정할 만큼 포악스러운 면이 있긴 해도 난 그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네. 그러니 자네만은 내 유언장대로 그가 남들에게서 멸시받지 않고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 “나는 그자를 만나게 된다 해도 좋게 대할 순 없을 걸세.” “그런 것은 바라지 않겠네. 다만 그자의 권리만이라도 지켜 주길 바라네. 내가 더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말일세.” 지킬 박사의 간곡한 부탁에 어터슨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그래, 약속하지.” 그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런던 시내는 잔인한 살인 사건으로 술렁였다. 런던의 템스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떤 집에서 한 하녀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하녀는 밤 11시쯤 잠을 자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공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하녀는 침실 창문 옆에 놓인 상자 위에 올라앉아 공상의 날개를 펴고 있었다. 한참 공상에 빠져 있던 하녀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신사 한 명이 좁은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을 보았다. 노신사의 반대쪽에선 몸집이 작은 한 신사가 오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깝게 되었을 때, 노신사가 먼저 인사를 하며 아주 공손하게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손가락질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길을 물어보는 듯했다. 노신사의 얼굴에서는 온화함과 고상함이 느껴졌다. 이윽고 몸집이 작은 신사 쪽으로 눈길을 돌린 하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언젠가 자기 주인을 방문한 적이 있는 하이드 씨였다. 그런데 갑자기 하이드 씨가 화를 버럭 내더니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이드 씨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늙은 신사를 밀어 땅에 쓰러뜨리더니 지팡이로 마구 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하녀는 너무 놀라서 기절하고 말았다. 새벽 2시가 되어 의식을 되찾은 하녀는 경찰을 불렀다. 그러나 범인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현장은 참혹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범인이 사건 당시 사용했던 지팡이는 아주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부러진 채 도랑에 빠져 있었다. 피해자의 몸에서는 우표가 붙은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피해자가 우체국에 가서 부치려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 같았다. 편지의 겉봉에는 어터슨 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튿날 아침, 어터슨 씨는 한 경찰관에게 그 편지를 전해 받았다. 편지를 읽고 난 어터슨 씨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직접 피해자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터슨 씨는 시체가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이분을 알고 있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분은 댄버스 커루 경입니다.” “아니, 뭐라고요! 변호사님, 그게 정말입니까?” 경찰관들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댄버스 커루 경은 의회 의원으로서 런던 시내에서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끔찍하게 살해당할 만큼 원한을 살 리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경찰관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피해자가 댄버스 커루 경이니 이 사건은 매우 시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 경찰관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건을 목격했다는 하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녀의 말에 따르면, 범인이 하이드 씨라는군요. 언젠가 자기 집에 다녀간 적이 있어서 얼굴을 안답니다.” 어터슨 씨는 하이드라는 이름을 듣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게다가 경찰관이 보여 주는 지팡이를 확인하니 의심은 더욱더 커질 뿐이었다. 그 지팡이는 어터슨 씨가 지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하이드라는 자는 몸집이 작은가요?” “하녀의 말에 따르면 눈에 띄게 작은 키에다가 아주 흉측한 인상이었다고 합니다.” 오전 9시쯤, 어터슨 씨는 뉴커먼 형사와 함께 전에 하이드 씨가 가르쳐 주었던 주소로 찾아가 보았다. 문을 두드리자 약간 늙어 보이는 부인이 문을 열었다. 곱게 화장을 한 부인의 태도에는 품위가 엿보였다. “여기가 하이드 씨 댁입니다만 지금은 안 계십니다. 어젯밤 늦은 시각에 돌아오셨다가 금방 나가셨으니까요. 그분은 자주 집을 비워요. 어제도 거의 두 달 만에 뵌 거였어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방을 좀 보고 싶은데요.” 어터슨 씨의 말에 늙은 부인은 거절했다. “잠깐, 이분을 소개해 두는 게 좋겠군요. 이분은 런던 경시청의 뉴커먼 형사이십니다.” 어터슨 씨가 말을 덧붙이자, 부인은 밉살스러울 정도로 밝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 그러세요? 하이드 씨가 무슨 일을 저질렀나요?” 형사가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집을 좀 조사해 보았으면 하는데요.” 조사 결과 하이드 씨의 집에는 부인 외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고, 하이드 씨는 단 두 개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이드 씨가 사용하고 있는 방들은 모두 호화로웠다. 그런데 방 안은 무엇인가를 급히 찾다가 어질러 놓은 흔적이 뚜렷했다. 난로 안에는 서류를 태웠는지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뉴커먼 형사는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수표책을 찾아냈다. 또한 살인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도 찾아냈다. 뉴커먼 형사는 집 안을 샅샅이 뒤져 그자의 이름으로 예금된 돈이 수천 파운드나 된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매우 만족해하며 말했다. “변호사님, 이 사건의 살인범이 누구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증거물인 지팡이를 치우지 못한 걸 보면 그는 굉장히 당황한 것이 틀림없어요. 은행에 잠복해 있다가 그자가 나타나면 체포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 전에 먼저 수배 전단을 돌려야겠군요.” 하지만 수배 전단으로 하이드 씨를 잡는 방법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이드 씨는 가까운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하녀 역시도 하이드 씨를 겨우 두 번 밖에 본 적이 없다고 했고 하이드 씨의 사진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날 오후 늦게, 어터슨 씨는 지킬 박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사인 풀 영감의 안내로 실험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해부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건물까지 왔다. 지킬 박사가 실험실에서 어터슨 씨를 맞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터슨 씨는 건물 구조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훑어보았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을 올라가니 빨간색의 천을 바른 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비로소 어터슨 씨는 지킬 박사만이 사용하는 방에 왔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꽤 큰 방으로 유리컵들이 빙 둘러 있는 가운데 큰 거울과 사무용 책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킬 박사는 친구가 온 것을 알면서도 차가운 손을 내밀며 인사할 뿐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풀 영감이 나가자 어터슨 씨가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도 그 소식을 들었겠지?” “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식당에서 들었네.” 지킬 박사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한마디 하고 싶어 온 거라네. 오늘 새벽 살해당한 커루 경은 내게 어떤 일의 변호를 부탁하려던 사람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난 내가 맡은 일은 정확히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라네. 설마 자네가 하이드를 숨겨 두진 않았겠지?” “어터슨, 나는 하느님께 맹세하네!” 지킬 박사는 소리를 지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나의 명예를 걸고 그와의 관계를 끊을 걸세. 그는 지금 안전하게 숨어 있네. 더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걸세.” 어터슨 씨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자네는 하이드를 꽤 믿고 있군그래. 그 친구를 위해 자네 말이 맞길 빌겠지만, 만약 이 사건으로 재판이 벌어지면 자네의 이름이 나올지도 모르네.” “난 하이드를 많이 믿고 있네. 물론 그럴 만한 근거가 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네. 그런데 자네에게 의논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네." "오늘 이상한 편지를 받았는데 경찰에게 보여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어터슨, 자네가 이 편지를 맡아 주게. 현명한 자네가 맡아 준다면 안심하겠어.” “자넨 지금 그 편지로 인해 그자가 들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건가?” “아닐세, 정말 그와의 관계는 다 끝났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피해를 입기는 싫어.” “그럼 그 편지를 보여 주겠나?” 지킬 박사가 꺼낸 편지에는 “에드워드 하이드”라고 서명이 되어 있었다. “이 편지의 봉투는 어디 있나?” 제게 항상 은혜를 베푸시는 지킬 박사님, 그런데 오히려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아주 안전하게 피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확실히 탈출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편지를 읽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태워 버렸는데, 소인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누가 가져온 모양이야.” “내가 이걸 가져가서 내일까지 조사해 봐도 되겠지?” “자네에게 모든 걸 맡긴다니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자네 유언장 중에서 ‘내가 만일 이 세상에서 모습을 더 이상 나타내지 않을 경우’라고 한 것은 누가 시킨 것 아닌가? 그자가 하이드지?” 이 말에 지킬 박사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내가 예상한 대로군. 하이드는 자네를 죽이려고 작정했던 것이 분명하네. 자네는 용케 피했군.” “그렇지만 난 중요한 교훈을 얻었네, 어터슨.” 지킬 박사는 진지하게 말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오는 길에 어터슨 씨는 풀 영감에게 물었다. “오늘 이 편지를 들고 온 사람은 어떻게 생겼던가?” “편지는 우편으로 왔습니다.” 풀 영감의 말에 어터슨 씨는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그 편지는 실험실 문을 통해서 전달된 것이 분명해. 어쩌면 그 방에서 하이드가 쓴 것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거야.’ 신문팔이 소년들의 외침이 들렸다. “호외요, 호외! 의회 의원 살인 사건이오!” 어터슨 씨는 여태까지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어 왔으나,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잠시 뒤에 어터슨 씨는 사무실로 돌아와 서기인 게스트와 마주 앉게 되었다. 어터슨 씨는 게스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자 했다. ‘게스트는 글씨체에 대해서 상당한 전문가니까 이 편지를 보고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터슨 씨가 말문을 열었다. “커루 경의 살인 사건은 너무 지독한 일이었어.” “맞아요, 변호사님. 범인은 분명 미친 사람일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지요.” “그 사건에 관해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 나에게 그 범인이 쓴 편지가 있어. 반드시 비밀을 지키게.” 어터슨 씨가 건네준 편지를 열심히 보던 게스트가 말했다. “변호사님, 이건 미친 사람의 글씨가 아닌데요.” “그것참 묘하군.” 그때 하인이 편지 한 통을 들고 들어왔다. “변호사님, 그 편지는 지킬 박사한테서 온 편지죠? 전 박사의 글씨를 알고 있습니다. 한번 보여 주십시오.” 두 장의 편지를 주의 깊게 비교하던 게스트가 말했다. “이상하게 두 편지의 글씨체가 아주 비슷합니다. 글자를 꼬부리는 데가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래, 이상한 일이군. 게스트, 이 편지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네. 자네도 잘 알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날 밤, 어터슨 씨는 그 편지를 금고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다. ‘지킬이 살인범을 위해 가짜 편지를 쓰다니.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자 어터슨 씨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커루 경의 살인 사건으로 인하여 하이드 씨의 사생활이 세상에 많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하이드 씨에 관한 나쁜 이야기만 떠돌 뿐,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터슨 씨는 점차 마음의 평정을 찾았고, 지킬 박사도 차차 고통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는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킬 박사는 남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 그런 평온한 생활은 두어 달 이상 계속되었다. 어터슨 씨는 지킬 박사의 초대로 라니언 박사와 파티에 참석하여 지나간 시간을 추억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지킬 박사는 또다시 아무도 만나려 하질 않았다. 마지막 파티가 열린 지 6일 뒤 어터슨 씨는 라니언 박사의 집으로 갔다. 친구의 얼굴을 본 어터슨 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니언 박사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으며, 그런 그의 모습에서 어떤 공포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터슨 씨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자네 어디 아픈가? 얼굴색이 좋지 않군.” “난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 몇 주일을 더 살 수 있을지 의문이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되네.” “지킬도 자네와 같아. 자네 요즘 그를 만나 본 적이 있나?” 그러자 라니언 박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난 이제 지킬과는 교제를 끊겠어. 지킬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내 앞에서 하지 말아 주게. 내가 죽은 뒤 어느 편이 잘못인지 자네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가 없네.” 어터슨 씨는 집으로 돌아와 지킬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지킬 박사가 자기를 만나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을 하고, 라니언 박사와 어떤 일 때문에 감정이 상했는지 물어보았다.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나는 절대로 라니언 박사를 만나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것이네. 난 자네를 진정으로 믿고 좋아하지만, 자네도 만나지 않겠네. 자네는 내 심정을 모를 걸세. 난 천벌을 받을 짓을 저질렀네. 어터슨! 저주받은 나의 운명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게. 괴로워서 난 미치게 될지도 모르네. 자네가 나의 고통이나 공포를 알게 된다면 나의 이런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네. 어터슨 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킬 박사의 활기차고 평안한 생활이 갑자기 깨진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라니언 박사는 병으로 자리에 눕더니 이 주일도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어터슨 씨의 마음은 너무나 쓸쓸했다. 그는 죽은 친구가 남긴 편지를 앞에 놓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터슨 변호사만 뜯어보시오. 만약 어터슨이 먼저 죽으면 읽지 말고 편지를 태워 주시오. 봉투에 씌어 있는 내용은 어터슨 씨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다가 친구의 뜻을 생각하여 봉투를 뜯었다. 뜻밖에도 봉투 안에는 또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지킬 박사가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뜯어보지 마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어터슨 씨는 호기심이 생겨 편지를 뜯어보고 싶었지만,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 금고에 편지를 넣었다. 이제 살아 있는 친구인 지킬 박사에 대한 어터슨 씨의 의혹은 점점 더 커졌지만, 친밀감은 더욱 깊어졌다. 지킬 박사의 집에 가서 듣게 되는 그의 소식은 한결같이 우울한 이야기뿐이었다. 지킬 박사는 집 안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 밖으로 외출도 하지 않았다. 일요일, 어터슨 씨는 평소처럼 엔필드 씨와 산책을 하다가 전에 들렀던 건물의 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는 하이드를 찾을 길이 없으니, 사건이 해결되려면 무척 골치가 아프겠군요.” 엔필드 씨가 말문을 열자, 어터슨 씨가 대꾸했다. “나는 그자를 또다시 만나지 않길 바란다네.” “그런데 바로 이 문이 지킬 박사 집의 뒷문이라는 점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네요.” “오, 그래? 이제 자네도 그걸 알아차렸단 말이지? 그럼 우리 창문 너머로라도 지킬을 만나 보지 않겠나? 나는 지킬의 일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네.” 어터슨 씨가 말했다. 지킬 박사의 집 2층에는 세 개의 창문이 있었다. 그중 가운데 것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지킬 박사는 그 창문 옆에 앉아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지킬 박사에게 어터슨 씨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이게 웬일인가, 지킬! 요즈음 자네 건강은 어떤가?” “어터슨,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난 이제 기운이 다 빠져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너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런 걸세." "참, 인사하지. 내 사촌인 엔필드야. 우리와 함께 산책이나 하세." 하지만 지킬 박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유, 신경을 써 주니 무척 고맙네. 하지만 난 밖으로 나갈 수가 없네. 생각 같아서는 엔필드 씨와 함께 내 집으로 모셔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형편이 아니라네.” “여기라도 좋아. 이렇게나마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게 돼서 기쁘네.” “나도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자고 말하려던 참이었네. 친구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나도 꽤 지독하군.” 지킬 박사는 미소까지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내 미소는 사라지고, 공포와 절망 따위의 감정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지킬 박사는 무섭게 창문을 닫아 버렸다. “하느님, 맙소사!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하여 중얼거리는 어터슨 씨의 말에 엔필드 씨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어터슨 씨가 식사를 끝내고 난롯가에 앉아 있는데 풀 영감이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혹시 지킬 박사가 아픈가?” “어터슨 변호사님, 박사님께서 요즘 좀 이상합니다.” “풀, 우선 이쪽으로 앉게."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이야기해 보게.” “변호사님께서는 박사님의 요즘 생활이 어떤지 잘 아시죠? 변호사님, 저는 무서워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풀, 진정하고 뭐가 두렵다는 건지 이야기해 보게.” “지난 일주일 동안, 저는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뭔가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제 생각엔 살인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풀 영감은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았다. “뭐라고? 살인이라고!” 어터슨 씨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일까? 어쨌든 빨리 가 봐야겠군.’ 어터슨 씨는 준비를 서둘렀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밖에는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지킬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정원의 나무들이 난간에 부딪힐 정도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큰 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난롯불 주위에 하인들이 불안한 듯 모여 있었다. 어터슨 씨를 보자 한 하녀는 울음을 터뜨렸고, 요리사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어터슨 변호사님 오셨군요!” “아니, 왜 모두 여기 모여 있나?” 어터슨 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어터슨 변호사님. 이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는 겁니다.” 풀 영감은 옆의 소년을 시켜 촛불을 가져오게 한 뒤 어터슨씨를 뒤뜰로 안내했다. “자, 이제부터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명심할 것은 저쪽에서 변호사님께 들어오라고 하여도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풀 영감의 주의에 어터슨 씨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들은 어느새 지킬 박사의 방문 앞에 있는 계단까지 왔다. 그러다가 풀 영감은 어터슨 씨에게 손짓했다. “변호사님, 이쪽으로 오셔서 귀를 잘 기울여 주십시오.” 풀 영감은 계단으로 올라가서 빨간 천을 바른 방문을 떨리는 손으로 두드렸다. “박사님, 어터슨 변호사님이 뵈러 와 계십니다.” 풀 영감의 말에 방 안에서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은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말씀드려!” 풀 영감은 어터슨 씨를 데리고 다시 부엌으로 되돌아왔다. “변호사님, 조금 전에 들으신 목소리가 우리 주인님 목소리 같습니까?” “아주 많이 변한 것 같군.” 어터슨 씨가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저도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집에서 20년간 주인님을 모셔 왔는데, 주인님의 목소리를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날 박사님께서 무슨 일을 당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풀 영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어터슨 씨가 묻자 풀 영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8일쯤 전의 일입니다. 박사님께서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부르셨습니다. 박사님은 어쩌면 그날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 방에서 박사님 행세를 하는 자는 누굴까요?” “풀, 자네 생각대로 지킬 박사가 살해되었다고 하세. 그렇다면 범인은 왜 달아나지 않고 그 방에 있을까?”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변호사님. 지금 저 방에 있는 자가 사람인지 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주 내내 어떤 약품을 구하려고 야단이었습니다. 박사님께서 종이에 원하는 약 이름을 써서 계단에다 내던지시면 저는 쪽지에 적힌 약을 구해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방 안에 있는 그자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주문 쪽지를 계단에다 계속 내던지는 겁니다. 저는 그가 날마다 던지는 쪽지대로 약품을 구하느라고, 이 도시에 있는 약국을 모조리 찾아다녔습니다." "그 약을 어디에 쓰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자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약인가 봅니다.” “풀, 지금 그 쪽지를 갖고 있나?" 풀 영감은 호주머니를 뒤져 꾸깃꾸깃한 종이쪽지를 꺼냈다. 어터슨 씨는 그 쪽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약국에서 최근 보내 주신 약은 불량품이어서 본인이 쓰고자 하는 목적에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본인은 18XX년에 당신의 약국에서 그 약을 굉장히 많이 산 적이 있습니다. 그 약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값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좋습니다. 그 약은 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약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필요 없는 박사의 글씨일세.” 어터슨 씨가 말하자 풀 영감은 괴로워하며 말했다. “저도 박사님의 글씨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 직접 그 사람을 본 적 있는데 그는 주인님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그 사람을 보았다고?” “제가 정원에서 그 건물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박사님의 방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 사람은 구석에 있는 상자를 뒤지다가 저를 보자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고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주인님이시라면 왜 얼굴에 마스크를 썼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도망갈 이유도 없지요.” 영감은 끝내 말을 맺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온통 이상한 이야기뿐이군." "하지만 알 것 같기도 하네. 지금 지킬 박사는 중병을 앓고 있는 거야. 얼굴까지 흉하게 변해 버리는 그런 끔찍한 병 말일세." "그런 이유로 아마 어떤 약을 찾는 모양이야.” “변호사님, 절대로 그 사람은 저희 주인님이 아닙니다.” 풀 영감은 주위를 살피며 속삭이듯 말했다. “저희 주인님은 키가 크지만, 그자는 훨씬 작았습니다. 마스크를 썼던 그자는 절대로 지킬 박사님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살인이 일어난 것이라고 믿습니다.” “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확인하는 게 내 의무겠지. 지킬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종이쪽지도 못 믿겠군. 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같군.”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터슨 변호사님.” “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걱정하지 말게. 그런데 풀이 보았다는 마스크를 한 사람 말이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없소?” 어터슨 씨는 신중하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달아나 버려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님께서 혹시 그가 하이드 씨가 아니냐고 물어보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몸집뿐 아니라 동작이 빠르고 가벼운 것도 역시 같더군요. 더구나 실험실 문을 통하여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도 하이드 씨 외엔 없으니까요. 커루 경 살인 사건 때도 그가 실험실 문을 열고 박사님을 찾아온 거 변호사님도 아시죠?” “그렇다면 하이드 씨에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겠군.” “네, 마스크를 한 그가 급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정말 등골이 오싹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제 느낌은 증거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그는 분명 하이드 씨일 겁니다.” 풀 영감은 힘주어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점도 바로 그 점일세. 자네 말대로 불쌍한 지킬은 살해당한 것 같군." "게다가 그 살인범은 아직 박사의 작은 방에 숨어 있고. 박사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 그자에게 복수하러 가세. 어서 마부 브래드쇼를 부르게나.” 마부가 겁먹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브래드쇼, 풀과 내가 문을 부숴서라도 박사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네. 자네는 10분 내로 몽둥이를 들고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가서 실험실 문을 지키고 있으면 되네.” 어터슨 씨는 마부가 실험실 문 앞까지 가는 시간을 재고 있었다. 작은 방에서는 이리저리 거니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중후한 느낌의 지킬 박사와는 다른 걸음걸이였다. “변호사님, 저자는 종일 저런답니다. 저자가 저토록 불안해하는 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방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변호사님, 저 발소리가 지킬 박사님의 발소리인가요? 말씀해 보세요.” 어터슨 씨는 한숨만 쉬다가 물었다. “그 밖의 다른 일은 없었나?” “참, 그자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터슨 씨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한 많은 여인의 울음소리 같았어요. 저도 덩달아 눈물이 날 정도였지요.” 약속된 10분이 지나, 풀 영감과 어터슨 씨는 각각 도끼와 부지깽이를 들고 작은 방으로 다가갔다. “지킬! 오늘은 자네를 꼭 만나야겠네. 만일 계속 거부하면 난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겠네.” “어터슨...제발 이렇게 빌겠네. 부디 나를 불쌍히 여겨 돌아가 주게.” 드디어 방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목소리는 지킬의 목소리가 아니야! 저건 하이드 씨의 목소리다. 풀, 어서 문을 부수게!” 풀 영감이 도끼를 한 번 휘두르자, 붉은 천으로 바른 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서운 비명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왔다. 다섯 번째로 휘두른 도끼에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자 부서진 문짝이 방 안의 융단 위로 떨어졌다. 문을 부수긴 했지만, 두 사람은 곧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비명 소리가 약간 들렸을 뿐, 방 안이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는 난롯불이 아늑하게 비치고 있었다. 약품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들만 없었다면, 그 방은 평범하고 아늑한 방처럼 보였다. 방 중앙에는 한 사나이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어터슨 씨와 풀 영감은 조심스럽게 그자 곁으로 다가가 몸을 젖혀 보았다. 그는 틀림없는 하이드 씨였다. 하이드 씨는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깨진 약병을 쥐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독한 약 냄새에서 어터슨 씨는 하이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자를 벌주기에도, 살리기에도 우리가 한발 늦었어. 이제 남은 일은 지킬 박사의 시체를 찾는 일뿐일세.” 어터슨 씨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곳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지킬 박사는 없었다. 풀 영감은 복도 바닥에 깐 돌을 발로 쾅쾅 밟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박사님은 여기에 묻혀 있는 게 틀림없어요.” 풀 영감은 자기가 밟은 돌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도망을 간 것인지도 모르지.” 어터슨 씨는 돌아서서 뒷골목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살피러 갔다.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군. 풀, 어서 방으로 돌아가세.” 어터슨 씨와 풀 영감은 방 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이 약품은 제가 항상 갖다주던 약품입니다.” 풀 영감이 말했다. 선반에는 몇 권의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의 한 권은 펼쳐진 채 찻잔 옆에 놓여 있었다. 그 책은 지킬 박사가 평소에 높이 평가해 오던 종교 관련 책이었다. 무심코 책을 넘겨 보던 어터슨 씨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틀림없이 지킬 박사의 글씨이기는 한데, 평소 그의 됨됨이로 미루어 보아서는 상상조차 못 할 정도의 거친 말들이 책 속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터슨 씨는 황급히 책을 덮었다. 방 안을 샅샅이 살펴보던 두 사람은 큰 거울 앞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변호사님, 이 거울은 방 안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괴상한 일들을 다 보았겠군요.” “음, 내게는 이 거울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지는군. 도대체 지킬은 이런 거울을 방 안에 왜 걸어 두었을까?” “글쎄 말입니다.” 풀 영감도 어터슨 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반에는 어터슨 씨의 이름이 적힌 지킬 박사의 편지도 있었다. 어터슨 씨가 편지 봉투를 뜯자 몇 장의 종이가 방바닥 위로 떨어졌다. 첫 번째 서류는 유언장이었는데, 여섯 달 전에 그가 지킬로부터 받았던 것처럼 이상한 글이 씌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산 상속자 칸에 하이드 씨가 아닌 어터슨 씨 이름이 씌어 있었다. 깜짝 놀란 어터슨 씨는 고개를 들어 풀 영감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유언장을 접어 봉투에 넣고 쓰러져 있는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군. 유언장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걸 하이드 씨가 보았다면 화가 나서 당장 이 유언장을 없애 버렸을 거야. 그런데 그는 왜 이 유언장을 그냥 둔 걸까?” 어터슨 씨는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서류 역시 박사의 글씨로 적힌 것으로서 윗부분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오, 풀!” 어터슨 씨가 외쳤다. “지킬 박사는 살아 있어!" "여기 날짜가 적혀 있는데 바로 오늘이야. 이처럼 짧은 시간에 시체가 사라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킬은 어디론가 도망친 것이 틀림없어." "우리는 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 같군. 잘못하다가는 지킬을 궁지에 빠뜨릴 수도 있으니까.” “변호사님, 편지를 왜 읽어 보시지 않는 겁니까?” 읽기가 두렵네.” 어터슨 씨는 편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어터슨에게. 이 편지가 자네 손에 들어갈 즈음, 나는 사라져 버린 뒤일 걸세. 죽음에 관한 나의 직감은 현재 내가 처한 형편에서 보더라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네. 라니언이 자네에게 맡겨 두겠다던 서류와 나의 고백서를 읽으면, 자네의 궁금증은 모두 풀릴 걸세. “풀, 큰 봉투에 든 것이 있었지?” 어터슨 씨가 물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풀 영감은 여러 군데 봉인을 찍어 밀봉해 놓은 두툼한 서류 묶음을 건네주었다. 어터슨 씨는 서류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 서류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지킬의 명성을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될 테니까. 이런, 벌써 10시군.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이 서류를 읽어 봐야겠어. 정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도록 하지." "자 그때 경찰에 알리도록 하세.” 어터슨 씨는 무거운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해결해 줄 나머지 두 통의 편지를 읽기 위해서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어터슨 씨는 먼저 라니언 박사의 편지를 뜯었다. 그 편지는 일기 형식으로 쓰인 것이었다. 오늘로부터 3일 전인 1월 9일 저녁에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겉봉에는 지킬의 글씨로 나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와 사귀어 오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놀랐다. 게다가 그 전날 밤,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놀라움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의혹에 찬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편지의 내용은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친애하는 라니언에게. 자네와 나는 오래전부터 우정을 쌓아 온 친구이네. 라니언, 자네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네. 나의 명예와 생명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네. 자네의 도움에 나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네. 만약 자네가 오늘 밤 나의 청을 거절하면, 나는 영원히 살아남을 길이 없어진다네. 이 편지를 읽은 즉시 나의 집으로 와 주게. 이 편지를 가지고 말일세. 그러면 풀 영감이 열쇠공과 함께 현관 앞에서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걸세. 열쇠공이 서재 문을 열어 주면, 자네 혼자 안으로 들어와 왼쪽에 있는 유리장 중 ‘E(이)’라고 표시된 유리장을 열게나. 그리고 위에서부터 네 번째 서랍, 그러니까 밑에서부터 세 번째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내게. 지금 내 정신이 몹시 산란하여 혹시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네. 물건들을 보면 자넨 아마 나의 뜻을 알 수 있을 걸세. 어떤 가루약과 유리병이 하나 그리고 수첩이 한 권 있는데, 내가 관심이 많던 분야와 관련되는 물건이니까 자네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네.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조금도 건드리지 말고, 서랍째 자네 집으로 가져가 주게. 이것이 자네에게 하는 첫 번째 부탁이고, 이번엔 두 번째 부탁이네. 자네 하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뒤 이 일을 처리해 주게. 난 이 일을 자네와 나만 알고 있기를 바란다네. 자정이 되면, 병원 진찰실에 혼자 남아 주게. 그 시각에 내 이름을 대고 자네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을 걸세. 그에게 내 방에서 가져간 서랍을 그대로 넘겨주면 되네. 그러면 자네의 할 일은 끝나는 거라네. 의아스럽고 궁금하겠지만, 그 일을 끝내고 5분 뒤면 자네가 직접 보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걸세. 만약 자네가 내 부탁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일이 생기면 내게 위험이 닥쳐오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 주게. 나의 이런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라네. 친애하는 라니언, 제발 나의 부탁을 들어주게. 추신 : 만일 오늘 저녁 안으로 도착하지 못하면, 내일 중으로라도 자네가 가장 편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나의 부탁을 처리해 주게.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날 밤 자정에 내가 보내는 사람을 기다려 주게나. 이 편지가 내일이 되어서야 자네에게 도착하게 된다면, 어쩌면 모든 일이 너무 늦어지게 될지도 모르네. 그렇게 되면 여느 때와 같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걸세. 그러나 모든 일이 늦어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헨리 지킬이라는 사람은 만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게.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지킬이 미쳐 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지킬을 도와주기로 한 나는 지킬의 집으로 향했다. 나를 본 풀 영감은 지킬한테서 받은 편지의 내용대로 열쇠공과 목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도착하자 우리는 지킬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지킬의 방문은 굳게 잠겨 있어 열쇠공이 두 시간가량 씨름한 끝에야 열렸다. 나는 지킬의 부탁대로 혼자 방으로 들어가서 ‘E’ 자가 표시되어 있는 유리장으로 갔다. 지킬이 지시한 서랍을 빼낸 다음 물건들 틈에 지푸라기를 잔뜩 넣어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나서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가루약 봉지는 어딘가 매끄럽지 않은 거로 봐서 지킬이 직접 싼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소금 같은 것이 들어 있었고, 옆에 있는 약병 속에는 빨간 액체가 반 정도 들어 있었다. 빨간 액체의 냄새는 몹시 지독했다. 나는 약병을 내려놓고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수첩을 꺼냈다. 안을 훑어보니 이상하게도 날짜만 적혀 있을 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날짜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적혀 있다가 거의 1년 전부터는 아주 갑작스럽게 끊겨 있었다. 날짜가 적힌 페이지 안에는 짤막한 말이 되풀이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았는데, ‘두 배’라는 의미의 단어가 여섯 번 정도 씌어 있었다. 수첩의 앞쪽에는 “완전 실패!”라고 쓴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가져온 이 물건들이 지킬의 명예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걸까? 또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정신병자를 상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밤이 되자 나는 하인들을 내보내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여 권총에 총알을 재 두었다. 이윽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자 현관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핏 보니 밖에 한 사나이가 현관의 둥근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그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킬 박사께서 보낸 분입니까?” “예.” 그의 태도는 어딘가 거북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니까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서 경찰관이 다가오자 질겁을 하고 뛰어 들어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도 당장 총을 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자는 처음 대하는 생소한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자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가득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이 함께 떨려 왔다. 그자는 몸집보다 헐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몰골의 사나이는 심부름하러 온 사람답지 않게 꽤 흥분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이던 그자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가져왔습니까, 가져왔느냐고요?” 그는 나의 팔을 붙잡고 다그치듯 외쳐 댔다. 나는 소름이 끼쳐 그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여보시오, 선생. 우선 의자에 앉으시죠." “죄송합니다, 라니언 박사님." 참을성이 부족한 저의 성질 때문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 지킬 박사의 급한 부탁으로 온 것입니다.”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두 손을 목에다 대고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듯했다. “제가 알기로는 저, 그 서랍 말입니다만.......”그의 태도에서 나는 더욱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아, 그건 저기에 있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서랍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더니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아주 무서운 모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흉측한 미소를 띠며 서랍 속의 물건들을 살펴보더니,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 댔다. 잠시 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금 표시가 되어 있는 유리컵이 있습니까?” 내가 유리컵을 건네주자 그는 컵 안에 빨간색 액체를 넣고 가루약 한 봉지를 쏟아 넣었다. 처음 컵 안의 액체는 가루약이 녹지 않아 빨간빛이었지만, 가루약이 녹으니 투명한 빛깔이 되었다. 컵 안의 액체는 부글부글 끓더니 검은 자줏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끓는 걸 멈추더니 푸른빛으로 변했다. 그는 미소를 띠며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더니 섬뜩하도록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박사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이상한 일들에 대해 모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시고 결정하십시오. 그 결정에 따라서 전과 같이 명예와 부를 가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박사님께서는 생활의 만족감이나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해 오던 것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새로운 지식을 터득하게 될 겁니다. 동시에 새 지식을 발표함으로써 박사님의 명예나 권력은 한층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그의 말에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군요.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 끝까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라니언 박사.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당신은 너그럽지 못한 성격과 밝혀진 학설에만 얽매이는 태도로 인해 항상 자신의 말만 옳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신비의 약들을 부정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선배들을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저를 자세히 보십시오.” 그는 컵 안의 액체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곧 비명을 지르며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금방 죽어 갈 듯 괴로워했다. 나는 그의 비참한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 별도리가 없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으나 그는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부어오르듯이 점점 커지더니 얼굴빛도 검은빛으로 변했다. 얼굴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나는 겁에 질려 비명만 질러 대고 있었다. 눈앞의 저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창백한 얼굴에 몸을 떨고 있는 그는 바로 헨리 지킬이었다. 그 뒤로부터 한 시간가량 지킬은 나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여기에 적고 싶지가 않다. 모든 것이 믿기 힘든 일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실임이 확실하다. 지킬의 심부름으로 나를 찾아왔던 자가 바로 지킬이었던 것이다. 지킬은 나에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야기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친구의 모습을 보자 나 역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공포에 사로잡혀 오싹해져 온다. 그 뒤 나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어터슨! 이제까지 내가 한 모든 이야기는 틀림없는 사실이네.지킬의 말에 의하면 그의 모습이 흉하게 변했을 때 자신의 이름이 바로 하이드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날 밤 내 집에 왔던 자가 하이드였다는 말이지. 살인범 하이드가 바로 지킬이었으니 지킬로 행세하고 있는 그를 어떻게 찾아낼 수가 있었겠나. 라니언 박사의 편지를 다 읽은 어터슨 씨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조금 충격이 가라앉자, 그는 지킬 박사가 남긴 봉투도 뜯었다. 나는 18XX년,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재산과 함께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결점은 쾌락을 탐하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감추고 진지한 척하며 절대 내색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행동하는 것이 서로 달라서 다른 사람들은 나의 행동만 보고 나를 진지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여겼다. 나이가 지긋해져 돌이켜보니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심각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착한 본성과 악한 본성이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내 경우는 그것이 보통 사람보다 더 확실히 나누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다. 나는 심각한 이중인격자가 되었지만, 절대로 위선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착한 나와 악한 나 모두 몹시 진지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나의 학문은 신비스러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 속에 착함과 악함의 싸움을 해결해 줄 방법이 있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서 착함과 악함의 싸움을 해결해 줄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끝에 사람이란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착함과 악함 두 가지를 함께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착함과 악함이 끊임없이 서로 다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방면에 대한 연구의 성과가 쌓여 가자, 나는 착함과 악함을 따로 나누어 각각 다른 몸에 넣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착함과 악함을 나누어 각각의 몸에 넣을 수 있다면 착함과 악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악한 나는 나쁜 일을 하고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착한 나는 원래대로 착한 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악한 일을 하게 될 때 도착한 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편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한 결과, 나는 어떤 약을 발명해 내는 데 성공했다. 나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착함과 악함을 나눌 수 있는 약을 말이다. 그 약을 먹으면 나는 몸집이 작아져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여러 실험 끝에 방법이 늘어나긴 했으나, 과학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 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짊어지게 되는 숙명이나 괴로움 따위를 사람들이 그 약을 이용해서 벗어 버리려고 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불만과 괴로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나의 연구 방법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약을 먹고 나면 나의 본래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고 나는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여 다른 사람에게 큰 죄를 짓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몰염치한 인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실제로 그 약의 효과를 시험해 보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약의 사용 방법에 따라 어쩌면 나의 몸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망설임 끝에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그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준비를 했다. 드디어 저주받은 무서운 밤이 찾아왔다. 나는 실험실 문을 잠그고 마음을 진정시킨 뒤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도 모르는 이상한 용기에 이끌려 결국 약을 마시고 말았다. 나는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고, 무서운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 뒤 이러한 고통이 갑자기 가라앉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무엇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내가 더욱 젊어진 것 같았고 겁이 나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피도 눈물도 인정도 없는 끔찍한 인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달아도 나는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명랑해져서 기뻐 날뛰었다. 그때 나의 방 안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책상 앞에 있는 거울은 그 뒤에 갖다 놓은 것으로 놀랄 정도로 변한 내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서 걸어 둔 것이었다. 실험실 안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어느새 새벽녘이 되었다. 나는 희망과 승리의 기분에 휩싸여 정원에서 머리를 식혔다. 지금까지 나는 나쁜 일들은 피해 왔으며, 항상 착한 일만을 해 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일만 베풀어 온 나의 본래 모습인 헨리 지킬의 얼굴에는 선한 표정이 빛나고, 악한 일만 하는 하이드의 얼굴에는 악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아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었다. 내가 하이드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나의 모습을 보고 몸서리를 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이드는 오직 악으로만 뭉쳐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하이드로 변한 나의 흉측한 모습을 평범하게 대하지 못했다. 하이드로 변한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던 나는 두 번째 실험을 빨리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습이 변한 이상 나는 옛날의 지킬이 아니란 생각을 하자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집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악한 인간 하이드의 집이 아니라, 선한 인간 지킬 박사의 집인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워져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작은 방으로 돌아가 약을 만들었다. 다시 약 기운이 스며들자 아까와 같은 고통이 온몸을 스치더니, 본래의 모습인 지킬로 돌아왔다. 체격도 다시 커졌고 흉측한 얼굴과 악한 마음도 사라졌다. 만일 내가 더욱 너그러운 마음가짐으로 실험에 임했다면, 아마 모든 것이 지금과는 정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 약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악한 일만 하게 한다든가 혹은 아주 선한 일만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약을 마시자 나의 선한 마음은 잠을 자고 악한 마음만 살아났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 하이드였다. 나는 연구에만 열중하는 생활에 점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연구를 집어치우고 유쾌하게 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즐겁게 노는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의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또한 존경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또 다른 나인 하이드가 지킬 박사를 유혹했다. 그것은 한 컵의 약만 마시면 억압되고 갑갑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유혹이었다. 나는 하이드로 변하였을 때를 위한 준비를 했다. 나는 소호 거리에 집을 한 채 마련하고 나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뻔뻔스러운 성품의 여인을 가정부로 두었다. 그런 다음 나는 지킬의 집에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도록 조처를 했다. 즉, 하이드로 변한 모습을 하인들에게 자주 보여 하이드와 지킬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 나는 유언장을 만들었다. 나는 지킬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하이드의 모습으로 살아갈 작정이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나는 악한 행위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쁜 짓을 숱하게 저지르고 다녀도 내가 지킬 박사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실험실엔 항상 약간의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1초나 2초 내로 충분히 약을 만들 수 있었다. 하이드가 밖에서 무슨 악한 행위를 했건 그 약을 먹으면 하이드의 모습은 금방 사라지고 지킬의 모습이 나타나므로, 나는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고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자가 바로 지킬이었다. 그동안 내가 저지르고 다닌 악한 일들을 돌이켜보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언제인가 나는 한 가지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내가 어느 여자아이에게 잔인한 행동을 했더니 때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화를 내면서 내게 대든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어터슨의 친척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곧 의사가 오고 여자아이의 식구들이 나와서 나에게 대들었다. 나는 사건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뒷골목에 있는 문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헨리 지킬의 이름으로 서명된 수표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 사건 뒤 지킬의 돈을 하이드 앞으로 예금해 두어 지킬과는 상관없는 일로 처리되도록 했다. 그래서 하이드가 나의 재산을 아무런 불편 없이 사용하게끔 했다. 하이드와 지킬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절대로 밝혀지지 않도록 더욱 완전하게 처리해 놓은 셈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하이드로 모습을 바꾸어 나쁜 짓을 일삼다가 밤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뒤숭숭한 꿈자리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침대에 앉아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상한 것은 조금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자꾸만 서먹서먹하고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두 손을 내려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지킬의 손은 희고 매끈한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 비치는 손은 뼈마디가 굵고 검은 털이 가득 덮여 있는 바싹 마른 손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이드의 손이었던 것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달려가 나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마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히 헨리 지킬의 모습으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음 날 하이드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가슴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날은 이미 밝아 하인들은 모두 일어나 있을 때이고, 약품이 있는 작은 방으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나는 불현듯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이드가 이 집을 아무 때나 마음대로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하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분 뒤 지킬 박사의 모습으로 회복한 나는 태연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침 식사를 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평상시처럼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나는 겉모습이 지킬로 돌아와도 여전히 나 자신을 하이드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제 악한 본성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여 하이드는 점점 당당해졌다. 날이 갈수록 나는 지킬로 지내는 것보다 하이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흥미와 쾌락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이 실험을 처음 할 때는 엄연한 지킬의 처지에서 하이드 노릇을 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인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내가 나의 나머지 생애를 지킬로서만 보내고자 한다면, 앞으로는 그동안 저지르고 다녔던 나쁜 행위를 조금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반대로 남은 생애를 하이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본래 지니고 있던 명예나 양심을 버리고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동안 맺어 온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생각 끝에 선한 인간으로 나의 나머지 인생을 보내기로 했다. 이와 같은 결심을 한 뒤로 두 달 동안은 착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이드 노릇을 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고민했다. 나는 또다시 약을 만들어 마셨다. 약을 마시는 순간 나는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더욱 억제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커루 경이 겸손하고 온화하게 말을 건넸을 때, 악한 마음이 일어나 순간적으로 그를 살해한 것이었다. 마치 갇혀 있던 악마의 혼이 깨어나 날뛰듯이 나는 끔찍한 행위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한참 뒤에 제정신이 들자 온몸에 휘감기는 공포로 나의 생명은 이제 끝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건 장소에서 도망쳐 소호 거리에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신분이 탄로 나지 않도록 서류들을 모두 태워 버렸다. 나는 밖으로 나와 가로등 밑을 거닐면서 내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만족감과 누군가에게 들켜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의 본래의 집에 도착한 나는 작은 방으로 가서 지킬로 모습을 바꾸기 위해 약을 만들었다. 잠시 뒤 다시 지킬로 돌아온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악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하던 어린 시절부터 전날 밤에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 현장의 광경과 비명 소리가 한데 뒤엉켜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자 나는 큰 소리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의 마음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후회도 차츰 엷어져 가고, 또다시 기쁨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내 마음속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나는 싫든 좋든 앞으로는 착한 행위만 하는 지킬로 지내기로 했다. 다음 날 뉴스에 살인 사건이 보도되자 하이드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이제는 지킬만이 하이드의 유일한 은신처가 되었다. 나는 지킬의 모습으로 보호를 받게 되면서 마음씨마저 지킬의 착한 마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는 선한 행동만 하여 지난날의 죄를 씻어 버리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 뒤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만 하게 되자, 나 자신은 무척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또다시 이중생활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이드의 몰염치한 생활로 다시 빠져들어 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이 아무리 커다란 그릇이라도 자꾸 내용물을 부어 넣다 보면 언젠가는 넘치는 법이다. 악의 유혹에 잠시 귀를 기울인 탓으로 마침내 나는 영혼의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나는 내가 타락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화창하고 맑은 1월이었다. 나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면서 남들과 나를 비교해 보았다. 나쁜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내가 선한 마음에서 베풀어 온 자선 활동을 다른 사람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혼자 기쁨에 젖었다. 이렇게 나 스스로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던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메스꺼움이 치밀어 오르더니 심한 욕지기가 나고 지독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무서운 전율이 지나가고 맑은 정신으로 되돌아오자 나는 나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대담성이 생겨 위험한 것을 우습게 여기고 나쁜 일을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나의 몸을 살펴보았다. 바지와 소매가 길어져서 헐렁한 모습으로 몸에 걸쳐져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나는 또다시 하이드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불과 1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모든 이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모든 사람이 멸시하고 증오하는 잔인한 인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실망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하이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드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더욱 예리해지고 나의 정신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사태가 갑자기 난처해지더라도 하이드에게는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용기가 있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험실 문은 오래전에 내가 잠가 버렸으니 그 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하인들이 나를 곧장 교수대로 끌고 갈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나는 마침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문득 라니언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그를 만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만나게 된다고 해도, 어떻게 이 일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만 유명한 의사를 설득시켜 그의 친구인 지킬 박사 집 서재에 있는 약을 가져오게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라니언은 흉하게 생긴 나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는데, 과연 그가 나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지도 의문이었다. 잘못 처리했다간 이 일로 인해서 나의 생명이 끝장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비록 몸은 하이드로 변해 있지만, 지킬의 본래 특징 중에서 아직 남아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하이드와 지킬의 글씨가 똑같다는 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들이 척척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마차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호텔 방에서 나는 아주 중요한 편지 두 통을 썼다. 한 통은 라니언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풀 영감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나는 그 편지들이 제대로 들어갈지 걱정되어 모두 등기 우편으로 부쳐 달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했다. 이윽고 한밤중이 되자 나는 마차 한구석에 올라앉아 문을 꼭 닫고 거리를 여기저기 달리면서 방황했다. 나는 짐승 같은 하이드를 다룰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또 다른 나 자신인데도 말이다. 사람들 사이를 걸으면서 내 속에선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증오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무서움에 사로잡혀 인적이 드문 거리를 찾아 살금살금 피해 다녔다. 자정 무렵이 되었다. 나는 라니언의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의 오랜 친구인 라니언이 내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자 라니언이 가엾고 안되어 보였다. 이때, 나는 내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왔던 것은 교수대에 매달리는 공포였으나 이제는 내가 하이드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날, 내가 라니언에게서 들은 비난의 목소리는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라니언의 집에서 출발하여 곧장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긴장을 풀고 아주 곤한 잠에 빠졌다. 그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나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날 있었던 무섭고 위험한 일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내가 사용하고 있는 그 약이 나의 곁에 가까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었던 사실에 감사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정원을 한가롭게 거닐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기쁨을 누렸다. 그런데 그때, 하이드로 변할 때 생기는 감정이 또다시 나타나 얼른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 그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하이드로 변하여 분노와 공포로 떨고 있었다. 하이드로 변해 버린 나 자신을 지킬로 바꾸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약이 필요했다. 놀랍게도 그 약을 먹은 뒤 여섯 시간 만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힘든 일을 하는 동안이나, 또는 약을 먹고 난 뒤 그 효력이 미치는 동안에만 지킬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하이드로 변하는 고통스러운 증세가 나타날까 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잠을 자고 일어났다든가, 혹은 잠깐 졸다가 깨어났을 때는 항상 하이드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포로 인해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이드의 모습으로 변할 때 일어나는 고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하이드의 능력은 크게 자랐지만, 지킬은 점점 약해져 갔다. 만약 하이드라는 인간이 죽어 버리면, 하이드는 이 세상에 없었던 것으로 될 터인데 바로 그러한 것이 지킬의 선한 생활을 방해하고 파괴해 가는 것이었다. 지킬의 마음이 약해지거나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악한 마음이 지킬을 눌러 이겨서 지킬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지킬에 대한 하이드의 증오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하이드는 교수대에 대한 지킬의 공포를 이용해서 자살을 하도록 끊임없이 지킬을 밀어붙이면서, 지킬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하이드는 자기를 미워하는 지킬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이드를 생각하기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가 비굴하고 끔찍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서도 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킬인 나 자신이 자살해 버리면 하이드도 역시 죽게 된다는 생각이 나를 두렵게 만들면서 그에 대한 연민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엄청난 일들을 저질러 놓은 지금, 무슨 이야기든 길게 말한다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만큼 괴로워하고 고민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점만을 이야기해 두어야겠다. 내가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된 이유는 나 자신이 습관적으로 하이드 노릇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얼굴과 성격, 심지어는 영혼까지 갈라지게 되었다. 나는 약품을 많이 사 두었기 때문에 실험을 시작한 뒤로 한 번도 새로 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험으로 약품이 점점 줄어들어 요즘에 와서는 약품명을 써서 심부름을 보내어 약품을 사야 했다. 새로 사들인 약품으로 나는 신기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전과 똑같이 유리컵에 넣고 혼합했다. 혼합된 약들은 유리컵 안에서 부글부글 끓더니 첫 번째 색으로 변하여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로 바뀌어야 할 색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그 약을 마셔 버렸다. 약을 먹은 뒤에도 몸에는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약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는 약이었던 것이었다. 초조해진 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약을 구하기 위하여 런던 거리의 구석구석을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나는 나중에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동안 내가 한 실험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 처음에 많이 사 놓았던 약품은 불량품이었다. 약품 속에 포함된 불순한 요소가 나의 실험에 놀라운 효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 틀림없었다. 불량한 약품으로 인하여 너무나 엄청난 결과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 뒤 약 일주일이 지나갔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 나의 외모는 물론이고 내면까지 온통 뒤바꾸어 또 다른 인간으로 변하게 했던 진짜 효력을 가진 약을 마시고 나의 본래의 모습인 지킬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나의 고백만큼은 본래의 모습인 헨리 지킬로 돌아가 끝내고 싶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닥쳐오면서 몸이 변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이드로 변해 버린 나는 하이드의 성격대로 이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빨리 마치고 하이드로 변하기 전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잘 보관해 둔다면 별걱정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 시간이 지나면 나는 증오스럽고 소름 끼치는 하이드의 모습으로 영원히 변해 버리게 될 것이다. 지킬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흉측하게 여기는 하이드로 죽어 가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진다. 나의 모습이 하이드로 변하게 되면 나는 의자에 앉아 몸부림치며 울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나의 고통과 괴로움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하이드는 교수대의 형벌을 받아 죽게 될 것인가? 내가 죽게 될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 자신 역시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이제 펜을 놓고 나의 고백서를 봉해야겠다. 나는 고백서로써 이 세상을 불행하게 살아왔던 삶의 패배자인 헨리 지킬의 전 생애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바이다.
보물섬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건 대지주인 트렐로니 씨와 의사 리브시 선생이 자꾸 권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물섬을 알고 있다. 그곳에는 아직 파내지 않은 보물이 잔뜩 있기 때문에 나는 섬의 위치만은 비밀로 한 채 이야기를 쓸까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가 ‘벤보 제독’이라는 여인숙을 경영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늙은 뱃사람이 ‘벤보 제독’ 여인숙에 들어섰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구릿빛 피부로, 손은 온통 흉터투성이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릿빛 얼굴 한쪽 볼에 있는 큼직한 칼자국이었다. 그는 자신을 ‘선장’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선장은 낮에는 망원경으로 해안을 살폈고 밤이면 여인숙의 휴게실에 앉아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할 때마다 그는 늘 케케묵은 뱃노래를 고래고래 불러 댔다.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장은 술에 취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따라 하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제멋대로 굴었다. 게다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는 교수형, 폭풍우, 해적선, 바다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 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선장 때문에 여인숙이 망할 거라면서 걱정을 했다. 저렇게 제멋대로 구니 손님이 남아나겠냐는 것이었다. 하루는 선장이 나를 은밀한 곳으로 부르더니, 한쪽 다리가 없는 뱃사람을 보게 되면 즉시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매달 4페니 은화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선장은 꽤 오래 우리 여인숙에 묵었다. 선장이 미리 낸 돈은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는 돈을 내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간신히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하면 무섭게 노려보며 아버지를 방에서 쫓아냈다. 이런 일 때문인지 아버지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어느 날, 리브시 선생이 진찰을 끝내고 아래층 객실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술 취한 선장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리브시 선생이 불쾌한 듯 바라보자 선장은 소리쳤다. “야! 넌 뭐야?” 리브시 선생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술을 많이 마셨군. 더 마신다면 얼마 못 가 당신은 저세상으로 가게 될 거요.” 화가 난 선장은 칼을 뽑아 들고 위협을 했지만, 리브시 선생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그 칼을 당장 거두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순회 재판 때 당신을 교수형에 처할 거요. 나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치안 판사이기도 하니까. 선장은 잠시 노려보더니 풀이 죽어 칼을 집어넣었다. 리브시 선생은 선장에게 또다시 말했다. “내가 밤낮으로 당신을 지켜볼 거요. 그러니 조심하시오!” 그날 이후, 선장은 아주 얌전하게 굴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난 아버지 대신 여인숙 일을 돌보아야 했다. 1월의 어느 날 아침, 여인숙 문이 열리더니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선장이 찾던 외다리의 사내가 아닌가 싶어 제일 먼저 발부터 보았다. 그러나 발은 두 개 다 있었고, 손가락이 두 개 없었다. “꼬마야! 여기 빌이라는 녀석이 묵고 있지?” 낯선 남자가 큰 소리로 물었다. “빌이라니요? 모르겠는데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녀석 말이야!” “아! 선장 말씀이군요. 바닷가로 산책하러 나갔어요.” 낯선 남자는 나를 데리고 휴게실 문 뒤로 갔다. 그런 다음, 자기 뒤에 나를 세운 채 옆에 찬 칼자루에 손을 갖다 대고 서 있었다. 그는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니 나도 겁이 났다. 이윽고 선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낯선 남자가 선장에게 소리쳤다. “빌!” 선장은 낯선 남자를 보더니 파랗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검둥개로군. 기어이 나를 찾아내고야 말다니.” “넌 밖에 나가 있어.” 검둥개가 험상궂은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로빈 후드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잉글랜드에 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건장한 체구에 활도 잘 쏘아 성안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로빈 후드,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어느 날, 로빈 후드는 노팅엄에서 활쏘기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1등을 하는 사람에게는 맥주 한 통을 준다고 했다. "내 활 솜씨를 뽐낼 좋은 기회로군." 로빈 후드는 활과 화살을 챙겨 들고 노팅엄으로 향했다. 로빈 후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셔우드 숲속을 걸어갔다. "이봐! 꼬마, 어딜 가나?"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던 삼림 감독관 중 하나가 로빈 후드를 보고 소리쳤다. 꼬마라는 말을 듣자 로빈 후드는 화가 났다. "꼬마라니? 이래 봬도 내 활 솜씨가 당신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오." "뭐라고? 좋아! 그렇다면 솜씨 구경을 좀 해 볼까?" 로빈 후드는 300미터 너머의 제일 큰 수사슴을 쏘겠다고 했다. 그러자 삼림 감독관들은 비웃어 댔다. "하하! 네가 사슴을 못 죽인다는 것에 금화 20닢을 걸겠어." 로빈 후드는 활을 꺼내어 힘차게 당겼다. 로빈 후드의 화살은 정확히 사슴의 가슴팍에 꽂혔다. "자, 이제 약속대로 금화 20닢을 주시지요." 로빈 후드가 삼림 감독관을 향해 말했다. 삼림 감독관들은 약이 올랐다. 특히 금화 20닢을 건 삼림 감독관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 "잔소리 말고 어서 꺼져! 너는 국왕의 사슴을 죽였다. 법대로 하자면 넌 처형을 받아야 마땅해." 삼림 감독관은 돈을 주기는커녕 욕을 해 대며 로빈 후드에게 활을 쏘아 댔다. ‘비겁한 놈들! 내가 못된 버릇을 확실하게 고쳐 주지.’ 로빈 후드는 감독관을 향해 재빨리 활을 당겼다. "윽!" 활을 쏘아 대던 삼림 감독관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로빈 후드는 그길로 숲속으로 내달렸다. 다른 삼림 감독관들은 로빈 후드의 활 솜씨를 알고 있는 터라, 아무도 그를 뒤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로빈 후드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숨어 지내거나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도 더는 볼 수 없었다. 왕실에서는 로빈 후드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 200파운드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국왕의 사슴을 죽였을 뿐 아니라 죽은 삼림 감독관이 장관의 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빈 후드는 셔우드 숲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어느덧 로빈 후드가 숲속에 몸을 숨긴 지도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로빈 후드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쫓기는 몸이거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마을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로빈 후드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우리를 못살게 군 이들에게 복수*합시다!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웁시다!" 로빈 후드의 무리는 비싼 세금과 벌금으로 가난한 백성을 괴롭힌 귀족과 성직자, 대지주 등에게 복수하기로 했다. 로빈 후드의 부하들은 모두 용감하였고, 로빈 후드처럼 활 솜씨가 좋았다. 로빈 후드의 무리는 귀족이나 성직자 등이 셔우드 숲을 지나가면 붙잡아 재물을 털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귀족이나 돈 많은 주교는 셔우드 숲을 지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로빈 후드의 무리를 존경했다. 또한, 그들은 로빈 후드의 무리를 '유쾌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어느 맑은 날 아침,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다. 로빈 후드와 유쾌한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 차가운 시냇물로 세수를 했다. "오늘은 멀리 나가 봐야겠소. 내가 뿔피리를 세 번 불면 위험에 빠진 줄로 알고 나를 도우러 와야 하오." 로빈 후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셔우드 숲을 빠져나왔다. 숲을 다 나올 때까지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로빈 후드가 개울 위의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였다. 반대편에서 키가 큰 사나이가 건너오고 있었다. 로빈 후드는 그와 외나무다리 중간에서 만나게 되었다. "다리를 먼저 건너기 시작한 사람은 나니 되돌아가시오." 키 큰 사나이는 로빈 후드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림없는 소리! 힘센 사람이 먼저 건너는 법이오." 이 대답을 들은 로빈 후드는 활을 겨누며 말했다. "나와 싸움을 해 보겠다는 건가? 좋아, 그렇다면 셔우드의 솜씨를 보여 주지."
피노키오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어느 숲속에 나무토막 하나가 뒹굴고 있었어. 여기저기 금이 간 볼품없는 나무토막이었어. 어느 날, 목수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그 볼품없는 나무토막을 주워 갔어. 코끝이 마치 잘 익은 버찌같이 새빨개서 사람들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버찌 코 할아버지”라고 놀려 댔어.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나무토막을 보면서 중얼거렸어. “이걸로 탁자 다리를 만들어야지!” 집에 온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도끼를 집어 들고, 나무토막을 힘껏 내리치려고 했어. 바로 그때였어. “너무 아프게 날 때리지 마세요.” 어디선가 가냘픈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어.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 “도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일까?”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문을 열어 밖도 내다보았지만 헛수고였어.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군!”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다시 도끼를 번쩍 들어 올렸어. 그런데 또다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어. “제발 그렇게 치지 말아 주세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너무 놀라서 멍하니 선 채로 중얼거렸어. “허허, 여기는 아무도 없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해.”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도끼를 내려놓고 대패질을 시작했어. “킥킥, 그만! 간지러워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또 들려왔어.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놀라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어. 바로 그때, 누군가가 문을 탕탕 두드렸어. “들어오세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주저앉은 채 힘없이 말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제페토 할아버지였어. 제페토 할아버지의 가발은 옥수수 죽 색깔과 비슷해서 사람들은 제페토 할아버지를 “옥수수 죽 할아버지”라고 놀려 댔지. “안토니오, 안녕하시오. 그런데 땅바닥에 주저앉아 뭘 하는 거요?” “개미한테 수학을 가르쳐 주고 있소.”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창피해서 얼른 이렇게 둘러댔어. “거참 재미있겠군.” “제페토, 여긴 무슨 일로 온 건가?”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물었어.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 나무토막을 얻으러 왔소.” 그 말을 들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빙긋 웃었어. 골치 아픈 나무토막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무토막을 내밀었어. 그런데 나무토막이 갑자기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두 손에서 빠져나와, 제페토 할아버지의 무릎을 힘껏 내리쳤어. “아야! 이까짓 나무토막 주기 싫으면 그만이지, 사람은 왜 때리는 거요?” “아니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나무토막이 그런 것이오.” “뭐라고? 이 거짓말쟁이 늙은이 같으니라고!” “왜 남의 말을 못 믿고 화만 내는 거요? 옥수수 죽 영감!” “뭐라고, 옥수수 죽이라고? 이 못된 버찌 코 영감아!” 두 할아버지는 한참을 옥신각신 싸웠어. 그러나 곧 화해하고 평생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맹세했어. 제페토 할아버지는 나무토막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나무토막을 깎아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어.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눈을 다 만들고 보니, 놀랍게도 나무 인형의 눈이 마치 사람의 눈처럼 또렷이 움직이면서 제페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어. 제페토 할아버지는 나무 인형의 코도 만들었어. 그런데 코는 만들자마자 쑥쑥 자라는 거야. 제페토 할아버지는 놀라서 멍하니 인형을 바라보았어.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입을 만들었지. 입이 만들어지자 나무 인형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어. “왜 웃느냐? 이 못된 녀석아!” 제페토 할아버지가 화를 버럭 내자, 나무 인형은 혀를 날름 내밀었어. 제페토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문 채 일을 계속해 나갔어. 제페토 할아버지는 미리 만들어 놓은 몸통에 머리와 양팔을 붙였어. 그러자 그 순간, 나무 인형은 제페토 할아버지의 가발을 쓱 벗겨 자기 머리에 푹 뒤집어썼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제페토 할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어. “이 못된 놈! 어서 가발을 내놓지 못해!” 그래도 제페토 할아버지는 화를 억지로 참으면서 나무 인형의 다리를 만들었어. “이제 다 되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나무 인형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다음 걸음마를 시키기 시작했어. 나무 인형은 처음에는 서툰 걸음으로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걷더니 금세 걷는 데 익숙해졌어. 제페토 할아버지는 나무 인형의 이름을 ‘피노키오’라고 지었어. 피노키오는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더니, 갑자기 문을 열고 길거리로 뛰어나가 버렸어. 순식간의 일이었지. 깜짝 놀란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잡으려고 따라갔지만,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어. “저 아이를 잡아 줘!” 제페토 할아버지는 숨을 헐떡이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어. 그러나 사람들은 경주마처럼 쌩쌩 달리는 피노키오를 보고 웃기만 했어. 마침 길을 지나가던 경찰관이 길 한복판에 서서 피노키오를 잡으려고 기다렸어. 피노키오는 경찰관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했어. 하지만 경찰관 앞에서는 피노키오의 잔꾀도 어림없었지. 경찰관은 피노키오의 코를 잡아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넘겨주었어.
하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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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알름 할아버지. 아름다운 알프스산은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에요. 화창한 6월의 어느 날 아침, 한 젊은 여자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었어요. 옷을 잔뜩 껴입은 여자아이는 하이디였고, 그 옆의 젊은 여자는 하이디의 이모인 데테였어요. 두 사람은 푸른 목장과 숲을 지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 되르플리에 도착했어요. 되르플리 마을은 데테 이모가 태어난 곳이어서 그녀를 아는 사람이 많았어요. 데테 이모를 본 마을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했고, 데테 이모도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어요. 마을을 거의 벗어나자 하이디는 이모의 손을 뿌리치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하이디, 다리가 아프니?” “이모, 너무 더워서 그래요.” 하이디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 기운을 내자, 하이디.” 데테 이모는 하이디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달랬어요. 하이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이디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하이디는 데테 이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어요. 데테 이모는 어느 휴양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 손님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함께 일하자고 했어요. 데테 이모는 하이디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하이디를 친할아버지한테 보내기로 했어요. 할아버지는 알름 산골의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아왔어요. 그래서 모두 그를 “알름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알름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데다가 무뚝뚝한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데테가 하이디를 알름 할아버지에게 맡긴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걱정했어요. “데테, 어린아이가 너무 불쌍해. 알름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교회에도 못 나오게 할 거야.” “하지만 하이디의 친할아버지인걸요. 그동안 제가 돌보았으니 이제는 알름 할아버지 차례예요.” 다시 험한 산길을 오르자 움푹 들어간 아늑한 산길 옆에 조그만 오두막집 한 채가 보였어요. “저기가 염소를 치는 목동 페터의 집이란다. 엄마랑 눈먼 할머니랑 셋이서 살고 있어.” 데테 이모가 하이디에게 말했어요. 페터는 마을 사람들이 기르는 염소를 맡아서 풀을 먹이고 돌보아 주는 일을 했어요. “휘익!” 저녁이 되어 페터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한 번 불면, 주인들이 각각 자기네 염소를 데리러 왔어요. 알름 할아버지에게도 두 마리의 염소가 있어요. 그래서 페터는 날마다 알름 할아버지네 집에 가서 염소를 데려오곤 했어요. 페터는 알름 할아버지와 친한 편이었지만, 종종 할아버지가 큰 소리를 질러 대는 바람에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알름 할아버지의 오두막집은 페터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어요. 그래서 데테 이모와 하이디는 곧 할아버지의 오두막집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오두막집의 뒤뜰에는 세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는데, 알프스의 산바람이 불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를 냈어요. 할아버지는 힘겹게 산을 오르는 데테 이모와 하이디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어요. 하이디가 먼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어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뒤따라온 데테 이모가 할아버지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어요. “안녕하세요? 이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녀인 하이디예요. 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할아버지가 하이디를 맡아 주셔야겠어요.” “하지만 여자아이를 이 산골에서 어떻게 키운단 말이오?”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말했어요. “어쩔 수 없어요. 하이디는 할아버지의 손녀니까 이제부터 할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전 상관하지 않겠어요.” 데테 이모는 냉정하게 말했어요. “당장 내 집에서 나가시오!” 할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데테 이모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산에서 내려갔어요. 데테 이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이디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어요. 오두막집. 데테 이모가 산에서 내려간 뒤 할아버지는 긴 의자에 걸터앉아 담뱃대만 뻐끔뻐끔 빨았어요. 하이디는 혼자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뒤뜰에 서 있는 전나무 세 그루를 바라보았어요. 산들바람이 전나무 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며 ‘솨솨’ 하고 소리를 냈어요. 하이디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마치 알프스산이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하이디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어요. 할아버지는 하이디를 보자 조용히 물었어요. “하이디, 지금 무얼 하고 싶으냐?” “오두막집 안을 구경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날 따라오너라.” 하이디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었어요. “할아버지, 저는 어디서 자요?” “너 좋을 대로 하렴.” 하이디는 어디가 좋을지 이리저리 살펴보았어요.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침대 맞은편에 놓인 사닥다리를 발견했어요. 하이디는 사닥다리를 타고 다락으로 올라갔어요. 그곳은 마른풀을 쌓아 두는 곳이었어요. 다락에는 작고 동그란 창문이 있어서 알프스산의 깊은 골짜기들이 훤히 내다보였어요. “할아버지, 전 여기서 잘래요. 창 너머로 알프스의 산들이 모두 보여요. 정말 아름다워요!”
80일간의 세계 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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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1872년, 영국 런던에 필리어스 포그라는 신사가 살고 있었다. 포그 씨는 매우 유명한 클럽의 회원이며 상당한 부자였는데 한편으로 별난 데가 있는 신사였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했으며, 생활은 엄격할 만큼 규칙적이었다. 포그 씨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읽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클럽에 가서 카드놀이를 했다. 포그 씨는 하인과 둘이서만 살고 있었다. 포그 씨의 집은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고 언제나 생활이 한결같았기 때문에 하인은 참 편했다. 10월 2일, 포그 씨는 지금까지 부리던 포스터라는 하인을 내보내고 새로운 하인을 고용하기로 했다. 포스터가 포그 씨의 면도 물을 30도로 데워야 하는데 29도로 데우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하인은 오전 11시에서 11시 30분 사이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포그 씨는 단정한 모습으로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시곗바늘을 바라보면서 하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나리, 새 하인이 왔습니다.” 포스터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게.” 곧 젊은 사나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프랑스 사람에다가 이름이 존이라고 했던가?” “아닙니다. 존이 아니고 장입니다. 그리고 별명은 파스파르투라고 합니다.” “파스파르투? 프랑스어로 ‘만능열쇠’ 아닌가? 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지?” “무슨 일이든 시키기만 하면 잘 해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붙여 주었습니다.” 젊은 사나이가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서커스단에서 곡예사도 했었고 노래도 불렀으며, 소방수 노릇과. “그럼 하인 노릇은 처음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프랑스 사람으로 5년 전에 영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가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 한 가정집에 들어가 하인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일자리를 잃었는데 마침 포그 씨가 하인을 찾는다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파스파르투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군. 자넨 내 조건들을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포그 씨는 시계를 쳐다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음, 11시 26분이군. 그런데 자넨 시계가 없나?” 파스파르투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커다란 시계를 꺼냈다. “주인님, 제 시계는 11시 22분입니다.” “자네 시계는 4분이 늦네.” “그럴 리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아무튼 자네는 1872년 10월 2일 수요일 오전 11시 29분부터 내 하인이 되었네.” 포그 씨는 엄숙하게 말하고 모자를 쓴 뒤에 집을 나갔다. “주인이 지나치게 꼼꼼한 사람이로군. 앞으로 고생 좀 하겠는데.” 파스파르투는 혼자 중얼거렸다. 포그 씨는 키가 크고 머리털과 수염은 황금빛이었다. 얼굴은 부잣집 신사답게 윤기가 흘렀다. 포그 씨는 걸음을 걸을 때 상당히 신중했다. 클럽에 갈 때도 지름길만 골라서 갔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곁눈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초조해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포그 씨는 아주 착실할 뿐만 아니라 꼼꼼하고 침착한 영국 신사였다. 파스파르투는 붙임성이 아주 좋은 사나이였다. 포그 씨가 나가고 난 뒤 파스파르투는 이 집의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봐 두기로 했다. “깨끗해서 한결 일하기가 편하겠어.” 파스파르투는 미소를 지으며 3층에 가서 자신이 쓸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음에 드는 방이야!” 그때 파스파르투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방 한쪽에 붙어 있는 하인의 일과표였다. 그곳에는 아침 8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하인이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었다. 8시 23분 차와 토스트로 아침 식사. 9시 37분 면도할 물의 온도를 30도로 데워 놓을 것. 9시 40분 머리 손질. 이 밖에도 포그 씨가 클럽에서 돌아와서부터 잠들 때까지의 일과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파스파르투는 주인의 양복장을 열었다. 양복장 안도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옷마다 입은 날짜가 적힌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구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잠시 후 파스파르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집 안에 서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집 안에는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었다. 어쨌든 파스파르투는 기뻤다. 집의 어느 곳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퐁스 도데의 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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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의 별 뤼브롱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사냥개 라브리와 양들을 데리고 몇 날 며칠 동안 사람의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한 채 초원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가끔 몽 드 뤼르의 수도자들이 약초를 캐러 지나가거나, 피에몽에서 온 숯장수들이 새까만 얼굴로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들은 거의 말이 없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흥미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아랫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 달에 두 번 보름치의 식량을 싣고 농장에서 올라오는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리거나, 꼬마 미아로를 데리고 올라오는 늙은 노라드 아주머니의 붉은 모자가 보이면 나는 마음이 무척 설렜다. 노라드 아주머니로부터 아랫마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것은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관한 일이었다. 나는 아랫마을에서 스테파네트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관심한 척하면서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잔치에 자주 초대를 받는지, 집 앞에 있는 작은 오솔길로 산책하러 많이 나가는지, 아직도 많은 남자들이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집으로 찾아오는지 등을 넌지시 물었다. 혹시 누군가가 나에게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한창 사랑에 들뜰 스무 살이에요. 그리고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그러던 어느 일요일, 보름치의 식량이 아무 소식도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성당에서 열리는 특별 미사 때문에 늦는 거겠지.’ 아침에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정오가 되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세찬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길이 좋지 않아 노새가 빨리 걷지 못하는 걸 거야.’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오후 3시쯤 되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 온 산이 촉촉한 물기로 뒤덮이고, 푸른 나뭇잎 위의 빗방울들은 햇빛을 받아 마치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리고 잠시 뒤 나뭇잎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에 섞여 딸랑딸랑, 경쾌한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앗!” 나는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노새를 몰고 온 사람은 꼬마 미아로도, 노라드 아주머니도 아니었다. 스테파네트 아가씨였다. 상큼한 산바람을 맞은 탓인지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뺨은 장밋빛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안녕, 늦어서 정말 미안해. 미아로는 가엾게도 아파서 앓아누웠고, 노라드 아주머니는 마침 휴가를 얻어 집에 가고 없었거든. 게다가 오는 도중 길을 잃는 바람에.”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노새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러나 화사한 레이스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는 숲속에서 헤맸다기보다는 어느 무도회에서 춤이라도 추고 오다가 늦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때때로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양 떼를 몰고 들판으로 내려가 농장에서 저녁을 먹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하인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아가씨를 먼발치에서나마 가끔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지금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만을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말이다. 내가 바구니에서 식량을 꺼내고 있는 동안,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여기저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예쁜 옷이 더럽혀질까 봐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는 양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내가 자는 곳과 양피를 깐 짚방석이며, 벽에 걸린 커다란 외투, 지팡이 등을 재미있다는 듯이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너 혼자 여기서 살고 있다는 거로구나. 가엾어라. 얼마나 심심할까? 보통 때는 무얼 하면서 지내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야? ‘종일 당신을 생각하며 지내지요, 나의 스테파네트 아가씨.’ 나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떨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참, 가끔 예쁜 애인이 만나러 오겠지? 네 애인은 아마. 황금빛 양이나 숲을 뛰어다니는 에스테렐 요정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니? 호호.” 머리를 뒤로 젖히고 예쁘게 웃는 모습이라니! 스테파네트 아가씨야말로 갑자기 왔다가 사라져 버리는 숲의 요정 에스테렐 같았다. “그럼 잘 있어.” “안녕히 가세요, 스테파네트 아가씨.”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빈 바구니를 노새에 싣고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곧 비탈진 오솔길 너머로 사라져 버렸지만, 노새의 발굽에 차여 구르는 조약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 조약돌 하나하나가 심장 위로 떨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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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날,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 위에 앉아 있었어요. 앨리스는 문득 따분한 생각이 들어 언니가 읽는 책을 슬쩍 보았어요.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는 책이었어요. 앨리스는 무슨 재미로 이런 책을 읽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흰토끼 한 마리가 앨리스 앞을 허둥지둥 지나갔어요. 토끼는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는 이런, 늦겠네. 하고 중얼거리며 바삐 가고 있었어요. ‘어, 토끼가 말을 하잖아.’ 앨리스는 신기해하며 토끼의 뒤를 따라갔어요. 토끼는 산울타리 밑에 있는 토끼 굴로 쏙 들어갔어요. 앨리스도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갔어요. “으악!” 토끼 굴은 우물처럼 무척 깊었어요. 앨리스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어요. 앨리스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끝없이 아래로 향하던 앨리스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더미 위에 쿵! 하고 떨어졌어요. 앞을 보니 또 하나의 긴 굴이 있었고, 흰토끼가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어요. 앨리스는 재빨리 그 뒤를 쫓아갔지만, 흰토끼는 이미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새 앨리스는 이상한 방 안에 들어서 있었어요. 그 방에는 크고 작은 문들이 있었지만, 모두 잠겨 있었어요. 앨리스는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탁자 위에 놓인 황금 열쇠 하나를 찾았어요. 앨리스는 황금 열쇠로 잠긴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어느 문도 열리지 않았어요. 앨리스는 차근차근 방 안을 다시 살펴보았어요. 그러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작은 문이 하나 있었어요. 앨리스는 황금 열쇠를 작은 문의 자물쇠에 꽂아 보았어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꼭 들어맞았어요. 앨리스가 작은 문을 열어 보니 작은 통로가 있었고, 통로 너머에는 아름다운 뜰이 보였어요. 앨리스는 그 방에서 빨리 나가 뜰을 거닐고 싶었어요. 그러나 문이 너무 작아서 머리도 내밀 수 없었어요. 앨리스는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가 보았어요. 탁자 위에는 작은 병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작은 병에는 나를 마셔요. 라고 씌어 있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어요. 앨리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용기를 내어 병에 든 것을 꿀꺽꿀꺽 모두 마셔 버렸어요. ‘어머나, 기분이 이상한걸. 내 몸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앨리스의 키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새 생쥐만큼 작아졌어요. 앨리스는 드디어 아름다운 뜰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작은 문 앞으로 조르르 달려갔어요. 그런데 문을 열 황금 열쇠를 탁자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났어요. 앨리스는 황금 열쇠를 가지러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하지만 몸이 작아져 탁자 위까지 손이 닿지 않았어요. 앨리스는 탁자 위로 올라가려고 한참을 애썼지만,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어요. 앨리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그러다가 스스로 자신을 타일렀어요. “울지 마,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탁자 아래 아까는 없었던 유리 상자가 하나 있는 거예요. 유리 상자 속에는 나를 먹어요. 라는 글씨가 새겨진 케이크가 들어 있었어요. “이 케이크를 먹어 보자. 그러면 다시 커질지도 몰라.” 앨리스는 혹시나 하고 그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었어요. 앨리스는 자신의 키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런데 키가 자꾸만 커지는 바람에 발이 너무 멀어져서 보이지도 않았어요. ‘아, 이걸 어쩌지. 발이 너무 멀리 있어. 혼자서는 양말도 신지 못하겠어.’ 바로 그때, 앨리스의 머리가 ‘쿵!’ 하고 천장에 부딪혔어요. 어느새 앨리스는 거인처럼 커져 버린 거예요. 그 덕분에 앨리스는 탁자 위에 있는 황금 열쇠를 쉽게 집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작은 문은 빠져나갈 수 없었어요. 그때, 아까 본 흰토끼가 나타났어요. 흰토끼는 말쑥한 옷을 입고, 흰 장갑과 큰 부채를 양손에 들고 있었어요. “큰일이야, 큰일! 공작부인을 기다리게 하면 화를 낼 텐데.” 흰토끼는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며 뛰어오고 있었어요. 앨리스는 흰토끼가 가까이 다가오자 머뭇거리며 말했어요. “안녕하세요, 흰토끼 씨.” 그러나 흰토끼는 커다란 앨리스가 말을 걸자 깜짝 놀라, 들고 온 물건들을 떨어뜨린 채 멀리 달아나 버렸어요. 앨리스는 속상해서 다시 엉엉 울었어요.
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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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발장이라는 사나이. 1815년 어느 가을날, 해 질 무렵 프랑스 남부의 디뉴라는 마을에 몹시 초라한 사나이가 나타났어요. 그는 낡은 옷에 배낭을 짊어진 채, 굵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어요.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했고 눈마저 움푹 들어가 몹시 지쳐 보였어요. 사나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 여관으로 들어갔어요. “어서 오십시오!” “식사를 한 다음 하룻밤 묵을 수 있습니까?” 친절하게 맞이하던 여관 주인은 사나이의 차림을 훑어 보더니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잠시 기다리세요.” 그러고는 심부름하는 아이를 불러 귓속말을 했어요. 아이는 곧장 어딘가로 달려갔어요. 여관 주인은 음식 주문도 받지 않은 채 사나이를 힐끔힐끔 바라만 봤어요. 심부름 갔던 아이가 돌아와 주인에게 쪽지를 건넸어요. 여관 주인은 쪽지를 보더니 단번에 얼굴빛이 변했어요. “죄송합니다만, 다른 여관으로 가시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나이는 당황하며 가죽 지갑에서 돈을 꺼내 보였어요. 하지만 여관 주인은 막무가내로 사나이를 밖으로 내몰았어요. “마구간이나 헛간이라도 좋습니다.” “그것도 안 돼요.” 사나이가 허리를 굽히며 사정을 해도 여관 주인은 냉정하게 말했어요. “그렇다면 식사만이라도 할게요.” “음식도 없어요.”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졌어요. “당신은 장 발장이잖아요! 내가 모를 줄 알고!” 그제야 사나이는 더 이상 애원하지 않고 배낭을 걸머지고 나왔어요. 날은 어둑어둑해졌고,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었어요.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노란 종이를 꺼냈어요. 그것은 범죄자들만 들고 다니는 통행증이었어요. 통행증을 바라보던 사나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사나이가 찾아가는 여관마다 모두 그를 거절했어요. 식당이나 술집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나이는 지친 나머지 성당 앞마당에 있는 긴 의자에 몸을 뉘었어요. 할머니가 그곳을 지나다가 사나이 옆에 멈춰 섰어요. “밤이 깊어 가는데 여관으로 가시지요.” “여관, 식당에 다 들렀지만 하룻밤 재워 주기는커녕 밥도 팔지 않는걸요.” 사나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어요. “그럼, 저 집에 가서 부탁해 보세요.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나이는 벌떡 일어나 할머니가 가리킨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어요. 그 집은 미리엘 주교의 집이었어요. 사나이가 문을 두드리자 점잖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문은 열려 있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사나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주교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가족은 주교의 여동생과 집안일을 도와주는 마글루아르 부인뿐이었어요. 사나이를 보자 여동생과 마글루아르 부인은 흠칫 놀랐어요. 사실 사나이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거든요. 하지만 주교는 인자한 눈빛으로 사나이를 보았어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저는 장 발장입니다. 19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며칠 전에 풀려났습니다.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아갔지만 아무도 저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주교는 장 발장이 말을 마치자 얼른 마글루아르 부인에게 일렀어요. “마글루아르 부인, 어서 저녁상을 차리고 잠자리도 봐 주세요.” 그러자 장 발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어요. “정말 저를 재워 주시겠습니까?” 주교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주교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주교는 마글루아르 부인에게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쓰는 은촛대와 은그릇을 꺼내 상을 차리게 했어요. 장 발장은 모처럼 배불리 먹고 깨끗한 침대에서 쉴 수 있었어요. 장 발장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 발장은 결혼한 누나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어요. 하지만 누나도 가난했기 때문에 장 발장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나뭇가지 치는 일을 하며 살았어요.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지독한 노예 상인. 바람이 쌀쌀한 2월의 어느 오후였어요.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한 저택의 거실에서 두 남자가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점잖은 사람은 이 집 주인인 셸비였고, 말투가 거친 사람은 노예 상인인 헤일리였어요. "자, 그럼,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이......." 셸비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헤일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어요. "절대로 안 됩니다. 밑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셸비가 말했어요. "헤일리, 내 말 좀 들어 보게. 톰은 부지런하고 똑똑한 일꾼일세. 어디다 내놔도 그만큼은 받을 수 있단 말일세." "아무리 유능해도 검둥이는 역시 검둥이 아닙니까? 톰 하나로는 그 값을 다 치러드릴 수 없습니다." 셸비는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었어요. 그때, 문이 열리면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들어왔어요. 까만 얼굴에 반짝이는 눈망울을 지닌, 귀여운 아이였어요. "오, 해리 왔구나. 이리 온." 셸비가 부르자, 아이는 머뭇거리며 다가왔어요. "해리야, 이걸 줄 테니 손님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춰 보렴." 셸비가 건포도를 한 줌 건네주자, 해리는 몸을 요리조리 흔들며 노래를 불렀어요. "야, 고놈 참, 영특하기도 해라." 헤일리가 갑자기 셸비의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자, 이제 이야기를 끝내 봅시다. 저 꼬마 녀석을 끼워 주면 빚을 모두 없애 드리겠습니다!" 이때, 문이 열리며 검은 얼굴의 젊은 여자가 들어섰어요. 해리의 엄마인 듯했어요. "엘리자, 웬일이야?" 셸비가 묻자 젊은 여자는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어요. "네, 영감마님. 해리가 혹시 여기에 있나 해서요." "해리가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네. 어서 데리고 나가게." 셸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젊은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헤일리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저 꼬마 검둥이를 꼭 끼워 주시는 겁니다." 셸비는 괴로운 듯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뗐어요. "자넨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 "나중에 다시 들르게. 집사람과 의논해 볼 테니......." 밖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젊은 여자는 해리를 껴안으며 흐느껴 울었어요. "해리, 이 일을 어쩌면 좋니?" 슬픈 이별. 엘리자는 어릴 적부터 셸비 집에서 자랐지만, 이웃 농장의 노예인 조지 해리스와 결혼해 해리를 낳았어요. 조지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마대 공장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조지는 마대를 세탁하는 기계를 발명할 정도로 똑똑하고 손재주가 뛰어났어요. 조지의 주인은 그런 조지를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음, 노예 주제에 기계를 발명하다니, 건방진 놈. 기계를 사용하게 되면 저놈들은 틀림없이 게을러질 거야.' 주인은 조지를 다시 농장으로 끌고 와서 힘든 일을 마구 시켰어요. 공장에서 일할 때, 조지는 공장 주인의 배려로 가끔 집으로 돌아와 엘리자와 해리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러나 농장으로 들어간 뒤로는 집에 돌아올 수 없었어요. 농장 주인은 한시도 조지를 쉬지 못하게 했거든요. 그래서 엘리자는 남편의 소식도 모른 채 지내야 했어요. 엘리자는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노예 상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해리를 뺏길 수는 없어. 이 사실을 조지가 알면 얼마나 놀랄까?' 엘리자는 혼자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살며시 엘리자의 등을 두드렸어요. 엘리자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조지가 서 있었어요. 두 사람은 반가움에 서로를 끌어안았어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조지는 모처럼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냈어요. 그리고 잠시 뒤, 해리가 잠이 들자 조지는 갈 채비를 하며 엘리자에게 말했어요. "나는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 하고 매질을 당하면서도 꾹 참아 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소. 엘리자, 난 여기서 도망칠 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엘리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어요. "캐나다로 도망가서 돈을 벌겠소. 그래서 그 돈으로 당신과 해리를 데려갈 거요. 그때까지만 참아 주시오, 엘리자." "안 돼요, 조지. 그러다 잡히면 어쩌려고요?" 엘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어요. "걱정하지 마시오, 엘리자.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조지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말했어요. "정말 떠나시겠어요? 그렇다면 부디 몸조심하세요." "엘리자, 당신도 몸조심해요. 그리고......."말을 맺지 못한 채, 조지는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엘리자는 창문으로 내다보았으나, 조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어요. 엘리자의 탈출. 톰의 오두막집은 셸비의 집과 딸기밭을 사이에 두고 있었어요. 톰은 셸비가 가장 믿는 노예였어요. 램프 불빛이 새어 나오는 톰의 오두막집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어요. 톰의 부인인 클로이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곱슬머리 사내아이는 아기를 돌보고 있었어요. 아기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듯했어요. 이윽고 저녁이 되자, 톰의 오두막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모두 고된 하루를 보낸 노예들이었어요. 그들은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리고 모두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아아, 우리가 갈 곳은 영광의 나라. 그대도 함께 그곳으로 가세. 한편, 셸비의 집에서는 셸비가 심각한 표정으로 헤일리와 마주 앉아 있었어요. 헤일리는 미소 띤 얼굴로 서류를 내밀며 말했어요. "이제 여기에 서명을 하시면 됩니다." 헤일리의 밝은 표정과 달리, 셸비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고, 서류를 든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어요. 서명하기 전에 셸비가 물었어요. "약속대로 톰을 꼭 마음씨가 좋은 주인에게 보내 주게." "네, 그렇게 하고말고요." 서류를 받아 든 헤일리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셸비의 집을 나섰어요.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한 흑인 노예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이야기예요. 이 작품을 쓴 스토는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당시 노예들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또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노예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분노를 느꼈어요. 이러한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기 위해 내놓은 작품이 바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에요.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30만 부가 넘게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어요. 뿐만 아니라, 노예 해방의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했어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도 이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아 노예 해방을 결심했다고 해요. 스토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통해 자유와 인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어요.
몬테크리스토 백작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1815년 2월 24일, 프랑스 마르세유항에 파라옹호가 들어왔다. 뱃머리에는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배 주인인 모렐은 작은 보트를 타고 파라옹호로 다가갔다. “당테스! 잘 다녀왔나? 그동안 별일 없었어?” “모렐 씨, 슬픈 소식이 있습니다. 르클레르 선장님이 열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청년은 안타까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정말 안된 일이군. 참, 내 화물은 어떻게 됐나?” “마침 당글라르 씨가 나오네요. 배 위로 올라오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당테스는 모렐에게 밧줄 사다리를 내려 주었다. 모렐은 배 위로 올라가서 당글라르를 만났다. “아, 당글라르. 선장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앞으로는 당테스처럼 젊은 친구들에게 선장을 맡길 생각이야.” 순간, 당글라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당테스가 일등 항해사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테스에게 선장을 맡긴다고요?” 당글라르는 저쪽에서 일하고 있는 당테스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모렐 씨, 그 일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당테스 때문에 반나절이나 늦어졌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엘바섬에 들러서 늑장을 부리지 뭡니까?” 엘바섬은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유배되어 있는 섬이었다. 잠시 뒤 당테스가 돌아왔다. “당테스, 엘바섬에는 왜 들렀지?” 모렐이 당테스에게 물었다. “나폴레옹의 부하 베르트랑 장군에게 물건을 전하라는 르클레르 선장님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렐은 당테스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 나폴레옹 황제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던가?” “네, 그분은 모렐 상선 회사와 파라옹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옛날에 내 숙부와 군대 생활을 같이했거든. 그나저나 몸조심하게. 자네가 나폴레옹 황제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입장이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모렐이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그러자 당테스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저는 르클레르 선장님이 전하라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나폴레옹 황제도 어쩔 수 없이 만난 것입니다.” “알았네, 그나저나 오늘 저녁 식사나 함께 할까?” 모렐은 얼른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아버지께 가 봐야 합니다. 따로 만날 사람도 있고요.” 당테스의 말에 모렐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아름다운 메르세데스가 자네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겠군. 석 달 뒤에 배가 출발할 예정이니까 그때까지 푹 쉬게. 하지만 그 전에는 꼭 돌아와야 하네. 선장이 없으면 항해를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선장이라뇨?” 당테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자네가 앞으로 파라옹호의 새로운 선장이 되었다는 말이야.”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테스는 매우 기뻐하며 배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당테스의 아버지는 마르세유시 뒷골목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어요!”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 당테스. 네가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기쁘구나.” “그리고 기뻐하실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제가 파라옹호의 선장이 되었어요!” “당테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앞으로는 아버지를 편안히 모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고맙구나.” 아버지는 당테스를 꼭 껴안았다. 그때 양복점을 하는 카드루스가 들어왔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그렇게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당테스, 축하하네. 선장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모렐 씨 마음을 잘 흔들었나 보군.” 카드루스가 비꼬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는 당글라르에게 돈을 받기로 하고는 당테스가 무슨 말을 하나 엿보려고 온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당테스는 카드루스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지만, 화를 꾹 참고 대답했다. “당테스, 어서 메르세데스에게 가 보거라. 너를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 아버지.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당테스는 카드루스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메르세데스를 만나기 위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카드루스 또한 길모퉁이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당글라르에게 갔다. 당글라르는 카드루스의 손에 은화를 쥐여 주며 물었다. “그래, 당테스가 뭐라고 하던가?” “어찌나 잘난 척을 하던지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더군. 게다가 메르세데스를 만나러 갔는데 그녀가 자기 아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더군.” “글쎄, 쉽지 않을걸? 메르세데스의 사촌 오빠인 페르낭이 메르세데스를 사랑하고 있거든.” 그 시각 메르세데스는 페르낭과 함께 있었다. 페르낭은 오래전부터 메르세데스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당테스에게만 향해 있었다. “메르세데스, 나와 결혼해 줘.” 페르낭이 커다란 결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메르세데스에게 청혼을 했다. “난 당신을 오빠로서만 좋아해요.” “뭐야? 에드몽 당테스 그놈 때문이구나. 만약 그놈이 바다에 나갔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메르세데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페르낭은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당테스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에드몽!” 당테스와 메르세데스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페르낭은 몹시 괴로워하며 뛰쳐나갔다. 페르낭은 레제르프 주점으로 갔다. 마침 주점에서 당글라르와 카드루스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페르낭, 표정이 왜 그런가?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카드루스가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페르낭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당테스 그 녀석은 어쩐지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페르낭의 이야기를 들은 당글라르와 카드루스도 당테스가 얄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당테스와 메르세데스가 주점 앞을 지나갔다. “여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새로운 선장님이 오는군그래.” 당글라르와 카드루스가 빈정거렸지만, 당테스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2, 3일 안에 이 주점에서 약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파리에 갈 일이 생겨서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부디 모두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파리에 간다고? 베르트랑 장군이 준 편지를 전하러 가는 거겠지? 당테스, 어디 혼 좀 나 봐라. 넌 결코 선장이 될 수 없어. 물론 메르세데스와 결혼도 할 수도 없고 말이야.’ 당글라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당테스와 메르세데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떠나자, 당글라르가 페르낭에게 말했다. “페르낭, 자네 메르세데스와 결혼하고 싶지?” “후유, 이젠 포기했습니다. 메르세데스는 당테스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페르낭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 방법이 있어. 당테스를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할 게 아닌가? 어때, 내가 도와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할 텐가?” 당글라르의 말에 페르낭은 귀가 번쩍 띄었다. “네, 방법이 있다면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전 메르세데스와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좋아, 사실 당테스는 이번 항해에서 엘바섬에 들러 나폴레옹을 만나고 왔지. 만약 그 사실을 이용해서 당테스가 나폴레옹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경찰에 알린다면 당테스는 꼼짝없이 감옥에 갇히게 될 걸세. 자, 펜과 종이를 가져와 보게.” 페르낭이 펜과 종이를 건네자 당글라르는 왼손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검사님, 에드몽 당테스가 나폴레옹의 밀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파라옹호를 타고 돌아오던 중 엘바섬에 들러 나폴레옹의 부하인 베르트랑에게 밀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파리의 보나파르트파 본부에 보내는 밀서를 받아 왔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려는 반란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드몽 당테스를 체포하면 모든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자,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검사에게 보내면 돼. 왼손으로 썼으니까 누구의 글씨체인지 잘 알아보지 못할 거야. 물론 이름은 밝히면 안 되지.” 당글라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뜻밖의 제안에 페르낭은 놀란 표정으로 당글라르를 바라보았다. 페르낭이 망설이는 듯 보이자 당글라르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편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아닐세, 페르낭. 내가 술에 취해서 엉뚱한 말을 했군. 당테스는 내 친구인데 이럴 수는 없지.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말게.” 당글라르와 카드루스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당글라르는 다시 돌아와 몰래 주점 안을 살펴보았다. 당글라르의 예상대로 페르낭은 편지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그럼 그렇지.’ 당글라르는 페르낭의 뒷모습을 보면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당테스와 메르세데스의 약혼식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그중에는 당글라르와 카드루스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에드몽 당테스, 당신을 체포하겠다.” “무슨 일입니까?” 약혼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당테스의 아버지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메르세데스, 금방 돌아올게.” 당테스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쓰면서 아버지와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다. 모두 놀란 표정이었지만 당글라르만 음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재판소로 체포되어 온 당테스는 검사 대리인 빌포르에게 조사를 받았다. 빌포르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넘기며 딱딱한 말투로 당테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과 나이를 말하시오.” “에드몽 당테스, 열아홉 살입니다.” “직업은?” “모렐 상회의 파라옹호 일등 항해사입니다.” “그래, 체포될 당시 뭘 하고 있었지?” “약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당테스의 말을 들은 빌포르는 태도가 약간 수그러지는 듯 보였다. 그 역시 약혼식 도중 연락을 받고 온 터였다. “자네는 별로 나쁜 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군.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일등 항해사에다가 내가 알아본 바로는 곧 선장이 될 예정이라 하고, 또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을 앞에 두고 있으니 질투에 눈이 먼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을 수도 있겠어. 자, 이걸 좀 보게.” 빌포르는 편지 한 장을 꺼내 당테스에게 보여 주었다. 당글라르가 쓴 편지였다. “이 글씨를 본 적이 없나?” 당테스는 재빨리 편지를 읽어 보았다. “아닙니다, 전혀 낯선 글씨입니다.” “그렇다면 이 투서의 내용은 모두 사실인가?” “절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선장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당테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르클레르 선장이 항해 도중 숨을 거둔 일이며, 자신에게 부탁한 물건을 전해 준 사실 등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듣기로는 당신은 죄가 없는 것 같군. 자, 그렇다면 자네가 엘바섬에서 받아 온 편지를 좀 보여 주게.” 이때까지만 해도 빌포르는 당장이라도 당테스를 풀어 줄 것 같은 태도였다. 당테스는 ‘파리 코크에롱가 13번지, 누아르티에 귀하’라는 주소가 적힌 편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빌포르는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 적이 있나?” “없습니다.” “이 편지가 있으면 자네를 풀어 줄 수가 없네. 그러니 편지를 없애 버려야겠군.” 빌포르는 편지를 난로 속에 던져 넣어 버렸다. “자, 이제 자네를 곤란하게 하는 건 없어졌군. 누구에게도 이 편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게.” 당테스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빌포르는 경관을 불렀다. 그리고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 사람을 따라가게.” 당테스가 밖으로 나가자 빌포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아버지 때문에 큰일 날 뻔했군.’ 누아르티에는 바로 빌포르의 아버지였다. 지금의 국왕인 루이 18세는 왕당파로 나폴레옹과는 적이었다. 빌포르는 현재 정권을 잡은 왕당파 집안의 르네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따르던 그의 아버지 누아르티에는 아직도 나폴레옹과 연락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빌포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사가 될 상황이었다. 빌포르는 당테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젊은이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편, 당테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재판소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빌포르 덕분에 곧 풀려날 것이라 생각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헌병들이 총을 들고 나타났다. “당테스, 이리 나와!” 그들은 당테스를 마차에 태웠다. 그러고는 항구에 도착하자 당테스를 작은 보트에 태웠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당테스가 물었다. “곧 알게 될 테니 조용히 하고 따라오기나 해!” 얼마 뒤 보트는 이프섬에 닿았다. 이프섬에는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다고 소문이 나 있는 감옥이 있었다. 당테스는 이프섬의 감옥을 보자 울부짖기 시작했다. 당테스는 절망하여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헌병들이 잽싸게 잡아 그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당테스는 이프섬의 캄캄하고 습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일이 이렇게 잘못되었는데 검사님은 뭘 하고 계신 걸까?’ 순진한 당테스는 그때까지도 빌포르를 믿고 있었다. 그사이 빌포르는 파리에 가서 루이 18세를 만났다. 그리고 당테스가 전하려던 편지의 내용을 모두 알려 주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빌포르, 자네야말로 진정한 충신일세.” 빌포르는 이 일을 전한 공으로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뒤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고 다시 황제가 되었다. 왕당파에 속했던 사람들은 모두 보복을 당했지만, 빌포르는 나폴레옹 편에 섰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모렐이 빌포르를 찾아와서 당테스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음, 정 그렇다면 법무장관께 편지를 쓰십시오. 그러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자, 여기에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렐이 편지를 다 쓰자 빌포르는 편지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모렐이 밖으로 나가자 책상 서랍 속 깊숙한 곳에 쑤셔 넣어 버렸다. ‘지금 와서 굳이 이런 일을 밝혀낼 필요는 없지. 오히려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면 내게는 아주 불리한걸.’ 아무것도 모르는 모렐은 당테스의 아버지를 찾아가 당테스가 곧 풀려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6월에 벌어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에 패하여 다시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갔다. 루이 18세는 황제의 자리를 되찾았다. ‘아, 우리 당테스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당테스의 아버지는 절망에 빠져 지내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년이 흐른 어느 날, 보비르 검사관이 이프섬의 감옥에 시찰을 나왔다. 당테스는 보비르 검사관에게 무죄를 호소하며 다시 재판을 받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알겠소, 당신의 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겠소.” 보비르 검사관은 성실해 보이는 당테스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소장실로 돌아온 보비르 검사관은 당테스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당테스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과격한 보나파르트 당원임. 엄중한 감시가 필요함. ‘흠, 이런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겠군.’ 보비르 검사관은 “사면의 여지가 없음.”이라고 적어 두었다. 이 일로 당테스는 꼼짝없이 감옥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파리아 신부와의 만남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어느 날 밤, 당테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쓱쓱, 탁탁. 분명히 누군가 벽을 긁는 소리였다. ‘누군가 감옥을 빠져나가려고 벽을 파고 있는 소리가 분명해. 그래, 나도 한번 해 보자.’ 그날부터 당테스는 사기로 만든 그릇을 깨서 몰래 벽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냄비의 손잡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밤을 새워 벽을 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단단한 바위와 마주쳤다. 바위는 너무나 단단해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당테스는 너무도 절망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 하고 외쳤다. 그러자 바위 너머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누구인가?” 당테스는 깜짝 놀랐다. 감옥에 갇힌 뒤로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간수 빼고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에드몽 당테스라고 합니다. 1815년부터 지금까지 억울하게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나는 1811년부터 여기에 있었다네.” 그 사람이 자신보다 4년이나 먼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당테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만 기다리게.” 벽 너머에서 흙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테스는 초조해하며 어두운 구멍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잠시 뒤 벽의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나는 파리아 신부라고 하네.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일하다가 이곳에 갇히게 되었지.” 파리아 신부는 감옥 안에서 미치광이로 잘 알려져 있었다. 교도소장이나 검사관이 올 때마다 큰돈을 줄 테니 풀어 달라고 졸랐기 때문이었다. 바싹 야윈 얼굴에는 그의 나이를 증명이라도 해 주는 듯 깊게 팬 주름이 빼곡했다. “신부님, 저와 함께 탈출 계획을 세우도록 해요.” 당테스는 파리아 신부에게 함께 감옥을 탈출하자고 했다. “아닐세, 난 포기하겠어.” 파리아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힘들게 벽을 판 이유는 탈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성벽 쪽으로 통로를 팠어야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결국 자네 방 쪽으로 오게 된 걸세. 이것은 탈출을 말리는 하느님의 계시라고 생각되네.” 당테스의 방은 간수들의 방으로 가는 계단 밑에 있었다. “하지만 신부님.” 당테스는 어떻게든 파리아 신부를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파리아 신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탈출 준비를 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지도 않으십니까?” “글쎄, 난 이 일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세.” “그럼 무엇을 하셨는데요?” “글을 쓰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했지.” “그럼 간수들이 신부님께 종이나 펜, 잉크 같은 것을 넣어 준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것들은 모두 내가 직접 만들었네.” “네? 신부님께서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래, 내 방을 한번 구경해 볼 텐가?” “네.” 당테스는 파리아 신부의 뒤를 따라 구멍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파리아 신부의 방이 나타났다. 파리아 신부의 비밀 창고에는 당테스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셔츠와 손수건을 이용한 두루마리 논문, 생선의 뼈로 만든 펜, 난로의 그을음과 포도주를 이용한 잉크, 고기의 지방으로 만든 초, 침대 시트를 찢어서 만든 줄사다리도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벽을 뚫어 만든 비밀 창고에 감쪽같이 숨겨져 있었다. ‘아, 이 신부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파리아 신부의 지혜에 놀란 당테스는 그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사실 당테스는 재판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이 지하 감옥에 갇힌 신세였던 것이었다. 파리아 신부라면 적어도 그 답답한 수수께끼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당테스, 자네를 모함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은 가는가?” “글쎄요.” 당테스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파라옹호의 선장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어. 그리고 약혼식 피로연을 하다가 잡혀 왔지. 그런 것들을 싫어할 만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잠깐 고민하던 당테스는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3명이 있습니다. 당글라르는 제가 선장이 되는 것을 싫어했고, 페르낭은 제 약혼녀 메르세데스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카드루스라는 사람은 제 성공과 결혼, 돈을 모두 시기했지요.” “그래?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바로 그 세 사람이 자네를 이렇게 만든 거야. 그리고 그 투서는 영악한 당글라르가 쓴 게 분명해. 잘 보게.” 파리아 신부는 왼손으로 글씨를 써 보였다. “그렇군요. 투서의 글씨체와 비슷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군요. 그렇듯 중요한 사건이라면 저는 왜 단 한 번의 조사로 여기까지 왔을까요?” 당테스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물었다. “자네를 조사한 검사는 어땠나?” “아주 친절했습니다. 제가 가진 편지가 저에게 불리하다며 불태워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그 편지를 읽어 보았다는 말인가?” “네.” “좋아, 그 편지를 전해 받을 사람이 누구였지?” “파리에 사는 누아르티에였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그 검사가 혹시 빌포르였나?” 파리아 신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당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수가! 자네를 조사했던 빌포르라는 사람은 누아르티에의 아들이야. 그리고 누아르티에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네. 하지만 빌포르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교활한 사람이지. 내 생각에는 자네가 그에게 이용당한 것 같군.” 당테스는 그제야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당테스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신부님, 저도 공부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배우고 익혀서 힘을 기르겠습니다.” 파리아 신부는 감옥 안에서 외국어와 수학, 물리, 역사, 화학 등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또한, 공부한 내용을 연구하여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래,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가르쳐 주겠네. 자네라면 2, 3년이면 배울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다음 날부터 당테스는 파리아 신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탈출의 그날을 기다리며 틈틈이 벽에 구멍을 뚫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파리아 신부는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으윽!” “신부님, 왜 그러십니까?” “당테스, 저기 침대 옆에 있는 약을 가져다주게.” 파리아 신부가 힘겹게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당테스는 신부의 입에 약을 넣어 주었다. “고맙네, 아마도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군. 어차피 이제 자네에게 가르쳐 줄 것도 없네. 기회가 생기면 자네 판단에 따라 꼭 여기를 빠져나가게.” “아닙니다. 신부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여기 남아서 신부님을 돌봐 드리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네. 이제 그만 돌아가게. 그리고 내일 다시 나를 찾아오게. 꼭 전할 게 있어.” 당테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파리아 신부는 당테스에게 쪽지 하나를 주었다. “300년 전에 이탈리아의 한 백작이 몬테크리스토섬에 보물을 숨겨 두었네. 백작은 이 쪽지에 보물을 숨겨 놓은 곳을 적어 놓았지. 만약 여기를 탈출하면 보물을 찾아 의미 있게 써 주길 바라네.” “하지만 이건 신부님의 것인걸요. 저에게는 이것을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아닐세, 자식이 없는 내게 자네를 보내 주신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일 거야. 그러니 꼭 받아 주게.” 파리아 신부는 당테스의 손을 꼭 잡았다. “네, 알겠습니다. 신부님.” 고개를 숙인 당테스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얼마 뒤 파리아 신부는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신부님!” 당테스는 슬퍼하며 오랫동안 파리아 신부의 곁을 지켰다. ‘아, 나는 이제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간단 말인가?’ 그때 간수가 아침 식사를 가져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테스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건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잠시 뒤 간수들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당테스는 다시 파리아 신부의 방으로 갔다. 침대에는 신부의 시체를 넣은 커다란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때 당테스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여기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죽은 사람뿐이야. 죄송하지만 신부님의 시체를 이용하는 거야. 그 방법밖에는 없어. 오, 하느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섬의 한 바위에 닿자 당테스는 기운이 빠져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 뒤 눈을 떠 보니 당테스는 티브랑섬의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이제 살았다! 자유다!” 그날 밤, 천둥소리와 함께 세찬 비가 쏟아졌다. 당테스는 비를 피할 곳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다가 바다 한가운데 어선 한 척을 보았다. 그런데 그 어선은 이내 거친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하늘은 다시 푸르게 개었고, 바다는 반짝이고 있었다. 당테스는 걱정이 되었다. “지금쯤이면 내가 탈출한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나를 잡으러 바다 위를 뒤질 텐데. 어서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겨야 해.” 하지만 육지는 너무 멀었다. 그때였다. 먼바다에 작은 배 한 척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 어제 태풍으로 난파된 배의 선원인 척하고 저 배를 타면 난 무사할 수 있을 거야.” 당테스는 얼른 바다로 뛰어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다 위에 선원 모자와 난파된 배의 조각이 둥둥 떠 있었다. 당테스는 선원 모자를 쓰고 배의 조각을 잡은 후 배를 향해서 헤엄쳐 갔다. “이봐요! 여기 사람이 있소. 살려 주시오!” 당테스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배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아아, 점점 기운이 빠지는구나.” 그런데 뱃머리를 돌린 배가 당테스 쪽으로 다가왔다. 당테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당테스는 어느 배의 갑판 위에 누워 있었다. “자네는 누군가?” 선장인 듯한 사람이 서툰 프랑스어로 당테스에게 말을 걸었다. 당테스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전 몰타 태생의 선원입니다. 간밤의 폭풍으로 배가 난파되었습니다.” “선원이라면 혹시 지중해에 대해서 잘 아는가?” “물론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중해를 자주 다녔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키를 잡아 보게.” 일등 항해사였던 당테스는 능숙하게 배를 몰았다. “아주 잘 하는군. 갈 곳이 없다면 이 배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떻겠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테스는 그 배가 밀수선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당장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선장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항해를 하면서 지금이 1829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테스가 감옥에 들어간 지 어느덧 14년이 지나 있었던 것이었다. ‘당글라르, 카드루스, 페르낭, 빌포르! 조금만 기다려라! 절대로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얼마 뒤 배가 리보르노에 도착하자 당테스는 이발소로 달려가서 머리와 수염을 깎았다. 당테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는 다시 바다로 떠났다. 당테스가 탄 배는 여러 번 몬테크리스토섬을 지나갔다. 그 섬을 바라볼 때마다 당테스는 안타까움이 생겼지만, 기회가 생길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선장이 몬테크리스토섬에서 밀수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섬은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밀수를 하기에 딱 적당했다. 몬테크리스토섬에 도착하자 당테스는 사냥을 하겠다며 혼자 나섰다. 그리고 파리아 신부가 준 쪽지에 있었던 장소를 찾아갔다. ‘섬 동쪽에서 스무 번째 바위 뒤에 동굴이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 바위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려 300년이나 지났으니 바위가 그대로일 리가 없었다. 얼마 뒤 선원들은 당테스를 찾기 시작했다. 당테스는 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이거 큰일이군. 이제 곧 배를 출발시켜야 하는데...” 선원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친 당테스를 부축하여 배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선장은 당테스를 위해 출항을 늦추려고 했지만, 당테스는 반대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시는 길에 저를 데려가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혼자 남아서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나? 그러지 말고 함께 가세.” 선장과 선원들 모두 당테스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당테스는 결심을 꺾지 않았다. “아닙니다. 어차피 잘 걷지도 못하니 제가 가면 방해만 될 뿐입니다. 차라리 여기서 쉬고 있겠습니다.” “그럼 할 수 없군. 10일 이내에는 꼭 데리러 오겠네.” 당테스는 몬테크리스토섬에 혼자 남게 되었다. 배가 떠나자 당테스는 총과 곡괭이를 가지고 바위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보물을 찾으려고 일부러 심하게 다친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었다. 당테스는 드디어 쪽지에 적힌 스무 번째 바위를 찾아냈다. 동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위를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바위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테스는 선원들이 두고 간 화약이 생각났다. 그는 화약을 가져와서 바위 사이에 끼우고 불을 붙였다. 잠시 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컴컴한 동굴이 나타났다. 당테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동굴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테스는 크게 실망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문득 쪽지의 구절이 생각났다. ‘그래, 두 번째 동굴이라고 했어. 바보같이 왜 그걸 깜빡 잊고 있었지?’ 당테스는 다시 주변을 곡괭이로 두드려 보았다. 그랬더니 소리가 울리는 곳이 있었다. 당테스는 곡괭이로 그곳을 부수었다. 마침내 두 번째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당테스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작은 동굴로 들어갔다. 14년 동안 어두운 감옥에 있었던 터라 당테스는 어두운 동굴에서도 문제없이 잘 볼 수 있었다. 한참을 내려간 다음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 움푹한 곳이 있었다. 당테스는 정신없이 바닥을 팠다. 이윽고 커다란 상자가 나왔다. 당테스는 얼른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금괴와 여러 보석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테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잠시 뒤 당테스는 보석 몇 개를 챙기고 상자를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동굴 입구도 숨겼다. 일주일 뒤, 약속대로 선장의 배는 당테스를 태우러 몬테크리스토섬으로 돌아왔다. 배를 타고 리보르노에 돌아온 당테스는 선원들과 헤어졌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자네와 같이 성실한 선원을 잃게 되어 아쉽군.” 선장과 선원들은 무척 아쉬워하며 다시 바다로 떠났다. 당테스는 그길로 보석상에 가서 보석을 팔아 커다란 배를 한 척 샀다. 당테스는 배를 타고 몬테크리스토섬으로 가서 나머지 보물을 모두 싣고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당테스는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르세유에서는 슬픈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메르세데스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제부터 복수의 시작이다!” 당테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테스는 신부로 변장하고 카드루스가 운영하는 여관으로 갔다. “여기 포도주 한 잔만 주십시오.” 당테스는 여관 주인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말을 걸었다. “혹시 예전에 양복점을 하셨던 카드루스 씨가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부조니 신부입니다. 혹시 에드몽 당테스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저와 이웃이었는걸요. 신부님도 당테스를 아십니까?” “네, 감옥에서 당테스가 죽을 때 곁에 있어 주었지요. 그런데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힌 이유를 모르고 있더군요. 혹시 카드루스 씨는 그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요.” 카드루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당테스는 얼른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하나를 꺼냈다. “참, 당테스가 죽으면서 제게 이 다이아몬드를 남겼습니다. 이 다이아몬드를 돈으로 바꿔서 자기 아버지와 약혼녀 그리고 세 명의 친구인 카드루스, 당글라르, 페르낭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더군요. 당테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넷이 이 다이아몬드를 나누어 가지면 되겠군요.” 당테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당테스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낸 놈들에게 다이아몬드를 나눠 주다니요!” 카드루스의 말에 당테스는 깜짝 놀란 척하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카드루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신부님, 비밀을 지켜 주시겠지요?” “네, 약속하겠습니다.” 카드루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후유, 지금까지도 그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당테스가 감옥에 들어간 뒤 모렐 씨는 당테스를 빼내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르세데스와 함께 당테스의 아버지를 정성껏 보살펴 드렸습니다. 하지만 당테스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문을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더니 결국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모렐 씨가 저기 선반 위에 지갑을 놓고 가는 바람에 지갑에 있는 돈으로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참, 그 지갑은 아직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카드루스는 목이 타는지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흠흠, 페르낭은 군대에 들어갔는데 에스파냐 전쟁에서 첩자 노릇을 잘 해서 대령이 되었고, 모르세르 백작 칭호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파리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당테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또다시 물었다. “혹시 메르세데스의 소식도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메르세데스는 당테스가 잡혀간 후 빌포르 검사에게 빌기도 하고 당테스의 아버지를 돌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낭에게 끌려가 그와 강제로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알베르란 아들도 있습니다.” 카드루스의 말을 듣고 당테스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탁자 아래 그의 두 주먹은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카드루스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당테스는 카드루스에게 다이아몬드를 내밀었다. 자, 받으십시오. 당신 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 다이아몬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군요. 그리고 모렐 씨의 지갑은 제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드리고말고요, 여기 있습니다!” 카드루스는 재빨리 지갑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당테스는 영국인으로 변장하고 마르세유의 시장을 찾아갔다. “저는 톰슨 앤 프렌치 상회의 지배인입니다. 저희와 거래하는 모렐 씨가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 일이라면 보비르 씨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시장은 보비르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보비르는 당테스가 이프섬에 있을 때 검사관으로 왔던 사람이었다. 당테스는 보비르를 찾아갔다. “모렐 씨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모렐 씨에게 20만 프랑이나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그 20만 프랑의 증서를 사겠습니다. 대신 파리아 신부와 당테스라는 죄수에 관한 기록을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대신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테스가 단단히 다짐을 하자, 보비르는 두 사람의 기록을 보여 주었다. “파리아 신부는 감옥에서 죽었고, 당테스는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되어 있군요. 당시 모렐 씨가 당테스의 석방 요구서를 보냈는데, 빌포르 검사가 없애 버렸습니다.” 기록 중에는 당글라르가 썼던 투서도 있었다. 당테스는 투서를 보비르 몰래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당테스는 모렐을 찾아갔다. 14년 만에 본 모렐은 많이 늙어 있었다. 게다가 모렐은 상황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이달 안으로 갚아야 할 돈도 있었고, 하나 남은 파라옹호마저 침몰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모렐 씨, 저는 톰슨 앤 프렌치 상회의 지배인입니다. 형편이 어려우시다니 저희에게 돈을 갚아야 할 날짜를 석 달 미루어 드리겠습니다.” 당테스의 말에 모렐은 매우 기뻐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당테스는 모렐의 집을 나오다가 모렐의 딸 쥘리를 만났다. “아가씨, 며칠 뒤 신드바드라는 사람이 아가씨에게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그 편지에 적힌 대로만 하시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모렐과 약속한 석 달이 지났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다이아몬드도 들어 있었다. 모렐은 이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인어른, 파, 파라옹호가 돌아왔어요. 빨리 항구로 가 보세요!” 사위가 달려와 말했다. 모렐은 사위와 딸 쥘리, 아들 막시밀리앙과 함께 항구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파라옹호가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새롭게 만들어진 배였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모렐과 자녀들은 기뻐서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것으로 제 아버지께 베풀어 주신 당신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멀리서 모렐을 지켜보던 당테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파리에 있는 모르세르 백작의 집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알베르는 손님맞이에 바빴다. 그는 바로 모르세르 백작인 페르낭과 메르세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오늘 내 생명의 은인이 찾아오신다네. 산적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신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분이야.” 알베르는 친구들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알베르의 친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알베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알베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 말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알베르가 직접 마중을 나가 백작을 맞았다. “모두 인사하게나. 몬테크리스토 백작님이시네.” 알베르 옆에 서 있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바로 당테스였다. 당테스는 복수하려고 일부러 알베르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해 봄, 알베르와 그의 친구 프란츠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묵고 있었다. 당테스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알베르가 묵고 있는 호텔에 머물면서 마치 눈에 띄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돈을 펑펑 쓰고 지냈다. 어느 날 저녁, 알베르와 프란츠는 바람을 쐬러 나가려고 했다. “지금 나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루이지 밤파가 나타날 것 같아요.” 호텔 주인이 두 사람을 말렸다. “루이지 밤파요?” “네, 무시무시한 산적이지요. 뱃사람 신드바드와 친한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두 사람은 주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밖으로 나가 마음껏 돌아다녔다. 축제 마지막 날, 호텔로 먼저 돌아온 프란츠는 어떤 사나이로부터 편지 두 통을 건네받았다. 한 통은 알베르에게서 온 것이었다. 프란츠,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에게 4,000피아스터를 주게. 자네만 믿겠네. 알베르 또 한 통은 루이지 밤파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일 아침 7시까지 4,000피아스터를 보내지 않으면 알베르 자작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루이지 밤파 “이거 정말 큰일이군.” 프란츠는 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보아도 4,000피아스터라는 큰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한담?” 고민하던 프란츠는 부자로 소문이 나 있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도움을 청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빌려주겠소.” 게다가 그는 알베르를 구하러 프란츠와 함께 루이지 밤파를 만나러 가 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이지 밤파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알베르를 풀어 주고 사과까지 했다. “아, 백, 백작님의 친구인 줄 모르고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도움으로 알베르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백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프랑스에 오시게 되면 꼭 우리 집을 방문해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알베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집으로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지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사실 이 납치 사건 또한 알베르와 친해지기 위해 루이지 밤파와 미리 짜 놓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계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당테스인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알베르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멋진 말솜씨로 파티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식사가 끝난 뒤 알베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부모님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모르세르 백작입니다. 제 아들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르낭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마워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잠시 뒤에 알베르의 어머니이자 당테스의 연인이었던 메르세데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백작님, 이분은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알베르의 말에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메르세데스 또한 아들을 구해 준 은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앗!”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얼굴을 본 메르세데스는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면서 비틀거렸다. 자신이 사랑했던 당테스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알베르가 쓰러지려는 메르세데스를 붙잡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널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서 그런다.” 메르세데스는 겨우 말을 이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알베르의 집을 나왔다. 메르세데스는 커튼 사이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저택에서 하인인 베르치오와 알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또 그는 오퇴유 거리에 있는 별장도 한 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 별장은 빌포르의 장인이 살던 곳으로 복수를 위해 산 것이었다. 어느 날,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은행가가 된 당글라르를 찾아갔다. 당글라르는 비굴한 표정으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마음에 들려고 애썼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톰슨 앤 프렌치 상회로부터 몬테크리스토 백작께 맘껏 돈을 빌려주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1년에 600만 프랑 정도만 빌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좋습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때 하인이 들어와서 당글라르 부인의 말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사실 그 말은 얼마 전,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하인을 통해 많은 돈을 주고 당글라르에게서 산 것이었다. 당글라르는 아내가 그 말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팔아 버린 것이었다. “앗! 마님의 말이 저기 있어요.” 창밖을 내다보던 하녀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일부러 그 말을 마차에 매어 가지고 온 것이었다. 당글라르 부인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서 창가로 달려갔다. “여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쩌면 한마디 의논도 없이 내가 아끼는 말을 팔아 버릴 수 있어요?” 부인이 당글라르에게 따져 물었다. “여보, 미안하오. 난 그저.” 당글라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집에 도착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당글라르 부인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말은 주인인 부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게 팔려 온 것 같군요. 아름다운 부인을 슬프게 하는 것은 신사 된 도리가 아니기에 말을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 뒤로 당글라르 부인은 가는 곳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칭찬하고 다녔다. 한편, 빌포르 역시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무척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빌포르의 아들이 마차에 치여 정신을 잃었을 때,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준 약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약은 조금 먹으면 몸에 굉장히 좋은 약이었지만, 많이 먹으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독약이었다. 빌포르 부인은 그 약이 꼭 필요하다면서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약을 나눠 달라고 부탁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빌포르 부인에게 약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이렇듯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를 위해 페르낭과 당글라르, 빌포르 모르게 그들을 조사하고 차근차근 계획대로 일을 꾸며 나갔다. 하지만 페르낭과 당글라르, 빌포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당테스인 것을 모른 채, 그와 가까워진 것을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당글라르 부부, 빌포르 부부, 모르세르 부부 등을 오퇴유의 별장으로 초대했다. 식사를 한 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손님들에게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이 별장은 원래 폐가였습니다만 여기저기 수리를 했지요. 그런데 2층에 있는 방은 어쩐지 손을 대기가 찜찜하더군요. 다들 재미 삼아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손님들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원래 침실이었던 것 같은데 벽은 피처럼 빨간색이지요. 마치 피비린내가 나는 느낌이에요.” 그 이야기를 듣자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커튼을 올리면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이 비밀 통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저를 따라오시면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이번에는 뜰에 있는 나무 아래로 갔다. “비료를 주려고 여기를 팠는데 상자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갓난아기의 유골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버린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을 보고는 빙긋이 웃었다. 사실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은 각자 가정이 있었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몰래 만나 오던 중 당글라르 부인이 빌포르의 아기를 낳고 만 것이었다. 빌포르는 사실이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아기를 장인어른의 별장에 있는 나무 아래 묻으려 했다. 그런데 땅에 상자를 막 묻으려는 순간 베르치오가 나타나 빌포르를 칼로 찔렀다. 빌포르에게 원한이 있었던 베르치오가 그를 죽이려고 따라왔던 것이었다. 옆에 있던 당글라르 부인은 상자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상자 속의 아기는 울어 댔고 베르치오는 상자에서 아기를 꺼내어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 아기는 자라서 못된 깡패가 되어 잘못을 저질렀고, 결국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윌 모어 경이라는 귀족으로 변장하여 그를 감옥에서 빼내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안드레아라는 이름의 귀공자가 된 것이었다. 아무도 안드레아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안드레아 역시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윌 모어 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무렵, 당글라르는 에스파냐 채권을 헐값에 팔아 버리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았다. 이 역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계략 때문인 걸 당글라르는 전혀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당글라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소개해 준 안드레아를 돈 많은 자작으로 잘못 알고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한편, 안드레아는 감옥에서 카드루스와 알던 사이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카드루스는 보석상 주인을 죽인 죄로 감옥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몬테크리스토 백작 즉 윌 모어 경은 안드레아를 빼낼 때, 카드루스도 함께 빼내 주었다. 물론 자신의 계획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카드루스는 안드레아를 찾아갔다. “이봐, 자네 당글라르의 딸과 결혼할 거라면서?” 안드레아는 카드루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좋아, 하지만 나도 돈 좀 벌어야겠어. 자네 요즘도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자주 어울리나?” “물론이지, 내일 오퇴유의 별장에 초대를 받았어.” “그래, 그 백작의 샹젤리제 집은 누가 지키지?” “아마도 하인들이 지키겠지.” “그러면 내일은 그 집을 털어야겠군.” 다음 날,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오늘 밤 집에 도둑이 들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카드루스를 없애려고 안드레아가 보낸 것이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재빨리 샹젤리제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하인 알리만 남겨 둔 채 나머지는 모두 오퇴유의 별장으로 보냈다. 밤이 되자, 드디어 도둑이 나타났다. ‘역시 카드루스로군.’ 창문을 통해 도둑이 누구인지 확인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얼른 신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알리, 촛불을 들고 저 방으로 들어가게.” 부조니 신부로 변장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알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카드루스!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부조니 신부님?” “몬테크리스토 백작 대신 내가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감옥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풀려난 겁니까?” “안드레아와 함께 윌 모어 경의 도움으로 풀려났지요.” “안드레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고요? 난 두 사람이 한패인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안드레아에게 돈을 뜯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카드루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 사실은 안드레아가 당글라르의 딸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서, 당글라르의 돈을 뺏기로 했습니다.” “당글라르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군요.” 그러자 카드루스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재빨리 피한 뒤 카드루스를 쓰러뜨렸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여기에 내가 부르는 대로 쓰시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당글라르 남작께. 남작의 딸과 결혼하려는 안드레아 자작은 사실 남프랑스 감옥을 탈옥한 자입니다. 그는 59호, 나는 58호로 불리는 죄수였습니다. 가스팔 카드루스 “자, 그럼 살아서 이 집을 나가게 되면 파리를 떠나시오!” “네, 그렇게 하고말고요.” 카드루스는 벌벌 떨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곧 비명 소리가 들렸고, 알리가 다친 카드루스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으으, 신부님! 안드레아가 절 찔렀어요!” 카드루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드레아를 저주했다. 카드루스의 상처는 꽤 깊었다.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알리, 어서 가서 빌포르 검찰 총장과 의사를 불러오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알리를 내보낸 뒤 카드루스의 필체를 흉내 내어 편지를 썼다. 저는 남프랑스 감옥에서 함께 지내던 안드레아에게 당했습니다. -가스팔 카드루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카드루스에게 서명을 하게 한 뒤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카드루스, 하느님이 당신을 심판하시려고 날 보내신 거요. 당신은 당테스라는 친구를 배신했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 보석상을 죽였소. 게다가 윌 모어 경의 도움으로 탈옥까지 했으면서 전혀 변하지 않았소. 또다시 도둑질하려고 했으니 말이오.” “하느님 따위는 없습니다. 있다면 당글라르와 페르낭이 지금처럼 잘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내가 보여 주겠소. 자, 잘 보시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가발을 벗었다. “윌 모어 경?” “아니, 자세히 보시오!” “헉! 당신은 에, 에드몽 당테스? 이럴 수가.” 카드루스는 아픈 몸에 큰 충격을 받아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빌포르와 의사가 달려왔을 때는 죽은 카드루스 곁에 부조니 신부가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프랑스의 유명 신문에 모르세르 백작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다. 예전 그리스 총독 알리 파샤의 죽음은 한 프랑스 장교의 배신 때문이었는데, 그 프랑스 장교가 모르세르 백작이라는 것이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귀족 집안으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사실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까지 열렸다. 모르세르 백작은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알베르는 아버지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밝혀낸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신문사에 다니는 친구 보샹을 통해서 당글라르가 모르세르 백작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는 그길로 당글라르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 “내 아버지의 뒷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까?” “난 그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부탁으로 자네 아버지를 조사하였을 뿐이네.” 알베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을 뿐 아니라 평소 존경해 왔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이름을 듣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알베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알베르, 결투를 원한다면 내일 아침 8시 뱅센트 숲으로 나오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집으로 돌아와 총을 정성껏 손질했다. 그때였다. 탕탕! 갑자기 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하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여인은 다름 아닌 메르세데스였다. 메르세데스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에드몽, 제발 알베르를 살려 주세요!” 순간,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라고요?” “에드몽, 전 당신이 에드몽 당테스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몰라보겠어요? 제발 우리 알베르를 살려 주세요.” “나는 페르낭에게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당글라르가 왼손으로 쓴 투서를 보여 주었다. “바로 이게 당글라르가 쓰고 페르낭이 보냈던 투서요. 바로 이 거짓 투서 때문에 나는 14년 동안 이프섬의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있었소. 약혼녀가 원수랑 결혼하고, 아버지가 굶어 죽은 것도 모른 채 말이오.” “에드몽, 하지만 알베르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제발 제 아들의 목숨을 살려 주세요.” 메르세데스는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그러자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았소, 알베르를 해치지 않겠소.”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사랑했던 여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메르세데스가 돌아간 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유서를 썼다. 알베르를 살려 주기로 한 이상 알베르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서는 자신의 전 재산을 모렐의 아들인 막시밀리앙과 쥘리에게 준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결투 장소로 갔다. 그런데 알베르는 슬픈 얼굴로 휘청거리며 걸어오더니, 몬테크리스토 백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께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작님께서 제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가 용서를 빌겠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알베르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알베르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메르세데스와 짐을 쌌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페르낭은 떠나는 두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뒤 페르낭의 집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뒤 빌포르는 카드루스를 죽인 죄로 안드레아를 체포하였다. 체포될 당시, 안드레아는 당글라르의 딸인 유제니와 혼인 서약을 한 뒤 피로연을 즐기고 있었다. 빌포르는 이 자리에서 안드레아의 정체를 폭로했다. “안드레아 자작은 남프랑스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입니다. 또한 그는 카드루스를 살해했습니다.” 연회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빌포르의 딸 발랑틴은 자려고 누웠다가 누군가의 기척을 들었다. “아! 몬테크리스토 백작님? 여기는 어떻게?” 발랑틴은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쉿! 조용히 하십시오. 저는 당신과 당신의 연인 막시밀리앙을 돕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절 믿어 주십시오. 이제 곧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올 테니 잠든 척하고 얼굴을 잘 봐 두십시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책장 뒤로 사라졌다. 발랑틴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는 척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더니 물그릇 속에 무언가를 넣었다. 발랑틴은 눈을 살며시 뜨고 그 사람을 보았다. 빌포르 부인, 즉 발랑틴의 새어머니였다. 빌포르 부인이 나가자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다시 나타났다. “발랑틴 양이 죽으면 전 재산을 자신의 아들인 에두아르가 물려받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발랑틴 양, 내가 구해 줄 테니 내 말에 따르도록 해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이렇게 말하면서 발랑틴에게 알약을 주었다. 약을 먹은 발랑틴은 그대로 잠들었고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렀다. 며칠 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발랑틴의 연인인 막시밀리앙을 찾아갔다. 막시밀리앙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으로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여보게, 이래선 안 돼!”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말렸다. “안 된다고요? 내가 죽건 말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지요?” “난 모렐 씨의 아들인 자네의 죽음을 막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난 자네 아버지에게 돈과 파라옹호를 선물했던 사람이네.” “그, 그러면 당신이 바로 신드바드?” “그렇네, 막시밀리앙 군. 그러니 나를 믿고 10월 5일까지만 기다려 주게.” 백작의 말을 들은 막시밀리앙은 약속한 날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안드레아의 재판이 있는 날, 재판소에는 재판을 구경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안드레아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는 빌포르 검찰 총장입니다.” “뭐, 뭐라고?” 빌포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법정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별장 2층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는 저를 원하지 않아 상자에 담아 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는 한 사나이가 휘두른 칼에 찔렸고, 그 사람은 상자를 가져갔습니다. 그는 상자에 담긴 저를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때였다. “아악!” 그때 당글라르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증거도 없이 그 말을 믿으란 말이오?” 재판장은 너무 놀라 소리쳤다. “증거요? 지금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하인인 베르치오가 바로 그때 제 아버지 빌포르 검찰 총장을 찌른 사람입니다.” 빌포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젊은이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모든 일은 법정에 맡기겠습니다.” 빌포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으로 집으로 향했다. 빌포르는 비틀거리며 아버지 누아르티에 백작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아르티에 백작은 부조니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신은 부조니 신부 아니오?” 그러자 부조니 신부는 가발을 벗었다. “빌포르, 나를 알아보겠소?” “다, 당신은 몬테크리스토 백작?” 빌포르가 깜짝 놀라 외쳤다. “흠, 자네가 오래전에 저지른 일을 생각해 보게.”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인데.” “나는 당신 때문에 14년을 이프섬의 감옥에서 보냈소.” “에, 에드몽 당테스?” 빌포르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렇소! 나는 에드몽 당테스요!” 죽은 줄 알았던 당테스가 살아 돌아오자 빌포르는 너무나 놀랐다. “아니야, 이건 꿈일 거야.” 빌포르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내젓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 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흐흐흐!” 빌포르는 큰 충격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미쳐 버린 것이었다. 복수를 끝낸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조용히 빌포르의 집을 나섰다. 그러고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당글라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났다. 당글라르 당글라르는 톰슨 앤 프렌치 상회에 있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게서 받은 어음을 가지고 돈을 찾으러 왔던 것이다. 상회에서 나온 당글라르는 마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향했다. 큰돈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이 무척 느긋했다. 그런데 마차가 멈춰선 곳은 베네치아가 아닌 산적 루이지 밤파가 머무는 동굴이었다. 당글라르는 마차에서 끌려 나와 캄캄한 동굴 안에 갇혔다. 산적들은 당글라르의 주머니를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당글라르는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저, 먹을 것 좀 주시오.” 그러자 산적이 다가와 말했다. “네, 무엇이든지 드리지요. 하지만 음식값은 주셔야 합니다.” 당글라르는 통닭을 시켰다. 산적은 곧 통닭을 가져와 말했다. “먼저 돈 10만 프랑을 주시오.” “아니, 이런 날강도 같으니라고! 통닭 한 마리가 10만 프랑이라고? 난 돈도 없단 말이오!” 당글라르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 주머니에 큰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당글라르는 10만 프랑과 통닭을 바꾸고 말았다. 당글라르는 그곳에 잡혀 있는 동안 음식값으로 엄청난 돈을 내야 했고, 결국 가지고 있던 돈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돈이 떨어지자 당글라르는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그때 루이지 밤파가 나타났다.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곧이어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바로 당신 때문에 말이오!” “다, 당신은 몬테크리스토 백작!” 당글라르는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누군지 자세히 보시오!” “누구?” “난 에드몽 당테스요!” 그 말을 듣자 당글라르는 그만 기절해 버렸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루이지 밤파에게 뒤처리를 부탁하고 자리를 떠났다. 루이지 밤파는 당글라르를 어느 풀밭에 버렸다. 한편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막시밀리앙이 약속한 10월 5일이 되었다. 10월의 눈부신 태양 빛이 지중해의 바다 위를 물들일 무렵, 막시밀리앙을 태운 요트가 몬테크리스토섬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막시밀리앙 군.”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반갑게 맞이했다. 막시밀리앙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따라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막시밀리앙 군, 발랑틴을 따라 죽겠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나?” “네,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길 보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 막시밀리앙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 꿈에도 잊지 못하던 발랑틴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발랑틴.” “오, 막시밀리앙!” 두 사람은 힘껏 부둥켜안았다. 발랑틴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말에 따라 그가 준 약을 먹고 그동안 거짓으로 죽은 척했던 것이었다. 발랑틴과 막시밀리앙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편지 한 장을 남겨 두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막시밀리앙 군! 파리에 있는 내 집과 이 동굴에 있는 모든 재산은 내가 두 사람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네. 그동안 발랑틴 양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은 까닭은 자네에게 행복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네. 죽을 정도의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알 수 있거든. 두 사람이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빌며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네. “항상 희망을 갖고 기다려라!” 당신의 친구, 에드몽 당테스, 몬테크리스토 백작 모든 복수를 끝낸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자신의 은인인 모렐의 아들에게 은혜를 갚고, 자신의 원수였던 빌포르의 딸에게는 사랑을 찾아 주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뒤로 떠오른 아침 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인과 바다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노인은 멕시코 만류에서 혼자 돛단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어요. 노인은 매일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지만, 지난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노인은 한마을에 사는 소년 마놀린과 함께 오랫동안 물고기를 잡았어요. 그런데 40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자 소년의 아버지가 말했어요. “마놀린,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이제 운이 다해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단다. 그러니 앞으로 다른 배를 타거라.”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배를 탔어요. 소년이 새로 탄 배는 일주일 동안 커다란 물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어요. 소년은 빈 배로 돌아오는 노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노인을 기다렸다가 낚시 도구와 돛을 둘둘 감은 돛대를 옮겨다 주었어요. 밀가루 부대를 이어서 만든 낡은 돛은 마치 영원한 패배의 깃발 같았어요. 노인의 목덜미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어요. 두 뺨은 열대 바다에서 반사되는 강한 햇빛 때문에 생긴 검버섯으로 얼룩얼룩했어요. 게다가 두 손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다 생긴 흉터투성이였어요. 이는 모두 오래된 것으로, 노인의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말해 주는 듯했어요. 그러나 바다같이 파란 두 눈에는 여전히 광채가 번득였어요. 두 사람이 돛단배를 묶어 놓고 기슭을 오르고 있을 때 소년이 말했어요. “할아버지, 이제 다시 할아버지와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갈 수 있어요. 그동안 돈을 좀 벌었거든요.” 소년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 노인을 사랑했어요. “아니다, 지금 네가 타고 있는 배는 운이 좋으니 계속 그 배를 타렴.”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어요. “할아버지, 전에 87일 동안이나 물고기를 못 잡다가 저랑 함께 나가서 삼 주 동안 매일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잖아요.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 기억하고말고. 나는 네가 내 실력을 믿지 못해 떠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제가 할아버지 곁을 떠난 건 아버지 때문이에요. 저는 아직 어려서 아버지 말에 따라야만 했어요.” “알고 있단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요.” “그래, 하지만 우리는 믿음이 있지. 안 그러니 얘야?” “맞아요, 테라스 식당에서 맥주 한잔 사드릴게요. 이것들은 나중에 옮겨도 되잖아요.” “좋아, 우리 어부끼리 말이다.” 두 사람은 테라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비웃었지만 노인은 화를 내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이 든 어부들은 노인을 쳐다보고 안쓰러워했어요. 그들은 낚싯줄을 던진 곳의 수심과 해류, 좋은 날씨 등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부들은 잡아 온 물고기를 손질해서 저장 창고로 보냈어요. 그리고 저장 창고의 물고기들은 냉동차에 실려 아바나의 어시장으로 보내졌어요. 테라스 식당은 햇빛이 잘 들어 쾌적했어요. “산티아고 할아버지! 내일 미끼로 쓰실 정어리를 구해 올까요?” 노인은 유리컵을 들고 옛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아니다, 이제 너는 가서 야구나 하렴. 내가 노를 저으면 로헬리오가 그물을 던질 거야.” “할아버지와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못 가니까 다른 방법으로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이렇게 맥주를 사 주었잖아, 너도 어른이 다 되었구나.” 노인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제가 몇 살 때 할아버지의 배를 처음 탔나요?” “다섯 살 때였지.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는데 어찌나 펄떡거리던지, 배는 부서질 것 같고 너는 바다에 빠질 뻔했단다. 기억나니?” “기억나고말고요, 물고기가 엄청 빠르게 꼬리를 흔드는 바람에 가로장이 부서졌잖아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저를 번쩍 들어서 젖은 낚싯줄 뭉치를 둔 뱃머리 쪽에 내려놓았구요. 배가 마구 흔들리던 것까지 기억나요.” 소년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했어요. “세상에,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 아니면 내가 그때 일을 말해 주어서 아는 거냐?” “저는 할아버지와 처음 바다로 나갔을 때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걸요.” 노인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어요. “만약 네가 내 아이였다면 함께 바다로 나가서 도전을 해 보았을 거야.” 노인은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어 갔어요. “하지만 너에게는 부모님이 계시고, 게다가 운이 좋은 배를 타고 있잖니.” “할아버지, 정어리를 구해 올게요. 네 마리 정도 구해 올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괜찮다, 오늘 쓰고 남은 미끼를 소금에 절여 상자에 넣어 두었단다.” “그래도 싱싱한 걸로 네 마리 구해 올게요.” “정 그렇다면 한 마리만 구해 오렴.” 노인에게 남아 있던 희망과 자신감이 상쾌한 바람처럼 새롭게 일렁이고 있었어요. “그럼 두 마리 갖다드릴게요.” “좋아, 두 마리만 가져오너라. 그런데 설마 훔쳐 오는 건 아니겠지?” 노인은 우스갯소리로 말했어요. “훔칠 수도 있지만, 돈 주고 사 올 거예요.” “고맙구나.” 소년의 도움을 순순히 받아들인 노인은 자신이 겸허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워할 일이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할아버지, 내일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새벽에 멀리 나갔다가 바람이 바뀌면 돌아올 생각이다.” “저도 주인아저씨에게 멀리 나가서 물고기를 잡자고 말해 볼게요." "만약 할아버지가 큰 물고기를 잡으면 우리가 가서 도와드릴 수 있게요.” “그 사람은 멀리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맞아요, 하지만 제가 물고기를 노리는 새를 봤다고 우겨서 멀리 나가게 할 거예요.” “그 사람 눈이 그렇게 안 좋으냐?” “네,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 사람은 바다거북 잡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눈이 안 좋을까? 바다거북을 잡는 일을 하면 눈이 안 좋아지지.” “할아버지는 몇 년 동안 모스키토해안에서 바다거북을 잡았어도 눈이 좋으시잖아요.” “그야 나는 좀 유별난 늙은이니까 그렇지.” “할아버지, 진짜로 커다란 물고기가 잡히면 끌어 올릴 힘이 있으세요?” “물론이지, 내게는 비결이 있단다.” “할아버지, 이제 저것들을 옮겨요. 그래야 투망을 가지고 정어리를 구하러 갈 수 있어요.” 두 사람은 슬슬 배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노인은 낡아 빠진 돛을 둘둘 감은 돛대를 어깨에 멨고, 소년은 낚싯줄이 든 상자와 갈고랑이와 작살을 날랐어요. 노인의 물건을 훔쳐 갈 사람은 없겠지만, 돛과 낚싯줄은 이슬을 맞으면 망가지고, 갈고랑이와 작살은 쓸데없는 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였어요. 하지만 미끼 고기가 담긴 상자와 커다란 물고기의 힘을 뺄 때 쓰는 몽둥이는 배 뒤편에 놓아두었어요. 두 사람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어요. 노인은 돛대를 벽에 기대어 놓았고, 소년도 상자와 다른 도구들을 그 옆에 내려놓았어요. 돛대는 오두막의 하나밖에 없는 방만큼 길었어요. ‘구아노’로 불리는 대왕야자나무의 질긴 껍질로 만든 오두막 안에는 침대와 탁자, 의자가 하나씩 있었고, 흙바닥에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작은 화덕과 숯이 있었어요. 구아노잎을 겹쳐 붙인 판판한 갈색 벽에는 죽은 아내가 남긴 색칠한 예수상과 코브레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었어요. 한때는 죽은 아내의 낡은 사진도 걸려 있었지만, 그것을 볼 때마다 쓸쓸해지자 노인이 떼어 냈어요. 그러고는 선반 위에 있는 자신의 깨끗한 셔츠 밑에 간직해 놓았어요. “할아버지, 뭘 좀 드셔야죠?” “노란 쌀밥과 생선이 있는데 너도 먹고 가렴.” “아니에요, 저는 집에 가서 먹을래요. 불 좀 피울까요?” “아니다, 이따 내가 피우마. 그냥 찬밥을 먹어도 되고.” “투망을 가져가도 되죠?” “그렇게 해라.” 노인의 오두막에는 투망이 없었고, 게다가 소년은 투망을 언제 팔았는지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두 사람은 매일 이렇게 지어낸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리고 노란 쌀밥과 생선이 없다는 것도 소년은 알고 있었어요. “85는 행운의 숫자란다. 만약 내가 손질하고도 500킬로그램이 넘는 물고기를 잡아 오면 어떨 것 같니?” 노인은 짐짓 큰소리로 말했어요. “저는 투망을 가지고 가서 정어리를 잡아 올게요. 그동안 할아버지는 문간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계세요.” “그러마, 나는 어제 신문이 있으니 야구 기사나 읽어야겠다.” 노인은 침대 밑에서 부스럭부스럭 신문을 꺼내며 말했어요. “정어리를 가지고 오면 야구 이야기를 해 주세요.” 오두막을 나온 소년은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갔어요. 소년이 돌아왔을 때 노인은 의자에 기대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어 있었어요. 소년은 침대에서 낡은 담요를 가져와 노인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어요. 노인은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어깨는 여전히 튼튼했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목덜미에도 주름살이 많이 보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이제 일어나세요.” 소년은 손을 노인의 무릎에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어요. “뭘 가지고 왔냐?” 잠에서 깬 노인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물었어요. “저녁이요, 우리가 먹을 저녁이에요.” “나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구나.” “이리 오세요.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 위해서는 굶으시면 안 돼요.” 의자에서 일어난 노인은 척척 담요를 개켰어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할아버지가 굶으시면서 물고기를 잡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라. 우리가 먹을 게 뭐니?” “검정콩과 쌀밥, 바나나 튀김 그리고 스튜예요.” 소년은 테라스 식당에서 가져온 음식을 꺼내며 말했어요. 두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스튜 맛이 좋구나.” “할아버지, 야구 이야기 해 주세요.”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내 말대로 양키스가 최고란다.” “양키스는 오늘 졌잖아요.” “위대한 디마지오가 회복했으니까 앞으로 이길 거야.” 노인은 좋아하는 야구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했어요. “디마지오와 함께 고기잡이를 갈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의 아버지도 어부였다는데, 어쩌면 우리를 잘 이해해 줄지도 몰라.” “위대한 시슬러의 아버지는 제 나이 때 메이저 리그에서 경기를 했대요.” “나는 네 나이 때 가로돛을 단 범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달려갔지. 그러고는 저녁이면 해변에서 사자를 봤단다.” “알아요, 할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소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어요. “할아버지, 루케와 곤잘레스 중 누가 더 위대한 감독인가요?” “내 생각에는 둘이 비슷하단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어부는 할아버지세요.” “아니다, 나보다 나은 어부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에요, 물고기를 잘 잡는 어부는 많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최고의 어부는 할아버지 한 분뿐이에요.” 소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어요. “고맙다, 너는 항상 나를 기쁘게 해 주는구나. 하지만 너무 커다란 물고기가 나타나면 못 잡을 수도 있단다.” “물고기가 아무리 커도 할아버지는 꼭 잡으실 수 있을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만큼 힘이 세지는 않지만, 나는 물고기를 잡는 기술과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할아버지, 이제 그만 주무세요. 저는 테라스 식당에 그릇을 가져다주어야 해요.” “너도 잘 자라, 아침에 늦지 않게 깨워 주마.” “할아버지는 제 알람 시계예요.” “내게는 나이가 알람 시계란다. 나이가 들면 왜 일찍 눈이 떠질까?” “글쎄요, 제가 아는 건 아이들은 늦게까지 잔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소년은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오두막을 나왔어요. 침대에 눕자마자 이내 잠이 든 노인은 소년 시절에 갔던 아프리카 꿈을 꾸었어요. 노인은 요즘 매일 밤 꿈속에서 아프리카의 연안에 살면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었고, 그 사이를 헤치며 달려오는 원주민들의 배를 보았어요. 그리고 아침이 되면 육지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아프리카의 냄새를 맡고 깨어났어요. 꿈속에서 사자들은 마치 새끼 고양이들처럼 뛰어놀았는데, 노인은 소년을 사랑하는 만큼 사자도 사랑했어요. 그러나 노인은 소년의 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어두컴컴한 새벽녘에 잠이 깬 노인은 소년을 깨우러 가려고 오두막을 나섰어요. 제법 쌀쌀해진 새벽 공기에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노인은 잠겨 있지 않은 소년의 집 문을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어요. 노인은 침대맡에 앉아 살그머니 소년의 한쪽 발을 잡고 소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할아버지!” 잠에서 깬 소년은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어요. 노인의 오두막으로 간 두 사람은 돛대와 낚싯줄이 든 상자와 작살 등을 챙겨 노인의 돛단배가 있는 바닷가로 향했어요. “할아버지, 커피 드시겠어요?” “이것들을 배에 갖다 두고 와서 마시자.” 두 사람은 돛대와 나무 상자를 배에 실어 놓은 뒤, 어부들을 위해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마놀린, 오늘 왠지 커다란 물고기를 잡을 것 같구나.” “할아버지를 믿어요. 저는 얼른 가서 정어리와 미끼 고기를 가져올게요. 우리 주인아저씨는 고기잡이 도구를 절대 다른 사람이 옮기게 하지 않아요.” “난 네가 다섯 살 때부터 옮기게 했는데.” “맞아요, 제가 올 때까지 커피 한잔 더 드세요.” 노인은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어요. 노인은 꽤 오래전부터 먹는 것이 귀찮아져 점심을 챙겨 가지 않았어요. 대신 물 한 병을 가져가 하루를 견디었어요. 얼마 뒤, 소년이 싱싱한 정어리와 신문에 싼 두 개의 미끼 고기를 가지고 돌아왔어요. 맨발인 두 사람은 발밑으로 자갈과 모래를 느끼며 배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배를 물속으로 미끄러뜨렸어요. “할아버지, 행운을 빌게요.” “너도 행운을 빈다.” 소년은 천천히 노를 저어 나가는 노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어요. 노인의 돛단배는 어둠을 헤치며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노인의 눈에 다른 배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와 바다로 나아가는 노 젓는 소리가 들렸어요. 노인은 마음먹은 대로 먼바다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갔어요. 노인은 수심이 갑자기 깊어져 어부들이 ‘거대한 우물’이라고 부르는 곳을 지나가면서 검푸른 물속에 있는 바다풀의 푸른 인광을 보았어요. 수많은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새우들과 미끼 고기들과 오징어가 떼를 지어 몰려 있었어요. 노인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을 느끼며, 날치들이 가슴지느러미로 물을 박차고 슉슉 뛰어오를 때 내는 소리를 들었어요. 노인은 문득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와 있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난 일주일 동안 거대한 우물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헛수고만 했어.' '오늘은 가다랑어와 날개다랑어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봐야겠군. 그곳에 가면 커다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노인은 날이 밝기 전에 노를 내려놓고 미끼를 매달 준비를 했어요. 첫 번째 낚싯줄은 70미터, 두 번째 낚싯줄은 140미터, 세 번째 낚싯줄은 180미터, 네 번째 낚싯줄은 230미터쯤 아래의 물속으로 내려뜨렸어요. 소년이 가져다준 신선한 다랑어 두 마리는 제일 깊이 내려뜨린 낚싯줄 두 개에 매달려 있었어요. 그리고 다른 낚싯줄에는 어제 쓰고 남았던 전갱이와 소년이 가져다준 정어리를 함께 매달았어요. 커다란 물고기가 미끼 고기에서 폴폴 풍기는 냄새를 맡고 낚싯줄을 조금이라도 물거나 당기면 초록색 막대찌가 바로 잠기게 되어 있었어요. 노인은 만약 미끼를 문 물고기가 500미터 밑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70미터짜리 낚싯줄 다발 2개와 여분의 낚싯줄을 준비해 두어서 걱정이 없었어요. 노인은 노를 저으면서 막대찌들을 바라보았어요. 어느새 바다 위로 해가 눈부시게 떠올라, 햇빛이 거울 같은 바다에 반사되어 노인의 눈을 아프게 했어요. ‘나는 근래에 운이 없었을 뿐이야. 하지만 오늘은 운이 좋을지도 모르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이니까. 만약 운이 따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나는 언제든 낚싯줄을 정확하게 드리울 거야.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물고기를 바로 잡을 수 있지.’ 노인은 팽팽하게 드리운 낚싯줄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해가 떠오른 지 두 시간쯤 지나자 노인은 해를 바라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어요. 노인의 눈에 보이는 배는 세 척뿐이었는데, 그것도 아주 멀리 연안 쪽에 있어서 가물가물했어요. ‘이른 아침의 해는 평생 내 눈을 고통스럽게 하는군.’ 노인은 날고 있는 날치 밑에서 물살을 가르며 쫓고 있는 커다란 만새기의 가느다란 등을 볼 수 있었어요. ‘굉장한 만새기 떼야. 만새기 떼에 쫓겨 날치들이 너무 빨리 달아나고 있군.’ 노인은 되풀이해서 뛰어오르는 날치와 군함조의 날갯짓을 바라보았어요. ‘너무 빨라서 쫓아갈 수가 없어. 하지만 뒤처진 물고기 한 마리쯤은 잡을 수 있겠지. 아마 저기에 내가 찾는 커다란 물고기가 있을지도 몰라.' '내가 찾는 물고기는 어딘가에 꼭 있을 테니까.’ 노인은 만새기 떼를 쫓아가며 생각했어요. 낚싯줄이 잘 드리워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검푸른 물속을 살피던 노인은 물결을 따라 떠다니는 플랑크톤 떼를 보고 미소를 지었어요. 플랑크톤이 많은 곳에는 물고기가 많이 몰리곤 했어요. 해가 높이 솟은 하늘을 보니 날씨가 좋을 것 같았어요. 노인은 노를 저으면서 뱃전 너머로 낚싯줄들을 바라보았어요. 돛단배 옆으로 자주색 고깔해파리의 젤리 같은 거품이 몽글몽글 넓게 펼쳐져 있었고, 고깔해파리의 촉수 사이로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녔어요. 노인은 독 때문에 해파리를 싫어했어요. 노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군함조가 다시 맴돌고 있었어요. “아, 새가 또 물고기를 찾았군.” 노인이 빙빙 도는 새를 바라보고 있을 때 다랑어 한 마리가 하늘로 펄쩍 뛰어올랐다가 머리부터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다랑어는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어요. 그 뒤를 이어 여기저기서 다랑어들이 연달아 뛰어오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고, 군함조는 곤두박질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었어요. 넓고 넓은 바다에는 오직 노인의 돛단배만 있었어요. 노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짙푸른 바다와 수평선 너머에 있는 구름뿐이었고, 어두운 바다는 빛을 받아 무지갯빛 광선을 만들었어요. 노를 젓는 노인의 목 뒤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어요. ‘이제 물결에 배를 맡기고 한숨 자 둘까? 낚싯줄 고리를 발가락에 걸어 놓으면 금방 잠에서 깰 수 있을 거야. 아니야, 오늘은 85일째 되는 날이니까 정신 차려서 커다란 물고기를 꼭 잡아야 해.’ 그때, 낚싯줄을 살피던 노인은 초록색 막대찌가 물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옳지, 드디어 물었구나!” 노인은 노를 거두어들인 뒤 팔을 뻗어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낚싯줄을 부드럽게 잡고 기다렸어요. 또 한 번 낚싯줄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물고기가 물밑 180미터에서 낚싯바늘에 꿰인 정어리를 뜯어 먹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물고기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노인은 조심스럽게 왼손으로 낚싯줄을 잡고 가만히 있었어요. ‘여기는 먼바다이고 지금은 9월이니까 커다란 물고기가 잡힌 게 틀림없어.’ 노인은 확신에 차 있었어요. ‘물고기야, 제발 먹으렴!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 있으니 미끼가 싱싱하고 맛있을 게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정어리를 물어라.’ 노인은 낚싯줄을 지켜보면서 물고기가 돌아와서 미끼를 덥석 물기를 기다렸어요. 노인의 바람대로 물고기가 미끼를 건드렸는지 아주 약하게 낚싯줄이 당겨졌어요. “하느님, 물고기가 미끼를 물게 해 주옵소서!” 노인은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그러나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않고 떠났는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어요. “가 버렸나? 절대 그럴 리 없어, 다시 돌아올 거야. 아마 낚싯바늘에 걸려 본 적이 있어서 조심하는 걸 거야.” 그때 낚싯줄이 가볍게 떨리자 노인은 뛸 듯이 기뻤어요. “아, 드디어 미끼를 물었어.” 물고기가 미끼를 문 채 달아나자 낚싯줄이 풀려 나갔어요. 노인은 여분으로 감아 놓은 낚싯줄 두 뭉치 중 하나를 계속 풀어 주었어요. 노인은 물고기가 미끼를 문 채 어두운 물속에서 헤엄쳐 가는 상상을 했어요. 그러나 물고기는 노인의 생각과 달리 꼼짝달싹 움직이지 않았어요. 물고기의 상태가 궁금해진 노인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자 팽팽한 낚싯줄이 곧장 아래로 떨어졌어요. 그리고 낚싯줄이 줄줄 풀려 나가자 노인은 재빨리 낚싯줄 끝에 미리 준비해 둔 여분의 낚싯줄을 붙들어 맸어요. “물고기야, 어서 미끼를 꿀꺽 삼켜라!” 노인은 힘주어 말했어요. ‘자, 낚싯바늘이 네 심장을 뚫을 때까지 삼켜라. 그리고 빨리 올라오렴. 이제 충분히 먹었겠지.’ 노인은 두 손으로 낚싯줄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지만 물고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물고기는 미끼를 문 채 북서쪽으로 서서히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순간 낚싯줄이 팽팽해지더니 배가 천천히 끌려갔어요. 노인은 낚싯줄을 어깨에 둘러메고 뱃전에 기대앉아 물고기가 끄는 힘에 맞서기 위해 몸을 뒤로 젖혔어요. “어쩌다 물고기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됐군. 낚싯줄을 배에 묶어 놓을까? 아니야, 그러다 낚싯줄이 끊어지면 물고기가 도망가 버릴 수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낚싯줄을 꽉 잡고 있다가 물고기가 잡아당기면 풀어 주는 것 밖에 없어. 물고기가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 노인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어요. ‘만약 물고기가 밑으로 내려가서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에이, 그때는 또 무슨 방법이 생기겠지.’ 미끼를 문 지 네 시간이 지났지만 물고기는 계속 돛단배를 끌고 나아갔어요. 그리고 노인도 등에 낚싯줄을 둘러멘 채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어요. “물고기가 정오 무렵에 미끼를 물었는데, 아직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 했군.” 푹 눌러쓴 밀짚모자에 이마가 쓰라렸고, 목도 심하게 말랐어요. 노인은 낚싯줄을 쥔 채 무릎을 꿇고 뱃머리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물을 조금 마시고 쉬었어요. 노인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육지는 보이지 않았어요. ‘육지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 '난 언제든 아바나의 불빛을 보고 돌아갈 수 있으니까.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간 정도 남았고, 그 전에 물고기가 떠오를 거야. 어쩌면 달이 뜰 때 떠오를지도 몰라. 그러지 않으면 해가 뜰 때는 떠오르겠지. 나는 아직 힘이 넘치고 손에 쥐도 나지 않았어.' '아직도 힘차게 배를 끌고 가는 걸 보면 정말 커다란 물고기일 거야. 낚싯바늘을 문 채 입을 꽉 다물고 있겠지. 도대체 어떤 물고기인지 보고 싶군.’ 노인은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바다에 어둠이 내리고 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반짝거렸어요. 노인은 별을 보고 물고기가 방향을 바꾸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날씨가 쌀쌀해져 팔과 다리에 오톨도톨 소름이 돋자, 노인은 낮에 햇볕에 널어놓았던 마대를 낚싯줄을 멘 어깨에 둘렀어요. ‘이런 상태로 계속 간다면 내가 물고기한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물고기도 나한테 할 수 있는 게 없지.’ 노인은 자세를 바꾸고 다시 한번 물고기가 가는 방향을 살펴보았어요. ‘아바나의 불빛이 희미한 걸 보니 좀 더 동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돛단배는 낮에 가던 것보다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어요. ‘오늘 메이저 리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야구를 중계해 주는 라디오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지금은 물고기 잡는 일만 생각하자.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돼.’ 훨씬 편안해진 노인은 잠깐 야구 생각을 했어요. “그 아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나를 도와주면서 이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노인은 소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어요.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있으면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기운을 차리려면 다랑어가 상하기 전에 꼭 먹어 두자. 먹고 싶지 않지만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먹을 거야.’ 노인은 마음속으로 별렀어요. 밤새 귀여운 돌고래 두 마리가 돛단배 주위에서 뛰어오르며 물을 뿜었어요. “돌고래들은 신나게 놀고, 장난도 치고, 사랑도 하지. 그리고 날치처럼 우리 어부들의 형제이기도 해.” 노인은 문득 낚싯바늘에 걸린 커다란 물고기가 가여웠어요. ‘정말 이상한 물고기야. 몇 살쯤 됐을까? 힘이 센 물고기가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처음 봐. 너무 영리해서 물 밖으로 뛰어오르지도 않는 것 같아. 별안간 뛰어오르거나 달려들면 꼼짝없이 당할 텐데. 어쩌면 예전에 낚싯바늘에 여러 번 걸려 본 적이 있어서 이런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 하지만 자신과 싸우는 상대가 한 사람뿐이고, 게다가 노인이란 건 모르겠지. 미끼를 물고 끌어당기는 힘만 봐도 수컷이 틀림없어. 물고기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까? 어쩌면 나처럼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노인은 언젠가 한 쌍의 청새치 중 암컷만 잡았던 때가 떠올랐어요. 수컷 청새치는 항상 암컷 청새치에게 먹이를 양보했어요. 망설임 없이 덥석 미끼를 문 암컷 청새치는 갈고랑이에 걸려 펄떡펄떡 뛰다 금세 지쳐 버렸어요. 그러자 수컷 청새치는 낚싯줄을 넘나들면서 암컷 청새치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노인이 소년의 도움을 받아 암컷 청새치를 갑판 위로 끌어 올린 뒤에도 수컷 청새치는 계속 배를 따라왔어요. 그러다 노인이 작살을 준비하는 동안 수컷 청새치는 날개 같은 가슴지느러미를 활짝 펼쳐 공중으로 뛰어올라 갑판 위에 있는 암컷 청새치를 보고 이내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아, 멋진 수컷 청새치는 끝까지 머물렀었지. 내가 고기잡이를 하면서 보았던 가장 슬픈 일이었어. 우리는 암컷 청새치에게 용서를 빌었지.’ 노인은 죽은 암컷 청새치 생각에 우울해졌어요. “그 아이가 여기 있으면 좋았을 텐데.” 노인은 중얼거리며 모서리가 닳아서 둥그스름해진 뱃머리 널빤지에 몸을 기대고 자세를 편안하게 고쳐 앉았어요. 돛단배를 끌고 가는 물고기의 강한 힘이 어깨를 가로질러 잡고 있는 낚싯줄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어요. ‘내 손에 걸려든 이상 물고기도 어떤 선택이든 해야겠지. 물고기는 어떤 위험도 미치지 못하는 먼바다의 컴컴한 깊은 물속에 머무르고 싶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끝까지 쫓아가서 물고기를 꼭 잡을 거야. 우리는 어제 정오부터 누구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계속 둘이서만 있었어.' '어쩌면 나는 어부가 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나 나는 타고난 어부야. 날이 밝으면 꼭 다랑어를 먹어야지.’ 어두컴컴한 바다 위에서 노인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어요. 날이 밝기 전 뒤쪽에 있는 낚싯바늘 중 하나에 무엇인가 걸렸는지 뱃전 너머로 낚싯줄이 마구 풀려 나갔어요. 노인은 어둠 속에서 왼쪽 어깨에 커다란 물고기가 물고 있는 낚싯줄을 멘 채, 선원용 칼을 빼 뱃전에 걸쳐 있는 다른 낚싯줄들을 재빨리 끊어 버렸어요. 그러고는 남은 낚싯줄 뭉치들의 끝을 연결해 묶었어요. ‘방금 미끼를 문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이 커다란 물고기를 놓쳤다면 누가 그걸 갚아 주겠어.’ 노인은 끊어 버린 낚싯줄에 어떤 물고기가 걸렸든 무조건 놓아 버려야 했어요. “아, 그 아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노인은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때 물고기가 심하게 움직여 노인은 앞으로 넘어졌어요. 그 바람에 눈 아래가 찢어졌는지 피가 뺨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렸지만 턱까지 내려오기도 전에 말라 버렸어요. 노인은 널빤지에 기대앉아서 지금까지 왼쪽 어깨에 메고 있던 낚싯줄을 오른쪽 어깨로 옮겨 멨어요. ‘무엇 때문에 갑자기 움직였을까? 낚싯바늘을 연결한 철사가 물고기의 등을 스쳤나 보군.' '그러나 내 등만큼 아프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물고기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배를 영원히 끌고 갈 수는 없겠지. 문제가 될 일은 모두 해결됐고, 여분의 낚싯줄도 충분하니 더 바랄 게 없어.’ 노인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생각했어요. “물고기야! 난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할 거란다.” 노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소리쳤어요. 차츰 날이 밝아 왔지만 돛단배는 계속해서 물고기에게 끌려가고 있었어요. “물고기가 북쪽으로 가고 있군.” 아침 햇살을 받으며 노인이 말했어요. ‘그러나 해류가 우리를 동쪽으로 밀어낼 거야. 물고기가 해류를 따라 방향을 바꾸면 좋겠어. 그건 물고기가 지쳤다는 뜻이니까.’ 해가 높이 떠올랐을 때도 물고기는 지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징조는 낚싯줄의 기울기로 보아 물고기가 좀 더 위로 올라와 헤엄치고 있다는 거였어요. 이제 커다란 물고기가 물 위로 뛰어오를 가능성이 조금 더 많아졌어요. “하느님, 제발 물고기가 뛰어오르게 해 주십시오. 물고기를 다룰 낚싯줄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기도하듯 말했어요. ‘날이 밝았으니 낚싯줄을 더 당겨 물고기가 뛰어오르도록 해야지. 그러면 부레에 공기가 차서 깊은 곳으로 못 내려갈 거야.’ 그러나 노인은 낚싯줄을 함부로 잡아당기면 물고기가 뛰어오를 때 낚싯바늘이 박혀 있는 부위가 벌어져 낚싯바늘이 빠질 것 같아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어요. “물고기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또 존경해. 그러나 오늘이 가기 전에 너를 꼭 잡고야 말겠어.” 북쪽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배에 내려앉았어요. 그러고는 노인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빙 돈 다음 낚싯줄에 사뿐 내려앉았어요. “작은 새야, 푹 쉬어라. 너만 좋다면 우리 집에 가서 지내자.” 노인은 작은 새가 친구처럼 무척 반가웠어요. 그때 물고기가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노인은 뱃머리 쪽으로 고꾸라졌어요. 만약 낚싯줄을 풀어 주지 않았다면 노인은 자칫 물속으로 빠질 뻔했어요. 오른손에는 상처가 나 있었어요. “물고기가 왜 갑자기 심하게 움직였을까? 어디를 다친 모양이로군.” 걱정이 되어 낚싯줄을 살짝 당겨 보니 여전히 팽팽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어요. ‘항구까지 물고기를 끌고 가려면 고생을 많이 하겠어. 하룻밤 잠을 못 잤다고 기운을 못 쓰고 넘어지다니.’ 노인은 몹시 피곤했어요. “물고기야, 너도 내가 낚싯줄을 당기고 있는 걸 느끼지. 물론 나도 널 느끼고 있단다.” 그사이 작은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만 노인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그 아이가 옆에 있고 소금도 조금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낚싯줄을 왼손으로 옮긴 노인은 무릎을 꿇고 바닷물에 손을 담갔어요. 노인의 손에서 나온 피가 가늘고 길게 떠내려갔어요. “물고기의 속도가 많이 느려졌군.”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손을 들어 햇볕을 쬐었어요. “자, 이제 다랑어를 먹어야지.” 노인은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갈고랑이로 다랑어를 찍어 조심스럽게 끌어당겼어요. 그러고는 한쪽 무릎으로 다랑어를 누른 채 칼로 검붉은 살점을 발라냈어요. 살점은 다시 여섯 토막으로 잘라서 뱃머리 널빤지 위에 펴 놓고, 남은 것은 꼬리를 잡아 뱃전 너머로 휙 던졌어요. “입맛이 없어서 한 토막도 다 못 먹을 것 같은걸.” 노인은 한 토막을 다시 둘로 잘랐어요. 순간 낚싯줄이 세차게 당겨져, 줄을 잡은 왼손에 쥐가 나 오그라들고 뻣뻣해졌어요. 노인은 찡그린 얼굴로 살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었어요. ‘물고기도 배가 고플 거야. 물고기에게 무언가 먹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차피 물고기는 내가 죽여야 하지만.’ 노인은 기운을 내기 위해 잘라 둔 다랑어 토막들을 모조리 먹어 치웠어요. “왼손아, 넌 이제 낚싯줄을 놓아도 돼. 이제부터는 오른손 혼자 물고기를 상대할 거야.” 노인은 왼손으로 붙들고 있던 낚싯줄을 왼발로 눌러 밟고, 몸을 젖혀 등을 짓누르는 낚싯줄의 무게를 버텼어요. “하느님, 제발 쥐가 풀리도록 도와주십시오. 물고기가 어떻게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인은 기도하듯 외쳤어요. ‘물고기는 여전히 잠잠하군. 대체 물고기의 계획은 무엇일까? 물고기가 너무 커서 나는 어떤 계획도 세울 수가 없어. 그저 물고기의 움직임에 따라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지. 물고기가 물 위로 뛰어 올라와 주기만 한다면 잡을 수 있지만, 아직도 물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니 나도 끝까지 버틸 거야.’ 노인은 오그라든 왼손을 바지에 살살 문질러 부드럽게 풀어 보려고 했지만 펴지지 않았어요. 넓은 바다에 떠 있는 것은 오직 노인의 돛단배뿐이었어요. 순간 노인은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러나 노인은 어두운 물속에 비친 무지갯빛 광선과 잔잔한 물결과 물오리 떼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바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노인은 아이스크림처럼 둥글게 피어오른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에 깃털처럼 펼쳐져 있는 새털구름을 바라보았어요. “아, 가벼운 바람이 부는군. 물고기야, 너보다 나한테 더 좋은 날씨로구나.” 노인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물고기에게 소리쳤어요. 왼손에 난 쥐도 서서히 풀리고 있었어요. ‘쥐가 나는 건 정말 싫어. 만약 그 아이가 옆에 있으면 쥐가 난 손을 주물러 주었을 텐데.’ 노인은 물속 낚싯줄의 기울기가 달라진 것을 바라보았어요. 그때 오른손 낚싯줄의 끌어당기는 힘이 달라진 것을 느꼈어요. “물고기가 올라오고 있어. 손아, 제발 풀려라!” 낚싯줄이 천천히 올라오고 배 앞쪽의 물이 부풀었어요. 드디어 커다란 물고기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어요. 물고기가 위로 솟아오르자 양쪽으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어요.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물고기의 머리와 등은 진한 자줏빛이었고, 몸 양옆 줄무늬는 밝은 연보랏빛이었어요. 야구 방망이처럼 긴 주둥이는 칼처럼 가늘고 뾰족했어요.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물고기는 이내 잠수부처럼 물속으로 쑤욱 들어가 버렸어요. 노인은 커다란 낫처럼 생긴 물고기의 꼬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어요. “세상에, 내 배보다 60센티미터는 더 긴 물고기군.” 노인은 중얼거리며 낚싯줄을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당기느라 애를 썼어요. ‘엄청난 물고기야. 만약 물고기가 달아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절대로 물고기가 자신의 힘을 알게 해서는 안 돼.’ 노인은 지금까지 450킬로그램이 넘는 물고기를 많이 봤고, 두 마리 정도 잡아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다른 어부들과 함께 잡은 것이었어요. 지금은 홀로 먼바다에서 물고기와 맞서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어요. 노인의 왼손은 여전히 쥐가 풀리지 않아 뻣뻣했어요. 물고기는 다시 속도를 늦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어요. ‘아까는 물고기가 왜 뛰어올랐을까?’ 노인은 물고기가 자신의 크기를 자랑하려고 뛰어올랐다고 생각했어요. ‘물고기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고 싶어. 하지만 쥐가 나서 오그라든 손을 들키면 안 되지. 어떻게 하든 내가 실제보다 훨씬 강한 상대로 보여야 해. 차라리 내가 저 물고기라면 좋겠어. 지금 물고기의 막강한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강한 의지와 머리뿐이야.’ 노인은 뱃전에 몸을 기댄 채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물고기는 꾸준히 헤엄쳐 나갔고, 배도 바다를 가르며 천천히 나아갔어요. 한낮이 되자 노인의 왼손은 쥐가 풀렸어요. “물고기야, 너에게 나쁜 소식이구나.” 노인은 어깨 위 낚싯줄의 위치를 조금 바꿔 놓으며 말했어요.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지만 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라면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열 번씩이라도 외우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물고기를 잡으면 코브레 성모의 성당을 꼭 순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노인은 무의식적으로 성모송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그리고 노인은 이렇게 덧붙였어요. “복되신 마리아시여, 저 물고기의 죽음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아주 놀라운 물고기입니다.” 노인은 기도를 마치고 나자 기분이 좋아졌지만 통증은 더 심해진 것 같았어요. 노인은 갑판에 기대어 왼손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어요.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시원했지만 햇빛은 여전히 뜨거웠어요. “고물 너머에 던져둔 작은 낚싯줄에 미끼를 갈아 끼워야지. 물고기가 하룻밤 더 버틴다면 나도 많이 먹어 두어야 해. 날치라도 한 마리 배로 뛰어들면 좋겠군. 물고기와 싸우려면 힘을 낭비해서는 안 돼. 나는 저 물고기를 꼭 잡을 거야.” 노인은 물고기에게 인간이 어떤 일을 하는지, 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었어요. 어느새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돛단배는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물고기에게 끌려갔어요. 그리고 노인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증도 약해졌어요. 햇빛이 왼팔과 어깨 위를 비추자 노인은 물고기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걸 알았어요. 노인은 물고기가 멋진 가슴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활짝 펴고, 꼿꼿한 꼬리로 어두컴컴한 바닷속을 헤엄쳐 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어요. 따뜻한 햇볕도 쬐고 손가락을 계속 움직인 덕분에 왼손의 쥐는 완전히 풀렸어요. 노인은 낚싯줄이 닿아 아픈 곳을 풀어 주기 위해 등 근육을 슬슬 움직였어요. “물고기야, 아직도 지치지 않았다면 너도 이상한 물고기란다.” 노인은 쪽빛 하늘을 꿈꾸듯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어요. ‘지금쯤 양키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경기를 하고 있겠지. 이틀 동안 경기 결과를 모르고 있군.’ 노인은 좋아하는 야구 경기가 궁금했어요. 그리고는 좀 더 자신감을 얻기 위해 젊은 시절 카사블랑카 선술집에서 몸집이 큰 흑인 선원과 팔씨름을 했던 일을 떠올렸어요. 시엔푸에고스 출신인 선원은 부둣가에서 가장 힘이 세기로 소문이 자자했어요. 그때 ‘산티아고 선수’로 불린 노인과 선원은 탁자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팔을 꼿꼿이 세웠어요. 그러고는 손을 움켜잡은 채 상대방의 손을 먼저 탁자 위에 넘어뜨리려고 힘을 썼어요. 두 사람은 힘이 막상막하여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어요. 내기에 돈을 건 사람들은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열심히 응원을 하며 밤새도록 들락거렸어요. 밤새 엎치락뒤치락하던 두 사람의 손톱 밑에서 피가 났어요. 램프의 불빛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선원의 거대한 그림자도 벽 위에서 흔들흔들 움직였어요.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선원에게 술을 먹였어요. 술기운에 안간힘을 낸 선원은 산티아고의 손을 8센티미터 정도 눕혔지만, 산티아고는 가까스로 손목을 세웠어요. 그 순간 산티아고는 선원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날이 밝아 올 무렵 산티아고는 젖 먹던 힘을 내서 선원의 손을 내리눌렀어요. 선원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탁자에 손등이 닿았어요. 시합은 일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월요일 아침에 끝이 났어요. 그 뒤 산티아고는 사람들에게 ‘승리자’로 불리며 팔씨름 시합에 나가 계속 이겼어요. 그러나 팔씨름이 고기잡이를 해야 하는 오른손에 나쁜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얼마 뒤 팔씨름을 그만두었어요. 노인은 왼손을 내려다보았어요. ‘햇볕을 충분히 쬐면 다시 쥐가 나지 않을 거야. 오늘 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 마이애미로 향하는 비행기의 커다란 그림자에 놀란 날치 떼들이 뛰어올랐어요. “날치들이 저렇게 많으면 만새기가 있을 거야.” 어두워질 무렵 짧은 낚싯줄에 만새기 한 마리가 걸렸어요. 노인은 만새기를 빼낸 낚싯바늘에 정어리를 매달아 다시 바다로 던지며 낚싯줄의 기울기를 살펴보았어요. “물고기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군, 정말 대단해!” 그러나 물속에 손을 담근 노인은 물의 흐름이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을 느꼈어요. 노인은 배 뒤쪽에 두 개의 노를 묶어 밤사이에 배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했어요. 그러고는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편한 자세로 하려고 꿈적거렸어요. “물고기야, 넌 어떠냐? 나는 아주 좋단다. 왼손도 다 낫고, 내일까지 먹을 걸 가지고 있단다. 너는 계속 배나 끌어라.” 노인은 물고기를 놀리듯 큰소리로 외쳤어요. 9월의 바다에는 달이 늦게 떠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어요. 노인은 배 위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잠시 뒤, 첫 별인 ‘리겔’이 뜨자, 노인은 곧 다른 별들도 하나둘 나타나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친구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물고기도 물론 친구야. 하지만 난 저 물고기를 잡아야 해.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이야.” 노인은 며칠 동안 굶고 있는 물고기가 불쌍했어요. 그러나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 또한 변함이 없었어요. ‘한 시간 정도 쉬었다가 물고기의 상태를 알아봐야지.’ 노인은 두 시간쯤 쉬었지만 늦도록 달이 뜨지 않아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어요. 노인은 여전히 물고기가 끄는 힘을 어깨로 버티고 있었어요. “자네는 잠을 통 못 잤잖아. 잠을 못 자면 머리가 흐려질 테니까 물고기가 얌전한 사이에 잠을 좀 자 두게.” 노인은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어요. ‘아니야, 내 머리는 아주 맑아서 별처럼 초롱초롱하지. 그래도 잠은 자 두어야지.’ 노인은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배 뒤로 가서 만새기를 손질하기 시작했어요. 만새기 배 속에서 싱싱한 날치가 두 마리 나왔어요. 노인은 만새기의 내장을 뱃전 너머로 던지고 몸통에서 껍질을 벗겼어요. 노인은 살을 발라낸 뒤 뼈를 바닷물에 던져 소용돌이가 이는지 지켜보았어요. 뼈는 희미한 빛을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았어요. 노인은 만새기 안에 날치 두 마리를 끼워 배 앞쪽으로 왔어요. 노인은 차가운 별빛 아래에서 만새기 살 절반과 날치 한 마리를 꾸역꾸역 먹었어요. “만새기는 날것으로 먹으니 형편없군. 다음에는 배 탈 때 소금이나 라임을 가져와야지.” 동쪽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자 별들이 숨바꼭질하듯 하나둘 사라졌어요. “사나흘 뒤에는 폭풍우가 몰려오겠군. 하지만 오늘 밤과 내일은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어서 눈을 좀 붙여야지.” 노인은 오른손으로 낚싯줄을 꼭 잡고, 온몸으로 낚싯줄을 누르며 웅크린 채 잠이 들었어요. 노인은 꿈속에서 엄청난 돌고래 떼를 보았어요. 돌고래들은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이내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노인은 이어서 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꿈을 꾸었어요. 그 뒤 황금빛 해변에 사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것을 보았어요. 닻을 내리고 있는 배의 널빤지 위에 턱을 괴고 더 많은 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노인은 행복했어요. 달이 뜬 지 꽤 되었지만 노인은 계속 잠을 잤고, 물고기는 여전히 배를 끌고 갔어요. 갑자기 오른손이 노인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면서 낚싯줄에 오른손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려 노인은 잠에서 깼어요. 노인은 얼떨결에 왼손으로 낚싯줄을 잡았지만 낚싯줄은 등과 왼손에 깊은 상처를 내고 술술 풀려 나갔어요. 바로 그때, 물고기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펄쩍 뛰어올랐다가 풍덩 떨어지기를 반복했어요. 노인은 낚싯줄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당겼다 풀어 주기를 되풀이했어요. 그러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노인은 만새기의 살점에 얼굴이 처박혀 꼼짝달싹 못 하게 되었어요.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군. 물고기에게 낚싯줄값을 치르게 해야지. 꼭 받아 내고야 말겠어.’ 노인은 물고기를 꼭 잡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어요. 커다란 물고기가 뛰어오를 때마다 ‘쏴’ 하는 소리와 물고기가 떨어질 때 ‘첨벙’ 하는 소리가 노인의 귓전을 울렸어요. 팽팽하게 잡아당겼던 낚싯줄이 빠르게 풀려 노인의 두 손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어요. 그러나 노인은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짐작하고 있어서 놀라지는 않았어요. ‘그 아이가 옆에 있었으면 낚싯줄 뭉치에 물을 뿌려 주었을 텐데.’ 노인은 소년을 떠올렸어요. 다행히 낚싯줄이 풀려 나가는 속도가 줄었어요. 그제야 노인은 만새기의 살점을 떼어 내고 얼굴을 들었어요. 노인은 엉거주춤 서서 낚싯줄을 풀어 주었어요. ‘물고기가 수차례 뛰어올랐으니 부레에 공기가 가득 차서 이제 물속에 가라앉아 죽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왜 뛰어올랐을까? 배가 고팠던 걸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침착하고 당당했는데 이상한 일이군.’ 노인은 물고기의 상태가 무척 궁금해졌어요. “어이, 자네나 겁먹지 말고 자신감을 갖게. 아직 낚싯줄도 끌어당기지 못하고 있으면서.” 노인은 계면쩍은 듯 중얼거리며 왼손과 양어깨로 물고기의 힘에 맞섰어요. 노인은 뱃전에 엎드려 오른손을 바닷물에 담갔어요. 잠시 뒤 노인은 오른손을 물에서 꺼내 바라보았어요. “이제 괜찮군, 통증쯤이야 사나이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노인은 왼손도 바닷물에 한 번 담갔다 꺼냈어요. 그리고 기운을 차리기 위해, 왼손으로 먹기 좋게 손질해 놓은 날치를 집어 들어 뼈째 오독오독 씹어서 꼬리까지 모두 먹어 치웠어요. ‘영양이 많은 날치를 먹었더니 힘이 솟는군. 이제 물고기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노인이 바다로 나온 뒤 세 번째 해가 떠오르고 있었어요. 그때 물고기가 빙빙 돌기 시작하자 노인은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낚싯줄을 끌어당겼어요. 그러자 낚싯줄이 서서히 끌려오기 시작했어요. 노인은 두 손으로 낚싯줄을 힘껏 끌어당겼어요. “와, 커다란 원이야. 물고기가 돌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낚싯줄이 더 이상 끌려오지 않고 팽팽해지자, 노인은 어쩔 수 없이 낚싯줄을 풀어 주었어요. ‘물고기가 또다시 뛰어오를 거야. 그때는 꼭 잡아야지.’ 노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물고기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어요. 그대로 두 시간이 지나자 노인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뼛속까지 지쳐 갔어요. 노인은 낚싯줄의 기울기를 보고 물고기가 헤엄을 치면서 점점 위로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노인의 눈앞에 검은 반점들이 보였고, 쏟아지는 땀방울에 이마의 상처와 눈이 쓰라렸어요. 게다가 노인은 두 번이나 현기증이 나서 아찔했어요. “물고기를 앞에 두고 죽을 수는 없어. 하느님, 제발 견딜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노인은 기도하듯 간절하게 외쳤어요. 얼마 뒤, 노인은 두 손으로 잡고 있던 낚싯줄이 덜컥 당겨지는 것을 느꼈어요. ‘물고기가 주둥이로 낚싯줄을 끊으려고 하는 게 분명해. 저렇게 날뛰다가는 낚싯바늘이 빠져 버릴 수도 있는데. 어떡하지?’ 노인은 낚싯줄이 끊어질까 봐 걱정되었어요. “물고기야, 제발 뛰어오르지 마라!” 노인은 물고기가 주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낚싯줄을 조금씩 풀어 주었어요. 잠시 뒤, 물고기가 낚싯줄을 치는 것을 멈추고 빙빙 돌기 시작하자 노인은 또 현기증이 나 눈앞이 아득했어요. 노인은 왼손으로 바닷물을 조금씩 떠서 머리를 적셨어요. “이제 곧 물고기가 올라올 거야. 난 끝까지 견딜 수 있어.” 노인은 물고기가 멀리 도는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쉬다가 가까이 돌 때 일어나서 맞서기로 했어요. 노인은 낚싯줄이 당겨지는 힘이 약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리에 힘을 주고 두 손을 번갈아 움직여 낚싯줄을 끌어당겼어요. “아, 물고기가 다음에 먼 곳을 돌 때 쉬자. 이렇게 두세 번만 더 돌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밀짚모자가 훌렁 벗겨졌고, 몹시 지친 노인은 털썩 주저앉았어요. ‘물고기야, 계속 돌아라. 돌아오면 꼭 너를 잡고야 말겠다.’ 노인이 물고기를 제대로 본 것은 세 번째 돌 때였어요. 물고기가 배 밑을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노인은 물고기의 짙은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저렇게 큰 물고기였다니?” 돌기를 마친 물고기는 배에서 2.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어요. 노인은 커다란 낫보다 훨씬 높이 솟은 물고기의 꼬리부터 보았어요. “세상에, 저렇게 크고 멋진 물고기는 처음 봐!” 물고기가 수면 아래에서 헤엄칠 때 노인은 비로소 줄무늬를 두른 거대한 몸통과 등지느러미와 활짝 펼쳐진 가슴지느러미를 볼 수 있었어요. 노인은 물고기의 커다란 눈과 그 주위를 맴돌며 한가롭게 헤엄을 치는 두 마리의 빨판상어도 볼 수 있었어요. ‘두 번만 더 돌면 작살을 쏠 수 있을 거야.’ 노인은 낚싯줄을 잡고 작살을 던질 기회를 노렸어요. ‘물고기를 최대한 배 가까이 끌어당겨야 해. 절대 물고기의 머리를 찌르면 안 돼, 꼭 심장을 찔러야 해.’ 물고기는 아까보다는 훨씬 더 가까이에서 등을 물 밖으로 내밀었어요. 그러나 노인이 작살을 찌르기에는 좀 멀었어요. 노인은 조금만 더 낚싯줄을 끌어당기면 물고기를 배에 나란히 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노인은 작살에 달린 밧줄이 엉키지 않게 잘 감아 두었고, 밧줄의 끝은 뱃머리의 말뚝에 단단히 매어 놓았어요. 물고기가 거대한 꼬리를 움직이며 돌기 시작하자 노인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낚싯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어요. 그 순간 물고기가 약간 기우뚱했다가 다시 똑바로 섰어요. “내가 물고기를 움직였어. 드디어 내가 물고기를 이길 수 있어.” 노인은 현기증을 느꼈지만 열심히 낚싯줄을 끌어당겼어요. 그러나 물고기도 온 힘을 다해 낚싯줄을 끌고 달아났어요. ‘물고기야, 네가 날 죽이기로 마음먹었구나. 하기야 너도 나를 죽일 자격은 있어. 나는 지금까지 너처럼 크고 멋진 물고기는 본 적이 없단다. 이제 누가 누구를 죽이든 아무 상관이 없지.’ 노인은 가물가물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았어요. “아니야, 정신을 차려야 해.” 노인은 마지막 남은 힘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긍지를 일깨워 물고기와 맞섰어요. 그런데 갑자기 물고기가 가까이 다가와 헤엄을 쳤어요. 노인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고기가 닿을락 말락 배 옆을 스쳐 지나가자 낚싯줄을 얼른 내려놓고 작살을 높이 쳐들었어요. 노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가슴 높이까지 솟아 있는 물고기의 옆구리에 작살을 깊숙이 찔러 넣었어요. 물고기도 마지막 기운을 내 높이 뛰어올라 커다란 몸을 완전히 드러냈어요. 그러고는 엄청난 물 폭탄을 일으키며 물속으로 떨어졌어요. 노인은 정신이 흐릿하고 속이 울렁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어요. 겨우 정신을 차린 노인의 눈에 은색 배를 드러낸 채 물에 둥실 떠 있는 물고기의 모습이 들어왔어요. 바다는 물고기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어요. 물고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노인은 작살의 밧줄을 뱃머리 말뚝에 감아 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어요. “정신을 차려서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해.” 노인은 자신의 돛단배보다 더 큰 물고기를 배에 싣기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물고기를 배 가까이 끌어당겨 밧줄로 잘 묶은 뒤, 돛을 올리고 집으로 가면 돼.’ 노인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기운을 차린 뒤 천천히 노를 저어 물고기 옆으로 갔어요. 그러고는 물고기의 어마어마한 크기가 믿어지지 않아 눈을 껌뻑거렸어요. “700킬로그램은 족히 될 것 같군.” 노인은 밧줄로 물고기의 아가미를 꿰어 머리를 뱃머리에 묶고, 꼬리는 올가미로 엮어 배 뒤쪽에 단단히 묶어 두었어요. 물고기를 배에 나란히 묶어 두자 마치 다른 배 한 척이 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노인은 물고기의 입이 벌어지지 않게 밧줄로 주둥이를 꽁꽁 묶었어요. 노인이 돛대를 세운 뒤 돛을 펼치자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는 돛단배가 남서쪽을 향해 나아가게 했어요. 비록 나침반이 없었지만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무역풍과 돛의 움직임만으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어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둥둥 떠다니는 해초를 건져 흔들자 작은 새우가 후두둑 떨어졌어요. 새우는 맛과 영양이 좋았어요. 돛단배는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노인은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바라보며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상처투성이 손과 등의 통증을 느끼며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노인의 돛단배는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달리고 있었어요. 상어의 습격 노인은 하늘에 뭉게구름과 새털구름이 높이 떠 있는 것을 보고 밤새 바람이 불어오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바닷속으로 퍼져 나간 물고기의 피 냄새를 맡고 청상아리가 쫓아왔어요. 청상아리는 상어 가운데 가장 빠르게 헤엄칠 수 있었어요. 게다가 새 발톱 모양으로 오므린 무시무시한 이빨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워 청상아리와 맞서 싸울 만한 물고기는 거의 없었어요. 청상아리는 푸른 등지느러미로 물살을 가르며 있는 힘을 다해 물고기를 쫓아오고 있었어요. ‘덴투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먹어 치우지.’ 노인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청상아리의 움직임을 살피며 작살에 밧줄을 맸어요. 밧줄은 물고기를 배에 붙들어 매는 데 써 버려 짧았어요. 노인의 온몸은 결의에 차 있었지만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어요.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아.’ 청상아리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노인은 생각했어요. ‘아,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어가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잡아 죽일 수는 있을 거야.’ 노인은 배 뒤쪽으로 다가와 물고기를 공격하는 청상아리의 커다란 입과 괴상하게 생긴 두 눈을 보았어요. 청상아리는 물고기의 꼬리 위 살을 덥석 물어뜯었어요. 노인은 청상아리의 두 눈 사이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작살로 힘껏 내리꽂았어요. 노인은 생기를 잃어 가는 청상아리의 눈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청상아리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꼬리로 물살을 헤치며 달려 나갔어요. 그 바람에 팽팽하던 작살의 밧줄이 툭 끊어지면서 청상아리는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어요. “맙소사, 20킬로그램 정도는 족히 뜯어 먹었겠군.” 노인은 분노에 찬 눈길로 청상아리가 사라진 물속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상어가 작살이랑 밧줄도 몽땅 가져가 버렸으니 어쩌지. 물고기의 피 냄새를 맡고 다른 상어들도 몰려올 텐데.’ 노인은 꼬리 윗부분 살이 뭉텅 뜯겨 나간 물고기를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노인은 청상아리가 물고기를 물어뜯을 때 마치 자신의 살이 뜯기는 것처럼 느꼈어요. ‘물고기를 뜯어 먹은 상어를 죽였으니 됐어.’ 노인은 모든 게 꿈이어서 물고기를 잡지도 않고,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편안히 누워 있었다면 좋을 것 같았어요. “사람은 지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무너질 수는 있어도 결코 질 수는 없지.” 노인은 큰소리로 외쳤어요. ‘나는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잖아. 그래도 물고기를 죽인 것은 미안한 일이야.’ 노인은 죽은 물고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이제부터 상어들이 몰려올 텐데 작살이 없으니 큰일이군. 상어는 잔인한 데다 힘도 세고 영리해. 하지만 좀 전에는 내가 더 영리했어. 아니 내가 더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노인은 다음에 나타날 상어 생각에 걱정이 앞섰어요. “이봐, 즐거운 생각을 해 보게. 집이 점점 가까워지고, 무게가 20킬로그램 줄었으니 가볍게 달릴 수 있잖아.” 노인은 앞으로 자신과 물고기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 잘 알고 있었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노인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 “아, 칼을 노의 손잡이에 붙들어 매면 되겠군.” 노인은 선원용 칼을 꺼내 노의 손잡이에 붙들어 맸어요. 배는 바람을 타고 쌩쌩 잘 달렸어요.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노인은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을 죄라고까지 생각했어요. 그러다 문득 자신이 물고기를 죽인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 나는 죄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나는 먹고살기 위해 저 물고기를 죽인 게 아니야. 나는 어부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죽인 거야. 나는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비록 죽었지만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 물고기를 사랑한다면서 죽이는 것은 죄가 안 될 거야. 아니야. 더 큰 죄가 될지도 모르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노인을 혼란스럽게 했어요. ‘고기잡이는 나를 살아가게 해 주는 일이면서 또 죽이는 일이기도 해. 아니, 날 살아가게 해 주는 건 그 아이야.’ 노인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배의 돛이나 연기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다만 배 앞쪽에서 휙휙 날아오르는 날치와 둥둥 떠다니는 누런 해초들만 보였어요. 뱃전에 기대어 두 시간쯤 쉬고 있던 노인은 두 마리의 상어 중 첫 번째 상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앗, 갈라노다!” 노인은 첫 번째 상어 바로 뒤에서 유유히 헤엄쳐 오는 두 번째 상어의 지느러미를 보았어요. 물고기의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상어들은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며 다가왔어요. 갈색의 삼각형 지느러미와 큰 곡선을 이루며 움직이는 꼬리로 보아 장완흉상어 같았어요. 노인은 칼을 붙들어 맨 노를 양손으로 꽉 잡고 상어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장완흉상어는 썩은 물고기는 물론 노와 키까지 먹어 치우고, 심지어 배가 고프면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어요. “상어야, 올 테면 와 봐라!” 장완흉상어는 청상아리처럼 와락 달려들지 않았어요.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배 밑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물고기를 덥석덥석 물어뜯는 동안 배가 이리저리 흔들렸어요.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노인을 살피고 있다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쏜살같이 물고기에게 달려들어 이미 물어뜯긴 꼬리 부분을 덥석 물었어요. 노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에 붙들어 맨 칼로 상어의 머리를 찔렀어요. 물고기에게서 떨어져 나간 상어는 죽어 가면서도 살점을 삼켰어요. 그러나 배 밑에서 물고기를 뜯어 먹고 있는 상어 때문에 배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어요. 노인은 상어를 배 밑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돛을 매어 쓰는 아딧줄을 움직여 돛단배를 옆으로 돌렸어요. 상어가 모습을 드러내자 노인은 재빨리 칼로 찔렀어요. 그러나 상어의 가죽은 워낙 단단해서 살만 찢어지고, 오히려 노인의 손과 어깨만 아팠어요. 상어가 코를 물 밖으로 내밀며 물고기 가까이 오자 노인은 재빨리 상어의 납작한 머리를 정확하게 칼로 찔렀어요. 노인은 끈질기게 공격하는 상어를 상대로 힘겹게 싸웠어요. 마침내 상어는 노인의 칼에 척추와 머리뼈 사이를 깊숙이 찔린 뒤 힘없이 떨어져 나갔어요. “상어들아, 잘 가거라. 빨리 가서 먼저 간 네 친구들이나 만나거라. 어쩌면 네 어미였는지도 모르겠다.” 노인은 상어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어댔어요. “나쁜 녀석들! 물고기의 사분의 일을 뜯어 먹다니. 그것도 제일 맛있는 부위를 말이야.” 노인은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이게 꿈이라면 좋겠군.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물고기야, 미안하다.” 노인은 물고기를 바라보며 뉘우치듯 말했어요. 물고기는 거친 파도에 씻기고 피가 빠져나가 흡사 거울의 뒷면 같은 은빛을 띠고 있었어요. ‘이렇게 멀리 오는 게 아니었어. 너와 나를 위해서도 그게 좋았을 텐데. 물고기야, 정말 미안하다.’ 노인은 또 몰려올 상어들을 물리치기 위해 노에 맨 칼과 줄을 살폈고, 양손을 회복시키기 위해 물에 담갔어요. “두 번째 상어가 얼마나 많이 뜯어 먹었는지 배가 많이 가벼워졌군.” 그러나 노인은 상어가 나타날 때마다 무참히 살점이 뜯겨 나간 물고기를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 뒤 몸집이 작은 상어가 나타났어요. 넓은 입을 가진 상어는 마치 돼지가 여물통에 달려들듯 덤벼들었어요. 노인은 노 손잡이에 붙들어 맨 칼로 거침없이 상어 머리를 찔렀어요. 그런데 상어가 몸을 뒤틀며 물러서는 바람에 칼날이 뚝 부러졌어요. 상어는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어요. “아직 갈고랑이와 노 두 자루와 키 손잡이와 몽둥이도 있으니까 괜찮아.” 노인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리쳤어요. 어느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바람이 세게 불자 노인은 곧 육지가 나타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이내 상어들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노인은 갈색 지느러미들이 배를 향해 나란히 헤엄쳐 오자, 몽둥이를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상어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첫 번째 상어가 물고기를 물면 몽둥이로 콧등이나 정수리를 힘껏 내리쳐야지.’ 상어들은 노인의 생각과 달리 한꺼번에 달려들었어요. 배 가까운 쪽에 있던 상어가 입을 벌려 물고기의 옆구리로 파고들자, 노인은 정수리 한가운데를 내리쳤어요. 그리고 상어가 물고기에게서 미끄러질 때 콧잔등을 세게 때렸어요. 노인이 한 마리를 상대할 때 다른 한 마리가 물고기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어요. 노인은 몽둥이로 두 번째 상어의 머리를 내리쳤지만 상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물속을 들락거리며 마음껏 물고기의 살점을 뜯어 먹던 상어들은 노인이 몽둥이로 마구 내리치자 잠시 뒤 모습을 감추었어요. ‘아, 나는 이제 너무 늙었어. 예전 같으면 저 녀석들을 모두 때려눕혔을 텐데.’ 노인이 상어들과 싸우는 사이 날이 저물었어요. 온몸에 힘이 빠진 노인은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항구에서 보내는 불빛을 찾아 보았어요. ‘이제 곧 아바나의 불빛을 보게 될 거야. 사람들이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아이는 당연히 걱정하고 있겠지만 틀림없이 나를 믿고 있을 거야,’ 노인은 상어들에게 물어뜯겨 볼품이 없어진 물고기에게 더는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반쪽 물고기야, 미안하다. 내가 우리 둘 다 형편없이 망가뜨렸구나.” 노인은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녔다면 상어를 용감하게 물리쳤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상어가 나타나면 끝까지 싸워야지.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 노인은 의지를 불태우며 말했어요. ‘아직 물고기의 반이 남아 있고, 내 운도 조금은 남아 있을 지도 몰라. 아니야, 이렇게 멀리 나왔을 때부터 내 운은 다 사라졌어.’ 노인은 캄캄한 어둠 속이지만 익숙하게 노를 저어 갔어요. “만약에 행운을 파는 곳이 있다면 지금 당장 사고 싶군. 그런데 무엇으로 사지? 사라진 작살과 부러진 칼과 다친 두 손으로 행운을 살 수 있을까?” 노인은 행운을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지난 84일 동안 바다에서 허탕 친 것으로도 행운을 사려고 했었잖아. 그리고 거의 살 뻔했지.” 노인은 스스로에게 힘주어 말했어요. 밤 10시쯤, 마침내 노인은 항구에서 비치는 불빛을 발견했어요. ‘다시 상어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 노인의 간절한 바람은 자정 무렵에 깨졌어요. 노인은 상어가 떼를 지어 나타나자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마냥 물고기가 물어뜯기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어요. 노인은 몽둥이로 인정사정없이 상어의 머리를 내리치며, 물고기의 살점이 뜯겨 나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돛단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고스란히 느꼈어요. 노인은 오로지 소리와 느낌에 의지해 몽둥이를 내리쳤지만 그마저도 상어에게 빼앗기고 말았어요. 노인은 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상어의 머리를 향해 맹렬히 휘둘렀어요. 상어들은 배 앞쪽으로 올라와 한 마리씩 번갈아 가며 물고기의 살점을 물어뜯었어요. 노인은 물고기의 단단한 머리를 물고 늘어지는 상어를 향해 계속 키 손잡이를 휘둘렀지만 그마저 뚝 부러져 나갔어요. 노인은 날카롭게 부러진 손잡이 끝으로 상어를 찔렀어요. 마지막 상어는 그제야 물고기한테서 떨어져 나갔어요. 물고기가 상어들에게 살을 모두 뜯겨 거대한 뼈대와 앙상한 가시를 드러내자 노인은 비로소 자신이 상어들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받아들였어요. 노인은 부러진 키 손잡이를 키 구멍에 끼워 넣어 자신의 집이 있는 항구를 향해 나아갔어요. 한밤중에 몰려온 상어들은 식탁에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줍기라도 하듯, 뼈만 남은 물고기를 공격했어요.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항구로 돌아가는 일에만 신경을 썼어요. 다행히 돛단배는 크게 부서진 곳이 없었고, 옆에 매단 물고기의 무게가 줄어 가볍게 쌩쌩 달렸어요. 얼마 뒤, 노인의 눈에 익숙한 바닷가의 불빛이 가물가물 보였어요. 그제야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노인 노인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을 바닷가에 다다랐어요.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테라스 식당의 불도 꺼진 지 오래여서 노인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어요. 노인은 힘겹게 돛단배를 자갈밭 위로 올리고 바위에 단단히 묶어 놓았어요. 돛대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던 노인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어요. 가로등 불빛에 비친 물고기의 커다란 꼬리가 뚜렷하게 보였어요. 삐죽 내민 주둥이가 달린 머리와 하얗게 발라진 등뼈와 앙상하게 가시만 남은 물고기는 처음 잡았을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지만 크기만은 그대로였어요. 지칠 대로 지친 노인은 언덕길에서 한 번 넘어지고, 오두막에 도착하기까지 다섯 번이나 주저앉았어요. 오두막으로 들어선 노인은 돛대를 벽에 세워 놓았어요. 그러고는 곧바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 소년은 여느 때처럼 노인의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소년은 곤히 잠들어 있는 노인이 숨을 쉬는지 살핀 뒤, 노인의 손에 난 상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소년은 테라스 식당에 가는 길에 내내 서럽게 울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돛단배 주위에 모여 서서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어요. 소년은 이미 배를 확인했기 때문에 테라스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마놀린, 영감님은 좀 어떠시냐?” 노인의 돛단배를 살펴보던 어부가 소년에게 물었어요. “주무시고 계세요.” “와, 코에서 꼬리까지 5미터 50센티미터나 되는구나.” 다른 어부는 자로 물고기를 재며 소리쳤어요. “그쯤 될 거예요.” 소년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 테라스 식당으로 갔어요.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어 뜨겁게 해 주세요.” 소년은 테라스 식당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어요. “마놀린, 저렇게 큰 물고기는 본 적이 없구나. 물론 어제 네가 잡은 물고기 두 마리도 컸지만 말이다.” 테라스 식당 주인인 마틴 씨가 커피를 타며 말했어요. “제가 잡은 물고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커요.”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소년은 커피가 든 깡통을 가지고 노인의 오두막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어요. 소년은 깊이 잠든 노인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어요. 노인은 몸을 뒤척이며 깨어날 것 같았지만 다시 잠들었어요. 소년은 식은 커피를 데우려고 장작을 빌리러 나갔다 돌아왔어요. 얼마 뒤 노인이 깨어났어요.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따뜻한 커피 좀 드세요.” 소년은 커피를 유리컵에 따라 노인에게 주며 말했어요. 노인은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마셨어요. “마놀린, 나는 그들한테 졌단다.” “물고기에게 진 건 아니잖아요, 할아버지.” “맞아, 나는 뒤에 나타난 상어들에게 진 거야.” “페드리코 아저씨가 배와 도구들을 살피고 있어요.” “물고기 머리는 페드리코에게 주고, 주둥이는 네가 갖고 싶으면 가지렴.” “그럼 제가 가질게요.” “사람들이 나를 찾았었니?” “당연하죠, 해안 경비대와 비행기까지 출동했었어요.” “바다는 아주 넓고 내 배는 작아서 찾기 힘들었을 거야.” 오로지 자기 자신과 바다만을 상대로 혼잣말을 했던 노인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마놀린, 네가 보고 싶었단다. 너는 얼마나 잡았니?” “첫째 날에는 한 마리, 둘째 날에도 한 마리 그리고 셋째 날에는 두 마리를 잡았어요.” “오, 많이 잡았구나.” “할아버지, 앞으로 저와 함께 물고기를 잡아요.” “아니야, 나는 이제 운이 다했단다.” “운은 상관없지만 필요하다면 제 운이 있잖아요.” “네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니?” “괜찮아요. 저는 어제 두 마리나 잡았어요. 이제부터 우리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요. 저는 아직 할아버지께 배울 게 아주 많아요.” “좋은 고기잡이용 작살을 하나 구해서 배에 항상 싣고 다녀야겠다. 낡은 포드 자동차의 용수철로 칼도 만들어야겠구나. 내 칼은 부러졌거든.” “작살과 칼은 제가 준비해 놓을게요. 할아버지, 바람은 며칠이나 계속 불까요?” “아마 사흘쯤, 아니 더 불 수도 있지.” “저는 그동안 바다에 나갈 준비를 마쳐 놓고 있을게요. 할아버지는 손에 난 상처를 빨리 치료 받으세요.” “걱정 말아라. 상처를 낫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할아버지, 그만 누우세요. 저는 나가서 깨끗한 셔츠와 음식을 가지고 올게요.” “올 때 내가 바다에 나가 있었던 동안의 신문을 가져오렴.” 노인은 자리에 누우며 말했어요. “네, 빨리 나으셔서 제게 뭐든지 다 가르쳐 주세요. 저는 할아버지께 배울 것이 아주 많아요. 도대체 얼마나 고생을 하신 거예요?” “많이 했단다.” “푹 쉬고 계세요. 저는 음식과 신문을 가져올게요. 그리고 약국에서 손에 바를 약도 사 올게요.” 오두막을 나온 소년은 언덕을 내려가면서 또 서럽게 울기 시작했어요. 테라스 식당에는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때 바다를 내려다보던 한 여인의 눈에 커다란 꼬리가 달린 크고 긴 하얀 등뼈가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어요. “저게 뭐예요?” 여인은 손가락으로 커다란 등뼈를 가리키며 종업원에게 물었어요. “상어가.” 종업원은 ‘상어가 청새치를 뜯어 먹은 거예요.’라고 대답하려고 했어요. “어머, 상어의 꼬리가 저렇게 멋지고 아름다운지 몰랐어요.” “음, 나도 모르고 있었어.” 옆에 있던 남자도 맞장구를 쳤어요. 언덕 위의 오두막에서 노인은 다시 잠을 자고 있었어요. 소년은 엎드려서 자고 있는 노인 옆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어요. 노인은 사자의 꿈을 꾸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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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4월, 어느 봄날이었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 한 젊은이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체격은 건장했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젊은이는 색이 몹시 바랜 옷을 입고 다 떨어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탄 늙은 말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다. 젊은이의 기묘한 행색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젊은이의 늠름한 태도와 허리에 찬 긴 칼은 그가 만만치 않은 기사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다. 젊은이의 이름은 다르타냥, 나이는 열여덟 살, 가스코뉴 지방의 가난한 귀족의 아들이었다. 그의 꿈은 국왕 폐하를 섬기는 총사가 되는 것이어서 지금 파리의 트레빌 총사대 대장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고향 가스코뉴를 떠나 묑까지 오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다르타냥의 아버지는 뛰어난 기사였으며, 그에게 무예를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다르타냥이 자신을 이길 정도의 실력에 이르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도 이제 스스로 실력을 닦아야 할 때가 왔구나. 자, 네 소원대로 파리에 가도 좋다. 이 아비는 네가 부디 훌륭한 총사가 되어,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살길 바란다. 아버지가 못 이룬 몫까지 합쳐 명예를 떨치거라.” 그러고는 아들에게 편지 한 통을 주었다. 그 편지는 루이 13세를 모시고 있는 총사대 대장 트레빌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다. 검술도 뛰어나지만, 국왕 폐하의 가장 훌륭한 신하란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가서 그에게 보여 주어라. 그러면 네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다르타냥은 어머니로부터 특별한 연고를 만드는 법도 배웠다.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그 연고를 바르면 곧 낫기 때문에, 싸우는 일이 많은 다르타냥에게는 아주 요긴하게 쓰일 약이었다. “아들아, 이 말을 타고 가도록 해라. 이 말은 우리 집에서 태어났고 줄곧 여기서만 있었으므로 네 사랑을 받을 만하다. 절대로 팔아선 안 되며 명예롭게 늙어 죽을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다르타냥은 차라리 걸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말이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은 자기가 보아도 우스꽝스러웠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다르타냥, 넌 귀족이며 기사다. 그러니 이 말을 타고 의젓한 모습으로 가야만 한다.” 다르타냥은 하는 수 없이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종일 달려서 겨우 묑에 이르게 되었다. 다르타냥도 말도 몹시 지쳐 있었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여관이 하나 보였다. 여관 앞에 이른 다르타냥이 말에서 내리고 있을 때였다. “으하하!” 체격이 단단하고 세련된 옷차림을 한 귀족이 다르타냥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그의 부하인 듯한 사람들도 다르타냥과 그의 말을 비웃고 있었다. 다르타냥은 발끈 화를 냈다. “왜 나를 보며 그렇게 웃는 겁니까?” “난 자주 웃는 편은 아닐세. 하지만 웃고 싶을 때 웃을 권리는 나에게 있지.” 귀족은 여전히 빈정대며 말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에 눈매는 날카로웠고 검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멋진 칼자루며 입고 있는 옷차림으로 보아서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다르타냥은 이 귀족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다르타냥은 칼을 뽑아 들고 귀족에게 외쳤다. “비겁하단 말을 듣고 싶지 않으면 어서 칼을 뽑으시오!” 하지만 귀족은 여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무례한 귀족을 그냥 놓아줄 다르타냥이 아니었다. 다르타냥은 귀족을 쫓아가며 외쳤다. “어서 돌아서시오! 뒤에서 공격하고 싶지는 않소!” “나를 공격한다고?” 귀족은 놀란 표정으로 다르타냥을 쳐다보았다. 화가 난 다르타냥은 귀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귀족은 피하는 듯하더니 어느새 한 손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다르타냥과 싸울 생각이 없는 듯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다르타냥은 그의 거만한 기세에 더욱 무섭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부하들이 다르타냥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다르타냥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휘청거려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리친 몽둥이에 이마를 맞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여관 주인은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다르타냥을 부엌으로 옮겨 치료해 주었다. 여관 주인이 다르타냥을 치료해 주고 응접실로 오자 귀족이 물었다. “그래, 그 미친 녀석은 어떤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헛소리를 하더군요. 트레빌 대장님 아래 있는 사람을 모욕하면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 라고 하면서 주머니를 툭툭 쳤습니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보았더니 트레빌 대장님께 보내는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귀족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뭐, 트레빌 대장이라고? 그럼 예삿일이 아니군. 어쩐지 어려 보이는 녀석이 칼을 제법 다루더라니. 내가 그 내용을 좀 알아야겠다.”
호두까기 인형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오늘은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축복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이브예요. 슈탈바움 씨네 오누이 프리츠와 마리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거실 근처를 기웃거렸어요. 아이들은 지금 거실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엄마와 아빠가 거실에서 멋진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있었거든요. “마리, 아까 드로셀마이어 대부님 봤니?” 프리츠가 여동생 마리에게 물었어요. “아니, 대부님이 이번엔 어떤 선물을 만들어 주실까?” 마리는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말했어요. 판사인 드로셀마이어는 작은 키에 비쩍 마른 몸, 오른쪽 눈에는 검은 안대를 한 볼품없는 모습의 사람이었어요. 그는 여러 가지 손재주가 아주 뛰어났는데, 특히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손재주는 놀라울 정도였어요. 게다가 주머니에 항상 신기한 것을 넣어 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어요. 드로셀마이어는 해마다 크리스마스에는 정성을 들여 만든 선물로 프리츠와 마리를 감동시켰어요. 엄마는 드로셀마이어의 선물을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하게 여겨 유리장에 보관해 두곤 했지요. “이번엔 대부님이 장난감 병정들을 위해 근사한 요새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다.” “아니야, 대부님은 내게 예쁜 정원을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어.” 프리츠는 퉁명스럽게 마리의 말을 가로막았어요. “난 차라리 엄마, 아빠가 주시는 선물이 더 좋아. 대부님이 주시는 선물은 어차피 유리장에 들어가 마음껏 가지고 놀 수도 없잖아.” “그건 대부님 선물을 함부로 망가뜨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잖아.” 그때, 두 아이의 누나이자 언니인 루이제가 다가왔어요. “선물은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거야.” 이윽고 날이 어두워졌어요. 프리츠와 마리는 서로 바싹 다가와 앉았어요. 밤공기가 두 아이의 코끝에서 살랑이더니 창밖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이 스쳐 지나갔어요. 바로 그때,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온종일 닫혀 있던 방문이 활짝 열렸어요. “얘들아, 오랫동안 기다렸지?” 아이들은 넋을 잃은 채 한동안 밝은 거실 쪽을 바라보았어요.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예쁜 장식들과 막대 사탕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어요. “자, 이제 이쪽으로 와 보렴.” 엄마는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있는 탁자 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어요.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선물이 놓여 있었어요. 마리는 리본으로 장식된 드레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지금까지 본 옷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에요.” 프리츠는 줄 맞추어 서 있는 병정 인형과 날쌔 보이는 말 인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이 말은 사나워 보이기는 하지만 상관없어. 난 충분히 길들일 수 있으니까.” 또다시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려왔어요. “우아, 드로셀마이어 대부님이다!” 두 아이는 조르르 드로셀마이어에게 달려갔어요. “오랫동안 기다렸지?” 드로셀마이어가 책상 위를 덮고 있던 덮개를 치우자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어요. “우아, 정말 굉장하다!” 거기에는 푸른 잔디와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정원, 거울로 만든 반짝이는 창과 금빛 종탑을 가진 작은 성이 놓여 있었어요.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문과 창문을 열자 정교하게 만들어진 신사 인형과 숙녀 인형이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리고 종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꼬마 인형들도 보였어요. “앗, 이건 대부님이잖아.” 프리츠가 가리킨 곳에 드로셀마이어를 닮은 인형이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넋을 잃고 인형들을 바라보던 프리츠가 갑자기 드로셀마이어에게 말했어요. “대부님, 저도 성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프리츠, 그건 불가능한 일이란다.” 드로셀마이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어요. 성은 금빛 종탑을 더해서 본다고 해도 프리츠보다 크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춤추는 아이들을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해 주세요.” 드로셀마이어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어요. “안 된다니까, 프리츠. 기계 장치라는 것은 한 번 고정을 시켜 놓으면 바꿀 수가 없단 말이다. 알겠니?” “치, 그렇다면 전 제 병정들이 훨씬 더 좋아요. 이 병정들은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거든요. 이렇게 말이에요.” 프리츠는 탁자 쪽으로 달려가 병정들을 한 줄로 세운 다음 줄을 맞추어 걷게 했어요. 마리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마리 역시 똑같은 동작만 반복하는 성안의 인형들에 싫증이 났던 거예요. “역시 아이들에게는 이런 작품은 소용없나 봅니다. 이 성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겠어요.” 드로셀마이어는 아이들의 신통치 않은 반응에 기분이 몹시 언짢아 보였어요.
로빈슨 크루소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내 이름은 로빈슨 크루소다. 나는 1632년 영국의 요크시에서 로빈슨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열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는 내가 안정된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바다로 나가 여행을 해 보고 싶어요. 한 번만 허락해 주세요. 여행에서 돌아와 아니다 싶으면 다시는 떠나지 않을게요.” 아버지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1년 뒤 나는 집을 떠났다. 나는 헐 이라는 항구에서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다. “로빈슨, 항구에는 웬일이야?” “그냥 구경이나 할 겸 나왔어.” “그래? 그럼 나와 함께 런던으로 가지 않겠어? 마침 일이 있어서 아버지의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가려던 참이었거든.” “런던으로의 항해라. 그거 좋지.” 나는 친구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배에 올라탔다. 1651년 9월 1일, 나는 부모님에게 떠난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배는 강을 벗어나자,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에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배를 처음 탄 나는 첫날부터 심한 뱃멀미를 하였다. 바다로 나온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아침,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쳤다. 선원들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성난 파도와 싸웠다. 그러나 폭풍우는 좀처럼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상용 닻을 내려라!” 선장은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오,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선장은 신음하듯 기도를 올렸다. 그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에 물이 들어온다!” 한 선원이 소리치자 선장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물을 퍼내라!” 선원들은 허둥지둥 배에 들어오는 물을 퍼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장은 하는 수 없이 대포를 쏘아 주위에 있는 배들을 향해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제는 틀렸어.” 모두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풍랑을 이겨 내고 우리 앞으로 나아가던 배에서 구명보트를 내려 주었다. 나와 선원들은 간신히 보트에 옮겨 탔다. 잠시 뒤 우리가 타고 있던 배는 조금씩 기울더니 그만 가라앉고 말았다. 보트는 용케 성난 파도를 헤치고 해안에 닿았다. 우리는 걸어서 야머스항에 도착했다. 친구의 아버지인 선장은 나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바다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런던으로 갔다. 나는 런던에서 한 선장을 만났다. 선장은 아프리카 기니로 간다고 했다. “선장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나는 선장에게 나의 꿈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나와 함께 기니로 떠나는 게 어떻겠나. 자네는 부두에서 선원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고팔게. 그러면 틀림없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드디어 나의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되었다. 나는 선장과 함께 항해하는 동안 돈도 벌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선장에게 항해에 필요한 천문학, 수학, 항해술 등을 배웠다. 선장은 내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선장은 기니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나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항해사가 선장이 되어 나는 기니로 가는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배가 아프리카에서 가까운 바다 위를 지나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수상한 배가 나타났다!” 배의 높은 곳에서 망을 보던 선원이 소리쳤다. 선장은 긴장한 채 수상한 배를 살펴보았다. “터키 해적선이군. 해적선이다!” 선장의 외침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장은 모든 돛을 올리라고 명령한 다음 전속력으로 배를 조종했다. 하지만 해적선은 더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타고 있는 배에는 짐이 많이 실려 있어 속력이 나질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두 배였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이대로 간다면 한두 시간 내에 붙잡힐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 전투 준비!” 선장이 각오한 듯 용감하게 명령했다. 배에는 열두 문의 대포가 있었다. 그러나 대포는 멀리 쏠 수가 없었고, 방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해적선이 뒤로 바짝 쫓아와 공격을 시작하자 기다리고 있던 선원들이 일제히 대포를 쏘았다. 대포는 해적선의 돛에 명중했다. 잠시 주춤했던 해적선은 곧 우리 배를 바짝 뒤쫓아 왔다. 우리 배로 뛰어 올라온 해적들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모두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싸우자!” 선원들은 결사적으로 대항했지만, 해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선장은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항복을 하고 말았다. 나와 선원들은 밧줄에 묶여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있는 살레 라는 항구로 끌려갔다. 나는 목숨은 건졌지만 해적 두목의 눈에 들어 노예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가 된 불행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불행은 앞으로 닥칠 불행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톨스토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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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나라의 한 마을에 부자 농부가 살고 있었어요. 농부에게는 세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어요. 큰아들 세묜은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나갔고, 둘째 아들 뚱뚱보 타라스는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러 도시로 갔어요. 마음씨 착한 막내아들 이반과,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딸 말라냐는 집에 남아 농사일을 했어요. 이반은 너무 착해서 ‘바보 이반’으로 불렸지요. 바보 이반과 말라냐는 열심히 일해서 부모님을 모셨어요. 세묜은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워 벼슬과 재물을 받았고, 귀족의 딸과 결혼도 했어요. 하지만 사치가 심한 아내가 돈을 물 쓰듯 펑펑 써서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지요. 어느 날, 세묜은 땅을 빌려준 농부들에게 소작료를 받으러 갔지만, 도리어 하소연만 듣고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세묜은 할 수 없이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지는 지금까지 저에게 아무것도 안 주셨잖아요. 그러니 아버지 땅의 삼 분의 일을 저에게 나눠 주세요.” “너도 나에게 해 준 것이 없는데 왜 내가 너에게 땅을 나눠 주어야 하느냐? 그리고 그건 이반과 말라냐에게도 공평하지 않단다.” 아버지는 딱 잘라 거절을 했어요. “아버지, 이반은 바보예요. 게다가 말라냐는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데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럼, 직접 농사를 짓고 있는 이반에게 물어보자.” 아버지와 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반이 말했어요. “아버지, 형이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아버지는 땅의 삼 분의 일을 세묜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얼마 뒤 세묜은 왕의 명령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어요. 둘째 아들 타라스는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모았고, 상인의 딸과 결혼도 했지만 만족하지 못했어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던 타라스는 장사 밑천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어요. “아버지, 저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세요.” 아버지는 타라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어요. “타라스, 너는 우리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잖니. 그리고 우리 재산은 이반과 말라냐가 열심히 일해서 늘려 놓은 거란다.” “아버지, 이반은 바보라서 재산이 필요 없어요.” 그리고 타라스는 다짜고짜 이반에게 말했어요. “이반, 너에게 무슨 재산이 필요하니? 곡식의 반을 나에게 줘. 그리고 회색 수말도 가져갈게.” “형이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져가세요.” 마음씨 좋은 이반이 히죽 웃으며 말했어요. 자기 몫을 챙긴 타라스는 회색 수말도 함께 끌고 돌아갔어요. 이반은 전과 같이, 늙은 암말 한 마리로 열심히 일을 했어요. 땅속에 사는 늙은 악마는 이반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면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약이 바싹 올랐어요. 그래서 작은 도깨비 셋을 불러 모아 하소연을 했어요. “얘들아, 바보 이반이 형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도 사이좋게 지내서 내 일을 망쳐 놓았단다. 너희가 몰려가서 삼 형제가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할 수 있겠지?” 늙은 악마의 말에 첫째 도깨비가 대답했어요. “네, 그거야 쉽죠. 먼저 삼 형제를 가난하게 만든 뒤, 한집에 모여 살게 하면 틀림없이 서로 치고받고 싸울 거예요.” “좋아, 삼 형제가 서로 싸우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마라. 만약 그냥 돌아오면 너희들을 혼내 주겠다.” 늪에 모인 도깨비들은 머리를 맞대고 삼 형제가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할 방법을 의논했어요. 도깨비들은 서로 쉬운 일을 맡으려고 옥신각신했어요. 그러다 제비를 뽑아 각자 할 일을 정하고, 먼저 일을 끝낸 도깨비가 다른 도깨비를 도와주기로 했어요. 도깨비들은 늪에서 다시 만날 날짜를 정하고 각자 맡은 형제를 찾아갔어요. 약속한 날짜가 되자 도깨비들은 늪에 다시 모였어요. “내 일은 아주 잘되어 가고 있어. 아마 세묜은 내일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거야.” 큰아들 세묜을 맡은 첫째 도깨비가 말했어요. “어떻게 했는데?” “나는 세묜을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군인으로 만들었어. 세묜은 왕에게 가서,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정복하자고 말했지. 왕은 곧바로 세묜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인도 왕과 전쟁하라고 보냈어." "나는 양쪽 군대가 싸우기 전날 밤에 세묜 쪽의 화약을 몽땅 물에 적셔 놓고, 인도 왕 쪽에는 지푸라기로 군인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빨리 말해 줘.” 첫째 도깨비가 뜸을 들이자 둘째 도깨비가 재촉했어요. “다음 날 아침, 사방에서 인도 군인들이 몰려들자 세묜의 군인들은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어. 전쟁에 진 벌로 세묜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 내가 가서 몰래 빼내면 아버지 집으로 도망칠 거야.” 첫째 도깨비가 우쭐우쭐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어요. “타라스도 앞으로 일주일 이상 버티지 못할 거야. 나는 타라스에게 욕심과 질투심을 불어넣었어. 그 뚱뚱보는 보는 것마다 손에 넣으려고 안달을 내더군. 가진 돈을 다 쓰고, 심지어 빚까지 내서 물건들을 사들였지. 일주일 뒤에는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데, 그 전에 내가 타라스가 쌓아 놓은 물건들을 다 못 쓰게 만들어 버릴 거야." "그러면 타라스도 아버지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지.” 둘째 도깨비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어요. 그러고는 이반을 맡은 셋째 도깨비에게 물었어요. “물론 너도 잘되어 가고 있겠지?”
돈키호테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에스파냐의 라만차라는 시골 마을에 ‘키하노’라고 하는 나이가 쉰 남짓 된 귀족이 살고 있었어. 키하노의 집에는 하녀와 조카딸 그리고 농사일을 거드는 하인과 여윈 말 한 마리, 날쌘 사냥개 한 마리가 있었지. 키하노는 몸이 마르고 얼굴은 작은 편이지만, 콧수염과 턱수염이 아주 잘 어울려 풍채가 제법 의젓해 보였어. 키하노는 기사 이야기책에 푹 빠져 있었어. 기사 이야기책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지. 키하노의 머릿속은 기사의 모험담으로 가득 찼어. 급기야 그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일을 실제로 있었던 일로 착각하게 되었어. 그리고 주인공인 용감한 기사가 마치 자기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지. 어느 날 아침, 키하노는 기사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어. 제일 먼저 옛 조상이 입었던 낡은 갑옷을 꺼내어 입고 투구를 썼어. 그리고 가죽과 뼈만 남은 앙상한 말에게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 돈키호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뒷문으로 빠져나갔어. 돈키호테의 눈앞에 푸른 들판이 아름답게 펼쳐졌어. 돈키호테는 끝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지. 마을을 빠져나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적은 나타나지 않았어. 돈키호테는 맥이 빠졌어. 길을 나서기만 하면 자기의 용맹함을 시험해 볼 만한 상대가 곧 나타나리라 생각했었거든. 종일 쉬지 않고 걸었기 때문에 해 질 무렵 돈키호테와 로시난테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어. 돈키호테가 사방을 둘러보니 멀리 집 한 채가 보였어. “아아, 저것은 틀림없이 성이다! 그렇다! 기사가 되려면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서 기사 임명을 받아야 한다고 책에 쓰여 있었지. 그래, 나도 저 성의 성주님께 기사 임명을 받도록 하자. 그러면 내일부터는 진짜 기사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힘을 내어 그곳으로 향했어. 그런데 돈키호테가 성인 줄 알았던 곳은 사실 보잘것없는 여관이었지. 그러나 돈키호테에게는 훌륭한 성으로 보였어. 돈키호테가 여관 가까이 가자 밭에서 돼지 떼를 모으고 있던 돼지치기가 뿔 나팔을 힘차게 불었어. 돈키호테는 뿔 나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 “저것은 틀림없이 기사를 맞는 나팔 소리이다. 로시난테, 이제 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관 앞에는 두 여자가 서 있었어. 돈키호테의 눈에는 여자들이 귀부인들로 보였어. 돈키호테는 눈을 반짝이며 여관으로 들어섰지. 여관 주인은 이상한 차림의 돈키호테를 보자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어. 그러나 웃음을 참고 돈키호테를 공손하게 맞이했어. “어서 오십시오, 누추한 곳이지만 정성껏 대접하겠습니다. 침대가 없습니다만……. 무슨 분부*든 내리기만 하십시오.” “성주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의 나들이옷은 갑옷이며 나의 휴식은 전투니까요.” 돈키호테가 말을 마구간에 매어 놓고 돌아오니, 두 여자가 갑옷을 벗겨 주었어. 그런데 두 여자는 투구를 벗기지 못해 쩔쩔맸어. “빨리 못 벗기겠느냐!” 돈키호테는 이렇게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상대방이 성주와 지체* 높은 귀부인이라 생각하니 차마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어. 돈키호테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고 있는데, 오히려 여관 주인이 화를 버럭 내며 소리를 질렀어. “이거 참, 투구가 꽉 끼어 벗길 수가 없군. 에이! 그냥 잘라 버리자! 어서 가위를 가져와!” 그 소리를 들은 돈키호테는 깜짝 놀랐어. “성주님! 그 일만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이 투구는 명마 로시난테와 함께 나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투구를 잘라야 한다면 차라리 일생 쓰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투구를 쓴 채 어떻게 식사를 한단 말이에요?” 한 여자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 “괜찮습니다.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이 정도의 불편함은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먹을 것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돈키호테는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들어 올린 후 힘겹게 식사를 마쳤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갑자기 돈키호테는 여관 주인 앞에 무릎을 꿇었어. 그러더니 진지하게 말했어. “성주님, 죄송하지만 저의 기사 임명식을 맡아 주십시오!” 돈키호테의 부탁을 듣고 여관 주인은 장난기가 발동했어*. 그래서 말투까지 바꾸며 돈키호테를 놀렸어. “좋소, 오늘 밤 우리 안뜰을 지켜 주시오. 그럼 내일 아침 내가 그대를 기사로 임명해 주겠소.” 돈키호테는 여관의 안뜰로 나와 보초를 서기 시작했어. 그는 한눈팔지 않고 여기저기를 살폈어. 그러다가 더운 날씨에 갑옷을 벗어 우물 뚜껑에 올려놓았어. 그때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자세히 보니, 웬 수상한 남자가 우물 뚜껑에서 돈키호테의 갑옷을 집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있었어. “음, 버릇없는 놈!” 돈키호테는 달려가서 남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어. 그는 말에게 줄 물을 뜨러 온 여관 손님이었어. 별안간 들려오는 비명에 놀라 여관에 묵고 있던 사람들 모두 허둥지둥 안뜰로 뛰어나왔어.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덤빌 테면 덤벼 봐라!” 여관 안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싸움터로 바뀌었어. 난처해진 여관 주인이 돈키호테를 말리며 소리쳤어. “그대는 안뜰을 잘 지켰소. 지금 당장 기사 임명식을 시작하겠소.” 돈키호테는 허겁지겁 칼을 거두고 여관 주인 앞에 무릎을 꿇었어. 주인은 가지고 온 여관 장부를 엉터리로 읽은 다음, 칼등으로 돈키호테의 목과 등을 살짝 내려치며 말했어. “이것으로 임명식은 끝났소.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곳을 떠나시오!” “성주님, 고맙습니다.” 돈키호테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 돈키호테는 이른 새벽에 여관을 나섰어. 여관 주인에게 숙박비 대신으로 가슴에 대는 갑옷을 빼앗겼지만, 어엿한 기사가 되었단 생각에 조금도 아깝지 않았지. 돈키호테는 못다 한 준비를 마저 하고 하인도 데려올 생각에 다시 집으로 향했어. 길을 가다가 잠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숲속에서 애처로운 소리가 들렸지. ‘저 애처로운 소리를 듣고 그대로 갈 수야 없지.’ 돈키호테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로시난테를 몰았어. 거기에는 한 소년이 나무에 묶여 농부에게 매를 맞고 있었어. 돈키호테가 다가가 그 까닭을 물었어. 농부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지. “이 녀석이 매일같이 양을 한두 마리씩 잃어버리는 주제에 품삯을 안 준다고 꾀를 부리지 않겠소. 그래서 혼을 내는 중이오.” “그렇다고 어린 소년을 때려서야 되겠느냐? 소년을 풀어 주면 네 목숨을 살려 주겠다!” 기가 찬 농부는 겁먹은 시늉을 하며 소년을 풀어 주었지. 돈키호테는 기사로서 첫 번째 임무를 잘 해냈다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어. 하지만 돈키호테가 떠나자 농부는 소년을 다시 나무에 묶고 아까보다 더 세게 매질을 해 댔어. 다시 얼마쯤 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어. 그들은 비단을 사러 가는 상인들이었지. 하지만 돈키호테에게는 그들 역시 기사로만 보였어. 돈키호테는 자신의 용맹함을 뽐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큰 소리로 그들을 멈춰 서게 했어. “멈추어라! 나는 정의를 지키는 기사 돈키호테다! 나의 둘시네아 공주님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인정한다면 길을 비켜 주겠다!” 상인들은 돈키호테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어이가 없었지. 그중 한 사람이 말했어. “기사님, 우리는 그 공주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공주님을 우리와 만나게 해 주신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분인지 봐 드리겠습니다.” “보고 난 뒤에야 누구인들 말을 못 하겠는가? 보지 않고도 공주님의 아름다움을 믿고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해야 참다운 기사라고 할 수 있지. 이 건방진 녀석들아, 나하고 한바탕 싸워야 할 줄 알아라!” 돈키호테는 칼을 뽑아 들고 상인에게 덤벼들었어. 하지만 돈키호테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로시난테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어. 돈키호테는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지. 그러면서도 돈키호테가 계속 큰소리를 치자 상인들은 달려들어 돈키호테를 마구 두들겨 팼어.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 버렸어. 돈키호테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지. 얼마 뒤, 돈키호테는 정신을 차렸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누워 있었지. 그때 마침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지나가다가 돈키호테를 보게 되었어. “아니, 키하노 님이 아니세요? 누가 나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돈키호테는 대답도 없이 뜻 모를 말만 중얼거렸지. 농부는 돈키호테를 자기 나귀에 태운 다음, 로시난테의 고삐를 쥐고 돈키호테의 집으로 향했어. 한편, 돈키호테의 집에서는 그와 친한 마을 신부와 이발사가 집을 나간 돈키호테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지. 하녀가 이렇게 말했어. “기사 이야기책 때문에 주인님이 떠나신 거예요. 언제나 입버릇처럼 기사가 될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 옆에서 키하노의 조카딸이 거들었어. “아저씨는 기사 이야기책을 읽으면 주무시지도 않았어요. 어떤 때는 칼을 빼 들어 벽의 이곳저곳을 찌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곤 했어요. 그러고는 거인들을 해치웠다고 떠들어 댔어요.” 신부와 이발사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어. 네 사람은 우선 돈키호테의 기사 이야기책을 모조리 불사르기로 했지. 그들이 이렇게 의논하고 있을 때 요란한 소리가 들렸어. “주인님이 돌아오셨다, 주인님이!” 모두 깜짝 놀라 뛰어나가 보니 꼴사나운 몰골로 돈키호테가 나귀 등에 매달려 있었어. 농부는 사람들에게 도중에 키하노를 만나게 된 일과 키하노가 중얼거리던 소리까지 빠짐없이 말해 주었지. 농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신부는 신음하듯 중얼거렸어. “음, 아무래도 책을 불사르지 않으면 안 되겠군.” 다음 날, 신부는 이발사와 함께 가족들 앞에서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어.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신부와 이발사가 깜짝 놀라 뛰어가 보니 돈키호테가 칼을 뽑아 들고 벽을 찌르면서 마구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어. “진정하십시오. 기사님은 지금 대단히 피로하십니다. 이번에는 뜻하지 않은 실수로 적을 놓쳐 버렸지만, 다음에는 당신이 반드시 승리하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신부는 돈키호테를 부축하여 침대 위에 뉘었어. 돈키호테는 밥을 배불리 먹고 깊은 잠에 빠졌어. 돈키호테는 조금 회복이 되자 제일 먼저 서재로 갔어.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서재로 들어가는 문이 없는 거야. “주인님,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이 집에는 이제 서재도 책도 없습니다.” 하녀가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했어. 그러자 옆에서 조카딸이 거들었지. “네, 그래요. 무냐톤이라는 마법사가 이 집 주인에게 원한이 있어 책을 모두 가지고 간다고 했어요.” “음, 너희가 잘못 들었구나. 무냐톤이 아니라 푸리스톤이라고 했을 거다.” 돈키호테는 어느 책에서 본 마법사 푸리스톤을 생각해 냈어. 그리고 언젠가 그를 혼내 주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었지. 그로부터 이 주일쯤 지나자 돈키호테는 완전히 회복되었어. 돈키호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가진 투구를 고치고 갑옷과 창을 새로 만들었으며 칼도 날카롭게 손질했어. 그런 다음 이웃에 사는 농부인 산초를 찾아갔어. “나를 따라다니면 흥미로운 모험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악당을 물리쳐 섬을 얻게 되면 자네를 그 섬의 영주로 삼겠다.” 순진한 산초는 돈키호테의 뚱딴지같은 말에 홀딱 넘어갔어. 이렇게 해서 돈키호테는 아무도 모르게 떠날 준비를 끝냈어. 드디어 떠나기로 한 날이 되었어.
셰익스피어 이야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오, 로미오. 당신은 왜 하필 로미오인가요? 나를 위해 아버지와 당신의 이름을 버려 주세요. 그러지 못한다면 사랑의 맹세라도 해 주세요. 그러면 나도 캐퓰릿이라는 이름을 버릴게요.” 줄리엣의 말을 들은 로미오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럼 나를 사랑이라고 부르시오. 그대가 로미오라는 이름이 싫다면 나는 이제 로미오가 아니오.” 줄리엣은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그가 로미오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둘은 한참 동안 사랑을 속삭였어요. 그때 유모가 이제 자야 한다며 줄리엣을 불렀어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거든요. 마침내 둘은 잘 자라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어요. 흥분한 로미오는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어요.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로렌스 신부를 만나기 위해 곧장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갔어요. 로렌스 신부는 로미오가 사랑의 괴로움 때문에 밤을 지새운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로미오는 티볼트에게 욕을 퍼부으며 칼을 뽑아 들었어요. 티볼트는 로미오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어요. 이 무서운 사건은 대낮에, 더구나 베로나 거리의 한복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금세 몰려들었어요. 모여든 사람 중에는 캐퓰릿 부부와 몬태규 부부, 베로나의 영주도 있었어요. 베로나의 영주는 죽은 머큐시오의 친척이었어요. 로미오의 친구인 벤볼리오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므로, 영주는 벤볼리오에게 이 사건에 관해 설명하도록 했어요. 영주는 사건을 자세히 조사한 다음, 로미오를 베로나에서 추방한다고 말했어요. 줄리엣은 기가 막혔어요. 신부가 된 지 몇 시간도 안 되어 남편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그녀는 처음에는 몹시 화를 냈어요. “아름다운 폭군, 천사 같은 악마, 까마귀 같은 비둘기, 늑대의 마음을 가진 양, 꽃 같은 얼굴에 뱀과 같은 심장을 지닌 사람.” 줄리엣은 이런 말로 로미오에 대한 미움을 쏟아 냈어요. 그러나 결국 사랑의 마음이 이겼어요. 사촌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며 흘리던 눈물은 사촌 오빠에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남은 로미오에 대한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어요. 이어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추방을 당한 데 대한 슬픔의 눈물을 흘렸어요. 줄리엣에게 그 소식은 티볼트가 죽었다는 소식보다도 더 끔찍했어요. 로렌스 신부는 작은 병을 줄리엣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어요. “네가 가족 묘지로 옮겨지면 나는 로미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너를 데려가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눈앞에 닥친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신부님 말씀대로 하겠어요.” 줄리엣은 집으로 돌아와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캐퓰릿 부부는 무척 기뻐하며 결혼식 준비를 했어요. 마침내 결혼식 전날이 되었어요. 줄리엣은 이런저런 걱정에 괴로웠어요.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로미오가 나를 데리러 오기 전에 깨어나면 어떡하나? 해골과 시체가 가득한 가족 묘지는 무서운데.’ 하지만 줄리엣은 용기를 내어 약을 마셨어요. 그리고 바로 정신을 잃었어요. 다음 날 아침, 파리스가 음악을 연주해 신부의 잠을 깨우려고 음악가들을 데리고 왔을 때 줄리엣의 몸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어요.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요. 결혼식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이 장례식에 쓰이게 되었어요. 잔치 음식들은 장례 음식이 되었고, 결혼을 축하할 노래는 우울한 장송곡으로 변했고, 신부에게 뿌릴 꽃들은 묘지로 가는 길에 뿌려졌어요. 줄리엣이 죽었다는 소식은 만토바에 있는 로미오에게도 전해졌어요. 줄리엣은 죽은 척하고 있을 뿐이며 가족 묘지에서 로미오가 데리러 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로미오는 미칠 듯이 괴로워했어요. 모든 사실을 알려 주려고 로렌스 신부가 보낸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절망한 로미오는 약방에 들러 독약을 산 다음, 묘지에 누워 있는 줄리엣 곁에서 죽을 결심을 했어요. 로미오는 한밤중에 베로나에 있는 캐퓰릿 집안의 묘지에 도착했어요. 로미오가 횃불을 밝히고 지렛대로 묘지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 옆에 누군가가 있었어요. 줄리엣의 약혼자 파리스였어요. 파리스는 로미오가 줄리엣의 묘지를 파헤치러 온 줄 알고 칼을 뽑아 들었어요. 로미오는 줄리엣의 묘지 옆에서 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아 파리스를 애써 달랬지만 소용없었어요. 마침내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파리스는 로미오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어요. 죽은 사람의 얼굴을 횃불로 비추어 보던 로미오는 죽은 사람이 줄리엣과 결혼하려고 했던 파리스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어요. 로미오는 불행한 운명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였던 파리스의 손을 잡았어요. “당신을 캐퓰릿의 묘지에 묻어 주겠소.” 로미오가 묘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줄리엣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는 듯이 누워 있었어요. 죽음조차도 줄리엣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어요. 줄리엣의 곁에는 피투성이가 된 티볼트도 함께 누워 있었어요. 로미오는 죽은 티볼트를 향해 용서를 빌고 줄리엣의 입술에 마지막 입맞춤을 한 다음, 가지고 온 독약을 마셨어요. 그때, 로렌스 신부가 삽과 등불을 들고 황급히 달려왔어요. 로렌스 신부는 만토바로 보낸 심부름꾼이 뜻밖의 사고로 로미오에게 편지를 전해 주지 못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급히 묘지로 달려온 것이었어요. 로렌스 신부는 묘지 입구에 핏자국이 있고 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기며 묘지 안으로 들어섰어요. 등불로 주위를 비추어 보던 로렌스 신부는 깜짝 놀랐어요. “아, 로미오가! 벌써 숨을 거두었구나. 오, 파리스까지도.” 로렌스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아, 이처럼 참혹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다니! 오, 줄리엣이 깨어나기 시작하는군.” 그때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줄리엣이 살며시 눈을 떴어요. 줄리엣은 로렌스 신부에게 로미오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때 밖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어요. 로렌스 신부는 겁을 먹고 서둘러 달아났어요. 줄리엣은 사랑하는 로미오가 손에 약병을 쥐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어요. 영주는 두 사람의 맹세를 만족스럽게 여기고 하늘을 우러러 조용히 말했어요. “오늘 아침은 어쩌면 이렇게도 구슬프단 말인가! 해마저 슬픔에 잠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구나! 자, 이제 모두 돌아가서 슬픔을 달래도록 하시오. 세상에는 많은 슬픈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젊은이들의 사랑만큼 애처로운 것은 또 없을 거요.” 그리하여 대대로 베로나의 평화를 깨뜨려 오던 두 집안의 불화는 젊은이들의 슬픈 사랑으로 마침내 끝이 나게 되었어요. 햄릿은 아버지를 여읜 슬픔과 어머니에 대한 실망이 겹쳐,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와 새 왕은 햄릿의 마음을 돌리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햄릿의 마음을 가장 괴롭힌 것은 아버지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새 왕은 선왕이 뱀에 물려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렸어요. 그러나 햄릿은 숙부인 새 왕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어요. 그 무렵, 궁전 안에는 매일 밤 죽은 선왕의 유령이 성에 나타난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어요. 유령을 본 것은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었는데,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리하여 햄릿은 친구인 호레이쇼와 병사 한 명과 함께 유령이 나타난다는 곳에서 보초를 섰어요.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추운 밤이었어요. 밤이 깊어지자 소문대로 유령이 나타났어요.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왕이 틀림없었어요. 왕은 투구와 갑옷으로 단단히 차려입고 있었어요. 유령을 본 햄릿은 놀라움과 무서움으로 부르르 떨었어요. 유령은 틀림없는 아버지의 모습이었거든요. “아버지!” 햄릿은 유령을 향해 소리쳤어요. “틀림없는 아버지라면 어찌하여 묘지 속에서 편히 잠드시지 못하고, 이처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십니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때마침 한 무리의 배우들이 궁전으로 찾아왔어요. 햄릿은 아버지가 죽은 상황과 비슷한 내용의 연극을 만들어 왕이 그 연극을 어떠한 태도로 구경하는지 살펴보기로 했어요. 그러면 그가 아버지를 죽였는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햄릿은 배우들에게 그와 같은 연극을 준비시킨 다음, 왕과 왕비를 초대했어요. 연극의 줄거리는 빈에 사는 어느 대공의 집에서 동생이 형의 재산을 탐내어 형을 독살하고 형수와 결혼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왕은 그러한 내용인 줄도 모르고, 왕비를 비롯한 여러 신하와 함께 연극을 구경하러 왔어요. 연극은 대공 내외가 이야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어요. 대공의 아내는 갖가지 달콤한 사랑의 말을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당신이 먼저 죽는다고 해도 저는 절대로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않겠어요. 만약에 그런 짓을 한다면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어요. 재혼하는 것은 당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요.” 햄릿은 왕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어요. 왕과 왕비는 연극을 보기가 몹시 괴로운 것 같았어요. 연극이 계속 진행되어 동생이 형을 죽이려고 다가가는 장면에 이르자, 왕은 자기가 저지른 죄와 너무 비슷하여 더는 연극을 볼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얼굴빛이 굳어진 왕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자리를 뜨고 말았어요. 햄릿은 유령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복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때 왕비의 부름을 전하는 시종이 햄릿을 찾아왔어요. 햄릿이 왕비에게 가자 왕비는 햄릿의 행동을 꾸짖었어요. “클로디어스왕은 너의 숙부며 이제는 너의 아버지이다. 너 때문에 네 아버지가 무척 불쾌해하시는구나.” 햄릿은 어머니가 친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아버지’라고 말한 것에 몹시 화를 냈어요. “아,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왕비이자, 남편 동생의 부인이 된 사람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서유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날 때 네 개의 땅덩어리가 있었어요. 그중 하나인 동승신주라는 곳에 오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이 이야기는 오래국의 높은 산인 화과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갑자기 바위가 쩍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돌 알이 하나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돌 알이 깨지면서 원숭이 한 마리가 나왔어요. 범상치 않게 생긴 원숭이는 돌에서 나왔다고 하여 돌 원숭이라고 불렸어요. 돌 원숭이는 그때부터 산속에서 다른 원숭이들과 어울려 자유롭게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어요. 목욕하러 시냇가로 간 원숭이들은 호기심에 시냇물을 따라 한참 동안 올라가 보았어요. 원숭이들은 시냇물이 물소리가 요란한 폭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늙은 원숭이가 원숭이들에게 말했어요. “여기서 우리의 왕을 뽑기로 하자.”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원숭이들은 모두 찬성했어요. 그리고 모두 머리를 맞대고 어떤 원숭이를 왕으로 뽑을 것인가를 궁리했어요. “저 폭포 아래에 들어가서 속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아 오는 원숭이를 왕으로 모시는 게 어떨까?” 늙은 원숭이가 제의했어요. 원숭이들은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어요. 그러나 폭포에 선뜻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원숭이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때 갑자기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돌 원숭이가 용감하게 폭포 아래로 뛰어든 거예요. 원숭이들은 돌 원숭이가 살아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폭포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물속으로 뛰어든 돌 원숭이는 간신히 헤엄을 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요. 정신없이 헤엄을 치던 돌 원숭이는 거친 물결이 잔잔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더니 돌 원숭이는 어느새 다리 위에 서 있었어요. 그곳에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했고, 커다란 동굴이 있었어요. 동굴 앞에는 화과산복지 수렴동동천 이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서 있었어요. 돌 원숭이는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어요. ‘야,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구나. 빨리 원숭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돌 원숭이는 다시 치솟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리고 정신없이 헤엄쳐서 폭포 속에서 빠져나왔어요. 원숭이들은 그날부터 돌 원숭이를 왕으로 모셨어요. “이제부터 나를 미후왕이라고 불러라.” 미후왕은 폭포 아래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고는 원숭이들을 데리고 폭포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원숭이들은 동굴을 보금자리로 삼고 평화롭게 살았어요. 어느 날, 미후왕은 부하 원숭이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어요. 한창 흥을 내던 미후왕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어요. 원숭이들은 무슨 영문 인지 몰라 미후왕 앞으로 몰려갔어요. “폐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한 원숭이가 미후왕에게 슬퍼하는 까닭을 물었어요. “지금까지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왔다. 그러다가 며칠 전, 문득 죽음을 생각해 보았지. 그걸 생각하니 몹시 슬프구나. 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을까?” 그 말을 들은 원숭이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미처 깊이 생각해 보지는 못했지만, 미후왕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은 곧 자기네들의 걱정이기도 했던 거예요. 나이가 제일 많은 원숭이가 미후왕의 앞으로 나와 말했어요. “폐하, 영원히 사는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신선을 만나 죽지 않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미후왕은 크게 기뻐하며 당장 신선을 찾아 나서겠다고 말했어요. “바다든 땅이든 샅샅이 뒤져서 신선을 만나야겠다. 그래서 영원히 늙지 않고 사는 법을 배워서 돌아오겠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미후왕은 다음 날 뗏목을 만들고 식량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원숭이들과 작별한 뒤, 혼자 뗏목을 타고 바다를 향해 한없이 떠내려갔어요. 며칠이 지나, 미후왕이 탄 뗏목은 드디어 어느 육지에 이르렀어요. 미후왕이 그곳에 상륙해 보니, 거기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어요. 그들은 미후왕의 털투성이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어요. 미후왕은 도망치는 사람 하나를 붙잡아 옷을 빼앗아 입은 다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사람의 말을 익히고 사람의 생활 방식을 배웠어요. 그러나 사람 중에는 늙지 않고 사는 법을 알고 있는 자가 없는 것 같았어요. 미후왕은 또다시 뗏목을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갔어요. 9년이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뗏목은 서우하주라는 곳에 닿았어요. 그곳은 숲이 우거진 곳이라 신선이 살고 있을 것 같았어요. 미후왕은 기대에 부풀어 험한 비탈길을 올라가 보았어요. 산꼭대기에 이르자 파랗게 이끼가 낀 동굴이 나타났어요. 동굴 앞에는 삼성동이라고 새겨진 큰 돌이 서 있었어요. 동굴 문을 살피고 있으니 동굴 안에서 한 소년이 나왔어요. “스승님께 도를 배우러 오신 분이오?” 소년이 대뜸 이렇게 물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미후왕은 허리를 굽혀 공손히 대답했어요. 잠시 뒤, 미후왕은 소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어요. 동굴 안에는 제자인 듯한 사람들 수십 명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수염이 하얀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어요. 미후왕은 노인 앞에 나아가 넙죽 절을 했어요. “너는 어디서 왔으며, 이름은 무엇이냐?” “네, 저는 동승신주 오래국에 있는 화과산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안 계셔서 이름이 아직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너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저는 화과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서 나왔습니다.”
이솝, 라퐁텐 우화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화창한 봄날, 해가 들판을 밝게 비추고 있었어. 갑자기 거센 바람이 휙 불어와 들판을 휩쓸었어. “도대체 무슨 짓이야?” 해가 바람에게 화를 냈어. “체, 감히 나에게 큰소리를 쳐? 이 들판의 왕은 바로 나, 바람이야.” “어째서 네가 들판의 왕이니?”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바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바람이 큰소리를 치자 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 “바람아, 강하다고 다 좋은 게 아니야. 때로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도 있어.” 그러자 바람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어. “흥,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내기를 해 보자!” “그래, 좋아!” 마침 나그네가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어. “저 나그네의 옷을 누가 먼저 벗기나 내기해 볼까?” 해가 말하자 바람이 으스대며 나섰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먼저 해 보겠어.” 바람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후욱! 바람이 강하게 불자 나그네는 옷깃을 꼭 여몄어. “뭐야? 이 정도로 부족해?”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었어. 하지만 나그네는 옷깃을 더욱 꼭꼭 여미고 발걸음을 재촉했어. “이제 내 차례야.” 해는 환하게 웃으며 나그네를 향해 따뜻한 햇볕을 부드럽게 비추었어. 그러자 나그네가 외투를 벗었어. 해가 더욱 부드럽게 비추자 나그네는 옷을 훌훌 벗고 강물로 뛰어들었어. “거봐,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겼지? 강하다고 다 이기는 건 아니란다.” 해의 말에 바람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나른한 오후, 양치기 소년은 언덕에서 혼자 양들을 돌보고 있었어. “아이, 심심해!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양치기 소년은 무릎을 ‘탁’ 쳤어. 그러고는 마을을 향해 외쳤어. “늑대가 나타났어요. 도와주세요!”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허둥지둥 언덕으로 달려왔어. “늑대는 어디 있니?” 그러자 양치기 소년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어. “늑대는 없어요. 심심해서 장난을 친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황당해하며 양치기 소년에게 말했어. “다시는 그런 장난을 치면 안 된다! 알겠니?”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타이르고 돌아갔어.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양치기 소년은 마을을 향해 또다시 외쳤어. “늑대가 나타나 양들을 잡아먹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몽둥이를 들고 허둥지둥 언덕으로 올라왔어. 하지만 양치기 소년은 깔깔 웃으며 말했어. “헤헤! 이번에도 장난이에요. 너무 심심해서요.” “이런 나쁜 녀석! 어른들을 놀리다니!” 마을 사람들은 화를 버럭 내며 돌아갔어.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양치기 소년은 한가롭게 양들을 돌보고 있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로 늑대가 나타난 거야. 양치기 소년은 마을로 허둥지둥 달려가 외쳤어. “늑대가 나타났어요. 이번에는 진짜예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 했어. “저 녀석이 또 거짓말을 하는군. 이번에는 절대 안 속아.” 양들은 늑대에게 잡아먹혔고,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했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어. 여우는 우아한 두루미를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서 언젠가 골탕을 먹이려 벼르고 있었어. 어느 날, 여우는 두루미를 찾아가 말했어. “두루미 님,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녁이 되자 두루미는 여우의 집으로 갔어. “어서 드세요.” 여우는 납작한 접시에 맛있는 수프를 가득 담아 두루미 앞에 놓았어. 그러나 두루미는 수프를 한 방울도 먹을 수가 없었어. 부리가 뾰족해서 납작한 접시에 담긴 수프를 먹을 수가 없었던 거야. “두루미 님은 수프를 싫어하시나 봐요.” 여우는 두루미의 접시에 담긴 수프도 싹 핥아 먹어 버렸어. 쫄쫄 굶은 두루미가 여우에게 말했어. “여우 님, 다음번엔 내가 초대할게요.” 며칠 뒤 여우가 두루미의 집에 초대받아 갔어. “두루미 님,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요.” 여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식탁 앞에 앉았어. 두루미는 목이 좁고 긴 병에 맛있는 고깃국을 가득 담아 여우 앞에 놓았어. “여우 님, 마음껏 드세요.” 하지만 여우는 고깃국을 한 방울도 먹을 수가 없었어. 목이 좁고 긴 병에 입을 넣을 수가 없었거든. 두루미는 병 속에 길고 뾰족한 부리를 쏙 넣어 고깃국을 맛있게 먹었어. “여우 님은 고깃국을 싫어하시나 봐요.” 그러면서 두루미는 여우의 병에 담긴 고깃국도 싹 먹어 버렸어. 여우는 쫄쫄 굶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 어느 날, 도시 쥐가 시골 쥐의 집에 놀러 왔어. 시골 쥐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며 보리 이삭*, 콩, 고구마, 감자, 당근을 잔뜩 차렸어. “많이 먹게나.” 그러자 도시 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어. “자네 참 불쌍하군. 어떻게 이런 것만 먹고 사나?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오게. 내가 훌륭한 음식을 대접할 테니.” 얼마 뒤 시골 쥐가 도시 쥐의 집을 찾아갔어. 도시 쥐는 시골 쥐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어. 식탁에는 빵, 고기, 치즈 등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어. “우아! 정말 대단해! 자네는 매일 이런 음식을 먹고 사나?” “물론이지!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는 특별히 맛있는지도 잘 모르겠네.” 도시 쥐가 으스대며 말했어. 그때 갑자기 부엌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들어왔어. 시골 쥐와 도시 쥐는 냉큼 쥐구멍으로 도망쳤어. “어휴! 큰일 날 뻔했군.” 사람이 나가자, 그제야 시골 쥐와 도시 쥐는 다시 부엌으로 갔어. “자, 어서 먹게!” 시골 쥐가 치즈를 한입 먹으려니 또 사람이 들어왔어. 시골 쥐와 도시 쥐는 또다시 쥐구멍으로 쪼르르 도망쳤지. 그렇게 부엌과 쥐구멍을 몇 차례 왔다 갔다 하자, 시골 쥐는 기운이 쏙 빠져 버렸어. “아무래도 난 시골로 돌아가야겠네. 불안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시골에서 마음 편히 보리나 고구마를 먹는 게 더 좋다네.” 그길로 시골 쥐는 도시 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서둘러 시골로 돌아갔어. 작은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고 있었어. 개구리들에게는 소원이 한 가지 있었어. “우리에게도 임금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개구리들은 ‘개굴개굴’ 요란스럽게 기도를 했어. “하느님, 저희에게 임금님을 보내 주세요.” 하느님은 개구리들의 시끄러운 기도 소리에 짜증이 나서 나무토막 하나를 연못에 떨어뜨렸어. “우아, 하느님이 보내 준 임금님인가 봐.” 그런데 나무토막은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야. “뭐, 이런 바보 같은 임금님이 다 있어? 우리가 바라는 임금님이 아니야.” 개구리들은 다시 기도를 했어. “하느님, 훨씬 무섭고 날쌘 임금님을 보내 주세요.” 하느님은 개구리들의 기도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어. 그래서 무서운 뱀을 내려보내 주었어. “우아, 정말 멋진 임금님이야!” 개구리들은 무척 기뻐하며 함성을 질렀어. 하지만 개구리들의 함성이 끝나기도 전에 뱀은 개구리들을 모두 잡아먹어 버렸어. 찬장 속에 맛있는 꿀이 가득 담긴 꿀단지가 있었어. 파리들은 꿀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하지만 뚜껑이 꽉 닫혀 있어 냄새만 맡아야 했지. 파리들은 어떻게 하면 꿀단지에 든 꿀을 먹을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어. 잠시 뒤 한 마리가 나서며 말했어. “우리가 힘을 모아 꿀단지를 떨어뜨리자. 그러면 단지가 깨져서 꿀이 흘러나올 테니까!” “이야!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파리들은 힘을 모아 꿀단지를 밀기 시작했어. “영차 영차!” 마침내 꿀단지는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졌지. 파리들은 꿀 속에 폭 파묻혀 꿀을 쪽쪽 빨아 먹었어. “우아, 달콤해!” 그때, 주인이 나타나 말했어. “꿀단지가 왜 떨어졌지? 파리 떼가 달려들었네!” 파리들은 깜짝 놀라 달아나려고 했어. 그런데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끈적끈적한 꿀에 발과 배, 날개까지 착 달라붙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거야. 파리들은 주인이 휘두른 파리채에 죽고 말았어. 화가가 마부에게 중요한 그림을 맡기며 말했어. “이건 임금님의 초상화일세.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큰 벌을 받게 될 테니 조심해서 궁전으로 가져가게.” 마부는 임금님의 초상화를 당나귀 등에 조심조심 실으며 말했어.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니 조심해서 가야 한다!” 마부는 당나귀의 목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어. ‘주인님이 갑자기 왜 이러지? 다른 때 같으면 마구 채찍질을 했을 텐데.’ 등에 실은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당나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거야. 길을 걸어가자 사람들이 당나귀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는 게 아니겠어? ‘오늘은 정말 희한한 날이네. 사람들이 나에게 절을 다하고 말이야.’ 당나귀는 기분이 좋아 ‘히힝히힝’ 하며 길 한가운데 멈춰 섰어. “어, 이 녀석이 갑자기 왜 멈췄지? 이랴! 이랴! 어서 가자!” 마부가 아무리 고삐를 잡아당겨도 당나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난 이제 귀하신 몸이라고요! 조금 전에 사람들이 나한테 절하는 거 봤죠? 그러니까 난 이제 짐 같은 건 나르지 않을 거예요.’ 당나귀는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어. “아니, 이러다 늦으면 큰일인데.” 참다못한 마부는 지나가던 장사꾼에게 당나귀를 팔아 버렸어. 그러고는 좋은 말 한 필을 사서 궁전으로 갔어. 당나귀는 여전히 풀밭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이 당나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군.” 당나귀를 끌고 가려다 지친 장사꾼은 당나귀를 죽여 고기로 만들고 말았어. 숲속에 늙은 사자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 “배고파서 사냥을 해야겠는데 동물들이 날쌔게 도망가니 도무지 잡을 수가 없군. 그래!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다음 날, 사자는 숲속 동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어. “요즘 내 입에서 자꾸 냄새가 나는구나. 너희들이 돌아가면서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아 보아라.” 마침 사자의 눈에 양 한 마리가 들어왔어. “양아, 네가 제일 먼저 내 입 냄새를 맡아 보렴.” 순진한 양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사자의 입 안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어. “악! 입 냄새가 너무 지독해요. 사자 님은 이빨을 안 닦으시나 봐요?” 양의 말에 사자는 불같이 화를 냈어. “뭐라고?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너를 당장 잡아먹어야겠다!” 사자는 양을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어. 그 모습을 본 동물들은 벌벌 떨기 시작했어. “이번엔 늑대! 네가 냄새를 맡아 보렴.” 늑대는 벌벌 떨면서 사자의 입 안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어. 사자의 입 안에서 고기 썩는 냄새가 폴폴 풍겼지만, 늑대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어.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그러자 사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어.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 너처럼 간사한 놈은 살려 둘 수가 없구나.” 사자는 늑대도 꿀꺽 삼켜 버렸어. “여우야, 네가 내 입 냄새를 좀 맡아 볼래?” 여우는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사자에게 말했어. “사자 님, 저는 지금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냄새를 맡지 못해요. 그러니까 다른 동물에게 물어보세요.” 여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도망쳐 버렸어. 햇볕이 뜨거운 여름날, 개미는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어. 추운 겨울에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해 두기 위해서야. 그런데 베짱이는 나무 위에 앉아 노래만 부르고 있었어. “야, 역시 그늘 밑이 시원해.” 베짱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개미에게 말했어. “개미야, 너는 왜 일만 하니?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놀자.” 베짱이의 말에 개미가 대답했어.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올 거야. 미리 먹을 것을 준비해 둬야 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너도 함께 일하자!” “멍청한 녀석! 벌써 겨울 걱정을 하다니, 아직 한여름인데.” 베짱이는 개미를 비웃으며 노래를 불러 댔어. 어느덧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지나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 왔어. 숲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고 동물들은 하나둘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잤어. 개미는 따뜻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히 겨울을 보내고 있었어. 하지만 베짱이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먹을 것을 찾아 숲을 헤매야 했어.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갔어. “개미야, 먹을 것 좀 나눠 주렴. 배가 너무 고파.” 베짱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어. 그러자 개미가 베짱이에게 물었어. “넌 지난여름에 무얼 하고 지냈니?” “여름 내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지.” 베짱이의 말을 들은 개미는 웃으면서 말했어. “넌 여름 내내 노래를 불렀으니 겨울에는 춤을 추면 되겠구나.” 개미의 말을 들은 베짱이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 “아함, 졸려! 낮잠이나 자 볼까?” 점심을 맛있게 먹은 사자가 그늘에서 잠이 들었어. 그때 생쥐 한 마리가 후닥닥 지나가다가 그만 사자의 발등을 밟고 말았어. “조그만 녀석이 겁도 없이 단잠을 깨우다니!” 화가 난 사자는 앞발로 생쥐를 꾹 눌렀어. “사자 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은혜를 꼭 갚을게요.” 생쥐의 말에 사자는 웃음을 터뜨렸어. “하하! 너처럼 조그만 녀석이 무슨 수로 은혜를 갚겠다는 거냐?” “사자 님에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좋아! 살려 주지.” 며칠이 지났어. 숲속을 어슬렁거리며 걷던 사자는 사냥꾼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고 말았어. 아무리 힘센 사자라 해도 질긴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어. ‘아이고, 이제 꼼짝없이 죽겠구나.’ 사자는 분하고 원통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어. 먼 곳에 있던 생쥐가 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쪼르르 사자에게로 달려왔어. “사자 님,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구해 드릴게요.” 생쥐는 날카로운 이빨로 사각사각 그물을 물어뜯어서 사자를 구해 주었어. “생쥐야, 고맙구나. 지난번에는 내가 미안했어.” 그러자 생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어. “사자 님, 저는 은혜를 갚았을 뿐이에요. 저처럼 작은 동물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까요.”
흥부와 놀부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흥부와 놀부가 살았어. 둘은 형제지만 닮은 곳이 하나도 없었지. 동생 흥부는 마음이 착하고 따뜻한데, 형 놀부는 소문난 욕심쟁이에다 심술만 덕지덕지 붙어 있었어. 상주 앞에서 춤추고, 얼씨구, 하하. 항아리에 돌 던지고, 신난다, 헤헤. 가난한 설마 밥 빼앗고, 재미있다, 흐흐. 똥 싸는 놈 주저앉게 하고, 고소하다, 킥킥. 불난 집에 부채질하면서, 시원하다, 히히거렸어. 그런 놀부이니 추운 겨울날, 동생 흥부네 식구들을 내쫓고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을 몽땅 차지한 것도 당연했어. 하루는 배고픔을 참지 못한 흥부가 놀부를 찾아왔어. “형님! 농사지어 갚을 테니, 쌀 좀 빌려주소.” “내다 버릴 쌀은 있어도 너 줄 쌀은 없다. 썩 물러가거라!” 쫓겨나던 흥부는 밥 냄새가 폴폴 나는 부엌을 기웃거렸지. 그러자 밥주걱을 든 놀부의 아내가 흥부의 뺨을 힘껏 내려쳤어. 흥부는 뺨에 붙은 밥알을 떼어먹으며 다른 쪽 뺨도 내밀었어. “형수님, 이번엔 우리 아이들 주게 이쪽 뺨도 때려 주소.” 그 소리를 듣고 놀부가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왔어. “그게 소원이면 내가 때려 주마!” 흥부는 놀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는 쫓겨났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어. 흥부네 처마 밑에는 제비 한 쌍이 날아와 집을 지었지. 좋은 집도 많은데 하필 허름한 우리 집에 집을 짓느냐? 오뉴월 장맛비에 힘들게 쯧쯧. 무너지면 어쩌려고. 흥부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제비는 알까지 낳았어. 제비 부부와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은 점점 흥부네를 닮아 갔지. 그러던 어느 날 제비가 요란스레 울기에 나가 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새끼 제비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겠어? “구렁이 이놈, 어딜 넘보느냐?” 흥부는 장대로 구렁이를 쫓아냈지. 그사이 새끼 한 마리가 땅에 툭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어. “여보 마누라, 명주실 좀 가져오소.” 흥부는 새끼 제비를 손에 들고 다급하게 말했어. 없는 살림에 명주실이 어디 있을까 싶더니, 그래도 이리저리 뒤지니 몇 가닥 있었지. 흥부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정성스레 동여매 주었어. 흥부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인지 제비는 금세 나았지. 놀부 소식을 들은 흥부가 한달음에 달려왔어. “형님, 너무 마음 아파 마소. 형제라고는 달랑 우리 둘인데 의지하며 함께 살면 좋지 않소.” 흥부의 말에 놀부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그 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친 놀부와 착한 흥부는 서로 아끼며 의좋게 살았지. 이듬해 봄, 제비가 다시 흥부네 집으로 돌아왔어. “여보, 이리 나와 보세요. 제비가 돌아왔어요.” 흥부가 맨발로 달려 나와 반기자, 어디서 물고 왔는지 제비가 박씨 하나를 흥부 발 앞에 톡 떨어뜨렸지. “어이쿠, 웬 박씨지?” 제비의 맘이 고마운 흥부는 담장 아래에 정성스레 박씨를 심었어.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나자, 파릇파릇 싹이 트고, 반들반들 잎이 나고, 하얀 박꽃이 피더니 달덩이 같은 박이 주렁주렁 매달렸어. “배고픈데 잘되었구나. 저 박을 타서 죽이라도 끓여 먹자!” 그날부터 놀부는 처마마다 제비집을 지어 놓고 제비가 날아들기를 기다렸어. 따뜻한 봄이 되자 놀부네 처마에도 제비 한 쌍이 날아왔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구렁이가 나타나지 않는 거야. 놀부는 둥지에서 제비 한 마리를 꺼내어 다리를 똑 부러뜨렸지. “아이고, 가엾은 제비야! 어쩌다 다리가 부러졌느냐? 내 얼른 고쳐 주마.” 놀부는 너스레를 떨며 준비해 둔 명주실로 제비 다리를 꽁꽁 묶었어. 흥부네 집은 어느새 비단옷과 좋은 음식으로 넘쳐났어. 소문을 들은 놀부가 냉큼 달려왔지. “이놈 흥부야! 네 형님, 놀부가 왔다!” 흥부네 살림살이를 요것조것 훑어보고 이것저것 들춰 보던 놀부가 냅다 호통을 쳤어. “도둑질을 한 게로구나! 천벌을 받을 놈!” 깜짝 놀란 흥부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어. ‘옳거니, 나도 제비 다리 고쳐 주고 박씨를 얻어야겠다.’ 놀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어. 이듬해 봄이 되자, 제비가 다시 돌아왔어. “왔구나 왔어, 제비가 왔어!” 놀부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제비가 박씨 하나를 툭 떨어뜨리지, 뭐야. “옳거니, 박씨야. 박씨!” 마음 급한 놀부는 당장 처마 밑에 거름 듬뿍 넣고 박씨를 심었어.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나자, 파릇파릇 싹이 트고, 반들반들 잎이 나고, 하얀 박꽃이 피더니 둥글둥글 커다란 박이 주렁주렁 열렸어. “열렸구나, 열렸어! 금은보화 가득 찬 박이 열렸어!” 이 고얀 놈! 네 조상이 빌려 간 돈 삼천 냥 내놓으렷다! 도깨비 굿 구경한 값 만 냥을 내놓으렷다! 열흘쯤 지나자, 제비 다리는 용케 나았어. 그리고 가을이 되자, 놀부네 제비도 남쪽 나라로 훨훨 날아갔지. 어서 빨리 타 봅시다! 놀부는 남은 박 하나를 서둘러 탔어. 슬근슬근 슬근슬근. 흥겹게 놀아 준 값 열 배로 쳐 내놓으렷다! 저승 가는 노자 만 냥을 내놓으렷다!
할망 할망 설문대 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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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하늘 나라에 옥황상제의 딸인 설문대 할망이 살았어. 설문대 할망은 키가 엄청 크고 힘도 엄청나게 셌지. 하루는 옥황상제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어.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설문대 할망은 너무 궁금해서 몰래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았지. ‘저곳은 어떤 세상일까?’ 설문대 할망은 슬그머니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보았어. 하지만 구경도 잠시 깜박 잠이 들었어. “에구,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네.” 벌떡 일어난 설문대 할망은 커다란 방귀를 요란하게 뀌었어. 그러자 여기저기가 쩍쩍 갈라지면서 맞붙어 있던 하늘과 땅이 나뉘었지. 설문대 할망은 옷자락에 흙과 돌들을 담고는 하늘 나라로 올라갔어. 그 사실을 알게 된 옥황상제는 노발대발했지. “내 말을 어긴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 설문대 할망은 하늘 나라에서 당장 쫓겨나고 말았어. 그런데 땅으로 내려오면서 옷자락에 담았던 흙과 돌들이 주르르 주르르 쏟아졌어. 흙과 돌들은 쌓이고 쌓이더니 섬이 되었지. 이 섬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주도야. 흙과 돌들은 또 쌓여서 높은 산이 되었지. 이 산이 그 유명한 한라산이야. 그 뒤에도 설문대 할망이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터진 옷자락 구멍으로 흙과 돌들이 조르르 흘러내렸어. 섬 전체에 산봉우리들이 봉긋봉긋 생겨났지. “아유, 한참을 걸었더니 정말 고단한걸.” 설문대 할망은 쩍쩍 하품을 하고는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눕고 잠이 들었어. 설문대 할망은 자면서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렸어. 설문대 할망에게 제주도는 너무 좁았나 봐. “아이고, 쪼그리고 잠을 잤더니 몸이 뻐근하네.” 설문대 할망은 팔다리를 쭉 폈어. 그랬더니 글쎄 할망의 발가락 두 개가 바다 건너에 있는 범섬에 쑥 박혀 버렸지. 범섬에는 콧구멍 동굴 두 개가 생겼어. 푹 쉬고 일어난 설문대 할망은 오줌을 누기 시작했어. 할망의 오줌 줄기가 어찌나 세던지, 졸졸졸, 줄줄줄, 콸콸콸! 오줌 줄기는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어. 그 바람에 섬의 한 귀퉁이가 쩍 떨어져 나갔어. 다행히 섬 귀퉁이는 바다로 떠내려가다가 멈추었어. 그 섬은 꼭 소처럼 생겨서 우도라고 불렸지. 설문대 할망은 옷이 딱 한 벌밖에 없었어. 그래서 날마다 속바지를 빨아야 했는데, 빨랫돌이 없어서 늘 투덜거렸지. 그런데 우도가 떨어져 나간 뒤로는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았어. 우도를 빨랫돌로 삼아 박박박 빨래를 하면 됐거든. “빨래가 참 쉬워졌네!” 설문대 할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빨래를 했어. 한편, 제주도에는 설문대 할망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와서 살기 시작했지. 설문대 할망은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어. ‘날마다 빨래를 하는 것도 힘든데, 새 속바지를 만들어 달라고 할까?’ 며칠을 고민하던 설문대 할망은 사람들에게 말했어. “새 속바지를 지어 주면 육지까지 닿는 다리를 놔 줄게.” 제주도 사람들에게 다리는 정말 필요했거든. “할망의 속바지를 만들려면 비단 백 필은 있어야 해요.” “우리 한번 비단을 모아 봅시다.” 사람들은 온 섬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비단 백 필을 모으기로 했어. 곧 새 속바지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설문대 할망은 힘이 났지. 설문대 할망은 육지까지 닿는 다리를 놓기 시작했어. 커다란 바위들을 던져 놓고, 작은 돌들을 그 사이에 채워 나갔어. “옷이 다 지어질 때쯤 다리도 완성되겠어.” 설문대 할망은 하늘 나라에서 쫓겨난 이후로 가장 즐겁고 행복했어. 그 사이, 제주도 사람들은 비단을 모았지만 아흔아홉 필밖에 되지 않았어. 설문대 할망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설문대 할망은 다리를 놓다가 그만두어 버렸어. “지금 그만두면 어떡해요. 제발 다리를 놓아 주세요!”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간곡하게 부탁하기도 했어. 그 이후 설문대 할망은 일부러 입바람을 불며 심술을 부렸어. 사람들은 불안하고 무서웠지. “아휴, 오늘도 파도 때문에 바다에 못 나가겠어.” 어느새 사람들은 설문대 할망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졌어. 그러던 어느 날, 설문대 할망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어. “설문대 할망도 물장오리 연못에 빠지면 별수 없어요.” “무슨 소리야, 아무리 깊어도 할망 무릎까지도 안 올걸.” “글쎄 아니라니까, 물장오리 연못은 아래가 뚫렸대.” 그러자 설문대 할망은 발끈했어. “흥, 이 섬 안에 내 키보다 깊은 연못은 없어.” 그러고는 성큼성큼 물장오리 연못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물장오리 연못은 정말로 밑 빠진 독처럼 아래가 뚫려 있었나 봐. 그 뒤로 설문대 할망은 영영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콩쥐 팥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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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콩쥐가 살았어. 콩쥐는 일찍이 엄마를 여의었지만 밝고 착하게 자랐지. “콩쥐는 마음씨가 참 고와.” “어디 마음씨만 고운가? 얼굴도 말씨도 얼마나 고운데.” 마을 사람들은 콩쥐를 볼 때마다 칭찬을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새엄마와 팥쥐를 데리고 왔어. 새엄마와 팥쥐는 콩쥐를 보자마자 입을 삐죽 내밀었지. 새엄마와 팥쥐는 콩쥐와는 달랐어.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하고, 말씨는 얼마나 거칠었는지 몰라. 하루는 새엄마가 콩쥐와 팥쥐를 불렀어. “둘이 나가서 밭을 매고 오너라.” 그러고는 팥쥐에게는 따끈따끈한 쌀밥과 튼튼한 호미를 주었어. 콩쥐에게는 새까맣게 탄 누룽지와 낡은 호미를 주었지. 팥쥐는 밭을 매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쌀밥을 날름날름 먹어 치웠어. “에구, 열심히 일했더니 졸린걸.” 팥쥐는 하품만 쩍쩍하다가 낮잠을 잤어. 하지만 콩쥐는 낡은 호미로 밭을 매느라 땀을 뻘뻘 흘렸지. 탄 누룽지를 먹을 틈도 없이 말이야. 그런데 그만 호미 손잡이가 부러졌어. “어머, 이를 어째!” 콩쥐는 부러진 호미를 잡고 발을 동동 굴렀어. 그때 하늘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사뿐 내려왔지. 콩쥐는 어찌나 놀랐던지 눈을 비벼 댔어. 검은 소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밭을 모두 매 주었어. 콩쥐에게 반짝이는 새 호미까지 주었지. 콩쥐는 탄 누룽지를 오독오독 먹으며 날 듯이 집으로 돌아갔어. 하루는 마을에 큰 잔치가 열렸어. 새엄마와 팥쥐는 고운 옷을 차려입었어. 그런데 새엄마는 콩쥐에게는 이렇게 말했지. “빈 독에 물 가득 채워 놓고, 벼 아홉 섬 콩콩 찧어 놓고, 삼을 잘근잘근 삼아서, 삼베 아홉 필을 모두 짜면 그때 잔칫집에 오너라.” 그러고 나서 새엄마와 팥쥐 둘만 잔칫집에 갔어. “언제 이걸 다 할까?” 콩쥐는 멀뚱히 서서 눈물만 뚝뚝 흘렸어. 그때 두꺼비 한 마리가 느릿느릿 기어 왔어. 두꺼비는 독 안으로 쏙 들어가더니 구멍을 척 막아 주었지. 콩쥐는 두꺼비 덕분에 빈 독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어. “두꺼비야, 정말 고마워!” 콩쥐는 말려 둔 벼를 보니 다시 한숨이 나왔어. “휴, 한 섬도 아니고 아홉 섬을 언제 다 찧지?” 그때 참새 떼가 우르르 날아와 벼를 쪼아 댔어. 깜짝 놀란 콩쥐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참새들을 쫓았지. 그런데 가만 보니 참새는 벼를 쪼아 먹는 게 아니라 벼 껍질을 벗기고 있었어. 참새들은 순식간에 아홉 섬의 벼 껍질을 모두 벗겨 놓았지. “참새들아, 정말 고마워!” 그런데 콩쥐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어. “삼은 언제 삼고, 삼베 아홉 필은 언제 짜지?” 그때 소 울음소리가 들렸어. 콩쥐가 돌아보니 며칠 전에 밭을 매 준 검은 소였지. 검은 소는 삼을 잘근잘근 어찌도 잘 삼는지 실이 줄줄이 만들어졌어. “검은 소야, 정말 고마워!” “아유, 삼베 아홉 필은 또 언제 짜지.” 콩쥐가 한숨을 쉬고 있는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어. 선녀는 베틀 앞에 앉더니 삼베를 모두 짜 주었어. 그런 다음, 고운 비단옷과 꽃신을 콩쥐에게 주었지. “콩쥐야, 이걸 입고 잔칫집에 가렴.” “선녀님, 정말 고맙습니다.” 콩쥐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 콩쥐는 곱게 꾸미고 잔칫집으로 향했어. 콩쥐가 냇물을 건너고 있을 때였지. “원님이 지나가시니, 모두 비키시오!” 그 소리에 놀란 콩쥐는 급하게 냇물을 건너다 발을 잘못 디뎌 꽃신 한 짝을 떨어뜨리고 말았어. 원님은 냇물에 동동 떠내려오는 꽃신을 주웠어. “이 아름다운 꽃신의 주인은 분명 특별한 여인일 테다. 이 꽃신 주인을 찾으러 가자!” 원님은 포졸들을 이끌고 꽃신 주인을 찾으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잔칫집으로 갔어. 포졸들은 잔칫집에서 소리쳤어. “이 꽃신의 주인을 찾소!” 그러자 너나없이 꽃신을 신으려 했지. 물론 욕심 많은 새엄마와 팥쥐도 나섰어. “내놔요, 내 꽃신이란 말이에요!” 자그마한 꽃신은 새엄마의 커다란 발에 맞을 리 없었고, 팥쥐의 두툼한 발에는 더더욱 맞지 않았지. 하지만 팥쥐는 꽃신을 쥐고 자기 것이라고 우겨댔어. 포졸들이 간신히 떼어 놓을 때까지 말이야. “제가 한번 신어 볼게요.” 마지막으로 콩쥐가 나섰어. 꽃신은 콩쥐의 자그마한 발에 꼭 맞았지. 원님은 감격하며 꽃신에 관해 물었어. 콩쥐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마음이 한없이 고와 하늘이 도왔구려. 나의 색시가 되어 주겠소?” 얼굴이 발그레해진 콩쥐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어. 새엄마와 팥쥐는 어떻게 되었을까? 행복한 콩쥐를 보고 약이 잔뜩 올라 울화병이 났대.
저승에 있는 곳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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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전라남도 영암이라는 곳에 욕심 많은 원님이 살고 있었어요. 원님은 백성들이 애써 지은 곡식을 빼앗는가 하면, 남이 가진 물건에도 눈을 번득이며 탐을 냈지요. 어느 볕 좋은 봄날, 원님이 태평스레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여기가 어디지?” 원님이 어두컴컴한 공간을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에서 저승사자가 버럭 소리쳤어요.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따라오시오!” 저승사자는 원님을 염라대왕 앞으로 끌고 갔어요. “아이고, 염라대왕님!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아직 젊은 제가 벌써 이곳에 오다니요? 제발 살려 주십쇼!” “어허, 하도 욕심을 부려 일찍 불렀는데, 아직 네가 이승에서 할 일이 있겠구나! 다시 이승으로 데려다주거라!” 원님은 뛸 듯이 기뻤어요. ‘살았다, 살았어!’ 하지만 저승사자는 원님을 다시 데려다주는 게 귀찮았어요. “노잣돈이라도 주게. 안 그러면 데려다줄 수 없네!” “돈이라고요? 지금 저는 돈이 한 푼도 없는데요?” 저승사자는 얼굴을 씰룩이며 쏘아붙였어요. “그럼, 저승에 있는 곳간에서라도 꺼내 주든가!” “저승에 있는 곳간이라고요?” “이승에서 남에게 베푼 것이 쌓이는 저승 곳간 말일세!” 원님 곳간에는 달랑 짚 한 단뿐이었어요. 예전에 원님이 아기를 낳은 부인에게 던져 준 것이었지요. 저승사자는 원님을 저승 곳간으로 데려갔어요. “여기가 자네 곳간이군. 어서 문을 열어 보게!” 덕진 곳간에는 온갖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어요. “쯧쯧, 자네도 덕진 곳간에서 빌려야겠구먼!” 저승사자는 덕진 곳간 문을 활짝 열어젖혔어요. 저승사자는 원님의 등을 냅다 떠밀며 소리쳤어요. “덕진 곳간에서 빌린 쌀 삼백 석은 꼭 갚아야 하네! 그리고 저승에 와서 고생하기 싫으면 좀 베풀고 살게나!” 원님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벌떡 일어났어요. “아이고, 십년감수했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우선 진짜 덕진이란 사람이 있는지 직접 봐야겠다!” 원님은 그날로 당장 덕진을 찾아 나섰어요. 덕진은 어머니를 모시고 주막을 하는 처녀였지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작은 주막에는 덕진이 반갑게 손님을 맞고 있었어요. 원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주막을 찾아갔어요. 밥을 다 먹은 원님이 덕진에게 두 냥을 내밀자, “한 냥이면 됩니다.” 하며 나머지 한 냥을 원님에게 돌려주었어요. ‘옳아, 내 차림을 보고 돈을 덜 받는 거로구나!’ 다음 날 원님은 다시 덕진을 찾아갔어요. “급해서 그러니 돈 열 냥만 꾸어 주시게.” 덕진은 이유도 묻지 않고 돈을 내주었어요. “아니, 이렇게 돈을 꿔 주었다가 떼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나?” “얼마나 필요하면 저에게까지 부탁하시겠어요.” 원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과연 저승 곳간이 가득 찰 만하구나.’ 며칠 후, 원님은 쌀 삼백 석을 가지고 덕진을 찾아갔어요. “전에 빌린 쌀 삼백 석이오. 요긴하게 잘 썼소.” 놀란 덕진은 화등잔처럼 눈을 크게 뜨고 물었어요. “제가 원님께 쌀을 빌려 드렸다니요? 저는 원님께 쌀을 빌려준 적이 없습니다.” 원님은 쌀을 내려놓고 돌아가며 말했어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말고, 나를 살린 값이다 생각하고 받으시오. 이유는 훗날 알게 될 것이오.” 덕진은 삼백 석의 쌀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원님께서 이 쌀을 주신 것은 아마도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라는 뜻일 거야. 여러 사람을 위해 이 쌀을 쓰자.’ 덕진은 쌀을 팔아 강에 다리를 놓기로 마음먹었어요. 비만 오면 강이 넘쳐 사람들이 매우 불편했거든요. 얼마 후 강에는 다리가 세워졌고, 마을 사람들은 그 다리를 ‘덕진 다리’라고 불렀어요. 그나저나 저승에 있는 원님의 곳간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네 장사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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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기가 막히게 신통방통한 이야기 한번 들어 볼래? 때는 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 깊은 산골짝 어느 마을에 허허허, 호호호 늘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이 평화롭게 살았지만, 딱 한 가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란다. “아들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런 바람을 하늘이 들었던 걸까? 어느 날 할머니의 배가 불러오더니 열 달이 차고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어. 할아버지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좋아했지.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우리 집에 큰 경사가 났네. 그런데 기쁨도 잠깐, 이 아이가 글쎄, 첫돌이 지나도록 엉금엉금 기기만 하더니, 세 살이 되어서야 겨우 어기적어기적 걷더래. 네 살이 되어서는 “아바바바!” 옹알이만 하더니, 다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아빠, 엄마.”를 부르더란다. 여섯 살이 되어도 똥오줌을 못 가리고, 일곱 살이 되어도 글 한 자를 못 읽었어. 그러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어느 날 아이가 감쪽같이 없어진 거야. “하늘로 솟았누? 땅으로 꺼졌누?” 온 집 안을 뒤지고, 온 동네를 다 찾아도 아이가 보이지 않았어. 할아버지는 마루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할머니는 마당에 주저앉아 한숨을 폭! 바로 그때 뒷산에서 시커먼 것이 흔들흔들하지,뭐야. 자세히 보니 아이가 산더미만 한 바위를 들고 내려오네. “여보, 우리 아이가 천하장사인가 봐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때부터 아이를 ‘바위손이’라 불렀지. 장사 났네, 장사 났어! 우리 집안에 천하장사가 낫네, 그려. 그러던 어느 날 나라에 큰 난리가 났어. “아버지, 어머니! 사내대장부가 가만히 앉아 나라를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가서 왜적을 물리치고 오겠습니다!” 바위손이는 부모님께 넙죽 절을 하고 길을 떠났어. 할아버지는 늠름한 아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워 울고, 할머니는 아들이 혹시 다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 눈물을 흘렸지. 성큼성큼 얼마나 걸었을까? 바위손이는 이상한 나무를 보고 우뚝 멈춰 섰어. 산 중턱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누웠다 일어났다 누웠다 일어났다 그러는 거야. 바위손이는 한달음에 산 중턱까지 올라갔어. 알고 보니 웬 사내가 코를 골며 자는데, 코를 푸우우 골면 나무가 벌러덩 눕고, 코를 드르렁 골면 나무가 벌떡 일어나네. 바위손이는 사내를 흔들어 깨웠어. “난 힘이 장사라 바위손이다! 넌 누구냐?” “난 콧바람이 세서 콧바람손이다!” 둘은 금세 친구가 되어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로 했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가는데 눈앞에서 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솟았다 사라졌다 솟았다 하는 거야. 둘은 산을 향해 달려갔지. 알고 보니 웬 사내가 고무래질을 하고 있는데, 쭉 밀면 높은 산이 스르르 사라지고, 쓱 당기면 높은 산이 우뚝 솟네. 바위손이가 사내 등을 툭 쳤어. “난 힘이 장사라 바위손이다!” “난 콧바람이 세서 콧바람손이다! 넌 누구냐?” “난 고무래질을 잘해서 고무래손이다!” 그리하여 셋은 금세 친구가 되어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로 했지. 세 장사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발밑으로 콸콸콸 퀄퀄퀄 물이 쏟아지지 뭐야. 셋은 얼른 물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어. 알고 보니 한 사내가 오줌을 누고 있네. “우리는 바위손이, 콧바람손이, 고무래손이다! 넌 누구냐?” “난 엄청난 오줌을 눈다 해서 오줌손이다!” 그리하여 친구가 된 네 명의 장사는 싸움터에 나서게 되었어. “난 엄청난 오줌을 눈다 해서 오줌손이다!” 그리하여 친구가 된 네 명의 장사는 싸움터에 나서게 되었어. 싸움터에는 왜적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진을 치고 있었어. “자, 슬슬 시작해 볼까?” 제일 먼저 바위손이가 나섰어. 바위손이는 이 산 저 산을 뛰어다니며 바위란 바위는 죄다 들고 왔어. 그러고는 산과 산 사이에 바위를 척척척 쌓아 올렸지. 결국 골짜기란 골짜기는 모두 막아 버린 거야. 어, 길이 막혔잖아? 여기도 막혔어. 다음은 오줌손이 차례! 오줌손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바지를 쓰윽 내렸어. 그러고는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지. 순식간에 쏟아지는 오줌에 왜적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어. “그렇다면 이제 내 차례인가?” 콧바람손이가 코를 한 번 핑 풀더니 신나게 콧바람을 불어제쳤어. 콧바람에 오줌 물이 꽝꽝 얼고, 왜적들은 꽁꽁 얼어붙은 채 눈만 끔뻑거렸지. 이번에는 고무래손이가 고무래를 쿵쿵 치며 나왔어. “자, 이제 마무리를 해야지?” 고무래손이는 얼음판 위로 고무래를 쭈우욱 밀고, 쓰으윽 당기고, 쭈우욱 밀고, 쓰으윽 당겼어. 결국 왜적들은 한목소리로 외쳤어. “항복! 항복!” 이렇게 해서 네 장사는 순식간에 왜적을 모두 물리쳤어. 그 뒤로도 네 장사는 좋은 일을 많이 했다더구나. 정말 신통방통 놀랍고 재미있는 이야기이지?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자린고비 영감이 살았어. 어찌나 구두쇠였던지, 앉을 때는 엉덩이 살짝 들고 “어이쿠, 귀한 옷 해질라.” 걸을 때도 지팡이 번쩍 들고 “어이쿠, 지팡이 밑동 닳을라.” 했지. 자린고비 영감을 보는 사람들마다 혀를 끌끌끌 찰 정도였지. 자린고비 영감의 이웃에는 달랑곱재기 영감이 살았어. 그 영감 역시 어찌나 구두쇠였던지, 방 안에만 콕 틀어박혀 앉아 “애고, 귀한 신발 닳을라.” 걸을 때도 버선을 번쩍 들고, “애고, 버선 짝에 구멍 날라.” 달랑곱재기 영감네 집을 지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어. 푹푹 찌는 더운 여름날 자린고비 영감이 땀을 뻘뻘 흘리자, “어메, 우리 아버님 땀띠 나시겄네.” 며느리가 부채를 활짝 펴서 부치려고 했어. 자린고비 영감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 “아가야, 부챗살 닳는다. 부챗살 두 개만 펴서 살살 부치거라.” 달랑곱재기 영감도 찜통 같은 방에서 헉헉거리며 앉아 있었어. “어쩔까나, 우리 아버님 더위 잡수시겄네.” 며느리가 부챗살 두 개를 펴 부치려 하자, 달랑곱재기 영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가야, 부채 망가진다. 부챗살 한 개만 펴 꼭 붙들고 있거라.” 하더니 부채 앞에서 고개를 휙휙 흔드는 거야. 하루는 동네에 새우젓 장수가 왔어. 자린고비 영감은 새우젓 장수를 불렀지. “어디, 새우젓 맛 좀 봅시다.” 하더니 새우젓 단지 속에 손을 푹 담갔어. 그러고는 며느리를 불렀어. “아가야, 어여 국 끓일 솥 가져오너라.” 며느리가 솥을 가져오자, 자린고비 영감은 국 솥에 새우젓 묻은 손을 씻었어. 그날 저녁 자린고비 영감네 가족은 구수한 새우젓 국을 먹을 수 있었지. 달랑곱재기 영감의 며느리도 새우젓 장수를 불렀어. 그러고는 자린고비 영감처럼 새우젓 씻은 물로 새우젓 국을 끓여 저녁상에 올렸어. 덕분에 짭조름한 국을 오랜만에 먹을 수 있었지. 달랑곱재기 영감은 새우젓 국을 젓가락으로 콕콕 찍어 먹으며 물었어. “이 맛난 국은 어디서 난 것이냐?” 며느리는 여차여차 설명을 했어. 그러자 달랑곱재기 영감이 젓가락을 탁 놓으며 “아이고야, 아까워서 어쩌누. 그 손을 물독에 씻었으면 한 달은 먹었을 터인데 아이고야, 아까워서 어쩌누.” 때마침 우물가에 가던 자린고비 영감의 며느리가 달랑곱재기 영감의 말을 듣게 되었어. 자린고비 며느리는 부리나케 어물전으로 달려갔지. 며느리는 팔을 둘둘 걷어붙이고, 온갖 생선을 만지작거렸어. 짜름한 고등어를 들었다 놓았다, 살 오른 갈치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했지. 그러고는 집으로 뛰어와서, 물독에 손을 푸욱 담그고 뽀득뽀득 헹궜지. “아버님, 한 달은 국 걱정 없겠어요.” “아버님, 한 달은 국 걱정 없겠어요.” 자린고비 영감은 방문을 빼꼼 열고 말했어. 아가야, 물 한 독 더 퍼다 붓거라. 두 달은 더 먹게. 아니, 아니다. 우물에 가서 씻고 오너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게. 하루는 달랑곱재기 영감 집에 굴비 한 마리가 선물로 들어왔어. 달랑곱재기 영감은 행여나 굴비 비늘 떼어질라, 소금 한 알 떨어질라, 조심조심 굴비를 새끼줄로 엮었어. 그리고 대들보에 단단히 매달았지. 한 번만 쳐다보거라. 굴비 닳는다. 밥 한술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고. 아, 맛나다. 한동안 반찬 걱정은 없겠네. “쯧쯧, 저렇게 아껴서 뭐에 쓰려고.” “그러게 말이야. 참 지독하기도 하지.” “아 글쎄, 두 구두쇠 영감이 밖에 안 나온 지 두어 해가 넘었대.” “나돌아 다니면 신발 닳고 지팡이 닳으니 그게 아까워 그러지.” 마을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자린고비 영감과 달랑곱재기 영감의 구두쇠 노릇 얘기뿐이었어. “그만 흉보고, 아끼고 싶은 사람들은 실컷 아끼라고 하고, 우리는 실컷 먹고 노세.” 그런데 그해,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었어. 물이 바싹바싹 말라서 논밭이 거북 등짝처럼 쩍쩍 갈라졌지. 곡식들은 푸석푸석 타들어 가고, 나무들도 시들시들 말라 갔어.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한숨만 쉬었지. 하지만 자린고비 영감과 달랑곱재기 영감네는 쌀가마니가 그득그득 쌓여 있어서 걱정이 없었어. 바깥나들이도 하지 않으니 마을에 가뭄이 든지도 몰랐지. 자린고비 영감이 먼지가 풀풀 나는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어. 그때 된장 독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았어. 자린고비 영감은 냅다 달려 나가 파리를 잡았어. “요놈, 된장을 묻히고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더니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을 쪽 빠는 거야. 파리는 버둥버둥 날갯짓을 하다가 파닥 날아 도망쳤어. 자린고비 영감은 발을 동동 구르며 파리를 쫓아갔어. 내 된장 묻은 파리 잡아라! “뭐? 된장이라고? 옳거니, 파리 씻은 물로 된장국 끓여 먹어야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웃집 달랑곱재기 영감도 빗자루를 들고 파리를 쫓아갔지. 자린고비 영감과 달랑곱재기 영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파리를 쫓아 마을 한 바퀴를 돌았어. “에구구, 놓쳤네.” “아이고, 아까워라.” 자린고비 영감과 달랑곱재기 영감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어. “여보게, 그런데 땅이 왜 이리 말라붙었는지 아는가?” “그러게 말일세. 사람들 몰골은 왜 또 저런고?” 두 영감은 마주 보다가 쩍쩍 갈라진 논밭을 보게 되었지. 이런, 가뭄이 들었구나! 그날 밤, 자린고비 영감네 곳간 문이 활짝 열렸어.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 내가 신발 닳는 것이 아까워 집에만 들어앉아 있었소. 그래서 가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굶고 있는 것도 몰랐다오. 어서어서 양껏 퍼 가서 주린 배를 채우시구랴. 달랑곱재기 영감도 쌀을 가득 내놓았어. “양식 걱정일랑 마시고, 우리 쌀을 가져다 드시오.” 마을 사람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쌀을 가져갔지. “지독하게 아껴서 이렇게 좋은 일에 쓰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요.”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자린고비와 달랑곱재기 영감의 속 깊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
요술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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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산속 깊은 마을에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집에 한 스님이 찾아왔어요. “계십니까? 시원한 물 한 대접만 주시겠습니까?” “어휴, 날도 더운데 고생이시네요.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스님은 마루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는 다시 길을 떠났어요. “아니, 웬 부채지? 스님이 놓고 가셨나 보네? 나중에 오다가다 들르면 전해 주게 잘 놔둡시다.” 그나저나 오늘은 유난히 푹푹 찌는구려. 날도 더운데 그 부채 좀 써 봅시다. 할머니가 빨간 부채를 들고 팔랑팔랑 부치자, 갑자기 할아버지 코가 엿가락처럼 쭈욱 늘어났어요. 깜짝 놀란 할머니가 파란 부채를 들고 펄렁펄렁 부치자, 이번에는 할아버지 코가 쏘옥 들어가더니 목도 자라목처럼 줄어들었지요. “거참, 신기하네. 영감, 아무래도 요술 부채인 모양이구려!” 그때 마침 골목을 지나가던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여보게, 날이 덥구만. 나도 그 부채 좀 빌려주게. 내가 요즘 더워서 잠을 못 자서 말이야. 그 부채로 부치면 잠이 솔솔 올 것 같은데. “미안하네. 이 부채는 내 것이 아니라서 빌려 줄 수가 없네.” 그러지 말고 좀 빌려주게. 그럼, 우리 집 돼지와 바꾸세. 아니면 이 노리개는 어떤가? 할아버지는 절대 빌려 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어요. “에이, 모르겠다. 그럼, 이 수밖에 없지.” 순간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부채를 낚아채더니 줄행랑을 쳤어요. “아니, 여보게. 부채 이리 주게나.” 할아버지가 욕심쟁이 할아버지 뒤를 쫓아갔지만, 다람쥐처럼 어찌나 빨리 도망을 가는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어요. “휴, 이제는 안 쫓아오겠지? 이 요술 부채를 실험해 봐야 하는데. 옳지, 저기 홍 서방이 있군.”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물을 마시는 홍 서방에게 살살 부채질을 했더니, 빠지직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코가 불쑥 튀어나왔어요. “아이고, 내 코! 사, 사람 살려!” “얼씨구나, 좋을시고. 빨간 부채로 코배기 만들고, 파란 부채로 코 고쳐 주고! 이 부채를 이용해서 돈이나 벌어 볼까? 흐흐흐!” 기이한 일이로고. 여봐라! 저것이 무엇이기에 예까지 올라온 것이냐? 당장 끌어올려 보거라! “어기영차, 올리세. 어기여차, 당기세.” 그러자 욕심쟁이 할아버지의 몸이 부웅 떠올랐어요. 놀란 할아버지는 얼른 파란 부채를 부쳤어요. 그랬더니 몸이 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가면서 와장창 지붕을 깨고, 와자작 나무를 부수고, 푸우욱 구름을 뚫고, 하늘로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만 코를 잡아당기던 신하들이 코를 놓쳐 버리고 말았어요. “으악, 사람 살려!” 욕심쟁이 할아버지가 살려 달라고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다시 푸우욱 구름을 뚫고, 와자작 나무를 부수고, 와장창 지붕을 깬 뒤 땅으로 떨어졌어요. 욕심쟁이 할아버지는 퉁퉁 부어오른 코를 잡고서 몇 날 며칠을 끙끙대며 앓다가 죽었어요. 저런 저런, 욕심쟁이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네요. 요술 부채로 부자가 된 욕심쟁이가 또 다른 궁리를 하고 있어요. 욕심쟁이는 이제 요술 부채로 무엇을 할까요? 여러분이 요술 부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코가 길게 늘어나면 불편하기만 할까요? 혹시 늘어난 코 덕분에 편리한 일은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소금 나오는 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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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에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정 많은 농사꾼이 살았어.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은 옷을 벗어 주고, 굶주린 사람을 보면 먹던 밥도 내주었지. 그러고도 “불쌍타, 불쌍타!” 하며 눈물까지 흘렸어. 오슬오슬 추운 겨울이 가고, 꽃 피는 봄이 왔어. “가을에 거둔 곡식은 겨우내 다 먹었으니, 이제 씨앗을 뿌려 언제 거둬 먹누.” 보릿고개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배가 고파 쩔쩔맸지. “산에 가서 풀뿌리라도 캐 와야지.” 농사꾼은 망태를 메고 터덜터덜 집을 나섰어. “칡뿌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 보자.” 농사꾼이 여기저기 살피는데 아, 글쎄 어떤 노인이 맷돌을 끌어안고 쓰러져 있는 거야. “어이쿠, 이를 어째.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하지만 노인은 옴짝달싹도 안 했어. 놀란 농사꾼은 노인을 업고 냅다 집으로 달렸어. 농사꾼은 노인을 뜨듯한 아랫목에 눕히고 정성껏 돌보며 노인 곁을 지켰어. 해가 산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릴 무렵 노인이 눈을 떴지. “할아버지, 이제 정신이 드세요?” 그제야 농사꾼의 얼굴에 미소가 빙긋 번졌어. “고맙소, 젊은 양반이 나를 살렸구려. 가진 것이라고는 이 맷돌뿐이니, 이거라도 받아 주게.” 농사꾼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노인은 기어코 맷돌을 두고 떠났어. 농사꾼은 맷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동글동글 콩이라도 있으면 이 맷돌에 갈아서 너도나도 모두 모여 죽이라도 쑤어 먹을 텐데.” 하며 드윽드윽 빈 맷돌을 돌렸어.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맷돌에서 콩이 솨르르 솨르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졌어. 깜짝 놀란 농사꾼이 “이제, 그만. 그만!” 하자, 나오던 콩이 뚝 멈추는 거야. “어허, 거참 신통한 맷돌일세.” “아무래도 보통 맷돌이 아니야.” 농사꾼은 다시 드윽드윽 맷돌을 돌렸어. “보기만 해도 좋은 돈, 너도나도 모두 나눠 쓸 돈 나와라.” 했더니 돈이 와르르와르르. “이제, 그만. 그만!” 그러자 나오던 돈이 뚝 멈추는 거야. “어허, 거참 신기한 맷돌일세.” 농사꾼은 또 드윽드윽 맷돌을 돌리며, “맛있고 귀한 쌀, 너도나도 모두 나눠 먹을 쌀 나와라.” 했더니 쌀이 솨르르 솨르르. “이제, 그만. 그만!” 그러자 나오던 쌀이 뚝 멈추는 거야. “어허, 거참 고마운 맷돌일세.” 신통방통한 맷돌 덕분에 농사꾼은 큰 부자가 되었어. 농사꾼 덕에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부자가 되었지. 마을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농사꾼을 칭찬했어. 농사꾼의 소문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웃 마을 김 부자의 귀에까지 들어갔지. 저희들끼리 요술 맷돌로 잘 먹고 잘산다 이거지? 요술 맷돌 그것참 탐나는구먼. 빼앗을 좋은 방법이 없을까? 김 부자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그리고 그날 밤, 김 부자는 도둑고양이처럼 농사꾼 집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맷돌을 훔쳐 나왔어. “하하하, 이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야! 가만있자, 맷돌을 빼앗기면 큰일인데.” 김 부자는 허겁지겁 강가로 달려가 배에 올라탔어.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까지 노를 저어 갔어. 그제야 김 부자는 마음이 놓였어. “여기는 아무도 없겠지?” 김 부자는 맷돌을 드윽드윽 돌리기 시작했어. “소금 나와라, 소금! 귀한 소금, 비싼 소금 펑펑 쏟아져라! 펑펑!” 김 부자는 비싼 소금이 펑펑 쏟아지자, 신이 났어. “소금을 많이 가졌으니 이제 난 부자야, 부자!” 김 부자는 배가 점점 가라앉는 줄도 모르고 덩실덩실 춤까지 췄어. 소금 나와라 소금! 결국 배는 소금 때문에 기우뚱기우뚱 가라앉고, 맷돌을 안은 김 부자도 깊은 바닷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았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그야 물론 맷돌은 계속 소금을 쏟아 내고 있지. 왜냐하면 김 부자가 ‘이제, 그만. 그만!’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바닷물 맛이 짜게 된 거란다.
선녀와 나무꾼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옛적 깊은 산속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무꾼 총각이 있었어요. 마음씨 착하고 인정도 많은 총각이었지만, 나무를 팔아 겨우 하루하루 먹고사는 형편이다 보니 장가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어요. ‘오늘은 이걸 팔아 어머니께 생선을 구워 드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도끼 쥔 손에 힘을 주는 참인데, 노루 한 마리가 겅중겅중 뛰어왔어요. 저 좀 숨겨 주세요! 제게 소원 한 가지를 말씀해 보세요. “나야, 색시 얻어 장가가는 게 소원이지.” “그럼, 오늘 보름달이 뜨면 저기 연못으로 꼭 오세요. 꼭이오.” 노루는 나무꾼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고 사라졌어요. 그날 밤 나무꾼은 노루가 일러 준 연못으로 갔어요. 그곳에는 하얀 물보라 속에서 목욕하는 선녀들이 보였어요. 언제 왔는지 노루가 나무꾼에게 소곤거렸어요. 어서 날개옷을 감추세요. 날개옷이 없으면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요. 그리고 옷을 잃은 선녀를 색시로 삼으세요. 나무꾼은 떨리는 손으로 날개옷 한 벌을 집었어요. 심장이 벌렁벌렁, 팔다리가 후들후들거렸지요. “선녀가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절대 날개옷을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노루는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어요. 목욕을 끝낸 선녀들은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지요. 나무꾼은 혼자 남은 선녀를 아내로 맞았어요. 늘 아들을 걱정하던 어머니도 소원을 풀었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지요. 그뿐인가요? 반질반질 살림도 잘하는 며느리가 자식을 둘이나 낳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지요. 나무꾼도 예쁜 색시와 재롱을 피우는 자식들이 있어 더없이 행복했어요. 하지만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면 선녀는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곤 했어요. 나무꾼은 하늘을 보며 한숨짓는 아내가 항상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 이제 아이도 둘이나 되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고?’ 나무꾼은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날개옷을 보여 주었어요. 아내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날개옷을 어루만졌어요. 아내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나무꾼도 좋았지요. 그런데 그날 밤 문득 잠에서 깬 나무꾼은 깜짝 놀랐어요. 아내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황급히 마당으로 나와 보니 날개옷을 입은 아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여보! 얘들아!” 나무꾼은 목이 터져라, 아내와 아이들을 불렀어요.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지요.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노루가 나타났어요. 나무꾼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뚝뚝 흘렸어요. 노루는 나무꾼에게 선녀들의 두레박 이야기를 전해 주곤 사라졌어요. 나무꾼은 노루가 일러 준 대로 연못에 가서 선녀가 물을 긷는 두레박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두레박에 올라탔지요. 두레박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어요. 하늘나라에 도착한 나무꾼은 그리운 가족을 다시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어요. 나무꾼의 마음을 알아챈 아내는 날개 달린 말을 마련해 주었어요. 그러면서 나무꾼에게 인간 세상의 음식을 먹지 말고, 절대 땅에 발을 디디지 말라는 당부를 했어요. 나무꾼을 태운 말은 단숨에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도착했어요. “어디 보자, 내 아들.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나무꾼도 여윈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흘렸지요. “어머니, 저는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해요. 건강하시고, 식사도 잘 챙겨 드세요.” “보자마자 이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어미가 끓인 호박죽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거라.”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나무꾼은 어머니에게서 호박죽 그릇을 건네받았어요. 결국 나무꾼은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요. 그 후 나무꾼은 매일매일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어요. “기다려요. 꼭 갈게요. '꼭'이오. 꼭꼭!”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던 나무꾼은 시름시름 앓다가 쓸쓸히 눈을 감고 말았어요. 그렇게 하늘나라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다 죽은 나무꾼은 수탉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요. 밤마다 하늘을 향해 ‘꼭'이오, 꼭꼭! 하던 혼잣말은 ‘꼬끼오, 꼬꼬!’ 하는 닭 울음소리로 바뀌었지요. 지금도 수탉이 하늘을 바라보며 긴 울음을 우는 건 이런 슬픈 사연 때문이래요.
반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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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깊고 깊은 산골에 나이 많은 부인이 살았어. 늙도록 자식이 없어서 자식 하나 얻는 게 소원이었지. 부인은 자나 깨나 신령님에게 빌고 또 빌었어. 하루는 꿈에 신령님이 나타난 거야. “뒤뜰 우물에 가면, 잉어가 세 마리 있느니라. 그것을 구워 먹으면 아들을 얻을 것이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부인은 뒤뜰 우물로 달려갔어. 우물 안에는 정말로 팔뚝만 한 잉어 세 마리가 있었어. 부인은 잉어를 잡아다가 뜨거운 석쇠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정성껏 뒤집었어. 고양이는 잉어를 반 토막만 먹고 남겼어. 할 수 없이 부인은 멀쩡한 잉어 두 마리와 잉어 반 토막을 먹었지. 얼마 뒤에 부인은 한꺼번에 아들을 셋 낳았어. 어느 날 형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데, 반쪽이도 따라나섰어. 형들은 반쪽이랑 같이 가기 싫었어. 사람들이 놀릴 게 뻔했으니까. 형들이 성큼성큼 가면 반쪽이는 콩콩콩, 형들이 후다닥 달려가면 반쪽이는 쿵쿵쿵, 금세 따라붙었지. 결국 형들은 커다란 바위에 반쪽이를 꽁꽁 묶고는 휭 가 버렸어. 반쪽이가 힘을 주니, 커다란 바위가 쑤욱! 반쪽이는 바위를 그대로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어.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달려 나왔어. “얘야, 이게 웬 바위냐?” 반쪽이는 커다란 바위를 마당에 쿵 내려놓으며 말했지. “나중에 잔치할 때 쓸 떡돌을 만들려고요.” 이게 웬 바위냐? 떡돌을 만들려고요. 쿵! 반쪽이는 다시 한 발로 콩콩 뛰어가더니 형들을 따라잡았어. 형들은 여전히 반쪽이랑 같이 가기 싫었어. 사람들이 쳐다볼 게 뻔했으니까. 형들이 성큼성큼 가면 반쪽이는 쿵쿵쿵쿵, 형들이 후닥닥 달려가면 반쪽이는 쿵쾅쿵쾅, 금세 따라붙었지. 그러자 형들은 굵은 나무에 반쪽이를 꽁꽁 묶고는 휭 가 버렸어. 반쪽이가 힘을 주니, 굵은 나무가 쑤욱! 반쪽이는 나무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어.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입을 떡 벌리고 달려 나왔어. “얘야, 이게 웬 나무냐?” 반쪽이는 굵은 나무를 마당에 쾅 내려놓으며 말했지. “떡을 칠 때 쓸 떡메를 만들려고요.” 이게 웬 나무냐? 쾅! 반쪽이는 또다시 한 발로 콩콩 뛰어가 형들을 따라잡았어. 형들은 반쪽이에게 소리쳤어. “따라오지 마!” 형들이 다시 성큼성큼 가면 반쪽이는 쿵쾅쿵쾅, 형들이 후닥닥후닥닥 달려가면 반쪽이는 쾅쾅쾅쾅, 금세 따라붙었지. 깊은 숲속에 들어서자 형들은 질긴 칡덩굴로 반쪽이를 꽁꽁 묶고는 휭 가 버렸어. 그런데 그때. 무시무시한 호랑이들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반쪽이를 에워쌌지. 어흥 ! 어흥! 반쪽이는 칡덩굴을 툭툭 끊어 버리고는 한쪽 다리로 뻥! 한쪽 손으로 휙! 반쪽이에게 흠씬 얻어맞은 호랑이들은 여기저기 픽픽 고꾸라졌어. 반쪽이는 호랑이들의 가죽을 모두 벗겨 낸 뒤에 가죽들을 둘러메고 집으로 향했어. 날이 저물자, 반쪽이는 부자 영감네 집에서 묵어가기로 했지. 그런데 호랑이 가죽을 본 부자 영감은 욕심이 생겼어. 나랑 장기 내기를 해서, 자네가 이기면 내 딸을 주겠네. 대신 내가 이기면 호랑이 가죽을 모두 내놓게. “하하, 좋습니다!” 반쪽이는 장기 내기를 모두 이겨 버렸어. 부자 영감은 약이 올라 획 돌아앉았지. “장기 내기는 없었던 일로 하세!” 반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어. “내일 밤 따님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장이오! 멍이오! 다음 날 밤부터 부자 영감은 딸을 단단히 지켰지. 그런데 반쪽이는 나타나지 않았어. 며칠 밤낮을 꼬박 새운 사람들이 꾸벅꾸벅 졸자, 반쪽이는 그제서야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갔어. 부자 영감의 수염에는 기름을 바르고, 딸의 방에는 벼룩 한 바가지를 뿌렸지. 그러자 곧장 딸이 마루로 뛰쳐나왔어. 반쪽이는 냉큼 딸을 들쳐 업고 크게 소리쳤어. 지붕 위의 하인들은 머리를 맞대고는. “아이고, 내 상투!” 대문 앞의 하인들은 이리 쿵 저리 쿵. 부인은 북채로 북을 둥둥 울리며 소리쳤어. “저놈 잡아라! 반쪽이 잡아라!” 저놈 잡아라! 반쪽이 잡아라!
망주석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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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에, 더위에 지친 비단 장수가 망주석 그늘에서 잠이 들었어요.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부채 삼아 새들의 노랫소리를 자장가 삼아 비단 장수는 달콤한 잠에 푹 빠져들었지요. 뻐꾹뻐꾹 뻐뻐꾹 뻐꾹! 요란한 뻐꾸기 소리에 잠을 깬 비단 장수는 기지개를 펴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여보시오, 혹시 내 비단 못 봤소? 무지개처럼 곱고 깃털처럼 보드라운 비단이라오. 여보쇼, 내 비단 좀 찾아 주시오!” 비단 장수는 비단을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비단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때, “우리 원님을 찾아가 보시오. 무엇이든 똑 부러지게 해결해 주시니 아마 당신 비단도 찾아 주실 거요.” “그, 그게 참말이오? 고맙소, 고마워!” 원님을 찾아온 비단 장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어요. “원님, 제 비단 좀 찾아 주십시오! 잠깐 잠든 사이에 비단이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음, 자기 전이나 자고 난 뒤에 주변에 사람은 없었느냐?” “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본 거라고는 망주석뿐입니다.” 원님은 일순간 표정이 굳더니 나졸들을 향해 명령했어요. “여봐라, 가서 망주석을 끌고 오너라!” “예? 그 무거운 돌덩이를요?” 나졸이 깜짝 놀라 묻자, 원님이 더 큰 소리로 명령했어요. “뭣들 하느냐! 당장 망주석을 끌고 오라니까?” “예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러게 말이야, 원님이 어디 아프신 거 아냐? 애꿎은 망주석은 왜 끌고 오라는 거야?” 마을 사람들은 밤늦도록 들려오는 영차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사르르 두 눈이 감겼다가도 영차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지요. “영차 영차 꽁꽁 묶어서 으랏차차 힘껏 밀어라! 영차 영차 꽁꽁 묶어서 으랏차차 힘껏 당겨라!” 다음 날 아침, 끌려온 망주석을 보려고 마을 사람들이 관아로 모였어요. “흠흠!” 헛기침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원님을 쳐다봤어요. “네 이놈, 망주석은 바른 대답만 하거라! 비단 장수의 비단을 가져간 자가 누구냐?” 원님의 목소리가 관아 마당에 쩌렁쩌렁 울렸어요. 그렇지만 돌덩이인 망주석이 대답할 리가 없었지요. “어허,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너도 도둑과 한패로구나. 여봐라, 저 못된 망주석의 볼기를 매우 쳐라!” 망주석이 곤장을 맞자, 사람들이 숙덕대기 시작했어요. “쯧쯧, 돌덩이한테 대답하라니 무슨 일이래?” “틀림없이 원님이 더위를 잡수셨어.” “저런다고 돌덩이가 아프기나 하겠어?” 사람들은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웃음이 더 터져 나왔어요.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원님은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어요. “원님,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해 지기 전까지 비단을 한 필씩 구해 오너라.” “비단을요?” “그게 싫다면 옥살이를 하겠느냐?” “아, 아닙니다. 구해 오겠습니다.” 사람들은 비단을 구하러 우르르 달려 나갔어요. “바쁘다 바빠. 이보시오, 비단 한 필 주시오!” “숨차다 숨차. 이보시오, 나도 한 필 주시오!” 사람들은 이 마을, 저 마을, 온 장터를 샅샅이 뒤져 비단 한 필씩을 구해서 관아로 돌아왔어요. 원님은 비단 장수에게 잃어버린 비단을 찾아보라고 했어요. “원님! 찾았습니다. 이게 제 비단입니다.” 원님은 그 비단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비단을 어디서 구했느냐?” “마침 한 장사꾼이 비단을 싸게 팔기에 샀습니다.” “옳거니, 그 장사꾼이 바로 도둑이다! 어서 가서 잡아 오너라!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단을 판 도둑이 잡혀 왔어요. “네 이놈! 네가 네 죄를 알렷다!” 비단 도둑을 보고 원님이 호통을 쳤어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비단 도둑이 잡히자 비단 장수는 싱글벙글 신이 났어요. 원님은 비단 장수에게도 주의를 줬어요. “눈앞에 재물이 있으면 누구나 탐이 나는 법, 비단 장수도 앞으로는 물건을 잘 간수하도록 해라.” “예, 원님! 명심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또 한 번 원님의 지혜로운 판결에 감탄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사람들이 원님 앞에서 “아함!” 하면서 하품하네요? 재판 때문에 어젯밤부터 한숨도 못 잤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견우와 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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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아주 오랜 옛날 하늘나라 임금님에게 예쁜 딸이 있었어요. 베를 아주 잘 짜서 이름도 직녀였지요. 직녀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베를 짰어요. 캄캄한 밤하늘에 베틀 소리가 울려 퍼지면 별들이 별똥별을 떨어뜨려 하늘에 반짝반짝 수를 놓았지요. 직녀는 정성 들여 짠 옷감으로 하늘나라 사람들의 옷을 만들었어요. 직녀가 만든 옷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늘나라 선녀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이렇게 곱고 예쁜 옷을 만드는 직녀 공주님은 아마 마음씨도 이 옷처럼 고우실 거야.” 선녀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흐뭇해진 직녀는 더욱더 열심히 베를 짰어요. 하늘나라에 향긋한 봄이 왔어요. 바람이 꽃향기를 몰고 와서 코를 간질이자, 직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 꽃을 따다 옷감에 수놓으면 정말 아름다울 거야!’ 직녀는 알록달록 예쁜 꽃들을 찾아 하늘나라 들판을 돌아다녔어요. 그때 직녀의 눈에 저 멀리 소를 몰고 가는 한 청년이 들어왔어요. 청년의 이름은 견우였지요. 세월이 흘러 견우와 직녀는 서로 좋아하게 되었어요. 둘은 황금색 꽃반지를 끼워 주며 혼인을 약속했지요. 임금님도 소를 열심히 돌보는 견우가 믿음직스러워 혼인을 허락했어요. 견우와 직녀는 신랑 신부가 되어 선녀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올렸어요. 부부가 된 견우와 직녀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견우는 푸른 들판에서 소를 돌보는 일도 잊고, 직녀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것도 잊었지요. 이제 하늘나라에는 철커덕철커덕 베틀 소리도 우어우어 소 모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선녀들은 견우와 직녀를 걱정했어요. “혹시 견우님과 직녀님이 아프신 것은 아닐까?” 어느덧 하늘나라에 겨울이 찾아왔어요. 직녀가 겨울옷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선녀들은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했어요. 또 견우가 돌보지 않은 소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하늘나라 들판은 아주 엉망이 되었지요. 임금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요. “일은 하지 않고 날마다 놀러만 다니다니!” 임금님은 견우와 직녀에게 큰 벌을 내렸어요. “이제부터 둘은 서로 떨어져 지내거라.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서 베를 짜고,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서 소를 돌보거라!” 견우와 직녀는 뒤늦게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어요. 임금님도 벌을 내리긴 했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니 마음이 아팠지요.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음력 칠월 칠일에만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어요. 칠월 칠석이 되어도 만날 수가 없는 견우와 직녀는 웃음을 잃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은하수를 건널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견우와 직녀가 흘린 눈물은 하늘나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땅 위의 숲과 마을을 휩쓸었어요. 그 바람에 땅 위에 살던 사람들과 동물들이 큰 고통을 받았지요. 다시 긴 시간이 지나고 다음 해 칠월 칠석이 다가왔어요. 오늘도 은하수 강가에 나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견우와 직녀는 깜짝 놀랐어요. 까치와 까마귀들이 서로서로를 의지하면서 길고 튼튼한 다리를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견우님, 직녀님, 이제 은하수를 건너가세요.” 드디어 만난 두 사람은 또다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칠월 칠석이 되었어요. 견우와 직녀는 한달음에 은하수 강가로 달려갔어요. 하지만 은하수가 너무 넓고 깊어 건널 수가 없었지요. “보고 싶은 견우님!” “보고 싶은 직녀님!” 견우와 직녀는 서로의 이름만 애타게 부르다 끝내 발길을 돌려야 했어요. 견우와 직녀는 다음 해 칠월 칠석을 약속하며 눈물 대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헤어졌어요. 내년에도 까치와 까마귀들이 만든 오작교를 건너 만날 테니까요.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를 보고 "천생연분이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어 봤지? 이 말은 하늘이 짝지어 맺어 준 인연이라는 뜻이야. 그만큼 둘이 꼭 어울린다는 말이지. 우리처럼 말이야. 천생인연 또는 천정연분이라는 말도 같은 뜻으로 쓰인단다.
금도끼와 은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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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옛날, 깊고 깊은 산골 마을에 마음 착한 나무꾼이 살았어. 나무꾼은 늙은 어머니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지. 나무 한 짐 베어다가 우리 어머니 드실 쌀을 사고, 나무 두 짐 베어다가 우리 어머니 드실 고기 사세. “이놈이 제일 쓸 만하구나. 퉤퉤!” 나무꾼은 도끼 자루를 꽉 쥐고, 나무 밑동을 힘껏 찍었어. 금세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뚝뚝 떨어지고, 도끼를 쥔 손도 축축하게 땀에 젖었지. 그런데 나무꾼이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는 순간 미끄덩하더니 도끼가 빠져나가고 말았어.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내 도끼!” 그때 갑자기 호수 한가운데에서 출렁출렁 물보라가 일더니 휘이익 세찬 회오리바람이 몰아쳤어. 겁에 질린 나무꾼은 눈을 꼭 감고, 납작 엎드려서 풀잎을 꼬옥 움켜쥐었지. ‘아이고, 도끼도 잃고 목숨도 잃는구나. ’회오리바람이 잠잠해지자, 우레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어. “무슨 일로 그리 우는 게냐?” 나무꾼은 깜짝 놀라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어. “뉘, 뉘십니까?” “나는 이 산을 지키는 산신령이니라!” 나무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어. “하나뿐인 도끼가 호수에 빠져서 그럽니다. 도끼가 없으면 어머니와 저는 굶어 죽습니다.” “잠시 기다리거라.” 하더니 산신령이 호수 속으로 사라졌어. 잠시 후, 산신령은 번쩍이는 금도끼를 들고 나타났어.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아닙니다, 제 도끼는 금도끼가 아닙니다.” 나무꾼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어. 산신령은 다시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가 반짝이는 은도끼를 들고 나타났어.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아닙니다, 제 도끼는 금도끼도 은도끼도 아닙니다. 닳고 닳은 쇠도끼입니다.” 다시 호수 속으로 사라진 산신령이 이번에는 낡은 쇠도끼를 들고 나타났어. “맞습니다, 맞아요! 듬성듬성 이가 빠진 게 틀림없는 제 도끼입니다.” 쇠도끼를 본 나무꾼은 너무 기뻐 얼굴이 환해졌지. 허허허,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로구나. 자, 너에게 이 도끼를 모두 주겠노라.” “네? 모두 제게 준다고요?” 나무꾼은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를 모두 받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갔어. 나무꾼은 금도끼를 팔아 땅을 사고, 은도끼를 팔아 소를 샀어. 그리고 매일매일 부지런히 일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잘 살았지. 한편 마음 착한 나무꾼의 소문을 들은 욕심쟁이 나무꾼이 쇠도끼 한 자루를 집어 들고 산으로 달려갔어. “으흐흐, 나도 이제 부자가 되겠구나!” “여기쯤이라고 했겠다.” 욕심쟁이 나무꾼은 툭툭 도끼질하는 시늉을 하다가 도끼를 냅다 호수에 집어던졌어. 욕심쟁이 나무꾼은 호수 물을 눈가에 찍어 바르고,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했어. “아이고, 내 도끼. 금쪽같은 내 도끼가 호수에 빠졌네.” 잠시 후, 물보라가 일고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면서 산신령이 나타났어. 욕심쟁이 나무꾼은 ‘얼씨구나!’ 속으로 웃었지. “산신령님, 산신령님! 제가 도끼를 호수에 빠뜨렸, 아니, 도끼가 호수에 빠졌습니다.” 산신령은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 금도끼를 들고 나타났어.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욕심쟁이는 환하게 웃으며 연방 고개를 끄덕였어. “예,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있습죠.” 이번엔 산신령이 은도끼를 들어 보였어. “이 도끼도 네 도끼냐?” 욕심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어. “예, 바로 그것입니다. 금도끼, 은도끼 모두 제 것입니다.” “네 이놈,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게냐? 썩 물러가거라!” 산신령이 불같이 화를 내자, 호수 가운데서 물보라가 일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쳤어. 산신령의 호통 소리에 천지가 진동했지. 놀란 욕심쟁이는 엉덩방아를 찧고, 가시덤불을 데굴데굴 구르며,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을 갔어.
우렁이 각시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아주 아주 먼 옛날 깊은 산골 마을에 혼자 사는 총각이 있었어요. 굽이굽이 산이 높고 험해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총각은 늘 외로웠지요. 하루는 총각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이 밭에 고구마 심으면 누구랑 먹지?” 하며 총각이 중얼거리는데, “나랑 나눠 먹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깜짝 놀란 총각이 숨죽이고 있다가 다시 조심조심 혼잣말을 해 보았어요. “이 밭에 옥수수 심으면 누구랑 먹지?” 다음 날 총각은 우렁이를 넣어 둔 항아리를 보고 말했어요. “우렁아, 일하고 올게.” “그럼, 난 집에서 기다리지.” 우렁이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리는 듯했지요. 총각은 서둘러 밭으로 나갔어요.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총각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마루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과 국이며 반찬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으니까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총각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어요. “누굴까? 누가 밥을 해 놓고 갔을까?” 총각은 밤이나 낮이나 그 생각만 했어요. “아이고, 답답해라. 이러다 나 죽것네! 누가 그랬는지 내일은 꼭 알아내고야 말겠어.” 다음 날 총각은 일하러 가는 척 나가다가 울타리 뒤에 숨어서 집 안을 지켜보았어요. 잠시 후 항아리에서 신비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달처럼 환한 여인이 스르르 나타났어요. 깜짝 놀란 총각은 정신이 얼떨떨했어요. ‘우렁이가 각시가 되었나?’ 총각은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각시의 손을 덥석 잡았지요. “각시, 우렁이 각시! 내 색시가 되어 줘요.” 우렁이 각시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끄덕했지요. 총각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어요. 밭에 나가도 각시랑, 밥을 먹어도 각시랑 함께였지요. 괭이질 한 번 하고 각시 얼굴 보고, 호미질 한 번 하고 각시 얼굴 보고, 괭이질 두 번 하고 각시 얼굴 보고, 호미질 두 번 하고 각시 얼굴 보고, 총각은 각시가 너무 좋았어요. 총각이 예쁜 각시를 얻었다는 소문은 금세 아랫마을에까지 퍼졌어요. 욕심 많은 원님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원님은 일부러 산골 마을에 가서 우렁이 각시를 몰래 훔쳐보았어요. ‘흠, 듣던 대로 천하제일 미인이구먼.’ 원님은 우렁이 각시를 아내로 삼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총각을 관아로 불렀지요. “자네가 이 마을에서 일을 제일 잘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나와 저 산에 있는 나무를 빨리 베는 시합을 해 보세.” 총각이 이기면 많은 땅을 주고, 원님이 이기면 우렁이 각시를 데려가겠다고 했죠. 총각은 그만 털썩 주저앉았어요. 원님이야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만, 총각은 원님을 이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고민하던 총각은 우렁이 각시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어요. 그러자 우렁이 각시는 총각에게 가락지 하나를 주며 바닷물에 던지라고 했어요. 바닷가에 도착한 총각은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가락지를 힘껏 내던졌어요. 그러자 돌개바람이 몰아치더니 파도가 거칠게 치솟았어요. “어느 놈이 날 부르느냐?” “아이고! 용왕님, 살려 줍쇼. 전 우렁이 각시가 가락지를 주어서 던졌을 뿐입니다.” “허허, 그럼, 네가 내 사위로구나. 내 선물을 하나 줄 터이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 조롱박을 열거라.” 총각은 조롱박을 가지고 산으로 갔어요. 총각이 조롱박 마개를 열자, 꼬마 장정들이 쪼르르 줄지어 나와 순식간에 쓱싹쓱싹 나무를 몽땅 베고는 사라졌어요. 총각이 내기에서 이기자, 화가 난 원님은 다른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이번에는 말을 타고 먼저 강을 건너는 사람이 이기는 시합이었지요. 강가에 도착한 총각이 조롱박을 열었어요. 실망한 총각이 탄식하자, 시들시들하던 말이 갑자기 번개처럼 휙 내달리는 것이었어요. “원님, 이번에도 제가 이겼습죠?” 총각은 뒤따라오는 원님을 향해 히쭉 웃었어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민 원님은 배를 타고 바다 건너기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총각이 조롱박을 열자, 작은 조각배가 나왔어요. 원님의 배는 둥둥 북소리에 맞춰 바다로 나아갔어요. 총각은 작은 조각배의 노를 휘휘 저으며 바다로 나아갔죠. 그때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와 원님의 배를 꿀꺽 삼켜 버렸지요. 그렇게 세 번째 내기에서도 못된 원님을 이긴 총각은 우렁이 각시와 아들딸을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요.
요술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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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산 좋고 물 좋은 어느 마을에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농부가 살았어. 그날도 농부는 밤늦도록 밭을 갈고 있었지. 그때 쨍! “어, 이게 무슨 소리지?” 깜짝 놀란 농부가 조심조심 밭을 파 보았더니 아, 글쎄 커다란 항아리가 있는 거야. 요리조리 항아리를 살펴보니 여기도 금이 쩍 저기도 금이 쫙 아주 볼품없는 항아리였어. 그래도 아직 쓸 만하겠다 싶었던 농부는 낑낑거리며 항아리를 집으로 가져갔어. 그러고는 마당에 굴러다니는 괭이를 항아리 속에 휙 던져두었지. 이 모습을 몰래 엿보던 욕심쟁이 영감은 요술 항아리가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요술 항아리만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쿵쾅, 얼굴이 화끈화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는 거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욕심쟁이 영감은 농부를 찾아갔지. “이보게, 그 요술 항아리 얼른 돌려주게.” 욕심쟁이 영감은 다짜고짜 요술 항아리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쳤어.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 그 밭을 누구에게 샀나?” “그야 십 년 전에 영감님께 샀습지요.” 그러니까 그 요술 항아리는 내 거야. 난 자네에게 밭만 팔았지 요술 항아리는 팔지 않았거든. 그러면서 욕심쟁이 영감은 요술 항아리를 덥석 끌어안았어. 요술 항아리에 찰싹 달라붙은 욕심쟁이 영감은 끙끙대며 항아리를 옮기려고 했지. 욕심쟁이 영감이 하루 종일 끙끙댔지만, 요술 항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 그러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어. “저러다 욕심쟁이 영감이 요술 항아리만 깨뜨리겠네. 이럴 게 아니라 원님께 가서 누구 것이 맞는지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하게.” 결국 농부와 욕심쟁이 영감은 원님을 찾아갔어. 원님은 농부의 하소연을 듣는 둥 마는 둥 욕심쟁이 영감 말도 요리 팽 저리 팽 고개만 끄덕이며 듣는 척만 하는 거야. 흘끔흘끔 요술 항아리만 바라보던 원님이 마침내 판결을 내렸지. 욕심쟁이 영감과 농부는 요술 항아리를 껴안으며 기겁을 했지. 그러자 원님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어. 반으로 쪼개는 것이 싫으면 어찌하겠느냐?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에게 줄 수도 없으니, 둘 중 한 사람이 양보할 마음이 생기거든 그때 이 요술 항아리를 가져가도록 하거라! 욕심쟁이 영감과 농부는 원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지. 잠깐만요! 항아리를 자르면 안돼요!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조용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원님은 관아를 뒤지기 시작했어. “제일 좋은 것을 넣어야 해. 이게 좋을까? 아니면, 쌀? 아니 아니, 더 좋은 걸로. 황소? 아니 아니, 더 좋은 걸로.” 하루 종일 원님은 항아리에 들어갈 제일 좋은 물건을 찾느라 온 관아를 헤집고 다녔어. “아범아! 아범아! 나 좀 꺼내다오.” 요술 항아리에서 원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깜짝 놀란 원님이 황급히 요술 항아리 속에서 아버지를 꺼냈어. “아이고, 십년감수했네. 무슨 항아리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누.” 그런데 또 원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 당황한 원님이 요술 항아리에서 아버지를 또 꺼냈지. 요술 항아리 속에서는 계속해서 아버지가 나왔어. “아니, 왜 남의 아들을 부르는 거요?” “내가 아버지니까 부르지.” 그때 한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요술 항아리를 깨고 말았어. 그러자 원님의 진짜 아버지만 남고 모두 사라졌지. 그 후, 욕심쟁이 원님은 잘못을 뉘우치고 고을을 잘 다스렸대. 요술 항아리에서 나온 아버지들은 서로 자기가 원님의 아버지라고 싸우기 시작했어. ‘내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원님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어.
혹부리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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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턱 밑에 혹이 대롱대롱 달려 ‘혹부리 영감’이라 불리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요. 마을 아이들은 혹 안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서 할아버지 뒤를 졸졸졸 따라다녔지요. “허허, 그 녀석들 뭐가 그리 궁금하냐!” 마음씨 좋은 혹부리 영감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어요. 어느 날 착한 혹부리 영감이 지게 가득 나무를 해서 마을로 내려가는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후드득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웬 비람?” 혹부리 영감은 후닥닥 산속 허름한 집으로 몸을 피했어요.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보내야겠군.” 서산에 해 떨어지고 동산에 달이 뜨니 밤이 점점 깊어 가네. 우리 할멈 내 걱정에 이 밤 꼴딱 다 새겠네. 그때였어요. 우락부락 덩치 큰 도깨비, 눈이 하나 외눈 도깨비, 키 작은 난쟁이 도깨비들이 하나둘, 산속 집으로 들어왔어요. ‘에구머니, 이런 어쩐다? 여기가 도깨비 집이로구나!’ 깜짝 놀란 할아버지는 노래를 뚝 그쳤어요. “어? 노랫소리가 멈췄어. 분명 이 집에서 들렸는데?” “그러게, 방 안에서 노래가 들렸는데?” 덩치 큰 도깨비가 방문을 열어젖히자 혹부리 영감이 버들버들 떨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하, 영감이 부른 노래였구나! 오랜만에 사람이 부른 노래를 들으니 절로 흥이 나는데, 한 번 더 불러 보시오.” 혹부리 영감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어요. 혹부리 영감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자, 산속 허름한 집에 한바탕 도깨비 잔치가 벌어졌어요. 도깨비들은 덩실덩실, 낡은 집은 들썩들썩, 모두들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어요. 그때 꼬끼오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음이 급해진 도깨비들이 혹부리 영감에게 물었어요. “영감, 그 노래는 어디서 나오는 거요?” “그야, 내 목구멍에서 나오지요.” “아니, 아니. 목구멍 말고 다른 거 없소? 영감 노래는 뭔가 다르단 말이오.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오?” “그, 글쎄요.” 혹부리 영감은 겁에 질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턱 밑의 혹만 만지작거렸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깨비들이 수군댔어요. “혹시 그 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오?” 도깨비들이 눈을 번뜩이며 혹 가까이 다가오자 놀란 할아버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금은보화를 줄 테니, 그 혹 우리 주시오.” 그래서 착한 혹부리 영감은 혹을 주고 금은보화를 얻게 되었지요. 부자가 된 착한 혹부리 영감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큰 잔치를 열었어요.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에 사는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어요. “옳지,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황급히 산으로 올라갔어요. “나도 혹 떼고 금은보화 얻어야지. 아니지, 금은보화보다 더 귀한 걸 달라고 해야지!” “애물단지 혹이 효자 노릇 하는구나!”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착한 혹부리 영감이 갔다던 산속 허름한 집으로 신나게 뛰어갔어요. 도깨비들아, 기다려라! 혹부리 영감이 가신다! 왜 이렇게 밤이 더디지? 아이고, 지루해라. 너무 빨리 왔나? 몸도 쑤시고 배도 고프네. 이럴 게 아니라 노래를 불러야지. 내 노래를 듣고 도깨비들이 달려올 거야.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얼씨구 좋네 얼씨구 좋아 어서 빨리 밤 되거라. 혹 떼고 금은보화 얻어서 천년만년 살아야지. 그때였어요. 우락부락 덩치 큰 도깨비, 눈이 하나 외눈 도깨비, 키 작은 난쟁이 도깨비들이 하나둘, 산속 집으로 들어왔어요. 도깨비를 보자마자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혹을 잡고 쑥 내밀었어요. “도깨비님들, 이제야 오셨소?” 그런데 이게 웬일이래요? “아니 네놈이 겁도 없이 또 왔어? 이놈, 감히 도깨비를 속여!”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을 발견한 도깨비들이 마구 화를 내었어요. “왜, 왜들 그러시오. 여기 노래가 나오는 혹이 보이지 않소?” “뭐, 노래 나오는 혹이라고? 오냐, 그래. 이 혹도 가져가라!” 도깨비들은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 턱에 철썩 혹 하나를 더 붙였어요. “어이쿠, 아니 왜 그러시오? 나는 아무 죄가 없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렸군. 어디 맛 좀 봐라.”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어요. 날이 밝아 겨우 산속 집에서 도망친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가 쫓아온다며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면서 온 동네를 달리고 또 달렸어요. 턱 밑에 혹을 두 개나 달고서 말이에요. 아이고, 사람 살려! 아이고, 나 죽네!
토끼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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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나는 어느 봄날, 한 나그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숲길을 지나고 있었어.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어흐 어흐으으으으으응. “어디서 나는 소리지? 호랑이 소리 같은데.” 나그네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보았지. 어흐 어흐으으으으으응. “호랑이 소리가 맞구먼. 몹시 슬피 우는 것 같아. 무슨 일일까?” 나그네는 소리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어. 어흐 어흐 으으으으으응. 소리는 커다란 구덩이에서 나오고 있었지. 가까이 가서 보니까 글쎄, 호랑이가 구덩이에 빠져 있는 거야. “호랑아, 거기서 왜 그리 슬피 울고 있는 게냐?” 나그네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먹잇감을 구하러 나왔다가 그만 구덩이에 빠졌지 뭡니까. “그거 참 딱하게 됐구나. 하지만 너를 구해 주면 네가 나를 잡아먹을 것 아니냐?” “그럴 리가요.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어찌 잡아먹겠습니까?” “정말 잡아먹지 않겠단 말이지?” “약속할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호랑이는 앞발을 모아 싹싹 빌며 부탁했어. “아이고, 살았다!” 구덩이에서 나온 호랑이는 후유, 한숨을 내쉬었어. “그럼, 나는 이제 가 보겠네.” 나그네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일어섰지. 사람들도 구덩이를 파서 우리를 잡아 가잖아. 사람은 다 나빠. 그러니까 사람은 다 잡아먹어도 돼.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나그네에게 막 달려드는 참이었어. “잠, 잠깐만! 그럼 우리 누군가에게 딱 세 번만 물어보자. 모두가 날 잡아먹는 게 옳다고 하면 순순히 잡아먹히마.” 이쪽저쪽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니 아, 글쎄 호랑이를 구하기에 딱 좋은 통나무가 있지 뭐야. 나그네는 구덩이에 통나무를 내려 주며 말했지. “자, 이 나무를 타고 올라오너라.” 우물우물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황소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어. 너무하긴 사람이 더 너무하지. 사람들은 우리를 실컷 부려 먹고는 결국 잡아먹잖아. 그러니 호랑아, 어서 나그네를 잡아먹으렴. 소는 큰 눈을 끔벅끔벅하며 호랑이 편을 들었어. 호랑이는 좋아라 펄쩍 뛰며 입맛을 쩍쩍 다셨지. 호랑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니? “아무렴, 호랑이 말이 맞고말고! 사람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우리에게 은혜를 갚기는커녕 우리를 도끼로 찍어서 아프게 하지. 그러고는 뜨거운 아궁이에 밀어 넣어 땔감으로 쓰잖아. 그러니 호랑아, 얼른 잡아먹어 버려라!” 신이 난 호랑이는 콧구멍을 벌름대며 좋아했어. 겁에 질린 나그네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어. “이제 나는 곧 잡아먹히겠구나. 이를 어쩌나?” 바로 그때 숲에서 깡충깡충 토끼가 뛰어나왔어. “토끼야, 사람들은 구덩이를 파서 우리를 잡아 가잖아.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은혜 따위 갚을 필요가 없어. 안 그래?” 토끼는 고개를 갸웃거렸어. 호랑이는 보란 듯이 펄쩍 뛰어올라, 구덩이로 몸을 날려 쿵 하고 빠졌어. 그러고는 소리쳤지. 이렇게 나그네는 토끼의 꾀 덕에 살 수 있었어. 토끼야, 네가 나를 살렸구나. 정말 고맙다. 너는 훌륭한 재판관이야.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뭘요. 은혜를 모르는 것들은 혼 좀 나 봐야 돼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토끼는 기다란 귀를 팔랑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졌어.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절대 잡아먹지 않을게요. 정말이에요. 약속할게요.” 산골짜기에는 호랑이 울음소리가 며칠이나 울려 퍼졌어. 자, 나그네! 아까처럼 나를 꺼내 보라고. 어서! 이때 토끼가 나그네 귀에 가만가만 속삭였어. “나그네님, 어서 저 통나무를 치워 버리세요.” 나그네는 통나무를 멀리 던져 버리며 호랑이에게 말했지. “흥! 꺼내 주면 날 잡아먹을 게 뻔한데, 내가 또 널 구해 주겠니?” 화가 난 호랑이는 으르렁 소리쳤지.
방귀쟁이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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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골 방 영감은 싱글벙글 기분이 좋았어. 솜씨 좋고 마음씨 곱기로 소문난, 뽕지골 봉 영감의 딸을 며느리로 들였거든. “달덩이 같은 얼굴에 복이 넘치네, 허허.” 그런데 며느리가 시집온 지 며칠 만에 얼굴빛이 이상해졌어. 복숭아처럼 발갛던 볼이 메줏덩이처럼 누렇게 뜨고 생글생글 웃던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하지 뭐야. 방 영감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며느리가 쭈뼛쭈뼛 말을 꺼냈어. “아버님! 방, 방.” “아이고, 답답해라! 방석을 달라고?” “아니, 그게 아니고요. 방, 방.” “방, 방 좀 그만하고 시원하게 말해 보거라.” 보다 못한 방 영감은 며느리를 불러 앉혔어. “얘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게냐?” 며느리는 그제야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어. “방, 방 방귀.” “방귀? 지금 방귀라고 했느냐?” “네, 아버님. 부끄러워 방귀를 참았더니 속병이 났습니다.” 방 영감은 어처구니없었어. “세상에 방귀 안 뀌고 사는 사람이 있다더냐.” “제 방귀는 흔한 방귀가 아니어서요.” “어디 그 귀한 방귀나 구경해 보자. 시원하게 뿡뿡 뀌어라, 어서어서!” 그런데도 며느리는 뀌라는 방귀는 안 뀌고 딴말만 늘어놓았어. “그럼, 아버님은 문고리를 꼭 움켜잡으시고.” “그래! 잡았다, 잡았어. 어서 뀌어라.” “아직이요! 어머님은 부엌 솥뚜껑을 꽉 잡으시고, 서방님은 앞마당 감나무를 꼭 끌어안으세요.” 방 영감은 며느리가 방귀 한 번 뀌는데 웬 호들갑인가 싶었지. 꼭 잡고 있어야 해요! 그제야 며느리는 참고 참았던 방귀를 냅다 뀌었어. 뿌웅! 뿡! 방귀가 어찌나 요란하고 센지. 낮잠 자던 개가 후다닥, 지붕이 들썩들썩. 방귀 한 방에 아주 생난리가 났어. 방 영감은 문고리 잡고 나가떨어지고 아내는 솥뚜껑 잡고 하늘로 치솟았다 내동댕이쳐지고 아들은 감나무 가지와 함께 휘청 고꾸라졌지. 그날 밤, 방 영감은 잠을 이룰 수 없어 밖으로 나왔어. “살다 살다 그런 방귀는 처음일세. 집이 폭삭 내려앉는 것도 시간문제겠어.” 며느리도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밖에 나와 있었지. 방 영감은 며느리를 조용히 불러 말했어. “얘야, 네가 하는 짓이 다 예쁘고 곱다만 네 방귀가 무서워 같이 살기가 겁나는구나. 잠시 친정에 가 있거라.” 며느리는 억울했지만 방 영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 다음 날, 방 영감이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뽕지골로 갔어. 뽕지골 어귀에 배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커다란 배나무가 있었어. 방 영감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말했어. “아버님, 서방님! 저를 믿으시고 배나무를 꼭 안고 있으세요.” 방 영감은 어리둥절했지만 곧 아들과 함께 며느리가 시키는 대로 했어. 며느리는 엉덩이를 살포시 들고 방귀를 뀌었지. 뽀옹! 뽀옹! 그때 배가 우수수 떨어졌지. 방 영감은 냉큼 배 하나를 베어 먹었어. “아이고, 시원해라! 아이고, 달콤해라! 며느리 방귀 덕에 맛난 배를 먹어 보네.” 방 영감은 껄껄 웃었지. 아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커다란 자루에 배를 가득 담았어. “얘야, 네 방귀도 쏠쏠하니 쓸모가 있구나.” 방 영감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어. 이제 방 영감은 며느리의 얼굴빛만 봐도 며느리가 방귀 뀔 때를 알았지. “방귀쟁이 며느리가 방귀 뀐다, 뭐든지 꼭 잡아라.” 날마다 방 영감의 고함 소리가 방구골에 쩌렁쩌렁 울렸대. 물론 행복한 웃음소리도 함께 말이야.
멸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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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따뜻한 물결이 살랑대는 기분 좋은 오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던 할아버지 멸치는 손자 멸치의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났어요. “할아버지, 멸치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물고기래요.” “허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우리 조상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이야기해 주마.” 너희 팔 대조 할아버지는 동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유명한 어른이셨지. 어마어마한 부자라 가자미를 종으로 부리실 정도였단다. 하루는 우리 멸치 어른께서 아주 이상한 꿈을 꾸셨어. “어허, 이게 도대체 무슨 꿈일꼬?” 지난밤 꾼 꿈이 너무너무 궁금한 거야. 그래서 글 좀 배웠다는 병어, 물메기, 꼴뚜기, 망둥이를 죄다 불렀지. 그리고 가자미에게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오라고 시켰어. 꿈 내용은 이러했지. 몸이 쑥 올라가다 뚝 떨어지고, 여럿이 메고 훌훌 걷다가 갑자기 흰 눈이 펄펄 내리고, 화끈화끈 덥더니 오슬오슬 추워지고, 높은 고개를 넘어 붉은 곳으로 갔다는 거야. 손님들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요리조리 서로 눈치만 봤지. 우리 멸치 어른께서 꾸신 꿈이 워낙 특별한지라 도무지 무슨 꿈인지 알 수가 없었거든. 이때 망둥이가 점잖게 한마디 했어. 허허허, 물고기가 위로 올라갔다 하니. 이는 틀림없이 용이 되실 꿈이외다. “오호, 그래? 그럼, 나머지는 무슨 뜻이오?” 우리 멸치 어른이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어. “용이 되었으니 오르락내리락하고, 훨훨 구름을 타고 다니며 해도 쨍쨍, 눈도 펄펄 더웠다 추웠다 천지에 조화도 부리고, 높은 고개를 넘어 좋은 곳으로 가는 꿈이지요.” 듣고 보니 망둥이 말이 그럴듯했어. 우리 멸치 어른은 어깨가 으쓱하고,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아 모두에게 음식을 권했지. 하지만 정작 음식을 차리느라 허리가 휠 지경인 가자미한테는 먹으란 소리 한마디를 안 했던 거야. 슬슬 심통이 난 가자미가 한 소리 했지. 쳇, 용꿈은 무슨 용꿈! 우리 멸치 어른은 가자미에게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물었어. 그래, 너도 해몽을 거들겠다는 거지. 웅얼웅얼 말고 어디 네 해몽 한번 들어 보자꾸나. 흠흠, 그 꿈은 딱 낚시에 걸릴 꿈입죠. 낚시에 걸려 쑥 올라가서 땅바닥에 휙 패대기쳐지면 낚시 통에 툭 던져져 사람이 메고 훌훌 걷지요. 흰 눈 같은 소금을 솔솔 뿌려 붉은 불판에 올리니 화끈화끈 더워지며 익는 거지요. 그런데 고루고루 잘 익으라고 가끔 부채질하니 오슬오슬 추워지는 것입죠. 그때 물메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어. “그나저나 마지막 높은 고개는 뭔가?” “그야, 사람 목구멍으로 꾸울꺽 넘어가는 거지요.” 붉으락푸르락 머리끝까지 화가 난 우리 멸치 어른은 가자미의 뺨을 철썩 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어.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함부로 말을 하는 게냐!” 그런데 힘이 어찌나 세셨던지 가자미 녀석 눈이 홱 돌아갔지 뭐냐. 그때 망둥이는 너무 놀라 눈이 툭! 병어는 호호 웃다가 주둥이가 쭉! 물메기는 하하 웃다가 주둥이가 쫙! 꼴뚜기는 얼결에 눈을 엉덩이에 척! 그때부터 물고기들의 생김새가 지금처럼 변한 것이란다. 다 우리 멸치 어른이 만들어 주신 것이지. 그러니 널 놀리는 물고기가 있거든 이 이야기를 꼭 해 주거라. 할아버지 멸치의 이야기가 끝나자, 손자 멸치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망둥이의 꿈 해몽이 맞았어요, 가자미의 꿈 해몽이 맞았어요?” 할아버지 멸치는 못 들은 척 안 들은 척 바위 속으로 스스슥 들어가 버렸어요.
도깨비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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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한 선비가 십 리 길을 걸어 친척 집에 다녀오고 있었어요. 아직도 두어 고개를 더 넘어야 하는데, 그만 어둑어둑 해가 기울고 말았지요. 주위를 둘러보니 고갯마루에 낡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어요. ‘저기에서 하룻밤 묵어가야겠구먼.’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했던 선비는 초가집에 들어서자마자 잠이 들었어요. “쏙닥쏙닥, 깔깔깔, 쑤군쑤군, 낄낄낄.” 잠결에 들려오는 말소리에 선비는 슬쩍 눈을 떠 보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글쎄,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거예요. 가만히 살펴보니 도깨비들이 뭔가를 썼다, 벗었다, 썼다, 벗었다 하는 게 아니겠어요? 선비가 벌벌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도깨비들이 그만 선비를 보고 말았어요. “손님이 왔구려!” “그럼, 오늘 이 대감 댁 제사에는 못 가는 겐가?” “글쎄,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옳거니! 이러면 어떻겠는가? 도깨비들 중 한 놈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선비의 머리 위에 감투를 척 씌워 줬어요. 순간 선비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지요. “자! 이제 슬슬 가 보세!" “그러세!” 도깨비들과 선비는 도깨비감투 하나씩 쓰고서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갔어요. 오호라, 이게 말로만 듣던 도깨비 감투로구나! 이 대감 댁 제사상에는 고기며 나물이며 맛난 음식들이 그득했어요. “얼씨구절씨구, 좋구나, 좋아! 배불리 먹고 신나게 노세!” 도깨비들은 상 위로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먹어 댔어요. 감투를 쓴 선비도 덩달아 신이 났지요. 그런데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이 얼굴이 파래져서 버들버들 떠는 게 아니겠어요? 도깨비들이 먹은 음식은 멀쩡한데, 선비가 먹는 음식들은 쓱쓱 사라지니 놀랄 만도 하지요. 꼬끼오, 꼬끼오! 새벽닭이 요란하게 울어 대자 도깨비들은 부리나케 이 대감 집을 빠져나왔어요. 물론 감투를 쓴 선비도 도깨비들을 따라 나갔지요. 고개를 넘던 선비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요놈들을 따라가도 죽고, 도망가도 죽는다면 차라리.’ 선비는 슬몃슬몃 두어 걸음 뒷걸음질하다가 잽싸게 뒤돌아 뛰기 시작했어요. “이놈! 우리 감투 내놔라! 감투!” 도깨비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지만, 날도 밝고 배도 불러 그만 선비를 놓치고 말았어요. “휴, 살았다. 살았어!” 자기 집 안방으로 씨근벌떡 뛰어 들어간 선비는 그제야 다리를 쭉 뻗으며 편한 숨을 내쉬었어요. 선비가 감투를 벗자, 아내가 깜짝 놀라며 “에구머니나! 영감, 언제 들어왔수?” 선비가 감투를 쓰자, 아내가 어리둥절. “아니, 이 양반이 그새 또 어딜 가셨나?” ‘허허! 이것 참 신기하고 재미난 물건일세!’ 도깨비감투를 얻은 선비는 더덩실 어깨춤이 절로 났어요. 그 후로 선비는 밤마다 도깨비감투를 쓰고 동네방네 제사 집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놀려 주었어요. 하루는 선비가 으리으리한 기와집의 제사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오다가 주인 영감이 묵직한 돈주머니를 숨기는 것을 보았어요. 선비는 냉큼 가서 그 돈주머니를 훔쳤지요.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선비의 욕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어요. 선비의 곳간에 돈과 곡식이 그득할수록 동네 사람들은 밤새 도둑이 들었다고 울고불고 야단이었지요. 그래도 선비는 미안한 줄 모르고 제 욕심만 차렸어요. 맛난 음식도 먹고 돈더 얻고 꿩 먹고 알 먹기일세! 그러던 어느 날 선비가 감투를 집에 두고 잠시 일을 보러 나갔어요. 때마침 방을 치우던 아내가 도깨비감투를 발견했어요. “아니, 이게 웬 낡아 빠진 감투람?” 선비의 아내는 감투를 화롯불에 휙 던졌어요. 밤이 되어 건넛마을 제사 집에 가려던 선비는 도깨비감투가 보이지 않자 아내에게 물었어요. “여보, 혹시 방 안에서 감투 하나 못 보았소?” “아, 그거요. 너무 낡아서 화로에 던졌는데, 왜 그러슈?” 선비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펄펄 뛰었어요. 화로 속에는 재만 폴폴 날리고 있었지요. 곰곰이 생각하던 선비는 무릎을 탁 쳤어요. ‘그래! 도깨비감투는 태워도 도깨비감투일 테지!’ 선비는 옷을 홀랑 벗고 온몸에 재를 발랐어요. 신통하게도 스르륵스르륵 몸이 점점 사라졌어요. 단숨에 제사 집으로 달려간 선비는 손에 바른 재가 훌훌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요것조것 맛난 음식을 집어 먹었어요. 난데없이 하얀 손이 제사상에 불쑥 나타나서 이것저것 음식들을 집어들자, 사람들이 모두 까무러치게 놀랐어요. “오호라! 이놈이 바로 제삿밥 도둑이로구나. 여봐라, 도둑 잡아라!” 사람들이 모두 함께 달려들어 하얀 손을 단단히 붙잡았어요. 사람들이 하얀 손을 꽉 잡고 몽둥이로 마구 때리자, 선비 몸에 묻은 재가 떨어져 나갔어요. “여봐라! 몽둥이로 더 치거라.” 결국 온몸에 바른 재가 모두 떨어져 나가고 발가벗은 선비가 떡 나타났지요. “요놈! 감히 제사 음식에 손을 대!” “이제야 잡혔구나. 이놈, 이 도둑놈!”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선비를 단단히 혼내 줬어요. “아이고, 창피해! 아이고, 망했네!” 선비는 싹싹 빌면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갔어요.
구렁덩덩 새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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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자식 없이 외롭게 살던 아주머니가 늘그막에 아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이를 어째! 사람이 아니라 구렁이를 낳은 거예요. “그래도 귀한 내 아기인걸!” 아주머니는 삿갓으로 구렁이를 따뜻하게 덮어 주었어요. 아주머니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에 옆집 사는 딸들이 구경을 왔어요. “아기는 어디에 있어요?” “삿갓을 들춰 보렴.” 옆집 딸들이 삿갓을 들추자, “에구머니, 구렁이잖아? 아이, 징그러워.” 첫째 딸이 요란스레 호들갑을 떨었어요. “아휴, 끔찍하게도 생겼네!” 둘째 딸은 막대기로 구렁이를 툭툭 건드렸지요. 하지만 셋째 딸은 “어머, 구렁덩덩 새 선비네?” 하고 이름까지 지어 부르며 구렁이를 가만가만 어루만져 주었어요. 세월이 흘러 장가갈 나이가 된 구렁이는 옆집 딸에게 장가보내 달라고 보챘어요. “아이고, 얘야! 누가 너한테 시집을 오겠니? 행여 꿈도 꾸지 마라.” 하지만 구렁이가 몇 날 며칠을 조르자,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는 옆집을 찾아갔어요. “우리 아이가 장가를 가고 싶다는데.” “어머머, 구렁이랑 어떻게 결혼을 해요?” 첫째 딸은 질겁하며 도망가고, “세상에 어떤 바보가 구렁이한테 시집을 가요?” 둘째 딸은 고개를 획 돌렸어요. “어머님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시집가겠어요.” 셋째 딸이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말했어요. 셋째 딸은 왠지 구렁이가 싫지 않았거든요. 셋째 딸이 시집가는 날, 혼례복을 차려입은 구렁이가 초례상으로 스르륵 건너왔어요. 그리고 수줍어 고개를 떨군 셋째 딸과 혼례를 치렀지요. 구렁이는 첫날밤에 색시가 된 셋째 딸에게 부탁했어요. “가마솥 가득 물을 끓여 주시오.” 구렁이가 펄펄 끓는 물속으로 들어가자, 스르르 허물이 벗겨지더니 놀랍게도 아주 잘생긴 선비로 변했어요. 혼례를 치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구렁덩덩 새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어요. 이 허물을 잘 가지고 계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오. 허물이 없으면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오. 구렁덩덩 새 선비는 색시에게 허물을 맡기고 과거 시험을 보러 먼 길을 떠났어요. 색시는 저고리 속에 허물을 넣고 고이고이 간직했어요. 구렁덩덩 새 선비가 떠나고 난 며칠 후, 언니들은 색시의 저고리 품이 불룩한 것을 보고 물었어요. “저고리 품에 뭘 감추고 다니니?” 언니들은 억지로 색시의 품에서 허물을 꺼냈어요. “어머, 징그러워라. 이 흉한 것을 왜 품고 다녀?” 심술궂은 언니들은 색시를 밀어제치고 허물을 홀라당 태워 버렸어요.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허물이 다 타 버렸으니 이를 어째. 우리 서방님 못 돌아오시면 어이 할꼬. 색시는 재가 된 허물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어요. 그날 이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구렁덩덩 새 선비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허물이 없어 돌아오시지 못하는 것이 분명해. 내가 서방님을 찾아 나서야겠어.’ 길을 떠나기 전에 색시는 정성껏 옷을 지었어요. ‘서방님! 한 땀 한 땀 곱게 지은 이 옷 입고 허물일랑 부디 잊으소서.’ 몇 날 며칠 공들여 만든 옷을 가지고 색시는 먼 길을 떠났어요. 걷고 또 걷고 한참을 걸은 뒤에 색시는 빨래하는 할머니를 만났어요. “할머니, 할머니! 구렁덩덩 새 선비를 보셨나요?” “흰 빨래는 검게 빨고, 검은 빨래는 희게 빨아 주면 알려 주지.” 색시가 옷을 걷어붙이고 흰 빨래를 검게 빨고, 검은 빨래를 희게 빨아 주자, 그제야 할머니가 일러 주었어요. “저기 가시넝쿨 산에 사는 까마귀에게 물어보오.” “까마귀야, 까마귀야! 구렁덩덩 새 선비 못 보았니?” 까마귀들은 흙 묻은 구더기를 주워 먹고 있었어요. “이 구더기를 깨끗하게 씻어 주면 알려 주지.” 색시가 냇가에 앉아 흙 묻은 구더기를 씻어 주자, 그제야 까마귀가 일러 주었어요. “고개 너머 황소에게 물어보오.” 까마귀가 일러 준 대로 고개를 넘어가자, 커다란 황소가 움질움질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어요. “황소야, 황소야! 구렁덩덩 새 선비 못 보았니?” “이 논 다 갈면 알려 주지.” 색시가 넓은 논을 말끔하게 갈아 주자, 그제야 황소가 일러 주었어요. “이 밥그릇 뚜껑을 타고, 출렁출렁 강을 건너, 새 쫓는 토끼에게 물어보오.” 색시는 황소가 일러 준 대로 밥그릇 뚜껑을 타고 출렁출렁 강을 건너 새 쫓는 토끼를 만났어요. 토끼야, 토끼야! 구렁덩덩 새 선비 못 보았니? "보았지만 우리 마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지 말고 알려 주렴. 이 가락지 줄게. 그제야 토끼는 구렁덩덩 새 선비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어요. 그리하여 색시는 어렵게 선비를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구렁덩덩 새 선비는 허물이 없어져 어쩔 수 없이 저승 나라 왕의 사위가 되었어요. 색시가 구렁덩덩 새 선비를 찾으러 온 것을 안 저승 나라 왕은 색시를 쫓아낼 궁리를 했어요. “구렁덩덩 새 선비를 데리고 가려면 내 딸과 세 가지 시험을 겨뤄서 이겨야 한다.” 저승 나라 왕은 색시가 자기 딸을 절대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첫 번째 시험은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꺾어 오기였어요. 색시는 언 강을 건너듯 조심조심 다가가 새가 앉은 나뭇가지를 살며시 꺾어 왔어요. 하지만 저승 나라 왕의 딸은 조심성이 없어서 후드득 새를 쫓고 말았지요. 두 번째 시험은 맨발로 가시나무 오르기였어요. 색시는 뾰족뾰족한 가시에 찔려도 구렁덩덩 새 선비를 생각하며 꾹 참고 나무에 올랐어요. 저승 나라 왕의 딸은 연방 입을 삐죽이며, 호들갑을 떨더니 가시나무에 겅중 뛰어올랐어요. “앗, 따가워. 아이고, 발이야.” 그러다가 그만 빠지직 나무를 부러뜨리고 말았지요. 세 번째 시험은 호랑이 눈썹 뽑아 오기였어요. “흥, 호랑이 눈썹을 어떻게 뽑아 와!” 저승 나라 왕의 딸은 몰래 마당에 있는 고양이 눈썹을 쏙 뽑았어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색시는 치마 사이로 살짝 호랑이 꼬리가 보이는 할머니를 만났어요. 색시는 산속에 들어온 까닭을 이야기했어요. 쯧쯧, 딱하기도 하지. 그래서 이 깊은 산중까지 여자 혼자의 몸으로 우리를 찾으러 왔구먼. 내 아들이 잠들면 눈썹을 뽑아 주리다. 호랑이가 잠이 들자, 할머니는 눈썹을 쏘옥 뽑았어요. 그러고는 아들이 사냥을 나가자, 색시에게 눈썹을 주었지요.
삼 년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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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마을에 오래 사는 게 소원인 영감이 살았어요.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들여놓고, 걸어 놓고, 붙여 놓고, 곁에 놓고, 심지어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름까지도 오래 산다는 뜻으로 ‘장수’라고 지었지요. 어느 날 아침, 영감은 장에 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어요. 영감이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산다는 삼 년 고개를 막 넘으려고 할 때, 멀리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영감은 행여 넘어질세라 지팡이를 살살 짚어 가며 살금살금 한 발짝, 침을 꼴깍 삼키고 살금살금 두 발짝, 도포 자락 움켜쥐고 살금살금 세 발짝, 한숨 한 번 내쉬고 살금살금 네 발짝.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영감은 장에 도착했지요.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살아! 장을 둘러보던 영감은 약장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영감님, 이 약 한번 잡숴 보소. 백 살까지 오래오래, 잔병 없이 오래오래, 무병장수 도와주는 신통방통한 보약이라오!” 약장수의 말에 영감은 귀가 솔깃했어요. “백 살까지 산다고? 그 약 모두 내게 주소!” 영감은 오래 살고 싶은 욕심에 가짜 약인 줄도 모르고, 약장수가 내미는 약을 벌컥벌컥 받아 마셨어요. 볼거리 많고 먹을거리 많은 장 구경에 금세 날이 어두워졌어요. 그런데 가짜 약 때문인지 배 속에서 꾸르륵 꾹꾹 난리가 났어요. “아이고, 배 아파. 어이쿠, 똥 마려!” 꽁무니를 틀어막고 비틀비틀 집으로 가던 영감은 그만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고 말았어요. 철퍼덕 주저앉은 영감은 엉엉 울었어요. “어찌할꼬, 어찌할꼬, 이 노릇을 어찌할꼬.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으니, 나는 이제 삼 년밖에 못 사네. 삼 년밖에 못 살아!” 휘적휘적 걸어서 간신히 집에 온 영감은 대문 앞에서 풀썩 고꾸라졌어요. “아니, 영감. 이게 어쩐 일이오?” 할머니가 달려 나왔어요. 영감이 맥없는 얼굴로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다고 말하자, 할머니도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아이고! 아이고, 어쩔거나. 불쌍한 우리 영감, 어쩔거나.” 영감은 그날로 앓아눕고 말았어요. 할머니는 용하다는 방법은 무엇이든 다 썼어요. 의원 불러 침도 놓고, 정성으로 보약 짓고, 무당 불러 굿도 하고, 귀신 쫓는 부적 쓰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이제 저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용하다는 의원도, 무당도, 점쟁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법이 없다고 포기했어요. “아이고, 아니 되오. 제발 우리 영감 좀 살려 주오.” 하루는 아들 장수가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어요. “아버지, 아버지! 제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제 아무 걱정 없이 오래 사실 수 있어요.” 그 소리에 영감은 눈을 번쩍 떴어요. “오래 살 수 있다고? 그 방법이 뭐냐?” 그러자 장수가 하는 말이, “삼 년 고개에서 또 넘어지세요!” 뭐라고? 삼 년 고개에서 또 넘어지라고? “네, 삼 년 고개에서 또 넘어지세요.” 장수는 손가락을 꼽으며 조곤조곤 말했어요. “삼 년 고개에서 한 번 넘어지면 삼 년을 살고, 두 번 넘어지면 육 년을 살고, 세 번 넘어지면 구년을 살잖아요.” “옳거니! 네 번 넘어지면 십이 년을 사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감은 삼 년 고개로 뛰어갔어요. 삼 년 고개에 이르자, 영감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졌어요.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고, 육 년이 지나고, 구년이 지나 영감의 칠순 잔치가 벌어졌어요. 내가 오래 사는 비결이 뭔 줄 아시오? 바로 저기 저, 삼 년 고개 덕분이라오. 함께 가서 넘어져 볼 텐가? 허허허. 영감의 웃음소리는 삼 년 고개를 타고 굽이굽이 퍼져 나갔어요. 이제 영감님은 어떻게 될까요?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으니 정말 삼 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렇게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워 있으니, 정말 걱정이에요. 영감의 소원대로 영감이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살아!’라는 말 중 ‘삼 년밖에 못 살아!’를 ‘삼 년을 더 살아!’로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복 타러 간 총각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아야, 저그 서천 새앗골에 가믄 복 타는 곳이 있다는디 거그 가서 복이라도 좀 타 와야 쓰지 않것냐?” 어머니 말에 총각은 맥을 탁 놓고 고개만 끄덕끄덕하더니, 별수가 없다 싶은지 주섬주섬 짐을 쌌어요. “엄니, 복 타러 다녀올라요.”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큰절을 하고 집을 나섰어요. 서천 새앗골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총각은 하염없이 걷기만 했어요. 한참을 가다가 고개를 넘어서는데 아리따운 처녀가 불 꺼진 청사초롱을 걸고 있었어요. “서천 새앗골에 복 타러 가려는디 어디로 가야 하오?” “높고 험한 저 봉우리 열 개 너머에 있습니다.” 총각은 첩첩이 두른 산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발걸음을 옮겼어요. 그러자 처녀가 총각을 향해 말했어요. “서천 새앗골에 가게 되면, 나와 혼인할 배필이 누구인지 꼭 좀 알아다 주세요.” 총각은 쉬지 않고 걷고 걸어 산봉우리 세 개를 넘었어요. 잠깐 숨을 고르는데, 장기 두는 노인들이 보였어요. “어르신, 서천 새앗골에 복 타러 가려는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쪽으로 가게나. 이제 세 봉우리 넘었으니 일곱 봉우리 남았네!” 그러더니 노인들이 한소리로 부탁했어요. “서천 새앗골에 가게 되면, 누가 장기에서 이기는지 좀 알아다 주게.” 총각은 힘이 쪽 빠지도록 걸어 산봉우리 세 개를 더 넘었어요. 잠깐 숨을 돌리는데, 나무에 물을 주는 아이가 보였어요. “아야, 서천 새앗골에 복 타러 가는디, 어디로 간다냐?” “저쪽으로 가세요. 이제 여섯 봉우리 넘었으니 네 봉우리 남았네요.” 총각은 기운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어요. 그때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어요. “참, 참, 서천 새앗골에 가게 되면, 이 나무에서는 왜 꽃이 피지 않는지 좀 알아다 주세요.” 총각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봉우리 세 개를 더 넘었어요. 총각은 처녀를 데리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갔어요. “엄니, 엄니 아들이 복 타 가지고 왔소!”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그 뒤 총각은 여의주를 나라에 바쳐 높은 벼슬을 얻고, 금덩이와 장기판을 팔아 큰돈을 벌어 곱디고운 처녀와 혼인도 했어요.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며 오래오래 효도하며 살았어요. 총각은 이무기의 긴 수염을 잡고 늘어졌어요. “아이고야, 잘 만났소. 서천 새앗골에 복 타러 가야 하는디 제발 나 좀 데려다주소.” 총각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이무기 등에 올라탔어요. 순식간에 이무기는 복숭아꽃 가득한 언덕 위에 총각을 내려놓았어요. “여기가 서천 새앗골이오.” “지지리도 복이 없어 복 타러 왔습지요.” 노인은 껄껄 웃더니, “복은 이미 코앞에 와 있으니 그만 가 보게나!” 하고 돌아섰어요. 총각은 돌아서는 노인의 옷자락을 붙잡았어요. 총각은 용이 주고 간 여의주를 받아 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어요. 세 봉우리를 넘자, 아이가 반기며 달려왔어요. “내가 심은 나무에 꽃이 피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라 하나요?” “나무 아래 박혀 있는 금덩이를 빼내라 하데?” 아이가 땅을 파서 호박만 한 금덩이를 빼내자, 가지가지마다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탐스러운 꽃이 활짝 피었어요. 총각은 아이가 준 금덩이를 받아 들고 발길을 재촉했어요. “그래? 결판도 나지 않을 장기를 뭐하러 두나?” 노인들은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총각은 장기판을 받아 들고 남은 세 봉우리를 넘었어요. 총각을 보자 처녀는 버선발로 달려 나와 반겼어요. “나의 배필은 누구라 합니까?” “처음 만난 사내라 하였소.” “처음 만난 사내요? 그건 당신이잖아요!” 처녀는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어요. 처녀의 말에 총각은 깜짝 놀랐어요. 그러고는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리며 처녀의 손을 꼬옥 잡았어요. “이제야 알것소. 복은 이미 코앞에 와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서 가소. 당신도 소중한 내 복이오.”
방귀 시합
의사소통
초등_고학년
옛날 어느 고을 윗마을에 방귀쟁이 사내가 살았어요. 한 번 방귀를 뀌었다 하면 어찌나 세게 방귀를 뀌는지 “나 방귀 뀔라네.” 하면 마을 사람들은 귀 틀어막고, 코 틀어막고, 문 걸어 잠그고, 기둥 부여잡고, 우당탕 쿵탕 난리 법석이었지요. 아랫마을에는 방귀쟁이 아낙이 살았어요. 아낙의 방귀 또한 어찌나 요란한지 “나 방귀 뀔라요.” 하면 마을 사람들은 귀 틀어막고, 코 틀어막고, 꽁꽁 소 묶어 놓고, 아이 꼭 끌어안고,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요. 하루는 방귀쟁이 사내가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땅이 흔들리고 벽이 쩌억 갈라졌어요. “아이코, 땅이 꺼지려나 하늘이 무너지려나!” 그때 아랫마을에서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어요. “내 태어나 저렇게 센 방귀는 처음일세. 아랫마을 방귀쟁이 아낙의 방귀는 소문대로 대단하구먼.” “뭐? 아랫마을 방귀쟁이? 나보다 센 방귀를 뀐단 말이야?” 방귀쟁이 사내는 속이 배배 꼬여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다못한 방귀쟁이 사내는 방귀 잘 나오는 보리밥을 잔뜩 지어 먹었어요. 그러고는 꽁무니를 꾹 틀어막고 아랫마을로 내려갔어요. “흥, 내 방귀가 더 세지. 암, 그렇고말고.” 누구 방귀가 더 센지 가려보자고! 방귀쟁이 아낙의 집 근처에 가니 구린내가 풍풍 풍겼어요. “옳아, 이 집이구먼.” 방귀쟁이 사내는 사립문을 박차고 들어갔어요. “윗마을 방귀쟁이가 왔소! 어서 나와 보시오!” 하지만 인기척은 없고 누렁이만 멍멍 짖어 댔어요. “에잇, 내가 올 걸 알고 숨어 버린 거야?” 심술이 난 사내는 참았던 방귀를 냅다 뀌었지요. “깨갱깽깽깽깽!” 검댕이가 된 누렁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을 피우자, 방귀쟁이 사내는 그제야 직성이 풀린 듯 집으로 돌아갔어요. 뒤늦게 방귀쟁이 아낙이 집에 돌아와 보니 온 집 안에 물건들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문이란 문은 죄다 덜렁덜렁, 검댕이가 된 누렁이는 펄쩍펄쩍 뛰며 짖어 댔지요. “이게 웬 난리래?” 아낙은 콧구멍을 발랑발랑 냄새를 맡아 보더니 “아이고, 구린내! 윗마을 방귀쟁이 짓이구먼.” 아낙은 방귀 잘 나오는 고구마 한 광주리를 쪄 먹고, 부리나케 윗마을로 올라갔어요. 저만치 윗마을 방귀쟁이의 초가집이 보였어요. 아낙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방귀쟁이의 집을 향해 돌아섰어요. 그러고는 젖 먹던 힘까지 모아서 방귀를 뀌었지요. “끄으으응!” 마침 뒷간에서 똥을 누던 방귀쟁이 사내는 뒷간이 무너지는 바람에 철퍼덕 똥을 깔고 앉아 버렸어요. “으으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화가 난 윗마을 방귀쟁이 사내가 방귀를 뿡 뀌자, 맷돌이 휙 날아갔어요. 맷돌은 아랫마을 방귀쟁이 아낙네의 지붕 위로 쿵 떨어졌지요. 이번에는 아랫마을 방귀쟁이 아낙이 방귀를 뀌자, 다듬잇돌이 쌩 날아가 윗마을 방귀쟁이네 기둥을 바지직 부러뜨렸어요. 그 뒤로도 계속 항아리가 뿡! 솥단지가 뽕! 요강이 뿡! 경대가 뽕! 삼 일 낮 삼 일 밤 동안 뿡뿡 뽕뽕 뿡뿡 뽕뽕, 방귀 시합은 쉬지 않고 계속됐어요. 어찌나 방귀를 뀌어 댔는지 방귀쟁이 사내와 방귀쟁이 아낙은 엉덩이가 욱신욱신했어요. “아이고, 더는 못 뀌것다.” “아이고, 나도 못 뀌것소.” 힘이 빠진 방귀쟁이 사내와 아낙은 마지막 시합을 하기로 했어요. “절구통을 방귀로 치고받읍시다!” “절구통을 못 받고 떨어뜨리는 사람이 지는 거요!” 이렇게 해서 방귀 시합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하늘에는 휙휙 절구통이 날아다니고, 땅 위에는 뿡뿡 방귀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어요. 절구통이 내려오려고 하면,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뿡! 아낙도 있는 힘을 다해 뽕! 방귀쟁이 사내와 아낙의 방귀를 맞은 절구통은 이리 가지도 저리 가지도 못하고 하늘 높이 부웅 솟아올랐어요. 절구통은 구름을 뚫고 날아올라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에 콕 박혔어요. 그때부터 달나라 옥토끼들은 절구통에 쿵더쿵쿵더쿵 방아를 찧었다고 해요.